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및 주의 사랑

2024.02.09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마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주의 사랑

마 22:37~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구절 중 하나는 용서를 얘기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내용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사역할 내용을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하나님은 성육신할 때, 한 단계의 사역과 함께 그 시대에 나타내고자 하는 성품과 구체적인 사역 항목도 가지고 온다. 해당 시기에 인자가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시대에 행하고자 하는 사역의 범위를 둘러싸고 이뤄지며, 그보다 넘쳐 나거나 부족하게 행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말씀과 사역은 해당 시대와 관련이 있다. 사람의 방식이나 언어로 표현하든 신적 언어로 표현하든, 어떤 방식으로 어떤 위치에서 표현하든 그의 목적은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에 대한 그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사람이 알게 하는 것이다. 그는 여러 방식으로, 그리고 서로 다른 위치에서 그의 뜻과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사람이 알고 이해하게 한다. 그래서 은혜시대에 예수가 자신이 설명하려는 바를 인간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아울러 더 많은 경우에 그는 평범한 길 안내자의 위치에서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며, 사람이 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러한 사역 방식은 은혜시대 이전의 율법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과 훨씬 친근해지고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며, 형식과 방식 면에서 훨씬 더 실제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비유가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언급한 숫자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당시에 이렇게 비유한 의도가 무엇인지 보여 준다. 그의 목적은 사람이 다른 이를 용서할 때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도 아니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어떤 개념이겠느냐? 바로 다른 이를 용서하는 일을 자신의 책임, 필수 과제이자 ‘도’로 삼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비유에 불과했지만, 이 표현은 가장 요긴하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비유를 통해 사람은 예수의 뜻을 깊이 깨달았으며, 이 말에서 자신이 실행해야 할 길을 찾고, 실행의 원칙과 기준을 얻었다. 또한, 이 비유로 사람은 이해와 관용을 베푸는 마음으로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조건 없이, 횟수의 제한 없이 다른 이를 용서하라는, 용서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확실한 이해를 얻었다. 예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이런 말씀을 했겠느냐? 그가 정말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란 숫자를 생각했겠느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사람을 용서하는 데에 횟수가 정해져 있겠느냐? 많은 사람이 여기서 말하는 ‘횟수’에 흥미를 느끼며, 이 횟수의 기원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싶어 한다. 왜 예수의 입에서 이러한 숫자가 나왔는지 궁금해하며, 이 숫자에 분명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이 숫자는 하나님이 인성으로 말씀한 비유에 불과하다. 설사 어떤 숨은 의미나 함의가 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사람에 대한 예수의 요구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지 않았을 때, 사람은 하나님의 많은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말씀은 완전한 신성에서 비롯되었기에, 그 말씀을 할 때의 위치와 배경을 사람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또한 사람이 볼 수 없는 영계에서 선포된 것이라 육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꿰뚫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육신한 후에는 영계에서 벗어나 인성의 각도에서 사람과 대화하게 되었다. 그는 사람의 관념 속 상상이나 사람이 삶 속에서 보고 접하는 일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과 이해할 수 있는 언어, 또는 인류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 그의 신적 성품과 마음, 그의 태도를 전했다. 그리하여 사람이 이해 가능하고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알고 인식하며, 하나님의 뜻과 요구 기준을 이해하고 깨닫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성으로 사역하는 방식과 원칙이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행하는 사역 방식과 원칙이 대부분의 경우 인성을 통해 이루어지긴 했지만, 오히려 신성으로 직접 사역해서는 얻기 힘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인성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은 그 내용이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목표 지향적이다. 방식도 훨씬 유연하고, 형식 면에서도 율법시대를 뛰어넘는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 주의 사랑

이어서 주를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말씀은 직접 신성으로 선포한 것이더냐? 결코 그렇지 않다! 이는 인자가 인성으로 한 말씀이다. 사람만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 ‘다른 사람을 자신의 생명을 보살피듯 보살피라.’라는 말을 할 수 있으며, 오직 사람만이 이런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말씀한 적이 없으며, 적어도 하나님의 신성에는 이러한 언어가 없다. 하나님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을 신조로 삼아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규범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라는 데 있다. 너희는 하나님이 “나는 인류를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한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 안에 들어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고 대하는 방식과 태도는 그의 성품의 자연스러운 표출이자 발현이다. 그래서 그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기 위해 일부러 무언가를 하거나 특정 방식과 도덕규범을 따르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는 원래부터 이런 본질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서 너는 무엇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은 인성으로 사역할 때, 인간적인 형식으로 많은 말씀과 진리, 방식을 전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 소유와 어떠함, 뜻도 함께 전하여 사람이 이해하고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신분과 지위를 대표하는 본질, 그리고 소유와 어떠함을 더없이 정확하게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성육신한 인자는 최대한 가장 정확하게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성품과 본질을 나타냈다. 인자의 인성은 사람이 하늘의 하나님과 사귀고 소통하는 데에 있어 방해물이나 장애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류와 창조주를 연결하는 유일한 경로이자 다리가 되었다. 이쯤에서 너희는 은혜시대에 예수가 행한 사역의 성격과 방식 중 일부는 지금 이 단계의 사역과 유사한 부분이 아주 많다는 느낌이 들지 않느냐? 지금 단계의 사역에서도 많은 인간적인 언어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했다. 또한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말하는 것이나 인류의 지식적인 측면의 언어와 방식을 많이 이용해 하나님 자신의 뜻을 표현했다. 하나님이 일단 성육신하고 나면 인간적인 위치에서 말씀하든 신적인 위치에서 말씀하든, 많은 말이나 표현 방식에 있어 사람의 말이나 방식을 매개체로 사용한다. 즉, 하나님이 성육신한 때는 바로 네가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보고, 하나님의 실제적인 면면을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했을 때 성장 과정에서 인성으로 사람의 지식, 상식, 언어 혹은 표현법을 이해하고 배우며 파악하게 된다. 피조물인 인류에게서 비롯된 이러한 것들은 성육신 하나님께 갖춰져, 그가 육신에서 하나님의 성품 혹은 신성을 나타내는 도구가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의 위치에 서서 사람의 언어로 더 적절하고 현실적이며 정확하게 사역할 수 있게 되고, 이에 사람은 더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사역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렇게 사역하는 것이 더 실제적이지 않겠느냐? 이는 하나님의 지혜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성육신했을 때, 하나님의 육신이 그가 하려는 사역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이 장차 실제적으로 발현될 때이다. 그리고 그때는 인자가 본격적으로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세대 차이’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사자(使者)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던 사역을 곧 그만두고, 하나님 자신이 친히 육신 가운데서 그가 하고자 하는 모든 말씀과 사역을 할 것임을 의미한다. 아울러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음을,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고, 곧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전 인류에게 다가올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은 모두 예수가 강생했을 때 일어난 많은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이 바로 마왕에게 쫓긴 것으로, 온 성안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까지 전부 살해당한 일이다. 이를 보면 하나님이 성육신해서 사람들 가운데 왔을 때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인류 구원의 경영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성육신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행하는 사역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는지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육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을 충분히 감당할 정도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느냐?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 새 사역을 사람들 가운데 전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적어도 기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며 직분 이행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더없이 즐거웠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준비한 끝에 드디어 정상인의 육신을 입고 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의 형상으로 그의 새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침내 사람의 신분으로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마침내 사람의 언어와 방식으로 사람들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람의 언어를 이용해 공급하고 인도하며 도와줄 수 있게 되었다. 또 사람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고 같은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람의 방식으로, 나아가 사람의 시각으로 인류와 사물, 모든 것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이 보기에 이 모든 것들은 육신 사역의 첫 전투에서 승리한 것과 같았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처음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함에 위안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실제적이고 자연스럽게 일어났기에, 하나님이 느낀 위안은 실로 참된 것이었다. 인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새로운 단계의 사역을 이룰 때, 하나님이 기쁨과 위안을 느낄 때, 그때가 바로 인류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을 때이자 구원이 한 걸음 더 가까워진 때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그때가 바로 그의 새 사역이 전개되고, 그의 경륜이 앞으로 나아가는 때이며, 더욱이 그의 뜻이 완전한 성취에 가까워지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가 왔다는 것은 인류에게 행운이자 더없이 좋은 일이었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하나님이 새로운 단계의 사역을 펼칠 때는 하나님께 새로운 시작이 열린다. 이 새로운 사역과 시작이 사람들 사이에서 전개되고 실현될 때는 이 사역의 결과가 나타나고 이루어진 때이며, 하나님이 최종 효과와 성과를 거둔 때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성과에 만족해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때 하나님의 마음은 당연히 즐거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미 그가 찾고자 하는 사람을 보았고 확정하고 얻었으며, 그의 사역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를 만족게 할 수 있는 자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의 위안을 얻었고, 슬픔을 내려놓았으며, 즐거움을 느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육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새 사역을 펼칠 수 있도록 그가 하고자 하는 사역을 막힘없이 행하기 시작했을 때,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느꼈을 때, 이미 결말을 보았으며, 이 결말로 인해 만족스럽고 즐거웠다. 하나님이 그 즐거움을 어떤 방식으로 나타내겠느냐? 상상이 되느냐? 하나님이 눈물을 흘려도 되겠느냐? 하나님이 눈물을 흘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손뼉을 쳐도 되겠느냐? 하나님이 춤을 출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노래를 불러도 되겠느냐? 그 노래는 어떤 노래여야겠느냐? 하나님은 당연히 마음속 즐거움과 기쁨을 표현하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며, 그 노래를 사람들과 자기 자신, 그리고 만물에게 들려줄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든 즐거움을 표현할 수 있고, 이는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하나님은 희로애락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다양한 심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리이며,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니,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고정된 생각을 가지거나 하나님을 자신의 틀 안에 가둬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이것도 저것도 하지 말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즐거움과 심정을 제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즐거워해서도, 울거나 눈물을 흘려서도 안 되며, 그 어떤 감정도 표현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최근 두 차례의 교제를 통해, 너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께 어느 정도 자유와 해방을 허락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은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다. 나중에 너희가 하나님이 슬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정 그 슬픔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정 그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되면, 최소한 하나님이 왜 즐거워하고 슬퍼하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슬픔으로 인해 슬퍼하고, 하나님의 기쁨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을 때, 너의 마음은 하나님께 완전히 얻어질 것이며, 너와 하나님 사이에는 그 어떤 장벽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너는 사람의 상상과 관념, 혹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속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너의 마음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가 되며, 너의 생명이 된 하나님이자 너의 모든 것을 주재하는 주인이 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러한 바람이 있느냐?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느냐?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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