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아들이 불치병에 걸린 후

중국 량신(梁欣)

2년 전, 아들이 갑자기 허리가 심하게 아팠습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결과가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라고, 아들에게 큰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들이 정말 심각한 병에 걸렸구나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난 하나님 믿으면서부터 계속 모든 걸 버리고 헌신하면서 본분을 이행하고, 고생도 많이 했어. 공산당이 미친 듯이 탄압하고 잡아가도, 친구나 친척들이 비웃고 비방해도 움츠러들지 않고 계속 본분을 이행했지. 이렇게 하나님 위해 버리고 헌신한 점을 봐서라도 하나님은 우리 아들을 지켜 주실 거야. 무슨 큰 병은 아니겠지.’ 그런데 검사 결과는 놀랍게도 간암과 간경화였고, 석 달에서 여섯 달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진단 결과에 저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서른일곱 나이에 그런 병에 걸리다니요. 그때 결과지를 든 제 손은 부들부들 떨렸고, 의사가 오진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습니다. 자리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다가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니 눈물이 막 쏟아졌습니다. ‘아직 젊은 애가 어쩌다 이런 중병에 걸렸을까? 간암이랑 간경화는 하나만도 위험한데 둘씩이나…. 걔는 우리 집의 기둥인데, 걔가 없으면 우리 집은 어떻게 살지?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 부모가 자식 먼저 보내는 건데.’ 생각할수록 괴로웠습니다. 한동안은 늘 울고만 싶고 매일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암담했죠.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들이 이런 큰 병에 걸려서 너무나 괴롭고 견딜 수 없습니다. 당신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저에게 깨우침과 빛 비춤을 주십시오.’

하루는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봤습니다.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사람이 연약해지거나 소극적이 되거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거나 실행의 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다 정상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너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믿음이 있어야 하고, 욥처럼 하나님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욥이 비록 연약하여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지만, 그는 사람이 태어나서 가지게 된 모든 것은 여호와가 베풀어 준 것이고, 그 모든 것을 거두어 가는 이도 여호와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어떤 시련을 겪든 그의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사역을 할 때 사람은 그것을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너의 믿음이 필요하다.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일에서 사람의 믿음이 필요하고, 네가 관념을 내려놓지 못할 때 너의 믿음이 필요하며, 네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모를 때 너의 믿음이 필요하다. 너는 이러한 주관을 갖고 굳게 서야 한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 중에서) 아들이 이런 병에 걸린 것이 제게는 시련이자 검증이니 믿음으로 겪어 내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서 깨달았습니다. 저는 욥을 떠올렸습니다. 욥은 막대한 재산과 온 산의 소와 양을 모조리 강도에게 빼앗기고, 자식들마저 다 죽었으며, 그 자신도 온몸에 악창이 났습니다. 그토록 큰 시련 앞에서도 욥은 자기를 저주할지언정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칭송했고, 결국 하나님을 아름답게 증거했습니다. 욥에게 시련이 닥쳤을 때 친구들은 비웃고 아내마저 나무라며 심지어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사람이 욥을 나무라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이면은 사탄이 사람의 입을 빌려 욥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배반하도록 유혹한 거였죠. 근데 욥은 넘어가지 않고 아내를 어리석은 여자라고 꾸짖었습니다. 지금 친척, 친구들이 이런 식으로 저를 공격하는 그 이면에도 사탄의 계략이 숨어 있으니 저는 그들의 헛소리를 듣지 말고 욥을 본받아 굳게 서서 하나님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는 그렇게 괴롭고 막막하지 않았습니다.

보름 후, 아들은 수술을 받고 병세가 조금 호전됐습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저 애를 긍휼히 여기실지도 몰라. 하나님께서 병이 낫는 기적을 보여 주셨으면 정말 좋겠어. 아들의 병이 완전히 나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은 뒤 평안만 얻고자 한다. 자식에게 병이 없고, 남편에게 좋은 직업이 있고, 아들이 좋은 배우자를 찾고, 딸이 좋은 남자와 결혼하고, 너의 우마가 밭갈이를 잘하고, 한 해의 농사가 잘되길 바란다. 네가 추구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너는 오직 편안하게 살기만을 바라고, 너의 집에 나쁜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며, 바람이 불어도 네 몸에는 불지 않고, 모래가 날려도 네 얼굴은 때리지 않으며, 홍수가 나도 네 집의 곡식은 잠기지 않고, 모든 재난이 너와 무관하길 바란다. ‘하나님의 품속’에서 살고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생활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처럼 육적인 것만 추구하는 못난 놈에게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영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너는 짐승 아니겠느냐? 아무 대가도 없이 참도를 네게 베풀어 주었는데 너는 추구하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느냐? 진정한 인생을 베풀어 주었는데 추구하지 않는다. 그럼 너는 개돼지 따위가 아니겠느냐?(<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제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과 복받으려는 속셈을 콕 집어 드러내셨는데, 저는 정말로 부끄러웠습니다. 주님을 믿을 때 저는 복을 받고 은혜를 얻길 추구했고, 저 한 사람 주님을 믿어 온 집안이 복받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인 뒤로는 대놓고 하나님께 은혜를 내려 달라고 구하진 않았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인식도 없이 여전히 ‘금세에 백 배를 얻고 내세에 영생을 얻는’ 복받으려는 관점으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헌신했으니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또한, 우리 가족이 아픈 데 없이 무탈하고, 평안하고 순조롭게 지내고 특별히 큰 불행은 생기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가정과 일을 내려놓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어떤 고생도 마다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아들이 암에 걸리게 되니까 종일 걱정하고 괴로워하느라 본분 이행에 전처럼 의욕이 있지 않았습니다. 또 제가 전에 얼마나 헌신하고, 얼마나 수고했는지를 손꼽아 헤아리면서 속으로 하나님께 따지고, 왜 아들을 지켜 주지 않느냐며 원망했습니다. 그러다 이런 환경을 통해 드러난 것과 하나님 말씀의 폭로 덕분에 하나님을 믿는 제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버리고 헌신한 이유는 진리를 추구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복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 축복과 맞바꾸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건 하나님과 거래하고, 하나님을 이용하고 속이는 것입니다. 저는 오로지 우리 가족이 아픈 데 없이 무탈하고 평안하게 지내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기만을 바라며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게 떡으로 배를 불리려는 교계 사람들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제 추구 관점이 정말 저급하더라고요! 이런 걸 알고 나니 하나님께 너무 죄송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들의 병을 완전히 하나님 손에 맡기고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에 순종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한동안 치료를 받은 뒤 아들은 병세가 다소 호전되고 정신 상태도 점점 좋아졌습니다. 밥도 잘 먹고 가벼운 일도 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정말 기뻤습니다. 특히 손자랑 같이 마이크 들고 노래하며 춤추는 걸 보면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병이 좋아질 거라는 희망이 생기면서 이런 생각마저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시한부로 반년밖에 살지 못할 거라 했는데, 지금은 벌써 반년이 넘었어. 이렇게 좋아진 건 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지켜 주신 덕분이야! 이대로 가면 저 애 병도 완전히 나을 수 있겠어.’ 하지만 상황은 제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아들은 밥을 먹지 못하고, 배도 하루가 다르게 점점 부풀어서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본 결과, 암은 재발하지 않았지만 간경화가 심해져서 복수가 차올랐습니다. 점점 죽음의 문턱에 다가서는 아들을 보면서 또다시 절망에 빠졌습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좀 좋아졌는데 어째서 또 악화된 거지? 그렇게 효성스럽고, 붙임성 좋고, 친척과 친구 그리고 주변에서도 하나같이 다들 칭찬하는 애가 말이야. 내가 하나님 믿는 걸 별로 반기지는 않아도 그렇다고 반대도 안 하는데, 어쩌다 이런 불치병에 걸린 거지? 난 하나님 믿은 후로 계속 복음을 전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교회 일이라면 적극 나섰어. 아무리 공산당이 핍박하며 붙잡고 가족들이 반대하고 말려도 물러나지 않고 꿋꿋이 본분을 이행했어. 그렇게 많은 걸 버리고 헌신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그 오랜 시간 다 버리고 헌신한 결과가 이거란 말인가?’ 저는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동안 너무 비관적이고 실망스러워서 온종일 멍하니 지냈습니다. 삶에 희망도 전혀 없고 너무 괴로워서 자꾸 눈물만 났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보게 됐습니다. 『공의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 고생한 만큼 분배하는 것, 일한 만큼 돈을 주는 것, 노력한 만큼 얻는 것, 이것은 공의가 아니라 그저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령 욥이 하나님을 증거한 후에 하나님이 그를 멸했다면 이것은 공의일까? 사실 이것 역시 공의이다. 어째서 그것을 공의라고 하겠느냐? 공의에 대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어떤 일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한다면 하나님은 공의롭다고 말하기가 매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공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때 하나님이 욥을 멸했다면, 사람은 하나님이 공의롭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이 패괴되었든 안 되었든, 사람의 패괴가 깊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이 사람을 멸할 때 사람에게 그 이유를 명확히 밝혀야 하느냐? 무슨 근거로 사람을 멸하는지 설명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그가 정한 규칙을 사람에게 얘기할 필요가 있느냐? 필요 없다. 패괴된 사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든 다 합당하고, 다 하나님의 안배다. … 하나님의 본질은 공의이다. 하나님이 하는 일을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이 하는 것은 모두 공의롭다. 다만 사람이 알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사탄에게 넘겨주었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말했느냐? “당신이 하시는 일을 사람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늘 당신의 아름다운 뜻과 공의가 있지요. 그러니 제가 어찌 당신의 지혜로운 행사에 찬미를 보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기간에 왜 사탄을 멸하지 않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류로 하여금 사탄이 어떻게 사람을 패괴시키는지,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패괴시켰는지, 하나님은 어떻게 인류를 정결케 하고 구원하는지 알게 하기 위함이다. 마지막에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사탄의 추악한 몰골을 똑똑히 보고 사람을 패괴시키는 사탄의 극악무도함을 알게 되면, 하나님은 그때 사탄을 멸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 줄 것이다. 언제 사탄을 멸할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지혜가 들어 있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다 공의롭다. 그것을 깨닫지 못할지라도 마음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거나 관념을 가진 일에 있어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장 비이성적인 태도이다. 베드로는 어떤 일들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지혜와 아름다운 뜻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사람이 모든 것을 측량할 수는 없으며, 사람이 측량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제 생각처럼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도 아니고, 애쓴 만큼 돌아오고 보상받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하나님의 본질은 공의입니다. 하나님이 거두거나 주시는 것, 또 내리시는 은혜나 고통스러운 연단, 시련에는 다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고, 모두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나타내죠. 욥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습니다. 하나님 눈에는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에게 시련을 주셨습니다. 그 많은 시련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욥의 믿음과 경외심은 날로 승화됐습니다. 결국, 욥이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해서 사탄을 완전히 이긴 뒤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배로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또 바울이 떠올랐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생도 많이 하고 많은 길을 뛰어다녔지만,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순종과 경외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사역과 헌신을 이용해 하나님의 축복과 맞바꾸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 많은 사역을 하고 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 바울의 수고와 헌신에는 야심과 욕망, 거래하려는 마음만 가득하고 그의 성품은 전혀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걸은 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이걸 보면 하나님은 겉으로 얼마나 바치고 헌신했는지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순종이 있는지를 보시고, 생명 성품이 변화했는지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고 공의로우십니다. 저는 수고하면 보답을 받아야 하고, 수고한 만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사람의 거래 관점이지 하나님의 공의 성품과는 전혀 다른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느 정도 버리고, 헌신하고, 좋은 일도 많이 했다고 하지만, 저는 잘못된 추구 관점으로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아프다고 불평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했습니다. 생명 성품은 전혀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 부류였으니, 어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모른 채, 하나님 믿고 본분 이행하면서 어느 정도 버리고 헌신했으니 하나님이 당연히 제 아들을 보살피고 지켜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거래 관점으로 하나님께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적합한 종착지가 있다. 그 종착지는 본인의 본질에 근거해 정해지는 것이지, 다른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녀의 악행을 부모에게 더할 수 없고, 자녀의 의를 부모가 공유할 수도 없다. 또한 부모의 악행을 자녀에게 더할 수도 없고, 부모의 의를 자녀가 공유할 수도 없다. 저마다 자신의 죄를 감당하고 각자의 복을 누릴 뿐, 그 누구도 다른 이를 대신하지 못한다. 이것이 공의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안식에 들어갈 것이다> 중에서) 저는 항상 제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 위해 모든 걸 버리고 헌신했으니까 아들이 아프면 하나님께서 낫게 해 주셔야지 안 그러면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정말 너무 황당한 관점이었습니다! 제 수고와 헌신이 얼마나 됐든, 그건 모두 제 본분이자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일 뿐, 아들의 병, 아들의 운명, 종착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걸 내세워서 하나님께 거래하거나 조건을 따지려 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그제야 제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의 본질을 조금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적그리스도에 해당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일을 겪어도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구해 해결할 줄 모르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사물을 바라보는 일은 더욱 모른다. 이것은 순전히 그가 하나님이 하는 말씀 하나하나가 다 진리임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진리를 교제하든 적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무슨 일을 대하든 올바른 태도를 보이지 않으며, 특히 하나님과 진리를 대할 때는 더더욱 관념을 지키며 죽어라 놓지 않는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는 하나님, 초자연적인 하나님이다. 이적과 기사를 나타낼 수만 있으면 관세음보살이든 부처든 마조(媽祖)든 상관없이 그는 모두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 적그리스도의 생각에 하나님은 신주 뒤에 숨어서 사람에게 공양을 받고, 사람이 바치는 음식을 먹고, 사람이 피우는 향으로 호흡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손 내밀어 도와주고 사람이 도움을 청할 때 정성껏 소원을 빌면 마땅히 큰 능력을 보여 주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즉시 사람을 도와주고 그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에게 있어 그러한 하나님이 바로 참하나님이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이 적그리스도의 눈에는 하찮게만 보인다. 왜 그럴까?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을 보면,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행하는 모든 양육, 목양, 구원 사역은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필요한 것은 현세에서 일이 잘 풀려 만사형통하는 것이고, 현세에 징벌받지 않고 내세에는 천당에 가게 되는 것이다. 그의 관점과 필요는 진리를 증오하는 그의 본질을 증명한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15조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의 본질을 부정한다(1)>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구구절절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반성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저는 늘 제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헌신했으니까 하나님께서 당연히 제게 상과 축복을 내려 주셔야 하고, 우리 가족이 아픈 데 없이 평안하고 무탈하게 지켜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병세가 좀 좋아졌을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그러다 다시 병세가 악화되니까 하나님이 이적을 보이셔서 아들의 병을 낫게 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자 하루아침에 낯빛을 바꾸고 원망을 잔뜩 품었습니다. 왜 제가 그렇게 애쓰고 헌신한 걸 보고도 아들을 지켜 주고 낫게 해 주지 않느냐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애쓰고 헌신한 걸 후회하기까지 했습니다. 제 모든 감정은 제가 이익을 얻느냐 못 얻느냐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저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여겨 경배하고 순종한 게 아니라 제 필요를 채워 주고 복을 베풀어 주는 ‘우상’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석가모니, 관음보살에 절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두 차례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커다란 굴욕을 견디시고, 사람의 정죄와 대적, 거역과 오해를 견디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사람에게 베풀어 주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게 하고, 마지막에 구원받고 살아남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너무나 커다란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누렸고, 이렇게 많은 진리로 양육받고 공급받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향한 진심이 눈곱만큼도 없었으니 하나님께 정말 큰 상처와 실망을 안겨 드렸습니다! 생각할수록 하나님께 죄송해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후회와 자책의 눈물을 쉴 새 없이 쏟아내며 하나님께 참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여러 해 동안 당신을 믿으면서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병 앞에서 굳게 서서 당신을 증거하지 못했고 당신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하나님, 당신께 회개하길 바랍니다. 아들의 병이 낫든 말든 당신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겠습니다. 제게 믿음을 주십시오.” 기도하고 나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마음이 아주 가벼워졌습니다.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깨닫게 됐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본분은 사람이 복을 받거나 화를 입는 것과 무관하다. 본분은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천직이므로 보수나 조건을 따지지 말아야 하고 이유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본분 이행이라 할 수 있다. 복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심판받은 후 온전케 되어 누리는 복을 말하고, 화를 입는다는 것은 사람이 형벌과 심판을 거친 후에도 성품 변화를 이루지 못해, 즉 온전케 되지 못해 받는 징벌을 말한다. 그러나 복을 받든 화를 입든 사람은 피조물로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이것은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것이다. 너는 복을 받기 위해 본분을 이행해서도 안 되고, 화를 입을 것이 두려워 본분 이행을 거부해서도 안 된다. 내가 한마디 하겠다.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바이고,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패역이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점점 변화하고, 또 그 과정에서 비로소 충성심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네가 자신의 본분을 이행할수록 더 많은 진리를 얻게 되고, 더 실제적으로 표현하게 된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육신 하나님의 직분과 사람의 본분의 구별>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본분은 화를 입거나 복을 받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도 복을 받는 것과 무관합니다. 피조물로서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식이 자기를 키워 준 부모한테 당연히 효도해야지 재산을 바라거나 조건을 따지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사람으로서 해야 하는 최소한의 도리입니다. 그런데 저는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 사랑에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본분 이행 기회를 오히려 하나님과 거래하는 협상 카드로 삼았습니다. 조금 애쓰고 헌신했다고 하나님께 은혜와 축복을 바라고, 그걸 얻지 못하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일말의 양심도 없이 하나님의 고심을 저버렸습니다. 특히 아들이 아픈 뒤로는 하나님께 요구만 하고,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했습니다. 생각할수록 저 자신이 몹시 미웠습니다. 저는 아들의 병이 어떻든 다시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뒤 아들의 병은 갈수록 악화되고, 하루가 다르게 몸 상태가 안 좋아졌습니다. 저도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지만, 더는 하나님께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봤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탄생, 출현, 수명, 결말 그리고 일생의 사명과 인류 전체에서 맡은 역할 등을 하나님은 전부 계획해 놓았으며, 이는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창조주의 권병이다. 모든 피조물의 탄생, 일생의 사명, 그리고 수명이 언제 끝날 것인지 등등 이 모든 규칙은 하나님이 이미 다 정해 놓았다. 하나님이 모든 별의 운행 궤도를 정해 놓은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어떤 궤도로 얼마 동안 어떤 규칙에 따라 어떻게 운행할 것인지 하나님은 이미 다 정해 놓았으며, 수천 년, 수만 년, 수십만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한 것이자 하나님의 권병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그래,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사람 수명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거야. 몇 살까지 살고, 평생 얼마큼 고생하고 얼마큼 복을 누릴지는 다 하나님 손에 달렸어. 하나님은 사람이 세상에서 선행을 많이 했다고 수명을 늘려 주시거나 악행을 많이 했다고 목숨을 일찍 거두시는 게 아니야. 선악과 관계없이 사람에게 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수명이 있는데, 이건 누구도 바꿀 수 없어. 저 애 수명도 하나님이 이미 다 정해 놓으셨어. 하나님은 어떻게 행하시든 공의로우셔. 내가 해야 할 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뿐이야.’ 이 점을 깨달으니 마음이 그렇게 괴롭지 않았습니다. 아들 병세가 어떻든 저는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해 하나님 사랑에 보답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들은 올해 3월 우리 곁을 영영 떠났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인도 덕분에 아들과의 이별을 바르게 대하게 됐고, 마음의 고통도 많이 덜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병을 얻고 지금까지 2년이란 시간을 돌아보았습니다.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 시간에 겪었던 고통과 연단 덕분에 저는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은 제 비열한 속셈과 패괴, 불순물을 똑똑히 알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공의 성품도 조금이나마 인식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하나님께 비이성적으로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또 사람의 눈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관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면 이익을 얻고 수확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그 체험을 통해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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