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나는 왜 짐을 짊어지지 않으려 하는가

한국 퉁신(同心)

2021년 10월, 저는 영상 사역을 맡아 훈련받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협력하는 장이(張毅) 형제와 리천시(李晨曦) 자매는 저보다 본분을 오래 이행한 데다가 사역 경험도 많아서 많은 사역을 그 둘이 주로 체크하고 관리했습니다. 막 훈련을 시작한 저는 각 방면의 업무를 잘 몰라서 자연스럽게 조수 역할을 맡게 됐고요. 저는 제가 담당하는 사역에서 문제만 생기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다른 일들은 그들이 나서서 해결할 테니 제가 신경을 좀 덜 써도 아무도 따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금씩, 제 책임감은 줄어들었고, 그들이 담당하는 사역에 대해 알아보고 참여하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함께 사역에 대해 토론할 때도 관점을 별로 말하지 않았고요. 저는 남는 시간에 이방인들의 동영상을 보거나 기분 전환을 했고, 그렇게 본분을 이행하니 무척 좋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때, 리더가 갑자기 찾아와서는 장이 형제와 리천시 자매가 다른 지역에 가서 본분을 이행하게 되었다면서 저보고 앞으로 많은 부담을 갖고 신경을 써서 영상 사역을 책임지라고 했습니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저는 순간 멍해졌습니다. ‘나는 훈련받은 지 얼마 안 됐어.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역을 체크해야 하니, 업무적 압박감이 얼마나 클까? 게다가 저들이 담당하는 사역은 꽤 복잡해서 시시각각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이야. 형제자매들의 업무에 부족한 점이 있으면 자료를 찾아서 가르쳐 줘야 하고. 나보다 업무를 잘하는 장이 형제와 리천시 자매도 평소에 그렇게 바빴는데 나는 훈련받은 지도 얼마 안 됐으니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 않겠어? 그럼 앞으로 여유 부릴 시간이 있을까? 업무를 감당하지 못해서 사역에 지장을 주면 과오를 남기는 것 아니겠어? 그렇게 되느니, 리더한테 말해서 더 적합한 사람에게 맡기라고 하는 게 낫겠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저를 보며 리더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반발심이 생긴 저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 사역에 대한 상의를 마치자마자 바로 그 자리를 떴습니다. 앞으로 사역 과정에서 맞닥뜨릴 각종 문제나 난관을 전부 혼자 헤쳐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압박감이 들었고, 그런 나날은 너무 힘들 것만 같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죠. 그때, 리더가 메시지를 보내 제 내적 상태가 어떤지 물어봤는데, 저는 급히 회신을 보냈습니다. “저는 이 사역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보다 적합한 사람을 찾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러자 리더는 다시 물었습니다. “본인이 어떤 부분에서 이 사역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질문에 저는 정말이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아직 해 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제가 정말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죠. 그저 앞으로 업무적인 압박감이나 육적으로 고생할 거라고 생각해서 거절하려고 한 겁니다. 이건 책임을 미루고 본분을 거부하는 것 아닐까요? 매일 눈앞에 임하는 모든 사람과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와 협력하는 두 형제자매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되어 저 혼자 사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반발심이 들고, 순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내적 상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당신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부디 제가 스스로를 인식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깨우치고 인도해 주십시오.’

그 후, 한 자매가 하나님 말씀을 보내 주었는데, 제 내적 상태에 딱 부합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정직한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이냐?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는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다. 둘째, 정직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모든 일에서 진리를 구하고 실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네가 스스로 무척 정직하다고 말할지라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이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겠느냐? 네가 “저는 자질이 부족해도 마음은 정직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막상 본분이 임했을 때, 고생할까 두려워하고 잘 이행하지 못하면 결과에 책임을 지게 될까 두려워 핑계를 대며 거부하거나 다른 이가 이행하도록 제안한다면, 그것이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겠느냐? 그것은 분명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직한 사람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반드시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며, 자신이 이행해야 하는 본분에 충성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해 드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측면의 모습이 있다. 하나는 정직한 마음으로 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육적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딴마음을 품지 않으며, 자신의 이익을 꾀하지 않는 것, 이것이 정직한 모습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 너의 마음과 사랑을 전부 본분에 사용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직한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며 보여 줘야 하는 모습이다. 만약 네가 깨닫고 알게 된 것을 행하지 않고, 50~60%의 힘만 쓴다면 이는 마음과 힘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사리는 것이다. 본분을 이행하며 몸을 사리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을 쓰지 않으며, 반드시 도태시킨다. 하나님은 오직 정직한 사람에게만 본분을 이행하게 한다. 충성스러운 봉사자라 해도 반드시 정직한 사람이어야 한다. 언제나 건성으로 임하고 몸을 사리는 사람은 전부 간사한 사람이자 마귀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모두 도태될 대상이다. 혹자는 ‘정직한 사람으로 살려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기만 하면 돼. 사실 정직한 사람으로 사는 건 쉬워.’라고 생각하는데, 이 생각이 어떠하냐? 정직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그렇게 좁은 범주의 일이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너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어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이 정직한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다. 그러므로 정직한 마음이 더없이 귀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의 숨은 뜻은 무엇이겠느냐? 그 마음은 네 행위를 지배하고 네 내적 상태를 바꿔 놓으며, 네가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께 인정받게 한다. 이 마음은 더없이 귀하다. 네가 그렇게 정직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러한 내적 상태로 살 것이고, 그러한 행위와 노력이 있을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저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정직한 사람은 본분이 임하면, 그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떤 위험을 감당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으며, 고생할 것이 두려워 미루거나 거부하는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일단 받아들이고 마음과 힘을 다해 임하죠. 이것이야말로 정직한 태도고요. 그런데 본분을 대하는 제 태도는 어땠을까요? 협력하는 두 형제자매가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을 듣자마자 저는 제 업무량이 늘어나서 신경 쓸 일도, 압박감도 커질까 봐 걱정했습니다. 사역을 제대로 못 해낸다면 책임까지 져야 하니,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핑계로 거절했고요. 저는 정말 간사하고 양심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평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부담을 헤아리겠다고 다짐했으면서 막상 실제 환경이 닥치자 육만 생각하며 진리를 실행한 실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빈말로 하나님을 기만할 뿐이었죠. 만약 제가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다면, 제가 그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당장 적당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업무를 익히는 데 박차를 가하고 형제자매들과 함께 협력하여 영상 사역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양심과 인성을 갖춘 사람의 행동이지요. 또 나중에 정말 그 사역을 감당하지 못해 조정되거나 교체된다면,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런 실행이 이성적인 거죠. 여기까지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그 후, 저는 또 하나님 말씀을 보고, 여태까지의 제 본분 이행 태도에 대해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도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다.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따르고,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무슨 일이든 시키는 대로 할 거야. 그러나 책임을 지고 마음을 졸이거나 노심초사하고 마음과 힘을 다하는 건 난 못 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러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 한다. 그저 힘만 쓸 뿐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니, 이는 진실로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가 아니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마음을 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에게 양심이 있으면 마음을 들일 수 있다. 언제나 마음을 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그 사람에게 양심이 없다는 의미이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어째서 진리를 얻을 수 없다고 하겠느냐? 그는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령의 깨우침을 구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지, 어떻게 마음을 들여 하나님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지 모르며, 어떻게 진리를 구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요구와 뜻을 구하고 깨달아야 하는지 또한 알지 못한다. 이것은 진리를 구할 줄 모르는 것이다. 너희에게는 무슨 일을 맞닥뜨리든, 어떤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든 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며, 마음을 들여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진리를 구하고, 그 본분을 어떻게 이행해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수 있을지, 어떤 진리를 갖춰야 본분 이행에 합격점을 받을 수 있을지 등을 마음을 들여 묵상하는 이런 내적 상태가 있느냐? 이렇게 진리를 구할 때가 많으냐? (많지 않습니다.) 마음을 들여 본분을 이행하고 책임을 질 수 있으려면 고통을 겪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은 말로만 떠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본분을 이행하는 데 마음을 들이지 않고 항상 힘만 쓰고자 한다면, 분명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형식만 갖추었을 뿐 본분을 어떻게 이행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마음을 들이면 점차 진리를 깨닫게 될 테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할 것이다.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 마음을 들이면, 점차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의 패괴와 부족함을 발견하며 자신의 다양한 내적 상태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네가 힘만 쓰는 데 집중할 뿐, 마음을 들여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네 마음속 실제 내적 상태, 네가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보이는 다양한 반응, 그리고 패괴 표출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네게 존재하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을 경우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을 때는 대충 건성으로 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너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이 닥치든 늘 진리를 구해야 하고, 그렇게 하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반성해 자신의 내적 상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알고 속히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고 사역에 지장을 주지 않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명 진입도 하고, 자신의 패괴 성품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만약 네가 마음속으로 늘 본분 이행이나 진리에 관련된 일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표면적인 일에 얽매이고 이러한 육적인 일에 마음을 쓰며 살아간다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진정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 수 있다> 중에서)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본분 이행 태도는 제 실제 상태와 같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이 본분을 처음 이행할 때부터 이렇다 할 부담이 없었습니다. 협력하는 두 형제자매가 저보다 경험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자 뒤에서 조수 역할을 하면서 제 업무에 문제만 생기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하면 체면도 서고 육적으로도 그다지 힘들지 않을 거라고 말이죠. 그래서 제 수중의 사역만 생각하고, 그들이 책임지는 사역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사역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오류나 어려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요. 리더가 팀 내 사역 효율이 낮은 이유에 대해 물어볼 때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제 이런 태도는 이방인들이 일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게 어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본분 이행이겠습니까? 저는 사역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진리를 구하지도 않고, 오류를 종합해 보지도 않았고, 어떻게 해야 사역 효율을 높일 수 있을지 묵상하고 구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저 일이 있으면 사역자가 알아서 하겠거니 생각하고 여유를 부리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육적인 것이나 즐기고 이방인들의 동영상이나 보다 보니 마음이 점점 방탕해지고, 하나님에게서도 멀어졌죠. 저는 제가 본분 이행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힘만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을까요? 그제야 하나님께서 환경을 마련해 제가 의지하는 사람들을 떨어뜨려 놓으신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제게 훈련받을 기회를 주신 것으로, 제가 신경 쓰고 자발적으로 책임감을 갖고, 어려움이 생기면 하나님께 많이 의지하고 진리 원칙을 구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려는 것이었죠. 더 중요한 것은, 본분을 이행할 때 해이해져 부담을 갖지 않는 태도가 하나님의 혐오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사역이 조금 벅찬데, 그것은 제가 본분에 더 신경을 쓰고,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방향으로 노력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자 마음속으로 이 환경에 순종하길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의식적으로 사역에 많이 신경 쓰고자 했고, 영상 사역에 문제가 발견되면 적어 놓았다가 구하고 해결했습니다. 또 학습 계획을 세워 하루빨리 그 사역을 감당하고자 했고요. 내적 상태를 돌이키자 본연의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저는 또 한 자매와 협력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의식적으로 부담을 가졌지만, 얼마 후 그 자매가 여러 분야의 업무를 모두 잘 해내며, 전문 지식도 저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일부 사역을 자매에게 맡기고, 그 후로는 별로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체면 때문에 토론에 참석하긴 했지만, 의견을 제시하지는 않았지요. ‘당신 혼자 해낼 수 있는데 나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이참에 머리나 좀 식히자고.’라고 생각했죠. 리더가 사역에 더 많이 신경 쓰라고 주의를 주면 며칠은 좋아졌지만, 며칠 후에는 또 제자리였습니다. 가끔 형제자매한테서 사역에 까다로운 문제가 생겼으니 얼른 해결해야 한다고 메시지가 왔지만, 파트너 자매가 주로 체크해야 하는 사역이면, 귀찮아서 일부러 메시지를 ‘읽지 않음’으로 설정해 두고 못 본 척했습니다. 조금 후에 자매가 처리할 거라고 생각하면서요. 속으로는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역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몇 달 후, 저는 자매와 떨어져 따로 영상 사역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도와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죠. 앞으로 많은 어려움과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본분 이행에 책임감이 부족하니, 어쩌면 그런 환경이 제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먼저 순종하자고 스스로를 타일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협력할 때가 되자 제가 체크해야 할 사역이 갑자기 늘어났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매일 처리해야 할 일이 끝이 없었고, 거기다가 제 업무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은 탓에 계속 문제가 터졌습니다. 매번 제작하는 영상마다 건의가 들어왔고, 모든 건의를 신경 써서 해결해야 했습니다. 얼마 안 되던 열정마저 점점 바닥을 보였고, ‘나는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아직도 문제가 이렇게 많잖아. 아무래도 리더한테 더 적합한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는 게 좋겠어.’라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습니다. 얼마 후, 제가 책임지는 영상 몇 개가 연달아 재작업에 들어가게 되자, 저는 더욱 의기소침해졌습니다. 그 까다로운 문제들을 앞에 두고도 해결하고 싶지 않았고, 예전에 몇몇 형제자매들과 함께 협력해서 본분을 이행하던 시절이 그리웠습니다. 그때는 아무 걱정 없이 그들 뒤에 있으면서 그렇게 큰 압박감을 견딜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그 며칠간 저는 본분 이행에 힘이 나지 않았습니다. 걸음걸이도 한없이 무겁기만 했습니다. 그제야 저는 그런 내적 상태로는 본분 이행을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구하던 중, 문득 노아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방주를 만들 때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고, 숱한 실패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120년을 노력한 끝에 결국 방주를 완성해서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했죠. 그런데 저는 어려움이 좀 임했다고 책임을 내팽개치고 탈영병이 되려 했습니다. 제가 바로 겁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기까지 생각하게 되자 힘이 좀 났고, 사역 과정의 문제들을 올바로 직면할 수 있었습니다.

영 생활을 할 때, 저는 하나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릇 거짓 리더는 끝까지 실제 사역은 하지 않고, 리더가 된 것을 벼슬로 여기며 지위의 복을 누린다. 그러면서 리더로서 이행해야 할 본분과 해야 할 사역을 귀찮은 일, 번거로운 일로 여기고, 속으로 교회의 사역에 대해 반발심이 가득하다. 그에게 사역을 감독하면서 사역에서 확인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면 끔찍이 싫어한다. 이는 리더 일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자 본연의 일이지만 너는 하지 못하고,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계속 리더 일꾼이 되려는 것이냐?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려는 것이냐, 아니면 감투를 쓰고 지위의 복을 누리려는 것이냐? 감투를 쓰기 위해 리더가 된 것이라면 염치가 없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자는 인격이 가장 비천하고 존엄도 없는 후안무치한 사람이다. 육적인 안일을 누리고 싶다면 속히 세상으로 돌아가서 네 능력껏 경쟁하고 빼앗고 쟁취해라. 아무도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집은 하나님의 선민들이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이며, 사람이 진리를 추구해 구원받는 곳이지,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곳도, 더욱이 사람이 사치를 부리며 안일하게 지내는 곳도 아니다. … 무슨 사역을 하든,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해내지 못하고 감당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이행해야 할 어떠한 의무나 책임도 다하지 못하니, 이는 폐물 아니겠느냐? 이런 자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바보, 지적 장애인, 각종 신체장애자 외에 누구든 살면서 자기 본분과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이 부류의 사람들은 늘 몸을 사리면서 책임을 다하려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람답게 살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사람답게 살아갈 기회를 주고 자질과 은사를 주었는데, 그는 그것을 본분 이행에 쓰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어디를 가든 누리려고만 한다. 이런 부류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역을 시켜도, 그것이 중요한 사역이든 평범한 사역이든, 혹은 어려운 사역이든 단순한 사역이든, 그는 다 건성으로 임하며 몸을 사린다.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미루려 한다.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며 계속 기생충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이런 자는 쓸모없는 폐물 아니겠느냐? 사회에서 자기 힘으로 생존하지 않는 자가 있더냐? 성인이 되면 누구나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부모의 책임은 이미 끝난 것이다. 설령 부모가 계속 지원해 주겠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편치 않고, ‘부모님의 자식 양육 사명은 이제 끝났어. 나는 성인이 되었고, 또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니 혼자 힘으로 살아야 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성인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이성 아니겠느냐? 만약 정말 이성이 있다면 남들에게 비웃음을 받고 체면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라도 계속 부모에게 빌붙어 살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일하기는 싫어하고 편한 것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들은 늘 공밥을 먹으려 하고,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며, 하늘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 입안으로 굴러 들어오기만 바란다. 또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삼시 세끼 챙겨 먹고 누군가 시중들어 주고 잘 먹고 잘살기를 바란다. 이는 기생충이 하는 생각 아니겠느냐? 기생충에 속하는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겠느냐? 인격과 존엄이 있겠느냐? 절대 없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남에게 빌붙어 사는 못난이로, 양심과 이성이 없는 짐승이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 집에 남아 있을 자격이 없다.(<말씀ㆍ5권 리더 일꾼의 직책ㆍ리더 일꾼의 직책(8)>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역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감독하고, 알아보고, 진리를 구해 해결하는 것은 리더 일꾼의 본연의 일입니다. 하지만 거짓 리더는 이것을 짐이라고 생각하죠. 이는 그가 본분을 이행하러 온 게 아니라 복을 누리고 감투를 쓰기 위해 왔음을 의미합니다. 제 모습에 대조해 보니, 저 또한 그러했습니다. 사역 과정에서 부딪히는 문제와 난관들은 모두 제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저는 이를 계기로 진리를 구해 제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더 빨리 성장해야 했고요. 하지만 저는 어려움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본분을 거절하려 했습니다. 책임자로서 실제 사역을 하지 않고 실제 문제도 해결하지 않았으니, 이는 지위의 복을 누리려 한 것이 아닌가요? 예전 모습을 떠올려 보니, 누군가와 협력할 때, 표면적으로는 제가 일부 사역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협력하는 형제자매 몇 명이 분담했을 뿐, 제가 실제적으로 책임지는 사역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본분 이행도 상대적으로 수월했고요. 그래서 그 안일한 시간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죠. 그러다 협력하는 두 형제자매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서 업무적인 압박감이 커지고 고생하며 짐을 짊어져야 하니까 속으로 거부감을 느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본분을 거부하고자 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내적 상태가 어느 정도 돌이켜지기는 했지만, 협력하는 자매가 저보다 경험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제 부담감은 다시 작아져서 매일 설렁설렁 본분을 이행했을 뿐, 마음을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혼자 영상 사역을 맡아서 어려움이 많아지니까 또 도망치려고 했고요. 제 본분 이행 태도가 무척 교활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육적으로 고생스럽거나 책임을 져야 하면 핑계를 대서 거절하고, 언제나 가볍고 압박감이 없는 일만 하려고 했으니까요. 사실, 어려움이 없는 사역은 없으며 제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않는 한 어떤 본분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진리를 싫어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는 본성을 갖고 있으며,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게 아니라 복을 누리려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렇게 믿어 봤자 마지막에는 전부 허사가 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들은 늘 공밥을 먹으려 하고,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며, 하늘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 입안으로 굴러 들어오기만 바란다. 또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삼시 세끼 챙겨 먹고 누군가 시중들어 주고 잘 먹고 잘살기를 바란다. 이는 기생충이 하는 생각 아니겠느냐?” 제가 바로 하나님이 드러내신 부류였습니다. 늘 공밥을 먹으려 하고, 다른 사람의 노동 결실을 누리려고만 했으니까요. 저 같은 사람이 바로 폐물 아닐까요? 생각하면 할수록 스스로가 역겨웠습니다. 여태까지 저는 공밥을 먹는 캥거루족들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부모가 성인으로 키워 줬는데, 집에 틀어박혀서 부모가 주는 것들을 누리며 전혀 책임을 다하지 않는 그런 사람은 못난 인간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지금 제 모습이 그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저는 자책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제가 너무도 이기적이며 본분 이행에 전혀 진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음속으로 오직 제 육만 생각하고 기생충이 되려 했던 것입니다. 이 타락한 사상 관점이 정말 너무도 두렵습니다. 지금 교회에는 당장 협력해야 할 사역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현실에 안주하며 짐을 짊어지지 않으려 했으니, 제가 바로 폐물입니다!’

그 후,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왜 업무적인 압박감이 커지고 맞닥뜨리는 어려움이 많아질 때마다 본분을 거부하고 도망가려는 걸까? 그 이면에 숨겨진 근원은 도대체 뭐지?’ 이렇게 구하던 중 하나님 말씀을 보게 되었죠. 『너는 지금 내가 한 말을 믿지 않고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지만, 어느 날 이 사역이 전개되는 것을 전부 보게 되면 그때는 후회하고 아연실색할 것이다. 있는 복도 누릴 줄 모르고, 있는 진리도 추구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망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 아니겠느냐? 비록 아직은 다음 단계의 사역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지금 너에게 요구하고 어떤 모습으로 살라고 하는 것이 그 사역과 무관한 일은 아니다. 이렇게 많은 사역과 진리가 모두 네가 알 가치가 없는 것이냐? 형벌과 심판은 너의 영을 깨어나게 할 수 없느냐? 형벌과 심판이 너로 하여금 너 자신을 증오하게 할 수 없단 말이냐? 너는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면서 평안하고 즐겁고 육의 편안함을 조금 얻는 것에만 만족하느냐? 그런 사람은 가장 비천한 사람 아니더냐? 구원을 보고도 구원을 얻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보다 미련한 사람이고, 육적인 것을 탐하는 사람이며, 사탄을 즐기는 사람이다. 너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어려움과 환난, 고통이 조금도 없기를 바란다. 너는 늘 이런 가치 없는 것들만 추구하고, 정작 생명은 한 푼의 가치도 없다고 여기며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각을 진리보다 앞자리에 놓는다. 너는 너무도 무가치한 사람이다! 네가 돼지처럼 산다면 개돼지 따위와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육적인 것을 좋아하는 자는 모두 짐승 아니겠느냐? 영이 없는 죽은 자는 모두 걸어 다니는 송장 아니겠느냐? 내가 너희 가운데서 얼마나 많이 말했더냐? 내가 너희 가운데서 행한 사역이 적더냐? 너희 가운데서 너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공급했느냐? 그런데 너는 어째서 얻지 못했느냐? 또 무슨 불평이 있단 말이냐? 네가 얻지 못한 것은 육을 너무 귀하게 여긴 탓이 아니더냐? 네 생각이 너무 사치스러운 탓이 아니더냐? 네가 너무 어리석은 탓이 아니더냐? 너는 이 복을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지 않았다고 원망할 수 있겠느냐? 너는 하나님을 믿은 뒤 평안만 얻고자 한다. 자식에게 병이 없고, 남편에게 좋은 직업이 있고, 아들이 좋은 배우자를 찾고, 딸이 좋은 남자와 결혼하고, 너의 우마가 밭갈이를 잘하고, 한 해의 농사가 잘되길 바란다. 네가 추구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너는 오직 편안하게 살기만을 바라고, 너의 집에 나쁜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며, 바람이 불어도 네 몸에는 불지 않고, 모래가 날려도 네 얼굴은 때리지 않으며, 홍수가 나도 네 집의 곡식은 잠기지 않고, 모든 재난이 너와 무관하길 바란다. ‘하나님의 품속’에서 살고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생활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처럼 육적인 것만 추구하는 못난 놈에게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영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너는 짐승 아니겠느냐? 아무 대가도 없이 참도를 네게 베풀어 주었는데 너는 추구하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느냐? 진정한 인생을 베풀어 주었는데 추구하지 않는다. 그럼 너는 개돼지 따위가 아니겠느냐? 돼지는 인생을 추구하지 않고 깨끗함을 바라지도 않으며 인생이 무엇인지 모른 채 날마다 배불리 먹고 쿨쿨 잠만 잔다. 참도를 베풀어 주었건만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런 돼지 같은 삶을 계속하고 싶으냐? 그런 사람이라면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비루하고 저속하며, 더럽고 음란하게 살면서 추구하는 목표가 하나도 없으니 너의 일생은 가장 비천한 일생 아니겠느냐? 무슨 낯으로 하나님을 뵙겠느냐? 계속 그렇게 체험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 아니겠느냐? 네게 참도를 베풀어 주었지만 결과적으로 네가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너 자신의 추구에 달려 있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하나님의 엄한 말씀을 보며 하나님께서 안일을 탐하는 사람에게 극도의 혐오와 반감을 느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눈에 이런 부류는 바로 짐승입니다. 편한 것만 좋아하고 일하기를 싫어하며, 현실에 안주한 채 늘 빈둥거리기만 하다가 결국에는 어떤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어떤 진리도 얻지 못하는 폐물입니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죠. 본분을 이행하면서 편안한 것만 좋아하며, 이행해야 할 본분이 있고 교체되거나 도태되지만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저는 어려움에 봉착해서 고생하고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오면 뒤로 물러나고, 간단하고 손쉬운 사역만 골라서 하려고 들었습니다. 제가 신봉하는 것은 “살아 있을 때 즐기자.”, “사람은 스스로를 아껴야 한다.” 등 사탄의 생존 법칙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상 관점에 지배받아 늘 안일을 탐했는데, 제가 책임지는 사역이 좀만 많아지면 귀찮아하면서 휴식 시간에 영향이 갈까 봐 걱정했습니다. 또 업무에 대한 것들을 많이 배워야 할 때 실제적으로 대가를 치르지 않았고요. 그 결과, 시간이 지났는데도 업무 능력이 별로 좋아지지 않아서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어떨 때는 제 본연의 일에 집중하지 않고, 업무를 배운다는 핑계로 이방인들의 동영상을 보기도 했죠. 그로 인해 마음속이 점점 더 무감각해지고 어두워졌습니다. 책임자로서 사역에 문제가 발생하면 주도적으로 체크하고 해결해야 하는데, 저는 문제가 까다롭다고 생각되면 얕은꾀를 부리면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사역 진도에 지장을 주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늘 누군가를 찾아 저를 대신하게 하고, 제 업무적인 압박감을 줄여 보고자 한 것입니다. 저는 영상 사역이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육적인 만족을 꾀하면서 어려움에 부닥치면 도망치려 했는데, 책임감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부모가 성인으로 키워 놓은 자식이 이제 집안을 위해 뭔가 해야 할 때, 고생하고 책임을 지는 걸 싫어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자는 비양심적이고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돌이켜 보면 제 태도가 바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저를 인도해 주셨고, 또 은총을 베풀어 이렇게 중요한 본분을 이행하게 하셨는데, 저는 늘 고생하는 걸 두려워하고 육만 생각했으니, 정말이지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었습니다! 저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항상 앓는 소리를 냈고, 육적인 즐거움을 탐했습니다. 진리를 얻을 기회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본분도 엉망으로 이행해 과오만을 남겼으니, 마지막에 하나님께 혐오받고 내쳐질 게 뻔했죠!

그 후, 저는 실행의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네게 어떤 사역을 안배해 준다면,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 사역을 하면서 남들 앞에 나설 수 있든 없든 제게 주어진 일이면 제대로 해내고 책임을 짊어질 것입니다. 저에게 접대하도록 안배한다면 온 힘을 다해 접대하겠습니다. 형제자매를 잘 돌보고 최선을 다해 안전을 확보하겠습니다. 저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안배한다면 진리를 잘 갖춘 다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것입니다. 외국어를 배우도록 안배한다면 열심히 배우고 죽어라 공부해서 되도록 빨리, 1, 2년 안에 외국어를 마스터한 다음, 외국인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에게 간증문을 쓰라고 하면 열심히 연습하며 진리 원칙에 근거해서 일을 바라보고, 언어 지식을 공부할 것입니다. 설령 미사여구가 뛰어난 글은 못 쓰더라도 최소한 저의 체험 간증을 분명하게 얘기하고, 진리를 알기 쉽게 교제하고, 진실되게 하나님을 증거해서 사람들이 제 글을 보고 도움과 유익을 얻게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맡기든 저는 마음과 힘을 다해 그 사역을 책임지겠습니다. 모르는 부분이 있거나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할 것이며, 진리 원칙에 근거해 문제를 해결하고 일을 제대로 처리할 것입니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온 힘을 다해 제대로 이행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제 몫의 책임을 다할 것이며, 최소한 양심과 이성에 어긋나거나 건성으로 임하거나 몸을 사리거나 다른 이의 노동의 결실을 누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양심의 선을 넘지 않겠습니다.” 이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준이다. 이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최소한 가슴에 손을 얹고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며, 공밥을 먹지 말고 네 하루 세끼의 값을 해야 한다. 이것을 책임감이 있다고 한다. 자질이 좋든 나쁘든, 진리를 깨달았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너는 이런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 사역을 나에게 맡겼으니 열심히 해야 해. 항상 이 사역을 신경 쓰며 마음과 힘을 다해 제대로 해내야지. 100% 잘 해낼 거라는 장담은 못 해도 내 태도는 온 힘을 다하는 거야. 절대 건성으로 임하지 않을 거라고. 만약 사역에 문제가 생긴다면 책임을 지고 그 일에서 교훈을 얻어 제대로 본분을 이행해야겠어.’ 이것이 바로 올바른 태도이다. 너희는 이런 태도를 갖추었느냐?(<말씀ㆍ5권 리더 일꾼의 직책ㆍ리더 일꾼의 직책(8)> 중에서) 하나님 말씀은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이 사역을 제게 맡겨 책임지게 한 이상, 저는 한 명의 성인으로서 마땅히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제 자질이 어떻든, 업무 능력이 어떻든, 앞으로 본분 이행 과정에서 어떤 난관에 부딪히든 위축되지 말고 용감히 전진하며, 온 힘을 다해 사역을 책임져야 하죠. 그 후, 저는 영상과 관련된 건의를 받을 때마다 제가 신경 쓰지 못한 것이든, 문제 해결 방법을 몰랐던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주도적으로 해결 방법을 찾거나 경험 있는 사람을 찾아가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그 분야의 업무에 익숙해졌고, 원칙도 더 분명히 파악하게 됐습니다. 예전에는 사역 과정에서 까다로운 문제가 생기면 습관적으로 파트너에게 넘겨 처리하게 했고, 단체 채팅방의 메시지를 보고도 바로 회신하지 않은 채 최대한 미뤘지만, 지금은 주도적으로 책임감을 갖고 본분 이행에 부담을 갖게 됐습니다. 협력하는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의지했을 때 모두와의 토론을 통해 길이 점점 더 분명해졌습니다.

이런 체험을 통해 저는 스스로가 정말 이기적이고 간사해 본분 이행에서 몸을 사리고 수작을 부리고, 짐을 짊어지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음가짐을 바로잡고 하나님의 부담을 헤아리며 온 힘을 다해 협력하려고 하자, 하나님의 이끌어 주심과 인도를 보았습니다. 또 내면에 믿음이 생겨 본연의 일에 충실한 사람,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 되기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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