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조 사악함과 음험함, 그리고 간사함(1)
참고 캐나다 적그리스도 사건을 처리하다
현재 캐나다 교회의 본분 이행 상황이 어떠냐? 너희는 적그리스도인 옌(嚴) 씨를 분별했느냐? 옌 씨의 언행에서 뭔가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느냐? (그땐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사역을 잘 점검하지 않고 다른 측면도 그다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다음 사람이 계속 말해 보아라. (저는 옌 씨를 만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2년 전에 그와 몇 번 예배를 드렸을 뿐 그 후론 못 만났습니다.) 옌 씨는 너희 교회의 리더인데 왜 팀마다 그를 만나지 못한 것이냐? 지금 그에게 문제가 생기니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냐, 아니면 정말 만나지 못한 것이냐? 옌 씨와 부적절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 그런 일이 있었느냐? (있었습니다.) 너희는 눈치챘느냐?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눈이 너무 먼 것이다. 다른 사람이 계속 얘기해 보아라. (저는 옌 씨를 자주 만났습니다. 그땐 그가 좀 교만하고 독선적이라서 자기를 추켜세우고 과시하길 좋아한다고만 생각했지 그에게 적그리스도의 본질이 있다는 것은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여자를 밝히는 건 모르고 있었느냐? (몰랐습니다. 그가 평소에 문란한 남녀 관계는 옳지 않다고 정당하고 엄숙하게 얘기하면서 그런 관계는 반드시 끊어야 한다고 자주 교제하곤 했기 때문에 남몰래 그러고 다닐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다음 사람이 계속 이야기해 보아라. (저는 옌 씨를 1년 동안 만났는데 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 잘 협력하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사역에 관해 소통할 때만 접촉하고 그 외에는 자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그다지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다지 분별하지 못했다? 보지 못했다는 것이냐, 아니면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이냐? 어째서 그다지 분별하지 못한 것이냐? 이런 결과는 어떻게 생긴 것이냐? (제가 옳지 않은 길을 가는 데다가 은사가 있는 사람을 숭배하고 앙망했기 때문입니다. 옌 씨는 말주변이 좋고 교제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부의 설교를 인용해서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교회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가 나서서 해결했거든요.) 그가 문제를 잘 해결한다면 왜 캐나다 교회의 영상팀에는 여태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산적해 있겠느냐? 그가 문제를 잘 해결한다는 네 말은 헛소리가 아니냐?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설교를 듣지 않느냐? 매주 예배도 드리지 않느냐? (예배를 드립니다.) 그럼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것과 관련된 내 설교는 들었느냐? (들었습니다.) 설교를 듣고 나서 옌 씨를 분별하게 되었느냐? 옌 씨가 저지른 일에서 문제점을 찾을 수 있겠느냐? 너희가 모두 적그리스도와 같은 곳에서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렸는데 이렇게 눈에 띄는 적그리스도도 간파하지 못하다니 이는 어떤 문제이냐? 옌 씨가 리더를 맡은 2년 5개월간 그와 가장 많이 접촉한 사람이 누구냐? 그가 어느 팀에 가장 오래 있었느냐? 그 팀에서 그를 분별한 사람이 몇 명이냐? 그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은 사람은 몇 명이냐? 그리고 그에게서 문제를 발견하고 일어나 보고한 사람은 누구냐? 이러한 것을 너희는 알고 있느냐? (아무도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나중엔 그가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옌 씨에게 꾀인 자매로부터 그녀의 내적 상태가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상황을 알아본 후에야 옌 씨의 이성 문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이 일을 폭로했는데, 그럼 다른 사람은 보고하였느냐?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을 교제하고 해부하였는데 너희가 옌 씨에게서 다른 문제는 찾지 못했느냐? (적그리스도의 분별에 대한 교제를 통해 옌 씨가 이간질에 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항상 제 앞에서 일부 형제자매를 판단하고, 저와 동역자 자매와의 관계를 이간질했습니다. 자매가 무골호인이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는 등 말을 들으니 그 자매에게 편견이 생겨 오랫동안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너희는 모두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무골호인이 되어 아무도 보고하거나 고발하지 않았다. 교회 사역을 그르칠지언정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또 그가 상부에서 안배한 사역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도 고발하지 않은 채 그 적그리스도를 비호하고 내버려두었다. 너희는 왜 고발하지 않았느냐? 남에게 미움을 사는 게 두려웠던 것이냐, 아니면 간파하지 못한 것이냐?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가끔 용건이 생겨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평소에 그와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사역이 바쁘다 하니 저희는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너는 그가 뒤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아볼 필요는 없어도 당장 눈앞에서 하는 일은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에는 행동이 있다. 또 그가 뒤에서만 일하는 것만은 아니니 눈앞에서 간파할 수도 있다. 그런데 너희가 간파하지 못한다면 눈이 먼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런 사람이 또 나타난다면 너희가 분별해 낼 수 있겠느냐? 옌 씨 같은 사람이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교제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무슨 근거로 그러지 못한다고 하느냐? (사역 성과를 보면 교회에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산적해 있고 사역의 진척 속도도 무척 느립니다. 또 제작된 영화 역시 하나님 집의 요구에 못 미칩니다.) 옌 씨에게 처분을 내리기 전에 너희는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아차렸느냐?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럼 설교를 듣고 무엇을 이해한 것이냐? 너희는 이렇게 심각한 문제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늘 핑계를 대며 이렇게 말한다. “그를 만나지도 못하는데 뒤에서 뭘 하는지 저희가 어떻게 아나요? 평신도인 저희가 리더인 그 사람과 늘 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러니 그를 간파하지 못하고 고발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는 거라고요.” 이게 너희의 생각 아니냐? (맞습니다.) 이는 어떤 성질이냐? (책임 회피입니다.) 그럼 앞으로 또 이런 사람이 나타나면 계속 그렇게 대하겠느냐? (그렇게 대하지 않겠습니다. 보이는 즉시 고발해야 합니다.) 내 눈에는 위험해 보인다. 많은 교회에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고발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캐나다 교회에는 없었다.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고발자가 없었다. 아무도 고발하지 않은 것이다. 최근 미국 영상팀이 투서를 보내왔는데 근거가 갖춰지고 조리 있게 작성되었고, 내용도 구체적이고 정확하여 기본적으로 모두 사실이었다. 이는 각 교회마다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사람이 얼마간 있다는 의미이니 좋은 일이다.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가 일정 기간 연기를 하고 있다가 일부 문제를 일으킬 때가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문제가 있다는 것만 알지 문제의 본질이나 진상은 간파하지 못하며,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는 분별력이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이럴 때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분별해야 한다. 여러 사람이 책임을 다할 수 있다면 함께 구하고 교제하며 상의하여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문제의 본질을 간파하여 거짓 리더인지 아닌지, 적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분별해 낼 수 있다.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거짓 리더는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으니 쉽게 알아내고 간파할 수 있으며, 적그리스도 역시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니 쉽게 알아내고 간파할 수 있다. 이는 모두 하나님 선민의 본분 이행을 교란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므로 그들을 고발하고 폭로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 사역을 그르치지 않게 된다.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고발하는 것은 하나님 선민이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도록 보장해 주는 핵심 사역이므로 모든 하나님 선민에게 책임이 있다.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라면 그게 누구든 하나님 선민은 폭로하고 보고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보고한 문제가 정말 사실이고, 정말 거짓 리더, 적그리스도에 관한 사안이라면 하나님 집에서는 즉각 원칙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적그리스도 옌 씨의 문제를 보고하였느냐? 보고하지 않았다. 너희는 그렇게 오랫동안 마귀에게 미혹되고 농락당하면서도 지각이 없는 것 같다. 주변에 그렇게 확실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오랜 시간 멋대로 설치는데도 그대로 내버려두다니 너희에게 정말 지각이 조금도 없다는 말이냐? 너희는 정상적으로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느냐? 성령 역사를 누릴 수 있겠느냐? 예배를 드릴 때마다 수확은 있느냐? 이런 일은 마땅히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적그리스도 옌 씨가 실제적인 사역을 하나도 하지 않아서 영상 사역에 차질을 빚었고 교회 사역도 엉망으로 만들었지만,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지만 너희는 한 명도 적그리스도를 폭로하거나 고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보아하니 너희는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고 더러운 귀신이나 악령과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너희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너희는 마귀와 섞여 지내면서도 그것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말씀을 읽을 필요도, 진리를 추구할 필요도 없고, 형식적으로만 본분을 이행하면서 구원받는 것이니, 진리 실행이니,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이니,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이니 등 이런 일은 전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저 육적으로 방종하게 굴고 멋대로 사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그 옛날 소돔 성 사람들처럼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먹고 마시며 놀기만 한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도 적그리스도를 폭로하거나 고발하지 않아 오랫동안 교회에 성령 역사가 없는데도 너희는 개의치 않는다. 너희는 이미 타락하여 불신파나 이방인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너희는 몇 년간 설교를 들었는데 아직까지 거짓 리더, 적그리스도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기꺼이 적그리스도와 함께 온종일 아무 생각 없이 빈둥대고자 한다. 너희의 이런 모습은 너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첫째, 너희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둘째, 너희는 본분에 대해 전혀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며 충성심은 말할 것도 없다. 교회 사역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겉으로는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이 형식만 취할 뿐이다. 적그리스도, 거짓 리더가 교회 사역을 어떻게 교란하고 망치든 너희는 지각하지 못하고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 적그리스도가 완전히 드러난 후에야 자신에게 분별력이 없음을 인정한다. 자세한 내막을 물어보면 “전 몰랐습니다. 제 책임이 아니에요!”라며 책임을 모조리 미룬다. 너희는 그러면 끝이라고, 책임을 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하나님 집에서 더는 추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너희는 하나님 집으로부터 그렇게 오랫동안 양육받았고, 또 적지 않은 설교를 들었는데 결과가 어떠냐? 교회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난 이렇게 심각한 문제가 터졌는데 너희는 지각조차 없었다. 이는 너희가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으며, 무감각하고 우둔한 데다가 육적으로 방종하게 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산 사람은 없고 온통 죽은 자뿐이라는 말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기껏해야 힘쓰는 자 몇 명뿐이다. 너희는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설교를 들었는데도 적그리스도와 섞여 함께 지내면서 전혀 폭로하거나 고발하지 않았으니 너희가 불신자와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와 한패다. 너희는 적그리스도와 사탄을 따르는 자이지 결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비록 적그리스도와 같은 악을 행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너희는 적그리스도를 따르고 비호했다. 너희가 적그리스도를 폭로하거나 고발하기는커녕 말끝마다 적그리스도를 별로 만난 적이 없어서 그가 저지른 일을 잘 모른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대놓고 사탄을 감싸는 것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가 그렇게 많은 악을 행하고 교회 사역을 마비시키며 교회 생활을 말도 못 하게 어지럽혔는데 적그리스도가 저지른 일을 몰랐다고 하니 너희의 말을 누가 믿겠느냐? 너희는 적그리스도가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망치는 것을 직접 보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폭로하거나 고발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고작 이런 책임조차 다하지 못하는 너희는 양심과 이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다!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고발하는 여러 교회의 투서를 너희는 본 적 없느냐? 오직 캐나다 교회만 썩어 있다. 상부에 연락하여 상황을 보고하는 법이 없으니 산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온통 죽은 자뿐이다! 이런 교회는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끝장이고, 전부 도태될 것이다.
오늘은 2019년 7월 10일이다. 오늘부터 캐나다 영상팀은 공식적으로 1년간 격리 반성에 들어간다. 영상팀에 모두 몇 명이 있느냐? (하나님, 현재 영상팀은 34명입니다.) 리더는 몇 명이냐? (두 명입니다.) 알겠다. 그럼 너희 둘이 일어나 보아라. 너희 영상팀은 7월 10일, 이날을 기억하여라. 오늘부터 캐나다 영상팀은 공식적으로 1년간 B팀으로 분류한다. 만약 너희가 회개한다면 다시 보통 교회로 회복되고, 1년 동안 너희 모습을 볼 것이다. 만약 너희가 계속 본분을 이행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너희의 교회 생활을 회복시켜 주겠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동안 너희의 본분은 바뀌지 않는다. 제명되거나 출교되기 싫은 자가 있다면 격리 반성 조치를 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만족하느냐? (네.) 왜 너희에게 1년의 시간을 주겠느냐? (저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너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1년 후에도 여전히 그 꼴이고 사역 효율도 별로 좋지 않으며 본분 이행도 지지부진하여 예전처럼 엉망이라면, 또 업무나 생명 진입 측면에서도 아무런 발전이 없고 성과 하나 없다면 너희는 1년씩 계속 격리될 것이다. 그 기간은 1년, 1년 미뤄질 것이다. 너희가 성장했을 때, 즉 체험 간증문을 쓸 수 있고 너희의 모습과 인식, 사역 성과가 확실히 합격점에 이르렀을 때 교회 생활을 회복할 것이다. 캐나다 교회의 다른 팀은 계속 교회 생활을 유지해도 된다. 앞으로 너희의 본분 이행 태도를 보아 너희가 여전히 그 꼴이라면 캐나다 교회의 모든 사람이 격리될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 처분 결과가 어떠하냐? (좋습니다.) 진정으로 좋은 것이냐, 아니면 좋은 척하는 것이냐? (진정으로 좋습니다.) 좋다. 너희가 매우 만족스럽다 하니 오늘 이 설교는 너희가 듣는 마지막 설교가 될 것이다. 나의 원래 뜻에 따른다면 너희를 완전히 격리하고 도태시켜 설교를 들을 수 없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설교를 헛들어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는데 더 들어서 무엇 하겠느냐? 너희를 보니 가슴이 아프다! 모두가 하나같이 무감각하고 우둔한 모습이구나.
예전에 캐나다 교회의 한 자매와 대화하면서 그곳의 시시덕거리며 아주 제멋대로인 현장 상황을 들었다. 마치 시장 바닥에 있는 것처럼 타이핑이 어려울 정도로 시끄럽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반감이 들어서 캐나다 교회 사람들은 경건하지 않고 모두 불신파처럼 제멋대로 굴며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중에 그들과 영화에 관해 교제할 일이 있었는데 그들은 무척 무감각했다. 무엇을 가리켜 무감각하다고 하겠느냐? 그들과 이야기하는데 반응조차 없고 무표정이었다. 마치 악령이 들린 것처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면서 어떤 일에도 반응이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역겹지 않겠느냐? 그들의 정신 상태를 보아 모든 팀이 별 볼 일 없고 엉망진창이었다. 특히 영상팀에 음란한 일이 발생했는데도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그들의 말이 정확하겠느냐? 이는 사람을 기만하는 것 아니냐? 사실, 리더 일꾼은 적그리스도 옌 씨 사건을 이미 처리했다. 하지만 사안이 너무 심각하고 역겨웠기 때문에 내가 이 일에 직접 관여해야만 했다. 내가 왜 관여해야 했겠느냐? 그들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충 몇 마디 말로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그 어떤 일도 확실하게 설명할 수 없다. 너희는 지금 어느 정도까지 무감각하겠느냐? 그야말로 철면피라 전혀 지각하지 못한다. 리더 일꾼이 책망과 훈계를 받았지만 그 후에도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그래서 내가 관여하여 너희의 ‘대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을 통해 너희는 어떤 교훈을 얻었느냐? 속이 씁쓸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이런 처분이 공평하지 않으냐? (공평합니다.) 어디가 공평하냐? 네게 사실을 알려 주겠다. 네가 바른길을 가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치를 들고서 이방인처럼 제멋대로 못된 짓을 하며 살아간다면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어째서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하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어디에 있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걷는 길, 인생관, 인생의 방향과 목표가 완전히 바뀌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세상 사람, 마귀와 완전히 달라지는 데 있다. 그들과는 완전히 상반된 길을 가는 것이다. 상반된 방향이란 무엇이냐? 너는 좋은 사람,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진리에 공을 들이는 것에 집중해야만 변화할 수 있다. 만약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실행하지도 않는다면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게 된다. 네 믿음은 빈 껍데기, 즉 남을 속이는 마귀적인 말이자 빈말일 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을 잘 묵상해 보아라. 이 말은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진리인데 너희가 묵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만약 네가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단, 저는 해야 할 일은 하고 제 생각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 인성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건 저와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너와 상관없다면 하나님은 뭐 하러 믿는단 말이냐? 왜 하나님을 믿으려 하느냐? 어떻게 믿으려는 것이냐? 하나님을 믿고 어떤 사람이 되려 하느냐? 이런 것이 너와 상관없다면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네가 늘 자기 관념과 상상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자기 취향대로 일하며 제멋대로 굴고 육적으로 방종하게 군다면 네 사상 관점, 행동은 진리와 상관없게 되고 하나님의 요구와 무관해진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의미가 없어질 테니 더는 믿을 필요가 없다. 설령 믿는다 해도 헛수고일 것이고, 하나님도 너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방금 다룬 내용은 무척 무거운 주제였다. 이 일을 처리하면서 다들 괴로웠을 것이고 조금은 의외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일은 앞으로 또 일어날 수 있다. 이번엔 이렇게 처리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한다면 이렇게 처리하지 않고 좀 더 엄하게 처벌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느냐? (합당합니다.)
이어서 좀 더 가벼운 주제를 교제하겠다. 너희는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느냐? (좋아합니다.) 그럼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어떤 이야기가 좋겠느냐? 어떤 주제를 듣고 싶으냐? 평서*를 듣는 걸 좋아하느냐, 아니면 시사, 정치 평론이나 역사를 듣는 걸 좋아하느냐?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은 얘기해 봤자 쓸모가 없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 사람의 성품 그리고 일상에서의 여러 내적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참고
밑천을 따지다
—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다
다섯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중 다쉐(大雪)라는 사람이 말했다. “전 대학을 다니던 몇 해 동안의 캠퍼스 생활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캠퍼스 곳곳에 여러 식물이 심겨 있었고 봄, 가을이 되면 풍경이 참 예뻐서 마음이 상쾌했거든요. 더군다나 그땐 젊다 보니 꿈도 많았고, 순수해서 스트레스도 별로 없었어요. 3년 대학 생활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어요. 10년, 20년 전의 캠퍼스 생활로 돌아간다면 평생 가장 아름다운 일이 될 거예요….” 여기까지가 다쉐라는 첫 번째 사람이다. 다쉐가 무슨 뜻이냐? 대학생이라는 뜻으로, 다쉐라는 이름은 이렇게 지어진 것이다. 다쉐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추억과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곧이어 샤오옌(小研)이 입을 열었다. “3년제도 대학인가요? 그건 전문대죠. 대학 본과는 보통 4년제에요. 그래야 대학이라고 할 수 있죠. 제가 4년제 대학을 다녔는데 그 기간 취업 시장에 대학생이 널리고 널려서 취업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래서 졸업하기 전에 대학원에 진학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직까진 대학원생이 그리 많지 않아서 취업하기 수월하거든요. 예상대로 대학원 졸업 후 괜찮은 보수에 괜찮은 직장을 구해 윤택하게 살고 있답니다. 이게 바로 대학원 진학의 결과인 거죠.” 이 말을 듣고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느냐? 다쉐는 전문대 출신이고, 샤오옌은 대학원 출신의 고소득자로, 사회에서 지위와 명예, 위신을 가진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샤오옌이 신나서 얘기하고 있는데 라오가오(老高)가 이어서 말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사회 경험이 없으면 아무리 석박사라도 대학 때 좋은 전공을 택하는 것만 못해. 내가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 시장 조사를 해 보니 크고 작은 모든 기업에는 경영 인재가 필요하더군. 그래서 대학에 진학해 시장 경영을 전공으로 선택했지. 졸업하고는 CEO라고도 하는 기업 경영자가 됐어. 내가 졸업할 때가 마침 크고 작은 여러 기업들이 나 같은 인재를 필요로 하던 때였고, 시장이 워낙 커서 한 번에 채용되었지. 여러 회사들이 앞다투어 나를 원해서 결국 제일 좋은 외국 기업으로 골라 들어갔고, 곧장 사장으로 취임했어. 고소득이라 5년 안에 차도 뽑았다고. 어때, 똑똑하지? 이런 걸 바로 안목이라고 하는 거야!” 라오가오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앞의 두 사람에게 오기가 생겼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고위 임원에 식견도 넓으니 우리보다 밑천이 훨씬 나아. 오기가 생기지만 군말 없이 인정해야지.’ 라오가오는 말을 마치고 득의양양해서 이 청년들이 자기만큼 노련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좋아하고 있는데 곧이어 샤오관(小管)이라는 사람이 말했다. 샤오관은 앞의 세 사람의 이야기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느릿느릿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했다. “요즘 널린 게 대학생인데 그깟 대학 누가 못 가나요? 대학만으로는 턱도 없어요. 장사도 마찬가지죠. 기업의 고위 임원이라고 해 봤자 철밥통도 아녀서 안정적이지 않아요. 중요한 건 철밥통입니다! 그럼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죠!” 이 말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철밥통이라고요? 요새 누가 그런 걸 따져요. 그것도 옛말이라고요!”라고 하자 샤오관이 답했다. “옛말? 훗, 안목이랑 식견이 없으시네. 그러니 옛말 타령이나 하지! 철밥통이 소득은 좀 적을지 몰라도 삶이 안정적이고 권력이 있어서 제힘이 닿지 않는 곳이 거의 없죠. 제가 공무원 준비할 때만 해도 아직 젊은데 왜 정부 기관에 들어가려 하느냐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결국, 공무원에 합격하고 나니 그 이후론 친척이고 친구고 취업이나 소송과 관련해서는 다 저를 찾아요. 어떻습니까? 대단한 권력이죠? 소득은 적어도 관사에, 관용차에 당신들보다 처우는 훨씬 좋죠. 이외에도 외식을 하거나 장을 본 비용까지 청구할 수 있고 차비나 항공비는 무료라고요. 당신들은 안 되죠. 밥벌이가 든든하지 않은 당신들보단 제가 훨씬 낫죠!” 그 말을 듣고 나서 모두 불편해하며 말했다. “대우는 좋지만 평판은 좋지 않죠. 어딜 가서도 등쳐 먹고 갑질하잖아요.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게 아니라 국민을 못살게 굴고 나쁜 짓만 일삼죠.” “실속이 있는데 평판이 좀 나쁘면 어때요?” 모두 갑론을박하던 차에 마지막 한 사람이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나 말했다. “보세요. 당신들은 대학생에, 대학원생에, 기업 고위 임원에 공직자인데 저는 여러분만큼 경험이 있지는 않아요. 저는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한마디 해야겠어요. 저희 ‘어머니’ 찾아갔을 때는 말이죠….” 이 말을 듣고 모두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머니라뇨? 우리는 공무원 시험 준비해서 공무원, 대학원 준비해서 대학원생, 기업 고위 임원에 올라서 CEO인데, 어머니가 왜 나오나요? 그게 무슨 뜻이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들이 대학이나 대학원을 나오고, 기업 고위 임원, 공무원이었던 것은 되고, 제가 모교를 찾아가는 건 안 된다는 건가요?” 얼마나 초조했는지 보아라. 가방끈이 짧은 이 사람도 허영심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했다. “모교를 찾아간다고 하면 다 알죠. ‘어머니 학교’가 아니라 모교라고 했으면 됐잖아요.” 그러고는 다들 모교 때라는 게 대체 몇 학년 때인지 물었다. 고등학교인지, 기술학교인지 아니면 대학인지 대학원인지 말이다. 그는 대답했다. “저는 대학이나 대학원을 다닌 적도 없고, 공무원을 준비해 본 적도 없어요. 초등학교 다닌 걸로는 안 되나요? 제 맘이죠!” 말을 마치고는 스스로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기 약점이 드러나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원래는 아닌 척 연기했다. 다른 사람과 만날 때는 자신의 학력을 전혀 밝히지 않았는데 이번에 들통난 것이다. 더는 낯을 들 수 없어 문을 박차고 자리를 뛰쳐나갔다. 그가 나가자 남은 네 명은 영문을 몰라 약속이나 한 듯 말했다. “초졸이라면서요. 왜 자리를 피하시나요? 초졸이라도 이렇게 대단하신데요!”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것이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이 이야기엔 다섯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이 무슨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느냐? (학력입니다.) 학력이란 사람들에게 과연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회적 지위입니다.) 학력이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이런 사회적 지위를 이야기하려 하느냐? 왜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밝혀 이야깃거리로 삼겠느냐? 그들이 뭘 하고 있는 것이냐? (자신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이야기의 제목을 뭐라고 해야겠느냐? (학력 싸움입니다.) 제목을 ‘학력 싸움’이라고 하면 너무 노골적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지위 자랑은 어떻겠습니까?) 너무 직접적이다. 함축적이지 않고 그다지 심각하지도 않다. 만약 주 제목을 ‘밑천을 따지다’로 하고 부제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다’로 한다면 어떻겠느냐? 풍자적인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밑천을 따지다’는 모든 사람이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 등 자신의 밑천을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그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다’는 무슨 뜻이겠느냐? (남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 그 안에는 ‘대학원 다니는 게 대수야? 나보다 학력이 높아서 어쩌라고?’라는 성품이 있다. 아무도 남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밑천을 따지는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이런 대화를 자주 듣지 않느냐? 자기 집이 잘산다고 과시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 가족의 내력이 대단하다고 과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황제나 유명 인사가 자기 성씨 출신이라고 과시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출신 대학을 언급하며 얼마나 찬란했는지 이야기한다. 심지어 뷰티샵에서 마사지를 하는 여종업원조차 이렇게 말한다. “저는 유명 마사지사에게서 마사지를 배워서 전문가의 지도와 자기 점검을 통해 결국 일급 프로 마사지사에 합격했어요. 2000년대 그 몇 해는 제겐 가장 찬란한 시기였죠….” 이 ‘찬란한’이라는 단어는 잘못 골랐다. 그렇지 않으냐? 서비스업종의 마사지사가 ‘가장 찬란한 시기’라는 말을 하다니 정말이지 허풍이 심하다. 이 주제는 현실 생활에서 사람들에게서 자주 듣는 대화, 자주 보이는 행위, 사람이 표출하는 성품을 주로 다룬다. 사람은 왜 이런 밑천을 이야기하려 하느냐? 여기에 어떤 성품이나 동기가 있느냐?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명예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명예로운 일인지는 논할 것도 없다. 이런 일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에게 유익이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너희도 이야기하느냐? (그렇습니다.) 아무 유익이 없는 걸 알면서도 왜 이야기하려 하느냐? 사람은 왜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길 좋아하느냐? (이런 것은 사람이 과시하는 밑천이기 때문입니다.) 과시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아무도 평범한 보통 사람이 되길 원치 않는다. 초등학생조차 ‘어머니’한테 찾아가 보고 싶다고 난리법석이니 모두가 이런 문학적인 말로 남을 속이고 무디게 해서 우러러보게 만든다. 남들이 우러러보게 만드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고 사람들 가운데 한자리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으며, 머리에는 후광이, 말에는 권위가 생겨서 다른 사람에게 추앙받고, 명성이 생기는 것이다. 만약 이런 것을 던져 버리고 평범한 보통 사람이 되려면 무엇을 갖추어야겠느냐? 먼저, 올바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 올바른 관점은 어디서 비롯되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읽어서 사물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나님 뜻에 합하는 것인지,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하는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관점이다. 그렇다면 보통의 평범한 정상인으로서 이러한 사회적 지위, 사회적 밑천 혹은 출신 등 다양한 측면을 어떻게 대해야 가장 적절하고 올바른 관점이겠느냐? 너희가 알고 있느냐? 만약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 자기가 많은 진리를 깨달았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라고, 또 하나님과 본분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사회와 무리 속에서 사람이 갖는 지위와 자기 신분을 중요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몹시 애지중지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밑천과 대단한 이력, 자기 신분을 늘 과시한다면 이 사람이 과연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겠느냐?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럼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아니다. 밑천을 따지는 것이 진리를 깨닫고 사랑하는지 여부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 어째서 신분을 애지중지하고 밑천을 따지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거나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그런 사회적 지위와 개인의 밑천, 신분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사회적 지위에는 무엇이 있느냐? 출신 가정, 학력, 명성, 사회에서 쌓은 업적, 개인의 재능 그리고 민족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을 어떻게 대해야 네가 진리를 깨달은 사람임을 입증할 수 있겠느냐?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이런 측면에서 너희는 이론적으로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을 테니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해 보아라. ‘아, 아직 충분히 생각해 보지 않았으니 대답하면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지 마라. 충분히 생각해 보지 않았어도 일단 있는 그대로 말해 보아라. 충분히 생각하고 나서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글쓰기라고 한다. 지금은 네게 글을 쓰라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일단 너희가 이론적인 측면에서 말해 보아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사람의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보지 않으시고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는지,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합격한 본분 이행을 하는지를 주로 보신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사회적 지위나 학력은 좋지만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걷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악을 멀리하지도 않는 사람은 결국 그렇게 도태될 것이고 하나님 집에 굳게 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학력, 지위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느냐는 것입니다.) 아주 좋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왜 가장 기본적이라고 하겠느냐? 통상적으로 모두가 이야기하는 것이 보통 이런 주제와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다르게 인식한 사람은 없느냐? 보충해서 말해 보아라. (만약 사람이 진리를 추구한다면 명예와 이익, 지위를 추구하는 것은 실제로 사람에게 속박이자 족쇄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추구하면 할수록 공허함을 느끼고 명예와 이익, 지위가 사람에게 주는 위해와 고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인식하고 나서 사람이 그런 것들을 밑천으로 삼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가엽게 느껴질 것입니다.)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깨달은 사람은 이런 사회적 지위, 명예를 대할 때 하나님 말씀에 따라 판단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고 어떻게 요구하시는지,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길 바라시는지, 사람이 이런 것을 추구하여 결국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결과와 일치하는지를 볼 것입니다.) 너희가 말한 것도 사실에 가깝지만 진리와 큰 관계가 있느냐? 너희 스스로 평가할 수 있겠느냐? 많은 사람이 조금 감성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만약 너희에게 설교를 시킨다면 그것은 권면의 설교가 될 것이다. 어째서 권면의 설교라고 하겠느냐? 권면의 설교는 사람에게 권하는 일련의 말이지 실제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들어 보면 전부 맞는 말이고 일리가 있어 사람의 인정 도리, 이성적 요건에 부합하지만 진리와 크게 관계는 없다. 단지 사람의 얕고 감성적인 인식에 불과한 것이다. 네가 만약 다른 사람과 이런 말을 교제한다면 사람의 문제나 고충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권면의 설교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의 고충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기에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지식과 명예, 지위를 숭배할 것이며, 또한 지식과 명예, 지위의 통제와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너희는 사람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 출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묵상해 보아라. 어떤 태도를 가져야 옳겠느냐? 먼저 하나님 말씀에서 하나님이 이 일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진리를 깨달아 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 하나님은 한 사람의 출신 가정이나 사회적 지위 그리고 후천적인 학력과 그가 사회에서 쌓은 부를 어떻게 바라보겠느냐? 네가 만약 무슨 일이든 하나님 말씀에 따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일을 바라보는 네 관점은 분명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 거리가 멀지 않다면 작은 오차일 뿐이니 문제 되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위배된다면 진리에 부합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이 봤을 때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엇을 얼마나 주는지는 하나님이 정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회에서 어떤 지위를 갖는지도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지 절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힘들고 가난하게 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구원의 희망이 없겠느냐? 그가 신분이 낮은 사회 하층민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지 않겠느냐? 그의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설마 하나님 눈에도 그의 지위가 낮겠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것은 무엇과 관련되느냐? 그가 걷는 길, 그의 추구, 진리를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 관련되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고 가정 형편이 궁핍하며 학력도 좋지 않은 한 사람이 착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보기에 그런 사람의 신분이 높겠느냐, 아니면 낮겠느냐? 귀하겠느냐, 아니면 천하겠느냐? 귀하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한 사람의 신분의 높고 낮음, 귀천은 무엇에 달려 있느냐?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보는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본다면 너는 값지고 귀하므로 귀중한 그릇이겠지만, 하나님이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심으로 하나님에게 헌신하지 않는 모습을 본다면 너는 쓸모없고 귀하지 않을 테니 비천한 그릇일 것이다. 네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깨닫지 못하면 네 신분은 높아질 수 없다. 설령 너를 옹호하고 추대하며 숭상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너는 천한 존재일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째서 사람을 이렇게 보겠느냐? 사회적 지위가 높고 많은 사람에게 추앙받으며 심지어 높은 위엄을 자랑하는 이토록 ‘존귀’한 사람이 어째서 하나님의 눈에는 비천해 보이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보는 관점과 사람이 사람을 보는 관점은 어째서 정반대인 것이냐?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사람과 대립하는 것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자 공의이지만 사람은 패괴된 인간이라 진리나 공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판단할 땐 하나님의 기준이 있다. 하나님의 그 판단 기준이 바로 진리이다. 이렇게 말하면 다소 추상적일 수 있으니 다르게 말해 보자.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하나님과 진리,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를 바탕으로 한다. 이렇게 말하면 추상적이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학력도 좋고 교육 수준이 높고 교양 있으며 가족 내력도 휘황찬란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 사람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반감과 혐오, 증오를 품는다. 그는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나 하나님과 관련된 주제, 하나님의 사역이라면 치를 떨면서 눈을 매섭게 뜨고 심지어는 손찌검까지 하려 한다. 하나님이나 진리와 관련된 주제를 언급하기만 하면 반감을 품고 적대시하며 야만성을 한껏 드러낸다. 그럼 이런 사람이 가치 있겠느냐? 하나님 눈에 그의 학력, 소위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명성의 가치가 얼마나 되겠느냐? 한 푼의 가치도 없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어떻게 보겠느냐? 이런 사람의 성질을 어떻게 규정하겠느냐? 이런 사람은 마귀 사탄이고 가장 쓸모없는 천박한 자이다. 지금 볼 때 한 사람의 신분의 귀천을 정의하는 근거가 무엇이냐? (하나님과 진리,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렇다. 먼저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태도를 알고 사람을 규정하는 하나님의 원칙과 기준을 알고 나서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원칙과 기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해야 가장 정확하고 가장 적절하며 가장 공평하다. 이제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가 생겼으니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예컨대, 학력이 무척 좋아서 어딜 가도 환영받고 모든 사람의 평판이 좋으며 사람들에게 누구보다 전망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눈에도 반드시 귀하게 여겨지겠느냐?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어떻게 판단해야겠느냐? 한 사람의 귀천은 사회적 지위나 학력에 근거하지 않고, 더욱이 민족에 근거하지도 않는다. 국적에 근거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럼 무엇을 근거로 해야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를 근거로 해야 합니다.) 그렇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미국으로 온 너희가 어느 날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고 해서 너희의 신분이나 지위가 달라졌느냐?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달라지지 않았다. 너는 여전히 너다. 네가 하나님을 믿고도 진리를 얻지 못한다면 너는 여전히 멸망의 부류다. 어떤 천박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지도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으며 세속만 좇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뒤 “당신 중국인들”, “중국에서 온 당신들”이라고 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이 고귀하냐, 아니면 비천하냐? (비천합니다.) 너무나 비천하다! 미국 국적을 얻자마자 고귀해진 것처럼 구는데 너무 천박하지 않으냐? 너무나도 천박하다. 어떤 사람이 평정심을 가지고 명예와 이익, 사회적 지위, 부, 학력을 대할 수 있다고 하자. 물론 이 평정심이란 네가 이 일을 이미 경험해 봐서 무감각해졌다는 말이 아니라 네게 판단 기준이 생겨서 이런 일을 네 생명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지 않는다는 말이다. 네가 이런 일을 판단하고 바라보는 기준과 원칙 그리고 네 가치관이 이미 바뀌어 그 일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고, 평정심을 가지고 그 일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증명하느냐? 네가 이른바 사회적 지위, 사람의 신분 등 이런 외적인 것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너희가 아마 이르지 못하겠지만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으면 이런 일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어떤 사람이 부유한 형제자매를 만났는데 명품으로 치장한 모습과 귀티 나는 외모를 보고는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몰라 저자세로 굽실거리며 아부하고 비위를 맞추며 온갖 추태를 다 부린다면 이는 천박하게 구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경우 그를 지배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 많은 여자를 만나면 누님이라 부르고, 돈 많은 남자를 만나면 형님이라 부르며 늘 들러붙어서 자신을 추천하고 싶어 한다. 반면 가난하거나 보잘것없는 시골 출신의 고학력도 없는 사람을 보면 깔보고 상대하기 싫어하며 태도가 달라진다. 교회에 이런 분위기가 있지 않으냐? 있다. 너희는 이 일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 중에 일부는 이미 이런 모습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고, 누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모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으니 사회적 풍조가 심각하다. 이런 사람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며 진리 실제가 하나도 없다. 너희 중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이 상당수 있다. 만약 변화하지 않는다면 결국 도태되고 말 것이다. 이런 잘못된 관점은 참도를 받아들이는 데 지장을 주진 않지만 사람의 생명 진입이나 본분 이행에 지장을 줄 것이다. 만약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라면 교회에서 교란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면 이런 일을 판단하는 원칙과 기준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측면이 있다. 즉,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학력이 어떻든, 어떤 가정 배경을 가졌든 네가 인정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바로 네 학력, 출신 가정이 네 인품을 바꾸거나 네 성품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이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고 후천적으로 어떤 교육을 받든, 그 교육 수준이 높든 낮든, 그리고 어떤 사회적 배경에서 태어나든,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그의 패괴 성품은 다른 모든 사람과 같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다. 이는 불가피한 것이다. 네 사회적 지위나 신분은 네가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인류 중 하나라는 사실을 바꿀 수 없고, 네가 패괴 성품을 지닌, 하나님을 적대하는 패괴된 인류라는 사실 역시 바꿀 수 없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이는 바로 네가 아무리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아무리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을지라도 네겐 패괴 성품이 있고, 네가 귀하든 천하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지위가 높든 낮든 너도 똑같은 패괴된 인류라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나면 모두가 평등하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고 공의롭게 대한다. 이것은 사람이 가져야 할 한 측면의 인식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인류 중 가장 고귀한 민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아 패괴 성품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이게 말이 되느냐? 인류사를 통틀어 이런 사실이 있느냐? (없습니다.) 없다. 사실 욥이나 아브라함, 여러 선지자와 옛 성도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모두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 속에 불가피하게 살아왔다. 그것은 모든 인류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탄의 패괴를 거쳤다는 사실이다. 사탄은 사람을 패괴시킬 때 네 교육 수준이 높든 낮든, 네 가족사가 어떠하든, 네 성씨가 무엇이고 족보의 규모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다. 결국, 결과는 하나이다. 즉, 이 인류 가운데 사는 한 너는 사탄의 패괴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게 사탄의 패괴 성품이 있고 네가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살고 있다는 이 사실은 네 신분, 네 학력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가져야 할 인식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이를 깨달은 후에 앞으로 또 자신의 은사나 밑천을 과시하는 사람이 있거나 너희 가운데 ‘뛰어난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따라 대하겠습니다.) 그렇다. 그럼 하나님 말씀에 따라 어떻게 대하겠느냐? 걸핏하면 “학력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근데 자랑해서 뭐 하시려고요? 이렇게 밑천 따지시면 본분은 제대로 이행하시겠어요? 학력이 아무리 높아 봤자 사탄에게 패괴된 건 아닌가요?”라며 그를 얕잡아 보고 비꼬는 게 좋겠느냐? 이는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는 정상적인 인성을 갖춘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대해야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그를 우러러보지 말고 깔보지도 마라. 이게 절충안이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절충이 옳으냐? 옳지 않다. 올바로 대해야 한다. 네가 깨달은 진리로 도울 수 있다면 도와주고, 도와줄 수 없다면 이렇게 하여라. 네가 리더로서 그에게 어떤 본분 이행이 적합해 보인다면 그 본분을 이행하게 하여라. 그가 고학력자라고 해서 무시하지 마라. ‘흥, 학력 높은 게 대수야? 진리는 깨달았대? 내가 학력은 낮아도 리더를 맡고 있다고. 자질이 훌륭한 거지. 네가 나보다 못하니 깔보고 모욕을 주는 거야!’ 이런 걸 악덕하고 인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올바로 대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진리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남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를 우러러보지 않고 앙망하지 않으며, 그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며 그 앞에서 굽실대지도 마라. 또 그에게 아첨하지도 말고 그를 짓밟지도, 깔보지도 마라. 그도 자기 신분이 매우 높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과시하지도 않았다. 그가 과시할 것을 지레 걱정하여 늘 짓밟기만 한다면 그것이 합당하겠느냐? 합당하지 않다. 이것을 악덕하고 인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흑백논리처럼 너무 극단적이다. 사람을 올바르고 공평하게 대하는 것, 이것이 원칙이다. 이 원칙은 듣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행하기 쉽지만은 않다.
일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어떤 리더에게 같이 있으면 사역을 논의하기 편할 테니 관련된 팀장과 팀원을 데려가도 좋다고 했다. 들으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어려운 말이 아니었다. 결국, 그가 데려간 몇몇 관계자들은 ‘내력’이 대단했다. 차를 따라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발을 씻겨 주고 등을 밀어 주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아첨꾼들이었다. 이 리더가 어느 정도로 역겨웠겠느냐? 전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 하나가 있었는데 날마다 그에게 아부를 떨고 아첨하며 그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시중을 들었다. 그는 전염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이렇게 아첨을 받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 했다. 결국, 전염병을 앓던 그 사람이 그곳에서 발병하는 바람에 그 리더 역시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니 진리를 깨달았든 그렇지 않았든 절대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야심과 욕망에 따라 행동하지 말며, 요행 심리를 갖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고 온 땅을 감찰하기 때문이다. 온 땅에는 무엇이 포함되겠느냐? 물질적인 것은 물론 비물질적인 것까지 포함된다. 머리를 굴려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권병과 전능을 판단하지 마라. 사람은 피조물이라 그 생명이 미미하기 짝이 없는데 어찌 창조주의 위대함을 판단할 수 있겠느냐? 어찌 만유를 창조하고 모든 것을 주재하는 창조주의 전능과 지혜를 판단할 수 있겠느냐? 무지한 짓이나 악한 일은 절대로 하지 마라. 악을 행하면 언젠가는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드러내는 날엔 너는 끝까지 책임을 물을 것이고, 그때 가서 너는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처신할 때는 자신을 정확히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어떤 일에서 하나님이 아직 너를 드러내기 전에 너 스스로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보고 먼저 자기를 반성하고 파헤쳐서 문제를 찾은 다음 진리를 구해 해결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이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지 마라. 일단 하나님이 너를 드러내면 너는 수동적이 되지 않겠느냐? 그때는 이미 과오가 형성된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감찰하기 시작해서부터 네가 드러나기까지 네 신분, 너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를 감찰해서부터 네가 드러날 때까지 그 기간에 네게 기회를 주고 희망을 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희망을 건 순간부터 마지막에 그 희망이 허사가 될 때까지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겠느냐? 그 격차가 너무 크다. 이는 네게 어떤 결과를 야기하겠느냐? 가벼우면 너란 사람은 하나님이 혐오하는 대상이 되어 한쪽에 방치될 것이다. 방치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남겨서 쓰고 지켜보겠다는 말이다. 그럼 심한 경우엔 어떤 결과가 기다리겠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자는 화근이다. 봉사할 자격조차 없다. 이자는 절대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에게 이런 생각이 들면 네 결말은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그땐 네가 이마에 피가 나도록 절해도 소용없다. 하나님은 이미 네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지만 네가 계속 회개하지 않고 지나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존재하고 어떤 패괴 표출이 있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자기를 반성하고 인식하거나 형제자매에게 조언을 구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너 스스로 미리 문제를 찾아 해결한다면 이는 자기반성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성과이다. 이것이 최선이다. 절대 하나님에게 드러나 도태되고 나서야 후회해서는 안 된다. 그때는 후회해도 늦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드러내면 그때 하나님은 크게 노하겠느냐, 아니면 널리 긍휼을 베풀겠느냐? 이는 미지수라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다. 내가 이를 보증해 주지 않을 것이니 네 길은 너 스스로 가거라. 내 책임이 무엇인지 너희는 아느냐? 내가 할 말, 내가 해야 할 말을 빠짐없이 너희에게 전부 알려 주는 것이다. 문자의 방식이든, 이야기하는 방식이든, 아니면 작은 프로그램을 만들든 어쨌든 여러 방식을 통해 하나님이 너희에게 깨닫게 하고자 하는 진리를 전하고 이와 함께 내가 본 문제를 알려 주는 것이다. 너희에게 경계하고 지적하고 권면하며, 공급하고 도움을 주고 너희를 붙들어 주며, 때로는 엄한 말도 하는 것이 내 책임이다. 남은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는 너 스스로의 일이다. 너는 내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내가 네게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신경 쓰지도 마라. 이런 건 모두 부질없다. 앞으로 네 결말이 어떨지는 나와 상관없다. 오로지 너 자신의 추구와 관계된다. 오늘 나는 흉금을 털어놓고 명확하고 분명하게 얘기했다. 내가 말한 한 마디 한 마디, 내가 할 필요가 있는 말, 내가 해야 하는 말, 내가 했던 말을 너희는 잘 듣고 알아들었느냐? 여기에 추상적이거나 너희가 알아듣지 못할 말은 없다. 너희가 모두 알아들었다면 나는 책임을 다한 것이다. 너희는 내가 말을 마친 후에도 너희를 지켜보면서 몸소 끝까지 책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희는 모두 하나님을 오래 믿었고 몇 살 먹은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이다. 너희가 하는 일은 리더가 책임지지 내가 책임지지 않는다. 내겐 내 사역의 범위가 있고 내 직책의 범위가 있다. 나는 너희를 따라다니면서 재촉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내겐 그럴 의무가 없다. 너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뒤에서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떤 길을 가는지는 나와 무관하다. 왜 나와 무관하다고 하겠느냐? 너희가 하나님 집에서 분수에 맞게 본분을 이행하면 하나님 집에서는 너희를 끝까지 책임진다. 너희가 본분을 이행하고 대가를 치르며 진리를 받아들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고자 하면 하나님 집에서 너희를 이끌고 너희에게 공급하며 먹여 살린다. 너희가 만약 본분을 이행하기 싫어하고 밖에 나가 일하여 돈을 벌고자 하면 하나님 집에서는 문을 활짝 열어 환송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가 하나님 집에서 교란하고 악행이나 못된 짓을 한다면 하나님 집에는 행정 법령이 있고 사역지침이 있으니 누구든 악을 행하면 그 원칙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알겠느냐? 너희는 모두 하나님을 오래 믿었고 하나님 말씀도 적잖이 읽었으며 예배에서 설교도 다년간 들었는데 어째서 조금도 회개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느냐? 여러 해 동안 설교를 들어서 진리를 일부 깨달았지만 회개하지 않고 본분도 대충 이행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자는 위험인물이다. 너희에게 한 가지 실상을 알려 주겠다. 너희는 절대 내가 너희를 지켜보고 돌봐 주기만을 바라지 마라. 내가 손수 가르쳐 주어야 실질적인 일을 좀 해서 성과가 약간 생기고, 너희를 챙겨 주지 않고 재촉하지 않으면 건성으로 하여 사역 진전 속도가 느리다면 너희는 끝장이다. 이는 너희가 조금의 충성심도 없이 본분을 이행하는 힘쓰는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내 직분을 다하면 내가 너희를 돌볼 의무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성령이 역사하고 있고 너희를 감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했고 해야 할 말도 다 했다. 또 내 직분을 지켰고 내 책임도 다했다. 남은 것은 너희 각자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만약 너희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일관되게 건성으로 하며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징벌을 받고 도태되어 나와 무관하게 될 것이다.
방금 우리가 다룬 이야기를 통해 한편으로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 출신 그리고 학력 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바라보는 기준과 원칙이 무엇인지 다루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일을 어떻게 대하고 그 일의 본질을 어떻게 꿰뚫어 볼 것인지에 대해 다루었다. 이런 일의 본질을 꿰뚫어 보게 되면 비록 네 마음속에 이런 것들이 있더라도 그것에 속박받지 않고 그것에 기대어 살지 않을 것이다. 이방인이 자신의 대학 시절이나 석박사 시절의 화려한 이력을 과시하는 것을 본다면 너는 어떤 관점과 태도를 취하겠느냐? 만약 네가 “당신이 대학 본과를 나온 게 대순가요? 저는 대학원 졸업한 지 벌써 몇 년 됐거든요.”라고 말한다면, 이런 마음을 갖는다면 골치 아파진다. 이는 네가 하나님을 믿고 나서도 별로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가 네 학력을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저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해서 작문도 잘 못해요.” 그러면 그는 네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고 너를 상대하지 않을 것이니 잘된 일이 아니겠느냐? 시간을 아껴서 하나님 말씀을 더 읽고 본분을 더 이행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이방인이나 불신파랑 그런 한담을 나눠서 뭐 하겠느냐? 네 학력이 낮고, 이렇다 할 사회적 지위도 없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너를 무시한다면 어쩌겠느냐? 괘념치 말고 속박받지도 마라. 남들이야 입만 살아서 자기 맘대로 지껄이든 말든 상관없다. 그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차질만 생기지 않으면 된다. 사실 이것은 사소한 주제이지만 일상에서 사람을 통해 나타난다. 사람은 이런 밑천을 무척이나 중요시해서 마음속에 이런 것들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이는 사람의 언행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생명의 진입에 지장을 주고 하나님 믿는 바른길을 택하는 데 지장을 준다. 좋다. 이런 유형의 주제는 앞으로 다시 다루지는 않겠다. 이제 저번에 교제했던 주제로 돌아가서 계속해서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에 대해 교제하고 해부해 보자.
적그리스도의 사악함, 음험함, 간사함을 해부하다
1.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적대시하고 증오하는 적그리스도를 해부하다
적그리스도의 여섯 번째 모습을 모두 해부하였다. 지금부터는 적그리스도의 일곱 번째 모습인 사악함, 음험함, 간사함을 해부하겠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해부하고 폭로하려는 대상이 적그리스도인데 그들이 사악하고 음험하고 간사하다고 하는 것은 너무 가볍지 않나요? 사악한 성품이나 간사한 성품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어딨어요? 이런 패괴 성품은 보통 사람들도 다 지니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폭로하고 해부하면 모든 사람이 적그리스도가 되지 않겠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는 틀린 생각이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함과 음험함, 간사함과 보통 사람의 이 몇 가지 측면의 패괴 성품 표출은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분명 차이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몇 가지 측면의 성품을 적그리스도의 모습에 포함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은 우선 차이점에 대해 주로 교제한 다음 적그리스도의 사악함, 음험함, 간사함 등 몇 가지 성품의 실제 사례들과 구체적인 모습을 다뤄 보도록 하겠다. 사악함, 음험함, 간사함이라는 이 몇몇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어려움은 이 몇 가지 측면에서 적그리스도와 일반인이 보이는 모습의 본질적인 차이를 분별하고, 왜 이런 패괴 성품과 본질을 지닌 자들을 적그리스도라 규정하는지, 적그리스도와 패괴된 보통 사람의 본질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는지를 분별하는 데 있다. 먼저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은 대놓고 진리와 하나님을 적대한다. 그들은 선민을 두고 하나님과 다투고, 지위, 사람의 마음을 두고 하나님과 다툰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선민 가운데서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고 사람을 미혹하고 마비시키는 일을 벌인다. 결론적으로 그들의 행동이 공개적이든 은밀하든 성질은 하나님을 적대한다는 것이다. 어째서 하나님을 적대한다고 하겠느냐? 그들은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임을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에게 대항하려 하고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적그리스도가 사람들을 끌어들여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따르도록 미혹하고 통제했다. 그런 다음 교회에서 각종 서적, 혹은 자료를 빼돌려 독자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독립 왕국을 만들었다. 적그리스도는 그를 추종하는 무리 속에서 그들의 숭배와 추종을 즐길 수 있도록 하고, 교회에 얹혀살기 시작했다. 이런 행위는 선민을 두고 하나님과 다투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특징 중 하나가 아니겠느냐? 이런 명확한 특징을 근거로 그를 적그리스도로 규정하는 게 억울한 일이겠느냐? 전혀 억울하지 않다. 너무나도 정확한 규정이다! 또 어떤 적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편을 갈라 교회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는 교회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를 배척하며, 그를 따르고 추종하는 사람만 곁에 두어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모두가 그의 말을 따르게 만든다. 이는 독립 왕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겠느냐? 상부에 어떤 사역지침이나 요구가 있든 그는 실행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그의 추종자를 이끌고 대놓고 상부에 대항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 집에서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는 리더 일꾼은 언제든 교체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적그리스도가 생각하기에 일부 리더 일꾼은 비록 실제적인 사역은 못 해도 그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그가 키운 사람이라 상부에서 이들을 교체하고 싶어도 적그리스도부터 교체하지 않는 이상 어림도 없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 교회는 적그리스도에게 통제되지 않았느냐?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이 그에게 전달되면 도무지 진행이 안 되고 실행에 옮겨지지 않는다. 사역지침을 내려보낸 지 오래되어 교회마다 진행 상황을 보고한다. 예를 들면 아무개가 어떤 상황으로 인해 본분이 조정되었다거나 교체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항상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고 아무도 조정하지 않는다. 늘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하여 교회 사역에 심각하게 지장을 준 사람이 있어도 적그리스도는 조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상부에서 직접 그 사람을 교체하라고 지시해도 오랫동안 감감무소식이다. 이는 문제가 있지 않으냐? 상부에서 사역지침을 실행하라고 하거나 어떤 일을 물어봐도 그에게서 차단당해 교회 형제자매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다. 상부에게서 떨어져 나가 교회가 그자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는 것이다. 그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어떤 성질이겠느냐? 이것은 적그리스도가 교회에서 권력을 잡은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교회에서 패거리를 만들어 독립 왕국을 세우고 하나님 집에 대항하며 하나님의 선민을 해친다. 사람들이 모두 성령 역사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함께함을 느끼지 못하며 아무런 평안과 기쁨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만다. 본분 이행에도 힘이 빠지고 심지어 소극적으로 변하고 타락하기까지 하니 사람의 생명이 제자리걸음을 하게 된다. 이는 모두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여 초래되는 결과이다. 지금 중국의 모든 대교구가 거짓 리더, 적그리스도들을 폭로하고 교체하였는데 그중 일부는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 거짓 리더, 거짓 일꾼이었다. 그들에게는 모두 적그리스도의 모습과 성품이 있었지만 적그리스도에 이르지는 않아서 교체되는 것에 그쳤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전횡을 일삼으며 어떤 일이든 혼자 결정하고 사역지침을 완전히 어기고 독자적으로 행동해서 적그리스도로 규정되고 출교되었다. 이렇게 거짓 리더, 적그리스도를 폭로하고 처리하는 것은 무척 잘한 일이다! 나는 이런 투서들을 보고 무척 기뻤다. 이는 일부 하나님 선민이 설교를 몇 년 들어서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다고 하겠느냐? 그들이 이런 설교를 듣고 난 뒤, 삶 속에서 일이 일어났을 때 비춰 보고 적용할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를 듣고 나서 처음에는 그리 잘 깨닫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나중에는 사람과 일에 대한 분별이 생겨서 전횡을 일삼는 사람,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 사람,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 본분 이행에 건성으로 임하고 부담을 갖지 않는 사람, 책임감이 없는 사람에 대해 마음속에 판단의 원칙과 기준이 생긴 것이다. 이는 성장한 게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성장한 것이다. 분량이 생겼다고까지는 할 수 없고,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이 거짓 리더, 적그리스도,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 자,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를 조금이나마 분별하게 된 것은 좋은 일이 아니냐? 이는 좋은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민이 진리를 깨닫고 분별력이 생겨 하나님의 편에 서서 교회 사역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기뻐하고 축하할 만한 일이다. 적그리스도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미혹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분별력이 없는 그 사람들은 한동안 미혹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느냐? 나는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수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길수록 적그리스도의 결박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짧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우리가 적그리스도의 여러 구체적인 모습을 교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이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거나 통제받을 경우 구원받기 매우 어렵다.
방금 적그리스도의 모습과 이런 부류의 사람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는 이유에 대해 간단히 교제했다. 그럼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음험함, 간사함 이 몇 가지 모습은 일반인의 패괴 성품과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인식이 좀 생겼느냐? 이야기 하나를 살펴보자. 이 이야기는 분명 사악함, 음험함, 간사함 이 측면과 관계가 있다. 성경 욥기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욥 1:7)라고 묻자 사탄이 뭐라 대답했느냐?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욥 1:7)라고 했습니다.) 사탄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성품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째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느냐? 아직까지 사탄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탄이 이렇게 대답한 것에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여기에 하나의 성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악한 성품이다. 이 이야기는 일단 여기까지 하고 다음 내용을 분석해 보자. 사탄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물음에 답하고 나자 하나님이 사탄에게 말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일반적으로 정상인이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욥이 어떻게 했는지 보고 싶어 합니다.) 사람은 곧장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온전한 사람이구나. 정말 부럽다!’ 이런 부러움은 어디서 비롯되느냐? 정상 인성 속에 있는 긍정적인 사물에 대한 갈망과 사랑, 동경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네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말을 듣고 나서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무시합니다.) 무시하고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고? 경외한다는 게 어떤 거지? 악에서 떠났다는 건 또 무슨 뜻이야? 지금 온전한 사람이 어딨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말씀을 듣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 같다면 그에게 간절히 사모하고 동경하는 마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갈망은 있겠느냐?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세부 내용이 무엇인지 깨닫고자 하겠느냐? 그런 바람이 있겠느냐? 그런 게 하나도 없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밖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온전한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부류의 사람도 있다. “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온전한 사람이라니, 그런 사람이 있다고요? 어디 그의 ‘온전함’ 좀 보여 줘 보세요. 저는 믿을 수가 없어요!” 이 부류 사람의 생각과 모습이 이러한데 그가 하나님의 그 말씀을 진실로 믿고 인정하겠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그는 진실로 믿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먼저 분명한 점 하나는, 그가 하나님 말씀이 진실하고 신실하며 정확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창조주의 말씀으로, 그리고 모든 인류를 위한 지고지상의 진리로 여기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기지 않으니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겠느냐? 그가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는데 설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겠느냐? 분명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표현 방식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슨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하나님이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라는 사실을 부인한다는 말이다. 이 점 하나는 확실하다. 또 한 가지 있다. 이 부류의 사람이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를 대하고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그의 태도 이면의 성품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욥을 어떻게 보겠느냐? ‘그럴 리가!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그건 다 역사적 유물이지.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 안 돼. 오직 간악하고 사악한 사람만이 살아가야 해. 욥 같은 사람은 죽어야지 살아 있으면 안 된다고!’ 이것은 어떤 성품이냐? (사악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사악함이다. 현재의 인류 중에는 사탄의 사악한 성품과 똑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 있지 않으냐?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온전한 사람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사람들이 속으로 불복하고, 불평하고, 반감과 혐오감을 느끼고, 심지어 마음속에 저주까지 생기겠느냐? 이런 것들이 생기는 사람을 사탄의 부류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 이들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는 것이 지나치냐?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하고 엄정하게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온전한 사람이다.”라고 사탄에게 말했을 때 사탄은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 사탄은 이 사실을 의심했다. 한편으로는 사탄은 욥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의심하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탄이 사악하고, 사탄은 모든 것이 사악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탄은 인류 가운데 그토록 아름답고 진정으로 하나님이 보기에 온전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욥이 이토록 좋은 사람인 것을 하나님이 알았을 때 사탄에게 어떤 마음이 들었겠느냐? 먼저, 가장 약하게는 질투다. ‘어떻게 온전한 사람이 있을 수 있지? 내가 모든 인류를 패괴시켜 놓았을 텐데? 사람은 모두 나처럼 하나님을 배반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따를 수 있지?’ 사람의 말로 번역하면 이런 마음이다. 사탄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 ‘불가능’ 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욥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가 존재하더라도 그를 멸해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탄의 사악함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사악함이다. 사탄은 진정으로 좋은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길 바라지 않았고, 욥과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며,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그런 사람이 생기는 것은 더더욱 바라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사악함이다. 사탄의 사악함의 근원이 무엇이냐? 사탄의 성품 본질이 사악하다는 것이다. 또 사탄은 모든 긍정적인 사물을 적대시한다. 여기서 모든 긍정적인 사물에는 무엇이 포함되겠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 포함된다. 사탄이 욥을 적대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실상 그런 것이다. 사탄이 욥을 적대시한 동시에 하나님도 미워한 것이다. 사탄은 아무도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길 바랐다. 이것이 사탄에게 가장 기쁜 일이자 가장 큰 바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이 모든 사실은 사탄이 바라고 기대하며 염원했던 것과 정반대인 것이다. 이토록 좋은 일이 사탄의 눈앞에서 벌어지자 사탄의 사악함과 흉악함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대화가 또 한 번 전개된다. 그것은 사탄이 하나님과 나눈 다음의 대화인데, 원문을 아는 사람이 있느냐?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입니다.) 사탄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사탄의 이 말엔 함정이 있는데 “어찌 까닭 없이”라고 말하여 자기 스스로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느냐? (아십니다.) 하나님은 안다. 하나님은 사탄을 마치 손바닥 보듯 훤히 들여다보았고, 그 일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사탄이 “어찌 까닭 없이”라고 하자마자 하나님은 사탄이 뭘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하나님은 사탄이 뭔가를 하려는 것을 보고 기회가 왔음을, 사탄을 이용해 욥에게 시련을 줄 기회가 왔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누가 지혜로우냐? (하나님이십니다.) 사탄은 모른다. 그저 ‘욥을 건들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나? 지금은 또 갑자기 허락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다들 대략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이 말을 한 사탄의 모습과 성품 그리고 이 말을 하는 동기와 속셈이 과연 무엇인지 해부해 보자. 먼저 사탄은 하나님이 하는 말씀을 믿지 않았다. 즉, 하나님 말씀의 내용과 사실에 대해 사탄은 의심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의심하는 동시에 어떤 방식을 통해 부인하고자 하면서도 대놓고 부인하지는 못했다. 사탄의 사악함이 어디에 있느냐? 더 간사한 방식을 취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나는 직접적으로 당신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욥을 해하도록 당신이 허락하게 한 다음 그가 당신을 부인하도록 할 겁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죠. 그럼 하나님이 실패하지 않겠습니까?’ 사탄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사탄과 하나님의 대화 그리고 그의 생각에서 사탄이 표출한 성품은 무엇이냐? 사악함이 분명하다. 사탄의 이런 사악함과 보통의 패괴된 인류의 사악함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여기에서 사탄은 어떤 역할을 했느냐? 사탄은 직접 욥을 찾아가 하나님을 부인하라고 하지 않았다. 만약 욥이 사탄을 반격한다면 사탄은 창피만 당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럼 사탄이 어떻게 했느냐? 사탄이 이런 일을 하게 된 동기와 이런 일을 한 수단과 수법은 무엇이었느냐?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것입니다.) 너는 사탄을 너무 쉽게 봤다. 사탄의 사악함은 사람이 짐작할 수 없다. 인간 세상에서 모든 정의롭고 아름다운 긍정적인 사물은 사탄이 볼 때 아름답지 않다. 사탄은 이를 전부 사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바꾸려 한다. 사탄과 패괴된 인류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이냐?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님이 진리이고 하나님께 지혜와 권병이 있고 하나님이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근원임을 뻔히 알면서도 사탄은 그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반감, 혐오, 증오를 품고 심지어 이 모든 것을 저주한다는 것이다. 반면 패괴된 인류는 항상 사탄에게 미혹되어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인지, 무엇이 정의인지 모르고, 무엇이 진리이고 하나님의 요구인지는 더더욱 모른다는 것이다. 비록 패괴 성품을 약간 표출하기도 하지만 이런 사악하고 간사한 패괴 성품은 사람이 어리석고 무지하며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무감각하며 기만과 우롱을 받는 상태에서 표출된다. 하지만 사탄은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잘못을 저지른다. 어째서 그것을 사탄이라고 부르겠느냐? 사탄은 하나님이 영계와 우주 전체에서 행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이 모든 것을 목격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하나님이 진리이며 전 인류의 주재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얼마든, 하나님이 얼마나 큰 사역을 하든, 하나님이 얼마나 큰 권병을 펼치든, 하나님이 얼마나 전능하든 사탄은 여전히 이 모든 것을 부인한다. 또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염치없이 인류를 마비시키고, 기만하고, 패괴시키며 온갖 방식으로 미혹하여 자기를 따르게 한다. 방금 얘기한 사탄의 사악함의 주된 모습이 무엇이었느냐? 사탄이 오로지 하나님에게 맞서기만 한다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인정하지 않는다. 사탄은 이것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사실을 왜곡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역사를 기록하라고 했다. 게다가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사실은 기록 외에도 그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사탄은 어떻게 했느냐? 사탄은 유인원이 변하여 사람이 되었다는 ‘다윈의 진화론’을 지어내었고, 유인원이 사족 보행에서 점점 두 발로 직립 보행하는 사람으로 변해 가는 그림까지 그려 놓았다. 사탄이 이런 엉터리 이론을 지어낸 결과 현재 진화론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은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이것이 사탄의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사악함이다. 사탄은 하나님이 얼마나 큰 사역을 하였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았으면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적대하고 대항하려 한다. 하루라도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지 않고 해결하지 않으면 사탄은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대항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사악한 점이다. 그 근원은 사탄의 본질이 사악하다는 데에 있다.
욥기에 나오는 사탄과 하나님의 이 대화에서 사탄의 모습이 적그리스도의 모습과 관련이 없느냐? (있습니다.) 어떻게 관련되느냐? 왜 이 대화를 다루겠느냐? 적그리스도의 사악함, 음험함, 간사함은 모두가 늘 접하는 주제이자 사람이 자주 보게 되는 실제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왜 적그리스도의 이런 모습을 일례로 따로 끄집어내 해부하겠느냐? 방금 말한 사탄의 사악함은 사탄이 오로지 하나님에게 맞서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 또한 이렇게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적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떠냐? 설교를 듣고 나면 그 도가 좋다는 것을 알고 말씀도 잘 알아듣는다. 그 밖에 그는 자질도 조금 갖추어서 이해하고 나면 기억하려 애쓰고 그가 좋아하고 그의 관념에 부합하는 것은 가슴에 새긴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그만의 설교 한 편으로 재가공하고 정리해 내는데, 다들 들으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의 주된 모습은 아니다. 그의 주된 모습은 무엇이냐? 이 부류의 사람은 진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들에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없겠느냐? (있습니다.) 있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예컨대 그는 형제자매를 자주 만나서 어떤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고 어떤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지 속으로 알고 있다. 누가 봉헌하고 버리며 충성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일반적인 일이 일어나면 반드시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쪽을 택할지 그는 속으로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그가 그 사람을 공평하게 대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대하는 것이 적그리스도의 모습에 속하느냐? 가령 그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자질이 나보다 나아도 발탁하지 않겠어. 널 발탁하지 않는다고 해서 널 상대하지 않겠다는 말은 아냐. 네가 나한테 잘 보이면 우리는 한배를 타겠지만, 내게 잘 보이려 하지 않고 늘 그렇게 정직하고, 늘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고 원칙을 고집한다면, 내가 하려는 나쁜 짓을 분별하고 나를 꿰뚫어 보고는 나에게 진리를 교제하며 회개하라고 할 테니 그건 너무나 수치스러울 거야. 내 일에 참견하지 않으면 관두겠지만, 늘 내 일에 참견한다면 없애 버리겠어!’ 그에게 이런 계획과 심산이 생길 것이다. 이것이 무슨 성품이겠느냐? 흉악함과 사악함이라는 두 가지 성품이 모두 있다. 그가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고 이 사람을 혼내지 않았을 때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그는 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정의감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를 발탁하지 않고 그를 가까이하지도 않으며 내심 그에게 경계심과 반감을 품는다. 이것이 무슨 성품이겠느냐?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여기서 사악함이란 무엇이겠느냐? 적그리스도가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부정적인 사물인지 모르는 게 아니다. 그는 무엇이 바른길인지 아는데도 그 길을 가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며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사악한 길만 택한다. 마치 양갓집 부녀가 되어 착실하게 살라고 해도 싫어하며 기어코 기생집에 들어가는 여자들처럼 말이다. 지금 시대에서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고 등 떠밀지 않는데 어째서 그녀는 기생집으로 향하겠느냐? 바로 사악함 때문이다. 그녀는 태생이 그런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바로 이런 부류다. 우리가 그를 해부하여 적그리스도로 규정한 이유가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은 영원히 정상인의 정직함, 선량함으로 변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와 정상인의 패괴 성품의 차이다. 그를 책망하고 훈계하든, 아니면 교회에서 행정 법령으로 그를 제재하든, 그것도 아니면 형제자매가 일어나 그에게 반대하고 그를 폭로하든 그가 일을 처리하는 것의 초심과 원칙은 바꿀 수 없다. 영원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그를 바꿀 수 없고, 아무도 그가 그의 관점과 처신의 원칙을 포기하도록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너는 그를 바꿀 수 없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다. 너는 적그리스도가 사악해서 무엇이 좋고 나쁜지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그도 알고 있다. 그가 상부에 문제를 보고하거나 사역 상황을 보고할 때 그가 쓴 글이 워낙 그럴싸해서 네가 보면 이 사람의 자질이 뛰어나 보일 것이다. 그런데 결국 실제로 알아보면 그가 사역을 하면서 언제나 사역지침을 어긴 데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억압하기까지 해서 교회 사역을 교란한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는 적그리스도들이 남긴 댓글들이 있는데 그들이 어떤 배경과 맥락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댓글만 보면 유창한 표현과 일목요연한 내용에 필력도 좋아 그의 자질이 뛰어나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는 수없이 악행을 저질러 3년 전 교회에서 출교당한 적그리스도다. 그들이 하나님 집 홈페이지에 줄기차게 댓글을 남긴 것은 상부의 관심을 끌어 그들이 잘 발탁되고 만회할 기회를 얻고자 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되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적그리스도가 복을 받고자 하지 않겠느냐? (그러고 싶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받고 싶어 한다. 그는 죽음과 멸망을 두려워한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모습에는 주로 어떤 게 있느냐? 그가 무엇이 옳고 진리에 부합하는지 뻔히 알면서 일할 때는 언제나 원칙과 진리를 어기고 오로지 개인의 이익과 지위만 충족시키기를 선택하는 것,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의 가장 주된 모습이다. 그가 글귀와 도리를 얼마나 이해했든, 설교를 얼마나 그럴싸하게 하든, 남들에게 얼마나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든 일할 때 그가 택하는 원칙과 방식은 오직 하나, 영락없이 진리를 어기고 자신의 이익을 지키며 진리에 끝까지 대항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택하는 일 처리의 원칙과 방식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상상하는 하나님과 진리는 과연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그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 수 있으면 된다는 식이지 결코 실행하려 하지는 않는다. 입으로만 떠들어서 하나님 선민의 우러름을 받고 이를 틈타 교회 리더직을 차지하여 하나님 선민을 장악하는 목적을 이루려고 한다. 그들이 도리를 전하는 것을 이용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진리를 경시하고 농락하며 유린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진리를 이렇게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들은 그저 진리를 이용할 뿐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진리는 하나의 구호이자 훌륭한 이론에 그친다. 사람을 미혹하고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데에 쓸 수 있고, 아름다운 사물에 대한 사람의 갈망을 채워 줄 수 있는 훌륭한 이론인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진리를 실행하고 살아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 통할 리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통할 수 있어야 진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입으로는 진리를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이를 진리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 일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겠느냐? (그는 진리를 실행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는다는 점은 하나의 측면이다.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현실 생활에서 일이 생겼을 때 그가 이해한 그런 도리가 결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도리를 말하는 것도 청산유수지만 막상 일이 일어나면 그의 행동은 치우쳐 버린다. 진리는 실행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사람의 관념과 상상, 사람의 기준, 취향에는 부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냐? 적어도 사람들이 납득해야 그의 지위를 다질 수 있다. 하지만 현실 생활에서 그가 하는 일은 몹시 치우쳐 있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어째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사탄 철학에 따라 일하기를 좋아하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려고만 한다. 처리하고 나서 남들이 수긍하고 자기 위신만 세워지면 그만인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어떤 장소에서 누군가의 실속 없는 이론을 들을 땐 귀를 곤두세우지만 진리 실제나 사람의 여러 가지 내적 상태 등의 구체적인 내용을 들으면 자기에게 하는 말 같아서 마음에 찔리니 반감을 품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에게 요즘 내적 상태가 어떤지, 발전은 있었는지, 본분 이행에 어려움은 없는지 교제해 보라고 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네가 다시 이런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면 그는 졸거나 들으려 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너와 사담을 나눌 땐 몸을 앞으로 바싹 기울이고 듣지만 진리를 교제하기만 하면 구석에 숨어서 꾸벅꾸벅 존다. 진리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어느 정도까지 진리를 사랑하지 않겠느냐? 좋게 말하면 흥미가 없다는 것이니 힘쓰는 자가 되면 그만이다. 나쁘게 말하면 진리를 싫어한다는 것이니 진리에 대해 반감이 커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리더가 되면 적그리스도이고, 일반적인 따르는 자가 된다 해도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 적그리스도의 싹이다. 겉으로는 머리도 좋고 은사도 있어 좋은 재목으로 보이는데 본성 본질을 보면 적그리스도이니 실상은 이런 것이다. 이를 판단하는 근거가 무엇이냐?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를 근거로 한다. 이는 진리를 대하는 측면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 보면, 많은 경우 사람은 진리와 직접 대면하지 않는다. 진리에 관련되지 않는 일도 있고 어떤 측면의 진리와 관련되는지 생각지 못하는 일도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직접 대면하는 이는 누구냐? 직접 대면하는 이는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 어떤 모습에서 그들의 사악한 성품을 알 수 있느냐? 그들이 하나님에게 진실하게 기도하고 하나님과 진실하게 교제하느냐? 정직한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 진실한 믿음을 지니고 있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진실하게 의지하거나 맡기고 있느냐? 진실하게 경외하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이는 정말 실제의 일이지 절대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나 입버릇처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네가 이 말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너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너희에게 이런 사람의 모습에 관해 예를 들어 주겠다. 어떤 사람이 예배 때 주먹을 쥐고 맹세했다. “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직장도 그만두겠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겠어요!” 그렇게 소리친 후 하나님에게 헌신하려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에게 많은 복을 받을 수 있을까? 뭐라도 해서 하나님께 보여 드려야겠어.’ 그러다가 결국 그와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지? 그럼 하나님과 거리를 좀 둬서 하나님 눈에 띄지 말아야겠어.’ 이는 어떤 내적 상태이냐? (경계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이 경계 속에는 어떤 성품이 있느냐? 사악함이다. 일할 때 항상 하나님을 경계하고, 하나님께 들통 날까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이것은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내적 상태는 너무 소극적이고 비정상적이다. 비록 그 역시 남들을 따라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겠지만 하나님의 심판과 폭로의 말씀만 들으면 도망가거나 재빨리 가식을 떨며 과거를 덮을 절충안을 찾아 은폐하려 애쓴다. 있는 힘껏 도망치고 경계하면서 마음속으로 계속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다. 그들은 일할 때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구하지도 않으면서 자기가 불평 없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을 더 많이 보여 주려 한다. 가식과 외식을 통해 모두의 지지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했는지, 하나님은 이 부류의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이 부류의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며 정의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은 누군지도 그는 잘 모른다. 전부 상상이고 판단이다. 하나님의 행사가 관념에 부합하지 않으면 속으로 정죄하기까지 한다. 비록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내면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사악한 성품이다.
어떤 적그리스도는 항상 하나님을 시험한다. 그들은 그때그때 상황을 봐 가면서 행동하니 쉽게 말해 두고 보는 것이다. 두고 본다는 게 무슨 말이냐? 예를 들어 보겠다. 가령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앞으로 당신께서 저를 보살펴 주시길 원합니다. 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맡기고 제 평생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서 그는 하나님이 어떤 축복을 주는지, 초자연적인 계시를 주거나 더 큰 은혜를 주는지, 최소한 자기가 세상에서 일할 때보다 더 많이 받고 더 좋은 것을 누리게 해 주는지 지켜본다. 이는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도와 봉헌이 무엇이겠느냐? (거래입니다.) 이 거래 속에 사악한 성품이 들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는 적은 밑천으로 큰 이득을 얻는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은혜와 축복을 받아 내려 한다. 이것이 목적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국내 여건이 너무 안 좋아요. 큰 붉은 용의 체포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요. 두 사람만 모여서 예배드려도 위험할 정도예요. 4인 가족이 함께 예배드리는 것도 위험하고요. 국내 여건상 하나님을 믿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죠. 정말 문제가 터지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되면 믿은 보람이 없는 거잖아요?” 그러고는 ‘해외로 나갈 방법을 찾아야겠어. 예전에야 여건이 좋았으니 편하게 살려고 외국에 가기 싫었던 거지. 온 가족이 모여 살면 얼마나 좋아? 거기에 하나님을 믿어서 복도 받으면 일거양득이고 말이야. 그런데 지금 분위기가 안 좋은 거 보니 곧 재앙이 닥칠 거야. 빨리 해외로 떠나야겠어. 해외에서도 본분은 이행할 수 있고, 본분을 이행하다 보면 복받을 기회도 있겠지.’라고 생각해서 결국 해외로 도피하고 만다. 이를 무엇이라고 하느냐? 이것을 기회주의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타산을 하기 마련이고 거래하려는 심리가 있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너희 가운데 이런 사람이 없느냐? ‘세상에서 남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부모나 가족이 지켜 주지만 하나님을 믿어서 체포되면 하나님이 지켜 주실까?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아. 장담 못 한다면 어쩌지? 부모님은 절대 지켜 줄 수 없을 텐데 말이야. 하나님을 믿어서 체포되면 일반인은 꺼내 줄 수 없어. 만에 하나 큰 붉은 용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유다가 되면 내 작은 생명도 끝나는 거잖아? 아무래도 해외에서 하나님을 믿는 게 좋겠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느냐?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다면 “저희를 모함하시는군요. 저희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 이런 사람이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너는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의 주된 특징이 무엇이냐? 첫째, 그는 긍정적인 사물을 인정하지 않고 진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사설과 궤변, 사악하고 부정적인 사물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측면의 모습이다. 예를 들면 “행복은 스스로 잡아야 한다.”, “권력이 있어야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논리이다. 그는 권력이 생기면 아부하는 자, 뇌물을 바치는 자, 온갖 지위의 복과 즐거움이 찾아오고 남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이끌려 다닐 필요 없이 자기가 남을 이끌 테니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심산은 어떠냐?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적그리스도는 그의 사탄 논리와 사설, 궤변으로 진리를 대신한다. 이것이 사악함의 한 측면이다. 먼저, 그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의 존재와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밖에 이 세상에 긍정적인 사물도 있고 부정적인 사물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도 일부 있겠지만, 그가 긍정적인 사물을 어떻게 대하고 진리의 존재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는 여전히 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가 택한 삶과 하나님을 믿는 길은 여전히 부정적이고 진리에 합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기 이익만 챙긴다. 긍정적인 사물이든, 부정적인 사물이든 자기 이익만 지킬 수 있다면 전부 옳은 것이고 지고지상한 것이다. 이것이 사악한 성품이 아니겠느냐? 또 한편으로, 사악한 본질을 지닌 이 부류의 사람은 태생적으로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 하나님의 신실함과 선함을 멸시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멸시한다. 예를 들어, 너희가 봤을 때 나는 매우 평범하지 않으냐? 평범하다. 그런데 못할 말이 무엇이냐? 나 스스로도 평범함을 인정한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비범하거나 위대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인정해 왔고 과감하게 그 사실을 직시한다. 나는 초인이나 위인 따위가 되고 싶지 않다. 그게 얼마나 피곤하겠느냐! 나란 평범한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늘 관념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내 앞에 나아와 내 겉모습이 어떻든 어느 정도 경건한 모습을 보인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나와 대화할 땐 그래도 공손하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나를 경멸한다. 그의 말투나 몸가짐을 보면 알 수 있다. 겉으로는 공경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지만 내가 뭐라고 하든 그는 아니라며 부인하기만 한다. 예를 들면 내가 오늘 날씨가 몹시 덥다고 하면 그는 “아뇨, 어제가 훨씬 더웠죠.”라고 한다. 부정하지 않았느냐? 네가 뭐라든 그는 아니라고만 한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더냐? (있습니다.) 내가 “오늘 음식이 짜구나. 소금을 많이 쳤느냐, 아니면 간장을 많이 넣었느냐?”라고 물으면 그는 “모두 아닙니다. 설탕이 많이 들어갔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내가 뭐라든 그는 항상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다른 말을 하지 않게 된다. 말이 통하지 않고 공통분모도 없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일에 관한 나의 말을 들으면 “이쪽이 전문이시니 그럼 들어 보겠습니다.”라고 하지만 내가 외부적인 일을 이야기하면 들으려 하지 않는다. 마치 내가 외부적인 일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상대하지 않으면 나야 좋다. 조용히 있고 싶으니 다른 사람이 상대해 주는 것 따위는 필요치 않다. 내 할 일을 하면 된다. 내게도 직책이 있고 삶의 방식이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의 이런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그가 보기에 내가 위인이나 능력자처럼 생기지 않고 언행도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니 이렇게 생각한다. ‘어째 하나님처럼 보이지 않지? 날 봐. 내가 하나님이었으면 누구보다 어울렸을 텐데.’ 하나님은 어울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어울려야 한다고 네가 요구한 것뿐이다. 나는 내가 어울린다고 한 적이 없고 어울리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어딜 가든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귀찮을 일이 없으니 차라리 모르는 게 좋다. 예수가 당시 유대 지역에서 그토록 많은 말씀과 사역을 했던 것을 생각해 보아라. 예수를 따르던 제자에게 어떤 패괴 성품이 있었든 예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였다. 이것이 정상적인 관계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저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했고, 심지어 예수를 오랫동안 따르던 일부 사람들도 항상 이런 태도를 취했다. 이는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 보통의 정상인으로서 항상 마주하는 일이자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열정이 넘쳐서 내가 떠날 때 엎드려 울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함께 지낼 때는 영 아니어서 내가 참아야 할 때가 많았다. 왜 참아야 했겠느냐?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 교화되지 않는 자, 봉사하게 해야 하는 자, 말이 통하지 않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참아야 할 때가 있고, 어떤 사람들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적대적인 성품을 지녀서 너무나도 역겹다. 어느 정도까지 적대하겠느냐? 예를 들면 귀여운 강아지를 보고 내가 “이 녀석을 얼룩 고양이라고 부르자!”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이 이 이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겠느냐? 그저 이름일 뿐이니 내가 먼저 이름을 지어주면 따라 부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적대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들은 따라 부르지 않고 “얼룩 고양이라니 무슨 이름이 그래요? 얼룩 고양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 보네요! 이런 이름 말고 영어 이름으로 지어야죠.”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난 영어 이름 지을 줄 잘 모르니 너희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도록 해라. 내가 양보하겠다.”라고 한다. 내가 왜 양보하겠느냐? 이렇게 사소한 일에 다툴 필요가 있겠느냐? 양보하지 않고 기어이 다투려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양보한다고 해서 내가 틀렸다고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이 내가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인 것이다. 내가 너와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너를 두려워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다투지 않지만 속으로는 네가 불신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개와 교류할지언정 너 같은 사람과는 교류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교류할 사람은 생활 반경에서 꼭 교류해야 할 일부 사람들 외에는 형제자매와 하나님 집의 사람들뿐이다. 이것이 나의 원칙이다. 이방인과는 한 사람도 교류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 집에 우호적인 불신파가 있다면 교회의 친구가 되어 교회에 도움을 주거나 힘을 내고 일을 처리해 주는 것은 괜찮다. 교회가 너를 수용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느 형제자매를 대하는 것처럼 너와 교류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사역이 무척 바빠 이 일을 처리할 여유가 없다. 몇 년간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성육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어느 정도 개념을 잡아야 하지만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이 이방인처럼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놈들을 무엇이라 하느냐? 바로 태생이 마귀이고 하나님의 원수이다. 사탄 마귀에 속하는 자와 깊이 교류하면 화근이 되고 재앙만 있을 뿐이다.
너희는 일상에서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할 것이다. 네가 어느 사람들과 합류하든 너를 달갑게 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네가 그를 건드리거나 그의 미움을 산 적도 없는데 그가 네게 험담을 하고 너를 판단하며 헐뜯는다. 너는 영문을 모르는데 그는 너를 눈엣가시처럼 보고 너와 어울리지 않으며 괴롭힐 생각만 한다. 이게 어찌 된 일이겠느냐? 너는 그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는 채 이유 없이 그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이런 악인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이런 자가 바로 적수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너는 아직 그와 교류하지 않았는데 그가 너를 보고 눈에 거슬려서 너를 괴롭힐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앙숙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앙숙과 함께 지낼 수 있느냐? 같은 길을 갈 수 있느냐? 결코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럼 너는 이런 사람과 다투고 시비를 따지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왜 따지지 않느냐?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긍정적인 사물, 올바른 것, 인류 중에 비교적 좋은 것, 다시 말해 인간이 동경하고 좋아하는 긍정적인 것을 싫어하고 이에 반감을 갖는다. 이런 자에게 뚜렷하게 보이는 성품이 바로 사악함이다. 그는 사악한 자이다. 예를 들어 여자 친구를 구하는 어떤 남자는 ‘외모가 어떻든 슬기롭고 착해서 잘 지낼 수만 있으면 돼. 특히 인성이랑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잘살든 못살든, 잘생겼든 못생겼든 혹은 병이 있든 죽을 때까지 나와 함께할 거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라면 모두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관점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사악한 사람입니다.) 그럼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악한 사람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겠느냐? 이런 말을 듣고 나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느냐? 너를 비웃을 것이다. “바보스럽네. 지금이 어느 시댄데 아직도 그런 사람을 찾고 있나요? 우유 빛깔 금수저를 찾아야죠!” 일반인은 올바르고 슬기로운 여자를 찾아 결혼해서 한평생 착실하게 살아간다. 온 가족이 똘똘 뭉쳐 평생 청렴하게 사는 것이다. 사악한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겠느냐? (하지 않습니다.) 그는 “요즘 같은 세상에 여자 친구를 열 명도 못 사귀어 보고 서너 명의 처첩도 못 거느리면 남자라고 할 수 있나요? 헛산 거죠!”라며 늘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 올바르고 슬기롭고 착한 여자, 특히 인성과 신앙을 가진 여자를 찾는다는 네 말이 그에게 통하겠느냐? (통할 수 없습니다.) 너를 비웃기만 할 것이다. “정말 바보스럽기 짝이 없으시네! 요즘 세상에 남한테 간섭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뭘 하든 자기 마음이죠. 서양에 가봐요. 훨씬 자유롭다고요. 참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뭐 하러 그렇게 자기를 옭아매나요? 정말 바보스럽군요!” 그의 관점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그에게 긍정적인 사물, 즉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진리에 속하고 정의에 속하는 긍정적인 사물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가 듣고 어떻게 느끼겠느냐? 그는 반감을 품고 속으로 너를 욕할 것이다. 그리고 너를 속으로 경계하고 피해야 할 사람으로 이해할 것이다. 결이 다른 사람이니 같은 길을 가지 않는 것이다. 그는 네가 그와 같은 사람에 대해 반감을 품는 것을 알고, 또한 너 같은 사람을 속으로 무시한다. 그가 아무리 잘난 체하고 제멋대로여도 너와는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네가 그에게 진리를 교제해서 바른길로 가라고 할까 두려워 심한 반감을 갖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마음속 깊이 모든 긍정적인 사물을 업신여긴다. 그래서 너희가 복음을 전할 때 이런 부류의 사람을 만나면 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해 봤자 적그리스도라 구원을 얻지 못한다. 너희가 어째서 여기 앉아 설교를 듣겠느냐?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어서 그런 게 아니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할 때 성령이 네게 역사하면 네 마음이 감동과 격려를 받게 되고,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기 위해 자기를 바치고 고통받으며 헌신하고자 하게 된다. 사악한 사람들은 남들이 정의, 진리,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는 말을 들으면 공허하다고 여기고, 말도 안 되는 구호라고 생각해 이런 사람들을 경시한다. 그러니 이 부류의 사람을 만나면 너희는 아무것도 교제하지 마라. 너희는 그들과 다른 사람이니 멀리하면 그만이다. 내가 이 부류의 사람을 만났을 때 나에 대한 태도와 말투가 저렇다면 그를 책망하고 훈계해야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거들떠보거나 상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네가 상대한다고 그가 바뀌겠느냐? 너는 그를 바꿀 수 없다. 그저 그를 한쪽에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이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도 오래가지 못한다. 그는 첫째로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둘째로 긍정적인 사물에 반감을 가지며, 셋째로 하나님을 경시한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모든 사랑스러운 점은 그의 마음속에서 가장 천대받기에 그가 가장 멸시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정해진다. 이 부류의 사람이 어디에 있든, 그가 솔직하든 간사하든 그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그의 성품에 사악한 부분이 있음을 결정한다.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은 곳의 교회 생활과 하나님 선민의 본분 이행 성과는 좋지 않고, 하나님 집의 사역도 가로막힌다. 그러니 적그리스도를 해결하거나 출교하지 않는다면 교회 사역이 얼마나 큰 손실을 입고, 얼마나 많은 하나님 선민이 곤경에 빠지겠느냐! 거짓 리더는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고, 사무적 업무도 진척이 느리고 효율이 떨어진다. 또한, 자질이 뛰어나고 진리를 추구하는 훌륭한 사람을 양성하여 쓰지도 못한다. 그리고 적그리스도는 어떻겠느냐?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으면 명예와 이익, 지위만을 위해 일하고 실제적인 사역은 조금도 하지 않으며 교회 사역을 직접적으로 방해하고 교란한다. 적그리스도는 오로지 파괴적인 일만 하니 사탄과 똑같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을 보면 불쾌한 마음이 든다. 이 불쾌함은 어디서 비롯되겠느냐? 이들의 사악한 성품에서 비롯된다. 즉, 그들의 본성 속에 있는, 정의와 긍정적인 사물, 진리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악한 성품 말이다. 그래서 그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보면 “가방끈도 짧고 볼품없이 생겼는데 진리는 잘 추구하네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태도이냐? 무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자매는 특정 분야에 은사와 특기가 있어 해당 분야의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 한다. 사실, 그의 여러 여건으로 봐도 적합한데 적그리스도는 이런 형제자매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는 속으로 ‘네가 그 본분을 이행하려면 일단 나와 가까이 지내야 돼. 나와 한배를 타야 그 본분을 이행하는 걸 허락하겠어. 그러지 않을 거면 꿈도 꾸지 마!’라고 생각한다.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느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 어느 정도 정의감과 인성이 있고 잘 추구하는 사람에 대해 적그리스도가 왜 그렇게 반감을 품겠느냐? 왜 이들에게 항상 대립하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좋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 늘 소극적이지 않고 마음씨가 좋은 사람을 보면 그는 불쾌해한다. 공정하게 일하고 원칙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며 진리를 깨달으면 실행하는 사람을 보면 적그리스도는 성질을 부리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그들을 혼내고 괴롭히려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을 꿰뚫어 보고 적그리스도의 음험함과 사악함을 간파하여 그를 폭로하고 고발하려 한다면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미운털이 박힌 눈엣가시 같은 그를 제거하고 이 사람을 저버리도록 형제자매를 선동할 것이다. 교회에서 아무 위신도 없고 지위도 없는 평범한 형제자매가 적그리스도에 대한 분별력만 조금 가지고 있을 뿐 아무런 위협도 주지 않는데 적그리스도는 왜 항상 그를 꼴 보기 싫어하고 미운털이 박힌 눈엣가시로 대하는 것이겠느냐? 이런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무엇을 방해한다는 것이냐? 적그리스도는 왜 이런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느냐? 적그리스도 안에 사악한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고 바른길을 걷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며, 바른길을 가려는 사람을 적으로 삼고 못살게 군다. 그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너를 제거하려 하고, 네가 소극적으로 변하고 연약해지도록 억압하거나 네 약점을 잡아 사방에 소문내서 모두가 너를 저버리게 하려 한다. 그러면 그는 기뻐한다. 네가 그의 말을 듣지도, 따르지도 않고 계속 진리를 추구하고 바른길을 가며 좋은 사람이 되면 그는 불안해하고, 네가 본분을 이행하면 괴로워하고 불쾌해한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네가 그에게 잘못이라도 했느냐? 그러지 않았다. 네가 그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고 그의 이익을 침해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왜 너를 이렇게 대하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 같은 자들의 본성이 사악하고 선천적으로 정의와 긍정적인 사물, 진리를 적대한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네가 그에게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으면 그 자신도 모른다. 그는 그냥 너를 못살게 구는 것이다. 네가 동쪽으로 가자 하면 그는 기어이 서쪽을 향하고, 네가 저 사람은 별로라고 하면 그는 굳이 대단히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네가 이런 복음 전파 방식이 아주 좋다고 하면 그는 한사코 안 좋다고 하고, 네가 믿은 지 1, 2년밖에 안 되어서 소극적이고 연약해진 자매가 있으니 붙들어 주어야 한다고 하면 그는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당신보다 강해요.”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매사에 네 반대편에 서서 대립하는 것이다. 그가 너에게 대립하는 원칙이 무엇이냐? 네가 옳다고 하는 모든 것을 그는 틀리다고 하고, 네가 틀리다고 하는 모든 것을 그는 기어코 옳다고 하는 것이다. 그의 행동에 진리 원칙이 있느냐? 진리 원칙은 전혀 없다. 그는 네게 망신을 주고, 네 민낯이 드러나게 하며, 너를 무너뜨리고,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연약해지고 믿지 않게 되면 그의 목적이 달성되어 그의 마음속에 기쁨이 넘칠 것이다. 왜 그러겠느냐?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의 사악한 본질이다. 만약 형제자매가 하나님을 찬미하고 증거하면서 그를 내버려두고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가 좋아하겠느냐?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질투할 것이다. 아무개가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보통 사람은 “저도 꽤 괜찮은 사람이에요. 저도 칭찬해 주세요.”라고 반응하는 게 정상이다. 이토록 옹졸할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증거하는 말을 들으면 ‘이들은 이렇게 체험과 간증이 있어서 다들 그를 지지하는구나. 이들은 이렇게 인식하고 있는데 내겐 왜 그런 인식이 없을까?’라고 생각한다. 속으로 부러워하고 탄복하는 것이다. 반면 적그리스도에게는 특징이 하나 있다. “이건 하나님께서 하신 거예요. 하나님의 징계,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안배예요. 기꺼이 순종하고 싶어요.”라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 그는 씁쓸해한다. “뭐든 다 하나님이 하신 거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주재하시는지 보기라도 했나요? 하나님이 어떻게 안배하시는지 느꼈나요? 그런데 왜 저는 모르겠죠?” 한편으로는,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욥을 칭찬한 일을 대하는 것이 사탄과 같고, 하나님이 한 사람을 얻었을 때 사탄에게 어떤 마음이 들었으면 적그리스도도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사탄의 성품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만약 진리를 깨닫고 그를 분별하게 되어 그를 따르지 않고 저버린다면 그는 당황한 나머지 성을 낸다. ‘이 사람을 내가 결코 얻지 못한다면 그냥 멸해 버리겠어!’ 그래서 욥에게 시험이 임했을 때 하나님이 사탄에게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라고 일러둔 것이다. 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사탄이 사정을 봐주었겠느냐?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절대 사정을 봐주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형제자매와 어느 정도 믿음이 있고 충성심을 가지고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을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 생명 체험을 이야기하며 하나님을 증거하고, 형제자매와 늘 진리를 교제하는 사람들을 또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 (질투하고 증오합니다.) 그들의 태도는 무엇에 의해 정해지느냐? 그들의 사악한 성품에 의해 정해진다. 그래서 그들이 아무 이유 없이 한 사람을 억누르고 증오하며 아무 이유 없이 일부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자주 볼 때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은 아무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고질적이며 태생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제자매가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 자신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남들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조차 치가 떨릴 정도로 싫어하는 그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겠느냐? 그는 절대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요. 형제자매가 들으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하나님을 잘 증거하는 적그리스도도 있는 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어떤 유형의 증거겠느냐? 다음과 같은 유형의 ‘증거’가 과연 진실한 증거인지 잘 들어 보아라. 좋은 직장과 좋은 가정을 가진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그 좋은 직장과 가정을 모두 버렸고, 나중에는 온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에게 헌신하였다. 마음은 몹시 괴로웠지만 여하간 전부 버린 것이다. 형제자매들이 “전혀 연약해지지 않으셨어요?”라고 묻자 그는 “조금 연약해지긴 했지만 제가 가정과 직장을 버린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당시 전 하루에 2, 3천 위안은 벌어서 월 소득 몇만 위안에 재산이 상당했죠. 하나님을 믿고 나서 본분을 이행하려고 자산 관리를 다른 사람에게 맡겼어요.”라고 답했다. 또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맡긴 후로는 전혀 관여하지 않으세요? 그러면 당신의 몫이 없어지는 거 아녜요? 어떻게 내려놓으셨어요?”라고 묻자 그는 “하나님이 하신 거죠.”라고 답했다. 이것이 너무 애매모호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더 들어 볼 것도 없이 빈말이다. 그리고 그의 소득이 그렇게나 많았다고 하는 말은 허풍이 아니겠느냐? 그가 왜 이런 말을 하겠느냐?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렸는지 증거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냐? 그는 자기가 어떤 대가를 치렀고, 어떻게 헌신했으며, 얼마나 바쳤는지, 그럼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자신의 ‘화려’한 이력을 증거하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부분이 있느냐? 하나님이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지 않으냐? 그가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명백히 자기를 증거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증거한다고 하다니!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외식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런데 어째서 이 말을 듣고 계속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는 사람이 있느냐? 별 어리석은 사람이 다 있구나!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면 얼마 되지도 않는 자기가 했던 일, 자기가 바쳤던 것, 자기가 들였던 시간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한다. 시간이 지나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으면 새로운 내용을 조금 가미해서 자기를 증거한다. 그보다 뛰어나고, 진리의 빛 비춤을 그보다 더 잘 교제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불쾌한 마음이 든다. 진리에 들인 그의 노력이 남에게 비할 바가 못 되다 보니 뛰어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가 불쾌해하겠느냐? 아니다. 그는 남들이 그보다 뛰어난 것을 용납하지 않고 남들이 잘난 꼴을 보지 못한다. 남들보다 자기가 잘나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남들이 너보다 뛰어나고 너보다 진리를 잘 깨닫는다면 남에게 배워야 한다. 이는 좋은 일 아니겠느냐? 모두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일이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을 따른 사람 가운데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6천 년 경영 사역 중 영광스러운 일이겠느냐, 아니면 망신스러운 일이겠느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이 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겠느냐? 어떤 관점을 지녀야겠느냐?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경축하며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찬미해야 할 것이다. 이는 좋은 일이다. 이토록 좋은 일을 어떤 사람들은 반감을 품고 혐오하니 이는 비정상이 아니겠느냐? 솔직하게 말하면 비정상이다. 이는 사악한 성품으로 초래된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성품은 사악하다.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하나님을 대적하고 독립 왕국을 세워 하나님과 대립하니 이것이 사악한 성품이다. 너희는 사악한 성품을 인식하고 있느냐? 아마 많은 이가 분별하지 못할 테니 예를 들어 보겠다. 평소 별일 없을 때는 정상적인 모습으로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대화하고 교류하며 나쁜 일도 하지 않아 정상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예배 시간에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교제할 때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 조는 사람, 귀찮고 괴로운 마음이 들어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어째서 진리를 교제하기만 하면 이렇게 많은 비정상적인 현상이 나타나겠느냐? 개중엔 내적 상태가 비정상인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이상한 자에 속하니 악령이 들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일은 간혹 사람이 꿰뚫어 보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한다. 적그리스도 안에는 악령이 있는 것이다. 그에게 왜 진리를 적대시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적대시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그는 인정하지 않고 우기지만 사실 그도 속으로는 자기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 말씀을 읽지 않을 때는 그가 정상인처럼 남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그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 말씀만 읽으면 그가 들으려 하지 않고 반감만 품는다. 이것이 바로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그는 악령 부류에 속한 자이다. 하나님 말씀이 그의 본질을 폭로하였느냐, 아니면 그의 아픈 곳을 건드렸느냐? 모두 아니다. 예배 때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그가 들으려 하지 않은 게 비정상이 아니냐? 비정상이라는 게 무엇이냐? 바로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 긍정적인 사람을 까닭 없이 적대시하는 것이다. 무슨 이유로 기어코 그런 짓을 저지르는지 그 자신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비정상인 것이다. 쉽게 말해 이상하다는 것이다. 어떤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말씀만 읽으면 듣기 싫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말만 들으면 반감이 들어요. 왜 그런 건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보면 도무지 어울릴 수가 없고 그냥 그 사람에게 맞서고 싶고, 욕하고 싶고, 몰래 해코지해서 죽여 버리고 싶어요.” 그 자신도 왜 그런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비정상이다. 사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적그리스도의 내면에는 결코 정상인의 영이 없고 정상적인 인성이 없다. 근본적으로 말해 이런 것이다. 만약 여러 측면의 진리를 이렇게 분명하고 명확하게 짚어 주는 하나님 말씀을 정상인이 듣는다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사악하고 음란하며 시비와 선악의 구분이 어려운 시대에 이렇게 많은 진리와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다니 너무 귀하고 얻기 힘든 일이야!’ 어째서 귀하겠느냐? 하나님 말씀은 마음과 영이 있는 사람의 염원과 영감을 일깨운다. 어떤 영감이겠느냐? 그들은 정의와 긍정적인 사물을 갈망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갈망하며, 공평과 공의가 인간 세상에 있기를,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임하여 권세 잡기를 갈망한다. 이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외침이다. 그런데 적그리스도가 이런 것을 갈망하겠느냐? (갈망하지 않습니다.) 적그리스도는 무엇을 갈망하겠느냐? ‘내가 권력을 잡으면 눈에 거슬리는 자들은 죄다 멸해 버리겠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이라고, 하나님이 인류의 주재자라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이고 인류 최고의 생명 격언, 인류 생존의 토대라고 증거하는 꼴을 보면 반감과 미움이 생기고 듣기 싫어 죽겠어!’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이다.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이렇지 않겠느냐? 누가 그를 숭배하고 앙망하며 따르기만 하면 똘똘 뭉쳐 한패가 된다. 늘 진리를 교제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만 보면 그는 반감을 품고 멀리하며 심지어는 그를 공격하고 배척하며 혼내고 괴롭힌다. 이것이 사악함이다. 사악함을 언급하면 모두 사탄의 간계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사탄이 하는 일이 사악하고, 큰 붉은 용이 하는 일이 사악하며,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이 사악하다. 그것들이 사악하다는 말은 주로 그것들이 모든 긍정적인 사물을 적대시하고 오로지 진리와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고,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예전에 만나보고 알았던 적그리스도 중에 누가 이런 사악한 성품의 모습을 보였는지 생각해 보아라. 나는 예전에 돼먹지 못한 한 여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인성이 너무 악독했다. 하나님 집에서 대재난이 곧 닥칠 것이니 시간이 얼마 없다고 얘기하고, 형제자매가 어떻게 선행을 예비해야 하는지, 어떻게 진리를 열심히 추구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서 후회 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얘기하면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욕했다.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데 세상 종말은 무슨! 당신한테나 세상 종말이지 내겐 세상의 종말이란 없어! 대재난이 온다고 해도 난 살아남을 거야. 죽는 건 당신들이겠지!’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 작자가 억지를 부리는 것 아니냐? 누구든 이런 측면의 진리를 얘기하면 그녀는 억지를 부리고 반감을 품는다. ‘난 지금 잘 살고 있다고! 우리 집안은 형편도 넉넉해서 집도 차도 있는 데다가 벌이도 짭짤해서 아무나 못 건드는 지역 유지라고. 우리 집이 이렇게 잘사는데 대재난이 오면 나만 손해 아닌가? 아직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그녀는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이 이 사악한 세상과 인류를 멸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 (적대시합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든 그녀의 이익에 관련되고 그녀의 이익을 침해하기만 하면 그녀는 적대시하고 증오하며 동조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되죠!”라며 곧장 하나님의 행사를 부인한다. 이외에도 그녀의 가장 사악한 부분은 공평과 공의가 권세 잡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게 누구든 설사 하나님이 권세를 잡아 공평과 공의가 세워지더라도 그녀의 이익을 침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도 그녀의 이익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귀신의 성질이 아니겠느냐? 이런 귀신의 성질이 한 번 발작하는 것은 악령이 들려 하나님 말씀을 듣기 싫다고 하는 성질과 똑같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 악령은 누군가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듣기 싫다고 말한다. 이 돼먹지 못한 여자는 하나님의 날이 머지않았고, 대재난이 닥칠 것이라는 형제자매의 교제를 듣기만 하면 미워하고 속으로 욕했다. 그녀가 왜 욕했겠느냐? 하나님이 와서 세상을 멸하면 그녀의 모든 재산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익에 관련되면 그녀는 욕한다. 그러니 그녀가 하는 욕과 하나님 말씀을 듣기 싫다고 하는 악령의 성질이 같은 것이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진리를 이야기해서 그들의 영혼 깊은 곳을 폭로하여 그들의 추악한 면과 사악함, 음험함을 폭로하면 속으로 미워하고 반발하며 저항하다가 욕하고 저주하는 것이다. 이것이 악령이다. 이 돼먹지 못한 여자는 겉으로는 정상인처럼 말하고 행동해서 귀신 들린 사람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녀가 저지르는 일의 성질은 그 귀신과 똑같다. 기회가 된다면 교회의 부자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아라. “언젠가 하나님의 날이 도래해서 대재난이 닥친다면 당신의 재산이 모두 사라질 텐데 괴롭지 않겠어요?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바라나요? 하나님께서 권세 잡고 공평과 공의가 권세 잡기를 바라나요? 하나님이 빨리 이 사악한 인류를 멸하시기를 바라나요? 당신을 멸하시더라도요? 그렇게 되길 원하나요?” 그들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아라. 원하는 사람도 있고,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 세계, 전 우주, 하나님이 다스리는 모든 물질적인 것, 비물질적인 것은 논외로 한 오직 물질의 범위에 속하는 것, 즉 사람의 하찮은 재산, 자동차, 집, 돈 등 모든 것을 합친다고 해도 하나님 손에 있는 모래알 하나보다 크겠느냐?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을 얻으면 손에서 놓지 않는다. 얻으면 하나님에게 맞설 자격이라도 생긴 것처럼 생각해 “만약 제 재산을 앗아 간다면 당신을 미워하겠어요. 당신에게 대항하면서 당신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한다. 네가 인정해야 하나님이고 네가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네가 재산을 좀 가졌다고 네게 하나님에게 맞설 자격이 생긴 것이냐? 너도 참 무지하구나! 지구 상에서 가장 값진 물건은 다이아몬드인데 보통 사람은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만 봐도 매우 놀란다. “이렇게 큰 다이아몬드라면 1, 2만 달러는 되겠지!” 다이아몬드라는 것을 무척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나중에 지구에서 가까운 곳에 행성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다이아몬드인 행성이 있다는 뉴스를 듣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너무 근시안적이라는 것이다. 너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를 보면 매우 좋아하며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행성 전체가 하나의 다이아몬드인 행성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관점을 갖겠느냐? 다이아몬드에 대한 관점이 바로 바뀔 것이다. 다른 소식을 듣고 나니 네 시야가 갑자기 확장되어 더 이상 근시안적으로 눈앞의 것에만 급급해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정보량이 많아지자 사람의 식견이 예전과 달리 높아진 것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과 다양한 환경을 끊임없이 접하면서 사람의 시야가 계속해서 달라지고 사람의 관점 역시 이와 함께 계속 새로워질 것이다. 이는 정상적인 일이며, 하나님에 의해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차츰 발전하여 식견과 관점, 세계 전체에 대한 인지,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인식이 계속해서 발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럼 너희는 내 말을 듣고 이 일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아, 이 지구 상에서 사람은 정말이지 무지하고 식견도 낮아 알고 있는 게 너무 적구나!’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 다시 말해, 우주 전체, 인류 전체, 하나님이 다스리는 만물과 모든 것에 대한 너의 견해와 식견은 아마도 네가 작은 다이아몬드의 가치와 행성을 비교하여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 일을 통해 어떤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느냐? 이 지구 상에서 누가 어떤 성취를 이루었든, 어떤 명성을 얻었든, 어떤 찬란한 업적을 세웠든 허풍을 떨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인류는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라 한 푼의 가치도 없다! 하나님이 지구에 예비한 얼마 되지도 않는 다이아몬드는 사람들이 뺏고 빼앗으면서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값진 행성이 하나님 손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는 모른다. 사람이 불쌍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불쌍하다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너무나도 무지한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에게 대항한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증오하고, 심지어 진리를 추구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고 정죄하고 억압하며 배척한다. 반면 그들에게 동조해서 물든 사람과는 자연스럽게 한패가 되어 서로 보호하고 비호하며 치켜세운다. 이는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은 악령과 더러운 귀신이 환생했기에 정상적인 인성이 없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그들이 진리를 얼마나 잘 알아듣든, 혹은 글귀와 도리를 얼마나 분명하게 말하든 막상 실행할 때 그들의 유일한 선택은 진리를 어기고 하나님에게 대항하며 자신의 지위와 이익을 지키는 것뿐이다. 이것이 그들의 사악한 부분이다. 그들의 가장 사악한 점이 무엇이냐? 진리를 증오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괜히 진리를 증오한다. 그에게 이유를 물으면 그 자신도 분명하게 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일만 하면 적그리스도의 성품과 방식이 묻어 나오고, 일만 하면 사람을 미혹하고 회유하며 하나님 집의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한다. 이런 결과인 것이다. 너희 스스로 비춰 보고 주변 사람 중에, 그리고 너희가 알고 있고 접하고 있는 각급 리더 일꾼이나 보통의 형제자매 중에 진리를 추구하는 형제자매들을 아무 이유 없이 증오하고 늘 이들을 공격하며 배척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아라. 그들 자신도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앞에서는 듣기 좋은 말만 하다가 뒤에서는 돌변하여 마귀의 모습이 튀어나와 남들과 대립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적그리스도의 가장 가증스러운 점이 무엇이냐? 그들은 항상 맞는 말로 하나님의 선민과 주변 사람들을 미혹하고, 심지어 상부를 속이고 기만하며, 나아가서는 감언이설로 하나님을 속이고 사람들의 신뢰를 얻은 다음 하나님 집에서 날뛰며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려 한다. 어떻게 말하는 게 옳고 어떻게 말하는 게 그른지,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안 되는지, 무엇이 원칙이고 무엇이 원칙이 아닌지, 무엇이 원칙을 어기는 것이고 무엇이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인지 그들도 안다. 이걸 그들이 모르는 게 아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주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원칙을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고 있든 일을 처리할 때는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감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나쁜 짓을 저지른다. 이로써 그들의 본성이 사탄, 적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항상 긍정적인 사물을 증오하고 정죄한다. 큰 붉은 용이 왜 진리와 하나님을 증오하겠느냐? 전적으로 그것의 사탄 본성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어떤 형제자매들이 박해와 추적을 당하여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 사탄 마귀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못 살겠다며 집을 나갔습니다.” 사실은 큰 붉은 용의 박해를 받아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빈번하다. 너희가 들어 본 사례 중엔 어떤 게 있느냐? (큰 붉은 용이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으면 세뇌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세뇌된 사람은 신화분자다.”라는 큰 붉은 용의 말은 시비가 전도된 말이다. 분명히 그것이 사람을 패괴시키고 세뇌시켰으면서 오히려 하나님 말씀이 사람을 세뇌했다고 하다니, 너무나도 사악한 마귀들이다! 큰 붉은 용은 남이 한 좋은 일은 자기 공으로 돌리고 그것이 저지른 나쁜 일은 남에게 뒤집어씌우는데 적그리스도 역시 이렇게 한다. 큰 붉은 용, 사탄의 수법과 똑같으니 진정한 사탄의 노예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함, 음험함, 간사함의 모습에 대한 교제를 거의 마치지 않았느냐? 오늘 교제한 내용이 너희가 표면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것과 다르지 않으냐? 더 진실하지 않으냐? 최근 몇 년간 하나님 집에서 찬양, 영화 등 많은 영상 작품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렸다. 중국에 있는 어떤 적그리스도가 이를 보고 말했다. “당신들이 해외에서 만든 이런 프로그램은 저희도 중국에서 만들 수 있어요.” 그렇게 그는 사람을 동원해 무리를 지어 큰 붉은 용의 나라에서 합창을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모두 잡혀 들어갔다. 적그리스도가 왜 이렇게 하겠느냐? 그가 목적이 있어서 그러지 않았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목적이었겠느냐? (사람을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단순히 사람을 통제하려고 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따로 파벌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 의미는 ‘하나님 집에서 합창을 했다고? 나도 할 수 있어! 내가 해낸다면 하나의 파벌을 이룰 것이고, 내가 팔 한 번 휘두르면 많은 사람이 몰려올 거야!’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목적을 이루려 하지 않았겠느냐? 결국, 큰 붉은 용에게 단속당해 그의 그럴듯한 계획은 무산되었다. 하나님 집에서는 안전이 확보된 상황에서 이 사역을 진행했지만 큰 붉은 용이 권력을 잡은 나라에서 그런 여건이 그에게 주어지겠느냐? 그런 여건이 아닌데도 그는 과시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결국 문제가 터져 버렸다. 몇 년 전에 한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인터넷에 올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철 지난 노래에 소수민족 의상인 꽃무늬 치마까지 입고 율동을 했다. 너무 진부하고 시대착오적이었다. 이들 적그리스도가 하는 짓은 온통 교란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방인과 종교인은 속사정을 모르니 정말 교회가 한 줄로 알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미련한 짓만 일삼으니 그는 사악할 뿐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하다. 그가 왜 어리석겠느냐? 사악한 정도가 너무 심해 어리석어진 것이겠느냐? 아니다. 사람은 자질이 어떻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깨달으면 일할 때 길이 보이지 않아 어떻게 하면 적절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지를 모르더라도 마음속에 마지노선이 있어서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교만하여 이성이 없는 사람들은 제멋대로 행동한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 부류의 사람은 이성이 없고, 이성이 없는 사람은 문제를 숙고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숙고란 무엇을 말하겠느냐? 처음에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예비하는지, 실제로 할 때는 어떤 것들이 필요할지, 이 프로그램을 왜 제작해야 하는지, 이 프로그램이 제작된 후 영향을 받고 도움을 받을 사람은 얼마나 될지, 부작용이나 폐해는 없을지 등을 평가해야 하는데 이 평가 과정을 숙고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어리석은 자들이 숙고할 줄 알겠느냐? (모릅니다.) 문제를 숙고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성이 없는데 진리를 깨닫겠느냐? 분명 깨닫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정말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으면 이성적으로 좀 더 분명하고 건전해질 것이다. 무엇이 긍정적이고 무엇이 부정적인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이 원칙이 어느 범주에 속할지 등을 어느 정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마음속에 기준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너더러 거리에 나가서 발가벗고 뛰라고 하면 나가겠느냐? (나가지 않을 겁니다.) 때려도 안 나가겠느냐? 1만 위안을 준다고 해도 안 나가겠느냐? (그건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수치스러운 일임을 인식하는 것은 이성에서 생기는 하나의 생각이자 결론이며 태도이다. 다시 말해 네게 이런 이성이 있어야만 이런 생각과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를 돈으로 유혹하든, 고문으로 괴롭히든 아무리 몰아세워도 나가지 않는다면 너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테고 이 일을 지켜 낼 수 있을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아무런 개념이 없다. 이 개념이란 무엇이냐?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사랑이 넘쳐서 사람을 동원해 합창 영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돈도 많이 들었고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중국의 환경은 해외처럼 좋지 않은데 문제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 그가 고려하겠느냐? 그도 환경에 대해 조금은 고려할 수 있겠지만 어떤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어떤 효과에 도달해야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왜 모르겠느냐? 그에게 그런 이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성은 어디서 비롯되느냐? 진리를 깨닫는 것을 통해 사람의 이성이 비로소 조금씩 분명해지고 건전해질 수 있다. 적그리스도의 본성은 진리를 증오하고 선천적으로 긍정적인 사물을 적대하며 마음속 깊이 영원히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데 정상 인성의 사고가 가능하겠느냐? 영원히 불가능하다. 정상 인성의 사고가 없는 사람에게 이성이 있겠느냐? 이성이 없다. 적그리스도의 언행과 관점, 그들이 하는 일은 마귀 악령이 하는 일과 별 차이가 없다. 어째서 별 차이가 없다고 하겠느냐? 가령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말이 많고 나서기를 좋아해서 늘 자기의 설교를 들어줄 사람을 찾는다. 남들이 듣기 싫어해도 그는 말하고, 남들이 아무리 반감을 가져도 그는 눈치채지 못한다. 또 살펴보지도 않고, 남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관심도 없으며, 그저 자기만을 만족시킬 뿐이다. 이는 수치스러운 일 아니냐? 수치스럽고 비이성적이다. 이렇게 비이성적인 것은 사탄 악령이 들려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일하는 것과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겉으로는 발가벗고 미친 듯이 거리를 뛰어다니는 정신병 환자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가 하는 일을 보면 비이성적이다. 그에게 형제자매를 몇 명 양육하거나 복음을 전해 보라고 하면, 혹은 본분 하나를 이행해 보라고 하면 그는 아무런 원칙도 없이 자기 맘대로 허튼 짓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20년간 복음을 전하면서 한 사람도 얻지 못했는데 리더를 하고 싶어 한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있다. 아무런 원칙도 없이 무슨 일을 하든 형편없이 하면서도 리더가 되어 남들을 이끌고 싶어 하는데, 이런 사람이 분명 많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설교도 많이 들었지만 그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깨닫지 못하는 것은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무슨 이유로 그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의 자질과 이해 능력이 형편없어서겠느냐, 아니면 그의 인품이 나빠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서겠느냐? (그의 본질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째서 본질과 관련이 있느냐? (그의 본질이 사악하여 성령 역사를 얻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이 부류의 사람에게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셔도 영원히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객관적인 이유다. 물론 객관적인 이유는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다. 이외에 주관적인 이유는 무엇이냐? (이 부류의 사람은 진리를 증오합니다.) 진리를 증오하는 사람은 진리를 무엇으로 여기느냐? (반대편입니다.) 반대편은 하나의 측면이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그들이 진리 실제의 측면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영원히 그러지 못할 것이다. 이 한 측면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들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영원히 깨닫지 못할 것이다. 객관적인 이유는 이 부류의 사람은 성령 역사를 얻지 못하고 하나님도 깨우쳐 주지 않는다는 것이고, 주관적인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진리, 긍정적인 사물을 증오하여 어떤 긍정적인 사물도 그에게는 긍정적인 사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긍정적인 사물은 무엇이겠느냐? 사탄이 선동하는 사악하고 공허하며 막연한 것들이다. 그럼 이 부류의 사악한 사람, 진리를 증오하는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영원히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 부류의 사람에게 진리를 교제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면 그가 듣겠느냐? 그들은 모두 이방인이고 마귀인데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한 채 “그에게 진리를 교제해 주면 그는 왜 알아듣지 못할까요? 사람이 맞나요?”라며 답답해한다. 그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들어주기 힘든 말을 하고, 황당한 짓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이방인이고 마귀라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 어떻게 나온 것이겠느냐? 네가 하나님이 존재하고 모든 것을 주재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하나님이 모든 걸 주재한다는 게 고작 이 정도야? 별거 아니네.’ 말이 안 통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러면 소통할 수 없다. 아예 다른 부류이고 짐승이니 말이 통할 수 없다. 짐승은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영원히 모르기 때문에 소통할 수가 없다. 소통할 수가 없다는 것은 그가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지 시간의 문제도 아니고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의 문제도 아니다. 그런데 그에게 무슨 말을 하겠느냐? 이 부류 사람의 내면엔 무엇이 있겠느냐? 그들의 마음속엔 정직함, 강직함, 선량함과 같은 요소는 없고 오직 사악함만 가득하다. 이것이 바로 이 부류의 사람이 말이 통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다.
간사함이나 음험함은 사악한 성품에 비해 정도가 상대적으로 가볍고 얕은 편이다. 정도가 얕은데 어째서 여기에서 언급하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언행이 간사하고 종잡을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음험하고 간사하다는 느낌을 주기에 보통 사람은 그 속내를 알 수 없다. 그들의 언행은 간사하여 착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이들을 농락하고 이용한다. 이들은 아예 영문도 모른 채 그들에게 농락당하고 속아 넘어가며 심지어 이용당하기까지 한다. 물론, 적그리스도의 이런 행위와 방식은 사람들에게 막대한 해를 끼친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큰 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의 사악한 성품이다. 이 사악한 성품에서 나오는, 사람에 대한 미혹과 통제, 억압이 더 심각한 것이다.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는 항상 동기가 있고,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속셈이 있다. 그들은 결코 까닭 없이 무언가를 바치거나 헌신하지 않으며 아무 이유나 대가 없이 어느 사람이나 하나님 집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 언행의 이면에는 항상 동기가 있고 속셈이 있다. 그들의 속셈과 동기가 탄로 나거나 그들의 야심과 욕망이 무산되면 그들은 물러날 기회를 노린다.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바치고 헌신하는 건 너무도 가치가 없어. 밑지는 장사야.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콩고물이라도 받아먹어야지. 대가 없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그들은 정상인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양심과 이성, 마땅히 지녀야 할 모습, 마땅히 갖춰야 할 선행을 어리석음, 미련함으로 규정한다. 이는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사악하기 짝이 없다. 예를 들어,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형제자매의 삶을 돌보는 사역지침을 만들면 적그리스도가 중간에서 가로막는다. 그가 가로막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만약 이 일을 그가 제안했고 형제자매가 이를 알고 그에게 감지덕지한다면 그가 앞장서서 추진할 것이다. 만약 형제자매들이 누가 한 것인지 모르고 하나님 집에서 한 것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에게 감사한다면 그가 협력하겠느냐? 그는 절대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가로막혀 실행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이 일을 하는 것이 형제자매에게 도움이 되고 복음 사역의 확장세 역시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다. 이는 하나님 사역에 관련되는 큰일이다. 그렇다면 리더로서는 어떻게 협력해야겠느냐? 온 힘을 다해 협력하여 사역을 실행시켜야 한다. 하지만 어떤 적그리스도가 중간에서 가로막는 바람에 2년간 실행되지 못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이는 사탄의 방해이자 교란이다. 어떤 교회들은 적그리스도와 악인에게 교란되고 통제되어 본분을 이행하는 형제자매가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적그리스도는 기뻐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일이랑 혜택은 나만 받으면 돼. 어떻게 형제자매들이 다 받게 할 수 있겠어?’ 이것이 그의 일에 지장을 주기라도 했느냐? 아무 일에도 지장을 주지 않았다. 이런 혜택을 그도 받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받으면 얼마나 좋으냐! 전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 일은 방해하거나 보류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실행시켜야 한다. 이것이 정상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이고 네 책임이다. 한편으로는 네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 사역의 확장이 모든 사람의 바람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형제자매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걸 보면 샘이 나느냐? 질투할 게 무엇이냐? 이런 자는 마귀가 아니냐? 그렇다면 그는 왜 실행시키지 않느냐? 질투하기 때문이다. 그럼 그가 이것이 복음 확장 사역에 유리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겠느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이익에 관련되었느냐? 그와 무슨 상관이겠느냐? 그와 조금도 관계가 없다. 그런데 그가 실행시키지 않으니 이것이 비정상이다. 이런 자는 살아 있는 마귀이니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하나님 집의 사역과 관련되고 본분을 이행하는 이토록 많은 사람과 관련되어 있는데도 그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다. 선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그가 왜 이렇게 했겠느냐? 이것을 악덕이라 하고, 사악함이라 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을 하느냐? 만약 그렇게 한다면 적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너희 역시 살아 있는 마귀이다. 너희는 절대 이런 짓을 저지르지 마라! 또 수시로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교회에서 제멋대로 날뛰는 악인이 있어도 내버려두는 적그리스도도 있다. 그에게 처리하라고 해도 핑계를 대서 거부하고 꾸물대면서 처리하지 않는다. 그는 형제자매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고 그의 위신에 금만 가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게 리더직을 맡겼으면 결정은 내가 해야지. 내게 절대적인 권력과 권위가 있다고. 당신이 출교하라는 사람을 출교하면 내가 너무 무능해 보이잖아. 형제자매들한테 그들을 돌보는 건 나고, 모두 내 아랫사람이란 걸 알려 줘야겠어.’라고 생각한다. 그는 누구에게 대항하는 것이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은 비정상이 아니겠느냐? 이것을 사악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너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느냐? 네 숨결조차 하나님이 주었거늘 이런 중요한 일을 모르다니 어리석지 않으냐? 하나님이 언제든지 네 생명을 끝낼 수 있는데도 네가 여전히 필사적으로 하나님에게 맞서고 있다. 이는 사악한 짓이고, 이런 자는 살아 있는 마귀이다! 그래서 너희더러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지 말고 진리를 추구하는 한편, 적그리스도를 분별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적그리스도를 만나면 그를 면밀히 살피다가 그가 나쁜 짓을 하려 하면 재빨리 저지하고 형제자매와 연합하여 고발하고 해부해야 하며 그를 저버리고 출교해야 한다. 얼마 전에 어떤 교회의 어린 형제자매 여럿이 연합하여 한 거짓 리더를 파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보니 이 젊은이들이 성장한 것 같다. 그들은 사탄 철학에 기대 살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니 다른 대부분 사람보다 훨씬 낫다. 대부분 사람은 처세 철학을 가지고 있고 사탄의 해악이 너무나도 깊이 스며들어 사탄 권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거짓 리더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은 진리를 조금 깨달았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 좋은 일이다. 이는 생명이 성장한 것이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사악함, 음험함, 간사함 측면의 본질과 그들의 다방면의 모습에 관해 교제하고 폭로함으로써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이 선천적으로 하나님을 적대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비록 제게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있긴 하지만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은 없어요. 적그리스도가 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거예요.” 이런 태도는 어떠냐? 네게 적그리스도의 본질은 없어도 네가 적그리스도의 그런 모습, 표출, 살아 냄과 성품도 지니고 있다면 너는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게 될 위험이 있다. 네게 지위와 권세가 생기고 거기에 밑천까지 생긴다면 네가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내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겠느냐? 너희에게 경종을 울려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사람이 일단 적그리스도의 길에 들어서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제때에 발견하여 돌아서서 반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으로, 이것이 최선의 경우이니 그래도 구원의 희망은 남아 있다. 하지만 진리 추구의 길에 오르지 못하고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적그리스도로 규정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됐다. 내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겠느냐? 네게 적그리스도의 모습이 있어도 여전히 만회할 여지가 있고 회개의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일단 적그리스도가 되면 위험해진다. 그래서 네게 있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고 돌아서서 진리를 구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권력이나 기회만 생기면 제멋대로 나쁜 짓을 저질러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한다면 그 결과는 네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자칫 네 결말과 종착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적그리스도와 일반인의 사악한 성품의 본질적인 구별을 분명하게 얘기했다. 확실히 알았느냐? 패괴된 인류는 모두 사악한 성품을 가지고 있고, 사악한 성품의 표출과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일반인의 사악한 성품은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과는 다르다. 일반인에게도 사악한 성품은 있지만 속으로는 진리를 갈망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비록 그가 실행할 수 있는 진리는 한정적이지만 결국 일부는 실행할 수 있으므로 그의 패괴 성품이 차츰 정결해지고 진실하게 변화될 수 있으며, 결국 기본적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된다. 반면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실행하지도 않는다. 너희가 내 말을 따라 살펴보고 분별해 보아라. 교회 리더 일꾼이든 일반 형제자매든 그가 깨달을 수 있는 진리의 범위 안에서 실행해 내는지 지켜보아라. 예를 들어, 그가 진리 원칙을 하나 깨달았지만 실행해야 할 때 조금도 실행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하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이것이 사악함이니 이런 사람을 구원하기 쉽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그다지 깨닫지 못하지만 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 뜻에 합하고 진리에 부합할지 구하고자 한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진리를 어기지 않으려 하는 바람이 있는 것이다. 단지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언행이 진리에 위배되고 잘못을 저지르며 나아가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성질은 무엇이겠느냐? 이 성질이 악행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리석음과 무지함의 소치이다. 오로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 원칙에 이르지 못한 채 관념과 상상에 따라 적절한 것 같아 그렇게 하였으니 하나님이 이 같은 성질을 우매하고 무지하며 자질이 부족한 것으로 규정한 것이지 진리를 깨닫고도 일부러 진리를 어긴 것은 아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늘 관념과 상상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항상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하는 리더 일꾼은 반드시 감독하고 제재해야 하며, 진리를 많이 교제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자질이 너무 형편없어서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한다면 거짓 리더에 준하여 면직해야 한다. 만약 진리를 깨닫고도 일부러 진리를 어긴다면 책망하고 훈계해야 한다. 시종일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면 악인에 준하여 처리해야 하고 제명해야 한다. 하지만 적그리스도의 성질은 악인이나 거짓 리더의 성질보다 훨씬 심각하다. 왜냐하면 적그리스도는 꿍꿍이를 가지고 일부러 교회 사역을 교란하기 때문이다. 설령 그들이 진리를 깨닫는다고 해도 실행하지 않으며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고, 겉으로는 받아들인다고 해도 마음속 깊이 반발하고 있다. 일할 때면 여전히 자기 입맛대로 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 앞에서는 인간적인 말을 하고 사람다운 모습을 보이지만 뒤에서는 일만 하면 마귀의 성질이 나오니 이런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위가 생기면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적그리스도가 된다. 지위는 없지만 본성 본질이 적그리스도와 똑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지위만 생기면 악행을 저지를 수 있으니 적그리스도이다.
너희 가운데 자신이 적그리스도의 싹임을 자각하여 지위만 생기면 100퍼센트 적그리스도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 너를 리더로 선출하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 그들이 너를 뽑지 않게 하여라. “기권하겠습니다. 절대 저를 뽑지 마세요 제가 뽑히면 끝장입니다.”라고 말하여라. 이것이 자기 분수를 아는 현명함이다. 지위가 없는 것이 네가 보호받는 것이다. 네가 평범하게 따르는 자가 된다면 큰 악을 행할 기회는 아마도 영원히 없을 것이고, 징벌받을 확률도 제로일 것이다. 하지만 지위가 생기면 네가 악을 저지를 확률은 100퍼센트이고, 징벌받을 확률 역시 100퍼센트일 것이니 그럼 너는 끝장이다. 구원받을 기회를 제 손으로 완전히 끊어 버리는 것이다. 네게 야심과 욕망이 있다면 속히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여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자제해서 지위를 차지하지 마라. 그러면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늘 관직을 중시하고 지위를 차지하면서 본분 이행은 등한시한다면 이는 허세이고 눈속임이니 도태될 수밖에 없다. 본분을 받아들였으면 지위에 관한 일에 눈을 팔지 말고 오직 본분만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실재적이다. 네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면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것이 너희가 악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다. 너희에게 지위가 생기지 않게 항상 제한하는 것이 좋은 일이겠느냐, 나쁜 일이겠느냐?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왜 선거만 하면 갖은 술수로 지위를 다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냐? 이들의 야심이 너무나도 크다. 사람의 야심이 큰 것은 정상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이상한 것이다. 관직에 앉고 싶어 하고 지위를 몹시 좋아하는 20대의 많은 어린 자매들이 있는데 이들은 리더로 뽑히지 않으면 삐쳐서 밥도 먹지 않는다. 유치해 보이지만 이런 기질을 봤을 때 나이가 들수록 점입가경으로 극에 달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은 역사상 황제였던 여자가 있었다는 말을 들으면 자기가 그 여자였으면 좋겠다면서 무척 부러워한다.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 되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믿어도 평범하게 따르는 자가 되려 하지 않는다. 가슴속에 꺼지지 않는 욕망이 자신을 뽐낼 틈만 나면 바로 뿜어져 나온다. 그녀는 본분을 착실하게 잘 이행하거나, 자신의 책임을 다하거나, 맘 편히 진리를 추구하거나,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기를 싫어한다. 그녀는 이렇게 진리를 추구하며 본분을 이행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가 이런 단조로운 삶을 원하지 않으니 골치 아픈 것이다. 너희 중에 이런 사람이 있느냐? 음란에 빠진 여자를 보아라. 남편이 얼마나 잘해 주든, 얼마나 돈이 많든 그녀의 마음을 붙잡지 못한다. 자녀를 여럿 두고도 불륜을 저지르는 여자도 있다. 그 어떤 남자도 그녀를 단속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비정상이다. 이런 사악한 기질은 어디서 비롯되느냐? (본성에서 비롯됩니다.) 그럼 그녀의 본성은 어떻게 생긴 것이냐? 그녀의 내면에 더러운 귀신이 살고 있다. 더러운 귀신이 환생한 게 바로 그 여자다. 영계의 일은 복잡하지만 아무리 복잡해도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 말씀에 따라 바라보기만 하면 사람에게 분별력이 생긴다. 이를 두고 영계를 꿰뚫는다고 한다. 진리를 깨달으면 일을 바라볼 때 예리하고 정확해지고, 생각은 민첩하고 분명해지며, 마음은 환해진다.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마음속이 늘 흐리멍덩해서 무슨 일을 해도 별수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마치 쓸데없는 걱정만 하는 멍청이처럼 말이다. 일을 많이 하자니 자기를 뽐내게 될까 걱정하고, 그렇다고 안 하자니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 걱정한다. 늘 이런 내적 상태에 처해 있는데 이는 진리를 너무 적게 깨달은 것이다. 진리를 깨달은 것이 너무 적으면 사람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는 모습이 무엇이겠느냐? 삶이 구질구질하고 구차하다. 적그리스도에게 농락당하고 속아 넘어가 괴롭힘 당하다 뒤늦게 깨달은 날, 자기가 그때 적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를 위해 봉사하며 목숨을 내걸었고,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나님에게 충성한다고 말했다는 것을 떠올린다. 그러고는 그 단어들을 잘못 사용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는 것이다. 너무 구차하지 않으냐? (구차합니다.) 왜 구차하냐? 이는 진리를 깨닫지 못해 생긴 일이다. 그래도 싸다! 네가 만약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를 분별하고 꿰뚫어 볼 수 있으며, 그 자리에서 그를 폭로하고 파면시켰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에게 미혹되어 그를 따랐겠느냐? 분명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또 너는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었고 하나님 집에서 다년간 양육받고 육성되었지만 아무런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적그리스도를 분별할 줄 모르며 자신이 다해야 할 책임마저 이행하지 않으면서 결국 적그리스도를 따라 가고 그의 공범이 되었다. 네가 보기에도 구차하지 않으냐? 이런 사람이 불쌍하냐, 불쌍하지 않으냐? 명분으로는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고 유괴되었다. 몇 년 동안 적그리스도의 길을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싶어도 형제자매를 볼 낯이 없으니 이런 삶이 얼마나 구차하냐! 아무리 괴로워도 쓸데없다. 누가 너더러 진리를 깨닫지 말라 하더냐? 남을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을 총 일곱 갈래로 나눠 교제했다. 각 갈래마다 이야기했던 그런 구체적인 모습과 해부한 본질 그리고 여러 사연은 모두 아무 근거 없이 지어낸 게 아니다. 전부 근거가 있고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이다. 다만 한 가지, 너희가 이런 내용을 듣고 나서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전혀 비춰 보지 못한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첫째,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뜻이다. 설령 약간 이해할 때가 있더라도 그건 반쪽짜리 이해이지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다. 둘째,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뜻이다. 셋째, 자질이 형편없어서 이해 능력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내가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는 말을 그렇게나 많이 했건만 알아듣지 못한다. 그 당시에 알아들은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 가물가물하다면 그건 알아듣지 못했다는 뜻이다. 왜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이는 이해하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알아듣지 못한다면 이해 능력이 너무 떨어지는 것이고,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별로 없는 것이다. 내 말이 정확하지 않으냐? 바로 그런 것이다. 너희 중에 설교를 10년, 20년을 들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여기엔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 하나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자질이 부족하여 이르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이해력은 있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에 흥미가 없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에 해당한다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만약 두 가지 경우 모두에 해당한다면 장님이 눈병에 걸린 격이니 가망이 없다. 내가 이 말을 교제하고 나서도 너희가 비춰 보지 못하고 무슨 말인지 모른다면 너희의 이해 능력이 어떻겠느냐? 형편없지 않으냐? 만약 너희가 계속 게으름을 피우고 안일함만 탐하는 데다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며 개인의 취향만 가지고 외부적인 일에 정신을 판다면 이 말씀들이 너희에게 미치는 영향은 점점 작아져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다. 사실 적그리스도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쉽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확실히 파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성품이 어떤지, 그들 인생의 방향과 생존관이 어떤지, 형제자매, 본분, 하나님 집의 이익, 하나님, 진리,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 그들의 행동 원칙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이런 측면을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성질을 규정할 수 있는데 굳이 한동안 지켜보고 알아볼 시간이 필요하겠느냐? 필요 없다. 적그리스도가 음란만을 행하거나 사람을 억압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사탄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 네가 이런 설교를 다 듣고도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전혀 분별해 내지 못하고 그가 표출하는 것이 적그리스도의 성품임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네가 과연 알아들었겠느냐? 도리는 기억하면서 비춰 보지 못한다면 네 도리는 사실 앞에서 맥을 못 출 것이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네가 알아듣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그 당시에 알아듣고, 나중에 다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 보고 늘 형제자매와 이 일에 대해 교제하며 마음을 기울여 그 진리를 묵상하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다면 네가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안일하고 해이한 자세로 본분을 이행하고 아무런 부담도 갖지 않으며 개인의 취향만 가지고 제멋대로 하는 데다가 진리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고 세상 흐름을 따르며 외부적인 일에 홀려 있다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교제했던 이런 진리는 네게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글귀와 도리로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헛되이 들었다는 의미이다. 너희는 이런 교제를 나중에 들어 보느냐? (듣습니다.) 몇 번이나 듣느냐? 한 번 들을 때마다 효과가 다르지 않으냐? 나중에 묵상하기도 하느냐? 묵상하고 나서 얼마나 기억에 남느냐? 이런 도가 네 삶에서 사람이나 일을 분별하는 실행 원칙과 준칙이 되느냐? (확실한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나 모습은 저 자신에게 비춰 봅니다. 저 자신이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것이 분명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머릿속에 하나님이 폭로하신 말씀이 떠올라서 이런 행동의 성질은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것이고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을 분별하는 측면으로는 아직 미흡해서 의식적으로 이런 하나님 말씀에 따라 주변 사람들을 비춰 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자기를 똑똑히 보려면 눈앞에 거울이 있는 게 좋겠느냐, 아니면 흙탕물이 있는 게 좋겠느냐? (거울입니다.) 거울을 보면 어떤 점이 좋겠느냐? 자기를 더 뚜렷하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자기만 분별할 줄 아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고, 또한 다른 사람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분별하는 것이 의식적으로 남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사람의 언행을 판단하고 분별하는 원칙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너 자신에게 유익하고, 원칙에 따라 사람을 올바로 대할 수 있으며, 본분 이행과 조화로운 협력에도 유리하다. 하지만 자신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진리를 추구하면서 그저 자기를 인식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되고, 진리를 실행해 내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성과에 도달하기를 중시해야 한다. 늘 한쪽으로만 치우쳐서는 진리를 완전하게 깨달을 수는 없고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없으며 생명도 성장할 수 없다. 이는 글귀와 도리만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모든 일을 꿰뚫어 볼 수 있고, 자기를 인식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분별할 수 있고 여러 사람과 일,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래야만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고 하나님에게 쓰임 받을 수도 있다.
오늘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의 모습에 대해 교제했는데 사악함이라는 측면의 성품에 대해 너희에게 어떤 깊고 새로운 인식이 생겼느냐? 한번 교제해 보도록 하여라. (하나님, 저는 오늘 만약 우리도 적그리스도처럼 행동하여 하나님 집의 사역을 일부러 방해하고 교란한다면 살아 있는 마귀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나은 꼴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서 제 승부욕이 특히 심각하다는 것을 반성했습니다. 제 파트너가 저보다 나은 데가 있으면 마음이 괴로워서 항상 그를 넘어서려 했습니다. 제 내적 상태가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살아 있는 마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 일의 성질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나니 너무 무서웠습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깊이 인식하지 못했는데 이제 제 안의 패괴 성품이 이토록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너무 괴롭습니다.) 이제 인식했구나. 사람의 패괴 성품은 단순한 일시적 표출이 아니다. 그 안에는 너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근원이 있고, 무언가가 있어서 네가 무의식적으로 많은 패괴를 표출하도록 계속 너를 통제하고 있다. 사람이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똑똑히 말하지 못하고 통제할 수가 없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의 성품이다. 사람이 이런 패괴 성품을 똑똑히 인식한다면 이것은 한 측면의 발전이다. 이런 패괴 성품에 대해 만약 진리를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하나님의 심판과 시련, 연단을 받아들여서 진리를 실행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게 된다면 이런 패괴 성품은 변화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깨달은 것을 토대로 진리를 실행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현재 너희 중 많은 사람이 패괴 성품을 표출할 때 자제하기 어려워하는데 이는 아직 진리를 실행하기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너희는 본분을 이행할 때 사소한 일은 대부분 흥미나 취향 심지어는 혈기에 따라 처리한다. 이는 성품의 변화와는 큰 관계가 없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훌륭하다. 느낀 바가 있구나. 또 누가 얘기해 보겠느냐? (오늘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나서 무척 가슴에 와 닿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 저는 간사하게 말하고 직설적이지 않고 늘 위선을 떨면서 기만하는 것을 사악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께서 사악한 성품이 무엇인지 해부하시는 내용을 듣고 나서야 사악함은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에 맞서고 대적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만약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에 대적하고 맞선다면 이게 바로 사악한 성품인 것입니다. 예전에 저는 사악한 성품을 너무 얄팍하게 이해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나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 크게 와 닿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1년간 캐나다 영상팀을 B조로 분류했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서 무척 놀랐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처리하신 일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팀에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 하나님 집의 사역에 큰 지장을 초래하게 된 것은 정말 화가 치미는 일입니다. 저희 팀원도 최근 비슷한 내적 상태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본분을 아무런 부담 없이 대하는 것입니다. 업무량이 예전만큼 많지 않을 때 본분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아서 본분을 대하는 자세가 해이해졌습니다. 하루하루 되는대로 사는 것이죠. 오늘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본분 이행 과정에서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발전하고자 하지 않으며 진리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런 본분 이행 태도를 증오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본분을 이행하는 시간과 기회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도 인식했습니다. 만약 본분을 소중히 여기지 않다가 하나님이 사람을 기다리시는 기한,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다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에게 내린다면 그땐 후회해도 늦을 것입니다.) 보아하니 너희에게 압박이 좀 필요한 것 같구나.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아주 좋다. 이것은 현실적인 문제다. 너희는 예배 때 이 문제를 교제하여 해결해야 한다. 일정한 간격으로 모두 함께 모여 교제하고 정리해서 새로운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나를 포함해서 사람마다 평생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이 사명을 위해 살지 않으면 평생 무가치한 삶을 살게 된다. 네 삶의 가치가 사라지면 네 목숨 역시 한 푼의 가치도 없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한 푼의 가치도 없다고 하겠느냐? 네 삶이 산송장과 다를 게 없으니 살 자격이 없는 것이다. 네가 네 책임을 다하지 않고 네 사명을 완수하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이 네게 준 이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없다. 이게 무슨 의미겠느냐? 바로 하나님은 언제라도 그 모든 것을 앗아 갈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네게 줄 수도 있고, 빼앗을 수도 있다. 이런 일이다. 사실 여기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는 모두 사명이 있다. 단지 각자에게 맡겨진 일이 다를 뿐이다. 이방인들에게도 사명이 있다. 그들의 사명은 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이 사회를 교란시켜서 사람이 점점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하고 재난 속에 죽어가게 하는 것이다. 너희의 사명은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고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새 사역을 확장하는 한편 진리를 깨달아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행복한 일이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행복하고 다행스러운 일은 없었고, 그 어떤 일도 이보다 중요할 수 없다. 이것은 인생은 물론 인류사에서도 가장 중차대한 일이다. 네가 네 사명에서 벗어나고 그 본분과 책임을 멀리하면 네 생명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네 삶의 의미도 사라질 것이다. 네가 당장은 죽지 않고 이 세상에서 네 여생을 다 살 수도 있겠지만 네 삶은 아무런 의미나 가치도 없을 것이다. 네가 말해 보아라. 여태껏 진리와 하나님의 도를 들어 본 적 없는 사람과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지 알았고 하나님의 도를 깨달았지만 결국 진리와 생명을 얻지 못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들이 마음속 깊이 느끼는 바가 똑같겠느냐? (다릅니다.) 이방인이야 사명을 모르니 사명감이 없겠지만, 너는 사명의 근원을 알고 하나님이 창조주이자 만물의 주재자이고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으니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 모든 것을 아는데 이 세상을 맘 편히 살아갈 수 있겠느냐? 태평하게 보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사명을 주었으니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책임을 지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며 사람이 이행해야 할 책임을 다하고 자기가 깨달은 진리와 자기의 체험 간증을 모두 바쳐서 사람들이 유익을 얻게 하면 하나님은 흡족할 것이다. 사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것뿐이다. 사람이 조금만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안락함을 덜 누린다면 이를 해낼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네 마지막은 이방인과 다를 것이고, 하나님이 보는 가치도 다를 것이니 이 얼마나 귀하냐! 이 복은 하나님이 네게 준 것인데 네가 소중히 여길 줄 모른다면 대역무도한 것이다. 네가 하나님 믿는 길을 택하였으니 그만 망설이고 일념으로 마음을 다잡고 후회하지 않도록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여라. 설령 당장은 베드로의 분량에 이르지 못하고 욥의 의로움도 갖추지 못했더라도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 무엇을 합격한 본분 이행이라 하겠느냐? 본분 이행 과정에서 진리 원칙에 따라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대로 하고, 요령을 피우거나 속내를 감추면서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면 본분 이행에 합격하게 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높지 않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거기에 이르는 것이 쉽지 않으냐? 이는 인성 범위에 속하는 일이니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이 있느냐? 없으면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2019년 7월 10일
*평서(評書): 중국 민간 문예의 일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