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가?
말세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사람은 사탄에 의해 패괴되기 전에는 본래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바로 순종했으며, 이성과 양심이 건전하고, 인성이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이후로 사람에게 원래 있었던 이성과 양심, 인성이 무감각해지고 전부 사탄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사랑을 모두 잃게 된 것이다. 사람의 이성이 정상에서 벗어나고, 사람의 성품도 짐승처럼 변해 하나님에 대한 패역이 점점 많아지고 심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아직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무턱대고 대적하고 거역하기만 한다. 사람이 드러내는 성품은 곧 사람의 이성, 식견, 양심의 발현이다. 사람은 이성과 식견이 건전하지 못하고, 양심이 극도로 무감각해졌기 때문에 사람의 성품 또한 하나님을 거역하는 성품이 된 것이다. 사람의 이성과 식견을 바꾸지 못하면 성품 변화는 물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는 것도 말할 나위가 못 된다. 사람은 이성이 건전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정상적인 이성이란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스러우며,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하나님에 대해 절대적이고 양심적이며, 하나님에 대해 일편단심이고,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이성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사탄에 의해 패괴된 후 하나님에 대해 관념이 생기고,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졌으며,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게 되었다. 양심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판단할 뿐만 아니라, 뒤에서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인 줄 뻔히 알면서도 뒤에서 판단하며, 순종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이 계속 하나님께 달라고 하고 요구하기만 한다. 이처럼 이성이 비정상적인 사람은 자신의 비열한 행위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패역한 행위를 통회하지도 못한다. 자신을 알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이성이 조금은 회복된 사람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면서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이성이 더 건전하지 못하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품이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적이 된다> 중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이유는 기존에 있던 것들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 내면에 여러 가지 관념과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상상을 만들어 냈으며, 이런 것들이 모두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므로 사람이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의 관념이자, 자신의 상상 속 기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네가 너의 상상 속 하나님을 기준으로 오늘날 실제적으로 사역하는 하나님을 판단한다면 너의 믿음은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며, 이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원치 않는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자격을 갖추고 아무리 많이 헌신해도, 설령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 심지어 순교를 해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는 은혜를 조금 베풀어 주어 잠시 누리게 할 뿐이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실천했다고 할 수 없다. 성령은 이런 사람에게 역사하지 않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하나씩 도태시킬 것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 마음가짐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은 모두 대적하고 방해하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의심의 여지 없이 모두 도태될 대상이다. 하나님에 대해 조금의 순종도 없이 그저 하나님의 이름만 인정하고 하나님의 친절함과 사랑스러움을 조금 느낄 뿐 성령의 발걸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성령의 현재 사역과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없고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도 없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중에서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려면 한편으로는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의 패괴 성품을 심판하고 정결케 함으로써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사람에게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올바른 길을 걸을지 가르쳐야 하며, 진리를 실행하는 법, 본분을 잘 이행하는 법,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법을 알려 주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탄의 사상 관점을 폭로하고, 사람을 패괴시키는 사탄의 갖가지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전부 폭로하고 해부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이 분별력을 가지게 한 다음 사탄의 것들을 마음속에서 제거하게 하고, 정결케 되어 구원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사람이 진리란 무엇인지를 깨닫는 한편 사탄의 성품과 본성, 사탄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따를 믿음을 얻는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사탄의 추함을 똑똑히 보게 되고, 사탄을 진정으로 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의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 비록 사람이 마음을 완전히 하나님에게 맡기기 전이어도, 다시 말해 사람의 마음이 아직 진리에 점유되지 않고 하나님에게 얻어지지 않았어도, 최소한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했다면 생활 체험 속에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사탄이 주입한 각종 의견을 분별하고 해부하고 간파할 수 있으며, 결국에는 그것을 버릴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탄의 자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급한 진리 원칙 등등 긍정적인 사물에 속하고 진리에 속하는 생명이 사람 내면에 차츰 뿌리를 내려 사람의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사람 마음속에서 왕권을 잡은 것이다. 즉, 사람을 패괴시키는 사탄의 각종 사상 관점,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사람이 분별하고 간파하여 증오하고 버리게 되면, 진리가 서서히 사람의 마음을 점유하고 사람의 생명이 된다. 그러면 사람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여 이끌든 적극적으로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체험 속에서 적극적으로 진리에 공을 들여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이러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생기는 데다가 진리를 점점 더 분명히 알게 되면서 믿음도 점점 커진다.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생기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따라서 생겨난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생기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얻기를 갈망하고, 기꺼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 순종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고, 자기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매일 혹은 매번 특별히 마련한 환경에 순종하게 된다. 사람은 이러한 바람과 갈망이 생기는 동시에 하나님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하게 된다. 사람에게 이러한 측면의 결실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실제적이 되면 사탄의 의견과 사상 관점이 사람의 마음에 작용하지 못한다. 사탄의 의견과 사상 관점이 사람에 대한 통제력과 영향력을 점차 잃어 간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5)> 중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말씀의 폭로와 인도하에 인류의 패괴와 사악함, 추태, 그리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 근원을 찾게 되면, 왜 사람이 하나님과 합하지 않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물과 기름이 영원히 섞일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의 본질이 본래부터 하나님과 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한쪽이 본질을 바꿔 다른 쪽의 본질과 같아져야만 서로 합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해 바꾸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겠느냐? 사람이다. 하나님은 진리를 선포해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며 사람의 패괴 성품과 사람 안에 있는, 진리에 어긋나고 하나님과 합하지 않는 것들을 해결함으로써 사람이 하나님과 합할 수 있게 하고, 사람 안의 모든 것이 진리에 부합할 수 있게 한다. 그러면 너와 하나님 사이에 거리가 없어진다. 패괴 성품을 없애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경계, 오해, 거부, 의심, 의혹, 심지어 패역과 정죄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것들은 모두 사람의 본성 안에 있는, 근원적인 것이다. 이런 패괴 성품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면 하나님에게 순종하기가 쉽다. 그럼 하나님이 말씀하고 행한 것이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맞지 않을지라도 사람은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또 죽어서 지옥에 갈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것만을 한탄하며 징벌받아 마땅하다고 여길 것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며, 그와 하나님 사이에는 거리가 없다. 진리를 깨닫고, 패괴가 정결케 되며,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게 되어 더는 관념도, 패역도, 대적도 없다면 그는 하나님과 합할 수 있게 되며, 진리를 생명으로 삼아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는 생명을 갖게 된다. 그 생명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순종과 진실한 경배가 갖춰져 있을 것이다.
― 하나님의 교통 중에서
순종의 공과를 배우려면 주로 어떤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겠느냐? 바로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품을 해결해야 한다. 이는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사람이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품을 갖고 있으면 이치를 따지고 불복하면서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여기기 아주 쉽다. 그러므로 먼저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품을 해결하고 다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이 얌전해지고, 자신의 이치를 말하지 않게 되면 패역 문제가 해결될 것이며, 순종도 할 수 있다. 사람이 순종하려면 어느 정도의 이성을 갖추어야 하지 않겠느냐? 반드시 정상인의 이성을 갖춰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일에서 너희의 행동이 옳든 그르든 하나님이 만족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무슨 일이든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이것이 이성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사람이 지녀야 할 이성이자 무엇보다 먼저 갖춰야 할 점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든, 우리의 마음가짐과 목적이 무엇을 위한 것이든, 이유가 무엇이든, 하나님이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지 못했다면 우리의 행동은 분명 진리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께 순종해야지, 하나님께 이치를 따지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 네가 이러한 정상인의 이성을 지녔다면 네 문제를 해결하기도 쉬울 것이며, 진실한 순종이 생길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패역이 없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반항하지 않고, 하나님의 요구가 옳은지 그른지, 좋은지 좋지 않은지 분석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치를 따지고, 강퍅하고 패역한 내적 상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런 패역의 내적 상태는 누구에게나 있지 않겠느냐? 사람은 수시로 이러한 내적 상태를 드러내며, ‘내 행동과 주장, 건의가 상식에 부합한다면, 진리 원칙을 어겼더라도 나를 책망하거나 훈계해서는 안 돼. 나는 악을 행한 게 아니니까.’라고 생각한다. 이는 사람에게 자주 생기는 내적 상태이다. 이런 사람의 관점은 악을 행하지 않았다면 책망과 훈계가 임해서는 안 되며, 오직 악을 행했을 때만 책망과 훈계가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관점이냐? 절대 그렇지 않다. 책망과 훈계는 주로 패괴 성품을 겨냥한 것이다. 패괴 성품이 있다면 책망과 훈계를 받아야 한다. 악을 행한 후에 책망하고 훈계한다면 그때는 이미 늦었다. 이미 일을 저질러 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너를 책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저 드러나고 도태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바로 교만한 성품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정말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자신의 교만한 성품을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해결할 수 있든 상관없이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로 패괴 성품을 해결하기 위해서이고, 하나님께 구원받기 위해서이다. 만약 사람이 정말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다면, 심판과 형벌을 겪을 필요가 있겠느냐? 책망과 훈계를 겪을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다. 패괴 성품이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조건> 중에서
사람은 성품을 스스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 고난과 연단, 또는 책망과 훈계, 징계를 겪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을 다하며, 하나님을 무성의하게 대하거나 건성으로 대하지 않게 된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 말씀의 연단을 받아야 성품에 다소 변화가 보인다. 하나님 말씀의 폭로와 심판, 징계와 책망을 겪은 사람만이 감히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고 침착하며 진중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현재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을지라도 관념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품이 변화된 사람은 모두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한 사람이다> 중에서
하나님이 행한 일이 네 관념에 맞지 않는다고 네가 하나님을 오해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한다면, 너는 하나님께 순종하기까지 아직 멀었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의 공급과 양육을 받아들이는 동안, 사실 늘 하나의 목표를 향해 노력한다. 바로 마지막에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라는 피조물은 합당한 자격을 갖춘 것이다. 때로 하나님은 일부러 네 관념에 맞지 않는 일, 네 바람과 어긋나는 일, 심지어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인지상정에 어긋나고 사람의 취향에 맞지 않아 보이는 일을 한다. 그리하여 네가 받아들이기 힘들고, 네 생각으로는 통하지 않고, 아무리 분석해도 옳지 않은 것 같고, 아무리 분석해도 받아들일 수 없어 이 일은 하나님이 불합리하게 했다고 생각하게 한다. 사실 하나님은 일부러 이렇게 한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한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너를 검증하고 드러내어 네가 진리를 구할 수 있는지,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하고 있는지를 보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한 것, 하나님이 요구한 것을 대할 때는 근거를 찾지 말고, 이유를 묻지도 마라. 무슨 이치를 따져도 소용없다. 너는 하나님이 진리임을 확신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 너는 하나님이 너의 창조주이고 너의 하나님이라고 정확하게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모든 도리와 처세술보다 높고, 사람의 도덕, 윤리, 지식, 철학 혹은 전통문화보다 높으며, 심지어 인간의 정, 인간의 의, 소위 인간의 사랑보다 높고, 모든 것보다도 높다. 네가 이것을 꿰뚫어 보지 못하면 조만간 어느 날 무슨 일이 닥쳤을 때 쓰러질지도 모른다. 가볍게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굽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러다 마지막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하나님이 너에게 역사한 의미를 인식할 수 있다면, 아직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하지만 이 일 때문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다면 희망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심판하든, 형벌하든, 저주하든 이는 모두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니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럼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이 “나는 너를 혐오하여 버렸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두려워해라. 이 말을 들으면 큰일이다. 이는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사람에겐 조금의 희망도 남지 않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절대 글자에 얽매여 “심판, 형벌, 이 단어는 괜찮아. 정죄, 저주, 궤멸은 끝장인 거 아냐? 그럼 피조물 노릇 할 필요 있겠어? 안 하고 말지. 당신은 이제 내 하나님도 아니야.”라고 말하지 마라. 네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굳게 서서 증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정말로 너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이 점을 인식했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얼마나 오래됐든,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녔든, 얼마나 많은 사역을 하고 얼마나 많은 본분을 이행했든, 이 기간에 사람이 한 모든 것은 사실 한 가지 일을 위한 예비였다. 무슨 일을 예비하고 있었겠느냐? 마지막에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무조건적이란 어떤 것이냐? 네 이유를 대지 말고, 네 객관적인 원인을 말하지 말며, 어떤 것도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너는 피조물이니 그럴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 따진다면 네가 선 자리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 이치를 따진다면 이 역시 네가 선 자리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과 논쟁하지 마라. 자꾸 이유를 밝히려 하고, 꼭 깨달아야만 순종하고, 깨닫지 못하면 순종하지 않으려고 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네가 선 자리가 잘못된 것이다. 그럼 하나님에 대한 네 순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조건부 순종이 된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에서 조건을 내거는 사람이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하는 사람이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했느냐? 창조주로 여겨 경배했느냐?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너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일을 체험해야 네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순종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체험해야겠느냐? 한편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또 한편으로,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본분 이행 과정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생명 진입에 관한 여러 측면의 진리를 깨달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때로는 사람의 자질이 부족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이해력이 없어 다른 사람의 교제에 기대고 하나님이 배치한 여러 환경에 기대어 공과를 배워야만 조금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너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거나 조건을 내걸지 마라.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든 모두 당연하다. 그는 창조주이고, 너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너는 순종하는 태도를 지녀야지 자꾸 이유를 묻거나 조건을 걸어서는 안 된다. 네게 가장 기본적인 순종의 태도조차 없다면, 더 나아가 하나님을 추측하고 경계하고, 또는 속으로 ‘하나님이 대체 날 구원하시는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지 봐야겠어. 다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데, 그럼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일에 정말 사랑이 있는지, 과연 사랑이 맞는지 봐야겠어.’라고 생각한다면, 언제나 하나님의 행사가 네 관념에 부합하는지, 네 입맛에 맞는지, 심지어 네가 생각하는 진리에 맞는지 등을 연구한다면 그것은 네가 선 자리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면 너는 위험할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쉽게 거스를 것이다. 순종 측면의 진리는 매우 중요하다. 어떤 측면의 진리도 한두 마디로 완벽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어떤 측면의 진리든 다 사람의 여러 내적 상태, 여러 패괴와 관련되어 있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은 1~2년, 3~5년 만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일을 체험하고,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많이 체험하고, 책망과 훈계를 많이 체험해야 한다. 결국 진리를 실행할 수 있어야만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효과를 거둘 수 있고, 진리 실제를 갖출 수 있다. 진리 실제를 갖춘 사람이야말로 진실한 체험이 있는 사람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자 했으며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모든 것에 순종하고자 했다. 그는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연단과 환난, 궁핍한 생활 역시 받아들였으며,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한 것 아니겠느냐?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한 것 아니겠느냐? 형벌이든 심판이든 환난이든 너는 죽기까지 순종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피조물이 도달해야 하는 경지이자, 사랑 안에 있는 순결한 요소이다. 사람이 이런 경지에 도달한다면 그는 합당한 자격을 가진 피조물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창조주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위해 사역은 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너는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정죄받을 것이다. 너는 진리가 없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것만 중요하게 여기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과 자신에 대한 인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창조주를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할뿐더러 창조주께 순종하지도 않고 창조주를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너는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순종의 공과는 가장 어렵기도 하지만 또 가장 쉽기도 하다. 어렵다고 하면, 어떤 점이 어려우냐?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다는 점이 어렵습니다.) 사람이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 이는 어려운 점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가 생각이 없겠느냐? 사람은 모두 마음과 두뇌를 가지고 있고, 모두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생각이 있다는 것은 어려운 점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어려운 것이냐? 사람의 패괴 성품이 어려운 점이다. 패괴 성품이 없다면 아무리 생각이 있어도 순종할 수 있으니 이는 어려운 점이 아닌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이런 이성을 갖추고 “모든 일에 있어 저는 전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저는 이유를 따지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일을 규정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순종하기 쉽지 않겠느냐? 규정하지 않는 것, 이것은 사람이 독선적이지 않음을 나타낸다. 고집하지 않는 것, 이것은 사람이 이성적임을 나타낸다. 거기에다 순종할 수 있다면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규정하지 않고 고집하지 않는 것, 이는 순종의 전제 조건이다. 네가 이 두 가지를 갖추면 쉽게 순종할 수 있고 손쉽게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그래서 순종하기 전에 너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미리 갖추어야 한다. 네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놓아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진리 실행의 태도이다. 어렵다지만 어렵지 않고, 어렵지 않다지만 그래도 정말 쉽지 않다는 이 말에서 어려운 점은 무엇이냐? 바로 사람이 패괴 성품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순종할 때 네가 어떤 심리와 내적 상태였든 상관없이 너의 진리 실행을 방해한다면 이러한 심리와 내적 상태는 분명 패괴 성품에 속한다. 이것이 사실의 진상이다. 네가 독선적이고, 교만하고, 패역하고, 황당무계하고, 편집스럽거나 또는 강퍅한 이 몇 가지 패괴 성품을 해결한다면 순종하기 쉬워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패괴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바로 네가 순종하기 싫을 때 기도하고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저는 왜 순종하지 못할까요? 저는 왜 늘 자신의 뜻을 따르려 할까요? 왜 저는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지 못할까요? 이 문제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제가 실행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따르고 자신의 의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과에 이르려면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야 한다. 네가 진리를 깨닫게 되면, 쉽게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게 되고, 이때 네가 육을 저버리고 육의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만약 네가 마음속으로 진리를 깨달았으면서도 육적인 이익, 지위, 허영심과 체면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너는 진리를 실행하기 매우 어렵다. 네가 마음속으로 육적인 이익, 허영심과 체면을 다른 모든 것들보다 중요시하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지위와 명예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여전히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 지위와 명예라는 것의 본질을 간파하고, 그것을 가볍게 보며, 진리 실행을 다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바로 이때 진리 실행의 의지가 생기게 된다. 때로는 사람이 진리를 실행해 내지 못한다. 책망과 훈계를 받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 문제의 본질을 간파하게 되어야 진리를 실행하기 수월해진다. 사실 진리 실행의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자신의 뜻이 너무 강해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시하는 것이며, 바로 자신의 이익을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시하는 것이고, 명예와 지위를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이 닥치면 늘 자신의 뜻에 따라 규정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하고, 진리 원칙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늘 자신의 뜻을 고수한다. 자신의 뜻을 고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냐? 바로 ‘당신이 1이라고 말하면 저는 2라고 말하고, 당신은 당신의 것을 말하고 저는 저의 것을 고수합니다.’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하는 태도이냐? (아닙니다.) 진리를 전혀 구하지 않고 자신의 뜻에 따라 규정하였으니 이는 교만한 성품이자 비이성적인 태도이다. 만약 어느 날 네가 자신의 기호와 규정이 모두 진리를 위배했음을 의식할 수 있다면, 자신을 부인하고 간파할 수 있게 되어 더 이상 자신을 믿지 않게 된다. 그 후에는 점차적으로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게 되고 함부로 규정하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진리를 구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의지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실행하면 맞다. 어떻게 실행해야 진리에 부합하는지 확정하기 전에 네가 먼저 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다. 만약 책망과 훈계에 임해서야 구한다면, 이는 다소 수동적이며 일을 지체시키기 쉽다. 진리를 구하는 법을 배우는 것,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진리를 구하면 어떤 이점이 있느냐? 첫째, 자신의 뜻에 따라 경솔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둘째, 패괴를 드러내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셋째, 또한 기다림과 인내를 배워 일을 간파하고 정확히 보게 되어 착오가 생기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구하면 얻을 수 있는 성과이다. 모든 일에서 진리를 구할 줄 알게 되면, 너는 무슨 일을 하든 쉬운 일은 없으며 마음을 쓰고 공을 들이지 않는다면 잘 해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동안 이렇게 훈련을 하면, 일이 닥쳤을 때 네가 비교적 성숙하고 노련해지며 태도가 많이 온화하고 부드러워져 충동, 모험, 대립을 하지 않게 되고,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여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게 되어 패괴 성품 표출 문제가 해결된다. 그래서 네가 순종하기는 매우 쉽고 난이도도 거의 없다. 설령 처음에는 약간 어렵더라도 너 또한 끈기 있게 진리를 구하여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진리를 얻는 기본적 공과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은 사람의 천직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하더라도 사람은 그것을 분석하고 연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정죄하고 어떤 사람들을 도태시키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관념과 반발심을 품든 하나님의 신분,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지위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그는 영원히 하나님이다. 그가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이상, 네 유일한 책임, 네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의 말을 듣고 그의 말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행의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논구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반박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 이런 건 모두 피조물이 해야 할 행동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하느냐? 어떻게 실행해야 하느냐? 사실 매우 간단하다.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정성을 다해 듣고, 정성을 다해 받아들이고, 정성을 다해 이해하고 깨닫고, 그런 다음 정성을 다해 실행하고 이행하는 것이다. 네가 들은 것, 마음속으로 깨달은 것이 네 실행과 단단히 맞물려야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네가 실행하는 것, 네가 순종하는 것, 네 손으로 하는 것, 네 두 발로 뛰어다니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말씀과 결부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길이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부록 3 노아와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였는가(2)> 중에서
순종의 실행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말을 잘 듣고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며, 자기 뜻을 갖지 말고 제멋대로 행동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깨달았든 깨닫지 못했든 고분고분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동하면, 실행하고 체험하는 과정에서 부지중에 진리를 깨닫게 된다. 입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하지만 마음속 계산과 욕망을 조금도 내려놓지 못하고, 저버리지도 않는다면, 이는 표리부동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진실한 순종이 아니다. 네게 진실한 순종이 없으면,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에게 갖가지 요구를 수도 없이 할 것이며,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네 요구를 충족해 주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하나님이 네 바람대로 이뤄 주지 않으면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울 것이며, 많은 고난을 겪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에 순종할 수도 없을 것이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너는 늘 스스로의 요구와 바람이 있으며, 개인적인 뜻을 내려놓지 못하고, ‘자신’에게 주도적인 지위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념에 맞지 않는 일이 닥쳤을 때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께 순종하기가 무척 힘들다. 사람이 이치상으로는 마땅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기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실제로는 내려놓지 못한 채 늘 손해나 피해를 볼까 봐 두려워한다. 말해 보아라, 사람의 어려움이 크지 않으냐? 고통이 가중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가 전부를 내걸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요구 등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다면, 하나님에게 조건을 걸지 않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동하고자 한다면, 네 내면의 어려움이 한결 작아질 것이며, 방해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1)> 중에서
순종하는 태도의 실제적인 일면이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너는 생명 진입도 깊지 않고, 분량도 아직 너무 작고, 진리 실제라는 부분에 대한 인식도 아직 충분히 깊지 못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따를 수 있고, 하나님에게 순종한다면, 이것이 바로 순종하는 태도이다. 너는 완전한 순종에 다다르기 전에 반드시 순종하는 태도를 먼저 갖춰야 한다. 즉,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옳다고 믿고, 그것을 진리이자 네 실행의 원칙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네가 원칙을 잘 모른다고 해도 규례로 여겨 지켜서라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일종의 순종하는 태도이다. 아직은 네 성품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먼저 순종하는 마음가짐, 순종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무조건 순종하겠습니다. 진리를 많이 깨닫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이 하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볼 때 이것이 바로 순종하는 태도다.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제 순종이 잘못된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틀릴 수가 있느냐? 하나님은 진리요, 공의다. 하나님은 잘못할 리가 없다. 다만 하나님이 하는 많은 일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을 뿐이다.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제 관념에 맞든 안 맞든 무조건 말 잘 듣고, 순종하고,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인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설령 남들이 바보같이 순종한다고 너를 판단해도 개의치 말고, 속으로 하나님은 진리이고 당연히 순종해야 한다고 확신해야 한다. 이것이 옳은 것이고, 순종하려면 당연히 이런 태도가 있어야 한다. 이런 마음가짐을 지녀야 사람은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마음가짐이 없고 “저는 눈에 티끌 하나도 용납 못 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도 저를 속일 수 없죠. 전 꽤 머리가 좋다고요. 저더러 무조건 순종하라고 하는데, 어림없는 소리죠! 뭐든 저한테 오면 우선 연구하고 분석해야 합니다. 제 뜻에 맞을 때라야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런 게 순종하는 태도이냐? 이건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다. 이는 순종하려는 마음가짐도, 순종하려는 의사도 없는 것이다. “설령 하나님이라 해도 연구해야죠.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와도 저는 연구해야 합니다. 당신이 말씀해도 저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피조물인 건 맞지만, 바보는 아닙니다. 절 바보로 생각하지 마십시오!”라고 네가 말한다면 끝장이다. 이건 진리를 받아들이는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이성도 없다. 정상 인성을 갖추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짐승이 아니냐? 사람이 이성을 갖추지 못하면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느냐? 순종하려면 먼저 순종하는 마음가짐을 갖추어야 하고, 순종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이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순종하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이성이 없는 것이다. 피조물인 사람이 어떻게 창조주를 측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생각 하나를 온 인류가 6천 년 동안에도 제대로 짐작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할지 사람이 한순간에 알 수 있겠느냐? 너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수천 년 동안 해 온 많은 일을 이미 인류에게 밝혔다. 하지만 명확하게 얘기해 주지 않으면 사람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아마 네가 지금 문자적으로는 이해했을 수도 있지만 20년이 지나야 진정으로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요구한 바와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은 마땅히 이성을 갖추고 순종하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개미나 구더기에 불과한 사람이 창조주를 측량하고자 한다면 그건 가장 비이성적인 일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비밀을 알려 주지 않는다고, 진리를 직접 알기 쉽게 얘기해 주지 않고 늘 구하게 만든다고 원망을 늘어놓는데, 그런 말을 하는 건 옳지 않고 비이성적이다. 지금 하나님이 너에게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해 주는데, 너는 얼마나 깨달았느냐? 하나님 말씀을 너는 얼마나 실행할 수 있느냐? 하나님 사역에는 다 절차가 있다. 만약 하나님이 2천 년 전 당시 사람들에게 말세 사역을 알려 주었다면 그들이 이해할 수 있었겠느냐? 은혜시대에 예수는 죄인의 형상으로 온 인류의 속죄 제물이 되었다. 만약 당시에 사람들에게 얘기하면 누가 이해할 수 있었겠느냐? 지금 너희도 그저 개념적인 이론만 조금 이해했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 성품의 진정한 일면, 인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당시 행사의 출발점과 계획 등, 이런 진리는 사람이 절대로, 절대로 깨달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비밀이고, 하나님의 본질인데 사람이 어떻게 그걸 측량할 수 있겠느냐? 네가 창조주를 측량하려 한다면 그건 너무 비이성적이다. 너는 너무 거만하고 주제넘다! 사람은 하나님을 측량하려 하지 마라. 사람은 그저 진리를 조금 깨달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훌륭하다. 진리를 조금 깨달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이미 충분히 얻은 것이다. 따라서 순종하는 마음가짐이 있다면 이것이 이성이 있는 것 아니냐? 이것은 절대적으로 이성적인 것이다. 순종하는 마음가짐, 순종하는 태도를 갖추는 것, 이것이 피조물이라면 누구나 최소한 갖춰야 할 조건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3)> 중에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려면 우선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하며, 또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 관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는 무엇이 포함되느냐? 하나님이 일으킨 주변 사람, 일, 사물이 포함된다. 주변 사람, 일, 사물은 때때로 너를 책망, 시험, 시련, 교란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를 소극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너는 공과를 배울 수 있고 분량과 저항력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과이다.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는 하나님이 일으킨 주변 사람과 일, 사물, 그리고 각종 환경이 포함된다. 그럼 이러한 환경이 닥쳤을 때는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기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원망하고 대항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겠느냐? 이치를 따지고 핑계를 대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겠느냐? 다 아니다. 그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일이 닥쳤을 때 먼저 마음을 가라앉혀 진리를 구하고 순종하되, 이런저런 이유나 원인을 대지 말아야 한다. 또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추측하거나 분석하지 말고, 누구의 잘못이 크고 누구의 잘못이 작은지 분석하지도 말아야 한다. 늘 이러한 것들을 분석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태도겠느냐?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겠느냐? 이는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는 태도도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실행 원칙의 한 가지 측면이다. 닥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재이며 하나님의 안배와 아름다운 뜻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려면 먼저 옳고 그름을 분석하지 않고 자신의 이치를 따지지 않으며 다른 이의 잘못이나 사소한 문제를 물고 늘어지지 않아야 한다. 또한, 객관적인 원인을 분석하지 않으며 사람의 머리로 분석하거나 연구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것은 전부 세부적인 사항이다. 실행 방법은 먼저 순종하는 것이다. 관념이 있고 밝히 알지 못해도 순종해야 한다. 일단 이치를 따지거나 거역하지 말고 순종한 다음 다시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구해야 한다. 어떻게 기도하느냐? 네가 “하나님, 당신께서 저에게 마련해 주신 이 환경에는 당신의 아름다운 뜻이 담겨 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무슨 의미이냐? 바로 네 마음속에 이미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고, 이 환경이 하나님이 너에게 마련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너는 말한다. “하나님, 오늘 이 환경이 닥쳤는데 저는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인도해 주십시오. 저로 하여금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당신의 뜻에 따라 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거역하지 않고, 대적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저는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에 따라 행하기를 원합니다.” 기도가 끝난 후에 너는 마음이 평안해지고 자연스럽게 그러한 이유를 버리게 된다. 이는 마음가짐에 변화가 생긴 것 아니겠느냐? 이는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기 위한 길을 닦아 놓은 것이다. 남은 문제는 바로 진리를 깨달은 다음에 어떻게 진리를 실행할 것인가이다. 만약 진리를 실행할 때가 되었는데 또다시 패역이 표출되면, 그럼 너는 또 기도를 해야 한다. 패역을 해결하면 당연히 진리를 수월하게 실행해 낼 수 있게 된다. 문제가 닥치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마음을 평온히 하고 진리를 구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늘 외적인 일로 간섭을 받아 내적 상태가 늘 변화무쌍하다면, 이는 무엇 때문이냐? 바로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내면의 패괴 성품이 주인 노릇하여 자기도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너는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의 문제를 찾아내어 관련된 하나님 말씀에서 어떻게 폭로하였는지를 찾아야 한다. 또한 설교나 하나님 말씀 찬양을 듣고 자신의 내적 상태를 대조해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의 문제를 명확하게 하면 처리하기 쉽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진리를 얻는 기본적 공과다> 중에서
만약 네가 하나님의 주재를 믿는다면, 너는 매일 일어나는 일들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연히 발생한 것은 없다는 것을, 누군가 일부러 너를 괴롭히거나 겨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안배하고 배치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이 모든 것을 배치했겠느냐? 그것은 너의 추한 모습을 들춰내기 위함도, 너를 드러내 도태시키기 위함도 아니다. 최종 목적은 너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너를 온전케 하고 구원하는 데 있다. 어떻게 너를 온전케 하겠느냐? 어떻게 너를 구원하겠느냐? 먼저 너에게 패괴 성품이 있음을 알게 하고, 너의 본성 본질, 부족함, 결점 등을 인식하게 한다. 네가 이러한 것들을 알고 마음속으로 깨달아야 비로소 진리를 추구하고 패괴 성품을 차츰 벗어 버릴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네게 준 기회로, 이는 하나님의 긍휼이다. 너는 기회를 잡을 줄 알아야지, 하나님께 대항해서도 하나님과 겨루어서도, 하나님을 오해해서도 안 된다. 특히 하나님이 네 주변에 안배한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늘 네 뜻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기며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오해해서도 안 된다. 그런 식으로 대하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므로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가 매우 어렵다. 어떤 일에 대해 밝히 알지 못하고 어려움을 느낄 때,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땅히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많이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너도 모르는 사이에 내적 상태가 바뀌고,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기간에 진리 실제가 내면에 만들어져 너는 성장할 것이며 생명 상태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변화가 생기고 이러한 진리 실제를 갖추면, 너에게 분량이 생기며, 분량이 생기면 생명이 생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를 얻으려면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로부터 공과를 배워야 한다> 중에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 이는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직면하는 기본적인 공과이자 가장 깊은 공과이다. 네가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는 만큼의 분량과 믿음을 갖게 되니 이는 서로 대응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순종에 도달하려면 어떤 진리를 갖춰야 하느냐? 우선, 하나님에게 어떠한 요구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진리 중 하나이다. 이 진리를 너는 어떻게 운용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에게 요구를 할 때, 이 진리로 자신을 가늠하고 반성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에게 어떤 요구를 갖고 있지? 이런 요구들이 진리에 부합하나? 이성은 있는 건가? 이것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거지? 상상인가, 아니면 사탄이 준 생각인가?’ 사실 모두 아니다. 이것들은 사람의 패괴 성품에서 생겨난 것이다. 너는 이러한 무리한 요구의 배후에 있는 속셈과 욕망이 정상적인 인성의 이성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분석해야 한다. 너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느냐? 네가 만약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베드로처럼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저를 노리갯감으로 여긴다고 하신들 제가 어찌 달갑게 여기지 않겠나이까?”라고 말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언제 사람을 노리갯감으로 여겨 사탄에게 넘기셨습니까?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매우 잘해 주시고, 저를 매우 선대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기에도 바쁜데 어떻게 사람을 노리갯감으로 삼으시겠어요? 이 말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어떻게 이 말을 하게 된 것이냐? (다양한 시련을 체험한 후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어 한 말입니다.) 베드로는 너무도 많은 시련과 연단을 겪고 나서 개인의 요구, 타산, 욕망을 전부 다 내려놓았다. 그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갖지 않았고, 자신을 완전히 내놓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옵소서. 저에게 시련을 주셔도, 저를 채찍질하셔도, 저에게 심판과 형벌을 내리셔도, 환경을 일으켜 저를 책망하고 훈계하셔도, 저를 단련하셔도, 저를 사자 굴과 이리 굴에 놓으셔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모두 옳고, 어떻게 하시든 저는 모두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모두 진리이니 저는 불평하지 않고 선택도 하지 않습니다.’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절대적인 순종 아니겠느냐? 때로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모두 진리라고 말하는데, 나는 왜 하나님께서 하신 이 일에서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도 진리에 부합하지 않을 때가 있구나. 하나님도 틀릴 때가 있네. 하지만 어떻게 말하든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니까 순종하자!’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절대적인 순종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선택적인 순종이지 진실한 순종이 아니다. 이 말은 베드로의 사상 관점과 모순된다. 노리갯감이 되면 너에게 이유를 말해 줄 필요도 없고, 합리적일 필요도 없으며, 너를 어떻게 대하든 다 괜찮다. 또한 너와 상의하지도 않고, 너에게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거나 도리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만약 네가 통과된 후에야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이는 노리갯감으로 대하는 것이겠느냐? 이는 너에게 충분한 인권, 자유, 존중을 준 것이며, 또한 너를 노리갯감이 아닌 사람으로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노리갯감이란 무엇이냐? (바로 주도권이 없으며, 권리도 없는 것입니다.) 단지 권리만 없느냐? 너는 이 말을 어디에 적용해야 하느냐? 예를 들어, 네가 한동안 구했는데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일이 있거나 네가 하나님을 이십 년 넘게 믿었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깨닫지 못하는 일이 있을 경우, 이런 상황에서 네가 순종해야 하느냐? 이 역시 순종해야 한다. 이 순종의 근거는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께서 저를 노리갯감으로 여긴다고 하신들 제가 어찌 달갑게 여기지 않겠나이까?”라는 베드로의 말이다. 만약 네가 늘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을 가늠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가늠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규정하고 대적하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이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겠느냐? 만약 네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지도 순종하지도 않겠느냐? 이럴 때는 어떻게 진리를 구해야겠느냐? 어떻게 하나님을 따라야겠느냐? 이는 진리와 관련이 있으니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답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을 때는 피조물의 위치에 서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이 네게 모습을 감추든 나타내든,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든 없든, 너는 네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 네 본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런 실행 측면의 진리도 알아야 한다. 관념을 계속 고집하면서 “나는 이 일이 진리에 부합하고 내 생각에도 맞는다고 확신이 들면 순종할 거야. 만약 판단이 안 된다면, 하나님의 행사라는 확신이 안 선다면 그럴 때는 일단 기다릴 거야. 하나님의 행사라는 것을 확신한 후에 순종할 거라고.”라고 말한다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이것은 조건적인 순종에 불과할 뿐, 절대적인 순종도, 완전한 순종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모두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지 않는다. 성육신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지 않고, 심판과 형벌도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순종하기 쉽지 않다.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할 수 없는데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피조물의 본분은 무엇이냐?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것은 근원을 찾은 것이다. 그러면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겠느냐? 피조물의 자리에 서서 창조주인 너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이는 모든 피조물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네가 많은 진리를 다 깨닫지 못하고 모른다면, 네가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없다면, 그럼 너는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겠느냐? 예를 들어, 네가 어떤 예언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느냐? 너는 그 말들이 영원히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안에 진리가 있으며, 비록 네가 깨닫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일부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이 아니고 진리가 아닌 것이냐? 만약 네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어쩌면 하나님 말씀이 아닐지도 몰라. 아마 불순물이 있을지도 몰라.”라고 말한다면, 이런 태도는 어떠하냐? 또 거역하는 것이다. 너는 이성을 갖춰야 한다. 이성이란 무엇이냐? 이성이 있다는 근거는 무엇이냐? 바로 피조물의 자리에서 창조주인 너의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이고,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이다. 하나님에게 순종할 때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해했는지, 하나님이 너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냈는지를 근거로 할 필요가 있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해야 하느냐? 순종의 진리를 근거로 해야 한다. 순종의 진리란 무엇이냐? (피조물의 자리에서 창조주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의 진리이다. 그렇다면 또 네가 옳고 그름을 분석할 필요가 있겠느냐? 절대적인 순종을 하는데 하나님이 행한 일의 옳고 그름을 고려할 필요가 있느냐? 하나님이 이 부분의 진리를 분명하고, 명백하고, 확실하게 말해 주어야 네가 순종할 수 있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든 너는 순종의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데, 그것으로 충분하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진리를 얻는 기본적 공과다> 중에서
네가 실생활에서 문제에 맞닥뜨릴 때 하나님의 권병과 주재를 어떻게 느끼고 깨달아야 할까? 이러한 문제에 봉착하여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떻게 체험해야 하는지 모를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네게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려는 마음과 염원과 실제가 있음을 보일 수 있을까? 우선 너는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다음 구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런 후에는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때, 즉 하나님이 너에게 안배한 사람과 일과 사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점차적으로 너에게 나타나는 것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안배한 사람과 일 가운데 하나님의 애쓰는 마음을 살피고 깨닫는 것이다. 그 속에 있는 진리를 깨닫고, 사람이 행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도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얻고자 하는 성과와 맺고자 하는 결실을 아는 것이다. ‘순종한다’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이 안배한 사람과 일, 그리고 그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 창조주가 어떻게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어떻게 그의 생명을 사람에게 공급하며, 어떻게 진리를 사람 안에 만들어 넣는지를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안배와 주재 아래에서 모든 일은 자연의 섭리대로 흘러간다.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한 모든 것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구할 줄 알아야 하며,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권병에 순종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이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다. 너희가 많은 노력을 들여 이런 태도와 소양을 갖춰야만 진정한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노아는 인류 중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한 가장 본받을 만한 인물로, 하나님이 칭찬하는 대상이자 오늘날 하나님을 따르는 이들이 본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에게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이냐? 그는 오직 한 가지 태도로 하나님 말씀을 대하였다. 그것은 바로 듣고는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고는 순종하며, 죽을 때까지 순종하는 태도였다. 이렇게 가장 귀한 태도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대충 대하거나 건성으로 대하지 않았고, 마음속으로 연구하고 분석하고 반발하고 거부하다가 뒷전으로 미뤄 두지 않았으며, 진지하게 경청하고 마음으로 조금씩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이행할지, 어떻게 왜곡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본뜻에 따라 실행할지 묵상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동시에 그는 속으로 조용히 자신에게 말했다. ‘이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분부, 하나님의 부탁이니 책임을 미룰 수 없고 반드시 순종해야 해. 세부 사항을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하나님의 의도를 하나도 거스르지 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세세한 부분을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난 사람으로 불릴 자격이 없고, 하나님의 부탁과 그분의 높여 주심 앞에 떳떳할 수 없어. 만약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맡기신 일을 이번 생에 완수하지 못한다면 여한이 되고, 하나님의 부탁, 하나님의 높여 주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을 거야. 그러면 창조주 앞으로 돌아갈 면목도 없어.’ 노아가 속으로 생각한 것, 그의 모든 관점과 태도는 그가 결국 하나님 말씀을 실행해 내고 하나님 말씀을 현실로 바꾸고 하나님 말씀을 실제로 이행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 말씀은 그의 노력과 수고를 통해 이루어지고 성취되었으며, 그를 통해 실제적인 것으로 바뀌었고, 하나님의 부탁은 허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다. 노아가 속으로 생각한 모든 것, 그의 마음속에서 나온 모든 생각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노아는 하나님이 일을 맡길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 하나님이 신임하는 사람, 또한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을 보고 마음과 생각을 살핀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노아는 잘못된 선택자가 아니었다. 그는 전체 인류 가운데 하나님의 부탁을 감당할 수 있고 하나님의 신임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부록 3 노아와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였는가(2)> 중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참된 믿음을 지닌 점에서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그의 유일한 태도는 청종하고,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대로 따랐던 것이다. 가령 하나님이 어떤 물건을 검다고 했을 때는 설령 자기 눈에 검지 않더라도 그는 하나님 말씀을 옳다고 믿고 그것을 검다고 인정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것을 희다고 하면 그는 그것을 희다고 인정했을 것이다. 이토록 단순했다. 하나님이 아이를 내려 주겠다고 했을 때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 백 살인데 아이를 내려 주신다니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야. 나의 주여, 감사합니다!’ 그는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을 믿었다. 이 믿음 안에 들어 있는 본질이 무엇이냐?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믿고 하나님의 신분을 믿었다. 창조주에 대한 그의 인식은 진실된 것이었다. 그는 입으로만 하나님의 전능을 믿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것을 믿는다 하면서 속으로는 ‘사람은 원숭이가 변해서 된 것 아니었나?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걸 사람이 직접 본 것도 아닌데 말이야.’라며 의심하는 사람들과는 달랐다. 이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든 반신반의한다. 그들은 눈으로 봐야만 참인지 거짓인지 확신하고, 무엇이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의구심을 가진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들은 속으로 물음표를 그린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모든 사실, 모든 일, 모든 분부를 꼼꼼히, 집중해서, 신중하게 연구하고 분석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을 때도 과학을 연구하는 태도로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연구해서 그 말씀들이 과연 진리인지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 그랬다가는 속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귀담아들었다. 단지 당시엔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한 하나님의 요구 때문에 고통스러웠을 뿐, 그의 선택은 여전히 순종이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은 바뀌지 않고 실현될 것이라고 믿었고, 피조된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피조된 인간에게 선택권이란 없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일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태도였다. 비록 무척 고통스러웠지만, 내심 아들에 대한 애틋함과 사랑 때문에 극도의 중압감과 고통을 느꼈지만 그는 여전히 아들을 하나님께 돌려보내는 쪽을 택했다. 왜 돌려보내려 했느냐? 하나님이 원하지 않을 때야 먼저 나서서 돌려보내지 않아도 되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이상 반드시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는 것, 왈가왈부할 이유도 없고 사람은 이치를 따지면 안 된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태도였다. 그는 이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고 기대하는 바였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일에서 보여 준 모습, 그가 이룬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대했던 모습이었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검증이자 테스트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노아를 대했던 것처럼 아브라함을 대하지 않았다. 일의 전말, 경과나 일의 모든 것을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지 않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유일하게 알았던 것은 이삭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라는 것뿐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이런 행사가 그를 검증하는 것인 줄 몰랐고, 이 검증을 받은 후 하나님이 그와 그의 후대에게 어떤 일을 이룰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 주지 않고 그저 간단한 한 마디로 분부하고 요구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간단하고 사람의 뜻에 맞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이삭을 제단에 올렸다. 그의 모든 행동들을 보면, 그가 이삭을 바친 것은 형식적이거나 무성의한 것이 아니라, 진심이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애틋하고 고통스러웠지만 창조주의 요구 앞에서 아브라함은 어느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방식을 선택했다. 그것은 창조주의 요구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이유나 어떤 부가적인 조건도 내세우지 않고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요구한 그 일들을 해낼 수 있었던 건 그가 어떤 것을 갖추었기 때문이냐? 첫째,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있었다. 그는 창조주가 곧 하나님이고 그의 하나님이자 그의 주이며, 창조주가 만물을 주재하고 인류를 창조했음을 확신했다. 이것이 진실한 믿음이다. 둘째,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창조주가 한 모든 말씀을 믿었으며 간단하게 직접 창조주가 한 모든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셋째, 창조주가 요구한 일이 얼마나 어렵든, 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 따르든 간에 그는 순종을 선택했다. 이치를 따지거나 반발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완전하게 순종하였다.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이 말씀한 모든 구절과 하달한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실행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나님이 보려는 대로 이삭을 제단에 올려 하나님께 바쳤다. 그가 한 이 모든 행동은 하나님이 선택한 이 사람이 옳고 하나님 눈에 의인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부록 3 노아와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였는가(2)> 중에서
사람은 진실한 믿음이 있어야 진정으로 순종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한다면 차츰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신심이 생겨난다. 너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과정에서 진실한 신심을 얻는다. 그런데 너에게 진실한 신심이 없다면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것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규례도 아니고 논리도 아니다. 진리는 철학이 아니기에 논리성을 가지지 않는다.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고 결코 분리할 수 없다. 네가 만약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신심이 있어야 하고, 신심을 가지려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규례이자, 글귀이자, 이론이다. 이는 큰소리치는 것이다! 생명의 일은 규례가 아니다. 말끝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의 유일한 구주, 유일무이한 참하나님이라고 인정하는데, 너는 하나님께 진실한 신심이 있느냐? 환난이 닥쳤을 때 무엇에 의지해야 굳게 설 수 있느냐?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무나 많은 진리를 선포했기 때문에, 혹은 천국에 가기 위해 하나님을 받아들인 이들이 많다. 하지만 막상 쫓기거나 환난이 닥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잃고 물러나거나 집에 숨어서 감히 본분을 이행하지 못한다. 그럴 때는 네가 하던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관하시니 제 생명은 하나님 손안에 있다고 믿습니다.”라는 그 말은 이미 종적을 감춘 지 오래다. 그건 그저 너의 입버릇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너는 그 말을 실행하고 체험할 용기도 없고, 그 말대로 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네가 하나님께 진실한 신심이 있는 것이냐? 하나님 믿는 본질은 단순히 하나님 이름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너는 이 사실을 네 생명으로 바꾸고, 네 생활의 실제 간증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즉, 일이 닥쳤을 때 그 말이 네 행위를 주도하고, 네가 행동하는 방향과 목표를 주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째서 그 말에 따라 살아가야 하느냐? 예를 들어, 네가 다른 나라에 가서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하게 되었다고 하자. 너는 너무 좋았다. 그 나라는 큰 붉은 용이 다스리지 않아서 신앙에 대한 박해도 없고, 하나님을 믿어도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으니 위험을 무릅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언제든 잡혀갈 위험이 따른다. 그건 마귀 소굴에서 사는 것으로, 너무나 위험하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말씀한다. “몇 년 동안 해외에서 하나님을 믿었으니 네게 생명 체험이 조금 생겼을 것이다. 중국에 형제자매들 생명이 아직 여린 곳이 있는데 네가 가서 그들을 목양하도록 해라.” 너에게 이런 책임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순종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겉으로야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속으로는 괴로울 것이다. 너는 밤에 이불 속에서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 당신은 제 연약함, 제 보잘것없는 분량을 알고 계십니다. 저는 중국으로 돌아가도 하나님 선민들을 목양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갈 수는 없습니까? 제게 임한 부탁이니 저도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막상 갔다가 제대로 하지 못해 본분 이행에 합격하지 못하고 당신 뜻을 저버릴까 봐 걱정입니다! 해외에 2년만 더 있을 수는 없습니까?’ 이런 선택은 어떠냐? 완전히 거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동의한 것도 아니다. 부탁을 완곡하게 거절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냐? 이는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다. 네가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은 반발 정서가 생겼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모르겠느냐? (아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한다. “가지 마라. 너를 난처하게 하지 않겠다. 단지 너에게 시련을 준 것이었다.” 그러면 너는 드러난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진실한 신심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것이 연약함이냐? (아닙니다.) 이것은 패역이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다. 이 시련을 통해 네가 하나님께 진실한 신심, 진정한 순종이 없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함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검증되었다. 너는 말한다. “제가 무서우면 안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생명이 위협받는다면 저도 거절할 수 있고, 그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도 제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게 무슨 신심이란 말이냐? 진실한 신심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구호를 크게 외쳐본들 이럴 때 소용이 있겠느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맹세한들 소용이 있겠느냐? 다른 사람이 너에게 진리를 교제하고 설득한들 소용이 있겠느냐? (소용없습니다.) 설령 설득해서 네가 억지로 간다고 한들 그것이 진정한 순종이냐? 하나님은 너의 그런 순종은 원치 않는다. 네가 기꺼이 원하지 않는 한, 가더라도 아무 소용없고, 하나님도 역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너는 이 일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네가 흔쾌히 원해야지, 가기가 싫어서 제3의 길을 생각하고, 또 도망치거나 거부하고 거절하고 싶은 생각만 든다면 안 가도 된다. 언제든 네 분량이 충분해지고 신심이 생기면 그때는 네가 자발적으로 신청하며 이렇게 말하면 될 일이다. “제가 가겠습니다. 아무도 안 가도 저는 가겠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두렵지 않습니다. 목숨 걸고 가겠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 아닙니까? 사탄이 뭐가 무섭습니까? 하나님 손안에서는 장난감일 뿐입니다. 저는 무섭지 않습니다! 잡혀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은총, 하나님 긍휼 덕분이지만, 상황이 발생해서 잡혀가더라도 그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입니다. 제가 감옥에서 죽더라도 하나님을 증거하겠습니다!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평생 깨닫고 체험한 것, 인식한 것을 아직 잘 모르고 깨닫지 못한 형제자매들에게 전부 교제해 주겠습니다. 그래서 형제자매들도 저처럼 이런 신심과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고 이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겠습니다. 물론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려면 위험을 감수하고 목숨도 바쳐야 할 수도 있겠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저 자신을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저한테는 하나님이 계시고 제 목숨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겠습니다.” 돌아가면 어려운 상황에서 고생할지도 모른다. 빨리 늙어서 흰 머리와 주름이 생기고 병을 얻을지도 모른다. 잡혀가서 박해받을지도 모르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위험을 만날지도 모른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마주해야 하느냐? 이것도 진실한 신심과 관계가 있다. 한순간의 열정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는데, 돌아간 다음 이런 고통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모든 것을 내걸고, 하나님의 주재를 믿어야 한다. 외모가 좀 늙어 보이거나 병을 얻는 것은 모두 사소한 일이다. 네가 하나님께 죄짓고 하나님 부탁을 거부한다면 평생 하나님께 온전케 될 기회는 사라질 것이다. 일생에서 하나님 부탁을 거절해 하나님께 죄짓는다면, 그것은 영원한 오점이다! 그 기회를 잃는다면 네가 여러 해의 청춘을 바쳐도 되돌릴 수 없다. 건강한 몸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예쁘장한 얼굴, 좋은 몸매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80세가 되어도 생각이 여전히 또렷하다고 한들, 하나님 말씀 한 마디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면 가련하지 않으냐? 이것이 가장 가련한 일이다! 그러니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하고도 소중한 것은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다. 어떤 일을 만나도 우선은 순종해야 한다. 설령 지금은 하나님께 약간의 오해가 있거나 혹은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되더라도 소극적이고 연약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베드로는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장난감처럼 다룬다고 하신들 사람이 무슨 불평을 할 수 있겠나이까?” 이만한 신심조차 없다면 네가 베드로처럼 순종할 수 있겠느냐?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너에게 하는 일은 모두 이치에 맞는 일이고, 사람의 분량, 사람의 상상, 사람의 관념에 맞는 일이다. 하나님이 네 분량의 크기에 맞게 사역하는데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베드로와 같은 순종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 그건 더욱 불가능하다. 그러니 너는 이 방향과 목표를 향해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에 이를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진실한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느냐? 그건 단언하기 어렵다. 하나님께 진실한 신심이 있어야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할 수 있다. 이것은 틀림없다. 네가 하나님께 진정한 순종이 없다면 하나님이 너를 깨우치고 인도하고 온전케 하는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이 너를 온전케 할 기회들을 네가 밀어냈다. 네가 원하지 않았고, 네가 계속 숨으면서 거부하고 도망쳤다. 너는 늘 육적으로 편안하고 고생스럽지 않은 상황만 택하려 한다. 이러면 큰일이다! 너는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이끄심, 하나님의 보호를 체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 진리를 얻을 수 없고, 진실한 신심도 얻지 못한다. 너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실로 순종해야 진실한 신심이 생긴다> 중에서
사람은 반드시 창조주가 피조물을 대할 때는 기본적인 원칙이자 최고의 원칙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어떻게 대하든 전부 그의 경륜에 근거하고 그의 사역의 필요에 근거한다. 그는 누구에게 자문할 필요가 없고, 누구의 동의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는 행하고 싶은 대로 행하고, 대하고 싶은 대로 대한다. 그가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대하든 모두 진리 원칙에 부합하고, 창조주가 일하는 원칙에 부합한다. 피조물은 오로지 창조주께 순종해야지, 어떠한 선택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피조물이 마땅히 지녀야 할 이성이다. 만약 이런 이성을 갖추지 못하면 사람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사람은 반드시 창조주는 영원히 창조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에게는 모든 피조물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주재할 권력과 자격이 있으며, 거기에 이유는 필요치 않다. 이는 그의 권병이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행한 일이 옳은지 그른지, 어떻게 해야 적합한지 평가할 권리도 자격도 없다.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일지 말지 선택할 자격이 있는 피조물은 없으며, 창조주에게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어떻게 주재하고 안배해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는 피조물도 없다. 이것은 최고의 진리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든 피조물인 인류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바로 창조주가 행한 이 모든 것에서 구하고 순종하고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최종적인 결과는 바로 창조주가 자신의 경륜을 이루고 자신의 사역을 성취하여 그의 경륜이 아무 방해 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한편, 피조물은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 가운데서 진리를 얻고 창조주의 뜻을 깨달으며 창조주의 성품을 알게 되는 것이다. 너희에게 또 하나 알려 줄 원칙이 있다. 창조주가 무엇을 하고 어떠한 태도를 보이든, 큰 행사를 하든 작은 일을 하든 그는 창조주라는 것이다. 반면 피조물인 인류는 무엇을 하든, 얼마나 큰 재능과 은사가 있든 결국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류는 창조주의 은혜와 축복을 얼마나 많이 받았든, 창조주의 긍휼과 자비 또는 은총을 얼마나 많이 받았든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자신이 고급 피조물이 되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너에게 아무리 많은 은혜를 베풀고, 은사를 주고, 일찍이 은총을 베풀거나 특별한 재능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너의 밑천이 아니다. 네가 피조물이라면 영원히 피조물이다. 너는 영원히 ‘나는 하나님 품속의 아기이니 하나님은 영원히 날 버리지 않으실 거야.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나를 사랑으로 대하실 거고, 나를 보호해 주실 거야. 또 나를 살살 어루만지시고, 작고 낮은 소리로 따뜻하게 위로하며 격려해 주실 거야.’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바꿔 말해, 창조주의 눈에 너는 다른 피조물과 같다. 하나님은 마음대로 너를 쓸 수 있고, 또 마음대로 너를 지배할 수도 있으며, 마음대로 너를 각종 사람과 일, 사물 속에 배치해 어떤 역할을 맡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인식이고 이성이다. 이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차 정상적이 될 것이고, 또 하나님과 가장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고 자신의 위치에 똑바로 설 것이며, 자신의 본분을 잘 지킬 것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를 깨달아야 하나님의 행사를 알 수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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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진정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 구원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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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은 하나님의 다스림에 맡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