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방법에 관한 말씀

발췌문 1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이 모두 진리임을 확인하고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집에 와서 하나님이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속으로 관념이 생겨 말과 행동을 조심하지 않고 방탕해지기 시작한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며 마음대로 판단하고 헐뜯는다. 그런 악인들은 그렇게 드러난다. 인성이 없는 그런 것들이 늘 악행을 저지르며 교회 사역을 교란하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 그들은 이렇게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헐뜯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며 모욕하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며 대립한다. 그런 사람들은 앞으로 무거운 형벌을 받을 대상이 된다. 거짓 리더에 해당하는 어떤 사람은 교체된 후 하나님을 계속 원망하며, 예배의 기회를 잡으면 죽어라 자신의 관념을 퍼뜨리고 불만을 터뜨린다. 심지어 모진 말, 분풀이하는 말도 쏟아 낸다. 이런 사람들은 마귀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집에서 제명당하자 그는 또 뉘우치며 자신이 일순간 어리석어 잘못된 말을 했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은 분별없이 “너무 불쌍해요. 참회하는 마음도 있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하잖아요. 용서해 주세요.”라고 한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용서할 수 있겠느냐? 사람에게도 존엄성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겠느냐! 하나님을 모독하고 헐뜯었던 사람이 참회하고 있으니 그들을 용서하라고 한다. 그리고 잠시 어리석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잠시 어리석었던 것이냐? 그 사람의 말은 항상 속셈이 있었고, 감히 하나님을 판단했다. 하나님의 집에서 교체되어 지위의 복을 잃자, 그는 도태될 것이 두려워 많은 불만들을 쏟아 냈다. 나중에 또 참회하며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데 그게 소용이 있겠느냐? 한 번 뱉은 말은 엎질러진 물처럼 주워 담을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을 함부로 대적하고 판단하고, 모독하는 사람도 너그럽게 용서하고 가만있어야 하느냐? 그러면 하나님은 존엄성이 없어진다. 어떤 사람은 대적하고 나서 “하나님, 당신은 보혈로 저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셨으니 부디 저를 용서하십시오!”라고 한다. 정말 뻔뻔스럽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헐뜯고 나서 겁이 났다. 벌을 받을까 두려워 “하나님, 제발 저를 떠나지 마십시오. 벌하지 마십시오. 제 죄를 인정하며 회개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며 무릎 꿇고 기도했다. 너희들이 보기에 이런 사람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왜 그럴 수 없느냐? 이것은 곧 성령을 거스른 것이다. 성령을 모독한 죄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영원히 사함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말씀에 책임을 진다. 하나님은 존엄이 있고, 진노가 있고, 공의로운 성품이 있다. 너는 하나님이 사람과 같다고 생각하느냐? 누군가 그에게 잘해 주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그가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느냐? 어림없는 일이다! 네가 하나님을 대적하고도 좋은 말로가 있겠느냐? 만약 일순간 어리석어 잘못을 했거나 이따금 패괴 성품을 드러냈다면 이것은 용서받을 여지가 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며,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맞서서 헐뜯고 모독하며 유언비어를 퍼트린다면 너는 완전히 끝난 것이다. 이런 사람은 기도할 필요도 없이 벌받을 준비를 해라. 용서할 수가 없다! 그때 가서 다시 뻔뻔하게 “하나님, 저를 용서하세요!”라고 용서를 구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은 후에 알면서 일부러 죄를 범한다면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다. 이전에 하나님은 사람들의 과오를 기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일부 가벼운 경우를 말하는데, 하나님의 행정 법령과 관계없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 않으며,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비방하지 않은 경우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하나님을 한 번이라도 모독하고, 판단하고, 비방했다면 이는 영원한 오점이 되어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마음대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욕하고 나서도 하나님을 이용하며 복을 받고자 하는데, 어디 그런 손쉬운 일이 있겠느냐! 사람은 항상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를 베풀며, 인자하고 천공해활과 같은 넓은 마음을 가졌으므로 사람의 과오를 기념하지 않으며 지난 과오, 과거에 했던 일은 묻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지난 잘못을 묻지 않는 것은 사소한 일인 경우이다.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없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진정한 인식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가 아주 힘들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기에 일단 하나님의 사역이 자신의 이익을 건드리면 제멋대로 말하는데, 말하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겠느냐? 너는 네가 한 말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며 하나님을 판단하는 말을 하는데 본인이 이를 모르겠느냐? 무릇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속으로 다 알고 있다. 악령이 들리고 정상적인 이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정상적인 사람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모른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는 말을 할 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이 하나님인 건 나도 잘 압니다. 내가 당신이 행한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할 것인데, 당신이 날 어쩔 겁니까? 내가 말한다 해도 당신은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그의 이런 행동은 고의가 담겨 있다. 고의로 다른 사람을 교란하고, 끌어들여 그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맞서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조금 지나 잘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그때 어떻게 그런 말을 했을까? 일시적인 충동에서 그런 거야. 정말 후회돼.’ 그가 후회한다는 것은 그가 당시에 모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모르는 게 아니었다. 만약 그가 일순간 어리석어 일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완전히 맞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일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을 믿으면 최소한의 상식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해야지,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마음대로 판단하고 비방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 판단인지, 무엇이 모독인지, 무엇이 비방인지 아느냐? 네가 뱉은 말이 판단인지 아닌지 너는 모르느냐? 어떤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하나님을 접대한 적이 있고 자주 만났다고 하고, 하나님과 마주 앉아 교제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사람만 만났다 하면 이런 얘기를 하지만, 한참을 말해도 겉면의 일뿐, 진정한 인식은 전혀 없다. 그가 하는 말은 나쁜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형제자매들을 위하고 모두가 힘을 내도록 하려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만약 자기가 자발적으로 그 일을 언급한 것이라면, 그것은 속셈이 있는 것으로, 주된 목적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러내 우러름을 받으려는 것이다. 만약 믿음을 갖게 하고 더 의욕적으로 하나님을 믿게 하려는 마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읽을 수도 있다. 그것은 진리다. 그런데 어째서 굳이 그런 겉면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냐?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근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이리도 점잖지 못하고 함부로 얘기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존엄이 있다! 사람이 이런 점을 인식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내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자신의 속셈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우러름을 받으려는 개인의 목적 달성을 위해 함부로 하나님은 어떻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데, 이는 그야말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모독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일말의 경외심도 없다. 이들은 전부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한 사람으로, 악령이고 마귀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몇 년간 믿었지만 큰 붉은 용에게 체포된 후 유다가 되었고, 심지어는 큰 붉은 용을 따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까지 했다. 또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파하면서도 종교인에게 동조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판단하고 하나님을 정죄하는 말을 한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하는 짓임을 잘 알면서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속셈에서든지 간에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너는 다른 말은 할 수 없느냐? 왜 굳이 그런 말을 해야 하는 것이냐?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 말은 네 입에서 나온 것이므로 너는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다. 일부러 그랬든 무의식중에 그랬든 그 말을 한 것은 경건하지 않은 것이다. 너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 너는 다른 사람을 따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며 환심을 사고 사람을 얻으려 했는데 정말이지 너무도 경건하지 않다. 그것은 마귀와 한패가 되어 나쁜 짓을 한 것이다! 하나님이 함부로 조롱하고, 판단하고, 규정하고, 모독할 수 있는 존재더냐? 이것은 큰일 날 일이다! 어떤 말을 잘못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다면 너는 끝난 것이다. 이는 목숨이 달린 일이다! 어떤 사람은 ‘종교계 사람 중 대다수가 목사, 장로에게 미혹되어 하나님을 모독하고 판단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정죄하는 말을 해. 그중 일부는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지. 그럼 하나님은 과연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실까? 만약 이들이 전부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몇 명 되지도 않을 만큼 적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너는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로우며, 누구에게나 그렇다. 노아시대에는 오직 8명의 사람만이 방주에 올라 살아남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파멸되었다. 그런데 감히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인류는 깊이 패괴되어 모두 사탄에게 속하는 존재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로, 천하고 쓸모없는 것들이니,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마찬가지로 파멸될 것이다. 혹자는 속으로 ‘만약 우리 모두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사역은 헛수고가 되는 것 아닐까? 내가 보기에 하나님의 인류 구원은 사람 없이는 안 돼. 사람이 없다면 하나님의 경영도 없어지는 거니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하나님은 사람 없이도 그의 경륜을 이어 나간다. 사람이 스스로를 지나치게 가치 있게 보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어 하나님 앞에서 조금의 경건함도, 성실한 태도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고 사탄에게 속하는 존재이므로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판단하고 모독할 수 있다. 이것은 큰일 날 일인데,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일이다!

발췌문 2

하나님을 믿을 때는 핵심적인 것을 파악해야 한다. 최소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믿으면 어떤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지, 하나님께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 하나님에게 순종하려면 어떤 진리와 어떤 하나님 말씀을 알아야 하고, 어떤 실제를 갖추어야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는지 등을 알아야 한다. 네게 이런 신심과 의지가 있다면 이따금 관념과 속셈이 좀 생길지라도 쉽게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신심이 없다면 사람은 항상 선택적으로 순종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트집을 잡고, 힘겨루기를 하고, 분노하고 원망하는 등 갖가지 패역이 수시로 나타날 것이다! 우연히 한두 번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생각이 좀 있는 것도 아니라 거역하는 말을 뱉고 거역하는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패역 성품이 특히 심각한 것이다. 사람은 패괴 성품이 있어서 의지를 갖고 하나님께 순종하려 할지라도 그 순종은 제한적이고 상대적이며, 지속적이지 않고 일시적이다. 또한 조건적이고, 절대적이지 않다.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고, 사람의 패역은 더없이 크다.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은 듣기를 원하지만 순종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하며, 모든 일에서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도, 하나님의 지배에 맡기지도 못한 채 자신의 선택과 속셈, 동기를 지니며, 자기의 의도와 생각, 수완을 갖는다. 자기만의 수완과 방법이 있으면 하나님께 순종할 리가 없다. 오직 자기 뜻대로 일을 처리하며 하나님을 거역할 뿐이다. 이러면 사람의 패역은 너무 큰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사람의 본성에는 표면적으로 자신이 옳고 대단하다고 여기거나 거들먹거리거나 때로 거짓말하고 하나님을 기만하는 등의 단순한 패괴 성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본질은 이미 사탄의 본질이다. 지난날, 천사장은 왜 하나님을 배반했느냐? 현재의 사람은 어떠하냐? 사실, 너희들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못하든 현재의 사람은 사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완전히 배반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 사상, 이념 속에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적대한다. 이는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켜 마귀로 만든 것으로, 사람은 정말 사탄의 후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너희들은 “저희는 하나님을 적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저희는 모두 곧이곧대로 들었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든 모두 따른 것 같다. 사실 내가 정식으로 교제하고 말할 때는 대부분이 관념 없이 성실하고 양순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내가 정상 인성으로 말하고 사역하거나 정상 인성으로 생활하고 활동할 때면 관념이 생겨나 받아들이려고 해도 받아들이지 못하며, 어떻게 진리를 교제해도 관념을 내려놓지 못한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할 때 상대적인 순종은 가능해도 절대적인 순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는 하나님임을 알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은 반드시 정상 인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왜 절대적으로 순종하지 못하느냐? 성육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이고 인자로, 신성과 정상 인성을 지닌다. 겉으로는 정상 인상이고, 신성은 정상 인성으로 생활하고 사역한다. 현재,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그리스도가 되었기에 신성도 있고 인성도 있다. 그런데 오직 신성의 일부 말씀과 사역에만 순종하며, 신성의 언어나 심오한 언어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그들은 하나님이 정상 인성으로 한 일부 말씀과 사역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또 일부 사람들은 마음에 생각, 관념이 있어 신성 언어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성 언어는 하나님의 말씀에 속하지 않는다고 여기는데 이런 자가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 정결케 되고 온전케 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이런 자는 이해가 터무니없는 사람으로,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요컨대, 사람의 내면세계는 아주 복잡하며, 이 패역한 것들은 특히 복잡하므로 이를 상세히 말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 신성에 순종할 수 있지만, 정상 인성으로 행한 사역과 말씀에는 순종할 수 없다면, 이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순종은 조건부적이다. 사람이 생각하기에 옳고 이치에 맞으면 듣고, 옳지 않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으면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에 순종하지 않으며, 자신이 행할 수 없는 것에도 순종하지 않는다. 이런 순종이 진정한 순종이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이는 사람의 성품이 나쁜 것인데, 아주 악질이고 못된 것이다. 이 말이 핵심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순종은 선택적 순종, 조건부적인 순종으로, 아무도 절대적으로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말을 잘 듣고 순종한다면 이는 상대적인 것이고, 그런 사람의 이익과 관련이 없고, 진짜 책망받거나 정면에서 강하게 책망받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책망받는다면, 상대와 힘겨루기를 할 것이다. 하루 종일 침울한 얼굴을 하고, 질문을 해도 답하지 않을 것이고, 무슨 일을 시켜도 하지 않을 것이며, 원치 않는 일을 시키면 물건을 집어 던지면서 맞설 것이다. 사람의 성품이 얼마나 나쁘냐! 너는 그가 하나님임을 알면서 어찌하여 그렇게 대한단 말이냐? 이는 지난날의 바리새인, 바울과 다를 바가 없다.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임을 몰랐느냐? 그는 어째서 예수의 제자를 핍박했느냐? 어째서 그렇게 많은 예수의 제자를 잡아갔느냐? 결국 그의 핍박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 예수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를 쓰러뜨렸다. 큰 빛에 그는 엎드렸고, 엎드린 후 그는 예수에게 물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그러자 예수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9:5)라고 하였다. 그 이후, 그는 많이 온순해졌다. 만약 예수가 그렇게 ‘빛을 비추지’ 않고 그를 쓰러뜨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며, 예수를 위해 전도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이는 무슨 의미겠느냐? 사람의 본성이 이미 썩을 대로 썩었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늘 “우리 사람은 다들 패괴 성품이 있어 다들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 못해요.”, “사람은 정말이지 독선적이고 교만해서 늘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사실 이는 가장 피상적인 인식이며, 단지 패괴 성품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너는 어째서 네 본성 중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그런 생각과 속셈들은 이야기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면 너는 기어이 저렇게 하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려 하면 너는 기어이 하나님에게 이렇게 하라고 요구하니, 이는 하나님과 겨루는 것 아니냐? 이런 성품은 누구에게나 있는데,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일부 사람들은 “이건 저와 대조가 안 되네요. 전 몰라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네가 하나님을 접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하나님을 접할 경우 일주일 뒤에 천천히 익숙해지면 반드시 변하고 본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이는 결코 내가 큰소리를 치는 것도 아니고, 너를 얕잡아 보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현재 패괴 성품을 갖고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본성이 이미 패괴되었다. 정상 인성은 이미 형편없이 패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즉, 사람에게 정상 인성이 없다는 것이다. 성육신한 하나님은 정상 인성을 지니고 있지만, 사람이 모두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고 정상 인성이 별로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분명 많은 일에서 하나님과 의견 차이와 논쟁이 있을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을 적대할 수도 있다. 사람 내면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없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마음도 없어 “네가 그를 하나님이라고 인정했으니,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순종해야 한다.”라고 요구할 수도 없고,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에게 양보하라고는 더더욱 요구하지 못한다. 이는 양보에 관한 일이 아니다. 사람은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결국 하나님이고, 사람은 결국 사람일 뿐이니 이 둘 사이에 경계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율법시대에 아브라함의 종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어떻게 기도하였느냐?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창 24:12)라고 하였다. 그는 등급을 확실하게 나누었다. 지금 사람들은 어떠하냐? ‘하나님은 우리와 다를 바가 없어. 똑같이 정상 인성을 지니고 있으셔. 정상 인성에 필요한 것과 정상 인성의 희로애락을 다 가지고 있으며, 정상 인성으로 생활하고 활동도 하셔. 그분이 신성으로 사역을 하시지만, 정상 인성도 없어서는 안 돼!’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내면에는 ‘정상 인성’이라는 윤곽이 있어 쉽게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성품을 모두 사람의 정상 인성으로 규정해 버림으로써 신성 본질을 부인한다. 이는 매우 큰 잘못이며, 이렇게 하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가 하나님을 접해 보지 않았는데, 너희 중 누가 감히 “하나님을 일 년 동안 접해도 전혀 거역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어느 누구도 그렇게 자신하지 못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10년, 20년 동안 하나님을 믿었어도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없다. 이는 사람이 사탄에 의해 깊이 패괴되었음을 의미한다. 사탄의 성품이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깊게 뿌리내려서 일부 패괴된 것들은 너희가 스스로 파낼 수 없다. 내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하고, 이렇게 많은 진리를 선포하여도,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람은 지금도 여전히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이미 무감각과 우둔함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단지 약간 우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패역 본성이 모양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아직도 꿰뚫어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접하면 하루 이틀은 낯설고 어색해하며 ‘이분은 하나님이셔!’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열흘이나 보름 정도 접하면서 조금씩 점점 익숙해지고 가까워지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방자해져 마치 완벽하게 평등하고 등급도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지위 구분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생활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때로는 나도 고민한다. ‘이 사람은 어째서 이럴까?’ 만약 내가 늘 그를 책망하고 훈계한다면, 그는 분명 고분고분하고 양순해질 것이다. 때로 내가 사람과 평등하게 이야기를 하면, 사람은 ‘흠, 봐 봐, 하나님께서 나한테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라고 생각한다. 너에게 잘해 주는 것이 네게 패역한 성품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너의 본성 본질이 좋다는 뜻도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조금만 잘해 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해져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자신의 신분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이런 것들을 모두 잊어버린다. 사람의 이런 본성은 정말 썩을 대로 썩어서 이성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한동안 하나님을 접하여 네 내면의 그러한 거역과 대적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보아라. 일정 시간 접하는 동안, 내가 일깨워 주지 않고, 나무라지도 않고, 책망하지도 않으며, 아무도 네게 교제해 주지도 않고, 그저 너 스스로 체험하게 하면, 네가 대체 어느 정도까지 체험할 수 있는지 보아라. 진리를 얻지 못하면 너는 분명 철저하게 실패하게 될 것인데,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패역 성품이 너무나도 심각해서 마음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너의 패역 성품, 사탄 본성, 교만한 마음은 너무나 사람을 받아들일 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나와 일정 기간 접하면 옳지 않은 생각들을 할 수도 있는데, 이것들을 해결하지 않고 관념이나 판단이 되게 내버려두면 위험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그건 당신이 너무 평범하고 정상이라 그래요. 제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렇지 않을 거예요.”라고 하지만, 네가 예수를 믿어도 마찬가지이다. 너희가 예수시대에 놓였다면 바리새인보다 나을 것이 없었을 것이며, 마음도 관념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네가 유다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마라. 유다는 주님을 팔고 주님의 돈을 훔쳐서 썼다. 너는 주님을 팔지 않고 교회 재산을 함부로 쓰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주님에게 순종하는 사람도 아닐 것이며, 분명 관념이 가득하고, 거역과 대적이 가득한 사람일 것이다. 예수의 말씀과 사역이 바로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인데, 왜 유다는 주님을 대적할 수 있었느냐? 그는 본성이 너무 나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어코 그리스도를 적대했다. 그 당시에 베드로도 많은 고통을 겪지 않았느냐? 결론적으로 그의 인성이 그 당시의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나았고, 하나님 사랑하기를 추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온전케 되었다. 그 당시에는 그도 예수에 대해 어느 정도 관념과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주님 사랑하기를 추구할 수 있었기에 결국에는 예수를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큰소리치지 말고 체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 성공할 수 있다고, 백 점을 받을 수 있다고 장담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말은 실제적이지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다. 반드시 네가 그 일을 체험한 다음에 자신의 인식과 깨달음을 이야기해야 비로소 실제적인 것이다. “하나님, 저희 집으로 오십시오. 다른 사람처럼 당신을 화나시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처럼 그렇게 인성이 없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마라.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 내면의 정상 인성의 것들이 이미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정상 인성이 사라졌으며, 양심과 이성도 사라졌다. 정상 인성의 상식들, 단순하고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나 말을 따르고 순종할 수 있는 것, 이런 긍정적인 것들이 사람 내면에서 이미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생활 원칙과 인생 목표가 이미 모두 변질되어 다들 사탄의 철학을 받들고 사탄 본성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번지르르하고 간사하게 말을 하고, 상황을 봐 가면서 말을 바꾸며, 듣기 좋은 말만 하는데, 그는 이렇게 사는 것을 매우 좋다고 여긴다. 인류가 깊이 패괴되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깊이 패괴되었는데 여전히 정상 인성을 약간이라도 갖고 있겠느냐? 너는 너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는 하지만, 그저 약간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약간 거만하고 말이 좀 간사하고, 또는 약간 건성으로 대충대충 본분을 이행하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인식한다면 너무나 가볍고, 그렇게 인식한 것은 모두 수박 겉핥기식이다. 핵심은 사람 본성이 사악하고, 사람이 모두 사악함을 숭상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며, 정상 인성이 이미 모두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다면 피조물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 말씀 속에서 실행의 길과 적합한 실행법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너희도 알다시피, 사람들 중에 너무 좋은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왜 어떤 사람은 인성이 있고 어떤 사람은 인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냐? 인성이 있는 사람은 정말 이런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느냐? 그도 실행해 내지 못한다. 그저 상대적으로 마음씨가 비교적 선량하고 온유하며, 사역에 대해 비교적 책임감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절대적으로 좋으며, 결점과 패역이 전혀 없고, 절대적으로 말을 따르고 순종하며, 절대 대충대충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는 너무 과장 아니겠느냐? 이것이 사실과 부합하겠느냐? 정말 이런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건 치우친 것이다. 하지만 만약 너희가 ‘우리 사람은 끝났어. 좋은 인간이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을 믿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아예 믿지 말고 죽기나 기다리자!’라고 생각한다면, 이것 또한 틀렸다. 너희는 늘 극단적이다. 마치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것처럼 왼쪽으로 치우치거나 오른쪽으로 치우쳐 버린다. 약하고 부드럽게 말하면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강하고 엄하게 말하면 고개를 푹 떨구고 소극적으로 되거나 심지어 자포자기해 버린다. 어떤 사람은 심판하고 정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은 틀렸다며, 구원받을 희망이 사라졌다며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린다. 바로 이런 사람이 구원하기 가장 어렵다. 사람 말을 못 알아듣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으로 폭로하는 것은 사람의 패괴 본성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어째서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지를 사람이 알게 하기 위함이다. 이런 것들을 폭로하는 것은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만약 폭로하지 않는다면, 설령 끝까지 믿는다고 해도 너는 여전히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늘 천사장은 거만하다고 하고, 이 사람은 교만하고 저 사람은 패역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너 자신은 어떠하냐? 또 어떤 사람은 늘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께 패역해.”라고 말하지만, 패역의 근원을 여전히 모르며, 그런 내적 상태의 본질을 여전히 꿰뚫어 보지 못하고, 여전히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면 변화할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다. 이 말들을 너희는 이해할 수 있느냐?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방금 두 가지 측면을 주로 교제하였다. 하나는, 하나님을 믿으면 진정으로 순종하고, 피조물의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람 내면의 패역과 사람의 본성을 폭로하여 사람이 자신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폭로하지 않고 사람 스스로 자신을 인식하게 한다면,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이 훌륭하다고,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은 “저도 깊이 패괴되었어요.”라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한동안 함께하고 나서는 그래도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지만, 내가 볼 때 너도 별로야. 네가 나보다 못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마라. 다른 사람보다 그다지 낫지도 않다. 사람의 패역한 본성은 다 마찬가지이다. 이제 이것들을 모두 명확히 알게 되었느냐? 이런 것들을 다 교제했는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나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오늘 하나님 교제를 다 듣고 나니까 알겠어. 나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하지 않았고, 아직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았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조차 해내지 못했어. 너무나 비이성적이고, 정말 엉터리로 믿었어!’라고 생각하지는 않느냐? 정말 이런 인식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될 희망이 있으며, 그래야만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발췌문 3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생명 성품의 변화를 중시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하나님 마음속에 자신이 일정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 여부를 중시하고 관심을 기울인다. 늘 하나님 눈에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지, 하나님 마음속에 자신의 자리가 있는지를 추측한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모두 이런 것들이 있다. 만약 하나님을 만나면 늘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할 때 기뻐하는지 아니면 화를 내는지 관찰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늘 다른 사람에게 “저의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적이 있나요? 하나님께서는 저를 어떻게 대하시나요? 저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나요?”라며 알아보기도 한다. 이보다 더 심각한 사람도 있는데, 그는 하나님이 쳐다보기만 해도 마치 새로운 문제를 발견한 것처럼 “아이고, 하나님께서 방금 저를 보셨는데 눈빛이 좋지 않았어요. 이건 좋은 징조가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사람은 모두 이런 것들을 특히나 중시한다. 어떤 사람은 “저희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믿는데, 그분께서 저희를 신경 써 주지 않으시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숨은 뜻은 바로 ‘하나님 마음속에 우리의 자리가 없는데 믿어서 뭐 해? 믿지 말자!’는 것이다. 이는 비이성적이지 않으냐? 너는 사람이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아느냐?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는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마음속에 자신의 자리가 있기를 바란다. 이 얼마나 교만하고 방자하냐! 이는 사람의 가장 비이성적인 일면이다. 심지어 너무 비이성적인 사람도 있다. 그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의 일을 알아보면서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면, 또는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신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다른 사람은 돌보면서 자신은 돌보지 않으면, 불만을 품고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으며 공평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이는 사람의 이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정신도 그다지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다. 평상시에 사람은 늘 하나님의 안배와 지배에 순종한다고,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든 절대 원망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책망하고 훈계해도 괜찮다고, 하나님이 심판하고 형벌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닥쳤을 때 받아들이지 않는데, 사람에게 이성이 있는 것이냐? 사람은 다 자신이 매우 잘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책망과 훈계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의 눈빛이 이상하다고 느끼기만 해도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이 좀 강한 어조로 말씀하면 마음이 찔렸다고 생각해 소극적으로 변하고 하나님을 믿는 일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신경 써 주지 않으시는데 어떻게 믿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분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저 사람이 얼마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지 봐라. 하나님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눈빛 하나에도 하나님의 의향을 성찰할 수 있겠어.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진짜 대단해. 정말 지상의 하나님을 천상의 하나님으로 보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냐? 이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다. 어떤 일도 꿰뚫어 보지 못하고 분량이 지나치게 작으니, 정말 수많은 추태를 드러낸다. 사람의 이성이 너무나 부족하고,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너무나 많고 너무 지나치기까지 하는데, 이성이라고는 전혀 없다. 사람은 늘 하나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만, 하나님에게 완전히 순종하고 경배하지 못하며, 오히려 자신의 기호에 따라 무리한 요구를 한다. 하나님이 넓은 도량으로 무슨 일을 보든 화를 내지 말아야 하고, 언제나 미소 띤 얼굴로 사람을 대해야 하고,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말을 해야 하고, 공급해야 하고, 진리를 교제해 주어야 하며, 거기에 더해 무조건 인내하고, 또 좋은 얼굴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사람은 요구하는 게 너무 많고 따지는 것도 너무 많다! 너희 모두 이 일들을 성찰해 보아라. 사람의 이성이 너무 부족하지 않으냐?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온전히 순종하거나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게 별도의 요구를 한다. 이렇게 요구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충성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또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 어떻게 사랑해 달라고, 어떻게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어떻게 보살피고 보호해 달라고,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고 돌봐 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배려하고 만족게 하고, 어떻게 해야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생기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를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의 마음속에 그런 것들이 있느냐? 그것들은 모두 사람이 마땅히 도달해야 하는 것인데, 왜 사람은 그것을 위해 마음을 쓰지 않느냐? 어떤 사람들은 한순간의 열정으로 조금은 버리고 헌신할 수 있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약간의 좌절에도 바로 낙담하고, 실망하고, 원망할 수 있다. 사람은 어려움이 너무나 많고,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 사랑하기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다. 사람은 아예 이성이 없어 잘못된 위치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너무나 귀중하게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또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당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존재로 여기십니다.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께서 커다란 대가로 우리를 사신 것이니, 우리가 너무나 가치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속에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우린 또한 대단하죠. 이방인보다 훨씬 지위가 높은 천국의 사람이랍니다.”라고 말한다.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매우 대단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많은 리더들이 다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 리더로 발탁되면, 그들은 하나님 집에서 지위와 신분이 생겼다고 느꼈으며, ‘하나님께서 나를 눈여겨보시고 중히 여기시어 리더가 되게 하셨어.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역을 해야 해.’라고 생각해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일정 시간이 흐른 후 나쁜 짓을 함으로 본모습이 드러나 교체되었고, 그러자 그는 의기소침해졌다. 거기에다 그의 추한 모습을 폭로하고 책망하자, 그는 더 소극적으로 변해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너무 매정하게 하시네.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으셔. 하나님께서 사람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신다면서, 그런데 왜 과오가 조금 있다고 나를 바로 교체해 버리셨지?’라고 생각해 의기소침해졌으며, 더 이상 믿기 싫어졌다. 그가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믿음을 갖고 있겠느냐? 책망과 훈계조차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분량도 지나치게 작은 것인데, 앞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 이런 자는 위험한 사람이다.

사람은 자신에게는 높은 요구를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요구가 높다. 하나님이 그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야 하고, 인내하고 포용하고, 아끼고 공급해 주면서 얼굴에는 늘 미소를 띠어야 하고, 참고 양보하며 무조건 맞춰 주면서 다방면으로 보살펴 주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조금의 엄격함을 보이거나 그에게 자극을 주어서는 안 되며, 매일 달래 주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사람의 이성은 정말 형편없구나!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지, 어떤 관점을 지녀야 하는지, 어떤 위치에 서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자신을 어떤 위치에 두어야 적합한지 등에 대해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지위가 조금 있는 사람은 자신을 매우 높게 보고, 지위가 없는 사람도 자신을 매우 높게 본다. 사람은 항상 자신을 모른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너희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뭐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너희에게 엄하고 너희를 거들떠보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따르면서 믿고 원망 없이 여전히 본분을 이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너는 성숙하고 능숙할 것이고, 참으로 분량이 생기고, 정상인의 이성을 조금이나마 갖추게 되어 하나님께 요구하지 않게 된다. 사치스러운 욕망도 사라지고, 자신의 기호대로 남에게 요구하거나 하나님께 요구하지 않게 된다. 이래야만 사람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갖춘 것이다. 지금 너희는 요구가 너무 많고 지나치고 사람의 뜻이 너무 많다. 이것은 네가 잘못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가 너무 높은 위치에 서 있고 자신을 너무 존귀하게 여긴 것이다. 마치 하나님보다 그저 약간 낮은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너라는 사람은 다루기가 어렵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본성이다. 너의 내면에 이런 내적 상태들이 존재한다면, 분명 소극적일 때가 많고 정상적일 때가 적을 것이며, 그러면 너의 생명은 느리게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마음이 단순하고 너무 따지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쉽게 받아들이고 성장이 빠를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단순하면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겪지 않는다. 하지만 너는 지나치게 정에 치우치고 너무 따지고 늘 하나님에게 요구하기 때문에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장애물이 많고, 생명 성장도 느리게 된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떤 식으로 그를 공격하고 배척해도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여전히 추구한다. 그는 도량이 있어 고통을 좀 덜 받고 생명 진입의 장애물도 적은 것이다.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 이런 식으로 너는 너무 따진다. 누가 너를 보는 눈빛이 좋지 않거나, 누가 너를 깔봤거나, 또는 누가 너를 상대하지 않았거나, 또는 하나님이 한 어떤 말씀이 너를 자극했거나 말씀이 심해서 너의 마음을 찔렀거나 너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거나, 혹은 좋은 물건을 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줬거나 하면, 너는 소극적으로 변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오해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람은 너무 따지는데 말로 납득시키기 힘들다. 아무리 그에게 진리를 교제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또 그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이런 사람이 가장 다루기 어렵다.

나는 너희가 “저는 어떤 일에서 넘어졌고, 나중에 고생을 좀 하고 나서 인식이 생겼어요.”라고 교제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 이렇게 체험하는데, 이런 체험은 너무나 얕다. 이 정도의 인식을 얻기까지 몇 년이나 체험했을 수도 있고, 겨우 이 정도의 인식과 변화가 생기기까지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겪었을 수도 있다니, 너무나 가련하다! 사람의 믿음에 너무나 많은 불순물이 섞여 있어 하나님을 믿기 너무 힘들다! 지금까지도 각 개인의 내면에는 여전히 불순물이 매우 많으며, 하나님에 대한 요구도 여전히 많다. 이는 모두 사람 내면의 불순물로, 이런 불순물이 있다는 것은 인성에 문제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자 패괴 성품의 표출이기도 하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요구 또한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으로 구분되는데, 이것을 명확하게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이 어떤 위치에 서야 하고, 어떤 이성을 갖춰야 하는지를 반드시 분명히 해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늘 사람을 대하는 나의 낯빛을 중시하고, 늘 하나님이 누구에게 잘 대하는지 못 대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을 발견했다. 만약 그를 대하는 하나님의 낯빛이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하거나 하나님이 그를 폭로하고 정죄하는 말을 들으면, 그는 이를 내려놓지 못한다. 네가 아무리 그에게 교제해 주어도 소용이 없으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돌아서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규정해 버리고, 그런 말 한마디에 집착해 그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규정해 버린다. 그러고는 계속 소극적이 되어 누가 어떻게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런 것이 바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이로써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전혀 알지 못하고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회개하고 변화할 수만 있다면,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 또한 바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너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데, 너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바뀔 수 있겠느냐? 네가 바꾸어야 하나님이 바꾸고, 네가 바꾸지 않으면 하나님도 바꾸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하나님이 증오하고 좋아하는 것, 하나님의 희로애락, 하나님의 전능함과 지혜에 대해서도 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약간 감성적인 것조차 이야기하지 못한다. 이것이 사람의 다루기 어려운 점이다. 하나님이 입이 닳도록 거듭 충고한 말씀은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면서 매서운 말씀 한 마디나 책망하고 훈계하는 말씀이나 심판하는 말씀은 바로 사람의 마음에 꽂혀 버린다. 왜 사람은 긍정적으로 인도하는 말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심판하는 말씀이나 책망하고 훈계하는 말씀들을 듣고는 괴로워하고 소극적으로 변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냐? 결국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스스로 고민을 거듭해야 간신히 돌아서게 되고, 거기에다 하나님의 위안의 말씀들이 결합되어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만약 위안하는 이런 말씀들이 없다면, 사람은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소극적으로 변한다. 이제 막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기 시작할 때, 사람은 그릇된 인식과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많이 지니고 있다. 늘 자신의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늘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여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말을 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그러다가 3~5년 체험을 한 후에야 비로소 점차적으로 깨닫고 밝히 알게 되는데, 마치 이제 막 어른이 된 것처럼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게 되고 자신이 지나치게 다루기 어렵다고 느끼게 된다. 체험을 많이 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도 적어져 더 이상 원망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게 된다. 예전에 비해 지금의 분량은 어느 정도 어른 같다. 예전에는 어린아이 같아서 어느 순간에 화를 내거나 소극적으로 변할지, 어느 순간에 하나님에게서 멀어질지, 어떤 일이 닥칠 때 속으로 원망할지, 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읽고 또 관념이 생길지, 언제 또 하나님에 대한 의혹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분량이 지나치게 작으면 바로 이렇다. 지금은 모두 많은 일들을 체험했고 몇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성장하여 예전에 비해 많이 안정되었다. 이는 모두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거둔 성과인데, 진리가 사람에게 작용한 결과이다. 그래서 사람이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진리를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모두 해결할 수 있으며, 얼마나 오래 체험하든 모두 수확을 거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체험 시간이 너무 짧아도 안 되지만, 한 가지 일을 체험할 때마다 매번 수확이 있다면 생명 성장이 빨라질 것이다.

지금 너희를 리더 일꾼이나 책임자로 양성하거나 중요한 본분을 이행하도록 양성한다고 해서 이것이 너희의 분량이 크다는 증거는 아니다. 너희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보다 자질이 조금 더 나을 뿐이며, 그들보다 좀 더 추구할 뿐이고, 그들보다 좀 더 양성할 가치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너희가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의 지배에 따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너희가 장래와 희망을 내려놓았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아직 이런 이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너희는 모두 어느 정도 소극적인 것들을 지닌 채 사역을 한다. 이 중에는 복을 얻고자 하는 속셈과 바람, 심지어 사람의 관념과 상상도 있다. 이와 동시에 너희는 또 속죄라도 하듯이 짐들을 짊어지고 사역을 하는데, 다들 마음에서 우러나 기꺼이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든 하나님의 뜻과 요구대로만 하는 것에도 이르지 못했다. 너희가 이 정도까지 이를 수 있겠느냐? 사람은 이런 이성이 없다. 다들 속내를 궁금해한다. ‘대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태도이신 걸까? 내가 봉사하도록 쓰시는 것일까, 아니면 나를 구원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것일까?’ 다들 속내를 궁금해하지만 말할 용기가 없을 뿐이다. 말할 용기가 없다는 것은 또 다른 것에 지배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말해도 소용이 없어. 내 본성은 원래 이래. 변할 수 없어. 그저 내가 나쁜 짓만 하지 않도록 하면 돼. 나도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아.’라는 것인데, 자신을 가장 낮은 자리에 제한시켜 놓는다. 결국에는 별로 성장하지 못하고 본분 또한 건성으로 대충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행하게 된다. 몇 번 교제하고 나서야 너희는 진리를 좀 깨닫게 되고 진리 실제를 좀 알게 된다. 너를 쓰든 안 쓰든, 또는 너를 어떤 태도로 대하든, 이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너의 주관적인 노력과 네가 어떤 길을 선택하는지, 마지막에 변화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이것이 가장 핵심이다. 아무리 좋은 태도로 너를 대한다 하더라도, 네가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이 닥칠 때마다 네가 넘어지고 충성심이 전혀 없다면, 아무리 좋은 태도로 너를 대해도 소용이 없다. 핵심은 여전히 사람이 걸어가는 길에 달려 있다. 예전에 너에게 저주하는 말, 증오하는 말, 혐오하는 말을 했었지만, 지금 네가 바뀌었다면 너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 또한 따라서 바뀌게 될 것이다. 사람이 늘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고 진정한 믿음이 없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제는 너희가 조금 깨달았는데,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치면 그래도 여전히 소극적이고 나약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실행함으로써 굳게 설 수 있겠느냐? 진정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겠느냐? 만약 이것들을 해낼 수 있다면, 정상 인성의 이성을 갖게 될 것이다. 이제 너희는 사람의 패괴 성품,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뜻에 대해 조금 인식하게 되지 않았느냐? 최소한 윤곽은 좀 생겼다. 언젠가 각 측면의 진리에서 모두 어느 정도 실제에 진입하게 되면, 온전히 정상 인성을 살아 내게 될 것이다.

발췌문 4

진리를 추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 읽기를 중시하는 것이지만, 하나님 말씀을 읽고 얼마나 얻을 수 있는지는 사람의 이해력에 달려 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읽지만, 하나님 말씀의 참된 의미와 빛 비춤을 읽어 내고, 하나님 말씀을 읽기만 해도 수확을 얻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도리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에, 그 결과 몇 년 동안 읽어 많은 도리를 이해해도 체험 과정에서 닥친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며, 전혀 써먹지를 못한다. 이는 어찌 된 일이겠느냐? 똑같이 하나님 말씀을 읽었는데 효과는 전혀 다르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닥쳐도 하나님 말씀 속에서 진리를 구하지 못한다. 체험이 좀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실제적인 것과 진리에 대한 실제 인식을 얼마간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반면, 체험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글귀의 표면적인 의미만 이해할 뿐 체험 인식은 전혀 없으니,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 어떤 리더는 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전적으로 교회를 다니면서 진리를 공급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옳으냐? ‘진리를 공급한다’라는 말을 절대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갖추고 있다는 말이냐? 누가 감히 자신이 진리를 공급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느냐? 이는 지나친 허풍 아니겠느냐? 너희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추구하는 사람이 되기만 해도 훌륭하다. 하지만 사람이 얼마간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진리에 대한 체험 인식을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진리를 공급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람은 모두 진리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체험 인식을 좀 말하는 것을 두고 어떻게 진리를 공급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리더 일꾼은 양육 사역을 하는 사람, 전문적으로 교회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을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뿐, 진리를 공급하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설령 분량이 좀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한다고는 할 수 없다.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 사람의 분량을 놓고 봤을 때, 진리를 공급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겠느냐? 설령 진리에 대한 체험과 인식이 좀 있을지라도, 진리를 공급할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절대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이다. 그런 말은 너무도 비이성적이다! 교회를 양육하고 진리를 공급한다고 자부심을 갖는 사람이 있다. 마치 자신이 꽤 많은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구는데, 결과적으로는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조차 분별할 줄 모른다. 이는 모순되지 않느냐? 어떤 사람이 너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진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에요.”라고 대답한다면, 너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겠느냐? 너는 글귀와 도리만을 말할 줄 알 뿐,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체험 인식조차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공급할 자격이 없다. 현재 리더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렇다 할 체험이 없다. 그저 자질이 좀 있고, 진리를 추구하려 하며, 양성과 훈련에 적합해 본분 이행에서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설령 인식을 좀 교제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를 어찌 진리를 공급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대부분의 리더 일꾼이 조금씩은 인식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진리 실제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몇 년 동안 설교를 들어 얕은 인식이 좀 있는 데다가 진리를 교제하고자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좀 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진리를 공급하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진리 공급은 리더 일꾼이 할 수 있는 일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리더 일꾼이 설교를 하고 교회를 양육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진정으로 교회를 양육할 수 있다. 대다수의 리더 일꾼이 아직까지 실질적인 문제들을 잘 해결하지 못하며, 진리에 대한 인식을 조금 교제할 수는 있어도 대부분 기본적으로 글귀와 도리에 속할 뿐, 진리 실제에 대해 제대로 교제하지 못한다. 그런데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대부분의 리더 일꾼은 약간의 이해력을 지니고 있을 뿐, 실제 체험이 별로 없다. 그런데도 그가 다른 사람보다 진리를 깨달았다고, 그에게 진리 실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 정도는 못 된다. 순전히 양성하기 위해 발탁한 리더 일꾼들도 있다. 자질과 이해력이 있고 가정 환경도 적합하기 때문에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지, 발탁되었다고 해서 진리 실제가 있다거나 진리를 공급할 수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먼저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빛 비춤으로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진리에 부합할 뿐, 진리에 속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직접 선포한 것만이 진리이며, 성령의 깨우침에 속하는 모든 것은 단지 진리에 부합할 뿐이다. 성령은 직접 사람에게 진리를 선포하지 않고 사람의 분량에 따라 사람을 깨우쳐 주며 사람이 닿을 수 있는 빛 비춤을 주기 때문이다. 너는 이 점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체험적 인식이 약간 있다고 해서, 이를 진리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순 없다. 기껏해야 진리에 대한 인식이 좀 있을 뿐이다. 성령이 깨우쳐 주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대표하지는 않으며, 진리에 속하지도 않는다. 그저 진리에 대한 인식과 성령의 깨우침이 좀 있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이 진리에서 얼마간 인식을 얻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공급한다면, 이 또한 자신의 체험 인식을 다른 이에게 공급하는 것일 뿐, 진리를 공급한다고는 할 수 없다. 진리를 교제한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으며, 이 표현은 적합하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네가 교제하는 것은 전부 진리에 대한 인식이지, 진리 자체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체험 인식을 교제한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진리를 공급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진리 공급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누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겠느냐?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할 수 있다. 사람이 그것을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이 일을 반드시 꿰뚫어 보아야 한다. 이는 부정확한 용어 사용이라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사실과 위배되고 사실을 왜곡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또한, 이는 사소한 일을 과장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약간의 체험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진리를 지니고 있다고, 진리에 속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절대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이 진리에서 아무리 많은 인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진리의 생명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진리에 속한다고 말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절대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은 그저 진리를 조금 깨닫고, 약간의 빛 비춤, 실행의 길, 순종의 실제를 지니고 있으며, 얼마간 참된 변화를 얻었을 뿐이다. 하지만 진리를 얻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진리 선포를 통해 사람의 생명을 공급하는 한편, 사람에게 진리를 깨닫고 얻어 하나님을 섬기고 만족게 할 것을 요구한다. 설사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다가 어느 날 정말로 진리를 얻는다 할지라도, 사람이 진리에 속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진리를 갖추었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사람은 아무리 오랜 세월 체험해도 제한적이고 얕은 진리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가장 심오한 것이고,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다. 사람이 평생 진리를 체험한다 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진리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진리를 완전히 얻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며, 진리를 완전히 깨닫고 살아 낼 수도 없다. 그러니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아기라는 하나님 말씀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를 체험하고 인식하며, 모든 진리를 다 완벽히 인식하여 진리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진리를 선포할 수 있다고, 이런 사람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 1:21)라는 바울의 말처럼,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이런 관점이 옳으냐? 이는 또 ‘신인경(神人經)’의 논조를 늘어놓는 것 아니겠느냐? 이는 틀려도 단단히 틀린 것이다! 진리에 대한 네 인식과 체험이 아무리 많아도, 설령 네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하더라도, 네 생명 진입이 아무리 높고 깊어도, 네 생명은 여전히 사람의 생명이고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절대적인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은 반드시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설령 마지막에 네가 어느 한 측면의 진리를 모두 체험하고 깨달아 하나님의 지배에 따를 수 있는 온전케 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진리에 속한다고 할 수는 없다. 또 설령 네가 참된 체험 간증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해도, 진리를 선포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전에 종교계에서는 늘 “내면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잘못되고 막연한 표현이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 않지만, 사람은 여전히 이 일을 모호하고 불분명하게 인식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진리를 얻어 진리가 우리 내면에 있으니, 우리에게 진리가 있는 거지. 진리가 우리 마음에 있으니, 우리도 진리를 선포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또한 틀린 것 아니겠느냐? 사람이 늘 얘기하는 ‘진리가 있다’ 또는 ‘진리가 없다’라는 말은 주로 진리에 대한 체험과 인식이 있는지, 진리에 따라 실행할 수 있는지 여부를 가리킨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체험하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체험하며, 진리에서 얻는 것 역시 각기 다르다. 즉, 모든 사람의 체험 인식을 종합해도 진리의 본질에 완벽하게 미치지는 못한다. 진리는 이렇게 심오하다! 어째서 네가 얻고 인식한 것이 진리를 대체할 수 없다고 하겠느냐? 네가 교제한 그 정도의 체험 인식은 다른 사람이 듣기만 해도 알게 되고, 그다지 오래 체험하지 않아도 완전히 깨닫고 얻게 되며, 다소 심오한 것도 몇 년씩 체험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진리는 사람이 평생 체험해도 다 체험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함께 체험해도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진리가 얼마나 심오한지 알 수 있다. 진리는 언어로 완전히 표현할 수도 없다. 진리를 인류의 언어로 표현하면 ‘인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데, 인류는 그것을 영원히 다 체험할 수 없으며, 완벽하게 진리를 살아 낼 수도 없다. 사람은 몇천 년을 체험해도 한 가지 진리조차 다 체험하지 못하며, 아무리 오래 체험해서 깨닫고 얻은 진리라 해도 여전히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인류의 영원한 생명 원천이고, 하나님은 진리의 근원이며, 진리 실제의 진입은 끝이 없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는 하나님 자신의 생명으로,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본질, 그리고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대표한다. 체험 인식이 조금 생긴 것을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너는 성결해졌느냐? 너는 왜 여전히 패괴를 드러내느냐? 왜 여러 부류의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느냐? 왜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하느냐? 네가 진리를 약간 깨달았다고 해서 하나님을 대변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성품을 살아 낼 수 있느냐? 네가 한 가지 진리의 어떤 측면에 관한 체험 인식이 있어 빛 비춤을 조금 얘기할 수 있다고 해도 네가 사람에게 공급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고, 절대 오래갈 수 없다. 너의 깨달음과 빛 비춤은 진리의 본질, 진리의 전부를 대표하지 못하며, 그저 진리의 한 측면, 작은 부분이자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정도일 뿐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본질까지는 아직 멀었다. 그 정도의 빛 비춤과 깨우침, 그 정도의 체험 인식은 영원히 진리를 대체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진리를 체험하고 어느 정도 성과가 있어, 그런 체험 인식을 모두 종합한다 해도 한 마디 진리의 전부와 본질에는 미치지 못한다. 예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인간 세상에 대해 ‘사람 중에는 나를 사랑하는 이가 없다.’라는 격언을 만들었다.” 이 말은 진리이자 인생의 정수, 가장 심오한 것으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네가 체험해 보아라. 3년간 체험하면 얕은 인식이 생길 것이고, 7년이나 8년간 체험하면 또 어느 정도 인식을 갖게 되겠지만, 그런 인식은 영원히 그 한 마디의 진리를 대체할 수 없다. 그가 2년간 체험하면 약간의 인식이 생길 것이고, 10년간 체험하면 또 어느 정도 인식이 생길 것이고, 평생을 체험하면 비교적 높은 인식이 생기겠지만, 너희 두 사람의 인식을 종합해도 그 한 마디의 진리를 대체할 수 없다. 너희 두 사람이 종합한 것에 아무리 많은 깨달음과 빛 비춤, 아무리 많은 체험과 인식이 있다 해도 그 한 마디의 진리를 대체하지 못한다. 즉, 사람의 생명은 영원히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너의 인식이 아무리 진리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한다고 해도 그것은 영원히 진리를 대체하지 못한다. 사람에게 진리가 있다는 것은 사람이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를 조금 살아 내고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하나님을 높이고 증거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이 진리를 갖췄다고 할 수는 없다. 진리는 너무 심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도 사람이 평생 체험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심지어는 사람이 몇 번의 생, 수천 년의 세월을 체험해도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를 온전히 체험해 낼 수 없다.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참으로 끝이 없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이 평생 체험하며 진리를 깨닫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의 글귀를 막 이해해 놓고 자기에게 진리가 있다고 말한다. 이건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냐? 빛 비춤이든 인식이든 모두 깊이의 문제가 있다. 사람이 평생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진입한 진리 실제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약간의 빛 비춤과 인식이 있는 것이 진리 실제가 있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중점적으로 봐야 할 것은 그 빛 비춤과 인식이 진리 본질에 닿을 수 있느냐이다. 이것이 가장 핵심이다. 어떤 사람은 빛 비춤을 좀 얘기할 수 있고, 얕은 인식을 좀 얘기할 수 있다고 해서 자기에게 진리가 있다고 생각해 속으로 흐뭇해한다. 그 때문에 우쭐거리는데 사실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까지는 아직 멀었다. 사람에게 무슨 진리가 있겠느냐? 사람에게 진리가 있다면 언제 어디서고 넘어질 수 있느냐? 진리가 있다면 어찌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신할 수 있느냐? 네게 진리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네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뜻인데, 그럼 정말 심각하다! 그건 네가 주가 되고 그리스도가 됐다는 것이 아니냐? 이것은 황당무계한 말이다. 순전히 사람의 추측이고,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전혀 성립할 수 없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다면, 그 ‘생명’은 어떤 것이겠느냐? 진리가 사람의 마음에서 주권 잡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참된 인식이 있고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사람 내면에 이런 새 생명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여 얻은 것으로,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에 기반을 둔 것이고, 진리의 범위 안에 살면서 얻어진 것이다. 사람의 생명에 온통 진리에 대한 인식과 체험이 존재하게 되고, 그것을 기초로 범위를 넘지 않게 된다. 진리 생명을 얻는다는 것에서 말하는 생명은 바로 이러한 생명을 의미한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로 살아간다고 해서 사람의 내면에 진리의 생명이 생기는 것은 아니며, 사람이 진리를 생명으로 삼았다고 해서 곧 진리가 되고, 사람 내면의 생명이 진리의 생명이 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사람이 곧 진리 생명이라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결국, 사람의 생명은 여전히 사람의 생명이다. 네가 하나님 말씀으로 살면서 진리에 대한 인식이 있다면, 그 인식이 네 안에 뿌리내려 생명이 되고, 네가 체험해 얻은 진리가 네 생존 토대가 된다면, 네가 그 말씀대로 살고 아무도 그것을 바꿀 수 없고, 사탄도 너를 미혹할 수 없고 패괴시킬 수 없다면, 너는 진리 생명을 얻은 것이다. 즉, 네 생명 안에 오직 진리뿐이고, 오직 진리에 대한 인식, 체험, 깨달음만 존재하며, 무슨 일을 하든 이러한 것들로 살아가고, 이 선을 넘지 않는다면, 너는 진리 실제를 갖춘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으로 궁극적으로 얻게 되는 자는 바로 이러한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진리를 잘 깨닫고 있다고 해도 그 본질은 여전히 사람의 본질이지, 하나님의 본질과는 전혀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 없다. 사람은 영원히 진리를 다 체험할 수 없으므로 진리를 완전히 살아 낼 수 없으며, 사람이 닿을 수 있는 극히 제한된 진리만 조금 살아 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단 말이냐? 만약 하나님이 직접 크고 작은 신들을 온전케 한다면, 매우 혼란하지 않겠느냐? 게다가 이는 불가능하고 황당한 일이자, 사람의 황당한 생각이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한 후 사람을 지은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것은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사람만 창조했을 뿐, 신은 창조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사역할 때는 성육신의 형상을 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창조하지 않으며, 하나님 자신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신의 본질을 갖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모른다면,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자주 진리를 구해야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상상한 대로 헛소리해서는 안 된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체험하여 진리에 대한 참된 체험 인식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이 점차 네 생명이 되었다고 해도 진리가 네 생명이고, 네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네가 또 틀린 것이다. 네가 진리의 한 부분을 어느 정도 체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네게 진리가 있음을 의미하겠느냐? 진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느냐? 너는 진리를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느냐? 너는 진리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발견할 수 있느냐? 이런 효과를 거둘 수 없다면, 이는 진리에 있어 어떤 한 부분의 체험만으로는 진정 진리를 깨달았다고 볼 수 없고,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도 없고, 진리를 얻었다고는 더욱 말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모든 사람은 한 측면, 한 범위에서 진리를 체험한다. 각자의 제한된 범위 안에서 체험하므로 진리의 모든 면을 아우르지는 못한다. 사람이 진리의 본뜻을 살아 낼 수 있겠느냐? 네가 체험한 그 정도의 진리가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되겠느냐? 그저 백사장의 모래 한 알, 바닷물의 한 방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네가 체험한 그 정도의 인식, 그 정도의 느낌이 얼마나 소중하든 그건 진리라고 할 수 없으며, 그저 진리에 부합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진리에 내포된 실제가 아우르는 범위는 아주 넓어서 아무도 헤아릴 수 없고 반박할 수 없다. 네게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 있는 한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이런 참된 인식은 아무도 반박할 수 없으며, 진리 실제가 담긴 간증이 있으면 영원히 굳게 설 수 있다. 하나님은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을 인정한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기만 하면, 어떤 환경에 있든 하나님께 의지해 하나님 말씀을 체험할 수 있고, 진리를 받아들여 네 생명으로 삼을 수 있다면, 네게 길이 생겨 살아남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이 얻은 그 정도의 것이 진리에 부합하긴 하지만 그것이 바로 진리라고 할 수는 없으며, 진리를 얻었다고 할 수도 없다. 그 정도의 빛 비춤은 특정 범위 내에서 자기 자신 혹은 일부 사람에게만 적합할 뿐, 다른 범위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사람의 체험이 아무리 깊어도 한계가 있고, 결코 진리의 깊이에 이를 수 없다. 사람의 빛 비춤, 사람의 인식은 영원히 진리와 비교할 수 없다.

사람이 어느 정도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고 진리를 깨달으면 하나님의 뜻도 조금 깨닫게 되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성품도 변화하며, 정결케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너는 여전히 사람, 창조된 인류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자가 바로 하나님이 얻으려는 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렇다면 너는 어떤 사람이냐? “저는 진리가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너는 “저는 사탄에 의해 패괴되고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체험한 후, 마지막에 진리를 깨달아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된 사람입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일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만약 “저는 진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모두 체험했고 깨달았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배경에서, 어떤 상태에서 하신 말씀인지 저는 다 알아요. 이게 바로 진리가 있는 것 아닌가요?”라고 말한다면, 또 틀렸다. 하나님 말씀을 좀 체험하고 빛 비춤이 좀 있다고 해서 너를 진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저 도리를 좀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면 더더욱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하나님과 진리 앞에서 대체 어떤 자리에 서야 하는지, 사람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사람 내면의 생명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하나님의 생명은 무엇인지를 반드시 완벽하게 인식해야 하며, 사람의 본질이 대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며칠 체험해 글귀와 도리를 좀 이해하게 되면 자신에게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가장 교만한 사람으로, 이성이 전혀 없는 자이다. 이 일은 반드시 분석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인류를 인식하게 하며, 패괴된 인류란 대체 어떤 존재인지, 마지막에 온전케 된 후에는 어느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어떻게 부르고 어떤 이름을 사용해야 적절한지를 알게 해야 한다. 사람은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한다. 늘 비현실적인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그래도 좀 현실적으로 처신하는 것이 낫다. 그래야 마음이 더 편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자신의 꿈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 내려고 하는데, 이것이 현실적이냐? 사람이 늘 하나님의 생명을 갖추고자 한다면, 이는 위험한 일 아니겠느냐? 이는 사람의 교만한 야심으로, 사탄의 교만한 야심과 똑같다. 어떤 사람은 한동안 교회 사역을 하고 나면 궁리하기 시작한다. ‘큰 붉은 용이 무너지고 나면, 우리가 왕권을 잡아야 하는 것 아냐? 몇 고을 다스리게 될까?’ 이런 것들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체험이 없는 사람은 도리를 따지고 비현실적인 생각을 하기 좋아한다. 그러고는 스스로가 매우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하나님을 믿어 얻은 것처럼, 살아서 그리스도라도 된 것처럼,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이들은 모두 바울의 제자로, 바울의 길을 걷는 것이다. 만약 이들이 죽을 때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모두 적그리스도가 되어 중형을 받을 것이다.

발췌문 5

너희는 하나님의 그런 말씀을 들을 때 자신과 대조하느냐, 아니면 그냥 도리만 듣고 머리로 한 번 생각해 보고는 의미가 이해되면 끝내느냐? 너희는 어떤 태도와 속셈을 가지고 들었느냐? 만약 너희가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자는 나중에 도태될 것이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사람이 아니라 악인이라고 한 하나님 말씀을 진정으로 깨달았다면, 마땅히 자신을 반성하며 자신의 어떤 행위가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것인지, 어떤 방법과 태도가 하나님이 보기에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모습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너희는 이를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자신을 반성하였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눈으로 한 번 보는 걸로 끝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묵상할 줄 알아야 하며,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사상과 행위를 하나님이 폭로한 말씀에 비춰 보아 자신을 인식해야만 진정으로 회개하고 변화할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묵상이나 자기반성을 할 줄 모르고 오로지 도리 이해만을 중시하고 끝낸다면,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 생명 진입이 생기지 않을 것이며, 진정한 변화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묵상할 줄 알고, 진리를 구할 줄 알며, 자신을 반성할 줄 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냐?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자, 진리이며, 길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생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도리나 구호가 아니며, 이론이나 학설도 아니고, 철학이나 지식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진리이며, 얻어야 하는 진리이고 생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활, 생명, 가야 하는 길, 결말이나 종착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약 사람이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고 얻는다면, 사람의 모든 것이 이에 따라 바뀌게 된다. 만약 사람이 아무리 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수 없다면, 사람은 참된 변화를 얻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칭찬도 얻을 수 없다. 그러면 사람의 결말과 종착지는 오직 침륜과 멸망뿐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는 사람에게 이토록 중요하다. 만약 네가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묵상할 줄 모르고, 자신을 반성할 줄 모르며, 자신의 실제 문제와 실제 어려움에 결부시킬 줄 모른다면, 너는 표면적인 것만 이해할 수 있을 뿐 진리를 깨닫거나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법을 배워야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방법은 많다. 혼자 마음속으로 조용히 읽고 기도하며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구하는 방법이 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는 방법도 있으며, 물론 설교 교제를 결부해서 묵상하며 하나님 말씀을 깊이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법도 있다. 방법은 많고 다양하다. 요컨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을 깨닫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은 말씀을 암송하거나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다. 반면 그것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묵상한 후 이러한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고 하나님이 한 이러한 말씀의 의미와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럼으로써 말씀에서 실행해야 할 길을 찾아내고 자신의 길을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폭로한 다양한 내적 상태와 각 부류 사람을 분별하고, 원칙에 따라 각 부류 사람을 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동시에 스스로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네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는 법과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방법을 배우고 그것을 자주 실천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네 마음속에 뿌리를 내려 너의 생명이 될 수 있다.

발췌문 6

말세에 창조주는 공개적으로 음성을 발하고 많은 말씀을 하여 각 부류의 사람을 모두 드러냈다. 지금은 진리, 참도, 창조주의 음성에 대한 각 부류 사람의 각종 소리와 관점이 모두 폭로되었다. 여기에는 사상 관점이 치우친 자, 독선적인 자, 교만한 자, 보수적인 자, 전통문화를 고수하는 자, 부패한 자가 있으며, 우매하고 무지한 자도 매우 많다. 더 나아가 진리를 증오하고 적대시하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미친개가 함부로 무는 것처럼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제멋대로 판단하고 함부로 정죄하며, 긍정적인 사물이거나 진리 선포이기만 하면 옳고 그름과 진리 여부를 전혀 분별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판단하고 정죄한다. 이런 자들은 모두 짐승과 마귀에 속한다. 진리와 참도를 마주할 때 인류가 갖는 다양한 관점은 모든 인류가 지니고 있는 편협하고, 완고하고, 강퍅하고, 교만한 사탄의 추한 모습을 모두 폭로하고 드러냈다. 너희는 분별하는 법을 배우고, 그것에서 식견을 넓혀야 한다. 또한, 그것에서 진리도 어느 정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이런 것들을 드러내는데, 그렇다면 너희에게는 이런 모습들이 없겠느냐? 때로는 다른 모습과 주장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사실 그들이 드러내는 그런 성품들은 너희에게도 있다. 마치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받아들이고 나서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은 세상 모든 사람을 저급한 인류로, 예수의 십자가 구원을 받아들인 그는 고급 인류로 여기면서 모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어떤 성품이냐? 그는 식견이 없고 지나치게 편협할 뿐만 아니라 특히나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것은 볼 수 있지만, 자신도 이 측면의 패괴 성품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런 모습이 없겠느냐? 분명 있을 것이다. 모든 인류의 패괴 성품은 다 똑같다. 단지 하나님의 사역과 구원 또는 하나님 사역의 필요성과 하나님의 정함에 따라 각 부류 사람의 본성 본질, 추구, 지향점이 각기 다를 뿐이다. 어떤 사람은 마음과 영이 없는 죽은 자이며 짐승이라 신앙을 알지 못한다. 이런 자는 전체 인류 중 가장 저급하며 인류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은 진리를 좀 더 많이 깨닫고, 식견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 또한 더 높으며, 이론과 관점 측면에서도 더 깊이가 있다. 마치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여호와를 믿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보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더 깊고 창조주의 창조와 사역에 대한 식견이 더 높은 것처럼, 3단계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은 기독교인보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더 깊다. 이는 하나님의 사역이 한 단계 한 단계 더 높아질 때마다 당연히 사람의 깨달음도 이와 상응해 확실히 점점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반면, 너희가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인 후 드러낸 패괴 성품은 종교인들이 드러내는 패괴 성품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너희는 단지 일찍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여 많은 도를 듣고 많은 진리를 깨달아 자신의 본성 본질에 대한 참된 인식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면서 참된 변화가 생겼을 뿐이다. 그래서 너희가 종교인들의 모습을 다시 봤을 때, 그들이 너희보다 패괴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사실 너희와 그들을 함께 모아 놓고 보면,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태도는 동일하다. 다들 관념 상상에 따라, 자신의 기호에 따라 일하는 동일한 패괴 성품을 지니고 있다. 만약 그들이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이고 이런 도를 듣고 이런 진리를 깨닫는다면, 너희와 그들은 큰 차이가 없게 된다. 이 일을 통해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진리가 사람에게 변화를 가져왔으며, 하나님이 한 이런 말씀과 도가 전체 인류에게는 구원이라는 것이다. 즉, 전 인류가 필요로 하는 것이지, 단지 어느 일부분의 사람, 어느 한 종족의 사람, 어느 한 부류의 사람, 어느 한 피부색의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인류는 전부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사탄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 단지 피부색, 종족, 성장 배경, 사회 제도가 다르거나 전통문화, 배경, 받은 교육 등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조금 다를 뿐, 패괴된 본질에 있어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모든 인류가 한 사탄에 의해 패괴되었기에 패괴된 본성 본질은 동일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 이런 말씀과 사역은 특정 민족이나 국가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각기 다른 종족은 서로 문화와 배경이 다르고 받는 교육 내용도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이 보기에는 그들의 패괴 성품은 완전히 똑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한 단계 사역을 할 때, 비록 한 곳에서 점에서 면으로 확장하는 방식으로 행하지만 전 인류에게 적용해 구원하고 공급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유럽 사람이나 다른 국가의 사람은 큰 붉은 용의 자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모두 깊이 패괴된 인류’라는 하나님 말씀이 부적합한 것 아닌가요?”라고 말한다. 이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사탄에 의해 패괴된 전 인류의 본성 본질은 모두 동일합니다.) 맞다. ‘큰 붉은 용의 자손’이란 단지 어느 한 종족 사람에 대한 호칭일 뿐이지, 결코 이런 호칭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본질은 동일하다. 전체 인류가 악한 자의 손아귀에 놓여 사탄에 의해 패괴되었기에 패괴된 본성 본질은 모두 똑같다. 지금 중국인들은 하나님이 한 이런 말씀을 듣고 거역, 대적, 관념, 상상 등 모습들을 보인다. 그 말씀을 또 다른 종족의 사람들에게 하면, 그들 역시 상상, 관념, 거역, 교만, 독선의 모습을 보이고 심지어는 대적하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중국인과 완전히 똑같다. 어떤 종족이든, 어떤 문화적 배경을 지니고 있든, 전체 인류는 하나님이 폭로한 패괴된 인류의 그런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다.

전 인류가 모두 동일한 패괴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크게 다르지 않고 눈에 띄는 차이가 없다. 하나님이 한 이런 말씀과 선포한 진리는 어떤 특정 민족, 국가, 무리가 아닌 전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다. 이 일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이러한 인류 중 사탄에 의해 패괴되지 않은, 별종이나 이종에 속하는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의 주재 대상이 아닌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내 말이 무슨 의미이겠느냐? 하나님은 전 인류를 주재하며, 한 분의 하나님이 전체 인류를 창조하였다. 어떤 민족이든, 어떤 인종이든, 능력이 어떠하든,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였다. 사람이 볼 때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좀 더 고급이지만, 하나님이 봤을 때는 다 똑같다. 즉, 하나님 눈에 인류는 다 똑같다. 어떤 일을 통해 이를 알게 되었느냐? 피부색과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겉모습일 뿐이고, 실상은 패괴 성품과 본성 본질이 모두 똑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한 말씀은 사탄의 패괴 성품을 지닌 인류를 대상으로 모두 성과를 거둘 수 있는데, 사람의 패괴 성품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에 인류의 모든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진리이며, 인류에게 공급할 수 있고, 인류를 정결케 하고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하다. 지금 하나님이 말세에 선포한 그런 말씀이 이미 세계 각국과 모든 종족에 다 전파되었다. 이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 (다양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런 다양한 반응이 반영하는 인류의 본질은 무엇이냐? 인류의 본성 본질이 동일하다는 것을, 예수가 사역할 그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유대인의 반응과 동일하다는 것을, 진리에 반감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상상과 관념으로 가득 차 있어 모두 허무맹랑한 상상 관념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 인류가 모두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 인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인 첫 번째 반응 또는 자연스럽게 드러낸 본성 본질 속에는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이 들어 있다. 이는 공통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에 대한 부정적인 온갖 소리와 관점은 패괴된 인류의 본성 본질에서 생겨난 것으로, 이 인류를 대표한다. 그들의 관념 상상은 예수가 있던 그 당시의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가진 관념 상상과 동일하며 변함이 없다. 종교인들은 십자가를 2천 년 동안 짊어졌는데도 여전히 이런 꼴로 전혀 변하지 않았다. 진리를 얻지 못했을 때, 바로 이런 것들이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천성에서 나오며, 사람이 바로 이런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게 된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하나님을 믿을 때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이런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믿어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패괴 성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2천 년 전에 바리새인은 미친 듯이 예수를 대적하고 정죄하며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지금 종교의 목사, 장로, 신부, 주교들도 여전히 과거의 바리새인처럼 성육신 하나님을 미친 듯이 대적하고 정죄하고 있다. 만약 그들 속에 들어가 성육신 하나님을 증거한다면, 아마도 그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할 것이다. 만약 성육신한 하나님이 여러 큰 종교의 예배당에서 전도한다면, 그들은 분명 하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거나 집권자가 처리하도록 넘길 것이다. 그들은 절대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이는 패괴된 인류의 본성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너희 마음속에 반응이 있느냐?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지만 전혀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사람이 매우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약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는 매우 무서운 일이다! ≪성경≫과 십자가를 들고, 율법에 따라 바리새인의 복장이나 제사장의 옷을 입고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죄했는데, 이는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벌건 대낮에 저지른 일 아니냐? 하나님을 정죄하는 사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멀리 바라볼 필요도 없이,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속에 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이며, 적그리스도이자 바리새인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진리를 얻지 못해 영원히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면,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과 합하지 못한다. 네 마음속에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기 싫어하는 주관적인 바람이 있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단지 바람만 있어서는 소용이 없으며, 자제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이는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으로 결정된다. 그래서 진리가 있는 사람이 되고자 추구해야 하며, 진리 실행을 추구해야 하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야 하며, 진리 실제에 진입해 하나님과 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른길이다. 너희는 하나님을 믿을 때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어느 측면에서부터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해야 하는지,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본분을 대하고 주변에 있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 각종 사물을 대해야 하는지, 모두 어떤 관점으로 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를 마음속으로 알아야 하며, 마음속으로 실제적인 것들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네가 진리를 구하지 않고 진리 원칙을 알지 못하며, 규례만 적용하여 규례, 논리, 관념 상상에 따라 규정한다면, 너의 실행법은 틀렸다. 이는 네가 하나님을 몇 년이나 믿었어도 규례만 지켰을 뿐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실제가 없다는 증거이다. 네가 규례를 지키고 관념 상상에 따라 산다면, 매우 힘들고 수고롭지만 그래도 다 쓸데없고, 하나님이 전혀 칭찬하지 않는다. 이를 가리켜 힘들어 죽어도 싸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 순수하고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많이 체험할수록 깨닫고 얻는 것이 많아질 것이며, 네가 깨달은 것들 또한 모두 실제적이고 진리에 부합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와 생명을 얻은 것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어서 얻은 것과 깨달은 것이 여전히 도리 규례와 같은 것이라면, 여전히 관념 상상의 것이라면, 여전히 너를 속박하는 각종 조항이라면, 너는 완전히 끝났다. 이는 네가 진리를 얻지 못했고 생명이 없다는 증거이다. 네가 하나님을 아무리 오래 믿었어도, 글귀와 도리를 아무리 많이 이야기할 수 있어도, 너는 그릇된 자이자 어리석은 자이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만, 이 말은 사실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어도 하나님 집에서는 진리가 권세를 잡고 그리스도가 권세를 잡고 성령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이는 깨달음이 전혀 없는 것이고, 눈이 먼 것이다. 어떤 자는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며 사람을 온전케 하지만 많은 사람을 도태시키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한다. 이런 사람이 이해력이 있겠느냐? 깨달음이 있겠느냐? 그는 그릇된 자로, 깨달음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릇된 자는 영원히 부조리한 시선으로 일을 바라보며, 오직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정확하고 사실에 부합하게 일을 바라볼 수 있다.

발췌문 7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전파하고 증거할 때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 중에 종교인이 가장 쉽게 관념을 가질 수 있는 말씀을 삭제해 버리고는 복음 대상에게 삭제되고 간결해진 하나님 말씀을 보여 준다. 그리고는 관념과 오해가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핑계를 댄다. 이 말이 옳으냐?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진리이다. 사람이 관념이 있든 없든,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좋아하든 싫어하든 진리는 진리이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멸망한다.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죽어 마땅하고 멸망해 마땅하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래 말씀을 읽게 해야지, 사람이 관념을 가질까 두려워 하나님 말씀을 삭제하고 줄여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참도를 알아보는 것은 “당신들이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분이 어떤 말씀을 하셨나요? 그분의 언어 풍격은 어떤가요?”라며 하나님의 원래 말씀에서는 어떻게 얘기했는지, 하나님 말씀에 모두 어떤 내용이 있는지, 그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초의 견해는 무엇인지를 보고 식견을 넓히려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굳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말씀을 고치려 하고, 종교인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도록 성경을 해석해 주는 것처럼 사람들이 왜곡된 하나님 말씀을 보게 하고 하나님의 원래 말씀을 보지 못하게 하니, 이는 무슨 뜻이냐? 설마 너희도 이런 하나님 말씀에 관념을 갖고 있는 것이냐? 너희도 종교인과 같은 관점을 지니고 있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하나님 말씀은 진리가 아니며,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는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 아니냐?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잘못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든 아니든, 모두 진리이다. 단지 패괴된 인류가 진리가 없고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관념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어리석음과 무식함이다. 하나님이 특히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말씀하는 것이 어떤 성과를 이루기 위한 것인지를 너희는 분명히 알지 못하고, 사람의 자질이 얼마나 부족한지, 만약 지나치게 간결하거나 이론적인 말을 한다면 사람이 얼마나 깨닫기 어려워하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예수가 나타나 사역할 때, 많은 제자들이 주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여 주께 예를 들어 설명하거나 비유로 말씀해 달라고 요구하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을 떠올려 보아라. 그렇지 않으냐? 지금 너희에게 지나치게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면 또 말이 많다고 싫어할 것이다. 깊이 있게 말하면 이해하지 못하며, 대략적이고 이론적으로 말하면 도리인 줄 알고 들으니, 사람이 이렇게 다루기 어렵다. 현재 하나님 말씀에는 신성 언어뿐만 아니라 인성 언어도 있으며, 간결한 내용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도 있다. 또한, 사람의 각종 내적 상태를 폭로할 때는 많은 예를 들었다. 일부 말씀은 이미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너무 세세한 것 같기는 하지만, 새 신자에게는 매우 적합하다. 그렇게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성과를 거두기 매우 어렵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 자녀가 어리면 부모가 자잘한 일을 많이 해야 하지만, 자녀가 철이 들고 혼자 할 수 있게 되면 이런 일들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사람이 이것은 이해하면서도 왜 하나님의 사역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냐? 새 신자는 비교적 얕은 말씀, 예를 들어 설명한 말씀, 비교적 구체적이고 자세한 말씀을 봐야 하며, 하나님을 여러 해 동안 믿어 왔고 진리를 좀 깨달은 사람은 비교적 깊이 있는 말씀, 닿을 수 있는 말씀을 봐야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이는 모두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모두 이런 성과를 거두기 위해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깊이가 있든 없든, 사람이 닿을 수 있든 없든, 어쨌든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너의 자질이 훌륭하면 깊은 진리에 닿을 수 있다고, 네가 얕은 진리를 갖추었으니 실제가 있다고 여기지 마라. 그런 일이냐? 정직한 사람이 되는 측면의 진리만으로도 사람이 평생 체험하기에 차고 넘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깊이가 얕고 많은 예를 들었어도, 네가 8~10년을 체험한다 해도 반드시 실제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깊이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대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일을 바라보는 관점은 옳지 않다. 사람은 그래도 실제를 중시하는 것이 가장 좋다. 네가 이해력이 있어 충분히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해서 실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진리를 실행하지 못한다면, 네가 아무리 잘 이해해도 공허한 도리이다. 진리를 실행해 내고 체험 인식이 있어야 그것이 비로소 실제가 된다. 하나님 말씀이 지나치게 세세하고 자질구레하다고 싫어하는 사람은 모두 교만하고 독선적인 자이며, 진리 실제가 없는 자이다. 하나님 말씀의 지혜와 하나님의 생각을 사람이 온전히 헤아릴 수 있겠느냐? 많은 사람이 지나치게 교만하고 무지한 태도로 하나님 말씀을 대한다. 마치 자신이 많은 진리 실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굴지만, 사실 그는 진리를 전혀 실행해 내지 못하고 참된 간증조차 말하지 못하며, 단지 공허함이나 이론만 말하는 이론가이자 사기꾼이다. 만약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하겠느냐? 마땅히 진리를 구해야 한다. 진리를 구하는 것, 여기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고 이와 관련된 일들도 많은데, 세세하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구체적이고 완벽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 수많은 예를 들어 설명하지 않으면 사람이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겠느냐? 많은 사람이 일부 하나님 말씀은 깊이가 얕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너는 그런 깊이가 얕은 말씀에 얼마나 진입하였느냐? 어떤 체험 간증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 얕은 것도 진입하지 못했는데, 그런 깊은 말씀에 닿을 수 있겠느냐? 네가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겠느냐?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교만하고 독선적으로 굴지 마라!

다시 하나님 말씀을 왜곡한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 하나님 집에서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표준판을 출판했는데, 어느 누구도 조금이라도 고쳐서는 안 된다. 표준판의 하나님 말씀이라면 어느 누구도 고쳐서는 안 되며, 누가 고친다면 하나님 말씀을 왜곡한 것으로 보고 처리할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왜곡한 자들은 진리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간절히 읽고 싶어 하는 갈망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은 정확한 하나님 말씀, 표준판의 하나님 말씀, 즉 하나님의 원래 말씀, 하나님의 본뜻, 하나님의 초심의 말씀을 읽고 싶어 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렇다. 하나님이 이 모든 사역을 하고 이 모든 말씀을 한 본뜻, 목적, 의의가 무엇이며, 왜 이렇게 자세하게 말씀하는지를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은 이해도 하지 못하면서 머리로 분석하고 종합하고는, 결국에는 하나님의 원래 말씀 중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말씀을 왜곡했다. 그 결과, 사람이 왜곡된 하나님 말씀을 다 읽어도 하나님의 원래 뜻을 깨닫기 매우 어렵게 되었다. 이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데 영향을 주는 것 아니겠느냐? 또한, 사람의 생명 진입에 영향을 주는 것 아니겠느냐? 이는 무슨 문제이냐?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는 불신파의 행동으로, 손을 뻗쳐 일하기만 하면 사탄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행하고 말씀한 것에 늘 의견과 생각을 품고, 늘 이를 가공하고 처리하고 싶어 하며, 늘 마귀의 검은 손을 뻗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말로 바꾸고 싶어 한다. 이것은 사탄의 본성, 교만함이다. 하나님이 현실적인 말씀, 소소한 일상에 관한 말씀, 인성에 근접한 말씀을 하면, 사람은 깔보고 멸시하며 경시하는 태도로 대하고, 사람의 지식과 상상을 더해 말씀을 수정하고 방식을 바꾼다. 구역질 나지 않느냐? (구역질이 납니다.) 너희는 절대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을 하든 분수에 맞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며,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모두 원문을 그대로 유지해야지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오직 현장 설교만 약간 정리할 수 있는데, 원문의 본뜻이 바뀌지 않는 범주 내에서 다듬기만 하면 되지 절대로 원래의 의미를 바꿔서는 안 된다. 너에게 진리가 없으니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며, 함부로 건드린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 집에서 설교 교통을 정리할 사람을 몇 명 안배하여도, 반드시 원칙에 따라 정리해야 하며 절대 왜곡해서는 안 된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끼어들지 마라. 징벌을 받지 않도록 말이다. 네가 하나님의 선민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고 진리를 깨달아 실제에 진입하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의심해서는 안 되며, 머리와 지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연구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늘 나쁜 생각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일단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어떤 사람은 성경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신학을 좀 공부했다고 해서, 공부를 좀 많이 했다고 해서, 자신이 진리를 잘 깨달을 수 있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까짓 능력이 뭐라도 되는 줄 아느냐? 너는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느냐? 진리 실제가 있느냐?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느냐? 너의 그 알량한 이론과 학문은 전혀 진리를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인성으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인류가 더 쉽게 깨달을 수 있는 말을 하면, 사람은 늘 수긍하지 않고 사람의 관념, 입맛, 바람에 맞게 고치려 한다. 듣기 편하고 눈에 거슬리지 않고 마음에 드는 말로 고치려 하는데, 이는 무슨 성품이냐? 이것이 바로 교만한 성품이다. 일할 때 진리 원칙이 전혀 없고 늘 사탄의 방식대로 하는데, 이러면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기 쉽다.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일단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면 문제가 심각해져 도태될 위험이 있다.

하나님 말씀에서 생명 진입 실행의 길을 너무나 자세하게 이야기한 것을 보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럼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선포한 율법과 율례 법도를 본다면 더 싫어하지 않겠느냐? 만약 또 성경에서 계명의 원문이 비교적 자세한 것을 본다면, 관념이 생기지 않겠느냐? ‘너무 자질구레하게 말씀하셨네. 한 마디로 분명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걸 굳이 서너 마디로 말씀하셨네. 딱 보면 알 수 있고 들으면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좀 간결하게 가다듬어야 해. 들을 때 말이 많다고 느껴지지 않는 게 얼마나 좋아.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고 실행하기 좋잖아. 이게 하나님을 더 증거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 아니겠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너는 하나님 말씀이 소설처럼 술술 읽힐수록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하나님 말씀은 진리이기에 사람이 곰곰이 생각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실행하고 체험해야만 진리를 깨닫고 얻을 수 있다.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하나님 말씀일수록 그 안에 진리가 있으며, 어떤 측면의 진리라 하더라도 사실은 다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는 모두 사람이 보거나 체험한 적이 없는 신선한 말씀이다. 하지만 네가 몇 년간 읽고 체험하고 나면 하나님 말씀이 전부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 늘 관념을 갖는데, 이는 무엇이 문제이겠느냐?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겠느냐?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실제적이고 실제 사정이며, 모두가 생활 언어이기에 이론이나 지식의 언어로 말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데 가장 도움이 된다. 오로지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만이 가장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사람은 모두 입으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다 옳고 사람에게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가장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해야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지를 아시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람에게 훈계하고 알려 주신 말씀을 사람이 더 잘 받아들인다는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내면의 구조와 사람이 어떤 마음과 관념을 지닐 수 있는지를 아십니다. 사람이 무엇을 가장 필요로 하는지는 더더욱 잘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사람은 전혀 모릅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볼 때는 다듬고 싶어 하고, 사람의 관념과 입맛에 부합하는 말로 바꾸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 말씀이 여전히 진리일 수 있겠느냐? 여전히 하나님 말씀일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하면 사람의 말로 변하는 것 아니겠느냐?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지나치게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 아니겠느냐? 사람의 관념 상상에 부합하든 아니든, 하나님 말씀은 모두 진리이다. 하나님 말씀이 많든 적든, 아무리 자세하든, 하나님 말씀은 허튼 것이 없다. 한 마디 더 하는 것은 사람이 더 잘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만, 한 마디 덜 하면 사람이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사탄이 빈틈을 파고들기 쉽다. 대부분 사람은 모두 자질이 지나치게 부족하기 때문에, 세세하게 많이 말하지 않으면 닿지 못한다. 또한, 사람은 모두 무감각하고 우둔하기 때문에 말 한 마디라도 덜 해서는 안 된다. 어느 측면을 확실하게 말하지 않으면 그 측면을 깨닫지 못한다. 너는 깨달았다 해도 그는 깨닫지 못하고, 너희는 깨달았다 해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는데, 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게 된다. 하나님은 너 한 사람만을 상대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상대로 말씀한다. 귀가 있고 하나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 말씀의 대상이다. 너의 안목이 편협하지 않으냐? 사람은 그저 눈앞의 것만 볼 수 있어서 ‘나는 이 말씀을 이해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또 저렇게 세세하게 말씀하시지?’라고 생각한다. 만약 너무 간단하게 말하면, 자질이 훌륭한 사람은 알아듣지만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만약 하나님이 자질이 평범한 사람을 상대로 몇 마디 더 말씀했다고 해서 네가 불만을 갖는다면,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겠느냐? 너의 그런 불만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그것은 사탄의 교만한 성품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너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일을 좀 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그리고 사람에 대한 사랑, 이해, 관심, 염려, 전면적인 보살핌을 좀 드러냈다고 해서, 네가 하나님의 말씀이 장황하고, 쓸데없고, 자질구레하다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의 관념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에 대해 그런 인상, 인식, 견해를 지니고 있다면,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모두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하십니다.”라는 말은 도리 아니겠느냐? 너에게는 도리가 되었으니 너의 인식이 하나님이 드러내는 것과 일치하지 않고 결합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너 또한 그렇게 하나님을 대하지 않고 여전히 너의 관념 상상과 교만한 성품으로 하나님 말씀과 사역을 대한다. 그렇다면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겠느냐? 너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하나님이 한 말씀과 일마저 네가 판단, 원망, 추측, 의심, 부인, 반항을 하고 선택한다면, 네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지 못하는데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그렇게 대하고, 진리와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그렇게 대하는데,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 너는 진리를 얻지 못하면 곧 징벌받는 대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분석하거나 연구하지 마라. 잔머리 굴리지 말고 의심도 하지 마라. 생각을 짜내지 말고, 진리를 대하는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절대로 ‘난 현대인이야. 지식과 교양이 있고, 문장도 쓸 줄 알아. 특정 전공을 배워서 특정 기술이나 업무에도 정통해. 내가 알고 이해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모르셔. 하나님께서는 전 인류를 이해하시지만, 진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셔. 업무를 모르시고 특별히 잘하시는 것도 없지. 그저 진리를 선포할 줄만 아셔.’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할 수 있고, 만사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너의 그 말은 맞다. 바로 하나님이 진리이기 때문에 인류의 운명을 주재할 수 있고, 또 너의 운명을 주관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은 어떤 태도로 하나님 말씀을 대해야 하겠느냐? 고분고분하게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고, 받아들이고, 실행해야 한다. 이는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하는 태도이다. 절대로 연구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많은 말을 했지만, 너희는 일부분만 받아들이고,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말들은 받아들이지 않으며 마음속으로 또 반발하고 반박한다. 너희가 단지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는 말만 받아들이고,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말은 거부하는데, 이렇게 하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설마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말씀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냐? 네가 감히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느냐? 그렇다면 너에게 물어보자. 너는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느냐? 너는 어떤 진리를 갖추었느냐?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다른 사람이 들어 보도록 네가 깨달은 진리를 모두 말해 증거해 보아라. 만약 네가 자신이 진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너는 이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네가 정말로 이성이 있다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말씀은 진리가 아니라고 감히 확신하겠느냐? 또 감히 하나님과 내기를 하겠느냐? 피조물인 인류가 지나치게 교만하거나 독선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자신을 지나치게 높게 봐서도 안 된다. 너는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며, 평생토록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도 다 체험하지 못하며,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 내지 못한다. 네가 일부분을 깨닫고 실행해 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사람은 모두 이렇게 가난하고 가련하다. 이것이 실제 사정이다. 그렇게 가난하고 가련하면서 어째서 또 그렇게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이냐? 이것이 바로 가련하고 또 가증스러운 것이다. 나는 사람에게 성실하게 하나님 말씀을 읽고, 관념이 있을 때는 재빨리 관념을 포기하며,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삼아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그런 다음 체험을 하면, 어쩌면 진리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자세하고 장황한 것 같아도, 만약 네가 읽고 이해할 수 있고 체험해 낼 수 있다면, 더 나아가 증거해 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너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다양한 식품을 먹는 것과 같다. 늘 이건 맛있고 저건 맛없다고 가린다면, 결과가 어떻겠느냐? 맛있는 식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영양이 풍부한 것은 아니며, 맛없는 것이라고 해서 영양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영양이 더 많고 좋을 수도 있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진리가 아닌지, 무엇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무엇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지, 이 모든 것을 사람이 분별하기는 어렵다. 진리를 깨달아야만 약간 분별할 수 있으며,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어떤 일도 꿰뚫어 보지 못한다. 만약 자신이 꿰뚫어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면,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진리를 많이 구해야 한다. 이래야만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것도 꿰뚫어 보지 못하면서 함부로 멋대로 굴고 무슨 일이든 다 판단한다면, 어느 누구의 말이라도 다 비난한다면, 이는 지나치게 비이성적인 것이다. 말해 보아라. 그렇지 않으냐? 진리 앞에서 절대 흉포하게 날뛰지 말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일에 진리를 구해야 한다. 이래야만 슬기롭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

발췌문 8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은 어떤 성질의 문제이냐? 만약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고치고 왜곡한다면, 이는 가장 심각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하는 것이다. 오직 사탄에 속하는 부류만이 이런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데, 이는 천사장과 같은 것이다. 천사장은 “하나님, 당신은 천지 만물을 창조할 수 있으며 이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는데, 나도 할 수 있소. 당신은 보좌에 오르면, 나 또한 보좌에 오를 거요. 당신이 만국을 통치하면, 나도 만국을 통치하겠소. 당신은 인류를 창조했고, 나는 인류를 관리하오!”라고 말했다. 천사장은 이렇게 교만하여 이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은 천사장과 성질이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하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장 대적하는 사람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직접적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을 가장 증오한다.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기에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죄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인 외에, 또 한 가지 일, 바로 사역지침을 감히 마음대로 바꾼 다음 교회에 하달해 하나님 선민을 미혹함으로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 이 또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자,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 없어 사역지침은 사람이 쓴 것이니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 생각해 그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으면 바로 마음대로 바꿔 버린다. 이는 어떤 행정 법령 조항을 거스른 것인지 너희는 아느냐? (제7항인 “사역이나 교회의 사무적인 일에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은 물론, 모든 것은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의 지시에 따라야지, 이를 조금이라도 어겨서는 안 된다. 또한 절대적으로 순종하되, 옳고 그름을 분석하지 마라. 옳든 그르든 너와는 무관하니 절대적으로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나라시대의 선민이 반드시 준수해야 할 10가지 행정 법령> 중에서)입니다.) 행정 법령을 거스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이다. 아직도 이를 분명히 알지 못했느냐? 어떤 자들은 상부의 사역지침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방자하다. 그런 자는 ‘상부는 사역지침을 내리고, 우리는 교회에서 사역을 해. 우리는 어떤 말씀, 어떤 일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는 바로 우리의 일이지. 상부는 그저 말씀하고 안배하실 뿐, 실제로 일하는 사람은 우리이기 때문이야. 사역을 우리에게 맡기기만 하면,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어떻게 해도 다 괜찮고, 어느 누구도 간섭할 자격이 없어.’라고 생각한다. 그의 일 처리 원칙은 바로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듣지만, 그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듣지 않는다.’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바로 진리이자 원칙이라고 생각하기에 그의 뜻에 부합하지 않으면 반항해 너와 공존하지 못한다. 상부의 말이 그의 뜻에 부합하지 않으면 좀 고쳐 버리며, 그의 동의를 얻어야만 하달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하달하지 못하게 한다. 다른 곳에서는 다들 상부의 사역지침을 원문 그대로 하달하는데, 그는 자신이 고친 사역지침을 자기 책임하에 있는 교회에 하달한다. 그런 자는 늘 하나님을 한쪽에 내버려둔 채,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믿고 따르며 그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안달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어떤 부분에서 하나님이 그보다 못하니 자신도 하나님이어야 하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성질이다. 만약 너희가 이 점을 똑똑히 알았다면, 그가 교체되었을 때 울 수 있겠느냐? 그를 동정할 수 있겠느냐? ‘상부의 행동이 부적절하고 불공평해. 어떻게 그렇게 고생한 사람을 교체해 버릴 수 있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분별이 없는 자이다. 그는 누구를 위해 고생하는 것이냐? 그가 하나님을 위해 고생하는 것이냐? 교회 사역을 위해 고생하는 것이냐? 그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고생하는 것이다. 그는 독립 왕국을 세우기 위해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겠느냐?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겠느냐? 하나님께 충성하고 순종하는 것이겠느냐? 그는 순전히 사탄의 심부름꾼인데, 그가 사역을 하면 마귀가 권력을 잡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경륜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하는 자로, 영락없는 적그리스도이다! “그도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런 것들을 써서 교회에 하달할 때도 공을 많이 들였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한번 물어보자. 그가 쓴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느냐? 그가 달성하려는 목적이 대체 무엇이냐? 너는 이런 것들을 분별할 줄 아느냐? 만약 네가 그에게 미혹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이런 생각들을 해 본 적이 있느냐? 이런 부류의 사람을 가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고 그걸 쓰는 것도 쉽지 않은데, 조금 빗나가고 치우쳐도 하나님 집에서 너그럽게 봐주세요!”라고 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무엇이 문제이냐? 설마 고생을 많이 하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냐? 그는 누구를 위해 고생을 하는 것이냐? 만약 그가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지위를 얻기 위해 고생을 한 것이라면, 아무리 많이 고생해도 그런 고생이 의미와 가치가 있겠느냐? 그런 고생은 이기적이고 비열하며, 사악하고 파렴치하다! 그런 적그리스도를 교체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 사람은 마음대로 교회 사역을 교란할 수 있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는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것 아니겠느냐?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고생을 좀 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냐?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해야 하는 것이냐? 제멋대로 함부로 하며 하나님께 순종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것이냐? 진리가 없으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않고, 또 함부로 하고 싶어 하며, 어떻게 하든 자신이 한 것은 다 이치에 맞고 옳다고 생각하는 자는 순전히 마귀로, 바로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러 온 사탄의 심부름꾼이다! 네가 이 부류의 사람을 분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동정하고, 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목소리를 낸다면, 너도 못난 놈이며 바보 멍청이다. 그럼에도 너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냥 교체해 버리다니, 상부에서 한 것이 사람의 뜻에 부합하지 않아.’ 네가 이렇게 말한다면, 너도 사탄의 심부름꾼이며 마귀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사탄의 철학에 따라 살며,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전혀 폭로하거나 고발하지 않는다. 그저 어느 날 적그리스도가 큰일을 저지르고 나면, 그제서야 정말로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한 사건임을 발견할 뿐이다.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해 여전히 관념을 갖고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니 교회 내에 얼마나 많은 적그리스도가 있는지 상부에서 당연히 알고 있으실 텐데 우리가 고발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그릇된 자 아니겠느냐? 지금 하나님은 인성으로 사역을 하고 있고 상부 리더는 사람인데, 그가 교회의 일을 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수많은 적그리스도 사건들은 모두 누군가의 고발과 폭로로 상부에서 조사하라고 명령함으로써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나님이 정상 인성으로 사역하며 사람을 인도할 때 전혀 초자연적이지 않고 무척이나 실제적이지만 사탄을 정복하고, 물리치며, 수치를 안긴다. 이래야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역은 이렇게 실제적이다. 하나님 선민이 공과를 배우고 분별과 식견을 기르도록 하나님은 이 모든 사람, 일, 사물을 안배한다. 일단 하나님 선민이 분별력이 생기면, 거짓 리더, 적그리스도, 악인은 ‘법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은 사실을 통해 그들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선민이 이를 분명히 보고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과거에도 수많은 악인과 적그리스도가 모두 이런 식으로 드러나 도태되지 않았느냐? 이것을 아직 분명히 알지 못하느냐? 너무 어리석구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도 이렇게 말하며 순종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건 다 맞고, 다 의미가 있어요. 우리가 꿰뚫어 보지 못해도 우선 순종해야지 하나님을 판단하면 안 돼요! 우리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도 따라야 해요. 우린 사람이니까요. 사람의 머리로 뭘 알 수 있겠어요? 그저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다 보면 언젠가 이해할 날이 올 거예요. 설사 훗날에도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기꺼이 순종해야 해요. 우린 사람이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게 당연하죠.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죠.”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와 달리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을 본 뒤 먼저 연구해 보고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렇게 요구하셨죠. 제가 보기에 첫 번째 항목은 괜찮은데, 두 번째 항목은 좀 부적절한 것 같으니 제가 좀 고칠게요.”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냐? 네 마음대로 사역지침을 고치는 것, 이는 어떤 성질의 문제이겠느냐? 이는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 아니겠느냐? 너의 그런 것들이 진리이겠느냐? 너에게 정말 진리가 있다면, 어째서 진리를 선포하지 않는 것이냐? 너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수정하려는 것이냐? 네가 그렇게 할 때 드러내는 것은 무슨 성품이겠느냐? 교만과 독선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감히 하나님의 안배를 이리저리 고르다니, 너의 마음가짐과 성품에 모두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하나님 선민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분별해야 한다. 첫째, 그는 진리를 교제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해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다. 둘째, 그는 사역지침에 관념이 있으면 하나님 집에 이야기하지 않고 사방에 이를 퍼뜨린다. 셋째,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 집 사역에 관념이 있어도 이를 해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선민이 모두 하나님께 관념을 갖고, 하나님께 반대하도록 선동해 그의 뜻대로 하도록 하나님께 강요함으로써 결국에는 하나님을 굴복시키려 한다. 이 세 가지 항목에 근거해 그런 부류의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를 확정할 수 있다. 그가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그는 진리를 전혀 구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관념을 지니고 있으며, 게다가 관념을 퍼뜨려 사람들이 하나님께 관념을 갖고 일어나 하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도록 한다. 이에 따라 그를 영락없는 적그리스도, 100% 완벽한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느냐? 그래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와야겠느냐? 소용없다.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책망과 훈계를 하면 어떻겠느냐? 그것도 소용없다.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문제가 매우 심각해진다. 이것은 심각한 일이다! 너희가 이 일이 별거 아니라며 간단하게 본다면, 너도 언젠가 하나님을 거스를 것이다. 나는 이런 자들을 본 적 있는데, 그들은 아직 제명되지 않았다 해도 사실 결말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바로 도태될 대상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최소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며, 무슨 일을 하든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자신에게 여지를 남겨야지, 하고 싶은 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마치 하나님 집에서 거짓 리더들을 교체할 때 어떤 사람이 “이 일은 뭐라고 말하기 어려워요. 대체 그가 어떤 일들을 했는지 저희도 몰라요. 설사 안다고 해도 그가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의 성질을 저희가 꿰뚫어 보지는 못해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모두 옳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드러내시어 저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하실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 집에서 왜 그렇게 행하는지 이해하지 못해도 순종할 수 있다면, 네가 바로 비교적 경건한 사람이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네가 이해하지 못하면서 하나님께 대항하고 또 교회 사역을 교란한다면, 너는 골치 아파질 것이다. 교회에서 매번 거짓 리더들을 교체하고 적그리스도들을 출교시킬 때마다, 늘 골수 지지자들이 튀어나와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낸다. 이 일 때문에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고 주장하며, 성령께 드러내라고 요구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복음 전파와 본분 이행에서 아무리 큰 공을 세웠어도 소용이 없다. 한 번의 배반으로 영원히 너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너는 배반의 본질을 꿰뚫어 봐야 한다. 이 일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너희 모두가 하나님을 대적한 적이 있고 과오가 어느 정도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성질이 다르다. 이는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대적한 일로, 성질이 너무나 심각하다. 어떤 사람은 늘 무언가를 쓰거나 편지를 써 교회에 멋대로 보내기를 좋아하는데, 이것이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그가 쓴 것이 참된 간증이겠느냐? 생명 체험에 속하는 것이겠느냐? 하나님 선민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겠느냐? 만약 아닌데도 교회에 멋대로 보낸다면, 이는 사람을 미혹하고, 사설과 궤변을 퍼뜨리며, 사실을 왜곡하고, 옳고 그름을 혼동하고, 함부로 지껄이고, 온통 헛소리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또 책을 한 권 써서 교회에 보내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한다. 바울의 예가 주는 교훈으로도 충분치 않은 것이냐? 그래도 책을 쓰고 싶어 하는데, 그것도 ‘위인전기’를 쓰려 하고, 또 ‘진리 귀납’이란 책을 쓰려 하다니, 너무나 비이성적이다! 그렇게 능력이 있다면 체험 간증을 몇 편 써 보아라. 그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받은 심판과 고생으로는 아직 부족한 것이냐? 이 일을 아직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이냐? 사람이 무엇을 깨달았다는 말이냐? 글귀와 도리만 좀 말할 줄 알 뿐,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려 하는데, 너무나 자신의 분수를 모른다! 하나님 집에서 왜 책을 통일적으로 인쇄하고 발행하겠느냐? 그 책들 대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나머지는 하나님 선민의 진실된 체험 간증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모두 긍정적인 것이고 하나님 선민에게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집에서 통일적으로 발행하는 서적은 모두 교회 사역과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필요한 것이다. 이 또한 성령의 인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통일적으로 발행하는 서적이 모두 가장 가치 있고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너희는 알고 있을 것이다. 너희가 설교를 듣고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는지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인데, 만약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가 퍼뜨리는 것을 분별할 수 있다면, 너희는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정말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너희의 분량으로는 그저 하나님을 믿는 도리를 많이 이해하고 있을 뿐, 진리에 대해서는 아직 밝히 알지 못한다. 일부 큰일은 아직도 제대로 꿰뚫어 보지 못해 마치 안갯속에서 꽃을 보는 것처럼 모호한 느낌을 받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진리 실제가 별로 없고 제대로 분별할 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누가 교회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고 어떤 말을 하든 모두 분명하게 분별하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재주만 있으면 하나님을 위해 증거할 수 있으며, 말재주가 없으면 체험 간증이 있어도 얘기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 말이 옳으냐? 이는 대단히 틀린 말이다. 체험 간증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모두 실제적이지만, 체험 간증이 없다면 아무리 도리를 잘 말해도 실제적이지 않다. 왜 그런 것이냐? 글귀와 도리를 말하는 것이 진리 실제를 대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진리를 좀 깨달았다 하더라도 매우 얕고 제한적이라 체험 간증을 아예 쓸 수 없다. 만약 체험 간증이 없으면서도 뻔뻔하고 파렴치하게 글귀와 도리를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을 꾸짖을 수 있다면, 그런 자는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다. 거짓 증언을 함부로 꾸며 내어 사람을 미혹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일이다. 진실된 간증을 할 수 있는지 여부는 사람의 말재주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체험 간증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그는 편지를 몇 통이나 썼느냐? 간증문을 몇 편이나 썼느냐? 아마 몇 편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베드로가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자,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만약 정말로 체험 간증이 있다면, 너는 분명 변화가 있고 많이 점잖아졌을 것이다. 열의를 갖는 일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람의 보잘것없음과 빈곤하고 가련함을 인식하게 되면, 너는 감히 멋대로 일을 하거나 위인전을 쓰지 않을 것이다. 늘 위인전을 쓰고 싶어 하고 공헌이라는 명의로 무언가를 좀 해서 자신의 명망을 세우려는 사람은 모두 교만하고 방자하며 야심이 있는 사람이고, 모두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며, 자신의 뜻에 따라 일하기를 좋아한다. 진심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모두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 진리를 깨닫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을 중시한다. 그는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 성품이 변화하는 것,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 참된 체험 간증이 있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추구할 수 있어야 가장 똑똑하고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다.

발췌문 9

구약 성경에 기록된 노아, 아브라함, 욥의 인성은 모두 어떤 특징이 있느냐? 그들이 정상 인성의 어떤 특징들을 지니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열납한 것이냐? (특히 양심과 이성이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정확하다. 욥이 그렇게 오래 살았지만, 하나님은 그와 직접적으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으며, 또 그에게 직접 나타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행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었으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1:21)라는 말로 요약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이냐? 바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자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저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설령 제가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해도 그분의 말씀을 에누리 없이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이 이 정도 수준에 이르렀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열납한 것이다. 그는 이런 체험과 경험이 있었고, 게다가 하나님이 그에게 준 시련을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있는 기초 위에서 이룬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봤든 못 봤든,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을 하였든, 하나님이 그에게 시련을 주었든 아니든, 그에게 나타났든 아니든, 그는 시종일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셔. 하나님께서 맡기시고 좋아하시는 것이라면 내가 이해를 하든 못하든 전부 지켜야 해. 나는 그분의 도를 준행해야 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하며, 그분께 순종해야 해.’라고 생각했다. 욥기에 욥의 자녀가 늘 잔치를 베풀어 즐겼는데 욥은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번제를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욥이 늘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마음속으로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과 사람이 잔치를 베풀어 즐기는 생활을 하나님이 혐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욥은 마음속으로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그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는 것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있었다. 욥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고 순종할 수 있었다. 어떤 순간에도 이를 모두 지켰으며, 한 번도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베풀어 즐기는 일에 참석하지 않았다. 욥이 진리를 깨달았느냐? 그는 깨닫지 못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심과 이성 외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마음속 깊이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창조주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한 것이다. 요즘 말로 풀이하면 이것이 바로 진리이며, 최고 지시이자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속으로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이든, 또는 하나님이 한 말씀 몇 마디이든 사람은 이를 모두 받아들여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이성이다. 이런 이성을 갖추면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가 훨씬 수월해져 어려움과 고통이 사라지고, 장애물도 사라질 것이다. 욥이 많은 진리를 깨달았느냐? 그는 하나님을 인식했느냐? 그가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하나님의 성품 본질을 인식하였느냐? 요즘의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인식하지 못했고 깨달은 것이 매우 적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를 갖추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깨달은 것을 바로 실행하고 깨달은 후에는 말씀을 따르고 지켰다는 점이다. 이것이 그의 인성 중 가장 고귀한 부분이자, 또한 사람이 가장 경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람은 ‘욥은 잔치에 참석하지 않은 것뿐이잖아? 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번제를 드린 것뿐이잖아? 요즘 말로 하면, 육적 편안함을 즐기지 않은 것뿐이잖아?’라고 생각한다. 이는 겉면의 일일 뿐이지만 그 일 이면에 있는 욥이라는 사람의 성품 본질과 인성을 본다면, 그것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며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평범한 백성에게 잔치에 가지 말라고 하면,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 쉽게 이를 실행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 욥은 부자였다. 잔치를 베풀어 즐기지 않는 부자가 어디 있겠느냐? 그렇다면 욥은 어째서 잔치를 베풀어 즐기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었느냐? (그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혐오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실행하였느냐? 바로 하나님이 혐오하는 그런 일들은 모두 악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하나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이 혐오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어느 누가 이야기해도 절대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다. 욥은 어째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던 것이냐? 그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였던 것이냐? 그는 어떻게 그런 악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냐?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바로 그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해 하나님을 크게 높일 수 있었으며,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거나 화를 낼까 봐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크게 높여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 하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다.”라는 말은 할 줄 알지만, 욥이 어떻게 해냈는지는 모른다. 사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마치 계명을 지키듯이 이 말을 지킬 수 있었다. 그가 하나님 말씀을 따른 것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크게 높였기 때문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리 보잘것없고 평범한 하나님 말씀이라도, 욥의 마음속에서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으며, 가장 크고 가장 무거운 말씀이었다. 설령 사람이 업신여기는 말씀이라도, 하나님 말씀이라면 사람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설사 다른 사람의 조소와 비방을 받는다 하더라도, 환난을 겪고 박해를 당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지켜야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모든 말씀을 지켜야 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규정한 일과 혐오하는 일을 네가 모른다면 할 수 없지만, 일단 알게 되면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설령 가족이 버리고, 이방인이 비웃으며, 심지어 주변 사람들이 비꼬고 조롱해도 여전히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너는 어째서 지켜야 하느냐? 너의 출발점과 원칙은 무엇이냐? 바로 ‘나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해야 해. 만약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라면 끝까지 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은 단호하게 포기해야 해. 하나님의 뜻을 내가 모른다면 몰라도, 내가 알고 깨달았다면 끝까지 말씀을 따르고 순종해야 해. 어느 누가 가로막아도 소용없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거야.’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다.

사람이 악에서 떠날 수 있는 전제 조건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 바로 하나님을 크게 높여야 한다. 하나님을 크게 높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바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이자 준칙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크게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크게 높인다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바로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으며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근본을 잊거나 자신이 나서지 않고, 하나님이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서 ‘나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보잘것없는 피조물이야. 나의 뜻에서 나온 주장, 건의, 결단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도록 해야 해.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시자 중심이시며, 또한 내가 모든 일을 할 때 길을 인도해 주는 등불이셔. 나는 ‘자신’을 우선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고 하나님 뜻에 따라 해야 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는 것이다. 네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을 때, 충동적이거나 경솔하게 굴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떻게 말했는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혐오할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경솔하게 굴지 말고, 먼저 마음속으로 질문하고, 생각하고, 묵상해 보아라. 경솔함은 충동적인 것으로, 혈기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 네가 늘 경솔하고 충동적이라면, 이는 네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크게 높인다고 할 때 너의 그 말은 빈말 아니겠느냐? 너의 실제는 어디에 있느냐? 너는 실제가 없어 하나님을 크게 높일 수 없다. 무슨 일이든 다 자신이 결정을 내리고 자신의 뜻대로 하는데,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헛소리 아니겠느냐? 이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을 크게 높인다. 하나님을 크게 높이는 구체적인 모습은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는 것인데, 하나님이 그의 마음속에서 첫 번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속에서 결정권과 권세를 잡게 한다. 그는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있다. 무모하거나 경솔하게 굴지 않고 또 혈기대로 하지도 않으며, 냉정하게 직면하고 조용히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진리 원칙을 구할 수 있다. 일을 할 때, 네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뜻을 따르는지, 자신의 뜻에 따라 결정하는지 아니면 하나님 말씀에 따라 결정하는지는 너라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너는 너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지만, 일이 닥치면 하나님은 한쪽에 내버려둔 채 맹목적이고 멋대로 하며 자신이 결정을 한다. 이것이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는 모습이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는 하지만, 기도한 후에 ‘내가 볼 때는 그러면 될 것 같아. 내 생각에는 이러면 될 것 같아.’라며 곰곰이 궁리를 하는데, 이는 모두 네 개인의 뜻이다. 어느 누가 너에게 교제를 해 주어도 듣지 않는데,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모습 아니겠느냐?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았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았으니, 하나님을 크게 높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면 너의 그 말은 모두 빈말이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으며 하나님을 크게 높이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과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모두 양심과 이성이 없는 자이다. 만약 정말로 양심과 이성이 있다면, 일이 닥쳤을 때 그는 자연스럽게 진리를 구할 수 있다. 그는 먼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구원받기를 추구하러 온 거야. 패괴 성품이 있어 무슨 일을 하든 늘 자신이 결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배해. 반드시 회개해야 해. 더 이상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해서는 안 돼.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해. 하나님 말씀에서 뭐라고 했었는지,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구해야 해.’ 이것이 정상 인성의 이성에서 나온 생각과 의지이자, 일을 하는 원칙과 태도이다. 네가 정상 인성의 이성을 갖췄다면 이런 태도를 갖추게 되지만, 네가 정상 인성의 이성을 갖추지 못했다면 이런 태도를 갖추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 인성의 이성이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구원받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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