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1)

참고 설교를 정리할 때 나타나는 문제를 해부하다

듣자 하니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이 지난 설교 몇 편에서 앞부분의 이야기는 삭제하고 뒷부분에서 본격적으로 설교한 내용만 남겼다던데,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 뒷부분 설교와 분리된 이야기가 어떤 것들이냐? (‘다바오(大寶)와 샤오바오(小寶)의 이야기’, ‘다밍(大明)과 샤오밍(小明)의 이야기’, ‘밑천을 따지다 ―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다’입니다.) 그 세 이야기가 설교 내용과 분리되었구나. 왜 분리되었겠느냐?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듣기로는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이 앞부분에서 한 이야기가 뒷부분의 설교 내용에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분리했다고 한다. 그게 이유가 되겠느냐? 이게 바로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이 한 일이다. 그들은 아주 교만하고 독선적이게도 설교 내용 없이 이야기만 골라내서 따로 한 파트로 엮었다. 너희가 보기에 이렇게 하면 효과가 좋겠느냐? 그리고 앞에서 한 이야기가 꼭 뒷부분의 설교 내용과 어울리고 들어맞아야겠느냐? 반드시 그래야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은 왜 그렇게 오해했겠느냐? 그는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겠느냐? 무엇이 문제겠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하신 이야기는 주제에서 벗어났어요. 제가 확인해 보고 하달할 때 따로 내려보낼게요. 앞에서 한 이야기의 내용이 설교의 내용을 교란하지 않게 설교는 설교끼리 따로 연결해 놓을게요. 당신이 속으로 딱히 기준이 없으니 제가 대신 확인해 드려야죠.’ 이건 선의가 아니냐? 그의 이런 선의는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사람의 관념에서 비롯되지 않았겠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설교할 때 그렇게까지 꼼꼼하게 생각해야겠느냐? 매번 꼭 뒷부분의 내용에 어울리는 이야기만 해야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그건 규례이자 관념이다. 그럼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느냐? (관념과 상상에 기대 일을 처리했습니다.) 또 어떤 잘못을 저질렀느냐? (제멋대로 굴었습니다.) 이런 행위의 성질은 다소 제멋대로 구는 것인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일리는 있지만, 이 문제의 본질과는 차이가 있다. 그는 설교를 정리할 때 어떤 마음가짐과 관점으로 하나님이 얘기한 각각의 일을 바라보겠느냐? 이야기든, 설교한 내용이든 그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어떤 관점에서 얘기한 일들을 바라보고 듣겠느냐? (지식과 교육 수준입니다.) 그렇다. 들려준 이야기와 설교 내용을 지식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그는 설교를 하면 어떤 말을 하든 반드시 순서대로 내용을 말해야 하고, 한마디 한마디 다 논리적이고 모든 사람의 관념에 부합해야 하며, 모든 내용이 반드시 엄격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관념으로 평가한다.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모습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지식의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방식으로 내가 얘기하는 내용들을 대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나는 진리를 교제하는 것이지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너는 이 점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너희는 예배 현장에서 설교를 듣고 나서 나중에 그들이 정리한 설교 내용을 다시 들었을 때 예배 당시에 했던 중요한 말이나 일이 삭제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적이 있느냐? 이런 현상이 존재하느냐? 예를 들어, 예배에서 꽤나 감동적이고 도움이 되는 말을 들었는데 나중에 설교 녹음을 들어 보니 그 부분이 삭제되고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있느냐? 자세히 듣지 않았다면 모를 수도 있으니 나중에 한번 자세히 들어 보아라. 나는 녹음을 한 번 들어 보았다. 처음에 내가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을 다루며 열다섯 가지 조항을 나열했는데 각 조항 중간에 했던 세세한 말이나 해석을 그들은 다 지워 버렸다. 그러고는 제1조, 제2조, 제3조 등으로 나열했다. 한 조항씩 얘기할 때는 속도가 유독 빨랐는데, 교사가 수업하는 속도보다도 훨씬 더 빨랐다. 해당 설교를 들어 본 적 없는 보통 사람이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듣는다면 생각할 겨를도 없을 것이다. 자세히 들으려면 잠시 멈춰서 한 문장을 다 듣고 서둘러 기록한 다음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고 이어서 다음 문장을 틀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속도가 너무 빨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설교 녹음을 정리하는 사람이 저지른 심각한 잘못이다. 설교는 대화하고 말하는 것이다. 설교는 어떤 내용을 다루겠느냐? 여러 진리와 사람의 다양한 내적 상태를 다루는데, 모두 진리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그럼 사람은 진리와 관련 있는 이런 내용을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겠느냐, 아니면 생각하고 묵상하며 마음과 머리를 거친 후에야 점차 반응하겠느냐? (생각하고 묵상하며 마음과 머리를 거쳐야 합니다.) 그럼 이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설교하는 사람은 어떤 속도를 유지해야겠느냐? 따발총처럼 말해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교사가 수업하듯 말해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연설하듯 말해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절대 그래선 안 된다. 중간에 질문하고 답하며 생각할 겨를이 있어야 하며, 사람에게 반응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 정도 속도가 적절하다. 그들은 이 원칙도 모르고 설교를 정리했는데,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이 얘기하시는 내용은 전에 들어 봤어요. 저는 한 번 들으면 대체로 다 기억할 수 있고 당신이 하시는 얘기가 뭔지도 알아요. 제 경험과 항상 설교 녹음을 정리하는 탁월한 기술을 통해 이렇게 정리하고 속도를 높였어요.’ 속도를 높인 건 문제될 게 없어 보이지만 설교문이 어떻게 바뀌었느냐? 글로 바뀌었다. 글로 바뀌니 현장에서 들을 때와 느낌이 다르다. 그럼 같은 효과를 이룰 수 있겠느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효과가 더 나아졌겠느냐, 아니면 떨어졌겠느냐? (떨어졌습니다.) 떨어졌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제멋대로 결정하고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어느 정도 교육을 받고 기술도 뛰어난 데다 은사도 있고 머리도 좋다고 생각해 결국 비이성적인 일만 저지른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설교할 때 왜 가끔 너희에게 질문을 하겠느냐? “저희가 졸까 봐 그러시는 거겠죠.”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것이겠느냐? 왜 내가 가끔 외부의 일도 좀 언급하고 주제에서 벗어나 가볍고 유쾌한 일을 얘기하겠느냐? 바로 너희의 긴장을 풀어주고 너희에게 어느 정도 생각할 여지를 주기 위해서이다. 그 밖에도 너희가 글귀, 문자의 표면적인 뜻, 도리, 문장의 문법 같은 것들에 국한되지 않고 어떤 방면의 진리를 좀 더 넓게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가끔 외부의 일도 좀 다루고, 분위기를 위해 농담도 좀 하지만, 사실은 주로 효과를 위해서이다. 그러니 너희는 이런 점을 이해해야 한다.

너희도 알다시피 종교계의 목사가 설교할 때 그는 연단에 서서 사람의 현실 생활, 마음 상태, 문제점과는 전혀 관련 없는 틀에 박힌 주제들만 다룬다. 전부 죽은 글귀와 도리뿐이다. 듣기 좋은 말만 하고 공허한 구호만 외치다 보니 듣는 사람은 재미도 없고, 수확도 없다. 결국 위에서 목사가 떠들어도 아래에서는 모두 외면하는, 상호 작용이 전혀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는 무의미한 설교가 아니겠느냐? 목사는 밥벌이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그렇게 설교하는데, 신도의 필요는 고려하지 않는다. 반면 지금 우리가 하는 설교는, 종교 의식을 치르거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몇 가지 방면에서 효과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성과를 이루려면 여러 방면을 두루 고려해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필요와 관념, 상상, 내적 상태, 관점을 다 고려해야 할 뿐 아니라 계층별 언어 수용 정도 또한 고려해야 한다. 교육을 좀 받고 비교적 글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글말로 쓰인, 비교적 어법에 부합하고 논리적인 말을 듣고 싶어 한다. 그는 그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반면 평범한 사람이나 사회 하류층은 이런 글말을 접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사투리를 좀 써야 한다. 예전에 나는 사투리를 많이 쓰지 않았는데 몇 년 사이 조금 배웠다. 가끔 헐후어(歇后語)를 사용하거나 농담을 할 때도 있다. 그러면 어느 계층의 사람이 들어도 내가 다룬 내용이 이해하기 쉽고 그들과 더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투리만 쓰면 설교 내용의 깊이가 부족한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반드시 글말과 섞어서 일상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할 수 있다. 사투리만 썼다 하면 ‘그러니까’, ‘이게’, ‘그게’ 같은 말이 너무 많이 섞여 진리를 표현하는 수준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글말만 써서 반듯하고 공식적으로 말하고 어법과 논리적 추론에 맞게 차근차근 이야기하면서 조금도 실수하지 않는다면, 글을 읽고 본문을 낭독하듯 초고를 써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다르지 않게 문장 부호조차 그대로 읽는다면, 너희가 보기에 그래도 되겠느냐? 그건 너무 번거롭고, 나는 그럴 에너지가 없다. 이것이 한 가지 이유다. 그 밖에도, 교육을 받았든 안 받았든 모든 사람의 인성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는데 이런 인성의 모습은 현실 생활과도 관련 있다. 현실 생활은 또 일상 언어나 너의 생활 환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생활 환경에서는 이런 종류의 일상생활 언어를 사용하고 나아가 일부 사투리도 섞어 쓴다. 여기에 문학적 수준의 일부 간단한 어휘도 첨가된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고려해야 할 부분은 기본적으로 다 포괄하고 포함하는 것이다. 노인이든 젊은이든, 교육을 못 받은 사람이든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춘 사람이든, 기본적으로 다 접근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으며 무미건조하거나 닿을 수 없다고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제하고 설교할 때 고려해야 할, 각 방면에서의 사람의 필요이다. 설교에서 성과를 이루려면 말하는 속도, 어휘, 표현 방식 등 방면을 다 고려해야 한다. 그 외에 어떤 일에 대한 주장을 표현하거나 어느 한 방면의 진리를 교제할 때 어디까지 말해야 철저하게 말한 것이고 어디까지 말해야 철저하게 말하지 않은 것인지, 어떤 방면들을 보충해야 하는지 모두 고려해야 한다. 이런 것들조차 생각하지 못한다면 생각하는 능력이 심히 부족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평면을 생각하면 너는 입체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남보다 더 전체적으로, 더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하고, 여러 방면의 문제를 모두 똑똑히 알아야 하며, 관련된 진리 원칙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이러면 모든 사람이 생각하거나 표현해 내고 드러내는 모든 방면의 패괴 성품, 그리고 관련 있는 내적 상태는 기본적으로 다 포괄하고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도 이런 자질과 생각을 갖추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것들을 갖추지 않는다면 설교의 대체적인 의미, 중심 생각, 각 단락의 대략적인 의미를 늘 자신이 배웠던 지식에만 기대 정리할 것이다. 이는 마치 중국인이 중국어 교과서를 학습하는 것과 같다. 교사는 우선 학생에게 본문 전체를 예습하고 숙독하게 한 다음 첫 공식 수업에서 첫 번째 단락의 대체적인 내용과 새 단어, 그 안에 등장하는 어법을 가르친다. 너는 모든 단락을 다 배운 뒤 외워야 하고 마지막에는 새로 나온 단어로 문장도 만들어 본 다음 다시 본문의 중심 생각, 작가가 글을 쓴 목적을 학습하여 글이 전하려는 뜻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것들은 모든 사람이 배워서 알지만 설교를 정리하는 데 활용하기에는 너무도 보잘것없다. 내가 알려 주겠다. 글을 쓸 때는 이런 것들을 활용할 수 있다. 이는 글을 쓰는 기본 상식이다. 그러나 설교를 정리하는 데 이런 생각과 이념, 방식을 적용한다면 이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지 않겠느냐?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알지 못하고 이 이야기 속에서 깨달아야 할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건 실수이다. 그 밖에, 너는 이야기와 설교 내용, 이 두 가지 안에 담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자에게 무슨 설교를 정리할 자격이 있겠느냐?

너희는 내가 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으냐?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은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관점을 그 안에 추가하는 것이다. 그는 내가 이야기를 하려면 뒷부분 내용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할 뿐, 내가 왜 이야기를 들려주는지는 알지 못한다. 너희도 모르지 않느냐? 모를 테니 내가 이유를 말해 주겠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을 거의 열 번 정도 다루었지만 전체 내용의 절반밖에 이야기하지 못했다.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다 이야기한다면 이 주제는 꽤 지루해질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매번 시작할 때마다 곧바로 우선 모두에게 지난번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돌이켜보라고 하고, 그런 다음 바로 설교를 시작하면 너희는 서둘러 받아 적을 것이고 적다 보면 눈꺼풀이 감길 것이다. 설교를 마치고 너희에게 정리해 보라고 하면 다들 눈을 비비며 그날 교제한 대체적인 내용을 죽 한 번 훑어보며 읽을 것이다. 다들 내용을 대략적으로 기억한 듯하면 마지막으로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마치도록 하자. 다음번에 이어서 얘기하겠다.”라고 하면 다들 조금 우려할 것이다. ‘예배 때마다 이런 일들만 다루시네. 항상 똑같은 스타일에다 내용이 너무 장황하고 지루해.’ 그 밖에, 진리는 반드시 여러 방면으로 교제해야 하고 사람은 진리의 각 방면에서 동시에 자라야 한다. 사람의 생명 진입과 마찬가지다. 사람은 자신에 대한 인식, 성품 변화, 하나님에 대한 인식, 자신의 각종 내적 상태에 대한 인식, 자신의 인성과 식견 등 여러 부분에서 자라야 한다. 이런 게 모두 동시에 자라야 한다. 이 시기에 늘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을 분별하는 것만 다루면 사람은 다른 측면의 진리는 내버려둔 채 머릿속으로 하루 종일 이런 생각만 할 것이다. ‘누가 적그리스도일까? 혹시 나는 아닐까? 내 주변에 몇 명이나 있을까?’ 이러면 다른 방면의 진리에 진입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나는 어떤 방식을 써야 설교 내용에 진리를 하나 더 추가해서 사람이 진리를 하나 더 깨닫게 할 수 있을지 궁리했는데,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라는 주제를 다루는 기간에 다른 방면의 내용들도 추가로 깨닫게 하기로 했다. 이러면 효과가 더 좋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밥을 먹을 때 사과도 하나 곁들여 먹으면 영양분을 한 가지 더 섭취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 생각에 내가 이야기를 들려줄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당연하다. 필요 없다면 이야기를 뭐 하러 하겠느냐?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가볍고 유쾌한 주제를 다루면 사람이 다른 방면의 진리에서도 어느 정도 소득과 수확을 얻을 수 있으니 이는 좋은 일이다. 가벼운 주제를 다 다루고 나서 다시 본론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안배하는 게 적절하다. 이는 식사 전에 무엇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냐? (애피타이저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바로 애피타이저이다. 보통 애피타이저는 맛도 좋고 식욕도 돋우지 않느냐? 따라서 어떤 방면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너는 이 이야기 속에서 그 방면의 진리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식이나 이해를 심화할 수도 있으니 아주 바람직하다. 물론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이야기를 들어도 표면적인 이야기만 듣고 그 속에 담긴 깨달아야 할 진리는 보지 못한다. 그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예를 들어, ‘다바오와 샤오바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어떤 사람은 다바오는 나쁘고 샤오바오는 멍청하다는 것과 그들의 이름만 기억할 뿐 이야기 속의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패괴 성품을 드러냈는지, 어떤 성품을 드러냈는지, 그 성품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며 진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너는 어떤 상황에서 그런 성품을 드러내느냐? 너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느냐? 만약 “저는 그러지 않아요.”라고 말한다면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니 아주 골치 아픈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일이 발생한다면 저도 그런 말을 하겠죠. 그건 특정한 내적 상태에서 드러내는 특정한 성품이니까요.” 이 사실을 인식했다면 이야기를 들은 보람이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다 듣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바오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죠? 어린아이조차 괴롭히고 속이다니, 정말 이상하네요! 저는 어린아이를 그렇게 속이지 않아요.”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는 말만 그럴싸하게 할 뿐, 여기서 교제하려는 진리는 깨닫지 못하고 자신을 비춰 보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없는 것이다.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에게 발생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어떤 사람은 진리와 관련된 일에는 무조건 불신파의 관점을 드러내고, 진리만 언급하면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어떤 사람들은 치우친 모습을 보이고, 어떤 사람들은 강퍅함을 드러내고, 어떤 사람들은 사악함을 드러내고, 어떤 사람들은 귀찮아한다. 그럼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은 어떤 성품이겠느냐? 최소한 오만방자하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자신이 깨닫지 못해도 구하지 않았다. 그는 묻지도 않고 직접 이야기와 뒷부분의 내용을 분리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제게 이 설교를 정리하라고 맡기셨으니까 제게 이런 결정을 내릴 권한이 있겠지요. 깔끔하게 이야기는 전부 없애 버리겠습니다. 제게 설교를 정리하라고 맡기셨으니 이렇게 처리하겠습니다. 그게 싫으시다면 저를 쓰지 마세요.’ 오만방자하지 않으냐? 그는 진리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며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건 하나도 모른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비이성적인 일,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인 일, 진리 원칙에 위배되는 일만 하며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순종하지 않는다. 내가 설교 녹음을 정리하라고 맡겼는데 그가 개인적으로 어떤 의견이 있고 어떻게 처리하고 싶은지 내게 의논하지도 않았다. 이는 꽤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로 심각한 것이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는 성질입니다.) 그런 성질이 묻어 있다.

나는 이야기를 하나 할 때 어느 한 가지 진리를 구체적으로 얘기한 다음 뒷부분에서 다른 방면의 설교를 하는데,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울리는지 내가 고려하겠느냐? 물론 나도 우선적으로 그 점을 고려하긴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이 두 가지가 반드시 서로 어울리게 하지는 않는 것이냐? 내가 알아차리지 못해서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설교를 정리하는 사람에게는 왜 이 일이 문제가 되었겠느냐? 나는 내가 한 이야기가 뒷부분의 내용과 상관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가 이 일을 알아차릴 수 있겠느냐?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 일을 자세히 고민해 보지도 않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시죠. 들었을 때 진리이면 그만이겠죠. 하지만 그날 들려준 이야기와 나중에 말한 구체적인 내용, 이 두 가지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왜 그렇게 얘기하시는지, 얘기를 다 하시고 나면 어떤 도움이 되는지,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시잖아요. 그러면 안 되죠!’ 우선, 너희가 보기에 내가 무엇을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할지 나는 분명히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나는 분명히 알고 있는 상태이지 절대 흐리멍덩한 상태가 아니다. 마음속에 생각이 분명하다. 사람이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진리를 구할 줄 모르며 아무렇게나 분석하고 분류하면서도 잘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전형적인 바리새인이 아니겠느냐? 대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허한 이론만 듣기 좋아하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설교는 듣기 싫어해서 결국 가장 얕은 진리조차 깨닫지 못한다.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심각하게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은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간이 아주 큰데 무슨 일이든 감히 판단하고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패괴된 인류는 이런 인간들인데, 이것이 바로 성품이다. 겁 없이 함부로 날뛰는 게 좋은 일이겠느냐, 아니면 나쁜 일이겠느냐? (나쁜 일입니다.) 간이 크든 작든 사실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아닌가이다. 앞으로 너희는 설교 녹음을 들을 때 그들이 정리한 설교 내용 중 핵심적인 것이 삭제되지는 않았는지 주의 깊게 분별해 보고 살펴보아라.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자들이 가끔 저지르는 일이 은연중에 교란과 파괴를 불러올 수 있다. 그는 고의가 아니라고 하지만 고의가 아니라고 해서 그 성품이 패괴 성품이 아니겠느냐? 여전히 패괴 성품이다. 이 일은 여기까지 얘기하겠다.

참고

샤오강(小崗)의 꿈

오늘도 먼저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겠다. 너희는 이야기를 듣는 데 관심이 있느냐? 이야기 속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느냐? 이야기 속에서는 사건이 등장하고 사건 속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 사실 이야기 속 등장인물의 일부 내적 상태와 표출, 속셈과 패괴 성품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모두와 관련 있다. 네가 이야기를 알아듣고 그 속에서 이런 것들을 알아낼 수 있다면 이는 네가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제게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럼 저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겠네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그건 별개의 일이다. 영적인 이해력은 있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알아듣는 데서 그칠 뿐 자신을 비춰 보거나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 영적인 이해력도 있고 듣고 나서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앞으로 어떻게 진입하고 변화할지 궁리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면 성과를 이룬 것이다. 그럼 오늘도 이어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이 주제는 다들 듣고 싶어 하는 가벼운 주제이다. 요 며칠 나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많은 사람이 듣고 나서 수확을 얻고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또한 특정 방면의 진리에 대해 더 깊은 인상을 받을 수 있을지, 실제와 대조하고 특정 방면의 진리에 진입하거나 특정 방면의 편차를 바로잡음으로써 이득을 볼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해 봤다. 지난번 들려준 이야기에 제목을 붙이는 걸 깜빡했으니 오늘은 제목을 하나 붙여 주자. 뭐라고 하는 게 좋겠느냐? (‘특별한 선물’이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특별한’은 빼고 그냥 ‘선물’이라고 하자. ‘특별한’이라는 단어가 조금 특이해서 사람들의 관심이 ‘특별한’이라는 단어에 집중될 수도 있다. ‘선물’이라는 단어는 다소 불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럼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좋겠느냐? 오늘 이야기의 제목은 ‘샤오강(小崗)의 꿈’이다. ‘샤오’가 크기가 작다는 뜻이라는 건 다들 알 것이다. 그럼 ‘강’은 무슨 뜻이겠느냐? (자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 제목을 들으면 너희도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고 대략적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샤오강은 열정과 학구열이 넘치는 꽤 부지런하고 똑똑한 젊은이이다. 그는 학구열이 높아서 요즘 비교적 유행하는 컴퓨터 기술을 좀 익혔다. 그래서 하나님 집에서는 당연히 그를 영상팀에 배정해 본분을 이행하게 했다. 영상팀에 막 왔을 때 샤오강은 아주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자신이 젊고 어느 정도 기술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영상 사역을 하는 것이 자신의 강점이자 취미이며, 여기에서 본분을 이행하면 자신의 특기를 발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면서 이 방면의 업무도 더 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여기에서 접하는 사람도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곳의 환경과 자신의 본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바쁘게 사역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이렇게 샤오강은 매일 일찍 일어나 사역을 시작했고, 밤이 깊어서야 휴식을 취할 때도 있었다. 샤오강은 그의 본분을 위해 대가도 많이 지불하고 고생도 꽤 했다. 물론 업무와 관련된 지식도 많이 배웠다. 그는 매일매일이 보람차다고 생각했다. 샤오강은 형제자매와도 자주 교제하고 예배했는데, 여기 온 뒤 고향에서 하나님을 믿을 때보다 성장하고 성숙해졌으며 사역을 하나 맡을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행복하고 흡족했다. 애초에 컴퓨터 기술을 배울 때부터 자신이 언젠가 컴퓨터 관련 일을 하게 되길 바랐는데 드디어 소원을 성취했으니 그는 이 기회를 몹시 소중히 여겼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샤오강의 사역과 자리는 그대로였다. 그는 자신의 자리와 책임, 본분을 굳게 지키며 전보다 더 성숙해진 듯했고 생명 진입 방면에서도 어느 정도 성장했다. 예배에서 자주 형제자매와 교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다 보니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관심도 더욱 깊어졌다. 샤오강의 믿음이 조금씩 깊어졌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자 그에게는 새로운 꿈도 생겼다. ‘컴퓨터 관련 사역을 하면서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은 흘렀지만 샤오강은 계속 같은 본분을 이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영화를 한 편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왜 그랬겠느냐? 그 영화에는 샤오강과 나이가 비슷한 젊은이가 등장했는데 샤오강은 그 젊은이가 영화에서 보여 준 모습과 연기, 언행이 부러웠고 살짝 질투도 났다. 다 보고 나서 그는 마음속으로 시도 때도 없이 상상했다. ‘내가 그 젊은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난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이런저런 영상을 제작하고 업로드하지만 아무리 바쁘고 지치고 고생해도 결국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일 뿐이야. 이런 수고를 누가 알아주겠어? 언젠가 나도 영화 속 그 젊은 사람처럼 스크린에 나와 더 많은 사람에게 나를 보여 주고 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샤오강은 그 영화를, 특히 그 젊은이가 나오는 여러 장면을 반복해서 봤다. 그는 보면 볼수록 부러웠고 마음속으로 배우가 되길 갈망했다. 그렇게 샤오강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다. 새로운 꿈은 무엇이겠느냐? ‘나도 연기를 배워서 언젠가 제대로 된 배우로 스크린에 등장하겠어. 그 젊은 사람처럼 분위기 있게 변해서 더 많은 사람이 나를 부러워하고 동경하게 할 거야.’ 그 후 샤오강은 자신의 꿈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여유가 생기면 샤오강은 인터넷에 접속해 연기와 관련된 각종 자료를 찾아봤고, 다양한 영화나 드라마도 보면서 공부도 하고 자신도 배우가 될 기회가 있을 거라는 환상에 빠졌다. 또 그렇게 하루하루가 흐르는 동안 샤오강은 계속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웠다.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드디어 그도 연기에 어느 정도 내공이 쌓여 모방도 할 줄 알게 됐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연기할 때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가 거듭 요구한 끝에 드디어 기회가 생겼다. 어떤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젊은 배우가 필요했는데 감독은 카메라 테스트를 통해 샤오강의 외모와 분위기, 연기 기본기가 나름 합격점을 줄 만하고 그를 조금만 더 가르치면 주인공 역할을 맡기에 충분할 거라고 판단했다. 소식을 들은 샤오강은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드디어 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됐어. 내 새로운 꿈이 곧 이루어지겠구나!’ 그 후 샤오강은 영화 제작팀으로 조정되어 본분을 이행하게 됐다.

영화 제작팀으로 조정된 샤오강은 새로운 사역 환경에서 신선함과 활력을 느꼈다. 답답하고 단조롭고 제한적이었던 예전과 달리 샤오강은 매일매일 행복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생활하고 사역하면서 매일 접하는 많은 것들이 컴퓨터 사역을 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또 다른 사역 영역, 전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았다. 그렇게 샤오강은 영상 사역에 투입되어 매일 바쁘게 연기하고 대사를 외우며 감독의 연기 지도와 형제자매의 줄거리 분석에 귀를 기울였다. 배역에 몰입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던 샤오강은 반복해서 대사를 외우고 자신의 배역을 사색했으며 어떻게 말하고 연기해야 하는지, 어떻게 걷고 서고 앉아야 하는지 모두 새로 배워야 했다. 이렇게 번잡한 사역이 한동안 지속되고 나서야 샤오강은 배우가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았다. 매일 같은 대사를 외워야 했고, 달달 외웠지만 실제로 연기할 때만 되면 늘 문제가 생겨 다시 찍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말 한마디나 동작 하나 때문에 감독에게 한소리 들을 때도 많았고, 연속으로 몇 번 연기를 제대로 못 하면 책망과 훈계를 받아 체면을 구기면서도 고통을 견뎌야 했다. 심지어 이상한 시선과 비웃음을 받기도 했다. 이런 일을 겪자 샤오강은 살짝 의기소침해졌다. ‘배우가 되어 스크린에 나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에 오지 않는 건데. 하지만 이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됐어. 기왕 왔는데 영화를 다 찍기도 전에 그만두는 건 말도 안 되잖아. 뭐라고 설명할 수도 없고. 이건 내 꿈이니까 반드시 이루어 내야지.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너무 먼 것 같은데 내가 계속 버틸 수 있을까?’ 샤오강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후 샤오강은 매일의 사역과 생활에 간신히 대처해 나갔다. 생활은 갈수록 견디기 힘들어졌지만 그는 그렇게 견디며 억지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앞으로 샤오강의 삶 여기저기에 문제가 생길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사역에 마지못해 대처하기 시작했고, 감독이 어떻게 하라고 하면 그냥 듣고 넘겼다. 나중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전력을 다했지만 할 수 없는 일은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 이때 샤오강은 어떤 상태였겠느냐? 마지못해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감독과 형제자매의 진지한 지도와 도움을 마음속으로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게 내 최선이야. 더 나아질 가능성은 없어. 당신들은 지금 내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거라고. 어쨌든 영화는 찍을 수 있으면 찍고 못 찍으면 마는 거지 뭐. 나야 다시 영상팀으로 돌아가서 본분을 이행하면 되니까.’ 영상팀의 사역을 떠올려 보니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매일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얼마나 안락하고 행복했던가! 자신의 전부, 자신의 세상이 모두 손가락만 까딱하면 되는 키보드 위에 있다. 특수 효과만 한번 적용하면 원하는 걸 다 만들 수 있는 가상 세계는 샤오강에게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그 순간 샤오강은 그의 과거, 영상팀에서 본분을 이행하던 그 시절이 더욱 그리워졌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샤오강은 잠에 들지 못했다. 왜 잠에 들지 못했겠느냐?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배우가 될 만한 재목일까? 그럴 재목이 아니라면 얼른 영상팀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어. 역시 영상팀의 본분이 수월했어. 컴퓨터 앞에 한 번 앉으면 한나절이 금방 지나가고, 식사도 직접 준비할 필요 없었잖아. 본분 이행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고. 키보드만 치면 못하는 게 없었지. 생각할 수 있는 건 뭐든 할 수 있었어. 근데 배우가 된 지금은 매일 대사를 외워야 해. 외우고 또 외워도 촬영할 때는 통과가 안 돼서 감독한테 혼나고 형제자매에게 비난받기 일쑤지. 본분 이행이 너무 힘들어. 역시 영상팀의 사역이 좋아!’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그리움에 사무쳐 한밤중에 잠을 설치며 잠들지 못하다가 새벽녘이 돼서야 너무 졸려서 겨우 잠든다. 샤오강은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자마자 이렇게 생각한다. ‘가, 말아? 영상팀으로 돌아가, 말아? 여기에 남아 있으면 영화를 다 찍고 나서도 합격인지 아닌지 알 수 없고, 그 기간 동안 많이 고생할지도 몰라. 난 배우가 될 재목도 아니잖아! 그때 배우가 되려고 했던 건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결정이었어.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봐봐. 한 걸음 잘못 내디뎠다가 상황이 이 지경이 됐잖아. 이 고통을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이대로라면 좋은 배우가 되는 건 쉽지 않을 테니 일찌감치 그만두자. 괜히 그들의 일을 지체시키지 말고 얼른 감독한테 돌아가겠다고 말해야겠어.’ 그렇게 샤오강은 용기를 내 감독에게 이 일을 말한다. “보세요. 배우가 될 재목도 아닌 저를 굳이 뽑으신 거잖아요. 그냥 저를 영상팀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그러자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그건 안 돼요. 영화를 절반이나 찍었는데 이제 와서 배우를 바꾸면 차질이 생기지 않겠어요?” 그래도 샤오강은 꿋꿋이 말한다. “그럼 어떡해요? 누구로 바꾸시든 그건 감독님의 사정이지 이제 저랑은 상관없어요. 어쨌든 저를 꼭 보내 주셔야 해요. 안 보내 주시면 아무렇게나 연기할 거예요!” 감독은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샤오강을 보고 영화를 찍기는 글렀다고 생각해 결국 그를 돌려보낸다.

샤오강은 결국 영화 제작팀에서 다시 영상팀으로 돌아온다. 과거에 익숙했던 사역 장소로 돌아와 의자와 컴퓨터를 만져 보니 친숙했고 역시 여기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자에 앉아 보니 푹신푹신했고 컴퓨터도 준비되어 있었다. ‘역시 영상 만드는 게 나아. 이 본분은 피곤하지 않거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역하는 것도 그 나름의 장점이 있지. 실수해도 아무도 모르고 지적하는 사람도 없어서 재빨리 수정하면 그만이니까.’ 샤오강은 드디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것의 장점을 발견한다. 이때 그는 어떤 기분이었겠느냐? 그보다 더 마음이 편하고 기쁠 수가 없었다. ‘이게 옳은 선택이야. 하나님이 내게 이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다니 이렇게 영광스러울 수가!’ 그는 자신이 옳은 선택을 했다며 기뻐한다. 그 후 샤오강은 영상팀에서 매일 순서대로 정해진 일을 한다. 그러는 동안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샤오강도 그렇게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느 날 영상을 만들던 샤오강은 갑자기 어느 댄스 프로그램에 나오는 젊은이의 출중하고 유머러스하며 분위기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왜 나는 저 사람처럼 춤을 잘 추지 못할까?’ 그래서 샤오강은 또 마음이 흔들린다. 어떤 생각이 들었겠느냐?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샤오강은 춤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반복해서 그 영상과 그 젊은이의 공연을 보고 어디에 가면 춤을 배울 수 있고 어떻게 배우는지, 가장 기본적인 춤은 무엇인지 수소문한다. 또, 일하면서 컴퓨터로 춤과 관련된 교재와 영상, 학습 자료를 자주 찾아본다. 물론 샤오강은 찾아보는 과정에서 그저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연습하며 배우기도 했다. 춤을 배우기 위해 샤오강은 매일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자신이 할 줄 아는 체조 무용을 기반으로 정식으로 민족춤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상체를 뒤로 굽히기를 했다. 배우는 과정에서 샤오강은 육적인 고통을 많이 견디고 시간도 많이 들였고, 결국 그의 춤 실력은 조금 나아진다. 샤오강은 드디어 자신에게도 무대에 올라 춤출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몸도 좀 유연해졌고 춤 동작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된 데다 모방하고 학습하며 나름 음악에 맞춰 리듬도 탈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샤오강은 교회에 본분 조정을 신청할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또다시 거듭된 요구 끝에 샤오강은 드디어 바라던 대로 무용팀의 무용수가 된다. 그 후 샤오강은 다른 무용수들과 마찬가지로 매일매일 일찍 일어나 아침 훈련과 무대 연습을 했다. 정상적으로 그들과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며 공연을 분석하고 구상하기도 했다. 매일같이 이런 사역을 하는데, 하루가 끝나면 허리가 쑤시고 다리가 아플 정도로 피곤했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이러했다. 처음에는 샤오강도 춤에 호기심이 가득했지만 무용수의 삶이나 이런저런 방면을 익히 알게 된 후 샤오강은 무용도 결국 별거 없고 한 가지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며 때로는 발목이나 허리를 삐는 등 다칠 위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춤을 계속 추던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에휴, 춤추는 일도 쉽지 않네. 매일 땀범벅이 될 정도로 힘들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 영상 사역보다 더 어렵다고! 안 돼, 그래도 포기할 순 없어!’ 그는 이번에는 쉽게 물러서지 않고 드디어 무용 공연의 리허설까지 견뎠고, 공연은 심사를 위해 제출됐다. 심사에 들어가는 날 샤오강은 기분이 어땠겠느냐? 그는 감격에 겨웠고 자신의 노동이 얻을 성과에 기대를 가득 품은 채 점심도 걸렀다. 공을 아주 많이 들이지 않았느냐? 드디어 기다리던 결과가 나왔는데 첫 번째 심사에서 통과하지 못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기분이 곤두박질친 샤오강은 의자에 턱 걸터앉아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춤을 췄는데 당신이 한마디로 그걸 다 부정해 버리신 건가요? 당신이 춤을 아세요? 저희는 원칙대로 춤을 추고 대가도 많이 치렀는데 당신이 그렇게 쉽게 부정해 버리시면 다예요?’ 샤오강은 또 이런 생각을 한다. ‘결정권은 그들의 손에 있으니 그들이 통과시키지 않으면 다시 수정해야지 뭐. 누구한테 하소연을 하겠어? 어쩔 수 없어. 다시 하자.’ 무용 공연이 첫 번째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날, 점심도 거른 샤오강은 마지못해 저녁은 몇 숟갈 들었다. 너희 생각에 그가 밤에 잠에 들 수 있었겠느냐? (그럴 수 없었을 겁니다.) 그는 마음속이 복잡해 또 잠에 들지 못했다. ‘왜 나는 어디를 가나 되는 일이 없지? 하나님도 나를 축복하지 않으시고. 춤을 두 달이나 췄는데 첫 번째 심사를 통과 못 했어. 두 번째 심사는 언제 통과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통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난 언제쯤 무대에 올라 정식으로 공연할 수 있을까? 보아하니 남 앞에 얼굴 내밀기는 글렀네!’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역시 영상 사역이 좋아. 의자에 앉아서 키보드만 한 번 두드리면 꽃이고 풀이고 나무고 다 튀어나오잖아. 새도 지저귀게 하고 말도 달리게 하고, 원하는 건 다 만들 수 있어. 하지만 무용은 심사도 통과해야 하고 매일 땀범벅이 될 만큼 힘들어. 밥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잘 만큼 힘들 때도 있어. 근데 첫 번째 심사도 통과 못 하다니 이 본분도 참 이행하기 쉽지 않네. 다시 영상팀으로 돌아가서 사역하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느꼈다. 그는 생각다 못해 ‘나도 참 못났다. 왜 또 흔들리는 거지? 이런 생각은 그만하고 잠이나 자자!’라는 결론을 내리며 몽롱한 상태로 잠든다. 이튿날 눈을 뜬 그는 그 일은 거의 다 잊고 계속 춤을 추고 리허설을 한다. 두 번째 심사 날이 오자 샤오강은 또 긴장하며 이렇게 묻는다. “통과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걸 누가 알겠어요? 통과하지 못하면 우리의 춤이 아직도 부족하다는 뜻이니 다시 수정해야죠. 언제 통과되면 그때 정식으로 공연하고 영상을 찍게 되죠. 모든 걸 순리에 맡기고 이 일을 바르게 대해야죠.” 그러자 샤오강은 이렇게 말한다. “그럴 수 없어요. 당신들은 바르게 대할 수 있겠지만 저는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요.” 드디어 두 번째 심사 결과가 나왔는데 이번에도 통과하지 못했다. 샤오강은 이렇게 말한다. “쳇, 그럴 줄 알았어요. 춤을 춰서 두각을 나타내는 게 어디 쉽겠냐고요! 우리는 젊고 외모도 출중하고 춤도 잘 추잖아요. 이게 특기 아니겠어요? 심사위원들은 춤을 못 추니까 우리를 질투해서 통과시켜 주시지 않는 거예요. 보아하니 앞으로도 통과 못 할 것 같네요. 춤추는 건 너무 어려워요. 저는 돌아갈래요.” 샤오강은 그날따라 유독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잤다. 왜냐하면 그는 다음날 보따리를 싸서 떠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샤오강은 이번에도 결국 원하는 대로 영상팀으로 돌아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예전의 그 익숙했던 느낌을 회상하며 샤오강은 이렇게 생각했다. ‘난 천성적으로 보이지 않는 데서 일할 재목인가 봐. 이름 없는 영웅밖에 될 수 없는 거지. 이번 생에는 무대나 유명해지는 것과는 연이 없는 것 같아. 착실하게 키보드나 두드리자. 이게 내 본분이니 이 사역이나 하는 거야.’ 그는 고생 끝에 마음이 안정됐다. 그의 두 번째 꿈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물거품이 됐다. 너희가 보기에 ‘부지런하고 학구열이 넘치는’ 데다가 ‘열정적이고 의지가 강한’ 샤오강에게 컴퓨터 앞에 앉아 따분하게 사역하는 일이 쉽게 내키는 일이겠느냐? 아마도 그렇게 내키는 일은 아닐 것이다.

최근 샤오강은 또 노래 부르는 데 빠졌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냐? 다른 것도 아니고 왜 또 무대를 못 떠나는 것이냐?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뭔가가 숨겨져 있다. 이번에 그는 본분을 바꿔 달라고 성급히 요구하지 않고, 매일 자료를 찾고 목소리 쓰는 법과 노래 부르는 법을 연습했다. 목이 쉴 정도로 자주 연습해서 목소리가 아예 안 나올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샤오강은 낙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전략을 바꿨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번에는 실제 상황도 알아보지 않고 본분을 바꾸지는 않을 거야. 꼭 조심해야 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들이 비웃을 테니까. 계속 본분을 바꾸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다들 나를 깔보겠지. 이번에는 내가 봐도 가수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 교회에 있는 가수들과 실력이 엇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계속 연습한 다음 찬양팀에 지원할 거야.” 그는 매일같이 공들여 연습한다. 여유가 있을 때도, 사역을 할 때도 귀찮아하지 않고 연습한다. 어느 날 샤오강이 사역을 하고 있는데 팀장이 갑자기 샤오강에게 이렇게 말한다. “샤오강, 이걸 일이라고 한 건가요? 계속 이렇게 건성으로 대충 하면 이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 그러자 샤오강은 “제가 언제요.”라고 답한다. 곧이어 사람들이 달려들어 이렇게 말한다. “샤오강, 무슨 일이에요? 아니, 이렇게 큰 잘못을 저지르다니! 상부에서 그렇게 많이 바로잡아 주셨는데 어떻게 또 이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죠? 매일 노래 연습하느라 영상 만드는 데 집중을 못하니까 실수만 저지르고 큰일을 그르치잖아요. 또 이렇게 실수하면 교회에서 당신을 출교시켜 버릴 거예요. 더 이상 당신을 원하지 않고 우리도 당신을 버릴 거라고요!” 샤오강은 변명을 이어갔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앞으로 조심할 테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출교시키지 말아 주세요. 부탁이에요. 출교만은 안 돼요! 하나님, 살려 주세요!” 그가 소리치는 와중에 커다란 손이 뒤에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샤오강, 정신 차려요! 샤오강, 정신 차리라고요!”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꿈을 꾼 것입니다.) 꿈을 꾼 것이다. 샤오강이 눈을 감은 채 비몽사몽간에 허공에서 손을 허우적거리자 다들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샤오강은 키보드 위에 엎드려 잠든 것이었다. 한 형제가 또 그를 툭툭 치고 몇 번 흔들자 샤오강은 드디어 깨어났다. 깨어난 그는 “아이고, 깜짝이야. 하마터면 출교당할 뻔했네.”라고 말했다. “무슨 일 때문에요?”라는 질문에 샤오강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실제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라 꿈일 뿐이었다. 꿈 때문에 놀라 깬 것이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게 바로 ‘샤오강의 꿈’이다.

이 이야기는 어떤 문제를 다루었느냐? 꿈과 현실은 자주 충돌한다. 많은 경우 사람은 자신의 꿈은 아주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꿈과 현실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꿈은 그저 너의 일방적인 소망이자 한순간의 흥미일 뿐이다. 사람의 기호와 야심, 욕망이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가 되다 보니 사람의 꿈은 현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을 때가 많다. 꿈이 너무 많으면 보통 어떤 잘못을 저지르겠느냐? 자신의 눈앞에 놓인 해야 할 사역이나 현실을 소홀히 하고, 지금 자신이 이행해야 할 본분, 제대로 해야 할 사역, 다해야 할 의무와 책임은 밀쳐놓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저 자신의 꿈을 좇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주하게 노력하며 무의미한 일을 많이 저지른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교회 사역을 그르치고 교란한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추구하지도 않는 사람이 아주 많은데, 그들은 본분 이행을 무엇으로 여기겠느냐? 일종의 일이나 취미, 흥미에 몰입하는 것으로 여길 뿐, 하나님이 맡긴 임무나 사명, 자신이 다해야 할 책임으로는 여기지 않으며, 더욱이 본분 이행 과정에서 진리나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본분을 잘 이행해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본분 이행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조금만 고생해도 싫어하고 도피하려 하고, 어려움에 조금 부닥치거나 좌절을 조금 겪으면 중도에 포기하고 또 도피하려 한다. 그는 진리를 구하지 않고, 무슨 일만 생기면 등딱지 안으로 숨었다가 별일 없으면 다시 나오는 거북이처럼 그저 도피할 생각만 한다. 이런 사람이 적지 않다. 특히 사역을 하나 책임지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충성을 다할 수 있을지, 어떻게 그 본분을 잘 이행하고 그 사역을 잘 할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고, 어떻게 해야 책임을 전가할 수 있을지, 책망받거나 책임지지 않을지, 문제가 생기거나 실수했을 때 빠져나올 수 있을지만 궁리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우선적으로 자신의 퇴로와 자신의 기호나 흥미를 충족시키는 것만 고려하지 어떻게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충성을 다할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그는 진리에 공을 들이지 않고 본분을 이행할 때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그는 오늘은 이걸, 내일은 또 저걸 하려 하고 누구의 본분이든 다 자신의 본분보다는 좋고 수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진리에 공을 들이지 않고 자신의 이런 생각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도 고민하지 않으며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는다. 마음속으로 늘 자신의 꿈이 언제 이루어질지, 누가 남의 주목을 받는지, 누가 상부의 눈에 드는지, 누가 사역할 때 책망도 받지 않고 진급하는지만 신경 쓴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런 것들만 가득하다. 너희가 보기에 늘 이런 일들만 생각하는 사람이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영영 그럴 수 없다. 그럼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어떤 부류에 속하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우선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집에서도 사회에서 살 때처럼 복을 누리고 유명해지고 체면을 세우는 것만 추구한다. 이런 사람은 본질을 놓고 보면 어떤 부류에 속하겠느냐? 바로 불신파이다. 불신파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도 사회에서 일할 때와 마찬가지로 누가 발탁되는지, 누가 팀장이 되는지, 누가 교회 리더가 되는지, 누가 사역할 때 남들 눈에 들고 우러름을 받으며 지명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는 이런 것들만 중시한다. 회사에서 누가 승진하는지, 누가 월급이 오르는지, 누가 상사의 눈에 드는지, 누가 상사와 친하게 지내는지 신경 쓰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 집에서도 이런 것들을 추구하고 하루 종일 이런 것들만 신경 쓴다면 이는 이방인과 다름없는 것 아니겠느냐? 본질적으로 이방인이며 전형적인 불신파이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그는 힘만 쓰고 대충 이행하며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실행하지도 않는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어도 조금의 변화도 없고 본분을 몇 년 이행하든 자신의 충성을 다하지도 못한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도, 충성심도 없는 불신파이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교회에서 그에게 사역을 하나 맡기면 그는 우선 그 사역을 할 때 책임을 져야 하는지 따져 보고 책임을 져야 한다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본분을 이행하는 조건은 첫째, 한가해야 하고, 둘째, 바쁘거나 피곤하지 않아야 하며, 셋째, 무엇을 하든 책임지지 않아야 한다. 그는 이런 본분만 받아들인다.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약삭빠르고 간사한 사람이 아니겠느냐? 책임은 조금도 지려 하지 않고 떨어지는 나뭇잎에도 머리가 깨질까 두려워하는 이런 사람이 무슨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무슨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집의 사역은 모두 사탄과 싸우는 일, 하나님나라의 복음 확장과 관련 있는데 책임이 따르지 않는 본분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보기에 리더를 맡으면 책임이 없겠느냐? 그의 책임이 더 크지 않겠느냐? 그는 더 많은 책임을 짊어져야 하지 않겠느냐? 사실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하거나 영상을 만드는 등 어떤 사역을 하든 진리 원칙과 관련된 일이라면 다 책임이 있다. 본분 이행에 원칙이 없다면 하나님 집 사역에 영향을 끼칠 것이고 책임지는 걸 두려워한다면 아무 본분도 이행하지 못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과연 간이 작은 것일까, 아니면 성품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이 일에 대해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 이것은 간이 작은 문제가 아니다. 자기를 위해 돈을 벌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일을 할 때, 그는 어찌 그렇게 간이 크단 말이냐?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나 하나님 집을 위해 일할 때는 눈곱만큼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사람은 이기적이고 비열하다. 가장 간교한 사람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 책임지지 않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 대해 진심이 전혀 없고, 충성심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책임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과감하게 중임을 맡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는 하나님 집 사역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앞에 나서서 용감히 나아가는 사람이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핵심적인 사역을 보면 용감하게 막중한 책임을 짊어질 줄 알고, 고생과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정예병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냐? 아니다. 그것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는 정의감도 책임감도 없는, 이기적이고 비열한 자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고, 진리를 전혀 안 받아들이는 자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는 구원받을 수 없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얻으려면 수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또 진리를 실행할 때는 숱한 장애물에 가로막힐 수 있으므로 반드시 어느 정도 버리고, 육적인 이익을 포기하며, 얼마간 고통을 견뎌야 한다. 그래야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절대 실행할 수 없다. 그러니 진리를 얻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두렵고,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이 두렵고, 모욕을 당하고 비방과 판단을 받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감히 진리를 실행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아무리 오랜 시간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께 구원받지 못한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교회 사역에 부담이 있는 사람, 책임감이 있는 사람, 진리 원칙을 견지할 수 있는 사람, 고생하며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몇 가지를 갖추지 않은 자는 본분 이행에 적합하지 않다. 그런 자는 본분 이행의 조건을 갖추지 않은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책임지기를 두려워한다.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나타내는 모습은 주로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언제나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본분을 선택한다. 교회 리더가 본분을 이행하도록 안배하면, 그는 먼저 그 본분을 이행할 때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물어본다. 만약 책임을 져야 한다면 받아들이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고 책임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면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또 힘든 일은 아닌지,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은 아닌지 본다. 마지못해 받아들인다고 해도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 않고 대충 건성으로 넘기려 든다. 한가하고 고생하지 않으며 육적으로 힘들지 않은 것을 원칙으로 삼는 것이다. 둘째, 어려움에 부닥치거나 문제에 직면했을 때 먼저 리더에게 보고해서 처리하고 해결하게 하며 자신은 편안하게 있으려고 한다. 리더가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는지 관심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책임만 지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이런 식의 본분 이행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겠느냐? 이는 책임 전가이자 직무 태만이며, 농간을 부리는 것이고, 입만 살아 있고 실제적인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속으로 ‘내가 그 일을 했다가 마지막에 실수라도 하면 어떡해? 책임을 추궁하면 내가 처리되지 않겠어? 내가 첫 번째 책임자 아니겠냐고.’라고 한다. 바로 이 점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럼 너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감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냐?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가짐이 올바르다면, 경험이 없고 그와 비슷한 일을 처리해 본 적도 없지만 최선을 다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알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감찰하고 사람의 마음을 감찰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것조차 믿지 못한다면 이는 불신파 아니겠느냐? 그런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런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든 안 하든 상관이 없다. 그렇지 않으냐? 책임지는 것이 두려워 책임을 미룬다. 무슨 일이 닥치든 우선 직접 문제를 처리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리더에게 전화를 걸어 통보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리더에게 통보하는 한편 직접 문제를 처리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리더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며, 전화를 한 후에는 수동적으로 지시를 기다린다. 리더가 지시하는 것만큼만 움직이고, 리더가 말하는 만큼만 행동하는 것이다. 리더가 말하거나 지시하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고 미루다가 꼭 누가 재촉하고 감독해야 일을 한다.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겠느냐? 힘을 쓴다고 해도 충성심이 없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모습이 더 있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표면적인 일, 단순한 일, 책임지지 않는 일만 한다는 것이다. 어려움이 있고 책임져야 하는 일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미룬다. 또 문제라도 생기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책임을 남에게 미룬다. 교회 리더가 책임을 지지 않는 그를 보고는 인내심 있게 도와주고 책망하고 훈계하며 책임감을 가지라고 해도 그는 여전히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이 본분은 제대로 이행하기가 쉽지 않아. 문제라도 생기면 책임을 져야겠지. 여차하면 제명되거나 도태될 수도 있어. 그럼 끝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태도겠느냐?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 일말의 책임감도 없다면 어떻게 그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며,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면 일을 그르칠 뿐이다. 이런 사람은 믿을 수 없고 일을 맡길 수도 없다. 그는 순전히 공밥 먹기 위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이런 ‘거지’는 내쳐야 하지 않겠느냐? 반드시 내쳐야 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이런 사람을 원치 않는다. 이것이 바로 본분을 이행할 때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보이는 세 가지 모습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모두 충성스럽게 힘쓰는 자에도 미치지 못하고 본분을 이행할 자격도 없다. 어떤 사람은 바로 본분을 이행하는 이런 태도 때문에 도태된 것이다. 그들은 아마 지금까지도 이유를 몰라 이렇게 불평할 것이다. “이렇게 열정적인 마음으로 본분을 이행하러 간 저를 왜 그렇게 냉정하게 내보내시죠?” 그들은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왜 도태됐는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평생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변명만 하며 끊임없이 궤변을 늘어놓고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이 자신을 보호하는 건 본능이고 당연한 거야. 자신을 조금도 보호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자기를 조금도 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누구나 스스로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 놓지 않나?’ 일이 닥치면 늘 스스로를 지키고, 여지를 남기거나 자신을 위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는데, 이것이 진리 실행이겠느냐? 이는 진리 실행이 아니라 농간을 부리는 것이다. 지금 너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 본분 이행의 첫 번째 원칙은 무엇이냐? 바로 마음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해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리 원칙, 네가 실행해야 할 원칙이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 여지를 남기는 것은 이방인들의 실행 원칙이요, 최고의 철학이다. 어떤 일이든 먼저 스스로를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을 1순위에 두는 것,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이니, 남들의 이익이니 하는 것은 전부 자신과는 무관하게 보는 것, 자신의 이익을 가장 먼저 고려하고, 그다음으로 퇴로를 생각하는 것, 이런 자는 이방인 아니겠느냐? 이런 자가 바로 이방인이다. 이런 부류는 본분을 이행할 자격이 없다. 또 다른 전형적인 예는 이야기 속의 샤오강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든 본분을 지키지 않고 수고를 덜려 하며, 고생이나 좌절은 조금도 겪지 않으려 한다. 육적으로 편안해야 하고, 제때 밥 먹고 잠을 잘 수 있어야 하고, 바람을 맞거나 햇볕에 노출되지 말아야 한다. 그 밖에, 사역할 때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자신이 하기 좋아하고 잘하며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일이어야 한다. 기꺼이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면 눈곱만큼도 순종하지 않고, 변덕스럽게 굴고 딴마음을 품으며 무엇을 하든 정성을 다하지 않고 여지를 둔다. 고생하면 바로 뒷걸음질치려 할 뿐 아니라 책망받는 것, 조금이라도 높은 요구를 받는 것, 조금이라도 고생하는 것은 다 받아들이지 못한다. 무슨 일을 하든 흥미와 자신의 계획대로 하며 조금도 순종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구하고 자신을 반성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이런 행동 방식과 패괴 성품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할 때는 최소한 어느 정도 진심은 있어야 한다. 너희가 보기에 이런 사람들에게 진심이 있겠느냐? 실제로 행동해야 할 때 그들은 뒷걸음질치고 진심이 조금도 없다. 이러면 아주 골치 아프고 다루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이 꽤 위대하다고 생각해서 교체되거나 책망받으면 상당히 억울해한다. 사람이 진리를 구하지 않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도 않으면 이렇게나 골치 아프다. 이 주제는 여기까지 다루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하는 적그리스도를 해부하다

오늘은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 중 제8조인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를 교제하겠다. 너희는 이 조항을 듣고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 우선 자신이 이해한 것을 이 조항의 어떤 모습에 비춰 볼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는 조항의 문자적인 의미는 이해하기 쉽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내적 상태, 여러 부류의 사람이 드러내는 갖가지 성품, 또는 갖가지 성품이 드러내는 다양한 행위가 담겨 있다. 이는 큰 주제이기 때문에 일부 작은 측면에서부터 교제를 시작해야 한다. 문자적인 의미대로 이 조항을 해석한다면 글귀와 도리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한다. “그건 바로 무엇이든 그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거예요. 그가 하는 말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가 글귀와 도리를 말하거나 한마디라도 말할 때 무조건 따르라는 거죠. 그는 늘 남에게 명령하고 사역을 배정하며 자신을 따르도록 강요해요.” 문자적인 의미만 좀 다룬다면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겠느냐? 또 어떻게 이야기하겠느냐? “그는 자신이 항상 옳다고 생각합니다. 남에게 자신의 말에 따르라고 하고, 그가 하는 말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순종하도록 하죠. 그는 자신을 진리이자 하나님으로 여겨서 남들이 그를 따르는 것이 진리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의미예요.” 너희가 이 주제를 다룬다면 어떻게 이야기할지 한번 생각해 보아라. 너희가 보거나 직접 겪은 일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먼저 어느 측면에서부터 이야기하겠느냐? 실제에 대해 얘기하니 다들 말이 없어지는구나. 그럼 너희는 평소에 형제자매와 교제할 때도 말이 없느냐? 말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역을 잘할 수 있겠느냐? 우선 이런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과 행위로 나타나는지 한번 말해 보아라. 너희가 예전에 보거나 겪은 것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생각나는 게 있느냐? (저는 본분을 이행할 때 강렬하게 드는 생각을 갖게 되면 정말로 그 생각대로 하고 싶습니다. 그 생각이 훌륭하고 옳다고 생각해서 남이 의문을 제기해도 서둘러 정해야 하는 미룰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그대로 강행합니다. 설사 남이 구하려고 해도 시간을 주려 하지 않고, 그저 남이 제 생각대로 행동하길 원합니다.) 그것도 구체적인 모습 중 하나다. 또 누가 말해 보아라. (한번은 제가 어떤 사람을 발탁하고 양성하는 일을 형제자매와 교제했는데, 사실 저는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발탁할 결심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저는 이미 상부에도 구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발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일부 형제자매는 그 일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왜 그 사람을 발탁하려는 것인지, 무슨 원칙과 진리에 따른 것인지 교제하지 않고 그저 그 사람이 아주 훌륭하고 그 사람을 발탁하는 것이 원칙에 부합한다고 형제자매에게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강제로 사람들이 제게 순종하게 하고는 제가 하는 일이 옳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너희가 이야기한 것은 같은 유형의 문제나 내적 상태인데, 기본적으로 이 조항에 부합한다. 하지만 보아하니 너희는 진리의 문자적인 의미만 깨달은 것 같으니 아무래도 내가 교제를 해야겠다. 너희가 웬만큼 이해했으면 이 조항은 넘어가고 이어서 다음 조항을 교제하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그냥 넘어가지 말고 계속 교제해야겠다.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 중 제8조인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에는 적그리스도의 본질적인 모습이 몇 가지 포함돼 있다. 그건 한 가지 일, 한마디 말, 한 가지 관점, 또는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성품이다. 그럼 그 성품은 무엇이겠느냐? 몇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한다. 이게 행동 방식이겠느냐? (아닙니다. 성품입니다.) 그렇다. 이는 성품의 표출이며, 그 성품의 본질은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이다. 이런 사람은 그 누구와도 협력하지 못한다. 이게 첫 번째 조항이다. 두 번째, 늘 사람을 통제하고 정복하려는 욕망과 야심을 지닌다. 이 또한 성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행동 방식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너희가 말한 것들과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너희가 말한 건 일이나 행동 방식이다. 그건 본질이 아니다. 두 번째 조항은 너희가 말한 것들보다 더 심각하지 않으냐? (심각합니다.) 두 번째 조항은 근본적인 원인을 짚었다. 세 번째, 어떤 일을 인계받든 다른 이가 사역에 개입하고 관여하고 감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본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각 본질 속에는 다양한 모습과 행동 방식이 있다. 이 본질 역시 제8조의 주제에 부합하지 않느냐? 네 번째, 얼마간의 경험과 지식, 교훈을 갖췄다고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한다. 즉, 진리를 좀 교제할 줄 알면 자신이 진리 실제를 갖추었다고 생각하고, 남들이 그를 진리를 갖춘 사람이자 진리를 실행하고 사랑하며 진리 실제를 갖춘 사람으로 바라보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가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하는 이 일의 성질은 심각하지 않으냐? (심각합니다.) 이 조항은 제8조의 큰 주제에 부합하느냐? (부합합니다.) 부합한다. 제8조에는 기본적으로 이렇게 네 가지 조항이 있다. 첫 번째 조항부터 읽어 보아라. (첫 번째,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한다.) 조화롭다는 것은 협력할 줄 안다는 뜻인데, 이런 사람은 아예 그 누구와도 협력하지 못하고 혼자서 일을 처리하며 독단적으로 행동한다. 첫 번째 조항의 특징은 바로 ‘독단’이다. 두 번째 조항. (늘 사람을 통제하고 정복하려는 야심과 욕망을 지닌다.) 이는 심각하지 않으냐? (심각합니다.) 그럼 두 번째 조항의 특징은 무엇이겠느냐? 한 단어로 표현해 보아라. (‘사악하다’입니다.) ‘사악하다’는 형용사로, 그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니 ‘통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통제는 일종의 행동, 바로 이런 성품에서 생겨난 그런 유형의 행동이다. 세 번째 조항. (어떤 일을 인계받든 다른 이가 사역에 개입하고 관여하고 감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적그리스도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성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적그리스도만의 특징적인 성품이다. 이 조항을 요약하기에 적절한 단어가 있겠느냐? ‘대항’이라는 단어가 있다. 누가 오든 저항하고, 형제자매나 보통 사람의 감독과 질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감찰조차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대항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 번째. (얼마간의 경험과 지식, 교훈을 갖췄다고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한다.) 이 조항을 적절한 단어로 요약해 보자면, ‘사칭’이라고 할 수 있다. 사칭하는 것은 외식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 제8조의 큰 주제와 관련된 적그리스도의 네 가지 기본적, 특징적인 모습과 행동 방식, 성품이 모두 이 네 가지 조항에 담겨 있다. 첫 번째 조항의 특징은 ‘독단’이다. 그는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하고 그저 혼자서 일을 처리하려 한다. 그 누구의 말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한다. 모두가 그의 말만 따르고 남의 말은 따르지 못하게 하며,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두 번째 조항의 특징은 ‘통제’이다. 남을 통제하려 하며, 여러 방식으로 너, 너의 생각, 행동 방식, 마음, 관점을 통제할 것이다. 그는 너에게 진리를 교제해 주지 않고, 네가 진리 원칙이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지 않는다. 그는 네가 오직 그를 위해 쓰이고 말하고 행동하고 힘쓰며 그를 높이고 증거하도록 통제하려 한다. 너를 통제해 그의 노예나 꼭두각시로 만들려 한다. 세 번째 조항의 특징은 ‘대항’이다. 이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 것으로, 그의 사역이나 주장을 분별하고 감독하고,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예외 없이 저항하고 반발하는 것이다. 네 번째 조항의 특징은 ‘사칭’이다. 무엇을 사칭하는 것이냐? 진리의 화신으로 사칭하는 것이다. 바로 그는 자신이 한 말이나 행동을 남에게 기억하게 하고 한술 더 떠서 노트에 받아 적게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머리로 기억하면 다예요? 노트에 받아 적어야죠. 다들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잖아요. 아주 심오한 말이라고요!” 그는 자신의 말을 무엇으로 여긴 것이겠느냐? 진리로 여긴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하나하나 교제해 보자.

1.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하는 적그리스도를 해부하다

첫 번째,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한다. 이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하는 적그리스도의 첫 번째 모습이다.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한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성격이 맞든 맞지 않든, 상황이 어떻든 협력하지 못하는데, 이는 일반적인 패괴 표출 문제가 아니라 본성의 문제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는 어떤 사람들과는 성격이 안 맞아서 협력하지 못해요.” 이는 단순히 성격 문제가 아니라 패괴 성품의 문제이다.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있다는 뜻이지만 적그리스도의 본질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진리를 구할 수 있고, 진리에 부합하기만 하면 누가 한 말에든 순종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과 조화롭게 협력하는 게 쉽지 않겠느냐? (쉽습니다.) 진리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쉽게 협력하고, 진리에 순종할 수 없는 사람은 누구와도 협력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몹시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사람과도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그는 적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것이며, 진리에도, 하나님에게도 순종하지 못한다. 사람은 패괴 성품이 있는데,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구원받기 쉽다. 반면 적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는데 진리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골치 아파진다. 구원받기 쉽지 않은 것이다. 수많은 적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주된 원인은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하고 늘 독단적이기 때문인데, 이는 패괴 성품의 표출이겠느냐, 아니면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겠느냐?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 문제겠느냐? 이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겠느냐? 첫 번째 조항을 명확히 교제한다면,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하고 누구와 협력하든 갈라서게 되며 심지어 원수지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떤 적그리스도들은 겉으로 볼 때 주변에 조력자와 파트너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일이 닥칠 경우, 그는 다른 이의 말이 아무리 옳아도 듣지도 않는다. 심지어 아예 참고하지도 않고 그 일에 관해 교제하거나 토론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고, 다른 이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그저 보여 주기식으로 형식적으로만 남이 말하는 것을 들을 뿐, 마지막에 결정을 내릴 때는 여전히 그가 결정권을 갖는다. 다른 이가 말해 봤자 아무 의미도, 소용도 없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어떤 일을 책임지고 하는데 그중 한 사람에게 적그리스도의 본질이 있다고 해 보자. 그는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무슨 일이든 자기 혼자서 시작하고, 물어보고, 처리하고, 해결할 뿐, 대부분의 경우 파트너에게 전혀 알려 주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자신의 파트너는 어떤 존재냐? 조수가 아니라 그저 장식품일 뿐이다. 적그리스도의 눈에는 그의 파트너가 전혀 없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는 생각해 보고 실행 가능하다 싶으면 모두에게 그렇게 하라고 통지한다. 다른 사람에겐 이 문제에 대해 물어볼 권리가 없다. 그가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것의 본질은 무엇이냐? 사실 한 사람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고, 어떤 문제가 생기든 다른 사람과 상의하지 않고 혼자 사역을 책임진다. 그의 파트너는 장식품이 되어 버린다. 그는 일할 때 늘 독단적으로 행동하며 누구와도 협력하지 않는다. 그는 사역할 때 누구와도 소통하거나 교류하지 않는다. 항상 혼자 결정하고, 문제가 생겨도 혼자 처리한다. 많은 경우, 다른 사람은 그가 일을 다 끝내고 처리한 후에야 그 일에 대해 알게 된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일이 생기면 우리와도 교제해야죠. 그 사람은 언제 처리한 거예요? 어떻게 처리한 거죠? 우린 왜 몰랐던 거죠?” 그는 설명해 주지도, 상대하지도 않는다. 그의 파트너는 그에게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이다. 그저 액세서리, 장식품에 불과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는 궁리해 본 후 결정을 내리고는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의 곁에 사람이 몇이 있든 마치 아무도 없는 양 다른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한다. 이런 식이면 다른 사람과 협력할 때 그에게 실제적인 면이 있을 수 있겠느냐? 없다. 그저 형식적이고, 이름만 걸어 놓았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이런 일이 생겼는데 왜 모두와 교제하지 않는 거죠?”라고 말하면 그는 “사람들이 뭘 알아요? 난 팀장이에요. 내가 결정하면 그만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또 “그럼 왜 당신 파트너와 교제하지 않은 거예요?”라고 말하면 “얘기해 봤어요. 별 의견이 없더군요.”라고 대답한다. 그는 상대가 ‘별 의견이 없다’, ‘주관이 없다’라는 이유로 자신의 이런 독단적인 행위를 덮어 버리곤 전혀 반성하지 않는데, 이런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건 더 불가능하다.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본성 문제다.

‘협력하다’라는 단어는 어떻게 해석하고 실행해야 하겠느냐? (일이 생기면 함께 상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것은 실행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또 있느냐?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며 서로 감독하는 것입니다.) 매우 적절하다. 그렇게 실행하는 것이 바로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이다. 더 있느냐? 일이 닥쳤을 때 상대방의 의견을 구하는 것도 협력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너대로 교제하고 나는 나대로 교제한 다음 결국에는 내 말을 따른다면, 그런 형식은 갖추어서 무엇 하겠느냐? 그것은 협력하는 게 아니고 원칙에 부합하지도 않으며 협력하는 성과도 거둘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너만 따발총처럼 끊임없이 말하거나 자신의 생각만 다 말해 놓고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는다면, 그것이 상의하고 교제하는 것이겠느냐? 그건 형식만 갖추는 것이지 협력하는 게 아니다. 그럼 협력이란 무엇이겠느냐? 그건 바로 네가 너의 생각과 결정을 말하고 난 뒤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관점을 구하고, 그런 다음 다시 두 사람의 주장이나 관점을 꺼내 비교해 보면서 여러 사람이 함께 분별하고 원칙을 구하고 공감대를 형성해 정확한 실행 길을 확정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상의하고 교제하는 것이자 협력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리더를 맡으면서 일을 간파하지 못하고 방법을 찾지 못하면 그제서야 남들과 상의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은 제가 독단으로 결정할 수 없어요. 여러분과 조화롭게 협력해야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의해 보고 정할 테니 여러분도 의견을 내 보세요.”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고 나서 그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도 저랑 생각이 같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안 그래도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상의해 보니 우리 생각이 똑같다는 게 확실해졌네요.” 이 말이 진심이겠느냐? 이 말에는 거짓이 섞여 있다. 그는 그 일을 전혀 간파하지 못했다. 그의 이 말에서는 우러름을 받기 위해 남들을 현혹하고 기만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가 사람들의 의견을 구하는 것은 그저 형식을 갖추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그는 독단적이지 않거나 권력을 독점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꼬리표를 떼기 위해 이런 방식으로 사실을 감추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말할 때 그는 전혀 듣지도, 신경 쓰지도 않으며 진심으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사람들에게 교제하고 토론하게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뜻에 맞는 방법을 찾기 위해 사람들에게 말하라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확정하고 나면 그는 자신의 뜻이 옳든 말든 남에게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사람들이 그의 방식이 옳고 모두의 뜻과 같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결국 강제로 실행한다. 이것이 협력하는 것이겠느냐? 이는 협력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겠느냐? 이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옳든 그르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려는 것이다. 그 밖에, 그는 일이 닥쳤을 때 간파하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먼저 말하게 하고, 다 듣고 나서 사람들의 관점을 정리한 다음 자신의 마음에 들고 적절해 보이는 방법을 찾아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한다. 이는 협력의 기치를 내건 것인데, 그 결과는 여전히 그 자신의 뜻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그 혼자 결정권을 갖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그가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사람들이 하는 말에서 트집을 잡고 평가하고 방향을 잡은 다음, 완전하고 정확한 주장으로 정리해서 결단을 내린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들의 의견도 듣고 사람들에게 말하게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결국에는 그 혼자서 결정을 내린다. 사실 그 결정은 사람들의 견해나 관점인데 단지 그가 정리해서 좀 더 완전하고 정확하게 말한 것일 뿐이다. 이런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가 이렇게 일을 처리하는 것은 어떤 성질이겠느냐? 너무도 교활하지 않으냐? 남들이 자신을 숭배하고 자신에게 순종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의 의견을 정리해서 제 의견인 양 말하면서 결국에는 전부 자신의 의견대로 하게 한다면 이것이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이겠느냐? 이는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독단적인 것으로,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과 협력하는 것은 매우 솔직하지 못한 것이자 너무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으로,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알아챌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제가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저도 파트너가 있어요. 파트너는 저와 아주 잘 협력한다고요. 제가 어디를 가든 따라오고 무얼 하든 따라 하죠. 가라는 데로 가고요.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든 다 시키는 대로 한다니까요.” 이게 파트너겠느냐? 이는 파트너가 아니라 졸개이다. 졸개는 무엇이든 네가 시키는 대로 하는데 이게 파트너겠느냐? 이는 노예임이 분명하다. 생각도, 관점도 없고 주관은 더더욱 없는 데다가 무골호인 성향까지 있다. 무슨 일을 하든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건성으로 형식만 갖추면서 하나님 집의 이익은 지키지도 않는다. 이런 파트너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누구와 협력하든 절대 복종하며, 노예처럼 말하는 대로 따르고 하라는 대로 한다. 이것은 협력이 아니다. 협력이란 무엇이겠느냐? 일이 생기면 상의하고 관점이나 견해를 밝히며 서로 보완하고 감독하는 것, 그리고 서로 구하고 의논하고 일러 주는 것이야말로 조화로운 협력이다. 예를 들어, 네가 자기 생각대로 일을 처리했을 때 어떤 사람이 “이 일은 잘못 처리했어요. 철저히 원칙을 위배했다고요. 왜 진리를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처리했죠?”라고 말하는 걸 듣고 네가 “그러게요. 당신이 일깨워 줘서 다행이에요. 일깨워 주지 않았다면 큰 화를 부를 뻔했어요!”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서로 일러 주는 것이다. 그럼 상호 감독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모두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고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며 자신의 지위와 체면만 지키고 하나님 집의 이익은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 모두가 이런 내적 상태를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문제점을 발견하면 너는 그와 적극적으로 교제하며 원칙대로 본분을 이행하라고 그에게 일깨워 주면서 스스로도 경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상호 감독이다. 상호 감독하면 무슨 작용을 하겠느냐?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는 동시에 사람이 길에 잘못 들지 않게 할 수 있다. 협력의 작용은 서로 일러 주고 감독하는 것 외에 서로 의견을 묻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누구를 처리하려고 할 때는 너의 파트너와 이렇게 교제하고 의논해야 한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 확신이 서지 않아요!” 그러면 그는 “저는 이런 문제를 처리해 본 적 있어요. 당시 상황이 이 사람의 상황과는 조금 달라서 그때처럼 처리하면 약간 규례를 지키는 격이 되겠어요. 저도 이번에는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할 것이다. “제 생각이 괜찮은지 한번 들어 보실래요? 이 사람은 됨됨이만 놓고 보면 악인인 것 같지만 당분간은 확신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가 힘을 쓸 수 있으니 일단 힘쓰게 두고, 힘을 쓸 수 없고 계속 방해하고 교란하면 그때 가서 처리하는 거예요.”라는 네 말을 듣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게 좋겠네요. 안전하고 원칙에 완전히 부합하는 데다 사람을 억누르지도, 개인적인 원한을 표출하지도 않는 방법이네요. 그럼 일단 그렇게 처리하죠.” 이렇게 두 사람이 상의를 거쳐 합의를 보면 사역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반면 두 사람이 협력도, 상의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너에게 떠맡기고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당신이 처리하고 싶은 대로 해. 어차피 실수하면 당신 책임이지 난 같이 책임지지 않을 테니까.’ 너는 그가 책임지지 않으려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고도 지적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아무렇게나 처리하고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내게 처리하게 하네. 그럼 내가 처리하지. 그를 출교시킬 거야.’ 두 사람이 마음이 맞지 않고 속마음을 숨긴 결과, 원칙을 위배하며 제멋대로 처리하고 힘을 쓸 수 있는 사람도 함부로 제명해 버린다. 이것이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이겠느냐? 조화롭게 협력해야만 긍정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다. 한 사람은 무책임하고 다른 한 사람은 제멋대로 군다면, 이는 협력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다 자기 뜻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해서야 어떻게 합격할 수 있겠느냐?

파트너 간에 일이 생기면 서로 의견을 묻고 상의해야 하는데 과연 적그리스도가 그렇게 실행할 수 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하고 늘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려 한다. 이 조항의 특징이 바로 ‘독단’이다. 어째서 ‘독단’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겠느냐? 일을 처리하기 전에 그는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지 않고 진리 원칙을 구하지도 않으며 “이렇게 하는 게 적절할까요? 사역지침에서는 어떻게 규정하고 있죠? 이런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요?”라며 남과 교제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사역자, 파트너와 상의하거나 구해 공감대를 형성하려 하지 않고 혼자서 궁리하고 계획하며 생각하고 안배한다. 그는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을 건성으로 한 번 읽고는 이해했다고 생각하며 무작정 사역을 안배한다. 다른 사람이 알았을 때는 이미 사역을 다 안배한 상태이다. 누구든 그의 입을 통해 그의 관점이나 주장을 미리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마음속에 있는 사상 관점을 절대 어느 누구와도 교제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리더 일꾼은 다 파트너가 있지 않나요?” 명목상으로는 그도 누구와 파트너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역할 때 그는 파트너 없이 늘 독단적으로 행동한다. 리더 일꾼은 파트너가 있고, 어떤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든 다 파트너가 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스스로 보통 사람들보다 자질이 뛰어나 보통 사람들은 그의 파트너가 될 자격이 없고 모두 그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는 혼자 결정하는 것을 좋아하고 남과 상의하는 건 싫어한다. 그는 다른 사람과 상의하면 자신이 못나고 무능력해 보인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관점이냐? 이는 어떤 성품이냐? 교만한 성품이 아니냐? 그는 다른 사람과 협력하며 상의하고, 다른 사람에게 구하고 물어보는 것을 남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구차한 짓으로, 그의 존엄을 해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고 무슨 일을 하든 투명하게 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과 상의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는 다른 사람과 상의하는 것은 무능함의 표현이라고 여기고, 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는 사람은 머리가 나쁘고 주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과 협력해 어떤 일을 완수하거나 어떤 상황을 처리하는 것은 능력 없는 모습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그들의 교만한 심리와 그릇된 심리가 아니냐? 이는 패괴 성품이 아니냐? 여기에서 교만과 독선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는 정상인의 이성을 상실한 것이며, 정신에 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늘 자신은 능력이 있어 혼자 일을 해낼 수 있으며, 다른 이의 협력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패괴 성품이 존재하기에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남과 협력하면 그의 권력이 흩어지고 나눠지니 남과 사역을 나누게 되면 자기 권력이 줄어들 것이고, 혼자서 전부 결정하지 못하면 자기에게 별 실권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이건 그에게 있어 굉장히 큰 손실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 생기든 어떻게 하는 것이 적합한지를 알고 이해한다고 생각하면, 그는 다른 사람과 상의하지 않고 혼자 결정한다. 차라리 실수할지언정 남에게 알리지 않고, 일을 잘못할지언정 권력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 하지 않으며, 면직되는 한이 있어도 다른 사람이 자기 사역에 끼어들지 못하게 한다. 이런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그는 하나님 집의 이익에 피해를 주고 하나님 집의 이익으로 모험을 할지언정 자신의 권력을 다른 이에게 나눠 주지 않는다. 그는 사역을 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뽐내고 남들 앞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권력을 행사할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입으로는 사람들과 조화롭게 협력하겠다고, 일이 닥치면 함께 상의하겠다고 하지만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권력과 지위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도리를 알고 자신이 해낼 수만 있다면 남과 협력할 필요 없이 혼자 일을 해내고 완수해야 능력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이런 관점이 올바르냐? 원칙을 어기면 그것은 본분 이행이 아니며,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할 수도 없고, 그저 힘만 쓰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한다. 또 그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속셈대로 권력을 휘두른다. 그렇게 스스로를 드러내고 뽐내면서 누구와 협력하든, 어떤 일을 하든 남과 상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며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려 한다. 이는 분명 권력 남용이고, 권력을 이용해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모두 권력을 사랑하며, 지위가 생기면 더 큰 권력을 갖고자 한다. 적그리스도는 수중에 권력이 들어오기만 하면, 지위를 이용해 자신을 뽐내고 과시해 남들에게 우러름을 받고, 사람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목적을 이루려고 한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권력과 지위를 무척이나 중요시하며, 어느 때라도 이 권력을 놓지 않을 것이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어느 방면의 업무와 관련 있든 그는 분명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고 다른 사람이 아는 척한다고 지적하면 이렇게 말한다. “저는 지금 배워도 당신보다 더 잘 알 수 있어요. 인터넷에서 자료 좀 찾아보면 바로 알 수 있지 않나요?”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어떤 일이든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고 자신이 감히 도맡는다. 그 결과 상부에서 사역을 검사하면서 그에게 일을 어떻게 처리했느냐고 물으면 그는 거의 다 됐다고 말하지만, 사실 뒤에서는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으며 혼자서 결정한다. 그에게 “이렇게 일을 처리하는 데 원칙이 있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그렇게 하는 게 옳고 원칙에 부합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그럴듯한 이론을 들이민다. 사실상 그의 생각은 모두 치우치고 잘못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과 전혀 상의하지 않고 늘 자기 생각대로 정하고 혼자서 결정을 내린다. 혼자서 결정을 내리면 보통 오류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 그처럼 이렇게 독선적이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체 어떤 성품이겠느냐? 교만한 성품임이 분명하다. 그는 교만한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제멋대로 못되게 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권력을 독점하고 혼자 권력을 독차지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절대로 다른 사람과 협력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그게 쓸데없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적그리스도는 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고 누구도 그와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과 협력하고 싶어 하지도, 협력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저 자기 혼자 결정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려 한다. 그래야 마음이 후련하고 그의 출중함을 드러내어 남들이 복종하고 숭배하게 할 수 있다.

그 밖에, 적그리스도는 늘 혼자 권력을 독차지하고 자기 혼자 결정을 내리려 한다. 그는 이런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협력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과 협력하기를 원하지 않는지 물으면 그는 원한다고 하지만 정작 협력해야 할 때가 되면 그러지 못한다. 이런 게 바로 성품이다. 왜 그러지 못하겠느냐? 만약 적그리스도가 부팀장이고 다른 사람이 팀장이라면,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을 가진 그자는 부팀장을 팀장으로, 팀장을 도리어 부팀장으로 바꿀 수 있다. 그는 어떻게 달성하겠느냐? 그는 다양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형제자매 앞에서 일을 처리할 때, 즉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을 때 많이 말하고 많이 행동하며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사람이 그를 우러러보게 하고 그가 그 팀장보다 훨씬 낫고 이미 그 팀장을 넘어섰다고 인정하게 한다. 시간이 흘러 형제자매가 팀장이 부팀장보다 못하다고 말하면 적그리스도는 그 말을 듣고 기뻐서 이렇게 생각한다. ‘드디어 내가 그보다 낫다고 인정했어. 이러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부팀장이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는 무엇이겠느냐? 팀장과 협력해 교회에서 안배한 사역을 이행하거나 수행하고, 팀장에게 지적해 주거나 팀장을 일깨우고 감독하면서 둘이서 상의해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팀장은 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부팀장은 그를 보조하고 그와 협력해 각 사역을 잘 처리해야 한다. 훼방을 놓아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모든 일에서 팀장과 협력해서 해야 할 사역을 잘 처리해야 한다. 팀장이 일을 처리할 때 원칙을 위배한다면 부팀장은 지적하고 도와주어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 팀장이 하는 올바르거나 잘 처리하는 일과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일은 부팀장이 지지하고 협력해야 하며, 최선을 다해 한마음 한뜻으로 사역을 잘 처리해야 한다. 문제가 발생하거나 문제를 발견하면 둘이서 상의해 해결해야 한다. 가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 할 때는 둘이 협의해서 일을 분담한 뒤 자신이 맡은 사역을 잘 처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협력이다.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과연 사람과 이렇게 협력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적그리스도가 부팀장을 맡는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팀장과 지위가 바뀌게 할지, 팀장을 부팀장으로, 부팀장을 팀장으로 되게 하여 자신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할지 궁리할 것이다. 그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며 팀장을 지휘하여 남들이 그를 팀장보다 훨씬 낫고 팀장을 맡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그렇게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명망을 얻고 자연스레 팀장으로 뽑힌다. 그는 일부러 그 팀장이 추태를 보이고 체면을 구기게 하여 남들에게 무시당하게 만든 다음, 빈정거리고 조롱하는 말로 그를 폭로하고 비하한다. 조금씩 두 사람의 격차가 점점 커지고 사람들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달라지다가 결국에는 적그리스도가 팀장이 되고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럼 이런 성품을 가진 그가 다른 사람과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혼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권력을 손에 쥔 채 독점하려 한다. 네 직함이 무엇이든, 정이든 부든, 크든 작든, 그는 지위와 권력을 언젠가는 자신이 독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그와 함께 본분을 이행하든, 어떤 사역을 하든, 나아가 한 가지 문제를 논의하든 그는 늘 독특하게 군다. 그는 누구와도 협력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그와 같은 명망이나 직함, 능력이나 평판을 가져서는 안 되고 누군가 그를 넘어서고 그의 지위에 위협이 되는 순간,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국면을 전환하려 한다. 예를 들어, 여럿이 한 가지 일을 상의하다가 마침 결론을 내리려 할 때 그는 곧장 상황을 파악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깨달은 뒤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이 그렇게 처리하기 어렵나요? 이렇게 상의까지 해야 할 일인가요? 여러분이 한 말은 다 적합하지 않아요!” 그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남다른 이론이나 그럴싸한 말을 하고, 마지막에는 사람들의 관점을 부정한다. 부정하고 나면 사람들은 그걸 보고 이렇게 말한다. “역시 대단해요. 왜 우리는 저런 생각을 못했을까요? 우린 너무 어리석어요. 안 되겠어요. 역시 당신이 방향을 잡아 줘야 해요!”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효과를 원한다. 늘 큰소리치면서 독특한 존재로 인식되는 효과를 이루고 남들의 우러름을 받고자 한다. 결국 다들 그에게 어떤 인상을 가지겠느냐? 그가 보통 사람은 닿을 수 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보통 사람보다 대단하다는 인상을 갖는다. 어느 정도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겠느냐? 그가 오지 않으면 다들 확정하지도,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고 그가 와서 한마디 해 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가 와서 한마디를 하면 듣자마자 감탄하고 그가 황당무계한 논리를 펼치더라도 여전히 대단하다고 한다. 이는 사람을 현혹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럼 왜 그를 두고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한다고 하겠느냐?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다른 사람과 협력한다는 건 대등하다는 뜻인데, 어떻게 산 하나에 호랑이가 두 마리나 있을 수 있겠어? 산이 하나면 산의 대왕도 하나여야지. 그 왕의 자리는 유능한 사람이 차지하는 거고. 나 같은 능력자나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당신들은 머리도 안 좋고 자질도 떨어지고 겁도 많은 데다가 살면서 누구를 속이거나 곤경에 빠뜨려 보기는커녕 그저 남에게 속기만 했잖아. 그러니 리더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 그는 나쁜 일도 좋은 일로 만들어 버린다. 나쁜 일도 드러내어 떠벌리니 뻔뻔하지 않으냐? 그는 왜 그렇게 말하겠느냐? 그가 그러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든 그는 리더가 되고 제일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것이다. 이런 뜻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모든 사람을 멸시하고 비하하고 조롱한 다음 그럴싸한 말로 사람들을 납득시키고 다들 그의 말을 따르게 한다. 이게 협력하는 것이겠느냐? 이는 협력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겠느냐? 이는 우리가 말하는 제8조인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에 부합한다. 이는 협력이라는 관점에서 말한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무슨 일을 처리하든, 언어적으로나 행동 방식상으로나 다른 사람과 협력해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협력하지는 않으면서 그의 주장과 행동 방식에 협조하라고 다른 사람에게 요구할 뿐이다. 그럼 그가 다른 사람의 제안은 따르겠느냐? 그럴 리 없다. 다른 사람이 어떤 제안을 하든 그는 아예 관심도 없고 세세한 부분이나 이유,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도 묻지 않으며 진리 원칙은 더더욱 구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내가 곁에 있어도 내게 묻지도 않는다.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이다. 내가 혹시 질문이 있는지 물으면 그는 없다고 한다. 분명 방금 발생한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모르면서 곁에 있는 내게 묻지 않는다. 이런 그가 누구와 협력할 수 있겠느냐? 누구도 그의 파트너가 될 자격은 없고 그의 노예나 졸개만 될 수 있다. 그렇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은 곁에 파트너는 있지만 그 파트너는 사실 그의 졸개이다. 꼭두각시 같은 존재로, 그가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라고 하면 서쪽으로 가며, 무엇을 알려 주면 그대로 믿고 알려 주지 않으면 감히 묻지도 못한다. 그저 그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안 돼요. 혼자서 결정해선 안 되고 당신과 협력하고 당신을 감독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같이 처리해야 하는 일도 있어요. 그리고 예전에 당신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사역은 자질과 사역 능력을 갖춘 파트너를 찾아 도움을 받아야 해요. 교회 사역과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고요!” 그는 뭐라고 하겠느냐? “당신이 제 파트너를 교체한다고 해도 달리 제 파트너가 될 만한 사람이 없는걸요.”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이냐? 파트너가 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그런 졸개나 노예를 찾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그는 그런 노예나 졸개, 그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을 ‘파트너’로 찾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가 이런 어려움을 제기하면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너는 이렇게 말해라. “저런, 협력할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군요. 그럼 당신도 이 사역을 할 필요 없어요. 파트너가 있는 사람에게 시킬게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느냐? 누구도 너와 협력할 자격이 없고 협력하지도 못한다면 그럼 너는 뭐 하는 인간이란 말이냐? 너는 괴물이지 사람이 아니다. 진정으로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협력하는 사람의 자질이 너무 떨어져서 협력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최소한 보통 사람과는 협력할 수 있다. 이성적인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 우선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상대방이 지능이 낮거나 마귀라서 협력이 불가능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사람과도 협력할 줄 알아야 한다. 대다수의 사람과 협력할 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며, 이는 정상적인 이성의 표징이다.

적그리스도의 본질에서 나타나는 가장 분명한 특징은 바로 권력을 혼자 차지하고 주무른다는 것이다. 누가 말해도 듣지 않으며, 어떤 사람도 안중에 두지 않는다. 누구에게 어떤 장점이 있든, 누가 어떤 올바른 관점과 고견을 제시하든, 혹은 어떤 적합한 방법을 내놓든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마치 그와 협력할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가 하려는 일에 참여할 자격을 갖춘 사람 또한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성품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는 인성이 좋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게 어디 그냥 인성이 좋지 않은 것이겠느냐? 이는 그야말로 사탄의 성품이다. 이런 성품은 너무도 흉악하다! 어째서 성품이 너무도 흉악하다고 하겠느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집의 소유물과 교회의 재산을 자기 손에 넣어 사유재산으로 삼고 자기가 통제하려고 하며, 다른 사람이 간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가 교회 사역을 할 때 고려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이익과 지위, 체면뿐이다. 그는 누구든 자신의 이익을 해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자질이 있고 체험 간증을 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자신의 명예나 지위에 위협을 가하는 것은 더더욱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체험 간증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 진리를 교제해 하나님의 선민에게 공급할 수 있는 사람을 경쟁 상대로 보면서 억누르고 배척하며 이들을 철저히 고립시키고 매장하고 망가뜨리려 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사람들이 줄곧 소극적이 되지 않은 채 본분을 이행하고 간증을 말하고 남들을 붙들어 준다면, 적그리스도는 최후의 수단을 쓴다. 즉, 빌미를 잡아 정죄하거나 죄를 뒤집어씌워 모함하거나 거짓을 날조해 억누르고 괴롭히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교회에서 제명되면 그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는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가장 음험하고 악독한 면이다. 그가 가장 우려하고 두려워하는 대상은 바로 진리를 추구하고 진실한 체험 간증이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선민들이 가장 동조하고 옹호하는 이는 글귀와 도리를 공허하게 논하는 사람이 아니라 체험 간증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는 진실한 체험 간증이 없고, 진리를 실행하지도 못한다. 기껏해야 좋은 일을 좀 해서 남의 기분을 맞춰 주는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가 좋은 일을 얼마나 많이 하든, 듣기 좋은 말을 얼마나 많이 하든, 좋은 체험 간증 하나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이점과 도움에는 미치지 못한다. 체험 간증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의 하나님 선민에 대한 공급과 양육 성과는 무엇보다 크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누군가 체험 간증을 말하는 걸 보면 눈초리가 사나워지고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며 증오가 샘솟는다. 그는 간증을 말하는 사람이 더는 말하지 못하게 당장이라도 입을 막아 버리고 싶어 한다. 상대가 계속 말한다면 적그리스도의 명성은 완전히 바닥에 떨어질 것이며, 적그리스도의 추악한 몰골이 철저히 드러나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빌미를 잡아 간증을 말하는 사람을 방해하고 억누르려 한다. 적그리스도는 그들 자신이 글귀와 도리를 논해 사람을 미혹하는 것만 허용할 뿐, 하나님의 선민이 체험 간증을 이야기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적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을 가장 증오하고 어떤 사람을 가장 두려워하는지를 알 수 있다. 누군가 사역을 잘해 두각을 드러낼 수 있으면, 또 누군가 진실한 체험 간증을 말해 하나님의 선민에게 도움과 이로움을 가져다주고 그들을 붙들어 주며 모두의 동조를 받을 수 있으면, 적그리스도는 질투와 증오에 휩싸여 배척하고 억누르려 하며 이들이 사역을 맡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는 상황을 피하려는 것이다.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 적그리스도 옆에 있으면 적그리스도의 빈궁함과 가련함, 추함, 사악함을 부각시키고 드러낸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파트너나 사역자를 선택할 때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 체험 간증을 말할 수 있는 사람, 정직한 사람,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을 절대 선택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적그리스도가 가장 질투하고 가장 미워하는 사람들로, 바로 적그리스도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이다. 진리를 실행하는 이들이 좋은 일을 얼마나 많이 하든, 하나님 집의 사역에 도움이 되는 일을 얼마나 많이 하든 적그리스도는 죽을힘을 다해 그것을 은폐한다. 심지어는 사실을 왜곡해서 말하며 좋은 일에 대한 공로는 자신에게 돌리고 나쁜 일에 대한 과실은 다른 사람에게 떠넘겨 자신을 높이고 남을 깎아내리기까지 한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체험 간증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몹시 시기하며, 그들이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까 봐 온 힘을 다해 공격하고 배척한다. 또한, 형제자매들이 체험 간증을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접하거나 옹호하고 동조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이는 진리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증오하는 적그리스도의 사탄 본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 또한 이는 적그리스도가 교회에서 사악한 역류이며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로막는 원흉임을 증명한다. 이 밖에도 적그리스도는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수시로 거짓말을 날조하고 사실을 왜곡하며 체험 간증을 말할 수 있는 이들을 깎아내리고 정죄한다. 이들이 어떤 사역을 하든, 적그리스도는 갖가지 이유를 찾아 배척하고 억누르며, 이들을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잘난 체하기 좋아하고, 야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한다. 사실 이들은 모두 어느 정도 체험 간증이 있고 진리 실제를 갖춘 사람들이며, 인성이 상대적으로 좋고 양심과 이성이 있으며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일부 결점과 부족함이 있고, 가끔 패괴 성품을 드러내지만,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할 수 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하나님께 온전케 될 희망이 있는 사람들이다. 전반적으로 보면, 이들은 본분 이행에 적합하고, 본분 이행의 요구와 원칙에 맞는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알고? 너는 내 구역에 들어와 역할을 수행하면서 나와 겨루려고 하겠지만, 그건 안 될 일이야. 꿈도 꾸지 마! 너는 나보다 지식도 많고 말솜씨도 뛰어나며 인맥도 좋은 데다 나보다 진리를 잘 추구하지. 너와 협력하라고? 네가 내 명성을 빼앗아 가면 어쩌라고?’라고 생각한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생각하겠느냐?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겠느냐? 어떻게 해야 자신의 지위를 보전할지나 생각한다. 적그리스도는 설령 자신이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자질이 좋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양성하거나 발탁하지 않는다. 그가 발탁하는 자는 다 아첨꾼들, 사람 숭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에게 동조하고 부러움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또한, 언행이 매끄럽고 진리를 조금도 깨닫지 못했고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적그리스도는 그런 사람들을 발탁하여 자기 옆에 두고 자신을 위해 봉사하게 하며, 자신을 위해 뛰어다니면서 매일 자신의 주변을 맴돌게 한다. 그러면 그가 교회에서 세력을 갖게 되는데, 이는 그에게 다가가고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이 있게 되고, 아무도 감히 그를 건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양성하는 이 사람들은 모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자들로, 대다수가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그저 규례를 지키는 것밖에 모른다. 그들은 대세와 세력 따르기를 좋아하는데, 권력의 앞잡이, 바보들이다. 이방인들이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지 않으냐? 사내대장부의 노복이 되는 한이 있어도 무뢰한의 조상이 되지는 않겠다. 이와 정반대로 적그리스도는 그런 사람들의 조상이 되고, 그들을 전적으로 양성해 자신을 거들게 하려 한다. 적그리스도는 교회에서 권력을 잡을 때 늘 멍청하고 마구 소란을 피우는 자들을 끌어모아 자신의 조수로 삼는 한편, 자질 있으며 진리를 깨닫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 사역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 특히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있는 리더 일꾼은 배척하고 억누른다. 그렇게 교회에 두 개의 진영이 형성된다. 한 부류는 인성이 상대적으로 정직하고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는 적그리스도가 이끄는 멍청하고 마구 소란을 피우는 자들이다. 이 두 진영은 적그리스도가 드러나고 내쳐질 때까지 계속 싸우게 된다. 적그리스도는 늘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맞서고 대항한다. 이는 교회의 사역을 심각하게 교란하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 적그리스도의 세력은 하나님의 뜻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막는 방해물이자 걸림돌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악한 세력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가 왜 그렇게 하겠느냐? 그 긍정적인 인물들이 일단 일어나 리더 일꾼이 되면 자신의 경쟁 상대가 되거나 자신의 적대 세력이 되지 자신의 말을 듣고 순종하거나 시키는 대로 복종할 리가 절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그의 지위를 위협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이들을 보고 증오를 느낀다. 이들을 배척하고 망가뜨리고 매장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고 평안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빨리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자신의 대오를 늘리려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민을 더 많이 통제할 수 있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몇이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까 봐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 적그리스도는 교회에서 자신의 세력을 만드는 한편,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 순종하며, 그에게 아첨하는 사람들을 붙들어 일으켜 각 분야의 사역을 책임지게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집의 사역에 도움이 되겠느냐? 그렇지 않다.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게 된다. 이 사악한 세력이 과반수가 되면 교회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교회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소수에 불과하고, 힘만 쓰는 자나 떡으로 배만 불리려는 불신파가 적어도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적그리스도가 시종일관 이들을 미혹하고 회유한다면 교회에서 리더를 뽑을 때 그가 자연히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렇기에 하나님 집에서는 선거 때 반드시 진리를 밝히 교제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진리 교제를 통해 적그리스도를 폭로하거나 물리치지 못한다면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고 리더로 선발되어 교회를 통제하고 점령할 수 있다. 이는 무척 위험한 일 아니겠느냐? 교회에 적그리스도가 한둘 나타나는 것은 무서운 일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적그리스도가 세력을 형성하고 대세를 장악하면 무서운 것이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가 대세를 장악하기 전에 반드시 그를 뿌리 뽑고 교회에서 출교시켜야 한다. 이는 급선무이자 꼭 필요한 일이다. 이 밖에, 교회의 불신파, 특히 사람을 숭배하고 따르기를 좋아하는 자, 세력 좇기를 좋아하는 자, 마귀의 공모자나 앞잡이가 되기를 좋아하는 자, 서로 결탁하고 패거리 짓는 것을 좋아하는 자 등 불신파와 마귀는 일찌감치 제명해야 한다. 그래야 그 오합지졸이 한데 뭉쳐 세력을 이루고, 교회를 교란하고 통제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이는 하나님 선민이 반드시 똑똑히 알아야 하는 일이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마땅히 이 일에 부담감을 가져야 한다. 교회 사역에 부담이 있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일들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다. 특히 적그리스도에 속하는 부류와 아첨하고 사람 숭배하기를 좋아하는 그 졸개 마귀들을 간파해야 한다. 그 후 그들을 제약하거나 교회에서 제명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실행은 꼭 필요하다.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은 전적으로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이 바보, 못난이, 비열한 소인배들과 한데 뭉치고 이들을 농락한다. 또 이 사람들과 매우 화기애애하며 조화롭고 친밀하게 ‘협력’을 한다. 이들이 어떤 존재겠느냐? 적그리스도의 무리가 아니겠느냐? 상부에서 그들의 ‘윗사람’을 교체하면, 아래 있는 그 충성스러운 자들은 싫어하면서 상부에서 일 처리를 불공평하게 한다고 판단하고 한데 뭉쳐 적그리스도 대신 불만을 제기할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그들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내버려 두겠느냐? 그들을 일망타진하고 전부 제명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적그리스도 악마 무리이니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은 단독 행동을 하는 일이 매우 드물며, 대부분의 경우 단체로 움직인다. 적어도 두세 명이 한 무리를 이룬다. 그러나 단독으로 움직이는 적그리스도도 있다. 이는 능력이 없거나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과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지위를 몹시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능력도, 배운 지식도 없다고 해서 지위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 생각은 틀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는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누구나 지위를 좋아한다. 적그리스도는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가 왜 멍청이, 쓰레기, 어중이떠중이들을 양성하여 자기에게 아첨하게 하겠느냐? 그들과 협력하려는 것이겠느냐? 그가 정말 그 사람들과 함께 협력할 수 있다면 ‘적그리스도는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한다는 말의 ‘어떤 사람’은 주로 긍정적인 인물을 뜻한다. 하지만 적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보면, 그는 작당한 자들과도 협력하지 못한다. 그럼 그는 왜 그 사람들을 키우는 것이겠느냐? 부리기 쉽고 요리하기 쉬우며 주관이 없고 그가 뭘 말하든 다 듣는 멍청한 자들을 키워 함께 그들의 지위를 지키려는 것이다. 자기 혼자 힘으로는 미약해 지위를 지키려면 쉽지 않다. 그래서 바보 한 무리를 구슬려 매일 자기 주변을 맴돌며 자기를 위해 일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또 하나님의 선민을 미혹하면서 그 무리 사람들이 어떻게 추구하고 어떻게 고생하니 양성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일이 있으면 자기를 찾아와 상담하고 물어보기도 하는데, 모두 말 잘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이라고도 이야기한다. 그들이 본분 이행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해 일해 줄 사람, 자신의 앞잡이, 공모자가 될 자들을 찾아 자기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다. 이는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세력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냐? 사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아주 쉬운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사람은 그것을 어렵게 느끼겠느냐?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인성과 양심, 이성이 있는 사람에게 남과 협력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고, 남과 협력하는 것이 행복한 일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것은 누구든 혼자서 일을 성사시키기란 어렵고, 어떤 분야든, 무슨 일을 하든, 옆에서 지적해 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여하튼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혼자 하는 것보다 일이 훨씬 쉬운 것이다. 이 밖에도, 사람의 자질로 이를 수 있는 것, 또는 체험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다. 아무도 모든 것에 능통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무엇이든 알고,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든 이런 이성을 갖춰야 한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너를 도와주고 지적해 준다거나, 참고할 만한 의견을 낸다거나, 너와 협력하며 일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네가 일을 좀 더 정확하게 할 수 있고, 실수를 덜 하고, 시행착오를 덜 하게 된다. 이는 좋은 일이다. 특히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않으면, 이는 위험한 일이다! 사람은 사탄의 성품을 갖고 있기에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할 수 있다. 사탄 성품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라도 하나님을 부정하고 대적하고 배반할 수 있다. 적그리스도란 인간은 우둔하여 이런 것들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어렵사리 잡은 권력을 남과 나눌 수 있겠어? 권력을 남과 나누면 그 권력이 없어지잖아? 권력이 없으면, 어떻게 내 능력과 재주를 드러낼 수 있겠어?’ 그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것이 권력이나 지위가 아니라 본분임을 알지 못한다. 적그리스도는 오직 권력과 지위만을 받아들이고, 본분은 한쪽에 제쳐 놓고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다. 명예와 이익, 지위만을 추구하며,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하나님의 선민을 통제하여 지위의 복을 누리려고 생각할 뿐이다. 이는 너무도 위험한 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이다! 무릇 명예와 이익, 지위만을 추구하며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자는 불장난을 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갖고 노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언제든 스스로를 망칠 수 있다. 지금 너는 교회의 리더 일꾼이며,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이는 보통 일이 아니다. 너는 누군가를 위해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너 스스로 밥을 먹고 생계를 유지하고자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에서 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특히 그 본분은 하나님의 부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 그 본분을 이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잘하든 못하든 하나님께 내놓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설명해야 하며, 결과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네가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부탁이며, 신성한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 책임은 크든 작든 엄숙한 것이다. 어느 정도로 엄숙하겠느냐? 작게 보면 너라는 사람이 평생 진리를 얻을 수 있을지,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대할지와 관련이 있다. 크게 보면 네 앞날과 운명, 그리고 결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그러니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정죄되고 징벌받게 될 것이다. 네가 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행한 모든 일을 하나님은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것에 대해 어떻게 점수를 매기고 평가할지, 하나님께는 원칙과 기준이 있다. 하나님은 네가 본분을 이행할 때 보인 모든 모습으로 네 결말을 결정한다. 이는 심각한 일이 아니겠느냐? 아주 심각한 일이다! 네게 사역을 하나 맡긴다고 해서 그게 네 혼자만의 일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역은 너 혼자 완성할 수는 없지만 네가 책임져야 한다. 네게 그 책임이 있고 네가 그 부탁을 완수해야 한다. 이는 무엇과 관련 있겠느냐? 협력과 관련이 있다. 어떻게 협력해 섬길지, 어떻게 협력해 본분을 이행할지, 어떻게 협력해 네게 맡겨 준 부탁을 완수할지, 어떻게 협력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지 등 이런 것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에는 많은 내용이 들어 있다. 최소한 다른 이가 말하고 다른 의견을 내놓게 해야 한다. 네게 정말 이성이 있다면 어떤 사역을 하든 먼저 진리 원칙을 구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주동적으로 다른 이의 의견을 구해야 한다. 모든 의견을 진지하게 대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면 기본적으로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어려움이 많이 줄어들고, 어떤 문제가 닥쳐도 해결하거나 처리하기 쉽다. 이것이 바로 조화로운 협력으로 이루게 되는 성과이다. 때로는 극히 사소한 일에서 의견 충돌이 생길 수도 있지만, 사역에 지장만 주지 않는다면 문제라고 볼 수 없다. 단, 핵심적인 일, 교회 사역과 관련된 큰일의 경우, 반드시 공감대를 형성하고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리더 일꾼인 네가 만약 늘 거들먹거리며 본분 이행을 무슨 벼슬로 삼아 누리고, 늘 지위의 복을 누리고, 자신만의 계산을 하고, 늘 자신의 명리와 지위를 생각하고 누리려 하고, 늘 자신의 경영을 하고, 더 높은 지위를 얻어 더 많은 사람을 다스리고 통제하려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한다면, 이는 문제가 된다. 중요한 본분 이행을 벼슬로 삼아 누리려 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네가 늘 이렇게 행동하며 누구와도 협력하기 싫어하고, 네 권력을 남과 나누고 싶어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돋보이고 주목받는 것을 싫어하고 그저 모든 것을 혼자 누리기를 바랄 뿐이라면,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반면 언제나 진리를 구하고 육을 저버리며 자신의 속셈과 생각을 내려놓고 주동적으로 남들과 협력한다면, 단순하게 마음을 열고 남들에게 의견을 묻고 구하면서 다른 이의 말과 건의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누구의 건의든 옳고 진리에 부합하는 건의는 다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런 실행은 슬기롭고 올바른 것이다. 그 실행은 네가 그릇된 길에 들어서는 것을 막아 줄 것인데, 너에게는 바로 보호이다. 너는 리더라는 감투와 지위가 주는 허세를 내려놓고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 남들과 같은 위치에 서서 본분 이행에 책임을 지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본분을 감투나 지위, 월계관처럼 여기면서 모두가 너의 지위를 위해 힘쓰고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너를 혐오하고 역겨워할 것이다. 네가 마음속으로 너 자신이 그저 다른 이보다 하나님의 부탁과 책임이 좀 더 있을 뿐 다른 이와 평등하다고 여기며, 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법을 배운다면, 나아가 허리를 굽혀 다른 이의 의견을 묻고, 진지하고 세심하게, 마음을 다해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남들과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다.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이 어떤 역할을 하겠느냐? 매우 큰 역할을 한다. 너는 전에 자신에게 없었던 것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진리의 빛 비춤과 생명의 실제이다. 또한 다른 이의 장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배울 수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네가 관념적으로 다른 사람이 어리석고 멍청하고 우둔하고 너보다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때, 또는 다른 사람이 마음을 열고 네게 이야기할 때, 너는 부지중에 모든 사람은 그렇게 평범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그 내면에는 서로 다른 생각과 취할 만한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조화롭게 협력하는 법을 배운다면 네가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배울 수도 있고, 너의 교만과 독선이 드러남으로써 잘난 체하지 않을 수 있다. 더 이상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낫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 때 스스로를 사랑하고 스스로에게 탄복하는 내적 상태로 살아가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네게는 보호가 되지 않겠느냐? 이 모든 것은 남과 협력하면서 배워야 할 공과이자 얻어야 할 이점이다.

나는 사람과 접촉할 때 많은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주의해서 듣는다. 다양한 사람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들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말하는 방식을 학습한다. 예를 들어, 너는 예전에 대다수의 사람이 교육을 좀 받고 지식이 좀 있을 뿐 업무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과 접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텐데 사실 이는 틀린 것이다. 그런 사람들, 나아가 일부 특수한 인물들과 접촉할 때 너는 사람 마음속에 있는, 네가 볼 수도, 알아차릴 수도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사상 관점과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사상 관점에는 치우친 것도 있고 비교적 정당한 것도 있다. 물론 그 ‘정당함’은 진리와 동떨어져 있거나 관련 없을 수도 있지만 너는 인성의 더 많은 측면을 알 수 있다. 이는 네게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를 두고 식견이라고 하며, 이는 식견을 늘리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식견을 늘리는 게 무슨 소용이 있죠?” 그것은 다양한 사람을 알고 분별하고 분석하고, 나아가 그들을 돕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게 바로 많은 사역을 하는 길이다. 영적인 척하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 라디오나 뉴스도 안 듣고 신문도 안 볼 거야. 바깥세상과 접촉하지 않을 거라고. 여러 분야의 사람들은 다 마귀야!’ 그럼 너는 틀렸다. 네가 진리를 갖추었다면 마귀와 접촉하는 걸 두려워하겠느냐? 하나님은 영계에서 사탄을 상대할 때도 있는데, 그렇다고 하나님이 변하겠느냐?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네가 사탄을 상대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 두려움 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할까 봐, 하나님을 믿는 것과 진리에 대해 마음속으로 올바른 이해나 관점을 가지지 못할까 봐, 수많은 관념과 상상을 가질까 봐, 너무 교조적일까 봐 두려운 것이다. 따라서 네가 리더 일꾼이든 팀장이든, 어떤 사역을 맡고 어떤 역할을 하든 너는 다른 사람과 협력하고 접촉하는 법을 배워야지 남들이 너를 따르게 하기 위해 큰소리치거나 늘 고상한 척만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늘 큰소리만 치고 진리를 실행해 내지 못하며 다른 사람과 협력하지 못한다면 이는 추태를 보이는 것이다. 그런 너를 누가 상대해 주겠느냐? 바리새인은 어쩌다 무너졌겠느냐? 그들은 늘 신학 이론만 늘어놓고 큰소리만 쳤다. 계속 큰소리만 치다 보니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어졌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나아가 사람의 관념이나 율법과 규칙으로 하나님을 정죄하고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들은 하루 종일 성경을 받쳐든 채 들여다보고 연구해서 성경의 문구는 줄줄 외웠지만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선포한 수많은 진리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죄까지 했다. 이러면 끝장난 것 아니겠느냐?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지는 너희도 잘 알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마음속에 이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너희는 폐쇄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네가 보기에 내가 폐쇄적이냐? 나는 가끔 뉴스도 보고 게스트 인터뷰 같은 프로그램도 본다. 형제자매와 몇 마디 잡담을 나누기도 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이나 청소를 담당하는 사람과도 얘기를 나눈다. 누구를 만나든 나는 이야기를 나눈다. 사역을 하나 맡았다거나 특기가 하나 있다고 해서, 나아가 특별한 사명을 맡았다고 해서 네가 다른 사람보다 특별하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잘못된 관점이 은연중에 너를 틀 안에 가두고 철통으로 겉을 감쌀 것이다. 그러면 너는 자신은 높은 위치에 서 있으니 이렇게 해서도 안 되고 저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이런 사람과 말을 해서도 안 되고 저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서도 안 된다고, 크게 웃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너는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 (‘과인’이 됩니다.) ‘과인’이 된다. 고대 황제들을 보면 늘 “과인은 어쩌고저쩌고”, “고는 어쩌고저쩌고”, “과인 생각에는”이라고 말하며 항상 자신을 과인이라 칭한다. 너는 늘 자신을 과인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몹시 위대해서 정말 천자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네가 천자이냐? 본질적으로 너는 보통 사람일 뿐이다. 네가 늘 자신이 위대하고 비범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아주 골치 아픈 일이고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런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처신한다면 네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방법, 원칙은 분명 변하고 말 것이다. 네가 늘 자신은 과인이기 때문에 높은 위치에 서야 하고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은 해선 안 되며 그런 일들을 하는 게 너의 지위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된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는 그저 이렇게 생각한다. ‘이 정도 지위에 있는 내가 남들에게 아무 말이나 다 할 수는 없지!’, ‘이 정도 지위에 있는 내가 남들에게 패역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이 정도 신분을 가진 내가 남들에게 내 연약함이나 결함, 문제점, 부족한 교육 등 품위에 손상이 가는 말을 할 순 없지. 절대로 남들에게 알리지 않겠어!’ 피곤하지 않겠느냐? (피곤합니다.) 이렇게 피곤하게 살면서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는 어디에 문제가 생긴 것이겠느냐? 본분이나 지위를 대하는 관점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네가 얼마나 높은 ‘관직’에 오르든, 어떤 직위이든, 얼마나 많은 사람을 관리하든 사실 본분만 다를 뿐 너는 다른 사람과 별다를 게 없다. 너는 이 일을 간파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늘 이렇게 생각한다. ‘본분이 다른 게 아니라 분명 신분상에 차이가 있는 건데, 내가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어야지 어떻게 다른 사람과 협력하겠어? 다른 사람이 내게 협력한다면 모를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협력할 순 없지!’ 네가 늘 이렇게 생각하고 높은 위치에 서서 다른 사람의 어깨를 밟은 채 다른 사람의 위에 서서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과 협력하기 쉽지 않다. 너는 늘 이렇게 생각한다. ‘저 사람이 뭘 알겠어? 아는 게 있다면 형제자매가 그를 리더로 뽑았겠지. 그럼 왜 나를 뽑았겠어? 내가 그보다 낫기 때문이지. 난 저 사람과 상의하면 안 돼. 그건 내가 뛰어나지 않다는 뜻이니까. 내가 뛰어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난 어떤 사람과도 상의할 수 없어. 나와 사역을 상의할 만한 사람은 없어. 아무도 그럴 자격이 없다고!’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생각한다.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종교적 신앙을 탄압해서 환경이 열악하다. 하나님을 믿으면 언제든 붙잡힐 위험에 직면하기 때문에 리더 일꾼도 예배를 그리 자주 하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사역자 모임을 갖는 것도 불가능한데 여건이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적절한 장소를 찾아 다시 모임을 가질 때도 있다. 그럼 사역은 어떻게 시행하겠느냐? 사역지침이 있으면 인편으로 전달해야 한다. 한번은 근처의 형제를 통해 한 교구 리더에게 사역지침을 전달했다. 평신도였던 그 형제가 사역지침을 지정된 장소에 전달했을 때 그 교구 리더는 사역지침을 읽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칫, 예상대로네.” 이는 그 형제를 앞에 두고 무엇을 과시한 것이겠느냐? 이는 허세를 부린 것으로, 그걸 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야, 정말 존엄하고 멋지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뒤이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사람을 통해 내게 사역지침을 전달하다니, 너무 급이 안 맞네!” 이 말은 ‘내가 교구 리더면 그래도 큰 리더인데 어떻게 평신도를 통해 내게 전달할 수가 있지? 이건 위계를 무시하는 거 아닌가? 상부에서 나를 너무 무시하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교구 리더이니 적어도 지역 리더 정도는 보내 줘야지. 근데 제일 급이 낮은 평신도를 보내다니, 급이 안 맞잖아!’라는 뜻이다. 이건 뭐 하는 인간이란 말이냐! 그는 급이 맞지 않다고 하는데, 대체 지위를 어느 정도로 사랑하는 것이겠느냐? 사소한 일을 저렇게 크게 부풀리니, 그는 마귀 같은 인간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마귀 같은 인간이다. 너희가 보기에 교회에서 사역할 때 누가 무엇을 전달하거나 통지하러 오는 경우, 우리가 사람을 가려서 받겠느냐? 더군다나 중국 같은 환경에서는 형제자매가 그런 것들을 전달하는 도중에 내내 상당한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그런데도 그는 급이 맞지 않다며 그와 급이나 신분, 지위가 맞는 사람을 보내라고 하고 그러지 않으면 그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니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이 마귀 같은 인간은 실제적인 사역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능력도 없으면서 그런 요구나 하고 지위도 몹시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의 명언은 무엇이냐? ‘급이 안 맞다’이다. 누가 말을 걸면 그는 먼저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리더 등급이 어떻게 되나요? 팀장이라고요? 물러가세요. 급이 안 맞잖아요!” 상부의 형제가 예배를 열면 그는 늘 곁에 다가가 이렇게 말한다. “교회 리더 중에서 형제님이 제일 급이 높고 제가 그다음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형제님 바로 옆에 붙어 앉을게요. 등급 순으로 앉아야죠!” 그는 이렇게 명확히 구분한다. 파렴치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몹시 파렴치하고 분수를 모른다! 어느 정도로 파렴치하냐? 역겨울 정도다. 네게 리더라는 직함을 주어 봤자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얼마나 잘할 수 있겠느냐? 네가 어느 정도 성과를 내놓고 거드름을 피운다면 그나마 적절하고 논리에 부합하는 셈이지만, 아무 성과도 없고 아무 사역도 하지 않은 주제에 무슨 등급을 논한단 말이냐! 그럼 네 등급은 무엇이냐? 너는 교구 리더를 맡았지만 실제적인 사역은 별로 하지도 않았으니 너도 급에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급을 따진다면 과연 내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너희가 보기에 내가 사람과 접촉할 때 무슨 등급을 따지느냐? 따지지 않는다. 나는 어떤 사람과 만나든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이면 얘기를 좀 나누고 얘기할 겨를이 없으면 인사만 하고 만다. 하지만 이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신분과 지위, 몸값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심지어 목숨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너희는 함께 본분을 이행할 때 등급을 따지느냐? 어떤 사람들은 무슨 일을 처리하든 등급을 따지고, 걸핏하면 다른 사람이 위계를 무시한 채 사역하고 통지한다고 한다. 무슨 위계를 무시했다는 것이냐? 먼저 본분을 잘 이행해라. 너는 제대로 이행한 본분도 없고, 어떤 사역도 하지 못하면서 무슨 등급을 따지는 것이냐? 누가 네 등급을 따지더냐? 아직 등급을 따질 때가 아닌데 너는 분수를 모르고 너무 일찍 등급을 따지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장소에 가서 사람을 찾는데, 적절한 사람을 찾을 때 등급을 따지겠느냐? 대체로 그렇지 않다. 네가 그 사역을 책임졌다면 너를 찾고 네가 없다면 다른 사람을 찾을 뿐, 네 등급이나 지위 고하를 따지지는 않는다. 사람이 스스로 등급을 따지는 것은 분수도, 원칙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도 이방인처럼 지위와 등급, 직함을 세세히 따진다면 너는 몹시 비이성적인 것이다! 너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몹시 부족하다. 하나님을 믿는 게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방금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것을 다루었는데, 그게 쉬운 일이겠느냐? 진리를 구할 수 있거나 어느 정도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인성을 갖췄고 양심적이며 이성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과 협력할 수 있다. 반면, 인성을 갖추지 못했고 늘 지위를 독차지하려 하며 항상 자신의 존엄과 지위, 명예와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한다. 물론 이 또한 적그리스도의 주된 모습 중 하나이다. 즉,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사람과도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이 원칙을 실행하지 않는다. 그가 실행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는 권력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고, 사람들이 그가 간파하지 못하는 부분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물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을 착각하게 만드는데, 다른 사람에게 그는 못하는 것이나 모르는 것이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척척박사라고, 그라면 못하는 게 없이 다 할 수 있고 뭐든 해낼 수 있다고, 그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도움, 일깨움, 제안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이것이 한 가지 이유다. 그 밖에, 이 적그리스도라는 인간의 가장 두드러진 성품은 무엇이겠느냐? 네가 그와 접촉하면서 그가 하는 말 몇 마디를 통해 간파할 수 있는 성품은 무엇이겠느냐? 교만함이다. 어느 정도로 교만하겠느냐? 정신병에 걸린 듯 비이성적이다. 예를 들어, 그는 물 한 모금 마시는 자태가 우아하다는 것까지 드러내서 과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물 마시는 제 자태가 아주 우아하지 않나요?” 그는 특히 과시와 자랑을 많이 하는데, 특히 부끄러움도 모르고 염치도 없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인간이다. 그의 눈에는 누구도 그보다 못하며, 그는 특히 자랑을 많이 하고 분수를 모른다. 어떤 적그리스도는 아주 못생겼지만 스스로는 잘생겼다고, 달걀형 얼굴에 동그란 눈, 가느다란 눈썹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정도로 분수를 모른다. 보통 사람은 삼사십 살까지 살면 대체적으로 자신의 외모와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만 적그리스도 같은 사람은 이런 측면에서 비이성적이다. 무엇이 문제겠느냐? 그의 교만한 성품이 정상 이성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그는 어느 정도로 교만한 것이겠느냐? 두꺼비처럼 생겨도 백조라고 말하니 이는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것이자 앞뒤가 바뀐 셈이며, 염치가 없을 정도로 교만한 것이자 자제력이 없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스스로 잘생겼다고 자랑하는 것을 어려워하거나 민망해하며, 자랑한 뒤에는 한참 동안 부끄러워하고 얼굴까지 붉힌다. 적그리스도는 얼굴도 붉히지 않고 자신이 어떤 좋은 일을 했었는지, 어떤 장점을 가졌는지, 얼마나 잘났고 얼마나 남보다 나은지 입만 열면 자신을 자랑한다. 평상시에 말을 하듯 얼굴도 붉히지 않는다! 이게 바로 한없이 교만한 것이자 파렴치하고 비이성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보기에 모든 정상인, 특히 진리를 구하고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정상적인 사고를 갖춘 사람은 모두 평범한 사람이고 별다른 능력도 없으며 그들보다 못한 데다가 그들만큼 특기나 장점도 없다. 그는 거만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무슨 일을 처리하든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거나 상의하려 하지 않는다. 설교를 듣든, 하나님의 말씀을 읽든, 하나님 말씀의 폭로를 보거나 때로 다른 사람이 그를 책망하고 훈계하든, 그는 자신에게 패괴 표출이나 과오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이 교만하고 독선적이라고는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보통 사람이고 자질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이런 것들을 인식하지 못한다. 아무리 네가 책망해도 그는 자신은 자질이 뛰어나고 보통 사람보다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구제 불능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구제 불능인 것이고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아무리 책망해도 그는 자신이 부족하고 무능력하다고 고개 숙여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자신의 문제와 결점, 패괴를 인정하는 것은 정죄되거나 멸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남이 그의 결점을 보거나 그가 자신의 자질이 떨어지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고 인정하는 순간, 하나님을 믿는 것은 힘이 빠지고 의미가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위를 지키지 못하고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위가 없다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차라리 죽는 게 낫지!’라고 생각한다. 지위가 생기면 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교만해지고 제멋대로 못되게 군다. 벽에 부딪치거나 책망을 받으면 그는 다 내팽개치려 하고 소극적으로 변해 일을 게을리한다. 그가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기를 바라는 건 꿈도 꾸지 마라.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나한테 지위를 주고 혼자 하게 한다면 어떨까? 나보고 다른 사람과 협력하라는 건 말도 안 되지! 나한테 파트너를 찾아 주지 마. 난 필요 없어. 아무도 나와 협력할 자격이 없다고. 아니면 나를 쓰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시키든지!’ 이건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이란 말이냐? 산 하나에 호랑이 두 마리는 가당치 않다는 것이 적그리스도가 가진 심리이자 드러내는 모습이다. 이는 구제 불능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첫 번째,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못한다’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겠느냐?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않는 것과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아니겠느냐?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본질에 의해 결정된다. 설사 누가 그와 협력해 사역한다고 해도 실질적으로는 진정으로 협력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그저 따르거나 거들어 주는 자, 심부름하거나 일을 처리하는 자일 뿐이다. 이는 절대 협력하는 거라고 할 수 없다. 그럼 협력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느냐? 사실상 협력의 최종 목적은 진리 원칙을 깨닫고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옳은 결정, 원칙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리며, 오류를 발생시키지 않고 사역 과정에서 실수를 줄임으로써 네가 하는 모든 것이 마음대로 하고 제멋대로 못되게 구는 게 아니라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하는 적그리스도의 첫 번째 모습은 바로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오직 그에게만 순종하도록 하는 건 아니죠.” 그가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누구의 의견도 묻지 않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뜻이나 진리 원칙도 구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의향대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 말의 숨은 뜻은 무엇이겠느냐? 그가 사역할 때는 진리나 하나님이 아닌 그가 다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사역하는 원칙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따르고 그를 진리이자 하나님으로 대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성질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하는 건 그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서 다른 사람과 협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것이겠느냐?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사람일수록 일을 처리할 때 더 다방면에서 묻고 구하며 다른 사람과 많이 상의하고 교제해서 손실이나 실수할 확률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일수록 더욱 이성적이고 다른 사람과 협력하려 하며 다른 사람과 협력할 수 있다. 그렇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과 협력하려 하지도, 협력하지도 못하는 사람일수록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고 누구의 제안도 참고하려 하지 않으며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 구하려 하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구하지 않을수록 진리를 더더욱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어떻게 오해하겠느냐? ‘형제자매가 나를 리더로 뽑았고 하나님이 내게 리더가 될 기회를 주셨으니 내 행동은 진리에 부합하고 내가 어떻게 하든 다 옳아.’ 이는 오해가 아니겠느냐? 그들은 왜 이렇게 오해하겠느냐?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런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다른 점은 이런 사람은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하다.

적그리스도가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적그리스도는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누구와 함께 협력하든 늘 충돌과 분쟁이 생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이 청소를 담당해 매일 방만 정리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과 협력하지 못할까요?” 여기에는 성품 문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누구와 함께 지내고 일하든 그는 늘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언제나 남을 가르치고 싶어 하며, 남들이 자기 말을 듣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이 누구와 협력할 수 있겠느냐? 누구와도 협력할 수 없다. 이것은 패괴 성품이 너무 심각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과 협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늘 높은 위치에 서서 남을 가르치고 옭아매며, 다른 사람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자기 말에 순종하게 강요하려 한다. 이는 성품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성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는 양심도 이성도 없는 것이다. 악인이 바로 그러한데,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하고 잘 어울리지 못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인성의 공통점이 있겠느냐? 어떤 것들이 서로 일치하겠느냐? 사람은 공통적으로 양심과 이성, 진리를 사랑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다 이런 정상 인성을 갖추고 있다면 서로 잘 지낼 수 있지만, 정상 인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잘 지낼 수 없다. 둘 중 한 사람만 갖춘 경우에도 잘 지낼 수 없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선인과 악인은 서로 잘 지낼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이 정상적으로 함께 지내려면 특정 조건이 필요하다. 최소한 양심과 이성, 인내와 포용이 있어야 협력할 수 있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제대로 협력하려면 반드시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하며, 서로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보완해야 한다. 또 인내와 포용을 갖고 최소한의 선을 지키며 처신해야 한다. 그래야 화목하게 함께할 수 있다. 가끔 충돌과 분쟁이 생길지라도 최소한 적대하지 않고 계속 협력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처신에 최소한 지켜야 할 선이 없고 양심과 이성을 중시하지 않는다면, 일을 처리할 때 ‘이익’을 최우선시하여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고 늘 남의 덕을 보려 한다면 협력할 수 없다. 악인과 악인, 마왕과 마왕 사이가 바로 그러한데 서로 한도 끝도 없이 싸운다. 영계의 여러 악령도 서로 잘 지내지 못한다. 때로 마귀도 동맹을 맺기는 하지만 모두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서로 이용하는 것으로, 연맹을 맺어도 잠시뿐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레 분열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인성이 없는 사람은 모두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이다. 정상 인성을 지닌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 쉽게 협력할 수 있다. 이런 사람만이 남을 포용하고 인내해 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사역할 때 신분을 내려놓고 남과 상의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비록 패괴 성품도 있고, 언제나 남들이 자기 말을 듣게 하려는 속셈도 품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양심과 이성이 있고, 진리를 구하며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고, 그런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해 속으로 가책을 받고 자제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일 처리 방식과 방법이 조금씩 바뀌며 남들과 협력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사람은 패괴 성품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하지만 악인이 아니고, 적그리스도의 본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만약 악인이나 적그리스도라면 다른 사람과 협력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제명한 모든 악인과 적그리스도는 다 이러하다. 그들은 어떤 사람과도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해 결국 드러나 도태되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있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수많은 사람은 책망과 훈계를 많이 겪고 나면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실로 회개하며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인내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점차 다른 사람과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게 된다. 오직 적그리스도만이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하고, 패괴 성품을 얼마나 드러내든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으며 계속 제멋대로 굴고 함부로 행동한다. 다른 사람과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할 뿐 아니라 누가 그를 분별하거나 못마땅해하는 걸 보면 괴롭히고 혼내 주며, 배척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상대방을 제거하기 위해 교회 사역에 지장을 주는 것도 불사한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에 의해 결정된다.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을 연습하는 데 있어 너희가 배워야 할 공과는 무엇이겠느냐?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진리를 사랑하는 실행의 한 측면이자 표징이기도 하다. 이는 양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 보이는 최소한의 모습이다. 너는 네가 양심적이고 존엄 있으며 이성적이라고 하지만 누구와도 협력하지 못한다면, 가족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친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며, 함께 지내면 바로 사이가 틀어지고 함께 일하면 끝없이 다투다 결국 원수가 된다면, 늘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한다면 이는 몹시 위험하다. 이런 측면의 모습이 너의 모든 패괴 성품 중 한 가지 모습이거나 진리에 맞지 않는 모든 행위 중 한 가지 모습이라면, 한 가지 모습일 뿐이고 너 자신도 알고 있으며 끊임없이 구하고 변화하는 중이라면 아직 기회도 있고 만회할 여지도 있으니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 네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서 천성적으로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으며 스스로도 자제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네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 문제는 별로 큰일이 아니며 너의 정상적인 생활이자 네 패괴 성품의 주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적그리스도의 본질이다. 적그리스도의 본질이라면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도 있지만 그 자체로 적그리스도인 사람도 있다. 이는 다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은 일을 처리할 때 보통 사람보다 좀 더 뚜렷하고 두드러지게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고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진리에 부합하고 인성을 갖췄으며 이성적인 사역을 할 수 있다. 만약 아무 긍정적인 사역도 행하지 못하고 그저 적그리스도의 모습만 보이고 적그리스도의 본질만 드러낸다면, 행하는 사역과 이행하는 본분이 모두 그런 표출인 데다가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게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일부 리더 일꾼도 과거에는 수시로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냈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독단으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눈에 띄는 큰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고 인성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책망과 훈계나 형제자매들의 도움을 통해, 또 조정되거나 교체되면서 한동안 소극적인 상태에 빠졌다가 마침내 예전에 자신이 드러낸 것들이 전부 패괴 성품이었음을 깨닫고 회개하고자 마음먹게 되었다. 그는 ‘어찌 됐든 계속 본분을 이행하는 게 중요해. 내가 걷는 길이 적그리스도의 길이지만 적그리스도라고 규정된 것은 아니야. 이건 하나님의 긍휼이니 제대로 믿고 추구해야 해. 진리를 추구하는 이 길은 틀리지 않아.’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조금씩 돌이키고 회개하여 좋은 태도를 갖게 된다. 본분을 이행할 때 진리 원칙을 구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도 진리 원칙을 구하며, 다양한 측면에서 좋은 방향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러면 변화된 것 아니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에서 돌아서서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하는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러면 구원받을 수 있는 희망과 기회가 있다. 이런 사람들이 한때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였거나 적그리스도의 길을 걸었다고 해서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는 없다. 적그리스도는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다. 그는 염치가 없으며 성품이 흉악하고 사악하며 또한 진리를 극도로 싫어한다. 진리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거나 회개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진리를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은 그가 절대로 회개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회개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확실한 점이 한 가지 있다. 바로 한때 잘못을 저질렀지만,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본분 이행에 온 힘을 다해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고,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만든다.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리를 싫어하지 않는다. 이것이 차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차이이다. 반면 적그리스도는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가 진리에 부합하는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의 이 본성은 무엇이겠느냐? 극도로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누가 진리를 교제하거나 체험 간증을 얘기하면 그는 극도로 반감을 가지고 진리를 교제하는 사람을 적대시한다. 교회에서 누군가 각종 터무니없고 사악한 논조를 퍼뜨리거나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하면 그는 특히 즐거워하며 재빨리 장단을 맞추고 그 사람과 한패가 되어 긴밀하게 협력한다. 이게 바로 유유상종이자 초록은 동색이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선민이 진리를 교제하거나 자신을 인식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체험 간증을 얘기하는 걸 들으면 격노하면서 그 사람을 어떻게 배척하고 공격할지 궁리한다. 아무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눈에는 다 거슬려서 그는 배척하고 적이 되려 한다. 누가 글귀와 도리를 말하고 자기 자랑을 많이 하면 그는 마치 지음(知音)이나 동반자라도 찾은 것처럼 유독 좋아하고 동조한다. 누가 “사역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공로가 크고 큰 상과 큰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데다가 하나님과 함께 왕이 될 수도 있어요.”라고 말하면 그는 몹시 감격스럽고 심장이 끓는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한층 뛰어나다고, 드디어 두각을 나타내서 자신을 뽐낼 기회가 생겼고 자신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흡족해한다. 이는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그와 교제하며 “하나님께서는 바울 같은 사람은 좋아하시지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 하루 종일 ‘주여, 주여, 제가 당신을 위해 사역을 많이 하지 않았나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시죠. 하루 종일 하나님께 상이나 면류관을 구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신다고요.”라고 말한다면 이런 말들이 틀림없는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런 교제를 듣고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그가 아멘 하며 이 말들을 받아들이겠느냐? 그의 첫 반응은 무엇이겠느냐? 마음속으로 반감을 가지고 듣기 싫어 할 것이다. 그건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 당신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거야? 난 그 말 못 믿겠어! 난 그냥 이렇게 할 거야. 바울처럼 하나님께 면류관을 구할 거라고. 나처럼 해야 복받고 좋은 종착지를 얻을 수 있어!’라는 뜻이다. 그는 여전히 바울의 관점을 고집하는데, 이는 하나님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는 명백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게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바울의 본질을 폭로하고 분석하며 했던 수많은 말씀들은 구구절절 다 진리이지만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바울의 모든 행동이 다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마음속으로 여전히 이렇게 의문을 제기한다. ‘당신이 한 말이 왜 옳지? 무슨 근거로 옳다는 거야? 내가 보기에 바울은 옳은 말과 옳은 행동만 했어. 잘못한 게 없다고. 면류관이나 상을 추구하는 건 내 능력이야! 당신이 막을 수 있겠어? 난 사역을 추구할 거야. 사역을 많이 해서 자본과 공로가 생기면 천국에 들어가고 상을 얻을 수 있어. 잘못된 게 없어!’ 그는 이토록 고집스럽고, 조금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네가 그에게 진리를 교제해 줘도 그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싫어한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다. 그럼 너희는 진리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했으며 아직 갈 길이 멀고 앞으로 진리 실제에 닿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매번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비춰 볼 때마다 자신이 너무도 부족하고 자질이 떨어지며 영적인 이해력도 없는 데다가 건성으로 대충 하고 사악하다고 느껴 소극적으로 변한다. 너희는 이런 내적 상태를 가지지 않았느냐? 반면 적그리스도는 절대 소극적으로 변하지 않고 늘 기운이 넘치며 자신을 반성하거나 인식하지도 않고 스스로에게 별로 큰 문제도 없다고 생각한다. 늘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은 바로 이렇다. 그는 권력을 잡는 순간 적그리스도로 변한다.

2. 늘 사람을 통제하고 정복하려는 욕망과 야심을 지닌 적그리스도를 해부하다

이어서 다음 항목을 교제하겠다. 적그리스도는 늘 사람을 통제하고 정복하려는 야심과 욕망을 지니고 있다. 이는 어떤 사람과도 협력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이다. 어떤 부류가 사람을 통제하고 정복하는 것을 좋아하겠느냐? 어떤 부류가 사람을 통제하고 정복하려는 야심과 욕망을 지니고 있겠느냐? 예를 들어 말해 보겠다. 유독 지위를 좋아하는 사람은 남을 통제하고 정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적그리스도와 같은 부류 아니겠느냐? 그가 사람들을 미혹하고 통제하고 제압하면 사람들은 그를 숭배하고 따른다. 그리하여 그는 우러름과 존경, 숭배, 앙망을 받는다. 이는 사람들 마음속에서 자리를 차지한 것 아니겠느냐? 그에게 복종하지도, 동조하지도 않는 사람이 그를 숭배할 리 있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지위를 가지고 나서도 남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진심으로 탄복하며, 감탄하게 하려고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그를 숭배한다. 이것이 한 가지 부류이다. 또 다른 부류로는 유독 교만한 사람들이 있다. 교만한 사람도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데, 우선 상대를 제압해서 그 사람이 자신을 숭배하고 자신에게 탄복하게 만든다. 그래야 그들은 만족한다. 유독 흉악한 사람도 남들을 통제하는 것을 좋아하며, 그의 말을 듣고 그를 위주로 행동하게 하고 그를 위해 일을 처리하게 한다. 유독 교만한 사람이든 성품이 흉악한 사람이든 권력을 잡는 순간 모두 적그리스도와 같은 부류가 된다. 적그리스도는 늘 사람을 통제하고 정복하려는 야심과 욕망을 갖고 있다. 적그리스도는 남과 접촉할 때 늘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대의 마음에 자기 자리가 있는지, 상대가 자기에게 탄복하고 숭배하는지 알아내려고 한다. 아첨하고 알랑거리는 사람을 만나면 몹시 기뻐하며 높은 자리에 서서 가르치고 큰소리치면서 일부 규례와 방식, 도리, 관념을 주입시킨다. 또 상대가 이러한 것들을 진리로 여겨 받아들이게 하면서 “당신이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듣기 좋은 말을 한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속으로는 모호해서 진리에 부합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런 말에 딱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고 진리에도 위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에게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고 폭로하는 사람이 나오면 그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다. 적그리스도는 인정사정없이 상대를 질책하고 정죄하고 위협하며 본때를 보여 준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그에게 철저히 제압당해 탄복을 금치 못하며 그를 숭배하고 의지하고, 심지어는 두려워하게 된다. 또 부림 받는 느낌이 들 것인데, 마치 적그리스도의 인도와 지도, 질책이 없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고, 또 이러한 것들을 잃으면 마음에 안전감이 없고, 하나님이 자신을 원치 않을 것처럼 생각한다. 이때, 사람은 적그리스도가 기분 나빠할까 봐 그의 안색을 살피고 행동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모두가 그의 비위를 맞추려 한다. 그러면 이들은 끝까지 적그리스도를 따르게 된다. 적그리스도는 사역할 때 글귀와 도리를 읊어대고, 사람들이 규례를 지키게 가르치는 데 능하다. 사람이 지켜야 할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하나님 집에서는 어떻게 사역을 안배했는지, 어떤 사역이 가장 실질적이고 중요한지, 주로 어떤 사역들을 잘해야 하는지 등 가장 중요한 일들에 대해 적그리스도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사역하거나 안배할 때 진리를 교제하는 법이 없다. 그 자신조차 진리 원칙을 모르기에 사람들에게 규례와 도리를 지키라고 가르칠 뿐이다. 누군가 그의 말이나 규례를 어기기라도 하면 그에게 혼나거나 야단맞는다. 적그리스도는 늘 하나님 집이라는 기치를 들고 사역하며, 높은 위치에 서서 사람을 질책하고 꾸짖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의 꾸짖음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의 요구대로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께 죄짓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부류는 적그리스도에게 통제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떤 행위겠느냐? 사람을 노예화하는 행위이다. ‘노예화’를 큰 붉은 용의 나라에서 쓰는 말로 표현하면 ‘세뇌’이다. 큰 붉은 용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체포했을 때 고문하는 것 외에 사용하는 또 다른 수단이 바로 세뇌인데, 그것과 마찬가지다. 농민이든, 노동자든, 아니면 지식인이든 큰 붉은 용은 무신론, 진화론, 마르크스 레닌주의 같은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으로 사람을 세뇌시킨다. 사람이 마음속으로 아무리 역겨워하고 혐오해도 큰 붉은 용은 강제로 그런 것들을 주입한 다음 그런 사상과 이론으로 사람의 손발을 묶고 마음을 통제한다. 큰 붉은 용은 이런 식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 진리를 받아들이고 추구해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적그리스도에게 통제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는 도대체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각종 일을 처리할 때 가져야 할 올바른 관점이 무엇인지,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을 하나도 알지 못하고 그저 마음속에 적그리스도의 글귀와 도리, 공허한 이론만 품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거나 통제되는 시간이 길어지면 적그리스도와 완전히 똑같아진다. 즉, 하나님을 믿긴 하지만 진리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맞서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거나 통제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의심의 여지 없이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 외식하는 사람, 하나님을 믿긴 하지만 진리는 추구하지 않거나 본분을 이행하긴 하지만 본연의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적그리스도를 따르고 적그리스도의 노예가 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진리를 얻지 못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하나님은 어떤 원칙으로 사람을 대하느냐? 강요하느냐? 통제하느냐? 아니다. 통제와는 정반대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십니다.) 그렇다. 자유 의지를 줌으로써 네가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에서 스스로 깨달아 자연스레 인식과 경험을 얻게 하고, 특정 측면의 진리를 깨달은 다음에 또다시 같은 환경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알게 하며, 마음속 깊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깨닫게 해서 최종적으로 옳은 길을 선택하게 한다. 하나님은 너를 통제하거나 네게 강요하지 않는다. 반면 적그리스도는 정반대로 행동한다. 그는 미혹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세뇌시키고 교화시킨 다음 너를 그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왜 노예라고 하겠느냐? 노예란 무엇이냐? 상대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고, 또 감히 분별하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그가 옳은지 그른지 너는 알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며 마음속이 혼탁하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너는 꼭두각시처럼 적그리스도의 지시를 가만히 기다리며, 그가 입을 열지 않으면 행동할 엄두도 내지 못하다가 그가 명령을 내리면 그제야 행동한다. 그렇게 너는 본능이 사라지고 자유 의지도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너는 죽은 사람이 된다. 너는 심장이 있지만 생각할 줄 모르고 머리가 있지만 문제를 사고할 줄 모르며 시비도 가리지 못하는 데다가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부정적인 사물인지, 어떻게 하는 게 옳고 어떻게 하는 게 그른지 역시 알지 못한다. 그는 이렇듯 은연중에 너를 통제한다. 무엇을 통제하겠느냐? 네 머리를 통제하겠느냐, 아니면 네 마음을 통제하겠느냐? 그가 네 마음을 통제하면 네 머리는 자연스럽게 통제된다. 그가 네 손발을 꽁꽁 묶고 단단히 동여매니 너는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한참을 망설이고 의심하다가 움츠린다. 또다시 한 발짝 내딛고 일을 좀 처리해 보고 싶다가도 다시 움츠러든다. 무슨 일을 하든 내면의 이상(異象)은 다 흐리고 불분명하다. 이는 사람을 미혹하는 적그리스도의 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적그리스도는 주로 어떤 수단으로 사람을 통제하겠느냐? 그는 사람의 관념과 상상, 인정, 도리에 부합하는 말만 한다.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 나름 인성이 있는 것 같지만 진리 실제는 조금도 없다. 말해 보아라. 적그리스도를 따르고 적그리스도에게 통제되는 사람이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 마음과 힘을 다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 가장 주된 이유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적그리스도 자체가 권모술수를 부린다는 것이다. 그는 본분을 이행할 때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마음과 힘을 다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그를 따르는 자들이 과연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적그리스도가 어떤 모습을 보이면 따르는 추종자들도 그와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 적그리스도가 앞장서서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먹고 권력을 독점해 횡포를 부리는데 따르는 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럼 그에게 휘둘리고 통제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서로 경계하고 시기하고 싸우면서 명예와 이익, 체면, 밑천을 두고 다툰다. 적그리스도에게 통제된 사람은 모두 마음이 흩어져 있고 서로 잘 맞지 않으며 일을 처리할 때 지나치게 신중하고, 서로 간에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지도 않는다. 또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지 않아 사람과 사람 간에 정상적인 교류가 없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지도 않고 정상적인 영 생활도 하지 않아 흩어진 모래알 같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탄에 속하는 속세의 무리와 판박이다.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으면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 사람과 사람 간에 서로 경계하고 옥신각신하며 궁지에 빠뜨리고 질투하는 데다가 서로를 판단하고 누가 더 무책임한지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책임지지 않으면 저도 책임지지 않을 거예요. 당신도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으면서 왜 저한테만 고려하라고 하죠? 저도 고려하지 않을 거예요!” 이런 곳을 하나님 집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이는 어떤 곳이겠느냐? 사탄의 진영이다. 이곳에서는 진리가 권세 잡고 있지 않은데, 성령 역사도, 하나님의 축복이나 인도도 없다. 그 때문에 그곳의 사람들은 모두 작은 마귀나 마찬가지다. 그들이 사람을 칭찬하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듣기 좋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몹시 사랑하고 많이 헌금하는 데다가 본분을 이행할 때 기꺼이 고난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지 평가하라고 했을 때 당사자 앞에서와 뒤에서 하는 말이 서로 다르다. 형제자매가 거짓 리더의 손아귀에 떨어지면 본분을 이행할 때 흩어진 모래알 같아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성령 역사도 없으며, 대다수가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적그리스도에게 통제되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런 사람들은 교회라고 칭할 수 없다. 그들은 완전히 사탄의 진영, 적그리스도의 무리에 속하게 된다.

왜 적그리스도는 늘 사람을 통제하려 한다고 하겠느냐? 그들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도,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관심을 갖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과 지위, 명망만을 생각할 뿐이다. 그들은 사람의 마음을 통제하여 그들을 숭배하게 하면 그들의 야심과 욕망이 충족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집의 이익에 관한 일, 교회 사역에 관한 일,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관한 일에 대해 그들은 아무 관심이 없고, 문제가 발생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나님 집 어느 곳의 인사 배치가 부적절한지, 하나님 집의 재물이 어디에서 불합리하게 분배되고 많이 유실되었으며 재물을 헤프게 쓴 자가 누구인지, 사역할 때 방해하고 교란하는 자가 누구인지, 사람을 부적절하게 쓰는 자가 누구인지, 건성으로 사역하는 자가 누구인지 등의 문제를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나아가 처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어떤 일을 처리하겠느냐? 어떤 일에 개입하겠느냐? (사소한 일에 개입합니다.) 사소한 일이란 어떤 일이냐? 자세히 얘기해 보아라. (어떤 리더는 일부 형제자매의 가정사를 해결해 줍니다. 예를 들어, 집안에서 누구와 누구가 잘 지내지 못하는지 같은 일상생활 속 일들 말입니다.) 그건 거짓 리더가 하는 일이다. 적그리스도는 어떤 일을 하겠느냐? (적그리스도는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이나 진리 원칙을 위배하는 것에 관한 일은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사람이 그를 따르지 않는다거나 누가 그를 못마땅해하는지 등 그의 체면과 지위에 관한 일만 신경 씁니다.) 그런 면도 있다. 실제로 있는 일이다. 그는 거북하고 거슬리거나 그에게 불손하고 그를 분별하는 사람을 보면 눈여겨보고 마음에 담아 둔다. 그는 그런 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 있느냐? (어느 교회에서 뽑혀 온 사람이 그를 분별하고 그와 생각이 다르면 갖은 방법을 동원해 트집을 잡고 그 사람을 교체합니다. 그는 그런 일을 하기를 좋아합니다.)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 어떤 결점이나 문제를 가지고 있든, 어떻게 방해하고 교란하든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 오로지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결점만 찾아내 이유나 핑계를 들어 그들을 교체한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통제할 때 보이는 주된 모습 중 또 다른 하나는 평범한 형제자매뿐 아니라 각종 사역을 책임지는 사람까지 통제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는 늘 권력을 완전히 자신의 손안에 쥐고 통제하려 하기 때문에 참견하지 않는 일이 없다. 무슨 일이든 주시하고 지켜보며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살펴본다. 그는 사람들에게 진리 원칙은 전혀 교제해 주지 않고 아무렇게나 하게 내버려두며 모두가 그를 따르고 그에게 순종하길 원한다. 그는 늘 권력이 분산되거나 남의 손에 들어갈까 봐 두려워한다. 문제를 논의할 때는 아무리 많은 사람이 교제하고 다 같이 어떤 결론을 도출하든 그에게 가면 모두 부정당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그럼 마지막에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모두가 그를 따라야 일이 끝난다. 그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는 한 계속 교제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를 따를 때까지 아무도 자지 못하게 하면서 한밤중까지 교제를 이어갈 때도 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하는 짓이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행동이 사역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 사역을 책임지는 것과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은 무엇이 다르겠느냐? (속셈이 다릅니다.) 사역을 열심히 책임지는 것은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도록 진리 원칙을 명확히 교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권력을 틀어쥐고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신과 의견이 다르거나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킬 수 있는 관점에 모두 반박한다. 이 두 가지는 속셈이 다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무엇이 다르겠느냐? 너희는 분별할 줄 아느냐? 교제를 통해 사람에게 진리 원칙을 깨닫게 하는 것과 개인의 체면을 챙기는 것은 무엇이 다르겠느냐? (속셈이 다릅니다.) 물론 속셈이 다른 것도 확실하지만, 속셈만 다른 게 아니다. (그 두 가지 행동 방식은 하나님 집에 더 이익이 되는가 하는 점도 다릅니다.) 어느 것이 하나님 집에 더 이익이 되는가 하는 것도 그중 한 가지이다.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는 면이다. 가장 주된 차이는 무엇이겠느냐? 진정으로 진리를 교제하는 경우, 너는 듣자마자 개인을 위해 변명하거나 설명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것만 교제하며, 진리 원칙도 명확히 교제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이 모두 실행의 길을 얻는다. 원칙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될 뿐 아니라 본분을 이행할 때 쉽게 원칙을 위배하지 않게 되고 실행 목표도 더욱 정확해진다. 그 안에는 개인의 변명이나 설명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다. 반면, 국면을 뒤집고 다른 사람을 자신의 권력 아래 두고 통제하려는 사람은 뭐라고 얘기하겠느냐? 어떤 말을 하겠느냐? 그는 자신의 이유를 설명하고 자신이 어떤 생각과 저의, 목적을 가지고 그 일을 했는지 이야기하여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그를 오해하지 않게 한다. 전부 설명일 뿐, 그 안에는 진리가 조금도 없다. 자세히 들어 보면 그가 교제하는 것 중에는 진리가 전혀 없다. 전부 사람의 주장, 핑계, 이유 같은 것들뿐이다. 그가 말을 마치면 사람들이 원칙을 깨닫겠느냐? 깨닫지 못하고 그의 생각에 대해서만 많이 알게 된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의 수법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통제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지위나 체면이 떨어지거나 영향을 받았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서둘러 예배를 소집해 어떻게 해서든 만회하려 한다. 어떻게 만회하겠느냐? 핑계나 이유를 대고 당시에 그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말한다. 그런 말을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그에 대한 사람들의 모든 오해를 풀려는 것이다. 큰 붉은 용이 사람을 괴롭히고 나서 다시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거나 오명을 씻겨 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진상을 덮으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래도 큰 붉은 용은 좋고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 나쁜 일을 한 후, 다시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고 보상을 해 주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통치가 위협받지 않는다. 적그리스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은 모두 자신을 위한 것으로, 그는 진리를 위해서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위해서는 더더욱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도 하지 않는다. 그의 말과 행동은 전부 그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위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적그리스도라고 단정하는 것은 억울한 거예요. 그는 열심히 노력하고 일도 성실하게 하고, 하나님 집을 위해 부지런히 사역하고 열심히 뛰어다니니까요. 너무 바빠서 밥을 못 먹을 때도 있고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니까요!” 그는 누구를 위해서 고생하느냐?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지위가 없었다면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느냐? 그는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위해, 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이다. 그에게 상을 주지 않거나 명리와 지위가 없었더라면 그는 일찍이 물러났을 것이다. 그는 그런 일을 할 때 사람들 앞에서 할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알리고자 한다. 하나님이 그가 한 모든 것을 보고 그에게 마땅한 상을 내려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은 상이지 진리가 아니다. 너는 이 점을 간파해야 한다. 자신이 충분한 밑천을 가졌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 사이에서 말할 기회가 생겼을 때 그는 어떤 내용을 말하겠느냐? 첫 번째, 자신의 공로를 과시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공략한다. ‘마음을 공략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모두가 마음속으로 그가 하나님 집을 대신해 좋은 일을 많이 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는 공이 있고 위험을 감수한 적이 있으며 위험한 사역도 했었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고생도 많이 했다고 사람들 앞에서 유세를 떨고 밑천을 논하는 것이다. 두 번째, 터무니없는 이론을 막연하게 떠들어 알 듯 말 듯하게 하고, 꽤 심오하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추상적인 이론인 것처럼 들리게 해 사람들이 그를 숭배하게 한다. 그런 다음 그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예를 들어 과학 기술, 우주, 재무와 회계, 또는 사회나 정치 관련 일, 나아가 범죄 조직이나 사기 관련 일을 다시 한번 막연하게 떠들며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이는 무엇이겠느냐? 자랑하는 것이다. 자랑하는 목적 또한 마음을 공략하는 데 있다. 그가 어리석은 것이겠느냐? 그가 말하는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과연 그가 계속 말하겠느냐?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데는 목적이 있다. 즉, 유세를 떨고 으스대고 자랑하기 위해서이다.

그 밖에 적그리스도는 어떤 태도를 자주 취하겠느냐? 그는 어디에 가든 가장 같은 태도를 취하며 “다들 뭐 하느라 바쁘세요?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죠? 어려움은 없나요? 맡긴 일은 서둘러 처리해 주세요! 건성으로 하시면 안 돼요. 하나님 집의 사역은 모두 중요한 일이니 그르치면 안 된다고요!”라고 말한다. 그는 마치 한 가정의 가장처럼 늘 가족 구성원의 행동을 감독한다. 가장이란 무엇이겠느냐? 가족 구성원 모두 실수하거나 길을 잘못 들 수 있으니 감시해야 하고, 감시하지 않으면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넘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남들은 모두 바보이고 어린아이라서 자신이 신경을 쓰지 않고 한시라도 눈을 떼면 잘못을 저지르거나 길을 잘못 드는 사람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관점이겠느냐? 이는 가장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는 실제적인 사역을 하겠느냐? 그는 실제적인 사역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사역을 남이 하도록 안배하고 자신은 관직에 올라 고관 행세나 할 뿐이다. 남이 사역을 다 완성하면 그 사역은 그가 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남의 공로를 모두 자신에게 돌린다. 그는 지위의 복만 누린다. 하나님 집 사역에 이로운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며,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거나 맡은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저 몇 마디 격려의 말로 위로나 좀 할 뿐 폭로하거나 제약을 가해 남에게 미움을 사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 남들이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 때문에 저는 애간장이 타고 혀에는 굳은살이 박힌 데다가 힘들어서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에요. 다들 제 속을 너무 썩이시네요!” 이런 말을 하다니 그는 뻔뻔하지 않으냐? 듣기에 역겹지 않으냐? 이것이 바로 늘 사람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지닌 적그리스도의 모습 중 하나이다. 이런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사람과 교제하겠느냐? 예를 들어,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저 아랫사람들은 말도 안 듣고 교회 사역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건성으로 하는 데다가 하나님 집의 재물도 아무렇게나 막 써요. 이런 사람들은 정말 짐승이에요. 짐승만도 못하다고요!” 이 무슨 말투란 말이냐? 그는 자신은 배제시켰다. 이는 “나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지만 저들은 고려하지 않아요.”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을 누구라고 여긴 것이겠느냐? ‘홍보 대사’로 여긴 것이다. 홍보 대사란 무엇이냐? 일부 국가에서는 어떤 사람이 홍보 대사가 되느냐? 미인 대회에서 선발된 사람들이다. 그녀들은 외모가 아름답고 말솜씨가 뛰어난데, 모두 훈련을 거친 것이고 키 크고 부유하며 잘생긴 사람이나 고위 관료, 부유한 상인과 남몰래 내통하고 왕래하기 때문에 홍보 대사가 된 것이다. 그녀들은 어떻게 홍보 대사가 되었겠느냐? 단순히 용모와 몸매, 말솜씨가 뛰어나서 홍보 대사가 되었겠느냐? 주로 배후의 관계 덕분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다. 늘 지도자나 가장의 분위기를 풍기는 적그리스도는 늘 그런 분위기와 모습으로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려 한다. 이 역시 어느 정도 홍보 대사의 ‘풍모’를 가진 것 아니겠느냐? 그는 뒷짐지고 서서는 형제자매가 그에게 굽실거리면 이렇게 말한다. “좋아요, 열심히 하세요!” 그는 무슨 자격으로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그는 자신을 어떤 위치에 놓은 것이냐? 나는 어디에 가도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어본 적 있느냐? (없습니다.) 나도 가끔은 “너희가 안심하고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이 기회는 흔치 않다! 너희는 악을 행하거나 교란하여 쫓겨나지 말고 이 기회를 잘 붙잡아 본분을 잘 이행해라.”라고 말하긴 하지만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이겠느냐? 진심이다. 그러나 과연 적그리스도가 그렇게 생각하겠느냐?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그렇게 행동하지도 않는다. 그는 남에게 열심히 하라고 하는데, 그 자신은 과연 열심히 하겠느냐? 그는 열심히 하지 않는다. 그는 남에게 열심히 하라고 하고 그를 위해 목숨 바쳐 일하며 힘쓰라고 하지만 결국 모든 공로는 그의 것이 된다. 그럼 지금 너희는 본분을 이행할 때 나를 위해 목숨 바쳐 일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는 나를 위해 힘쓰는 것도 아니다. 너희는 자신의 본분과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 집에서 너희를 먹여 살리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먹여 살린다고 하면 지나친 말이겠느냐? (지나친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해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도 정말 그렇다. 하지만 내게 그렇게 말하라고 해도 나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은 도저히 꺼낼 수 없다. 그저 하나님 집에서 너희를 먹여 살린다고, 너희가 하나님 집에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이 너희를 먹여 살린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 너희는 누구를 위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겠느냐? (자신입니다.) 너희는 자신의 본분과 의무, 자신이 다해야 할 피조물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다. 절대 나를 위해 일한다고 말하지 마라. 난 필요 없다. 난 나를 위해 일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난 사장도 아니고 회사의 총재도 아니다. 난 너희의 돈을 벌지 않고 너희도 내게 기대어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너희가 깨닫고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게 내가 교제해야 할 진리를 너희에게 교제해 주면 나는 마음이 놓이고, 그로써 내 책임과 의무를 다한 것이다. 서로 협력하고 각자 맡은 바 역할을 다하는 것이지, 누가 누구에게 이용당하고 쓰인다거나 누가 누구를 먹여 살린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 태도를 취하지 마라. 쓸모없고 역겹다. 네가 정말로 사역을 제대로 해내면 모두가 알게 되고 결국 너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적그리스도가 과연 이렇게 이성적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는 책임을 좀 짊어지고 공로를 좀 세우고 예전에 일을 좀 처리했다면 그것을 자랑한다. 홍보 대사가 되려는 듯 그야말로 역겨울 정도로 자랑한다. 홍보 대사가 되려 하지 않고 실제적으로 사역을 좀 한다면 다들 너를 어느 정도 존중할 것이다. 홍보 대사 같은 태도를 취하지만 세부적인 사역을 전혀 하지도 못해 무슨 사역을 하든 상부를 걱정시키고 상부에서 직접 지시하면서 뒤따라 감독하고 지도하게 한다면, 모든 사역은 다 상부에서 하는데도 자신에게 재능과 능력이 생겼으며 모든 사역을 자신이 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수 있다. 정상인은 몇몇 일을 겪고 나면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닫고 ‘나는 자질이 너무 떨어지고 아무것도 아니구나. 상부에서 신경 쓰고 감독하거나 일일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못해. 그야말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이제야 나를 좀 인식할 수 있게 됐어. 내 주제를 알게 됐으니 앞으로 상부에서 또 책망하고 훈계하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순종해야겠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주제를 알고 나서 성실하고 착실하게 자신의 본분 내 사역을 하고 상부에서 분부하는 일은 마음과 힘을 다해 제대로 한다.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하겠느냐? 그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집의 이익도, 하나님 집의 사역도 고려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의 최대 이익은 무엇이겠느냐? 교회의 재산이겠느냐? 하나님의 제물이겠느냐? 아니다. 그럼 무엇이겠느냐? 모든 사람은 어떤 사역을 둘러싸고 본분을 이행하겠느냐? 인류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게 돌아오도록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집의 최대 이익이다. 최대 이익은 각 팀과 여러 사역으로 분리되어 나온 뒤 다시 각자 이행하는 다양한 본분으로 세분된다. 이게 바로 하나님 집의 이익이다. 알고 있었느냐? 알지 못했다! 내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언급하면 너희는 그것이 돈, 집, 차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무슨 이익이란 말이냐? 물질적인 것들일 뿐이 아니냐? 그렇다면 “그런 것들은 이익이 아니니 함부로 써 버리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느냐? 그래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된다! 제물을 함부로 쓰는 것은 중죄이다.

적그리스도는 사람을 통제하려는 욕망과 야심을 지닌 것 외에 또 무엇에 관심을 갖겠느냐? 기본적으로 없다. 다른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적그리스도는 각자가 이행하는 본분이 적절한지, 인사 배치가 적절한지,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은 없는지, 교회의 여러 사역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지, 어떤 부분에 문제가 생겼는지, 어떤 부분이 취약한지, 어떤 부분을 아직 생각지 못했는지, 어떤 사역이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등과 같은 일은 신경 쓰지도, 참견하지도 않는다. 이런 것에 절대 관심을 갖지 않고, 이런 세부적인 사역을 절대 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번역, 영상, 영화, 문서, 그리고 복음 전파 등의 사역 중 어느 하나도 진지하게 체크하지 않는다. 그의 명예나 이익, 지위와 관련이 없다면 모두 그와 관련이 없는 듯하다. 그럼 그는 오로지 무엇만 하겠느냐? 사무적인 사역이나 좀 하고, 남들이 중시하거나 남들 눈에 띄는 표면적인 사역이나 좀 완수한 다음 그걸 가지고 유세를 떨고 지위의 복을 누리기 시작한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관심을 갖겠느냐? 그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는 오직 그의 명예와 지위, 어떤 일들에서 자신을 드러내어 남들에게 우러름과 숭배를 받을지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교회 사역에 무슨 문제가 발생하든 신경 쓰거나 묻지 않고,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든, 하나님 집의 이익에 얼마나 큰 손해를 입히든 그는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런 그에게 마음이 있긴 하겠느냐? 이런 사람이 충성심이 있는 사람이겠느냐?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겠느냐? 이런 것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럼 그는 매일 무엇을 하길래 교회 사역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이겠느냐?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이 맡긴 실질적인 사역은 하지 않으면서 외부의 일부 사무적인 사역만 하느라 바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역을 한 것 같아 보이고, 겉으로는 본분을 이행하느라 분주하며 열성과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이 일부 사람의 눈을 가렸지만 그는 교회의 실질적인 사역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양육하고 진리를 공급하는 사역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절대로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저 사무적인 사역만 좀 할 수 있고 체면이 서는 일만 좀 하며 교회의 실질적인 사역은 그저 건성으로 하고 책임지지 않는데 책임감이라고는 전혀 없다. 문제가 얼마나 많이 발생하든 전혀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고, 본분을 대할 때는 대강대강 한다. 그리고 표면적이고 사무적인 사역만 좀 하고는 실제적인 사역을 했다고 생각한다. 적그리스도는 본분을 이행하는 기간에 제멋대로 못되게 굴고 독단적이며, 교회 사역을 엉망진창에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합격하거나 잘못되지 않는 사역은 하나도 없고, 어떤 사역이든 다 상부에서 개입하고 관여하고 감독해야 잘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교체되고 나서는 마음속에 원망을 가득 품고 불복하며 자신을 위해 궤변을 늘어놓고 책임을 상급 리더 일꾼에게 떠넘기는 사람도 있다. 어처구니없지 않으냐?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때는 사람이 진리를 대하는 진실한 태도를 볼 수 없다. 책망과 훈계가 닥쳐 교체될 때는 사람이 진리를 대하는 진실한 태도가 드러난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이 틀렸으면 잘못을 인정하고 사실을 마주하며 진리를 받아들인다. 반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설사 그의 잘못이 드러나더라도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집의 처분은 더더욱 받아들이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이유를 대는 사람도 있겠느냐? ‘저는 잘하고 싶었는데 잘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지금 잘하지 못했다고 해서 저를 탓하시면 안 되죠. 제 의도는 좋았잖아요. 전 고생도 하고 대가도 치렀어요. 헌신도 했다고요. 제가 악을 행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런 이유와 핑계를 대며 하나님 집의 처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이게 적절하겠느냐? 어떤 이유와 핑계를 대든 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를 숨길 수는 없다. 이는 사람의 본성 본질과 관련된 문제로, 문제를 가장 잘 보여 준다. 일이 닥치든 닥치지 않든 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네 본성 본질의 상징으로, 바로 네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다. 네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네가 진리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방금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통제하는 측면의 모습을 다뤘는데 어떤 내용을 다루었느냐? (적그리스도는 사람을 통제하는 데만 관심을 가집니다.) 맞다. 특히 교만하고 지위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을 통제하는 데 충분한 ‘관심’을 갖고 있다. 이 ‘관심’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야심이며, 부정적인 것이자 나쁜 의미가 담긴 것이다. 그들은 왜 사람을 통제하는 데 관심을 갖겠느냐? 객관적으로 말하면 그건 본성인데, 또 다른 측면의 원인이 있다. 바로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지위, 명예와 이익, 허영, 그리고 권력에 특수한 갈망과 감정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런 특수한 갈망과 감정은 사탄과 비슷하지 않겠느냐? 이는 사탄의 본질이 아니겠느냐? 사탄은 하루 종일 어떻게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할지 궁리한다. 매일같이 사람에게 일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주입하는데, 주입하고 교육하는 방식을 쓰기도 하고, 전통 문화를 이용하기도 하며, 일부 과학이나 심오한 지식, 혹은 학설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런 것들을 주입할수록 사람은 그런 것들을 점점 더 숭배한다. 사탄이 사람에게 그런 것들을 주입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주입하고 나면 사람은 사탄의 생각과 철학, 생존 방식을 갖게 된다. 그러면 사탄이 사람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람이 사탄에 기대어 살아가게 되고,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사탄이 살아가는 것이자 마귀가 살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렇지 않겠느냐?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통제하는 것 역시 이런 성질이 아니겠느냐? 그는 모든 사람을 그와 똑같은 사람으로 바꾸고 싶어 한다. 모든 사람이 그를 위해 살아가고 쓰이며 일을 처리하게 하려 할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 다 자신이 통제하려 한다. 사람의 생각, 하는 말, 말하는 방식, 사상 관점, 행동하는 관점이나 태도, 나아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나 믿음, 그리고 본분을 이행하려는 의지나 뜻까지 통제하려 한다. 어느 정도까지 통제하겠느냐? 그는 우선 사람을 세뇌하고 교화한 다음 사람이 그와 똑같이 행동하게 한다. 그렇게 그는 ‘교부(敎父)’가 된다. 적그리스도는 사람을 이렇게 바꾸기 위해 미혹하고 주입하고 공갈하는 등 다양한 방식을 쓴다. 또 어떤 방식이 있겠느냐? (마음을 공략합니다.) 그건 미혹에 해당한다. 또 있느냐? (협박하고 회유합니다.) 어떻게 회유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 제멋대로 못되게 구는데, 적그리스도가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느냐? 그는 아주 잘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럼 그가 그것을 처리하느냐? 그는 처리하지 않는다. 그럼 그는 왜 처리하지 않겠느냐? 그는 그 일을 통해 사람을 회유하려 한다. 그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처리하지 않은 건 제가 당신에게 좋은 일을 해 준 것이니 당신은 제게 감사해야 해요. 당신이 나쁜 일을 저지르는 걸 봤지만 난 보고하지도, 당신을 처리하지도 않고 당신의 사정을 봐 줬어요. 앞으로 제게 감지덕지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 사람은 그에게 감사하며 그를 은인으로 삼고, 둘은 한통속이 된다. 권력을 잡고 있는 기간 동안 적그리스도는 악을 행하는 자, 하나님 집의 이익을 해치는 자, 뒤에서 하나님을 판단하는 자, 뒤에서 훼방을 놓는 사람을 회유한다. 그는 이런 악인 무리를 옹호한다. 이는 일종의 통제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실, 적그리스도 역시 마음속으로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들은 서로 마음속으로 다 알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하니 그것은 한통속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피차일반이야. 당신이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속이듯 나도 하나님을 속여. 당신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듯 나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적그리스도는 이런 사람들을 회유한다. 이는 회유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 집의 이익이 손해를 보게 하는 것도 불사한다.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이런 사람들이 제멋대로 못되게 굴며 하나님 집에서 대충대충 살아가게 내버려 둔다. 마치 그가 이런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라도 하듯 말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에게 감사한다. 하나님 집에서 이런 악인들을 처리할 때가 되면 그들은 적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에이, 그는 벌써 교체됐어. 그가 교체되지 않았더라면 며칠 더 누릴 수 있었을 텐데. 그가 보호해 주었다면 아무도 나를 처리할 수 없었을 거야.’ 이들은 마음속으로 여전히 적그리스도를 그리워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적그리스도가 하는 이런 일들은 모두 방해하고 교란하거나 사람을 미혹하는 일이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행임을 알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런 악행을 증오하지 않는 데다가 감싸기까지 한다. 예를 들어, 일부 리더는 적그리스도를 비호하는데, 상부에서 그에게 교회에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이나 제멋대로 못되게 구는 사람, 사람을 미혹하는 적그리스도가 있는지 물으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제가 확인해 드릴게요.” 이는 그의 본분 내 사역이 아니냐? 그는 “제가 확인해 드릴게요.”라는 말투로 네게 대충 답하고 넘어간 뒤 아무 소식도 없다. 그는 확인해 보지 않는다. 그가 그런 사람들의 미움을 살 리 없다! 네가 다시 그에게 “확인해 봤어요?”라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확인해 봤는데요, 없었어요.” 정말 없었겠느냐? 그가 바로 가장 큰 적그리스도이다. 그는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해치는 장본인이다. 그 자신이 적그리스도인데 확인하긴 뭘 확인한다는 말이냐? 그가 있는 한 아랫사람들이 무슨 나쁜 일을 저지르는지, 어떻게 방해하고 교란하는지 아무도 확인해 보지 않는다. 그가 못 하게 막는 것이다. 이 말은 이런 상황에서 그의 아랫사람들은 그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그로 인해 단절된다. 그럼 그로 인해 단절되면 그 사람들은 누구를 따르겠느냐? 그를 따르지 않겠느냐? 그는 악질 토호이자 도적, 지방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 사람들을 통제한다. 이는 어떤 방식이겠느냐? 상부를 기만하고 아랫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아랫사람을 회유하고, 상부를 기만한다. 아래의 상황을 상부는 모르게 하고 상부에는 말하지도 않고 허상까지 만들어 낸다. 어떤 허상을 만들겠느냐? 그는 상부에 이렇게 말한다. “저희 교회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형제자매가 다들 그가 인성이 좋지 않고 아주 악랄한 데다가 본분도 이행하지 못한다고 하네요. 처리할 수 없을까요?” 그 사람의 모습에 대해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악인임이 틀림없고 처리해야 했다. 그래서 상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처리해도 되죠. 처리를 했나요?” 그러자 그는 말한다. “저희가 지난달에 그를 처리해서 제명했어요.” 그의 말이 정말 사실이겠느냐? 자세히 알아보니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그 사람이 그와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잘 맞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그놈이 실제적인 사역은 하지 않고 늘 형제자매 사이에서 편 가르기나 하며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서 그를 분별한 그 사람이 그의 그런 문제점을 보고하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보고했다는 사실이 그 수하의 한 패거리에게 발견되어 그 사람은 그에게 괴롭힘당하고 제명된 것이다. 이 적그리스도는 아래에서 물밑 작업을 다 벌인 뒤 다들 들고일어나 그 사람을 반대하고 버리게 만들어 결국 그 사람을 제거하고 제명해 버렸다. 그런 다음 상부에 ‘희소식’을 알리기까지 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과 다르다. 이런 일이 교회에 있지 않겠느냐? 있다. 이런 적그리스도들은 형제자매를, 그들을 분별할 줄 알고 그들의 문제점을 보고하는 사람을, 그들의 본성 본질을 꿰뚫어 보는 사람을 억압할 뿐 아니라 적반하장으로 그 사람들이 교란한다고 상부에 보고한다. 하지만 실제로 교란하는 자는 누구겠느냐? 교회를 교란하고 통제하는 것은 적그리스도들이다.

적그리스도는 사람을 순종하도록 할 때 어떤 수단을 쓰겠느냐? 그중 하나는 다양한 방식으로 너를 통제하는 것이다. 바로 너의 생각과 행동 방식, 걷는 길을 통제하고, 나아가 수중의 권력으로 네가 이행할 수 있는 본분을 통제한다. 네가 그를 가까이하면 그는 네게 수월하고 체면이 서는 본분을 주는 반면, 네가 늘 그를 순순히 따르지 않고 그의 결점을 지적하고 그의 패괴 문제를 폭로하면 그는 네게 사람이 싫어하는 일을 안배한다. 예를 들어, 젊은 자매에게 더럽고 힘든 일을 시킨다. 그를 가까이하고 그에게 아첨하며 늘 그의 말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수월하고 깨끗한 일을 안배한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고 통제한다. 즉, 인사권이나 인사이동권, 누가 무슨 일을 할지에 대해 모두 그가 관리하고 그 홀로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단지 야심과 욕망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이는 마침 적그리스도의 여덟 번째 모습인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에 부합하지 않느냐?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는 무슨 뜻이겠느냐? 이런 모습은 무엇이 잘못되었겠느냐? 어디가 잘못되었겠느냐? 그가 사람에게 순종하도록 하는 것은 모두 진리를 위배하는 것,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전부 하나님 집의 이익과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고 진리에 부합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가 순종하도록 하는 것은 모두 그 개인의 야심과 욕망, 기호, 취미, 관념이다. 이는 본질이 아니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가 가진 본질의 한 모습이다. 이는 요점을 짚은 것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이런 행동 방식을 쉽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리더 일꾼은 정확하고 올바른 관점을 제시했을 때 불복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올바른 관점을 계속 관철하고 실행해 나갈 수 있다. 이런 모습은 적그리스도의 행동 방식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둘의 행동 방식은 겉으로 보면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르다. 적그리스도는 일부러 진리와 하나님 집의 사역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고, 하나님 집을 위해 본분을 이행한다거나 진리에 순종한다는 명목으로 남들이 그를 따르게 한다. 이는 지나치고 황당할 정도로 잘못되었다. 반면 일부 리더 일꾼은 올바른 관점을 고집한다.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고집해야 한다. 이는 교만하고 독선적이거나 사람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고집하는 것이다. 두 가지 행동 방식은 겉으로 보면 비슷하지만 본질은 다르다. 하나는 진리 원칙을 고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된 관점을 고집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은 모두 진리에 위배되고 진리를 적대하는 것으로, 전부 그 개인의 야심과 욕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핵심이다. 우리가 방금 말한 것은 기정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욕망과 야심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일부 사람들은 적그리스도가 하려는 일을 눈에 띄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이나 모습이 있다는 것은 그가 그런 욕망과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무리에 가든 그는 늘 감투라도 쓴 것처럼 사람을 지휘하려 한다. “당신은 가서 밥을 하세요!”, “당신은 가서 누구누구에게 알리세요!”,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세요. 충성을 다하라고요. 하나님이 보고 계시잖아요!” 이런 말을 네가 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게 무슨 말투란 말이냐? 네가 누구길래 주인 행세를 한다는 말이냐?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감히 그렇게 말하다니, 이는 비이성적인 것 아니겠느냐? “그자는 멍청이예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자는 보통의 멍청이가 아니라 특별한 멍청이다. 무엇이 특별하겠느냐? 그는 누구와 어떤 일을 논쟁하거나 상의할 때 결국에는 옳든 그르든 항상 우위를 점하려 하는데, 옳든 그르든 자기가 정하고 직접 결단하고 의사 결정을 내리려 한다. 그는 자신의 지위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의사 결정을 내리려 한다. 다른 사람이 올바른 의견을 내놓아 우위를 점하면 그는 화를 내면서 일에서 손을 떼고 할 일을 내팽개친다. 나자빠지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 마음대로 떠들라고. 어차피 내 말은 듣지도 않을 테니!” 그는 이런 야심과 욕망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이 주인이나 책임자, 또는 리더가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느냐? 그런 사람은 전형적인 적그리스도가 된다. 너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지 않으냐? 그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는 얻지 못하고 되레 적그리스도가 된다면, 이는 큰 재앙이 닥친 것 아니겠느냐?

이방인은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겠느냐? 사람과 접촉할 때 그는 우선 사람의 외모와 옷차림을 보고, 사람이 하는 말을 들을 때 그는 늘 사람이 내면에 지식을 갖추고 있는지 확인하려 한다. 만약 네 겉모습이나 생김새, 옷차림이 별로 좋지 않고 소양이나 지식도 뛰어나지 않으면 그는 너를 무시하고 너와 말할 때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 나는 “그러고 싶으면 네가 다 말하거라.”라고 말하고 아무 말 없이 참고 양보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다 내 말을 듣고 어디에 가든 다들 내 말을 듣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기회를 찾아 다른 사람이 말을 많이 하게 하려 하는데, 다들 자신의 마음의 소리, 자신 내면의 어려움, 자신의 인식을 말하게 하려 한다. 듣다 보면 일부 오류와 사람이 가진 문제점이나 결함, 사람이 걷는 길에 나타난 문제점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나는 교회 어느 측면의 사역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어떤 문제가 있으며 해결할 필요가 있는지 등에 중점을 두고 듣는다. 만약 한 가지 일을 논의할 때, 예를 들어 내가 이 컵은 종이로 만들었다고 말했는데 네가 한사코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래, 네 말이 맞다.”라고 말하며 너와 다투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당신 말씀이 맞는데 왜 다투지 않으시죠?’ 그건 어떤 일인가에 따라 다르다. 만약 진리에 관련된 일이라면 너는 당연히 내 말을 따라야 하지만 외부의 일이라면 너희가 뭐라고 하든 나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건 나와 무관한 것이다. 그런 일을 다퉈 봤자 아무 소용없다. 또 어떤 사람이 나라에 관한 일을 논의하면 나는 “내가 알기로 그 일은 이렇다.”라고 말한다. 앞에 “내가 알기로”를 덧붙인 것은 어느 정도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들어 그 일을 설명하면서 “지금은 이런 상황인데 일부 특수한 상황은 나도 잘 모른다.”라고 말한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로 그 일을 평가할 수밖에 없지만, 아는 게 많다고 자신을 과시하는 게 아니다. 나는 단지 네게 참고할 만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뿐이다. 난 너보다 높은 위치에 서서 너를 억누르며 내가 아주 뛰어나다고, 난 모든 걸 알고 넌 아무것도 모른다고 네게 알도록 하려는 게 아니다. 난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나와 채팅할 때 내가 그는 모르는 일을 좀 말하면 “하루 종일 두문불출하는 당신이 뭘 아세요?”라고 말한다. 그는 알지도 못하면서 나와 다투고 나를 이기려 든다. 그러면 난 이렇게 말한다. “맞다. 난 두문불출한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는 알고 있다. 나는 그냥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는 것뿐이다. 믿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하면 된다.” 이게 다툴 일이겠느냐? 이건 성품이다. 어떤 사람은 외부의 일 하나를 가지고도 우열을 가리려고 한다. “당신이 어떻게 이 일을 아세요? 왜 나는 모르죠? 당신은 그렇게 잘 얘기하시는데 나는 왜 말을 못할까요?” 예를 들어, 나는 “몇 년간 여기서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이곳 기후의 특징은 꽤 습하다는 거다.”라고 말한다. 이는 오랜 기간 머물면서 보고 들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듣자마자 “정말 당신 말씀처럼 그런 건가요? 저는 습한 것 같지 않은데요?”라고 말한다. 네가 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넌 네 느낌을 근거로 삼을 게 아니라 데이터를 근거로 삼아야 한다. 매일 일기 예보가 아주 상세하게 날씨를 알려 주니 많이 보다 보면 이곳이 확실히 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상상한 것도, 느낌대로 말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렇겠느냐? 담벼락 밑의 응달진 곳에 일년 내내 푸른 이끼가 끼어 있고 봄철에 어떤 곳은 너무 미끄러워서 걸을 수 없을 정도다. 이는 경험하고 겪은 것이고 직접 눈으로 본 것이며 몸소 체험하고 느낀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건 사실에 위배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나와 말할 때 이런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내가 여기가 습하다고 해도 그는 한사코 습하지 않다고 우기는데, 이는 바보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말들은 터무니없이 상상한 게 아니라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실제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왜 상상한 것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네가 사소한 부분을 낱낱이 명확하게 말하고 나서 사람들이 직접 보고 체험하면 네가 한 말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말은 정확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확한 말에 대해서도 늘 논쟁하고 나와 말할 때 이런 식으로 다투는 사람도 있다. 그는 무엇을 다투려는 것이겠느냐? 이판사판으로 너 죽고 나 죽자는 것이겠느냐? 그게 아니라 그는 누가 더 많이 아는지를 다투려는 것이다. 그는 그저 다투는 걸 좋아하는 것이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건 일종의 성품이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그를 폭로하고 그와 얼굴을 붉히며 다툴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무지한 사람과 다투는 건 쓸데없다. 격이 떨어지니 그에게 양보하면 그만이다. 그게 좋지 않겠느냐? 그런 멍청이와 다퉈서 뭐 하겠느냐? 진리에 관한 일을 깨닫지 못해서 논쟁하고 토론한다면 괜찮겠지만 외부의 일 때문에 다툰다면 무지한 것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성품은 주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진리는 말할 필요도 없고 옳은 말, 사실에 부합하는 의견이나 주장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연구하고 네게 따지고 논쟁하려 든다. 이는 성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교만한 것이다. 그의 뜻은 이러하다. ‘당신은 진리를 좀 깨달은 것뿐이잖아요? 외부의 일은 모르실 테니 제 말을 들으시라고요! 화나니까 아무렇게나 얘기하지 마세요. 이건 당신이 관리하시는 일이 아니에요. 당신의 본연의 일이나 진리를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당신 말을 따를 거예요. 하지만 외부 일에 대해선 얘기하지 마세요. 잠자코 있으시라고요! 당신도 이 일을 접해 보시지 않았으면서 뭘 아시겠어요? 당신은 제 말을 따르셔야 해요!’ 그는 무슨 일이든 남들이 그를 따르게 하고 상대방이 누군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모든 사람을 정복하려 한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조금이라도 이성이 있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가 보기에 나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울리기에 쉽겠느냐, 아니면 어렵겠느냐? (어울리기에 쉽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차렸느냐? 왜 어울리기에 쉽다고 하겠느냐? 내가 말해 볼 테니 내 ‘설명’이 옳은지, 정확한지 너희가 한번 살펴보거라. 첫 번째, 내 이성은 정상이다. 여기서 정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어떤 일을 바라보든 그 기준이나 각도가 정확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각종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주장, 혹은 각종 일을 대하는 태도 역시 정상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정상이다. 최소한 정상 인성의 기준에는 부합한다. 두 번째, 진리로 자신을 단속한다. 이는 정상 이성이 최소한 갖춰야 하는 두 가지 측면이다. 그 밖에 내가 어울리기에 쉬워 보이는 이유는 내가 각 부류의 사람을 대하는 나름의 척도를 가지고 있고 그 기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리더나 평범한 형제자매, 노인이나 젊은이, 자신을 과시하는 교만한 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나 있는 사람 등 각 부류의 사람을 대하는 각각의 척도와 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척도와 방식의 핵심은 무엇이겠느냐? 제멋대로 구는 것이 아니라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다. 가령 네가 대학생이라면 우러러보고 농민이라면 무시한다면 이는 원칙이 아니다. 그럼 무엇을 통해 이런 원칙을 파악하겠느냐? 사람의 자질과 인성, 이행하는 본분, 하나님을 믿는 믿음, 진리를 대하는 태도 등 여러 측면을 종합해 한 사람을 바라본다. 내가 어울리기에 쉬워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아마 많은 사람이 관념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은 지위가 있으신데 왜 지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 당신은 겸손하고 거들먹거리지도 않으셔. 사람들은 아마 마음속으로는 당신을 우러러볼 텐데 어째서 직접 당신을 볼 때는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게 딱 맞고 심지어 내려다봐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어울리기 쉽다고 생각해 긴장을 푼다. 그렇지 않겠느냐? 바로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어울리는 게 좋다고 느낀다. 너희가 보기에 내가 만약 모든 방면에서 너희를 억누르고 괜히 너희를 책망하며 하루 종일 굳은 얼굴로 너희를 비판하고 꾸짖는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겠느냐? 너희는 ‘당신은 참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이셔. 성격도 별나고 너무 변덕스러우셔!’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면 쉽게 어울리지 못한다. 나의 모든 측면, 성격과 희로애락이 너희가 보기에 정상이기 때문에, 게다가 너희는 마음속으로는 신분과 지위가 높다면 대단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너무도 평범하기 때문에 경계를 풀고 나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 밖에, 너희가 보기에 내가 말할 때 관료적인 말투를 쓰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관료적인 말투를 쓰지 않는다. 너희가 깨닫지 못하면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최대한으로 돕지 너희를 비웃는 일은 거의 없다. 왜 거의 없다고 하겠느냐? 가끔은 몹시 화가 나 부득이하게 한두 마디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나약해질 것을 고려해 가급적 그런 말은 하지 않고 포용하고 이해하며 인내한다. 너희를 도울 수 있으면 최대한 돕고 가르칠 수 있으면 최대한 가르친다.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한다. 왜 그렇게 하겠느냐? 왜냐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진리를 깨닫는 일에서 몹시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향락을 좇으며 세월을 보내거나 외모를 가꾸거나 게임을 하는 등 세속적인 일에 대해서는 특히 잘 알지만, 하나님을 믿는 일이나 진리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얘기만 하면 멍해진다. 하나님을 증거하거나 자신의 전공과 강점, 은사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역을 하는 얘기, 또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작품을 만드는 얘기만 하면 바로 말이 없어진다. 나는 이런 상황을 보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가르치고 하나하나 지도해야 한다. 온 힘을 다해 가르쳐야 하는데, 내가 깨닫고 있거나 알고 있거나 할 줄 아는 것을 골라 가르쳐야 한다. 계속해서 가르치다 보면 작품 하나가 완성된다.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건 최대한 가르치고 가르칠 수 없거나 가르칠 줄 모르는 건 너희가 아는 데까지 알면 된다. 모든 걸 순리에 맡기고 너희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결국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문외한에게 제압당했어요. 할 줄 아는 우리는 아무 일도 못 했고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늘 우리를 가르쳐야 하다니 너무 창피해요!” 이는 창피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건 모든 인류에게 생소한 일이다. 사람이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증거할 줄 안다면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사탄의 부류이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본성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나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에 관련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사람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그만이다. 내가 돕고 지도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면 도울 것이고, 그럴 에너지가 없거나 다른 일 때문에 틈이 나지 않는다면 너희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면 된다. 이는 원칙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럴 수밖에 없다.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지 않겠다. 그렇게 해 봤자 소용없다. 그 일을 이룰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은 어울리기에 쉬워요. 당신의 요구는 충족하기 쉽고요. 저희는 당신이 알려 주시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겠어요.’ 가끔 책망당하는 사람도 있는데 책망받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은 올바르게 이해해 괜찮지만, 일부는 일을 팽개치고, 일부는 뒤에서 교란하면서 본분도 잘 이행하지 않고 실제적인 사역도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교체된다. 하기 싫으면 내려가라. 반드시 너를 써야 할 이유가 있느냐? 사람을 바꾸면 그만이다. 아주 간단하지 않으냐? 앞으로 그가 회개하고 변해서 잘할 수 있게 되면 다시 기회를 주고, 계속 그렇게 방해하고 교란하면 영영 쓰지 않는다. 말 잘 듣는 사람을 쓰는 게 낫지 그와 계속 얽혀서 뭐 하겠느냐? 그렇지 않으냐? 그러면 그도 힘들고 나도 피곤하다. 이런 일을 처리하는 데도 원칙이 있고 사람과 어울리는 데도 원칙이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사람과 어울릴 때 사람에 대한 요구가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경우,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라. 할 수 없는 것은 내가 하나하나 네게 가르쳐 줄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할 수 있으면 다해라. 하지만 네가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어떻게 믿는지는 너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결국 얻지 못한다 해도 너는 아무도 원망해선 안 된다. 사람을 대하는 내 원칙이 어떠냐? 약간 사람을 내버려두는 느낌이 들지 않느냐?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이렇게 처리하는 건 분명 원칙에 부합한다. 어떤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내가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너희도 바로 깨달을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은 인성으로 사역하는데, 사역할 때 성령, 하나님의 영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러니 나는 하늘의 하나님을 대신해 모든 사역을 하겠다고 거들먹거려서는 안 된다. 그건 함부로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다.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된다. 할 수 있는 것을 완전하고 제대로 해내고 내 마음과 온 힘을 다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게 바로 내 본연의 사역이다. 그러나 내가 이런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 사실에 불복하고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늘 자신을 드러내고 눈에 띄려 하거나 과시하려 한다면 그것이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너희 생각에 내가 이 일을 알고 있겠느냐? 아주 잘 알고 있다! 육신이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있는 사역의 범위가 바로 하나님이 육신으로 하는 사역의 범위이다. 이 범위 외에 사람이 뒤에서 겪는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 성령의 깨우침과 인도, 나아가 하나님이 준 이상(異象), 그리고 하나님이 앞으로 어떤 사람을 온전케 하고 어떤 사람을 도태시킬지,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어떤 관점이나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하나님 자신의 일이다. 너희가 나와 가까이 접촉한다면 나도 이런 것들을 볼 수 있겠지만 아무리 본다고 해도 얼마나 볼 수 있겠느냐? 볼 수 있는 사람도, 접할 수 있는 사람도 제한적인데 모든 사람을 다 포괄하는 게 가능하겠느냐? 불가능하다. 너는 이 일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가 보기에 나는 이 일을 명확히 알고 있느냐? 나는 명확히 알고 있다. 이는 정상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나는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그럴 수 없다. 사람은 그럴 수 있을 만큼 이성적이지 않다. 내게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늘 뒤에서 일을 알아보고 다니시는 거 아니에요? 누가 뒤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뭐라고 당신을 험담했는지, 아니면 뒤에서 당신을 어떻게 판단하고 당신의 무엇을 연구했는지 묻고 다니시는 거 아니에요?” 솔직히 말해 주겠다. 난 결코 그런 일들을 묻고 다니지 않는다. 그럼 그런 일들은 누가 책임지겠느냐? 하나님의 영이 책임진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감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온 땅을 감찰하고 사람의 마음을 감찰한다. 하나님이 감찰한다는 것도 믿지 못한다면 너는 이성이 비정상적인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잘못된 위치에 선 것으로,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난 너희가 하나님을 믿기를 바라고, 마음속으로 이 일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 따라서 내 말과 행동은 모두 이를 기반으로 한다. 난 분수에 넘치는 일이나 내 능력 범위 밖의 일은 하지 않는다. 이는 성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런 신분과 지위, 권력을 가진 내가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궁금해한다. 그는 내가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파악하고 있어야 더 높은 신분과 지위, 더 뛰어난 능력과 더 많은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이나 능력은 하나님이 내게 준 만큼 가질 수 있는 것이지 내가 쟁취하거나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권력과 능력, 전능은 작은 육신 하나로 대표할 수 없다. 이 일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면 네 이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 아직도 이 문제를 간파하지 못한다면 몹시 무지몽매한 것이다. 나는 많은 일을 물어보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다 알고 있지 않겠느냐?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알고 있겠느냐? 모든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겠느냐? 모든 사람이 각자 하나님을 몇 년씩 믿었는지 알고 있겠느냐? 이런 것들은 알 필요 없다. 모든 사람의 내적 상태를 알고 있으면 그만이다. 모든 사람이 무엇이 모자라는지, 생명 진입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모든 사람이 어떤 진리를 들어야 하는지, 모든 사람을 어떤 진리로 양육하고 모든 사람에게 어떤 진리를 공급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만 알면 충분하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본연의 일이 아니겠느냐? 해야 할 본연의 일, 즉 해야 할 말, 해야 할 사역을 알고 있다면 이성적인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이성은 어떻게 생긴 것이겠느냐? 성육신 하나님이 이 정도 이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만사 만물을 가늠하는 이 정도의 기준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진리를 얘기하겠느냐? 성육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과 싸우고 지위를 다툰다면 큰일이 난 것 아니겠느냐?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그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런 일은 절대 발생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늘 이렇게 걱정하며 말한다. “당신은 늘 뒤에서 저희에 대해 물어보고 연구하시나요? 하나님께서는 늘 저희가 마음속으로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바라보는지 추측하시나요?” 내가 왜 쓸데없이 그런 일들을 생각하겠느냐! 그런 것들을 생각해서 뭐 하겠느냐? 그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감찰 범위 안에 있다. 하나님의 영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 사역하고 성육신은 더더욱 일정한 범위 안에서 사역한다. 성육신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진리의 출구이자 선포이다. 이 단계에서 하는 사역은 이 단계를 대표할 뿐 전 단계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성육신 하나님은 이 시기와 이 범위 내의 사역만 할 수 있다. 그럼 다음 단계의 사역은 대표할 수 있겠느냐?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건 하나님의 일이다. 손을 길게 뻗지 않고 내 본연의 일을 하고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늘 거들먹거리며 “나는 전능하다! 나는 위대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하나님의 영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이 기간 동안 하려는 사역의 선포나 출구를 대표할 뿐 그가 사역하는 범위, 해야 할 사역은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 네가 “성육신한 그리스도는 전능해요.”라고 말한다면 이 말이 옳겠느냐, 아니면 틀리겠느냐? 반은 옳고 반은 틀리다. 하나님의 영은 전능하지만 그리스도가 전능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말해야 표준적이고 정확하며 사실에 부합한다. 나는 어떤 이성을 갖춰야겠느냐? 남들이 내가 하나님이라고, 내가 하나님 자신이라고, 내가 성육신이라고 한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영을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느냐? 그럴 수 없다. 설사 하나님이 내게 그런 권력과 능력을 준다고 해도 나는 대표할 수 없다. 내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은연중에 모독하는 것 아니겠느냐? 육신은 제약이 크디크다! 그렇게 인식해서는 안 된다. 이 주제는 그런 관점에서 다루면 안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런 생각과 이런 행사 원칙을 가지고 있고, 매사를 처리할 때 고려하는 사항이 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은 성육신 하나님이 하나님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접촉하지 않았을 때는 일부 환상과 상상, 관념을 가진 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하다가, 접촉하고 나서는 “그냥 사람일 뿐이잖아. 두려워할 게 뭐 있어.”라며 긴장을 풀고 간덩이가 커지며 제멋대로 못되게 군다. 이들을 뭐라고 하겠느냐? 불신파다. 만약 성육신만 믿고 하나님의 영은 믿지 않는다면 너는 불신파다. 하나님의 영만 믿고 성육신은 믿지 않는다면 너는 여전히 불신파다. 성육신과 하나님의 영은 하나이고 일체이다.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 분리되는 일은 더더욱 없으며 제각각도 아니다. 그 둘은 하나이다. 다만 성육신은 반드시 육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사역과 하나님을 대해야 한다. 이는 육신의 일이고 너희와는 무관하다. 이는 그리스도 자신의 일이고 인류와는 무관하다. 너는 “당신도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좋아요, 그럼 우리는 다 사람이고 다 똑같겠네요.”라고 말해선 안 된다. 그렇게 말해서야 되겠느냐? 그러면 문제가 생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당신은 꽤 어울리기 쉬운 사람 같네요. 그럼 그냥 편하게 지내요. 벗이나 친구처럼 대해요. 우리 지음(知音)이 됩시다. 벗이 되자고요.” 이래도 되겠느냐? 이런 자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자이자 불신파이다. 네가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수록, 진리나 사실, 진리 실제를 이야기할수록 그는 너를 무시하는데 이런 자는 불신파이다. 또, 네가 심오한 비밀이나 구호, 도리, 추상적인 것을 이야기할수록, 거들먹거리고 자랑하고 과시할수록 그는 너를 우러러보는데 이런 자 역시 불신파이다. 행동에 원칙이 있고 분수를 아는 사람, 행동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사람,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대할 때 명확하게 선을 긋고 분별하는 사람일수록 그는 미워하고 거들떠보지 않는데, 이런 자가 바로 불신파이다.

내가 사람과 접촉하고 사귈 때 누구와 얼마나 오래 사귀든 ‘그는 늘 나를 통제하려고 해. 그는 우리 집의 모든 일에 다 관여하고 늘 나를 정복하려고 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 나는 너를 정복하지 않는다! 너를 정복해서 뭐 하겠느냐? 너는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천천히 사색하며 진입하면 된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성령이 네게 역사하고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고 인도할 것이다. 반면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내 말에 늘 불복하며 내 말을 듣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려고 한다면 너는 결국 드러나게 되고 일을 처리할 때 늘 실수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는 어찌 된 일이겠느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감찰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 일은 너희가 스스로 경험하고 체험해야 한다. 내가 한 가지 일을 말했을 때 사람들이 동의하든 말든, 받아들이든 말든 성령은 지지하겠느냐, 아니면 상관하지 않겠느냐? (지지합니다.) 성령은 절대 훼방을 놓지 않고 틀림없이 지지할 것이다. 너희는 이 일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이 받아들이든 말든 언젠가 진실이 밝혀지면 모두가 “알고 보니 당신 말씀이 맞았어요. 당신이 예전에 말씀하셨었는데 왜 저는 몰랐을까요?”라고 말할 것이다. 네가 그 말씀을 들을 당시 그 말씀이 상상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든, 머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든, 아니면 지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든 언젠가 좀 체험하고 나면 너는 ‘그 말씀이 진리였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너는 어떻게 깨닫게 되겠느냐? 체험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다. 네가 그런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은 네가 머리로 분석한 것이겠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건 성령이 인도하고 하나님이 행사한 것이다. 이방인도 평생을 살아가며 천지 만물의 일부 법칙을 어느 정도 인식하겠지만 그가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얻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무엇이 부족하겠느냐? (성령 역사가 없습니다.) 그렇다. 그들에게는 성령 역사가 없다. 바로 그것이 부족한 것이다. 네가 나를 어떻게 대하고 평가하든, 내가 한 말이나 행동을 어떻게 대하든 마지막에는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행사를 통해 네 선택과 태도가 옳은지 그른지, 네 관점에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드러낼 것이다. 하나님은 육신의 사역을 지지한다. 그럼 하나님은 왜 다른 사람은 지지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왜 적그리스도는 지지하지 않겠느냐? 그건 바로 영과 육신은 하나이고, 그 근원도 같기 때문이다. 사실은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끝까지 체험해 보면 그 말씀이 성육신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든, 아니면 네가 성령에게서 얻은 깨우침이든 모두 일치하고 절대 충돌하지 않으며 합치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는 이런 확증이 있느냐? 이런 확증이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 정도까지 겪어 보지 않아서 이런 확증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건 사람의 믿음이 아직 그 정도에 이르지 못한 것인데, 믿음이 아직 아주 작은 것이다. 다시 말해, 네가 일정한 정도까지 믿게 되면 이 평범한 육신이 내뱉은 평범한 한마디가 들을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인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말씀이 네 생명이 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어떻게 네 생명이 되었겠느냐? 너는 행동할 때 저도 모르게 그 말씀에 의지하게 되고 그 말씀이 네 삶의 지침이 된다. 네게 길이 없을 때 그 말씀은 네 실제가 되고 네게 길을 알려 주는 목표가 된다. 네가 고통스러울 때 그 말씀은 네가 소극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너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이런 것들을 겪고 나면 그 말씀은 평범하지만 그 안에 무게와 생명이 담겨 있는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진리 추구를 중시하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육신,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를 정죄할 수 있다.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여러 일을 겪고 난 뒤 언젠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과 어울리는 건 꽤 쉽네요. 성육신과도 꽤 어울리기 쉽고요.” 그러나 “저는 그분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분과 어울려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그렇겠느냐? 네가 그의 말씀을 체험하는 것이 네가 일상생활에서 그를 만나지 못할 때 성령이 네게 하는 역사와 같다. 이 ‘같음’이 네게 무엇을 가져다주겠느냐? 너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평범하고 일반적인 외모와 육신의 형상을 취하시어 사람은 그분의 본질을 몰라보았어요. 사람은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본질의 일면을 보지 못하고 그저 사람이 볼 수 있는 면만 보는 거예요. 사람은 정말이지 진리를 갖추고 있지 않네요!” 이 말이 맞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말이 맞다. 예를 들어, 일부 사역을 할 때 만약 수많은 측면 중에 내가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면 분명 많은 이들은 관념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어떤 측면이든 조금씩이라도 할 줄 안다면 사람들은 다들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는 것이다. ‘그래, 하나님 같으셔. 하나님 같으시다고 할 수밖에 없겠어. 성육신 하나님 같으셔. 그리스도 같으시다고. 아마 그리스도가 맞으실 거야.’ 사람은 그저 이렇게 정의 내릴 뿐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저 진리를 교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좀 선포할 뿐 어떤 사역도 실제로 지도하지 않거나 지도하지도 못한다면 이 육신에 대한 사람 안목의 비중, 가치가 떨어질 것이다. 사람은 육신은 마땅히 일정한 능력과 재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그게 재능이겠느냐? 아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재능과 은사, 여러 능력을 사람에게 부여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 자신도 그런 것들을 갖추고 있지 않겠느냐? 당연히 많이 갖추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이런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노래도 못 부르시는 당신이 어떻게 우리에게 노래를 지도하신다는 거죠? 그건 문외한이 전문가를 지도하시는 거 아닌가요? 그건 원칙에 위배되지 않나요?”라고 물으면 나는 예외라고 말한다. 왜 그렇겠느냐? 너희가 잘하지 못하면 나는 도와주어야 하겠지만 너희가 잘할 수 있다면 나는 아예 손을 떼고 신경 쓰지 않고 싶다. 나도 피곤하다. 너희가 잘할 수 있다면 내가 굳이 도와줄 필요가 있겠느냐? 난 과시하는 것도, 큰소리치는 것도 아니다. 업무든 진리 원칙이든 난 너희에게 가르쳐 주고 싶다. 너희가 다 배워서 알고 원칙을 파악하게 되면 나도 한시름 놓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내 본연의 사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의 본연의 사역도 아닌데 왜 하시는 거죠?”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사람은 너무도 모자라서 이렇게 지도하지 않으면 만들어 낸 작품은 아주 평범할 것이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과도 그저 그럴 것이다. 만약 대단한 몇 가지 작품을 내놓지 못하면 나는 직책을 다하지 못한 것이고 마음도 불안해진다. 그래서 내 에너지와 신체 상황에 따라 사역을 어느 정도 하는 것이다. 왜 그러겠느냐? 그럴 만한 고려 사항들이 좀 있다. 사람이 만든 것들을 전 인류가 보고 소화할 때, 모든 사람의 안목과 관점, 이해 능력은 단지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나 체험, 자질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 그 출발점은 같을 것이다. 그것은 모두 진리를 깨닫는 것을 기반으로 한 진리 실제에 대한 체험이다. 이는 인류가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평범한 사람의 관점에서 사역하거나 작품을 만들 수 없다. 그럼 나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겠느냐? 육신의 관점을 가져야겠느냐? 그것 역시 불가능하다. 적절하지 않다. 그렇지 않겠느냐? 나는 당연히 육신에서 하나님과 하나님 사역의 관점에서 말하고 사역하고 이런 관점을 선포해야 한다. 인류 가운데서 이런 것들의 가치를 돈으로 가늠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일단 완성품이 되면 모든 인류에게 영원히 보존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평범한 작품도 영원히 보존될 것이다. 그러나 기왕 영원히, 오랫동안 보존될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측면에서 지도하든, 공급하고 도와주든 인류 전체에게 어느 정도는 기여를 할 것이라면 더 가치 있는 것을 만들면 좋지 않겠느냐? 그래서 나는 인류가 가질 수 없는 관점에서 말하고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겠느냐? 교회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이다. 이 출발점이 옳지 않겠느냐? (옳습니다.) 교회의 인지도가 올라가면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도움이 됩니다.) 촉진제 역할을 하겠느냐, 아니면 방해 역할을 하겠느냐? (촉진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건 분명하다. 분명 촉진제 역할을 할 것이다. 일부 이방 단체나 종교 단체는 이런 것들을 보면 영화를 너무도 잘 찍었다는 생각에 놀라워하고, 늘 스크린 뒤의 감독을 만나고 싶어 한다. 나는 만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 시간도 없고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나를 만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만나서 뭐 하겠느냐? 그들이 영화를 보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기만 하면 그만이고, 참도를 알아보고 싶게 된다면 더더욱 좋은 것이다. 굳이 만날 필요는 없다. 아무튼 가치 있는 작품을 만들면 인류가 그런 것들을 보고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을 인류에게 남겨 두는 것은 좋은 일이겠느냐, 아니면 나쁜 일이겠느냐? (좋은 일입니다.) 가치 있고 할 만한 일이다.

나는 너희와 이런 식으로 어울리며, 너희와는 너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그런 관계이다. 그럼 하나님과 너희는 어떤 관계인지 느낄 수 있겠느냐? 똑같다. ‘성육신 하나님은 사람이시니까 어울리기 쉽지만 하늘의 하나님은 어울리기 어려워. 위엄이 있고 진노가 있으셔서 너무 무섭다고!’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어떤 언어나 방식으로 혹은 강제로 너를 정복하거나 통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너희가 느꼈듯이 내가 너희와 어울리는 그런 방식처럼 말이다. 즉, 너희에게 가르칠 수 있는 건 최대한 가르치고 너희에게 깨닫게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깨닫게 하며, 너희가 깨닫지 못하는 건 강제로 주입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강제로 주입하지 않으신다면서 왜 항상 진리를 교제하시죠?” 그게 주입이겠느냐? 그건 공급이다. 그건 빨리 성장하도록 서두르는 게 아니라 양육하는 것이다. 양육은 정당한 것이고 긍정적인 사물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정복하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을 정복하는 것은 똑같지 않나요?”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겠느냐?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정복하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을 정복하는 것은 같은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 둘의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이냐? 너희는 명확히 설명할 수 있겠느냐? 이것조차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면 너희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몹시 부족한 것이다. (사탄이 사람을 정복할 때는 강제로 통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정복할 때는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사람에게 진리 원칙을 알려 주시고, 사람이 실행할 줄 알게 되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너희에게 묻겠다. 사탄이 사람을 통제하고 정복하지만 진리를 갖추고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은 무엇이냐? 그것은 무슨 근거로 사람을 정복하려는 것이겠느냐? 다른 말로 하자면, 사탄은 무슨 자격으로 사람을 정복하고 얻으려 하느냐? 그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 무엇으로 사람을 정복하겠느냐? 사람을 정복하고 나서 사람에게 무엇을 공급할 수 있겠느냐? 사탄은 너를 패괴시킬 뿐이다. 그것은 너를 가지고 놀고 짓밟기만 하다가 결국에는 너를 철저히 짓밟고 나면 지옥에 떨어뜨린다. 사탄의 이런 정복과 통제는 순전히 무엇에 해당하느냐? 해를 입히는 것이다. 사탄이 너를 통제하고 정복하는 목적은 네가 하나님이나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고 그것에게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탄이 보기에는 네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잘못됐고 그것에게 순종해야만 옳다. 네가 사탄에게 순종하고 그것에게 통제되거나 정복된다면 너는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고 저버릴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을 정복하는 것은 어떻겠느냐? 하나님은 그 자체로 진리이고,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고,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근원이자 진리의 근원이다. 그럼 사람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사탄에 의해 패괴된 족속이다. 사람에게는 진리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진리를 선포하고 사람의 패괴 성품을 폭로함으로써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며 사람에게 시련과 연단을 주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자신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정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엎드리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 이는 모두 진리에 부합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 정복은 무엇이겠느냐? 얻음이자 구원으로, 이것은 긍정적인 사물이다. 너를 해치지 않는다. 이는 사탄의 정복과 다르지 않으냐? 하나님이 사람을 정복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나님은 진리이자 모든 긍정적 사물의 근원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인류를 정복한다’는 말은 너무나 적절한 표현이다! 인류는 진리를 갖추고 있지 않고 사탄에게 심하게 패괴되어 사탄의 족속이 되었다. 이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저버린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해야겠느냐? 하나님은 진리의 선포를 통해, 심판과 형벌의 방식으로 사람에게 누가 하나님이고 누가 창조주인지, 누가 피조물이고 누가 사탄인지 알게 하고, 사람이 주인에게 돌아와 창조주를 인정하고, 창조주 앞에서 자신을 그의 피조물로 인정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정복의 의의다. 하나님에게 정복된 사람은 진리를 깨달았느냐, 아니면 깨닫지 못했느냐?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럼 사탄에 의해 정복된 사람은 무엇을 얻었느냐? 아무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배반하고 저버리며 하나님에게 관념까지 품고, 심지어 사탄과 적그리스도를 따른다. 하나님을 판단하고 거역하고 욕하며 하나님의 주재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주재에는 더더욱 순종하지 못한다. 이것이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이 정복한 사람과 정반대이며 하나님이 인류를 정복한 성과와도 상반된다.

적그리스도 부류에게 지위가 생겼는데 어디 갔을 때 남들이 그가 리더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그가 기분이 좋겠느냐? 좋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딜 가더라도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알릴 것이다. “저는 리더니까 음식 좀 만들어 줘요. 좋은 것 좀 먹어야 합니다!” 내가 지위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냐?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나는 어디에 가면 가능한 한 함부로 알리지 말고 남들이 모르게 하라고 이른다. 왜 이렇게 하겠느냐? 사람들이 알게 되면 너무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지 모른다면 내게 속마음도 좀 털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알게 되는 순간 골치 아파진다. 나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음을 털어놓을 대상이 없다면 내가 외롭지 않겠느냐? 가능한 한 사람들이 모르게 해서 나를 평범한 사람처럼 대하고, 하고 싶은 말을 얼마든지 하게 한다. 사람들이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게 하면 좀 좋으냐. 늘 사람들이 내 앞에서 깍듯하게 행동하도록 옭아매고 싶지 않다. 그럴 필요 없다. 난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당신은 틀림없이 그런 걸 좋아하니까 제가 그렇게 해 드릴게요.’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이런 사람을 보면 피한다. 늘 굽실거리는 사람을 보면 나는 서둘러 피한다. 절대로 그런 사람과 접촉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까다롭고 몹시 골치 아프다! 반면 적그리스도는 다르다. 그는 사람에게 존경을 받길 바라고, 어디에 가든 특별 대우를 받길 바란다. 나아가 무엇을 바라겠느냐? 그가 그 자리에 있는 한 그가 이끄는 범위 내의 사람이 모두 그에게 절대복종하고 완전히, 절대적으로 순종하길 바란다. 그러면 그는 ‘이것 봐. 내가 통솔하는 병사들, 내가 이끄는 팀이 어때? 다들 고분고분 내 말을 따르잖아.’라고 생각하며 커다란 성취감을 느낀다. 사람들을 마치 꼭두각시나 노예처럼 독립적인 생각도 없고 주견도 관점도 없는 사람으로 훈련시켜서 하나같이 무감각하고 우둔하게 만들어 놓는다. 그러고는 사역이 성과를 이루어서 자신의 욕망과 야심이 충족되었음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즐거워하고 흡족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마음속으로 괴로워하며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들이 왜 내 말을 안 따르지? 내게 복종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래, 내가 대단하다는 걸 모른다면 내 능력을 보여 줘야지! 난 대학원을 졸업했고 졸업 증명서도 매일 가지고 다니니까 한번 보여 주지. 영어는 8급이고 학생회장도 했었다고. 다들 나를 잘 모르니까 내가 보여 주는 수밖에!’ 사역을 의논할 때마다 그는 말한다. “다들 어떤 의견이든 얘기해 보세요. 제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자기 관점을 밝히면 돼요.”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하기 시작한다. 사람들 얘기가 끝나면 대학원을 졸업한 ‘뛰어난 사람’이 나서서 말한다. “당신들 관점은 안 되겠어요. 너무 평범해요. 모두 일반 사람의 관점이라고요. 정말 제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네요. 보세요, 당신들은 이 사역을 하지 못한다니까요! 사실 저도 이 사역을 맡고 싶지는 않지만 제가 여기에 없으면 당신들은 정말 이 책임을 짊어지지 못할 테니 제가 개입할 수밖에 없죠. 이 일에 대해 제가 생각해 봤는데 우리는 이렇게 처리해야 해요. 당신들이 얘기한 방법들은 다 소용없으니 제가 더 나은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예전에는 사역지침에서 그렇게 하라고 요구했지만 앞으로 우리는 그 규례를 따르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요.” 일부 사람들이 “사역지침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 집의 손실이 너무 클 거예요.”라고 하면 그는 “그렇게 많이 고려하지 않아도 돼요. 하나님 집에서 그 정도 돈을 아까워하겠어요? 우리에게는 성과가 중요하잖아요. 그러니 앞으로는 제 말대로 처리하세요. 문제가 생기면 제가 책임집니다!”라고 한다.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다. 이는 큰소리치는 것 아니겠느냐? 그가 큰소리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과시하는 것이다. 시시각각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와 훌륭함을 일깨우는 것이다. 어떤 부분이 훌륭하냐? 평범한 사람은 짐작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설사 그의 관점이 다른 사람과 같더라도 그는 다른 사람의 관점을 부정하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같은 말을 한다. 이 말을 듣고 다들 “똑같은 말 아닌가요?”라고 하면 그는 “같아도 그건 제가 한 말이지 당신들이 한 말이 아니에요. 제가 제일 먼저 말했다고요.”라고 한다. 아무튼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의 목적은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제가 괜히 리더가 된 게 아니에요. 제가 괜히 팀장이나 책임자가 된 게 아니라고요. 허풍 떠는 게 아니라 제가 재능과 은사,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제게 맡긴 거라니까요.”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일이 발생했는데 그가 자리에 없을 때는 사람들끼리 결정을 내려선 안 되고, 그가 자리에 있을 때는 그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다들 그의 눈치를 봐야 한다. 그가 결정을 내리면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가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다들 가슴을 졸인다. 그에게 결정을 내리도록 하지 않으면 이 일은 끝나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데는 목적이 있지 않겠느냐? 가끔은 그도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이렇게 하지 말자. 너무 창피하잖아. 이건 적그리스도의 행동 방식 아닌가? 그럼 안 되지. 내 체면이 얼마나 중요한데 적그리스도라니, 상부에서 정죄하지 않았으면 적그리스도가 아니야!’ 그는 계속 그렇게 행동한다. 가끔은 사역지침과 진리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체면과 지위를 고려하고 자신의 속셈을 품은 채 계속 그렇게 행동한다. 결과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더더욱 없다. 이는 성품의 문제가 아니겠느냐? 이런 성품에 지배된 나머지 그는 어떻게 행동하느냐? 자기만 잘났다고 뽐내고 제멋대로 못되게 군다. 어떻게 행동하는 게 적절한지 그가 마음속으로 정말 모르겠느냐? 그렇게 행동하는 게 원칙에 위배된다는 걸 그가 정말 모르겠느냐? 그렇게 하는 게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는 것이고 악을 행하는 것임을 그가 정말 모르겠느냐? 그는 알고 있고 이해한다. 그런데도 그가 여전히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싫어한다는 뜻이다. 어떤 관점이든, 어떤 방식과 방법, 주장이든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는 모두 부정한다. 이는 야심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안에는 야심과 저의가 담겨 있다. 그 저의는 무엇이겠느냐?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겠느냐? (남들이 그를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모두 자신을 따른다는 이 좋은 점,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이 기회는 절대 놓쳐서도, 남에게 돌아가서도 안 된다. 매번 그가 결정하고 결단을 내려야 하며 모든 사역의 성과도 그 혼자만의 것이어야 하고 그의 공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로 인해 결국에는 사람들은 일종의 타성을 갖게 되는데, 그게 무엇이냐? 이 팀은 그가 있는 한 사역을 운영할 수 있지만, 그가 없으면 다른 사람은 사역을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이는 목적을 이룬 것 아니겠느냐? 그가 사람들을 통제하게 된 것이다. 통제하기 전 단계는 무엇이겠느냐? 철저히 정복하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바로 너를 괴롭혀 굴복하게 하고, 너는 옳고 그름을 모르고 그를 분별하지도 못하고, 어느 방면의 진리이든 그에게는 대조해 보지 않고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행동하든 다 옳다고 인정하여 더 이상 옳고 그름을 감히 분석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고 통제된 결과이고 곧이어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따르게 된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분명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하는 모습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의 출발점과 저의, 그의 행동, 방식과 방법, 나아가 그가 하는 주장은 무엇에서 비롯되겠느냐? 그는 너를 무너뜨리고 굴복시켜 복종하게 하고, 누가 대장이고 앞장설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지, 여기서는 누구에게 결정권이 있는지 알게 하고, 여기서는 진리가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한다. 자기 말고는 이 사람들의 주인이 되어 결정을 내리고 의사를 정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언급하고 싶더라도 어림도 없다. 다른 의견을 제기하고 싶더라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어떤 성품이겠느냐? 흉악함이다. 그는 사람을 정복하고 통제하려 한다. 적그리스도의 욕망과 야심으로 보든, 아니면 그들의 실제 행동으로 보든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싫어하는 흉악한 성품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정복하고 통제하는 행동 방식, 표출, 모습, 그들의 그런 본질은 마침 우리가 교제하는 주제에 부합한다. 적그리스도가 사람들이 그에게만 순종하도록 하는데, 그 숨은 뜻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야 하고, 그를 따르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누가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그는 이렇게 반박한다. “진리에 부합하지 않다니요? 그럼 진리가 무엇인지 당신이 한번 얘기해 보세요. 명확하게 설명하면 인정하겠지만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면 가만두지 않겠어요!” 그가 이렇게 말하면 정말로 두려워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겠으니 그냥 당신 말을 따를게요.” 이렇게 그는 목적을 이룬다.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느냐? (있습니다.) 너희도 이렇게 행동했느냐? (그러지 않았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 보통 사람은 자신이 남을 설득하지 못하면 그냥 내버려둔다. 그에게는 그런 수완이 없다. 한편으로는 말주변이 없어 그렇게 말로 표현할 줄도 모르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도 그리 독하지 않다.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내면에 사악한 성품을 지녀야 하고 흉악하고 독해야 한다. 그는 누구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누가 불복하면 필사적으로 괴롭힌다. 사람을 얼마나 처참하게 괴롭히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스스로 지각하지도 못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안 그래도 불쌍한데 내 말을 듣게 할 필요가 뭐 있어? 한번 봐주자. 저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거지 나를 믿는 것도 아니잖아. 진리에 부합하는 말을 하는 사람을 따르는 거지 뭐. 누구 말을 듣든 상관없어. 이번에는 그냥 내버려두자.”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생각하겠느냐? 그렇지 않다. 적그리스도는 결코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 그는 자신의 야심과 욕망 앞에서는 칼 같은 태도를 보이며 마치 늑대가 양을 문 것처럼 꽉 쥐고 놓지 않는다. 양을 먹지 말라고 늑대를 설득하는 게 가능하겠느냐? 불가능하다. 왜 그렇겠느냐? 늑대의 성품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늑대는 이렇게 생각한다. ‘배고파. 나는 양고기가 좋아. 그게 옳아. 내가 먹고 싶든 먹고 싶지 않든 다 옳아.’ 이게 바로 늑대의 철학이고 늑대가 행동하는 준칙이자 근원이다.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정복하고 통제할 때 ‘하나님도 아닌 내가 사람을 통제하다니 너무 염치없어. 남들이 분별해 내면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지?’라고 생각하겠느냐? 이렇게 부끄러워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럼 그의 인성에 결여된 것이 무엇이냐? 염치와 이성, 양심이 결여되었다. 그의 인성에는 이런 것들이 없다. 이런 것들이 없어도 사람이겠느냐?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다 사람은 아니다. 귀신일 수도, 산송장일 수도, 동물일 수도 있다. 그럼 적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이겠느냐? 마귀이다. 그중 일부는 악마이고 일부는 악령으로, 어쨌든 사람은 아니다. 적그리스도는 정상 인성의 이성과 양심, 염치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 혹은 사람의 마음을 두고 하나님과 다툴 수 있다. 이를 보면 그의 본성 본질이 사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과 지위를 다투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지위나 사람을 다투는 게 말이 되겠느냐! 이로써 그가 영락없는 적그리스도이자 마귀 사탄이라는 것을 더 잘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적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해 제8조까지 교제했다. 너희는 자신을 적그리스도 같은 사람들,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거나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과 대조해 보고 자신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알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대조할 수 있을 것이다. 대조할 수 있으면 사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잘못된 길을 걷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길을 걷지 않을 수 있다. 또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주위의 사람과 일, 사물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주위의 일부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분별하는 것이 한 측면이다. 주로 자신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는데, 자신 내면의 적그리스도 성품과 걷는 길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이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치우친 길이나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지 않는 데 도움이 된다.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길에 들어서면 돌이키는 게 쉽겠느냐? 쉽지 않다. 일단 그 길에 들어서면 다시 돌이키기 쉽지 않다. 왜 그런지 아느냐? (성령이 역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게 주된 이유이다.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것은 몹시 위험하다. 네가 진리를 구하거나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자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맞서 싸우고 하나님 선민을 놓고 하나님과 다투며 하나님에게 끝까지 반항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런 길에 들어서면 골치 아프다. 너는 하나님과 대립하는 것이다. 즉, 주관적인 의지가 이미 하나님과 대립하고, 네 사상 관점과 주견, 선택이 모두 하나님을 적대한다. 이 길에 들어서기 전에 네가 하나님과 대립하거나 하나님을 적대하는 객관적인 모습, 성품, 본질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긴 했지만, 하나님을 적대하는 길이나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지 않기 위해 마음속으로 늘 조심하면 구원받을 기회가 있다. 네가 일단 적그리스도의 길이나 하나님을 적대하는 길에 들어서면 몹시 위험해진다. 얼마나 위험하겠느냐? 돌이키기가 쉽지 않다. 방금 어떤 사람들이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는 너무도 명확하다! 성령이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 역사할 수 있겠느냐? 그런 길에 들어서고 그런 선택을 하는 순간 너는 위험해진다. 마음속으로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그 길을 걷고 그렇게 선택한다면, 늘 자신의 원칙이나 과거의 오래된 방식대로 행동하며 뉘우치거나 회개하지 않고 돌아서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네 선택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너는 그런 길을 걸으며 계속 하나님을 적대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너는 알지 못한 게 아니라 알면서도 일부러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는 바울과 유사하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왜 저를 치시려는 겁니까?” 그는 예수가 주님이자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끝까지 반항했다. 이게 바로 알면서도 일부러 죄를 범하는 것이다. 바울은 주님을 증거하지도, 높이지도 않고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은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잖아? 당신이 나를 치는 건 그럴 만한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잖아? 당신이 그런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난 여전히 하늘의 하나님을 믿어. 성육신한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과 상관없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와 평등해.’ 그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았겠느냐? 바울은 무엇을 기반으로 이런 관점을 가졌겠느냐? 그는 예수가 성육신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계속 그런 관점을 고수했다. 이는 심각한 문제이며 이로써 그의 결말이 정해졌다. 계속 그런 관점을 고수했는데 그럼 그가 걷는 길이 바뀔 수 있었겠느냐? 사람이 걷는 길은 사람의 관점에 달려 있는데, 사람은 가지고 있는 관점에 맞는 길을 걷게 된다. 반대로 걷는 길에 따라 그에 맞는 관점이 생기고, 그에 맞는 관점을 품게 되고, 그에 맞는 관점에 좌우되거나 조종된다. 네가 하나님을 적대하는 길에 들어서는 순간, 그런 관점이 네 내면에 생겨 뿌리내린다. 그러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로 네가 기어코 끝까지 하나님에게 반항하고, 자신의 잘못된 관점이나 인식, 태도를 고수하며 끝까지 하나님에게 맞설 것이라는 점이다. 조금도 돌아서지 않을 것인데, 누가 말려도, 성령이 깨우쳐 주고 형제자매가 타일러도, 심지어 하나님이 빛 비춤을 주어도 소용없을 것이다. 조금의 여지도 없을 것이다. 이게 바로 네 선택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기회를 세 번이나 주었는데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너는 앞으로 더 이상 기회가 없다. 네가 얼마나 사역하고 대가를 치르든 하나님은 감동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하나님은 무슨 결정을 내렸겠느냐? 너를 봉사하게 하고 이용한 다음 형벌과 징벌을 받게 어떤 곳에 두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나님은 왜 이런 결정을 내렸겠느냐? 사람의 순간적인 생각 때문이겠느냐? 사람의 순간적인 의견 때문이겠느냐? 사람이 순간적으로 잘못된 길을 걸었기 때문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네 마음속에 존재하는 관점, 네가 오랫동안 진리를 대해 온 태도, 네가 가기로 결정한 길을 근거로 결정을 내렸다. 네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면 누가 말해도 소용없다. 너 스스로 그 이론을 기반으로 앞으로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결정했으니 하나님이 네 결말을 규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일찍이 결정됐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늘 모습을 근거로 하는데, 마지막에 길 끝까지 걸어갔을 때 그의 여러 모습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말이 정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악행보다 선행을 많이 했고, 부정적이거나 악을 행하는 태도보다 올바르고 긍정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대한 적이 많은데, 하나님은 이에 더해 그들의 여러 행위와 모습을 종합해서 평가한 뒤 마지막에 결말을 정한다. 하지만 걷는 길을 보고 바로 결말이 정해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 하나님은 사람의 결말을 규정하기 전에 기회를 주겠느냐? 기회를 준다. 기회는 몇 번이겠느냐? 구체적인 수가 정해져 있지 않고 사람의 본성 본질이나 추구하는 바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회를 세 번 주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구제 불능에 몹시 우매하고 완고하고 강퍅한 데다가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기회를 세 번 주기도 전에 결말이 정해진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의 내적 상태에 따라 일부 환경을 마련해 준 다음 다시 그의 나이나 그가 겪은 일에 따라 어쩌면 기회를 다섯 번 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본성, 본질,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 등에 따라 사람의 결말과 종착지를 규정한다.

사람은 이런저런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직면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느냐?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잘못된 길을 걷기 쉽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사람이 사탄의 패괴 성품에 따라 살아가니 그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들 중 진리에 부합하거나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왜 늘 설교를 듣겠느냐? 늘 설교를 듣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구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경건한 마음, 진리를 동경하는 마음을 품고 하나님 앞에 오는 것, 매일 정해진 시간에 영 생활을 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 남들과 교제하고 사역할 때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 매일 이런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이런 것들을 지키는 것 등 하나님은 사람의 이런 세세한 실행이 성과를 이룰 수 있는지 지켜본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건 형식적이지 않나요?” 뭐가 형식적이라는 것이냐? 이는 단지 표면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네게 그런 마음이 있어야만 이런 것들을 지킬 수 있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네게 지키라고 한들 며칠이나 지킬 수 있겠느냐? 넌 지키지 못할 것이다. 일부 리더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지도, 영 생활을 하지도 않는다. 이는 무슨 뜻이겠느냐? 이는 진짜로 믿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로 믿는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리더가 되었겠느냐? 적절한 사람이 없으면 아쉬운 대로 그런 자를 쓰는 곳도 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난 리더로 선발되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아도 예전처럼 사역할 수 있어. 다리와 입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사역이니까.’ 이는 바보 같은 생각이다. 하나님은 네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아니라 네가 무엇을 했는지 살핀다. 네가 할 수 있으면 그도 할 수 있고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리더로 선발되었고 네가 할 수 있다고 해서 네가 온전케 되는 건 따 놓은 당상이라고, 너는 살아남을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네가 얼마나 하는지가 아니라 네가 무엇을 했고 어떤 길을 걷는지를 살핀다. 너는 이 일에서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 네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두고 나를 뽑은 걸 보면 내가 그래도 남들보다 뛰어나고 자질도 더 갖춘 데다가 더 훌륭한가 봐.’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무엇이 더 훌륭하단 말이냐? 훌륭하다고 해서 네게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진리를 위배해 행동할 자격이 있는 것이냐? 훌륭하다고 해서 네게 절대 영 생활도, 기도도 하지 않으며 행동할 때 진리를 구하지 않을 자격이 있는 것이냐? 네겐 그럴 자격이 없다. 그 어떤 지위나 직함도 네 밑천이 아니다. 그건 일시적이고 외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네 충성심,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하고 대하는 태도, 너의 순종 여부, 네가 본분과 사명을 대하는 태도를 살핀다.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힘을 많이 들이지만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데, 네가 그에게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알려 주면 그는 바로 반발하고 화를 내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게 그는 드러난다. 무엇이 드러난 것이냐?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불신파이다. 불신파는 왜 그렇게 쓸데없이 바쁘겠느냐? 그렇게 열심히 바쁘게 지내겠느냐? 그에게는 목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관직에 오를 기회가 있어. 관직에 오르면 교회에 얹혀살 수 있고 사람들에게 숭배받을 수 있지. 정말 좋은 곳이야! 밥벌이도 쉽게 할 수 있고 명예와 이익, 지위도 쉽게 얻을 수 있잖아. 참 할 만한 관직이군!’ 그는 이번 생에 ‘관직’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면 그는 본모습을 드러내고 다시는 하나님 집을 위해 힘을 들이지 않는다. 이런 그가 고생을 견디고 대가를 치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이로써 드러나지 않았느냐? 어떤 사람들은 지위를 가지면 전력을 다해 일하고 땀 흘리며 힘을 들이고 아무리 고생해도 불평하지 않다가, 지위가 사라지는 순간 곧장 소극적으로, 그것도 견디지 못할 만큼 소극적으로 변한다. 이러면 그는 드러나지 않았느냐? 지위가 그를 드러냈는데 굳이 시련을 줄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2019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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