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고난 속에서 순종을 배우다
2008년 초, 아들의 귀 뒷면에 멍울이 생겨서 병원에서 검사를 했더니 종양이라고 했습니다. 의사는 이런 종양이 특히 뼈를 갉아 먹는다면서 당장은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지만, 특효약이 없어서 치료도 잘 안 되는, 상당히 고생스러운 질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발병할 때마다 감염된 뼈 부위를 잘라 내야지, 안 그러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의사의 말을 들으니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라 하나님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의지하는 분이시니 아들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며, 일단 하나님께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아이를 축복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나중에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회복도 무척 빨랐습니다. 수술한 지 3일 만에 아이는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일주일 만에 퇴원했습니다. 그 후로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겠다는 의지는 더 커졌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기든 기쁘게 받아들이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본분에 열중했습니다. 가족들이 이해해 주지 않고, 친지나 친구들이 뒤에서 손가락질해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고난받고 헌신한다면, 분명 하나님은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10년 봄, 채 아홉 살도 안 된 아들이 갑자기 허리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니 왠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옷을 젖혀 아이가 말한 위치를 보니 볼록하게 멍울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살짝 만져 봤는데 아이는 아프다고 난리였습니다. 순간 병이 재발했다는 생각에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습니다. 급히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니 과연 병이 재발한 것이었습니다. 맨 처음 수술을 마치고 수술실에서 나올 때 온몸에 관을 잔뜩 꽂은 허약한 모습을 보고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또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할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린 아들이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근심스러운 마음에 며칠은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그 병을 내가 걸려서 대신 아파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다음부터 계속해서 하나님께 헌신했는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지켜 주지 않으시는 거지?’ 다행히 그날 같은 동네에 사는 자매님이 문안을 왔습니다. 자매님의 교제를 듣고서 아들에게 병이 난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는 한편, 믿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고 자기 본분을 끝까지 잘 이행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꾸준히 예배에 나갔고, 본분을 이행하려는 열정도 더 강해졌습니다. 예배 시간에 저의 이러한 체험을 형제자매들에게 이야기했더니 모두들 제 믿음에 감탄했습니다. 형제자매들의 칭찬을 듣자, 제가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섰으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아들을 축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당시 저는 마음 있는 불순물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제가 굳게 섰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이의 병은 다섯 번까지 재발했고, 의사는 발병 주기가 거의 6개월인데, 이러면 너무 위험할 수 있으니 화학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맥이 탁 풀리면서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때 전 하나님을 상대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교회 일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고, 다른 사람이 비판하고 공격해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계속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이런 고난을 다 감내했는데, 왜 제 아들을 지켜 주지 않으십니까?’ 저는 마음이 원망으로 가득 차서 외적으로는 예배 모임과 본분을 계속해 나갔지만 마음은 이미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말씀 책을 손에 들고도 멍하니 있기 일쑤였고, 기도를 해도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습니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저는 속마음을 하나님께 다 털어놓았습니다. ‘하나님, 지금 너무 괴롭습니다. 아이가 아프더라도 당신을 원망하면 안 된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당신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저를 깨우치고 이끌어 주십시오.’ 기도를 마치자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가령 욥이 하나님을 증거한 후에 하나님이 그를 멸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공의롭다.』 그래서 바로 찬양을 찾아 들었습니다. 『2. 공의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 고생한 만큼 분배하는 것, 일한 만큼 돈을 주는 것, 노력한 만큼 얻는 것, 이것은 공의가 아니다. 가령 욥이 하나님을 증거한 후에 하나님이 그를 멸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공의롭다. 어째서 그것을 공의라고 하겠느냐? 사람이 보기에 어떤 일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한다면 하나님은 공의롭다고 말하기가 매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데 하나님을 공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공의이다. 그의 행사를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이 행하는 것은 모두 공의롭다. 다만 사람이 깨닫지 못할 뿐이다. 3. 하나님이 베드로를 사탄에게 넘겨주었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말했느냐? “당신이 하시는 일을 사람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늘 당신의 아름다운 뜻과 공의가 있지요. 그러니 제가 어찌 당신의 지혜로운 행사에 찬미를 보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다 공의롭다.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마음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네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거나 관념을 가진 일에 있어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장 비이성적인 행위이다. 베드로는 어떤 일들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지혜와 아름다운 뜻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사람이 모든 것을 측량할 수는 없으며, 사람이 측량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드물다.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어린양을 따르며 새 노래 부르네ㆍ하나님이 하는 일은 모두 공의라> 중에서) 찬양을 반복해서 듣는데, 들을수록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제가 생각하듯 하나를 둘로 나누는 그런 공평함과 합리가 아니고, 수고에 따라 분배를 받거나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는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이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든 모두 공의롭고, 그 속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바로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제 관념으로는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은 당연히 나를 보살펴 주어야 하고, 내가 하나님께 헌신했으니 하나님은 항상 나를 충족시켜 주고, 범사에 나를 평안하게 해 주어야 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가족 전체가 복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과 거래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얼른 말씀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은 뒤 평안만 얻고자 한다. 자식에게 병이 없고, 남편에게 좋은 직업이 있고, 아들이 좋은 배우자를 찾고, 딸이 좋은 남자와 결혼하고, 너의 우마가 밭갈이를 잘하고, 한 해의 농사가 잘되길 바란다. 네가 추구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너는 오직 편안하게 살기만을 바라고, 너의 집에 나쁜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며, 바람이 불어도 네 몸에는 불지 않고, 모래가 날려도 네 얼굴은 때리지 않으며, 홍수가 나도 네 집의 곡식은 잠기지 않고, 모든 재난이 너와 무관하길 바란다. ‘하나님의 품속’에서 살고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생활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처럼 육적인 것만 추구하는 못난 놈에게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영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너는 짐승 아니겠느냐? 아무 대가도 없이 참도를 네게 베풀어 주었는데 너는 추구하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느냐? 진정한 인생을 베풀어 주었는데 추구하지 않는다. 그럼 너는 개돼지 따위가 아니겠느냐? 돼지는 인생을 추구하지 않고 깨끗함을 바라지도 않으며 인생이 무엇인지 모른 채 날마다 배불리 먹고 쿨쿨 잠만 잔다. 참도를 베풀어 주었건만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런 돼지 같은 삶을 계속하고 싶으냐? 그런 사람이라면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비루하고 저속하며, 더럽고 음란하게 살면서 추구하는 목표가 하나도 없으니 너의 일생은 가장 비천한 일생 아니겠느냐? 무슨 낯으로 하나님을 뵙겠느냐? 계속 그렇게 체험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 아니겠느냐?』(<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제가 하나님을 믿는 속셈과 목적, 사치스러운 욕심이 다 드러나 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읽을 때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돌아보니, 제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도 복을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헌신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 평안을 주시고, 아들도 건강할 줄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이 손가락질해도 계속 본분을 이행했던 것입니다. 아들의 병이 재발했을 때는 하나님이 그것을 이용해 하나님을 향한 저의 믿음이 진실한지를 검증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모든 고난을 견디고 굳게 선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아들의 병도 치유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병이 자꾸 재발해서 생명이 위태로워지고, 복과 은혜를 바랐던 저의 욕심이 깨졌을 때, 저는 원망을 토하며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하나님을 공의롭지 못하다고 불평했고, 본분을 향한 열정도 식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서야 제가 헌신하고 노력했던 이유가 모두 하나님의 축복을 얻으려고 했던 것으로, 제가 그동안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하나님을 속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마주한 저는 크게 탄복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공의롭고 거룩하신 분이고,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시련을 통해 불순물이 섞인 저의 믿음과 복을 추구하는 그릇된 관점을 깨닫지 못했더라면, 계속 자신의 외적인 행위에 미혹되어 스스로를 충성스러운 사람이자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선 사람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입니다.
그 후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적 상태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에 맞추어 새로운 사역을 하고, 이로써 사람이 그를 알고 그에게 순종하며 그를 사랑하고 증거하게 한다. 이렇게 되려면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연단을 겪어야 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훈계와 책망을 겪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영영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진실하게 사랑하거나 증거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연단하는 것은 한 측면의 성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의 성과를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진리를 구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연단의 사역을 하고, 이로써 사람의 의지와 사랑이 하나님께 온전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연단은 진리를 구하기 원하며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이자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이 쉽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므로 어쨌든 사람과 같은 성품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의 성품을 알기가 쉽지 않다. 진리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사탄에 의해 패괴된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에게는 진리가 갖추어져 있지 않고, 진리를 실천하려는 의지도 갖추어져 있지 않다. 사람이 고난과 연단을 받지 않고 심판도 받지 않는다면, 사람의 의지는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연단은 모든 사람에게 상당히 고통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연단 속에서 사람에게 자신의 공의로운 성품을 보여 주고, 연단 속에서 사람에게 자신의 요구를 공개하는 한편, 연단 속에서 사람에게 더 많은 깨우침을 주고, 더 많이 실질적으로 책망하며 훈계한다. 이렇게 사실과 진리를 대조함으로써 사람이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하고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더 잘 깨닫게 하며, 이를 통해 사람이 하나님을 더 참되고 순수하게 사랑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연단의 사역을 하는 목적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연단을 겪어야 참된 사랑이 생기게 된다> 중에서) 말씀 가운데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시련과 연단을 주시고 고난의 환경을 주어 겪도록 하시는 목적은 바로 사람을 드러내고 정결케 하기 위함입니다. 이로써 사람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자신의 실체를 똑똑히 보고, 하나님을 믿을 때 드러나는 자신의 불순물과 패괴 성품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여 정결케 되고 변화되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이의 병이 재발하고 심해지자 이를 계기로 그동안 감춰졌던 저의 속셈과 패괴 성품이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부터 어떻게 하면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을 수 있을지만 궁리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정말 열정적이고 누구보다 열심히 추구하는 것 같았지만 그 이면에는 저의 비열한 속셈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사탄 독소의 지배를 받아 무슨 일을 하든 자기 이익부터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 욕심이 무산되면, 하나님께 대항하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갖은 추태를 보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비열했습니다. 지금껏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토색질하고 대적했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저는 하나님께 엎드려 통곡하며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지금까지 저는 복을 바라는 마음을 품은 채 당신을 속이고, 늘 당신과 거래를 했습니다. 진실한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참으로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인간성을 상실한 존재입니다. 이제 복을 바라는 속셈을 내려놓겠습니다. 아들을 당신께 온전히 맡기고 당신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면서 절대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너무 홀가분했습니다.
며칠 후, 본분 때문에 다른 지역에 있었는데,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종양이 머리, 허리, 경추까지 다 전이되어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의 말을 듣고 저는 한참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아들의 모습을 도저히 상상하고 싶지 않았고, 전화를 끊은 후에는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지금의 결과를 마주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너무 연약합니다. 당신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기도를 마친 후,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행하는 많은 일들이 이해되지 않고, 심지어는 기이하게 보일 때도 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할 때, 이 ‘지배’는 대부분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으며, 이해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자 검증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드러났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것이다. … 비록 하나님이 서로 다른 배경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 사람을 검증한다고는 하나,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았고, 아브라함의 마음이 진심임을 보았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무조건적인 것이었고, 이 ‘무조건’은 바로 하나님이 원한 것이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이미 이것을 바쳤고, 그것을 포기했어. 그런데 하나님은 왜 내게 만족을 못 하시는 걸까? 왜 계속 내게 시련을 주시는 거지? 왜 계속해서 나를 검증하시는 거지?” 이것은 한 가지 사실을 설명해 준다. 하나님은 너의 마음을 보지 못했고, 너의 마음을 얻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너에게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여 하나님께 바치려고 칼을 들었던 것과 같은 그런 진심과 무조건적인 순종을 보지 못했고, 너에게서 위안을 얻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네 시련이 계속되는 것은 당연하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번 곱씹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독생자를 하나님께 바칠 때, 그는 요구하지 않았고, 이유를 대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요구대로 아들을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이 당연한 이치요, 피조물이 지녀야 할 양심이자 이성이었습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해야 하기에 종국에는 아들을 죽이기 위해 진정으로 칼을 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은 진실했기 때문에 사실의 검증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저를 비춰 보니, 저는 말로는 하나님의 지배를 따르겠다고 말하고 아들을 하나님께 맡기겠다고 했지만 마음에는 나름의 요구가 있었습니다. 아이의 병이 악화되어 손쓸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아이를 잃을 수 있다는 고통에 직면하자 바로 요구가 생겼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참으로 이성적이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믿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 아들은 저의 소유물이 아니었고, 아들의 숨결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단지 저의 몸을 빌어 인간 세상에 태어났을 뿐, 아들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벌써 정해 놓고 안배해 놓으셨습니다. 그 아이가 평생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고, 얼마나 고생을 하게 될지는 이미 다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생명이 여기까지라면 저는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를 깨닫자 저는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들은 저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당신이 아이를 저에게 주시든 거두어 가시든, 모두 당신의 뜻이 있는 줄 믿습니다. 아이의 생사를 당신께 맡기고 순종하겠습니다. 당신께서 어떻게 하시든 절대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기도를 마치니 그렇게 괴롭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한 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어느 날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남편이 전화가 와서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아들의 종양이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병원에서 CT 검사를 했더니 자연 치유가 된 것으로 확진이 났고, 의사들도 이 병이 자연 치유된 경우는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너무 감격해서 눈물이 났고 속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했습니다. 이 특별한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생명이 있든 없든 전부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움직이고 변화하고 새로워지며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방식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은 사람 생명의 근원이다> 중에서) 저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재하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도 있고, 유에서 무로 돌아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손에 달렸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마음으로부터 감사를 드렸습니다.
1년 후, 남편에게서 갑작스레 문자가 왔습니다. 아들의 병이 재발하여 화학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괴롭기는 했지만, 전에 이미 경험한 바가 있으니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고자 했습니다. 뜻밖에도 보름 후 아들은 퇴원을 했고, 지금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병은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병에 걸린 일로 비록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했지만, 하나님은 제 무지와 어리석음을 보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저를 깨우치고 인도하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자신의 간사한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복을 추구하는 그릇된 관점을 되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과 주재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게 내리신 은총과 축복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