문제가 보여도 말하지 않아야 좋은 친구인가

2023.03.11

미국 딩리

전 바바라 자매와 안 지 2년이 됐어요. 저희는 말이 잘 통하다 보니까 항상 보면 할 말도 많고 친했어요. 그러니 자주 서로의 경험과 깨달음을 나누곤 했었죠. 자매는 일이 있으면 저한테 연락했고 저도 어려움이 있으면 자매랑 교제했는데, 늘 친절하게 교제해 주더라고요. 전 그런 돈독한 관계를 소중히 여겼어요. 곁에 도와주고 붙들어 주는 자매가 있다는 게 참 좋았죠.

작년에 우연히 그 자매가 다른 자매들과 하는 얘길 들었어요. 자기가 복음을 전했는데 성과가 좋았다며, 다 종교 관념이 많은 사람들이었는데, 기도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잘 교제하고 말씀을 읽어 줬더니 다들 말세 사역을 빨리 받아들였다는 거예요. 자매들이 그 얘기를 듣고 엄청 부러워하는 거 같았고, 이것저것 자문을 구하면서 실행 길을 묻더라고요. 전 그게 좀 의아했어요. 복음 성과가 좋은 건 좋은 일인데, 자매는 그냥 성과가 좋단 얘기만 하고 구체적인 길을 주진 않았어요. 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해 주셨는지도 얘기 안 했고요. 저한텐 그게 자기 자랑처럼 들렸어요. 며칠 후에 페이 자매가 그러는 거예요. “바바라 자매 정말 대단해요. 복음 전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성과가 좋아요. 글쎄 리더가 직접 경험 교류를 부탁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속으로 아차 했어요. 그 자매가 왜 그랬을까 싶은 거예요. 페이 자매가 그 자매를 높이 보는 건, 유익함을 주지 못했다는 거잖아요. 전에 바바라 자매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본분 성과가 좋다고 자랑한 것도 생각나 왠지 불안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자랑은 사탄의 성품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위험한 거잖아요. 그래서 바바라 자매한테 말해 줘야겠다고 생각했죠. 근데 정작 자매를 만나게 될 때는 망설여지더라고요. 몇 년 전의 일이 생각나는 거예요. 그때 동역자 류샤오가 늘 고위적이고 글귀만 말할 뿐 자기 문제는 해부하지 않았어요. 전 그 문제를 보고 지적했는데, 받아들이진 않고 오히려 저의 실패와 과오를 꺼내 반박하는 거예요. 그 뒤론 항상 절 외면했고요. 그때 난감하고 힘들었었죠. 또 한번은 록산나 자매가 주제를 벗어난 교제를 하길래 지적해 준 적이 있어요. 그 후에 자매가 그러더라고요. 제가 문제를 지적해 줄 때 자기 체면을 구긴 것 같아 짜증이 났었고, 제가 일부러 꼬투리 잡는 것 같아서 예배 땐 교제하고 싶지 않았었대요. 나중에 자매가 그 문제를 반성하면서 자기 문제를 알게 됐다곤 했지만 그 얘길 듣고 전 그래도 힘들었어요. 그 뒤로 문제를 지적하기 전엔 고민을 하게 된 거예요. 전 늘 바바라 자매와 가깝게 지내고 있는데, 만약 문제를 대놓고 지적하면 너무 창피를 주는 것처럼 돼 버리진 않을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제가 딴지를 걸려고 고의로 단점을 들춘다고 저를 오해하고 앞으로 모른 척하면 어쩌나, 저희는 매일 얼굴 보는 사이인데, 그러면 힘들잖아요. 근데 계속 그러는 것도 아니니까 어쩌면 말씀 보다 반성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거예요. 그래서 말을 안 하게 됐어요.

어느 날, 바바라 자매가 하는 말이, 누가 자기한테 지적하더래요. 예배 때 자기 자랑하면서 자기를 높이 보게 한다고, 그래서 괴롭다고요. 그때, 저도 갈등이 되더라고요. 사실 전 자매가 자기 자랑하는 모습이 있다는 걸 발견했거든요. 근데 우리 사이가 나빠질까 봐 보고도 못 본 척하면서 그 부분을 말 안 한 건데, 기왕 이렇게 말이 나온 김에 저도 다 얘기해 볼까 싶기도 했어요. 근데 이미 괴롭다고 말을 하는데, 더 하면 더 못 받아들일까 걱정됐어요. 안 그래도 제가 본 문제를 지적해 줘야 할 것 같더라고요. 근데 절 냉정하게 보고 멀어질까 겁났어요. 고민해 봤죠. 제가 어떤 말투와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듣기 부드럽고 자매가 난처해지지 않을지요. 그래서 제가 자기 자랑을 했던 모습을 예를 들면서 말했어요. 그리고 반성한 과정도 얘기하면서 자매의 문제를 곁들여서 말해 줬죠. 또 창피해할까 봐 위로도 해 줬고요. 사람은 패괴 성품이 있어 누구나 다 그렇고, 저도 마찬가지라고 하나님 믿는다지만 지금도 많이 교만하고 자기 자랑을 한다고 그러니 구속받지 말고 자신을 바르게 대하랬죠. 그렇게 말하니까 별 다른 얘기가 없었어요. 근데 그 후에 일들이 생기면서 마음이 너무 불편했어요.

어느 예배 때, 바바라 자매가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교제하는데, 얘기를 하다가 자기가 복음 전한 경험을 말하는 거예요. 예수 믿은 지 몇 십년 된 목사한테 복음을 전했는데, 관념도 많고 유언비어를 믿고 있어서 형제자매들이 여러 번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대요. 근데 자기가 몇 번 가서 변론하고 하나님 말씀을 보여 주며 그 관념을 다 깨 줬대요. 그러니 목사가 관념을 내려놓고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다고요. 자매의 말이 끝나니까 모든 사람이 다 자매의 복음 전파 경험에 빠지고 말씀 묵상은 뒷전이 됐어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제를 벗어난 거 아닌가? 자매가 복음을 전했던 경험을 교제하긴 했지만 결과는 모두가 자매를 높이 보게 됐으니까 그건 자기 자랑을 한 거잖아?’ 전 그건 아니라고 지적해 주고 싶었어요. 근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말을 끊어 버리면 자매가 얼마나 난처할까? 전도의 성과가 좋은 것도 사실인데, 내가 이렇게 하면 다들 내가 질투심에 꼬투리 잡는 거라고 보지 않을까? 어쩌면 자매는 자랑하려는 의도가 아닐 수도 있잖아?’ 그래서 결국 말을 안 했죠. 근데 말씀에 도저히 집중이 안 되더라고요. 결국 빛 비춤도 얻지 못해서 제대로 교제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예배를 마쳤어요.

그날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안 오더라고요. 머릿속엔 바바라 자매가 자기 자랑을 하는 말들이 계속 떠올랐고, 모두가 자매를 우러러보는 모습이 생각났어요. 그 자매는 말씀을 잘 깨달을 수 있게 이끈 게 아니라 모두의 주의를 자기가 복음 전한 일로 이끈 거예요. 결국 예배 효과는 안 좋았죠. 그때 전 교회 생활보다 자매의 체면만 생각한 거예요. 그게 바로 무골호인처럼 정의감이 없는 거잖아요? 그때 말씀이 생각났어요. 『자신이 옳은 사람인지 아닌지 잘 살펴보아라. 네 속마음과 목적이 모두 나를 위한 것이냐? 네 말과 행동이 모두 내 앞에서 행해지고 있느냐? 나는 네 마음과 생각을 모두 감찰하고 있다. 너는 마음에 가책이 없느냐? … 이번에 사탄이 형제자매들의 먹고 마시는 시간을 빼앗아 갔는데 다음번에는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너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이것이 보상할 수 있는 것이더냐? 이 시간을 네가 보상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자신을 많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 몇 번의 예배에서 먹고 마시지 못한 까닭이 무엇인지, 누가 방해한 것인지 하나하나 교제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을 엄격하게 저지하지 않으면 형제자매들이 알지 못해 이런 일이 또 생길 수 있다. 정말이지 영적 눈이 열리지 않은 소경이 너무도 많구나! 분간할 수 있음에도 일어나서 지적하지 않고 어정쩡 넘어가는 자는 여전히 소경이며, 보고도 입을 열지 않는 자는 벙어리다. 불구자가 너무 많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그리스도의 최초의 말씀ㆍ제13편> 중에서) 이 말씀에 양심이 찔렸어요. 말씀으로 교제해야 할 때 바바라 자매가 딴 얘길 하면서 모두의 시간을 뺏고, 예배 효과에도 지장을 줬는데, 전 그걸 묵인하고 있었어요. 생각해 봤어요. 자매의 교제가 주제에서 벗어난 걸 알고도 왜 교회 생활을 지키지 못하고 무골호인이 됐는지요. 일단은 전 자매의 행동이 자기를 높이는 게 맞는지 확신을 못 했어요. 자매가 복음을 잘 전한 건 맞아요. 그런 교제가 모두한테 도움이 되는 것도 맞는 것 같고요. 그래서 자기 자랑이라고 봐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게다가 제가 잘못 말했다가 자매가 구속이라도 받으면 다들 제가 질투한다고 오해할까 겁나기도 했고요.

다음 날 예배 때 이 문제를 꺼내 놓고 다른 자매들한테 물어봤어요. 그리고 같이 이 말씀을 봤어요. 『패괴된 인류는 모두 스스로를 높이고 증거하며 뽐내 남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할 수 있다. 이는 사탄의 본성에 지배되어 본능적으로 보이는 반응이자, 패괴된 인류의 공통적인 특성이다. 사람은 보통 어떻게 스스로를 높이고 증거하느냐? 어떻게 그 목적을 달성하느냐? 자신이 많은 사역을 했고 많은 고난을 겪었으며 많은 헌신을 했고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고 증거한다. 자신의 밑천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높여 사람들 마음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더 높게, 더 공고하게, 더 안정되게 만든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고 우러러보고 부러워하며, 심지어는 숭배하고 앙망하고 추종하게 한다. 사람이 이 목적을 위해서 겉으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나 본질적으로는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일을 많이 저질렀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성적인 것이냐? 그것은 이성의 범주를 넘어선 일로, 염치없는 것이다. 즉, 염치도 모르고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고,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증거하며 심지어는 자신에게 어떤 은사나 재능, 특별한 기능, 어떤 경험이나 좋은 처세술, 남을 우롱하는 수단 등이 있는지 자랑하기까지 한다. 스스로를 높이고 증거하는 수단은 자신을 뽐내고 남을 깎아내리는 것이며, 또한 자신을 위장하고 포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들이 자신의 약점과 결점, 부족한 부분을 보지 못하게 하고, 영원히 자신의 빛나는 일면만 보게 한다. 심지어는 소극적이 되어도 남들에게 알리거나 마음을 열고 교제하지 못하며, 일을 잘못하면 애써 포장하고 숨긴다. 자신이 본분 이행 과정에서 교회 사역에 끼친 손실은 입에도 올리는 법이 없지만, 아주 작은 기여나 성과만 있어도 즉시 끄집어내 자랑한다. 자신이 얼마나 재능 있고 자질이 좋은지, 자신이 얼마나 남들과 다르고 특별한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해 한스러워한다. 이것이 스스로를 높이고 증거하는 방식 아니더냐?(<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4조> 중에서) 이 말씀을 보고 깨달았어요.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이는 행동이 바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은사와 재능,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거죠. 자기가 많이 뛰어다나는 걸 보여 줘서 자신을 높이 보게 하는 거예요. 복음을 전하는 건 긍정적인 일이잖아요. 자매는 그쪽에 소질도 있고요. 만약 자기가 어려울 때 어떻게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 사역을 경험했고 그걸 통해 뭘 깨닫고 얻게 됐는지 어떤 실행 길을 찾았는지 요약하면 그런 교제는 유익한 거예요. 근데 자매의 교제는 많은 사람을 얻었다는 내용과 고난받았다는 얘기가 전부였어요. 결국 그 교제를 듣고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거나 각종 어려움을 어떻게 대하고 실행해야 하는지를 알지는 못했어요. 오히려 자매가 복음을 전하는 데 경험이 많고, 은사가 있고, 다른 사람보다 잘 추구한다는 걸 알게 됐죠. 그래서 다 자매를 칭찬하고 부러워하면서 높이 보곤 했어요. 이렇게 자기 자랑과 하나님을 증거하는 건 효과 자체가 다른 거예요. 교제를 통해 제가 본 게 맞는지 확인해 봤어요. 자매가 한 말들은 확실히 하나님을 증거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증거하는 거였고 하나님이 증오하시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낸 거였어요. 한 자매가 그랬어요. 지금 바바라 자매가 그런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데, 본인은 아직 못 느낄 수 있다고요. 그러니 그걸 봤으면 말해 줘서 도와줘야지 절대 인간관계 때문에 무골호인이 되지 말라고요. 그 말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빨리 자매와 교제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예배가 끝나고 마음이 안정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자매의 문제를 안 지 오래됐는데, 지적을 못 했잖아요. 말해 줘도 그냥 가볍게만 언급했으니 실제 효과는 없었죠. 결국 자매는 자기 문제를 모르고 반성하지 못한 거예요. 그걸 생각하니 괴롭고 자책됐어요. 생각해 봤죠. ‘평소에 바바라 자매와 다른 얘긴 잘하면서 왜 문제를 지적해 주는 건 그렇게 힘들어하고 입을 열지 못할까?’ 구하는 과정에 이 말씀을 보게 됐어요. 『너희는 모두 지식이 있고, 우아하고 겸손하게 말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게다가 말하는 방식을 중시하고, 말투가 완곡하고, 그 누구의 존엄도 손상시키지 않고 그 누구의 체면도 구기지 않는다. 또한, 말할 때나 일할 때 다른 사람에게 여지를 주고, 가능한 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상처와 단점을 들춰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괴롭게도, 난처하게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일반인의 처세 원칙이다. 이 처세 원칙은 어떠하냐? (이는 무골호인의 원칙으로, 간사하고 교활한 것입니다.) 간사하고, 교활하며, 간교하고, 음험하다. 웃는 얼굴 뒤에는 악독하고 음험하며 떳떳하지 못한 것들이 가득 감춰져 있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생명 성장의 여섯 가지 기준> 중에서)중용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제일 음험하다.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고, 세상 물정에 밝아 처세술이 능란하며, 임기응변에 능하고, 아무에게도 빈틈을 보이지 않으니 그야말로 살아 있는 사탄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를 실행해야 패괴된 성품의 결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중에서)처세 철학 중에 “문제가 보여도 말하지 않아야 좋은 친구다.”라는 말이 있다. 좋은 친구라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의 문제점을 간파했어도 말해서는 안 되며, 상대의 체면을 깎아내리거나 단점을 까발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라는 것이다. 서로 기만하고 숨기고 음모를 꾸미며, 마음속으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솔직히 말하지 않고, 교활한 수법으로 그 관계를 지키는 것이다. 왜 그런 관계를 지키려 하겠느냐? 이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적을 만들어 자신이 수시로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남의 단점을 까발리거나 상처를 주어 상대가 너의 원수가 되면 그가 너에게 어떤 해악을 끼칠지 모르며, 너 스스로도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것을 원치 않기에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처세 철학을 취하는 것이다. 이 점으로부터 봤을 때 이런 관계의 두 사람을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없다. 마음을 나눈 사이는 더더욱 아니다. 그럼 이들은 과연 어떤 관계겠느냐? 기본적인 인간관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인간관계에서는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없고, 깊이 사귈 수 없으며,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도 없다. 또 자신의 마음에 있는 말, 자신이 본 상대의 문제점,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할 수도 없다. 그저 듣기 좋은 말만 찾아서 하면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적이 되지 않으려 할 뿐이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평안하게 살 수 있지 않겠느냐?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말을 제창하는 이유는 이런 것 때문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남에 대한 경계심이 들어 있는, 완곡하고 간사한 생존 방법으로, 자기 보호에 그 목적이 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 누구와도 마음을 나눌 수 없을 것이며,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친한 친구가 하나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저 피차간에 서로 경계하고 이용하며 수작을 부리고 원하는 것을 취할 뿐이다. 그렇지 않으냐?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행동 방식의 근본적인 목적은 남의 원망을 사거나 상대와 적이 되지 않는 데 있다.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지키려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상처받지 않기 위한 수법이자 방식이다. 이 몇 가지 측면의 본질을 봤을 때, 사람의 덕행 중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요구를 고상하고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이것이 사람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누구에게도 원한을 사거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마지막에 상처 입는 사람은 너 자신이 된다고 말이다. 또한,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 네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 누구라도 네가 상처를 주는 순간 그 관계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그는 친하고 가까운 친구에서 네게 낯선 사람, 적으로 변할 것이다. … 그럼 그 가르침으로 사람이 최종 얻게 되는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을 정직하게 바꿔 놓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간사하게 만드는 것이겠느냐? 사람이 간사하게 변한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벽이 높아지고, 사람과 사람 간에 거리가 멀어지며, 관계도 복잡해진다. 이는 사람의 인간관계가 복잡해지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교류를 하지 않게 되고, 상호 간에 경계심이 생겨난다. 이러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정상적이겠느냐? 사회 분위기가 좋을 리 있겠느냐?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말은 분명히 틀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가르치면 정상 인성을 살아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광명정대하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없으며, 절대 긍정적인 성과를 얻을 수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8)> 중에서) 이 말씀을 통해서 전 사탄의 처세술로 바바라 자매와 지내고 있단 걸 깨닫게 됐어요. 뭐 “좋은 친구라면 모른 척해 줘라.”, “얼굴과 치부는 건드리지 마라.”, “친구가 많으면 길이 많고, 원수가 많으면 벽이 많다.” 여태껏 전 이런 처세술을 인간관계의 원칙으로 삼았던 거예요. 전 이렇게 해야만 인간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고 미움도 안 사고 항상 편할 거라고 여겼어요. 근데 폭로의 말씀을 보고 깨달았죠. 이런 철학은 모두 교활하고 간교한 처세술일 뿐이라서 서로 경계하고 골만 생길 뿐이지, 진심이 있을 수 없고 사랑도 있을 수 없어요. 이렇게 하면 미움 사는 일도 없고 문제도 안 생기겠지만 진정한 친구를 얻기는 힘들죠. 오히려 더 교활하게 변해 갈 뿐이고요. 그리고 또 깨달은 건 사람들과 지낼 때 솔직해야 하고 문제점을 발견하면 사랑으로 최대한 도와줘야 하는 거예요. 설령 당장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를 오해한다고 해도 원칙을 지키고 바른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거죠.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책망받으면 체면 때문에 당장은 거부할지 몰라도 나중엔 진리를 구하고 반성해요. 그럼 미워하기보다 지적한 걸 고맙게 생각하죠. 저는 바바라 자매와 지내면서 몇 번이나 자매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랑 하고 자신을 높이 보게 하는 걸 봤지만 그걸 지적했다가 자매가 다시는 절 안 볼까 봐 겁나고 또 자매와의 좋은 사이를 유지하려고 분명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걸 보고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결국 자매는 자신의 문제를 몰라 반성을 못 하게 됐고, 같은 문제가 반복된 거예요. 제가 사탄의 처세 철학대로 사니까 인간관계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전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란 말만 들으려 했지 자매의 생명 진입은 생각해 주지 않았어요. 제가 좀 더 빨리 자매의 문제를 보고 지적해 줬더라면 자매가 더 빨리 패괴 성품에 대해 알게 돼서 그렇게 이성적이지 못한 말들을 안 했을 수도 있잖아요. 전 인간관계를 위해 무골호인이 됐으니 오히려 자매를 해친 거예요. 전에 한 자매님과 있었던 일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때 그 자매님이 본분을 건성으로 했는데, 형제자매들이 지적해도 변명만 하고 인정 안 했죠. 저도 반성하라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자매님이 저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러면 제가 체면을 안 봐주고 매정하게 구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자매의 문제를 보고도 그냥 못 본 척 넘어가 버렸었죠. 그러면서 겉으론 웃어 주고 친절하게 대했고요. 나중에 자매가 그 문제로 본분에서 해임되고 나서야 일찍 도와주지 못한 걸 후회했어요. 자매가 떠날 때야 그 문제에 대해 교제해 줬죠. 자매는 자신의 문제를 깨닫긴 했지만 절 꾸짖더라고요. 왜 더 빨리 얘기해 주지 않았냐고 안 그럼 해임되기 전에 회개하지 않았겠녜요. 그 일을 통해 또 깨달았어요. 처세술에 따라 무골호인이 되는 건 정말 좋은 사람이 아닌 거예요. 그건 진심과 사랑이 없고 이기적이고 간사할 뿐이고 하나님이 증오하시는 사탄 성품으로 사는 거였어요. 게다가 바바라 자매는 저한테 늘 잘 대해 줬는데, 전 처세술로 대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았죠. 그저 남한테 미움을 안 사고 좋은 사람으로 남기만 바라고 자매가 패괴 성품을 드러내도 외면했어요. 그건 좋은 친구라 할 수 없잖아요. 정말 “좋은 친구라면 모른 척해 줘라.”는 건 사람을 해치는 사탄의 말이라 더는 그 말대로 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제가 자매의 문제점을 지적해 주지 못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었어요. 제 속에 잘못된 관점이 있었어요. 전 늘 지적해 주는 건 흠을 들추는 일이고 체면을 안 봐주는 거고 밉보이는 일이고 괜한 짓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바바라 자매와의 일에서도 괜히 지적해 줬다가 미움을 사고 사이까지 틀어질까 봐 진리를 행하지 못했었어요. 그래서 기도하면서 이걸 해결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했어요.

그러다 이 말씀을 보게 됐죠.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실한 말,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되 남을 기만하거나 조롱하거나 미혹하거나 놀리거나 비방하거나 속박하지 말라고, 또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남의 단점을 까발리거나 비웃지도 말라고 요구했다. 이는 말을 할 때의 원칙 아니겠느냐? 여기에서 ‘단점을 까발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사람의 약점이나 잘못, 혹은 단점을 잡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점이다. 그럼 긍정적인 면에서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말은 어떤 것이겠느냐? 주로 격려하고 일깨우고 인도하고 권면하고 이해하고 위로해 주는 말이다. 이 밖에, 때로는 다른 이의 결점이나 단점, 문제점을 바로 지적하고 질책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매우 이롭다. 이것이 진정한 도움 아니겠느냐? 그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 않겠느냐? … 요컨대, 말을 할 때의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마음속에 있는 것, 진실한 체험과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에게 가장 이로운 말이고, 공급과 도움이 되는 말이며, 가장 올바르고 긍정적인 말이다. 거짓된 말, 상대에게 도움과 이로움이 되지 않는 말은 절대 하지 마라. 그랬다간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 있고 상대를 쓰러뜨려 소극적인 상태에 빠뜨릴 수 있으며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올바르고 긍정적인 말을 하면서 최대한 상대를 도와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에게 도움과 공급을 주고, 하나님께 진실한 믿음이 생기게 하며, 그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네 체험과 문제 해결 방식, 방법을 통해 도움을 얻고 큰 수확을 거두게 해야 한다. 또 그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고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는 길을 깨달아 생명 진입과 생명 성장을 이루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원칙 있게 말해 상대에게 도움을 줄 때 얻을 수 있는 성과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3)> 중에서)너는 어떤 형제자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상대가 너에게 그의 문제점을 지적해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이는 네가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을 대하는지와 관계가 있다. … 그럼 진리의 원칙을 따른다면 이 일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어떻게 해야 진리에 부합할 수 있겠느냐? 몇 개의 원칙이 있겠느냐? 첫째, 최소한 사람을 쓰러뜨려선 안 된다. 우선 그의 약점이 무엇인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그를 쓰러뜨리지 않을지 생각해야 한다. 이는 최소한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만약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면 적극적으로 그를 도와줘야 한다. 손 놓고 있거나 남들이 그를 비웃는 것을 지켜보기만 한다면 이는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고 해하는 것으로, 그런 자는 양심도 이성도, 사람에 대한 사랑도 없는 것이다. 양심과 이성이 있다면 형제자매가 웃음거리가 되도록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 그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고, 어떻게 된 일인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게 해야 한다. 회개할 수 있을지 여부는 그의 몫이다. 네가 책임을 다했다면, 설령 그가 지금 당장은 회개하지 않을지 몰라도 언젠가 깨달음을 얻게 되면 너를 원망하거나 고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형제자매를 대할 때는 최소한 양심과 이성의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 빚지지 말되, 도와줄 수 있는 만큼 도와주어야 한다. 이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형제자매를 대할 때는 사랑과 진리의 원칙으로 대해야 한다. 이런 자가 바로 가장 좋은 사람, 마음씨가 가장 선량한 사람이다. 물론, 진정한 형제자매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떡으로 배만 불리고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형제자매가 아니다. 진정한 형제자매를 대할 때는 진리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든, 어떤 길을 걷든 사랑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최소한 어떤 성과를 내야겠느냐? 첫째, 그를 쓰러뜨리거나 소극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둘째, 그를 도와 잘못된 길에서 돌이킬 수 있게 해야 한다. 셋째, 그가 진리를 깨닫고 올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사랑으로 도와주어야 얻을 수 있는 성과이다. 만약 진실한 사랑이 없다면, 이 세 가지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며 기껏해야 한두 가지 성과만 얻을 수 있다. 이 세 가지 성과는 또한 사람을 도와주는 세 가지 원칙이기도 하다. 너는 이 세 가지 원칙을 모두 알고 파악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너는 정말 그의 어려움을 알고 있느냐? 이것 또한 문제 아니겠느냐? 너는 ‘그가 겪는 어려움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내가 그를 도울 수 있을까? 내가 분량이 너무 작아 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도 함부로 말한다면 잘못된 길로 인도할지도 몰라. 또 그의 이해 능력은 어떨까? 자질은 어떨까? 그는 고집스러운 사람일까? 영이 통하는 사람일까?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일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일까? 만약 내가 그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그가 깨달았는데도 내가 그에게 교제해 주면, 질투하지 않을까? 소극적으로 변하지는 않을까?’ 등을 모두 생각해야 한다. 확실하게 생각해 본 후 그에게 가서 교제하며, 그의 문제점에 맞춰 하나님 말씀 몇 단락을 읽어 주어라. 그가 하나님 말씀 속에서 진리를 깨달아 실행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면 문제는 해결되고 그는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이 간단하겠느냐? 이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만약 진리를 깨달았다면, 단 몇 마디만으로 사람에게 깨우침을 주고 도움이 될 수 있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를 추구해야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를 해결할 수 있다> 중에서) 이 말씀에서 깨달았어요. 사실 흠을 들추는 건 남을 비꼬고 판단하고 정죄할 목적으로 단점을 물고 늘어지는 거죠. 그건 하나님이 증오하시고요. 근데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문제점이나 부족함을 짚어 주는 건 타인에게 유익한 거고, 사랑을 가지고 형제자매의 생명에 책임지는 자세예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게 되면 자신을 반성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진리를 구하고 생명 진입에서 성장해요. 근데 책망이나 도움을 주는 것에 불쾌해하고 반감을 갖는다면 그건 진리를 거부하고 싫어하는 성품이 드러나는 거죠. 그동안 제가 남의 문제를 지적하는 건 흠을 들추는 안 좋은 거라 여겼는데 그런 관점은 잘못된 거였어요. 남을 도와주려고 지적하는 것에도 원칙이 있더라고요. 누구한테 문제가 있다고 해서 생각해 주는 좋은 마음만 가지고 보이는 대로 지적하는 게 아니라 지혜롭게 대처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야 해요. 가장 중요한 건 그에 맞는 진리를 묵상하고 상대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행할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진정으로 도와주는 거예요. 그제야 느꼈어요. 예전에 문제를 짚어 줘도 효과가 없었던 건 제가 진리의 원칙을 구하지 않은 탓이었어요. 록산나 자매는 체면이 굉장히 심하고 책망을 받아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주제에서 벗어난 교제를 할 때, 전 지적만 할 게 아니라 나중에 하나님 말씀의 원칙을 가지고 교제해 주면서 실행 길을 찾게 해 줘야 해요. 그럼 자매가 구속도 안 받고 나중에 원칙에 따라 교제할 수 있잖아요. 이 부분의 원칙을 알고 문제를 지적하는 게 겁나지 않았어요.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원칙에 따라서 사랑으로 도와주면 되죠. 기도하면서 생각해 봤어요. 어떻게 교제하면 좋은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자매가 구속받지 않고 이 부분의 진리도 알고 자기 문제를 알게 할지요.

그 뒤로 시간 날 때면 이 문제를 묵상해 보고,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셨어요. 또 시간 내서 자매와 교제하면서 그동안 제가 발견한 문제를 다 말해 줬죠. 자신을 높이는 성질과 결과,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지도 교제했고요. 교제하고 나서 자매도 심각성을 깨닫게 됐어요. 그게 다 지위욕에 지배를 받아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으려 한 거죠. 다 하나님이 증오하시는 거예요. 그 후에 자매는 예배에서도 자신의 이런 행동을 모두 파헤치면서 분별하게 해 줬어요. 자매가 자기 문제를 반성하고 자신을 증오하는 모습을 보니까 저도 기뻤어요. 근데 자책도 됐어요. 좀 더 빨리 말해 주지 못한 게 후회되더라고요. 자매는 제가 자기의 문제를 지적했다고 해서 편견을 가지지 않았고, 그것 때문에 사이가 틀어지긴커녕 오히려 더 가까워졌어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진리 원칙에 따라 처신할 때 마음도 넘 편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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