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의 진리에 부합하는 말과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2017.05.31

관련된 하나님 말씀:

내 말은 영원불변한 진리이며, 나는 사람의 생명 공급자이자 인류의 유일한 인도자다. 또한 내 말의 가치와 의의는 인류가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 자체의 본질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이다. 설령 이 세상에 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내 말의 가치와 인류에 대한 도움은 그 누구도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거역하고 반박하거나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오직 하나뿐이다. 바로 시간과 사실이 나를 증거하여, 내 말이 곧 진리이자 길이자 생명이며, 내가 한 모든 말은 옳은 것이고,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하고 또 받아들여야 하는 것임을 실증할 것이다. 나는 나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사실을 알게 할 것이다. 즉, 나의 말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사람, 나의 말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 나의 말에서 목표를 찾지 못하는 사람, 나의 말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내 말에 정죄받을 사람이고, 더욱이 내 구원의 은혜를 잃은 사람으로, 내 채찍이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너희는 자신의 모든 행위를 숙고해야 한다> 중에서

하나님이 한 말씀은 겉으로 봤을 때 이해하기 쉽든 심오하든, 전부 사람의 생명 진입을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진리이며, 사람의 심령과 육체가 생존해 나가기 위한 생수의 근원이다. 그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일상적인 처세 법칙과 신조를 공급하며,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과 목표, 방향을 공급한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로서 갖춰야 할 모든 진리를 공급하고,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경배해야 하는지에 관한 모든 진리를 공급한다. 그는 사람이 살아 나가기 위한 보장이자 일용할 양식이며, 사람을 굳세어지고 우뚝 설 수 있게 하는 견고한 방패이다. 그에게는 창조된 인류를 정상 인성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진리의 실제가 가득하고, 인류를 패괴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탄의 올무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진리가 가득하며, 창조된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간곡한 가르침과 권면, 격려와 위로가 가득하다. 그는 사람이 모든 긍정적인 사물을 알도록 인도하고 깨우치는 길잡이 등불이자, 사람이 모든 정의와 아름답고 선한 것을 구현하고 가질 수 있게 하는 보장이며,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가늠하는 준칙이자, 사람을 구원과 광명의 길로 이끄는 등대이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서문> 중에서

내가 하는 말은 나의 어떠함을 대변하지만, 사람은 내가 하는 말에 이를 수 없다. 내가 하는 말은 사람이 체험한 것도, 볼 수 있는 것도, 접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부 나의 어떠함이다. 어떤 이는 내가 교제하는 것이 내가 체험한 것이라고만 인정할 뿐, 영의 직접적인 발현이라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말은 당연히 내가 체험한 것이고, 6천 년 경영 사역은 내가 하는 것이다. 나는 태초에 인류를 창조할 때부터 지금까지 전부 체험했는데 어찌 말하지 못할 수 있겠느냐? 나는 사람의 본성에 대해 꿰뚫고 있고 벌써 다 살펴보았는데, 어찌 제대로 말하지 못할 수 있겠느냐? 나는 사람의 본질을 꿰뚫고 있으므로 사람을 형벌하고 심판할 자격이 있다. 사람은 모두 내게서 나왔고, 또한 사탄에 의해 패괴되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내가 한 사역을 평가할 자격이 있다. 그 사역은 내 육신이 한 것이 아니지만 영의 직접적인 발현이고, 나의 소유와 어떠함이다. 그러기에 나는 발현할 자격이 있고, 내가 해야 할 사역을 할 자격도 있다. 사람이 하는 말은 모두 사람이 체험하고 본 것이며, 사람 혼자서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고, 사람의 촉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이러한 일들만 나눌 수 있다. 성육신 하나님이 하는 말은 영의 직접적인 발현으로, 영이 이미 행했던 사역을 나타내는 것이다. 육신이 체험한 것도, 본 것도 아니지만, 나타내는 것은 여전히 그의 어떠함이다. 육신의 본질이 영이고, 나타내는 것은 영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설령 육신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영이 이미 행한 사역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후에 육신의 발현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어떠함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그가 하는 사역을 보게 한다. 사람이 하는 사역은 사람들이 마땅히 진입해야 할 것과 깨달아야 할 것을 더욱 명확하게 하도록 만드는 것이고, 사람들을 이끌어 진리를 깨닫고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것은 붙들어 주는 사역이고,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인류를 위해 새로운 활로와 시대를 열고, 평범한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밝혀 그의 성품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가 하는 것은 전 인류를 이끄는 사역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 중에서

하나님이 직접 선포한 것은 모두 진리에 속한다. 성령의 깨우침에 속하는 것은 단지 진리에 부합할 뿐이다. 성령은 사람의 분량에 맞춰 사람을 깨우치지, 사람에게 직접 진리를 선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이 점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진리의 말씀에서 깨달음이 있고 체험을 통한 인식이 있다면, 그것을 진리라고 할 수 있겠느냐? 기껏해야 진리에 대해 약간의 인식이 있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성령이 깨우쳐 준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뜻하지 않으며, 진리에 속하지도 않는다. 그저 진리에 대해 얼마간 인식이 있고 성령의 깨우침이 좀 있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사람이 진리에 있어 얼마간 인식을 얻은 후에 다른 이에게 공급해 준다면, 그러니까 자신의 인식과 경험을 공급해 준다면 이는 진리를 공급한다고 할 수 없다. 진리를 교제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괜찮다. 그 말은 적절하다. 이는 간단한 일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밝히 알지도 못하는 일이니 반드시 확실히 해야 한다. 이는 어휘 선택이 올바른가 그렇지 않은가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며, 말만 이해했다고 그만인 일도 아니다. 네가 진리 안에서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것들을 얻었다고 해서 네게 진리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네가 아무리 진리 안에서 뭔가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네게 진리의 생명이 있다고는 할 수 없고, 네가 곧 진리에 속한다고는 더더욱 할 수 없다.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너는 그저 진리 안에서 약간의 빛과 길을 얻었을 뿐이다. 이는 네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필요한 실제를 갖추게 한다. 하나님은 진리를 통해 사람에게 공급하며, 사람이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한다. 마지막에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완벽히 만족게 할지라도 그 사람이 진리에 속한다고는 할 수 없고, 그 내면에 진리가 생명이 되었다고는 더더욱 할 수 없다. … 모든 사람이 진리를 체험하지만 각자가 체험하는 상황은 다 다르고, 똑같은 진리에서 얻는 것 또한 서로 다르다. 하지만 사람의 인식을 모두 종합한다고 해도 그 진리를 완벽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진리는 이렇게나 깊은 것이다! 어째서 네가 얻은 것과 너의 인식이 진리를 대체할 수 없다고 하겠느냐? 너의 그 인식을 다른 사람과 교제하면, 상대가 2, 3일 정도만 생각해도 전부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진리는 사람이 평생 체험해도 다 체험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함께 체험해도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진리가 얼마나 심오한지 알 수 있다. 진리는 언어로 완전히 표현할 수도 없다. 진리를 인류의 언어로 표현하면 ‘인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데, 인류는 그것을 영원히 다 체험할 수 없다. 인류는 마땅히 진리에 기대어 살아가야 한다. 한 가지 진리라도 전 인류를 수천 년 동안 살게 할 수 있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너는 진리가 대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중에서

진리는 하나님 자신의 생명으로,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본질, 그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대표한다. 사람이 얼마간 체험을 했다고 해서 진리를 갖췄다고 한다면 너는 하나님의 성품을 대변할 수 있겠느냐? 네가 한 가지 진리의 한 측면, 또는 한 부분을 어느 정도 체험하고 빛을 얻었을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 영원히 공급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얻은 그 빛은 진리가 아니라, 그저 사람이 이를 수 있는 어떤 정도이다. 즉, 그것은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올바른 체험이자 올바른 인식, 진리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으로 얻은 인식이다. 그 정도의 빛과 깨우침, 체험으로 얻은 인식은 영원히 진리를 대체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한 마디의 진리를 체험하고 그 체험한 인식들을 종합해 놓는다고 해도 그 한 마디의 진리를 대체하지는 못한다. 예전에 “내가 인간 세상에 대해 ‘사람 중에는 나를 사랑하는 이가 없다.’라는 격언을 만든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하나의 진리이자 인생의 정수, 가장 심오한 것으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네가 체험하고 또 체험해서 3년간 체험하면 얕은 인식이 생길 것이고, 7~8년간 체험하면 또 어느 정도 인식을 갖게 되겠지만, 그런 인식은 영원히 그 한 마디의 진리를 대체할 수 없다. 누군가 2년 동안 체험하면 약간의 인식이 생길 것이고, 10년 동안 체험하면 좀 높은 인식이 생길 것이며, 일생 동안 체험하면 또 어느 정도 인식이 생기겠지만, 너희 둘을 합해 얼마나 많은 인식과 체험, 깨달음, 빛 비춤, 실례(實例)가 있든 그것은 그 한 마디의 진리를 대체하지 못한다. 이는 사람의 생명은 영원히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너의 인식이 아무리 진리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해도 그것은 영원히 진리를 대체하지 못한다. 사람에게 진리가 있다는 것은 얼마간 실제가 있고, 진리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이 있으며, 하나님이 한 말씀에 대해서도 실제 진입과 체험을 좀 하고,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사람이 평생 체험할 수 있다. 심지어 몇 번의 생 동안, 몇천 년 동안 체험해도 하나의 진리를 다 체험하지 못할 것이다. …

…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체험하여 진리에 대한 인식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이 네 생명이 되었다고 해도 진리가 네 생명이고, 네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네가 또 틀린 것이다. 네가 진리의 한 부분을 어느 정도 체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를 대표할 수 있겠느냐?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럼 너는 진리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느냐? 너는 진리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느냐?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한 측면, 한 범위에서 진리를 체험한다. 각자의 제한된 범위 안에서 체험하므로 진리의 모든 면을 아우르지 못한다. 사람이 진리의 본뜻을 살아 낼 수 있겠느냐? 네가 체험한 그 정도의 진리가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되겠느냐? 백사장의 모래 한 알, 바닷물의 한 방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네가 체험한 그 인식과 네가 얻은 그 느낌이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그것을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 진리의 근원과 내용은 매우 넓은 범위를 포함하므로 그 어떤 것도 반박하지 못한다. 어떤 이는 “제 이러한 체험과 인식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박당하지 않을까요?”라고 묻는데, 그것은 당연하다. 네가 하나님 말씀을 통해 체험한 참된 인식은 진리에 부합하는데, 어떻게 반박당할 수 있겠느냐? 진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네 생명이 되고, 네게 길을 주며, 네가 살아남게 한다. 그러나 사람이 지닌 그 약간의 것, 그 얼마 안 되는 빛은 오직 한 범위 안에서만 자신, 또는 일부 사람들에게 적합할 뿐, 다른 범위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사람이 아무리 깊게 체험해도 한계가 있고, 어떻게 해도 진리가 적용되는 범위에는 이르지 못한다. 사람의 빛과 인식은 영원히 진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너는 진리가 대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중에서

구약에서 예언서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역사(歷史) 기록에 속한다. 신약 서신에는 사람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도 있고, 성령의 깨우침에서 비롯된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이 쓴 서신은 사람이 한 일이었다. 그것은 모두 성령이 한 말씀이 아니라 성령이 깨우쳐 준 것으로, 바울이 여러 교회에 보낸 서신들이며, 여러 교회의 형제자매들에 대한 권면과 격려이다. 바울은 성령을 대표하여 말할 수 없는 데다가 선지자도 아니었고, 요한이 본 이상(異象)은 더더욱 보지 못했다. 그 편지들은 당시 에베소, 빌라델비아, 갈라디아 등의 여러 교회에 써 보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의 바울 서신은 바울이 교회들에 써 보낸 편지이지, 성령이 묵시한 것도, 성령이 직접 한 말씀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서신은 다만 바울이 사역하는 기간에 쓴 여러 교회에 대한 권면과 위로와 격려이자 당시 그가 했던 많은 사역에 대한 기록일 뿐이다. 그것은 주 안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써 준 것이고, 또한 당시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그의 권유를 듣고 예수가 전한 회개의 도를 행하라는 것이기도 했다. 바울은 당시의 교회든, 그 이후의 교회든 모두 그가 써 준 것을 먹고 마셔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고, 자신의 그 말들이 완전히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당시 교회의 상황에 대해 형제자매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권면하며, 믿음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또 그는 단지 설교하거나 일깨워 주고 권면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감과 연관 지어 말했고, 그런 말로 그들을 붙들어 준 것에 그쳤다. 당시 교회들의 사도로 사역한 바울은 예수가 쓴 일꾼이었다. 그렇기에 바울은 교회에 대해 책임지고, 교회의 사역을 담당하며, 형제자매들의 상태를 파악해야 했다. 그래서 주 안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편지를 썼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거나 긍정적이었던 바울의 말은 모두 옳았다. 하지만 바울의 말은 성령의 말씀도, 하나님도 대변할 수 없다. 사람들이 만일 사람의 체험에 대한 기록과 사람의 서신을 성령이 교회들에 한 말씀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인식법이고, 크나큰 모독이다! 특히 바울이 교회들에 보낸 서신이 그렇다. 바울은 그 당시 각 교회의 상황과 실제 상태에 근거해, 주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예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권유하려고 편지를 써 보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을 격려해 주기 위한 것으로, 바울 본인이 져야 할 책임감이자 성령이 그에게 더해 준 책임감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어디까지나 당시 교회들을 이끄는 사도였으므로 교회들에 편지를 보내 권면하는 것은 그의 책임이었다. 바울의 신분은 사역하는 사도이고 보냄을 받은 사도일 뿐 선지자도, 예언자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사역과 형제자매들의 생명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을 대표해 말할 수 없다. 바울이 한 말은 성령의 말씀도 아니거니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바울은 피조물일 뿐, 성육신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과 예수의 신분은 다르다. 예수의 신분은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그의 말씀은 성령의 말씀이자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니 바울을 어떻게 예수와 동등하게 볼 수 있겠느냐? 사람이 바울의 서신이나 말과 유사한 것들을 성령의 음성으로 간주하고 또한 하나님으로 여겨 경배한다면, 너무나 분별력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심하게 말하면, 이는 완전히 모독에 속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표하여 말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사람의 말과 사람의 서신 기록을 ‘성서’와 ‘천서(天書)’로 삼아 엎드릴 수 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표하여 말할 수 있단 말이냐? 이러한데 바울이 교회들에 써 보낸 편지에 자신의 생각이 섞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또한 바울 자신의 뜻이 섞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바울은 자신의 체험과 인식에 따라 교회에 편지를 썼다. 예를 들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쓴 편지와 베드로가 갈라디아 교회에 쓴 편지의 견해는 서로 각각 다르다. 그렇다면 어떤 견해가 성령에게서 비롯되었겠느냐? 그 누구도 명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교회에 대해 책임감이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의 편지는 그들의 분량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에 대한 그들의 공급과 붙들어 줌, 그리고 교회에 대한 그들의 책임감을 의미한다. 단, 그것은 사람이 사역하는 면만 의미할 뿐, 절대적으로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네가 바울의 서신을 성령의 말씀에 속한다고 말한다면, 너는 그릇된 자이다. 이는 모독에 속한다! 바울의 서신과 신약의 다른 서신은 근대 영적 인물의 전기에 해당하며, 그것은 워치만 니의 책이나 로렌스의 체험 등과 같이 사람이 쓴 영적 전기와 동일시할 수 있다. 단지 근대 인물들이 쓴 책은 신약 성경에 편성되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들의 본질은 같다. 그들은 다 성령께 한동안 쓰임 받았던 인물로, 직접 하나님을 대표할 수는 없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경에 관하여 3> 중에서

사람이 실행하는 길과 깨달은 진리는 모두 특정 범위에 적용되며, 사람이 가는 길이 완전히 성령의 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은 성령의 깨우침을 받을 수만 있지, 완전히 성령으로 충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 있으며, 정상 인성의 두뇌 사유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진리 실제를 살아 낼 수 있는 사람들은 다 이 범위 안에서 체험한 것이다. 그들은 다 성령의 깨우침을 받아 정상 인성의 삶 속에서 진리를 체험하는 것이지, 정상 인성의 삶을 벗어나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 인성의 삶을 유지하는 기초 위에서 성령이 깨우쳐 주는 진리를 체험하며, 게다가 그 진리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르고, 그 깊이도 사람의 내적 상태와 관련된다. 그들이 가는 길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정상 인성의 삶이자, 성령의 깨우침이 있는 정상인이 가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 성령이 가는 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상 인성의 체험을 보면, 추구하는 사람이 다름에 따라 성령이 하는 사역도 각기 다르다. 또한, 사람이 체험하는 환경과 범위가 서로 다르고, 사람의 생각과 사유가 섞이기 때문에 사람의 체험에는 서로 다른 정도의 불순물이 섞이게 된다. 어떤 진리에 대한 인식은 각자 개인의 조건 차이에 따라 다르다. 그들이 인식하는 진리의 참뜻은 완전하지 않으며, 단지 어느 한 측면, 또는 여러 측면에 국한된다. 사람이 체험하는 진리의 범위 역시 개인의 조건에 따라 다르므로 똑같은 진리라고 해도 사람마다 인식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다시 말해, 사람의 체험에는 한계가 있기에 성령의 뜻을 완전히 대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잘 맞는다고 해도, 또 사람의 체험이 성령이 하려는 온전케 하는 사역에 매우 근접한다고 해도 사람의 사역을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볼 수는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종만 될 수 있고 하나님이 맡긴 사역만 할 수 있으며, 그저 성령의 깨우침으로 얻은 인식과 자신이 직접 체험해서 얻은 진리만 말할 수 있다. 사람은 성령의 대변인이 될 자격도, 조건도 없으며, 사람의 사역을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할 자격 또한 없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 중에서

사람의 교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다. 사람은 자신이 본 것과 체험한 것을 교제하고, 하나님이 행한 사역을 토대로 자신이 보고 체험한 것을 나타낸다. 그들의 책임은 하나님의 사역이나 말씀이 끝난 후, 마땅히 실행해야 할 것과 진입해야 할 것을 찾아 따르는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역은 사람의 진입과 실행을 대변한다. 물론, 이러한 사역에는 사람의 경험과 교훈, 또는 일부 생각들이 섞여 있다.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든, 사람을 통해 역사하든 아니면 성육신을 통해 역사하든, 모두 사역하는 사람이 자신의 어떠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모두 사람의 고유한 어떠함을 토대로 이뤄지는 것이다. 성령은 아무 까닭 없이는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성령은 아무 근거 없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실제 상황과 조건에 따라 역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사람의 성품이나, 낡은 관념, 낡은 사상이 변화될 수 있다. 사람이 나타내는 것은 모두 사람이 보고 체험한 것이며, 사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도리나 관념이라고 해도 전부 사람의 사유로 닿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사역은 크기에 상관없이 사람이 체험한 것, 본 것,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것과 구상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어떠함으로,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사람의 사유로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전 인류를 이끄는 그의 사역을 선포하는데, 이는 사람의 세부적인 체험과 무관하며, 그 자신의 경영과 연관된다. 사람이 나타내는 것은 사람의 체험이고,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어떠함이다. 이 어떠함은 곧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으로, 사람이 갖출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체험은 하나님이 나타낸 어떠함을 토대로 보고 인식한 것이다. 이렇게 보고 인식한 것을 모두 사람의 어떠함이라고 한다. 이는 사람의 고유한 성품과 자질을 토대로 나타내는 것이므로 사람의 어떠함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체험하고 본 것을 교제할 수 있다. 체험하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나 사람의 사유로 닿지 못하는 것, 즉 사람의 내면에 없는 것은 교제할 수 없다. 만약 사람이 체험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상상이나 도리일 것이다. 요컨대 그런 말에는 실제가 조금도 없다. 가령 네가 사회의 일을 겪어 본 적이 없다면 너는 복잡한 사회관계를 제대로 교제할 수 없다. 또한, 너에게 가정이 없다면, 다른 사람이 가정사를 교제할 때 너는 그가 말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의 교제나 사역은 그 사람 내면의 어떠함을 대변한다고 하는 것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 없고, 사람의 말은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성육신 하나님이 아니고, 성육신 하나님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아니다. 여기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 말씀들을 읽고 난 다음 이것을 사람이 얻은 깨우침이라고만 인정할 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네가 너무 무지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찌 사람이 얻은 깨우침과 같을 수 있겠느냐? 성육신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를 열고, 전 인류를 인도하고, 비밀을 밝히는 말씀이자 사람에게 새 시대에서 나아갈 방향을 알려 주는 말씀이다. 사람이 얻은 깨우침은 그저 간단한 실행이나 인식에 지나지 않아 전 인류를 새 시대로 인도할 수 없으며, 하나님 자신의 비밀도 밝힐 수 없다. 하나님은 어쨌든 하나님이고, 사람은 어쨌든 사람이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본질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한 성령의 깨우침으로 보고 사도와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이 직접 한 말씀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사람의 잘못이다. 어찌 되었든 너는 높은 것을 낮다고, 깊은 것을 얕다고 말하며 옳고 그른 것을 뒤바꿔서는 안 된다. 진리임을 분명히 알면서 일부러 반박해서도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올바른 입장에서 문제를 살펴봐야 하고,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새 사역과 새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에 의해 도태될 것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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