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잃은 그림자에서 벗어나다
그간 하나님을 믿으면서 저는 사람의 운명과 생사는 모두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걸 이치적으로는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앎은 없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 관념에 맞지 않는 상황을 주셨을 때, 그러니까 아들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하게 됐을 때, 저는 원망하고 오해하고 따지는 모습만 드러냈어요. 정말 남김없이 제 모습을 다 드러내 보이고 나서야 제 진짜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됐고, 기복 신앙을 하는 저의 잘못된 관점에 대해서도 좀 알게 됐어요.
2017년 7월쯤이었어요. 저랑 남편은 지역에서 신앙인으로 소문난 사람이라 경찰이 수차례 조사를 나왔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두고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해야 했죠. 그 뒤에도 경찰은 계속 우리를 수소문했지만 저랑 남편은 한 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어요. 올해까지 벌써 7년이 흘렀죠. 가끔 남자아이가 엄마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팠죠. 아들을 보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갈 순 없고, 그저 같은 동네의 형제자매들을 통해 아들의 소식을 접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아들이 무탈하게 잘 지내는 게 확인되면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하심에 너무 감사했고 마음 놓고 본분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그러다 2023년 8월 어느 날 오후, 책임자의 편지를 받았는데, 왕카이(王凱)의 아들이 오토바이를 타다 교통사고 나서 사망했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왕카이는 우리 남편인데? 우리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그럴 리가 없어. 책임자가 잘 모르고 보낸 거겠지.’ 제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눈을 비비고 다시 편지를 자세하게 읽었는데, 분명하게 그렇게 쓰여 있더라고요. 저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서 대성통곡했어요. 어떻게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나 싶은 게 당장 날개라도 달아 집에 가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남편과 저는 경찰의 체포 대상이라 당장 고향에 돌아가는 건 너무 위험했어요. 아들이 죽었는데 집에도 못 가는 현실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오해와 원망이 생겼죠. ‘하나님, 왜 우리 아들을 지켜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부부는 하나님을 믿을 때부터 계속 본분을 이행했고, 큰 붉은 용의 추적과 핍박에 가정과 아들을 내려놓고 지금까지 따라왔잖아요. 교회에서 어떤 본분을 맡겨 주든 거절 한 번 안 했고요. 아들이 이제 겨우 30대인데, 창창한 나이에 갔으니 이건 정말 부모가 자식을 앞세운 거잖아요. 아들은 우리 부부의 유일한 희망이었어요. 근데 아들의 마지막도 보지 못했고, 이제는 남은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아들 따라 죽고 싶네요.’ 전 그때 그건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하는 옳지 못한 생각이란 걸 인지했어요. 그래서 얼른 속으로 기도했죠. ‘하나님,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니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당신을 원망하고 오해하면 안 되는 줄 압니다. 하나님, 제가 당신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십시오.’ 그렇게 계속 부르짖었더니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어요. 하지만 아들이 이 세상에 없고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너무 고통스럽고 연약해졌어요. 정말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서 밤새도록 아들의 살아생전 모습만 떠올렸어요. 속으로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데, 눈가에 눈물이 자꾸 차올랐어요.
그 며칠 동안은 아들에 대한 그리움에 괴로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복음 사역에 대해 체크할 마음까지 다 식어 버려서 사역의 진도를 지체하게까지 했고요. 제가 맡은 복음 사역을 생각할 때, 계속 그런 상태에 빠지면 안 되겠더라고요. 아들이 세상을 떠났어도 저는 본분을 잘 이행하면서 살아 나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눈물을 닦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어요. ‘하나님 이렇게 의기소침해지기 싫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공과를 배우고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 있게 이끌어 주십시오.’ 기도하고 나서 리더가 보내 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게 됐어요. 『일부 어리석은 부모들은 인생과 운명을 밝히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지 못해 자녀를 대하는 일에서 쉽게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다. 예를 들어, 자녀가 독립한 후 특수한 일을 만나거나 고난과 큰 사고가 닥친 경우가 그렇다. 어떤 이는 병으로 고통받고, 어떤 이는 소송에 휘말리며, 어떤 이는 이혼하고, 어떤 이는 사기당한다. 또 어떤 이는 납치당하거나 남에게 해를 입거나 구타당해 죽음에 직면하기도 하며, 심지어 어떤 자녀는 마약에 손을 대기도 한다. 이렇게 특수하고 큰 사건이 벌어졌을 때 부모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대다수의 부모는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부모의 신분을 지닌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을 하겠느냐? 이런 일을 전해 듣고 남의 일처럼 행동하는 부모는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가 하룻밤 새에 머리칼이 하얗게 세고,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낮에는 밥을 넘기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 싸맬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하염없이 울어서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고 눈물마저 말라 버린 채 하나님을 믿는 자신을 봐서 자기 자식을 지켜 달라고, 아이에게 은총과 축복을 내려 달라고, 빠져나갈 길을 열어 주어 아이의 목숨을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계속 기도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부모로서 인성적인 연약함과 유약함, 그리고 자녀에 대한 정이 전부 드러난다. 또 무엇이 드러나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패역이 드러난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 자식에게 어떤 재앙도 닥치지 않게 해 달라고, 설령 재앙이 닥치더라도 그 아이가 죽지 않고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악인에게 해를 입지 않게 해 달라고, 병세가 심해지지 않고 호전되게 해 달라고 구하고 기도할 것이다. 이는 무엇을 구하는 것이냐? (하나님, 그의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며, 또 원망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기 자식에게 그런 일이 닥친 것에 몹시 불만을 품고, 제 자식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게 해야 했다며 하나님을 원망한다. 불만 속에 원망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 후에는 하나님에게 생각을 바꾸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자기 자식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 평안해지게 해 달라고 구한다. 병에 걸렸다면 낫고, 소송에 휘말렸다면 그 상황이 마무리되고, 화를 당했다면 화근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즉 모든 것이 평화롭고 순조롭게 해 달라고 말이다. 이런 기도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패역한 모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의 말에 담긴 속내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도 좋지도 않으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네 자식이고 너는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은 그에게 그런 일이 닥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다른 사람의 자식과는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하나님을 믿는 너를 봐서라도 하나님은 그를 축복해 줘야 한다고 말이다. 또 만약 하나님이 그를 축복해 주지 않는다면 너는 괴로워하고 울고 소란을 피우며 하나님을 따르지 않을 거라고, 그가 죽는다면 너도 못 산다고 말이다. 이런 의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딱 저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어요. 아들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됐을 때, 저는 식음을 전폐하고 생떼를 쓰며 하나님께 따지고 대항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했어요. 그건 제가 잘못된 관점을 갖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죠. 저랑 남편은 직업과 가정을 내려놓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한 번도 힘들다고 우는소리 한 적이 없었어요. 친척과 친구들이 비웃고 경찰에게 쫓기고 핍박받아도 우리는 본분 이행을 계속 이어 갔으니까요. 전 제가 다 버리고 헌신하고 고생을 감내하면서 본분을 열심히 이행하면 분명 하나님은 제 아들을 무탈하게 잘 지켜 주실 거라고 믿었어요. 근데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전 바로 하나님께 따지며 대항했어요. 제가 지금까지 버리고 헌신한 걸 내세워서 왜 제 아들을 지켜 주시지 않았냐고 따졌던 거고, 게다가 아들이 죽었으니 제가 무슨 낙으로 살겠냐며 차라리 아들 따라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제 모습을 돌아보니까 그건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상황에 대한 반발과 불만이었어요. 그건 하나님께 대항하고 대드는 성격을 띤 거였고, 하나님께 대적하는 거였어요. 아들의 죽음으로 저의 진짜 분량이 다 드러난 거예요. 그제야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정과 직업을 내려놓고 많은 고생을 감내했던 이유는 하나님에게서 은혜와 복을 얻어 내기 위함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사실 욥을 생각하면 그가 큰 시련을 겪었을 때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자녀들이 다 죽고, 본인은 악성 종기가 나기까지 했지만, 욥은 무조건 하나님께 순종했고, 하나님의 이름을 칭송하면서 하나님 편에 굳게 섰어요. 제가 보인 모습을 보니까 너무 부끄럽더라고요. 더 이상 하나님을 원망하면 안 되고, 하나님께 의지해 굳게 서서 사탄을 부끄럽게 해야겠더라고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저의 잘못된 신앙 관점에 대해 좀 알게 됐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주님을 믿으면 온 가족이 복을 받는다.”라고 말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그럼 왜 아직도 그렇게 금식 기도를 하고, 뻔뻔스럽게도 네 자식을 지키고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이냐? 또 감히 하나님에게 항의하고 겨루며, “이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계속 금식하고 기도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금식의 의미는 무엇이냐? 단식이다. 단식의 또 다른 뜻은 생떼를 쓰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생떼를 쓸 때는 발을 구르면서 “아이고, 내 자식이 죽으면 나도 안 살 거야. 살아갈 수가 없다고!”라고 말한다. 비록 하나님 앞에서 이런 행동을 보이지는 않고 더없이 우아하게 “하나님, 제 아이를 지켜 주시고 그 아이의 병이 낫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당신은 사람을 구하는 최고의 의사이시며, 당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를 돌보고 지켜 주십시오. 당신의 영은 어디에나 존재하지요. 당신은 공의로운 분,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당신은 사람을 걱정하고 아끼십니다.”라고 말하지만, 이게 무슨 의미겠느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럴 때 해야 할 말도 아니다. 네 뜻은, 만약 하나님이 네 자식을 구하거나 지켜 주지 않고 네 소원대로 해 주지 않는다면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이 아니며, 사랑이 없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이는 생떼를 쓰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생떼를 쓰는 사람이 하나님을 크게 높이겠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있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생떼를 쓰는 사람은 못난 사람이며, 그런 자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노골적인 이익 관계, 그러니까 복을 받는 자와 복을 베푸는 자의 관계에 불과하다. 솔직히 말하면, 이는 피고용인과 고용인의 관계다. 피고용인의 수고는 오직 고용인이 주는 품삯을 받기 위함이다. 이런 이익 관계에는 애정은 없고 거래만 있으며,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없고 베풂과 연민만 있다. 또 이해는 없고 어쩔 수 없이 참는 것과 기만하는 것만 있으며, 친밀한 관계는 없고 영원히 넘을 수 없는 깊은 골만 있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부록 3 사람은 하나님의 경영 안에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 중에서) 이 말씀을 보면서 깨달았어요. 하나님은 “한 사람이 주님을 믿으면 온 가족이 복을 받는다.”라고 말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고 하셨는데, 저는 계속 그 관점을 갖고 하나님을 믿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은 저를 반성해 보면 겉으로는 직업과 가정을 내려놓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기 위함이었어요. 그래서 아들이 무탈하게 잘 지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하나님 집에서 어떤 본분을 맡겨 줘도 저는 최선으로 임했어요. 하지만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는 바로 하나님께 따지면서 대항하고 본분 이행에서 마음이 떠났어요. 심지어 아들 따라 죽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원망으로 가득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보니까 제가 바로 하나님께 행패를 부리고 생떼를 쓰는 존재였어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어 왔고 정말 많은 말씀을 먹고 마셨는데도 하나님에 대한 순종심과 경외심은 조금도 없었어요. 지금까지 제가 고생하면서 헌신했던 건 오직 하나님의 복을 바랐던 거고, 하나님과 거래를 한 셈이었지 절대 본분을 잘 이행해서 하나님을 흡족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더라고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얻지 못하게 되니 하나님께 따지면서 대항했는데, 정말 인간성과 이성을 찾아볼 수 없었어요.
그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한 사람이 주님을 믿으면 온 가족이 복을 받는다.”라는 잘못된 관점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게 됐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적합한 종착지가 있다. 그 종착지는 본인의 본질에 근거해 정해지는 것이지, 다른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녀의 악행을 부모에게 더할 수 없고, 자녀의 의를 부모가 공유할 수도 없다. 또한 부모의 악행을 자녀에게 더할 수도 없고, 부모의 의를 자녀가 공유할 수도 없다. 저마다 자신의 죄를 감당하고 각자의 복을 누릴 뿐, 그 누구도 다른 이를 대신하지 못한다. 이것이 공의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안식에 들어갈 것이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은 사람의 본질과 일관된 모습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제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건 제가 당연히 다해야 하는 책임일 뿐, 아들의 운명과 종착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거였죠. 절대 제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아들의 운명이 바뀌지는 않죠.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사람의 운명은 다 하나님의 주재에 달려 있는 거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안배하시든 다 하나님의 공의이죠. 저는 당연히 순종해야 하는 거고, 그게 이성적인 모습이죠. 근데 전 “한 사람이 주님을 믿으면 온 가족이 복을 받는다.”라는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제가 본분 이행을 위해 다 버리고 헌신하면 하나님은 제 아들을 지켜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그저 저의 관념과 상상일 뿐, 전혀 진리에 부합하지 않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복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저의 잘못된 관점에 대해 좀 알게 됐고, 전 아들의 죽음에 대해 이미 내려놨다고 생각했죠. 근데 하나님은 또다시 상황을 마련해 주셨어요. 저는 아들이 죽은 원인을 알게 됐을 때, 또 불평을 하게 됐어요. 8월 14일에 하나님을 믿는 시누이를 만났는데,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는 문제가 크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 당시에는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찍고 의사가 집에 가서 쉬라고 했다는 거예요. 하지만 집에 갔을 때, 호흡 곤란을 겪어 다시 병원을 찾아 입원했지만 호전되지 않았다고 했어요. 아들이 다른 병원으로 옮기고 싶어 했지만 의사가 동의해 주지 않았고요. 그러다 아들이 심하게 호흡 곤란을 겪게 돼서야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걸 허락해 줬는데, 다른 병원으로 가는 길에 숨이 멎었다고 했어요. 나중에 부검을 했더니 골절된 갈비뼈가 폐를 찔러서 염증이 발생했던 건데, 바로 수술을 했다면 죽지 않았을 거라고 했어요. 다 의사의 오진 때문에 아들이 죽은 거였죠. 그 얘기를 듣는데, 머리가 핑 돌면서 쓰러질 뻔했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전 시누이를 안고 대성통곡했죠. 그리고 그 자리에 저랑 남편이 있었더라면 바로 병원을 옮겨 치료를 받았을 거고, 그럼 죽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시누이가 위로의 말을 건네더라고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까 이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자고요. 시누이의 말에 저는 또다시 불평하는 저를 보게 됐어요. 그래서 속으로 조용히 기도했어요. 제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하심에 순종할 수 있게 제 마음을 지켜 달라고요. 그리고 이틀 전에 봤던 이 말씀이 생각났어요. 『하나님의 주재에는 그의 정함과 계획이 있다. 네가 바꾸고 싶다고 그게 되겠느냐? (안 됩니다.) 네가 바꾸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그러니 어리석은 일이나 비이성적인 일을 저지르지 마라.』(<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람의 생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흘러간다는 걸 깨달았어요. 설령 우리가 곁에 있으면서 제때에 수술받을 수 있게 해 줬더라도 아들의 수명이 다했으면 결국 죽게 될 텐데, 그건 아무도 바꿀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러니 제가 하나님께 불평하는 건 참 이성적이지 못한 모습이었어요. 이런 생각이 드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면서 저의 본분을 잘 이행하기로 마음먹었죠.
그리고 영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봤는데, 전 기복 신앙을 하는 잘못된 관점에 대해 조금 더 분명히 알게 됐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본분은 사람이 복을 받거나 화를 입는 것과 무관하다. 본분은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천직이므로 보수나 조건을 따지지 말아야 하고 이유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본분 이행이라 할 수 있다. 복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심판받은 후 온전케 되어 누리는 복을 말하고, 화를 입는다는 것은 사람이 형벌과 심판을 거친 후에도 성품 변화를 이루지 못해, 즉 온전케 되지 못해 받는 징벌을 말한다. 그러나 복을 받든 화를 입든 사람은 피조물로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이것은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것이다. 너는 복을 받기 위해 본분을 이행해서도 안 되고, 화를 입을 것이 두려워 본분 이행을 거부해서도 안 된다. 내가 한마디 하겠다.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바이고,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패역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육신 하나님의 직분과 사람의 본분의 구별> 중에서) 이 말씀을 되새기면서 본분 이행은 복을 받거나 화를 입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본분은 하나님이 주신 부탁이자 거부할 수 없는 책임이며 사람이 당연하게 완수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죠. 저는 피조물이고 저의 숨결은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 저는 당연히 제 본분을 다해야죠. 제가 버리고 헌신했던 걸 하나님께 복과 은혜를 요구하는 밑천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거죠.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사람의 운명은 다 하나님께서 주재하고 안배하시잖아요. 인간의 생로병사는 매우 정상적인 거고요. 제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는 건 당연한 거죠.
그리고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게 됐어요. 『네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에 대한 정이 있어 내려놓지 못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에게 어떤 일도 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겠느냐? 그것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아니면 도덕과 인성에 부합하겠느냐? 어떤 측면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도덕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너는 자녀를 아끼는 것이 아니라 비호하는 것이며, 감정에 얽매인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자식이 죽으면 따라 죽겠다고 한다. 네가 네 생명을 그렇게 무책임하게 대하고 하나님이 네게 준 생명을 아끼지 않으며 자식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하니 그럼 자식과 함께 죽거라. 그가 병에 걸리면 너도 얼른 그 병에 옮아서 함께 죽거나 밧줄로 목을 매 죽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것이 쉽지 않겠느냐? 네가 죽은 후에도 너와 네 자식이 한 부류겠느냐? 여전히 육적인 관계가 있겠느냐? 여전히 정이 있겠느냐? … 그는 죽은 후에 어디로 가겠느냐? 그가 죽고 육의 목숨이 끊어져 영혼이 떠나면 너와는 완전히 안녕을 고할 것이고 너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다른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그가 다른 세계로 돌아갈 때, 너 혼자 울고 그리워하며 심적으로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아이고, 우리 아이가 떠났구나. 다시는 볼 수 없게 됐어!’라고 말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의식하겠느냐? 그는 너에게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며, 티끌만큼도 너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육을 떠난 그는 그 즉시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제삼자가 된다. 그는 너를 어떻게 보겠느냐? ‘저 노인네들이 누구 때문에 저렇게 우는 걸까? 아, 저 육 때문에 우나 보네. 내가 방금 저 육에서 빠져나왔지. 난 이제 그렇게 무겁지 않고, 병으로 고통스럽지도 않아. 해방된 거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죽은 후 육에서 나와 다른 세계에 가서 계속 생존하고,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니 너와는 관계가 없어진다. 너는 이곳에서 크게 울고 그리워하고 고통스러워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인연이 닿으면 그는 너의 직장 동료나 동향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네게서 아주 멀리 떨어질 수도 있다. 같은 세상에 있을지라도 서로 상관이 없는 둘이 될 것이다. 설사 누군가가 특수한 상황에서, 혹은 특수한 방법으로 그의 전생을 알아낸다고 할지라도, 그를 바라보는 너와 너를 바라보는 그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그가 지난 생에 네 자식이었을지라도 너는 그에게 아무 감정이 없으며, 네가 그리워하는 것은 죽은 그 아이일 뿐이다. 그 역시 너에게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다른 부모와 가정, 성씨가 있고, 너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데도 너는 여전히 그곳에서 그리워한다.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이냐? 한때 너와 혈연관계가 있던 그 육, 그 이름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네 머릿속에, 또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하나의 장면이나 형체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가치는 없다. 그는 다시 태어나 사람이 되든, 아니면 다른 생명체가 되든 너와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부모들이 “아이가 죽으면 저도 못 삽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다! 그의 수명이 끝났는데, 네가 무엇 때문에 못 산다는 것이냐? 어찌 그리 무책임한 말을 한단 말이냐? 그의 수명이 다 됐기에 하나님이 그의 목숨을 거둔 것이다. 그에게는 또 다른 임무가 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만약 네게 또 다른 임무가 있다면 하나님이 네 목숨을 거두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너는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살아가게 한 이상 너는 죽을 수 없다. 부모에게든, 자식에게든 혹은 주변의 어떤 가족이나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에게든 사람은 감정을 이렇게 생각하고 인식해야 한다.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이 혈연으로 얽혀 있다고 한다면, 책임을 다하면 그만이다. 책임을 다하는 것 외에 어떤 의무도 없고, 무언가 변화시킬 능력도 없다. 그러니 ‘자식이 죽어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낸다면 그 부모도 못 산다’는 부모의 말은 무책임하다. 만약 정말로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간다면, 그것은 그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날이 그만큼이어서 가야 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부모는 죽지 않았으니 잘 살아가야 한다. 물론, 인성 측면에서 자식을 그리워하는 것은 정상이다. 하지만 남은 세월을 전부 가 버린 자식을 그리워하는 데 허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일을 대할 때,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명에 책임을 져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혈연관계에 대해 밝히 알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 간의 진정한 관계는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든 하나의 생명체와 다른 생명체 사이의 관계이다. 그 관계는 육적으로도 혈연으로도 얽혀 있지 않다. 그저 독립된 두 생명체일 뿐이다. 이런 각도에서 생각한다면, 부모 입장에서 자식에게 불행히 병고가 임해도, 혹은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 닥쳐도 그런 일을 올바로 마주해야지 자식의 불행이나 죽음 때문에 자신에게 남은 생존의 시간을 버려서는 안 되고,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나 완수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버려서도 안 된다. 이 일은 올바로 마주해야 한다. 네게 올바른 사상 관점이 있고, 이 일을 밝히 알 수 있다면 절망과 비통, 그리움 속에서 금방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밝히 알지 못한다면 어떻겠느냐? 그 일은 죽을 때까지 네 남은 생을 옭아맬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이 말씀을 보니까 마음이 많이 환해졌어요. 아들이 살았을 때는 우리는 모자 관계이자 혈연관계에 해당하지만, 제가 아이를 낳아서 어른으로 다 키워 놓으면 저의 책임은 다한 거더라고요. 그 외에 그 애가 한평생 운명이 어떠할지, 언제 어떻게 죽을지, 어떤 결말과 종착지를 맞이할지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달렸죠. 이제 아이의 수명이 다 돼서 하나님이 그의 목숨을 거둔 것이라면, 그 아이의 영혼이 육을 떠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며,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되는 거죠. 지금까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정말 많은 말씀을 봤고, 본분도 많이 이행했는데, 그건 하나님께서 제가 참된 인생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거고, 진리를 얻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덕분이었어요. 근데 정작 아들이 죽게 됐을 때 전 본분을 이행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고 아들 따라 죽으려고 했어요. 정말 양심도 이성도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죠. 저는 응당 아들의 죽음이라는 슬픔에서 떨치고 일어나 남은 생은 본분을 잘 이행하면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이끄는 데 사용해야 하죠.
그 후에도 가끔 아들 생각이 날 때면 전 기도하고, 또 <온전케 되려면>이라는 찬양을 불렀어요. 『고난이 닥쳤을 때 육을 돌보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이 너에게 모습을 감추었을 때 하나님을 따를 믿음을 갖고 예전의 사랑도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또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하나님의 지배에 따르고, 차라리 자기 육체를 저주할지언정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며, 시련이 닥쳤을 때 고통을 참으며 사랑하는 것을 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할지언정 하나님을 만족게 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사랑과 믿음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 중에서) 하나님 말씀 찬양을 부르니 너무 마음에 와닿았어요. 하나님의 뜻은 제가 시련 속에서 더 굳건해지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하심에 순종하면서 저의 본분을 지키라는 것이었죠. 그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이더라고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니 죄스러움과 자책의 눈물이 흘렀어요. 전 더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에 빠져 있지 않기로 했어요. 아들을 잃었지만 저에게는 아직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저의 가장 큰 의지처시잖아요.
이번의 잊을 수 없는 체험으로 고통을 좀 겪긴 했지만, 하나님의 주재하심에 대해 알게 됐고 잘못된 저의 신앙 관점에 대해서도 알게 됐어요. 이렇게 사실 앞에서 드러나지 않았으면 저는 저의 진짜 분량, 그리고 패괴함과 불순함을 알지 못했을 거예요. 이런 것들을 깨닫고 얻게 된 건 순전히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끌어 주신 덕이예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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