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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관문,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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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번잡한 일들, 좌절과 실망, 기쁨과 슬픔, 좋은 시절과 나쁜 시절,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을 경험하고 계절이 지나고 또 지나는 것을 보며 사람은 미처 알지 못한 채 삶의 중요한 시기를 보낸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 인생이 저물어 가는 시점에 와 있음을 깨닫는다. 시간은 온몸에 흔적을 남겨 놓았다. 이제는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고, 검은 머리가 흰색으로 변했으며, 초롱초롱 빛나던 눈은 흐릿해졌다. 부드럽고 탄력 있던 피부는 주름지고 얼룩졌다. 청력이 약해지고, 치아는 흔들리고 빠지며, 반응과 움직임이 느려진다. 이 시점에서 사람은 열정적이었던 젊은 시절과 작별하고 생의 황혼, 노년에 들어선다. 앞으로 남은 것은 한 가지, 삶의 마지막 관문인 죽음이다.

여섯 번째 관문, 사람의 죽음

1. 오직 창조주만이 사람의 삶과 죽음을 주관할 수 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전생의 인연으로 시작된 것이라면, 죽음은 전생 인연의 끝인 것이다. 태어나는 것이 금생에서 해야 할 사명의 시작이라면 죽음은 그 사명의 끝인 것이다. 창조주가 사람이 태어날 때 그 상황을 정해 놓았으므로 그의 죽음의 상황 또한 이미 계획되어 있다. 다시 말해, 우연히 태어나거나 예기치 못하게 죽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태어남과 죽음은 모두 그 사람의 전생 및 금생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태어남과 죽음의 상황 모두 창조주가 예정해 놓았다. 이것이 그의 타고난 숙명이자 운명이다. 모두가 다른 상황에서 태어나듯 모두가 다른 상황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그래서 사람의 수명, 죽음의 방식과 시점이 모두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튼튼하고 건강하지만 일찍 죽는다. 어떤 이는 몸이 약하고 자주 아프지만 장수하며 편안히 눈을 감는다. 비명횡사하는 사람도 있고, 천수를 다하는 사람도 있다. 타지에서 마지막을 맞는 이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눈을 감는 이도 있다. 하늘에서 죽는 사람도 있고, 지하에서 죽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익사하고 누구는 재난에서 죽는다. 누구는 아침에, 누구는 밤에 죽는다. 누구나 주목받고 태어나 아주 멋진 삶을 살고 명예롭게 죽기를 바라지만 운명을 뛰어넘고, 창조주의 주재에서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사람은 미래를 위해 어떤 계획이든 세울 수 있어도 어떻게 태어나고 죽을지 계획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죽음이 닥치는 것을 피하고 막으려 애쓰지만 알지 못하는 사이 죽음은 조용히 다가온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더 나아가 어디서 죽을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존재는 사람도, 자연계의 어떤 생명체도 아닌 창조주이다. 그의 권능은 유일무이하다. 인류의 삶과 죽음은 자연법칙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주의 권능과 주재로 생긴 결과이다.

2. 창조주의 주재를 모르는 사람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노년에 접어든 이가 맞이하는 도전은 가족을 부양하거나 인생의 원대한 꿈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삶과 작별할까, 어떻게 죽음을 맞을까, 어떻게 삶에 마침표를 찍을까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사람들이 죽음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도 죽음에 대해 탐구하게 된다. 사람이 모르는 또 다른 세상이 죽음의 저편에 존재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두려워하고, 죽음을 직면해야 함에도 겁을 내며,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애써 외면한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고,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은 수수께끼가 되고, 모든 이의 마음에는 걷히지 않는 그늘이 생긴다.

사람은 몸 상태가 악화됨을 느낄 때, 죽음이 다가옴을 감지할 때, 은은한 공포와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외로움과 무력함을 더욱 느끼게 될 때 사람은 스스로 묻게 된다. ‘사람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삶이 이렇게 빨리 끝나는 것인가? 이것이 삶의 마지막 시간인가? 결국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삶은 궁극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가? 명성과 부를 얻기 위한 것인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인가?’ 사람이 이 구체적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봤든 그렇지 않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크든, 마음 깊은 곳에는 이 수수께끼에 깊숙이 파고들려는 욕망과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이 있다. 세상에 대한 그리움과 떠나기 싫은 마음도 섞여 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여섯 번째 관문, 사람의 죽음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걱정을 너무 많이 한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마음 놓을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이것저것 걱정을 한다. 마치 걱정거리가 있으면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을 지울 수 있기라도 한 듯, 산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 가면 죽음이 가져오는 무력함과 외로움을 피할 수 있기라도 한 듯, 아이들과 사랑하는 사람과 재산을 걱정한다. 사람은 마음속 깊이 어렴풋한 공포를 느낀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 파란 하늘과 이 세상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있는 것에 익숙해진 외로운 영혼은 낯선 미지의 세계로 혼자 떠나기 싫어한다.

3. 명성과 부를 좇던 삶은 죽음 앞에서 무너진다

본래 가진 것 하나 없던 외로운 영혼이 창조주의 주재와 정해 놓은 운명으로 부모와 가족을 얻고, 인류의 일원이 되고, 삶을 경험하고 세상을 볼 기회가 생겼다. 창조주의 주재를 경험하고, 창조주의 만물 창조가 얼마나 경이로운지 알며, 창조주의 권능을 알고 그 권능 아래에 복종할 기회도 생겼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이 드문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평생의 에너지를 운명과 맞서 싸우는 데에 쓰고, 자기가 가진 모든 시간을 가족을 부양하고 번갈아 가며 부와 지위를 좇는 데에 다 써 버린다. 사람들은 가족, 돈, 명예, 이익과 같은 것들을 소중히 아끼고,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모두가 운명이 기구하다고 불평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마음속 저편에 미루어 둔다. 그 일이란 사람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생이 얼마나 되든 명성이나 부만 좇다가 젊음을 보내고 흰 머리와 주름살을 발견한다. 그제서야 명성이나 부도 나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돈이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없으며, 누구도 생로병사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고, 누구도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삶의 마지막 시간을 마주한 뒤에야 백만장자도, 집안이 대단하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며, 모든 사람은 반드시 그의 원래 자리, 즉 가진 것 없는 외로운 영혼으로 되돌아가야 함을 진실로 이해하게 된다. 부모가 있는 사람은 부모가 그의 모든 것이라 믿는다. 재산이 있으면 돈이 삶에서 기댈 수 있는 자본이라 생각한다. 지위가 있으면 그것에 집착하여 목숨이라도 걸려고 한다.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평생을 바쳐 좇은 그러한 것들이 찰나에 지나가는 구름에 불과하여 소유할 수도, 가져갈 수도 없고, 죽음을 피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외로운 영혼이 돌아가는 길에 함께하거나 위안이 될 수도 없고, 사람을 죽음에서 구원해 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세상에서 쌓은 명성이나 부는 일시적인 만족, 잠시의 기쁨과 위로를 주고 마음이 편안한 듯한 착각을 주어 방향을 잃게 한다. 그래서 안식과 위안과 평온을 갈망하던 사람들이 망망대해에서 허우적대다 겹겹이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리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일, 즉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왜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 등의 질문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명성이나 부에 꾀여 잘못된 길을 가고, 조종당하여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된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세월은 눈 깜짝할 새 지나고,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삶의 좋은 시절은 지나간다.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조금씩 멀어지고, 가졌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는다. 그제서야 사람은 갓 세상에 태어나 우는 아기처럼 여전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사는 동안 무엇을 했는지, 삶이란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는지, 사람이 왜 세상에 왔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또한 내세가 있는지, 하느님이나 보응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죽음이 다가올수록 삶이 진정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고, 마음은 점점 더 공허해지며, 의지할 데가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는 매일같이 커진다. 사람들이 죽음에 임박해 이런 행동을 보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삶의 기반이 되었던 명성이나 부를 곧 잃게 되기 때문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을 남겨 두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낯선 미지의 세상, 두렵고 알 수 없는 세상,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의지할 데도 없는 세상과 곧 혼자 대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다 불안감을 느낀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사람마다 처음으로 느끼는 공포와 무기력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야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 사람은 어디서 왔으며, 삶의 이유는 무엇이고, 누가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며, 누가 인류를 생존하게 하고 인류의 생존을 주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진정한 삶의 자산이며, 사람 생존의 근본이다. 어떻게 가족을 부양할지, 어떻게 명성과 부를 좇을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성공할지, 어떻게 더 부자가 될지, 어떻게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고 경쟁해서 남들을 이길지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익히는 다양한 생존의 기술로 물질적 편안함은 충분히 얻을 수 있지만, 그것들이 마음의 진정한 평안과 위안을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자꾸만 방향과 통제력을 잃게 하고, 삶의 의미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놓치게 하며, 올바른 방법으로 죽음을 대면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이렇게 해서 삶은 망가진다. 창조주는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고, 모두에게 일생 동안 그의 주재를 체험하고 알도록 기회를 준다. 하지만 사람은 죽음을 마주했을 때, 곧 죽게 되었을 때에야 문득 이를 깨닫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다!

여섯 번째 관문, 사람의 죽음

사람들은 돈과 명성과 부를 좇는 데에 인생을 쓴다. 그리고 그것을 목숨을 건지는 지푸라기로 삼고 유일한 의탁으로 삼는다. 그것만 있으면 영원히 살 수 있고 죽음도 오지 않을 것처럼 꽉 움켜쥔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멀리 있고 죽음 앞에서 얼마나 힘이 없는지,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지,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스스로가 얼마나 외롭고 무력한지를 깨닫게 된다. 또 사람들은 돈이나 명성과 부로 목숨을 교환할 수 없다는 것, 아무리 부자여도,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 해도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똑같이 가난하고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돈으로 목숨을 살 수 없고, 명성이나 부가 죽음을 면케 하지 못하며, 둘 중 어느 것도 단 1분 1초를 더 살게 하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깨달을수록 사람들은 더욱 강렬하게 살고 싶어 하고, 죽음이 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생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고, 스스로 지배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며, 죽고 사는 것의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그 어떤 사람도 주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4. 창조주의 권세에 복종하여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다

한 사람의 탄생은 외로운 영혼이 이 세상에 와서 인생을 경험하는 출발점이자 창조주의 배치에 따라 창조주의 권능을 경험하는 시발점이 된다. 이는 당연히 한 사람 또는 한 영혼이 창조주의 주재와 권능을 인지하고 창조주의 권능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사람은 평생 동안 창조주가 배치한 운명의 법칙 속에서 살아간다.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 수십 년의 삶을 살아가면서 창조주의 주재를 인정하고 창조주의 권능을 인지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수십 년의 인생 경험을 통해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이 정한 것임을 깨닫고 삶의 의미를 느끼거나 정리하는 것은 굉장히 쉬운 일이다. 그러한 삶의 경험을 인정함과 동시에 사람의 생명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마음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을 진정한 삶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삶의 목표와 사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조금씩 깨닫게 된다. 또한 창조주를 경배하지 않거나 창조주의 권세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죽음에 직면할 때, 즉 영혼이 다시 창조주와 마주할 때 그 영혼은 더없는 공포와 불안에 떨게 될 것임을 점차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서 수십 년을 살면서 사람의 생명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지 못하고 운명이 누구에 의해 좌우되는지도 깨닫지 못한다면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수밖에 없다. 수십 년 동안 삶을 영위하면서 창조주의 주재를 깨달은 사람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순수하게 받아들인 사람이며, 삶의 이유를 깊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또 창조주의 주재를 제대로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서는 창조주의 권능 아래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은 창조주가 사람을 만든 의미를 안다. 또 창조주를 경배해야 하고, 사람의 모든 것이 창조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머지않은 미래에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안다. 이런 사람은, 삶은 창조주가 마련한 것이고, 죽음은 창조주의 주재에 있으며, 삶과 죽음 모두 창조주의 권능으로 정해져 있음을 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을 때 자연스레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고, 몸 이외의 모든 것을 편안히 내려놓게 된다. 또한, 무조건적으로 반항하거나 극도의 두려움에 떨지 않고 곧 닥칠 모든 것을 흔쾌히 수용하고, 그것에 순종하며, 창조주가 마련한 삶의 마지막 관문을 맞이하게 된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창조주의 주재를 경험하고 창조주의 권능을 알아 가는 기회로 삼고, 또한 창조된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이행하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는다면, 분명히 올바른 인생관을 가지게 될 것이고, 창조주의 축복과 인도에 따라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창조주의 빛 속에서 행하고, 창조주의 주재를 깨달으며, 창조주의 권세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또 창조주의 경이로운 행사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고 창조주의 권능을 증거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은 분명 창조주의 사랑을 받고 창조주에게 열납될 것이다. 이런 사람만이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삶의 마지막 관문을 흔쾌히 맞이할 수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욥이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삶의 마지막 관문을 흔쾌히 맞이하는 태도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순조롭게 인생의 길을 갔고 그의 삶의 사명을 완수하였으며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갔다.

5. 욥은 평생 동안 추구하고 얻은 것이 있었기에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성경은 욥에 대해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욥 42:17)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욥은 어떠한 미련이나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자연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모두가 알다시피, 욥은 살아생전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다. 그의 의로운 행위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후세에 기려졌다. 그는 인류 중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땅에서 하나님께 의인이라고 불렸다. 또 하나님이 준 시련을 받기도 했고 사탄의 시험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부여한 ‘의인’이란 호칭이 무색하지 않게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섰다. 하나님의 시련을 받는 수십 년 동안 그는 이전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았으며, 더 성실하고 담담하게 살았다. 그는 의로운 행위로 인해 하나님이 준 시련을 받았고, 또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욥은 시련을 받은 후 수십 년 동안 삶의 가치와 창조주의 주재를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고, 창조주가 복을 베풀어 주는 것과 거두어 가는 것에 대해 더 정확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욥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이전보다 더 축복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욥이 창조주의 주재를 깨닫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데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따라서 욥은 나이를 먹고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에도 재산에 대해 추호도 걱정하지 않았고 다른 근심거리도 없었다. 어떠한 미련도 없었고 당연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평생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갔기에 자신의 최후도 걱정하지 않았다. 현대인 중에 죽음을 앞두고 욥처럼 담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왜 겉보기에 쉬워 보이는데도 이런 자세를 갖춘 사람이 없는 것일까? 이유는 단 하나다. 욥이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인정하며,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기를 추구하는 주관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욥은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인생의 중요한 몇 개의 관문을 넘겼고, 자신의 노년을 보냈으며, 인생의 마지막 관문을 맞이했다. 욥이 살면서 어떤 일을 겪었든 그의 추구와 인생 목표는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 행복한 것이었다. 그가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창조주의 축복이나 칭찬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추구와 인생 목표이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창조주의 주재를 조금씩 깨닫고 실제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창조주의 주재를 경험함과 동시에 그의 경이로운 행사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하고 그를 알아 가면서 느끼는 따뜻함과 잊지 못할 경험, 마음 깊이 새겨진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조주의 뜻을 깨닫는 과정에서 위안과 기쁨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창조주의 위대함, 경이로움, 사랑스러움, 신실함을 경험하여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욥이 아무런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평생 동안 추구하고 얻은 것이 있었기에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창조주가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는 것에도 담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런 걱정 없이 성결하게 창조주와 마주할 수 있었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욥이 소유했던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너희들은 그런 행복을 소유할 조건을 갖추었느냐? 지금의 사람들이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욥처럼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의 사람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죽음을 앞두고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공포에 질려 덜덜 떠는 사람도 있다. 기절하는 사람,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사람, 심지어 대성통곡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행동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만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당혹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마음 깊은 곳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대해 제대로 느끼거나 깨닫지 못하고 진심으로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모든 것을 계획하거나 통제하려 들고, 자기 스스로 운명과 생사를 결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6. 창조주의 주재를 받아들여야 그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

창조주의 주재를 받아들여야 창조주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하거나 이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면 운명과 죽음에 대한 인식도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주재하며, 사람이 그의 주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숨을 거두기 전 끊임없이 유언을 남기고 걱정과 미련을 남긴다. 마음의 짐이 몹시 무겁고, 원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삶과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그 과정을 건너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이 고통 없이 이 세상을 떠나고, 아쉬움과 근심 없이 삶의 마지막 관문을 맞이하고 싶다면, 그 유일한 방법은 미련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 미련을 남기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창조주의 주재와 권능을 깨닫고, 창조주의 주재와 권능 아래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인류의 다툼과 죄악, 사탄의 올무에서 멀어질 수 있다. 욥처럼 창조주의 인도와 축복 속에서 살 수 있고, 자유롭고 가치와 의미가 있는 정정당당한 삶을 살 수 있다. 욥처럼 창조주의 시련과 박탈, 창조주의 섭리에 순종할 수 있다. 욥처럼 평생 동안 창조주를 경배하여 창조주의 칭찬을 받을 수 있으며, 욥처럼 창조주가 친히 발한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의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욥처럼 행복한 삶을 살다 고통이나 근심과 미련 없이 행복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으며, 욥처럼 빛 속에서 지내며 빛 속에서 삶의 모든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빛 속에서 순조롭게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즉,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주재를 경험하고 깨달아 빛 속에서 세상을 떠날 수 있다. 그리하여 창조주의 인정을 받는 피조물로서 그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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