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7)

지난 예배 때 교제한 ‘가정에서 비롯되는 짐 내려놓기’는 ‘부모의 기대 내려놓기’라는 주제와 관련된다. 모든 사람에게 부모의 기대는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이는 가정에서 비롯되는 짐 중 하나이다. ‘부모의 기대 내려놓기’는 네 생활이나 삶, 걸어가는 길에서 부모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나 짐을 내려놓는 것이다. 즉, 부모의 기대가 네가 인생길을 선택하거나 본분을 이행하거나 바른길을 걷는 데에 영향을 미치고, 네 자유나 권리, 본능에 영향을 미칠 경우, 네게 스트레스나 짐이 된다는 말이다. 이런 짐은 사람의 생활과 삶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다. 이것이 앞서 교제한 내용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물론, 부모에게서 비롯되는 기대는 많은 내용과 관련된다. 예를 들면 학업, 직업, 결혼, 가정, 나아가 사람의 경제 활동, 앞날, 미래 등이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에게 기대하는 모든 일은 아주 자연스럽고 합당하다. 자녀에게 기대를 걸지 않는 부모는 없다. 정도의 차이만 있거나 특정 시기에 자녀에게 거는 기대가 다를 뿐이다. 자녀가 학업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거나, 직장 일이 잘 풀리거나, 고소득을 올리거나, 결혼이 순조롭고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이다. 심지어 가정, 경제 활동, 앞날 등의 측면까지 저마다 자녀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부모 입장에서는 이 모든 기대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자녀의 입장에서 보면 각 측면에서 부모가 거는 기대는 상당 부분 자녀의 올바른 선택을 방해한다. 심지어는 자녀의 자유 그리고 정상적인 사람으로서의 권리나 권익을 방해하고 동시에 자녀가 자질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방해하기도 한다. 요컨대, 부모가 되었든 자녀가 되었든 어떤 관점으로 보든, 자녀에게 거는 부모의 기대가 정상적인 인성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나 정상인의 본능이 미칠 수 있는 범위, 혹은 정상인이라면 가져야 할 사람의 권리나 하나님에게 부여받은 본분, 의무 등을 넘어선다면 부모의 기대는 정당하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는 있어서도 안 되고, 존재해서도 안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녀는 부모의 그런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 부모는 부모의 관점이나 지위에서 마치 자녀가 이런 일, 저런 일을 하고, 어떤 길을 가며, 어떤 인생을 택하고, 어떤 학업 환경이나 직업, 결혼, 가정 등을 선택하는지 기대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굴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부모는 부모의 관점이나 지위에 서서는 안 되고, 부모라는 신분으로 자녀에게 자녀의 의무가 아닌 일이나 인성 능력 밖의 일을 시켜서는 안 된다. 나아가 자녀의 여러 측면의 선택에 참견하거나 자신의 기대나 취향, 자신의 결핍이나 불만 혹은 자신의 특정 흥미를 자녀에게 강요해서도 안 된다. 이는 부모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부모가 가져서는 안 될 그런 기대를 갖게 되면 자녀는 이를 올바르게 대해야 하며, 더 중요한 것은 부모에게 받는 그 기대의 성질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부모의 그런 기대가 네 인성 권리를 박탈하고 네가 긍정적인 사물과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것을 간섭하거나 방해하는 것이 훤히 보인다면 너는 그것을 내려놓고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너의 권리이고, 하나님이 피조된 모든 인류에게 부여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기가 낳았다고 해서, 네 부모라고 해서 네 인생길이나 인권에 간섭할 특권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니 모든 피조물은 부모의 불합리하고 부적절한, 나아가 정당하지 않은 기대를 수용하는 것에 대해 “아니요.”라는 말로 단호히 거부할 권리가 있다. 너에 대한 부모의 기대를 받아들이거나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모의 정당하지 않은 기대를 내려놓는 실행 방식이다.

‘부모의 기대 내려놓기’에서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는 무엇이냐? 다시 말해 네가 부모의 기대를 내려놓는 진리 근거가 무엇이고, 준행하는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네가 부모를 이 세상에서 가장 친한 사람, 네 직속상관이나 어른, 너를 낳아 키워 준 사람, 의식주를 마련해 주는 사람, 너를 키워 준 은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부모의 기대를 내려놓기 쉽겠느냐? (내려놓기 쉽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는 육의 관점으로 부모의 기대를 대하기 십상일 것이고, 너에 대한 부모의 부적절하고 불합리한 기대를 내려놓기 어려울 것이다. 너는 그들의 기대에 결박되고 억압될 수밖에 없다. 설령 마음에 다소 불만이 있고 원하지 않는다 해도 거기서 벗어날 능력이 없으니 순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 어째서 순리를 따를 수밖에 없겠느냐? 너에 대한 부모의 기대를 내려놓고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거부한다면 너는 자신을 불효자, 부모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나쁜 놈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육의 관점으로 최대한 양심에 따라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여 부모의 고생이 헛되지 않게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네게 거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 할 것이고, 부모가 시킨 모든 일을 열심히 해서 그들의 체면을 세우고 그들을 실망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 부모의 행복한 노후를 위해 그들을 부양하겠다고 마음먹을 것이다. 좀 더 멀리 본다면 부모의 임종을 지켜서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는 동시에 효자가 되겠다는 자기의 바람도 충족시키는 것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사회의 여러 여론과 분위기 그리고 사회에서 유행하는 여러 사상 관점의 영향을 받는데,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저 육적 감정의 관점으로 이런 일을 바라보고 처리할 수밖에 없다. 비록 이 기간 동안 부모가 한 많은 일이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닌 것 같고 심지어 부모의 어떤 행동이나 인성, 인격 그리고 그들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방법은 네 내면 깊은 곳에 경멸과 혐오감을 일으키지만, 그런데도 너는 부모를 홀대하지 않고 효도하며 그들을 흡족하게 하는 효자가 되려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사회에서 배척당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양심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모두 인간, 사회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부모의 기대, 부모와의 관계를 이성적으로 다루기가 쉽지 않다. 너는 억지로 효자가 되어 부모를 대하고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네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부모의 기대를 내려놓는 것이 더더욱 어려워진다. 네가 정말 마음에서 내려놓는다고 해도 또 다른 짐이나 스트레스가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 가문, 가정으로부터의 비난, 나아가 네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의 자책, 비난, 욕, 경멸이다. 스스로를 돼먹지 못한 놈, 불효자, 배은망덕한 놈이라 하고, 심지어는 사회 사람들처럼 이렇게 말한다. “나는 머리 검은 짐승이고 불효막심한 놈이야. 버릇없는 놈이라고.” 온갖 듣기 거북한 말은 다하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이런 곤경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해, 부모의 기대를 내면 깊은 곳에서 이성적으로 내려놓거나 억지로라도 그것을 내려놓으면 네 내면에 또 다른 짐이나 스트레스가 생길 것이다. 그 스트레스는 사회와 네 양심의 작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부모의 기대를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 어렵지 않다. 진리에 공을 들여야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진리를 구하고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그 문제가 해결된다. 그럼 어떤 측면의 진리를 깨달아야만 부모의 기대를 내려놓을 때 사회 여론의 비난과 자기 내면 깊은 곳의 양심의 가책, 그리고 너에 대한 부모의 악담과 질책을 감당하는 것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하나님 앞에서 우린 피조물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자기 부모에게 책임을 다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자기의 본분과 의무를 제대로 이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꿰뚫어 본다면 앞으로 부모의 기대를 내려놓을 때 부모와 사회 여론의 비난으로부터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또 말해 보아라. (지난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교제하셨습니다. 우리가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환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분 이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를 떠나야 해서 그들을 돌볼 수 없는 것이지 책임을 다하는 걸 피하려고 부모를 떠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본분을 이행해야 해서 그들을 돌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부모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책임을 다하려 하지 않는 것이나 불효와는 다른 경우입니다.) 이 두 측면의 원인은 모두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이고 알아야 할 사실의 진상이다. 사람이 이 두 가지 측면을 깨닫는다면 부모의 기대를 내려놓을 때 마음 깊이 평안과 평온을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겠느냐? 만약 거시적 환경의 영향이 없다면 네 운명이 부모와 연관되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정상적으로 일하고 날을 보낸다면 그렇다고 꼭 부모와 함께 거할 수 있겠느냐? 효를 다할 수 있겠느냐? 부모의 곁에서 그들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평생 부모의 은혜에 보답만 하며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 일은 다른 관점으로 인식해야 하고, 다른 관점으로 그것의 본질을 꿰뚫어 봐야 한다. 이는 사람이 깨달아야 할 더 깊은 차원의 진리이자 한 측면의 사실이며, 나아가 한 측면의 사물의 본질이다. ‘부모의 기대 내려놓기’에서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가 무엇이겠느냐? 한편으로는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님을 알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가 네 생명과 운명의 주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진리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두 가지 진리를 깨닫는다면 부모의 기대를 내려놓기가 좀 더 수월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먼저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측면의 진리부터 말해 보자.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라는 말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이겠느냐? 부모가 너를 키워 준 은혜를 두고 말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부모가 너를 키워 준 은혜 때문에 네가 부모와의 관계를 내려놓기 쉽지 않은 것이다. 너는 반드시 그들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불효자이니 그들에게 효도하고 그들의 말을 따르며 그들의 바람과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을 저버리지 못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좋은 직장과 높은 소득이 있어서 부모에게 물질적인 즐거움과 풍족한 물질적 생활을 제공하여 자식 덕을 보게 하고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부모에게 집과 차를 사 주거나 부모를 모시고 호화로운 레스토랑에 가서 산해진미를 맛보게 하거나 유명 관광지로 여행을 떠나 고급 호텔에 묵어서 부모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네가 이렇게 하는 모든 것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여 부모가 너를 키워 주고 아껴 준 보람이 있다고, 자식에게 버림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부모에게 생색내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 사람과 사회에 과시하는 동시에 최대한 네 양심의 필요를 충족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측면에서 보든, 네가 무엇을 충족하고 있든, 결국 네가 하는 모든 것은 상당 부분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있는 것이며, 네가 이런 일을 하는 본질은 너를 키워 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네게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그런 생각이 들겠느냐? 그것은 바로 부모가 너를 낳았고 너를 힘들게 키웠다고 생각해서 은연중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네가 부모에게 빚을 졌으니 반드시 보답해야 하고, 그래야만 인성이 있는 것이고 진정한 효도이며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도덕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너의 그런 사상 관점과 행동 방식은 본질적으로 네가 부모에게 빚진 것을 반드시 갚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는 크게 보면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네가 그들의 은혜에 빚을 졌다는 것이다. 지금 네가 보답하고 갚을 능력이 있으니 네 힘으로 보답하고 돈이나 정으로 갚으려는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인성이겠느냐? 진정한 실행 원칙이겠느냐? (아닙니다.) 어째서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라고 하겠느냐?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진리인 이상 네가 부모를 은인, 채권자로 여기고 네가 하는 모든 일이 오로지 그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런 사상 관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마지못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니냐?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와 “부모는 네 은인이니 반드시 갚아야 한다.” 중 어느 말이 진리이냐?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진리입니다.)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가 진리라면 “부모는 네 은인이니 반드시 갚아야 한다.”라는 말은 진리가 아니냐? (아닙니다.) 이 말은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말과 모순되지 않겠느냐? (모순됩니다.) 어느 말이 네 양심에 찔리든 이는 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어떤 말이 진리이냐는 것이다. 설령 그 진리인 말이 네 양심을 찔리게 하고 가책받게 하더라도 너는 그 말이 진리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 “부모는 네 은인이니 반드시 갚아야 한다.”라는 말은 비록 사람의 인성 도덕 수준과 양심적 지각에 부합하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네 양심에 만족감과 편안함을 주더라도 너는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것이 네가 진리를 받아들일 때 지녀야 할 태도이다. 그럼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와 “부모는 네 은인이니 반드시 갚아야 한다.” 중 어느 말이 더 듣기 편안하고 인성 양심과 인성 도덕 수준에 더 부합하겠느냐? (두 번째가 더 부합합니다.) 왜 두 번째 말이 더 부합하느냐? 그것이 사람의 정에 부합하고 감정 필요를 충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이다. 그럼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사람에게 불편한 느낌을 일으키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이 말을 듣고 나면 어떤 느낌과 기분이 드느냐? (좀 비양심적인 느낌이 들 것입니다.) 좀 인정미가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인정미가 없는 자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요?” 인정미가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더냐?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말은 인정미가 없게 들리긴 하지만, 이는 사실이다. 만약 네가 부모와의 관계를 이성적으로 대한다면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근원적으로 자식과 부모 간의 모든 관계, 사람과 사람 간의 본질과 근본을 명확하게 설명해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설령 네 양심이 찔리고 네 감정 필요를 충족하지 못했을지라도 이 말은 사실이자 진리이다. 이 진리로 인해 너는 너를 키워 준 부모의 정과 너에 대한 부모의 기대를 이성적이고 올바르게 대할 수 있게 된다. 더욱이 부모와의 관계를 이성적이고 올바르게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네가 부모와의 관계를 올바르고 이성적으로 대할 수 있게 되면 부모와의 관계를 이성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 진리는 정말 좋은 말 같네요. 거창한 말이죠. 그런데 듣고 나면 왜 살짝 부족한 느낌이 드는 걸까요? 특히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말은 듣고 나면 어째서 부모와의 관계가 친밀해지지 않고 점점 소원해지는 것 같을까요? 왜 부모와의 관계가 정이 없는 관계인 것처럼 느껴지죠?” 진리가 일부러 사람 간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느냐? 일부러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단절시키느냐? (아닙니다.) 그럼 이 진리를 깨달으면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겠느냐? (이 진리를 깨달으면 부모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밝히 알 수 있는데, 그 사실의 진상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 네게 이 사실의 진상을 명확하게 보여 주고 네가 이 일을 이성적으로 대하고 처리하게 해 준다. 정에 빠져 살거나 사람과 사람 간의 육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말해 보자.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라는 말이 사실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 일을 이치에 맞게 분명히 밝히는 것이 마땅하다. 부모가 너를 낳은 것에 대해 살펴보자. 네가 태어날 부모를 택한 것이냐, 아니면 그들이 너를 낳기로 택한 것이냐? 누가 누구를 택했느냐?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둘 다 아니다. 네가 태어날 부모를 택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너를 낳기로 택한 것도 아니다. 근원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해 놓은 것이다. 이 일은 사람이 이해하기 쉬우니 이 주제는 일단 제쳐 두고 이야기하지 않겠다. 네 관점에서 보면 너는 수동적으로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그들에 의해 태어났다. 부모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주관적으로 너를 낳기를 원했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고 본다면 네가 태어난 일에서 주도권은 부모에게 있다. 그들이 너를 낳기로 했으니 그들에게 주도권이 있다. 너는 그들에게서 태어날 것을 선택하지 않았고, 그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태어났다. 너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러니 부모가 주도권을 가지고 너를 낳기로 선택했다면 너를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하고 키울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너를 공부시키든, 먹이고 입히며 돈을 쓰든 그것은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이다. 하지만 너는 양육받는 동안 늘 수동적인 입장이다. 네게는 선택권이 없고 그들에게 양육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는 어리고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부모의 손에 수동적으로 자랄 수밖에 없다. 너는 부모가 키우는 대로 자라난다. 부모가 네게 좋은 것을 먹이면 좋은 것을 먹고, 부모가 네게 제공하는 생활 환경이 고달프고 빈곤하면 너는 변변치 못한 음식을 먹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양육받는 동안 너는 수동적이고, 부모는 책임을 다한다. 화분의 꽃을 키우기로 했으면 비료와 물을 주고 햇빛을 쐬어 주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가 너를 극진하게 보살피든, 정성껏 보호하든, 결국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들이 너를 키우는 목적이 무엇이든 이것은 그들의 책임이다. 그들이 너를 낳았으니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이렇게 본다면 부모가 네게 하는 것이 은혜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고 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부모가 네게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은혜라고 할 수 없다. 화초를 하나 키워도 물을 주고 비료를 주며 책임을 다하는데 그것도 은혜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은혜라 할 수 없습니다.) 더더욱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작은 화초는 밖에서 더 잘 자란다. 땅에 심으면 햇볕을 쬐고 바람과 비를 맞아 더 튼튼하게 자라지만, 집에서 화분에 옮겨 심어 키우면 밖에서 자라는 것만 못하다. 어디서든 못 살겠느냐? 어디에 있든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이 있다. 너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이 살아가도록,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준수하는 법칙을 준수하도록 책임진다. 한 사람으로서 너는 부모가 양육하는 환경에서 생활할 뿐이니 그 환경에서 성장하고 살아가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은 거시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고, 미시적으로 보면 부모가 너를 키우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어찌 되었든 부모가 너를 키우는 것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부모가 너를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우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자 책임이지 은혜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은혜라고 할 수 없다면 이것은 네가 누려 마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이는 네가 누려야 할 하나의 권리이다. 너는 마땅히 양육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미성년일 때는 양육받는 것이 네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가 받은 것은 단지 너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지 부모의 은혜나 은정이 아니다. 모든 생물이 새끼를 낳아 기르고 번식하며 후대를 양육하는 것은 하나의 책임이다. 예를 들어 새, 소, 양 심지어 호랑이도 새끼를 낳은 후에는 키워야 한다. 후대를 키우지 않는 생물은 없다. 물론 예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주 드물다. 이는 생물이 생존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생물의 본능이다. 그것을 은혜로 귀결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그저 창조주가 동물과 인간에게 정해 준 법칙을 따르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모가 너를 키우는 것은 결코 은혜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절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네게 책임을 다하고 심혈을 쏟고 돈을 썼다고 해서 너더러 갚으라고 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다. 그것이 부모로서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책임이고 의무라면 아무런 대가가 없어야 한다. 보상을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부모가 너를 키우는 것은 단지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일 뿐이니 대가가 없어야 하고 거래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니 너는 갚을 생각을 가지고 부모를 대하거나 부모와의 관계를 다룰 필요가 없다. 만약 갚을 생각을 가지고 부모를 대하고 부모에게 보답하고 부모와의 관계를 다룬다면 이는 오히려 비인도적인 태도인 동시에 육의 정에 제약을 받고 발목 잡히기 쉬우며, 육의 정이라는 올무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심지어는 방향을 잃어버릴 것이다.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너는 부모의 기대에 일일이 부응할 의무도 없거니와 그들의 기대를 떠안을 의무도 없다. 그들의 기대는 그들 몫이고, 선택은 네가 하는 것이다. 네게는 하나님이 정해 준 너의 인생길과 운명이 있다. 네 부모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이 불효막심한 녀석, 몇 년이 지나도록 얼굴 한 번 안 비추고 오랫동안 전화도 한 통 없다니. 내가 병들면 보살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정말 널 헛키웠구나. 배은망덕한 녀석, 고마운 줄도 모르고!”라고 하는데, 만약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이 말을 듣는다면 너는 칼에 찔린 듯 마음이 아플 것이고, 양심의 가책을 받을 것이다. 부모의 말이 구구절절 네 마음을 후벼 파니 너는 부모를 볼 면목이 없다고, 부모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해서 죄책감으로 가득 찰 것이다. 부모가 너를 배은망덕하다고 말할 때 네가 정말 ‘그러게 말이야. 부모님은 여태껏 날 키우시느라 자식 덕은 보지도 못했어. 이제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내가 병시중을 들며 돌보길 바라시는데 막상 은혜에 보답해야 할 때 내가 곁에 없으니 난 정말 배은망덕한 자식이야!’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배은망덕한 자식이라 규정하는데, 이것이 이치에 맞느냐? 네가 배은망덕한 것이냐? 네가 만약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하는 대신 집에서 부모 곁을 지킨다면 부모가 병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 (장담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생사나 빈부의 문제가 네게 달려 있느냐? (그 역시 아닙니다.) 부모가 어떤 병에 걸리든 너를 키우느라 고생해서, 네가 보고 싶어서 걸리는 것이 아니다. 특히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크고 중한 병에 걸리는 것도 너 때문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운명이니 너와 상관없다. 네가 아무리 효도해 봤자 기껏해야 그들의 육적인 고통이나 부담을 조금 덜어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 어떤 병에 걸릴지, 언제 어디서 죽을지 너와 상관있겠느냐? 너와 아무 관련이 없다. 네가 배은망덕하지 않고 효자라고 해서 온종일 부모 곁을 지키며 돌본다면 그들이 병에 걸리지도 않고 죽지도 않겠느냐? 결국 걸릴 병은 걸리고, 죽을 사람은 죽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으냐? 부모가 네게 배은망덕하다고 할 때, 양심도 없고 고마운 줄도 모른다고 할 때 네 마음이 괴롭지 않겠느냐? (괴로울 것입니다.) 지금도 괴롭겠느냐? (지금은 괴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된 것이냐? (하나님께서 부모의 병환과 생사는 우리와 관계가 없고 오직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이니 우리가 그들 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교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배은망덕하다고 하는 부모의 말은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네가 부모의 말처럼 배은망덕하든 그렇지 않든 최소한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여 하나님이 보기에 배은망덕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사람이 뭐라 하든 소용없다. 부모가 너를 뭐라 하든 꼭 그렇지 않고, 그런 말은 소용없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이 네가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라고 하면 사람이 아무리 너를 배은망덕하다고 욕해 봤자 소용없다.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사람은 단지 양심 때문에 혹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거나 분량이 작아서 이런 악담의 영향을 받아 기분이 나빠지고 의기소침하게 되지만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면 이 모든 것이 해결되니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문제가 해결되었느냐? 이 일을 이해하였느냐? (이해했습니다.) 여기서 사람이 알아야 할 사실은 무엇이냐? 부모가 너를 키우는 것은 그들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너를 낳기로 했다면 너를 양육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들이 너를 성인으로 키우는 것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네가 그들에게 빚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너는 갚을 필요가 없다. 네가 갚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밝혀 준다. 너는 부모의 은혜를 이유로 그들에게 무엇을 할 필요가 없다. 네가 책임을 다할 여건이 된다면 책임을 다하고, 그들에게 의무를 다할 환경이나 객관적인 여건이 안 된다면 깊이 고민하지 말고 부모에게 빚졌다고 생각하지 마라.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네가 부모에게 효도하든, 부모에게 책임을 다하든 이는 그저 자녀의 입장에서 너를 낳아 키워 준 부모에게 어느 정도 책임을 다하는 것일 뿐이다. 다만 갚는다는 관점으로 이런 일에 임해서는 안 되고, “부모는 네 은인이니 반드시 보답해야 하고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라는 관점으로 이런 일에 임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방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다. “까마귀는 자라면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고, 새끼 양은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는다.” 또 “불효자는 짐승만도 못하다.”라는 말도 있다. 이 얼마나 수준 높고 대범하고 품위 있는 말이냐! 사실, 그들이 말하는 “까마귀는 자라면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고, 새끼 양은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는다.”라는 현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생물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하나님이 각 생물에게 정해 준 법칙일 뿐이다. 사람을 포함한 각종 생물은 모두 이 법칙을 지키고 있다. 생물마다 그 법칙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모든 생물을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것을 한층 더 입증하는 것이다. 어떤 생물도 이 법칙을 깨거나 뛰어넘을 수 없다. 생각해 보아라. 사자나 호랑이는 사나운 육식 동물이지만 새끼 때는 성체가 되기 전까지 길러지고 물지 않는다. 이것이 동물의 본능이다. 사납든, 온순하든 모든 동물은 이 본능을 가지고 있다. 각종 생물은 이런 본능과 법칙을 따라야만 번식해 나갈 수 있다. 인류도 예외는 아니다. 만약 각종 생물이 이 법칙을 지키지 않거나 이런 법칙과 본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번식할 수 없을 것이고, 먹이 사슬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까마귀는 자라면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고, 새끼 양은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는다.’는 말이 바로 생물계가 이 법칙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각종 생물은 이런 본능을 가지고 있다. 새끼가 태어나면 성체가 될 때까지 암컷이나 수컷의 보호와 보살핌 속에서 자란다. 각종 생물도 자기 새끼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극진하게 돌보는데, 하물며 사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인간이 자칭 고등 동물이라고 하면서 이 법칙을 지키지 않고 이런 본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동물보다 못하다. 그러니 부모가 너를 키우면서 얼마나 보살피고 책임을 졌든 그들은 그저 피조된 인류의 능력 범위 안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그들의 본능이다. 생각해 보아라. 새들도 번식기가 되면 한 달 전부터 둥지를 틀 만한 안전한 곳을 쉴 새 없이 찾아다닌다. 암컷과 수컷이 번갈아 가며 갖은 풀과 깃털, 나뭇가지를 물어 와 잎이 무성한 나무에 둥지를 짓기 시작한다. 새 둥지는 무척이나 튼튼하고 정교하다. 새는 새끼를 위해 이렇게나 공을 들여 둥지를 틀고 짓는다. 둥지를 다 짓고 알을 낳으면 암수가 돌아가며 24시간 빈틈없이 온종일 둥지를 지킨다. 하나가 날아오면, 다른 하나가 날아간다. 며칠 지나지 않아 새끼 새가 알을 깨고 나와 고개를 내밀면 나무에서 “짹짹짹” 새끼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럼 머지않아 부모 새가 돌아와 벌레를 먹이고 곧이어 또 먹이를 물어 오니 그야말로 지극정성이다. 한두 달이 지나 새끼 새가 자라면 둥지 위에 서서 날개를 파닥인다. 부모 새는 번갈아 날아와 새끼를 먹이며 보호한다. 어느 해엔가 새끼 새를 물고 날아가는 까마귀를 본 적이 있다. 그 새끼 새는 처절하게 울어 대는데 아마도 살려 달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새끼 새를 입에 문 까마귀가 앞서 날아가고, 그 뒤를 새 두 마리가 쫓고 있었는데 그 두 마리도 처절하게 울어 댔다. 결국, 까마귀는 멀리 날아가 버렸다. 까마귀를 따라잡을 수 있든 없든 새끼 새는 아마 죽을 것이다. 그 한 쌍의 새들은 땅에 있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뒤에서 울부짖었다. 그 울부짖는 소리가 얼마나 처절했겠느냐? 사실, 그 새들에게 새끼가 한 마리밖에 없었겠느냐? 둥지에 서너 마리가 더 있었을 텐데 하나가 물려 갔다고 뒤에서 그렇게 울어 대며 쫓았던 것이다. 보아라. 동물계, 생물계도 이와 같다. 이토록 정성껏 새끼를 돌본다. 그 새들은 해마다 돌아와 둥지를 새로 틀고 같은 일을 반복한다. 새끼를 낳고 먹이며 나는 법을 가르친다. 나는 법을 가르칠 때 새끼는 높이 날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여러 번이나 구해서 다시 둥지에 올려놓은 적도 있다. 부모 새가 날마다 가르치니 언제 새끼들이 전부 떠나서 둥지가 텅 빌지 모른다. 이듬해 새로운 새 한 쌍이 또 날아와 둥지를 틀어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운다. 각종 생물이나 동물은 이런 본능과 법칙을 가지고 있고, 이를 잘 지키고 제대로 실행한다. 아무도 이를 깨뜨릴 수 없다. 이 외에도 특별한 동물이 있다. 호랑이, 사자와 같은 동물들은 성체가 되면 부모에게서 떨어진다. 심지어는 수컷끼리 경쟁하며 물 땐 물고, 겨룰 땐 겨루며, 싸울 땐 싸우기도 하는데 지극히 정상적이다. 이것이 법칙인 것이다. 그것들은 정에 얽매이거나 인간처럼 정에 빠져 살지 않는다. “은혜에 보답하고 은혜를 갚아야 돼.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지 불효하면 남들이 비난하고 욕하며 뒤에서 험담할 거야.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어!”라는 말은 동물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째서 사람은 이런 말을 하겠느냐? 왜냐하면 사회나 사람들 가운데에 여러 가지 잘못된 사상과 여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런 잘못된 사상과 여론에 영향을 받고 물들고 부식되고 나면 자녀와 부모의 관계를 저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다루게 된다. 결국, 부모를 자신의 채권자로 삼고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부모가 죽으면 부모가 기뻐하고 원하는 걸 해 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부모의 은혜에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것은 불필요하지 않으냐? 사람이 정에 빠져 살면 정에서 비롯된 여러 생각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패괴된 인간의 사상이 만연한 환경 속에서 살면 사람은 여러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에 휘둘리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이 다른 생물처럼 단순하지 않고 피곤해진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역사하고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이 이 모든 사실의 진상을 알게 하고 진리를 깨닫게 하기 때문에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나면 이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은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에 이끌려 부모와의 관계를 다루지 않게 된다. 그럼 삶이 홀가분해진다. 삶이 홀가분해진다는 것은 사람의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책임과 의무를 알지만 사람이 어떤 관점과 방식으로 대하는지에 달렸다. 하나는 정을 택하는 길을 가는 것으로, 정에 따라 처리하고, 사탄이 이끄는 방식과 사상 관점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말씀대로 그런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탄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으로 그런 일을 처리하면 정에 얽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고, 언제나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이런 상태로는 굴레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늘 “당신이 맞고, 제가 틀렸어요. 당신이 해 주신 게 많고, 저는 해 드린 게 없어요. 당신은 배은망덕하고, 너무했어요.” 등의 말에 얽매여 똑 부러지게 말할 때가 없다. 하지만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나서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과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이런 일은 단순해진다. 네가 만약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올바른 진리 원칙, 사상 관점을 준수한다면 삶이 아주 홀가분해질 것이다. 사회 여론이든, 양심의 지각이든, 감정적 짐이든 네가 부모와의 관계를 다루는 데 더는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부모와의 관계를 이성적이고 올바르게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진리 원칙대로 하면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네 마음 깊은 곳은 그 영향을 받지 않고 평안하고 잠잠할 것이다. 적어도 너 자신만큼은 속으로 스스로를 배은망덕하다고 자책하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가르쳐 준 방식대로 했고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도를 준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의 도를 준수하는 것은 사람이 최우선적으로 가져야 할 양심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러지 못한다면 너는 배은망덕한 놈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겠느냐? 분명히 아는 것이 한 측면이고, 그것을 차츰차츰 꿰뚫어 보고 실행하는 것이 또 하나의 측면이다. 분명히 알기까지는 한동안 체험해야 한다. 이 사실과 본질을 분명히 알고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 것은 단기간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우선 여러 그릇되고 터무니없고 사악한 사상 관점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하는 한편, 더 중요한 것은 자기 내면의 양심과 감정의 속박이나 영향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고 특히 자신의 감정이라는 문턱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옳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인정하고, 사탄이 주입한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안다고 해도 감정이라는 문턱을 넘지 못한다면 늘 부모가 불쌍하다고, 부모의 은혜가 너무 크다고, 부모가 너무 많은 것을 헌신하고 너무 많은 것을 해 주었다고, 너무 고생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너를 위해 부모가 했던 모든 일의 잔상과 그들이 했던 말, 심지어는 그들이 너를 위해 치렀던 모든 대가가 네 마음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네게는 넘기 힘든 중요한 문턱이다. 사실 가장 넘기 힘든 것은 너 자신의 문턱이다. 만약 각 문턱을 하나하나 넘는다면 마음속으로 부모에 대한 정을 확실하게 내려놓게 될 것이다. 이런 측면으로 교제하는 것은 부모를 저버리라는 것도 아니고, 부모와 선을 확실히 그으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캠페인을 하는 것은 아니니 선을 그을 필요는 없다. 단지 마음속으로 이런 일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올바른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라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네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 때문에 곤욕을 치르거나 발목 잡히지 않고, 더 중요하게는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네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한다면 그것으로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물론 육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이런 것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부모와의 정에 조금도 얽매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럴 리 없다.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는 부모나 자기 자녀가 육적인 관계에서 가장 친한 존재이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떨어뜨릴 수 없다. 그들과 관계를 단절하고 살든 죽든 발길을 끊겠다고 형식적으로 선언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렵겠느냐? 그 어려움은 사람이 진리를 깊게 깨달을수록, 또한 나이가 들수록 점점 줄어들 것이다. 보아라, 부모에 대한 애착은 20대가 다르고, 30, 40대가 다르다. 그러다 50대 이상이 되면 더 약해지고, 60, 70대는 말할 나위도 없이 더 약해진다.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측면의 진리는 사람이 깨달아야 할, 부모를 대하는 올바른 실행 원칙이다. 다른 측면의 실행 원칙은 무엇이냐? (“부모가 네 생명과 운명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네 생명과 운명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말이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말보다 이해하기 쉽고 내려놓기 쉽지 않겠느냐? 겉으로 보면 네 육의 생명을 부모가 낳았고 부모가 준 것 같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근원적으로 보면 네 육의 생명은 부모가 준 것이 아니다. 사람은 생명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아무도 사람의 숨결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이다. 각 사람의 육이 사람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숨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숨결에 생명이 깃들어 있고, 그 숨결이 바로 생명이 있는 사람의 상징인 것이다. 한 사람에게 숨결이 생기고 생명이 생긴 것의 뿌리와 근원은 부모가 아니다. 단지 부모의 출산이라는 방식을 빌려 네가 생겼을 뿐이다.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이다. 그러므로 네 생명의 주인은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여 생명의 숨결을 인간에게 주었다. 이것이 사람 생명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부모가 네 생명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말은 이해하기 쉽지 않으냐? 네 숨결은 부모가 준 것이 아니니 부모가 그 숨결을 이어지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은 네 하루하루를 돌보고 주재한다. 네가 매일 어떻게 생활하는지, 하루하루가 순조롭고 즐거운지, 매일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환경에서 생활하는지는 부모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네 부모를 통해 너를 돌보게 하였을 뿐이고, 그들은 단지 하나님이 너를 돌보라고 파견한 대상에 불과하다. 네가 태어난 것은 네 생명을 부모가 주어서가 아니다. 그럼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네 생명을 부모가 주어서겠느냐? 그 역시 아니다. 네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하나님이지 부모가 아니다. 만약 네 부모가 너를 낳았다고 해도 네가 한 살이나 다섯 살 때 하나님이 네 생명을 거두려 한다면 부모에게 방법이 있겠느냐? 부모가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어떻게 네 생명을 살릴 수 있겠느냐? 병원 의사에게 데려가 치료해서 네 생명을 살리는 것뿐이다. 그것이 그들의 책임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생명, 이 사람은 살아서는 안 된다며 다른 집에 다시 태어나게 하겠다고 하면 부모도 네 생명을 살릴 능력이나 방법이 없다. 그들은 눈앞에서 그 작은 생명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한 생명이 사라질 때 그들은 무력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부모의 책임을 다해 너를 의사에게 데려가 목숨을 건지도록 치료받게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생명이 이어질지를 부모가 결정할 수는 없다. 만약 하나님이 네가 계속 살아가게 하면 네 생명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 생명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네 생명은 사라지는 것이다. 부모에게 어떤 방법이 있겠느냐? 그들도 그저 운명을 따를 수밖에 없다. 사실 그들은 평범한 피조물이다. 단지 네 입장에서 신분이 특별할 뿐이다. 그들이 너를 낳아 키웠으니 너의 직속상관이자 부모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이고 패괴된 인류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도 주관하지 못하는데 네 생명을 주관할 수 있겠느냐? 그들이 너를 낳았지만 너의 그 생명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른다. 그 생명이 언제, 몇 시에, 어디에서 왔는지, 그 생명이 어떤 생명인지 다 모른다. 그들도 수동적으로 기다릴 뿐이다. 하나님의 주재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안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이 그 모든 것은 하나님 손에 지배되고 일어난다. 부모가 네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 이해하기 쉽지 않으냐? (이해하기 쉽습니다.) 부모가 네 육을 낳긴 했지만 부모가 네 육의 생명을 낳은 것은 아니다. 이는 사실이다. 나아가 네 키가 몇이고, 체질이 어떤지, 머리칼은 무슨 색인지, 숱은 많은지, 네가 어떤 취향인지 등을 부모가 주관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네 피부가 좋은지 나쁜지, 네 생김새가 어떤지는 부모가 정할 수 없다. 어떤 부모는 통통한데 아이는 코와 눈이 작고 몸집도 왜소하다. 남들이 보면 “얘는 부모를 안 닮고 누굴 닮은 거야?”라고 할 정도다. 누구를 닮는지도 부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부모는 체격이 건장한데 허약한 아이가 있는가 하면, 부모는 허약한데 황소처럼 튼튼한 아이가 있다. 부모는 소심한데 대담한 아이가 있는가 하면, 부모는 신중한데 대단한 야심가인 아이도 있다. 결국, 황제나 대통령이 되는 아이가 있고, 건달이나 깡패 두목이 되는 아이가 있다. 부모는 농민이지만 고위직 공무원이 되는 자녀가 있고, 부모는 교활하지만 착실한 아이도 있다. 또 부모는 불신파에 심지어 우상과 마귀를 숭배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살 수 없다며 하나님을 믿으려 하는 자녀도 있다. 어떤 부모가 자녀에게 대학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면 아이가 말한다. “안 돼요. 저는 피조물이라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고요!” 그럼 부모가 말한다. “넌 아직 어려서 본분을 이행할 필요 없다. 늙고 별 볼 일 없는 우리가 본분을 이행해서 가족의 복을 챙기면 되니 너까지 나설 거 없어. 너는 공부나 열심히 해서 대학을 나와 고위 공무원이 돼야 해. 엄마가 네 덕 좀 보자.” 그럼 자녀는 “안 돼요. 저는 피조물이라고요. 본분 이행이 가장 중요하단 말이에요.”라고 대답한다. 물론, 부모는 집과 생업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지만 아무리 설득해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인 자녀도 있다. 아무리 봐도 부모와 자식이 한가족처럼 보이지 않는다. 외모나 생활 습관, 심지어 성격마저 한가족처럼 보이지만 취향, 흥미, 추구하는 바나 걸어가는 길은 전혀 다르다. 마치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두 부류 사람 같다. 그러니 사람의 생명은 구별되는 것이다. 부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어떤 생명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날지는 모두 부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는 네 생명의 주인도 아니고 네 운명의 주인도 아니다. 생명은 부모가 준 것이 아니다. 그럼 운명이란 것은 생명보다 중한 일이냐, 가벼운 일이냐? 사람에게 이 두 가지는 모두 중요한 일이다. 왜 그러겠느냐? 이는 사람의 본능, 사람의 능력과 자질로는 이르지 못하고, 도달하지 못하며,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운명과 생명 궤적은 모두 하나님이 결정하고 주재한다. 그 누구도 이 두 가지 일에 대해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다. 네가 이번 생에 어떤 가정에서,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날지는 네가 선택할 수 없고 부모도 선택할 수 없다. 부모 역시 수동적으로 너를 낳은 것이다. 그렇다면 네 운명의 궤적이 어떨지, 네가 인생에서 부귀영화를 누릴지, 아니면 가난하고 비천하게 생활할지, 아니면 평범한 사람일지, 평생 어디를 가고 어디에서 생활하며 결혼 생활이나 자녀는 어떨지, 물질적인 생활 환경은 어떨지 등을 부모가 결정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는 부모의 가족이 잘나가서 먹고 입는 데 부족함이 없고 돈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그의 자녀가 성인이 되어 가산을 탕진하니 부모가 아무리 돈을 벌어 와도 방탕한 자식의 낭비벽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또 어떤 부모는 형편이 어려웠는데 자녀를 낳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사업이 번창했다. 삶이 한결 나아지고 순탄해지며, 주위 환경도 좋아진다. 보아라, 이 모든 것은 부모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그렇지 않으냐? 자녀의 운명은 부모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자녀의 운명은 부모와 아무 관계도 없다. 네가 어떤 길을 갈지, 네가 평생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날지, 살면서 화는 얼마나 당하고 경사는 얼마나 있을지, 부귀는 얼마나 누릴지는 부모와 상관없고 그들의 바람과도 상관없다. 자기 자식이 평생 탄탄대로를 가길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더냐?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설사 부모의 바람처럼 자녀가 탄탄대로를 가서 고위 공무원이 되고 부를 축적하며 잘 산다고 해도 부모가 그 복을 누리지도, 덕을 보지도 못하고 병들어 몇 년 살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있다. 자녀의 운명이 부모와 관계가 있느냐? 관계가 없다. 부모의 바람대로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식의 운명은 부모와 상관없고, 부모도 자식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 설령 부모가 너를 낳았고, 심지어 네 앞날과 꿈, 미래의 운명에 기반을 다져 줄지라도, 네 운명과 미래의 인생길이 어떨지는 부모가 결정할 수 없다. 이 역시 부모와 상관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네 운명의 주인이 아니고 네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네가 부귀영화를 누릴 운명이라면 부모가 아무리 가난하고 능력이 없어도 너는 너대로 잘될 것이다. 반면 네 운명이 가난하고 평범한 하층민으로 정해져 있으면 부모가 아무리 유능하다 한들 너를 도와줄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이 너를 하나님이 택한 대상, 하나님의 선민으로 정해 놓았다면 네 부모가 아무리 재능이 있고 능력이 있어도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막으려야 막을 수 없다. 네가 하나님 집의 사람, 하나님의 선민으로 정해졌다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오직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이 정한 운명과 관계가 있지 부모의 바람, 기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물론 개인의 흥미, 취향, 성격, 포부 그리고 사람의 자질이나 능력과도 무관하다. 그러니 너는 “부모가 네 생명과 운명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진리에 따라 부모의 기대를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전적으로 받아들이겠느냐, 아니면 무시하겠느냐, 그것도 아니면 이성적으로 대하겠느냐? 네 생명이나 운명과 관련된 이런 문제에서 정상적인 부모로서 기대하고 싶은 대로 기대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할 수 있다. 단, 부모는 부모대로 말할 뿐, 행동하는 것은 네 몫이니 그들과 부딪힐 필요는 없다. 일의 진상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논쟁으로 생기거나 사람의 의지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너 스스로도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부모는 어림도 없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아무리 부모가 너보다 어른이라고 해도 네 운명과는 아무런 관계나 관련도 없다. 부모는 너보다 몇 살 많다는 이유로, 너보다 한 세대를 앞섰다는 이유로 네 운명에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 이는 비이성적이고 혐오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부모가 네 인생길이나 희망 사항에 대해 참견한다면 너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네 운명의 주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제 운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고, 그 누구도 제 운명을 바꿀 순 없어요.”라고 말하여라.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운명이나 자기의 운명을 좌우할 수는 없다. 부모 역시 그럴 자격은 없다. 조상도 그럴 자격이 없는데 하물며 부모겠느냐? 오직 누구에게 자격이 있겠느냐? (하나님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사람의 운명을 주재할 자격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론적으로는 인정한다. “부모는 제 운명에 간섭할 수 없어요. 제가 부모에게서 태어나긴 했지만 제 생명은 부모가 아닌 하나님이 주셨거든요. 제 모든 것도 하나님이 주셨어요. 단지 부모를 통해 제가 장성할 때까지 키워 주시고 지금까지 살게 하신 거죠. 사실 하나님이 저를 키워 주신 거죠.” 이 말은 제법 그럴싸하고 제대로 이해한 것처럼 들리지만 특수한 환경에 놓이면 사람은 육친의 정을 이기지 못하고 “부모가 네 생명과 운명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말을 확신하지도 못한다. 특수한 상황에서 사람은 정에 지배되어 시험에 빠지거나 연약해진다. 생각해 보아라.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다가 정부나 교계로부터 박해받고 정죄받아 체포되고 수감되면 유다가 되지 않겠다고, 어떤 고문을 받더라도 형제자매나 교회의 정보를 절대 팔아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죽으면 죽었지 유다는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고문을 받고 처참한 몰골이 되었다. 눈이 퉁퉁 부어 앞이 잘 보이지 않고, 귀도 안 들리고, 이가 빠지고, 찢어진 입가에서 피가 나고, 다리도 가누지 못하고, 부어오른 몸은 여기저기 시퍼런 멍투성이였다. 하지만 갖은 고문에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결코 유다가 되지 않고, 굳게 서서 하나님을 증거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매우 굳건하고, 증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느냐? 고문과 협박에도 유다가 되지 않고 며칠 밤낮으로 그렇게 괴롭힘을 당했다. 마귀가 보고 “이 녀석 맷집이 대단하군. 단단히 중독됐어. 정말 신화분자(神化分子)야. 어린놈이 이 꼴이 되도록 한마디도 불지 않다니. 이를 어쩐다? 이 녀석이 핵심 인물이라 교회 정보를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저 녀석한테서 뭘 좀 끄집어내면 사람을 꽤 잡아넣고 현금도 짭짤하게 압수할 텐데!”라고 말한다. 마귀는 애써 궁리해 본다. ‘저 입을 어떻게 열지? 어떻게 하면 정보를 불고 사람들을 넘기게 만들 수 있을까?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약점은 있게 마련이지.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처럼 말이야. 아무리 내공이 높아도 결국 급소는 있는 법. 사람이라면 약점이 있을 테니 거길 공략하면 돼. 녀석의 약점이 뭘까? 외동이라 어려서부터 오냐오냐 컸다고 하니 부모가 무척 아끼고 사랑하겠지. 녀석도 부모에게 효심이 깊을 테고 말이야. 놈의 부모를 데려와 아들에게 정신 교육 좀 시키게 하면 부모 말은 통할지 모르겠군.’ 이윽고 그의 부모를 데려왔다. 그가 부모를 보자 어땠을 것 같으냐? 부모를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 저는 굳게 서서 증거하겠습니다. 절대 유다가 되지 않겠어요!’라고 생각했지만 부모를 본 순간 그의 마음이 이미 반은 무너져 버렸다. 그 순간 그는 ‘부모님께 너무 죄송해. 이런 꼴을 보이다니, 분명 가슴이 찢어지실 거야.’라는 생각에 주저앉는다. 비록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유다가 될 수는 없어. 굳게 서서 하나님을 증거해야 해. 난 잘못된 길을 가지 않았어. 내가 가는 길은 인생의 바른길이야. 하나님을 증거해서 사탄에게 치욕을 안겨야 해!’라며 마음을 다잡고 버텨 보지만 정을 이기지 못해 부모를 보자마자 반은 무너지고 만다. 고문으로 그런 몰골이 된 자식을 본 부모의 마음은 어떻겠느냐?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는 마음이 찢어질 것이다. 자기 자식이 고문을 당해 사람 꼴이 아닌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괴로우며 고통스러울 것이다. 부모가 휘청이며 네게 다가온다면 어떻겠느냐? 차마 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너나 부모나 여태 입을 떼지 못하면 너는 이미 무너진 것이고 정을 이겨 내지 못한 것이다. 너는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부모님은 연로하시고 몸도 안 좋아. 집에 두 분만 남아서 서로 의지하며 살고 계셔. 나 같은 자식을 낳으시고 지금껏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셨는데 나는 부모님께 폐를 끼치며 얼굴에 먹칠하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고생하는 모습이나 보이다니.’ 내면 깊은 곳에 은연중 자기가 불효자라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실망시키고, 걱정을 끼친다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너와 부모가 모두 고통스러운 데에는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다. 부모는 너를 끔찍이 아끼기 때문에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고, 너는 너를 아끼는 부모가 괴로워하는 걸 알기에 너 때문에 부모가 괴로워하고 걱정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모두 감정의 작용이 아니겠느냐? 아직까지는 이것을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네가 굳게 서서 증거하는 데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곧이어 부모가 만약 “멀쩡한 사람을 이 지경까지 때리다니.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너를 애지중지 키워서 손끝 하나 함부로 대지 않았는데 네가 어쩌다 이 꼴이 되었니? 우린 너한테 손찌검 한 번 하지 않고 그저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라고, 금이야 옥이야 키웠지. 부모를 돌보지 않는 건 상관없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증거한다고 입을 꾹 닫아서 이렇게 고생하고, 고문으로 이 지경이 돼도 포기하지 않는구나. 왜 이렇게 기어코 하나님을 믿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 했는데 이 꼴로 지내면서 우릴 볼 면목이 있니? 네가 정말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린 앞으로 어찌 살라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 모시길 바라지 않아. 그저 너만 잘 지내길 바랄 뿐이다. 넌 우리의 전부야. 네가 잘못되어서 죽기라도 하면 우리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겠니? 우리한테 너 말고 누가 있니? 무슨 희망이 있겠냐?” 부모의 이런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정곡을 찔러 정에 대한 목마름을 채우고 네 정과 양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부모가 이런 말을 하기 전까지는 속으로 자신의 신앙과 입장을 고수했지만 부모의 책망 한 마디로 마음 깊은 곳의 방어선이 무너지지 않겠느냐?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 했는데 좋은 직장과 촉망받던 미래를 포기하고, 윤택한 삶도 마다하면서 기어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며 스스로를 이렇게 망치고 있으니 우릴 볼 낯이 있니?” 이 말을 듣고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이 말을 듣고 자책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이 말을 듣고 부모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이 말을 듣고 그것이 사탄의 시험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겠느냐? 이 말을 듣고 정에 이끌리기는 하지만 이성적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이 말을 듣고도 “부모가 네 생명과 운명의 주인이 아니고 네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꿋꿋하게 믿을 사람이 있겠느냐? 이 말을 듣고 감정적으로 조금 연약해지더라도 자신의 본분과 의무, 피조물로서 굳게 서서 해야 할 증거를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는 하나라도 할 수 있겠느냐? 네가 만약 감정적으로 조금 괴롭거나 심지어 눈물이 나고 부모가 안쓰럽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네가 해야 할 증거를 잃지 않고, 네 본분을 이행하고,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의 간증과 책임, 본분을 잃지 않는다면 너는 굳게 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어머니가 눈물 흘리면서 너를 책망하는 것을 보고 정에 깊이 빠져 자신이 불효자이고 잘못된 선택을 했다며 후회한다면, 다시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피조물이 해야 할 증거와 피조물의 본분, 책임, 의무를 포기하고 부모 곁으로 돌아가 그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고, 다시는 부모가 고생하거나 걱정하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면 네 증거는 사라질 것이니 너는 하나님을 따를 자격이 없다. 하나님이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뭐라고 했느냐? (하나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라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크다면 너는 하나님을 따를 자격이 없다. 너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이긴 자가 아니라는 말이니 하나님은 너를 원하지 않는다. 이 시련에서 너는 드러나고 굳게 서서 증거하지 못한 것이다. 사탄의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았는데 부모의 책망 몇 마디에 굴복했으니 너는 무골충이다. 하나님을 배반했으니 너는 하나님을 따를 자격이 없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부모는 늘 말한다. “다른 건 바라지 않아. 너더러 부귀영화를 누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평생 건강하고 평안하길 바라는 거야. 행복하게 사는 걸 보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니 고문을 당할 때 너는 부모에게 죄송한 마음이 든다. ‘부모님이 많은 걸 바라시는 게 아닌데 난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렸어.’ 이런 생각이 옳으냐? 네가 그들을 저버린 것이냐? (아닙니다.) 사탄이 너를 박해한 것이 네 잘못이냐? 네가 혹독한 고문과 학대를 당하며 잔혹하게 박해받는 것이 네 잘못이냐? (아닙니다.) 사탄이 너를 박해하는 것이지 네가 스스로를 망치는 것이 아니다. 너는 바른길을 가며 진정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 네 선택, 네가 한 일은 하나님을 증거한 것이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한 것이다. 이는 모든 피조물이 선택하고 걸어가야 할 길이다. 이것은 바른길이지 스스로를 망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설령 육은 고문을 받고 비인간적인 학대를 수없이 받더라도 이는 정의로운 일을 위한 것이지 나쁜 길을 가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망치는 것도 아니다. 네 육이 고통받고, 고문을 당하여 사람의 몰골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도 부모에게 죄송한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해명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너의 선택이고, 네가 가는 길은 바른 인생길이다. 단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그들은 그저 부모의 입장에서 정이 앞서서 너를 보호하고만 싶고, 네가 육의 괴로움을 받지 않았으면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들이 너를 보호하고 싶다 한들 뭘 어쩌겠느냐? 그들이 너 대신 증거할 수 있겠느냐? 너 대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너 대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네 선택은 옳으니 그것을 견지해야지 부모의 몇 마디 말에 현혹되거나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 너는 스스로를 망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른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하는 모든 것, 네가 견지하고 있는 것은 진리를 고수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며 사탄 앞에서 하나님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단지 네 육이 잔혹한 박해로 인해 고통을 받을 뿐이다. 이는 사람이 당연히 받아야 할 고통이고, 사람이 창조주에게 바쳐야 할 것이자 치러야 할 대가이다. 네 생명은 부모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에 부모에게는 네가 가는 길을 결정할 권리도, 네가 자신의 육을 어떻게 대하는지, 네가 굳게 서서 증거하면서 어떤 대가를 치를지 등을 결정할 권리도 없다. 그들은 단지 육의 정에 이끌려, 육의 정이라는 관점에서 네가 육의 고통을 받길 원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피조물로서 육이 얼마나 고통을 받든 이는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이다. 사람은 구원받기 위해,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 수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의무와 책임이며,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바쳐야 할 것이기도 하다. 사람의 생명은 본래 하나님에게서 비롯되고 사람의 육 역시 하나님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이다. 따라서 사람이 받아야 할 고통이라면 육이 어떤 육체적 고통을 받든 부모에게 어떤 설명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라고 하는데 부모에게서 받은들 또 어쩌라는 것이냐? 비록 사람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양육되지만 사람의 모든 것이 부모가 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람이 어떤 길을 가야 하고 어떤 대가를 치를지 부모에게 강요받고 속박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또 사람이 진리 추구의 길을 가거나 창조주를 위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때 부모의 동의를 거쳐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너는 부모에게 보고할 필요가 없다. 네가 보고드려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다. 네가 고통을 받든 받지 않든 너는 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또한, 만약 네가 바른길을 걷고 있다면 네가 치르는 대가를 하나님은 열납하고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이 기억하고 인정한다면 그 대가는 치를 만한 가치가 있다. 비록 육은 피부로 고통을 느끼겠지만 결국 그 대가로 네가 굳게 서서 증거하여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되고 구원받고 하나님에게 기억된다. 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부모의 소위 기대든, 너를 향한 책망의 말 몇 마디든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이행해야 할 본분과 해야 할 증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언급할 가치도 없다. 네가 받는 고통이 너무나도 값지고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피조물로서 일생 중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사람은 부모의 말 몇 마디 때문에 연약해지고 의기소침하여 시험에 빠져서는 안 되고, 부모의 그런 말 때문에 후회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받아 부모에게 죄송스럽게 생각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마땅히 자기가 받은 고통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저를 택하셔서 제 육이 이런 대가를 치르고 사탄에게 해코지를 당하게 하신 덕분에 저는 하나님을 증거할 기회가 생겼어요.”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이 많고 많은 선민 중에 너를 택한 것은 네게 영광이니 괴로워하지 말아야 한다. 네가 만약 굳게 서서 증거하여 사탄을 부끄럽게 한다면 이는 피조물에게는 평생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네 육이 잔혹한 박해로 어떤 병이나 후유증을 얻든, 친지와 부모가 이를 보고 얼마나 상심하든 너는 그것 때문에 부끄러워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고 부모에게 미안해하지 마라. 네가 한 모든 것은 정의로운 일을 위해 치른 대가이고 선행이기 때문이다. 네 선행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네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본분을 이행하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네 행위와 대가, 선택을 판단할 자격은 오직 창조주에게만 있으며 그 외에는 아무도 판단할 자격이 없다. 부모를 포함한 그 누구도 너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만약 그들이 네 가장 친한 사람이라면 너를 이해하고 격려하고 위로해 줄 것이다. 또한, 네가 계속 견지하며 굳게 서서 증거하도록, 사탄에게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도록 지지해 줄 것이고, 너를 자랑스러워하고 너로 인해 기뻐할 것이다. 네가 굳게 서서 증거하기 위해 지금까지 견디며 사탄에게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네 발목을 잡거나 더욱이 너를 책망하지도 않고 격려해 줄 것이다. 네가 잘못했다면 그들에게 비난할 자격이 있다. 네가 잘못된 길을 가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배반한다면 그들이 너를 책망할 자격이 있다. 하지만 네가 하나님이 열납하며 기억하는 긍정적인 일을 하는데도 너를 비난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옥석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니 그들의 잘못이다. 그들은 네가 하나님을 믿고 바른길을 가며 선한 사람이 될 땐 속상해하면서도 사탄이 너를 박해할 땐 어째서 사탄을 책망하지 않느냐? 그들이 정 때문에 너를 비난하는데 네가 무슨 잘못을 하기라도 했느냐? 네가 유다가 되지 않은 것뿐이 아니냐? 너는 굳게 서서 유다가 되지 않고 사탄에게 협조하거나 타협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런 고문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이것이 뭐가 잘못이냐? 너는 잘못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너로 인해 기쁘고 너로 인해 영광스럽다. 그런데 부모는 오히려 너로 인해 부끄러워하는 것도 모자라 네 선행을 비난하니 이는 시비가 전도된 것이 아니냐? 이런 부모가 좋은 부모겠느냐? 그들은 왜 사탄을 책망하지 않고 너를 박해하는 악인이나 마귀를 책망하지 않느냐? 너는 그들에게서 아무런 위로나 격려, 지지도 얻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책망과 원망만 받는다. 반면 사탄이 아무리 악을 저질러도 그들은 정죄하지 않고 저주하지 않으며 욕이나 책망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멀쩡하던 애가 어쩌다 이 꼴이 되었나요? 그저 하나님을 믿으며 바른길을 가는 것뿐이잖아요?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한 것도 아니고, 법을 어긴 적도 없는데 왜 우리 아이를 괴롭히는 겁니까? 이런 사람은 오히려 격려해 줘야죠. 사회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바른길을 간다면 이 사회는 법도 필요 없고, 아무 범죄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책망하지 않겠느냐? 그는 어째서 너를 박해하는 사탄 마귀를 감히 책망하지 못하겠느냐? 그들은 바른길을 가는 너를 책망하면서도 악인의 악행은 묵인한다. 이런 부모는 어떠냐? 안쓰러워해야겠느냐? 효도해야겠느냐? 마음속으로 사랑해야겠느냐? 효도할 가치가 있겠느냐? (그럴 가치가 없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 그들은 옳고 그름과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정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고 무엇이 정의이고 어떤 것이 바른길을 가는 것인지,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사악한 세력인지도 모른다. 그저 정과 육을 지킬 줄만 안다. 얄팍하기 그지없는 그런 육적인 관계를 빼면 그들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는 ‘자식이 무사하고 평안하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생각뿐이다. 인생의 바른길, 정의로운 일, 그리고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바른길을 가는 너를 책망하니 어리석음이 그야말로 극에 달했다. 이런 부모는 어떠냐? 교활한 마귀 한 쌍이 아니겠느냐? 너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 교활한 마귀들아, 내가 지금까지 버티면서 온갖 구타와 고문을 받았지만 며칠간 하나님께 밤낮으로 기도했지. 하나님이 나를 보살펴 주시고 지켜 주셨기에 지금에 이를 수 있었어. 힘겹게 굳게 섰는데 몇 마디 말로 날 부정하다니. 바른길을 가는 게 잘못이야?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게 잘못이냐고. 유다가 되지 않는 게 설마 잘못이란 말이야? 교활한 마귀 같으니! 뭐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내 모든 건 분명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는데 당신들이 주었다고? 단지 하나님께서 당신들이 나를 낳아 기르도록 정하시고 당신들 손을 통해 나를 키우신 것뿐이야. 당신들이 나를 안쓰럽게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는 건 단지 감정을 충족시키려는 것뿐이지. 내가 죽으면 당신들을 죽을 때까지 부양할 사람이 없을까 봐, 남들이 비웃을까 봐 걱정하면서 나 때문에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만약 절도, 강도, 모함, 사기 등의 범죄로 감옥에 간다면 그들은 너를 위해 애쓰며 말할 것이다. “우리 아이는 착한 아이예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애 본성만큼은 나쁘지 않아요. 천성이 선한 아이죠. 세상의 사악한 흐름에 물든 것뿐이에요. 당국의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너를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네가 하나님을 믿는 길을 가고, 바른길을 가면 그들은 마음 깊이 경멸한다. 어떻게 경멸하느냐? “네가 무슨 꼴로 사는지 좀 봐라. 우릴 볼 낯이 있니?” 너는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사는 꼴이 어때서? 난 인생의 바른길을 가는 건데.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사람이지! 이런 걸 선행과 증거를 갖췄다고 하는 거야. 이게 강건함이고, 진정으로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하는 거야. 겁쟁이, 머저리, 유다가 아니라고. 무슨 꼴이냐고? 진정한 사람으로 살고 있지! 나로 인해 기뻐하기는커녕 책망이나 하다니 그게 무슨 부모야? 부모가 될 자격도 없는 당신들은 저주를 받아 마땅해!’ 네가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넌 왜 이 정도로 망가지도록 내버려두었단 말이냐?”라는 부모의 말을 들었을 때 울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정말이지 맹추 같은 사람들이네!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란 무슨 소리야! 자기 몸을 누가 주었는지도 모르면서 그따위 말로 나를 책망하다니 맹추도 이런 맹추가 없을 거야! 분명 사탄 마귀가 나를 박해하고 있는데 어떻게 사실을 왜곡해서 내 잘못이라고 할 수가 있지? 내가 법을 어기기라도 했어? 내가 도둑질을 했어, 강도질을 했어, 아니면 사람을 모함하거나 속이기를 했어? 내가 무슨 법을 어겼냐고. 난 아무 법도 어기지 않았어. 단지 바른길을 간다는 이유로 사탄이 날 이렇게 박해한 거라고. 지금까지 난 한 마디도 발설하지 않았고 유다가 되지 않았어. 나만큼 강인한 사람이 어딨어? 그런데도 나를 칭찬하고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책망이나 하고 앉았으니 당신은 마귀야!’ 이렇게 생각하면 울음이 터질 리도, 연약해질 리도 없지 않겠느냐? 그들이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들의 마귀적인 말이나 엉터리 논리에 영향받지 말고 네가 고수하고 있는 진리를 꿋꿋하게 지켜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너는 참으로 굳게 서서 증거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굳게 서서 증거하는 것이 쉽겠느냐? 우선 정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다음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만 이런 특수한 환경에서도 연약해지지 않고 굳게 서서 증거할 수 있으며, 하나님에게 열납되고 인정받을 수 있으며,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이긴 자이자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네가 이기면, 네가 부모가 아닌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으면 너에 대한 부모의 모든 기대를 내려놓을 수 있다. 그렇지 않겠느냐? 부모의 기대는 중요하지 않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굳게 서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피조물이 가져야 할 태도이자 추구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연약해지거나 길을 잃고 헤매면, 특히 바른길을 가다가 사탄의 공격에 포위당해 박해를 받거나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조롱과 버림을 당하면 네 주위의 가족과 친구 혹은 너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네가 망신스러운 일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무도 너를 이해하거나 격려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너를 지지하거나 위로하지도 않을 것이며, 더욱이 너를 붙들어 주거나 방향을 잡아 주고 실행의 길을 알려 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네 부모도 예외는 아니다. 네가 하나님을 믿으며 본분을 이행하느라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않고 혹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 그들을 호강시켜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모 역시 너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은 관점으로 네가 그들에게 망신을 주었다고, 너를 키운 보람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고, 네 덕을 보지도, 뭔가를 기대하지도 못했다고 생각할 것이며, 널 부모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부모도 너를 이해하지 못하고 너를 긍정적으로 이끌지도 못하는데 친척이나 친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네가 바른길을 갈 때 오직 하나님만이 지겨워하지 않고 너를 격려하고 붙들어 주며 위로하고 공급한다. 네가 투옥되어 고문에 시달릴 때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네게 준 믿음만이 일 분 일 초 그리고 하루하루를 버티도록 너를 지탱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혹독한 고문을 받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네게 준 믿음으로 말미암아 꿋꿋이 굳게 서서 하나님을 증거하려 하고 유다가 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여 사탄을 부끄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네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네 의지 덕분이고, 다른 한편으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그리고 인솔 덕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부모는 네게 위로와 도움이 가장 절실할 때 여전히 자기 생각뿐이다. 네가 배은망덕하고, 평생 네게 기대할 수 있는 게 없다며 키운 보람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너를 키웠다는 것을 잊지 않고 네 덕에 호강하고, 네 덕에 가문이 빛나며, 네 덕에 친척이나 친구 앞에서 득의양양하고 우쭐댈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어떤 부모도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명예롭거나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네가 하나님을 믿으며 본분 이행으로 바빠 부모에게 문안하거나 부모를 돌볼 시간이 없다고 늘 책망한다. 책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너를 ‘배은망덕한 놈’, ‘감사할 줄 모르는 놈’이라고 욕한다. 너는 이런 오명을 뒤집어쓰고 바른길을 걷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이런 일을 겪을 때 부모의 지지나 격려, 이해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항상 자신이 부모를 저버렸다고 생각되지 않겠느냐? 그렇다 보니 심지어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평생 부모에게 효도할 인연도 없고, 부모와 같이 살 인연도 없으니 효도는 다음 생에 해야겠다!’ 이런 생각은 어리석지 않으냐? (어리석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네 어리석은 생각의 근원을 해결해야 한다. 네가 바른길을 가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기로 한 것, 네가 창조주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인간 세상에서 유일한 바른길이기에 네 선택은 옳은 것이다. 부모를 포함하여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몰이해하고 실망하든, 그것이 네가 하나님을 믿는 길을 선택하거나 본분을 이행하려는 의지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에 영향을 주어서도 안 된다. 네가 가는 길이 바른길이기 때문에 너는 그것을 견지해야 한다. 부모의 기대는 더더욱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이 네가 바른길을 가는 데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네가 바른길을 가는 것은 네 인생에 가장 올바른 선택인데 부모가 지지하지 않고 너를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욕한다면 너는 더더욱 그들을 분별해야 하고, 감정적인 면에서 그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들에게 속박받아서는 안 된다. 만약 그들이 너를 지지하거나 격려하지 않고, 또 위로해 주지 않으면 너도 상관하지 마라. 그들의 지지나 격려, 위로가 있건 없건 큰 의미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기대하고, 너를 격려하고, 너에게 공급하고, 너를 인도하고 있으니 너는 외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부모의 기대가 없어도 너는 원래대로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고,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한다면 너는 여전히 선한 사람인 것이다. 부모의 기대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윤리 도덕을 상실한다는 뜻이 아니며, 더욱이 인성과 도의를 저버린다는 뜻도 아니다. 네가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 이유는 긍정적인 사물과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옳은 선택이며 가장 올바른 길이다. 너는 이를 고수하며 굳게 믿어야 한다. 어쩌면 네가 하나님을 믿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한다는 이유로 부모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부모의 축복은 더더욱 받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너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네가 하나님을 믿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길을 선택하면 하나님이 너에게 기대하고 너를 좋게 본다는 것이다.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친구나 친척을 떠나서도 여전히 잘 지낼 수 있고, 물론 부모를 떠나서도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을 떠나기만 하면 사람은 흑암에 빠질 것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인도에 비하면 부모의 기대는 그야말로 보잘것없으니 말할 가치도 없다. 부모가 감정적인 면에서 네가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삶을 살기를 기대하든 그것이 너를 바른길이나 구원받는 길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너는 네 관점을 바로잡아 마음 깊은 곳에서, 그리고 감정적인 면에서 너에 대한 부모의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 계속 이런 부담을 지지 말고 또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택했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마라. 너는 아무에게도 미안해할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네가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기를 선택한 것은 부모에게 미안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네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창조주의 구원을 받아들이기를 선택한 것으로 말미암아 부모가 자랑스러워하고, 자부심을 느끼고,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런 부모는 선한 사람이 아니니, 네가 존중할 필요도 없고 효도할 필요도 없으며, 당연히 그들을 염려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존중받을 만한 사람은 어떤 부류이냐? 바른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그 바른길이란 무엇이냐?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길이 아니겠느냐? 바른길을 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가 이런 사람이거나 이런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데 부모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담을 퍼붓는다면, 네가 연약해지고 의기소침해질 때나 길을 잃고 헤맬 때 너를 지지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기는커녕 늘 부모에게 돌아와 효도하라고, 자기들을 저버리지 말고 돈 많이 벌어서 부모를 부양하라고, 자기들이 네 덕을 보고 호강하게 해 달라고 한다면 이런 부모를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부모를 존중할 가치가 있겠느냐? 네가 효도할 가치가 있겠느냐? 네가 그들을 책임질 가치가 있겠느냐? (그럴 가치가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그들이 긍정적인 사물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한 가지 사실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증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한 가지 사실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들이 네가 바른길을 가는 것을 경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한 가지 사실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정의로운 일에 몸담는 사람을 경멸한다. 네가 하나님을 따르며 본분을 이행하기 때문에 그들이 너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이다. 이는 어떤 부모겠느냐? 비열하고 졸렬한 부모가 아니냐? 이기적인 부모가 아니냐? 사악한 부모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큰 붉은 용에게 추적당하고 수배당하고, 사방으로 도망치느라 집에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해외로 피신할 때도 있다. 주위 친척과 친구 그리고 동기들이 모두 네가 지명수배자가 되었다고 하면 부모는 이런 소문과 유언비어를 듣고 너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너를 이해하고 지지하고 동정하며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들, 너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들을 책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너를 미워한다. 불신자나 집권자들과 똑같은 논리로 너를 대하니 이런 부모는 어떠냐? 좋은 부모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너희는 아직도 그들에게 빚졌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네가 이따금 집에 전화라도 하면 그들은 지명수배자와 통화한다는 생각에 극도의 수치감을 느끼고 너를 집에도 오지 못할 정도로 모두에게 혐오받는 사람으로 치부하여 너 같은 자식을 둔 것을 평생의 망신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모를 존중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 그렇다면 너에 대한 그들의 기대는 어떤 성질이냐? 너희가 염두에 둘 만한 가치가 있느냐? (그럴 가치가 없습니다.) 부모가 네게 기대를 갖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정말 네가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도록 바른길을 가게 하는 것이겠느냐? 그들은 네가 사회의 흐름을 따라 출세해서 부모의 체면을 세워 주고 그들이 밖에서 으스댈 수 있도록 부모의 자랑거리가 되어 주길 바란다. 또 무엇이 있느냐? 네 덕에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며, 명품을 걸치고, 금과 은으로 치장하고, 크루즈를 타고 세계 여행이나 다니길 바란다. 네가 만약 출세해서 세상에서 부와 명예를 이룬다면 그들의 체면이 서고, 어디서든 네 이름을 내세울 것이다. “아무개가 내 아들, 내 딸이랍니다.” 그런데 지금은 부모가 네 얘기를 꺼내느냐? (꺼내지 않습니다.) 네가 바른길을 가는데 오히려 그들은 너를 언급하지 않는다. 부모는 네가 빈털터리라서 자기에게 망신을 준다고, 너를 언급하는 건 자기 얼굴에 먹칠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부모의 기대는 무엇을 위한 것이겠느냐? 네 덕을 보기 위해서이지 순수하게 너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덕을 보아야 기뻐한다. 네가 지금 창조주 앞에 돌아와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며 인생의 바른길을 가는데 부모는 너를 통해 아무런 이득과 혜택을 보지 못해 너를 키운 것이 헛고생이었다고, 흡사 일종의 장사처럼 본전도 못 찾았다고 생각하며 후회한다. 어떤 부모는 항상 말한다. “널 키우느니 개를 키우지. 개는 키워 주면 주인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친근하게 구는데, 널 키워 봐야 뭘 기대하겠니? 맨날 하나님을 믿으며 본분을 이행한다고 장사도 안 하고, 직장도 안 다니고, 철밥통도 마다하다가 결국 주변 이웃들에게 웃음거리나 되고 말이야. 네게서 건질 게 뭐가 있겠니? 쓸모라곤 하나도 없고 덕 볼 것도 없다.” 네가 만약 세상의 사악한 흐름을 따라 세상에서 두각을 보이려 애쓰느라 고생하거나 병이 나고 괴로워하면 부모는 아마도 너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위로해 줄 것이다. 하지만 네가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받을 희망이 생기면 그들은 기뻐하거나 축하하지 않고 오히려 너를 미워하고 욕한다. 이런 부모는 본질적으로 원수이자 앙숙이니 너와 다른 길을 가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한가족이지만 본질, 추구, 취향, 걸어가는 길,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고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서 보면 그들은 너와 한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네가 “제게는 구원받을 희망이 있어요. 전 인생의 바른길을 걷습니다.”라고 아무리 말해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를 축하하거나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수치스러워하는 것이다. 이런 부모는 감정 면에서 보면 네 가족이지만, 본성 본질 면에서 보면 가족이 아니라 원수이다. 생각해 보아라. 자녀가 집에 돌아올 때 선물이나 용돈을 가지고 오거나 부모가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면 그들은 기뻐한다.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속으로 계속 이런 말을 한다. ‘내 아들딸 기특하기도 하지. 애지중지 키운 보람이 있구나. 철이 드니까 엄마 아빠한테 효도도 할 줄 알고 부모 생각을 하긴 하는구나. 착하기도 하지.’ 네가 만약 하나님을 믿으며 본분을 이행하느라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집에 가서 그들에게 진리에 대해 교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네가 진리 추구의 길을 간다고 하면, 부모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뭐라는 거니?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지금까지 너를 키우면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만 모처럼 집에 오는데 어떻게 양말이나 과일 같은 것도 하나 없이 빈손으로 올 수 있니.” 하지만 이런 말은 할 리가 없다. “네가 얘기하는 걸 보니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 예전엔 어려서 교만했는데 이번에 와서 보니 사뭇 달라졌어. 말하는 족족 바른말만 하는 걸 보니 많이 발전했구나. 내 새끼가 이젠 장래가 밝고 희망이 보이는구나. 바른길을 가고 하나님을 따라서 구원을 받는다니 기특하기도 하지. 밖에서 고생하는데 맛있는 것 좀 해 줘야지. 닭 몇 마리 키우면서 평소엔 잡아먹기 아까워서 달걀만 먹었는데, 네가 왔으니 암탉 한 마리 잡아서 푹 고아야겠다. 네가 선택한 길이 옳다.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정말 기쁘구나! 요 몇 년간 네가 정말 보고 싶었는데 연락은 못 했지만 지금 이렇게 보니 안심이 된다. 네가 자라면서 예전보다 성숙하고 철이 들더니 옳은 말만 하고, 바른 일만 하는구나.”라고 말이다. 자식이 바른길을 가고 올바른 사상 관점을 가진 것을 보면 부모에게도 유익이 있고 식견이 생기는 것이다. 자식이 본분을 이행하며 진리를 추구한다면 부모는 지지해야 한다. 자식이 나중에 구원받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다시는 사탄의 패괴 성품의 해코지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되면 그건 너무나 좋은 일이다. 부모가 비록 연로하여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더디고 잘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우리 아이가 바른길을 가다니 정말 훌륭하고 기특한 녀석이야. 높은 관직에 앉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좋은 일이지!’라고 생각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부모가 좋은 부모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부모는 존중받을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 (그럴 가치가 있습니다.) 네가 존중할 가치가 있다. 그럼 너는 그들을 어떻게 존중하겠느냐? 마음속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하나님을 믿는 부모라면 하나님께 그들을 인도하고 지켜 달라고, 시련이나 시험 가운데 굳게 서서 증거하게 해 달라고 구하여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부모라면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서 그들의 삶이 안정되기를,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고 악행을 덜 저지르고, 죽어서 징벌을 덜 받기를 바라며, 또한 부모에게 긍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사상 관점에 대해 최선을 다해 교제해 주어라. 이것이 바로 존중하는 것이고, 또 최고의 효도이자 최고의 책임이다.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나 정신적으로는 부모를 격려하며 지지하고, 육적으로는 집에서 부모와 같이 지내는 동안 최선을 다해 집안일을 돕고 네가 깨달은 것 중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교제하는 것이다. 그들이 너무 고생하지 않고 금전적으로나 여러 측면에서 너무 따지지 않고 순리를 따르도록 좀 더 유연한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 이것이 존중이다. 그들을 선한 사람, 바른 사람으로 대하여 책임과 효도, 의무를 다하는 것을 존중이라고 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일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부모야말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으며, 그 외에는 어떤 부모도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 그들은 네가 돈을 벌거나 출세하거나 유명해져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할 뿐이다. 이런 부모는 모두 올바른 일에 힘쓰지 않는 부모이니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

부모의 기대 내려놓기에 관한 내용을 이제 다 이해했으니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또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 부모의 삶이나 부모와 관련하여 네 마음에 걸리는 것, 다시 말해 감정적인 면에서 포기하거나 내려놓기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고, 부모가 네 생명과 운명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주제에 대한 교제를 거의 마무리하지 않았느냐? 이해가 되었느냐? (네, 이해했습니다.)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라는 것은 부모가 너를 여태껏 키워 주었으니 부모에게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부모에게 보답하지 못하고 보답할 기회나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너는 늘 괴롭고 죄책감을 느끼며, 심지어 누가 부모 곁에서 그들을 돌보거나 효도하는 모습을 보면 괴로워한다. 하나님이 네 부모로 하여금 너를 성인이 되기까지 키우도록 정한 것은 네가 평생 부모에게 보답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네게는 평생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고 가야 할 길이 있다. 네게는 너의 삶이 있으니 평생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에 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서는 안 된다. 이는 단지 네 인생길에서 네 삶에 딸려 오는 일, 인성과 감정의 관계에서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하지만 너와 부모 간 어떤 인연이 있는지, 네 남은 인생에서 부모와 함께 살 것인지, 아니면 함께할 인연이 없어 떨어져서 살 것인지는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달려 있다. 만약 하나님이 너와 부모를 평생 멀리 떨어져 있게 배치하고 안배하여 늘 함께 생활할 수가 없다면 너는 그 책임을 그저 마음에 품게 될 것이다. 만약 네 인생에서 하나님이 너와 부모를 가까이 살게 안배해서 부모의 곁을 지키게 한다면 부모에게 책임을 다하고 효도하는 것도 네가 해야 할 일이기에 그다지 지탄받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네가 부모와 떨어져 있어서 효도할 기회가 없고 여건이 안 된다면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네가 효도하지 못하는 것이 부모를 볼 면목이 없을 일도 아니다. 단지 여건이 따라 주지 못할 뿐이다. 자녀로서 “부모가 너의 채권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깨달아야 한다. 너는 평생에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런 일은 창조주에게서 받은,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이다.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며 갚는 것은 네 평생의 사명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즉, 반드시 부모에게 효도하고 보답하며 부모를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여건이 되면 효도하고, 책임을 다하되 여건이 안 되면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네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큰 잘못은 아니다. 단지 양심과 인간의 도의 및 관념에 조금 위배될 뿐 최소한 진리에 위배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그것을 정죄하지도 않는다. 네가 진리를 깨닫는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런 측면의 진리를 깨달으면 너희 마음이 편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정죄하지 않으시겠지만 제 양심이 찔리는걸요. 마음이 편치 않아요.” 그렇다면 너는 분량이 너무 작은 탓에 아직 이 일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사람의 운명과 하나님의 주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며, 네게는 항상 사람의 뜻과 감정만 있을 뿐이다. 사람의 뜻과 감정이 주인 노릇 하면서 너를 차지하고 네 생명이 되어 버린 것이다. 네가 사람의 뜻과 감정을 선택하면 진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도, 진리에 순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네가 사람의 뜻과 감정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배반하는 것이다. 분명 여건과 환경이 따라 주지 않는데도 너는 늘 ‘내가 부모님께 빚졌고 효도하지 못했어. 부모님을 이렇게 오래 찾아뵙지 못했으니 날 키운 보람이 없으실 거야.’라고 생각한다. 마음속으로 항상 이것들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이는 한 가지 사실을 입증한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네가 도리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고 네 행동의 원칙으로 삼지 않는다면 적어도 부모를 대하는 일에서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일에서 네가 진리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네 정과 양심만 좇아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려 하기 때문이다. 네 이런 선택을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고, 너 스스로의 선택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손해를 보는 쪽, 특히 생명의 측면에서 손해를 보는 쪽은 너 자신이다. 너는 항상 이 일에 얽매여 부모를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하나님은 너를 보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그 소원이 그리도 대단하니 아예 네게 환경을 마련해 주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할 것이다. 너는 진리나 그 모든 것보다 부모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네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네 양심과 정을 좇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을 버리고 진리와 구원받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하니 그럼 좋다. 이는 네가 선택한 것이니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고 네게 환경을 마련해 줄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너를 제명하고 포기한다. 네가 집에 돌아가 부모에게 효도하기를 선택하고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네게 준 본분에서 도망치는 것이고 본분을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과 기대, 하나님이 준 본분을 저버리는 것이며,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다. 네가 집에 돌아가 부모를 만나고 네 양심을 따르고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도 상관없다. 돌아가는 것을 택해도 괜찮다. 도저히 부모를 내려놓지 못하겠다면 자발적으로 거수 신청하여 이렇게 말해도 된다. “부모님이 자꾸 생각나서 안 되겠어요. 날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고 감정적인 목마름도 채워지지 않아 마음이 아파요. 부모님이 보고 싶고 염려됩니다. 부모님께 돌아가 효도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기회가 없을까 봐, 여한이 남을까 봐 걱정돼요.” 그렇다면 돌아가도 좋다. 부모가 네 하늘이자 땅이고, 네 목숨보다 중요하며 네 전부라면 내려놓지 않는 것을 택해도 좋다. 아무도 네게 강요하지 않으니 그들에게 돌아가 효도하고 돌보면서 그들이 허리를 펴고 살게 해서 은혜에 보답해도 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아라. 오늘 네가 그런 선택을 한다면 결국 너는 구원받을 기회를 잃을 것이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네 몫이 될 것이며, 아무도 너 대신 그런 결과를 감당해 줄 수 없다. 너 홀로 감당해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네가 본분 이행의 기회와 구원받을 기회를 포기해서라도 기꺼이 부모를 너의 채권자로 생각하여 그 빚을 갚겠다고 한다면 이는 네 선택이다. 아무도 네게 강요하지 않는다. 만약 교회에 “전 집을 나와 너무 고생했어요. 부모님이 너무 그립습니다. 마음속에서 그들을 내려놓을 수 없어요. 부모님이 자꾸 꿈에 나오고 머릿속에, 마음속에 온통 부모님의 잔상뿐이에요. 부모님이 제게 해 준 모든 것에 갈수록 죄책감이 들어요. 이제 부모님 연세도 점점 많아지는데 자녀를 키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기쁨을 드려서 보답해야겠어요. 제가 부모님을 모시면서 위로해 드리고 여생을 보내게 해 드리는 거죠. 제가 구원받을 기회를 포기하더라도 부모님께 돌아가 효도를 해야겠어요.”라고 요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희는 그냥 이렇게 신청하면 된다. “보고합니다. 저는 부모님께 돌아가 효도하고 싶어요. 본분을 이행하고 싶지 않습니다.” 교회는 승인하고, 아무도 그를 설득하지 말며 그에게 교제해 주지도 마라. 한 마디라도 더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 사람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진리를 분명하게 교제해도 된다. 네가 만약 진리를 분명하게 교제해 주지 않아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게 한다면 그것은 너의 책임이다. 하지만 그가 도리적으로 전부 깨달았다면 다른 사람이 설득할 필요는 없다. “전 뭐든 다 깨달았으니 제게 말할 필요 없어요.”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말이다. 잘된 일이다. 그에게 괜히 말할 필요가 없으니 신경 쓸 일을 덜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바로 돌려보내라. 첫째, 막지 마라. 둘째, 지지하라. 셋째, 위로하고 격려하며 이렇게 말해라. “돌아가서 부모님께 잘 효도하세요. 부모님을 노하게 하지 마시고 언짢게 하지도 마세요. 부모님께 효도하고 보답하려면 효자가 되어야겠죠. 단, 나중에 구원을 받지 못해도 후회는 하지 마세요. 그럼 조심히 돌아가시고 모든 것이 잘되길 빕니다!” 어떠냐? (좋습니다.) 돌아가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는 것은 괜찮다. 마음에 담아 두지 마라.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자원하는 것이니 아무도 네게 강요하지 않는다. 네가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정죄하지 않는다. 네가 본분을 이행한다고 해서 무조건 구원받겠느냐?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이는 본분 이행을 대하는 태도 문제일 뿐이다. 그럼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멸망하느냐?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네가 구원받을 희망은 사라질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좋은 일인가요, 나쁜 일인가요?” 그것은 알 수 없다. 네가 효도하고 싶으면 효도하여라. 우리는 평가하지 않는다. 그것을 평가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이는 인성과 감정에 관한 일이고, 어떤 생존 방식을 택하느냐에 관한 문제이지 진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집에 돌아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라. 하나님 집에서는 강요하지 않고 간섭하지도 않는다. 교회 리더나 주변 사람은 그들을 막거나 설득하지 말고 그들에게 진리를 교제해 주지 마라. 집에 가고 싶으면 돌아가거라. 모두가 너를 환송할 것이며, 만두를 빚어 먹으며 편안한 여정을 빌어 줄 것이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가장 큰 기대는 한편으로는 자녀가 잘살기를 바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늙었을 때 자녀가 곁을 지켜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가 아프거나 삶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자녀가 근심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부담을 덜어 주는 것이다. 또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 자녀가 그들의 곁을 지키면서 마지막으로 자녀의 얼굴을 눈에 담게 해 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이 두 가지를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부모가 아프거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네가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그 일은 그렇게 흐지부지될 수도 있겠지만 소식을 듣는다면 일반적으로 견디기 어려워한다. 특히 부모가 큰 병이나 중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더더욱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마음속에 부모의 건강이나 생활, 직업은 아직 10년, 20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부모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활에 별일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여전히 건강하고 젊고 건장한 모습으로 말이다. 네 생각에 그들은 아직 너를 필요로 하지 않은 시기라서 마음속으로 그리 큰 염려는 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가 이미 노년기에 접어들어 쇠약하니 그들을 돌보고 모실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네가 외지에 있다면 괴롭고 영향을 받을 것이다. 심지어는 본분을 포기하고 부모에게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에 치우친 사람은 비이성적인 선택을 하며 이런 말도 할 것이다. “부모님이 10년 더 살 수만 있다면 내 수명이 10년 줄어도 좋아.” 또 어떤 사람은 부모를 위해 전심으로 복을 빌고 그들에게 건강식품, 영양제를 사 준다. 부모의 병세가 중하다는 말을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정에 빠져 당장 부모에게 달려가려 한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의 병을 내가 대신 걸릴 수만 있다면.”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어떤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지 생각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탁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연약해져 시험에 빠지기 쉽다. 너희는 부모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면 눈물을 짜지 않겠느냐? 특히 병원에서 이미 통지서를 발부했다는 가족 편지를 받게 된다면 말이다. 통지서를 발부했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이 말을 해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며칠 못 산다는 뜻이다. 그럼 너는 생각한다. ‘부모님은 이제 겨우 50대인데 말도 안 돼. 무슨 병에 걸렸다는 거야?’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너는 생각한다. ‘어쩌다 암에 걸리셨지? 최근에 내가 곁에 없어서 그런 건가? 나를 그리워하시다가 생활고까지 겹쳐서 병에 걸리셨나?’ 너는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로 돌린다. ‘부모님 형편이 어려우신데 내가 짐을 덜어 드리지 못했어. 부모님은 나를 보고 싶어 하시고 걱정하시는데 내가 부모님 곁을 지키지 못했으니 너무 죄송해. 온종일 자식 생각에 걱정만 안겨 드렸으니! 이 나이 먹도록 날 키우시면 뭐 해? 걱정만 잔뜩 끼쳤는걸!’ 생각하면 할수록 부모에게 미안하고 빚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이렇게도 생각한다. ‘아냐, 나는 하나님을 믿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고 있어. 그 누구에게도 미안하지 않아.’ 하지만 또다시 생각한다. ‘부모님 연세가 이렇게나 많은데 곁에서 돌볼 자식이 없으면 날 키운 게 무슨 소용이야?’ 이래저래 생각해 보다가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부모와의 감정 굴레 속으로 깊이 빠져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내려놓기 쉽겠느냐? 너는 “부모님은 절 낳아 키우시면서 제게 어떤 부귀영화를 바라지도, 그 어떤 무리한 요구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저 부모님이 병들어 제가 필요할 때 곁에서 돌보면서 고통을 거들어 주기만 바라셨는데 그마저도 해 드리지 못했어요!”라며 부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한 그날부터 울기 시작해서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운다. 너희가 이런 일을 당하면 괴롭지 않겠느냐?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겠느냐? (그럴 것입니다.) 이럴 때 네 의지와 바람이 흔들리지 않겠느냐? 자초지종이 어찌 되었든 모든 것을 제쳐 두고 부모에게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지 않겠느냐? 마음 깊이 자신을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부모가 너를 키운 보람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부모를 볼 면목이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지 않겠느냐? 너를 키워 준 부모의 은혜와 네게 잘해 준 부모가 계속 생각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본분을 포기하지 않겠느냐?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친구나 형제자매를 통해 부모의 근황을 알아보고 싶지 않겠느냐? 이런 모습은 모든 사람에게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럼 이 일을 해결하기 쉽겠느냐? 이 일을 어떻게 인식해야겠느냐? 부모가 병들고 큰 어려움에 직면한 이 일을 너는 어떻게 바라보느냐? 꿰뚫어 본다면 내려놓을 것이고,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너는 부모가 겪고 직면한 모든 것이 너와 관계가 있으니 너도 함께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책임을 네게로 돌린다. 항상 너와 결부시키고 자신을 개입시키려 하니 이런 생각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으냐? 이런 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겠느냐? 어떤 모습이 정상이겠느냐? 또 어떤 모습이 비정상이고 비이성적이며 진리에 부합하지 않겠느냐? 일단 정상적인 모습부터 살펴보자. 사람은 모두 부모에게서 태어난다. 사람은 육에 속하기에 정을 가지고 있다. 정은 인성의 한 부분으로, 아무도 이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두가 가지고 있다. 작은 짐승들도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겠느냐! 단지 심한 사람이 있고 약한 사람이 있을 뿐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이라면 다 가지고 있다. 부모가 병에 걸렸다거나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거나 고통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들으면 감정적으로든, 인성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사람은 괴로워할 것이다. 괴롭지 않을 사람은 없다. 괴로워하는 것은 정상이다. 이는 인간의 본능이며 인성과 정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이 표출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부모가 중병에 걸리거나 큰 어려움에 직면해서 사람이 괴로워하고 울며 억압을 느끼고 해결책을 고민해서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정상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런 영향으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슴이 답답하여 온종일 울적해하는데 이는 정서적으로 표출되는 모습이며 이 역시 정상이다. 사람은 정상적인 것을 비난하면 안 된다. 너는 이를 피해서도 안 되고 더욱이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받아서도 안 된다. 네게서 이런 모습이 보인다는 것은 너와 부모 간의 정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네가 양심과 지각이 있는 사람이며 평범한 정상인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네가 이런 정을 보이고 이런 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누구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이성과 양심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비정상적인 모습은 어떤 것이겠느냐? 비정상은 이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사람은 충동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모에게 돌아가려 한다. 모든 책임을 자신이 통째로 짊어지려 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이상과 바람, 의지,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것까지 포기하려 하니 이는 비정상적이고 이성을 벗어나는 것이며 너무 충동적인 것이다! 사람이 길을 선택할 때 바르고 옳은 길을 충동적으로 선택할 수는 없다. 네가 본분 이행의 길을 선택하고, 피조물의 본분 이행을 택하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어떤 일로도 대신할 수 없으며 충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게다가 이것은 바른길이니 주위 환경이나 사람과 일, 사물 때문에 네가 선택한 인생의 바른길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네가 가져야 할 이성이다. 부모든, 아니면 그 어떤 큰 변화든 피조물의 본분 이행이라는 네 가장 중요한 일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이것이 하나의 측면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부모가 어떻게 병에 걸렸는지, 언제 걸렸는지, 그 병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등은 네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냐?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가 효도하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제가 돈을 잘 벌고 열심히 일해서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면 부모님은 진작에 치료받을 수 있었을 테고 병세도 이렇게까지 나빠지지 않았을 거예요. 제 불효의 소치입니다.” 이런 생각이 맞느냐? (틀립니다.) 돈만 있으면 건강을 살 수 있고 병이 생기지 않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세상에 부자들도 병에 걸리지 않더냐? 한 사람이 병에 걸릴 것을 감지하면서부터 실제로 병이 들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모두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 사람에 의해 결정되거나 가진 돈의 유무나 환경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모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니 부모가 중병에 걸리거나 큰 어려움에 봉착한 일을 지나치게 분석하고 연구할 필요는 없다. 네 힘을 들여서는 더더욱 안 된다. 부질없는 짓이다.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생로병사나 크고 작은 일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네가 성인이라면 네 생각이 성숙했을 테니 이 일을 냉정하고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부모님이 병에 걸리면 날 생각하느라 그런 거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말이나 돼? 생각이야 했겠지. 자기 자식인데 어떻게 생각을 안 할 수가 있겠어? 나도 부모님을 생각하는데 어째서 나는 병에 걸리지 않는 거지?’ 병에 걸리는 사람은 모두 자식이 보고 싶어서 걸리는 것이겠느냐? 그런 게 아니다. 그럼 부모가 큰일을 당하는 것은 어찌 된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에 그 일을 배치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하나님의 손으로 배치한 것이니 객관적 원인이나 이유를 들이댈 수 없다. 그저 부모가 그 나이가 되면 그 일이 일어나고 그 병에 걸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네가 곁에 있다고 피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그들의 운명에 병에 걸리는 일을 안배하지 않았으면 네가 그들 곁에 없어도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의 인생에 그런 큰일이 일어나도록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네가 그들 곁에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들은 여전히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보아라. 온 식구가 해마다 같이 있지 않더냐? 부모에게 큰 어려움이 닥치면 가족과 자녀가 모두 부모 곁에 있지 않더냐? 부모가 병에 걸리거나 병세가 악화되는 것이 자녀가 부모를 떠나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겠느냐? 그런 게 아니라 그럴 운명이었던 것이다. 단지 자녀로서 부모와의 혈연관계 때문에 남이 들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네가 들으면 괴로운 것일 뿐이다. 이는 정상이다. 하지만 부모가 큰 어려움에 처했다고 해서 네가 분석하고 연구하며 어떻게 벗어나고 해결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 부모도 성인이고 사회에서 이런 일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만약 그들이 그 일에서 벗어나게끔 환경을 안배한다면 그 일은 조만간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만약 그것이 그들이 겪어야 할 인생의 고비 중 하나라면 얼마 동안 겪어야 할지는 하나님이 정하는 것이다. 그들이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것이니 피해 갈 수 없다. 네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그 일의 근원과 인과관계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발상이며 부질없고 쓸데없는 짓이다.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동기나 친구에게 연락해 부모에게 병원과 최고의 의사를 소개시키고 가장 좋은 병실을 확보하기 위해 분석하고 연구하며 고민하느라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다. 네게 정말 그럴 여력이 있다면 지금 이행해야 할 본분이나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부모에겐 부모의 운명이 있어 때가 되면 죽으리니 아무도 피할 수 없다. 부모가 네 운명의 주인이 아닌 것처럼 너 역시 부모 운명의 주인은 아니다. 그들이 만약 그럴 운명이라면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네가 마음 졸이고 방법을 강구한들 별수 있겠느냐? 그래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거두어 네가 편안하게 본분을 이행하게 하겠다면 네가 관여할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과 협상이라도 하겠느냐?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머리를 쥐어짜서 연구하고 분석하며 책임을 자기에게 돌리면서 부모를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이 가져야 할 생각과 행동이겠느냐? 이는 하나님과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이성적이지 못하고 현명하지 못한 모습이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부모님이 병에 걸리거나 큰 어려움에 처하신 걸 분석하거나 연구해 봤자 소용없으니 그러지 말고 진리 원칙에 따라 대해야 한다는 건 저도 알죠. 그런데 분석하고 연구하는 걸 자제하지 못하겠는걸요.” 그럼 네가 자제할 필요가 없도록 자제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보자. 어떻게 하면 자제할 필요가 없겠느냐? 사람이 살면서 건강하면 50, 60대 때부터 노인병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근육과 뼈가 약해지고, 기력이 저하되며, 잠도 잘 못 자고, 입맛도 없어지며, 일이든 독서든 매사가 힘에 부친다. 그리고 고혈압, 당뇨병, 심장병, 심뇌혈관 등 온갖 질병에 걸린다. 비교적 건강한 사람은 노인병 증상이 나타나도 할 일은 하면서 정상적인 일과 생활에 지장을 받지는 않는다. 이는 건강한 편이다. 반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정상적인 일과 생활을 하는 데 지장이 있어 수시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는다. 감기에 걸리거나 두통이 있는 사람도 있고, 장염에 걸려 배탈이 나는 사람도 있는데 배탈이 나면 이틀은 앓아눕는다. 어떤 사람은 혈압이 높아 어지러워서 걷지도 못하고 차도 못 타니 멀리 나갈 수가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요실금 때문에 외출하기도 여의치 않아 친척이나 친구들과 여행도 못 간다. 그 밖에 음식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 불면증으로 시끄러운 곳은 피하고 잠자리가 바뀌면 잠들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것은 생활과 일에 심각한 지장을 준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3~4시간 이상 업무를 지속하지 못한다. 더 심한 경우 50, 60대에 암이나 당뇨병, 류머티스성 심장병,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등의 난치병에 걸리기도 한다. 이런 병이 음식에서 기인하든, 환경이나 공기, 수질의 오염에서 기인하든 신체의 법칙에 따르면 여성은 45세 이후, 남성은 50세 이후 몸이 망가져 간다. 매일 여기가 불편하다, 저기가 아프다 하다가 병원에서 말기 암 판정을 받고 결국 의사로부터 “돌아가세요. 이미 늦었습니다.”라는 말을 듣는다. 이런 육의 병은 누구에게나 나타난다. 오늘은 저들이지만 내일은 너희나 우리가 될 수 있다. 누구나 나이에 따라 순서대로 늙어가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는다. 이것이 바로 생로병사의 법칙이다. 단지 부모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면 너와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마음이 쓰이는 사람, 너를 키워 준 사람이 부모다 보니 정이라는 문턱을 넘지 못하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남의 부모야 죽든 말든 별생각 없는데 우리 부모님은 아프시면 안 돼. 부모님이 아프시면 나도 괴롭고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단 말야. 정 때문에 마음에 걸려!’ 그들이 네 부모라서 늙으면 안 되고 병들어도 안 되며 죽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게 말이 되느냐? 말이 안 된다. 이는 진리가 아니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누구든 부모가 쇠약해지고 병드는 것을 겪기 마련이다. 심지어 중풍이 들어 침대에 드러눕는 사람도 있고, 식물인간이 된 사람도 있다. 그리고 고혈압, 반신불수, 뇌출혈에 걸리고 심지어 중병에 걸려 죽는 사람도 있다. 누구나 부모가 쇠약해지고 병들어 죽는 과정을 직접 겪고 보고 듣는다. 단지 그 소식을 부모가 50대일 때 일찍 듣는 사람이 있고, 부모가 60대일 때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80, 90, 100세를 넘기고서야 듣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언제 듣게 되든 자녀라면 그 사실을 언젠가는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네가 성인이라면 생각이 성숙했을 테니 인간의 생로병사를 충동적으로 대하지 말고 올바른 태도로 대해야 한다. 부모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나 부모가 병원으로부터 위독하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너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생로병사는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인데 너는 뭘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냐? 이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인간의 생사 법칙이거늘 왜 이를 어기려 하느냐? 어째서 받아들이지 않느냐? 의도가 무엇이냐? 네 부모가 죽지 않고, 하나님이 정한 생로병사의 법칙대로 살지 않으며, 병에 걸리지도 죽지도 않기를 바란다면 무엇이 되겠느냐? 불사신이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이 사실을 너는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 부모가 쇠약해졌다거나 병이 들었다거나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누구나 쇠약해지고 죽기 마련이다. 네 부모가 정상적인 사람인데 어째서 이 과정을 겪으면 안 된다는 것이냐? 부모는 이 과정을 겪어야 하며 너 역시 이를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이 문제가 해결되었느냐? 이 일을 이성적으로 대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나중에 부모가 중병에 걸리거나 큰 어려움에 처할 때 너는 어떻게 대처해야겠느냐? 방관해서도 안 된다. 남들이 “냉혈한 같으니, 어쩜 이렇게 냉정해?”라고 할 것이다. 네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반응을 보여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여라. ‘부모님은 정말 힘든 인생을 사셨어. 일찍부터 이런 병에 걸려서 호강은 누리지도 못하고 말야.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도 않으셔서 평생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바른길도 가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은 채 허송세월만 했어. 소나 말 같은 짐승이랑 다를 게 없는 거지. 이제 중병에 걸렸으니 자구책을 찾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좀 덜어 주셨으면 좋겠어.’ 속으로 부모를 위해 기도하면 충분하다. 사람이 뭘 할 수 있겠느냐? 네가 부모 곁에 있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네가 그들 곁에 있다고 한들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자기 부모가 젊다가 쇠약해지고, 쇠약해졌다가 여러 질병에 걸리고, 병에 걸렸다가 치료가 안 돼 사망 선고를 받고 영안실로 향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적지 않을 것이다. 자녀들이 부모 곁을 지켰다 한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그저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직 보지 않았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낫다. 본다고 네게 좋을 것이 없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문제에서 한편으로는 인간의 생로병사는 하나님이 정한 법칙임을 꿰뚫어 보아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이행해야 할 책임과 사람의 운명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비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충동적이고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마라. 왜 그러지 말아야겠느냐? 그래 봤자 소용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너의 어리석음을 드러낼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네가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싫어하고 혐오한다는 점이다. 네가 이런 진리를 도리적으로 모두 이해하고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고집을 부리며 목을 곧게 하여 인위적으로 일에 임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싫어하고 혐오할 것이다. 네 어떤 점을 혐오하겠느냐? 네 완고함과 패역을 혐오한다. 너는 자기에게 인간미가 넘친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은 네가 완고하다고 할 것이다. 너는 완고하고 어리석으며 강퍅하여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네게 그 안의 본질과 근원, 구체적인 실행 원칙을 분명히 알려 주었는데 네가 모든 일을 정에 치우쳐 처리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싫어할 것이다. 부모의 병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지 않는다면, 부모가 중병에 걸릴 운명이면 결국 걸릴 것이며, 죽을 운명이면 죽을 것이다. 이 사실은 아무도 바꿀 수 없다. 네가 만약 바꾸려 한다면 이는 네 손으로, 네 방식대로 하나님의 주재를 바꾸려 하는 최악의 거역이며 하나님에게 반항하고 있는 것임을 입증할 뿐이다. 네가 하나님에게 반항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부모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냉정을 찾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울고 생각하며 기도하거나 주위 형제자매에게 그리움의 마음을 표현하면 된다.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말고 어리석은 짓은 더더욱 하지 마라.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연유로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오랜 세월 본분을 이행한 걸 봐서 부모의 병을 거두어 달라고, 몇 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또는 네가 몇 년 덜 살더라도 그만큼 부모의 수명을 늘려 달라고 기도하지 마라. 하나님은 네 이런 기도를 듣지 않고 네 그런 생각과 기도도 싫어하니 그런 짓은 하지 마라.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 분노하게 하지도 마라. 하나님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운명에 왈가왈부하면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바꾸려 하고 하나님이 정해 놓은 사실과 사람 운명의 궤도를 바꾸려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이는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짓이다.

부모의 질병을 대할 때 자녀가 지녀야 할 태도와 생각, 인식에 대한 교제를 마쳤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모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 또한 올바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몇 년간 부모와 떨어져 있어서 부모 곁에서 함께 살지 않다 보니 부모가 돌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다소 충격적이고 갑작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오랫동안 부모 곁에서 함께 살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과 관념적으로 늘 착각하는 한 가지가 있다. 어떤 착각이겠느냐? 네가 부모를 떠날 때 부모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오래 떨어져 있어도 네 머릿속에 부모의 나이, 건강 상태, 생활 형편 등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머물러 있으면 낭패인 것은 부모가 불로장생하며 장수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부모에 대한 이미지가 네 마음속에 들어서면, 그들의 생활과 언행이 네 마음과 기억 속에 잔상을 남기고 각인되면 너는 부모가 영원히 변치 않고 그 모습으로 남아 있을 거라고, 늙지도, 죽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죽지 않을 것’이란 말은 무슨 뜻이겠느냐? 한편으로는 그들의 육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이미지와 너에 대한 그들의 정 등 모든 것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이런 착각은 네게 엄청난 문제를 안길 것이다. 그러니 부모의 나이대를 불문하고 제명에 죽든, 병이나 사고로 죽든 너는 충격을 받을 것이고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네 머릿속에 부모는 아직 살아 있는데 갑자기 사라지니 ‘어째서 사라지셨지? 살아 있던 사람이 어떻게 먼지가 될 수 있는 거야? 내 마음속에서는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신 게 느껴져. 어머니는 부엌에서 밥하느라 바쁘시고 아버지는 매일 밖에서 일하시다 밤늦게 돌아오시는데 말야.’라고 생각한다. 이런 삶의 장면들이 네 머릿속에 인상을 남긴 것이다. 그래서 정 때문에 네 의식 속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즉, 부모가 영원히 네 마음속에 살아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부모가 죽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고, 부모가 어떤 식으로 세상을 떠나든 엄청난 충격을 받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이 사실이 잊히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겠느냐? 부모가 병에 걸린 것도 아주 뜻밖인데 부모가 세상을 떠난다면 더 뜻밖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일로 생긴 뜻밖의 충격이 네 본분 이행과 걸어가는 길에 타격이나 지장을 주고 영향을 미치는 것을 사전에 해결할 수 있겠느냐? 먼저 죽음이 대체 무엇인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것은 인간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육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생명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세계에서 제명되어 사라지면 다른 세계에서 또 다른 형태로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생명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너와 그의 관계가 제거되고 사라지며 종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또 다른 형태로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되는데, 그 다른 세계에서 어떤 삶을 사는지, 다시 인간 세상으로 올 수 있는지, 너와 만날 수 있는지, 너와 어떤 육적인 관계나 감정적인 갈등이 생길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은 하나님이 정하는 것이니 너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결론적으로 그가 세상을 떠나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의 사명이 끝났고 매듭지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의 평생의 사명이 끝나면 너와 그의 관계도 그렇게 끝나게 된다. 그가 후에 다시 태어나는지, 아니면 다른 세계에서 처벌이나 규제, 어떤 처분이나 안배를 받을지는 너와 관계가 있겠느냐? 네가 결정할 수 있겠느냐? 너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네가 결정할 수도 없으며, 그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너와 그의 관계는 그렇게 끝나는 것이다. 즉, 그와 함께 지냈던 10년, 20년 혹은 30, 40년의 인연이 그렇게 끝났고, 그 후에는 그는 그, 너는 너, 너희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없다는 말이다. 설사 너희가 모두 하나님을 믿더라도 그는 그대로 본분을 이행하고 너는 너대로 본분을 이행하며 서로 다른 공간과 환경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니 너희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단지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한 사명을 그가 일찍 완수했을 뿐이다. 그럼 너에 대한 그의 책임은 어떻게 되느냐? 네가 그에게서 독립한 그날부터 책임은 이미 끝났으니 너는 그와 관련이 없어진 것이다. 지금 그의 죽음으로 인해 단지 감정적인 면에서 상실감이 생기고 그리운 가족이 한 명 줄어 다시는 볼 수도, 그의 소식을 들을 수도 없게 된 것일 뿐, 그의 앞날과 미래는 너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와는 어떤 혈연관계나 동질감을 가질 수 있는 관계도 아닌 것이다. 사실이 바로 이렇다. 부모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 네가 듣는, 그들에 관한 마지막 소식이자 네가 보고 듣는, 그들이 인생에서 경험하는 생로병사의 마지막 관문이다. 그뿐이다. 그들의 죽음이 네 무언가를 가져가지는 않을 것이고 네게 무언가를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냥 죽는 것이고, 사람으로서의 이번 여정을 마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이 사고사인지, 자연사인지 아니면 병사인지 등 이런 것을 상관할 필요가 없다. 결국,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가 아니라면 어떤 사람이나 세력도 그들의 생명을 앗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오직 그들의 육적 생명의 종료를 의미할 뿐이다. 네가 만약 부모를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며 또는 정 때문에 부모에게 죄스럽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럴 필요도 없다. 사람은 죽었으니 네가 아무리 생각해 봤자 부질없는 짓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네가 만약 ‘오랜 세월 부모님은 내가 보고 싶지 않으셨을까? 이렇게 오랫동안 부모님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줄곧 부모님 곁에서 며칠이라도 모시고 싶었는데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몰랐어. 너무 괴롭고 죄스러워.’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 이는 너와 무관한 일이다. 왜 관계가 없겠느냐? 네가 부모에게 효도하든, 부모와 함께하든 그것은 하나님이 네게 준 의무나 임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로 인해 얼마나 복을 누리든, 얼마나 고생하든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너와 추호도 관련이 없다. 네가 곁에서 함께한다고 해서 그들의 수명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며, 네가 부모와 떨어져 있어서 늘 곁을 지켜 주지 못한다고 해서 수명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수명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으로, 너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니 네가 살아 있는 동안 부모의 사망 소식을 들으면 죄책감을 갖지 말고 올바르게 대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부모의 병세가 위중할 때 눈물을 많이 흘렸다면 그들이 눈을 감을 때는 기뻐해야 한다. 마침내 해방되어 부모를 보냈으니 울 필요는 없다. 자식으로서의 책임은 이미 다했다. 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그들 때문에 가슴 아파했으며, 그들로 인해 울기도 많이 울었다. 물론 부모의 병을 치료해서 고통을 최대한 덜어 주고자 온갖 방법을 찾아보기도 했다.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일은 이미 했으니 그들이 세상을 떠날 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고된 인생 사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자식으로서 편히 가시기만 바랄게요. 그간 살아오시면서 하나님께 많은 죄를 지었다면 앞으로 가게 될 세상에서 징벌받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징벌을 다 받고 나서 하나님께서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날 기회를 주신다면 잘 처신하시고 바른길을 가셨으면 좋겠어요. 다시는 하나님께 죄짓지 마시고 그다음 생에는 징벌받지 않게 노력하세요.” 이게 전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다. 부모에게든, 다른 어떤 가족에게든 이것밖에 할 수 없다. 물론 부모가 결국 세상을 떠날 때 네가 그들 곁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했다고 해서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죽음은 사실 고독하기 때문이다. 설령 자식이 곁을 지킨다고 해도 사자가 그를 찾아오는 것은 자기에게만 보인다. 그가 떠날 때 그와 함께할 사람은 없다. 자식도, 아내도 함께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떠날 때는 고독하다. 모든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이런 장면과 과정, 그리고 이런 환경에 놓이게 된다. 그러니 네가 부모의 곁을 지켜서 그가 너를 본다 하더라도 소용없다. 부모가 떠나려는 순간에는 네 이름을 부르고 싶어도 소리가 나오지 않아 네게 들리지 않고, 그가 손을 뻗어 너를 잡아당기려 해도 힘이 없으니 네가 느끼지 못한다. 그는 고독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홀로 왔기 때문에 마지막에도 반드시 홀로 떠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이 사실을 통해 사람은 더 분명히 알게 된다. 사람의 생명과 운명, 생로병사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으며, 모든 사람의 생명은 독립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비록 누구나 부모와 형제나 자매가 있고 가족이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모든 사람의 생명은 무리를 이루고 있지 않고 독립되어 있다. 모든 생명은 짝을 이루고 있지 않다. 각 사람의 생명은 창조된 인류의 관점에서 보면 독립적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생명은 고독하지 않다. 하나님이 동행하고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단지 인간 세상에 있을 때 네가 부모에게서 태어나다 보니 부모를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생각할 뿐이다. 사실 네 부모가 떠날 때 너는 부모가 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부모의 생명이 끝날 때 너는 여전히 살아 있다. 부모의 생명이 끝났다고 해서 네 생명을 가져가지 못하며, 네 생명에 영향을 미치지도 못한다. 이렇게 오랫동안 네가 부모 곁에 없었는데도 너는 여전히 잘 살고 있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보살핌과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의 주재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너는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부모의 동행, 보호, 보살핌, 양육이 없더라도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청년, 중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인도 속에서 네 삶이 분명해지고 네 앞날의 방향과 길이 확실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사람이 부모를 떠나도 괜찮다고 하는 것이다. 부모의 존재는 사람의 유년기에만 필요하다. 사람이 성인이 되고 나면 부모의 존재는 그저 형식적인 것이고, 감정적으로 의지하고 의탁하는 것일 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물론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이런 점을 점점 분명하게 느낄 것이다. 또한,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정신, 마음, 생명의 의지처로 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음을 더욱 느낄 것이다. 부모가 떠나면 너는 정 때문에 그리워하겠지만 이와 동시에 감정적인 면에서나 여러 면에서 해방될 것이다. 해방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바로 부모가 있을 때 그들은 네 걱정거리이자 짐이다. 그들은 네 멋대로 굴 수 있는 존재이면서도 네가 정에 얽매이게 되는 존재이기도 하기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사라지면 걱정할 필요도 없고 그리워할 필요도 없다. 네가 부모와의 이런 종속 관계를 타파할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 부모가 떠났다는 것이 네 마음 깊이 뼈저리게 느껴져 더 이상 부모와의 혈연관계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을 때 너는 진정으로 성숙하고 독립하게 된다. 생각해 보아라. 사람은 나이를 불문하고 부모가 있을 때 무슨 일만 생기면 ‘엄마한테 물어보자. 아빠한테 물어보자.’라고 생각한다. 감정적인 면에서 항상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감정적으로 의존할 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무척 따뜻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행복감과 온기가 사라졌을 때 네가 자신이 고독하다거나 행복과 온기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는 성숙한 것이고 사상과 감정적인 면에서 진정으로 독립한 것이다. 너희 중 다수는 여기까지 체험해 보지는 못했을 텐데 겪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아라. 사람은 나이를 불문하고 마흔이든, 쉰이나 예순이든 부모가 죽으면 무척 성숙해진다. 마치 철부지 아이에서 단번에 어른이 되어 철든 것처럼 하루아침에 사리 분별을 하며 독립한다. 그러므로 부모의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큰 문턱이다. 네가 부모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다루고 대하며 이와 함께 네게 거는 부모의 여러 기대나 네가 감정적인 면에서, 윤리적인 면에서 부모에게 다해야 할 책임 등을 올바르게 대하고 다루며 또한 내려놓는다면 너는 진정으로 성숙할 것이고, 최소한 하나님 앞에서 너는 성년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성년이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은 육의 정이라는 측면에서 고통을 받아야 하는데, 특히 감정적인 면에서 상처와 괴로움을 받는 것은 물론 잘 풀리지 않고 뜻대로 되지 않거나 불행한 일로 인한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 이런 고통을 모두 겪고, 이런 일을 좀 더 꿰뚫어 보고 난 뒤 우리가 교제한 이런 측면에 관련된 진리를 아우른다면 너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사람의 생명과 운명, 그리고 사람 간의 가족애를 철저하게 꿰뚫어 보게 될 것이다. 이를 꿰뚫어 볼 수 있게 되면 내려놓는 것이 수월해진다. 네가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올바르게 처리한다면 올바르게 대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의 도리나 양심의 기준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자세로 대하는 것이다.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가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하는 것은 좋은 징조이자 조짐이다. 어떤 조짐이겠느냐? 구원받을 희망이 생길 조짐이다. 그러니 부모의 기대를 대하는 것에 있어서 네가 지금 어리든, 중년이든, 장년 혹은 노년이든, 그리고 아직 경험하지 않았든, 현재 경험 중이거나 이미 경험해 봤든 너는 정을 내려놓고 부모와 관계를 끊거나 거리를 두기만 해서는 안 된다. 진리에 공을 들이며 이런 측면의 진리를 구하고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이 이런 복잡한 관계를 깨달으면 거기에서 벗어나 속박받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의 속박을 받지 않게 되면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지고, 장애물이나 걸림돌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을 거역할 가능성은 줄어들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부모와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일을 꿰뚫어 보고 극복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 시간이 되면 진리의 측면에서 고민해 보아라. 앞으로의 날들이나 지금 겪고 있는 일들에서 진리에 따라 자신을 비춰 보고, 진리에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네 문젯거리와 어려움은 훨씬 줄어들 것이고, 삶은 홀가분하고 즐거워질 것이다. 반면 네가 이런 일들을 진리에 따라 대하지 않는다면 네 문젯거리가 많아지고 삶이 고달파지는 결과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부모의 기대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안녕!

2023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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