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이적과 기사를 행하다

2024.02.09

1. 예수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다

요 6:8~13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2. 나사로의 부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다

요 11:43~44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가 행한 이적과 기사 중에서 이 두 가지만 골랐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문제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이적과 기사이며, 은혜시대에 예수가 행한 대표적인 두 가지 이적과 기사이다.

먼저 첫 번째 구절, ‘예수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다’를 보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떤 개념이냐? 보통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몇 명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느냐? 일반인의 식사량으로 계산해 본다면, 기껏해야 두 사람이 먹기 충분한 양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사람에게 주는 기본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이 기록에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몇 사람에게 나눠 주었느냐?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비해 오천이라는 수는 너무 많지 않으냐? 수가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람이 봤을 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두 숫자의 차이는 너무 커서, 한 사람당 한 입만 먹는다 쳐도 오천 명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는 이적과 기사를 하나 행하였다. 그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을 뿐만 아니라 여분까지 있게 하였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라는 성경 기록처럼 말이다. 이 이적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의 신분과 지위를 보았고, 하나님은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며 전능하다는 사실을 목도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는데, 만일 음식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없었을까? 당연히 가능했다! 이것은 이적과 기사이기 때문에, 사람이 이해할 수 없고 그 기묘함을 측량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결코 대단한 일도 아니다. 하나님께 평범한 일이라면 왜 여기서 굳이 설명하고 있겠느냐? 그것은 이 기적의 뒤에 인류가 발견하지 못한 예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 오천 명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아보자. 그들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더냐? 성경을 보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겠느냐? 분명 알지 못했을 것이다! 최소한 그들은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일부는 그의 이름만 알고 있었고, 일부는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 있거나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소문으로 알게 된 예수에 대해 단지 호기심이 생겼을 뿐, 그를 따른다고 할 수는 없었고, 더욱이 잘 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예수가 이 오천 명을 보았을 때, 그들은 배가 고파서 그저 배부르게 먹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는 그들의 바람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들의 바람을 충족시켜 주면서 예수는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 배만 채우려 하는 자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어떠했겠느냐? 여기서 예수의 마음과 태도는 하나님의 성품 및 본질과 관련된다. 한 끼 배불리 먹을 생각만 하고 있는 오천 명의 굶주린 사람들 앞에서, 예수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가득한 오천 명 앞에서, 예수는 그저 이적과 기사를 통해 은혜를 내려 주고 싶었을 뿐, 결코 이 오천 명이 그를 따르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예수는 그들이 그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좇아 왔으며, 원하는 것은 배를 채우는 것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나 기적을 보기 좋아하는 오천 명의 눈을 열어 성육신 하나님이 이룰 수 있는 일을 직접 보게 한 것이다. 예수는 실제 사건으로 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오천 명이 그저 배불리 먹기만 바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상대로 어떤 말씀도, 설교도 하지 않았으며, 그저 이적과 기사를 보여 주기만 했다. 그는 결코 그를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들처럼 그 사람들을 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속에서는 모든 피조물이 그의 주재하에 있다. 하나님은 그의 시야 안에 있는 피조물이라면, 필요하다 느낄 경우 누구든 그의 은혜를 누리게 한다.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에 대해 아는 바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떡과 물고기를 다 먹고 나서도 예수에 대해 특별한 인상을 받거나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그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주었다. 혹자는 하나님이 사역을 하는 데는 원칙이 있어, 믿지 않는 사람은 보살펴 주지도 지켜 주지도 않으며, 은혜를 내려 주는 일은 더더욱 없다고 말한다. 정말 그렇겠느냐? 하나님은 그가 만든 살아 있는 피조물이기만 하면 누구든 관리하고 보살펴 주며, 다양한 방식으로 대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안배하며 주재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이다.

떡과 물고기를 먹은 오천 명은 예수를 따를 생각이 없었지만, 예수는 그들과 따지지 않았다. 배불리 먹이고 난 후, 예수가 무엇을 했는지 너희는 아느냐? 예수가 그들에게 어떤 설교라도 했더냐? 이 일이 있은 후에 예수는 어디로 갔더냐? 성경에는 예수가 그들에게 말씀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예수는 기적을 행한 후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그렇다면 예수가 그들에게 뭔가 요구라도 했더냐? 그들을 증오했더냐? 그런 일은 없었다. 예수는 절대 자신을 따를 가능성이 없는 자들을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때, 그는 인류의 타락함을 보았고, 인류가 그를 저버렸다고 느껴 마음이 아팠다. 또한, 그 사람들을 보거나 그들과 함께할 때 느낀 인류의 우둔함과 무지함은 그의 마음을 아주 슬프고 힘들게 했다. 그래서 그는 빨리 그 사람들을 떠나고 싶어 했다. 주님은 그 사람들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고, 그들을 더 상대하는 것도, 나아가 그들에게 정성을 쏟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예수는 그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아주 명확했다. 그는 다만 그들을 선대하며 은혜를 베풀어 주고 싶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재하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대하는 그의 태도이다. 즉, 모든 피조물을 선대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며, 그들을 키워 주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발현하여 그 사람들을 선대하였으며, 인자하고 관대한 마음으로 그 사람들을 대해 주었다. 그들이 예수를 어떻게 대하든, 어떠한 결과가 생기든 그는 창조주의 신분으로 모든 피조물을 대했으며, 그에게서 발현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성품이자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었다. 예수는 조용히 일을 하고 나서 또 조용히 떠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어떤 측면의 성품이겠느냐? 하나님의 자비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에게는 사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평범한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당연히 할 수 없다! 본질을 보았을 때, 예수가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인 오천 명은 어떤 사람들이더냐? 주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모두가 하나님께 적대적인 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들은 절대 주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아니며, 그들의 본질은 확실히 하나님께 적대적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느냐?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적대감을 자신의 방식으로 녹여 버렸다. 이 방식이 바로 ‘선대’다. 즉, 예수가 그들을 죄인으로 봤을지라도, 하나님 눈에 그들은 여전히 피조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죄인들을 선대해 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용이다. 이 관용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본질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이는 그 어떤 피조물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태도를 진정으로 체험할 수 있을 때,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과 염려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너는 창조주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인 인류에게 들인 정성과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너는 두 가지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표현이 무엇이겠느냐? 누군가는 ‘사심 없는 마음’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박애’라고 한다. 이 두 표현 중 ‘박애’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데에 가장 적합하지 못하다. 이 말은 보통 가슴이 넓고 정이 많은 사람을 묘사하는 데 쓰인다. 나는 이 표현을 아주 혐오한다. 이 표현은 대상도 가리지 않고 원칙 없이 무턱대고 베푼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어리석고 멍청한 자들의 흘러넘치는 감정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한다면, 피치 못하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뜻이 들어갈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할 더 적절한 표현이 두 가지 있다고 본다.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첫 번째 표현은 ‘더없이 크다’이다. 이 표현에는 시적인 느낌이 있지 않으냐? 두 번째 표현은 ‘광대하다’이다. 내가 이 두 가지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데는 실제적 의미가 담겨 있다. ‘더없이 크다’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실물의 부피나 용량을 묘사하는데, 이 실물은 아무리 커도 사람이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추상적이지 않고 분명 존재하기에, 사람에게 상대적으로 확실하고 실제적인 개념을 줄 수 있다. 이차원적으로 보나 삼차원적으로 보나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상상할 필요가 없다. ‘더없이 크다’라는 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측량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는 해도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하나님의 사랑을 측량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허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재하에 있는 만물이 함께 누리고, 또 모든 피조물이 다방면적으로 다양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만물이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자양분을 얻어 살아가고, 만물의 생존이 하나님 사랑의 면면을 나타내며, 시시각각 누리는 그 사랑을 헤아리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반면 측량하기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만물에게 자양분을 주고 공급하는 비밀을 사람이 가늠하기 어렵고, 하나님이 만물을 대하는 마음, 특히 인류를 대하는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창조주가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정성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창조주가 친히 만든 인류에게 얼마나 깊은 사랑을 쏟았는지,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이해하거나 알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없이 크다’라고 묘사하는 목적은 사람이 크고 실제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이해하며, ‘창조주’라는 말의 실제적 함의를 더 깊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한, ‘피조물’이라는 호칭의 진정한 의미까지 깊이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광대하다’라는 표현은 보통 무엇을 묘사하느냐? 큰 바다, 우주 등을 묘사한다. 예를 들면, 광대한 우주, 광대한 바다 등이 있다. 사람은 우주의 광활함과 심오함에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끝없이 상상하고 우러러보지만, 그 오묘함과 심오함에 대해 바라만 볼 뿐 닿을 수는 없다. 바다를 생각할 때, 너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의 광활함을 떠올리고, 그 신비함과 포용력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광대하다’라고 묘사한다. 그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 사랑의 소중함과 깊이,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사랑의 능력이 무한하고 광대함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 또한, 하나님 사랑의 신성함과, 하나님의 사랑에서 드러나는 존엄과 거스를 수 없음을 느끼게 하는 데 있다. 이제 너희는 내가 ‘광대하다’라는 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더없이 크다’와 ‘광대하다’라는 두 가지 표현으로 묘사해도 손색이 없지 않겠느냐? 전혀 손색이 없다! 인류의 언어 가운데 오직 이 두 표현만이 가장 적절하고 하나님 사랑에 대한 묘사에 비교적 근접하다.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했다면, 이 두 표현을 사용했겠느냐? 분명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너희가 이해하고 체험한 것은 아직 입체적인 공간의 차원에는 오르지 못하고 단지 평면적인 범위 안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라고 하면, 표현이 궁색해지고 심지어는 알맞은 말도 찾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오늘 말한 두 표현에 대해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예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너희가 체험하고 이해한 것이 너무 얕고, 범위도 좁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내가 전에 하나님께는 사심이 없다고 말했더니 너희는 그것만 기억했구나. 설마 하나님의 사랑을 사심 없는 마음이라고밖에 묘사할 수 없겠느냐? 이는 너무 협소한 범위 아니겠느냐? 너희는 이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야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위의 첫 번째 이적과 기사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보았다. 몇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이야기들은 간단한 줄거리로 간단한 현상들만 알게 해 주지만, 우리는 이 간단한 줄거리 속에서 더 가치 있는 것들을 보았다.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다. 이러한 소유와 어떠함은 하나님 자신을 대변하며, 하나님 자신의 뜻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나타낼 때, 마음의 소리도 함께 표현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자가 있기를 바라고, 누군가 그를 알고 그의 뜻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사람이 그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그와 협력해 그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가 행했던 이런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무언의 표현이다.

예수가 표적과 기사를 행하다

이어서 ‘나사로의 부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다’라는 구절을 보자.

너희는 이 구절을 보고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 예수가 행한 이 이적과 기사는 위에 언급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다. 죽은 자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이적과 기사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러한 일을 행한 것은 그 시대에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 하나님이 성육신했기에 사람은 그의 겉모습과 실제적이고 미미한 면만 보았다. 설령 예수의 성격을 좀 알거나 겉으로 드러나는 특징을 본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그의 본질은 도대체 누구인지, 그가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지 누가 알 수 있었겠느냐? 이는 전부 사람이 알 수 없는 일들이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나사로의 사건을 증명하고 사실의 진상을 알고자 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는 하나님에게 식은 죽 먹기만큼 쉬운 일이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특정한 행사를 통해 자신의 신분과 본질을 증명할 수 있지만, 두서없이 일하는 법은 없으며, 매사에 계획과 절차가 있다. 그저 합당한 시기와 기회를 찾아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함으로써 사람에게 보여 주고, 그것을 통해 그의 권병과 신분을 증명할 뿐이다. 그렇다면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지 않겠느냐? 성경 구절을 보자.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 나오는데” 예수는 이때,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한마디만 했을 뿐이다. 그러자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다. 주의 입에서 나온 말씀 한마디로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때 예수는 제단을 쌓지도 않았고 다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마디만 했을 뿐이다. 이것을 이적과 기사라고 해야겠느냐, 아니면 명령이라고 해야겠느냐? 그것도 아니면 술법이라고 해야겠느냐? 겉으로 보면 이적과 기사라고 칭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지금 시대에 적용해도 이적과 기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절대 혼을 부르는 술법이라고는 할 수 없고, 사악한 요술이라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해서, 이 이적과 기사는 창조주의 권병이 드러낸 매우 평이하고 작은 부분일 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병이자 능력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죽게 할 수 있는 권병이 있고, 그 영이 육을 떠나 저승으로도, 혹은 마땅히 가야 할 다른 곳으로도 가게 할 수 있다. 사람이 언제 죽고, 죽은 뒤에 어디로 가야 할지는 다 하나님이 결정한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며, 사람과 일, 사물이나 공간적, 지리적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만물과 생령은 다 그의 주재하에 있기 때문이다. 만물 또한 그의 말씀과 권병으로 인해 생겨나고 살아가며 또한 소멸한다.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 역시 그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창조주만이 지닌 권병이다.

예수가 나사로를 부활시킨 목적은, 바로 사람의 생사를 포함한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사람과 사탄에게 증명해 보이고, 알려 주고자 함이었다. 또한 하나님은 성육신해서도 변함없이 사람이 볼 수 있는 물질세계와 볼 수 없는 영계까지 주관한다는 것을, 사람의 모든 것은 결코 사탄의 주관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함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지닌 권병의 표출이자 발현이며, 또한 하나님이 인류의 생사를 주관한다는 사실을 만물에게 전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예수가 나사로를 부활시킨’ 방식은 창조주가 인류에게 분명하게 알려 주고 가르쳐 주는 방식이자, 그의 능력과 권병으로 인류에게 가르쳐 주고 공급해 주는 구체적인 행위이다. 또한, 비언어적 형태로 인류에게 창조주가 만물을 주관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방식이자, 창조주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그의 실제 행사를 통해 알려 주는 방식이다. 이러한 무언의 방식으로 인류에게 준 가르침은 영구적이고 영원불멸한 것이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인류의 마음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 놀라움과 깨달음을 가져다주었다. ‘나사로의 부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이 사건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자에게 아주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 일을 잘 아는 모든 이에게 ‘하나님만이 사람의 생사를 주관한다’는 깨달음과 이상(異象)을 확고히 해 주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이러한 권병이 있을지라도, ‘나사로의 부활’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이 인류의 생사를 주재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을지라도, 이는 결코 그의 주된 사역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의미 없는 일을 행한 적이 없다. 그가 한 모든 일은 더없이 가치 있는 최고의 보물들이었다. 그는 절대 ‘사람을 무덤에서 나오게 하는 것’을 유일하고 주된 사역 목표나 항목으로 삼지 않는다. 하나님은 의미 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나사로의 부활은 하나님의 권병을 나타내기에 충분했고, 예수의 신분을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러한 이적과 기사를 반복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의 원칙에 따라 일을 한다.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본업에 힘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 취지를 벗어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현 단계에서 어떤 사역을 하고 무엇을 이뤄야 하는지를 알고 있으며, 엄격하게 자신의 계획에 따라 일을 한다. 만일 패괴된 사람이 이런 능력을 갖춘다면, 어떻게든 자신의 힘을 알리려고 능력을 과시할 것이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기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어 다른 이를 통제하고 집어삼키려는 목적을 이루려 할 것이다. 이는 사탄에게서 비롯된 사악함으로, 패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성품도, 본질도 없다. 그가 일하는 목적은 과시가 아니라 사람을 더 많이 깨우치고 이끌어 주는 데 있기 때문에 성경 속에 이러한 사례는 아주 적다. 사례가 적다고 해서 예수의 능력이 유한하거나 그가 행할 수 없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전혀 원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사로를 부활시킨 일은 아주 실제적인 의미가 있으며, 성육신 하나님의 주된 사역은 기적을 보이거나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에게 가르침과 공급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역을 더 많이 행하였다. 나사로의 부활과 같은 일은 예수가 직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보인 아주 작은 단편적 사건일 뿐이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본질 속에 ‘과시’라는 요소는 없다. 그러므로 예수가 더 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이지 않은 것은 일부러 자제하거나 환경적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며,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나사로를 부활시킬 때, 예수는 “나사로야 나오라”라는 한마디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한마디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을 포함해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룸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할 때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도 말씀으로 이루었다. 즉, 명령의 말씀에 의해, 권병의 말씀에 의해 만물이 그렇게 생겨났고 일들도 그대로 이루어졌다. 예수의 입에서 나온 이 말씀은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 한 말씀처럼 하나님 자신의 권병과 창조주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세워지고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나사로는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무덤에서 걸어 나온 것이다. 이는 하나님에게서 온 권병이며, 그 권병은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서 나타나고 육신에 실체화한 것이다. 이러한 권병과 능력은 창조주에게 속하며, 창조주가 실체화한 인자에게 속한다. 이 역시 하나님이 나사로를 부활시킨 사실을 통해 사람을 가르쳐 알게 한 내용이다. 이 주제는 여기까지 얘기하겠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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