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하나님의 거룩함(2)

오늘은 찬양 한 곡을 불러 보거라. 너희가 좋아하고 평소 자주 부르던 곡을 찾아보아라. (하나님 말씀 찬양 제760곡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을 부르겠습니다.)

1. ‘사랑’이란 티 없이 순수한 감정이다. 마음으로 사랑하고 느끼고 헤아리는 것이다. ‘사랑’에는 조건도 간격도 거리도 없다. ‘사랑’에는 의심도 추측도 없고 기만도 간교도 없다. ‘사랑’에는 거래도 어떠한 불순물도 없다. 너에게 사랑이 있다면 기만도 원망도 하지 않을 것이고, 배반도 거역도 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무엇을 얻고자, 얼마큼 얻고자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2. ‘사랑’이란 티 없이 순수한 감정이다. 마음으로 사랑하고 느끼고 헤아리는 것이다. ‘사랑’에는 조건도 간격도 거리도 없다. ‘사랑’에는 의심도 추측도 없고 기만도 간교도 없다. ‘사랑’에는 거래도 어떠한 불순물도 없다. 너에게 사랑이 있다면 기꺼이 바치고, 고난을 감내할 것이다. 또한 나와 마음을 합할 것이며, 나를 위해 너의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다. 너의 가정과 앞날, 청춘과 결혼까지도 포기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기만이고 배반이다!

―≪어린양을 따르며 새 노래 부르네≫ 중에서

찬양을 참 잘 선택했구나. 너희는 이 찬양을 좋아하느냐? 이 찬양을 부르고 나니 어떤 느낌이 드느냐? 자신에게 이런 사랑이 있다고 느껴지느냐? (아직 거기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이 찬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어느 부분이냐? (“‘사랑’에는 조건도 간격도 거리도 없다. ‘사랑’에는 의심도 추측도 없고 기만도 없고, 간교도 없다. ‘사랑’에는 거래도 어떠한 불순물도 없다.”라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직도 많은 불순물이 있고, 하나님과 거래하는 부분도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확실히 아직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네 사랑은 어느 정도에 머물러 있느냐? (그런 사랑을 추구하고 소망하는 단계에 불과합니다.) 너의 분량에서 자신이 체험한 것으로 말해 보아라. 어느 정도에 도달했느냐? 기만이 있느냐? 원망이 있느냐? 그럼 마음속에 얻어 내려고 하는 것이 있느냐? 하나님에 대해 요구나 욕망이 있느냐? (그런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 불순물은 어떤 상황에서 나타나느냐? (하나님이 마련하신 환경이 저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거나 저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그런 패괴된 성품이 드러납니다.) 대만의 형제자매들, 너희도 이 찬양을 자주 부르느냐? 너희는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말해 볼 수 있느냐? 왜 하나님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겠느냐? (저도 이 찬양을 매우 좋아합니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완전한 사랑임을 진실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이런 기준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 참된 사랑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멀었습니다. 어떤 일에서는 하나님 말씀이 더해 주신 힘과 기도로 하나님과 협력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시련이 임하거나 드러나 저 자신에게 앞날이나 운명, 종착지가 없다고 느껴질 때는 특히 연약해집니다. 자주 이 부분에서 방해받고 있습니다.) 그럼 네가 말하는 ‘운명과 앞날’은 도대체 무엇이냐? 가리키는 것이 있느냐? 하나의 그림이냐? 아니면 상상이냐? 그것도 아니면 네가 직접 그 앞날과 운명이란 것을 보기라도 했느냐? 그것은 하나의 실체이냐? 너희 모두 생각해 보아라. 너희가 마음속으로 염려하는 앞날과 운명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구원받아 살아남는 것입니다.) 다른 형제자매들도 말해 보아라.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느냐? (그것은 자신의 불순물이 없고, 앞날과 운명의 속박을 받지 않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든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배치에 순종하면서 끝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사랑이야말로 티 없이 순수한 사랑입니다. 저 자신과 대조해 보면, 하나님을 믿어 온 이 여러 해 동안 겉으로는 얼마간 헌신도 하고 버리기도 했지만, 마음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드러날 때는 이제 구원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소극적인 상태로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으며, 종착지, 앞날, 운명을 한시도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너희가 이 찬양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고 실제 체험과도 연결을 좀 시키고 있지만,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서 언급된 매 구절의 말씀에 대해 이해하는 정도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어떤 사람은 기꺼이 원하는 것, 어떤 사람은 앞날을 내려놓으려 하는 것, 어떤 사람은 가정을 내려놓으려 하는 것,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 또 어떤 사람은 기만도, 원망도, 거역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 또 사람에게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했겠느냐? 사람은 이러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사람이 이런 사랑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겠느냐? 사람이 보기에 불가능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은 사람에게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이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했기에 이런 말씀들이 사람에게는 다 생소한 것이다. 사람은 이런 세상에 태어나 패괴된 성품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에게 이런 사랑이 있거나 혹은 이런 사랑을 갖추어 바라는 것이 없고, 무엇을 얻고자 하지도 않고, 기꺼이 바치고 고난을 감내할 수 있다면, 또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다면, 이런 사랑을 갖춘 자는 사람들이 보기에 어떤 사람이겠느냐? 완벽한 사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런 완벽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겠느냐?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체험하면서 이런 말씀과 자신을 대조하며 스스로를 다스리고 억제했고, 심지어는 끊임없이 자신을 저버리면서 고난을 받고 관념과 패역, 욕망과 요구를 내려놓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것은 어찌 된 영문이겠느냐?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한 것은 사람에게 하나의 기준을 준 것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즉시 도달해야 한다고 말씀했더냐? 사람에게 얼마 동안의 시간 내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씀했더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사람이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했느냐? 이 말씀에 그런 부분이 있느냐? 이 말씀에 그런 부분은 없다. 하나님은 단지 사람에게 하나님이 말씀하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알려 주었을 뿐이다. 사람이 그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지, 하나님을 대할 수 있을지는 말씀하지 않았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즉시,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랑에 도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런 사랑을 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너희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늘 이런 말씀을 읽는다고 조금씩 사랑이 생기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 조건은 무엇이겠느냐? 먼저,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만이 없으려면? (역시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거래가 없으려면? 이것도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간교가 없으려면? 사랑에 선택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모두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 아니더냐? 여기에는 많은 세부적인 것들이 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언급하거나 사랑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리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사랑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통해 그것을 깨달았느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조건이 있더냐? 하나님이 사람과 간격이나 거리가 있더냐? 하나님이 사람을 의심하더냐? (그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감찰하고, 알고 있다. 진실로 알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기만이 있더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완벽하게 말씀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이나 하나님의 본질이 바로 완벽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분명 완벽할 것이다. 사람은 어느 정도 체험하다 보면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람 중에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린 사람이 있더냐?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리느냐? 사람은 사랑에 대해 어떻게 말하느냐? 베풀거나 바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느냐? (맞습니다.) 그것은 간단한 말에 불과하며, 본질적인 면은 없다.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말씀은 하나님의 한 가지 측면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 어떤 측면의 본질이겠느냐? 지난번에 우리는 아주 중요한 화제를 교통했다. 그 화제는 이전에 사람이 자주 말했던 것이고, 또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 그 단어가 자주 제기되지만 사람은 그것에 대해 익숙하면서도 또 생소하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 단어가 인류의 언어에서 오긴 했지만, 인류가 그것에 대해 내리는 정의는 명확하면서도 모호하다. 그 단어는 무엇이겠느냐? (거룩함입니다.) 거룩함, 이것은 우리가 지난번에 교통했던 화제다. 지난번에는 일부만 교통했다. 지난번의 교통을 통해 누구나 다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측면의 본질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인식이 생기지 않았느냐? 어떤 인식들이 새롭다고 생각되느냐? 어떤 인식과 말씀들이 너희로 하여금 너희가 이해하고 있던 하나님의 거룩함과 내가 교통한 하나님의 거룩함이 구별되거나 다르다고 느끼게 하였느냐? 여기에 대한 인상이 있느냐?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신 대로 말씀하시는데, 거기에는 불순물이 없습니다. 이것은 거룩함에 대한 한 측면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노를 발하실 때도 거룩하시고 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저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는 진노와 긍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에 특히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유일무이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전에는 인식하지 못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화를 내는 것과 같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는 긍정적인 것이고 원칙이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로 인해 발하게 되는 것이고, 부정적인 것을 보셨기에 그런 진노를 발하는 것이며, 이는 그 어떤 피조물도 갖추지 못한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화제는 ‘거룩함’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다 조금씩은 들어 보았고, 또 조금씩은 알고 있다. 또한 많은 사람이 흔히 하나님의 공의 성품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같이 놓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거룩한 것이라고 말한다. ‘거룩함’이란 이 단어는 모두에게 생소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룩함의 함의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내는 것에서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들이냐? 하나님이 나타낸 것에서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들이냐? 이것을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지만, 네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거룩하다고 말한다면 듣기에 조금 모호하고 헷갈린다. 왜 그렇겠느냐? 너는 하나님의 성품이 공의롭다거나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 거룩하다고 말하는데, 그럼 너희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은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느냐?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다시 말해, 사람이 알고 있는 거룩함에는 하나님의 어떤 나타냄이나 소유, 어떠함들이 있느냐? 이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내가 본 것은, 사람은 늘 자주 쓰는 단어나 자주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쨌든 모두가 그렇게 말하니 습관이 되어 관용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따져 보고 알아보면, 그것의 실제 의의가 무엇이고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룩함’이란 이 단어를 예로 들자면, 사람이 말하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도대체 하나님의 어느 부분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인지, ‘거룩함’이란 이 단어가 하나님에게서 어떻게 적절하게 나타나는지(원문: 兌現)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음속이 멍해 그냥 두리뭉실하게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여길 뿐, 하나님이 어떻게 거룩한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오늘 우리가 이 화제를 교통하는 것은 바로 ‘거룩함’이란 이 단어를 하나님에게서 구현시켜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의 실제 내용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이 이 단어를 늘 함부로 쓰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을 피하고, 또한 맞는지 틀리는지, 정확한지 부정확한지도 모른 채, 아무튼 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말하니 너도나도 덩달아 입버릇처럼 쓰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런 단어를 더럽히게 되는 것을 피하게 하려는 것이다.

‘거룩함’이란 단어가 겉보기에는 이해하기 쉽지 않으냐? 사람은 기본적으로 ‘거룩함’이란 단어가 깨끗하고, 정결하고, 신성하고, 순결하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또는 방금 부른 찬양 ‘티 없이 순수한 사랑’과 같이 어떤 사람은 ‘거룩함’을 ‘사랑’과 연결시키는데, 이는 틀리지 않았다. 그것도 일부분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지닌 본질의 일부이지, 전부는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관념적으로 이 글자를 볼 때 늘 본인이 순결하거나 깨끗하다고 여기는 것, 혹은 소위 말해서 불결하지 않고 정결한 것들을 연상한다. 일례로 연꽃이 정결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진흙 속에서 났지만 물들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은 ‘거룩함’이란 단어를 연꽃과 연결시킨다. 또 지어낸 사랑 이야기나 꾸며 낸 위대한 인물들을 거룩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성경이나 영적 서적에 기록된 성도나 사도와 같은 인물, 또는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을 따랐던 자들의 영적 체험을 거룩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는 모두 사람의 상상이자 관념이다. 사람은 왜 그런 관념을 갖고 있겠느냐?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 패괴 성품으로 살고 사악하고 더러운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접하고, 체험한 것이 전부 사탄의 사악함과 사탄의 패괴,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 간의 암투와 싸움뿐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역하고, 말씀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나타내도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본질을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이는 참된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사람은 더러움 속에서, 패괴 속에서,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으므로 빛을 보지 못한다. 또한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긍정적인 것인지 알지 못하고, 진리가 무엇인지는 더더욱 모른다. 그래서 거룩함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패괴된 인류 가운데 거룩한 것이나 거룩한 사람이 존재하겠느냐? 오직 하나님의 본질만이 거룩하므로 그런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난번에 하나님의 거룩함의 본질에 대해 일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일부 내용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깨닫는 데 어느 정도 깨우침을 줄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부족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함을 완전히 알게 하거나 하나님의 거룩함이 유일무이한 것임을 깨닫게 하기에는 부족하다. 더욱이 거룩함의 참뜻이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나타난다는 내용을 깨닫게 하기에도 역부족이다. 따라서 이 부분의 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할 필요가 있겠다. 지난번에 우리는 세 가지를 나누었다. 이제 네 번째 주제로 넘어갈 차례이다. 성경을 읽어 보자.

사탄의 시험

마 4:1~4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는 마귀가 첫 번째 시험에서 예수에게 한 말이다. 어떤 내용이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이 말은 간단하지만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는 말이 아니냐?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했다. 그럼 마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몰랐겠느냐? 그가 그리스도임을 몰랐겠느냐?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만일’이라고 했겠느냐? (하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시험한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마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게 잘 알고 있었음에도 마귀는 순종하거나 경배하였느냐? (아닙니다.) 마귀는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이냐? 그런 방식, 그런 말로 예수를 격노하게 하여 꼬임에 빠지도록 유인하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가 자신의 뜻대로 행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사탄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이것이 사탄의 본성 아니겠느냐? 사탄의 본성은 어떠하냐? (교활하고 사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하나님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겠느냐? 사탄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고는 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말했다. 이것은 사탄의 음흉한 속셈 아니겠느냐? 사탄은 무엇을 하려고 했느냐? 사탄의 의도는 아주 분명하다. 즉, 그런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와 신분을 부인하려 한 것이다. 사탄의 그 말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니 그 사역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의미가 아니겠느냐? 사탄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공격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허물거나 망치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악독함이다. 사탄의 악독함은 본성에서 자연스레 나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성육신 하나님임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짓, 그러니까 하나님을 뒤쫓고, 계속 공격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망치는 짓을 하는 것이다.

다시 사탄이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한 말을 분석해 보자. 돌을 떡이 되게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이냐? 있는 음식을 먹으면 될 것을 왜 굳이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하는 것이냐? 이는 무의미한 일 아니더냐? 그때 예수가 금식을 하고 있긴 했으나 설마 먹을 것이 없었겠느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탄이 한 그 말이 얼마나 황당한지 알 수 있다. 또 사탄이 아주 음험하고 악독하지만 한편으로는 황당하고 터무니없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사탄이 한 일들을 통해 사탄의 악독한 본성과 하나님의 사역을 망치는 짓들을 보고 있자면 너무나 가증스럽고 화가 난다. 그런데 반대로 사탄이 한 그런 일과 말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몹시 유치하고 황당하지 않으냐? 이는 사탄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런 본성이 있기에 그런 짓을 한 것이다. 지금 사람이 그 말을 보면 황당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다. 그런데 사탄은 그런 말을 꺼냈다. 그러니 사탄을 무지하고 그릇되다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사탄의 사악함은 어디서나 시시각각 드러난다. 예수는 어떻게 대답하였느냐?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강력하지 않으냐? (강력합니다.) 이 말씀이 강력하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이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이 살려면 떡에만 의지해야 하느냐? 예수는 사십 주야를 금식했다. 그가 아사하였더냐? 그가 아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다가와 그런 말을 하며, “돌을 떡으로 만들면 먹을 것이 생기지 않느냐? 그럼 금식을 할 필요도, 굶주릴 필요도 없지 않겠느냐?”라는 식으로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다. 하지만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그 말은, 사람이 비록 육으로 살고 있으나 사람의 육을 살게 하고 숨 쉬게 하는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진리로, 한편으로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어 하나님을 진리로, 사람이 기댈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하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말씀에 그의 실제적인 면도 담겨 있지 않으냐? 예수는 사십 주야를 금식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더냐? 살아 있지 않았더냐? 이것이 실례(實例) 아니겠느냐? 예수가 사십 주야를 금식했음에도 살아 있었다는 것이 이 말씀의 강력한 증거이다. 간단한 말씀이긴 하나 예수는 사탄이 그를 시험할 때 그제서야 이 말씀을 한 것이냐, 아니면 원래부터 이 말씀을 갖고 있었던 것이냐? 다시 말해, 하나님은 곧 진리이고 생명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은 후천적으로 생겨난 것이냐? 후천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본질이 진리이자 생명이다. 어떤 일이 임해도 그에게서 발현되는 것은 다 진리이다. 그가 말한 내용이 길든 짧든 그 진리, 그 말씀은 사람을 살게 하고,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 또한 사람이 그 말씀에서 진리를 얻게 하고, 인생의 길을 알게 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한다. 즉, 하나님이 한 이 말씀의 근원은 긍정적인 것이다. 그럼 긍정적인 것을 거룩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탄이 한 말은 사탄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다. 사탄은 언제 어디서나 사악하고 악독한 본성을 드러낸다. 이는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아니더냐? 사탄에게 그렇게 하라고 지시한 자가 있더냐? 도와준 자가 있더냐? 협박한 자가 있더냐? 없다.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나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사악한 본성이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든 사탄은 그 뒤를 쫓는다. 사탄이 한 행동, 말의 본질과 본색이 바로 사탄의 본질, 즉 사악하고 악독한 본질이다. 사탄은 또 어떤 말을 하였느냐? 다음 내용을 읽어 보도록 하자.

마 4:5~7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우선 사탄이 한 말을 살펴보자. 사탄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라고 했고, 또한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는 성경 말을 인용하였다. 사탄의 이 말이 어떻게 들리느냐? 굉장히 유치하지 않으냐? 유치하고 황당하며 역겹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사탄은 항상 어리석은 짓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스로 아주 똑똑하다고 여기며 늘 성경의 말, 심지어 하나님이 했던 말씀까지 인용한다. 이런 말을 통해 역으로 하나님을 공격하고 시험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 계획을 망치려고 하는 것이다. 사탄이 한 말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사탄의 사악한 속셈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하는 짓은 언제나 사람을 시험하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사람을 시험하고 유인하고 유혹하는 방식으로 빙 돌려 말한다. 사탄은 평범한 사람을 시험하듯이 하나님을 시험했다. 하나님도 사람처럼 우매하고 어리석으며 사물의 본모습을 잘 분별하지 못한다고, 또한 그것의 본질, 교활함과 음흉한 속셈을 간파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사탄의 어리석은 면 아니겠느냐? 또한, 사탄은 당당하게 성경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말이 이치에 맞고 근거가 있다고 여겼다. ‘당신이 무슨 빈틈을 찾을 수 있겠어?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사탄의 터무니없고 유치한 점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증거하며 복음을 전할 때, 불신자들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지 않더냐? 너희도 비슷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지 않더냐?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떠하더냐? 역겹지 않더냐? (역겹습니다.) 역겨운 마음이 들면서 혐오감과 증오심이 생기지 않더냐? 그럴 때면 사탄, 그리고 사탄에 의해 생성된 패괴 성품이 사악한 것임을 깨닫게 되지 않더냐? 그런 느낌이 들 때, ‘사탄의 말은 공격성과 유인책을 담고 있어 참으로 황당하고, 가소로우며, 유치하고 역겹구나.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를 보면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말씀하거나 사역하신 적이 없어. 그런 방식은 한 번도 없었다고.’라는 생각이 들지 않더냐? 물론 그때도 사람은 그런 느낌만 들 뿐 하나님의 거룩함을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의 현재 분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진리야. 우리에게 이로우니 받아들여야 해.’라는 정도만 느낄 뿐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는 상관하지 않고 모두가 입을 모아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하나님이 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리 자체가 곧 거룩함이요, 하나님이 곧 거룩함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럼 방금 사탄이 했던 말에 예수는 어떻게 대답했느냐? 예수는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라고 했다. 예수의 이 말씀에 진리가 담겨 있지 않으냐? 틀림없이 진리가 담겨 있다. 겉보기에는 명령의 말씀, 아주 간단한 말씀 같아도 사람과 사탄은 이를 자주 거스른다. 그래서 예수는 사탄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라고 말씀한 것이다. 사탄은 항상 그렇게, 그칠 줄 모르고 하나님을 시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사탄의 본성과 본질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경외심도 없다. 사탄은 하나님의 곁에서 하나님을 보았지만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시험한다. 이 때문에 예수는 사탄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라고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항상 한 이 말씀이 오늘날에도 유효하지 않으냐? (유효합니다. 저희도 자주 하나님을 시험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도 자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겠느냐? 사람에게 사탄의 패괴 성품이 가득하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위에서 사탄이 했던 말들을 사람도 자주 하지 않더냐? 어떤 상황에서 말하느냐? 사람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한다. 이는 사람의 성품이 사탄의 패괴 성품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증거이다. 예수는 아주 간단한 말씀을 했지만, 이는 진리를 대변하는 것이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사탄과 언쟁을 벌이며 한 말씀이 있더냐? 사탄과 맞붙어 싸우면서 한 말씀이 있더냐? (없습니다.) 그는 사탄의 시험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역겹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느냐? 혐오스럽고 역겹다고 느끼면서도 그는 사탄과 언쟁을 벌이지 않았다. 사탄에게 큰 이치를 설명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왜 그랬겠느냐? (사탄은 줄곧 그렇게 해 왔고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치로 깨우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진리임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영원히 알지도, 인정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사탄의 본성이다. 사탄의 본성에 혐오스러운 점이 또 하나 있는데 무엇이겠느냐? 사탄은 예수를 시험해서 성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일단 시도해 보려고 했다. 징벌을 받을지라도 그렇게 행동하며, 하나님을 시험해서 얻는 것이 없을지라도 그런 짓을 계속하고, 하나님께 끝까지 맞섰다. 이는 어떤 본성이겠느냐? 사악함 아니겠느냐? 하나님 얘기만 나오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본 적이 있느냐? 그들이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느냐?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다. 하나님 역시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없고, 그를 건드린 적도 없다. 그런데 그들은 왜 화를 내는 것이겠느냐? 그런 사람을 사악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세상의 풍조며,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것이며, 스타를 추종하는 것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 않으면서 ‘하나님’이란 단어만 언급해도 성을 내고,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만 언급해도 성을 내니, 이것이 사악한 본성 아니겠느냐? 이것으로 사람의 사악한 본성이 충분히 증명된다. 너희는 진리를 언급하거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시련과 심판의 말씀을 들을 때 즉시 반감이나 혐오감이 들고 듣기 싫은 경우가 있느냐? 너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모두가 하나님은 진리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어떤 건 진리가 아니라 사람을 꾸짖는 말씀이잖아!’ 심지어 ‘맨날 이런 이야기만 하시지. 입만 열면 시련이요, 심판이요 하는 것들뿐. 도대체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 거지? 언제쯤이면 좋은 종착지에 이를 수 있는 거냐고!’라며 반감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원인 모를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는 어떤 본성이겠느냐? (사악한 본성입니다.) 이는 바로 사탄의 사악한 본성으로 초래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사악한 본성이나 인류의 패괴 성품에 대해 사람과 언쟁을 벌이거나 따진 적이 없고, 또는 사람의 우매한 행동을 크게 문제 삼은 적도 없다. 하나님에게서는 인류가 특정 사물에 대해 갖는 관점 같은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인류의 관점이나 지식, 과학, 철학, 상상으로 일을 처리하는 모습은 더더욱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하나님이 행하고 나타낸 모든 것은 진리와 관련이 있다. 즉, 하나님이 한 모든 말씀과 모든 일은 다 진리와 관계가 있다. 그 진리는 터무니없이 상상해 낸 것이 아니다. 그러한 진리와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과 생명으로 인해 발현된 것이다. 그런 말씀과 하나님이 행한 일들의 본질이 진리이므로 하나님의 본질은 거룩하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모든 행사나 말씀은 사람에게 생기와 빛을 가져다준다. 그리하여 사람에게 긍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의 실제를 보게 하고 길을 알려 줘 바른길을 가게 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에 의해 결정된다. 너희도 이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 계속해서 성경 구절을 읽어 보자.

마 4:8~11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사탄 마귀는 앞에서의 두 가지 방법이 통하지 않자 또 다른 방법을 택했다. 바로 예수에게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자신을 경배하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마귀의 어떤 본모습을 알 수 있느냐? 사탄 마귀는 참으로 뻔뻔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뻔뻔하냐?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께 역으로 만물을 보여 주며 “만국의 이 부귀영화를 보라. 당신이 내게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라고 말하다니,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니냐? 뻔뻔하지 않으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였다고는 하나 그 모든 것을 누리더냐? 하나님은 만물을 인류에게 주었다. 사탄은 이를 삼켜 버릴 속셈을 품고 있었고, 그다음 하나님께 보여 주며 “내게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탄의 추악한 몰골 아니겠느냐! 사탄은 ‘수치’라는 두 글자의 의미를 모른다. 여기서 또 사탄의 사악함을 볼 수 있다. 사탄은 수치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사탄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며, 주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만물은 하나님의 것으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며 더욱이 사탄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마귀 사탄은 뻔뻔하게 하나님께 이 만물을 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사탄이 또 한 번 어이없고 낯 두꺼운 일을 저지른 것 아니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증오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그렇지 않으냐? 하지만 사탄이 어떤 짓을 하든 예수가 그 꼬임에 넘어갔더냐? 예수는 어떻게 말씀했느냐?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실제 의미가 담겨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실제 의미가 있겠느냐? 사탄의 말에서는 사탄의 사악함과 뻔뻔함을 알 수 있다. 그럼 인류가 사탄을 경배한다면 어떤 결말을 맞겠느냐? 만국의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사람도 사탄처럼 뻔뻔하고 가소로워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탄과 똑같이 될 것이다. 그래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고 한 예수의 말씀은 모든 이에게 매우 중요하다. 즉 주님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섬기거나 사탄 마귀를 경배한다면, 너는 사탄과 한패가 되는 것이며, 사탄과 똑같이 뻔뻔하고 사악해질 것이고, 사탄처럼 하나님을 시험하고 공격하게 될 것이다. 그럼 네 결말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께 혐오받아 죽임을 당하거나 멸망되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몇 번의 시험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을 때, 사탄은 계속해서 시험했더냐? 더 이상 시험하지 않고 떠나갔다. 이로써 무엇이 증명되었느냐? 사탄의 사악한 본성, 악독함, 그릇되고 황당무계한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단 세 마디로 사탄을 물리쳤다. 그리하여 사탄은 수치를 당하고 풀이 죽어 도망갔으며, 더 이상 예수를 시험하려 들지 않았다. 예수는 이미 사탄의 그 시험을 이겼으므로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사역, 담당한 사역을 순조롭게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예수가 한 이러한 말씀과 일들을 오늘날로 가져와도 모든 이에게 실질적인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실질적인 의미가 있겠느냐? 사탄을 물리치는 것이 쉬운 일이냐? 그러려면 사람이 사탄의 사악한 본성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사탄의 시험을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사탄의 시험에 들었을 때, 사탄의 사악한 본성을 간파할 수 있다면 사탄을 이길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사탄의 그릇되고 황당무계한 면을 알게 되면 사탄의 편에 서서 사탄과 같이 하나님을 공격할 수 있겠느냐? 너 자신에게서 사탄의 뻔뻔함과 악독함이 발로될 때, 이를 확실히 깨닫고 의식한다면 계속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공격하고 시험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느냐? (사탄을 저버리고 내칠 것입니다.) 그것을 쉽게 할 수 있겠느냐? 쉽지 않다. 이를 위해 사람은 항상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을 성찰해야 하며,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과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사탄의 미혹과 통제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

사탄이 한 이 모든 말을 통해 사탄의 본질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정리해 보자. 우선, 사탄의 본질은 전반적으로 사악하며 하나님의 거룩함과 대립된다. 왜 사탄의 본질이 사악하다고 하겠느냐? 이는 사탄이 사람에게 한 일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근거해 살펴보아야 한다. 사탄은 사람을 패괴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통제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살면서 일을 하고, 사탄이 패괴시킨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사탄에게 점령되고 동화되어 사탄의 패괴 성품, 즉 사탄의 본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탄의 말과 행위에서 교만함을 보지 못했느냐? 사탄의 간사함과 악독함을 보지 못했느냐? 사탄의 교만함은 주로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느냐?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지위를 차지하려고 하지 않더냐?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사역과 지위를 없애고 자신이 하나님의 지위를 차지하려 들며,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고, 옹호하고, 경배하게 하려고 한다. 이것이 사탄의 교만한 본성이다.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킬 때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직접 알려 주더냐? 사탄이 하나님을 시험할 때 “당신을 시험하고 공격하겠습니다.”라고 직접 이야기하더냐? 사탄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럼 어떤 식으로 하느냐? 유인하고, 시험하고, 공격하고, 함정을 파 놓으며, 심지어 성경 말까지 인용해 다양한 방식의 말과 행위로 음흉한 속셈과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사탄이 이렇게 한 후, 사람에게서 발로되는 것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사람도 교만해지지 않더냐? 수천 년 동안 사탄에게 패괴되면서 사람 역시 교만하고, 간사하고, 악독하게 변했고, 이치로 깨우칠 수 없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사탄의 본성이 초래한 결과다. 사탄은 사악한 본성을 가졌기에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도 그 사악한 본성이고, 그 사악한 패괴 성품이다. 그래서 사람은 모두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게 되었으며, 사탄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공격하고, 시험하고, 나아가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한 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게 되었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다섯 가지 방식

하나님의 거룩함은 매우 익숙한 화제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추상적이라고 느끼거나 내용이 좀 심오하여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래도 서두를 것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겠다. 한 사람이 행한 일과 일의 결과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의 본질이 어떤지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자. 다시 말하자면, 사탄의 본질은 사악하다. 그럼 사탄이 인류에게 한 일은 어떠하냐? 끝없이 패괴시키고 또 패괴시킨다…. 사탄은 사악하므로 그것이 패괴시킨 사람 또한 분명 사악할 것이다. “사탄은 사악하지만, 사탄이 패괴시킨 사람 중에는 거룩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웃음을 살 얘기가 아니겠느냐?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불가능합니다.) 사탄은 사악한 존재다. 여기에는 본질적인 측면도 있고 실질적인 측면도 있다. 이는 빈말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탄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실과 실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다. 이 부분의 실제를 교통하면 상처를 받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여기에 악의는 없다. 어쩌면 너희는 오늘 이 말을 듣고 언짢을 수도 있다. 그러나 머지않은 미래에 깨닫게 될 때면 스스로를 증오하게 될 것이며, 오늘 이 말이 너희에게 굉장히 유익하고 가치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탄의 본질은 사악하므로 사탄이 한 일 역시 사악한 결과를 낳으며, 적어도 사탄의 사악함과 관계가 있게 된다. 이렇게 보아도 되겠느냐? (네.) 사탄은 어떻게 사람을 패괴시키느냐? 이 세상에서, 이 인류 가운데서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사탄의 사악함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느냐?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너희는 생각해 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럼 내가 너희에게 몇 가지 요점을 알려 주겠다. 사탄이 제기한 진화론은 모두가 알고 있지 않더냐? 진화론은 사람이 배우는 지식의 일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사탄은 가장 먼저 지식으로 사람을 패괴시키고, 자기의 방식으로 사람에게 지식을 가르친다. 그런 다음, 과학을 이용하여 사람을 패괴시키고, 지식, 과학, 비밀, 또는 사람이 알아내고자 하는 일들에 흥미를 갖게 한다. 그러고는 이어서 전통문화, 미신, 사회 풍조를 통해 사람을 패괴시킨다. 이것들은 모든 사람이 살면서 접할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사람의 주변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 보고, 듣고, 접하고, 경험하는 모든 것이 이것들과 관계가 있다. 사람은 모두 이것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망가려고 해도 도망갈 수 없고,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은 이것들에 속절없이 영향받고, 동화되고, 지배받고, 결박되어 벗어날 힘이 없다.

1. 사탄은 어떻게 지식으로 사람을 패괴시키는가

우선, 지식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긍정적인 것 아니더냐? 적어도 ‘지식’이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사탄이 지식으로 사람을 패괴시킨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진화론은 지식의 일부 아니더냐? 뉴턴의 법칙도 지식의 일부 아니더냐? 지구 인력 역시 지식의 일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그럼 지식이 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로 포함되겠느냐?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지식에 진리가 조금이라도 담겨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지식의 본질은 무엇이냐? 사람은 무엇에 기초하여 이 모든 지식을 배우느냐? 모두 진화론을 기초로 배우는 것 아니더냐? 사람이 탐구하고 정리한 지식은 모두 무신론에 기반한 것 아니더냐? 이 모든 지식이 하나님과 관련이 있느냐?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관련이 있느냐? 진리와 관련이 있느냐?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어떻게 지식으로 사람을 패괴시키겠느냐? 나는 방금 이런 지식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도, 진리와도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진리와 상관은 없지만 지식이 사람을 패괴시킨 것도 아니잖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지식은 너에게, 행복은 사람의 두 손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더냐? 사람의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가르치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그런 말을 어떻게 보느냐? (허튼소리입니다.) 적합한 표현이다. 모두 허튼소리이다! 지식이란 것은 굉장히 복잡하다. 만약 단순히 어느 지식은 그저 지식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한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 분야의 지식을 습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지식을 배울 때,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고, 다스리고, 관리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지식 안에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탐구하고, 답을 찾는 것에 그칠 뿐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연구만 한다면 영원히 진정한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저 지식을 통해 생계 수단과 일자리를 마련하고, 돈을 벌어 그럭저럭 밥벌이를 할 뿐, 지식은 결코 너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고 악을 멀리하게 하지 못한다. 사람은 배운 지식이 많을수록 하나님을 더 거역하고, 연구하고, 시험하려 들며,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이 더 커진다. 지식이 사람에게 어떤 것을 가르쳐 주느냐? 모두 사탄의 철학이다. 사탄이 패괴된 인류 가운데서 퍼뜨린 생존 철학과 생존 법칙이 진리와 관계가 있겠느냐? 진리와 관계가 있기는커녕 오히려 진리에 위배된다. 사람은 흔히 “목숨은 운동에 달렸다”,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라고 말한다. 이는 무슨 말이냐? 전부 궤변이자 듣기만 해도 역겨운 말이다. 사탄은 소위 말하는 지식에 자신의 많은 처세 철학과 사상을 담아 사람에게 주입한다. 그와 동시에 사람이 그러한 사상, 철학, 관점을 근거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하나님이 만유와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은 지식을 배울수록, 또한 지식을 습득할수록 하나님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사탄이 인류에게 일부 사상, 관점, 관념들을 주입했기 때문이다. 사탄이 이런 독소들을 사람의 내면에 주입한 후, 사람은 사탄에게 미혹되고 패괴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너희들이 말해 보아라, 현재 인류는 무엇으로 살고 있느냐? 사탄이 주입한 이런 지식과 사상에 기대어 사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이런 지식과 사상 속에 숨겨진 것은 사탄의 철학과 사탄 독소가 아니냐? 인류는 바로 사탄 철학과 사탄 독소에 기대어 산다. 그럼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핵심은 어디에 있느냐? 바로 인류로 하여금 사탄처럼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고 하나님과 대립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목적이자 방식이다.

지식 얘기가 나왔으니 가장 간단한 것부터 이야기해 보자. 말과 글의 문법이나 글자가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겠느냐? 단어가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겠느냐? 단어는 사람을 패괴시킬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이 말을 하기 위한 도구이자 하나님과 소통하는 수단이다. 게다가 오늘날 하나님은 언어와 말씀을 통해 사람과 소통하므로 이는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다. 1+1=2, 2×2=4는 지식이 아니더냐? 그런데 이런 지식이 너를 패괴시킬 수 있겠느냐? 이는 상식, 규칙일 뿐 사람을 패괴시킬 수 없다. 어떤 지식이 사람을 패괴시키느냐? 사탄이 지식에 가미한 관점과 사상이다. 사탄은 지식을 통해 사람에게 이러한 관점과 사상을 주입한다. 한 편의 글을 예로 들어 보면, 그 모든 글자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는 것은 저자가 글을 쓸 때의 관점과 속셈, 그리고 그의 사상에 대한 내용이다. 이는 영혼과 관련된 것이므로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네가 드라마를 본다고 하자. 드라마의 어떤 부분이 사람의 관점을 변화시키겠느냐? 배우가 하는 말, 그 어휘들이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어떤 것들이 사람을 패괴시키느냐? 바로 그 드라마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와 내용이다. 이는 감독의 관점을 대변하며, 이러한 관점에 담긴 메시지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좌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이제 사탄이 지식을 이용해 사람을 패괴시킨다고 이야기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으니 그릇되게 이해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럼 소설이나 글을 읽을 때 그 글에 담긴 사상이 사람을 패괴시키는지, 아니면 사람에게 유익한지 분별할 수 있겠느냐? (조금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단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천천히 배우고 경험해야 한다. 사람이 어떤 지식을 연구하거나 학문을 배운다고 생각해 보자. 그 학문에 긍정적인 점이 있을 수도 있다. 그 학문에 대한 상식과 사람이 피해야 할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전기를 예로 들어 보자. ‘전기’는 지식 아니더냐? 전기에 감전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무지한 것 아니겠느냐? 그러나 전기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 후에는 함부로 전기를 만지지 않고 이를 활용할 수도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긍정적인 점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람을 패괴시키는 지식이 어떤 것들인지 이제 확실히 이해하겠느냐? 이해했으면 더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은 매우 많아서 너희는 스스로 천천히 분별해 나가야 한다.

2. 사탄은 어떻게 과학으로 사람을 패괴시키는가

과학이란 무엇이냐? 모두가 마음속으로 과학이 아주 대단하고 심오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과학이라고 하면 그것은 과학 연구원이나 전문적인 연구 인력이나 접하는 것이지 일반인은 이해할 수도 없고,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관계가 없겠느냐? (있습니다.) 사탄이 어떻게 과학으로 사람을 패괴시키겠느냐? 멀리 갈 필요 없이 요즘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을 얘기해 보자. ‘유전자’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지 않으냐?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전자는 과학을 통해 발견한 것 아니더냐? 그럼 유전자라는 것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가져다주었느냐? 사람의 몸이 굉장히 신비롭다고 느끼게 하지 않았느냐? 사람이 이 화제를 접하면, 특히 호기심이 많은 사람의 경우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하지 않겠느냐?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에 몰두할 것이다. 이 분야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한 나머지 시간만 나면 온갖 서적을 뒤지고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를 검색할 것이다. 과학이란 무엇이냐? 과학이란 사실 사람이 호기심을 느끼는 일, 사람이 모르는 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주지 않은 일, 사람이 탐구하는 비밀에 대한 상상이나 학설이다. 과학의 범위는 어떻게 되느냐? 매우 광범위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흥미를 느끼는 모든 것이 연구 대상에 포함되며, 세부적인 내용과 법칙을 연구한 후 보기에 그럴싸한 결론을 낸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이 이렇게 많다니 과학자들은 정말 대단해. 지식을 얼마나 쌓아야 이런 것까지 알 수 있는 걸까?’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우러러본다. 그렇지 않더냐!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더냐? 만물을 연구하고, 흥미를 느끼는 신비로운 현상을 연구하고 싶어 하지 않더냐? 그럼 궁극적인 결과는 무엇이냐?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고, 경험에 근거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사람도 있다. 또 역사와 배경을 연구하여 결론을 얻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럼 과학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과학은 사람에게 물질세계의 존재만 보게 하고 호기심만 충족시켜 줄 뿐,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법칙을 일깨워 주지는 못한다. 사람은 과학에서 해답을 찾은 것 같지만, 이 해답은 사람을 미혹하고 일시적인 만족감을 준다. 이러한 만족감은 사람의 마음을 물질세계에 가둬 버린다. 사람은 과학을 통해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하며 어떤 일이든 과학적인 관점에서 증명하고 받아들인다. 과학이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고 차지하면서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을 알아 가거나 경배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됐고,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믿지 않게 됐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답을 얻어야 하는 것 아니더냐? 과학을 믿는 사람일수록 그릇됐다. 그런 사람은 어떤 일이든 과학이나 연구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님을 찾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도 않는다. 여러 해 하나님을 믿은 사람 중 많은 이들이 어떤 문제가 닥치든 컴퓨터에서 자료를 조사하고 답을 찾는다. 그들은 과학 지식만 믿는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진리의 관점에서 인류의 모든 문제를 바라본 적이 없다. 어떤 문제가 닥치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찾아 해결하지 않는다. 많은 일에 있어 지식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과학이 최종 답안이라고 믿는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조금도 없다. 그는 불신파로, 수많은 고급 지식분자나 과학자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은 관점을 갖고 있다. 그들은 늘 과학을 연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연구하려고 한다. 일례로, 많은 종교 전문가가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던 산에 가서 방주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드러난 방주의 현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으므로 이야기와 역사(歷史)만 믿게 된다. 이것이 과학과 물질세계를 연구한 결과이다. 물질을 연구하면, 연구 대상이 미생물이든 천문 지리이든, 하나님이 존재하고 만유를 주재한다는 결과는 절대로 얻을 수 없다. 그럼 과학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느냐?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을 연구하게 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주재를 더욱 의심하여 하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게 하지 않았느냐? 결과는 바로 이러하다. 그럼 사탄은 과학으로 사람을 패괴시켜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냐? 바로 과학적으로 입증된 결과를 가지고 사람을 미혹하고 마비시키고 이런 불확실한 답으로 사람의 마음을 점유하여 사람이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를 찾지도, 믿지도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기에 과학 역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3. 사탄은 어떻게 전통문화로 사람을 패괴시키는가

전통문화에 포함되는 것이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전통문화란 무엇을 말하느냐? 어떤 사람은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한 부분이다. 가족, 민족, 나아가 인류가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는 생활 방식이나 규칙, 논리, 규례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 주입되어 사람은 그것을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 규례, 생명으로 간주하며 지켜 나간다. 심지어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것이므로 영원히 바꾸거나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이외에도 공자나 맹자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 중국의 도교나 유교가 주는 가르침 등이 모든 사람의 뼛속에 박혀 있다. 그렇지 않으냐? 전통문화에는 또 어떤 것들이 포함되느냐? 사람이 기념하는 명절들도 포함되지 않느냐? 예를 들어 설날, 정월 대보름, 청명, 단오, 백중, 추석과 같은 명절들이 있으며, 심지어 어떤 집안에는 집안 어른의 생신, 생후 1개월 축하 잔치, 백일잔치 등등 여러 가지 기념일이 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전통 명절에 속한다. 전통 명절의 근간이 전통문화 아니더냐? 전통문화의 핵심은 무엇이냐? 거기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내용이 있느냐? 진리를 실천하게 하는 내용이 있느냐? 하나님을 위해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하는 명절이 하나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모든 명절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현대인은 명절을 먹고 놀며 즐기는 날로 생각한다. 이러한 전통문화는 어디에서 기원했느냐?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느냐? 사탄에게서 비롯되었다. 사탄이 이러한 전통문화를 통해 몰래 사람에게 주입하는 것들이 있다. 무엇을 주입하겠느냐? 조상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이 그중 하나 아니더냐? 일례로 청명절에는 성묘를 가서 제사를 지내며 조상을 기린다. 단오절에는 나라 사랑의 정신을 되새긴다. 음력 8월 15일은 어떠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가족들이 어떤 배경에서 모이느냐? 왜 모이느냐? 정을 나누고 마음을 교감하기 위함이다. 물론 섣달 그믐날, 정월 대보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런 다양한 설은 모두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철학과 사상이다. 사탄은 사람에게 이런 것을 주입하여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게 하고, 또 사람이 조상이나 사탄을 위해 제사를 지내게 하며, 육의 쾌락을 추구하게 만든다. 여러 명절을 지내면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도 모르게 사탄의 사상이나 관점이 심어지며, 40~50세 또는 그 이상 나이를 먹으면 이런 사상과 관점이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또한 사람은 그 관점이 맞는지 틀린지 전혀 분별하지 못한 채 다음 세대에게 이를 있는 그대로 남김없이 전수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전통문화와 명절은 어떻게 사람을 패괴시키느냐? 이것을 알고 있느냐? (규례로 사람을 속박하고 옭아매어 하나님을 찾을 시간과 힘을 앗아 갑니다.) 그것도 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설날에 다른 사람은 모두 설을 쇠는데 너 혼자 쇠지 않는다면 마음이 씁쓸하지 않겠느냐? 꺼림칙한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 ‘올해 설도 제대로 못 쇠었는데, 한 해 동안 일이 안 풀리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겠느냐? 불안하거나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겠느냐? 심지어 몇 년 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았더니 조상이 꿈에 나타나 돈을 요구했다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겠느냐? ‘세상을 뜨신 분이 돈이 부족하다니 안되셨네. 종이돈이라도 태워 드려야지 안 되겠어! 그러지 않으면 산 사람이 무슨 해를 입을지 몰라.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이 꼬일 수도 있다고!’라며 마음속에 늘 이런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걱정은 누가 가져다준 것이겠느냐? 바로 사탄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이다. 이것이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식 아니더냐? 사탄은 온갖 방식과 구실을 동원하여 너를 지배하고, 위협하고, 속박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사탄에게 굴복하고 순종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식이다. 사람은 연약할 때 종종 귀신에 홀린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어리석은 일을 하곤 한다. 즉, 사탄에게 사로잡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일을 하고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식이다. 심지어 지금도 많은 사람이 뿌리 깊이 박힌 전통문화에 연연하며 놓지 못하고 있다. 특히 사람은 연약해져 있거나 소극적일 때, 명절을 보내면서 사탄과 상봉도 하고, 다시금 사탄을 만족시키면서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를 얻고자 한다. 이런 전통문화의 뒤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겠느냐? 사탄의 검은 마수가 조종하고 있지 않겠느냐? 사탄이 사악한 본성으로 휘어잡고 지배하고 있지 않겠느냐? 사탄이 이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전통문화 속에서 살면서 전통 명절을 지내는 것은 사탄에게 농락당하고 패괴되는 것이라고, 또한 그것은 스스로가 원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 모두가 이를 알고 인정하는구나.

4. 사탄은 어떻게 미신으로 사람을 패괴시키는가

‘미신’이란 단어가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미신은 전통문화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오늘은 상통하는 부분이 아닌, 사람들이 점을 보고 향을 태우며 불상 앞에서 절을 하는, 흔히 접할 수 있는 미신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점을 보는 사람도 있고, 향을 태우며 불상 앞에서 절을 하는 사람도 있으며, 사주나 관상을 보는 사람도 있다. 너희 중에 사주나 관상을 본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대부분의 사람이 굉장히 흥미를 느끼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점을 보는 것이 사람에게 어떤 도움이 되느냐? 사람의 어떤 마음을 충족시켜 주느냐? (호기심입니다.) 그저 호기심뿐이냐? 꼭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점을 보는 목적이 무엇이냐? 왜 점을 보느냐?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서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서, 어떤 사람은 화복이 궁금해서 점을 본다. 결혼이나 내년 운세가 궁금해서 점을 보는 사람도 있고, 자신과 자녀의 미래를 알고 싶어서 점을 보는 사람도 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는지 궁금해서 점쟁이에게 방향을 제시해 달라고 한다. 이것이 단순히 호기심 차원에서 점을 보는 것이냐? 사람이 점을 보는 것은 모두 자기 미래의 실질적인 이득을 위해서다. 점을 보는 것이 자신의 운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 그런 것들이 소용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왜 소용없느냐? 조금이라도 알면 좋은 일 아니겠느냐? 미래에 불행이 닥쳤을 때 모르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또 미리 안다면 불행을 피할 수 있지 않겠느냐? 잘되면 방향을 바로잡아 줄 수도 있고, 다음 해에 행운을 불러와 사업으로 큰돈을 벌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 이런 것들이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이러한 것들이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우리와 상관이 없다. 오늘 우리가 나눌 것은 이런 화제가 아니다. 사탄은 어떻게 미신으로 사람을 패괴시키느냐? 사람은 모두 앞으로의 운명을 알고 싶어한다. 사탄은 사람의 호기심을 이용하여 사람을 유혹한다. 사람이 점, 사주, 관상을 보는 것은 모두 미래의 운세와 앞으로 가게 될 길을 알기 위해서다. 그런데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미래와 운명은 결국 누구의 손에 의해 결정되더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하지만 사탄은 이런 방식으로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더냐? 사탄은 사주나 점을 보는 방식으로 사람의 향후 운세를 알고 있다면서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알고 관장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 기회를 틈타,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지배하여 미신을 받아들이고 따르게 하는 것이다. 네가 사주를 보러 갔다고 가정해 보자. 점쟁이가 눈을 감고 지난 몇십 년 동안의 일을 정확하게 맞춘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정말 용하네! 다른 사람한테 옛날 일을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참 대단해!’ 사탄이 너의 과거를 아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아니겠느냐! 하나님은 오늘날까지 너를 이끌어 왔고, 사탄 또한 오늘날까지 너를 쫓아다니며 패괴시켜 왔다. 몇십 년 동안 너에게 발생했던 일을 알기란 사탄에게는 식은 죽 먹기이다. 점쟁이가 한 말이 모두 정확하다고 느낄 때 너는 마음을 그에게 내주게 되지 않겠느냐? 너의 앞날과 운세를 모두 그가 결정하게끔 맡기지 않겠느냐? 너는 갑자기 그에 대한 숭배나 존경의 마음이 생길 것이다. 심지어는 혼이 쏙 나가서 곧바로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년에는 무엇을 피해야 하죠?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점쟁이는 가지 말아야 할 곳, 피해야 할 일, 입지 말아야 할 옷 색깔, 많이 가면 안 되는 장소, 많이 하면 좋은 일 등등을 늘어놓는다. 너는 그 말을 듣는 즉시 마음에 새기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빨리 마음에 새길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에 기대 요행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때 점쟁이가 너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겠느냐? 점쟁이의 말이 하나씩 들어맞으면 다시 그를 찾아가 다음 해의 운세를 보고 싶지 않겠느냐? (그럴 겁니다.) 점쟁이가 하라는 것, 하지 말라는 것을 그대로 따르면서 시키는 대로 다 하지 않겠느냐? 너는 아주 빨리 그 품으로 들어가고, 쉽사리 미혹되며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점쟁이가 한 말이 사실이고, 그가 네 전생, 금생, 미래를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탄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지배한다. 하지만 실제로 누가 사람을 주관하느냐? 사탄이 아닌 하나님이다. 사탄은 그저 이때를 틈타 무지하고 물질세계만 보는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의지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고는 사람을 사로잡아 자신의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따르게 한다. 그다음,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려고 하면 사탄이 손을 놓아주겠느냐? 사탄은 손을 놓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정말 사탄에게 사로잡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사탄의 이러한 행위를 뻔뻔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겠느냐? 사탄은 사기와 기만이란 수단을 동원한다. 사탄은 뻔뻔하기 그지없으며, 자신이 사람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무지한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만든다. 불과 두세 마디 말로 사람을 기만하고 속여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 사탄은 어떤 방식이나 말들로 네가 믿게 하겠느냐? 예를 들어, 네가 너희 집 식구가 몇 명이란 말을 하기 전에 점쟁이가 너희 집 식구가 몇 명이고, 네 부모와 자식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맞춘다고 가정해 보자. 네가 점쟁이를 믿지 못하고 의구심을 가질 때 이런 말을 들으면 믿음이 좀 생기지 않겠느냐? 곧이어 점쟁이가 “요즘 일이 잘 안 풀리는군요. 상사가 알아주기는커녕 툭하면 걸고넘어지니….”라고 하면 너는 그 말을 듣고 “맞아요. 요즘 일이 잘 안 풀리긴 하죠.”라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또 믿게 되지 않겠느냐? 그럼 점쟁이는 다시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으며 너를 미혹하고 그를 더욱더 믿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너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조금씩 그와 맞설 힘을 잃고 의심을 지우게 된다. 사탄은 하찮은 능력, 심지어 보잘것없는 수작으로도 너를 미혹한다. 또한, 네가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하게 만들어 자신의 말에 복종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고단수’의 수법이다. 네가 자신도 모르게 꼬임에 넘어가도록 유인하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먼저 일러 준다. 그런 다음,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것을 피해야 하는지 알려 준다. 그러다 보면 너는 자신도 모르게 속임수에 빠지게 되고, 속임수에 빠지는 순간 일은 복잡해진다. 너는 사탄의 말과 지시를 시시때때로 떠올리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에게 점령당할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사람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없으면 사탄의 유인과 유혹에 맞설 힘이 없다. 사탄의 사악함, 간사함, 음험함 앞에서 사람은 몹시도 무지하고 유약하며 연약하다. 그렇지 않으냐?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식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모두 자신도 모르게 사탄의 온갖 수법에 조금씩 유혹당하고 속아 넘어간다. 사람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분별할 능력과 분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탄을 이길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5. 사탄은 어떻게 사회 풍조로 사람을 패괴시키는가

사회 풍조는 언제부터 존재했느냐? 최근 들어 형성된 것이냐? 그것은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킨 순간부터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이 사회 풍조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느냐? (옷차림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자주 접하는 것이다. 옷차림, 패션, 의류 풍조는 사회 풍조의 작은 부분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소문도 포함되지 않겠느냐? 사람들이 동경하는 라이프 스타일도 포함되지 않겠느냐?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수, 스타, 잡지, 소설도 포함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보기에 어떤 분야의 풍조가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을 것 같으냐? 너희에게 가장 큰 유혹이라고 할 수 있는 풍조는 무엇이냐? “우리는 이제 나이가 들었습니다. 50~60대, 70~80대 사람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지요. 풍조는 우리에게 유혹적이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맞는 말이냐? 또 어떤 사람은 “20대 애들이나 연예인을 따라다니지, 우리는 그러지 않습니다. 유행하는 패션 아이템을 입지도 않고요. 그런 건 멋 내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지요.”라고 말한다. 그럼 무엇이 너희를 패괴시키느냐? (유행하는 말들입니다.) 그런 말들이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겠느냐? 내가 예를 들어 볼 테니 맞는지 보아라.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라는 말은 풍조에 포함되지 않느냐? 너희가 언급한 패션, 미식보다 더 강력하지 않으냐?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라는 말은 사탄의 철학으로, 인류에게서, 그리고 모든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주입되어 자리 잡고 있으므로 풍조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람도 실생활에서 이 말을 접했을 때 차츰 묵인하게 되고 이 말이 사실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과정 아니겠느냐? 이 말에 대한 이해도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거나 자신이 직접 겪은 일에 기반하여 각기 다른 정도로 해석하고 수긍한다. 그렇지 않으냐? 사람이 이 말을 얼마나 체험했는지는 차치하고, 이 말이 사람의 마음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은 무엇이겠느냐? 너희 모두를 포함해 이 세상의 인류에게서, 성품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돈을 숭배하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이를 지우기가 쉽겠느냐? 쉽지 않을 것이다! 사탄이 사람을 참 심각하게도 패괴시켰다! 사탄은 바로 돈으로 사람을 유혹하여 사람이 돈을 숭상하고 물욕적인 것을 숭상하도록 패괴시킨 것이다. 사람이 돈을 숭상하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너희는 돈 없이는 이 세상에서 단 하루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사람은 돈을 많이 가질수록 높은 지위를 누리고 존귀해진다. 기를 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과 달리 부자는 높은 지위를 누리고 거만을 떨며 큰소리를 치면서 오만 방자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 말과 이런 풍조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겠느냐? 많은 사람이 돈을 위해 어떠한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지 않겠느냐?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 존엄성과 인격을 잃게 되지 않겠느냐? 수많은 사람이 돈 때문에 본분을 이행할 기회와 하나님을 따를 기회를 놓치지 않겠느냐? 진리를 얻고 구원받을 기회를 놓치게 되는데, 이는 사람에게 가장 큰 손해 아니겠느냐? 사탄은 이런 방식, 이런 말로 사람을 이 정도로 패괴시켰다. 사탄의 속셈이 음흉하지 않으냐? 이는 아주 악랄한 수법이 아니더냐? 이런 말이 유행할 때 처음에는 수긍하지 못하던 네가 이를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너라는 사람의 마음은 사탄에게 철저히 빼앗겼다. 그래서 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말대로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너는 이 말에 벌써 얼마나 영향을 받았더냐? 참도이고 진리임을 알면서도 추구할 힘이 없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뻔히 알면서도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으며, 진리를 얻기 위해 고난을 감내하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미래와 운명을 희생하더라도 하나님과 끝까지 맞선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어떻게 행해도, 너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알게 되어도, 너는 오로지 이 말만 고집하고 집착하며 자신을 바친다. 즉, 이 말이 네 사상을 미혹하고 통제하며, 네 행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이 말에 네 운명이 좌우될지라도 돈에 대한 추구를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 사탄의 말에 좌지우지되어 끌려다니는 것은 사탄에 의해 미혹되고 패괴된 것 아니겠느냐? 사탄의 철학 사상과 사탄 성품이 네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것 아니겠느냐? 네가 계속 돈만 추구하고 진리 추구는 포기한다면 이는 사탄이 너를 미혹하려는 목적을 달성한 것 아니겠느냐? 사실이 바로 이러하다. 그럼 너는 사탄이 너를 미혹하고 패괴시키는 것을 느꼈느냐? 너는 느끼지 못했다. 너는 사탄이 네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지 못했고, 사탄이 배후에서 한 짓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런데 네가 사탄의 사악함을 볼 수 있겠느냐? 사탄이 어떻게 인류를 패괴시키는지 알 수 있겠느냐? 사탄은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패괴시킨다. 사람은 막으려고 해도 막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사탄의 사상, 관점, 사탄에게서 비롯된 사악한 것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후에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만 아니라 보물처럼 끌어안고 소중하게 여기면서 사탄의 지배를 받고 농락당한다. 이렇게 사람은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사탄에게 순종하게 되며 사탄에 의해 갈수록 패괴된다.

사탄은 위의 몇 가지 방식을 통해 사람을 패괴시킨다. 사람은 지식을 습득하고, 과학적 이론을 어느 정도 이해하며, 전통문화에 물든 채로 살아간다. 모든 사람은 전통문화의 계승자로, 사명감을 가지고 사탄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전통문화를 이어 간다. 또한, 사람은 사탄이 만든 사회 풍조에 발을 맞춘다. 사람은 이렇게 사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탄이 하는 모든 일에 항상 협조한다. 그리고 사탄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사악함, 간사함, 악독함, 교만함을 받아들인다. 사탄의 이러한 성품을 갖게 된 후 이 패괴된 인류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행복하겠느냐, 슬프겠느냐? (슬플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사람은 모두 패괴된 것들에 결박당하고 지배당하여 죄악 속에서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안경을 쓴, 유식해 보이는 사람을 예로 들어 보자. 그는 점잖게 말을 하고 입만 열면 청산유수이며 근거가 탄탄하다. 다양한 일을 두루 겪었기에 경험과 경력이 풍부하고,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그 경위를 설명할 수 있으며, 일의 이치와 진위도 판단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그의 행위, 외모, 인격, 인성, 됨됨이 무엇 하나 흠잡을 것이 없어 보인다. 이런 사람은 오늘날의 사회 풍조를 적극적으로 따르는 사람이며, 나이가 들었음에도 사회 풍조에 뒤처지지 않고 평생을 배우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렇게 외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사람의 내적 본질은 사탄에 의해 완전히 패괴되어 있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점잖으며, 유식하고, 윤리 의식과 인품을 갖추어 흠잡을 구석이 없어 보이고, 젊은 세대만큼 아는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의 본성과 본질은 사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완전히 살아 있는 사탄의 모델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켜 거둔 ‘성과’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너희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사실이다. 사람이 습득한 지식, 사람이 지닌 과학, 사람이 사회 풍조에 발맞추기 위해 선택한 방식, 이 모두가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수단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사람은 이렇듯 철저히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이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사람의 행위 역시 비정상적인 데가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정상적으로 일하고, 생활하고, 책을 읽고, 신문을 보고, 공부하며, 말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윤리 도덕을 좀 배워 말을 잘하고, 이해심이 많고, 친절하고, 타인을 돕는다. 또 은혜를 베풀고, 계산적으로 굴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덕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탄에 의해 패괴된 성품은 내면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그 본질은 외적인 노력으로 바꿀 수 없다. 사람은 이런 본질을 지녔기에 무엇이 하나님의 거룩함인지 알지 못한다. 설령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을 공개한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사탄이 이미 온갖 방식을 동원하여 사람의 마음과 생각, 관점과 사상을 완전히 점령했기 때문이다. 이 점령과 패괴는 일시적이거나 이따금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3~4년, 5~6년 믿고도 사탄이 주입한 사악한 사상과 관점, 논리와 철학을 여전히 보물인 양 끌어안고 내려놓지 못한다. 사람이 사탄 본성에서 비롯된 사악하고, 교만하고, 악독한 것들을 받아들였기에 사람들 사이에 언쟁과 싸움이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고, 서로 마음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사탄의 교만한 본성이 초래한 것이다. 사탄이 사람에게 긍정적인 것을 가져다주었다면, 예를 들어 사람이 유교와 도교와 같은 전통문화를 수용했을 때, 그런 것들이 좋은 것이라면 이를 받아들인 사람들끼리 마음이 잘 통해야 한다. 그런데 왜 사람은 똑같은 것을 받아들이고도 더 심하게 분열하겠느냐?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이러한 것들은 사탄에게서 비롯되었고, 사탄은 분열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사탄에게 속한 것이 겉으로 그럴싸하고 위대해 보여도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 그리고 살아 내게 한 것은 다 교만하고 간사하고 사악한 본성이다. 그렇지 않으냐? 아무리 위장에 능하고, 지식이 풍부하고, 가정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라도 사탄에 의해 패괴된 성품을 감출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몹시 그럴싸해 보이는 사람, 네 생각에 성인(聖人) 같은 사람이나 완벽해 보이는 사람, 천사 같은 사람이라도, 네가 그를 아무리 깨끗하게 생각할지라도 그들의 삶 이면에서, 그들의 성품에서 드러나는 본질을 보면 다 무엇이더냐? 완전히 사탄의 사악한 본성으로 가득하다고 할 수 있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주변에서 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던 사람이나 우러러보았던 우상을 예로 들어 보자. 현재의 네 분량으로 보면 그를 어떻게 평가하겠느냐? 우선 너는 그에게 인성이 있는지, 정직하고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언행이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도움이 되느냐? (아닙니다.) 그가 드러낸, 소위 말하는 선량함, 사랑, 훌륭함은 무엇이냐? 모두 위선과 허상일 뿐이다. 그러한 허상 뒤에는 자신을 우상으로 떠받들게 하려는 은밀하고 사악한 목적이 숨어 있다. 이제 확실히 간파했느냐? (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이런 방식들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이냐? 거기에 긍정적인 것이 있겠느냐? 우선, 사람이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 이 세상의 유명인, 위인이나 잡지, 간행물의 선악, 시비 분별 기준이 정확하겠느냐?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겠느냐? 진리가 담겨 있겠느냐? 이 세상과 인류가 진리의 기준에 따라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가늠하고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 사람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겠느냐? 그렇게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과학을 이해하게 됐으면 능력도 대단하지 않겠느냐? 어찌하여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도 분별하지 못하겠느냐? 무엇 때문이겠느냐? (사람에게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지식은 모두 진리가 아닙니다.) 사탄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은 사악함과 패괴일 뿐, 진리, 생명, 길이 없다. 사탄은 사람에게 이런 사악함과 패괴를 가져다주었는데, 사탄에게 사랑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이 인류에게 사랑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이나 노숙자를 돕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리고 자선 단체들도 선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선행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어떠냐? 사탄은 온갖 방식과 학설로 사람을 패괴시킨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킨다는 것이 모호한 개념이냐? 모호하지 않다. 사탄도 이 세상과 사회에서 어떠한 관점, 학설을 제창하며 실제적인 일들을 하고, 각 연대, 각 시기마다 학설을 제창하며 사람에게 사상을 주입한다. 이런 사상과 학설은 사람의 마음에 차츰 뿌리를 내리고, 그러면 사람은 그런 학설과 사상들에 의존해 살게 된다. 사람이 그런 것들에 의존해 살아가면 사탄으로 변하지 않겠느냐? 사탄과 하나가 되지 않겠느냐? 사람이 사탄과 하나가 되면 결국 하나님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게 되겠느냐? 사탄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일치하지 않겠느냐? 이를 인정하기는 두려운가 보구나. 그렇지 않으냐? 더없이 무서운 일이다! 어째서 사탄의 본성을 사악하다고 하겠느냐? 사탄이 저지른 일과 드러낸 것에 따라 그것을 규정하고 해부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사악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저 말로만 사탄이 사악하다고 한다면 너희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아도 사탄은 사악한 존재입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탄이 어떤 면에서 사악하냐?”라고 물으면 너는 “하나님을 대적하니 사악하지요.”라며 얼버무릴 것이다. 지금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니 사탄의 사악한 본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이해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사탄의 사악한 본성을 정확히 간파하면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 너희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말해 보아라.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에 대해 교통할 때, 사탄의 사악한 본질을 얘기할 필요가 있느냐? (그렇습니다.) 왜 그러하냐? (사탄의 사악함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부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냐? 그 말도 반은 맞다. 즉, 사탄의 사악함 없이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알 수 없다는 말은 옳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함은 사탄의 사악함으로 부각되어 드러난다고 한다면, 이 말이 옳겠느냐? 이렇게 변증하듯 하는 말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하나님 고유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함으로써 무엇이 발현되었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이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로, 줄곧 존재해 온 것이고, 하나님이 본래부터,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다. 다만 사람이 보지 못했을 뿐이다. 사람은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살며,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거룩함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의 거룩함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포함하는지 더더욱 알지 못한다. 그러니 먼저 사탄의 사악한 본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왜 항상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법과 사탄의 사악한 본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라며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그런 의문이 해소되었느냐? 사람이 사탄의 사악함을 분별하고, 이를 정확히 정의하여 사악함의 구체적인 내용과 태도, 근원과 본질을 모두 똑똑히 본 후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논해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이고, 이것이야말로 거룩함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거나 인식할 수 있다. 내가 사탄의 사악함을 언급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들은 사회 안에서나 인류 가운데서 사람이 행한 일, 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들 중에도 거룩함과 연관된 것이 있다고 착각한다. 이는 잘못된 관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나는 방금 이렇게 사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희는 지난 몇 년간의 체험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함으로써 그의 거룩함에 어떤 인식을 갖게 되었느냐? 이야기해 보아라. 듣기 좋은 것만 골라 말하지 말고 너 자신이 체험한 것을 말해 보아라. 하나님의 거룩함이 하나님의 사랑만 가리키더냐?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 거룩하다고 할 수 있더냐? 그러면 지나치게 단편적이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사랑 외에도 다른 측면의 본질을 가지고 있느냐?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명절, 풍속, 미신들을 혐오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것을 혐오한다는 의미이냐? 그럼 하나님의 거룩함은 도대체 무엇이냐? 하나님의 거룩함은 실질적인 내용이 없고 혐오뿐인 것이냐? 너희는 하나님이 사악한 것을 혐오하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이는 추리 아니더냐? 일종의 추론, 판단이 아니더냐?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을 알아 가는 데 있어 가장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실제에서 벗어나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피해야 할 것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추리와 상상입니다.) 그 역시 가장 피해야 할 것들이다. 추리와 상상이 필요 없는 이유는 무엇이냐? 네가 추리한 것과 상상한 것이 실제로 본 것이더냐? 하나님의 참된 본질이더냐? (아닙니다.) 그럼 또 무엇을 피해야겠느냐? 듣기 좋은 말로 하나님의 본질을 나열하거나 묘사하는 것을 피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런 것은 허풍 아니겠느냐? 헛소리 아니겠느냐? 판단과 추리도 헛소리이고,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하는 것도 헛소리이다. 근거 없는 찬미도 헛소리 아니겠느냐? 그럼 하나님이 그런 헛소리를 들으면 즐겁겠느냐? (아닙니다.) 듣기 괴롭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이끌고 구원하는데,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듣고도 그 의미를 모른다. 누군가 “하나님이 좋습니까?”라고 물으면 “좋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얼마나 좋습니까?”라는 물음에는 “너무너무 좋습니다!”라고 답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으면 “사랑하십니다!”라고 대답한다.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묘사해 보십시오.”라고 하면 “아주아주 사랑하십니다! 하늘만큼 땅만큼이요!”라고 대답한다. 이는 헛소리 아니더냐? 이 헛소리는 너희가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은 사탄의 패괴 성품을 증오하시기 때문에 거룩합니다.”라는 말과 비슷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도 헛소리를 한 것 아니겠느냐? 헛소리는 주로 어디에서 비롯되느냐? 헛소리는 주로 사람의 무책임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를 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불경 아니겠느냐? 지식을 조금 습득했다고, 추리와 논리를 약간 알게 되었다고 여기에 모두 적용했다. 그것도 하나님을 아는 데에 적용했으니 하나님이 듣고 괴롭지 않겠느냐? 너희는 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냐? 듣기만 해도 거북하지 않으냐?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일을 언급할 때는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알게 된 것만큼 이야기하고, 사실대로 이야기하며, 실제를 이야기해라. 빈말을 하지 말고 아부를 떨지 마라. 이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며, 모두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사탄은 성품이 교만하여 사람이 자신에게 아부하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해 주는 것을 좋아한다. 또한, 인류가 배운 사탕발림을 총동원하여 비위를 맞춰 줘야만 만족하고 기뻐한다. 반면 하나님은 이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의 칭찬과 아첨을 원하지 않으며, 사람이 무턱대고 하는 허튼소리, 근거 없는 찬미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찬미와 아부를 혐오하여 아예 듣지도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일부 사람들의 가식적인 찬미, 터무니없는 서원과 기도를 전혀 듣지 않는다. 너는 네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인식하지 못했다면 인식하지 못했다고 하고, 인식했다면 실제적인 말을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함에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어떤 내용이 포함되는지에 대해 참된 인식이 있느냐? (패역을 드러냈을 때, 과오를 범했을 때, 저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았습니다. 또한, 제 뜻에 맞지 않는 환경에 처하여 이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하나님 말씀의 깨우침과 인도를 보았을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것은 체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사람이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하나님은 대가를 아끼지 않고 저희를 구원하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매우 실제적인 말이자 참된 깨달음이구나. 다른 인식을 가진 사람이 있느냐? (저는 사탄이 말로 하와가 죄짓도록 유인한 것과 예수님을 시험한 것에서 사탄의 사악함을 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먹어도 되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을 일러 주신 것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매우 직설적이고, 깨끗하며,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들은 몇 사람의 말 중에 누구의 말에 아멘을 하게 되느냐? 누구의 교제가 오늘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 주제에 더 가깝고 실제적이냐?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자매의 교제가 어떠하냐? (좋습니다.) 너희는 자매의 말에 아멘을 했는데 어떤 말이 핵심을 찔렀느냐? (방금 자매님이 한 말에서 저는 돌려 말하는 사탄의 화법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직설적이고 솔직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볼 수 있다는 부분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한 측면이다. 이 말이 맞는 말이냐? (네.) 아주 좋다. 너희가 두 차례 교제를 통해 어느 정도 효과를 얻은 것 같구나.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것은 아주 깊은 공과여서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도, 한두 마디의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존재하는 사탄의 갖가지 패괴 성품, 지식, 철학, 사람의 사상과 관점, 그리고 사람에게 원래 있는 갖가지 측면은 하나님의 본질을 알아 가는 데에 굉장히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래서 이 주제를 들으면서 잘 모르겠거나 이해가 안 되거나 실제 상황과 연관시키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 너희의 인식을 들어 보니, 너희가 마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관한 내 말과 교제의 내용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너희 마음속에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을 알고자 하는 소망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더 기쁜 것은 몇몇 사람들이 이미 가장 간단한 말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인식을 묘사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이는 나도 언급한 적이 있는 매우 단순한 말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마음속으로 인정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마음속에 이 말을 새긴 이들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이는 바람직한 시작이다. 또한, 나는 너희가 심오하다고 느끼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주제에 대해 더 많이 묵상하고 교제를 했으면 한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향후 누군가 너희에게 더 많은 가르침을 줄 것이다. 일단은 지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많이 교제해라. 교제를 함과 동시에 성령이 역사하여 더 많은 것을 일깨워 줄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을 알고 이를 이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생명 진입에 매우 중요하다. 이를 간과하지 말고 장난으로 여기지도 마라.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근본이고, 진리를 추구해 구원받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를 알지 못하고 문구와 이치로만 살아간다면, 소위 말하는 진리의 표면적인 의미대로 행하고 살아간다고 한들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즉,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를 알지 못한다면 너의 믿음은 제로이고 실제가 전혀 없는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하도록 하자.

2014년 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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