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다

2017.09.28

창 3:20~21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제 세 번째 단락을 보도록 하자. 여기에서 아담이 하와에게 지어 준 이름은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는 지음 받은 아담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고를 하는 존재임을 말해 준다. 그가 무엇을, 얼마나 아는지에 대해 지금 연구나 토론은 하지 않겠다. 그런 것은 내가 말하려는 세 번째 성경 내용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라는 부분을 살펴보자. 오늘 이 내용을 가지고 교제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평생토록 이 속에 어떤 뜻이 내포돼 있는지 모를 것이다. 먼저 너희에게 약간의 단서를 줘 보겠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에덴동산을 떠올려 보거라. 아담과 하와는 그곳에 살고 있고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가 봤다. 그런데 그들은 벌거벗었으므로 숨어 버렸다. 하나님은 그들이 보이지 않자 그들을 불렀고, 그들은 자신들이 벗었으므로 두려워 하나님을 뵙지 못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벌거벗었으므로 감히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이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해 주었느냐? 본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으로 옷을 지어 입혔는지 알겠느냐?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혔다. 그 말인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들어 준 그 옷은 가죽옷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 준 첫 번째 옷이다. 가죽옷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고급 옷으로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다. 혹자가 너에게 “인류의 선조가 최초로 입은 옷이 어떤 옷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너는 “가죽옷입니다.”라고 대답하면 된다. 이 가죽옷은 누가 지어 준 것입니까?”라고 물으면, “하나님이 지어 주셨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된다.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옷은 하나님이 지어 준 것이다. 이 부분은 거론할 가치가 있지 않으냐? 방금 나의 묘사를 듣고, 너희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떠오르지 않느냐? 분명 대략적인 윤곽이 떠오를 것이다! 너희에게 인류가 입은 최초의 옷이 무엇인지 알려 주려고 오늘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말의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 핵심은 가죽옷에 있지 않다. 내가 말하려는 핵심은 바로 하나님이 이 일을 할 때 나타낸 성품, 소유와 어떠함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 장면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신분으로 아담, 하와와 함께 있었느냐?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어떤 신분으로 나타났느냐? 하나님의 신분으로 나타났느냐? 홍콩의 형제자매들이 대답해 보아라. (부모의 신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한국의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이 어떤 신분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하느냐? (가장의 신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대만의 형제자매들이 말해 보아라. (아담과 하와의 가족의 신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가족의 신분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어떤 이는 하나님이 가장의 신분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부모의 신분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모두 아주 적절한 대답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그 두 사람을 창조하여 그들을 동반자로 삼았고, 그들의 유일한 가족이 되어 그들의 생활을 돌보고 의식주를 돌보았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부모 신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이 행한 그 일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지고지상함도 보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신묘막측함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은 더더욱 보지 못했다. 오로지 하나님의 낮춤과 자비,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근심과 책임과 보호만 보았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대하는 태도와 방식은 흡사 자식을 두고 걱정하는 부모와 같았다. 또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돌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진실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대한 지위를 가진 자라 자처하지 않고 가죽으로 직접 인류에게 옷을 지어 입혔다. 이 가죽옷으로 치부를 감추든 추위를 막든 어쨌든 하나님은 손수 그 일을 했다.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생각이나 이적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옷을 지어 사람의 몸을 가린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을 실제로 한 것이다. 이 일은 단순해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언급할 가치도 없다. 하지만 이런 일을 통해 하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상상으로 가득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실함과 사랑스러움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신실함과 낮춤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대단하다고 여기며 안하무인이었던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실함과 낮춤 앞에 부끄러움을 느껴 한없이 높이 쳐들었던 머리를 떨구었다. 여기서 사람은 하나님의 진실함과 낮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더한층 느끼게 되었다. 마음속 ‘위대한’ 하나님, ‘사랑스러운’ 하나님, ‘무소불능한’ 하나님은 반대로 아주 미미하고 추하고 연약하게 느껴졌다. 이 말씀을 보고 나서, 이 일을 듣고 나서, 너는 하나님이 행한 이런 일들 때문에 하나님을 얕보겠느냐? 어떤 이들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정반대다. 그는 하나님이 진실하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진실함과 사랑스러움에 감동받는다. 하나님의 진실한 면을 볼수록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로 존재함을 더욱 느끼게 되고, 사람 마음속에 자리 잡은 하나님의 비중과 늘 사람 곁에 있는 하나님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현재와 연결시켜 봐야 한다. 하나님은 처음에 자신이 창조한 사람을 위해 이처럼 소소한 일을 했고, 사람이 지금껏 감히 상상하지도, 예상치도 못한 일까지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지금의 사람에게 할 수 없을까? 어떤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본질은 꾸며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도 꾸며 낸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본질은 진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가 더해 준 것도 아니고, 시간이나 장소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화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행한 일에서, 사람이 하찮거나 아주 사소하게 여기는 일, 심지어 하나님이 절대 할 리 없다고 여기는 아주 미미한 일들에서 진정 하나님의 진실함과 사랑스러움이 비로소 나타난다. 하나님은 위선적이지 않다. 그의 성품과 본질 속에는 과장, 가식, 거만, 교만이 없다. 그는 지금껏 큰소리친 적이 없다. 그는 신실하고 진실한 태도로 자신이 창조한 사람을 사랑하고 걱정하고 돌보고 인도하고 있다. 사람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든, 얼마나 느낄 수 있든, 얼마나 볼 수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확실하게 행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러한 본질을 사람이 알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영향을 줄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 영향을 줄까? 나는 네가 하나님의 진실한 면을 이해하게 될 때,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돌봄을 더 실감하길 바란다. 그와 동시에 너의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고,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 어떠한 추측도, 의심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묵묵히 모든 일을 행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진실함과 신실함과 사랑으로 모든 일을 묵묵히 행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어떠한 주저함이나 후회도 없었고,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보답받거나 얻으려 한 적도 없었다. 그가 이 모든 것을 행하는 유일한 목적은 사람의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얻기 위함이다. 첫 번째 주제는 여기까지 얘기하겠다!

이 주제가 너희에게 도움이 되었느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느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훨씬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교제해 주시니, 앞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이 당시 말씀하셨을 때의 심정과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씀들을 보고, 하나님의 참된 존재를 더 실감하게 되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존재가 공허하거나 막연하지 않다고 느끼지 않았느냐? 이런 느낌을 받으면 하나님이 사람의 곁에 있음을 느끼게 되지 않겠느냐? 어쩌면 너희는 지금 명확한 느낌이 없고 잘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대해 마음속 깊이 감명받고 제대로 알게 되면, 하나님이 네 곁에 계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단지 네 마음이 여태껏 하나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을 뿐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교제 방식에 대해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충분히 따라올 수 있겠느냐?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에 관한 주제를 교제하는 것이 무겁게 느껴지느냐? 어떻게 느껴지느냐? (좋습니다. 감동적입니다.) 어느 부분이 좋은 것이냐? 왜 감동적인 것이냐? (마치 에덴동산으로 돌아간 것 같고 하나님 곁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주제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무척 생소하다. 네가 평상시에 상상하고 책에서 본 내용이나 교제에서 들은 것들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듯한 내용들이나 다름없다. 그저 손으로 만져 보았을 뿐 눈으로는 보지 못한 것이다. ‘손으로 만지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 기본적인 윤곽뿐 아니라 정확한 개념조차도 잡지 못한다. 오히려 무수히 상상만 하게 되기 때문에 너는 무엇이 하나님의 성품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본질인지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상상으로 도출된 불확실한 요소들은 늘 수많은 의심을 품게 만든다. 정의 내릴 수 없지만 알고 싶은 일이 너의 마음속에 늘 모순을 만들고 충돌을 일으키며 심지어 때로는 교란을 일으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든다. 하나님을 추구하고 싶고, 알고 싶고, 제대로 보고 싶지만 아무리 해도 답을 얻지 못할 때, 이는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냐? 물론 이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려고 하는 사람에 한해서다. 이런 일들을 아예 외면하는 사람은 사실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실함과 하나님의 존재가 전설이나 꿈이었으면 제일 좋겠다고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은 제멋대로 굴 수 있고, 안하무인이자 유아독존일 수 있으며,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그 어떤 뒷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징벌받지 않아도 되고, 아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나아가 하나님이 악인에게 한 말씀도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 알기를 싫어하고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일을 알기 싫어하며, 차라리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은 하나님을 적대하는 자들이고, 도태될 자들이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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