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내려놓다
어릴 적, 저는 엄마가 저희들이 먹고 입고 쓰는 걸 챙겨 주는 것 말고도 밭에 나가 일도 하고 가사를 다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여자는 그렇게 살아야 현모양처라고 생각했어요. 결혼하고 나서 저도 엄마를 따라 애와 남편의 의식주를 챙기고 집 정리도 다 잘해 놨어요. 하지만 애가 한 살이 됐을 때, 남편이 교통사고로 먼저 떠났어요. 그때 저는 삶의 의미를 잃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하지만 아이 때문에 버티고 살았어요. 애한테 그래도 제대로 된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 재혼을 했죠. 그 남편이 그래도 애를 잘 챙겨 주니까 저도 위안이 되더라고요. 나중에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인 후에 저는 자주 형제자매들이랑 모여서 예배드리고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고 본분도 이행하게 됐어요. 그러다 마을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면서 경찰의 주목을 받게 돼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할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애는 남편과 시부모님께 맡겨 뒀죠. 근데 객지에서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애가 너무 보고 싶은 거예요. 엄마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언제 상황이 좋아지면 집에 돌아가 미안함을 다 보상해 주고 싶었어요.
2023년 7월에 몰래 집에 갔는데, 남편은 이혼 소송을 냈더라고요. 게다가 애가 일도 제대로 못 하는 데다 어디에 취직해도 오래 못한다면서 계속 저렇게 두면 애를 버리게 될 거라고 한소리 하더라고요. 친정 부모님도 제가 애를 잘 돌보지 않아서 애 미래를 망쳤다고 원망했죠. 그런 말을 들으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죠. ‘내가 집에 있으면서 잔소리도 하고 챙겼더라면 애가 빈둥거리지 않고 바른길로 가지 않았을까?’ 아이의 상태와 주변 사람들의 질타에 저도 모르게 애한데 미안한 감정이 생겼어요. 어느 날 고모가 오셨는데, 제 사촌 동생이 아들한테 치킨 가게를 하나 차려 줬더니 조카 녀석은 그 일이 더럽다고 하면서 맨날 게임만 하고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고 했어요. 고모의 얘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이 말씀이 떠올랐어요. 『‘자녀가 바른길을 걷지 않는 것은 부모와 일정 부분 상관이 있다’는 말은 틀렸다. 어떤 사람이든, 그가 걷는 길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분명한 사실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길을 걷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다. 그가 어떤 길을 걷고 어떤 사람이 되든 그것은 그 자신의 일이며, 예정된 것, 타고난 것으로, 본성과 관계가 있다. 그럼 부모의 교육이 어떤 역할을 하겠느냐? 사람의 본성에 영향을 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부모의 교육은 사람의 본성에 영향을 줄 수 없고, 사람이 어떤 길을 걷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다. 부모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오직 무엇뿐이냐? 일상생활 속 자녀의 단순한 행위들, 깊이가 얕은 사상과 처신의 도리들은 부모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자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모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 책임은 바로 자녀가 바른길을 걷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가 열심히 공부하고, 성인이 된 후 두각을 드러내며, 나쁜 일을 하지 않고, 나쁜 사람이 되지 않도록 가르치는 한편, 자식의 행위를 규범화하여 연장자를 보면 인사하는 등 예의를 알려 줘야 한다. 이렇게 행위와 관련된 것들을 가르치는 것이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이다. 자녀의 생활을 돌보고, 자녀에게 기본적인 처신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 부모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다. 하지만 사람의 성격은 부모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부모는 성격이 굼떠서 무슨 일을 하든 느릿느릿하지만, 자식의 성격은 매우 급해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그는 열네다섯 살이 되면 사회에 나가 분투하며, 어떤 일이든 자기가 알아서 해서 부모를 필요로 하지 않는 등 매우 독립적이다. 이것이 부모가 가르친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의 성격과 성품, 나아가 그의 본질과 관계되는 것, 추후에 그가 선택할 길 등은 부모와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는 말에는 문제가 있다. 부모에게 자녀를 가르칠 책임이 있다고는 하나 자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사람의 본성이다. 교육으로 사람의 본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사람이 평생 어떤 길을 걷느냐 하는 것은 부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정한 바이다.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정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인류가 체험을 통해 종합해 낸 것이다. 상대가 미성년자일 때, 너는 그가 어떤 길을 걸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성인이 되면 사상이 생기고, 문제를 사고하게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일을 할지 선택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고위 관리가 되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변호사가 되겠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작가가 되겠다고 하는 등 각자 다른 선택을 하고, 자신만의 생각을 갖는다. 누구도 “부모님이 가르쳐 줄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부모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될 거예요.”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런 바보는 없다. 성인이 되면 사상이 활성화되고, 조금씩 성숙해지며, 눈앞에 놓인 길과 목표가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럼 그가 어떤 부류이고 어떤 집단에 속하는지가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나고 나타난다. 이때, 모든 사람의 성격이 점차 명확해지고, 성품도 점차 분명해지며, 그가 추구하는 길이나 인생 방향, 그가 속하는 집단 역시 점차 확실해진다. 이는 다 무엇에 근거한 것이겠느냐? 근원을 따져보면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지, 부모와는 상관이 없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1)> 중에서)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더라고요. 자녀가 바른길을 가고 못 가고는 부모의 교육이 좌지우지하는 게 아니라 자녀 본인의 본성에 의해 결정된다고요. 부모의 교육은 자녀의 외적 행위만 규범화할 수 있을 뿐이지 자녀의 운명까지는 바꿔 줄 수 없죠. 자녀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길을 가게 될지는 부모가 바꾸거나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제 사촌 동생도 매일 집에서 애를 붙들고 이것저것 다 관여했지만, 결국 자식은 자기 멋대로 살고 있죠. 맨날 공부도 안 하고 게임만 하고 있고요. 사촌 동생은 애가 뭐라도 제대로 했으면 하는 마음에 가게를 하나 차려 줬지만 결국 애는 여전히 한량으로 지내면서 부모한테 용돈 받고 살아요. 또 제 시누이를 보면 툭하면 남편하고 싸우고는 홧김에 친정에 와 버려요. 하지만 그 집은 애한테 크게 관심이 없어도 애는 공부도 줄곧 잘했고 일찍이 철들었어요. 사실 시누이가 교육을 잘 시킨 것도 없어요. 그냥 애가 태생이 공부를 좋아하고 열심히 하고 노력하거든요. 사실 저도 제 아들이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교육했지만 어릴 때부터 애가 자유분방했어요. 하교해서 집에 오면 컴퓨터에 앉아 게임만 하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았어요. 그리고 좀 엄하게 다루면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었죠. 사실 지금 애가 바른길을 가지 않고, 빈둥거리는 건 애 자신의 선택이자 자기 본성에 따라 결정된 거잖아요. 제가 교육한다고 선택을 달리할 것도 아니고, 제가 애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이걸 깨닫고 나니까 더는 제가 곁에서 애를 잘 교육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지 않았어요. 그리고 항상 제힘으로 애를 교육시켜서 미래와 삶을 바꿔 주려고 했던 교만하고 무지한 저를 보게 됐어요. 전 정말 너무나도 비이성적이었죠.
2023년 11월에 다시 아들과 연락이 됐어요. 그때 애가 남편이랑 시부모님하고 같이 안 살고 혼자 옛날 집에 살고 있더라고요. 밥은 하지 않고 계속 시켜만 먹고, 집 정리도 안 해요. 더러운 옷이 침대에 잔뜩 쌓여 있는 걸 보는데, 가슴이 아픈 거예요. 제가 말을 걸어도 듣는 둥 마는 둥 했어요. 애는 제가 보살펴 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면서 저를 엄마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애한테 너무 미안한 거예요. 엄마로서 애를 잘 챙겨 주지 못했으니까 엄마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느낌이 들었죠. 그래서 집 청소를 다 해 주고 애 빨래도 다 해 줬어요. 그리고 애가 자주 일도 안 하고 집에서 게임만 하면 자꾸 잔소리했죠. “이제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게 좀 제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니?”라고요. 근데 애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여전히 그 모양으로 살았어요. 나중에는 남편도 애가 빈둥거리며 지내는 게 꼴 보기 싫다면서 못 키워 준다고 했어요. 그때 전 이런 생각이 들었죠. ‘차라리 내가 일자리 하나 구해서 일하면서 애를 챙겨 줄까? 그렇게라도 엄마의 책임을 다하는 건 어떨까?’ 하지만 제가 새 신자 양육을 해야 하는데, 일하고 아들을 챙기다 보면 새 신자 양육을 지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예요. 심적으로 갈등이 심했어요. 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걸 생각하면 양심 없이 본분을 포기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일을 안 나갔어요. 근데 애를 도저히 내려놓지 못하겠는 거예요. 그래서 본분이 크게 바쁘지 않으면 집에 가서 챙겨 줬고,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 걱정을 했어요. 나중에 교회에서 저에게 객지로 떠나 본분을 이행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는데, 그러니까 더 애를 내려놓지 못하겠는 거예요. 제가 멀리 떠나면 애를 챙겨 줄 수 없는데 그게 걱정됐거든요. 근데 또 생각하면 지금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널리 확장하는 시기니 빨리 일어나 협력해야 하잖아요. 저도 몇 년 동안 본분 이행을 통해 훈련을 받았고 진리도 조금 알게 됐으니까 저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양심 없이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래서 객지로 떠나 본분을 이행하기로 했어요. 그때 놀랍게도 그 며칠 사이에 아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의 일을 찾은 거예요. 일해서 돈도 벌고, 이제 자립할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남편도 애를 받아 줬고요. 그건 제가 예상도 못 한 일이거든요.
그 후에 제가 자식을 내려놓지 못하는 근원이 뭔지 성찰하기 시작했는데,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게 됐어요. 『사람은 이 현실 사회를 살아가면서 사탄에게 깊이 패괴되었다.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 사람의 사상 관점에는 전통문화의 요소가 적지 않다. 특히 전통문화는 여자에게 남편을 돕고 자식을 가르치는 현모양처가 될 것을 요구한다. 여자는 남편과 자식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남편과 자녀를 위해 살아가며, 가족들 세끼 식사 준비와 뒷정리를 비롯한 모든 집안일을 훌륭히 해내야 한다. 이것이 모두가 인정하는 현모양처의 표준이다. 여성들도 모두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렇지 않으면 좋은 여자가 아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양심에 어긋나고 도덕 기준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도덕 기준에서 벗어나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남편과 자식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좋은 여자가 아니라고 느낀다. 네가 하나님을 믿은 후로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서 진리를 이해하고 일을 간파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피조물이니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해.’ 이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현모양처가 되는 일이 부딪히지 않느냐? 현모양처가 되려면 본분에만 전념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본분에만 전념하려면 현모양처가 될 수 없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여 책임 있게 교회 사역을 대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길을 택한다면 현모양처가 되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데, 이럴 때 너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네 사상에는 어떤 파동이 일겠느냐? 네 자식과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는 않겠느냐? 너의 그런 미안함과 불안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네가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드느냐? 미안함도 없고 죄책감도 없다면 그것은 네 마음과 네 사상 속에 진리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네가 이해한 바는 무엇이냐? 전통문화이고,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네 사상 속에는 현모양처가 못 되면 좋은 여자가 아니고, 바른 여자가 아니라는 관념이 생겨났다. 그때부터 너는 이 관념에 얽매이고 사로잡혀 하나님 믿고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여전히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본분 이행과 현모양처 되는 일이 부딪혔을 때, 너는 비록 마지못해 본분을 택하거나 하나님께 충성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안하고 죄책감이 든다. 그래서 본분을 이행하다가 틈이 생기면 자식과 남편에게 더 많이 보상해 주려는 마음에 여전히 그들을 챙길 기회를 찾는다. 설령 본인이 더 고생스럽더라도 마음만 편하면 된다. 이것은 전통문화 중에서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 이론의 영향을 받아서 생긴 일이 아니냐? 너는 지금 양다리를 걸친 채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고 싶고 현모양처도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책임과 의무, 너희의 사명은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 하나뿐이다.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였느냐? 어째서 또 다른 길로 빠지려 하느냐? 설마 네 마음속에 죄책감도 참소도 없단 말이냐? 진리가 아직 마음에 단단히 뿌리내리지 않고, 마음에서 진리가 권세를 잡지 못한 까닭에 너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다른 길로 빠진다. 비록 지금 본분을 이행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사실 진리의 기준, 하나님의 요구와는 거리가 멀다. …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기회이자 하나님이 정한 운명,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래서 너는 어떤 사람에게도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다할 필요가 없고, 오로지 하나님에게 피조물이 다해야 할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가장 당연히 해야 할 일이요, 사람의 일생에서 반드시 완성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일생일대의 과업이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너는 합격된 피조물이 아니다. 사람이 볼 때 너는 현모양처이자 훌륭한 주부, 효녀, 사회의 선량한 시민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 자신의 의무와 본분을 전혀 다하지 않은 사람, 하나님의 부탁을 받고도 완성하지 못한 사람, 도중에 포기한 사람일 뿐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이런 사람은 눈곱만큼의 가치도 없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자신의 잘못된 관점을 알아야 진정으로 돌이킬 수 있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깨달았어요. 제 주변의 여자들도 다들 현모양처가 되려고 했고, 저도 그걸 좋은 여자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더라고요. 좋은 여자는 자녀와 남편을 살뜰히 챙기고 모든 가사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결혼하고 나서 저는 혼자 모든 가사를 도맡았고, 아무리 힘들고 고생스러워도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본분을 이행하느라 아들한테 밥 세끼 챙겨 주지 못하고, 곁에서 보살펴 주지 못하게 됐을 때, 저는 엄마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느끼면서 자책하고 괴로워했고 애한테 미안한 감정을 느꼈어요. 그리고 세상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으니 저는 더더욱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애가 고생을 덜하게 챙겨 줄 수 있을지만 고민하면서 최선을 다해 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메우려고 했어요. 새 신자가 정상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면 신속하게 알맞은 진리를 찾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새 신자가 믿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먹을 정도로 소극적으로 변하고 나서야 붙들어 줬어요. 그렇게 새 신자의 생명에도 손실이 생겼죠. 저는 세상 사람의 호평과 자녀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생각하고, 교회 사역은 고려하지 않고,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했어요. 그럼 제가 아무리 엄마의 책임을 다하고, 자식의 하루 세끼를 다 챙겨 줬다 해도 피조물로서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을 잃은 거잖아요. 지금까지 수많은 역대의 성도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많은 형제자매들이 가정과 직업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증거하며 복음을 전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었잖아요. 그건 하나님께 인정받는 행실이자 선행이고 의로운 행위이며, 그게 진정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죠. 저의 모든 것과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거고, 지금까지 하나님이 양육하시고 공급해 주신 많은 말씀을 누렸는데, 그게 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잖아요. 그럼 더더욱 제 본분을 잘 이행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죠. 근데 저는 본분을 잘 이행하지 못한 걸로는 하나님께 미안한 마음이 없었고 오히려 아들한테는 미안한 감정을 느꼈으니 정말 양심도 인간성도 찾아볼 수 없었어요. 사람에게 좋은 어머니로 보이기를 추구하면 사람은 흡족하고 칭찬하겠지만, 그건 단지 가정과 육체만을 위한 삶이고, 허송세월하는 것일 뿐,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건 아니죠.
그 후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면서 자녀를 어떻게 대하는 게 맞는 실행인지 알게 됐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이 미성년자이든 어른이든 부모의 생명은 그들 자신만의 것이지 자식의 것이 아니다. 물론 부모는 자식이 공짜로 부리는 가정부나 노예도 아니다. 자식에게 어떤 기대를 품든 부모는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식에게 함부로 부림을 당하는 하인, 식모, 노예가 될 필요는 없다. 자식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든 부모 역시 독립된 사람이다. 그가 너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그가 어른이 된 이후의 생활을 당연한 듯 책임져서는 안 된다. 그럴 필요 없다. 그가 어른이 되었으니 너는 그를 부양하는 책임을 다한 것이다. 그가 앞으로 잘 살지 못 살지, 부유할지 가난할지, 즐겁게 생활할지 불행하게 생활할지 등은 그 자신의 일이지 부모와는 관련 없다. 부모는 이 모든 것을 바꿔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다. 그의 삶이 즐겁지 않다고 해도 부모는 “너는 불행하게 살고 있구나.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 재산을 팔고 내 평생을 다 걸어서라도 너를 즐겁게 해 줄게.”라고 말할 의무가 없다. 그럴 필요 없다. 너는 그저 책임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네가 그를 돕고 싶다면 그에게 왜 불행한지 물어보고 그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리적, 사상적 차원에서 문제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는 있다. 그가 받아들인다면 물론 더 좋지만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는 책임만 다하면 된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가 기꺼이 고생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그 자신의 일이니 그것으로 인해 네가 근심하고 괴로워하며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잘 필요는 없다. 다 부질없다. 왜 그렇겠느냐? 왜냐하면 그도 이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모든 일을 처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부모가 만약 그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그건 정인 것이다. 부모가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모가 모질거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어른의 문제를 직면해야 할 뿐 아니라 어른이 견뎌야 할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해야 하지 모든 일을 다 부모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물론 부모 역시 자식이 어른이 된 후 자식의 일이 잘 풀리는지, 사업이 잘되는지, 가정이 화목한지, 그리고 결혼 생활이 순탄한지 여부에 대한 책임을 전부 부모 자신이 짊어져서는 안 된다. 너는 관심을 갖고 물어볼 수는 있지만 모든 책임을 떠맡고 자식을 자기 곁에 묶어 둔 채 가는 데마다 데려가고 어디에 가든 다 지켜보며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늘도 밥 잘 먹고 즐겁게 지내고 있을까? 일은 잘하고 있겠지? 상사가 예쁘게 봐 주려나? 며느리(사위)가 걔를 사랑하겠지? 우리 손주는 말 잘 듣고 있겠지? 학교에서 공부는 잘하려나?’ 이런 것들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자식의 일은 자식 스스로 해결하면 되지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왜 물어보겠느냐? 정말로 너와는 상관없다는 뜻이다. 너는 자식에게 책임을 다했고 그가 클 때까지 정성 들여 길렀다. 그러니 너는 이제 물러나야 한다. 물러난다고 해서 네가 할 일 없이 한가한 것도 아니다. 너는 여전히 할 일이 많다. 네가 이번 생에 완수해야 할 사명에 있어 자식이 어른이 될 때까지 정성 들여 기르는 것 외에도 완수해야 할 다른 사명이 또 있다. 너는 네 자식의 부모일 뿐 아니라 피조물이기도 하다. 너는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에게 와서 너의 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너의 본분은 무엇이겠느냐? 너는 본분을 완수하였느냐? 전력을 다했느냐? 구원받는 길에 들어섰느냐? 너는 이런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자식이 어른이 된 후 어떤 길을 갈지, 어떻게 생활할지, 형편이 어떨지, 기쁘고 즐거울지는 부모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 형식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그는 이미 독립했다. 너도 그를 독립적이 되게 하고, 그만 놓아주어야지 통제해서는 안 된다. 형식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육체적 혈연관계 차원에서든 너는 이미 책임을 다한 것이고, 더 이상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8)> 중에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너는 여생의 에너지와 세월을 네가 이행하는 본분과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에 쏟아부어야지 자녀를 위해 시간과 세월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네 생명은 자녀에게 속하지 않으며, 자녀의 삶이나 생존을 위해서, 자녀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소모해서도 안 된다. 네 생명은 하나님이 맡긴 본분과 부탁, 그리고 너라는 피조물이 완수해야 할 사명에 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네 생명이 지닌 가치이자 의미이다. 만약 네가 자녀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꺼이 존엄을 내팽개치고 자녀의 노예가 되어 자녀를 걱정하고 무슨 일이든 해 준다면 이는 의미도, 가치도 없는 행동이며, 하나님께 기억될 수도 없다. 한결같이 이렇게 하면서 이런 생각과 행동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그것은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도,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또한, 너라는 사람은 더없이 패역하고, 하나님이 준 생명과 세월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만약 네 생명과 세월을 하나님이 준 본분에 쏟지 않고 오직 네 육과 감정을 위해 쏟는다면 너라는 사람은 살아갈 필요가 없으며, 그 삶은 가치가 없으니 너는 살아갈 자격도, 하나님이 준 생명을 누릴 자격도, 하나님이 베풀어 준 모든 것을 누릴 자격도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고 깨달았죠. 부모의 책임과 의무는 자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잘 키워 주고 사람됨의 도리를 잘 가르치는 거죠. 그리고 아이가 자라서 혼자 살 수 있는 능력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어른이 되면 부모는 그만 놓아주어야 하는 거죠. 근데 현모양처가 되려고 평생을 가정과 자녀를 위해 사느라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건 아무런 가치와 의의도 없는 삶이 되는 거죠. 아들에 대한 저의 책임은 어른이 될 때까지 잘 키우는 거예요. 아이가 바른길로 가고 참답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도록 깨우쳐 주는 거죠. 돌아보면, 애가 어렸을 때부터 늦게까지 게임을 했어요. 저는 애한테 온라인 게임은 사람에게 매우 해로운 것임을 얘기해 주고, 실용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하나님의 참된 존재를 증거했죠. 하지만 아이는 듣지 않고 계속 놀고먹기만을 좋아했어요. 그리고 남편도 애가 바르게 살지 않으니 부양하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그건 아이가 가는 길에 따른 결과이고, 본인이 감당해야 할 고난인 거죠. 저는 엄마로서 책임을 다했으니 애한테 미안할 것도 없는 거죠. 근데 제가 애의 삶만 생각하면서 본분을 버리고 애를 챙겨 주는 데에 저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다 쏟아붓고 아들의 모든 생활을 제가 다 떠맡고, 심지어 남은 생을 모두 다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면, 그건 정말 어리석은 거더라고요. 사실 아들도 이제 성인이거든요. 그럼 어떤 인생길을 갈지 본인이 선택하는 거고 또 혼자 생활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있거든요. 제가 애를 평생 챙겨 줄 수도 없고, 그 아이의 운명을 바꿔 줄 수도 없잖아요. 저는 한 아이의 엄마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피조물이잖아요. 그럼 당연히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을 위해 살고 저의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게 옳죠. 아직도 하나님 앞에 오지 못한 사람도 많고, 아직 뿌리를 온전히 내리지 못한 새 신자들도 많고 많죠. 그 사람들을 빨리 양육해야 하는 게 제가 다해야 할 책임이자 본분이죠. 그러니 저는 제 본분에 시간과 에너지를 더 많이 투자해야 하잖아요. 제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저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만 하면 되는 거더라고요.
그 후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게 됐어요. 『모든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므로 평생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고 얼마나 많은 복을 누릴지, 어떤 가정과 결혼, 자녀를 갖게 될지, 이 사회와 인생 속에서 어떤 일들을 겪을지 자녀 스스로도 예측하거나 바꿀 수 없으며, 부모는 더더욱 바꿀 능력이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깨달았어요.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어떤 고난을 받고, 어떤 복을 누리고, 어떤 일들을 겪어야 하는지는 모두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거라 사람이 바꿔 놓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부모가 자기 운명도 바꾸지 못하는데, 자식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겠어요? 자식이 평생 어떤 운명으로 살고, 어떤 굴곡진 삶을 살게 될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따라가는 거죠. 그게 그 아이의 인생길이고 당연히 겪어야 하는 과정인 거죠. 큰 붉은 용의 체포와 박해 때문에 제가 곁에서 아들을 잘 챙겨 주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뒷바라지해 줄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것도 현실이고요. 더구나 이제 아들도 성인이 됐으니까 이제 혼자서 미래를 향해 걸어가고 독립적으로 자기 몸을 건사해야 하잖아요. 이렇게 실행의 길이 생기니까 저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물론 상황이 되면 집에 가서 좀 들여다보고 애도 챙겨 주겠지만, 그래도 제 본분 이행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죠. 그렇게 살아야 마음도 편하고 평안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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