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한 번의 코로나 감염으로 나는 드러났다
최근 몇 년간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전 세계적으로 감염자가 점점 더 많아지면서 많은 사람이 이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끝날 때 대재앙을 내릴 텐데, 악을 저지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이 재앙 속에서 파멸될 거야. 오직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정결케 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겠지. 그러니 나는 서둘러 복음을 전하고 본분을 이행하며, 더 많은 선행을 쌓아야 해. 그래야 나중에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얻게 될 거야.’ 저는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인 후부터 일을 포기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전념해 왔던 것을 떠올렸습니다. 경찰에게 여러 번 붙잡혔지만 한 번도 배반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으며, 이 몇 년 동안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 저는 70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여러 교회에서 복음 사역을 책임지고 있고, 그 성과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만 하면 나중에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기뻤고, 본분을 꾸준히 적극적으로 이행할 수 있었습니다.
2022년 12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리에서 미열이 나고 목도 조금 가렵고 기침까지 나왔습니다. 생각해 보니 며칠 전에 코로나에 감염된 사람을 만났었는데, 저도 감염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증상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고, 몸이 아직 버틸 정도여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집에서 며칠 쉬니 금방 회복했습니다. 그때 제 마음이 굉장히 기뻤습니다.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어 오면서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했기 때문에 이렇게 빨리 나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저를 지켜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더 많이 복음을 전하고 선행을 더욱 많이 쌓으리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제 병이 심해질 줄은 생각 못 했습니다. 하루는 제가 복음을 전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온몸에 힘이 없고 고열이 나며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다음 날에도 여전히 고열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조금 무서웠습니다. ‘코로나에 감염된 뒤로 원망 한 번 하지 않았고, 그대로 계속 본분을 이행했으면 당연히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왜 병이 더 심해지는 걸까? 코로나가 터지고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어. 그중 나이 든 사람들도 많았는데, 내 병이 더 심해져서 나도 죽으면 어떡하지?’ 그 며칠 동안 해열제를 먹었지만 체온은 여전히 높았습니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기침도 계속했습니다. 특히 주변에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에 감염되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두렵고 걱정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 사역이 끝날 때가 다가오고 있는데, 만약 이 시점에 내가 죽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내가 오랫동안 노력한 게 수포로 돌아가는 거 아니야? 교회에는 본분을 이행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감염이 안 되는 걸까? 그런데 나는 줄곧 가정과 일을 내려놓고 본분을 이행했고, 많이 고생하면서 대가를 치렀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지켜 주시지 않는 걸까?’ 여기까지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조금 침울해졌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본분을 이행했지만 기운이 다 빠져서 본분을 이행하면서 더이상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리더가 저에게 여러 교회의 복음 사역을 더 책임지기를 원했을 때, 저는 마음이 그다지 내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몸을 잘 챙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 많이 신경 쓰면 몸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다시 말해 몸이 완전히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코로나에 또 감염되면 정말 코로나로 죽게 될지도 모르는 실정이었습니다. 이후 본분을 이행할 때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하기만 하면 병이 악화되는 건 아닌지 늘 걱정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저는 제 내적 상태가 옳지 않음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병이 제게 닥친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에는 여전히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있어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부디 저를 인도해 주셔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게 해 주시고, 그 과정에서 진리를 찾고 공과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께 기도드린 뒤 저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과 하나님의 주재를 사람이 꿰뚫어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며 받아들이지도 순종하지도 못할 때,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사람이 여러 난관에 부딪히거나 여러 난관이 정상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 때 사람에게 갖은 걱정과 염려, 근심이 무의식적으로 생겨난다. 내일은 어떨지, 모레는 어떨지, 몇 년 후는 어떨지, 미래는 어떨지 모르니, 다양한 일로 근심하고 염려하며 걱정하는 것이다. 다양한 일로 근심하고 염려하며 걱정하게 되는 배경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주재를 믿지 않고 꿰뚫어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령 사실을 직접 목격한다 해도 인식하지 못하고 믿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것도, 사람의 일생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불신하게 되고, 그 후에는 원망이 생겨 불순종하게 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3)> 중에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늘 이렇게 생각한다. ‘아, 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싶은 의지는 있어. 그렇지만 원래부터 내게 병이 있으니 하나님께 보호해 달라고 간구해야지.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면 걱정이 안 되는데, 본분을 이행하다 지치면 병이 재발하지 않을까? 정말 재발하면 어쩌지? 만일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면 난 돈이 없어. 빚을 내서라도 치료하지 않으면 병세가 악화하지 않을까? 악화하면 죽는 것은 아닐까? 이런 죽음을 정상적인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말 죽고 나면 생전에 내가 이행했던 본분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려나? 이걸 선행이라고 할 수 있고,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그는 마음속 깊이 염려하게 된다. 손안의 본분은 멈추지 않고, 해야 할 일도 계속하고 있지만 자신의 질병과 건강, 장래, 생사를 놓고 늘 생각에 잠긴다. 결국 ‘하나님이 치료해 주시고 보호해 주실 거야.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내가 질병으로 고통받는 것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실 거야.’라고 혼자 결론을 내린다. 이런 생각은 아무 근거도 없으며, 심지어 일종의 관념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사람의 이런 관념과 상상으로는 자신의 그 어떤 실제적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사람은 마음속 깊이 자신의 건강과 질병을 근심하고 염려하며 걱정하면서도 누가 책임질 수 있는지, 책임질 사람이 있기나 한지는 알지 못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3)>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재하심에 대해 사람은 진실한 인식이 없고, 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두려움과 걱정의 부정적인 정서 속에 산다는 것을 밝히고 계십니다. 제가 바로 하나님이 밝히신 이러한 내적 상태에 놓여 있음을 반성했습니다. 코로나에 감염되고 처음에는 병세가 빠르게 호전되어서 정말 기뻤고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병세가 심해지고 고열이 떨어지지 않았을 때엔 두렵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나이가 많아서 병세가 심해지면 코로나로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서 의기소침한 상태로 지냈으며, 본분을 이행할 힘이 사라졌습니다. 특히 리더가 저에게 여러 교회의 복음 사역을 더 맡아 달라고 했을 때, 저는 본분에 너무 무리하면 병세를 더욱 악화시켜 코로나로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서 받아들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병고 속에서 걱정하고 두려워했으며, 제가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도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니 제가 언제 병에 걸리고, 이 병이 언제 호전되고, 저의 목숨이 언제 끝날지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주재하심을 믿지 않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심을 믿지 않았으며, 늘 걱정과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다. 정말 너무 어리석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병이 제게 임하심을 허락하셨으니, 저는 그 가운데 진리를 구하고 공과를 배워야 했습니다. 만약 제가 계속 이런 부정적인 감정 속에 산다면, 어느 날 정말 죽음에 임할 때도 저는 여전히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하며 불평하고, 심지어는 입으로 죄를 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할 수도 있어 하나님께 미움받고 정죄 받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저는 마음속으로 조금 두려웠고, 조급한 마음도 들었으며, 진리를 구하여 이 내적 상태를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가운데 저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피조물인 네가 무슨 근거로 하나님에게 요구하느냐? 사람은 하나님에게 요구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은 가장 비이성적인 일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며,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다. 공의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 고생한 만큼 분배하는 것, 일한 만큼 돈을 주는 것, 노력한 만큼 얻는 것, 이것은 공의가 아니라 그저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령 욥이 하나님을 증거한 후에 하나님이 그를 멸했다면 이것은 공의일까? 사실 이것 역시 공의이다. 어째서 그것을 공의라고 하겠느냐? 공의에 대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어떤 일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한다면 하나님은 공의롭다고 말하기가 매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공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때 하나님이 욥을 멸했다면, 사람은 하나님이 공의롭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이 패괴되었든 안 되었든, 사람의 패괴가 깊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이 사람을 멸할 때 사람에게 그 이유를 명확히 밝혀야 하느냐? 무슨 근거로 사람을 멸하는지 설명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그가 정한 규칙을 사람에게 얘기할 필요가 있느냐? 필요 없다. 패괴된 사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든 다 합당하고, 다 하나님의 안배다. 하나님이 네가 눈에 거슬려 넌 증거를 다 했으니 쓸모없어졌다며 널 멸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냐, 아니냐? 이것 역시 공의다. …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다 공의롭다. 그것을 깨닫지 못할지라도 마음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거나 관념을 가진 일에 있어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장 비이성적인 태도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니 저는 제가 이전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해 참된 인식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면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을 받아야 하고, 병에 걸리는 것도, 심지어 죽음에 임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관점의 영향을 받아 저는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고 많은 대가를 치렀으며, 심지어 코로나에 감염된 후로도 본분 이행을 계속했으니, 하나님께서는 제가 평온하도록 보호해 주시거나 병을 최대한 빨리 낫게 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과가 제가 생각한 것과 달랐을 때, 제 마음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했으며, 본분을 이행할 힘도 사라졌습니다. 더욱이 어떤 형제자매는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데도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는데, 반면 계속해서 열정적으로 헌신했음에도 코로나에 감염된 저를 보니, 마음이 섭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않다고 여겨서 본분을 대하는 데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교회 몇 곳의 사역을 더 맡는 것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은 지 여러 해 동안 줄곧 본분을 이행하려고 노력했고, 하나님께 어느 정도 순종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저의 패역과 저항이 드러났고, 전혀 순종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많은 하나님 말씀의 양육과 공급을 누리면서 조금이라도 본분을 이행하고 헌신하는 것은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런 것들을 내세우면서 하나님과 조건을 따지고 흥정을 하며,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정말 너무나도 이성적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고 어떻게 사람을 대하시든 모두 공의로우신 것입니다. 그 안엔 모두 하나님의 뜻이 있고, 제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봐서는 안 됐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네가 결정할 수 없는 일을 두고 근심하고 염려하며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손을 써서 해결하고,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묵묵히 순종하며 하나님이 보호해 주길 바라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정말로 병에 걸리고 죽음이 닥치면 사람은 불평하지도 말고, 하나님을 거역하지도,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공격하지도 말고 순종해야 한다. 피조물 본연의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모든 것을 경험하고 체득해야 한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4)>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수록 저는 더욱 자책감과 부끄러움을 느꼈고, 제가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생로병사와 저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만약 코로나가 저의 목숨을 앗아간다면 그건 하나님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든 삶이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인 제가 최소한 갖춰야 하는 이성이었습니다. 저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너무 패역했습니다! 이 병이 좋아지든 나빠지든 제가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겠습니다. 더 이상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비이성적인 요구를 하지 않겠습니다.”
이후 저는 저 자신을 반성했습니다. 병도 없고 피해가 없을 때는 본분을 적극적으로 이행하고 형제자매들과 자주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닥치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했는데, 왜 이번에 병세가 악화되자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하며, 심지어 본분을 이행할 힘도 없었던 걸까요? 왜 이러한 거역과 대적이 드러났던 걸까요? 구하는 가운데 저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본분을 이행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앞날이나 복받는 것, 좋은 종착지, 나아가 면류관에 마음속 깊이 한껏 기대를 품고, 큰 믿음을 갖는다. 또 그들은 이런 속셈과 포부를 갖고 하나님 집에 와서 본분을 이행한다. 그러니 그들이 이행하는 그 본분에 하나님이 바라는 진심과 참된 믿음, 충심이 있겠느냐? 이때는 참된 충심이나 믿음, 진심을 찾아볼 수 없다. 본분을 이행하기 전까지 그는 거래하겠다는 생각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익에 이끌리고 야심과 욕망으로 점철된 상황에서 본분을 이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럼 적그리스도가 본분을 이행하는 속셈은 무엇이겠느냐? 거래와 교환을 하려는 것이다. 그가 본분을 이행하는 전제 조건은 ‘본분을 이행하면 반드시 복을 받고 좋은 종착지를 얻을 수 있어야 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인류에게 예비된 모든 복과 이점들을 다 얻어야 한다고. 그것을 얻지 못한다면 나는 본분을 이행하지 않을 거야.’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속셈과 야심, 욕망을 품고 하나님 집에 와서 본분을 이행하는데, 얼마간 진심이 있는 것 같다. 물론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어 이제 막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열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는 진실한 믿음과 충심이 없다. 그저 그 정도의 열정이 있을 뿐, 진심을 이야기할 것은 못 된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본분 이행 태도를 통해 볼 때, 그의 내면은 거래 심리로 점철되어 있으며, 복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고 면류관을 얻고 상을 받는 등 이점에 대한 욕망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많은 적그리스도가 출교되기 전까지 본분을 이행한다. 심지어는 그들이 버린 것, 고생한 것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많을 때도 있다. 그들의 헌신과 그들이 치른 대가, 그들이 뛰어다닌 길은 바울보다 부족하지 않다. 이는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들의 행위나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려는 다짐에 관해 논한다면 그들이 아무것도 얻지 못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표면적인 행위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과 성품, 그 사람이 표출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행한 모든 일의 성질과 본질에 근거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보거나 대할 때, 상대의 표면적인 행위와 상대가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것이 얼마나 되는지에 근거하여 그를 규정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7)> 중에서)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말씀을 통해 제가 깨닫게 된 것은 제가 여러 해 동안 본분을 이행하며 열정적으로 헌신한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진심과 충성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본분 이행을 복받으려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살아남아 영원한 복을 누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재앙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하나님의 사역이 곧 끝날 것을 보면서 제 마음은 은근히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헌신하며 본분을 다했으니 분명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감염과 병세가 심각해지자, 제 나이가 많아서 어쩌면 코로나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고, 낙담하고 실망하여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이것저것 내세우며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그렇게 많은 고생을 했고 복음을 전하는 것도 성과가 있었으니, 하나님께서는 저를 당연히 보호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사치스러운 욕망이 충족되지 않자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보호해 주시지 않고, 저에게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본분을 이행할 힘도 없어졌습니다. 사실이 드러나고 나서야 제가 하나님을 믿어 온 것이 줄곧 복을 받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입을 열면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이용하고 기만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너무 이기적이고 간사했습니다! 저는 은혜시대의 바울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럽 대부분 지역을 돌아다녔고, 많은 고생을 하며 여러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노력하고 고생한 것은 모두 천국에 들어가 상을 받기 위한 것이었고, 거래와 속임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러한 헌신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큰 혐오감을 불러일으켜 결국 바울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징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고 거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결말과 종착지를 정하실 때 우리가 겉으로 얼마나 고통을 받았고, 얼마나 많은 일을 했으며, 얼마나 좋은 행동을 했는지를 보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진리를 얻었는지, 성품이 변화되었는지를 보십니다. 제가 늘 겉으로 열심히 뛰어다니며 헌신하는 것으로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얻으려 하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패괴된 성품에 정결함과 변화를 얻지 못한다면, 결국 바울의 결말처럼 하나님께 도태되고 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실패는 저에게 깨우침이자 경고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패괴된 인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전심으로 모든 심혈의 대가를 치르시고,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어떠한 요구와 독촉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사심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않았고, 본분을 조금 이행하면서 하나님과 거래하려고만 했습니다. 좋은 결말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그렇게 했으니, 저는 정말 너무 이기적이고 비열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이용하고 기만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식으로 고생과 헌신을 한 저를 어찌 하나님께서 싫어하지 않으시고 혐오하지 않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까지 깨닫고 나니 저는 자책감과 빚진 마음이 들어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더 이상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거래하지 않고, 진리를 잘 추구하여 피조물의 본분을 다해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길 원한다고 기도했습니다.
이후 저는 또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게 되어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그것은 가장 정당한 일이다. 이는 인류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정의로운 일이다.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창조주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권세하에 살면서 하나님의 모든 공급과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받아들이므로 마땅히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이 예정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사람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살면서 행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정의롭고 아름다우며 고상한 일이다. 인류 가운데 어떤 일도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은 없으며, 지음 받은 사람이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없다. 땅에서 유일하게 진심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창조주께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상의 조류를 좇지 않고, 하나님의 인솔과 인도에 순종하며, 오로지 창조주의 말씀을 듣고, 창조주가 선포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창조주의 말씀대로 살아갈 뿐이다. 이는 가장 진실되고 힘 있는 증거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가장 훌륭한 증거다. 한 피조물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창조주를 만족게 할 수 있는 것은 인류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며, 인류 가운데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져야 할 일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어떤 일을 부탁하든, 피조물은 마땅히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인류에게 행복한 일이자 영광스러운 일이다.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이는 무엇보다 아름답고 기념할 만한 일로, 긍정적인 사물이다. … 피조물로서 창조주 앞에 왔으면 마땅히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이는 지극히 올바른 일이며, 사람이 이행해야 할 책임이다. 창조주는 피조물이 본분을 이행하는 이런 전제하에 인류 가운데서 더 큰 사역을 하고, 사람에게 한층 더 깊은 사역을 했다. 그것은 어떤 사역이겠느냐? 바로 인류에게 진리를 공급하여 인류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리를 얻게 하는 것이다. 또 이를 통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정결케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인생의 바른길을 걷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더는 사탄의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완전히 구원받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본분을 이행하게 하여 최종적으로 이루려는 성과이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7)>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저는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가장 의미 있고 가장 아름다운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하듯, 이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이자 의무이고, 조금의 거래나 요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환경을 마련하셔서 우리의 패괴와 부족함을 드러내신다는 점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를 구하여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도록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며, 사탄의 패괴와 괴롭힘에서 벗어나 마지막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한 여러 해 동안 제가 경찰에게 몇 차례 붙잡혔을 때,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은 저를 깨우치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제게 믿음과 힘을 더해 주셨고, 제가 악마의 잔해를 이겨 낼 수 있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제가 본분을 이행하며 자신을 높이고 과시하며 교만한 성품을 표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일으켜 저를 처벌하고 징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말씀을 통해 저는 저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고, 즉시 하나님께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구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렇게 많은 헌신을 하셨는데도 저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복을 받기 위해 본분을 이행했으니, 제가 너무 양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병에 걸렸을 때 진리를 구하고 자신을 반성한 결과, 제가 오랫동안 본분을 이행한 이유가 복을 얻기 위한 비열한 속셈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저 자신의 패괴 성품에 대해서도 얼마간 인식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제게 생명을 주셔서 살도록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입니다. 저는 복을 얻으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본분을 충실히 다해야 합니다.
이후 저는 또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출생과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 과정을 건너뛸 수 없다. 사람이 아무런 고통 없이 이 세상을 떠나고, 아무런 아쉬움과 근심 없이 인생의 마지막 관문을 맞이하고 싶다면, 유일한 방법은 그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무런 미련을 남기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창조주의 주재와 권병을 깨닫고, 창조주의 주재와 권병 아래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인류의 다툼과 죄악, 사탄의 올무에서 멀어질 수 있다. 욥처럼 창조주의 인도와 축복 속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정의롭고 떳떳한 삶을 살 수 있다. 욥처럼 창조주의 시련과 박탈, 창조주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다. 욥처럼 평생 동안 창조주를 경배하며 창조주의 칭찬을 받을 수 있으며, 욥처럼 창조주가 친히 발한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의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욥처럼 행복한 삶을 살다 그 어떤 고통이나 근심과 미련 없이 행복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다. 욥처럼 빛 가운데 살며 빛 가운데 삶의 모든 관문을 통과하곤 빛 가운데 순탄히 인생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 순조롭게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즉,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주재를 체험하고, 깨달아 빛 가운데 세상을 떠날 수 있다. 그리하여 창조주의 칭찬을 받는 창조된 인류로서 그의 곁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고 제 마음이 훨씬 밝아졌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나이가 많고 병세가 계속 악화되니 언제든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해있고, 만약 코로나로 죽는다면 좋은 결말과 종착지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저는 사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죽음의 본질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께 드러나 도태된 것이고,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육체가 죽었지만 영혼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욥처럼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있었고, 시련 중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증거를 보여 피조물의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욥이 죽을 때는 어떤 걱정이나 두려움 없이, 오히려 만족과 위안을 가지고 인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육체는 죽었지만 영혼은 구원받았습니다. 베드로 역시 일생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만족게 하기 위해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환난과 시련이 닥쳤을 때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순종했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위해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아름답게 증거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지금 저는 육체의 죽음은 한 사람이 좋은 결말과 종착지가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동안 진리를 추구하여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마지막에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얻을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입니다. 제가 해야 하는 것은 바로 피조물로서 제 위치에 잘 서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께 의지해 본분을 다해야 하며,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원칙대로 행동해 본분 이행에 합격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깨닫고 나니 제 마음은 한결 편해졌고, 더 이상 병의 속박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며칠 후에 제 병세가 호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 감염을 통해 저는 제가 하나님을 믿는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 제가 복을 받고자 하나님과 거래했던 것입니다. 저는 복을 받고자 하는 욕망을 조금 내려놓고 마음을 바로잡아 본분을 이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