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1)

2024.02.09

1. 예수가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다

마 12: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 12:6~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우선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라는 구절을 보자.

왜 이 구절을 골랐겠느냐? 이 부분이 하나님의 성품과 어떤 연관이 있겠느냐? 우리는 이 구절에서 먼저 이날이 안식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안식일임에도 밖으로 나갔고, 게다가 제자들을 이끌고 밀밭을 지나갔다. 더욱 ‘대역무도’한 것은 ‘이삭을 잘라 먹었다’는 것이다. 율법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는 안식일에 마음대로 외출하지 말고 마음대로 활동하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다. 즉,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런 행동은 오랫동안 율법 아래에서 생활한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심지어 많은 비난을 야기했다. 사람이 왜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떻게 예수의 행동을 비판했는지는 잠시 차치해 두고, 우선 예수가 왜 하필 안식일을 택해서 이런 일을 했는지에 대해 얘기해 보자. 그리고 그가 이 일을 통해 율법 아래 살고 있는 자들에게 알려 주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 보자. 이것이 바로 이 구절과 하나님 성품의 관계에 대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세상에 온 예수는 자신의 실제 행동으로 인류에게 하나님이 이미 율법시대에서 나와 새 사역을 시작했으며, 이 새 사역에서는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안식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새 사역에 대한 일종의 맛보기에 불과했다. 진짜 큰 사역은 뒤에서 계속될 터였다. 예수가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율법시대의 ‘속박’에서 벗어나 율법시대에 정한 규례와 원칙을 깨뜨린 상태였다. 그에게서는 율법과 관련된 그 어떤 행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것들을 전부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며, 사람에게 지키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예수가 밀밭을 지나간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이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밖에서 사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이 행동은 사람의 고정 관념을 깼으며, 사람에게 그가 더 이상 율법 아래에서 살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며 완전히 새로운 형상과 새로운 사역 방식으로 사람들 앞에, 사람들 가운데 나타났음을 알려 주었다. 또한,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새 사역을 가져왔으며, 그 새 사역은 율법과 안식일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하나님은 새 사역을 할 때, 더 이상 옛것에 연연하지 않았고, 율법시대의 규례에 신경 쓰지 않았으며, 지난 시대에 했던 사역에 영향받지도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도 변함없이 사역했으며, 게다가 그의 제자들은 배고프면 이삭을 잘라 먹어도 되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아주 정상적인 것이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많은 사역과 말씀들을 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며, 그 새로운 시작 앞에서 이전에 했던 옛 사역을 더 이상 언급하지도, 지속시키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 원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새 사역을 하고자 할 때, 즉 그가 사람을 새로운 사역 절차로 인도하고자 할 때, 다시 말해 그의 사역이 더 높은 단계로 진입할 때, 사람이 지난날의 말이나 규례를 계속 지킨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지도 칭찬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미 새 사역을 가져왔고, 새로운 사역 단계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는 새 사역을 가져올 때, 완전히 새로운 형상과 각도, 방식으로 사람에게 나타나고, 사람에게 그의 다양한 성품과 소유와 어떠함을 보여 준다. 이것은 그가 새 사역을 하는 목적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옛것을 지키지 않고 옛길을 가지 않는다. 그의 사역과 말씀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이런저런 금기가 없다. 하나님은 아무런 매임도 없이 완전히 자유롭고, 그 어떤 금기도 없고 속박도 받지 않으며, 그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전부 자유와 해방이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고, 진실로, 실제로 존재하는 하나님이지, 목각 인형도, 흙으로 빚은 인형도 아니다. 그는 사람이 모시고 절하는 우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이며, 그의 사역과 말씀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전부 다 생명과 광명, 자유와 해방이다. 그에게 진리와 생명, 길이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사역을 한다.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인류가 그의 새 사역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평가하든,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을 한다. 그는 그 어떤 사람의 관념에도 신경 쓰지 않고, 사람이 그의 사역과 말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 심지어 사람이 그의 새 사역을 극력 반대하고 대적해도 개의치 않는다. 피조물 중 그 누구도 사람의 이치나 상상, 지식, 혹은 사람의 도덕관념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평가하고, 규정하고, 헐뜯고, 방해하고, 파괴할 생각은 하지 마라. 하나님이 일하고 사역하는 데는 어떤 금기도 없고, 그 어떤 사람, 일, 사물의 속박도 받지 않으며, 그 어떤 적대 세력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 그의 새 사역에 있어, 그는 바로 영원히 승리하는 왕이며, 모든 적대 세력과 인류에게서 온 각종 사설이나 그릇된 말들은 다 그의 발등상 아래에 뭉개진다. 그가 어느 단계의 새 사역을 하든지 간에, 그의 사역은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되고, 사람들 가운데서 확장되며, 또한 전 우주에서 막힘없이 행해지고 대성공을 거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이자,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떳떳하게 안식일에 나가 사역할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 어떤 규례도, 사람에게서 온 그 어떤 지식과 학설도 없었고, 그가 가진 것은 바로 하나님의 새 사역과 하나님의 도였으며, 그가 행한 사역은 모두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고, 사람을 빛 속에서 살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도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상과 거짓 신을 섬기는 자들은 매일 사탄의 속박과 각종 복잡한 규율에 묶여 오늘은 이것을 금기시하고, 내일은 저것을 금기시하며, 자유라곤 전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마치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인 죄수 같아 즐거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금기’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속박을 의미하고 굴레를 의미하며 사악함을 의미한다! 사람은 일단 우상을 섬기게 되면, 다시 말해 거짓 신이나 악령을 섬기게 되면 금기가 뒤따라온다. 이것도 먹으면 안 되고 저것도 먹으면 안 되며, 오늘은 외출하면 안 되고 내일은 취사하면 안 되며 모레는 이사하면 안 된다. 관혼상제 때마다 항상 택일해야 하고, 심지어 아이 낳는 것도 날을 가려서 낳아야 한다. 이것들을 뭐라 하느냐? 이것들이 바로 금기이자, 사람에 대한 속박이며, 사탄과 악령이 사람을 통제하고 사람의 마음과 육을 옭아매는 족쇄이다. 하나님에게 이러한 금기가 있느냐? 하나님의 거룩함을 얘기할 때, 너는 먼저 하나님께 어떠한 금기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는 원칙이 있지만, 어떠한 금기도 없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진리, 길, 생명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아래의 구절을 보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여기에서 ‘성전’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성전’은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을 가리킨다. 율법시대에 ‘성전’은 바로 제사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였다.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라고 한 예수의 말씀에서 ‘이’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이’는 성육신한 예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예수만이 성전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느냐? 사람에게 성전에서 나와야 한다고 알려 준다. 하나님이 이미 성전에서 나와 거기서 사역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마땅히 성전 밖에서 하나님의 발자취를 찾고, 하나님의 새 사역의 발걸음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이 말씀을 한 이유는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겼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성전이란 장소를 숭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에게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알려 준 것이다. 하나님은 지고지상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고 한 것이다. 예수가 봤을 때, 율법 아래에 있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이상 여호와를 경배하지 않고, 제사를 드리는 형식만 차렸을 뿐이었다. 예수는 그 형식을 ‘우상 숭배’로 정한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고 높게 생각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성전만 있을 뿐 하나님은 없었다. 그들은 성전이 없으면 삶터도, 경배할 곳도 없고, 제사를 드릴 수도 없다고 여겼다. ‘삶터’란 그들이 여호와를 경배한다는 명목으로 성전에 머무르면서 자신들의 일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또한, ‘제사를 드리는 일’이란 성전 안에서 섬긴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떳떳하지 못한 수작들을 은폐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당시에 사람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생각했던 원인이다. 그들이 성전을 눈가림으로, 제사를 핑계로 삼아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런 말씀으로 사람들을 일깨워 준 것이다. 이 말씀은 현재에 적용해도 효과가 있고, 현재 상황과도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비록 오늘날의 사람과 율법시대 사람이 체험한 하나님의 사역은 서로 다르지만, 사람의 본성 본질은 같다. 사람은 지금과 같은 사역의 배경하에서도 여전히 ‘성전을 하나님보다 크게 여기는 것’과 비슷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은 본분 이행을 직업으로 삼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큰 붉은 용과 싸우는 것을 인권 보호로, 자유와 민주 쟁취를 위한 정치 운동으로 여기며, 약간의 기술을 요하는 본분을 자신의 사업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종교적 교리로 간주하여 지키는 등등의 행동을 한다. 사람의 이러한 행동들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크게 여기는 것’과 성격이 같지 않으냐? 다만 2천 년 전의 사람은 형체가 있는 성전에서 개인의 경영을 했지만, 오늘날의 사람은 형체가 없는 성전에서 자신의 경영을 할 뿐이다. 규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규례를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고, 지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위를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며, 사업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사업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본다. 나는 사람들의 이러한 행동들을 보면서, “사람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장 높다고 칭송하나 모든 것을 하나님보다 크게 본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는 길에서 일단 자신의 재능을 펼칠 기회를 찾거나, 자신의 경영과 사업을 할 기회가 생기면, 하나님을 멀리 버려두고 자신이 열중하는 사업에만 몰두하며, 하나님이 맡긴 소임과 하나님의 뜻을 일찌감치 새까맣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러한 모습이 2천 년 전 성전에서 여러 가지 개인적인 경영을 했던 사람들과 뭐가 다르겠느냐?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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