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기초이다

먼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헤매지 않으리’라는 하나님 말씀 찬양부터 들어 보아라.

1. 하나님은 너희가 독립적으로 먹고 마시고, 언제나 하나님의 얼굴 빛 속에 살며, 삶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야 하나님 말씀으로 채워지고 가득 찬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일거수일투족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네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할 것이다. 진정으로 그런 정도로 가까워져 언제나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면, 너는 어떤 일을 해도 어리둥절하지 않고, 혼란에 빠지지 않으며, 하나님이 함께하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행할 수 있다.

2. 사람과 일, 사물이 임할 때마다 하나님 말씀이 언제나 너에게 나타날 것이다. 네가 하나님 뜻대로 행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 말씀 안에서 행하도록 인도하고, 일거수일투족 네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헤매지 않고 새로운 빛 안에서 살게 하고, 더욱 많고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하리. 어떻게 하고 어떻게 행할지를 사람의 관념대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의 인도에 순종하라.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평온히 하고 많이 묵상하라.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

3. 하나님은 너의 전능임을 믿어라.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고 갈망하며 구하라. 사탄의 구실과 속셈, 간계를 거절하고, 실망하거나 연약해지지 말고,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려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협력하고, 내면의 걸림돌을 없애라.

― 하나님의 교통 중에서

방금 틀어 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헤매지 않으리’라는 찬양을 다 듣고 나서 너희는 어떤 빛이나 실행의 길을 얻었느냐? 어느 말씀에서 깨우침과 빛을 얻었느냐?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헤매지 않으리’라는 말이 옳으냐? 이 말이 진리이냐? (그렇습니다.) 이 찬양의 어느 말씀 때문에 네가 현실의 삶에서 네 체험에 특별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느냐?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여기서부터 읊어 보아라.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 하나님은 너의 전능임을 믿어라.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고 갈망하며 구하라. 사탄의 구실과 속셈, 간계를 거절하고, 실망하거나 연약해지지 말고,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려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협력하고, 내면의 걸림돌을 없애라.’) 이 부분에서 어느 말씀이 실행의 길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주는, 현실의 삶에서 일이 닥쳤을 때의 실행 원칙이겠느냐? 너희가 짚어 낼 수 있느냐? 생각해 보아라. 사람들이 신문, 잡지나 여러 서적을 읽으면 저마다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다. 어떤 부분이 눈길을 끌겠느냐? 하나는 사람이 관심을 갖는 부분이고, 하나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며, 또 하나는 사람이 일상에서 알아 둬야 하는 중요 정보들이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 말씀에서는 어느 말씀이 눈길을 끄는 부분이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분명히 밝히는, 일상에서 일이 닥쳤을 때 실행하고 준수해야 할 원칙이겠느냐? 알아볼 수 있겠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읊어 보아라.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 하나님은 너의 전능임을 믿어라.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고 갈망하며 구하라. 사탄의 구실과 속셈, 간계를 거절하고, 실망하거나 연약해지지 말고,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려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협력하고, 내면의 걸림돌을 없애라.’) 이 한 마디 한 마디 말씀의 뜻을 모두 이해하겠느냐? (네.) 전부 구어체 문장이라 추상적이지 않고 평이하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의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짚어 낼 수 있느냐? 무엇이 원칙이냐? 크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 진리가 원칙이겠지만, 이렇게 말하면 다소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리고, 나아가서는 조금 추상적이기까지 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원칙은 바로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갖춰야 하는 실행의 길과 준칙이다. 이것을 원칙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서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정확하게 말하면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실행하고 처리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미 알려 준 실행의 길이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이 부분을 다시 한번 읽을 때 잘 들어 보아라.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 하나님은 너의 전능임을 믿어라.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고 갈망하며 구하라. 사탄의 구실과 속셈, 간계를 거절하고, 실망하거나 연약해지지 말고,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려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협력하고, 내면의 걸림돌을 없애라.’) 이 부분을 세 번 읽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이 좀 있느냐? 세 번 읽고 나니 평소에 별생각 없이 들었을 때랑 좀 다른 느낌이 드느냐? (그렇습니다.) 이 부분에서 너희가 볼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실행 원칙은 무엇이냐? 여기에서 하나님이 제시하는 진리의 한 측면은 무엇이냐? 이 측면의 진리는 실행의 원칙과 관련된다. 여기에서의 원칙은 도대체 무엇이냐? 어떤 현실적 문제와 관련되느냐? 첫 소절에 있으니 바로 이해되지 않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이해되지 않는 일이란 진리의 측면, 실행의 측면, 성품 변화의 측면 그리고 본분 이행 중 업무의 측면, 개인의 내적 상태의 측면 및 사람의 본질을 분별하는 법에 관한 측면 등이 해당된다. 분명 이런 일은 네 주변에서 일어나 네가 보고 듣게 되지만, 너는 이런 문제의 본질이 무엇이고 어떤 진리와 관련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여기에 관련되는 실행의 길과 원칙이 무엇인지 모르고, 물론 여기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등도 알지 못한다. 사람이 이런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간파하지 못하여 가장 큰 고충이 되면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많다. 그것이 외부의 일이든, 하나님 집의 일이든 네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떡해야 하느냐? 먼저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했는지, 어떤 진리 원칙이 있는지 주의 깊게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번 읽어 보고 우선 진리 실제가 어디에 있는지 찾은 다음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그다음 진리를 실행하는 원칙을 확실히 정하면 진리를 깨닫기가 수월해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구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되느냐? (이해됩니다.) 이런 환경과 이런 사람, 일, 사물은 하나님이 배치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태도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네게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조급하게 정의하거나 단정 짓지도 말며, 그 어떤 판단도 하지 말라고 한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네가 그 일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조급해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 이런 일이 일어났고, 하나님이 이 일을 네 눈앞에 배치하여 너를 그런 환경에 두었다면 하나님의 태도는 확실하다. 하나님은 네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네가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속히 이해하고, 또 당장 단정 짓고 결론을 내어 어떤 해결 방안을 내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이 일은 네게 익숙하지 않고, 네가 이해하지 못하며, 접해 본 적 없고, 배우지 못한 공과이기 때문에, 또 네가 이 일에 대해 아무런 경험이나 교훈도 없고 그 어떤 체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네게 답을 내놓으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하나님이 이런 환경을 마련하신 거라면 어째서 빨리 결과를 보려 하지 않으십니까?”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이 환경을 마련하는 목적은 네가 속히 하나의 이론적 판단이나 결론을 내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이런 환경과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 그 속의 사람과 일, 사물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공과를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네가 이렇게 체험하고 몸소 경험하고 나면 이 일이 네게 의미 있는 일이 되고, 게다가 그 의미와 가치는 더없이 클 것이다. 결국, 네가 이 일을 겪고 난 후 얻는 것은 하나의 이론이나 관념, 상상, 판단이 아니고, 사람이 정리한 경험 교훈도 아니라 몸소 깨달은 하나의 체험이자 사물에 대한 진실한 인식이다. 이런 인식은 진리에 근접하거나 부합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겪은 것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이토록 명확하고 분명하게 표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네가 속히 답을 도출하여 답안지를 제출하라고 다그치지 않고 네가 이런 환경을 겪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태도이다. 하나님의 태도가 이러하니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의 요구 기준을 갖게 되었다. 그 기준은 바로 사람이 실행하는 하나의 원칙이다. 무엇이 실행의 원칙이겠느냐? 그것은 실제로 일이 닥쳤을 때 네가 그 일을 처리하는 경로와 방식, 방법이다. 그 일에서 하나님의 뜻과 태도를 이해했다면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이냐? 하나님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는 말에는 유래가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왜 이런 요구 기준을 제시했는지 알고 있느냐? 네가 슈퍼맨이 아닌 보통의 사람이고, 네 생각이 정상인의 생각이며, 네가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네가 40, 50살, 나아가 80살까지 살았든 너는 계속 발전하고 있으며 한평생 영원히 같은 모습일 수는 없다. 지금 너의 이런 경력과 경험, 체험, 견문, 이력 등 각 측면과 네 마음, 생각 속에서 인지하고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세월의 풍파를 겪으면서 쌓인 것이다. 이것을 정상 인성이라고 일컫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준 정상 인성의 성장 과정이며, 정상 인성의 모습이다. 그러니 이해되지 않고 생소한 일이 네게 닥쳤을 때 하나님은 네가 로봇처럼 신속하게 반응하여 속히 답안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로봇은 한 번에 모든 정보를 기억 장치 속에 입력하기 때문에 네가 답을 원할 경우, 기억 장치 속에 저장만 되어 있다면 검색 한 번으로 답할 수 있다. 정상적인 사람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겪은 일이라고 해서 반드시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경험과 경력, 이력, 진실한 체험 등의 정상 인성과 관련된 것만 있을 뿐이다. 이는 슈퍼맨, 로봇, 특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과는 다르다.

하나님은 정상 인성에 필요한 것과 갖춰야 할 것을 바탕으로 사람에게 요구 기준을 제시하고 실행의 길을 가리켜 주었다. 이 실행의 길이 무엇이냐?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네가 급히 알려고 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너는 보통 사람이다. 설사 네가 과거에 겪은 일이라 경험이나 체험을 조금 해 봤다고 한들 미래에 동일한 일이 일어났을 때 네가 꼭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찾게 되는 것도 아니고, 완전하게 진리에 따라 실행하는 것도 아니며, 만점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라면 조급하게 알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느냐? 사람에게 정상 인성을 이해하게 해 준다. 정상 인성은 비범하지 않고, 고상하지 않으며,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여러 사물에 대한 사람의 체험과 경험, 인식, 이해 그리고 각 부류 사람의 본질에 대한 견해는 모두 여러 환경, 여러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한 체험을 통해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정상 인성이다. 초자연적인 일은 없고, 아무도 이 단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네가 만약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한 이 법칙을 뛰어넘으려 한다면 이는 비정상적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네가 정상 인성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설명할 뿐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네가 몹시 교만하고 실속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고 알려 주었다. 너는 정상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많은 환경을 마련하여 네가 그 안에서 사람의 패괴를 경험하고 체험하고 인식하도록 할 필요가 있으며, 사람과 일, 사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체험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정상 인성이 마땅히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라는 말씀에서 실행의 길은 무엇이겠느냐?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닥쳤는데 사람이 간파하지 못하고, 이해도 되지 않으며, 접해 본 적도 없고, 생각도 안 해 봤다면,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사람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하나님의 요구 원칙이 무엇이냐?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게 이렇게 요구한다. 그럼 너는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어떤 태도로 이 일을 대해야겠느냐?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이 간파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으며 겪어 보지 못한 일, 나아가 속수무책인 일에 직면하면 먼저 태도를 바르게 해야 한다. ‘이런 일은 내가 이해할 수 없고, 간파하지도 못하고, 겪어 본 적도 없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어.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어. 어떤 일을 간파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겪어 보지 못했다고 해서 부끄러운 건 아냐.’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인식하면 끝이냐? 문제가 해결되었느냐? 부끄러울까 걱정하지 않는 것은 그저 이런 일에 대한 하나의 인식이고 태도일 뿐이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만약 네가 속으로 ‘이런 일은 체험해 보지도 못했고 간파하지도 못하겠어. 하나님께서 이런 환경을 마련하신 이유가 뭔지도 모르겠고. 어떤 성과를 거두려 하시는지, 하나님은 어떤 태도이신지 모르겠으니 그냥 내버려두자. 되는대로 놔두고 신경 쓰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무슨 태도이냐? 이것이 진리를 구하는 태도겠느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실행하는 태도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행하는 태도겠느냐?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속으로 ‘이 일은 내가 간파하지도 못하겠고 이해도 안 돼. 겪어 보지도 못했고. 대학 다닐 때 이런 일에 관한 수업을 들은 적도 없어. 내가 석사, 박사에 한때는 교수까지 했었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이 일을 간파하지 못하고 겪어 보지 못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면 너무 창피한 일 아닌가? 다들 날 무시하지 않겠어? 안 되지. 간파하지 못하겠다고 하지 말고, ‘이런 일은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고 구하면 알게 됩니다.’라고 하는 게 좋겠다. 간파하지 못하겠다거나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은 죽어도 못하겠어.’라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는 어떠냐? (좋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를 무엇으로 여기느냐? 자기를 성인이나 완벽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는 ‘내가 명색이 대학생, 저명한 학자, 석사, 박사, 명사, 위인인데 이해하지 못하거나 간파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어? 그럴 순 없지! 설사 그런 게 있다 한들 당신들도 모르는 거니까 문제 될 게 없어. 내가 간파하지 못하더라도 그걸 당신들이 알게 할 수는 없어. ‘간파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한다’, ‘할 수 없다’ 따위의 말은 절대 내 입에 담을 수 없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자는 어떤 사람이냐?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하고 잘난 척하고, 비이성적인 사람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라는 말씀을 읽고 실행의 길을 얻었느냐? 깨달음은 좀 얻었느냐? 만약 얻지 못했다면 읽은 게 헛수고이다. 어째서 이렇게 평이한 구어체 문장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냐? 여러 해 공부하고 글을 익혔는데도 쓸모가 없구나. 이렇게 간단하고 직설적인 말조차 이해하지 못하다니 정말 못난 인간이구나!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라는 이 말씀에서 실행의 길이 대체 무엇인지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갖춰야 할 태도는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본능이 무엇에 이를 수 있는지 확실히 파악하고, 무엇이 정상 인성인지 분명히 알고, 하나님이 말씀한 정상 인성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슈퍼맨이나 보통 사람보다 월등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되라고 한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인지 먼저 이해해야 한다. 네가 이해되지 않는 일을 아는 척해도 소용없다. 아무리 그런 척해도 알 수는 없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실한 태도와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주위 사람에게 너도 모르는 일, 간파하지 못하는 일, 겪어 보지 못한 일이 있고 남들과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이것은 그다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정상 인성의 모습이니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인 후에는 어떡해야 하겠느냐? 모두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 일은 저도 겪어 보지 않았고, 간파하지도 못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라요. 저도 여러분과 똑같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보다 나은 면은 있을 겁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빛을 보았고 실행의 길을 보았거든요. 제겐 희망이 있습니다.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알아요.” 그 희망이 어디에 있느냐?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이 일을 가슴에 담아 수시로 하나님 앞으로 가져와 구하고, 이 일을 가슴에 담아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자 하는 부담으로 변화시키고, 네 책임, 네가 구하는 방향과 목표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실행하면 너는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이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반드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기도로 구하고, 예배 교제 시에도 이 일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고 묵상할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저 형식적으로, 건성으로,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에 부담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가지고 이 일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 일의 본질을 간파하고자 해야 한다. 아울러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이 직면하게 되는 문제와 고민, 그리고 자신의 패괴 성품이나 여러 가지 비정상적인 내적 상태 따위의 문제도 해결하고자 해야 한다.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완전한 실행의 길이다. 이 말씀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환경을 마련해 주는 목적은 한편으로는 사람이 다방면으로 여러 일을 겪어 그로부터 공과를 배우고, 하나님 말씀의 다방면의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사람의 체험이 더 풍부해지고 하나님, 자신, 환경, 인간을 더 다각적이고 포괄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특수한 환경을 마련하고 특수한 공과를 안배하여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없는 상태에서 살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하려는 것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진리와 전혀 관계없는 행동을 하면 곤란하다. 그러니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에서 사실상 사람은 무척 수동적이고 강제적으로 하나님에게 이끌려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고심이다. 이해되지 않는 일일수록 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항상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진리를 구해야 한다. 네가 이해하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가 필요하며,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기에 더 많은 하나님의 사역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고심이다. 네가 하나님 앞에 자주 나아올수록 네 마음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다. 네 마음이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네 마음속에 하나님이 머물지 않겠느냐?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머물수록 사람이 추구하는 바와 걷는 길, 그리고 사람 내면의 상태가 점점 좋아질 것이다.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점점 더 가까워져 네가 하나님 앞에 자주 나아와 진실한 마음을 바칠수록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이 진실해지고, 네 생활과 일 처리, 행동, 처신에 절제가 생길 것이다. 이 절제는 어떻게 생기느냐? 사람이 자주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며 하나님의 감찰을 받는 것에서 생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럼 사람은 어떤 환경과 조건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감찰을 받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다거나 하나님과 매우 가깝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 마음속에 언제나 하나님의 지위가 있고 하나님이 마음속에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네가 수시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신분 본질, 하나님의 주재, 하나님의 모든 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마음속에 하나님을 담아서 하나님이 마음속에서 매우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네 마음속에 하나님을 담으면 너와 하나님 사이에 정상적인 관계가 생기고, 너는 하나님의 감찰을 받게 되며,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렇게 해야 절제가 생기는 것이다.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라는 이 짧은 말에 이렇게 다층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에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이 요구하는 태도, 그리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포함된다. 그렇다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이겠느냐? 일이 닥쳤을 때 포기하거나 도망치지 말고 무심한 태도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고, 간파하지 못하거나 이겨 낼 수 없는 일이 닥쳤을 때, 더 나아가서는 너를 연약하게 하는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해야겠느냐? 급히 알려고 하지 마라. 하나님은 등 떠밀지 않는다. 하나님은 절대 사람에게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네게 시키거나 요구하는 일은 모두 정상 인성이라면 이룰 수 있고, 도달할 수 있고,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조금도 터무니없거나 막연한 것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정상 인성으로 이를 수 있는 범위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네가 늘 상상에 따라 남보다 뛰어나고, 남보다 높고, 남보다 능력 있고, 남보다 더 잘하고자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것이다.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은 늘 이렇다. 하나님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진리를 구해야 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라고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이런 요구를 제대로 묵상해 보지도 않고 기어코 단숨에 일을 해치우려 하고, 멋지게 해내서 남의 기를 죽이려 한다. 그는 슈퍼맨이 되려고 하지 절대 평범한 사람이 되려 하지는 않는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준 자연법칙을 어기려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분명 이런 사람은 정상인이 아니며, 정상 인성이 없고 교만하기 짝이 없다. 그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제시한 정상 인성 범위 안에서의 요구를 경시하고, 하나님이 인류에게 정해 준 정상 인성 범위 안에서 도달할 수 있는 기준을 경시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요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나님의 요구는 너무 낮아. 하나님을 믿는데 어떻게 고작 정상인이 되겠어? 비범한 사람, 일반인보다 월등한 사람, 명사나 위인은 돼야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맞는 말이긴 하지만 너무 평범하고 일반적이라고 생각하여 신경 쓰지 않고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소위 슈퍼맨이나 위인이 경시하는 그 평범하고 일반적인 말씀으로 사람이 지키고 실행해야 할 원칙과 길을 분명하게 알려 준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진지하고 객관적이며 실제적이냐! 사람에 대한 요구는 하나도 높지 않고, 전부 사람이 도달할 수 있고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정상 이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뜬구름을 잡기보다는 땅에서 착실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본분을 잘 이행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진리를 자신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으로 삼아야지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아서는 안 된다.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라는 말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진리가 곧 사람의 실행 원칙임을 더더욱 깨달아야 한다. 그럼 여기서 ‘사람’은 무엇을 뜻하겠느냐? 바로 정상인을 말한다. 정상 이성과 정상적인 판단을 가지고 긍정적인 것을 사랑하며 객관, 실제, 평범, 보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말이다. 너희는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라는 말을 다시 자세히 음미해 보아라. 이 말은 평범하고, 고상하지는 않지만 정상 인성의 이성에 갖춰져 있어야 하는 것이며,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이 현실 생활에서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최우선으로 실행해야 할 진리 원칙이다. 또한, 정상 인성과 이성을 가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진리이다. 조금도 공허하지 않다. 이 평범한 가사를 너희는 여러 번 부르고 들었지만 아무도 이 말을 진리로 여겨 자세히 묵상하거나 신경 써서 교제하지 않았다. 이토록 귀한 말씀을 그냥 흘려버린 것이다. 사실,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조언과 훈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등 많은 것이 담겨 있다. 하지만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비이성적으로 그 말씀을 평범한 말로 취급하면서 소중히 여기지 않고 묵상하지도, 실행하지도 않았다. 그러면 결국 누가 손해 보고 손실을 입겠느냐? 바로 사람 자신이다. 이것이 교훈 아니겠느냐?

정상적인 사람은 이 대목에서 하나님이 요구한 것을 손쉽게 실행할 수 있다. 어렵지 않고 힘들지도 않으며 성과도 있을 것이니 결국 너는 차츰 성장하고 발전할 것이다. 물론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라는 원칙을 실행하면 진리, 성품의 변화, 여러 환경을 겪어 얻은 인식 등의 측면에서도 발전할 것이다. 이 얼마나 좋은 말씀이냐! 이렇게 하나님 말씀의 인도와 가르침 속에서 이성적으로 그 말씀에 따라 실행한다면 하나님이 여러 환경을 배치할 때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결국,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이런 환경에서 얼마간 수확과 체험이 생기고 진리를 인식하게 된다. 이런 수확을 얻으면 하나님이 왜 이런 환경을 배치했는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고, 사람에게 무엇을 얻게 하려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또한, 사람이 이런 환경을 겪을 때 어떤 시행착오와 좌절을 겪었는지, 어떤 치우친 인식을 갖게 되는지, 어떤 비현실적인 생각을 품고 하나님에 대해 어떤 관념과 거부감을 갖게 되는지 등이 이런 환경을 겪는 과정에서 점점 폭로되고 드러난다. 폭로되고 드러난 그런 것들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한동안 체험해야만 분명히 알 수 있고 인식이 생긴다. 이것은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의 진정한 함의가 응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네가 꿰뚫어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며 겪어 보지 못한 일을 마련하여 네가 무언가를 깨닫고 얻고 체험하게 하지만, 그것은 하루 이틀 안에 성과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간의 시간을 거쳐 하나님이 한 걸음씩 인도하고 깨우치며 이끌어야 네가 차츰 깨닫고 성과를 볼 수 있다. 절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폭발적이고 즉각적으로 모든 것을 완전히 깨닫거나 하나님의 뜻을 단숨에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에서 초자연적인 행사를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네가 한 가지 일의 원인과 결과를 체험하게 하여 차츰차츰 터득하게 한다. ‘이제 보니 이 부류 사람들의 본질은 이렇구나. 이런 일의 진상과 본질은 이렇구나. 이게 바로 하나님의 그 말씀이 응한 거구나. 하나님이 하신 그 말씀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달았어. 하나님이 이런 일, 이 부류의 사람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를 마침내 깨달았어.’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네가 체험을 통해 터득하게 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터득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한동안의 체험을 통해 얻은 인식과 깨달은 진리는 도리적이나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네 절실한 체험과 참된 인식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이미 진입한 진리 실제인 것이다. 하나님이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한 원인과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네가 겪은 일 가운데서 수확을 얻게 한다. 그것은 네가 그저 형식만 따르고 하나의 이론만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체험과 인식 그리고 긍정적인 관점과 올바른 실행 방법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 대목은 몇 마디 안 되는 짤막한 내용이지만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요구한 것과 사람에게 준 실행 원칙은 무척 중요하다. 지식과 도리를 대하는 태도로 하나님 말씀을 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 때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즉, 이런 일에 처할 때마다 이 원칙과 방식대로 실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원칙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는 단순한 몇 마디 말이 아니다. 비록 언어적 표현 방식과 구현 방식이 구어체라 말씀이 무척 직설적이고, 화려한 미사여구도, 고상한 어휘 사용도, 점잖은 화법도, 더욱이 권위적인 말투도 아니며, 마음과 얼굴을 맞대고 진심으로 하는 경고이자 요구이지만, 실질적으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실행 원칙과 실행의 길을 알려 준다.

많은 사람이 가장 일상적인 하나님 말씀은 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심오하거나 오묘한 말씀만 하나님 말씀으로 여기는데, 이는 치우치게 이해하는 모습 아니겠느냐? 하나님 말씀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진리이다. 일상적인 말씀이든, 심오한 말씀이든 그 속에는 진리가 있고 오묘한 뜻이 있어 수년간 체험하고 어느 정도 분량이 있어야 깨닫고 인식할 수 있다. 방금 너희가 부른 찬양 속에 이렇게 중요하고 좋은 하나님 말씀이 있건만 아무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노래를 만들어 몇 년을 부르는데도 아무도 그 속에서 중요한 실행 원칙을 찾아내지 못했다. 설령 의식적으로 하나님 말씀이 사람에게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라고 알려 주는 것 같다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이러이러한 것 같다고 느낀다고 해도 그 말씀을 현실의 삶 속에서 실행하고 실천하며 이러한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한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람은 이렇게 단순한 하나님 말씀조차 행하지 못하니 여기에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사람이 진리를 싫어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또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하신 말씀은 매우 실용적이고 원칙적이지만 저희는 하나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눈길도 주지 않으며 실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너희는 평소에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읽느냐? (평소 저희는 하나님 말씀을 대강 훑기만 합니다. 사전적 의미만 통하면 그냥 넘어가니 하나님 말씀 속에 담겨 있는 뜻이 무엇인지, 실행해야 할 진리 원칙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게 세부적으로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너희가 이론적인 것은 제법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꿰뚫어 보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긴다면 그 속에서 평생 쓰고도 남을 보배, 황금, 다이아몬드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이런 보배를 얻지 못할 것이다.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너무 많은 데다가 전부 진리이니 어떤 것이 보배인지 모르고 다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골치 아프다. 소중히 여긴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 말씀이 모두 진리이고, 그 진리가 사람의 삶과 인생에 그 무엇보다 쓸모 있고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이라는 것을 알며, 하나님 말씀을 보배로 여겨서 늘 애지중지하는 태도로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이 가장 값진 보배임을, 그 어떤 명사나 위인의 인생 격언보다 백배, 천배 귀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를 얻고, 인생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을 발견하여 얻게 되면 네 가치가 올라가고 하나님에게 칭찬받기 때문에 너는 이 진리를 무척 소중히 여기게 된다. 실생활에서의 예를 들어 보겠다. 가령 어떤 여자가 예쁜 옷 한 벌을 사서 집에 돌아와 입어 보고는 거울 앞에 서서 이리 보고 저리 보며 생각한다고 해 보자. ‘이 옷 진짜 예쁘다. 원단도 너무 좋고 박음질도 잘 됐어. 착용감도 보들보들한 게 참 편해. 이런 좋은 옷을 손에 넣다니 난 정말 복받았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이니까 아껴 입어야지. 격식 있는 곳에 가거나 중요한 사람을 만날 때만 입어야겠다.’ 평소 시간이 날 때마다 옷을 꺼내 감상하고 입어 본다. 반년이 지나도 그 옷에 대한 애착이 여전해 애지중지한다. 이것을 소중히 여긴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 말씀을 이 정도까지 대하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너희가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정도는 여자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옷을 아끼는 정도보다도 못하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너희가 하나님 말씀을 숱하게 읽어도 진리를 얼마 발견하지 못하고 도무지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너희는 그저 이론적으로만, 입으로만 하나님 말씀이 전부 진리라고 떠들 뿐이다. 만약 가장 단순한 말씀, 하나님이 최초에 선포한 말씀을 언급하며 거기에 담긴 진리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고 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너희는 하나님 말씀을 적잖이 읽고 들었건만 어째서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냐? 문제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 사실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데 있다. 지금 너희가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정도로는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원칙, 그리고 실행의 길을 발견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일이 닥쳤을 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언제나 원칙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여러 일을 겪고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별다른 발전이나 변화도 없으니 그 수확이 보잘것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너무나도 불쌍하지 않으냐?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아라.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 하나님은 너의 전능임을 믿어라.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고 갈망하며 구하라. 사탄의 구실과 속셈, 간계를 거절하고, 실망하거나 연약해지지 말고,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려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협력하고, 내면의 걸림돌을 없애라.”) 하나님 말씀을 읽는 원칙과 실행의 길을 찾는 법을 너희에게 콕 집어 알려 주겠다. 다시 한번 한 구절씩 읽어 보아라.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이 구절에서 사람은 원칙 하나를 깨달아야 한다. 즉, 조급해하거나 덜렁대거나 성급하게 결과를 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한 가지 태도이다. 첫 구절은 사물을 대하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이다. 이 올바른 태도는 정상 인성의 이성적 범위 안에 있는 것이고, 정상 인성의 이성과 능력 범주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어서 두 번째 구절을 읽어 보아라.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실행의 길입니다.) 그렇다. 이 얼마나 간단하냐! 말 그대로 실행의 길이다. 여기서 ‘자주’는 ‘내키는 대로’의 의미가 아니며, 십 년에 한 번 정도의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생각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가져와서 기도하고 구하라는 것이다. 네가 만약 이 일에 부담을 느끼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 있다면, 이 일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요구 그리고 네가 꿰뚫어 봐야 할 문제의 본질을 절실하게 깨닫고 싶다면 항상, 즉 매우 높은 빈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한다. 여건에 따라 바쁠 때는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그 일을 생각해라. 마치 생각하듯, 또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구하듯 말이다. 이런 실행 방식은 무척 명확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식사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이렇게 묵상하고 기도해라. ‘하나님, 제가 겪는 환경이 이런데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고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났는지 꿰뚫어 보지 못하겠습니다. 그 사람은 대체 무슨 속셈을 지녔을까요? 제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죠? 이런 일에 처했을 때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간결하게 말 몇 마디로 자신이 구해야 할 일과 깨닫고자 하는 문제의 본질에 대해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단순히 하나님 앞에 문제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진리를 구하는 한편, 돌파구를 열어 달라고,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알려 달라고, 너를 깨우치고 인도해 달라고 하기 위함이다. 네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전제가 무엇이겠느냐? (급히 알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급히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하나의 태도이다. 지금은 급히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급히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대전제하에서 네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 생겼고 그 일에 부담이 생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네게 그 일이 일종의 압박으로 작용해서 부담이 생겼고, 깨닫고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네 실행의 길은 이렇다. 여가 시간이나 정규적인 영 생활 시간, 혹은 형제자매와 이야기할 때 너는 마음속에 있는 실제적인 고충과 문제를 모두 꺼내 형제자매와 교제하고 구해도 된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으로 가져와 진리를 구하며 이렇게 기도해라.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환경을 어떻게 겪어야 할지 아직 모르겠고, 여태 아무런 인식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또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분량이 작고 깨달은 진리도 얼마 안 되니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인도해 주십시오. 이런 환경에서 제가 무엇을 얻고 깨닫기를 원하시는 건지, 이런 환경에서 제게 무엇을 드러내려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저를 깨우쳐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라는 구절의 실행 길이다. 이렇게 실행하면서 때로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때로는 묵묵히 기도하며, 때로는 소리 내어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또 때로는 형제자매와 교제하여라. 이런 모습이 있으면 네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또한, 늘 이렇게 마음으로 하나님과 소통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몇 년 동안 경험하면 자연스레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실행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는 좋은 일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환해질 때가 있는데, 이는 네가 체험했던 말씀을 읽은 것으로, 예전의 관념과 상상이 단숨에 해결될 것이다. 그럼 너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이 말씀을 읽으니 마음이 환해집니다. 예전의 문제를 갑자기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깨우침이란 걸 압니다. 이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는 또 한 번 기도하고 또 한 번 하나님 앞에 나아온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려우냐? 이런 시간은 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구하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 이렇게 기도하기까지 줄곧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라는 하나님 말씀의 원칙을 실행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네가 한결같이 이 말씀을 실행하고 이 말씀의 실행 원칙을 지키며 이런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면, 이를 실행 원칙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렵겠느냐? (어렵지 않습니다.) 신경을 쓰고 입을 움직이며 시간과 정성을 들이고 수시로 시간을 내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마음속 말이나 마음이 통하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주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것이다. 이는 이렇게나 단순하고 홀가분하고 쉬운 일이다.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다. 너는 마음속에 대단히 큰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담아 놓고 그것을 부담으로 여겨 늘 그 일을 잊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네 마음속에 그 일이 있으니 수시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며 이야기하고 대화해라.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에게 얘기해야겠느냐? (진심 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 진심 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네게 부담이 있다면 네 마음은 분명 진실해질 것이다. 남들이 한담할 때 너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소통한다. 때로는 일이 힘들어 쉬는 시간에도 그 일이 생각난다. ‘안 되겠어. 아직도 이해가 안 가. 하나님께 얘기해 봐야겠어.’ 어째서 시간만 나면 그 일이 생각나겠느냐? 네가 속으로 그 일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고, 그것을 너의 부담이나 일종의 책임이라고 여겨 이해하고 해결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과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고 대화하면 네 마음은 자연스레 진실해진다. 너는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마음가짐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전처럼 차갑고 거리감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가까워진다고 느낄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실행의 길은 이처럼 사람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과 이렇게 교류하는 것이 어렵겠느냐? 이 일을 염두에 두면서 수시로 하나님과 얘기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인사하고 하나님에게 마음속 말을 해라. 또 네 어려움과 알고 싶은 일, 속에 담아 놓은 생각과 의구심, 네 고충과 책임 등을 전부 하나님에게 이야기해라. 이렇게 실행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동안 실행하면 금방 효과를 보고 수확이 생기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것도 과정이란 게 있다. 즉, 한동안 이렇게 실행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가까워지고, 마음가짐이 좋아지며, 내적 상태가 정상화되고,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대한 관심도 점점 높아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깨달아 실행한다면 하나님 말씀 실제에 진입하기 시작하겠지만 이는 짧은 시간에 실현되는 일이 아니다. 반년이나 1년이 걸릴 수도 있고, 2년이나 3년이 되어야 뚜렷한 성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 기간에 사람에게 패괴나 패역이 없겠느냐? 그렇지 않다. 네가 하나님에게 수없이 기도하고 이렇게 실행했다고 해서 반드시 성과가 나타나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꼭 결과를 보여 주고 답을 주어야 하겠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꼭 그렇지도 않고 그러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굳이 왜 이렇게 하시는 거죠? 어째서 사람이 이렇게 실행하게 하시는 건가요?” 성급하게 굴지 마라. 그렇게 실행하면 절대 성과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1~2년간 이렇게 실행할 때 당장, 단기간에는 아무런 성과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5년, 10년 뒤에 하나님이 또다시 비슷한 환경을 배치할 때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측면의 진리를 바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5년, 10년 뒤에 네가 깨닫고 이해하게 될 한 측면의 진리는 반드시 지금의 체험과 인식, 깨달음을 토대로 할 것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생각해 보아라. 사람이 한 측면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 쉬운 일이겠느냐?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기 위해 대가를 치르는 의미이자 가치이다. 이것이 두 번째 구절의 실행 원칙이다.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 이 말씀은 평이해서 이해하기 쉽다. 즉, 자주 기도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만 진실하면 이루어지니 이렇게 간단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말은 분명히 모든 사람이 반드시 진입해야 하는 진리 실제이자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나중에 구원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다. 비록 구어체라 무척 단순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렇게 체험하고 진입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큰 건물을 지을 때 30층이든, 50층이든, 나아가 100층 이상의 건물이든 반드시 기반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기반이 부실하면 아무리 고층 건물이라도 오래갈 수 없으며, 몇 년 지나지 않아 무너지고 만다. 다시 말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진리를 기반으로 해야 굳게 설 수 있고 하나님에게 칭찬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더 심오하고 높은 경지의 진리를 깨달으려면 반드시 가장 기본적인 것, 즉 토대가 되는 것들을 갖추어야 한다.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지 못한 것보다 위험한 일은 없다. 가장 기본이 되는 진리나 실행 원칙, 실행의 길을 간과하지 마라. 진리인 이상, 사람이 갖추고 실행해야 하는 것이니 크고 작음, 높고 낮음을 가리지 마라. 반드시 기초부터 시작해야만 뿌리를 튼튼히 내릴 수 있다.

이어서 세 번째 구절을 읽어 보아라. (“하나님은 너의 전능임을 믿어라.”) “하나님은 너의 전능임을 믿어라.”라는 말은 무슨 의미이냐? 이는 믿음과 이상(異象)이다. 이런 이상이 너를 받치고 인도하면 네게 길이 생긴다. 이렇게 실행하면 성과가 없겠느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제가 실행해 봤는데 기운이 빠지더군요.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지도, 알려 주지도 않으시니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시긴 한가요?”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네게 알려 주든 말든, 하나님은 전능하다. 하나님이 네게 알려 주고자 하여 알려 주어도 하나님은 전능하고, 하나님이 네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아 알려 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전능하다. 하나님이 네가 깨닫게 하든 말든 하나님은 전능하다. 하나님의 본질과 신분은 변하지 않는다는 이 이상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세 번째 구절로, 매우 간단하다. 간단하긴 하지만 사람은 체험해야 한다. 체험해 보면 이 말이 확실히 진리라는 것이 검증되고, 다시는 이 말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 않게 될 것이다.

계속해서 네 번째 구절을 읽어 보아라.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고”)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고”, 이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사람은 무엇을 ‘대단하다’고 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살벌하다, 야심 차다, 교만하고 독선적이다, 제멋대로 난폭하게 굴다,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단하다고 하느냐?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고’를 어떻게 이해해야겠느냐? 어떻게 하나님을 원해야겠느냐? 이는 앞서 말한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라는 것으로, 진리를 깨닫고 구원받고자 하는 바람과 의지가 있고, 하나님의 주재와 지배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는 바람도 있어야 한다. 이것을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의지라고 하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이 일을 구체적으로 묘사했지만 사람은 여기에 담긴 의미를 극단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순수하고 올바르게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의 ‘대단하다’는 인위적으로 무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성을 띠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어리석고 무모하게 구는 것도 아니다. ‘대단하다’는 주로 의지에 관한 말이다. 마치 사람이 한 물건을 일정 정도까지 귀중히 여기면 기어코 손에 넣는 것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의미가 있다.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고’는 긍정적인 것으로, 긍정적인 결실을 맺는다. 그렇다면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고’는 정확히 무슨 의미겠느냐? (자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기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자 하는 바람과 의지를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육의 이익과 즐거움을 내려놓고, 개인적인 여가 시간을 버리고 그 시간을 하나님께 구하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주재 인식하기를 구하는 등의 긍정적인 사물을 위해 써야 하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한 가지 일을 위해 기도하고, 한 측면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구하며,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일정한 대가를 치르는 것, 이것을 대단히 하나님을 원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정상 인성의 이성에 부합하지 않겠느냐? 이 말이 이해하기 쉽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런 모습에 살벌하거나 폭력적으로 빼앗는다는 의미가 있느냐? 거칠고, 무모하며, 지혜롭지 못한 모습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른바 ‘대단히’가 무엇이겠느냐? 방금 내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말해 보아라. (자주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며 자신의 육적인 즐거움을 버리고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진리를 구하는 데 쓰면서 그 일을 위해 힘쓰고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예를 들어, 간혹 문뜩 네가 좋아하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연예인이 어떤 영화에 출연했다는 것이 생각나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려다 생각한다. ‘아냐, 그가 무슨 영화를 찍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늘 영화 보는 건 옳지 않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해야 해.’ 마음이 평온해지니 예전에 하나님 앞에서 구했던 문제가 아직까지 아무런 개념도 없이 이해하지 못한 것이 생각난다. 너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평온히 하고 기도한다. ‘하나님, 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놓길 원합니다. 최근에 겪었던 환경으로 인해 제가 크게 감동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순종하지 못하고, 그것이 당신의 주재임을 밝히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환경 속에서 제 패괴와 패역을 드러냄으로 제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순종할 수 있도록 저를 깨우치고 인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고 나서 이런 생각을 한다. ‘아냐. 내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니 하나님 말씀을 좀 더 읽어서 문제를 해결해야겠어.’ 이윽고 하나님 말씀을 잠깐 읽다가 시간을 본다. ‘아, 30분이나 됐네. 하나님 말씀이 참 좋긴 한데 방금 읽은 말씀은 내 문제랑 상관없는 내용이야. 내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어. 하나님께서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고 이런 환경을 주신 건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일단 본분부터 빨리 이행하자. 해야 할 일을 지체할 순 없지. 어쩌면 언젠가 관련된 말씀을 읽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몰라.’ 이것이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게 간단하다. 자신의 취향과 즐거움, 여가 시간을 버리는 동시에 진심을 조금 수확하고,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의지를 조금 실행하여 마음이 아주 든든하고 평안하다. 육을 저버리고 자기 육의 즐거움을 내려놓는 것이 얼마나 평안하고 윤택한 일인지 난생처음으로 체험하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여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며 마음속 말을 하는 것이 사회적 흐름이나 일에 관심을 갖는 것보다 평안하고 즐거우며 수확이 있다는 것도 체험하게 된다. 진리를 깨닫고, 많은 일을 꿰뚫어 보면 하나님 말씀이 좋다고, 하나님이 좋다고, 진리를 얻는 것이 분명 보배를 얻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많은 일을 꿰뚫어 보아 곤혹스럽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며 하나님 말씀을 의지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의지로 맺을 수 있는 결실이다. 네가 이렇게 실행하여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육적인 즐거움을 내려놓는 것이 바로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의지의 모습 중 하나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모습이 공허하냐? (공허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으냐? (쉽습니다.) 너무나도 쉽다. 이는 정상 인성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이 있기에 선택도 있다. 만약 일이 닥쳤을 때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마땅히 뉘우치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지 절대 잘못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이런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다. 만약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뉘우치지 않는다면 이런 자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다. 예를 들어, 네가 본분을 이행할 때 대충 건성으로 하면서 자기 몸을 사리고 하나님의 감찰을 피하려 한다면, 그런 생각이 들 때 얼른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면서 그런 행동이 옳은 것인지 반성해야 한다. 또한, 이렇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거지? 내가 이렇게 건성으로 하면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어. 게다가 내가 몸을 사리려고 하나님을 믿는 건 아니잖아. 나는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거야. 내가 이렇게 하는 건 정상 인성의 모습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태도도 아니야. 안 되겠어. 세상에 있을 때는 몸을 사리면서 내 마음대로 행동해도 그만이었지만, 지금 나는 하나님 집에 있잖아. 하나님의 주재와 감찰 아래 있다고. 나는 사람이니까 마땅히 양심적으로 일해야지, 내 마음대로 행동해선 안 돼. 대충 건성으로 하면서 몸을 사릴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고.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몸을 사리거나 건성으로 임하는 게 아닐까? 더 노력해야겠다. 방금 나는 그렇게 하는 건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해 고생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이젠 나도 알아. 그렇게 하면 귀찮기는 해도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러니 그렇게 해야만 해.’ 막상 행동에 옮기려고 하면 그래도 고생할 게 걱정될 것이다. 그때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게으르고 교활한 사람입니다. 저를 징계하고 질책하여 제 양심이 자각하게 해 주시고, 제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저는 대충 건성으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패역과 추태를 알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해 주시고 깨우쳐 주십시오.’ 네가 이렇게 기도하고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하면 후회의 마음이 생길 것이며, 자신의 추태를 증오할 수 있어 잘못된 내적 상태가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또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왜 나는 대충 건성으로 하는 걸까? 나는 왜 늘 몸을 사리려 드는 거지? 그건 양심도 이성도 없는 짓이야. 그러고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 나는 왜 일할 때 참답게 대하지 못하는 걸까? 그냥 에너지와 시간을 좀 더 들이는 것뿐이잖아? 그게 뭐라고? 그건 당연한 거잖아. 이런 것조차 해내지 못하면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 그래서 의지를 다지며 하나님께 맹세할 것이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저는 정말 깊이 패괴되어 양심도 이성도 인성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제 회개하고자 하니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반드시 잘못을 바로잡겠습니다. 만약 제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저를 징벌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마음가짐이 바로잡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본분을 이행하거나 일을 할 때 참답게 대할 수 있다. 대충 건성으로 하는 부분이 줄어들고, 고생하며 대가도 치를 수 있다. 또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게 정말 좋다고 생각하며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깃들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면 내적 상태가 바로 달라질 것이다. 네 마음속 소극적인 상태가 바로잡히고 자신의 속셈과 육의 사욕을 저버리게 되고 육의 안락함과 즐거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며 더 이상 제멋대로 하지 않게 되니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게 된다. 이렇게 육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쉽겠느냐?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육을 저버리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이렇게 실행하기만 하면 자기도 모르게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되는데, 조금도 어려울 것이 없다. 물론 진리를 실행할 때도 싸움의 과정과 생각의 전환 과정이 있다. 이는 모두 진리를 구하여 해결해야 한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소극적인 상태를 해결하기 쉽지 않을 것이고 진리를 깨닫지도, 실행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런 생각의 전환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생각의 전환이 매우 어려울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 어렵지 않을 테니 자연스럽게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에 순종할 수 있다.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겨 낼 수 있으니 체험 간증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인 것이다.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네게 패괴와 패역이 생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 네게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이 있으면 적어도 양심과 이성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진리를 구할 것이다. 그리하면 너는 모든 일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실행하고 진입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공허하겠느냐? (공허하지 않습니다.) 공허하지도, 막연하지도 않다. 그것은 아주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이며 전혀 추상적이지 않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아, 제가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는데 진리를 실행해야 할 때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조급한 마음에 진땀이 나는데도 길이 보이지 않아요. 늘 육이 고생하지 않고 자기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 쪽으로 진리를 실행할 궁리만 하다가 결국 길을 찾지 못합니다. 대단히 하나님을 원한다는 게 이렇게 쉬울 줄이야,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쉬운 일인 것을 진작 알고 이 말씀대로 실행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네가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은 건데 누굴 탓하겠느냐? 누가 너더러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지 말고 쓸데없는 짓이나 실컷 하라고 하더냐? 지금 한마디로 정리해 주겠다.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해야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다. 절대 자기 맘대로 일을 처리하지도 말고,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도 말며, 교회에서 의지할 만한 패거리를 만들지도 마라. 이런 사람은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이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을 중시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자, 늘 사람을 우러르고 의지하면서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를 따라 소란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자는 변덕만 부리다 자신을 망칠 것이고,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려 아연실색해질 것이다. 자기 길만 고집하지 않으려면 자주 하나님 앞에 나아와 매사에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야 한다. 그러면 진리를 깨닫는 결실을 맺을 수 있고, 진리 실행의 길에 들어설 것이며,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핵심은 절대 사람을 추종하거나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은 이 사람이 좋다고 따르다가 내일은 저 사람이 옳다고 그를 따른다고 부산을 떨어 봤자 진리를 얻지 못한다. 어떤 문제에 처하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만약 맹목적으로 사람을 따르거나 듣기 좋은 말, 그럴싸하게 들리는 말을 하는 자를 따르면 속아 넘어가기 십상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임을 믿으며 하나님 말씀만 듣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실행해야 한다. 그리하면 사람을 추종하거나 사람을 따르다가 잘못된 길로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어서 다음 구절을 읽어 보아라. (“갈망하며 구하라. 사탄의 구실과 속셈, 간계를 거절하고”) 이 역시 실행에 관한 내용이다. ‘갈망하며 구하라’는 진리를 실행하고 싶지만 길이 없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싶지만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른다는 의미이다. 마음에 이런 갈망이 있으면 구하고 기도해야 한다. 항상 자신에게 결핍된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특히 일이 일어났을 때 길이 보이지 않아 괴롭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는지 몰라 늘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 힘으로 해결하니 마음이 평안하지 않다. 진리를 실행하고 싶어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모른다. 이런 느낌이 바로 갈망이다. 갈망이 있으면 구해야 한다. 구하지 않으면 길이 없고, 구하지 않으면 흑암에 떨어진다. 계속 구하지 않으면 끝장이다. 불신파인 것이다. ‘사탄의 구실과 속셈, 간계를 거절하고’는 무슨 뜻이냐? 사람에게 일이 일어나면 항상 자신의 뜻을 갖고 자신의 육적인 이익만 생각하며 육을 위해 돌파구를 찾는데, 이럴 때 사람은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 내면에 싸움이 일어나는데, 사람은 사탄의 구실과 육의 여러 가지 이유를 거절해야 한다는 말이다. ‘거절’은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여러 가지 구실과 이유, 즉 사탄의 속셈과 간계를 꿰뚫어 보고 간파한 후 저버림을 선택하는 과정을 말한다. 때로 사람에게 패괴된 생각, 속셈, 목적 그리고 사람의 지식, 철학, 이론 및 처세술, 모략과 간계 등이 생기면 그 즉시 이는 패괴된 것의 표출임을 의식해야 한다. 그것을 놓치지 말고 진리를 구해서 해부하여 진상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철저하게 거절하고 저버려서 싹을 잘라 버려야 한다. 언제든지 패괴된 생각이나 사상, 속셈이나 관념이 생기면, 생긴 그 즉시 놓치지 말고 꿰뚫어 보고 간파하여 저버린 다음 바로잡아야 한다. 바로 이런 과정인 것이다. 사탄을 거절하고 육을 저버리는 것은 이렇게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쉽지 않으냐? 이 과정은 사실 방금 들었던 두 가지 예에서 이미 언급했다. 이것이 바로 일이 일어나 사람에게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않은 내적 상태가 생겼을 때 대처해야 하는 방법에 관한 실행 원칙이다.

이어서 다음을 읽어 보아라. (“실망하거나 연약해지지 말고,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려라.”) 한마음으로 구하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실망하거나 연약해지지 말고,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려라.”라는 두 구절의 짤막한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어떤 의미겠느냐? (첫 번째 의미는 실망하거나 연약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만나거나 잠깐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말고 낙담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리라는 것은 구하는 과정에 끈기가 있어야 하고, 이해되지 않으면 계속해서 구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의미입니다.) ‘실망하거나 연약해지지 말고’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지키고, 전능한 하나님이 너를 깨우쳐 진리를 깨닫게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째서 지금 네가 깨닫지 못하겠느냐? 왜 하나님이 지금은 너를 깨우치지 않겠느냐? 여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네 믿음을 검증하고 있는 동시에 이런 방식으로 네 믿음을 굳건히 하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최소한 깨닫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기도하며 구하기도 하고,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도 가지고, 하나님 말씀도 소중히 여기기 시작하며 하나님 말씀에 관심을 가졌다. 또 수시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해야 한다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말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일할 때는 구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하지만 너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한테서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깨우침이나 빛 비춤, 인도가 확실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 같아. 더구나 내가 이행하고 있는 본분에서 하나님이 내게 어떤 특별한 은사나 재능, 특별한 기량을 주시는지도 잘 모르겠어. 오히려 나보다 못한 사람이 이젠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인걸. 본분도 나보다 잘 이행하고 복음을 전하는 말솜씨도 나보다 유려해. 난 어째서 남들만 못한 걸까? 왜 여태 별다른 발전 없이 제자리걸음만 하는 걸까?’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의 이유가 있다. 한 측면은 본인에게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본인이 구하는 방식, 속셈과 목적, 그리고 기도할 때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속내와 동기 등 이 모든 것을 네가 반성하고 인식하며 문제를 찾아내 빨리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측면은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많이 주든 적게 주든, 또 어떤 방식으로 베풀어 주든 거기에는 하나님의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이 있다.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너는 어쩌면 하나님에게 은혜나 긍휼을 받을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말하는 은혜 줄 자나 긍휼히 여길 자가 아닐 수도 있다. 하나님이 보기에 네가 다른 사람보다 굳세거나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시련과 연단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유는 많지만 어떤 이유든 하나님이 한 일이라면 언제나 옳다. 그러니 사람은 하나님에게 그 어떤 배부른 요구도 하지 말아야 한다. 네가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은 그저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하나님이 너를 깨우치고 답을 주기 전까지 네가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은 그저 구하면서 하나님이 네게 베풀어 줄 시간, 하나님이 네게 은혜를 줄 시간을 기다리고, 하나님이 너를 깨우치고 인도할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평균적으로 분배하는 식으로 각 사람을 대하지는 않기 때문에 너는 ‘평균’이라는 말로 하나님에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네게 줄 때가 바로 네가 받아야 할 때이고, 하나님이 네게 주지 않을 때는 그 시간이 하나님이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고 옳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기에 그때는 네가 받으면 안 되는 때인 것이다. 하나님이 너는 받으면 안 되니 주지 않겠다고 하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이성적인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이 제게 주지 않으시면 순종하고 기다리겠습니다. 전 아직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아마 제 분량이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겠습니다. 원망이나 시기하지 않고 의심은 더더욱 하지 않겠습니다.” 이럴 때 사람은 이성을 잃어선 안 되고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성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하나님을 대할 때 피조물이 지녀야 할 태도는 오직 하나, 즉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반면 하나님은 너를 서로 다른 태도로 대한다. 여기에는 근거가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뜻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일을 하고 각 사람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갖는지는 하나님 자신의 선택이고 방식이다. 물론 이런 선택과 방식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기 전까지 사람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유일한 일은 구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짓은 하지 마라. 이럴 때 사람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짓은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 은혜, 긍휼을 느끼지 못할 때 하나님을 멀리하면서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고 하거나 하나님에게 대든다거나 심지어는 하나님의 깨우침이나 인도를 느끼지 못할 때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가장 보기 싫어하는 것이다. 물론, 네가 정말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신분 본질을 부인하면서 하나님에게 대드는 지경에 이른다면 이는 초기에 하나님이 너를 상대하지 않은 것이 옳았음을 입증한다. 네가 이 정도의 시련과 검증도 이겨 내지 못한다면 너는 하나님에게 일말의 믿음조차 없는 것이고, 네 믿음이 공허한 것이다. 하나님의 깨우침이나 인도를 느끼지 못할 때 사람이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구하고 기다리는 것은 사람의 책임이자 하나님을 대할 때 사람이 가져야 할 이성과 태도, 실행 원칙이다. 구하고 기다릴 때는 그 어떤 요행도 바라지 말고, ‘내가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내게 확실한 음성을 들려주시겠지. 좀 더 진심을 다해서 하나님이 나를 깨우쳐 주실지 봐야겠어. 어쩌면 깨우쳐 주실지도 모르잖아. 깨우쳐 주지 않으시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지 뭐.’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런 요행은 바라지 마라. 하나님은 사람의 이런 태도를 싫어한다. 이게 무슨 태도란 말이냐? 요행에는 시험하려는 의도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짓이다. 기다릴 거면 진심을 다해 기다려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며, 자신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를 구하여라.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대하든, 결국 네가 완전히 깨닫든 아니든 네가 준수하고 순종해야 할 원칙은 변해선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너는 피조물이 가져야 할 지위와 본분을 지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결국 너를 외면하든, 네게 뒷모습을 보이든, 혹은 네게 나타나든 네 본분을 지키고 피조물의 본래 자리를 지키면 너는 증거가 생기고 이긴 자가 될 것이다. “실망하거나 연약해지지 말고,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려라.”라는 두 구절의 짤막한 말은 무척 중요하다. 여기에는 사람이 갖춰야 할 이성과 서야 할 본래 자리, 실행해야 할 길이 담겨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구하고 기다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깨우쳐 주지 않으시나요? 어째서 저를 이끌어 주지 않으시죠?”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하나님에게 요구하지 마라. 이는 정상 인성의 이성이고, 피조물이 최우선으로 갖추어야 할 이성이다. 사람의 두뇌, 사상, 관념으로는 사람이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으니 하나님이 모두 알려 줘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게는 너에게 알려 주어야 할 책임이나 의무가 없다. 내가 알려 주고자 하면 너는 조금 알게 될 것이니 그것은 예상 밖의 수확이다. 그러나 내가 알려 주고 싶지 않아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너는 깨달을 생각도 하지 마라!” 어떤 사람은 말한다. “어째서 저희랑 줄다리기를 하시나요?” 이것은 줄다리기가 아니다. 창조주는 영원히 창조주이다. 그가 하는 일에는 자신의 방식과 방법이 있다. 설령 그 방식과 방법이 인간의 취향이나 사상과 관념, 나아가서는 전통문화에 맞지 않는다 하여도, 인간의 그 어떤 측면에 맞지 않는다 하여도, 쉽게 말해 인간의 요구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도 창조주가 어떻게 하든, 사람이 이해하든 말든 창조주의 신분과 본질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며, 사람은 영원히 인간의 언어, 인간의 관념, 인간의 그 어떤 방식으로도 창조주를 판단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이성이다. 네가 이런 이성조차 갖추지 못했다면 내가 솔직히 말해 주겠다. 네가 제대로 된 피조물이 되지 못하면 언젠가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네가 이런 이성조차 갖추지 못한다면 언젠가 너의 사탄 성품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때 너는 하나님을 의심하고 욕하며 부인하고 배반할 것이니 완전히 끝장나 도태될 것이다. 그래서 피조물이 갖춰야 할 이성은 무척 중요하다. “실망하거나 연약해지지 말고,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려라.” 이 두 구절의 말은 사람이 현실 생활에서 항상 겪는 여러 환경을 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할 때 피조물이 갖추어야 할 이성과 원칙이다.

이 말씀은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라는 말로 시작해서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려라.”라는 말로 끝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의 속뜻은 어쨌든 결국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닌가요? 우리가 마음을 다해 구하며 기다리고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갈망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가 일의 진상을 알도록 답을 주시지 않을까요?” 내 대답은 이렇다. 꼭 그렇지만은 않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의 모든 구절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며, 피조물이 지켜야 할 실행 원칙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실행의 길과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실행하고 지켜야 할 원칙을 주었지만 “너희가 이 말씀을 얼마나 깨달았든 이 원칙을 지키기만 하면 반드시 너희에게 사실과 답을 알려 주고 결국에는 설명해 주겠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그런 책임이 없다. ‘반드시’란 없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너희 모두가 깨달아야 할 일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절대 사람의 관념과 철학, 경험, 교훈에 따라 인간의 룰, 나아가서는 인간의 법칙을 지키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이 요구하는 원칙을 지키고 하나님이 제시하는 여러 진리 실제에 진입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을 알아들었느냐? (알아들었습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이 말씀에 분명히 설명되어 있다. 일단 첫 구절을 말해 보아라.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이는 하나의 원칙으로, 손쉽게 실행할 수 있다. 평이한 말이라 실행하는 데 아무런 부담이나 압박감이 없어 무척 수월하다. 두 번째 구절은 무엇이냐?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입니다.) 네가 지구상에 살고 있는 정상적인 사람 중 하나라면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네게 그럴 생각이 없으면 몰라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루 24시간 중 정상적인 업무와 휴식, 식사나 개인의 영 생활 시간을 제외하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치는 것’이 쉽지 않겠느냐? (쉬울 것입니다.) 길을 가고, 대화를 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 쉽게 할 수 있어 올바른 일이나 본분 이행, 하고 있는 일에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얼마나 쉬운 일이냐! 사람의 자질이 어떻든, 진심을 바치고 진리에 공을 들이면 진리를 차츰차츰 깨닫게 되고, 이런 실제에 쉽게 진입하게 될 것이다.

다음 구절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너의 전능임을 믿어라.”입니다.) 그럼 반대로 너희에게 물어보겠다. 너희는 ‘하나님이 너의 전능’임을 믿느냐? 언제부터 믿었느냐? 어떤 일에서 믿은 것이냐? 그런 증거나 체험이 있느냐? 누군가 네게 “하나님이 당신의 전능임을 믿으시나요?”라고 묻는다면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은 저의 전능이십니다! 어떻게 저의 전능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라고 주저 없이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이어지면 어떻겠느냐? “하나님이 너의 전능이냐? 그렇다면 너는 어떤 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보았느냐? 하나님의 전능이 네게서 얼마나 나타났느냐? 넌 언제 하나님이 너의 전능임을 알게 되었느냐? 어떤 일에서 하나님이 너의 전능이라고 생각했느냐? 네가 만약 하나님은 전능해서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째서 연약해질 때가 있는 거냐? 어째서 소극적으로 변하느냐? 일이 일어났을 때 왜 육을 저버리지 못하고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느냐? 사람들과 지낼 때 왜 늘 사탄 철학에 의지하여 살아가느냐? 어째서 항상 거짓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책망을 느끼지 못하느냐? 정말 하나님이 너의 전능이냐?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전능이란 게 대체 무엇이냐? 하나님의 본질과 부합하느냐?”라고 묻는다면 확실하게 대답할 엄두가 나겠느냐? 내가 이렇게 물으면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네게는 이런 체험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고, 하나님을 믿는 동안 하나님의 주재를 체험해 보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이 전능한 손으로 사람과 일, 사물을 주재하는 사실도 보지 못했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고 경험이나 체험해 본 적은 더더욱 없다. 그러니 하나님이 너의 전능이냐는 물음에 아는 게 없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은 네게 이런 믿음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너에게 이 말은 네 이상(異象)이어야 한다. 반드시 네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데 가장 강력한 증거이자 네가 나아갈 수 있도록 지탱하는 한 측면의 이상이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가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저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만 믿을 뿐 진실로 하나님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너는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거나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는 체험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체험하지도 못했다. 네게는 이런 깨달음이나 체험은 물론, 인식마저 없는 것이다. 만약 단순히 “하나님이 당신의 전능임을 믿으시나요?”라고 묻는다면 너는 분명 그렇다고 대답하겠지만, 이에 더해 어떻게 체험하고 인식했는지 묻는다면 분명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초래된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이런 측면의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론적으로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네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 피조물이라고 인정하지만 하나님을 따른 그날부터 너는 피조물로서의 직책을 이행한 적이 전혀 없다.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 네 삶의 근간으로 삼고 하나님 말씀을 본분 이행의 실행 원칙과 길로 삼아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 바로 직책이다. 이런 진리 실제에 아직 진입하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그것은 네가 비록 하나님을 따르지만, 너란 사람이 비록 가정과 직업이나 사업을 버리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따르고 있지만 네 마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풀어 준 진리,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며 내려놓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를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준 인생의 목표와 방향, 생활 준칙, 인생 준칙과 같은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입으로만 따라 하며 도리나 조금 말할 줄 알 뿐이니 이것을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겠느냐? 네가 비록 하나님을 따르고 겉으로는 본분을 이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으로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지만 네 삶의 원칙과 방식 그리고 걷고 있는 인생길은 여전히 사탄의 것이니 너는 여전히 사탄의 성품, 패괴된 인간의 생활 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옛 사람으로, 하나님의 요구와 원칙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본질에서 보면 이것은 진실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며 그저 자신이 피조물이라고, 창조주는 네 하나님이라고 인정하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위해 조금 일하고 조금 바친 것일 뿐이다. 이를 전제로 너는 하나님이 네 하나님이고, 너는 그를 따르는 자라고 마지못해 인정하지만 네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네 생명이고, 네 주인이며, 네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서 방금 말한 “하나님이 당신의 전능이십니까?”라는 문제로 돌아가 보면,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 너는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물, 온 우주에 대해 하나님은 전능하다. 그렇지만 너는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인정해도 실제로는 체험하지 못했고 목격하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전능에 대해 속으로는 물음표를 그리는 것이다. 사람이 언제 진정으로 “하나님이 너의 전능이다”라는 말을 확신하여 이 측면의 이상을 믿음의 근간이 되게 할 수 있겠느냐? 오직 사람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 지위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며 하나님 말씀을 삶의 근간이 되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너의 전능이다”라는 말을 진정으로 인정하게 된다. 이 말은 사실 무엇보다 이루기 어렵지만, 하나님이 언급했다는 것은 이 말이 사람에게 무척 중요하며 평생의 에너지를 쏟아 경험하고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속 깊이 이 말씀에 진실하고 확실한 대답을 하기 위해 사람은 평생의 에너지를 들여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 즉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의 전제 조건은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라는 실행 원칙을 토대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실행하는 것은 단순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목표에 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에너지와 시간을 들여 이를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

다음 말씀은 무엇이냐?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고 갈망하며 구하라.”입니다.) 이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구원을 받으려면 이에 대한 동경과 추구하려는 의지, 진실한 갈망을 가져야 한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이 준 실행의 길을 따라 실행하고 진입한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차츰 진리 실제로, 올바르고 정상적인 내적 상태로 이끌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에서 깨닫는 진리가 점점 많아질 것이고 갈수록 실제적이 되어 결국 사람의 올바르지 못한 내적 상태와 패괴 표출 그리고 패역이 하나님이 배치한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각종 사역 방식에 의해 점차 해결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이 해야 하고 실행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행하고 행동하면 하나님이 가리켜 준 올바른 길에 들어서게 된다. 사람이 이런 올바른 길에 들어서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과 요구 원칙에 따라 정해진 시기에 정해진 양만큼 사람에게 베풀어 줄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이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사람의 협력, 사람의 대가, 사람의 헌신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의 뜻이나 상상과 관념에 따라 행동하지 말고 반드시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고 실행해야 한다. 그러면 결국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 사람이 얼마나 변화하고 얼마나 수확하게 될지가 사람의 뜻에 달려 있겠느냐?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소관이지 너와는 관련이 없다. 결국, 하나님이 무엇을 얼마나 줄지, 어느 시기에 어느 연령대에 줄지는 하나님의 일이지 너와 무관한 일이라는 것이다. 내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겠느냐? 너는 진리를 실행하는 일만 신경 쓰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네게 준 길대로 진입하여 피조물이 해야 하고 협력해야 할 일을 네가 다 하고 나면 마지막에 무엇을 언제 얼마나 수확할지, 하나님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하나님의 시간이 있기 마련이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제가 이렇게 실행하면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너희가 말해 보아라.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고 공급한 이런 말씀과 진리가 곧 구원받는 길이다. 네가 하나님의 이런 말씀과 진리대로 실행하여 하나님 말씀 실제에 진입했다면 구원받지 못할까 걱정하겠느냐? 하나님에게 버려질까 매일 염려하고 근심하며 걱정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는 믿음이 너무 작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해 초래된 것 아니겠느냐? 네가 만약 진정으로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마음이 평안하고 기쁨이 넘친다면, 진실한 체험 간증을 얘기하고 마음속에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형성했다면 구원받지 못할까 걱정하겠느냐?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너는 오로지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진입하는 것에만 집중하여라. 하나님 말씀에는 중요하지 않은 말씀이 없다. 하나님 말씀은 전부 진리이다. 진리는 사람이 얻어야 할 생명이며, 구원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이런 말씀대로 실행하고도 구원받지 못할까 걱정하다니, 그리도 어리석고 무지하단 말이냐? 너무 과민한 거 아니냐? 쓸데없는 걱정 대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 얼마나 즐겁겠느냐? 네가 가는 길이 옳다면 마지막에 도착할 목적지도 분명 옳을 것이고, 하나님이 네게 지정해 준 목적지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행하고 진입하면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너는 오로지 하나님이 알려 준 구원받는 길에 따라 실행하고 추구하는 데만 집중하면 된다.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구원받으면 어떤 느낌인가요?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일까요?” 이런 질문을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정말 구원을 받을 때 알게 될 것이니 지금은 알 필요가 없다. “제가 구원받을 때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저에게 나타나 주실까요?”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이성적인 요구이냐? 이런 요구는 하지 마라. 네가 구원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이런 요구를 한들 무슨 소용이냐? 부질없다. 가령 네가 지금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한다면 일단 초등학교 공부를 잘하고 선생님이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늘 나중에 어느 대학에 갈지, 어떤 직업을 가질지 고민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 봤자 소용없다. 너무 먼 미래라 비현실적이다. 네가 올바른 방식과 길에 따라 실행하고 진입하기만 하면 분명 네 최종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도하는데 무엇이 걱정이냐? 하나님이 네 전능이라는 사실을 믿느냐? (믿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한데 너 같은 인간 하나를 구원하는 게 어렵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온 세상을 다 준다 해도 전혀 어려울 게 없는데 패괴된 인간 하나를 구원하는 게 무엇이 어렵겠느냐? 그러니 네가 근심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구원할지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이런 말씀이 너를 구원할지도 염려하지 마라. 마땅히 네가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을지, 하나님 말씀에서 실행의 길을 찾아낼 수 있을지, 자신이 지금 하나님 말씀 실제에 진입했는지, 자신의 행동거지나 걷고 있는 길이 하나님이 알려 준 길인지를 걱정하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런 실제나 현실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근심하지 마라. 다 소용없다.

다음 구절은 무엇이냐? (“사탄의 구실과 속셈, 간계를 거절하고”입니다.) 이 구절은 방금 교제한 내용이니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이다. ‘사탄의 구실과 속셈, 간계’는 대체로 사람의 패괴 성품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구실과 핑계, 속셈, 간계이며 접할 수 있는 여러 악인과 불신파가 택하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이를 어떻게 분별하고 거절하며 선택하는가는 네가 개인적으로 추구할 일이다. 다음 구절을 읽어 보아라. (“실망하거나 연약해지지 말고,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려라.”) 이 구절 역시 방금 자세히 교제하였다. 구구절절 사람에게 경고하고 조언하는 동시에 사람을 붙들어 주고 도와주며 공급하는 내용이다. 물론 이 말씀에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넘치는 희망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연약함과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낙심하고 실망하며 믿음을 잃고 진리와 구원받기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꺾이는 것을, 진리를 얻어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이 겁쟁이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사람이 아무리 어렵고 연약해져도, 아무리 많은 패괴를 표출했어도 포기하거나 굴하지 않고 여전히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이 알려 준 실행의 길에 따라 추구하기를, 계속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체험할수록,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수록 커지는 것이지 연약함에 처했다고 위축되거나 어려움에 처했다고 소극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패괴를 조금 표출했다고 훌쩍이거나 위축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등의 모습은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한결같은 마음이 시간이나 환경, 지리적 위치나 특정 사건으로 인해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께 구하는 네 마음이 변치 않고 하나님께 구하는 끈기가 줄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볼 것이고 네 진심을 이해할 것이니 결국 하나님이 네게 베풀어 줄 것은 분명 네가 구하고 바랐던 것을 초월할 것이다. 욥은 하나님의 주재를 체험한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이 그에게 친히 이야기하고 나타날 줄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마지막 시련을 넘고 나서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난 것이다. 바람 속에서 그와 친히 대화한 일은 사람이 구하고 바란 것을 초월한 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사람이 구하고 바라는 것을 초월한 것으로, 사람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사람은 자신의 본래 자리를 지키며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 할 길을 가며 본분 내의 일을 해야 한다.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은 하지 말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일은 하지 마라. 언제든 자신이 하나님의 요구에서 벗어나 야심과 욕망에 휩싸인 비이성적인 상태라고 느껴진다면 당장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엎드려 죄를 고백하고 마음 깊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서야 한다. 이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자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거는 하나님의 기대이다.

이 말씀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이렇게 많은 내용을 교제하면서 당부할 것은 당부했고, 사람이 깨달아야 할 것은 깨달았을 것이다. 이렇게 교제하는 것은 너희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는 방법을 알려 주고 하나님 말씀을 읽는 방식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충만하고 하나님의 희망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이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깊이를 떠나 모두 인간이 갖추어야 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짧은 말씀 몇 마디에도 사람이 최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실행 원칙이 담겨 있지만 사람은 이르지 못하고, 아무도 이 몇 구절의 하나님 말씀을 주목하거나 눈여겨보지 않았다. 사람이 어느 지경까지 무감각해졌는지 좀 보아라. 좋게 말해 무감각이지 사실상 사람이 한도 끝도 없이 교만한 것이다. 이 말씀을 무시한 채 보려 하지도, 읽으려 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어떤 것을 읽고 싶어 하느냐? 심오하고 고상하며, 철학적이고 체계적인 것을 읽고 싶어 한다. 심오하고 고상한 것은 둘째 치고 이 짧은 말씀 몇 마디라도 깨달으면 다행이다. 이런 말씀은 단순해서 읽는 족족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정말 이렇게 실행하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일이 일어났을 때 정말 하나님 앞으로 가져와 기도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급하게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 여태껏 이 하나님 말씀을 준수하고 실행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이 말씀에 매료되어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하고 아끼며 사랑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내가 방금 너희가 틀어 놓은 찬양을 듣고 그 하나님 말씀을 너희는 어떻게 먹고 마시는지, 이 평이하고 단순 명료한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어 냈는지, 사람이 깨닫고 진입해야 할 실행의 길을 읽어 냈는지, 그 어떤 진리를 깨달았는지, 다시 말해 이 진리 몇 마디가 사람에게 성과를 보이거나 효력을 발휘했는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교제를 통해 정말 이런 사람은 없다는 것을, 너희의 분량이 형편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아하니 최근 하나님이 한 말씀 중 대부분이 너희 마음속에 진정으로 뿌리내리지 못했고, 너희가 이를 진리로 삼아 아끼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이는 좋은 징조가 아니고 좋은 현상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희는 하루하루 본분을 이행하느라 바빠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시간이 없어요.” 사실은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을 쓰지 않고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그것이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데 지장을 주겠느냐? 식사 시간, 휴식 시간에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수 있지 않겠느냐? 사람이 마음을 두는지에 달려 있다. 사람은 이렇게 분주히 보내면 충실한 줄로 생각하지만 사실 한가할 때 생각해 보면 하나님 말씀 중 어느 한 구절도 진지하게 묵상해 보지 않았고 마음에 새기지 않아 그 말씀이 인생의 나침반이나 실행의 준칙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때는 부끄러울 것이다. 네 분주함은 그저 가상일 뿐이다. 네 믿음이 공허하지 않고 하나님을 충실하게 믿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세상의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가장 정의로운 사람들 편에 서서 하나님 사역에 협력하며,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으니 이미 구원을 받았거나 구원받는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이 이미 이긴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전제하에 이렇게 단순한 찬양이나 짧은 하나님 말씀, 그것도 최초에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에 대해 너희가 이런 태도를 가지고 아무도 이 말씀에서 아무런 수확이나 깨우침을 얻지 못하고, 실행하지도 않으며 아무에게서도 그 어떤 수확이나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면 이것이 좋은 일이겠느냐, 아니면 나쁜 일이겠느냐? (나쁜 일입니다.) 최근 몇 년간 너희가 본분을 이행하느라 바쁘고 특히 복음 사역으로 바빴는데 성과가 있으니 마음에 만족감을 느낀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 말씀, 복음 사역이 확장되어 하나님 말씀이 각국 각 지역의 사람들에게 공급되었으니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게 되었다. 겉으로는 성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하나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평생의 대업에 갈피가 잡혔느냐? 이런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서 보면 갈피는 아직 잡히지 않았다. 세상 말로 갈 길이 구만리라는 말이다. 이런 너희의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이 어떻겠느냐? 이렇게 단순한 말도 너희에게 자세히 설명해 줘야 하니 말이다. 사소한 것까지 너무 상세히 말해 주면 너희가 듣고 싶겠느냐? 내가 잔소리 너무 심하다고 말하지 않겠느냐? 나도 이렇게 잔소리하고 싶지는 않다. 너희는 저마다 당당하고 머리를 굴릴 줄 알고 지식이 있으며 많은 사람이 자기만의 특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찬양 속 짧은 말씀 몇 마디를 눈여겨보지 않았고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지금껏 아무도 이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지 못했으니 정말이지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러면 도대체 너희는 무엇 때문에 교회의 여러 사역을 하는 것이냐? 설마 바울이 말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는 것을 위해서이냐? 만약 정말 이런 목표를 위해서라면 너희는 모두 바울이고, 나중의 결과 역시 낙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데 힘쓰지 않으면 언젠가는 도태되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도태되는 그 순간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얻은 게 뭘까?” 너는 정말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니 너무나도 부끄러워 죽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이러면 너무 불쌍하지 않으냐. 하나님은 부족함 없이 다방면으로 말씀했는데 네가 전혀 마음을 다해 추구하지 않았고,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보지 않았으며, 이렇게 많은 하나님 말씀 중에 한 마디도 네 마음속에 자리 잡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다. 이러니 네가 도태되지 않으면 누가 도태되겠느냐?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셔서 하나님 말씀이 네 실제가 되게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는 사람이 번성하여 후대를 잇는 것, 본분을 이행하는 것, 업무를 배우는 것, 복음 사역을 확장하는 것 등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지 않았다면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니든 그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다. 결국, 그 어떤 성과도 이루지 못한 채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네가 지금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니는지, 어떤 직위에서 어떤 사역을 하고 성과를 얼마나 거두었는지는 상관없다. 그것은 금방 사라질 것으로, 언젠가는 지나가 버린다. 오직 사람이 하나님 말씀 실제에 진입해서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를 얻고, 하나님 말씀에서 실행의 원칙과 길, 방향을 찾는 것만큼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이런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사람이 지금 이행하고 있는 본분과 치르고 있는 모든 대가만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으며, 하나님이 열납한다. 네가 하나님 말씀 실제에 진입하고 매사에 하나님 말씀의 요구 원칙과 요구 기준에 따라 실행한다면 네가 이행하는 본분은 헛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열납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네가 만약 자신의 자제력이나 끈기, 사고력, 은사에만 의지하고, 사람의 방식이나 방법으로 고생하며 대가를 치른다면 네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말씀과 무관하니 최종 결과가 어떨지는 너 자신이 잘 알 것이다. 많은 사람이 경제적으로나 수지 타산적으로는 계산기를 두드릴 줄 알지만, 이런 면으로는 계산한 적이 없다. 너희가 외부의 일을 처리할 때는 머리가 참 잘 돌아가고 노하우도 가지고 있으며 무척 영리한 것 같은데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는 일,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일은 간과하여 중시하지 않았다. 네가 중시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이 법칙을 피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힘 좀 썼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요행히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스스로를 기만하지 마라! 사람이 정한 법칙은 사람의 지식과 식견에서 생긴 것으로, 사람의 잔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서 생겨난 법칙이 아니다. 구원받는 일에 대해 절대로 요행을 바라지 마라.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뿐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가장 큰 일이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셔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본분 이행이 아무리 바빠도, 사역이 아무리 쌓여 있어도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서 다방면의 진리의 실행 원칙과 길을 찾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유일한 근본 취지이다. 네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실행 원칙이 생기면 네가 하는 모든 일이 합격한 본분 이행이니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하는 모든 일은 힘만 쓰는 것이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힘을 쓰는 것도 네가 구원받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고, 실행하지도, 체험하지도 않으며,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저 힘써 일하는 것에만 만족할 뿐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짓 아니겠느냐? 사람은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듬직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있는 한 이 사역은 틀림없이 제대로 굴러갈 거야. 내가 여기서 책임을 지고 있는 한 교회 사역이 교란을 당할 리 없어. 내가 숨 돌릴 틈 없이 하나님 집에서 계속 본분을 이행하기만 하면 구원받겠지.’ 자신을 속이지 마라. 하나님은 사람이 계속 본분을 이행하기만 하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한 적이 없다. 그것은 자기만의 상상이자 일방적인 바람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사람이 사탄에게 깊이 패괴된 본질과 진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에 이런 어리석은 말을 내뱉는 것이다. 여태껏 하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본분을 이행하지 않았느냐? 그들이 구원받았더냐? 아니다. 그들에게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느냐? 없다. 말세에 하나님이 심판 사역을 하여 인간이 패괴된 진상을 낱낱이 폭로해서 사람이 인식하고 바로잡게 하고 진리를 얻고 실제에 진입하게 하였으며 진정한 변화가 생기게 한다. 이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네가 계속 본분만 이행한다면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겠느냐?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핵심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심판 형벌에 순종하며 진리를 얻어야만 하나님 마음에 합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인간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대가를 치르고 그의 생명을 바치는 것인데 네가 이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늘 간과하고 경시하며 하나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니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마지막에 좋은 결과가 있겠느냐? 꿈도 꾸지 마라.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셔서 진리를 깨닫고 하루빨리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다. 먼저 자기 주변에 일어난 일부터 시작하고,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여 하나님 말씀에 따라 자신을 반성하고 진리를 구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진정한 변화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고 하나님 말씀 실제에 진입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기회는 없다. 네가 구원받을 기회를 완전히 끊어 버린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사역이 끝났을 때 네가 “그 당시 하나님의 복음 사역이 확장될 때 제 공이 있었습니다. 당시 복음 확장 사역의 중요한 단계마다 제가 대가를 치르고 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었어요.”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때까지 여전히 진리를 얻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먹고 마시지도 못하며, 본분을 정상적으로 이행하지도 못한다면 너는 전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때서야 구원받을 기회를 스스로 끊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너무 늦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게 되면 기회는 사라지고 이미 재난 속에 떨어진 것이다. 즉,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을 그 기회는 무척 소중하다고 하는 것이다. 반드시 매일의 시간과 1분 1초의 순간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먼저 주변의 사소한 일부터 시작해서 차츰 많은 일, 큰일을 해 나가면서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 말씀과 진리 실제에 진입해야 한다. 마음속으로 항상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한다. 절대 육적인 취향, 세상의 시류와 같은 사탄에게 속하는 것들에 마음을 뺏겨서는 안 되고,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마음속에서 권세를 잡게 해야 한다. 그러면 네 마음은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네 마음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네 삶을 주도하면 네 삶은 목표가 생기고 빛의 인도를 받게 되어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 네가 깨달은 하나님 말씀이 서너 마디에서 열 마디, 백 마디까지 쌓여 가면서 차츰차츰 하나님 말씀이 네 마음을 차지하고 네 생각과 행동, 삶을 주도하여 점점 더 많은 하나님 말씀 실제에 진입하고 점점 더 많은 진리 원칙을 파악하게 되면 더 이상 네 뜻이나 취향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을 것이고, 네 본분 이행에 불순물도 점점 줄어들 것이며, 점점 진심으로 하나님을 대할 것이고, 네가 이해한 도리는 차츰 진리 실제가 될 것이다. 그러면 네 생명 성품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네가 구원받을 희망은 더 이상 보이지 않거나 막연한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느낄 수 있고, 갈수록 희망이 보일 것이다. 네가 이 빛을 보게 되는 때가 사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구원받는 이 일에 크나큰 희망을 걸게 되는 때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네가 점점 더 많이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에 진입하게 할 것이며, 네가 시험이나 사탄의 굴레, 사탄의 흑암 권세에 빠지지 않도록, 사람 간의 갈등, 다툼, 질투, 분쟁 등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줄 것이고, 빛 속에서, 하나님 말씀의 인도 속에서 살아가게 할 것이다. 이는 행복이고 기쁨이며 평안이다. 사람이 이 모든 것을 해내려면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실행하고 체험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는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항상 설교를 듣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한다면 차츰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이렇게 차근차근 넘어가고 나아가면 어렵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진리를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믿으면서 정당한 일을 하고 진리에 공을 들이며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데에 집중할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줄 알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을 줄 알면 하나님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 말씀에서 실행의 길을 찾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진리를 깨닫기 시작하게 된다. 그럼 다시 깨달은 진리를 토대로 자신의 패괴 성품을 반성하고 인식하여 패괴 성품의 본질을 해부한 다음 진리로 해결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실행하고 진입하면 자신을 진실로 인식하게 되고 패괴 성품을 쉽게 벗어 버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차근차근 인식하고 체험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패괴를 벗어 버리면 자기도 모르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 체험의 과정이다. 진리를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이 일단 진리를 깨달으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는지, 어떤 성과를 거두려 하는지를 알게 되고, 사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사람이 도달할 수 있고, 사람의 양심과 이성으로 충분히 이를 수 있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이런 과정이 모두 생명 진입에 관한 일이다. 생명 진입을 위해서는 본분 이행과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는 데 마음을 다해야 하며,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의지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이렇게 실행하고 체험하면 점점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이런 일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생명 진입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관심도 없으므로 몇 년간 하나님을 믿어도 체험 간증을 얘기하지 못한다. 반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르다. 하나의 일을 체험할 때마다, 한 시기를 체험할 때마다 체험 간증 글을 쓸 수 있고 진실한 수확이 생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10년, 20년을 체험하면 커다란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때가 되면 체험 간증 글을 쓰는 것이 힘들지 않고 진리를 교제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느껴지며 본분 이행도 완전히 정상이 된다.

너희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냐?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이 있느냐? 진실한 마음이 있느냐? 선뜻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그렇지 않으냐? 사실 너희 스스로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본분을 대충 이행하고 싶어질 때, 교활하게 자기 잇속을 챙기고 싶을 때, 제멋대로 하고 싶을 때 스스로 의식할 수 있겠느냐? 육을 저버릴 수 있겠느냐?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 너는 진리 실행을 택하겠느냐, 아니면 육의 즐거움을 택하겠느냐? 긍정적인 것을 택하겠느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을 택하겠느냐? 진리를 얻기 위해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는 것을 택하겠느냐, 아니면 육적 안락을 탐하는 것을 택하겠느냐? 이를 통해 네게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에게 진실하게 순종하는 마음이 있는지 판단하고, 네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지를 가늠하는 것이다. 네가 만약 하나님에게 진심이 아니고 제멋대로 하기를 좋아하며 자기만 만족하면 기뻐하고 그러지 못하면 화를 내고 심술을 부리며, 자기 책무를 내팽개치려 한다면 그것이 정상적인 마음가짐이겠느냐? 여기에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마음이 있겠느냐? 이것이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겠느냐? 너는 왜 진리를 실행하지 않느냐? 설마 하나님 말씀을 못 알아듣는 것이냐? 아니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하지만 실행하려고 보면 너무 어려워. 하나님 집에서 항상 진리를 실행하라고 하는데 이건 사람을 괴롭히고 난제를 던져 주는 거야. 기분 나빠 실행 안 할래. 교회에서 날 제명하거나 도태시키지 않는 한 난 자유자재로, 하고 싶은 대로 할 테야.’ 이런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 이는 불신파가 아니냐? 불신파가 바로 이런 태도로 본분을 이행한다.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제멋대로 굴면서 대충 건성으로 하기를 좋아한다. 아무리 책망하고 훈계해도 소용없고, 진리를 교제해도 듣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그저 내치고 도태시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 이방인이며,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설령 패괴 성품을 표출하더라도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일 수 있고, 진리를 구해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할 수 있으며, 회개할 줄 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구원할 사람이다.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가장 큰 위험이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가장 쉽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사소한 일 하나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책망과 훈계를 한 번 한 것 때문에 용납할 수 없다며 하나님을 배반한다. 이러니 재난이라도 당하면 더 쉽게 원망하며 하나님을 배반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다 가장 위험한 사람이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는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어느 정도로 사랑하는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지에 달려 있다. 진리의 요구로 자신의 진실한 분량을 가늠하고 자신을 분별하여 자신의 패괴 진상과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인식하여라. 이렇게 분별하면 한편으로는 자신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어 진실한 회개에 이를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모습이다. 이 문제를 꿰뚫어 보면 사람이 구원받는 길을 가는 데 도움이 된다. 사람이 진심으로 진리를 사랑하면 하나님을 대단히 원하는 마음과 진실한 마음을 갖게 되고,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께 순종할 힘이 생긴다. 이런 진실한 힘이 생기면 대가를 치르고 에너지와 시간을 쏟을 수 있게 되며, 이익을 버리고 육의 모든 짐을 내려놓음으로써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는 것을 우선시하게 된다. 하나님 말씀 실제에 진입하기 위해 자신의 관념, 육적인 이익, 체면, 지위, 명성, 육의 즐거움 등을 내려놓을 수 있다. 네가 이런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다면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진리 실제에 진입할 것이고, 그 어떤 어려움이나 난제들도 쉽게 풀려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는 것도 수월해질 것이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면 진실한 마음과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 이 두 가지는 필수 불가결이다. 만약 진실한 마음만 있을 뿐 늘 나약하고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려움에 봉착할 때 위축될 것이다. 이러면 안 된다. 만약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만 있어 다소 충동적으로 의욕만 앞설 뿐 일이 일어났을 때 진실한 마음이 없다면 주춤하게 될 것이고 자신의 이익을 택할 것이다. 이 또한 안 될 일이다. 진실한 마음과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은 겸비해야 하는 것이다. 네가 진실한 마음과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만큼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네가 진실한 마음과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수 없고, 진리 실행에 힘이 빠질 것이다. 그러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없으며 구원받기도 어려울 것이다.

구원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꿰뚫어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혹자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혹자는 영적 도리를 많이 이해하면 구원받을 거라고 생각하며, 또 혹자는 리더 일꾼이 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전부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다. 핵심은 구원받는 것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구원받는 것은 주로 죄악과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진실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죄악에서 벗어나고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무엇을 갖춰야겠느냐? 진리를 갖춰야 한다. 사람이 진리를 얻으려면 수많은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하고,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고 실행할 줄 알아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를 깨달아 실제에 진입해야 한다. 그래야 구원에 이른 것이다.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는지, 얼마나 많은 지식을 쌓았는지, 은사와 재능이 있는지, 얼마나 고생했는지 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구원받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오직 진리를 얻었는지 여부이다. 그렇다면 지금 너는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달았느냐? 하나님 말씀 중 네 생명이 된 것은 몇 구절이나 되느냐? 하나님의 모든 요구 중 어떤 것에 진입했느냐? 하나님을 그렇게 오래 믿었는데,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얼마나 진입했느냐? 만약 네가 모르거나 하나님 말씀 실제 중 그 어떤 것에도 진입하지 못했다면 내가 솔직히 알려 주겠다. 네가 구원받을 희망은 없으며, 너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네가 지식이 많고, 하나님을 오래 믿었으며, 외모가 봐 줄 만하고 말재간이 좀 있고, 또한 몇 년 동안 리더 일꾼을 했다고 해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실행하지도 체험하지도 않아 참된 체험 간증이 없다면 네가 구원받을 희망은 여전히 없다.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과학적 지식을 얼마나 쌓았는지, 얼마나 고생하며 대가를 치렀는지는 상관없다. 잘 들어라.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다면 너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이건 확실하다. 내게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얼마나 진입했는지 얘기해 준다면 네가 구원받을 희망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 주겠다. 그 판단 기준을 너희에게 알려 주면 너희 스스로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통해 너희는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느냐?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고, 말씀으로 여러 가지 사실,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모든 사실을 성취하였다. 또한, 하나님은 말씀으로 두 단계 사역을 하였고, 이제 세 번째 단계 사역을 하고 있다. 이번 단계 사역에서 가장 많은 말씀을 하고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사역 중 유사 이래 가장 많은 말씀을 한 시기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말씀으로 모든 사실을 성취하며, 모든 사실을 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 바꾼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권병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이 사실도 말씀으로 성취할 것이다. 이 사실은 지금 너희 모두가 보았다. 하나님은 말세에 말씀과 무관한 그 어떤 사역도 하지 않았다. 즉, 계속 말씀하면서 오늘날까지 말씀으로 사람을 이끌고 있다. 물론, 이렇게 말씀하는 동안 말씀으로써 그를 따르는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을 인도한다. 이런 말씀은 구원받기를 원하거나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에게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통해 그가 인류를 구원하는 그 사실을 성취할 것이다. 이런 말씀은 내용으로 보나 양적으로 보나, 어떤 유형의 말씀이든, 어느 부분의 말씀이든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통해 그의 6천 년 경륜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성과를 성취할 것이다. 이런 말씀은 이 인류에게, 현재의 인류에게도 미래의 인류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태도이고,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는 목적과 의의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겠느냐?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모른 체하지 말고 협력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마치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말이다. 여전히 자신이 추구할 것을 추구하고 자신이 할 것을 하면서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밖에 하나님이 뭐라 말씀하든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겠어. 하나님께서 동쪽을 가리키시면 동쪽으로 가고 서쪽을 가리키시면 서쪽으로 가는 거야. 하나님이 죽으라면 그분 눈앞에서 죽겠어.’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이런 신념뿐 하나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생각한다. ‘하나님 말씀이 너무 많아. 그냥 단순하게 내가 할 일을 바로 말씀해 주시면 될 것을. 그럼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텐데 말이야.’ 하나님이 얼마나 말씀하든 그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문외한처럼 결국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체험 인식도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좋아하겠느냐?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싶겠느냐? (그러고 싶지 않으실 것입니다.) 결코 그러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내가 수없이 얘기했거늘 너는 어찌하여 소경과 귀머거리처럼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이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보아하니 오로지 복받을 생각과 아름다운 종착지로 들어갈 생각밖에 없구나. 너는 그저 바울의 목표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나의 도를 준행하려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은 왜 믿느냐? 너는 구원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고 복을 받겠다는 욕망을 채우러 왔구나. 이런 계산이 있으니 너는 봉사자가 제격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충성스러운 봉사자도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모습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사람이 이방인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는 것보다는 충성스러운 봉사자로 남는 것이 훨씬 낫다. 특히 하나님 집 사역에는 봉사자가 필요하기에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도 하나의 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왕의 종노릇보다야 훨씬 낫고,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흡족하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심판 사역을 하는 것은 사람을 구원하고 정결케 하며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에만 만족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역사하면서 이루려는 목표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려는 결과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욕망의 불길에 휩싸여 어리석고 눈멀면 사소한 이익에도 미혹되고 마음을 빼앗긴다. 반면 하나님의 이토록 귀한 생명의 말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직시하지도 않으며, 중시하지 않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 말씀을 읽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과연 슬기로우냐, 아니면 어리석으냐? 구원에 이를 수 있겠느냐?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모두 내려놓고 진리 추구에 집중해야만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사람은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 말씀은 사람에게 초인이나 위인이 되지 말고 피조물의 위치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늘 야심과 욕망이 있어서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내키지 않으니 어쩌면 좋죠?” 이 문제는 간단하다. 먼저 네가 왜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지에 대한 문제의 근본 원인을 파헤치면 문제는 쉽게 풀린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데 이는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이다. 네가 만약 정직한 사람이 되는 진리를 깨닫는다면 너는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만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이고, 진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정직한 사람이 되면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바로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의 본능, 생각, 이성은 어떤 것들에 이르느냐? 정상적인 사람이 말하고 행동할 때는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그는 마음속 말을 할 줄 안다. 마음에 있는 것을 그대로 얘기하고 거짓이나 간사함이 없다. 일이 일어났을 때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양심과 이성에 따라 행동하고,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그 역시 실수하고 실패하며 착각하기도 하고 관념이나 자기만의 상상이 생기며, 눈앞의 거짓 이미지에 속기도 한다. 이는 정상 인성의 모습이다. 그럼 이런 정상 인성의 모습이 하나님의 요구에 이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사람에게 진리가 없으면 하나님의 요구에 이를 수 없다. 이런 정상 인성의 모습은 패괴된 평범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며,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습이자 타고난 것이다. 너는 자신에게 이런 모습과 표출이 생기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사람의 본능과 자질, 천성이 이렇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해하고 나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그럼 올바르게 대하려면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은 진리로 무장하며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나 관념을 가지고 있는 일, 잘못 판단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자주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반성하고 진리를 구하여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렇게 체험하는 동안 몇 번 실패하고 넘어지는 것은 괜찮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에서 이런 일을 꿰뚫어 보고, 어떻게 실행해야 원칙에 맞고 하나님 뜻에 합하는지 아는 것이다. 이렇게 공과를 배우는 것이다. 몇 년간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 패괴된 인류의 본질과 세상이 어둡고 사악한 근본 원인을 확실히 알고 각종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분별력이 생기면 너는 진리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초인이나 위인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일도 전부 꿰뚫어 보거나 이해할 수는 없고, 세상과 이 인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한눈에 간파할 수는 없다. 너는 평범한 사람이므로 수많은 실패와 판단 착오, 오차를 겪고 미망 속에서 헤매야 한다. 그래야 네 패괴 성품과 약점, 결함, 무지, 어리석음이 전부 드러날 수 있다. 그것은 네가 다시금 스스로를 살피고 인식하게 하며, 하나님의 전능과 전지(全智),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게 한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긍정적인 것들을 얻어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게 한다. 체험 과정에는 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수도 없이 존재하여 부득이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너는 더 구하고 기다리며,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일의 답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모든 일의 뒤에 숨겨진 본질과 각 부류 사람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평범한 사람, 정상적인 사람의 태도이다. 너는 이렇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전 못 합니다.”, “저는 안 돼요.”, “저는 꿰뚫어 보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체험한 적이 없어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전 왜 이리도 연약할까요? 왜 하나도 옳은 게 없을까요?”, “전 자질이 형편없습니다.”, “전 무감각하고 우둔합니다.”, “제가 어리숙해서 이 일은 며칠 기다려야 하는데, 하기 전에 확실히 이해해야겠어요.”, “다른 사람과 의논 좀 해 봐야겠어요.” 너는 이렇게 실행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네가 스스로를 정상인으로 인정하고 정상인이 되고자 하는 모습인 것이다. 스스로를 위대하고 속되지 않으며 비범한 초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는 못 하겠어요.”, “저는 안 되겠어요.”, “저는 간파하지 못하겠어요.”, “잘 모르겠네요. 공부하면서 관련 자료 좀 찾아봐야겠어요. 사람들과 교제해 보고 상부에 구해 보겠습니다.”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 특히 지위가 생기고 나면 그들은 남들이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남들처럼 못 하는 것이나 간파하지 못하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항상 남들이 그를 초인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따라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주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진실한 마음을 바칠 필요가 없고 구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식은 죽 먹기로 이해하고 터득하며 간파한다. 그에게는 패괴도 없고 연약함도 없고, 꿰뚫어 보지 못하는 일, 체험해 보지 못한 일도 없다는 것이다. 설령 체험해 보지 못한 일이더라도 한눈에 간파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초인이다. 이것이 정상 인성의 모습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가 정상적인 사람이겠느냐? 결코 아닐 것이다. 이 부류의 사람은 자신을 연약하고 결함이 있고 패괴 성품이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구하고 기도하겠느냐?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했고 정상 인성을 살아 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어떻게 해야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해야 위인이나 초인이 되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피조물의 자리에 제대로 설 수 있겠느냐?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떻게 실행해야 하겠느냐?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겠느냐? 누가 대답해 보아라. (먼저 자신이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이라서 잘 모르는 일, 이해하지 못하는 일, 간파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는 점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패괴와 결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진실한 마음으로 자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구해야 합니다.) 먼저, 감투나 금고아를 쓰고 “나는 리더야. 나는 팀장이야. 나는 책임자야. 나는 이 업계에서 가장 정통하고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야.”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만든 이러한 감투에 가려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에 가려지는 순간, 그것은 너의 손발을 옭아맬 것이며, 네 말과 일 처리, 그리고 네 정상적인 사유와 판단에 영향을 줄 것이다. 너는 이러한 지위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먼저 너의 그 직함, 위치에서 내려와 평범한 위치에 서야 한다. 그럼 정상적인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 또한, ‘나는 이 일을 할 줄 모르고, 저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 그러니 찾아보고 배워야겠어.’, ‘나는 이 일을 겪어 본 적이 없어서 할 줄 몰라.’라고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마음속 말, 솔직한 말을 할 수 있으면 이성적이고 정상적이다. 사람들이 진실한 너를 알게 되면 너에 대한 시선도 정상적일 것이며, 너 또한 위장하거나 큰 압박감을 느낄 필요 없이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살면 마음이 무척 가볍고 자유롭다. 사는 게 너무나 피곤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다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위장하지 말고 포장하지도 마라. 먼저 네 마음속 말, 진실한 생각을 솔직히 털어놓아 모두가 알고 이해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너와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이나 의심, 네 마음속 고민이 전부 사라질 것이다. 이 밖에, 너를 속박하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너는 늘 자신이 팀장이나 리더 일꾼, 직함과 지위, 신분이 있는 사람이니 네가 이 일은 잘 모르고 저 일은 할 줄 모른다고 말한다면 이는 자기 비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네가 이러한 심리적 속박에서 벗어나고 자신이 리더 일꾼이라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남과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며, 어떤 부분에서는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며, 이런 마음가짐으로 진리를 교제하고 사역에 관련된 일들을 교제하면 성과도, 분위기도 달라질 것이다. 만약 네가 늘 마음속에 근심을 품고 압박과 속박을 느끼며, 이러한 것들을 내려놓고 싶지만 그게 어렵다면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며 자신을 반성해 보아라. 그리하여 자신의 부족한 점을 파악하고 진리에 공을 들여 진리를 실행하면 성과가 날 것이다. 절대 지위에 서거나 직함을 내세우면서 말하거나 행동해서는 안 된다. 먼저 그것들을 한쪽에 제쳐 놓고 자신을 평범한 사람의 위치에 놓아라. 남들이 “당신은 리더 아닌가요? 당신이 팀장이잖아요? 이런 일쯤은 이해하고 계셔야죠.”라고 말하면 너는 이렇게 대답하여라. “하나님이 언제 리더나 팀장이라면 무슨 일이든 다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나요? 이런 일은 저도 잘 모릅니다. 본인의 잣대로 저를 판단하지 마세요.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시네요. 제가 리더인 건 맞지만 저는 아직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너무 얕아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제가 겪어 보지 못한 일이라 아직 꿰뚫어 보지 못해서 기도하고 구해 봐야겠어요. 하나님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늘 저보고 당장 이해하고 결정을 하라고 하시는데 제 결정이 틀리면 어쩌려고요? 누가 이 책임을 지겠어요? 당신이 책임질 수 있겠어요? 제가 잘못을 저질렀으면 좋겠어요? 이러시는 게 저에게 책임감 있는 행동인가요? 같이 협력하고 기도하며 구해서 이 일을 잘 처리해야죠.”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하는 것이 쉽겠느냐? 네가 만약 남들과 마음을 나누면서 “사실, 저도 분량이 작아서 구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자꾸 실수를 합니다. 때로는 저도 모르게 실수하기도 해요. 제 분량이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은데 절 너무 과대평가하신 겁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가 이런 사정을 듣고 속으로 이 사람은 참 진실되고 마음을 나눌 줄 안다고 생각하고는 네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고 너와 협력할 것이다. 이렇게 실행할 때, 너는 훨씬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고, 명예와 이익, 지위의 속박과 구속을 받지 않게 되고 마음속으로 해방감을 맛볼 것이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며, 남들과 조화롭게 협력하고, 형제자매를 올바로 대할 수 있다. 그때 네 내적 상태는 점점 정상적이 될 것이고 일도 점점 이성적으로 처리하게 되니 남들이 알아보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리더 일꾼은 정말 변화되었고 양심과 이성이 있어. 정상 인성을 살아 내고 있잖아. 이런 사람이 리더 일꾼이 되었으니 우리에게도 많은 유익이 되겠지!” 그 후로 네가 다시 사역하면, 구하고 기도하든, 남들과 교제하든 모든 것이 정당하고 합리적이어서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다. 너는 어떤 일이든 급히 알려고 하지 않고 순리에 따라 침착하게 할 것이다. 무슨 일이 생겨도 모두 하나님 앞으로 가져와 진실한 마음을 바치며 늘 이 원칙을 실행할 수 있다. 리더 일꾼이든 형제자매든 모두 평범한 사람이며, 이 원칙을 실행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몫과 책임이 있는 것이다. 네가 리더 일꾼이든, 혹은 팀장이나 책임자든, 혹은 사람들 가운데 우러름을 받는 자든, 네가 어떤 사람이든 이렇게 실행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머리의 후광과 감투를 버리고, 남들이 네게 준 면류관을 벗어 버리면 쉽게 정상적인 사람이 되고 양심적이고 이성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이해하지 못하고 모른다고 인정하기만 하면 그만인 것은 아니다. 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궁극적인 방법이 아니다. 그 궁극적인 방법은 무엇이겠느냐? 일과 어려움을 하나님 앞에 가져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이다. 혼자 기도해서는 안 되고, 모두가 함께 그 일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느냐! 너는 위인이나 초인이 되는 길을 피할 수 있다. 네가 만약 이렇게 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피조물의 자리에 설 것이며, 초인이 되고 위인이 되려는 야심과 욕망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이다.

피조물 본연의 위치에 서서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쉬우냐? (쉽지 않습니다.) 어떤 면이 어렵겠느냐? 사람은 항상 자기 머리에 많은 후광과 감투가 있다고 생각하고, 또한 자처하고 있는 위인과 초인의 신분과 지위 및 위선적이고 거짓된 행동과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네가 이런 것들을 내려놓지 않고 언행이 항상 이런 것들에 속박받고 통제받는다면 너는 하나님 말씀 실제에 진입하기 어려울 것이고, 이해하지 못하는 일에서 급히 알려고 하지 않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치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너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네 지위와 감투, 신분과 같은 것들이 바로 거짓되고 실속 없는 것이며, 하나님 말씀과 어긋나고 대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너를 결박하기 때문에 너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수 없다. 이런 것들이 네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위선에 능하게 만든다. 남들이 우러러보고 탄복하도록 이해한 척, 똑똑한 척, 위인인 척, 유명인인 척, 능력 있는 척, 지혜로운 척, 심지어 무엇이든 알고, 무엇이든 할 줄 알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척하게 만든다. 다들 일만 생기면 널 찾고, 의지하며, 앙망하게 되니 이렇게 하는 것은 제 발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기분이 좋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지 못하고, 간파하지 못했으면서 간파하지 못했다고 말하지 못한다. 분명 자신이 잘못했으면서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속으로는 죽도록 괴로우면서 “이번엔 정말 제 잘못입니다. 제가 하나님께 죄송하고 형제자매에게 폐를 끼쳤고 하나님 집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어요. 하지만 그 자리에서 인정할 용기가 나지 않아요.”라고 말하지 못한다. 어째서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겠느냐?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형제자매가 내게 준 명성, 후광, 나에 대한 그들의 우러름, 신뢰, 더욱이 오랫동안 쌓아 온 간절한 기대를 헛되게 할 수는 없어. 그러니 나는 계속 그런 척해야 해.’ 이렇게 가식을 떠는 게 어떠냐? 위인이나 초인이 되었기에 형제자매가 무슨 일이든 너를 찾아와 상담하고 자문을 구하며 심지어는 네게 간구까지 할 것이다. 마치 네가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너는 속으로 괴롭지 않겠느냐? 물론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도 일부 있을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괴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에게 모든 사람보다 높은 지위가 생겼다고 생각해 대단히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대개 정상적인 사람은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 같으면 괴로워한다. 자신이 남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평범한 사람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 사역을 지체하고 하나님의 선민에게 지장을 주어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이성적인 사람이다. 이것이 해결하기 쉬운 문제겠느냐? 이성적인 사람은 쉽게 해결하겠지만, 비이성적인 사람은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지위만 차지하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지위의 복만 누리려 하다가 결국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해 드러나 도태된다. 이는 화를 자초한 것으로, 그래 싸다! 그를 불쌍히 여기거나 동정할 가치가 하나도 없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왜냐하면 기어이 스스로 높은 자리에 서서 제 발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으니 자업자득이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고 싶지 않다면 이런 감투와 후광을 모두 버리고 마음속의 진실한 내적 상태와 생각을 형제자매에게 말해야 한다. 그러면 형제자매들이 너를 올바르게 대할 것이니 너도 가식을 떨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지금 네가 자신의 진실한 내적 상태를 숨김없이 밝힌다면 한결 마음이 편하고 홀가분해지지 않겠느냐? 왜 굳이 그리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길을 가려 하느냐? 자신의 실제 사정을 밝히면 형제자매들이 정말 너를 무시하겠느냐? 정말 너를 버리겠느냐?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형제자매들이 찬성하고 네가 속 얘기를 털어놓은 용기에 탄복하며 네가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네가 하고 있는 교회 사역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되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형제자매들이 정말 네 고충을 알게 되면 그들이 나서서 너를 도와주고 너와 협력할 것이다. 너희 생각에도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남들의 우러름을 받으려고 늘 위선을 떠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한, 평상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민과 속 시원하게 늘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누가 너를 우러러보고 칭찬하거나 부추기며 추켜세우는 말을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말고 거절해야 한다. 예를 들어, “대학교수님이시잖아요? 아는 게 많으시니 진리도 잘 깨달으시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이렇게 대답하여라. “대학교수는 뭘요. 아무리 아는 지식이 많아도 진리를 대신할 순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지식 때문에 제가 곤경에 처할 수도 있는걸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절 너무 과대평가하지는 마세요. 저도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물론 지위를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역시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 되어 피조물 본연의 위치에 서고 싶고 이렇게 괴롭지 않았으면 하지만 그게 마음 같지 않아서 항상 높은 자리를 자처하고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곤란해진다. 그는 남들이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숭배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무슨 일이 생기든 그를 찾아오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남들이 그를 의지하고, 그의 말을 따르며, 그를 우러러보는 것을 즐긴다. 그를 만물박사, 뛰어난 사람이라고 여기고, 그가 모르는 것이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여기고, 나아가 그를 이긴 자로 여기면 좋아하고 흡족해한다. 이는 구제 불능이다. 어떤 사람은 남들에게 칭찬과 면류관을 받아 한동안 초인이나 위인이 되면 괴로워하며 힘들어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너를 치켜세우는 사람은 너를 불구덩이로 몰아넣는 사람이니 그를 멀리하거나 기회가 되면 그에게 자신의 패괴된 진상을 밝혀야 한다. 진실한 내적 상태를 털어놓고 자신의 결점이나 흠을 폭로하면 그가 너를 숭배하지 않고 우러러보지도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겠느냐? 사실 손쉽게 할 수 있다. 네가 정말로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네가 오만 방자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네가 정말 초인이나 위인을 자처하면서 이런 성품을 조금도 혐오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면 그저 남들 앞에서 망신살이 뻗치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다. 정말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늘 초인이나 위인이 되고자 하는 패괴 성품에 대해 혐오와 역겨움을 느낄 것이다. 최소한 이런 감정을 느껴야만 자기를 혐오하고 육을 저버릴 수 있다. 그럼 평범한 사람, 보통 사람, 정상적인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먼저 자신이 지키고 있는 것 중 좋고 값지게 여기는 것 그리고 남들이 네게 탄복하고 칭찬하는 헛된 미사여구를 모두 부인하고 내려놓아야 한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본질을 갖고 있는지, 어떤 결함과 패괴 표출이 있는지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다면 솔직히 마음을 열고 남들과 교제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네 실제 내적 상태와 사상 관점을 보게 하고, 네가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알게 해야 한다. 절대 스스로를 위장하거나 포장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패괴와 결함을 남들이 알지 못하게 숨겨서도 안 된다. 이런 거짓된 행동이 바로 심리적인 장애물이자 패괴 성품이다. 그것은 사람이 회개하고 변화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너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너에 대한 남들의 찬사와 네게 안겨 주는 후광, 그리고 면류관 등 거짓된 것들을 가져와 반성하고 해부하고, 그것의 위해를 간파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의 실제 분량을 알고 스스로를 제대로 파악하게 되어 자신을 초인이나 위인으로 여기지 않게 될 것이다. 스스로를 제대로 파악하면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쉽다. 또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너에 대한 창조주의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착실하게 평범한 사람, 진실한 사람이 되어 너라는 피조물과 창조주인 하나님 사이에 정상적인 관계를 수립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로, 사람이 완전히 이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그의 앞에 나아오는 것만을 받아들이지 위선적이고 거짓된 유명인이나 위인, 초인의 경배는 받지 않는다. 네가 이런 거짓된 후광을 내려놓고 자신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임을 인정하여 하나님을 향해 진리를 구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에 대한 네 마음은 훨씬 진실해질 것이고, 한결 홀가분한 기분이 들 것이다. 이럴 때 너는 하나님의 붙들어 줌과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자주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께 구하고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위인이나 초인이 되는 것이 쉽겠느냐, 아니면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쉽겠느냐? (평범한 사람입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쉬우나 위인이나 초인이 되는 것은 어렵고 늘 고통스럽다. 하지만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고 실행해 보라고 하면 사람은 저도 모르게 초인이나 위인이 되려 한다. 이는 사람의 본성 본질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사람도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앞으로 너희에게 “어떻게 하면 초인이나 위인이 되지 않을 수 있나요?”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내가 말한 방법대로 실행하여 평범한 사람이 되고 위장하지 마라. 그리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남들과 솔직하게 마음을 나누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레 성과가 생길 것이다. 너는 차츰차츰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고 사는 것이 피곤하지 않으며 괴롭지도, 고통스럽지도 않게 된다. 모든 사람은 평범하다. 사람 간에 그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개인의 은사가 다르고 자질의 수준 차가 조금 있을 뿐이다. 만약 하나님의 구원이나 보호가 없다면 모두 악을 저질러 징벌을 받을 것이다. 자신이 평범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사람의 상상과 허무맹랑한 것에서 빠져나와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과 정직한 일을 하는 것을 추구하고 성실히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고 사람다운 모습을 온전히 살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쉬운 일이거늘 어째서 길이 보이지 않겠느냐? 지금은 내가 이렇게 쉽게 말하지만 사실 또한 그렇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대단한 것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에요. 전부 사람의 양심과 이성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도 어렵지 않아요. 마음을 다해 하고 의지와 바람을 가지고 실행한다면 쉽게 해낼 수 있답니다.” 하지만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늘 야심과 욕망을 품고 초인과 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해도 쉽지 않다. 그들은 항상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고 강하다고 생각하여 오로지 초인이나 위인이 되려는 생각뿐이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이 되어 피조물 본연의 위치를 지킬 마음이 없을뿐더러 초인이나 위인이 되는 것을 기어코 추구하려 하니 구제 불능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진리를 구하거나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바람과 은사, 자질로만 행동한다. 설령 하나님에게 기도한다고 해도 형식적으로만 할 뿐 속으로는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든 말든 어차피 그건 하나님 일이니 나는 내 할 일이나 하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그 일을 완전히 처리할 수 있고 이행 중인 사역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에게 하는 기도는 형식적인 것에 그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어떻겠느냐? 그들은 자신이 평범한 정상인이란 것을 인정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신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든 자기가 다 처리할 수 있다고, 하나님 말씀을 구하지 않아도 일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다고, 이루지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걷는 길은 어떤 길이냐? 위인이나 초인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길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화를 자초하든, 얼마나 잘못을 저질렀든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많아지고, 성과도 꽤 쌓여 우월감이 어느 정도 생기면 자기에게 밑천과 능력이 생겼고, 하나님 집에서 수고한 공이 크니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은 필요 없고 자기가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절대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불가능이란 없는 사람이라고 자부하여 일이 생겨도 하나님에게 전혀 기도하지 않고 진리 원칙을 구하지도 않으며 더욱이 형제자매와 교제하지 않고 상부에도 전혀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구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이 언급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일이 많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한쪽에 제쳐 두고, 남을 업신여기며, 모든 사람을 자기 발밑에 둔다. 그들이 걷는 길은 바로 유명인, 위인, 초인이 되는 길이다. 이런 사람은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한다.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라 잘못이나 과오를 저지르며 실패할 수 있고, 흠이나 결점이 많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에게 요구하면 그가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에게 그런 후광과 감투를 내려놓고 그를 향한 형제자매의 우러름과 교회에서의 명성과 지위를 내려놓으라고 한다면 그가 납득하겠느냐?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가 얼마나 어렵게 얻은 명성과 감투인데 어떻게 순순히 양보할 수 있겠어요? 제가 그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더 많은 사람에게 초인이나 위인으로 대접받길 갈망하지 남에게 자신의 흠이나 결점을 보여서 정상인 취급을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더구나 남들이 그의 잘못이나 실패, 그리고 행동거지를 폭로하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의 사람이 자주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겁니다.) 설사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한다고 한들 그것이 진심이겠느냐? 아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감투와 명성만을 위해 말하고 행동하며 이를 모든 사람에게 내보이면서 하나님의 감찰은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에게 진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에게 진심이 없으니 절대 하나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런 부류의 사람은 진리를 구하려 하고 유명인이나 위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려 해도 진심이 아니다. 그는 육을 저버리지 못하고 진리를 실행해 내지도 못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불신파이고 적그리스도다. 적그리스도에게 지위나 권세가 생기고 사람들 속에서 또 명성이 조금 생기면 기어이 독립 왕국을 세워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고 만다. 네가 그에게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고 책망과 훈계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 집에서 진리를 교제하고 체험 간증을 이야기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고 증거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 순수한 이해와 진리 원칙을 교제하는 것 등의 긍정적인 것은 오직 진리를 사랑하고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사람에게서만 결실을 볼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 복받기만 추구하는 자, 초인이나 위인이 되는 것을 좋아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 어떤 진리나 옳은 말, 긍정적인 사물은 모두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다 듣고 나면 진리가 옳다고, 진리가 좋다고 말하지만 다음과 같은 고민에 빠진다. ‘내가 왜 살겠어? 이런 명성과 지위, 면류관, 후광, 하나님의 상을 위해 사는 거지. 이게 없어지고 나서도 내게 존엄성이 있겠어? 사는 게 무슨 의미 있겠어? 상이나 면류관 받으려고 하나님을 믿는 거 아니겠어? 지금 이토록 심혈을 기울이고 대가를 치르면서 어렵사리 기대해 온 하나님의 상선벌악의 때, 내가 면류관을 받고 상을 받을 때가 되었는데 그걸 어떻게 순순히 남에게 양보할 수 있겠어? 일반인처럼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난 그렇게 어리석진 않아!’ 이는 구제 불능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타이를 필요 없다. 진리는 그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진리를 바라지 않고 오로지 복과 면류관만 구하니 그들의 욕망과 야심이 정상인이 원하는 범위를 넘어섰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이 왜 그렇게 지위나 권력에 연연해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게 바로 이 부류 사람의 본질과 천성이다.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네 본질이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너를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다. 네가 왜 그렇게 어리석은지, 눈앞의 면류관이나 후광, 명성을 마다하고 왜 굳이 평범한 사람이 되려 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고, 도무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이 사람은 착실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고,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을 하고, 하라는 대로 순종하는데 어쩜 저리 어리석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 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미련하며 맹추 같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을 추구하고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만물에 통달했다고 자부하면서 이런 결론을 도출한다. ‘사람에게 지위나 명성, 면류관이 없고, 사람들 가운데서 신분의 가치나 발언권도 없다면 삶에 가치가 없어. 인생의 목적은 명예 아니면 실리인데, 실리가 없다면 목표는 마땅히 명예가 되어야겠지.’ 이는 사탄의 논리가 아니냐? 사탄의 논리를 따라 살면 구제 불능이다. 그 어떤 하나님 말씀이나 긍정적인 사물, 아무리 옳은 조언이라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에게 말을 걸지 마라. 이런 말은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만 하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만이 진지하게 하나님 말씀을 듣고 묵상하여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에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여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반면 긍정적인 사물과 하나님 말씀을 속으로 무시하고 적대시하는 자는 평생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 무사 평온하게 사는 평범한 사람이 되어 성실히 하나님 앞에 나아와 이해되지 않는 일에 대해 마음을 다하여 구하고 기다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천국은 이런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곳이 아니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하나님이 말한 평범하고 정상적인 피조물이 되어 피조물 본연의 위치에 서서 기꺼이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기꺼이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자주 하나님 앞에 나아와 구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말하는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말하는 이기는 자가 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는 약속을 받을 것이다. 이는 확실하다.

한 사람이 선한지 악한지, 진리를 추구하는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 사람의 이해와 태도가 어떤지, 진리를 깨달아 실행하는지, 책망과 훈계나 시련에 처할 때 진리를 받아들이는지, 진심으로 하나님을 원하고 받아들이는지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학력이나 자질, 은사가 어떤지,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니고 사역을 얼마나 하는지를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보지 않을뿐더러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너는 늘 자신의 욕망과 야심을 가져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상과 면류관으로 바꾸려 하면서 하나님 말씀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수없이 말씀했지만 네 마음속엔 한 마디도 남지 않았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분부이든, 하나님의 경고나 지적이든,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 형벌이나 가르침이든 네 마음속엔 하나님 말씀이 한 마디도, 네 좌우명이 된 하나님 말씀이 한 마디도 없다. 네가 하나님 말씀을 한 마디도 마음에 새기지 않은 채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진입하는 데에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에게는 네 결말과 종착지가 이미 정해진 것이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창조주 앞에서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창조주 앞에서 감히 경솔하게 굴며 늘 위인이나 초인, 비범한 사람이 되려 한다. 하나님이 네게 준 본연의 위치는 지키지 못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으려 하느냐? 하나님이 네게 주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약속을 얻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해야 한다. 이것이 기본적인 방향이다. 세부적인 방향은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실행하는 것이다. 이 길은 영원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실행하여 그 말씀을 네 삶 속의 실제가 되게 하고, 네가 말하고 처신하고 일을 바라보고 일을 처리할 때의 근거, 원칙, 방향 그리고 목표가 되게 하여라. 즉, 네가 하는 말이든, 일에 대한 판단이든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부류의 사람을 만나든, 혹은 어떤 부류의 사람을 멀리하고 관계를 끊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네가 화를 내고 남을 욕하는 것도 원칙과 배경이 있어야 하며, 기본적으로 진리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 실제를 살아 내는 것이고, 하나님에게 칭찬받을 것이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며 정상 인성을 살아 내어 합격한 피조물이 되는 과정이자 초인, 엘리트, 유명인, 위인이 되는 것에서 벗어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네가 초인, 유명인, 위인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길이나 이런 추구 방식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먼저 자세를 낮춰 자기가 사람임을, 미미한 사람이자 하나님의 인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다시 말해 평범한 사람임을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창조주의 주재와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임을, 하나님이 주는 호흡이나 하나님이 공급하는 모든 것 없이는 쓸모없는 송장과 다름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이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모든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해서 하나님 말씀을 네 생명, 네 삶과 생존의 토대와 근거, 네 평생 살아가는 근원과 의지처가 되게 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자 사람에 대한 최고의 요구이다.

오늘은 주로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먹고 마시는지에 관해 교제하였다.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사랑하고 실행해야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에 관한 교제는 주로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에 대한 내용이다. 이런 것이 바로 너희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자 사람이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제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명확히 알 수 없다. 잠재의식 속에서 어렴풋이 아는 것 같아도 명확하게 말하지는 못한다. 마치 글을 쓸 때 개요는 짜도 내용을 채우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너희의 실상이다. 오늘 교제한 이 내용은 사람에게 한 가지 조언과 주의를 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진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를 깨닫고 나면 구체적인 실행법에 관해서는 너희에게 길이 있을 것이니 자주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실행해서 하나님 말씀 실제에 진입해야 한다. 네가 만약 자신의 분량이 형편없고 이해력이 떨어져서 깊이 있는 하나님 말씀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그 말씀에 이르지 못하며 그 말씀에 결부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쉬운 것부터 먹고 마셔라. 평이하고 알기 쉬우며 자신이 실행해 낼 수 있는 말씀을 외우고 마음에 새겨서 자신의 실행 원칙이 되게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하여라. 하나님이 동쪽으로 가라 하면 동쪽으로, 서쪽으로 가라 하면 서쪽으로 가고, 하나님이 자주 기도하라고 하면 자주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라. 남들 눈에 어리석어 보일지언정 사탄이 생각하는 똑똑한 사람, 영리한 사람이 되지는 마라. 오직 진리 실행을 택하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2021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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