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조 사악함과 음험함, 그리고 간사함(3)

참고 선물

본격적인 교제에 앞서 해 줄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떤 이야기냐? 혹여 이 이야기가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거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생명에 진입하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 측면에 아무런 도움이나 유익도 주지 않는다면 이야기하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려면 그 이야기 자체에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어야 하고, 이야기할 만한 가치와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럼 오늘 들려주는 이 이야기가 너희에게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지 잘 들어보아라. 개중엔 실화인 이야기도 있고 실화를 가공하여 꾸며 낸 이야기도 있는데 실화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어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다. 꾸며 낸 이야기이든, 정말 있었던 일이든, 사람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런 이야기를 왜 너희에게 들려주려고 하겠느냐?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렇다. 너희가 거기서 진리, 곧 실생활에서는 인식하기 아주 어려운 일부 진리를 깨닫게 해 주려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는 방식을 통해 사람이 진리와 하나님을 좀 더 현실에 가깝게 인식하고,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과 오래 그리고 자주 접하다 보면 별의별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 다 생긴다. 이야기는 올 봄에 있었던 일이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니 날씨가 날로 따뜻해졌다. 땅 위에 여러 식물들이 싹트기 시작했고 햇볕을 쬐고 비를 맞으며 하루하루 자라났다. 이런 식물에는 자연산인 것도 있고 재배한 것도 있으며, 동물이 먹는 것, 사람이 먹는 것, 동물과 사람이 모두 먹을 수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이 봄날의 풍경이다. 온통 푸르고 생기 가득한 풍경 말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어느 날 나는 생각지도 못한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어떤 선물이겠느냐? 산나물 한 봉지다. 보낸 사람은 “이건 냉이라, 드셔도 돼요. 몸에 좋대요. 달걀에 볶아 드셔도 돼요.”라고 말했다. 이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전에 사 두었던 냉이와 비교해 보니 문제가 있었다. 어떤 문제인지 짐작이 되느냐? 내가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어떤 비밀이겠느냐? 해외의 냉이와 중국의 냉이가 다르게 생긴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같은 종이라면 똑같이 생겼어야 하는데 이제 보니 다르게 생긴 것이다.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들었겠느냐? 이게 과연 냉이일까?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럼 선물한 사람에게 어찌 된 일인지 물어봐야 하지 않겠느냐? 나중에 그에게 물었다. “냉이라더니 확실한 것이냐?” 그는 생각해 보더니 “흠, 냉이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라고 대답했다. 자기도 모르는데 어떻게 냉이라며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느냐? 어찌 남에게 감히 줄 수 있겠느냐? 내가 함부로 먹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틀 후 과연 진짜 냉이가 아니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선물한 사람이 뭐라고 했겠느냐? 그는 “냉이가 아닌 걸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긴가민가했거든요. 괘념치 마시고 그냥 드시지 마세요.”라고 했다. 이런 걸 먹어도 되겠느냐? (먹으면 안 됩니다.) 먹어선 안 된다. 만약 내가 “네가 잘 모르긴 하지만 성의를 봐서 위험해도 한번 먹어 보겠다.”라고 한다면 이렇게 해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이런 행동은 어떤 성질이냐? 어리석은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짓이다. 다행히 나는 먹지 않았고 추궁하지도 않았기에 이 일은 유야무야되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들에는 여러 야생 식물들이 자라났다. 큰 것, 작은 것, 꽃 핀 것, 피지 않은 것 등 가지각색의 오색찬란한 식물들이 자라나면서 갈수록 많아지고 무성해지며 형태를 갖춰 갔다. 어느 날 같은 사람에게서 선물을 또 한 봉지 받았는데 이번엔 냉이가 아니라 쑥이었다. 그가 또 한 번 크게 선심을 써서 한 봉지 선물한 것이다. 건네면서 이렇게 당부하기도 했다. “드셔 보세요. 쑥인데 냉한 체질에 좋대요. 이것도 달걀에 볶아 드시면 돼요.” 내가 살펴보니 호초(蒿草)가 아니겠느냐?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나는 쑥은 잎에서 독특한 향이 나는데 이자가 준 것에서는 향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쑥이라고 하는 것일까? 잎 모양은 비슷한데 정말 쑥일까? 선물해 준 사람에게 물어봤는데 뜻밖에 그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모르겠다는 한 마디로 깔끔하게 책임을 전가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왜 아직 안 드셨어요? 쑥인지는 모르겠지만 드셔 보세요. 제가 먹어 보니 맛있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자기도 모르는 걸 권하는데 내가 어떡하면 좋겠느냐? 억지로라도 먹어야겠느냐? (아닙니다.) 선물한 사람도 뭔지 모른다고 하니 절대 먹어선 안 된다. 맛만 보려고 모험을 한다면 괜찮을 수도 있다. 먹어 본 사람이 괜찮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괜찮다는 것만 믿고 덮어놓고 먹는 것은 어떤 행동이냐? 맹목적인 행동이 아니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맹목적인 일을 하느냐? 덤벙대고 경솔한 사람이어야 이런 짓을 한다. 그는 ‘맞든 틀리든 비슷하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내가 이렇게 해야겠느냐?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 굳이 왜 위험을 무릅쓰며 정체불명의 식물을 먹어야 하느냐? 기근이 들어 양식이 없을 때는 모험을 하며 여러 산나물을 캐 먹어 볼 수도 있다. 이럴 땐 먹어도 된다. 하지만 지금이 그런 때이냐? (아닙니다.)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 어째서 산나물을 캐 먹어야 하느냐? 전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상상 속의 작은 유익을 위해 이런 모험을 할 필요가 있느냐?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먹지 않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내가 먹지 않았고 추궁하지도 않아서 이 일은 또 유야무야되었다.

한동안 지나 이 사람이 또 선물을 보내왔다. 벌써 세 번째다. 이번 선물은 굉장히 독특하다. 그것은 땅에서 자라는 것도, 나무에서 열리는 것도 아니다. 그럼 무엇이냐? 새알 두 개가 쇼핑백에 반듯하게 포장되어 있었는데, 거기엔 ‘하나님께 바치는 새알’이라고 적혀 있었다. 웃기지 않느냐? 쇼핑백을 열어 보니 새알 두 개의 껍데기 색이 예뻤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색이었다. 어떤 새가 낳은 것인지 알 수 없어 인터넷을 뒤져 보려고 했지만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 같은 무늬에 같은 색깔인 새알이 많아서 크기와 색깔로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너희 생각에 선물한 사람에게 무슨 알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겠느냐? (물어볼 필요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그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너희 짐작이 맞다. 이번에도 그는 모를 것이다. 그래서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면 그의 체면이 깎일 것이고 ‘내 호의, 내 배려심을 의심하시는 것도 모자라 검색까지 하시다니. 뭘 찾아보고 그러시나, 드시라면 드실 것이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먹어야겠느냐? 아니면 먹지 말아야겠느냐? (먹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에게 준다면 먹겠느냐? (안 먹습니다.) 나도 먹지 않겠다. 새가 낳은 알은 전부 시간이 지나면 부화하여 번식하기 마련인데 먹어 버리면 너무 잔인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새알 사건도 그렇게 유야무야되었지만 이런 일이 계속 생기고 있다.

하루는 어떤 곳에서 쑥같이 생긴 호초가 난간에 놓여 햇볕에 말려지고 있길래 한 자매에게 그것의 용도를 물었다. 그녀는 “저번에 그 사람이 당신께 보낸 쑥이잖아요? 쑥에는 제습과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효능이 있어요. 당신은 추위를 타시잖아요? 그가 햇볕에 말렸다가 물에 끓인 다음 족욕으로 몸을 따뜻하게 해 드릴 거래요.”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 것 같으냐? 두 어절이다.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 어이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자의 배려심이 너무 크고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왜 어이가 없겠느냐? 왜냐하면 이 사람에겐 지각하지 못한 전례가 몇 번 있었는데 이번에는 방식을 바꿨기 때문이다. ‘드시라고 드렸는데 드시지 않으니 그럼 뜨거운 물에 족욕이라도 하시라고 말려 드릴게요. 그래야 저도 고생한 보람이 있죠.’라는 뜻이다. 이런 광경을 보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나중에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당장 약국에 가면 원하는 만큼 살 수 있을 정도로 쑥은 충분하다고, 포장도 다양하고 생산지도 다양한 데다가 가공도 그가 보내온 것보다 훨씬 깔끔하게 되어 있다고 말이다. 길가에 가서 뽑을 필요도, 난간에 놓고 햇볕에 말릴 필요도 없다. 이건 헛수고가 아니겠느냐? 그가 다 말려서 나한테 주는 걸 내가 원하겠느냐? (원하지 않으십니다.) 원할 리 없다. 한동안 지나자 난간에서 호초가 사라졌다. 내 말이 그에게 전달되어서 그가 보내지 않은 까닭이다. 나중에 들에 들풀이 무성해져서 귀하다고 생각되지 않자 더 이상 아무도 선물을 보내지 않았다. 아마도 이 기간에는 새알도 다 부화해서 건질 게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지금까지 새알과 산나물을 더는 받지 못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야기에서 네 가지 사건을 언급했는데 모두 내게 물건을 선물한 내용이었다. 그중 두 번은 정체불명의 산나물을 보낸 일이고, 한 번은 알 수 없는 새알이고, 나머지 한 번은 말린 ‘한약’이었다. 이 이야기가 웃기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일 자체만 놓고 볼 때 너희는 듣고 어떤 느낌이 들었느냐? 이 속에 사람이 인식하고 배워야 하거나 교훈 삼아야 할 것이 없느냐? 너희는 듣는 동안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 특정인을 겨냥해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겠느냐? 결코 아니다. 특정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면 내가 왜 들려주었겠느냐?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것이 그저 한담이겠느냐? (아닙니다.) 너희에게 한담으로 들리지 않았다면 내가 왜 이야기했겠는지 알겠느냐? 이 사람이 왜 이런 일을 했느냐? 그가 이런 일을 한 성질은 무엇이고, 취지는 무엇이냐? 이 속에 어떤 문제가 존재하느냐? 이것을 실제에 결부시켜야 하지 않겠느냐? 실제에 결부시켜 사람과 일 자체의 성질을 꿰뚫어 보면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말해 보아라. 이런 일을 한 사람이 선의로 했겠느냐, 아니면 악의를 가지고 했겠느냐? (선의로 했습니다.)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는 선의였다. 그의 선의 속에 어떤 문제가 존재하느냐? 선의로 한 행동이라면 배려심이 있는 것이냐?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사람의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면 거기에 패괴 성품의 불순물은 절대 없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 너희에게 묻겠다. 네게 부모에 대한 효심이 있다면 어째서 부모에게는 이것들을 먹어 보라고 보내지 않느냐? 네가 만약 상사나 지도자를 아껴서 그들에게 마음을 쓴다면 어째서 그들에게는 이것들을 먹어 보라고 선물하지 않는 것이냐? 어째서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느냐? 왜냐하면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네 부모나 지도자, 상사에게 해가 될까 봐 걱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해가 되는 건 걱정되지 않느냐? 이게 무슨 심보냐? 네 선의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 하나님을 기만하고 싶은 것이냐? 하나님을 희롱하고 싶은 것이냐? 하나님이 영체라면 네가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육신이 정상 인성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런 짓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느냐? 네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런 일을 한 것이 진정한 배려심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배려심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만하고 희롱한 것이니 당돌하기 짝이 없구나! 네가 만약 정말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면 어째서 먼저 맛을 보고 먹어 봐서 아무 문제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하나님에게 주지 않느냐? 네가 맛보지도 먹어 보지도 않고 바로 하나님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을 희롱하는 게 아니겠느냐? 네가 이렇게 하고도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다 생각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이 일을 잊어버리겠느냐? 너는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을 것이다. 너는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일을 했느냐? 네가 먹어 보지도 않고 과학적 근거도 없이 감히 하나님에게 주는 것이 책임감 있는 모습이냐? 혹여 하나님에게 해가 되었다면 네가 어떻게 책임지겠느냐? 설사 법적으로는 처벌받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영원히 너를 징벌할 것이다. 이렇게 허름한 물건을 이방의 지도자나 공직자에게는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내밀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에게는 보내니 그 저의가 무엇이냐? 내 가치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 네가 만약 산나물 한 봉지를 네 사장에게 선물한다면 그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내 가치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다른 사람들은 돈이나 명품을 주는데 이 사람은 풀때기를 주네?’ 네가 그걸 내밀 수 있겠느냐? 분명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걸 보낸다면 어떤 게 걱정되겠느냐? 너는 먼저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사장님이 뭘 좋아하시지? 이게 필요하실까? 필요 없는데 드리면 날 난처하게 하지 않으실까? 회사에서 날 구박하고 괴롭히지 않으실까? 최악의 경우 구실을 찾거나 꼬투리를 잡아서 날 자르지 않으실까?’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사장한테 잘 보이려면 일단 무엇을 선물해야 하느냐? (그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가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그가 지금 컵 한 개가 필요하다고 해서 네가 2, 3천원짜리 컵 하나를 사 주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금이나 은 정도는 되어야 선물을 내밀 수 있는 것이다. 자기도 사기 쉽지 않은 것을 왜 그에게 주느냐?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잘 보이려는 목적이 무엇이냐? 먼저, 최소한 그가 너를 비바람으로부터 막아줄 수 있다. 그는 수중의 권력으로 너를 보호하고 안정적인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해 줄 수 있다. 아무리 못해도 그가 너를 곤란하게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네가 정체 모를 산나물 한 봉지를 그에게 주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자기 사장한테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나물을 보낸 그는 나한테 왜 이러는 것이냐? 그가 뒷일을 생각했겠느냐? 분명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당신께서는 우리를 괴롭히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더냐? 내가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냐? 그런 것이냐? 그가 왜 감히 이런 선물을 했겠느냐? (그는 자신이 선의로 그런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는 선의로 그의 추악하고 사악한 부분을 가렸다. ‘저는 당신에게 선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산더미만 한 나물 보이시죠? 누가 캐 드린 겁니까? 제가 캐 드린 게 아닙니까?’라는 뜻이다. 이게 무슨 태도냐? 이게 무슨 마음가짐이냐? 이 선의가 인성에 부합하느냐? 인성에도 부합하지 않는데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리와 동떨어져도 한참 동떨어졌다! 이게 무슨 선의냐? 진정한 선의겠느냐?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태도의 선의냐? 어떤 불순물과 어떤 본질을 지닌 선의겠느냐? 세상물정 모르는 너희 같은 젊은이들도 직속상관에게 선물할 때는 훗일을 생각해서 아무거나 줘서는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세상에 닳고 닳은 사, 오십대가 이따위 물건을 선물한 것은 무슨 성질인 것 같으냐? 우리가 토론해 볼 만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과연 어떤 성질이겠느냐? 그는 자기도 무엇인지 모르는 나물을 내게 먹으라며 주었다. 그러다 내가 그 산나물이 아닌 것 같다고 하니 얼른 먹지 말라고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다시 나보고 먹으라며 다른 산나물을 보냈다. 내가 먹지 않으니 그가 뭐라 했느냐? “드셔 보세요. 제가 먹어 보니 맛있더라고요.”라고 했다. 이게 무슨 태도냐? (경솔하고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그렇다. 너희도 이런 태도가 느껴지느냐? (느껴집니다.) 이게 선의겠느냐? 여기엔 선의조차 없다! 돈도 들이지 않고 대충 물건을 구해 와서는 비닐 봉투에 담아 먹으라고 준 것이다. 풀을 뜯어 양이나 토끼를 먹이더라도 ‘먹고 중독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까지 하지 않겠느냐? 짐승을 먹일 때도 이런 모험은 하지 않는데 어떻게 대충 나물을 구해 나한테 먹으라고 주느냐? 이게 어떤 성품이냐? 어떤 성질의 문제겠느냐? 너희가 확실히 알 수 있겠느냐? 생각해 보아라. 나를 이렇게 대하는 사람이 그의 부하, 그의 눈에 평범해 보이는 사람은 어떻게 대하겠느냐? 함부로 희롱할 것이다. 이게 어떤 성품이냐? 사악하고 흉악한 것이다. 이런 자를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의 몸과 목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내기 정도로 생각한다. 지나고 나면 아무런 느낌도 없고 양심에 가책도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이런 짓을 저지르니 정말 이상하기 짝이 없다.

내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 했던 말을 너희는 아마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산나물은 사람이 먹는 게 있고, 짐승이 먹는 게 있으며, 사람과 짐승이 모두 먹을 수 있는 게 있다.”라고 했다. 이는 ‘명언’이다. 이 말엔 유래가 있는데,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아느냐? 여기엔 ‘사연’이 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몇 가지 선물을 보낸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이 사람은 재배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세 가지 종류의 옥수수를 재배했다. 어떤 종류겠느냐? 사람이 먹는 것, 짐승이 먹는 것, 사람과 짐승이 모두 먹을 수 있는 것, 이렇게 세 가지 종류다. 이 세 가지 옥수수 이야기는 굉장히 재밌는데 들어보았느냐? 들어보지 못했구나. 나도 처음 들었는데 정말 희한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재배를 맡은 사람이 무책임해 이 세 가지 옥수수가 섞이는 바람에 짐승한테 줄 것을 사람에게 나눠 주고, 사람에게 줄 것을 짐승에게 나눠 먹였다. 다들 먹어 보고는 곡식 맛이 아니라 여물 맛이 난다며 맛이 이상하다고 했다. 이 사람이 일을 어떻게 한 것이냐? 무책임하게 본분을 이행하는 바람에 사람이 먹는 것과 짐승이 먹는 것이 뒤섞여 아무도 알아볼 수 없으니 종자를 새로 사서 다시 심어야 했다. 이 일을 어떻게 한 것이냐? 이런 부류의 사람이 일을 할 때 원칙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일할 때 진리를 구하겠느냐? (구하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로 일하고, 이렇게 불손하고 무책임하게 사람을 대하는데 이런 부류의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떻게 바라보겠느냐? 진리는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들의 마음속에서 진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겠느냐? 하나님의 신분은 얼마나 중요하겠느냐? 그들이 알겠느냐? (모릅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은 알아야 하지 않느냐? 어째서 그들은 모르느냐? 이는 성품과 관련이 있다. 이것이 어떤 성품이냐? (사악함입니다.) 사악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다. 그들은 이런 행동이 어떤 성질인지 의식하지 못한다. 전혀 묵상하지도 구하지도 않으며 행동한 뒤 성찰하지도 않는다. 대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선의만 있으면, 좋은 의도이기만 하면 그 누구의 감독이나 질책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이미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겠느냐? 어떤 사람은 말한다. “당신께서 하신 이야기는 잘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이 닥쳤을 때 당신은 어떤 태도를 지니십니까? 이런 짓을 저지른 사람을 당신은 어떤 태도로 대하십니까? 분노하십니까? 혐오하여 버리십니까? 반감을 가지십니까? 아니면 좋아하십니까?” (증오하십니다.) 이런 일은 증오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에게 만약 이런 일이 닥친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만약 선의를 가진 한 사람이 계속해서 네게 정체불명의 것을 선물하면서 “몸에 좋으니 드셔 보세요. 보양식이니 드셔 보세요. 먹으면 예뻐지고 기운도 나니 드셔 보세요. 정말이니까 제 말 들으세요.”라며 끈질기게 권했는데 검증 결과 아무런 효험도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저라면 이런 부류의 사람과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에게 진절머리가 나고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 혐오감과 반감이 들 것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화를 내고, 마음 아파하며 괴로워해야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으냐? “이 사람은 아마 진리를 깨닫지 못해 이런 짓을 저질렀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사람과 사람 간에 구별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 마치 다음의 경우처럼 말이다. 사람끼리 왕래하고 물건을 주고받을 때 상대방이 잇속을 차리게 되더라도 개의치 않고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오래 지낼 수 있게 된다. 그는 인성이 있어서 조금 손해 보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반면 인성이 없어서 잇속만 차리길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오로지 이득을 얻고 잇속만 차리기 위해 남들과 왕래한다. 그는 너에게서 조금이라도 득을 볼 수 있으면 너에게 잘 보이려 하면서 관계를 다지지만 득 볼 일이 없으면 여지없이 내팽개치고 널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인성이 없는 것이다.

오늘 이야기에서 선물을 보낸 그런 부류의 사람을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사람들은 왜 선물을 보내느냐? 이게 우연이겠느냐? 몇 년에 한 번이라면 우연이겠지만 한 계절에 똑같은 일이 네 번이나 일어났는데 우연으로 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우연으로 볼 수 없다. 그의 성품이 일시적으로 패괴를 표출하거나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의 이런 행동의 성질이 무엇이겠느냐? 방금 우리는 그가 이렇게 한 것에 대해 태도가 불손하고 무책임하며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며, 성품이 야만적이라고 했다. 그러면 그는 왜 이런 행동을 했겠느냐? 왜 이런 것들을 남들에게는 주지 않고 나에게만 줬겠느냐? 내 신분, 지위가 달랐기에 이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물을 준 그의 속셈과 이런 행동의 성질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목적이 무엇이었겠느냐? (잘 보이려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가 잘 보이려 한 행동을 가장 정확하게 정의하는 단어가 무엇이냐? ‘약다’이다. 환심을 사고, 잔머리로 이득을 보는 것이다. 아주 교묘하게 환심을 사서 그가 파 놓은 함정에 자기도 모르게 걸려들어 그가 뭘 해도 좋게 느껴진다. 사실 그는 전혀 진정성 없이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으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한다. 그는 이런 짓을 하면서 어떤 대가가 따를지는 꼼꼼하게 따져 보지도 않는다. 그냥 거저 주운 것을 네게 주면서 그가 배려심이 넘친다는 생각에 미소로 화답하게 만든다. 이게 무슨 뜻이겠느냐? 그가 돈 한 푼 쓰지 않고 네가 큰 이익을 얻은 것처럼 느끼게 만드니 이는 대놓고 너를 바보 취급하는 것이다. 이런 뜻이 아니겠느냐? 그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돈 한 푼, 힘 한 번 쓰지 않고 성의 없이 선물 하나 보내서 날 기억하게 하고, 내게 호의, 배려심, 충성심이 있고, 내게 사랑이 있다고 여기게 만들겠어.’ 자기가 이런 사람이라고 너를 오해하게 만드니 이것이 바로 약다는 것이고 잔머리를 굴린다는 것이다. 아무 대가나 진정성도 없이 싸구려 호의로 이익이나 혜택은 최대한 취하려 하는 것은 약은 짓이다. 너희는 이럴 수 있느냐? 모두가 그럴 수 있다. 단지 너희가 그와 똑같은 일을 하지 않았을 뿐, 기회가 생기면 너희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이것이 이런 부류의 사람과 왕래하면서 내가 내린 첫 번째 결론이다. 즉, 이런 부류의 사람은 아주 약다는 것이다. 그들이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득이 되고 복을 줄 수 있어서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따른다. 이 일은 이런 부류 사람의 믿음을 완전히 폭로해서 그의 진상이 무엇인지 드러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 순종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해서 약빠르게 행동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아 복을 받으려는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진정성이 있겠느냐? 그리고 경외심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첫 번째 결론이다. 내 말이 맞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게 누명을 씌우는 것이냐? 크게 비난하는 것이냐? 절대 아니다. 그의 본질에 따라 말하면 이보다 훨씬 심각하다. 최소한 그는 하나님을 기만하고 희롱했다.

두 번째,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았냐면 사람의 마음이 너무 무시무시하다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어디가 무시무시하겠느냐? 어째서 사람의 마음이 무시무시하다고 하겠느냐? (이 사람은 복을 받으려는 자신의 속셈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 잘 보이려 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책임하게 행동했고 하나님이 이것을 드시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결과가 어떨지는 고려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가족에게 먹을 것을 줄 때는 뒷일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드릴 땐 뒷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잘 보이려 했습니다. 그의 이기적이고 비열한 모습과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인즉슨 너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냐?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꿍꿍이가 너무 무시무시하구나!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가족처럼만 대했어도 속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무시무시하다. 친구라면 이렇게 대하겠느냐? 역시 그러지 않을 것이다. 친구는 무엇을 먹으면 좋은지 알려 줄 것이다. 만약 이것을 먹고 부작용이 생긴다면 절대 먹지 말라고 할 것이다. 친구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자가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한다. 나한테조차 이러는데 너희에게는 더 그럴 것이다. 그의 무서운 점에는 또 무엇이 있느냐? (그의 속셈이 너무 교묘합니다. 그는 겉으로만 열심인 척하는 식으로 속내를 감추는데 사실 그는 싸구려 물건으로 최대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으니 너무 무서운 것 같습니다.) 좋은 관점이다. 방금 그의 이기적인 면을 말했는데 이것이 그의 속셈이다. 너희가 말한 대로 사람 내면 깊은 곳의 이런 인성에서 드러나는 것, 자기가 헤아릴 수 있거나 헤아릴 수 없는 것, 남들이 볼 수 있거나 볼 수 없는 것, 혹은 해석할 수 없는 것, 이런 것들은 어디서 비롯되느냐? 부모가 가르친 것이냐? 학교에서 가르친 것이냐? 아니면 사회에 물든 것이냐? 어디서 비롯된 것이겠느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것이 태생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태생적인 것은 무엇과 관련되느냐? 본성 본질과 관련된다. 그럼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예전부터 어느 정도 의도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갑자기 든 생각이겠느냐?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깨달은 것이겠느냐?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겠느냐? 그것도 아니면 내가 그에게 어떤 암시를 준 것이겠느냐? 모두 아니다. 비록 이런 몇 가지 사소한 일은 겉으로는 평범하게 보이지만 그 이면의 성질은 모두 평범하지 않다. 장본인인 그가 이런 일의 결과가 무엇인지 의식할 수 있었겠느냐? 그는 의식하지 못했다. 왜 그는 의식하지 못했느냐? 예를 들어 네가 노점에서 싸구려 물건을 하나 사서 사장한테 선물한다면 선물을 줄 때 이런 예상을 하지 않겠느냐? ‘사장님이 노점에서 이걸 보시지 않을까? 인터넷에서 이 물건의 가격을 찾아보지 않으실까? 이 물건의 가격을 알려 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이걸 보고 날 어떻게 보실까?’ 이렇게 예상하지 않겠느냐? 너는 이런 예상부터 해 보고 나서 살 것이다. 만약 이 물건이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된다면 그래도 선물하겠느냐? 선물할 리 없다. 만약 그 물건을 선물하는 게 돈도 덜 들고 사장도 좋아하게 할 수 있다면 너는 분명히 선물할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이자는 이런 걸 예상하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 그는 이래야만 그가 의도한 바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분석을 통해 이제 이 일의 성질이 도출되었다. 그럼 이 일의 성질을 통해 무엇을 볼 수 있느냐? 사람과 접촉하면서 사람에게서 보게 된 두 번째 결론은 바로 사람의 마음이 무시무시하다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표출하는 패괴 성품이 의도적이든 어쩔 수 없는 것이든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지 않겠느냐? 사람의 마음이 무시무시한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너무 무감각하기 때문이냐? 무감각한 사람은 지각하지 못하는데 무감각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올바르겠느냐?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럼 우매하기 때문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그 이유는 결국 무엇으로 귀결되어야 하겠느냐? 사람의 사악한 성품에 귀결되어야 한다. 사람의 무서운 점이 무엇인지 알려 주겠다. 바로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 말에 어떤 느낌이 드느냐? 왜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다 하겠느냐? 너희가 이해할 수 있는 게 무엇이냐? 말해 보아라, 이 말이 무섭지 않으냐? 이 말을 듣고 소름이 끼치지 않느냐? 너희는 지금껏 너희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패괴 성품이 있다고만 생각했을 뿐 마귀가 그 안에 살고 있는지는 몰랐다가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이건 심각한 문제가 아니냐? 내가 정확하게 보지 않았느냐? (맞습니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내가 왜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다고 하는지 고민해 보아라. 그리고 양심과 이성을 지닌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기만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라. 이게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냐? 이것은 눈을 부릅뜨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러 이 땅에 왔는데 사람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냐? 수직적인 관계이냐? 친구이냐? 가족이냐? 과연 어떤 관계이냐? 너는 이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고 대하느냐? 네가 하나님과 접하고 함께 지낼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느냐?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지내야 하느냐? (경외심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경외심은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은 것 같다.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으로는 부족하다. 만약 네가 나를 서로 잘 모르고 그저 알고만 지내서 친구라고 할 수도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여긴다면 우리 관계가 어떻게 조화와 융합을 이룰 수 있겠느냐?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 알아야 한다. (존중해야 합니다.) 이는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상대방의 이름도 모를 만큼 아직 서로를 잘 모르는 두 사람이 만났는데 상대방이 얌전한 것을 보고 한 사람이 희롱하려 한다면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냐? 가장 기본적인 존중도 하지 않는다면 인성이 있겠느냐? 사람과 사람이 함께 지내면서 어떤 논쟁이나 갈등이 있든 적어도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존중은 처신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으로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최소한의 존중이 있어야 한다. 그럼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지낼 때는 이것이 있느냐? 만약 네가 이것조차 도달하지 못한다면 네 마음속에 하나님과 너는 어떤 관계가 되겠느냐? 제삼자도 아닌 아무 관계도 아니게 될 것이다. 그러니 선물을 보낸 그가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는 것은 존중이 없는 것도 모자라 하나님을 속이려 한 것이다. 그는 속으로 하나님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먹고 건강에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세심하고 꼼꼼하게 살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들은 그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술수를 써서 하나님을 속여 환심을 사기만 하면 되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것이 그의 속내다. 사람이 이런 마음을 품는 것이 무시무시하지 않으냐? 정말 무시무시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는 겉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가 가는 길, 자기가 치른 대가를 마음 깊이 반성한 적이 있느냐? 하나님이 부탁한 본분을 제대로 이행했는지 성찰하거나 구한 적이 있느냐? 사람은 대체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냐? 사람의 여러 모습과 표출, 나아가 사람 내면 깊은 곳의 속셈, 그리고 하나님이 행한 일을 대하면서 표출하는 여러 성품을 통해 보았을 때 사람은 하나님에게 무엇을 했느냐? 자기에게 유익한 일에 대가를 치르고 마음을 쓰는 것 외에 하나님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하나님에게 무엇을 바쳤느냐? 전부 계산적이고 타산적이며, 방어적인 데다가 불손한 태도이다. 불손은 태도의 일종인데 이 태도로부터 나오는 행동을 동사로 표현하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농락이다. 이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 (들어 보았습니다.) 농락은 점잖은단어인데 속된 말로는 뭐라고 하느냐? 조롱, 희롱이다. 너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네가 우습게 보이고 얌전해 보이니 그는 너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농락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성품이냐? 이런 성품을 가진 그의 마음속에 천사가 살고 있겠느냐, 마귀가 살고 있겠느냐? (마귀입니다.) 마귀가 살고 있다. 감히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니 그는 과연 무엇이겠느냐? 그가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선물을 준 이런 부류의 사람은 진리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도 못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떻게 하기를 요구하는지, 하나님은 무엇을 기대하는지,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직속 상사를 대하는 것처럼 환심을 사고, 기만하여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느냐? 아첨과 아부에 기대어 살아간다. 지도자의 비위를 맞추면서 구차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가 왜 내게 이런 ‘배려심’과 ‘호의’를 보이겠느냐?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이런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가 예측이나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그는 알지 못한다. 정상인의 사고가 전혀 안 되는 것이다. 그의 행동, 그의 성품을 내가 어떻게 보고, 어떻게 정의하며 평가하는지 그는 알지 못하고 관심도 갖지 않는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이냐? 어떻게 비위를 맞추면 목적을 달성해서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런 속셈을 가지고 행동한다. 이것이 어떤 인성이냐? 정말 양심과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겠느냐? 네가 그 정도 살았으면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 첫째, 내게 잘 보일 필요 없다. 둘째, 내게 아무것도 바칠 필요 없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 네가 무엇을 하든, 네게 어떤 속셈이나 목적이 있든 네가 하는 일의 성질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내게서 정의되고 규정된다. 한 사람이 어떤 일을 끝마쳤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나는 네가 어떤 속셈이었는지, 어떤 동기였는지 확실히 살펴볼 것이다. 나는 오직 네 성품만 본다. “사람에게 너무 가혹하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가혹하냐? 내가 보기엔 전혀 가혹하지 않다. 조금도 가혹하지 않기에 빈틈을 타는 자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나를 접해 보고는 바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니까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겠어. 나랑 별반 차이 없잖아. 똑같이 삼시 세끼 드시고 권병이나 능력은 보이지도 않아. 내가 당신을 어떻게 대하든 아무 말씀도 없으시잖아. 날 어쩌시겠어?’ 이것은 어떤 생각이냐? 이 생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냐?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째서 사람에게 이런 성품이 생기겠느냐?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살면, 아무리 하나님이 위대하고 하나님의 지위가 존귀하며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을 구원한다고 생각해도, 또 그가 아무리 입으로는 감격했다면서 기꺼이 수고하고 대가를 치르겠다고 말해도, 막상 본분을 이행할 때는 그의 마음속에 마귀가 주인 노릇하며 일하기 시작한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까지 속이고 농락하는 자는 어떤 사람이냐? (마귀입니다.) 마귀이다. 이는 확실한 사실이다.

예전에 우리는 사탄과 하나님의 어떤 대화에서 사탄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지 교제한 적이 있다. 하나님이 “사탄아, 네가 어디서 왔느냐?”라고 물었을 때 사탄이 뭐라고 대답했느냐?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욥 1:7)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마귀적인 말입니다.) 이것이 마귀적인 말이다! 그것이 만약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였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게 물으시니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성실하게 답하겠습니다.” 이것이 말 같은 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정상 인성의 사고에 부합하고 완전한 말로서 문법에도 맞아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다. 사탄이 이렇게 대답했느냐?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대답하더냐?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너희는 이 말을 알아들었느냐? (못 알아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사탄은 대체 어디서 왔느냐? 그것이 어디를 두루 돌아다녔느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여기에 정론이 있느냐?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사탄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그것이 하나님에게 와서 하나님에게 말하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지금까지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도 이런 것들을 모르는 것이다. 사탄은 왜 이런 말투와 방식으로 하나님의 물음에 답하는 것이냐? 하나님이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것은 진지하게 대답했느냐?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물음에 대답했느냐? 농락했다. 마치 네가 누군가에게 “당신은 어디서 왔나요?”라고 물었는데 “맞춰 보시죠.”라고 답하니 “모르겠네요.”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네가 맞추지 못할 걸 알면서 너더러 맞춰 보라고 하니 이는 너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바로 이런 태도를 우롱이라고 하고, 농락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의 없이 알려 주고 싶지 않으면서도 너를 희롱하며 가지고 놀고 싶어 하는데, 사탄의 성품이 바로 이렇다.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이들이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대하지 않느냐? 만약 열심히 뛰어다니고 일하며 가끔씩 수고하고 대가를 조금 치르는 그들의 겉모습만 보면 그런 사람 같지 않고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 그들의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물음에도 바로 답하지 않고 뱀처럼 빙빙 돌려 답을 찾지 못하게 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이겠느냐? 그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불손하고 무시하는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기고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왜 못하겠느냐? 그들의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전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런 부류 사람의 사악한 점이다. 그들의 사악한 점은 그들이 보는 하나님의 신실함, 낮춤 그리고 정상 실제 등을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부족한 점이고 사람에게 쉽게 관념을 일으키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가장 큰 옥의 티이자 결점, 허물, 흠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을 어떻게 봐야 하겠느냐? 그들이 이런 방식과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인데, 그들 자신에게는 어떠냐? 그들에게 득이 되었느냐? 이것은 그들 자신에게도 모욕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어떤 사람이 성의 없이 먹을 것을 하나 선물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도 묻지 않고 바보처럼 그냥 집어 먹는다면 보통 사람으로서 이런 사람은 인성에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지 않겠느냐? 인성에 모자란 구석이 있는 사람을 정상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성육신한 그리스도가 만약 이런 정상 인성도 갖추지 못했다면 사람이 믿을 만한 가치가 있겠느냐? 믿을 만하지 못하다. 성육신한 하나님의 인성의 특징이 무엇이냐? 이성과 사고, 양심이 무엇보다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럼 판단력은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계십니다.) 만약 내가 판단력이 없고 부주의하며 상식이나 식견도 없어서 일이 닥쳤을 때 숙고할 줄 모른다면 정상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는 결함이 있는 인성이지 정상 인성이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라 불릴 자격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성육신할 때 이런 육신을 택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약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너희가 이런 하나님, 소위 성육신을 따를 가치가 있겠느냐? 그럴 가치가 없다. 그렇다면 너희는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이것은 내 관점에서 본 하나의 측면이다. 다시 너희의 관점에서 봤을 때 네가 그를 하나님으로 여기고 따라야 할 대상으로 여겨서 그의 추종자가 되어 그를 이렇게 대한다면 너는 너 자신의 위치를 어디에 둔 것이냐? 이는 너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을 존중할 만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데도 그를 믿는다면 너는 무엇이란 말이냐? 멍청이가 아니냐? 너는 아무 생각도 없이 따르는 것이 아니냐? 이는 스스로를 모욕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만약 네가 그를 정상 인성의 몇 가지 측면을 두루 갖춘,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행동한다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냐?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맞는 말이지 않으냐?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든 사람의 관점에서 보든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봤을 때 네가 그를 하나님으로 여기면서 그렇게 대한다면 이는 대놓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반면 네가 그를 하나님이 아닌 사람으로 여기는데도 그를 따른다면 이는 모순이 아니냐? 이는 너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두 가지 경우에 대해 잘 생각해 보아라. 내 말이 맞지 않으냐? 그렇지 않으냐? 사람은 어째서 이런 것을 생각하지 못하느냐?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냐? 설마 단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겠느냐? 깊게 따져 볼 것도 없이 이런 사람은 자질 면에서 지능이 떨어지는 자이다. 여기서 지능이란 무엇을 뜻하겠느냐? 생각이다.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고 이해득실을 따질 줄 모르며, 이런 일은 어떤 성질인지,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지 고민할 줄 모르니 이를 두고 지능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지능이 떨어지는 것에는 무엇이 있느냐? 동물, 짐승이 그렇다.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을 생각할 줄 안다. 사람이 일시적인 충동으로 어리석은 일을 할 수는 있지만 똑같이 어리석은 짓을 반복한다면 지능이 떨어지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은 이성이 건전하지 못한 자로, 속된 말로 ‘팔푼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그의 사심이 너무 크고 그의 음흉한 속내가 결코 작지 않다. 이것이 바로 내가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산다고 하는 까닭이다.

‘선물’ 사건을 가지고 교제하는 것이 침소봉대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만약 이렇게 교제하지 않고 이 일을 대충 얘기한다면 너희가 그 말을 듣고 나서 이런 성과에 이를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면 너희는 기껏해야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은 왜 그렇게 행동했지? 난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정말 별 사람이 다 있네!’ 너희는 기껏해야 이렇게 생각하고 얘기하면 끝이다. 하지만 이렇게 깊이 인식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그렇게 깊이 인식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내가 말한 것들이 너희에게 어떤 유익이 있겠느냐? 너희가 어떤 진리를 얻었느냐? 먼저 너희에게 한 가지 알려 주어야 할 것은, 사람과 하나님이 과연 어떤 관계를 형성해야 가장 좋으냐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하거나 하나님과 가까이 지낼 때 어떻게 지내야겠느냐? 원칙을 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또 사람이 하나님을 이렇게 오랫동안 믿었는데,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어떤 일이 이야기 속 그자가 한 일과 성질이 같으냐?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니겠느냐? 이런 교훈을 얻는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 눈을 속이려 했다간 큰일 나. 그분과 가깝게 지내지 말고 떨어져 지내는 게 좋겠어. 만만한 분이 아니니 왕래하지도 말아야지! 잘못했다가는 괜히 크게 비난받고 뼈도 못 추릴 수도 있어. 그분께는 선물도 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생각해서야 되겠느냐? (안 됩니다.) 사실 너희는 이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가까이 지낼 기회가 많지 않을뿐더러 왕래하는 경우는 더더욱 많지 않기 때문에 너희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너희와 접하는 날이 있더라도 걱정하지 말아라. 비결을 하나 알려 주겠다. 나와 함께 지내든 남몰래 기도하며 구하든 최고의 비결이 무엇이겠느냐? 절대 내 앞에서 잔머리를 굴리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만약 그런 부류라면 내게 얼씬도 하지 말거라. 어떤 사람은 말할 때 자꾸만 잔머리를 굴린다. 눈 깜짝할 사이에도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하는 말마다 과장과 허풍이 섞여서 그런 사람이 몇 마디 더 하게 되면 어떤 말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분이 안 된다. 이런 사람은 내게 얼씬도 하지 말아라. 네가 하나님과 접촉하고 왕래할 때 네가 지키고 준수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원칙이 무엇이겠느냐?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존중은 체면을 차리는 것도 아니고, 환심을 사거나 아첨하는 것도, 아부하며 비위를 맞추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행해야 할 한 측면이다. 나와 접촉할 때 내 말을 끊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 말한다. 그러면 내가 말하는 동안 그는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 눈을 감고 듣는다. 그게 무슨 뜻이겠느냐? ‘당신은 쓸데없는 말을 하고 계세요. 당신이 뭘 아세요?’ 이런 태도인 것이다. 내가 모르긴 하지만 원칙이 있다. 내가 배운 것, 내가 본 것, 내가 이해한 것, 내가 아는 원칙을 알려 주면 네가 많은 것을 얻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네가 만약 항상 흘끗거리며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내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면 너는 얻지 못할 것이다. 네가 알아서 찾아보아라. 그렇지 않겠느냐? 그러니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너희가 들을 때 내가 너희 관점을 밝히지 못하게 가로막더냐? 내가 막을 일은 없을 것이다. 말을 마치고 나면 나는 너희에게 질문이 있는지 묻는다. 누군가 질문하면 내가 바로 설명해 주고 그 문제가 어떤 원칙에 해당하는지 알려 준다. 어떨 때는 너희에게 원칙만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직접 하나하나 알려 준다. 비록 내가 모르는 업무도 있지만 나만의 원칙이 있고 이런 일에 대한 나만의 관점과 처리 방식이 있다. 나는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관점과 원칙으로 너희를 가르친다. 어째서 너희를 가르치겠느냐? 너희가 그런 것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끝나면 다른 질문은 없는지 물어보고 질문이 더 나오면 바로 설명해 준다. 나는 내 말을 들으라고만 하지 않고 너에게도 발언권을 준다. 단, 너는 쓸데없는 말을 하며 시간을 뺏지 말고 합리적으로 말해야 한다. 내가 다급한 마음에 일부 사람들의 말을 끊을 때가 있는데 어떤 상황에서 그러겠느냐? 그가 중언부언하고 다섯 마디면 끝날 말을 열 마디나 할 때이다. 사실 나는 한 마디만 해도 알아듣고 뒤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으니 길게 말할 필요 없다. 간단명료하게 말하고 다른 사람의 시간을 뺏지 말아라. 말하고 나서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원칙을 따라야 할지 답을 알려 주면 되는 것 아니냐?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어쭙잖게 이렇게 말한다. “안 됩니다. 당신도 저를 존중해 주십시오. 저희 사이에서 존중은 상호적인 겁니다. 당신은 하실 말씀 다 하셨지만 제 관점은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잖아요. 제 관점은 이렇습니다. 처음부터 말씀드릴게요.” 그는 늘 자기 관점을 밝히려 하는데, 내가 그의 관점을 모르는 줄 안다. 사실 나는 그가 운만 떼어도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데 그가 말할 필요가 있느냐? 필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지능이 너무 떨어져서 두 마디로 끝날 일을 열 마디를 하고, 말을 끊지 않으면 한도 끝도 없다. 다들 알아듣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런데도 말을 계속하려 하니 이는 지능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있습니다.) 이토록 이성과 지능이 떨어지는데 자기가 똑똑한 줄 아니 역겹지 않으냐? 소름 끼치도록 역겹다. 사람이 하나님과 접촉할 때 첫 번째 원칙은 정직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고, 두 번째 원칙은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며, 가장 중요한 세 번째는 진리를 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진리를 구하지 않는데 하나님을 믿는 게 무슨 소용이냐? 하나님을 믿는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 의미가 어디에 있느냐? 아마도 이 원칙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지킬 수 없는 것일 텐데 어째서 이것을 언급하겠느냐?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이렇게 실행하는 것을 배워야 하니 지금 미리 준비하라는 것이다.

나는 교회에서 많은 사람을 접했다. 어떤 사람들에게 몇 가지 일을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며칠 후 내가 부탁한 일을 일일이 적어 놓은 메모를 보여 주면서 지금도 하나하나 실행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또 만나면 실행 상황이 어떤지 보고하고, 구해야 하는 문제는 무엇이며,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문제는 무엇인지 모두 설명했다. 중간의 세부 사항들도 자세히 얘기해 주는데, 때로는 너무 사소한 것까지 시시콜콜 얘기할 때도 있지만 그의 이런 태도를 통해 진정성과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책임과 본분, 의무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이와 달리 두 가지 일을 부탁했더니 당시에는 메모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실행하지 않고 있다가 내가 물어보니까 그제서야 생각나서 또 한 번 메모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 어째서 아직도 일을 처리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봤더니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는 또다시 노트에 적었다. 그가 어디에 적었느냐? (노트에 적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되지 않느냐? 인간도 아니다. 그에게 어떤 일을 맡기면 흘려듣고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내가 부탁하는 여러 가지 업무나 사무 쪽 일, 일부 교회 사역은 모두 사람의 역량 안에 있는 일이다.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많은 경우 리더 일꾼에게 일을 맡기면 다수가 모두 알겠다고만 하고 피드백도 없고, 어떤 상황인지 파악도 안 된다. 그야말로 감감무소식이다. 과연 이 사역을 안배했는지, 잘하고 있는지, 어떤 착오가 있는지, 결과는 어떤지 전혀 보고하지 않고 구하지도 않은 채 그냥 한쪽에 미뤄 둔다. 그래서 결과를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문제가 더 심각하다. 내가 부탁한 일을 이행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아첨하고 기만하기까지 한다. “저희는 어제 어디를 가서 어떤 일을 했고 그저께는 어떤 일들을 했으며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식과 둘러대기에 얼마나 능한지 잘 들어 보아라. 내가 특별히 부탁한 일은 하지 않고 쓸데없는 일이나 실컷 하면서 중요한 사역을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는다. 이게 어떤 모습이냐?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입만 열면 거짓말과 기만뿐이다!

농사를 담당하는 사람에게 “올해 어떤 채소가 괜찮던데 종자를 남겨 두었느냐?”라고 묻자 “남겼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저번에 채소를 모두 수확해서 남은 게 없다고 들었다.”라고 하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다 거두지는 않아서 조금 남았습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조금 남았다는 채소가 어디 있는지 한번 보자.” 그가 말했다. “어? 잠시만요. 제가 우선 가서 보겠습니다.” 과연 종자를 남겼겠느냐? 남기지 않았다. 그의 말 중 처음에 “남겼습니다.”라고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다 거두지는 않아서 조금 남았습니다!”라고 한 두 번째 말은 거짓말이 아니냐? 남겼는지 그러지 않았는지도 모르면서 “제가 우선 가서 보겠습니다.”라고 말했으니 세 번째 말도 거짓말이다. 거짓말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의 거짓말에는 모두 단계가 있어서 점점 심해지니 입만 열면 거짓말이다! 너희는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과 왕래하고 싶으냐?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인 사람과 함께 대화하거나 일할 때 기분이 어떠냐? 화나지 않느냐? 그 누구라도 감히 다 속이다니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이것이 속일 일이냐? 이렇게 속여서 네가 얻는 유익이 무엇이냐? 이런 태도로 일을 하고, 이런 태도로 너를 대하는 것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한 사람이 한담이든, 사역이나 올바른 일에 대한 이야기든, 진리에 대한 교제든 하는 말의 99%가 전부 거짓말이면 이 사람은 구제 불능이다. 누구라도 속일 수 있다면 너는 어떤 인간이냐? 네가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 어떤 이방인은 말만 하면 “제가 알기론”, “양심적으로 말하면”이라는 이 전제와 함께 그래도 사실을 좀 말한다. 너는 하나님을 이렇게 오래 믿고 이렇게 설교를 많이 들었는데도 사실은 한 마디도 없고 전부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너는 어떤 마귀이냐? 남들이 역겨워하거나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런 자가 많지 않으냐? 너희가 이런 자들이냐? 너희는 나와 접촉할 때 어떤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느냐? 사고를 쳐서 출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결과가 심각하리라는 것을 알면 남들이 말만 꺼내도 거짓말로 무마한다. 이런 일에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또 어떤 일에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느냐? 바로 자기 체면을 세우고 남들에게 추앙받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말했다가 교체당할까 봐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 상부에 사역을 보고할 때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구하는 척하면서 남들에게 거짓 이미지를 심어 준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이 거짓이다. 그는 사역을 전혀 하지 못하지만 아무 문제도 거론하지 않으면 상부에서 자신의 허점을 눈치채고 자기를 교체할까 봐 재빨리 뭔가 하는 체한다. 거짓 리더, 적그리스도의 마음가짐이 모두 이렇다.

방금 교제한, 사람과 하나님이 접촉할 때 지켜야 할 원칙 세 가지 중 어떤 원칙이 지키기 힘들고, 어떤 원칙이 지키기 쉬운지 생각해 보아라. 사실 진정으로 지킨다면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속의 마귀를 쫓아내야 지킬 수 있다. 너는 마음속에서 마귀와 전쟁을 치러야 하며 그때마다 그것을 물리친다면 너는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매번 패배하여 그것에 사로잡힌다면 너는 지킬 수 없다. 그 어떤 원칙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이 세 가지 원칙을 모두 지킬 수 있다면, 나와 함께 지내고 왕래할 때만이 아니라 평상시 형제자매와 접촉할 때도 이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면 모두에게 유익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적그리스도의 사악함, 음험함, 간사함을 해부하다

지난 시간에는 적그리스도의 일곱 번째 모습인 사악함, 음험함, 간사함에 대해 교제했다. 이 내용에 대해 두 차례 교제했는데 첫 번째는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내용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느냐? (진리를 적대시하고 혐오한다고 하셨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적대시하고 혐오하며, 진리나 하나님과 합하는 모든 긍정적인 사물을 증오한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의 첫 번째 주된 모습이다. 첫 번째 교제 때는 적그리스도가 혐오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보통 사람은 부정적인 사물과 사악한 세력을 혐오하고, 불결하고 어둡고 사악한 사물들을 싫어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정반대다. 그의 사악한 본성의 첫 번째 모습을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바로 그가 싫어하는 것이 부정적인 사물이 아닌 진리나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긍정적인 사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사악함의 첫 번째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두 번째 교제에서는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을 보여 주는 두 번째 강력한 증거를 이야기했다. 그가 긍정적인 사물을 혐오한다면 무엇을 좋아하느냐? (부정적인 사물입니다.)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느냐? 정의롭고, 선하며, 아름답고 인성과 관련된 사랑, 인내, 포용을 좋아하고, 긍정적이고 사람에게 유익한 상식과 학문을 좋아한다. 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모든 긍정적인 사물, 하나님이 정한 만물의 규율과 법칙, 하나님의 율법, 행정 법령,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진리와 생명의 도 등 하나님과 관련된 것을 좋아한다. 반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은 이와 정반대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좋아하겠느냐? (거짓말과 기만입니다.) 그렇다. 그는 거짓말과 기만, 그리고 음모와 계략, 여러 처세술, 아첨과 알랑방귀를 좋아하며, 싸움, 지위와 권세를 좋아한다. 이 모든 부정적인 것,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에 위배되는 것들을 그는 다 사랑한다. 바로 이 점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을 입증한다. 이런 것이 강력한 증거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비록 강력한 증거들이긴 하지만 두 가지 부분뿐이므로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다. 오늘은 이어서 적그리스도의 사악함, 음험함, 간사함, 이런 모습의 세 번째 부분을 이야기하겠다. 세 번째 부분은 분명 첫 번째 부분이나 두 번째 부분과는 다르지만 이 두 가지 부분과 관련되어 있다. 어떻게 관련되어 있겠느냐? 모두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 본질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 차이점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그의 사악한 본성이 사랑하고 필요로 하며 혐오하는 것들이 앞선 두 부분에서 말한 것과 다소 다르다.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그가 좋아하는 것 중에 긍정적인 사물도 있다거나 그가 부정적인 사물을 싫어하기도 한다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부분이라는 말이다. 이 부분은 단지 그가 사랑하는 것이나 그에게 필요한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적그리스도라는 사악한 세력이 숭상하는 것, 다시 말해, 숭배하거나 경모하는 것까지 아우른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숭상’, ‘숭배’, ‘경모’는 긍정적인 사물에 쓰는 말 아닌가요? 어떻게 적그리스도에게 쓰십니까? 이 단어들을 쓰는 게 적절할까요?” 이 단어들은 좋은 뜻이라고도, 나쁜 뜻이라고도 할 수 없는 중립적인 단어이다. 따라서 여기에 써도 원칙적으로 잘못된 것은 없으니 써도 무방하다.

3. 적그리스도가 숭배하고 경모하는 것을 해부하다

적그리스도는 무엇을 숭배하고 경모하느냐? 일단 확실한 것은 그들이 숭배하는 것이 진리나 하나님,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아름답고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럼 그들이 숭배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느냐? 너희는 어떤 것들이 떠오르느냐? 힌트를 주겠다. 종교에서 주를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기독교로 전락하였느냐? 어째서 지금 그들을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집, 하나님 사역의 대상이 아닌 종교, 교파로 규정하느냐? 그들에겐 교리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했던 사역과 말씀을 한 권의 책으로 편집해 교재로 만든 다음 학교를 세워 여러 신학자를 불러모으고 양성한다. 이 신학자들이 무엇을 배우겠느냐? 진리를 배우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그들이 무엇을 배우느냐? (신학 지식입니다.) 신학 지식과 이론을 배울 텐데 이는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와는 전혀 무관하다. 그들은 신학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대신하니 그렇게 기독교나 천주교로 전락한 것이다. 종교에서 숭상하는 것이 무엇이냐? 가령 네가 어느 교회에 갔는데 하나님을 몇 년이나 믿었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의 질문에 믿은 지 얼마 안 됐다고 답하면 그들은 너를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성경’을 끼고 들어가 “얼마 전에 모 신학원을 졸업했습니다.”라고 한다면 너를 상석에 앉힐 것이다. 반면 네가 평신도라면 사회에서 어지간한 지위에 있지 않은 이상 너를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며 종교계가 다 이렇다. 교회에서 설교하고, 신분과 지위가 있으며 명망 높은 사람은 모두 신학원이 배출한 신학 지식과 신학론을 갖춘 사람들로서 기본적으로 기독교를 지탱하는 주체이다. 기독교는 이런 사람들을 양성해서 강단에서 설교하게 하고,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사역하게 한다. 그들은 이런 신학생과 설교하는 목사, 신학자 등의 인재가 있어 기독교가 오늘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이 기독교의 존재 가치, 존재의 밑천이 된 것이다. 만약 한 교회의 목사가 신학원을 나오고 성경을 잘 해석하고 영적인 책도 좀 읽고 지식과 말주변이 좀 있다면 이 교회는 번창하여 그 명성이 다른 교회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기독교의 이런 사람들은 무엇을 숭상하느냐? 지식이다. 신학 지식 말이다. 이 지식은 어디에서 오느냐? 예부터 전해진 것이 아니냐? 예부터 경문이 있었고, 그것이 대를 거듭하여 전해져 오면서 사람이 이렇게 읽고 배우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사람은 성경을 여러 단락으로 나누고 여러 버전으로 편집하여 사람이 파고들며 배우게 했다. 하지만 그들이 성경을 배우는 것은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을 인식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지식과 비밀을 파고들어서 어느 시기에 어떤 일이 ‘계시록’의 어떤 예언과 맞아떨어지는지, 언제 대재난과 천년왕국이 임할지 알아내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이런 것만 연구한다. 그들이 연구하는 것이 진리와 관련이 있느냐? (없습니다.) 진리와 무관한 일을 그들이 왜 연구하겠느냐? 그들은 연구하면 할수록 아는 게 많아진다고 생각하고, 글귀와 도리를 많이 무장할수록 자격도 높아진다고 생각하고, 자격이 높을수록 자신의 능력이 커진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믿어서 마침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산 사람도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 주님과 만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종교 관념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종교계의 목사와 장로들은 모두 성경적 지식과 신학을 연구하는 자들로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다. 그럼 그들이 교회에 숨어 있는 적그리스도와 다를 게 있느냐? 계속해서 그들 사이의 연관성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다. 기독교와 천주교에서 성경과 신학을 연구하고 나아가 하나님 사역의 역사(歷史)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믿는 자들이겠느냐?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한 신도나 하나님을 따르는 자와 차이가 있느냐? 하나님의 눈에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보이겠느냐? 아니다. 그들은 신학과 하나님을 연구할 뿐이지 하나님을 따르거나 증거하지 않는다. 그들은 역사(歷史), 철학, 법률, 생물, 천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연구한다. 단지 그들은 과학이나 다른 학과는 싫어하고 유독 신학 연구를 좋아할 뿐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행한 사역에서 단서를 찾아 하나님을 연구하는데, 연구한 결과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존재를 알아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영원히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낼 수 있느냐? (알아내지 못합니다.) 어째서냐? 그들은 글귀 속에서 살고, 지식 속에서 살고, 철학 속에서 살고, 인간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을 것이며, 성령의 깨우침을 절대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무엇으로 규정하겠느냐? 불신파로, 이방인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불신파와 이방인들은 소위 크리스천 공동체와 어울려 지내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기독교인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느냐? 진정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느냐? (아닙니다.) 왜 그렇겠느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상당수의 사람이 속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만유를 주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이 성육신할 수 있다는 것은 더더욱 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의심하고 부정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이 말씀한 예언들, 특히 재난에 관한 예언들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이행되지 않기를 바라는 태도까지 취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일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이자, 그들의 소위 믿음의 실체이며 본모습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학이라는 학문과 지식에 특히 관심이 있고,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 무척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연구한다. 그들은 순전히 신학을 연구하는 지식인 무리이다. 이러한 지식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역하러 오고, 그의 말씀이 이루어졌을 때 그들은 어떻게 대하느냐?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새로운 사역을 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 그들의 첫 반응은 어떠하냐? “그럴 리가요!” 하나님의 새 이름과 새 사역을 전하는 사람을 정죄하고 심지어는 죽이고 제거하려 든다. 이는 어떤 모습이냐? 전형적인 적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냐? 그들이 당시 바리새인, 대제사장, 서기관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말세 심판, 하나님의 성육신을 적대시하고 하나님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은 더더욱 적대시한다. 그들의 입장은 이렇다. “당신이 육신을 입지 않은 영체라면 하나님이 맞겠죠. 그런데 성육신해서 인간이 되었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아녜요. 인정 못 해요.” 이 말의 숨겨진 의미가 무엇이냐? 그들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성육신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락없는 적그리스도가 아니냐? 이것은 틀림없는 적그리스도이다. 그러한 주장이 종교계에 존재하지 않느냐? 그러한 주장은 매우 힘 있게, 또한 매우 강력하게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었다는 건 잘못된 거야. 그건 말도 안 돼! 성육신했다면 그는 가짜일 거야!”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믿고 있는 건 사람이 분명해. 그들은 미혹된 거야!” 이런 말을 내뱉는 그들이 2천 년 전에 주 예수가 나타나 사역할 때 있었다면 그들은 주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 주 예수를 믿는 것은 사실 주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 예수’라는 세 글자를 믿고, 하늘의 막연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들을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닌 불신파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성육신, 하나님의 창세 사역을 믿지 않고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전 인류를 구속한 사역은 더더욱 믿지 않는다. 그들이 연구하는 신학은 종교적 이론이나 학설의 하나로 완전한 사이비이자 사람을 미혹하는 엉터리 주장이다. 기독교의 소위 신학 지식인은 우리 교회 안의 적그리스도와 어떤 필연적인 관계가 있느냐? 그들의 여러 모습은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어째서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겠느냐? 일단 기독교인은 차치하고 적그리스도로 규정된 사람들이 진리를 어떻게 대하는지, 진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통해 그들이 숭상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먼저 그가 어떤 진리를 깨닫고 나면 그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그가 그 진리를 어떻게 대하느냐? 그가 어떤 태도로 진리를 받아들이느냐? 그는 그 말씀들을 자신의 실행의 길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무장해야 할 하나의 이론으로 여기고 남들에게 이야기해 주길 좋아하느냐? (이야기해 줄 하나의 이론으로 여깁니다.) 그는 하나의 이론으로 여기고는 배우고 분석하며 연구한다. 그러고 나서는 머리로 습득하고 기억해서 줄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면 여기저기서 으스댄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오래 이야기하든,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가 얼마나 많은 도리를 이야기하든, 얼마나 언변이 좋든,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하든, 말이 얼마나 청산유수든, 얼마나 많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진리에 부합하든, 그렇지 않든, 그에게서 어떤 결과나 실행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진리를 어떻게 여기느냐? 자기를 뽐낼 도구로 여긴다. 가령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면서 정직한 사람에게는 어떤 모습이 있는지, 정직한 사람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본분 이행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면 그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이 말씀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먼저 그는 그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어떤 태도이냐? “알겠어요. 정직한 사람은 거짓말하지 않고 남들 앞에서 마음을 터놓고 진실만을 얘기한다는 거군요. 그리고 본분도 얼렁뚱땅하지 않고 충성을 다해 이행하고 말이에요.” 그는 이 말씀을 하나의 이론으로 여겨서 마음에 새긴다. 이런 이론이 그의 마음에 뿌리내린다고 한들 그를 변화시킬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왜 기억하느냐? 그는 이런 말씀의 정확성을 좋아한다. 그 올바른 이론으로 자기를 포장해서 남들로부터 우러름을 받는 것이다. 남들이 무엇을 우러러보느냐? 그가 유려하고 거창하게 옳은 말을 하는 것을 우러러본다. 이것이 그가 바라던 바다. 그가 이 말씀을 듣고 진지하게 대한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왜 없겠느냐?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는 실행하지 않습니다.) 그가 왜 실행하지 않느냐? 그는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 ‘이게 하나님 말씀이라고? 쉽네. 한 번만 말해도 난 기억해. 정직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번만 들어도 줄줄 외우겠어. 너희는 메모하면서 묵상까지 해야겠지만 난 그럴 필요 없다고!’ 그는 하나님 말씀을 하나의 이론이나 지식으로 치부해서 어떻게 정직한 사람이 되는지 속으로 묵상하지 않고 자기에게 비춰 보지도 않는다. 자신의 행실이 정직한 사람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자기가 한 일 중에 어떤 일이 정직한 사람이 되는 원칙에 어긋나는지 성찰하지도 않는다. 또 이런 고민도 전혀 하지 않는다.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니 진리인 거야.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해. 그런데 어떻게 해야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흡족해하실까? 내가 한 일 중에 정직하지 않은 일은 없었나? 어떤 모습이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가 이런 고민을 하겠느냐?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이게 정직한 사람이라고? 이게 진리라고? 이론이나 구호가 아니고? 실행할 필요도 없이 거창한 말만 하면 되겠네.’ 그는 왜 실행하지 않느냐? 이런 생각 때문이다. ‘속에 있는 생각을 전부 남에게 말하면 자기를 폭로하는 꼴이잖아? 스스로를 폭로해서 남들이 나를 간파하면 그러고도 나를 우러러보겠어? 내가 하는 말을 듣겠어? 하나님 말씀은 정직한 사람이 되면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는 뜻인데, 거짓말을 못 하면 마음속에 프라이버시가 없어지는 거잖아? 그러면 남들이 간파하게 되지 않겠어? 이렇게 살면 바보 아냐?’ 이것이 그의 관점이다. 다시 말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이론을 받아들일 때 그의 마음에 생각이 깃드는 것이다. 무슨 생각이냐? 왜 그를 사악하다 하느냐? 먼저 그는 그 말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어떤 이해득실이 있는지 분석한다. 일단 그에게 불리하다고 여겨지면 이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실행할 순 없어.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내가 그렇게 어리석은 줄 아나. 난 너희처럼 우매하고 단순하지 않거든! 언제든 내 생각과 주관을 가지고 있어야 해. 네게 천 가지 묘책이 있다면 내겐 하나의 원칙이 있어. 마음의 계략을 밝혀선 안 돼. 바보들이나 정직한 사람이 되는 거야!’ 그는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부인하면서 한편으로는 비교적 유명한 말들은 명심해 두었다가 남들에게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보이고, 더욱 영적인 사람처럼 보이도록 자기를 포장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속셈이다.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듣는 것과 진리에 대해 보이는 반응을 보면 그들은 진리에 흥미가 없으며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무엇을 사랑하느냐?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옳은 것, 신선한 것, 비교적 고상한 이론적 지식이다. 이런 이론적 지식은 그들을 더 완벽하게, 더 그럴듯하게, 더 존엄 있게, 남들에게 더 숭배받을 수 있게 포장해 준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점이 사악하냐? 어떤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든 그는 일련의 사이비 같은 이론이나 옳은 말로 교제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고 그를 따르게 만드니 사탄과 마찬가지로 사악하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은 그의 사악한 계산과 모략, 그리고 일련의 계획에서 나타나는데, 그는 하나님 말씀을 읽는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사악함을 추동할 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한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이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부분적으로만 인용하는데 이는 완전히 사람을 미혹하고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는 설교나 교제를 듣다가 신선하고 써먹을 만한 게 있으면 바로 메모해 두는데 그의 이런 모습을 우매한 사람이 보면 이렇게 생각한다. ‘그는 참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이야. 설교만 들으면 메모하니 얼마나 영적인 이해력이 있겠어. 중요한 부분은 전부 메모하네.’ 그가 메모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메모하는 것과 같으냐?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이런 생각으로 메모한다. ‘이 말씀 참 좋다. 이해가 안 되니 적어놔야겠어. 내게 실행의 길과 원칙이 생기도록 나중에 실행하면서 적용해 봐야지.’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생각하겠느냐? 그는 애초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난 오늘 너희는 들어보지도 못한 진리를 메모해 놓았어. 아무한테도 알려 주거나 교제해 주지 않을 거야. 난 얻었어. 내가 진리를 깨달았다는 걸 알 수 있게 언젠가 너희에게 한 수 가르쳐 줘야지. 다들 엄지를 치켜세우게 말이야.’ 그가 이렇게 메모하는 것을 보면 넌 그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사모하고 아주 정확하게 메모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메모하고 나서 그가 어떻게 하느냐? 노트를 접으면 그만이다. 언젠가 그에게 설교를 시키면 그는 뭘 설교 해야 할지 모를 때 재빨리 노트를 뒤적여 설교할 내용을 정리할 것이다. 그러고는 보고, 적고, 외워 써서 확실하게 숙지하고 나서야 ‘안심’한다. 또 마침내 자신이 ‘진리’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어딜 가든 큰소리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말에는 특징이 있다. 그들은 모두 공허한 도리, 논조, 틀에 박힌 것들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네게 구체적인 어려움이 생기거나 문제가 생겨서 그에게 찾아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물어보면 그들은 일련의 도리를 늘어놓으며 조리 있게 말하지만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묻는 말엔 대답하지 못한다. 대답을 못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는 그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흔히 진리를 하나의 주장이나 이론으로 받아들이는데,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다 해도 어떤 일에 맞닥뜨리게 되면 꿰뚫어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순종할 수도 없으며 진리를 구할 줄도 모른다. 누군가 그들에게 교제해 줄 때, 그들은 ‘명언’을 빌려 대답하곤 한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난 모든 것을 이해해. 난 당신이 걷기도 전에 설교했던 사람이야!” 이것이 그들의 ‘명언’이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면서 일이 닥쳤을 때는 어찌 꼼짝도 못 하는 것이냐? 네가 이해한 대로라면 어찌 행하지 못하느냐? 이 일이 어찌 너를 얽매여 갈피를 못 잡게 하느냐? 네가 과연 진리를 이해했느냐? 네가 이해했다면 왜 받아들이지 않느냐? 네가 이해했다면 왜 순종하지 않느냐? 진리를 깨닫고 나서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다름 아닌 순종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전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으니 아무도 저한테 교제하지 마세요. 남의 도움은 필요 없으니까요.” 남들 도움이야 필요 없는 건 상관없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가 연약해졌을 때 그가 이해한 도리들이 아무런 쓸모도 없을 것이고, 심지어 본분조차 이행하기 싫어지며 불신하는 나쁜 마음까지 생길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신학 이론을 말했지만 주저하지 않고 믿음을 포기하며 물러난다. 여기에 분량이 있느냐? (없습니다.) 분량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의미이다. 네게 생명이 있다면, 그렇게 사소한 일에 맞닥뜨렸을 때 왜 그것을 이겨 낼 수 없겠느냐? 너는 말솜씨가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스스로를 납득시켜 보아라. 자신조차 설득할 수 없다면 네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이냐? 그것이 진리이냐? 진리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사람들의 패괴 성품도 해결할 수 있다. 왜 네가 이해한다는 ‘진리’가 너 자신의 어려움조차 해결하지 못하느냐? 그렇다면 네가 이해한 것은 대체 무엇이냐? 이치일 뿐이다.

적그리스도의 일곱 번째 모습은 사악함, 음험함, 간사함이다. 방금 이런 모습의 세 번째 부분인 지식과 학문을 숭상하는 적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적그리스도가 지식과 학문을 숭상하는데 그중 어떤 일이 그들의 사악한 성품을 보여 주느냐? 어째서 그들이 지식과 학문을 숭상하는 것에 사악한 본질이 있다고 하겠느냐? 여기서는 꼭 사실을 말해야 한다. 공허한 말이나 이론만 얘기하면 사람은 이 측면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단편적으로만 이해할 것이다. 먼저 오래전 일부터 말해 볼 테니 너희는 들어보면서 적그리스도의 행실을 비춰 보고, 그들의 모습과 본질을 비춰 보아라. 먼저 2천 년 전의 바리새인부터 얘기해 보자. 당시 바리새인은 외식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육신을 입고 나타나 사역할 때 바리새인은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사력을 다해 주 예수를 정죄하고 대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이 때문에 바리새인을 적그리스도의 대표적인 전형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이고, ‘적그리스도’는 바리새인의 다른 이름이 된 것이다. 바리새인은 본질적으로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이다. 따라서 먼저 바리새인으로부터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을 해부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바리새인의 어떤 행동을 보고 그들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겠느냐? 방금 적그리스도는 지식과 학문을 숭상한다고 했는데 지식과 학문이 어떤 사람들과 관련이 깊겠느냐? 어떤 부류 사람들의 대명사더냐? 석박사를 뜻하겠느냐? 아니다. 본론에서 벗어났다. 바리새인을 말한다. 바리새인이 외식하고 사악한 이유는 그들이 진리는 싫어하지만 지식은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로지 성경을 파고들어 성경 지식만 추구하면서 진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거나 진리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다. 하나님이 했던 말씀과 일을 연구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일종의 이론이나 학설로 만들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 이것이 파고든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했겠느냐? 그들은 무엇을 파고들었던 것이냐? 그들은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발현이 아니며 진리는 더더욱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학문의 한 일종으로 보는데, 신학 지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이런 지식과 학문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도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전도라는 것이며, 그들은 항상 신학 지식을 이야기하며 전도한다.

바리새인의 사악함은 어디서 나타나느냐? 일단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성육신을 대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하면 너희가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 관해 말하자면 먼저 2천 년 전 하나님이 육신을 입었을 때 하나님의 육신이 어떤 가정과 배경에서 태어났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먼저 주 예수는 명문가에서 태어나지 않았기에 그의 가족은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의 양부인 요셉은 목수였고 어머니 마리아는 평신도였다. 부모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는 주 예수가 태어난 가정의 배경을 상징하므로 주 예수는 평민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 평민이란 무엇이냐? 평범한 백성으로, 보통의 일반적인 하층민이다. 명문 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대단한 지위와도 거리가 멀었으며 귀족은 더더욱 아니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부모도 평범한 사람이었고 대단한 사회적 지위나 가정의 배경도 없었으니 주 예수가 태어난 배경과 가정은 더할 나위 없이 평범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성경의 기록에는 주 예수가 받은 교육에 특별할 게 있었겠느냐? 신학원의 교육을 받았겠느냐? 대제사장의 훈련을 받았겠느냐? 바울처럼 많은 책을 읽었겠느냐? 유명 인사나 유대교의 대제사장과 친분이나 교류가 있었겠느냐? 없었다. 주 예수가 태어난 가정의 사회적 지위만 봐도 주 예수가 유대교 상류층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 접점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평범한 유대인들 속에서 생활했고 가끔 교회에 가도 평민을 만나는 게 전부였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주 예수의 성장 과정에서 그가 정식으로 사역을 담당하기 전까지 그의 성장 배경은 늘 한결같았다는 말이다. 열두 살 이후에 집안이 흥해서 부유해지지도 않았고 사회 상류층이나 종교계의 상류층을 접할 기회는 더더욱 없었으며 자라면서 고등 교육을 받을 기회도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후대 사람에게 어떤 정보를 주느냐?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 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에게 고등 교육을 받을 기회는 없었고 그럴 여건도 안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회 환경, 평범한 가정에서 살았고, 특별한 면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주 예수가 한 설교나 일에 관해 듣고 나서 감히 일어나 대놓고 판단하고 모독하며 정죄했던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정죄한 근거가 무엇이냐? 의심의 여지 없이 구약 성경의 율법과 규례들이다. 먼저 주 예수는 제자들을 데리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도 계속 사역했다. 또 그는 율법이나 규례를 지키지 않고 성전에 가지도 않았다. 그리고 죄지은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묻는 사람에게도 율법대로 처리하지 않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었다. 주 예수가 한 다방면의 일들은 바리새인의 종교 관념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 예수를 증오했고 주 예수가 율법을 어겼다며 꼬투리를 잡고는 사력을 다해 주 예수를 정죄하는 것도 모자라 그를 죽이기로 작정했다. 만약 주 예수가 명문가에서 태어나 고등 교육을 받고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가깝게 왕래했다면 그 당시 주 예수의 처지는 아마도 달랐을 것이니 나중에 그런 일을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평범했고 정상적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출신 배경 때문에 바리새인들에게 정죄당했다. 그들이 주 예수를 정죄한 근거가 무엇이더냐? 그들이 알고 있고 만고불변하다고 생각하는 규례와 율례들이다. 바리새인은 그들이 알고 있는 신학적 이론을 하나의 지식이자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삼고는 그 잣대를 주 예수에게까지 들이대 정죄했다. 그들은 한 사람을 평가하거나 대할 때 그 사람의 본질에 근거하지 않았고 그 사람이 전하는 도가 진리인지의 여부에도 근거하지 않았으며, 그 사람이 한 말의 근원에는 더더욱 근거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이 알고 있는 구약 성경의 규례나 글귀, 도리로만 판단하고 정죄했다. 그들이 속으로는 주 예수가 말씀하고 행한 것이 죄가 아니고 율법을 어기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정죄하려 했던 것은 주 예수가 선포한 진리와 행한 이적과 기사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주를 따르고 찬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리새인은 그를 점점 더 증오하게 되었고, 심지어 그를 제거하기까지 하려고 한 것이다. 그들은 주 예수를 메시아의 강림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주 예수의 말씀에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주 예수의 행사가 진리에 부합한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 예수가 참람한 말을 하고,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판단했다. 그들이 주 예수에게 이런 죄명을 씌운 것은 주 예수를 속으로 얼마나 증오하는지를 보여 준다. 그래서 그들이 주 예수가 하나님이 보낸 자,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라는 것을 사력을 다해 부인했던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이랬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행하신다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실 거였으면 대단한 지위의 가문에서 태어나셨어야죠. 그리고 서기관, 바리새인에게 훈련받고 성경을 체계적으로 파고들어 성경 지식을 알아서 성경의 모든 지식을 갖춰야 ‘성육신’이라는 호칭을 감당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주 예수는 이런 지식을 갖추지 않았으니 그들이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정죄했던 것이다. “첫째, 당신은 이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으니 하나님이 아닙니다. 둘째, 당신이 이런 성경 지식을 쌓지 못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을 테니 당신은 더더욱 하나님일 리 없습니다. 셋째, 사역할 때 성전을 나가서는 안 되는데 당신은 지금 성전 안에서 사역하지 않고 항상 죄인의 무리 속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사역은 성경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당신은 더더욱 하나님일 리 없습니다.” 바리새인이 이렇게 정죄하는 근거는 어디서 비롯되었느냐?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사람의 머리와 사람이 받은 신학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관념과 상상, 지식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이런 지식이 옳은 것이고 진리이며 근거라고 생각한다. 언제든 하나님도 이를 어기며 사역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진리를 구하느냐?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엇을 구하느냐? 초자연적인 하나님, 영체의 현현을 구한다. 그러니 그들이 사람의 관념과 상상, 지식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규정하고 부인하며,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결과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정죄하는 것도 모자라 성육신한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관념과 상상, 지식으로 하나님을 판단한 결과이자 그들의 사악한 점이다.

바리새인이 지식과 학문을 숭상한다는 점에서 봤을 때, 바리새인의 사악한 점은 무엇이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이런 부류 사람의 사악한 본성을 어떻게 파헤치고 해부하느냐? 이것은 다들 알 테니 자세히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가 표출하는 사악한 본성이 과연 무엇이겠느냐? 이런 부류 사람의 사악한 본성을 어떻게 해부하고 간파할 수 있겠느냐? 누가 말해 보아라. (그들은 이론과 지식으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항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사악한 모습 중 하나입니다.) 대항이란 것은 하나의 행동이다. 그렇다면 그가 왜 대항하겠느냐? 이 대항에는 흉악한 성품이 좀 들어 있긴 하지만 아직 사악함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가 왜 대항하겠느냐? 여기에 그가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일이 있느냐? 그는 이런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으며,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야 해. 그것도 셋째 하늘에 말야. 사람들이 모두 경모하고 이르지 못하며 짐작할 수도 없는 분, 모든 인류와 모든 피조물, 심지어 우주의 모든 생물이 우러러보는 분이어야 하나님이지! 이제 하나님이 오셨는데 목수의 집에 태어나 보통 사람을 부모로 두었어. 더구나 말구유에서 태어나서 출생 배경이 평범한 것도 모자라, 보통이나 일반적인 수준보다도 못하니 어떻게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겠어? 정말 하나님께서 오셨다면 이렇게 오실 리가 없잖아!’ 사람이 이렇게 규정하지 않겠느냐? 사람은 모두 이렇게 규정한다. 사실 그들도 속으로는 주 예수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고, 주 예수가 하는 말이 모두 옳고, 사람이 예수를 판단했던 그 몇 가지 죄는 모두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주 예수는 사람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는데, 그가 한 설교와 말씀에 흠이 없고 꼬투리를 잡을 게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했다. ‘설마 하나님이 이런 분이실까? 하나님은 하늘 위에서 위대하시니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시면 더 위대해야 하고 만인이 경모해야 마땅해. 명문가를 드나들며 말도 청산유수로 하고 인성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조금도 표출하지 말아야지. 또 그는 먼저 그의 지식과 학문, 그의 재능으로 성전의 성직자들을 납득시켜서 그들부터 얻어야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야.’ 그들은 주 예수의 행사를 용납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으며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은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이라면 성직자인 그들 모두도 하나님이 될 수 있고 하나님보다 더 하나님다울 수 있으며 주 예수보다 더 그리스도에 걸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러면 골치 아프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를 정죄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이번에 성육신하여 선택한, 육신과 관련된 배경의 모든 면에 반항하고 경멸하고 있었다. 아직 바리새인의 사악한 점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이어서 교제해 보자.

하나님은 육신을 입어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만유보다 높고 큰 형상이나 신분과 지위에서 자신을 낮춰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될 때 부유한 가문을 택하지 않았다. 그의 출생 배경은 평범하다 못해 아주 가난하고 초라하기까지 했다. 만약 평범한 사람의 입장에서, 양심과 이성, 인성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일을 본다면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사람이 경모하고 사랑할 만한 것이었다.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경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높고 큰 신분에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된 사실에 대해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찬미해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이는 패괴된 사람이나 사탄 마귀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긍정적인 것이겠느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겠느냐? (긍정적인 것입니다.) 이 긍정적인 것, 이 현상, 이 사실은 정확히 무엇을 말해 주느냐?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 하나님의 친절함과 사랑스러움을 말해 준다. 또 하나의 사실은 바로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짓되지 않고 진실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허한 말이나 구호가 아니고 허상도 아니며 오히려 실제적이고 사실이다. 하나님은 친히 육신을 입어 인류의 오해와 조롱, 비방, 모독을 견뎌 냈다. 자신을 낮추어 평범한 사람이 된 그는 겉으로는 높거나 크지 않았고, 특별한 재능도 없었고, 수준 높은 지식이나 학문은 더더욱 없었다. 이렇게 한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그 목적은 바로 이런 신분,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성의 겉모습을 통해 그가 선택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한 이 모든 것은 그가 치른 대가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대가를 사람이 치를 수 있겠느냐? 아무도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꾸미기를 좋아해서 항상 화장하는 여자가 있는데 그녀는 화장하지 않으면 외출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맨얼굴로 외출하거나 무대에 서라고 하면 그녀가 그렇게 하겠느냐? 그러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그녀에게 창피를 주지 않는데도 맨얼굴로 외출하지 못한다. 고작 그 정도의 체면과 육적인 이익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냐?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되어 사회 하층민에게 태어났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버렸느냐? 그의 존엄을 버렸다. 그렇다면 이 존엄을 하나님은 어떻게 버릴 수 있었느냐?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품이 표출된다. 그렇다면 존엄을 잃어버린 것과 어떻게 관련되느냐? 이 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겠느냐? 어떤 사람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무슨 존엄을 잃어버렸다는 거죠? 육신을 입어도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신분이 아닌가요? 여전히 당신을 따르고 당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이 있잖아요? 사역도 하나님 당신의 사역을 하고 계시면서 무슨 존엄을 잃어버렸다고 그러세요?” 여기서 ‘존엄을 잃어버렸다’는 것에는 몇 가지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먼저 하나님이 하는 이 모든 것의 취지는 사람을 위한 것인데,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를 따르는 사람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이 몰이해에는 무엇이 있느냐? 오해와 곡해 그리고 사람들의 경멸의 눈빛과 이상한 눈빛이 있다. 하나님은 영계에 있고, 만물 가운데 있으며, 모든 인류는 그의 발밑에 있다. 지금 하나님이 육신을 입은 것은 같은 환경 속에서 사람과 동등하게 사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그는 인류의 조롱과 비방, 오해와 비아냥, 그리고 관념과 적대, 판단에 직면해야 한다. 그는 이런 것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과 직면하는데도 너희는 하나님에게 여전히 존엄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신분대로라면 이런 것을 겪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대해선 안 되고, 하나님은 이런 것을 감내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감내해야 할 것들이 아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면 반드시 감내해야 한다. 이것은 그가 감내해야 할 것들로, 하나도 빠뜨려선 안 되는 것이다. 패괴된 인류는 하늘의 하나님에겐 온갖 듣기 좋은 말만 하면서 성육신 하나님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 이렇게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별 능력도 없는데? 보아하니 나 하나도 어쩌지 못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에겐 입에 담지 못할 말이 없다! 그의 이익과 관련되거나 그의 체면에 관계되면 그 어떤 판단이나 정죄의 말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니 하나님이 성육신하면 비록 사람과 함께 지내고, 패괴된 인류와 함께 있으면서 이런 지위와 신분을 갖지만 사실상 그는 이와 동시에 그의 신분으로 인한 숱한 굴욕을 감내해야 하기도 한다. 존엄을 모두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이 첫 번째로 감내해야 할 것이다. 즉, 그에 대한 패괴된 인류의 모든 몰이해, 오해, 의심, 시험, 거역, 판단, 기만 등에 직면해야 하는데, 이는 그가 전부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잃어버린 존엄이다. 또 한 가지는 무엇이냐? 성육신과 영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 옳은 말이냐? (옳습니다.)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지만 육신은 영원히 영을 대신할 수 없는 한 가지 측면이 있다. 즉, 육신은 수많은 기능상의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은 공간을 초월하고, 시간이나 기후, 여러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무소부재하지만 육신은 이런 것들의 제약을 받는다. 그럼 하나님의 존엄은 어떻게 훼손되었느냐? 이 일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겠느냐? 하나님에게는 원래 이런 능력이 있지만 육신의 제약으로 인해 사역하는 기간에는 사역이 끝날 때까지 성실하고 묵묵히 그리고 조용히 이 육신의 사역을 지켜야 한다. 육신이 사역하는 동안 사람이 볼 수 있고, 사람의 관념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은 바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육신이다. 그럼 사람의 상상과 관념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함, 하나님의 전능함, 하나님의 지혜, 나아가 하나님의 권병이 어느 정도 제약을 받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상당히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이런 제약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 (성육신하셔서 생깁니다.) 성육신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육신이 하나님 스스로를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곤란’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그다지 합당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으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이 곤란은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사람이 하나님과 진실하게 지내고 왕래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기에 이르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나님의 육신을 본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육신과 왕래해 본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육신이 하는 말씀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들 평생에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본질이나 성품은 영원히 그 육신에게서 인식하고, 보고, 인지한 것에 머물 것이다. 이는 하나님에게 불공평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 불공평한데도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겠느냐? 오직 성육신의 방식으로만 하나님이 사람을 정결케 하고 구원하는 가장 좋은 성과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길을 택한 것이다. 성육신은 사람들 속에서 사람과 대면하며 생활하면서 그의 말씀을 들려주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여 주며 그의 성품은 물론 그의 성격과 희로애락까지 보여 준다. 사람이 이런 성품, 이런 희로애락을 보면 관념이 생기고, 하나님의 본질을 인식하는 데 지장을 주며, 사람의 인식에 제약이 생기게 될지라도 하나님은 사람에게 오해받을지언정 사람을 구원하는 최고의 성과에 도달하는 이런 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의 참모습, 하나님의 진실한 신분, 지위, 본질을 인식하는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그의 존엄을 포기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는 이런 관점에서 본 것이다. 너희가 자세히 묵상해 보아라. 하나님이 희생하고 행한 여러 측면을 통해 사람이 알 수 있는 것 중에, 바리새인이나 적그리스도가 말한 이론이나 구호와 대등한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하나도 없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이 “하나님은 존귀하시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 존귀를 어떻게 이해했느냐? 그는 하나님의 존귀가 어떻게 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위대하고 고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존귀하시다. 이렇게나 존귀하시다.” 이것이 도리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존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면 지위가 대단해야 하고, 지식과 재능, 능력도 뛰어나야 하며, 언변이나 외모도 최고로 출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그런 존귀가 무엇이냐?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존귀는 사탄이 만든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선민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살펴본 다음, 사탄의 세상에서 날고 기는 엘리트들이 모두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아라. 이렇게 대조해 보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하는지 알게 될 것이고, 어떤 부류의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몹시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은사와 재능이 있는 사람에겐 진리를 받아들이는 게 무엇보다 어렵다. 그들은 무척 지적으로 말하고 언변도 뛰어나 사람들에게 숭배받고 추앙받지만 그들의 치명적인 점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한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그들은 멸망의 길을 가게 된다. 다시 하나님 선민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특별한 은사나 재능은 없지만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명예와 이익, 지위를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며 본분을 기꺼이 이행하는데,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에게 구원받는 사람이다. 이방인은 어떤 사람을 숭배하느냐? 다들 높은 수준의 지식인을 숭배하고, 지체가 높은 가문의 사람을 숭배한다. 은사나 특기, 가족의 지위로 말하자면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없다. 우리는 똑같다. 너희는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데, 그저 그렇게 단순한 것이냐? 하나님이 왜 이렇게 안배하지 않겠느냐?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에겐 사람이 어느 가정에서 태어나 어떤 지식을 배울지 안배하는 모든 것이 너무 쉽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할 수 있으십니다.) 하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부유하고 대단한 가정에서 태어나게 안배하지 않았겠느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점이자 하나님의 본질이 표출된 것이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이 일을 간파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성육신하고 나서 사람의 관념이 얼마나 크든, 하나님의 사역에 얼마나 큰 어려움과 장애물이 있든, 얼마나 큰 조롱과 비방을 받든, 또 그가 성육신한 후 그의 존엄을 얼마나 잃어버리든 신경 쓰겠느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신경 쓰겠느냐? 너희가 만약 이것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이 사랑스럽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신경 쓰겠느냐? 하나님이 이토록 공을 들이고 대가를 치른 그 고심은 무엇이겠느냐?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겠느냐?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들이 하나님을 더 잘 인식하고 하나님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과 더 잘 접촉해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인식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유익이 있다는 말이냐? 하나님이 이토록 많은 대가를 치른 것이 이런 목표를 위해서냐? 그런 것이냐?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려고 하나님이 고생스럽게 6천 년 사역을 한 것이겠느냐?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고 나서 인류는 하나님을 멀리하고사탄을 따라 산 마귀처럼 살고 있는데, 가장 기뻐할 자가 누구겠느냐? (사탄입니다.) 피해자는 누구겠느냐? (사람입니다.) 그럼 누가 가장 괴롭겠느냐? (하나님이십니다.) 너희가 가장 괴롭느냐? (아닙니다.) 사실 사람은 이 일을 간파하지 못해서 자기도 모른다. 생긴 대로 논다고 그에게 진리를 실행하라고 해도 그것이 좋은 줄 모르고 한결같이 관념과 상상만 따라 살면서 하나님을 계속 거역하니 가장 괴롭고 가슴 아픈 건 사실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했는데 인류가 지금 어떻게 생존하고 있는지, 잘 살고는 있는지 하나님이 관심 갖지 않겠느냐? (관심을 가지십니다.) 누구보다 관심을 갖는 건 하나님인데, 당사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고, 사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도 깨닫지 못할 수 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백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대대로 번성하며 대대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잘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세상만사가 돌고 도는 것이다. 대대로 사람이 태어나 다양한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다. 단지 사회 구조와 제도가 조금씩 변할 뿐이다. 그러다 어느덧 지금에 이르렀는데 사람이 지각하느냐? 지각하지 못한다. 그럼 누가 가장 잘 지각하겠느냐? (하나님입니다.) 이 일에 가장 마음을 쓰는 건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자나 깨나 자기가 만든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현재의 삶이 어떤지, 잘 지내고 있는지, 무엇을 먹고 입는지, 앞날은 어떨지, 사람이 매일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생각뿐이다. 사람이 만약 매일 악한 생각만 하고 온통 자연의 법칙을 어떻게 바꾸고 어길까, 어떻게 하늘과 싸울까, 어떻게 세상의 사악한 조류를 따를까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이것을 보고 마음이 편하겠느냐? (편하지 않으십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은 것으로 끝나겠느냐? 그는 일을 행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방법을 생각하여 사람이 제대로 살게 하고, 사람됨의 도리를 깨닫게 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모든 자연법칙,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함을 알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사람은 사람답게 살게 될 것이니 하나님이 안심할 것이다. 하나님이 설사 이들을 떠나더라도 이들이 이런 환경에서 사탄의 괴롭힘을 받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사탄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사람답게 사는 것을 보면 철저히 수치를 느끼며 실패하게 된다. 이들을 완전히 포기하고 다시는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다. 그럼 사탄은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갖느냐?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자, 하나님 말씀을 읽지도 않고 하나님에게 기도하지도 않는 자, 본분 이행에 전념하지 않는 자, 늘 배우자를 찾아 자립할 생각만 하는 자에게만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이들이 하나님에게 도태될 때까지 이들을 꾀어내고 미혹해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고,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려 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한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을수록, 명예와 이익, 지위를 추구할수록,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할수록, 하나님을 멀리하고 배반할수록 그것은 더욱 기뻐한다. 이것이 사탄의 마음이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마음이 이렇지 않겠느냐? 사탄의 부류에 속하는 것은 모두 이런 마음이다. 그들은 누군가 하나님을 잘 믿지 않는 것을 보면, 지식을 중시하고 명예와 이익, 지위를 추구하는 것을 보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것을 보면 꾀어내고 싶어 한다. 그들은 이런 사람을 보면 공통 언어가 생기고, 함께 있으면 할 얘기가 많아 하고 싶은 얘기를 거침없이 한다. 그럼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이들을 보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겠느냐? 하나님은 애가 탄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모든 대가를 치른 원인은 무엇이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걱정, 보살핌, 염려 때문이다.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사람을 걱정하고 보살피며 염려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이 한 단계씩 생겨난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고 감추든, 하나님이 얼마나 진실하게 사람을 사랑하든, 혹은 하나님이 신실하든, 위대하든,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의 대가가 가치 있고 그에 따른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보상은 무엇을 말하겠느냐? 그가 속으로 염려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그가 걱정하는 사람들이 그의 뜻에 따라, 그가 가르치고 인도하는 방식과 방향대로 살아가게 되어 더 이상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고 고통 속에 살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염려가 사라져 하나님이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취지가 무엇이든, 하나님의 계획이 크든 작든, 하나님의 이 모든 행사는 긍정적인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모두 긍정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 방식이 사람이 보기에 볼품이 있든 없든, 거론할 가치가 있든 없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사역 방식을 사람이 어떻게 판단하든,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이 치른 그 모든 대가를 보면 하나님은 칭송할 만한 분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위대하냐, 아니면 미약하냐? (위대하십니다.) 너무나도 위대하다! 인류 중에 이렇게까지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인류 중에는 모성애가 가장 위대합니다.” 모성애가 이것만큼 위대하냐? 일반적으로 자녀가 독립하여 자기 삶을 잘 이어 나가면 간섭하지 않는다. 사실 간섭하고 싶어도 간섭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인류를 대하는 것은 어떠냐? 몇천 년을 참았느냐? 하나님은 6천 년을 참았다. 지금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염려와 걱정 때문에 하나님은 이토록 큰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토록 큰 대가가 바리새인이나 적그리스도의 눈에는 어떻게 비치느냐? 그들에게 정죄되고 판단되며 심지어 모독당하기까지 한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적그리스도의 본성이 사악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칭송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행사, 사람에게 찬미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그들은 찬미하기는커녕 온갖 핑계와 이론으로 정죄하고 판단하며 심지어 그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니 이들이 가증스럽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들이 사악하지 않으냐? 그들의 이런 사악한 모습을 통해 그들이 지식과 학문을 숭배한다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으냐? 권세와 지위를 숭배한다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긍정적인 일일수록, 사람이 칭송하고 기념하며 전파할 만한 일일수록 적그리스도는 정죄하니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표출하는 사악한 본성의 일면이다. 이 때문에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의 정도가 일반적으로 패괴 성품을 지닌 사람들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계속해서 바울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바울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느냐? 그는 지식인 가정, 학문이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났으니 그의 출생 배경은 좋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고등 교육을 받았는데 지금 기준으로는 아마도 신학을 배웠거나 대학을 나온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지식이나 학문이 일반인보다 높지 않았겠느냐? (그렇습니다.) 바울의 지식이나 학문으로 볼 때 주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아보는 것이 아주 쉽지 않았겠느냐? (그렇습니다.) 아주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는 주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아보지 못했느냐? (지식을 숭배했던 그는 주 예수의 지식이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건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주 예수의 지식이 그에 못 미쳐서 알아보지 못했다면, 만약 정말 지식이 있었다면 그가 알아보았을 것이란 말인데, 이 말은 어찌 보면 반은 추론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적그리스도가 지식을 숭배한다는 점만 다루겠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거나 사람과 일을 대할 때 가지고 있는 그의 관점을 보면 그가 지식과 학문을 숭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네 말이 논리적이고, 수준 높고 뛰어나고, 짐작하기 어렵고 추상적이라면, 이것이 바로 그가 좋아하는 것이다. 추상적이고, 논리나 철학에 맞고 심지어 특정 학문에 부합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원하는 것이다. 주 예수는 성육신한 하나님이며, 그가 한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자 진리이다. 지식과 학문이 있는 사람들은 그 말씀과 진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말이 너무 평범하고 얄팍해. 전부 하나님 믿는 거에 관한 사소한 것들이라 심오하지도 않고 헤아릴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오묘함도 없는데 진리라고 하네. 진리가 뭐가 대단하다는 거지?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이렇게 판단한다. ‘당신이 말하는 것들이 내 학식보다 높은지 어디 한 번 봅시다.’ 그는 듣고 바로 비교해 본다. ‘계속 들어보니 당신은 초등학생 같아요. 전 대학생이니 저보다 못하네요!’ 그러고는 하나님 말씀에서 꼬투리를 잡는다. ‘보니까 문법도 잘 모르고 가끔 단어 사용도 부적절한 걸 보니 당신은 하나님답지 않아요.’ 그는 하나님다운지 겉모습만 살피고 말씀 속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 선포한 말씀이 진리인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말씀인지는 듣지 않는다.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따라서 적그리스도에게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특징도 있다. 그가 지식과 학문을 중시하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영원히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 이해력이 없을 수밖에 없다.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판단하는데 그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느냐?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진리라고 정의할 수 있겠느냐? 그가 알아차릴 수 있겠느냐?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는 성육신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겠느냐? ‘어딜 봐도 사람인데 말이야. 아무리 봐도 하나님 같은 구석은 찾아볼 수 없고, 아무리 들어봐도 어떤 말이 진리에 부합하고 어떤 말이 진리인지 모르겠어.’ 그래서 그들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당신에게 신선한 뭔가가 있어서 거기서 제가 이론이나 밑천을 건질 수 있다면 우선 당신을 따르고 결과가 어떨지 두고 볼게요.’ 그런데 그들이 마음 깊이 주 예수를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받아들이지 않느냐? 이유가 무엇이냐? 지식을 지나치게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가 좋아하는 지식, 그가 무장한 지식, 그가 배운 지식이 그의 두 눈을 가리고 그의 판단력을 흐려서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보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설령 하나님이 한 말씀이 확실히 진리이고 하나님이 행한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이 분명하게 발현되어도 그는 알아보지 못한다. 어째서 알아보지 못하겠느냐? 그의 지식과 학문으로 인해 그는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 규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아무리 하나님을 접해도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이 사람이 한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고, 이 사람이 한 말씀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는 그가 영원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영원히 받아들이지 못하며, 바울처럼 구원받지 못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바울이 주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였느냐?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다메섹의 길에서 하나님이 그를 치셨을 때 그가 주를 부르짖지 않았나요? 그가 인정했을 텐데 어째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시나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 바울이 한결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를 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가 되기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대로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느냐?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사람이 된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이다. 되고 싶다고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스도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 그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냐? 이는 사람이 원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되고자 했다. 바울이 이렇게 추구한 것을 보면 그가 주 예수를 그리스도나 주로 인정할 수 있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주 예수의 신분과 지위를 어떻게 자리매김했느냐?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무엇이냐? 즉, 이런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은 하나님보다 작고 우리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당신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다른 부탁을 하셔서 당신이 다른 사역을 했을 뿐이죠. 하나님께서 그 사역을 저에게 주신다면 저도 할 수 있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그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는 이 그리스도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인식과 주 예수에 대한 태도는 어떻게 생겨난 것이겠느냐? 바로 그의 지식과 상상으로 추측한 것이다. 어떻게 추측했겠느냐? 그가 어떤 말씀에서 그런 것을 보았겠느냐? 주 예수가 “내 아버지는 어떠어떠했다.”, “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말미암아 어떠어떠했다.”라고 말씀했을 때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도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네요? 당신도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네요?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잖아요?’ 이는 사람의 머리로 상상하는 게 아니냐? 지식이 있는 자가 얻은 결론은 이랬다. ‘하늘의 하나님을 당신도 아버지라 부르고 우리도 아버지라 부르니 우리는 형제겠군요. 당신이 장남, 저희가 차남인 셈이죠.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라면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는 동등한 관계입니다. 따라서 누가 상을 받을지, 누가 징벌을 받을지, 누구의 결말이 어떠할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입니다.’ 바울의 이런 결론, 이런 엉터리 관점은 전부 한 사람이 신학과 지식을 배우고 나서 머리로 판단하고 분석해서 얻은 결과물이다.

바울은 지식을 생명줄이자 그의 밑천으로 삼았고, 나아가 그가 추구하는 목표로 삼았다. 만약 바울이 지식을 숭배하지 않고 전에 배운 지식을 내려놓고 주 예수를 주님으로, 따를 수 있는 대상,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고 주 예수의 말씀을 진리로 삼아 지키고 실행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베드로가 주를 세 번 부인한 것은 당시 그가 두려웠던 탓도 있고, 한편으로는 평범한 사람인 주 예수가 잡혀가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연약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것이 치명적인 잘못은 아니다. 한때 부인한 것이 치명적인 잘못은 아니며 그것이 사람의 결말을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증거가 되지도 않는다. 사람의 결말을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여겨 받아들이고 준수하고 실행하는지에 달려 있다. 바울과 베드로는 완전히 다른 사례이다. 베드로는 연약했고 주를 부인하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했지만 결국 마지막엔 온전케 되었다. 반면 바울은 주를 위해 오랜 세월 사역하고 고생했으니 이치대로라면 그는 면류관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왜 그는 마지막에 하나님에게 징벌받는 결말을 맞이했느냐? 그와 베드로의 결말이 왜 달랐느냐? 이는 한 사람의 본성 본질과 그가 추구하는 길에 달려 있다. 바울의 본성 본질은 무엇이냐? 적어도 사악함이 있다. 그는 지식과 지위, 상과 면류관을 미친 듯이 추구했다. 면류관을 위해 뛰어다니며 사역하고 대가를 치렀지만 진리는 전혀 추구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사역 과정에서 주 예수의 말씀을 전혀 증거하지 않았음은 물론, 예수가 그리스도이자 하나님, 하나님이 입은 육신임을 증거하지도 않았고, 주 예수가 하나님을 상징하고, 그의 모든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라는 것을 증거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이런 것을 다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떤 길을 간 것이냐? 그는 지식과 신학을 고집스럽게 추구하며 진리에 맞서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자신의 은사와 지식으로 사역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경영하고, 또한 그것을 지키고 공고히 했다. 결국 그의 결말은 무엇이었느냐? 아마 표면적으로는 그가 생전에 징벌받거나 별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없겠지만 결국 그와 베드로의 결말은 달랐다. 이 ‘차이’는 무엇에 의해 결정되느냐? 하나는 사람의 본성 본질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걷는 길이다. 주 예수에 대한 바울의 태도와 관점을 보면 그의 대적과 보통 사람의 대적은 어떤 차이가 있느냐? 또 바울이 주를 부인하고 거부한 것은 베드로가 연약함과 두려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인하며 주를 세 번 부인한 것과 어떻게 구별되느냐? 바울은 지식과 학문, 그리고 은사로 사역하면서 전혀 진리를 실행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가 뛰어다니며 사역하는 동안, 혹은 그의 서신에서 그의 연약함을 찾아볼 수 있느냐? 없지 않으냐? 그는 줄곧 사람에게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만 가르치고, 상과 면류관, 좋은 종착지를 추구하도록 부추겼다. 그에겐 진리 실행에 대한 체험, 인식이나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주 겸손하게 행동했다. 그에겐 심오한 이론이나 저명한 서신이 없었다. 그저 진리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과 실행이 조금 있었다. 평생을 살면서 연약함도 있고 패괴도 있었지만 몇 차례 시련을 겪은 뒤 그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쌓았다. 바울과는 확연히 달랐다. 바울은 사역은 했지만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과 관계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증거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사랑,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지 않았으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요구는 더더욱 증거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주 말했다. 이로 인해 결국 인류는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여기게 되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바울에게서 생겨난 말이다. 만약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이 없었다면 ‘삼위일체’가 생겼겠느냐?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상상은 지나치게 ‘풍부하다’. 네가 성육신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함부로 규정하거나 판단하지 말아라. 너는 예수의 말씀을 따르고, 예수를 하나님으로 대하도록 해라. 즉, 그를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 사람이 된 하나님으로 대하도록 해라. 이렇게 대하는 것이 좀 더 객관적이다.

처음에 이 단계 사역의 성육신이 여자라고 증거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기에 걸린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하시는 말씀은 모두 진리이고, 하시는 일은 말씀으로 심판하는 사역이야. 이건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같고, 이 사람이 성육신이라는 것도 인정할 수 있어. 다만 성별만큼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군.’ 하지만 말씀이 모두 진리이니 억지로 받아들였다. 속으로 ‘우선은 따르면서 과연 하나님이 맞는지 한번 보자.’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따르는 자가 적지 않았다. 하나님이 만든 사람 자체가 남녀 두 가지 성별이니 하나님의 성육신 역시 예외가 아니다. 남자가 아니면 여자인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내게 물었다. “이번 성육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인식해야 합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너는 어떻게 보느냐? 하나님의 행사는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네가 만약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확신했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연구하면 안 된다. 이해가 안 되면 기다려라. 네가 구해도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그때는 네가 순종할 수 있느냐에 달린 문제다. 네가 순종할 수 있다면 네게 이성이 있다는 뜻이고, 그 일 때문에 걸려서 하나님의 행사를 모두 부인한다면 이는 네게 이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한 열 가지 일이 모두 옳게 보이고, 관념에 부합하는데 단 한 가지가 네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열 가지 일을 모두 뒤엎는다면 이는 어떤 인간이냐? 마귀가 아니겠느냐?” 내가 이렇게 교제하니 그가 말했다. “맞습니다. 이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교제하자마자 그는 바로 인식하고 받아들였다. 정말 좋은 자질이 아니냐?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그가 또 물었다. “하나님께선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첫 번째 성육신은 남자였으니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번의 성육신은 여자이니 그럼 하나님의 딸이 아닌가요? 제가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까? 사람은 자녀를 낳을 때 아들, 딸을 모두 갖기를 바라는데 하나님도 이렇게 아들, 딸을 모두 원하시는 거 아닌가요?” 내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 줘야겠느냐?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겠느냐? 바로잡아 줄 필요가 있겠느냐? 그의 말에 문제가 있지 않으냐? 문제가 있다. 그는 말했다. “하나님께 예수라는 아들이 있었고 이번의 성육신은 여자이니 이렇게 보자면 딸입니다. 그럼 하나님껜 아들과 딸이 다 있는 셈이죠. 아들, 딸을 다 가지셨으니 성령이 필요 없게 됩니다. 그럼 성부, 성자, 성녀 삼위일체인 것이죠. 이 얼마나 보기 좋은 조화입니까! 딸이 없으면 어쨌든 완벽하지 않죠.” 들어보니 어떤 기분이 드느냐? 울지도 웃지도 못한다. 말해 보아라. 이것이 농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가 성육신을 이렇게 인식하는 것이 바울과 차이가 있느냐? (없습니다.) 별반 차이가 없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일, 특히 하나님의 신분, 본질을 대하는 일에 있어서 사람이 만약 늘 자신의 잔재주나 상상과 관념으로 짐작하고 추측하거나 몇몇 관점을 그대로 적용시킨다면 그때는 곤란하다. 오류가 생기고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겠느냐? 어떤 일은 상대적으로 오묘하고 추상적이어서 사람이 이해하기 쉽지 않고 이 문제 이면의 본질과 근원이 대체 뭔지 간파하기 쉽지 않다. 만약 이 일이 진리와 그다지 상관없거나 너의 진리 추구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일단 내려놓아라. 그것을 연구한들 무슨 소용이냐? 이 일은 네가 연구할 일이 아니다. 너는 그저 생명 진입에만 집중하고 본분만 제대로 이행하면 된다. 언젠가 이 일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다. 이를 내려놓지 못하고 연구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러면 골치가 아프다. 절대 연구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 지위와 관련된 일은 사람이 절대 연구하는 태도로 대하면 안 된다. 만약 계속해서 연구한다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심할 경우 하나님을 모독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신분, 본질과 관련된 일을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쉽게 말해, 그 일이 잘 이해되지 않더라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고, 그가 바로 하나님의 현현이며, 그가 선포하는 것은 진리라는 사실이다.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것은 진리이며, 진리를 얻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에서 보면 그들은 어떤 것을 가장 숭배하느냐? 바로 고상하고 공허하며 추상적인 것, 이른바 신학 이론이다. 그들에게 이 신학 이론은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들은 이것들을 애지중지하며, 남보다 뛰어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것들을 얻으려 한다. 그들은 이것들을 마음에 새겨 자신의 밑천으로 삼고, 자신의 인생 목표를 실현할 발판으로 삼는데, 이것들이 결코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런 신학 이론을 갖추길 좋아하며, 이런 것만 옳다는 선입견을 안고 이것을 진리로 여긴다. 그들은 이 신학적 지식으로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를 연구한다. 그러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가 그들이 추종하는 신학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속으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성경적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정죄하기까지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지루해. 어떤 말씀은 논리에 맞지 않고, 어떤 말씀은 문법에 맞지 않고, 어떤 말씀은 단어 사용도 부적절하다니까.”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 갇혀 살면서 자기가 파악한 지식이나 학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하고 연구한다. 심지어 많은 이들이 상상과 판단을 근거로, 하나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특정인의 종착지를 규정한 내용이나 하나님이 특정인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찾아내고, 그런 다음 성경의 말을 근거로 분석하고 정죄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기 시작한다. 이 분석과 정죄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에 따라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 게 문제다. 그게 무슨 일인지 아느냐?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분석하고 연구할 때, 사람에게 정죄 심리가 생길 때, 성령은 사람을 버리고 사람에게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아주 무서운 일이 아니냐?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너희도 알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 이들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은 이들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 원인을 분석할 수 있다. 그들이 반평생 무장한 신학 이론이 과연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것이 누구를 대변하는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사실 이것들은 결코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사람의 순수한 깨달음도 아니다. 그것은 모두 사람의 그릇된 해석이다. 따라서 이는 사탄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완전히 사탄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신학적 지식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성경에 대한 그릇된 해석 말고도 사람의 논리적 추리, 사람의 관념과 상상, 그리고 사람의 경험, 사람의 윤리도덕, 사람의 철학 사상이 있다. 이런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을 판단할 때, 그들은 사탄의 편에 서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얼굴을 가리니 성령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체험해 본 적이 있느냐? 예전에 이런 측면의 체험을 이야기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님을 처음 믿을 땐 하나님을 연구하길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어휘 사용,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어떤 사람에게 잘해 주시는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시는지, 어떤 사람을 증오하시는지 등등을 연구했습니다. 그렇게 연구하다 보니 결국 마음이 어두워졌고 기도해도 하나님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자유로웠던 마음도 사라져 버렸죠. 평안과 기쁨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마치 큰 돌덩어리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죠.” 너희는 이런 경험이 있느냐? (있습니다.) 늘 하나님을 연구하는 사람은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전혀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 해도 빛 비춤이 없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연구하는 데 가장 능하고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에서 사람들과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지 않고 늘 높은 자리에 서서 사람들을 가르치려 든다. 그들은 항상 지식으로 허풍을 떨고 평범한 형제자매를 업신여긴다. 만약 적그리스도가 너와 접촉하면서 네 낮은 학력을 알게 되면 너를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설령 네가 교회 리더나 팀장의 임명 조건에 부합한다고 해도 너를 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떤 사람을 쓰느냐? 사회에서 지위나 권세가 있는 사람, 그리고 지식이나 은사가 있는 사람, 언변이 좋은 사람이 보이면 눈여겨보았다가 그 사람을 쓸 것이다. 만약 그에게 사람을 선발하거나 쓰라고 하면 그는 죄다 언변이 좋고 고학력에 지식이 있으며 사회에서 지위가 있는 사람만 선발할 것이다. 설사 이들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아무런 사역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는 좋아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 역시 이런 부류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유상종이다. 어떤 적그리스도는 글귀와 도리를 조금 이해하면 온갖 방법을 다해 설교 연습을 한다. 어느 정도로 연습하느냐? 사전에 원고를 작성하지 않아도 강단에서 몇 시간이고 청산유수로 설교할 수 있을 정도로 연습한다. 그는 이것이 사역하는 것이고, 이때가 바로 그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자 자기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기회를 잡으면 놓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항상 교제하는 것, 즉 정상 인성, 사람의 양심과 이성, 정상인의 현실 생활에 관계된, 인성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사람이 보기에 모두 자질구레한 일 같아도 사실은 전부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적그리스도는 이것을 어떻게 대하느냐? 그는 속으로 업신여기면서 이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속으로 이 일들을 정죄하며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다. 네가 그에게 진리 실제를 아무리 교제해도, 예를 들어 정직한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 성실하고 착실한 사람이 되라고 아무리 교제해도 그의 관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언변이 좋고, 겉보기에 재주가 넘치고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심지어는 방언이나 엄청난 속독 능력, 엄청난 기억력 등의 특이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이런 재능까지 갖추면 그는 너무나도 흡족할 것이다. 그는 이런 것을 마음속 깊이 추구하고 숭상한다. 예를 들어 내가 방금 전에 얘기한 것을 잊어버렸다. 내가 모두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보아라. 기억력이란 게 거기서 거기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이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당신도 기억력은 별로 좋지 않군요! 아무개는 영적인 사람이라 글도 한번에 열 줄씩 읽고 얼핏 본 것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데 한번에 몇 줄을 읽습니까?” 그래서 내가 “내겐 그런 특이한 능력이 없다. 한 구절을 읽어도 기억나지 않아서 다시 읽을 때도 있다.”라고 말하니 그가 되묻는다.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으십니까?” 그에게 관념이 생긴 것이다. 그는 성육신 하나님을 속으로 어떻게 보느냐? ‘성육신 하나님은 평범하고 정상적이기 짝이 없는 사람이구나. 기억력도 안 좋고 체격도 좋지 않고 어딜 봐도 하나님 같지 않아.’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관해 설교하는 것을 들으면 이런 생각을 한다. ‘영적인 사람 아무개나 유명 인사 아무개가 하나님이라면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어. 그런데 지금 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도무지 하나님 같지 않아서 사랑할 수가 없어.’ 그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이라고 하려면 반드시 하나님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언행과 외모가 하나님다워야 하고 사람이 봤을 때 관념이 조금도 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생각이다. 왜 그런 것이냐? 그의 이런 생각 때문이다. ‘첫째, 당신에겐 특이한 능력이 없어요. 둘째, 당신에겐 특별한 재주가 없어요. 셋째, 당신에겐 세상에서 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은사가 없어요. 당신은 어느 면에서도 특별하지 않은데 뭘 믿고 당신의 말을 따르라는 거죠? 뭘 믿고 당신을 존중하라는 겁니까? 그리고 뭘 믿고 당신에게 순종하라는 건가요? 순종하지 못하겠어요!’ 이것이 어떤 문제냐? 이는 어떤 성품이냐? 설령 진리는 깨닫지 못해도 정상인의 양심과 이성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 사람에게 관념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정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람에게 관념이 생기면 함부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죄하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기 십상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함부로 정죄하고 대적하는데 이는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으로 인한 것이다. 그는 지식을 배운 후 하나님, 하나님의 위대함,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권병과 전능에 대해 더욱 풍부하고, 더욱 광범위하고, 더욱 전면적인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러고 나서는 그 상상에 그가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하나님을 비춰 보려 한다. 그게 가능하겠느냐? 영원히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연구할수록 그들은 속으로 더욱 하나님을 부인하고, 정죄하고, 대적하게 된다. 이는 필연적인 결과다.

너희가 성경이나 지금 하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통해 볼 때, 하나님이 은사나 학문, 지식을 강조하느냐? (강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람의 지식과 학문을 해부한다. 하나님은 은사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특이한 능력, 특별한 재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너희는 은사나 특이한 능력, 특별한 재능이 결코 생명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생명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겠느냐? 이런 것은 사람이 진리를 얻고 나면 생기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런 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느냐? 하나님께로부터냐?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지식이나 학문을 전수해 주지 않으며 더욱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도록 더 많은 은사를 부어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너희가 이해되지 않겠느냐? 그럼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은 어디에서 나타나느냐? 그들은 은사와 학문, 지식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그들은 이런 것들을 숭상하고 추구하며 나아가 얻기를 바라기까지 한다. 특히 은사와 특이한 능력을 말이다. 네가 적그리스도에게 “당신이 특이한 능력을 얻게 되면 악령이 모여들 겁니다.”라고 말하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두렵지 않습니다!” 네가 “그럼 앞으로 구원받을 희망이 사라지고 18층 지옥에 떨어져 유황불 못에 빠질 겁니다.”라고 해도 그는 여전히 “무섭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만약 그가 열 가지 방언을 할 수 있게 해 주고, 자기를 드러내어 남들의 우러름을 받게 해 주면 그는 동의할 것이고 바라 마지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정상 인성 속에서 지극히 평범하게 말하고 실제적으로 사역하는 것 등의 사역 방식과 형식, 그리고 이러한 사역의 내용을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업신여긴다. 사람은 이 일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느냐? 예를 들어 여러 가지 방언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이것이 정상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이상하게 보이느냐? (이상합니다.) 그래서 정상 인성의 이성 범위 안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색깔, 형태, 사람의 얼굴, 이름 등 어떤 것이든 한 번만 봐도 잊지 않고, 또 수백 페이지의 책을 읽고 모든 내용을 기억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설명할 수 있는 사람과 접촉하면 인간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이런 것을 좋아한다. 말해 보아라. 종교계의 소위 전도자, 설교자, 그리고 목사 등 바리새인으로 통칭되는 이런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이 네 내면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실제의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이 네 내면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하나님이 네 내면의 필요에 더 가깝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바리새인과 접촉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어떤 이해득실이 있는지,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부분이 있는지 말해 보아라. (바리새인과 접촉하면 거짓된 느낌이 들고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그들이 말하는 내용은 너무 공허하고 거짓되어서 많이 듣다 보면 역겨워지고 접촉하기 싫어집니다.) 바리새인이 말하는 관점이 옳으냐, 아니면 터무니없느냐? (터무니없습니다.) 그런 관점의 성질은 터무니없다. 또 그들이 하는 말의 대부분은 실제적이냐, 아니면 공허하냐? (공허합니다.) 많은 사람이 터무니없고 공허한 것과 상상과 관념의 것들을 들으면 혐오하느냐, 아니면 좋아하느냐? (혐오합니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지 않고 듣기 싫어한다. 그의 관점과 말을 듣고 나서 그의 성품과 위선적이고 거짓된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계속 듣고 싶겠느냐? 그를 가까이하고 그와 깊이 접하며 그에 대해 많이 알고 싶겠느냐?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접촉하기 싫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말이 너무 공허하고 이론이나 구호뿐이라는 것이다. 한참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한다. 게다가 성품이 거짓되고 위선적인 그가 겸손한 척, 인내하는 척, 배려심이 있는 척하고 오래 믿은 척하니 무척 ‘경건’하다. 하지만 그의 진상을 보게 되면 역겨울 것이다. 너희는 나와 그다지 깊게 접촉하지 않았는데 내가 한 이 설교가 어떻게 들리느냐? 바리새인의 말과 차이가 있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느냐? (실제적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그 밖에 내가 말한 것들은 모두 너희의 실행과 체험, 그리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과 실생활에서 마주치는 다방면의 일과 관련되어 있다. 실제와 동떨어지지는 않는다. 또한 내가 말한 모든 진리나 모든 일을 대하는 관점은 실제적이냐, 아니면 공허하냐? (실제적입니다.) 왜 실제적이라고 하느냐? 실생활과 괴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생활을 뛰어넘어 말하는 공허한 이론이 아니다. 모두 사람의 현실 생활에서의 분별과 인식, 실행 그리고 본분 이행 과정에서 여러 일에 직면하면서 생기는 내적 상태와 관련된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실행하고 생활하는 것과 관련되고,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생기는 여러 내적 상태 등의 주제와 관련된다. 우리는 성경을 들고 ‘창세기’나 ‘이사야서’는 물론, ‘계시록’에 대해서도 헛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계시록’을 보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 것들을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냐? 어떤 재앙이 이루어질지 네게 알려 줘 봤자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행사가 이루어진다 한들 네가 어쩌겠느냐? 너는 그래 봤자 네가 아니겠느냐? 네게 어떤 재앙이 이루어질지 알려 주면 네가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겠느냐? 그렇게 신통하겠느냐?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따르면 사람이 모두 각기 부류대로 나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을 즐겨 읽으며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은 굳게 서겠지만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듣기 싫어하는 사람, 한결같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본분을 기꺼이 이행하지도 않는 사람은 드러나 도태될 것이다. 그들은 예배도 드리고 설교도 듣지만 한결같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니 늘 변화가 없다. 그들은 설교를 들으면 싫증을 내고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본분도 건성으로 이행하고 늘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이다. 이들은 불신파이다. 만약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불신파와 자주 접촉하고 함께 생활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아무 유익이나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마음속에 그들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커질 것이다. 네가 만약 바리새인과 접촉한다면 구구절절 조리 있고 조목조목 분명하게 말하는 그들에게 대단한 이론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분석해 보면 진리 실제는 하나도 없고 죄다 공허한 이론뿐이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론, 신학, 하나님에 대한 이론 등 하나님은 하늘에서 사자들과 어떤 모습인지, 하나님의 성육신과 주 예수는 어떻게 된 일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느냐? 결과적으로 신화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럼 적그리스도는 왜 이런 것을 즐겨 듣고 즐겨 이야기하며 이런 사람과 접촉하고자 하겠느냐? 이것이 그들의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의 사악함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느냐? 그들 내면에 필요로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이런 지식과 학문을 숭배하고 바리새인이 갖춘 이런 것들을 숭배하는 것이다. 그럼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냐? (남들의 우러름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남들의 우러름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늘 평범한 사람보다는 초인, 고위 인사, 지식이 있는 유명인이 되고 싶어 한다. 그들이 되고 싶어 하는 초인은 다른 말로 무엇을 뜻하겠느냐? 속된 말로 공상가이다. 예를 들면 일반인은 기껏해야 ‘비행기 타고 하늘 높이 날 수 있으면 좋겠다.’ 정도의 바람이 전부가 아니지 않으냐?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무엇을 바라느냐? ‘언젠가는 날개를 달고 멀리 날아 보겠어!’ 그에겐 이런 의지가 있다. 너에겐 있느냐? (없습니다.) 왜 없느냐?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커다란 날개를 두 개 단다고 날 수 있겠느냐? 넌 그런 류가 아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이 늘 상상만 하면서 욕망을 추구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구원하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고 현실에 집중하며 착실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초인이나 고위 인사가 되려는 사람은 정상인이 아닌 정신병자이니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는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접하면 이상한 질문을 한다. 그들이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들이 마음속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속으로 숭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의미한다. 처음에 성육신 하나님을 증거할 때 계속 떠보는 사람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집에서 성경을 보시나요? 제가 여쭤보려고 한 건 아니고요, 사실 저는 궁금하지 않은데 형제자매 대신 물어보는 거예요. 이런 고민을 가지고 있는 형제자매가 많더라고요.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자주 보시는 게 확실하다면 지금 성경에 대해 말씀하시고 진리를 선포하시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고요. 그런데 성경을 보시지 않고도 성경에 대해 말씀하신다면 이건 이적과 기사이니 그야말로 하나님이시라는 거죠!” 물론 그는 이렇게 얘기하지 않고 대놓고 물었다. “하나님, 집에서 성경 보세요?” 너희가 말해 보아라. 내가 보겠느냐, 보지 않겠느냐? 너희는 보느냐? 너희가 만약 예수를 믿은 적이 없다면 안 보는 게 아주 정상이다. 그럼 믿었던 사람은 보겠느냐? (봅니다.) 믿었던 사람은 분명히 볼 것이다. 나도 예수를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어찌 성경을 안 볼 수 있겠느냐? 내가 보지 않으면 어떻겠느냐? (그 역시 정상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정상이고, 읽지 않는 것도 물론 정상이다. 읽는지 안 읽는지에 따라 무엇이 결정되느냐? 지금 내가 만약 이런 신분이 아니라면 내가 성경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뭘 읽든 묻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런 특별한 신분이 생겼기 때문에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늘 이런 일에 대해 알아본다. “그분은 어렸을 때 성경 읽으셨대요?” 대체 그들이 알고 싶은 게 무엇이냐? 읽었다면 어쩔 것이고 안 읽었다면 어쩔 것이냐? 이는 두 경우로 설명될 것이다. 만약 읽었다면 그들은 성경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고, 성경을 읽지 않고도 성경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하나님답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이런 결과를 원하고 이런 내막을 알고 싶어 한다. ‘당신이 성경을 읽지 않았는데도 어린 나이에 성경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고찰해 볼 만한 일이에요. 이런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죠!’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그들의 관점이고,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연구한다. 생각해 보아라. 성경을 숙독한 바리새인들이 성경의 말을 다 꿰뚫어 보았느냐? 성경에서 진리를 찾아냈느냐?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성경을 읽어 보았는지 물어보는 사람이 이것을 생각했겠느냐? 그가 생각했다면 이 문제를 물어보지 않을 것이고,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으며 하나님의 신분, 본질을 꿰뚫어 보지도 못하면 결국 이런 방법으로 해결하게 된다. 이런 방법이 문제를 해결해 주느냐? 해결하지 못한다. 그저 호기심만 조금 풀어 줄 수 있을 뿐이다. 사실 나도 성경을 읽는다. 주를 믿는 사람 중에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이 어딨겠느냐? 가볍게라도 읽어 본다. 적어도 신약의 사복음서는 읽어 보고 ‘계시록’, ‘창세기’를 뒤적여 보거나 ‘이사야서’를 본다. 내가 가장 즐겨 보는 게 무엇일 것 같으냐? (‘욥기’입니다.) 그렇다. 욥기의 이야기는 완전하고 구체적이라 이해하기 쉽다. 또 그 이야기는 가치가 있어서 현재의 사람에게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된다. 현재 사실이 증명하듯 욥의 이야기는 확실히 후대 사람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후대 사람은 욥을 통해 많은 진리를 깨달았다. 하나님을 대하는 욥의 태도, 그리고 욥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와 정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 도를 교제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도를 교제할 때 욥기를 배경으로 삼는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가치 있다. 틈틈이 읽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성육신을 보고, 하나님의 실제적이고 정상적인 면을 보고 나서도 과연 하나님이 맞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런데 그가 진리를 깨닫고 나면 이 일을 내려놓고 연구하지 않으며 관심도 갖지 않게 된다. 오로지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가며, 자기가 해야 할 사역을 제대로 하는 데에만 열중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영원히 내려놓지 못하고 연구하려 한다. 내가 이 일에 신경 써야 하겠느냐? 이 일을 거들떠봐야겠느냐? 그럴 필요 없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구하지 않을 것이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끝까지 연구할 것이다. 여기서 연구란 무엇이냐? 연구는 바로 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그런 말씀이 있다. 대적의 결과가 무엇이냐? (죽음입니다.) 대적하면 죽는 것이다.

어떤 적그리스도는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였지만 성육신이 하는 말씀이나 사역에 초자연적인 부분이 있는지, 정상 인성의 범위를 벗어나는 부분이 있는지, 그에게 하나님의 신분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부분이 있는지 늘 관심을 가지고 이런 것들을 연구한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방식이나 내가 말할 때의 거동, 시선, 행동 원칙을 부지런히도 연구한다. 무엇으로 연구하느냐? 그들이 파악하고 있는 명인, 위인의 이미지나 기준으로 연구하고 판단한다. 심지어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다. “당신은 성육신입니다. 당신의 신분과 본질은 분명 일반인과 다를 테죠.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잘하시나요? 당신을 따르고 순종해서 우리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게 할 만한 특별한 점이 뭐가 있나요?” 정말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 비상한 시력과 청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활자 매체를 속독하지도 못하며 보고 나서도 곧잘 잊어버린다. 음악은 조금 알지만 악보는 보지 못하고 남이 부른 노래를 두 번 들으면 얼추 따라 부를 수는 있다. 그런데 이것을 잘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럼 어떤 특별한 재주가 있겠느냐? 예를 들어 영어 실력이 10급이 되거나 어떤 방언을 할 수 있겠느냐? 나는 이런 것을 다 못 한다. 그럼 무엇을 잘하겠느냐? 음악, 미술, 춤, 문학, 영상, 디자인 등을 조금 알지만 수박 겉핥기 정도일 뿐이다. 전문가와 이론적으로 얘기하면 죄다 비전문적인 이야기뿐이다. 그래도 보면 이해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주택 건축 디자인의 경우 전공이나 업무상 데이터에 관해 얘기하면 잘 모르는데 색상이나 스타일이 어울리는지에 관해 얘기하면 이런 쪽으로는 어느 정도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전문적으로 공부해서 이 분야의 인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 배워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사람이 접촉할 수 있는 것, 음악, 문학, 춤, 영상 등 우리 교회 업무 범위 안에 있는 것은 배우면 피상적으로 조금은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제 당신의 실상을 알겠네요. 당신은 피상적으로만 알고 계시는군요.”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가 아마 모르는 게 하나 있다. 아마도 이것이 내 특기일 것이다. 어떤 특기겠느냐? 바로 이 분야에 어떤 업무가 관련되어 있는지 안다는 것이다. 이 예술은 어떻게 표현되고, 그것의 범위와 원칙이 무엇인지 등 파악만 하면 복음 사역에 이바지하고 하나님의 말세 복음을 전파하는 성과에 이르도록 이 유용한 것들을 교회의 사역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안다. 이것이 특기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지금 이 인류에게 가장 부족한 것에 대해 올바른 방식을 사용하고 그다음 그에 관련된 진리를 전달해서 사람들이 보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최선의 성과이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진리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명확하게 말하며, 말한 것이 모두 정상 인성의 사고로 받아들이고 이를 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사람에게 너무나도 큰 유익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피상적인 것, 그 모든 유용한 것들을 사용해서 이런 특기를 갖추면 그것으로 족하다. 내게 한 가지 장기가 있는데 너희는 알아차렸느냐? (진리 교제에 능하십니다.) 진리 교제에 능한 것이 장기이냐? 그건 특기가 아니냐? 내 장기는 무엇이겠느냐? 나는 너희의 패괴 본질을 찾아내는 데에 능하다. 내가 이것에 능하지 않다면 너희에게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이 어떤 패괴 성품인지, 어떤 본성 본질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사역하겠느냐? 사역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너희의 패괴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 내 최고의 장기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내 최고의 장기일 것이다. 사람의 패괴 성품, 본성 본질을 찾아내는 데 가장 능하다. 그리고 사람의 본성 본질을 통해 그 사람이 가는 길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간파하고 그다음 사람의 이런 모습과 행동, 본질을 통해 진리를 교제하고 그에 맞는 처방을 해 주어서 그 문제를 해결하여 거기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데 가장 능하다. 사실 이것은 장기가 아니라 직분이며 직분 안에 있는 사역이다. 너희는 이것을 잘하느냐? (잘하지 못합니다.) 그럼 너희는 무엇을 잘하느냐? (패괴를 잘 표출합니다.) 패괴 표출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너희는 진리를 듣고 나서 미온적인 태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하면서 참답게 대하지 않는 데 능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나는 이렇게 마음을 터놓고 너희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바리새인이나 적그리스도는 너희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절대 못 한다. 왜 못 하겠느냐? 그들은 이것을 창피한 일, 부족한 인성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속사정이자 프라이버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속내를 어떻게 남한테 알려 줄 수가 있어? 그러면 체면이고, 존엄이고, 지위고 다 없어지는 거 아냐? 그러고 어떻게 살겠어?’ 그의 말대로라면 살 수가 없지 않겠느냐! 너희에게 내 사정을 들려주고 나서 내 말이나 행동이 너희의 믿음에 지장을 주었느냐? (그러지 않았습니다.) 설사 너희에게 이견이 조금 있더라도 걱정하지 않는다. 걱정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네게 이견이 있는 게 정상이고 그것이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눈과 귀가 일으킨 착각으로 인해 일시적인 편견이나 오해가 생기기 마련이다. 설마 이것 때문에 이탈하겠느냐? 혹은 소극적이 되고 연약해지겠느냐? 그런데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일시적으로 관념이 조금 생겼다고 해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떠나겠느냐? 아니다. 떠날 수 없다.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 일을 올바르게 대하고 이해하여 자기도 모르게 정상적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러고는 이 사실을 조금씩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인식, 객관적이고 정확한 인식으로 바꿔 나간다. 이것이 진리를 참되게 깨달은 것이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말할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은 너무 불쌍해요. 진리만 말씀하시지 아무것도 할 줄 모르시잖아요.” 이는 어떤 말투냐?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말투다. 너희는 그의 말에 동의하느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 동의하지 않느냐?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한 것은 사실이다. 성육신 하나님은 진리를 선포하는 것 말고는 재주가 하나도 없어 아무것도 못 한다. 이것이 불쌍한 것이냐? 너희는 이렇게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실제적인 사역 덕분에 패괴된 우리 인간에게 구원받을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모두가 지옥에 떨어질 거예요. 우리가 정말 큰 덕을 봤으니 속으로 기뻐해야죠!” 너희는 이런 느낌이 드느냐? (네.) 하지만 이와는 사뭇 다른 사람도 있다. 그들은 ‘말씀만 하시는 하나님이 초월적이진 않지. 내가 얻은 게 뭔데? 하나님께 관념과 이견을 가지고 뒤에서 하나님을 판단하는데도 하나님은 징계하시지 않아. 나도 딱히 괴롭지 않고 징벌도 받지 않았어.’ 점점 대담해지는 그는 막말을 서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성육신 하나님을 이렇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고 사역하시며 진리를 선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고 그 육신은 껍데기일 뿐입니다. 하나의 도구인 셈이죠. 진정한 본질은 하나님의 영이에요. 하나님의 영이 말씀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영이 사라지면 육신이 그런 말씀을 할 수 있겠어요?” 이 말들이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여기에 사용된 단어가 어떤 의미이냐? (모독적입니다.) 그렇다. 모독적인 뉘앙스를 띄고 있고 그 성품이 흉악하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겠느냐? ‘당신은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외모도 세련되지 않고 대단해 보이지도 않아요. 말도 유창하지 않고 이론도 출중하지 않고 말하기 전에 생각까지 해 봐야 해요. 당신이 어떻게 성육신인 거죠? 어쩜 그리 복도 많고 운이 좋으세요? 왜 제가 아닌 거죠?’ 그는 결국 “그 모든 게 하나님의 영께서 역사하시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 육신은 영의 출구, 즉 도구인 셈이죠.”라고 말하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진다. 이것은 질투이다. 그리고 질투로부터 증오가 생겨난다. 이런 의미이다. ‘당신이 어떻게 성육신하신 하나님인 거죠? 어쩜 그리 운이 좋으세요? 당신은 어떻게 이런 덕을 보셨나요? 저는 왜 그런 덕을 보지 못했죠? 저보다 잘나신 게 없어 보이는데 말이죠. 말주변도 없으시고, 학력도 낮은 데다가 외모도 저보다 볼품없고 체구도 저보다 작으시잖아요. 어디가 저보다 잘나셨죠? 어떻게 성육신이 되신 거예요? 왜 저는 아닌가요? 당신이 성육신이라면 성육신이어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고요. 다들 당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니 저도 별수 없죠. 그래도 전 당신을 이렇게 평가해요. 이렇게 말해야 한이 풀리겠어요!’ 흉악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지위를 손에 넣으려고 별말을 다 지껄이니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 아니냐? 그가 하나님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데 누가 강요하더냐? 내가 강요했느냐? 강요한 적 없지 않으냐? 첫째, 나는 너더러 받아들이라고 애원한 적 없다. 둘째, 나는 비상수단으로 너더러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셋째, 하나님의 영도 너에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징벌할 테니 꼭 받아들이라고 한 적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했느냐? 그런 적 없다. 네겐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으니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왜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면서 받아들였느냐? 그래도 복은 받고 싶은 것이 아니냐? 복은 받고 싶은데 받아들일 수도 없고 순종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달갑지도 않다면 어떡해야 하느냐? 이런 악독한 말만 내뱉는다. 너희는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느냐? 내가 이런 말을 일부 사람들에게서 들어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일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리가 당신과 함께 하나님을 믿을 때 당신은 어렸습니다. 늘 하나님 말씀을 쓰시더니 나중에는 설교도 하기 시작하시더군요. 당신은 더없이 평범한 사람이에요. 당신의 실상은 저희가 잘 알고 있죠.’ 내 실상이 무엇이냐? 내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란 것이 내 실체이다. 평범하고 정상적인데도 지금 따르는 사람이 많으니 달갑지 않은 것이냐? 달갑지 않으면 믿지 말아라.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나는 거부할 수 없고, 회피할 이유도 없고, 사람에게 해가 될 일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너는 왜 이런 관점으로 나를 대하느냐? 달갑지 않으면 믿지 말아라. 나를 따르지 말고 기꺼이 믿어지는 사람을 믿어라. 내가 강요하지 않았는데 왜 나를 따르느냐? 나의 집에 와서 연구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무엇을 연구하느냐? “집에 안 돌아가세요? 지금 가정 형편은 어떠신가요? 가족들은 뭐 한대요? 다들 어디 갔죠? 생활은 어떠세요?” 우리 집에 이불이나 담요가 느는 것까지 감시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조금도 달갑지 않은 것이다! 왜 달갑지 않겠느냐? 그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래선 안 되지. 하나님이 이렇게 미약해선 안 돼. 하나님이 이렇게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평범하고 일반적이면 안 돼. 너무 평범해서 하나님인 걸 못 알아볼 정도야.’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네 눈이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겠느냐? 설사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와 네게 알려 준다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네게 하나님의 본체를 볼 자격이나 있느냐? 하나님이 네게 하나님이라고 똑똑히 얘기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데 네가 알아볼 수 있겠느냐? 이런 자들은 어떤 사람이냐? 본성은 어떠하냐? (사악합니다.) 정말이지 이런 자들이 내 ‘식견’을 넓혀 준다.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하고 나서부터 나는 지금의 신분과 지위로 사역하면서 일부 사람들과 접촉했다. 각양각색의 ‘인재’들을 만나면서 나는 사람의 패괴 성품이 ‘사’와 ‘악’이라는 두 글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 두 글자로 요약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왜 매일 나를 연구하느냐? 왜 나의 신분을 인정하는 것이 달갑지 않으냐? 내가 아주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만약 영체라면 그들이 감히 그럴 수 있겠느냐? 감히 그렇게 연구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만약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고 특별한 재능, 위인의 이미지와 외모를 갖춘 데다가 성품마저 악랄하고, 포악하며, 사납기까지 하다면 감히 내 집까지 찾아와 조사하거나 연구하겠느냐? 절대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그는 슬슬 피해 다니다가 내가 오는 것을 보면 숨기 바빠서 결코 연구할 생각도 못 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럼 그는 왜 이렇게 연구할 수 있느냐? 나를 만만하게 보기 때문이다. 만만하게 본다는 말은 어떤 뉘앙스를 띄고 있느냐? 너무 평범하다는 말이다. 평범하다는 말의 속뜻은 무엇이냐? ‘당신은 사람이에요. 어딜 봐서 하나님이라는 거죠? 당신은 하나님이 가지고 있어야 할 지식이나 학문, 은사, 재능, 능력을 갖추지 못했어요. 어디가 하나님답나요? 하나님답지 않아요! 그러니까 저한테 당신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당신을 따르며, 당신의 말을 따라 순종하라고 하신다면 쉽지 않을 거예요. 제가 확실하게 연구해야겠어요. 당신을 지켜보고 감시하면서 당신이 분에 넘치는 일을 못하게 할 거예요.’ 이게 무슨 짓이냐? 가령 내가 사회적 지위가 있고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일류 성악가인데 어느 날 내가 하나님이고 그리스도라고 증거한다면 적어도 일부 사람은 믿고 수긍하지 않겠느냐? 상대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보통, 정상, 실제가 너무 평범한 것이 많은 사람을 드러내게 됐다. 무엇을 드러냈느냐? 그들의 사악함을 드러냈다. 어느 정도로 사악했느냐? 그의 곁을 지나가면 뒷모습에 하나님의 형상은 없는지, 말에 이적과 기사가 따르는지 하루 종일 연구할 것이다. 그는 늘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그분 말씀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걸까? 배운 건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아. 공부하실 틈이 없을 것 같은데. 최근 몇 년 동안 변화가 너무 커서 배운 것 같지는 않아. 그럼 이 말씀은 대체 어떻게 나온 말이지? 짐작이 안 되니 조심해야겠어.’ 그는 항상 연구만 한다. 항상 연구만 하는 그들은 직접 나와 함께 지내지도 왕래하지도 대화하지도 못하면서 뒤에서는 언제나 말에서 잘못을 찾거나 트집 잡을 궁리만 한다. 한 마디라도 그의 관념에 맞지 않으면 며칠이고 연구하고, 조금이라도 엄하게 얘기하면 관념을 갖는다. 이런 것이 다 어디에서 왔겠느냐? 전부 사람의 머리와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을 연구하고 여기저기서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추측하는 이들은 모두 어떤 사람이냐? 성품이 사악한 사람이라고 규정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고도 남는다! 그럴 여유나 여력으로 진리를 묵상하면 얼마나 좋겠느냐! 어떤 진리든 네가 한동안 교제하거나 묵상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많은 진리를 평생 다 묵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가 너무나도 많다. 그런데 그는 이에 대해 부담을 느끼지는 않고 그저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일에만 연연해하며 연구한다. 말만 하면 눈만 껌뻑거리며 네 눈빛이나 행동, 표정을 지켜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추측한다. ‘이런 점을 하나님 같다고 할 수 있나? 말씀하시는 거나 시선이 그래 보이지 않아. 어떻게 하면 그분을 측량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그분이 과연 나를 어떻게 보실지 꿰뚫어 볼 수 있을까? 이 일은 어떻게 보시고 저 일은 어떻게 보실까? 나를 어떻게 정의하실까?’ 마음속에 늘 이런 것이 있으니 사악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러면 답이 없다. 너무나도 사악하다!

진정한 인류가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은 인성과 양심에 부합하고, 정상 인성의 사고와 현실 생활에 부합하고,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치우치거나 괴상하지 않고, 추상적이거나 공허하거나 초월적이지 않다. 이런 것을 사람이 애지중지하고 올바르게 대하며, 습관적으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사물로 간주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반면 어떤 사람은 현실 생활의 의식주나 행동과 됨됨이 등 다방면의 일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진리를 보면 업신여기고 무시하며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는 어떤 문제이냐? 이는 그 사람의 취향과 본성 본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긍정적인 것일수록,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일수록, 하나님이 원하고 행하는 것일수록,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람이 하길 바라고, 사람이 받아들이길 바라는 것일수록 그는 더더욱 의심하고 연구하며 반대하고 정죄한다. 이것이 사악하지않으냐? 너무나도 사악하다! 적그리스도는 이방인 가운데서 인기가 대단하다. 내가 만약 이방인 가운데 있다면 적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입은 육신 중에 어느 쪽이 이방인에게 더 받아들여지겠느냐? (적그리스도입니다.) 어째서냐? 이방인은 정직한 사람을 좋아하느냐, 아니면 사악한 사람을 좋아하느냐? (사악한 사람입니다.) 아부할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하느냐, 아니면 정직한 사람을 좋아하느냐? (아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 그들은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네가 사람들 속에서 술수로 여러 인간관계를 다룰 줄 모르고 술수로 여러 사람을 희롱하거나 조종할 줄 모른다면 그 무리가 너를 받아주겠느냐? 네가 너무 바르고 모든 말을 직설적으로 한다면, 많은 문제의 본질을 간파하여 네가 간파하고 깨달은 진리를 전부 이야기한다면 받아들일 사람이 있겠느냐? 없다. 이 세상에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에서는 절대 진실한 말을 하지 말아라. 그러지 않는다면 골치를 썩을 것이고, 화를 입을지 모른다. 정직한 사람이 되면 살길이 없으니 절대 정직한 사람이 되지 말아라. 그렇다면 적그리스도의 경우는 어떠냐? 그들은 누구보다 거짓말과 위선, 자기 포장에 능한 자들이다. 남들이 숭배하게끔 자기를 위대하고 격조 높고 선량하며 정숙한 사람으로 포장한다. 그들은 이런 데 가장 능한 것이다. 또한 그들은 모두 똑같은 것을 좋아하는데 공허한 지식과 학문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은사나 수단을 비교하는 것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회사나 사람들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이나 학문의 수준이 아니다. 그것이 회사에서의 직위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는 아닌 것이다. 그럼 주요한 요소가 무엇이겠느냐? (술수와 재능입니다.) 그렇다. 술수와 재능이다. 이것이 없으면 학문이 아무리 높아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예를 들어 네가 국내파들 간 게임의 룰을 전혀 모르는 유학파인데 해외 기업의 규정이나 처신의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면 너는 난관에 봉착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다. 너는 술수를 가지고 충분히 사악해야 높은 자리를 도모할 수 있다. 남편이 돈을 벌어 오는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출세해서 명예와 이익, 지위를 얻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첨하며, 필요하다면 ‘접대’도 마다하지 않는 여자처럼 말이다. 그녀는 아무런 미안함이나 가책도 없이 뻔뻔하게 남편과 가족을 대한다. 너는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듣기만 해도 역겨우니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그들 속에서 어찌 높은 자리를 도모할 수 있겠느냐? 어림도 없다. 그것은 다 영혼을 팔고, 온갖 사악한 수법을 동원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는 이런 방식이 좋으냐? (싫습니다.) 지금은 싫다고 하지만 언젠가 네가 궁지에 몰리면 좋아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하루 종일 너를 괴롭히고 타박하며 곤란하게 만들면서 트집을 잡고 너를 쫓아내려 한다면 너는 네 밥벌이를 위해 육체를 팔아야 할 것이다. 그녀가 어떤 사악한 간계를 썼는지 보고 너도 배울 것인데, 결국 너는 그녀와 같아질 것이다. 지금 당장은 네가 “그런 건 싫습니다. 그런 사람들처럼 살긴 싫어요. 전 그 정도로 사악하지 않습니다. 제 육체를 팔기도 싫고, 돈도 싫습니다. 그저 먹고 입을 것만 있으면 족해요.”라고 단호하게 말하지만 네가 어떤 사람이냐? 넌 아무것도 아니다. 너는 사탄이 너를 패괴시키는 대로 생겨 먹은 사람일 뿐이다. 네가 스스로를 주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하고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에 명예와 이익, 지위, 돈, 그리고 온갖 시험을 너는 결코 이겨 낼 수 없다. 만약 네가 그런 환경에 놓인다면 너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이방인의 무대는 고기 분쇄기 같아서 사람이 일단 말려 들어가면 살아 나올 수 없다. 지금 네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서 누구의 괴롭힘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평안하게 사는 것은 더없이 큰 복이다. 몰래 기뻐하여라! 네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책망과 훈계를 조금 받는다고 해서 억울해해서는 안 된다. 너는 큰 복을 받았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방인이 ‘고기 분쇄기’에 있으면 어떤 기분이겠느냐? 죽을 맛이다. 네가 하나님 집에서 고생하는 것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고생이다. 그렇게 큰 고통도 아닌데도 사람은 자족할 줄 모르고 아무리 책망하고 훈계해도 회개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집으로 돌려보내면 이방인에게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이방인은 너무 악하고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막상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은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들 목숨에 연연하는 것이다. 사람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을 신봉해서 관만 보면 울며불며 통곡한다. 이방인들 속에서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이제 모두가 안다. 존엄하게 살고 싶고 능력껏 먹고살고 싶겠지만 어림도 없다. 능력만으로는 안 되고 충분히 사악하고 악하며 독해야만 통할 수 있다. 너는 무엇을 갖추었느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제가 좀 사악하긴 한데 충분히 악하진 않아요.”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고기 분쇄기’에 들어가면 한 달도 안 돼서 악해질 것이다. 네가 좋은 사람이 되면 그가 널 죽이려 들 것이다. 네가 그를 내버려둬도 그는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너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와 싸울 수밖에 없다. 일단 악해지면 돌이킬 수 없고, 너도 마귀가 된다. 그렇게 사악해지는 것이다. 이방인의 세상은 이렇게 어둡고 이렇게 사악하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어둡고 사악한 사탄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진리를 깨달아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 지금 하나님을 믿고 있는 네가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며 많은 일을 꿰뚫어 볼 줄 알아야 한다. 또한 행동 원칙의 한 면으로는 지혜가 있어야 하고, 다른 한 면으로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명예와 이익을 좇거나 지위에서 오는 복을 누리려고만 하지 말아라.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입에 풀칠만 하면 된다. 하나님에게 이런 은혜를 부어 달라고 기도해야만 보호받을 수 있다. 사치스러운 욕망만 품으면 이성이 사라질 것이고, 하나님도 네 기도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에 관해 오늘은 주로 세 번째 모습인 적그리스도가 숭배하는 것에 관해 교제하겠다. 적그리스도는 무엇을 숭배하느냐? (지식과 학문입니다.) 지식, 학문 그리고 하나가 더 있으니 은사이다. 지식과 학문에는 무엇이 있느냐? 세상에서 배운 책의 내용, 몸 담고 있는 분야의 지식과 관련된 업무에서 얻은 경험, 그리고 사회에서 가르치는 윤리, 인성, 행위 등 다방면의 잡다한 규율과 속박이 있으며 그 밖에 각 분야의 과학적 지식도 포함된다. 예를 들면 하나님 말씀 중에 사람이 윤회한다는 말을 내내 믿지 않다가 어느 날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나서야 믿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죽고 나면 무언가 빠져나가서 체중이 몇 그램 주는데 이것이 아마도 영혼의 무게일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다가 과학자가 체중으로 측정하니 믿는다. 그는 과학만 믿는 것이다. 국가와 정부, 관련 자료나 학설, 유명인의 주장만 믿는 사람도 있다. 그는 이런 것만 믿는다. 하나님이 아무리 말하고, 알리며, 가르치고 말씀을 선포해도 거들떠보지 않다가 유명인이 하는 말은 곧장 받아들이는 것도 모자라 숭배하고 전파하기까지 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매일 사람에게 만나를 내려 주되 오늘 거둔 것은 내일이 되면 신선하지 않기 때문에 먹으면 안 된다고 해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만에 하나 하나님이 내려 주지 않으면 굶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그것을 비축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튿날 하나님이 또 내려 주면 계속해서 비축해 두었다. 다음 날도 내려 주면 또 비축했다. 하나님이 매일 같은 말씀을 해도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당부를 어기는 일을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믿지 않고 따르지도 않은 것이다. 어느 날 한 과학자가 연구를 통해 “이 만나라는 것은 당일 다 먹지 않고 다음 날까지 두면 겉으로는 신선해 보여도 속에는 세균이 번식해서 먹으면 위장병을 일으킬 수 있어요.”라고 하니 그때부터 다시는 비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과학자의 말 한 마디가 하나님의 열 마디 말씀보다 중요하니 사악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인정하고, 또 하나님을 인정하고 따르며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기를 바랐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이 내려 주는 은혜와 축복, 보살핌과 보호를 누리고 있었지만 이것 외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당부와 분부, 부탁은 한 마디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지식과 학문을 갖추고 또 권세와 지위가 있는 사람의 말이나 엉터리 논리라면 덮어놓고 주저 없이 받아들인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 이것을 사악이라고 한다. 너무나도 사악하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에게 중독되기 쉬우니 고구마와 달걀을 같이 먹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말한 근거가 무엇이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이 두 가지를 같이 먹다가 중독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듣고 나서 정상인은 어떻게 반응하겠느냐?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고구마를 먹을 때 달걀은 안 먹어야겠어. 최소한 두세 시간 안에는 달걀을 먹지 말아야지.’ 그는 진지하게 듣고 두 번 다시 그렇게 먹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믿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달걀이랑 고구마를 같이 먹으면 중독된다고? 말도 안 돼. 중독되는지 안 되는지 내가 같이 먹어 주겠어!” 이는 어떤 사람이냐? (사악한 사람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 사람은 사악한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기어이 같이 먹겠다고 하니 사악한 것이 아니겠느냐? 바르고 옳으며 긍정적인 사물에만 맞서고 따지며 대항하는 것이 사악함이다. 패괴된 인류는 사악함과 권세를 숭상하고 사탄, 마귀가 어떤 엉터리 주장을 내세우든 주저 없이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이 선포하는 수많은 진리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모자라 많은 관념을 갖는다. 사례를 더 들어 보겠다. 미국의 많은 지방 도시는 원시림 지대라 야생 동물이 자주 출몰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혼자 다니지 않는다. 저녁이 되면 되도록 외출을 삼가고, 나가야 할 일이 생기면 만일에 대비해 무리를 짓거나 호신용 무기를 챙기는 등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괜찮아요.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게 아니냐? 그 조치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조치다. 네게 머리가 있고 마음과 영이 있는데 어째서 굳이 하나님에게 지켜 달라 하느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 만에 하나 네댓 명으로도 못 당할 포악한 야생 동물을 만나도 죽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호이다. 어떤 사람이 확실히 늑대를 보고 늑대나 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야생 동물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내가 저녁엔 야생 동물과 쉽게 마주칠 수 있으니 나가지 말라고 한 것은 내가 상상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겁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내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럼 조심해야겠어요. 만에 하나 야생 동물을 만날 수 있으니 앞으로 나갈 땐 일행을 구하거나 호신용 무기를 챙겨야겠어요.” 이 말을 진지하게 들은 사람은 믿고 받아들인 다음 내 말대로 실행한다. 이것이 바로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하지만 내 말을 듣지 않는 부류의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어째서 저는 야생 동물을 본 적이 없을까요? 어디 있는데요? 올 테면 오라지요.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고요. 야생 동물이 뭐가 무서워요? 당신들은 소심하고 믿음이 작아요. 곰도 무섭지 않은 제 믿음을 보시라고요!” 그는 일부러 혼자 나간다. 툭하면 나가서 어슬렁거리고 밥을 먹고 나면 꼭 산책하는데 기어코 혼자 나가는 것이다. 남들이 일행을 붙여 주겠다고 해도 그는 “안 돼요. 무슨 일행을 찾고 그러세요? 일행이 있으면 얼마나 못나 보여요! 혼자 갈게요!”라고 한다. 기어이 그렇게 해보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사람이냐? 그가 야생 동물을 만났는지는 둘째 치고 이런 일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문제가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어떤 문제냐? (이런 사람의 성품은 사악합니다.) 그에게 올바른 일에 대해 말해도 그는 농담으로 치부한다. 이런 사람에게 무슨 말을 더 하겠느냐? 이런 부류의 사람은 짐승보다 못하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방금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을 가진 사람은 지식, 학문, 은사, 그리고 특별한 재능에 몹시 민감하다고 했다. 그들은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감탄하고 그 사람을 우러러보고, 그 사람의 말에 탄복해 머리를 조아리며 고분고분해진다. 사람에게 유익한 것, 정상 인성이 갖춰야 할 상식이나 식견, 진정한 학문, 정상 인성의 사고로 이해하는 긍정적이고 실제적인 것에는 그들이 어떤 태도를 갖느냐? 업신여기고 거들떠보지 않는다. 예배 때마다 말씀과 진리를 교제하면 그들은 무엇을 하느냐? 귀나 턱을 만지면서 눈이 풀리고 넋이 나가는 사람이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이 안 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 집에서 올바른 일에 대해 말할수록 흥미를 잃고, 진리를 교제할수록 꾸벅꾸벅 존다. 이를 통해 그들에게는 진리에 대한 흥미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불신파들은 구제불능이 아니냐? 어떤 사람은 종교에서 방언 듣기를 좋아하고 기이한 일을 보는 것을 좋아하며 신기한 일을 보면 이내 정신을 차린다. 어떤 사람은 나만 보면 이런 말을 즐겨 한다. “저는 대학 본과생인데 철학을 배우고 있어요. 당신은 무엇을 전공하셨나요?” 그러자 내가 어떤 전공도 배운 적이 없고, 그저 글만 조금 알아서 책을 읽을 수 있다고 하니 그가 말한다. “그럼 안 되죠.” 그래서 내가 “이런 건 비교해 봤자 쓸데없으니 교제해 보자. 네게 지금 어떤 어려움이 있느냐?”라고 하니 그가 어떻게 말하겠느냐? “참나, 어떤 어려움이 있냐고요? 어려움 따윈 없습니다. 본분 잘 이행하고 있다고요!” 그와 진리를 교제하면 그는 흥미를 잃고 귀신 들린 것처럼 하품을 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계속해서 그의 패괴 성품을 폭로하면 그는 잔을 들고 가 버린다. 듣기 싫은 것이다. 그와 동등하게 지내면서 대화할수록 그는 더 무시하니 이것이 은혜도 모르는 것이 아니겠느냐?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그에게 운전한 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한 지 2년 만에 차를 샀습니다.” 나는 “차를 몬지 꽤 오래되었구나. 나는 아직 운전을 할 줄 모른다.”라고 말했다. 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동등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정상 인성에서의 대화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내 말을 들은 그가 “어? 운전 못하세요? 그럼 뭘 할 줄 아시나요?”라고 묻자 나는 “차를 탈 줄만 알지 아무것도 못한다.”라고 답했다. 그러고 나서 지금 어떤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지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저는 재무와 회계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제 머릿속은 온통 숫자뿐입니다. 대학 시절에 수학을 제일 잘했어요. 이과 쪽으로 제일 뛰어났어요. 청화대나 북경대 감이죠.” 내가 말했다. “나는 수학을 가장 못한다. 숫자만 보면 머리가 아플 지경이지. 나는 단어 공부 같은 글 배우기를 좋아한다.” 그가 말했다. “그런 건 배워 봤자 쓸모없어요. 일반적으로 인문계에 진학한 사람들은 전망이 좋지 않더라고요.” 그의 말을 들어보면 정상 인성의 이성이 있는 것 같으냐? (없습니다.) 그와 이렇게 소탈하게 대화하고 함께 지내는데 그는 이것을 올바로 대하지 않고 무시하고 얕잡아 본다. 그가 만약 지위가 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사뭇 다를 것이다. 이렇게 어느 정도 같이 지내고 나면 그는 자기가 하나님과 수다도 떨고, 왕래도 하고, 하나님과 친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자격이 생겼다고 생각하니 말투도 바뀐다. 한번은 그에게 물었다. “본분을 이행하기 싫어서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 그가 집에 돌아갔느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그 사람이요? 그 사람은 집에 갈 생각이 없었어요!” 이것이 무슨 말투냐? 변하지 않았느냐? 처음 만날 때는 잘 몰라서 일단 공손하고 겸손하게 꼬리를 내리며 처신하더니 이제 좀 친해졌다고 꼬리를 세우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투냐? 대드는 뉘앙스로, 대수롭지 않고 귀찮다는 듯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로 대화한다. 이것이 어떤 성품이냐? 사악함이다. 이것이 정상 인성이겠느냐? (아닙니다.)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너와 정상적으로 교류하고 대화하는 것은 더없이 정상적인 일이다. 그가 만약 너를 괴롭히고 압박하며 얕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그가 너를 이렇게 대하는 건 정상 인성이 있는 것이냐? 생각해 보아라. 이런 부류의 사람이 세상의 유명인이나 지위와 명망이 있는 사람, 또는 자신의 사장이나 상사를 만난다면 감히 이렇게 대하겠느냐? 그럴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그는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자신을 비직(卑職), 수하(屬下), 노재(奴才), 소인(小人), 천민(賤民), 초민(草民) 등과 같은 칭호로 지칭하며 그들과 대화하기를 바라 마지않을 것이다. 이방인 속에서는 계급이 깡패다. 누가 너 같은 소인배와 소탈하게 얘기하겠느냐? 간혹 기분 좋게 네게 몇 마디 했다고 해도 너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너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틈만 나면 공 다루듯 차고 놀 것이다. 내가 이렇게 사람들과 소탈하게 이야기하고 대화하는데도 긍정적인 반응은커녕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얕보이며 업신여겨지고 조롱당하기만 하는 것은 내 방식이 잘못된 것이냐, 아니면 사람의 성품에 문제가 있는 것이냐? (사람의 성품이 너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다. 나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데 어째서 올바르게 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이냐?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인성이 있어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사악하고 교만하여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자이다. 말해 보아라. 인간의 탈을 쓰고 자기 주제도 모르는 게 무엇이겠느냐? 이성이 없는 짐승이다. 또 한번은 내가 그에게 “얼마 전에 네게 부탁한 일은 어찌 되었느냐? 그것들을 잘 정리했느냐?”라고 물으니 그는 “뭐라고 하셨는데요?”라고 되물었다. “몇 가지 물건들 말이다. 잘 보관하고 있느냐? 정리했느냐?” 두 번이나 상기시키고 나서야 생각났다. “아, 그거요? 진작에 정리했죠.” 맨 처음 ‘아’는 무슨 말투냐? 또다시 무시하는 말투다. 마귀의 본성이 또 튀어나왔다. 그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다. 계속해서 어떻게 정리했냐고 묻자 그는 “어떤 사람들이 보고는 그렇게 정리하더라고요.” 그러고 끝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에게 부탁한 일에 대해 내게 알 권리가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책임은 무엇이냐? 그에게 부탁한 일을 그가 수락한 후에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내게 보고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는 보고하지 않았고, 나는 계속 그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사람을 보내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을 수밖에 없었지만 역시 답을 듣지 못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좋다. 널 기억해 두겠다. 너란 사람은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네게 부탁하지 않을 것이다. 너란 사람은 너무나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이는 어떤 마귀이냐? 이런 부류 사람의 성품은 어떠하냐? 사악하다. 그와 다정하게 상의도 하면서 동등하게 지냈는데 그는 이 일을 어떻게 보았느냐? 무능하고 연약하며 얕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보다 사악할 수 없다. 이 정도로 사악한 사람은 자주 보이진 않아도 교회마다 있다. 이들은 마음이 강퍅하고 교만하며 진리를 싫어하고 성품이 흉악하다. 그들이 이런 모습과 성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부류의 사람이 사악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정상 인성의 선함, 관용, 인내, 사랑 등 긍정적인 것을 사랑하기는커녕 오히려 속으로 경시하고 업신여기니 이들의 마음 깊은 곳이 어떻겠느냐? 사악해도 너무 사악하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의 또 다른 하나의 모습이다.

오늘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모습에 관해 교제한 이런 내용은 지난번 두 차례에 걸쳐 교제한 두 가지 부분과 약간 다르다. 제각각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말해 보아라. 적그리스도는 마음속 깊이 지식과 학문, 은사, 그리고 특별한 재능을 숭상한다. 그들이 속으로 이것들을 숭상하는데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들도 변할 거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변하겠느냐? 그럴 리 없다. 그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속으로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 하나님의 신실함, 그리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 돌봄을 무시한다. 또 무엇이 있느냐?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을 무시하고 지식, 학문, 과학, 은사와 전혀 무관한 모든 진리는 더더욱 무시한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의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왜 구원받을 수 없느냐? 이는 특정 측면의 패괴 성품이 잠깐 표출된 것이 아니라 본성 본질이 표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아무리 권면하고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그는 변하지 않는다. 이는 그의 일시적인 취미가 아니라 그의 내면이 이것들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식, 학문, 은사, 특별한 재능을 원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숭상하는 것이다. 숭상한다는 게 무슨 뜻이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들을 따르고 얻으려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숭상의 뜻이다. 그는 이것들을 얻기 위해 따르는 고통과 모든 대가를 불사하고서라도 얻으려 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숭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서 제게 뭘 시키든 다 괜찮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흡족하게 해 드릴 수 있어요. 다만 저한테 진리를 추구하라고만 하지 않으면 돼요.” 이것이 그들의 바람이다. 그들은 영원히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거기에 앉아서 차분히 설교를 듣고 하나님 말씀을 읽고는 있지만 그런다고 진리를 얻지는 않는다. 그들은 늘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 말씀을 판단하고 신학적 지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기 때문에 진리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서 지식과 학문, 그 어떤 정보나 비밀, 자기가 속으로 동경하고 탐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학문을 얻길 바란다. 그렇게 그들은 남들이 모르는 그런 학문을 얻고 나면 자랑하러 간다. 그 학문과 지식으로 자기를 무장하고 포장하여 좀 더 품위 있고 충실한 삶을 살면서 사람들로부터 위신과 지위를 더 얻고 남들의 신뢰와 숭배를 더 받을 수 있다고 망상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업적이나 휘황찬란하다고 생각되는 일, 그리고 훌륭하고 내세울 만하다고 생각되는 것, 자기를 능력자, 출중한 사람으로 치켜세워 줄 만한 것들을 여기저기 부지런히 떠벌리고 다닌다. 어딜 가든 그들이 하는 말은 항상 똑같은 이론들이다. 이들은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읽고 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들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설사 진리를 조금 깨닫는다고 해도 절대 실행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런 부류의 본질이다. 이것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그들의 사악한 본질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치명적인 점이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바울의 길을 가며, 진리와 하나님에게 끝까지 대항할 수밖에 없다. 이유가 무엇이냐?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영원히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에 대해 겪어 보았느냐? 너희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느냐? 이런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있느냐? 우리가 왜 몇 차례의 예배 시간을 할애하여 이 주제를 다루겠느냐? 평소 사람들이 자신을 인식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간사한 성품은 자주 언급하지만 사악함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지금 이렇게 사악한 성품에 관해 교제하니 아무개의 성품이 사악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너희가 정말 조금은 깨달은 것 같구나. 예전에 사람이 자기에 대한 인식을 얘기하면서 늘 교만하다고 했는데 이제는 교만함과 사악함 중 어느 성품이 더 심각하다고 생각하느냐? (사악함입니다.) 그렇다. 예전에는 사악함이라는 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다. 사실 사악함이라는 성품과 본질은 교만보다 더 심각하다. 만약 성품과 본성 본질이 대단히 사악한 사람이 있다면,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절대 그와 접촉하지 말고, 거리를 두어라. 이런 사람은 바른길을 가지 않을 것이다. 사악한 사람과 왕래하거나 접촉해서 네게 득 될 게 무엇이 있겠느냐? 득이 되진 않지만 너에게 그의 사악함에 저항할 수 있는 ‘항체’가 있다면 왕래해도 괜찮다. 그럴 자신이 있느냐? (없습니다.) 어째서 그럴 자신이 없으면 이런 사람과 접촉하지 말아야 하겠느냐? 사악함의 이면에 음험함과 간사함이라는 이 두 가지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체험이나 식견도 없으면 미혹되기 쉬워서 그에게 굴복하고 결국 그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 포로가 되면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 하나는 네가 졌다는 사실을 속으로는 승복하지 못하지만 말로는 어쩔 수 없이 승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에는 한 가지 사람이 모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그가 온갖 방식과 주장, 술수, 계책, 방법, 궤변으로 네가 그의 말을 따르도록 설득하여 그가 옳고 바르며 긍정적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설사 그가 악을 저질러 진리 원칙을 어기고 패괴 성품을 표출했더라도 결국엔 그것을 뒤집어 자신이 옳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다. 이것이 어떤 능력이냐? 바로 사람을 미혹하는 대단한 능력이다. 사람을 미혹하는 대단한 능력, 이것이 그의 사악함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 사랑하지 않는 것, 싫어하는 것, 숭상하는 것, 숭배하는 것들은 그들 마음속의 치우친 편견에 의해 생긴 것이다. 이 관점들이 그들에게 형성하는 일련의 이론들은 죄다 그럴듯한 궤변인데, 보통 사람은 반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잘못을 위해 궤변을 늘어놓기 때문이다. 네게 진리 실제가 없으면 그와 진리를 교제해도 그를 설득할 수 없으니 결과는 하나뿐이다. 그가 그의 공허한 이론으로 너를 반박해서 할 말을 잃게 만드니 너는 조금씩 그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런 사람의 사악함은 사람을 미혹시키는 능력이 대단한 데에 있다. 본인이 아무것도 아닌 게 분명한데도 어떤 본분이든 엉망으로 이행해 놓고 결국에는 일부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기를 숭배하게 하고, 자기 발 앞에 ‘무릎 꿇고’ 고분고분 따르도록 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잘못된 것을 옳다고 하고, 검은 것을 희다고 하면서 시비를 전도시킨다. 그러면서 자기가 저지른 나쁜 짓은 남에게 뒤집어씌우고 남이 한 좋은 일은 자기 공으로 돌리니 시간이 지나면 너도 헛갈려서 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너는 그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의 겉모습을 보고 ‘이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네. 우리가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미혹된 게 아니겠느냐? 미혹되는 순간 너는 위험해진다. 이렇게 사람을 미혹하는 사람은 너무 사악하지 않으냐? 누구든 그의 말을 들으면 미혹되고 교란당해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한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그에게 분별이 생겨서 그가 사람을 미혹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그를 폭로하고 저버릴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미혹되어 그를 싸고 돈다.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 집이 그를 차별한다면 제가 그를 지키겠어요.” 이것은 무슨 문제이냐? 그에게 미혹된 게 분명한데도 그를 변호하며 감싸고 있으니 이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람을 따르는 자가 아니겠느냐?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째서 그를 숭배하고 특별히 그를 변호하기까지 하느냐? 이렇게 명확한 일조차 간파하지 못한다면 어느 정도 미혹된 것이 아니겠느냐? 그는 사람을 미혹하여 사람답지 않게 만들고, 하나님을 따를 마음이 없게 만들며, 자신을 숭배하고 따르게 만드니 이는 하나님을 배반한 자가 아니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으나 하나님이 너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적그리스도가 네 마음을 얻어 네가 한결같이 그를 따른다면 이는 그가 이미 너를 하나님 집에서 가로채 갔음을 의미한다. 네가 일단 하나님의 보살핌핌과 보호에서 벗어나고, 하나님 집에서 떠나면 그가 너를 마음대로 우롱하고 희롱할 것이다. 어느 날엔가 실컷 희롱한 다음에는 너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미혹할 것이다. 네가 계속 그의 말을 따르고 그에게 이용 가치가 있다면 한동안 너를 곁에 둘 수도 있지만 네가 그에게 아무런 이용 가치도 없다면 너 같은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걷어차 버릴 것이다. 그러면 네가 돌아와 하나님을 계속 믿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 믿을 수 없겠느냐? 네 처음 믿음이 사라졌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사람을 미혹하고 해친다. 그들은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미혹한 것처럼 사람이 숭배하는 지식과 학문,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를 통해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한다.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 무엇이든, 그리고 그들의 본성 본질 속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혐오하고, 무엇을 숭상하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좋아하는 것과 그들이 사람을 미혹하는 수단이 모두 진리에 위배되고 진리와 무관하며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적그리스도는 영원히 하나님과 합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말해 보아라, 어떤 부류의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특징과 상징을 가지고 있느냐? (은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더 말해 보아라. (자기를 드러내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드러내길 좋아한다고 해서 그를 사악하다고 하는 것은 무리이다. 자기를 드러내길 좋아해도 남을 조종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면,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면 그것은 패괴 성품일 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어떤 사람의 여러 행적에서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는 특징과 상징을 볼 수 있느냐? (교만하고 지위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교만하고 지위를 사랑하는 것에도 그런 뜻이 조금은 있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내가 한 가지 말할 테니 중요한 내용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아라. 늘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는데 겉으로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고 특출나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아마도 그의 관점이 그가 이렇게 겉치레식 행동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정말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예를 들어 다 같이 교제하는 자리에서 모두가 “이 일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들여야 해. 이해되지 않으면 우선은 순종해야 해.”라고 한다면 이 관점이 옳으냐? (옳습니다.) 이 실행 원칙이 치우친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의 특징과 상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말을 하느냐? “순종할 땐 순종하더라도 어찌 된 영문인지는 분명히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매사에 참답게 대해야죠. 순종하더라도 아무 생각 없이 순종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보고 아무렇게나 순종하라고 하신 건 아녜요.” 이것은 하나의 논조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천천히 기다렸다가 이해한 사람을 찾아가 교제해도 돼요. 지금은 우리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한 사람을 찾아가 교제할 수도 없으니 일단 순종합시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면 적그리스도는 어떤 관점을 보이느냐? ‘이 못난 놈들, 뭐든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다니, 내 말을 들어야지! 어째서 아무도 내 얘기를 안 하는 거야? 고견을 들려주겠어!’ 그는 큰소리치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진리를 실행하거나 진리 원칙을 지키는 것에 반대한다. 늘 거드름을 피우고 까탈스럽게 굴면서 잔머리나 쓰고 큰소리쳐서 남들에게 주목받을 생각만 한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의 한 가지 특징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그의 상징이 아니겠느냐? 모두가 순종하는 것이 왜 옳지 않다는 것이냐? 어리석은 순종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정죄하겠느냐?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는데 그는 뭘 믿고 여기에 끼어들어서 교란하느냐?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보면 속에서 화가 치미는 것이냐?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보니 달갑지 않은 것이다. 그가 득을 보지 못하고, 사람들의 순종을 얻지 못하고, 자기 말을 따르거나 자기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사람이 없으니 원하지 않게 되고, 속으로 ‘당신 누구한테 순종하는 거야? 진리에 순종한다고? 진리에 순종하는 것도 맞긴 하지만 이 일은 연구해 봐야 해. 무엇이 진리일까? 순종하는 게 맞긴 한 걸까? 어느 정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라고 반발한다. 이것이 그의 논조가 아니겠느냐?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겠느냐? 사태를 교란하고 사람을 미혹하려는 것이다. 무감각하고 미련하며 우매한 사람은 그의 말을 들으면 미혹되지만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들으면 그를 반박한다. “당신 지금 뭐 하는 짓이죠? 제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걸 질투하고 샘을 내시는 건가요? 제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언짢아하고 당신에게 순종하면 좋다는 건가요? 모두가 당신에게 순종하고 당신의 말을 따르고 당신 말대로 해야 맞는 건가요? 당신의 말이 진리에 부합하나요?” 이런 말을 들은 그는 생각한다. ‘분별할 줄 아는 사람도 있구나. 일단 기다려 보자.’ 어찌 되었든 모두가 진리 원칙 대로 실행할 때면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온다. 모두가 하나님과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종할수록, 모두가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고, 사역지침과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수록 그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지고 언짢아지고 불안해진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의 특징 중 하나이다. 모두가 하나님 말씀대로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기만 하면 그의 마음이 불편하고 초조하며 불안해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아무도 하나님 말씀을 읽지 않거나 말씀을 읽고도 교제하지 않고 그의 말만 들으면 그는 기뻐한다. 이는 어떤 문제를 보여 주느냐? 그는 하나님 말씀을 전혀 교제하지 않는다. 모두가 조용히 하나님 말씀을 교제하느라 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 말을 듣지도 않으면, 그리고 남들에게 숭배받지 못해 지위 보전이 어려워질 것 같으면, 중간에 끼어들어 어지럽힌다. 사설과 궤변으로 너를 미혹하고 교란하여 방금 네가 한 말의 옳고 그름을 알 수 없게 만든다. 모두가 어렵사리 교제하여 조금이나마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가 마귀적인 말 몇 마디로 훼방을 놓으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이 아니겠느냐? 이 사악한 성품은 어떤 모습과 맞아떨어지느냐? (진리를 적대시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 모두가 진리를 깨달을수록 그는 더 괴로워하는데, 이것이 진리를 적대시하는 게 아니겠느냐? 여기에 들어맞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모두가 한 가지 일을 교제할 때는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겨우 교제가 가닥을 잡아갈 때쯤 그가 튀어나와서는 난제 하나를 던져서 이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내가 한 수 가르쳐줄 테니 잘 보라고! 진리를 교제하면서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날 무관심하게 신경 쓰지도 않으면 너희에게 어려운 교제 거리를 던져 줘서 교란시키겠어!’ 이는 마귀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이고 영락없는 적그리스도이다.

누군가 소극적으로 변했다거나 연약해졌다는 것을 들을 때마다 무척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 특히 교회 생활을 교란하고 교회 사역을 망쳐 놓는 나쁜 짓을 하거나 소란을 피우는 사람을 보면 그는 축포라도 터뜨려 축하하고 싶을 만큼 더없이 기뻐한다. 이런 사람은 왜 그러는 것이냐? 왜 남의 불행을 보며 즐거워하느냐? 어째서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 편에 서지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 않느냐? 이런 사람은 불신파가 아니겠느냐? 사탄의 졸개가 아니겠느냐? 너희는 자기에게 이런 모습이 없는지 반성하고, 주변에 이런 부류의 사람이 없는지, 그들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특히 악인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게 될 때 어떤 태도를 갖는지, 강 건너 불구경하지는 않는지, 자기도 이런 길을 갈 수 있지 않은지, 이런 부류의 사람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자기를 반성하지 않는다. 그는 남의 좋은 점은 보기 싫어하고 자기보다 나빠야 좋아하고 기뻐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에게 헌신한 사람이 책망받거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과오를 범한 것을 보면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내심 기뻐한다. ‘훗, 당신한테도 이런 날이 있네. 하나님께 헌신하더니 이를 어쩌나? 억울하지? 본전도 못 찾았지? 헌신하면 뭐 해! 항상 정직하게 말하라고 하더니만 책망받았네? 꼴 좋다!’ 그는 왜 이리 신났느냐? 이는 남의 불행을 즐기는 것이 아니냐? 정말이지 심보가 고약한 자가 아니냐? 그는 누군가 하나님 집 사역을 교란하거나 하나님 집 사역이 손해 보는 것을 보면 기뻐한다. 그가 기뻐하는 부분이 무엇이냐? ‘마침내 나처럼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생겼군. 하나님 집 이익에 손해를 끼쳐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어.’ 그는 이 점을 기뻐하는 것이다. 사악하지 않으냐? (사악합니다.) 너무나도 사악하다! 너희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평소엔 흥얼거리지 않다가 어떤 일을 하다 실수한 사람만 보면 갑자기 콧노래를 부르고 몸을 흔들며 아주 기뻐한다. ‘오늘은 정말 행복한 날이야. 너무 기뻐서 밥 두 그릇 더 먹어야겠네!’ 이는 어떤 성품이냐? 사악함이다. 하나님 집의 이익이 손해를 봤다는 이유로 그가 눈물 한 방울 흘리거나 단 1초라도 슬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죄책감이나 괴로움, 고통은 전혀 느끼지 않고, 도리어 잘못을 저질러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실을 끼치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한 사람이 있으면 기뻐하고 후련해한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을 지닌 특징 중 하나가 아니겠느냐? 이 역시 특징 중 하나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 중에 말주변이 좋은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오랫동안 설교를 듣고 일련의 도리를 정리하고는 여기저기서 허풍을 늘어놓으며 설교를 기가 막히게 해서 자신의 은사와 언변을 마음껏 드러낸다고 한다. 이런 사람의 능력이 대단한 것 같아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결국 어떤 말을 하느냐? “그 사람의 교제를 들으면 상부의 설교도 들을 필요 없고, 하나님 말씀도 들을 필요 없어요. 그분 교제를 대신 들으면 돼요.” 이런 사람은 위험하지 않으냐? (위험합니다.) 이런 사람은 무척 위험하다. 그들은 적그리스도의 행위를 사랑하고 적그리스도의 방종과 야만, 사악함을 사랑하며, 적그리스도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적그리스도가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은 적그리스도가 설파하는 지식과 학문, 도리, 온갖 신학 이론, 온갖 사설과 궤변들을 사랑한다. 이것이 그들이 숭배하는 것들이다. 어느 정도로 숭배하느냐? 잠꼬대를 할 때도 그런 말을 내뱉는다. 심각하지 않으냐? 이 정도로 숭배하는데도 이들이 하나님을 따를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교회에 있고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있는 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기회가 생겨서 자기가 숭배할 사람이나 대상을 찾으면 언제라도 하나님을 떠날 수 있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을 가졌다는 특징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보면 분별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일의 성질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제 이런 부류의 사람을 또 만난다면 그들에 대해 속으로 긴가민가하겠느냐?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두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이런 부류의 사람에 대해 분별이 조금 생긴 것이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드러내는 특징과 정보들이다. 이들은 기회나 지위가 생기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미혹되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그들의 표출과 사악한 본질을 사람이 알아볼 수 있겠느냐? 그 실마리가 드러나겠느냐? (그럴 것입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내가 이것들을 언급하지 않으면 너희는 ‘누가 이런 상징을 가지고 있지? 누구에게서 이런 특징이 드러나지? 없는 것 같아. 못 알아보겠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해 준 몇 가지 특징을 통해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았느냐? 이런 사람 중에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도 있고 리더 일꾼도 있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을 가진 세 번째 특징이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을 지닌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들이 진리를 사랑하고 참도를 갈망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설교를 듣고 진리와 관련된 여러 지식과 내용을 배운다는 것이다. 이런 명분을 내세워 신학적 이론과 지식을 무장하고 나서 이런 이론과 지식을 이용해 리더 일꾼과 설전을 벌이거나 특정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미혹하며 설득하는 것도 모자라 그 사람들에게 이른바 공급, 도움, 양육이란 것을 행한다. 하지만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이들이 아무리 무장하고 설교해도, 말만 그렇게 하면서 스스로를 무장하기만 할 뿐, 전혀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혀’는 무엇을 뜻하느냐? 그들이 진실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정직한 사람은 한 번도 되지 않았으며, 지위의 복을 내려놓기 위한 대가를 치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들은 어떤 장소에서 말하고 행동하든 늘 자신의 명예와 이익, 지위를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겉으로 얼마나 대가를 치르고, 얼마나 진리를 사랑하든, 그들의 사악한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어떤 문제이냐? 한 측면으로는 이들이 일하면서 진리 원칙을 전혀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한 측면으로는 설사 진리 원칙과 실행의 길을 알더라도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의 특징이다. 이들에게 지위가 있든 없든, 복음 전파의 본분을 이행하든, 리더 일꾼을 담당하든, 그들의 특징은 무엇이냐? 옳은 도리만 말할 줄 알지, 옳은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도리는 누구보다 분명하게 말하면서 일은 누구보다 엉망으로 하는 것이 사악함 아니겠느냐?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을 가진 네 번째 특징이다. 주변에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은지 한 번 비춰 보아라. 이렇게 구분했으니 너희가 가늠해 보아라. 주변에 이런 사람이 많지 않으냐? 백 명 중에 몇 명꼴로 있느냐? 리더가 많으냐, 아니면 평신도가 많으냐? 어떤 사람들은 예전에 적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리더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예전엔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 관점이 변했느냐? 지위가 있어야만 적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위가 없었을 때도 그는 이런 인간이었다. 단지 우연히 리더가 되었을 뿐 그가 가진 적그리스도의 실체는 순식간에 폭로되었다. 마치 적절한 온도와 토양만 있으면 순식간에 발효되는 세균처럼 진상이 폭로되는 것이다. 만약 적절한 환경이 없다면 그의 본성 본질이 서서히 폭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서서히 폭로된다고 해서 그에게 이런 본성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본성을 지닌 자는 반드시 일을 저지를 것이고 표출할 것이다. 이렇게 표출되어 나온 행위가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의 특징이자 상징이다. 이런 특징과 상징을 지녔다면 그들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해 보아라.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 원칙대로 일하는 데 여러 핑계나 근거가 필요하겠느냐?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진심만 있으면 실행해 낼 수 있다.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온갖 핑계를 대지 않더냐? 예를 들어 그가 잘못을 저지르고 원칙을 어겼을 때 남들이 바로잡아 준다면 그가 따르겠느냐? 따르지 않는다. 따르지 않으면 그걸로 끝이겠느냐? 그의 사악함이 어디에서 나타나느냐? (설득할 구실을 찾아 그가 옳다고 여기게 만듭 니다.) 그는 네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는 말에, 네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 진리에 부합하는 일련의 영적인 이론을 더해 너를 설득한다. 너를 설득해 그가 옳다고 여기도록 만듦으로써 사람을 미혹하고 조종하려는 그의 목적을 달성한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악함이다. 분명히 잘못을 저지르고, 원칙과 진리를 어기는 짓을 하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았으면서 일련의 이론적 근거까지 만들어 내니 정말 이보다 더 사악할 수 없다. 양을 잡아먹는 이리처럼 말이다. 원래 양을 잡아먹는 건 이리의 본능이다. 양을 잡아먹도록 하나님이 만들었으니 양은 그것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리가 잡아먹고 나서 온갖 구실을 갖다붙인다면 너는 이리에게 어떤 생각을 갖게 되겠느냐? ‘내 양을 잡아먹어 놓고 네가 잡아먹는 게 마땅하고, 합당하며, 적절하니 도리어 자기한테 고마워하라고?’ 화가 나지 않겠느냐? (화가 납니다.) 화가 나면서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이 자식 너무 사악하네! 잡아먹었으면 잡아먹은 거지. 넌 원래 그런 놈이잖아. 내 양을 잡아먹은 건 둘째 치고, 핑계랑 구실만 잔뜩 늘어놓으면서 오히려 나더러 고마워하라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것이 사악함이다. 이리가 양을 잡아먹을 때 무슨 핑계를 대더냐? “어린 양아, 내가 오늘 꼭 널 잡아먹어야겠다. 작년에 네가 날 욕한 것에 대한 복수야.”라고 이리가 말하자 억울한 양이 대답했다. “작년에 전 태어나지도 않았는걸요.” 그 말을 들은 이리가 새끼 양의 나이를 세어 보지 않아 실수한 걸 깨닫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없던 일로 하자. 그래도 널 잡아먹어야겠어. 저번에 내가 강가에서 물 먹을 때 물을 더럽혔잖아. 그 복수야.” 새끼 양이 대답했다. “전 강 하류에 살고 당신은 상류에 사는데 제가 어떻게 상류 물을 더럽힐 수 있겠어요? 온갖 핑계 대지 말고 잡아먹을 거면 그냥 잡아먹으세요.” 이것이 이리의 본성이다. 사악하지 않으냐? (사악합니다.) 이리의 사악함과 큰 붉은 용의 사악함이 같지 않으냐? (같습니다.) 이것이 큰 붉은 용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하는 말이다. 큰 붉은 용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 그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해 먼저 허상을 몇 개 만들고 유언비어를 날조한 후 세상에 알려서 온 세상이 너를 정죄하게 만든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사회 치안 교란’, ‘국가기밀 유출’, ‘국가 정권 전복’ 등의 몇 가지 누명을 씌우는 것도 모자라 형사 사건을 저질렀다는 유언비어까지 날조해 퍼뜨리고 누명을 씌운다. 네가 인정하지 않으면 되겠느냐? 이것이 네가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겠느냐? 아니다. 이리가 기어코 양을 잡아먹고야 마는 것처럼 그것도 기어이 너를 체포하려 하기 때문에 온갖 핑계를 대는 것이다. 큰 붉은 용이 우리가 어떤 나쁜 일을 했다며 만들어 낸 허상은 사실 다른 사람이 한 짓이다. 그것이 그 죄를 교회에 뒤집어씌운 것인데, 그것에게 따진다고 되겠느냐? (안 됩니다.) 어째서 그것에게 따지지 않느냐? 그것에게 확실히 따질 수 있겠느냐? 네가 그것에게 따져서 이 일을 확실하게 해 두면 너를 체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그것을 너무 좋게 생각하는데, 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것은 네 머리채를 잡아 벽에 머리를 찧고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마귀다!” 그러고는 흠씬 두드려 팬다. 여기에 몇 날 며칠 동안 심문과 고문까지 더해지면 너는 고분고분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는 알게 될 것이다. ‘여긴 말이 통하지 않는 곳이야. 이게 바로 올가미로구나!’ 큰 붉은 용이 너와 논쟁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허상을 만들어 낸 것이 고의가 아닌 우연이었다고 생각하느냐? 이는 그가 몰래 음모를 꾸며서 다음 단계를 생각해 놓고 일을 도모할 것이라는 전조이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게 어떤 건지 몰라서 그런 거야. 그들에게 확실히 알려 주면 별일 없을 거야.’ 네가 확실히 말할 수 있겠느냐? 네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어도 죄를 뒤집어씌웠는데 확실히 말할 수 있겠느냐? 그것이 네게 누명을 씌울 때 네가 무고하다는 것을 모르겠느냐? 누구의 소행인지 모르겠느냐? 알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왜 너에게 뒤집어씌우느냐? 잡아야 할 사람이 너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네게 누명을 씌워 놓고도 네가 억울한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너를 억울하게 하고 체포하여 박해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사악함이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 본질은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그들은 속으로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실행할 마음도 전혀 없다. 그런데도 너는 그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진리를 교제해 주려고 한다면 그 결과 어떻게 되겠느냐? 벽에 부딪히지 않았느냐? 사람을 잘못 찾았다.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니 그와 교제할 게 아니라 그를 훈계하고 따끔하게 지적해야 한다. “당신은 본분을 이행한 지 얼마나 됐죠? 본분이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아세요? 그것이 당신 혼자만의 일인가요? 누구에게 맞서는 겁니까? 저를 겨냥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겨냥하고 진리를 겨냥하고 있는 거라고요!” 이렇게 그를 훈계해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그와 진리를 교제한다고 해서 소용이 있겠느냐? 소용없다. 왜 소용이 없겠느냐? 그는 길 잃은 양이 아니라 이리이다. 이리가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느냐? 실행하지 못한다. 이리의 본성이 무엇이냐? (사악함입니다.) 양만 보면 군침을 흘리고 구미가 당기니 양은 필연적으로 그것의 먹잇감이 된다. 이것이 본성이고 사악함이다. 네가 그것에게 “양이 얼마나 가엾고 온순하니. 절대 잡아먹지 마. 다른 사나운 동물을 잡아먹으면 안 되겠니?”라고 말하면 알아듣겠느냐? 못 알아듣는다. 이것이 본성이다. 어떤 이들은 진리는 실행하지 않으면서 온갖 핑계를 대는데 이것이 바로 본성이다. 이 본성은 무엇이냐? 사악함이다. 그들의 행동이 아무리 비열하고, 패역하며,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확실하더라도 그들은 체면을 지키려 한다. 진리를 어기더라도 허울 좋고 당당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진리를 어기는 것이 긍정적인 사물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사물이냐? (부정적인 사물입니다.) 부정적인 사물인데도 어찌 떳떳하고 당당하며 허울 좋게 행동하느냐? 이 두 가지 모습이 한데 있으니 이상하지 않으냐?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을 가진 자의 행위와 모습이다.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그들은 이렇게 행동하고 이런 성품을 지녔으며 이렇게 표출한다. 그들은 속으로 진리를 증오하고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요,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 본질이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이 모두 몇 가지였느냐? (네 가지입니다.) 총 네 가지이다. 이 네 가지 특징이면 너희가 분별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냐? 사악함 자체에 음험함과 간사함이 있는데, 이 음험함과 간사함이 극에 달하면 사악한 성품으로 규정된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사악한 성품을 갖고 있다.

2019년 9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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