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1) 제 6 부
적그리스도는 사람을 통제하려는 욕망과 야심을 지닌 것 외에 또 무엇에 관심을 갖겠느냐? 기본적으로 없다. 다른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적그리스도는 각자가 이행하는 본분이 적절한지, 인사 배치가 적절한지,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은 없는지, 교회의 여러 사역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지, 어떤 부분에 문제가 생겼는지, 어떤 부분이 취약한지, 어떤 부분을 아직 생각지 못했는지, 어떤 사역이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등과 같은 일은 신경 쓰지도, 참견하지도 않는다. 이런 것에 절대 관심을 갖지 않고, 이런 세부적인 사역을 절대 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번역, 영상, 영화, 문서, 그리고 복음 전파 등의 사역 중 어느 하나도 진지하게 체크하지 않는다. 그의 명예나 이익, 지위와 관련이 없다면 모두 그와 관련이 없는 듯하다. 그럼 그는 오로지 무엇만 하겠느냐? 사무적인 사역이나 좀 하고, 남들이 중시하거나 남들 눈에 띄는 표면적인 사역이나 좀 완수한 다음 그걸 가지고 유세를 떨고 지위의 복을 누리기 시작한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관심을 갖겠느냐? 그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는 오직 그의 명예와 지위, 어떤 일들에서 자신을 드러내어 남들에게 우러름과 숭배를 받을지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교회 사역에 무슨 문제가 발생하든 신경 쓰거나 묻지 않고,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든, 하나님 집의 이익에 얼마나 큰 손해를 입히든 그는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런 그에게 마음이 있긴 하겠느냐? 이런 사람이 충성심이 있는 사람이겠느냐?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겠느냐? 이런 것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럼 그는 매일 무엇을 하길래 교회 사역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이겠느냐?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이 맡긴 실질적인 사역은 하지 않으면서 외부의 일부 사무적인 사역만 하느라 바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역을 한 것 같아 보이고, 겉으로는 본분을 이행하느라 분주하며 열성과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이 일부 사람의 눈을 가렸지만 그는 교회의 실질적인 사역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양육하고 진리를 공급하는 사역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절대로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저 사무적인 사역만 좀 할 수 있고 체면이 서는 일만 좀 하며 교회의 실질적인 사역은 그저 건성으로 하고 책임지지 않는데 책임감이라고는 전혀 없다. 문제가 얼마나 많이 발생하든 전혀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고, 본분을 대할 때는 대강대강 한다. 그리고 표면적이고 사무적인 사역만 좀 하고는 실제적인 사역을 했다고 생각한다. 적그리스도는 본분을 이행하는 기간에 제멋대로 못되게 굴고 독단적이며, 교회 사역을 엉망진창에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합격하거나 잘못되지 않는 사역은 하나도 없고, 어떤 사역이든 다 상부에서 개입하고 참견하고 감독해야 잘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교체되고 나서는 마음속에 원망을 가득 품고 불복하며 자신을 위해 궤변을 늘어놓고 책임을 상급 리더 일꾼에게 떠넘기는 사람도 있다. 어처구니없지 않으냐?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때는 사람이 진리를 대하는 진실한 태도를 볼 수 없다. 책망과 훈계가 닥쳐 교체될 때는 사람이 진리를 대하는 진실한 태도가 드러난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이 틀렸으면 잘못을 인정하고 사실을 마주하며 진리를 받아들인다. 반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설사 그의 잘못이 드러나더라도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집의 처분은 더더욱 받아들이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이유를 대는 사람도 있겠느냐? ‘저는 잘하고 싶었는데 잘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지금 잘하지 못했다고 해서 저를 탓하시면 안 되죠. 제 의도는 좋았잖아요. 전 고생도 하고 대가도 치렀어요. 헌신도 했다고요. 제가 악을 행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런 이유와 핑계를 대며 하나님 집의 처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이게 적절하겠느냐? 어떤 이유와 핑계를 대든 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를 숨길 수는 없다. 이는 사람의 본성 본질과 관련된 문제로, 문제를 가장 잘 보여 준다. 일이 닥치든 닥치지 않든 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네 본성 본질의 상징으로, 바로 네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다. 네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네가 진리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방금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통제하는 측면의 모습을 다뤘는데 어떤 내용을 다루었느냐? (적그리스도는 사람을 통제하는 데만 관심을 가집니다.) 맞다. 특히 교만하고 지위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을 통제하는 데 충분한 ‘관심’을 갖고 있다. 이 ‘관심’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야심이며, 부정적인 것이자 나쁜 의미가 담긴 것이다. 그들은 왜 사람을 통제하는 데 관심을 갖겠느냐? 객관적으로 말하면 그건 본성인데, 또 다른 측면의 원인이 있다. 바로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지위, 명예와 이익, 허영, 그리고 권력에 특수한 갈망과 감정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런 특수한 갈망과 감정은 사탄과 비슷하지 않겠느냐? 이는 사탄의 본질이 아니겠느냐? 사탄은 하루 종일 어떻게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할지 궁리한다. 매일같이 사람에게 일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주입하는데, 주입하고 교육하는 방식을 쓰기도 하고, 전통 문화를 이용하기도 하며, 일부 과학이나 심오한 지식, 혹은 학설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런 것들을 주입할수록 사람은 그런 것들을 점점 더 숭배한다. 사탄이 사람에게 그런 것들을 주입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주입하고 나면 사람은 사탄의 생각과 철학, 생존 방식을 갖게 된다. 그러면 사탄이 사람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람이 사탄에 기대어 살아가게 되고,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사탄이 살아가는 것이자 마귀가 살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렇지 않겠느냐?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통제하는 것 역시 이런 성질이 아니겠느냐? 그는 모든 사람을 그와 똑같은 사람으로 바꾸고 싶어 한다. 모든 사람이 그를 위해 살아가고 쓰이며 일을 처리하게 하려 할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 다 자신이 통제하려 한다. 사람의 생각, 하는 말, 말하는 방식, 사상 관점, 행동하는 관점이나 태도, 나아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나 믿음, 그리고 본분을 이행하려는 의지나 뜻까지 통제하려 한다. 어느 정도까지 통제하겠느냐? 그는 우선 사람을 세뇌하고 교화한 다음 사람이 그와 똑같이 행동하게 한다. 그렇게 그는 ‘교부(敎父)’가 된다. 적그리스도는 사람을 이렇게 바꾸기 위해 미혹하고 주입하고 공갈하는 등 다양한 방식을 쓴다. 또 어떤 방식이 있겠느냐? (마음을 공략합니다.) 그건 미혹에 해당한다. 또 있느냐? (협박하고 회유합니다.) 어떻게 회유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 제멋대로 못되게 구는데, 적그리스도가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느냐? 그는 아주 잘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럼 그가 그것을 처리하느냐? 그는 처리하지 않는다. 그럼 그는 왜 처리하지 않겠느냐? 그는 그 일을 통해 사람을 회유하려 한다. 그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처리하지 않은 건 제가 당신에게 좋은 일을 해 준 것이니 당신은 제게 감사해야 해요. 당신이 나쁜 일을 저지르는 걸 봤지만 난 보고하지도, 당신을 처리하지도 않고 당신의 사정을 봐 줬어요. 앞으로 제게 감지덕지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 사람은 그에게 감사하며 그를 은인으로 삼고, 둘은 한통속이 된다. 권력을 잡고 있는 기간 동안 적그리스도는 악을 행하는 자, 하나님 집의 이익을 해치는 자, 뒤에서 하나님을 판단하는 자, 뒤에서 훼방을 놓는 사람을 회유한다. 그는 이런 악인 무리를 옹호한다. 이는 일종의 통제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실, 적그리스도 역시 마음속으로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들은 서로 마음속으로 다 알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하니 그것은 한통속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피차일반이야. 당신이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속이듯 나도 하나님을 속여. 당신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듯 나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적그리스도는 이런 사람들을 회유한다. 이는 회유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 집의 이익이 손해를 보게 하는 것도 불사한다.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이런 사람들이 제멋대로 못되게 굴며 하나님 집에서 대충대충 살아가게 내버려 둔다. 마치 그가 이런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라도 하듯 말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에게 감사한다. 하나님 집에서 이런 악인들을 처리할 때가 되면 그들은 적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에이, 그는 벌써 교체됐어. 그가 교체되지 않았더라면 며칠 더 누릴 수 있었을 텐데. 그가 보호해 주었다면 아무도 나를 처리할 수 없었을 거야.’ 이들은 마음속으로 여전히 적그리스도를 그리워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적그리스도가 하는 이런 일들은 모두 방해하고 교란하거나 사람을 미혹하는 일이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행임을 알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런 악행을 증오하지 않는 데다가 감싸기까지 한다. 예를 들어, 일부 리더는 적그리스도를 비호하는데, 상부에서 그에게 교회에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이나 제멋대로 못되게 구는 사람, 사람을 미혹하는 적그리스도가 있는지 물으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제가 확인해 드릴게요.” 이는 그의 본분 내 사역이 아니냐? 그는 “제가 확인해 드릴게요.”라는 말투로 네게 대충 답하고 넘어간 뒤 아무 소식도 없다. 그는 확인해 보지 않는다. 그가 그런 사람들의 미움을 살 리 없다! 네가 다시 그에게 “확인해 봤어요?”라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확인해 봤는데요, 없었어요.” 정말 없었겠느냐? 그가 바로 가장 큰 적그리스도이다. 그는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해치는 장본인이다. 그 자신이 적그리스도인데 확인하긴 뭘 확인한다는 말이냐? 그가 있는 한 아랫사람들이 무슨 나쁜 일을 저지르는지, 어떻게 방해하고 교란하는지 아무도 확인해 보지 않는다. 그가 못 하게 막는 것이다. 이 말은 이런 상황에서 그의 아랫사람들은 그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그로 인해 단절된다. 그럼 그로 인해 단절되면 그 사람들은 누구를 따르겠느냐? 그를 따르지 않겠느냐? 그는 악질 토호이자 도적, 지방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 사람들을 통제한다. 이는 어떤 방식이겠느냐? 상부를 기만하고 아랫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아랫사람을 회유하고, 상부를 기만한다. 아래의 상황을 상부는 모르게 하고 상부에는 말하지도 않고 허상까지 만들어 낸다. 어떤 허상을 만들겠느냐? 그는 상부에 이렇게 말한다. “저희 교회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형제자매가 다들 그가 인성이 좋지 않고 아주 악랄한 데다가 본분도 이행하지 못한다고 하네요. 처리할 수 없을까요?” 그 사람의 모습에 대해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악인임이 틀림없고 처리해야 했다. 그래서 상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처리해도 되죠. 처리를 했나요?” 그러자 그는 말한다. “저희가 지난달에 그를 처리해서 제명했어요.” 그의 말이 정말 사실이겠느냐? 자세히 알아보니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그 사람이 그와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잘 맞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그놈이 실제적인 사역은 하지 않고 늘 형제자매 사이에서 편 가르기나 하며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서 그를 분별한 그 사람이 그의 그런 문제점을 보고하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보고했다는 사실이 그 수하의 한 패거리에게 발견되어 그 사람은 그에게 괴롭힘당하고 제명된 것이다. 이 적그리스도는 아래에서 물밑 작업을 다 벌인 뒤 다들 들고일어나 그 사람을 반대하고 버리게 만들어 결국 그 사람을 제거하고 제명해 버렸다. 그런 다음 상부에 ‘희소식’을 알리기까지 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과 다르다. 이런 일이 교회에 있지 않겠느냐? 있다. 이런 적그리스도들은 형제자매를, 그들을 분별할 줄 알고 그들의 문제점을 보고하는 사람을, 그들의 본성 본질을 꿰뚫어 보는 사람을 억압할 뿐 아니라 적반하장으로 그 사람들이 교란한다고 상부에 보고한다. 하지만 실제로 교란하는 자는 누구겠느냐? 교회를 교란하고 통제하는 것은 적그리스도들이다.
적그리스도는 사람을 순종하도록 할 때 어떤 수단을 쓰겠느냐? 그중 하나는 다양한 방식으로 너를 통제하는 것이다. 바로 너의 생각과 행동 방식, 걷는 길을 통제하고, 나아가 수중의 권력으로 네가 이행할 수 있는 본분을 통제한다. 네가 그를 가까이하면 그는 네게 수월하고 체면이 서는 본분을 주는 반면, 네가 늘 그를 순순히 따르지 않고 그의 결점을 지적하고 그의 패괴 문제를 폭로하면 그는 네게 사람이 싫어하는 일을 안배한다. 예를 들어, 젊은 자매에게 더럽고 힘든 일을 시킨다. 그를 가까이하고 그에게 아첨하며 늘 그의 말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수월하고 깨끗한 일을 안배한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고 통제한다. 즉, 인사권이나 인사이동권, 누가 무슨 일을 할지에 대해 모두 그가 관리하고 그 홀로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단지 야심과 욕망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이는 마침 적그리스도의 여덟 번째 모습인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에 부합하지 않느냐?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는 무슨 뜻이겠느냐? 이런 모습은 무엇이 잘못되었겠느냐? 어디가 잘못되었겠느냐? 그가 사람에게 순종하도록 하는 것은 모두 진리를 위배하는 것,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전부 하나님 집의 이익과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고 진리에 부합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가 순종하도록 하는 것은 모두 그 개인의 야심과 욕망, 기호, 취미, 관념이다. 이는 본질이 아니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가 가진 본질의 한 모습이다. 이는 요점을 짚은 것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이런 행동 방식을 쉽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리더 일꾼은 정확하고 올바른 관점을 제시했을 때 불복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올바른 관점을 계속 관철하고 실행해 나갈 수 있다. 이런 모습은 적그리스도의 행동 방식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둘의 행동 방식은 겉으로 보면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르다. 적그리스도는 일부러 진리와 하나님 집의 사역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고, 하나님 집을 위해 본분을 이행한다거나 진리에 순종한다는 명목으로 남들이 그를 따르게 한다. 이는 지나치고 황당할 정도로 잘못되었다. 반면 일부 리더 일꾼은 올바른 관점을 고집한다.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고집해야 한다. 이는 교만하고 독선적이거나 사람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고집하는 것이다. 두 가지 행동 방식은 겉으로 보면 비슷하지만 본질은 다르다. 하나는 진리 원칙을 고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된 관점을 고집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은 모두 진리에 위배되고 진리를 적대하는 것으로, 전부 그 개인의 야심과 욕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핵심이다. 우리가 방금 말한 것은 기정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욕망과 야심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일부 사람들은 적그리스도가 하려는 일을 눈에 띄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이나 모습이 있다는 것은 그가 그런 욕망과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무리에 가든 그는 늘 감투라도 쓴 것처럼 사람을 지휘하려 한다. “당신은 가서 밥을 하세요!”, “당신은 가서 누구누구에게 알리세요!”,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세요. 충성을 다하라고요. 하나님이 보고 계시잖아요!” 이런 말을 네가 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게 무슨 말투란 말이냐? 네가 누구길래 주인 행세를 한다는 말이냐?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감히 그렇게 말하다니, 이는 비이성적인 것 아니겠느냐? “그자는 멍청이예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자는 보통의 멍청이가 아니라 특별한 멍청이다. 무엇이 특별하겠느냐? 그는 누구와 어떤 일을 논쟁하거나 상의할 때 결국에는 옳든 그르든 항상 우위를 점하려 하는데, 옳든 그르든 자기가 정하고 직접 결단하고 의사 결정을 내리려 한다. 그는 자신의 지위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의사 결정을 내리려 한다. 다른 사람이 올바른 의견을 내놓아 우위를 점하면 그는 화를 내면서 일에서 손을 떼고 할 일을 내팽개친다. 나자빠지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 마음대로 떠들라고. 어차피 내 말은 듣지도 않을 테니!” 그는 이런 야심과 욕망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이 주인이나 책임자, 또는 리더가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느냐? 그런 사람은 전형적인 적그리스도가 된다. 너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지 않으냐? 그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는 얻지 못하고 되레 적그리스도가 된다면, 이는 큰 재앙이 닥친 것 아니겠느냐?
이방인은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겠느냐? 사람과 접촉할 때 그는 우선 사람의 외모와 옷차림을 보고, 사람이 하는 말을 들을 때 그는 늘 사람이 내면에 지식을 갖추고 있는지 확인하려 한다. 만약 네 겉모습이나 생김새, 옷차림이 별로 좋지 않고 소양이나 지식도 뛰어나지 않으면 그는 너를 무시하고 너와 말할 때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 나는 “그러고 싶으면 네가 다 말하거라.”라고 말하고 아무 말 없이 참고 양보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다 내 말을 듣고 어디에 가든 다들 내 말을 듣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기회를 찾아 다른 사람이 말을 많이 하게 하려 하는데, 다들 자신의 마음의 소리, 자신 내면의 어려움, 자신의 인식을 말하게 하려 한다. 듣다 보면 일부 오류와 사람이 가진 문제점이나 결함, 사람이 걷는 길에 나타난 문제점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나는 교회 어느 측면의 사역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어떤 문제가 있으며 해결할 필요가 있는지 등에 중점을 두고 듣는다. 만약 한 가지 일을 논의할 때, 예를 들어 내가 이 컵은 종이로 만들었다고 말했는데 네가 한사코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래, 네 말이 맞다.”라고 말하며 너와 다투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당신 말씀이 맞는데 왜 다투지 않으시죠?’ 그건 어떤 일인가에 따라 다르다. 만약 진리에 관련된 일이라면 너는 당연히 내 말을 따라야 하지만 외부의 일이라면 너희가 뭐라고 하든 나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건 나와 무관한 것이다. 그런 일을 다퉈 봤자 아무 소용없다. 또 어떤 사람이 나라에 관한 일을 논의하면 나는 “내가 알기로 그 일은 이렇다.”라고 말한다. 앞에 “내가 알기로”를 덧붙인 것은 어느 정도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들어 그 일을 설명하면서 “지금은 이런 상황인데 일부 특수한 상황은 나도 잘 모른다.”라고 말한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로 그 일을 평가할 수밖에 없지만, 아는 게 많다고 자신을 과시하는 게 아니다. 나는 단지 네게 참고할 만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뿐이다. 난 너보다 높은 위치에 서서 너를 억누르며 내가 아주 뛰어나다고, 난 모든 걸 알고 넌 아무것도 모른다고 네게 알도록 하려는 게 아니다. 난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나와 채팅할 때 내가 그는 모르는 일을 좀 말하면 “하루 종일 두문불출하는 당신이 뭘 아세요?”라고 말한다. 그는 알지도 못하면서 나와 다투고 나를 이기려 든다. 그러면 난 이렇게 말한다. “맞다. 난 두문불출한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는 알고 있다. 나는 그냥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는 것뿐이다. 믿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하면 된다.” 이게 다툴 일이겠느냐? 이건 성품이다. 어떤 사람은 외부의 일 하나를 가지고도 우열을 가리려고 한다. “당신이 어떻게 이 일을 아세요? 왜 나는 모르죠? 당신은 그렇게 잘 얘기하시는데 나는 왜 말을 못할까요?” 예를 들어, 나는 “몇 년간 여기서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이곳 기후의 특징은 꽤 습하다는 거다.”라고 말한다. 이는 오랜 기간 머물면서 보고 들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듣자마자 “정말 당신 말씀처럼 그런 건가요? 저는 습한 것 같지 않은데요?”라고 말한다. 네가 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넌 네 느낌을 근거로 삼을 게 아니라 데이터를 근거로 삼아야 한다. 매일 일기 예보가 아주 상세하게 날씨를 알려 주니 많이 보다 보면 이곳이 확실히 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상상한 것도, 느낌대로 말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렇겠느냐? 담벼락 밑의 응달진 곳에 일년 내내 푸른 이끼가 끼어 있고 봄철에 어떤 곳은 너무 미끄러워서 걸을 수 없을 정도다. 이는 경험하고 겪은 것이고 직접 눈으로 본 것이며 몸소 체험하고 느낀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건 사실에 위배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나와 말할 때 이런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내가 여기가 습하다고 해도 그는 한사코 습하지 않다고 우기는데, 이는 바보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말들은 터무니없이 상상한 게 아니라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실제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왜 상상한 것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네가 사소한 부분을 낱낱이 명확하게 말하고 나서 사람들이 직접 보고 체험하면 네가 한 말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말은 정확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확한 말에 대해서도 늘 논쟁하고 나와 말할 때 이런 식으로 다투는 사람도 있다. 그는 무엇을 다투려는 것이겠느냐? 이판사판으로 너 죽고 나 죽자는 것이겠느냐? 그게 아니라 그는 누가 더 많이 아는지를 다투려는 것이다. 그는 그저 다투는 걸 좋아하는 것이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건 일종의 성품이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그를 폭로하고 그와 얼굴을 붉히며 다툴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무지한 사람과 다투는 건 쓸데없다. 격이 떨어지니 그에게 양보하면 그만이다. 그게 좋지 않겠느냐? 그런 멍청이와 다퉈서 뭐 하겠느냐? 진리에 관한 일을 깨닫지 못해서 논쟁하고 토론한다면 괜찮겠지만 외부의 일 때문에 다툰다면 무지한 것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성품은 주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진리는 말할 필요도 없고 옳은 말, 사실에 부합하는 의견이나 주장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연구하고 네게 따지고 논쟁하려 든다. 이는 성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교만한 것이다. 그의 뜻은 이러하다. ‘당신은 진리를 좀 깨달은 것뿐이잖아요? 외부의 일은 모르실 테니 제 말을 들으시라고요! 화나니까 아무렇게나 얘기하지 마세요. 이건 당신이 관리하시는 일이 아니에요. 당신의 본연의 일이나 진리를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당신 말을 따를 거예요. 하지만 외부 일에 대해선 얘기하지 마세요. 잠자코 있으시라고요! 당신도 이 일을 접해 보시지 않았으면서 뭘 아시겠어요? 당신은 제 말을 따르셔야 해요!’ 그는 무슨 일이든 남들이 그를 따르게 하고 상대방이 누군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모든 사람을 정복하려 한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조금이라도 이성이 있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가 보기에 나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울리기에 쉽겠느냐, 아니면 어렵겠느냐? (어울리기에 쉽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차렸느냐? 왜 어울리기에 쉽다고 하겠느냐? 내가 말해 볼 테니 내 ‘설명’이 옳은지, 정확한지 너희가 한번 살펴보거라. 첫 번째, 내 이성은 정상이다. 여기서 정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어떤 일을 바라보든 그 기준이나 각도가 정확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각종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주장, 혹은 각종 일을 대하는 태도 역시 정상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정상이다. 최소한 정상 인성의 기준에는 부합한다. 두 번째, 진리로 자신을 단속한다. 이는 정상 이성이 최소한 갖춰야 하는 두 가지 측면이다. 그 밖에 내가 어울리기에 쉬워 보이는 이유는 내가 각 부류의 사람을 대하는 나름의 척도를 가지고 있고 그 기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리더나 평범한 형제자매, 노인이나 젊은이, 자신을 과시하는 교만한 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나 있는 사람 등 각 부류의 사람을 대하는 각각의 척도와 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척도와 방식의 핵심은 무엇이겠느냐? 제멋대로 구는 것이 아니라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다. 가령 네가 대학생이라면 우러러보고 농민이라면 무시한다면 이는 원칙이 아니다. 그럼 무엇을 통해 이런 원칙을 파악하겠느냐? 사람의 자질과 인성, 이행하는 본분, 하나님을 믿는 믿음, 진리를 대하는 태도 등 여러 측면을 종합해 한 사람을 바라본다. 내가 어울리기에 쉬워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아마 많은 사람이 관념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은 지위가 있으신데 왜 지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 당신은 겸손하고 거들먹거리지도 않으셔. 사람들은 아마 마음속으로는 당신을 우러러볼 텐데 어째서 직접 당신을 볼 때는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게 딱 맞고 심지어 내려다봐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어울리기 쉽다고 생각해 긴장을 푼다. 그렇지 않겠느냐? 바로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어울리는 게 좋다고 느낀다. 너희가 보기에 내가 만약 모든 방면에서 너희를 억누르고 괜히 너희를 책망하며 하루 종일 굳은 얼굴로 너희를 비판하고 꾸짖는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겠느냐? 너희는 ‘당신은 참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이셔. 성격도 별나고 너무 변덕스러우셔!’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면 쉽게 어울리지 못한다. 나의 모든 측면, 성격과 희로애락이 너희가 보기에 정상이기 때문에, 게다가 너희는 마음속으로는 신분과 지위가 높다면 대단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너무도 평범하기 때문에 경계를 풀고 나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 밖에, 너희가 보기에 내가 말할 때 관료적인 말투를 쓰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관료적인 말투를 쓰지 않는다. 너희가 깨닫지 못하면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최대한으로 돕지 너희를 비웃는 일은 거의 없다. 왜 거의 없다고 하겠느냐? 가끔은 몹시 화가 나 부득이하게 한두 마디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나약해질 것을 고려해 가급적 그런 말은 하지 않고 포용하고 이해하며 인내한다. 너희를 도울 수 있으면 최대한 돕고 가르칠 수 있으면 최대한 가르친다.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한다. 왜 그렇게 하겠느냐? 왜냐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진리를 깨닫는 일에서 몹시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향락을 좇으며 세월을 보내거나 외모를 가꾸거나 게임을 하는 등 세속적인 일에 대해서는 특히 잘 알지만, 하나님을 믿는 일이나 진리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얘기만 하면 멍해진다. 하나님을 증거하거나 자신의 전공과 강점, 은사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역을 하는 얘기, 또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작품을 만드는 얘기만 하면 바로 말이 없어진다. 나는 이런 상황을 보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가르치고 하나하나 지도해야 한다. 온 힘을 다해 가르쳐야 하는데, 내가 깨닫고 있거나 알고 있거나 할 줄 아는 것을 골라 가르쳐야 한다. 계속해서 가르치다 보면 작품 하나가 완성된다.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건 최대한 가르치고 가르칠 수 없거나 가르칠 줄 모르는 건 너희가 아는 데까지 알면 된다. 모든 걸 순리에 맡기고 너희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결국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문외한에게 제압당했어요. 할 줄 아는 우리는 아무 일도 못 했고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늘 우리를 가르쳐야 하다니 너무 창피해요!” 이는 창피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건 모든 인류에게 생소한 일이다. 사람이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증거할 줄 안다면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사탄의 부류이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본성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나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에 관련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사람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그만이다. 내가 돕고 지도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면 도울 것이고, 그럴 에너지가 없거나 다른 일 때문에 틈이 나지 않는다면 너희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면 된다. 이는 원칙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럴 수밖에 없다.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지 않겠다. 그렇게 해 봤자 소용없다. 그 일을 이룰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은 어울리기에 쉬워요. 당신의 요구는 충족하기 쉽고요. 저희는 당신이 알려 주시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겠어요.’ 가끔 책망당하는 사람도 있는데 책망받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은 올바르게 이해해 괜찮지만, 일부는 일을 팽개치고, 일부는 뒤에서 교란하면서 본분도 잘 이행하지 않고 실제적인 사역도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교체된다. 하기 싫으면 내려가라. 반드시 너를 써야 할 이유가 있느냐? 사람을 바꾸면 그만이다. 아주 간단하지 않으냐? 앞으로 그가 회개하고 변해서 잘할 수 있게 되면 다시 기회를 주고, 계속 그렇게 방해하고 교란하면 영영 쓰지 않는다. 말 잘 듣는 사람을 쓰는 게 낫지 그와 계속 얽혀서 뭐 하겠느냐? 그렇지 않으냐? 그러면 그도 힘들고 나도 피곤하다. 이런 일을 처리하는 데도 원칙이 있고 사람과 어울리는 데도 원칙이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사람과 어울릴 때 사람에 대한 요구가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경우,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라. 할 수 없는 것은 내가 하나하나 네게 가르쳐 줄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할 수 있으면 다해라. 하지만 네가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어떻게 믿는지는 너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결국 얻지 못한다 해도 너는 아무도 원망해선 안 된다. 사람을 대하는 내 원칙이 어떠냐? 약간 사람을 내버려두는 느낌이 들지 않느냐?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이렇게 처리하는 건 분명 원칙에 부합한다. 어떤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내가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너희도 바로 깨달을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은 인성으로 사역하는데, 사역할 때 성령, 하나님의 영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러니 나는 하늘의 하나님을 대신해 모든 사역을 하겠다고 거들먹거려서는 안 된다. 그건 함부로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다.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된다. 할 수 있는 것을 완전하고 제대로 해내고 내 마음과 온 힘을 다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게 바로 내 본연의 사역이다. 그러나 내가 이런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 사실에 불복하고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늘 자신을 드러내고 눈에 띄려 하거나 과시하려 한다면 그것이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너희 생각에 내가 이 일을 알고 있겠느냐? 아주 잘 알고 있다! 육신이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있는 사역의 범위가 바로 하나님이 육신으로 하는 사역의 범위이다. 이 범위 외에 사람이 뒤에서 겪는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 성령의 깨우침과 인도, 나아가 하나님이 준 이상(異象), 그리고 하나님이 앞으로 어떤 사람을 온전케 하고 어떤 사람을 도태시킬지,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어떤 관점이나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하나님 자신의 일이다. 너희가 나와 가까이 접촉한다면 나도 이런 것들을 볼 수 있겠지만 아무리 본다고 해도 얼마나 볼 수 있겠느냐? 볼 수 있는 사람도, 접할 수 있는 사람도 제한적인데 모든 사람을 다 포괄하는 게 가능하겠느냐? 불가능하다. 너는 이 일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가 보기에 나는 이 일을 명확히 알고 있느냐? 나는 명확히 알고 있다. 이는 정상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나는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그럴 수 없다. 사람은 그럴 수 있을 만큼 이성적이지 않다. 내게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늘 뒤에서 일을 알아보고 다니시는 거 아니에요? 누가 뒤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뭐라고 당신을 험담했는지, 아니면 뒤에서 당신을 어떻게 판단하고 당신의 무엇을 연구했는지 묻고 다니시는 거 아니에요?” 솔직히 말해 주겠다. 난 결코 그런 일들을 묻고 다니지 않는다. 그럼 그런 일들은 누가 책임지겠느냐? 하나님의 영이 책임진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감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온 땅을 감찰하고 사람의 마음을 감찰한다. 하나님이 감찰한다는 것도 믿지 못한다면 너는 이성이 비정상적인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잘못된 위치에 선 것으로,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난 너희가 하나님을 믿기를 바라고, 마음속으로 이 일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 따라서 내 말과 행동은 모두 이를 기반으로 한다. 난 분수에 넘치는 일이나 내 능력 범위 밖의 일은 하지 않는다. 이는 성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런 신분과 지위, 권력을 가진 내가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궁금해한다. 그는 내가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파악하고 있어야 더 높은 신분과 지위, 더 뛰어난 능력과 더 많은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이나 능력은 하나님이 내게 준 만큼 가질 수 있는 것이지 내가 쟁취하거나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권력과 능력, 전능은 작은 육신 하나로 대표할 수 없다. 이 일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면 네 이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 아직도 이 문제를 간파하지 못한다면 몹시 무지몽매한 것이다. 나는 많은 일을 물어보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다 알고 있지 않겠느냐?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알고 있겠느냐? 모든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겠느냐? 모든 사람이 각자 하나님을 몇 년씩 믿었는지 알고 있겠느냐? 이런 것들은 알 필요 없다. 모든 사람의 내적 상태를 알고 있으면 그만이다. 모든 사람이 무엇이 모자라는지, 생명 진입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모든 사람이 어떤 진리를 들어야 하는지, 모든 사람을 어떤 진리로 양육하고 모든 사람에게 어떤 진리를 공급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만 알면 충분하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본연의 일이 아니겠느냐? 해야 할 본연의 일, 즉 해야 할 말, 해야 할 사역을 알고 있다면 이성적인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이성은 어떻게 생긴 것이겠느냐? 성육신 하나님이 이 정도 이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만사 만물을 가늠하는 이 정도의 기준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진리를 얘기하겠느냐? 성육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과 싸우고 지위를 다툰다면 큰일이 난 것 아니겠느냐?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그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런 일은 절대 발생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늘 이렇게 걱정하며 말한다. “당신은 늘 뒤에서 저희에 대해 물어보고 연구하시나요? 하나님께서는 늘 저희가 마음속으로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바라보는지 추측하시나요?” 내가 왜 쓸데없이 그런 일들을 생각하겠느냐! 그런 것들을 생각해서 뭐 하겠느냐? 그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감찰 범위 안에 있다. 하나님의 영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 사역하고 성육신은 더더욱 일정한 범위 안에서 사역한다. 성육신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진리의 출구이자 선포이다. 이 단계에서 하는 사역은 이 단계를 대표할 뿐 전 단계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성육신 하나님은 이 시기와 이 범위 내의 사역만 할 수 있다. 그럼 다음 단계의 사역은 대표할 수 있겠느냐?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건 하나님의 일이다. 손을 길게 뻗지 않고 내 본연의 일을 하고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늘 거들먹거리며 “나는 전능하다! 나는 위대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하나님의 영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이 기간 동안 하려는 사역의 선포나 출구를 대표할 뿐 그가 사역하는 범위, 해야 할 사역은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 네가 “성육신한 그리스도는 전능해요.”라고 말한다면 이 말이 옳겠느냐, 아니면 틀리겠느냐? 반은 옳고 반은 틀리다. 하나님의 영은 전능하지만 그리스도가 전능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말해야 표준적이고 정확하며 사실에 부합한다. 나는 어떤 이성을 갖춰야겠느냐? 남들이 내가 하나님이라고, 내가 하나님 자신이라고, 내가 성육신이라고 한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영을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느냐? 그럴 수 없다. 설사 하나님이 내게 그런 권력과 능력을 준다고 해도 나는 대표할 수 없다. 내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은연중에 모독하는 것 아니겠느냐? 육신은 제약이 크디크다! 그렇게 인식해서는 안 된다. 이 주제는 그런 관점에서 다루면 안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런 생각과 이런 행사 원칙을 가지고 있고, 매사를 처리할 때 고려하는 사항이 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은 성육신 하나님이 하나님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접촉하지 않았을 때는 일부 환상과 상상, 관념을 가진 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하다가, 접촉하고 나서는 “그냥 사람일 뿐이잖아. 두려워할 게 뭐 있어.”라며 긴장을 풀고 간덩이가 커지며 제멋대로 못되게 군다. 이들을 뭐라고 하겠느냐? 불신파다. 만약 성육신만 믿고 하나님의 영은 믿지 않는다면 너는 불신파다. 하나님의 영만 믿고 성육신은 믿지 않는다면 너는 여전히 불신파다. 성육신과 하나님의 영은 하나이고 일체이다.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 분리되는 일은 더더욱 없으며 제각각도 아니다. 그 둘은 하나이다. 다만 성육신은 반드시 육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사역과 하나님을 대해야 한다. 이는 육신의 일이고 너희와는 무관하다. 이는 그리스도 자신의 일이고 인류와는 무관하다. 너는 “당신도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좋아요, 그럼 우리는 다 사람이고 다 똑같겠네요.”라고 말해선 안 된다. 그렇게 말해서야 되겠느냐? 그러면 문제가 생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당신은 꽤 어울리기 쉬운 사람 같네요. 그럼 그냥 편하게 지내요. 벗이나 친구처럼 대해요. 우리 지음(知音)이 됩시다. 벗이 되자고요.” 이래도 되겠느냐? 이런 자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자이자 불신파이다. 네가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수록, 진리나 사실, 진리 실제를 이야기할수록 그는 너를 무시하는데 이런 자는 불신파이다. 또, 네가 심오한 비밀이나 구호, 도리, 추상적인 것을 이야기할수록, 거들먹거리고 자랑하고 과시할수록 그는 너를 우러러보는데 이런 자 역시 불신파이다. 행동에 원칙이 있고 분수를 아는 사람, 행동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사람,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대할 때 명확하게 선을 긋고 분별하는 사람일수록 그는 미워하고 거들떠보지 않는데, 이런 자가 바로 불신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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