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먼저 ‘하나님나라의 축가 1 하나님나라가 인간 세상에 임했다’ 찬양을 부르자.

Acc: 모든 백성들이 나를 향해 환호하며 찬양하고 있다. 모든 입이 나를 유일한 참하나님이라 부른다. 하나님나라가 인간 세상에 임했다.

1. 모든 백성들이 나를 향해 환호하며 찬양하고 있다. 모든 입이 나를 유일한 참하나님이라 부르고, 만인이 눈을 들어 나의 행사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님나라가 인간 세상에 임했고, 나의 본체는 풍부하고 완전히 갖추어져 있다. 어느 누가 기뻐하지 않으랴? 어느 누가 즐겁게 춤추지 않으랴? 시온아! 승리의 깃발을 들고 나를 향해 경축하라!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널리 전파하라!

2. 땅끝의 만물아! 어서 깨끗이 씻고 나를 위해 제사를 올려라! 하늘의 별들아!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 궁창에서 내 큰 능력을 나타내라! 내가 귀를 기울여 땅의 백성들의 소리를 들어 보니 노랫소리에 나에 대한 경애심이 넘쳐흐른다! 내가 만물이 소생하는 날에 친히 인간 세상에 임하자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새들이 일제히 지저귀며, 만물이 기쁨으로 들끓는다! 사탄의 나라는 하나님나라의 예포 소리에 무너지고, 하나님나라에서 울려 퍼지는 축가에 부서져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리!

3. 땅의 사람 중에 어느 누가 감히 일어나서 대적할 수 있으랴? 나는 땅에 내려올 때 불사름과 진노를 가지고 임했으며, 모든 재난을 가지고 임했다. 세상 나라는 나의 나라가 되었도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물결치고 일렁이며, 하늘 아래에서는 호수와 강물이 세차게 출렁이며 감동적인 무곡을 연주하고 있다. 동굴에서 지내던 짐승이 모습을 드러내고, 꿈속에 잠들어 있던 만백성은 나로 인해 눈을 떴으며, 만민이 기다리던 날이 마침내 도래하였다! 그들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나에게 바친다!

―≪어린양을 따르며 새 노래 부르네≫ 중에서

너희는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느냐? (감격과 감동에 벅차오릅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나님과 함께 지낼 수 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너희가 상상하기에 사람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님과 함께 이후의 아름다운 하나님나라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성품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품이 어느 정도까지 변화되어야 하느냐?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하느냐? (성결해져야 합니다.) 성결해진다는 것에는 어떤 기준이 있느냐? (모든 생각이 그리스도와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된다는 것은 어떤 모습이냐?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대답은 정답에 가깝다. 모두 마음을 열고 하고 싶은 말들을 해 보거라.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생활할 사람이라면 마땅히 기본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면서 사람과 일, 사물의 통제를 받지 않고 본분을 이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 마음이 하나님과 일치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하나님과 일치하고,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적어도 사탄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는 사람이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탄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아직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기준은 사람의 마음과 뜻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더 이상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알고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말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무게

너희는 자신이 지켜야 할 도에 대해 나름의 인식이나 깨달음 같은 것들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인식이나 깨달음이 공허한 것인지 실제적인 것인지는 너희가 평소 실행할 때 무엇에 중점을 두느냐에 달려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너희는 각 부분의 진리에 대해 도리적인 면에서나 진리의 내용적인 면에서나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뒀다. 그것은 지금의 사람들이 진리 추구를 무척 중요시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진리의 각 부분과 이런저런 틀은 분명 일부 사람들 마음속에 이미 깊이 뿌리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런 진리의 주제와 이론은 너희 마음속에 뿌리내렸지만 실제적인 내용은 아직 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너희가 시련에 직면하고 선택에 직면했을 때 그런 진리의 실제가 너희에게 있어 얼마만큼의 역할을 할까? 너희가 난관을 헤쳐 나가고 시련에서 나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시련 속에서 굳게 서서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너희는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느냐? 너희에게 묻겠다. 너희는 마음속으로나 너희가 매일 생각하는 이런 일에서 너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요약해 본 적이 있느냐? 너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혹자는 “당연히 진리 실행입니다.”라고 하고, 또 혹자는 “당연히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라고 한다. 혹자는 “당연히 매일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또 혹자는 “당연히 매일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입니다.”라고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하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한다. 맞느냐? 이런 내용들만 있을까?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었지만 막상 일이 닥쳤을 때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는 한 번만이라도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아무리 해도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릴 수가 없어요.”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었어요. 시련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지배에 따르고 어떤 원망이나 요구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해도 순종하지 못하고 거의 매번 실패했습니다.”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는 선택을 해야 할 상황에 놓였을 때, 늘 진리 실행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늘 육체적 만족을 바랐고, 제 개인의 사욕을 만족시키려고만 했습니다.” 왜 그런 걸까? 하나님이 검증하기 전에 너희는 수차례 자신에게 도전해 보고 자신을 검증해 보지 않았느냐? 자신이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진실로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절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 없이 자신과 자신의 사욕을 만족시키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만족게 할 수 있는지를 보려고 말이다. 이렇게 해 본 사람이 있지 않으냐? 너희 앞에 놓인 사실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최대 관심사이자 가장 궁금해하는 것, 바로 각자의 결말과 종착지이다. 아마도 너희는 이 점을 의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아무도 이 점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결말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어떤 종착지로 이끄는지 등 이 몇 가지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이미 여러 차례 연구해 봤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리저리 찾아보고 고민한 뒤에도 결론을 내지 못하였거나, 혹은 애매한 결론만 얻고 결국 자신에게 어떠한 결말이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늘 그 실제 사정을 알고 싶어 한다. 즉, 자신의 결말은 어떠할지, 자신이 끝까지 갈 수 있을지,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전에 어떤 일도 했었고, 어떤 말도 했어. 전에는 하나님을 거역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기도 했지. 그리고 어떤 일은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지도 못하고 상심케 하기만 했어. 그 일로 하나님이 내게 실망하신 것은 물론이고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셨지. 그러니 내 결말은 미지수일 거야!’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결말에 대해 불안해한다. “난 내가 살아남을 거라고 100% 확신해. 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자신이 있어. 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를 지키기가 아주 어렵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자신은 구제 불능이고, 좋은 결말이 있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혹은 자신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없고, 살아남을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자신에게는 결말이 없고, 자신은 좋은 종착지를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어떻게 생각하든 사람은 저마다 마음속으로 자신의 결말을 수도 없이 따져 본다. 자신의 앞날과 하나님의 사역이 끝났을 때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따져 보고 계획한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들은 배로 대가를 치르고, 어떤 사람들은 가정과 직장을 내려놓고,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포기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직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하고, 어떤 사람들은 고난과 괴로움을 참고 견디면서 가장 힘들고 고달픈 일을 감당한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헌금하거나 모든 것을 바친다. 더욱이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 알기를 추구한다. 너희가 어떤 실행 방식을 택하든 그 방식이 중요하겠느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방식이 중요하지 않다면 무엇이 중요하냐? (외적인 행위가 좋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 실행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실행했는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가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적그리스도들이 넘어지고 또 일부 거짓된 리더들이 넘어지면서 저희는 외적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기꺼이 대가도 치렀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해부했을 때 저희는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고, 곳곳에서 하나님과 맞서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사탄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일이 닥쳤을 때 우리가 어느 편에 서는지,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무엇인지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잘 말했다. 보아하니 너희의 마음속에는 진리 실행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어느 정도 기초적인 인식도 있고 기준도 있구나. 너희가 그렇게 말하다니 무척 감동되는구나. 너희의 말이 적절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진리에 대해 마땅히 갖추어야 할 해석에 근접했다. 이는 너희가 주변의 사람, 일, 사물과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과 너희 눈으로 본 것에 대해 이미 자신만의 진정한 인식, 즉 진리에 근접한 인식을 갖췄다는 점을 증명한다. 너희의 말이 완벽하지 못하고 적절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너희의 인식은 이미 진리의 실제에 매우 가까워졌다. 너희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기쁘구나.

사람의 생각은 진리를 대신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고난과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대가를 치르고 외적 행위가 아주 좋아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고 감탄을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외적 행위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한다고 확정할 수 있느냐? 왜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보면 흔히 그가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길을 가고, 하나님의 도를 지키고 있다고 여기느냐? 왜 어떤 이는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거기에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진리의 실제가 있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등의 문제에 대해 아직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종종 겉으로 보았을 때 영적이고 고상해 보이는 사람, 이미지가 괜찮은 사람에게 미혹된다. 사람들은 글귀 도리를 말하고, 말과 행동이 다른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그런 사람들의 일을 하는 본질과 원칙, 일을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또 그런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지는 살피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의 인성 본질을 전혀 분별하지 않는다. 그 대신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점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탄복하고 우러러보다가 나중에는 그 사람들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는다. 게다가 일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숭상하는 우상,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가정과 직장을 내려놓고 대가를 치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사람, 참으로 좋은 결말과 좋은 종착지가 있을 사람,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존재하는 이런 생각은 어떤 원인으로 초래된 것이냐? 이 일의 본질은 무엇이냐? 이 일로 초래된 결과는 무엇이냐? 먼저 이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앞에서 언급한 사람의 관점과 실행법, 사람이 스스로 취한 실행 원칙, 그리고 사람들이 평소에 중시하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모두 하나님의 요구와 무관하다. 사람이 중요시하는 것이 깊든 얕든, 글귀의 이치이든 실제이든,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람은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고,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원인을 따져 보면, 사람이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실행 원칙을 찾아 실행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도리어 지름길로 가면서 자기 자신이 생각하고 있고 알고 있는 좋은 행위와 방법을 종합해 그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아 추구하고, 진리로 삼아 실행하고 있다. 이렇게 했을 때 직접적으로 초래되는 결과는 사람이 생각하는 좋은 행위로 진리 실행을 대체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던 욕망이 충족되고, 사람에게 진리에 대항하고 하나님과 따지고 맞설 밑천이 생기게 된다. 그와 동시에 사람은 서슴없이 하나님을 한쪽에 제쳐 놓고 자신의 마음속 우상을 하나님 자리에 놓는다. 사람에게 이런 미련한 행위와 우매한 사고방식, 혹은 단편적인 사고방식과 실행법이 생기게 된 근본 원인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을 오늘 알려 주겠다. 그 원인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면서 날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있어도 사실상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한 데에 있다.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혐오하는지, 무엇을 얻으려고 하고 무엇을 버리려고 하는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을 싫어하는지, 어떤 기준으로 사람에게 요구하고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지를 안다면, 사람에게 자신만의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느냐? 또 멋대로 다른 사람을 숭상할 수 있겠느냐? 또 일반 사람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 만약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사람의 견해는 다소 이성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패괴된 사람을 함부로 자신의 우상으로 삼지 않을 것이고, 진리를 실행하는 길에서 제멋대로 몇 가지 간단한 규례나 원칙을 지키는 것을 진리 실행으로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기준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고 있다

원래 주제로 돌아와 계속해서 결말에 관한 얘기를 해 보자.

모든 사람의 관심이 자신의 결말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너희는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어떻게 정하는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은 한 사람의 결말을 어떤 방식으로 정할까? 어떤 기준으로 한 사람의 결말을 정할까? 사람의 결말이 아직 정해지기 전, 하나님은 어떤 사역들을 하여 사람의 결말을 드러낼까?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느냐? 내가 방금 말했다시피, 일부 사람들은 사람의 결말이 무엇인지, 사람의 결말이 어떻게 나뉘는지, 사람마다 각각 어떤 결말이 있는지, 하나님 말씀에서는 사람의 결말을 어떻게 정했는지, 하나님이 어떤 기준과 방식으로 한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지 알고 싶어서 하나님 말씀 가운데 오랫동안 연구를 해 왔다. 하지만 결국 아무 결과도 찾지 못했다. 사실 하나님 말씀에는 아주 조금만 언급되어 있을 뿐 내용이 많지 않다.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은 사람의 결말이 드러나기 전까진 그 누구에게도 최후의 결과를 알려 주기를 원치 않고, 사람의 종착지가 어떤지 미리 알려 주는 것도 원치 않는다. 사람에게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너희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어떤 방식을 통해 사람의 결말을 정하고 어떤 사역 원칙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고 드러내는지, 어떤 기준으로 한 사람이 살아남을지를 정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너희도 가장 관심 갖고 있는 내용이 아니냐? 그럼 사람의 관념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의 결말을 어떻게 정하느냐? 조금 전에 너희가 일부를 얘기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고 헌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을 흡족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배에 따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너희가 이런 진리들을 실천하고, 스스로 원칙이라 생각하는 것에 따라 실천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느냐? 너희는 너희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것인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나는 많은 사람이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저 하나님 말씀의 일부, 설교의 일부, 그리고 자신이 숭상하는 일부 영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준을 따라서 적용하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강요할 뿐이다. 마지막 결과가 어떠하든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며 계속 이를 고수하고 그대로 행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난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렇게 실천해 왔어. 그동안 많은 진리를 깨달았고, 지난날 몰랐던 것들도 많이 알게 됐지. 특히 사상과 관점, 인생의 가치관이 많이 바뀌고, 이 세상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됐어. 그래서 하나님을 아주 흡족게 해 드렸고 얻은 것도 적지 않은 것 같아.’ 그러면서 그것을 수확이라고, 하나님의 사역이 사람에게서 맺는 최종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너희 모든 사람이 실천하고 있는 것들을 포함한 이런 기준들을 종합해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해 드리는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확신에 차 대답한다. “물론이죠! 우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천하고, 상부의 설교에 따라 실천하며, 계속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르면서 지금껏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거든요.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고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이해했든,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깨달았든 결론적으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길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한 것이 올바르다면, 결과도 틀림없이 옳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어떠하냐? 올바르냐?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는 이런 일들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서 계속 하나님 말씀의 요구대로 행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다다랐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선 그런 걸 저한테 알려 주신 적도, 명확하게 지시하신 적도 없으시거든요. 저는 그저 쉬지 않고 행하면 하나님께서 흡족해하실 것이고, 더 이상 다른 요구는 없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올바르냐? 내가 봤을 때, 너희의 그런 실천과 생각, 관점에는 상상이 섞여 있고 다소 맹목적이다. 내가 이 말을 하면 낙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맹목적이라고요? 그럼 우리가 구원을 받거나 살아남을 가망이 불투명하고 희박하다는 말인가요? 저희에게 찬물을 끼얹는 말씀 아닌가요?”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말하려는 것과 내가 하려는 것으로 너희에게 찬물을 끼얹는 느낌을 주려는 것은 아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하고, 하나님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혐오하고 무엇을 증오하는지, 어떤 사람을 얻으려고 하는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싫어해 버리는 대상인지 더 확실히 알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 모두의 모든 행위와 생각이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분명하고 뚜렷하게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주제들에 관한 교제가 참으로 필요하지 않으냐? 나는 너희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많은 도를 들었지만 이런 부분이 가장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모든 진리를 다 노트에 기록해 두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은 머릿속에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 두며 준비를 해 둔다. 실천할 때가 되면 그 진리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릴 수 있도록, 수시로 필요한 것을 채울 수 있도록, 혹은 눈앞에 연이어 놓인 난관들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을 받도록, 아니면 그 진리들이 너희의 삶에 함께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너희가 어떻게 행하든 마냥 행하기만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하겠느냐? 네가 행할 때 그 행함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인지, 너의 행함과 생각과 이루려는 결실과 목표가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인지,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인지 아주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것들이야말로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도를 행하라.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

너희가 반드시 기록해 두어야 할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날마다 이 말을 몇 번이나 되새겨 보는지 모른다. 왜 이렇게 말할까? 그것은 사람을 대할 때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을 믿어 온 누군가의 체험이나 간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 말을 가지고 그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맞는지,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맞는지 가늠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말일까? 너희 모두 잔뜩 기대하고 있지만 이 말을 꺼내는 순간 아마 크게 실망할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이미 오랜 시간 입에 달고 살 듯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껏 이 말을 입이 아닌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 이 말은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것,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말 아니냐? 간단하지만, 이 말을 진정 깊이 이해하는 사람은 아주 무게 있고, 실천할 가치가 있는, 진리 실제가 있는 생명의 언어이자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길 원하는 사람이 평생 추구해야 할 목표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일생 동안 행해야 할 도라고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이 너희에게는 진리가 아니냐? 이런 의미가 있지 않으냐?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 말에 대해 생각하고 되새겨 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되려 의심을 품을 것이다. ‘이 말이 중요할까? 정말 중요할까? 이렇게까지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이 한마디로 하나님의 도를 요약하는 건 너무 간단한 것 아닐까? 하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한마디로 귀결시키는 건 하나님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 중 대다수는 아마 이 말의 깊은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이 말을 적어 두긴 하겠지만 마음속에 새겨 둘 생각은 없다. 그저 노트에 적어 두고, 한가할 때 펼쳐 되새겨 볼 뿐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은 기억할 가치가 전혀 없다고 여기고, 적용할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내가 왜 이 말을 하겠느냐? 너희의 관점과 생각이 어떠하든, 이 말은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것과 큰 관련이 있기에 나는 반드시 말해 줘야 한다. 너희가 지금 이 말에 대해 어떻게 깨닫고 대하든, 나는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사람이 이 말을 실천하고 체험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다’라는 기준에 이른다면, 틀림없이 살아남을 것이고, 좋은 결말을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의 기준에 이르지 못한다면, 너의 결말은 미지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말을 너희에게 하는 목적은 하나님이 어떤 기준으로 너희를 가늠하는지 실상을 우선 알려 주려는 것이다. 나는 방금 이 말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것과 큰 관련이 있다고 했다. 어떤 부분에서 관련이 있을까? 너희도 무척 알고 싶어 하니 지금부터 이야기를 나눠 보자.

하나님은 여러 가지 시련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지 검증한다

각 시대마다 하나님은 사역하면서 사람에게 말씀을 베풀어 주고 진리를 알려 주었다. 이 진리들은 사람이 지키고 행해야 할 도이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게 하는 도이다. 또한 사람이 삶 속에서, 인생 역정 속에서 실천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을 선포하는 목적이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포된 것으로 사람은 마땅히 이를 지켜야 하고, 지키면 생명을 얻게 된다. 만약 하나님의 이 말씀을 지키지 않고 실천하지 않고 삶 속에서 살아 내지 못한다면 그는 진리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을 흡족게 하지 못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흡족게 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은 결말이 없어진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어떻게 사람의 결말을 정할까?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할까? 너희는 내가 말해 주지 않으면 잘 모를 테지만, 많은 사람이 이미 관련된 체험을 했기 때문에 내가 그 과정을 말하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역을 시작해서 지금껏 모든 사람에게, 즉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크고 작은 시련을 주었다. 어떤 사람은 가족에게 버림받는 시련을 겪었고, 어떤 사람은 열악한 환경에 처하는 시련을 겪었으며, 어떤 사람은 잡혀가거나 고문을 받는 시련을 겪었다. 또 어떤 사람은 선택을 해야 하는 시련을 겪었고, 어떤 사람은 지위와 재물의 시련에 맞닥뜨렸다.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다양한 시련이 닥쳤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 왜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할까? 그는 어떤 결과를 보려고 하는 것일까?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고자 하는 핵심이다.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지를 보려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네게 시련을 주어 어떤 환경에 처하게 할 때는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지 검증하려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제물을 관리하는 본분이 주어졌다고 하자. 그 본분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의 제물을 접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일은 하나님이 마련한 것이 아니냐?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너에게 닥치는 일은 다 하나님이 마련한 것이다. 너에게 이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은 네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실천하는지,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은밀히 관찰하며 지켜볼 것이다. 하나님은 그 결과에 가장 관심을 기울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결과를 통해 네가 그 시련 가운데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렀는지 가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은 흔히 왜 이런 일이 닥쳤는지,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보려는 것이 무엇이고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대신 이런 생각만 한다. ‘나한테 이런 일이 주어졌으니 소홀히 하지 말고 신중을 기해야지! 이건 하나님의 제물이니까 손을 대선 안 돼.’ 이렇게 단순히 생각하고선 책임을 다했다고 여긴다. 이 시련의 결과에 대해 하나님은 만족했을까, 아니면 만족하지 못했을까?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제물을 접하는 일이 주어졌을 때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기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 틀림없이 신중을 기할 것입니다.) 근접했지만 아주 적절하지는 않다. 하나님의 도를 행한다는 것은 외적인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일이 닥쳤을 때 먼저 그것을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책임이나 사명으로 여기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일이 닥쳤을 때 너는 그것을 하나님이 너에게 준 시련으로 여겨야 한다. 일이 닥쳤을 때 네 마음속엔 기준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온 일이니 어떻게 해야 책임을 다하고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노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 않을지 생각해야 한다. 방금 우리는 제물 보관에 대해 말했다. 제물과 관련 있고 또 너의 본분 및 책임과도 관련 있는 일이다. 그 책임은 마땅히 해내야 한다. 그러나 이 일이 주어지면서 시험도 따르지 않을까? 당연히 시험이 있다. 시험은 어디에서 오느냐? 사탄에게서 비롯되기도 하고 사람의 사악하고 패괴된 성품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시험이 있다는 것은 이 일이 사람이 굳게 서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굳게 서는 것 역시 너의 책임과 본분이다. 혹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작은 일을 굳이 큰 문제로 여길 필요가 있을까요?” 너무나 필요하다! 하나님의 도를 행하려면 우리 곁이나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일단 우리의 입장에서 중요한 일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무시하지 말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검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런 태도는 어떠하냐? 너에게 이런 태도가 있다면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해 준다. 너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너에게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고 싶다는 이런 소망이 있다면, 네가 실천해 내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다’라는 이 기준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이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는 일이나 평소 사람들이 아예 언급하지 않는 일은 작은 일로 여기고 진리의 실천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일이 닥치면 가볍게 생각해 그냥 흘려보낸다. 사실, 이런 일이 닥쳤을 때가 바로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야 하는지를 배워야 할 때이다. 또한 너는 이런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더더욱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너의 곁에서 너의 언행을 관찰하고 행동과 생각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저는 왜 느끼지 못하는 걸까요?” 네가 느끼지 못하는 것은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도를 가장 중요한 도로 삼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는 하나님이 사람의 서로 다른 생각과 행동에 기반해 사람에게 행하는 미묘한 사역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너는 정말 부주의한 사람이구나! 무엇이 큰일이고 무엇이 작은 일이겠느냐?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것과 관련된 일에는 크고 작음의 구분이 없이 다 큰일이다. 이 말을 너희는 받아들일 수 있느냐? (네.) 사람이 보기에 매일 닥치는 일 중에 어떤 일은 아주 크고 어떤 일은 아주 작다. 흔히 사람들은 큰일을 아주 중요한 일로 간주하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막상 큰일이 주어져도 사람의 분량이 작고 자질이 부족한 탓에 하나님의 뜻에 이르지 못하고,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하며, 가치 있는 실제적 인식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가 하면 작은 일은 무시하면서 조금씩 흘려보낸다. 그렇게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검증받고 시련받을 무수히 많은 기회를 놓치게 된다. 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너를 위해 마련한 사람과 일, 사물과 환경을 소홀히 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나님이 너를 온전케 하고 인도하려는 것을 네가 날마다, 더 나아가 매 순간 저버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너에게 어떤 환경을 마련해 너를 은밀히 관찰하고 네 마음과 모든 생각을 감찰한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하려고 하는지를 본다. 만일 네가 경솔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도,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한 번도 참답게 대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너는 하나님이 너를 위해 마련한 환경에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고, 무엇을 요구하는지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너에게 주어진 사람과 일, 사물이 진리나 하나님의 뜻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너에게 이렇게 여러 차례 환경과 시련을 주었음에도 너에게서 아무런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느냐? 너에게 수차례의 시련이 주어졌음에도 네 마음이 하나님을 크게 높이지 않고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하나님이 준 시련이나 검증으로도 여기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내려 준 기회를 지속적으로 밀어내고 흘려보낸다면 그것은 엄청난 패역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일로 슬퍼하겠느냐? (슬퍼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슬퍼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희는 또 크게 놀랄 것이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늘 슬퍼하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하나님께서 슬퍼하지 않으신다고? 그럼 하나님은 언제 슬퍼하시는 거지?’ 어쨌든 하나님은 이 일에서는 슬퍼하지 않는다. 그러면 앞서 언급했던 사람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보일까? 사람이 하나님이 주는 시련과 하나님의 검증을 밀어내고 도피하려 할 때 하나님은 오직 한 가지 태도만을 취한다. 어떤 태도일까?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이런 사람을 증오하고 버린다. ‘증오와 버림’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돼 있다. 내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석할까? ‘증오’에는 극도로 혐오하고 미워한다는 의미가 있다. ‘버림’은 어떤 의미일까? 내게 있어서는 포기한다는 뜻이다. ‘포기’가 어떤 뜻인지 너희는 다 알고 있겠지? 결론적으로 증오와 버림이란 하나님이 위에서 말한 일들을 행하는 사람에게 취하는 마지막 반응이자 태도로, 사람에게 크게 혐오감과 반감을 가져 포기하기로 결정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의 도를 전혀 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악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이 내린 최종 결단이다. 이제 너희는 내가 한 말의 중요성을 깨달았느냐?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지 알겠느냐? (날마다 다른 환경을 마련해 주시는 방식으로 정하십니다.) 다른 환경을 마련한다는 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느끼고 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일을 하는 출발점은 무엇일까? 그 출발점은 하나님이 각기 다른 시간과 지점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을 시련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시련하는 것일까? 사람에게 닥치는 모든 일에서, 네가 듣고 보고 직접 겪는 모든 일에서 네가 과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지를 보려고 시련하는 것이다. 이런 시련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을 몇 년간 믿어 왔는데 왜 제게는 시련이 닥치지 않은 걸까요?” 시련이 닥치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은 네가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을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았고 하나님의 도를 행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준 시련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에게도 시련이 몇 번 닥쳤지만 정확한 실천의 길을 몰랐었습니다. 실천했다 하더라도 제가 과연 그 시련 가운데 굳게 섰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상태인 사람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가늠하는 기준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내가 앞서 언급했던 그 말이다. 즉, 네가 행하고 생각하고 드러낸 것들이 과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지를 확정한다. 이것이 쉬운 일이냐? 말로야 쉽겠지만 실천하기도 쉬울까? (쉽지 않습니다.) 왜 쉽지 않으냐?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온전케 하시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에서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할 줄 모릅니다. 사람은 여러 가지 시련과 연단, 형벌과 심판을 겪어야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실제가 있게 됩니다.) 너희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지금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쉽게 해낼 수 있으리라 느낄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지금 너희는 많은 도를 듣고 진리 실제로 많은 양육을 받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는지 이론과 의식상으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너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를 실천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너희는 쉽게 해낼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왜 실제로 해내지 못할까? 바로 사람의 본성과 본질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원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대립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다’는 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살펴보자. (욥기입니다.) 욥을 언급한 김에 욥에 대해 말해 보자. 욥이 살았던 시대에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고 정복하는 사역을 하였느냐? 하지 않았다. 그렇지? 그렇다면 당시의 욥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그렇게 많이 알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너희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보다 많을까, 적을까? 너희는 왜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느냐? 아주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다. 적다! 틀림없이 그렇다! 지금 하나님과 마주하고 있고 하나님 말씀과 마주하고 있는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욥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내가 왜 이 일을 언급하겠느냐?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설명하기 전에 너희에게 하나 묻겠다. 욥은 하나님을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무엇 때문일까? (너무나도 깊이 패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깊이 패괴되었다는 것은 문제의 표면적인 현상일 뿐 나는 절대 그렇게 보지 않는다. 너희들은 평소 ‘깊이 패괴되었다’, ‘하나님을 거역한다’, ‘하나님에 대해 충성심이 없다’, ‘순종하지 않는다’,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와 같은 도리나 글귀를 곧잘 말한다. 이런 실속 없는 말들을 입에 달고 살면서 그것으로 모든 문제의 본질을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실천법이다. 다른 성질의 문제들을 똑같은 답으로 해석하는 것은 진리를 모독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그런 답을 듣길 원치 않는다. 잘 생각해 보아라! 이 일에 대해 너희 누구도 생각해 본 적이 없겠지만 나는 여기서 날마다 보고 느낀다. 그래서 너희는 행하고 있고 나는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가 행하고 있을 때 너희는 이 일의 본질을 느끼지 못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이 일의 본질을 볼 수 있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면 이 본질은 무엇일까? 왜 지금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악에서 떠나지 못할까? 너희의 답은 이 문제의 본질을 전혀 해석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다. 그것은 여기에 너희가 모르는 근본 원인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이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너희가 무척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럼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을 알려 주겠다.

하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 사람을 무엇으로 여겼을까? 하나님은 사람을 구하여 그의 가족으로 여겼고 그의 사역 대상으로 여겼으며 정복하고 구원하고 온전케 할 대상으로 여겼다. 이것은 하나님이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 사람에 대해 가졌던 태도다. 그러나 당시 사람은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대했을까? 사람은 하나님을 생소하게 느끼며 낯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에 대해 갈피를 못 잡는 태도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람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고, 결국 자신의 생각대로 대하고 행했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 있었을까? 처음에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관점도 없었다. 사람의 관점이란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을 말한다.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는 것이면 받아들이고 부합하지 않는 것이면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극력 저항하고 반대했다. 이것이 처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였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족으로 여겼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낯선 사람으로 대했다. 그러나 일정 기간 하나님이 사역한 후, 사람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참하나님임을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이때 사람은 하나님을 무엇으로 여겼느냐? 생명줄로 여겼다. 그러면서 하나님에게서 은혜와 축복을 받고 약속을 받기를 원했다. 이때 하나님은 사람을 무엇으로 여겼을까? 하나님은 사람을 정복할 대상으로 여겼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검증하고 시련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사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하는 대상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가 사람을 정복하고 구원할 수 있음을 보았고, 하나님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는 종착지를 얻을 기회가 있음을 보았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은 조금이나마 진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르려고 했던 것이다. 나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표면적인 도리상의 인식도 조금 생기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해 점차 ‘익숙’해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전한 도, 선포한 진리, 행한 사역에 대해서도 서서히 ‘익숙’해졌다. 그런 이유로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이 낯설지 않다고 착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길을 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진리의 도를 많이 들었고 하나님의 사역도 무수히 많이 체험했다. 하지만 수많은 요인, 그리고 상황의 방해와 저지로 인해 다수의 사람들은 진리를 실천하지 못했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지 못했다. 사람은 점점 태만해지고 믿음을 잃어 갔으며 점차 자신의 결말이 불확실하다고 느끼게 되었고, 사치스러운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며 발전하려고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마지못해 따르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가고 있을 뿐이다. 지금 사람들의 이런 모습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하나님은 단지 진리와 그의 도를 사람에게 부어 준 뒤 여러 환경을 마련하고 각종 방식으로 사람을 시련하려고 한다. 그 목적은 말씀과 진리와 그가 행하는 사역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게 되는’ 결과를 이루는 것이다. 내 눈에 비친 많은 사람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도리와 글귀와 규례로만 삼아 지킬 뿐, 일을 처리하고 말하거나 또는 시련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도를 자신이 지켜야 할 도로 여기지 않는다. 특히 크나큰 시련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방향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나는 전혀 보지 못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극도의 반감과 혐오감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차례, 심지어 수백 차례 시련을 준 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겠다!’라는 결심을 드러내는 그 어떤 명확한 태도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이런 결심과 태도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전처럼 사람에게 긍휼과 관용, 포용과 인내를 베푸는 대신 극도의 실망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실망’은 누가 초래한 것이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누구에게 달려 있느냐? 하나님을 따르는 각자에게 달려 있다. 이토록 오랫동안 행한 사역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적지 않은 요구를 했고 사람에게 많은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실천했고 하나님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든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목표에 따라 명확하게 실천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한 마디로 종합한 말로 방금 우리가 언급했던, 사람이 왜 하나님의 도를 행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즉 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지 못하는지에 대해 해석해 보겠다. 이 말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할 대상이자 사역할 대상으로 여겼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원수이자 대립적인 상대로 여겼다는 말이다. 지금 이 사실에 대해 분명히 깨달았느냐? 사람의 태도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분명하다. 너희는 스스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길을 찾는 것, 하나님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것,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 등과 같은 내용들을 종합해 냈다. 하지만 너희가 도를 얼마나 많이 들었든지 상관없이, 너희가 스스로 종합한 내용들은 내 입장에서 봤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하나님의 도를 의식 있게 행한 것이 아니다. 그 내용들은 그저 너희가 어떤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한 경로일 뿐이다. 너희는 그런 목적들을 위해 억지로 규례들을 지키는데, 바로 그런 규례들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와 더욱 멀어지고 또다시 하나님과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얘기하는 주제가 다소 무겁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는 너희가 앞으로의 체험과 시간 속에서 방금 내가 말한 것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을 공기처럼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공기처럼 생각해 필요할 땐 존재한다 느끼고 불필요할 땐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끼지 말기를 바란다. 네가 잠재의식 속에서 그렇게 인식할 때는 이미 하나님을 노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저는 하나님을 공기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범위와 원칙 기준에 맞게 실천했지 제 뜻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실천 방식은 맞다. 하지만 일이 닥쳤을 때 너는 어떻게 생각했느냐? 일이 닥치면 어떻게 실천했느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할 때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여기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하나님은 공기처럼 생각하고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불쑥 드러내며 자신의 뜻대로 행하려 한다. 그럴 때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필요로 할 때는 하나님이 존재해야 하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긴다. 자신의 뜻대로 실행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하나님의 도를 찾을 필요가 전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사람이 지금 이런 상황과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은 위험한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니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제가 위험한 경계에 있든 어쨌든 저는 이렇게 오랫동안 믿어 왔으니 하나님은 저를 버리실 수 없을 거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차마 버리지 못하실 테니까요.”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모태에서부터 지금까지 사오십 년간 주님을 믿었어요. 시간으로 따지면 저는 가장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가장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오십 년간 저는 가정과 직장,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돈, 지위, 향락과 가족의 단란함 같은 것도 포기했습니다. 오랜 시간 맛있는 음식도 먹지 않고, 재미있는 것도 즐긴 적이 없으며 좋은 곳에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일반 사람이라면 견딜 수 없는 고통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지 않으신다면 너무 억울합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너희에게 실정을 알려 주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다 돌을 들어 제 발등을 찍는 존재들이다. 자신의 상상으로 자기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 상상과 규정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을 대체했고, 하나님의 진실한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실한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께 온전케 될 기회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무관한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방법과 기준

그 어떤 생각과 결정이 있기 전에 너는 우선 너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어떠하며,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사람의 결말을 시간을 기준으로 정한 적도, 받은 고통의 양에 따라 정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할까? 시간을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방법은 사람의 관념에 가장 부합한다. 또한 헌금을 많이 내고 헌신도 많이 하고 대가도 많이 치르고 고난도 많이 받는 등 너희가 종종 보게 되는 사람들은 다 너희의 관념으로 볼 땐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는 대상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보여 주고 살아 내는 것은 바로 사람의 관념 속에 있는,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기준인 것이다.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너희의 관념 속에 있는 기준들을 일일이 나열하지는 않겠다. 결론적으로 말해, 하나님이 생각하는 기준이 아니라면 모두 사람이 상상해 낸 것이고, 사람의 관념이다. 네가 계속 너의 관념과 상상을 고집한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그 결과는 아주 분명하다. 하나님은 너를 혐오하여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 원인은 네가 하나님의 마음과 뜻, 그리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알려고 하지 않고, 늘 하나님 앞에서 경험 많은 티를 내고,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며 논쟁하려고만 들기 때문이다. 너의 그런 행위는 자신을 높이는 것이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며,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원하지 않고 구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이런 관점을 버리고 지난날의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아 하나님의 요구에 따른다면 아주 좋겠다. 지금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행하고, 어디서든 하나님을 높이며, 자신의 상상, 관점으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규정하지 않으면 참으로 좋겠다. 매사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알고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흡족게 한다면 그야말로 너무나 좋겠다! 이는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곧 들어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이런저런 사상과 관점을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할까?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는 사람이 시련을 받는 횟수이고, 둘째는 시련을 통한 결과이다. 이 두 가지 기준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 이제 이 두 가지 기준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 보자.

첫째, 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준 시련이 닥칠 때(이 시련 역시 네 입장에서는 아주 사소하고 언급할 가치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손길이 임한 것이고,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임을 분명히 알게 해 줄 것이다. 너의 분량이 작다면 하나님은 네 분량에 맞고, 네가 깨닫고 감당할 수 있는 시련들을 마련하여 너를 검증한다. 너의 무엇을 검증하겠느냐? 하나님을 향한 너의 태도를 검증한다. 이 태도가 중요한 것일까? 당연히 중요하다! 그것도 특별히 중요하다! 이 태도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결과이기 때문에 사람의 태도는 하나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그토록 공을 들여 사람에게 이런 사역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너의 태도를 보려고 하고, 네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있는지 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당시 네가 깨달은 진리가 많든 적든 하나님이 주는 시련은 너에게 임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깨닫는 진리가 많아짐에 따라 하나님은 계속해서 너에게 알맞은 시련을 마련할 것이다. 너에게 또다시 시련이 임할 때, 하나님은 그때의 네 관점과 생각과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 발전이 있는지를 보고자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왜 자꾸 사람의 태도를 보려고 하시죠? 사람이 이렇게 진리를 실천하는 것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람의 태도까지 봐서 뭐 합니까?”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행한다는 건 그 속에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항상 사람의 곁에서 사람의 말과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마음과 생각까지 하나하나 다 살펴본다. 하나님은 사람의 선행, 사람의 잘못과 과오, 더 나아가 사람의 패역과 배반 등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일일이 기록하여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증거로 삼는다. 하나님의 사역이 점차 깊어질수록 네가 들은 진리도 점점 많아지고, 네가 받아들인 긍정적인 사물과 긍정적인 정보와 진리의 실제도 점점 많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높아질 것이며, 하나님은 너에게 더 큰 시련을 마련할 것이다. 이는 그 기간 하나님에 대한 너의 태도에 발전이 있었는지 검증하기 위함이다. 물론 그때 하나님은 너의 관점과 네가 깨달은 진리 실제가 서로 부합되기를 요구한다.

너의 분량이 점차 커짐에 따라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도 점차 높아질 것이다. 네가 어릴 때 하나님은 매우 낮은 기준을 설정해 주지만, 너의 분량이 좀 커졌을 때는 그에 상응해 조금 더 높은 기준을 설정해 줄 것이다. 그러나 네가 모든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할까? 하나님은 너에게 더 큰 시련이 임하게 할 것이다. 더 큰 시련 가운데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것과 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더 깊어진 네 인식과 진실한 경외심이다. 그때 하나님이 네게 요구하는 바는 네 분량이 작을 때의 요구보다 더 높고 ‘가혹’할 것이다(사람의 입장에서는 가혹하겠지만 사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아주 정당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시련을 주는 기간, 하나님이 이루려는 건 어떤 걸까? 하나님은 사람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어떻게 드려요? 저는 본분도 이행하고, 가정과 직장도 내려놓았고, 헌신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게 이미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표현 아닌가요? 거기다 더 어떻게 마음을 드리라는 겁니까? 설마 이런 방식들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행위가 아니란 말인가요? 하나님은 대체 구체적으로 뭘 요구하시는 건가요?” 그 요구는 매우 간단하다. 사실, 각 단계의 시련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정도는 다르나 이미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 한 번도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 적이 없다. 하나님이 너에게 시련을 줄 때, 하나님은 너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육체나 사탄에게로 향하고 있는지를 본다. 하나님이 너에게 시련을 줄 때, 네가 하나님과 대립하는 편에 서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입장에 서 있는지를 본다. 네 마음이 하나님 편에 있는지 없는지를 보는 것이다. 네가 어릴 때 네 믿음은 시련 가운데 한없이 나약하다. 깨달은 진리가 많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네가 진심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도하게 하고,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고자 한다면, 이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네가 들은 도와 깨달은 진리가 점점 많아지면, 너의 분량도 점차 성장하게 된다. 그때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네가 어릴 때 요구했던 기준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기준일 것이다. 사람이 마음을 점차 하나님께 드리게 되면, 마음이 점차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된다.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과 가까이할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점점 더 생기게 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이다.

하나님이 누군가의 마음을 얻으려고 할 때면 그 사람에게 여러 차례 시련을 준다. 시련들을 주는 기간,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그의 어떤 태도도 보지 못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실천과 태도를 보지 못하고, 악에서 떠나려고 하는 태도와 결심도 보지 못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 차례 시련을 준 뒤 그 사람에 대한 인내심을 접고, 더 이상 관용도 베풀지 않으며 시련도 주지 않을 것이다. 또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사역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결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의 결말은 결말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는 어떤 악행을 저지른 게 아닐 수도 있고, 방해와 교란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감추고, 하나님에 대해 명확한 태도와 관점을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 입장에선 그가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를 추구하고 있는지 명확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더 이상 인내해 주지도, 그 어떤 대가도 지불해 주지도, 긍휼을 베풀어 주지도 않고, 더 이상 그에게 어떤 사역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생애가 이미 끝난 것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준 여러 번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부 사람들에게서는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이 있었던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사람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겉으로는 열정적으로 뛰어다녔고 책도 많이 보고 일도 많이 했다. 필기 노트도 열권이 넘고, 글귀와 이치도 많이 이해했다. 하지만 발전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나 명확한 태도도 전혀 볼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은 늘 베일에 싸여 있고 봉쇄되어 있었다. 하나님을 향해 봉쇄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서 진실한 마음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외심도 보지 못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어떻게 행했는지는 더더욱 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지금까지도 얻지 못했는데 이후라고 얻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얻지 못할 대상에게 하나님이 강요를 하겠느냐?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런 부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어떠하겠느냐? (혐오하여 포기하시고 상대하지 않으십니다.) 상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고 혐오하여 포기한다. 너희는 그 말을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기억했구나. 아주 잘 알아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하나님을 따를 때 어리고 무지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도 몰라 인위적이고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 시련이 닥쳐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에 대해 아주 무감각하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시련 속에서 굳게 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느 정도의 기한을 주어 그 기한 내에 하나님이 주는 시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그런 다음 자신의 관점을 밝힐 수 있도록 한다. 하나님은 그 단계에 있는 사람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관점들로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려 흔쾌히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고, 일부 기본적인 진리들은 실천하면서도 큰 시련이 닥치면 이내 도망가고 포기하려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도 여전히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다. 그 결과는 사람의 태도와 행동에 달렸다. 사람이 적극적으로 발전해 나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느냐? 포기한다. 하나님이 너를 포기하기 전에 네가 이미 스스로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너는 하나님이 너를 포기했다고 탓해서는 안 된다. 네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의 궁색한 모습

또 다른 한 부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결말은 가장 비참하다. 그들은 내가 가장 언급하고 싶지 않은 부류이다. 그들의 결말이 비참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았거나 그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가혹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초한 일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자업자득’이다. 이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이냐? 바른길을 가지 않아서 일찌감치 결말이 드러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보기에 가장 혐오스러운 대상이다. 사람의 말을 빌려 하자면, 이런 사람은 가장 비참하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르면서 처음에는 무척 열성적이고 대가도 많이 치렀으며, 하나님 사역의 앞날을 아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상상으로 가득했다. 또 하나님에 대해서 믿음이 충만했으며,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고 사람에게 아름다운 종착지를 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역하는 기간 어떤 이유로 인해 도망가 버렸다. 이 ‘도망가 버렸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 버리고, 말 한마디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길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믿은 시간이 얼마나 오래됐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떠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떠났고, 어떤 사람은 살림 때문에 떠났으며, 어떤 사람은 큰돈을 벌러 갔고, 어떤 사람은 결혼하고 애를 낳는 삶을 위해 떠났다…. 이런 부류 사람 중 일부는 양심의 가책으로 돌아오려고 한다. 또 일부는 아주 비참하게 살고 있다. 세상에서 오랫동안 떠돌며 갖은 고생을 하고 나니 세상에 있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러면서 다시 하나님 집으로 돌아와 위로를 받고 평안과 기쁨을 얻으려고 한다. 계속 하나님을 믿으면서 재난에서 벗어나거나 구원받고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고자 한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큰 사랑은 한량없고, 하나님의 은혜는 무궁무진하여 사람이 이전에 어떠했든지 하나님은 자신을 용서해 주고 자기의 과거를 포용해 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끝마다 돌아와 본분을 이행하겠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얼마간 재물을 바치는 방법을 통해 다시 한번 하나님 집으로 돌아오려고 한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하나님은 그들의 결말을 어떻게 정할 것 같으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원래는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실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방금 교제를 듣고 나니 아마 다시는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유를 말해 보아라. (그런 사람은 죽지 않는 결말을 위해 하나님 앞에 오려는 것이지 진심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곧 끝난다는 것을 알고는 돌아와 복을 받으려는 헛된 꿈을 품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이 받아 주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그렇지? (네.) (제가 깨달은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기회주의자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으려고 오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기회주의자라고 말했다. 그것도 아주 잘 말했다! ‘기회주의자’는 누구나 다 증오한다.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고, 이익이 없는 일엔 움직이지 않으니 증오해야 마땅하다! 다른 관점을 가진 형제자매들이 있느냐? (다시 받아들이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하나님의 사역이 곧 끝나고 사람의 결말을 정하실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돌아오려고 하는 것은 진실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재난이 닥치는 것을 보았거나 어떤 외부 요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 참으로 진리를 추구할 마음이 있었다면 어떤 경우에도 도중에 도망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느냐? (받아들이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이 계속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들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든, 설령 정말 통회하고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기회를 주셨음에도 하나님을 떠나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지금 다시 돌아오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실 거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참도를 보고 하나님의 사역을 그렇게 오랫동안 체험했음에도 다시 세상으로, 사탄의 품속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배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긍휼과 사랑이지만 어떤 부류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 와서 위로와 기댈 곳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는 결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은 거기에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긍휼인데 왜 그런 부류의 사람에게는 더 이상 긍휼을 조금도 베풀지 않겠느냐? 조금이나마 긍휼을 베풀면 그에게도 기회가 생기지 않겠느냐? 이전에 사람들은 늘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지 아무도 침륜되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양 백 마리 중 한 마리를 잃으면 하나님은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그 한 마리를 찾으십니다.” 지금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점을 봐서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받아들이고 두 번째 기회를 주어야 할까? 이 문제는 사실 대답하기 어렵지 않다. 매우 간단하다! 너희가 정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 있다면 무수히 많은 설명과 추측이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의 대답들은 근접하긴 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방금 너희 중 일부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며 확신에 찬 관점을 이야기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받아들일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며 명확하지 않은 관점을 보였다. 비교적 중립적인 태도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받아들였으면 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애매모호한 태도다. 확신에 찬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이 이제는 끝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 필요가 없어져서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비교적 중립적인 사람들은 상황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한다면, 하나님은 지난날의 연약함과 잘못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를 용서해 다시 한번 기회를 주어, 하나님 집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다시 도망간다면 그때는 하나님이 그를 다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그 사람으로선 억울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대체 그 사람을 받아들일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만약 하나님이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하나님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자신과 하나님의 관점이 맞지 않는 것 같고, 반대로 하나님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하나님이 사람을 무한히 사랑하기에 기회를 한 번 더 주고 싶다고 하면 또 사람의 무지함이 드러나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너희는 각자의 관점들을 가지고 있다. 너희의 관점은 너희의 생각에서 비롯된 인식이다. 또한 진리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깨달음의 깊이가 드러난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으냐? 이 일에 대해 너희가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하지만 너희의 관점이 맞는지는 아직 의문이다. 너희들은 모두 걱정스럽지 않으냐? ‘어떤 관점이 맞는 걸까? 난 잘 알지 못하겠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모르겠어. 더구나 하나님이 알려 주신 적도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사랑이잖아. 지난날 하나님의 태도를 보면 하나님은 분명 받아들이실 거야. 하지만 하나님의 지금 태도는 어떠신지 잘 모르니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 아주 우스운 일 아니냐? 정말 너희를 난처하게 했구나. 이런 일에 대해 너희에게 올바른 관점이 없다면, 정말 그런 사람이 너희 교회에 찾아올 경우 어떻게 대처하겠느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거스를 수도 있는 일이다. 이건 아주 위험한 일이 아니냐?

방금 얘기한 이 일에 대해 내가 왜 너희의 생각을 물어보았겠느냐? 너희의 관점을 테스트하려 한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테스트하려 한 것이다. 답은 무엇이냐? 그 답은 너희가 말한 관점이다. 일부 사람들은 아주 보수적이고, 일부 사람들이 말한 것은 다 추측하고 상상해 낸 것이다. 무엇을 ‘추측’이라고 하느냐?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어 아무런 근거 없이 하나님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다. 사실 자기 자신도 옳은지 그른지 모르면서 그런 애매한 관점을 말한다. 이런 사실 앞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중요시하는 경우가 드물고, 하나님의 마음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경우도 너무도 적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거나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면 갈피를 못 잡고 당황해 추측하거나 아무 대답이나 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태도이냐? 이는 하나의 사실을 증명한다. 즉,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있는 듯 없는 듯한 공기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이렇게 말할까? 그것은 너희가 일이 닥칠 때마다 늘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왜 모를까? 지금 모르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태도를 꿰뚫어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할 때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구해 본 적이 있느냐? 교제해 본 적이 있느냐? 없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을 실증한다. 즉, 네가 믿는 하나님과 진정한 하나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너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신의 뜻만 되새기고 리더의 뜻만 되새기며, 하나님 말씀 겉면의 도리적인 뜻만 되새길 뿐,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거나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냐? 이런 상황의 본질은 아주 심각하다! 오랜 세월 나는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을 보아 왔다. 그들은 하나님을 무엇으로 믿어 왔느냐?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공기처럼 대하며 믿어 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답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느끼지도 의식하지도 못했고, 분명한 깨달음과 인식은 더 말할 나위도 없으며, 잠재의식상에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람처럼 대하며 믿어 왔다. 즉,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은 하나님도 하지 못한다고 여기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도 생각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또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목석으로 대하며 믿어 왔다. 그들은 하나님에겐 희로애락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석상 같아서 어떤 일에도 태도나 관점이나 생각이 없고, 사람의 뜻에 지배당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위대한 존재로 여겼다가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겼다가 하며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과 사랑이 필요할 때는 하나님이 마땅히 긍휼을 베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머리로 ‘하나님’을 상상해 낸다. 그렇게 상상해 낸 ‘하나님’이 자신들의 필요를 공급할 수 있게 하고, 자신들의 모든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게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이런 상상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하나님을 믿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으면서도 하나님이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량없고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로우니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거슬러도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의 잘못, 과오, 패역은 일시적으로 드러난 성품이니 하나님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관용을 베풀고 인내할 것이고,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므로 여전히 구원받을 가망이 많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믿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입장에선 사람에 대해 부정하는 태도를 취한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동안 하나님 말씀 책을 보배처럼 여기면서 날마다 보고 읽었겠지만, 막상 진정한 하나님은 한쪽에 방치해 두고 그를 공기처럼, 사람처럼 여겼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아예 목석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내 눈으로 본 바에 의하면 일이 닥치든, 어떤 환경을 만나든, 너희의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과 내면에서 나오는 것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무관했기 때문이다. 너는 그저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자신의 관점이 무엇인지만 안다.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억지로 하나님께 씌워 하나님의 관점이라고 할 뿐만 아니라 그 관점을 준칙으로 여겨 고수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너는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태도를 알고 하나님에 대한 각종 오해를 버려라

너희가 지금 믿고 있는 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그는 악인의 악행을 보면 증오할까? (네.) 그는 우매한 사람의 잘못을 보면 어떤 태도를 취할까? (슬퍼하십니다.) 그는 사람이 제물을 훔쳐 먹는 것을 보면 어떤 태도를 취할까? (증오하십니다.) 다들 잘 알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흐리멍덩히 믿으면서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너희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 ‘흐리멍덩한’ 태도는 죄를 짓거나 하나님을 거스른 것이 아니니 사람은 그렇게 큰 잘못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말해 보아라.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상대하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상대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바로 이런 자를 경시하고 멸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 대해 차갑게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다. 한쪽에 내버려 두는 것이다. 즉, 깨우침과 빛 비춤, 채찍질과 징계 등 그 어떤 사역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열외로 취급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거슬러 노하게 하고 자신의 행정 법령을 거스른 사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까? 극도로 혐오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거슬러 노하게 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해 극도로 노한다! ‘노’는 일종의 정서이고 심정일 뿐 명확한 태도를 뜻하지는 않지만 이런 정서와 심정은 그 사람에게 어떠한 결말을 가져다줄 것이다. 하나님이 극도로 혐오하는 결말이다! 그렇다면 ‘극도로 혐오’하여 초래되는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일단 상대하지 않고 한쪽에 내버려 두었다가 ‘추수 후’ 일괄적으로 처리한다. 그 뜻은 무엇이겠느냐? 그런 사람에게 결말이 있겠느냐? 하나님은 이 부류 사람들에게 결말을 줄 생각이 없다! 그러니 하나님이 지금 이런 자들을 상대하지 않는 것은 매우 정상 아니냐? (맞습니다.) 이런 사람은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느냐? 자신이 저지른 악행과 자신의 행위로 초래된 나쁜 결과를 감당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이 이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 부류의 사람들에게 명확히 알려 주겠다. 어떤 환상도 가지지 말고, 더 이상 그 어떤 요행심도 품지 마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관용을 끝없이 베풀지 않을 것이고, 사람의 과오와 패역을 한없이 참아 주지도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도 그 부류의 사람들을 몇몇 만나 봤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큰 감동을 받아 눈물 흘리며 통곡하더군요. 평소에도 무척 즐거워하는 걸 봐선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인도가 있는 것 같았어요.” 이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 눈물 흘리며 통곡한다고 해서 꼭 하나님께 감동받거나 하나님이 함께한다고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인도가 있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을 거슬러 노하게 했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인도하겠느냐?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도태시키고 포기하려고 작정했을 때는 이미 그 사람의 결말은 없어진 것이다. 그가 기도하며 스스로 얼마나 만족스러워하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얼마나 크든 그런 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이미 그를 혐오하여 포기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앞으로 그런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가 하나님을 거슬러 노하게 한 그 순간 그의 결말은 이미 정해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만약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면, 하나님은 그를 남겨 두었다가 벌을 받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태도이다.

하나님의 본질에는 사랑이라는 요소가 있어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푼다. 하지만 사람은 그의 본질에 존엄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잊어버린다. 그에게 사랑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그를 제멋대로 거슬러도 아무 느낌과 반응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에게 긍휼이 있다고 해서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원칙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고 진실로 존재하는 분이지, 사람이 상상해 낸 목석이나 어떤 물체가 아니다. 그가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마땅히 매 순간 그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태도를 중시하며, 그의 느낌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상상으로 하나님을 규정해서는 안 되고, 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바라는 바를 하나님께 강요하여 사람의 방식과 상상대로 사람을 대해 달라고 해서도 안 된다. 네가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을 거슬러 노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노를 시험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엄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이 심각성을 알았다면 너희 모두 조심스럽게 행하고, 말하며, 하나님을 대할 때 부디 신중하고 또 신중하며 조심하고 또 조심하기를 권고한다! 하나님의 태도가 어떤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함부로 말하지도, 일을 하지도 말며, 함부로 딱지를 붙이지 말고, 함부로 결론짓는 일은 더욱 하지 말아야 한다. 기다리면서 구해야 한다. 이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행실이다. 네가 우선 이렇게 행할 수 있고 이런 태도를 갖출 수 있다면, 하나님은 네가 무지몽매하고 사리를 모른다고 탓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는 너의 태도로 인하여 너를 기억하고 인도해 깨우쳐 주거나 혹은 어리고 무지한 너에게 관용을 베풀어 줄 것이다. 그와 반대라면, 함부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뜻을 추측하며 정의를 내리는 너의 오만불손한 태도 때문에 하나님은 너를 정죄하고 징계할 것이다. 나아가 너에게 벌을 주거나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 결론은 아마 너의 결말과 관련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너희 모두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대함에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한다.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일해서도 안 된다.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일까?’라고 생각해 봐야 한다. 단순한 일일지라도 마음속으로 많이 되새겨 보고 많이 생각해 봐야 한다. 네가 정말 언제 어디서나 매사에 이런 원칙에 따라 실천하고, 특히 네가 모르는 일에서도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너를 인도하며 실천의 길을 열어 줄 것이다. 사람이 어떤 행실을 보이든 하나님 쪽에서는 모든 걸 분명하고 명확하게 보고 있을 것이며, 너의 행실에 따라 정확하고 합당한 평가를 내려 줄 것이다. 네가 마지막 시련을 겪을 때, 하나님은 너의 모든 행위를 종합하여 너의 결말을 정할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진심으로 탄복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너희가 행한 모든 것과 마음속으로 생각한 모든 것이 너희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결말은 누가 정하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하는 너희의 태도이다. 이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이 태도는 너희가 최종적으로 멸망에 이를지, 아니면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예비한 아름다운 종착지에 들어갈 것인지를 결정한다.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에 하나님은 이미 20년 넘게 사역하였다. 20년이 넘는 이 기간 동안 너희는 자신의 행실에 대해 다소 모호하겠지만,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모든 사람의 행실을 확실하고 진실하게 기록해 놓았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고 자신이 전하는 도를 듣기 시작해서부터 점점 더 많은 진리를 깨닫고 본분을 이행하기까지, 사람이 이 기간에 보였던 각종 행실을 다 기록해 두었다.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여러 가지 환경이나 시련이 닥치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여러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마음속으로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등을 하나님은 기록부에 다 기록해 두었다. 이런 일들이 너희에게는 아마 무척 흐릿하겠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전혀 흐릿하지 않고 매우 분명하다. 모든 사람의 결말, 모든 사람의 운명 및 앞날과 관련 있으며, 하나님의 모든 심혈이 들어가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 쪽에서는 조금도 등한시하지 않고 한 치의 소홀함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을 위해 이런 기록부를 작성하는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따른 노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해 두고 있다. 이 기간 하나님을 대하는 너의 태도가 어떠했는지가 바로 너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는 무척 진실하지 않으냐? 지금까지 너희는 하나님이 매우 공의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것은 아주 적절하지 않으냐?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또 다른 상상을 하고 있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희의 결말을 하나님이 정하는 건지, 아니면 사람이 스스로 정하는 건지 말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누가 정한다고? (하나님이요.) 여전히 모르는구나! 홍콩의 형제자매들이 먼저 말해 보아라. 누가 정하느냐? (사람이 스스로 정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정한다고? 그 말은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다는 뜻이냐? 한국의 형제자매들이 말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든 행위와 가는 길에 근거해 사람의 결말을 정하십니다.) 객관적인 대답이었다. 너희에게 알려 줘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하나님은 구원 사역을 하는 기간 사람에게 기준을 하나 정해 주었다. 그 기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것이다. 이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가늠한다. 네가 하나님의 이 기준에 따라 행한다면 좋은 결말을 얻을 것이다. 반대로 이 기준에 따라 행하지 않는다면 좋은 결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결말을 누가 정하는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정하는 것이다. 이 말이 맞느냐? (맞습니다.) 왜 이렇게 말할까?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구원 사역을 하며 아름다운 종착지를 예비해 준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역하는 대상으로, 위에서 말한 결말과 종착지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비해 주는 것들이다. 사역 대상이 없다면 하나님은 이런 사역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사역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구원받을 기회가 없어진다. 사람은 구원받는 대상이다. 구원받는 대상이란 게 수동적이긴 하지만 이 대상의 태도가 하나님의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결정된다. 하나님의 인도가 없으면 너는 기준도 모르고 목표도 없다. 기준과 목표가 있더라도 네가 협력하지 않고 실천으로 옮기지 않고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너는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결말은 하나님과도, 사람과도 떨어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 대체 누가 결말을 정하는 건지 알았겠지?

사람은 경험으로 하나님을 규정하기 좋아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한 주제를 교제할 때, 너희는 어떤 사실 하나를 발견하지 못했느냐? 지금 하나님의 태도가 바뀐 것을 발견하지 못했느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고정불변한 것이냐? 하나님이 계속 그렇게 인내하고, 계속 사랑과 긍휼을 사람에게 무제한으로 베풀어 주겠느냐? 이는 하나님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 조금 전 이야기했던 소위 탕자의 회개에 대한 주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질문을 했을 때, 너희의 대답은 그리 명확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너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의 상징으로 규정해 버린다. ‘하나님께는 사랑이 있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한량없기 때문에 사람이 무엇을 하든, 어떻게 행동하고 하나님을 대하든, 어떻게 거역하든 다 괜찮아.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사람을 포용해 주시고 긍휼히 여겨 주실 거야. 어리고 무지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사람의 패역도 긍휼히 여기실 거야.’ 정말 그러할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인내를 한 차례 혹은 몇 차례 느끼고 난 후 그 경험을 하나님을 알게 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한 번으로 인해 하나님은 영원히 자신을 인내해 주고 긍휼히 여겨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내가 자신을 대하는 하나님 태도의 기준이라고 평생토록 여긴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한 번 관용을 베푼 것을 가지고 영원히 관용을 베풀어 줄 거라고 규정지어 버린다. 게다가 그 관용이란 기한도 조건도 없고, 나아가 아무 원칙도 없는 관용이다. 이런 인식법이 맞느냐?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너희는 어리벙벙해지는데, 너희의 그런 모습을 보면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다. 너희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진리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얘기를 적지 않게 들었다. 하지만 너희 머릿속에는 이런 내용들과 이런 측면의 진리들이 그저 이론과 글자로만 기억되어 있을 뿐, 지금까지 아무도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지 느끼거나 보지 못했다. 그래서 너희 모두 흐리멍덩하고 맹목적으로 믿고 있고, 하나님에 대해 오만불손하고 무시하는 태도까지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이런 태도로 어떤 상황이 초래되었느냐? 너희는 늘 하나님을 규정하게 되었다. 조금만 알아도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하나님의 전부를 얻었다고 생각하곤 하나님을 그곳에 규정지어 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그러다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하면 그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어느 날 하나님이 “나는 더 이상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더 이상 긍휼을 베풀어 주지 않는다. 나는 사람에게 더 이상 그 어떤 관용과 인내도 베풀지 않는다. 나는 사람에게 극도의 혐오감과 반감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면 사람은 속으로 이 말에 반발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더 이상 저의 하나님이 아니고, 더 이상 제가 따르려고 했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당신은 저의 하나님이 될 자격이 없고 저는 당신을 계속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저에게 긍휼과 사랑과 관용을 베풀어 주시지 않는다면 당신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저에게 한없이 관용을 베풀어 주시고 인내해 주시면서 사랑과 인내와 관용이 있는 분이심을 보여 주셔야 저는 당신을 따를 것이고, 끝까지 따라갈 자신이 있습니다. 당신의 인내와 긍휼이 있어야 저의 패역과 과오가 한없이 용서받고 죄 사함 받을 수 있으며, 그래야 제가 언제 어디서 죄를 지어도 언제든 죄를 자백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제가 언제 어디서 당신을 거슬러 노하게 해도 당신은 저에 대해 그 어떤 견해를 가지거나 규정을 내려선 안 됩니다.” 물론 사람마다 마음속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 이렇게 주관적이고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죄를 사해 주는 도구나 아름다운 종착지를 가져다주는 이용 대상으로 생각할 때, 너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생생히 살아 있는 하나님을 네 대립 면에 놓고 원수로 삼은 것이다. 이것이 내 눈에 비친 모습이다. 네가 아무리 말끝마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저는 진리를 추구합니다”, “저는 성품이 변화되고 싶습니다”, “저는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충성하며 본분을 잘 이행하고 싶습니다” 등등 듣기 좋은 말을 하고, 번지르르 그럴듯한 이론을 많이 갖추었다 할지라도, 실제론 지금껏 많은 사람이 자신이 익힌 규례나 도리, 학설로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을 배웠고, 그렇게 자연스레 하나님을 자신과 대립하는 편에 놓아두게 되었다. 글귀와 도리는 익혔지만 진정으로 진리의 실제에는 진입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알며,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기가 매우 어렵다. 이는 참 슬픈 일이다!

나는 동영상에서 몇몇 자매가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책을 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자신들의 머리 위로 매우 높이 받쳐 들고 있었다. 한 장면이었지만 내게는 하나의 장면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은 나로 하여금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높이 받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 책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였다. 이는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높이 받드는 것이 전혀 아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주 분명한 문제와 아주 작은 문제에서도 마음속에 관념을 갖게 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질문을 던지며 진지하게 파고들 때 너희의 대답은 상상과 추측 일색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의심스러운 말투로 반문하기까지 한다. 나는 이런 태도들을 보고 너희가 참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님을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하나님 말씀을 읽은 후 너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과 많은 도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규정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려고 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가 어떠한지,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나님이 왜 슬퍼하는지, 왜 노하는지, 왜 사람을 혐오하여 포기하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전혀 알아보지 않는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각종 행실을 보기만 할 뿐 아무런 태도도, 생각도 없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 것은 묵인했기 때문이라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나님께 아무런 태도도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태도를 이미 책에서 다 말씀했고, 이미 사람에게 다 나타냈으니 수시로 반복해서 사람에게 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은 침묵을 지키지만 여전히 태도와 관점이 있으며, 사람에 대한 요구 기준이 있다. 설령 사람이 그를 알아 가지 않고 그에게 구하지 않을지라도 그의 태도는 매우 명확하다. 한때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따르던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다 다시 돌아오려고 하는 상황에 대해 놀랍게도 너희는 하나님의 관점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이는 무척 가슴 아픈 일이 아니냐? 사실 이건 정말 단순한 상황이다. 너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다면 이런 사람에 대한 그의 태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고, 애매모호한 대답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가 모르고 있으니 내가 알려 주겠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기간 도망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하나님의 도에 대해 확신했으면서도 여러 이유로 인해 아무 말 없이 떠나 버리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 그들은 작별 인사도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마음대로 떠나 버린다. 그런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일단 접어 두고, 먼저 그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살펴보자. 하나님의 태도는 아주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떠난 그 순간부터 그의 하나님을 믿는 생애는 이미 끝난 것으로 간주한다. 그 사람이 스스로 마침표를 찍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마침표를 찍어 준 것이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건 이미 하나님을 원치 않아 저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고,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데 하나님이라고 그를 원하겠느냐? 또한 이런 태도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떠나려고 작정했을 때 그는 이미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노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은 길길이 날뛰면서 하나님께 손가락질하며 욕하지 않았고, 과격하거나 악랄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밖에서 놀 만큼 놀았거나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그때 다시 돌아올 거야. 혹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다시 돌아올 거야.’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제가 밖에서 상처 입거나, 바깥세상의 어둡고 사악한 면을 보고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싶지 않게 되면, 다시 돌아와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 다시 돌아올 거라고 속으로 계산해 놓았고, 자신을 위한 퇴로를 남겨 두었지만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자신들이 어떤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있든 그것은 혼자만의 바람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자신들이 떠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한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떠나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 사람을 철저히 포기했고, 속으로 이미 그의 결말을 정해 두었다. 어떤 결말일까? 그 사람을 쥐들과 같이 분류해 두었다가 그 쥐들과 함께 멸망당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종종 보게 된다. 누군가 하나님을 저버렸는데 징벌을 받지 않는 상황 말이다. 하나님은 원칙 있게 일을 한다. 어떤 일들은 사람이 볼 수 있지만, 어떤 일들은 하나님이 마음속으로만 정해 뒀기에 사람은 그 결과를 보지 못한다. 사람의 눈에 보인다고 해서 진실한 일면이라고 할 수는 없다. 네가 보지 못한 일면이야말로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진실한 생각과 결정이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기간 도망친 사람은 참도를 배반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기간 도망친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왜 이렇게 심한 징벌을 내릴까?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에게 이렇게 크게 노할까? 먼저 하나님의 성품은 위엄과 진노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아무에게나 죽임을 당하는 온순한 양이 아니고, 사람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꼭두각시는 더더욱 아니며, 사람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공기도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네가 참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거슬러 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거슬러 노하게 한다’는 것은 아마 한 마디 말 때문일 수도 있고, 어떤 생각 때문일 수도 있으며, 어떤 악랄한 행위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어떤 아주 온화한 행위, 사람의 관점에서나 사람의 도덕 윤리적 관점에서 봤을 땐 넘어갈 수 있는 행위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학설이나 이론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네가 일단 하나님을 거슬러 노하게 하면 너의 기회는 사라져 버리고, 그에 따라 너의 마지막 날도 다가오게 된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네가 만약 하나님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걸핏하면 하나님을 거스르게 될 것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하나님의 도를 어떻게 행해야 할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일단 네 마음속에 하나님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생기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인지 알게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도는 네가 많은 진리를 깨닫고 시련을 겪고 징계를 경험해야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네 마음속 태도와 네가 드러내는 본질이다. 사람의 본질과 사람의 주관적인 태도가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하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떠난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시하는 태도와 진리를 혐오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노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기에 그들은 영원토록 용서받지 못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하나님이 이미 왔다는 소식도 들었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도 체험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미혹된 상황이나 흐릿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고, 강요당해 떠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의식과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들은 방향을 잃거나 버려지게 되어 떠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기에 그들은 양 떼에서 잃어버린 어린양이 아니고, 방향을 잃은 탕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들은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떠난 사람들인데, 그들의 이런 상태와 상황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노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노하게 한’ 것이 그들에게 수습할 수 없는 결말을 가져다준 것이다. 이런 결말이 무섭지 않으냐?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을 거스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절대 사소한 일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 하나님은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을 거라고 여기고, 자신은 하나님의 잃어버린 어린양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직도 그가 마음을 돌려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징벌받을 날이 멀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거기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다시 한번 거슬러 노하게 만들었다. 이는 더욱 무서운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 사람의 오만불손한 태도가 이미 하나님의 행정 법령을 거슬렀는데, 하나님이 그를 받아들이겠느냐? 사람이 참도를 확신한 후 의식이 또렷하고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멀리해 떠난다면, 하나님은 그가 구원받는 길을 막아 버린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대문은 그 순간부터 그 사람에게는 닫힌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런 일을 처리하는 원칙이다. 그 사람이 다시 문을 두드릴 때 하나님은 더 이상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이며, 그는 영원히 문밖에 버려질 것이다. 너희 중 일부는 아마 성경 속 모세 이야기를 읽어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세운 뒤 250명의 족장들은 모세의 여러 행실과 각종 이유 때문에 불복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그들은 누구에게 불복한 것이냐? 그들은 모세에게 불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배에 불복한 것이고, 하나님의 행사에 불복한 것이다. 그들은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이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사람이 보기에 매우 심각하냐? 심각하지 않다. 최소한 글자 자체로 표현된 뜻은 심각하지 않고, 법적으로도 별일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반항하는 말이나 단어가 없고, 모독의 뜻도 없다. 그저 평범한 말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이 한마디가 하나님의 큰 노를 불러일으켰을까? 그들의 이 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 몇 마디 말에 나타난 성품과 태도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 거슬러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다. 그들의 최종 결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일찍이 하나님을 떠난 적이 있는 사람의 관점과 태도는 무엇이고, 왜 그의 관점과 태도는 하나님의 이런 처분을 초래한 걸까? 그 이유는 하나님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배반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받을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한 것이다. 성경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히 10:26)라고 한 것과 같다. 이제는 이 일에 대해 잘 알았겠지?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하나님이다. 어떤 일에 부딪히면 사람들은 각기 다른 행실을 보인다. 하나님은 사람의 각기 다른 행실에 따라 다른 태도를 취하는데, 이는 그가 목석도 아니고 공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태도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태도를 알아 가면서 조금씩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조금씩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다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을 쉽게 규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을 규정하지 않게 되면 하나님을 쉽게 거스르지 않을 것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알게 해 줄 것이다. 이로써 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는 글귀의 이치나 이론을 하나님께 씌우지 않고,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하는 사역을 보지 못하고 짐작하지도 못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의 행위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볼 수도 있다. 이는 사람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부분이다. 만약 네가 속으로 늘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고 해 보자.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하는 걸 하나님이 아실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걸 하나님이 아실까? 아실 수도 있고 모르실 수도 있을 거야.’ 네가 한편으론 이런 관점을 가진 채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또 한편으론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다면 언젠가는 하나님을 거슬러 노하게 할 것이다. 너는 이미 위험한 경계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으면서도 진리 실제를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은 더더욱 모르며, 생명과 분량이 전혀 자라지 않는 사람, 얕디얕은 수준의 도리밖에 지키지 않는 사람 말이다. 그렇게 된 원인을 살펴보면 그들은 지금껏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고, 하나님의 존재를 직시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보면 기뻐하겠느냐? 마음에 위로가 되겠느냐?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방식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추구하고 하나님을 대하는지, 사람의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을 공기처럼 여겨 뒷전에 미뤄 두지 말고, 네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 있고 확실히 존재하는 하나님임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는 셋째 하늘에서 할 일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시시각각 사람들의 마음과 모든 언행을 감찰하고 있으며, 너의 행실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감찰하고 있다. 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기 원하든 원치 않든 너의 모든 행위와 마음과 생각은 다 하나님 앞에 놓여 있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고 있다. 너의 일거수일투족으로 인해, 너의 태도로 인해 하나님은 끊임없이 너에 대한 견해를 바꾸고 있고, 너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일부 사람들에게 충고하고자 한다. 자신을 하나님 손안의 귀염둥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너를 매우 총애하고 하나님에겐 네가 없으면 안 된다고 착각하지 말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고정불변이라고 착각하지도 말아라. 꿈꾸지 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의롭게 대한다. 그는 아주 신중하고 엄숙하게 정복 사역과 구원 사역을 행한다. 이것이 그의 경영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엄격하고 진지한 태도로 대한다. 사람을 애완동물처럼 어르고 달래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총애나 지나친 애정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긍휼과 관용은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방임이 아니다. 반대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아끼고, 가엾게 여기며,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긍휼과 관용에는 그의 기대가 깃들어 있으며, 그의 긍휼과 관용은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밑천이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분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분이다. 사람에 대한 그의 태도에는 원칙이 있다. 그 원칙은 바뀔 수 있는 것이지 절대로 규례가 아니다. 인류에 대한 그의 마음은 시간과 환경에 따라,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점차 바뀌고 달라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은 변함이 없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아마 너는 이 일을 그리 심각하지 않게 여기면서 너의 고정 관념으로 하나님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상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일은 너의 관념과 정반대이다. 네가 자신의 관념으로 하나님을 가늠하는 순간, 너는 이미 하나님을 거슬러 노하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네 상상대로 행하지 않을 것이고, 절대로 너의 말처럼 일을 대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신중하게 대하라고 일깨워 주고자 한다. 또한 범사에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것,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원칙에 따라 실천하는 법을 배우라고 일깨워 주고자 한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태도에 관한 일을 대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올발라야 하고, 분별이 있는 사람들과 교제하며 성실히 구해야 한다. 네가 믿는 하나님을 장난감처럼 여겨 함부로 판단하거나 결론을 내리거나 오만불손한 태도로 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고 너의 결말을 정하는 과정에서 너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든, 심판과 형벌을 주든 결론적으로 너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너의 태도와 인식에 달려 있다. 네가 하나님의 어떤 면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영원히 하나님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 죽은 하나님을 믿지 말고 살아 있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기억했겠지? 내가 한 말들은 사실이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지금 너희의 내적 상태와 분량을 감안해 나는 더 높은 요구로 너희의 적극성을 꺾고 싶지 않다. 그런 식으로 너희 마음을 처량하게 만들거나 하나님에 대해 큰 실망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반대로 나는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존중하는 태도로 앞을 향해 나아가기 바란다. 하나님을 믿는 일을 흐리멍덩하게 대하지 말고, 가장 큰 일로 여겨 마음속에 담아 두고, 실제와 연결 짓고 실생활과 연결 짓기를 바란다. 입에만 달고 있지 말아라. 왜냐하면 이 일은 목숨과 결부된 일이고, 너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우스갯소리나 아이들 장난으로 여기지 마라! 오늘 너희와 나눈 말을 통해 너희가 뭐라도 깨닫고 얻은 것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한 말에 대해 또 궁금한 것이 있느냐?

이런 주제는 다소 새롭기도 하고, 너희의 관점이나 너희가 평소 추구하고 중시하던 것과는 좀 거리가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교제하고 나면 내가 한 말들에 대해 너희에게 공통의 인식이 생길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주제들은 아주 새롭고 너희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다. 이런 말들이 너희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오늘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은 너희에게 겁을 주거나 이런 방식으로 너희를 책망하려는 게 아니라 진실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태도도 알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 그렇게 열성적으로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무턱대고 믿다 보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흐리멍덩하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해 너희가 알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즉, 너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각 부류의 사람에 대한 그의 태도는 어떤지, 너희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그의 요구와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 그가 요구한 기준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에 대해 말이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너희들 각자의 마음속에 판단의 기준이 생겨 자신이 이 길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아직 얻지 못한 것은 얼마나 되는지, 아직 발을 들여놓지 않은 영역은 무엇인지 알게 하려는 것이다. 평소 너희가 교제할 땐 일부 사람들이 늘 말해 오던 주제만 다루다 보니 교제의 범위가 매우 좁고 내용도 너무 얕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범위 기준과 거리가 멀고 차이도 난다. 계속 이대로 나간다면 하나님의 도에서 점점 멀어질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기존 말씀을 그저 숭상할 대상으로 삼고, 의식과 규례로만 삼게 될 뿐이다. 그게 다이다! 사실 너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전혀 없고, 또 하나님은 지금까지 너희 마음을 얻은 적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일이 매우 어렵다고 여긴다. 그것도 솔직한 말이다. 확실히 좀 어렵다. 본분을 이행할 때 사람에게 외적인 일을 하라고 하거나 열심히 일하라고 하면 하나님을 믿는 일이 아주 쉽다고 여길 것이다. 이는 다 인류의 능력 범위 안에 있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관련된 영역은 사람에게 있어 분명 어려움이 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는 일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어려움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네가 첫걸음을 떼고 진입하기 시작하면 어려움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시작이다

방금 누가 “저희는 하나님에 대해 욥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데 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까요?”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선 전에도 살짝 언급한 적이 있다. 사실 우리는 이 문제의 본질에 대해서도 얘기했었다. 당시 욥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했고, 하나님을 천지 만물의 주재자로 여겼다. 그는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지 않았고 창조주로 여겨 경배했다. 그런데 지금의 사람은 왜 하나님을 이렇게도 대적할까? 왜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할까? 첫 번째 원인은, 지금의 사람은 사탄에 의해 심히 패괴되었고, 사탄의 본성이 깊이 뿌리박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과 맞서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본성으로 결정된 것이다. 두 번째 원인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는 있지만 하나님을 전혀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고, 사람의 대립 상대로 여기고 사람의 원수로 여기면서 하나님과 맞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원인은 이처럼 간단하다. 이것도 조금 전 교제할 때 언급하지 않았느냐?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이 원인이 맞지 않으냐? 설령 네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좀 있을지라도 너의 인식은 어떤 것이냐? 모두들 이야기하고 있는 것 아니냐? 하나님이 알려 준 것 아니냐? 너는 고작 이런 것과 관련된 이론과 도리만 알 뿐이다. 하나님의 진실한 일면에 대해 깨달은 것이 있느냐? 주관적인 인식을 갖고 있느냐? 실제적인 인식과 체험이 있느냐? 하나님이 알려 주지 않는다면 알 수 있겠느냐? 이론을 알았다고 해서 진실한 인식을 갖추고 있음을 뜻하는 건 아니다. 결론적으로 네가 어떻게 알게 되었든, 얼마나 알고 있든 하나님을 진실하게 알기 전까진 하나님은 너의 원수인 것이다. 또한 네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기 전까진 하나님은 여전히 너와 대립되는 지점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네가 사탄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네가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너는 아마 하루 세끼 시중들며, 차를 대접하고 물을 떠다 드리며, 그의 생활을 돌볼 것이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 같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이 생기면 사람의 관점은 늘 하나님과 어긋나고, 사람은 늘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람이 겉으로는 그와 화목하게 지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그와 마음이 잘 맞음을 뜻하진 않는다. 일단 일이 생기면 사람은 거역하는 본색을 드러낸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대치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렇게 대치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대립하는 것도, 하나님이 사람을 적대시하는 것도,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과 대립되는 지점에 놓고 대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주관적인 의지와 잠재의식 속에 하나님과 대립되는 이런 본질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기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대하거나 하나님과 관련된 것을 대할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은 추측과 의심이다. 그런 다음 사람은 재빨리 저항하는 태도를 취하여 하나님과 대립할 것이다. 이어서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하나님을 ‘논박’하거나 하나님과 겨루려 들 것이다. 심지어 이런 하나님을 따를 가치가 있는지 의심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더라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이 선택을 끝까지 고수할 것이다. 가령 하나님에 관한 어떤 유언비어나 비방을 들었을 때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무엇일까? ‘그 유언비어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존재하는지, 아닌지 모르니 조용히 지켜봐야지.’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런 다음 ‘이 일이 정말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네. 이 유언비어는 진짜일까?’라고 생각해 본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이미 의심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을 부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태도와 관점은 어떤 본질을 지니고 있느냐? 배반이 아니냐? 이 일이 닥치기 전까진 그 사람의 관점이 보이지 않으니 그는 하나님과 대립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그 사람은 즉시 사탄의 편에 서서 하나님과 대립한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느냐? 사람은 하나님에게 대립적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이 사람을 원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본질 자체가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따른 시간이 얼마나 오래되었든, 지불한 대가가 얼마나 되었든,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하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어떻게 억제하든, 심지어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할지라도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못한다. 이것은 사람의 본질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냐? 네가 그를 하나님으로 대하고 정말 하나님으로 여긴다면 그에 대한 의심이 생길 수 있겠느냐? 마음속에 그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겠지? 이 세상 풍조가 이렇게 사악하고, 이 인류가 이렇게 사악한데 너는 왜 그들에 대해서는 관념을 가지지 않는 것이냐? 너 스스로가 그렇게 나쁜데 왜 관념을 가지지 않느냐? 몇 마디 유언비어나 비방으로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큰 관념과 그렇게 많은 생각을 갖는데, 너의 분량이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다. 모기나 역겨운 파리 몇 마리가 ‘앵앵거렸을’ 뿐인데 미혹되었단 말이냐?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느냐? 사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아주 분명하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차갑게 무시해 버린다. 아예 상대하지 않는다. 이 무지한 자들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는 그를 필사적으로 적대하려고 하고, 그의 마음에 합하는 길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얻을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해서 또 일부에게 상처를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너희는 내가 계속 이렇게 너희에게 상처 주는 것을 원하느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쨌든 내 말은 사실이다! 내가 계속 이렇게 너희에게 상처를 주고 늘 너희의 흉터를 들춰내면 너희 마음속에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 (아닙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애초에 너희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애써 지키고 보호하는 위대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상상해 낸 것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밝히는 편이 좋겠다. 그러면 ‘진상이 환히 드러나지’ 않겠느냐? 참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해 낼 수 있는 분이 아니니 너희 모두 현실을 직시하기 바란다. 그래야 너희가 하나님을 알아 가는 데에 유익하다.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

어떤 사람들의 믿음은 하나님께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따른 시간이 얼마나 되었든 그들의 생각과 관점은 바뀐 적이 없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의 처세 원칙과 방식을 지키고 있고, 이방인과 같은 생존 법칙과 신념을 지키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믿은 적이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려고 한 적도 없고,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취미로만 믿을 뿐이고, 하나님을 정신적 의지처로만 여길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은 알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다시 말해, 진정한 하나님의 모든 것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그들은 관심을 가지려고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늘 ‘하나님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하는 강렬한 목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고, 자신을 우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입으로만 인정하면서 그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고 그 어떤 실제적인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진짜 현명한 것이라고 여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볼까?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인으로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방인이 하나님 말씀을 읽을 수 있나요? 본분을 이행할 수 있나요?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말을 할 수 있나요?” 사람들이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다 외적 행실이지 사람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인 행실을 보지 않고 사람의 내적 본질만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들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하고, 이런 정의를 내리게 된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죠? 하나님은 왜 저렇게 하시죠? 난 이 일을 납득할 수 없고 저 일도 납득할 수 없어요. 이 일은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아요.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해 주셔야 합니다….” 이런 말에 나는 이같이 답할 것이다. “너에게 설명해 줄 필요가 있느냐? 이 일이 너와 상관이 있느냐? 너는 누구냐? 너는 어디서 왔느냐? 네가 하나님에 대해 흠잡을 자격이 있느냐? 네가 그를 믿기라도 하느냐? 그가 너의 믿음을 인정하느냐? 너의 믿음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그의 행사가 너와 또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하나님 마음속에서 너의 위치가 어떤지도 모르는데, 네게 하나님과 대화할 자격이 있겠느냐?”

훈계의 말씀

너희는 이 말을 듣고 무척 괴롭지 않으냐? 듣기 싫거나 받아들이기 싫을지라도 이는 다 사실이다. 이 단계의 사역은 하나님이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태도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알아 가지 않는다면, 최종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은 너 자신이다. 너희는 내 말이 듣기 거북하다고 탓하지 말고, 내 말이 너희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다고 탓하지도 마라. 내가 말하는 것은 다 사실이지 너희에게 타격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어떻게 하라고 요구하든 모두 너희가 올바른 길을 가기 바라고, 너희가 올바른 길에서 빗나가지 말고 하나님의 도를 행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그의 도를 지키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을 거역하며 올바른 길에서 엇나가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너희에게 명확히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너희가 흐리멍덩하지 않고 아주 분명하고 정확하게 믿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태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온전케 하는지,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지를 너희가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말이다. 언젠가 네가 따라가지 못하게 되더라도 나는 이미 내게 책임이 없다고 할 것이다. 나는 이미 많은 말을 분명히 해 주었기 때문이다. 네가 자신의 결말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전적으로 너에게 달렸다. 하나님은 각기 다른 태도로 사람들의 결말을 대하고 있다. 그에게는 자신만의 가늠 방식이 있고, 자신만의 요구 기준이 있다. 그 가늠 기준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 이유로 어떤 이들의 걱정은 불필요한 것이다. 이제 안심이 되겠지? 오늘은 여기까지 얘기하겠다. 안녕!

2013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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