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1 무엇이 진리인가
<피조물은 모두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돌아와야 한다>, 이 찬양을 불러 보자.
1.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자신의 권세 아래로 돌아와 순종하게 한다. 그는 만유를 주관하여 만유가 모두 자신의 수중에 있게 한다. 동물, 식물, 인류, 산천, 호수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그의 권세 아래로 돌아올 것이다. 하늘의 만물이든 땅의 만물이든 모두 그의 권세 아래로 돌아올 것이며, 선택의 여지 없이 모두 그의 지배에 순종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규정한 것이고 또 하나님의 권병이다.
2.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여 만물이 다 질서를 갖추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각기 부류대로 나뉘며 각각 자기 위치에 있게 한다. 아무리 큰 것도 하나님을 넘어설 수 없으며 모두 하나님이 창조한 인류를 위해 이바지한다. 어떤 것도 감히 하나님께 반역하거나 다른 것을 요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음 받은 사람도 반드시 사람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사람이 만물의 주인이든 만물의 관리자든 관계없이, 또 사람이 만물 가운데서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해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는 작디작은 사람일 뿐이다. 그저 작디작은 사람이고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보다 높을 수 없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피조물은 모두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돌아와야 한다>는 찬양에서 진리는 무엇이겠느냐? 어느 말이 진리겠느냐? (모두 진리입니다.) 마지막 말은 무엇이냐? (“사람이 만물 가운데서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해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는 작디작은 사람일 뿐이다. 그저 작디작은 사람이고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보다 높을 수 없다.”입니다.)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보다 높을 수 없고, 피조물은 영원히 하나님보다 높을 수 없다. 하나님 외에는 모두 피조물이다.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보다 높을 수 없다는 것은 진리이다. 이 진리가 변할 수 있겠느냐? 오랜 세월이 지나면 변화하겠느냐?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진리이다. 무엇이 진리인지 누가 말해 보겠느냐? (진리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진리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두 번 교제한 바 있다. 무엇이 준칙인지 다시 한번 말해 보아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준칙이다. (준칙은 기준이 되는 정확한 원칙과 법칙, 규율입니다. 준칙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 또 이어서 말해 보아라. (준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은 가장 기준이 되고 가장 정확한 원칙과 법칙, 규칙입니다.) 여기서 ‘가장’이라는 단어를 덧붙였는데 이 ‘가장’이라는 단어를 덧붙일 필요가 있느냐? ‘가장’을 덧붙이는 것과 ‘가장’을 덧붙이지 않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느냐? ‘가장’이 있으면 두 번째가 있고 세 번째가 있고 네 번째가 있다. 이 ‘가장’이라는 단어를 덧붙이니 어떠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유일한 기준인데 ‘가장’을 덧붙이는 순간 두 번째와 세 번째 같이 다른 것과 비교되는 상대적인 개념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정확하냐? (정확합니다.) 그런대로 합리적이다. 너희가 ‘무엇이 진리인가’의 정의에 대해 정확한 견해와 인식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이 진리라는 일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너희는 과연 이 ‘가장’이라는 단어를 덧붙여야 하는지, 덧붙이는 게 옳은지 아니면 덧붙이지 않는 게 옳은지, 덧붙이고 나면 무엇이 다른지, 덧붙이지 않으면 무슨 뜻이고 덧붙이면 무슨 뜻인지 등의 몇 가지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 이제 ‘가장’을 덧붙이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게 확실해졌다. 이 단어를 덧붙인 사람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느냐? 그는 하나님의 어느 측면을 형용하든 다 ‘가장’이라는 단어를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렇게 비교하는 것은 무엇이 잘못됐느냐? 하나님의 어느 말씀과 어느 진리에 위배되겠느냐? (피조물은 영원히 하나님보다 높을 수 없는데 ‘가장’을 덧붙이고 나면 마치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도 두 번째, 세 번째라는 개념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이 옳지 않겠느냐? (옳습니다.) 이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또 어떤 말들로 이 ‘가장’이라는 단어를 앞에 덧붙이는 게 잘못됐음을 증명할 수 있겠느냐? (한마디가 떠올랐습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비롯될 수 있고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이기 때문에 두 번째나 세 번째 등 상대적인 개념은 없습니다.) 이 말도 맞다. (진리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입니다. 법칙과 규율, 준칙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비롯될 수 있고, 사람은 일을 처리하는 준칙과 법칙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규율을 제정할 수도 없기 때문에 ‘가장’을 덧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설명이 상대적으로 좀 더 실제적이다. 또 있느냐? (하나님의 권병과 하나님의 본질은 유일무이합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바로 진리이고,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이라는 단어를 덧붙이면 마치 진리가 유일무이하지 않은 것만 같습니다.) 이 말은 어떠냐? (좋습니다.) 어디가 좋으냐? (하나님이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유일무이’라는 단어를 잊었다. 하나님은 유일무이하다.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의 준칙과 사람에 대한 모든 요구가 인류 가운데 존재하겠느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지식과 전통문화, 사람의 머릿속에 그런 것이 존재하겠느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생겨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한다. 그래서 ‘가장’을 덧붙이면 두 번째, 세 번째가 생기고, 높은 것과 낮은 것, 더 낮은 것이 구분되며, 1급, 2급, 3급처럼 등급이 나뉜다…. 즉, 모든 옳은 것이 다 순서대로 준칙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말에 ‘가장’을 덧붙이고 나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느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진리가 상대적인 것으로 변한다. 단지 피조된 인류 사이의 지식과 철학, 각종 옳은 것들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높아질 뿐이다. 진리를 등급으로 나누는 것이다. 등급으로 나누는 순간 패괴된 인류 사이에서 옳은 것도 진리로 변한다. 그런 것들도 사람이 일을 처리하고 처신하는 준칙이 된다. 다만 상대적으로 급이 좀 낮을 뿐이다. 예를 들어, 소양과 예의를 중시하는 것, 사람의 선량함, 사람이 선천적으로 갖춘 일부 좋은 것들이 모두 준칙으로 변한다. 모두 무엇으로 변한다는 뜻이겠느냐? (진리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로 변한다. 봐라, ‘가장’이라는 단어를 덧붙이자 이 준칙의 성질이 변했다. 준칙의 성질이 변하면 하나님에 대한 정의도 변하지 않겠느냐? (변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의가 어떻게 바뀌었느냐? 하나님과 하나님의 권병, 능력, 본질이 유일무이하지 않게 되고, 그저 인류 가운데 능력과 권병이 있는 가장 높은 인물도, 인류 가운데 재능과 위신이 있는 어떤 사람도 다 하나님과 엇비슷해지고 비견될 수 있게 됐다. 다만 하나님만큼 높거나 크지 않을 뿐이다. 하나님은 1인자이고 인류 가운데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인물이나 지도자는 바로 하나님 뒤를 이어 2인자, 3인자, 4인자가 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설명하니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이 철저히 변한 것 아니겠느냐? ‘가장’이라는 단어 하나가 하나님의 본질을 철저히 바꿨다. 이는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가장’이라는 단어를 덧붙이지 않으면 이 말의 정확성은 어디에 있겠느냐? (한 가지 사실을 진술한 데 있습니다.) 그 사실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진리요, 원칙이고 기준이며 준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준칙을 만들어 낸 원천이라는 것이다. 패괴된 인류 가운데에는, 피조물 가운데에는 이런 준칙이 없다. 하나님은 이런 준칙을 선포하는 유일한 원천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이 본질을 갖추고 있다.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와 준칙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비롯될 수 있다. 만약 한 사람이 일을 처리하고, 처신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원칙을 좀 알고, 준칙을 좀 알고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는다면 하나님이 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진리의 원천이겠느냐? 모든 진리의 선포자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그를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이게 바로 본질의 차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무엇이 진리인가’라는 주제를 두 번 다뤘는데도 너희의 대답에는 여전히 이런 커다란 실수가 등장하는구나. 하나님을 피조물의 일원으로 바꿨고, 피조물과 하나님이 대등해졌다. 이 둘의 관계를 평등하게 만들었으니 이 문제의 성질이 변했다. 이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인류는 피조물이다. 이 둘은 같은 등급의 역할이 아닌데 ‘가장’이라는 단어를 덧붙이자 어떻게 변했느냐? 본질과 등급이 같아졌다. 다만 높고 낮음과 위아래가 나뉘었을 뿐이다. 내가 자세히 물으면 너희는 이렇게 머리를 굴린다. ‘이건 우리를 무시하는 거 아닌가? 우린 다 교양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말 하나 기억 못 하겠어? 입만 열면 저절로 나오지. 필기를 볼 필요도 없다고.’ 그러고 입을 열자 바로 문제가 드러났다. 너희는 내가 한 말을 몇 번이나 읽고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너희는 이 방면의 진리를 여전히 잘 깨닫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가장’이라는 단어를 덧붙이고 나서 이렇게 생각한다. ‘‘가장’이라는 단어를 덧붙이지 않은 걸 보니 당신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크지 않은가 보군. 나를 봐, ‘가장’이라는 단어를 덧붙였잖아. 역시 난 교양 있어. 대학을 나온 보람이 있다고!’ ‘가장’이란 단어를 덧붙여도 너희 중 대다수는 듣고도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소수는 듣기에 조금 어색하다고 여길 뿐 무엇이 문제인지 명확히 말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설명을 들으면 너희는 이론적으로는 알아듣고 그 설명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너희가 진리의 측면에서 깨달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가장’이라는 단어를 덧붙이는 것의 잘못된 점을 이렇게 교제하니 너희는 알아듣지만, 이 문제의 본질을 정말로 인식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해하지 못한 것은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왜 진리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내가 이렇게 말하니 너희는 알아듣지 않았느냐? 알아듣는데 어째서 여전히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냐?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이라는 제목의 글은 총 몇 편이 있느냐? 너희는 몇 번이나 봤느냐? 이 말을 정말로 이해했느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너희는 이해하지 못해서 오늘 망신을 당한 것이고 이 한마디 말에 의해 드러난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제 교훈을 좀 얻지 않았느냐? 다음에 또 이런 일을 마주쳐도 이렇게 잘난 체할 수 있겠느냐? 감히 그러지 못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교양과 지식이 뛰어나도 소용없다. 만약 네가 교양이 없고 이 말의 용법을 알지 못한다면 너는 아마 이 ‘가장’이라는 단어를 덧붙이지 않을 것이고 이런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이런 망신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교양이 있고 일부 단어의 의도와 용법을 어느 정도 이해해서 하나님에게 썼고, 결국 문제가 생겼다. 이는 재주를 피우려다 일을 망친 것이다. 네가 만약 이를 사람에게 쓴다면 단지 개인을 숭배하고 치켜세우는 것이므로 기껏해야 조금 역겨울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쓴다면 문제가 심각해지는데,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고 정죄하는 말이 된다. 이게 바로 패괴된 인류가 진리를 갖추지 않아서 가장 쉽게 저지르는 잘못이다. 앞으로는 조심해야 한다. 부사나 형용사를 함부로 덧붙이면 안 된다. 왜 그렇겠느냐? 하나님의 신분 본질,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에 관한 것은 모두 패괴된 인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자 패괴된 인류가 가장 얕고 적게 인식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으면 절대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좀 신중한 게 좋다.
1.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을 해부하다
방금 몇몇 사람들이 진리의 정의와 개념을 설명했다. 너희가 진리의 개념과 정의를 깨달았으니, 그렇다면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너희가 과연 정말로 깨달았는지, 아니면 깨달은 척하는지 내가 한번 시험해 봐야겠다. 어떻게 시험하겠느냐? 너희의 강점으로 너희를 시험할 것이다. 너희의 강점은 무엇이냐? 교양과 글귀, 단어, 그리고 사람이 각각의 무리 속에 살며 파악한 여러 측면의 철학과 처세술, 사람의 전통문화와 관념, 상상, 그 밖에 여러 인종과 집단, 국가의 사람이 의지해 생존하는 각종 법칙과 관념, 이런 것들에 너희는 익숙하다. 이는 너희의 강점이 아니겠느냐? 그중 일부는 비교적 고정된 성어이고 일부는 속어나 속담이다. 또 일부는 서민이 자주 말하고 줄줄 외우는 속된 말이다. 생각해 봐라, 사람은 보통 어떤 일에 관해 비교적 깊이 있는 사상 관점을 가지고 그것을 하나의 성어로 요약하겠느냐? 우선 일부 속담과 성어, 법칙, 그리고 사람의 처세술과 전통 관념을 분석해서 대체 무엇이 진리인지 깨달을 수 있게 해 보겠다. 반대되는 측면에서부터 대체 무엇이 진리인지 서술해 보자. 이러면 좋지 않겠느냐? (좋습니다.) 그럼 너희가 먼저 하나 말해 봐라.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우선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에서부터 교제를 시작하자. 너희가 한번 설명해 보아라, 이 말은 대체 무슨 뜻이겠느냐? (이 말은 어떤 사람을 쓸 때는 그를 믿어야 하고 그에게 경계심을 품어선 안 되며, 만약 그를 믿을 수 없다면 쓰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설명하면 그런 뜻이다. 너희가 먼저 말해 보아라, 세상에서 대다수 사람은 이 말을 인정하겠느냐, 아니면 인정하지 않겠느냐? (인정합니다.) 인정한다. 이 사회에서 대다수 사람은 사람을 쓰는 일에서 모두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을 원칙으로 삼고 모두 이 원칙을 근거로 사람을 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이 말에는 정확한 측면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럼 왜 이방인 중 대다수는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하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활용하겠느냐? 그들의 출발점은 무엇이겠느냐? 왜 이 말을 하겠느냐? 누군가는 말한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쓴다면 당신은 그를 의심하면 안 되고 그를 믿어야 해요. 그가 일을 잘 처리할 능력과 인품을 갖췄고 당신에게 충성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해요. 그를 의심한다면 아예 쓰지 마세요.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란 말처럼 말이죠. 이 말은 정확해요.” 사실, 이 말은 순전히 사람을 미혹하는 마귀적인 말이다. 이 말은 어디에서 나왔겠느냐? 어떤 속셈과 음모가 있겠느냐? (하나님, 저는 지난번 교제 때 어떤 사람이 그의 사역에 남이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을 때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고 말한다고 했던 게 생각납니다. ‘당신이 사역을 내게 맡겼고 나를 썼으니 당신은 내 사역에 개입하면 안 되고 내게 간섭하면 안 돼.’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말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적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성품이다. 그럼 이런 말을 한 사람이나 그 말을 발명한 사람은 사람을 쓰는 측이겠느냐, 아니면 쓰임을 당하는 측이겠느냐? 이 말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겠느냐? (쓰임을 당하는 측입니다.) 이 말은 쓰임을 당하는 사람에게 어떤 유익을 주겠느냐? 그가 만약 그를 쓰는 주인에게 계속 이 말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사상을 주입하는 것으로, 교육하고 주입하는 성질을 좀 띤다. 이는 상대방에게 ‘당신이 누구를 쓴다면 그가 당신에게 충성할 수 있고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으며 그럴 능력이 있다고 믿어야지 절대 의혹을 품어선 안 돼요. 의혹을 품으면 당신 자신에게 불리해요. 당신이 만약 늘 딴마음을 품은 채 다른 사람을 찾아 그를 대체하려고 한다면 당신에 대한 그의 충성심에 영향을 끼칠 거예요.’라고 알리는 것이다. 사람을 쓰는 측이 듣고 나면 이 말에 영향을 받거나 미혹되기 쉽지 않겠느냐? (쉽습니다.) 그가 영향을 받거나 미혹되고 나면 쓰임을 당하는 사람은 득을 보게 된다. 사람을 쓰는 측이 만약 이런 사상을 받아들이고 쓰임을 당하는 사람에게 의혹이나 의심을 조금도 품지 않는다면, 그가 대체 무엇을 했는지, 주인에게 충성하는지, 이런 일을 처리할 능력이 있는지 감독하거나 알아보지도 않는다면, 쓰임을 당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주인의 감독과 감시를 피할 수 있고 이후로는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고 제멋대로 굴 수 있다. 너희 생각에 쓰임을 당하는 사람이 정말로 이 말을 하는 동시에 절대적으로 그의 주인에게 충성할 수 있는 인품을 갖췄겠느냐? 그를 감시할 필요가 전혀 없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옛날부터 지금까지 한 가지 공인된 사실은 바로 인류는 심하게 패괴되어 모두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고, 특히나 교활하고 간사하며, 정직한 사람은 없고 바보조차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실이 사람을 쓸 때 큰 어려움이 됐다. 신뢰할 만한 사람을 거의 찾을 수 없으며, 완전히 믿을 만한 사람은 더더욱 찾을 수 없다. 기껏해야 상대적으로 쓸 만한 사람을 몇 명 찾으면 괜찮은 정도다. 신뢰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또 어떻게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을 실천할 수 있겠느냐? 이는 실천할 수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두 믿을 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상대적으로 쓸 만한 사람은 어떻게 써야겠느냐? 감독하고 지도하며 쓸 수밖에 없다. 이방인은 그 사람 곁에 밀정이나 첩자를 배치해 그를 감독하는데, 그래야만 상대적으로 안심할 수 있다. 그러니 옛날 사람들이 했던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은 자기기만이 된다. 이 말을 한 사람 자신도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을 실천하지 못한다. 만약 정말 실천한다면 그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고 바보 중의 바보이며, 사기를 당할 수밖에 없다. 이는 사실이 아니겠느냐?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의 가장 큰 허점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말해 보자.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은 어떤 기반 위에 만들어졌겠느냐? 쓰임을 당하는 사람이 반드시 전적으로 믿을 만하고 충성심과 책임감이 있어야 하며, 반드시 이런 사람이라고 100% 확신할 수 있어야만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을 실천할 수 있다. 지금은 이렇게 믿을 만한 사람은 찾을 수 없다.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니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은 헛소리가 됐다. 만약 네가 믿을 만하지 못한 사람을 뽑고 나서 의심이 들지 않도록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로 자신을 단속한다면 이는 자기기만이 아니겠느냐? 네가 의심하지 않는다고 해서 쓰임을 당하는 사람이 믿을 만해지고, 충성스럽고 책임감 있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느냐? 사실, 네가 의혹을 품든 말든 그는 여전히 자기 방식대로 일을 처리한다. 그가 간사한 사람이면 간사하게 일을 처리하고, 그가 착실한 사람이면 착실하게 일을 처리한다. 이는 사람이 의심을 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바뀌는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네가 간사한 사람을 쓴다면 너는 마음속으로 그가 간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네가 “저는 당신을 의심하지 않으니 마음 놓고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세요.”라고 말한다고, 설마 네가 의심을 품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착실한 사람이 되어 착실하게 일을 처리하겠느냐? 그게 가능하겠느냐? 만약 네가 착실한 사람을 쓴다면 네가 그에게 의심을 품고 그를 잘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간사한 사람이 되겠느냐? 그러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은 순전히 바보가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고 자기를 속이는 헛소리다. 인류는 어느 정도로 패괴됐느냐? 지위와 권력을 위해 부자지간이나 형제지간에도 사이가 틀어져 원수가 되거나 서로 잔인하게 죽일 수 있고, 모녀지간에도 서로 증오할 수 있으니, 누가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느냐? 절대적으로 믿을 만한 사람은 없고 오로지 상대적으로 쓸 만한 사람만 있다. 어떤 사람을 쓰든 다 감독하고 감시해야만 실수를 방지할 수 있다. 따라서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은 자신을 속이는 말이자 헛소리이며 황당한 이론으로,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말세에 왜 진리를 선포하고 심판 사역을 해서 사람을 정결케 하고 구원하려 하겠느냐? 인류가 심하게 패괴되어 진실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도, 하나님이 쓰기에 합당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거듭 요구한다. 또한, 인류가 너무도 간사하고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가득 차 있어서, 모두 사탄 본성을 가지고 있고, 저도 모르게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해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할 수 있어서 패괴된 인류 중에는 쓸 만한 사람도, 신뢰할 만한 사람도 없다. 인류 가운데서 사람을 뽑아 쓰는 건 너무도 어렵다! 첫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둘째, 사람은 다른 사람을 간파할 수도 없다. 셋째, 특수한 배경에서 사람은 더더욱 다른 사람을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없다. 이런 배경에서 쓸 만한 사람을 찾는 것은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은 완전히 잘못됐고 조금도 실용적이지 않다. 만약 사람을 뽑아 쓸 때 이 말을 근거로 하면 사기를 당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을 옳은 말이나 진리로 여기는 자는 누구보다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 말이 정말로 사람을 쓰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조금도 해결할 수 없다. 그저 자신을 위로하고 자신과 남을 속이며 스스로를 우롱할 뿐이다.
여기까지 교제하고 나니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이 옳은지 그른지 대체로 이해되지 않았느냐? 이 말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이 말은 무엇이겠느냐? (사탄의 철학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말은 다른 사람의 감독이나 감시를 뚫거나 벗어나려는 핑계이자 모든 악인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살포하는 연막탄이다. 이 말은 꿍꿍이를 품은 사람들이 제멋대로 굴려고 내세우는 구실이자 그들이 자신들에 대한 도의와 양심의 감독이나 감시, 정죄에서 당당하게 벗어나려고 퍼뜨리는 일종의 황당한 이론이다. 지금도 여전히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이 실용적이고 맞는 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분별력이 있겠느냐? 그가 진리를 깨달았겠느냐? 그런 사람은 사상 관점에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만약 교회에서 누가 이 말을 퍼뜨린다면 그는 속셈이 있고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다. 그는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로 자신에 대한 남들의 우려나 질의를 불식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 뜻인즉슨 남들이 그가 사역할 줄 알고 쓸 만한 사람이라고 믿게 한다는 말이다. 그는 이런 속셈과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겠느냐? 틀림없이 그렇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늘 나를 믿지 않고 의심해. 어쩌면 언젠가 내 자그마한 문제점을 발견하면 바로 나를 교체해 버릴지도 몰라. 항상 마음이 놓이지 않는데 어떻게 사역을 하겠어?’ 따라서 그가 이런 관점을 퍼뜨리는 것은 하나님 집이 자기를 의심하지 않고 믿게 만들고, 자기가 마음 놓고 사역하게 내버려두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목적이 달성된다. 만약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집에서 그의 사역을 감독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올바르게 대할 것이고, 그게 자신을 지키는 것이고 나아가 하나님 집 사역을 책임지는 것임을 알 것이다. 그 역시 패괴를 표출하긴 하지만 하나님에게 자신을 감찰하고 지켜 달라고 기도하거나, 악을 행하면 하나님의 징벌을 받겠다고 하나님에게 맹세할 수 있다. 이러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겠느냐? 왜 황당한 이론을 퍼뜨려 사람을 미혹하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냐? 일부 리더 일꾼은 하나님 선민의 감독이나 윗선 리더 일꾼이 사역을 파악하는 것에 대해 늘 반발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그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말라는 말도 있는데, 당신들은 왜 항상 나를 감독하는 거야? 나를 믿지도 못하면서 왜 쓰는 거지?’ 만약 그에게 사역 상황이나 사역 진도를 물어보고 그 개인의 내적 상태를 물으면 그는 더더욱 불만을 갖는다. ‘이 사역은 내게 맡겼으니 내 권력 범위 안에 있는데 당신들은 왜 내 사역에 개입하는 거야?’ 그는 감히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못하고 빙빙 돌려 말한다.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속담도 있잖아요. 의심이 너무 많으시네요!” 그는 너를 정죄하고 네게 낙인을 찍기까지 한다. 만약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분별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가 의심이 많나요? 그럼 제가 잘못했네요. 제가 간사했어요! 당신 말이 맞아요.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말아야 해요.” 이는 미혹된 것 아니겠느냐?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이는 허튼소리다! 그 사악한 자는 음험하고 간사해서 속담을 진리로 여겨 이 멍청이를 미혹했고, 결국 그 멍청이는 그 말에 정말 미혹되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게, 저 사람한테 미안하게 됐네.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도 있다는데 나는 왜 그를 못 믿을까? 사역을 이런 식으로 할 게 아니라 저 사람을 격려해 줘야 해. 그에게 사역에 관한 일은 캐물으면 안 돼. 저 사람을 쓰려면 믿어야 하고 알아서 하게 내버려둬야 해. 저 사람을 속박하지 말고 능력을 발휘할 여지를 줘야 해. 저 사람은 그럴 능력이 있어. 그럴 능력이 없다고 해도 어차피 성령이 역사하시잖아!’ 이게 다 무슨 논리란 말이냐? 진리에 부합하는 말이 한마디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듣기에는 다 맞는 말이다. ‘사람을 속박하면 안 돼.’, ‘사람은 뭘 할 수 없고 전부 성령이 역사하시는 거야. 성령이 모든 걸 감찰하시니까 우리는 의혹을 품을 필요 없어. 하나님이 전적으로 책임지시잖아.’ 사실 이는 다 어떤 말이겠느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멍청이가 아니겠느냐? 그들은 이만한 일조차 간파하지 못하고 그 말에 미혹됐다. 대다수 사람이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을 진리로 여겨 대하고 모두 이 말에 미혹되고 얽매이며, 사람을 뽑고 쓸 때도 이 말에 교란되고 영향받고 심지어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수많은 리더 일꾼이 교회 사역을 파악하거나 사람을 발탁하고 골라 쓸 때 늘 어려움과 우려를 겪다가 결국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로 그저 자신을 위로하고 만다. 사역을 검사하고 따져 물을 때마다 그들은 생각한다.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말라잖아. 형제자매를 믿어야 해. 게다가 성령이 감찰하고 계시잖아. 늘 사람을 의심하고 감독하면 못써.’ 이는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에 영향을 받은 것 아니겠느냐? 이 말에 영향을 받으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첫째, 마음속에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관점이 있으면 사람의 사역을 검사하고 지도하겠느냐? 사람의 사역을 감독하고 체크하겠느냐? 만약 누구를 쓰든 다 믿어서 검사하지도, 지도하지도, 감독하지도 않는다면 그게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겠느냐? 교회의 사역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할 수 있겠느냐? 그게 하나님의 부탁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겠느냐? 둘째,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네 본분을 지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처세 철학, 사탄의 음모와 계략을 진리로 여겨 준수하고 실행했다. 이는 사탄에게 순종하고 사탄 철학에 기대 살아가는 것 아니냐? 너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너는 완전히 망나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제쳐 놓고 오히려 사탄의 말을 진리로 여겨 실행하다니, 이는 진리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 집에서 사역하지만 네가 일을 처리하는 원칙은 처세 철학과 사탄의 논리이다. 이런 자는 어떤 사람이냐? 이런 자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심히 욕되게 하는 사람이다. 이 성질은 무엇이냐? 이는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정죄하고 공개적으로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런 성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탄의 헛소리와 사탄의 처세 철학이 교회에서 횡행하게 했다. 너는 사탄의 공범자가 되어 사탄이 교회에서 일을 저지르고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도록 도왔으니 문제의 성질이 아주 심각하지 않으냐?
지금 대다수 리더 일꾼은 마음속에 사탄의 독소가 있고 여전히 사탄의 철학에 기대 살아가며 마음속에 주인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별로 없다. 수많은 리더 일꾼이 사역할 때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사역을 안배한 뒤 절대 사역을 검사하거나 감독하지 않는다. 사실 그들도 속으로는 사역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분명 문제가 발생할 것임을 알지만 어떻게 해결할지 몰라서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관점을 가지고 무성의하게 대한다. 그러고는 내심 편안해하기까지 한다. 이로 인해 일부 사람은 실제적인 사역은 하지도 못하고 그저 사무적인 일만 형식적으로 좀 처리한다. 그 결과 교회 사역은 엉망진창이 되고, 어떤 지역에서는 하나님의 제물마저 도둑맞았다. 보다 못한 하나님 선민이 상부에 그 상황을 보고한다. 거짓 리더는 그 사실을 알고 나서 큰 재난이 닥쳐왔다고 생각해 어쩔 줄 몰라 한다. 상부에서 “왜 사역을 검사하지 않죠? 왜 사람을 잘못 쓴 거죠?”라고 추궁하면 그는 “저는 사람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해서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원칙을 따랐는데, 사람을 잘못 써서 큰일이 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라고 답한다. 너희가 보기에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관점이 옳겠느냐? 이 말이 진리겠느냐? 그는 왜 이 말을 하나님 집 사역과 본분 이행에 적용했겠느냐?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은 분명 이방인의 말이고 사탄에게서 비롯된 말인데 그는 왜 이 말을 진리로 여겨 대하겠느냐? 왜 이 말의 옳고 그름을 분별해 내지 못하겠느냐? 이 말은 분명 사람의 말이고 패괴된 인류의 말이지 결코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부합하지 않으니 일을 처리하고, 처신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럼 이 말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만약 네가 정말 분별력이 있다면 너는 어느 방면의 진리 원칙으로 이 말을 대체해 네 실행 원칙으로 삼아야겠느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것은 바로 어느 누구에게도 속박받지 않고 딴생각 없이 전심전력하는 것이다. 이는 네 책임이고 네 본분이니 잘 이행해야 한다. 이는 불변의 진리이다. 어떤 문제를 마주하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 처리할 것은 처리하고, 책망 훈계가 필요하면 책망 훈계하고, 교체할 자는 교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근거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 이는 원칙이 아니겠느냐? 이는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과는 정반대가 아니냐?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은 무슨 뜻이겠느냐? 어떤 사람을 썼으면 의심해선 안 되고, 그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둬야 하며, 만약 의심된다면 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이는 완전히 잘못됐다. 인류는 사탄에 의해 심하게 패괴되어 모두 사탄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할 수 있다. 모두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설령 사람이 굳게 맹세하더라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패괴 성품에 속박받아 자신도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 형벌을 받아들여야만 패괴 성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는 문제, 즉 사람이 죄를 범하는 근원을 해결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정결케 함을 거치지 않고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모두 믿을 만하지 못하고 신뢰할 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을 쓸 때는 반드시 감독하고 지도해야 할 뿐 아니라 책망하고 훈계하며 자주 진리를 교제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사람을 계속 남겨 두고 쓸 수 있을지 간파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리와 책망, 훈계를 받아들일 수 있고 충성스럽게 본분을 이행하여 생명이 끊임없이 자랄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쓸 만한 사람이다. 진정으로 쓸 만한 사람은 성령 역사를 증거로 한다. 성령 역사가 없는 사람은 모두 믿을 만하지 못한 사람이고, 힘쓰는 자이자 임시 직원이다. 리더 일꾼을 선발하는 일에서 도태된 사람의 비율은 비교적 높다. 적어도 절반은 넘는다. 쓸 만하고 쓰임에 합당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게 사실이다. 일부 교회 리더는 절대로 사역을 감독하거나 검사하지 않고, 사역을 교제하고 안배하고 나면 신경 쓰지 않는다.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을 근거로 삼고 속으로 ‘남은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게 두자.’라고 생각한다. 안일함을 누리기 시작하며 그 일에 대해 질문도 하지 않고 그 일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렇게 사역하면 건성으로 대충 하는 것 아니겠느냐? 책임감이 조금이라도 있겠느냐? 이런 사람은 거짓 리더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본분을 이행할 때 반드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고 요구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야말로 진리이다. 리더 일꾼이 하나님의 말씀은 따르지 않고 마귀 사탄의 말을 따라 사역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는 모습이 아니겠느냐? 왜 하나님 집에서 리더 일꾼을 선발할 때 반드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양심과 이성이 있는 좋은 사람, 자질이 뛰어나고 사역을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겠느냐? 인류가 너무 깊이 패괴되어 쓸 만한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 훈련하고 양성하지 않으면 일 처리 효율이 형편없고 본분을 잘 이행하기 어려워서 반드시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여러 차례 거친 뒤에야 쓰임에 합당해지기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은 다 훈련 과정에서 드러나고 도태되는데, 리더 일꾼의 도태율은 상당히 높다. 이는 무엇 때문이겠느냐? 인류가 사탄에 의해 너무 깊이 패괴되어 많은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양심과 이성의 기준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쓸 수 없는 사람이 많고, 반드시 하나님을 몇 년 믿어 진리를 조금 깨달은 뒤에야 어느 정도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 이게 패괴된 인류의 실정이다. 우리는 이 점을 근거로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이 완전히 잘못됐고 실용 가치가 전혀 없으며,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순전히 마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은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이고 마귀적인 말이며 사탄 철학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렇게 규정하는 게 전적으로 적절하다. 하나님은 결코 “패괴된 인류는 믿을 만하다.”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늘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데, 이는 인류 전체에 정직한 사람은 몇 안 되고, 모두 거짓말하고 기만하며 간사한 성품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 밖에, 하나님은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을 배반할 가능성은 100%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 쓰려면 여러 해 동안 책망과 훈계를 거쳐야 하고, 나아가 쓰는 동안 사람은 여러 해에 걸쳐 심판 형벌을 겪어야만 정결케 될 수 있다. 이제 너희가 보기에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 있겠느냐? 감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감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겠느냐? 사람은 모두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 다시 돌아와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을 살펴보면, 이 말이 대체 어디가 잘못됐는지, 어느 부분이 터무니없는지 일목요연하지 않으냐? 만약 누가 여전히 이 말에 옳은 측면이나 쓸 만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진리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고 몹쓸 인간이다. 오늘 너희가 이 말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 말을 황당한 이론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여 패괴된 인류의 본질을 어느 정도 명확히 알고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귀적인 말,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철저히 부인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 사역의 구원이 없었더라면 너희도 사탄의 이 헛소리에 미혹될 것이고, 나아가 그것을 경전이나 좌우명으로 삼아 사용할 것이다. 그러면 너무도 불쌍하고 진리 실제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을 예전에 들어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너희는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그르다고 생각하느냐? (그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르다고 생각하면서 왜 현실 생활에서는 여전히 이 말의 영향을 받는 것이냐? 이런 일이 닥치면 이 관점이 바로 튀어나와서 어느 정도 교란당한다. 교란당하는 순간 제대로 사역하지 못한다. 너는 이 말이 그르다고 생각하고 그르다고 규정하면서 왜 여전히 영향을 받고 이 말로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냐?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할 수 없어서 사탄의 처세 철학을 원칙이나 준칙으로 삼아 실행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한 가지 이유다. 또 있느냐? (이 말이 사람의 육적인 이익에 비교적 부합해서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 자연스레 이 말대로 일을 처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진리를 깨닫더라도 반드시 진리대로 실행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육적인 이익에 비교적 부합한다.”라는 말은 맞다. 사람은 계략이나 사탄의 처세 철학을 준수해 자신의 육적인 이익을 지킬지언정 진리를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 밖에, 그가 이렇게 행동하는 데도 근거가 있다. 어떤 근거겠느냐? 이 말은 대중이 공인한 맞는 말이라서 이 말대로 행동하더라도 그는 모든 사람 앞에서 성립될 수 있고 비난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덕이나 법률의 관점에서 보든, 아니면 전통 관념의 관점에서 보든, 이 말은 타당한 관점이고 행동 방식이다. 따라서 진리를 실행하기 싫거나 진리를 깨닫지 못할 때, 너는 차라리 하나님에게 죄짓거나 진리를 어기고 도덕적으로 최소한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는 곳으로 물러나고자 한다. 그곳은 어디겠느냐? 바로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최저선이다. 이곳까지 물러나서 이 말대로 행동하면 너는 마음이 편안해진다. 왜 편안해지겠느냐?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네 안에 “다수가 저지른 범법행위는 처벌받지 않는다.”라는 관념이 있다. 너는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생각하잖아. 내가 이 말대로 실행한다면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든 마시든 어차피 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성령을 만질 수도 없잖아. 최소한 사람들은 내가 인간미도 있고 양심도 좀 있다고 생각하겠지.’ 너는 이 ‘인간미’를 위해, 대중이 적대시하는 눈빛으로 너를 바라보지 않게 하기 위해 진리를 배반하기로 한다. 그러고 나서 모든 사람이 네가 훌륭하다고 말하고 너를 비난하지 않게 되면 너는 윤택하게 살아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네가 바라는 건 마음이 편안한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 것은 진리를 사랑하는 모습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이 안에는 간사함이 있지 않겠느냐? 간사함이 있다. 너는 생각을 거쳐서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이 옳지 않고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왜 궁지에 몰렸을 때는 진리를 선택하지 않고 사람이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전통문화에서 생겨난 철학적인 문구 하나를 선택해 지키는 것이냐? 너는 왜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냐? 여기에는 사람의 복잡한 생각이 담겨 있다. 복잡한 생각이 있으면 어떤 성품과 관련 있겠느냐? (사악함과 관련 있습니다.) 사악함 외에 한 가지 측면이 더 있다. 너는 이 말이 올바르다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이 말을 준수할 수 있고 이 말에 좌우되고 통제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네가 진리를 싫어한다는 것, 너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성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점은 분명하다. 사람은 행동할 때 많은 관점의 영향을 받는데, 사실 너는 마음속으로 이 관점들이 반드시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여전히 준수할 수 있고 계속 고수할 수도 있다. 이는 한 가지 성품 때문에 그런 것이다. 너는 그 관점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영향을 받고 좌우되고 지배당한다. 이게 바로 사악한 성품이다. 예를 들어, 마약이나 도박에 빠지는 사람이 있는데, 그도 마약과 도박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가산을 탕진할 수도 있으니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남을 말리기도 한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게 옳지 않고 그것이 부정적인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손을 뗄 수 있겠느냐? 끊어 버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발걸음을 영영 제지하지 못하고 심지어 공개적으로 말한다. “도박으로도 돈을 벌 수 있어요. 도박도 하나의 직업이 될 수 있다고요.” 이는 미화하는 것 아니냐? 사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직업은 무슨. 집 안에 값어치가 있는 물건은 전부 저당 잡혔고 다 잃었어. 도박하는 사람 중 결국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럼 그는 왜 그렇게 말하겠느냐? 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왜 끊지 못하겠느냐? 그의 본성 안에 그런 것들이 있고 이미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저버리지 못한다. 이게 바로 본성이다.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에 관해 거의 다 교제했다. 사람이 이 말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일시적 충동으로 이런 관점을 받아들였거나 일시적인 부주의로 사탄에게 틈을 내주어 이런 관점이 주입된 후 이런 관점대로 행동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사람의 패괴 본성과 관련 있다. 사람의 본성 안에 이런 것이 있기 때문에 그는 그런 길을 걷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을 이렇게 분석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이해할 것이다. 이 말은 사탄의 처세 철학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 말은 결코 진리가 아니다. 그러면 진리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 말은 진리와 전혀 관련이 없고, 하나님에 의해 정죄된다. 이 말은 진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아닌 사탄에게서 비롯됐다. 이 말은 진리와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일을 처리하고, 처신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과도 아무 관련이 없으며 완전히 정죄됐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진 편이라서 너희가 그것이 올바른지 여부를 분별하기 쉽다.
2. ‘와신상담’에 대해 해부하다
또 다른 성어인 ‘와신상담’에 대해 말해 보자.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누가 한번 설명해 보겠느냐? (와신상담에서 ‘신’은 장작이고 ‘담’은 쓸개입니다. 월나라 왕 구천(句踐)이 장작더미에서 자고 매일 쓸개를 핥으며, 복수하여 원한을 풀고 재기해서 자신의 나라를 되찾으려 한 것을 말합니다.) 네가 설명한 것은 이 성어의 전고이다. 전고란 이 성어가 어떤 이야기에서 비롯됐는지를 말한다. 보통 성어를 설명할 때는 전고뿐 아니라 그 성어의 파생적 의미와 현대인이 이 성어로 무엇을 비유하는지도 설명해야 한다. 다시 한번 설명해 보아라. (어떤 사람이 몹시 애쓰고 분발하며 자신의 목적과 염원을 위해 분투하고 노력하는 것을 비유합니다.) 그럼 여기서 ‘신’과 ‘쓸개’는 어떻게 설명해야겠느냐? 너는 이 두 가지의 뜻은 설명하지 않았다. 단어 자체로 보면, ‘신’은 가시 돋은 장작을 가리킨다. 그는 가시 돋은 장작 위에 누워 잠을 자면서 항상 자신의 처지와 치욕, 자신이 짊어진 사명을 상기시켰다. 그 밖에, 그는 쓸개를 대들보에 걸어 놓고 매일 핥았다. 쓸개를 핥을 때 사람은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씁니다.) 몹시 쓰다! 그는 그런 맛으로 원한과 자신의 사명, 자신의 염원을 잊지 말라고 자신에게 상기시켰다. 그의 염원은 무엇이었느냐? 나라를 재건하는 대업이었다. 와신상담은 보통 무엇을 비유하겠느냐? 보통 어떤 사람이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사명과 염원을 잊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염원과 이상, 사명을 위해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것을 비유한다. 대략 이런 뜻이다. ‘와신상담’이라는 말은 세상 사람이 보기에 긍정적인 것이겠느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겠느냐? (긍정적인 것입니다.) 왜 이 말은 긍정적인 단어로 여겨지겠느냐? 이 말은 역경 속에서도 원한과 치욕을 잊지 말고 분발하여 강해지도록 사람을 격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비교적 고무적인 성어이다. 세상 사람이 보기에 이 말은 의심할 여지 없이 긍정적인 단어이다. 만약 이 말대로 행한다면 사람의 행동과 출발점, 행동 방식, 지키는 원칙 모두 틀림없이 옳고 긍정적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 말에는 기본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없다. 그럼 우리는 이 말을 가지고 무엇을 분석하려는 것이겠느냐?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이겠느냐? (이 말에서 진리와 위배되는 부분을 분석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 우리는 이 말이 과연 진리인지 아닌지 분별하려는 것이다. 이 말이 그토록 ‘옳다’면 우리는 대체 어디가 ‘옳은지’ 분석하고 증명한 다음 이 말을 정확하게 정의하여 과연 진리인지 아닌지 살펴볼 만하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이루려는 성과이다. ‘와신상담’이라는 말은 사람이 일부 특수한 환경에서 지키는 생존 법칙이다. 우선 확실하게 말해 보자. 이 말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이 말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문자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이 말에는 부정적인 뜻이 없다. 그럼 이 말의 긍정적인 뜻은 무엇이겠느냐? 이 말은 사람을 격려하여 사람이 포부를 갖고 분발하여 발전하며 위축되거나 기죽지 않고 겁쟁이가 되지 않게 하는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포함하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은 사람이 어떤 배경에서 지켜야 하는 것이냐? 이 말이 지키는 원칙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관련이 있겠느냐? 진리 실행과 관련이 있겠느냐? 본분 이행과 관련이 있겠느냐? 하나님의 도(道)를 준행하는 것과 관련이 있겠느냐? (관련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정의를 내렸느냐? 관련이 없는지 너희가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말은 너무 단순하다. 그건 무책임한 말이다. 네가 깨닫지 못한 상태로 “어쨌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으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저도 몰라요. 저는 그 말을 따르지 않을 거예요. 마음대로 말하라고 하세요. 저는 믿지 않을 테니.”라고 말한다면 이는 무책임한 말이다. 너는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네가 진지하게 대하여 철저히 깨닫고 이 말을 진실로 분별하게 되면 영원히 이 말을 진리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지금 네게 이 말의 정확성을 부인하라는 게 아니라 이 말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과 같은 배경에서 진리란 무엇이고 어떻게 진리를 지켜야 하는지를 깨달으라고 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그럼 너희는 어떻게 이해했는지 한번 말해 보아라. (와신상담은 사람이 역경에 처했을 때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집에서는 역경이라는 말이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드러내시거나 사람에게 시련을 주시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을 온전케 하시는 과정이지 역경이 아닙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 지금 고생하면 나중에 만회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알려 주는데, 이런 말도 하나님 집에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예를 하나 들자면, 어떤 리더는 교체되고 나서 와신상담으로 자신을 격려하며 “월나라 왕 구천처럼 와신상담해서 언젠가 재기하고 다시 리더가 되고 말 테니 다들 두고 보세요! 지금은 당신들이 저를 이렇게 저렇게 나쁘다고 평가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만회해서 제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당신들에게 보여 줄 거예요. 지금 당하는 이 굴욕을 언젠가 반드시 씻어 낼 거라고요!”라고 말합니다.) 꽤 좋은 예시다. 너희는 깨우침을 좀 얻었느냐? 너희도 와신상담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으냐? 재기하고 싶은 생각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자신의 관점이 남에게 부정당할 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형제자매와 어떤 일들을 소통하는데 형제자매가 제가 내놓은 관점에 대해 질의할 때면 속으로 오기를 부리고 언젠가 반드시 잘해서 보여 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중에 관련 업무를 열심히 익힙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가짐은 옳지 않습니다.) 그건 진리를 받아들이고 구하고 실행하는 태도가 아니라 오기를 부리고 남에게 증명해 보이려는, 일종의 불복하는 태도다. 이런 태도는 이 인류 사이에서는 긍정적인 것이다. 끝까지 불복하는 것은 일종의 기질로, 패기 있는 것이다. 그럼 어째서 이게 진리 실행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그가 일을 처리하는 태도와 원칙, 출발점이 진리가 아니라 전통문화인 ‘와신상담’이라는 말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는 카리스마가 넘치고, 승부욕이 강하고 불복하는 그의 마음과 태도에 세상 사람들은 탄복하지만 진리 앞에서 그런 마음과 기질은 무엇이겠느냐? 보잘것없고 형편없으며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이다. 누가 또 말해 보겠느냐? (한 가지 본분을 이행할 때 자신이 업무에 익숙하지 않아서 남들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남몰래 용기를 북돋습니다. ‘열심히 업무를 익혀서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당신들에게 보여 주겠어.’ 때때로 남들이 본분상의 부족함을 지적하면 저는 공들여 고칠 뿐 아니라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업무를 익힙니다. 아무리 고생을 많이 해도 속으로 삭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본분을 잘 이행할지 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언젠가 남들에게 우러름과 존중을 받기를 바랍니다. 또한, 와신상담의 내적 상태도 있습니다.) 너희가 하는 말을 통해 문제점을 하나 발견했다. 너희는 하나님을 믿은 지 꽤 됐고 모두 가정과 직업을 버린 채 많은 고생을 했지만 수확은 아주 적다. 너희는 본분을 이행할 때 고생하고 헌신하고 대가를 치를 줄도 아는데 어째서 진리에서는 늘 자라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깨달은 진리가 어째서 그토록 적고 얕은 것이냐? 그 이유는 너희가 진리를 중시하지 않고, 늘 와신상담하려고 하면서 자신을 증명하려는 의지를 마음속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와신상담은 ‘커다란 고름집’이다. 그게 무슨 좋은 것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와신상담은 결국 어떤 효과가 있겠느냐? 어떤 사람이 자신은 훌륭하고 능력 있으며 남에게 뒤지지 않고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 할 때 그는 와신상담하려고 한다. 즉, “고생을 해 봐야 뛰어난 사람이 된다.”라는 것이다. 그럼 와신상담에는 몇 가지 모습이 있겠느냐? 첫 번째 모습은 불복하는 것이다. 두 번째 모습은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다. 남과 무엇을 논쟁하거나 남에게 무엇을 반박하거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설명하는 말은 전혀 하지 않더라도 남몰래 공을 들인다. 어떤 공을 들이겠느냐? 그건 아마 너희가 치르는 대가일 수도 있다. 밤을 새우거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남들이 놀고 있을 때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업무를 익히면서 공을 많이 들이는 것이다. 이는 고생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게 바로 와신상담이다. 세 번째 모습은 무엇이겠느냐? 내면에 원대한 포부를 가지는 것이다.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자신의 근심을 토로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이루기로 한 목표를 지키고자 그런 투지를 유지한다. 그런 투지는 무엇이겠느냐? 예를 들어, 네가 리더가 되거나 어떤 일을 성취하려면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그런 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자신의 다짐과 사명, 지향과 이상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이를 한마디로 어떻게 표현하겠느냐? (초심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초심을 잊지 않는 것도 맞지만 조금 약하다. (마음속에 원대한 포부를 품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런 느낌이 좀 있다. 어떻게 표현해야 더 정확하고 간결하겠느냐? (투지와 포부입니다.) 완전한 말로 표현하면 무엇이냐? 싸울 때마다 번번이 패배하지만 싸울수록 더 용감해지는 것이다. 이게 바로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투지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교체되는 일이 닥쳤다고 바로 주저앉는 거예요? 저는 몇 번이나 교체됐지만 주저앉지 않았어요. 어디에서 넘어지든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 해요. 우리는 그런 투지를 가져야죠!”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투지는 그가 보기에는 긍정적인 것이다. 그는 사람이 지향과 이상, 투지를 갖는 건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패괴 성품 중 교만한 성품이 만들어 내는 야심과 욕망을 무엇으로 여기느냐? 긍정적인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그는 와신상담하고 그런 고생을 하여 자신이 분투하는 목표, 옳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이루는 것이 정당하고 사람들의 눈에 드는 일이며 분명 진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와신상담의 모습에는 이 세 가지가 포함된다. 이 세 가지로 와신상담 안에 포함된 뜻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세 가지 모습을 근거로 세세하게 교제해 보자.
1) 불복하다
먼저 와신상담의 첫 번째 모습인 불복하는 것에 대해 말해 보자. 불복하는 것이란 무엇이겠느냐? 일반적으로 사람이 보이는 어떤 모습이 내면에 불복하는 마음가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느냐? 불복하는 것은 어떤 성품이겠느냐? (교만하고 강퍅한 것입니다.) 교만하고 강퍅한 이 두 가지 측면의 성품은 분명히 갖추고 있다. 또 있느냐? (승부욕이 강합니다.) 그게 성품이냐? 그건 모습이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건 성품이다. (진리를 싫어합니다.) 진리를 싫어한다면 분명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리더 일꾼이 네가 일을 처리할 때 원칙을 위배해 하나님 집 사역을 그르쳤다며 너를 교체하려고 하면 너는 생각한다. ‘흥, 난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교체할 테면 하라지. 못 하게 하면 나도 안 해. 순종한다고!’ 이 순종 안에는 불복하는 태도도 있다. 이게 바로 성품이다. 이 성품 안에는 교만하고 강퍅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것 외에 또 뭐가 있겠느냐? 여기에는 하나님에게 맞서려는 성품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흉악한 것이다. 너희는 이토록 흉악한 성품도 알아보지 못한다. 왜 흉악하다고 하겠느냐? (그는 하나님에게 맞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맞서는 것을 흉악하다고 한다. 몹시 흉악하다! 만약 흉악하지 않다면 그는 진리에 맞서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에게 맞서거나 하나님과 겨루지도 않을 것이다. 이는 흉악한 성품이다. 불복하는 것 안에는 교만한 것, 강퍅한 것, 진리를 싫어하는 것, 흉악한 것이 포함된다. 이는 관련된 몇 가지 뚜렷한 성품이다. 불복하는 것은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어떤 마음가짐이 있겠느냐? 불복하는 사람은 모두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교체되는 일이 닥치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표출하겠느냐? 가장 흔한 모습은 바로 그가 한 가지 본분을 이행할 때, 상부에서 보기에 그가 그 본분을 이행하기에 적절하지 않아서 그를 교체하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팔로는 허벅지를 비틀지 못하니 나는 다투지 않겠어. 난 재능이 있으니까. 금은 언젠가 빛나기 마련이야. 어디에 있든 난 인재라고! 상부에서 어떻게 안배하든 난 일단 참고 따를 거야.’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하기도 한다. “하나님, 제가 불평을 늘어놓지 않게 지켜 주시고 제 입과 혀를 지켜 주세요. 제가 당신을 판단하거나 모독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하지만 또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순종하지 못하겠어. 그게 제일 어려워. 이 사실을 못 받아들이겠는데 어떡하지? 상부에서 이렇게 안배했으니 어쩔 수 없지. 난 이렇게 재능이 있는데 어째서 하나님 집에서는 펼칠 수 없는 거지? 보아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적게 읽었나 봐. 앞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어야겠어!’ 그는 오기를 부리며, 자신이 남에게 뒤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좀 짧은 것이라고, 그건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공들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으며 매일 찬양 하나를 배우고 하나님 말씀을 한 편 읽을 뿐 아니라 설교 연습도 하면서 점차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해진다. 수많은 영적인 도리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되고 예배 때 입을 열어 교제도 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불복하는 기운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그건 어떤 기운이냐? (사악한 기운입니다.) 아주 골치 아프게 됐다! 왜 이렇게 분석하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사악한 기운이라고 규정하느냐? 그건 좋은 일 아니냐? 영 생활이 정상적이고 세속에 참여하지도 않으며 시비를 가리지도 않는다. 하나님 말씀을 여러 편 암송하고 찬양을 여러 곡 외워 부를 수 있으니 ‘뛰어난 자’인데, 왜 이를 사악한 기운이라고 하느냐? (그는 작심하고 자신이 훌륭하고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불복하는 것이다. 그가 불복하는 것이 정말로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패괴와 교만한 성품을 인식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가 불복하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고 있느냐? 그는 자신이 훌륭하고 뛰어나며 남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하고, 결국 그를 교체한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측면에 힘을 쓴다. 이는 불복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불복하는 태도가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그의 행동 방식을 만들어 냈다. 겉으로 보면 그는 꽤 공을 들였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를 줄 알며 결국 목적을 이루었는데, 하나님은 어째서 좋아하지 않겠느냐? 왜 정죄하겠느냐?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고, 진리를 근거로 모든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행위와 속셈, 모습, 성품을 하나님은 어떻게 평가하겠느냐? 전부 진리를 근거로 평가한다. 그럼 이 일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평가하고 정의하겠느냐? 네가 고생을 얼마나 많이 하고 대가를 얼마나 많이 치렀든 결국 너는 진리에 힘쓰지 않았고, 진리에 순종하며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을 먹지 않았다. 스스로가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방식으로 너에 대한 하나님과 하나님 집의 규정이나 처리가 잘못됐음을 증명했다. 이는 무슨 뜻이겠느냐? 너는 네가 한 번도 실수한 적 없는 사람이자 패괴 성품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과 하나님 집의 처리가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도 틀릴 때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실수를 저지르거나 네게 문제가 생기면 너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고, 너는 순종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결과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런 결과를 칭찬하겠느냐, 아니면 정죄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정죄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정죄하는 것이다.
사람의 이런 불복하는 태도가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진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런 불복하는 태도가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진리와 현격히 차이가 난다고 말한다면, 이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다. 그것은 진리와 아예 관련이 없다. 이런 불복하는 태도는 세상에서, 모든 인류 가운데서 추앙받겠느냐, 아니면 정죄되겠느냐? (추앙받습니다.) 어떤 장소에서 추앙받겠느냐? (직장과 학교에서 추앙받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이번 시험에서 60점을 맞더니 “나는 불복해. 다음에는 90점 맞을 거야!”라고 말하고 다음에 90점을 맞자 또 100점을 맞으려고 하며 결국 목표를 이루면, 학부모는 그 아이가 패기 있고 유망하다고 생각한다. 흔히 볼 수 있는 또 다른 상황은 경기장에서 일어난다. 어떤 팀은 시합에서 져서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오르지만 그들은 불복한다. 이런 불복하는 정신과 태도로 인해 그들은 열심히 노력하고 부지런히 연습해 다음 시합에서 상대 팀을 이기고 그들에게 망신을 준다. 이 사회에서, 이 인류 가운데서 불복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이다. 정신이란 무엇이겠느냐? (마음을 지탱하는 생각입니다.) 그렇다. 사람이 계속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면서 무너지지도, 낙담하거나 움츠러들지도 않고 이상과 목표를 이루도록 지탱하는 동력이다. 이를 불복한다고 한다. 이는 불복하는 정신이다. 사람은 이런 정신이 없으면, 이런 ‘정신력과 체력’이 없으면 살아 있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무엇에 기대 살아가겠느냐? 일종의 정신에 기대 살아간다. 그 정신은 어디에서 비롯됐겠느냐? 사람의 관념과 상상 속에서 비롯되고, 패괴 성품 속에서 생겨난 것으로, 실제적이지 않고 사람이 이르지도 못한다.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고 나서 지금까지 몇 년이 지났든 상관없이 생물이 생존하는 법칙과 인류가 생존하는 법칙, 천지 만물과 우주가 운행하는 법칙 등 긍정적인 것이 너무도 많다. 인류의 생각과 소양의 수준에 따르면 인류는 그 속에서 한 가지 법칙을 찾아내어 준수하고 그것을 일을 처리하고 처신하는 원칙과 동력, 혹은 근간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 올바른 측면에 공들이지 않고 어느 측면에 힘쓰느냐? 잘못된 측면에 힘쓴다. 즉, 사물이 발전하는 법칙과 만물이 순환하는 법칙을 위배하고 늘 하나님이 정해 놓은 자연법칙을 파괴하면서 사람의 방식과 방법으로 행복을 창조하려 한다. 그는 행복이 어떻게 얻어지는지, 그 안의 비밀은 무엇인지, 근원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그 근원을 찾지 않고 사람의 방법으로 창조할 뿐 아니라 늘 기적을 만들고 사람의 방법으로 이 모든 정상적인 법칙을 바꾼 다음 자신이 원하는 행복과 목표에 이르려고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비정상적이다. 사람이 자신에게 기대 계속 쟁취하다 보니 결국 어떤 결과가 생겼느냐? 하나님이 인류에게 관리하라고 맡긴 이 세상이 이제 파괴됐다. 파괴된 뒤 최대 피해자는 누구냐? (사람입니다.) 최대 피해자는 인류다. 사람은 이 세상을 이 지경으로 짓밟아 놓고도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으니 이는 정신이 좀 비정상적인 것 아니겠느냐?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아서 결국 어떤 결과를 불러왔느냐? 치명적인 재난을 불러왔다. 그건 단지 시합에서 한두 번 지고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앞길을 망치고 퇴로를 끊으며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불복하면 이런 말로를 맞이한다.
지금 분석하는 것은 사탄의 흉악한 성품과 교만한 성품의 전형적인 모습, 즉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다.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은 일종의 정신으로, 우리는 그것을 비판하고 폭로하고 정죄한다. 그러나 이 인류 가운데서 그것을 정죄한다면 먹혀들겠느냐? (먹혀들지 않습니다.) 왜 먹혀들지 않겠느냐? (사람들이 모두 이 말을 떠받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런 정신을 제창한다. 불복하거나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정신이 없으면 너를 보고 나약하다고 한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제창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약한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이 나약하지 않다뇨? 강단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살고 있잖아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예요?” 이것이 맞는 말이겠느냐? 우선 한번 분석해 보자. 불복하는 것은 어떤 태도겠느냐? 정상적인 이성을 지닌 사람이 그런 태도를 가져야 하겠느냐? 사실, 사람의 이성이 정상적이라면 그런 마음을 가져선 안 된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은 잘못이다. 반드시 현실을 마주해야 이성적인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면 불복하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정신이 다소 비정상적이다. 그건 분명 잘못된 태도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불복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불복하는 것 자체에 교만한 성품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교만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쉽겠느냐? (쉽지 않습니다.) 그게 문제다. 만약 네가 교만한 성품을 바탕으로 진리를 추구한다면 네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네가 추구하는 것은 분명 진리가 아닐 것이다. 그 추구 자체가 긍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네가 얻는 것도 분명 진리가 아니라 사람이 상상한 일종의 ‘정신’일 것이다. 사람이 이런 정신을 진리로 여겨 대한다면 잘못된 길에 오르게 된다. 그럼 불복하는 이런 마음가짐을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말해야겠느냐? 현실적인 문제를 마주하고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지, 불복하는 태도를 가져선 안 된다. 불복한다는 건 누구에게 불복하는 것이겠느냐? (하나님께 불복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불복하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사실의 진상에, 잘못을 저질러 드러나게 된 것에, 자신이 교만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불복하는 것이다. 이게 진실이다. 그럼 그들에게 어떻게 반박할 수 있겠느냐?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그들이 가장 난감해하는 일로 반박하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인류를 가장 난감하게 하느냐? 과학이다. 과학은 인류에게 무엇을 가져왔느냐? (재난을 가져왔습니다.) 인류가 가장 떠받들고 자랑스러워하는 과학이 인류에게 전례 없는 재난을 가져왔다. 이런 단서가 있으니 너희는 어떻게 반박해야 그를 부끄럽게 할 수 있겠느냐? 말해 보아라, 사탄에 속하는 부류를 부끄럽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는 늘 진리를 멸시하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차별할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나약해서 하나님을 믿는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에게 어떻게 반박해야겠느냐? (당신은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당신에게 불복할 밑천이 어디 있어요? 뭘 믿고 불복하는 거죠? 과학자라고 한들 뭘 어쩔 수 있나요? 그들이 발전시키는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 한들 뭘 어쩔 수 있죠? 지금 과학이 인류에게 가져온 재난들을 그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나요?) 그렇게 반박하면 된다. 너희가 보기에 그렇게 반박하면 좋지 않겠느냐? 네가 “인류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무슨 생각으로 불복하는 거죠? 당신은 자신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모르면서 왜 오만하게 구는 겁니까? 당신은 당신을 만드신 하나님도 몰라보면서 왜 불복하는 거예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어요.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기어코 사람은 짐승에서 변한 것이라고 믿고 인정하다니 당신은 정말 미천하다고요! 그토록 위대하고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당신의 창조주라고 하셔도 당신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인정하지 않으니 정말 비천하다고요!”라고 하면 그는 뭐라고 반박하겠느냐? “사람은 원숭이에서 변했어요. 역시 고등 동물이죠.” “그래 봤자 동물이고 짐승이잖아요? 우리는 우리가 동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우리는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류라고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당신을 사람으로 인정하셨는데 당신은 사람이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기어코 부인하면서 짐승이 되려고 하네요.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죠? 당신이 살아갈 자격이 있나요?” 이는 강단 있는 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반박하면 된다. 그가 인정하든 말든, 받아들이든 말든 사실이 그렇다. 한 가지 더 얘기하겠다. 인류는 영원히 불복하면서 자신이 아주 능력 있고, 뛰어난 과학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각종 지혜를 갖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류는 대자연을 어떻게 대하느냐? 끊임없이 대자연과 싸우고 늘 대자연을 정복하려 하며 대자연의 법칙을 전혀 따를 줄 모른다. 결국, 인류는 대자연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느냐? 전부 과학을 알고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다스린 것 아니었느냐? 너는 불복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능력이 있는 것 아니었느냐? 하나님의 주재가 필요 없는 것 아니었느냐? 인류는 대자연과 몇천 년 동안 어울려 지냈지만 대자연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모른 채 과도하게 개발하고 소모하며 심각하게 오염시켰다. 이제 천연자원은 갈수록 부족해지고 있고, 사람이 마실 물과 먹을 음식, 숨 쉬는 공기 중에는 독이 없는 게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태초에 대자연을 만들었을 때는 모든 생물과 음식, 공기와 물이 깨끗했고 독도 없었다. 그러나 인류에게 다스리게 한 뒤로 이런 것들은 전부 독성을 띠게 됐고, 사람 스스로도 그것을 ‘누려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은 왜 불복하는 것이냐? 하나님이 인류에게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고 관리하게 했는데 인류는 어떻게 관리했느냐? 관리할 줄이나 알았느냐? 인류는 세상을 짓밟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바닷물과 산, 토지, 땅, 공기, 나아가 하늘의 오존층까지 남김없이 파괴했다. 결국 이 모든 나쁜 결과는 누가 감당해야겠느냐? (사람입니다.) 인류 자신이다. 사람은 모두 어리석기 그지없는데도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불복한다! 왜 불복하는 것이냐? 만약 인류에게 계속 이렇게 다스리게 두면 이 대자연이 태초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겠느냐? 영영 그러지 못할 것이다. 인류가 불복하는 정신으로 다스릴수록 이 세상과 대자연은 점점 더 나빠지고 망가지고 더러워질 것이다. 결국, 어떤 결과를 불러오겠느냐? 인류는 모두 스스로가 파괴한 이 환경에서 죽고 말 것이다. 그럼 이 모든 것은 결국 누가 바꿀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바꿀 수 있다. 만약 인류가 능력이 된다면, 누가 나서서 이 세상의 현 상태를 바꿔야 하는데, 감히 이런 책임을 짊어질 사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왜 불복하는 것이냐? 사람은 자신이 마실 물조차 보호하지 못한다. 이는 사자나 호랑이가 파괴한 것도 아니고, 새나 물고기, 벌레가 파괴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인류 자신이 파괴하고 짓밟은 것이니 결국 사람이 자기 죗값을 치러야 한다. 이제 와서 바꿀 방법이 있겠느냐? 바꿀 수 없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약 하나님이 와서 이 모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인류 전체가 생존하는 환경이 갈수록 열악해지고 나빠질 뿐, 좋아지지 않을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가 불복해서야 되겠느냐? 네가 이 환경을 바꿀 수 있겠느냐? 네게 좋은 환경을 주면 너는 파괴할 줄만 알지 지킬 줄 모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먹이 사슬에 대해 인류가 알겠느냐? 모른다. 예를 들어, 늑대라는 동물은 흉악하다. 그런데 인류는 늑대를 모두 잡아 죽이면 대자연을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결심과 사기(士氣), 도전 정신이 생기면 인류는 늑대를 대량으로 잡아 죽이기 시작하고, 초원의 늑대를 거의 멸종시키고는 이 자연과 늑대라는 생물을 이겼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집에는 늑대 가죽을 걸어 놓고 몸에는 늑대 가죽옷을 걸치고 늑대 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쓴 채 총검에 어린 늑대의 가죽을 걸어 놓고 사진을 찍어 온 세상에 알린다. “우리는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 생물인 늑대를 이겼다!” 우쭐해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겠느냐? 늑대가 줄어들면 겉으로 보기에는 인류와 일부 생물의 생명이 위협받지 않을 것 같지만 그다음에는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인류는 이로 인해 엄중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어떤 대가겠느냐? 대량으로 늑대를 잡아 죽인 결과, 늑대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뒤이어 초원의 각종 토끼와 쥐, 늑대가 잡아먹는 여러 동물이 많이 번식하기 시작한다. 이런 동물들이 넘쳐나면 가장 먼저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풀이 사라집니다.) 풀이 점점 줄어든다. 풀이 줄어들면 땅 위의 식생도 점점 줄어든다. 이런 동물들이 넘쳐나면 풀을 많이 먹어야 하는데, 풀이 자라는 속도와 각종 초식 동물의 수가 비례하지 않게 된다. 비례하지 않게 되면 어떤 상황이 발생하겠느냐? (토양이 사막화됩니다.) 그렇다. 토양이 사막화된다. 땅이 식생으로 뒤덮이지 않으면 사막화가 시작되어 점차 모래땅이 된다. 많은 식물이 모래 위에서는 뿌리를 내리거나 번식하지 않아서 모래땅이 빠르게 확산되고 점점 넓어져 결국 초원 전체가 사막으로 변한다. 이어서 사막은 사람이 사는 지역으로 확장되기 시작하는데, 이때 사람은 가장 먼저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사람은 사막의 면적이 커진 것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 황사가 불어오면 인류는 어떤 피해를 입겠느냐? 처음에는 흙먼지가 흩날리지만, 바람 부는 계절이 되면 모래가 날려 눈도 뜰 수 없게 되고, 온몸에 먼지가 묻고 입안이 모래로 가득 찬다. 심각한 경우, 사막 근처의 집과 가축, 혹은 사람이 모두 모래에 파묻힐 수도 있다. 사람이 모래를 막을 수 있겠느냐? (막을 수 없습니다.) 막을 수 없으니 이사를 하며 계속 내륙으로 물러나야 한다. 결국, 초원은 갈수록 줄어들고 사막은 갈수록 넓어져 인류가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은 점점 축소된다. 그럼 사람이 생존하는 환경이 좋아지겠느냐, 아니면 나빠지겠느냐? (나빠집니다.)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이 결과는 어떻게 생겨났느냐? 어떤 일에서 야기됐느냐? (늑대를 죽인 것에서 야기됐습니다.) 늑대를 죽인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눈에 띄지 않는 그런 작은 일이지만 사람이 그 법칙을 따르고 지킬 줄 모른다면 결국 어떤 결과가 야기되겠느냐? 사람이 모래 속에서 파멸된다. 이는 치명적인 재난 아니겠느냐? 늑대를 죽이는 것은 하나의 행위이지만 그 안에는 어떤 성품이 담겨 있느냐? 그런 성품의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그 행동의 출발점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길래 그런 행위를 할 수 있겠느냐? (대자연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그렇다. 정복하려고 한다. 사람은 늑대가 인류의 천적이고 인류에게 위협이 되며, 늘 사람을 잡아먹는 나쁜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인류는 이렇게 늑대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후, 그것을 정복하고 한 마리도 남김없이 멸종시켜 편안하고 홀가분하게 살며 아무 위협도 받지 않길 바란다. 이런 출발점을 기반으로 사람은 늑대를 죽이기 시작한다. 이는 무엇이 지시한 것이겠느냐? 불복하는 정신이 지시한 것이다. 인류는 늑대를 적절히 관리하고 규범화할 줄은 모르고 늘 죽이고 멸종시키려 하며, 이 법칙을 뒤집어 다른 것으로 바꾸려고 한다. 그 결과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이 모래에 파묻힌다. 이런 결과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결과이다. 전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이 만든 이 세상에서, 지구의 한구석에서, 하나님의 눈에는 땅콩 알보다 작아 보일 수도 있는 이 구석에서 발생한 이토록 사소한 일조차 사람은 간파하지 못한 채 자연과 겨루고 하나님과 겨루며 불복하기까지 한다! 불복하는 것은 어떤 결과를 불러오겠느냐? (멸망입니다.)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이제 이 사실은 불 보듯 뻔하다. 이 결과가 발생하면 인류는 어떻게 다스리겠느냐? (다스릴 방법이 없습니다.) 다스릴 방법이 없다. 일부 공익 활동을 하는 선량한 사람이나 사회단체가 나서서 생태계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호소하는데, 그들의 출발점과 동기는 옳고 그들이 호소하는 일도 옳다. 하지만 응답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정부도 나서지 않고 아무도 이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 일이 발생한 원인을 알고도 구경이나 할 뿐이며, 늑대는 계속 죽인다. 누가 “계속 이렇게 죽인다면 언젠가 당신은 모래에 파묻힐 거예요.”라고 하면 그는 “파묻히면 파묻히는 거죠. 저 혼자 파묻히는 것도 아닌데 뭐가 두렵겠어요!”라고 한다. 이는 어떤 성품이냐? 무감각하고 생각이 없으며 인성을 갖추지 않은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럼 그는 왜 그토록 오만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그런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큰 지구에는 사막 말고 산이나 숲도 있는데 그렇게 빨리 다 파괴되겠어? 아직 멀었어! 늑대 몇 마리 죽여서 일부 지역이 사막으로 변한 걸 가지고 저렇게 놀라는 건가? 그래도 죽일 건 죽여야지.’라고 생각한다. 어리석지 않으냐? 늑대를 좀 죽였더니 불과 20, 30년 만에 푸르른 초원이 완전히 변해 버렸다. 만약 이 지역에 풀씨를 좀 뿌리거나 사막에서 자라기에 적합한 식물을 심어서 환경을 바꿀 수 있다면 인류는 공로로 과오를 메우는 셈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간단하겠느냐?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법칙은 모두 가장 좋고 적절한 것으로, 반드시 그 법칙을 따라야만 땅이 존재할 수 있고, 동물과 식물, 인류가 땅 위에서 생존해 갈 수 있다. 즉, 여러 생명체가 특별히 조화를 이루고 상생상극과 상호 의존을 통해 서로 존재할 수 있다. 일단 한 부분을 파괴한다면 10년 안에는 별다른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20년 뒤에 정말로 결과를 느낄 때가 되면 아무도 그것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무슨 뜻이겠느냐? 만약 하나님이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주지 않으면 앞으로 인류가 생존하는 환경은 갈수록 열악해질 수밖에 없고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결과이다. 이 결과는 무엇에서 기원하겠느냐? 인류가 떠받드는 불복의 정신, 즉 와신상담의 첫 번째 모습에서 기원한다. 사람이 보기에 와신상담은 몹시 ‘위대’하고 ‘신성’한 성어지만, 그것에서 비롯된 사상이 인류에게 미친 첫 번째 영향은 바로 이토록 커다란 나쁜 결과이다. 사람은 생각한다. ‘이 자연계에는 법칙이 있지 않나? 근데 내가 보기에는 그 법칙도 별거 아니야. 신성은 파괴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하지만 어떻게 되는지 내가 한번 파괴해 보겠어!’ 오늘날 인류가 ‘누리는’ 이 나쁜 결과는 인류가 가장 원치 않던 것이다. 그 ‘어떻게 되는지’라는 결과가 이렇게 발생했고 이미 인류의 눈앞에 펼쳐져서 모두가 ‘종말의 날’의 광경을 보았다. 그래도 싸지 않으냐? 이게 바로 자업자득이다.
와신상담의 첫 번째 모습은 불복하는 것이다.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결과는 무엇이냐? 치명적인 재난이다. 이는 자업자득으로, 속담에서는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한다. 그래도 싸다! 이제 이 말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 진리인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이 말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진리가 아니다. 만약 이방인이 또 “처신할 때는 정신력과 체력이 좀 있어야 하고 강단도 있어야 해요!”라고 하면 너는 생각할 것이다. ‘그렇고말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늘 순종을 강조하는데, 그럼 너무 자주권이 없잖아? 너무 나약하지 않나? 정말 강단이라곤 없다고.’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만약 오늘 내가 말한 이런 것을 받아들인다면 너는 영원히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이 인류는 구제 불능이에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도 당연하죠. 인류는 이미 말이 안 통하는 지경에 이르렀어요.”라고 말하며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설사 반박할 적절한 말이 없거나 그 사람과 논쟁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더라도 너는 속으로 그의 관점이 절대 진리가 아님을 알 것이다. 이런 생각이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긍정적일지라도, 이 세상의 인류가 아무리 제창하고 치켜세울지라도 너는 그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버리고 멸시할 것이다. 와신상담의 첫 번째 모습에 대해 교제를 마쳤다. 원래는 진리를 교제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또 본론에서 벗어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내가 교제하는 이런 것에 대해 단지 하나의 정의나 개념에만 머무를 뿐이라면, 너는 영영 그것의 어떤 부분이 옳고 그른지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어리둥절해하며 옳다고 생각할 때도 있고 그르다고 생각할 때도 있을 것이다. 어느 부분이 그른지, 옳은지도 명확히 말하지 못하면서 수시로 이 ‘원칙’대로 실행할 것이고 네 내면은 항상 흐리멍덩할 것이다. 너는 간파하지 못하면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것들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절대적으로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여겨 경배하고 준수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절대적이지 않고 그저 상대적으로 가끔 하나님의 말씀도 옳다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옳다고 생각할 뿐이다. 도리상으로는 이렇게 지킬지라도 소위 지식이나 그럴싸한 말에 영향을 받고 교란을 받는다면, 네게 하나님 말씀은 영원히 상대적으로 옳을 뿐, 절대적인 진리는 아닐 것이다.
2)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
와신상담의 두 번째 모습은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 역시 세상 사람들이 권장하는 일종의 사상과 정신이고 사물을 대하는 태도이다. 사회와 세상에서는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것이고, 인류가 비교적 밝고 발전적이고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사상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분석하려는 것이겠느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 뭐가 나쁘겠느냐? 왜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하겠느냐? 그것은 진리와 아예 무관하다. 무관하다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실행하려면 너는 완전히 하나님 말씀의 원칙대로, 하나님의 요구 기준과 세칙대로 해야지 소위 사람의 뜻이 담긴 주장과 정신, 기개와 같은 방식과 방법, 일을 처리하는 태도나 관점을 섞어선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로, 이런 것과 무관하다. 그럼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 왜 나쁘겠느냐? 왜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하겠느냐? 이는 분석해 볼 만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우선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를 설명해 보자. 그러면 좀 더 이해하기 쉽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나 중책, 혹은 이어받거나 받아들인 사명을 위해 모든 치욕과 고통, 굴욕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의 기본적인 의미는 이럴 것이다. 그럼 보통 어떤 상황이나 배경에서 이 말을 쓰겠느냐? 누가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가 현재 처한 형편은 그의 사명을 완수하여 그가 이루려는 목표를 이룬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보통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고 말할 때는 어떤 하찮은 사람이 지위나 후광은 아예 없고, 권세는 더더욱 없는 배경에 놓이고, 이런 배경 아래 자신의 책임과 자신이 완수해야 할 사명까지 짊어지기 위해 기죽지도, 타협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 역시 일종의 정신이 아니겠느냐? 이런 정신의 핵심은 무엇이겠느냐? ‘참는 것’과 ‘짊어지는 것’이다. ‘참는 것’은 인내하거나 견디는 것을 가리키는데, 참는 동시에 중책이나 책임을 담당하거나 짊어져야 하고, 뭇사람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고 부탁한 사람의 기대를 저버려서도 안 된다. 이는 어떤 정신이겠느냐? (고수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도 있지만 그건 가장 기본적이고 얕은 차원의 뜻이다. 또 어떤 게 있겠느냐? 우리 이렇게 분석해 보자. 수모를 참는 것에서 ‘수모’는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굴욕이나 치욕을 가리킵니다.) 주위 사람이 주는 치욕으로 인해 굴욕당하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가 사람에게 치욕을 가져오고 굴욕당하는 느낌을 받게 하겠느냐? (조롱이나 비방, 비아냥거림입니다.) 그렇다. 조롱이나 비방, 조소, 농락, 비아냥거림이 그렇다. 그럼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에서 ‘무거운 짐’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책임이나 부탁을 가리킵니다.) 책임이나 부탁에는 보통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사명이나 중책이 있는데, 여기서 중책은 남이 맡긴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이 이루려고 분투하는 목표나 자신이 생각하는 사명일 수도 있다. 사람이 자신이 이어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명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출세해서 가문을 빛내는 것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모두 맞다. 그런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 자신이 지향하는 것들로, 그런 목표를 이루고 실현하기 위해 그는 기존의 환경에서 주위 사람이 그에게 주는 굴욕이나 조롱, 비방, 비아냥거림, 심지어 심한 희롱까지 견딜 수 있다. 그럼 그가 이 모든 것을 견디는 동력은 무엇이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나중에 대장군이 되기를 지향하는데, 그가 권력을 얻기 전 어느 날 지역의 불량배 한 무리가 그에게 치욕을 주며 “네가? 장군이 되겠다고? 지금 말 한 필도 없는 네가 어떻게 장군이 되겠다는 거야? 장군이 되려면 먼저 내 가랑이 아래로 기어가라!”라고 말하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껄껄거린다. 그는 생각한다. ‘내가 장군이 되려고 하는 게 잘못도 아닌데 저들은 왜 나를 희롱하고 비웃는 거지? 하지만 일단은 능력을 과시하면 안 돼. 오늘 이 상황을 보니 저들 말대로 하지 않으면 얻어맞고 말겠어. 자칫하면 목숨을 잃겠다고. 그러면 난 장군이 못 되잖아? 내 이상을 위해서라면 가랑이 아래로 기어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나잖아?’ 이렇게 생각한 그는 ‘쿵’ 하고 무릎을 꿇은 뒤 두 손을 땅에 대고 마치 개처럼 그 불량배의 가랑이 아래로 기어간다. 기어갈 때 그의 마음은 칼에 찔리듯 괴롭고 고통스러우며 원망으로 가득 찬다! 그는 속으로 ‘언젠가 내가 정말로 장군이 되면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어!’라고 생각하지만 겉으로는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참아야 한다. 그가 가랑이 아래로 지나가자 그 무리는 흡족해하며 그를 봐주고 발로 차 버린다. 그는 일어서서 몸에 묻은 흙을 털고 말한다. “잘 찼어요. 앞으로 형님이라고 부를게요.” 그가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왜 그는 그렇게 하겠느냐?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다. ‘나는 살아남아야 해. 내가 이 모든 것을 견디는 건 언젠가 장군이 되어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야. 오늘 내가 이런 고생을 견디고 이런 치욕을 당하는 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앞으로 난 더 노력하고 분발해야 해. 어떤 어려움에 부닥치든, 얼마나 큰 고통과 굴욕을 당하든 반드시 장군이 되고야 말겠어! 장군이 되고 나서 제일 먼저 할 일은 바로 저놈을 죽여서 가랑이 아래서 당한 치욕을 씻는 거야!’ 그가 나중에 장군이 되든 말든, 당시에는 ‘참는 것’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이 안에는 계략이나 음모가 있지 않겠느냐? (있습니다.) 음모가 있다. 그는 부득이하게 참는 것인데, 무엇을 위해 그러겠느냐? 언젠가 이 모든 굴욕을 씻기 위해서이다. 그가 참는 것에는 “푸른 산이 있는 한 땔나무 걱정은 없다.”, “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는 10년 걸려도 늦지 않다.”와 같은 계략이 가득하다. 이 몇 가지 계략이 그가 가랑이 아래서 당한 치욕을 견디게 한다. 그 이후로 장군이 되려는 그의 욕망은 더욱 커지고 강렬해져서 절대 포기하지 않게 된다. 그럼 그는 무엇을 위해 굴욕과 치욕을 견디겠느냐? 정의의 사업을 지키기 위해서겠느냐, 아니면 진정한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겠느냐?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이다. 그럼 이는 긍정적이겠느냐, 아니면 부정적이겠느냐? (부정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여기서 ‘참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이익과 욕망, 야심이 부추겨서 참는 것이다. 이렇게 ‘참는 것’ 안에 진리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진리는 없다. 정상 인성은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는 정의로운 것도, 올곧은 것도 아니고 결점이 없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욕망과 음모, 음해로 가득하다.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 사악한 인류가 권장하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사상과 정신은 기본적으로 방금 했던 이야기 속에서 말한 것과 같다. 즉, 한 사람이 큰일을 성취하려면 반드시 보통 사람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참는 것은 주로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치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참는 것이 사람에게 살아 내도록 하는 게 진실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거짓된 것이겠느냐? (거짓된 것입니다.) 핵심은 여기에 있다. 사람이 자신의 야심과 이상을 위해 살아 내는 것과 하는 말, 드러내는 행위는 모두 위장한 것이고, 부득이한 것이며, 이 모든 욕망과 이익, 그리고 사람이 말하는 지향과 목표라는 전제하에 부추김을 당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 내는 이런 것은 모두 임시방편일 뿐 정직하거나 진실한 것, 공개적으로 드러내거나 솔직한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임시방편이다. 이는 모두 계략이 아니겠느냐? 임시방편은 바로 당분간 일단 이렇게 참고 잠시 아부하고 구슬리고 속이면서 자신의 진실한 신분과 마음, 생각, 관점, 심지어 증오까지 포장하여 상대방이 보지 못하게 하고, 대신 상대방에게는 자신의 연약하고 무능하며 나약하고 겁이 많은 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자신의 진실한 면을 전부 감추겠느냐? 언젠가 대업을 이루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되어 남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해서이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라는 말을 실행해 내거나 나타낸 것은 어떤 것이겠느냐? 거기에 정직한 태도가 있겠느냐? 자신에 대한 진실한 인식이나 뉘우침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당신 주제에 장군이 되려는 거야?”라고 하면 그는 생각해 보고는 “저는 안 돼요. 저는 장군이 되지 않을 거예요. 농담이에요.”라고 말한다. 이게 참말이겠느냐, 아니면 거짓말이겠느냐? (거짓말입니다.) 그는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나 정도는 돼야 장군이 될 수 있지!’ 그는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겉으로 이렇게 말하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왜 안 되겠느냐? 얻어맞지 않기 위해,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그는 말한다. “그건 농담이에요. 감히 정말로 장군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당신이야말로 대장군 같네요. 당신은 미래의 대원수예요. 장군보다도 더 위라고요!” 이게 참말이겠느냐? (아닙니다.) 참말은 어디에 있겠느냐?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렇다. 마음속에 담아 두고 말하지 않는다. 왜 말하지 않겠느냐? 말하면 얻어맞을까 봐 두려워 말하지도, 드러내지도 않고 아무도 모르게 하여 자신의 실력을 영원히 보존하려는 것이다. 실력을 보존한다는 건 무엇이겠느냐? 자신의 진실한 능력을 남에게 보이지 않고, 자신의 진실을 싸매 탄로 나지 않게 하여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경계하거나 자신에게 불리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 역시 와신상담의 진실한 함의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와신상담하고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자신의 목표와 욕망, 증오를 절대 잊어선 안 되고, 남들에게 자신의 실제 모습과 실력을 절대 보여 줘선 안 된다. 일부 능력 있는 사람은 무리 안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고 과묵하며, 설사 말을 하더라도 끝맺지 않아서 남들은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도저히 짐작할 수도, 알아들을 수도 없다. ‘말을 왜 저렇게 심오하게 하지? 속마음을 말하는 게 왜 저렇게 어렵지? 어떻게 된 일일까?’라고 생각할 뿐이다. 사실 그가 마음속에 생각이 있더라도 말하지 않는 것은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일을 처리할 때 늘 여지를 둔다. 늘 여지를 두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일부 능력자나 대단한 인물이 보고 나서 질투하여 그를 겨냥하고 해칠까 봐 두려운 것이다. 무리 안에서 늘 남을 칭찬하고 남이 훌륭하다고 말하며 누구든 자기보다는 낫다고 하는 사람이 가장 음험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도저히 그의 속내를 알 수 없다. 겉으로는 별말 안 하는 걸 보고 너는 그 사람이 야심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너는 틀렸다. 그런 사람 중 일부는 바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사람이다. 이는 마치 영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런 장면과 비슷하다. 어떤 사람이 외부에서 자주 선행을 하고 해진 옷을 입으며 무리에서 늘 괴롭힘을 당한다. 이는 그가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집에 돌아온 뒤 그는 한 밀실에 들어가는데 밀실의 벽에는 지도가 한 장 걸려 있고 지도 위 지역의 80%는 이미 그가 보낸 하수인에 의해 감시와 통제를 당하고 있다. 그러나 외부에서 자주 그와 접촉하는 사람은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그에게 이런 야심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언젠가 지도 위의 모든 지역이 그에 의해 통제되어 그의 목표가 완전히 달성되면 그를 괴롭히던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한다. “알고 보니 마귀였어요. 저 녀석은 야심도 크네요! 이렇게 오랫동안 위장했는데 아무도 그를 간파하지 못했어요.” 그럼 그는 말한다. “저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거예요. 제가 이렇게 참지도, 당신들의 경계심을 늦추지도 않고 무엇이든 당신들에게 알려 줬다면 이렇게 큰 사업을 이룰 수 있었겠어요?” 악인이나 지극히 큰 야심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겠느냐? 한편으로, 그들의 인내력과 의지력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다. 그 밖에 그들의 음모도 보통 사람을 뛰어넘어서 일반인이 그들과 어울리면 우롱당하기 일쑤다. 우롱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무도 그를 간파하지 못하고 그가 표면적으로 하는 말이나 행동만 알 수밖에 없다. 그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그의 행동과 말에서 어떤 실마리를 찾을 생각은 하지도 마라. 이게 바로 그에게 우롱당하는 것 아니겠느냐? 인내력과 의지력 자체는 긍정적인 말이지만 그의 음모가 그의 인내력과 의지력을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야심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 보통 사람도 야심과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얻지 못할 것 같으면 포기하고 그 고생을 하려 하지 않는다. 그 밖에, 누구와 싸워야 하든 다 드러내 놓고 싸우지 그런 음모는 없다. 반면 그 부류의 악인들은 커다란 야심을 가지고 있고 늘 음모와 계략을 쓰며, 언제까지나 그의 야심과 욕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끝까지 투쟁하고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교과서에도 월나라 왕 구천이 와신상담한 이야기가 실려 있고 부모들도 아이들을 그렇게 교육한다. 일부 아이들은 듣고 나서 생각한다. ‘보통 사람이 되는 것도 꽤 좋은데 왜 꼭 그렇게 큰 야심이 있어야 하지? 와신상담하는 고생을 누가 견딜 수 있겠어? 그건 보통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고생이 아니야.’ 야심 있는 사람에게만 그렇게 고생을 견딜 의지가 있다. 거기에는 음모가 있다. 그러나 이 인류 가운데서는 이런 정신을 권장한다. 예를 들어, “얼마나 큰 고생을 견디고 굴욕을 당하든, 처지가 얼마나 열악하든 사람은 절대 자신이 지향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있다. 이 사회는 와신상담하는 것이나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과 같은 사상을 권장하여 사람이 자신의 행복과 목표를 위해 분투하도록 채근하고 격려하는데, 왜 우리는 그것이 잘못됐다고 비판하겠느냐? 인류 전체가 모두 사탄에 의해 패괴됐다. 인류 가운데 목표가 진리나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겠느냐? (없습니다.) 따라서 인류가 와신상담하고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질수록 사탄 세력은 더욱 날뛰고, 이 인류의 투쟁과 학살은 더욱 많아지며, 인류는 점점 더 사악해지고, 사회도 갈수록 암담해진다. 반대로 만약 네가 하늘의 안배와 이 모든 자연법칙에 순응할 수 있다면, 모든 걸 순리에 맡기고 이 법칙을 존중하며 하늘의 안배를 기다린다면 너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도 없고, 각성하고 깨달아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 그 밖에, 사람은 모든 일을 할 때 최소한 양심에 따를 줄 알아야 하고, 좀 더 뛰어나다면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제정한 법칙대로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럼 사람이 가면을 쓰고 중책을 짊어질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렇게 교제하고 나니 너희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 대체 어떤 행위인지 깨닫지 않았느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의 목표는 긍정적인 것이겠느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겠느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리더가 되고자,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여 상을 얻고자, 혹은 온전케 되고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다고 한다면 이런 말들이 성립하겠느냐? (성립하지 않습니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완전히 사탄 철학이고, 그 안에는 진리가 없다. 들어 보면 다 치우친 말이다. 그 사람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하나님의 안배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한다고 한다면 이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지 않겠느냐?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네가 수모를 참는 것도, 억울함을 당하는 것도 하나님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과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어떤 실질적인 차이가 있겠느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서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바로 사람이 자신의 계획과 지향, 염원, 추구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과 추구 목표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부합하지 않는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을 통해 사람이 도모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도모하는 것은 개인의 이익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배치하고 주재하는 운명과는 관련이 없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사람들은 모두 속셈이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한 학부 졸업생이 어느 회사에 인턴으로 막 들어갔을 때 기존의 직원들이 이렇게 말했다. “학부 졸업생은 입사 후 3년간 차 심부름을 해야 해요.” 그러자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학사 학위밖에 없지만 당신들에게 숙이고 들어가지는 않을 거야!’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감히 밖으로 드러내지는 못했고, 겉으로는 웃는 얼굴을 하며 매일 고분고분하고 얌전한 태도로 굽실거려야 했다. 누가 트집을 잡아도 참아야 했다. 그는 무슨 목적으로 참았겠느냐? 언젠가 출세해서 기를 펴면, 매니저나 사장의 비서가 되면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을 밟아 주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해야죠. 그러지 않으면 평생 수모를 당할 텐데 누가 그런 고생을 하고 싶겠어요? 게다가 사람이 패기가 없어서야 되겠어요? 사람은 높은 곳으로 가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게 인지상정이죠. 장군이 되려 하지 않는 병사는 훌륭한 병사가 아니라고요.” 이런 말들이 좌우명이 되었는데, 그것들은 전부 사탄의 논리이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몇 년 동안 매일같이 누구나 공손하게 대하며 참아야 했다. 어느 날 사장이 그에게 말했다. “지난 3년간 실적이 나쁘지 않았군. 다음 주부터 영업 사원으로 일하게.” 그는 듣자마자 기분이 상했다. ‘3년을 버텼는데 겨우 영업 사원이나 하라니! 영업 총괄 책임자가 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입으로는 발탁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해야 했다.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니 계속 참아야 했다. 그는 또다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고생스럽게 사장 뒤를 따라다니면서 술 상대를 해 주고 웃는 얼굴로 대했다. 그렇게 버티자 10년째 되는 해에 드디어 목적을 이뤘다. 어느 날 사장이 그에게 말했다. “자네는 일을 잘하니 실무 책임자로 발탁하겠네.” 그는 이 말을 듣고 드디어 고생이 끝났다며 기쁨에 겨워했다! 이는 어떤 결과이냐? 그가 보기에는 출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이 모든 일을 기꺼이 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누구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했느냐? (자신을 위해서 했습니다.) 그 자신을 위해서 했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것도, 취할 만한 것도 없고 찬미하고 칭송할 만한 것은 더더욱 없다. 그러나 현재 사회에서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꼬리를 내리고 처신하는 이런 정신을 떠받든다. 그러니 사람들이 떠받드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라는 말은 어떠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바람직하지 않으냐? 사람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다 자신만의 속셈과 동기가 있기 때문이고,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이지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취할 만한 점이 조금도 없고, 전혀 칭송하고 칭찬할 만하지도 않으며, 기억될 만한 점은 더더욱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고대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살펴보자. 어떤 황제가 죽자 황후는 자기 아들이 아직 어리니 황위를 계승해도 결코 조정을 장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이 진정으로 황제가 되어 집권할 수 있도록 황후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며 죽은 황제의 남동생과 결혼했고, 그 둘이서 함께 아들을 길렀다. 황후가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목적은 무엇이냐? 아들의 황위를 위해서이다. 아들의 황위가 보장되면 그녀의 신분은 황태후가 된다. 이런 것을 두고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어떤 수모를 겪었느냐? 정조를 지키지 않고 선황이 죽자마자 시동생에게 시집가는 바람에 평판이 나빠졌다. 사람들이 다 뒤에서 그녀를 욕하고 판단했고, 심지어 역사서에서도 그녀를 나쁘게 평가했다. 그녀가 그런 것을 신경 썼겠느냐? 사실 시동생에게 시집가기 전에 그녀는 그 일의 결과를 이미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여전히 그렇게 했겠느냐? 아들의 황위와 자신의 황태후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그녀는 그런 오명을 감수하고 기꺼이 그런 고생을 견딘 것이다. 이게 바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다. 그녀는 그 모든 굴욕을 견딤으로써 무엇을 얻었느냐? 더 큰 이익을 얻었다. 그게 바로 그녀가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목적이다. 그녀가 더 큰 이익을 얻는 순간 그 모든 오명은 별것도 아니게 된다. 그녀는 그 오명으로써 자신과 아들의 권세와 지위를 얻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은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만약 그녀의 행위만 본다면 그녀는 자신을 버릴 줄 알았고, 그녀가 겪은 굴욕과 고생은 그녀의 아들이 보기에는 사심 없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칭송하며 “너무도 위대한 어머니예요!”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녀의 욕망과 야심, 진정한 목적을 본다면 사람들은 그녀를 욕해야 하고, 그녀의 행동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 심지어 하나님의 저주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들인다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는 확실하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적용하면 전혀 성립하지 않고 정죄된다. 이 말을 여기에 적용하면 왜 옳지 않겠느냐? 이런 행위를 여기에 적용하면 옳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겠느냐? 단지 말로만, 도리적으로만 이 말이 옳지 않다고 인정해서도 안 되고, 여기에 관련된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예전에 너는 하나님의 온전케 함이나 구원을 받아들이려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와신상담하는 법을 익혀야 하고, 월나라 왕 구천의 정신을 배워야 하며 실패를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그야말로 얼간이이고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제 내가 이렇게 교제했으니 너는 ‘이 말은 형편없는데 난 예전에 늘 이 말을 썼어. 난 왜 그렇게 멍청했을까?’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이해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너는 이 말의 어느 부분이 옳지 않은지 깨달아야 한다. 어느 부분이 옳지 않은지 정말로 깨달으면 너는 이 말을 철저히 이해한 것이다. 네가 이 말을 절반만 간파한다면, 부정적인 그 절반만 간파하고 사람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라고 생각하는 측면은 간파하지 못했다면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내가 방금 교제한 것을 듣고 나니 너희는 나의 이 방식대로 이런 일들을 해부하고 분석할 수 있지 않겠느냐? 왜 하나님 집에서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행동 방식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왜 이런 행동 방식과 정신은 하나님 집에서는 정죄되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겠느냐? (하나님, 제가 이해한 바로는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것, 심지어 교체되거나 정죄되는 것은 결코 굴욕을 당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 방식이고, 우리가 진리 추구의 바른길에 오르도록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사람이 만약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높여 주심이라는 것,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께서 지극하게 보살펴 주시고 지켜 주시고 사람을 구원하고 계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옳으냐? (옳습니다.) 만약 심판과 형벌이라는 일을 간파하지 못하면 마음에 반발심과 불평이 생기고, 사탄 철학인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라는 말을 실행하면서 속으로는 ‘아이고, 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해. 월나라 왕 구천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고는 자신의 책상 위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라는 말을 새겨서 자신을 채찍질하고 격려하며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을 것이다. 이러면 골치 아프지 않겠느냐? 물론 오늘 이렇게 교제하고 나면 너희는 절대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또 다른 말을, 예를 들어 내가 아직 분석한 적 없는 “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지 않겠느냐? 이는 같은 성질이 아니겠느냐? 이런 것들은 모두 중국의 전통문화에 속한다. 이런 것들은 사탄의 독소가 아니겠느냐? 모두 사탄의 독소이고, 사탄의 처세 철학에 속한다.
예전에 중국의 여러 교회에서 사역할 때, 막 사역을 시작하던 시기에 하나님 집에서 일부 형제자매에게 소양과 지식을 학습하도록 안배했다. 당시 어떤 상황이었겠느냐?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고 비교적 외진 지역에 사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은 교육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았고 아는 글자도 적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말씀에서 언급하는 ‘자질이 떨어진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뜻’ 등과 같은 고정적인 용어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나중에 하나님 집에서 형제자매에게 여유 시간에 소양과 지식을 학습해도 된다고 알려 줬다. 최소한 일부 고정적인 구절이나 용어, 혹은 명사가 무슨 뜻인지는 알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글자나 단어 자체의 뜻도 이해하지 못할 텐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진리를 실행하겠느냐? 그 뒤로 형제자매는 공들여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는 좋은 일이었지만 일부 치우친 사람은 빈틈을 파고들었다. 어떤 리더는 예배 시간에 소양과 지식을 학습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소양과 지식을 익히면 어떤 이점이 있는지, 익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특별히 이야기하고, 이런 이치에 대해 잔뜩 말했다. 이런 것은 진리가 아니니 너무 많이 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일들은 말만 하면 다들 이해할 수 있으니 예배 시간에 진리로 여겨 교제하지 않아도 된다. 일부 리더는 예배 시간을 많이 할애해 이런 것을 진리로 여겨 교제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수법까지 생각해 내어 일부러 비교적 생소한 글자들을 가지고 형제자매를 시험하기도 했다. 형제자매가 대답하지 못하면 그의 소양이 뛰어나 보이지 않겠느냐? 그 기간에 일부 거짓 리더는 실제적인 사역은 하지도 않고, 생명 체험이나 진리, 하나님의 말씀은 교제하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소양을 쌓는 일에 대해서만 교제했다. 이를 뭐라고 하겠느냐? 이게 바로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왜 이 일을 언급하겠느냐? 너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느냐? 이렇게 하려는 사람이 있느냐? 만약 이렇게 한다면 너희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이런 성어에 대해 얘기하는 걸 보고 속으로 벼르며 준비를 시작한다. ‘알고 보니 진리 교제가 이렇게 쉬운 일이었구나. 성어만 교제하면 되는 거였어. 당신이 성어를 교제하신다면 나는 속담이나 방언, 속어, 이언을 교제하겠어.’ 이는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영적인 이해력이 있겠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습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당신은 여기에 앉아서 쓸데없는 한담이나 하고, 성어 두 개로 우리를 속이고 있어. 당신처럼 교제하는 건 나도 할 수 있다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아무렇게나 흉내 내는데, 이렇게 흉내 내는 리더는 교체돼야 한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교체돼야 한다. 내가 왜 이 일을 언급하겠느냐? 너희가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너희에게 그릇된 길을 가지 말라고 일깨워 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건 괜찮지만, 네가 이렇게 얘기한다면 알아듣게 얘기할 수 있겠느냐? 너는 알아듣게 얘기하지 못한다. 그럼 나는 왜 이런 속어나 성어에 대해 얘기하겠느냐? 어떤 전제하에 얘기하는 것이겠느냐? 사람은 진리의 정의와 개념을 깨달은 것을 토대로 사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을 더 깊이 분석하더라도 닿을 수 없고, 어떻게 묵상해야 하고 어떤 일과 연결시켜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한다. 너희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고사성어를 좀 들려주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은 진리에 관해 자신은 이미 대학교에 진학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이런 초등학교 수업 같은 내용을 보충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다. 이건 초등학교 수업이 아니라 대학교 수업인 셈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너희는 아직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계속 초등학교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자신이 대학교에 진학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가 대단히 괜찮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느낌은 옳지 않다. 잘못된 느낌이다. 너희는 대학교에 진학하려면 아직 멀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일깨워 주겠다. 너희는 방금 말했던 그런 일을 절대 저질러선 안 된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만 착실하게 교제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구 지껄이지 마라. 진리 교제는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는 게 아니다. 너와 그렇게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는 아무렇게나 흉내 내서도 안 된다. 내가 와신상담에 대해 얘기하는 걸 보고 너는 월나라 왕 구천에 대해 얘기하거나 현대사, 고대사에 대해 얘기하는데, 그런 것들을 얘기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들으려는 사람이 있겠느냐? 설사 들으려는 사람이 있다 한들 그건 진리가 아니다.
방금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고,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을 실행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고 말했다. 그럼 이토록 ‘좋은’ 말과 ‘위대한’ 정신을 어째서 실행하면 안 되겠느냐? 대체 어디가 잘못됐겠느냐? 어째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정신을 갖춰선 안 되겠느냐? 도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하나님이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준 행동 원칙도 아니다. 왜 이 말이 진리도, 실행 원칙도 아니라고 하겠느냐? 우선,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에서 ‘수모’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수모’는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굴욕이고 당하는 치욕이다. 그럼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 것,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치욕을 당하거나 굴욕을 견디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인내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저는 마음속의 화나 분노, 원한, 언짢음을 억누르고 참으면서 잠자코 있어야 해요. 이런 것이 제게는 다 치욕이지만, 저는 그냥 억누르고 있는 거예요.”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게 진리 실행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을 행한 것이냐? 패역이고 허위이고 위장이다.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기 위해 네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어떤 고통을 견디는 게 아니다. 너는 어떤 굴욕도 견딜 필요 없다. 너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네게 치욕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치욕이 아니다. 너에 대한 하나님의 폭로와 심판, 형벌, 시련이나 연단은 네게 치욕을 주는 게 아니라 네 패괴 성품의 표출을 폭로하는 동시에 네가 자신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자 네가 그것을 벗어 버리고 저버려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성과를 이루겠느냐? 너는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흡족해하고 칭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럼 이런 것을 이루는 과정에서, 이 기간에 네가 견뎌야 할 것들 중에 굴욕이 하나라도 있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주는 치욕이 하나라도 있겠느냐? (없습니다.) 너에 대한 하나님의 폭로, 예를 들어 하나님이 폭로하는 너의 교만함과 사악함, 간사함, 강퍅함, 혹은 흉악함 중 사실이 아닌 게 하나라도 있겠느냐? (없습니다.) 전부 다 사실이다. 하나님이 너를 폭로하거나 네게 하는 말씀은 어떤 방식이든 전부 다 사실이다. 사람이 인식할 수 있든 없든, 사람이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든 그런 것은 모두 사실이지 없는 사실을 꾸며 내거나 허풍을 치는 게 아니며 너를 모함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 네게 치욕을 주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네게 치욕을 주는 게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네게 일러 주는 것이다. 네가 악인의 길을 걷지 않고 사탄을 따르지 않고 인생의 바른길을 걸을 수 있도록 주의를 주는 것으로, 네게 미치는 영향과 이루는 성과는 긍정적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는 성질은 완전히 정당한 것이고 너를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전적으로 진리에 부합한다. 이는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고통이자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기 위해, 진정한 피조물이 되기 위해 받아야 하는 고통이다.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는 적극적으로 이런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지 굴욕적으로 견디는 게 아니다. 이런 고통은 치욕도, 풍자도, 비방도 아니고, 하나님의 희롱은 더더욱 아니며, 전부 사람이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로 인해 사람에게 이런 고통이 생겨났다. 그럼 이런 고통 안에 하나님이 일부러, 별도로 사람에게 가하는 것이나 사람이 받아서는 안 될 고통이 하나라도 있겠느냐?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이런 고통을 적게 받으면 사람은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없다. 사람의 패역한 성품이 얼마나 심각하든, 하나님이 사람의 패괴 성품을 폭로하는 것을 사람이 얼마나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든 결국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치욕이 아니다. 사람이 받는 것도 굴욕이 아니라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자 사탄에 의해 깊이 패괴된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고통이다. 사람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한다. 왜 받아야 한다고 하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몹시 심하게 거역하고 사탄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려면 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는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고 반드시 견뎌야 하는 고통이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한 게 아니다. 이는 찬물을 마시면 배가 불편한 것과 마찬가지다.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찬물을 원망하겠느냐?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 고통은 누가 네게 가한 것이냐? (자신입니다.) 너 자신이 초래한 것이다.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이 결과와 과정은 모두 사람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므로 결코 굴욕이나 치욕을 당한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뭐라고 생각하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리더를 맡으라고 나를 발탁하길래 기뻐하면서 리더를 맡았는데 제대로 사역하지 않고 잘못을 범했다는 이유로 나를 다시 교체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난 뭐가 된 거지? 내게 아직 인격이나 존엄이 있나? 내게 아직 사람으로서의 자유가 조금이라도 있나? 내게 아직 자주권이 있나?’ 그는 사람이 이렇게 선택권 없이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서는 안 된다고, 만약 사람이 절대적으로 순종하면 그건 바보이고 존엄이 없는 사람이라고, 그러면 사람이 너무도 나약하고 억울하게 사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사람이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면 치욕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 밑에서는 눈치를 살펴라.”라는 속담처럼 말이다. 보아라, 사탄 철학이 또 등장했다. 이 명언이 그를 굴복시켰다. 그는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기꺼이 순종하겠느냐, 아니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겠느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집니다.) 그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기꺼이 순종하지 않는다. 그는 기꺼이, 순수하게 순종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어쩔 수 없음이 그에게는 일종의 치욕이다. 이런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진리 실행으로 여기기 때문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는 순종을 진리로 여기는 게 아니라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을 진리로 여긴다. 이는 성질이 다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비록 기꺼이 순종하는 사람과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사람 모두 복종을 하긴 하지만, 모두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반항하지도 않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말을 잘 듣고 행동이 올바르고 영리하지만 이 둘의 성질은 다르다. 진심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순종을 자신의 직책, 본분과 의무, 천직, 진리로 여긴다. 진심으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설사 겉으로는 반항하지 않더라도 속으로는 자신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 그에게는 최고의 진리다. 그는 수모를 참는 것을 진리 실행으로 여긴다. 순종을 무엇으로 여기겠느냐? 진리 실행이 아닌 치욕을 견디는 것으로 여긴다. 이는 뒤바뀐 것 아니겠느냐? 이를 뭐라고 하느냐? (본말이 전도됐다고 합니다.) 본말이 전도됐다. 그는 진리를 처세 철학으로 여기고, 도리와 사람의 처세 철학을 진리로 여긴다. 이는 흑백이 전도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흑백이 전도된 것이다. 그럼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사람은 자신이 받는 고통이 치욕도 아니고 누가 자신에게 치욕을 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럼 사람이 받는 고통은 무엇 때문에 초래됐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 때문에 초래됐습니다.) 그렇다. 만약 패괴 성품이 없고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완전히 순종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다면 너는 이런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이런 수모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겠느냐?
고통과 수모 중 무엇이 긍정적인 것이겠느냐? 이 두 가지는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고통은 긍정적인 것이다. 만약 네가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 고통을 기꺼이 받는다면 이 고통에 대해 너는 이렇게 이해할 것이다. ‘나는 당연히 이 고통을 받아야 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마음이 괴롭고 소극적이고 연약해지더라도 하나님의 행사는 모두 옳아. 나는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께 이치를 따져선 안 돼. 내 마음이 아무리 괴로워도 그건 내 잘못 때문이고 하나님께서는 잘못하신 게 없어. 하나님의 행사는 모두 옳아. 나는 고통을 받아도 싸. 그러게 누가 패괴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악을 행하래? 그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하신 게 아니라 내 본성이 부추긴 거야. 그러니 이 고통을 받는 건 당연해.’ 그럼 사람이 이 고통을 받는 건 긍정적인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사람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인다면 이 고통은 긍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저도 순종할 수는 있지만 아무리 순종하더라도 이치는 명확히 따져야겠어요. 제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가 어떻게 하는지를 분명히 설명해야겠다고요. 이렇게 나약하게, 영문도 모른 채 순종할 순 없어요. 안 그러면 답답해서 죽을 거라고요.”라고 말한다면, 늘 분명하고 알아듣게 이야기하여 일의 전후 관계를 명확히 말하려 한다면,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은 어떻게 대가를 치렀는지, 자신이 얼마나 정당한지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면, 자기 이치를 설명하지도, 해명하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순종을 무엇으로 여기는 것이냐? 굴욕을 견디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는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하나님께서 내가 순종한다고 칭찬하시도록 난 이 모든 굴욕을 견뎌야 해.’ 그럼 이 ‘수모’는 과연 존재하겠느냐? 만약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면 그는 왜 명확히, 알아듣게 이야기하여 이 ‘수모’에서 벗어나려 하겠느냐? 이는 진실한 순종이 아니다. 설사 네 행동의 마음가짐이 옳더라도 하나님이 이렇게 배치하려고 한다면 너는 변명할 필요도, 이치를 따질 필요도 없다. 욥이 너보다 잘하지 않았느냐? (잘했습니다.) 만약 시련이 닥쳤을 때 욥이 이치를 따지고 변명했다면 하나님이 들어주었겠느냐? 하나님은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사실이다. 그럼 욥은 하나님이 변명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겠느냐? 알지 못했지만 욥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그 정도 분량이 있었고 진실로 순종했다. 무슨 나쁜 짓을 저질렀길래 하나님이 욥을 그렇게 대했겠느냐? 그는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순전한 사람이라고 했다. ‘수모’라는 배경대로라면 하나님은 그에게 그런 굴욕을 당하게 해서도, 그를 사탄에게 넘겨 사탄이 그를 시험하고 그의 모든 재산을 약탈하게 해서도 안 된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의 논리로 보면 욥은 고통을 받았고 큰 굴욕을 당했으며, 그가 그 시련을 받아들인 것은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이다. 이후에 하나님에게서 더 큰 축복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욥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실행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어떻게 실행했느냐? 그는 그 시련을 어떻게 대했느냐? 그는 참을 필요도 없었고 자신이 굴욕을 당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어떻게 생각했느냐?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왔다. 하나님이 네게 명과 숨을 주었다. 너라는 사람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왔으니 네가 가진 것들도 모두 하나님이 준 것 아니겠느냐? 네가 큰소리칠 게 뭐가 있느냐? 모두 하나님이 준 것이니 하나님이 가져가려 한다고 한들 우리가 무슨 이치를 따질 수 있겠느냐? 줄 때는 기뻐하면서 주지 않을 때는 언짢아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에게 달라고 하고 하나님과 다툰다. 주든 말든 결정권은 하나님에게 있으며, 사람은 따질 수 있는 이치가 없다. 욥이 이렇게 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욥은 이렇게 했다. 그가 속으로 억울해했느냐? (그러지 않았습니다.) 억울해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면 욥은 억울함을 호소하고 설명하고 변명하며 하나님과 겨루고 이 모든 일을 하나님에게 명확히 알아듣게 말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는 누구보다 그럴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했느냐?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몇 가지 동작만 했을 뿐이다.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 이 일련의 동작으로 보아 욥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순전한 사람이다. 순전한 사람의 정의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 아무 평가도 내리지 않고 그저 칭송하고 순종한다. 아무리 큰 고통을 받아도 “저는 억울한 일을 당했어요. 이건 굴욕적인 일이에요.”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무리 큰 고통을 받아도 그는 이런 표출이나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이를 뭐라고 하겠느냐? 이방인은 이를 두고 ‘자신을 잊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어떤 논리겠느냐? 정말 이런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자신을 잊는 것’은 정신이 병든 것이고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다. 욥은 아무리 큰일이 닥치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지 않았고 하나님에게 대항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순종할 뿐이었다. 그가 순종한 본뜻은 무엇이었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다. 그가 순종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에서 비롯됐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고 하나님의 행사는 모두 옳다고 믿었다.
어떤 팀장이나 책임자는 교체되면 계속 울고 억지를 쓰며 짜증을 부린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다고 불평하며, 형제자매가 그를 폭로하고 고발한 것은 그에게 잘못한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양심 없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제가 그렇게 잘해 줬는데 저를 이렇게 대하다니요! 하나님께서도 공의롭지 못하시네요. 제가 이렇게나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저를 지켜 주지 않으시고 무참하게 교체하셨어요. 당신들도 저를 무시하고, 하나님께서도 저를 무시하시는군요!” 자신이 아주 억울하다고 생각하며 억지를 쓰기 시작한다. 네가 보기에 이런 사람이 순종할 수 있겠느냐? 내 생각에는 쉽지 않다. 이러면 끝난 것 아니냐? 웬 억지를 부리느냐?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받아들이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겠고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겠다면 하나님 집에서 나가라! 하나님을 믿지 마라.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다. 뭐가 억울하냐? 웬 억지를 쓰느냐? 여기는 하나님 집이다. 자신 있으면 사회에 가서 억지를 쓰든, 사탄 마왕을 찾아가 억지를 쓰든 할 것이지 하나님 집에서는 억지를 쓰지 마라. 팀장을 맡다가 교체된 건 별일도 아니다. 팀장을 맡지 않아도 살 수 있지 않으냐? 팀장을 맡지 못한다고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이냐? 욥은 그토록 큰 고통을 받으면서 뭐라고 말했느냐? 불평 한마디 없이 하나님을 칭송하며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라고 말했다.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칭송한 것이 상과 이익을 아주 많이 얻었기 때문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는 그저 그렇게 인식했고 그렇게 실행했다. 이는 인품과도 관련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격이 저열해서 조금만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자신이 억울하기 이를 데 없다고 생각하고, 온 세상 사람이 다 자신에게 잘못했고 자신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골치 아픈 인간이냐! ‘굴욕’이라는 두 글자는 어떻게 설명해야겠느냐? 이방인이 굴욕을 당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말이 달라진다. 진리를 얻고자 고통을 받고 굴욕을 당하는 것은 모두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이다. 책망과 훈계에 부닥치든, 아니면 교체되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그것을 굴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사람이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지 그건 굴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굴욕을 당하는 건 누구겠느냐? 하나님이야말로 굴욕을 당한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는데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니 말이다. 보아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온 뒤 그들은 우상을 숭배했고, 먹을 음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와 다른 음식을 베풀어 주어야 했다. 그들은 또 며칠 지나 살 만해지면 하나님을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다시 하나님을 찾아왔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얼마나 큰 굴욕을 당했겠느냐? 시대에 의해 버림받은 성육신 하나님이 얼마나 큰 굴욕을 당했겠느냐!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이 준 은혜와 하나님이 공급한 진리를 이토록 많이 누리고 있고,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좀 받으면서도 특히나 억울해한다. 사람이 억울해할 게 뭐가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평소에는 강인하지만 조금이라도 고통을 받으면, 형제자매가 그를 책망하거나 누가 그에게 듣기 싫은 말을 한마디 하면, 혹은 아무도 그를 옹호하거나 치켜세우지 않으면 속상해하고 자신이 큰 고통을 받았고 아주 억울하다고 생각하면서 불평한다. “다들 저를 무시하는군요. 저를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고요. 저는 태생적으로 모욕을 당할 운명인가 봐요!” 이 무슨 억지냐? 그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진리에 부합하는 말이 한마디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이건 뭐겠느냐? 이게 수모겠느냐?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은 간파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설교를 그토록 많이 들었는데도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고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 깨닫지 못한다. 이런 것도 모르면서 자신이 엄청난 굴욕을 당한 것처럼 생각하니 이는 공연히 말썽을 부리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이런 굴욕이 존재하겠느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설사 가끔 형제자매가 정말로 너를 억울하게 하더라도 너는 어떻게 체험해야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곳에 50위안이 놓여 있었는데 네가 그곳을 지나간 뒤 돈이 사라지자 다들 네가 가져갔다고 의심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속으로 억울하고 속상해서 “제가 가난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요. 염치는 있다고요. 남의 물건은 절대 가져가지 않아요. 저보다 결백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당신들은 평소에도 저를 무시하더니 이런 일이 발생하니까 저를 먼저 의심하는군요. 하나님께서도 저 대신 해명해 주지 않으시는 걸 보니 저를 좋아하지 않으시나 봐요!”라며 억지를 쓴다. 이게 치욕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이런 일이 닥치면 너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네가 가져갔다면 인정한 다음 앞으로 다시는 가져가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하고, 네가 가져가지 않았다면 “제가 안 가져갔어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시니까 그 돈을 누가 가져갔는지는 가져간 사람 자신이 알고 하나님께서도 아실 거예요. 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하면 된다. “당신들은 저를 무시해요. 저를 괴롭히려고 한다고요.”라는 말은 할 필요 없다. 그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 있겠느냐? 많이 말하는 게 좋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왜 좋지 않겠느냐? 그런 말을 많이 하면 네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고 너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없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네가 진실을 말하면 하나님은 다 안다.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살피고 사람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감찰한다. 다른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라고 해라. 너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안다고 믿으면 많이 말할 필요 없다. 속상해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다. 이게 별일이라도 되느냐? 너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비방당하고 평가받기도 하는데, 네가 억울하다고 해서 명확히 말할 수 있겠느냐? 네가 그에게 끊임없이 변명하다가 올바른 일을 그르친다면 의미 없지 않겠느냐? 그에게 이치를 따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건 진리 실행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통을 받는데 사람이 받는 고통이 굴욕이겠느냐? (아닙니다.) 절대 아니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사람은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패괴 성품을 가진 것이 한 가지 이유다. 그 밖에, 네가 어느 측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지, 자신의 내면에 어떤 소극적인 성분이 있는지 꺼내어 교제해도 된다. 억누를 필요 없다. 교제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구하고 깨달아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너는 억누를 필요도, 굴욕당할 필요도, 참으면서 “저는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제게 순종하라고 하시네요. 저는 순종하려면 먼저 이해해야 해요.”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이해하지 못하면 교제해도 된다. 진리를 구하는 것은 올바른 길이고 잘못된 게 아니다. 어떤 일은 알아듣게 교제하고 명확히 말하면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된다. 너는 진리를 구하는 태도를 가지고, 진리를 구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만약 진리는 깨닫지 못한 채 순종하는 훈련만 한다면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설사 네게 순종하라고 하더라도 아무렇게나 원칙도 없이 순종하라는 게 아니다. 그러나 순종에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네가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먼저 순종하고, 순종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갖춰야 할 이성이다. 이것에 이르고 나서 천천히 구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 않을 수 있고 보호받아 길 끝까지 걸어갈 수 있다. 사람을 폭로하거나 정죄하는, 나아가 심판하거나 저주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치욕을 주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엄청난 인내로 이 모든 것을 견딜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오히려 사람은 엄청난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것을 받아들여야만 사탄의 패괴 본성이 대체 무엇인지, 사람의 패괴 본질이 대체 무엇인지, 사람이 하나님을 적대하는 근본 원인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 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못하는지를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진리를 구해야만 해결할 수 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아무리 알아듣게 말씀했더라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런 문제들을 영원히 해결할 수 없다. 설사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치욕을 주는 게 아니라 그저 폭로일 뿐이야. 우리를 위한 거야.’라고 인식하더라도 그저 도리적으로 인정한 것일 뿐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을 한 진실한 함의나 하나님이 이루려는 성과가 대체 무엇인지, 하나님이 말씀한 진리가 대체 무엇인지는 영원히 깨달을 수 없다. 이렇게 교제하고 나니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는 것, 교체됨을 받아들이는 것,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하나님의 행사와 안배, 주재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조금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최소한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행사가 모두 옳다고, 부정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우선 가져야 할 태도는 바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협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이 모든 행사에 대해 사람은 강인한 인내를 가질 필요가 없다. 즉, 이 모든 것을 견디지 않아도 된다. 그럼 무엇을 해야겠느냐? 받아들이고 구하고 순종해야 한다. 이방인이 말하는 ‘수모를 참는다’는 말은 듣기에 사람을 모욕하는 것만 같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에 대해 너는 수모를 참을 필요가 없다. 너는 인내와 사랑하는 마음, 겸손을 실행할 수 있고, 순종하고 받아들이고 정직하게 대하고 털어놓고 구할 수 있다. 이런 것은 비교적 긍정적인 것이다. 그럼 이방인이 말하는 이 논리는 무엇이겠느냐? 사탄 철학이고 사탄의 거짓말이다. 아무튼 수모를 참는 행동 방식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준수해야 할 원칙도, 진리도 아니다. 그것은 사탄의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수모를 참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수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행사는 모두 사랑이고 구원이며 보살핌이고 보호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사역은 모두 긍정적인 것이고 진리이며, 사탄과 같은 부분은 하나도 없고 사탄의 방식과 방법도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만 정결케 되고 구원받을 수 있다.
사탄이 말하는 수모를 참는 것은 사람에게서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그것이 사람에게서 보이는 모습은 해치고 파괴하고 유린하고 짓밟는 것으로, 결국 그것은 네게 화를 끼친다. 고통을 겪었든, 아니면 굴욕을 당했든 결국 그것이 사람에게 최종적으로 얻게 하는 것은 결코 진리가 아니다. 사람이 얻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고통이다. 사탄이 사람에게서 저지르는 짓은 온갖 치욕과 풍자, 그리고 유린과 패괴다. 그럼 사람에게서 이루는 것이나 사람에게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자기 뜻을 굽히게 하고, 심지어 마음이 비뚤어지게 한다. 사람은 갖은 수단과 방식으로 이 모든 것에 대처하고 대응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알랑거리고 위장하고 거짓말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 모든 것을 표출하거나 드러낼 때 사람은 마음속으로 달갑고 행복하고 평안하겠느냐, 아니면 분노하고 고통스럽겠느냐? (분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이 세상에서 수모를 참을수록 사람 마음속의 분노는 더 커지겠느냐, 아니면 더 작아지겠느냐? (커집니다.) 그럼 사람은 이 인류를 점점 더 적대시하겠느냐, 아니면 점점 더 사랑하겠느냐? (적대시합니다.) 사람은 이 인류를 점점 더 적대시하고, 누구를 보든 미워하게 된다. 사람이 젊을 때는 이 사회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무엇을 보든 다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남을 특히 쉽게 믿지만, 서른 살쯤 되면 남을 잘 믿지 않게 되고, 마흔 살쯤 되면 대부분의 사람을 다 믿지 않으며, 쉰 살쯤 되면 마음속이 증오로 가득 차서 남을 해치려고까지 한다. 증오로 가득 차기 전까지 사람이 견디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전부 굴욕과 고통이다. 네가 남만큼 능력이 뛰어나거나 세력이 크지 않을 때는 남이 뭐라고 하면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해야 하고, 뭐라고 욕하면 어찌할 수 없이 다 듣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너는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언젠가 내게 세력이 생기면 직접 네놈을 죽이고 네놈의 조상 삼대를 멸하겠어!’ 마음속의 증오는 점점 커진다. 이게 바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 이 패괴된 인류에게 가져오는 결과다. 사람들은 사회에서 떠받들고 제창하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 긍정적인 것이며 사람을 분발하게 하는 일종의 정신이자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결국에는 오히려 사람에게 분노와 증오를 가져오겠느냐? (그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나쁜 결말을 맺는 것이다. 사회나 세간에서 대대로 이어지는 원한이나 원한에 의한 살인은 어떻게 일어나겠느냐? (굴욕을 당한 뒤 사람 마음속의 증오가 점점 더 커져서 원한에 의한 살인이 일어납니다.) 그렇다. 그렇게 원한에 의한 살인이 일어나서 대를 이어 서로 잔인하게 죽이다가 인류가 재난에 의해 멸해져야 끝난다. 바로 이런 결과이다. 이 인류는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사탄의 철학과 논리에 기대어 살아가며 점차 오늘날까지 발전해 왔고, 사람들 간의 관계는 점점 틀어지고 소원해지고 신뢰를 잃고 각박해져 왔다. 지금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느냐? 아무 상관이 없는 두 사람의 마음속에도 서로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가득하다. 과거에는 이웃끼리 서로 오가며 자주 교류했지만 오늘날에는 사람이 죽은 지 대여섯 날이 되도록 이웃이 알지 못할 정도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겠느냐? 서로 증오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너는 남이 너를 적대시하지 않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남을 적대시한다. 이게 바로 악순환이고, 사탄의 법칙이 인류에게 가져온 나쁜 결과이자 재난이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남에 대한 견해나 인상은 점점 더 나빠지고, 사람은 점점 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법을 배우게 되며, 마음속의 분노와 증오는 갈수록 커져서 결국 “차라리 아무도 살지 말고 다 죽는 게 나아요!”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이 다 이런 증오로 가득 차지 않았느냐? 이 세상이 얼른 멸망하길 바라며 “사람은 다 나쁘기 그지없으니 멸해져야 해요!”라고 말한다. 너는 남들이 나쁘기 그지없다고 말하면서 정작 너 자신은 어떠냐? 너 자신은 과연 정말로 변화했느냐? 구원에 이르렀느냐? 나쁘기 그지없다고 남들을 증오한다면 너 자신은 남들보다 훌륭해야 한다. 만약 네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나쁘다면 너는 비이성적이다. 이성적인 사람은 인류가 나쁘기 그지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진리를 추구해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내어 하나님을 흡족게 해야 한다. 그래야 적절하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사악한 인류를 멸할 때 너는 살아남게 된다.
너희는 이 사악한 인류를 증오하지 않느냐? (증오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대부분 아직 인성과 이성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고 마음이 좀 선량하며, 광명을 동경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권세 잡고 진리가 권세를 잡는 것을 동경하고, 사악한 것들과 불공평한 것들은 싫어한다. 그러니 이 인류에 대해 희망과 사랑, 포용이 가득해야 하는데 어째서 이 인류를 증오하는 것이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선생님께서 저를 괴롭히셔도 저는 끽소리도 내지 않고 당하고만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대학에 진학하고 나면 제가 대단하다는 걸 보여 주겠다고, 그때는 제가 그들을 괴롭히겠다고 결심했죠!”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직장인 시절을 돌이켜보면 회사에서 잘나가는 사람이 늘 저를 괴롭혔어요. 그래서 저는 언젠가 성과를 내서 그들의 머리끝까지 기어올라 그들을 죽도록 괴롭히겠다고 생각했죠!” “장사하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공급업체 사장님이 늘 저를 속였어요. 그래서 저는 언젠가 부자가 되면 그 사람을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힘겹게 살아간다. 다들 괴롭힘을 당할 때가 있고, 마음속에 증오하는 사람이 있으며, 원수를 갚아 원한을 풀려고 한다. 이 세상은 이런 모습이 됐다. 증오와 적개심으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서로를 극도로 적대시하고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하게 됐으며 화목함은 사라졌다. 이 세상은 곧 끝장날 것이다. 끝에 다다랐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다 피눈물 맺힌 과거가 있다. 예전에 어디에서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어느 기업이나 조직에서 어떤 무리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속고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이는 무엇을 증명하겠느냐? 이 인류 가운데는 이제 노아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저마다 마음속에 사악함이 가득하고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 정의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하여 사람은 이미 구제 불능이 됐다. 어느 누구도, 어떤 학설도, 어떤 이론도 이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 바로 이런 상황이다. 어떤 사람은 “언제 세계 대전이 일어날까요? 전쟁이 끝나면 죽을 사람은 다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겠죠.”라며 기대하기도 한다. 가능하겠느냐?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저런 종교에 희망을 걸기도 하지만 지금 각종 종교도 몰락해 가고 있고 곧 소멸될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 종교든 부패가 극에 달했고 평판이 몹시 나쁘다. 내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하겠느냐? 사람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과 진리로 인류를 구원하지 않는다면 이 인류의 마음속 증오와 흉악한 성품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창궐할 수밖에 없고, 결국 인류는 서로 학살하다가 자멸하는 말로를 맞이하고 말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 사악한 인류를 피해 인적이 드문 깊은 숲속이나 인가가 없는 곳에 가서 혼자 살려고 한다. 그럼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인류가 더 이상 번식하지 않아 다음 세대가 없어진다. 이번 세대를 마지막으로 멸종하고 후손을 남기지 못한다. 이 인류는 하나님을 몹시 심하게 대적하여 일찍이 하나님을 노하게 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끝장날 것이다. 왜 많은 사람이 결혼을 하지 않겠느냐? 속을까 봐 두려워 더 이상 좋은 사람이 있다고 믿지 않고 혼인에 대해 적개심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 일을 두고 누구를 탓하겠느냐? 인류가 너무도 깊이 패괴된 것을 탓해야 하고 사탄 마귀를 탓해야 하며 사람이 스스로 기꺼이 패괴를 받아들이는 것을 탓해야 한다. 남을 증오하는 너는 남보다 잘났냐? 너는 진리를 갖추지 않았으니 남을 증오해도 소용없다. 사람이 진리를 갖추지 못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결국 막다른 길에 오르게 되고, 재난에 떨어져 멸해진다. 바로 이런 말로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지 않는다면 패괴된 인류 중 아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수모’란 대체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수모를 참을 필요가 있겠느냐? 이 ‘수모’가 존재하겠느냐?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해결된 것 아니겠느냐? 그럼 앞으로 누가 “하나님을 믿을 때는 가장 먼저 인내를 배워야 해요. 무슨 일이 있든 참아야 하고 마음속에서 억눌러야 해요.”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 그에게 얘기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얘기해야겠느냐? 이렇게 말하여라. “뭘 인내한다는 거죠? 당신이 정말로 굴욕을 견딘다면 당신은 참 불쌍한 거예요.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죠. 당신이 진리를 깨닫는다면 그런 굴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배치하신 모든 환경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할 거예요. 이런 고통은 사람이 마땅히 겪어야 하는 것이지 어떤 굴욕이 아니에요. 이는 하나님의 높여 주심이라고요. 우리가 이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남겨 주셨다는 뜻이에요. 만약 우리에게 고통을 겪을 기회나 자격조차 없다면 구원받을 기회도 없는 거예요. 당신은 그게 굴욕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해요.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 한번 살펴보세요. 그런 굴욕은 존재하지 않아요. 우리는 패괴된 사람이니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은 당연해요. 병에 걸리면 약을 먹고 수술을 하면서 고통을 좀 겪어야 하잖아요! 병을 치료하기 위해 겪는 고통을 굴욕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건 굴욕이 아니라 병을 치료하기 위한 거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심판과 형벌을 겪는 것은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내며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아가기 위해서이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더 제대로, 더 존엄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예요.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고, 진리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고요. 그걸 굴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우리가 다해야 할 책임이자 의무, 걸어야 하는 길로 여겨 받아들여야 해요. 그건 하나님의 높여 주심이죠. 우리는 우리를 높여 주시고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미해야 해요. 우리의 행동거지로 보면 우리는 이런 고통을 겪을 자격이 없어요.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멸해져야 한다고요. 만약 우리가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이 모든 은혜를 굴욕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너무도 양심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죠.”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정도의 도리는 아주 얕으니 말하지 않아도 깨달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일깨우면 사람은 이런 일을 깨달아 마음이 좀 넓어지고, 일이 닥쳐도 억지를 쓰지는 않게 된다. 어떤 사람은 마음속으로는 이것이 진리이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입으로는 정말 억울하다고 말하고, 말하다 보면 하나님을 판단하는 말도 내뱉는다. 너희는 절대 이런 짓은 저지르지 마라. 무슨 일이 닥치든 진리를 향해 구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니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진리, 길, 생명으로 인정한다면 너는 하나님이 배치한 그 어떤 환경도 인위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배치한 모든 환경을 네 성품 변화의 기회이자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회로 여겨야 한다.
‘수모’의 뜻에 대해서는 교제를 마쳤으니 이어서 다음 부분인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란 무슨 뜻인지 교제하겠다. 방금 우리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 사람 마음속의 욕망과 야심, 자신이 이루고 싶은 목표라고 얘기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들이려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있겠느냐? 방금 말했듯이 ‘수모를 참는다’는 말은 하나님 집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너는 수모를 참을 필요도, 자신이 몹시 고통을 겪고 있다고 느끼고 속으로 억울해하며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 위해 이 모든 굴욕을 견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마치 네가 몹시 고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럴 필요 없다. 그럼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건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만약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은 사람이 더 큰 책임과 사명을 짊어져서 더 큰 축복과 더 좋은 종착지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이런 말이 정당하고 합리적이겠느냐? (정당하지 않습니다.) 정당하지 않다. 그럼 어떻게 규정해야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더 잘 살아가도록 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것은 과연 사람을 위해서이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이겠느냐?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당연히 사람을 위해서이다. 최대 수혜자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이 그 안에서 어떤 이득을 얻을지와는 관련이 없고, 사람이 이런 고통을 겪어서 얼마나 큰 복을 받을지와는 더더욱 관련이 없다. 너는 참을 필요도, 그런 ‘원대한 이상과 포부’를 가질 필요도, 그렇게 버릴 필요도 없다. 사실 너는 무엇을 버리지도, 잃지도 않았다. 결국에는 오히려 사람이 얻는 게 가장 많다. 사람은 처신하는 여러 측면의 준칙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한 이 모든 규칙과 법칙에 순응하며 질서 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살아가는 방식은 오늘날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 비해 어떻겠느냐? (좋습니다.) 오늘날 살아가는 방식보다 좋다. 그럼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더욱 행복하고 진정한 피조물답게 살아가는 것이고, 더욱 인류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이겠느냐? (전자입니다.) 당연히 전자이다. 너는 이런 고통을 겪고 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동시에 많은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를 깨달은 것을 토대로 어떻게 처신하는지 배웠으며, 네 인성 안에서 진리가 생명이 되었으니, 네게 값어치가 생긴 것 아니겠느냐? 원래 사람은 진리를 전혀 갖추지 않은 값어치 없는 싸구려이고, 개미만도 못하며 살아갈 자격이 없다. 하지만 이제 너는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를 근거로 말하고 행동하며, 하나님이 네게 무엇을 시키든 다 따르고 그대로 이행하며, 하나님이 어떻게 안배하든 다 순종한다. 그런 네가 여전히 하나님을 판단하겠느냐?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겠느냐? 누가 네게 하나님을 거역하라고 지시한다면 네가 따르겠느냐? (따르지 않습니다.) 누가 하나님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려 너를 미혹한다면 네가 믿겠느냐?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다. 따라서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너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인류는 완전히 하나님의 권세 아래 산다. 그럼 이런 인류도 오늘날 사람이 겪는 그런 고통을 감내할 필요가 있겠느냐? 마음속에 증오나 고통이 있겠느냐?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런 고통이 없다. 이런 사람은 무슨 일이든 원칙을 가지고 처리하지 함부로 처리하지 않는다. 그 밖에, 일이 닥치면 하나님이 주관하기 때문에 사탄은 너를 해치지 못한다. 너는 진정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런 인류마저 멸하겠느냐? 이런 인류가 스스로 자신을 멸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그건 오늘날의 이 패괴된 인류와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이다. 오늘날의 사람은 마음속에 증오와 고통이 가득해 언제 어디서든 자살하거나 싸우고 살인할 수도, 나쁜 일을 저질러 세상에 재난을 불러올 수도 있다. 반면 하나님에게 구원받고 진리를 얻어 생명으로 삼은 이 인류는 함께 화목하게 어울릴 수 있고 싸우거나 증오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할 수 있다. 사람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고 한 방향을 향해 노력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너도 진리를 깨닫고 그도 진리를 깨달으며, 너희와 그들 모두 진리를 깨닫는다면 모두가 같이 있을 때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리에 기대어 살아갈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이 합하게 된다. 이런데도 사람과 사람이 서로 싸우고 죽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사람이 고통을 견딜 필요가 있겠느냐? 고통이 사라진다. 이런 인류는 행복하게 살아가고, 다투거나 서로 싸우고 죽이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이 맡긴 만물을 사람은 어떻게 관리하겠느냐? (화목하게 어울려 지냅니다.) 화목하게 어울려 지내는 한편, 하나님이 제정한 규칙과 법칙대로 관리한다. 이 모든 규칙과 법칙, 그리고 생물이 모두 인류에게 속하고 쓰이며 인류를 위해 복을 창조한다. 이런 인류는 얼마나 좋으냐! 그때가 되면 인류의 생존 환경을 모두 사람이 맡아 관리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규칙과 법칙을 모두 사람에게 정해 주고 신경 쓰지 않는다. 만약 어느 날 늑대 한 마리가 토끼를 먹고 있는 것을 보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먹도록 허락해야 한다. 늑대에게 토끼를 먹지 않고 풀을 먹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러면 어떤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겠느냐? (법칙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토끼는 풀을 먹고 늑대는 고기를 먹는다. 너는 그들의 천성을 존중해야 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살게 해야 하지 인위적으로, 별도로 그들의 활동이나 생활에 참견할 필요가 없다.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다 정해 놓았다. 어떤 지역에 비가 많이 내리고 기후가 적절하지 않으면 동물들은 이주해야 하는데, “이 지역은 관리를 좀 해야겠어요. 어째서 늘 비가 그렇게 많이 올까요? 동물들이 늘 이주하느라 얼마나 힘들겠어요!”라고 말한다면 이는 우매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부분이 우매하겠느냐? 그 기후는 하나님이 정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기후를 정하여 그 동물들을 그 지대에 살게 했으니, 동물들이 이주하는 것도 하나님이 그것들에게 정해 놓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너는 왜 막으려고 하느냐? 네가 괜히 웬 호의를 베푸느냐? 동물들이 이주하면 어떤 이점이 있겠느냐? 많은 동물이 한 곳에서 반년 동안 머물면서 풀을 다 먹어 치웠는데 비가 내리지 않아서 동물들이 이주하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계속 비가 내리면 땅이 젖어 머물 수 없게 되고 풀도 빗물에 잠겨서 동물들은 떠나야 한다. 한 번 이주하면 동물들이 몸을 단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풀에게도 자랄 틈을 준다. 동물들이 다른 곳에서 풀을 거의 다 먹으면 그 지역에 또 눈이 내려 동물들을 ‘몰아내야’ 하고 동물들은 서둘러 이주해야 한다. 떠나서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그곳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풀도 자라서 또 먹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이 생태계는 자연스럽게 계속 균형을 유지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뿔말은 늘 사자에게 잡아먹히잖아요. 얼마나 불쌍해요! 뿔말을 좀 더 똑똑하게 만들 수는 없을까요?” 괜히 웬 호의를 베푸느냐? 네가 착하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것이냐? 그건 지나치게 호의적인 것이다. 뿔말이 교활해지면 사자는 굶주리게 된다. 사자가 굶주리는 것은 안쓰럽지 않으냐?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자는 나빠요. 사슴과 얼룩말을 물잖아요. 얼마나 피비린내 나고 잔인해요!” 네가 사자를 없애 버리면 얼룩말이나 사슴이 너무 많아져서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풀을 다 먹어 버려서 초원은 사막이 된다. 네가 견딜 수 있겠느냐? 이런데도 그 호의를 베풀겠느냐? 그럼 너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들이 자유롭게 살도록 놔둬야 한다. 동물들 간의 관계는 그렇다. 하나님이 이미 이 모든 법칙을 정해 놓았으니 너는 원하든 말든 받아들여야 하고, 법칙대로 해야 한다. 법칙을 위반하면 너는 생존할 수 없다. 이 모든 법칙을 이해하면 너는 이 모든 법칙을 존중할 것이고, 이 모든 법칙대로 이 사물들을 바라볼 것이며, 그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게 될 것이다. 그 밖에, 이 모든 법칙은 타고나는 것인데, 이 타고나는 것은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안배해 놓았다. 인류는 과학과 생물, 다양한 학과를 연구했다. 이토록 오랜 세월 연구했지만 간단한 도리나 규칙만을 깨달았을 뿐, 누구도 그 도리와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주재와 지혜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왜 이 모든 생태와 먹이사슬이 그토록 정밀하고 기묘하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인류는 단지 어떤 현상을 규명하거나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사실을 공표할 뿐이고, 이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됐다는 것을 정리해 내거나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연적으로 형성됐다는 말대로라면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어째서 사람으로 변하는 원숭이를 한 마리도 보지 못했겠느냐? 이 모든 법칙은 다 하나님이 정한 것인데, 원숭이가 사람으로 변하는 것과 관련이 있겠느냐?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 일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법칙과 규칙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사람이 만약 운 좋게 살아남는다면 그때 사람은 이 모든 규칙과 법칙을 존중하고 지키고 관리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부분은 사람이 이 모든 규칙과 법칙 속에서 최대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예비하고 정해 놓은 것이고, 사람은 무엇이든 이미 이루어진 것을 누릴 뿐이다. 모든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라는 피조물만이 가장 복 있다. 사람은 언어와 생각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고, 언어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다. 무엇보다 행복한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장 큰 밑천을 주어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 앞에 올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하는 이 모든 것, 하나님이 정한 이 모든 규칙과 법칙은 사람이 관리하고 지켜야 한다. 이 모든 규칙과 법칙을 연구하고 파괴하고 짓밟고 왜곡하기만 하는 인류는 멸절될 것이다. 사람은 이토록 많은 고통을 겪었는데, 사람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추구하고 갈망하는 그 아름다운 종착지가 과연 존재하겠느냐?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단지 사람의 욕망과 야심일 뿐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려는 것과는 다르고, 전혀 상관없는 별개의 일이다. 따라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에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의 뜻은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네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종착지나 마음속의 야심과 욕망이 이루려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고 얼마나 큰 굴욕을 견뎠든, 결국 네가 갈망하는 종착지와 네가 욕망 속에서 이루려는 것,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얼마나 큰 복을 누리려는지 등 그런 것은 다 성립하지 않는다. 그건 하나님이 네게 주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또 어떤 문제가 있느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사람이 굴욕을 견디며 실력을 보존한 다음 자신이 이루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굴욕을 당하는 것이다. 그 목표는 무엇이겠느냐? 사람 자신의 마음속 이상, 나아가 욕망이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것이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서이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고통을 겪으며 추구하고 이루려는 목표는 긍정적인 것이겠느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겠느냐? (긍정적인 것입니다.) 욕망과 관련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럼 이 긍정적인 목표는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진정한 사람이 되어 더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진정한 사람이 되어 더 잘 살아가는 것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구원받는 사람이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다. 너희는 욥이나 베드로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냐? (되고 싶습니다.) 그럼 그것이 목표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목표가 욕망과 관련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 목표는 정당한 추구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목표이자 길이다. 이는 정당한 것이다. 따라서 이 정당한 추구 목표를 위해 겪는 고통은 수모를 참는 게 아니라 사람이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것이며 마땅히 걸어야 하는 길이다. 마음속으로 자신이 굴욕을 견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길에 오를 수 있겠느냐? 오를 수도 없고 이 목표를 이룰 수도 없다.
이제 와서 보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라는 말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사람이 일을 처리하고 처신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도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구원받으려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져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어느 부분이 옳지 않으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게 아닌데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그건 어떤 사람이 살인과 방화 등 수많은 나쁜 짓을 저질러 드디어 ‘국민이 추대하는 지도자’가 됐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말과 비슷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뜻이다. 분명 사악한 길을 걸었는데 오히려 긍정적인 인물이 되었으니 이는 모순적이다. 어떤 사람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져 드디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고, 드디어 시련 속에서 굳게 섰다고, 드디어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했다고 말한다면 이 중에서 어느 말이 옳겠느냐? (모두 옳지 않습니다.) 모두 옳지 않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마을 전체에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면 이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런 의혹을 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옳을까? 이 말은 옳지 않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려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하는 경우가 많잖아.’ 이 말을 여기에 쓰는 게 옳지 않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어째서 옳지 않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져 이루는 성과는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적용하는 게 옳겠느냐? 이 말이 어째서 옳지 않은지 한번 분석해 보자.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복음을 전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얻고 많은 성과를 거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전파했어요.”라는 말이 옳은지 그른지 모르겠느냐? 우리가 오늘 교제한 모든 조항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이 말을 여기에 쓰는 건 옳지 않지만, 만약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사람들이 복음 전파 대상에게 맞거나 욕을 먹고 집 밖으로 내쫓기는 것을 연상한다면 그건 수모를 참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건 무엇이겠느냐? (복음을 전하면서 마땅히 겪어야 하는 고통입니다.) 그렇다. 이는 사람이 마땅히 견뎌야 하는 고통이자 사람의 책임과 의무이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한 부탁이다. 이는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 몹시 고통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건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아이에게 “엄마가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면서 너를 낳았단다.”라고 한다면 그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그녀도 고통을 겪었는데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게 옳지 않겠느냐? 그건 그녀가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이다. 예를 들어, 늑대가 몇 시간을 쫓은 끝에 겨우 토끼 한 마리를 잡았는데, 늑대가 “나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면서 토끼 한 마리를 잡아먹었다.”라고 한다면 그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토끼를 먹기 위해서 늑대는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토끼가 도망가지 않고 늑대에게 잡아먹히기를 기다릴 리 없다. 그렇게 쉬운 일이 있겠느냐? 무슨 일을 하든 다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라는 말을 철저히 무엇으로 구분했느냐? (부정적인 것으로 구분했습니다.) 부정적인 것이나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로, 사탄의 논리나 사탄의 처세 철학으로 구분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긍정적인 사물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만약 누가 “저는 복음을 전한 지 오래됐어요. 그야말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거죠!”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복음을 전하는 건 네 책임이고, 네가 마땅히 겪어야 하는 고통이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해도 너는 살아가면서 고통을 겪지 않느냐? 그건 바로 사람이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이고 정당한 것이다.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다.”라는 말은 하나님 집에서는 거의 근절되었다. 만약 누가 또 이런 말을 한다면 너는 어떻게 이해하겠느냐? 만약 누가 “저는 감옥에서 유다처럼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건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거죠!”라고 한다면 그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겠느냐? 유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은 그 얼마나 정의로운 말이고 정의로운 목표냐? 근데 어째서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게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유다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유다가 되는 게 정당한 것이냐? 유다가 되지 않은 것을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그 말은 허튼소리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위해 증거하는 것은 너의 사명이고 피조물이 굳게 서야 하는 간증이자 입장이다. 사탄은 사람의 칭송을 받을 자격이 없다. 사람이 경배해야 하는 이는 하나님이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사탄이 너를 굴복하도록 한다면 너는 응당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서 목숨을 내놓아 유다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말을 명확히 했으니 만약 또 누가 자신이 어떻게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졌는지를 말한다면 너희는 그 일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그에게 오늘 설교한 내용을 들려주면 깨달을 것이다. 그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3)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투지
와신상담의 세 번째 모습은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투지이다.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은 어떤 성품이겠느냐? 교만한 성품이다.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실수하지도, 틀린 말을 하지도,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는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 자신에게 결함과 흠이 있다는 것, 자신도 실수하거나 틀린 말을 할 때가 있다는 것, 자신도 실수할 수 있고 그릇된 길을 걸을 수도 있다는 것, 자신은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실패하거나 좌절을 겪거나 그릇된 길을 걷더라도 인정하지 않고 완강하게 계속해 나가는 것, 실패해도 기죽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아무리 많은 사람이 지적하고 정죄해도 뉘우치지 않고 자신의 방향과 목표를 향해 분투하고 노력하고 추구하면서 어떤 대가도 따지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정신이다. 이런 정신은 상당히 고무적이지 않으냐?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말은 보통 어떤 상황에 쓰이겠느냐? 여러 가지 상황에 쓰이는데, 패괴된 인류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이런 말과 이런 정신이 존재한다. 그럼 사탄에게 속하는 인류가 이런 말을 만들어 낸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영원히 자신과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고, 자신의 취약하고 나약하고 무능한 면만을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 있고 위대하고 용맹스러운 면을 보게 하려는 것이며, 자신을 깔보지 않고 자신이 능력 있다고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네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할 수 있다고, 실패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으며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럴 수 있다고, 네가 그런 결심과 의지, 야심과 욕망만 있으면 다 이룰 수 있다고, 사람은 보잘것없지 않고 위대하다고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방인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네 마음의 크기가 네 무대의 크기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무척 좋아한다. “어머, 그럼 제가 십 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원하면 가질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벤츠 한 대를 원하면 가질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마음이 이렇게 크면 물건을 바로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황당한 이론이다. 솔직히 말하면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라는 말을 믿거나 인정하는 사람은 지극히 오만한 사람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어떤 말씀과 정반대되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을 인식하고 착실하게 처신하라고 한다. 사람은 패괴 성품과 결점, 하나님을 대적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사람은 모두 완벽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떻게 처신하라고 훈계하느냐? (착실하게 처신하라고 하십니다.) 착실하게 처신하고 성실하게 피조물의 본위를 지키라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실패를 입에 올리지 말라고 하더냐? (그러지 않으십니다.) 그러지 않는다. 그럼 사람이 그릇된 길을 걷거나 패괴 성품을 표출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느냐?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받아들이고 인정한 다음 인식하고 돌아서서 진리를 실행하라고 한다. 그런데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은 자신의 문제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고,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또한 죽어도 뉘우치거나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는 더더욱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운명이란 대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떻게 지배하고 안배하는지 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운명을 자신의 손에 쥐고 스스로 결정권을 가지려 한다. 그 밖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을 인식하고 정확하게 가늠하고 평가하며 무언가를 할 수 있으면 착실하고 성실하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잘해 내라고 하지만, 사탄은 사람에게 교만한 성품을 충분히 이용하고 발산하며 초인이나 위인, 심지어 초능력을 가진 사람,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탄의 철학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바로 틀려도 틀린 게 아니고, 불복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되고 염원과 목표도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럼 이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도 있지 않겠느냐?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고 그릇된 길을 걸을 수도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 외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갖은 방식과 음모로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실현시킨다.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에 운명을 기다리고 운명에 순종하는 사람의 태도가 담겨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 사람은 운명을 완전히 자신의 손에 쥐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다스리려 하며, 자신이 앞으로 어느 길로 갈지, 복을 누릴지 아니면 어떻게 생활할지를 모두 스스로 결정하려 한다. 이방인들이 하는 말 중에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수많은 사람이 오랜 세월, 심지어 평생을 준비하지만 죽을 때까지도 기회를 얻지 못한다. 기회는 어떻게 오는 것이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네게 예비하지 않았다면 네가 아무리 준비한들 소용이 있겠느냐? (소용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네게 줄 생각이 없고 네 운명에 없다면 네가 몇 년을 준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네가 그토록 오랜 세월 준비한 것을 봐서 너를 불쌍히 여기고 네게 기회를 좀 내려 주겠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느냐?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네게 예비해 놓으면 네게 기회가 있고, 네게 예비하지 않으면 네게는 기회가 없는데, 네가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해서 소용이 있겠느냐? (소용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저는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을 거예요. 운명은 제 손에 달려 있다고요!” 독한 말을 내뱉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그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는 아들을 낳고 싶었지만 연달아 딸을 낳았고, 남들이 그녀의 운명에는 아들이 없다며 그만 낳으라고 말려도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럴 리 없어요. 저는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을 거예요!”라고 했다. 열 번째에도 딸을 낳자 결국 그녀는 받아들이며 말했다. “보아하니, 저는 이번 생에 정말로 아들이 없는 운명인가 봐요.” 이런데도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겠느냐? 여전히 자신이 있겠느냐? 이 여자가 감히 자식을 더 낳을 수 있겠느냐? 감히 그러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장사를 하면서 2년 안에 50만 위안을 벌려고 계획하고는 첫해의 상반기에 돈을 벌지 못하자 “괜찮아요. 상반기에 돈을 못 번 게 뭐 대수인가요. 하반기에는 분명 벌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1년이 좀 지났는데도 돈을 못 벌었지만 그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는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아요. 저는 모든 것이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어요. 기회는 널렸다고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2년이 되었을 때도 50만 위안은커녕 5만 위안도 벌지 못했다. 그는 기간이 너무 짧고 자신의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2년간 또 공부하러 갔다. 4년이 지났지만 50만 위안을 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본금조차 거의 다 잃었다. 그런데도 그는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으며 “저는 재산이 많은 운명인데 어떻게 50만 위안을 못 벌겠어요?”라고 말했다. 8~10년이 지났을 때도 여전히 50만 위안을 벌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겠느냐? 그에게 올해 얼마를 벌 계획이냐고 물으면 그는 말한다. “아이고, 먹고살 수만 있으면 되죠.” 이래도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겠느냐? 실패한 것이다. 왜 실패했겠느냐? 정한 액수가 너무 높아서 실패했겠느냐? 그런 것이겠느냐? 아니다. 사람의 재산과 자녀, 일생 동안 어떤 고통을 겪고 언제 어디에 갈지는 모두 사람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벼슬길에 오르고자 하지만 아무리 기회가 많아도 그의 몫은 없다. 그가 능력이 없는 탓이겠느냐? 그는 능력도 있고 계산도 밝으며 아첨도 잘하는데 관직에 오르는 게 왜 그렇게 어렵겠느냐? 그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나 그가 얕보는 사람 중에서도 관직에 오르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말솜씨도 좋고 재능과 학식도 갖춘 그는 벼슬길에 오르고 싶은데 왜 그토록 어렵겠느냐? 젊었을 때 늘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평사원으로 남은 그는 결국 받아들이고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정해요. 운명에 있는 것만 가질 수 있고, 없는 건 애써도 얻을 수 없어요.” 고분고분해지지 않았느냐?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정신은 어디로 갔느냐? 사람은 사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정신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사람의 욕망과 야심을 조장한다.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긍정적인 영향이나 지도가 아니라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영향이다. 사람은 원래 하늘 높고 땅 두꺼운 줄 모르고, 하늘의 뜻이나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도 알지 못하는데 이런 정신적 버팀목까지 얻게 되면 미혹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람의 최종적인 말로는 무엇이겠느냐? 한바탕 헛수고를 하고, 불필요한 일을 수없이 많이 한다.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육체와 마음에 많은 손실과 상처를 입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야심,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분명 많은 악을 행했을 것이다. 이 악이 사람의 내세에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징벌뿐이다. 패괴 성품이 사람에게 가져오는 것은 사람에게 야심과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심과 욕망이 사람을 지배해 하도록 하는 것 중에 정당한 게 있겠느냐? 진리에 부합하는 게 있겠느냐? (없습니다.) 무엇밖에 없겠느냐? 악을 행하는 것밖에 없다. 이 악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남을 음해하고 곤경에 빠뜨리고 해치고 속이는 것이다. 결국, 남에게 빚을 너무 많이 져서 다음 생에 환생하면 짐승이 될지도 모른다. 빚을 많이 지고 많이 속이고 곤경에 많이 빠뜨린 사람의 집에서 짐승이 되어 말도 못 하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설사 환생해서 사람이 되어도 평생 동안 끝없이 고통받으며 빚을 갚아야 한다. 바로 이런 나쁜 결말을 맺는다.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말이 그에게 지시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야심과 욕망은 조장되지 않았을 것이고, 2~3년 안에 실현되지 못했다면 그는 포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탄이 그렇게 부추기자 그의 욕망은 갈수록 커졌고, 커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를 지배하여 사악한 길에 오르게 했다. 사악한 길에 오르면 좋은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사람다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목표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 절대로 그만두지 않으며 어떤 나쁜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 보아라, 자식이 재산을 얻기 위해 부모를 살해하는 일도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이익을 위해 자기 손으로 가족과 친구를 살해하는 일이 너무도 많다. 두 사람이 한 가지 이익을 가지고 싸워야 할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들의 신념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이것이다. “저는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아요. 이번에는 절대 실패해선 안 돼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이번 생에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꼭 이겨야 해요. 반드시 얻어야 한다고요. 누구든지 제 길을 가로막는다면 가차 없이 죽여 버릴 거예요!”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을 죽여서 자신의 목표와 욕망은 실현하고 충족했을지 모르지만 악을 행하여 큰 화를 초래하게 된다. 그는 이번 생에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고 참소를 당할 수도 있고, 아무런 지각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런 지각도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일에 대해 정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게는 처리 방법이 있다. 그는 이번 생에서는 목적을 달성하고 뜻을 이뤘을 수도 있지만 다음 생에서는 이번 생에 했던 일 때문에, 어쩌면 한 가지 악행 때문에 참혹한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한 번의 생에서, 두 번이나 세 번의 생에서, 아니면 영원히 그래야 할 수도 있으니 그 대가는 너무도 참혹하다! 그럼 이런 결과는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한마디 말이나 한 가지 신념이 그에게 가져온 것이다. 그는 이번 기회를 얻으려 했고 불복할 수도, 포기할 수도, 실패할 수도 없었다. 그가 이번 기회를 꽉 잡으려고 한 결과, 큰 화를 불러왔다. 큰 화를 불러온 뒤에 견뎌야 할 결과는 1~2년 안에 갚거나 다 메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대가는 너무도 크지 않으냐? 사람은 한 생에 겨우 80~90년을 살고, 적으면 50~60년을 산다. 네가 얻은 이익이든, 지위든, 돈이든 그런 물질적인 것들을 의식적으로 누릴 수 있는 기간도 기껏해야 20~30년이다. 그러나 그 20~30년 동안 누리기 위해 너는 영원히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그 대가는 너무 크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개인적인 욕망과 일시적인 사리사욕을 위해서 일종의 관념이나 사탄의 논리에 지배당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수 있고 영원히 후회를 남길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영원’은 이번 생의 20~30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번 생뿐 아니라 내세에서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더라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눈에 띄는 악을 행하지 않았고 겉으로 봐도 살인이나 방화를 저지르지도, 공개적으로 남을 모함하지도 않았을 수 있지만 남몰래 많은 수작을 부렸다. 이런 악이나 눈에 띄는 그런 악이나 하나님이 보기에는 성질이 같다. 성질이 같다는 건 무슨 뜻이겠느냐? 하나님이 보기에 하나님이 이런 일을 정죄하는 원칙은 같고, 같은 방식과 같은 진리로 정죄한다는 뜻이다. 네가 하는 모든 일은 어떤 이유에서 비롯됐든, 하나님 집에서 했든 아니면 세상에서 했든 하나님에 의해 모조리 정죄된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네게 주는 결말이 이방인과 다르겠느냐? 말해 보아라, 네가 예전에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고 교회를 위해 몇 년간 봉사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정을 봐주고 그의 공의로운 성품을 바꾸겠느냐? 너희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내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하겠느냐?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 행한 악도 악이고, 네가 진리를 깨닫고 나서 행한 악도 악이다. 하나님이 보기에는 모두 악이고, 악은 다르지 않고 다 똑같다.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모두 악이고, 하나님에게는 성질 면에서 차이가 없다. 똑같이 악이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행한 악에 대해 똑같이 책임지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다. 네가 의심하든, 믿든 하나님은 그렇게 하고 그렇게 정의한다. 내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하겠느냐? 너희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으니 나는 하나님의 마음에 든 대상이야. 나는 많은 진리를 깨달았으니 악을 좀 행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규정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실 거야. 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진리를 실행하기 위해 고통받는다는 명분으로 악을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정죄하지 않으시겠지?’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틀렸다. 하나님이 악을 정죄하는 원칙은 똑같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무리에서든 하나님은 인종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이 택한 자든 아니든 구분하지 않는다. 이방인이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하나님은 다 한결같이 대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이 사탄 성품의 지시를 받아 하는 말이고, 사탄 세상에서 창도하는 정신이다. 이런 정신은 우리가 보기에는 무엇이냐? (정신병입니다.) 정신병자가 창도하는 일종의 생각이자 사람이 생활하고 일을 처리하는 일종의 원칙이다. 그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하라고, 어떤 상황에서든 전혀 기죽지 않고 ‘청산에 단단히 자리 잡은 대나무’와 같은 원칙으로 추구하면서 자신의 욕망과 야심이 정당한지 여부는 분석할 필요 없이 그런 정신만 있으면 제창할 만한 일이라고 사람을 부추기고 선동한다. 만약 누군가 인류에게 이로운 것을 연구하면서 자신은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며 실패해도 기죽지 않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계속 연구할 것이라고, 그 목적은 앞으로 인류가 더 잘 살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여기에는 그래도 취할 만한 점이 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인류가 추구하는 목표가 그것이겠느냐? 누가 그렇게 사심 없이 인류를 위하겠느냐? 그런 사람은 없다. 설사 누군가 겉으로 인류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한들 그 이면의 목적은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고 자신의 사업을 이루는 것, 그리고 인류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는 것이다. 이런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다 정당하지 않다. 이런 것들 외에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정신은 사람에게 또 무엇을 하도록 지시하겠느냐? 우선,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정신은 사람의 한계와 본능에 도전한다. 예를 들어, 체육 경기장에서 사람이 공중회전을 연달아 세 번 하면 심장이 견디지 못하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아요. 저는 한계에 도전할 거예요. 기네스 세계 기록에 도전할 거라고요. 저는 공중회전을 연달아 열 번 할 거예요!” 결국 여덟 번째 공중회전을 할 때 숨이 끊어진다. 만약 이런 정신이 그렇게 하도록 그를 선동하지 않았다면 어땠겠느냐? (그는 능력껏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떻게 하도록 하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정상 인성 안에 살도록 하고, 사람에게 연약함이 있음을 용납한다. 사람 육체의 본능과 오장육부의 수용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 견딜 수 있는지는 사람이 스스로 정확히 알아야 한다. 공중회전을 연달아 열 번 하면 어떤 결과가 있을지 너 스스로 정확히 알고 있느냐?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행동하고 한계에 도전한 결과 목숨을 잃었으니 누구를 탓하겠느냐? (자기를 탓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는 “실패를 입에 올리면 안 돼. 다섯 번 회전하고 나서 포기하는 건 너무 나약하잖아. 여덟 번은 해야지!”라고 사탄이 늘 그를 선동한 것이고, 그가 고민하다가 ‘여덟 번도 너무 적어. 열 번은 해야지!’라고 생각해 결국 여덟 번째 회전할 때 심장이 멈춰 숨이 끊어진 것이다. 이는 사탄에게 조롱당한 것 아니겠느냐? 물론 우리는 예를 든 것뿐이다. 공중회전을 연달아 스무 번 해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사람이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투지를 가지고 이리저리 싸우다가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잃은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목숨만 잃었을 뿐 악은 행하지 않아서 내세에 사람으로 환생하여 다시 사람이 되는 기분을 느낄 기회가 아직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큰 악을 행하고 큰 화를 초래하여 몇 번의 생애 동안 그 일 때문에 참혹한 대가를 치르고 계속 빚을 갚으며 모든 생에서 다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이번 생에 다 갚지 못하면 다음 생으로 이어지며, 몇 평생을 살아야 다 갚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바로 이런 결과이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것에 실패하면 수긍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저는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아요. 이번에는 사람을 얻지 못해 실패했지만 다음번에는 실패해선 안 돼요. 반드시 하나님의 증인이 될 거예요. 이기는 사내아이가 될 거라고요!” 사람이 이런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좋지만,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떠냐? 이는 어떤 성품이냐? 이는 천사장의 성품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그렇게 증거하라고 했느냐? 네가 진리를 깨달았느냐? 그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냐? 그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너희가 보기에 이런 자는 어떤 사람이냐? (얼간이입니다.) 이런 자가 바로 얼간이다. 진리를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하나님을 증거한다고 말하다니,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말은 어떠냐?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영원히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실패했지만, 그는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정신 승리라고 생각한다. 이방인은 몇 번을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 싸우고 좌절할수록 용감해지는 이런 정신에 탄복한다. 만약 네가 예전에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정신에 기대 분투하여 목적을 이루었다면 그것은 치욕이 아니겠느냐?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말은 주로 사람의 어느 측면의 패괴 성품을 표출하겠느냐? 사람의 어느 측면의 본질을 나타낼 수 있겠느냐? 이렇게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고 죽어도 굴복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하고 비이성적인 자 아니겠느냐? 사람이 이렇게나 교만한 데다가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비이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마치 목숨을 내던진 사람처럼 좀 모자란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젊고 혈기왕성해서 그렇지 않을까요?” 그런 측면과도 관련이 있다. 사회에서는 “목숨을 내걸어야 이길 수 있다.”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그게 바로 젊은이를 대표하는 필사의 정신이다. 마치 “이 한 몸 갈기갈기 찢기더라도 황제를 끌어내리자.”라고 하는 성난 젊은이들처럼 말이다. 이게 바로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정신이다. 그럼 나이가 많은 사람도 이런 정신력과 체력을 가지고 있지 않겠느냐? 가지고 있다. 관료 사회를 보면 대체로 다 어른이나 노인인데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냐! 사람은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고 패괴 성품에 기대 살아가며 다들 어느 정도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다. 이는 나이의 많고 적음과는 별로 큰 관련이 없지만 성품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깨달으면 이 일을 꿰뚫어 볼 수 있고, 이런 정신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고 패괴 성품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투지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고 정당한 거야. 사람이 살면서 약간의 투지조차 없으면 되겠어? 투지가 없으면 삶에 활력이 없어지지. 그럼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무슨 일이든 꾹꾹 참고 견디기만 한다면 얼마나 유약하고 무능하겠냐고!’ 사람은 모두 살아가면서 승부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그 ‘욕구’는 어떻게 충족할 수 있겠느냐? 여기에서 ‘싸우다’라는 글자가 두드러진다. 어떤 일이 닥치든 싸워서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말은 ‘싸우다’에 기원을 둔다. 무신론자가 가장 숭배하는 것이 바로 싸움 정신이다. 그들은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고, 사람과 싸우는데 그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잘 싸우는 사람일수록 영웅이고 영웅은 투지가 가득하다고 생각한다.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다. 이게 바로 싸움의 핵심이다. 사탄에 속하는 온갖 마귀는 진리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데, 그들은 무엇에 기대 살아가겠느냐? 사탄의 싸움 철학에 기대 살아간다. 그들은 하루를 살면 하루를 싸운다. 어떤 일을 하든 싸워서 이기려고 하고, 승리를 통해 자신을 뽐내려고 한다. 무슨 일을 하든 승부욕을 드러내는데, 그런다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겠느냐? 그들은 대체 무엇을 두고 다투며 싸우겠느냐? 명리와 지위를 위해서, 또 이익을 위해서 싸운다. 싸우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영웅 행세를 하고 호걸이라고 불리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렇게 다투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모두 죽어야 하고, 징벌을 받아야 한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탄 마귀가 있는 곳에 싸움이 있으며, 마지막에 멸망에 이르러야 싸움도 끝이 난다. 이것이 바로 사탄 마귀의 결말이다.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투지와 같은 정신을 더욱더 고양해야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내쳐야 합니다.) 그것을 분별하고 정죄하고 내쳐야 한다. 이 말은 진리도 아니고 사람이 준수해야 할 준칙도 아니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도 아무 관련이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네게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투지를 가지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의 패괴 본질을 인식하라고 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자신의 자질이 높은지 낮은지, 이해 능력이 어떤지, 자신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라고 한다. 하나님은 네게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한 다음 자신의 분량과 자신이 갖춘 자질에 근거해 능력껏 행동하며 자신의 최선을 다하라고 한다. 여기에 싸우라는 뜻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네가 싸울 필요 없다. 누군가 말한다. “자신의 패괴 성품과 싸우면 안 되나요?” 패괴 성품이 싸워서 없앨 수 있는 것이냐? 싸움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변화시킬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탄의 사악한 세력과 싸우면 안 되나요? 적그리스도와 싸우면 안 되나요? 악인이나 사악한 성품을 가진 사람,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과 싸우면 안 되나요?” 이건 절대 안 된다. 왜 안 되겠느냐? 싸움이라는 행위 자체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언제 “적그리스도와 싸워라.”, “바리새인과 싸워라.”, “외식하는 사람과 싸워라.”, “너의 패괴 성품과 싸워라.”라고 말씀했느냐?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반면 사회의 사탄에 속하는 세상에서는 지주나 집권파, 혹은 지식인과 싸우고, 군중끼리도 싸우며, 닭과 개, 소 등과도 싸우는데, 어쨌든 다 좋은 일은 아니다. 싸움은 사탄이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생물에게 화를 입히는 수단이다. 그것은 인류가 화목하게 어울리지 못하게 하고 사람 간에 갈등과 증오를 일으켜 서로 다투고 죽이게 하고는 옆에서 비웃으며 구경한다. 이런 행위는 사탄에게 속하는 행위인데, 교회나 하나님 집에서 싸움과 관련된 행위나 현상, 일이 발생한다면 너희는 어떻게 바라보겠느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지지하고 찬성하겠느냐, 아니면 제지하겠느냐? (제지할 것입니다.) 제지하고 그가 깨닫도록 명확히 얘기해야 한다. 일을 처리할 때는 진리에 기대고 원칙에 따라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한다고 그에게 알려 줘야 한다. 또한, 그를 책망하고 훈계해도 된다. 하지만 책망과 훈계, 지적, 나아가 징계는 모두 싸움이 아니다. 싸움이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싸움은 혈기에 기대 다른 사람과 시비를 다투고, 이치를 따지며 억지를 쓰고, 떼를 쓰며 행패를 부리는 것, 심지어 음모와 계략을 쓰거나 인간의 여러 수단과 방식, 방법을 동원하여 한 사람을 굴복시키고 쓰러뜨리고 괴롭혀서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게 싸움이다. 싸움은 순전히 혈기에 속하는 행위나 동작이고, 완전히 사탄에게 속하는 행위이자 일 처리 방식과 방법으로, 진리와 아무 관련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 선민이 떨치고 일어나 거짓 리더, 적그리스도, 바리새인, 그리고 악인 같은 사람들과 싸우는 게 어째서 옳지 않죠? 싸워서 그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거나 쫓아내면 좋은 일 아닌가요? 하나님 집이 평온해지지 않나요? 형제자매가 조용히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지 않나요? 왜 그런 사람들과 싸우지 못하게 하는 거죠?” 그런 사람들과 싸우는 게 옳겠느냐? 우선,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싸움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왜 옳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악인을 징벌하고 정죄하는데, 사람이 그들과 싸우는 건 왜 문제가 되겠느냐? 그를 부끄럽게 하고 골탕 먹이거나 괴롭히고 호되게 꾸짖는 것, 나아가 그를 바닥에 눌러 놓고 비난하고 그와 싸우는 건 어째서 옳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행정 법령을 제정했는데, 행정 법령에는 싸움이라는 조항이 없다. 하나님은 행정 법령을 규정했을 뿐이다. 행정 법령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에 대한 처리 방식과 원칙이 있어서 어떤 부류의 사람을 출교하고 어떤 부류의 사람을 제명해야 하는지, 어떤 부류의 사람을 교체하고 어떤 부류의 사람을 양성해야 하는지, 어떤 부류의 사람을 사용하고 어떤 부류의 사람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떤 부류의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고 어떤 부류의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는지 알려 준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원칙을 알려 줄 뿐이다. 그럼 사람으로서 너희는 하나님의 그런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겠느냐? 하나님의 그런 말씀은 전부 다 진리다. 무엇이 진리겠느냐?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고 모든 부류의 사람을 대할 때, 설사 그가 악인이고 악행을 저질러서 하나님 집의 사역과 이익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한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방식으로 그를 처리하지 절대 사탄이나 혈기에 속하는 방식으로 그를 처리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두고 무엇이라고 하겠느냐? 공평하게 사람을 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공평 안에 싸움이 있겠느냐? 없다. 이게 진리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혈기나 사탄에 속하고 아무리 악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지시이자 정확한 원칙으로 삼아 그를 처리하지, 혈기에 기대 그를 비난하고 공격하거나 둘러싸고 공격하지 않는다. 절대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공평하게 사람을 대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원칙이다.
동양에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투지라는 확실한 말이 있으면 서양에도 같은 뜻을 가진 말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든 사탄의 패괴를 겪기만 하면,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기만 하면 모두 사탄 성품을 가지고 있고, 특히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다. 이런 성품이 부추기면 사람에게는 분명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이런 정신과 사상이 생겨난다. 인류가 퍼뜨리는 이런 사상과 정신을 사람들은 모두 정당하고 긍정적인 것, 인류가 계속 나아가고 살아가도록 지탱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들이 이런 소위 정신과 사상을 얼마나 정당하게 바라보고 얼마나 정당하게 말하든 우리는 그것을 분별해야 한다. 인류 전체에서 어떤 인종에서든 진리가 권세를 잡고 있지 않다. 그 인종에서 생겨난 사상과 전통문화, 그들이 받아들이는 교육과 가지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뛰어나고 오래되고 신비롭든,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런 것들은 다 진리가 아니고 진리와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일부 전통문화 속의 도덕관이나 시비, 잘잘못, 선악을 판단하는 관념은 진리와 비교적 비슷한 것 같아요.” 견해가 비슷하다고 해서 뜻이 비슷한 것은 아니다. 패괴된 인류의 견해는 사탄에게서 비롯됐기에 영원히 진리가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다. 따라서 사람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아무리 비슷해도 진리가 아니고 진리가 될 수도 없다.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하다. 비슷하다고 해도 그저 견해와 언어의 표현 방식이 비슷한 것이지, 사실상 그런 전통 관념은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비록 일부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비슷할지 몰라도 그 근원은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주에게서 비롯됐고 전통문화의 그런 말이나 사상 관점은 사탄 마귀에게서 비롯됐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전통문화의 그런 사상 관점이나 명언은 인류가 공인하는 긍정적인 것이에요. 설사 거짓말이나 허튼소리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몇 백 년, 몇 천 년을 굳게 지킨다면 진리가 되지 않을까요?” 절대 그럴 리 없다. 이런 관점은 마치 원숭이가 사람으로 변했다는 말처럼 황당하다. 전통문화는 영원히 진리가 될 수 없다. 문화는 문화일 뿐이고, 아무리 고상하더라도 그저 패괴된 인류 사이에서 생겨난 일종의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이라고 해서 진리나 준칙인 것은 아니고, 그저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것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긍정적인 것의 이면에서 전통문화가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은 긍정적이겠느냐, 아니면 부정적이겠느냐? 그것이 인류에게 가져오는 영향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다.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하다.
오늘은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속담을 분석했다. 이는 일종의 처세 철학이다. 전고가 있는 ‘와신상담’이라는 유명한 성어도 분석했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너희가 인류의 전통문화와 처세 철학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전통문화와 처세 철학의 본질은 대체 무엇이냐? 우선, 이런 것들은 절대 긍정적이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의 패괴 성품에서 생겨났고 사탄에게서 비롯됐다. 그것이 인류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이냐? 미혹과 패괴, 결박과 속박을 가져다준다.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하다. 그것이 인류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모두 부정적인 영향이나 부정적인 작용이다. 그럼 그것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도 아닌데 인류는 그것을 진리로 받든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겠느냐? 미혹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거치지 못했고 진리를 깨닫지 못했으며 이런 말이나 일에 대한 하나님의 정확한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결국 관념 속에서 상대적으로 올바르고 훌륭하며 자기 뜻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사상 관점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선입견이 되었고, 사람은 이런 것들을 몇 백 년, 몇 천 년 동안 계속 굳게 지켜 온 것이다. 이런 전통문화와 사탄 철학에 속하는 것들이 일찍이 사람 마음속에 뿌리내려 대대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영향을 끼쳤다. 너희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계속 그것에 미혹되고 영향받을 것이다. 오늘 교제하고 분석한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와 ‘와신상담’은 하나는 속담이고 하나는 성어인데, 이 두 가지 말을 통해 세상 전체에서 사탄에게 속하는 문화가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모두 사람을 미혹하고 패괴시키고 짓밟고 해치는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이다. 인류가 사탄의 이런 철학을 받든다면 사람은 살아가면서 점점 더 패괴되고 사악해져서 서로 싸우고 죽이고, 끝없이 싸울 것이며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사라지고 화목하게 어울리지도 못하고 서로 사랑하지도 못하게 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그것이 인류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나쁜 결말로, 인류가 이런 사상이나 정신의 지배를 받아 끊임없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의 도덕적 최저선에 도전하게 할 것이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결국 멸망의 길을 향해 걸어가 징벌받게 할 것이다. 이게 바로 인류 문화의 본질이다. 너희는 속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건 인류가 창도하는 진정한 사상이라고 할 수 없어요. 상류층 사회의 비교적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그걸 받들지 않아요.” 그럼 방금 분석한 상류층 인사가 인정하는 ‘와신상담’이라는 성어는 고급스러우냐? (그렇지 않습니다.)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그 성어나 그런 사상과 정신은 확실히 여러 대학이나 인류 사회의 다양한 고위급 자리에서 모든 사람에게 떠받들어지고 창도된다. 이게 바로 인류의 문화다. 인류는 이런 전통문화에 의해 영향받고 마비되고 패괴되고 있는데 결국 어떤 결과를 불러오겠느냐? 인류가 전통문화에 의해 미혹되고 속박되고 얽매여 자연스레 학설이나 정신이 만들어지고, 인류는 그것을 창도하고 퍼뜨리고 널리 전파하여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한다. 결국,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모두가 이런 사상과 정신을 인정하고 이런 사상에 의해 패괴되도록 한다. 일정한 수준까지 패괴되면 사람은 더 이상 시비를 구별하는 관념을 가지지 않게 되고,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사악함인지 분별하려 하지 않게 되며,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도 분별하려 하지 않게 된다. 심지어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과연 사람인지 아닌지도 명확히 알지 못하게 된다.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지 못하는 변태적인 사람도 많아진다. 이런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겠느냐? 이런 인류는 노아 시대의 사람에 비해 어떻겠느냐? 더 사악하지 않겠느냐? 이미 사악하기 그지없다. 사악해서 어떤 일은 듣고 나면 역겨워서 도저히 들어 줄 수 없을 정도다. 사람들이 모두 일정 수준까지 변태스러워져서, 겉으로 보기에 육체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미 변태가 되어 돌이킬 수 없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100~200년 전쯤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음성을 들으려는 사람이 더 많았을 수도 있고, 이 세상에 정의와 공의, 공평이 존재한다고 믿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고 동경하기도 하며 나아가 언젠가는 구세주가 강림하여 이 어둡고 사악한 권세에서 벗어나도록 인류를 구원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100~200년이 지난 지금 그런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하나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설사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진실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갈수록 줄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인류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뒤 격려를 받아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게 되고 광명과 정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공평과 공의의 강림을 동경하게 되는 사람이 갈수록 줄고 있다. 이는 무엇을 증명하겠느냐? 사탄의 철학 법칙, 사탄의 사상과 소위 정신이 인류 전체를 다 미혹시키고 패괴시켰다는 것을 증명한다. 미혹과 패괴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느냐? 사람들이 모두 사탄의 황당한 이론과 헛소리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사탄을 받들고 따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창조주의 말씀은 알아듣지 못한다. 창조주가 어떤 말씀을 하든,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든, 얼마나 명백하고 실제적으로 말씀하든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고 듣고도 이해하지 못한다. 모두 무감각하고 우둔해졌고 생각과 정신이 다 혼란스러워졌다. 왜 혼란스러워졌겠느냐? 사탄이 교란한 것이다. 사탄이 사람을 철저히 패괴시킨 것이다. 오늘날 사회에는 다양한 사상과 주의, 주장이 존재하는데 사람은 믿고 싶은 것을 믿고 따르고 싶은 것을 따른다. 아무도 참견할 수 없고 관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너희가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은 복 있는 일이다. 오늘날 너희는 하나님이 하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고 조금이나마 양심이 있으며 하나님이 하는 말씀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강림을 갈망한다. 또한, 광명과 정의, 공평과 공의가 있는 하나님나라에서 생활하길 간절히 바란다. 너희가 이런 진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얻기 어려운 일이 아니겠느냐? 그것은 어떻게 얻은 것이냐? 하나님이 지키고 성령이 네게 역사하여 너를 깨우쳤기 때문에 네가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았다면 너희가 여기에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겠느냐? 오늘날과 같은 변화가 있을 수 있었겠느냐? 보아라, 오늘날 저 이방인들에게 사람다운 모습이 있느냐? 너도 지금은 깨달은 진리가 많지 않고, 많은 일에서 이방인과 관점이 완전히 같으며,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비록 그들의 일부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너는 분별력이 없고 걸을 수 있는 다른 길도 없다. 언젠가 네가 진리를 깨달으면 그들의 관점이 잘못됐고 사악하다는 것을 분별할 수 있고 마음속으로 거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는 그들의 마귀 몰골을 똑똑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너는 그것이 사람이 아닌 살아 있는 마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인두겁을 쓰고 있지만 인간다운 일을 하지 않는다. 이를 어디에서 알아차릴 수 있겠느냐? 그들이 대외적으로 퍼뜨리는 말은 모두 특히나 듣기 좋고 사람을 잘 미혹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극도로 사악하고 추하며 그야말로 후안무치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들이 굳건히 지키는 소위 사상이나 정신은 어찌나 사악하고 반동적인지,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와 배치되거나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들은 이런 억지 논리와 그릇된 주장을 진리로 여겨 멋대로 퍼뜨리고, 공개적으로 분위기를 조성해 인류를 미혹하고 패괴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온갖 비열하고 파렴치한 죄행과 추악한 몰골을 가린다. 이를 통해 너는 그들이 모두 마귀이고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이자 더러운 귀신이므로 그들과 시비를 논할 수 없고 그들에게는 좋은 말이나 진실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다. 언젠가 이 정도까지 꿰뚫어 본다면 너는 인류가 너무 깊이 패괴되었고, 자신도 남들과 똑같이 패괴됐지만 이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좀 깨달아 비로소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게 됐다는 것, 마귀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그들을 분별하고 증오하고 내칠 수 있게 됐다는 것, 만약 하나님의 구원이 없었다면 자신도 그들과 똑같고 별다른 차이가 없으며 어떤 악행이나 사악한 일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너는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향해 힘쓰고 공들이며 실행을 중시하고 진리를 자신의 실제로 만들고 있다. 진리를 깨달아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를 살아 내어 진실한 체험 간증이 있게 되면, 마음속에는 기쁨과 평안이 생길 것이고, 마음가짐과 내적 상태는 점점 더 정상화될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도 점점 더 가까워지고 정상화될 것이고, 생활도 갈수록 나아질 것이다.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늘 사탄 철학에 기대 살아가며 늘 하나님을 오해하고 의심한다면 네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을 믿어도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설사 네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고 수많은 글귀와 도리를 이해하고 이방인의 온갖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소용없다. 너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글귀와 도리만 좀 이야기할 수 있을 뿐 여전히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없다. 네 마음속에는 선입견이 된 것들이 여전히 권세를 잡고 있어서 너는 그런 것들에 기대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무엇을 하려고 하든, 어떤 일이 닥치든 너는 저도 모르게 사탄 철학에 속하는 것들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따라서 마음속에서 사탄 철학과 같은 것들이 권세를 잡고 있으면 진리를 실행할 수 없게 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저는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사탄을 따르지도 않아요.” 그게 가능하겠느냐? 중간 길은 없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깨달은 다음 선입견이 된 사탄에게 속하는 것들을 제거해야만 진리에 기대 행동할 수 있다. 마음속에서 진리가 권세를 잡고 하나님의 말씀이 권세를 잡으면 네가 말하고 행동할 때 자연스레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사탄의 이러한 논리와 사상, 그리고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이 정신적 지주들을 인류는 무엇이라 여기느냐? 마음의 양식? 영혼의 닭고기 수프? 사실 이것은 사람을 패괴시키는 것으로, 이를 ‘먹으면’ 사람은 끝나는 것이다. 사람이 만약 끊임없이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사탄의 것들을 내면에 쌓아 둔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원래의 패괴 성품을 아직 벗어 버리지 못한 데다 또 사탄의 새로운 패괴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러면 끝난 것이다. 구원받지 못할 운명이다. 너는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그것을 분별하고 거부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그것을 벗어 버려야 한다. 그것에 기대어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저는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저절로 제 내면에 들어올 거예요.”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너는 주동적으로 진리를 구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진리를 깨닫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그런 억지 논리와 그릇된 주장에 대해 분별력이 생기게 되고, 점차 이를 포기하게 된다. 이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점차 네가 일하는 원칙이 되고, 네가 일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지 알게 돼 자연스럽게 진리를 실천하게 되고, 이 방면의 패괴 성품에 다소 변화가 생기게 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게 어렵겠느냐? 이는 사실 어렵지 않다. 어려운 점은 사람이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건 정말 어려워.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이건 불가능한 일을 강요하는 거 아닌가? 날 난처하게 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너는 이 일을 올바르게 대해야 하고, 이런 일을 정확히 분별해야 한다. 오늘 사탄의 황당한 이론 몇 가지를 교제하고 분석하는 데만 해도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사람 안에 고작 그 몇 가지만 존재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많다! 앞으로 이 측면의 주제를 계속 이어서 교제하겠다. 예전에는 이런 측면을 교제한 적이 없는데, 너희는 이런 측면의 주제에 대해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없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결과를 얻지 않겠느냐? 너희가 진리에 공을 좀 들일 수 있다면 사탄의 이런 황당한 이론도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오늘 이런 주제를 교제하는 것이 갑작스러우냐?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것에 대해 교제하는 것 아니었나요? 왜 갑자기 이런 주제를 교제하시는 거죠?”라고 묻는 사람도 있지 않겠느냐? 이런 일들은 모두 사탄의 패괴 성품과 관련이 있다. 그 밖에, 이런 일들은 사람이 사탄의 패괴 성품을 분별하는 것과도 관련돼 있고 더욱이 사람이 진리를 정확히 깨닫는 데도 이롭다. 교제하고 나면 사람은 최소한 ‘이렇게 좋은 말이 알고 보니 진리가 아니었구나.’라고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와신상담’과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황당한 이론은 너의 마음속에서 제거될 수도 있다. 아마 어떤 사람은 곧장 제거하지는 못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 그 말이 사람을 미혹한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비록 네가 마음속으로는 그런 말들이 어느 정도 옳고 그렇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이 말은 진리가 아니라고 하셨어. 난 이 말대로 행동해선 안 돼.’라는 생각도 들 것이다. 이는 네게 이롭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왜 이런 말을 이렇게 분석하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온종일 “진리를 실행해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진리이고 긍정적인 사물이에요. 모두 우리가 실행해야 하는 거라고요.”라고 말한다. 어느 날 책망과 훈계가 닥쳤을 때 ‘와신상담’, “하늘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게 한다.” 같은 말이 네 마음속에서 흘러나온다면 그게 진리겠느냐? 그건 웃음거리가 된 것 아니겠느냐? 만약 하나님을 증거하라고 한다면 너는 어떻게 증거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수모를 참아 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와신상담해야 해요.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투지와 정신도 있어야 하죠.”라고 말한다면 그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의 논리를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로 여겨 사람에게 증거해 준다면 하나님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사탄의 웃음거리가 되고 하나님을 부끄럽게 한 것이니, 너는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이냐? 만약 하나님이 이 일로 인해 너를 정죄한다면 너는 억울하다고 생각하며 “저는 무지하고 아무것도 몰라요. 하나님께서도 제게 교제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말할 것이다.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면 그 성질은 꽤나 심각한데,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해야겠느냐? 내버려둬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딱히 무언가를 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너희가 최대한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의 이해 정도와 내가 너희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것에 근거해 대체 무엇이 진리인지, 너희가 좋고 옳다고 생각하는 그런 말들이 진리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그게 진리인지 아닌지 최대한 너희에게 알려 주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알려 줘야 한다. 네가 알고 나서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고집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내버려두거나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정죄돼야 한다. 하나님이 행동할 것이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겠느냐? 네가 깨닫지 못했을 때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은 네가 무지몽매하다고 생각하고 너를 대하겠지만 네가 알고도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뻔히 알면서도 죄를 저지르는 것이니 하나님은 원칙대로 처리할 것이다.
2019년 1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