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진리에 공을 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리 원칙을 파악해야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본분과 관련된 각종 업무나 전문 기술을 배울 필요가 있으며, 반드시 간단한 실용 기술을 익혀야 한다. 기술적인 업무는 좀 알고 있지만 어떻게 자신의 본분에 적용해야 할지 몰라 일할 때면 늘 머릿속이 모호하며, 어떻게 하는 게 옳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는 게 잘못이고 원칙에 위배되는지 알지 못한 채 마음이 혼돈 상태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해도 괜찮은 것 같고 저렇게 해도 괜찮은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을 잡지 못하며,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올바른 길인지 알지 못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자신의 내적 상태나 수많은 일에 대한 인식과 판단 기준이 모호해진다. 일하지 않을 때는 뭐든 아는 것 같고 전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막상 현실적인 환경이 닥치면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알지 못한다. 그제야 자신이 원래 아무것도 갖추지 못했으며,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기가 말할 줄 아는 도리는 쓸모가 없어 그저 남과 상의하고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이다. 즉,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근심 걱정에 휩싸인 채 이렇게 해도 틀린 것 같고 저렇게 해도 틀린 것 같아 정확한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제야 진리가 없으면 한 걸음도 나아가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럼 이럴 때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탄 철학과 지식이겠느냐, 아니면 진리를 깨닫는 것이겠느냐? 진리를 깨닫는 것이 핵심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어떤 일을 마쳐도 자신이 없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 모르며, 사역을 마친 후에 어떤 성과가 날지 등 이런 것을 판단하지 못한다. 어째서 판단하지 못하겠느냐? 왜 늘 자신이 없겠느냐? 네가 일을 처리할 때 정말 착실히 원칙을 따랐는지, 네가 실행한 것이 원칙이 맞는지, 진리에 부합하는지 너 자신조차 불분명하고 검증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성과가 조금이라도 나면 자신에게 능력과 밑천이 있다고 생각되어 날아갈 것 같지만, 눈에 띄는 성과가 없고 원칙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면 바로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 ‘하나님은 언제 나를 깨우쳐 주실까? 하나님은 왜 항상 다른 사람만 깨우쳐 주시는 거지? 나는 왜 어떤 영감도, 깨우침과 빛 비춤도 없는 걸까?’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자기 행동의 마음가짐이 옳고, 노력을 기울였다고 여기며 하나님이 열납하고 인정하고 긍정해 주기를 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잘못했다는 말을 듣고 칭찬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이것이 환득환실 아니겠느냐? 자기 분량이 미미하고 패역과 교만함이 너무 많으며 일만 좀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너무 패괴되었다고, 자신은 마귀 사탄이니 하나님에게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끼지만,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성적을 내면 자기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그래도 능력이 있고 성과를 낼 수 있으니 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환득환실 아니겠느냐? 환득환실의 이런 내적 상태는 어떻게 생겼겠느냐? 이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많은 내적 상태와 태도가 생겨나는데, 주요하게는 환득환실의 내적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평소 상태이다. 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에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알지 못한다. 또 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에 본분 이행의 원칙과 기준, 성과가 무엇인지 모르며, 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왜 너에게 노하는지, 왜 너를 칭찬하는지, 왜 네게 관용을 베푸는지 등을 알지 못한다. 이런 일을 다 모르는 것이다. 또 자기가 어떤 위치에 서 있어야 하는지 모르고, 자신의 행동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한 것인지, 합격했다고 할 수 있는지 역시 판단하지 못한다. 때로는 일을 처리하면서 위축되고, 또 때로는 과하게 행동하는 등 늘 불안정한 상태를 보인다. 불안정한 상태는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결국,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일 처리에 원칙이 없고, 일할 때 이리저리 휘둘리며 늘 오류가 생긴다. 일하지 않을 때는 뭐든 아는 것 같고 논리적으로 도리를 말하지만 막상 일이 생겨 처리하라고 하면, 깨달은 진리를 실생활에 적용하라고 하면 길을 찾지 못하고, 어떤 원칙을 적용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건 알아. 또 하나님께 관념이나 오해를 품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그런데 이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줄곧 규례에 맞추려고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게 되지 않는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 말씀 서적을 뒤적이며 찾는 자가 정말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겠느냐? 이는 정말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저 몇몇 도리를 이해한 것이며, 진리의 실제적인 면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는 그가 평소 말하던 것, 이해했다고 생각한 것이 전부 도리임을 의미한다. 네가 깨달은 것이 진리이고 네게 진리 실제가 있다면,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어떻게 해야 원칙 범위 안에 들어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네가 이해한 것이 진리가 아니라 도리라면, 정말 일이 닥쳤을 때 도리에 기대 규례를 지키면 통하지 않을 것이고, 원칙과 실행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측면의 진리를 듣고 이해한 것 같고, 이 말씀들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것 같고,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좀 이해한 것 같아 전부 아는 느낌이겠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실행할 줄 모르고 함부로 규례에 맞추어 일을 망치게 된다. 이는 망신 아니겠느냐? 정말로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일이 닥쳤을 때 실행의 원칙을 찾을 수 있고, 실행의 길이 있으며,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다. 글귀와 도리만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말할 때는 진리를 깨달은 것 같아도 일을 처리할 때는 멍해져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는 글귀와 도리를 늘어놓을 줄 안다고 해서 진리를 깨달은 것은 절대 아니며, 글귀와 도리를 말하는 자는 전부 사람을 미혹하는 사기꾼임을 충분히 입증한다. 남들은 물론이요 자신까지 속이는데, 이는 남을 곤경에 빠뜨리고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지금 너희는 진리를 더 많이 깨닫고 있느냐, 아니면 도리를 더 많이 이해하고 있느냐? (도리를 더 많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겠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해 진리를 묵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과 다 관계가 있다. 하지만 너희가 말한 것은 전부 주관적인 원인이다. 객관적인 원인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사람의 자질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10여 년 동안 설교를 들어도 진리와 도리의 차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규례를 지키는 것과 진리 실행의 차이도 분별하지 못한다. 그는 설교도 열심히 듣고 자세히 분별하기도 하지만, 그 차이를 알아내지 못한 채 언제나 모두가 교제하는 내용이 거의 비슷하고 다 훌륭하고 무척 실제적이라고 생각하며, 아무리 들어도 무엇이 도리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한다. 이는 자질 문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의 자질은 진리 실제에 이를 수 있느냐? 리더 일꾼이 매번 예배 자리에서 교제하거나 평소 너희와 교류하고 접할 때, 너희는 그가 하는 말 중 진리 실제는 얼마나 되고 도리는 얼마나 되는지 알아챌 수 있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은 너희에게 어느 정도 분별력이 있다는 뜻이다. 또 아예 분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은 너희 자질이 부족하지 않다는 뜻이다. 사람의 자질은 몇 가지 등급으로 나뉘는데, 기본적으로는 자질이 부족한 것, 자질이 평범한 것, 자질이 좋은 것, 자질이 뛰어난 것 이렇게 4가지 등급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자질이 부족한 것보다 더 심각하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그런 자는 자질이 전혀 없으며, 무엇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무슨 일을 해도 생각이나 논리, 원칙이 없어 머리가 실타래 같다. 즉, 바보와 다름없는 자로, 흔히 짐승과 같다고 일컫는 부류이다. 자질이 너무 떨어진다면 지적 장애가 있고 정상인의 이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속된 말로 멍청이, 바보, 반편이라고 불린다.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은 지적 장애자에 속하므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을 몇 해 동안 믿고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최소한의 복음 전파 본분조차 이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리 교제도, 복음 증거도 못 하는 것은 자질이 부족한 모습이다. 그럼 자질이 부족한 것에는 또 어떤 모습이 있겠느냐? 여러 해 동안 설교를 들어도 전부 같은 것 같고 비슷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각 진리 사이의 세부적인 차이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도리인지는 더더욱 구분하지 못한다. 간단한 글귀와 도리조차 말하지 못하니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언급할 나위도 없다. 이런 자는 자질이 누구보다 떨어지는 사람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은 설교를 아무리 들어도, 몇 년 동안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며,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자기 인식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몇 년 동안 믿든,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듣든 결국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몇 가지 규례만을 지키면서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일만을 기억하는데, 그나마도 많아지면 기억하지 못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자질이 부족해 진리에 미치지 못하며, 너무 많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껏해야 얕은 도리만을 좀 이해하는 수준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또 흔히 교만해져서 큰소리를 친다. 어떤 이는 “저는 모태에서부터 주님을 믿었습니다. 오래전에 성결해졌고, 세례를 받아 정결케 됐죠.”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인 지 3~5년, 혹은 10여 년이 지나도 똑같은 소리를 늘어놓는데, 이는 자질이 부족한 것 아니겠느냐? 또 어떤 사람은 “제가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고요? 당신들이야말로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겠죠. 저는 이미 오래전에 성결해졌다고요.”라고 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자, 자질이 누구보다 떨어지는 자이다. 이런 사람에게 진리를 교제해 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네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그는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진리 실행인지, 무엇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인지, 무엇이 생명 진입인지, 무엇이 성품 변화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이러한 것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며 거기에 이르지도 못한다. 그저 하나님을 믿으면서 규례를 지키는 것에만 집중한다. 또 속세에서 벗어나 세상을 버리고 마귀와 교류하지 않는 것, 악을 행하지 않고 죄를 적게 짓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지키고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 것, 매사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는 것 등의 일이 기본적으로 종교 신앙의 형식에 머무른다. 그는 하나님 말씀과 진리의 도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며, 들은 게 많아지면 더 혼란스러워져서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에게 하나님이 이번 단계 사역에서 사람에게 어떤 요구를 했는지 물어보면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간단히 도리만 좀 늘어놓을 뿐이다. 이는 자질이 너무 떨어져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주된 모습은 바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력이 없다는 것이다. 즉, 설교를 들어도 글귀와 도리만을 좀 이해할 뿐 새로운 빛을 발견하지 못하고, 일이 닥쳐도 처리할 줄 모르고 진리를 실행할 줄도 모르며 공허한 도리나 늘어놓고 규례만 지키는 것이다. 설교를 들을 때는 이해한 것 같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여전히 규례를 지키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며, 늘 글귀와 도리를 늘어놓으면서 남을 훈계한다. 하나님을 여러 해 동안 믿어 이해한 도리가 많아지면 다른 사람과 교제할 때 인식에 관한 말을 좀 할 수 있고, 완전하고 구체적으로 의미를 말하며, 정상적으로 대화할 수 있지만,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실제인지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자기가 말하는 그런 도리가 진리 실제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이 진리 실제와 관련된 체험, 본인의 인식과 실행 길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하여 진리와 도리는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무리 많은 설교를 들어도 그런 설교 내용에서 실행해야 할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어떤 진리를 갖춰야 하는지 깨닫지 못하며, 스스로를 인식할 줄도 모르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기 위해 어떤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를 알지도 못한다. 또 실생활 속에서 규례와 종교 의식을 지키고 꾸준히 예배에 참석하며 남에게 도리를 늘어놓고 본분 이행에 좀 힘을 쓰는 것 외에 성품 변화나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생명 진입을 이루는 것과 관련된 진리에 전혀 진입하지 못하고 깊이를 더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평범한 것이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이 정도 수준에 이를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20~30년간 믿고도 여전히 도리만 늘어놓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을 10년 넘게 믿고도 도리만 늘어놓는 사람을 접해 본 적이 없느냐? (있습니다.) 그런 자가 바로 자질이 평범한 사람이다.

자질이 좋은 사람에게는 어떤 모습이 있느냐? 자질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길든 짧든, 설교를 듣고 나면 그것이 성경의 말과 차이가 있고, 교계에서 하는 말과 완전히 다름을, 그 도가 더 깊이 있고 자세하며 실제적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인 후 진리를 실행하고 실제에 진입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하며, 실생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할지 훈련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너희는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했을 때, 처음에는 규례만을 지키며 마음속으로 생각한 대로 말하다가 조금씩 설교를 듣고 실제로 체험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종합하여 결국에는 정직한 사람이 되는 진리가 무엇인지, 생명이 과연 무엇인지 등을 체험하고 경험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를 듣고 깨달은 진리를 자기 실생활에 적용하여 자신의 실제로 만들며, 실제적인 체험이 생겨 생명 체험에 점차 깊이를 더하게 된다. 즉, 설교를 들을 때나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그 안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여기에서 진리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공허한 도리도, 한 가지 표현 방식도, 어떤 분야의 이론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실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어려움과 관련이 있고, 자기가 표출하는 갖가지 패괴 성품과 관련이 있다. 그는 이러한 내적 상태를 성찰하여 하나님 말씀이나 하나님이 폭로한 것과 대조한 후 어떻게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는지 깨닫는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좋은 것이다. 자질이 좋은 것은 주로 어디에서 구현되겠느냐? 설교를 들으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고, 그 말이 자신의 실제 내적 상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깨달으며, 그 말이 자기에게 주는 영향은 무엇인지 대조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좋은 것이다. 듣고 이해하며 대조하는 것 외에도 그는 실생활 속에서 실행의 원칙을 파악할 수 있고, 그런 원칙을 실생활 속에서 직면한 모든 어려움이나 닥친 일에 적용할 수 있다. 이는 깨닫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깨닫는 능력이 있는 자야말로 진정 자질이 좋은 사람이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패괴 성품을 표출할 때, 자신의 내적 상태나 그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가 이해한 도리와 대조할 뿐이다. 그는 그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그 본질의 근원이나 진리와 관련된 면을 인식하지 못한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책망과 훈계, 해부와 분석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으면 그 일 자체에 대해 얼마간 인식이 생기지만, 다른 내적 상태나 환경이 닥치면 또 인식하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원칙을 찾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평범한 것이다. 자질이 좋은 사람한테 왜 자질이 좋다고 말하겠느냐? 어쩌면 그도 일이 닥쳤을 때 당장은 실행의 길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설교를 듣거나 하나님 말씀에서 구하여 길을 찾음으로써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게 된다. 그럼 비슷한 일이 닥쳤을 때도 처리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는 규례를 지키지 않고 그 안에서 돌파구를 모색하며, 하나를 보고 열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는 원칙을 찾았고, 그 측면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그 측면의 진리가 가리키는 사람의 내적 상태, 표출, 패괴 성품, 그리고 관련된 사물, 삶 속에서 마주하는 환경 등을 모두 알게 되었으며, 이런 일을 할 때의 원칙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앞으로 비슷한 일이 닥치면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는데, 이는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진리를 깨닫는 자질을 갖춰 팀장이나 리더가 되지만, 어떤 사람은 도리까지만 이해할 수 있어 팀장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원칙을 파악하지 못하고 관리 감독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게 팀장을 시키는 이유는 앞장서고 관리 감독하게 하기 위함이다. 무엇으로 관리 감독을 하겠느냐? 도리나 구호, 지식, 관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원칙으로 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 집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자 최고의 원칙이다. 네 자질이 평범하거나 자질이 너무 떨어진다면 진리를 깨닫지 못할 텐데 어떻게 관리 감독을 하고 어떻게 그 책임을 짊어지겠느냐? 너는 그 사역과 본분을 감당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팀장으로 뽑혔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어떤 사역도 해내지 못해 허울뿐인 팀장으로 있다가 교체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팀장으로 뽑힌 후 진리 원칙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에 사역을 감당하고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 팀장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주요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개중에는 인성이 좋지 않은 소수의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질이 너무 떨어져 본직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도 못한다. 바로 이런 이유이다. 자질이 좋은 사람은 진리 이해든, 어떤 분야의 업무나 전문 기술 학습이든 그 해당 원칙을 파악하고 근원을 알며 실제적이고 실질적인 면을 찾아 자신이 하는 일이나 종사하는 일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정확한 기준과 원칙을 정한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좋은 것이다. 자질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 집의 각 사역에서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맡지만, 자질이 평범하거나 부족한 사람은 그 사역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는 절대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차별하거나 일부 사람을 무시하거나 가리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자질 문제로 관리 감독을 하지 못한다. 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근원은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이냐? 자질이 평범하거나 너무 떨어져서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는 열심히 듣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너무 젊어서일 수도 있으며, 하나님을 믿는 일에 아직 개념이 없고 그리 흥미가 없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다 주된 원인이 아니다. 주된 원인은 자질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자질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얼마나 오래 사역하든,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듣든, 어떻게 진리를 교제하든 갈피를 잡지 못하며, 본분 이행도 차일피일 미루면서 엉망으로 만들 뿐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팀장이 되어 몇몇 사역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는데, 처음 사역을 책임지게 됐을 때는 원칙을 파악하지 못해 몇 번의 실패를 겪지만, 그 후 구하고 자문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깨닫고 원칙을 파악하게 되어 원칙대로 관리 감독하고 혼자 사역을 맡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있는 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원칙을 알려 주어도, 심지어 세부적인 실행의 길을 말해 주어도 들을 때는 이해한 것 같지만 일할 때는 여전히 원칙을 파악하지 못한 채 자기 뜻과 상상대로 하면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원칙에 부합하는지에 관해서는 분명히 말하지 못하고, 하나도 아는 게 없다. 만약 상부에서 물어보기라도 하면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떻게 말하는 게 적절한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상부에 관리하고 지도해 달라고 요구해야만 감을 잡게 된다. 이는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것이다. 자질이 너무 떨어지면 하나님의 요구에도, 진리 원칙에도 미치지 못하고,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은 언급할 나위도 없다.

방금 말한 ‘좋은 자질’ 위에 한 등급이 더 있다. 바로 ‘뛰어난 자질’이다. 자질이 뛰어난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후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체험 속에서 점차 하나님 말씀이 가리킨 각 측면의 내적 상태가 어떤 것인지 체험하고 느끼고 인식할 수 있다. 즉, 공급이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혼자 하나님 말씀에서 실행의 길을 찾을 수 있고, 하나님 말씀이 알려 준 원칙과 방향, 기준대로 스스로에게 요구하는데 오류도 없고 치우친 점도 없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알아 갈 수 있다. 이는 가장 뛰어난 자질이고, 이런 사람이 바로 이해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들 사이에 이런 자가 있더냐? 너희는 지금 이 인류 가운데서 이런 자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생각해 보아라. 성경에는 이런 사람이 있었느냐? (있었습니다. 욥과 베드로가 그러합니다.) 욥과 베드로 모두 그런 사람으로, 인류 가운데서 자질이 가장 뛰어났다. 일단 그들의 인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차치하고 자질만 놓고 본다면, 그 둘은 자질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무엇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하겠느냐?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본 적이 없음에도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한 적이 없는데, 그는 어디에서 체험과 경험, 인식을 얻었겠느냐? 삶 속에서 관찰하고 발견한 후 자세히 음미하여 마음으로 감응을 느끼고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은 것이다. 그는 이러한 진리를 하나하나 깨달았고, 깨달은 후에는 자신이 이해한 대로, 깨달은 진리대로 실행하면서 조금씩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말은 사람이 지키고 실행하고 준행해야 할 최고의 도이다. 후세 사람들이 보기에는 욥이 이 말을 아주 쉽게 실행해 낸 것 같다. 하지만 네가 간단하고 쉽다고 느낀 것은 이 말 안에 담긴 실제적인 면을 인식하지도, 체험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욥은 이 말을 어떻게 얻었느냐? 자신의 실제 체험으로 얻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말을 좌우명이나 진리 원칙으로 삼아 지키고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옳은 생각이지만, 욥은 말이 아니라 오로지 행동에만 집중했다. 그런 행동 원칙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겠느냐? (일상생활 속에서 체험한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이 원칙을 지킬 수 있었겠느냐? (삶 속에서 경험하고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인생의 정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보았고, 사람에게 한 하나님의 사역을 보았다. 그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하나님에게 경외심을 품었으며, 진실한 믿음과 앙망, 진실한 순종과 신뢰의 마음을 갖게 됐다. 그의 경외심은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고 따른 후, 그의 실행과 태도를 종합하여 생긴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행위와 인식, 그리고 일 처리 원칙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보인 태도와 표출, 행위, 그리고 마음 깊은 곳의 본심, 일 처리 원칙 등 그 모든 태도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욥에게 내린 정의이다. 욥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말씀을 듣고 많은 진리를 공급받은 후 스스로의 이해를 통해 조금씩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그에게 명확한 말씀을 하지 않았다.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하나님의 사자뿐이었으며, 그가 들을 수 있었던 것 또한 기껏해야 선조들이 전해 준, 하나님과 관련된 전설이나 이야기뿐이었다. 그가 알 수 있었던 것 역시 그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욥은 그 얼마 안 되는 정보를 통해 삶 속에서 점차 더 많고 더 실제적인 것들을 인식했으며, 하나님에 대해서도 점점 큰 믿음과 진실한 경외가 생기게 되었다. 이 두 가지가 생긴 후 욥의 진실한 분량과 자질이 보였다. 우리는 욥에게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인류가 구원받는 것과 관련된 이 수많은 진리는 사실 정상 인성의 사유와 자질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상생활 속에서 조금씩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욥이 바로 그 사례로, 그는 실제적인 것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느냐? 시련을 겪으면서 실증한 최고의 좌우명이자 최고의 인식이었다. 그 좌우명과 최고의 인식은 무엇이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인류 가운데 이 일을 욥처럼 진실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욥과 같은 인식에 이른 사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지금 사람이 이해한 것은 도리뿐이다. 위의 말은 욥이 체험한 것으로, 후세 사람들은 이 말을 할 수는 있어도 마음속에 그러한 인식이 없다. 욥도 처음에는 이런 인식이 없었다. 하지만 이 말은 그에게서 비롯되었으며, 그가 겪고 체험한 것으로, 욥에게는 그런 실제가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욥의 말을 어떻게 배워서 따라 하든, 도리만을 이해할 뿐이다. 어째서 도리에 불과하다고 하겠느냐? 한 측면으로는 사람이 실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사람은 아예 그러한 체험이 없으며, 체험 속에서 얻은 그런 인식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그 인식은 공허하다. 네가 아무리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저는 하나님의 모든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외칠지라도 사실 앞에서 그것이 하나님의 행사임을 마음으로 인정할 수 있겠느냐? 만약 하나님이 거두어 가고 파괴했다면, 너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겠느냐? 그러기 힘들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하기 어렵겠느냐? 너는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한 본뜻도, 하나님의 주재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며, 피조물이 서야 할 위치와 지녀야 할 순종, 그리고 해야 할 일을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것을 모르면 네가 입으로 욥이 한 말을 전해 봤자 그것은 어느새 빈말, 수식어, 스쳐 지나가는 말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네가 욥과 똑같은 말을 해도 이 말에 대한 욥의 인식과 이해, 그리고 이 말을 할 때의 심정은 너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심경이다. 욥은 평소에 이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그의 모든 것을 거두어 갔을 때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의 행사를 찬미했다. 반면, 너는 수시로 이 말을 하는데 만약 하나님이 네 것을 거두어 간다면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엎드려 기도할 수 있겠느냐? 너는 순종하지 못할 것이다. 설사 표면적으로는 “순종하자. 이건 하나님의 행사잖아. 사람은 이렇다 할 능력도 없고, 반항도 할 수 없는걸.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순응하자.”라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진실한 순종이겠느냐? 일단 네 이런 소극적이고 반항적이며 반발적인 정서가 도대체 어떤 성질인지는 차치하고, 네 그런 태도는 욥과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차이가 무척 크다. 이것이 바로 진리 실제를 갖춘 자와 갖추지 못한 자의 차이이다. 또한, 이는 사람의 체험과 깨달음이 생명의 자연스러운 표출이 된 것과 도리만 이해했을 뿐 실제가 없는 것의 분명한 차이이다. 일이 닥치지 않았을 때, 사람은 누구나 욥의 그 말을 입에 올리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대다수가 욥의 그 말을 하지 못한다. 이는 그가 단지 도리만을 이해했을 뿐, 그 말이 그의 생명이 되지 않았으며, 그에게 일이 닥쳤을 때 사상과 태도를 주도하지도 못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말을 생명으로 삼은 사람은 일이 닥쳤을 때 이 말이 그의 일상생활에서 얘기하는 좌우명일 뿐만 아니라 그가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진실한 태도, 나아가 하나님을 대하는 진실한 태도임을, 이 말은 그가 외치는 구호가 아니라 그의 생명의 체현임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진리를 깨달은 것과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이제 베드로에 대해 살펴보자. 왜 베드로의 자질이 좋았다고 하겠느냐? 베드로는 예수가 선포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예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은혜시대에 살았다. 예수가 은혜시대에 전한 구속의 도는 율법시대보다 높았으며, 생명 진입 측면에 관한 기본적인 진리와 관련이 있었고, 또한 성품 변화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진리와 관련이 있었다. 예컨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배치에 순종하는 것, 사람이 패괴 성품을 표출할 때의 대처법 등과 관계되었다. 예수는 이러한 것을 길게 말하지 않았고, 그렇게 체계적으로 말하지도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언급했다. 그것은 당연히 욥의 시대보다 훨씬 많았지만 지금 이 시대보다는 훨씬 적었다. 성경에 사람의 성품 변화,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마음속 깊은 곳 패괴된 본질, 및 패괴 성품의 표출과 관련된 측면의 진리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예수는 분명 이런 이야기를 어느 정도 했다. 다만 사람이 거기에 이르지 못해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다. 예를 들어, 예수가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5)라고 답했다. 이는 어떤 성격의 말이냐? (교만하여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는 말입니다.) 이는 바로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여 교만한 말을 한 것으로, 자기 인식과 관련이 있다. 닭이 운 후에 베드로는 무엇을 깨달았느냐? (자신이 큰소리를 쳤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마음속으로 느낀 바가 있지 않았겠느냐? (있었습니다.) 이 일이 벌어진 후, 그의 첫 번째 반응은 무엇이었느냐? (후회하고, 마음속으로 자책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반응은 자책과 후회였다. ‘주님의 말씀이 맞았어.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그저 바람이나 이상, 구호에 지나지 않았어. 내게는 그런 분량이 없었던 거야.’ 예수가 체포되는 상황 앞에서 베드로는 겁을 먹고 두려워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저자는 너희의 주가 아니냐? 저자를 모르느냐?”라고 질문했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생각했겠느냐? ‘맞아. 나는 저분을 알아. 하지만 여기에서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나도 잡혀가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는 겁을 먹었기에, 또 고난을 치르고 예수와 함께 잡혀갈까 봐 두려워했기에 인정하지 않았다. 두려움이 믿음을 이긴 것이다. 그럼 그의 믿음은 진실한 것이었느냐, 아니면 거짓된 것이었느냐? (거짓된 것입니다.) 그때 그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는 과거 자신의 말이 일방적인 착각이었음을, 그것은 그의 진실한 믿음이 아니라 빈말이자 구호, 도리였음을, 자신에게는 진실한 분량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럼 그는 자신에게 진실한 분량이 없다는 사실을 언제 깨달았느냐? (사실이 닥쳐서 드러났을 때 깨달았습니다.) 사실이 닥쳐 드러났을 때 자책하고 후회하면서 깨달았다. ‘이제 보니 내 믿음과 분량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보잘것없었구나. 주님의 말씀이 맞았어. 그때 내가 주님께 한 말은 허풍이었어. 그건 진실한 믿음이 아니라 한때의 충동이었던 거지. 일이 닥치자 나는 겁을 먹고 고난을 겪지 않으려고 했어. 그것은 사심을 품고 나 스스로 선택한 거야. 나한테는 순종도,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어. 내 믿음과 분량은 겨우 이 정도였다고.’ 그의 후회는 이런 생각으로 연결되지 않았겠느냐? 그가 후회했다는 것은 이미 스스로를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분량과 내적 상태, 믿음을 정확히 판단했다. 신약 성경에는 베드로가 주를 세 번 부인했다고만 쓰여 있을 뿐, 그가 어떻게 후회하고 돌아섰는지, 어떻게 변화했는지 등의 체험 간증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사실, 베드로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지만, 성경 편집자들이 발췌하지 않았다. 이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으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두 전도와 간증을 중시하고 생명 체험과 관련된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사도들이 어떻게 전도 사역을 하고 어떻게 고난을 겪었는지에만 관심을 가질 뿐 사람의 생명 진입이야말로 가장 핵심이라는 사실은 몰랐다는 것을,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 편집자들은 베드로의 일을 너무 간단하고 두루뭉술하게 기재했지만, 바울의 일은 오히려 매우 많이, 자세하게 적어 놓았다. 이는 성경 편집자들이 편견을 갖고 있었으며, 진리란 무엇인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그들은 바울을 숭배했기에 바울의 서신을 더 많이 발췌하여 수록했고, 베드로의 서신에는 매우 적은 지면만 할애했다. 그런 식으로 성경 편집에 원칙적인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이로 인해 2천 년 동안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바울을 숭배하고 본받게 됐고, 종교계 전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을 걸으면서 적그리스도에게 통제받는 종교 왕국이 되었다. 그들은 베드로의 이 훌륭한 간증을 전부 무시한 채 베드로의 서신 두 개, 베드로전후서만을 기재했다. 베드로가 과연 어떻게 체험했는지,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깨우쳤는지, 예수는 그에게 현현하여 어떤 말을 했는지, 그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을 어떻게 받아들여 마지막에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혔는지, 베드로가 그 단계까지 어떻게 걸어갔는지, 그러한 생명 성품의 변화를 어떻게 얻었는지, 그런 믿음과 순종에 어떻게 도달했는지 등의 체험 과정은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장 가치 있는 내용을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으니 실로 너무나 유감스럽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베드로는 주를 세 번 부인했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혔다. 이 두 가지 일을 종합해 보면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주를 세 번 부정할 때부터 마지막에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힐 때까지 그것은 험난한 과정이자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과정 아니겠느냐? 그것은 어떤 과정이었겠느냐? (사람이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를 이루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렇다. 사람의 성품 변화는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헌신하며, 하나님의 모든 지배에 기꺼이 순종하는 생명 여정이다. 생명 체험은 바로 이런 과정이며, 절대 극적인 것이 아니다. 처음에 자신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못할 때부터 마지막에 용기와 믿음을 갖고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힐 때까지 베드로의 믿음과 성품, 순종에는 얼마나 큰 변화 과정이 있었겠느냐! 분명 성장 과정이 있었다. 이 성장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지금의 사람은 알 필요가 없다. 지금 말한 이런 내용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면서 깨달아야 할 진리로, 하나님이 오늘 사람에게 분명히 이야기하고 공급했기 때문이다. 그럼 베드로는 어떻게 체험했겠느냐? 예수가 떠난 후, 어떻게 체험해야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지 그에게 분명히 알려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이 명확한 말씀으로 공급해 주지 않았던 그 시대에 그는 아무 원망도 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는 일도 없이 기꺼이 순종하는 분량과 믿음을 이루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는 도대체 어떤 진리를 얻었느냐? 또 어떻게 얻은 것이냐? 기도하고 구한 후 조금씩 체험하고 모색한 것이다. 물론, 그 기간에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 특별한 은총과 인도를 얻은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이것 외에는 스스로 노력해서 깨달은 것이다. 베드로는 그 과정에서 모호하기만 했던 자기 인식이나 하나님의 뜻, 사람이 진입해야 하는 각 측면의 진리를 점차 뚜렷하고 정확하게 알게 되었고, 그 후로는 실제적이고 확실한 실행의 길을 찾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어떤 오류도 없이 절대적으로 순종하게 되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실증을 얻었기에 용기를 갖고 그렇게 실행할 수 있었다. 그 실증은 어떻게 얻은 것이겠느냐? 모색하는 한편, 기도하고 구하여 성령이 역사하고 하나님이 역사하도록 했다. 방해나 징계 없이 성령의 깨우침이 있었고, 평안과 기쁨이 있었으며, 이와 동시에 하나님이 붙들어 주고 축복하고 인도해 주었다. 이렇게 실증을 얻은 것이다. 베드로는 실증을 얻은 후 계속 용기 있게 나아가며 구하고 모색하고 실행했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겪은 후 베드로는 인성 측면, 자기 인식 측면, 성품 측면, 그리고 다양한 환경 속에서 사람의 패괴 성품이 야기하는 갖가지 내적 상태에 대해 점차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정확히 이해한 후에는 이런 일에서 상응하는 실행의 길을 찾는 데에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갖가지 패괴 성품이 다양한 환경 속에서 야기하는 내적 상태를 하나씩 해결했다. 어떻게 해결했느냐? 하나님이 깨우쳐 준 진리와 원칙에 따라 하나씩 해결한 것이다. 물론, 그 기간에 베드로는 수많은 시련과 연단을 겪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어느 정도까지 시련과 연단을 주었겠느냐? 마지막에 그는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배우게 한 순종의 공과를 이해했다. 그럼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어느 정도까지 역사하여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겠느냐? 우리는 전에 베드로의 말 한마디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느냐? (“설령 하나님께서 저를 장난감으로 생각하신다 해도 제가 어찌 기꺼이 달가워하지 않겠습니까?”입니다.) 그렇다. 바로 그 말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사역이나 인도를 체험하고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은 사람을 장난감으로 여기시는 것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는 일의 출발점은 결코 그런 게 아니다. 사람은 인간의 시선과 머리, 지식으로 이 일을 판단하면서 아무래도 하나님은 사람을 장난감처럼 마음대로 갖고 노는 것 같다고, 오늘은 이렇게 하는 게 맞는다고 했다가 내일은 또 저렇게 하라고 한다며 자기도 모르게 ‘아이고, 하나님은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도대체 뭘 하고 계신 걸까?’라고 생각한다. 또 사람은 아리송해지고 갈팡질팡하며,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베드로에게 시련을 주었다. 시련의 최종 성과는 무엇이었느냐? (베드로는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순종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원한 것은 바로 그 결과였으며, 하나님은 그 결과를 보았다. 그럼 베드로의 어떤 말을 통해 그가 순종했고, 그의 분량이 성장했음을 알 수 있겠느냐? 베드로는 어떻게 말했느냐? 베드로는 하나님의 모든 행사와 사람을 장난감 취급 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했느냐? 그의 태도는 무엇이었느냐? (그는 “제가 어찌 기꺼이 달가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 그것이 베드로의 태도였고, 그가 한 말이다. 하나님의 시련과 연단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그 이면의 맥락을 모르며, 체험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체험한 적이 없기에 그 이면의 일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 분명히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함부로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이는 사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시련과 연단을 체험했고, 하나님이 그에게서 많은 것을 거두어 갔으며, 이와 동시에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준 후에는 또 거두어 가고, 거두어 간 후에는 그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한 다음 다시 주었다.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많은 행사가 변덕스러워 보인다. 하나님은 사람을 장난감으로 여길 뿐 사람을 존중하거나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 같고, 사람의 삶은 장난감처럼 존엄이 없는 것 같다. 또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주지 않고 무슨 말이든 다 해도 되는 것 같다. 너에게 뭔가를 줄 때는 “네 그런 행동은 상을 받아 마땅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라고 하고, 거두어 갈 때는 또 다른 말을 하니 말이다. 그럼 이 과정에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라는 것도, 하나님 행사의 성질을 알아내라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 이 과정에서 더 존엄 있게 살라는 것도 아니다. 네게 이런 것을 선택하게 하지는 않으며, 네 역할은 이런 게 아니다. 네 역할은 무엇이겠느냐? 너는 체험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도,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지도 못한다면 네 유일한 선택은 순종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순종하기가 쉽겠느냐? (쉽지 않습니다.) 순종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이 바로 네가 배워야 할 공과이다. 만약 순종하기 쉽다면 공과를 배울 필요도,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순종하기가 쉽지 않기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네게 시련을 주는 것이고, 너를 장난감처럼 마음대로 대하는 것이다. 언젠가 네가 쉽게 순종하게 되면, 아무 어려움도, 장애물도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즐겁게 순종하게 되면, 너 자신의 선택이나 의도, 기호를 갖지 않게 되면 하나님은 너를 장난감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네가 “하나님이 저를 장난감으로 여기시면 제 삶에는 존엄이 없어요. 저는 이런 상황에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순종하지 않겠다고요.”라고 말한다면, 그날은 하나님이 너를 버리는 날이 될 것이다. 반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고, 하나님은 늘 제게 감추시지만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옳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저는 기꺼이 순종할 것입니다. 순종할 수 없어도 그런 태도를 지녀야 하고요. 원망을 품거나 저 자신의 선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피조물이고, 제 본분은 순종하는 것이니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되겠죠.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하나님의 행사는 모두 옳습니다. 하나님의 행사에 어떤 관념도, 상상도 품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피조물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니니까요. 하나님께서 주시면 감사드리고, 주지 않으시거나 혹은 줬다가 다시 거두어 가실지라도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사는 다 제게 도움이 됩니다. 설령 어떤 이로움도 없다고 할지라도 저는 순종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면, 네 분량이 이 정도 수준에 이른다면 “제가 어찌 기꺼이 달가워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베드로의 말이 이룬 성과와 같지 않겠느냐? 이런 분량을 갖추어야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이어서 사람의 자질 측면에 관해 교제하겠다. 한 사람이 자질을 갖추었는지를 판단하려면 그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과 태도를 이해하는지, 자신이 서야 할 위치와 준수해야 할 원칙, 지녀야 할 태도를 아는지를 보면 된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모두 이해한다면 자질이 있는 것이다. 반면, 네가 이해한 것이 실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배치한 이 모든 것과 무관하다면 너는 자질이 없거나 부족한 것이다. 베드로와 욥의 진실한 분량, 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궁극적으로 얻고 수확한 것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이냐? 그들은 절대로 지금 너희가 누리는 것처럼 항상 진리를 교제해 주고, 공급하고, 붙들어 주고, 도와주고, 관리하고, 감독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이 깨달은 진리는 대부분 혼자 인식하고 체험한 것, 일상생활 속에서 스스로 조금씩 이해하고 체험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뛰어난 것이다. 사람이 이런 자질도 없고, 진리와 구원받는 일을 대하는 이런 태도도 갖추지 못했다면 매사에 진리를 구하지 않고 진리 실행에 집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진리를 얻을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욥과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부러워하지만, 한동안 부러워하다가 곧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고, 자기 역시 일이 닥치면 욥이나 베드로가 했던, 성경에 등장한 말들을 뱉을 수 있을 거라며 그 일을 간단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복음서를 제외하면 신약 성경에 가장 많이 실려 있는 것은 바울의 서신이다. 또한, 같은 시기 바울과 베드로가 한 사역이 비슷한데도 바울의 이름이 베드로보다 훨씬 유명하다. 이 두 가지 일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이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을 알 수 있다. 후세 사람들은 바울의 서신 중 많은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바울의 명언으로 스스로를 고취시킨 결과 그들은 그릇된 길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심지어 수많은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반면, 베드로는 잘 등장하지도 않고 글을 통해 어떤 주장을 한 일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심오한 도리나 거창한 구호와 이론으로 당시 형제자매를 가르치고 돕는 일도 없었고, 대단한 이론으로 후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일도 없었다. 그저 착실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만족게 하기를 추구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그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의 차이다. 결국, 바울은 적그리스도의 길을 걸어 멸망했지만, 베드로는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걸어 온전케 되었다. 그들이 걸어간 길에서 너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을 기뻐하지 않는지, 사람의 어떤 표출과 태도를 기뻐하지 않는지, 사람이 걷는 길은 어떤 길인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중시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바울에게 자질이 있었느냐? 바울의 자질은 어떤 수준이었느냐? (뛰어났습니다.) 너희가 이렇게 많은 도를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구나. 바울의 자질이 뛰어났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질이 부족했습니다.) 어째서 바울의 자질이 부족했다고 하느냐? (그가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울 역시 예수가 전하는 도를 들은 적이 있으며, 당연히 그가 사역하는 기간에도 성령 역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많은 사역을 하고, 그렇게 많은 서신을 쓰고, 그렇게 많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왜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도리만을 읊었겠느냐? 이는 어떤 자질이겠느냐? 이게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이 밖에도 당시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고 주의 제자들을 체포했다. 그 후 예수가 하늘에서 큰 빛으로 바울을 치자 바울은 자신에게 닥친 그 큰일을 어떻게 대하고 인식했느냐? 그는 베드로의 인식법과 달랐다. 그는 ‘주님이 나를 치셨어. 나는 죄를 지었으니까 빨리 사역을 많이 해서 만회해야 해. 공을 세워 과오를 덮으면 상을 받을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가 스스로를 인식했느냐? 그는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했으며, “제가 예수님을 대적한 것은 본성이 악독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적그리스도의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대적했으니 좋은 사람이 못 됩니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이런 인식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의 서신에는 이 일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 그는 이 일에 어떤 관점을 가졌느냐?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역하게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큰 빛이 자신을 비췄기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나님께 중용되기 시작한 거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그것이 상과 면류관을 받기 위한 가장 강력한 증거이자 밑천이라고 여겼다. 이 밖에, 그는 속으로 자신에게 가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가시는 무엇이었느냐? 그가 광적으로 예수를 대적했기에 하나님이 그를 징벌하여 병이 나게 한 것이다. 그는 이 일을 어떻게 대했느냐? 그의 마음속에는 늘 병이 있었다. ‘그 일은 내 인생 최대의 과오야. 하나님이 과연 내 죄를 사해 주실지 모르겠어. 다행히 예수께서 목숨을 살려 주시고 복음 전파 일을 맡기셨으니 속죄의 기회가 온 거야.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해야 해. 어쩌면 죄 사함을 받는 건 물론이고, 면류관과 상을 받을지도 모르잖아. 그럼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그는 항상 그 가시를 떨쳐 버리지 못해 마음이 혼란스러웠고, 늘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 큰 과오를 어떻게 만회하지? 어떻게 해야 이 잘못을 상쇄해서 내 앞날이나 면류관을 얻는 데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려면 많이 사역하고 대가를 치르고 서신을 쓰고 뛰어다니며 사탄과 싸우고 아름답게 증거해야 해.’ 그는 이 일을 이렇게 대했던 것이다. 그에게 뉘우치는 마음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는 전혀 뉘우치지 않았고, 나아가 스스로를 인식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없었다. 이는 바울이라는 사람이 자질에 문제가 있으며,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한 가지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그의 인성과 추구 때문이고,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의 자질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것을 깨닫지 못했고, 다음과 같은 의식도 없었다. ‘사람은 사탄에게 깊이 패괴되어 그 본성이 너무 나쁘고 사악하구나. 사람에게 사탄과 적그리스도의 본성이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려는 근본 원인이니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께 구속되어야 해. 그럼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구속을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고, 자기가 왜 예수를 대적하고 정죄하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비록 그가 스스로를 괴수라고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 일에 대해 조금도 반성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어떻게 하면 그 큰 죄를 상쇄할지, 어떻게 하면 죄를 지은 상황에서 공을 세워 속죄하고 결국에는 여전히 면류관과 상을 받을 수 있을지만 고민했다.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는 그 속에서 진리를 깨닫거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진리를 이해하는 측면에서 바울은 누구보다 뒤처지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바울의 자질 또한 가장 뒤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구원에 이르려면 반드시 합격한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최소한 자질이 평범하기라도 해야지 너무 떨어져서는 안 된다. 즉, 반드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진리를 어느 수준까지 이해하든, 최소한 이해한 진리 위에서 스스로를 인식해야 하며, 어떻게 진리를 실행할지 알아야 한다. 그러면 구원받을 수 있다. 왜 그렇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겠느냐? 일상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일을 진리와 연관 지을 수 있고, 하나님 말씀과 결부시켜 바라보고 대할 수 있으면, 하나님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다. 그럼 이것을 기초로 하나님 말씀의 심판,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이게 된다. 만약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말씀의 심판,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일 자격조차 없을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기 전에 적어도 일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를 지녀야 하고, 조금은 변화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행사를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 관점으로 대할지 알아야 한다. 이는 모두 진리와 관계가 있다. 사람이 단순한 종교적 구호나 종교 의식, 규례로 제멋대로 대한다고 해서 진리와 관계되는 것도 아니고, 또는 사람에게 몇 가지 좋은 행위가 있다고 해서 진리 실행과 관계되는 것도 아니다. 그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네가 인식하고 체험하고 마주하는, 네 주변의 일에서 너는 지켜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마음속으로 알아야 한다. 이것이 진리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 밖에, 하나님이 네게 시킨 일, 하나님이 너를 대하는 방식과 태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있어 너의 태도와 관점은 반드시 진리와 관련되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 진입을 이룰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네게 역사할 수가 없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규례를 지키고 도리를 늘어놓으며 외식하는 종교인들을 보아라. 그들의 외적 행위는 무척 훌륭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들에게 역사하지 않겠느냐? 그들이 행한 일, 그들의 모든 좋은 행위는 진리와 관계가 없으며, 그들이 겨우 이룬 행위상의 변화 역시 성품 변화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요구와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가능하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걷는 길에 관해 말하든, 아니면 사람의 인성과 자질에 관해 말하든 사람은 최소한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을 지녀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반드시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야 하며,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자질을 어떻게 판단해야겠느냐? 진리를 대하는 태도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에 근거해 판단해야 한다. 전문적인 업무는 매우 빨리 배우지만 진리만 들었다 하면 멍해지고, 졸리고, 속으로 어리둥절해서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혹자는 자질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으면 인정하지 않고 자신은 교양이 높으니 자질이 좋다고 생각한다. 교양이 높다고 자질이 좋다는 뜻이겠느냐? 그것은 자질이 좋다는 의미가 될 수 없다. 사람의 자질을 어떻게 판단해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대한 이해도를 통해 사람의 자질을 판단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말재간이 좋고 머리를 잘 굴리며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 매우 능숙하지만, 설교를 들을 때는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체험 간증을 얘기할 때 글귀와 도리만을 늘어놓아 문외한처럼 보이며,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느낌을 준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집을 위해 일을 처리한다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에게 진리 원칙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이제 너희는 이 일이 이해되었을 것이다. 하나님 집을 위해 일을 처리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본분 이행이다. 본분 이행이라고 하면 진리,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되고 사람됨의 원칙, 다양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 및 방법과 관계가 있다. 이 문제들은 다 사람이 본분 이행에서 성과를 내고 합격할 수 있을지 여부와 관계된다. 본분 이행과 관련된 이 문제들이 진리와 관련되지 않겠느냐? 만약 진리와 관련되는데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그저 너의 그 잔머리에 기댄다면 문제를 해결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몇 가지 일에서 실수가 생기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은 네가 행한 일이 진리와 관련되지 않고 순전히 외부의 일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외부의 일을 처리한다고 해도 원칙이 있어야 하고, 모두의 눈에 적절하게 보여야 한다. 만약 너에게 어떤 일을 원칙대로 처리하라고 했는데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돌발 상황이 벌어진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할 것이다. 너는 경험에 따라 그렇게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경험에 따랐다가 공교롭게 방해와 교란을 일으켜 일을 망쳤다면, 이는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겠느냐?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순수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원칙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리나 원칙과 관련된 일만 만나면 처리하지 못하고 자기 뜻이 튀어나오니, 결국 교회 사역과 하나님 집의 이익에 해를 끼치고 너 자신도 못난 꼴을 보이는 것이다. 사람의 경험과 수단으로 문제를 처리하는 게 소용이 있느냐? (소용없습니다.) 어째서 소용없겠느냐? 사람의 경험과 수단은 진리가 아니며, 하나님의 선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사람의 경험과 수단으로 문제를 처리한다면, 이는 잘난 척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이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궤변을 늘어놓는다. “저는 이 일에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속으로는 깨달았지만 많이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죠. 조금만 더 노력하고 고민한다면 저도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예전에 이방인들과 일을 처리하고 교섭할 때는 이런저런 방법과 수단을 써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니 어떻게 할지 몰라서 제 뜻대로 처리한 겁니다. 그러니 실수가 나오는 것도 정상적이죠.” 그가 스스로를 인식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 인식하지 못했겠느냐? 이것은 진리와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그는 이 일에서 진리를 구하지 않고 어떻게든 감추려고만 했다. 자신은 행위에서 실수와 착오가 있었을 뿐 진리와는 관계가 없다고, 진리를 깨닫지 못해 패괴 성품대로 일을 처리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여겼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일이 닥쳤을 때 계속 원인을 찾고 핑계를 대면서 자기는 그저 실수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첫 번째 반응은 진리를 구할 줄 모르는 것이고, 두 번째 반응 역시 진리를 구할 줄 모르는 것이며, 세 번째 반응도 여전히 진리를 구할 줄 모르고 스스로를 인식할 줄 모르는 것이다. 이는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지적하고 폭로하고 교제해도 그는 자신이 어긴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자신이 실행해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아무리 지적해도 이런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즉,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네가 아무리 명확히 진리를 교제해 줘도 그는 그것이 진리임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만의 이유와 변명, 혹은 실수나 착오로 사실을 감추고, 자기가 진리를 어기고 패괴 성품을 표출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즉,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어떤 패괴 성품을 표출하고 얼마나 많은 패괴된 내적 상태가 생길지라도 그는 자기가 드러낸 패괴 성품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며, 자신의 패괴 본질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또한, 이 일에서 어떻게 진리를 구하고 스스로를 인식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러한 것을 하나도 모른다. 영적으로 무감각하여 이런 일에 전혀 느낌이 없는 것이다. 이게 바로 자질이 부족한 모습이다.

이제 몇 가지 예에 결부시켜 사람의 자질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교제해 보자.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은 일 처리를 질질 끌고 대충 건성으로 한다고 얘기하면, 자질이 좋은 사람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자신에게도 그런 내적 상태가 있고, 몸이 안 좋을 때나 소극적이고 게으를 때 늘 그런 내적 상태와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게다가 머릿속에 일부 장면이 떠오르면서 자기가 어떤 일에서 늦장을 부리고 건성으로 했는지 대조해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의 패괴된 실태를 폭로하고 있고, 그것이 사람의 패괴 성품과 관련이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 말씀은 진리라고 인정한다. 그는 오해나 관념 없이 전부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게 바로 자질이 좋은 것이다. 그가 이 말을 듣고 맨 처음 보인 반응은 스스로에게 대조해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에게도 그런 내적 상태가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말씀을 자신의 내적 상태나 일상생활과 연결 지은 후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그 내적 상태를 분명히 알 수 있으며,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 자질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이런 반응을 보인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어떻겠느냐? ‘늦장을 부린다’라든가 ‘대충 건성으로 한다’라는 말만 해서는 안 된다. 그의 모습을 폭로하면서 그의 행동과 결부하여 직접적으로 지적해 줘야 한다. “당신은 평소에 흐지부지하고 진지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의 본분 이행은 대충 건성으로 하는 건데 왜 자각하질 못하죠? 몇 번을 말해 줬습니까? 그게 바로 대충 건성으로 하는 거고 늦장을 부리는 거라고요.” 이렇게 지적해 주면 그는 자신이 어떻게 늦장을 부리고 건성으로 했는지 반성할 것이다. 진정으로 반성하고 인식한 후에는 자신의 잘못임을 인정하고 고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일정한 일과 일정한 내적 상태뿐이다. 그는 네 말이 자기 상상과 맞아떨어져야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평범한 것이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에게 사역을 하려면 공을 들여야 한다. 사실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해야 그가 진심으로 탄복할 수 있다. 그럼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내적 상태를 보이겠느냐?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나사가 빠져 있고 생각이 단순해서 어떤 일을 직면하든 밝히 알지 못하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 또 분명히 말해 주거나 직접적으로 알려 주는 사람이 없다면 혼자서는 생각해 내지 못한다. 그래서 자질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더 직설적으로 말해 줘야 하며, 예를 들고 사실에 초점을 맞춰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해 줘야 한다. 그래야 성과가 좀 난다. 너는 “그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건 늦장을 부리고 건성으로 하는 겁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럼 그는 가장 먼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느냐? “제가요? 제가 늦장을 부렸다고요? 저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본분 이행에 관한 일을 생각합니다. 먼저 본분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 외출할 때도 어떻게 해야 그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지 생각하죠. 저는 늦장을 부리거나 건성으로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이 일에 적잖이 공을 들였다고요!” 그의 첫 번째 반응은 먼저 네 말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는 어떤 인식도 하지 못하며, 늦장을 부리면서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자신의 내적 상태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그에게 반드시 어떤 태도가 늦장을 부리고 건성으로 하는 것인지 설명해 주어야 한다. 진심으로 탄복하게 설명해 줘야 받아들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외부의 일을 제대로 못 하고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진리나 원칙 실행,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된 일이라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더더욱 이르지 못할 것이다. 네가 아무리 말해도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말을 많이 할수록 그는 더 혼란스럽고 어지럽다고 느껴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자가 바로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이다. 진리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이런 모습을 보인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소용이 없다. 네가 아무리 말해도 그는 알아듣지 못하며, 기껏해야 도리와 규례에 관련된 것들만 좀 이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에게는 진리를 자세히 교제해 줄 필요가 없다. 그저 간단히 어떻게 하라고 시킬 수밖에 없다. 그가 그것을 지킬 수만 있어도 괜찮은 편이다.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은 이해력이 전혀 없고, 심지어는 영원히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사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해 줘도 그는 대조하지 못한다. 이것을 가리켜 자질이 부족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는 것에 대해 자질이 좋은 사람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아라. 다른 사람들이 본인이 거짓말하고 기만하는 내적 상태를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했는지 이야기하고, 거짓말한 내적 상태와 사례를 말하면, 자질이 좋은 사람은 듣고 나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내적 상태에 대조하면서 자기가 어떤 일에서 거짓말을 했는지, 일할 때의 속셈은 어떤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또 그는 자기가 일상생활 속에서 드러낸 것에서 자신의 속셈과 동기, 생각을 성찰함으로써 자기가 한 어떤 말이 거짓말이고 간사함을 내포한 말인지 알아낸다. 그는 다른 사람의 체험 간증을 듣고 도움을 얻으며 수확을 거둔다. 몇 가지 원칙만 말해 줘도 그는 이해하고, 적용할 줄 알며, 그 후에는 그 말을 진리 원칙으로 삼고 자신의 실제로 만들어 조금씩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체험 간증을 들을 때, 명확한 사례는 스스로에게 대조할 수 있지만, 명확하지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표현해 내지 않는 것들은 대조하지 못한다. 이 밖에, 진리 원칙에 대한 이해도 얕아서 마치 도리와 같고, 자질이 좋은 사람보다 이해도가 많이 떨어진다. 그럼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어떻겠느냐? 다른 사람의 간증을 들을 때, 상대가 어떤 것들이 거짓말이고 빈말인지, 어떤 것들이 간사한 내적 상태인지 아무리 해부해도 그는 스스로에게 대조해 보지 못하고, 자신을 돌아보거나 인식하지도 못한다. 그는 거짓말하고 간사하게 구는 자신의 내적 상태를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너무 정직해서 거짓말할 줄 모른다고 생각한다. 누가 거짓말로 기만해도 분별할 줄 몰라 쉽게 속아 넘어가며, 다른 사람이 교제하는 진리 원칙에는 더더욱 이르지 못하고, 이해력이 전혀 없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모습이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자질의 사람 중 성품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누구겠느냐?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겠느냐? (자질이 좋은 사람입니다.) 자질이 좋은 사람은 진리 실제에 더 빨리, 더 깊게 진입한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진입이 늦고 얕은 편이며,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아예 진입하지 못한다. 이런 차이가 있다. 보아라,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느냐? 바로 사람의 자질에 있고,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진리를 사랑하고 자질이 좋은 사람은 진리 실제에 무척 빨리 진입하여 생명을 얻는다. 반면,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고집스럽고 무감각하여 진리 진입도, 생명 성장도 느리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어리석고 완고하고 교만하고 멍할 뿐만 아니라 무감각하고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반응이 느린 데다가 진리에 대한 이해도 굼뜨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늘 도리만 말하고 구호만 외치며 규례만 지키기에 생명이 없다. 또 진리를 깨닫지 못하므로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도 못한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는 사람은 내면에 생명이 있겠느냐? 생명이 없다. 생명이 없는 사람은 일이 닥쳤을 때 자기 뜻대로 어리석게 행동하며 이쪽에 치우쳤다 저쪽에 치우쳤다 하면서 정확한 실행의 길을 얻지 못한다. 또 마음이 늘 갈팡질팡하고 무기력해서 더없이 가엾어 보인다. 최근 일이 닥쳤을 때 갈팡질팡한다는 사람들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이렇게 많은 도를 들어 놓고 왜 아직도 갈팡질팡한단 말이냐? 그들은 정말 갈팡질팡하는 표정을 보이고, 무감각하고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다. 혹자는 “제가 어디가 무감각합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 유행하는 것들에 제가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데요. 컴퓨터니, 휴대전화니, 게임기니 하는 것들 모두 다룰 수 있다고요. 멍청한 건 그런 것들을 하나도 쓸 줄 모르는 당신들이겠죠. 어쩜 그렇게 자질이 부족합니까?”라고 말하는데, 그 정도 잔재주는 한 가지 분야에서의 특기이자 끼일 뿐 전혀 자질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에게 설교를 듣고 진리를 교제하라고 하면 영적으로 심각하게 무감각하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어느 정도로 무감각하겠느냐? 하나님을 여러 해 동안 믿었으면서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여부조차 분명히 알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하며, 자기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도 모른다. 네가 그에게 스스로의 자질이 어떤 것 같냐고 물어보면 그는 “자질이 좋은 사람보다는 좀 부족할지 몰라도 자질이 평범한 사람보다는 훨씬 낫지요.”라고 말한다. 이 정도로 자질이 부족하다. 이는 좀 멍청한 것 아니겠느냐? 자질이 너무 떨어지면 멍청해 보인다. 어떤 측면에서든 진리나 원칙과 관련되기만 하면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이르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여기까지 교제했는데, 자질이 좋은 것이란 어떤 것이고 자질이 부족한 것이란 어떤 것인지 판단이 되느냐? 무엇이 자질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자질이 부족한 것인지 이해하고, 자신의 자질과 본성 본질을 정확히 바라보는 것은 자기 인식에 도움이 된다. 자기 위치를 정확히 설정하면 어느 정도 이성을 갖추게 되며, 자기 주제를 알게 되어 건방지게 굴기가 쉽지 않고, 본분을 이행할 때도 좀 착실하고 편안하게 임할 수 있다. 즉,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게 된다. 사람이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면 수많은 문제가 생긴다. 어떤 문제가 생기겠느냐? 분명히 평범한 자질을 지녔는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스스로가 자질이 좋다고,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마음속에 항상 리더가 되어 남들을 이끌고 싶다는 충동을 품게 된다. 마음속에 늘 이런 것들이 들어 있으니 본분 이행에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 사람이 늘 이런 것들에 교란되며 불안해하고 평온을 찾지 못하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을뿐더러 어리석고 낯부끄러운 일, 비이성적인 일을 저질러 하나님의 혐오를 사게 된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해결하지 않으면 되겠느냐? 절대로 안 된다. 반드시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신이 왜 그런 사상을 가졌는지, 왜 야심이 그렇게 큰지, 그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단순히 묵상하기만 한다면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으며 문제의 근원을 찾아야만 제대로 해결할 수 있다.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만 야심과 욕망이 사라진다. 그렇게 되어야 착실히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더 이상은 그렇게 안하무인격으로 날뛰고 거들먹거리면서 자기는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고, 분수를 지키면서 처신할 수 있다. 그럼 이런 패괴 성품은 너를 교란할 수 없을 것이며, 너는 훨씬 성숙해질 것이다. 적어도 단정하고 바른 성도의 품위를 지니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고 단언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집에 왔으면, 최소한 양심과 이성을 지녀야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방인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처럼 굴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뭐가 어렵습니까? 저는 수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라고 말하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단순한 일은 아니다. 올바른 마음가짐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지녀야만 하나님에게 열납될 수 있다. 짐승 같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온다면 하나님은 증오하고 혐오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일방적으로 원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네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니다. 이 일의 결정권은 하나님 손에 있다. 하나님이 너를 인정해야 네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고 진리를 구하며 수시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성령의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 앞에 나아온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너를 무지한 백성,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이라고 한다면 너를 신경이나 쓰겠느냐? (그러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에게 은총과 축복 등 표면적인 것들만 좀 줄 뿐 너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실제적인 의미 측면에서 보면, 너는 절대 진정으로 하나님에게 다가가거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를 ‘하나님을 따르는 자’로 인정하기 전에 너는 어느 정도 변화를 이뤄 하나님에게 하나님 집의 일원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네 본분과 모든 언행, 생각을 검증하고 네게 역사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 집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 사람의 행위와 태도, 인성의 표출, 행동, 마음과 생각,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하나님에게 혐오와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이 혐오하고 반감을 갖는 이들의 손을 잡고 하나님 집으로 이끌어 들어오겠느냐? (그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즐겁고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겠느냐? 그 느낌은 어디에서 왔겠느냐? 다 꾸며낸 것이다. 이는 좀 비이성적인 데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즉 창조주가 그를 따르는 사람을 택하는 데는 반드시 기준이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모두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고,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하나님을 높이고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바라보는 기준은 사람과 다르다. 너는 친구를 사귈 때 상대의 인품을 볼 것이고, 그와 생각이 맞는지, 그의 성격은 어떤지, 너와 공통적인 취미가 있는지, 생김새는 어떤지 등을 볼 것이다. 네가 사람을 고르는 데도 기준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떻겠느냐? 혹자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택하십니까? 하나님에게 그렇게 다가가기가 힘든 건가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 집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건가요?”라고 하는데, 사실 어렵지 않다. 하나님 집의 문턱은 높지 않지만 기준이 있다. 첫째, 최소한 경건한 태도를 지니고 안분지족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둘째,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해야 한다. 셋째, 성도의 품위에 맞는 언행을 보여야 한다. 최소한 좋은 언행과 몸가짐, 교양을 갖춰야 할 것이다. 만약 네가 이 최소한의 것조차 갖추지 못한다면, 솔직히 말하건대 하나님은 너를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을 믿는 몇몇 사람을 대할 때 너는 그들의 일 처리와 태도, 표출을 보아라. 하나님이 왜 그들에게 그렇게 반감과 혐오를 품겠느냐? 그들에게는 인성도, 양심도, 이성도 없으며,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성도의 품위조차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이 직접 손을 잡고 하나님 집까지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인성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는 바보밖에 없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늘 짙은 화장을 하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 등 이방의 댄서들보다 더 요염하게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사생활이나 처세를 보면 이방인들과 다를 게 없다.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그들은 부정할 수 없는 이방인이자 불신파다. 이런 사람도 겉으로 보기에는 진심으로 믿는 것 같으며, 버리고 본분을 이행하는 듯하다. 또 핍박과 환난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들이 살아 내는 것을 보아라. 그들이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이겠느냐? 정직한 사람이겠느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겠느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겠느냐?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겠느냐? 절대 원할 리 없다. 그들은 하나님 집에 섞여 들어온 이방인이다. 그들은 하나님 집 문밖에 있으며, 문 안으로 들어온 적이 없다. 그들이 하나님 집을 위해 하는 일들은 전부 거들고 힘쓰는 것뿐이다. 그들은 교우이지 하나님 집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도, 야생 동물도 원하지 않는다. 혹자는 자기가 하나님을 오래 믿어 밑천이 좀 있고 몇몇 중요한 본분을 이행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 집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며, 교회를 손에 넣고 주무르려고 한다.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의 혐오를 산다. 그들의 본질,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근거로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 집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 집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왜 그들이 하나님 집에서 일을 하게 하겠느냐? 이는 그들에게 일을 거들거나 임시직 같은 업무를 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일을 거들고 임시직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정말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말을 잘 듣고 순종하게 된다면, 또 진리를 받아들이고 성도의 품위를 갖추며 얼마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진심으로 일을 처리하게 된다면 이러한 검증을 통해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 집에 받아 줄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 집 사람이 될 것이다. 그때 그들이 하는 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부탁이야말로 본분이다. 하나님 집 밖에서 하는 것은 본분 이행이 아니라 하나님 집을 위해 일을 거들고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이런 사람은 봉사자에 속한다.

이제 너희가 하나님 집의 일원인지 가늠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은 기간으로 본다면 당연히 하나님 집의 일원이 맞겠지만, 그것이 정확한 판단 방식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에 근거해서 가늠해야겠느냐? 진리를 들은 후 네 내면에 반응이 있는지, 진리를 어겼을 때,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했을 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양심의 가책과 질책, 징계가 느껴지는지 등에 근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판단하는 말을 하면 징계가 임해 입안에 부스럼이 나고, 어떤 사람은 대충 건성으로 일을 처리하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징계로 병에 걸린다. 이런 일을 언급할 때 그는 마음속 깊이 후회하고 회개할 수 있다. 이런 태도를 지닌 사람이 바로 하나님 집의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하나님 집 사람, 자기 집안 사람으로 대할 것이며, 채찍질하고 징계하고 질책하고 책망 훈계할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 집의 사람이다. 네가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회개할 줄 알게 되면 하나님 역시 너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 생명 진입을 이루고,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인생의 방향이 모두 달라지며,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외가 점차 커지고 변화한다면 너는 하나님 집의 사람이 된 것이다.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 집에 도움이 되는 일은 많이 하지 않고, 나쁜 일은 적잖이 한 사람들이 있다. 거짓말하고 기만하고, 대충 건성으로 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제물을 훔쳐 먹고, 이간질하고,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고 망치는 등 나쁜 짓을 숱하게 저질러 놓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도 없고 마음속으로 후회하거나 미안해한 적도 없다면, 이런 자는 하나님 집 밖에 있는 사람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집 밖에서 살고, 일 처리에 이렇다 할 원칙이 없으며,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에 흥미가 없다. 그저 일을 처리하고 바삐 뛰어다니며 힘을 쓰고 자신을 뽐내고 밑천을 모으는 데 집중할 뿐이다. 그는 교회 사역도, 자신의 본분도 대충 건성으로 대하며, 하나님에게 거짓말을 하고 기만행위를 한다. 심지어는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후회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징계를 느끼지도 못한다. 이런 자는 하나님 집 사람이 아니다. 언뜻 보기에 이런 부류는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헌신하려는 열의가 꽤 크고 믿음도 있고 기꺼이 바치고자 하는 것 같다. 또 진리를 무척 좋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진리를 실행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설교만 들었다 하면 졸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며, 반감을 갖는다. ‘이런 교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하나하나 지적해서 사람이 스스로를 인식하게 한 후에 진리를 좀 깨닫게 하고, 마지막에 순종하게 하는 것뿐이잖아. 나는 이런 걸 다 이해하고 있는데 왜 또 교제하는 거지?’라고 말이다. 그는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가책과 징계가 없다. 마치 마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자들은 모두 하나님 집 밖에 있는 사람으로, 이방인에 속한다. 처음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일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자신이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그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그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며, 기꺼이 본분을 이행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잔머리와 약간의 열정, 그리고 야심으로 인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사역해서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는 데 매진하며, 하나님 집에서 지위를 얻으려고 한다. 그는 ‘난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각 곳에서 명망을 쌓고 위신을 세웠어. 교회에 제대로 발을 붙였다고. 어디를 가든 형제자매들에게 우러름을 받지.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이런 명성을 얻었으니 된 거야. 이게 바로 생명이 있는 거라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정의하시든, 그런 건 참답게 대할 필요 없어.’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부류겠느냐? 엄밀히 말하자면 불신파다. 무엇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하겠느냐? 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단 한 번도 회개하거나 스스로를 인식한 적이 없으며, 무엇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인지 깨달은 적도 없다. 그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며, 본분 이행의 기치를 들고 자신의 경영을 하면서 자기 욕망과 취향을 충족시킬 뿐이다. 그들은 그렇게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많은 도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관해, 하나님을 믿으면 진리를 실행해야 한다는 것에 관해 전혀 개념이 없다. 그렇게 많은 도를 들었지만, 그 도가 과연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은 너무 패괴되어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마음 깊이 해 본 적이 없으며, 진리와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갈망과 동경을 마음 깊이 느껴 본 적도 없다. 이는 문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무척 큰 문제이다. 하나님과 진리, 구원받는 것이 그들에게는 하나의 구실이나 논조, 구호에 불과하니 문제가 심각하다.

너희가 보기에 바울과 베드로의 가장 명확한 차이는 무엇인 것 같으냐? 바울은 오랜 세월 사역하면서 열심히 뛰어다니고 헌신하고 봉헌했으며, 또 숱한 고생을 했지만 그가 걸어간 길은 진리와도,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나 성품 변화와도 무관했으며, 구원받는 것과는 더더욱 무관했다. 그렇기에 그의 명성이 얼마나 높든, 그가 글을 써서 남긴 내용이 후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든 그는 진실로 예수를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예수를 진실로 인식하지 않았고, 예수가 유일한 참하나님임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평범한 한 사람임을 인정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에게 진실로 순종하지 않았다. 그저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얻으며, 교회를 설립하는 등 자신이 직접 목양함으로써 하나님에게 인정받으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울의 속내를 감찰하였기에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베드로는 묵묵히 일을 하면서 마음속에 늘 예수가 자신에게 한 말을 품고 있었다. 그는 예수의 요구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식하기를 추구했다. 그 기간에 그는 하나님의 질책과 책망, 훈계, 심지어 꾸짖음까지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어떻게 꾸짖었느냐?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마 16:23)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꾸짖는 말일 뿐 결말을 정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럼 바울이 사역할 때 하나님이 그를 꾸짖은 적이 있느냐? (없었습니다.) 먼저, 주관적인 요소에서 보면 하나님은 그를 꾸짖은 적이 없다. 이 밖에, 객관적인 요소에서 보면 그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거나 구하지 않았고, 구원의 도를 구하지도 않았기에 이러한 것을 받아들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한 사역은 그로 하여금 힘쓰게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힘을 쓰면서 큰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면 봉사자로 남겨 두겠지만, 큰 악행을 저지른다면 결말은 달라지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차이가 있었다. 한편, 베드로가 받아들인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질, 꾸짖음은 무척 많았다. 표면적으로 보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은 그를 좋아하지 않은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을 보면 이런 자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고 기뻐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를 채찍질하고 훈계하여 그가 조금씩 성장하고 진리에 진입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마지막에는 진실한 순종과 변화를 이루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구원이다.

지금 너희는 자신이 하나님 집 사람인지 아닌지 분명히 알 수 있느냐? 진정으로 하나님 집에 들어왔느냐? 내가 방금 교제한 내용에 근거하여 판단할 수 있겠느냐? 자신이 이미 하나님 집 문으로 들어갔다고, 하나님 집의 일원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느냐? (확신할 수 있습니다.) 확신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이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미 토대가 생겼고, 하나님 집에 뿌리를 내렸다는 의미이다. 토대가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 집 밖의 사람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증거한다고 해도, 남들 앞에서 너 스스로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일원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너를 모른다고 한다면 이는 문제 아니겠느냐? 이것이 사람에게 복이겠느냐, 아니면 화겠느냐? 이는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면 반드시 하나님 집 사역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하고, 선행을 예비하여야 하며, 마음을 하나님에게 향해야 하고, 하나님을 크게 높여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먼저,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잘못된 관점과 태도, 행동, 그리고 자기가 걷고 있는 잘못된 길을 바꿔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하며, 이것이 기초이다. 그다음은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요구한 대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이러한 것에 도달하면 하나님은 만족할 것이고, 네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조금씩 진정한 피조물, 합격한 피조물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네가 여전히 하나님 집 밖의 사람이고, 하나님이 너를 하나님 집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구원받고 싶다고 말한다면 이는 황당무계한 소리 아니겠느냐? 너희는 지금 채찍질과 징계를 체험했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하여 하나님을 믿는 토대가 생겼다. 이는 좋은 일이다. 다음 단계는 진리 이해를 기초로 생명 진입을 이루는 것이며, 이러한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삼아 살아 내고, 본분 이행과 하나님이 부탁한 모든 일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받을 희망이 생긴다. 너희 중 대부분이 자질이 떨어진 편은 아니고 평범한 수준은 되니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다만 인성 면에서 결함과 문제가 좀 있다. 혹자는 게으르고, 혹자는 허풍 치기를 좋아하며, 혹자는 거만하고, 혹자는 둔하고 무감각하고 강퍅하다. 이는 성품 문제이다. 인성과 성품 면에서 문제가 있다면 반드시 체험 과정에서 진리를 구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조금씩 변화할 수 있다. 받아들이고 깨달은 진리를 기초로 체험하고 깊이를 더하면 생명이 조금씩 성장할 것이다. 생명이 있어야 희망이 있고, 생명이 없으면 희망도 없다. 지금 너희는 자신에게 생명이 있는지, 마음속으로 진리를 이해하고 있는지, 체험과 경험이 있는지, 하나님에게 얼마나 어느 정도로 순종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모호하다면 생명 성장을 이루기가 무척 힘들다.

교회에서 큰 힘을 좀 쓰거나 위험한 일을 몇 가지 한 후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그가 한 일에 의하면 칭찬해야 마땅하지만, 그의 성품과 진리에 대한 태도를 보면 혐오스럽고 역겹다. 그는 진리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싫어하기까지 한다. 이 점은 역겹기 이를 데 없으며, 이런 사람은 아무 가치가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자질이 부족한 것, 얼마간 나쁜 습관이 있는 것, 패괴 성품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질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사람에게 반감을 갖거나 그 사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며, 그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 역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부족한 자질과 어리석음을 혐오하지 않고,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는 것도 혐오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가장 혐오하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싫어한다면 이 한 가지만으로도 하나님은 영원히 너를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정해진 일이다. 네가 진리를 싫어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진리를 대할 때 너는 경시하며 냉담하고 교만한 태도를 보일 것이고, 심지어는 반감을 갖거나 저항하거나 거부할 것이다. 네게 이런 모습이 있으면 하나님은 너를 몹시 싫어할 것이며, 너는 구제 불능일 것이다. 만약 네가 마음속으로 정말 진리를 사랑하지만 자질이 좀 부족하고 견식이 부족하며 어리석다면, 늘 잘못을 저지르지만 고의로 악을 행하지는 않고 그저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다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진리 교제를 듣고자 하며 진리를 갈망한다면,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간절한 마음과 갈망하는 태도로 대하며 하나님 말씀을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 가끔 어리석은 일을 저질러도 하나님은 너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진리를 갈망하는 네 마음을 좋아하며, 진리에 대한 네 간절한 태도를 좋아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를 긍휼히 여겨 언제나 은혜를 베푼다. 하나님은 네 부족한 자질과 어리석음을 보지 않으며, 네 과오 역시 보지 않는다. 네가 간절한 마음, 갈망하는 태도로 진리를 대하기 때문이다. 너에게는 진심이 있다. 그 진심과 그런 태도 때문에 하나님은 늘 너를 긍휼히 여길 것이며, 성령은 네게 역사할 것이다. 그러면 네게는 구원받을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반면, 네 마음이 강퍅하고 방종하며 진리를 싫어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와 관련된 모든 일을 마음에 담는 법이 없으며 마음 깊이 반발하고 멸시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어떤 태도로 대하겠느냐? 혐오와 반감, 끝없는 노로 대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두 가지 특징은 무엇이냐? 널리 긍휼을 베푸는 것과 크게 노하는 것이다. ‘널리 긍휼을 베푼다’에서 ‘널리’란 하나님의 긍휼 안에 관용과 인내, 포용, 지극한 사랑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널리’의 의미이다. 사람이 우매하고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 네가 진리를 사랑하지만 어리석고 자질이 부족하다면 하나님은 너를 ‘널리 긍휼을 베푸는’ 태도로 대할 것이다. 긍휼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느냐? 인내와 포용이 포함된다. 네 어리석음을 인내하고 포용하며, 네게 충분한 믿음과 포용을 베풀어 줌으로써 너를 붙들어 주고 공급해 주며 도와주어 네가 조금씩 진리를 깨닫고 성장하게 한다. 이는 무엇을 기초로 이뤄지겠느냐? 진리를 사랑하고 갈망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기초로 이뤄진다. 이는 사람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마음속으로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에 반감을 갖고 있다면, 심지어 진리를 증오하며 한 번도 진리를 중요하게 여긴 적이 없다면, 언제나 자신의 공을 말하고, 자기가 어떻게 사역했는지, 얼마나 경험이 많은지, 어떤 것들을 체험했는지,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중시하고 또 어떤 큰일을 맡겼는지 등을 이야기한다면, 자신의 밑천과 공로, 능력을 말하면서 스스로를 뽐내지만 진리를 교제하거나 하나님을 증거하는 법이 없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한 후의 인식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교제하는 법도 없다면 이는 진리를 싫어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모습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설교를 듣습니까?”라고 묻는데,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이 다 진리를 사랑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형식만 취하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교회 생활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 집에서 그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진리를 대하는 이런 태도에 관해 하나님은 어떻게 그 성질을 정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싫어한다고 할 것이다. 그의 성품에는 가장 치명적인 것, 교만함이나 간사함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근거하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노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노할 때, 때로 그 사람을 질책하거나 징계하고 징벌한다. 만약 사람이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인내하고 기다리고 살펴볼 것이며, 환경이나 다른 어떤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잠시 그러한 불신파를 힘쓰는 데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적당한 환경이 갖춰지고 때가 무르익으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쫓겨날 것이다. 그들은 힘쓸 자격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노이다. 하나님은 왜 크게 노하겠느냐? 이는 하나님이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을 몹시 증오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크게 노한다는 것은 진리를 싫어하는 이런 부류 사람의 결말과 종착지가 정해졌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어디로 보내겠느냐? 사탄의 진영으로 보낸다. 하나님은 그들을 싫어하고 그런 사람에게 노하기 때문에 그들을 문전박대할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 집의 문에 들어서지 못하게 할 것이고, 그들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지도 않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노하는 한 가지 모습이다. 이 밖에, 하나님은 그들을 사탄, 더러운 귀신, 악령, 불신파와 동일시하며, 때가 되면 그들을 도태시킬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처리 방식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노이다. 도태된 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구원을 또 누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은혜시대의 사람은 늘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지 아무도 침륜되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이 말이 패괴된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마음이자 태도를 의미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류를 어떻게 구원하겠느냐? 전부를 구원하겠느냐, 아니면 일부만 구원하겠느냐? 하나님은 어떤 일부의 사람을 구원하고, 어떤 사람들을 포기하겠느냐? 이 일은 많은 사람이 꿰뚫어 보지 못하고 남들에게 그저 도리만 떠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지 아무도 침륜되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너무 많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을 구원하는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고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사람이니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국 멸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고 더없이 광대하며 위대하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은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그 은혜와 사랑을 베풀기를 원치 않는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그들에게 거저 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태도이다. 진리를 싫어하고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밥 동냥하는 거지처럼 누구에게 구걸하든 속으로는 주인을 공경하지 않을 뿐 아니라 헐뜯고 증오한다. 심지어 주인의 것을 빼앗아 자기의 소유로 만들지 못해 한스러워한다. 이런 거지에게 주인이 먹을 것을 베풀고 싶겠느냐? 분명 그러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가 진짜 불쌍한 게 아니라 너무나 가증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주인은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주인이 음식을 개에게 줄지언정 그 거지에게 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주인의 진짜 마음이다. 너희는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맞서는 사람이 아니냐? 설령 그가 대놓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본성 본질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에게 “저는 당신의 말씀을 잘 듣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진리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저는 제게 득이 되고 유익한 사람을 믿거든요.”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방인의 태도가 이렇지 않더냐? 진리를 대하는 네 태도가 이렇다면, 이는 대놓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대놓고 하나님을 적대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겠느냐? 그럴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노하는 이유다. 진리를 싫어하는 이런 부류 사람의 본질은 하나님을 적대하는 본질이다. 하나님은 이런 본질을 가진 자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들은 원수이자 마귀이니 하나님은 절대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며, 결국 재앙을 내려 멸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밥 동냥하는 거지가 주인의 밥을 먹으면서 주인을 욕하고 조롱하며 헐뜯는 것도 모자라 공격한다면 주인이 그를 미워하지 않겠느냐? 분명 미워할 것이다. 그를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그가 자기한테 먹을 것을 준 주인에게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주인을 헐뜯고 조롱하며 공격하니, 이런 사람에겐 양심과 이성, 그리고 인성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주인이 그 거지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겠느냐? 그에게 주었던 것을 다시 빼앗은 후 그를 내쫓을 것이다. 그런 것은 개나 짐승에게 줄지라도 그에게 주지 않는다. 이 결과는 거지의 자업자득이다. 하나님이 한 사람 혹은 한 부류의 사람에게 크게 노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기호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한 사람이 진리를 싫어한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구원에 결점이 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용서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행위의 일종이 아니며 일시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닌 사람의 본성 본질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 만약 네게 가끔 진리를 싫어하는 패괴 표출이 있다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네 패괴 표출이 진리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진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인지 성찰해야 한다. 이는 네가 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깨우침과 도움이 필요하다. 네가 만약 진리를 싫어하는 본성 본질을 가지고 있어서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심한 반감만 품은 채 진리를 적대시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너는 악인이 분명하니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방인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그저 신앙이 다른 것뿐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으로, 특히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방인들은 모두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은 존재라는 사실을 예로 들어 보자. 이는 사실이 아니냐? 이는 진리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절대적으로 믿고 인정하며, 그 사실과 그 진리를 받아들여 하나님을 믿는 토대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사람은 하나님이 지은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의 인도와 주재를 받아들이기를 기꺼이 원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사람은 하나님이 지은 존재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인정하지 않는 것 외에 또 어떤 반응을 보이겠느냐? 그는 너를 비웃고 모든 면에서 이 일로 약점을 잡으며 비방하고 빈정대고 멸시할 것이다. 그는 그 말을 경멸하고, 그 사실을 경멸하며, 심지어는 그 말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에게 빈정대고 헐뜯고 멸시하고 적대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것이 진리를 싫어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증오스럽지 않으냐?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야.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니 정말 배은망덕하고 심각하게 양심이 없는 데다가 대역무도한 존재야. 그야말로 사탄의 부류라고!’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생각하겠느냐? 그가 그 말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한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왜 이런 반감이 들겠느냐? (진리를 대하는 그의 태도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이 말을 한마디 평범한 말이나 이론, 혹은 신앙으로 생각해 존중했다면 너도 그렇게까지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반감과 반발, 경멸, 그리고 이 진리를 폄하하는 주장과 태도, 성품을 보자 분노가 솟구친 것이다. 이런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타인의 신앙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일에 관해 말하면 비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너도 반감이나 혐오가 들지 않으며, 친구로 지내면서 적이 되지 않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 사실, 함께 지내도 무방한 이방인들이 있다. 그런 이방인은 참도를 받아들여 하나님 집 사람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함께 지내고 교류하는 것이 가능하다. 최소한 그는 양심과 이성이 있고, 너를 음해하지 않으며, 뒤에서 너를 해치지 않으니 교류할 수 있다. 진리를 폄하하는 사람, 즉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너는 마음속으로 분노가 솟구칠 것이다. 그러니 그와 친구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친구가 될 수 없는 것 외에도 너는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만약 네게 그를 어떻게 대할지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입니다. 이는 사실이자 진리죠. 이 얼마나 위대하고 신성한 일입니까! 그런데 당신은 이 일을 받아들이기는커녕 폄하하고 있으니 정말 양심이 없군요! 만약 하나님이 제게 권력을 주신다면 저는 당신을 저주하고 멸하여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이런 심정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정의감이다. 하지만 보통은 이성이 있기에 상대가 마귀임을 간파하면 얽히지 말고 멀리하며, 그가 말을 걸어도 대충 응대하면 된다. 이것이 지혜이다. 하지만 너는 이런 사람과는 가는 길이 다르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알고 있다. 그는 절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대적한 그들은 짐승이자 마귀로, 우리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마귀와 접하기를 원치 않는다. 보지 않는다면 모를까, 보는 순간 반감이 생기니 영원히 보지 않아야 마음이 평안하다. 늘 이방의 마귀들에게 하나님 집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자는 팔이 밖으로 굽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 못난 인간이다. 이렇게 황당한 짓을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하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항상 마귀와 교류하는 사람은 전부 불신파로, 절대 하나님 집 사람이 아니니 언젠가는 사탄에게 돌아갈 것이다. 누가 형제자매이고 누가 이방인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가장 어리석은 자이다. 불신파나 마귀에게 하나님 집 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이고 개 발에 편자를 갖다 붙이는 격이다. 그들은 개돼지와 같은 존재로, 짐승에 속한다. 네가 그들에게 하나님 집 일을 말해 봤자 멍청해 보일 뿐이다. 또 그들은 네 말을 듣고 함부로 하나님 집과 진리를 폄하할 테니, 네 그런 행동은 하나님에게 죄송하고 빚진 것이다. 하나님 집의 일을 절대 그런 불신파나 마귀에게 말하지 마라.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싫어하며 폄하하는 사람은 누구나 싫어하고 거부감을 갖고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떻겠느냐?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하나님의 생명 그리고 하나님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본질은 전부 진리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원수이다. 이것이 어디 하나님과 합하지 않는 문제에 그치겠느냐? 이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노는 더없이 크다.

너희는 지금 다들 어느 정도 토대가 있고, 하나님 집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열심히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 이행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각종 내적 상태를 돌아보며, 어느 정도 성품 변화의 수확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가치 있는 일이고,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다. 최소한 하나님이 열납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가 욥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친히 사탄과 내기를 하면서 주는 시련을 받을 자격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네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얼굴빛 가운데서 이뤄진다면 하나님은 너를 지키고 보호해 줄 것이며, 하나님을 따르는 자, 하나님 집의 일원으로 인정해 줄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너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은 후로 하나님의 도를 어떻게 준행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네 행위와 진심에 만족했기에 너를 하나님 집으로 이끌어 훈련시키고, 책망과 훈계,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했다. 이 얼마나 큰 복이냐! 처음에 너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던 하나님 집 밖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첫 번째 검증을 받아들이고 이겨 냈다. 그 후 하나님은 친히 너를 하나님 집으로 이끌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으며, 부탁을 맡기고 네가 이행해야 할 본분을 안배했다. 그리하여 너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얼마간 사람의 본분을 이행하게 됐다. 보잘것없는 사역일지라도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얻은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것이니 그 복은 더없이 크다. 내세에 면류관과 상을 받는 것은 물론, 이번 생에도 그런 것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들은 이런 진리와 네가 누린 하나님의 은혜, 긍휼, 보살핌과 보호, 그리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각종 징계와 채찍질,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이 모든 진리의 공급 등, 얻은 것이 얼마나 많으냐! 마지막에 이러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외에도 하나님은 너를 사탄의 진영에서 완전히 구원해 하나님을 인식하고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 사람, 하나님 집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이 복이 크지 않으냐? (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너를 하나님 집으로 이끌어 데려온 후 이렇게 말씀했다. “너는 복이 있구나. 교회에 들어왔으니 구원받을 희망이 생긴 것이다.” 너는 아직 어찌 된 일인지 감을 잡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사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미 너에게 주었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은 또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진리를 공급하고, 책망 훈계하고, 너에게 본분을 주고 부탁을 맡기는 이 모든 행사로 네 생명을 조금씩 성장시키고 있으며, 네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경배하는 사람이 되게 하고 있다. 지금 사람은 이 약속을 얻지 않았느냐? 약속이 이루어지고 실현되는 날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다. 사실, 너희 중 일부는 이미 얻었다. 몇몇은 의지만 있을 뿐 아직 얻지 못했는데, 이는 너희에게 이 약속을 붙들고 실현할 의지가 있는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시간 맞춰 조금씩 사람에게 베풀어 준다. 그러니 너는 자신이 어리석거나 자질이 부족하다고, 혹은 나이가 어리거나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짧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네 생명 진입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 한편으로는 사람이 자신의 실제 분량과 자질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판단하며, 자기 주제를 알게 한다. 또 한편으로는 사람이 긍정적인 측면에서 진리를 더 깊이 있게 인식하게 함으로써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도록 한다. 바로 이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이루는 것은 사실 무척 간단해서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어려울 게 없다. 사람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어려움은 무엇보다 크다. 이는 본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진실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아마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고, 언제나 진리를 폄하하고 멸시한다면, 이런 본성을 가진 너는 변화하기가 쉽지 않다. 설령 변화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태도가 바뀌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만약 네가 행한 일이 하나님의 태도를 바꿔 놓는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태도가 바뀔 정도는 아니고 하나님이 마음속 깊이 너라는 사람의 본질을 계속 싫어한다면 너는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 그러니 너희는 스스로를 성찰해야 한다. 만약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에 반발하는 내적 상태가 있다면 무척 위험할 것이다. 수시로 이런 내적 상태가 생기고, 또 수시로 이런 내적 상태에 빠진다면, 혹은 네가 아예 이런 사람이라면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진다. 진리를 싫어하는 내적 상태가 어쩌다 한 번씩 나타난다면, 이는 분량이 작은 것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의 패괴 성품 자체에 그런 본질이 있어 이런 내적 상태가 생기는 걸 피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적 상태가 본질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가끔은 한때의 기분 때문에 내적 상태가 생겨 진리를 싫어할 수도 있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이지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 본질이 야기한 것은 아니다. 일시적인 내적 상태는 바로잡을 수 있다. 어떻게 바로잡아야겠느냐? 얼른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그 측면의 진리를 구함으로써 진리를 인정하고 진리와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되면 그 내적 상태는 해결된다. 하지만 해결하지 못한 채 계속되게 내버려두면 위험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저는 자질이 부족해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니 추구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필요도 없겠죠. 하나님은 왜 저한테 이런 자질을 주신 걸까요?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으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공의를 부정했으니, 이는 진리를 싫어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태도이자 모습이다. 이런 모습이 나타난 데는 배경이 있으니 이런 내적 상태가 생겨난 배경과 근원을 해결해야 한다. 근원을 해결하면 너의 그 내적 상태도 사라진다. 어떤 내적 상태는 병증과 같다. 예를 들어 기침이라고 하면, 감기나 폐렴 때문에 나타났을 테니 감기나 폐렴을 치료하면 기침도 나아진다. 병의 근원을 해결하면 병증도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싫어하는 내적 상태 중 일부는 병증이 아니라 암과 같다. 병의 근원이 안쪽에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어떤 병세도 발견되지 않지만, 일단 발병하는 순간 치명적이며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런 사람은 늘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이방인처럼 언제나 진리를 폄하한다. 입으로는 말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폄하하고 거부하고 반박한다. 그게 어떤 진리일지라도, 예컨대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정하는 것,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일할 때 대충 건성으로 하지 않는 것,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 등 어떤 측면의 진리일지라도 그는 받아들이거나 인정하거나 신경 쓰지 않으며, 심지어는 반박하고 폄하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으로, 하나의 본질이다. 이런 본질이 사람에게 어떤 결말을 초래하겠느냐? 하나님에게 혐오받고 내쳐지며 도태된 후 파멸하는, 더없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오늘 교제한 이런 내용이 너희에게 뭔가 도움이 되었느냐? (네, 자질이 좋은 것이란 어떤 것인지, 자질이 부족한 것이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고, 제 자질에 대해서도 진실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일이 닥치면 스스로를 정확하게 판단하여 교만하고 독선적으로 굴지 않고 착실히 본분을 이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든 너희의 생명 진입에 도움이 된다. 만약 너희가 이러한 말을 너희의 일상생활과 결부시킨다면 내가 한 말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조금 깨달을 때마다 일 처리는 조금씩 더 정확해지고 길이 넓어진다. 만약 깨달은 진리가 적고, 자신의 실제 분량이나 자질에 대해서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면 일 처리가 늘 부정확할 것이며, 언제나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자신에게 높은 점수를 줄 것이다. 또 관념과 상상에 기대 일을 처리하면서도 깨닫지 못한 채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고 여기며, 관념과 상상을 진리 원칙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일을 처리하면 오류가 심각해진다. 이런 관념과 상상, 지식, 학문이 마음속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면, 사람은 진리를 구하지 않게 된다. 진리가 네 마음속에서 2순위, 3순위, 심지어 최후 순위라면 너한테서 권세를 잡고 있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탄의 성품과 사람의 관념, 철학, 지식, 학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네게서 주도권을 잡고 있으니 하나님이 네게 행하는 사역에 성과가 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네게서 생명이 되지 못했으면 너는 구원받기까지 무척 멀리 떨어져 있으며, 아직 구원받는 길에 오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이 조급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긍휼을 베풀어야 너를 구원받는 길에 오르게 할 수 있겠느냐? 만약 너희가 전통문화 지식, 사탄의 철학 속에서 빠져나와 하나님 말씀과 진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진리 원칙으로 관리 감독하며,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법을 배운다면, 진정으로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 된 것이고, 독립적인 생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된 것이다. 지금 너희는 아직 부족하고 갈 길이 멀다. 그저 약간의 생명만 있을 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관용에 기대 살아가야 하니 분량이 너무 작다. 만약 너에게 한 가지 사역을 맡긴다면 독립적으로 완수할 수 있겠느냐? 그 사역을 잘해 낼 수 있겠느냐? 일을 엉망으로 만든다면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욕되게 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일을 반만 하고 어디론가 놀러 간다면, 이는 성격이 침착하지 않은 것 아니겠느냐? 이는 불성실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고, 본연의 업무에 힘쓰지 않는 것이다. 이런 자는 누군가가 지켜보고 관리해야 본분을 좀 이행한다. 어떤 이는 30~40대가 되어서도 이런 작태를 보이는데, 그럼 끝이다. 그는 평생 어떤 일도 해내지 못할 것이다. 만약 네가 20대고, 하나님을 믿은 지 2~3년밖에 되지 않았다면 그래도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 이런 사람은 분량이 작은 사람이다. 성격이 침착하지 않고, 미덥지 못하며, 늘 하나님이 지켜 주고 보호하고 일깨우고 인도해야 하는 사람, 언제나 하나님의 이런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서 은혜에 기대 살아가고, 하나라도 부족하면 안 되는 사람은 분량이 너무 작은 것이다. 너희가 지금 바로 이런 상태에 있다. 너희에게 한마디라도 덜 하면, 때때로 착오가 생기고 일이 엉망이 된다. 한마디 덜 하면 엉망이 되니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희 모두 성인 같지만, 사실 영적 생명은 성장하지 않았다. 비록 본분 이행에 의지와 진심을 좀 보이고, 진실한 믿음도 얼마간 있다고는 하나 깨달은 진리가 너무 적고, 본분을 이행할 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인도, 지시에 기대 나아가며, 이 중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된다. 그러니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 너희에게 어떤 부분만 드러났겠느냐? 널리 긍휼을 베푸는 부분이다. 물론, 이는 하나님의 사역 원칙이다. 지금 너희는 왜 하나님의 시련과 연단을 누리지 못하겠느냐? 그런 분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희의 분량은 너무나 보잘것없고, 너희가 깨달은 진리는 너무나 적어서 그 무엇도 꿰뚫어 보지 못하며, 일이 닥치면 멍해진 채 어찌할 바를 모른다. 너희는 늘 걱정만 끼치고,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하나하나 가르쳐 줘야 해서 마음을 졸이게 한다. 너희에게는 한마디라도, 한 번이라도 말을 덜 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인 일도 두세 번 말해 줘야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또 잊어버려서 몇 번 더 말해 줘야 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는 생각이 없는 멍청이로, 힘쓰는 것조차 합격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결코 쉽지 않다. 자질이 너무 떨어져서 진리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분량이 작지만, 어떤 일이든 한두 번, 두세 번 체험하면 배워서 할 줄 안다. 진리를 교제했을 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도달한다면 자질이 있는 사람이다. 자질은 있지만 분량이 작은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체험의 깊이나 진리에 대한 이해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뿐이다. 체험이 많아지고 깨닫는 진리가 깊어지면 분량은 자연히 자랄 것이다.

2019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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