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교체된 후의 깨달음
2008년,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또 예배와 교제를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고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으려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리더나 팀장을 맡은 형제자매들이 예배 때 수시로 하나님 말씀을 교제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 사역을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본분을 맡고 있으니 분명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 저는 그들이 무척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형제자매를 접대하거나 사무적인 일을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본분은 진리 교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었죠. 눈에 띄지 않는 그런 본분은 사람들에게 별로 인정도 못 받고, 나중에 구원받을 희망도 불분명해 보였습니다. 그 후, 저는 교회 리더 한 명을 접대하게 됐습니다. 그 자매는 형제자매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교제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곤 했는데, 많은 진리를 깨닫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또 윗선 리더가 종종 그 자매와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 말씀을 교제해 주었고요. 그런 모습을 보자 저는 더더욱 자매가 교회에서 양성하려는 대상이고 구원받을 희망도 무척 크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자매를 부러워하는 한편, 리더나 팀장에 대한 동경은 더욱 커져 갔습니다. 그래서 저도 언젠가는 반드시 중요한 본분을 맡으리라 다짐했죠.
얼마 후, 저는 양육 팀장이 되어 몇 개 팀의 양육 사역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어찌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리더가 이런 중요한 본분을 맡긴 걸 보니 그래도 내가 진리 실제를 갖추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가 봐. 그럼 나도 구원받을 희망이 생긴 거네.’ 이렇게 생각한 저는 속으로 계속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저는 갓 하나님을 믿은 형제자매들이 하루빨리 참도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매일 교회에서 바쁘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명확하게 교제하지 못한 탓에 양육 성과가 늘 저조했죠. 예배에 정상적으로 참석하지 않는 새 신자가 많았습니다. 반면, 다른 양육 팀장이 담당하는 새 신자들은 예배도 잘 나오고, 본분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더욱 조바심이 났습니다. ‘내 본분 이행 성과가 안 좋은 걸 리더가 알면 나를 진리 실제도 없고, 실제 사역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다 교체되기라도 하면 또 어디서 이렇게 중요한 본분을 맡겠어? 사무 사역처럼 보잘것없는 일이라도 맡게 되면 망한 거잖아? 형제자매들한테 무시당하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좋은 결말과 종착지가 없어지면 큰일인데. 안 되겠다. 얼른 양육자들을 불러서 해결책을 찾아야겠어.’ 이윽고 저는 각 팀과 차례로 교제하고, 사람들에게 예배에 안 나오는 새 신자들은 반드시 보름 안에 붙들어 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양육 과정에 존재하는 실제 문제와 어려움을 교제로 해결하지 못했죠. 얼마 후 한 자매가 제 교제에서 실행의 길을 찾을 수도 없고, 저 때문에 자꾸 눈치가 보인다며 울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반성은커녕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나도록 제가 담당하는 팀들은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리더한테 교체될까 봐 걱정이 됐고요. 교체되면 끝장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나님의 사역이 곧 마무리될 텐데 이 시점에 교체되고 도태되면 좋은 종착지를 얻을 수 있겠어? 구원받을 수 있겠냐고. 그럼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은 게 다 허사가 되는 거잖아?’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고,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얼마 후, 저는 사역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교체되었습니다. 그리고 리더는 사역상의 필요에 따라 저에게 형제자매를 접대하는 일을 배정했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형제자매를 접대하라고? 내가 그렇게 형편없나? 양육 사역이 미숙하긴 했지만, 접대하는 일을 해야 할 정도까지는 아니잖아? 형제자매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문득 교체된 뒤 7년 동안 접대하는 일만 하고, 다시 발탁되지 못했다던 한 자매가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보잘것없는 본분만 이행하다가는 빛 볼 날도 없고, 구원받을 가능성도 없을 것 같았죠. 그러자 그 본분에 더욱 반감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로 늘 버리고 헌신하고 수고하고 대가를 치렀는데, 결국 접대하는 일을 맡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러고도 무슨 좋은 미래가 있겠나 싶었죠. 하지만 본분을 거부하는 것은 너무 비이성적인 짓이었기에 일단 순종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적당한 셋방을 알아보러 다닐 때는 다리가 너무 무거워서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습니다. 저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몇 번이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교회에서 저에게 형제자매를 접대하게 한 것도 당신이 허락하신 일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도무지 순종하기가 힘듭니다. 이 본분을 이행하기 싫어서 자꾸만 움츠러들고 나약해집니다. 하나님, 이런 제 내적 상태가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디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저는 계속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기도를 마치고 하나님 말씀을 봤습니다. 『현재 많은 사람이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해.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해.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해.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고 내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해.’라고 생각하며 이런 내적 상태로 살고 있다. 이는 복을 받으려는 속셈에 지배된 것으로, 순전히 하나님이 내리는 상을 받기 위해, 그리고 면류관을 얻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진리가 없으며, 틀림없이 글귀와 도리를 얼마간 이해한 것으로 곳곳에서 뽐낼 것이다. 이런 사람이 걷는 길이 바로 바울의 길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한결같이 사역만 한다. 그는 사역을 많이 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고, 틀림없이 하나님을 만족게 하며, 하나님 앞에서 면류관을 얻을 자격이 있고 큰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생하고 전도하며 죽을 수 있는 사람, 목숨조차 돌보지 않는 사람, 또한 하나님이 맡긴 본분을 훌륭히 완수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하나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을 사람이며, 분명 면류관을 얻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어떻게 베드로의 길을 갈 것인가> 중에서), 『적그리스도는 복받는 일을 하늘보다도, 목숨보다도 크게 생각하고, 진리 추구나 성품 변화, 구원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본분을 잘 이행하거나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는 것,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 구원을 받는 일을 다 사소한 일, 언급할 가치도 없는 하찮은 일로 생각하고, 복받는 일만 평생에 영원히 잊지 못할 일로 여긴다. 어떤 큰일이나 작은 일이 닥치든 복받는 것과 연관 짓고 조심하고 신중하며 자신을 위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둔다. 그래서 본분이 조정될 때, 만약 직급이 올라가면 적그리스도는 자신에게도 복받을 희망이 있다고 여긴다. 만약 직급이 내려가면, 팀장에서 부팀장이 되거나 부팀장에서 보통 멤버가 되면, 그는 상황이 심상치 않고 복받을 희망이 묘연하다고 예감한다. 이런 관점은 어떠하냐? 올바른 관점이냐? 절대 아니다. 이런 관점은 너무나 황당하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12조 복받을 희망이나 지위가 없으면 물러나려 한다> 중에서)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말씀에 비추어 보니 제가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복받기 위해 추구하고 살아가는 사람, 복받기 위해 하나님께 헌신하고 온 힘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관점처럼, 리더나 팀장이 되면 복받을 희망이 있고, 중요한 본분에서 눈에 띄지 않는 본분으로 조정되면 복받을 희망도 멀어진다고 생각했던 거죠. 저는 하나님을 갓 믿었을 때를 떠올려 봤습니다. 리더나 팀장을 하는 형제자매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죠. 그들이 맡은 본분은 하나같이 중요한 본분인 것 같았습니다. 그들 또한 다 자질도 훌륭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구원하고 온전케 하시려는 대상, 훗날 큰 복을 받을 게 분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죠. 반면 보잘것없는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은 진리 실제가 없어 구원받고 복받을 희망도 크지 않다고 생각했죠. 이런 관점에 지배된 저는 늘 리더나 팀장이 되려고만 했습니다. 양육팀장이 되고 나서는 본분 이행에 성과가 나지 않자 스스로를 반성할 생각은 않고, 교체될까 봐 전전긍긍했습니다. 팀장 직무를 지키기 위해 당장의 성과에만 목을 매며 고압적인 태도로 형제자매들을 억압하고 모두에게 눈치를 줬고요. 교체된 후 교회에서 형제자매들을 접대하는 일을 안배하자 하기가 싫었습니다. 별 볼 일 없는 본분이라고 생각하며 소극적이고 게으른 태도를 보였죠. 이런 사실 하나하나가 복을 바라는 제 속셈과 욕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보인 제 노력과 헌신의 밑바탕에 복을 바라는 마음이 깔려 있었음을, 하나님께 순종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한 것이 결코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과 거래를 했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하나님 말씀을 봤습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늘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말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럼 본분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겠느냐? 크게 보자면,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으로 인해 생긴다. 작게 보자면,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되면서 여러 가지 사역이 생기는데, 그러한 사역은 사람이 협력하고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사람에게 책임과 사명이 생기게 되고, 그 책임과 사명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본분인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사람이 협력해야 하는 각종 사역이 바로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그렇다면 본분에는 상하 귀천이나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겠느냐? 그런 차이는 없다.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관계가 있고, 하나님 집의 사역에 필요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확장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이 곧 사람의 본분이다. 이것이 바로 본분의 유래이자 정의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합격한 본분 이행이란 어떤 것인가> 중에서), 『한 피조물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창조주를 만족게 할 수 있는 것은 인류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며, 인류 가운데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져야 할 일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어떤 일을 부탁하든, 피조물은 마땅히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인류에게 행복한 일이자 영광스러운 일이다.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이는 무엇보다 아름답고 기념할 만한 일로, 긍정적인 사물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그들에게 어떤 약속을 주는지는 창조주의 일로, 피조된 인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분명하고 간단하게 말하면, 이 일은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으로, 사람은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뭔가를 주면 너는 뭔가를 얻는 것이고,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네가 할 말은 없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창조주에게 협력하여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능력을 다하는 것은 본래 거래가 아니고 교환도 아니다. 사람은 태도나 행위, 행동 방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에게서 오는 어떤 약속이나 축복도 맞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 창조주가 너희에게 이런 일을 맡겼으니 피조물로서 마땅히 그 본분과 부탁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에 거래가 있느냐? (없습니다.) 창조주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 당연히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너희 각자에게 맡기기를 원하는 것이고, 피조된 인류 입장에서 보면 기꺼운 마음으로 그 본분을 받아들여 이생에 다해야 할 의무와 살아 내야 할 가치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거래는 없다. 이것은 등가 교환이 아니며, 어떤 상이나 사람이 상상하는 다른 설명과는 더더욱 무관하다. 그것은 절대 교환이 아니며, 본분 이행을 위해 바친 대가나 노동력으로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고 사람도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7)>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본분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맡기신 부탁이고, 교회의 본분 안배는 모두 교회 사역의 필요와, 각자의 자질, 장점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각자가 맡은 본분은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알리고 증거하기 위한 거죠. 본분에는 귀천도, 높고 낮음이나 크고 작음의 구분도 없으며, 하나 하나 모두 교회 사역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주어진 본분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순종해서 제대로 이행해야 합니다. 이 역시 피조물이 지녀야 할 양심과 이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은총을 베풀어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주신 것은, 제가 그 과정에서 진리를 추구하면서 하나님 말씀과 사역을 체험하는 한편, 한 걸음 더 나아가 제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해결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며, 다시는 사탄 성품에 얽매여 고통받지 않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본분에 등급을 매기는가 하면, 본분을 복받기 위한 조건으로 취급하면서 계속 하나님을 속이고 이용했습니다. 본분 이행을 대가로 훗날의 복을 얻고자 했으니 너무도 이기적이고 비열했습니다! 저는 그제야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잘못된 추구와 관점을 바꾸지 않고,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않는 한, 아무리 크고 중요한 본분을 맡고, 또 아무리 애쓰고 헌신해도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라면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결국 도태되고 징벌받게 됩니다. 이 점을 인식하고 나니 제가 아주 위험하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가짐을 바로잡고 제대로 본분을 이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또 하나님 말씀을 봤습니다. 『사람의 본분은 사람이 복을 받거나 화를 입는 것과 무관하다. 본분은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천직이므로 보수나 조건을 따지지 말아야 하고 이유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본분 이행이라 할 수 있다. 복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심판받은 후 온전케 되어 누리는 복을 말하고, 화를 입는다는 것은 사람이 형벌과 심판을 거친 후에도 성품 변화를 이루지 못해, 즉 온전케 되지 못해 받는 징벌을 말한다. 그러나 복을 받든 화를 입든 사람은 피조물로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이것은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것이다. 너는 복을 받기 위해 본분을 이행해서도 안 되고, 화를 입을 것이 두려워 본분 이행을 거부해서도 안 된다. 내가 한마디 하겠다.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바이고,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패역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육신 하나님의 직분과 사람의 본분의 구별> 중에서), 『나는 사람의 종착지를 정할 때, 그의 나이나 관록, 또는 그가 겪은 고난의 양을 보지 않는다. 그가 얼마나 가련한지에 따라 종착지를 정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에게 진리가 있는지 여부만 볼 뿐, 그 외에 다른 선택 기준은 없다. 너희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은 사람도 똑같이 징벌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너는 종착지를 위해 충분한 선행을 예비해야 한다>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통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복받거나 화를 당하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본분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기신 부탁이자 사람이 해야 할 일, 마땅히 완수해야 할 의무입니다. 구원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핵심은 그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 진리를 얻을 수 있는지, 성품 변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있지, 그 사람이 어떤 본분을 이행하는 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이 이행하는 본분이 아무리 중요하고,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도 그것이 그에게 진리 실제가 있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성품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또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거래하고, 그분을 이용하고 기만하며,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한다면,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드러나 도태되고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반면 이행하는 본분이 겉보기에는 대단해 보이지 않더라도 마음과 힘을 다하고, 또 그 과정에서 진리를 추구하며 성품 변화를 이룬다면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드러나 도태된 거짓 리더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사람들도 중요한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늘 사람들과 예배하고 교제하며, 수고하고 헌신했죠. 형제자매들에게 존경도 받았고요. 하지만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고, 진리의 글귀를 남들에게 공급하기만 할 뿐 정작 자신들은 하나님 말씀을 전혀 실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았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 자신들의 명예와 지위를 지키기 위해 버리고 헌신했던 겁니다. 결국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도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성품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잘못된 길을 걸어 교체되고 말았죠. 저는 많이 고생하고 헌신하며 지위가 높고 큰 사역을 하면 구원받아 좋은 결말을 맞이할 거라고, 평범한 사역이나 보잘것없는 본분을 이행하면 구원과 멀어지고 복받을 희망이 사라진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너무나 터무니없고,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에 완전히 위배된다는 점을 알게 됐습니다. 지난날, 바울은 교회에서 높은 지위가 있었으며, 복음을 전도하면서 열심히 뛰어다니고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숭배와 존경을 받았죠. 더욱이 오늘날 종교계에서는 바울을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사실 바울은 진리를 추구한 적이 없고, 성품 변화는 더더욱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애쓰고 헌신한 것도 모두 복을 받고, 면류관을 얻기 위한 것이었고요. 바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을 걷다가 결국 하나님께 징벌받았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겉으로는 바울처럼 큰 사역은 하지 않았지만,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추구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인식하려 애썼고요. 결국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힘으로써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으며, 또 하나님께 온전케 됐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분과 거래하고 그분을 기만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하나님나라로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패괴 성품으로 가득한 사탄의 부류는 더더욱 살아남도록 하지 않으시죠. 진리를 추구하고, 성품 변화를 추구하여 결국에는 진리를 얻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분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깨닫자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꺼이 순종하며 형제자매들을 접대하기로 했습니다. 바로 그때, 리더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교회 사역에 필요하니 어떤 교회에 가 새 신자들을 양육하라는 내용이었죠. 그 소식을 들은 저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진리를 추구하고 성품 변화에 힘쓰며 착실하게 본분을 이행하겠다고 기도드렸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분과 거래하며 복을 바라는 제 속셈을 어느 정도 인식했고, 제 이기심과 비열함도 알게 됐습니다. 앞으로는 순종하며 피조물의 본분을 착실하게 이행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