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조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1)

참고 무엇이 진리인가

오늘은 지난번 내용을 이어서 교제하도록 하겠다. 지난번에는 어떤 주제에 관해 교제했느냐? (와신상담은 진리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예전에는 그것이 진리라고 여겼느냐? 여태까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진리라고, 적어도 그럭저럭 긍정적이고 고무적인 것, 사람들의 열정을 고취시키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부분에서 보자면 사람은 그것을 그래도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에 가까운 것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와신상담’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인 축에 속하는 말이라고, 적어도 부정적인 단어가 아니라 긍정적인 단어로, 사람의 삶과 처신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교제를 통해 그 말에는 매우 큰 문제가 있으며, 생각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너희는 이 단어와 비슷하고 관련 있으며 동일한 역할을 하는 단어, 그러니까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그럭저럭 긍정적이고 좋다고 생각하는 단어를 찾아 분석해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말을 이 상황에 적용하면 적절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단어는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는 측면에 있어 실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번에 우리는 ‘와신상담’에 관해 교제하였다. 그럼 ‘와신상담’과 같은 유형의 다른 단어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대체로 비슷한 의미를 갖거나 비슷한 역할을 하는 다른 단어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내 방식으로 ‘와신상담’과 비슷한 유형의 단어를 분석해 보는 것도 좋다. 모두 함께 교제한 후 새로운 인식을 얻어 그것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점을 꿰뚫어 본다면 그런 말을 버릴 수 있다. 그러면 앞으로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하는 길에서 완전히 하나님 말씀에 근거할 수 있다.

이제 지난 두 차례의 주제를 이어서 교제해 보자. 어떤 주제였느냐? (‘무엇이 진리인가’ 하는 주제였습니다.) 그렇다. ‘무엇이 진리인가’ 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진리냐? (진리란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입니다.) 너희는 이론과 정의 면에서 이 말을 기억한 것 같구나. 그럼 두 번의 교제를 마친 지금, 너희 내면 깊은 곳 진리에 대한 정의와 인식, 이해는 예전과 달라졌느냐? (달라졌습니다.) 무엇이 달라졌느냐? 단기간에는 실제 체험에 대한 인식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감성적인 인식은 있을 것이다. 너희 자신이 체험하고 인식하고 이해한 대로 말해 보아라. (예전에도 일이 닥치면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에 근거하여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항상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평소에 혈기를 쉽게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지요. 하나님 말씀을 보고 혈기를 드러내는 게 옳지 않다는 걸 깨달았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알았지만, 그래도 계속 혈기를 드러냈습니다. 늘 그 근원을 찾지 못했지요. 그러다가 지난번에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사람이 패괴를 드러내는 건 대부분 사탄의 사상에 지배되어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제가 혈기를 드러내는 건 제 내면에 “남이 나를 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범하지 않으며, 만약 남이 나를 범하면 나도 반드시 남을 범한다.”라는 사탄의 논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행위는 정당방위라고 여겼지요. 이렇듯 사탄의 사상과 관점에 영향받아 진리를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사탄의 그 논리들은 언뜻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이 전달하는 뜻은 하나님 말씀이 요구한 것에 위배되며, 그릇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해야 완전히 정확합니다.) 훌륭하다. 누가 더 보충해 보아라. (제가 좀 더 보충해 보겠습니다. 저는 예전에도 일이 닥치면 진리를 구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는 좀 모호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나서 진리가 무척 실제적이며, 삶의 다양한 면면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하나님께서 예로 들어 주신 것처럼 중국인이 서양 국가에 가서 커피를 마시게 된 것은 행동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사상, 관점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진리와 관계가 있고요. 이 밖에도 하나님께서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속어나 성어들을 분석해 주신 것을 통해 언뜻 옳은 것처럼 보이는 제 행위와 행동 방식들, 그리고 그 행위의 배후에 있는 속셈, 사상, 관점이 과연 무엇인지, 이러한 것들에 기대 살아가면 무엇을 살아 내게 되는지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진리를 구하고 실행해야 할지가 그렇게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된 느낌입니다.) 두 번의 교제를 통해 많은 사람이 진리의 정의나 진리와 관련된 주제에 기본적인 인식이 생긴 것 같구나. 그리하여 마음속 깊이 자신의 행위가 정말 진리와 관계가 있는지, 자기가 하나님을 믿으며 지키는 것, 듣는 것 중 과연 어떤 것이 진리이고 어떤 것이 진리가 아닌지,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들이 정말 진리가 맞는지, 진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을 돌아보기 시작한 것 같다. 돌아본 후에 사람은 과연 무엇이 진리인지, 어떤 것들이 진리이고 어떤 것들이 진리가 아닌지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설교를 듣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어느 정도 수확을 거뒀고,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하나님 말씀은 진리가 분명하다는 것, 하나님의 요구가 바로 진리이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전부 진리라는 것을 말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으로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지만, 실생활 속에서는 여전히 진리와 무관한 말, 진리에 어긋나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자주 하곤 한다. 혹자는 심지어 사람들이 옳고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진리로 대한다. 특히 사탄에게서 비롯된, 언뜻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궤변과 마귀적인 말들을 분별하지 못해 마음에 받아들인 것으로도 모자라 그것들을 긍정적인 사물로 여긴다. 예를 들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 사람의 방법으로 그 사람을 다스린다.”, “명철보신이 살길이다.”, “남이 나를 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범하지 않는다.” 등 수많은 사탄의 철학을 진리로 여겨 지키고,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으면서 마음속으로 아주 의기양양해한다. 그러다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나서야 사탄에게서 비롯된 그런 것들이 사실 진리가 아니며, 언뜻 옳은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미혹하는 사설이자 궤변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들은 다 어디에서 왔느냐? 일부는 학교 교육에서 왔고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다. 또 일부는 가정에서 교육받은 것이고, 일부는 사회에서 영향받은 것이다. 요컨대, 전부 전통문화에서 비롯되었으며, 사탄의 교육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것들이 진리와 관계가 있겠느냐? 전혀 관계가 없다. 하지만 사람은 그것을 분별하지 못한 채 진리로 여기니, 문제가 너무 심각하지 않으냐? 사탄의 이러한 것들을 진리로 여기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사람이 그것을 지키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겠느냐? 그것을 지키면 정상 인성을 살아 낼 수 있겠느냐? 그것을 지키면 양심과 이성대로 살아갈 수 있겠느냐? 양심과 이성의 기준에 이를 수 있겠느냐? 사람이 그것을 지키면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전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데, 사람이 지키는 그것들이 과연 진리겠느냐? 그것들이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겠느냐? 사람은 자신이 옳고 좋다고 여기는 처세 철학과 생존의 길, 생존 법칙, 심지어 전통문화 등 부정적인 것들을 진리로 여겨 지키는데,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인류는 그러한 것들을 몇천 년 동안 지켜 왔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겼느냐? 인류의 현재 모습에 조금이라도 개선된 바가 있느냐? 패괴된 인류는 여전히 점점 더 사악해지고 점점 더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은 각 단계 사역을 통해 적잖은 진리를 선포했고, 사람은 모두 그러한 진리에 권병과 능력이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 인류는 왜 하나님을 부정하고 대적하는 것이냐? 왜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냐? 이는 인류가 사탄에게 너무 심하게 패괴되었음을 충분히 보여 준다. 패괴된 인류는 사탄 성품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할 뿐,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문제의 근원은 인류가 사탄의 철학과 사탄의 지식을 너무 많이 받아들인 데 있다. 사람의 영혼 깊은 곳에 사탄의 각종 사상과 관점이 침투하여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성품이 생겼다.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에게서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권병과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진리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한편, 입으로는 “하나님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지고지상하지요. 또 진리는 저희 마음속에 있습니다. 저희는 진리 추구를 생존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라고 인정하지만, 실생활 속에서는 여전히 사탄의 명언과 사탄의 철학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한쪽에 치워 둔 채 사람의 그 신학 지식과 영적인 도리 같은 것들을 진리로 여겨 지키고 실행한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대다수 사람의 실제 상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계속 이대로 지키며 뿌리 깊게 박힌 사탄의 전통문화들을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해부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분별하거나 꿰뚫어 보거나 버리지도 못한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바로 하나님을 오랜 세월 믿어도 무엇이 진리인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모두가 입으로는 영적인 도리와 신학 이론, 아주 듣기 좋은 말, 진리에 부합하는 도리를 언급하지만, 사실 행동하고 살아 내는 모습은 오히려 영락없는,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이겠느냐?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에게 정죄받고 저주받게 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바리새인으로, 영원히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

자녀 교육 문제를 예로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은 아이가 말을 듣지 않고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옛사람들 말이 맞습니다.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에요.”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이 일을 대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속에는 사람의 말만 있을 뿐, 하나님 말씀은 없다. 그러니 그에게 진리 실제가 있겠느냐? 없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조금 이해했으니, 진리로 자녀를 가르침으로써 아버지가 된 책임을 다해야 하지만, 그렇게 실행하지 않았다. 자녀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탄식하듯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이는 어떤 말이냐? 누구의 명언이냐? (사탄의 명언입니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한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이 말은 어디에서 왔느냐? (사탄에게서 왔습니다.) 사탄에게서 왔고, 이 세상에서 왔다. 사람은 그렇게 진리를 ‘추구하고’, 그렇게 진리를 ‘사랑하며’, 그렇게 진리를 ‘높이는데’ 왜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사탄에게 속하는 말을 하는 것이냐? 그러면서 당당하게 “보십시오. 제가 진리와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고 경모하면 입을 열자마자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이 얼마나 위대한 진리입니까! 만약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라고 하는데, 이는 기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말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는 어떤 말이냐?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이 말의 의미는 자녀가 말을 듣지 않거나 철이 들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책임이고, 부모가 제대로 교육하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러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부모는 착실하게 처신하는데도 아들은 양아치가 되고 딸은 창녀가 된다. 그럼 화가 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라고 했어. 다 내가 그를 버릇없게 만들었어!” 이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만약 네가 이 말의 잘못된 점을 깨닫는다면 진리를 깨달았다는 의미이고,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만약 네가 이 안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 일에 대해 분명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너희는 진리에 대한 해석과 정의를 들었으니, 이 말을 듣고 ‘이 말은 옳지 않아. 이 말은 세상적인 표현이라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 그렇게 말하면 안 돼.’라고 느낄 수 있다. 이는 네가 말하는 방식만 바꿔서 이 일에 대해 얘기했을 뿐, 진리를 깨달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너는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는 말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말해야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겠느냐? 먼저 이런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옳은지 말해 보자. 하나님 말씀은 뭐라고 했느냐? 하나님 말씀에 이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내용이 있느냐? 하나님은 수많은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이 생명으로 삼게 하였다. 그런데 자녀를 교육할 때는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면 안 되는 것이냐? 하나님 말씀은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한다. 어른이든 아이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이고,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을 이끌어 인생의 바른길에 오르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일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럼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사람이 걷는 길은 그의 본성 본질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밖에, 그가 이번 생에서 어떤 징벌을 받을지, 혹은 어떤 축복을 받을지는 그의 전생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바른길을 걷지 않는 것은 부모가 제대로 교육하지 않아서이다.”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는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신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네 말대로라면 자식이 바른길을 걷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주재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냐?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바른길을 걷게 한다. 하지만 사람은 사탄 본성이 있어 모두 자기만의 선택이 있으며 자기가 좋아하는 길을 선택할 뿐,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기를 원치 않는다. 만약 네 말이 진리에 부합한다면, 이 일을 분명히 해석하여 사람들을 승복시켜야 할 것이다.

이제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는 말에 관해 교제해 보도록 하자. 먼저 명확히 해야 할 점이 있다. ‘자녀가 바른길을 걷지 않는 것은 부모와 일정 부분 상관이 있다’는 말이 틀렸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든 그가 걷는 길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분명한 사실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길을 걷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다. 그가 어떤 길을 걷고 어떤 사람이 되든 그것은 그 자신의 일이며, 예정된 것, 타고난 것으로, 본성과 관계가 있다. 그럼 부모의 교육이 어떤 역할을 하겠느냐? 사람의 본성에 영향을 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부모의 교육은 사람의 본성에 영향을 줄 수 없고, 사람이 어떤 길을 걷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다. 부모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오직 무엇뿐이냐? 일상생활 속 자녀의 단순한 행위들, 깊이가 얕은 사상과 처신의 도리들은 부모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자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모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 책임은 바로 자녀가 바른길을 걷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가 열심히 공부하고, 성인이 된 후 두각을 드러내며, 나쁜 일을 하지 않고, 나쁜 사람이 되지 않도록 가르치는 한편, 자식의 행위를 규범화하여 연장자를 보면 인사하는 등 예의를 알려 줘야 한다. 이렇게 행위와 관련된 것들을 가르치는 것이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이다. 자녀의 생활을 돌보고, 자녀에게 기본적인 처신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 부모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다. 하지만 사람의 성격은 부모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부모는 성격이 굼떠서 무슨 일을 하든 느릿느릿하지만, 자식의 성격은 매우 급해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그는 열네다섯 살이 되면 사회에 나가 분투하며, 어떤 일이든 자기가 알아서 해서 부모를 필요로 하지 않는 등 매우 독립적이다. 이것이 부모가 가르친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의 성격과 성품, 나아가 그의 본질과 관계되는 것, 추후에 그가 선택할 길 등은 부모와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혹자는 “그게 어떻게 아무 관계도 없습니까? 어떤 집은 학자 가문이나 세가입니다. 예를 들어 한 세대가 그림을 배우면 다음 세대도 그림을 배우고, 그다음 세대도 그림을 공부하지요. 이는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는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합니다.”라고 반박하는데, 이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이 사례로 이 문제를 설명하는 것은 옳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그것은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일이기 때문이다. 세가가 영향을 주는 것은 한 가지 측면의 기술뿐이다. 그러한 가정 환경에서는 모두 똑같은 것을 배울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 역시 똑같은 것을 선택한 것 같지만, 근원을 따져보면 그것은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다. 그가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것 역시 하나님이 주재한 일 아니겠느냐? 부모에게는 자식을 성인으로 키울 책임이 있을 뿐이다. 자식은 외적 행위나 생활 습관 등에서 부모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받지만, 성인이 된 후 평생 추구하는 목표와 운명은 부모와 아무 관계가 없다. 어떤 부모는 평범하고 성실한 농민인데 자녀가 관직에 오르기도 하고, 큰 사업을 하기도 한다. 어떤 부모는 각각 변호사와 의사로 능력이 뛰어난데 자녀는 변변치 않아서 아르바이트조차 구하지 못한다. 이것이 부모가 교육한 것이겠느냐? 아버지가 변호사인데 자식을 안 가르치고, 자식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어떤 아버지도 “저는 이만큼 성공했지만, 제 아들은 저처럼 성공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너무 피곤한 일이거든요. 그냥 소나 키우면서 살면 좋겠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분명히 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앞으로 자신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을 것이다. 가르친 후에는 어떻게 됐겠느냐? 자식은 여전히 그대로고, 그의 운명 역시 그대로다.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여기에서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느냐? 자식이 걸어가는 길은 부모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부모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식에게도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지만, 아무리 말해도 자식이 믿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또 어떤 부모는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자식은 믿는다. 그 자녀는 하나님을 믿은 후로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진리를 받아들여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운명이 바뀌었다. 이것이 부모가 교육한 결과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이는 하나님이 예정하고 택한 바와 관계가 있을 뿐이다.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는 말에는 문제가 있다. 부모에게 자녀를 가르칠 책임이 있다고는 하나 자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사람의 본성이다. 교육으로 사람의 본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사람이 평생 어떤 길을 걷느냐 하는 것은 부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정한 바이다.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정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인류가 체험을 통해 종합해 낸 것이다. 상대가 미성년자일 때, 너는 그가 어떤 길을 걸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성인이 되면 사상이 생기고, 문제를 사고하게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일을 할지 선택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고위 관리가 되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변호사가 되겠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작가가 되겠다고 하는 등 각자 다른 선택을 하고, 자신만의 생각을 갖는다. 누구도 “부모님이 가르쳐 줄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부모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될 거예요.”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런 바보는 없다. 성인이 되면 사상이 활성화되고, 조금씩 성숙해지며, 눈앞에 놓인 길과 목표가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럼 그가 어떤 부류이고 어떤 집단에 속하는지가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나고 나타난다. 이때, 모든 사람의 성격이 점차 명확해지고, 성품도 점차 분명해지며, 그가 추구하는 길이나 인생 방향, 그가 속하는 집단 역시 점차 확실해진다. 이는 다 무엇에 근거한 것이겠느냐? 근원을 따져보면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지, 부모와는 상관이 없다. 이제 이 부분이 확실히 이해가 되느냐? 그럼 부모와 관계있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생김새, 키, 유전자, 유전병 등이 부모와 약간 관계가 있다. 어째서 ‘약간’이라고 하겠느냐? 100%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가족은 모든 세대가 같은 병에 걸렸지만, 그의 세대에 이르러 그 병이 사라졌다. 이는 어찌 된 일이겠느냐? 혹자는 “그건 그 사람의 성격이 좋아서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겠느냐?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렇다. 그럼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는 말이 정말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이제 분명해졌을 것이다. 분별하지 못하면 안 된다. 진리가 없으면 어떤 일도 밝히 알 수 없다.

일상생활 속에서, 사탄에게서 비롯된 이 언뜻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관점들은 모두의 머릿속에 적잖이 존재한다. 내면에 도사리고 쌓여 있다가 일이 닥치면 표출하는 것이다. 혹자는 “훌륭한 남자는 여자와 다투지 않는 법입니다. 제가 얼마나 고상한지 보십시오. 저는 사내대장부고, 당신은 연약하고 소심한 여자이니, 저는 당신과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는 이 말을 무엇으로 여기는 것이냐? (진리로 여깁니다.) 진리로 여기고 진리 실행의 원칙으로 여긴다. 또 혹자는 정인군자처럼 준수하게 생겼지만, 하는 짓은 영 수상한 데다가 늘 위장하며 남들과 함께할 때 무척 간사하고 음흉하게 굴어 많은 사람이 간파하지 못하는 이를 보면서 “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정직하고 선량하며 남에게 우호적인 사람, 남과 척을 지지 않는 사람이 되려는 생각뿐입니다.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마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비슷한 의미를 지닌 하나님 말씀도 있고요.”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어떠하냐?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마라’는 말을 보아라. 사람에게 일이 닥치면 내면에 있던 속담이며 명언, 성어들이 튀어나오고,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데, 거기에서 진리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도 마지막에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깨우쳐 주셨군요.”라고 한다.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마라’는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옳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그런데 어디가 옳지 않으냐? 거짓 군자의 잘못은 ‘거짓’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으로 꾸며 낸 군자는 되기 싫어하고 진짜 소인배가 되기를 원한다. 사람이 진짜 소인배에 동조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그는 진실하기에 소인배라고 할지라도 모두에게 인정을 받는다. 그럼 너희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 진짜 소인배가 되고 싶으냐, 아니면 거짓 군자가 되고 싶으냐? (모두 원치 않습니다.) 어째서 이 두 부류가 되고 싶지 않으냐? (둘 다 진리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거짓 군자가 되라거나 진짜 소인배가 되라고 한 적이 없다. 관련된 근거를 찾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했다. 그럼 정직한 사람과 진짜 소인배는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소인배’라는 단어는 부정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진실한데, 어째서 좋지 않으냐?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진짜 소인배와 거짓 군자 두 부류 모두 긍정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근거는 무엇이냐? 소인배란 무엇이냐? 통상적으로 소인배는 어떤 단어와 연결되느냐? (비열함과 연결됩니다.) 그렇다. 하나님 말씀은 ‘비열함’을 어떻게 형용하고 정의하느냐? 하나님 말씀은 ‘비열함’을 긍정적인 단어로 정의하느냐, 부정적인 단어로 정의하느냐? (부정적인 단어로 정의합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단어로, 하나님에게 정죄되는 말이다. 일 처리와 관점이 비열한 사람은 모두 소인배다. 일반적으로 소인배의 성품과 본질의 또 다른 측면의 정의는 무엇이겠느냐? 이기적인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부류는 이기적이고 비열하다. 설령 그가 드러내는 것이 진실한 것, 진짜 성품일지라도 그는 역시 소인배다. 거짓 군자는 간사하고 사악해서 늘 스스로를 위장하고, 남들에게 허상을 보여 주며, 화려하고 우호적인 모습만을 보여 준다. 또 자신의 진짜 성품과 생각, 관점을 꼭꼭 숨겨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그를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사람은 어떤 성품을 지닌 것이냐? (간사하고 사악한 성품을 지닌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악한 무리이다. 그러니 군자든 소인배든 이 두 부류는 다 좋은 사람이 아니다. 하나는 내면이 나쁘고, 다른 하나는 외면이 나쁘나 사실 그 성품은 동일하다. 둘 다 더없이 사악하고 이기적이고 간사하다. 이렇게 사악하고 간사한 두 부류가 정직한 사람이 되고자 추구하는 자들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두 부류 중 어떤 부류가 되든 하나님이 요구하는 좋은 사람, 정직한 사람은 아니다. 너는 하나님이 혐오하는 사람일 뿐, 하나님이 되라고 요구한 사람이 아니다. 그럼 말해 보아라.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마라’는 말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내용으로 볼 때, 이 말은 진리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거짓 군자를 공격하고 정죄함으로써 좋은 사람 행세를 하며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그 소인배의 비열함이 꽤나 정의롭고 진실한 양, 정의의 힘이라도 지닌 양 말이다. 소인배 주제에 무슨 정의를 좇는단 말이냐? 너는 정죄되어 마땅한 사람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이런 단어, 이런 것들이 적잖이 존재한다. 또 많은 사람이 이런 관점을 지킨다. 전통문화든, 민간의 속담이든, 혹은 집안의 가훈이나 가규든, 한 나라의 법률 제도든 사람은 언제나 사회에서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고 널리 퍼진 것들, 나아가 사회에서, 인류 가운데서 오랫동안 긍정적인 사물로 여겨져 전파되고 제창되던 것들을 다음 세대, 또 그다음 세대에게 가르친다. 어떤 말들은 사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실행의 원칙이나 생존의 원칙으로 삼는다. 또 어떤 말들은 사람이 그 관점에 동조만 할 뿐 그렇게 실행하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실행하려고 하든 그러지 않든, 네 내면 깊은 곳은 이런 말들을 처신의 실행 원칙으로 삼는다. 결국 이런 것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 큰 방해가 되며, 백해무익하다. 현대인이 자주 언급하는 말을 예로 들어 보겠다. “생명은 고귀하고 사랑은 더욱 귀하나 자유를 위해서라면 둘 다 버리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자유를 추구하고 봉건 전통 제도에서 벗어나려는 동서양의 지사들에게 제창되고 추앙받는 명언이다. 여기에서 사람이 추구하는 중점은 무엇이냐? 생명이냐? 아니면 사랑이냐? (둘 다 아닙니다. 자유입니다.) 그렇다. 자유다. 그럼 이 말이 진리겠느냐? 이 말의 뜻은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생명도, 사랑도,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버리고 아름다운 자유를 향해 달려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자유를 어떻게 보았느냐? 그들이 생각하는 이 자유를 어떻게 해석했느냐? 전통을 부수는 것, 낡은 관습을 부수는 것, 봉건 군주제를 부수는 것을 자유라고 해석했다. 또 있느냐? (정권에 통제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권력이나 정치에 통제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이러한 자유이다. 그럼 그들이 말하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말하는 자유와 같은 점이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도 이런 관점을 지닌 자가 있을지 모른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정말 좋아. 자유롭고 마음이 편안하지. 관습이니 하는 것들을 따지지 않아도 되고, 전통문화의 형식을 취하지 않아도 되잖아. 관혼상제 같은 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고. 모든 풍습을 내려놓을 수 있으니 정말 자유로워!’라고 말이다. 정말 이렇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도대체 자유란 무엇이냐? 너희는 지금 자유로우냐? (어느 정도 그렇습니다.) 그럼 그 어느 정도의 자유는 어떻게 얻은 것이냐? 그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진리를 깨닫고, 사탄의 흑암 권세를 깨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탄의 흑암 권세를 깨뜨리면 어느 정도 해방감을 느끼고 자유롭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해부해 주지 않는다면, 너희는 스스로가 정말 자유롭다고 생각할 것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진정한 자유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육체의 공간적, 물질적 자유와 해방이 아니다. 진리를 깨달은 후 마음속으로 각종 사람과 일, 사물, 세상에 대해 올바른 관점을 갖고, 올바른 인생 방향과 목표를 추구하여 사탄의 권세와 사상, 관점에 속박되지 않을 때 마음이 자유로워지는데,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이다.

어떤 이방인 젊은이는 자기가 자유를 좋아한다고, 한 마리의 새처럼 구속받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삶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집안의 지긋지긋한 규칙이나 가르침들을 몹시 경멸했다. 그는 수시로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나는 아주 전통적인 가정에서 태어났어. 가족도 많고 집안 규율이며 전통도 무척 많아. 심지어 가족 사당도 있다니까? 거기 가 보면 세대마다 위패가 모셔져 있어. 하지만 나는 그 전통들을 깨부수고 집안의 규율이나 가풍, 세속의 영향에서 벗어났지. 어때? 나라는 사람은 전통과는 거리가 멀어.” 그러자 친구는 “그래 보여. 넌 전통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 보여.”라고 말했다. 그것을 어디에서 알 수 있겠느냐? 그는 혀와 코에 피어싱을 하고, 귀도 4, 5군데나 뚫고, 배꼽에도 피어싱을 했으며, 팔뚝에는 뱀 문신을 새겼다. 뱀은 중국인들이 불길하게 생각하는 동물인데 하필 그 동물을 새겨 넣어 보는 사람이 움찔할 정도였다. 이는 전통과 거리가 먼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전통과 무척 거리가 멀다. 또한, 그가 하는 말에는 전위적인 분위기가 드러났다. 누구든 그를 보고 “저 친구, 대단하네! 전통과는 거리가 멀어. 아주!”라고 말했다. 그는 전통과 거리가 먼 것을 이런 부분에서만 드러내면 안 되겠다고, 더 실질적이고 남들에게 자신이 전통적이지 않다는 걸 더욱 잘 보여 줄 수 있는 상징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보통 피부색이 노란 중국인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을 보고 그는 굳이 백인 외국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더욱 그가 정말 전통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모든 부분에서 여자 친구를 본받아 여자 친구가 하는 말을 따라 하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얼마 후 그의 생일날, 여자 친구는 그에게 커다란 상자에 담긴 신비한 선물을 내밀었고, 그는 신이 나서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포장을 하나하나 벗겨 내자 초록색 모자가 나왔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녹색 모자(역자 주: 바람난 아내의 남편을 비유하는 표현)’가 상징하는 바를 알지 않느냐? 이 얼마나 전통적인 상징이냐? 모자를 본 그는 화가 나서 “이게 무슨 선물이야? 누구한테 하는 선물이야?”라고 말했다. 기뻐할 줄 알았던 남자친구가 화를 내자 여자친구는 그 이유를 생각하지 못하고 알 수도 없었다. “얼마나 힘들게 구한 모자인데 그래. 자기한테 잘 어울릴 거야.”라고 말했다. “녹색 모자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 “그냥 모자잖아? 녹색 모자가 얼마나 예쁜데.” 그녀는 계속 그에게 모자를 써 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권해도 쓰지 않았다. 서양인이 ‘녹색 모자’의 의미를 알겠느냐? (모릅니다.) 이 일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밝혀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모두 대답을 하지 못하는데, 왜 이 일에 대해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냐?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냐? 너희는 이 남자와 같다. 전통적이지 않고, 전통을 내려놓고 사탄의 전통문화 관념에서 벗어나 진리와 자유를 추구한다는 기치를 들고 있지만, 녹색 모자 하나에 꽂혀 있다. 그 남자는 여자친구가 모자를 쓰라고 해도 계속 거절하다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 이 모자를 꼭 씌우려고 하는데, 내가 이 모자를 쓰면 비웃음당한다고!” 이것이 바로 문제의 초점이자 근원이며, 이것이 바로 전통이다. 이 전통은 색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물건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물건이 사람에게 전달하는 암시와 관점에 있다. 녹색 모자는 도대체 무엇을 암시하느냐?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람은 이 색상의 모자에 부정적인 꼬리표를 붙여 놓았다. 그래서 거부하는 것이다. 왜 거부하겠느냐? 왜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느냐? 네 내면에 전통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전통 사상 자체는 진리가 아니라 물질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와 종족이 그것을 은연중에 부정적인 사물로 변질시켰다. 예를 들어, 사람은 하얀색을 거룩함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검은색을 흑암과 사악함의 상징으로 생각하며, 붉은색은 경사스러운 일, 피비린내, 그리고 열정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과거, 중국인들은 결혼할 때 빨간 옷을 입었으며, 혼인을 경사라고 여겼다. 또 서양인들은 결혼할 때 예쁘고 깨끗한 흰색 옷을 입는데, 이는 거룩함을 의미한다. 결혼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서로 다르다. 한쪽은 빨간색으로 대표되고, 한쪽은 흰색으로 대표된다. 이 두 가지는 결혼이라는 일에 대한 축복의 태도를 의미한다. 민족마다, 종족마다 같은 것을 가져다 서로 다른 용도로 사용하며, 그렇게 그들의 문화 배경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문화 배경이 만들어지면 뒤이어 전통문화가 탄생한다. 그렇게 서로 다른 사회, 서로 다른 종족에 서로 다른 풍속이 생겨나고 그 풍속은 그 종족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중국인은 ‘녹색 모자’의 암시에 영향을 받았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입되어 어떤 결과가 빚어졌느냐? 모든 남성이 녹색 모자를 쓸 수 없게 되었고, 여성도 쓰지 않게 되었다. 여성이 녹색 모자를 쓰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사실 이 전통문화는 남성에게만 해당한다. 남성이 녹색 모자를 쓰는 것은 부정적인 상징으로 해석되지만, 여성과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이 같은 전통문화가 탄생하는 순간, 배경과 무관하게 해당 종족의 모두가 이 사물에 대해 차별을 하게 된다. 이렇게 차별이 생기면 그 대상은 은연중에 아무 잘못 없는 한 사물에서 부정적인 사물로 변질된다. 사실 그 사물은 아무 잘못이 없으며, 긍정과 부정의 구분도 없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물질, 색깔, 형태를 띤 물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전통문화에 의해 이렇게 해석되고 영향을 받아서 결국 무엇으로 변했느냐? (부정적인 사물로 변했습니다.) 부정적인 사물로 변했다. 부정적인 사물로 변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합리적으로 대하거나 쓸 수 없게 되었다. 보아라, 중국의 시장에는 빨간색, 분홍색, 노란색 등 갖가지 색상의 모자가 있지만, 녹색 모자는 없다. 사람들이 이 전통 사상에 속박되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전통문화 중 한 가지가 사람에게 미친 영향이다.

어떤 사람들은 해외에 와서 유럽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의 문화와 전통, 규범, 의식주 등 물질적인 측면을 접하고, 다른 나라의 법률, 상식에 익숙해져도 자기 나라의 전통에서 벗어나기 아주 힘들어한다. 설사 고향 땅을 떠나 다른 나라의 의식주, 심지어는 법률과 제도를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네가 매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네 관점과 입장이 어떤 건지는 본인도 모른다. ‘난 서양에 있으니까 서양 사람 아닌가?’ ‘난 일본에 있으니까 일본 사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인은 “우리는 초밥을 가장 좋아하고, 우동을 즐겨 먹습니다. 고상하지 않나요?”라고 말하고, 한국인은 “우리는 쌀밥과 김치를 즐겨 먹습니다. 우리 대한민족은 품격이 있지 않습니까? 당신들, 중국인은 당신들의 문화가 유구하다고, 우리보다 몇 천 년은 더 오래되었다고 하는데, 당신들이 우리보다 더 효도를 잘할까요? 당신들한테는 우리 같은 전통이 있나요? 우리처럼 규범이 많나요? 지금 당신들은 이러한 것들을 중시하지 않고 다들 낙후되었어요. 우리야말로 진정으로 전통 있는 민족입니다. 우리의 문화야말로 진정한 문화고요!”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문화가 우수하다고 여기며, 앞다투어 더 많은 것들을 세계 유산에 등재하고자 한다. 이런 식의 경쟁은 어떻게 된 것이겠느냐? 각 국가와 종족, 소수민족들은 모두 자신의 조상들이 남긴 것, 규범, 전통, 풍속, 풍조를 좋은 것, 긍정적인 것이라고 믿고, 이 인류에게 전파시킬 만한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사상과 관점은 곧 이러한 것들이 진리이자 좋은 것, 긍정적인 것이며, 이 인류가 계승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 아니겠느냐? 그럼 이 계승해야 할 것들이 자유와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느냐? 방금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는데, 그는 집안에서의 속박을 깨부수고, 온몸에 피어싱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여기저기 문신을 새기고, 외국인 여자친구까지 사귀었다. 표면적으로, 육적으로 보면 그는 집안의 규율을 지키지 않고 전통도 벗어 버린 것 같으며, 형식과 행위에서 볼 때, 나아가 그의 주관적인 바람 측면에서 볼 때 이미 가족과 전통, 풍속 같은 것에서 벗어난 듯하다. 하지만 생일 선물 하나가 그를 드러냈으며,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는 그의 생각을 부정하고 정죄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전통적이냐, 아니면 전통과는 거리가 멀겠느냐? (전통적입니다.) 전통은 과연 좋은 것이냐, 아니면 나쁜 것이냐? (나쁜 것입니다.) 그렇기에, 네가 스스로를 전통적이라고 생각하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든, 네가 어떤 종족이든, 소위 고상한 종족이든 평범한 종족이든 네 내면의 사상은 속박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네가 아무리 자유를 추구하고 숭상해도, 전통적인 세력과 전통적인 가풍을 깨부수겠다는 다짐, 바람, 뜻이 아무리 위대해도, 네 실제 행동이 아무리 고무적이고 강력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사람은 사탄이 주입한 학설과 궤변 속에서 맴돌 뿐, 벗어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전통문화의 영향을 받고, 어떤 사람은 사상 교육의 영향을 받으며, 어떤 사람은 신분과 지위의 영향을 받고, 또 어떤 사람은 무슨 무슨 ‘주의’의 영향을 받는다. 정치인을 예로 들어 보자. 공산주의를 숭상하는 사람들은 무산 계급에서 시작해 공산주의 선언과 이론을 받아들이고 전통과 봉건 군주제, 낡은 관습을 깨부순 뒤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받아들인 후 자유로워졌느냐, 아니면 여전히 제약받고 있느냐? (여전히 제약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돌아선 것이 곧 자유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이 낡은 것에서 어떤 새로운 것으로 돌아서든,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영원히 사탄의 올무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공산주의나 특정 사업을 위해 몸 바치고, 어떤 사람은 한 마디 맹세를 위해 몸 바치며, 어떤 사람은 한 마디 이론을 위해 몸 바친다. 또 어떤 사람은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국가에 어려움이 닥치면, 모든 국민이 책임을 져야 한다.” 등의 말을 신봉한다. 이러한 것들이 전통문화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언뜻 보기에 무척 긍정적이고 정당한 것 같고, 인류 가운데서 무척 숭고하고 고상한 것 같지만 사실 이것들은 또 다른 각도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람의 영혼을 결박하고 사람을 제약하며, 사람이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인류는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인류 가운데서 그나마 긍정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받아들여 본인의 생존의 길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소위 ‘전통문화’, 세상 사람들이 그럭저럭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또 받아들인 후에는 자기 삶에 밑천과 저력, 동력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지식과 학력에 대해 이 사회와 인류가 내린 정의를 받아들였다고 해 보자. 그 정의는 무엇이냐? (지식이 운명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모든 게 다 쓸모없고, 오직 공부만이 최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러한 것들에 대해 마음속 깊이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동조한다. 받아들이고 동조하는 동시에, 이 사회에서 오래 고생할수록 그런 것들을 더 귀하게 여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지식으로 살아가며, 지식과 학력이 없으면 사람은 사회에서 발붙이고 살아갈 수 없다고, 무시당하고 차별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을 힘을 다해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학력이 높을수록 사회에서, 한 종족과 사람들 사이에서 네 사회적 지위는 높아지며, 네가 남들로부터 받는 존중과 대우 등도 점점 높아지고 좋아진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학력은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 대학교수 칠팔 명이 베이징에 연수하러 갔다. 당시에는 특별 배정 차량이나 전용 차량 같은 게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베이징에서 버스를 타야 했다. 사실 이런 교수들은 베이징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서민이지만, 그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의 심각성이 바로 여기에 있었고, 또 여기에서 일이 생겼다. 어떤 일이 생겼겠느냐? 그 교수들은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다들 마음이 급해져 버스가 도착하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내리기도 전에 벌 떼처럼 밀고 올라탔다. 서로 밀고 소리치며 현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그때, 곰곰이 생각하던 교수들은 이렇게 말했다. “베이징 사람들은 매일 출퇴근 때 버스 타는 것조차 이렇게 힘들군요. 우리는 대학교수이니 국민들의 실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수준 높은 지식인으로서 서민들과 똑같은 식견을 보여 줄 수는 없지요. 레이펑(雷鋒) 정신을 발휘해 저들 먼저 타라고 합시다. 밀고 올라타지 말고요.” 암묵적인 합의에 이른 그들은 다음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다음 버스도 그만큼 사람이 많았고, 다들 난리를 치며 승차했다. 그들은 당황해서 만원 버스가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할 뿐 밀고 올라타지 않았다. 그들 몇 명은 다시 상의하며 말했다. “조급해하지 맙시다. 그래도 우리는 수준 높은 지식인 아닙니까? 서민들과 다투며 버스에 오를 수는 없죠. 마음을 느긋하게 먹자고요. 다음 버스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겁니다.” 세 번째 버스가 오자 그들 몇 명은 조금 조급해졌다. 일부는 주먹을 쥐며 “이 버스도 사람이 많으면 안 탈 겁니까? 이번에 안 타면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버스에도 못 탈 겁니다. 그냥 밀고 올라갑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또 어떤 교수들은 “수준 있는 지식인들이 어떻게 밀고 올라탈 수가 있습니까? 그건 이미지를 깎아 먹는 일이죠! 우리, 수준 높은 지식인들이 버스에 밀고 올라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얼마나 체면이 떨어지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의견 일치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상의하는 동안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또 많아졌다. 그러자 그들은 잔뜩 긴장한 채 더 이상 상의하지 않았다. 다음 버스가 와서 차 문이 열리자 지난번 버스 때 교훈을 얻은 그들은 하차하는 사람들이 내리기도 전에 힘껏 밀고 올라갔다. 몇 명은 밀고 올라탔고, 몇몇 우아한 지식인, 즉 유학자들은 패기와 열정이 없어서 밀치고 올라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다. 말해 보아라, 이것은 실화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원 버스에 밀고 올라타는 일은 너무도 흔하다. 그런데 이 지식인들은 정말 위장을 잘하지 않느냐! 이 이야기의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먼저 이 지식인들이 고등교육을 받고, 남을 가르치는 교수로 활동하며,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들이 받은 교육과 갖춘 지식은 일반인의 수준보다 높았다. 그들의 지식은 그들이 교사나 교관이 되어 지식을 가르치고 전수해 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래서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 이 수준 높은 지식인들의 사상 관점에는 문제가 없겠느냐?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럼 그들의 문제는 어디에 있겠느냐? 이 일에 관해 분석해 보도록 하자. 그들은 많은 지식과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는데 그들의 사상은 경직되어 있겠느냐, 자유롭겠느냐? (경직되어 있을 것입니다.) 경직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들의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먼저, 그들은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고 자처했다. 이 말에는 문제가 없느냐? (있습니다.) 이 말에는 문제가 있다. 그 후, 그들은 “우리는 수준 높은 지식인들이니 다른 사람들을 밀면서 버스에 올라타선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는 문제가 없느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문제이다. 세 번째 문제는 그들이 “우리, 수준 높은 지식인들은 다음 버스를 기다려도 됩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에는 문제가 없느냐? (문제가 있습니다.) 모두 문제가 있다. 그럼 이 세 가지를 통해 문제를 분석하고, 문제가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아라. 너희가 이 문제를 확실히 파악했다면, 첫째로 너희는 수준 높은 지식인들을 숭배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너희는 수준 높은 지식인이니 뭐니 하는 게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첫 번째 문제는 무엇이었느냐?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것이었다. 이 말에는 문제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자처’라는 단어에는 문제가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고 칭했다. 그럼 ‘스스로를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고 한 말에는 문제가 없느냐? 사실, 대학 교수는 사회에서 수준 높은 지식인에 속한다. 이것이 사실인데 왜 이 말에 문제가 있다고 하겠느냐? (그는 지식을 배운 후에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데는 분명 한 가지 성품이 있다. (그는 자기가 배운 지식이 많은 것이 남들보다 뛰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러한 것들은 사람의 성품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일부만 맞았다. 그러나 확실히 이야기하지는 못했구나. 누가 더 말해 보아라. (하나님, 그들은 스스로 고결하다고 자처한 것 아닙니까?) 맞게 말했지만, 본질을 분명히 말하지는 못했다. 더 자세히 말해 보아라. (그들은 지식을 배운 후 자신들이 남보다 고상하고 고귀하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평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정상인이 이 사회에서 살면서 버스에 밀고 올라타는 것은 실생활의 환경으로 인한,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무척 고귀하고 고상하게 여겼기에 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렇듯 정상인의 행동이 그들의 신분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는 게 비정상적으로 느껴집니다.) 비정상적이다. 그들은 수준 높은 지식인을 자처하는데, 그 안의 함의가 비정상적이었다. 즉, 그들의 인성 안에는 왜곡된 것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남들보다 고상하고 고귀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그들이 수많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머릿속에는 지식이 가득하고, 누구를 만나도 끝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고, 뭔가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식을 무엇으로 보았느냐? 사람으로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도덕의 준칙으로 보았다. 그들은 지식이 있으면 인격과 인품, 신분이 고상해진다고, 귀하고 가치가 생긴다고 생각하는데, 그 의미인즉슨, 수준 높은 지식인은 곧 성인(聖人)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수준 높다’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버스에 밀고 올라타지 못하는 것이다. 왜 밀고 올라타지 않겠느냐? 무엇에 지배되었겠느냐? 무엇에 제약받고 속박받았겠느냐? 그들은 버스에 밀고 올라타는 것이 그들의 신분이나 이미지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신분과 이미지는 다 지식이 준 거라고 생각하기에 스스로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것이다. 이렇게 분석하니 그가 한 말이 역겹지 않으냐? 매우 역겹다. 그는 또 여기저기에서 “우리는 수준 높은 지식인입니다.”라고 말하고 다니는데, 사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그저 지식인이고, 궁상맞은 꼴을 하고 있으며, 모두에게 무시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스로 몹시 고상하다고 여기니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그들은 자신이 무척 고상하고, 자기 신분이 매우 고귀하다고 생각하며, 심지어는 스스로를 성인으로 여긴다. 이러한 관점은 그들에게 일종의 속박 아니겠느냐? 지식에 대한 그들의 정의는 무엇이냐? 지식이 있으면 인격이 높아지며, 사람이 존귀해지고 고상해지니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인들의 정상적인 행위가 그들에게는 경멸받고 정죄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식인은 재채기를 한 후 주변을 둘러보며 급히 사과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재채기를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사실 살면서 트림이나 재채기를 하는 것은 무척 정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 지식인들 눈에는 그것이 저속하고 비천한 행위로 보인다. 그들은 그런 행위를 경멸하고 멸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저 예의 없는 무지렁이들 좀 보십시오. 재채기하는 모습도 보기 흉하군요. 앉으나 서나 자세가 바르지 않아요. 버스가 오면 밀고 올라탈 줄만 알고요. 양보라고는 전혀 모르죠!” 지식에 대한 그들의 정의는 ‘지식은 신분의 상징이다. 지식은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고, 사람의 신분과 몸값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무엇이었느냐? (‘수준 높은 지식인은 사람들을 밀면서 버스에 올라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밀면서 버스에 올라타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밀면서 버스에 올라타는 것은 그들이 삶 속에서 마주하는 한 가지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이 일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들은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반드시 언행이 우아해야 하고, 신분에 걸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걸음걸이는 가벼워야 하고, 사람들과 접촉할 때는 다정하고 친절해서 존중할 만하다는 느낌을 줘야 하며, 언행은 반드시 우아해야지 평범한 사람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어야 신분의 존귀함과 비범함을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버스에 밀고 올라타는 일 등에서 그들은 마음속 깊이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 건 사회 하층민,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 심오한 지식이나 고급 지식인과 같은 신분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야.’ 그럼 이 수준 높은 지식인들은 어떤 일을 하겠느냐? 강단에서 도를 전수하고, 지식을 가르치며, 의문을 풀어 준다. 이것이 그들의 직책이고 신분, 이미지이며, 직업의 상징이다. 그들은 이러한 일들만 할 줄 알 뿐, 서민들의 잡스러운 일 같은 건 아는 바가 없다. 그들은 이 ‘저급 취향’의 부류에서 벗어났다. 서민들의 잡스러운 일, 버스에 밀고 올라타는 것 같은 행위를 그들은 뭐라고 정의했느냐? (저속한 짓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렇다. 저속하고 비천하다. 그들은 마음속 깊이 그들보다 수준이 낮은 평범한 서민들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제 세 번째 문제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우리, 수준 높은 지식인들은 다음 버스를 기다려도 됩니다.”라는 건 어떤 정신이냐? 이는 전통문화 중 공융양리(孔融讓梨)의 정신 아니겠느냐? 지식인들은 전통문화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들은 전통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수많은 사상과 관점을 마음속에 수용해 긍정적인 사물로 대하며, 심지어는 몇몇 유명한 말을 좌우명으로 삼는다. 이렇게 인생의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전통문화는 유가 학설을 대표로 한다. 유가 학설은 일련의 사상과 이론으로, 주로 전통 도덕 문화를 널리 퍼뜨리며, 역대 통치 계급으로부터 숭배받았다. 공자와 맹자 등은 그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유가 학설은 처신할 때 인의예지신을 지켜야 한다고, 어떤 일이 닥치든 먼저 마음을 가라앉혀 참고 인내하며 할 말이 있으면 찬찬히 해야 한다고, 싸우거나 다투지 말고 양보하는 법을 배워 모두에게 존중받아야 품격 있게 처신하는 거라고 주장한다. 이 지식인들은 스스로를 남들 위에 놓으며,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인내하고 양보하고 포용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지식의 ‘역할’이 무척 크지 않으냐! 이 부류는 거짓 군자와 매우 비슷하지 않으냐? 사람이 배운 지식이 많아지면 거짓 군자가 된다. 이 기품 있는 선비들을 한마디로 형용하면 ‘우아한 품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품 있는 선비들이 함께 어울릴 때의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처세술은 무엇이겠느냐? 예를 들어, 평범한 서민들은 리(李) 씨 성을 가진 남성을 부를 때 ‘라오리(老李)’ 혹은 ‘샤오리(小李)’라고 부른다. 지식인들이 이렇게 부르더냐? (그러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부르느냐? (‘리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여성을 만나면 ‘OO 여사님’이라고 부르며 신사처럼 매우 공손하고 품격 있는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신사들의 우아한 품격을 열심히 배우고 따라 한다. 함께 말하고 어떤 일을 상의할 때 그들은 어떤 말투와 방식을 취하겠느냐? 표정은 더없이 온화하고, 말은 우아하고 함축적이며, 모두 자기 관점만을 이야기할 뿐, 다른 이의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알아도 말하지 않는다. 아무도 상대를 상처 주지 않는데, 솜과 솜이 부딪히는 것처럼 말투가 더없이 온화하며 뜨뜻미지근해서 듣는 사람이 다 역겹고 초조하고 화가 날 정도다. 사실 그들은 아무도 명확한 관점을 말하지 않고, 아무도 상대에게 승복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위장에 매우 능해서 이렇게 작은 일까지 위장하고 포장하며, 아무도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서민들 앞에서 그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어떤 이미지를 꾸며 내겠느냐? 서민들 눈에 그들은 겸손하고 예의 바른 군자로 보이려 한다. 군자란 남들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사람, 사람들이 존경하고 숭배하는 대상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일반인보다 높은 식견을 갖고 있고, 일반인보다 사리 분별이 잘된다고 생각하기에 다들 일이 생기면 그들을 찾아가 물어본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결과로, 사람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는 것이다.

방금 해부한 세 가지 문제로 볼 때, 그 교수들이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는 호칭을 얻은 후 사상이 더 자유로워졌겠느냐, 아니면 더 속박되었겠느냐? (더 속박되었을 것입니다.) 속박되었을 것이다. 무엇에 속박되었겠느냐? (지식에 속박되었습니다.) 지식은 그들 업계의 것으로, 사실 그들을 진정으로 속박한 것은 지식이 아니다. 그들을 속박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지식에 대한 그들의 태도, 그리고 지식이 그들의 사상에 초래한 영향과 주입한 관점들이다. 이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그들은 배운 지식이 많을수록 자기 신분과 지위가 남들과 달라졌다고, 자신이 고상하고 위대해졌다고 생각하며, 이와 동시에 사상 역시 점점 더 속박된다. 그럼 이러한 면에서 봤을 때, 더 많은 지식을 배운 사람이 자유를 얻었겠느냐, 아니면 자유를 잃었겠느냐? (자유를 잃었을 것입니다.) 사실 자유를 잃었다. 지식은 사람의 사상과 사회적 지위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은 긍정적이지 않다. 지식을 많이 배운다고 해서 처신할 때 마땅히 지녀야 할 원칙과 방향, 목표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식을 추구하면 할수록, 지식을 깊이 습득하면 할수록 결국 정상 인성이 지녀야 할 사상과 관점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수많은 지식과 교육을 받은 이 지식인들처럼 말이다. 그들은 최소한의 상식조차 모른다. 무슨 상식 말이겠느냐? 사람이 많을 때 밀면서 버스에 올라탄다. 밀지 않으면 영원히 버스에 타지 못한다. 이렇게 간단하기 그지없는 도리조차 그들은 모른다. 그러니 그들이 똑똑해졌겠느냐, 아니면 어리석어졌겠느냐? (어리석어졌습니다.) 사실 그들은 전부 바보들이다. 서민들은 그들과 같은 고급 지식과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고 지위도 없지만, 그 이치를 알기에 “버스에 탈 때 사람이 많으면 밀면서 올라가야 합니다. 그것도 힘껏 밀어야 하죠. 힘을 덜 주고 좀 주저하면 뒤로 밀려나서 다음 버스를 타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서민들이 익히 알고 있는 최소한의 생활 상식이다. 하지만 그 지식인들은 이것을 모른 채 다음 버스, 또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그들은 무엇에 제약받았겠느냐? “우리는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는 말에 단단히 얽매여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실생활의 문제조차 어떻게 직면하고 처리해야 할지 모르니, 그야말로 한 무리의 바보들이다! 지식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느냐? 세속적인 것을 초탈하게 했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실생활 속에서 어떤 일을 마주할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지 못하게 했다. 서민들이 실생활 속에서 수시로 마주하는 문제를 그들은 대단한 이론으로 처리하지만, 그렇게 처리한 후에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모를 것이며, 또 어쩌면 노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을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후광이 없어질 것이고,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는 명예도 한평생 그럭저럭 누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버스에 타다가 곤란했던 장면을 떠올리며 자기가 그렇게 고상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문득 깨달을 것이다. 또 문득 ‘우아함이 밥 먹여 주나? 나도 서민들처럼 하루 세끼 밥을 먹잖아?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고. 나이가 들면 나도 구부정하게 걷지 않나? 또 나 역시 위험한 일이 닥치면 무서워하고 떨고 겁을 먹잖아? 가족이 죽으면 괴로워하고, 기쁜 일이 생기면 기뻐하지 않나? 이런 게 서민들처럼 살아가는 것 아니겠어? 남다르지 않다고!’라고 깨닫겠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할 때 소위 ‘긍정적인’ 말과 관점을 받아들이면 드러내는 갖가지 추태이다. 사람은 그런 관점이 옳은지 그릇되었는지 알지 못할 때, 늘 그런 관점과 말을 진리로 여겨 지키고 적용한다. 적용할 때는 갖가지 결과를 맞이하며, 또 갖가지 추태를 보이게 된다. 이는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느냐? 사람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동시에 또 끊임없이 이쪽 소용돌이 속에서 저쪽 소용돌이로 휘말리며, 하나의 결박에서 또 다른 결박에 빠진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기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네가 지키는 것이 하나의 관점이든 전통문화든, 어떤 규칙이나 제도, 이론이든, 이러한 것들이 사회에서 낙후된 것이든 전위적이고 세련된 것이든 영원히 진리를 대신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네가 이것들을 얼마나 잘 지키든, 얼마나 잘 적용하든 결국 이것들은 네가 진리를 얻게 하는 게 아니라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한다. 네가 이러한 것들을 지키면 지킬수록 진리로부터 멀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도와 진리의 도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반대로, 네가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이 소위 ‘긍정적인’ 것, 이론, 거짓 진리를 내려놓으면 진리에 진입하는 속도가 상대적으로 빨라질 것이다. 그러면 일상생활 속에서 이 이른바 ‘전통문화’나 거짓 진리로 진리나 하나님 말씀을 대신하여 실행 원칙으로 삼지 않게 되며, 추태도 점점 줄어들고 해결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 가정이나 국가의 전통문화에서 벗어나 외래, 이민족에게서 비롯된 전통문화를 받아들인 것을 진리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낡은 전통문화와 사상, 관점을 벗어 버리고 비교적 선진적이고 현대적인 사상을 받아들인 것을 진리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보면 그 생각이 맞느냐, 틀렸느냐? (틀렸습니다.) 모두 틀렸다. 사람은 낡은 것을 벗어 버리기만 하면 자유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를 얻었다는 말의 함의는 무엇이냐? 진리를 얻고,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진정한 삶의 방법을 얻은 것, 사람은 이런 것이 참도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겠느냐? 이것이 맞겠느냐? 그렇지 않다. 인류가 아무리 현대적이고 선진적인 문화를 받아들여도 그것들은 결국 다 전통문화로, 그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전통문화는 어디까지나 전통문화다. 전통문화가 세월의 흐름과 현실의 시험을 견뎌냈다고 할지라도,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떠받들어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전통문화일 뿐이다. 이러한 전통문화는 왜 진리가 아니겠느냐? 근본을 따져보면, 그것들은 인류가 사탄에게 패괴된 후에 생겨난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그 안에는 사람의 상상과 관념이 섞여 있다. 더욱이 그것은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켜 초래한 결과이다. 사탄은 인류를 패괴시키는 사상과 관점, 각종 가르침, 논조를 이용해 사람의 사상을 속박하고 패괴시킨다. 만약 사탄이 눈에 띄게 황당하고 그릇되며 잘못된 것들로 사람을 미혹한다면, 사람은 분별할 것이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다. 이런 분별력으로 그것을 부정하고 정죄할 것이다. 그러면 그 학설은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사탄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는 것,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상과 이론으로 사람을 물들이는 한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주입하기에 사람은 아주 쉽게 그것에 미혹되며, 그 가르침은 아주 쉽게 받아들여지고 전파된다. 그렇게 한 세대 한 세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악비(岳飛)나 양가장(楊家將) 등 중국 영웅들의 이야기, 문천상(文天祥)의 애국 이야기 등이 있다. 이러한 사상이 왜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왔겠느냐?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역대 어느 시기든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나 통치자들이 항상 이런 사례와 인물들의 사상, 정신을 통해 한 세대, 또 한 세대 사람들을 지도했다. 그리하여 한 세대, 또 한 세대 사람들이 착실하고 성실하게 그들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했으며, 이 사상들을 통해 매우 수월하게 한 세대, 또 한 세대 사람들을 통치하는 한편, 자신들의 통치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악비와 양가장의 우국충정 이야기, 문천상과 굴원의 애국정신 등을 들어 피통치자인 민중을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에게 한 가지 도리를 알게 했다. 바로 사람이라면 충성해야 하며, 이는 인품이 고상한 사람이 갖추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 말이다. 어느 수준까지 충성해야겠느냐? ‘임금이 신하에게 죽으라고 하면 신하는 죽어야만 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처럼 충성해야 한다. 이는 그들이 떠받드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또 애국지사들을 떠받든다. ‘애국’이란 무엇을 사랑하는 것이냐? 그 땅을 사랑하는 것이냐? 그 국민들을 사랑하는 것이냐? 국가란 무엇이냐? (통치자입니다.) 통치자는 국가의 대변인이다. 만약 네가 “제가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 제 고향, 제 부모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들 같은 통치자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네가 “애국이란 마음속 깊이 통치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받아들이고 네 그런 ‘사랑’에 동의할 것이다. 만약 네가 사랑하는 것이 그가 아니라고 명확하고 분명하게 말한다면 그는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역대의 통치자들은 무엇을 대표하느냐? (사탄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사탄을 대표하며, 사탄과 한 패거리로, 마귀에 속하는 존재이다. 그들은 백성들이 하나님, 창조주를 경배하도록 가르칠 리가 없다. 그렇게 하지 않을뿐더러 백성들에게 통치자는 천자(天子)라고 알려 준다. 천자란 무슨 의미냐? 하늘이 한 사람에게 권력을 내려 준 것으로, 그 사람을 ‘천자’라고 부르며, 그에게는 천하의 백성들을 다스릴 권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통치자가 백성들에게 주입한, 일종의 사상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천자가 된다는 것은 하늘이 정하는 일로, 하늘의 뜻이 그에게 있는 것이니 백성들은 무조건적으로 그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어떤 통치든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이 사람에게 주입한 것은 이런 사상으로, 네가 하늘의 존재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가 천자임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가 천자임을 받아들이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하늘, 하나님,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는 게 아니라 그가 천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그는 하늘의 뜻이 있기에 천자로 태어난 것이니, 백성들은 마땅히 그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입하는 것은 전부 이런 사상이다. 인류의 기원부터 오늘날까지 생겨난 이 사상의 배후에는 해부하는 것이 유래가 있는 단어나 성어든, 아예 유래가 없는 민간의 속담이나 속어든 다 인류에 대한 사탄의 결박과 미혹이 있으며, 패괴된 인류가 이런 사건 자체에 내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정의가 있다. 이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정의가 후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겠느냐? 좋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겠느냐, 아니면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겠느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와신상담’, ‘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 ‘큰일을 위해 치욕을 참는다’,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겉으로는 잔도를 만드는 척하면서 몰래 진창으로 진군해 기습한다’ 등의 말은 후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가져다주었느냐? 사람은 이러한 전통문화를 받아들인 후 한 세대 또 한 세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며,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고 구원하는 사역, 하나님의 경륜 사역과도 점점 멀어졌다. 인류는 전통문화의 잘못된 관점들을 받아들인 후 점점 더 사람의 운명은 자기 손안에 있는 거라고, 행복은 자신의 두 손으로 만드는 것이고 기회는 준비된 자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류는 점점 더 하나님과 하나님의 주재를 부정하고,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게 되었다. 현대인들이 즐겨 말하는 것들은 사실 2천 년 전 사람들이 즐겨 말하던 사상과 내용이 동일하다. 다만, 현대인들은 점점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말하며, 하나님의 존재와 주재를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갈수록 심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죄한다.

예를 들어, 옛사람들이 말하던 ‘국가에 어려움이 닥치면, 모든 국민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구절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모두가 이 말을 무척 귀하게 여기며, 특히 애국지사들은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는다. 너희가 지금 외국에 있는데 중국에 뭔가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 일이 너희와 관계가 있겠느냐? (아무 관계 없습니다.) 어째서 관계가 없다고 하겠느냐? 어떤 이는 “저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증오합니다. 중국은 지금 공산당이라는 사악한 정당이 권력을 잡고 있어요. 공산당은 사탄 마귀이며 전체주의 정당으로, 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들은 저희를 박해하고, 저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증오합니다.”라고 말한다. 언젠가 중국이 멸망의 위기에 처해도 너는 아무 느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살고 있는 도시가 이민족에게 침략당하고 점령당했다는 말을 들으면, 난민이 된 것 같고 유랑민처럼 집이 없어진 것 같아 괴로울 것이며, ‘낙엽은 뿌리로 돌아간다’는 말대로 할 수 없게 됐다고 생각할 것이다. ‘낙엽은 뿌리로 돌아간다’는 말 역시 하나의 전통 사상이다. 또 어느 날, 갑자기 네 고향, 너를 낳고 길러 준 그 땅이 이민족에게 침략당했고, 네가 매일 등하교하던 그 길, 네 집과 논밭이 모두 이민족에게 점령당해 네 몫이 없어졌으며, 네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 작은 땅, 너와 가장 가까운 그 땅, 그곳의 가족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말을 들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라가 없는데, 어찌 집이 있을까! 이제 나는 정말 난민이 되었구나. 정말 돌아갈 집을 잃고 유랑민이 된 거야. ‘국가에 어려움이 닥치면, 모든 국민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맞았어!’ 그리고 그때가 되면 너는 변할 것이다. 그럼 지금은 왜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여기에는 배경과 전제가 있다. 이 나라가 너를 박해하고, 네게 너무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으며, 너를 받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이 나라를 증오하는 것이다. 사실 네가 진정으로 증오하는 것은 이 땅이 아니라 너를 박해한 사탄 정권이다. 너는 그것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에 이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국가에 어려움이 닥치면, 모든 국민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알 게 뭐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너를 낳고 길러 준 그 땅이 더 이상 네게 속하지 않게 되면, 고향을 잃게 되면, 너는 자신이 유랑민, 무국적자가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너는 진정으로 국가를 잃은 것이며, 그때는 가슴이 아플 것이다. 왜 가슴이 아프겠느냐? 지금은 깊이 와닿지 않겠지만, 그때가 되면 깊이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깊이 느끼는 바가 있겠느냐? 나라가 망해서 네가 망국의 노예가 되는 것은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럼 무엇이 두렵겠느냐? 망국의 노예가 되어 남들에게 괴롭힘과 욕설, 차별과 유린을 당하고, 마음 편히 살 곳이 없어지면 그때 ‘나라가 있다는 건 너무도 소중한 일이구나. 나라가 없으면 진정한 집도 없는 거야. 사람이 집을 가지려면 기본적으로 나라가 있어야 해. 그래서 옛말에 ‘국가에 어려움이 닥치면, 모든 국민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 거였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모든 국민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에서 ‘책임’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자기 집의 안녕을 위한 것,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민족 사이에서나 타향에서 차별받을 때, 소속할 곳이 필요할 때, 국가가 뒤에서 네 존엄과 체면, 신분, 지위를 지켜 줬으면 할 때, 너는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이국 타향에 있을 때 뒤에서 강력하게 받쳐 주는 건 위대한 조국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과 심경이 다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지금 너는 단순히 한때의 분노 때문에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든 너와는 무관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가 되어도 이렇게 말하려면 어떤 분량을 갖춰야겠느냐? 이 세상에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강력한 조국이 뒤에서 받쳐 주지 않으면, 이국 타향에서 분명 차별당하고 멸시당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이것을 느낄 때, 너는 첫 번째로 어떤 요구를 하겠느냐? 혹자는 “만약 제가 유대인이나 일본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감히 아무도 저를 괴롭히지 못할 테고, 어느 나라를 가도 존중받겠죠. 저는 왜 중국에서 태어났을까요? 나라가 무능하니 중국인은 어디를 가도 괴롭힘 당하잖아요.”라고 말하는데, 너희는 이런 일이 닥치면 제일 먼저 어떤 생각을 할 것이냐? (저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니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것입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닫고, 어떤 것들을 겪고, 얼마나 많은 체험적 인식을 갖추어야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며, 또 그 말이 자신의 분량이 되겠느냐?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어떤 사상과 인식, 실제 체험을 갖춰야 연약해지지 않겠느냐? 사람들이 네게 침을 뱉고 망국의 노예라고 욕을 해도 괴롭지 않으려면, 어떤 분량을 갖추어야겠느냐? 어떤 분량을 갖추어야 괴롭지 않고 그런 것들에 속박되지 않겠느냐? 지금 너희는 이런 분량을 갖추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면 언젠가는 갖출 수 있겠느냐? 그러려면 어떤 진리들을 갖추어야겠느냐? 어떤 진리들을 깨달아야겠느냐? 지금 일부 사람들은 중국에 있는 가족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붙잡혔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속으로 이해한 ‘모든 것은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말이 도리가 돼 버릴 것이다. 그들은 가족이 잡힌 일에 속박되어 본분을 이행할 의욕을 잃는다. 만약 가족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질지도 모른다. 고향 땅이 파괴되고 그곳 사람들이 전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심정이겠느냐? 국가, 집, 고향, 조국 등 전통적인 것들, 그리고 이 단어들과 관련된 전통 사상과 문화는 너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느냐? 네 생명 속에서 네 모든 행동과 사상, 행위를 주도하고 있지는 않느냐? 만약 네 마음이 여전히 국가, 종족, 민족, 가족, 고향, 땅 등 너와 관련된 이 모든 전통적인 것들에 점유되어 있다면, 또 이것들이 네 마음속에서 일정 부분 전통문화의 색채를 띠고 있다면, 네가 들은 설교와 네가 이해한 진리는 전부 도리에 그치게 될 것이다. 수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내려놓아야 할 것들, 분리되어야 할 것들조차 내려놓지 못하고, 올바로 대하지 못한다면, 네가 이해하는 진리들이 도대체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많은 중국인이 서양에 가면, 자신의 전통문화나 자신이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서양인들에게 주입하려고 한다. 하지만 서양인들도 지지 않고, 자신들의 전통문화 역시 역사가 깊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나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는 전부 ‘고대’라는 말이 앞에 오며, 그들의 문화는 전부 3천 년이 넘는다. 이러한 숫자로 미루어 볼 때, 그 속에는 분명 문화적 깊이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 문화적 깊이에서 생겨난 것들을 두고 거기에는 전 인류의 삶의 정수가 들어 있다고, 그것은 인류의 삶과 생존, 처신을 종합한 최고의 정수라고 여길 것이다. 이 ‘최고의 정수’는 사람들 속에서 전해져 내려오면서 뭐라고 불리겠느냐? ‘전통문화’라고 불린다. 사람들은 한 세대, 또 한 세대 이 전통문화를 계승해 내려왔고, 모두가 마음속으로 그것을 최고라고 생각하게 됐다. 현재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든 지키지 않든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각 종족의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지고지상한 것, 진리로 여긴다. 그렇기에 모든 종족의 사람들은 전통적이고 합리적이며 그 종족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두고 서로 토론하고 비교하며 심지어 그것으로 상대를 제압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중국인이 “우리 중국의 백주는 최고죠. 도수도 높고요!”라고 말하면, 서양인은 “백주가 뭐 대단할 게 있습니까? 도수가 너무 높아서 좀만 마셔도 취하잖아요. 간 손상도 심하고요. 우리 서양인들이 마시는 포도주는 도수도 낮고 간에 무리를 주지도 않는답니다. 혈액 순환에도 도움이 되고요.”라고 말한다. 그럼 중국인은 “우리 백주도 혈액 순환에 도움이 돼요. 엄청나게 도움이 되죠. 마시기만 하면 취기가 올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거든요. 당신들의 포도주는 한참 부족해요.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잖아요. 우리의 술에는 음주 문화가, 차에는 차 문화가 있답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서양인은 또 “우리도 차 문화와 커피 문화, 음주 문화가 있어요. 요즘에는 패스트푸드 문화도 있죠.”라고 말하면서 서로 비교한다. 누구도 지지 않으려 하며, 서로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모두 자신의 것이 진리라고 여기지만, 사실 그것들은 전부 진리가 아니다. 이방인들은 차치하고,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심지어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인 지 20~30년 된 사람들마저도 이러한 것들이 결코 진리가 아님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그럼 그것이 진리와 관계있다고 말하는 건 괜찮습니까?”라고 하는데, 관계있다고 말하는 것도 안 된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며, 진리와 어떤 연관성도, 관계도 없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일로, 완전히 다른 부류이다. 구리를 아무리 그럴싸하게 도금하고 맨질맨질하게 닦아 놓아도 그것은 구리일 뿐이며, 금은 문지르지 않고 빛내지 않아도, 광택이 없어도 금인 것처럼 말이다. 그것들은 같은 부류가 아니다.

혹자는 “비교적 좋은 전통문화 교육을 받고 거기에 영향받은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까요?”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일이다. 그래 봤자 생활 방식이 좀 다를 뿐,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나 각종 사상과 관점 그리고 전체 인류가 패괴된 정도는 모두 동일하다. 하나님이 말세에 이 단계의 사역을 행하면서 말씀하기 시작한 배경과 대상은 중국인이다. 30년이 지나 이 말씀들이 아시아의 다른 지역, 유럽, 아메리카 등 각 종족에게 퍼져 나가자 흑인이든, 백인이든, 갈색 인종이든, 황인종이든 모두가 이 말씀을 보고 “이 말씀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하나님 말씀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모든 인류의 패괴 성품이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렇게 말한다. “이 말씀들은 당신들,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고, 중국인의 패괴 성품을 다루고 있군요. 우리에게는 그런 게 없습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런 말을 한다. 예전에 한국인들도 이런 오해를 한 적이 있다. 그들은 한국인이 민주 자유 사회제도 아래 살고 있고, 기독교 문화와 수천 년 한민족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니, 그들 민족이 중국인보다 존귀하고 고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겠느냐? 많은 중국인들이 한국에 들어온 후 어디를 가든 위생 관념 없이 살았으며, 시끄러웠고, 소매치기, 형사 사건 등도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한국 사회 분위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기에, 한국의 형제자매들은 ‘중국인은 큰 붉은 용의 자손이고 모압의 후손이야. 우리 한국인은 큰 붉은 용에게 패괴되지 않았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말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느냐? ‘우리는 큰 붉은 용에게 패괴되지 않았으니 중국인만큼 패괴가 심하지 않아. 중국인은 우리보다 더 심하게 패괴되었지. 반면 우리는 중국인보다 나아.’라는 뜻이 숨어 있다. 그들의 말 중 이 ‘낫다’라는 단어는 무슨 의미겠느냐? (행위가 비교적 좋다는 뜻입니다.) 한 가지 측면에서 보면 행위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마음속 깊이 유사 이래 대한민족이 만들고 받아들인 전통문화는 고상하다고, 중화민족의 문화와 전통보다 고상하고, 이런 전통문화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과 종족은 중국 전통문화에 영향받은 사람들보다 고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이 “너희 이 천한 것들”이라고 이야기한 대목을 보면, 그 대상이 중국인이라고 여긴다. 중국의 형제자매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인류를 지칭합니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우리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 말씀의 함의에는 한국인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이렇게 생각한다. 어떤 측면에서 보든 그들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각도는 진리에 기반하지 않으며,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유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한 민족과 전통문화라는 배경 아래에서 문제를 바라볼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어떻게 보든, 그 결과는 모두 진리에 어긋난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바라보든, 그 출발점은 항상 ‘우리, 대한민족은 뭐든 맞아. 뭐든 표준적이고 뭐든 옳지.’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각도와 출발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모든 일을 판단하는데, 그 결과가 옳겠느냐, 그릇되겠느냐? (그릇됩니다.) 분명 그릇될 것이다. 그럼 모든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겠느냐?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기준이다. 그들의 기준 자체가 잘못되었다. 그들은 잘못된 각도와 관점으로 만사와 만물을 판단하니, 그 결과는 분명히 틀렸을 것이며, 공정하거나 올바르지도, 나아가 객관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외부에서 온 사물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든 것이며, 사상이 더없이 극단적이고 보수적이고 편협한 데다가 혈기대로 하는 것이다. 그들의 혈기는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무엇을 말하든 다 ‘우리, 대한의 민족’이라고 하면서 꼭 ‘대(大)’ 자를 붙였다. ‘대’ 자를 붙이는 것은 무슨 의도겠느냐? 이 ‘대’ 자는 교만함을 의미하지 않느냐? 세계 각국을 돌아다녀 봤을 때, 혹은 지도에서 한국이 얼마나 큰지 봤을 때, 한국이 정말 다른 나라들보다 크다면 ‘대’ 자를 붙일 만할 것이며,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상의 평범한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한국이라는 나라는 크지 않다. 그런데 왜 ‘대’ 자를 붙이는 것이겠느냐? 이 밖에, 한 나라가 크든 작든 거기에서 만들어진 규범과 전통문화는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결코 진리로부터 비롯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진리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사람이 받아들이는 모든 사상은 사탄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사탄에게서 생겨난 모든 사상과 관점, 전통문화 같은 것들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느냐? 미혹과 패괴, 결박, 속박을 가져다주었고, 패괴된 인류의 사상을 편협하고 극단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단편적이고 편파적이며, 나아가 그릇되고 황당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킨 결과이다. 이로 인해 많은 나라, 심지어 일부 종족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중국에서 성육신하셨다.”라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먼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되었느냐? 딱 한마디, “말도 안 돼!”라는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들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곳은 어디겠느냐?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 이스라엘이다. 사람은 규례에 끼워 맞추고 관념을 지키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사역한 곳이니 하나님은 마땅히 이스라엘, 혹은 그들이 숭배하는 어떤 강력한 제국, 아니면 그들의 관념과 상상 속의 어떤 고대 문명국가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기에 하나님이 중국에서 성육신했다고 증거하면 받아들이기 아주 힘든 것이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이번에 구원받을 기회를 잃기에 충분하다. 이는 누가 초래한 일이겠느냐? (그들 자신이 초래한 일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이런 관념이 있고 패역이 생겼는데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는 법이 없기에 결국 스스로를 망친 것이고, 이 유일한 구원의 기회를 잃게 된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할 때 생기는 수많은 상상과 관념, 심지어 숭배 대상은 하나같이 매우 그릇되고 황당하기 그지없다. 미국을 좋아하는 한 한국 여성이 미국에 거주하면서 미국인을 만나 상대로부터 “곧 새해네요. 중국인은 새해에 뭘 먹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중국인이 아니에요. 한국인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한국인은 새해를 기념하지 않나요?”라고 하면 “우리, 한국인은 설을 쇠지 않아요.”라고 하고, 또 “저는 한국인도 중국인처럼 새해를 기념하는 줄 알았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발끈해서 말한다. “우리는 중국인과 달라요! 당신은 우리가 설을 쇤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게 맞겠어요? 그건 우리 한국인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모욕하는 말이에요!”라고 한다. 한국인이 정말 설을 쇠지 않느냐? (쇱니다.) 사실 한국인도 설을 쇤다. 그럼 그녀는 왜 한국인이 설을 쇠지 않는다고 했겠느냐? 이 일에 관해 논의해 보도록 하자. 도대체 설을 쇠는 게 맞느냐, 안 쇠는 게 맞느냐? 너희는 이 일을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느냐? 사실 외국인에게 있어 설날을 축하하는 것 그 자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삶 속에서 중요한 날을 기념하는 특별한 의식이다. 전통문화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인류에게, 설을 쇠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 그녀는 왜 설을 쇤다고 인정하지 못했겠느냐? 설을 쇤다고 인정하는 순간, 서양과는 거리가 생기며 아주 전통적인 동양 사람이라는 딱지가 붙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동양의 전통적인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상대가 그녀를 동양의 전통이 없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심지어 동양의 전통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사람으로 여겼으면 한다. 그래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며, 파란색 렌즈를 끼고, 서양인과 같은 복장을 한 채 서양 여성처럼 그렇게 쿨하고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식견 있어 보이려 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봐 주기를 원한다. 이 사상에 지배되어 일이 닥쳤을 때 일 처리 방식이 이 사상을 따르게 된 것이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한국인은 설을 쇠냐고 물어봤을 때, 그녀는 “우리, 한국인은 설을 쇠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만약 주변에서 누가 “우리는 설을 쇠는데 왜 아니라고 한 거예요?”라고 말한다면 그녀는 뭐라고 하겠느냐? “바보 같군요. 설을 쇤다고 하면 그 사람이 저를 전통적인 한국인이라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그녀를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으로 봐 주기를 바란다. 만약 네가 그녀에게 “당신은 이곳에서 태어났군요. 그럼 당신의 가족들은 이곳에서 몇 대째 살고 있나요?”라고 물으면 그녀는 “우리는 선조 때부터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라고 답할 것이다. 그녀는 이것이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런 거짓말도 불사하고, 들킬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이는 어떤 사상이냐? 이것이 거짓말할 가치가 있는 일이냐? 이런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는 일이냐? 그렇지 않다. 이렇게 사소한 일 한 가지에서 사람의 사상과 관점이 드러난다. 어떤 사상과 관점이 드러나겠느냐? 한 중국 여자아이는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굳이 머리를 노란색으로 염색하고 파마를 하며 색색깔의 렌즈를 끼고는 외국인인 척하는데, 보는 사람이 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런 사람들은 왜 굳이 외국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겠느냐? 외모를 그렇게 꾸미면 혈통이 달라지겠느냐? 혈통이 달라진다고 할지라도, 다음 생에는 백인종으로 태어나거나 존중받는 종족으로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너희는 이 일을 꿰뚫어 볼 수 있느냐? 사람이 꼭 폼이 나야 하고 기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기가 숭배하는 어떤 민족이나 종족의 일원인 척 가장하는 것은 무슨 이유겠느냐? 그것은 한 가지 사상에 지배된 것 아니겠느냐? 어떤 사상에 지배되어 있겠느냐? 그 한국 여성은 미국인이 탁구를 치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한다. “탁구가 뭔가요? 탁구는 중국인이나 치는 거죠. 우리는 테니스나 골프를 친답니다.” 언행이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한 자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위장하는 사람 아니겠느냐? 무엇이든 위장하니 삶이 너무도 피곤할 것이다! 너희는 이렇게 처신하지 않느냐? 어떤 중국인은 서양에서 수십 년간 살아서 고향에 돌아오면 중국어를 하지 못한다. 이는 일을 망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혹자는 “사람은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근본을 잊지 말라고 하셨고요. 하나님이 곧 사람의 근본이지요.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이고, 사람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근본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라고 말한다. 이런 것 아니겠느냐? 모든 상황에서 구할 만한 진리가 있지만, 사람은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 사람이 지키는 것은 전통문화뿐이다. 이는 어찌 된 일이냐? 혹자는 “우리는 근본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디를 가든 우리 스스로가 중국인임을 인정하지요. 우리 나라가 가난하고 낙후되어 있다는 것까지도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근본을 잊지 않습니다.”라고 하는데, 이것이 옳으냐? 이 모든 문제는 첫째로 인류에 대한 소위 ‘전통문화’의 영향과 교육이 너무 심해서 생겨났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사람은 이렇게 오랫동안 설교를 들었지만, 무엇이 진리인지 자세히 묵상하거나 구하기는커녕 늘 자기가 지금 갖고 있는 것, 이미 배운 것, 먼저 주입되어 머릿속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전통문화나 낡은 것들로 진리를 사칭한다. 이것이 두 번째 측면이다. 세 번째 측면에서 보자면, 사람은 설교를 들은 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진리를 구하지 않고, 전통적인 시선, 사람이 관념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학문으로 하나님 말씀을 평가한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많은 설교를 들었음에도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소위 ‘일 처리 원칙’이나 소위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원칙 등은 늘 몇몇 옳은 지식과 속담, 속어에 근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잘못을 저질러 교회 리더나 형제자매에게 책망받을 때, 이렇게 생각한다. ‘흥,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다.’, ‘웃는 낯에 침 뱉으랴.’라는 말도 있잖아. 이 정도의 단점은 나조차도 웃으면서 참고 받아들이는데, 당신은 왜 끝없이 까발리는 거지?’ 겉으로 보면 순순히 듣고 순종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는 내면 깊은 곳에서 전통 관념으로 반박하며 거부하고 있다. 그가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다.”, “웃는 낯에 침 뱉으랴.” 등의 말이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자 옳은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렇게 각박하게, 끝없이 책망하고 폭로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앞에서 교제한 내용을 통해, 너희는 진리에 대해 좀 더 깊은 인식이 생겼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말씀해 주셨는데, 실행 과정에서 어떤 원칙들을 지켜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전통문화나 지식, 관념들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 할까요? 이런 것들에 지배되지 않으면 어떻게 입을 열어 하나님 말씀을 전할까요? 이러한 것들이 없으면, 하나님 말씀을 전할 근거가 사라지는 것 아닐까요? 그럼 저희에게 남는 건 뭐가 있을까요?” 너희에게 정말 이러한 것들이 없어진다면 진리를 구하는 것도, 진리를 받아들여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도 쉬워질 것이다. 예전에 너는 입만 열었다 하면 사탄의 철학이며 문화, 지식을 내뱉었다. “시대의 흐름을 잘 아는 자가 걸출한 인물이다.”, “웃는 낯에 침 뱉으랴.”,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다.” 등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이것들은 다 옳지 않아. 전부 부정당하고 정죄된 것들이라고.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얼른 성실하고 착실하게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근거를 찾자.’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입만 열었다 하면 이러한 속어나 속담, 그리고 전통문화가 가져온 것들, 관점들을 말한다. 일이 닥쳤을 때 있는 그대로 하나님을 높이고 증거하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 “하나님은 저렇게 말씀하셨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 못하고, 누구 입에서도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은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오지 않으면서 이 속담들은 자연스럽게 나온다면, 과연 무엇이 네 마음속을 채우고 있겠느냐? 전부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들이다. 어떤 사람은 팀장이 그의 사역을 검토할 때 이렇게 말한다. “뭘 검토합니까? 사람을 쓸 때는 의심하면 안 되고, 의심할 거라면 사람을 써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항상 저를 의심하면서 왜 저를 쓰시죠? 다른 사람한테 시키세요.” 그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이 그를 감독하고 지적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지만, 원칙을 구하지 않아 사역에 방해와 교란을 초래하다가 결국 교체되었다. 게다가 크게 책망받고, 정죄하는 말을 듣자 불복하는 마음이 들었다. ‘옛말에 ‘공로는 없어도 노고는 있고, 노고는 없어도 피로는 있다’고 하잖아? 이 정도 일쯤 잘못했다고 해서 뭐가 문제야?’ 그 속어가 먼저 주입되어 그의 마음속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그의 사상을 지배하며 영향을 주었기에, 이런 환경 속에서 이런 내적 상태가 생겨나자 그는 이 말을 근거로 하나님 집의 처분에 반항하고 불복하게 되었다. 그러니 그가 순종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쉽겠느냐? 겉으로는 순종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마지못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반항하지 않을지 몰라도 마음속으로는 거부하는데, 이것이 진실한 순종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대충 흉내만 내는 것일 뿐, 진실한 순종이 아니다. 여기에는 이치를 따지고 소극적으로 굴고 대항하는 것만 있을 뿐, 순종은 없다. 그럼 이치를 따지고 소극적으로 굴고 대항하는 태도는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바로 “공로는 없어도 노고는 있고, 노고는 없어도 피로는 있다.”라는 말에서 생겨났다. 이 말로 인해 그에게 어떤 성품이 생겼느냐? 불복과 강퍅함, 대항, 이치를 따지는 성품이 생겼다. 이렇게 교제하니, 너희는 진리에 대해 더 깊이 있는 인식이 생기느냐? 이 부정적인 것들을 명확하게 해부하고 분별하며, 마음속에서 파헤친다면, 일이 닥칠 때 진리를 구하고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낡은 것들을 버렸기 때문이다. 너는 더 이상 그것에 기대 본분을 이행하거나 하나님을 섬기거나 따르지 않는다. 또한, 그것들은 더 이상 네 처신의 원칙도, 본분 이행 때 지켜야 할 원칙도 아니며, 이미 비판받고 정죄받았다. 네가 다시 그것을 가져다 쓴다면, 네 내면 깊은 곳이 어떻겠느냐? 똑같이 그렇게 기쁘겠느냐? 똑같이 그렇게 의기양양하겠느냐?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정말 네 내면에서 제거되었다면, 너는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도대체 무엇이 진정한 원칙인지,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인지 구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일을 할 때 주인 말대로 하지 않으면 지쳐 죽어도 공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 말은 옳으냐? 절대 옳지 않다. 어느 부분이 옳지 않으냐? ‘일을 할 때 주인 말대로 하지 않으면’이라는 구절에서 ‘주인’이란 누구를 가리키느냐? 고용인, 사장, 상사를 뜻한다. 이 ‘주인’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옳지 않다. 하나님은 네 고용인이 아니고 네 사장도 아니며, 네 상급자는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은 네 하나님이다. 상급자, 사장, 상사는 모두 사람과 같은 부류로, 동등하고 본질이 같다. 즉, 모두가 패괴된 인류이다. 너는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서 돈을 받으며 그가 시키는 대로 하고, 그는 네가 일한 만큼 돈을 주면 그것으로 끝이다. ‘지쳐 죽어도 공이 없다’는 구절에서 ‘공’이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공로를 의미합니다.) 공로, 보수이다. 네가 일을 하는 출발점은 보수를 받는 것이다. 여기에는 충성심이나 순종도, 진리를 구하고 경배하는 것도 필요 없다. 이러한 것이 없이 그저 일종의 거래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며 진리를 추구할 때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들이다. 만약 네가 ‘일을 할 때 주인 말대로 하지 않으면 지쳐 죽어도 공이 없다’는 말을 진리로 삼는다면 이는 단단히 틀린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려고 하면 그는 반응이 뒤처지고 영민하지 못하게 군다.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먹고 마셔도 한두 가지 진리도 이해하지 못하며, 하나님 말씀 한두 마디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민간에서 전해지는 즉흥시나 속어, 속담 등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것들은 무척 빨리 받아들인다.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무척 빨리 받아들인다. 이는 어찌 된 일이겠느냐? 네가 어떤 종족이든, 네 피부색이 어떻든 결국 모두 사람으로, 모두가 같은 부류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과 다른 부류일 뿐,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면 전 인류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인류 가운데 누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게 아무리 지위가 낮은 사람일지라도, 모두의 관념에 맞는다면 다들 아주 빨리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의 사상 관점, 사유 방식, 이해 정도와 경로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누군가가 관념적인 말,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말을 하면 무척 빨리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지, 진리가 아니지만 진리를 사칭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런 것을 어느 정도 깨달았느냐? 이런 것들 중 너희 마음속에는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지금 당장은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지식에 속하지 않으며, 책을 넘기는 것처럼 뒤적여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일이 닥쳤을 때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이고,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통제하고 싶어도 통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그것들이 네 생명이 되어 뼛속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다는 뜻이다. 네게 생각해 내라고 하면 생각해 내지 못하지만, 말하지 말라고 하면 참지 못하고 일이 닥쳤을 때 그 치우친 관점이 튀어나온다. 이것이 사실이다. 천천히 체험해 보아라. 지금부터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것들,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여 보아라. 예전에, 큰 붉은 용의 독소와 사탄의 처세 철학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것들은 문자적인 의미를 보면 분별하기가 쉽다. 그것이 확실히 진리가 아니라 큰 붉은 용의 독소이고, 안에 간계가 들어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분별하기가 쉽기에, 너희에게 해부해 보라고 하면 그럭저럭 해부할 것이다. 너는 이렇듯 명확하게 사탄에게 속하는 것들은 버렸지만, 네 내면에는 여전히 “큰일을 위해 치욕을 참는다.”, “와신상담”, “웃는 낯에 침 뱉으랴.”, “도에 맞으면 돕는 이가 많고, 도에 어긋나면 도움을 얻기가 힘들다.”, “군자는 무례한 대접을 받지 않는다.” 등의 말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런 것들은 너희 내면 깊은 곳에서 여전히 인정받고 있을 것이다. ‘정말 귀한 말들이야. 평생 사람으로 살아가는 존엄은 이 말들 속에 다 들어 있어.’라고 생각할 것인데, 이러한 것들을 아직 파헤치지 못했다. 이것들을 철저히 파헤치고 그것에 대한 분별력이 생기면 앞으로 전통문화에 속하는 것들이 튀어나올 때, 그것이 자연적인 반응이든, 아니면 객관적인 조건 반사든 너는 그것이 잘못되었으며 결코 진리가 아님을 바로 깨달을 것이다. 그때, 진리에 대한 네 인지와 인정 정도는 지금보다 높아진다. 지금보다 높아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느냐? 어느 정도 분량을 갖추고, 분별력이 커지며, 진리에 대한 체험이나 인식이 지금보다 깊어지고,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지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 너는 ‘사탄에게서 온 것들, 이 세상 모든 종족의 문화 배경에서 나타난 각종 전통문화는 다 옳지 않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항목이 옳지 않은지, 어디가 옳지 않은지는 아직 모를 것이다. 그러니 하나씩 해부하고 인식한 다음 그것을 내려놓고 정죄하며, 철저히 그것과 단절하여 그것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너희는 그저 주관적인 의지로 이 속어와 속담, 명언, 흔히 설파되는 말들이 하나님 말씀과 전혀 무관하며, 진리가 아니라는 것만 알 뿐이다. 하지만 일이 닥치면 여전히 자기도 모르게 이 말들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스스로를 제약하며, 자신의 행위를 이끌 것이다. 그 말들이 네 사상과 관점을 견제하고 지배할 텐데 그러면 매우 골치 아픈 일이며, 네 진리 진입에 영향을 줄 것이다. 언젠가 사탄에게서 비롯된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 나타나기는 해도 네가 그것을 분별하고 그것에 따라 살지 않고 진리 원칙에 근거하여 실행할 수 있다면, 그때는 진정으로 분량이 생긴 것이다. 지금 네게는 이러한 분량이 있느냐? 아직 없을 것이다. 만약 너희가 모두 맞다고 공인하는 말이 있고, 표현 방식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하나님 말씀 중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면 너는 그 말도 진리라고, 하나님 말씀과 똑같다고 착각할 것이다. 네가 이러한 일을 간파하지 못하고, 계속 사람의 말을 지키며 버리려 하지 않는다면, 이 말은 네 진리 진입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이 말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며, 진리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진리란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 교제하고 있다. 이건 너희를 진지하게 대한다는 뜻이다. 너희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려면 반드시 사람의 다양한 사상과 관점, 좋은 행위, 좋은 마음, 사람이 기대 살아가는 옳은 가르침, 상식에 맞는 행동 방식, 그리고 전통문화의 사상과 관점들을 모두 가져와 해부하고 분별하여 그것이 정말 진리에 부합하는지, 진리와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네가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그 근거는 무엇이냐? 만약 네가 사탄의 이론과 학설에 근거하여 그것을 진리로 규정했다면, 너는 사탄에게 속하는 존재다. 또 이러한 것들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사탄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니, 그 본질이 도대체 무엇인지 해부해 보아야 한다. 특히, 전통문화 가운데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구전되는 숱한 가르침과 관점들에 대해 올바른 인식과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래야 사람은 과연 무엇이 진리인지 진정으로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으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도대체 무엇인지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라는 말이 과연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인류에게는 소위 도덕 윤리에 부합하고, 인성에 부합하고, 세상 물정에 부합하는 관점과 가르침, 사람이 의지해 살아가는 사상과 관점, 가르침이 있는데, 하나님은 왜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을 구원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진리만이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킨다고 말씀했는데, 왜 이렇게 말씀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분명 구할 만한 진리가 있다. 적어도 한 가지, 사람이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상과 관점, 가르침은 패괴된 인류에게서 비롯되었으며, 패괴된 인류가 종합한 것이고,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속하는 것으로, 진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자면, 이러한 것들은 본질적으로 진리를 거부하고 적대시한다. 그것은 진리를 대신할 수 없으며, 더더욱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영원히 진리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에게 잘못된 것으로 정의되고 정죄받으며, 결코 진리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행사와 진리 선포는 이러한 것들과 전혀 관계가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는 패괴된 인류의 처세술, 사람의 전통문화, 사상과 관점, 좋은 행위, 도덕과 존엄성, 긍정적인 사물에 대한 정의와 어떤 관계도 없다. 하나님의 진리 선포는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본질을 발현한 것이지, 인류가 종합한, 사람이 생각하는 각종 긍정적인 사물과 가르침에 근거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고 진리이며, 인류가 의지해 생존해야 할 유일의 법칙이자 토대이다. 반면, 이른바 사람의 각종 ‘신조’에서 비롯된 것들은 전부 그릇되고 황당한 것이고, 하나님에게 정죄된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의 원천이나 근거는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해 그의 성품과 본질을 발현한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으며, 하나님은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므로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말씀은 진리이다.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규정하고 정의하고 바라보고 인식하든, 하나님 말씀은 영원히 진리이며, 이 사실은 언제까지고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되든, 이 패괴되고 사악한 인류에게 어떻게 정죄받고 버림받든 한 가지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바로 하나님 말씀은 영원히 진리이며, 사람은 그 사실을 영원히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인류는 모두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사람이 추앙하는 전통문화와 과학 지식은 영원히 긍정적인 사물이나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할 것이다. 이는 절대적인 사실이다. 인류의 전통문화와 생존의 길은 시간이 바뀌고 오래되었다고 해서 진리로 변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 말씀 역시 인류가 정죄하고 망각했다고 해서 사람의 말이 되지는 않는다. 진리는 영원히 진리이며, 이 본질은 언제까지고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사실이 존재하느냐? 사람이 종합한 그 속담들의 기원은 사탄이고 사람의 상상과 관념이며, 혹은 사람의 혈기와 패괴 성품에서 비롯된 것으로, 긍정적인 사물과 어떤 관계도 없다. 반면,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본질의 발현이자 하나님 신분의 발현이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 말씀들을 선포했겠느냐? 왜 이 말씀들을 진리라고 하겠느냐? 만물의 모든 법칙과 규율, 근원, 본질, 본모습, 비밀은 다 하나님이 주재하며 하나님 손안에 있기에 그 모든 규율과 본모습, 사실, 비밀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있다. 하나님은 만물의 모든 근원을 알고 있고, 그 근원이 과연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이 만물에 대해 내린 정의만이 가장 정확하다. 또한,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인류가 살아가는 기준이자 원칙이며, 인류가 의지해 생존하는 진리이자 법칙이다. 반면, 인류가 사탄에게 패괴된 후 의존해 살아가는 사탄의 법칙과 이론들은 한 가지 측면에서는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에 위배되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하나님이 만물의 법칙과 규율을 주재한다는 사실에 위배된다. 사탄에 속하는, 사람의 각종 이론은 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 속에서 생겨난 것이자,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사탄은 어떤 역할을 하겠느냐? 먼저, 사탄은 진리를 사칭한다. 두 번째로 사탄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이 모든 규율과 법칙을 교란하고 파괴하고 짓밟는다. 그렇기에, 사탄에게서 온 것들은 사탄의 본질과 너무도 어울리며, 사탄의 사악한 속셈과 위선, 위장, 영원불변한 야심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패괴된 인류가 사탄에게서 비롯된 그 철학과 이론을 분별하든 못 하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것을 떠받들고 퍼뜨리고 추종하든, 패괴된 인류가 그것을 얼마나 오래 추앙하고 숭배하고 전해 왔든 그것이 진리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것의 본질과 근원, 원천은 사탄이고, 하나님과 진리에 적대하는 사탄이기에 영원히 진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영원히 부정적인 사물이다. 진리와 대조해 보지 않았을 때, 그것은 선하고 긍정적인 것을 사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리로 폭로하고 해부하면, 그것은 완벽하지 않으며 굳게 설 수 없고, 아주 빨리 정죄되고 버려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는 하나님이 지은 인류의 정상 인성의 필요에 부합하지만,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것들은 인류의 정상 인성의 필요에 위배된다.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을 비정상으로 만들며, 과격하고, 편협하고, 교만하고, 어리석고, 사악하고, 강퍅하고, 흉악하게 만든다. 심지어는 안하무인이 되는데, 그게 심각해지면 정신이 이상해져서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며, 정상적인 사람, 평범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고, 반드시 초인이나 비범한 사람, 고급 인간이 되려고 한다. 그것은 사람의 인성과 본능을 왜곡한 것이다. 진리는 사람이 더 본능적으로 정상 인성의 규율과 법칙, 그리고 하나님이 제정한 모든 규율대로 생존하고 살아가게 한다. 하지만 그 이른바 속어나 사람을 미혹하는 가르침들은 사람의 본능에 위배되며, 하나님이 예정하고 제정한 법칙에서 벗어나게 한다. 심지어는 사람이 정상 인성의 궤도에서 벗어나 극단적인 일, 정상인이 행해서도, 상상해서도 안 되는 일을 하게 만든다. 이 사탄의 법칙들은 사람의 인성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정상 인성과 정상 인성의 본능을 상실하게 한다. 예를 들어, 사탄의 법칙은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행복은 자신의 두 손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주재와 사람의 본능에 위배된다. 사람의 몸과 본능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혹은 운명이 중요한 순간에 다다랐을 때, 이 사탄의 법칙들에 기대면 버텨 낼 수가 없다. 많은 사람이 압박감을 느끼며 한계를 뛰어넘고, 정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다. 결국 어떤 사람은 정신이 분열된다. 지금 대입 시험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무거운 압박감을 견디고 있다. 사람의 신체적 상황과 심리적 자질은 모두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이 제도에 적응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적응하지 못해서 끝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정신이 분열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투신자살을 선택하기도 하는 등 온갖 상황이 발생한다. 이러한 결과는 어떻게 초래되었겠느냐?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여 명예와 이익을 좇게 하고, 사람을 망가뜨린 것이다. 사람이 만약 하나님이 제정한 규율을 따라 순리에 따라 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정해 놓은 방식으로 살면서 하나님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다면, 정신 이상이 생기겠느냐? 그렇게 큰 압박감을 받겠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게 한다. 그럼 사람은 압박감 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고, 오직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된다. 인류는 하나님이 지은 존재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본능과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제정한 그 규율들로 사람을 인도하고,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공급하지만, 사탄은 그러지 못한다. 사탄은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을 위배하게 하고, 초인이나 능력자가 되라고 한다. 이는 사람을 우롱하는 것 아니겠느냐? 사실, 사람은 모두 정상적이고 평범한 존재이다. 그런데 어떻게 초인이나 비범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이는 사람을 능욕하는 것 아니겠느냐? 네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네 야심과 욕망이 아무리 커도 초인이나 비범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네가 스스로를 아무리 엉망으로 망가뜨려도 초인이나 비범한 사람이 되지는 못한다. 사람이 평생 어떤 직업을 가질지는 하나님이 예정해 놓은 일이다. 네가 하나님이 제정한 법칙과 규율대로 생존하지 않고, 사람을 미혹하는 사탄의 허튼소리를 택해 초인이나 비범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한다면 시달림을 받아야 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사탄의 능욕과 유린, 패괴를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한다면 네가 감내해야 할 것은 자업자득이고, 그래도 싸다. 그것은 네가 원한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입 시험을 볼 때 한 번 떨어지면 두 번, 세 번 더 보지만 계속 합격하지 못해서 미쳐 버리고 만다. 이는 자기가 자초한 일 아니겠느냐? 너는 왜 대입 시험을 보려고 하느냐? 사람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가문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아니냐? 사람들 앞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가문의 이름을 빛내겠다는 이 두 가지 목표를 버려라. 이런 것을 추구하지 말고 올바른 목표로 바꾸면 압박감이 사라지지 않겠느냐? 네가 사탄의 패괴를 받아들이고 그 사상과 관점을 전부 수용한다면, 네 몸은 갖가지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그래도 싸다는 건 이럴 때 하는 말이다! 이 결과는 너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너 스스로 초래한 것이지,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네게 그렇게 살라고 한 적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명확하게 밝혀 주었는데 네가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의 몸과 의지력, 심리적 자질이 감내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사람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의식하지도 못한 채 운명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운명을 이기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는데, 어떻게 운명을 손에 쥘 수 있겠느냐? 사탄은 이렇듯 갖가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과 사설, 궤변으로 사람을 패괴시킨다. 사람은 자각하지 못한 채 그것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으니 우리도 시대에 발맞춰 그 긍정적 에너지를 전부 받아들여야 해.’ 이는 전부 마귀적인 말이다. 이방의 마귀 세계에 어떤 긍정적 에너지가 있겠느냐? 전부 부정적인 에너지이자 악성 종양, 시한폭탄이다. 네가 그런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에 따른 안 좋은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 사탄에게 시달림 받고 해를 입어야 하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네가 사탄을 따르는데 좋은 결과가 있을 리 있겠느냐? 사탄은 너를 해치고 네게 독소를 주입할 뿐이다. 하나님은 너를 구하고, 사탄은 너를 해친다. 하나님은 네 병을 치료하고, 사탄은 네게 독을 주입해 병들게 한다. 네가 사탄의 독소를 많이 받아들일수록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이런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이 주제는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이제 다른 주제를 교제해 보자.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 적그리스도를 해부하다

1. 무엇이 하나님의 이익이고 무엇이 사람의 이익인가

이번에는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 중 제9조,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에 관해 교제하도록 하겠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이익, 하나님 집의 이익을 강조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매사에 자기 이익을 중심에 두는데 무척 이기적이다. 게다가 그들은 일을 처리할 때 늘 하나님 집의 이익에 해를 끼치고 그 대가로 자기 이익을 지키며, 심지어는 말을 빙빙 돌려 하나님 집에 뭔가를 요구함으로써 자신의 사욕을 채운다. 여기에서 중심 단어는 무엇이냐? 무엇에 관해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느냐? (이익입니다.) 그럼 이익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이냐? 이익에는 무엇이 포함되느냐? 사람에게 이익이란 무엇이냐? 사람의 이익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느냐? 지위, 명예, 그리고 물질적인 이익과 관련된 것들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남들을 미혹하여 자신을 우러러보고 숭배하게 하는 것은 정신적인 측면이다. 이 밖에, 물질적인 측면도 있다. 일례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당한 이익과 이점을 취하고, 하나님 집의 물품을 자기 소유로 삼는 것을 들 수 있다. 적그리스도는 오직 이익만을 취하려고 한다. 그것이 정신적인 측면의 이익이든, 아니면 물질적인 측면의 이익이든 끝없이 탐내며, 전부 독차지하려고 든다. 이익과 관련된 일은 사람을 가장 잘 드러내며, 이익은 모든 사람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이 매일 접하는 모든 일은 다 이익과 연관된다. 예를 들어, 말을 하고 일에 관해 논할 때 어떤 이익과 관계가 있겠느냐? 두 사람이 어떤 일에 관해 논하는 것은 누구의 말재간이 좋고 누구는 말재간이 좋지 않은지, 누가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고 누구는 무시당하는지 등과 관계가 있으며, 또한 말하는 방식에 따라 그로 인한 결과도 달라지는 것과 관련된다. 이는 이익과 연관된 것 아니겠느냐? 그럼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은 어떻게 하겠느냐? 온 힘을 다해 뽐내고, 머리를 쥐어짜 할 말을 잘 생각해서 명확히 이야기함으로써 더 조리 있는 말로 듣는 이가 기분 좋게 하고, 논리 정연하다는 느낌을 줘서 깊은 인상을 남기려 한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말재간과 머리,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고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은 일종의 이익이다. 사람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또 어떤 부분과 관계가 있겠느냐? 일을 처리할 때 사람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판단하고 계산하고 궁리하며,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이롭고 어떻게 하면 이롭지 않은지, 어떻게 해야 더 큰 이익을 얻고 어떻게 하면 최소한 이익을 잃지 않게 될지, 어떻게 해야 최고의 명예와 물질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고 자신이 최대 수혜자가 될 수 있을지 등에 관해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한다. 이는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이 쟁취하려는 두 가지 측면의 이익이다. 사람이 얻으려는 이익은 다음의 두 가지에 중점을 둘 뿐이다. 첫 번째는 물질적인 이익을 얻는 것으로, 최소한 손해를 보지 않고 이득을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신적으로 남들에게 우러름을 받고 감탄을 자아내며 마음을 얻는 것이다. 때로는 권력과 지위를 얻기 위해 물질적인 이익을 포기하기도 하는데, 이는 작은 손해를 감수하고 더 큰 이익을 얻는 것이다. 어쨌든 사람의 명망, 지위, 명예, 그리고 물질과 관련된 것들은 모두 사람의 이익이라는 범주에 속하며, 사람이 추구하는 이익이다.

이러한 이익 추구의 성질은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왜 이런 것을 추구하겠느냐?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게 정당하겠느냐? 합리적이겠느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겠느냐? 그것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그 이익을 최대화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이익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자신의 지위와 명망, 손안의 권력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모든 대가를 불사하고 그런 것들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이 네게 지위를 준다면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이 치욕이 아니라 네 명예가 되게 해야 한다. 이는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이다.’라는 내용이 있더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한 적이 있더냐?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 가운데 이런 내용이 없다면,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피조물에게 어떻게 요구하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익을 어떻게 대하라고 요구하겠느냐? 먼저,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익을 버리라고 한다. 이는 무척 개괄적인 말이다. 이 밖에, 하나님은 더 다양한 측면에서 사람에게 적절한 실행의 길을 주며,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인지,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피조물로서 해야 할 일인지, 물질과 명리를 대할 때 어떤 관점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알려 주었다. 따로 언급할 필요 없이, 하나님 말씀은 사람이 이익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직접적으로 알려 주지 않았지만, 그 행간에는 패괴된 인류의 이익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무엇인지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기 관점을 내려놓고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라고, 착실히 하나의 피조물이 되어 자신의 위치를 지키라고 분명히 이야기했다. 하나님의 마음을 보면, 사람에게 이렇게 요구한 것이 의도적으로 사람의 이익을 박탈한 것이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에서는 늘 하나님 집의 이익, 교회의 이익에 관해 말합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저희, 사람의 이익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겁니까? 저희, 사람의 이익은 누가 주는 겁니까? 저희도 인권이 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희에게 작은 이익 정도는 주셔야죠. 왜 저희에게는 조금도 남겨 주지 않는 겁니까? 왜 전부 하나님의 것이죠? 하나님도 이기적이신 것 아닙니까?” 이런 말은 너무도 패역적이며 대역무도하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말로, 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마귀만이 어떤 패역한 말도 다 내뱉을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늘 사람에게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거나 자기 자신을 위해 계획을 세우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두각을 드러내고 싶어 일을 좀 하고 성취를 거둬 모두의 숭배를 받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가리켜 야심이라고 하시지요. 또 사람이 좀 이익을 얻고 좋은 것을 먹고 호시절을 보내고 육적인 안일을 탐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폼 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가리켜 자기 이익을 충족하는 거라며 내려놓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전부 내려놓는다면 저희가 어떻게 더 나은 삶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채 늘 하나님의 요구에 반발하며, 이런 일에서 항상 하나님과 충돌한다. 이는 다음 상황과 같다. 부모가 자녀를 키우느라 반평생 고생하면서, 병에 걸려 몸이 망가지면 자식이 기댈 곳이 없을까 봐 영양제를 사 먹으니 철없는 자식은 그 모습을 보고 “저는 새 옷을 못 산 지 몇 년이나 됐는데, 엄마 아빠는 왜 영양제를 사는 거죠? 돈을 모아서 제가 대학에 갈 때 써야죠.”라고 말한다. 이 말은 부모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겠느냐? 부모가 하는 모든 일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도, 육적인 안일을 누리기 위한 것도, 좀 더 편하게 오래 살면서 훗날 자식 복을 누리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위한 것이겠느냐? 부모가 위하는 것은 자식이다. 그런데 자식은 이해하지 못한 채 부모를 책망하니, 이는 대역무도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부모와 충돌하며, 심지어는 고집을 부리면서 부모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 그럼 너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느냐? 이는 진리를 깨닫는 것과 연관이 있다. 사람이 자기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는 행동이 왜 하나님에게 정죄되겠느냐? 설마 하나님이 이기적이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람을 가난하고 불쌍하게 만들기 위해서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사람이 잘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와서 사역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이유는 사람에게 복을 내리기 위함이고, 사람을 아름다운 종착지로 이끌어 들어가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사람이 진리와 생명을 얻고, 하나님에게 약속과 축복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하지만 사람은 사탄에게 깊이 패괴되어 모두 패괴 성품을 갖고 있으므로 반드시 숱한 고난을 겪어야 진리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만약 모두가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며, 호시절을 보내고 육의 사치스러운 욕망을 충족하려고만 하면서 진리 추구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진리를 얻을 수 없고, 정결케 되어 구원받을 수도 없다. 구원받지 못한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재난 속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그러니 지금이 육적인 누림을 탐할 때겠느냐? 그렇지 않다. 진리를 얻지 못하면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육적인 이익을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람을 위해서이며,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이고, 사람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일단 진리를 얻어 구원받으면,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은 언제든 임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복은 사람이 상상하는 육적인 누림보다 수백 배, 수천 배 크다. 그런데 사람은 왜 그것을 모른단 말이냐? 모두 눈먼 것이 아니냐? 그럼 하나님은 왜 늘 사람에게 자기 이익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이익과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라고 하겠느냐? 누가 이 일에 관해 설명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라고 하신 것은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되었고, 사람의 이익은 모두 진리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사람에게 처신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하신 이런 사역은 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킬 줄 모른다면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 말에는 실제적인 부분이 좀 있구나. (제가 조금 보충해 보겠습니다. 저는 명리와 지위에 대한 욕심이 무척 컸습니다. 저는 은사가 있으니 책임자로 발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선거 때마다 떨어지자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작은 바람조차 이뤄 주지 않으시는 걸까?’라고 말입니다. 그 후 여러 번의 실패를 겪고,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반성했고, 제가 많은 경우에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면서 질투하고 분쟁을 일으켜 형제자매들과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로 인해 제 생명만 성장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집의 사역에도 손실을 가져다주었지요. 저는 명리와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올바른 인생관이나 추구 목표가 아니며,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여 주입한 잘못된 관점임을, 이런 식의 추구는 무척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힘들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무척 위험한 길이고, 그런 식의 추구는 마지막에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무척 위험하다.”라고 말했는데, 너희는 여기에서 ‘위험’이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느냐? 정말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끝나겠느냐? 그것은 어떤 길이겠느냐? (멸망의 길입니다.) 그런 추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이다.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지위와 명망을 추구하는 것이며,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이다. 네 바람과 포부가 아무리 정당하다고 생각해도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식의 추구도 아니다. 하나님은 네게 그렇게 추구하라고 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고집을 부리면서 네 멋대로 군다면, 마지막에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을 걷게 된다. 그럼 무엇이 위험하겠느냐? 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한편, 하나님에게 아우성치고 대항하며,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멸망이다. 또 보충할 것이 있느냐? (하나님, 제가 보충해 보겠습니다. 방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은 왜 사람이 자기 이익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게 하는가?’에 관해 물어보셨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셨으며,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다 사람을 위한 것이지요. 하나님이 두 번 성육신하여 하신 이 모든 사역과 현재 교회를 세우는 이 모든 사역까지 포함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든, 그것은 사실 다 사람을 구원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교회 생활을 하며 본분을 이행하면 구원받는 길을 얻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저희에게 개인의 이익을 내려놓게 하시는 것은 박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익과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켜서 최종적으로 혜택을 보는 것은 사람입니다.) 훌륭하다. 너희가 교제한 내용의 대략적인 의미는 기본적으로 옳다. 자신의 소소한 체험을 이야기한 사람도 있고, 이론적인 각도에서 말한 사람도 있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이해한 것들은 전부 ‘하나님의 이익은 정당하고, 사람의 이익은 정당하지 않다. 하나님의 이익이야말로 이익이라고 부를 수 있고, 사람의 이익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특히 ‘사람의 이익’이라는 단어와 주장, 이 사실을 사람이 누려서는 안 된다. 반면 하나님의 이익은 지고지상하니 반드시 지켜야 한다.’라는 데 치우쳐 있다. 사람이 이해한 것은 기본적으로 이러하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이익을 지킬 책임이 있고 하나님의 이익을 올바르게 대해야 하지만, 사람의 이익은 무시당하고 박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이익은 그리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라는 근본 원인이 있고, 또 내면에 패괴 성품이 섞여 있기에 사람의 모든 이익은 어떤 각도에서 보든, 형태가 있든 없든 전부 정당하지 않은 범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내려놓을 수 있든 없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이익을 쟁취하고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주관적으로는 이미 인식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다. 이미 공감대를 형성했으니,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이익인지 교제하도록 하자.

하나님의 이익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하나님의 이익과 하나님 집의 이익, 교회의 이익에 등호를 붙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호칭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하나님 본질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하나님 집’과 ‘교회’는 어떠하냐? 하나님 집은 범주가 꽤 큰 편이며, 교회는 비교적 구체적이다. 하나님의 이익, 하나님 집의 이익, 교회의 이익에 등호를 붙여도 되겠느냐? (그러면 안 됩니다.)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되겠느냐, 안 되겠느냐?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 교회의 행정 법령, 하나님이 반포한 행정 법령은 같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모두 같다. 이런 각도로 본다면, 이 세 가지 이익에는 등호를 붙여도 된다.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이 택한 선민들이 있기에 하나님 집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 집의 선민들이 있기에 교회가 생긴 것이다. 교회는 비교적 구체화된, 하나님 집의 ‘하부 기관’이다. 하나님 집은 꽤 넓은 의미를 지니며, 교회는 비교적 구체적이다. 그럼 하나님의 이익, 하나님 집의 이익, 교회의 이익에 등호를 붙일 수 있겠느냐? 말해 보아라. 등호를 붙여야겠느냐? 모르겠느냐? 그럼 일단 등호를 붙이고 분석해 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이익이다. 만약 이를 하나님 집의 영광이라고 한다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안 된다. 하나님 집은 하나의 명칭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대표하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의 영광이 곧 교회의 영광이라고 한다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분명히 이 역시 안 된다. 교회의 영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모든 형제자매의 영광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시하면 큰일이다. 사람은 이 영광을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님 집과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이익과 하나님 집의 이익, 교회의 이익에 등호를 붙이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안 된다. 그럼 또 다른 각도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일부 사역과 하나님 집의 일부 사역, 교회의 일부 사역 이 세 가지에 등호를 붙일 수 있겠느냐? 예컨대,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이다. 이 부탁이 하나님 집으로 하달되었을 때, 이 사역과 하나님이 하려는 사역에 등호를 붙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부탁 또한 하나님 사역의 일부이다. 이 구체적인 부분과 하나님이 하려는 사역에는 등호를 붙일 수 있다. 이 부탁이 다시 교회로 하달된다면, 하나님의 사역과 동일시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럴 수 있다. 이 두 가지 예 중 하나는 하나님 본질과 관련된 부분으로, 하나님과 하나님 집, 교회에 등호를 붙일 수 없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부탁, 더 구체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관련된 것으로, 등호를 붙일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신분,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증거와 관련된 것이라면 하나님, 하나님 집, 교회에 등호를 붙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집과 교회는 그런 증거와 영광을 가질 수 없으며, 하나님과 등호를 붙일 수 없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한 가지 사역이나 부탁과 관련된 것에는 등호를 붙일 수 있다. 일전에 우리는 하나님 집의 이익과 교회의 이익에 관해 교제하며 적잖은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오늘은 하나님의 이익이란 과연 무엇인지, 사람이 알지 못하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하나님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하나님의 이익에 속하는 것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는지 중점적으로 교제하겠다. 명사여도 괜찮고, 말이어도 괜찮으며, 하나님의 본질이나 신분과 관련된 것이어도 괜찮다. 하나님의 이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확실히 맞다.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얻은 증거이니 말이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과 경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증거, 하나님의 신분, 하나님의 지위 등이 모두 해당한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이 지키려는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증거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겠느냐? 과연 무엇이겠느냐?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륜, 이것이 하나님이 지키려는 가장 귀한 것이다. 하나님의 6천 년 경륜은 하나님이 6천 년이라는 기간에 하려는 모든 사역으로, 하나님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지음 받은 인류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이익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익에 대해 사람이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마땅히 이해해야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정도이다. 이제 하나님 집의 이익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하나님 집의 이익에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 증거를 지키는 것이 있다. 이것 외에, 하나님이 인류에게 맡긴 부탁 중에 사람이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맡긴 가장 큰 부탁은 하나님 집의 가장 큰 이익이다. 그럼 그 이익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6천 년 경륜이 인류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이루어짐에는 당연히 여러 측면이 포함된다. 그럼 어떤 것이 포함되겠느냐? 교회가 세워지고 형성되는 것, 교회의 각급 리더 일꾼이 등장하는 것, 그리하여 교회의 여러 사역과 하나님의 복음 확장 사역이 막힘없이 원활하게 진행되는 것이 포함된다. 이는 교회의 이익과 연관된다. 이것은 우리가 자주 얘기하는 하나님, 하나님 집, 교회의 이익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의 사역이 확장되고 하나님의 경륜이 막힘없이 진행되며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사람 가운데 막힘없이 이루어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가운데 널리 확장되고 전파되어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오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는 이 모든 사역의 근본 취지이자 핵심이다. 따라서 하나님 집의 이익과 교회의 이익에 관련된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경륜과도 관련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각 시대와 각 단계에 하는 사역이 막힘없이 펼쳐지고 확장될지, 인류 가운데에서 순조롭게 전개되며 진행될 수 있을지와 관련이 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진척되고 있다면 하나님의 집과 교회의 이익이 확보된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증거 또한 확보된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집과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방해를 받고 막힘없이 펼쳐질 수 없다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하려는 사역이 가로막히게 된다면 하나님의 집과 교회의 이익은 분명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이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집과 교회의 이익이 큰 피해를 입거나 제약을 받을 때 하나님의 경륜에 분명 큰 장애물이 생기고 하나님의 이익이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무엇이 하나님의 이익인지 교제를 마쳤으니, 이제 무엇이 사람의 이익인지 이야기해 보겠다. 사람의 이익에 관해서는 방금 어느 정도 다루었지만, 이제는 사람의 이익이라는 정의 측면에서 그 성질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그 성질을 규정해 보자.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사람의 이익을 내려놓으라고 하겠느냐? 설마 사람에게는 그 권리가 없는 것이겠느냐? 설마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 권리를 주지 않은 것이겠느냐? 사람에게는 그런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는 것이겠느냐? 그런 것이겠느냐? 방금 이야기한 사람의 이익 몇 가지를 통해 볼 때, 사람은 무엇을 위해 이익을 추구하겠느냐?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모호한 말이다. 자기 자신이란 누구냐? (사탄입니다.) 만약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진리대로 살아가고, 성품 변화를 이뤄 구원받는다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변화되고 구원받기 전까지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육과 관련된 갖가지 측면과 명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전적으로 진리를 적대시하고 맞서며 진리와 어긋나고 반대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그의 추구 목표의 본질이 두각을 드러내기 위한 것, 자신을 과시하여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기 위한 것, 개인적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그의 본분 이행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 명예와 이익, 지위를 위한 것이라면 이러한 추구는 옳은 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가 행한 것은 교회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촉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겠느냐? 명백히 방해하는 것이지 촉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사역을 한다는 기치를 든 채 개인적 명예와 이익, 지위를 추구하고, 자신의 경영을 하며, 자신의 작은 집단과 소왕국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냐? 그들이 하는 사역은 본질적으로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며 파괴하는 것이다. 그들이 명예와 이익, 지위를 추구하는 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 우선 하나님 선민이 하나님 말씀을 정상적으로 먹고 마시며 진리를 깨닫는 일에 영향을 미치고,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지장을 준다. 또한, 하나님 선민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하나님 선민을 곁길로 이끌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선민을 해치고 망치게 된다. 그럼 결국 교회 사역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느냐? 교란하고,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명예와 이익, 지위를 추구하여 초래하게 되는 결과이다. 그들의 그런 본분 이행은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예와 이익, 지위를 내려놓으라는 것은 사람에게 자유 선택의 권리를 주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명예와 이익, 지위를 추구하는 동시에 교회 사역과 하나님 선민들의 생명 진입을 방해하고 교란하며, 심지어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이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면 결코 진리를 추구할 수 없고, 절대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할 수도 없다. 그저 명리와 지위를 위해 말하고 행동할 뿐이다. 그가 하는 모든 사역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다 명리와 지위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행위와 방식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하나님나라의 복음 확장과 하나님의 뜻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가로막는 갖가지 결과가 초래된다. 그러므로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는 사람이 걷는 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는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반기를 드는 것이며, 사탄과 협력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과 대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는 것의 성질이다. 사람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의 잘못은 추구하는 목표가 사탄에게 속하는 것, 사악하고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는 데 있다. 사람이 명리와 지위, 이러한 개인적 이익을 추구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도구이자 출구, 나아가 사탄의 화신 노릇을 하게 된다. 교회에서 부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 사역과 정상적인 교회 생활, 하나님 선민들의 정상적인 추구를 방해하고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부담을 헤아릴 수 있다. 또 본분 이행 과정에서 늘 교회 사역을 지키며, 하나님을 높이고 증거할 수 있다. 이 밖에도 형제자매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한편 붙들어 주고 공급해 주며, 하나님이 영광과 증거를 얻게 한다. 이는 사탄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그의 추구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피조물을 얻게 되고, 그의 추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사역이 진전될 수 있다. 이런 추구는 하나님 눈에 긍정적인 것, 빛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추구는 하나님의 선민에게 크나큰 이익을 가져다주며, 교회 사역에도 전적으로 도움이 되고, 추진 작용을 한다. 이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바다.

이어서 하나님의 이익과 하나님 집의 이익, 그리고 교회의 이익에 관해 교제하겠다. 일단 이 세 가지 사이에 공통된 점을 감당할 만한 것이 있는지, 한 가지 이익에 대해 말할 때 이 세 가지에 등호를 붙일 수 있는지는 차치하자. 먼저 하나님의 이익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방금 하나님의 이익에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증거, 하나님의 이름이 포함되며,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 사역의 확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이는 하나님에게 가장 크고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증거는 사람과 좀 거리가 있으니 잠시 차치하고, 먼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슨 사역을 하느냐? 하나님 사역의 내용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이런 사역을 하는 성질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역은 인류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인류에게 도대체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먼저 이 몇 가지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도대체 무엇이냐? (인류를 구원하시는 사역입니다.) 그 주제, 사역의 근본 취지는 변하지 않는다. 즉,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사탄에게 깊이 패괴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다. 이 사역은 사탄에게 패괴되어 사람다운 모습이 없는 자들, 사탄의 패괴 성품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성품으로 점철된 자들을 구원하여 사람다운 모습을 갖추게 하고, 진리를 깨닫게 하며,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정의가 아닌지,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진정으로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낼 수 있는지, 어떤 위치에 서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 놓은, 사람이 서야 할 자리인지 깨닫고 알게 한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 사역의 기본 내용으로, 너희 모두가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사람을 정죄하고 멸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을 정결케 하고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인지,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는 것이 사람을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을 구원해 광명으로 인도하는 것인지 알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많은 진리를 선포하고, 사람의 갖가지 패괴된 내적 상태를 폭로하며,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의 문제점과 관념을 바로잡고,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진정으로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내도록 인도하는 일이 이미 하나님 선민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교만한 성품을 폭로하고, 초인이나 위인이 되는 것을 막으며, 진정한 피조물,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 되게 한다. 또한,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외식하는 본질을 폭로하여 사람들이 바리새인의 외식하는 몰골을 보게 하며, 사람을 하나님 말씀의 진리 실제로 이끌어 들어간다. 이 밖에도 하나님은 전통문화의 황당무계한 점과 사람에 대한 속박, 해악을 폭로함으로써 사람이 전통문화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게 한다…. 이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이 귀결할 수 있다.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을 사악한 세상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 집으로 돌아오게 이끌어 세심하게 지도하는 한편, 진리와 생명을 공급해 준다. 그리하여 사람이 진정한 처신의 원칙은 무엇인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이해하고 인식하게 하며, 이를 통해 사탄의 사악한 흐름과 각종 사탄의 철학, 사탄의 독소가 가져다주는 해악에서 벗어나게 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다양한 측면의 사역을 했다. 하나님이 율법시대의 사역을 하고 은혜시대의 사역을 해서부터 오늘날 말세 심판 사역을 하기까지, 이 세 단계의 사역을 너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6천 년 경륜 사역을 하는 성질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그것을 어떻게 정해야겠느냐? (그것은 인류 가운데서 가장 정의로운 사업입니다.) 그렇다.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는 이 사역의 기간은 6천 년에 달한다. 이 6천 년 동안 하나님은 끝없이 인내하고 기다리고 말씀했으며, 이 인류를 포기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줄곧 이끌었다. 하나님이 한 이 사역은 인류 가운데서 가장 정의로운 사업이다. 하나님이 사역을 하는 성질을 볼 때, 하나님의 이익은 가장 정의롭고 정당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이익이 보장받는다면 인류는 어떻게 되겠느냐? 인류는 계속해서 잘 살아가고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내며, 하나님이 제정한 만물의 법칙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베풀어 준 모든 것을 누릴 것이고, 만물의 진정한 주인이 될 것이다. 하나님 경영 사역의 가장 큰 이익은 마지막에 사람에게 간다는 것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그러니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은 인류 가운데서 가장 정의로운 사업 아니겠느냐? 이는 부정할 여지도, 의심의 여지도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가장 정의로운 사업이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자기 이익을 위해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실을 주고 하나님 사역의 확장을 가로막는 것을 불사한다면,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는 분명히 사악한 무리이자 마귀이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공급만 해 줄 뿐 바라는 것이 없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가장 이로운 사역을 하고, 또 가장 정의로운 사업을 하지만 사람은 호의를 받아들이지도, 감사히 여기지도 않으며 보답할 줄도 모른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고 파괴하며, 개인의 이익을 추구한다. 이런 자는 일말의 양심도, 이성도 없는데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겠느냐? 이런 자는 영락없는 마귀 사탄이다! 하나님의 이런 행사에 감동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있겠느냐? 마음이 없다. 마음이 없으면 양심도 없다. 이런 사람은 양심도, 지각도 없는 존재다. 인성 안에 양심이 없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 마귀, 사탄이다. 이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대가를 불사하며, 지치지도 않고 사역한다. 사람이 아무리 오해하고 의심을 품어도 줄곧 참으면서 사람에게 공급하는 한편, 갖가지 측면의 진리를 몇 번이고 이야기하여 사람이 조금씩 깨닫고 반성하고 성찰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알게 한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감동받고 몇 방울 눈물을 흘려도 뒤돌아서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언제나처럼 자기 이익과 복받기를 추구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은 양심도, 이성도 없는 자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양심과 이성, 인성이다. 하나님은 극도의 인내로 온갖 고통을 견디면서 사역하여 사람을 구원하는데, 사람은 하나님을 오해하면서 늘 하나님과 겨루고, 자기 이익을 지키면서 하나님 집의 이익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또 언제나 폼 나게 살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여하지는 않는다. 그런 자에게 조금이라도 인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입만 열면 하나님을 증거한다고 외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건 내가 한 사역이 낸 성과야. 나는 힘도 쓰고 대가도 치렀다고. 그런데 왜 나를 증거하지 않는 거야?’라고 하면서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증거를 나눠 가지려 한다. 사람에게 그럴 자격이 있느냐? ‘영광’이라는 두 글자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 창조주에게만 돌릴 수 있다. 그것은 지음 받은 인류와 상관이 없다. 설령 사람이 힘을 들이고 협력했다고 해도 그것은 성령 역사의 인도하에서 이뤄진 일일 뿐이다. 성령 역사가 없었다면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 ‘증거’라는 두 글자도 역시 사람에게 속하지 않는다. ‘증거’가 명사든 동사든, 이 두 글자는 원래부터 지음 받은 인류와 관계가 없다. 오직 창조주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증거하게 하고, 사람의 증거를 얻을 자격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 본질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행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대가를 치른 것이기에 하나님은 얻을 자격이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것은 전부 성령이 깨우치고 이끌고 인도해 준 결과이다. 사람의 본성을 놓고 보면, 진리를 좀 깨닫고 사역을 좀 하는 순간 교만해진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으로 약간의 은사와 특기, 익힌 업무 기술, 잔재주가 있으면 안하무인 격으로 굴면서 늘 하나님의 영광과 증거를 나눠 가지려 든다. 이는 비이성적이지 않으냐? 너무도 비이성적이다. 이는 서 있는 위치가 잘못된 것으로, 스스로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또 다른 부류, 초인으로 여긴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신분과 본질이 어떤 것인지, 어떤 위치에 서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정확히 모르는 것이다. 사람이 낮은 것은 낮추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은 원래 낮으며 비천하다. 반면 하나님의 낮음은 자신을 낮춘 것이다. 사람한테 낮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나마 높여 준 편이다. 사실 사람은 비천하다. 사람은 늘 명리와 지위, 하나님의 선민을 놓고 하나님과 다투려고 하는데, 이는 사탄의 역할을 맡는 것으로, 사탄의 본성이다. 이런 자는 조금의 차이도 없이 진짜 사탄의 후예이다. 설령 하나님이 사람에게 권병과 능력을 주어 사람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초월적인 일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요구대로 전부 똑같이 할 수 있게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뛰어넘을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사탄, 천사장의 능력이 사람보다 부족하겠느냐? 그것이 늘 하나님을 뛰어넘으려고 하지만 마지막 결과는 어떠하냐? 마지막에는 무저갱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은 영원히 정의의 화신이고, 사탄, 마귀, 천사장은 영원히 사악함의 화신이자 사악한 힘의 대표이다. 하나님이 영원히 정의롭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비범하고 초월적인 일면이다. 인류가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얻는다고 해도 그저 작디작은 피조물에 불과하고 하나님을 뛰어넘을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인류와 하나님의 차이점이다. 사람은 그저 하나님이 제정한 이 모든 규율과 법칙 속에서 질서 있게 생존할 뿐이며, 또한 이 모든 규율과 법칙 속에서 하나님이 지은 이 모든 것을 관리할 뿐이다. 사람은 그 어떤 생물을 창조할 수도, 나아가 인류의 운명을 바꿀 수도 없다. 이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은 무엇을 설명하느냐? 하나님이 인류에게 얼마나 큰 권병과 재능을 주든 결국 그 누구도 하나님의 권병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몇 년이 지나도, 몇 세대가 지나도, 인류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인류는 영원히 하나님의 권병과 주재 아래에서 생존할 뿐이다. 이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이다!

교제를 듣고 나니 어떤 느낌이 드느냐?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는 의식적으로 이런 일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제 능력이 점차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나이가 들면서 생각도 성숙해지고, 많은 문제를 세심하게 살필 수 있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들어 하나님의 뜻을 얼마간 깨닫게 되면서 제가 강해졌다고, 하나님의 주재가 필요 없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저도 모르게 자신이 대단하다고, 하나님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요.” 이런 생각이 좋으냐? (좋지 않습니다.) 어째서 좋지 않으냐? 이는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럼 좋은 현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살면서 점점 더 ‘사람은 먼지 같은 존재야. 개미만도 못하지. 아무리 강해져도, 아무리 존엄성을 갖추고 있어도, 많은 도리를 이해하고 생각이 성숙해져도 사람은 하나님의 주재를 뛰어넘을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살면서 점점 더 하나님 권병의 위대함과 하나님 권병의 전능을 느끼는 한편, 사람은 보잘것없고,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다고 느끼게 된다. 이런 마음 상태가 정상이다. 지금 너희는 이런 내적 상태를 갖고 있느냐? 아직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는 여전히 발버둥 치고, 이익의 언저리에서 배회하며, 심지어는 다음과 같이 작은 신호를 보낼 때도 있다. ‘하나님의 이익은 왜 나에게 조금도 허락되지 않는 걸까? 하나님은 왜 나를 칭찬해 주지 않으시는 거지? 하나님은 왜 주변 사람들이 나를 좀 우러러보게 해 주지 않으시는 거야? 하나님은 왜 사람들이 나를 증거하게 해 주지 않으실까? 나도 대가를 치르고 공을 세웠어. 하나님은 나한테 어떤 상을 주실까?’ 그러면서 늘 자기만족과 우쭐거리는 심리 상태에 빠져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적 상태는 비정상적이며, 이는 생명의 성장이 아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겠느냐? 패괴 성품이 또 팽창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공을 세우지 않았을 때는 얌전하고 겸손하지만, 큰일을 좀 해서 공을 세우면 밑천이 생겼다고 생각해서 주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들은 왜 내 공로를 보고하지 않는 거야? 당신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본질은 증거하면서 왜 나를 소개하지 않는 거지? 증거까지는 아니더라도 소개는 해도 되잖아. 나, 모 자매는 하나님을 25년 동안 믿었어. 마흔다섯인 지금까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살면서 경건하고 열정적으로 추구하고 있지. 교회의 핵심이라는 이유로 몇 번이나 중국 공산당 정부에 수배되어 쫓겨 다니고 각지에서 숨어 다녔어. 10개 이상의 성(省)을 떠돌다가 해외를 전전했지. 그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 집에서 중요 사역을 맡아서 책임자로 있는 동안 하나님 집의 어떤 사역에 많은 건설적 건의와 아이디어, 구상을 제시했어. 교회 사역의 추진과 하나님나라 복음의 확장에 지울 수 없는 공헌을 했어. 왜 나를 이렇게 소개해 주지 않는 거야? 하나님은 왜 내게 재능을 발휘할 환경과 장소를 마련해서 모두가 나를 이해하고 알게 해 주지 않으시지? 하나님은 왜 늘 우리를 억압하시는 걸까? 하나님 집에서는 그렇게 자유롭지도, 그렇게 편안하고 홀가분하고 유쾌하지도 않아!’ 그녀는 편안하고, 해방되고, 유쾌하기를 바란다. 어떻게 해야 편안하고, 해방되고, 유쾌할 수 있겠느냐? 너를 1위에 올리면 되겠느냐? 그런 다음 “이 사람은 세계적 명의로, 국가 명의 1등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세계 명의 대전>에 이름이 올라가 있고,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지요. 하나님 집에 와서도 핵심 역할을 하는 인재고요. 최근에는 윗선 리더가 되었습니다.”라고 소개하면 그녀는 기뻐하지 않겠느냐? 그녀는 ‘나는 인재야. 예전에는 유명인이었고, 하나님 집에 온 후에도 여전히 유명하지. 원래 금은 어디를 가도 빛나는 법 아니겠어? 아무도 막을 수 없다고. 내 재능은 감출 수가 없는걸! 하나님은 증거해 주지 않으셨지만, 이 사실들이 나를 힘 있게 증거했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어떠냐? 사람이 명리를 추구하면서 하루도 내려놓지 않으면, 계속 명리와 지위에 결박되어 진정한 해방감과 기쁨을 얻을 수 없다. 네가 명리라는 족쇄에 결박되고 제약되고 얽혀 있는 한, 네 진리 추구의 발걸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 것이다. 혹자는 “퇴보하지는 않나요?”라고 말하는데, 사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 자체가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퇴보하는 것이다. 이는 네 본성 본질이 그렇다는 의미이다. 네가 하나님을 아무리 오래 믿어도 시종일관 성장하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수많은 악을 행한다면 단언컨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적당한 환경이 조성되고, 지위가 생기는 순간 야심이 튀어나온다. 사실 그런 환경이나 지위가 없으면 그에게 야심이 없겠느냐? 그래도 있다. 그는 그런 존재이고 그런 본질을 지니고 있기에 야심을 숨길 수 없다. 적당한 환경이 갖춰진 순간 바로 ‘폭발’할 것이다. 자제하려고 해도 자제되지 않고 악을 행하기 시작하며, 마귀의 추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것이다. 이는 드러난 것이다. ‘드러나다’는 말은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네게 훈련의 기회를 주었지만 네가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니 드러나도 싸지 않으냐? 이는 네가 선택한 것이지 하나님이 일부러 너를 드러내고 도태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네 속셈과 야심이 스스로를 드러낸 것인데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사람의 이익과 하나님의 이익이라는 이 측면의 진리에 대해 어느 정도 교제가 되지 않았느냐? 사람의 이익이란 무엇이냐? 명리와 지위, 복받으려는 야심과 욕망, 그리고 허영과 체면, 가정, 가족, 물질적인 이익 등 사람이 추구하는 것들이다. 사람의 이익의 본질은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사악하고, 사탄에 속하며, 진리에 어긋나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고 파괴한다. 반면, 하나님의 이익은 인류를 구원하는 가장 정의로운 사업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사역,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이익을 지키는 것은 정당하며, 그것은 정의로운 사업을 지키는 것이지 하나님이 이기적으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의롭고 정당하며, 하나님이 구원하는 인류에게 헤아릴 수 없이 큰 도움이 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익을 지켜야만 그 과정에서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고,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며, 진리와 길,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진정한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이 제정한 이 모든 규율과 법칙 속에서 살아가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들어 준 만물 가운데에서 살아갈 수 있다. 인류는 그래야 행복을 얻고 진정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이 한 이 모든 것은 정의로운 사업 아니겠느냐? 더없이 정의롭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역과 경영, 인류 구원과 관계되는 교회의 모든 사역, 예컨대 복음 전파, 영화 촬영, 간증문 작성, 동영상 제작, 하나님 말씀 번역, 정상적인 교회 생활 질서 유지 등 이런 사역은 모두 매우 중요하며,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또한, 본분을 이행하는 모든 하나님 선민의 삶을 보장하는 사역 분야도 있다. 이는 후방 지원 사역처럼 가장 기초적인 사역으로, 하나님 집의 주요 사역과 큰 관계는 없어 보이지만 무척 중요하며, 반드시 여기에서 다뤄야 한다. 정상적인 의식주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비해 놓은 것이자 정상 인성 안에 반드시 갖춰져야 할, 가장 정당한 육의 필요이다. 이 필요를 하나님은 박탈하지 않고 지키려 한다. 하나님이 지키려는 것에 대해 만약 네가 늘 교란하고 방해하고 무너뜨리고, 무시하고, 관념과 생각을 갖는다면, 이는 하나님에게 반기를 들고 대립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 집의 사역과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늘 무너뜨리고 파괴하려 하거나 그 속에서 이익을 얻고 속임수를 쓰고 횡령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네게 노하지 않겠느냐? (그러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징벌받게 됩니다.) 그건 확실하다. 하나님은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한 것은 교회 사역을 무너뜨리고 파괴하는 짓, 하나님 집의 사역과 이익에 반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는 크나큰 악이자 하나님에게 반기를 드는 짓, 하나님의 성품을 직접적으로 거스르는 짓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찌 네게 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만약 어떤 사람들이 자질이 부족하여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는 관계로 자기도 모르게 교란하고 방해하는 일을 저지른다면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질투하고 싸우고, 고의로 하나님 집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고 파괴하는 짓을 저지른다면, 이는 뻔히 알면서 죄를 지은 것이니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를 용서하겠느냐? 하나님은 6천 년 경륜 사역을 하면서 여기에 모든 심혈을 쏟아부었다. 만약 네가 하나님에게 대항하면서 고의로 하나님 집의 이익에 해를 끼치고, 또 하나님 집에 해를 끼치는 것을 대가로 개인의 이익과 명망, 지위를 추구한다면, 이를 위해 교회 사역을 무너뜨리는 것까지 불사하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가로막고 파괴한다면, 심지어 하나님 집의 물질과 재물에 크나큰 손실을 끼친다면 이런 사람을 용서해야겠느냐?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너희도 모두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이 부류의 사람에게 노하지 않겠느냐? 분명히 노할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을 구원하며, 이렇게 큰 사역을 하면서 여기에 모든 심혈을 쏟아붓고 모든 대가를 치렀다. 하나님은 이 가장 정의로운 사업을 이토록 중요하게 생각해서 자신의 심혈과 대가를 자신이 구원하려는 이 사람들에게 전부 쏟아부었고, 자신의 모든 기대를 이 사람들에게 걸었다. 그의 6천 년 경륜이 마지막에 얻으려는 성과와 영광은 전부 이 사람들에게서 실현된다. 그런데 누군가가 하나님에게 반기를 들고 대항하고 교란하며 이 일의 결과를 파괴한다면 하나님이 용서하겠느냐?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른 것 아니겠느냐? 너는 입만 열었다 하면 하나님을 따르며 구원받기를 추구하겠노라고, 하나님의 감찰과 인도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 순종하겠노라고 하지만, 그와 동시에 교회의 각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고 파괴하고 있다. 네 방해와 교란, 파괴 때문에, 네 실수나 책임 소홀 때문에, 혹은 네 사욕 때문에, 네가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느라 하나님 집의 이익과 교회의 이익 등 여러 부분이 피해를 보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사역이 심각하게 교란되고 파괴된다면 하나님이 네 생명록에서 네 결말을 어떻게 저울질하겠느냐? 너를 어떻게 규정하겠느냐? 공정하게 말하면 징벌받아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인과응보라고 한다. 지금 너희는 무엇을 깨달았느냐? 사람의 이익이란 무엇이냐? (사악한 것입니다.) 사람의 이익은 사실 사람의 사치스러운 욕망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부 시험이고 허상이며, 사람을 시험하는 사탄의 미끼이다. 명리와 지위,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사탄에게 협력해 악을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사역을 가로막기 위해 다양한 환경을 일으켜 사람을 시험하고 교란하고 미혹하는 한편,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탄에게 협력하고 사탄을 따르면서 고의로 하나님 사역을 교란하고 파괴하게 된다. 또 하나님이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집에서 아무리 책망과 훈계를 해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하나님에게 조금도 순종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게 된다. 그러다 결국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파괴해서 교회의 각종 사역의 진전에 심각한 지장을 주고 하나님 선민들의 생명 진입에 크나큰 해를 끼친다. 이 죄악은 너무도 크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된다.

지금 너희의 마음속에서는 교회의 어떤 사역이 가장 중요하고, 하나님 경륜의 확장과 관계가 있느냐? (복음 전파입니다.) 복음 사역은 큰 사역이다. 하나님의 사역이 하나님에게는 사역이고, 사람에게는 본분이다. 복음 사역 외에도 영상 사역, 번역 사역, 찬양 및 각종 문서 사역이 있다. 지금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많은 사람이 다 이 사역들과 관계된 일에 종사하고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 사역들 중 어떤 것을 버릴 수 있겠느냐? 혹자는 “음악은 음을 다루는 일이니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곡조가 없어도 똑같이 전파되고 확장될 수 있으며,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할 수 있으니까요.”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맞느냐? (맞지 않습니다.) 어째서 맞지 않겠느냐? 다양한 영상 작품에 음악이 없으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교회 내부에서 노래를 부를 때 필요한 것 외에도 모든 영화, 뮤직비디오, 합창, 뮤지컬, 하나님 말씀 낭송 영상 등에 다 음악이 필요하다. 음악이 겉으로 보기에는 음을 다루는 일 같지만, 사람들에게 그것을 들려주면 하나님 말씀 전파 성과가 더욱 좋아지며, 복음의 확장을 추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너희가 여기에서 아무렇게나 말을 한다고 해도 배경 음악이 있으면 효과는 다를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래서 이 본분은 무척 중요하다. 또 혹자는 “그럼 영상 사역은 중요한가요?”라고 말하는데, 영상 사역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특수 효과 기술로 제작한 일부 대형 장면은 어떤 소재로도 대체가 불가능하고, 촬영해 낼 수도 없다. 이는 현대 예술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현대 예술을 논하다니, 이는 시대에 발맞추는 것 아닌가요?”라고 말하는데, 뭐가 시대에 발맞추는 것이냐? 이는 사탄을 이용해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형제자매를 이용해 힘쓰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몇몇 기술과 예술 측면의 업무를 익히고 이러한 업무 지식을 복음 확장과 하나님 말씀 전파 사역에 쓴다면, 네가 배운 것은 쓸모가 있을 것이다. 네가 그것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고, 네가 그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면 복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너의 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배우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본분에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저희가 하는 문서 사역은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저희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저희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얼마 안 되고요. 저희는 있으나 없으나 한 존재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일을 밝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너를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너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너를 감찰하고 인도하고 축복하고 있는데 왜 느끼지 못하는 것이냐? 사람들이 너를 볼 수 있는지, 너희에 관해 언급했는지가 중요하냐? 너희에게 어떤 진리를 공급해 주지 않았더냐? 너희가 빠진 설교 교제가 어떤 것이 있더냐? 사실, 문서 사역은 기술 수준이 그리 높지 않고, 업무 측면에서도 그리 강화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아무것도 써낼 수 없다. 너는 글쓰기 지식을 갖추고, 말을 규범화하고 조직화할 수 있으며, 한 작품의 구조와 맥락을 써낼 수 있겠지만, 구조가 그 자체로 문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 내용을 채워 넣어야 한다. 내용으로 과연 무엇을 쓸지, 과연 어떻게 써야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과를 낼 수 있을지 등은 너희가 진입해야 할 부분이다. 만약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이 단계 사역을 전파하는 기초에만 머무른다면, 너희의 분량은 결코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너희가 하나님의 새 사역을 증거하고 사람의 관념을 깨부술 수 있다면, 이상(異象) 측면의 진리 외에도 생명 진입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고, 사실과 이야기, 비교적 섬세하게 묘사된 상황 설명으로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 각종 내적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의 패괴를 인식하게 하고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며 가장 중요한 문제인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지, 사람이 가야 할 길은 무엇인지, 사람이 지금 걷고 있는 잘못된 길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길을 걸으라고 요구하는지 등을 인식하게 한다면, 또 한 걸음 한 걸음 이러한 측면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너희의 본분 이행은 더없이 가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난관이자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사람의 생명 진입은 하루 이틀에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일이 처음 말할 때부터 의식을 가질 때까지 1~2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고, 모호하게 의식할 때부터 분명하게 의식할 때까지 2~3년, 3~5년의 시간이 걸리며, 분명하게 의식할 때부터 그 일의 성질을 의식하게 될 때까지 2~3년이 걸린다. 또 그 문제의 심각성을 아는 데까지는 2~3년이 더 걸린다. 무감각하고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은 여기까지 올 수 있지만, 자질이 좀 좋고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무엇이 진리인지 주동적으로 구하는 데 또 2~3년이 걸린다. 이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생이 지나가는 것이다. 생명 진입은 이렇게 느리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속도는 진리를 체험하고 인식하는 속도를 크게 뛰어넘는다. 이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체험과 인식은 영원히 느리다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해하고 기억하는 데는 머리만 쓰면 된다. 기억력과 이해력이 좋고 자질이 좀 있으며, 지식적인 기초가 갖춰져 있으면 아주 빨리 해낼 수 있다. 하지만 이해한 후에 바로 인식이 생기겠느냐? 그렇지 않다. 이해했다고 해도 그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아는 데 머무를 뿐, 일을 할 때는 여전히 잘되지 않는다. 왜 그렇겠느냐? 대부분의 경우, 네가 아는 도리는 일이 닥쳤을 때 쓸 수도, 연관 지을 수도 없다. 그 결과, 몇 번 실패하고, 적잖은 손해를 보며, 여러 번 길을 잘못 들기도 한다. 많은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여야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갖가지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할 수 있다. 그렇게 몇 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네 얼굴은 주름으로 덮일 것이다. 이것이 무척 느린 것 아니겠느냐? 사람의 생명 성장은 무척 느린 일이다. 사람이 깨닫는 진리는 사람의 본성 본질, 사람의 생존, 사람이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등과 연관되며, 이는 또 성품 변화나 생명 변화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네 생명이 다른 종류의 생명으로 변하는 것이 그리 쉬울 리 있겠느냐? 먼저 하나님의 사역이 필요하고, 이와 동시에 사람이 주동적으로 협력해야 하며, 게다가 외부 환경의 시련을 겪어야 하고, 개인적인 추구도 필요하다. 이 밖에도, 충분한 자질과 이해력이 있어야 한다. 그다음, 하나님이 추가적으로 너를 깨우치고 인도해 주며, 형벌과 심판, 책망과 훈계를 해야 한다. 또한, 형제자매들의 질책이 있어야 하고, 너 역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사탄에게 속하는 것들을 제거할 수 있고, 진리에 속하는 긍정적인 사물들이 조금씩 들어갈 수 있다. 혹자는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생명이 변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어디가 옳지 않으냐?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진리를 갖춘 것은 아니며, 진리가 네 생명이 된 것도 아니다. 네가 진리를 듣고 이해하고, 알아들었다고 해서 그게 네 마음속에 얼마나 오래 남아 있겠느냐? 어쩌면 한 달 후, 네가 당시에는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그 말씀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그 말씀들을 들을 때 너는 처음 듣는 것 같다고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네가 이러한 생명의 분량을 갖추었다면 반복적으로 들을 필요는 없다. 반대로, 갖추지 못했다면 항상 들어야 한다. 듣지 않는다면 네가 이해한 것들이 점점 줄어들고 사라질 것이며, 서서히 불신자들과 같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과 진리는 늘 듣고 보아야지, 적게 보고 들으면 안 된다. 너희는 이 점에 대해 깊이 느낀 바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가끔은 2~3일만 찬양을 부르지 않고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아도 마음이 공허해지고 하나님을 느낄 수가 없어 밖에 나가 산책하며 기분을 풀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기분을 풀수록 마음이 더 흩어지기만 하고, 교회에 가서 형제자매들과 진리를 교제하면 생소하게 느껴지며, 교회 사역에 대해 말해도 몇몇 말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2~3일만 지나도 이렇게 변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고, 너 자신조차 스스로를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어찌 된 일이겠느냐? 네가 설교를 많이 들었다고 해서 진리를 네 생명으로 삼았다고, 진리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직 멀었다! 또한, 간증문을 하나 쓰고 그런 체험이 생겼다는 이유로 네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아직 그러기엔 이르다! 그것은 그저 네 기나긴 생명 체험 중 하나의 편린일 뿐이다. 그 편린도 한때의 기분이나 느낌, 바람, 포부에 그쳤을 수도 있다. 어느 날 네가 연약해질 때, 지난날의 간증과 서약, 인식을 돌이켜보면 낯선 느낌이 들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게 저라고요? 저한테 이렇게 큰 분량이 있었단 말이에요? 왜 모르겠죠? 이건 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때, 너는 네 생명이 아직 변하지 않았음을 느낄 것이다. 생명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느냐? 아직 성품이 변화하지 않은 것이다. 과거에 간증을 할 당시에는 너 자신에게 큰 분량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처럼 소극적인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성품 변화가 너무도 어렵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진리가 사람 내면에 만들어지는 것은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사람이 정말 진리를 얻어 생명으로 삼으면 복을 얻게 되고,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지금처럼 그렇게 수시로 패괴 성품을 표출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충성심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며, 철저히 변화하게 된다.

인류가 너무 깊이 패괴되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진리는 너무도 귀하기에 하나님이 진리를 사람 내면에 만드는 것은 더욱 어렵다. 진리의 가치와 의미, 그리고 진리의 다양한 측면은 사람에게 너무도 가치 있고 의미 있다. 하지만 인류는 사탄에게 너무 깊이 패괴되었고, 내면에 사탄에게 속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에, 진리를 사람 내면에 만들어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리가 사람 내면에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진리는 사람 내면에 만들어질 수 있다. 다만, 사람이 올바른 태도와 관점을 지녀야 하고,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한다. 어렵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지난 두 단계 사역을 보면, 하나님은 온전케 하는 사역을 하지 않았고, 이런 진리를 선포하지 않았으며, 이런 말씀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온전케 된 사람이 있었고, 하나님을 인식한 사람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진리는 사람 내면에 만들 수 있다. 아예 안 되는 게 아니라 가능하다. 다만 이는 사람의 진리 추구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럼 어떻게 추구해야겠느냐? 가장 간단한 방법은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대표적인 하나님 말씀을 외우며, 하나님 말씀 한 대목을 묵상하는 한편,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들을 반복해서 읽고 교제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너에게 가르쳐 주려는 관점과 가르침,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 이해하고 마음속에 담으면, 갖가지 일이 닥쳤을 때 너도 모르게 올바른 사상 관점, 실행 원칙을 살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지금 아직 이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욥이 무엇을 했는지 보았느냐? 그의 자식들이 잔치를 열 때 욥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자식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았다. 즉, 너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일은 피해라. 너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말은 하지 마라. 너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 네게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의혹을 싹트게 하는 것은 보지 말고 피해라. 너를 소극적으로 만들고, 타락하게 만들고, 방종하게 만드는 사람, 네게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거부감, 거리감이 생기게 하는 사람은 접하지 말고, 그런 사람으로부터 멀리해라. 접했을 때 네게 유익과 도움, 공급을 주는 사람이라면 가까이해라. 네가 진리에 반감, 염증을 갖거나 진리를 좋아하지 않게 만드는 일은 하지 마라. 이런 것들을 너는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저 그렇게 살 때까지 살면 되지. 모든 건 다 순리대로 따르고 하나님의 지배에 맡기자.’라고 생각하며 맹목적으로 그럭저럭 살지 마라. 하나님은 네게 환경을 안배해 놓고, 네게 자유 의지를 주어 네가 선택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네가 협력하지 않고, 늘 세속적인 것을 좋아하고, 육체를 방종하고, 본분에 충실하지 않은, 무책임한 사람과 적극적으로 접하며 그런 사람과 어울린다면, 최종 결과와 그 말로는 무엇이겠느냐? 그런 사람은 한가할 때면 먹고 마시고 놀며 즐기는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구설수를 부르는 말을 한다. 이런 시험이 닥쳤을 때 멀리하지 않고 그런 일에 골몰하면서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 다닌다면 위험하다. 그러면 언제라도 시험을 마주할 수 있다! 슬기로운 사람은 이런 시험을 보면 멀리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다. ‘나는 그럴 분량이 없어 듣지 않을 거야. 상대하고 싶지도 않아. 저런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좋아하지 않아. 저들을 피해 조용한 곳을 찾아서 혼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차분한 마음으로 묵상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겠어.’ 이런 모든 원칙, 근본 취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지 마라. 둘째, 마음으로 하나님을 멀리하지 마라. 이렇게 무엇이 진리인지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언제나 하나님 앞에 살면,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네가 시험에 들지 않게 보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네게 특별히 은총을 베풀어 네가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인지 알게 하고, 여러 가지 진리에서 빛 비춤과 깨우침이 있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네 본분에 있어서 네가 최대한 실수하지 않게 인도하여 늘 옳게 하고 원칙을 알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러면 네가 보호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 물론, 보호받는 것이 최대 목표, 최종 목표는 아니다. 그렇다면 최종 목표는 무엇이냐? 바로 네가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에서 공과를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역을 인식하여 하나님이 요구한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너의 생명과 분량은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성장할 것이다. 만약 네가 늘 업무 때문에 정신이 없어 본분 이행 과정에서 진리를 실행하고 생명 진입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면, 네 생명은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생명 진입은 본분 이행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본분 이행과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나면 생명도 성장하지 못한다. 혹자는 남들이 잡담하는 것을 보면 끼어들고 알아보려고 하며, 늘 수다쟁이 역할을 맡고 시비를 논하기를 좋아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느냐?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마음을 평온히 하고 무엇을 하느냐? 나무 인형이 되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느냐?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하나님의 보호와 깨우침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또, 어떤 방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경우 그 방면의 진리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도록 깨우침과 빛 비춤을 구하고, 어떤 방면의 사역에서 난제를 만난 경우 하나님의 인도를 받거나 해결되기를 구한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할 때 배워야 할 공과와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다. 한가할 때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저 여기 있어요. 당신은 제 마음속에 계시고, 저와 함께하세요. 저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세요!” 같은 도착 보고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무성의하게 대한다면 이런 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진리를 베풀어 주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진리를 베풀어 주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무엇을 갖춰야 하느냐?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마음과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네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네가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가 늘 하나님을 무성의하게 대하고, 진심이 전혀 없고, 무슨 일이든 스스로 결정하려 하고, 하나님 앞으로 가서 도착 보고를 하고 인사를 마치고는 자기 혼자 결정하고 일을 처리하려 한다면 하나님의 사역을 네게 맡겼음에도 종국에 너는 하나님과 무관하고 진리와 무관해진다. 이를 무엇이라 하느냐?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경영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면 하나님이 너를 깨우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너희는 진리를 추구하고 깨닫는 길을 알아냈느냐? 늘 하나님 앞에 와서 마음을 평온히 한 뒤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평온해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평온해진다는 것은 머리를 텅 비우는 것이 아니라 구하고 생각하고 부담을 가지는 것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갈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와서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고, 자신의 본분과 사역에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와서 평온히 할 때 네가 마땅히 갖춰야 하는 것이다.

방금 전에 교회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나라의 복음 확장 사역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교제했다. 특히 복음 전파 사역, 업무와 관련된 각 사역은 복음 확장 사역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복음 확장 사역에 관련된 것은 하나님의 이익, 하나님 집의 이익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복음 확장 사역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자신이 이행하는 본분과 다른 사람이 이행하는 본분을 올바로 대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로 대하는 것이겠느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는 것이다. 적어도 고의로 파괴하고 교란하는 행위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알면서도 일부러 범해서는 안 된다. 어떤 행동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끝끝내 고집하고 누구의 충고도 듣지 않는다면 이는 악을 행하는 것, 죽음을 자초하는 것으로, 마귀가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형제자매들이 빨리 분별하게 한 후, 악인을 교회에서 제명해야 한다. 만약 악을 행한 사람이 고의가 아니라 한때의 어리석음으로 그런 행동을 한 거라면 이 일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가르치고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 가르쳤는데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형제자매들이 함께 질책해야 한다. 만약 그가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지만 열심히 하지 않는데, 당장은 대체할 사람이 없고 모두가 계속 그에게 시키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모두 함께 그를 책망하고 훈계하고 경고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높여 주심 덕분에 이 본분을 이행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고 교란하며 본분을 내팽개친다면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죠. 당신은 본분 이행에 적합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이다. 이러면 어떻겠느냐? 만약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떠나보내라. 너희는 이렇게 할 용기가 있느냐? 대다수는 감히 그러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교회 사역을 보호하는 일에 나서서 정의를 지키는 것을 겁낸다. 이는 진리를 견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어떤 사람은 겁쟁이가 되어 교회 사역이 교란되고 방해받는 것을 보고도 미적지근한 태도를 취한다. 마치 자기와 무관한 듯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러면 안 된다고 질책하거나 경멸하고 무시하면, 짜증을 내며 생각한다. ‘당신이 뭔데? 무슨 근거로 나를 질책하는 거야? 뭘 근거로 나를 무시하는 건데? 여기에 대해서 분명히 말해 보자고.’ 그는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눈에 새겨 두며, 거기에 대해 말을 하거나 태도를 밝히지 않고는 못 배긴다. 교회 사역이 가로막히고 교란되고 파괴되는데 그는 느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른 척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람입니다.) 그냥 이기적이고 비열할 뿐이겠느냐? 이 문제는 너무도 심각해서 한마디로 요약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인성이 없다고,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행동하며, 거짓 리더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집의 이익이 무엇인지 개념이 없고, 교회 사역이 가로막혀도 보지 못한다. 누가 교회 사역을 교란하여 엉망으로, 난장판으로 만드는데 그는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대충 뜨뜻미지근하게 한마디 하거나 좀 타이르고는 끝이다. 전혀 분노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 정의감이 있겠느냐?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런 자는 배은망덕한 것으로, 변절자이고 파렴치한이다!

방금 우리는 사람의 이익이란 무엇인지, 사람의 이익의 본질은 무엇인지, 사람은 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지, 사람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성질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이익의 성질은 무엇인지, 어떻게 정의하는지 등에 관해 개괄적으로 이야기하였다. 하나님의 이익은 가장 정의로운 사업이다. 마땅히 이렇게 대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의 이익을 지키는 것은 절대 이기적인 게 아니고, 그저 하나님의 존엄과 영광을 지키기 위한 것만도 아니라 하나님 사역의 진도와 성과, 정의로운 사업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는 가장 정의롭고 정당한 행위이자 행동 방식이다. 하나님에게는 행사이다. 지음 받은 인류는 하나님의 이러한 행사에 어떤 관념도 가져서는 안 되며, 나아가 어떤 질책이나 판단도 해서는 안 된다. 그럼 하나님의 이익이 모든 것 위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이기적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이러한 측면의 진리에 대한 사람의 이해를 기초로 성립된다. 이는 의도적으로 한쪽 편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편파성이 없으며 정당하다.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본질이다. 이익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행동은 이런 성질을 띤다. 그들은 절대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다. ‘절대’란 무슨 의미겠느냐?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이런 개념이 없으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로 심각하겠느냐?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와 이익을 얻을 정도로 심각하고, 그의 이익은 지고지상해서 하나님의 이익을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 그의 이익이 아무리 사악해도, 아무리 정당하지 않고 부정적이어도 그는 쟁취하려 한다. 누구를 희생시키고 어떤 대가를 치르든 그는 자기 이익을 얻어 내고 쟁취하려고 한다. 이는 어떤 행위겠느냐? (적그리스도의 행위입니다.) 적그리스도의 행위이다. 사탄은 이렇게 행동한다. 사탄은 이 인류, 한 국가, 한 종족을 통치하면서 몇 명의 목숨이든 희생시켜 통치를 공고히 한다. 사탄의 이익은 무엇이겠느냐? 권세와 통치의 지위이다. 그럼 사탄은 통치 지위를 어떻게 얻고, 그 통치를 어떻게 공고히 하겠느냐? (모든 대가를 불사합니다.) 모든 대가를 불사한다. 즉, 이런 행동 방식과 수법이 외부에 정당하게 보이든, 정당하지 않게 보이든 신경 쓰지 않고 학살, 탄압, 당근과 채찍, 협박과 회유 등 모든 수법을 쓰고, 어떤 사람의 목숨이든,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숨이든 희생시켜 자기 지위를 공고히 하고 권력을 손에 넣는 것이다. 이것이 사탄의 행위이다. 그리고 적그리스도도 이렇게 행동한다.

오늘 교제한 이 말씀들이 너희 입맛에 맞느냐? (오늘 말씀을 듣고 큰 수확이 있었습니다. 특히, 지식과 지식인에 대한 해부를 듣고 크게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저는 지식인들이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말을 그리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하나님께서 지식에 대해 해부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조금씩 대조해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제가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도, 알아듣지도 못하며, 사람과 일을 바라볼 때 지식의 관점에서 살피고 분석하여 치우치게 이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었지요. 지금은 지식인의 본질에 대해 어느 정도 꿰뚫어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지식인에 관해 한 이야기는 절대 어느 한 사람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너희가 스스로에게 대조해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방향을 바로잡고 진입할 희망이 생길 테니 말이다. 열심히 추구해 보아라. 진리를 깨닫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데서, 조금씩 간단하고 단편적이며 얕은 진리를 깨닫고, 또 글귀와 도리가 아니라 진리를 깨닫게 되면 점차 영적인 이해력이 생길 것이다. 진리와 실제를 깊이 생각하면 차츰 진리를 깨닫게 된다. 언제나 도리 측면에서 분석하고 논리와 머리로 분석하면 도리와 이론만을 이해하게 될 뿐이다. 그것은 영원히 진리가 될 수 없고, 네게서 영원히 도리의 기초에 머물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혹자는 “몇몇 하나님 말씀은 왜 봐도 이해가 되지 않을까요? 문법이나 문장 구조로 판단하면 아무리 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고 그다지 잘 받아들여지지도 않습니다.”라고 말하는데, 너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지금 이해할 수 있겠느냐? 내가 설명해 주겠다. 인류가 탄생한 후로 하나님은 인류에게 말씀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 한마디, 한 단락은 언어일 뿐 문장이 아니다. 오늘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글을 쓰고 보고하는 것이냐, 아니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냐?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이야기하고 진리를 말하며 너희가 필요로 하는 화제를 다루는 것이다. 이것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글이란 무엇이고 말이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차이가 있다. 글에 필요한 몇 가지 요소와 관련된 지식은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은 말씀할 때 그러한 것들을 지키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저 그가 말하려는 진리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야기해 주기만 하면 되고, 사람이 진리를 듣고 이해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심지어는 문장 부호조차 필요하지 않다. 인류는 문장 부호와 글, 문법, 글에 필요한 요소들을 발명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지식 범주에 속하며, 하나님은 그런 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 이 밖에, 언어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긍정적인 사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모두 옳으며, 문법적인 문제를 파고들거나 대조해 보고 해부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너는 그저 하나님의 이 말씀 한 편, 한 단락, 한 구절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진리는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진리 원칙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실행의 길은 무엇인지 이해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는 피조물인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이성이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행사할 때는 사람이 만든 틀이나 지식에 속하는 규범, 순수한 지식적인 것들을 따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은 수많은 말씀을 했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전부 진리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 체험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전부 진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안에 담긴 진리가 무엇인지 사람은 묵상하고 구하고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말씀을 한다. 기억하여라. 하나님은 말씀한다. ‘말씀하다’라는 단어를 다르게 풀면 ‘한담하다’, ‘이야기를 하다’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얘기하려는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뜻과 진리,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바로 이런 내용이다. 말씀의 성질은 대화의 방식으로 마음과 얼굴을 마주하고 명료하게,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이다. 때로는 입말이나 방언을 사용할 수도 있고, 때로는 문학적인 어휘를 사용할 수도 있다. 글을 쓰면 첫 번째 단락에 발단을 쓰고, 중간에 사건의 전개와 경위를 쓰며, 마지막에 클라이맥스와 결말을 써야 한다. 완벽하게 이 형식에 맞춰 써야 글이라고 할 수 있고, 교사들이 첨삭하면서 상, 중, 하로 등급을 매길 수 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해 이렇게 등급을 매길 수 있겠느냐? “이 말씀 한 편은 내용이 좋고 수준 높은 문법을 활용했으며 신적인 언어를 쓴 데다가 문장 구조가 완벽합니다. 반면 이 말씀 한 편은 별로네요. 산만한 감이 있고 구조도 그리 안 좋습니다. 어떤 문장은 문법에 맞지 않고, 심지어 몇몇 단어는 사람이 봤을 때 용법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이는 치우치게 바라본 것으로, 이렇게 하면 영원히 진리를 얻을 수 없다. 하나님 말씀의 행간에서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그 안에 있는 진리는 무엇인지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 현명하다. 그런데 너는 이러한 것조차 보지 못한 채 온종일 “하나님의 말씀은 왜 글이 아닌 거죠? 하나님 말씀은 연설문 같아야죠. 하나님은 입만 열어도 멋진 글이 나와야 하는 겁니다.”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다. 너희가 듣기에도 피곤하고 말하는 사람도 피곤하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한 말씀, 욥에게 한 말씀, 베드로에게 한 말씀, 모세와 요나에게 한 말씀을 보아라. 하나님 말씀이 간단명료하지 않더냐? 그렇게 비범하고 추상적이고 위대하며 엄격한 어구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사탄이 욥을 시험할 때, 하나님이 사탄에게 한 말씀을 보아라.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욥 2:6) 하나님의 말씀은 간단하고 정제되어 있으며, 더없이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자 본질이다. 하나님은 교활한 술수를 부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비범함, 존귀함, 권병, 능력은 꾸며 낸 것이 아니다. 어째서 꾸며 낸 것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그는 누군가와 말할 때 거드름을 부리지 않고, 대단한 형상을 꾸며 내지 않으며,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사탄이나 그렇게 하지,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말씀하는 이상 네가 알아듣게 한다. 네가 어린아이라면 어린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야기할 것이고, 네가 노인이라면 노인들의 말로 이야기할 것이다. 네가 남성이라면 남성들이 자주 쓰는 말로 이야기할 것이고, 네가 패괴된 인류라면 패괴된 인류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 방식과 구조로 이야기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때로는 유머가 들어가 있고, 때로는 반어법을 사용하며, 때로는 풍자하고, 때로는 해부한다. 또 때로는 엄격하고, 때로는 온화하며, 때로는 네게 감동을 주고, 때로는 책망한 후 위로한다…. 하나님이 이 모든 사역을 하고 이러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은 굳어 있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수의 근원이며, 진리의 원천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해도 된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전부 진리이며, 어떤 방식을 쓰든 상관없다. 늘 하나님의 말씀 방식과 구조 등에 관념을 갖고 연구하고 의혹을 품고 씁쓸해하면서 ‘내가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 같지가 않아. 왜 저러시지?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네. 그분 말씀을 받아들이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 아무래도 다른 누구를 믿어야겠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자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불신파입니다.) 이는 불신파다. 불신파는 대부분 어떤 사람이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눈을 부릅뜨고 연구한다. 결과적으로는 확실히 알아내지 못한 채 ‘참도라면, 이렇게 믿어서 과연 복을 받을 수 있을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믿는데, 믿지 않는다면 지옥에 가지 않겠어?’라고 속 좁은 생각을 한다. 그는 ‘다들 하나님 말씀 안에 진리가 있다고 하는데, 뭐가 진리지? 나는 왜 알아볼 수가 없는 거야? 더 살펴보고 들어 봐야겠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마침내 ‘듣고 이해한다’. ‘이 말씀들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다 실제 상황이야. 이 말씀들은 진리라고. 언어가 너무 평범하고 일반적이며 대중적이라서 지식계에서 멸시받고 무시당하며 가장 평범한 말로 취급당하는 거지. 어떤 말씀은 너무 수수하기도 하고. 지식계의 유명한 지식인들은 쳐다도 보지 않을 단어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다니 정말 불가사의하네.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늘 이렇게 연구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너는 자기가 하나님보다 낫다고, 오히려 하나님이 너를 믿고 높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이런 자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는 영원히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며, 이와 동시에 반발하는 것이다. 반발하는 동시에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이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당신은 너무 보잘것없고 하나님 같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저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고, 당신을 멸시하고 연구할 것입니다. 당신을 하나님이 아니라고 분석하여 모두가 당신을 믿지 않게 되면 저는 기쁠 것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하나님을 찾아 믿으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거예요.’ 이런 자를 불신파라고 한다. 불신파는 대부분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이런 가장 평범한 말씀 속에서 진리를 깨닫지도 얻지도 못한다. 그는 그저 연구할 뿐이다. 이렇게 저렇게 연구하다가 진리를 얻기는커녕 구원받는 큰일에 지장을 주며 스스로를 드러내고 도태시키게 된다.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안녕!

2020년 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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