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멋대로 본분을 이행하면 남도 자신도 해치게 된다
2020년 4월에 저는 교회 리더로 뽑혀 주로 양육 사역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보니까 새 신자들이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아서 자주 지각을 하거나 일찍 나가더라고요. 일이나 공부 때문에 바빠서 시간이 될 때 온다고 하더군요. 또 정부나 교계에서 퍼뜨린 헛소문을 믿고 안 오는 사람도 있었죠. 형제자매들이 연락해 봤지만 전화도 안 받고 전혀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쨌든 연락은 했고, 자기들이 예배에 나오기 싫다고 하니 우리 책임은 아니야. 포기할 사람들은 포기하자.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도 사람 수가 아니라 알맹이 같은 사람이야. 하나님은 진심으로 믿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구원하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소용없어.’라고 여겼죠. 저는 기도로 구하지도 않고 리더 일꾼과 의논도 하지 않은 채 그 새 신자들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동안 몇 사람에게 연락도 해 봤었는데 역시나 나올 생각이 없더라고요. 저는 제 생각이 맞다고 더욱 확신했습니다. 두 달째 포기하는 새 신자가 너무 많아지자 협력하는 자매가 일깨웠습니다. “이렇게 많이 포기하는 게 합당할까요? 리더한테 물어보고 함께 구하고 교제해서 원칙을 깨닫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근데 전에도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처리했었잖아. 연락 안 한 것도 아니고, 다들 연락이 안 되거나 믿을 마음이 없다는데 구하고 말고 할 게 있나?’ 저는 자매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맘이 좀 불안하고 이러는 게 맞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잘못하는 건 아니지. 분명 우리가 붙잡아 줬는데도 자기들이 안 나오는 건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 중요한 건 그 사람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그렇게 저는 기도로 구하지도 않고, 매달 새 신자들을 저 스스로 포기해 버렸습니다.
나중에 제가 새 신자들을 포기하는 게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리더가 알고 저를 심하게 책망하고 훈계했습니다. 리더는 제가 원칙도 모르면서 구하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함부로 한다고 했습니다. 또 새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서 다른 형제자매들도 최선을 다해 새 신자를 붙들어 주는데, 저는 그런 새 신자들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사랑으로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사람을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너무 무책임하다고 했죠.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새 신자들이 왜 예배에 안 나올까요? 그들의 관념이나 문제는 뭐였나요? 교제하고 해결해 줬어요? 다른 방법으로 도와주고 붙들어 줄 생각은 해 봤어요?” 쏟아지는 리더의 질문에 저는 꿀 먹은 벙어리였습니다. 새 신자들을 포기했던 장면들이 영화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제가 그들을 대할 때 책임을 다하지 않고, 진정 사랑으로 도와주거나 붙잡아 주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해결되지 않은 관념이 뭔지, 예배에 안 나오는 구체적인 원인이 뭔지 잘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한참 예배에 안 나오면 마음이 없는 줄 알고 그대로 신경을 끊었어요. 새 신자들을 전혀 책임감 없이 대했을 뿐만 아니라 원칙을 어기고 함부로 포기했더라고요. 인성이 정말 형편없었죠! 저는 하나님 앞에 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뜻을 깨닫고 저 자신을 반성하도록 깨우치고 이끌어 달라고요.
그 뒤에 하나님 말씀을 보게 되었어요.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은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그들은 모두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설령 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매우 연약하며, 관념에 맞지 않는 일이 조금만 있어도 반항하고,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말이 한 마디만 나와도 논쟁을 벌이기 쉽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포용과 인내, 크나큰 사랑이 필요하고, 어느 정도 방식과 방법도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고 하나님이 선포한, 사람을 구원하는 모든 진리를 전해 주어 하나님의 음성, 창조주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하나님의 현현을 갈망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보고 하나님 음성을 듣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말은 적게 하고 하나님 말씀은 많이 읽어 주며, 읽어 준 후에는 다시 진리를 교제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얼마간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가 쉽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이 의무가 누구에게 주어지든 미뤄서는 안 되며, 어떤 핑계나 이유를 대면서 거부해도 안 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복음 전파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는데 자주 소극적이고 연약해진다. 이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분량이 너무 작으며 하나님을 믿는 데 관한 각 방면의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자질이 부족하고, 따라가지 못하며, 어려움이 많다고 생각하여 소극적으로 변하며 심지어는 자포자기하기까지 한다.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자신을 도태시키는 것이다. 그는 ‘어쨌든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께 인정도 못 받고, 하나님이 날 좋아해 주시지도 않잖아. 나는 예배드릴 시간도 많지 않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돈도 벌어야 하고 말이야.’ 등과 같이 생각한다. 이런 것들이 모두 예배에 나가지 않는 이유가 된다. 사정을 제때 알아보지 않는다면, 너는 그저 그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규정하기 쉽고, 혹은 그가 육적 편안함만 탐하고, 세상을 추구하고, 세속에 미련이 남아 있다고 규정할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를 포기해 버릴 것이다. 이는 진리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이러한 이유가 정말 사람의 본성 본질을 대표할 수 있겠느냐? 사실, 그는 그런 어려움에 얽매이다 보니 소극적이 된 것이다. 만약 그를 위해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 준다면 그는 소극적이 되지 않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소극적이고 연약해질 때가 바로 붙잡아 줄 사람이 필요한 때이다. 네가 도와준다면 그는 일어설 수 있고, 내버려둔다면 그는 소극적이 되고 믿음을 포기하고 물러나기 쉽다. 그것은 교회 사역을 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마음과 책임감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에 자주 나오지 못하는데 그것이 그 사람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또한 그들이 육적 즐거움만 탐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가정과 일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들이 정에 이끌리고 돈을 좋아한다고 판단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저 그런 일에서 사람의 분량이 저마다 다르고, 의지 역시 저마다 다를 뿐이다.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고생해도 내려놓을 수 있다. 믿음이 작은 사람은 구체적인 어려움을 만나면 무기력해지고 이겨 내지 못하는데, 도와주고 붙잡아 주는 사람이 없으면 자포자기해 버릴 것이다. 이때는 곁에서 붙잡아 주고 관심을 기울이고 도와주어야 한다. 그가 불신파이거나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거나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내버려두어도 된다. 만약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일부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예배에 자주 나오지 못한다면 포기하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와주고 붙잡아 주어야 한다. 좋은 사람이고 이해 능력이 있는 데다 자질도 괜찮다면 더욱 붙잡아 주고 도와주어야 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성육신 하나님이 말세에 사람들 사이에 오셔서 말씀하고 사역하시는 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커다란 굴욕을 겪고도 지극히 크신 인내로 최선을 다해 인류를 구원하고 계십니다. 당신 음성을 듣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구원하십니다. 한 사람도 버리시길 원하지 않으시죠. 사람에게 과오가 있어도 언제나 사해 주시고 회개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항상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어 주시고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세요! 새 신자들은 갓난아기와 같아서 진리를 깨닫지 못해 참도에 대해 깊이 뿌리내리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커다란 사랑으로 이들을 보듬고 포용하길 바라세요. 인성이 좋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한 그 사람들이 소극적이고 연약하다거나 종교적 관념을 지녔어도, 혹은 세속의 일 때문에 예배를 소홀히 하더라도 함부로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을 완전히 부정하는 건 더욱 안 되죠. 몇 번 붙잡아 주었는데도 예배에 안 나온다고 해서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무책임한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 하나님 믿을 때는 집안일로 바빠서 예배를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하지만 형제자매들이 다들 이해해 주고, 제시간에 맞춰 예배 시간도 조정하고 진리도 차근차근 교제해 주었죠. 형제자매들의 도움과 부축으로 저는 진리 추구의 중요성을 깨닫고, 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용을 느꼈습니다. 또 그 덕분에 꾸준히 예배드리고 본분도 이행하게 됐어요. 만약 그때 형제자매들이 절 진리를 싫어하는 불신파라고 생각해 싫어했다면 진작에 버려져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또 새 신자들의 어려움도 이해해 주지 않고 그들을 못마땅하게만 생각했어요. 다들 너무 바쁘고 관념도 많은 것 같다고 단정 짓고 포기하고, 굳이 애써서 도와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인성이 너무 못됐어요. 새 신자들 생명에 책임감도 전혀 없었고요.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회개하고 싶습니다. 제가 하루빨리 잘못을 바로잡고 사랑으로 새 신자들을 붙잡아 주고 싶습니다.’
그 뒤로 형제자매들과 같이 새 신자들을 붙잡아 주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어려움을 파악하고 차분히 교제해 주었더니 예배 나오겠다는 사람도 있었죠. 그중에는 회사 일로 바빠서 못 나온다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는 속으로 믿으니까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을 거라고 했죠. 전에는 그 자매가 돈 버는 것만 중시하니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정을 알아보니까 저희가 정한 예배 시간이 본인과 맞지 않아서 예배를 나오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예배 시간을 자매에게 맞추고, 이렇게 교제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세에 진리를 선포하셔서 사람을 정결케 하고 구원하세요. 그러니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예배에 많이 참석하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교제하고 진리를 얻으려고 노력해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 생명 성품이 변화돼야 해요. 그래야 하나님께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요. 하나님을 믿으면서 예배도 드리지 않고, 말로만 인정하고 속으로만 믿으면서 하나님 믿는 걸 취미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눈엔 이방인이랑 똑같아요. 끝까지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죠.” 자매는 교제를 듣더니 자기 관점이 잘못됐다는 점을 깨닫고 예배에 나오겠다고 했습니다. 다시 예배에 나오겠다는 새 신자들이 계속 생기는 것을 보면서 정말 죄책감이 들고 후회가 됐습니다. 저는 멋대로 사람들을 포기했는데, 이는 새 신자들을 모해하고 망치는 짓이었습니다. 정말 악을 행한 것입니다!
하루는 리더가 묻더라고요. “양육 사역을 맡은 이후로 끝까지 책임지지 않고 포기한 새 신자가 얼마나 돼요? 새 신자를 포기하기 전에 진리 원칙은 구해 봤어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리더가 하나님 말씀을 보내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전부 자기 생각대로 하고, 그 일을 아주 간단하게 생각한다. 또 진리를 구하지도 않고 원칙이 전혀 없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행할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목을 꼿꼿이 세우고 자기 뜻대로만 일한다. 이런 사람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전혀 없다. 어떤 이들은 “저는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래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웬만한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해도 소용없으니까요.”라고 말하는데, 그런 사람은 마음에 하나님이 전혀 없다. 평소에 어떤 일을 하든 진리를 구하지 않고 그저 자기 뜻대로만 하는데, 그럼 그가 일을 처리할 때 원칙이 있겠느냐? 절대 없다. 그는 무슨 일이든 만만하게 생각해 누군가 진리 원칙을 교제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일할 때 전혀 원칙이 없기 때문에 마음속에 하나님 자리는 없고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그는 자기 뜻도 훌륭하고, 악을 행하는 것도 아니며, 진리에 어긋난 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 뜻에 따라 행하는 것이 당연히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그 일에 관해 진정으로 하나님께 구하거나 기도하지 않았다. 그저 열정으로 자기 뜻에 따라 마구 행동했을 뿐, 하나님의 요구대로 본분을 이행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도, 그런 바람도 지니지 않았다. 이것이 실행에 있어서 가장 큰 잘못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면, 이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 아니겠느냐?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면 무슨 결실이 있겠느냐?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면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말씀은 딱 제 내적 상태와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새 신자들을 포기할 때 기도로 구하지도 않고 리더와 상의도 없이, 경험에 의지해 제멋대로 처리했습니다. 전에도 양육했던 새 신자 중에 몇 달씩 예배에 안 나오는 신자는 다시 데려오지 못해 포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도 못 데려오니 포기해도 되겠거니 생각했죠. 그리고 누가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고 누가 불신파인지 척 보면 안다고 생각해 맘대로 단정하고 포기했습니다. 설령 마음이 불안해도 구하지 않고, 파트너 자매가 일깨워 줘도 그냥 무시하고 제 맘대로 처리했어요. 제 생각을 진리 원칙으로 생각하고 저는 잘못할 리가 없다고 믿었죠. 그건 바로 교만이었습니다. 안하무인에 하나님도 마음에 없었으니 제 뜻이 너무 강했던 거죠! 저는 단지 새 신자가 예배 나오는 것만 가지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단정 지었습니다. 오랫동안 예배를 드리지 않고 연락도 닿지 않으면 포기해도 된다고 생각했죠. 사실 새 신자가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불신파라는 뜻은 아닙니다. 누가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고, 누가 불신파인지는 실제 사정을 알아보고 난 뒤에 판단, 확정해야 하고, 구별해서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를 안 드리는 새 신자들 중에는 그들이 하나님 믿기를 바라는 가족 때문에 억지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속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고, 말씀 읽는 것도, 예배드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과 명예, 이익, 사악한 조류만 좇고 하나님 믿고 예배드리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교제해 주어도 싫어하고 반감을 가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본성이 진리를 싫어하고 본질이 불신파라서 예배드리기를 원하지 않으면 완전히 포기해도 됩니다. 그러나 일부 새 신자들은 인성도 좋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다만 처음에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예배드리는 의미도 잘 몰라서 하나님의 존재만 인정하면 되고, 예배는 드리든 안 드리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예배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으면서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나오기 싫으면 안 나오는 식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일과 예배 시간이 겹치는 것과 같은 실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면 예배에 나오지 않으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는 그 사람들의 어려움이나 문제점에 초점을 맞춰 사랑으로 도와주고 붙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관념과 어려움을 진리로 해결해 주어서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그 사람들의 실제 상황에 맞춰 예배 시간을 조정해 주어야 하죠. 하지만 저는 그들의 실제 상황을 구별해서 대하지 않고 원칙 없이 본분을 이행했어요. 또 진리도 깨닫지 못했으면서 목에 힘을 주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예배에 나오지 않는 새 신자들을 불신파로 간주하고 가볍게 포기해 버렸습니다.
모든 새 신자들이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기까지 하나님은 뒤에서 많은 일을 하셨고, 수많은 사람과 일을 안배하시고, 많은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형제자매들도 사랑과 인내로 수차례 복음을 전했지요. 그런데 저는 원칙도 구하지 않고, 그런 새 신자들을 구원 대상이 아니라고 마음대로 규정했으니, 이성을 잃을 정도로 교만했습니다! 새 신자들이 예배에 안 오는 건 그 사람들 잘못이 아니라 제가 그분들 실제 상황도 알아보지 않고, 책임을 다해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저는 ‘하나님이 바라는 건 사람 수가 아니라 알맹이 같은 사람’이라는 말씀을 방패 삼아 새 신자를 포기했어요. 사실 그 말씀은 하나님나라에는 진심으로 믿으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불신파와 악인, 적그리스도는 구원 대상이 아니란 뜻이죠. 그런데 저는 예배에 안 나오는 사람을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으니 하나님 말씀을 왜곡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새 신자들에게 실제로 교제해서 도와주는 등의 노력과 책임도 다하지 않고, 새 신자들이 진리에 정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진정 불신파인지 아닌지 파악하지도 않고 멋대로 규정하고 포기했습니다. 리더의 책망과 훈계가 아니었다면 제가 얼마나 더 많은 사람에게 해를 입혔을지 모릅니다. 제 행동이 너무 가증스럽더라고요! 진리 원칙도 모르면서 구하지도 않고 패괴 성품대로 일을 처리했으니 이 모든 게 다 과오였죠! 회개하여 달라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교회 리더인 제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이제 막 믿기 시작한 형제자매들을 양육하고 붙잡아 주면서 그들의 각종 관념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알고 하루빨리 참도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죠. 그런데 저는 제 뜻에 따라 제멋대로 행했습니다. 저 혼자만 마음과 눈이 멀어 치우친 길을 간 게 아니라 형제자매도 잘못 이끌어서 다들 멋대로 새 신자들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악행을 저지른 거죠! 멋대로 일한 결과가 그렇게 심각하다니 덜컥 겁이 나고 저 자신이 미웠습니다. ‘왜 그때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았을까? 왜 리더 일꾼과 의논하고자 하지 않고, 예배에 나오지 않은 새 신자들을 쉽게 포기했을까? 무엇 때문에 겁도 없이 그렇게 함부로 행동했을까?’ 기도로 구하는 중에 또 하나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네가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으면 어떻게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지를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 네가 올바른 길을 가고 하나님 뜻에 부합하게 된다면 성령 역사도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을 배반할 위험도 점차 줄어들 것이다. 진리가 없으면 쉽게,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예를 들어, 네게 교만한 성품이 있다면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으려고 해도 안 된다. 너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는데,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너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본성의 지배를 받아 그렇게 하는 것이다. 교만함은 네가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게 하며, 너 자신을 추켜세우고 모든 일에서 스스로를 나타내게 한다. 교만함은 네가 다른 사람을 얕보게 하고, 너를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만든다. 교만함으로 인해 너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게 된다. 그러다 결국 하나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네게 순종하게 할 것이다. 자신의 뜻과 생각, 관념에서 나온 것들을 진리로 여겨 받들게 한다. 교만한 본성에 지배받아 사람이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지르게 되느냐!』(<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를 추구해야 성품이 변화될 수 있다> 중에서) 자주 보던 말씀이지만, 이번 제 체험에 비추어 보니까 더 와닿더라고요. 교회 리더를 한 지 얼마 안 되다 보니 진리 실제도 전혀 없고, 본분 이행하는 과정에서 모르는 진리 원칙도 많았는데, 저는 제가 뭐든 다 알고 잘난 줄 알았어요. 새 신자들을 대하는 일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불신파로 규정하고, 각자의 실제 상황을 구별해서 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저만 옳다는 생각에 기도로 구하지도 않고, 리더와 상의도 안 하고, 파트너 의견은 더더욱 무시했습니다. 너무나 교만했죠! 사실 사랑으로 도와주는 원칙, 공평하게 대하는 원칙, 새 신자의 관념을 해결해 주는 각 방면의 진리 등 새 신자를 대하는 것과 관련된 진리 원칙은 정말 많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지니고, 그렇게 교만하고 독선적이지 않고, 이런 원칙들을 진지하게 구하고 고민했다면 함부로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만한 성품으로 살면서 저도 모르게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했다고 생각하니 저 자신이 밉고 하나님께 저주받아 마땅하게 느껴졌죠. 저는 반드시 진리를 구해 제 교만한 성품을 해결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 두 단락을 보았습니다. 『교회의 리더 일꾼이 사역할 때는 반드시 다음의 두 가지 원칙을 주의해야 한다. 첫째, 사역지침에서 규정한 원칙대로 정확히 행하되, 원칙을 어기거나 마음대로 상상하거나 자기 뜻대로 행동해선 안 된다. 모든 일에 있어 교회 사역을 생각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중시해야 한다. 둘째, 매사에 성령의 인도를 따르도록 신경 쓰고, 엄격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행해야 한다. 이것도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성령의 인도마저 어기고, 고집스럽게 자기 뜻과 상상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가장 심각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네가 진리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여 하나님이 매우 흡족해하지 않았다면, 너는 어떻게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해야 하겠느냐? 그 일을 할 때 하나님께 기도했느냐? ‘이렇게 하면 진리에 부합할까? 이 일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면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 하나님이 아시면 기뻐하실까, 아니면 반감을 느끼실까? 극도로 증오하고 혐오하지는 않으실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너는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누군가 일깨워 주었다고 해도 너는 그 일이 별것 아니라고, 원칙에 어긋난 편이 아니고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진노를 사게 됐으며, 심지어는 하나님께 증오까지 받게 되었다. 이는 사람의 패역으로 초래된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마땅히 매사에 진리를 구해야 한다. 만약 먼저 진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기도한 다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진리를 구했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진리 실행에 치우친 점이 있을지라도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며, 몇 번 체험하면 정확하게 실행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알면서도 진리대로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건 네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일이 닥치든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일이 닥쳤을 때 이해가 되지 않으면 진리를 구한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없고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진리를 깨달은 몇 사람을 찾아 진리를 교제해야 한다. 만약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없다면, 이해가 순수하고 올바른 몇 사람과 함께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모두가 진리를 사모하고 구하고 진리를 교제하면 언젠가는 누군가 좋은 방법을 떠올릴 것이다. 모두가 그 방법을 듣고 적절하다고, 좋은 길이 생겼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성령에게서 온 깨우침과 빛 비춤일 수 있다. 그때 모두 함께 비교적 정확한 실행의 길을 교제하면 진리 원칙에 부합할 것이다. 혹시 실행 과정에서 그 방법이 부적절하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얼른 바로잡아라. 조금 문제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는다. 너는 일할 때 올바른 마음가짐을 지녔고 진리대로 실행했으나, 그 당시에 원칙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실행에 약간의 실수가 생겼을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용서받을 여지가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일할 때 자신의 머리와 상상대로 행동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떻게 실행해야 진리에 부합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지 묵상하지 않는다. 그저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이로운지, 어떻게 해야 남들의 우러름과 감탄을 받을 수 있을지만 생각하며, 오로지 자기 뜻대로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하는데, 이는 문제가 있다. 이런 사람은 일할 때 진리에 부합할 수 없으며, 영원히 하나님께 혐오받는다. 정말 양심과 이성이 있다면 무슨 일이 닥치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고 구하며, 자기 행동의 속셈과 불순물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에 따라 어떻게 해야 적절한지 확실히 정해야 한다. 또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증오하는지, 하나님은 사람의 어떤 행동을 인정하는지 등을 반복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모두 반복적으로 묵상해서 확실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 일을 할 때 속셈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안다면, 자신이 그렇게 하는 속셈과 목적은 무엇인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는 것인지, 그러는 것이 자기에게 이로운지 아니면 하나님 선민에게 이로운지, 그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등을 반성해야 한다. 네가 이렇게 기도하며 자꾸 묵상하고, 구하고, 스스로에게 더 많은 문제를 물으면서 진리를 구한다면 일할 때 실수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이는 네가 하나님 말씀의 요구에 따라 구한 것이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해 얻은 결론은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저는 하나님 말씀에서 실행 길을 찾았습니다. 리더 일꾼은 사역할 때 엄격하게 진리 원칙과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을 따르고, 모든 일에서 성령의 인도에 주의하고 따라야 합니다. 또 본분을 이행할 때 많이 기도하고 구하며 하나님께 경외심을 지녀야 합니다. 자기 맘대로, 혹은 경험이나 관념 상상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절대 안 됩니다. 맹목적으로 자기를 믿는 것은 더더욱 안 되고요. 반드시 진리 원칙을 구하고, 자신이 잘 모르거나 간파할 수 없는 문제는 형제자매들과 같이 구하고 교제해서 원칙을 정확히 파악한 다음 해 나가면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본분을 이행할 수 있습니다. 이번 체험으로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상황을 마련하여 리더를 통해 저를 책망하지도, 훈계하지도 않았다면 저는 여전히 제멋대로 일한 결과와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진리를 많이 구하고 원칙대로 본분을 이행하자고 스스로 다짐했어요. 그 뒤로 또 두 사람이 예배에 잘 안 나왔는데, 더 이상 교만한 본성에 따라 쉽게 단정 짓고 포기하는 건 못하겠더라고요. 그 중 한 명은 여러 번 알아보고, 도와주고, 또 리더 일꾼과도 구하고 교제한 결과 그 본질이 불신파에 해당한다고 판단되어 포기했습니다. 다른 한 자매는 아직 2년도 안 됐지만 평소 말씀도 자주 보고 본분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중에 자매는 패괴 성품을 폭로하는 말씀을 보고 자기한테 맞춰 보더니 스스로가 너무 깊이 패괴됐다며 본인은 구제 불능이라고 규정하고 자포자기하더라고요. 저희는 자매한테 하나님 말씀을 교제하면서 하나님이 구원하실 대상은 우리처럼 사탄에게 깊이 패괴된 사람이고, 그분은 우리의 어려움과 연약함,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신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최대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 추구를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고도 했죠. 이에 감동받은 자매는 하나님 사랑에 감동해서 펑펑 울었습니다. 여러 번 붙잡아 주고 도와주었더니 지금은 예배도 잘 나오고 있습니다.
이 일을 겪고 패괴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고심과 크신 사랑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또 말씀의 심판과 폭로를 통해 제 교만한 성품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인식하게 됐고, 제멋대로 본분을 이행할 때의 위험성과 결과를 알게 됐어요. 그리고 비로소 하나님께 경외심도 어느 정도 생겼습니다. 지금 제가 원칙대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게 된 건 다 하나님 말씀으로 이룬 효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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