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조 사악함과 음험함, 그리고 간사함(2)
참고 캐나다 모 교회를 처리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해결하다
지난번 예배 때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 무슨 일이었느냐? (캐나다 교회를 처리한 일입니다.) 이 일이 있은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 기억이 생생한 느낌이 들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 일이 너희의 마음에 크게 와 닿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교회나 일부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내가 상황에 따라 결정해 주고 원칙대로 그들을 처리한다. 캐나다 교회를 처리한 일 역시 기본적으로 이런 배경에서였다. 그럼 너희가 말해 보아라. 캐나다 교회에서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내가 왜 이렇게 처리했겠느냐? 너희 생각은 어떠냐? 많이 놀란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 왜 놀란 것이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토록 가혹하게 처리하셨는데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가요? 어찌 이렇게 처리하실 수 있나요? 이게 원칙에 부합하나요? 즉흥적으로 그러신 거 아녜요? 이렇게 처리한 결과가 어떤가요? 그들이 한 일이 그렇게 심각한가요? 현지에서 알아봤는데, 그들의 태도나 말, 그리고 현지에서 들은 소식에 따르면 그렇게 가혹하게 처리하지 말았어야 할 것 같은데요?” 이것은 일부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처리하신 건 그럴 만한 도리와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생각이겠느냐? 이 일을 처리한 데에는 초심이 있고 이유가 있지 않았겠느냐? 그들을 이렇게 처리한 것이 합리적이지 않으냐? (합리적입니다.) 너희가 합리적이라고 하니 오늘은 일단 이 문제를 논의해 보자.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과연 어디가 합리적인지, 너희는 과연 이 일을 어떻게 보는지, 앞으로 너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너희 생각이 과연 옳은지, 틀리거나 치우친 부분은 없는지 살펴보자. 너희가 언제나 참고 입을 다물고 있으며 아무런 입장도 내보이지 않고 늘 마음이 꼬인다면 가장 좋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원칙이 무엇이겠느냐? 내가 내린 이 결단을 너희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기에 생각과 관념, 반발심을 품고 심지어 오해해서 의구심이나 다른 좋지 않은 생각들이 생겨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우리가 이 문제를 논의해 보자. 만약 견해가 다르다면 우리에게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그럼 어떻게 공감대를 형성하느냐? 의견이 다른 부분은 일단 놔두고 공통점부터 취하는 것은 어떠냐? 대충 타협하는 식으로 내가 한발 양보하고 너희도 한발 물러서는 것이 좋겠느냐? 분명히 안 된다. 이는 서로 합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럼 우리가 공감대를 형성하여 이 일에 대한 인식과 결정을 일치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 너희가 진리를 구하고 진리에 공을 들이며 진리를 인식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럼 나는 이 일의 자초지종을 모두에게 분명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구도 마음속의 응어리를 가지지 마라. 이렇게 하면 이 일에 대한 견해가 일치되어 이 일을 잘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런 일을 만나면 내가 또 이렇게 처리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고 다른 방식을 취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 일에서 무엇을 얻어야겠느냐? (진리를 구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이 왜 이렇게 처리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두 가지 측면을 말해 주었구나. 아주 훌륭하다. 더 있느냐?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을 깨닫고자 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경계이기도 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측면이다.
캐나다 교회를 처리한 일을 분명히 이야기하려면 발단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어디서부터 말하면 좋겠느냐? 먼저 이들이 출국한 시점부터 이야기하겠다. 너무 뒤로 간 셈이냐? 너희는 웃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지난 일을 들추는 것이겠느냐? 아니다. 내가 말해 주는 이 방면의 도리를 들어 보면 너희는 내가 왜 여기서부터 이야기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일단 외국으로 온 모든 사람에게 부탁이나 사명, 책임이 있었는지는 차치하고 작은 측면부터 이야기하겠다. 모든 사람이 출국하는 것이 우연한 일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네게 해외에 나가서 본분을 이행하겠다는 뜻이 생긴 것에서부터 외국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사람의 협력이라는 측면을 제외하면 사람이 순조롭게 출국하는 일이 누구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 네게 어떤 연줄이 있는지에 달린 것도 아니고, 네가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수속이 완벽한지에 달린 것도 아니다. 외국에 온 모든 사람은 공통된 인식이나 체험이 있었을 것이다. 다들 무엇을 체험했느냐? 사람이 순조롭게 출국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재한 것이지 사람이 재주가 있거나 능력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이는 한 나라 안에서 이쪽 지방에서 저쪽 지방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출국하는 것이며, 온갖 복잡한 수속이 요구된다. 특히 큰 붉은 용이 광적으로 탄압하고 체포하며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철저히 감시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출국 수속은 그리 간단하게 처리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이들이 순조롭게 해외에 올 수 있었던 것이 전부 하나님의 주재이고 하나님의 전능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출국할 수 있는지, 수속이 순조롭게 진행되는지, 처리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는 모두 하나님에게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손이 지배하고 안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을 믿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사실이다. 사람의 협력과 하나님의 주재가 있었기에 이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만약 네가 출국한 일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면 이 일을 누가 촉진해서 성사시켰다고 하겠느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한 일이다. 사람이 자랑할 만한 건 하나도 없으니 마땅히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합니다.) 열심히, 마음 편히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여러모로 봤을 때 결국 네가 출국해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은 네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안배와 인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정의 내릴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왜 제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건가요? 하나님께서도 인도하시긴 했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도 저는 대학원생에 영어도 8급이라 토플(TOEFL) 시험은 문제없습니다. 출국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거든요.” 이런 조건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해당한다. 가령 어떤 사람은 돈이 많아서 투자 이민 수속을 밟을 수 있겠지만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럼 이들의 출국에는 하나님의 주재나 허락이 없겠느냐? 여기에도 마찬가지다. 개별적인 경우는 접어 두고, 외국에 나가 생활하면서 앞으로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들에 관해 얘기해 보자. 이 경우는 온전히 개인의 뜻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한편으로는 사명을 띠고 출국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인도로 출국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네가 출국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본분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네 수속을 준비하면서 시간이 얼마나 걸리고 대가를 얼마나 치렀든, 하나님이 어떻게 주재했든 아무튼 너는 출국해서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게 되었다. 네가 해외로 나온 일에는 사명이 있으며, 너는 책임과 막중한 임무를 짊어지고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네가 해외로 나온 그 목표는 아주 분명할 것이다. 첫째, 너는 삶을 즐기려고 해외로 이민 온 것이 아니다. 둘째, 너는 삶의 돌파구를 찾으러 외국에 온 것이 아니다. 셋째, 너는 또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찾으러 외국에 온 것이 아니다. 넷째, 너는 소소한 삶을 살기 위해 외국에 온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겠느냐? 너는 세상을 추구하기 위해 외국에 온 것이 아니라 사명을 띠고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 본분을 이행하러 온 것이다. 이런 점에 근거해 봤을 때 네가 해외에 와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겠느냐? (본분 이행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 집에 와서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찾고 하나님 집의 안배대로 착실하고 분수에 맞게 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옳다. 그리고 너는 누군가에게 협박당해 온 것도, 납치당해 온 것도 아니다. 네가 기꺼이 원해서 온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네가 해외에 왔으면 네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이게 맞지 않느냐? 사람에게 하는 이런 요구가 높으냐? (높지 않습니다.) 요구가 높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다. 이건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그럼 내가 앞서 이야기한 내용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 본분을 어떻게 대하고 본분을 어떻게 이행해야만 하나님이 네게 한 부탁 앞에서 떳떳할 수 있겠느냐? 이 일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제 난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내 어깨에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고. 어떤 책임이냐고? 하나님이 주신 부탁과 책임이지. 하나님이 나를 외국으로 인도하셨으니 나는 하나님의 복음 확장에 피조물로서 이행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해. 그게 내 본분이야.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어떤 본분을 이행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거야. 그다음으로는 어떻게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나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저버리지 않게 될지 고민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과하겠느냐? 거짓된 생각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이는 이성과 인성,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해 봐야 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이 “막상 외국에 와서 보니 생각했던 거랑 달라서 후회돼요.”라고 한다면 이런 인간을 뭐라고 하겠느냐? 이런 자는 인성이 없고 신의를 저버리는 자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외국에 와서도 본분에 몰두하고자 한다.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계속해서 캐나다 교회의 일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가겠다. 캐나다 교회의 그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이 캐나다에 간 것이 우연이겠느냐?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왜 필연이라 하겠느냐? 하나님이 진작에 구분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연’에는 하나님의 주재가 있다. 하나님이 네가 어떤 나라에 가도록 주재해서 일이 이렇게 성취된 것이다. 캐나다 교회의 그 사람들도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아래 외국에 온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캐나다라는 나라로 인도하였고, 교회에서는 그들 각자의 재능과 그들의 업무, 특기 등 여러 요소에 따라 그들을 각 사역의 직위로 배치해 자기 본분을 이행하게 했다. 처음 그들이 본분을 이행할 때는 좀 경직되어 있었다. 여기서 ‘경직’이란 서툴다는 뜻의 경직이 아니라 비록 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러 왔지만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하겠느냐? 일이 생겨도 진리를 구하지 않고, 일할 때도 원칙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상부에서 무엇을 안배해 주거나 무엇을 하라고 알려 주어도 그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본분을 이런 태도로 이행한 것이다. 이렇게 건성으로 하다 보니 본분을 이행하는 그들의 내적 상태도 난장판이 되고 엉망이 되어 버렸다. 이들의 교회 생활과 생명 진입은 늘 변변찮았고, 본분 이행의 성과도 별로였다. 진리를 교제해도 실제가 없었으며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도 전혀 분별하지 못했다. 즉,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그곳에 적그리스도 옌 씨가 나타났고, 그들은 적그리스도와 한패가 되었다. 한패가 되었다는 게 무슨 말이겠느냐? 이 적그리스도는 26살 청년으로 사역한 지는 2년 반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자매를 꾀었는데 아마 열 명은 될 것이다. 이들 중에는 그의 맘에 드는 자매도 있었고, 눈에 안 차는 자매는 상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같이 적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자들이었다. 2년 반 전, 캐나다 교회 사람들은 본분을 썩 잘 이행하지 못했고 모두들 의욕이 없는 상태였다. 상부에서 어떤 사역을 안배하든 그들은 건성으로 임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아서 사역이 실행되기가 쉽지 않았다. 상부에서 책망하면 그들은 고개를 떨구고 풀이 죽었다. 상부와 연락도 거의 안 하고 사역하는 태도도 무척 의기소침했다. 적그리스도 옌 씨가 리더가 되고 나서 그들의 상황은 날로 나빠져서 많은 사람이 허송세월하게 되었다. 어쩌다 그런 지경에 이르렀겠느냐? 이는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객관적인 원인은 리더와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좋은 리더가 없었기 때문이다. 리더조차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친목만 도모하며 나쁜 짓만 일삼았다. 그럼 주관적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들이 전부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무리 속에서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고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이 쉽겠느냐?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사람과 불신파들 속에서 나쁜 짓을 일삼고 건성으로 임하며 상부에 대항하는 것은 쉽지 않겠느냐? (쉽습니다.) 이런 무리 속에서 내리막길을 가고 타락하여 이방인처럼 되는 일은 쉽지 않겠느냐? 너무나 쉽다. 그들이 가는 길은 이런 길이었다. 본분 이행이라는 핑계로 하나님 집의 쌀을 축내고 하나님 집의 방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그들을 부양하는데 그들은 하나님 집에서 속임수로 먹고 마시는 것도 모자라 천국에 들어가 상을 받기를 기대했다. 그들은 이토록 기만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적그리스도가 교회 사역을 교란했을 때 아무도 상부에 문제를 보고하지 않고 오직 한 여성만이 그 문제를 거짓 리더에게 보고했다. 결국 이 일은 해결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눈뜬장님이었다. 교회에 이렇게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리더 일꾼을 교체하는 원칙은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 분명히 나와 있었지만 그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모두 적그리스도를 따라 허송세월했다. 이들 불신파 중에는 하나님을 믿은 지 오래된 사람은 20년이 넘었고 기간이 짧은 사람도 최소 5년은 되었다. 그런데 아무도 보고하지 않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무엇이냐? 여러 팀의 팀장과 부팀장이 모두 이 적그리스도와 내통한 것도 모자라 서로 질투하며 다퉜다는 것이다. 남녀가 연애하는 일은, 보통 성인이나 노인들은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런 남녀 간의 일은 누구에게나 민감한 일이어서 한눈에 알 수 있는데도 아무도 보고하지 않았다. 아무도 일어나 그들을 질책하거나 폭로하지 않았고, 그들을 분별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이 적그리스도 무리라는 걸 알고, 속으로 ‘난 절대 너희를 따르지 않을 거야. 윗선에 보고해서 너희를 교체시키겠어. 아니면 정의감이 있는 형제자매를 모아서 너희를 파면시키겠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한 사람이 있었느냐? 없었다. 이 사건이 폭로되기 직전까지 아무도 보고하지 않았다. 이들은 어떤 인간들이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이들은 눈앞에서 이런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지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들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었겠느냐? 그들은 어떤 태도로 본분을 대했겠느냐? 밥을 얻어먹으려 빌붙은 것이 분명하다. 그저 하루하루 되는대로 산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집은 빌붙기 좋은 곳이니 문제를 보아도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미움을 사지 말자고 생각했다. 괜히 ‘윗사람’에게 미운털이 박히면 큰일이라고, 그러면 좋은 결과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너는 남에게 미움을 살까 봐 미움받을 짓을 하지 못하면서 감히 하나님에게 미움을 살 짓은 하느냐? 하나님에게 미움을 사면 좋은 결과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나쁜 결과가 따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나쁜 결과가 따를 것이다. 물론 그가 남에게 미움 살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사악한 사람이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 외에도 어리석은 짓을 적잖이 저질렀다. 캐나다 교회에 사람은 얼마 없었지만 그들의 야심은 결코 작지 않았다. 본분 이행에 별 성과가 없는 게 분명한데도 사역 범위를 확대하려 했고, 집 매물을 물색하다 결국 쓸데없이 계약금을 지불한 것이다. 지금은 그들 중 대부분이 격리되었다. 너희가 보기에 이것이 어떤 무리 같으냐? 짐승의 무리이고 얼간이의 무리가 아니냐? 분명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그렇게 제물을 낭비했다.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는 사람이나 정의감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로지 마귀 무리뿐이었다! 정말이지 분통 터지는 일이다!
캐나다 교회 인원수는 그다지 많지 않아서 몇백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들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직무를 소홀히 하며 패거리를 짓고 허송세월하고 있었으니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니겠느냐? 사역에 효율이 없고 진척도 없었다. 모두가 옥신각신하며 조화롭게 협력하지 않았다. 리더와 일부 사람은 나쁜 짓을 일삼는데 아무도 마음을 졸이거나 속을 끓이지 않았다. 괴로워하거나 이 일로 기도하는 사람도 없었고, 상부에 구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이도 없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무도 일어나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행하는 이 본분은 하나님이 맡기신 건데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리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었다. 인원수도, 각종 설비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럼 무엇이 부족하겠느냐? 부족함은 좋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교회 사역에 부담을 느끼거나 하나님 집 사역을 지키지 않았다. 나서서 목소리를 내거나 분별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여 모두가 일어나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고 폭로하게 하는 이도 없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이들 얼간이가 눈이 멀어 보지 못한 것이냐, 아니면 자질이 떨어지거나 나이 들어 노망이 든 것이냐? (아닙니다.) 그 어떤 원인도 아니다. 그럼 실상은 무엇이냐? 그들은 모두 적그리스도와 한패여서 서로 보호하고 아첨하며 아무도 누구를 폭로하지 않았다. 모두가 마귀의 소굴에서 뒹굴고 있었다. 본분이나 하나님의 부탁이 그들의 마음속에 있었겠느냐?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되는대로 살면서 마음에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았다. 그들 마음에 죄책감이 없었다는 것은 어떤 현상이냐?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 하나님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버렸다는 말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즉, 본분과 진리, 하나님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 그리고 그들의 생각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싫어하게 되었다는 말이고, 그들에게 더 이상 이 본분을 이행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가책, 징계가 보이지 않았고 아무런 양심의 발견도 없었으며 나아가 깨우침과 빛 비춤, 책망과 훈계, 심판과 형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런 것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들은 무감각해졌고 마귀와 다를 바 없었다. 하나님 집에서 다년간 설교를 들으며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말씀,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방법에 관한 말씀도 들었는데, 그동안 그들이 진리를 구하고 받아들였느냐? 적그리스도를 분별했느냐?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에 대해 토론을 벌였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그랬더라면, 틀림없이 몇 명이나마 일어나 적그리스도를 폭로하고 고발했을 것이고, 이 지경까지 엉망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한 무리의 바보, 못난이들이다! 그들의 실상과 그런 모습들, 그리고 그들에 대한 규정을 근거로 해서 나는 그들을 B조로 보내서 격리 반성을 하게 했다. 이것이 과한 처사였느냐? (아닙니다.) 하나도 과하지 않다. 과하지 않다면, 가장 적당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어떤 기회겠느냐? 그들이 정말 인성이나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어서 회개하고 뉘우친다면 교회로 돌아올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회개의 마음조차 없다면 평생 격리되고 심지어 교회에서 제명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곧바로 제명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만약 이들이 “저희가 나쁜 짓 좀 했다고 이렇게 화를 내시고 격리시키시는군요. 그래도 지금껏 본분을 이행하면서 공로는 없다 해도 나름대로 수고했는데 왜 이건 생각해 주지 않으시죠?”라고 말한다면, 사실 그들을 격리시킨 것만으로도 충분히 관용을 베푼 것이다. 그들의 모든 행동에 따르면 제명당해 마땅하다. 그들의 이런 태도를 보면 너무나도 위험하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겠느냐? 두 가지 단계로 나누어야 한다. 먼저 그들을 격리시킨 다음, 격리 동안 그들의 상황과 각자의 태도를 참작해서 교회에 계속 머물게 하거나 제명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그들에게는 충분한 관용이 아니겠느냐?
그 캐나다 교회 사람들이 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저질러서 그들의 행동에 따라 격리한 것은 너무나도 큰 관용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처리한 것에 이견을 갖느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께서 이렇게 처리하신 것이 옳긴 하지만 그래도 문제가 없는 건 아녜요. 그 캐나다 교회 사람들은 자업자득이고 인과응보지만 당신께서 이렇게 처리하신 것은 일벌백계하려는 것이 아닌가요?”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올바르냐?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일부 사람들이 “이렇게 처리하는 게 맞죠.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보여 주는 것처럼, 산을 두드려 범을 놀라게 하는 것처럼 일벌백계해야 해요.”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는 이방인의 말이 아니냐? 이는 일을 바라보는 이방인의 관점이다. 아마도 너희가 이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방인의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말을 하면 역겹지 않으냐? 너희가 이런 말로 이 일을 해석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그런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처리한 것은 과연 무슨 의미겠느냐? (원칙대로 처리하신 것입니다.) 원칙대로 처리한 것은 맞다. 이 말이 실제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이는 그들의 자업자득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외에 무엇보다 간단하게 두 어절로 말할 수 있는데 무엇이겠느냐? (‘당해도 싸다’입니다.) 그렇다. 그들의 소행에 따르면 그들은 당해도 싸다. 자업자득인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 원칙에 합당하게 일하고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준다. 또한, 사람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응당한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 잘못을 저지르면 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들이 행한 대로 갚아 준다. 이것이 바로 그들에 대한 응보이고, 요즘 말로 하면 원칙대로 그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들의 일을 폭로한 것 중에 어떤 게 사실이 아니더냐? 그들의 그런 일에 대한 분석과 정의, 그들에 대한 규정과 관련해서 어떤 말이 사실이 아니더냐? 전부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이러한 모습과 모든 행동에 따라 그들에게 갚아 주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이냐? 산을 두드려 범을 놀라게 하는 것, 일벌백계,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보여 주는 것 등이 캐나다 교회를 처리한 일과 같은 성질이겠느냐? (다릅니다.) 그 일벌백계의 목적이 무엇이냐? 어떤 성질이냐? 일벌백계, 산을 두드려 범을 놀라게 하는 것,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보여 주는 것, 이 말은 기본적으로 같은 성질이다. 과연 어떤 성질이겠느냐? 통치자나 권세자가 그가 생각하는 특정 장소에서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 어떤 일을 함으로써 남에게 겁주려는 목적을 이루는 것으로, 이를 일벌백계라 한다. 그가 이렇게 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남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앞에서 경솔하게 행동하고 제멋대로 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이 원칙에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느냐? 통치자의 행동에는 동기가 있다. 그의 동기는 바로 그의 정권을 공고히 하고 그의 권세를 지키는 것이니 그가 그 일을 구실로 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그 일을 하는 성질인 것이다. 캐나다 교회 사건은 이방인의 사탄 철학이 아닌 진리 원칙을 토대로 처리했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며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여 교회를 엉망으로 만들었는데도 많은 사람이 적그리스도를 옹호하니 그들의 이런 성질은 실로 악랄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이렇게 그럭저럭 지낼 바에 교회를 떠나 본인의 삶을 사는 것이 낫다. 이렇게 하면 최소한 하나님 집의 자원은 낭비되지 않을 테니 이 또한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했느냐? 그들의 양심에는 이런 지각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 집의 재산과 물질을 낭비하고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적그리스도와 한통속이 되어 함께 악행을 저질렀다. 이 얼마나 심각한 성질이냐! 하나님 집에서 그들을 이렇게 처리한 것은 그들이 자기를 반성하고 인식하게 하여 뉘우치고 회개할 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유익하다. 만약 처리하지 않는다면 내년 오늘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다행히 적절한 때에 그들을 격리하고 처리해서 더 많은 사람이 악을 저지르고 교회 사역에 더 큰 손실이 발생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들에게 구원이겠느냐, 아니면 도태겠느냐? (구원입니다.) 사실 구원이며, 그들을 도와주려는 것이다. 그들이 정신 차리게끔 그들에게 경종을 울려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렇게 하다가는 침륜되고 멸망되고 구원받을 희망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점을 깨닫는다면 그들에게 아직 희망이 있을 것이고, 이조차 깨닫지 못해 계속 의기소침하고 타락하며 자포자기하면서 상부에 대항하고 소극적인 정서를 보이며 관념을 분출한다면 문제가 된다. 너희는 그들이 어떻게 하길 바라느냐? (회개하길 바랍니다.) 너희도 그들이 나아지고 회개하기를 바라는데 나는 어떻겠느냐? 내가 그들이 회개하지 않기를 바라고 그들은 없는 게 낫다며 모두 정리해 내보내기를 바라겠느냐?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겠느냐? (아닙니다.) 이런 마음이 아니다. 그들이 나아지고 회개하며 회개하고 나서는 하나님 집에 돌아와 다시 본분을 이행해서 예전 모습과는 달라지기를 바란다. 그런 말이 있지 않으냐?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욘 3:8) 만약 이런 성과에 이른다면 그들에게 이것은 평생에 지울 수 없는 기억이자 흔치 않은 체험일 것이니 이는 잘된 일일 것이다. 이것은 그들 각자의 추구에 달려 있다.
캐나다 교회의 적그리스도 사건을 처리하고 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들은 몇 년간 본분을 이행했는데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교란한 일 때문에 격리당했어.’ 그에게 위기감이 엄습한다. ‘아, 하나님께서 노하시면서 사람을 저주하시는 모습은 처음 봐. 적그리스도의 일당, 공범자, 추종자까지 봐주지 않으시니 정말 매정하시네! 평소엔 항상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긴다고 하시면서 이번에 정말 사람이 견디기 버거울 정도로 화를 내시네!’ 그들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너희는 이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다고 하느냐? 이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너희가 설교를 들은 게 몇 년째냐? 최소 5년 이상은 되지 않았느냐? 그럼 우리가 많은 일에서, 특히 원칙성이 비교적 명확한 일에서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공감대가 무엇이냐? 일종의 이심전심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하면서 너희에게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는데도 너희가 왜 그런 건지 마음속으로 이미 다 알고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또 긍정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이를 이심전심이라고 한다. 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느냐? 사람이 설교를 많이 듣고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아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내가 많은 일을 분명히 설명해 주고, 나의 관점과 생각, 일하는 원칙, 그리고 너희가 깨달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 등을 너희에게 알려 주고, 내 관점이 이런 것이라고 알려 준 다음 너희가 내 관점을 받아들이고 내 관점에 따라 사물, 본분, 신앙, 삶, 사람을 대한다면 우리 사이의 이심전심이 갈수록 많아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캐나다 교회를 처리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이런 이심전심의 수준에 이르렀느냐? 오늘 내가 이렇게 해석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느 정도로 이심전심이 되겠느냐? ‘일벌백계’,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보여 주는 것’ 이런 게 이심전심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들은 꽤 오랫동안 설교를 들었는데 내가 한 이 일이 이들 사이에 왜 이런 반응을 일으켰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들의 이런 관점을 내가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겠느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지 느끼게 되었다!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겠느냐? (그러셨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랬을 거라 생각하느냐? 이런 말, 이런 관점, 이런 인식과 이해의 방식은 존재해서도 안 되고 나타나서도 안 된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결과는 뜻밖의 일이고 나의 예측과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니 내가 이 일로 수치를 느낀다!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심각한가요? 이는 침소봉대가 아닌가요?” 너희에게 이렇게 답해 주겠다. 이 일은 큰일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작은 일이라고도 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해서부터 하나님이 네 하나님이며 네 주라 인정하고, 네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받아들이며 너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순종한다면 그날부터 너는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 관계가 형성되고 나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게 된다. 어떤 문제겠느냐?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행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식하지도 못하며 나아가 자발적으로 구하거나 이해하지 않는다면 너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시각각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위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네가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먹고 마시든, 네가 하나님에게 어떻게 순종할 생각이든 이 위기가 하루라도 존재하는 한 네가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바람은 성립되지 않고 산산조각 나서 환상이 되어 버릴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정상이고, 이 위기가 존재하는 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과연 어떤 관계이겠느냐? 서로 합하는 관계이겠느냐? 가족의 관계이겠느냐, 아니면 동료의 관계이겠느냐? 과연 어떤 관계이겠느냐? 너와 하나님의 관계에 위기가 존재하는 한 너는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행사를 판단하고 오해하여 하나님이 한 일에 대항하고 그 일을 거부할 것이다. 이것이 위험이 아니겠느냐? 이 위험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일단 긍정적인 면은 제쳐 두고 부정적인 면부터 이야기해 보자. 예를 들어, 네가 영원히 하나의 시선으로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세상의 군주요, 최고의 관료요, 이 땅 위의 권력을 가진 절대자라고 생각한다면, 언제까지나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이를 바탕으로 너는 하나님의 행사와 말씀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겠느냐? 몇 가지 예를 들어 주면 아마도 내가 말한 이 관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임금을 모심이 마치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럼 이 말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적용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 많은 사람은 이런 관점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 또 방금 말한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보여 주는 것” 역시 하나님을 세상의 군주나 권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가 이렇게 보기 때문에 이런 인식이 있는 것이고, 그와 하나님의 관계가 이렇기 때문에 또 그가 하나님을 이렇게 바라보며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이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가 세상에서 지위를 가진 사람을 대하는 시선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또 “자기 침상 곁에 어찌 남이 코를 골게 내버려두랴.”라는 말도 있다. 이것은 세상의 군주나 지위와 권세를 가진 자들의 행동 방식을 묘사하는 말이다. 너희 중에 이런 부류의 사람을 알거나 접해 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너희 역시 이런 말을 하나님에게 적용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어떤 일이나 말씀을 할 때 너는 그 말들을 결합하여 그런 시선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것이다. 네가 그런 시선과 그런 관점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과연 어떻게 되겠느냐? 대립할 것이다. 네가 자기 마음속 하나님을 얼마나 존경하고 앙모하고 두려워하든, 얼마나 순종하고 머리 숙여 복종하든, 또 네 태도가 어떻든 사실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여전히 대립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너희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상황이 이러하지 않으냐? 캐나다 교회의 적그리스도 사건을 내가 이렇게 처리한 후에 너희에게 상세한 내용과 구체적인 사정 그리고 그들을 처리한 이유를 얘기하지 않아서 자기 앞날과 운명을 걱정한 사람이 많았다. 이 걱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근본 원인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인식이 하나님의 본질에 부합한다면, 가령 하나님의 공의와 권병, 지혜에 대한 네 인식이 진리에 부합한다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든 네가 그 안에 담긴 이유를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 한들 하나님을 오해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이다. 절대 그럴 리 없을 것이다. 내가 캐나다 교회의 일을 처리하고 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보여 주는 것으로, 우리를 겁주려는 거예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뭐가 문제겠느냐? 이 말이 진리에 부합하느냐? 이것이 올바른 인식이냐? (아닙니다.) 왜 아니라고 하느냐? 내가 간단히 한마디만 하겠다. 그의 이런 인식 방식은 실상에 부합하지 않는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해한 것이다. 이 말이 간단하지 않으냐? (간단합니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 그리 어렵게 해석하느냐? 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누굴 겁주려는 것이 아니다. 최근 본분 이행의 성과가 계속 올라가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다면 그들은 본분 이행에 합격했겠느냐? 아직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이들은 본분 이행이 합격점에 이르는 과정에 있기에 사소한 문제들이 있어도 추궁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교란하는 사람들이 있고 꾸물대는 사람들이 있으며, 혹은 도중에 사소한 문제가 발생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썩 괜찮은 것이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본분을 이행하러 왔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신없이 바쁘고 고생해도, 아무리 책망과 훈계를 받아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여러 환경을 체험할 기회를 주어서 여러 체험과 경험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니 좋은 일이다. 그런데 너희는 무엇을 걱정하느냐? 또 누구를 경계하느냐? 그럴 필요 없다. 너희는 정상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자기 위치를 올바로 찾아서 자기 본분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면 된다. 너희에 대한 요구가 높지 않다.
캐나다 교회에 일어난 적그리스도 교란 사건으로 인해 그들이 오늘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인내했느냐? 내가 그들 사정을 전혀 몰랐던 게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참아 왔다. 어느 정도로 참았겠느냐? 오랜 시간 그들은 완성된 작품을 만들지 못했고 사역에도 진전이 없었는데 다들 쓸데없는 일에 정신 팔려 제멋대로 굴고 단속 없이 방탕하게 지냈으니 진작에 처리되었어야 했다. 너희도 만약 제멋대로 굴고 쓸데없는 일에 정신 팔린다면 내가 너희를 처리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너희가 자발적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거라. 이 얼마나 체면이 서느냐? 이렇게 하는 것이 옳으냐? 이것도 옳지 않다. 너희는 자꾸 떠날 생각만 하지 말고 마음 편히 이곳에 발을 붙여 자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제대로 이행할 수 있든 없든 도망치지 말고 최소한 마음을 다해 마지막에 온전한 답안지를 제출하여라.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자질이 떨어지고 가방끈도 짧아서 별 재능이 없어요. 성격에도 결함이 있고 본분 이행에도 늘 어려움이 있습니다. 만약 제대로 못 해서 교체되면 어떡해요?” 뭐가 걱정이냐? 그 사역이 너 혼자 완수할 수 있는 일이냐? 너는 그중 한 역할을 맡았을 뿐이지 너더러 전부 도맡으라는 것이 아니다. 너는 그저 네 몫만 맡으면 된다. 이게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얼마나 간단한 일이냐? 왜 의심하기만 하느냐? 떨어지는 낙엽에 맞을까 걱정하며 발 뺄 궁리부터 하니 못나지 않았느냐? 무엇을 못나다고 하느냐? 현실에 안주하며 전력을 다하려 하지 않고 늘 대충 먹고 살 궁리만 하며 좋은 것을 누리려 하니 이런 사람이 바로 쓸모없는 자이다. 속이 너무 좁은 사람을 뭐라 부르느냐? (좀생이라고 합니다.) 좀생이인 사람은 모두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속을 헤아려서 다른 사람을 모두 그와 같이 이기적이고 비열하게 여긴다. 이런 사람은 못난 사람이다. 설사 하나님을 믿더라도 진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람의 믿음이 너무 작은 것은 무엇에서 기인하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해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하는 모든 사역과 일, 너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이해하기에는 네가 깨달은 진리가 너무나도 미미하여 이것을 이해하는 데 미치지 못하니 네게 하나님에 대한 여러 의심과 상상, 오해, 관념이 생기는 것이다. 네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곤 죄다 이런 것들이라면 네게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있겠느냐? 너희에게 진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너희가 언제 교체될지 몰라 늘 안절부절못하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한테 오셔서 시찰하실지 몰라.’라는 생각에 두려워한다. 안심해라. 너희가 하나님 집으로부터 받은 일을 제대로 하기만 하면, 설사 너희가 진리 추구나 생명 진입이 조금 부족하다고 해도 내가 추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너희가 예배 때 설교를 어떻게 듣는지, 교회 생활은 어떤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먹고 마시는지 등 일은 내가 감시하지 않고, 너희의 사역을 간섭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 너희를 간섭하지 않겠느냐?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각 방면의 업무에 관해 너희가 나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의 사역 과정에서 너희의 경험이나 업무 측면에서 발전이 있었을 것이고, 일련의 방안을 도출해 냈을 것이다. 그것이 글이든 말이든 하나의 틀은 도출해 냈을 터이다. 너희의 사역 패턴이 어떤지 나는 모르니 너희의 사역 계획이나 사역 방식을 깨뜨리고 싶지 않다. 너희 나름의 스타일이나 규칙, 틀에 따라 손에 익은 방식, 쉬운 방식, 모두가 자유롭고 사역 효율이 높은 방식대로 하여라. 너희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는 것이다. 내가 교회를 둘러볼 때도 있겠지만 너희 눈에 띄지 않게 돌아가면서 최대한 너희에게 자유를 준다. 왜 이렇게 하겠느냐? 모두가 업무가 익숙지 않아 배우면서 조금씩 익혀 가는 게 필요하다. 업무를 배우는 것이든 아니면 진리에 진입하는 것이든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진도와 효율이 있기 마련이다. 무리하게 강요해선 안 된다. 사람은 반드시 과정을 거쳐야 하는 법이다. 실패와 좌절을 겪거나 약간의 교훈을 얻은 다음 차츰 다방면으로 어느 정도 길을 도출해 내고 원칙을 파악하면 발전이 있게 된다. 너희에겐 너희 나름의 업무 스타일이 있고 자기만의 방식이 있으니 내가 간섭해선 안 된다. 그래서 내가 너희 사역에 관한 일을 논의하는 자리에 거의 참석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의 입장을 고려한 이유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내 입장을 고려한 것이다. 너희에게 숨김없이 말하자면, 업무 측면이든 아니면 예술과 관련된 측면이든, 더 나아가 진리와 관련된 측면이든 너희가 볼 수 있거나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은 무척 낮은 것 같다. 내가 만약 알묘조장 식으로 너희를 대한다면 너희가 견딜 수 있겠느냐? 견뎌 내지 못한다. 내 뜻대로 너희 가운데에서 일을 한다면 내 요구치가 지금 너희의 실제 업무 수준과 실제 생명 진입의 분량을 넘어설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힘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희가 고생스럽기도 하다. 우리 모두에게 난감한 장면이 연출될 것이니 이는 좋지 않다. 그것은 내가 기대하는 모습이 아니다.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실제 상황이 바로 이렇다. 이 두 가지 원인, 즉 하나는 너희 자신의 원인, 다른 하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때문에 내가 이렇게 처리한 것이다.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너희의 점진적 성장에 적합하다. 생명 진입 측면으로는 하나님 말씀 책이 있고, 여러 예배와 설교가 있으며, 양육하고 붙들어 주는 리더 일꾼이 있으니 너희가 먹고 마시며 공급받을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사람의 생명 성장 과정은 마치 파종하고 물을 대고 비료를 주면 점점 싹을 틔우고 자라나 열매를 맺는 것과도 같은 매우 더딘 과정이다. 물론 이 더딘 정도는 낱알의 씨가 싹을 틔워서 열매를 맺는 과정보다 훨씬 느리다. 왜 그렇겠느냐? 사람의 내면에 많은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이유가 있다.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은 타성을 가지고 있으며 소극적으로 변하기 쉽고 게을러서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것이 무감각하고 둔하다. 또한, 사람 자체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이 진리에 진입하여 생명 진입에 이르는 것은 순전히 오르막길을 가고 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대세를 따르고 그럭저럭 살며 세상을 추구하고 사회 흐름을 따르게 하는 것은 물결에 떠내려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는 건 쉬울 뿐 아니라 주관적으로 사람도 이렇게 하는 것을 바라 마지않는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고 정의로운 일을 하며 정의감을 가지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그가 자기의 주관적 바람을 버려야 하고 자신의 기분과 관념은 물론 게으름 등 이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것들을 버려야 한다. 자기 상상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이나 사역 파트너, 환경을 마주하고 나아가 정곡을 찌르거나 듣기 거북한 말을 들으면 기도로 이겨 내야 하니 그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 추구의 길을 가는 데에 장애물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의 심지가 깊고 진리를 추구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면 한두 해를 체험한 후 어느 정도 성장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 자기 성미대로 하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이라면 그의 성장은 더디기만 할 것이다. 어쩌면 얼마 동안 특수하고 뜻깊은 일이 일어나 그가 교훈을 받아들이고 책망과 훈계를 받아 마음 깊은 곳에 엄청난 상처와 자극을 받아야만 그의 생명 진입에 자그마한 전환점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 전환점으로 인해 그가 성장할 수 있겠느냐? 아직 그럴 수 없다. 그동안 그가 어떻게 진리를 향해 구하는지에 달려 있다. 그가 만약 이치만 떠들고 육적인 편안함만 탐하며 그다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일은 그에게 있어 수박 겉핥기 식의 교훈이 될 수밖에 없기에 진리를 깨닫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의 생명 성장이 더딘 정도에 따라 내가 너희와 이런 식으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런 방식을 취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느냐? (적절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너희에게 더없이 유익하다. 최소한 너희는 마음이 편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온종일 살피고 지켜보면서 24시간 숨돌릴 틈 없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라’고 하면서 별도로 너희에게 부담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 너희가 순리에 따르게 할 것이다. 순리에 따르는 것이 너희가 방종해도 된다는 뜻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내가 안심하고 너희를 지켜보지 않겠느냐? 성령이 감찰하기 때문이다. 또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그런 필요가 있고 그가 마음속 깊이 진리를 추구하고 싶어 하기에 네가 지켜보지 않아도 그는 진리를 추구할 것이다. 그가 바로 정직하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만약 그가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면 네가 지켜보고 있어 봤자 소용없다. 지켜보더라도 그는 겉으로만 반응할 뿐이고, 네가 잠깐이라도 한눈팔면 그는 구색만 맞추다 돌아서서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진리 추구는 사람이 감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이 일을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너희와 지내고 접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
캐나다 교회의 일이 모두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이 일에서 어떤 진리를 깨달았느냐?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도 계속 이것이 일벌백계이고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느냐? 이런 일이 없을 땐 네가 하나님의 마음과 이미 합해져서 너와 하나님의 관계를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자 네 보잘것없는 분량이 드러나고 말았다. 무슨 분량이겠느냐? 너는 네가 중임을 맡을 수 있다고, 고생할 수 있다고, 네 의지가 예전보다 강하고 믿음도 커져서 곧 온전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속에 이런 착각이 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어떠냐? 아직 멀었다! 나란 사람을 보면 외모는 이렇게 생겨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다. 내 성격은 시원시원하다고 할 수 있지 않으냐? 성격으로만 보면, 나는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너희에게 말하지 않고 숨기고 있다가 몰래 그 일을 하고는 너희에게 내가 무슨 생각인지 맞춰 보라고 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무슨 일이든 나는 너희에게 똑똑히 말해 준다. 결국, 너희는 일련의 이론을 도출해 낸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제 최고의 인식입니다.”라고 말이다. 이 인식이 어떠냐? 이제 교훈을 얻은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가장 실패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내가 하는 말을 너희가 들을 수 있고, 내 외모를 너희가 볼 수 있으니 나는 너희가 만질 수도 볼 수도 있는, 뼈와 살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겨우 이 정도의 일만 해도 너희는 짐작하지 못하니 우리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것이고, 고작 이 정도의 이심전심도 안 되는 것이다. 너와 하나님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머냐! 너는 하나님을 인식하기에 아직 멀었다! 이것이 진실한 말이고, 실제 상황이다. 너는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오래 믿어서 도리를 말할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잘 들어라. 너는 아직 멀었다! 네게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사실 너는 하나님을 인식하기에 아직 멀었고 근처도 가지 못했다. 어떤 일이든 다 사람을 드러낼 수 있다. 캐나다 교회를 처리한 일의 경우에도 일부 사람들이 드러났다. 사람은 이런 다양한 환경과 사건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자신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인식하여 하나님의 행사와 성품을 이해하고 사람의 패역,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이 과연 어떤 관계인지 인식해야 한다. 아울러 진리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인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 이런 일을 통해 네 진실한 분량과 내적 상태를 가늠하는 것이다. 너희가 이번에 교훈을 좀 얻었느냐? 다음부터는 이런 인식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여라. 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가슴 아픈 일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것이 이렇게나 오래 이야기할 일이었느냐? 그래선 안 될 일이었다. 왜 그래선 안 될 일이라고 하겠느냐? 너희가 알고 있는 글귀와 도리에 따라 이 정도의 일은 너희가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 혼자 생각해 본 다음 다 같이 교제해서 이렇게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게 상대적으로 순수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결국 지금은 극단으로 치우쳤으니 내가 일부 구체적인 내용을 교제해야 했던 것이다. 이번 교제로 모두의 마음이 환해지지 않았느냐? 이 일과 관련하여 다른 생각이 들면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다면 그들을 이렇게 처리한 것이 과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일은 여기까지 교제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교제하도록 하겠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함, 음험함, 간사함을 해부하다
지난 시간에는 적그리스도의 일곱 번째 모습인 사악함, 음험함, 간사함에 대해 교제하였는데 어떤 측면을 위주로 교제하였느냐?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왜 그가 사악하다고 하겠느냐? 그의 본성 본질 속에 어떤 특수한 성품이 있고 어떤 특수한 모습이나 특징이 있길래 적그리스도의 사악함, 음험함, 간사함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냐? 어떤 명확한 특징이 있어서 그의 사악함이 존재하고 실제 상황에 부합한다는 것이 입증되느냐? 우리가 이런 부류의 사람을 사악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그들의 본성 본질의 주된 특징은 무엇이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진리를 깨달을 수 있지만 대놓고 진리를 어기는 적그리스도가 많습니다. 그는 무엇이 옳은지 뻔히 알면서 자기 고집대로 하며 자신의 길을 선택합니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은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나 긍정적인 인물을 까닭 없이 적대시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납니다.) (적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이 잘되는 꼴을 못 봅니다. 하나님 집에서 형제자매에게 제공하는 혜택도 형제자매에게 돌아가게 하기보다는 자기 혼자 독차지하려는 마음에 그는 이 일을 실행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 그리고 지난번 교제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적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진리를 자기 지위를 도모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삼는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특히 사악하다고 생각합니다.) 너희 중에 내가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을 교제할 때 들었던 사례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너희는 사례만 기억하지 내가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을 교제하고 해부하며 했던 말은 기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너희는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 본질을 교제하고 해부한 것과 관련된 진리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느냐?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당시에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겠느냐? 만약 머릿속에 각인되었다면 조금이라도 기억나지 않겠느냐? 너희가 떠올릴 수 있는 일은 너희가 이해한 일이 아니겠느냐? 너희가 생각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 당시에 들었을 땐 그 말씀이 옳다며 도리 그대로 기억하고, 아주 힘들게 기억했지만 한숨 자고 나면 기억이 나지 않고, 한 달이면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렇지 않으냐? 네가 한 가지 일이나 한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럼에도 네가 이방인의 관점을 고수하면서 이방인의 방식으로 일을 바라보고 논한다면 이는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네가 몇 년간 설교를 듣고 교제해도 아무런 수확이 없고, 남들이 네게 진리를 교제하면서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이는 네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자질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핵심적인 말을 너희 중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한편으로는 시간이 오래되어 너희가 잊은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 말의 중요성을 의식하지 못했고 그 말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을 간파하고 폭로하는 핵심적인 말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어떤 말이겠느냐?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은 그가 긍정적인 모든 사물과 진리와 관련된 모든 사물을 적대시하고 혐오하는 것에서 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는 왜 긍정적인 사물을 적대시하고 혐오하겠느냐? 긍정적인 사물이 그에게 해가 되었느냐? 그렇지 않다. 그의 이익에 연관되느냐? 그럴 때도 있고 전혀 그렇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럼 적그리스도가 왜 아무 이유 없이 긍정적인 사물을 적대시하고 혐오하겠느냐? (그의 본성 때문입니다.) 그에게 이런 본성이 있어서 모든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적대시하고 혐오하는 것이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본성이 사악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 말이 중요하지 않으냐? 너희는 이토록 중요한 말은 기억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말만 기억한다.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겠느냐? 너희에게 대답해 보라고 하는 건 너희가 어느 정도까지 이해했는지, 마음속에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그 당시에 얼마나 이해했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너희는 역시나 지엽적인 것만 기억하고 있다. 너희는 내가 얘기한 것을 모두 한담으로 치부했다. 나는 한담하러 온 게 아니라 너희에게 무엇으로 사람을 분별하는지 알려 주는 것이다. 내가 한 이 말은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을 분별하는 최고의 진리 원칙이다. 네가 만약 이 말을 적용할 줄 모른다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을 분별하고 인식할 방법이 없다. 예를 들어 적그리스도로 규정된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이 “그는 저희를 참 잘 대해 주었어요. 그리고 사랑을 가지고 저희를 도와주었고요. 이렇게 좋은 사람을 왜 적그리스도로 규정하시나요?”라고 말한다. 그들은 적그리스도가 겉으로는 남에게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며 일부러 하나님에게 맞선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렇게 음험하고 교활한 점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분별은 하나도 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에 대해 관념이 생기며 심지어 이로 인해 하나님을 정죄하고 원망까지 한다. 이런 사람은 그야말로 머저리이니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길이 없다. 그는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농락하고 꼬드기며 아첨하는 등 그런 표면적인 일만 보고 적그리스도 본질의 사악한 면은 보지 못하며 적그리스도가 어떤 수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독립 왕국을 세우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왜 알아차리지 못하겠느냐? 그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며 늘 표면적인 현상에 미혹되기만 할 뿐 문제의 본질과 결과를 간파하지 못하고 사람의 전통적인 도덕관념과 세상 물정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어 적그리스도의 편에 서게 되고 하나님과 갈등하며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누구의 잘못이냐? 이 잘못은 어디에서 기인하느냐? 이것은 그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늘 관념과 상상으로만 사람과 일을 바라보아서 생긴 결과이다.
2. 부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적그리스도를 해부하다
오늘은 적그리스도의 일곱 번째 모습인 사악함, 음험함, 간사함에 대한 교제를 이어 가겠다. 여기에서 중점은 사악함이다. 음험함과 간사함을 포함하고 있는 대표적인 적그리스도의 본질이 사악함이고, 음험함과 간사함은 그다음이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는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을 교제하고 폭로했다. 그땐 하나의 큰 틀, 개념을 정의하는 성격이 강한 내용을 교제했는데, 적그리스도의 이런 측면의 본질을 폭로하는 말씀이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이 주제를 교제해 보자. 어떤 사람들은 “이 주제에 교제할 만한 게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있다. 교제가 필요한 구체적인 내용들이 이 속에 있다. 오늘은 방식과 관점을 바꿔서 교제해 보도록 하겠다. 지난번에 교제한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의 주된 특징과 모습은 무엇이었느냐? 적그리스도라는 작자는 모든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적대시하고 혐오한다. 그가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적대시하고 혐오하는 데는 이유가 필요치 않다. 누가 종용한 것도 아니고 악령이 들린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 자신이 원래부터 싫어하고 적대시하며 혐오한 것이다. 즉, 그의 생명과 뼛속까지 긍정적인 사물을 보기만 하면 반감이 생기는 것이다. 네가 만약 그에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진리를 교제한다면 그는 너를 증오하고 심지어 때릴 생각까지 할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긍정적인 사물을 적대시하고 혐오하는 이 측면은 지난번에 교제하였으니 오늘은 그런 측면으로 교제하기보다는 다른 면을 이야기해 보겠다. 다른 면은 무엇이겠느냐? 적그리스도가 긍정적인 사물을 적대시하고 혐오한다면 그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오늘은 이런 측면과 관점으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을 분석하고 해부하겠다. 이럴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필요하다. 너희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이다. 그럼 이를 바탕으로 적그리스도가 과연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하기 좋아하는지, 그가 일하는 방식과 수단은 무엇인지, 그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더 자세히 생각해 보아라. 이런 관점과 측면으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을 살펴보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이것이 좀 더 구체적이고 객관적일 것이다. 먼저, 적그리스도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그가 긍정적인 사물을 적대시하고 부정적인 사물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부정적인 사물에는 무엇이 있느냐? 거짓말, 기만이 부정적인 사물이 아니겠느냐? 거짓말, 기만은 부정적인 사물이다. 그럼 거짓말, 기만에 상대되는 긍정적인 사물은 무엇이냐? (정직함입니다.) 그렇다. 정직함이다. 사탄이 정직함을 좋아하겠느냐?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기만을 좋아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요구 사항이 무엇이더냐? 나를 믿고 따르려거든 먼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느냐?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럼 사탄이 가장 먼저 사람에게 가르친 것은 무엇이더냐? 거짓말이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의 첫 번째 증거가 무엇이냐? (기만입니다.) 그렇다. 그는 기만과 거짓말을 좋아하고 정직함을 혐오하고 증오한다. 정직함은 긍정적인 사물이라 사랑하지 않고 반감을 품고 증오하는 반면 기만과 거짓말은 좋아한다. 누군가 항상 적그리스도 앞에서 “당신은 사역을 하면서 지위를 좋아하고 때로는 게으름도 피워요.”라고 정직한 말을 한다면, 이 말을 들은 적그리스도가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일종의 태도이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끝이겠느냐? 사실대로 말하는 이 사람에게 그는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반감을 품고 싫어한다. 어떤 적그리스도가 형제자매에게 “제가 한동안 여러분을 이끌었는데 제게 의견이 있으면 얘기해 주세요.”라고 하면 다들 이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진솔하게 얘기하니 말해 줘야겠다.’ 그래서 한 사람이 “당신은 무슨 일이든 진지하고 성실하게 임해서 고생을 많이 하세요.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저희는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 집에 당신 같은 리더가 몇 명만 더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결점이라면 진지하고 성실한 게 당신의 결점이겠죠. 만에 하나 당신이 지쳐서 아프거나 쓰러져서 사역할 수 없게 되면 저희는 끝 아닌가요? 누가 저희를 이끌겠어요?”라고 하면 그 말을 들은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기뻐한다. 그것이 거짓말이고 알랑방귀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적그리스도를 바보로 여기고 농락하는 것인데 적그리스도는 바보가 될지언정 이 말을 굳이 들추지 않는다.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아첨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이들이 그의 흠이나 패괴 성품, 결점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오히려 은근히 그를 칭찬하며 치켜세우는 것은 누가 봐도 거짓말이고 아부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그 말을 들을 때 마음이 후련해지고 산해진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느긋하게 만끽하고, 듣고 나면 으쓱거린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적그리스도 안에 거짓말을 좋아하는 성품이 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적그리스도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란 사람은 너무 교만해서 사람들을 불공평하게 대해요. 당신을 지켜 주는 사람은 잘해 주고, 당신을 멀리하거나 아첨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얕잡아 보고 무시하죠.” 이는 바른말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적그리스도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겠느냐? 언짢아서 듣기 싫어하고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원점으로 돌리려고 해명할 수 있는 핑계나 이유를 찾고자 고민할 것이다. 앞에서 늘 자기를 떠받들고 감언이설을 통해 은근히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 심지어 자기를 기만하는 게 확실한 말을 하는 사람조차 적그리스도는 전혀 추궁하지 않고 오히려 요직에 두어 쓴다. 그것도 모자라 항상 거짓말을 늘어놓는 사람을 중용의 대상으로 삼고는 그들에게 중요하고 체면이 서는 본분을 이행하도록 배치한다. 반면 늘 사실대로 말하며 문제를 보고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보내 본분을 이행하게 해서 그들에게 윗선 리더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고 그들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거나 접근할 수 없게 한다. 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재능이 있든, 하나님 집에서 어떤 본분을 이행할 수 있든 적그리스도는 일절 신경 쓰지 않는다. 오로지 남을 잘 속이고 그에게 득이 되는 사람만 쓰고 하나님 집의 이익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적그리스도는 기만과 거짓말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그가 담당하고 있는 교회는 복음 사역을 전혀 하지 않고 복음 전파를 위해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것도 등한시하기 때문에 복음 전파의 성과가 형편없고, 사람도 많이 얻지 못한다. 그런데도 적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실상을 보고할까 두려워 바른말을 하는 사람은 미워하고, 거짓말과 기만에 능해서 나쁜 일은 보고하지 않고 좋은 일만 보고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어떤 말을 듣기를 가장 좋아하겠느냐? “우리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모두 잘 증거해서 복음 전파 선수예요.” 이 말은 사람을 속이는 말이 아니냐?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이런 말을 듣기를 좋아한다. 이 말을 들으면 적그리스도가 반응하지 않겠느냐? 그는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네, 우리 교회의 복음 전파 성과가 갈수록 좋아져서 다른 교회보다 훨씬 나아요.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전문가입니다.” 그저 이렇게 서로를 치켜세울 뿐 그는 굳이 들추지 않는다.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사역한다. 아랫사람들이 그를 속여도 그는 기꺼이 속아 주면서 이런 식으로 놀고 있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실상을 알게 되어 “그건 아니죠. 우리가 복음을 전한 열 명 중에 두 명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해서 알아보는 걸 포기했고, 남은 여덟 명 중에서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고작 세 명뿐이에요. 우리가 전력을 다해서 그 세 명을 전해 와야 합니다.”라며 일어나 실상을 폭로하면 적그리스도는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그는 속으로 ‘난 모르는 일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럼 다른 사람이 그가 모르는 일의 실상을 솔직히 말했는데 그가 동의하겠느냐? 기뻐하겠느냐? 기뻐하지 않는다. 그가 기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리더인데도 교회 사역의 실상과 구체적인 사정을 모르고 있고 파악하지도 못해서 실제 상황을 아는 사람이 낱낱이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각 있는 사람과 정직한 말을 하는 사람이 이 일을 분명하게 밝힐 때 그 말을 들은 그에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무엇이겠느냐? 체면을 구기고 위신이 떨어지겠다는 생각이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에 따라 그가 어떻게 하겠느냐? 그에게 증오심이 생길 것이다. ‘입방정은! 너만 조용히 있었으면 그냥 넘어갈 일을, 그렇게 말해서 모두가 알게 됐으니 다들 내가 아닌 너를 숭배할 거 아냐. 이러면 내가 무능하고 실질적인 사역은 안 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너 나한테 찍혔어. 네가 사실대로 말하면서 매사에 나한테 대들고 맞서면 큰코다치게 만들어 주겠어.’ 봐라, 그가 진지하게 사역하고 정직한 말을 하며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을 어떻게 여기느냐? 그에게 맞서는 사람으로 여긴다. 이는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냐? 그는 얼른 협조하여 자기 사역에서의 실책을 보완하기는커녕 오히려 계속 사역에 태만하면서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 사역을 열심히 책임지는 사람을 증오하며 심지어 그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려 한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행동 방식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무슨 성품이냐? 이것이 사악함이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은 이렇게 드러난다. 정직한 사람, 사실대로 말하고 진실한 말을 하는 사람, 원칙을 고수하고 진상을 추궁하는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적그리스도는 반감을 품고 혐오한다. 그의 사악한 본성이 터져 나오고 표출되는 것이다. 반면 기만적으로 행동하거나 거짓을 꾸며 내기만 하면 적그리스도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정신을 못 차린다. 너희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읽어 보았느냐? 적그리스도의 행동 방식에 어느 정도 이런 성질이 있다. 그 임금이 벌거벗고 길을 걸어가자 수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임금님의 새 옷이 정말 아름다워요! 임금님은 너무 멋지세요! 정말 위대하십니다. 임금님의 새 옷은 정말이지 신비롭네요!”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임금이 알았느냐? 그렇게 벌거벗고는 어떻게 자기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을 모를 수 있느냐? 이것을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악한 적그리스도는 음험하고 간사하지만 지혜롭지는 않다고 하는 것이다. 왜 그가 지혜롭지 않다고 하겠느냐? 그가 벌거벗은 임금처럼 그를 속이는 말을 분별하지 못하고 벌거벗은 채로 거리를 활보하며 추태를 보이니 어리석지 않으냐? 그러니 많은 경우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겠느냐? 바로 그의 어리석음이다.
적그리스도는 사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기만과 거짓말을 좋아하고 정직함을 싫어하며 진실을 증오하기 때문에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고 있는 교회에서는 정직한 사람이나 정직한 사람이 되고자 추구하는 사람, 진리를 실행하고 기만이나 거짓말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항상 괴롭힘을 당한다. 그렇지 않으냐? 적그리스도는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일수록 괴롭히고 밉게 본다. 반대로 그를 치켜세우고 그를 속이는 사람일수록 그의 총애와 환영을 받는다. 적그리스도가 사악하지 않으냐? 너희 주변에 이렇게 사악한 적그리스도가 있지 않으냐? 본 적 없느냐?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의 입을 막아 진실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네가 거짓말로 그에게 맞춰 주는 말을 하면서 한패가 되면 그때는 너와 원수가 되지 않는다. 네가 만약 사실대로 말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기를 고수한다면 언젠가 그에게 괴롭힘을 당할 것이다. 너희는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느냐? 거짓 리더, 적그리스도의 악행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해 결국 할 말이 있어도 그냥 속으로 삭이고 말하지 못했던 적이 있느냐? 네가 사실대로 말하여 문제를 보고하면 호되게 당하는 것이다. 교회마다 문제를 보고했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한 사람이 있지 않으냐? 만약 사람이 거짓말로 교회를 속여 책망을 받게 된다면 이것이 괴롭힘이냐? (아닙니다.) 이는 정상적인 징계로, 괴롭힘과는 다르다. 그것은 네게 업무상 실책이 있기 때문에, 네가 원칙을 어겼기 때문에, 네 행동에 옳지 않은 속셈이 있었고 거짓말로 기만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는 네가 사실대로 말했다는 이유로 결과를 감당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탄과 적그리스도 앞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여기에 대응하는 말이 바로 임금을 모심이 마치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와 말할 때는 항상 눈치를 살펴야 한다. 그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안색이 밝은지 어두운지에 따라 어떤 말이 그의 마음에 들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적그리스도가 “오늘 비가 오려나요?”라고 물어보면 너는 “오늘 일기 예보에 비가 온다고 하더라고요.”라고 대답해야 한다. 사실, 적그리스도가 오늘 비가 올 것 같다고 한 건 본분을 이행하러 나가기 싫다는 얘기다. 네가 만약 “오늘 일기 예보는 맑을 거래요.”라고 대답한다면 그가 화를 낼 것이다. 그러면 너는 재빨리 “아, 잘못 말했어요. 오늘 비 온대요.”라고 말해야 한다. 이에 적그리스도가 “방금 전엔 비가 안 온다더니 지금은 왜 또 비가 온다고 하시나요?”라고 물으면 너는 “지금 맑다고 계속 맑으란 법은 없죠. 옛말에 ‘하늘에 예측할 수 없는 풍운이 있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일기 예보도 틀릴 때가 있는데 아무래도 보는 눈은 당신이 정확하겠죠!” 적그리스도가 이 말을 들으면 기뻐하며 너보고 뭘 좀 안다며 칭찬할 것이다. 너희가 이렇게 처신하겠느냐? 너희 역시 그러지 않겠느냐? 남들이 참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참말을 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등 적그리스도가 자주 하는 일을 너희는 하지 않느냐? 너희는 모두 궁정극을 보지 않았느냐? 조정에서 황제와 대신이 어떤 관계냐? 그들의 관계를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그것은 황제가 모든 사람의 말을 글자 그대로만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 사람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분석하고 연구해야 한다. 이것이 그가 남의 말을 듣는 원칙이다. 모든 대신의 경우는, 남의 말을 들을 때 그 말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황제가 왕정승이 오늘 한 가지 일을 얘기했다면서 뭐라 뭐라 말한다면, 그 말을 들은 대신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황제의 의도는 왕정승을 중용하겠다는 것이군. 그런데 황제께서 가장 걱정하시는 게 작당 모의이고 역모이니 대놓고 왕정승 쪽에 붙을 순 없지. 중립을 지키면서 왕정승을 반대하지도, 지지하지도 말아야 해. 황제가 내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되 황제의 뜻에 반대하지는 말아야겠군.’ 그들이 말 한마디 하면서 속으로 얼마나 고심하며 구불구불 꼬는지 좀 보아라. 뱀이 지나간 길보다 더 굽었다. 그들이 하는 말의 요점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죄다 모호해서 오랜 세월 쌓아 올린 경험으로 어떤 말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분석하고, 그의 평소 언행을 바탕으로 그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분석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들의 말 속엔 진실이 하나도 없다. 저마다 거짓말만 늘어놓는 것이다. 아랫사람이 하는 말이든, 윗사람이 하는 말이든 그들의 대화는 각자의 역할과 말로서, 전부 자기 입장에서 하는 말들이다. 하지만 그 말의 뜻이 네가 듣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절대 아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어떻게 생겨나느냐? 사람의 언행에는 일정한 속셈과 목적, 동기가 있기 때문에 말할 때 그 말의 속뜻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게 되고, 돌려 말하게 되며, 자기만의 방식이 생기게 된다. 방식이 생기면 그것이 진실한 말이겠느냐? 아니다. 그 말 속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허와 실이 혼재하여 실제도 있고, 허구도 있으며, 기만도 있다. 결론적으로 전부 진실한 말이 아닌 것이다. 방금 말한 왕정승의 예시처럼 조정에서 공개적으로 왕정승을 반대하는 자의 그 반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짐작할 수 없다. 그러니 이어지는 내용을 봐야 한다. 다음 장면은 그가 왕정승 집의 밀실에서 술자리를 갖는 것이다. 그 둘은 원래부터 한패였던 것이다. 그가 왕정승을 반대하는 장면만 보고서 어떻게 그 둘이 한패라는 것을 간파할 수 있겠느냐? 그가 왜 반대하겠느냐? 의심받지 않으려고 이런 식으로 황제를 둔감하게 만들어 그 둘이 한패라는 의심을 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수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테두리 안에 사는 이들은 진실한 말은 한마디도 못 하고 매일 거짓말을 하느라 피곤한데도 왜 벗어나지 않겠느냐? 적수가 죽으면 참배까지 하는 것은 어찌 된 영문이냐? 그는 남들과 싸우길 좋아한다. 싸우지 않으면 무료하다고 생각하고 인생이 무미건조하다고 느낀다. 그의 대단한 음모와 계략을 선보일 곳이 없으면 적수를 찾아 그와 우열을 가려야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 내게 된다는 것이다. 적수가 죽으면 인생의 의미가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 부류의 사람이 교화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본성이다. 적그리스도의 본성은 이렇다. 매일 남들과 싸우며 리더 일꾼과 싸우는 것도 모자라 하나님과도 싸우려 한다. 날마다 거짓말하고 기만하며 하나님 집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니 당최 쉴 틈이 없다.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큰 붉은 용처럼 하루라도 멸망시키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적그리스도는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이나 정직한 사람을 싫어하고, 기만과 거짓말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에게 어떤 태도를 지니겠느냐? 예를 들어,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에 대해 적그리스도는 어떤 태도를 지니느냐? 먼저, 그는 이 진리를 멸시한다. 그가 긍정적인 사물을 멸시한다는 점이 그의 문제를 잘 말해 주고, 그의 본성이 사악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완전하지도, 철저하지도 않다. 한발 더 나아가 적그리스도는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하나님의 요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직한 사람이 되면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 고하여 알리고, 무슨 일이든 형제자매에게 털어놔야 하는데 이래서 존엄성이 생기겠어요? 이러면 존엄성이나 자아는 고사하고 프라이버시도 없어질 텐데요. 이거 끔찍하군요. 이게 무슨 진리예요?” 그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하는 말씀과 정직한 사람이 되라는 요구를 속으로 멸시하는 것도 모자라 정죄하기까지 한다. 그가 정죄하는데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결코 그럴 리 없다. 그는 절대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거짓말하고 나서 시인하는 사람을 보면 적그리스도는 어떤 반응을 보이겠느냐? 그는 이런 행동을 속으로 멸시하고 비웃는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 되는 이들이 너무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가 정직한 사람을 어리석다고 정의하는 것은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악함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 하나님께서 정직한 사람이 되랬다고 정말 정직한 사람이 돼서 이런 일도 곧이곧대로 말하다니,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어!’ 그가 속으로 정직한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그가 이 진리를 정죄하고 혐오하며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긍정적인 사물이 분명하고 처신할 때 갖춰야 할 정상 인성 측면의 살아 냄이 분명한데, 적그리스도는 오히려 이를 정죄한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교회에는 언제나 일부 문제를 상부에 보고했다거나 실상을 말했다는 이유로 리더로부터 ‘책망과 훈계’를 받는 사람, 즉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 때로 상부에서 교회 상황을 물으면 어떤 리더는 안 좋은 일은 빼고 좋은 일만 보고한다.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이실직고하라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사실을 발설하지 못하게 그 사람을 한쪽으로 제쳐 둔다. 어떤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수법에 넘어가지 않고 ‘당신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리더로 인정하지 않고 상부에 사실대로 말씀 드리겠어. 상부에서 책망한다고 해도 두렵지 않아.’라고 생각하고는 상부에 실상을 사실대로 보고하였다. 이 사람이 실상을 말하자 교회가 발칵 뒤집혔다. 왜 발칵 뒤집혔겠느냐? 이 사람이 적그리스도에 대한 사실을 폭로하여 실상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가 동의하겠느냐? 그가 용인하겠느냐? 그는 문제를 보고한 사람을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곧 그 일로 회의를 소집해 함께 논의하게 해서 다들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부화뇌동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누군가 실상을 보고해서 리더가 지금 위험해졌어. 우리가 보고하지 않았으니 상부에서 리더를 처리하면 우리도 연루되는 거 아냐?’ 따라서 이들은 그 리더를 지킬 궁리를 하게 되고 결국 실상을 보고한 사람만 고립되었다. 이렇게 해서 적그리스도는 제멋대로 할 수 있게 되었고, 아무리 악을 저질러도 그 사실을 감히 상부에 보고할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그는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러니 어떤 사람들은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싶어도 실제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실상을 알지만 적그리스도가 늘 그의 입을 틀어막으려 하니 그는 겁이 나고 두려워서 타협했다. 이는 적그리스도에게 협박을 당한 게 아니겠느냐? 끝에 가서 이 적그리스도가 드러나 교체된다면 타협한 사람은 어떤 심정이겠느냐? 후회하지 않겠느냐? (후회할 것입니다.) 그는 기쁘면서도 후회할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포기하지 말고 그가 교체될 때까지 계속 그를 폭로하고 그의 문제를 보고할걸.’ 하지만 너무 나약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적그리스도가 기만과 거짓말을 좋아하고 정직함을 혐오하는 것은 그의 사악한 본성이 가장 먼저 뚜렷하게 드러나는 모습이다. 생각해 보아라.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은 때로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고, 또 어떨 때는 끝은 있으나 시작이 없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챌 수가 없으며,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사람한테 분명하게 말하라고 하면 말하지 않는다. 그는 말을 할 때 대명사를 즐겨 사용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을 보고한다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 말이에요. 그러니까 말이죠. 그가 그렇게 생각했대요. 나중에 형제자매들은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았죠….” 한참을 얘기해도 확실한 게 없고 횡설수설한다. 온전한 문장 없이 전부 단어의 나열이며, 서로 연결이 되지 않아 끝까지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고 속이 답답하다. 사실, 그는 가방끈도 길고 문화적 소양도 높은 편이다. 그런데 왜 제대로 된 문장 하나 말하지 못하겠느냐? 이는 성품 문제이다. 사람은 너무나도 교활하여 진실을 좀 얘기하는 것도 힘들다. 적그리스도는 하는 말마다 핵심이 없어서 이야기를 하면 항상 결론이 없고, 뱉은 말을 주워 담거나 늘 떠보는 식이다. 자신의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게 해서 추측하게 하기 위함이다.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그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알아채지 않겠느냐? 이는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는 무엇을 원하겠느냐? 그는 너 스스로 추측하게 하려는 것이다. 네가 추측한 게 곧 사실이라고 믿게 말이다. 어쨌든 그는 확실히 말하지 않았으니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 밖에, 네 추측을 말하는 게 그에게 어떤 이로움이 있겠느냐? 네가 말한 추측은 바로 그가 이끌어 내고 싶었던 말이다. 네 말을 통해 그는 그 일에 대한 네 생각과 관점을 알게 된다. 그러면 그는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는지 선택적으로 말할 것이며, 다음 행동을 취할 것이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의 뒤에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네가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늘 뒷말을 잇는다면 그의 함정에 완전히 빠지게 될 것이다. 그가 늘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피곤하지 않겠느냐? 그는 사악한 성품을 갖고 있어 피곤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이런 건 너무도 손쉬운 일이다. 그가 왜 함정을 파 놓겠느냐? 그는 네가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고, 네가 그를 간파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는 네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을 싫어하는 동시에 너에 대해 알아보려고 하며, 네 관점과 생각, 행동 방식을 끌어내려 든다. 만약 끌어낸다면 그가 꾸민 함정이 제 역할을 한 것이다. 혹자는 말할 때 ‘흠’, ‘아’와 같은 간투사로 시간을 끌며 구체적인 관점을 말하지 않고, 또 혹자는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등의 단어로 시간을 끌면서 자신의 진실한 뜻을 숨기고 하려는 말을 대신한다. 말할 때마다 쓸데없는 조사나 부사, 보조동사가 특히 많다. 만약 그가 한 말들을 녹음해서 정리하면, 그 일에 대한 그의 관점과 태도를 드러내는 말이 한마디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가 하는 모든 말에는 함정과 시험, 유인이 도사리고 있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사악한 성품입니다.) 너무도 사악하다! 이는 기만 아니겠느냐? 함정을 파고 시험하고 유인하는 것은 전부 기만이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을 지닌 이 부류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이 공통된 특징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겠느냐? 좋은 일은 알리고 나쁜 일은 알리지 않으며, 듣기 좋은 말만 하고, 늘 우물쭈물하면서 반은 숨기고 반만 드러낸다. 또 애매모호하거나 두리뭉실하게 말하며 남을 시험하려 든다. 이러한 것이 전부 함정이자 기만의 수단이다.
이런 모습, 이런 언행을 보이는 적그리스도가 많은데, 너희가 만약 오랫동안 그들과 접촉한다면 분별할 수 있겠느냐? 꿰뚫어 볼 수 있겠느냐? 먼저 그가 정직한 사람인지 살펴봐야 한다. 그가 아무리 남들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고 정직하게 말하라고 해도 너는 그가 정직한 사람인지, 정직한 사람이 되고자 추구하는지, 정직한 사람에 대해 어떤 관점과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가 정직한 사람에 대해 속으로 반감을 품고 혐오하고 업신여기는지, 아니면 속으로 정직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 단지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게 어렵고 쉽지 않아서 못하는 건지 등 어떤 상황인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이를 분별할 수 있겠느냐? 짧은 시간 안에 분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가 기만하는 수단이 교묘하다면 알아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알아볼 수 있게 되어 그의 정체는 탄로 날 수밖에 없다. 큰 붉은 용처럼 말이다. 늘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국민 모두의 종이 되겠습니다.”라고 떠들지만 지금 아직도 그것이 국민의 당이라고 믿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그것이 국민을 위해 책임을 진다고 믿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아무도 없지 않으냐? 처음엔 서민들도 공산당 덕분에 신세를 고쳐 주인이 되었다고, 공산당이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국민의 종이라며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것의 마귀적인 말을 믿는 사람이 있느냐? 사람들은 이제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그것은 공공의 적이 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국민의 종에서 공공의 적으로 바뀐 것이냐? 그것이 하는 짓들을 통해, 또 그것의 말에 대조해 보고, 전부 사람을 속이는 허언이자 거짓말이고 자기를 미화시키는 말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말만 번지르르하지 하는 짓은 최악임을 알게 된 것이다. 적그리스도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형제자매에게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불순물이 있어서는 안 돼요.”라고 말하면서 그가 이렇게 하더냐? 네가 그에게 의견을 제시하면서 의사를 조금만 내비쳐도 그는 동의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본분이나 하나님 집의 이익이 자신의 이익과 충돌하면 사소한 이익도 필사적으로 다투며 양보하지 않는다. 그의 행동을 보고 나서 그의 말에 대조해 보면 무엇을 알게 되느냐? 그의 말은 듣기에는 좋지만 전부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이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을 꾀하고 다툴 때 그가 취하는 행동이나 일 처리의 속셈과 방식, 방법은 모두 거짓이 아닌 진짜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적그리스도를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다.
적그리스도는 거짓말과 기만을 좋아한다. 그리고 또 무엇을 좋아하느냐? 수단과 음모, 계략을 좋아한다. 그들은 사탄 철학을 따라 행동하고 진리는 전혀 추구하지 않은 채 오로지 거짓말과 기만에 의지하고, 음모와 계략만을 꾸민다. 네가 아무리 진리를 확실하게 교제해도, 설사 그가 머리를 끄덕이며 인정한다 해도 그는 진리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머리를 쥐어짜서 음모와 계략을 세워 행동한다. 네가 진리를 아무리 확실하게 교제해도 그는 마치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행동한다. 그는 번지르르한 말로 자기의 진상과 본래 모습을 감추고 사람들을 속이며 기만한다. 남들이 자기에게 속아 넘어가면 그는 기뻐한다. 그의 야심과 욕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적그리스도가 행동하는 한결같은 수단이자 방식이다.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말하고, 자신의 소극성과 연약함, 패역한 내적 상태를 툭 터놓고 교제하며, 솔직하게 말하는 정직한 사람에게 적그리스도는 오히려 반감을 품고 업신여긴다. 그는 자기처럼 간사하게 에둘러 말하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한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찾았다며 기뻐한다. 더 이상 남이 자기보다 낫거나 자기를 분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의 모습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을 설명해 주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적그리스도가 사악하다는 것을 의미하느냐? 긍정적인 사물, 진리는 양심과 이성을 가진 피조물이라면 모두 좋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의 입장에선 이런 긍정적인 사물을 눈엣가시로 여긴다. 이를 준수하고 실행하려는 사람은 모두 그의 원수가 되고, 그에게 적대시된다. 이것은 사탄이 욥을 적대시한 것과 같은 성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똑같은 성질이다. 성품과 본질 역시 사탄과 똑같다. 그들의 본성은 모두 사탄에게서 비롯되었고, 그들과 사탄은 같은 부류이다.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사탄과 한패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이 과하냐? 하나도 과하지 않고 완전히 옳은 말이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적그리스도는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고, 기만과 거짓말, 허상과 위장을 좋아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들의 진상을 폭로한다면 그들이 복종하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느냐? 그들은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욕지거리를 퍼부을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 그들의 진상을 폭로하는 사람은 그들을 격분시키고 노발대발하게 만들 것이다. 예를 들면, 위장에 능한 적그리스도가 있는데 모두가 그를 좋은 사람,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남을 동정할 줄 알고, 남들의 고충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 소극적이고 연약한 이들을 항상 붙들어 주고 도와주는 사람, 남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헤아리고 보살필 줄 아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사람들 마음속에서 그는 하나님보다 더 위대하다. 이렇게 위선적인 사람인데 네가 만약 그의 위장과 가식을 폭로하고 그에게 사실대로 말한다면 그가 받아들이겠느냐? 그는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위장하고 가식을 떨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바리새인이 성경을 들고 사거리에서 기도하며 남들에게 읽어 줄 때 네가 그의 이런 모습은 가식이며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폭로한다면 그가 네 말에 수긍하겠느냐? 그가 흔쾌히 받아들이겠느냐? 그가 그 말을 듣고 반성하겠느냐? 자기가 그러는 것이 가식이고 기만이라고 인정하겠느냐? 그가 반성하고 회개하여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네가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을 미혹하는 겁니다. 지옥에 떨어져 징벌받을 짓이에요.”라고 한다면 이 말이 사실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사실이다. 그럼 그가 받아들이겠느냐? 그는 듣자마자 노발대발하며 말할 것이다. “뭐? 나보고 지옥에 떨어져 징벌받으라고? 말이 심하네! 내가 믿는 건 네가 아니라 하나님이야. 네가 정할 일이 아니라고!” 그가 말만 이렇게 하고 끝이겠느냐? 그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네게 이런 말도 할 것이다. “내가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한 사람이 얼마고, 맺은 결실이 얼마고, 십자가를 진 게 얼마고, 감옥에 갇혀 고통받은 게 얼만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내가 주님을 믿을 때 넌 엄마 뱃속에 있었어!” 본성이 드러나지 않았느냐? 인내와 포용을 얘기하는 그가 아니었느냐? 근데 어찌 이런 일도 포용하지 못한단 말이냐? 왜 포용하지 못하겠느냐? 네가 실상을 말해서 그의 속내가 들통 났고 그의 종착지도 사라지게 되었는데 그가 포용할 수 있겠느냐? 그가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길은 가지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식적인 모습도 있을 경우 네가 만약 그가 가식적이라고 폭로한다면 그가 어떻게 하겠느냐? 곧바로 반성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곧바로 반성할 것이라고 하면 다소 비현실적이고 공허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정상인이 이런 말을 들을 경우 먼저 가슴이 찔리는 느낌을 받는 게 일반적이다. 가슴이 찔린다는 게 무슨 의미냐? 그가 마음에 새겨듣는다는 뜻이다. 그는 감히 자기 앞에서 그런 경솔한 행동을 하고 사실대로 말하며 자기를 정죄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는 그가 예상치 못했던 말이며 지금껏 들어 본 적도 없는 말이다. 또한, 그는 염치가 있고 체면을 차리다 보니 그가 사거리에 서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것은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라고 한 다른 사람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렇게 성찰한 후 자신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가 얼마나 경건하고 얼마나 주를 사랑하는지, 얼마나 고생을 감내할 수 있는지를 남들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가식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말도 맞는다고, 또 이렇게 했다간 고개를 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염치가 있다. 염치가 있으면 어느 정도 삼갈 줄도 알아서 다시는 악행이나 몰염치한 짓,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는다. 다시는 하지 않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어느 정도 회개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반드시 회개할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회개할 가능성은 있으니 적그리스도나 바리새인보다는 훨씬 낫다. 어떤 점이 낫겠느냐? 그는 양심이 있고 염치가 있어서 남들이 폭로하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찔리는 느낌을 받는다. 비록 창피하고 존엄성이 손상되지만 최소한 그 말이 옳다는 것을 확신한다. 설령 체면이 말이 아니더라도 속으로는 이미 인정하고 승복하며 받아들인 것이다. 적그리스도와 그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 어째서 적그리스도가 사악하다고 하겠느냐?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은 그가 맞는 말을 듣고 나서 그것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증오한다는 데 있다. 또한, 그는 자기 방식으로 구실과 핑계를 찾고, 온갖 객관적인 이유를 찾아 자기를 변명하고 변호한다. 그는 어떤 목적을 이루려 하는 것이겠느냐? 부정적인 사물을 긍정적인 사물로, 긍정적인 사물을 부정적인 것으로 바꿔 국면을 전환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네 말이 아무리 옳고 진리에 부합한다고 해도 내 언변을 당해 낼 수 있을 것 같아? 비록 내 말이 거짓말이고 사람을 속이고 미혹하는 말인 것은 분명하지만 네 말을 부인하고 정죄하겠어.’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이것을 사악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너는 적그리스도가 좋은 사람을 보면 속으로 그를 정직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그도 그 사람을 정직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하지만 그는 진리 추구나 정직함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그는 정직한 사람을 바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리 추구에 대해 반감을 품고, 증오하고, 적대시한다. 그는 그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진리 추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무슨 말이든 남에게 얘기하고 무슨 일이든 하나님에게 맡길 정도로 바보 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로 바보 같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방식이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이 모든 것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전능하고 공의롭다는 사실을 적그리스도가 믿겠느냐?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에 대해 그가 물음표를 찍는 것이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무슨 뜻이겠느냐? 이 많은 물음표를 어떻게 해석하겠느냐? 그는 의구심을 가지고 의혹을 제기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부정하고 국면을 전환하려 한다. 내가 말한 국면 전환이 무슨 뜻이냐?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이 아무리 정의로워 봤자 무슨 소용입니까? 거짓말도 천 번 하면 진리가 됩니다. 아무도 진리를 말하지 않으면 그건 진리가 아니고, 소용이 없습니다. 그건 거짓말입니다!’ 이것은 흑백을 전도하는 것이 아니냐? 이는 사탄의 사악함이고 흑백을 전도하는 것이며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것을 좋아한다. 적그리스도는 가식과 기만에 능하다. 그들이 능하다는 것은 당연히 뼛속 깊이 새겨졌다는 뜻이다. 뼛속 깊이 새겨진 것은 바로 그들 본성 본질 안에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들이 열중하고 좋아하는 것이자 그들이 이 세상에서 생존하는 법칙이기도 하다. 그들은 “착한 사람은 장수하지 못하고, 악한 사람은 천 년을 산다.”,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사람의 힘으로 자연을 이길 수 있다.” 등 말을 믿는다. 이 말 중에 인성에 부합하고 정상인이 이해할 수 있는 자연법칙에 부합하는 말이 하나라도 있느냐?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적그리스도는 사탄의 이런 헛소리를 좋아하고 이런 말을 좌우명으로까지 삼는 것이냐? 이는 그들의 본성이 너무나도 사악하기 때문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내가 몇 번 접해 본 어떤 교회 리더가 있었는데 1년가량 되는 기간에 만날 기회가 꽤 있었지만 대화한 적은 많지 않았다. 그 사람은 말을 아끼기 때문이다. 말을 아낀다는 게 무슨 뜻이냐? 그에게 질문해도 그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교회에서 다른 사람과 지낼 때도 이렇겠느냐? 아마 두 가지 경우가 있을 것이다. 맘에 드는 사람에게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고,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은 경계해야 하니 섣불리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정리해 보니 그와 함께했던 기간에 그는 총 다섯 마디의 가장 ‘전형’적인 말만 했다. 말을 아끼는 그가 말만 했다 하면 ‘전형’적인 말이 되었다.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귀인’이 아니냐? 교회 리더 일꾼이 나와 만나 상의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이지 않으냐? 그런데 이 사람은 특별했다. 그는 다섯 마디, 가장 전형적인 말 다섯 마디를 했다. 그 전형이 과연 무엇을 근거로 정의된 것인지 너희가 한번 들어 보아라. 그의 말에는 모두 배경이 있고 소소한 이야기가 있는데 먼저 그의 첫 번째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 들려주겠다.
이 리더의 소속 교회에는 나쁜 짓을 몇 번 저질러서 교회 사역을 교란한 악인이 있었다. 그가 악인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아차리고는 그에 관한 일을 교제하고 토론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를 출교해 내쫓는다면 교회에 통보하여 그가 어떤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 왜 악인으로 규정되어 쫓겨나는지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 그 악인이 저지른 나쁜 짓을 폭로하자 말을 아끼는 그 리더가 말했다. “그 사람도 선의로 그런 겁니다.” 그 악인이 그런 나쁜 짓을 해서 교회 사역을 교란한 것이 그에게는 어떻게 보이느냐? ‘선의’로 보인다. 그는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해도 선의라면 진리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그 일의 성질이 좋든 나쁘든 혹은 그 결과가 어떻든 선의이기만 하면 방해하고 교란하더라도 진리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도 선의로 그런 겁니다.” 이것이 그 리더에게서 나온 첫 번째 말이었다. 너희는 악인이 악행을 저지른 것이 분명한데도 그가 선의로 나쁜 짓을 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있느냐? 다들 이 말을 분별하느냐? 이 말에 미혹될 사람이 일부 있을 거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선의로 그랬다면 처리해서는 안 된다고, 선의로 한 나쁜 짓은 고의적인 악행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선동과 미혹을 통해 그의 편으로 기울어 악인을 동정하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리더가 미혹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올바로 이해하여 악인이 악행을 저지르면 출교하고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리더의 그런 선동과 미혹을 통해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고민하게 된다. ‘그가 선의로 그런 건 맞아. 우리도 그럴 때가 있잖아. 그럼 선의로 나쁜 짓을 저지르면 우리도 제명당하고 쫓겨나는 거 아냐?’ 그래서 이 리더의 편으로 기우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자신을 위해 퇴로를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리더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느냐? 받아들인 결과가 무엇이냐? 하나님에게 의구심을 품는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과 하나님이 일하는 원칙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하나님 집의 일 처리 원칙을 의심하며 물음표를 찍는다. 그러고는 정죄한다. 모두의 마음속에 이런 것들을 품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 악인을 내쫓는 것은 나쁜 짓을 한 번 한 것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를 하나님 집에서 내쫓을 때 그가 힘쓰는 일을 하든, 어떤 분야의 특수한 본분이나 업무 기술 분야에 관련된 본분을 이행하든 우연한 잘못을 이유로 쫓겨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전부 교회 리더, 형제자매가 그의 일관된 모습을 종합해서 성질을 규정하여 처리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일을 해야 할 때 게으름만 피우거나 핑계를 대며 일하지 않으면 이런 모습을 근거로 그를 내쫓는 게 합당하지 않으냐? (합당합니다.) 이는 합당하다. 예를 들어 네게 청소를 시켰는데 툭하면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차를 마시거나 신문을 보며 껍질을 아무 데나 버린다면 직무 태만이 아니냐? 네가 청소는 하지 않고 환경을 더럽힌다면 직무 태만이다. 너는 사역을 감당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너를 내쫓는 것은 전적으로 원칙에 부합한다. 그러니 너는 어떤 변명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교회 리더는 이 사람이 선의로 그런 것이라며 사람들을 미혹했다. 교회 리더의 이런 선동과 미혹을 통해 그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생겼고 그들에게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면서 하나님과 진리 원칙은 어디에 내팽개쳤느냐? 그들은 한 가족처럼 되어서 ‘우리 교회’, ‘우리 하나님 집’이라고 말한다. ‘교회’와 ‘하나님 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나님이 없는 곳에 하나님 집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 교회가 존재하거나 성립하겠느냐?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들이 말하는 ‘우리’가 무슨 뜻이겠느냐?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교회가 이 멍청한 리더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그가 교회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이른바 형제자매, 바보들이 그와 한패가 되고, 친척이 되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 집’ 밖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리더의 첫 번째 말이 이런 배경 속에서 이와 같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모두가 그에게 특히 동조하면서 ‘우리 교회 리더는 공정해. 우리를 생각해 주고 우리의 연약함을 헤아려 주며 우리를 대신해서 목소리도 내 줘.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를 폭로하고 책망하시는데 우리 리더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 줘. 마치 병아리를 보호하는 어미 닭처럼 말이야. 그가 우리 곁에 있으면 억울할 일은 없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그에게 감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리더의 첫 번째 말이 불러온 결과이다.
이어서 이 리더의 두 번째 말을 들려주겠다. 많은 사람은 교회에서 외부 일과 관련된 사역은 하지 못하거나 본분을 이행하느라 바빠서 할 시간이 없다. 교회에 이름만 올려 둔 사람들 중에 외부 일을 잘 처리하는 자들이 있는데 하나님 집에서는 이 부류의 사람에게 돈을 주고 그런 일을 맡긴다. 때로 돈을 더 주면 이들이 하나님 집을 위해 많은 일을 해 주기도 한다. 너희는 하나님 집에서 이런 일에 200위안 정도 더 쓴다고 해서 원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느냐? 이런 일은 이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효과가 좋으니 이렇게 하는 것이다. 200위안 더 내서 하나님 집에서 수월하게 일을 처리하고 많은 일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 돈을 들일 만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그럴 만하기에 이렇게 하는 것이 적절한 것이다. 이 돈을 그 일을 처리할 수 없는 사람에게 준다면 들인 보람이 없겠지만, 그에게 주어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하나님 집에서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원칙에 부합하지 않겠느냐? (원칙에 부합합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형제자매와 상의하거나 소통하지 않는 것은 원칙에 부합하느냐? (부합합니다.) 이렇게 처리할 권한이 상부에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교회 리더는 이렇게 말했다. “형제자매 생각에 그 사람에게 200위안을 더 주는 것은…. 제가 형제자매를 대신해서 여쭤보는 것입니다만, 형제자매들은 이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측면의 진리를 어떻게 교제해야 할지 구하고자 합니다.” 전부 에둘러대기만 한다. 이것이 그의 두 번째 말이다. 분명한 것은 이 말이 질문이라는 것이고, 그 뜻은 이런 것이다. ‘당신은 항상 원칙대로 일한다고 하셨는데 이 일은 원칙에 어긋납니다. 형제자매에게 불만이 생기고 관념이 생겨서 제가 그들을 대신해 당신께 여쭤봐야 하는 상황인데 이 일을 당신은 어떻게 해석하시나요? 제게 설명해 주세요.’ 이것은 질문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다면 너희가 여기서 몇 가지 정보를 분석해 보아라. 너희가 이런 일을 들었을 때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이 일을 통해 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나님, 그의 말은 질문의 어감을 띠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 겁니다. 실은 그 자신이 이 일에 대해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진짜 생각은 말하지 않고 형제자매들이 납득하지 못한다고, 형제자매에게 불만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교회 리더로서 형제자매에게 관념이 생기면 형제자매에게 진리를 교제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그 관념을 가지고 하나님께 따집니다. 그 안에는 간사하고 사악한 성품이 들어 있습니다.) 두 가지를 말해 주었다. 하나는 질문이고, 하나는 이미 그 자신의 내면에 관념이 생겼으면서 오히려 형제자매가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니 구하고자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 말 속에 문제가 있지 않으냐? 형제자매가 마음속에서 그렇게 중요하더냐?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을 그렇게 중시한다면 어째서 그들에게 생긴 그토록 큰 관념은 해결해 주지 않은 것이냐? 직무 태만이 아니냐? 직무 태만이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으면서 뻔뻔하게 형제자매의 관념을 가지고 상부에 따진다. 그럼 너는 뭐 하느냐? 왜 묻는 것이냐? 너도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 너 역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 너도 이렇게 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00위안을 네게 쓰지 않아서 손해 봤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는 ‘200위안을 내게 주셨어야지. 그는 불신파이니 그가 아니라 내가 받았어야 해. 진심으로 믿고 있는 건 우린데 말야. 하나님 집 사람은 그가 아니라 우리라고.’라고 생각한다. 이런 뜻이 아녔겠느냐?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뜻이었다. 그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이렇게 떠듬떠듬대면서 말했다. 여기까지 너희는 다 알아들었느냐? 이렇게 돈을 쓰는 것에 대해 너희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 많은 사람이 이만한 일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이토록 큰 사역을 하고 있는데 200위안 더 쓴 게 눈에 들어오느냐? 게다가 네 돈을 쓴 것도 아닌데 네가 아까울 게 무엇이냐? 남들이 좋은 사람이 되는 걸 보면 샘이 나느냐? 바로 이런 뜻이 아니겠느냐? 내가 방금 말한 것을 너희는 이해할 수 있느냐?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느냐? “안 되죠! 200위안이 더 들어간 걸 우린 몰랐어요. 알 권리가 없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하나님 집의 제물을 낭비한 게 아닌가요?”라면서 말이다. 하나님 집이 어떤 개념이냐? 그리고 제물은 무슨 개념이냐? 잘 들어라. 제물은 모두의 것도 아니고 형제자매의 것도 아니다. 만약 하나님은 없고 형제자매만 있다면 하나님 집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타나 사역하고 나서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불러 모아 교회를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 집이다. 형제자매가 바치는 십일조는 하나님 집에 바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바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사람에게 바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 돈은 하나님에게 바친 것이니 하나님의 사유재산인 것이다. 사유재산이 무얼 의미하느냐? 하나님이 임의로 배분할 수 있고, 네게는 간섭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네가 이 일로 따지고 이 일로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잘 들어라. 네 이런 행동은 선을 넘는 것이고 불필요한 것이다. 이는 너의 가식적인 행동이다! 네가 구하지 않은 중요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일을 구하고 있느냐. 그렇다면 왜 그 악인은 처리하지 않느냐? 어째서 “그 사람이 이런 악한 모습을 보여서 형제자매들이 그를 싫어하는데 처리해야 할까요?”라고 구하지 않느냐? 이런 일은 묻지 않고 악인을 일절 못 본 척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겠느냐? 이 리더의 첫 번째 말이 무엇이었느냐? (“그 사람도 선의로 그런 겁니다.”였습니다.) “그 사람도 선의로 그런 겁니다.” 이 얼마나 ‘어진’ 인물이냐? 이런 자가 바로 위선자다! 사악하고, 늘 인의도덕을 외치지만 표리부동하고, 인간다운 일을 하지 않는다. 그는 두 번째로 어떤 말을 했느냐? “하나님 집에서 어떤 사람에게 200위안을 더 주면서 일을 시키는 것에 대해 제가 형제자매를 대신해서 여기에서의 원칙을 어떻게 인식하고 파악해야 하는지 구하고 싶습니다.” 이는 내가 온전한 문장으로 말한 것이고, 그는 물론 이렇게 말하지 않고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떠듬거렸다. 그는 그런 식으로 말했다. 이것이 이 리더가 말한 두 번째 말이다.
너희가 이 리더의 세 번째 말을 더 들어 보아라. 다 같이 흙을 파면서 각자 한 광주리씩 파도록 일을 분담했다. 그중 작업 속도가 빨라 먼저 흙을 다 판 사람이 있었는데 자리에 앉아 목을 축이고 다른 사람을 기다리면서 쉬다가 문제가 생겼다. 어떤 문제겠느냐? 세 번째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이 리더가 또 찾아와서 상부에 이렇게 물었다. “저희 중에 작업 속도가 빠르고 몸놀림도 민첩한 사람이 있는데 한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그가 작업을 마치면 다른 사람을 돕지는 않고 계속 자리에 앉아만 있으니 다들 그에게 불만을 갖습니다.” 상부의 형제가 “평소에 일할 때 그가 게으름을 피워요?”라고 물으니 그 리더가 대답했다.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습니다. 단지 작업 속도가 빠를 뿐이죠. 작업을 마치고 나면 그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고 아무도 돕지 않으니 형제자매가 그에게 사랑이 없다며 불만을 갖는 것입니다.” 형제자매가 이렇게 말하니 그 리더가 마음 아파한 것이다. ‘아, 저 사람 참 매정하네! 우리 형제자매들이 일하느라 힘들고 작업 속도도 더딘데 도와주지를 않네.’ 모두가 속상해한다고 그도 속상해하니 얼마나 남을 ‘배려’하는 것이냐! 그는 이런 ‘부담’을 가지고 보고한 것이다. 그는 첫 마디부터 “이런 사람을 혼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보았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혼내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듣고 너희는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마음이 복잡하지 않으냐, 속상하지 않으냐? (속상합니다.) 하나님 집에서 줄곧 사람에게 진리를 깨닫고 공평하게 남을 대하라고 교제하였는데 사람은 이것조차 하지 못한다. 그가 그 사람을 혼내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 형제자매가 모두 고생했고 그 사람이 사랑이 없다고 보고하니 리더로서 나는 이들을 어떻게 구슬리고, 달래며, 보호하고, 또 그들의 억울한 마음을 풀어 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그 첫 반응이 그 사람을 혼내는 것이었다. 그 사람을 혼내서 사람들의 분노가 풀리면 공평하고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하고 싶어 하지 않았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같은 밥을 먹고, 같은 곳에서 살며, 같은 처우를 받으면서 뭘 믿고 그렇게 빨리 작업하는 거지? 속도가 빠르면서 다른 사람은 왜 안 도와?’라고 생각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 말을 들은 사람에게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일을 빨리하는 게 죄구나. 보아하니 앞으로는 절대 일을 빨리하면 안 되겠다. 이 리더 밑에선 좋을 게 없어. 일을 빨리해도 안 되고, 능동적으로 해도 안 돼. 느린 것도 정당하네!’ 상부에서 그에게 “그럼 일을 느리게 하는 사람에겐 포상해 주나요?”라고 묻자 그는 당돌하게 말했다. “포상해 주지는 않지만 일을 빨리하는 그 사람은 혼내 줘야 합니다. 형제자매가 모두 그를 혼내 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답했던 것이다. 이 말이 과연 형제자매를 대변하는 말이겠느냐, 아니면 그 본인의 개인적인 생각이겠느냐?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형제자매는 일단 논외로 하겠다. 그들 중에는 별의별 멍청이가 다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비뚤어진 말을 하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시비를 거는 사람, 원칙 없이 말하는 사람, 개념 없이 행동하는 사람 등 없는 사람이 없지 않으냐? 그렇다면 교회 리더로서 너는 어떤 책임을 지느냐? 네 책임은 세력이 큰 형제자매를 두둔해 말하고 못된 분위기를 지키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책임이겠느냐? 네 책임은 형제자매 가운데 치우치고 빗나간 문제가 있을 경우 진리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무엇이 문제이고 사람의 내적 상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려 주고 사람들이 자신을 인식하고 진리를 깨닫게 하여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 리더의 책임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가 이 책임을 다했느냐? 그는 책임을 다하기는커녕 오히려 나쁜 분위기를 부추기고 그런 분위기가 교회 안에서 자생하고 만연하도록 지키고 종용하며 용인했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사악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상부에서 책망하고 폭로하면 속으로 승복하겠느냐? (승복하지 않습니다.) 승복할 리 없다. 상부에서 당부한 원칙대로 그가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겠느냐?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에서 그 고약한 심보를 알 수 있다. 나중에 나는 “일을 빨리한 사람이 혼나면 누가 일을 빨리할 엄두를 내겠느냐? 모두가 뜸만 들이다가 사흘 동안 강 근처에도 못 가는 느림보 거북이가 되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지 않겠느냐? 이 리더가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지 못한 것 외에 가장 치명적이고 심각하면서도 사람을 미혹하는 점은 형제자매가 어떤 나쁜 짓을 하고, 잘못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을 퍼뜨리든 그가 분별하고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눈감아 주고 감싸며 달랜다는 것이다. 이는 위험인물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무 위험하다! 이것이 그 리더가 했던 세 번째 말이다.
다음은 네 번째 말이다. 이 리더가 맡고 있는 교회를 내가 자주 가는데 그곳에서는 닭을 키우고 있었다. 내가 갈 때마다 닭을 한 마리씩 잡아 요리하는데 하루는 곰탕, 다음 날은 조림, 그다음 날은 훈제 요리다. 내가 매일같이 방문하면 그 닭들은 며칠 안에 씨가 마를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닭 요리를 하면 나는 한 조각만 먹을 때도 있고, 식욕이 없어 한 조각도 먹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들과 함께 먹기 때문에 한 마리를 한 번에 다 먹어 치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한 번 올 때마다 한 마리씩 잡으면 닭이 아무리 많아도 이렇게 먹는 속도를 감당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에게 닭을 잡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에게는 곤란한 문제가 되었다. “닭을 잡지 못하게 하시면….” 이어지는 질문이 무엇일지 너는 모를 것이다. 결국, 그가 뱉은 말이 무엇이었겠느냐? “그럼 뭘 먹나요?”였다. 나는 “닭고기 말고는 먹을 게 없느냐? 텃밭에 채소가 가득하지 않으냐? 그걸 먹으면 될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그의 뜻은 닭을 잡지 못하게 해도 고기는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다정’하지 않으냐? “고기는 무슨 고기냐! 채소가 있으면 고기는 됐다. 너더러 닭을 잡으라 한 적 없으니 잡지 말아라!” 이런 일 정도는 이해하기 쉽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에게는 고충이 되었다. 이렇게 닭을 잡지 않는 것이 그에게는 더없는 괴로움이라니 너무 비정상적이다. 이번에 닭을 먹지 못하자 다음에 내가 갔더니 그가 또 물었다. 이것이 다섯 번째 말이다. 듣고 있으면 모두 하나같이 웃긴 질문들이다. 어떤 질문이냐? 그는 이렇게 물었다. “닭을 못 잡게 하셔서 토끼도 키우고 있습니다. 토끼 고기 좀 드시겠습니까?” 그 말에 화가 나서 말했다. “우리가 키우는 토끼는 너무 예쁘다. 빨간 눈에 털도 새하얀 게 놀기도 잘 노는데 넌 어찌 고기 먹을 생각밖에 하지 않느냐? 고기 좀 안 먹으면 안 되겠느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주방에 고기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닭 다리며 갈비며 끊이지 않아서 고기를 못 먹는 것도 아닌데 왜 토끼를 잡네 마네, 토끼 고기를 먹네 마네 묻는 것이냐? 나는 한 마디로 일축했다. “잡지 말아라! 잡긴 뭘 잡는다는 말이냐!” 그는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고는 책망받을까 봐 물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중에 그는 무슨 요리를 했느냐? 6, 7월이 되자 텃밭에 잎채소며, 열매채소며 온갖 채소로 가득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요리로 한 상을 차렸는데 숙주나물 볶음, 콩나물국, 두부 생선찜, 완두콩 달걀 볶음, 목이버섯 볶음 등이 있었고 푸른 잎채소는 하나도 없었다. 보아하니 죄다 마른반찬이었다. 이런 계절에는 싱싱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그가 차린 것들은 제철 음식이 아니었다. 나는 이자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텃밭에 없는 채소가 없을 텐데 어째서 잎채소는 쓰지 않은 것이냐? 결국, 나는 그를 당장 쫓아내라고 했다. 그와 같은 사람이 요리를 하면 언제든 제철 음식을 먹을 수 없을 것이다. 늘 제철이 아닌 음식만 먹는 것이 정상적이냐? 너무나도 비정상적이다!
나는 이 리더가 물었던 몇 가지 질문과 그가 만든 요리를 통해 첫째, 그의 인품이 형편없고, 둘째, 그의 성품이 사악하고 음험하며, 셋째, 그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의외이고 괴상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은 과거 이 교회에서 선거가 있을 때마다 그의 득표수가 가장 많았고 다시 선거를 치러도 그의 득표수가 가장 많았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선거에서 수차례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는 것은 어찌 된 영문이냐? 양쪽에게 원인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양쪽 모두에게 원인이 있다. 그렇다면 주된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깨닫지 못해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는 형제자매가 많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교회 리더가 사람을 미혹하는 데 능하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자가 누군지 모르고,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본 적이 없으며,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과연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내가 말한 몇 가지 일과 그가 한 다섯 마디 말을 통해 너희 생각에 이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 같으냐? 그가 교회 리더를 맡기에 적합한 것 같으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형제자매들이 계속 그를 뽑는 것이냐? 그가 술수를 써서 이들을 미혹했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얌전하고 착실한 사람이 아니다. 그가 술수를 쓴 것이 틀림없다. 그 후 나는 이 교회에 리더에 적합한 사람이 없으니 사람을 따로 보내 리더를 맡겨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형제자매가 뽑은 사람이 아니라며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형제자매’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느냐? 형제자매가 진리를 대변하느냐? 이렇게 정의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형제자매가 함께 한목소리를 내거나 규칙, 견해, 논조를 만들어 낸다면 그것이 진리에 부합하느냐? 하나님이 그들의 문제를 살피고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이렇게 하느냐? (그러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이 형제자매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느냐? 본분을 이행하고 힘을 내서 일하고자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없으며 진리를 이해하는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많다. 그들은 우매하고 무감각하고 미련하여 사람을 분별할 줄 모르고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면서 이기적이다. 선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희생하며 힘을 들이고자 해도 치명적인 게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돈이 많은 사람이 아버지이고, 젖을 주는 사람이 어머니이다.”라는 말을 신봉해서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 자기한테 득이 되는 사람, 자기 대신 목소리를 내 주는 사람, 자기를 지켜 주는 사람을 뽑는다. 만약 이들 맘대로 리더를 뽑게 내버려둔다면 좋은 리더를 뽑을 수 있겠느냐? 좋은 리더를 뽑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생명 진입에 발전이 있겠느냐? 만약 상부에서 그들이 이렇게 내키는 대로, 마음대로,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둔다면 그들에게 무책임한 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어리석어도 상부는 어리석지 않으니 그들이 뽑은 리더를 교체하고 다른 사람으로 바꾼 것이다. 설령 그들이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다고 해도 이 사람이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만 있다면 사람을 미혹하는 그 거짓 리더보다는 훨씬 낫다. 비록 그들이 상부의 안배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닫고 사리를 분별하게 되면 누가 좋은 사람인지, 누가 나쁜 사람인지 알게 될 것이다. 상부에서 이렇게 한 것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느냐? (합당합니다.) 설사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성질대로 뽑고 싶은 사람을 뽑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네가 반기를 들겠느냐? 네가 만약 악행을 저지르고 사탄의 졸개가 되려 한다면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그러니 상부에서 그들을 대신해 결정하여 별도의 리더를 뽑아 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 스스로 뽑은 그자가 리더를 맡는 것이 적절하다고 확신했다. 이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냐? 그들은 어째서 그를 좋다고만 생각하느냐? 그의 어떤 점이 좋으냐? 어째서 그 사람만 단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냐?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 거짓 리더에게 미혹되고 해를 입었는데도 알지 못하니 정말 머저리들이다. 이 일에 대한 얘기는 여기까지다. 우리가 이 부류의 사람을 이 주제로 묶어 그 전형적인 사례로 삼아 해부하고 분석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필경 이 부류의 사람의 성품 속에 있는 사악함은 전형적일 터이다.
적그리스도의 일곱 번째 모습 중 사악함을 교제하면서 구체적인 사례와 결합하여 분석하고 대조하니 좀 더 명확하지 않으냐? 방금 말한 이 사람이 앞으로 진리를 추구할지는 미지수라 단정하긴 어려우니 일단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도록 하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성품이 사악하고 본질이 사악하며 본성이 사악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가 무엇을 사랑하겠느냐? 그가 공평과 공의를 사랑하겠느냐? 그가 하나님이 말씀한 여러 진리를 사랑하겠느냐? 정직한 사람이 되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며 원칙적으로 행동하고 진리를 구하는 것을 사랑하겠느냐? 그는 이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는 100퍼센트 확실하다. 이런 그의 몇 마디 말과 몇 가지 질문을 통해 그의 내면 깊이, 뼛속 깊이 좋아하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을, 긍정적인 사물에 부합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좋아하고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냐? 그가 지키는 사람은 악을 행하고 교회 사역을 교란하는 사람들이고, 본분 이행에는 전혀 충성하지 않고 악행을 일삼는 사람들이다. 그는 이런 사람을 보면 화를 내거나 증오하지 않고, 심지어 그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고 변명을 늘어놓고 해명하기까지 하니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들은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서 같은 취향과 본질을 가지고 있어 서로 죽이 맞고 한통속이라는 뜻이다. 어떤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에 늘 관념과 오해를 가지고 있을 때 그의 마음속에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그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부담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에게 이런 부담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것이고, 그가 거들떠보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자,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자, 본분을 충성심 없이 건성으로 이행하는 자,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 집의 이익에 해를 끼치고 교란과 파괴의 역할을 하는 자, 소극적인 것을 내비치고 관념을 퍼뜨리는 자가 있다면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그가 알 수 있겠느냐? 그는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이런 문제가 존재하는 건 정상이야. 패괴를 표출하지 않는 사람이 어딨어?’라고 생각한다. 이는 무엇을 암시하느냐? 그 사람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모두가 이렇게 하면 그의 나쁜 점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고, 실체를 숨기게 되고 ‘보호’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이들이 한결같이 방해하고 교란해도 그는 처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그에게 정의감이 있느냐? 그가 진리를 사랑하느냐? 그가 하나님 집을 어떤 곳으로 간주했느냐? 그는 하나님 집의 사람들이 모두 정직한 사람, 하나님에게 충성하는 사람, 하나님의 도(道)를 준행하며 분수에 맞게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원치 않고, 모두가 마음을 열어 하나님 말씀을 함께 교제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는 하나님 집이 이런 사람으로 가득한 것을 싫어한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좋아하겠느냐? 모두가 인맥을 통해 서로의 이익을 지켜 주는 것, 그 누구도 상처 주지 않고 누구의 과거도 폭로하지 않으면서 서로를 지켜 주고 비호하는 것,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있으면 외부에 알리지 않는 것 등 모두가 한패가 되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 남이 한 나쁜 짓이나 실상을 들추어내고 공개해서 모두에게 알리면 그는 이런 행동을 증오하고 혐오한다. 그는 나쁜 일이 가려지고 포장되는 것,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도 폭로하지 않는 것, 기만하거나 하나님 집의 이익을 해치는 사람이 있어도 원칙대로 처리하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하나님 말씀,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은 그가 맡고 있는 교회에서 무엇이 되겠느냐? 헛된 말이 되어 실행되지 못하게 된다. 왜 실행될 수 없겠느냐? 그에게서 가로막히기 때문이다. 그가 벽이 되어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사실을 왜곡하고, 술수로, 음모와 계략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기만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룸으로써 드러내는 사악한 성품이다.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은 교회에서는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이 실행되지 않는다. 이와 더불어 교회에 괴상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과 무관하거나 상반된 사역만 하여 형제자매들이 다른 견해, 다른 논조를 갖게 하고, 교회에 혼란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럼 거짓 리더는 어떻게 하느냐? 그는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을 따라 사역하지 않는다. 마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랫사람들은 흩어진 모래알 같다. 체계를 잡아 주는 사람은 없고 다들 원하는 일을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런데도 거짓 리더는 아무 말도 없고 이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반면 적그리스도는 다르다. 그는 사역지침을 지키기는커녕 본인이 직접 일련의 주장과 행동 방식을 만든다. 상부의 사역지침을 자신의 주장으로 가공해 실행하는 자도 있고, 상부의 사역지침을 전혀 따르지 않고 다른 수작을 부리는 자도 있다. 그가 상부의 사역지침을 보류하여 전달하지 않으니 아랫사람은 영문을 모른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일련의 이론과 주장을 정리해서 아랫사람을 미혹하고 속인다. 그러니 너는 적그리스도가 겉으로 얼마나 버리고 어떤 고통을 받는지를 보지 마라. 겉으로 보이는 그의 이런 행동 방식은 제쳐 두고 그가 행한 그런 일의 본질을 보아라. 그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냐? 하나님이 말씀하고 행한 것, 하나님이 형제자매에게 깨달으라고 한 것, 하부에 실행하라고 요구한 것 등 이 모든 일을 그는 반대한다. 어떤 사람들은 “실행하지 않은 게 반대한 건가요?”라고 묻는다. 그가 왜 실행하지 않겠느냐?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납득할 수 없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 집보다 높으냐? 납득할 수 없다고 한들 그에게 묘책이 있느냐? 없다. 그런데 어째서 납득할 수 없다며 감히 실행하지 않겠느냐? 그는 교회를 장악하고 통제하고 싶은 것이다. 만약 완벽하게 사역지침과 상부의 요구에 따라 실행한다면 그의 공로가 묻히고 두드러지지 못할 테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그에게 재난이다. 만약 사람들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늘 진리를 교제하며, 진리를 깨달아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고, 일이 생겼을 때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께 기도로 부르짖는다면 그가 무슨 역할을 하겠느냐? 그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그의 역할이 사라져 장식품이 될 것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장식품이 되는 것을 그가 수긍하겠느냐? 그는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 국면을 되돌리려 할 것이다. 성품과 본질이 사악한 적그리스도가 만약 형제자매가 모두 진리를 추구하면 자신이 드러나게 될 거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하겠느냐? 이토록 나쁘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그는 사악하고 간사하며 음험한 데다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만약 모두가 진리를 깨닫는다면 그를 분별할 것인데 적그리스도가 이를 모르겠느냐? 그는 알고 있다. 영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네가 어떤 곳에서 악령을 만났는데 그 악령이 너를 눈에 거슬려 하고 너는 그가 역겨워 보여서 그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 사실 그가 네게 잘못한 일이 없고 네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는데 너는 그가 역겹게 보이고 그의 말은 더더욱 역겹게 들린다. 실제로 그는 너를 모르고 너도 그를 모르는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란 것이 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선민의 원수이다. 네가 그와 함께 지내면서 아무런 느낌이나 지각이 없다면 너무 무감각한 게 아니겠느냐? 그가 하나의 논조를 말하고, 어떤 관점을 제시하며, 어떤 태도로 행동할 때, 그가 두세 마디만 하고 말을 아끼면 너는 간파하지 못한다. 오랫동안 함께 지냈는데도 네가 지각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상부에서 그를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고 나서야 크게 깨닫고 두려움을 느끼면서 ‘이렇게 확실한 적그리스도를 나는 왜 분별하지 못했을까? 정말 위험했어!’라고 생각한다면 너는 얼마나 둔하고 무감각한 것이냐!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에는 확실한 특징이 있다. 분별할 수 있는 비결을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그것은 바로 그의 말이든, 행동이든 네가 그의 속내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너와 대화할 때 이리저리 눈을 굴리지만 너는 그가 무슨 계략을 꾸미는지 알 수 없다. 그가 충성스럽고 무척 진지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네가 줄곧 그를 간파하지 못하면 네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이 들 것이다. 이 사람은 음침하고 헤아릴 수 없으니 참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 말이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의 첫 번째 특징이다. 이것으로 이미 사악한 특질을 갖추었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의 두 번째 특징은 무엇이냐? 바로 그가 어떤 말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미혹성이 몹시 강하다는 것이다. 이 미혹성은 어디에서 나타나느냐? 그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능해서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는 말, 사람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을 한다는 데서 볼 수 있다. 하지만 네가 분별해야 할 한 가지는 그의 그럴싸한 말들이 그에게서 전혀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가 다른 사람에게 도리를 전하면서 정직한 사람이 되는 법, 일이 생겼을 때 기도하는 법,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법을 알려 주지만 그에게 일이 생기면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전부 자기 뜻대로 하며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자기의 이익만 도모하면서 모두가 그를 위해 봉사하고 그의 일을 하게 한다. 그는 하나님에게 주인이 되어 달라고 전혀 기도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그럴싸하지만 행동은 전혀 딴판이다. 그가 일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이다.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가 일할 때 순종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도모하고 살길만 찾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것이 사람이 볼 수 있는 적그리스도의 간사함과 사악함의 단면이다. 적그리스도가 사역하면서 수고하고 대가를 치를 때도 있고, 심지어 침식을 잊을 때도 있는데 이는 명예와 지위를 도모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야심과 목적을 위해 고생하지만 하나님 집에서 안배한 중요한 사역은 건성으로 하고 조금도 실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겠느냐? 자기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겠느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에게는 다른 측면의 모습도 있다. 형제자매가 이견을 제시하면 에둘러 거부하고 빙빙 돌려 말함으로써 모두와 교제하고 상의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말하다 보면 결국 그의 말을 따르게 된다. 그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부정하고 남들이 자기 의견을 따르고 자기 말을 듣게 하는 것이 진리 원칙을 구하고 있는 것이냐? 분명 아니다. 그럼 그가 사역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그것은 모든 사람이 그의 말을 따르고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 그 누구보다 그의 말에 따르는 것이 낫다는 것, 그의 말이 최선이자 최고라는 것, 모두가 그의 말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그가 곧 진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의 두 번째 특징이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의 세 번째 특징은 그가 자기를 증거할 때 항상 자신의 공로, 자기가 했던 고생, 자기가 모두를 위해 처리했던 유익한 일을 증거하여 모든 사람이 이를 명심하게 하고 그에게 신세를 졌다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를 칭찬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무척 영적인 말을 해서 그가 대단히 영적인 사람이고 진정한 하나님의 착한 종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사실 그는 자기를 높이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지위가 전혀 없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그의 지위는 이미 하나님의 지위를 훨씬 넘어섰다. 이것이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증거한다는 것에 대한 사실적인 증거가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고 통제하는 교회의 사람들 마음속에는 적그리스도의 지위가 가장 높고, 하나님의 지위는 그저 두세 번째에 머물 뿐이다. 만약 하나님이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은 교회에 가서 이야기를 하면 그들이 귀담아듣겠느냐? 속으로 받아들이겠느냐? 장담할 수 없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증거하는 데 얼마나 힘을 쏟는지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하나님을 전혀 증거하지 않고 하나님을 증거할 기회를 죄다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데 쓴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수단은 너무 음험하지 않으냐? 너무 사악하지 않으냐? 앞에서 교제한 세 가지 특징을 토대로 하면 적그리스도를 손쉽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적그리스도에게 또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이는 사악한 성품의 주된 모습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진리를 교제하든, 하나님의 선민이 자기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교제하든, 그리고 어떻게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든 적그리스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명예와 이익, 지위를 추구하면서 복을 받으려는 속셈과 욕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 대가를 치르며 수고하면 하나님이 축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한동안 교회 사역을 하면 교회를 위해 또 어떤 사역을 했었는지, 하나님 집을 위해 어떤 공을 세웠는지, 형제자매에게 어떤 일을 처리해 주었는지 세어 보고, 이런 일을 가슴에 새겨 두어서 나중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어떤 은혜와 축복을 줄지 지켜본다. 과연 이렇게 한 보람이 있는지 확인하기 편하게 말이다. 어째서 그는 속으로 늘 이런 일들을 따지는 것이냐? 그가 마음속 깊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무엇이냐? 그는 하나님을 처음 믿을 때부터 복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설교를 몇 년을 들었든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먹고 마셨든, 도리를 얼마나 이해했든 그는 복을 받고자 하는 욕망과 속셈은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본분에 충실한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건 저랑 상관없어요. 제가 추구할 바가 아니거든요. 제가 추구해야 하는 건 싸울 땐 싸우고, 힘쓸 땐 힘쓰고, 고생할 땐 고생하는 겁니다. 제가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면 하나님은 제게 상을 베풀어 주시고 저를 살아남게 해 주실 겁니다. 하나님나라에서 면류관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보다 높은 위치에 서겠죠. 적어도 두세 개 고을은 맡기실 거예요.” 적그리스도가 무엇보다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하나님 집에서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복을 받고자 하는 그의 속셈과 욕망은 끊어 낼 수 없다. 이런 자가 바로 바울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 이런 적나라한 거래 속에 사악하고도 흉악한 성품이 들어 있지 않겠느냐? 어떤 종교인들은 말한다. “우리 세대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며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이니 우리는 복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수고하고 대가를 치렀으며 고배도 마셨습니다. 심지어 체포되고 수감되어 형을 산 사람도 있어요. 우리가 이토록 고생하고 설교도 많이 들어서 성경 지식을 이렇게나 쌓았는데 언젠가 복을 받지 못한다면 셋째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께 따질 겁니다!” 너희는 이런 말을 들어 본 적 없느냐? 그들은 무슨 담력으로 하나님에게 따지러 셋째 하늘에 올라간다는 말을 하느냐? 듣기만 해도 두렵지 않으냐? 누가 감히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겠느냐? 그들이 믿는 예수가 이미 승천해서 다행이지 아직까지 땅에 있었으면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지 않겠느냐? 물론, 하나님을 처음 믿은 경우, 이 말이 힘 있고 대단하게 느껴져서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런 기개와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믿어 온 너희는 이 말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이런 사람이 천사장이 아니냐? 사탄이 아니냐? 네가 누구에게 이치를 따지든 하나님에게 따져선 안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복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하나님이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네가 복받을 조건을 충족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주지 않는다고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져선 안 된다. 전 우주, 전 인류를 모두 하나님이 다스리고 하나님이 결정하는데 너같이 미미한 사람이 감히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다니 어쩜 그리도 자기 분수를 모르느냐? 자기가 누군지 거울로 비춰 보지도 않고 감히 창조주에게 언성을 높이며 대드니 제 무덤을 파는 꼴이 아니냐? “언젠가 복을 받지 못한다면 셋째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께 따질 겁니다.” 이는 대놓고 하나님에게 고함치는 말이다. 셋째 하늘이 어떤 곳이냐? 하나님이 거하는 곳이다. 감히 셋째 하늘에 가서 하나님에게 따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찬탈이자 반란’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말씀하신 이 일이 적그리스도와 무슨 상관이죠?” 관계가 대단히 깊다. 셋째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에게 따지려는 사람은 모두 적그리스도이고, 오직 적그리스도 같은 부류의 사람만이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말을 가슴 깊이 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이다. 적그리스도가 입으로는 이런 말을 하지 않지만 마음속에는 이런 것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단지 그가 감히 표출하지 못하고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있는 욕망과 야심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계속 타오른다. 왜 그렇겠느냐? 적그리스도가 진리, 하나님의 공평과 공의,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한다는 사실은 더더욱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증오한다. 그럼 그가 무엇을 사랑하겠느냐? 그는 지위를 사랑하고 상에 관심을 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게 은사와 능력, 재주가 있고 교회를 위해 힘을 들였으니 하나님께서 제게 보상해 주시고 상을 주셔야 해요!” 이러면 골치 아프지 않겠느냐? 이는 제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에게 직접 도전하는 것이 아니냐? 창조주에게 도전하는 게 아니냐? 감히 하나님에게, 창조주에게 창끝을 겨누는 것은 천사장이나 사탄만이 저지를 수 있는 짓이다. 만약 정말 이런 관점을 가지고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의심의 여지 없는 적그리스도이다. 감히 이렇게 대놓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판단하는 자는 이 땅에 오직 적그리스도밖에 없다. “저희가 본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난폭하고 건방지지 않던데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적그리스도가 처한 배경과 환경을 봐야 한다. 그가 완전히 득세하지 못해 조력자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감히 서슬을 드러낼 수 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잠자코 때를 기다릴 줄 안다. 권토중래할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시퍼런 서슬을 완전히 드러낼 것이다. 일부 적그리스도는 지위가 없을 땐 잘도 숨어 있어서 겉으로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일단 지위를 갖게 되어 조력자들이 많아지면 그들의 사악함과 추함은 남김없이 드러난다. 마치 이런 경우와 같다. 진리 실제가 없는 사람들은 지위가 없을 땐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마지못해 순종하고 속으로도 승복하지만 리더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선민 가운데 명성이 좀 생기고 나서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본색을 드러내고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며 떠들어댈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평소 본분을 무척 잘 이행하면서 전혀 불평을 가지지 않는데 암에 걸려 곧 죽을 처지가 되면 아마 본색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에게 큰소리치며 따질 것이다. 적그리스도들은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며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폭로되고 드러난 후에도 교회에서 기꺼이 힘쓰고, 나아가서는 말단 따르는 자 중 가장 작은 자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느냐?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 그에게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는 복받겠다는 속셈을 항상 내려놓지 않는다. 그의 뜻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해. 복을 못 받으면 하나님과 끝장을 볼 거야. 내가 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거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성품이냐? 대놓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에게 언성을 높이니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복받을 희망이 한 줄기라도 있으면 그는 하나님 집에 머물며 복받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이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느냐? 바리새인처럼 늘 외식하는데 그 안의 속셈과 목적이 분명하지 않겠느냐? 그가 겉으로는 얼마나 훌륭하게 행동하고 얼마나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든 그는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고 일할 때 진리를 구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고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오직 복을 받으려는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채우는 것만 추구한다. 이러면 골치 아프지 않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게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가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은 오직 그의 사탄 성품만을 대변할 뿐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 추구하는 것을 모두 긍정적인 것,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하나님에게 열납하고 축복해 달라고 하는 것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느냐? 이는 하나님에게 반기를 들고 대드는 것이 아니냐? 적그리스도는 매사에 하나님과 거래를 한다. 고생하며 치른 대가로 하나님에게 상과 면류관을 요구하고 좋은 종착지를 받아 내려 한다. 그의 타산이 잘못되지 않았느냐? 그가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어찌 하나님의 징벌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는 그가 뿌린 대로 거둔 것이고 인과응보인 것이다.
예전에 업무를 좀 파악한 적그리스도가 있어서 합창단의 형제자매에게 업무를 가르치도록 안배했다. 그 형제자매들은 모두 어려서 대부분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짧았고, 본분 이행을 하고자 하는 열의만 있을 뿐 진리는 깨닫지 못했다. 기반도 다지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적그리스도는 사역하면서 그들이 성령 역사를 느끼게끔 인도해서 하나님이 함께하는 느낌과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 체험하게 했다. 그저 느낌에만 매달리게 한 것이다. 그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진실한 체험도 없어서 이렇게 그의 관념과 상상으로만 사람을 미혹하고 오도했다. 상부에서 그에게 진리 실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단지 그에게 업무만 지도하라고, 업무만 확실히 설명해도 합격한 본분 이행이고 책임을 다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진리 교제’를 하여 사람들이 느낌을 찾고 느낌에 매달리게 하려 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사람들을 악령 역사의 초자연적인 느낌으로 이끌기 쉽지 않겠느냐? 너무나 위험한 행동이다! 한 번 악령이 사람에게 달라붙을 틈을 주면 그 사람은 끝장이다. 훈련 기간 그는 그들에게 기도를 시키면서 기도하고 나서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자기에게 땀이나 눈물이 나는지, 혹은 몸에서 어떤 다른 느낌이 있는지 살펴보게 했다. 그는 여전히 이런 것들을 중시했다. 사실 이런 것은 이미 충분히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토록 많은 진리는 제쳐 둔 채 교제하지 않고 그들을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게 이끌지도 않았다.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형제자매에게 안무를 짜지 말고 무대에서 내키는 대로 춤추고 마음대로 발휘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괜찮아요. 하나님께서 이끄시니 걱정 마세요. 성령이 역사하십니다!”라고 했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깨닫지 못해 미련한 짓만 일삼았다. 그 형제자매들도 분별하지 못한 채 그의 말을 따라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역사하소서. 하나님, 역사하소서….” 그들도 ‘마음을 다해’ 힘껏 기도했다. 기도하고 나서는 울기도 했다. 그다음엔 무대에 올라 즉흥적으로 한바탕 춤을 췄다. 다른 사람은 무대 밑에서 이를 지켜보면서 분위기가 좋다고, 성령이 크게 역사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춤추는 것을 보면 눈물이 나오니 마치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것 같은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이 일을 모두 기록하고 사진으로 남겨 내게 보여 주었다. 사진에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울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한겨울인데도 얼굴 전체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진을 보고 나서 문제가 되겠다, 그가 이들을 망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들에게 업무만 지도하라고 했는데 그는 아무런 진리도 깨닫지 못하면서 상상에만 의지해 엉망으로 한 것도 모자라 성령 역사의 느낌까지 찾으려 했다. 성령 역사가 느낌에 관한 일이더냐?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실제적이다. 느낌에만 매달리는 것은 공허하고 소용없다. 네가 느낌만으로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너는 느낌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저 하나님 말씀을 토대로 원칙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 다음 일이 생겼을 때 상황에 맞게 적용하면 된다. 이 얼마나 현실적이냐. 그러면 차츰차츰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면 성령이 자연스레 역사한다. 설령 성령이 역사하지 않더라도 네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실행하면 하나님도 너를 따르는 자로 인정할 것이다. 이 얼마나 현실적이냐. 이것이 가장 진실한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교제하지 않고 한결같이 느낌을 찾거나 이적과 기사, 기이한 꿈 같은 것을 찾도록 사람을 선동했다. 이것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문외한이 무지몽매한 아이들을 이끌면서 저지른 황당한 일이다. 사진 속의 사람이 울며 눈물을 흘린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것이 무언가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한 가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한 일이 어떤 성질이냐 하는 점이다. 이 적그리스도는 그 일들을 모두 사진으로 남기면서 ‘하나님 역사의 면면’이라고 이름까지 지었다. ‘면면’이 무엇이냐? 이들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툭하면 성령 역사의 느낌을 찾고 툭하면 즉흥적으로 춤추니 출 때마다 춤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느낌이 다르고 하나님의 ‘인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면면’이다. 이런 ‘면면’에는 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느냐? 그리고 이것이 성령 역사의 성과라고 했다. 이렇게 말하자 형제자매들은 마치 믿음과 분량이 단번에 훌쩍 성장하기라도 한 것처럼 흥분했다. 그가 왜 ‘면면’이라고 했겠느냐? ‘면면’이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느냐? 내가 하나님 역사의 면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면면이 무슨 뜻이더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여 이룬 성과다. 이는 사람이 볼 수 있고 만질 수도 있으며 초자연적이지도, 막연하지도 않다. 네가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네게 많은 사역을 했고 많은 말씀을 했으며 심혈을 기울여서 너라는 사람의 생존 방식, 일을 바라보는 관점, 처신하는 태도,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등 다방면에서 바뀌게 하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 사역의 수확과 결실을 면면이라고 한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그가 한 일을 ‘면면’이라고 하였는데 일단 이 일이 어떤 성질인지는 차치하고 이 말만 분석해 보았을 때 너희는 무엇을 알아차렸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역사하면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는 면면을 보라고 했는데, 이 적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이렇게 제멋대로 굴도록 이끌어 엉망진창을 만들었으면서 ‘면면’이라는 말을 썼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이었느냐? (그는 하나님과 대등해지고자 했습니다.) 그렇다. 그의 ‘면면’이라는 말은 어디서 비롯되었느냐? 그는 하나님과 대등해지고 싶다는 생각에 하나님을 흉내 내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면면이라고 하니까 내가 이 사람들을 이끌면서 하는 것도 면면이지.’라는 뜻이다. ‘면면’의 수식어는 ‘하나님 역사’지만, 사실 그는 속으로 성령 역사의 면면의 성과를 자기 자신에게 돌린 것이다. 이것이 적그리스도가 하는 짓이다. 나설 기회만 있으면, 실낱같은 기회만 있으면 그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사람을 두고 하나님과 다투려 한다. 어떤 사람을 두고 다투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대세에 편승하기를 좋아하며 겉으로만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 믿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기초가 얕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는 사람들이다. 결국, 이 일은 제때 제재를 받게 되었다. 제재하는 것은 별것 아니지만, 적그리스도가 저지른 그 어리석은 일들은 한번에 드러났다는 것이다. 모두가 교제하고 돌이켜 보면서 말했다. “이 적그리스도가 없었을 땐 저희의 찬양이 전문적인 면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헤맬 때도 있었지만 찬양할 땐 마음에 와 닿아서 구절마다 마음을 다해 부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온 뒤로는 전문적인 이론을 얘기하다 보니 다들 딱딱한 느낌을 받아서 찬양하기 싫어졌어요. 가사 속에 담긴 하나님 말씀이 무엇인지 음미할 수 없고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거든요.” 이러면 골치 아프지 않겠느냐? 적그리스도가 나서기만 하면 그 결과 사람은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합당한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사람이 일단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충성스럽게 행동할 수 있겠느냐? 사탄에 의해 패괴된 사람에게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들 파리처럼 대세를 따르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확실한 목표는 필요 없다. 무리를 이끄는 한 사람만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를 따라 떠들어대기만 한다. 이렇게 활기 넘치고 이렇게 행동하는 데 구속을 받을 필요가 없으며 제한도 없으니 아무도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기도하며 구할 필요도 없고, 경건할 필요도 없으며, 조용히 있을 필요도 없다. 머리가 있고 숨을 쉴 수만 있으면 할 수 있다. 이는 짐승과 다를 바 없지 않으냐? 패괴된 인류가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으니 미혹을 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진리를 깨달아 이런 것을 분별할 줄 알면 쉽게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이 적그리스도가 폭로된 후 모두 모여 하나님 말씀에 대조하면서 사람을 미혹하는 그의 말과 그런 일을 저지른 그의 수단을 해부해 보고는 그자가 사람을 미혹하는 데 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엉망으로 하면서도 마치 대단한 기운이 도는 것처럼, 성령이 크게 역사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사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못했는데 말이다. 겉으로 보면 다들 열의가 대단하고 믿음과 분량이 갑자기 커진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은 허상이다. 그것은 악령이 역사한 것이다. 초자연적인 상황이 나타나 성령이 역사하지 않았다. 나중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모두가 진리를 교제하면서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게 되었고 내적 상태도 차츰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예전에 이들은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어 나와 소원했었다. 내가 말하면 이들은 낯선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고, 묻는 말에도 대답하려 하지 않아서 금방 서먹서먹해졌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적그리스도가 말해야 순종했다. 적그리스도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다 보니 적그리스도의 말이 그들을 대변하게 되어 그들에게 발언권이 없어졌다. 그런데도 이들은 발언권이 없음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으며, 그에게 통제되었다. 악령, 적그리스도는 이런 짓으로 사람을 미혹한다.
말로 분명하게 설명하고 해부할 수 있는 사악한 것들도 있지만, 그 속에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악령 역사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사악한 것들도 있다. 이것은 오직 네 느낌이나 네가 깨달은 진리, 네 체험으로만 분별할 수 있다. 그 적그리스도를 신속하게 분별해서 해결하니 교회 생활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모두가 이 일을 교제하면서 뒤늦게 두려움을 느끼며 말했다. “정말 위험했어요! ‘면면’이라고 한 적그리스도의 말이 우리에게 끔찍한 해를 끼쳐서 하마터면 그 사람이 우리를 망쳐 놓을 뻔했네요.” 그래서 너희가 적그리스도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만약 적그리스도에 대한 분별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면 너는 위험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될지 모르고, 심지어 영문도 모른 채 얼떨결에 적그리스도를 따를지도 모른다. 그 당시 너는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적그리스도의 말도 옳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너도 모르게 미혹되었다. 네가 미혹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평소 괜찮은 모습을 보이다가 일순 적그리스도에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교회에서 만류하고 교제하여 결국 구해 내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돌아오지 않고 죽을 때까지 적그리스도를 따른다. 이렇게 되면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가 고집을 부리며 뉘우치지 않으면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분별하지 못하고 이런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말한다. “그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에요.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으면서 버리고 헌신했죠. 예전엔 본분도 무척 충성스럽게 이행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대단해서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었는데 그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줘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관점이 옳으냐? 진리에 부합하느냐?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볼 때 겉모습만 볼 수 있을 뿐 속내를 알 수 없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는지 간파하지 못한다. 반드시 한동안 그 사람과 접촉해 보거나 지켜봐야 하고, 일이 닥쳐서 드러나야 그를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네가 선의로 그를 구해 내려고 하지만 아무리 교제해도 그가 뉘우치지 않으면 너는 그 이면에 어떤 원인이 있는지 모른다. 사실 하나님이 진작 그를 꿰뚫어 보고 도태시킨 것이다. 무슨 이유로 하나님이 그를 도태시켰겠느냐? 가장 직관적인 이유는 바로 어떤 적그리스도들은 악령이 분명해서 악령 역사가 있는 적그리스도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일정 기간 그를 따르면 마음이 어두워지고, 진흙같이 퍼져 버릴 정도로 연약해진다. 이는 하나님이 일찍이 그들을 포기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성품을 가지고 있고, 사탄을 증오한다. 그들이 사탄과 악령을 따르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하나님 따르는 사람으로 인정하겠느냐? 하나님은 거룩하고 사악을 증오한다. 악령을 따랐던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 설사 사람들에게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자일지라도 하나님은 원하지 않는다. ‘사악을 증오한다’는 게 무엇이냐? ‘사악을 증오한다’는 게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이어서 내가 하는 말을 들으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에게 택함 받은 때부터 하나님이 진리, 공의, 지혜, 전능이고 유일무이한 하나님임을 인정할 때까지 이런 것을 깨닫고, 어느 정도 체험이 생기고 나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마음속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기본적인 이해는 그의 믿음, 그가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본분을 이행하는 동력이 된다. 그에게 체험이 생기고, 그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마음속에 뿌리내리는 등의 분량을 갖추게 되면, 그는 두 번 다시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실제의 하나님은 진실하게 인식하지 못하면서 적그리스도를 숭배하고 따른다면 이런 사람은 여전히 위험하다. 그는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저버리고 사악한 적그리스도를 따를 것이다. 이는 대놓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런 뜻이다. ‘나는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사탄을 따르겠어. 나는 사탄을 사랑하고 기꺼이 사탄을 섬기며 따를 거야. 사탄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를 어떻게 유린하고 짓밟고 패괴시키든 나는 마다하지 않겠어.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롭고 거룩하든, 얼마나 많은 진리를 선포하든 나는 하나님을 따르고 싶지 않아. 나는 진리보단 명예와 지위가 좋고, 상과 면류관이 좋은걸. 가질 수 없다 해도 그런 것을 좋아해.’ 그는 이렇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을 따르고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적그리스도와 함께 달아났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겠느냐? 절대 원할 리 없다. 하나님이 그를 원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으냐? 합리적이기 그지없다. 하나님은 사악을 증오하는 하나님이고, 거룩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너는 도리적으로 알고 있다. 네가 이 도리를 이해하지만 하나님이 그 적그리스도 추종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알고 있느냐? 하나님은 일단 사람을 혐오하여 버리면 주저 없이 그 사람을 포기한다. 내 말이 실제 상황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실제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을 포기하는 하나님을 매몰차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행사에는 원칙이 있다. 하나님이 누군지 알면서 하나님을 따르기를 싫어하고, 사탄이 누군지 알면서 한사코 그것을 따르고자 한다면 하나님도 강요하지 않는다. 영원히 사탄을 따르고 돌아오지 마라. 하나님은 너를 포기했다.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고 거룩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에는 사악을 증오하는 요소도 있다. 즉, 피조물로서 네가 기꺼이 타락하고자 하는데 하나님이 무슨 말을 하겠느냐? 하나님은 결코 하기 싫은 일을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고, 진리를 억지로 받아들이라고 하지 않는다. 타락을 자처한 건 네 선택이었으니 결국 그로 인해 초래되는 결과는 네 몫이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처리하는 원칙은 변치 않는다. 네가 타락을 자처한다면 징벌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네가 지금껏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따랐든, 네가 타락을 자처한다면 하나님도 네게 회개를 강요하지 않는다. 너 자신이 사탄을 따르며 사탄에게 미혹되고 유린당하기를 원한다면 결국 이런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 혹자는 이런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무작정 호의를 베풀어 그를 돕지만 아무리 그를 권면해도 뉘우치지 않는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이겠느냐? 사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데 사람이 뭘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그 이면의 이유다. 그런데 사람이 간파하지 못할 때에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고 이행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고 난 뒤의 결과가 어떨지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끄는가에 달려 있다. 내가 들려준 이런 세부 사항을 통해 “하나님은 사악을 증오하는 하나님이다.”라는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았느냐? 이것은 그중 하나의 측면으로, 하나님은 악령에 물들었던 자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사탄을 택했는데 하나님이 너를 원하겠느냐? 네가 사탄을 택했는데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고 감동을 주어 네가 돌아오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하고도 남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고, 하나님은 사악을 증오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는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의 주된 모습, 즉 모든 긍정적인 사물과 모든 진리를 적대시하고 혐오하는 것에 대해 중점적으로 교제하였다. 오늘은 다른 관점으로 교제해 보겠다. 적그리스도는 긍정적인 사물과 상반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 그것이 무엇이냐? (부정적인 사물입니다.) 그렇다. 부정적인 사물이다. 다시 말해, 진리에 어긋나고 맞서며 합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다. 적그리스도가 긍정적인 사물을 싫어하면 좋아하는 것도 있지 않겠느냐? 그럼 그가 무엇을 좋아하겠느냐? 그는 기만과 거짓말 그리고 음모와 계략, 술수를 좋아한다. 틈만 나면 ≪삼십육계≫를 보는 적그리스도가 있지 않으냐? 아마 있을 것이다. 내가 ≪삼십육계≫를 보더냐? 보지도 않고 연구하지도 않는다. 그걸 봐서 무슨 소용 있느냐? 보면 역겨워서 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삼십육계≫를 보고 나서 너희에게 어떤 느낌이 들더냐? 이 사악한 인류에 대한 염증이 더 커지지 않겠느냐? 이런 느낌이 없었느냐? 보면 볼수록 역겹고 정말 나쁜 사람이라는 느낌 말이다! 사소한 일도 계략을 세워야 하니 일이 복잡하고 머리 아프다. 밥맛도 없고 밤잠을 설치며 어떻게 싸울까 골머리를 앓는데 이럴 필요가 있겠느냐? 틈만 나면 삼십육계를 배워서 남들과 두뇌 싸움을 하고 하나님과 두뇌 싸움을 하는 적그리스도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거짓말, 기만, 음모, 계략, 술수, 계책을 좋아한다. 그럼 하나님의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겠느냐? 공평과 공의의 반대말이 무엇이냐? (사악함과 추함입니다.) 사악함과 추함이다. 그들은 추한 것들을 좋아한다.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모든 것들을 좋아하고 정의롭지 않고 정당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정의로운 일인데 적그리스도는 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바보야!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평생 사는 게 무슨 가치가 있겠어?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살아야 해. 뭐 하러 진리나 정의를 위해 살아? 그건 바보나 하는 짓이지!” 이게 그의 관점이다. 그런 그가 정의로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그는 정의로운 일을 하지 못한다.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일이 교회에 일어나면 그가 나서서 목소리를 내겠느냐? 그는 나서기는커녕 남의 불행에 신이 나서 몰래 기뻐하니 이를 악질이라 한다. 그는 결코 하나님 집 사역에 관한 일로 마음을 졸이거나 하나님의 선민을 지키기 위해 발 벗고 나서지 않을 것이다. 악을 행하는 악인이나 교회에서 제멋대로 구는 나쁜 사람을 보고도 남몰래 기뻐하고 하나님 집을 조롱하는 자는 어떤 사람이냐? 모두 사악한 무리이다. 그렇다면 이런 악인들을 싸고도는 리더는 어떤 사람이냐? 바로 적그리스도다. 자기 이익에 해가 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지만 교회의 이익에 해가 되는 것에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뒤에서는 자기가 손해 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이다.
방금 적그리스도가 진리는 싫어하면서 불의하고 사악한 일은 좋아한다는 것에 관해 언급했다. 그들은 이익을 추구하고 복받기를 추구해서 항상 복받으려는 속셈과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과 거래를 한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분별하고 규정해야겠느냐? 만약 이익에 눈이 멀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약하다. 마치 바울이 그의 몸에 가시가 있어서 속죄하기 위해 사역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마지막엔 공의의 면류관을 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어떤 성질이냐? (흉악함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흉악한 성품이다. 그런데 이 일의 성질은 무엇이냐?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질이 있는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이든 이득을 보려 하고 거래를 한다. 이방인의 말 중에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적그리스도 역시 같은 논리다. ‘제가 당신을 위해 사역하는데 당신은 제게 무엇을 주시나요? 제가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죠?’ 이 성질을 어떻게 결론지어야 하겠느냐? 이익이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익에 눈이 멀었다, 이기적이고 비열하다는 것이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다. 적그리스도는 오로지 이익과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약간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그것 역시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것이다. 복을 받고 상을 얻으려는 그의 속셈과 욕망이 너무 커서 단단히 붙잡고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토록 많은 진리를 선포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한결같이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한 것, 즉 좋은 종착지를 얻기 위한 거야. 이는 지고지상의 원칙으로서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어. 만약 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선 안 되지. 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는 의미나 가치는 사라져 없어지는 거야.’ 적그리스도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누군가가 주입했기 때문이냐? 누가 가르치고 영향을 주기라도 했느냐? 전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본성 본질에 의해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 오늘날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하는데 그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고 정죄한다.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그의 본성은 영원히 바꿀 수 없다. 그가 바뀔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의 본성이 사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성품이 사악하여 대놓고 하나님에게 고함치며 맞서는 것이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며 그의 실체이다. 하나님에게 대놓고 고함치며 대항하는 적그리스도는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느냐? 사악함이다. 어째서 사악함이라 하겠느냐? 적그리스도가 복받기 위해, 명예와 이익, 지위를 위해 감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고함치기 때문이다. 그가 왜 감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마음속에 그를 지배하는 일종의 힘과 사악한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굴며 하나님에게 따지며 고함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면류관을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기도 전이고, 하나님이 그의 종착지를 빼앗아 간 것도 아닌데 “제게 면류관과 종착지를 주지 않으면 셋째 하늘에 올라가 당신께 따지겠어요!”라며 그의 내면에 있던 사악한 성품이 폭발한 것이다. 만약 사악한 성품이 없다면 이런 기세가 어디서 나오겠느냐? 일반인에게 이런 기세가 나오겠느냐? 어째서 그는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 않느냐? 복을 받겠다는 욕망을 왜 한사코 물고 늘어지겠느냐? 이 또한 이상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약속한 복이 바로 그의 야심과 욕망이 된 것이다. 그는 복을 받겠다는 의지만 대단하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려 하지 않고 진리도 싫어한다. 그는 그저 복과 상, 면류관을 받는 것만 추구한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지 않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하나님에게서 쟁탈하려는 것이다. 그의 논리는 무엇이냐? “제가 복과 상을 받지 못하면 당신께 따질 거예요.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라며 맞설 거예요!”라고 한다면 이것이 하나님을 위협하는 게 아니겠느냐? 이는 왕궁까지 쳐들어와 반란을 일으키는 꼴이 아니냐? 그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사역이 그의 뜻에 부합하지 않으면 감히 하나님이 창조주이며 유일무이한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이것이 사탄의 성품이 아니겠느냐? 또 사탄의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행태와 하나님을 대하는 사탄의 태도가 다를 게 무엇이냐? 완전히 똑같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그가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에게서 복과 상, 면류관을 빼앗으려 하니 이것이 어떤 성품이겠느냐? 그가 무엇을 근거로 이런 짓을 하며 이렇게 빼앗으려 하느냐? 그가 어떻게 이런 기세를 부릴 수 있느냐? 이제는 그 이유를 결론지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이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복과 면류관을 받으려 하고 하나님에게서 이런 상을 빼앗으려 한다. 이는 제 무덤을 파는 게 아니겠느냐? 이것이 제 무덤을 파는 짓임을 그가 알겠느냐? (모릅니다.) 자신이 상을 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 역시 은근히 느낄 것이기에 “만약 복을 받지 못하면 셋째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께 따지겠습니다!”라고 선수를 치는 것이다. 그 자신도 이미 복을 받지 못하리라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탄이 공중에서 몇 년간 하나님에게 고함쳐서 하나님에게 무엇을 받았느냐? 하나님은 그에게 딱 한 마디만 했다. “사역이 끝나면 너를 무저갱에 던져 버릴 것이다. 너는 무저갱에 속한 것이다!” 이것이 사탄에게 한 하나님의 유일한 ‘약속’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상을 받을 생각을 하니 이는 사악한 생각이 아니냐?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적그리스도의 태생적 본질은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이다. 그 자신도 영문을 모른 채 오로지 복과 면류관을 받는 데만 몰두한다. 진리와 관련되고 하나님과 관련되기만 하면 그의 마음속에 거부감이 들고 화가 미친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정상인은 그의 마음속 느낌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도 죽을 맛이긴 하다. 그토록 야심이 크고 내면이 악질적이며 복을 받으려는 욕망까지 커서 욕심이 불타오른다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 집에서 늘 진리를 교제하니 그가 들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괴롭고 견디기 어렵겠느냐? 또 얼마나 스스로 억지춘향이 되고 가식을 떨어야 버틸 수 있겠느냐? 이는 사악한 힘이 아니겠느냐? 일반인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교회 생활이 따분하게 느껴져 마음속에 반감이 생길 것이다. 그에겐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교제하는 것이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적그리스도는 버틸 수 있겠느냐? 복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도 자신이 억울함을 당하고 싶지 않지만 억지로 버티도록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하나님 집에 숨어 들어가 사탄의 종노릇을 하며 일부러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한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완수하지 못하면 마음이 편치 않고 사탄에게 미안해진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정해진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적그리스도가 지위를 좋아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지위를 어느 정도로 좋아하느냐? 그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먼저 그는 기회만 생기면 기어오른다. 그 방식이 아부가 되었든, 아니면 기만이 되었든, 혹은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한 선행이 되었든, 어쨌든 기회만 생기면 기어오른다. 그는 지위를 얻고 나면 그것을 더욱 애지중지한다. 정상인이 지위를 갖게 되면 자괴감이 들어 자중할 것이다. 특히 하나님 집에서 리더 일꾼을 맡는 것은 본분이지 지위나 관직이 아니다. 그것은 본분이다. 자기가 관직에 올랐다는 생각에 패괴 성품을 표출하여 자기를 과시할 때면 그는 이런 모습을 가끔 보이는 건 괜찮지만 자주 그러면 본인조차 역겹게 느껴지고 형제자매에게 들키면 낭패라며 걱정한다. 그에게는 존엄이 있고 체면이 있으니 어느 정도 자중하는 것이다. 그가 진리를 깨닫고 나면 지위를 점점 중요시하지 않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어떤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고 어떤 좋은 결과가 있겠느냐? 사람이 본분 이행에 전념하게 된다. 자기가 지금 어떤 직무를 맡고 있든 그것을 본분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왕 리더로 뽑혔다면 사람에게 리더는 일종의 부담이자 본분이기에 먼저 그 본분의 범위에 어떤 일들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리더를 맡지 않았을 때는 어떤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되지만, 리더를 맡고 나면 자기 본분 내의 일들을 어떻게 잘해야 할지, 어떻게 원칙과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 따라 본분을 이행할지 고민해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좋은 쪽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럼 지위를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태도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과 어떤 면에서 다르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지위에 열중하고, 지위를 추구하며, 지위를 애지중지하고, 지위를 경영한다. 그는 매사에 지위에 대해 생각한다. 그에게 지위는 목숨과도 같아서 남들이 자기를 우러러보지 않거나 자기가 실언해서 남들에게 무시당하면 사람 마음속에서 자신의 지위가 사라질 테니 그는 지위 때문에 늘 안절부절못하고 언행에 신중을 기한다. 네가 아무리 진리 추구를 교제한들 그는 알아듣지 못한다. 그가 유일하게 알아듣는 것이 무엇이냐? “제가 어떻게 해야 이 ‘관직’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관직자다울 수 있을까요?”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모습이 있다. 가령 교회 리더가 형제자매 20여 명과 함께 단체 사진을 찍는다고 할 때 존엄성이 있고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어디에 앉겠느냐? 가장자리 구석에 앉는다. 그럼 적그리스도는 보통 어디에 앉느냐? (가운데 앉습니다.) 그가 가운데 앉는 것은 모두가 원하는 것이냐, 아니면 그 자신의 바람이냐? (그 자신이 원하는 겁니다.) 때로 모두가 그를 위해 가운데 자리를 남겨 두고 억지로 그 자리에 앉히면 그는 속으로 흐뭇해한다. ‘이것 좀 보라고, 모두가 나를 얼마나 옹호하는지. 이 자린 내가 앉아야 해. 이런 걸 보면 모두의 마음속에 내가 리더로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거야!’ 그는 기분이 좋고 즐겁다. 모두가 그를 위해 비워 둔 가운데 자리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그가 어찌 그 자리에 앉겠느냐? 그가 그 순간 그 자리와 그 기분을 즐긴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에게는 그 순간의 그런 느낌이 더없이 필요하고 소중하다. 그래서 그 자리를 사양하지 않는 것이다. 주변의 수십 명이 이 리더를 에워싸는데도 그가 정 가운데 방석을 깔고 앉아 있는 것은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남들과 같은 높이에 있으면 안 돼. 그렇게 해서 리더로서의 내 존귀함이 드러날 수 있겠어? 자리를 좀 더 높이고 가운데 자리에 앉아야 해. 그래야 눈에 띄지. 이게 자리를 보는 안목이라는 거야. 사람들이 사진을 보자마자 나를 보고 이 사람이 우리 리더 아무개라고 하면 얼마나 영광스러워! 이 사진은 못해도 몇 년은 보관될걸. 내가 안 보이면 사람들에게 서서히 잊힐 텐데 그럼 리더를 맡은 보람이 없지 않겠어?’ 그는 지위를 이렇게나 애지중지하는 것이다.
한번은 상황을 알아보려고 어느 교회 사람들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화면을 띄우고 카메라 쪽을 보고 앉았는데 가운데 자리는 비워 두었다. 그게 의아했던 나는 화면이 작아서 얼굴이 잘려 보이면 어색하니 가운데로 모이라고 했다. 조금 있다가 그들은 중앙으로 아주 살짝 이동했고 가운데 한 자리는 여전히 비워 두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왜 가운데는 아무도 안 앉지? 그 자리에 부처라도 있나. 왜 엄두도 못 내는 걸까?’ 나중에 한 사람이 왔는데 굉장히 뚱뚱했다. 그가 ‘턱’ 하니 가운데 앉는데 보아하니 둥글둥글한 게 정말이지 ‘부처’ 같았다. 알고 보니 가운데 자리는 그를 위해 비워 둔 것이었다. 너희가 알아맞혀 보아라. 이 사람이 누군 것 같으냐? (리더입니다.) 그렇다. 정중앙 자리는 신분의 상징이다. 이 마귀가 오더니 부처처럼 정말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다른 사람은 양 끝 가장자리에 앉기를 자청하면서 그를 무척 아끼고 ‘잘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 ‘와, 드디어 오셨군요. 오랫동안 기다렸어요.’라고 아첨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하는 말을 아무도 듣지 않았다. 모두 그 리더만 기다렸던 것이다. 그 ‘부처’를 모셔 와야지 그러지 않으면 내가 이야기를 나눌 방법이 없었다. 어째서 그가 거기에 앉고 그토록 자연스럽게 앉는 것이냐? 이는 평소 좋아하는 것, 중요시하는 것, 추구하는 것과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평소 그들의 모습이 어떻겠느냐? 너희가 상상력을 발휘해서 생각해 보아라. 그가 만약 예배를 진행하거나 모두가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곳에 방문한다면 다들 그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조상이나 부처가 오기라도 한 것처럼 재빨리 상석으로 모시고 주인 석을 그에게 내줄 것이다. 남겨 두지 않으면 안 되느냐? 1초 동안 카메라에 담긴 장면을 보니 남겨 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것이 하나의 규칙, 즉 불문율이 되어 버린 것이다. ‘부처’가 오면 곧장 주인 석을 양보하고, ‘부처’가 오지 않아도 주인 석은 그를 위해 비워 두어야 하니 이를 지위라고 한다. 너희도 이렇게 지위를 그 무엇보다 높게 여기지 않느냐? 방금 언급한 이 장면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사람은 지위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대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지위를 하나의 본분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부탁을 소중하게 여기며, 본분만 받아들이고 지위는 차지하지 않는다. 지위를 성가신 것으로 생각해서 또 다른 부담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에게 이것은 스트레스이고 속박이며 나아가서는 근심거리를 안겨 주는 것이다. 하지만 지위를 숭상하는 사람은 지위를 관직으로 생각해서 항상 지위의 복을 누린다. 그들은 지위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에 지위가 생기고 나면 이를 위해 목숨과 체면은 물론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는다. 심지어는 몸까지 팔 정도로 말이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을 사악함이라고 한다. 그들 눈에 지위는 무엇이냐? 높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이나 수단이자 신분과 운명을 바꾸고, 사람들 가운데서의 위상을 바꾸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들이 지위를 그토록 중시하는 것이다. 지위가 생기면 무슨 일이든 사람들이 그의 말에 따르고 순종하며 그를 용인해 주고 그에게 알랑방귀를 뀐다. 그리고 그는 남들이 이렇게 하는 것을 역겨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만끽한다. 그 리더가 가운데 자리에 앉으면서 보였던 자태처럼 유유히 만끽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지위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여러 우월감과 우위를 무척 좋아할 뿐만 아니라 추구하고 애지중지하며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극도로 사악한 사람이다. 어째서 극도로 사악하다고 하겠느냐? 지위를 가진 사람에게 알랑방귀를 뀌고 감언이설과 아첨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어떤 말을 하느냐? 전부 거짓말, 파렴치한 말, 낯간지러운 말, 역겨운 말, 사람을 기만하는 말이다. 심지어 듣기조차 민망한 말도 있다. 예를 들면 지위가 있는 사람이 아들을 낳았는데 원숭이처럼 못생겼다. 그렇다면 아첨하는 자들이 못생겼다고 하겠느냐? 그들은 어떤 식으로 말하느냐? (정말 예쁘다고 합니다.) 그냥 ‘정말 예쁘다’로 끝이겠느냐? 좀 더 낯간지럽게 말해야 한다. “미간이 넓고 턱이 둥글어서 부귀영화를 누릴 관상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버젓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관직에 있는 자는 들어 보면 흡족하니 이런 말을 즐긴다. 이런 소리를 듣는 게 좋은 것이다. 어느 정도로 좋아하느냐? 자기한테 이런 가식적이고 아첨하는 말이나 그를 기만하는 말, 그를 기쁘고 즐겁게 해 주는 거짓말이나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극도로 사악한 것이다. 자신이 거짓말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역겨운데 그는 거짓말하는 다른 사람들이 파리 떼처럼 자기 주위를 맴도는 것을 좋아하고 한없이 만끽한다. 그는 언변이 좋고 비위를 맞추며 아첨할 줄 알고 에둘러 말하는 사람을 좋아해서 이런 사람들을 주위에 두고 중용한다. 이런 리더는 위험하지 않겠느냐? 그가 어떤 사역을 할 수 있겠느냐? 교회가 이런 자들의 손에 넘어가면 끝장나지 않겠느냐? 여전히 성령의 역사가 있겠느냐?
내가 듣기로는 어떤 먹성 좋은 리더가 있었는데 그가 지내는 곳의 형제자매가 음식을 잘하지 못해서 음식이 맛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에게 알랑거리며 비위를 잘 맞춰 주고 날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줄 접대 가정을 구했고, 거기서 매일같이 배 터지게 먹고 마시며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잔치를 즐기는 건 정말이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사람은 위험하다. 설사 지금은 적그리스도가 아닐지라도 그들의 모습에서 이미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과 사악한 성품이 드러났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들이 적그리스도가 될 것인지, 적그리스도인지는 앞으로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지금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고 있으며 그들의 성품 본질이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정적인 사물을 좋아하고 긍정적인 사물은 싫어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사물을 속으로 경멸하고 정죄하며 거절한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이냐? 기만과 거짓말 그리고 부정적인 사물과 관련된 것들이다. 내가 어떤 곳에 갔을 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컨디션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잠깐 쉬세요.” 컨디션이 좋은지 나쁜지, 언제 쉬어야 하는지는 내가 안다. 네가 그렇게 똑똑한 체할 필요도, 아양을 떨 필요도 없다. 나는 그런 걸 받아들이지 않고 혐오한다.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느냐? 일이 생기면 그 즉시 교제하고 내게 마음을 털어놓아라. 그러면 내가 네게 교제하여 네 어려움을 해결할 테니 너는 나와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아부하며 잘 보일 궁리만 하지 마라. 역겹기 짝이 없다! 이런 사람은 보기만 해도 역겨우니 내 곁에서 떨어지거라. 내가 너를 똥파리, 빈대로 규정한다. 썩 물러가거라!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 곁에는 항상 시중드는 사람이 있어야겠죠?” 너는 내 신분과 지위에 걸맞은 대우와 서비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필요 없다. 절대 그런 짓을 하지 마라. 알겠느냐? 나는 그런 것에 반감을 가지고 혐오한다. 네게 정말 그런 마음이 있어서 정 나를 생각해 주고 관심을 가져 주고 싶다면 정당한 방법이 굉장히 많다. 가령 내가 어떤 일을 네게 시켰다고 해 보자. 너는 착실하게 실행하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즉시 내게 말해도 된다. 다만 이방인이 관리에게 아첨하는 수법을 모방해 사탕발림 따위의 말은 절대로 하지 마라. 나는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 내가 키가 작은 게 분명한데도 굳이 “당신은 키가 크진 않지만 저희보다 크신 분입니다.”라고 하는데, 이런 말은 듣기 싫으니 절대 내 앞에서 입에 올리지 마라. 그런 말은 다른 데 가서 해라. 적그리스도는 이런 말을 듣기 좋아한다. 예를 들어 보자. 그가 수하에 두고 있는 형제자매에게 묻는다. “제가 뚱뚱해 보이나요?” 누군가 대답한다. “뚱뚱해도 저희보다 예쁘세요.” “그럼 제가 말랐나요?” “당신은 말라도 예쁘세요. 어차피 옷걸이가 좋아서 뭘 입어도 잘 어울려요.” 이 말을 들은 적그리스도는 흡족해서 그 사람을 자기와 한패로 생각한다. 적그리스도가 좋아하는 이런 것들은 모두 역겹고 사악하다. 그렇지 않으면 왜 그를 사악하다고 하겠느냐? 양심, 이성, 염치, 존엄, 그리고 선악과 흑백, 시비를 분별하는 능력 등 정상 인성에 해당하는 이런 것들 중 적그리스도는 어떤 것을 좋아하느냐? 그가 염치가 있는 사람을 좋아하느냐? 존엄성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느냐? 그가 좋아하는 자는 후안무치해서 아무리 낯간지러운 말을 해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이 염치없는 게 아니겠느냐? 그는 네가 낯간지러운 말을 하면 할수록 더 좋아한다. 적그리스도의 취향, 여러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선택, 성향 등으로 볼 때 그의 사악함은 끝이 없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에서 정의감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이런 수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공직사회에서 관리에게 아첨하는 자들을 보아라. 목숨을 다해 아첨하지 않느냐! 관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준다. 자기 부인마저 바칠 수 있으니 이것이 존엄성이 없는 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또 어떤 관리는 동성애자인데 그에게 들러붙는 동성도 있다. 자기도 내키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 (못합니다.) 그들은 그럴 수 있다. 그들에겐 넘지 말아야 할 선도 없고, 염치도 없고, 양심 지각, 이성도 없다. 그러니 이런 짓을 하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말을 대사로 만들어서 연기해 보라고 하면 너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겠지만 그들은 광대보다도 더 낯간지럽게 해낸다. 무엇을 광대라 하느냐? 알몸으로 남들 앞에 서서 구경거리가 되더라도 아무렇지 않고, 낯빛 하나 붉히지 않는 강심장을 광대라 한다. 그렇다면 알랑방귀를 뀌고 아첨하며, 낯간지럽고 역겨운 말을 하고, 사악한 사물을 좋아하는 이런 사람은 광대보다 더 심하다. 그들은 단지 몸을 팔 뿐이지만 이 사악한 적그리스도 무리는 무엇을 파느냐? 영혼을 판다. 이들은 악마의 무리이니 구제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꼴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할 리가 없다. 그들은 지위를 이렇게 대한다. 지위가 그들에게 가져다주는 우월감과 쾌감을 즐기는 것이다. 이렇게 즐기면서 생기는 여러 느낌은 어떤 것이냐? 이는 긍정적인 사물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사물이냐? 전부 부정적인 사물이다. 그들은 지위만 생기면 사람들의 알랑방귀와 아첨, 아부, 사탕발림 그리고 특별 대우를 누리려 한다. 음식이든, 집이든, 물건이든 모두 특별해야 하고 무엇이든 남들과는 달라야 하는 것이다. 설마 네 몸뚱이가 남들과 다르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지위가 생기면 자기가 존귀하고 대단하다고, 땅에 자기를 품을 수 있는 곳은 없을 테니 ‘연화보좌’에 앉아 사람들이 바치는 것들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정상인이 일반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지겠느냐? 지위의 유무를 막론하고 정상인도 지위에 대한 동경이나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염치와 양심, 이성이 있고 게다가 이제는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지위에 대한 애착은 줄어들고 무덤덤해진다. 또한, 지위가 가져다주는 유익이나 지위의 복에도 무덤덤해진다. 남들의 알랑방귀, 아첨 등에도 반감이 들어 멀리하고 심지어 등을 돌리고 저버릴 수 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그런 것을 저버리거나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 이런 것을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으라는 말과 다름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위가 없어졌다고 “안 믿을래요. 살아서 뭐 해요? 죽고 말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겠느냐? 여기엔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그에게 지위가 어쩜 이렇게 중요하단 말이냐? 그에게 무난하게 살라고 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는 반드시 지위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기어이 남들로부터 공경과 숭배, 추대를 받고, 남들이 비위를 맞추고 환심을 사기 위해 하는 입 발린 거짓말을 들으려 한다. 그는 이런 것들을 누리고자 한다.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이 이런 걸 누리려고 하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마음이 편치 않아서다. 적그리스도는 왜 이런 것들을 누리기 좋아하느냐? 내면에 사탄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사탄의 부류만이 이런 것들을 추구하고 그런 요구를 한다. 정상인은 이런 것들을 한동안 즐기고 나면 싫증 나고 귀찮기만 해서 피하게 된다. 반면 죽어도 이런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 스타 배우들이 나이를 먹어도 영화계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후광도 없이 사람들에게 관심 밖에서 밀려나 혼자 살면 재미없기 때문이다. 하늘도 더 이상 파랗지 않고, 인생의 방향도 사라지며, 삶의 의미와 가치도 사라지고, 인생 전체가 어두워지니 그는 영화계로 돌아가 스타로서의 기분을 즐기려 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와 이들의 성질이 똑같다. 그들은 똑같이 사악한 성품과 본질을 가지고 있다. 적그리스도는 지위가 생기면 여기저기서 뽐내고 심지어 자기 집에서까지 완장을 차고 가족들이 모두 그의 말을 따르게 한다. 적그리스도는 사악한 성품과 본질을 가지고 있고, 지위를 매우 애지중지하며, 몹시 떠들고 다니며 뽐내는데 여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이자에게 염치가 있느냐? 없다. 지위만 생기면 신분은 물론 가정에서 부모와의 관계마저 변하니 이는 문제가 있지 않으냐? 딴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들이 이런 태도로 지위를 대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사악한 본질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하나의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창조주로,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는 지고지상하다. 하나님에게는 권병과 지혜,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 있다. 하나님이 모든 인류와 만물 가운데서 얼마나 오랫동안 사역했는지 아는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이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사역하고 인류를 경영해 왔는데, 구체적 연한과 정확한 수치는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인류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나 사탄이 이런 일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공표하지 않겠느냐? 사탄은 분명 그 사실을 공표했을 것이다. 사탄은 자신을 드러내 더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공을 인정받으려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 일을 알리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본질에는 자신을 낮추고 감추는 측면이 있다. 낮춤과 감춤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교만함과 드러냄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큰 사역을 해도 그는 사람이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말해 주어 인식하게 하면 충분하다. 하나님이 행하는 이 사역들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본질을 알게 한다. 이것이 사람에게 어떤 도움이 되겠느냐? 이렇게 해서 거둘 수 있는 성과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으려면 이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냐? 사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경지는 마지막에 도달하는 객관적인 성과다. 그러나 사람에게 그런 것을 인식하게 하는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무엇이냐? 사람이 이런 일들을 알게 한 후, 하나님이 어떻게 인류를 경영하고 주재하며 안배하는지 알게 한 후 더 이상 의미 없는 반항을 하거나 굽은 길을 갈 필요 없이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그러면 사람은 훨씬 덜 고통받게 될 것이다. 네가 순리대로 살고, 하나님이 준 방식과 법칙, 하나님의 요구와 하나님이 준 원칙에 따라 살 수 있다면, 더는 사탄의 손안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두 번째로 사탄에게 패괴되거나 짓밟히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너는 영원히 하나님이 세운 법칙 가운데서 하나님의 피조물답게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역하는 본래 의도이자 근본 취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렇게 큰 사역을 하였음을 과시한 적 있느냐? 어떤 일이 하나님이 한 것인지 사람에게 알려 준 적이 있느냐? 그런 적이 없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일이 하나님이 한 것이고, 어떤 일이 하나님이 한 게 아닌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사실 하나님은 수없이 많은 일을 했지만 한 번도 인류에게 설명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설명하지 않으니 너는 그저 네가 알아야 할 것만 확실히 알면 된다. 앞으로 인류가 땅 위에서 정상적으로 살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 왔을 때 사람이 하나님과 정상적으로 교류할 수 있고, 하나님을 응접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사탄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땅 위에 나타난 것이다. 땅 위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한 무리 사람들이 생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할 수 있는 한 무리 사람들이 생기면, 하나님의 사역은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성과를 이루면 된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든, 네가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해도 하나님은 네게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째서 설명하지 않겠느냐? 설명할 필요가 없다. 많은 일을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네가 인식하도록, 네가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도록 네게 어느 정도의 비밀들을 말해 주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역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현재 집중적으로 하는 일은 무엇이냐? 바로 사람이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일이다. 네가 진리를 깨달으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삶의 토대도 생기게 되고, 나중에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도 있게 된다. 또한, 사탄에 대해서도 분별력이 생기고 사탄을 저버릴 수 있게 되어 더 이상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 사탄을 추종하는 일이 없게 된다. 이러면 된 것이다. 그런 비밀들에 대해서는 이 인류가 이해할 기회가 나중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행사에는 너무나 많은 비밀이 있어 하나님이 네게 이를 드러낸다 해도 네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네가 이를 접할 수 있다고 해도 이해하거나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어째서냐?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는 거리가 있고,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에도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네가 무지개는 하나님과 인류 사이 언약의 증거임을 알아도 무지개가 어떻게 생기는지 아느냐? 하나님이 이 비밀을 네게 말해 준다면 너는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너는 알아들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게 말해 주지 않는 것이다. 네게 말해 줘 봤자 너에게 짐이 되고, 너는 그것을 연구하고 분석해야 하는데, 이는 너에게 골치 아픈 일이 된다. 그래서 비밀 같은 일에 대해 하나님은 길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탄에 속한 자는 이를 알면 참고 말을 안 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본질적 차이다. 하나님이 이미 인류에게 드러낸 지 오래지만 사람이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일에 대해 하나님이 설명하느냐? 초자연적인 일을 하느냐? 하나님은 하지 않는다. 인류는 하나님이 만들었다. 사람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 어느 정도까지 이해할 수 있는지 하나님은 알고 있다. 이런 일들은 사람의 눈앞에 놓여 있지만 사람이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은 사람에게 깨우쳐 줄 필요가 없다. 또한 사람에게 강요하여 사람의 부담이 되게 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행사에는 원칙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은 보호와 배려, 사랑이고, 하나님은 사람이 잘되길 바란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의 근원이자 본래 의도이다. 반면, 사탄은 스스로를 뽐내면서 강제로 사람에게 들이밀며, 그다음에는 사람이 사탄을 숭배하게 하고 미혹되게 한다. 또 사람을 타락시켜 조금씩 살아 있는 마귀로 변하게 하여 멸망으로 나아가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깨닫고 얻게 되면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구원받을 수 있다. 이는 멸망의 결말이 아니다. 사탄은 사람이 잘되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한다. 사탄은 사람의 생사를 개의치 않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자신의 이익과 통쾌함만을 고려한다. 사탄에게는 사랑도, 긍휼도 없으며 관용과 포용은 더더욱 없다. 사탄은 그런 것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런 긍정적인 사물은 오직 하나님만이 갖추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다량의 사역을 하였는데, 하나님이 얘기한 적 있느냐? 해명한 적 있느냐? 설명한 적 있느냐? 없다.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오해해도 하나님은 많은 말로 해명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기에 너는 나이가 예순이든, 여든이든 하나님을 너무 모른다. 하나님을 그 정도밖에 모른다면 너는 아직 어린아이인 셈이다. 하나님은 네게 따지지 않는다. 너는 아직 철부지다. 어떤 사람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육은 늙었는데도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유치하고 천박하다. 그래도 하나님은 네게 따지지 않는다. 네가 모르면 모르는 것이고, 겨우 그 정도 자질밖에 안 되는 변변찮은 인간이라서 그럴 수밖에 없으니 하나님은 네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라고 요구하지만 하나님은 스스로를 증거한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조금만 일을 해도 사람들이 이를 몰라줄까 걱정한다. 적그리스도처럼 말이다. 그는 조금만 일을 하면 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공적을 자랑한다. 그 말을 들어 보면 겉으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으면 그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뽐내고 자신을 내세우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그런 말들을 하는 속셈과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선민과 지위를 두고 하나님과 다투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고 감추지만 사탄은 자신을 드러낸다. 이는 차이가 있지 않으냐? 드러냄과 낮춤과 감춤 중 어떤 것이 긍정적인 사물이냐? (낮춤과 감춤입니다.) ‘낮춤’이란 말이 사탄에게 쓰일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사탄의 사악한 본성 본질을 보면, 사탄은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싸구려이다. 사탄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게 비정상이거늘, 무슨 낮춤을 말하겠느냐? 낮춤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분,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성품은 위대하고 존귀하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자신을 과시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고 감춤으로써 사람이 하나님이 어떤 일들을 했는지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묵묵히 행하고 있고, 인류는 하나님에게서 끊임없이 공급받고, 양분을 얻으며, 인도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안배한 것이다. 하나님은 한 번도 설명하지 않았고, 그런 일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이 낮춤과 감춤 아니냐?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지만 이를 언급하지도 설명하지도 않고, 사람과 이런 일들을 논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낮춤인 것이다. 너는 이렇게 할 수 없는데 네가 무슨 낮춤을 논하겠느냐? 그런 일들은 네가 한 일이 아님에도 한사코 공을 가로채려 하니, 이를 뻔뻔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인류를 이끌며 이렇게 큰 사역을 하였고, 온 우주를 주관한다.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은 그토록 크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나의 능력은 비범하다.”라고 말씀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숨어서 이 모든 것을 주관하며 인류가 양분과 공급을 얻도록 하고, 온 인류가 대대로 이렇게 이어지게 한다. 예를 들어, 공기, 햇빛 그리고 인류가 땅에서 생존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인 것들은 모두 끊임이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급한다는 것은 조금도 거짓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하면, 이를 숨기고 이름 없는 영웅이 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교회에 있는 일부 적그리스도처럼 말이다. 그들은 다소 위험한 사역을 맡은 적이 있고, 버리고 고생한 적도 있으며, 심지어 옥살이한 적도 있다. 또한 하나님 집의 어떤 사역에 공헌을 한 자도 있다. 그들은 그 일들을 늘 되새기며 잊지를 않고, 이를 평생의 공로이자 평생의 자본으로 삼는다. 이는 사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말해 준다. 사람은 확실히 보잘것없고, 사탄은 염치가 없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적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지위가 있다면 그들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어야 하겠느냐? 이름난 음식을 먹고 명품을 입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이런 물질적인 것에 대해 적그리스도가 격식을 요구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어떤 지역에 가려면 비행기를 타야 한다. 그곳에 도착하면 평범한 형제자매의 가정이 그들을 접대할 수 있겠느냐? 설령 접대할 수 있다고 해도 거기서 지내지 않고 성급 호텔에서 묵어야 한다. 적그리스도는 격식을 따지지 않느냐? 지위가 그들에게 주는 영예와 즐거움, 그리고 허영 같은 것들을 적그리스도가 포기할 수 있겠느냐? 여건만 된다면, 그리고 기회만 된다면 그들은 이런 것들을 한 아름 움켜쥐고 누릴 것이다. 그들의 원칙은 무엇이냐? 지위만 생기면 손에 돈이 들어오고 명품을 착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것은 거부하고 명품만 찾는다. 넥타이, 양복, 셔츠, 커프스 단추, 금목걸이, 벨트 등 전부 명품이다. 이는 좋지 않은 징조다. 형제자매가 화를 입지 않겠느냐? 형제자매의 헌금이 적그리스도가 명품을 사는 데 들어간다. 이 적그리스도가 저지른 못된 짓이 크지 않으냐?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으로 초래된 결과가 아니냐? 그들은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리더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평범하게 입고 다녔다. 옷가지도 얼마 없고 그마저도 명품이나 고급 의류가 아니었다. 결국, 몇 년간 리더를 하다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체되었는데 떠날 때 보니 짐이 한 트럭은 되었고, 전부 명품 옷이나 가방 같은 귀한 것들이었다. 그는 리더를 하면서 돈을 벌지도 않았는데 그런 것들이 어디서 났겠느냐? 바로 지위를 통해 얻은 것이다. 만약 그가 남들이 사다 주는 물건을 거절했다면 형제자매가 굳이 그에게 사 주었겠느냐? 그럴 사람이 있겠느냐? 그가 거절한다면 사람들이 사 주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느냐? 그가 강점하고 횡령한다는 것이다. 그는 형제자매에게서 갈취하기도 하고 자기가 나서서 사기도 했다. 또 형제자매에게 사오라고 시키기도 하는데 사오지 않으면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다. 이런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풍작’을 거두어 부자가 됐다. 너희는 이런 리더가 부러우냐? 너희도 기회가 된다면 이렇게 부자가 되고 싶으냐? 잘 들어라. 이런 부는 쌓을 게 못 된다. 결과가 따른다! 어떤 사람은 리더가 되어서 이런 일이 자기에게 일어날까 걱정한다. 시험이 너무 커서 사람이 피하기 어렵고 대처하기도 어렵다고, 시험에 빠져들기 쉽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고 ‘이게 정상이지. 한자리 차지하고 이 정도도 누리지 않는 사람이 어딨어? 자리에는 왜 앉는 건데? 바로 이런 이유 아니겠냐고!’라고 생각한다. 이게 무슨 소리냐? 이는 바로 적그리스도의 소리이니 위험하다.
내가 사역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 그동안 내가 누군가의 물건을 뜯어낸 적이 있었느냐? 예를 들어 누군가의 예쁜 액세서리가 탐이 나서 그에게 “이 액세서리는 나한테 주세요. 금이나 은 같은 액세서리는 지위가 있는 사람이 차야지, 당신이 착용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지위가 없는 사람은 착용하지 마세요.”라고 말한 적이 있었느냐? 그런 적이 전혀 없었다. 형편이 넉넉한 형제자매가 무스탕 같은 것을 사 주어도 다 돌려보냈다. 옷이 안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이런 것들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고민이 되었다. ‘이 물건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사다 준 사람이 서운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물건들을 교회로 가져와 원칙에 따라 형제자매에게 나누어 주고, 귀중품은 원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싼값에 사게 하면 된다. 이는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서로에게 적절하다. 아무도 이 물건을 공짜로 가져갈 수는 없다. 필경 이것은 네게 사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물건 자체가 많지 않아 모두가 골고루 나누어 가질 수는 없고, 누구에게 주든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돈이 있는 사람, 사고 싶은 사람이 살 수밖에 없다. 분명 시세보다 저렴할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이런 혜택을 주는 것은 내게 그렇게 할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그 물건을 나한테 주었으면 그것은 내 것이니 내게 처분할 권한이 있다. 구매한 사람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의 체면을 생각해서 이렇게 처리한 것이니 네가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정당하다. 내게 물건을 사 주는 형제자매가 많은데 내가 사 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내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다. 그들의 마음이 그런 것이니 그 마음은 받겠지만, 그 많은 물건은 받을 수 없다.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건 현실적인 문제다. 이 말이 적절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내가 이렇게 처리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또 어떤 형제자매들이 내가 추위를 잘 타서 찬 음식을 못 먹는 것을 알고서 위장에 좋은 약을 사다 주었는데 그 약을 먹고 몸에 탈이 나서 몸이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아무거나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너희가 이해해야 한다. 어떤 형제자매는 산삼이나 홍삼, 보약 등 건강식품을 사다 주는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나한테 맞지 않기 때문이다. 형제자매가 사 준 물건이나 그것의 출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복용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좋은 것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효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것은 많아도 먹고 나서 탈이 나거나 알레르기가 생기면 자신에게 좋은 게 아닌 것이다. 그럼 어떻게 처리해야겠느냐? 몸에 맞는 사람이 먹는 게 가장 좋다. 그래서 누구든 내게 줄 무언가를 사려고 지갑을 열 때 “절대 사지 마라.”라는 이 말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체면 차리지 않고 직접 얘기하겠다. 알겠느냐? 너희가 가져온 물건을 보고 내가 필요 없다, 나한테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 역시 체면을 차리느라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고, 가식적이 아니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은 사실이고 진짜다. 내 말에서 절대 다른 의도를 찾지 마라. 필요 없다면 필요 없는 것이고, 쓸 수 없다면 쓸 수 없는 것이다. 절대 그렇게 마음 쓰지 말고 불필요한 지출을 하지 마라. 그리고 좋은 것은 마땅히 하나님에게 드려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마라. 내가 쓰는지 안 쓰는지 네가 아느냐? 내가 쓰지 않으면 괜한 돈을 들인 것이 되지 않느냐? 네가 진심을 담아 내게 사 준 것이라면, 분명히 말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사지 마라. 만약 모두에게 나누어 주라는 뜻으로 내게 사다 준 것이라면 그건 괜찮다. 내가 전달해 줄 수 있다. 이런 물건과 지위나 신분으로 받게 되는 물질적인 대우를 나는 이런 태도로 대한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이런 것들을 이렇게 대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그들은 틀림없이 본인에게 오는 것들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할 것이다. 누가 어떤 선물을 주든 다 괜찮은 것이다. 또 그들은 분명 갈취할 것이고 그러고 나서도 계속 탐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이며, 그들이 추구하는 지위를 통해 그들이 얻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과 관련해서 지난번과 오늘 나눈 교제를 통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을 한마디로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의 가장 큰 특징은 다음과 같다. 모든 긍정적인 사물과 정의롭고 진리에 부합하는 일, 사람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사물로 여겨지는 것을 그는 정죄하고 증오하며 싫어한다. 반면, 모든 부정적인 사물, 양심과 이성, 정의감이 있는 사람에게 정죄되고 멸시받는 사물은 공교롭게도 적그리스도가 좋아하고 좇고 애지중지하는 것들이다. 또 한 가지가 있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모든 긍정적인 사물과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은 증오하면서 하나님이 혐오하고 정죄하는 모든 사물은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이다. 이 사악함의 주된 특징이 무엇이냐? 그는 오로지 추하고 부정적인 사물만 좋아하고, 아름답고 긍정적이며 진리에 부합하는 모든 사물은 혐오하고 적대시한다. 이것을 사악함이라 한다. 알겠느냐? 오늘은 ‘적그리스도가 무엇을 좋아하는가’라는 주제에 관해 교제하면서 일부 사례도 짚어 보았다. 이 사례에는 전형적인 것도 있었고 그다지 전형적이지 않은 것도 있었는데 이런 확실한 증거들을 통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성 본질을 해석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너희가 해야 할 일은, 너희가 목격하거나 깨달은 사악한 사물과 긍정적인 사물에는 어떤 게 있는지, 적그리스도가 좋아하는 부정적인 사물과 그가 혐오하는 긍정적인 사물에는 각각 어떤 것이 있는지, 너희가 깨달았거나 목격하고 체험한 것에는 또 어떤 것이 있는지 묵상하고 교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패괴된 인류와 적그리스도는 모두 공통적인 성품과 본질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런 공통적인 것들은 심각성의 차이만 있을 뿐 성품의 본질은 똑같다. 걷고 있는 길, 추구하고 있는 목표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표출하는 수많은 패괴 성품의 본질은 공통된 것이다. 따라서 적그리스도의 다방면의 본질을 폭로하는 것은 패괴된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하나님의 선민이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분별할 줄 안다면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지 않고 그를 숭배하거나 따르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2019년 8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