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잊기 힘든 복음 전파 경험
저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긴 복음 전파 경험이 있습니다. 2021년 4월, 저는 인터넷상에서 한 천주교 형제를 알게 됐습니다. 라파엘(Rafael)이라는 사람으로, 저는 그에게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교제하는 과정에서 저는 라파엘 형제의 자질이 훌륭하고 이해도 빠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 같다고 생각해 구하고 살펴보고자 했고,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한 자매로부터 라파엘 형제가 천주교 신부를 마주친 후 예배에 나오지 않게 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라파엘 형제에게 많은 관념과 궤변이 주입됐을 거라고 생각하고 급히 연락해 봤습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의 교제 내용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당혹스러웠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하얘진 저는 어떻게 교제해야 할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연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만약 라파엘 형제가 하나님의 양이라면 부디 그를 인도해 주십시오. 저는 온 힘을 다해 그와 교제하겠습니다.’
그 후, 저와 아닐라(Anila) 자매는 라파엘 형제를 만나서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라파엘 형제는 종교 이론을 끝도 없이 늘어놓았습니다. 약간 흥분한 어조였죠. 이 밖에도 그는 자신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진심인지, 자신의 신앙이 얼마나 굳건한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남성의 육신을 입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으며, 종교계 사람들도 습관적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니 주님은 다시 오실 때도 남성의 모습을 취하실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은 여성의 모습으로 현현하여 사역하시니 이 점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죠. 흥분조로 말하는 그를 보며, 저는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저를 깨우치고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죠. 기도를 마친 후, 저는 라파엘 형제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형제님의 믿음이 굳건하다는 것은 믿습니다. 하지만 한 번쯤은 이런 생각도 해 보는 게 어떨까요? 우리는 늘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예수님을 알고 있을까요? 우리는 정말 그분이 성육신하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을까요? 정말 그분이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고 생각할까요? 예수님의 신성 본질을 알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정말 그분을 알아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분을 믿나요? 그분의 출생 가정 때문인가요, 아니면 그분의 외양 때문인가요?” 라파엘 형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전능하신 하나님 말씀을 몇 단락 읽어 주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본질은 사실 하나님의 영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믿는 이유도 그 육신이 하나님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즉, 그렇게 믿는 것은 역시 영을 믿는 것이다. 영과 육신이 서로 구별되긴 하지만, 그 육신은 영에서 비롯된 것이고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믿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다> 중에서), 『성육신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 된 것, 즉 하나님이 육신 된 것이다. 육신이 하는 사역은 곧 영이 하는 사역이다. 영이 하는 사역은 육신을 통해 실체화되고, 육신을 통해 발현된다. 하나님이 거하는 육신 외에는 누구도 성육신 하나님의 직분을 대신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정상 인성만이 신성 사역을 나타낼 수 있고, 그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본질>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읽은 후, 저는 교제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이 목수 집안에서 태어나셨으며 외양도 평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으셨죠. 하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자, 성육신하신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믿는 것도, 그분이 마리아의 자식이기 때문에 믿는 것도, 나아가 그분의 성별이나 외양 때문에 믿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께 하나님 영의 본질이 있으며, 그분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믿는 거죠. 오직 그분만이 진리를 선포하셔서 신성의 사역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돌아오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또 한 번 평범한 정상인의 육신을 입고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시며, 진리를 선포하셔서 말세에 사람을 심판하고 정결케 하는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근원은 같습니다. 두 분 다 그 본질은 하나님의 영이죠. 이번에 성육신 하나님께서 어떤 가정에 태어나셨든, 어떤 외모와 성별을 지니셨든 그런 것은 그분의 본질을 바꿔 놓을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토록 많은 진리를 선포하고 말세 심판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자 재림하신 예수님이심을 알 수 있죠.”
교제를 들은 라파엘 형제는 조금씩 구하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제가 말한 내용에 모두 동의하지만, 왜 하나님이 이번에는 여성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조금 부드러워진 그의 태도를 보며 저는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사역하실 때 어떤 모습을 취할지, 어떤 성별을 택할지 등을 우리가 정할 수 있을까요? 이는 우리가 태어날 때 어머니의 외모를 선택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든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죠. 이는 자식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이성이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라파엘 형제는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히 선택의 권리가 없죠.” 저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그럼 마찬가지로, 오늘날 하나님이 성육신하실 때 어떤 육신을 택할지, 남성이 될지 여성이 될지 등을 우리가 정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남성으로 오시면 받아들이고 여성으로 오시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비이성적인 태도 아닐까요? 성육신 하나님이 어떤 성별이든 이는 하나님 자신의 일이고 하나님 자신의 선택입니다. 우리에게는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죠.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늘보다 높고,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죠. 우리는 보잘것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이런 우리가 어찌 하나님 사역의 지혜를 꿰뚫어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에 대해 선택할 권리가 없습니다. 성육신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사역을 하실 수만 있다면 그분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다 하나님 자신이니, 우리는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성적이고 슬기로운 사람이죠.” 라파엘 형제는 반박하지 않고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성경 몇 구절을 읽어 주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신 4:15~18) 저는 이렇게 교제했습니다. “이런 성경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은 영으로, 어떤 고정된 형상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어떤 형태로든 조각해 경배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시고요. 창세기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말씀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남성일까요, 아니면 여성일까요? 만약 하나님을 남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여자를 만드신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반면 하나님을 여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를 만드신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죠. 하나님의 첫 번째 성육신은 남성이고 말세의 성육신은 여성이니, 이는 하나님이 남성과 여성을 공평하게 대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두 번 다 남성의 몸으로 성육신하셨다면 여성에게는 불공평한 일이겠죠. 우리가 하나님을 남성이라고 하는 것, 또는 여성이라고 하는 것 모두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에 속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가장 증오하시는 일이죠. 하나님은 매번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셨습니다. ‘성육신’이라면 사람의 형상이 되는 것을 뜻하죠. 그건 남성일 수도, 여성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육신 하나님이 어떤 성별이든 하나님의 본질은 영원히 바뀌지 않습니다.” 라파엘 형제는 여기까지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제 교제에 동조했습니다. 저는 또 그에게 전능하신 하나님 말씀을 몇 단락 읽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각 단계 사역에는 모두 실제적인 의의가 있다. 예수는 예전에 왔을 때는 남성으로 왔었지만 이번에는 여성으로 왔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든 것은 모두 그의 사역을 위해서이며, 하나님께는 성별의 구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영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육신을 취할 수 있고, 그 육신은 하나님을 대표한다.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라면 모두 하나님을 대표한다는 말이다. 설령 예수가 여자의 몸으로 왔더라도, 즉 당시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가 남자아이가 아닌 여자아이였어도 똑같이 그 단계의 사역을 완성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단계의 사역은 남자가 하게 됐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사역을 완성할 것이다. 사역은 어느 단계든 모두 의의가 있으며, 두 단계의 사역은 중복되지도, 서로 모순되지도 않는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두 번의 성육신으로 성육신의 의의가 완전해지다> 중에서), 『가령 성육신한 하나님이 단지 남자라면, 사람은 그를 남자로 규정하고 남자의 하나님으로 대하지, 결코 여자의 하나님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자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같은 성별이니, 하나님은 남자들의 머리라고 여길 것이다. 그럼 여자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이는 불공평한 일이다. 그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은 모두 자신과 같은 남자뿐일 테고, 여자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할 때 아담도 만들고 하와도 만들었다. 하나님은 아담만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하나님은 남자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여자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사역 이상 3> 중에서), 『‘하나님’이란 성령, 그 영, 일곱 배로 강화된 영, 만유를 포함하는 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이다. 그것도 보통 사람이고 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또 남성일 뿐만 아니라 여성이기도 한데, 같은 점은 둘 다 사람에게서 났다는 것이고, 다른 점은 성령으로 잉태됐다는 것과 사람에게서 났으나 직접 영에서 왔다는 것이다. 같은 점은 성육신 하나님이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을 맡았다는 것이고, 다른 점은 한쪽은 구속 사역이고 한쪽은 정복 사역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대표하는 것은 같지만 한쪽은 자비와 긍휼이 가득한 구속주이고, 한쪽은 진노와 심판이 가득한 공의의 하나님이다. 한쪽은 구속 사역을 펼친 사령관이고, 한쪽은 정복 사역을 이루는 공의의 하나님이다. 한쪽은 시작이고, 한쪽은 끝이다. 한쪽은 죄 없는 육신이고, 한쪽은 구속을 완성하고 이어지는 사역을 하는, 본래 죄에 속하지 않는 육신이다. 동일한 하나의 영이지만 각각 다른 육신에 거하고 다른 곳에서 태어났으며, 수천 년의 시간 차에도 하는 사역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며,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 있다. 또한 둘 다 사람이지만 남자 아기이고, 또 여자 아기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에 대해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본 후 아닐라 자매가 교제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하나님은 중복되는 사역을 하시는 법이 없죠. 하나님의 사역은 늘 새로워지고 변화하며 끊임없이 높아집니다. 하나님이 중복되는 사역을 하신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규정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께 진실한 인식을 갖지 못하겠죠. 하나님의 첫 번째 성육신이 남성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도 남성의 육신을 취하셨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요? 사람은 하나님을 남성이라고 규정했을 겁니다. 하나님은 오직 남성만을 인정하고 편애하신다고, 하나님은 여성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신다고 생각했겠죠. 그럼 여성은 영원히 차별받았을 테고요. 이런 인식이 옳을까요? 이는 여성한테 불공평한 것 아닐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까요? 이는 사람의 관념이자 상상 아닐까요?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공평하게 대하시죠. 하나님이 한 번은 남성으로, 한 번은 여성으로 성육신하셨다는 것은 더없이 큰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말세에 여성으로 성육신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의 관념을 깨부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인식을 돌려놓으셨으며, 사람이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을 일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남성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전 인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하셨죠. 누구든 자신의 관념으로 하나님을 남성이라고, 혹은 여성이라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아닐라 자매가 교제를 마친 후 저도 덧붙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성육신이 어떤 형상을 취하셨든 그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전부 하나님의 영이 육신에 실체화한 존재로,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고 신성의 사역을 행하실 수 있으니까요. 은혜시대 때 성육신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속죄 제물이 되신 것처럼 말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남성이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를 구속하실 수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첫 번째 성육신이 여성이었더라도 똑같이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선포하셔서 사람에게 회개의 도를 주셨겠죠. 그러니 성육신 하나님이 어떤 성별인지, 어떤 외양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표면적인 형상이 위대한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중요한 것은 그분께 하나님의 본질이 있다는 것이며, 그분이 선포하신 것이 진리이고, 그분이 행하시는 것이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참도를 살펴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말을 마친 저는 그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해야 할 사역을 가져오고,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어떠함을 나타낼 것이며, 성육신한 이상 사람에게 진리를 가져다주고, 생명을 베풀고, 길을 가리켜 줄 수 있다. 하나님의 본질을 갖추지 않은 육신이라면 분명히 성육신 하나님이 아니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하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맞는지 알아보려면 그가 나타내는 성품과 말씀으로 확인해야 한다. 바꿔 말해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맞는지, 혹은 참도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반드시 그의 본질로 판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지 아닌지의 핵심은 그 본질(사역, 말씀, 성품 등 훨씬 다양한 측면)에 있지, 겉모습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겉모습을 살피느라 그 본질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무지몽매한 것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서문> 중에서) 저는 교제를 이어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성육신 하나님이 맞는지를 확인하려면 그 사람이 진리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있는지를 봐야 한다고 말이죠. 참도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집중하지는 않고, 성육신 하나님의 외양과 성별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면, 지난날 예수님을 대적한 바리새인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닐까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출신, 가정, 외양 등이 하나하나 자신들의 관념에 맞지 않고, 메시야에 대한 환상에 부합하지 않자 함부로 예수님을 판단하며 정죄했어요.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살펴보려는 마음은 전혀 없었죠. 그러다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저주와 징벌을 마주하게 됐고요. 그러니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집중하지 않은 채 성육신 하나님이 여성이라서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분을 부정하고 대적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는 것 아닐까요?”
이렇게 교제하자 라파엘 형제는 계속 구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다음 날 저녁 예배에 참석하라고 했고, 그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음 날 저녁 예배 때 오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가 무척 걱정됐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에게 하나님 말씀을 보내 주면서 그의 회신이 오기만을 기다렸죠. 하지만 그는 계속 제 메시지를 보지 않았고, 저는 무척 실망했습니다. 그 후, 저는 다른 형제자매와 함께 그에게 연락했지만, 아무리 해도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난관에 부딪힌 저는 여기까지 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완전히 포기하려고 했을 때, 무의식중에 한 편의 글을 보았습니다. 이탈리아인에게 복음을 전한 자매의 경험을 서술한 글이었죠. 그녀가 전도한 그 형제는 제가 얼마 전에 알게 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저와 함께 협력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형제는 인성이 좋고 진리를 순수하게 이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의 그에게 관념이 그렇게 많았을 줄은 생각도 못 했죠. 심지어 그는 두 달 동안이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매는 그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다리면서 기회가 올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제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관념이 하나하나 해결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습니다. 자매의 체험을 보며 저는 무척 감동했고, 또 부끄러웠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오게 되기까지 하나님이 뒤에서 얼마나 많은 사역을 하시고 얼마나 많은 사물을 안배하시며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셨는지 모릅니다. 제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고심을 깨달았다면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야 했죠. 하지만 저는 난관에 부딪혔다고 바로 물러나 포기하려 했습니다.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죠. 이런 제게 조금이라도 충성심과 간증이 있을까요? 저는 하나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우선 책임을 다해야 한다. 양심적이고 이성적으로 네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것은 다 해야 한다.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어떤 관념을 갖고 있거나 어떤 질문을 하든 사랑하는 마음으로 답해 주어야 한다. 네가 정말 답할 수 없는 일이라면 관련된 하나님 말씀 몇 단락을 찾아 읽어 줘도 되고, 관련된 체험 간증 영상이나 복음 간증 영화를 찾아 보여 줘도 된다. 그러면 온전히 효과를 볼 수 있다. 최소한 너 또한 책임을 다했기에 양심에 가책이 없다. 만약 대충 넘어가면 일을 그르치기 쉽고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책임’이라는 두 글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책임을 어떻게 실제 상황에 정확하게 적용해야 하겠느냐? 네가 주님을 영접했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체험한 이상 너는 하나님의 현현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 어떻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느냐? 온라인 전도든, 대면 전도든 사람을 얻을 수 있는 방식, 성과가 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네가 전하고 싶을 때 전하는 것이 아니고, 네 기분이 좋을 때는 전하고 좋지 않을 때는 전하지 않는 것 역시 아니다. 또한, 네 기호에 따라 사람을 골라 가며 전하거나 네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전하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 집의 원칙에 따라 전해야 한다. 피조물의 책임과 본분을 다하고,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네가 깨달은 진리, 하나님 말씀과 사역을 힘자라는 대로 증거해야 한다. 그러면 피조물의 책임과 본분을 다한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어떻게 해야겠느냐? 책임을 다해야 하며,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복음 전파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중에서), 『그럼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상대가 하나님 집에서 규정한 복음 전파 원칙에 부합하는 한, 우리는 그에게 복음을 전할 의무가 있다. 설사 그가 지금은 좋은 태도를 보이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 언제까지, 어느 정도로 인내해야겠느냐? 그가 너를 거부하고 집에 들이지 않으며, 네가 아무리 이야기하고 전화해도 안 되고, 다른 사람을 통해 약속을 잡아도 안 되며, 네게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 복음을 전할 방도가 없다. 이럴 때는 네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본분 이행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다면, 모든 방법을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서 그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고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해야 한다. 예를 들어, 네가 어떤 사람을 2~3년 동안 접하면서 여러 차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했는데도 그가 받아들이려는 뜻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 보자. 하지만 그 사람이 이해력이 뛰어나 확실히 복음 전파 대상에 속한다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먼저, 절대 그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계속 정상적으로 교류하면서 그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고 하나님 사역을 증거해야 한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 언젠가 그가 깨달음을 얻으면 참도를 알아볼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인내하며 끝까지 견디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어째서 그렇게 해야겠느냐? 이는 피조물의 본분이기 때문이다. 그와 교류한 이상, 너는 그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가 하나님 말씀과 복음을 듣고 돌아서기까지 중간에 수많은 과정이 있을 것이고,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 너는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돌아서는 날, 너는 그를 하나님 앞으로, 하나님 집으로 인도해야 한다. 이는 너의 의무이다. 무엇을 의무라고 하겠느냐? 미룰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책임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식이 아무리 말을 안 듣고 말썽을 부려도, 혹은 병이 나서 밥을 먹지 않는대도 어머니로서 어떤 의무가 있겠느냐? 그녀는 네가 자기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한결같이 너를 아끼고 사랑하고 보호해 줄 것이다. 네가 그녀를 어머니라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녀를 어떻게 대하든 그녀는 네 곁을 지킬 것이며 매분 매초 너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네가 그녀를 어머니라고 믿고 그 품으로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 그녀는 줄곧 그렇게 너를 지키고 보호할 것이다. 이것을 바로 거부할 수 없는 책임이라고 한다. 만약 복음 전파자가 이렇게 실행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이런 사랑을 보인다면 이는 복음 전파의 원칙을 지킨 것이니 100%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복음 전파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복음 전파자가 다해야 할 책임을 명확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복음 대상이 처한 상황과 배경은 언제나 다릅니다. 그러니 매번 다른 방식으로 상대를 대해야지, 자신의 관념과 상상에 근거하여 편견을 갖고 상대를 미워하거나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를 쉽게 포기해서는 더더욱 안 되고요. 복음 전파 원칙에 맞는 대상이라고 확신했다면 온 힘을 다하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증거함으로써 그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할 때 마땅히 가져야 할 원칙이죠. 하지만 저는 라파엘 형제와 잠깐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인내심과 사랑을 잃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살면서 계속 그를 찾아가 교제하지 않으려 했죠. 그가 우리를 무시하고 전화도, 메시지도 받지 않으니 또 무슨 방법이 있겠나 싶었습니다. 교제해야 할 내용은 다 교제했으나 그가 받아들이지 않으니 저도 힘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 일단은 미뤄두자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사실 제 마음은 무척 무거웠습니다. 그 형제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데다가 자질도 뛰어나고 말씀에 대한 이해 능력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신부에게 교란되고 미혹되었으며, 종교 관념에 가로막혔을 뿐이죠. 이 중요한 시기에 그를 도와주어야지, 수수방관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복음 전파자로서 책임을 다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체험 간증 문장을 한 편 보내 주었습니다. 그가 메시지를 보든 말든 최선을 다해 제가 해야 할 일을 다 해 보자고 생각한 겁니다.
며칠 안 돼 라파엘 형제에게 회신이 왔습니다. “저는 그동안 계속 기도했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저는 마음속으로 줄곧 전능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제가 잘못을 저질러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도록 깨우치고 인도해 달라고요.” 저는 감격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의 메시지에는 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너무 패괴되고 사악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다가가기가 정말 쉽지 않죠. 사악한 것에 대항하는 유일한 무기는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들었다는 것이고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격렬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러다가도 또 다음 순간 메시지를 보지 않을까 봐 무척 걱정되고 초조했죠. 그래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떠올라 저는 급히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았습니다. 『요나 4장 10절에서 1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의 원래 말씀으로, 요나와의 대화이다. 이 대화는 짧고 간결하지만, 인류를 아끼고 염려하는 창조주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요나가 명을 받들고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긴 했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 성안 사람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염려와 기대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요나를 질책함으로써 그에게 알려 주려는 것이 있었다. 즉, 인류는 하나님이 손수 만든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심혈을 기울였고, 모든 사람에게 기대를 걸고 있으며, 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 공급을 누리고 있고, 하나님이 자신이 기울인 심혈로 그 모든 사람을 바꾸어 왔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가 박 넝쿨을 아끼는 것처럼 하나님도 손수 만든 인류를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더군다나 그 성안에는 수많은 아이와 무고한 가축이 있었으니 말이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저는 감동받았습니다. 그래서 라파엘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죠. “형제님, 형제님은 생각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줄도 알고요. 하나님은 말세에 육신을 입고 수백만 자에 달하는 진리를 선포하시어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고 우리가 죄의 결박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하고 계시죠. 우리가 정결케 되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시는 거예요. 저는 형제님이 우리의 운명, 결말과 관련된 이 큰일을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해요. 형제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게요. 형제님이 마음의 문을 열고 하루빨리 하나님 집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구하겠습니다.” 저는 또 그에게 하나님 말씀 낭송 영상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는 그중 한 대목을 보며 스스로를 돌아보았고, 거기에서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재림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크나큰 구원이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에게는 정죄받는 기호가 될 것이다. 너희는 자신의 길을 택해야 한다. 성령을 모독하거나 진리를 저버리는 일을 하지 말고, 무지하고 교만한 사람이 되지 말며,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고 진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너희에게 충고하겠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하나님을 믿는 길을 가고 함부로 단정 짓지 마라. 또한 제멋대로 건성으로 하나님을 믿지 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적어도 겸손한 마음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리를 듣고 코웃음 치는 사람들은 다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이고, 진리를 듣고도 멋대로 단정 짓거나 정죄하는 자들은 다 교만한 자들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두 다른 이를 저주하거나 정죄할 자격이 없다. 너희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성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진리의 도를 듣고 생명의 말씀을 본 후, 그 말씀 중에서 단 만분의 일이라도 너의 생각과 일치하고 성경과 일치한다고 여겨진다면, 너는 그 만분의 일에 해당하는 말씀에서 계속 찾고 구하여라. 나는 또 네게 자신을 과신하거나 높이 여기지 말고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을 권한다. 미약하게나마 하나님을 경외하는 너의 마음에 더 큰 빛을 얻게 될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고 자꾸 생각해 보면, 너는 이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과연 진리가 맞는지, 생명이 맞는지 알게 될 것이다. 혹자는 몇 마디 보지도 않고 “이것은 성령의 깨우침에 불과해.”라고 하거나 “이것은 거짓 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는 거야.”라며 맹목적으로 정죄할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하는 자는 그야말로 너무나 무지하다! 너는 하나님의 사역과 지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지극히 적다. 그러니 나는 너에게 다시 시작할 것을 권한다! 너희는 말세에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해서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을 맹목적으로 정죄해서는 안 되고, 미혹될 것이 두려워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느냐? 여러 번 살펴보고도 이런 말씀이 진리도 길도 아니고 하나님의 선포가 아니라고 여긴다면, 너는 결국 징벌받을 사람이고, 복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진리를 이렇게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였는데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너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돌아올 복이 없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잘 생각해 보아라! 경솔하게 굴지도, 덤벙대지도 말라. 하나님 믿는 일을 아이들 장난으로 여기지도 말라. 자신의 종착지와 앞날, 자신의 생명을 생각해야지, 스스로를 우롱해서는 안 된다. 너는 이 말들을 다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네가 예수의 영체를 볼 때는 하나님이 이미 하늘과 땅을 새롭게 바꾼 후이다> 중에서) 라파엘 형제는 그날 이 하나님 말씀을 보고 제게 아주 긴 감상과 인식을 보냈습니다. 저는 그가 격렬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는 길을 잘못 들까 봐,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또 다른 교파를 따르는 것일까 봐,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일까 봐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말씀 한 단락을 찾아 보내면서 이렇게 교제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는 어떤 종교 단체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는 예수님의 현현과 사역으로 생겨난 것일 뿐, 어느 누군가가 만든 새로운 교파가 아니에요. 전능하신 하나님은 진리를 선포하시고 심판 사역을 행하시면서 하나님나라시대를 열고 은혜시대를 끝마치셨죠. 성육신한 하나님 자신 외에는 세상 그 어떤 지도자나 위인, 명인도 진리를 선포할 수 없고, 인류를 인도하고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예수님이나 여호와와는 다른 사역을 하셨지만, 그 본질은 전부 같은 한 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예수님,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이 서로 다른 시대에 취하신 서로 다른 이름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바뀌든, 하나님의 사역이 어떻게 바뀌든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아요.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가 행한 사역은 예수라는 이름을 대변한 것이자 은혜시대를 대변한 것이었고, 여호와가 행한 사역은 여호와를 대변한 것이자 율법시대를 대변한 것이었다. 그들의 사역은 한 분의 영이 서로 다른 두 시대에 행한 사역이다. … 비록 서로 다른 두 이름으로 불렸지만, 이는 한 분의 영이 두 단계의 사역을 행한 것이며, 그 사역은 계속 이어진 것이었다. 이름과 사역의 내용이 다르기에 시대 역시 다르다. 여호와가 오면 여호와의 시대이고, 예수가 오면 예수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한 번 오게 되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고, 하나의 시대를 대표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데, 그 단계의 새로운 길이 하나의 이름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은 언제나 새롭고, 그의 사역은 끊임없이 발전함을 의미한다. 역사(歷史)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하나님의 사역도 끊임없이 발전한다. 6천 년 경륜을 끝내려면 반드시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날마다 새로운 사역을 하고, 해마다 새로운 사역을 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길과 새로운 기원뿐만 아니라 더 새로운 사역과 더 큰 사역을 개척해야 한다. 그에 따라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사역이 나타나게 된다. … 여호와부터 예수까지, 그리고 예수부터 이 단계의 사역까지 세 단계 사역이 이어져 오면서 하나의 완전한 경영이 되었는데, 이는 모두 한 분의 영이 행한 사역이다. 창세 이래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역하면서 인류를 경영하고 있다. 그는 처음과 나중이고, 시작과 끝이며, 시대를 펼치는 분이자 시대를 끝내는 분이다. 3단계 사역은 시대도 다르고 장소도 다르지만, 한 분의 영이 행한 것임에 틀림없다. 3단계 사역을 따로 갈라놓는 자는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 지금 너는 첫 단계부터 지금까지 행한 사역이 의심할 바 없이 한 분의 하나님이 행한 것이고, 한 분의 영이 행한 사역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사역 이상 3> 중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어요.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은 세 단계로 나뉘죠. 첫 번째 단계는 율법시대의 사역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은 율법을 반포하여 이스라엘인들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은혜시대의 구속 사역이에요. 하나님이 처음으로 성육신하여 인류의 구속 제물이 되신 거죠. 세 번째 사역이 바로 계시록에 예언된, 하나님이 말세에 행하시려는 심판 사역이에요. 이 세 단계의 사역이 곧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경륜입니다. 하나님이 각각의 시대에 행하신 사역은 전부 달라요. 하지만 세 단계 사역은 모두 한 분의 하나님이 행하신 거죠. 간단한 예를 들어 볼까요? 하나님의 경영 사역을 집을 짓는 것으로 비유해 볼게요. 하나님은 율법시대에 집의 토대를 만드셨어요. 토대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가 없으니까요. 은혜시대에는 집의 구조를 만드셨어요. 구조가 없으면 집이 형태를 갖출 수 없겠죠. 하나님나라시대는 지붕을 올리는 단계예요. 만약 이 마지막 단계가 없다면 그 집은 바람을 막아 주지도, 비를 가려 주지도 못하는 불완전한 집일 거예요. 그래서 이 세 부분 중 어떤 한 부분이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배반하는 게 아니에요. 또 다른 하나님을 믿는 건 더더욱 아니고요. 그건 어린양의 발걸음을 따르는 거예요. 지금 이 세상에는 몇 개의 거대 종교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약 2천 개 정도의 교파로 다시 나눌 수 있죠. 하지만 어떤 교파에서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현현을 갈망하는 형제자매들이 끊임없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고 그분 말씀의 양육과 공급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죠! 또한 이는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사 2:2)라는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제 메시지에 그는 기도하는 이모티콘을 보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말이 맞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참하나님이시죠. 우리는 모두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 아래로 돌아가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고 계시네요. 그분은 제 마음을 아시고, 제 걱정과 두려움도 알고 계시죠.” 그 후 저는 또 그에게 복음 영화와 하나님 말씀들을 보내 준 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가 예배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기다리고 구하며 순종하는 법을 배우겠습니다.’
나흘 후, 저는 갑작스러운 그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계속 예배에 참석해도 되느냐는 내용이었죠.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무척 소중하다며, 하나님 말씀을 떠날 수가 없다고,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수많은 성경의 진리와 비밀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매료시켰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드렸죠! 그 후, 그는 제가 보낸 하나님 말씀을 보고 힐책하는 말씀에 무척 자책했다며 털어놓았습니다. 또 “저는 하나님을 믿는 일을 애들 장난처럼 여길 수 없었습니다. 경솔하게 굴 수 없었죠. 그래서 계속 살펴보기로 한 겁니다. 주님의 재림에 관한 일은 제게 무척 중요합니다. 주님을 영접할 기회를 놓쳐 마지막에 하나님께 죄를 짓고 그분을 배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무척 감격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병과 위력을 깨달았죠.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관점을 바로잡아 주고,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게 한 것입니다.
이 경험으로 저는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복음 대상을 만나든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보는 한, 제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그를 하나님 집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이렇게 본분을 이행해야 죄책감과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는 것도요.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