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이 다시 욥을 시험하다(온몸에 악창이 나다)(2)

2017.09.29

욥에 대한 사람들의 많은 오해

욥이 겪은 고통들은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서 준 것도, 하나님이 친히 준 것도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이 직접 준 것이었다. 그러니 욥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때, 욥은 자신이 평소 마음속에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행동 원칙,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전부 드러냈으며, 그것은 다 진실했다. 만일 욥에게 시험이 임하기 전에,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시련을 주기 전에, 욥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했다면, 너는 그를 위선적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막대한 재산을 베풀어 주었으니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했을 것이다. 또한, 만일 욥이 시련을 받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는 말을 했다면, 너는 욥을 허풍선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은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을 받으면 분명 하나님의 이름을 버렸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욥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고, 보고 싶어 하지 않고, 자신에게 임하지 않았으면 하며, 임할까 봐 두려워하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도, 심지어는 하나님조차도 차마 볼 수 없었던 그런 지경에 처해 있을 때에도 여전히 순전함을 지켰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의 이러한 태도에, 공리공론을 즐기며 글귀와 도리를 늘어놓기 좋아하던 자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지만 하나님에게서 오는 시련을 받아들인 적이 없던 자들은 욥이 지켜 낸 순전함에 의해 정죄받았고,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지킬 수 있다’고 믿지 않았던 자들도 욥의 증거로 인해 심판을 받았다. 욥이 시련 속에서 보여 준 행동과 그의 말을 두고 혹자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혹자는 질투를 하며, 혹자는 의혹을 품었다. 심지어 무시하는 태도로 욥의 증거에 대해 코웃음 치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욥이 시련 속에서 받은 고통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욥이 하는 말을 들었고, 시련이 임했을 때 그가 드러낸 인간적인 ‘나약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나약함’은 그들이 생각하는 욥의 이른바 순전함 중의 순전하지 않은 부분인 동시에, ‘하나님 안중의 순전한 자’의 흠집이 되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순전한 자는 완벽한 사람, 즉 흠도 없고 오점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라면 나약함이 없고, 고통도 느끼지 못하며, 아파하고 슬퍼하는 감정도, 증오도, 과격한 행동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욥을 진정으로 순전한 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욥이 시련 속에서 보여 준 많은 행동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욥은 사람들의 상상처럼 재산과 자녀를 잃었다고 대성통곡하지 않았다. 욥의 그러한 ‘예상을 벗어난 행동’은 그가 사람들의 눈에 냉혈 인간으로 비치게 했다. 그에게서는 눈물도, 혈육의 정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욥이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남긴 ‘나쁜 인상’이었다. 이어지는 욥의 일련의 행동들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람들은 ‘겉옷을 찢는’ 행동을 하나님에 대한 불경함으로 보았으며, ‘머리털을 미는’ 행동을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께 대드는 것으로 오해했다. 사람들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욥의 말 외에 하나님이 칭찬한 그 어떤 의로움도 그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욥에 대한 대다수 사람들의 평가는 그저 몰이해와 오해, 의심, 정죄, 도리적인 인정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깨닫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위와 같은 인상을 기저에 깐 사람들은 욥의 의로움에 한층 더 의구심을 품었다. 욥의 행동과 성경에 기록된 그의 태도는 천지를 놀라게 하고 귀신을 울릴 만큼 큰 감동을 선사할 것이라는 사람의 상상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큰일’을 해내기는커녕, 고작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다. 이 장면에 세상 사람들은 놀람을 금치 못했고, 욥의 의로움에 의혹을 품고, 심지어는 부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욥은 몸을 긁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맹세하지 않았고, 통곡하며 눈물 흘리는 모습 또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사람들이 욥에게서 본 것은 오직 그의 나약함뿐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는 욥의 말을 듣고서도 무감각한 채로 있거나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없었으며, 욥의 말에서 그의 의로움을 보지도 못했다. 시련의 고통을 겪고 있던 욥이 사람들에게 준 인상은 대체로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 이면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과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는 원칙 또한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의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모습을 보며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이 그저 빈말에 불과하다고,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심 역시 소문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그의 ‘나약함’에 대해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나약함’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의한 순전하고 정직한 자를 ‘다시 보게’ 되었으며, 심지어 ‘새롭게 이해’하기까지 했다.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장면에서 사람들이 그를 ‘다시 보게’ 되고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이 입증되었다.

욥이 받은 고통은 누구도 상상하거나 느낄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대역무도’한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몸의 고통을 줄여 보고자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욥 3:3)이라고 했을 뿐이다. 이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수도 있고, 이 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너희는 이 말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뜻이 들어 있다고 보느냐? 이 말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느냐? 나는 너희 대부분이 욥의 이 말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 너희는 욥이 순전하고 정직한 자라면 그 어떤 나약함도 보여서는 안 되고 슬퍼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탄의 모든 공격을 직면하거나, 심지어 웃으면서 사탄의 시험을 마주해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또한 사탄이 욥의 육체에 어떤 고통을 가해도 욥은 마땅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말아야 하고, 자신이 느꼈던 어떤 것도 표현하지 말아야 하며, 나아가 하나님께 더 강력한 시련을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강직한 자가 마땅히 보여 주고 갖춰야 할 태도라고 말이다. 그러나 욥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그저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을 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뜻은 더욱 없었다. 이는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로 행하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다. 예부터 지금까지 욥과 같은 시험을 받은 자가 없을뿐더러, 욥과 같은 상황을 겪어 본 자도 없기 때문이다. 왜 욥과 같은 시험을 받은 자가 아무도 없겠느냐? 하나님이 보기에 이러한 책임과 사명을 짊어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며, 욥이 해낸 것을 해낼 수 있는 자 역시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욥처럼 이러한 고통이 임했을 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뿐,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자 역시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 지금 우리가 욥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욥의 행위를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겠느냐? 의인인 자, 이처럼 하나님을 증거한 자, 사탄으로 하여금 머리를 감싸고 도망쳐 다시는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지 못하게 한 자를 칭찬해선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느냐? 설마 너희의 요구 기준은 하나님보다 더 높다는 것이냐? 시련이 닥쳤을 때 너희는 욥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말이냐? 하나님도 칭찬했거늘 너희에게 무슨 이견이 있느냐?

욥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보고 사람은 사람의 겉면을 본다고 나는 늘 말해 왔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살피기에 사람의 본질을 알지만, 사람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본질을 정의한다.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자, 욥의 세 친구를 비롯한 모든 영적 인물들은 그 행동에 아연실색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왔으므로 생일을 비롯해 생명과 육체를 준 하나님께 마땅히 감사해야지, 그것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이해이자 생각이었다. 이런 이해는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신성불가침한 것이자 영원히 바뀌지 않는 진리이다. 그런데 욥은 그 ‘관례를 어기고’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 금기를 깨는 행위로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거나 동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그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많은 사람이 욥의 ‘의로움’에 의심을 품었다. 그들은 욥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방종’해져 그런 경거망동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살아생전 하나님께 받은 축복과 보살핌에 감사하기는커녕 자신이 태어난 날이 멸망했으면 하고 저주했으니,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대적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현상은 사람들이 욥의 행동을 정죄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그때 욥의 마음이 진정 어떠했는지 누가 알겠느냐? 또 욥이 왜 그렇게 했는지 누가 알겠느냐? 그 실상과 이유는 오직 하나님과 욥 자신만이 알고 있다.

욥에 대한 사람들의 많은 오해

사탄이 손을 뻗어 욥의 뼈를 쳤을 때, 욥은 사탄의 마수에 걸렸다. 그는 벗어날 수도 저항할 힘도 없었으며, 그의 몸과 영혼은 극한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 ‘극한의 고통’을 통해, 욥은 육으로 사는 사람의 보잘것없음과 무력감, 유약함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동시에 욥은 하나님이 왜 인류를 염려하고 보살피는지, 그 심정을 절실히 느끼고 이해하게 되었다. 마수에 걸려든 욥은 평범한 육체를 가진 사람이 그렇게도 무력하고 나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을 때, 욥은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고 숨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나님이 욥을 완전히 사탄의 손에 넘기기는 했지만, 또 그로 인해 눈물 흘리고 마음 아파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욥의 고통에 아파하고, 욥의 상처에 괴로워했다…. 욥은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고, 또한 안타까워하는 하나님의 마음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자신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하나님이 자신 때문에 눈물 흘리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더욱이 하나님이 자신 때문에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때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육의 껍데기에서 벗어나 더 이상 육에서 오는 고통을 받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도 더는 자신의 아픔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육체의 고통을 참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걱정시켜 드리고 싶지 않다’는 심적 고통까지도 감내해야 했다. 육체와 마음에서 오는 이중의 아픔에 욥은 가슴이 찢어지고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감내했으며, 참으로 속절없고 무기력한, 육체를 가진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은 더욱 강렬해졌으며, 사탄을 증오하는 마음 역시 그에 따라 더 커져 갔다. 당시의 욥은 차라리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기를 바랄지언정, 하나님이 자신 때문에 눈물 흘리고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심히 증오하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도, 자기가 태어난 날도 싫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이 다 싫어졌다. 욥은 자신의 생일과 출생에 관련된 모든 것을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던 것이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욥 3:3~4). 욥의 말에는 자신에 대한 증오가 담겨 있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또한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 때문에 자책하고 죄스러워하는 심정도 담겨 있다.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이 두 마디는 그 당시 욥의 심정을 최대한 표현한 것으로, 모든 이에게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오롯이 보여 주고 있다. 그때, 욥이 원했던 대로 그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진정으로 승화되었다. 물론 이 승화는 하나님이 예정한 결과였다.

욥은 사탄을 이기고 하나님 눈에 진정한 사람이 되었다

욥은 처음의 시련에서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었다. 그러나 그는 무너지지 않았고, 하나님께 죄를 짓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탄의 시험을 이겨 냈고, 재산과 자녀, 나아가 몸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는 시련을 이겨 냈다. 다시 말해, 욥은 하나님의 거두어 감에 순종했고, 그로 인해 감사와 찬양까지 드릴 수 있었다. 이것이 사탄의 첫 번째 시험에서 욥이 보여 준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첫 번째 시련에서 욥이 증거한 것이다. 두 번째의 시련에서 사탄은 손을 뻗어 욥에게 갖은 해를 가했다. 욥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고통을 겪었지만, 그의 증거는 오히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강인함과 믿음,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으로 또 한 번 사탄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가 보여 주고 증거한 것은 또다시 하나님께 인정받고 열납되었다. 이번 시험에서 욥은 자신의 실제 행동을 통해 사탄에게 선포했다. 육체의 고통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과 순종을 바꿔 놓을 수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경외심을 빼앗아 갈 수도 없다고 선포한 것이다. 또한 그는 죽음이 다가왔다고 해서 하나님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며, 순전함과 정직함을 버리는 일 또한 없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욥의 의연함을 본 사탄은 겁이 났다. 사탄은 욥의 믿음에 두렵고 간담이 서늘해졌으며, 사탄과 사생결단하겠다는 욥의 기세를 보고 침통해졌다.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 앞에 사탄은 속수무책이 되었다. 그래서 욥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욥을 참소하는 짓도 그만두었다. 이는 욥이 세상을 이기고, 육체를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죽음을 이겨 하나님께 속한 완전한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욥은 두 차례의 시련 속에서 굳게 섰으며, 순전함과 정직함을 실제로 살아 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그의 생존 법칙의 범위 역시 확장될 수 있었다. 그 두 번의 시련을 겪은 후, 욥의 인생 경험은 더욱 풍부해졌다. 이 ‘경험’으로 인해 그는 더 성숙하고 원숙해졌으며, 더 강인해지고 더 믿음 좋은 사람으로 바뀌었다. 나아가 욥은 자신이 지킨 순전함의 정확성과 가치를 확신하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준 시련으로 인해 욥은 사람을 염려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깨닫고 느끼게 되었으며, 하나님 사랑의 소중함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이 더해졌다. 여호와 하나님이 준 시련에 욥은 천 리 밖으로 밀려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으로 하나님께 더 다가갔다. 육체의 고통이 극한에 달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보살핌을 느낀 욥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다. 그런 모습은 그가 일찍이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운 발현이었다. 욥의 그 자연스러운 발현은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말해, 욥은 자신을 미워했고, 하나님이 고통받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기에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잊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때의 욥은 오랜 세월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사모하고 그리워하던 데서 하나님을 헤아리고 사랑하는 경지로 자신을 승화시켰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순종과 경외심을 헤아림과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욥은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상처 주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신의 어떤 행동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하나님을 슬프게 하거나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자신도 용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눈에 욥은 여전히 똑같은 욥이었지만, 그의 믿음과 순종,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하나님께 완전한 만족과 기쁨을 드릴 수 있었다. 그때의 욥은 하나님이 기대했던 완전함에 이르렀으며, 하나님 눈에 명실공히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었다. 욥은 자신의 의로운 행동으로 사탄을 이겼고,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섰으며, 온전하게 되었고, 자신의 생명 가치를 승화시켰으며, 초월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더 이상 사탄에게 공격받지 않고 시험당하지 않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욥은 의로움으로 인해 사탄에게 참소당하고 시험당했으며, 의로움으로 인해 사탄의 손에 넘겨졌지만, 또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이기고 물리치고 굳게 설 수 있었다. 그리하여 욥은 더 이상 사탄에게 넘겨지지 않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으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빛 속에서, 그리고 사탄의 감시와 해가 없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눈에 진정한 사람이 되었고, 자유로워졌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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