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우유부단했던 이유
얼마 전까지 저는 본분 이행 효율이 낮았습니다. 영상을 만들 때마다 여러 번 수정을 반복하느라 전반적인 사역 진도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죠. 처음에는 제가 우유부단한 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형제자매가 수정 의견을 낼 때마다 원칙에 근거해 수정할지 말지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의견을 받는 대로 다 수정했으니까요. 그 결과 어떤 의견들은 부적절했기 때문에 계속 재수정해야 했죠. 나중에 책망 훈계를 받은 뒤 하나님 말씀의 폭로에 비추어 저를 반성하고 나서야 제 우유부단함 뒤에 사탄 성품과 비열한 속셈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개월 전의 일입니다. 형제자매 몇이 교만하고 독선적으로 늘 자기 생각만 고집하며 형제자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사역 진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 적이 있었습니다. 리더가 여러 차례 교제하고 폭로했지만 그들은 태도를 바로잡지 않아 결국 교체되었습니다. 그들이 교체되는 것을 보고, 저는 속으로 ‘앞으로 형제자매가 나한테 무슨 의견을 제기할 때 내 고집만 부리면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로 여러 사람이 영상 수정 의견을 제기하면, 매번 거의 다 받아들였습니다. 심지어 고치지 않아도 될 작은 문제까지 모두 다 수정했죠. 사실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의견도 있었고, 신경 쓸 필요 없는 자질구레한 문제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 고치면 책임자와 형제자매가 나를 어떻게 볼까? 내가 너무 교만해서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 사람들한테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나쁜 인상을 남기면 머지않아 교체될 거야. 게다가 나도 100% 확신은 없잖아. 혹시 내가 제대로 못 봐서 고쳐야 할 것을 안 고쳤다가 영상이 업로드 된 후에 문제가 발견되면, 그 책임을 나 혼자 져야 하잖아.’라는 생각이 들어 이리저리 고민하다 결국 안전 차원에서 모든 제안을 받아들여 영상을 다시 수정했습니다. 가끔 같은 문제를 두고 다른 의견이 들어오면, 버전을 여러 개 만들어 책임자에게 어떤 버전이 더 좋은지 결정해 달라고 하거나, 사역 토론 시간을 틈타 형제자매에게 함께 토론해 최종안을 결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죠. ‘이건 책임자와 여러 형제자매가 결정한 거야. 다수 의견이란 뜻이지. 그러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게다가 이렇게 하는 게 더 확실해.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나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니까.’ 가끔 수정 의견을 많이 받아서 도대체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 결정 내리지 못할 때면, 책임자를 찾아가 저 대신 수정 방향을 확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때로는 의견이 많아서 계속 바꾸다 보니 저도 어떤 효과를 내야 할지 몰라서 본분 이행 효율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제가 늘 사역 토론 시간에 모두에게 결정해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형제자매의 본분 이행 시간을 방해해 전반적인 사역 진도가 늦춰지기도 했고요.
한번은 영상 배경 화면을 만드는데, 사람이 죄 속에서 사는 고통스러운 상태를 구현해야 했기에 화면을 역광에 어두운 톤으로 제작했습니다. 그런데 형제자매들이 화면이 너무 어두워 미관상 별로라며 화면을 좀 밝게 하고 빛 효과를 집어넣으라고 제안했습니다. 그 제안을 보고 저는 망설였습니다. 주제를 고려했을 때 화면이 너무 밝으면 사람이 어둠 속에 살아간다는 전체 분위기에 맞지 않는 데다 빛을 추가하면 객관적인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니까요. 저는 그 제안이 그렇게 썩 좋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여러 사람이 같은 제안을 하는데 제가 고치지 않았다가 영상이 올라간 뒤에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제 책임이 될 터였습니다.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리더도 수정에 찬성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의견을 제시하면서 수정에 반대하면, 모두 나를 고집스럽다고 생각하겠지? 내가 수정하기 귀찮아서 괜히 핑계 댄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됐다, 그냥 고치자. 문제가 생겨도 나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잖아. 나도 사람들 제안에 따라 고친 거니까.’ 이렇게 저는 그 제안이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많은 시간을 들여 화면을 대대적으로 수정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수정하고 나자 책임자가 관련 원칙과 수정 후 실제 효과에 근거해 가늠해 보더니 화면이 객관적인 사실에 맞지 않는다며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요즘 본분을 수동적으로 이행한다며 사람들 의견이 들어왔을 때 우유부단하게 행동해 사역 진도를 지체시켰으니 자신을 잘 반성해 보라고 하는 겁니다. 그 말에 저는 한참 동안 진정할 수 없었습니다. 괴롭고 자책감이 들었죠. 화면을 수정하는 데 이미 많은 시간을 들였는데 지금 다시 되돌려야 하니 이는 확실히 사역 진도를 지체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사람들이 여러 수정 의견을 냈을 때 사실 저도 속으로는 제 관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교만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제 관점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진리 원칙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대신 결정해 주길 기다리며 늘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라 일했습니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너무 수동적이고, 교회 사역에도 지장을 줍니다. 저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저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할 수 있게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생각하며 구하는 중에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교회 사역에 부담이 있는 사람, 책임감이 있는 사람, 진리 원칙을 견지할 수 있는 사람, 고생하며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몇 가지를 갖추지 않은 자는 본분 이행에 적합하지 않다. 그런 자는 본분 이행의 조건을 갖추지 않은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책임지기를 두려워한다.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주로 다음의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언제나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본분을 선택한다. 교회 리더가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면, 그는 먼저 그 본분을 이행할 때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물어본다. 만약 책임을 져야 한다면 받아들이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고 책임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면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또 힘든 일은 아닌지,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은 아닌지 본다. 마지못해 받아들인다고 해도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 않고 대충 건성으로 넘기려 든다. 한가하고 고생하지 않으며 육적으로 힘들지 않은 것을 원칙으로 삼는 것이다. 둘째,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문제에 직면했을 때 먼저 리더에게 보고해서 처리하고 해결하게 하며 자신은 편안하게 있으려고 한다. 리더가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는지 관심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책임만 지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이런 식의 본분 이행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겠느냐? 이는 책임 전가이자 직무 태만이며, 농간을 부리는 것이고, 입만 살아 있고 실제적인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속으로 ‘내가 그 일을 했다가 마지막에 실수라도 하면 어떡해? 책임을 추궁하면 내가 처리되지 않겠어? 내가 첫 번째 책임자 아니겠냐고.’라고 한다. 바로 이 점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럼 너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감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냐?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가짐이 올바르다면, 경험이 없고 그와 비슷한 일을 처리해 본 적도 없지만 최선을 다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알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감찰하고 사람의 마음을 감찰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것조차 믿지 못한다면 이는 불신파 아니겠느냐? 그런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런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든 안 하든 상관이 없다. 그렇지 않으냐? 책임지는 것이 두려워 책임을 미룬다. 무슨 일이 임하든 우선 직접 문제를 처리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리더에게 전화를 걸어 통보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리더에게 통보하는 한편 직접 문제를 처리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리더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며, 전화를 한 후에는 수동적으로 지시를 기다린다. 리더가 지시하는 것만큼만 움직이고, 리더가 말하는 만큼만 행동하는 것이다. 리더가 말하거나 지시하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고 미루다가 꼭 누가 재촉하고 감독해야 일을 한다.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겠느냐? 봉사한다고 해도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더 있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일, 단순한 일, 책임지지 않는 일만 한다는 것이다. 어려움이 있고 책임져야 하는 일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미룬다. 또 문제라도 생기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책임을 남에게 미룬다. 교회 리더가 책임을 지지 않는 그를 보고는 인내심 있게 도와주고 책망하고 훈계하며 책임감을 가지라고 해도 그는 여전히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이 본분은 제대로 이행하기가 쉽지 않아. 문제라도 생기면 책임을 져야겠지. 여차하면 제명되거나 도태될 수도 있어. 그럼 끝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태도겠느냐?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 일말의 책임감도 없는데 어떻게 그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며,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면 일을 그르치기만 할 뿐이다. 이런 사람은 믿을 수 없고 일을 맡길 수도 없다. 그는 순전히 공밥 먹기 위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이런 ‘거지’ 같은 자는 내쳐야 하지 않겠느냐? 반드시 내쳐야 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이런 사람을 원치 않는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자신에게 순종하도록 한다(1)>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제 내적 상태를 폭로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제 본분 이행 모습을 되돌아보니, 여러 수정 의견을 보면서 속으로 어떤 의견은 부적절하고, 어떤 의견은 원칙에 어긋나니 수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가 만에 하나 문제가 생겼을 때 혼자 책임져야 할까 봐, 제 관점을 고수했다가 다른 사람에게 교만하고 독선적이라는 나쁜 인상을 남길까 봐 두려워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관점을 듣고, 그들이 제기한 의견대로 수정하고, 심지어는 여러 버전으로 수정한 후 마지막에 책임자와 형제자매가 결정해 주길 기다렸습니다. 저는 한 번도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았고, 결단을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결과를 감당하기 두려워서요. 그러면서 이게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겼죠. 다른 사람들이 결정 내린 것이니 쉽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고, 설사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저 혼자 책임지진 않을 테니까요. 겉으로 보기에 저는 온종일 바쁘게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 제가 그때그때 생각하는 것은 제 이익이었고, 어떻게 해야 책임을 회피하고 저를 지킬 수 있을까였습니다. 이것은 교활한 짓 아닙니까? 이런 본분 이행은 그저 열심히 움직이고 다른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하되 스스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본분에 무책임하고 교회 사역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정말이지 너무 비인간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교회 이익을 생각합니다. 잘 판단이 서지 않는 일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진리 원칙을 구하죠. 하나님과 한마음이 되어 본분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속 빈 강정처럼 본분을 이행할 때 진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마치 고용인처럼 명령을 기다렸다가 일을 할 뿐, 한 번도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한 적이 없었죠. 저의 본분 이행은 하나님, 진리와 아무 관계가 없었고, 그저 형식적으로 해치운 것일 뿐이라 봉사하는 것조차 불합격이었습니다.
저는 또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선인지 악인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바로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드러내는 것, 행하는 것에 진리를 실행한 간증, 진리 실제를 살아 낸 간증이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네게 그러한 실제가 없고 그러한 살아 냄이 없다면, 너는 의심할 나위 없이 악을 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겠느냐? 네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 겉으로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사탄을 수치스럽게 하거나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어디서나 하나님을 욕보이는 표가 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 네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도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냐? 정확하게 말하면 사탄을 위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하나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할 것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네가 행한 것이 선행이 아니라 오히려 악행이어서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죄받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냐? 믿어도 결국에는 전부 허사가 되지 않겠느냐?』(<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야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있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하시고,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사역했고 얼마나 많이 고통받았느냐가 아니라 본분을 이행하는 마음가짐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하는 것인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실천한 증거가 있는지 등입니다. 만약 늘 자기를 만족게 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행이고, 혐오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제 생각은 모두 저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책임지지 않기 위해 시간이 얼마나 들든 상관없이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들을 수정했고, 심지어 거듭되는 재수정 작업이 사역 진도를 지연시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어떤 의견은 부적절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제 뜻과 상관없이 수정했고, 그 결과 영상 효과는 갈수록 떨어졌습니다. 사역이 이렇게 저 때문에 지체되는데도 저는 초조해하지 않았고, 어떻게 원칙에 따라 본분을 이행해야 효율을 높일 수 있을지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제 본분 이행은 절차와 형식에만 치우쳐 있었습니다. 수정을 마치고 사람들의 오케이 사인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저의 이런 무책임한 방식은 결코 본분을 이행하는 것도, 선행을 예비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는 악을 행하는 것이었죠. 저는 제 이익을 지키기 위해 거듭 교회 사역을 지체시켰으니, 이는 사탄의 종이 되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자 겁이 나서 얼른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제 본분 이행 태도를 바로잡을 수 있게 인도해 달라고요.
그 뒤로 본분 이행 중에 여러 수정 의견을 받으면,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기도하여 구하고, 어떤 것은 수정해야 하고 어떤 것은 수정하지 않아도 될지 분석하고, 어떻게 해야 효율을 높여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수정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들이 있으면, 제가 이해한 원칙에 근거해 제 관점을 제시하고, 여러 사람과 함께 구하고 교제하여 합의를 끌어냈습니다. 이렇게 실천한 뒤부터 본분 이행 효율도 조금 올라갔죠. 저는 제가 어느 정도 바로잡혀 진입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책임져야 할 일이 닥쳤을 때 제 고질병이 되살아났습니다.
한번은 영상에 넣을 이미지를 제작하는데, 사람들이 화면의 디테일에 관해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을 냈습니다. 같이 의논해 봤지만, 어떻게 수정하는 게 좋을지 결정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양보 없는 대치가 계속됐습니다. 사실, 저는 화면이 그저 봤을 때 예쁘고, 내용이 객관적인 사실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되니까 자잘한 디테일까지 파고들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죠. 하지만 막상 여러 가지 의견을 마주하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더군요. ‘내 생각대로 했다가 영상을 업로드한 다음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그럼 내 책임이 되잖아.’라는 생각이 들었죠. 저는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가 책임져야 할 게 두려워 또 모두의 의견에 따라 여러 버전으로 수정한 뒤 다른 사람들이 최종 결정을 내려 주길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계속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겁니다. 시간이 하루 이틀 흘러가는 것을 보며 또 영상 진도를 지연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몹시 초조해졌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난 결단 내리는 게 왜 이리 힘들까? 왜 손발이 묶인 것처럼 자유롭지 못할까?’ 저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기도하며 저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할 수 있게 인도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 뒤에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정직한 사람으로 살려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어떻게든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절대 교활한 사람이 되지 마라. 문제가 닥쳤을 때 책임을 회피하며 본인이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데만 급급하다면, 이런 행동은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비난을 받는데 하나님 집에서는 오죽하겠느냐! 이것은 하나님에게 정죄되고 저주받는 짓이고, 하나님 선민들에게 혐오받고 버림받는 짓이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좋아하며, 간사한 사람, 교활한 사람을 혐오한다. 네가 교활한 사람이 되어 농간을 부리는데 하나님이 너를 혐오하지 않을 리 있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너를 가만둘 리 있겠느냐? 언젠가는 너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좋아하고, 교활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이를 분명히 알아야 하고 더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 한순간 어리석게 군 것은 그래도 용서할 수 있다. 만약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고집불통이다. 정직한 사람은 책임을 질 줄 안다. 그는 자신의 이해득실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집의 사역과 이익을 지킨다. 또 마음이 정직하고 선량하며, 한 그릇의 맑은 물처럼 한눈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이런 사람은 일 처리도 투명하다. 간사한 사람은 온갖 농간을 부리며 늘 꾸미고 숨기고 가리면서 자신을 아주 빈틈없이 포장해 아무도 꿰뚫어 보지 못하게 한다. 네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남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네 내면의 가장 깊은 곳까지도 감찰할 수 있다. 하나님 눈에 네가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 교활한 인간이고, 좀처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께 간사한 수작을 부리며 마음을 보여 주지 않으면 하나님은 너를 좋아하지 않고 혐오하고 포기할 것이다. 바깥세상에서 형통하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너희는 알고 있느냐? 그들의 본질은 무엇이냐? 하나같이 꿍꿍이가 가득한 사람, 몹시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이고, 영락없는 마귀 사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하겠느냐?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자는 바로 마귀이고,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 부류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너희는 절대 그런 사람이 되지 마라. 말을 할 때 항상 눈치를 살피고, 일을 처리할 때 늘 분위기를 보면서 처세에 능한 사람, 내가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가장 혐오한다. 이런 사람은 구제 불능인 사람이다.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이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해도 그것은 전부 사람을 기만하는 헛소리이다.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일수록 마귀 사탄이다.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자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말해 보아라. 간사한 사람, 거짓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말을 잘하는 사람이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을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혐오하고 버리며, 한쪽으로 제쳐 두고 신경도 쓰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짐승과 같은 부류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눈에, 이런 자들은 사람의 탈을 썼지만 본질은 마귀 사탄 부류의 자들이고,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절대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말씀ㆍ5권 리더 일꾼의 직책ㆍ리더 일꾼의 직책(8)>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제 내적 상태를 폭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의견을 받으면 늘 우유부단하게 행동했습니다. 잘못했다가 책임져야 할까 봐 두려워하고, 늘 저를 지키는 것만 고민했죠. 사실 이것은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명철보신이 살길이다.”, “다수가 저지른 범법행위는 처벌받지 않는다.” 등 사탄 독소의 지배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았을 때, 분명 저는 다르게 생각하는데도 제 관점을 제시해 구하지 않았고, 어떨 땐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수정했습니다. 저 자신을 지키려고 했던 거죠. 이러면 일단 문제가 발생해도 저 혼자의 책임이 아니고, 책망받을 필요도 없으니까요. 겉보기에 저는 남의 의견을 잘 수용하고, 남이 말한 대로 수정해 ‘교만하지 않고 진리를 잘 받아들인다’는 거짓 인상을 줬지만, 사실 그 뒤에는 제 비열한 속셈이 숨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제 모습을 돌이켜 보면, 저는 책임질 일이 생길 때마다 저 자신을 보호하려 애썼습니다. 가끔 남들이 문제가 생겼다며 제게 의견을 달라고 하면, 먼저 남들의 생각과 관점을 분석했습니다. 만약 제 관점과 같으면 남들의 생각에 적당히 제 의견을 덧붙여 말했고, 제 관점과 다르면 제 관점이 틀려서 문제가 생길 때 책임을 져야 할까 봐 아예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애매모호한 말로 적당히 넘겨 버렸죠. 저는 이런 사탄의 처세 철학에 기대 살면서 몹시 약삭빠르고 간사하게 변했습니다. 언제나 제 관점을 명확히 얘기하지 않고, 원칙도 입장도 없고, 말이나 행동도 다른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하고, 제 마음속 진짜 생각을 내비치지 않았죠. 그러면서 제 방식이 똑똑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결과도 책임질 필요가 없고, 책망 훈계 받을 일도 없고, 교체되지도 않을 거라고 말이죠. 이건 하나님과 형제자매에게 잔머리 굴리고 간사를 부리는 것으로,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고 역겨워하실 거란 걸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구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형제자매는 속여 넘길 수 있다 해도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못 속입니다. 제가 계속 이렇게 하나님을 기만하고, 본분을 무책임하게 형식적으로만 이행하고, 진리 원칙을 구하는 데 집중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 진리도 얻지 못하고 내쳐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약삭빠르게 굴다가 제 꾀에 제가 넘어갈 거로 생각하니 정말 너무 어리석게 느껴졌습니다! 이걸 깨닫고 두려웠습니다. 저는 계속 이렇게 나갈 수는 없다고, 정말 하나님께 회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또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봤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원칙을 파악해 진리를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바로 원칙이 있는 것이다. 일을 간파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합당한지 알 수 없다면 구하고 교제해 합의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교회 사역에 유리하고 형제자매들에게 유익이 되는지 확신하면 그렇게 행해야 한다. 이런저런 규례에 얽매이지 말고 미루거나 기다리지 말고 관망하지 마라. 늘 관망하고 자신의 주관이 없이 늘 다른 사람이 결정하면 일을 하고, 결정하는 사람이 없으면 미루거나 기다릴 경우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 각 부분의 사역이 전부 정체된 채 진척이 되지 않고, 어떤 일도 이뤄지지 않는다. 마땅히 진리를 구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최소한 양심과 이성에 근거하여 일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 네가 분명히 알고, 또 많은 사람이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실행해야 할 것이다. 책임질까 두려워 말고, 미움을 살까 두려워 마라. 뒷감당할까 봐 두려워 마라. 사람이 실질적인 일을 하지 않고 늘 소심하게 굴며 책임질까 두려워 원칙을 고수하며 일 처리하지 못하면 그런 사람은 너무 교활하고 간사하며 꿍꿍이와 잔꾀가 너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누리고 싶어 하면서 실질적인 일을 하지 않으니, 참으로 도덕심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을 가장 증오한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든 진리에 따라 실행하지 않고, 충성심이 없고, 항상 개인적인 불순물, 개인적인 뜻과 생각을 품는데, 하나님은 그런 일을 다 감찰하고 알고 있다. 너는 하나님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면 너는 너무도 어리석은 것이다! 네가 즉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잃게 될 것이다.』(하나님의 교통 중에서), 『정직한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이냐?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는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다. 둘째, 정직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모든 일에서 진리를 구하고 실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네가 스스로 무척 정직하다고 말할지라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이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겠느냐? 네가 “저는 자질이 부족해도 마음은 정직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막상 본분이 임했을 때, 고생할까 두려워하고 잘 이행하지 못하면 결과에 책임을 지게 될까 두려워 핑계를 대며 거부하거나 다른 이가 이행하도록 제안한다면, 그것이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겠느냐? 그것은 분명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직한 사람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반드시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며, 자신이 이행해야 하는 본분에 충성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해 드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측면의 모습이 있다. 하나는 정직한 마음으로 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육적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딴마음을 품지 않으며, 자신의 이익을 꾀하지 않는 것, 이것이 정직한 모습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 너의 마음과 사랑을 전부 본분에 사용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직한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며 보여 줘야 하는 모습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정직한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매하고 자질이 부족해도 괜찮지만, 핵심은 마음이 올바르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꾸미지 않고, 생각하는 것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고, 잘 모르는 것은 여러 사람과 함께 구하며 교제하고, 원칙에 맞고 교회 사역에 도움이 되면 그대로 행동하고, 본분을 이행할 때 충성을 다하면 하나님은 만족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면, 설사 자질이 부족해서 혹은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조금 실수하더라도 거기에 배워야 할 공과가 있을 것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제때 진리를 구해 문제를 정리한다면, 이런 실수는 점점 줄어들고 점차 원칙을 파악하여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게 될 테고요. 교회에서도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사람을 정죄하거나 책임을 추궁하진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나니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습니다.
그 후, 그동안의 제 내적 상태를 한 자매에게 털어놓고 교제했습니다. 자매는 인내심 있게 저를 도와주었죠. 자매와 함께 교제하고 진리를 구함으로써 저는 쭉 고수하고 있었던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았습니다. 예전에 저는 형제자매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다른 관점과 견해를 제시하면, 남들이 저를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으로 볼 거라며 걱정했습니다. 사실 저는 무엇이 교만과 독선이고, 무엇이 원칙을 견지하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던 겁니다. 원칙을 견지한다는 것은, 진리를 구함으로써 이렇게 실천하는 것이 진리 원칙에 맞고 교회 이익을 지키는 것이라 확신하면 그대로 견지하면서 남들이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때도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교만, 독선과 비슷해 보이지만, 이것은 진리를 견지하는 긍정적인 것이죠. 그러나 교만과 독선은 자신이 남들보다 잘나서 자기 생각과 관점은 다 맞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남들이 다른 관점을 제시할 때도 구하며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고집을 부려 틀린 것을 억지로 옳다고 말하죠. 사실, 그 관점은 자기 뜻에서 나온 것이기에 전혀 원칙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늘 남들이 자기 말을 듣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게 하고 싶어 하죠. 이것은 사탄의 성품이자 교만하고 독선적인 행동입니다. 예전에 교체됐던 형제자매 몇 명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자기 관점을 고집하고, 다른 형제자매가 제기한 문제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구하거나 생각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늘 자기 뜻을 주장했고, 수정 보완하려 하지 않았죠. 사실, 그들이 고수한 것은 원칙에 부합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생각과 취향이었죠. 이것이 교만하고 독선적인 행동입니다. 만약 원칙에 근거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해 자기 관점을 제시했다면, 이는 교만이 아니라 진지한 것입니다. 사역을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대한 것이죠. 가끔 잘 모르는 문제가 있을 때 자기 관점을 얘기하며 구하고 교제하는 것 역시 교만과 고집이 아닙니다. 원칙을 구하고 분명히 하기 위해서인 거죠. 이 부분의 진리를 깨닫고 나니 마음이 차분해지고 밝아지면서 훨씬 편해졌습니다.
그 뒤로는 본분 이행 중에 또 여러 의견이 들어오면, 하나님께 기도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관련된 진리 원칙을 구했습니다. 그런 다음 원칙에 근거해 수정해야 할지 말지를 판단하고, 또 적극적으로 제 생각을 제시하며 소통하고 토론했죠. 한번은 제가 완성한 영상 배경 화면을 본 리더가 색깔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다른 색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습니다. 저는 생각했죠.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대대적인 수정을 해야 하고, 그러면 영상 업로드가 지연될 수 있어. 사실 이건 원칙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미적 취향 문제야. 고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내가 고치지 않으면, 리더가 나를 다른 사람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으로 여기진 않을까?’ 또 망설임이 시작됐을 때,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제가 원칙에 따라 실천할 수 있게 인도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저는 참고 자료를 찾은 뒤 리더, 책임자와 함께 이와 관련된 원칙을 구하고, 제 이해와 관점을 교류했습니다. 그들은 제 관점에 모두 동의했고, 영상은 금방 인터넷에 올라갔죠. 정말 기쁘고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동안의 체험을 돌아보면, 저는 책임을 피하고 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때 이것저것에 얽매이고 온갖 걱정이 앞서 사는 게 피곤하고 본분 이행 효율도 낮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진리 원칙에 따라 실천하니 문제가 금방 해결되고, 본분 이행도 수월하고 편해졌죠. 제가 여실히 체험한 바에 따르면, 사탄의 처세 철학에 기대어 살면 갈수록 약삭빠르고 간사해지고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돼 하나님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진리를 실천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본분을 이행해야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죠. 이렇게 살면 편하고 떳떳해지고, 마음도 즐겁고 평온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