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두 번의 성육신으로 성육신의 의의가 완전해졌다고 하는가?

2017.05.31

관련된 하나님 말씀:

첫 번째 성육신은 죄에서 사람을 속량했다. 이는 예수의 육신으로 사람을 속량해 온 것, 즉 사람을 십자가에서 구해 낸 것이다. 하지만 사람 안에는 여전히 사탄의 패괴 성품이 존재했다. 두 번째 성육신은 더 이상 속죄 제물이 되지 않고, 죄에서 속량해 온 사람들을 철저히 구원한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 완전히 정결케 되고, 성품이 변화됨으로써 사탄의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돌아오게 한다. 그래야만 사람이 완전히 성결해질 수 있다. 율법시대가 끝나고 은혜시대가 시작되면서 하나님은 구원 사역을 시작했다. 말세에 하나님은 인류의 패역을 심판하고 형벌하는 사역을 하여 인류를 완전히 얻고 정결케 한 뒤에야 구원 사역을 끝내고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3단계 사역 중 두 차례만 성육신으로 친히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는 것이다. 3단계 사역 중 한 단계는 사람의 생활을 이끌어 주는 사역이고, 나머지 두 단계는 구원하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해야만 사람과 함께 생활할 수 있고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할 수 있으며 정상적인 육신으로 살 수 있다. 그래야만 창조된 사람에게 필요한 실제적인 도를 공급할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이지, 직접 하늘에 간구하여 얻은 것이 아니다. 사람은 모두 육에 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영에 접근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사람이 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입은 육신뿐이다. 사람은 이 육신을 통해야만 모든 진리와 도를 깨닫고 모든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두 번째 성육신은 사람의 죄를 충분히 벗겨 버릴 수 있고 사람을 완전히 정결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성육신으로 하나님이 육신으로 하는 모든 사역을 끝내고 하나님이 성육신한 의의를 완전케 한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이 육신으로 하는 사역은 전부 끝나게 되었다. 그가 두 번째의 성육신 후에 또다시 세 번째로 성육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의 모든 경영이 끝났으며, 말세의 성육신을 통해 이미 그가 택한 사람들을 완전히 얻었고, 마지막 때의 사람들이 모두 각기 부류대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구원 사역을 하지 않을 것이고, 육신으로 되돌아와 사역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육신의 비밀 4> 중에서

예수가 사역할 때, 예수에 대한 사람의 인식은 여전히 막연하고 모호했다. 사람은 줄곧 그를 다윗의 자손으로 여겼고, 대선지자이자 사람의 죄를 속량하는 인자한 주님이라고 했다.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그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았고, 소경도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죽은 자도 부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깊이 뿌리박힌 사탄의 패괴 성품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것을 어떻게 벗어 버려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사람은 많은 은혜를 받았다. 육체의 평안과 즐거움, 한 사람이 주를 믿으면 온 가족이 복을 받는 것, 병이 낫는 것과 같은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 외에도 선행을 하고 경건한 겉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합격선에 들어선 신자였다. 그런 신자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갈 수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구원을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생전에 생명의 도를 전혀 알지 못했고, 그저 죄를 짓고 자복하기만을 반복할 뿐, 성품이 변화되는 길은 없었다. 은혜시대의 사람들은 그런 상태였다. 사람이 완전히 구원을 받았느냐?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그 단계 사역이 끝난 후에 또 한 단계의 심판과 형벌 사역이 있는 것이다. 이 단계에는 말씀을 통해 사람을 정결케 하고 사람이 실행할 길을 얻게 한다. 이 단계에서도 귀신을 쫓아낸다면 아무런 성과도, 의미도 없을 것이다. 사람이 죄성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그저 죄 사함을 받은 기초에만 머물러 있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속죄 제물을 통해 이미 죄 사함을 받았다. 십자가 사역이 끝났고 하나님이 사탄을 이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안에는 패괴 성품이 아직 존재한다. 사람은 여전히 죄를 짓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인류를 얻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번 사역은 말씀으로 사람의 패괴 성품을 들추어내어 사람이 적합한 길을 따라 실행하게 하는 것이다. 이 단계 사역은 이전 단계의 사역보다 더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성과도 더 크다. 지금은 말씀으로 직접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해 사람의 성품을 완전히 새롭게 하는 더 철저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성육신은 하나님이 성육신한 의의를 완전케 하였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확실히 완성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육신의 비밀 4> 중에서

하나님은 처음 성육신했을 때 성육신의 사역을 완전히 끝내지 않았다. 다만 육신이 해야 할 첫 단계의 사역만 마쳤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육신의 사역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 다시 한번 육신으로 돌아와서 육신의 모든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을 살아 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도를 가장 정상적이고 평범한 육신으로 나타냄으로써 육신으로 끝내지 못한 사역을 완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두 번째로 입은 육신은 첫 번째의 육신과 본질 면에서 같지만, 첫 번째 육신보다 더 실제적이고 정상적이다. 이로 인해 두 번째의 성육신이 받는 고난은 첫 번째 성육신 때보다 더 크다. 그러나 그 고난은 육신의 직분으로 인해 생긴 것이지, 패괴된 인간이 받아야 할 고난과는 다르다. 또한, 그 고난은 육신이 정상적이고 실제적이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가장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육신으로 직분을 이행하기에 그 육신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 육신이 정상적이고 실제적일수록 직분을 이행할 때 겪는 고난은 더 커진다. 하나님의 사역은 지극히 평범한 육신으로 발현되기에 초자연적인 모습이 조금도 없다. 육신이 정상적인 데다가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까지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겪는 고난은 초자연적인 면을 가진 육신이 겪는 고난보다 훨씬 더 크다. 그 고난은 모두 육신이 실제적이고 정상적이기 때문에 겪는 것이다. 두 번의 성육신이 직분을 이행하면서 겪는 고난을 통해 성육신의 본질을 알 수 있다. 사역을 담당하는 육신이 정상적일수록 겪는 고난이 더 크고, 사역을 담당하는 육신이 실제적일수록 사람의 관념은 더욱 심해지며, 감당해야 할 위험도 커진다. 그러나 실제적인 육신일수록, 그리고 정상인의 완전한 이성과 요구를 지닌 육신일수록 하나님이 육신으로 행하는 사역을 더 잘 담당할 수 있다. 예수는 육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육신으로 속죄 제물이 되었다. 즉, 정상 인성을 지닌 육신으로 사탄을 물리치고 사람을 십자가에서 완전히 구원한 것이다. 두 번째의 성육신은 완전한 육신으로 정복 사역을 하며, 사탄을 물리친다. 완전히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육신만이 완전한 정복 사역을 할 수 있고, 강력하게 증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을 정복하는 것은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면과 정상적인 면을 통해 이루는 성과이지, 초자연적인 이적과 계시를 통해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이번에 성육신한 하나님이 이행해야 하는 직분은 말씀을 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사람을 정복하고, 온전케 한다. 즉, 영이 육신으로 실체화하여 행하는 사역은 말씀을 하는 것이며, 육신의 기본 사역 또한 말씀을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을 완전히 정복하고, 드러내며, 온전케 하고, 도태시키는 목적을 이룬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육신으로 하는 사역은 정복 사역을 통해 철저히 완전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속죄 사역은 성육신의 초기 사역에 불과하며, 정복 사역을 하는 육신이야말로 성육신의 모든 사역을 보완한다. 성별을 봐도 하나는 남자, 하나는 여자로, 성육신의 의의가 완전해졌으며, 이로써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그 어떤 관념도 가지지 않게 된다. 즉, 하나님은 남자가 될 수도 있고, 여자가 될 수도 있으며, 성육신 하나님의 본질에는 성별의 구분이 없다. 그는 남자를 만들고 여자도 만들었으며, 그에게는 성별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단계 사역에서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지 않는 이유는 말씀을 통해 성과를 얻는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서이며, 또 다른 이유는 이번 성육신의 사역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사람을 정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번에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본능은 말씀하고 사람을 정복하는 것이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가 정상 인성으로 하는 사역은 이적을 보이거나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보기에 두 번째로 입은 육신은 첫 번째의 육신보다 훨씬 정상적이고, 또한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이번 성육신이 예수의 성육신과 다르며, 성육신이기는 하나 완전히 같지는 않은 것이다. 예수는 정상적이고 평범한 인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수많은 이적과 기사가 따라다녔다. 이번 성육신에게서는 사람의 병을 고쳐 준다거나 귀신을 쫓는다거나 물 위를 걷는다거나 40일 동안 금식하는 등의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그 어떤 이적과 기사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예수가 했던 것과 같은 사역을 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입은 육신의 본질이 예수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직분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망가뜨리지도, 방해하지도 않는다. 실제적인 말씀으로 정복하기에 이적으로 사람을 탄복시킬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이 단계는 성육신의 사역을 완전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본질> 중에서

하나님의 각 단계 사역에는 모두 실질적인 의의가 있다. 예수는 예전에 왔을 때는 남성으로 왔었지만 이번에는 여성으로 왔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든 것은 모두 그의 사역을 위해서이며, 하나님께는 성별의 구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영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육신을 취할 수 있고, 그 육신은 하나님을 대표한다.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라면 모두 하나님을 대표한다는 말이다. 설령 예수가 여자의 몸으로 왔더라도, 즉 당시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가 남자아이가 아닌 여자아이였어도 똑같이 그 단계의 사역을 완성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단계의 사역은 남자가 하게 됐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사역을 완성할 것이다. 사역은 어느 단계든 모두 의의가 있으며, 두 단계의 사역은 중복되지도, 서로 모순되지도 않는다. 예수는 사역할 당시에 독생자라고 불렸다. 독생자의 ‘자(子)’는 남자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왜 독생자라고 하지 않느냐? 사역의 필요에 따라 예수와 성별이 달라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성별의 구분이 없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으며, 그의 사역은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매우 자유롭지만, 모든 단계에 다 실질적인 의의가 있다. 하나님은 두 번 성육신했는데, 두말할 필요 없이 말세에 성육신한 것이 마지막이며, 그는 자신의 모든 행사를 보여 주기 위해 왔다. 만약 이번 단계에서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직접 사역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이 여자가 아닌 남자일 것이라는 관념을 가질 것이다. …

만약 예수가 행한 그 단계의 사역만 끝내고 말세의 사역으로 보완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영원히 예수만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관념에 사로잡힐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뿐이기에, 나중에 다른 이름으로 임한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고, 하나님 자신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은 속죄 제물이 된 분은 하나님의 독생자이고, 하나님을 위해 정사를 메고 전 인류를 구속한 분이라면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관념적으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남성으로 온 분은 하나님의 독생자라 칭할 수 있고 하나님을 대표한다고 여기며, 심지어 어떤 이는 예수를 여호와의 아들이자 그의 독생자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에게 크게 자리 잡은 관념이 아니고 무엇이냐? 만약 마지막 시대에 이 단계의 사역을 하지 않는다면, 전 인류는 하나님에 대해 선입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남자는 자신이 여자보다 높다고 생각할 것이고, 여자는 영원히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자는 구원받을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늘 하나님의 성별이 남자이고, 하나님이 언제나 여자를 미워하며, 여자를 구원할 리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여호와에게 지음 받고 또 똑같이 패괴를 거친 여자들은 영원히 구원받을 기회가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여호와가 여자를, 즉 하와를 만든 것부터가 의미 없는 일이 되지 않겠느냐? 또한 여자는 영영 멸망하지 않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두 번의 성육신으로 성육신의 의의가 완전해지다> 중에서

예수가 한 단계 사역을 했지만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는 본질적 의미만 이루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리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의 영은 육신과 함께하므로 둘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즉, 육신을 입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과 함께하므로 성육신한 예수가 하나님의 첫 번째 성육신이라는 증거가 더 뚜렷해지는 것이다. 이번 단계의 사역은 ‘말씀이 육신 되었다’는 말의 함의를 이룬 것이다. 또한,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말의 의미와 더 깊게 맞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말까지도 확신하게 만든다. 즉, 천지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으며, 그의 말씀은 그와 함께하였으므로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마지막 시대에는 그의 말씀의 위력과 권병을 한층 더 명확하게 드러내어 그의 모든 말씀을 보게 한다. 즉, 그의 모든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하는 사역이다. 너는 이런 것을 밝히 알아야 한다. 육신을 어떻게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육신과 말씀, 육신과 도의 관계를 어떻게 알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마땅히 해야 할 간증이자 모든 이가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두 번째로 성육신하여 하는 사역이자 마지막 성육신이다. 즉, 말씀이 육신 된 의의를 완전케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육신에서 하는 모든 사역을 철저하게 하여 선포하고, 하나님이 육신에 있는 시대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행 4> 중에서

하나님나라시대에는 성육신 하나님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말씀으로 정복하는데, 이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말세에 이 사역을 한다. 바로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의 실제 의의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는 말씀만 할 뿐, 사실이 임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의 본질이다. 성육신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이자, ‘말씀’이 ‘육신’에 온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말씀이 육신 되었도다’, 하나님은 말세에 이 사역(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사역)을 이룰 것인데, 이는 전체 경륜의 마지막 장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이 땅에 와서 그의 말씀을 다 육신으로 나타낼 것이다. 오늘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할 것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온전케 하는 것은 무엇인지, 마지막 시대 사람의 종착지는 어디인지, 어떤 사람들이 구원받고 어떤 사람들이 멸망하는지 등과 같이 마지막에 해야 할 사역들을 모두 분명히 말씀한다. 이 모든 것은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의 실제 의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이전에 반포한 행정 법령과 법도,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멸망하고 어떤 사람들이 안식에 들어갈 것인지 하는 말씀들은 다 이루어질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은 말세에 주로 이 사역을 완성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예정한 사람은 어디로 가고 예정하지 않은 사람은 어디로 가며, 백성들과 아들들은 어떻게 나뉘고,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고 애굽은 어떻게 되는지를 알게 한다. 앞으로 이 말씀들은 하나하나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 사역의 발걸음은 빨라지고 있다. 하나님은 각 시대에 해야 할 일, 말세에 성육신 하나님이 해야 할 일, 수행해야 할 직분을 모두 말씀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공개한다. 이 말씀들은 모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의 실제 의의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말씀이 모든 것을 이룬다> 중에서

무엇 때문에 예수의 그 단계 사역이 성육신의 의의를 완전케 하지 못했다고 하겠느냐? 그것은 말씀이 완전히 육신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행한 사역은 하나님이 육신으로 하는 사역 중 일부일 뿐이었다. 그는 구속 사역만 했을 뿐, 사람을 완전히 얻는 사역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세에 두 번째로 성육신한 것이다. 이번 단계 사역도 평범한 육신으로 하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 한다. 그에게는 비범한 인성이 전혀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신분을 가진 완전한 사람, 완전한 육신으로 사역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비범한 면이 조금도 없는 육신이자, 하늘의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그는 이적을 나타내지도, 권능을 행하지도 않으며, 예배당에서 종교의 실상을 폭로하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사람이 보기에 두 번째 성육신이 하는 사역은 첫 번째 성육신이 한 사역과 완전히 다르며, 심지어는 똑같은 점이 하나도 없다. 또한 이번 단계에서는 첫 단계의 사역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두 번째로 하는 사역은 첫 번째에 한 사역과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근원이 하나가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의 근원이 하나인지 아닌지는 육신으로 하는 사역의 성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육신의 외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3단계 사역에서 총 두 번 성육신하였다. 또한 두 번의 성육신 사역은 모두 시대를 열고 새로운 사역을 하는 것으로, 두 번의 성육신은 서로 보완 관계에 있다. 사람의 육안으로는 이 두 육신의 근원이 하나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다. 물론, 이는 사람의 육안으로 알아볼 수 없고, 사람의 사유로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이지만 그 본질은 원래부터 하나다. 그들의 사역은 하나의 영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의 성육신의 근원이 하나인지를 알아보려면 육신의 출생 연대나 출생지, 혹은 육신의 다른 조건들을 볼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나타낸 신성 사역을 봐야 한다. 두 번째의 성육신 사역에서는 예수가 행한 사역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역할 때마다 이전의 방법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길을 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성육신한 이유는 첫 번째 육신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긴 인상을 더 깊게 하거나 공고히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첫 번째 육신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긴 형상을 보완하고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이며,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모든 규례를 깨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잘못된 형상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하나님 자신이 행한 어느 한 단계의 사역도 사람이 하나님을 완벽하게 알게 할 수는 없다. 일부만 알 수 있을 뿐, 완전히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그의 모든 성품을 다 나타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은 이해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불완전하다. 사람의 언어로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남김없이 다 표현할 수 없을진대, 단 한 단계의 사역으로 어찌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밝힐 수 있겠느냐? 육신의 사역은 정상 인성에 가려져 있기에 사람은 오로지 신성의 말씀을 통해 그를 알 수 있을 뿐, 육신의 외형을 보고서는 그를 알 수 없다. 육신을 입고 온 그는 서로 다른 사역을 통해 사람에게 그의 사역이 단계마다 다르다는 점을 알게 한다. 그래야 사람은 육신으로 하는 그의 사역을 일정 범위에 규정하지 않고 전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두 번에 걸친 성육신의 사역이 서로 다르지만, 육신의 본질은 같고 사역의 근원은 동일하다. 다만 두 번의 성육신은 서로 다른 두 단계의 사역을 하기 위한 것이고, 두 시대에 나타났을 뿐이다. 하지만 어찌 됐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본질은 같고 그들의 근원도 같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본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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