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3)

참고 동서양의 전통문화를 해부하다

말해 보아라, 무엇이 진리이냐? 예전에 이 주제를 교제한 적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 자신의 언어로 한번 말해 보아라, 무엇이 진리이냐? (진리는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평가하는 원칙이자 준칙입니다.) 좋다. 누가 또 말해 보아라. 다른 주장은 없느냐? 도리에 관한 어떤 말이나 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써서 대답하려 하지 말고 자신이 실제로 체험한 언어나 실제 인식으로 대답해 보아라. 얕아도 괜찮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진리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렇게 말할 줄만 알고 그 말이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인식하지 못한다면 네게 그 말은 도리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말해 보자. 무엇이 진리이냐?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이겠느냐? 하나님 말씀의 본질이란 또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생각으로 만들어 낸 준칙이 진리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정리한 경험과 배운 지식, 혹은 사회 문화나 사회적 배경하에 생겨난 전통문화가 진리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사람이 스스로 정리해 낸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이 진리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진리겠느냐? 여기서 말하는 원칙이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가리키게 하려면, 사람들이 듣자마자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하게 하려면 그것을 어떻게 규범화해야겠느냐? 어떻게 말해야 간결하고 정확하다는 느낌을 주겠느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모두 진리입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모두 진리이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더 정확히는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 (진리는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입니다.) 이것은 예전에 자주 하던 이야기다. 예전에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가 전부 진리라고 자주 이야기했다. 또 뭐가 있느냐? (진리는 사람이 행동하고 처신하는 준칙이자 길입니다.) 사람이 행동하고 처신하는 준칙이자 길이다. 이 역시 맞는 말이다. 그럼 이 몇 가지 측면을 하나로 정리해 무엇이 진리인지 간결한 말로 정의해 보아라. (하나님이 바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진리라는 말은 너무 포괄적이고 막연하다. 듣고 나면 그 정의가 공허하지 않고, 제법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정확하다고 느끼고, 아주 적절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좀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해야 더 정확할지 너희가 다시 정리해 보아라. (진리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이라고 상부에서 교제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이 간결하지 않으냐? (간결합니다.) 진리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이다. 왜 준칙이라고 정의하겠느냐? ‘준칙’이라는 단어는 글자상으로 보면 어떻게 이해해야겠느냐? (정확한 원칙입니다.) 정확한 원칙이자 법칙이며, 규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준’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기준을 가리킵니다.) 기준이 되는 정확한 법칙이자 원칙이 바로 준칙이다.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에서 앞의 그 몇 가지 정의가 정확하다면 그 준칙은 무엇과 관련 있겠느냐? 여기서 말하는 준칙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앞에서 정의한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이 바로 진리이다. 그럼 사람들이 이 말을 보고 나서 ‘우리의 전통문화도 진리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 그걸 진리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우리가 진행한 어떤 학술 연구의 결론은 진리입니다.”, “우리 민족의 어떤 문화와 체험, 좋은 도덕 기준도 진리입니다.”라고 말하고 정의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런 것들로 진리를 정의할 수 없겠느냐? 왜 그 몇 가지 모두 진리와 무관하다고 하겠느냐?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것들도 처신과 관련 있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그것들이 말하는 처신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그것들의 기준과 법칙은 무엇이겠느냐? 사탄에게서 비롯된 좋은 행동이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게 아니다. 사탄을 경배하고 지키는 것이고 사람의 상상과 관념, 사람이 생각하는 좋은 도덕이나 행위에서 정리해 낸 일련의 처신에 관한 가르침이나 문화이지, 진리와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중국인들은 전통문화 하나를 정리해 냈는데, 그 전통문화는 중국인에게만 적합하고 서양인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서양인들도 그들만의 민족 영웅과 민족 기개, 민족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럼 그들의 문화를 동양에 가져오면 동양인이 받아들이겠느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이 보기에 그런 문화가 아무리 좋고 전통이 아무리 고상한들 진리와 관련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관련이 없다. 예를 들어, 동양의 전통문화에서는 부엉이를 길조로 여기지 않는다. 민간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부엉이 우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라 부엉이 웃는 게 무섭다. 부엉이 소리를 들으면 틀림없이 안 좋은 일이 생긴다.” 동양의 전통문화에서는 부엉이를 불길하고 재수 없는 동물로 여긴다. 그럼 그렇게 ‘재수 없는’ 동물을 동양인이 좋아하겠느냐?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동양의 전통문화와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에 근거해 “부엉이 울음소리를 들으면 집안에 반드시 초상이 난다.”라고 말한다. 그건 정리해 낸 규칙일 수도 있고 사람의 상상이나 우연일 수도 있는데,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부엉이가 나쁘다고, 누구도 부엉이를 받들면 안 된다고, 부엉이를 길조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부엉이만 보면 반가워하지 않고 내쫓기 바쁘다. 이건 일종의 문화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런 문화 역시 일종의 민간전승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동양에서, 특히 중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런 문화를 특별히 인정한다. 모두가 마음속으로 부엉이는 좋은 동물도, 길조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는 순간 서둘러 피한다. 반면 서양에서는 부엉이를 길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부엉이 조각상이나 그림으로 장식을 하기도 하며 각종 자수 작품과 토템에도 부엉이 도안이 있는 등 부엉이를 길조로 여긴다. 길조로 여긴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그 동물이 행운을 가져다주고 그 울음소리를 듣거나 그것을 보면 불운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서양의 한 민간 전통문화다. 우리는 동서양의 이 두 가지 문화 중 무엇이 맞고 틀린지는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평가는 하지 않겠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이 만든 같은 동물에 대해 동서양의 생각과 관념이 다르며 완전히 딴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양인은 부엉이가 좋은 동물이 아니라고, 부엉이가 웃든 울든 모두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면 서양인은 부엉이가 울든 웃든 모두 길하고 부엉이를 보면 행운이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 부엉이를 길조로 대한다. 부엉이를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길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 두 가지 생각이나 취급법 모두 전통문화에서 비롯된다. 지금 보면 어느 것이 진리에 부합하고 어느 것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겠느냐? (둘 다 진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모두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무엇을 근거로 한 말이냐? (두 관점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부엉이는 길조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의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동양의 전통문화이다. 무엇이 길하고 무엇이 불길한지, 무엇이 사람에게 재앙을 불러오는지, 무엇이 재수 없고 무엇이 상서로운지 그는 전통문화를 근거로 평가한 것이고 상상 관념을 근거로 그런 생각을 정리해 내고 그런 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서양인은 부엉이가 사람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이는 부엉이가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취급법이나 생각보다는 좀 더 낫고 진보적이다. 부엉이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하니 최소한 부엉이를 보고 나서도 마음이 안정되고, 보고 나서 재수 없다고 생각할 때보다 좀 더 기분이 좋다. 그러나 이런 인식법이 네게 무엇을 얻게 하겠느냐? 부엉이가 정말 네게 행운을 가져다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네가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부엉이가 정말로 네 운수를 결정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그런 생물이 불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든,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든 그건 사람의 생각과 관념일 뿐 사실이 아니다. 이는 무엇을 증명하느냐? (전통문화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렇다. 어떤 문화든 진리는 아니다. 부엉이를 어떻게 대해야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이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과 관련 있다. 여기서 말하는 준칙이란 무엇이겠느냐? 어떤 관점을 가지고 그런 생물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말한다. 그런 생물이 너의 곁에 나타났을 때, 그것이 울든 웃든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준칙과 관련 있다. 그럼 그 준칙은 무엇이겠느냐? (진리입니다.) 그 준칙이 바로 진리이다.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네 근거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이 근거입니다.) 그럼 그런 생물을 대하는 것에 관해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했느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았다. “너는 반드시 부엉이를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이 일에서는 치우쳐서도, 그것이 재수 없다고 말해서도, 그것이 네게 행운을 가져다줄 거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너는 부엉이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그럼 무엇을 근거로 부엉이를 대하는 네 관점이 준칙과 진리에 부합하게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근거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야 한다. 그게 바로 진리이다. 만물은 하나님의 손안에서 각각의 기능과 사명, 존재 가치를 갖는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모두 좋은 것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은 모두 좋은 것이고 존재 가치가 있으며 존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라면 그것은 절대 쓸데없을 리 없다. 여기서 ‘쓸데없지 않다’는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그것이 아무렇게나 사람에게 불운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작은 부엉이 한 마리가 아무렇게나 불운을 가져올 수 있겠느냐? 그럼 너무도 대단한 것 아니겠느냐? 인간과 부엉이 중에 무엇이 더 우월하겠느냐? 만물의 관리자는 인류이다. 인류가 부엉이의 운명을 좌우하고 마음대로 멸종시킬 수는 있어도 부엉이가 인간의 운명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 그런 생물을 대체 어떻게 대해야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대해야 한다. 만물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했다. 여러 생물과 인류는 모두 하나님이 창조했다. 부엉이도 하나의 생물이므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대하는 관점에 따라 그것을 대해야 한다. 우선, 그것의 생존 규칙을 제멋대로 파괴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부엉이의 습성과 특징은 낮에 잠자고 밤에 사냥하고 활동하는 것이다. 만약 다친 부엉이 한 마리를 좋은 마음에 거두어 키운다면 너는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그것의 습성에 맞게 대해야 합니다.) 그렇다. 너는 그것의 생활 규칙을 지켜야 한다. 밤에 그것을 재우기 위해 자지 않는다고 수면제를 먹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옳지 않다. 만약 그것이 밤에 계속 시끄럽게 울어 네 휴식을 방해한다면 그것을 네 휴식을 방해하지 않는 곳에 두면 되지 그것의 생활 규칙을 깨뜨리거나 생존 방식을 위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올바른 취급법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은 이런 관점으로 대해야 한다. 우선, 올바른 관점을 지녀야 한다. 이는 일을 처리할 때 가장 먼저 지녀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행동하고 일을 처리할 때 이 올바른 관점을 활용해야 한다. 그러면 행동이 진리에 부합할 것이다. 이것을 바로 준칙이라고 한다. 준칙은 결국 정확한 법칙이나 규칙이다. 예를 들어, 고양이는 쥐를 보면 잡으려고 하는데, 쥐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생각해서 고양이에게 쥐를 잡지 못하게 한다면 그건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런 처리 방법은 어떠냐? (규칙을 위배했습니다.) 자연의 규칙을 위배했다. 또 어떤 사람은 물속의 물고기를 보고 생각한다. ‘다들 물고기는 물을 떠날 수 없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든 물고기가 물을 떠나 육지에서 살게 하겠어.’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물고기는 죽어 버린다. 이를 뭐라고 하겠느냐? (터무니없다고 합니다.) 터무니없다고 한다. 부엉이에 관한 일을 다룸으로써 준칙이란 무엇이고 준칙의 근거는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깨닫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 준칙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럼 너희는 앞으로 부엉이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만약 어느 날 밤 부엉이가 네 창가에 앉아 울면 너는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최소한 우리는 부엉이에게 울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것에게 울 권리를 줘야 한다. 만약 너무 시끄러우면 내쫓아도 되지만 내일 불운이 닥치지는 않을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운명과 생사는 하나님의 수중에 있고 하나님이 주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사물에 편견이 생기기 쉽고 나아가 상상 관념이나 미신을 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 많은 일에서 올바른 관점을 갖지 못하고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며 모든 일에서 사람이 갖춰야 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도 갖추지 못한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진리를 깨닫지 못해 초래되는 것이다.

어떤 동양인은 서양인과 접촉할 때 서양인이 콧대도 높고 눈도 크고 머리카락 색깔도 다양한 등 특색 있게 생기고 유독 분위기가 있는 걸 보고는 은연중에 서양인을 부러워하고 우러러보는 감정이 생긴다. 또, 접촉하는 과정에서 서양 문화도 끊임없이 받아들인다. 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부러워하고 자신이 그들과 같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는 외모는 하나님이 정했으니 바꿀 수 없지만 만약 서양인의 생활 방식과 그들이 먹고 입고 쓰는 것, 그들의 말과 사고방식, 문화와 가까워지면 자신도 고귀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어떠냐? 모두가 가지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동양인은 서양인을 모방하는 걸 좋아한다. 그들이 가장 먼저 모방하는 것은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그들은 동양인이 차를 마시는 게 너무 미천하다고 생각해서 서양인을 따라 커피를 마신다. 특히 일부 동양인은 많은 서양인이 매일 아침 커피 한 잔을 들고 바쁘게 출근하는 모습을 보고 시간이 지나면서 따라 하게 된다. 때로는 바쁘지 않아도 그렇게 하는데, 이게 바로 모방이다. 사실 동양인은 그런 습관이 없지만 그들은 서양인의 습관이 좋다고, 존귀하고 우아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습관은 없지만 배우고 모방하려 한다. 익히고 나서 그 습관대로 생활하면 서양인의 일원이 되고 서양인처럼 변하지 않겠느냐? 이게 바로 마음속으로 서양인을 숭배하는 것이다. 마음에 들어서 배워 보는 건 괜찮지만 그런 습관을 익혀서 남에게 보여 주며 허세를 부린다면 그건 모방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무슨 일을 하든 준칙이 없고 머리 없는 파리처럼 목표 방향도 없이 서양인을 보고 따라 하고 세상에서 유행하는 걸 보고 따라 한다. 이방인이 그러한데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런다면 그건 어떤 인간이겠느냐? (불신파입니다.) 그렇다. 그들의 행동에 기준이나 원칙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원칙이 없다. 왜 없겠느냐?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의 흐름이나 사악함을 숭상하고 하나님을 우러러보지 않으며 마음속으로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모두 불신파다. 이런 사람은 그런 본질을 가졌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더라도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을 영영 찾지 못한다. 이 말은 이런 사람은 영영 진리를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커피 마시는 걸 모방하는 것은 사람의 기호와 걷는 길, 행동 원칙을 드러낸다. 차를 마시는 게 진리겠느냐, 아니면 커피를 마시는 게 진리겠느냐? (모두 진리와 무관합니다.) 맞는 말이다. 그럼 무엇이 진리겠느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건 모두 진리예요. 하나님께서는 계절에 맞게 음식을 먹는 게 신체에 이롭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진리예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맞는 말이다. 진리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이다. 그럼 처신하는 준칙은 무엇을 포함하겠느냐? 처신과 관련된 여러 측면의 진리를 포함한다. 일을 처리하는 준칙은 무엇이겠느냐?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방법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안다. 준칙의 범위란 이런 것들을 가리키고 모두 진리와 관련 있다. 누가 “왜 차 마시는 걸 싫어해요?”라고 물으면 “차 마시는 걸 싫어하는 게 진리에 부합하지 않나요?”라고 답하고, 누가 “서양에 왔으니 커피를 좀 마셔 보는 게 어때요? 커피를 안 마시다니 정말 품위가 없네요!”라고 말하면 “저를 정죄하려는 건가요? 커피를 안 마시는 게 죄를 짓는 건가요? 품위가 진리인가요? 품위가 그렇게 가치 있나요?”라고 답해라. 아무런 가치도 없지 않으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치 없는 것이다! 그럼 이런 예시를 드는 것은 사람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겠느냐? 그런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그런 사람과 일, 사물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이를 수 있는 것인지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 일들에서 사람이 깨닫고 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실행해야 하는 여러 사물을 대하는 준칙이다.

한 가지 전통문화나 민족 정서가 ‘준칙’이라는 단어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이 준칙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라는 말이 준칙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또 누구는 “여성은 정숙해야 해요.”, “여성은 반드시 삼종사덕을 지켜야 해요.”라고 하는데, 그게 준칙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남성은 아내를 한 명만 가질 수 있고 바람을 피우면 안 된다.”라는 말이 준칙이겠느냐? 진리에 미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건 옳은 행위이고 도덕이며 인성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것이지만 진리에 미치지는 못한다. 정상 인성의 도덕과 행위 기준에 부합할 뿐이다. 그럼 준칙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준칙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진리를 가리킵니다.) 준칙은 진리를 가리킨다. 진리에 미치지 못하면 준칙이 아니다. 알겠느냐? 방금 여성과 남성에 대한 전통문화의 요구를 언급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요구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남성에게 어떻게 요구하느냐?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하느냐? (땀 흘려 일해 가족을 먹여 살리라고 합니다.) 그건 남성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자 남성이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여성에 대해 어떻게 규정하느냐? (남편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했으면 그게 바로 진리이고 인간이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전통문화나 도덕경에서 비롯된 것은 아무리 옳다 한들 진리는 아니다. 왜 진리가 아니라고 하겠느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으면 절대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 말씀의 요구와 무관한 것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 동양인은 무엇을 기준으로 여성을 정의하느냐? 동양인은 좋은 여성은 일단 상냥하고 어질며 온화하고 우아하며 사랑스러워야 하고, 결혼 후에는 온 가족을 잘 돌보고 불평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박덩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는 동양인이 만든 여성의 이미지이자 여성에 대한 동양인의 요구 기준이다. 이제 여성에 대한 서양인의 요구 기준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들의 사상 관점에서 그들은 무엇을 교육하고 제창하겠느냐? 여성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몇 가지가 서양에서 기본적으로 제창하는 여성의 권리이다. 이 여성의 권리에는 여성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와 요구, 여성의 생활 방식이나 외모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담겨 있다. 그 개념은 무엇이겠느냐? 여성은 순종적이거나 가련해서는 안 되고 구박덩이처럼 하루 종일 고분고분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면 좋지 않다고, 여성은 강인하고 호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서양인의 마음속 여성에 대한 요구 기준이다. 그들은 여성이 꼭두각시처럼 매일 외부의 압박을 참고 견디며 남이 꾸짖거나 명령을 내리길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여성이 적극적이고 독립적으로 행동해야 하고 패기 있어야 한다고 제창한다. 물론 우리가 이해한 것이 그들의 생각과 완전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여성은 대체로 이런 차이를 보인다. 그럼 이 두 관점 중 어느 것이 올바르겠느냐? (올바른 게 없습니다.) 사실 이는 옳고 그름과는 무관하다. 동양의 사회적 배경에서 한 집단 안에 있다면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반항하려 한들 가능하겠느냐? 한 가족 안에서 반항한다면 괴롭힘을 당해 죽을 수도 있다. 서양에 있다면 서양 여성처럼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가든, 어떤 사회적 배경에서, 어떤 집단 안에서 살든 어떤 관점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모두 진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어떤 관점도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진리에 위배된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동양인은 여성에게 늘 고분고분하고 삼종사덕을 지키며 정숙하고 상냥하라고 하는데, 그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쉽게 통제하려는 것이다. 이는 동양의 전통문화에서 생겨난 일종의 암적인 생각이다. 그건 사실 사람을 해치고 결국 여성이 방향도, 주견도 없이,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는 게 옳고 어떻게 하는 게 그른지도 모른 채 살아가게 한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가족에 바치고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한다. 이는 사람을 해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신이 가져야 하고 누려야 할 권리를 박탈당하고도 반항하지 않는다. 그녀는 왜 반항하지 않겠느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반항은 옳지 않아요. 반항하면 현모양처가 아니에요. 누구누구와 비교해 보면, 그 사람은 저보다 훨씬 잘하고 훨씬 더 고생하는데도 불평하지 않아요.” 그녀는 왜 이렇게 생각하겠느냐? (전통문화 사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전통문화가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려 그녀를 해치는 것이다. 그럼 그녀는 왜 이런 해를 받아들이겠느냐? 그녀는 그런 해가 자신을 아주 고통스럽고 무력하게 하며 마음에 크게 상처를 준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왜 받아들이겠느냐? 객관적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사회적 환경이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벗어나지 못하고 그렇게 외부의 압박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주관적으로 말하면 그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녀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존엄 있고 옳은지도 깨닫지 못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녀에게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모든 준칙은 무엇이겠느냐? 전통문화다. 그녀는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이 옳고, 그것을 위배하면 양심에 가책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바로 그녀의 ‘준칙’이다. 사실상 그 준칙이 옳겠느냐? 그 준칙에 인용 부호를 붙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준칙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런 사상 관점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행위가 얼마나 수긍이 가고 호감을 주든 실제로 그것이 준칙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건 진리와 인성에 위배된다. 오랜 세월, 동양의 여성은 온 가족을 뒷바라지하고 집안의 모든 자질구레한 일을 전부 혼자 처리해야 했다. 그게 공평하냐? (불공평합니다.) 그럼 그녀는 왜 견딜 수 있는 것이냐? 그런 사상 관점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내할 수 있고, 최소한 마음속 깊이 80%는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자신이 맹목적으로 참으면 전통문화의 기준에 미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 기준과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만약 그녀가 마음속 깊이 그렇게 하는 게 옳지 않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하면 인성에 부합하지 않고 인성과 진리에 위배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녀는 그런 사람들과 분리되고 그들의 노예가 되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그렇게 할 엄두를 못 낸다. 그녀는 그 집단을 떠나도 살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집단을 떠난 뒤 짊어져야 할 오명이 얼마나 클지, 그렇게 하는 결과는 어떨지 가늠한 뒤 만약 그렇게 하면 동료들은 자신이 현모양처가 아니라고 비평할 것이고 사회도 그녀를 비난할 것이며 여론이 형성돼 아주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에 결국 이렇게 궁리한다. ‘그냥 참자. 안 그러면 비난에 숨 막혀 죽을지도 몰라.’ 동양의 여성은 대대로 이렇게 살아왔다. 그 모든 좋은 행위의 이면에 사람은 무엇을 견디고 있겠느냐? 사람은 존엄도, 인권도 박탈당했다. 이런 사상 관점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부합하지 않는다. 존엄도, 인권도 박탈당했고 인격도 사라졌으며 독립된 생활 공간이나 사상 공간도, 말할 권리도, 자기 뜻을 표현할 권리도 없이 하는 일은 전부 가족을 위해서다. 그녀가 그렇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여성에 대한 전통문화의 요구 기준을 충족시켜 남들에게 칭찬받고 좋은 며느리,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는 해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생각이 정당하냐, 아니면 왜곡되었느냐? (왜곡됐습니다.)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어 사람이 그 자유 의지 안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게 했느냐? 인성에 부합하는 것 아니겠느냐? 최소한 인성에 부합한다. 그 밖에 생활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정확한 생각과 인지를 가지게 했고 옳은 길을 선택해 생활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준,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할 인생이다. 그러나 사람은 평생 소위 전통문화나 도덕경에 속박되고 얽매이고 왜곡되어 결국 무엇이 되었느냐? 전통문화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이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해 일어난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이런 길을 걷기를 선택할 수 있겠느냐? (선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저는 그들과 싸울 거예요.”, “당신들 뒷바라지는 그만둘 거예요. 제게도 인권과 독립된 인격이 있어요.”라고 말해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그래서도 안 된다. 하나의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원칙대로 해야 합니다.) 원칙대로 하는 것은 당연히 옳다. 원칙대로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한다. 그가 만약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를 형제자매로 대하고, 믿지 않는다면 이방인으로 대해야 한다. 스스로를 서럽게 만들거나 자신의 인격을 왜곡할 필요도, 자신의 존엄과 권리를 포기하고 그들을 위해 일생을 바칠 필요도 없다. 그들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이 세상에 네가 일생을 바칠 만한 존재는 단 하나뿐이다. 누구겠느냐? (하나님입니다.) 왜 그렇겠느냐?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인류가 생존하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준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정확하게 할 수 있다. 이는 마지막에 사람이 구원받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서 이루려는 성과이다.

‘무엇이 진리인가’라는 주제는 몹시 방대하다. 우리는 예시 몇 가지만 들었을 뿐이다. 하나는 부엉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였다. 또 무엇이 있었느냐? (동양인이 서양인처럼 커피 마시는 것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여성에 대한 동서양 사람들의 요구 기준입니다.) 그런 것들이 가장 두드러진 예시이다. 그럼 여러 사물에 대한 동양인과 서양인의 생각 중 어느 것이 준칙이냐? (모두 준칙이 아닙니다.) 모두 진리와 관련 없는, 사람의 생각과 관점이다. 정확히 말하면 모두 준칙이 아닌 그릇된 관점과 황당한 이론, 사탄이 사람을 해치는 수단이나 주장, 철학이다. 이런 일을 이렇게 교제하니 조금은 깨닫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너희는 언젠가 서양인을 따라 커피를 마시고 햄버거를 먹으며 서양인을 모방할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게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설사 매일같이 양식을 먹더라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소용없고 넌 여전히 처신하는 준칙이 없는 것이다. 핵심은 진리를 구해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가이다. 그래야 비로소 사람에게 이롭다. 이렇게 교제하니 너희는 마음속으로 진리나 준칙에 대해 조금 깨닫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전통문화나 도덕 준칙 안에 진리가 있느냐? (없습니다.) 도덕경 안에 진리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확신할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확신하고 나면 생각해야 한다.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일까? 하나님 말씀에서 요구하는 원칙은 무엇일까? 사람에게 알려 주는 준칙은 무엇일까?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고 이런 일을 하는 정확한 원칙일까?’ 이런 것들을 구해야 한다. 이 주제는 여기까지 얘기하겠다.

참고

샤오자(小賈)의 하루

다음 주제로 넘어가자. 다음 다룰 주제는 무엇이냐?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다. 이야기의 내용은 전부 진리와 관련 있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과 관련 있다. 오늘 들려주는 이야기가 진리나 사람의 행위 준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한번 들어 보아라. 이야기의 내용은 샤오자(小賈)의 하루다. 주인공은 샤오자이다. 이야기 줄거리는 얼마만큼의 시간을 다루느냐? (하루입니다.) 하루다.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이야기할 가치가 있나요?”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에 달려 있다. 쓸데없는 말을 하거나 시비를 가린다면 이야기할 가치가 없겠지만 진리와 관련 있다면 하루가 아닌 일 분 동안 일어난 일이라 해도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샤오자는 열성적으로 추구하고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다. 그의 이야기는 이른 아침 기상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 말씀을 읽고 영생활을 한 뒤 샤오자는 아침을 먹으러 갔다. 그는 죽을 한 그릇 담고, 채소도 좀 떠 담은 다음 달걀을 보며 생각했다. ‘두 개 가져가자. 하루에 달걀 두 개 먹으면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는 셈이지.’ 손을 뻗은 순간 그는 주저했다. ‘두 개 가져갈까, 아니면 한 개 가져갈까? 두 개 가져가면 보기에 얼마나 안 좋겠어. 너무 욕심부리는 거겠지. 남들이 게걸스럽다고 생각할 거야. 역시 한 개만 가져가는 게 좋겠어.’ 그는 손을 움츠렸다가 다시 뻗어 달걀 한 알을 집어 들었다. 그때 누군가 달걀을 집으러 왔다. 그 사람이 달걀을 집는 순간 샤오자는 심장이 쿵쾅댔다. ‘아무래도 달걀은 안 먹는 게 좋겠어. 죽이랑 채소, 시리얼이면 아침 식사로 충분하지. 너무 욕심부리지 말자. 달걀은 먹어서 뭐 해. 남들이 얼마나 안 좋게 보겠어. 그건 안일을 탐하는 거잖아? 그냥 먹지 말자.’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달걀을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몇 분 뒤 샤오자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분주하게 하던 일을 하나하나 완성했다.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 어느덧 점심시간이 됐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식사하러 갔고, 시계를 보니 12시 40분이었다. 샤오자는 생각했다. ‘좀 더 기다리자. 다들 밥 먹으러 가도 나는 서두르지 말아야지. 서둘러서 남들과 같이 먹으면 나도 그 사람들이랑 똑같잖아. 게걸스러워 보일 거 아니야. 좀 더 기다리자.’ 그는 하던 일을 계속했지만 배가 말을 듣지 않아 꼬르륵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배를 감싸 쥐고 멍하니 컴퓨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배고파 죽겠네! 오늘 점심 메뉴는 뭘까? 고기반찬은 없을까? 고기를 먹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배는 여전히 꼬르륵대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다른 사람들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누가 “샤오자, 왜 밥 먹으러 안 가요? 어서 가서 먹어요. 음식이 다 식겠어요.”라고 말하자 샤오자는 “괜찮아요. 하던 일을 아직 못 끝냈어요. 다 끝내고 먹으러 갈게요.”라고 했다. “밥 먹고 계속하면 좋잖아요.” “괜찮아요. 금방 끝나요.” 샤오자는 허기를 억지로 참으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사실 배가 고파서 더 일할 마음도 없었지만 허기를 참으며 계속 그렇게 일하는 척했다. 얼마 후 시계를 보니 한 시 반이었다. ‘이 정도면 됐어. 이제 밥 먹으러 가야겠다.’ 그가 몸을 일으켜 식사하러 가려고 하는데 한 자매가 쟁반에 음식을 담아 그의 앞에 가져다주며 말했다. “이 시간까지 왜 식사하러 안 갔어요? 아무리 바빠도 식사는 해야죠. 제때 밥을 안 먹어 버릇하면 위병에 걸려요.” 그는 “괜찮아요. 일을 마치고 먹으러 갈게요.”라고 말했다. “안 가도 돼요. 제가 밥 가져왔으니 얼른 먹어요.” “뭘 그렇게 서둘러요. 저는 아직 배가 안 고파요.” 바로 그 순간 배에서는 천둥 치듯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났다. 샤오자가 배를 감싸 쥐고 민망하게 웃으며 그 자매에게 “앞으로는 밥 안 가져다주셔도 돼요.”라고 하자 그 자매는 “가져다주지 않으면 음식이 식어서 다시 데워야 해요. 이것도 한 번 데운 거예요.”라고 말했다. 이에 샤오자는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 샤오자는 군침을 삼키며 자매가 가져다준 음식을 받아들었다. 쟁반에 차려진 식사를 흘끗 보니 찐빵 두 개와 채소, 고기, 국이 있었다. 그는 속으로 무척 기뻤다. 찐빵을 보고 다른 생각이 든 샤오자는 자매에게 말했다. “찐빵을 두 개나 먹진 못해요. 요즘 너무 바빠서 잠도 안 오고 식욕도 별로거든요. 그러니 제게 찐빵을 두 개 가져다주면 낭비 아니겠어요? 하나는 도로 가져가세요.” “괜찮아요. 다 못 먹으면 다시 가져가면 돼요.” 자매는 그렇게 말하고 떠났다. 샤오자는 생각했다. ‘얼른 가요. 배고파 죽겠어요.’ 그는 국그릇을 들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살폈다. 그리고 조금은 민망해하며 가볍게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런 뒤 고기를 보고 생각했다. ‘아이고, 아까부터 멀리서 돼지고기 조림 냄새가 나더라니. 하지만 바로 먹을 순 없어. 채소부터 먹어야 해. 채소를 배불리 먹고 고기는 조금 덜 먹어야 해. 안 그러면 그릇에 있는 고기를 절반이나 먹을 텐데, 얼마나 창피해!’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그렇게 했다. 그는 찐빵을 먹으면서 채소를 먹고 국물을 마셨다. 먹다 보니 고기도 한 입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친 김에 돼지고기 조림을 한 조각 집어 입에 넣고 눈을 감은 채 세세히 음미했다. ‘너무 맛있다! 역시 고기가 맛있어. 하지만 많이 먹으면 안 돼. 한 입이면 충분해. 채소를 많이 먹고 국물을 많이 마셔야지.’ 뒤이어 그는 찐빵과 채소를 먹으면서 동시에 고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각했다. ‘고기를 먹을까 말까? 저렇게 맛있는데 안 먹으면 얼마나 아까워.’ 그는 또 군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좋은 생각이 있어. 찐빵을 잘게 잘라서 고기 국물에 찍어 먹으면 고기를 먹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러면 남들은 내가 고기를 안 먹었다고 생각할 거고 나는 고기 맛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찐빵을 고기 국물에 적셨다. 찐빵을 집어 먹어 보니 너무 맛있어서 고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어서 샤오자는 찐빵을 전부 쪼개서 고기 국물 안에 넣었다. 10분도 되지 않아 그는 음식을 다 먹어 치우고 국물도 다 마셨다. 찐빵은 하나만 먹고, 남은 찐빵 하나도 먹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자제력을 발휘하며 더 먹지 않았다. 모든 채소와 음식을 원래 계획대로 다 먹었더니 배도 70, 80% 정도 불러서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때 샤오자는 생각했다. ‘아이고, 이렇게 빨리 먹지 말았어야 했는데. 엄청 배고팠던 것 같잖아. 정말로 배가 고프긴 했지만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면 좋지 않으니 천천히 먹었어야 했어. 하지만 벌써 다 먹어 버렸으니 어쩌지? 좋은 방법이 있어. 10분 뒤에 가져다 놔야겠다.’ 그는 움켜쥔 시계를 바라보고 ‘5분, 10분, 15분, 음, 두 시네. 가져다 놓자. 좋았어!’라고 생각하며 흐뭇해했고 남은 돼지고기 조림과 찐빵을 가져다 놨다.

샤오자가 돌아왔을 때는 벌써 2시가 넘었다. 다른 형제자매는 모두 낮잠을 자러 갔다. 할 일 없이 혼자 심심했던 그는 생각했다. ‘나도 가서 한잠 잘까? 배불리 먹고 나서 한잠 자는 것도 좋지. 안 돼. 남들이 잔다고 따라 자면 내가 뭐가 되겠어? 자면 안 돼. 버텨야 해. 어떻게 해야 안 잘 수 있지? 서 있으면 안 잘 수 있어. 하지만 계속 서 있으면 갑자기 들어오는 사람이 놀랄 테니 서 있을 수는 없어. 그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자. 누가 보면 내가 사역하고 있는 줄 알 거야. 사실은 쉬고 있는데 말이지. 괜찮은 방법이네.’ 그는 자연스레 컴퓨터 앞에 앉아서 컴퓨터를 바라보며 멍을 때리다가 5분도 되지 않아 키보드 위에 엎드려 잠든 뒤 코까지 골았다. 40분 정도 지났을 때 자고 있던 샤오자는 갑자기 퍼뜩 잠에서 깨며 펄쩍 뛰어올랐다. ‘나 서 있지 않았나? 어쩌다 잠들었지?’ 시간이 꽤 흐른 걸 본 그는 사람들이 오기 전에 서둘러 세수하러 갔다. 화장실에 도착해 거울을 본 그는 ‘이런, 얼굴에 키보드 자국이 선명하네.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지?’라고 생각하며 얼른 세수했다. 그는 얼굴을 문지르고 두드리며 한참 동안 화장실에 머물렀다. 다시 거울을 보니 얼굴에 있던 키보드 자국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속으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거야.’라고 생각하며 다행이라 여긴 그는 머리를 한번 빗고 옷깃을 매만졌다. 그러던 그는 갑자기 연한 색 셔츠의 옷깃에 묻어 있는 기름때를 발견했다. 소맷부리도 조금 더러운 걸 보고 그는 생각했다. ‘며칠째 씻지도 않고 옷도 안 갈아입었네. 안 씻는 것도 좋은 점이 있어. 더러우면 더러운 거지. 좀 더러우면 어때? 좀 더러우면 더 영적인 것처럼 보이잖아?’ 그는 아예 셔츠 깃과 소매를 겉으로 뒤집고 외투의 소매도 말아 올려 더러운 부분을 다 드러냈다. 만족스러웠던 그는 기운을 차리고 여유롭게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 잠깐 사이 많은 사람들이 자리로 돌아와 사역하기 시작하면서 분주해졌다. 샤오자는 다들 돌아온 걸 보고 말했다. “이렇게 빨리들 일어나셨군요. 다들 정말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시는군요! 저는 낮잠은 안 자고 살짝 눈만 감고 있다가 세수했어요. 세수를 안 하면 너무 기운이 없더라고요.” 대꾸하는 이가 없자 그는 재미없다고 생각하고 바쁘기 시작했다. 점심에 국물을 너무 많이 마셔서 계속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그는 억지로 참으면서 가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면 내가 게으름 피운다고 생각하겠지? 게으름 피운다고 소문나면 안 되니까 가지 말자.’ 그는 그렇게 참고 견뎠다. 간신히 견디고 있는데 누가 화장실에 가자 그는 이때다 싶어 얼른 뒤따라 화장실에 갔다. 그는 생각했다. ‘대세를 따르니까 얼마나 좋아. 나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샤오자는 오후 내내 분주히 움직이며 사역을 많이 했다. 이 사람을 찾아가 교제하고 저 사람을 찾아가 질문하고 자료를 찾아보며 자신의 본분과 관련 있는 여러 사역을 했다. 바쁘게 일하다 보니 드디어 저녁 식사 시간이 됐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늦게 갔지만 거의 제시간에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식사 이후가 샤오자의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왜냐하면 오직 그 시간에만 아무런 자책도, 지적도 받지 않고 평온한 마음으로 본인이 좋아하는 커피를 편안하게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겠느냐? 왜 커피를 마셔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충분하고, 그 이유는 누가 봐도 아주 정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간이 그에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커피를 탈 때 그는 소리 없이 입으로 중얼거렸다. “아이고, 오늘도 야근해야겠네. 몇 시까지 버텨야 할지 모르겠다. 이 커피로 버틸 수 있는 시간까지 버텨야지 뭐.” 그는 타 놓은 커피를 책상 위에 ‘쾅’ 하고 내려놓았다. 마치 모두에게 “내가 커피를 마시겠다는데 당신들이 어쩔 건데!”라고 말하는 듯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그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컵을 들어올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생각했다. ‘다들 커피가 좋다고 하던데 정말 그렇네. 매일 마실 때마다 맛도 다르고 느낌도 달라. 정말 좋다!’ 그는 흐뭇해하며 만족스럽게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밤에 해야 할 사역을 막연히 찾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거의 목표가 없었다. 게다가 하루 종일 바쁘게 사역해서 정말 피곤했지만 졸면 안 된다고, 남에게 피곤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사역이나 본분에 대해 조금이라도 무성의하고 무책임하거나 오만한 태도를 취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자신을 몰아붙이며 계속 힘겹게 버텼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컴퓨터 옆에 앉아 계속 사역했고 당연한 듯 커피를 연거푸 몇 잔이나 마셨다. 마실수록 정신이 들고 졸음이 오지 않았다. 샤오자는 이따금 시계를 보며 생각했다. ‘새벽 1시가 넘었네. 하지만 잘 수 없어. 내가 스스로 정한 목표는 3시니까 2시 50분에도 자면 안 돼. 잔다면 나와의 약속을 어기는 거고 하나님께도 드릴 말씀이 없어. 이건 피조물이 지켜야 할 약속이니까 반드시 지켜야 해. 3시에 잔다고 했으면 3시에 자야 해. 커피를 몇 잔 마시든 어쩔 수 없어.’ 그는 커피를 마시며 간신히 졸음을 참았고 마음속으로도 끊임없이 자신을 단속하고 통제했다. 3시가 되자 샤오자는 중요한 임무를 집행해야 했다.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이런 내용의 문자를 하나 보냈다. ‘누구누구 자매님, 저 샤오자예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일 오전 10시에 팀 예배 있는 거 잊지 마세요. 지각하지 말고 꼭 출석해 주세요.’ 맨 밑에는 발신인 이름 ‘샤오자’를 적었다. 문자를 보낸 뒤 안심이 된 샤오자는 생각했다. ‘보내긴 보냈는데 혹시 못 받으면 어떡하지? 내가 문자를 보냈다는 걸 알까? 자지 말고 답장을 하는지 기다려 보자.’ 30분을 기다렸지만 상대방이 답장을 하지 않자 그는 생각했다. ‘벌써 잠들었나? 어떻게 이렇게 일찍 자지? 3시에 자다니 형편없군.’ 3시 50분까지 기다렸더니 드디어 그 자매가 답장했다. ‘내일 10시 예배 잊지 않았어요. 당신도 잊지 말고 시간 맞춰 오세요.’ 이를 본 샤오자는 생각했다. ‘아이고,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나보다도 더 늦게 자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커피는 그만 마셔야겠다. 더 마시다간 밤을 새우겠어. 5시 30분에 일어나야 하니까 얼른 가서 자야지. 늦어도 6시에는 일어나야 해. 다른 형제자매보다 늦을 순 없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는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 줘야 하니까 늦게 일어나면 안 돼. 일찍 자고 싶었는데 다 저 문자 때문이야. 여하튼 다른 사람이 내가 밤새운 걸 아니까 목적은 달성했어. 내일은 4시에 자야지.’ 이렇게 생각하던 샤오자는 저도 모르게 정신이 혼미해져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방에 돌아가 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쓰러진 그는 거의 반수면 상태였지만 억지로 버티며 자신을 다잡았다. ‘아침에는 달걀을 먹으면 안 돼. 점심에는 찐빵 하나만 먹고 돼지고기 조림은 먹으면 안 돼. 새벽 3시에 자야 하고 문자도 보내야 하고….’ 생각에 잠겨 있던 샤오자는 조용해지더니 졸음기와 피로, 몽상, 허망 속에서 잠들었다. 이게 바로 샤오자의 하루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샤오자는 늘 그렇게 위장하니 피곤하지 않겠느냐? (피곤합니다.) 로봇은 하루 종일 한 가지 동작을 끊임없이 해도 피곤하지 않다. 신경도, 지각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계속 그렇게 버티면 피곤하다. 그는 그토록 피곤해하면서도 왜 그렇게 살겠느냐? 왜 그렇게 하려고 하겠느냐? 그는 속으로 계산이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그가 계산할 때 무엇에 초점을 두느냐? (남에게 보여 주는 데 초점을 둡니다.) 남에게 보여 주면 무엇이 이롭겠느냐? (남이 우러러보게 할 수 있습니다.) 남이 우러러보게 할 수 있다. 너희는 샤오자의 행동 방식이 익숙하지 않으냐? 어떤 부류의 사람이 그렇게 하겠느냐? (바리새인이 그렇게 합니다.) 그렇다. 바리새인은 좋은 행위,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는 행위나 행동 방식을 남들 앞에서 보여 주어 사람들이 그것을 적절하다고 생각하게 하고, 그들을 숭배하게 한다. 바리새인은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미혹하는 목적을 이룬다. 그럼 그들이 그렇게 거짓으로 꾸미고 온갖 좋은 행위를 해서 남에게 보여 주는데, 거기에 담긴 주된 성질은 무엇이겠느냐? 위장하는 것과 사람을 기만하고 미혹하는 것이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영적인 체하는 것입니다.) 그럼 샤오자가 하루 동안 한 일 중 몇 가지가 성품에 관한 일이자 모든 외식하는 사람의 공통점이겠느냐? 달걀과 찐빵, 돼지고기 조림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것은 모두 겉면의 일이다. 그 안에서 너는 그의 어떤 본질을 보았느냐? 위장하고 억제하는 것이다. 무엇을 위장하겠느냐? (고생하는 척합니다.) 고생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좋은 일이겠느냐, 아니면 나쁜 일이겠느냐? (좋은 일입니다.) 이는 모두가 지극히 추앙하는 좋은 행위이다. 사람들은 이런 좋은 행위를 무엇으로 생각하느냐? 진리를 실행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도 불사한 것이다. 고생하는 것에는 무엇이 포함되겠느냐? 좋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 밤을 새우는 것, 일찍 일어나는 것,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어떤 성질이겠느냐? 모두 위장하는 것이다. 진리나 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로부터 우러름과 숭배를 받기 위해, 자신이 훌륭한 명성과 높은 위신을 얻기 위해 고생하는 것이다. 그가 진리를 위해 고생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하는 몇 가지 일 가운데 진리 원칙에 부합하고, 진리를 위해 자신을 저버리며 개인의 이익을 내려놓는 일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라도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가 그런 고생을 하는 것은 어떤 성질이겠느냐?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겠느냐? 진리를 사랑하는 모습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겠느냐? (외식하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것이자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고, 기만, 위장, 사칭, 미혹이다. 이는 순전히 개인의 상상 관념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중심에 놓고 하게 되는 행위이자 선택이며, 진리와는 조금도 관련이 없다. 그는 진리를 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행하는 것도 진리가 아니다. 진리와 조금도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그의 마음속 인성의 정상적인 요구와도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달걀을 먹는 게 죄를 저지르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달걀을 먹는 것은 게걸스러운 것이다. 달걀은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만든 음식이다. 먹을 여건이 되어 먹는다면 그걸 게걸스럽다고 할 수 없다. 그럴 여건이 안 되는데 남의 것을 훔쳐 먹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게걸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샤오자는 이 일을 어떻게 정의했느냐? 그는 달걀을 먹는 건 게걸스러운 것이고 그걸 남에게 들키면 더더욱 게걸스러운 것이지만, 몰래 먹어서 남들 눈에 띄지 않으면 그건 게걸스러운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떤 기준으로 게걸스러운가를 가늠하느냐? 남이 봤는지 안 봤는지를 근거로 가늠한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했느냐? 그렇지 않다. 그건 그 자신의 관점이다. 사실 달걀을 먹는 일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생각이나 주장을 가지겠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그건 순전히 그가 혼자서 만들어 낸 이론이다. 그는 아침으로 달걀을 먹는 것이 게걸스럽고 안일을 탐하며 육을 챙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달걀을 먹는 사람은 모두 안일을 탐하고 육을 챙기는 것 아니겠느냐? 그의 뜻은 이런 것이다. ‘당신들이 달걀을 먹는 건 육을 챙기는 거야. 나는 육을 챙기지 않아. 난 억제할 수 있어. 난 안 먹는다고. 달걀이 눈앞에 있어도 들었다가 내려놓을 수 있어. 난 그럴 의지도, 결심도 있어. 나는 이렇게나 진리를 사랑하는데 당신들도 그럴 수 있어?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당신들은 진리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는 본인의 생각을 무엇으로 삼았느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이것이 외식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외식하는 것이다.

샤오자가 보인 또 다른 모습은 바로 식사를 해야 할 시간에 식사하러 가지 않은 것이다. 그는 무엇을 했느냐? (시간을 끌었습니다.) 억지로 허기를 참으며 시간을 끌었다. 그는 무엇을 위해 시간을 끌었느냐?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시간을 끌었습니다.) 허세를 부리고 남에게 보여 주려 했다. 그럼 그는 그 일에서 남에게 무엇을 보여 주려 했느냐? 무엇을 깨닫게 하려 했느냐? 남에게 자신이 고생을 잘 견디고 사역에도 아주 열심이고, 충성심이 강하고, 책임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 했다! 자신이 초인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 했다! 그러면 그는 목적을 이룬 것이다. 그는 그런 평가를 원했다. 그런 평가는 그에게 무엇이겠느냐? 그의 생명이자 명줄이다. 이게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이런 부류의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겠느냐? 그는 쇼를 하는 것도 불사하고 음모와 계략을 써서 허상으로 남을 기만했다. 자신이 고생을 얼마나 잘 견디는지 남에게 보여 주고, 이로써 남의 입을 통해 이런 평가를 얻었다. “당신은 고생을 정말 잘 견디네요. 당신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군요.” 그는 허상을 이용하고 수단을 써서 진실을 숨겨 하나님을 기만하고 사람을 속이는 것도 불사하는데, 이는 남에게서 듣기 좋은 말이나 좋은 평가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는 어떤 성품이냐? (사악함입니다.) 이는 사악함이다. 위장하고 쇼하고 수작 부리는 게 수준급이다! 단지 밥을 먹는 일일 뿐인데 당당하게 가서 먹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이냐? 밥 안 먹고 사는 사람도 있느냐? 제때 식사하는 게 죄악이냐? 배고플 때 음식을 먹는 게 죄악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육체의 필요이고 정당한 것이다. 그는 이 모든 정당한 필요를 부당한 것으로 여기고 정죄했다. 그가 제창한 것이 무엇이냐? 무작정 자신을 극복하고 실상을 숨기며 남에게 허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신이 고생을 견디고 안일을 탐하지 않으며 사역을 위해 어떤 대가도 기꺼이 치르는 모습, 시간과 에너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 주려 했다. 사실상 그가 정말로 그렇게 했느냐?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허상으로 남을 미혹했다. 그게 바로 사악한 성품의 특징이다. 밥 먹는 것과 같은 작은 일을 이렇게 크게 부풀리다니 그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게 정상 인성의 모습이냐? (아닙니다.) 아니다. 이는 몹시 음험하다! 고작 이런 일을 가지고 그렇게 쇼를 많이 하다니 보통 사람이 이 일에 대해 들으면 칭찬하겠느냐, 아니면 반감을 품겠느냐? (반감을 품습니다.) 그럼 너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으냐?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이토록 심각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배고플 때의 심정은 꽤 견디기 힘들지만 그런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사람도 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공들이라고, 하나님 말씀의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고 정직하게 말하라고 하면 그는 힘들고 어렵게 느낀다. 자신의 이익과 체면을 포기하라고 하면 그에게는 그것이 하늘에 오르기보다도 어렵다. 하지만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제쳐 놓고 그 자신의 상상대로 행동하며 자신의 육적인 이익을 지키라고 하면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든 그렇게 하고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한다. 이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모습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샤오자는 또 어떤 모습을 보였느냐? 그는 몹시 졸렸지만 자러 가지 않았다. 사람이 졸릴 때 한잠 자고 휴식을 좀 취하면 더 좋은 체력으로 사역할 수 있으니 그건 정당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정당하다. 그럼 그가 한잠 잔다고 해서 누가 정죄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도 정죄하지 않는다. 그럼 샤오자는 어째서 그렇게 겁에 질렸겠느냐? 그는 대체 무엇이 두려웠겠느냐? (탄로 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렇다. 그는 탄로 날 것이 두려웠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모두가 자신이 특히 고생을 잘 견디며 매우 경건하다고 생각한다고 상상했다. 일단 자신의 실상이 폭로되어 다들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면 자신의 좋은 이미지는 전부 무너진다고 여겼다. 그는 속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졸더라도 스스로를 억제하려 했고, 자신에 대한 요구도 그토록 엄격했던 것이다. 이는 어떤 인간이겠느냐?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은 설교도 듣고 하나님의 말씀도 읽으며 예배와 교제도 많이 하는데 어째서 진리를 중시하지 않느냐? 진리 원칙을 묵상하면 얼마나 좋으냐?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했는지 살펴보아라. 하나님의 말씀 중 사람이 조는 일에 대한 정의가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정의하지 않았고 언급한 적도 없다. 정상 인성의 사유를 가지고 있다면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 것이다. 졸려서 잠깐 조는 건 정당하다. 여름에 날씨가 너무 더워서 점심때 잠시 쉬는 것도 정당하다.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은 신체와 에너지 등 여러 측면에서 뒤처지기 때문에 점심 식사 후에는 한잠 자야 한다. 이는 생활 습관이 아닌 신체적 요구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은 정상 인성의 지각과 의식, 반응을 주어 네가 사역과 환경에 따라 일상적인 식사나 일하고 휴식하는 것과 같은 일을 스스로 처리하도록 했으니 너는 자신을 해쳐선 안 된다. 예를 들어, 너는 푸짐한 음식을 먹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좋은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하셨어. 늘 좋은 음식을 먹으면 게걸스러워지니까.”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말씀을 한 적도, 사람에게 그렇게 요구한 적도 없다. 그러나 샤오자는 그렇게 생각했고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 여겼다. 또 사람이 일찍 자는 것은 안일을 누리는 것이며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구하면 된다. 그러나 그는 구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주관적 뜻대로 행동했다. 어느 정도까지 했느냐? 밤을 새우기 위해 하루에 커피를 서너 잔이나 마셨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저는 하나님 집에서 사역하느라 본분을 이행하는 요 몇 년간 커피를 많이 마셨어요.” 남이 “누가 커피를 마시라고 했나요? 당신이 스스로 마시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라고 하면 그는 생각한다. ‘내가 왜 커피를 마시는지 알아? 밤을 새우려고 마시는 게 아니라 살을 빼려고 마시는 거야. 몰랐어? 하지만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순 없어. 말하면 당신도 알게 되잖아? 당신이 나보다 마르면 내가 말라 보이겠어?’ 이는 잔꾀를 부리는 것 아니겠느냐? 이 안에는 어떤 관점과 사상이 담겨 있겠느냐? 정상 인성의 이해와 이성이 있느냐? (없습니다.) 없다. 전부 머리싸움과 수작, 음모, 그리고 위장과 외식, 미혹 같은 것들뿐이다. 무슨 일이 생기든 잔꾀를 부리고 결코 자신의 진실한 관점이나 생각을 말해 남에게 알리지 않는다. 모두에게 알리거나 하나님에게 보여 주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의 마음가짐은 이런 것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개방적이고 솔직해. 속으로 생각하는 대로 행동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그는 결코 이런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지 않는데, 그럼 어떤 것이냐? 다른 사람 마음속 자신의 이미지가 충분히 위대하고 경건하고 영적이지 않을까 봐 두려워 한사코 감추고 위장한다.

샤오자는 왜 밤을 새우려고 했겠느냐? 대부분의 사역은 밤을 새울 필요가 없다. 밤 10시가 넘으면 사람은 졸리기 마련이고 설사 계속 일하더라도 효과가 좋지 않다. 사람의 에너지는 유한하다. 그러나 샤오자는 늘 억제한다. 사실 그도 그렇게 해 봤자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왜 자기 전에 문자를 보냈겠느냐?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새벽 3시에 잤다는 것을 남에게 증명해 달라고 하기 위해서이다. 네가 밤새 한숨도 안 잔다 한들 결국 졸린 사람은 너 아니냐? 네가 자초한 일 아니냐? 어떤 사람은 새벽 3시까지 밤을 새우고 남에게 문자를 보낸다. 상대방이 새벽 4시에 답장을 하면 자신이 더 늦게 잤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새벽 5시까지 기다렸다가 답장한다. 그렇게 실랑이하고 서로를 곤란하게 하다가 결국 두 사람 다 밤을 지새운다. 이는 두 얼간이가 아니냐? 이는 어떤 행위겠느냐? 어리석은 행위다. 이런 행위는 다 무엇에서 비롯되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에서 비롯된다. 우선 이게 어느 측면의 패괴 성품인지는 차치하고 이 일이 황당한지, 황당하지 않은지 말해 보자. 하나님의 말씀 중 아무것이나 한마디 찾아 실행하면 이런 황당한 행위와 행동 방식을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의 어떤 말씀이든 다 너를 평온하고 착실하게, 더욱 현실적이고 실제적으로 살아가도록 할 수 있는데 너는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선택하지 못하는 것이냐? 왜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냐? 그건 자업자득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든 헛고생하는 것이고 얼마나 큰 고생을 하든 스스로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는 지난 세월 하나님을 믿으면서 20년 동안 리더를 맡았어요. 늘 밤을 새우고 잠을 안 자서 결국 신경 쇠약에 걸렸죠.”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한다. “신경 쇠약이라니 그나마 다행이네. 계속 그렇게 쓸데없이 고생하면서 사역하다가는 얼마 안 가 정신병에 걸릴지도 몰라.” 사람이 밤에 잠을 안 자고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 몸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데 건강할 수가 있겠느냐? 그건 자업자득이다! 그에게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사역을 최대한 낮에 안배해서 사역 효율을 높여야 해요. 여럿이 모여 사역에 대해 소통할 때는 헛소리나 쓸데없는 말은 줄이고 중요한 것과 핵심, 주제를 파악해 말하세요. 그런 다음에는 잔소리하거나 꾸물거리지 말고 서둘러 각자 할 일을 하고요.”라고 해도 그는 듣지 않는다. 그는 말하는 수준이 떨어지면서도 경험을 정리하지 않고, 허튼소리나 하면서 시간을 때운다. 새벽 한두 시까지 시간을 때우며 잠도 안 자고 남도 못 자게 하니 이는 사람을 괴롭히고 해치는 것 아니겠느냐? 결국 그는 또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 보셨죠. 저 새벽 3시까지도 안 잤어요!’ 하나님은 보았다. 하나님은 네 겉모습뿐 아니라 속마음까지 보고 이렇게 말씀한다. “너는 속마음이 더러운 인간이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쓸데없이 고생하면 하나님은 기념하지 않는다. 자야 할 때 자지 않고 억지로 참고 버티니 너는 고생해도 싸다!” 졸릴 때 눈꺼풀이 자연스레 감기는 건 사람의 본능이다. 너는 늘 본능과 자연법칙을 위배하니 고생해도 싸다! 하나님은 네가 무의미하고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고생, 원칙과 진리에 위배되는 고생을 견디게 하지 않는다. 네가 굳이 그런 고생을 견디고 싶다면 견뎌라. 어떤 사람은 누가 새벽 3시는 돼야 잔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이렇게 생각한다. ‘나랑 똑같잖아? 그럼 난 앞으로 3시 30분에 자겠어.’ 다음에 또 누가 3시 30분에 잔다고 들으면 그는 4시에 자려고 한다. 이는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비교할 게 따로 있지 누가 더 늦게 자나 비교하다니, 이는 정신이 비정상인 것이다. 정신이 비정상인 사람은 이해에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간이 있으면 표면적인 행위나 위장, 외식 같은 일에 공들이고 머리 쓰고 신경 쓰지 말고 어떤 일에 공들여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패괴 본성과 사악한 성품, 사람의 불성실함을 어떻게 폭로하는지 한번 살펴보아라. 사람을 폭로하는 하나님의 그런 말씀에 공들이고 대조해 보며 자신에게 하나님이 폭로하는 모습이 몇 가지나 있는지, 자신이 자주 행하고 드러내는 모습이 몇 가지나 있는지 반성해 보아라. 그런 것들을 정리해 보면 얼마나 좋으냐! 늘 달걀을 몇 알, 찐빵을 몇 개 먹는지에 공들이고, 고기 국물에 찍어 먹는 일에 공들인다면 그 얼마나 비열하냐! 그건 무엇이겠느냐? 잔꾀를 부리는 것이고 지혜가 없는 것이다. 그는 어떤 인간이겠느냐? (머저리입니다.) 맞는 말이다. 달걀을 보고 늘 몇 알을 먹을지 연구하고, 밤에는 항상 커피를 마시며 밤을 새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식충이나 머저리라고 해도 전혀 과하지 않다. 그들은 어떤 부분에서 어리석으냐? 왜 그런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겠느냐? (아무 가치 없이 고생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분명 가치가 없다. 그렇게 유치한 일을 너는 왜 하려는 것이냐? 네가 평생 달걀을 안 먹는다고 해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라.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짓을 하기 쉽겠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 사람은 참 자질이 뛰어나요. 설교를 능숙하게 잘하잖아요.” 설교는 능숙하게 잘하는데 왜 일할 때만 되면 항상 유치한 행동을 하는 것이냐? 왜 행동이 그토록 유치하고 가소로운 것이냐?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그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 그의 말은 도리상의 이해이고 그의 행동이야말로 그가 진정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도리를 마음속 깊이 수긍하거나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이 진리임을, 그가 실행하고 지켜야 하는 준칙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속 꿍꿍이와 관념, 외식하는 생각과 행동 방식, 남이 좋다고 생각하는 행위야말로 그가 생각하는 준칙이자 실행의 길이다. 이런 사람이 만약 계속 돌이키지 않는다면 폐기되지 않겠느냐? 구원받을 기회가 있겠느냐? 희망이 크지 않다.

뙤약볕 아래에서 양산을 쓰고 밀짚모자를 쓰는 일은 정당하지 않으냐? (정당합니다.) 뙤약볕 아래에서 일하면서 밀짚모자를 쓰지 않으면 금방 피부가 타서 벗어지기 때문에 밀짚모자를 쓰고 일하는 건 정당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해하지 않고 “밀짚모자를 쓰라고요? 그건 저를 모욕하는 거 아닌가요? 제가 밀짚모자를 쓸 수 있겠어요? 저는 고생이 두렵지 않아요. 햇볕에 좀 타더라도 저는 두렵지 않아요. 좀 까매야 건강하죠.”라고 말한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중요한 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들은 더운 날 피부가 타고 벗어질 게 두려워 밀짚모자를 쓰는군. 하지만 난 쓰지 않을 거야. 피부가 타고 벗어지는 게 뭐가 두렵지? 난 하나님께서 좋아하신다면 남들이 어떻게 보는지는 신경 안 써!’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어떻겠느냐? 조금 간사하고 외식하는 것 같지 않으냐? 사실 그가 밀짚모자를 쓰지 않는 데는 속셈이 있다. 자신이 고생을 잘 견디고 정말로 영적이라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다. 이렇게 외식하는 행위는 너무도 역겹다! 이렇게 위장에 능한 사람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본분 이행에서 고생을 견디고 대가를 치를 수 있겠느냐? 피부가 검게 타고 벗어지는 순간 그는 불평하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느냐?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은 결코 진리를 실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영적인 체하기도 하는데, 그들이 정말로 고생을 견디고 대가를 치를 수 있겠느냐? 외식하는 사람의 본질로 보면 그들은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위해 고생을 견디고 대가를 치르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 밖에, 그들은 진리의 말씀을 얼마나 들었든 그것을 진리로 생각해 듣거나 이해하지 않고 일종의 영적인 이론으로 대하고 전한다. 이렇게 외식하는 사람은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하나님이 왜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려 하는지,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체 어떤 과정이고 그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이 말씀하는 구원받는 것이란 대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한다. 그런 진리를 그는 깨닫지 못한다. 만약 어느 교회에 어떤 외식하는 사람이 진리는 사랑하지 않고 외식하기만 좋아한다면 그가 바로 전형적인 바리새인이다. 그는 행위와 겉모습, 사람들 마음속의 평가를 중시하고, 진리를 얼마나 많이 듣든 실행하지 않는다. 하는 말은 모두 옳고 어떤 도리든 말할 줄 알지만 실행해 내는 것은 그가 한 말에 부합하지 않는다. 만약 누가 그와 손발이 잘 맞는다면 그들은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정상 사유를 지닌 사람이라면 그의 그런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겠느냐?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런 실행법은 틀리지 않나? 왜 저렇게 이상하지? 밥 먹을 시간에는 가서 밥을 먹으면 되지 왜 저렇게 빙빙 돌려서 얘기하지?’ 그들은 그 사람이 이상하다고, 남들과는 다르게, 치우친 방식으로 사물을 이해한다고 말할 것이고, 그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면 모두 겉모습과 행위를 특히 중시하고, 남의 생각을 중시하며 남과 비교할 것이다. 마치 샤오자가 새벽 3시에 문자를 하나 보내자 상대방이 새벽 4시에 다시 샤오자에게 답장을 하며 서로 ‘나한테 3시에 보냈으니 나는 당신에게 4시에 답장할 거야.’, ‘나한테 4시에 답장했으니 나는 5시에 보낼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식으로 재다 보면 다들 외식하는 사람이 된다. 만약 어느 교회 리더가 그런 사람이고 형제자매도 분별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들은 위험해지고 언제든 미혹될 수 있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표면적인 좋은 행위에 미혹되거나 좌우되기 쉽다. 그는 무엇이 옳은지 모르기 때문에 관념 속에서 그런 행위가 좋다고 생각하고,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숭배 대상으로 삼으며 그 사람이 틀림없이 리더를 맡고 온전케 될 것이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런 행위를 인정하고 내심 그런 행위를 긍정한다. 그가 그렇게 긍정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는 따르기 시작한다. 만약 그들이 모두 리더라면 서로 비교하게 된다. 한번은 각국 교회의 리더 일꾼이 온라인에서 예배할 때 접속해서 잠시 들어 봤다. 난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받고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뭘 하고 있는 거지? 설교를 하는 건가?’ 알아본 뒤에야 그들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난 그들이 왜 그렇게 기도하는지 궁금했다. 흉악하게 날뛰어서 무섭게 들렸다. 흉악하게 날뛰는 것은 큰 문제 아니었다. 주된 문제는 무엇이었겠느냐? 그들은 마치 눈을 뜨고 기도하는 것 같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속마음을 털어놓는 게 아니라 누구의 언변이 더 좋은지, 누가 도리를 더 많이 말할 수 있는지, 누가 이야기한 내용이 더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지 경쟁하는 듯했다. 듣고 있으니 꼭 링 위에서 누가 더 뛰어난지 시합을 벌이는 것 같았고, 아무리 들어 봐도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끝장난 것 아니겠느냐? 폐기되지 않겠느냐? 그런 사람이 리더를 맡으면 아랫사람도 덩달아 얼마나 크게 고생하겠느냐! 그러면 곤경에 빠뜨리는 것 아니겠느냐? 그들은 한 사람당 최소한 20분씩 열심히 기도했다. 상부에서 한 사람만 발언하는 것을 금지하고 한 사람당 5분에서 10분씩 교제하는 것만 허용한다고 규정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서슴없이 그토록 긴 시간을 점용해 기도했다. 나중에서야 나는 왜 수많은 예배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되는지 깨달았다. 그런 소위 리더들이 기도만 해도 계속 시간이 길어진다. 한 명 한 명 연달아 기도하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은 덩달아 고생한다. 그 거짓 리더들은 설전을 벌이고 끊임없이 지껄인다. 어떤 사람은 횡설수설하면서 앞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는지도 잊은 채 남보다 더 길게 말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도는 눈을 감고 하나님에게 하는 건데 저자는 왜 눈을 뜨고 있지? 눈을 뜬 채 남이 어떻게 기도하는지 보면 생각이 교란당하지 않나? 무엇보다 남이 어떻게 기도하고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지 속으로 생각해야 하잖아. 남보다 잘하고 싶은 생각도 들고. 마음속에 그런 것들이 가득한데 어떻게 하나님에게 속마음을 말하며 기도할 수 있지? 이성이 비정상적인 거 아닌가? 저건 전부 거짓 리더와 거짓 일꾼이 영적인 척하는 모습 아닌가?’ 다 같이 모여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교제하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보고했다. “아이고, 그거 아세요? 그 리더들은 예배하고 기도할 때 마치 경을 외우는 것처럼 한 가지 일만 끝없이 말해요. 예배할 때마다 그런 식이라서 듣다 보면 싫증 나요.” 그런 예배가 사람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거짓 리더와 거짓 일꾼은 그런 짓들만 벌이는데 하나님의 뜻에 맞을 수 있겠느냐? 그들은 진리를 교제해 사람이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나 진리 교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중시하지 않고 영적인 척하는 종교의 그런 수작만 부리는데, 이는 치우치게 길을 인도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되겠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깨닫지 못한 채 종교의식만 하고 자신을 드러내기만 한다! 더 심하게는 기도를 통해 남을 폭로하고 공격하고 정죄하며, 기도로 자신을 위해 해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에게 들려주는 것 같지만 사실 모두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전부 불신파가 하나님 집 사역을 교란하는 것이다. 그런 거짓 리더들은 기도할 때 추태를 너무도 많이 드러낸다.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어떤 사람은 저를 오해해요. 제가 그렇게 행동한 건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저는 당신께 기도해요. 저는 소극적이지 않아요. 남들이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을래요.” 이런 말만 한다. 도리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누가 설교를 더 많이 듣는지, 누가 찬양의 가사를 더 많이 기억하는지,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기억하는지, 누가 더 오래 기도하는지, 누가 더 언변이 좋은지, 누가 기도 방식이 더 다양한지 경쟁하는 등 별의별 기도를 다 한다. 그게 기도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무엇이겠느냐? 그건 제멋대로 나쁜 짓을 일삼는 것이다! 그건 진리를 희롱하고 짓밟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욕하고 모독하는 것이다! 이런 마귀와 불신파는 기도를 통해 어떤 말이든 당돌하게 하니 그들이 진실로 믿는 것이겠느냐? 조금이라도 경건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의 리더 지위를 교체하면 소극적으로 변하고 조금도 반성하지 않으며 여기저기에 불평을 늘어놓는다.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면서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는데 제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은 거짓 리더라면서 저를 교체했어요. 그리고, 저처럼 도리를 완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저처럼 사랑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저는 가정도 일도 버리고 하루 종일 교회에 머물며 형제자매와 예배를 해요. 한 번 시작하면 3일에서 5일 동안 예배하죠. 그런 저를 어떻게 이렇게 쉽게 교체하죠?” 그는 여전히 불복하고 불평한다. 이런 논조를 퍼트리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 집에서는 리더를 맡으면 안 돼요. 리더로 뽑히면 재수 없거든요. 교체되는 순간 평신도가 될 기회조차 사라져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 터무니없고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불복이자 불만, 모독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 뜻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말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 공격이 담겨 있다. 그것은 평범한 판단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교체된 것이 제멋대로 못되게 굴고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에 대해 공의롭지 못하다고, 하나님이 행사할 때 그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았고 그의 기분과 감정이입을 이해하지 않았다고 원망한다. 그의 마음가짐은 이방인과 같으니 진리 실제가 있을 리 없다!

너희는 예배할 때 보통 얼마나 오래 기도하느냐? 사람들의 시간을 너무 오래 점용하지는 않느냐? 사람들에게 지겹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는 않느냐? 어떤 사람은 너무 오래 기도해서 다들 듣다가 지겨워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장 영적이라고, 그것이 하나님을 여러 해 믿으면서 얻은 수확이자 성취라고 생각한다. 그는 한두 시간 기도해도 지칠 줄 모르고 기도할 때 케케묵거나 시시콜콜한 일들만 말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글귀와 도리, 구호, 남에게서 들은 것, 자신이 상상한 것을 전부 한 번씩 말한다. 남들이 지겨워하든, 싫어하든 상관 않고 그렇게 말한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느냐? 기도 시간이 긴 게 옳겠느냐, 짧은 게 옳겠느냐? (옳고 그름은 없습니다.) 그렇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규정할 수 없고 개인의 심리적 필요에 따라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된다. 환경이나 일어난 일에 따라 기도에 의식이 필요 없을 때도 있고 의식이 필요할 때도 있다. 만약 이번 기도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면 자신의 사적인 일은 뒤에서 따로 하나님에게 기도해라. 예배 중에 기도해서 사람들의 시간을 점용하지 마라. 이런 것을 두고 이성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체면과 명성을 위해 그런 것들은 신경 쓰지 않는데, 그게 바로 무지하고 이성이 없는 것이다. 이성이 없는 사람이 염치가 있겠느냐? 그가 기도하는 걸 보고 모두 싫어해도 그는 느끼지 못한다. 이 정도 느낌이나 의식조차 없는 사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실행하도록 요구한 진리 원칙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 교제하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 안에는 원칙이 있고 그 모든 게 원칙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묵상하는지 여부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진리 실행에 관한 원칙이 아주 많다. 다양한 일, 여러 상황과 배경에서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원칙과 길이 있다. 중요한 것은 네게 영적인 이해력과 이해 능력이 있는지 여부이다. 사람이 이런 이해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지만, 이런 이해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이 아무리 세세하게 말씀해도 규례로 이해할 뿐,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네게 스스로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원칙을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 다양한 체험, 교제를 통해, 나아가 성령의 깨우침으로 네가 하나님이 말씀하는 한 측면의 원칙과 한 측면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을 깨닫는다면 너는 그 측면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만약 하나님이 모든 일을 다 세세하게 말해야 하고 이 일은 어떻게 해야 하고 저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람에게 알려 줘야 한다면 하나님이 말씀한 그 원칙들은 소용없어진다. 만약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일을 한 가지씩 가르치고 사람에게 규례를 알려 준다면 사람은 결국 무엇을 얻겠느냐? 행동 방식과 행위만 얻을 뿐 하나님의 뜻과 말씀은 영영 깨닫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대부분의 사람은 깨닫지 못한다. 오직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소수의 사람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다. 그럼 깨달을 수 있는 그 사람들은 어떤 조건을 기반으로 깨닫겠느냐? 영적인 이해력과 이해 능력이 있고 진심으로 추구하며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것을 기반으로 깨닫는다. 그러면 깨달을 수 있다. 나머지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자질이나 이해의 문제, 혹은 시간문제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 이는 20대에게 50살이 갖추고 이르러야 할 깨달음에 이르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는 무리한 요구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 너희가 보기에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지는 무엇과 관련 있겠느냐? (자질과 관련 있습니다.) 자질과 관련 있다. 또 무엇과 관련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지와 관련 있습니다.) 사람의 추구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어떤 사람은 사실 그의 깨닫는 능력과 두뇌 반응, 지능만으로도 충분히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사랑하지도, 추구하지도 않고 마음속에서 진리에 아무 느낌이 없으며 그 측면에서 마음을 쓰지도 않는다. 그에게 진리는 영원히 모호하고 인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몇 년을 믿든 소용없다.

이야기를 마치겠다. 이런 이야기의 줄거리와 내용이 너희가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는 데 도움이 되느냐? (그렇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겠느냐? 이런 이야기가 현실 생활 속 사람의 생활 상태와 사람이 드러내는 성품, 사람의 일부 생각과 동떨어져 있다면 들려줄 필요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들려줄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생활 속에서 사람이 흔히 볼 수 있는 일부 현상과 사람이 자주 드러내는 일부 내적 상태로, 사람의 성품, 사람의 관점, 사상과 관련 있다. 이런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그저 이야기일 뿐이고 조금 우습고 재미있다고 생각할 뿐 그 속에서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런 이야기는 너희에게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너희는 그 속에서 진리를 좀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최소한 너희의 행위, 특히 한 부류의 사물을 대하는 관점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여 네가 치우친 이해 방법에서 돌아서고 그런 일을 순수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는 행위를 바꾸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패괴 성품이 유발한 그런 내적 상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알아들었느냐? 이어서 본론을 교제하겠다.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하는 적그리스도를 해부하다

4. 얼마간의 경험과 지식을 갖췄다고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하는 적그리스도를 해부하다

지난번에 적그리스도의 모습 중 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를 교제했다. 제8조는 총 네 가지 소주제로 나뉘는데, 앞의 세 가지는 교제를 마쳤다. 네 번째 소주제는 무엇이냐? (얼마간의 경험과 지식, 교훈을 갖췄다고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하는 것입니다.) 그게 제8조의 네 번째 소주제이다. 물론 네 번째 소주제 역시 이 주제의 한 측면의 모습에 관한 것이고 이 주제와 관련 있다. 주제가 무엇이냐?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이 소주제를 조금씩 나누어 말해 보자. 경험과 지식, 교훈이라는 이 몇 가지는 각각 무엇이겠느냐? 어떤 사람들이 갖추고 있겠느냐? 어떤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갖추기 좋아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이 진리는 중시하지 않으면서 이런 것들을 갖추는 것만 중시하겠느냐? 또 어떤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진리로 여길 수 있겠느냐? 우선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자질이 어떻고 깨닫는 능력이 어떻든 그들은 지식을 아주 좋아하고 진리 실제보다 지식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은 소위 경험과 지식을 어느 정도 얻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지식과 경험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포장해 자신을 더 품위 있고 격조 있고 교양 있게 만들고, 남들에게 더 우러름과 숭배를 받으려 한다. 그들은 그런 지식과 경험을 갖추고 있으면 더 가치 있고 보람차며 자신감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보기에,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런 지식과 신학에 관한 말, 여러 측면의 상식과 지식, 교훈에 관한 말로 자신을 무장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그런 것들을 갖추면 하나님 집과 그 무리에서 한자리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이 매일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숭배하고 추종하는 것은 모두 지식이나 경험 같은 것들과 관련 있다.

우선 지식과 경험, 교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어떤 것들을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이 몇 가지는 틀림없이 진리와 무관하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며 진리에 위배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관념 속에서는 옳은 것이고 긍정적인 사물이거나 아름답고 선한 사물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하나님이 보기에는 진리와 무관하다. 심지어 이런 것들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진리를 정죄하는 근원이고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하나님에 대해 관념을 갖게 되는 근원이자 원천이다. 경험과 지식, 교훈 같은 것을 갖춘 사람들 간에 나이나 성별의 차이가 있느냐? (없습니다.)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은사를 가지고 있는데, 은사란 무엇이냐?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남이 한 가지 이론이나 주장을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 그런 이론의 핵심이나 기본 개념을 이해한 뒤 빠른 두뇌 반응으로 그런 이론이나 주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어떻게 그것을 자신의 말로 바꿔 남에게 말하고 들려줄지 바로 알 수 있다. 그는 듣고 나면 금세 기억하는데, 깨닫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고 기억력이 특히 좋은 것이다. 이게 바로 일종의 특별한 은사이다. 이런 은사를 갖춘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 그는 하나를 말하면 곧장 둘을 알고, 하나를 듣고 열을 안다. 들은 주제를 잘 활용해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외부의 일부 사물이나 이론과 같은 논리, 글에 관한 것에 아주 능하다. 즉, 언어유희에 아주 능하고, 이론으로 남을 구슬리고 굴복시키는 데 능하다. 이런 은사를 가진 사람이 일부 있는데, 말재주가 특히 좋고 생각과 반응이 아주 민첩하다. 그는 한 측면의 진리를 들으면 자신의 잔재주와 은사로 그 측면의 진리를 일종의 지식과 학문으로 이해한다. 그런 다음 그런 학문을 이용해 남에게 교제하고 소위 양육하고 목양하는 사역을 한다. 이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겠느냐? 좋은 효과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왜 그렇겠느냐? (실제적이지 않고 사람이 듣고 나서도 실행의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하는 말을 듣고 나서 전부 옳다고, 틀리거나 원칙에 위배되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모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행할 때는 그 말이 공허하다고, 실행할 때 목표와 방향이 없어서 그것을 실행의 원칙으로 활용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그럼 그 말은 무엇이겠느냐? (도리입니다.) 도리이고 지식이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모습은 매우 뚜렷하고 두드러진다. 그들은 진리를 지식이나 학술, 이론으로 여기고 늘 알 듯 말 듯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요구한다.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자세히 말해 달라고 하면 명확히 말해 주지도 못하면서 반박까지 한다. “당신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군요. 진리를 사랑한다면 제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실행의 길이 생겼을 텐데 말이죠.” 일부 어리석고 분별없는 사람은 듣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그러게 말이에요. 제가 정말로 진리를 사랑했다면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겠죠.” 분별없는 사람은 그의 말이 옳다고, 자신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책임을 돌린다. 그렇게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어 우왕좌왕한다.

다시 경험에 대해 얘기해 보자. 경험은 오랜 시간 겪은 것을 정리해 낸 일종의 행동 방식이다. 이틀 사역한 사람이 경험을 갖췄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10년, 20년 사역한 사람은 분명 경험을 갖췄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사역해서 경험을 갖췄으니, 어떤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에게 어떤 도리를 말해야 하는지 다 안다고 생각한다. 결국 어느 날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새로운 일이 발생하면 그는 지난 20년간 사역한 기록을 들춰 보며 궁리하다가 과거의 말과 행동 방식을 그대로 적용한다. 그가 그렇게 적용하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가 한 일이 진리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보자마자 말한다. “저 사람은 제멋대로 사역하네요. 사역할 때 원칙이 없이 전부 경험에만 기대잖아요. 하나님의 뜻도 깨닫지 못하고,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고 하나님 집의 사람을 대하는 원칙에 부합하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아무렇게나 규례를 적용하는군요.” 여기에 문제가 있다. 보통 사람은 사역한 기간이 짧으면 “저는 경험이 있어서 두렵지 않아요. 사역을 그렇게 오래 했는데 제가 만나 보지 못한 사람이나 처리해 보지 못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라고 말할 밑천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 있게 그렇게 말한다. 설사 네가 많은 일을 처리해 봤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적지 않게 처리해 봤다 하더라도 네가 모든 일을 처리하고 모든 사람을 대할 때 다 진리 원칙에 맞게 행동한다고 확신할 수 있겠느냐? 사실상 감히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경험이나 공식을 진리로 여기는 사람은 누가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면 “저는 오랜 세월 사역해서 당신보다 경험이 더 풍부해요. 감히 다른 의견을 내다니, 집에 돌아가서 기도나 제대로 하세요!”라고 말한다. 그의 앞에서는 아무도 감히 “아니요.”라고 말하지 못하고, 아무도 감히 다른 의견이나 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이를 뭐라고 하느냐? 이게 바로 경험을 진리로 여기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진리의 화신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저도 자신을 진리의 화신으로 여기지 않았어요. 감히 누가 진리의 화신을 자처하겠어요?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이시죠. 저는 그렇게 행동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너는 주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행동하려 하지도 않았지만, 객관적으로 네 행동 방식과 행위, 그리고 네가 그렇게 행동한 본질을 보면, 결국 네가 자신을 진리의 화신으로 여겼다고 규정할 수 있다. 왜 너는 네가 내놓은 제안에 사람들이 곧이곧대로 순종하도록 할 수 있겠느냐? 만약 네가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네게 사람들을 순종하도록 할 자격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사람들이 네게 순종할 수 있는 상황은 하나뿐이다. 네가 진리를 깨달았을 때, 즉 네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일 때이다. 하지만 설사 네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너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평범한 사람이 진리의 화신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한 말씀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깨닫도록 요구한 진리를 모두 깨닫는다고 해서 진리의 화신이 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건 아마 온전케 되지 않은 거겠죠. 베드로는 온전케 된 사람이니 진리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온전케 되더라도 진리의 화신은 아니다. 왜 그런지 아느냐? (본질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에 차이가 있다. 이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우리는 사람이 진리의 화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해 봐야 한다. 왜 사람은 진리의 화신이 될 수 없다고 하겠느냐? 진리의 화신이 단지 본질의 문제겠느냐? 누군가 말한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피조물이고 하늘의 그분은 선천적으로 창조주예요. 우리가 이 일에 대해 해명할 필요는 없어요. 하나님은 영원히 진리의 화신이시죠. 그럼 그리스도는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갖추었기 때문에 진리의 화신일까요?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진리를 얻는다면 우리도 진리의 화신으로 불릴 수 있을까요?”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럴 수 없어요. 예전에는 진리를 많이 깨달으면 그리스도가 되고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 본질은 교체하거나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들은 여기까지 이해한다. 그럼 이 일을 더 깊이 이해할 수는 없겠느냐? 내가 이 일을 교제하면 너희는 곧장 이해할 것이다. 진리의 화신을 언급해서 말인데, 그럼 화신이란 무엇이냐? 이 말은 조금 추상적이니 제일 간단한 말로 얘기해 보자. 하나님 자신은 바로 진리이고, 그는 모든 진리를 지니고 있다. 그는 진리의 원천이다. 모든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는 다 하나님에게서 왔고, 그는 만사 만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그는 과거에 발생한 일이든,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일이든, 아니면 앞으로 발생할 인류가 모르는 일이든 모두 판단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재판관이다. 즉, 모든 사물의 옳고 그름은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사물의 준칙을 알고 있고, 언제 어디서나 진리를 선포할 수 있다. 하나님이 곧 진리의 화신이다. 즉, 그 자신이 진리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었다고 해도 진리의 화신과 관계가 있겠느냐? 없다. 이는 틀림없는 것이다. 사람이 온전케 되면 하나님이 지금 행하는 이 모든 사역과 하나님이 요구한 여러 방면의 기준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되고, 정확한 실행 방법을 얻게 된다. 또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깨닫게 된다. 어떤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어떤 것이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분별할 줄 알게 되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릇된 것인지 알게 된다. 하지만 사람이 닿을 수 없고 꿰뚫어 볼 수 없는 일들도 있는데,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주어야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아직 사람에게 알려 주지 않은 일, 미지의 일은 사람이 알 수 있겠느냐? 사람이 예측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이 밖에,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진리를 얻어 진리 실제를 갖추고, 수많은 진리의 본질을 깨닫고, 시시비비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사람에게는 모든 사물을 통제하고 주관할 능력이 있겠느냐?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람과 하나님의 차이점이다. 피조물은 영원히 진리의 원천으로부터 진리를 얻을 뿐이다. 사람에게서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사람이 진리이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공급해 줄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차이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너는 진리를 받아들이기만 할 수 있을 뿐, 진리를 공급해 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너를 진리를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너를 진리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진리의 화신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공급하는 원천이요, 모든 사물을 주관하고 주재하는 원천이요, 또한 만사 만물을 판단하는 유일한 준칙이자 기준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화신이다. 적그리스도의 부류는 흔히 이 점에 불복한다. 그들은 지식은 힘이고 경험은 사람이 자신을 무장해 강하게 만드는 무기라고, 사람이 경험과 지식, 교훈을 갖추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사람의 운명을 통제하고 사람의 사상을 통제하거나 좌우하며 나아가 사람의 행위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런 것들이 사람을 가르치고 사람의 생각과 성품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생각이냐? (적그리스도의 생각입니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생각이다. 하나님은 왜 인류의 운명을 주재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본질은 진리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할 수 있다.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이 점을 보지도, 인식하지도 못하며 더욱이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그는 사람과 지식, 사회에서 비롯된, 사악한 인류가 숭배하는 것들을 진리로 여기고 그런 것들로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여 교회 안에서, 하나님 선민 사이에서 한자리 차지하려 한다. 그들이 사람을 미혹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이 그런 것들을 배우고 갖추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들이 그에게 순종하고 그의 말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의 말을 따르도록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그에게 통제당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에게 통제당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가 한 마디만 해도 사람들이 그의 말을 따르고 그의 지배를 받아 그의 도구이자 노예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의 관점과 소위 경험, 지식, 교훈을 받아들이면 그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그를 숭배하면 그의 말을 따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말을 따르면 그가 사람들을 휘두르기 편해지지 않겠느냐? 그는 목적을 이루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일단 사람들이 그의 말을 따르기 시작하면 그는 하나님에게서 사람들을 가로채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는 기뻐한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의 목적이다. 사실, 그도 마음속 깊이 자신이 진리의 화신이고 진리라고 아주 분명하게 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겠느냐? 그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은사에서 비롯된 것들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고 그런 것들의 힘을 빌려 사람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손아귀에 꽉 움켜쥐려 한다. 그런 경험과 지식, 교훈 중 일부는 분명히 사람을 속이는 마귀적인 말이고, 일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 함정이 숨겨져 있고 계략과 묘책이 들어 있어서 간파하지 못하면 미혹된다. 미혹되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며, 사람의 지식과 경험, 교훈을 진리로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은 옆으로 제쳐 놓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매우 모호해하면서 그런 지식과 경험은 유독 신경 쓰고 떠받들며 나아가 공들여 실행하고 이행하게 된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의 행동이 이루려는 목적이다. 만약 그에게 사람을 휘두르고 통제하여 순종시키려는 야심이 없었다면 그가 그런 것들을 갖추었겠느냐? 그는 공들여 갖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목표가 있고 목적성이 아주 명확하다. 그의 명확한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통제하려는 것이다. 그가 한 무리 사람을 통제하려는 것이든, 일부 사람을 통제하려는 것이든 만약 이론적 기초가 없다면 사람을 통제할 수 있겠느냐? 그는 먼저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가장 부합하고 사람의 구미에 가장 잘 맞는 사상과 이론을 찾아 무리 속에서 전력을 다해 퍼트려야 한다. 사람을 세뇌시키고 설득하며 끊임없이 주입하고 들려주고 숙지시켜 그런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 사실 사람은 매우 수동적으로 주입되고 세뇌되며, 부지불식간에 그런 관점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사람 안에는 옳고 그름과 시비를 분별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기 전에 사람은 그런 것들에 저항할 능력도, 항체도 없다. 사람은 그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을 받아들이고 나면 금세 그런 것들의 포로가 된다. 포로란 무엇이겠느냐? 그런 관점을 받아들인 뒤 그런 것들이 옳다고 점점 더 철저히 믿게 되고, 그런 관점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설득함과 동시에 남을 설득하게 된다. 이게 바로 미혹되고 통제되는 것이다. 사탄이 사람을 미혹할 때는 바로 이렇게 목적을 이룬다.

세상에서 일부 특수한 업무 기술을 배웠거나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 오고 나서 한 가지 공통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그 생각으로 인해 한 가지 공통적인 모습을 보인다. 어떤 생각이겠느냐? 그들은 자신이 사회에서는 엘리트라고 생각한다. 엘리트란 무엇이냐? 무리에서 비교적 뛰어난 사람이다. 그들은 일부 특수한 고등 교육을 받았고, 사회에서 그들의 재능과 자질, 은사는 출중하다. 출중하다는 것은 무엇이냐? 한 무리 사람들 속에서 사고와 지능, 말재주가 뛰어나고 일부 사물이나 기술에 대해 특수한 이해력을 가진 것을 출중하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사회에서 엘리트로 불린다. 모든 국가에서 그런 사람들을 양성하는데, 양성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국가를 더 빠르게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들이 각자의 직무에 뛰어들면 각 업계가 더 빨리 발전할 수 있다. 그럼 이런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는 높겠느냐, 아니면 낮겠느냐? (높습니다.) 분명 평범한 지위는 아닐 것이다. 특수한 재능을 어느 정도 갖추었고, 일부 특수한 지식을 배웠으며, 특수한 교육도 좀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자질과 재능, 학습한 지식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그들의 심리는 어떻겠느냐? 그들이 가장 먼저 하는 생각은 무엇이겠느냐? 그는 먼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부잣집은 망해도 삼 년을 간다잖아. 하나님을 믿은 뒤로는 세상을 추구하지 않게 됐고 세상에서 환영도 못 받게 됐지만 내가 받은 특수한 교육과 학습한 지식, 갖춘 재능으로 보면 당신들 중에서는 내가 지도자가 돼야 해. 하나님 집에서 대들보나 기둥 역할을 해야 하고 리더나 인솔자가 돼야 한다고.’ 그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는 무슨 근거로 이렇게 생각하겠느냐? 만약 그가 농민에 불과하다면 감히 이렇게 생각하겠느냐? (감히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왜 감히 그러지 못하겠느냐? (그럴 밑천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할 밑천이 없다. 그럼 어떤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 어느 정도 지식과 재능, 은사, 그리고 소위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 집에 와서 생각한다. ‘나는 이제 세상을 추구하지 않을 거야. 세상은 너무 사악하니까. 이제 하나님 집에 와서 추구하자. 하나님 집에 오면 최소한 교회의 리더 일꾼 정도는 맡아야 해.’ 그가 좋은 마음을 품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왜 좋은 마음을 품지 않겠느냐? 그가 학습한 것들과 그가 갖춘 사회적 지위가 그를 해치기 때문이다. 만약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는 평생 그런 지위에서 내려올 수 없다. 그는 늘 자신이 구름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하나님이 보기에 그는 평범한 피조물과 다르지 않다. 그는 늘 자신을 구름 위에 올려놓는데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느냐? 떨어지는 순간 크게 다쳐서 목숨도 부지하기 어렵다! 이런 사람은 왜 자신이 당연히 높은 지위를 가져야 하고 당연히 숭배받아야 한다고, 많은 사람이 당연히 그 위주로 행동해야 한다고, 무슨 일이든 당연히 먼저 그의 의견을 묻고 경청해야 하며 당연히 그를 먼저 떠올리고 그를 최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겠느냐? 그는 왜 ‘당연히’라는 생각을 그토록 많이 하겠느냐? 그가 자신이 갖춘 사회적 지위와 지식, 그리고 학습한 특수한 것들을 아주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한다. ‘진리를 아무리 많이, 대단하게 말한다 해도 내가 가진 것들은 여전히 가치 있어. 진리보다 가치 있고 진리가 대체할 수 없는 거라고. 나는 사회에서 기업 총수로 수천 명을 관리했어. 내가 팔 한 번 휘두르면 모두가 내 말을 들어야 했지. 그렇게 큰 권력을 가졌으니 신분과 지위가 얼마나 높았겠어! 하나님 집의 이런 보잘것없는 인물들 중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한 바퀴 돌아봐도 특별한 인물은 별로 없네. 내게 관리를 맡기면 식은 죽 먹기일 텐데. 별것도 아니라고!’ 네가 그에게 “좋아요. 그런 야망이 있는 것도 괜찮아요. 그럼 당신이 욕망을 채울 수 있도록 제가 당신을 교회 리더로 추천할게요. 당신이 이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진리를 실행할 줄 알게 하고, 연약하고 소극적이고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을 모두 붙들어 주세요.”라고 말하면 그는 “그거야 쉽죠. 저는 기업을 경영할 때 사람을 설득하는 일만 했거든요. 자신 있어요.”라고 한다. 한 교회의 30명 넘는 사람을 그의 손에 맡기고 나면 어떻게 되겠느냐? 두 달도 되지 않아 그중 연약한 사람은 더 연약해지고 소극적인 사람은 더 소극적으로 변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사람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예배만 하면 졸며 상부의 설교조차 들으려 하지 않는다. 누가 “당신은 꽤 능력 있지 않아요?”라고 하면, 그는 “맞아요. 저는 기업 총수니까 당연히 능력 있죠!”라고 한다. 아무리 세상에서 총수였다 한들 소용없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교회 사역에는 문외한이다. 그에게 복음 사역을 맡기면 표면적이고 소용없는 형식적인 일만 하고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며, 한 교회의 몇십 명조차도 잘 양육하지 못한다.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그렇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사회에서 한때 기업 총수나 고위 임원이었던 사람이 왜 하나님 집에 와서는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겠느냐? (성령이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지키지 않는 것도 한 측면이다. 주된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그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내적 상태와 패괴 성품,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사람을 폭로하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말씀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그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어서 어떻게 된 일인지 꿰뚫어 보지 못하고 겉으로만 맹목적으로 행동한다. 그는 교회 사역을 하는 것이 세상에서 기업을 경영하는 것과 비슷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열정을 북돋우면 사역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사람을 설득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처세술을 활용해 상부를 매수하고 하부를 회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이 돈을 벌 수만 있으면 모두 자기 말을 듣고 자기를 따를 것이라고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한다. 외부의 일은 진리와 관련이 없다. 하나님을 믿으면 무슨 일을 하든 모두 진리와 성품 변화에 관련되는데, 세상에서 쓰던 수법을 쓴다고 통하겠느냐? (통하지 않습니다.) 통하지 않는다. 사람의 내적 상태와 연약함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어떻게 사람을 잘 붙들어 줄 수 있는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념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사람이 패괴 성품을 드러낼 때 어떻게 자신을 인식하게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정직한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고 되는대로 규례를 적용한다. 예를 들어, 누가 문외한이거나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말을 한 마디 하면 그는 그 사람이 자질이 떨어지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이리저리 되는대로 규례를 적용해 사람이 길을 잃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휘저어 놓아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도 기운이 빠지게 하고, 소극적인 사람은 더 소극적으로 변하게 한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교회를 이끌게 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게 낫다고 말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겠느냐? 그가 교회를 이끌면 사람들의 마음을 흩트리니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왜 믿으려고 하지 않겠느냐? 사람은 원래 명확한 이상(異象)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그렇게 행동하며 사람을 휘저어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다. 본래 사람은 마음속에 진리가 없고 도리만 깨달을 뿐인데, 그가 휘저으니 더욱 모호해지고, 성령 역사도 종잡을 수 없게 되며, 과연 하나님이 있는지도 좀 헷갈리게 된다. 그럼 그는 어떤 행동 방식을 써서 사람을 그 지경으로 이끌었겠느냐? 예를 들어,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라는 말이 진리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는 네가 진실로 깨달은 것과 인식한 것, 체험한 것으로 이 말을 논증해 형제자매가 그 말이 진리이고 옳다고 더 확고히 인정하게 하고, 인류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됐다고 확신하게 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더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 사람은 징계를 받거나 고난을 겪고 박해를 당해도 마음속에 힘이 생긴다. 이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뭐라고 말하느냐?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1억 년 전의 인간은 부족 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그가 이렇게 지식을 과시하며 역사(歷史) 얘기를 하자 다들 듣고 어리둥절해서 말한다. “인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 말을 들으니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네요. 그럼 사람은 원숭이에서 진화한 게 아닐까요?” 보아라, 그는 사람을 어디로 이끌었느냐? 이는 사람을 해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걸핏하면 그의 지식을 자랑하고 역사나 철학 얘기를 한다. 그리고 그가 세상에서 관직에 오른 사람들과 어떻게 왕래하고 서로 결탁했는지 이런 것들을 자랑한다. 그가 이렇게 자랑하는 걸 들으면 원래 분량이 작고 연약하며 믿음도 작은 일부 형제자매의 마음은 어디로 달아나겠느냐? (세상으로 달아납니다.) 그렇다. 이는 무슨 뜻이냐? 그 사람들을 그에게 맡기면 그가 망쳐 버린다는 뜻이다. 그는 분명 문외한이고, 생명 진입에 관한 일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본직 사역이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했고, 생명 영 안의 일이나 성품 변화에 관한 일은 더더욱 깨닫지 못했다. 이런 것들은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으로 사칭하고 목자가 되어 하나님 선민을 이끌려 한다. 황당하지 않으냐? 만약 네가 생명 영 안의 일을 모른다면 리더로 뽑혔을 때 너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는 문외한이고, 교회를 이끌어 본 적도 없어요. 저는 구해야 해요. 사역 지침에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해요. 그리고 잘 아는 사람을 찾아 어떻게 사역해야 하는지 교제하거나 진리를 깨달은 형제자매와 협력해야 해요.” 이게 올바른 태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한사코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이 있다. “저보고 다른 사람과 협력하라고 하는데, 누가 저만큼 자격이 있겠어요? 저만큼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있겠어요? 저는 사회에서 상당히 명망이 높았어요. 누구든 절 보면 어느 정도 체면을 세워 줘야 했죠.” 이렇게 허풍을 떨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한다. 그처럼 교회를 이끌면 형제자매가 진리 실제에 진입할 희망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없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람들이 무슨 일이든 그에게 보고하게 한다. 이 마귀는 대학을 며칠 다니고 지식을 좀 갖추었다고 사회에서 공공연히 사기를 치고 어떤 나쁜 짓도 서슴지 않는다. 약간의 생존 수단이 있으면 하나님 집에 와서 명성을 쌓으려 하고, 지위를 얻어 가문을 빛내기 위해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하면서 하나님 선민이 모두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따르게 하려 한다. 그에게는 이 ‘진리의 화신’이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바로 이런 것이다. “당신들은 제 생각, 행동 방식, 관점 하나하나 다 진리로 여기고 지켜야 해요. 규칙을 하나 정해 줄게요. 5위안 이하의 영수증은 다 제게 보고하세요.” 누가 “5위안은 보고할 필요 없죠. 저희도 권한 범위가 있잖아요. 저희도 원칙대로 하면 안 되나요?”라고 하면 그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래서야 되겠어요? 이건 중요한 일이에요. 제가 리더니까 제게 결정권이 있다고요!’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사람을 통제한다. 나쁜 짓이나 사람을 기만하는 짓은 무엇이든 저지를 수 있다. 남을 속이고 해칠 때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가슴도 두근거리지 않으며, 속으로 전혀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하나님 집에 왔을 때 지위를 하나 주면 대담하게 차지하고, 일단 지위를 차지하면 내려오려 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순종하도록 자신이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하려 한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긴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지는 않고 마지못해 본분을 이행한다. 그저 힘써서 복받을 생각만 하지 진리에 공을 들이려 하지는 않고, 늘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그저 성과를 조금 내서 제명되지 않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그러나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든 말든,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든 말든 하나님은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준다. 하나님은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거나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한다고 해서 너를 정죄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계속 너를 감찰하면서 네가 과연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진실로 회개해 올바른 인생의 길을 걸을 수 있는지 살핀다. 그것은 네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러 올 때는 아무 진리도 깨닫지 못한 상태지만 자주 설교를 듣고 예배하고 교제하면서 점차 진리를 깨닫게 된다. 마음도 점점 밝아져서 자신이 너무도 많이 부족하고 아무 진리도 갖추지 못했으며 본분을 이행할 때도 원칙 없이 그저 자신의 뜻대로 일을 좀 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러고는 그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마음속으로 뉘우치면서 진리에 공을 들이기 시작하고, 본분 이행도 점점 성과를 내게 된다. 이러면 그는 생명 진입이 있을 뿐 아니라 본분 이행도 점차 합격점에 이를 수 있다. 이게 바로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다. 진리를 점차 명확하게 깨닫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패괴 표출도 분명히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의지할 수 있게 되고, 패괴를 벗어 버리고 진리를 실행하며 진리 추구의 길을 걸으려 한다. 이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생명이 점차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변화가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럴 리 없다. 어떤 사람은 유독 교만하고 방자하다. 그는 하나님 집에 와서 특히 본분을 이행한 뒤 그 오만한 태도를 드러내는데, 두 손을 허리에 얹거나 팔짱을 낀 채 모든 것에 불복하고 분개한다. 그는 왜 그렇게 교만하겠느냐? 그는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서 나는 세상과 가정, 일을 모두 버렸어. 이 정도면 큰 대가를 치르지 않았나? 내가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많이 버렸으니 하나님께서도 내게 어떤 보상을 좀 해 주셔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내 사회적 지위와 수입을 고려하면 하나님 집에서 최소한 내게 같은 대우를 해 줘야 하지 않나? 이제 나도 본분을 이행하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순 없나? 나는 특별한 인재이고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니까 하나님 집에서 지위를 가져야 해. 다른 사람이 리더를 맡을 수 있다면 나도 맡을 수 있어. 내 지위는 남보다 낮으면 안 되고 내가 누리는 대우도 보통 사람보다 좋아야 해.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중에 복을 받고 좋은 종착지를 얻게 해 주신다고 하나님께서 내게 약속하실 수 있는지야.’ 그의 마음속 생각을 통해 그는 하나님과 거래하러 온 것이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그의 이성은 바울에 훨씬 못 미치고 아예 비교도 안 된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왜냐하면 바울은 수년간 복음을 전파하며 분명 많은 고생을 견뎠을 뿐 아니라 복음 전파의 성과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최소한 유럽 대부분에 발자취를 남겼고, 유럽 일대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이 점에서 평범한 적그리스도는 바울만큼 이성적이지도 못하고 바울만큼 힘쓰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금 언급했던 그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고 나서 안하무인이 되었으니 이성이 너무 없는 것 아니냐? 그는 전혀 이성이 없다. 마치 도적처럼 일단 복받을 기회를 잡으면 절대 놓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늘 닥치는 대로 하나님 집에서 사람들 앞에 나설 기회를 찾는다. 설사 팀장이나 책임자를 맡는 것일 뿐이더라도 말이다. 아무튼 그는 하나님 집에 와서 평범하게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은 내켜 하지 않는다. 누가 자신은 평범한 피조물이라고, 수많은 중생과 마찬가지로 그저 평범한 피조물일 뿐이라고 인정하든 말든, 그는 그런 관점을 영영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절대 자신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하고 하나님이 그에게 특별한 은혜와 축복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또 하나님 집에서 특별한 지위의 복을 누리려 하면서 하나님 집이 그의 재능을 의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남이 그의 사역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더더욱 허락하지 않으며, 그가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고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를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무리한 요구가 아니겠느냐? 이 사람이 이성이 있겠느냐? 이런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 교회에서 어느 정도 비율을 차지하겠느냐? 이런 사람은 늘 자신이 어느 정도 능력 있고 재능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을 아주 뛰어나다고 치켜세운다. 그럼 그가 말하는 재능이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큰소리치고 허튼소리 할 줄 아는 것, 보는 사람마다 말이 달라지고 속이는 기술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것이다. 그는 그게 재능이고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능력으로 공공연히 사기를 치려 한다. 진정한 재능이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특별한 기능을 가진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면서 각 부류의 사람에게 서로 다른 재능을 주었다. 혹자는 문학에 재능이 있고, 혹자는 의학에 재능이 있으며, 혹자는 기술 연구에 재능이 있고, 또 혹자는 과학 연구에 재능이 있는 식이다. 사람이 지닌 이 재능들은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이니 우쭐거릴 만한 것이 못 된다. 또한, 어떤 재능을 갖고 있든 그것이 진리를 깨달았다는 의미는 아니며, 진리 실제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어떤 재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됐다면, 마땅히 그 재능을 본분 이행에 써야 하며, 이는 하나님이 열납하는 일이다. 만약 어떤 재능이 있다고 우쭐거리거나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든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이성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기술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집에 와서는 자기가 남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며 특별 대우를 받고 싶어 한다. 그들은 평생 가는 철밥통이 있다고 여기면서 그 기술을 밑천으로 삼는데, 이는 너무도 교만한 것이다! 그럼 이러한 은사와 재능을 어떻게 봐야겠느냐? 그것들이 하나님 집에서 쓸모가 있다고 해도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도구에 불과할 뿐, 진리와는 상관이 없다. 은사와 재주가 아무리 많아도 기껏해야 사람의 재능에 불과하며, 진리와는 어떤 관계도 없다. 네게 은사와 재능이 있다고 해서 진리를 깨달았다는 의미는 될 수 없으며, 진리 실제가 있다는 의미는 더더욱 될 수 없다. 만약 네가 은사와 재능을 본분 이행에 발휘해서 그 본분을 잘 이행했다면, 그것은 올바른 곳에 사용한 것이며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그 은사와 재능을 자신을 나타내고 증거하며 독립 왕국을 세우는 데 쓴다면 그 죄는 매우 커지게 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흉이 된다. 하나님이 준 은사를 본분 이행과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 쓰지 못한다면 이는 너무도 양심과 이성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께 큰 빚을 지는 것이며, 대역무도한 행위이다! 하지만 네가 은사와 재능을 아무리 잘 발휘한다고 할지라도 진리 실제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진리를 실행하고 일 처리에 원칙이 있어야 진리 실제를 갖춘 것이다. 은사와 재능은 영원히 은사와 재능일 뿐, 진리와는 무관하다. 네게 얼마나 많은 은사와 재능이 있든, 네 명성과 지위가 얼마나 높든 영원히 네게 진리 실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은사와 재능은 영원히 진리가 될 수 없으며, 진리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적그리스도 부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몹시 중시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연기에 재능이 있어서 하나님 집에서 영화를 찍을 때 한 번 주연을 맡은 뒤로 거만을 떤다. 화장할 때는 세 명이 붙어 화장을 해 줘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는 원래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이제 하나님을 믿고 배우의 본분을 이행하더니 거만을 떠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 아니겠느냐? 내가 보기에 그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다! 그는 외모도 특별하지 않고 연기도 평범하다. 그런데 특정 역할에는 어울리기 때문에 그를 또 작품에 출연시킨 것이다. 이는 그를 높여 준 것 아니냐? 본분 이행의 기회를 줬더니 그는 거만을 떨었고, 연기할 때 다른 사람에게 차를 대접하고 물을 따르며 시중을 들게 하여 보고 있던 형제자매를 화나게 했다. 내가 “그를 정리해 내보내거라!”라고 하자 교회는 그를 정리해 내보냈다. 이런 사람은 제명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는 교회에서 영화를 찍을 때 그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감히 거만을 떤 것이다. 그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는 못했다. 이게 바로 본성이 부추긴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지식과 재능, 학문과 경험을 사랑한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몹시 중시하는 반면 가장 귀중한 것, 즉 진리는 소홀히 한다. 그들은 하나님 집에서는 진리가 권세를 잡는다는 것,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지식과 학문이 아무리 뛰어나고 말재주가 아무리 좋아도 굳게 설 수 없으며 조만간 드러나게 되고 도태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 정도 도리는 사람이 깨닫기 쉽지 않으냐? 하나님을 여러 해 믿고도 이 정도 일조차 간파하지 못한다면 그건 멍청이에다 분량도 전혀 없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사리에 밝다면 그토록 교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바로 마귀와 사탄이 본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내가 이 일을 직접 짚어 주어 너희도 이 일을 이해할 수 있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도 이 일을 어느 정도 분별하고 간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내가 명확히 짚어 주지 않는다면 너희들이 이렇게 분별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그를 제명할 수 있겠느냐? 다들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하니 내가 직설적으로 말해 주어야 한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너희가 깨달은 그깟 도리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적그리스도의 부류는 늘 자신이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은 대학을 졸업했고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이 풍부하며 뛰어난 학식과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과 자신이 학습한 영적 이론을 지극히 사랑하고 중시하며 나아가 그런 것들을 진리로 여겨 대한다. 심지어 그들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지식과 경험으로 주위 사람을 지도하고 미혹하고 훈도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들은 자신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자주 이야기하고 그런 것들로 남을 설득하거나 굴복시켜 남들에게 우러름과 숭배를 받는다. 그런 ‘영광스러운’ 역사에는 무엇이 있겠느냐? 누군가 말한다. “저는 대학에서 강사로 일한 적이 있어요. 제 학생은 모두 석사나 박사였죠. 제가 강의할 때마다 강의실에는 빈자리가 없었고 쥐 죽은 듯 조용했어요. 모두가 숭배하고 우러러보는 눈빛으로 저를 쳐다봐도 저는 긴장하지 않았죠. 얼마나 카리스마 있어요! 저는 그런 재능과 배짱을 타고났어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는 14살 때부터 차를 운전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차를 몰았어요. 운전 기술이 뛰어나죠.” 그의 말은 무슨 뜻이겠느냐? 이런 뜻이다. ‘겨우 며칠 운전한 니들이 뭘 알겠어? 나는 평생 차를 운전한 숙련된 기사야. 별의별 경험을 다 했지. 앞으로 모르는 게 있으면 내게 물어보고 내 말을 전부 따라야 해.’ 적그리스도의 부류는 능력이 좀 있으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신비화하며 자신을 드러내고 증거하여 남에게 우러름과 숭배를 받는다. 이런 사람은 장점이나 은사가 좀 있다는 이유로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남을 지도하려 한다. 누가 그에게 문제를 물어보면 그는 지위에 서서 남을 훈계하며, 훈계한 뒤에도 그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그 사람은 자질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사실은 그 자신이 알아듣게 말하지 못한 것이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고장 난 기계를 수리하지 못하는 걸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왜 또 못 고치죠? 다 알려 주지 않았나요? 제가 얼마나 명확하게 말했는데요. 그렇게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다니, 자질이 너무 떨어지네요. 매번 가르쳐도 못하잖아요.” 남이 그에게 처리하게 하면 그는 한참을 보고도 어떻게 고치는지 모르면서 그가 못 고친다는 걸 남이 알지 못하게 숨긴다. 그는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게 한 다음 혼자 몰래 궁리하고 연구하지만 여전히 고칠 줄 모르고, 결국 엉망으로 해체해 놓고는 다시 조립하지도 못한다. 게다가 누가 볼까 봐 두려워 물건들을 숨겨 놓는다. 어떤 일을 못 하는 게 창피한 것이냐?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어떤 일을 못 하는 건 창피한 것이 아니다. 넌 보통 사람이고 아무도 너를 우러러보거나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마라. 보통 사람은 보통 사람일 뿐이다. 못 하면 못 한다고 하면 되지 왜 위장을 하느냐? 늘 위장하면 사람들을 역겹게 하고 언젠가는 결국 탄로 난다. 그때가 되면 네 존엄과 인격은 사라질 것이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다. 그는 늘 자신이 만능이고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할 줄 모르는 것이나 불가능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면 골치 아프지 않으냐? 그가 정직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도 이 분야의 기술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경험만 조금 있을 뿐이에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직면한 새로운 문제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몰라요. 우리가 본분을 잘 이행하려면 업무 지식을 좀 배워야 해요. 업무 지식을 파악하면 본분 이행에서 성과를 이룰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 본분을 우리에게 맡기셨으니 우리는 그걸 잘 이행할 책임이 있어요. 우리는 본분에 대해 책임감 있는 태도를 가지고 업무 지식을 학습해야 해요.” 이것이 진리 실행이다.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이성적이라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는 이 정도밖에 못 해요. 그러니까 저를 우러러볼 필요 없어요. 저도 거만 떨 필요 없죠. 그럼 마음이 홀가분하잖아요? 늘 외식하고 위장하면 너무 괴로워요. 우리 못 하는 건 같이 배우고 조화롭게 협력해서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해요. 우리 모두 책임감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요.” 이를 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저 사람은 나보다 낫네. 일이 생겼을 때 무턱대고 억지를 쓰지도, 남에게 미루거나 책임을 회피하지도 않고 스스로 짊어진 채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로 행동하잖아. 좋은 사람이야. 사역이나 본분을 진지하게 책임지니까 믿을 만해. 하나님 집에서 이 중요한 사역을 그에게 맡긴 건 옳아. 하나님은 정말로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하시는구나!’ 그가 그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기술도 향상되고 다들 그를 칭찬한다. 무엇 때문에 칭찬하겠느냐? 첫 번째, 그는 본분을 대할 때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를 지녔다. 두 번째, 그는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실제적인 것을 추구하며 배우기 좋아하는 태도를 지녔다. 세 번째, 성령의 인도와 깨우침이 있다는 것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 이는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는 패괴 성품과 결점이 있고 할 줄 모르는 일도 많지만 그의 실행 길은 옳다. 그는 위장하거나 기만하지 않고,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로 본분을 대하며, 갈망하는 태도, 경건한 태도로 진리를 대한다. 적그리스도의 부류는 영영 그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은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의 생각과 영원히 다르기 때문이다. 왜 다르겠느냐? 그의 내면에는 사탄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사탄 성품에 기대 살아가는 것은 권력을 잡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그는 늘 여러 방식으로 음모와 계략을 쓰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사람을 미혹해 남들의 숭배와 추종을 받으려 한다. 따라서 그는 진실을 감추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위장하고 기만하고 거짓말하며 남을 속인다. 이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는 뭐든 옳고 뭐든 할 줄 알며 뭐든 가능하다고, 남보다 똑똑하고 지혜롭고 더 많이 안다고, 무슨 일에서든 남보다 낫고 남보다 뛰어나다고, 나아가 어떤 무리에서든 그는 출중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그에게는 이런 것이 필요하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다. 그래서 그는 사칭하는 것을 배우고 다양한 행동 방식과 모습을 보인다.

생각해 보아라,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이 사칭하는 것을 좋아하겠느냐? 그는 어떤 사람으로 사칭하겠느냐? 그는 마귀나 부정적인 인물로 사칭하지 않고, 뛰어나고 좋고 아름답고 선하며 사람들이 숭배하고 우러러보는 사람으로 사칭한다. 그는 이렇게 사람들이 칭찬하고 인정하는 사람으로 사칭한다. 그가 무엇이든 알고 이해하는 척, 진리를 갖춘 척, 긍정적인 인물인 척, 진리 실제인 척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 아니겠느냐? 그에게 그런 실제나 본질이 있겠느냐? 없다. 없기 때문에 사칭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 그가 진리 실제를 갖췄으니 진리의 화신일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그런 주장이 성립하겠느냐? (성립하지 않습니다.) 진리 실제를 조금 갖췄다고 해도 결코 진리의 화신은 아니다. 따라서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하는 사람은 모두 교만한 자이고 그릇된 존재이다! 사람이 진리 실제를 조금 갖췄다고 해서 감히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하는 것은 물 한 방울에 불과한 사람이 감히 망망대해인 척하는 것과 같다. 이는 교만하기 그지없지 않으냐? 후안무치하지 않으냐? 사람이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하려면 그런 척할 밑천이 있어야 하는데, 적그리스도는 무엇을 가지고 사칭하느냐? 방금 말했던 지식, 경험, 교훈 같은 것들을 가지고 사칭한다. 그 안에는 사람이 배운 특별한 기술과 재능, 그리고 선천적으로 갖춘 은사가 포함된다.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갖춘 사람도 있고 설교하는 은사나 말재주를 갖춘 사람도 있으며 일부 특별한 업무 기술을 학습하고 숙달한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춤에 특히 뛰어난 사람도 있고 음악에 특히 뛰어난 사람도 있으며 미술에 특히 뛰어난 사람도 있다. 언어나 문학에 특히 뛰어난 사람도 있고, 정치를 잘해서 유독 사람을 잘 휘두르고 외교에 능한 사람도 있다. 아무튼 각 분야에서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다 포함된다. 이렇게 특수한 재능이나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나 고정적인 사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지역에서 생활하지만 옛날 얘기든 지금 얘기든 조리 있게 말하고 특히 말재주가 뛰어나다. 이렇게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 집에 와서도 안주하지 않고 어느 정도 야심과 욕망을 품게 되며, 서서히 그것들이 드러나게 된다.

적그리스도가 얼마간의 경험과 지식, 교훈을 갖췄다고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한다는 조항에 관해 방금 우리는 지식과 경험, 교훈의 범위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기서 했던 이야기의 초점은 무엇이냐? (사칭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핵심은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하는 것이다. 지식과 경험, 교훈 같은 것들은 모두 진리가 아니고 근본적으로 진리와 아무 관련도 없다. 심지어 그런 것들은 진리에 위배되고 하나님에게서는 정죄된다. 예를 들어, 지식의 경우, 역사를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인류의 역사와 어떤 국가나 민족의 역사, 현대사, 고대사, 나아가 일부 야사까지 이런 지식과 역사서는 모두 어떻게 생겨났느냐? (사람이 썼습니다.) 그럼 사람이 쓴 그런 것들이 진실한 역사에 부합하겠느냐? 사람의 사상 관점은 하나님의 행사 원칙이나 방식, 방법과 배치되지 않겠느냐? 그럼 사람이 하는 그런 말들이 진실한 역사와 관련이 있겠느냐? (관련 없습니다.) 관련 없다. 따라서 역사서에 아무리 사실과 일치하게 기재돼 있더라도 그건 지식일 뿐이다. 역사학자들의 말재간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역사를 아무리 논리적으로 명확히 얘기해도 듣고 나면 결국 어떤 결론을 얻겠느냐? (그런 일들을 알게 될 뿐입니다.) 그런 일들을 알게 될 뿐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것들을 얘기하는 것이 단지 네게 한 가지 일을 알려 주려는 것뿐이겠느냐? 그는 일정한 사상을 네게 주입하려는 것이다. 그가 주입하는 사상의 핵심은 무엇이냐? 우리는 그것을 분석하고 해부해야 한다. 그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입하려는 것인지 예시를 들면 너희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결국 한마디 말을 정리해 낼 수 있다. 인류의 역사가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한 가지 사실은 바로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지식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 지식은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방식이나 방법과 관련이 있느냐? (없습니다.) 사실상 상반되고 상호 위배되거나 저촉된다. 그럼 그가 네게 이것을 주입하는데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거나 이방인이라면 너는 듣고 나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너는 이 말을 어떻게 보겠느냐? 우선, 역사학자나 역사서는 그런 일들을 전부 열거하고 충분한 증거나 역사적 사건으로 이 말의 정확성을 증명한다. 너는 처음에는 아마 단지 책에서만 이 말을 배운 적이 있고 그저 이 말을 알고 있을 뿐일 것이다. 그런 일들을 알기 전에 너는 한 가지 차원이나 정도에서만 이 말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그런 역사적 사실을 듣고 난 뒤에는 이 말을 더 깊이 인정하고 수긍하게 될 것이다. 너는 절대 “그렇지 않은 일들도 있어요.”라고 말하지 않고 “맞아요. 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류는 그렇게 발전했어요.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됐다고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 일에 대해 그런 인지를 갖게 될 때, 너는 마음속으로 네 처신과 사업, 생활, 주위의 사람과 일, 사물을 어떤 관점과 태도로 대하겠느냐? 그런 인지는 네 태도를 바꾸지 않겠느냐? (바꿀 것입니다.) 일단 그럴 것이다. 그럼 어떻게 바꾸겠느냐? 네 인생 방향과 처세 방식을 인도하고 바꾸지 않겠느냐? 아마 예전에 너는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 ‘좋은 사람은 일생이 평안하다.’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된다잖아. 벼슬길에 오르고 싶으면 누구누구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해. 그는 내 편이 아니니까 그를 발탁해야 하더라도 발탁하면 안 돼.’ 이렇게 고민하면 네 태도는 달라지고 금세 바뀐다. 이런 변화는 어떻게 생기겠느냐? 네가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된다’는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생긴다. 너는 수많은 사실을 듣고 나서 이런 관점이 인류의 현실 생활 속에서 얼마나 정확한지 더욱 확신하게 되고, 네가 행동하고 처신할 때 이런 관점을 이행하여 앞으로의 생활과 앞길을 추구해야겠다고 깊이 느끼게 된다. 이런 사상 관점이 너를 바꾸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를 바꾸는 동시에 너를 패괴시킨다. 바로 그런 것이다. 이런 지식이 너를 바꾸고 패괴시킨다. 그럼 근본적으로 보면 아무리 사실과 일치하게 역사를 말하더라도 결국 그런 말을 정리해 내고 그런 사상을 네게 주입한다. 그럼 그 지식은 진리의 화신이겠느냐, 아니면 사탄의 논리겠느냐? (사탄의 논리입니다.) 바로 그거다. 내가 충분히 세세하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이제 이해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생을 두 번 더 살아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살아갈수록 자신이 어리석고 충분히 모질지 못하다고 느끼고 좀 더 모질고 약아야 한다고, 좀 더 음험하고 나쁘고 악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살인을 할 수 있다면 나는 방화를 하겠어. 그가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나는 열 명을 죽이겠어. 그가 감쪽같이 사람을 죽인다면 나는 사람을 해치고 나서도 그에게 알리지 않고 그의 가족이 삼대에 걸쳐 내게 감사하게 하겠어!’ 이게 바로 사탄의 철학과 지식, 경험과 교훈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사실상 해를 입히고 패괴시킨다. 따라서 이 세상은 어떤 지식을 전파하고 퍼트리든, 그와 동시에 네게 일종의 사상 관점을 주입할 것이다. 만약 네가 분별할 줄 모른다면 해를 입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런 지식은 민간에서 비롯된 것이든 정부에서 비롯된 것이든, 소수의 사람이 숭배하는 것이든 절대다수의 사람이 숭배하는 것이든 모두 진리와 무관하다. 진리는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다. 그것의 정확성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인정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 자체가 바로 진리이고, 아무도 그것을 바꾸거나 부인할 수 없다. 진리는 영원히 진리이다.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더 얘기해 보자. 하나님이 이 인류를 인도하기 시작한 이래 하나님에게도 역사와 장부가 생겼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보여 주려는 것은 진리이지만, 인류가 일을 바라보며 내리는 평가나 정설은 모두 진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인류는 왜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를 근거로 역사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냐? 인류가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며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는 그럴싸하고, 터무니없고, 황당한 이론을 정리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은 긍정적인 사물인데 사탄은 어떻게 말하느냐? 사탄은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주 예수가 사생아이며 사람에게서 태어났다고 모독한다. 사탄은 인류의 가장 더러운 말, 사람들이 증오하고 경멸하는 말을 주 예수의 출생에 사용한다. 이는 사실을 왜곡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은 하나님의 행사이다. 하나님이 행한 행사가 어떤 형식이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진리이며, 영원불변의 진리라는 점이다. 그럼 이토록 뚜렷한 사실을, 하나님이 예정하고 증거한 사실을 사탄은 왜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사탄은 왜 그 사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주 예수를 사생아이며 사람에게서 태어났다고 하겠느냐? (사탄은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적대시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일부러 깎아내리는 것이다! 이 일은 사탄이 가장 잘 안다. 그는 영계에서 분명히 봤다. 그러면 그는 왜 그러겠느냐? 그가 그렇게 하는 동기와 속셈은 무엇이겠느냐? 그는 왜 그런 말을 퍼트리겠느냐? 그는 일부러 하나님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깎아내리는 것이다. 깎아내리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들이 예수가 사생아라는 말을 듣고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예수를 믿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들이 전부 당신을 믿지 않는데 당신의 사역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진리는 영원히 진리이다. 당시에 인류 전체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도 결국 2천 년 뒤에는 주 예수를 따르는 자, 칭송하는 자들이 널리고 널렸고, 도처에 십자가가 높이 걸리게 되었으니 사탄은 실패했다. 사탄의 그 말이 쓸모 있겠느냐? (쓸모없습니다.) 따라서 사탄은 진리가 아니고 굳게 서지 못하며, 그가 하나님을 깎아내려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이 행사가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든 말든, 인류의 전통문화나 주장, 혹은 도덕과 윤리에 어긋나든 말든 하나님은 신경 쓰지 않는다. 하나님은 왜 신경 쓰지 않겠느냐? 이는 무엇과 관련 있겠느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데 사탄의 그 헛소리 한마디가 하나님의 사역을 무너뜨릴 수 있겠느냐? 이 일을 간파하지 못했느냐? (그렇습니다.) 만물이 모두 하나님 손에 장악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사탄이 그 헛소리를 한다고 해서 그 몇 글자로 하나님의 경륜을 무너뜨릴 수 있겠느냐? 가능하겠느냐? (불가능합니다.) 그는 목적을 달성하려 하겠지만 과연 달성할 수 있겠느냐? 진리는 영원히 진리이다. 그게 바로 진리의 힘이고, 진리의 힘은 사탄을 포함해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사탄은 아직까지도 그 말을 퍼트리지만 소용 있겠느냐? 소용없다. 은혜시대의 그 사역은 끝났고 주 예수의 복음은 이미 땅끝까지 두루 퍼졌다. 말세에 하는 심판의 새 사역이 시작된 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사탄은 진작 패배해서 치욕을 당했는데 이제 와서 노발대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소용없다. 따라서 논조가 어떻고 지식이 얼마나 뛰어나든, 그 논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관철되고 널리 퍼지든 다 소용없고 굳게 서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거침없기 때문에 사탄도 막을 수 없다. 몇몇 보잘것없는 하찮은 인물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가로막으려 하다니, 헛된 망상이다! 너희 중 많은 이들은 이런 유언비어를 접하고 사람을 미혹하는 사탄의 논조를 받아들이며 자라났기 때문에 머릿속에 사탄의 논리와 철학, 지식이나 과학 같은 것들이 가득하다. 결국 어떻게 됐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너희는 그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다. 사탄의 유언비어와 헛소리도 소용없다. 하나님 사역의 발걸음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조금도 가로막지 못했다. 각국의 하나님 선민이 모두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날마다 설교를 듣고 하나님을 위해 본분을 이행하고 증거하고 있다. 사탄은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말한다. “내가 사람을 미혹하는 말을 그토록 많이 했는데 왜 소용이 없지? 하나님 선민을 탄압하고 체포하고 해치는 일을 그토록 많이 했는데 왜 별로 효과가 없지? 어째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오히려 점점 늘어날까?” 사탄도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정말로 전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철저하게 치욕을 당했다. 그러니 이런 말이 있는 것이다. “사탄은 영원히 하나님에게 패배자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겠느냐? (사실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사탄과 모든 마왕은 다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있고, 하나님의 손안에서는 모두 봉사만 하는 존재이자 부각물이다. 이런 봉사만 하는 존재와 부각물이 우리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관련 없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을 믿는 것만 신경 쓰면 되고, 그와는 관련이 없다. 그가 제왕이든, 도적이든 모두 사탄에 속하고 전부 멸해져야 할 대상이다. 우리는 단지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영원히 사탄을 저버리면 되고, 오로지 하나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지식과 경험이라는 측면에 관해 예시를 하나 들었으니 아마 더 정확히 이해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 이런 것들을 교제하겠느냐? 한 측면으로는 들려준 사실과 실례를 통해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고 자신에게 있는 그런 측면의 적그리스도 성품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밖에 이렇게 얘기하면 제멋대로 못되게 구는 일부 사람들을 제약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본분을 이행할 때 경험에 의존하고 낡은 방식을 답습하거나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는 바람에 하나님 집 사역에 방해와 교란을 초래해서 결국 처리되는 몇몇 사람들이 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낡은 방식과 경험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고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어떻게 사람에게 요구하는지, 진리 원칙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와 같은 중요한 일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낡은 방식을 끈질기게 고집했다. 그 밖에도 “우리는 원래 이렇게 했어요.”, “우리 고향에서는 이렇게 했어요.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했어요.”라는 황당한 논리를 근거로 댔다. 그는 왜 늘 이런 말을 강조했겠느냐? 이는 그가 새로운 사물이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증거다. 그는 낡은 방식의 서툴고 낙후되고 황당한 부분을 간파하지 못했고, 새로운 방식도 있고, 그것이 더 선진적이고 정확하고 적절한 방식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늘 낡은 방식에 얽매이고 예전의 경험에 기대면서도 그것이 꽤나 선진적인 줄 알고, 자신이 진리를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그릇된 인간이 아니겠느냐? ‘우리 고향에서 하는 방식’, ‘내가 예전에 하던 방식’, ‘우리가 계속 해 오던 방식’과 같은 낡은 방식, 구닥다리에 속하는 것이 진리 원칙을 대체할 수 있겠느냐? 낡은 방식이 진리 실행을 상징할 수 있겠느냐?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간파하지 못했다. 이게 바로 고루하고 고집스러운 것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에게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이 너무나 어렵다! 새로운 사물이든, 예전의 낡은 사물이든 너는 그 일을 어떻게 대하느냐?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그런 일을 처리하는 근거는 무엇이냐? 만약 모두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그런 일을 어떻게 대하는 게 옳고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반드시 먼저 상대적으로 그런 업무를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자문을 구해야 한다. 고수를 찾기만 하면 길이 있다. 만약 고수를 찾지 못한다면 인터넷에서 자문을 구하거나 자료를 찾아 완벽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구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도록 해야 한다. 이를 두고 뭐라고 하느냐? 이를 실행 원칙이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한다.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고 경험도 풍부해. 이 분야에서 일하면서 상도 탔다고. 나는 이런 밑천을 가지고 있어. 이 사역을 나에게 맡겼으면 내가 책임자고 내게 결정권이 있어. 모든 걸 내가 결정할 수 있다고. 모두가 내 지휘를 따르고 내게 복종해야 해. 누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어. 나와 다른 소리를 내는 거라면 다들 잠자코 있으라고!’ 이 생각이 옳겠느냐? 옳을 리 없다. 네 태도, 네가 드러낸 성품에 문제가 있다. 너는 마음속으로 네가 이 부탁을 받아들이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들은 그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되고 네가 결정권을 가지려 한다. 이는 마치 너는 파트너도 필요 없고 남들이 내는 의견도 필요 없고 무슨 일이든 네 말만 따라야 하고 너 혼자 결정해야 하는 것과 같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이는 너무도 교만하고 비이성적이지 않으냐?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아마 너는 다른 사람보다 자질이 좀 더 좋고, 이해력이 좀 더 있으며, 그 일을 한 경험이 좀 더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네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점은 네가 갖춘 그 몇 가지 것들은 다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네가 자신이 자질도 좀 뛰어나고 이해력과 재능도 좀 있으며 지식도 약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것들을 진리로 여기고, 너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남들이 모두 네 지휘를 따르고 네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아니겠느냐? 만약 정말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면 네가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네가 네 은사를 진리로 삼는 것은 무엇이 잘못되었겠느냐? 네가 갖춘 자질과 이해력, 재능과 지식은 잘못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석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우리가 분석하는 것은 성품이다. 이런 요소 뒤에 네가 지니고 있는 패괴 성품, 즉 교만한 성품이나 독선적인 성품이다. 이런 은사들을 진리로 여겨서 이런 은사를 갖춘 것을 진리를 갖춘 것으로 생각하고, 은사로 진리를 대신하는 것은 어떤 성품이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모두 자신의 사상, 자신의 학문과 은사, 재능을 진리로 대하고, 자신이 그런 은사를 갖추었으면 진리를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순종하고 자신의 지휘를 따르며 자신의 권력에 복종하라고 요구한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 부분에서 잘못됐다. 네가 정말 진리를 갖추었느냐? 너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인식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없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너는 진리를 전혀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교만하고 방자하며 독선적으로 굴고, 자신이 진리를 갖추었으니 남들이 모두 네게 순종하고 네 지휘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바로 전형적인 적그리스도이다.

복음을 확장하는 사역에는 다양한 항목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다양한 기술과 업무에 대한 전문적인 학습을 요구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쉽게 치우친 길로 간다. 그들은 그저 업무나 기술을 파고들 뿐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냐? (그들은 은사에 집중하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들은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며, 심한 경우 적그리스도이다.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이러한 것들을 배운 다음 같은 기술과 업무를 아는 모든 이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들은 가장 우수하고 능숙하게 그것을 익혀 모든 일에서 다른 사람들이 의지해야 하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그들은 그 무리 가운데서 지도자가 되는 동시에 다른 이들이 자신들의 말에 따르게 하고 이것으로 진리 실행을 대체한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느냐? 단지 다양한 지식과 학문, 경험을 배우고 갖추려 하고, 또 자신의 자질과 재주, 은사에 의지해 모든 것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언젠가 그러한 길을 가게 된다. 이는 피할 수 없으며, 바로 바울의 길이다. 어떠한 영역이나 분야든, 네가 습득하게 된 경험이나 지식, 교훈이 다른 이들보다 더 많다고 해도 이것은 네가 진리를 깨달았거나 진리 실제에 진입했음을, 나아가 네가 진리를 얻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를 증명하기에 충분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관련된 업무 기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그런 본분을 이행하는 원칙과 그런 본분 이행에 대한 하나님 집의 요구 기준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업무에 관한 지식을 배우라고 하면 할수록 더 반감을 가진다. 그들은 본분을 이행할 수 없다고 느끼며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을 믿으면 이방 세상과 분리되어야 하는데, 왜 이방인의 기술과 지식을 배워야 하나요?” 그들은 배우기 싫어한다. 이것은 나태함이다. 그들은 무책임한 태도로 행동한다. 그들은 또한 충성심이 없으며 이 작은 일에서조차 노력하길 원하지 않는다. 기술과 업무를 배우는 출발점은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전에 접하지 않은 많은 지식이나 상식적인 것을 습득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바이며 사람에게 맡기는 부탁이다. 이러한 것을 배우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함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기술들을 배우고 나면 하나님 집에서 설 자리가 생긴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곤란하지 않으냐? 이러한 관점은 틀렸다. 이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으냐? 네가 그에게 준 권력이 크면 클수록, 그에게 준 사역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그에게 준 책임이 크면 클수록 그는 더 위험해진다. 이러한 위험은 왜 생기는 것이냐? 당연히 인간에게 패괴 성품, 적그리스도 성품이 있어 일을 할 때 방식만 구하고 과정만을 거칠 뿐 원칙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 하지 않으며, 진리 원칙을 더 많이 이해하고 파악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는 원칙을 구하지 않으며, 또한 본분 이행 과정에서 자신이 어떠한 패괴를 드러내는지, 어떠한 그릇된 관점이 생겨나는지, 어떠한 그릇된 내적 상태에 빠지는지 성찰하거나 반성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표면적 방식만을 중시하고, 본분에 필요한 각종 지식을 파악하고 갖추는 것만을 중시한다. 그는 어느 직종, 어느 업무에서든 지식이 모든 것을 선도하며, 지식이 있으면 자신이 강해져 사람들 무리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고 어떤 무리에서든 지식과 학력이 높은 사람이 지위도 높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병원을 예로 들어보자. 일반적으로 병원장은 각 방면의 업무에 출중하고, 기술적인 업무 능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 집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이 올바른 것이냐? 그렇지 않다. 이는 “하나님 집은 진리가 권세를 잡는다.”라는 말에 위배된다. 그는 하나님의 집은 지식이 권세를 잡으므로 하나님 집은 지식과 경험이 있고, 경력이 풍부하며, 충분한 밑천이 있는 사람을 세우고, 모두들 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관점은 그릇된 것 아니냐? 어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또 이렇게 행동한다. 이렇게 추구하면 그는 언젠가 벽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어째서 벽에 부딪히겠느냐? 진리를 좋아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으며, 진리를 전혀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많은 지식을 갖추었고, 하나님 집을 위해 어느 정도 대가를 치르고 공로도 좀 생기자 이것들을 무엇으로 변화시켰겠느냐? 밑천으로 변화시켰다. 이 밑천은 그에게 무엇이냐? 진리를 실행한 기록이자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진리를 깨달았다는 증거인데, 이렇게 변한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좋은 일이고 긍정적인 사물로 여겨진다. 당연히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지식을 진리로 잘못 생각한다. 이러한 잘못을 그는 여전히 좋게 여기는데 이것이 바로 위험한 신호이다. 어떤 부류의 사람이 이렇게 하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다 이렇게 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된 길에 들어서서 네가 되돌아오도록 잡아끌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네가 그에게 진리를 교제해 주고, 그의 내적 상태를 지적하고, 그를 폭로해도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과 대조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심각하게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지식, 경험, 교훈을 매우 자연스럽게 진리로 여긴다. 일단 이것들을 진리로 여기면 결국 필연적으로 어떤 상황이 나타날 것이다. 가령 하나님이 한마디 하고 그도 한마디 하면, 관점이 틀림없이 다를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누구의 말이 옳겠느냐?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한다. 이는 자신을 진리의 화신으로 생각하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마치 불교도처럼 드디어 수련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부인하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자신을 하나님으로 대하게 하고, 자신이 진리의 화신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어떤 방면의 지식이나 업무에 아주 정통한데 나는 그 방면에 대해 문외한이어서 내가 업무에 관한 일들을 그에게 물어볼 때가 있다. 이렇게 한 번 물으면 그는 으스대기 시작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냐? 내가 그에게 물어보는 게 잘못됐느냐?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나는 왜 그에게 물었겠느냐? 어떤 일들은 사역이나 업무와 관련 있기 때문에 모르면 물어보는 게 당연하다. 그 밖에도 나는 그가 경험이 있고 그 일을 이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 묻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나의 이런 본심과 방법은 옳지 않으냐? (옳습니다.) 여기에는 잘못이 없지 않으냐? 그럼 그가 이 일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냐? 그는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한 다음 어떻게 생각해야겠느냐? 어떻게 생각하는 게 옳고 어떻게 생각하는 게 옳지 않겠느냐?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은 또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어떤 사람은 내가 모른다고 하면 바로 이렇게 말한다. “아, 모르신다고요! 저희가 할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당신은 몰라요! 당신은 그 일을 몰라요. 당신은 뭘 모른다니까요!” 이렇게 말하면서 으스대기 시작한다. 으스대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겠느냐?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는 평소에는 꽤 점잖고 경건한데 왜 갑자기 으스대겠느냐? (지식을 좀 알고 경험이 좀 있다는 이유로 자신을 진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 예전에 다른 사람이 물어봤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내가 물으면 그는 ‘당신은 진리잖아? 그럼 뭐든 다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이런 것도 모를 수 있지? 당신이 모른다면 내가 당신보다 더 뛰어나겠군.’라고 생각하며 자랑하려 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영광이라고 느끼는 게 아니라, 사탄 성품이 폭발해서 갑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아주 위대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이는 착각이 아니겠느냐? 이는 얼간이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봐도 그렇다. 오직 얼간이만 이렇게 생각한다. 너는 업무를 좀 이해할 뿐이지 않으냐? 사람은 알지 못하는 일이 널렸으니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옷감에 대해 좀 알아서 만져만 봐도 어떤 소재인지 대충은 알 수 있다. 그에게 “옷감에 대해 잘 아시나봐요.” 하고 칭찬 한 마디만 하면 그는 “맞아요. 당신들은 배운 적이 없으니 모를 거예요. 저는 배워 봐서 당신네보다야 잘 알죠.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당신도 좀 배우긴 해야 해요.”라고 말한다. 상당히 역겹지 않으냐? 또 어떤 사람은 밥을 며칠 하고 나면 밥과 반찬을 얼마나 할 줄 아는지 자랑하면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또 어떤 사람은 농촌에서 며칠간 돌팔이 의사로 일을 한 적이 있다. 잔병을 앓는 형제자매가 안마를 해 주거나 침을 놓고 부항을 떠 달라고 하면서 완치될 수 있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그게 그렇게 쉽게 낫겠어요?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우리처럼 의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알아요. 사람 몸은 복잡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에도 비밀이 있으니 침을 놓고 부항을 뜨는 것도 상황을 봐야 해요.” 사실 그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병세가 어떤지도 정확히 말하지 못하고 고칠 수 있는 병도 몇 가지 안 된다. 그러나 체면을 차리느라 거드름을 피우고 으스대며 전문가 행세를 한다. 이 몇 사람의 모습을 보면 패괴된 인류는 모두 사탄 성품과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심한 경우는 끝까지 위장하고 행세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칭찬하든 말든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음흉한 생각이 하나 있다. 어떤 생각이겠느냐? ‘나는 영원히 그 누구에게도 내 진짜 신분과 재능을 알리지 않을 거야.’ 예를 들어, 그는 돌팔이 의사지만 늘 남들이 그를 명의라고 생각하게 하려 하고, 그가 돌팔이 의사라는 사실과 그가 진찰을 할 수 있는지 여부를 영원히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실상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는 자신을 어느 정도로 포장하겠느냐? 그는 자신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결점도 없다고, 배운 것은 모두 할 줄 알고, 남들이 필요로 하는 일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남들이 그에게 밥을 지을 줄 아는지 물으면 그는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산해진미를 한 상 차려 낼 수 있느냐고 하면 속으로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상대가 채근하면 “할 수 있죠!”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시키면 핑계를 대며 거절한다. 이는 사람을 속이는 것 아니겠느냐? 자신은 뭐든 잘하고 뭐든 가능하며 뭐든 할 수 있다고 위장하는 것은 얼간이 아니냐? 얼간이든 아니면 자질이나 재능, 혹은 은사가 조금 있든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이 가진 공통점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무엇이든 아는 척, 자신이 진리인 척 행세하려는 것이다. 비록 그는 자신이 진리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인 척,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척 행세하려 한다. 그 뜻인즉슨 그가 진리의 화신이라는 말이 아니냐? 그는 자신이 진리의 화신이고, 자신이 하는 말은 무엇이든 옳고 모두 진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상부에서 그에게 특별한 일을 처리하도록 안배하면 듣고 나서 생각한다. ‘이 일은 상부에서 분부했으니 내 권력이 커졌어. 내 재능과 권력을 보여 줄 기회가 생겼다고. 아랫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려 주겠어.’ 그는 형제자매와 접촉할 때 그들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가서 저 일을 처리하세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물으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할 거예요, 말 거예요? 안 하면 혼날 줄 알아요! 이건 상부의 명령이에요. 일을 그르치면 당신이 책임질 거예요? 상부에서 추궁하면 누가 이 책임을 질 수 있겠어요?” 형제자매가 “저희는 이 일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 일을 하는 원칙을 구하려는 거예요. 흐지부지 건성으로 아무렇게나 처리하고 싶지는 않아요. 무슨 일이든 다 원칙대로 처리해야죠. 무슨 일이든, 얼마나 조급하고 중요하든, 누가 맡긴 일이든 상관없이 원칙을 지키는 건 영원불변의 진리예요. 이건 우리의 본분이니 우리가 책임져야 해요. 원칙을 구하는 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거고요. 그러니 우리는 책임감 있는 태도로 구하고 명확히 알아봐야 해요. 이건 잘못된 게 아니라고요. 저희에게 반드시 명확히 말해 줘야 해요.”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일에 대해 할 말이 뭐가 있어요? 상부의 말씀이 틀릴 리가 있겠어요? 빨리 하기나 하세요!” 형제자매가 “상부에서 그렇게 말씀했으니 저희도 서둘러 처리할 거예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명확히 말해 주면 안 되나요? 구체적인 규정이나 내용은 없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당신들이 알아서 하세요. 상부에서도 제게 그렇게 자세히 말씀해 주지 않았어요. 그러니 스스로 고민해 보시라고요!”라고 답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냐? 우선 그가 이렇게 행동하는 동기나 원천이 무엇인지는 차치하고, 그의 이 성품이 어떤지 먼저 살펴보자. 그의 이런 행동 방식이 바람직하겠느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는 왜 이런 행동 방식을 보이겠느냐? 이런 행동 방식이 정상이겠느냐? (비정상입니다.) 비정상이다. 이는 정신이 비정상인 것이겠느냐, 아니면 성품에 문제가 있는 것이겠느냐? (성품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성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기회를 엿보아 행동한다’라는 말이 있다. 예전에 그는 권력을 ‘발휘’할 적절한 기회가 없었지만, 이제 그런 기회가 생기자 기회를 틈타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이는 어떤 성품이냐? 네가 상부로부터 어떤 본분을 받아들였든 일하는 원칙은 바뀌면 안 된다. 상부에서 네게 한 가지 사역이나 임무를 맡겼을 때 그건 단지 네게 하는 한 가지 부탁이자 네가 이행해야 할 본분일 뿐이다. 그러나 상부로부터 한 가지 부탁을 받아들이고 그 사역을 짊어졌다고 해서 네가 전권 대사이고 진리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느냐? 네게 타인을 지휘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이 생긴 것이냐? 자신의 성질이나 기호에 따라, 자기 방식대로 제멋대로 행동해도 되겠느냐? 상부에서 직접 네게 일을 하나 맡기는 것과 네가 평소에 본분을 이행하며 정상적으로 일하는 것은 차이가 있겠느냐? 차이가 없다. 모두 네 본분이다. 모두 네 본분이라면 일하는 원칙이 바뀌겠느냐?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네가 어떤 경로로 받아들인 본분이든 본분의 본질과 성질은 똑같다. 내가 하는 이 말은 무슨 뜻이겠느냐?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다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상부에서 직접 네게 맡긴 일이라고 해서 제멋대로 해도 된다거나 아무렇게나 처리해도 옳다는 게 아니다. 설사 네게 능력이 좀 있다 한들 네가 진리 원칙을 구하는 길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너는 여전히 패괴된 인류이고, 하나님이 된 것도 아니며, 특수한 부류도 아니다. 너는 여전히 너이고 영원히 사람이다. 성경에는 모세와 노아, 아브라함, 욥 등 하나님이 직접 부른 사람이 적지 않게 기재돼 있고, 하나님과 대화해 본 사람도 꽤 많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자신이 특별한 인물이거나 특별한 부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하나님이 불꽃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직접 본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사람도 있으며, 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걸 들은 사람도 있다. 또 직접 하나님의 시련을 받은 사람도 있다. 그럼 이 사람들 중 하나님이 보기에 정상적인 인류와는 다른 사람도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없었다. 하나님도 그렇게 보지 않는데 네가 그렇게 이해하고 늘 자신을 특별한 인물로 여긴다면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적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이는 너무도 끔찍하다! 설사 하나님이 네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네게 권병을 주어 네가 권병을 지닌 이적을 행하거나 일부 사역을 할 수 있게 하더라도, 너는 영원히 사람일 뿐 진리의 화신이 되지는 못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이겠느냐? 너는 영원히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진리를 위배하거나 너 자신의 성질대로 행동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그건 천사장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가끔 일부 특별한 방식이나 경로로 사람들에게 특별한 일이나 사역을 맡기거나 특별한 사건이나 임무를 전달하는데, 이는 그런 사람들이 그 사역을 맡을 수 있고 하나님이 맡긴 그 사역을 완수할 수 있으며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뿐이다. 하나님이 친히 맡겼다고 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고 해서, 하나님과 대화를 해 봤다고 해서 그들이 보통 사람과 달라지는 것도, 평범한 피조물에서 특출난 사람이나 고급 피조물로 승격되는 것도 아니다. 영영 그럴 일은 없다. 따라서 한 사람이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 집에서 어떤 특별한 재능이나 신분, 지위, 경험, 교훈과 같은 것들을 갖추었다고 해도 그는 진리의 화신으로 바뀔 리 없다. 만약 누가 제멋대로 사칭한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적그리스도다. 어떤 사람은 가끔 그런 성품을 드러내지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회개도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갖고 있거나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이지만 여전히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반면 한결같이 그렇게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하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런 자는 전형적인 적그리스도다. 적그리스도에 속하는 자들은 모두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설사 드러나 도태되더라도 자신을 인식할 줄 모르며 진실로 뉘우치지도 않는다. 일부 리더 일꾼은 단지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갖고 있을 뿐이고, 그의 행동 원칙이나 그가 선택하는 길은 적그리스도와 똑같다. 그도 이성이 없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며 자신이 하는 일이 대체 어떤 성질이고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제멋대로 행동한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와 다른 점은 내가 하는 이런 말들을 일부 사람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내 말은 그들에게 채찍질하고 경고하는 효과가 있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비록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진리를 조금 받아들일 수 있고 책망과 훈계도 조금 받아들일 수 있고 진실로 뉘우치며 어느 정도 회개할 줄도 안다. 이는 적그리스도와 다르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에 속한다.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을 가진 것과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것은 공통점이 있다. 즉, 기본적으로 똑같다. 적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의 공통점은 바로 둘 다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진실로 뉘우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적그리스도가 아니고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에 속한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의 차이점이다.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실로 뉘우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전형적인 적그리스도에 속하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실로 뉘우치는 사람은 모두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에 속하며 구원받을 수 있다. 이 두 부류 사람의 차이를 명확히 알아야지 무턱대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어느 종류의 사람에 속하느냐? 만약 누가 “저는 왜 제가 적그리스도와 똑같다는 느낌이 들까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요?”라고 한다면 그 느낌은 정확하다. 별로 명확한 차이가 없다. 만약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실로 뉘우칠 수 있다면 이 점이 바로 유일한 차이이자 인성의 작은 차이이다. 적그리스도는 악인이지만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은 악인이라고 할 수는 없고 패괴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이 정도 차이밖에 없다. 패괴 성품에서는 별 차이가 없이 똑같고 공통점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폭로하는 패괴된 인류의 여러 내적 상태는 모두 완전히 사실에 부합하고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 선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나면 모두 공감하고 같은 인식을 가진다. 체험의 깊이나 정도만 다를 뿐 모두 자신이 교만하고 이성이 없다는 것,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너무도 많다는 것, 인류가 사탄에 의해 깊이 패괴됐다는 것,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쉽지 않고 그토록 많은 말씀을 했지만 아직 다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 사람이 가난하고 불쌍하며 눈이 멀었고 무지하다는 것, 사탄이 인류를 너무도 깊이 패괴시켰고 인류의 패괴와 사악함의 근원은 바로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키고 통제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킨 뒤 사람의 내면에는 사탄의 독소와 사탄 성품이 생겨났고 정상인의 이성과 양심, 이지(理智)는 사라졌으며 시비와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능력도 없어졌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율법을 제정해 주지 않았더라면 사람은 남을 때리거나 살인을 저질러도, 도둑질하거나 음란한 짓을 해도 옳은지 그른지 몰랐을 것이며, 오히려 정당하다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율법과 계명을 반포한 뒤 사람은 그런 행동들이 범죄라는 것을 알게 됐고 사람의 이성은 어느 정도 정상화됐다. 물론 이 이성은 가장 피상적인 수준이지만 진리를 깨닫고 나면 자연스레 깊어질 것이다. 이제 사람이 여러 진리를 더욱 깨닫고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으며, 자신의 자질과 깨닫는 능력,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얼마나 높은지 정확히 가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는 패괴된 인류의 여러 태도 중 대체 어떤 것들이 긍정적이고 어떤 것들이 부정적인지, 어떤 것들이 관념과 상상이고 어떤 것들이 진리에 부합하는지를 진리를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이런 일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면 사람의 이성은 더 정상화될 것이다. 따라서 오직 진리만이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네가 그런 지식을 갖추고 그런 행동 방식을 중시하면서 늘 자신을 뽐내고 드러내고 아무 보잘것없는 그깟 지식과 학문을 자랑하며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는다면 네가 그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겠느냐? 얻지 못한다. 그건 망상이다. 너는 얻지 못할 뿐 아니라 구원받을 기회조차 잃게 되니 이는 몹시 위험한 일이다!

너희는 모두 진리에 관한 설교를 많이 듣고 나서 다양한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분별이 생겼다. 비록 악인이나 나쁜 사람은 분별할 수 있게 됐지만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는 여전히 분별할 줄 모른다. 지금 하나님 집은 진리는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제멋대로 하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을 모두 점차적으로 교회에서 정리해 내보내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사역이 이 경지에 이르렀고 하나님 선민이 각성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예전에 나는 어떤 사람들과 접촉했을 때 늘 그들의 몸에서 일종의 ‘낌새’를 느꼈다. 어떤 낌새겠느냐? 마치 각종 야수나 사나운 동물의 낌새 같았다. 사람이 곁에 다가가기도 전에 털을 세우고 포효하는 동물처럼 사람도 어느 정도 동물과 유사한 행위를 보인다. 이런 행위는 어떻게 생겨나겠느냐? 사람의 사탄 패괴 성품에서 생겨난다. ‘낌새’란 무엇이겠느냐? 그의 눈 속에서 진실함을 보지 못하고 그의 눈빛이 아주 막막하고 불안해 보이는 것이다. 그는 너를 꿰뚫어 볼 수 없다고 생각해서 너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너는 그의 말에서도 솔직한 태도를 느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솔직함이 없기 때문이다. 솔직함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어떤 사람과 접촉하든 그의 마음속에는 경계심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계심은 그의 눈빛과 말투, 말하는 방식에서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런 낌새는 사람들에게 그가 설교를 그토록 많이 들었음에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구원받는 길에 오르지 못했다는 느낌을 준다. 아무리 그에게 진리를 교제하고 사람의 패괴 성품을 폭로해도, 아무리 그를 진실하게 대하고 공급하고 목양하고 도와도 그에게서 진실한 태도를 이끌어 낼 수는 없다. 그럼 그의 내면에는 무엇이 있겠느냐? 경계심과 의심이 있는데, 이는 가장 흔한 것이다. 그 외에 사람의 자기 보호도 있고 늘 남에게 우러름을 받으려는 마음도 있다. 따라서 그의 말과 눈빛, 표정이 드러내는 것은 아주 부자연스럽다. 즉, 네가 그의 눈빛과 표정에서 보는 것은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사람이 겁이 많든 신중하든, 아니면 내면에 어떤 어려움이 있든 결국 그 솔직함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문제다. 그럼 이를 어떻게 알아채겠느냐? 사람의 모습과 말하는 방식을 통해 알아챈다. 그는 마음속에 있는 것을 전부 말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적절한 말을 선택하고, 이미 생각해 놓은 것만 네게 교제한다. 이게 바로 이방인의 호신술이다. 일이 닥칠 때마다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워 먼저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실제 상황과 재능, 능력, 잘못했던 일, 막막함, 나아가 자신의 기만과 위선까지 모두 그 가시 안에 숨긴 채 외부에 보여 주지 않는다. 그는 내게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감추고 포장하며 지킨다. 이런 것들은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이후 사람에게 이런 것들이 생겼다. 태초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이후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생활하도록 이끌었고, 그들에게 어떤 나무에 달린 열매는 먹어도 되고 어떤 나무에 달린 열매는 먹으면 안 되는지 알려 주었다. 그들은 벌거벗은 채 하나님을 마주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창조했으니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준 것이고, 하나님을 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이든 늘 솔직했고 그들의 눈빛에서 진실함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계심도, 방호벽도 없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고 사랑하고 아끼기만 하지 절대 그들을 해치지는 않는다는 것이 그들 마음속의 가장 기본적이고 확고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언제부터 바뀌기 시작했느냐?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뒤부터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은 사실 하나의 상징이다. 즉, 사탄이 하와를 유혹하는 순간부터 그들은 사탄에게 조금씩 유혹당해 죄를 범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잘못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탄의 독소가 그들의 내면에 들어갔다. 곧이어, 하나님이 오기도 전부터 그들은 자주 하나님을 피했고 하나님이 그들을 찾지 못하길 바랐다. 그들은 왜 그럴 수 있었겠느냐? 그들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 거리는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그들의 내면에 다른 것이 생긴 것이다. 사탄이 그들에게 일종의 사상 관점과 생명을 주어 그들이 하나님을 의심하고 경계하게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곧장 알아차렸다.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하나님이 보면 비웃지 않을까?’ 이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됐겠느냐? (사탄에게서 비롯됐습니다.) 사탄이 그를 유혹하지 않았을 때 그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느냐? 그때 그들의 내면에는 하나님이 준 가장 원시적인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비웃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런 생각들도 없었다. 그러나 사탄이 유혹한 뒤로 모든 일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난 아무것도 입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보시면 나를 비웃으시지 않을까? 내가 이러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아닐까?’ 일련의 문제들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 생각들이 들면서 그들은 저도 모르게 하나님을 피하게 됐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께서 오시는 날이 언제지? 하나님께서 오시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서둘러 피해야 해!’라고 생각하며 시시각각 숨었을 것이다. 이는 패괴 성품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 패괴 성품이 생겨난 근원은 바로 사탄의 유혹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계하고 피할 때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이 남아 있겠느냐? (경계가 남아 있습니다.) 경계와 의혹, 거리 두기, 공포, 의구심이 남아 있다. 심지어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치시지는 않을까? 우리는 몸을 지킬 것도 없이 벌거벗은 채로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때리실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를 죽이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목숨을 주었으니 쉽게 그들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마음이 흐릿해지고 혼란스러워졌다. 인류가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는 눈빛에서 알 수 있으며, 지금껏 변한 적 없다. 그 진실함은 사라졌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과 신뢰, 의지도 사라졌다. 그 근원은 어디에 있겠느냐? (사탄의 패괴에 있습니다.) 그렇다. 바로 사탄의 패괴이다. 사탄이 사람을 해친 것이다! 사람은 사탄의 패괴를 겪지 않았을 때가 꽤 좋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사람이 구원받고 나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알게 된 것과 비교하면 그때의 내적 상태는 구원받은 뒤의 내적 상태만 못하다. 만약 선택할 수 있다면 너희는 무엇을 선택하겠느냐? (구원받은 뒤를 선택하겠습니다.) 사실 무엇을 선택하든 적절하지 않고, 사람이 선택할 수도 없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인류는 그런 운명이다. 사탄의 패괴를 겪지 않았을 때는 설사 사람의 내면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의지가 있었다 한들 최초의 인류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사람은 최소한 개념이 생겼다.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됐다는 것과 사람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것,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때의 사람은 이런 것들을 몰랐고 아주 단순했다. 하나님이 볼까 봐, 비웃을까 봐 두려워하지 않았고 무슨 일이 있든 하나님을 찾았다. 이 정도로 단순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가 알았겠느냐? 알지 못했다. 따라서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사역은 인류에게 심원한 가치와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모두 좋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한 역사에 대해 말하면 너희는 상당히 슬프게 느껴지지 않느냐?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예전에는 친밀했지만 이제 이렇게 소원해졌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사람을 보호하고 사랑하지만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을 의심하고 피하고 멀리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적으로 보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상당히 마음 아픈 일이다. 사탄이 사람을 몹시 고통스럽게 패괴시켰기 때문에 사탄을 증오해야 한다. 비록 사탄이 인류를 이렇게 패괴시켰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할 방법이 있다. 사탄이 어떻게 교란하든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전능함이자 하나님의 권병이다.

‘얼마간의 경험과 지식, 교훈을 갖췄다고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하는 적그리스도’라는 소주제는 거의 다 교제를 마쳤다. 너희는 이를 통해 어떤 정보를 얻었느냐? 어떤 진리를 깨달았느냐? (지식을 중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측면도 있다. 또 있느냐? (사람은 영원히 진리가 아니고 하나님을 사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진리를 사칭하는 것 자체는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다. 진리는 사칭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하나님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공급해 주면 너는 진리를 좀 얻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사람은 진리의 화신까지 되려고 한다. 그건 불가능하다. 그런 말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그 밖에,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으려면 성실하게 처신하는 법을 배워야지 완벽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완벽’이라는 말은 존재할 수는 있지만 이 일은 피조된 인류 사이에서는 영원히 성립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벽하다. 패괴로 가득한 인류가 어떻게 완벽하겠느냐?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은 완전무결한데, 이를 두고 완벽하다고 하는 것이다. 바닷속의 물고기, 하늘을 나는 새, 땅 위의 날짐승과 길짐승은 모두 완벽하다. 훌륭하지 않은 게 뭐가 있느냐? 모든 생물이 형성하는 먹이사슬은 또 얼마나 완벽하냐! 그러나 패괴된 인류는 파괴할 줄만 알고 그 완벽함을 깨뜨리며 결함과 결점을 만드니 너무도 이기적이고 비열하다! 하나님이 만든 모든 것은 다 훌륭하다. 나뭇잎은 저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크고 작은 동물들도 다양한 체형과 제각기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빈틈없이 계획했다. 다만 인류가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만물을 관리하지 못하고 짓밟아 하나님의 고심을 헛되게 만든 것이다. 인류는 이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마구 파괴했다. 모든 자원을 극도로 낭비하고 파괴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느냐? 결국 어떤 결말을 맞이했느냐? 자업자득이다! 환경과 먹이사슬은 파괴됐고 공기와 물은 오염됐으며 천연 식품도 사라졌다.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어도 구할 수 없다. 따라서 ‘완벽’이라는 말은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인류 사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든 진리 추구를 명분으로 자신이 완벽하다거나 완벽을 추구한다고 말한다면 그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건 사람을 기만하고 미혹하는 거짓말이다. 이런 패괴된 인류가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하려 하다니! 나쁜 짓을 그토록 많이 저질러 놓고도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하려 하다니, 이는 사탄의 본성이 바뀌지 않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리는 전혀 갖추지 않았으면서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하려 하니 사탄의 족속은 얼마나 후안무치하냐!

2019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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