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바로잡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맺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측면에 대해 말씀하든, 혹은 어느 정도까지 말씀하든 그 모든 것은 인류에게 가장 필요하며 인류가 깨닫고 갖추어야 할 것들이다. 또한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 즉 사람의 본능으로 충분히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알아듣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말씀과 일을 하든, 그것이 성령이 사람에게 하는 역사이든, 혹은 하나님이 배치하는 여러 사람과 일, 사물, 환경이든 전부 사람의 본능으로 이를 수 있는 범위나 사람의 사상 영역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진실하며 현실적이기도 하다. 사람이 깨닫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인데, 이는 그의 자질이 형편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이 말씀하는 방식과 어투, 말씀하는 취지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급하는 모든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고 모두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는 것이 모두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고, 또한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되도록 인간이 도달할 수 있고 이를 수 있는 평이하고도 다방면적인 말과 어휘로 표현하고 사람에게 공급함으로써 생각과 관점, 교육 수준, 사회 교육 환경, 가정 환경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고 이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한 이 모든 말씀에서 네가 깨달아야 할 한 가지가 있다. 하나님 말씀은 너무 심오하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사람이 이해 못 할 말씀이 없다는 것이다. 자질을 어느 정도 갖추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는 것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지만 진리를 선포하는 언어 형식, 구체적으로 사용하는 어휘에 이르기까지 모두 인간의 언어이므로 인간 언어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떤 형식으로 말씀하든, 말씀하는 방식이나 어조가 어떻든, 말씀에 사용하는 어휘가 서양의 것이든 동양의 것이든, 인간의 옛말이든 현대어이든, 인간이 느끼기에 난해하거나 인간의 언어가 아닌 경우가 있느냐? (없습니다.) 지금껏 아무도 그런 걸 발견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아닙니다. 제겐 ‘공의’와 ‘위엄’이라는 단어가 그렇습니다.” ‘공의’와 ‘위엄’은 신성 본질 중 한 측면의 정의이자 표현이긴 하지만 이 두 단어가 사람들 사이에서 쓰이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 두 단어에 대해 네가 어느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떠나 적어도 사전에서 이 두 단어의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해석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원초적인 해석으로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에 대조해 보고 결합해 보면 이 두 단어가 인간에게 추상적이지 않고 비교적 구체적일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 말씀에는 사실에 대한 해설, 주해, 설명이 대폭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단어는 모든 사람에게 점점 구체적이고 생동감이 있으며 진실하고 사람이 인식해야 할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에 근접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성품에 관련되는 단어와 표현은 너희에게 추상적이거나 심오하지 않다. 그렇다면 평상시 사람의 실행, 사람이 걷는 길, 진리 원칙에 관련되는 진리 중에 추상적인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것이 없는 것이다.

내가 말씀을 선포하고 설교하면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너희가 진리를 더 잘 깨달을 수 있도록 힘을 다해 인간의 말,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고 접할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교하고 진리를 교제하며 진리 원칙을 이야기하였다. 이것이 좀 더 인성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하면 너희에게 좋은 게 무엇이겠느냐? 너희가 좀 더 많은 진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너희에게 좀 더 풍부하고 다양한 말을 들려주고, 그 다양한 말을 통해 사람이 쉽게 진리를 깨닫고 또 단조롭게 느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구약시대이든 신약시대이든 성경에 기록된 여러 말들에는 틀이 있어서 사람이 이런 말을 보면 그것이 성경의 언어라는 것을, 성경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런 말들은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말의 스타일이나 어휘가 상징성이 없게 해서 이것이 성경의 틀을 뛰어넘는 말이라는 것을 사람에게 알려 주려 힘쓰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의 내용과 어투를 통해 그 근원이 하나님이 성경에서 한 말씀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 같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말씀에 쓰인 어휘를 통해서 성경을 이미 초월했음을, 성경의 신구약을 초월했으며 나아가 수천 년 동안 모든 영적인 사람이 사용했던 영적 용어를 뛰어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이 말씀한 이런 단어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느냐? 사람이 자주 쓰는 긍정적이고 좋은 의미의 말이 있을 것이고, 사람의 패괴 성품을 더 실감 나게 폭로하고 표현할 수 있는 단어와 말이 있기도 할 것이며, 문학, 음악, 무용, 번역 등 분야의 전문적인 것들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어느 분야의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든, 어느 분야의 전문 지식에 정통한 사람이든 내가 말한 진리가 실생활이나 사람이 이행하는 본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어떤 측면의 진리이든 사람의 실생활, 사람이 이행하는 본분과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느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럼 이런 진리가 너희에게 많은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만약 이런 일에 무관심해서 번역, 영상, 미술, 작문, 혹은 음악 등에 관련된 일에 일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이런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도 않고 피한다면 사역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 일부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너희와 소통하기가 매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말들을 배우고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업무적으로 너희에게 이론과 원칙상 도움이 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희가 이런 분야의 본분을 이행할 때 본분 이행에 관련된 업무가 진리와 동떨어진 게 아님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네 전공이나 강점이 무엇이고 네가 배운 업무가 무엇이든 이 말씀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에 진입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좋은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좋은 결과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이 인성에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 어떤 것을 갖추어야겠느냐? 그것은 성육신이 갖춘 정상적인 인성으로도 여러 분야의 전문 지식을 조금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지식에 정통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그저 진리를 교제하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각 분야의 전문 지식을 활용함으로써 각 분야의 사람들이 하나님 집의 간증과 여러 영상 작품을 이해하고 깨닫게 할 수 있을 정도면 된다. 이는 복음 사역의 확장에 크게 유익하다. 만약 하나님 집의 언어로만 진리를 교제하고 사회 각 분야의 전문 용어나 지식은 사용하지 않는다면 성과는 크게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이런 사역을 잘하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겠느냐? 전문 지식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하니 나는 가끔 노래를 듣고 뉴스를 보며, 잡지나 신문을 보기도 하고, 때로는 이방의 일을 들어 보기도 한다. 이방의 일이 여러 분야와 관련되어 있다 보니 하나님 집에서는 쓰지 않는 말도 있지만 그 말을 설교에 사용하면 효과가 좋을 때도 있고, 너희에게 도움이 되고,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길이 그렇게 단조롭거나 지겨운 것이 아니라 넓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는 너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너희는 이를 통해 유용한 것을 배워야 한다. 물론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자질이 충분한 사람은 유용한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인데, 이는 본분 이행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시간이 나면 뉴스를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은연중 배우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내가 크게 공을 들일 필요도 없이 여가 시간에 좀 배우고, 보고, 들으면 나도 모르게 알게 되는 것들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파악하는 것이 사역에 지장을 주겠느냐? 조금도 지장을 주지 않는다. 또한 매우 필요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 집의 사역에 도움이 되고 복음 확장에도 유익하다. 너희와 이런 문제를 교제하는 게 무슨 뜻이겠느냐?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너희가 충분히 이를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으며 쉽게 실행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말씀은 적어도 인성에 마땅히 갖춰져 있어야 할 것들이다. 인성에 갖춰져 있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런 사역을 하고 이런 말씀을 선포할 때 이미 인성을 통해 가공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가공’은 무슨 뜻이겠느냐? 예컨대 도정하지 않은 밀의 껍질을 벗긴 후 밀가루로 빻아 만두나 전병, 면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제대로 가공한 다음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결국 너희는 완제품이나 잘 차려진 음식을 즐기게 되는 것이다. 너희가 협력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바로 오늘날 하나님이 한 모든 말씀을 재빨리 먹고 마시는 것이다. 많이 먹고 마시고 받아들이면서 조금씩 체험하고 소화하며 흡수하여 너희의 생명, 너희의 분량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네 매일의 삶과 이행하는 본분을 지배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말씀은 모두 인성의 언어로 되어 있어 비록 평이하긴 하지만 말씀 속의 진리는 결코 쉽게 깨달아 진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은 이해하기 쉬워도 진리에 진입하는 것은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해서 사람을 지금까지 이끌었고, 그 모든 말씀이 너희에게서 조금씩 실현되고 있고, 그가 선포한 진리와, 사람이 진리에 진입하고 구원의 길에 들어서도록 인도하는 이 절차는 너희에게서 명확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조금씩 이행되고 실현되고 있다. 이런 결실이 조금씩 구현되고 있다는 것은 추상적인 게 아니다. 그럼 우리는 이 말씀들이 인성을 통해 어떻게 가공되는가를 신경 쓰지 말자. 이 과정은 연구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는 사람이 연구해도 밝혀낼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오직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만 생각하면 된다. 이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자 올바른 태도이다. 늘 연구해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다. 그것은 시간만 허비하는 것이다. 진리는 연구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과학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선포하는 것이고 체험을 통해서만 깨닫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해야만 진리를 얻을 수 있다. 머리로 연구만 하고 실행하지도 체험하지도 않으면 진리를 얻을 수 없다. 하나님 말씀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 것 외에 긍정적인 태도는 무엇이겠느냐? 받아들이고 협력하며 가감 없이 순종하는 것이다. 만약 누구에게 연구 자격이 있다면 적격자는 사실 나겠지만 나는 연구해 본 적이 전혀 없다. ‘이 말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누가 알려 주었을까? 난 언제, 어떻게 알았을까? 다른 사람은 알고 있을까? 내가 말하고 나면 결실이 있을까? 결과는 어떨까? 이렇게 많은 사람을 이끌었는데 결국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치거나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지 못한다면 어떡할까?’라며 말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것들이 연구해야 할 내용이겠느냐? (아닙니다.) 나는 이런 것들을 연구해 본 적이 없다. 내가 할 말이 있거나 너희에게 알려 주려는 내용이 있으면 바로 알려 준다. 머리를 굴리며 연구하는 과정을 거칠 필요 없다. 내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다음과 같은 내용뿐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희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야 하는지, 좀 더 많은 사례와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너희가 좀 더 구체적인 내용과 실행의 길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하는지, 내가 한 말과 용어, 말하는 방식이나 어투, 그리고 내가 말하는 어법, 어휘를 너희가 이해하였는지, 너희가 오해하거나 난해하게 느낄 만한 곳은 없는지, 너희에게 추상적이거나 오묘하고 공허하게 느껴질 만한 것은 없는지’라는 것뿐이다. 나는 이런 것들만 관찰하고 생각하면 될 뿐 그 외의 것은 연구하지 않는다. 내가 이런 일을 연구하지 않는 것은 정상인데 너희가 연구하지 않는 것도 정상이겠느냐? 너희가 연구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고 연구하지 않는 것이 비정상이다. 너희는 분명 패괴된 인간의 본능과 본성에 휘둘려 연구할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과 왕래함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차츰 정상적이 되어 자신의 자리와 자기 마음속 하나님의 위치를 바로잡는 것이다. 이 과정이 잘 진전되고 좋은 방향으로 발전됨에 따라 사람이 하나님의 행사를 인지하고 인식하며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정도 역시 갈수록 깊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사람이 성육신에 대해 확신하고 인지하며 인식하고 인정하는 정도도 분명 깊어질 것이다. 이렇게 깊어지고 나면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연구와 의구심도 점점 줄어들고 약해질 것이다.

사람은 어째서 하나님을 연구하겠느냐? 왜냐하면 사람 내면에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 불확실한 요소나 의구심, 이해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고, 난해한 일, 비밀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서 연구를 통해 결론을 도출하려 하기 때문이다. 네가 표면적인 현상이나 네 전문 지식, 머리로 하는 판단으로는 아무리 연구해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시간을 허비했더라도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고 진리가 무엇인지 여전히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몇 년도 안 되어 결실을 맺고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생기고 경외심과 순종의 마음이 생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이 실제적이고 진실하다는 것을 믿지 못해 늘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려 하고, 심지어 성육신마저 연구하려 한다. 생명에 관련된 일, 영적인 일은 연구로 이해할 수 없다. 언젠가 네가 이 진리를 체험하고 모든 생각과 대가, 집중력을 진리를 실행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데 쏟는다면 너는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되고, 성육신 하나님을 더 이상 연구하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 그가 과연 사람인지 하나님인지에 대한 답을 그때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인성이 아무리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 같다고 해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네가 그의 신성 본질을 마침내 알게 되었고, 그가 선포한 진리를 마침내 인정했으며, 이 사람이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라는 사실을 이미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너는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일련의 사실과 과정, 체험과 좌절, 실패의 교훈으로 인해 진리를 조금 깨닫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너는 더 이상 이 사람을 의심하거나 연구하지 않고 그가 바로 실제의 하나님이며 이는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너는 본능적으로 그가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의심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의 인성이 아무리 정상적이고 언행이 평범한 사람과 똑같아도, 전혀 비범하거나 위대하지 않더라도 너는 의심하지 않고 속으로 업신여기지도 않게 된다. 예전의 너는 성육신이 네 관념에 맞지 않는다며 연구하고 업신여기고 비웃으며 속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가 하는 말씀을 곱씹고 경청하는 동시에 다른 관점으로 그가 선포한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어떤 관점이겠느냐? ‘나는 피조물이야. 그리스도는 작은 체구에 목소리도 크지 않고 이목을 끄는 외모도 아니지만 그분의 신분은 나와 달라. 그분은 패괴된 인류의 일원이 아니야. 우리 가운데의 일원도 아니야. 우리는 그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함께 논할 수도 없어.’ 네가 가진 관점이 예전과 달라진 것이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느냐? 처음엔 받아들이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연구하던 네가 마음 깊이 그의 말씀을 생명과 네 실행의 길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진리가 있음을, 그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마치 그에게 하나님의 모습과 하나님 성품의 표출이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의 부탁과 사역이 그에게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때 너는 그를 완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에 대한 너의 모든 반응과 태도가 피조물이 가져야 할 본능과 올바른 반응이 될 때 너는 성육신한 인자를 하나님으로 대하게 되고, 더 이상 연구하지 않게 된다. 심지어 연구하라고 해도 연구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네 부모가 너를 왜 낳았는지, 너는 왜 부모를 닮았는지를 연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너는 본능적으로 이런 일을 연구하지 않게 된다. 이런 일이 네 일상생활 영역에 해당하는 주제가 아니게 되니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에 대해 처음엔 조건 반사적으로 연구하던 네가 본능적으로 연구하지 않게 되면, 이런 본능으로 바뀌게 되면 네 마음속에서 성육신한 이 사람이 갖는 지위와 분량이 점점 높아져 아무도 대신할 수 없게 되는데, 하나님 자신으로 바뀌게 되고 하나님의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완전히 정상적이 될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네가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하니 영적 세계에 있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비교적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고 어떤 분이며 사람에게는 어떤 태도를 가지는지, 사람과 이야기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지금 네 앞에는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형태와 형상이 있는 사람이 서 있다. 처음엔 네가 그를 알지 못해 거부하고 의심하고 추측하고 오해하며 심지어 멸시했다가 그의 말씀을 체험한 후 그 말씀을 생명과 진리로, 네 실행 원칙과 걷는 길의 방향과 목표로 삼아 받아들이게 된다. 나아가 이렇게 진실한 이 사람을 받아들이게 된다. 마치 그가 바로 네 마음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체화된 형상인 것처럼 말이다. 네가 이렇게 느끼게 되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공허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막연하고 보이지 않는 형상에서 그가 이미 육신이 되었고, 사람들 가운데서 아예 무시당하는 사람으로 구체화하였을 때도 여전히 그와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를 유지한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더없이 정상적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네가 그에게 무엇을 하든 그것은 기본적으로 피조물에게 있어야 할 본능적인 반응일 것이다. 너더러 하나님을 의심하라고 해도 의심하지 못할 것이고 연구하라고 해도 연구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연구하려 하면서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시죠? 왜 그렇게 웃으시고, 왜 그렇게 행하시나요?” 이는 네게 더할 나위 없이 정상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원래 이러시고 그래야 해. 틀림없어! 그가 어떻게 하시든 나와 그분의 관계가 정상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아.’

모든 인간의 사상 관념으로 볼 때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절대 가져서는 안 되는 형상이다. 왜냐하면 평범한 사람은 서민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토록 위대한 하나님이 무시당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관념에 가장 부합하지 않는 일이다. 오늘날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가장 무시당하는 사람이 되었는데도 그가 네 하나님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사실 자체가 간증이다. 그렇다면 너와 하나님의 정상적인 관계에 지장을 주고 그 관계를 깨뜨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가 네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것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꽤 있는데, 하나님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임을 인정하겠느냐? 하나님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과연 어떻겠느냐? 그가 진실로 하나님에게 순종하겠느냐? 하나님을 거부하지 않겠느냐? 사람은 이 점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너와 성육신한 하나님은 똑같이 사람의 모습과 사람의 형상, 사람의 취향을 가지고 있고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며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네가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고 너와 하나님의 지위를 확실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는다면, 네가 이 관계를 넘어서거나 선을 넘지 않으면, 네가 이런 분량에 도달한다면 하나님 편에서는 합격한 것이다. 그 어떤 세력도 너와 하나님의 이런 관계를 깨뜨릴 수 없다. 이 관계는 무엇보다 안정적이고 기준에 부합하게 될 것이다. 만약 너와 이 육신의 관계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이런 관계를 갖추지 못했다면 네가 “저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관계는 무척 좋아요. 지극히 정상적이죠.”라고 말할 때 이 말이 진실하겠느냐? 진실하지 않다. 네가 하나님과 관계가 좋다고 하는데 그걸 누가 보았느냐? 어떤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냐? 그런 사실이 없다. 사람은 육체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영적 세계를 직접 꿰뚫을 수 없고 하나님을 접할 수 없는데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영과 함께할 수 있겠느냐? 지금 너희와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관계가 하나님과 사람의 정상적인 관계에 이를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무엇이 어려우냐? 사람이 깨닫지 못한 진리가 아직 많다.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느냐? 패괴된 인간과 성육신한 하나님은 여러 측면에서 관점과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도 일치하지 않으며, 더욱이 하나님에 대해 사람은 수많은 관념과 상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이 문제의 근원은 어디에 있느냐?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지장을 주는 요소는 무엇이냐? 사람의 패괴 성품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여전히 사탄의 편에 서서 사탄의 독소에 기대 살고 있어서 사탄의 성품, 사탄의 본질만 살아 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진리이고, 하나님의 본질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과 합하려면 바뀌어야 할 쪽은 누구겠느냐? 당연히 사람이다. 이것은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변해야겠느냐? 반드시 하나님 사역에 순종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과 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길에 들어서야만 점점 진리를 깨달아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으며,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네 일 처리 원칙, 네가 일을 바라보는 관점, 네 인생관과 가치관 등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합하게 될 것이다. 너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이 줄어들 것이고, 갈등도 사라질 것이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네 연구도 점점 줄어들 것이고, 네 순종은 자연스레 늘어날 것이며 점차 온전하게 하나님과 합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이 두려우냐? (두렵지 않습니다.) 너희는 두렵지 않을지 몰라도 나는 두렵다. 무엇이 두렵겠느냐? 너희는 분량이 너무 작아 깨닫지 못한 진리가 많다. 내가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말을 할 때 너희 분량으로 이를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해서 바로 말하거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너희가 진리를 체험하고 체득할 수 있도록 충분한 여유와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런 다음 나는 기다린다. 너희가 이런 진리를 깨닫고 차차 받아들여 분량이 커지면 조금씩 너희에게 다가가려 노력한다. 그런 다음 너희를 관찰하면서 너희 분량이 자랐는지 본다. 분량이 자랐으면 너희에게 좀 더 많이 말하고 분량이 아직 작으면 좀 피한다. 내가 왜 너희를 피해야겠느냐? 너희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 너무 지나치게 요구하고 재촉하면 알묘조장이 되기 쉽다. 알묘조장의 결과가 무엇이겠느냐? 위험해질 것이고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너희와 함께 지내는 것이 조화나 일치에 이르기는커녕 진정한 융화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억지로 너희와 자주 만나거나 함께 생활하면서 너희가 이행 중인 본분을 일일이 지도한다면 너희에게 압박이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너희는 힘들게 느껴질 것이다. 너희가 볼 때 내가 참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내가 참는 것은 고통스럽지 않겠느냐? 나도 고통을 받아야 한다. 만약 이런 고통이 너희에게 유익하고 너희를 빨리 성장시킬 수만 있다면 내가 받는 이 정도 고통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많이 참고 말을 줄이면서 관용을 베풀고 기다리며 인내할 뿐이다.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너희가 어떤 고통을 미리 받으면 어느 정도 성과를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일부 특수한 사람에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를 이해할 수 있고 양심과 이성을 지녔으며 사리에 밝은 데다가 진리를 무척 사랑하고 꿋꿋이 진리를 추구하고 마음 깊이 빛과 긍정적인 사물을 에누리 없이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 베드로처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말이다. 이런 인성과 추구를 갖추고 이런 이해를 갖추어야만 이런 고통을 미리 받을 수 있다. 너희 중에 이런 조건을 갖춘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너희가 너무 일찍 이런 고통을 받지 않도록 우리는 거리를 두고 지내야 한다. 그럼 이런 고통은 언제 받겠느냐? 너희의 분량이 어느 정도까지 자라면 하나님이 자연스럽게 환경을 마련하고, 사람, 일, 사물을 배치할 것이다. 욥처럼 말이다. 욥의 분량이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사탄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욥을 참소하자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해서 욥이 시험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욥은 모든 재산을 빼앗겼다. 이것이 너희와 동떨어진 일이냐? 얼마나 동떨어져 있느냐? 한편으로는 너희의 추구에 달려 있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 사역의 필요나 하나님이 세운 계획의 타이밍에 달려 있기도 하다. 어떤 타이밍이겠느냐? 사람이 기본적으로 이런 진리를 갖추고 깨닫게 되는 그 시기가 올 때이다. 그런데 분량이 아직 충분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시간이 되면 하나님은 행사한다. 네가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아무도 이 관문을 피할 수 없다. 이를 공사를 검증한다고 하는데 모든 사람은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아무도 이 관문을 미리 통과하거나 뒤늦게 통과할 수 없다. 아무도 미리 통과할 수 없다는 말은 분량이 부족하고 진리를 많이 듣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에게 시련을 달라고 해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 하나님이 보기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하나님은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며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공급하고 사역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너희가 가지고 있는 내적 상태와 분량에 따라 내가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너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너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고 지금 너희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너희가 정상적으로 여러 방면의 본분을 이행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너희가 갖추고 깨달아야 할 진리 역시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공급하여 너희가 제때에 알맞게 공급받고 도움을 받게 한다. 그런 다음 너희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차츰 이 진리를 소화하고 흡수하고 체험하여 진리 원칙과 실행의 길을 찾고 서서히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과 하나님 간의 관계를 바로잡고 피조물의 위치, 즉 자신의 자리에 서서 자신의 본분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나면 어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시련과 연단을 겪게 될 것이다. 그게 언제겠느냐? 한 마디로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그 시련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올 것이다. 말이 조금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해야 할 때가 되면 너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 하려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나는 내 자리를 지키고 내 위치에서 내 사역을 할 것이다. 나는 보수적이거나 급진적이지 않고 순차적으로 사역할 것이다. 너희의 구원의 길은 열려 있다. 내가 그 길을 막는 일도 나아가 너희 발목을 잡는 일도 없을 것이다.

“당신을 따르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라며 걱정하는 사람이 있느냐? 이런 생각을 안 해 본 사람도 있겠지만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해서 의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의심은 아마 존재할 것이다. 그럼 내가 진실을 말해 주겠다. 걱정하지 마라. 걱정은 너보단 내가 해야 한다. 가장 걱정해야 하는 사람인 내가 걱정하지 않는데 네가 무엇이 걱정이냐? 네 걱정은 쓸데없지 않겠느냐? 네 그런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니 너는 걱정할 필요 없다. 나는 그 일을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이 일을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좋은 일이 아니냐? 그렇다면 누가 책임지느냐?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 “너무 무책임한 말씀 아닌가요? 당신이 책임질 필요가 없으면 누가 책임집니까?” 내가 책임질 필요가 없다. 나는 그런 걱정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일을 염려하고 연구할 필요가 없다. 내가 만약 ‘이런! 너희의 결말과 종착지를 감당 못 하겠다! 한 발짝 내딛고 한 마디 할 때마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연구하고 분석해야 하며, 결과를 본 다음 하자.’라며 걱정한다면 그건 책임 방기이다. 하지만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그 후과도 연구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답한다. “당신은 이 일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아니다. ‘꿰뚫어 보았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연구와 분석을 거친 후에야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이 일을 연구하지 않는다. 마치 사람이 자기가 왜 부모를 닮았는지 연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본능적으로 이 일을 연구하지 않는다. 애초에 머릿속에 이런 것들이 없는 것이다. 연구하지 않는 것은 매우 좋은 결과이니 너희도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본능적으로 연구하지 않는데 저희가 어떻게 배우나요? 배울 수 없죠!” 여기에서 교제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육신으로 실체화되고 하나님이 한 사람으로 된 것인데,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왔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연구할 필요 없다. 어쨌든 하나님은 사람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서 무엇을 하는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비밀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연구할 가치가 있느냐? 연구할 가치는 없다. 다만 너희가 진리를 구할 가치는 있다. 여기에서의 진리는 무엇이겠느냐? 너희가 꿰뚫어 볼 수 있느냐? 한 사람의 본질과 신분, 그리고 그의 사명이 하나가 되었으니 그의 사명이 바로 그의 본질이자 그의 본능인 것이다. 그가 살아 내는 것, 그가 표출하는 것, 그가 하고자 하는 것, 그에게 충만한 것이 바로 그의 본질이자 그의 본능이고 사명이다. 이것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느냐? 여기에서 너희가 볼 수 있어야 할 사실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이토록 많은 진리를 선포했으니 사람은 볼수록 깨달을 것이고, 볼수록 진리라고 생각할 것이며, 경험하고 실행할수록 마음속이 훤해질 것이고, 그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정상적이 될 것인데, 이는 연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네가 아무리 연구해도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진리는 체험으로 깨닫는 것이다. 체험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진리를 깨달으면 자연스레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생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을 인식하는 것도 진리를 깨닫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떤 황당무계한 사람들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자마자 하나님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제아무리 하나님을 연구한들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느냐? 어림없는 일이다. 종교계에서도 수천 년간 연구했지만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은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존재를 깊이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말이겠느냐? 너는 아직도 하나님을 연구하고 있느냐? 몇 년 동안 연구했느냐? 어떤 연구 성과가 있었느냐? 너에게 알려 주겠다. 성육신한 하나님은 자기가 누군지 전혀 연구하지 않는다. 내면에 오직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뿐 다른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고 살아 내며 행하는 것이 사람에게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으로 보여지고, 게다가 그 자신도 한 사람이 행사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느낀다. 어찌 된 일이겠느냐? 그의 내면에는 다른 생명이 없고 오직 하나의 생명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생명의 본질이 무엇이겠느냐? 겉으로 봐서는 사람이 꿰뚫어 볼 수 없으니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생명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사명과 그가 하는 사역의 본질에서 볼 때 그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어떤 연유겠느냐? 이는 사람이 인식할 가치가 있다. 하나님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본질을 표출하는 이 육신이 대체 누구인지는 사람이 구하고 파고들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이 육신이 자기가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자기가 본질적으로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정상이지 않겠느냐? 지극히 정상적이지 초월적이지 않다. “초월적이지 않은 건 하나님답지 않아요.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초월적이어야죠!”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여기서 ‘마땅히’는 어디서 비롯된 것이냐?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다. 사실상 사람이 알고 있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나님의 첫 행동이나 거동이 무엇이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여섯째 되던 날 흙 한 줌을 쥐어 그것으로 사람을 만들었고 그 이름을 아담이라 하였다. 그 후 아담을 잠재우고 그의 몸에서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또 다른 사람을 만들었는데 바로 하와다. 하나님의 이 모든 일련의 거동과 행동을 보면 무척 생동감 있지 않으냐? 모든 행동이 이토록 진실하니 사람의 상상과 관념 속 하나님과는 사뭇 다르다. 사람의 초월적인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사람이 하나님의 성육신을 만나고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의 모든 행사를 보고 다시 하나님이 태초에 사람을 지을 때의 실제 행위와 행동에 대조해 본다면 여기에 괴리나 차이가 있겠느냐? 네가 그 행동을 본 적이 없으니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의 측면에서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한 근원과 방식을 지금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의 근원 및 방식과 비교해 보면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왜 기본적이라고 하겠느냐? 여기에서 ‘기본적’이라는 말에 얽힌 사연이 있다. ‘기본적으로’란 무슨 뜻이겠느냐? 사람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행한 실제의 일과 말씀하는 방식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초월적인 요소를 갖는다. 그런데 지금 사람이 보고 듣는, 하나님이 말씀하는 방식과 방법, 어투는 매우 실제적이라 알 수 있고 눈에 보이고, 초월적인 요소나 사람이 상상할 여지가 없다. 둘 사이에는 거리가 있고, 그 거리는 결국 너희가 보기에 기본적으로는 일치한다. ‘기본적’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 너희와 마음에서 우러나는 가장 진실된 얘기를 좀 교제할 필요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겠느냐? 많은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이 무척 심오하고 측량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늘 연구하려 든다. 네가 이를 연구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네가 늘 하나님을 연구하면 진리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네가 늘 하나님을 연구하면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기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왜곡되고 변질되어 정상적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관계가 갈수록 정상적이 되게 할 수 있겠느냐? 네가 이 육신을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정상적으로 바라보며 마음속으로부터 그를 조금씩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의 모든 면, 그러니까 말씀하는 방식, 어투 심지어는 그의 생김새나 겉모습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만약 받아들이지 않고 연구만 한다면, 이리저리 연구해 봤자 손해를 보고 손실을 보는 쪽은 결국 너 자신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이룬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한 시대를 열었으니 시대 전체에도 영향을 미치고 시대 전체를 이끌 것이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 일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느냐? 연구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인식하며 계속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으면서 수시로 이렇게 자각해야 한다. ‘나는 피조물이고 패괴된 인간이야. 하나님은 겉모습은 평범한 사람이지만 내면의 본질은 하나님이셔.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 그분이 겉으로 무슨 일을 하시고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분의 태도가 어떻든, 내가 연구할 바가 아니야. 이것이 내가 가져야 할 이성이고 내가 지켜야 할 위치야.’ 오늘 너희에게 나 자신에 관한 일을 좀 얘기한 것은 마음속으로 이 일을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너희가 안개 속을 헤매지 말고, 마치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지 않으려고 뭔가를 숨기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사실 너희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 따위는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또 이렇게 행한다. 여기에는 추상적이거나 심오한 것이 없다. 너희가 보는 나의 모습이나 너희가 볼 수 없는 내 이면의 모습이나 모두 똑같다. 이것이 진실이다. 하지만 너희가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너희 눈앞에 보이는 사실과 표면적인 현상이 어떻든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이 현상을 진리나 사실로 여길 것이다. 반면 진리를 깨닫는다면 너는 현상이나 겉모습을 통해 본질과 진리를 인식할 것이다. 그럼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점점 정상적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 본질은 네게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모든 것을 주재하는 그분이다. 이것은 고정불변할 것이다. 피조물인 네가 늘 하나님 육신의 겉모습을 연구한다면 골치 아파진다.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사라질 것이다. 다시 말해,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가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 결과는 자세히 얘기할 것도 없이 최악일 것이다. 그 어떤 결과도 나타날 수 있고, 일어날 수 있다. 이 관계가 없으면 우리 사이에 사귐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이 말은 더없이 명확하지 않으냐? 우리 사이에 이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지키려면 사람이 어떤 신분이어야 하느냐? (피조물이어야 합니다.) 영원히 피조물이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이에 왕래가 있고 진정한 관계가 존재하게 된다. 네가 만약 피조물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이에는 그 어떤 관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와 왕래하지 않을 것이고 네가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을 것이다. 너와 나는 그 어떤 접점도 없을 것이다. 나는 네게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그것은 나와 무관한 것이다. 나를 연구할 필요도, 정죄할 필요도 없다. 내 신분과 지위, 내가 행한 모든 것은 너라는 평범한 사람이 정죄하거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이 말은 더없이 명확하지 않으냐? 이것이 진리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여기에서 어떤 진리를 깨달아야 하느냐? 사람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기초와 토대가 무엇이냐? 사람은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이런 토대가 생기면 계속 발전해 나갈 때 사람은 많은 일에서 그릇된 길을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만약 늘 연구하려 하고 피조물의 자리에서 이런 관계를 대하지 않는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골치 아픈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알겠느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만약 피조물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건가요? 서로 알고 있잖아요? 그런 관계가 아니라면 친구나 벗, 친지가 되면 안 될까요?” 안 된다. 내겐 친구나 벗이 없으며 더군다나 그런 친지도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 당신의 진정한 친지는 누구신가요? 가족인가요?” 아니다. 내겐 친지나 전우도 없고, 아랫사람이나 수행원도 없다. 창조주에게 있어 창조주와 관련된 사람은 오직 피조물밖에 없다. 지음 받은 모든 인간, 즉 피조물에게 있어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오직 하나의 신분만을 갖는다. 오직 이 관계만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는 관계가 좋으니 벗하면 안 될까요?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면 안 된다고 하겠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네가 누군지 모르는데 무얼 믿고 너와 벗하겠느냐? 우리에겐 그런 관계란 없다. 그런 사람은 “너무 단정적으로 말씀하시네요. 너무 매정하신 거 아닌가요?”라고 하는데 이렇게 단정적이다. 나는 그런 관계가 필요 없다. 나는 공급할 만한 대상에게 내가 행하고 말한 것을 공급한다. 그 대상이 누구겠느냐? 지음 받은 인간이고, 진리를 사랑하는 인간이며, 하나님이 구원할 대상이다. 이런 관계만 있을 뿐이다. 이 외에 그 어떤 관계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참 사귀기 어려운 사람이시군요!” 사귀기 어려운 게 아니라 그런 관계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도 “제가 당신과 오랫동안 만나 왔으니 우리는 친구 아닌가요?”라는 말은 하지 마라. 네가 만약 피조물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누구보다 친하고 좋은 관계이자 가장 정당하고 순결한 관계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제가 이토록 오랫동안 당신을 섬겼으니 우리는 서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닌가요? 제가 당신의 지음이자 막역한 친구 아닌가요?” 아니다. 내겐 막역한 친구가 없다. “당신이 어떤 옷을 좋아하시는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시는지 늘 제게 말씀하셨고, 저도 당신께 숨김없이 말씀드렸어요. 그럼 우리는 친구가 아닌가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아니다. 나는 사람을 친구로 사귀지 않으니 내겐 친구가 없다. 네가 만약 피조물이라면 우린 할 얘기가 있다. 교류하고 관계를 형성하고 우정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정을 쌓는 것이 친구겠느냐? 아니다.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나를 접대하고 보호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공이 있고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한다. 말을 그렇게 해선 안 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지배한 것이다. 만약 그가 “은혜를 저버리시는 게 아닙니까?”라고 한다면 이 말은 어떻게 해석되겠느냐? 사람이 꿰뚫어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해 함부로 규례를 맞추면 안 된다. 그러면 판단하기 십상이다. 네가 만약 자신이 피조물임을 안다면 이 일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네가 만약 이 관계를 이용해 나에게 강요하려 하거나 가까워지고 친한 척하려 한다면 잘 들어라. 잘못 생각한 것이다. 괜한 수작 부리지 마라. 내게 친한 척하면 네가 역겹다.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 “당신에게 이 수법이 안 먹히는 거 아닌가요?” 아니다. 친한 척하는 방식이 옳지 않다. 이는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전 젊고 잘 생긴 데다가 말주변도 좋아요. 하나님은 저 같은 사람이 좋지 않으신가요?”라고 묻는다.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네가 가진 그런 생각은 하나님 말씀에서 답을 찾을 수 있으니 제발 나를 역겹게 하지 마라. 이 말은 더없이 명확하지 않으냐? 이보다 더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어떻게 이해해야겠느냐?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오직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만 있습니다.) 그렇다. 사람은 자기의 위치를 바로잡아 언제든 자격을 내세우거나 경력을 따지지 말고 잔머리를 굴리지 마라. 그 어떤 처세 철학으로 자신의 신분을 바꾸려 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꾸려 하지도 마라. 절대 이런 시도를 하지 마라. 이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다. 이런 무의미한 발악은 하지 마라. 부질없다! 사람은 왜 항상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느냐? 오늘 말씀이 끝나면 많은 사람들이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일에 얽히고 싶지 않다. 마음이 괴롭단 말이다! 만약 사람이 이성을 지니고 있다면 이런 일을 잘 이해할 것이다. 그토록 많은 말씀에서 이 일을 언급하고 있으니 정말 이해 능력이 있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은 사람이라면 이 일을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얻었고 하나님의 사역도 완전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2019년 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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