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헌신 이면의 거래

중국 류잉(劉英)

2019년 연말, 하루는 손녀가 갑자기 다리가 아프다고 하길래 병원에 데려가 엑스레이를 찍었습니다. 특별한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죠. 그런데 다음 날에도 다리가 자꾸 욱신거린다고 하는 거예요. 아프다고 계속 우는 손녀를 보면서 저도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났습니다. 저녁이 되자 통증이 오는 간격이 더 짧아졌고, 그 탓에 밤새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저는 다리를 주물러 주는 한편, 쉼 없이 기도하며 손녀의 병을 하나님께 맡겼어요. 셋째 날 아침에는 아들과 며느리가 손녀를 데리고 현 병원에 갔습니다.

입원한 손녀는 고열에 시달렸어요. 40도까지 오른 체온이 도통 떨어질 줄을 몰랐죠. 외과와 내과 검사를 전부 받았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의사도 고쳐 주질 못했어요. 아들은 손녀를 성 행정부 소재지에 있는 병원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찰해 본 전문의들이 처음에는 루푸스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또 패혈증이라고 했다더군요. 저는 병원에 다녀온 사돈한테서 그 이야기를 들으며 큰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루푸스건 패혈증이건 심각한 병이기는 마찬가지니까요. 다른 건 다 차치하고, 40도에 달하는 열이 내려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문제였어요. 열이 오래가면 몸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잖아요. 아무래도 손녀가 잘못될 것 같다는 생각에 저는 점점 더 괴로워졌습니다. 제 손으로 키운 아이가 잘못되는 걸 어떻게 견디겠어요? 저는 계속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괜찮을 거야.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손녀를 지켜주시겠지. 죽게 놔두실 리 없어.’ 아픈 손녀가 생각날 때면 가슴이 미어져서 눈물이 났습니다. 어린아이가 그토록 큰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니요. 차라리 그 병을 제가 얻어 대신 아프고 싶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어째서 제 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습니다.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죠. ‘이런 환경이 임한 것도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겠지. 어쩌면 내 믿음을 검증하고 계시는지도 몰라.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돼. 내가 꿋꿋하게 본분을 이행한다면 손녀의 병도 나을 거야.’ 그 뒤 저는 정상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셨고, 꿋꿋하게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형제자매를 접대할 때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하면서도 그들이 제 일을 도와준다고 하면 거절했죠. 제가 본분을 최대한 많이 이행하면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실 테고, 그러면 손녀가 나을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보름 정도 지났을 때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손녀가 패혈증 진단을 받았다면서 고열이 반복되고 심막에 혹까지 생겨서 생명이 위험하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저는 하나님께 요구가 생겼습니다. “손녀가 아픈데도 저는 꿋꿋하게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그랬으면 병이 나아야 하는데, 상태가 호전되기는커녕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정말로 낫지 못할 병인 건가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울면서 이러더군요. “손녀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병원에서 위독하다는 통지서가 날아왔어. 의사도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집으로 데려가래.”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믿기지도 않았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어요. 손녀와 함께 지내던 때의 추억들로 머릿속이 가득 찼습니다. 사랑스럽던 손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마음속으로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지켜 주시고 제가 순종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라고요. 그러다가 휴대전화로 찍은 손녀 사진을 봤습니다. 퉁퉁 부은 손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모든 의욕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 말씀도 읽고 싶지 않고, 본분 이행할 기운도 없더군요. 제 마음속에 남은 건 오로지 아픈 손녀에 대한 걱정뿐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사위가 손녀의 진료 기록을 가지고 상하이에 있는 큰 병원에 가 봤는데, 거기 전문의도 못 고친다면서 쓸데없이 돈 버리지 말라고 했다는 거예요. 저는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긴 세월 하나님을 믿으면서 계속 본분을 이행했어. 교회에서 시키는 일이면 그게 뭐든 최선을 다했어. 손녀가 아파도 본분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형제자매를 접대했다고. 그렇게까지 헌신했는데 어떻게 내 손녀가 죽을병에 걸릴 수가 있지?’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엉엉 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제 손녀가 죽게 생겼습니다. 저는 지금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연약합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고, 가슴에 원망의 말이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세요.’

고통에 시달리다가 하나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4. 네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바쳤는데 내가 너의 요구를 단 하나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자. 그럼 나에게 믿음을 잃고 실망하거나 나아가 원망과 욕을 퍼부을 수도 있겠느냐?

5. 네가 줄곧 나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를 사랑해 왔다고 하자. 그런데도 질병으로 인해 고통받고, 궁색한 삶을 살며, 가족과 친구에게 버림받거나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면 그때도 나에 대한 너의 충성과 사랑이 지속될 수 있겠느냐?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매우 심각한 문제 ― 배반 2> 중에서

하나님의 물음 하나하나를 마주하니 너무나 부끄러워지더군요. 손녀가 병에 걸린 건 저에 대한 하나님의 실제적 검증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충성하고 순종하는지 검증하신 거죠. 예전의 저는 그간 하나님을 위해 쭉 헌신하며 본분을 이행했으니까 당연히 제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손녀가 패혈증을 얻고 병세가 점점 나빠지자 저는 소극적이 되고 원망을 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도 읽기 싫어지고 본분을 이행할 힘도 없어졌어요. 알고 보니 저한테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는 실제가 없었던 거예요. 저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손녀가 병에 걸린 일로부터 공과를 배우고 진실로 순종할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달라고요. 이때 하나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은 뒤 평안만 얻고자 한다. 자식에게 병이 없고, 남편에게 좋은 직업이 있고, 아들이 좋은 배우자를 찾고, 딸이 좋은 남자와 결혼하고, 너의 우마가 밭갈이를 잘하고, 한 해의 농사가 잘되길 바란다. 네가 추구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너는 오직 편안하게 살기만을 바라고, 너의 집에 나쁜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며, 바람이 불어도 네 몸에는 불지 않고, 모래가 날려도 네 얼굴은 때리지 않으며, 홍수가 나도 네 집의 곡식은 잠기지 않고, 모든 재난이 너와 무관하길 바란다. ‘하나님의 품속’에서 살고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생활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처럼 육적인 것만 추구하는 못난 놈에게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영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너는 짐승 아니겠느냐? 아무 대가도 없이 참도를 네게 베풀어 주었는데 너는 추구하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느냐? … 추구하는 목표가 하나도 없으니 너의 일생은 가장 비천한 일생 아니겠느냐? 무슨 낯으로 하나님을 뵙겠느냐? 계속 그렇게 체험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 아니겠느냐? 네게 참도를 베풀어 주었지만 결과적으로 네가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너 자신의 추구에 달려 있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폭로하신 것은 바로 제 내적 상태였습니다. 저는 처음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부터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본분을 이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정이 평안하고, 만사가 순조롭고, 가족 모두가 무탈할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내내 본분을 열심히 이행했죠. 하나님께서는 제게 은총을 베푸셔서 원래 제가 앓던 병도 어느새 전부 고쳐 주셨더라고요. 그래서 더 열성적으로 추구하게 됐어요. 공산당에 체포당했다가 석방된 적도 있지만, 그 이후에도 꿋꿋하게 본분을 이행했어요. 하지만 손녀가 죽을병에 걸리니까 왜 지켜 주지 않으셨느냐고 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됐어요. 본분을 굳건하게 이행했던 것도 하나님께서 병이 낫도록 손녀를 지켜 주시기를 바라고 한 일이었어요. 표면적인 헌신을 이용해 하나님의 축복을 얻으려고 한 거죠. 그러다가 손녀의 상태가 호전되기는커녕 생명이 위험해지고 병원에서도 치료를 포기하는 걸 보고 완전히 무너졌어요.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했고, 공의롭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소극적으로 대항했죠. 그제야 자신이 은혜와 축복을 얻기 위해, 편안한 생활과 육체의 평안을 위해 하나님을 믿은 것이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버리고 헌신했던 것도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게 아니라 지나친 욕망과 요구로 점철되었지요. 이는 하나님을 속이고, 하나님과 거래를 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이런 하나님 말씀을 읽었어요. 『하나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며,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다. 공의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 고생한 만큼 분배하는 것, 일한 만큼 돈을 주는 것, 노력한 만큼 얻는 것, 이것은 공의가 아니라 그저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령 욥이 하나님을 증거한 후에 하나님이 그를 멸했다면 이것은 공의일까? 사실 이것 역시 공의이다. 어째서 그것을 공의라고 하겠느냐? 공의에 대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어떤 일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한다면 하나님은 공의롭다고 말하기가 매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공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때 하나님이 욥을 멸했다면, 사람은 하나님이 공의롭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이 패괴되었든 안 되었든, 사람의 패괴가 깊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이 사람을 멸할 때 사람에게 그 이유를 명확히 밝혀야 하느냐? 무슨 근거로 사람을 멸하는지 설명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그가 정한 규칙을 사람에게 얘기할 필요가 있느냐? 필요 없다. 패괴된 사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든 다 합당하고, 다 하나님의 안배다. 하나님이 네가 눈에 거슬려 넌 증거를 다 했으니 쓸모없어졌다며 널 멸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냐, 아니냐? 이것 역시 공의다. 지금은 네가 사실상 알기 어렵겠지만, 이치는 이해해야 한다. 너희가 말해 봐라,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냐, 아니냐? (공의입니다.) 사탄을 남겨 둔다면? 뭐라 말하기 힘들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공의이다. 하나님이 하는 일을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이 하는 것은 모두 공의롭다. 다만 사람이 알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사탄에게 넘겨주었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말했느냐? “당신이 하시는 일을 사람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늘 당신의 아름다운 뜻과 공의가 있지요. 그러니 제가 어찌 당신의 지혜와 행사를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다 공의롭다. 그것을 깨닫지 못할지라도 마음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거나 관념을 가진 일에 있어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장 비이성적인 태도이다. 베드로는 어떤 일들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지혜와 아름다운 뜻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사람이 모든 것을 측량할 수는 없으며, 사람이 측량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움은 제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한 만큼 돈을 주고, 헌신한 만큼 보상해 주는 식이 아닙니다. 그건 제 관념과 상상에 불과해요. 하나님은 진리고, 하나님의 본질이 바로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그게 사람의 관념에 맞든 안 맞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공의롭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래와 매매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판단했습니다. 많이 헌신하고 많이 버리면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면 하나님께서 제 가족을 지켜 주시고 제 손녀를 무탈하게 돌봐 주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손녀가 중병에 걸리자 저는 하나님을 상대로 이치를 따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고 생각했죠. 제 관점은 너무나 황당무계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장님이었던 거예요! 피조물인 제가 본분을 이행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건 당연한 도리입니다. 제가 다해야 할 의무고 책임이죠. 하나님과 거래하려 들어서는 안 됩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듯, 하나님께 보답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제게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든 그러지 않으시든, 제가 복을 받든 화를 입든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저는 응당 조건 없이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사람으로 불릴 자격도 없어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생로병사와 길흉화복을 겪듯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예외가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평안하고 순조로우리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어떠한 환경에서든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을 갖고 순종하면서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라는 말씀을 하셨죠. 그러나 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받을 생각만 했습니다. 가족들이 평안하고 무탈하도록 지켜 달라고 요구하면서도 진리를 구해 하나님께 순종하지는 않았어요. 제 믿음은 떡으로 배만 불리려는 식의 종교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아예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사실이 드러나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제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을 추구하는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끝까지 믿어도 진리를 얻을 수 없으며, 그저 하나님에 의해 도태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제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환경이 제게 임하도록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복받으려는 제 속셈과 패괴와 불순물을 정결케 하고, 저를 변화시키고,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거예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과의 거래를 꾀했던 제 행동이 어떤 본성에 지배받은 것인지 계속 성찰하다가 이런 하나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패괴된 인류는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말은 사람의 본성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 자신을 위해서이고,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헌신하는 것도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해서이며,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 또한 자신이 상을 받기 위해서이다. 결론적으로 전부 자신이 복을 받거나 상을 받고, 천국에 가기 위한 것이다. 세상에서 일을 하는 것은 다 자신이 이익을 얻기 위해서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해서이다. 복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많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사람에게 사탄 본성이 있음을 가장 잘 입증한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인류가 너무 깊이 패괴되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사람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늘 하나님에게 요구가 있다. 이것은 어떤 문제겠느냐? 사람이 늘 하나님에게 관념을 갖는 것은 또 어떤 문제겠느냐? 사람의 본성 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나는 사람이 어떤 일에 부닥치든, 어떤 일을 대하든 항상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자신의 육을 고려하며, 항상 자신을 위해 핑계와 구실을 대면서 전혀 진리를 구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자신의 육을 위해 변호하고 자신의 앞날을 위해 계산한다는 것을, 하나님에게 은혜를 요구하며 이득이 되는 것이라면 다 얻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왜 그렇게 많은 요구를 하겠느냐? 이는 사람의 본성이 탐욕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일말의 이성도 없다.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은, 그것이 기도든 교제든 설교든 할 것 없이, 결국 사람이 추구하고 생각하고 동경하는 것은 다 하나님에게 요구하고 받아 내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얻기를 바란다. 어떤 이는 “이는 본성의 일입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렇다! 이 밖에, 사람이 하나님에게 너무 많이 요구하고 지나친 욕망을 너무 많이 품는 것은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모두 스스로를 위해 요구하고 얻어 내려고 하거나 구실과 핑계를 댄다. 전부 자신을 위한 것이다. 많은 일에서 사람의 행동에 조금의 이성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사탄의 논리가 이미 사람의 본성이 되었음을 완벽하게 보여 준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요구는 너무나 많다>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으며 복받고 이익을 얻을 생각만 했던 것은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이익이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등과 같은 사탄 독소에 지배당한 탓이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사탄 독소를 따라서 제 이익만 추구하며 몹시도 이기적이고 간사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걸핏하면 하나님과 거래하려고 했고요.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으면서 많이 헌신했지만, 그건 전부 복받고 이익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지불한 작은 대가로 하나님의 큰 축복과 맞바꾸려고 했던 거죠.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을 다하려고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손녀가 중병에 걸리면서 복받으려던 욕망이 물거품이 되자 저는 불평을 쏟아 내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본분을 이행할 의욕을 잃었고, 그간의 보잘것없는 헌신을 밑천 삼아 하나님을 상대로 이치를 따지고 하나님을 대적했어요. 그제야 저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을 속였고, 하나님께 보상을 받아 내려 하고, 하나님과 거래하려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사탄에게 깊이 패괴된 저는 너무 이기적이고 간사했어요. 문득, 바울이 떠올랐습니다. 바울은 전도하고 사역하면서 버리고 헌신했으며 온갖 고난을 겪다가 순교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았죠. 바울이 버리고 헌신한 것은 상을 받고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달려갈 길을 마치고 선한 싸움을 싸웠으니 자기한테 공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인즉슨, 자기가 상을 받고 면류관을 얻어야만 하나님이 공의로운 것이고, 만약 자기한테 상과 면류관을 내리지 않는다면 공의롭지 않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한 말에서 읽어 낼 수 있듯이 그가 하나님을 믿으며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것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징벌받았죠. 저 역시 하나님을 믿으면서 은혜와 축복을 받을 생각만 했고, 게다가 버리고 헌신하는 것을 복받을 수단이자 밑천으로 취급했습니다. 잘못된 추구 관점을 고치지 않는다면 아무리 열심히 헌신해도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고, 바울처럼 하나님께 드러나 도태될 것입니다. 이어서 이런 하나님 말씀을 더 읽었습니다. 『피조물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고, 선택의 여지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한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은 개인의 이익과 소망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옳은 추구 방식이다. 네가 추구하는 것이 진리이고 실행하는 것이 진리이며 얻은 것이 성품의 변화라면, 너는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나니까 알겠더군요. 저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음식과 풍성한 생명 공급을 누리고 있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응당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피조물로서 지녀야 할 양심이고 이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두 번이나 성육신하시어 세상 사람의 조롱, 비방, 저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게다가 공산당과 종교계로부터 박해받고 정죄받으시면서도 묵묵히 진리를 선포하시어 저희를 양육하고 공급하고 계십니다. 또한, 갖가지 환경을 배치하셔서 저희의 패괴 성품을 드러내시고, 저희를 정결케 하시며 변화시키십니다. 저의 수많은 패역과 패괴 성품, 그리고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하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에 대한 구원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으로 심판하고 폭로하고, 일깨우고 권면하시고, 위로하고 격려하시면서 제가 돌아서길 기다리셨죠. 하나님의 사랑에는 사심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받고 이익을 얻을 생각만 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지는 않았죠. 양심과 이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거예요. 이러한 것들을 깨닫고 얼마나 통회하고 자책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죄스러운 마음이었어요.

며칠 뒤, 병원에서 또다시 손녀가 위독하다는 통지서가 날아왔어요. 다른 환자를 받아야 하니 손녀를 퇴원시키라더군요. 그 소식을 듣고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드렸어요. ‘하나님, 지금 제 손녀가 지니고 있는 숨결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배치하고 안배하시든 모두 적절하고 공의롭습니다. 손녀가 죽더라도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계속 하나님을 믿고 따를 것입니다.’ 그 후에 아들이 손녀를 데리고 성 행정부 소재지에 있는 다른 병원에 가 봤지만, 그 병원 의사도 진료 기록을 보더니 못 고친다며 손녀를 입원 병동에 받아주지 않고 돌려보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하나님께서 손녀의 죽음을 정해 놓으신 거라면 아무도 구하지 못할 테고, 죽음을 허락하지 않으신 거라면 한 가닥의 숨결이 붙어 있더라도 절대 안 죽겠지. 모든 것은 하나님 손에 달렸어. 나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할 거야.’ 이렇게 생각했더니 마음이 예전처럼 괴롭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며칠 후에 손녀를 보러 갔을 때 병고에 시달리느라 비쩍 마른 손녀의 얼굴을 보고 가슴이 너무 아파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손녀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역시 괴롭더군요. 현실을 외면하고 싶기도 했어요. 저는 묵묵히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저 혼자서는 이 환경을 이겨 낼 수가 없습니다. 부디 제 마음을 지켜 주시고, 순종할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세요.’ 그 순간,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 역시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괴로웠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시키신 대로 아들을 제단에 올렸습니다. 아들을 죽이려고 칼을 드는 모습에서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종을 확인한 하나님께서 그를 제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참된 믿음과 순종이 있었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굳게 서서 하나님을 증거했고,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체험으로부터 큰 격려를 얻고 저를 돌이켜 봤습니다. 손녀가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입으로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한다고 했지만, 사실 저는 다 내려놓지 못했어요. 고통스러워하는 손녀의 모습을 보고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졌고,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손녀를 치료해서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기대했어요. 전 언제나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무언가를 바랐습니다. 이성이라고는 없었고, 하나님께 전혀 순종하지 않았던 거예요. 하나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전체 인류를 통틀어, 전능자의 눈 아래에서 보살핌을 받지 않는 자가 있느냐? 전능자의 예정 속에서 생존하지 않는 자가 있느냐? 사람의 생사존망은 자신의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냐? 사람의 운명은 자신이 주관할 수 있는 것이더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음을 원했는지 모르지만 죽음은 오히려 그들을 멀리 피해 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삶의 강자가 되길 원하고 죽음을 두려워했는지 모르지만, 부지불식간에 죽는 날이 다가와 그들을 죽음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게 하였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이 전 우주를 향해 한 말씀ㆍ제11편> 중에서) 그렇습니다. 사람의 생사와 화복은 모두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는지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으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손녀의 병이 과연 나을 수 있을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그 모든 것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여기까지 생각한 저는 손녀가 낫든 낫지 못하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겠다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자매가 저한테 민간요법을 알려 줬어요. 저는 자매가 알려 준 방법대로 약을 만들어서 손녀한테 먹였어요. 효과가 있든 없든 일단 한번 해 보자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손녀의 병세가 정말로 하루하루 호전되는 거예요. 열이 서서히 떨어지더니 위독한 상태에서 벗어났어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민간요법을 입수했어요. 그 방법대로 만든 약을 한동안 먹였더니 손녀의 다리 통증이 사라지더군요! 저는 마음속 깊이 하나님께 감사드렸어요. 몇 달이 지나자 손녀는 기댈 것을 짚고 몇 걸음씩 걸을 수 있게 됐고, 병세도 차츰차츰 나아졌어요. 그리고 1년이 되자 정상적인 생활과 보행이 가능해졌죠. 심장 수술도 받았고요. 뒤늦게 손녀가 죽지 않고 회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성 행정부 소재지 병원 전문의는 도저히 믿기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그 병원에서 엄청난 돈을 쓰고도 병을 못 고쳤고, 큰 병원 여러 군데에서 전부 손녀한테 사망 선고를 내렸었잖아요. 그런데 제가 복받으려는 속셈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기로 하면서 손녀를 하나님께 맡겼더니 돈도 별로 안 드는 간단한 민간요법만으로 병이 나은 거예요. 하나님의 전능과 주재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습니다. 이제 손녀는 다리를 살짝 절고 심장 박동이 남들보다 조금 빠른 것만 빼면 아무 문제 없이 살고 있습니다. 손녀가 아팠던 걸 잘 아는 사람들은 다들 지금만큼 좋아진 건 기적이라고 말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추구하는 것은 다 나중에 복을 얻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러한 속셈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있는 패괴된 것들은 반드시 시련과 연단으로 해결받아야 한다. 사람의 내면에 정결케 되지 않은 부분이 있고 패괴 표출이 있다면 반드시 그 부분에서 연단을 받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안배이다. 하나님은 환경을 마련해 네가 그 환경 속에서 연단을 받으면서 자신의 패괴를 알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지막에는 죽음을 맞이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의도와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놓고 말하면 몇 년간의 연단과 어느 정도의 고난을 겪지 않는다면 사람은 생각과 마음속에서 패괴된 육체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사탄 본성에 통제되는 부분이 있고, 자신의 욕망과 요구가 있다면 그 부분에서 고난을 겪어야 한다. 오직 고난 속에서만이 공과를 배울 수 있다. 즉, 진리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수많은 진리는 다 고난과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깨닫게 된다. 편안하고 순탄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이번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받으려고 했던 제 속셈과 패괴와 불순물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됐습니다. 또, 믿음의 관점도 달라졌고 하나님의 전능과 주재, 그리고 공의 성품에 대해서도 실제적 인식이 생겼어요. 저는 진실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제가 겪은 고난은 저한테 유익한 일이었고, 저에 대한 하나님의 정결케 하심과 구원이었다는 걸 진실로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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