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8)

며칠 전 적그리스도가 복음 확장 사역을 교란하는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다. 너희는 다들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하나님 집에서는 복음 사역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일부 인원도 조정되고 변동되기 시작했고, 사역 방면의 일도 일부 변경됐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집에 이런 큰일이 발생했고 너희 주변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 이토록 큰 일이 닥쳤는데 너희는 공과를 배울 수 있겠느냐? 너희는 진리를 구하였느냐? 이런 큰일들 속에서 일부 문제의 본질을 보고 교훈을 좀 얻을 수 있었느냐? 대다수의 사람은 일이 닥치면 그저 표면적으로 교훈이나 좀 얻고 도리나 좀 깨달을 뿐 그 안의 본질을 파헤치지도 않고 어떻게 진리를 근거로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지 배우지도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일부 사람들은 어떤 일이 닥치든 그저 자신의 머리와 잔꾀로 마음속으로 궁리만 할 뿐이다. 진리 원칙에 조금도 닿지 못할 뿐 아니라 총명과 지혜에도 닿지 못한다. 그저 교훈을 좀 정리하고 나서 이런 결정을 내린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닥치면 어떤 말들을 하면 안 되고 어떤 일들을 해선 안 되는지, 어떤 부류의 사람을 경계하고 어떤 부류의 사람을 가까이해야 하는지 조심하고 주의해야겠어.’ 이를 두고 공과를 배우고 체험이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 크든 작든 이런 일들이 닥치면 사람은 어떻게 체험하고 직면하며 깊이 파고들어야 비로소 공과를 배울 수 있고, 이런 환경들이 닥쳤을 때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아 자신의 분량이 어느 정도 자라게 할 수 있겠느냐? 대다수의 사람은 이런 일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런 일들을 생각하지 않으면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너희는 스스로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어떤 일들을 근거로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또 어떤 일들을 근거로 가끔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본분을 이행하며 고생을 좀 할 줄 알고 대가를 좀 치를 줄 알 때, 가끔 좀 열심히 사역할 때, 또는 헌금을 좀 할 수 있을 때, 또는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학업과 결혼을 포기할 수 있을 때, 또는 세상의 흐름에 따르지 않을 때, 또는 악인을 만나면 피할 수 있을 때 등 너희가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을 때 스스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자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너희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가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한 것이냐? (아닙니다.) 너희는 일방적으로 생각한 것이고 스스로 규정한 것이다. 가끔씩 규례와 규율을 지키고 좋은 인성을 좀 드러낼 때, 인내하고 포용할 때, 겉으로 겸손하거나 겸허하고, 떠벌리거나 날뛰지 않을 때, 하나님 집의 사역에 관해 조금은 책임지려는 의지나 마음가짐이 있을 때 스스로 진리를 잘 추구한다고 느끼고 자신이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이런 태도들을 두고 과연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표면적인 방법이나 행동, 그리고 태도는 정확히 말하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사람은 왜 늘 이런 태도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느냐? 왜 늘 자신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느냐? (사람은 관념으로 어느 정도 대가를 치르고 헌신하면 이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대가를 조금 치르고 고생을 조금 하면 스스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일에 관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하나님은 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 여부를 어떻게 판정하는지 한 번도 구한 적 없습니다. 그래서 늘 자신의 관념과 상상 속에서 살면서 스스로를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시종일관 관념을 내려놓지 않고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는지를 정의하는 이 중대한 일에서 늘 자신의 관념과 상상, 그리고 일방적인 생각에 기댄다. 왜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마음이 편하고,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굳이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결국 자신은 이익과 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겠느냐?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는데, 소위 버리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는 등 이런 좋은 행위들은 사람이 닿을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쉽게 가정과 직장을 버릴 수 있다.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실행하며 진리 원칙에 따라 일하는 것은 사람이 쉽게 도달할 수 없고 닿을 수 없다. 설령 네가 진리를 조금 깨달았다고 해도 너는 본인의 생각, 관념 또는 패괴 성품을 저버리기는 어렵고 진리 원칙을 고수하기도 어렵다. 네가 만약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믿은 이 몇 년 동안 왜 각 항목의 진리에서 성장이 거의 없었느냐? 네가 대가를 치렀든, 무언가를 버리고 포기했든 최종적으로 거둔 성과가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실행함으로써 거둔 성과였느냐? 네가 대가를 얼마나 치렀든, 고생을 얼마나 했든, 육적인 것을 얼마나 버렸든 네가 최종적으로 얻은 것은 무엇이냐? 진리를 얻었느냐? 너는 진리에서 수확이 있었느냐? 너는 생명 진입에 성장이 있었느냐? 너의 패괴 성품은 변화가 있었느냐?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했느냐?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런 깊은 공과와 실행 말고 제일 간단한 부분을 말해 보자. 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이토록 여러 해 동안 고생하고 대가를 치렀는데 하나님 집의 이익을 수호할 수 있었느냐? 특히 적그리스도와 악인이 악을 행하고 교회 사역을 교란할 때, 너는 보고도 못 본 체하며 악인의 이익을 수호하고 너 스스로를 보전했느냐, 아니면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 집의 이익을 수호했느냐? 너는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했느냐?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네가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것은 바울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것처럼 그저 복을 얻기 위한 것이었고 헛수고한 것이다. 이는 싸워야 할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으니 최종에는 복과 상을 받을 일만 남았다고 한 바울의 말과 같다.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너는 바울의 길을 걸은 것이지 진리를 추구한 것이 아니다. 너는 네가 버리고 헌신하며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이 몇 년 동안 너는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느냐? 진리 실제가 얼마나 있느냐? 너는 얼마나 많은 일에서 하나님 집의 이익을 수호했느냐? 너는 얼마나 많은 일에서 진리의 편에, 그리고 하나님의 편에 섰느냐? 너는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악을 행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았느냐? 이는 모두 사람이 깨닫고 성찰해야 하는 것들이다. 만약 이런 것들을 성찰하지 않으면, 사람은 믿은 시간이 길수록, 특히 본분을 이행한 시간이 긴 사람일수록 스스로 공로가 있으니 분명히 구원받을 것이고 하나님에게 속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언젠가 일단 교체되고 드러나 도태되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전 공로는 없어도 나름 고생했고, 고생이 아니더라도 나름 힘들었다고요. 하나님 집에서는 제가 이토록 여러 해 동안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걸 봐서라도 저를 교체하면 안 되죠. 이렇게 대해서도 안 되고 말이에요. 하나님 집에서 토사구팽하면 안 되죠!” 만약 네가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만약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을 하나하나 착실하게 이행한 적이 몇 번이나 있느냐? 얼마나 이행했느냐? 각 항목의 사역을 너는 얼마나 체크했느냐? 얼마나 검사했느냐? 네 책임 범위와 본분 이행 범위 내에서, 너의 자질과 이해 능력, 그리고 네가 진리를 깨달은 정도로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너는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발휘했느냐? 어떤 본분들을 제대로 이행했느냐? 선행을 얼마나 예비했느냐?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 추구하지 않는지를 검증하는 기준이다. 만약 이런 일들을 다 형편없이 하고 아무런 성과도 없다면 그것은 이 몇 년 동안 네가 복을 얻고자 하는 소망 때문에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것이지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네가 한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지위와 복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 네가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이런 사람은 결국 바울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바울의 길을 걷고 있다. 물론 그들의 결말 역시 바울과 같다. 너는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네가 직장과 가정을 버렸다고 해서 혹은 어떤 사람은 자신이 심지어 어린 자식마저 버렸다고 해서 본인에게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너는 별 공로가 없다. 너는 그저 피조물일 뿐이고 네가 하는 모든 것은 전부 너 자신을 위한 것이니 모두 당연할 따름이다. 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네가 고생하고 대가를 치를 수 있었겠느냐? 네가 가정과 직업을 버릴 수 있었겠느냐? 가정과 직업을 버리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는 것을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과 동일시하지 마라. 그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진리도, 책망과 훈계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매번 대규모 정리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하나 드러나고 제명된다. 어떤 사람은 드러난 후 문제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아 남겨 두고 관찰하며, 회개의 기회를 준다. 어떤 사람은 문제가 매우 심각하여 몇 번이나 타일러도 고치지 않고, 계속 같은 일을 하며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데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고, 파괴하여 결국 원칙에 따라 제명되고 출교되며,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회를 주지 않다니 너무 불쌍한 거 아닌가요?” 기회를 적게 준 것이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의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정결케함과 구원을 받아들이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경영을 하러 온 것이다. 교회 사역을 하거나 여러 본분을 이행하고 나서부터 그는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기 시작했다. 방해하고 교란하며 교회의 사역을 심각하게 파괴했고 하나님 집의 이익에 심각한 손실을 초래했다. 하나님 집에서는 그들에게 몇 번이나 기회를 줬다. 그들을 본분을 이행하는 각 팀에서 점차 도태시킨 후 복음 그룹에 안배해 본분을 이행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 그룹에 간 이후에도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계속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며 아무런 회개도 변화도 없었다. 하나님 집에서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그 어떤 사역을 안배해 기회와 일깨움을 주어도, 심지어 책망과 훈계를 해도 아무 소용없었다. 그들은 너무 무감각한 게 아니라 너무 강퍅한 것이다. 물론 이 강퍅함은 그저 사람의 패괴 성품이라는 이 관점에서 말한 것일 뿐이다. 본질적으로 말하면, 이런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다. 그들은 교회에 들어와 사탄의 역할을 맡는 것 말고는 하나님 집에 이로운 그 어떤 일도, 교회 사역에 이로운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나쁜 짓만 한다. 전적으로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파괴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여 몇 사람을 얻은 뒤 스스로 자본과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여 과거의 공로를 우려먹기 시작한다. 자신이 하나님 집에서 왕권을 잡을 수 있고 어떤 사역에 관해서도 명령을 내리고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람에게 강제로 실행하고 이행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부에서 어떻게 진리를 교제하고 어떻게 사역을 안배하든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앞에서는 이렇게 듣기 좋게 말한다. “하나님 집에서 사역을 잘 안배했군요. 마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딱 적기에 바로잡아 주었어요. 안 그랬으면 우리가 얼마나 멀리 빗나갔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고개를 돌리면 바로 변해서 다시 자신의 주장을 내놓기 시작한다.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이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겉으로는 인두겁을 쓰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사람의 일을 하지 않으니 그런 자는 바로 귀신이다! 그들이 교회에서 맡은 역할은 오로지 하나님 집의 각종 사역을 교란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사역을 하든 모두 교란하고, 절대로 진리를 구하거나 원칙을 구하지 않으며, 사역지침도 전혀 보지 않고 그에 따라 행하지도 않는다. 조금만 권력이 생기면 바로 하나님 선민 앞에서 거들먹거리고 이래라저래라 하고 시킨다. 그 자체로 귀신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사람 모습이 없다. 하나님 집의 이익은 전혀 수호하지 않고 그 개인의 이익과 지위만 수호한다. 그가 어떤 급의 교회 리더를 하고 어떤 사역의 책임자를 맡든 그에게 사역을 맡기면 곧 그의 것이 되어 그가 마음대로 결정한다. 다른 사람은 따져 묻고 감독할 생각도, 체크할 생각도 말아야 하고 개입할 생각은 더더욱 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영락없는 적그리스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이 복을 얻을 생각을 하다니! 이런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한 마디 하고 싶다. 바로 막무가내에 구제 불능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관문에서 넘어질지 모르니 멀리 갈 수 없을 것이다. 예전에 너희에게 늘 “끝까지 봉사하여 충성스러운 봉사자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그럼 봉사자가 되어라. 잘 봉사하고, 교란하거나 방해하지 않는다면, 악을 행해 제명되지 않는다면, 확실히 악을 행하지 않고 끝까지 봉사할 수 있다면 살아남을 수도 있다. 비록 큰 복은 얻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네가 하나님 사역 기간에 봉사했고 충성스러운 봉사자라면 결국 하나님도 너를 푸대접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보니 확실히 일부 봉사자는 끝까지 봉사하지 못하는데, 왜 그런 것이겠느냐?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사람의 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 내면이 도대체 어떤 영인지 우리가 연구하진 않겠지만 최소한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태도를 보면 그의 본질은 마귀이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추구한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10년 전 각 항목의 진리를 세부적으로 교제하지 않았을 때,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일부 사람들은 일을 처리할 때 그저 자신의 뜻, 상상, 관념에 기대거나 규례를 지켰다. 사람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비록 각 방면의 진리를 아직 끝까지 얘기하진 않았지만 기본적인 것, 사람이 사역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에 관련된 각 방면의 진리는 최소한 원칙적으로는 이미 사람에게 명확히 얘기했다. 마음과 영이 있는 사람,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방면의 본분이든 양심과 이성에 기대어 일부 진리 원칙은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심오한 진리에는 사람이 이를 수도, 닿을 수도 없고, 일부 문제의 본질, 그리고 진리와 관련된 본질 역시 사람은 간파하지 못한다. 그러나 명문화된, 스스로 닿을 수 있는 진리는 실행해 낼 수 있을 것이고, 최소한 하나님 집에서 명문화한 사역지침은 지키고 이행하며 하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마에 속하는 이 사람들은 이런 것조차도 하지 못한다. 이들이 바로 봉사조차 끝까지 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봉사마저 끝까지 하지 못하면 이는 도중에 열차에서 내던져진다는 뜻이다. 왜 열차에서 내던지겠느냐? 만약 열차에서 잠을 자든 가만히 있든 혼자 오락을 즐기든 조용하게 있고,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고 열차의 진행 방향을 교란하지만 않는다면 누가 모질게 그를 열차 밖으로 내던지겠느냐? 아무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네가 정말로 봉사할 수 있다면 하나님도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를 사용해 봉사하도록 하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현재 하나님 집 각 방면의 사역은 이런 사람들의 교란하에 손실이 너무나 크고, 그들은 신경을 너무 많이 쓰이게 한다! 진리를 어떻게 교제하든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나중에 또다시 나쁜 일을 저지른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 정말로 끝없이 말하게 하고 화나게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사람들은 악행을 너무도 많이 저질러 하나님 집의 복음 확장 사역에 막대한 손실을 준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행하는 그 정도의 본분은 전부 방해와 교란일 뿐인 데다가 하나님 집 사역에 가져오는 손실은 메꿀 수도 없다. 이런 사람들은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저지른다. 아래에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제물을 남용하며, 복음을 전해 얻은 사람의 숫자를 거짓으로 보고한다. 게다가 사람을 마구잡이로 쓰기도 하는데, 전적으로 악인, 어리석은 사람,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을 쓴다. 누가 제안을 해도 듣지 않고 의견을 내놓는 사람이 있으면 억누르고 괴롭힌다. 하나님의 말씀, 요구 그리고 사역지침은 그가 관할하는 범위 안에서는 이행되지 못하고 방치된다. 그는 그 지역의 깡패이자 우두머리, 거물이 된다. 네가 보기에 이런 사람을 남겨두고 쓸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은 교체되고 나서 마치 그가 퍽 고상하고 순종하며 진리를 추구하는 것처럼 “하나님 집 안배에 순종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해도 그는 할 말이 없고 하나님 집 안배에 순종하겠다는 뜻이다. 너는 하나님 집 안배에 순종하겠다고 말했으면서 왜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교회에서 너를 교체하도록 만들었느냐? 이 일을 왜 인식하지 못했느냐? 왜 아무런 설명이 없느냐? 네가 사역하는 기간에 하나님 집 사역에 가져온 각종 골칫거리와 손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함구하면 그만이냐? 하나님 집 안배에 순종한다고 말하면 퍽 고상하고 위대해 보일 것 같겠지만 이는 완전히 위장이고 기만이다! 너는 이제 하나님 집 안배에 순종할 줄 알게 됐다면, 그럼 예전의 하나님 집 사역지침에는 어째서 순종하지 않았느냐? 어째서 이행하지 않았느냐? 그때 너는 무얼 하고 있었느냐? 너는 도대체 누구에게 순종하는 것이냐? 이 일에 대해 왜 설명하지 않느냐? 너의 주인은 대체 누구냐? 하나님 집에서 안배한 각 항목의 사역을 너는 이행했느냐? 성과를 거두었느냐? 진지하게 검사하면 감당할 수 있겠느냐? 네가 제멋대로 나쁜 짓을 저질러 하나님 집 사역에 가져온 손실은 어떻게 메꿀 것이냐? 이 일에 대해 좀 말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 집 안배에 순종한다는 말 한마디면 그만이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들은 인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인성도, 이성도, 양심도 없고 후안무치하다! 아무리 큰 악행을 저지르고 하나님 집에 아무리 큰 손실을 입혀도 지각하지 못하고,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아무리 많이 저질러도 통회하지도, 죄책감을 갖지도 않으며 별다른 인식도 없다. 네가 추궁하면 그는 “저만 그렇게 한 것도 아니잖아요.”라고 말하는데 변명까지 한다. 네 말은 다수가 잘못을 저지르면 처벌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냐? 다들 악행을 저질렀으니 너에게 책임을 추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옳지 않다. 네가 저지른 악행은 네가 책임져야 한다. 각자 자신의 행동에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 집 안배에 순종해야 하고 자신의 문제를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네가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너에게 기회를 주고 너를 남겨 두고 쓸 수 있지만 늘 악행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네가 양심의 지각이 없고, 하나님에 대해 그 어떤 죄스러움도 느끼지 못하며 조금도 회개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너에게 기회를 주어 네가 계속 본분을 이행하도록 하고 너의 책임을 따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할지 너는 알고 있느냐? 사람이 따지지 않는다고 하나님도 따지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대하든, 어떤 일을 대하든 다 원칙이 있다. 하나님은 너를 되는대로 처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와 같은 무골호인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원칙이 있고 공의로운 성품이 있다. 네가 하나님 집의 원칙과 행정 법령을 거스르면 교회와 하나님 집에서는 행정 법령의 원칙과 규정에 따라 너를 처리할 것이다. 그럼 네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사실 너도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있다. 네가 만약 정말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한다면 너는 하나님 앞에 와서 참회하고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 만약 너에게 이런 태도가 없다면 너는 불신파이자 마귀이고 하나님의 원수이니 저주받아 마땅하다! 네가 무슨 설교를 듣느냐? 너는 설교를 들을 자격이 없으니 썩 물러나야 한다! 진리는 정상적인 패괴된 인간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패괴 성품이 있지만 진리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어떤 일이 닥쳐도 반성할 수 있고, 잘못을 저지르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다. 이런 사람은 구제가 가능한데, 진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무슨 일이 닥치든 회개하는 태도가 없는 사람은 보통의 패괴된 인간이 아닌 별종이다. 이런 사람의 본질은 마귀이지 사람이 아니다. 똑같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더라도 보통의 패괴된 인간은 양심과 정상 인성의 알량한 수치심에 기대어, 그리고 얼마 안 되는 이성에 기대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나쁜 일을 저지르지도 않고 일부러 방해하고 교란하려는 뜻도 없다. 이 부류의 사람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끝까지 봉사할 수 있고 마지막까지 따랐을 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부류의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 없고 염치와 수치심 역시 전혀 없기 때문에 악행을 아무리 많이 저질러도 통회하는 마음이 없고 뻔뻔스럽게 하나님 집에 숨어 있으면서 복까지 얻으려 할 뿐 회개할 줄 모른다. 누군가 “당신이 이 일을 하는 건 방해하고 교란하는 겁니다.”라고 말하면 그는 “그런가요? 그럼 제가 잘못했네요. 다음에 고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 “그럼 당신은 패괴 성품에 대해 좀 인식해 보세요.”라고 말하면 그는 “패괴 성품을 인식할 게 뭐 있어요? 이건 그냥 무지몽매한 것일 뿐이에요. 다음에 고치면 되죠.”라고 말하며 깊이 인식하지 않고 그저 말로만 대충 얼버무린다. 이런 태도로 회개할 수 있겠느냐? 그는 수치심조차 없으니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이 아니면 짐승입니까?” 짐승이 맞다. 하지만 그는 개만도 못하다. 생각해 보아라. 개는 나쁜 일을 저지르거나 말썽을 부리고 까불다가도 네가 야단 한 번 치면 바로 민망해하고 네 앞에 와 끊임없이 잘 보이려고 한다. 그건 “절 싫어하지 마세요. 다음에는 안 그럴게요.”라는 뜻이다. 다시 같은 일이 닥치면 개는 일부러 너에게 눈빛으로 “이번에는 안 그럴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뜻을 전한다. 개가 얻어맞는 것이 두려운 것이든 주인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든 어느 방면에서 보든 개는 주인이 좋아하지 않고 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개는 스스로 단속할 줄 알고 수치심도 있다. 동물도 가지고 있는 수치심을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런 사람이 사람이겠느냐? 동물만도 못하다면 그것은 인류도, 생물도 아니고 영락없는 마귀다. 악행을 얼마나 많이 저지르든 절대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으며 회개할 줄은 더더욱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조금만 악행을 저질러도 형제자매 보기를 부끄러워하고 선거 때 만약 형제자매가 그를 뽑기라도 하면 이렇게 말한다. “저는 기권하겠습니다. 전 그럴 자격이 없어요. 전 예전에 우매한 일들을 해서 교회 사역에 손해를 좀 끼쳤어요. 전 자격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수치심을 느끼고 양심과 이성도 있다. 그러나 악인들은 수치심을 느끼지 못한다. 네가 그에게 리더가 되라고 하면 그는 바로 몸을 곧게 펴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거 봐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 집에서는 제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요. 저는 거물이고 능력자죠!” 네가 보기에 이런 사람은 낯가죽이 두껍지 않으냐? 얼마나 두껍겠느냐? 중국 산하이관(山海關)의 성벽보다도 두꺼운데 부끄러움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악행을 얼마나 저지르든 뻔뻔스럽게 교회에서 빈둥거리고, 형제자매와 함께 지낼 때도 절대로 자세를 낮추지 않는다.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면서 수시로 자신의 ‘위대한 공적’, 자신이 과거에 버리고 헌신한 행적이나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행적, ‘찬란하고 위대했던’ 자신의 과거를 자랑하기까지 한다. 기회만 있으면 바로 꺼내 자랑하고 과시하며 밑천을 논하고 자격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자신이 악행을 얼마나 많이 저질렀는지, 하나님의 제물을 얼마나 남용했는지, 하나님 집 사역에 얼마나 큰 손실을 입혔는지는 절대로 얘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몰래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조차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과 하나님 집에 입힌 손실 때문에 눈물 한 방울 흘린 적 없다. 이토록 강퍅하고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는 어처구니없고 구제 불능인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구제 불능이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이다. 네가 그에게 아무리 기회를 주어도 그건 쇠귀에 경 읽기나 마찬가지다.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는 것이고 마귀와 사탄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 부류 사람에 대한 하나님 집의 최종적인 태도는 포기하는 것이다. 네가 만약 본분을 이행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 기회를 좀 줄 것이다. 네가 만약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지 않고 “저는 밖에 나가 일해 돈을 벌어서 생활할 거예요. 저는 제 사업을 하러 갈 겁니다.”라고 말한다면 마음대로 해라. 하나님 집의 대문은 열려 있으니 어서 가거라! 다시는 그들의 낯짝을 보고 싶지 않다. 역겹기 그지없다! 뭣하러 위장하느냐? 네가 조금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것, 버리고 헌신한 것은 단지 네가 악행을 저지르기 위해 예비한 전제에 불과하다. 네가 하나님 집에 머무른다고 해서 하나님 집을 위해 무슨 힘을 쓸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 집 사역에 어떤 이익을 가져올 수 있겠느냐? 악인이나 적그리스도 한 명이 반년 동안에 행한 악과 저지른 나쁜 일이 교회 사역에 너무나 큰 방해와 교란이 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얼마나 많은 형제자매가 손실을 메꾸기 위한 사역을 해야겠느냐? 그들을 사용해 힘을 좀 쓰게 하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적그리스도 무리가 결탁하여 저지른 나쁜 짓이 얼마나 큰 손실을 가져오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적그리스도가 내뱉은 황당한 이론과 허튼소리 한마디, 적그리스도가 선포한 터무니없는 명령 하나가 교회 사역에 얼마나 큰 손해를 가져오겠느냐? 네 생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사역을 해야 이를 메꿀 수 있겠느냐? 이 손실은 누가 책임지겠느냐? 아무도 책임질 수 없다! 이 손실을 메꿀 수 있겠느냐? (메꿀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일손을 더 늘리고 형제자매가 좀 더 고생하면 그 손실을 메꿀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부분 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집에서 얼마나 많은 인력과 물력을 들여야겠느냐? 특히, 낭비한 시간과 하나님 선민이 생명 진입에서 받은 손실은 누가 메꿀 수 있겠느냐? 아무도 메꿀 수 없다.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저지른 잘못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적그리스도들은 손해 본 돈은 그들이 배상하겠다고 말했어요.” 당연히 그들이 배상해야 한다! “적그리스도들은 떨어진 사람을 다시 전도해서 데려오겠다고 말했어요.” 이 역시 당연한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악행이니 그들이 보상해야 한다! 하지만 잃어버린 세월과 시간은 누가 메꾸겠느냐? 그들이 메꿀 수 있겠느냐? 이는 메꿀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저지른 잘못은 극악무도한 죄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적그리스도를 매우 엄하게 처리하는데,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떠나보내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사람에게 기회를 준다고 하지 않았나? 겨우 이 정도 잘못을 저질렀다고 원하지 않는 건가? 기회를 주지 않는 거야? 기회를 주어야지. 하나님 집에는 사랑이 너무 없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들에게 기회를 얼마나 주었겠느냐? 그들이 설교를 얼마나 들었겠느냐? 주어진 기회가 적었겠느냐? 너는 사역할 때 네가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복음을 전파하고 있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느냐? 너는 모르는 것이냐? 네가 기업을 경영하고 회사나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냐? 개인의 경영을 하는 것이냐? 하나님 집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기회를 얼마나 주었겠느냐? 누구든지 다 적지 않은 기회를 누렸다. 각 팀에서 복음 그룹으로 조정된 사람 중 복음 그룹에서 하루 이틀만 머물다가 교체된 사람이 있느냐? 저지른 악행이 너무나 분명해 교체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하나도 없다. 기회는 적지 않게 주었다. 그저 사람이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회개할 줄도 모른 채 자기 고집대로만 행동하며 계속 바울의 길을 걸은 것이다. 말은 아주 번지르르하고 명쾌하게 했지만 사람답게 행동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또 기회를 주어야겠느냐? (주면 안 됩니다.) 기회를 줄 때는 너를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너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하나님 집의 대문은 열려 있으니 너는 물러가라. 나가라. 하나님 집에서는 너를 쓰지 않겠다.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쓰는 것은 하나님 집의 자유다. 하나님 집은 그럴 주권이 있다. 너를 쓰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 너는 믿으려면 밖에 가서 믿어라. 어쨌든 하나님 집에서는 너를 쓰지 않을 것이다. 너무 신경이 쓰여 쓸 수가 없다! 네가 하나님 집에 끼친 손실은 너무도 커서 이 일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감당이 안 된다! 네가 운이 나쁜 것도,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 집에 사랑이 없어 너에게 모질게 구는 것도 아니고, 토사구팽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네 행동이 너무 지나쳐서 더는 못 봐주겠고, 네가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 설명조차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어떤 사역을 하든 하나님 집에서는 사역 원칙을 전부 설명했고 상부에서 직접 지도하고 검사하며 바로잡아 주기도 했다. 한두 번 예배, 한두 마디 말로 끝난 일이 아니었다. 말씀을 적게 하지도, 예배를 적게 드리지도 않고 간곡하게 얘기하였으나 결국 얻은 것은 기만이었고, 교회 사역도 방해와 교란을 받아 엉망이 되었다. 네가 말해 보아라. 누가 또 너에게 기회를 주려 하겠느냐? 누가 너를 두고 쓰려 하겠느냐? 네가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는 건 되고 하나님 집에서 원칙에 따라 너를 처리하는 건 안 된다는 것이냐? 너를 처리하는 것은 사랑의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원칙이 있는 것이다. 사랑의 마음은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 우매하지만 용서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악인과 마귀, 그리고 일부러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적그리스도에게 주는 것도 아니다. 적그리스도는 저주받을 자격밖에 없다! 왜 저주받을 자격밖에 없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얼마나 많은 악을 행하든 회개하지도,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돌아서지도 않으며 끝까지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 와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죽더라도 서서 죽을 겁니다. 저는 굳세고 강합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와서도 무릎 꿇지 않고 엎드리지 않을 거예요. 저는 항복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이란 말이냐! 그는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이렇게 말한다. “저는 하나님 집에 끝까지 대항할 거예요. 저는 죄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저는 잘못이 없어요!” 좋다. 네가 잘못한 게 없다고 한다면 나가라. 하나님 집에서는 너를 쓰지 않겠다. 하나님 집에서 더 이상 너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안 될 게 있느냐? 안 될 게 전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집에서 저를 쓰지 않으면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네가 살펴보아라. 하나님 집에 있는 어떤 사역이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더냐? 성령 역사가 없고 하나님의 보호가 없었다면 어느 누가 오늘에 이를 수 있었겠느냐? 지금까지 유지될 사역이 과연 있었겠느냐? 너는 여기가 세상인 줄 아는 것이냐? 세상에서는 만약 능력과 은사가 있는 사람들이 수호하지 않으면 그 어떤 단체도 사업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 집의 사역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 집의 사역은 모두 하나님이 수호하고 이끌며 인도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 집의 사역이 특정한 사람에게 의존해 유지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치도 않다. 이는 불신파의 관점이다. 하나님 집에서 적그리스도와 불신파 같은 악인들을 포기하는 것이 너희 생각에는 타당하지 않겠느냐? (타당합니다.) 왜 그렇겠느냐? 이런 사람들을 사용해 사역하면 손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력이든 재력이든 모두 무절제하게 제멋대로 쓰고 아무런 원칙도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고 완전히 자신의 야심과 욕망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적그리스도가 한마디 하면 그것을 크게 떠받들고 그에 따라 실행한다. 듣자 하니 어떤 어리석은 자가 유럽에 있으면서 아시아의 사역을 한다고 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시차 없이 유럽에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그의 본분을 조정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하나님 집의 안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아시아의 사역을 하려고 들었다. 왜냐하면 그가 숭배하는 적그리스도가 아시아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주인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겠느냐? (맞습니다.) 너희 생각에 그는 본분을 이행할 자격이 있겠느냐? 이런 사람을 우리가 원하겠느냐? 하나님 집에서는 늘 사역을 합당하게 안배한다. 네가 유럽에 있으면 너는 아시아가 아닌 유럽에 관련된 사역을 해야 한다. 자신이 사는 대륙에 관련된 사역을 하면 시차도 없고 얼마나 좋으냐! 하지만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에서 하는 한마디 말로는 효과도 없고 그를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는 주인이 말한 대로만 실행한다. 그의 주인이 “유럽으로 가.”라고 말하면 그는 바로 간다. 그의 주인이 “넌 유럽으로 가면 안 돼. 여기는 네가 없으면 안 돼.”라고 말하면 그는 “그럼 저는 가면 안 되죠.”라고 말한다. 그는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냐? (그의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의 주인인 적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그럼 그는 그의 주인과 함께 정리돼야 하지 않겠느냐? 그에게 나가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왜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 이토록 화가 나겠느냐? 왜냐하면 그들이 저지른 악행이 너무나 커서 누가 들어도 다 분개할 만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나님을 기만하니 너무나도 악독하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왜 이 부류의 사람에게 이토록 화가 나겠느냐? (그는 입으로는 그가 믿는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주인의 말을 따릅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마귀 사탄을 따른다. 그가 하나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것은 허울에 불과하다. 그는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는 명목으로 사탄을 따르고 사탄에게 충성을 다하면서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에게서 상과 복을 얻으려고 한다. 이는 후안무치한 것 아니겠느냐? 어처구니없고 구제 불능인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 생각에 이런 사람을 하나님 집에서 남겨 두겠느냐? (남겨 두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처리하는 게 적절하겠느냐? (그와 그의 주인을 같이 정리해 내보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을 따르는 것을 좋아하고 한사코 그의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쳐 일한다. 그는 본분을 이행할 때 하나님 집의 이익을 수호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본분을 이행하는 게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무리 속에서 그의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다. 이것이 그가 사역하는 본질이다. 그래서 그는 무엇을 하든 기억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정리해 내보내야 한다. 그는 봉사할 자격조차 없다! 그럼 너희가 보기에 이런 사람들은 이 사역을 하거나 악인을 만나고 나서 이렇게 변한 것이겠느냐? 환경이 그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겠느냐, 아니면 악인이 그들을 현혹시킨 것이겠느냐? (둘 다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본성 본질이 원래 이런 사람인 것입니다.) 그들의 본성 본질은 그들의 적그리스도 주인과 같다. 그들은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 그들은 같은 관심사와 사상 관점, 일 처리 방식을 가지고 있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추구하는 길 역시 같다.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 집 사역을 교란하려는 공통의 뜻, 동기 그리고 실행법도 가지고 있다. 보아라.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 대한 그들의 태도 역시 매한가지인데, 윗사람을 기만하고 아랫사람을 속인다.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는 것이다. 또 윗사람에게는 겉으로 잘 따르는 척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제멋대로 못되게 군다. 그들은 행동 방식도 똑같은데, 상부에서 책망하면 이렇게 말한다. “제가 틀렸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저는 나쁘고 패역합니다. 저는 마귀입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돌아서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저는 상부의 사역지침을 실행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일을 처리한다. 복음 전파는 전부 형식적으로만 하고 복음을 전해 얻은 사람의 수도 거짓으로 보고하며 하나님 집을 기만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 무리의 행태다. 그들은 사역지침을 대할 때 늘 자기만의 대책과 방법이 있다. 그들의 귀신 몰골이 드러나지 않았느냐? 이런 자들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런 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다! 우리는 귀신을 상대하지 않는다. 서둘러 그들을 내보내라. 귀신의 몰골은 보고 싶지 않으니 그를 썩 물러가게 해라! 봉사하고자 하는 자는 B팀으로 보내고, 봉사하고자 하지 않는 자는 전부 출교시켜라! 이렇게 하는 게 옳지 않겠느냐? (옳습니다.) 이렇게 하는 건 너무나도 타당하다! 그들은 본질이 같아서 대화를 하든 일을 하든 자기들끼리라면 대단히 순조롭다. 함께 일을 처리할 때 유달리 조화로우며 손발이 잘 맞는다. 주인이 입만 뻥긋하면 그게 어떤 허튼소리이든 수족 노릇을 하는 자들은 바로 호응하고 마음속으로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 말이 옳아요. 그렇게 합시다! 상부의 사역지침은 너무 따지는 게 많아요.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그들은 상부의 사역지침에서 아무리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말해도 실행하지 않으면서 마귀 사탄이 한 말은 아무리 치우치고 황당해도 전부 받아들인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겠느냐?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집에서 끝까지 봉사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끝까지 봉사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인내하든, 마귀의 행각을 인내하든 그 인내에는 다 한계가 있다. 너에게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더라도 어느 정도에 다다르면 드러낼 자는 드러내고 도태시켜야 할 자는 도태시킨다. 이 정도에 이르면 사람은 갈 데까지 간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본성 본질이 진리를 적대하는 것이다. 보아라. 네가 말하는 긍정적인 사물, 순수하고 올바른 이해 또는 진리에 부합하는 원칙을 그들은 전부 듣지 않는다. 네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말할수록 그는 마음속으로 더욱 괴로워하고, 네가 진리 원칙을 말하기만 하면 그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한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 핑계를 대며 얘기를 중단시키려 하거나 시선을 돌린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물컵을 들고 물을 받으러 간다. 네가 진리를 교제하고 자기 인식에 대해 얘기하기만 하면 그는 반감을 갖고 듣기 싫어한다. 화장실에 가지 않으면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프다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졸거나 전화를 받으러 가거나 무슨 일을 처리하러 간다. 그는 늘 핑계를 대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한다. 네가 만약 그의 방식에 따라 전적으로 방해하고 교란하는 그들의 그 따위 말과 방법에 대해 얘기하면 그는 신이 나서 쉴 새 없이 떠든다. 네가 만약 그와 공통된 대화거리가 없으면 그는 너에게 반감을 갖고 너를 피한다. 이게 바로 전형적인 마귀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이런 마귀를 간파하지 못하고 그가 그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생각이 어떻게 그렇게 단순한 것이냐? 너는 어째서 우매한 말만 하는 것이냐? 그가 단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겠느냐? 아니다. 그는 악마이며 극도로 진리를 싫어한다. 예배 때 그는 꽤 점잖은 모습을 보이지만 그건 위장한 것이다. 실제로 예배에서 교제한 내용과 읽은 하나님 말씀을 그가 귀담아들었겠느냐? 몇 마디나 귀담아들었겠느냐? 몇 마디나 받아들였겠느냐? 몇 마디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그는 간단하고 또 평소에 가장 자주 언급하는 도리조차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얼마나 오랜 시간 사역을 하든, 어떤 등급의 리더나 책임자를 맡든 설교할 줄 모르고 개인의 체험을 얘기할 줄도 모른다. 만약 누군가 “어떤 방면에 대한 당신의 인식을 말해 보세요. 반드시 당신이 체험한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그 일에 대해 당신이 어떤 인식과 깨달음을 가지고 있는지 얘기해 보세요.”라고 말하면 그는 입이 마치 봉인된 것처럼 열지 못하고 도리조차 말하지 못한다. 그가 만약 억지스럽게 조금 말을 하면 너에게는 어색하게 들릴 것이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째서 일부 리더들의 설교는 마치 선생님이 아이에게 교과서를 가르치는 것처럼 유난히 어색하게 들리는 걸까요?” 그것은 설교할 줄 모르는 것이다. 그는 왜 설교할 줄 모르겠느냐? 그건 바로 그에게 진리 실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왜 진리 실제가 없겠느냐? 왜냐하면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속으로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에 관한 모든 원칙과 말에 대해 반발심을 갖는다. 반발심이라고 말해도 아마 너는 겉모양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럼 그가 반발심을 갖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진리를 교제하든 그는 마음속으로 전부 부인하고 거절하며 유난히 반감을 갖는다. 진리에 대한 인식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교제하든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건 당신 생각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는 진리를 어떻게 판단하겠느냐? 그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 옳은 것이라면 그게 바로 진리이고, 그가 싫어하는 것은 아무리 맞게 한 말이라도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보면 그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진리에 반발하고 진리를 싫어하며 적대시한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진리는 아무런 지위도 없으며 그들은 진리를 멸시한다. 어떤 사람들은 간파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저희는 평소에 그 사람이 하나님을 더럽히는 말이나 진리를 모독하는 말, 진리 원칙에 위배되는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너도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서 규정한 모든 구체적인 내용은 다 필요한 것인데, 완전히 하나님 사역의 이익, 하나님 선민의 생명 성장, 교회 생활의 정상적인 질서, 복음 사역의 정상적인 진전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시기의 사역지침이든, 어떤 사역의 구체적인 배치, 안배, 변동이든 그것은 모두 하나님 집 사역의 정상적인 진전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고, 형제자매가 진리 원칙을 깨닫고 진리 원칙에 진입하도록 더 잘 돕기 위한 것이다. 더욱 확실하게 말하자면 형제자매를 하나님 앞으로, 진리 실제로 인도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끌고 인솔해 가면서 몸소 너를 가르치고 붙들어 주고 공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역지침의 실행에 대해 예배에서 구체적으로 교제하든, 아니면 구두로 전달하든 모두 하나님 선민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여 진실한 생명 진입이 있도록 하려는 것으로, 이는 모두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이롭다. 그 어떤 지침도 하나님 집 사역과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이롭지 않은 것이 없으며 교란하고 파괴하는 작용을 하는 것도 없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이런 사역지침들을 전혀 거들떠보지 않고 실행하지도 않으며 멸시한다. 그는 이런 사역지침들이 너무 단순하고 눈에 띄지 않고, 그들이 사역하는 방식보다 기세가 없으며, 사역 과정에서 그들의 명예, 지위, 명망에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실행은 고사하고 여태껏 듣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며, 자기 방식대로 일을 처리했다. 이 점에서 보면 너희 생각에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이 단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일 뿐이겠느냐? 이 점을 통해 그들이 진리를 적대시한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진리를 적대시한다고 하면 사람은 간파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사역지침 실행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거짓 리더, 거짓 일꾼은 사역지침을 대할 때 기껏해야 형식적으로 얘기 한 번 하면 그만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뒤따르는 체크와 감독, 구체적인 사역은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이 거짓 리더이다. 그래도 거짓 리더는 최소한 사역지침을 실행하고 형식은 갖추며 수호하기는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수호조차 하지 않는다. 그는 아예 받아들이지도 실행하지도 않으며 자기 방색대로 처리하기까지 한다. 그가 고려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자신의 지위, 명예, 위신이다. 상부에서 자신을 알아줄지, 얼마나 많은 형제자매가 자신을 지지하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자신의 지위가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권력을 잡아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지, 자신의 손아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지, 그들은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갖는다. 그는 형제자매가 참도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어떻게 양육하고 공급할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이 어떤지, 형제자매가 복음 전파 또는 각 방면의 본분 이행이 어떤지,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는지는 더더욱 고려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형제자매를 하나님 앞에 데려올 수 있는지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그는 이런 일들에는 관심이 없다. 이는 모두 뻔한 사실들 아니겠느냐? 모두 너희가 자주 볼 수 있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겠느냐? 그럼 이런 사실들은 그들이 진리를 적대시한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겠느냐? (충분합니다.) 적그리스도는 늘 자신의 지위, 명예, 위신에 관심을 갖는다. 네가 적그리스도에게 교회 생활을 책임지도록 한다고 하자. 형제자매들이 정규적인 교회 생활을 하도록 하고, 교회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깨달아 뿌리내리고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을 가지며 하나님 앞에 올 수 있도록 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할 능력과 본분을 이행할 믿음을 갖추도록 한다면 하나님 집의 복음 확장은 뒤에서 지지하는 힘이 생길 것이고, 복음을 전파할 인재를 계속해서 더 많이 제공해 복음 확장 과정에서 본분을 이행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생각하겠느냐? 그는 절대로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교회 생활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모든 사람이 전부 마음을 다해 교회 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깨닫는다면 누가 제 명령을 듣겠습니까? 누가 제게 관심을 갖겠습니까? 저를 중시하는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그들이 늘 교회 생활을 중시하거나 교회 생활에 열중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제 곁에는 더 이상 아무도 없지 않겠습니까?” 적그리스도는 이런 태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형제자매가 진리와 생명을 얻도록 공급하는 것을 중시하면 그가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는 데 불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모든 시간을 형제자매를 위해 일하는 데 쓴다면 내게 명리와 지위를 추구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 만약 형제자매가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따르면 내 말을 듣는 사람이 없을 텐데 그럼 내가 얼마나 난처하겠어!’ 이런 것들이 모두 적그리스도의 몰골이다. 그들은 단순히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극도로 싫어한다. 그의 주관적 의식 속에서 ‘나는 진리를 증오하고 하나님을 증오해. 형제자매에게 이로운 모든 사역지침, 말, 방식을 다 증오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고 일부 행동 방식과 태도를 통해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 반항한다. 그렇다면 그의 이런 행동 방식과 태도의 본질은 바로 자신의 방식대로 일을 처리함으로써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르고 그에게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하더라도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이런 태도들에 대해 전에도 많이 교제했다. 너희는 분량이 작고 깨달은 진리도 얕다. 적그리스도가 눈앞에서 이토록 많은 악행을 저질러도 분별할 줄 모른다. 너희는 우매하고 가련하며 무감각하고 우둔한 데다가 궁핍하고 눈이 멀었다. 이것이 너희들의 실제 모습이자 실제 분량이다. 적그리스도가 아무리 못된 짓을 하여 하나님 집 사역에 아무리 큰 손실을 가져와도 그를 사용해 힘을 쓰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를 사용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은 데도 교체할 줄 모르고 처리할 줄도 모른다. 너희의 이 분량과 이런 생각들은 몇 년이 지나야 변할 수 있겠느냐? “저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큰소리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 하나를 만나면 제대로 분별할 줄 모르고 심지어 따르기까지 하는데,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이냐?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여전히 분별할 줄 모른다. 그럼 이 주제는 여기까지 말하겠다. 이제 본론에 대해 얘기해 보자.

지난번 예배에서는 ‘가정에서 비롯되는 짐 내려놓기’ 중 부모의 기대와 관련된 방면의 내용을 교제했다. 그때 언급한 관련 원칙과 주요 주제는 이미 교제를 끝냈으니 이어서 ‘가정에서 비롯되는 짐 내려놓기’의 또 다른 방면의 내용, 즉 ‘후손에 대한 기대 내려놓기’를 교제하겠다. 이번에는 역할을 좀 바꿔 보자. 부모의 기대를 대하는 방면에 관한 내용은 사람이 자식의 관점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품는 여러 가지 기대와 자식을 대하는 갖가지 방법을 자식이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어떤 원칙들을 실행해야 하는지, 이는 부모에게서 비롯되는 각 방면의 문제를 자식의 관점에서 올바르게 다루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교제할 ‘후손에 대한 기대 내려놓기’라는 주제는 부모의 관점에서 자식에 관한 여러 방면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으로, 여기에도 배워야 할 공과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네가 자식으로서 부모의 기대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이런 상황에서 네가 지켜야 할 도와 너의 실행 원칙은 무엇인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물론 사람은 누구라도 부모가 될 기회가 있거나 이미 부모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이는 후손에 대한 기대, 그리고 태도와 관련 있다. 부모이든 자식이든 상대의 기대에 대해 각기 다른 원칙이 있어야 한다. 자식으로서 부모의 기대를 대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이 있듯 부모 역시 자식의 기대를 대할 때 지켜야 할 진리 원칙이 있다. 그럼 우선 생각해 보아라. 너희가 지금 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 지켜야 할 원칙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원칙이라고 말하면 너희에게는 조금 멀게 느껴지고, 주제가 조금 거창하고 심오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니 먼저, 네가 만약 부모라면 너의 후손에게 어떤 기대들을 가질지 얘기해 보겠느냐? (하나님, 만약 언젠가 제가 부모가 된다면 저는 무엇보다 자식이 건강하길, 건강하게 자라길 바랄 것입니다. 그 밖에도 자식이 나름의 이상을 가지고, 자기 인생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포부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말해, 자식이 잘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주로 이 두 가지입니다.) 자식이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부자가 되기를 바라진 않느냐? (그 역시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자식이 최소한 출세하여 뛰어난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의 우러름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건강하고, 일에서도 성공하고, 빠르게 출세하고, 평생 뜻대로 풀리는 것, 이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바라는 것이다. 이것 말고 후손에게 갖는 다른 기대는 없느냐? 자식이 있는 사람이 한번 말해 보아라. (자식이 건강하길 바랍니다. 평생 순탄하고 평안하게 살며 가정이 화목하면 좋겠고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했으면 합니다.) 또 있느냐? (만약 제가 언젠가 부모가 된다면 방금 말한 몇 가지 방면 외에, 아이가 말을 잘 듣고 철이 들었으면 좋겠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중에도 부모를 봉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꽤 중요한 문제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사람의 관념과 잠재의식 속에서 자식에게 거는, 비교적 전통적이고 대표적인 기대이다.

‘가정에서 비롯되는 짐 내려놓기’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후손에 대한 기대 내려놓기’이다. 부모라면 모두 자식에게 어느 정도 기대를 건다. 이 기대는 크든 작든, 가깝든 멀든 모두 자식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 살아가는 것, 또는 부모를 대하는 것에 대해 갖는 일종의 태도이자 구체적인 요구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요구들은 자식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해내야 하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전통 관념에서 보면, 부모의 명령은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걸 어기면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서도 아주 크고 무거운 짐을 짊어진다. 그럼 후손에 대한 부모의 이런 구체적인 기대들이 합리적인지 아닌지, 당연한 것인지 아닌지, 어떤 것들이 합리적이고 어떤 것들이 불합리한지, 어떤 것들이 정당하고 어떤 것들이 강제적이고 부당한지, 이러한 것들을 사람이 깨달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사람은 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무엇을 버리고 취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와 관점으로 부모의 기대를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지, 여기에도 사람이 깨닫고 지켜야 하는 진리 원칙이 있다. 이런 일들이 해결되지 않았을 때, 부모는 자주 이런 부담을 갖는다. 그는 자식과 후손에게 기대를 품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자 의무일 뿐 아니라 당연히 부모가 더욱 갖춰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자신의 후손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다면 그것은 후손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고 부모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자신은 책임을 다하는 좋은 부모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은 후손에 대한 기대를 다루는 일에서 자기도 모르게 자식에게 이런저런 요구가 생긴다. 다양한 시기, 다양한 상황에서 부모는 자녀 각자에게 서로 다른 요구를 가진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이런 생각과 부담을 가지고 있다 보니 옳든 그르든 이런 성문화되지 않은 규정에 따라 부모가 해야 할 일을 하게 된다. 사람은 이런 행동들을 일종의 의무와 책임으로 여겨 자식에게 요구하는 동시에 자식에게 그것을 달성하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이 일은 우리가 몇 단계로 나누어 교제하면 좀 더 명확해질 것이다.

부모는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부터 이미 그들에게 다양한 것을 요구한다. 물론 그 다양한 요구에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다양한 기대가 담겨 있기도 하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에게 각종 기대를 거는 동시에 자식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실현하기 위해 부모 자신도 몸소 실천하며 갖은 대가를 치르고 다양한 행동을 취한다. 그러므로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부터 부모는 자식에게 다양한 것을 가르치고 요구한다. 예를 들어, 자녀가 어릴 때부터 이렇게 얘기한다. “공부는 열심히 하고 많이 해야 해. 공부를 잘해야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고 남들한테 무시당하지 않지.” 또 어떤 부모는 자식에게 나중에 커서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심지어 아이가 겨우 두세 살일 때도 늘 이렇게 묻는다. “나중에 크면 네가 아빠 모실 거야?” 그럼 아이는 “네.”라고 대답한다. “엄마는?”이라고 물으면 아이는 “엄마도요.”라고 대답한다. “아빠를 사랑해, 엄마를 사랑해?” “아빠요.” “안 돼. 엄마를 사랑한다고 한 다음 아빠를 사랑한다고 해야지.” 그러면 아이는 부모로부터 이런 것을 배운다. 부모의 언행을 통한 가르침은 자식의 어린 마음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물론 그들에게 어느 정도 깨우침을 주기도 하는데 부모는 이 세상에서 그들을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자 그들이 가장 따르고 효도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물론 어린 자식 마음에 부모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까 부모 말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 주기도 한다. 동시에 어린 자식 마음에도 이런 생각이 생겨난다. 그것은 바로 부모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고 부모가 하는 일은 다 자식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식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인도적이든 비인도적이든 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 옳고 그름을 가리는 능력이 없는 나이일 때 부모의 언행을 통한 가르침은 사람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심어 놓는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명분으로 자식에게 이런저런 일을 요구할 수 있다. 비록 어떤 일들은 인성에 부합하지 않고 자식의 천성과 자질, 또는 기호에도 부합하지 않지만, 본인에게 아무런 주도권이나 자주적인 능력도 없는 상황에서 자식은 소위 부모의 기대와 요구에 대해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반항할 능력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부모 말에 무조건 따르고 부모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부모 마음대로 주무르고 부모가 어떤 길로 인도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래서 미성년자 시기에 부모가 하는 모든 것은 선의에서 비롯됐든, 아니면 별 뜻 없이 한 일이든 다 자식이 처신하고 행동하는 데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즉, 자식에게 온갖 사상 관점을 심어 주게 된다. 이런 사상 관점들은 심지어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 깊이 숨겨져 있어 성인이 된 뒤 그 사람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에, 나아가 그가 걸어가는 길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친다.

자식은 미성년자 시기에 부모가 자식에게 제공하는 생활 환경, 또는 유전이나 교육에 반항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 미성년자이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른바 미성년자는 독립적으로 문제를 사고할 수도, 시비를 판단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그저 부모의 지배에 맡길 수밖에 없다. 사람이 미성년자일 때는 부모가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부모는 이 사악한 시대에 사회의 흐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교육 방식과 사상 관점을 채택해 자식을 부추긴다. 예를 들면 현재 사회는 경쟁이 유독 치열한데, 부모는 사회의 각종 흐름과 여론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경쟁이 치열하다는 이런 정보를 받아들이고 재빨리 자식에게 전달한다. 부모가 받아들인 것은 사회의 경쟁이 치열하다는 일종의 현상이자 흐름이지만 느낀 것은 일종의 중압감이다. 부모는 중압감을 느낄 때 재빨리 자식을 떠올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사회는 경쟁이 너무 치열해요. 저희 때는 지금 같지는 않았는데 말이죠. 만약 자식이 예전의 우리처럼 공부하고 일하고 사회를 대한다면, 우리가 하던 식으로 각종 사람과 일을 대한다면 금세 이 사회에서 도태될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가 어릴 때부터 다잡아야죠. 아이가 출발선에서부터 뒤처지게 둘 순 없어요.” 지금처럼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누구나 자식에게 큰 희망을 걸기 때문에 부모는 사회에서 받은 이런 중압감을 재빨리 후손에게 전달한다. 그럼 후손은 이런 일들을 의식할 수 있겠느냐?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조금도 의식하지 못한다. 부모에게서 오는 이런 압박감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것인지, 이를 거절해야 하는지 아니면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부모는 아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는 바로 꾸짖는다. “넌 왜 이렇게 맹하니? 지금이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 세상인데, 넌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오늘부터 당장 유치원 다니자!” 아이는 몇 살부터 유치원에 가느냐? 어떤 아이는 서너 살부터 부모가 유치원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무엇 때문에 그러겠느냐? 지금 사회에는 아이가 출발선에서부터 뒤처지지 않게 아기 때부터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유행이다. 보아라. 어린아이들이 불행해지는데, 아이가 서너 살 때부터 부모는 유치원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어떤 유치원을 알아보겠느냐? 평범한 유치원에서는 선생님 한 명이 아이들을 데리고 늘 꼬리잡기 놀이를 하는데 이런 유치원은 안 되고 이중 언어 교육을 하는 귀족 유치원을 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언어를 배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아이는 모국어도 제대로 못 하는데 제2외국어까지 배워야 한다. 이는 아이를 괴롭히는 것 아니겠느냐? 하지만 부모는 뭐라고 하느냐? “아이를 출발선에서부터 뒤처지게 둘 수는 없어요. 지금은 아이가 한 살 때부터 집에 보모를 두고 아이를 공부시키는 부모도 있어요. 부모는 모국어로 얘기하고 보모는 제2외국어로 얘기하면서 아이에게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를 가르치죠. 우리 애는 벌써 네 살이에요. 벌써 나이가 조금 있어서 이제라도 가르치지 않으면 늦어요. 아이 교육은 일찌감치 시작해야죠. 유치원은 이중 언어를 가르치고, 선생님은 다 학사, 아니면 석사 출신인 곳으로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유치원은 너무 비싸잖아요.” 그럼 부모는 또 이렇게 말한다. “비싸도 괜찮아요. 지금 우리는 큰 집에 사는데 작은 집으로 이사 가면 돼요. 거실 하나에 방 세 칸짜리 집을 팔고 거실 하나에 방 두 칸짜리로 이사 가면 되죠. 그 돈으로 아이를 귀족 유치원에 보낼 거예요.” 좋은 유치원을 선택한 것으로도 모자라 여유 시간에는 또 과외 선생님을 초빙해 아이에게 올림피아드 수학을 가르친다. 아이가 선천적으로 싫어하더라도 공부해야 한다. 올림피아드 수학이 안 되면 춤을, 춤이 안 되면 노래를 배우게 한다. 노래도 안 되면 부모는 ‘얘는 체격이 좋고 팔다리가 기니까 모델은 할 수 있지 않을까?’라면서 아이를 바로 예술 학교에 보내 모델 준비를 시킨다. 이렇게 아이는 네다섯 살부터 기숙 학교에 살기 시작하고, 집은 방 세 칸에서 두 칸으로, 다시 방 두 칸에서 한 칸으로, 결국은 방 한 칸에서 셋방으로 바뀐다. 아이의 과외 수업은 갈수록 많아지고 집 크기는 갈수록 작아진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온 가족이 남쪽으로 갔다 북쪽으로 갔다 하며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다가 결국에는 어디로 이사 가야 할지도 모르고, 아이는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도 몰라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에 빠진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아이가 출발선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또 아이가 앞으로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이 사회에 적응하여 나중에 좋은 직업과 안정적인 수입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모는 아이가 미성년자일 때부터 갖은 대가를 치른다. 어떤 부모는 능력이 좋아서 큰 사업을 벌이거나 높은 관직에 올라 자식에게 많은 것을 쏟아붓고 거액을 투자한다. 어떤 부모는 능력은 별로 뛰어나지 않아도 다른 사람처럼 아이를 귀족 학교에 보내고 각종 과외를 시키며 춤, 그림, 다양한 외국어와 음악을 배우게 해서 아이에게 많은 압박감과 고통을 준다. 아이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언제쯤 좀 놀 수 있을까? 나는 언제쯤 커서 어른처럼 마음대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나는 언제면 어른들처럼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될까? 언제면 잠깐 텔레비전 보면서 멍도 때리고 혼자서 어디라도 좀 돌아다닐 수 있을까? 언제면 부모님께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부모는 늘 이렇게 말한다. “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빌어먹고 살아야 해. 네 꼴을 좀 봐! 아직 놀기에는 너무 일러. 노는 건 나중에 해! 지금 놀면 나중에 변변치 못하게 살지만 나중에 놀면 실컷 재밌게 놀 수 있어.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말이야. 너 세계적인 부자들이 어렸을 때 노는 거 봤어? 다들 공부만 했지.” 부모는 거짓말만 한다. 부모가 봤느냐? 그들이 잘 알고 있느냐? 세계적으로 어떤 부자들, 갑부들은 대학도 나오지 않았다. 이게 사실이다. 부모는 가끔 자식에게 거짓말을 한다. 부모는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자식의 미래를 더 잘 통제하고 자식이 말을 잘 듣도록 하기 위해 어떤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물론 어떤 고생도 대가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자녀를 걱정하는 세상 부모 마음”인 것이다.

부모는 후손에 대한 기대를 실현하기 위해 자식에게 많은 기대를 건다. 그래서 그들은 말로 자식을 교육하고 지도하며 자식에게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동시에 실제 행동으로도 자식을 단속함으로써 자식이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이 지정한 궤적과 정해 놓은 방향에 따라 행동하며 생활하도록 한다. 자식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부모는 결국 이 말 한마디뿐이다. “너 내 말 안 들으면 후회할 거야! 지금 말 안 듣고 공부 열심히 안 해 놓고 나중에 후회하면 나 찾아오지 마. 왜 안 알려 줬냐고 나한테 따지지도 말고!” 한번은 우리가 일을 처리하러 어떤 빌딩에 갔는데 가구를 옮기는 짐꾼 두세 명이 힘겹게 계단을 오르고 있는 모습을 봤다. 맞은편에서는 한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내려오고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 장면을 보고 “짐 옮기고 있으니까 잠깐 비켜 주자.”라고 말할 것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상대방과 부딪치지 않고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서둘러 비켜서야 한다. 그런데 그 엄마는 이 상황을 보고는 기회를 틈타 상황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몇 마디 말을 나는 아직까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 엄마는 뭐라고 말했겠느냐?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들 짐 옮기는 거 봐. 얼마나 무겁고 힘들겠어? 저게 다 어렸을 때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지금 좋은 일자리를 못 구하니까 짐 옮기고 힘쓰는 일 하는 거야. 봤지?” 아이는 알 듯 말 듯 하면서도 엄마의 말이 옳다고 믿는 것처럼 보였고, 당황스러움과 두려움, 믿음이 섞인 순수한 눈빛을 내비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그 짐꾼 몇 명을 쳐다봤다. 그 엄마는 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둘러 아이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봤지? 너도 어렸을 때 열심히 공부 안 하면 커서 저렇게 짐 옮기고 힘쓰는 일 해야 먹고살 수 있어.” 이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어디가 옳지 않겠느냐? 어떤 기회든 놓치지 않고 설교조로 이야기한 것인데 네 생각에 이 말을 듣고 난 어린아이는 어떤 기분이겠느냐? 어린아이가 이 말이 옳은지 그른지 분별할 수 있겠느냐?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럼 아이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나중에 저렇게 힘쓰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이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힘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공부를 열심히 안 했구나. 나는 꼭 엄마 말대로 열심히 공부할 거야. 엄마 말이 맞아. 공부 안 하는 사람은 다 힘쓰는 일을 하게 돼 있어.’ 아이가 부모에게서 받아들인 이런 사상들은 그의 마음속 평생의 진리로 변한다. 네가 보기에 이 부모는 어리석지 않으냐? (어리석습니다.) 어떤 면에서 어리석으냐? 네가 이런 사실을 가지고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아이가 반드시 인재가 되겠느냐? 나중에 힘쓰는 일도 안 하고 고생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겠느냐? 네가 이런 일과 상황을 이용해 아이에게 겁주는 것이 바람직하겠느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는 아이 평생의 그늘이 될 것이다. 이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아이가 커서 부모의 이 말을 조금 분별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부모가 말한 그 이치가 아이의 마음속, 그리고 잠재의식 속에서 제거되기는 어렵다. 이는 사람의 사상을 어느 정도 현혹하고 얽매어 일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을 규정해 버린다. 미성년자인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대부분 자식이 미성년자 시기에 많은 것을 배우고 열심히 노력하여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그들을 위해 뭐든지 해 주고, 자신의 청춘, 시간, 세월, 그리고 건강과 정상적인 생활을 희생한다. 심지어 자식을 기르기 위해 자식이 학교에 다니는 기간 동안 함께 공부하며 자신의 직업과 과거의 소원, 게다가 신앙까지 포기하는 부모도 있다. 교회에도 미성년자인 자식이 장성하는 동안 함께하기 위해, 자식이 나중에 일에서 성공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순조롭게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늘 곁에 함께하며 자식을 기르는 부모가 적지 않다. 이들은 예배에 참석하지도, 본분을 이행하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들도 비록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요구가 있고 조금이나마 의지와 바람도 있긴 하지만, 자식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지 못해서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자식과 함께하기로 하고 피조물로서 자신의 본분도, 신앙에서 자신의 추구도 포기한다. 이는 가장 비참한 일이다. 어떤 부모는 자식을 배우, 화가, 작가, 과학자로 기르기 위해, 자식이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도 많은 대가를 치른다. 직장도 버리고 자신의 사업도 포기할 뿐 아니라 개인의 이상과 향락마저 포기해 가며 자식과 함께한다. 심지어 자식을 위해 자신의 혼인 생활도 포기한 채 이혼 후 홀로 자식을 부양하고 기르는 중임을 맡는데, 오직 자식에 대한 기대가 실현될 수 있도록 자신의 일생을 다 자식에게 걸고 자식의 미래에 바치는 부모도 있다. 또 어떤 부모는 자식이 나중에 출세하여 사회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많이 하고 무의미한 대가를 많이 치르면서 자신의 세월과 육체적 건강,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희생한다. 이는 한편으로 부모를 놓고 말하면 다소 무의미한 희생이고, 다른 한편으로 자식을 놓고 말하면 부모의 이런 행동 방식들은 미성년자인 자식에게 큰 중압감과 부담을 안겨 준다. 왜냐하면 부모가 치른 대가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금전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아니면 에너지 측면에서든 부모는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렀다. 미성년자인 자녀는 옳고 그름을 가릴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그저 부모가 이렇게 하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록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나름의 생각이 좀 있지만 여전히 부모가 하는 대로 따른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새 자식은 부모가 자신을 기르기 위해 이토록 큰 대가를 치렀으니 자신은 평생을 들여도 갚을 수도, 보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모가 자신을 기르고 자신과 함께하는 기간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부모에게 보답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부모를 즐겁게 하고 좋은 성적을 받아 부모를 만족게 하고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는 자녀가 미성년자일 때 이런 대가들을 치른 이후 자식에 대한 기대가 갈수록 커지면서 점차 자식에 대해 요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즉, 소위 부모가 치른 이런 대가와 헌신들을 받아들이고 나면 자식은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 좋은 성적으로 부모에게 보답해야 한다고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의 입장에서든, 아니면 자식의 입장에서든 이렇게 헌신을 하고 헌신을 받아들이는 관계하에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치는 점점 더 높아진다. 기대치가 점점 높아진다는 것은 듣기 좋게 말한 것이고, 실제로는 헌신과 희생을 많이 할수록 부모는 마음속 깊이 자식이 성공으로 그들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 동시에 자식이 그들에게 빚졌다는 생각을 점점 많이 하게 된다. 네가 많이 헌신하고 많이 바랄수록 너의 기대는 점점 높아지고 자식이 너에게 보답할 수 있을지에 대한 너의 기대도 점점 커진다. 미성년자인 후손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출발선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아이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해’에서 ‘커서 출세하고 사회에서 자리 잡아야 해’로, 자식에 대한 요구로 점차 변해간다. ‘너는 어른이 되어 사회에서 자리 잡고 나서도 근본을, 부모님을 잊어선 안 돼. 너는 가장 먼저 부모님께 보답해야 해. 넌 부모님께 효도해야 하고, 부모님께서 행복한 생활을 하시도록 해야 해. 왜냐하면 부모님은 이 세상에서 너의 은인이고 너를 기른 사람이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사회에서 자리 잡을 수 있는 것, 네가 누리는 이 모든 것, 네가 가진 이 모든 것은 다 부모님의 피땀으로 바꾸어 온 거야. 그러니 너는 여생을 바쳐 부모님께 보답하고 부모님께 진 빚을 갚고 부모님께 잘해 드려야 해.’라는 것이다. 이는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자식이 사회에서 자리 잡고 출세하길 바라는 부모의 기대가 변화한 것으로, 자식에 대한 정상적인 기대가 점차 자식에 대한 요구와 토색으로 변한 것이다. 아이가 미성년자일 때 만약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면, 반항하며 공부하기 싫어하거나 부모의 말을 듣기 싫어하고 부모를 거역한다면 부모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안 힘든 줄 알아?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이러는데? 다 너를 위해서 아니야? 내가 하는 모든 건 다 너를 위해서인데 넌 감사할 줄도 모르는구나. 넌 왜 이렇게 맹하니?” 이런 말들로 너를 협박하고 구속한다. 이런 방식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옳지 않다. 이는 부모의 ‘고상’한 부분이자 비열한 부분이다. 이런 말은 어떤 점에서 옳지 않겠느냐?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이런 기대와 양육은 모두 일방적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앞으로 출세하여 자신의 체면을 세우거나 나중에 자신에게 효도하도록 하기 위해 이것저것 배우라고 자식에게 압박을 가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모가 하는 모든 것은 다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하는 부모의 이기적인 방면은 제쳐 두고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부모가 자식에게 주입하는 이런 사상들, 그리고 자식에게 가하는 압박, 자식에게 무언가를 배우도록 요구하는 것, 커서 어떤 직업에 종사해야 하고 어떤 성취를 이루어야 하는지 요구하는 것들에 대해 얘기하자면, 부모의 이런 행동 방식들은 어떤 성질이겠느냐? 우선 부모가 무엇을 위해서 이러는 것인지, 이런 행동 방식들이 적절한지는 일단 평가하지 않겠다. 먼저 부모의 행동 방식이 어떤 성질인지 교제하고 해부하고, 본질에 대한 해부를 통해 더욱 정확한 실행의 길을 찾을 것이다. 이 관점에서 이 방면의 진리를 교제하고 깨닫는다면 이는 정확할 것이다.

우선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이런 요구들, 이런 행동 방식들이 옳은지 살펴보자. 과연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그럼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이런 행동 방식들은 결국 근본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부모의 주관적인 의식 속에 자식의 미래에 대한 그들의 여러 가지 예상, 계획, 그리고 규정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런 기대가 생긴 것이다. 이런 기대의 부추김을 받으며 그들은 자식에게 여러 가지 기능이나 연기, 춤, 그림 등을 배우도록 요구한다. 그리하여 자식이 인재로 자라나 하류층이 아닌 상류층이 되고, 졸병이 아닌 고위 관료가 되며, 세계 500대 기업에서 일하는 사장, CEO, 임원이 되는 등등 말이다. 이것들은 모두 부모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그럼 자식은 미성년자일 때 부모가 기대하는 이런 내용들에 대해 개념이 있겠느냐? (개념이 없습니다.) 아무런 개념도 없고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겠느냐? 어린아이는 학교에 가서 글자를 깨치고 열심히 공부하며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어린아이가 아는 것은 그저 매일 착실하게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집에 돌아와 숙제를 완성하는 것뿐이다. 그것 말고 하는 일들이라고는 놀고먹고 상상하고 꿈꾸는 것 등이다. 아이는 미성년자일 때 인생의 길 위에 놓여 있는 미지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없고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다. 성인이 된 이후와 관련되는 예상이든 정의든 그것은 모두 부모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이런 그릇된 기대들은 자식과는 관련이 없다. 자식은 그저 부모의 기대 속에서 이런 기대들의 본질이 대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할 뿐이다. 부모의 이런 기대들은 무엇에 근거하겠느냐? 모두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사회와 세상에서 비롯되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모두 자식이 이 세상과 사회에 적응하고 세상과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자식이 사회에서 자리 잡아 안정적인 직업, 가정, 그리고 미래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부모는 후손에게 여러 가지 주관적인 기대가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컴퓨터 공학자가 꽤 유행하다 보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중에 제 아들도 컴퓨터 공학자 시킬 거예요. 그 일을 하면 돈도 많이 벌고, 하루 종일 컴퓨터를 갖고 다니면서 컴퓨터 공학을 다룰 테니 부모도 체면이 서잖아요!” 아이가 모든 사물에 대해 아무런 개념도 없는 상황에서 부모가 자식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잘못된 것입니다.) 부모는 완전히 어른의 시선으로, 그리고 세상사에 대한 견해, 관점, 기호에 따라 자식에게 기대를 거는 것인데, 이는 주관적인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듣기 좋게 말하면 주관적인 것이지만 사실은 무엇이겠느냐? 이 주관적인 것을 또 다른 방면에서 해석하면 무엇이겠느냐? 이기적인 것 아니겠느냐? 강요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어떤 일, 어떤 직업을 좋아하고, 사회에서 자리 잡는 것, 체면이 서는 것, 관직에 오르는 것, 돈이 많은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자식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한다면, 그런 사람이 되고 그런 길을 걷도록 한다면 앞으로 그런 환경에서 생활하며 그런 일에 종사하는 것을 자식이 좋아하겠느냐? 자식에게 어울리겠느냐? 그의 운명은 무엇이겠느냐? 그에 대한 하나님의 안배와 주재는 무엇이겠느냐? 너는 알고 있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것들은 상관없습니다. 부모인 제가 좋아하면 그만이죠. 제가 좋아하니까 자식에게 이런 기대를 거는 거예요.” 이는 너무나 이기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무도 이기적이다! 듣기 좋게 말하면 주관이 뚜렷하고 자주적이지만 사실은 무엇이겠느냐? 이기적이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는 자식의 자질과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개인의 운명과 일생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안배하는지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기호, 타산, 그리고 계획을 자식에게 강요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강요하지 않으면 아이는 너무 어려서 이해하지 못해요. 이해할 때가 되면 너무 늦어 버리죠.” 정말 그렇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늦어 버린다면 그건 그의 운명이지 부모의 책임이 아니다. 네가 이해한 것을 자식에게 강요한다면 네가 이해했다고 해서 자식도 일찍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인생의 길을 선택할지, 어떤 직업을 선택할지, 사람의 일생이 어떨지 등 이런 일들을 자식이 언제 이해할지는 부모의 교육과 관련 없다. 그에게는 자기의 길이 있고 자기의 리듬과 규칙이 있다. 네가 생각해 보아라. 자식은 어릴 때 부모가 어떻게 교육하든 사회에 대한 인지가 전혀 없다. 그 자신의 인성이 성숙해지면 사회의 경쟁, 복잡함과 어두움, 온갖 불공평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부모가 어릴 때부터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부모가 어릴 때부터 “사람을 사귈 때는 만일에 대비해야 해.”라고 가르쳐도 자식은 이것을 그저 하나의 도리로 여길 뿐이다. 그가 진정으로 부모의 이 말에 따라 행동할 때는 그 자신이 진정으로 깨달았을 때이다. 그가 깨닫지 못한 때에는 부모가 아무리 가르쳐도 그건 그저 하나의 도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부모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은 경쟁이 치열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엄청난 중압감을 느껴. 만약 아기 때부터 다잡지 않으면 아이는 나중에 고생할 거야. 고통스러울 거라고.’ 이게 말이 되겠느냐? (되지 않습니다.) 너는 자식이 나중에 받을 그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그가 미리 이 중압감을 견디게 하고, 세상 물정을 모를 때부터 중압감을 견디게 하는 것인데, 이는 자식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 아니겠느냐? 이게 자식을 위한 것이겠느냐?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게 더 낫다. 이해하지 못하면 적어도 몇 년 동안은 편안하고 즐겁게, 순수하고 단순하게 살 수 있다. 그가 일찍 이해하게 된다면 네 생각에는 그게 복이겠느냐 화이겠느냐? (화입니다.) 이는 화이다.

사람이 어떤 나이대에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는 사람의 나이와 인성의 성숙도에 근거하는 것이지 부모의 가르침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미성년자일 때 사람은 놀고 간단한 지식을 배우고 학교 교육을 조금 받고, 다양한 일을 배운다. 또 친구를 어떻게 사귀는지, 어른과 어떻게 어울려 지내는지, 주위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등도 배운다. 사람은 미성년자일 때 미성년자가 하는 일을 해야 하지 어른이 견뎌야 할 그 어떤 중압감이나 불문율, 또는 복잡한 일을 견뎌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 미성년자에 대한 정신적 해악이지 복이 아니다. 네가 이런 어른의 일들을 일찍 알게 될수록 너의 어린 마음이 받는 충격은 더욱 커진다. 그런 일들은 어른이 된 이후의 네 인생이나 생활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런 일들을 너무 일찍 알거나 마주하였기 때문에 그것들은 너의 어린 마음에 일종의 부담이자 무형의 그늘로 변해 버리고 심한 경우 너는 그것들을 평생 떨쳐 낼 수 없다. 생각해 보아라. 사람이 만약 아주 어린 나이에 끔찍한 일에 대해 들었는데 그것이 네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고, 네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의 일이라면 그 화면, 또는 그 일, 심지어 거기에 관련된 사람, 일, 그리고 말들까지 일생 동안 너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그늘로, 너의 성격뿐만 아니라 네가 처신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예를 들어, 예닐곱 살짜리 아이라면 다 조금씩은 장난기가 있기 마련이다. 수업 시간에 친구와 귓속말을 해서 선생님께 한바탕 꾸지람을 듣는데 선생님이 잘못한 사실을 가지고 혼내는 게 아니라 인신공격을 하며 아이에게 삐죽한 입에 볼은 움푹 꺼져서 도둑놈처럼 생겼다고 욕하고, 심지어 “네 꼴을 좀 봐! 넌 평생 그 모양일 거야! 너 열심히 공부 안 하면 막노동이나 할 놈이야. 나중에 구걸이나 해야 할 거다! 넌 딱 봐도 도둑놈 같아. 넌 싹수부터 도둑놈이야!”라고 말했다고 하자. 비록 아이는 이 몇 마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선생님이 왜 이렇게 말하는지, 선생님의 말이 사실인지도 알지 못하겠지만 이런 인신공격적인 말들은 그의 마음속에서 무형의 마수가 되어 그의 자존심을 깊이 건드리고 그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다. 선생님이 내뱉은 “넌 삐죽 입에 볼은 움푹 꺼져서 꼭 도둑놈처럼 생긴 데다 머리는 주먹만도 못 하구나!”와 같은 이런 인신공격적인 말들은 평생 동안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가 직업을 선택할 때, 상사와 동료를 대할 때, 형제자매를 대할 때 선생님이 예전에 그에게 했던 인신공격적인 말들이 수시로 튀어나와 그의 감정과 생활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물론 너에 대한 부모의 부당한 기대들, 너에게 전달되는 감정 또는 정보, 말, 사상 관점 등 역시 너의 어린 마음속에 어느 정도 그늘을 만들 것이다. 비록 부모의 주관적인 의식에서 보면 그들은 전혀 악의가 없지만 부모의 무지 때문에, 부모가 패괴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식을 대할 때 그들은 정당하고 원칙에 부합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세상의 흐름을 좇아 너를 대할 수밖에 없는데, 그로 인한 궁극적인 결과는 너에게 갖가지 부정적인 정보와 부정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다. 너에게 아무런 분별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부모가 하는 말, 부모가 주입하고 권장하는 각종 그릇된 사상은 선입견으로 작용하여 네가 일생 동안 추구하고 분투하는 목표로 변한다. 비록 네가 미성년자일 때 부모가 너에게 품는 갖가지 기대는 너의 어린 마음에 충격과 상처를 주지만 그래도 너는 부모의 이런 기대와 너를 위한 부모의 다양한 헌신 아래에서 살아가며 그들의 뜻을 깨닫고 그들의 여러 은혜를 받아들이며 그에 감사해한다. 너를 위한 그들의 다양한 헌신과 희생을 받아들이고 나면 너는 마음속 깊이 부모를 볼 면목이 없고 부모에게 빚졌다고 느끼며 어른이 되면 반드시 부모에게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무엇에 보답하려는 것이냐? 너에 대한 그들의 불합리한 기대에 보답하려는 것이냐? 네가 미성년자일 때 그들이 너에게 준 상처에 보답하려는 것이냐? 이는 다소 흑백이 전도된 것 아니겠느냐? 사실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보면 너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그저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것일 뿐 미성년자가 갖추어야 할 것이 전혀 아니고, 실행하고 살아 내야 할 것도 아니며, 미성년자에게 필요한 것도 아니다. 부모는 세상의 흐름을 좇기 위해,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이 세상의 발전에 발맞추기 위해 너도 그들을 따르고 그들처럼 이런 중압감들을 견디도록, 이런 사악한 흐름을 받아들이고 좇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의 간절한 기대하에 많은 자식들이 열심히 여러 가지 기예를 배우고 각종 수업을 듣고 지식을 습득한다. 처음에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에서 부모가 이루기를 기대하는 목표를 자발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이 미성년자일 때는 부모의 기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점차 어른이 된 이후에는 부모의 주관적인 의식 속 기대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며 이런 중압감과 사회에서 비롯되는 현혹, 통제, 결박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요컨대 수동적인 태도에서 능동적인 태도로 점차 변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부모는 흡족해한다. 자식 스스로도 마음속이 평안하다고 느끼는데, 부모에게 떳떳하고 드디어 부모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으며 자기도 다 컸다고 느끼는 것이다. 단순히 다 커서 어른이 된 것이 아니라 부모가 보기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고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비록 어른이 된 후 부모의 눈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데 성공했고, 겉으로 보기에 부모의 헌신에도 어느 정도 보답했으며, 너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물거품이 되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떻겠느냐? 너는 성공적으로 부모의 꼭두각시가 되었고 부모에게 엄청난 빚을 졌으며, 부모에게 보여 주기 위해, 그들의 체면을 세우고 명예를 빛내기 위해 남은 인생을 바쳐 너에 대한 부모의 기대를 실현하는 데도 성공한 것이다. 또한 너는 부모를 흡족게 하는 데 성공하여 부모의 자랑이 된 것이다. 부모는 어디를 가나 네 얘기를 할 것이다. “제 딸은 어느 어느 회사 매니저예요.”, “제 딸은 어느 어느 유명 브랜드 디자이너예요.”, “제 딸은 외국어 몇 급이고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해요. 어느 어느 언어 통역사예요.”, “제 딸은 컴퓨터 공학자예요.” 너는 부모의 자랑이 되는 데 성공했지만 동시에 부모의 그림자가 되는 데도 성공했다. 왜냐하면 너는 같은 방식으로 너의 후손을 교육하고 기를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네 부모가 너를 성공적으로 길러 냈다고 생각하여 네 부모의 교육 방식 그대로 너의 후손을 기를 것이다. 그럼 너의 후손은 너와 같은 비극과 비참한 처지를 견디고 너처럼 부모가 주는 상처를 견뎌야 할 것이다.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부모가 자식에 대한 기대를 실현하기 위해 하는 모든 것은 다 양심과 이성에 위배되는 일, 자연 규칙에 위배되는 일, 더욱이 하나님의 예정과 주재에 위배되는 일이다. 미성년자는 비록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과 문제를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없지만 그의 운명은 여전히 하나님이 주재하는 것이지 부모가 주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매한 부모는 사상 의식 속에서 자식에게 기대를 품을 뿐 아니라 행위적인 측면에서 더 많이 행동하고 희생하며 대가를 치른다. 돈이든 시간이든 에너지든, 이런 것들은 상관하지 않고 자식을 위해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내키는 일이라면 전부 한다. 이런 일들은 비록 부모가 자원해서 하는 것이지만 인도적인 것이 아니고 부모가 다해야 하는 책임도 아니다. 이는 이미 부모의 능력과 부모가 다해야 하는 책임의 범위를 넘어섰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왜냐하면 부모는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부터 그들의 미래를 계획하고 통제하며 결정하려는 시도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리석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한 사람을 평범한 노동자로 정해 놓으면 이번 생에 그는 얼마 되지도 않는 기본적인 임금이나 벌어 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의 부모는 기어코 그를 유명 인사, 부자, 고위 관료로 만들기 위해 그가 미성년자일 때부터 그의 미래를 계획하고 안배해 두며, 그를 위해 소위 다양한 대가를 치르며 그의 인생과 미래를 통제하려고 한다. 이는 어리석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식이 비록 학습 성적이 뛰어나 대학에도 진학하고 어른이 된 후 다양한 기능을 배워 전문 기술을 가진다고 해도 결국 일자리를 구할 때는 아무리 노력해 봤자 평범한 노동자에 그칠 뿐이다. 운수가 좋아도 기껏해야 작업반장 정도인데 그것은 괜찮은 편이다. 그래 봤자 결국 기본임금밖에 못 받고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가 요구하는 고위 관료나 부자가 받는 만큼의 임금은 받을 수 없다. 부모는 늘 그가 빠르게 출세하여 큰돈을 벌고 고위 관직에 올라 자기도 덕을 좀 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는 어릴 때 성적도 매우 뛰어나고 말도 아주 잘 들었다. 부모도 그를 위해 상당히 많은 대가를 치렀으며 그는 커서 대학에도 진학했다. 그런 그가 이번 생에 겨우 노동자나 될 운명이라고 부모가 생각이나 했겠느냐? 그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정말로 고생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부모는 집도 팔고 땅도 팔고 가산도 판다. 심지어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신장을 파는 부모도 있다. 자식이 반대하면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신장이 두 개라서 하나를 떼어 내도 하나가 남잖아. 엄마는 나이가 많아서 신장 하나면 충분해.” 이 말을 듣고 난 아이는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저 대학교 안 갈래요. 엄마가 신장을 팔게 둘 순 없어요.” 그럼 부모는 이렇게 말한다. “안 간다니? 너 이거 거역하는 거야! 불효라고! 부모가 뭘 위해서 신장을 팔겠어? 다 나중에 너 출세하라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 자식은 듣고는 감동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럼 파세요. 부모님을 저버릴 수는 없죠.” 결국 정말로 팔고 만다. 어머니는 신장 하나와 자식의 미래를 맞바꾸었지만 그는 겨우 노동자가 되었을 뿐 출세하지 못했다. 그럼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해 신장을 팔아 맞바꾼 것이 그저 노동자일 뿐인데 이게 적절하겠느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그의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겨우 노동자가 될 운명인가 봐. 이럴 줄 알았으면 신장까지 팔아 가며 너를 대학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그냥 바로 노동자가 되면 그만이었잖아? 대학은 뭐 하러 갔나 몰라!” 늦었다! 그러게 너는 그때 왜 그렇게 어리석었냐? 너는 그때 왜 그렇게 자식이 관직에 오르고 돈을 많이 벌기를 바랐느냐? 그건 네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서 그런 것이니 네 잘못이다! 너는 자식을 위해 많은 대가를 치렀지만 그게 자식이 너에게 빚진 것이겠느냐? 그건 자식이 너에게 빚진 게 아니라 네가 자원한 것이니 누구 탓을 하겠느냐! 신장 하나를 파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두 개를 팔더라도 그 역시 네가 자원한 것이다.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어떤 사람은 각막을 팔고 피를 판다. 또 어떤 사람은 전 재산을 털고 가산까지 팔아 버린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겠느냐? 피 좀 팔고 장기 좀 팔면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고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만 정말 그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너무도 어리석다! 눈앞의 성공과 이익에만 급급하고 명예와 이익 때문에 이성을 잃은 것이다. 너는 늘 자신의 인생이 그냥 이러하니 희망을 후손에게 걸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후손의 운명이 꼭 너보다 나으리라는 법이 있겠느냐? 후손이라고 빨리 출세할 수 있겠느냐? 너와 다를 게 있겠느냐? 왜 그리 어리석은 것이냐? 너는 네가 자식에게 높은 기대를 가지고 있으면 자식이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절대로 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사람의 운명은 부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자식이 거지가 되길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자식이 거지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자식이 빨리 출세하여 사회 상류층에서 지위가 높은 관리가 되도록 할 필요도 없다. 사회 상류층 사람이 된다고 좋을 게 뭐가 있겠느냐? 빨리 출세한다고 좋을 건 또 뭐냐? 그건 다 수렁일 뿐 별달리 좋은 일도 아니다. 유명 인사, 위대한 인물, 출중한 사람, 지위와 신분이 높은 사람이 되는 게 좋은 일이겠느냐? 평범한 사람이 가장 편안하게 산다. 생활이 조금 빈곤하고 힘들며 피곤하더라도, 먹고 입는 게 조금 부실하더라도 나쁠 게 뭐가 있겠느냐? 최소한 한 가지는 보장된다. 너는 사회 상류층의 흐름 속에서 살지 않으니 최소한 죄를 덜 저지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도 덜 할 것이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크거나 많은 시험이 닥치지 않는다. 비록 너의 생활은 다소 고생스럽겠지만 최소한 마음은 지치지 않는다. 생각해 보아라. 노동자는 하루 세끼만 보장되면 충분하지만 관직에 오른 자는 다르다. 늘 다퉈야 하고 언제 자신이 관직에서 물러나야 할지도 알 수 없다. 물러나는 게 끝이 아니라 자신이 미움을 산 사람이 찾아와 따지면 괴롭힘을 당하기도 한다. 명인, 위인, 부자는 다 무척 피곤하게 산다. 부자는 나중에 지금처럼 돈이 많지 않으면 그런 생활을 견디지 못할까 봐 늘 두려워한다. 명인은 자신의 인기가 사라질까 봐 늘 걱정하며 항상 인기를 유지하고 싶어 하고 이 시대와 흐름에서 도태될까 봐 걱정한다. 다들 얼마나 피곤하게 사느냐! 부모는 항상 이런 것들을 간파하지 못하고 자식을 바람이 세고 파도가 높은 위험한 곳으로 내몰고, 범의 아가리와 수렁으로 밀어 넣으려고 한다. 부모가 나쁜 의도를 품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부모가 나쁜 의도를 품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 너희는 듣기 싫어할 것이다. 부모의 기대가 너희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인정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를 크게 해쳤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사람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부모님은 저를 위해서 그러신 거예요.” 너는 부모가 너를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너한테 좋은 게 뭐가 있었느냐? 부모가 너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네가 긍정적인 사물을 얼마나 깨닫도록 해 주었느냐? 부모가 너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너의 그릇되고 불량한 사상 관점을 얼마나 바로잡아 주었느냐? (없습니다.) 그럼 이제 이런 것들을 간파할 수 있지 않겠느냐? 부모의 기대가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느냐?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의 본질을 해부해 보면, 부모의 기대는 이기적이고 인성에 위배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부모의 책임과도 관련이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강압적으로 여러 가지 기대를 품는 것, 강제로 다양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소위 책임이란 무엇이겠느냐? 부모가 최소한 다해야 하는 책임은 너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나쁜 사람이 되지 말고 선량해야 한다고 교육하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너를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최소한의 책임이다. 그 밖에 너의 나이, 네가 견딜 수 있는 정도, 너의 자질과 취미에 근거해 너에게 적합한 어떤 지식과 재주 등을 익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보다 더 훌륭한 부모는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했고 이 우주에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식에게 알게 하며, 그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인도하고, 성경 이야기도 좀 들려준다. 그가 어른이 된 후 세상의 흐름을 좇고 각종 복잡한 인사 관계에 빠져 이 세상, 이 사회의 갖가지 흐름에 짓밟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길 바란다. 부모가 다해야 하는 책임은 부모의 기대와는 관련이 없다. 부모가 다해야 하는 책임은 바로 부모라는 역할을 맡아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그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인도하고 그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또한, 자식의 육적인 생활 방면에서 그의 의식주를 제때 살피는 것, 또는 그가 아플 때 신속히 보살펴 주는 것이다. 아이가 아플 때 치료가 필요하면 치료를 해야 한다. 그를 상관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가 아픈 걸 보고도 그에게 “학교는 계속 가야지. 공부도 계속 해야 하고. 숙제도 빼먹으면 안 돼. 많이 빼먹으면 수업을 못 따라가니까.”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그에게 휴식이 필요하면 휴식을 취하도록 해야 하고, 그가 아프면 몸이 회복하도록 보살펴 주어야 한다. 이는 부모의 책임이다. 한편으로는 그의 몸이 건강하도록 잘 보살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이 건강하도록 지도하고 교육하며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은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이지 자식에게 강요하는 어떤 비현실적인 기대나 요구가 아니다. 한 방면은 마음에 필요한 것이며 다른 한 방면은 육적인 생활에 필요한 것으로, 부모는 이 두 방면에서 모두 책임을 다해야 한다. 겨울에는 그가 추위에 떨지 않도록 그에게 생활 상식들을 알려 주어야 한다. 감기에 걸리는 상황, 차가운 음식을 먹으면 배가 아프기 때문에 따뜻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 날씨가 추워지면 바람 부는 곳에서 함부로 옷을 벗거나 바람을 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 그가 스스로 건강을 챙길 줄 알도록 해야 한다. 한편, 아이의 어린 마음속에 자신의 미래에 대해 유치하고 성숙하지 못한 생각들이 생기거나 극단적인 사상들이 생기면, 부모는 발견 즉시 강제로 억압하지 말고 제때 올바르게 인도해야 한다. 그가 그것들을 표출하고 털어놓아 진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책임을 다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보살펴 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끌고 바로잡아 주며 올바른 사상 관점으로 지도하는 것이다. 부모가 다하는 책임은 사실 후손에 대한 부모의 기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너는 그가 어른이 된 후 건강하길 바라도 되고, 그가 어른이 된 후 인성과 양심, 그리고 이성을 갖추기를 기대해도 되며, 혹은 그가 너에게 효도하기를 바라도 괜찮다. 그러나 그가 어른이 된 후 어떤 유명 인사, 위대한 인물이 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고, 아이에게 “옆집 아이 샤오밍(小明)은 얼마나 말을 잘 듣니!”와 같은 말을 자주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네 아이는 그저 네 아이일 뿐이다. 네가 다해야 하는 책임은 그에게 옆집 샤오밍이 얼마나 착한지 알려 주어 그가 옆집 샤오밍을 본받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부모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르다. 사람마다 사상 관점, 취미와 관심사, 자질, 성격이 서로 다르고, 또한 인성 본질이 선량한 사람이 있는 반면 흉악한 사람도 있다. 선천적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타고나길 말 수가 적어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 해도 답답해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만약 책임을 다하고 싶다면 자기 아이의 성격, 성품, 취미, 자질, 그리고 인성에 필요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어른인 자신의 세상과 명리에 대한 추구를 자식에 대한 기대로 변모시켜서는 안 되고, 사회에서 비롯되는 명리에 속하고 세상에 속하는 이런 것들을 자식에게 강요해서도 안 된다. 듣기 좋게 말하면 자식에 대한 기대지만 사실 이는 자식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명백히 자식을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고 마귀의 품 안으로 떠미는 것이다. 만약 네가 정말로 부모의 자격을 갖췄다면, 너는 자식의 몸 건강과 마음 건강에 대해 책임을 다해야 하지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자신의 바람을 그들에게 강요하여 그들의 어린 마음이 미성년자일 때 견뎌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을 견디도록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네가 정말로 그들을 사랑하고 아낀다면, 네가 정말로 그들에게 책임을 다하고 싶다면 너는 그들의 몸이 건강하도록 그들의 몸을 잘 보살펴야 한다. 물론, 어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건강하지 않다. 부모가 정말로 형편이 된다면 그에게 영양제를 많이 먹이거나 한의사, 영양사에게 자문하여 그들을 별도로 좀 더 보살필 수도 있다. 그 밖에 그들이 미성년자일 때 모든 연령대, 그러니까 유년기와 아동기에서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성격 변화와 취미 변화, 그리고 인성 탐구 방면에 필요한 것에 대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의 심리적인 변화와 잘못된 인식, 그리고 인성에 필요한 일부 알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겪어 본 사람으로서 자신의 소감, 경험, 교훈을 활용해 그들을 긍정적이고 인간적으로 지도하고 도와주며 공급해 주어야 한다. 그런 다음 그들이 모든 연령대에서 순조롭게 성장하도록, 시행착오를 겪거나 길을 잘못 들지 않도록, 과격해지지 않도록 그들의 어리고 혼란스러운 마음이 충격과 상처를 받았을 때는 제때 치유해 주고 부모의 관심, 사랑, 보살핌, 그리고 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부모가 다해야 하는 책임이다. 그들이 미래에 대해 어떤 계획이 있는지에 관해서는, 교사가 되고 싶은지, 화가가 되고 싶은지, 아니면 관직에 오르고 싶은지 등 이런 것들은 만약 올바른 것이라면 그들을 격려해 주어도 되고 부모 자신의 여건, 교육 수준, 자질, 인성, 가정 형편 등에 따라 그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과 지원을 해 주어도 괜찮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 범위를 넘어서서 차나 집을 팔고 신장이나 피를 팔 필요는 없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저 부모가 능력껏 그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을 주면 된다. 만약 아이가 “저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부모는 “네가 대학에 가겠다면 나도 찬성해. 반대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 집은 형편이 좋지 않단다. 내가 이제부터 매일 돈을 얼마만큼 벌어야 네 1년 치 대학 등록금을 댈 수 있어. 만약 그때 가서 벌어 놓은 돈이 충분하다면 대학에 가고, 부족하다면 네가 알아서 하렴.”이라고 말하면 된다. 부모와 자식은 이렇게 합의를 보아야 한다. 함께 상의하고 공감대를 형성한 다음 자녀가 원하는 미래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물론 미래에 대해 자녀가 가진 어떤 타산이나 계획이 실현될 수 있도록 부모가 충분히 도와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다. “나는 내 아이를 볼 면목이 없어. 내가 능력이 없어서 아이를 고생시키네. 다른 집 애는 대학 가서 맛있는 거 먹고 명품 옷 입고 승용차 타고 다니면서 집에 올 때도 늘 비행기를 타는데, 우리 애는 기차를 타도 일반석에나 앉아야 하고 침대칸에도 못 타는 처지야. 부끄러워서 우리 애 얼굴을 볼 수가 없어!” 너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 없다. 네 형편이 그러한데, 너는 신장을 팔아도 자식을 대학에 보낼 형편이 안 되니 그냥 운명을 받아들이거라. 하나님이 너에게 그런 환경을 마련해 준 것이니 너는 자식에게 전혀 참회할 필요 없다. “내가 미안하구나. 나중에 네가 효도 안 해도 엄마는 원망하지 않을게. 엄마, 아빠가 무능해서 너에게 좋은 생활 환경을 주지 못한 거니까.”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부모는 그저 책임을 다하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자신의 최선을 다하여 자식이 심적으로나 육적으로 모두 건강하도록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소위 건강은 최선을 다하여 그가 긍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하고, 삶과 인생을 대할 때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며 낙관적인 생각이나 태도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자식은 근심거리 하나 생겼다고 바로 울며불며 난리를 피우고 목매달아 죽는다고 야단법석을 떨면서 부모를 성가시게 해서는 안 된다. 또 무능하고 나약하며 돈 못 번다고 부모를 욕하면서 “다른 부모 좀 봐요. 승용차도 몰고 호화 주택에 살면서 유람선 타고 유럽 여행도 다니는데, 우리는 이 지역도 한 번 못 벗어나 보고 고속 열차도 한 번 못 타 봤잖아요!”라고 말하는 것도 금물이다. 그가 만약 이렇게 울며불며 난리를 피우면 너는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너는 이렇게 말하면 된다. “네 말이 맞아. 엄마, 아빠는 말 그대로 무능해. 너는 이런 가정에서 태어났으니 그냥 운명을 받아들이렴. 부모한테 억지 쓰지도, 널 위해 뭘 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말고 능력 있으면 네가 나중에 직접 돈을 벌어. 우리는 힘닿는 데까지 책임을 다했으니 너에게 빚진 거 없어. 나중에 언젠가 너도 부모가 되면 이렇게 할 거야.” 그가 부모가 되면 부모가 돈을 벌어 자신을 먹여 살리고 온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에게 사람됨의 도리를 좀 알도록 해야 한다. 만약 그가 받아들일 수 있다면 너 또한 네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는 길,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인 올바른 사상 관점들을 그들에게 교제해 주어야 한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자 하여 너와 함께 하나님을 믿는다면 더욱 좋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너는 그저 책임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잔소리를 늘어놓고 걸핏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에 관한 글귀와 도리들을 이야기하며 그들에게 설교조로 얘기하지 마라. 그럴 필요 없다. 비록 그들은 믿지 않더라도 그들이 너를 지지하기만 한다면 너희는 그래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고, 무슨 일이 있으면 얘기도 하고 상의도 할 수 있다. 어찌 됐든 너희는 혈연관계가 있으니 자식과 원수가 되지 말고 자식에게 원망도 품지 마라. 그가 만약 기꺼이 너에게 책임과 효도를 다하고 부모의 말을 듣는다면 너는 그와 혈육 관계를 유지하고 정상적으로 왕래하면 된다. 신앙에 대한 견해와 관점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늘 이 일에 관해 그들을 저주하고 욕할 필요 없다. 그럴 필요 없다. 혈기를 부릴 필요도 없고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마치 엄청난 일인 것처럼, 마치 네가 목숨과 넋을 잃은 것처럼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그들이 믿지 않으면 자연히 그들이 선택한 가야 할 길이 있는 것이다. 너 역시 네가 가야 할 길이 있고 네가 이행해야 할 본분이 있다. 이는 그들과 관련이 없다. 그들이 믿지 않아도 강요할 필요 없다.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하나님이 아예 그들을 택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만약 하나님이 아예 그들을 택하지 않았는데 네가 구태여 그들에게 믿도록 강요한다면 그건 네가 무지하고 패역한 것이다. 물론 만약 하나님이 그들을 택했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면 네가 지금 그들에게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 역시 너무 이른 것이다. 하나님이 행사하려고 하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주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이 그가 믿도록 안배한 것이라면 그건 하나님의 말 한마디, 생각 하나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만약 하나님이 그가 믿도록 안배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는 감동을 받지 못한다. 그가 감동을 받지 못하면 네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소용없다. 그가 믿지 않는다고 해도 네가 그에게 빚진 것이 아니다. 그가 믿는다고 해도 그게 너의 공로인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와 자식이 신앙상의 공통된 목표가 있는지, 또는 서로 뜻과 생각이 일치할 수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결국 너는 책임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네가 책임을 다한다고 해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도 아니다. 그가 믿지 않는다고 해서 네가 그에게 빚진 것도 아니다. 너는 책임을 다했으니 그만하면 된 것이다. 관계를 변함없이 유지하고 그동안 지내던 대로 지내면 된다.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네가 도와줄 수 있는 데까지 도와주어라. 만약 네가 물질적으로 도와줄 형편이 되면 도와주어라. 정신적으로 또는 사상적으로 그들의 사상 관점을 바로잡아 줄 수 있고 그들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들을 어느 정도 지도하고 도와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아무튼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부모가 다해야 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으로, 자식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자식의 취미와 포부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만약 그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며 범죄를 저지르려고 한다면 너는 엄하게 단속해야 하며 꾸짖고 벌하는 것도 불사해야 한다. 하지만 만약 그가 말을 잘 듣는 아이이고 여느 보통의 아이와 마찬가지로 꼬박꼬박 학교에 다니고 부모가 한 말도 그대로 따른다면 부모는 책임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책임을 다하는 것 외에 소위 기대나 요구, 그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전부 부질없다. 왜 부질없다고 말하겠느냐? 사람의 운명은 모두 하나님이 정한 것이지 부모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에 대한 너의 기대가 어떤 것이든 그가 미래에 그것을 반드시 실현한다고 할 수는 없고, 그 기대가 그의 미래와 인생을 결정할 수도 없다. 그에 대한 너의 기대가 얼마나 크든, 그것을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하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든 다 헛수고이며, 그의 미래와 인생을 좌우하지도 못한다. 그러니 부모는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무의미한 희생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 너무 긴장할 필요도 없다. 자식을 부양한다는 것은 부모가 배우기도 하고 여러 환경을 체험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후, 점차 자식이 부모에게서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 밖에 자식의 미래, 앞으로의 인생길은 부모의 기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즉, 부모의 기대는 너의 미래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너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높고 거창하다고 해서 네가 정말로 순조롭고 잘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너에게 기대가 없다고 해서 네가 거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 두 가지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너희가 보기에 내가 교제하는 이런 주제들이 이해하기 쉬우냐? 사람이 쉽게 행할 수 있느냐? 어렵지는 않겠느냐? 부모는 자식에게 책임을 다하여 자식을 잘 부양하고 그가 어른이 될 때까지 정성 들여 기르기만 하면 되지, 그를 인재로 기를 필요는 없다. 이 점은 쉽게 행할 수 있느냐? (쉽게 행할 수 있습니다.) 이는 수월한 일이다. 너는 그의 미래와 인생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 없다. 그에게 어떤 계획을 마련해 줄 필요도, 그가 어떤 사람이 되도록 미리 정해 놓을 필요도 없다. 미래에 어떻게 생활할지, 어떤 생활권에서 살아갈지, 앞으로 이 세상에서 삶의 질은 어떨지,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지위를 가질지, 너는 이런 것들을 미리 정해 놓을 필요도, 통제할 필요도 없다. 그저 단순하게 부모의 책임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나 간단하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되면 학교를 하나 찾아 그를 진학시키고, 학비를 내야 하면 학비를 대주고, 학교에서 무언가를 사야 한다고 하면 돈으로 그에게 사 주면 된다. 이런 책임들만 다하면 충분하다. 일 년 사계절 무엇을 먹고 입어야 할지에 관해서는 너의 형편에 따라 그의 몸을 잘 보살펴 주면 된다. 자녀가 미성년자 시기에 자신의 몸을 보살필 줄 몰라 병근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가 좋은 생활 습관을 기르도록 그의 나쁜 버릇과 나쁜 습관들은 제때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가 과격해지지 않도록 심리적으로 그를 일깨우고 인도해야 한다. 만약 그가 세상의 사악한 것을 좋아하는데, 네가 보기에 그는 좋은 아이이지만 그저 세상의 사악한 흐름의 영향을 받은 것일 뿐이라면 너는 즉시 바로잡아 주고 그가 나쁜 버릇과 나쁜 습관을 고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부모는 바로 이런 책임들을 다하고 이런 역할들을 해야 하지 그가 미성년자일 때 한시라도 빨리 어른이 견뎌야 할 각종 중압감을 견디도록 그를 사회의 흐름 속으로 내몰아서는 안 된다. 이는 옳지 않다. 하지만 이토록 단순한 일조차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명리를 추구하는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이 세상의 사악한 흐름을 내려놓지 못하며, 세상에서 도태될 것이 두려워 아이가 미성년자일 때 일찌감치 사상적으로 이 사회에 녹아들고 사상적으로 빠르게 이 사회에 적응하도록 한다. 만약 이런 부모를 만나면 그 아이는 재수가 없는 것이다. 부모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핑계를 대며 그를 사랑하고 아끼고 그를 위해 대가를 치르든 그 집의 자식에게는 반드시 좋은 일이라고 할 수만은 없으며, 심지어는 일종의 재난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부모의 기대는 보이지는 않지만 자식의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부모는 사실 진정으로 자식이 건강한 마음과 건강한 몸을 갖기를 기대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식이 사회에서 자리 잡고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부모의 목적은 그가 잘 살아가도록 하는 것, 거지가 아닌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되어 남에게 차별받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사악한 흐름과 사악한 무리 속에 녹아들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좋은 일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부모의 이런 기대에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된다. 만약 너의 부모가 예전에 너에게 이런 기대가 있었다면, 또는 너에 대한 그들의 기대를 실현하기 위해 그들이 많은 대가를 치렀으니 너는 부모에게 빚졌다고 생각하고 일생 동안 부모가 너에게 치른 대가를 모두 갚을 계획이라면, 만약 너에게 이런 생각과 바람이 있다면 오늘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네가 그들에게 빚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너를 학대하고 너를 해친 것이다. 그들은 부모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너를 곤경에 빠뜨리고 너의 어린 마음에 여러 상처를 입혔으며 이런저런 좋지 않은 기억과 흔적을 남겼다. 아무튼 이런 부모는 별로 좋은 부모가 아니다. 만약 네가 미성년자일 때 너에 대한 부모의 교육과 영향, 그리고 갖가지 말들이 그저 너에게 열심히 공부하고 출세하여 힘쓰는 일은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었다면, 나중에 꼭 성공해서 부모의 자랑이 되고 부모를 위해 두각을 나타내며 부모를 영광스럽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면 오늘부터 너는 그들의 소위 은혜와 끝을 내야 한다. 더 이상 마음 쓸 필요 없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미성년자인 후손에 대한 부모의 기대다.

자식이 어른이 되고 난 후에도 부모는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품었던 기대와 같은 성질의 기대를 자식에게 품는다. 비록 어른이 되면 사람은 독립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어른의 신분과 관점에서 부모와 대화하고 말하고 일을 논하게 되지만 부모는 여전히 부모의 관점에서 자식에게 같은 기대를 품는다. 이 기대는 미성년자에 대한 기대에서 어른에 대한 기대로 바뀐다. 어른에 대한 기대는 비록 미성년자에 대한 기대와는 다르지만 부모는 평범한 사람이자 패괴된 사람, 그리고 사회와 세상의 한 구성원으로서 여전히 자식에게 같은 기대를 품는다. 자식이 하는 일이 잘되고 결혼 생활도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를, 임금과 직급이 오르기를, 상사의 눈에 들고 일도 술술 풀리고 어려운 일에 부닥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기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소용없습니다.) 소용없고 부질없다. 부모는 네가 자신들이 고생해서 키운 자식이므로 자기들이 네 마음속에 들어가 있는 줄 안다. 그래서 네가 성인이 되었는데도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원하고 성격은 어떤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안다고 생각한다. 네가 어른이 되고 독립해서 스스로 돈을 벌어 먹고살 수 있어도 그들은 여전히 너를 통제할 수 있고 너의 모든 일에 대해 발언하고, 참여하고, 결정하고, 간섭할 권리가 있으며 심지어 주도권까지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혼사의 경우 네가 어떤 이성 친구를 사귀는 것을 알고 부모는 이렇게 말한다. “안 돼. 너랑 학력도 안 맞고 생긴 것도 별로야. 게다가 농촌 출신이라서 결혼하고 나면 시골 친척들이 한 번 올라오면 떼로 몰려올 텐데, 화장실도 쓸 줄 몰라서 여기저기 지저분해질 거라고. 분명 힘들 거야. 안 돼. 난 반대야!” 이는 간섭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간섭이 지나치고 역겹지 않겠느냐? (지나칩니다.) 자식이 어떤 결혼 상대를 고르는지까지 부모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어떤 자식들은 부모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결혼 상대를 찾았더라도 부모에게 아예 알리지 않는다. 부모가 “사귀는 사람은 없니?”라고 물으면 자식은 “없어요. 아직 이르죠. 나이도 어리니 급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사실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을 뿐 그에게는 사귄 지 이삼 년 된 애인이 있다. 왜 알리지 않았겠느냐? 부모가 무슨 일이든 간섭하려 들고 까다로워서 알리지 않은 것이다. 결혼을 앞두고 나서야 집에 데리고 와서는 이렇게 말한다. “어떠세요? 저희 내일이면 결혼해요. 두 분 의견이 어떻든 저희는 이미 결정했어요. 계속 반대하시다가는 아이가 먼저 태어날지도 몰라요.” 부모가 자식의 일에 너무 많이 간섭하다 보니 자식의 결혼에까지 간섭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식이 고른 결혼 상대가 자기 기대에 못 미치거나 자기와 잘 맞지 않으면, 또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둘을 갈라놓으려 하고 자식이 듣지 않으면 목매달아 죽겠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자식이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든다. 또 나이가 많아 결혼하지 않겠다는 자식에게 부모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안 되지. 난 네가 커서 어른이 되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길 바랐다. 네가 크는 걸 봤으니 이제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걸 보고 싶구나. 그럼 죽어도 여한이 없겠어. 네가 결혼하지 않으면 이런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할 거고, 그럼 난 죽지도 못해. 죽어도 편안히 눈 감지 못한다고. 결혼은 꼭 해야 해. 일단 얼굴만 몇 번 보여 줘도 괜찮으니까 얼른 하나 데려와 봐.” 이는 간섭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식이 어른이 되면, 그가 어떤 결혼 상대를 선택할지에 대해 부모는 적절한 의견을 제시하고 조언하고 같이 점검해 줄 수는 있지만 간섭하거나 대신 결정해 주어서는 안 된다. 상대를 좋아하는지, 서로 마음이 맞는지, 취미가 비슷한지, 앞으로 행복할 수 있을지는 자식 스스로 느끼는 것이지 부모라고 해서 반드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안다고 하더라도 그저 제안을 해 줄 수 있을 뿐이지 함부로 방해하거나 심하게 간섭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이렇게 말하는 부모도 있다. “우리 아들, 우리 딸 결혼 상대는 꼭 집안 형편이 우리 집이랑 비슷해야 해. 만약 형편도 안 맞는데 우리 아들, 우리 딸에게 다른 속셈이 있는 거면 허락 못 해. 반드시 떼어 놓고 말 거라고. 우리 집안에 들어오겠다고? 어림도 없지.” 이런 기대가 적절하겠느냐? 이성적이겠느냐?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부모가 인륜대사에까지 간섭하려고 하다니 이는 비이성적인 것이다.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의 인륜대사이기 때문에 더더욱 간섭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아무 이성 친구나 하나 붙잡고 잠깐 얘기를 나누는 것이라면 부모는 간섭하지 않겠지만 결혼은 큰일이니 반드시 간섭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힘들여 자식을 감시하는 부모도 있다. 자식의 휴대폰, 컴퓨터에 어떤 이성 친구들의 연락처와 정보가 있는지 살펴보고, 간섭하고 추적하여 자식도 어찌 할 수 없게 만든다. 때릴 수도 없고, 욕할 수도 없고, 결국 이 관문을 넘지 못한다. 그럼 부모로서 이렇게 하는 게 적절하겠느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넌더리 나게 하면 이를 밉상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겠느냐? 부모가 어른이 된 자식에게 다해야 하는 것은 여전히 부모의 책임과 의무이다. 앞으로 그들의 인생길에서 그들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합리적이고 가치 있는 제안과 조언, 경고를 건네어 그들이 일하면서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을 접할 때 속지 않고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또는 불필요한 골칫거리를 마주하지 않도록, 심한 경우 소송에 휘말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부모는 경험자의 관점에서 자식에게 유용하고 가치 있는 제안과 참고 사항들을 알려 주어야 한다. 자식이 들을지 말지는 자식이 알아서 할 일이다. 책임을 다하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하는 일이다. 자식이 평생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을지, 고생은 얼마나 하고 복은 얼마나 누릴지는 부모가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자식이 이번 생에 어떤 시련들을 겪어야 할 팔자라면, 네가 가르쳐야 할 것을 다 가르쳤는데도 일이 닥쳤을 때 여전히 그렇게 제멋대로라면 고생을 해야 한다. 고생할 팔자니 너도 자책할 필요 없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떤 부모들은 자식이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과 부부 간 불화로 이혼을 하고, 이혼 후 아이 양육 문제로 또 분쟁을 겪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자식이 일도 잘 풀리고 결혼 생활도 행복하고 원만해서 불화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길 바라던 부모는 결국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아서 속을 끓이며 울기도 하고, 이웃에게 하소연도 하고, 아이 양육권을 쟁취할 수 있도록 변호사를 선임해 소송을 돕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자신의 딸이 수모를 당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남자 집에 가서 소란을 피우기까지 한다. “왜 우리 딸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요? 화가 나서 도저히 못 참겠소!” 심지어 사돈의 팔촌까지 불러 딸 대신 분풀이를 하고, 대판 싸움을 벌여 결국 일을 엉망으로 만든다. 원래는 가족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우지 않았더라면 부부 둘이서 감정을 서서히 누그러뜨리고 냉정을 되찾아 이혼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소란을 피우니 오히려 일이 커져서 깨진 거울처럼 완전히 금이 가 버렸다. 결국 자식도 결혼이 순탄하지 못하게 되고, 부모도 같이 걱정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말해 보아라.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그런 일들에 참견해서 무슨 소용이겠느냐? 자식의 결혼이든 일이든, 부모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내가 관여해서 꼼꼼하게 확인하고 살펴야 해.’라고 생각하며 자식의 결혼 생활이 행복한지, 애정 전선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아들이나 사위가 밖에서 바람을 피우지는 않는지 관찰한다. 어떤 부모는 자식의 결혼 또는 여러 방면의 일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식의 생활을 다방면에서 함부로 간섭하고 나무라며 이래라저래라 해서 자식의 생활과 일의 정상적인 질서에 심각하게 영향을 끼친다. 이런 부모는 밉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자식의 생활 방식과 습관에도 참견하는데, 쓸데없이 아들의 집에 찾아가 며느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몰래 친정에 물건이나 돈을 보내지는 않는지, 혹은 다른 사람과 놀아나지는 않는지 살핀다. 이런 행동 방식은 자식에게 무척이나 반감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부모가 계속 이렇게 하면 자식에게 혐오감과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이런 행동 방식들은 명백히 비이성적이다. 물론 또 다른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는 비도덕적이고 인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네가 자식에게 어떤 기대를 품든 그들이 어른이 되고 나면 부모는 그들의 생활, 일, 그리고 가정에 참견해서는 안 되고, 그들의 생활 영역을 간섭하거나 통제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심지어 유난히 돈을 좋아해서 자식에게 이런 것을 바라는 부모도 있다. “얼른 돈을 많이 벌어서 사업을 키워야지. 누구누구 집 자식은 사업을 키워서 조그맣던 가게를 크게 확장하고 나중에는 또 체인점까지 열었다더라. 걔 부모도 덩달아 호강하고 말이야. 너도 돈 많이 벌어야 해. 돈 많이 벌고 가게를 많이 열어서 우리도 덕 좀 보자.” 그는 자식의 어려움, 자식의 바람은 상관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기호와 사욕만 충족시키려 한다. 자식을 이용해 큰돈을 벌게함으로 육적 향락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다. 이는 모두 부모가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그런 것은 비도덕적이고 인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는 책임을 다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의 관점에서 어른이 된 자식을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 또한 아니다. 그저 꼰대질일 뿐이고, 부모가 자식을 책임진다는 핑계로 어른이 된 자식의 생활, 일, 또는 결혼 등에 간섭하는 것이다. 어른이 된 자식의 경우, 그들의 능력과 자질, 사회적 지위, 그리고 수입이 어떻든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마련해 준 운명이다. 하나님의 주재인 것이다. 올바른 길을 걷지 않고 범법 행위를 저지른다면 부모는 엄하게 혼내고 가르쳐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그들이 어떤 삶을 살든 부모는 간섭해서는 안 된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어른이 된 자식이 정상적으로 생각하며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생존할 능력이 있는 상황이라면 부모는 손을 떼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어른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이제 막 어른이 되었고 겨우 스물한두 살이라서 이 사회의 여러 복잡한 상황과 처신하는 방법을 모르고 사회생활도 할 줄 모르며 생존력이 조금 떨어진다면, 부모는 그들이 점차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적절히 도와주어야 한다.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부모의 도움으로 정상 궤도에 오르고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면 부모는 그만 물러나야지, 계속 자녀를 미성년자나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어떤 비현실적인 기대를 품는 것, 또는 그들에게 어떤 기대가 있다는 핑계로 그들의 사생활, 일, 가정, 결혼, 또는 사람과 일을 대하는 여러 태도, 관점, 그리고 행동 방식에 간섭하는 것은 모두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이 독립적으로 생존할 능력이 있는 상황이라면 부모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자식의 일, 생활, 가정과 관련해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필요한 보살핌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혹은 만약 자식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돌볼 틈이 없는 상황이라면 적절히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식이 아이를 낳고 나서 부부 둘 다 일이 바쁜데 아이는 너무 어리고 가끔 돌봐 줄 사람이 없다면 네가 대신 좀 돌봐 줄 수 있다. 이는 부모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자신의 혈육이므로 네가 돌보는 것이 다른 사람이 돌보는 것보다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식이 안심하고 너에게 아이를 맡긴다면 너는 대신 돌봐 주면 된다. 만약 자식이 너를 믿지 못해서 네가 돌봐 주기를 바라지 않거나 건강이 좋지 않은 너를 걱정하고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에 너에게 아이를 맡기지 않는다고 해도 너는 트집을 잡아서는 안 된다. 심지어 아예 부모를 믿지 못하고 부모가 손주를 돌볼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식도 있는데, 그는 부모가 그저 손주를 애지중지할 뿐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하며 음식을 먹일 때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식이 너를 믿지 않고 네가 아이를 보살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너에게는 오히려 여유가 생기니 더욱 좋은 것이다. 이는 양쪽이 모두 원하는 바이고,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이해할 줄 아는 것이다. 자식이 도움과 관심, 그리고 보살핌이 필요할 때, 감정적인 면이나 여러 방면에서 그에게 적절하게 필요한 관심과 도움을 주고 경제적 지원을 해 주면 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저축해 놓은 돈이 좀 있거나 원래부터 일을 잘하고 수입이 괜찮다면 자식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부모는 능력껏 도와줄 수 있다. 만약 그럴 능력이 없고 전 재산을 털거나 사채를 빌려야만 자식을 도울 수 있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능력 범위 안에서 혈육 간의 정이라는 틀에 맞는 책임을 다하기만 하면 되지, 자식을 위해 전 재산을 털고 신장과 피를 팔거나 목숨까지 바칠 필요는 없다. 너의 목숨은 오로지 너 자신의 것이고 하나님이 너에게 준 것이다. 너에게는 너만의 사명이 있고, 너의 목숨은 네 일생의 사명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자식의 목숨 역시 그가 그의 인생길을 끝까지 걷고 그 일생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주어진 것이지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식이 미성년자이든 어른이든 부모의 생명은 그들 자신만의 것이지 자식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부모는 자식이 공짜로 부리는 가정부나 노예도 아니다. 자식에게 어떤 기대를 품든 부모는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식에게 함부로 부림을 당하는 하인, 식모, 노예가 될 필요는 없다. 자식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든 부모 역시 독립된 사람이다. 그가 너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그가 어른이 된 이후의 생활을 당연한 듯 책임져서는 안 된다. 그럴 필요 없다. 그가 어른이 되었으니 너는 그를 부양하는 책임을 다한 것이다. 그가 앞으로 잘 살지 못 살지, 부유할지 가난할지, 즐겁게 생활할지 불행하게 생활할지 등은 그 자신의 일이지 부모와는 관련 없다. 부모는 이 모든 것을 바꿔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다. 그의 삶이 즐겁지 않다고 해도 부모는 “너는 불행하게 살고 있구나.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 재산을 팔고 내 평생을 다 걸어서라도 너를 즐겁게 해 줄게.”라고 말할 의무가 없다. 그럴 필요 없다. 너는 그저 책임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네가 그를 돕고 싶다면 그에게 왜 불행한지 물어보고 그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리적, 사상적 차원에서 문제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는 있다. 그가 받아들인다면 물론 더 좋지만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는 책임만 다하면 된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가 기꺼이 고생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그 자신의 일이니 그것으로 인해 네가 근심하고 괴로워하며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잘 필요는 없다. 다 부질없다. 왜 그렇겠느냐? 왜냐하면 그도 이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모든 일을 처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부모가 만약 그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그건 정인 것이다. 부모가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모가 모질거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어른의 문제를 직면해야 할 뿐 아니라 어른이 견뎌야 할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해야 하지 모든 일을 다 부모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물론 부모 역시 자식이 어른이 된 후 자식의 일이 잘 풀리는지, 사업이 잘되는지, 가정이 화목한지, 그리고 결혼 생활이 순탄한지 여부에 대한 책임을 전부 부모 자신이 짊어져서는 안 된다. 너는 관심을 갖고 물어볼 수는 있지만 모든 책임을 떠맡고 자식을 자기 곁에 묶어 둔 채 가는 데마다 데려가고 어디에 가든 다 지켜보며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늘도 밥 잘 먹고 즐겁게 지내고 있을까? 일은 잘하고 있겠지? 상사가 예쁘게 봐 주려나? 며느리(사위)가 걔를 사랑하겠지? 우리 손주는 말 잘 듣고 있겠지? 학교에서 공부는 잘하려나?’ 이런 것들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자식의 일은 자식 스스로 해결하면 되지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왜 물어보겠느냐? 정말로 너와는 상관없다는 뜻이다. 너는 자식에게 책임을 다했고 그가 클 때까지 정성 들여 길렀다. 그러니 너는 이제 물러나야 한다. 물러난다고 해서 네가 할 일 없이 한가한 것도 아니다. 너는 여전히 할 일이 많다. 네가 이번 생에 완수해야 할 사명에 있어 자식이 어른이 될 때까지 정성 들여 기르는 것 외에도 완수해야 할 다른 사명이 또 있다. 너는 네 자식의 부모일 뿐 아니라 피조물이기도 하다. 너는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에게 와서 너의 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너의 본분은 무엇이겠느냐? 너는 본분을 완수하였느냐? 전력을 다했느냐? 구원받는 길에 들어섰느냐? 너는 이런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자식이 어른이 된 후 어떤 길을 갈지, 어떻게 생활할지, 형편이 어떨지, 기쁘고 즐거울지는 부모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 형식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그는 이미 독립했다. 너도 그를 독립적이 되게 하고, 그만 놓아주어야지 통제해서는 안 된다. 형식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육체적 혈연관계 차원에서든 너는 이미 책임을 다한 것이고, 더 이상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그의 사명과 너의 사명은 서로 관련이 없고 그가 걷는 인생의 길도 너의 기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에 대한 너의 기대와 책임은 거기까지이다. 물론 그 어떤 기대도 품어서는 안 된다. 그는 그이고 너는 너이다. 그가 만약 가정을 이루지 않더라도 그와 너는 운명과 사명이라는 차원에서 아무런 관련도 없는 독립된 두 개체이다. 그가 만약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고 해도 그의 가정과 너의 가정 역시 아무 상관없는 두 가정이다. 그는 그의 생활 습관과 생활 방식이 있고 원하는 삶의 질이 있으며, 너 역시 너만의 생활 습관과 네가 원하는 삶의 질이 있다. 너에게는 네 나름의 인생길이 있고 그에게도 그 나름의 인생길이 있다. 너에게는 너의 사명이 있고 그에게도 그의 사명이 있다. 물론 너에게 너의 믿음이 있고 그에게도 그의 믿음이 있다. 만약 그가 금전과 명리를 믿는다면 너희 둘은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이다. 그가 만약 너와 같은 믿음이 있고 그 역시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는 길을 걷는다고 해도 너희 둘은 당연히 전혀 다른 두 개체다. 너는 너고 그는 그이니 너는 그가 어떤 길을 걷든 참견해서는 안 된다. 지지하고 돕고 공급해도 되고, 일깨우고 격려해 주어도 되지만 간섭하고 참견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 어떤 길을 걷고 어떤 사람으로 살며 무엇을 추구할지는 어느 한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아라. 나는 무엇을 기반으로 여기에 앉아 너희와 한담하고 이런저런 일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느냐? 바로 너희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너희가 내 진심 어린 잔소리를 기꺼이 듣고자 하기에 나는 말하는 것이다. 만약 너희가 듣고자 하지 않았거나 떠나 버렸다면 나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말을 얼마나 많이 할지는 모두 너희가 듣고자 하는지,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려고 하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네가 “저는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면 나는 네가 깨닫고 진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좀 더 자세하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너를 정상 궤도에 오르도록 붙들어 주고 너를 하나님 앞으로, 진리 앞으로 데려와 네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도록 할 것이다. 그럼 나는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그러나 네가 듣고 나서 실행하고자 하는지, 네가 어떤 길을 걷는지, 네가 어떤 인생을 선택하는지, 네가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나의 일이 아니다. 만약 네가 “저는 그 방면의 진리에 대해 질문이 있습니다. 구해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너의 질문에 답해 줄 것이다. 네가 만약 단 한 번도 진리를 구하고자 하지 않았다고 해도 내가 그 일 때문에 너를 책망하겠느냐? 나는 너를 책망하지 않을 것이고, 너에게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며 너를 비웃거나 헐뜯지도 않을 것이다. 냉담한 태도로 너를 대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나는 예전에 하던 그대로 할 것이다. 네가 만약 본분을 이행하다가 실수하거나 일부러 방해하고 교란한다면 나는 내 나름의 원칙과 처리 방식으로 너를 대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저는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고 싶지 않고 그런 관점들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요. 저는 제가 예전에 하던 대로 본분을 이행할 거예요.”라고 말한다면 원칙과 행정 법령을 거슬러서는 안 될 것이다. 네가 행정 법령을 거스른다면 나는 너를 처리할 것이다. 네가 만약 행정 법령을 거스르지 않고 착실하게 교회 생활을 한다면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네 개인의 생활, 무엇을 먹고 입고 싶어 하는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나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고 너에게 자유를 줄 것이다. 왜 그렇게 하겠느냐? 나는 이 모든 일들의 원칙과 내용을 너에게 분명히 말해 주었다. 나머지는 너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 네가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네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네가 만약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가 강요할 수 있겠느냐? 결국 모든 사람이 걷는 길과 맺게 되는 결실은 스스로 책임지게 될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다. 진리를 추구하든 추구하지 않든, 모두 네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아무도 너를 가로막지 않는다. 네가 진리를 추구한다고 해도 네가 은혜와 물질적 축복을 얻을 수 있도록 너를 격려해 주는 사람은 없다. 나는 그저 책임을 다할 뿐이다. 나의 책임을 다하여 너희가 깨닫고 진입해야 할 진리를 모두 너희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너희가 뒤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나는 전혀 묻지 않고 몰래 살피지도 않는다. 나의 태도는 이렇다. 부모로서 자식을 대할 때도 이렇게 해야 한다. 어른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가 ‘옳은 것’을 선택하든 ‘그른 것’을 선택하든, 흑을 선택하든 백을 선택하든, 긍정적인 사물을 선택하든 부정적인 사물을 선택하든, 그것은 그 자신의 일이고 그의 내면의 필요에 근거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의 본질이 악하다면 그는 긍정적인 사물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선을 추구하고, 인성을 갖추고 있으며 양심 지각, 염치가 있다면 그는 긍정적인 사물을 선택할 것이고, 조금 느리더라도 언젠가는 바른길을 걷게 될 것이다. 필연적으로 그렇다. 그래서 부모도 자식을 대할 때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하는데, 자식의 선택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어떤 부모들은 자식에게 이런 것을 요구한다. “자식은 바른길을 걷고 하나님을 믿어야 해요. 세상과 직장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때 자식은 들어가지 못할 것이고, 부모와 자식은 흩어지고 말 거예요. 나중에 가족 모두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지상에서 모여 살았으니 천상에서도 모여 살아야 하고 하나님나라 안에서도 헤어지면 안 돼요. 대대손손 함께해야 한다고요.” 그런데 자식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을 추구한다. 돈 벌고 부자 되는 것을 추구하며, 유행하는 옷을 입고 유행하는 일을 하고 유행하는 말을 하면서 부모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이 때문에 부모는 괴로워하며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한다. 한 번 금식했다 하면 일주일, 십 일, 십오 일 동안이나 한다.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갖은 애를 쓰는데 늘 배가 고파서 머리가 어질어질하기 일쑤이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목 놓아 울며 기도할 때도 많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하고 애를 써도 자식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고 자식은 각성하지도 않는다. 자식이 믿지 않을수록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이고, 아이한테 빚을 지고 말았어. 아이를 볼 면목이 없어. 아이에게 복음을 전하지도 못했고 아이가 나와 함께 구원받는 길로 나아가도록 하지도 못했어. 이건 복을 받는 길인데, 너는 어찌 그리 어리석니!’ 그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부모가 이렇게 자식에게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것 아니겠느냐? 그가 필요하다면 네가 먼저 말할 필요가 있었겠느냐? 그가 스스로 편지를 보내왔을 것이다. 부모는 늘 이렇게 생각한다. ‘내 아이에게 미안해. 일찍 대학에 보냈더니 대학에 가자마자 돌이킬 수 없게 돼 버렸어. 세상을 추구하느라 여념이 없고, 집에 돌아오면 일하고 돈 버는 얘기만 해. 누가 승진하고 차를 샀다느니, 누가 부자에게 시집갔다느니, 또 누가 유럽에 가서 연수하고 유학 갔다느니 하면서 남 사는 것 좀 보라는 얘기만 해. 집에만 오면 하는 이런 얘기들을 나는 듣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아이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아.’ 결국 자식과 사이가 틀어져서 만나기만 하면 얼굴을 찌푸리고 얘기만 나누면 얼굴을 붉힌다. 어쩔 줄 몰라 이렇게 생각하는 자식도 있다. ‘우리 부모님은 대체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 안 믿으면 안 믿는 거지 왜 늘 저런 태도로 나를 대하시는 거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믿을수록 훌륭해져야 하는 거 아니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왜 가족애가 없어진 거야?’ 너무 애가 탄 부모는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한다. “쟤는 제 자식 아니에요. 쟤랑 모자 인연 끊을 거예요.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부모는 어리석지 않으냐? (어리석습니다.) 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하고 자식의 미래와 신앙, 그리고 자식이 걷는 길마저 지배하려 하니 이는 너무도 어리석다! 적절하지 못하다. 특히 자식이 세상을 추구해서 매니저로 승진도 하고 임금도 올라 부모에게 줄 인삼, 금귀고리, 금목걸이를 한 보따리 사오면 이렇게 말하는 부모도 있다. “이런 건 필요 없어. 나는 너희가 건강하게 나랑 같이 하나님을 믿었으면 좋겠어. 하나님을 믿으면 얼마나 좋으니!” 그러면 자식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승진했는데 축하는 못 해 주실망정 그런 말씀은 왜 또 하시는 거예요? 다른 부모님들은 자식이 승진했다고 하면 샴페인을 터뜨리면서 축하해 주고 푸짐하게 먹으러 레스토랑에 간다는데 두 분은 참, 제가 사온 목걸이랑 귀걸이를 보고 기뻐하지도 않으시네요. 제가 대체 뭘 잘못했죠?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짜증을 부리시다니 너무하세요!” 부모가 이렇게 짜증을 부리는 게 옳겠느냐? 사람은 각자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걷는 길도 서로 다르다. 사람은 스스로 길을 선택하는 것이니 이 일을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자식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너는 그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억지로 하는 일은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다. 자식이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면 네가 자주 언급할수록 그는 너를 더 짜증 나게 할 것이고 너도 그를 짜증 나게 할 것이니 결국 그도 너도 모두 짜증이 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너희 모두 짜증이 날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혐오하고 네가 감정에 너무 치우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라는 점이다. 자식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너는 이토록 큰 대가를 치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그가 세상을 추구한다고 너는 이토록 괴로워한다. 그렇다면 만약 어느 날 하나님이 그를 앗아 가려고 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느냐? 네 마음속에 자식은 네 전부이다. 너의 미래이자 희망이며 너의 목숨이나 마찬가지다. 이런데도 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느냐? 네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혐오하지 않겠느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너무도 현명하지 못한 것이고 원칙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하나님도 못마땅해할 것이다. 그러니 네가 현명하다면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식이 만약 믿지 않으면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이치는 설명할 만큼 다 설명했고, 해야 할 말도 다 했으니 그들이 스스로 선택하게 두어라. 자식과 부모 사이의 관계가 어떻든 지금껏 유지해 온 대로 유지해라. 그들이 너에게 효도하고 너를 아끼며 보살피려고 한다면 거절할 필요 없다. 그들이 너를 데리고 유럽으로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만약 본분을 이행하는 데 지장을 주어 가기 싫다면 너는 가지 않아도 된다. 만약 네가 가고 싶고 갈 시간이 있다면 가거라. 식견을 넓히는 것도 나쁠 것 없다. 이는 나쁜 사람과 어울려 못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너에게 좋은 것과 맛있는 음식, 좋은 옷을 사 주는데 네가 보기에 성도가 입고 쓰고 착용하기에 적합하다면 그냥 누리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해라. 만약 네가 이런 것들을 경멸하고 이런 것들을 누리고 싶지 않다면, 이런 것들이 성가시고 역겹게 느껴져 누리고 싶지 않다면 너는 이렇게 말하며 거절해도 좋다. “돌아온 너희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쁘단다. 뭘 사오지 않아도 돼. 돈도 쓸 필요 없어. 나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아. 그저 너희만 평안하고 즐거우면 돼.” 이 얼마나 좋으냐! 입으로도 이렇게 말하고 마음속으로도 이렇게 생각하며, 네가 덕을 볼 수 있게 너에게 물질적인 향락을 제공하도록 정말로 자식들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진심으로 너에게 탄복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들의 일과 생활상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네가 도울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돕되, 만약 그들을 돕는 것이 본분 이행에 영향을 준다면 너는 거절해도 된다. 그것은 너의 권리다. 왜냐하면 너는 이미 그들에게 빚진 것이 없고 아무런 책임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어른이 되어 독립했고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챙길 수 있으니 네가 무조건적으로, 언제든 그들을 위해 봉사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너에게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만약 네가 원하지 않거나 본분 이행에 지장을 준다면 너는 거절해도 된다. 이는 너의 권리다. 비록 너는 그들과 혈연관계가 있고 그들의 부모이지만 이는 그저 형식적, 혈연적, 감정적인 차원의 관계일 뿐 책임적인 차원에서 너는 이미 그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났다. 그래서 만약 네가 현명한 부모라면 자식이 어른이 된 후에는 그들에게 아무런 기대도, 아무런 요구 기준도 가져서는 안 된다. 부모의 관점이나 위치에서 그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무엇을 하라고 요구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독립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독립했다는 것은 너는 책임을 다했다는 뜻이다. 여건이 허락하는 상황에서 네가 그들에게 무엇을 하든, 그들에게 관심을 갖든, 그들을 보살피든 그것은 그저 정인 것이고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혹은 그들이 자식으로서 너에게 무엇을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 역시 부수적인 것이지 당연히 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너는 이 점을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이 이제 명확해지지 않았느냐? (명확해졌습니다.)

“저는 늘 제 아이가 마음에 걸려요. 걔는 태어나길 약골로 태어났어요. 선천적으로 야무지지 못하고 겁도 많죠. 자질도 떨어져서 사회에서 늘 괴롭힘을 당해요. 그래서 마음이 안 놓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네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네가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네 감정이 작용했을 뿐이다. 너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저는 아이가 늘 마음에 걸리고 걱정돼요. 밥은 잘 먹는지, 속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식사를 규칙적으로 안 한 지 오래되고 늘 배달 음식만 시켜 먹으면 위장병이 생기지는 않을지, 병에 걸리지는 않을지, 아플 때 보살펴 주고 챙겨 주는 사람은 있는지, 배우자가 관심을 갖고 돌봐 주는지 말이에요.” 네가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은 그저 감정과 혈연관계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는 너의 책임은 아니다. 하나님이 부모에게 부여한 책임은 그저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그를 부양하고 보살피는 것뿐이다. 자식이 어른이 되고 나면 부모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책임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측면에서 본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네가 얼마나 감정에 휘둘리든, 어느 시점에 너의 모성애가 크게 표출되든, 그건 책임을 다하는 게 아니라 그저 감정의 작용일 뿐이다. 감정의 작용은 인성의 이성이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원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에 대한 사람의 순종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며, 사람의 책임에서 비롯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감정이라고 한다. 모자간의 정, 혈연의 정이 그 안에 약간 섞여 있는 것이다. 그는 너의 자식이기 때문에 너는 늘 그를 걱정하는 것이다. 그가 밖에서 고생하지는 않는지,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는지, 밖에서 일은 잘 풀리는지, 밥은 제때 먹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아플 때 병원비는 댈 수 있는지 염려하는 것이다. 너는 이런 것들을 자주 생각하지만 이는 부모의 책임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만약 네가 자식에 대한 이런 걱정들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너는 감정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것이자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너는 감정에 사로잡혀 살고 감정적으로 자식을 대하는 것이지 부모의 책임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감정에 따라 이 모든 것을 느끼고 바라보고 처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명백히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너에게 알려 준 책임은 자식이 어른이 되고 나면 모두 끝난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알려 준 이 실행법은 수월하고 간단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행하면 헛수고할 일이 없고 자식에게 어느 정도 자유와 단련할 기회를 줄 수 있다. 그들을 번거롭게 하거나 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기분을 상하게 하지도 않는다. 어른으로서 그들이 어른의 시선으로, 어른의 독립적인 일 처리 방식이나 일을 바라보는 방식, 독립적인 세계관으로 자신의 인생을 마주하고 자신의 생활과 생존 과정에서 부닥치는 여러 문제를 마주하도록 할 수 있다. 이는 그들의 자유이자 권리이며 더욱이 그들이 어른으로서 해야 하는 일이다. 너와는 관련이 없다. 만약 네가 늘 참견하려고 한다면 그건 상당히 역겨운 것이다. 늘 인위적으로 참견하고 간섭하려 한다면 그것은 교란하고 파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식에게 너에 대한 반감마저 불러일으켜 너는 아주 피곤하게 살고 말 것이다. 종국에는 잔뜩 억울해하면서 자식이 효도도 하지 않고 말도 듣지 않으며 부모 마음을 헤아리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배은망덕하며 은혜를 모르는 인간이라고 불평하게 될 것이다. 또 목매달아 죽겠다고 울고불고 난리 치는데 갖은 수를 다 쓰며 억지 부리는 비이성적인 사람들도 있다. 이는 더욱 역겹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순리대로 홀가분하게 살아가며 부모의 책임을 다하면 그만이다. 만약 네가 정 때문에 좀 보살펴 주고 관심을 갖는 것이라면 필요한 관심을 주는 것은 괜찮다. 자식이 어른이 되고 부모가 책임을 다했다면 아예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 아니다. 자식에게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그가 세상을 혼자 살아가도록 내버려두고, 그가 얼마나 큰 어려움에 처해 있든 상관하지 않고, 어려움에 무너질 정도라도 모르는 체하고, 자식이 너를 필요로 할 때마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이 역시 옳지 않다. 이는 극단적인 것이다. 자식이 너에게 하소연하고 싶어 하면 너는 수신기가 되어 그의 말을 들어 주고, 그런 다음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할 계획인지 물어보고 네 의견도 제시할 수 있다. 그가 만약 나름의 생각과 계획이 있어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너는 이렇게 말하면 된다. “그래. 기왕 네가 결정을 내렸으니까 앞으로 어떤 결과가 생기든 아무도 너 대신 책임져 줄 수 없는 거야. 이건 네 인생이니까 네 인생길은 네가 알아서 걸어가고 완주해야 해. 아무도 네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없어. 네가 결정을 내렸다면 난 너를 지지해. 돈이 필요하면 내가 어느 정도 지원해 줄 수 있어. 내가 힘을 보태야 하면 내 능력 범위 안에서 도와줄게. 부모로서 달리 할 말은 없구나. 물론 네가 만약 나는 힘을 보탤 필요도, 돈을 지원해 줄 필요도 없고 그저 들어 주기만 하면 되는 경우라면 나야 더 편하긴 하겠지.” 너도 그렇고 자식도 그렇고 이제 각자 할 말은 다 했다. 자식은 가득했던 고통도 다 쏟아 냈고 불만도 다 털어 냈을 것이다. 자식은 눈물을 닦고 제 할 일을 하러 갈 것이고 너 역시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정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정이라고 한다. 왜 그런 것이겠느냐? 자식에게 있어 부모는 무해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을 해코지하지도, 음해하지도, 비웃지도 않을 것이며 그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비웃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자식은 부모 앞에서 거리낌 없이 눈물을 흘리고 감정을 분출하며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다. 아이처럼 어리광을 피우고 토라지고 제멋대로 굴어도 괜찮다. 그러나 토라지고 감정을 분출하고 제멋대로 굴고 나서도 할 일은 해야 하고 눈앞의 일은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 부모가 힘을 보탤 필요도, 도울 필요도 없다면 꽤 좋은 일이다. 그럼 부모도 상당히 여유롭지 않겠느냐? 기왕 자식이 그렇게 말했으니 부모도 주제를 파악해야 한다. 자식은 이제 커서 독립했다. 그들은 단지 그 일에 대해 너에게 말만 했을 뿐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 만약 네가 이성적이지 않다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큰일을 나에게 말했다는 건 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지. 그럼 내가 조언을 좀 해 주어야 하지 않나? 결정하는 걸 도와주어야 하지 않나?’ 이는 분수를 모르는 것이다. 자식은 그저 너에게 그 말을 좀 했을 뿐인데 네가 스스로를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적절치 않다. 자식은 네가 부모이니 너를 존중하고 신뢰해서 너에게 말한 것이다. 그는 사실 이미 다 생각이 있는데 네가 늘 간섭하려고 하니 이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너를 신뢰하면 너도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어 그의 결정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참견하지도, 간섭하지도 마라. 만약 그가 네가 참견하길 원한다면 너는 참견해도 된다. 만약 네가 참견하고 보니 ‘아이고, 꽤나 골치 아픈 일이구나. 내가 본분을 이행하는 데 영향을 받겠어. 난 발을 빼야겠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이런 일들은 하면 안 돼.’라는 생각이 들면 서둘러 빠져나와라. 그런데도 그가 네가 개입하길 원한다면 너는 이렇게 생각해라. ‘난 네 일에 개입 안 할 거야. 네가 알아서 처리해. 내가 네 하소연과 쏟아 내는 쓰레기들을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은 이미 다했어. 내가 개입하길 원해도 어쩔 수 없어. 나는 그 불구덩이에 뛰어들지 않을 거야. 뛰어들고 싶으면 너나 뛰어들어.’ 이것이 적절하지 않겠느냐? 이런 것을 바로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언제든 원칙과 입장을 잃어서는 안 된다. 부모라면 그럴 줄 알아야 한다. 알아듣겠느냐? 쉽게 행할 수 있겠느냐? (쉽게 행할 수 있습니다.) 사실 쉬운 일이지만 네가 늘 감정에 휘둘려 감정 속에 빠져 있다면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너는 마음을 졸이며 내려놓지도, 제대로 짊어지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이다.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느냐? ‘걸렸다’이다. 너는 거기에 걸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진리를 실행하고 싶지만 감정을 내려놓지 못한다. 아이를 애지중지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큰일이다. 너는 선택을 해야 한다. 후손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그들을 신경 쓰지 않으며 어른이 되어 독립한 그들을 자유롭게 날아가도록 두든지, 아니면 그들을 따르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선택하여 그들에 대한 걱정과 감정을 내려놓았다면, 너는 부모가 해야 할 일을 잘하고 너의 입장과 원칙을 잘 지켜야 하며, 하나님이 역겨워하거나 혐오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는 행하기 쉽다. 그 알량한 정을 내려놓기만 하면 바로 행할 수 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참견하지 않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가 만약 너에게 그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한다면 너는 들어 주어라. 무슨 일인지 알기만 하면 된다. 그가 그 일에 대한 얘기를 마치면 너는 이렇게 말하면 된다. “알겠어. 또 다른 일도 있니? 밥 먹고 싶으면 밥해 줄게. 먹고 싶지 않으면 이제 돌아가렴. 돈이 필요하면 돈을 좀 주고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도울게. 내가 도울 수 없는 일이면 네가 알아서 해라.” 그가 만약 기어코 너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너는 이렇게 말하면 된다. “난 책임을 다했어. 아빠, 엄마 능력은 여기까지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너처럼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 네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그건 네 일이야. 우리는 끌어들이지 마. 우리는 이미 나이도 많고 그럴 나이는 지났어. 너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네가 어른이 될 때까지 정성껏 기르는 거야. 너 스스로 어떤 길을 걸을지, 어떤 고생을 감수할 것인지에 관한 일이라면 우리는 끌어들이지 마. 우리는 너를 따라 고생할 생각 없어. 너에 관한 한 우리는 이미 사명을 완수했으니까. 우리에게는 우리의 일과 삶의 방식이 있고, 우리의 사명도 있어. 너 대신 일을 하는 건 우리의 사명이 아니란다. 너도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는 걸 도울 필요 없어. 우리 스스로 완수하면 되니까. 그러니 우리에게 너의 생활과 인생에 개입해 달라고 하지 마. 그건 우리와 상관없어.” 이렇게 명확하게 말하면 그만이다. 필요할 때는 왕래하고 연락하며 회포도 풀 수 있다. 얼마나 간단하냐! 이렇게 하면 어떤 좋은 점이 있겠느냐? (홀가분하게 살 수 있습니다.) 너는 최소한 육체적 혈육 간의 정에 관한 일은 적절하고 타당하게 처리하게 된다. 생각과 정신세계가 편안해지고, 의미 없는 희생과 부질없는 대가는 전혀 치르지 않게 되며,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게 되며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도록 하게 된다. 사람이 다해야 할 책임은 조금도 남김없이 다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도 하지 않게 된다. 하지 말아야 하는 일에는 손을 뻗지 않고 하나님이 알려 준 대로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이 알려 준 대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길로, 사람이 홀가분하고 행복하며 즐겁고 평안하게 살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렇게 살아가면 너는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본분에 충성심을 다하는 데 드릴 시간과 에너지가 더 많아질 뿐 아니라 진리에 공을 들일 시간과 에너지도 더 많아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만약 너의 에너지와 시간이 모두 감정, 육체, 자식, 혈육 간의 정에 얽매이거나 점유되면 너는 진리를 추구할 여력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사업을 하면 머릿속으로는 온통 세상의 흐름, 명리, 육적 향락을 추구하는 일들만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의 숨은 뜻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너의 에너지, 시간, 청춘이 모두 이런 것들에 의해 점유되고 소모된다는 뜻이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결국 무엇을 얻겠느냐? 명리를 얻는다고 해도 공허할 것이다. 그럼 삶의 방식을 바꾸면 어떻겠느냐? 너의 시간과 에너지, 생각이 진리와 원칙에 점유되어 있다면, 네가 어떻게 본분을 잘 이행할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갈지 등 긍정적인 사물들만 생각한다면, 너의 에너지와 시간을 모두 이런 긍정적인 사물들을 위해 쓴다면 너는 다른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너는 가장 실속 있는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어떻게 살아갈지, 어떻게 처신할지, 어떻게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마주할지 알게 될 것이다. 어떻게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마주할지 알게 되면 너는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게 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자연스럽게 순종할 줄 알게 되면 너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생각해 보아라. 이는 좋은 일 아니겠느냐? 어쩌면 너는 알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살아가는 과정에서, 네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너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하게 되고, 너는 너도 모르게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신뢰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좋은 일 아니겠느냐?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 에너지와 시간, 세월을 쏟으면 결국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네가 늘 감정, 육체, 자식, 일, 명리를 위해 살아간다면, 늘 이런 일들에 얽매여 있다면 너는 최종적으로 무엇을 얻겠느냐? 공허함이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갈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것이며 결국 하나님께 철저히 혐오받아 버려질 것이다. 너의 이번 생은 그냥 그렇게 끝나 버리고 더 이상 구원받을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로서 자식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든, 자식이 어른이 된 후에는 자식에 대한 그 어떤 감정적인 걱정, 애착, 또는 감정적인 갈등을 전부 내려놓아야 한다. 절대로 부모라는 신분과 위치를 이용해 자식에게 감정적인 차원에서 그 어떤 기대도 품어서는 안 된다. 네가 만약 이 점을 행할 수 있다면 아주 훌륭한 것이다! 최소한 하나님 앞에서 너는 부모로서 해야 할 책임을 다한 것이고, 너는 부모라는 신분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사람의 어느 방면의 관점에서 보든 사람이 행해야 하는 것, 견지해야 하는 관점과 입장에는 모두 원칙이 있고, 하나님에게는 다 기준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후손에 대한 부모의 기대, 자식이 어른이 된 후에 부모가 실행해야 할 원칙에 관해서는 여기까지 얘기하도록 하겠다. 다음에 보도록 하자!

2023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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