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조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6)

2. 적그리스도의 이익

지난번에는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 중 제9조,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에 관해 교제하였다.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이익을 또 몇 가지로 나누었는데, 첫 번째는 자신의 안위였고, 두 번째는 자신의 명예와 지위였으며, 세 번째는 혜택이었다. ‘혜택’에는 몇 개 조항이 있느냐? (첫 번째 조항은 ‘하나님 집의 재물을 횡령한다’였고, 두 번째 조항은 ‘형제자매가 그를 위해 봉사하고 힘쓰도록 이용한다’였으며, 세 번째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치를 내걸고 ‘직무상 편리를 이용해 속임수로 먹고 마시고 다른 것도 사취한다’였습니다.) 여기에서 ‘다른 것’에는 특별 대우, 사적인 일 처리 등이 포함되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큰 주제 아래에서 소주제를 분류하고, 소주제 아래에서 또 몇 가지 측면을 분류하여 교제하니 아리송하게 느껴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교제하면 할수록 더 뚜렷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이익에서 세 가지 항목을 교제했는데, 이것들 외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적그리스도의 이익 중 네 번째 항목인 ‘앞날과 운명’이다. 앞날과 운명은 적그리스도 부류가 하나님을 믿는 주된 목적이자 그들이 내면에 품고 있는 최대의 꿈이며, 마음속 깊이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이다. 사람에게는 앞날과 운명이라는 화제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는 미래, 혹은 다음 세대 사람들의 종착지나 거처, 나아갈 길과 관련이 있다. 요컨대 한 사람의 훗날의 종착지와 관계된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앞날과 운명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너무도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적그리스도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의 이익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앞날과 운명, 그러니까 종착지일 것이다.

4) 앞날과 운명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이익 중 앞날과 운명이라는 항목에 대해서도 다양한 각도, 다양한 측면에서 교제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비교적 명확해진다. 예전에 교제한, 적그리스도의 각종 이익에는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안위와 명예, 지위 등은 비물질적인 것으로, 형태가 없고 정신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반면, 물질적인 이익에는 재물, 먹고 마시는 것, 특별 대우, 물질적인 누림 등이 있다. 그럼 오늘 교제하는 앞날과 운명은 어떤 측면과 관계되겠느냐? 사람의 관념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형태가 있겠느냐, 없겠느냐? (형태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의 정신세계, 관념과 상상, 생각 속에 존재하는 부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이 간절히 바라고 의탁하는 것이며, 또한 사람이 평생의 정력을 바쳐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사람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사람의 모든 삶을 주도하고, 사람의 사상과 행위, 속셈, 추구 방향을 좌우한다. 그래서 앞날과 운명은 모든 사람에게 너무도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이 중요하기는 해도 그것에 대한 적그리스도의 추구는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추구와 그 방식이 확연히 다르다. 대체 어떤 부분이 확연히 다르겠느냐? 그 차이점이 대체 어떤 측면에서 드러나기에 그것이 적그리스도의 추구 방식이고 특징임을 사람들이 분명히 알고 분별할 수 있겠느냐? 이는 토론하고 교제할 만한 내용이 아니겠느냐? 물론, 대부분의 사람이 지닌 모습은 진정한 적그리스도나 적그리스도 본질을 지닌 사람들의 모습과 유사점이 매우 많다. 하지만 같은 모습, 같은 성품이어도 그 본질은 같지 않다. 각 측면에서 적그리스도의 이익 중 네 번째 항목인 ‘앞날과 운명’에 대해 교제하도록 하자.

앞날과 운명을 과연 어떻게 해부해야 하겠느냐? 어떤 방식과 어떤 사례를 통해 적그리스도의 이익 중 하나인 앞날과 운명이 진리에 합하지 않는 것이고, 적그리스도 본질의 표출이라고 해부할 수 있겠느냐? 몇 가지 측면에서 해부해야겠느냐? 이는 자세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더 정확하고 명확하게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도록 그것을 몇 가지 대분류로 나누어 보자. 첫 번째 항목은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이고, 두 번째 항목은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본분을 대하는가’이며, 세 번째 항목은 ‘적그리스도는 책망과 훈계를 어떻게 대하는가’이다. 네 번째 항목은 ‘적그리스도는 ‘봉사자’를 어떻게 대하는가’이고, 다섯 번째 항목은 ‘적그리스도는 교회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어떻게 대하는가’이다. 어째서 이 다섯 가지겠느냐? 너희가 각각의 항목에 어느 정도 인식을 갖고 있는지, 각각에 상응하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이나 성품을 찾을 수 있는지 묵상해 보아라. 이 다섯 가지 항목을 기초로 도대체 무엇을 해부해야겠느냐? 이 몇 가지 측면에서 적그리스도의 주된 특징과 성품은 무엇이고, 정상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과 패괴된 보통 사람의 모습은 또 어떤 것이겠느냐? 적그리스도와 패괴된 보통 사람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다른 점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이 각자 선택한 길은 어떻게 다르겠느냐? 그들의 모습은 어떻게 다르겠느냐? 너희는 이 몇 가지를 인식하고 있느냐? (이 다섯 가지 항목을 보면, 적그리스도는 주로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에 근거하여 일을 바라보지 않고, 늘 자신의 관념과 상상으로 어떤 일의 표면적인 현상이나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추측하며, 자신에게 과연 앞날과 운명이 있을지 가늠합니다. 예를 들어, 본분을 대하는 측면을 본다면, 그는 사람들 앞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고, 욕망과 허영, 체면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자기가 하나님 집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며, 앞날과 운명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책망과 훈계가 임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고 불만스러워하신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낙담하고 실망하며, 마음속으로 소극적이고 대항하는 마음을 품습니다.) 어느 정도 빛 비춤이 있는 요약이다. 이 안의 진리를 조금 헤아렸구나. 너희가 말한 대체적인 의미를 볼 때, 너희는 이 다섯 가지 항목에 대해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럼 이제 하나씩 교제하도록 하겠다.

(1)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

첫 번째 항목은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이다. 적그리스도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다. 그의 손에는 하나님 말씀이 있고, 그 역시 설교를 들으며, 예배에 참석하고, 정상적인 영 생활도 한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은 삶의 일부이다. 그는 또 수시로 하나님 말씀을 읽는다. 하지만 똑같이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과 다르며,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인다. 그럼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먼저, 그는 하나님 말씀을 가져다 연구하고 분석하는데, 특이한 시선과 관점으로 하나님 말씀을 깊이 파고든다. 어째서 깊이 파고든다고 하겠느냐? 먼저, 객관적으로 보면 그는 그것이 하나님 말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 역시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대단하다고, 보통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 없다고, 어디에서도 그런 말은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기초로 그는 그것이 하나님 말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겨 받아들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럼 그는 왜 계속 읽겠느냐? 하나님 말씀 안에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있고, 그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있으며, 정신세계 속에서 그가 의탁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이겠느냐? 당연히 적그리스도의 앞날, 운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깊이 파고들 때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에서 종착지, 결말, 인류가 앞으로 가게 될 길 등과 관련된 말씀을 찾는다.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을 두고 깊이 파고든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읽으면서 연구하고 분석하고 판단한다. ‘하나님 말씀의 어조를 보니 이 부류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이 부류 같단 말이야. 하나님이 이 부류에게 주신 종착지가 어떤 건지 봐야겠어.’ 이런 식으로 읽으면서 연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부류를 단번에 무저갱으로 차 버리겠다고 한 말씀을 보면 그는 ‘큰일이다. 무저갱으로 차 버리신다면, 끝장 아닐까? 이 부류한테는 앞날과 좋은 종착지가 없구나. 어쩌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마음이 은근히 아프고, 불안하고, 편치 않다. ‘설마 하나님이 정말 이 부류를 이렇게 대하실까? 아니야. 나는 포기할 수 없어.’ 그는 또 계속 하나님 말씀에서 찾는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내 아들아, 나는 너를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이고, 너는 또 어떻게 될 것이다.”라고 한 말씀을 보면 그는 괴로워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은 사람 마음을 참 따뜻하게 해. 하나님 말씀은 정말 좋다니까.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아들’이야.’ 그는 또 하나님 말씀에서 ‘장자’라든가 ‘왕권을 잡다’라는 말을 보면 마음속으로 ‘정말 다행이야! 하나님을 믿으니 희망도 생기고, 좋은 점도 있구나. 이 길을 선택한 건 잘한 거야. 내 베팅이 적중했다니까. 반드시 열심히 믿어야지. 하나님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리저리 보다가 그는 또 ‘끝까지 따르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으리라’는 하나님 말씀을 발견한다. 이 말씀을 본 적그리스도는 마치 구명줄을 잡은 기분이다. ‘이 말씀대로 실행해야지. 언제 어디서든, 무슨 일이 벌어지든 오랜 세월이 지나고 상전벽해가 일어나도 이 말씀은 변하지 않을 거야. 하늘과 땅이 사라져도 이 말씀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내가 이 말씀을 지킨다면 좋은 결말, 좋은 종착지를 얻을 수 있지 않겠어? 내 앞날과 운명은 보장되는 것 아니겠냐고. 정말 잘됐어. 반드시 끝까지 따르는 사람이 될 거야!’ 그는 이렇게 뒤적거리며 찾고 연구하고 분석하다가 결국 하나님 말씀에서 구명줄을 찾고, 가장 큰 ‘비밀’을 발견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몹시 기뻐한다. ‘더는 도태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어. 유황불 못이나 지옥에 떨어질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드디어 내 종착지를 찾았고, 마침내 인류의 아름다운 종착지인 천국으로 가는 통로를 발견했으니 얼마나 좋아!’ 하지만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는 또 <종착지에 관하여>라는 하나님 말씀을 본다. ‘이 말씀은 어떻게 종착지를 다루고 있지? 하나님이 각 부류의 종착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신 것 같네. 하나님의 뜻은 도대체 뭐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초조해하지 말고 더 보자.’ 이어서 그는 또 ‘너는 종착지를 위해 충분한 선행을 예비해야 한다’는 말씀을 보고 곰곰이 생각한다. ‘좋은 종착지를 얻으려면 충분한 선행을 예비해야 해. 하나님께서 조건을 제시하셨으니 일이 쉬워졌어. 헛수고나 헛고생을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이제 어느 쪽으로 힘을 쏟아야 할지 알게 됐어.’ 적그리스도는 교제를 통해 무엇이 선행인지 알았고, ‘길’을 찾았고, 방법이 생겼다. ‘알고 보니 이렇게 간단한 거였구나. 베풀고 봉헌하는 것, 복음 전파를 통해 많은 사람을 얻는 것, 형제자매를 많이 붙들어 주는 것,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베푸는 것 등이 전부 선행이었어. 나는 종착지를 위해 목숨을 걸 거야. 이런 건 다 필요 없다고!’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안 되겠어. 만약 내가 돈이나 물질을 전부 바치면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지? 하나님 말씀을 봐야겠어. 조급하게 굴지 말고, 하나님의 사역이 언제 끝나는지, 사람이 땅에서 살면서 언제면 이런 것들이 없어도 되는지 본 다음에 생각하자고. 하지만 이런 것들을 바치지 않으면 무엇으로 선행을 예비하지? 형제자매들을 접대하고 복음을 전해 사람을 얻는 건 쉬운 일이야. 그런 것들은 할 수 있어.’ 그는 선행을 예비하는 동시에,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자기가 예비한 선행이 얼마나 되는지, 자기에게 좋은 종착지가 생길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한다. ‘나는 이렇게 많은 선행을 예비했는데, 하나님은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실까? 하나님의 사역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쩌지? 안 되겠어. 앞날과 운명에 대해서 또 어떤 말씀이 있는지, 어떤 구체적인 설명이 있는지 봐야겠어.’ 그는 하나님 말씀에서 이리저리 찾아본다. 그러다가 자신의 앞날과 운명에 유익이 되는 말씀을 찾으면 기뻐하고, 자기 앞날과 운명에 저촉되는 말씀을 보면 괴로워한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읽는 여러 해 동안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 소극적이고 연약해지기도 하고, 또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 적극적이고 기뻐하고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내적 상태, 어떤 감정을 갖게 되든 그는 종착지나 앞날과 운명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계속 하나님 말씀에서 각 부류 사람의 결말에 대한 규정과 설명을 찾는다. 요컨대, 하나님 말씀에 들일 수 있는 노력을 모두 들이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그는 하나님 말씀에 진리와 길,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의 종착지, 인류의 종착지를 찾을 수 있고, 지옥에 떨어져 종착지를 잃는 상황을 피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러니 그렇게 오랜 세월 하나님 말씀을 읽은 후에 무엇을 얻겠느냐? 그는 옳은 도리나 옳은 영적 이론을 많이 늘어놓을 수는 있겠지만,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며,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전혀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는 이런 본질에 대해서는 아예 대조해 보지 못한다.

적그리스도는 늘 하나님 말씀에서 비밀에 대한 해석을 연구하고 찾으며, 또 늘 하나님 말씀에서 참신한 단어와 사물, 설명을 찾는다. 심지어는 무화과란 무엇인지, 14만 4천의 남자아이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긴 자의 의미가 무엇인지 등 그 어떤 영적 인물, 그 어떤 사람도 알지 못하는 비밀, 또 계시록에서 사람들이 오랜 세월 연구했음에도 이해하지 못한 말이나 단어를 찾기도 한다. 그는 이런 일에 무척 공을 들이며, 이런 말씀에 사람의 종착지와 관련된 말이 없는지, 사람의 종착지에 대한 명확한 해석이 없는지 끊임없이 찾고 연구한다. 하지만 어떻게 찾든 결국에는 헛수고일 뿐이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을 따르고 교회에서 대세를 따르는 동시에, 마음속 깊이 계속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주 묻곤 한다. ‘내가 복을 받을 수 있을까? 내 앞날과 운명은 과연 어떤 것일까? 나중에 하나님나라에 내 분깃이 있을까? 내 종착지가 임했을 때, 나는 두 눈을 들어 파란 하늘을 바라보게 될까, 아니면 내 손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세상에 있게 될까? 내 종착지는 대체 무엇일까?’ 그는 마음속으로 줄곧 이렇게 자문하는 한편, 조용히 하나님에게 질문을 던진다. ‘제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을까요? 지옥에 가지 않으면 안 될까요? 제 이런 추구 방법으로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훗날의 복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저한테 내세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태도는 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어째서 제가 안심하도록 이 일에서 제게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 않는 겁니까? 제가 도대체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요?’ 이는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깊이 파고들고 대세를 따르며 마지못해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마음속 깊이 지니고 있는 생각 아니겠느냐? 한시도 잊지 못하고 죽어도 놓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 내면 깊은 곳에 간직한, 자신의 앞날과 운명에 대한 태도이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깊이 파고들면서 종착지를 찾고 비밀을 연구하는 것 외에, 더더욱 흥미를 갖는 일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성육신한 하나님이 언제 땅을 떠날지, 언제 그의 직분을 완수할지, 하나님의 대업은 언제 이루어질지, 하나님의 사역은 언제 끝날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언제 큰 복을 받을지, 언제 하나님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을지 등이다. 하나님이 땅을 떠날 때, 그들이 그 광경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것 또한 그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부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륜이 대업을 이루는 그날에 대해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언제 땅에서 떠날지, 땅에서 떠날 때 어떤 광경일지, 자기가 지금 몇 살인데 10~20년 후면 그 때를 맞이할 수 있을지, 만약 그 때를 맞이하면 어떻게 되고, 맞이하지 못한다면 또 어떻게 되는지에 관해서는 더욱 관심을 가지며, 마음속으로 이런 일을 계산하고 있다. 혹자는 곰곰이 생각한다. ‘내가 벌써 육십인데, 만약 10년 후에도 내가 살아 있다면 그 순간을 맞이할 수 있겠지만, 10년 후 하나님의 사역이 끝날 때 이미 죽어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좋은 일, 이렇게 큰 일을 맞이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나도록 예정하셨어도 나는 복 있는 사람이 아닌 거고, 큰 복 같은 것도 얻을 수 없는 거잖아!’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기분이 언짢아지고 이 일에 불만을 품는다. 어느 정도로 불만을 품겠느냐? ‘내가 지금 이렇게 나이가 많은데, 하나님은 왜 아직 안 가시는 거지? 하나님의 사역은 왜 아직 안 끝나는 거야? 복음 전파가 언제쯤 끝날까? 하나님의 사역이 빨리 끝나고, 하나님의 대업이 빨리 이루어지고, 재난이 빨리 임했으면 좋겠어. 얼른 사탄을 멸하고 악인을 징벌하셨으면 좋겠다고!’ 이는 무엇을 하는 것이냐? 개인의 뜻을 하나님에게 요구하고, 하나님이 그의 뜻대로 행하기를 바라는 것 아니냐? 그의 그런 뜻 안에는 그 개인의 이익이 들어 있지 않겠느냐? 개인의 이익이 들어 있기에 그는 절박하게 하나님의 대업이 이루어지기를, 재난이 빨리 임하기를, 하나님이 한시바삐 악한 자들에게 벌을 주고 착한 자들에게 상을 주기를, 하나님이 영광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는 어떤 꿍꿍이냐?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을 하는 것이냐? (자신이 복을 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이익과 종착지를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경륜이 그의 종착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는 비열하고 몰염치한 것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가 모든 일에서 드러내는 본질은 무엇이냐? 그의 이익이 모든 것에 우선하고 지고지상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경륜을 비롯한 어떤 일도 그의 이익과 충돌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언제 사역을 마칠지, 하나님의 대업이 언제 이루어질지, 하나님이 언제 영광을 얻을지, 언제 이 인류를 멸할지 등은 전부 그의 이익과 종착지를 중심으로 해야 하며, 그의 종착지와 연관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믿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욕할 것이다.

적그리스도 부류가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의 가장 주된 모습은 바로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이는 부정할 여지 없이 불신파가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이다. 어떤 내용을 깊이 파고들겠느냐? 그가 깊이 파고드는 것은 진리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인류를 폭로하거나 심판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고, 나아가 하나님의 뜻도 아니라 자신의 앞날과 운명이다. 어떤 부분의 하나님 말씀을 읽든 만약 그가 가장 관심 갖는, 그의 앞날과 운명에 관한 말씀이 있다면 그는 자세하게 깊이 파고들며, 중요한 부분에는 표시를 해 놓는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그와 같은 부류에 대해 폭로하고 해부한 말씀, 그와 같은 부류에 대한 규정과 말씀을 보면 자세하게 깊이 파고들며,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본다. 무엇을 보고자 하는 것이겠느냐?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행의 원칙을 찾을 수 있을지 보려는 것이겠느냐? 어떻게 해야 그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을지 보려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행간 속에서 그 뒤에 숨겨진, 그와 같은 부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 증오하고 혐오하는 것인지, 아니면 구원하려는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내용을 연구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어조와 태도,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하게 된 배후의 뜻까지 연구하려고 한다. 그는 하나님 말씀에서 그런 부류의 종착지와 관련된 말씀을 다방면으로 종합하고, 하나님이 그런 부류에 대해 혐오하고 구원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발견하면 하나님을 믿는 태도가 바로 80~90% 식어 버리고, 즉시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게 된다. 그의 태도는 180도 달라진다. 어느 정도로 달라지겠느냐? 원래 어떤 본분을 이행하려고 계획했지만 이제는 이행하지 않으려 하고, 무엇을 버리려고 했지만 이제는 버리지 않으려 하며, 원래는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전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믿지 않으니 가족들도 믿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원래의 계획을 전부 철회하고 버린다. 이는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본질적인 태도 아니겠느냐? 그가 하나님 말씀을 깊이 파고드는 목적은 진리를 추구하거나 진리 실행의 원칙을 찾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런 부류의 결말과 종착지를 어떻게 규정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말씀을 찾으려는 것이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얻는 순간, 그는 그것을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않으며, 그 일말의 희망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태도를 크게 바꾼다. 하지만 복받으려는 희망이 전부 물거품이 되고 나면 태도가 또 크게 바뀌어 믿지 않고 배반하게 되며, 심지어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욕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모습이다.

물론,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깊이 파고드는 동시에 하나님 말씀을 이용하여 개인의 혜택을 도모한다. 어떤 혜택이겠느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깊이 파고드는 한편, 하나님 말씀에 어떤 규율이 있는지, 하나님이 사람을 책망 훈계할 때는 어떤 어조인지, 하나님은 어떤 말씀 방식으로 사람을 폭로하는지, 사람을 어떻게 위로하고 권면하는지, 어떤 방식을 채택하는지, 어떤 지혜가 있는지 등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방식을 전적으로 배우고 모방한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이 자주 하는 말을 응용하여 사람들과 대화하고 교제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깊이 파고드는 한편,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 속 각종 진리의 글귀를 갖추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며, 그 말씀들을 이용해 사역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한다. 여기에서 자본이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예를 들어, 예배에서 옳은 말, 옳은 도리를 많이 언급하는 사람, 하나님 말씀을 많이 기억하는 사람,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인용하고 해석하는 사람은 그 교회에서 구원받을 확률이 가장 높은 부류라고 생각한다.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행동하든 자신의 앞날, 운명과 연결 짓는다. 그는 절대 그렇게 단순히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겨 실행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기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지도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그는 하나님 말씀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고, 자신의 명망을 높이며, 구원받기 위한 충분한 조건을 예비한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본질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진리나 사람이 마땅히 준행해야 할 도(道)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매일 하나님 말씀을 받들어 읽고, 하나님 말씀 낭송을 듣기는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 때마다 그는 진심이 없다. 그가 꾀하는 것은 그저 자신의 앞날과 운명뿐이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매우 사랑하고 갈망하는 양 위장하지만, 사실 그가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축적하는 목적은 구원받을 조건에 이르기 위해서이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호감을 얻어 내기 위해서이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감찰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볼 때 겉모습만 보고, 하나님도 사람을 볼 때 겉모습만 본다고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일에서 위장하고 기만하고 간사한 짓을 하며 이렇게 생각한다. ‘표면적으로 이렇게만 하면 돼. 내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쓰지 말라고. 사람들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도 보시지 못하잖아. 사실 나는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읽든 진정한 피조물이 되려는 게 아니야. 만약 앞날과 운명이 걸려 있지 않다면, 이런 고생 안 할 거고, 이런 억울함을 참지는 않을 거야!’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 말씀이 아무리 좋아도 실현될 수 없고 사람이 살아 내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설령 다른 사람들이 조금 살아 낸다고 할지라도 모두 그와 마찬가지로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이방인들 말처럼 말이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렇게 고생하고,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들으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건 무엇을 위해서 그러겠어? 그 한 가지 목적 때문 아니겠냐고. 모두가 알다시피, 앞날과 운명 때문이야.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왜 세상을 추구할 금쪽같은 시간을 포기하고 여기에서 이 고생을 하고 있겠어?’라고 생각한다. 이 일에서 그가 부정한 것은 어떤 사실이냐? 하나님 말씀은 진리이며, 진리는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킬 수 있고, 사람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 말씀이 이룰 수 있는 성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적그리스도가 이런 사실을 인정하겠느냐? 그는 이런 사실을 부정한다. 그는 “모두가 하나님 말씀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하는데, 누구를 구원했죠? 본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왜 그 일이 믿기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 왜 하나님 말씀이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며, 사탄의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게 할 수 있다고 하겠느냐? 하나님 말씀은 진리이고,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으며,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생명으로 삼으면 구원받을 수 있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는 이 사실을 부정한다. 그는 모두가 복을 받기 위해서, 또 좋은 종착지를 위해서 오늘날까지 온 것이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성과를 부정하고, 진리가 사람에게서 이루는 성과를 부정하며, 진리가 사람을 정복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또한 진리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도 부정한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이유가 다 앞날과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는 하나님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께 충심을 품게 하며,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게 하고, 하나님 집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게 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처럼 이익을 최고로 여기는 부류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하나의 논조나 주장으로 여기는 한편, 하나님의 이 말씀들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믿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진심과 충심을 다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되다고, 다 이익과 관련이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도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마지막에 그들 마음속에는 딱 두 단어, ‘앞날과 운명’만 남는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하나님의 경륜이 사람에게 좋은 앞날과 운명, 종착지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진실하며, 이 한 가지가 그들에게는 지고지상한 진리이다. 만약 이것 때문이 아니라면, 첫째,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 둘째, 그는 이렇게 몸을 굽혀 하나님 집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셋째, 그는 하나님 집에서 어떤 본분도 이행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 그는 하나님 집에서 어떤 고생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 만약 그것 때문이 아니라면 그는 진작 속세로 돌아가 부귀영화를 누리고, 속세와 명리, 재물, 사악한 흐름을 추구했을 것이다. 그가 지금 잠시 하나님 집에 머무는 이유는 앞날, 운명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앞날과 운명을 반드시 얻고야 말겠다는 태도를 보이며, 이와 동시에 요행 심리를 품고 하나님의 사역이 끝날 때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 큰 복을 누리는 일원이 되기를 바란다. 이는 어떤 마음가짐이겠느냐? 하나님에게 이익을 요구해 목적을 달성하기를 원하지만 순종하는 것은 싫어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주재를 믿지 않는 것이다. 이는 좀 비정상적인 데가 있지 않으냐? 하나님 말씀을 깊이 파고드는 태도를 놓고 본다면 그는 불신파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태도로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고 읽고 하나님 말씀을 대한다. 그는 전형적인 불신파이고, 부정할 여지 없는 불신파이다. 그럼 그는 왜 하나님 집에서 얼마간 겉으로 보이는 일을 하면서 믿음을 포기하고 물러나지 않은 채 따르는 것이겠느냐? 왜 아무리 책망과 훈계를 받아도 떠나지 않고 교회 생활에 참여하며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이겠느냐?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복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복을 받고 싶어서이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이 말하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버지이고, 젖을 주는 사람이 어머니이다.”라는 것이다. 이는 어떤 논리냐? 이 논리 안에는 사탄의 처세 철학이 가득하지 않으냐? 그는 바로 이런 사탄 철학에 지배된 채 하나님을 믿는다. ‘저는 당신이 어떤 경천동지할 사역을 하시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또 당신이 어떤 성품과 어떤 본질을 갖고 계신지도 상관이 없지요. 오직 제게 복을 주고, 좋은 종착지와 미래를 주며, 큰 복을 얻게 해 주시기만 한다면 당신을 따르고 잠시 당신을 하나님으로 모실 것입니다.’ 여기에 진실한 믿음의 성분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일에서 그를 적그리스도, 불신파로 규정하는 것은 매우 정확하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깊이 파고드는 태도로 대하며,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전혀 여기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 말씀을 뭐라고 여기겠느냐? 비밀 백과? 천일야화? 글자가 없는 천서(天書)? 그는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나 성품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내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는 사람들을 찾고자 하는 것이 바로 지금 나의 절실한 마음이다.”라는 하나님 말씀을 볼 때, 그가 감동을 받겠느냐?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을 찾으신다고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죠? 밥이 나옵니까, 돈이 나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 좋은 종착지가 있나요? 큰 복을 얻을 수 있어요?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관두겠습니다. 헤아릴 필요 없어요. 지금 저는 지옥에 가지 않고 좋은 종착지를 얻는 길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복을 받을 수 있다면 헤아릴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헤아리라는 거죠?” 말해 보아라, 그가 하나님의 요구에 이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 이 한 가지를 언급했다. 네가 이렇게 행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니 큰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이 말을 들으면 ‘내가 너무 앞서갔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건 못 해. 관두자. 이 방법은 안 통하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어.’라고 생각하고는 다른 측면에 공을 들인다. 다른 측면에서 연구하고 분석하는 데 공을 들이지만, 이리저리 분석 끝에 얻는 것은 글귀와 도리뿐이다. 그들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과 앞날, 운명을 평생의 추구 목표로 여기기에 하나님 말씀은 그들에게 입에 발린 말로 보인다. 하나님의 사역이나 성령의 인도에 대해 그들은 어떤 누림도 느끼는 법이 없으며,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빛 비춤이 없고 깨우침과 공급을 얻지 못한다. 그들이 얻는 것이라고는 글귀와 도리, 비밀이나 종착지와 관련된 폭로, 말뿐이다. 이러한 말과 도리를 밑천으로 삼을 때, 그들은 자신의 종착지를 손에 넣고 자신의 종착지를 얻은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의 끊임없는 폭로와 심판, 형벌 속에서, 혹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각 단계 요구 속에서 그들은 또 종착지를 잃은 것 같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시종일관 마음을 졸이며 불안해하고, 좋은 종착지를 얻기 위해 마음 깊은 곳에서 수시로 사상적 싸움을 벌인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 한마디 때문에 고뇌하고, 하나님 말씀 한마디 때문에 소극적이 되며, 또 하나님 말씀 한마디 때문에 기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기뻐하든, 구명줄을 잡든 그런 사람들에게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결국, 일부 적그리스도는 자기 같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할 것 같다고 느끼고, 하나님 말씀을 보며 하나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낀다. 자신이 과연 복을 받을 수 있을지, 앞날과 운명이 과연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불확실하다고 느낀다. 이럴 때, 그들은 어떻게 하겠느냐? 회개하겠느냐? 니느웨 사람들처럼 손으로 행하는 악을 버리고 돌이켜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 말씀을 생명으로, 자신이 생존하는 근간으로 받아들이겠느냐? 그러지 못한다. 그러니 오랜 세월 추구하고 기대하고 하나님 말씀을 깊이 파고든 후, 자기 같은 사람은 전혀 복을 받을 수 없고, 아예 희망도 없으며, 자기 같은 사람은 전혀 하나님이 구원할 대상이 아니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전혀 얻지 못할 거라는 결론을 내리면, 그들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을 떠날 것입니다.)

“사랑의 맹세를 되새기며 몸과 마음을 바친다.”라는 영적인 말이 있다. 이 말은 너무도 ‘위대하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인류의 언어가 ‘위대하다’고 깊이 느꼈다. 인류는 자신의 맹세를 이렇게나 귀하고 순결하고 무결하게 보며, 사랑의 봉헌을 이렇게나 순결하고 신성하게 본다. 그럼 적그리스도가 사랑의 맹세를 되새기며 몸과 마음을 바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냐?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은 후 제 생각이 통하지 않고 결과를 얻지 못할 것 같으면 다시금 사랑의 맹세를 합니다. 지난날 하나님 앞에서 한 맹세를 되새기는 거죠. 이것이 뉘우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려울 것 없습니다.” 그럼 적그리스도는 그렇게 할 수 있느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못 하겠느냐? ‘사랑의 맹세를 되새기는 것’은 인류 최고의 명언 아니냐? 인류의 가장 위대하고 순결한 사랑 아니냐?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겠느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며,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의 사랑은 허울뿐이고, 이익을 기초로 합니다. 자기가 도모할 이익이 사라지는 순간 그는 등을 돌려 떠날 것입니다.) 여기까지 온 적그리스도는 큰일을 그르쳤다고, 자기가 베팅을 잘못했다고 느끼며, 정신을 차린다. 일종의 구호와 이론으로 정신세계를 지탱하려는 것이다. 어떤 구호겠느냐? ‘사랑의 맹세를 되새기며 몸과 마음을 바치자’는 것이다. ‘다시 한번 해 보자. 그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하나님을 믿는 것도 끝이 난 거라고.’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사역을 하면서 매일 말씀하는데, 매번 하는 말씀이 모두 진리이고, 모두 사람의 패괴 성품을 폭로하며, 모두 사람에게 어떻게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어떻게 진리 원칙을 깨달아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 전부 이런 말씀이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왜 종착지나 복받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으시지? 그럼 사람의 앞날과 운명이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건 전부 헛된 것 아니겠어? 사람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이 사라지는 것 아니겠어? 이 일에 대해서는 통 언급이 없으시네. 사람의 기대가 물거품이 되는 건 아닌지 몰라.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그래, 하나님 말씀에 언급된 게 없으면 사람의 방법을 써야지. 사랑의 맹세를 되새기는 거야!’ 지난날,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떻게 그렇게 큰 열정과 사랑, 믿음을 지녔겠느냐? 이런 것들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다짐하며 ‘이번 생은 언제 어디서나 원망도, 후회도 없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봉헌하겠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비가 와도, 날이 궂어도 날이 좋아도, 병고와 환난이 닥쳐도 바닷물이 마르고 바위가 흙이 될 때까지 하나님을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만약 맹세를 어긴다면 저는 벼락을 맞아 죽을 것이며, 좋은 종착지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맹세했다. 지금 그 맹세의 말들은 왜 사라진 것이냐? 그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그 믿음과 사랑도 전부 마모되었다고 생각한다. ‘안 되겠어. 정신을 차려야 해. 처음처럼 그렇게 새롭고 활기차야 한다고. 그렇게 큰 믿음과 열정을 갖고, 내 꿈과 종착지, 복을 얻으려는 욕망을 되찾아야 해.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도 지난날처럼 커지지 않겠어? 하나님을 위한 진실한 봉헌이 지난날과 같지 않겠어?’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아무리 고뇌해도, 지난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열정을 아무리 되새긴다 해도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사람의 현재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그 상황은 어떤 것이겠느냐? 앞날과 운명이 물거품이 되고, 자신에게서 점점 더 멀어질 때, 복받으려는 욕망이 거의 무너져 갈 때, 그 모든 좋은 생각과 욕망이 실현되지 않을 때, 사람이 계속 버티기란 무척 힘든 일이다. 이렇게 버틸 때 사람의 마음은 무척 고통스럽고,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상태와 마음이 수시로 생겨나며, 하나님의 사역이 언제쯤 끝나 천국의 복을 누릴 수 있을지 늘 기대하게 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이 빨리 끝나고 대재난이 임했으면 좋겠어. 하늘이 무너져서 모두 죽었으면 좋겠다고. 아무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게 말이야. 내가 복을 받지 못하니 당신들도 복받을 생각을 버리라고!’라고 희망하기도 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기를, 하나님의 대업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하나님의 6천 년 경륜이 마지막에 영광을 얻지 못하기를,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이긴 자를 얻어 인류를 아름다운 종착지로 인도하지 못하기를 바란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원치 않는다. 반대로, 복받으려는 모든 욕망이 무너질 때, 그는 마음속 깊이 하나님의 사역을 저주하고 싫어하며, 나아가 하나님 말씀을 싫어한다.

지금, 이렇게 오랜 세월 설교를 들으면서 점점 더 깨닫고, 마음이 밝아지며, 더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일부 사람들은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반감을 갖는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 순간 추한 몰골을 보이고, 하나님이 또 진리를 교제하고 사람의 패괴 성품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들으면 반발심을 품는다. 이 밖에도 강렬한 반감을 표출하는데, 어느 정도로 그러겠느냐? 어떤 사람은 마음속으로 욕을 한다. 하나님을 욕하고 진리를 욕하며 교회의 리더 일꾼을 욕하고 꽤 추구하는 사람들을 욕한다. 그는 그런 사람들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공격하고 싶어 한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묵상하고 하나님 말씀을 교제하는 것을 볼 때, 그는 마음속으로 욕을 하는데, 욕하다가 지치면 졸기 시작한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교제를 들으면 눈을 반짝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교제를 듣거나 누가 하나님 말씀에서 어떤 빛 비춤을 얻었다는 말을 들으면 머리가 몽롱해지고 마음이 흐려지며 영적으로 침체되고 마음이 답답해 숨을 잘 못 쉬게 되어 밖에 나가 바람을 쐬고 싶다는 생각만 드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앞날과 운명,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는 시점, 비밀 등의 일을 교제하면, 그는 실내가 아무리 좁아도, 공기가 아무리 안 좋아도 나가서 바람을 쐬지 않고, 졸지도 않으며,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다. 아무리 오래 말해도 상관없다. 자지 않고 먹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일부 새 신자들이 나와 접할 때, 내가 사람의 내적 상태와 진리 추구법을 교제해 줬지만 알아듣지 못하고 내게 비밀을 말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내가 “비밀을 듣고 싶으냐? 그럼 먼저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마. 언제나 비밀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 하고, 하나님 말씀에서 이런 일을 연구하는 데 집중하는 사람들은 다 좋은 작자가 아니다. 그들은 전부 불신파이고 바리새인이다.”라고 말하니 그들은 눈이 둥그레진 채 민망해서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또 틈을 봐서 물어 나는 똑같은 말로 대답해 줬다. 말해 보아라, 내가 이렇게 대답하는 게 어떠냐? (좋습니다. 그가 스스로를 반성하게 하니까요.) 그가 반성하겠느냐? 그는 반성하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 그에게 알려 주어라. “비밀은 생명도, 진리도 아닙니다. 당신이 많은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해서 진리를 깨닫는 것은 아니에요. 당신이 모든 비밀을 이해한다고 해서 천당에 가고 좋은 종착지를 얻는 것도 아니고요.” 이 말로 그를 도와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 말은 확실하지 않으냐? 영적인 이해력이 있으며 진리를 좋아하고 추구하는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저는 비밀이 생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알았네요. 비밀은 생명이 아니군요. 그럼 연구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생명은 뭔가요?”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얼마간 깨달은 것이다. 그럼 적그리스도 부류가 이 말을 듣고 도움을 얻겠느냐? 변화하겠느냐? 변화하지 못한다. 그는 이 말 가운데서 어떤 도움도 얻지 못한 채 이 말은 이렇다 할 축복이 없고, 그의 앞날이나 운명과 관계되지도 않는다고, 그의 앞날이나 운명과 상관도 관련성도 없으니 이 말을 들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럼 어떤 일을 교제해야 그의 앞날이나 운명과 관계되겠느냐? 예를 들어 네가 “지금 이 세상에는 많은 이상(異象)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달이 4개가 떴고, 블러드문이 몇 번이나 나타났죠. 기이한 천체 현상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갖가지 전염병과 재난이 나타났고요. 어떤 지역에서는 식인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죠. 이런 형세를 볼 때 계시록에 예언된, 대접 몇 개니 재앙 몇 개니 하는 때가 이미 온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적그리스도 부류는 바로 눈을 반짝이고 귀를 쫑긋 세우며 기뻐할 것이다. ‘이 시대에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큰 복을 받을 수 있게 됐잖아. 나는 정말 똑똑하다니까! 나는 속세를 추구하지 않고 속세에서의 진로와 가정을 버리고 하나님의 이 단계 사역을 따랐어. 여기까지 올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지. 하나님의 날이 눈앞에 있잖아. 형세를 보니 죽기 전에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는 날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때가 되면 분명 하나님께 구원받는 사람 중 하나가 될 거야. 정말 잘됐어!’ 그는 마음속으로 남몰래 기뻐한다. 자기가 옳은 길을 선택하고 옳은 문을 찾은 것, 대가를 치른 것, 지금까지 따르면서 포기하지 않은 것, 아직 하나님 집에 있는 것, 뭔가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고 출교되거나 제명되지 않은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럼 이제 그는 진리를 실행하겠느냐, 아니면 여태까지의 바람을 이어 나가겠느냐? 적그리스도의 마음 깊은 곳의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자기가 이뤄질 거라고 생각하는 그 부분 말씀을 찾고는 보물을 얻은 양 자기는 행운아라고, 옳은 길을 선택했고 옳은 문에 들어섰으며 자기가 선택한 분이 하나님이 맞다고, 자기는 똑똑한 사람이고 슬기로운 처녀라고 생각한다. ‘그때 일자리를 포기해서 다행이야. 내 선택은 옳았어. 나는 어쩜 이렇게 똑똑할까! 지난날, 한순간 방심했다면 지금 이 복을 얻지 못했을 거야. 앞으로도 계속 조심해야지. 내 앞날과 운명을 위해 평생 노력하는 거야.’ 이 일에서 너희는 적그리스도의 어떤 본질을 보았느냐? 이 사람들은 투기꾼 아니겠느냐?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조금도 없다. 그들은 투기꾼이고 하나님 집에 섞여 들어온 부류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항상 머릿수만 채우며 허송세월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몇 년 동안 따랐는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어떤 큰 일들을 했는지, 하나님의 어떤 사역을 직접 체험하고 하나님의 어떤 사역 단계를 이해하고 있는지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한다. 온종일 마음속으로 이런 일을 계산하는데, 이리저리 계산하다가 가장 중요한, 진리와 생명에 속하는 것들은 빠뜨린다. 그들은 오직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이것은 곧 투기이다. 언제든 하나님의 어떤 말씀도, 어떤 사람의 체험적 인식도 그들의 투기하는 태도를 바꿔 놓지는 못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양보도 하지 않고, 자신의 앞날과 운명을 위해서 어떤 관점도, 자신이 걸어가는 방향과 목표, 처신의 원칙도 바꾸지 않는다. 또한, 앞날과 운명을 위해 하나님 말씀을 조금도, 한 구절도 실행하지 않는다. 혹자는 “그들도 가끔은 실행합니다. 예를 들어 버리고 헌신하는 것이 있지요.”라고 말하는데, 그가 어떻게 실행하든 전부 앞날과 운명을 얻고 복을 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이루어지며, 어떤 진리를 실행하든 불순물이 섞여 있고, 속셈과 목적이 들어 있으며, 하나님이 요구한 실행과는 다르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은 주로 하나님 말씀을 이용해 종착지와 비밀을 찾고, 하나님의 사역과 경륜이 언제쯤 끝날지, 재난이 언제 임할지 등의 내용을 찾기 위함이다. 그는 자신의 종착지를 위해 많은 것을 대가로 지불할 수 있고,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고 대재난이 임할 때, 자신이 한 일과 치른 대가, 버린 것들로 자기가 원하는 복을 얻고 재난의 고통을 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이자 관심을 갖는 내용이다. 하나님 말씀을 깊이 파고드는 모든 과정에서 몇 년이 걸리든 그가 관심을 갖는 유일한 일은 바로 자신의 앞날과 운명이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의 주안점과 하나님 말씀에서 찾는 내용은 다 특별한 징조나 특징 등이다. 보통 하나님을 믿은 지 반년에서 1년 정도 된 새 신자들은 하나님 말씀에서 이런 화제를 찾는다. 하지만 반년이나 1년이 지나면, 일부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전부 읽은 후 더 이상 연구해도 의미가 없으며 이런 내용은 사람이 진리에 진입하게 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진리 진입에 지장과 교란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읽지 않는다. 어쩌다 한 번 읽어도 마음속으로 깨달으면 그만이다. 그것 외에는 ‘어떻게 해야 진리에 진입할 수 있을까? 사람을 폭로한 하나님 말씀은 무척 많아. 사람의 간사함과 패역, 교만한 성품을 폭로하고, 사람의 갖가지 종교 관념과 하나님을 대하는 갖가지 태도를 폭로하고 있지. 나아가 사람의 각종 비정상적인 인성의 모습도 폭로했어. 그럼 하나님 말씀에서 사람이 실행해야 할 것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라고 묵상한다. 진리를 좋아하고 추구하는 사람은 이런 내용에 공을 들인다. 그들이 자주 물어보는 것은 “이제 저희는 어떻게 행하고 실행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믿은 후 이방인이나 종교 신앙이 있는 사람들과는 달라졌을 텐데, 그럼 저희의 삶에는 어떤 질적인 변화가 생길까요? 처신 측면에서 언행을 어떻게 하고, 사람들과 어떻게 교류하며,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할까요?” 등 현실에서 깨닫고 진입해야 할 실제적인 문제들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 부류는 10년, 20년, 30년을 믿어도 절대 이런 질문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깊이 파고들고, 하나님 말씀에서 복받을 희망과 종착지를 찾는데, 20~30년 동안 찾아도 싫증을 내지 않는다. 그들은 약간의 움직임만 있어도 급히 하나님 말씀에서 자신의 종착지와 관련된 내용을 찾은 후, 자기가 지금처럼 계속 믿는다면 하나님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 평가한다. 그들은 주기별로, 시기별로 자신의 종착지를 이렇게 판단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 사역 방식을 바꾼다거나 사람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드러낸다고 해서 절대 생각이나 태도를 바꿔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20~30년 동안 믿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런 비밀과 하나님이 언급한, 사람의 운명, 종착지와 관련된 화제에 공을 들인다고 한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어느 정도로 공을 들이는 줄 아느냐? “저는 하나님 말씀을 앞뒤로 계속 대조해 보면서 최고의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봄에 땅을 떠나실 겁니다.”라고 말한다. 말해 보아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어떤 기분이었겠느냐? 기뻤겠느냐, 아니면 슬펐겠느냐? 나는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정말 이런 데 공을 들이는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구체적인 계절까지 안다니, 만약 더 연구해서 구체적인 시간이나 분초까지 맞춘다면 그자는 그야말로 ‘기재’일 것이다! 나 자신조차 모르는 일을 이런 ‘기재’가 연구해 내다니, 정말 우습고도 화나는 일이다. 무엇이 우습겠느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올 때가 언제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탄조차 몰랐다. 사탄조차 모르는 일을 하나님이 어떤 한 사람에게 알게 했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대업이 이뤄지는 날, 하나님의 육신이 땅에서 행하는 사역이 끝나 땅을 떠나는 시간을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알려 주겠느냐?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할 이유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주려 하지 않는 일에 대해 흘릴 리 있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감히 자기가 하나님 말씀에서 하나님이 땅을 떠나는 시간을 찾았다고 하며 또 그것이 봄일 거라고 한다. 이는 기괴한 일 아니겠느냐? 우스운 일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이냐? 하나님이 봄에 무엇을 한다고 한 말은 다른 일을 지칭한 것일 수도 있다. 정말 그 일을 지칭한 것이겠느냐? 너는 왜 그 일에 갖다 붙이는 것이냐? 네게 알려 줄 일은 명문으로 알려 주며, 네게 알려 주지 않는 일은 네가 연구해도 깨달을 수 없다.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안다고, 연구해서 결과를 얻었다고 구체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은 헛소리 아니겠느냐? 이는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을 교란하는 것이며, 사람의 시선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그것은 사탄에게서 온 것이지, 절대 하나님에게서 온 깨우침이 아니다. 하나님은 네게 그것을 깨우쳐 주지 않으며, 네가 그것을 안다 해도 쓸모가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알려 주지 않으려는 일을 절대 무의식중에 흘리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습다고 한 이유이다. 그럼 화가 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하는 것은 사람이 그 말씀들을 통해 자신의 패괴된 성품을 변화시키기 위함입니다. 또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얻게 하기 위함이고요.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가져다가 종착지와 비밀을 연구합니다.) 그것 또한 좀 화가 나는 일이다. 하지만 정말 화가 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예를 들어 한 부자가 자식을 위해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해 보자. 그의 자식은 아직 어리고 그의 보살핌이 필요하며, 모든 생활 여건을 그에게 의지한다. 그런데 그 자식이 부모가 얼른 죽기를 바라겠느냐? 점쟁이를 찾아가 부모가 도대체 언제쯤 죽을지 알아보겠느냐?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화가 나지 않겠느냐? 이는 화가 나는 일이다. 이 부류는 너무도 증오스럽다! 하나님이 땅에 와서 그 육신이 100살까지 살지라도, 100년 동안 사역할지라도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진리는 제한적이다. 보아라, 예수의 성육신부터 지금의 이 단계 사역까지 2천 년 동안 이 인류는 진리를 얼마나 얻었느냐? 기본적으로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이 단계 사역은 30년 동안 이뤄졌고, 하나님은 30년 가까이 말씀했다. 하나님 말씀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은 이미 30년 가까이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느냐? 사람이 깨달은 것은 무척 제한적이다. 또 사람이 진리에 진입하는 속도는 느리다. 진리를 사람 내면의 생명으로 삼는 것만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고 무척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느린데, ‘하나님이 언제 땅에서 떠나실까? 하나님의 사역은 언제 끝날까?’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땅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는 게 네게 어떤 이득이 되겠느냐? 하나님이 땅에서 떠나는 날, 너는 죽은 목숨이며 사형 판결을 받게 될 텐데 무엇이 기쁘단 말이냐? 이는 어떤 사람이냐? 품행이 나쁜 사람 아니겠느냐? 세상 사람들은 이런 자를 불효자라고 부르고, 우리는 이런 부류를 불신파, 적그리스도라고 부른다. 이런 자는 좋은 존재가 아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이라는 책의 내용이 선포되는 동안 많은 사람이 생각했다. ‘성육신은 사역을 하고 몇 개의 사역 단계를 펼칠 뿐이야. 몇 가지 사역 방식과 말씀 방식이 다라고. 그러면 사역은 끝나는 거야. 사역이 끝나면 육신은 쓸모가 없어지고, 더 이상은 말씀할 필요도 없겠지. 우리는 뭔가를 얻을 것이고, 하나님의 사역이 언제 끝날지 기다리기만 하면 돼. 하나님의 이 말씀들을 우리는 모두 이야기할 수 있고, 또 전할 수도 있으니 종착지를 얻고 큰 복을 받을 거야.’ 이런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 있었다. 나중에 나는 또 많은 말씀을 교제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라는 말씀도 있고, 지금 이 기간에 교제한 말씀도 있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한 권 아니었어? 왜 또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라는 말씀을 선포하신 거지?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이 왜 점점 더 많아지는 걸까? 앞으로는 비밀이나 하늘에서의 일, 사람이 나중에 하늘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할지 등에 관해 말씀하셔야 할 텐데, 이런 말씀을 하시면 얼마나 신이 날까!’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겠느냐? (적그리스도가 그럴 것입니다.) 그들은 왜 이런 생각을 하겠느냐? 진리에 조금도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는 오랜 세월 하나님을 따랐어. 우리는 하나님이 처음에 어떻게 사역하셨는지 안다고. 하나님의 사역에 몇 단계가 있는지 직접 겪었고, 하나님의 말씀 방식에 대해서도 직접 체험하고 두 눈으로 보았지. 우리는 하나님의 증인이자 복받을 자격이 가장 많은 세대야.’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진리를 선포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정하고, 그들로 하여금 몇 개의 사역 단계를 체험하도록 인도했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하나님을 따르게 된 것이다. 이후, 하나님의 사역이 부단히 앞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또 이 단계 사역을 따를 수 있는 더 많은 사람을 택하였다. 하나님 사역의 중점 대상은 끊임없이 확충되고, 또 끊임없이 옮겨갔다. 처음에 하나님을 따른 사람 중 일부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갖가지 관념과 오해를 품으며,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갖가지 불복과 불만의 마음을 갖고 있으므로 점차 도태되었다. 이들을 도태시키는 데는 주관적, 객관적 이유가 있었다. 주관적 이유는 그들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처럼 하나님 말씀을 도리로 여겨 여기저기서 전하지만, 지금까지도 죽은 사람처럼 무엇이 진리 실제인지 모르는 자들이 있다. 객관적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의 최초 체험자지만, 인품과 추구하는 바, 자질 때문에 앞으로 이어질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 절차에 따라 빠르게 도태되고 버림받았다.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라는 말씀이 선포되기 전 한동안, 많은 사람이 마음속으로 몰래 기뻐했다. ‘내가 예전에 대적하고 정죄했던 그 사람이 드디어 할 말을 다 했네. 그의 사역 단계가 드디어 끝났어. 예전에 나는 그에게 관념과 불복, 불만의 마음을 품고, 그를 정죄하며 대적했지. 역시 내가 맞았어. 그는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아니었다고. 내가 그를 어떻게 대했든 문제 될 건 없겠어. 그는 하나님이 아니니까. 그는 그저 하나님의 전달자, 대변인에 불과하다고.’ 더 심한 자는 “그 육신은 우리와 아무 차이가 없어. 말씀하고 사역하는 것은 그의 내면에 있는 그 영인데, 그건 그 육신과 관계가 없지.”라고 말했다. 일부 사람들은 뒤에서 이렇게 날뛰며 정죄하고 모독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제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라는 진리가 선포되었을 때, 지난날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모독했던 사람들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한 측면에서 보자면, 그들은 오랫동안 마음에 관념을 품고 있었고,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과 힘겨루기를 했으며, 그 사람에게 불복과 불만의 마음을 품었고, 심지어 그를 정죄하고 모독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2013년 이후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들 가운데는 많은 사람이 알지 못했던 비밀이 드러나 있었다. 그 비밀들은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돼 토대가 없는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 믿음을 굳건히 해 주는 역할을 했고, 의심하는 마음을 일소하며 확신을 안겨 주었다. 반면, 하나님을 믿은 지 오래되었지만 한때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정죄하고 모독한 사람들은 한 방 맞은 것처럼 더더욱 불안해했다. ‘이제 우리는 완전히 끝났어. 하나님께 도태됐다고. 하나님은 우리를 원치 않으셔. 여태까지 하나님은 이렇게 많은 말씀을 선포하셨지만, 우리는 늘 그분을 사람으로 여기면서 그 사역 단계가 끝나면 그분이 하실 일도 없어질 거라고, 그분은 봉사를 다 하신 거라고 생각했지. 그다음부터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교류하고 하늘의 하나님만 믿을 거라고 생각했어. 땅에 계신 하나님께는 관념을 품은 채 불복하고 무시했어.’ 2013년에 선포된 말씀들을 통해 이 사람들의 오만함은 한풀 꺾였다. 그전까지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에 의구심을 품었고,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 반감을 보이고 모독했으며, 심지어는 믿지 않기도 했다. 무엇 때문이었겠느냐? 관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육신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까지 부정했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볼 때, 그들은 어떤 결말을 맞이해야겠느냐?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을 볼 때, 그들의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불신파입니다.) 불신파의 가장 주된 특징은 첫째, 투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서 자신의 이익을 찾은 후 그것을 물고 늘어지며 그 가운데서 이익을 도모한다. 둘째,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모독할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에게 관념을 품을 수 있다. 또 자신의 관념에 안 맞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판단하고 정죄하고 대적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조금도 경외하지 않는다. 이들은 전부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지녔으며, 적그리스도에 속한다. 그들이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진리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가장 먼저 하나님 말씀을 얻은 것은 그들이고, 가장 먼저 하나님 말씀을 들은 것도 그들이며, 직접 하나님의 사역 단계와 사역 방식을 체험한 것 또한 그들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벌써 30여 년을 믿었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어떤 본분도 이행하지 못하고, 어떤 체험도 말하지 못하며, 어디를 가나 죽은 글귀와 도리만을 늘어놓는다. 그들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하나님을 30년 동안 믿었지만 성품에 전혀 변화가 생기지 않았고, 하나님을 전혀 경외하거나 인식하지 않으며, 뒤에서 함부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판단하고, 트집을 잡아 하나님을 정죄한다. 두려움이나 경외는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고 싫어하며, 또한 진리를 대적한다. 성육신과 관련해 그들은 어떤 말이든 내뱉고, 어떤 일이든 평가하고 판단하며, 관념이 생기면 개의치 않고 유포한다. 이런 사람들이 가증스럽지 않으냐? (가증스럽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 속하는 사람이겠느냐? 하나님을 30년 동안 믿었지만 실제가 전혀 없고 성품 변화도 전혀 이루지 못했으니, 이는 죽은 사람 아니겠느냐? 정말 진리를 추구하려는 사람, 정상 인성을 갖추려는 사람은 하나님을 3년만 믿어도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닫고 거기에 진입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30년 동안 믿은 사람이 전혀 체험이 없다. 네가 체험을 말해 보라고 하면 그들은 도리와 구호, 사람을 가르치는 말만 늘어놓을 뿐이다. 그럼 그들은 그 30년 동안 하나님 말씀에 무슨 공을 들인 것이겠느냐? 무엇을 얻은 것이겠느냐?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준 축복과 약속의 말씀, 듣기 좋은 말씀, 위로하고 권면하는 말씀, 자기 마음에 드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그들은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진리와 인류에 대한 요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 한 구절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도태시켜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도태되면 억울하겠느냐? (억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세에 이렇게 많은 사역을 하고 또 이렇게 많은 말씀을 했다. 사람은 모두 그것을 체험했으며, 또한 하나님 사역의 각 단계를 직접 목도하였다. 어떤 각도에서 보든 하나님이 이렇게 많은 진리를 선포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며, 사람이 의구심을 품어서도 안 된다. 성육신이 아무리 평범하고 정상적이어도, 사람의 눈에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겨 받아들여야 한다. 혹자는 “성육신이 너무 보잘것없고 평범한 데다가 전혀 위대하지 않은데 저희가 어떻게 탄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평범한 육신이 어떤 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정말 저희에게 큰 복을 주실 수 있습니까? 저희는 아는 게 없으니 그를 평범한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요.”라고 말하고, 또 혹자는 “당신의 어떤 행사는 경탄스럽지 않고, 어떤 행사는 우리가 관념을 갖게 하며, 어떤 행사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하신 몇몇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당신은 하늘의 하나님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끝까지 대항할 겁니다. 당신이 복음을 전하라고 하면 기어코 우리는 전하지 않을 것이고,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면 기어코 이행하지 않을 것이며, 진리를 받아들이라고 하면 기어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라는 사람에게 끝까지 대항할 거예요. 당신이 우리를 어찌할 수 있을지 지켜보죠!”라고 말한다.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이 사람들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역을 부정하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부정하며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부정할 천 가지, 만 가지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 하나가 있으니, 그들이 아무리 많은 이유를 대더라도 이 진리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네가 나라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고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네가 하나님의 이 말씀들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고, 이 말씀들을 진리로 여겨 실행하지 않는다면, 솔직히 말하건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히 천국의 문에 들어서지 못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이 말씀들을, 이 진리들을, 사역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리 많은 도리를 깨닫고 아무리 많은 고생을 할지라도 진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니, 그런 너는 폐물이다. 어떤 명분으로 하나님을 믿든, 어떤 목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든 너는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받을 수 없는 네가 어떤 복을 얻을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하늘의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고, 어떤 사람들은 땅의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며, 또 감히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와 힘겨루기를 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결말과 종착지가 어떻게 될지 신경도 쓰지 않고 무관심하게 구는데, 이게 제정신이겠느냐? 이 행실이 나쁜 자들은 너무도 사악하다! 하나같이 악인이고 불신파이며 투기꾼이고 몰염치한 작자들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질이다.

방금 우리는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 교제하였다. 적그리스도 부류는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그 속에서 실행의 원칙이나 진리를 찾지 않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道)에 이를지 깨달으려고 하지 않으며, 나아가 하나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 속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종착지와 각종 이득을 얻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 이득에는 이번 생에 축복을 받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은혜를 받을지, 내세에 백 배를 얻을 수 있을지 등이 포함된다. 이것들이 바로 그들이 하나님 말씀 속에서 찾으려는 내용이다. 그래서 어떤 각도에서 보든 적그리스도 부류는 결코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삼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진리라고, 인류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그 말씀을 이용해 자신들이 원하는 복과 종착지를 얻으며, 하나님 말씀을 도약대 삼아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얻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들이 추구하는 바와 걸어가는 길,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그들은 한 무리 불신파이고 투기꾼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 속에서 그들이 원하는 이득이나 종착지를 찾지 못하고, 혹은 하나님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말씀한 앞날과 운명,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찾지 못하면 실망한다. 욕망이 충족되지 못할 때, 그들은 가차 없이 전혀 망설이지도 않고 손에 있는 하나님 말씀을 내려놓으며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 그들이 원하는 삶을 추구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온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기를 원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을 진리로 여기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 말씀을 통해 그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그들 자신의 욕망과 야심을 충족하려고 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질리지도 않고 하나님 말씀 속에서 결말과 종착지, 재난에 관한 내용, 비밀과 인류 발전에 대해 밝힌 내용, 그리고 하나님 사역의 내막 등을 찾는다. 그들이 관심 갖는 것은 이런 내용이다. 이런 내용들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 심지어는 늘 패괴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멸시하고 거부하며, 나아가 패괴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폭로를 싫어한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의 단어 사용이나 말씀하는 어조를 트집 잡으며 따지고 든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인류를 ‘음녀’나 ‘기생’이라고 드러내면 그는 “이게 무슨 하나님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사람을 헤아려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또 사람의 관념과 어법, 패괴된 인류의 상식에 맞지 않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 그들은 ‘이건 하나님 말씀이 아니야.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말씀하실 리가 없지! 하나님은 그렇게나 지고하고 위대하며 심오해서 헤아릴 수 없는데 말이야. 하나님 말씀이 어떻게 이렇게 평범할 수 있겠어? 어떻게 이렇게 상식에 어긋날 수 있겠냐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라면 모든 사람이 높이 보고 숭배하고 우러러보아야 해. 심오해서 가늠할 수 없어야 하고. 그런 게 하나님 말씀이지!’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갖은 관념을 갖고 있고, 갖가지 규정을 하며, 나아가 각종 요구를 한다. 그들의 요구와 규정으로 볼 때, 적그리스도의 본질은 사탄의 본질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는 태도, 거부하고 판단하거나 트집 잡고 따지는 태도로 대한다. 또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에 전혀 공을 들이지 않고, 순종하거나 받아들이거나 실행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의 본질이 바로 사탄과 악령의 본질인 것이다. 적그리스도들이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는 바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며,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대표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대표한다. 이 말씀들이 육신을 통해 선포되었든 아니면 하나님의 영을 통해 선포되었든, 어떤 내용을 선포했든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을 대표한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들이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고 분석하며 거기에 관념을 갖는 것은 하나님에게 관념을 갖는 것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나아가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 않으며, 더욱이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적그리스도들은 이런 본질을 갖고 있다.

혹자는 말한다. “성육신 하나님은 너무 보잘것없고 평범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사는 늘 제게 관념이 생기게 하고, 제 상상에 전혀 부합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표하지 않아요. 그래서 말씀과 행사를 통해 아무리 많은 진리를 선포할 수 있을지라도 그는 하나님 같지 않은 겁니다.” 이 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이 말은 무엇을 대표하느냐? 사탄을 대표하지 않느냐? 사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결코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 않으며, 나아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법도 없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말하려고 한다. 그것이 말하는 방식은 하나님을 비웃고 희롱하고 기만하는 것이며, 그것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지위가 없다. 한편, 적그리스도의 언행은 사탄과 완전히 똑같다. 그들의 본질은 같다. 그저 사탄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적그리스도는 사람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인두겁을 둘러쓴 사탄이라는 것만 다를 뿐이다. 만약 사탄이 아니라면 그는 그런 일,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사탄은 언제나 거짓말을 하니 하나님의 말씀 역시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또 사탄은 늘 사람을 기만하며, 교활하고 간사하고 사악하다. 그러니 그것은 하나님 말씀 또한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든 적그리스도는 늘 하나님 말씀에 자기 말을 보태고, 자기 뜻을 더해 함부로 해석한다. 더 심각한 경우, 하나님의 몇몇 말씀이 그들보다 대단하지 않고 레벨이나 수준이 떨어진다고, 패괴된 인류를 정복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방식과 어조, 내용을 몇몇 사람들 사이로 가져와 분석하고 판단하며, 나아가 비난하고 정죄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동시에 그 하나님에게서 자신들이 원하는 앞날과 운명을 얻고자 하고, 또 그 하나님에게서 자신들이 원하는 종착지를 얻고자 기다린다. 그렇다면 왜 여전히 그렇게 하겠느냐? 이는 자기 뺨을 때리는 짓 아니겠느냐? 이유는 딱 하나다. 그들의 눈에는 이런 하나님이 하는 말씀이 너무 평범하고 일반적으로 보이며, 행사 또한 너무 일반적으로 보인다. 이런 하나님은 그들이 우러러보고자 하는 존재가 아니고, 그들의 상상 속 존재도 아니며, 그들과 맞지 않는다. 만약 이런 하나님을 따른다면 그들의 종착지와 앞날, 운명은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하나님을 극력으로 반대하며, 판단하고, 하나님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사역을 망치고 교란하고 파괴하여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려 한다. 그러면 그들의 목적도 달성된다. 혹자는 “그들의 목적이 달성되면 그들의 종착지도 사라지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는데, 이 부류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아예 인정하지 않고, 나아가 하나님이 경영 사역으로 인류를 구원한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판돈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이다. 만약 정말 그 하나님을 무너뜨린다면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하나님 집에서 그렇게 고생할 필요도 없다. 안심하고 대담하게 속세로, 사악한 흐름 속으로, 그들의 소위 그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재난이나 연단도 겪을 필요가 없고,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은 더더욱 겪지 않아도 된다. 이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고 이 세상은 예전처럼 돌아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꿈에 그리는 일이다. 그자들이 악하지 않으냐? 그들이 악한 근원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본질적으로 사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증오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적그리스도 악마들은 마음속 깊이, 영적으로 자신들 같은 부류가 하나님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느끼고 있고 알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증오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합하지 못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인성과 본성 본질을 혐오한다. 그래서 그들이 아무리 공을 들여도, 아무리 복을 받고 싶어 해도 마지막 결과는 그들의 의지로 바뀌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사실도 바꿔 놓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 그리스도와 합하지 못한다. 그럼 그들의 마지막 결말은 무엇이겠느냐? 모두 멸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결과를 그들도 마음속으로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하나님 집에 여전히 머물러 있겠느냐? 그들은 이렇게 좋은 복받을 기회를 선뜻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도박을 하려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걸면 어쩌면 복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얼렁뚱땅 빠져나가 살아남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하나님이 눈치채지 못하는 새에 천국의 문에 슬쩍 들어설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는 이 몇 개의 ‘어쩌면’이라는 요행 심리를 품고 하나님 집에서 계속 허송세월을 보내지만, 그의 관점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말씀과 진리, 모든 긍정적인 사물을 멸시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준이 너무 낮은 것 아닌가?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 왜 겨우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만 말씀하시는 거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말씀이라면 심오해야지. 점점 더 고매하고 예측하기 어렵고 사람이 이를 수 없어야 한다고. 우리는 높은 요구 기준이 필요해. 평범해서 공개 석상에 내놓을 수 없는 낮은 기준의 요구는 필요하지 않단 말이야.’ 이런 사람은 진리 실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 마음이 좀 언짢아진다. 하지만 교제와 체험, 한동안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한 내용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된다. 어째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하겠느냐? 사람은 사탄에게 깊이 패괴되어 정직한 자가 한 명도 없으며, 온 세상은 거짓말로 점철되어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두가 매일 거짓말을 거듭하며, 말에는 사탄의 거짓말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는, 가장 간단명료한 요구를 한 것이다. 사람이 한동안 체험하면 하나님 말씀을 어느 정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요구와 뜻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깨닫는 바가 생긴다. 또 하나님 말씀의 인도와 지도 아래에서 점점 더 하나님 말씀이 매우 실제적이라고, 모든 구절이 사람이 깨닫고 진입해야 하는 내용이며 의미 없는 말은 없다고, 다 인류에게 필요한 것들이라고, 하나님은 사람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꿰뚫어 보고 있으며 사람의 패괴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정상인의 체험 과정이다. 반면,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한 말씀을 볼 때부터 무시와 조롱, 비웃음, 심지어는 반항하는 마음가짐으로 그 요구를 바라본다. 이 말씀에 대해 편견이 생긴 후, 그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뇌리 한편에 치워 두고 하나님을 더더욱 멸시하며, 경멸의 태도로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바라보고, 심지어는 깊이 연구조차 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신이 어떻게 간사한 성품을 드러내고 어떻게 회개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는지 등의 체험을 얘기하면, 그는 속으로 반발심과 반감, 멸시하는 마음을 품는다.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제자매가 교제한 체험적 인식에 맞서고 반감을 가지고, 심지어는 많이 교제하고 잘 인식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증오하고 멸시한다. ‘바보들 같으니라고. 하나님이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했다고 정직한 사람이 되려고 하네. 어쩜 그렇게 말을 잘 들어? 내가 하는 말은 왜 안 듣는 거지? 나를 봐, 지금까지 내 속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가 얼마나 간사한지, 얼마나 꿍꿍이가 많은지 아무도 모른다고. 나는 당신들과 말하지 않을 거야. 당신들한테 그런 내 말을 들을 자격이 있겠어?’ 그는 하나님의 요구에 이런 태도를 보인다.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맞서고 정죄한다. 이것이 불신파의 모습 아니겠느냐? 이는 전형적인 불신파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공개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정죄한 적이 없고, 하나님 말씀을 불 속에 던져 태워 버리지도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매일같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으며, 예배 때 교제도 하지만, 사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 말씀을 깊이 혐오하고 거부하고 저버린다. 즉, 하나님 말씀에 관념을 가졌을 때 그는 이미 하나님 말씀을 저버린 것이다. 혹자는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는 저버리지 않은 겁니까?”라고 말하는데, 그때까지는 아직 저버리지 않았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가 하나님에게 품고 있는 숱한 상상과 관념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앙모하게 하며, 위인으로 여기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자 하나님에 대한 그의 생각은 철저히 바뀌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렇게나 평범한 거였다니!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이렇게나 간단하고 직설적이며 이해하기도 쉬운 거였어. 그럼 나도 말할 수 있겠네. 모두들 하나님이 위대하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거지? 하나님이 위대하고 지고지상하다면 사람에게 이렇게 낮고 보잘것없는 요구를 하셔서는 안 돼!”라고 말한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은 깊이가 없다고, 사람의 관념과 하나님의 위대한 이미지, 신분에 맞지 않는다고 느낄 때부터 그는 하나님 말씀에 관념을 갖는다. 관념이 생긴 후 그는 하나님 말씀을 깊이 혐오하게 되며, 이어서 하나님에 대한 상상과 관념의 둑이 완전히 무너진다. 둑이 무너진 후 어떤 결과가 벌어지겠느냐? 마음속 깊이 하나님 말씀을 저버리고 정죄하게 된다. 그러니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적그리스도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들은 방관자가 되어 관망한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찬미하거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체험을 교제할 때 그도 옆에서 관망하지만 마음속으로 아멘 하는 일이 없다. 때로는 남들을 비웃기도 한다. ‘당신이 정직한 사람이 되어서 얻은 게 뭐죠? 정직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꼭 당신을 구원하는 건 아니고 100% 복을 받는 것도 아니죠.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안 된다고요. 만약 내가 복을 받지 못한다면, 당신들도 복을 받지 못할 겁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을 적대하는 본성 본질을 지니고 있다. 이런 본성 본질이 있기에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욱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데 체험이 생길 리 있겠느냐? 그럴 리 없다. 그럼 그가 말하는 개인의 인식은 무엇이겠느냐? 전부 상상이나 추측이고, 도리이자 이론이며, 심지어는 부화뇌동하는 듣기 좋은 말일 뿐이다. 그들은 절대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적그리스도 부류는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각종 태도 때문에, 또 본성 본질 때문에 하나님을 10년, 20년, 혹은 더 오랜 세월 믿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체험을 찾아볼 수도, 들어볼 수도 없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인식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말투에서 너는 그가 하나님에게 관념이나 오해를 품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폭로를 통해 깨우침을 얻어 마침내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게 되고 관념이 사라졌다는 것을 파악할 수 없다. 그에게는 이러한 체험도, 인식도 없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 부류가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는 데 아무리 공을 들여도 진리를 얻지 못하고 자신의 체험이나 인식을 전혀 말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는 그저 형제자매들이 자주 인용하는 하나님 말씀에서 유명한 단락을 그대로 따라 하며 읽고 외우며, 형식만 취하고 대세를 따를 뿐이다. 그 후에는 마음속으로 자기 멋대로 생각한다.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아무리 많이 생겨도, 그와 하나님 사이에 아무리 큰 갈등과 문제가 생겨도 그는 해결하지 않으며, 이런 관념과 문제는 늘 그의 곁에 머문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마음속에 점점 더 깊은 원한이 쌓이고, 하나님에 대한 증오도 점점 더 커진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믿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어떤 결과가 야기되겠느냐? 이 쌓인 원한과 관념이 그들로 하여금 앞날과 운명, 복받으려는 속셈을 내려놓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마지막에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폭발할 것입니다.) ‘폭발’이라는 단어는 무척 직설적이구나. 어떻게 폭발하겠느냐? 몇 가지 방식이 있겠느냐? (예전에 본 하나님 말씀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심지어는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던 ‘착한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험상궂은 망나니로 돌변하기도 한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실행> 중에서)) 어떤 배경 속에서 망나니가 되겠느냐? 복받으려는 욕망이 물거품이 되면, 그는 안면몰수하고 말할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잘 지낼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겁니다. 저도 더 이상 숨기거나 감출 필요는 없겠지요. 저는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습니다. 복을 받을 수 없다면 진작에 떠났을 거예요!” 마음속 말을 전부 내뱉으면서도 정죄될까 봐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정죄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어째서 안면몰수하고 폭발하는 것이겠느냐? 더는 믿고 싶지 않으며 떠나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그동안 줄곧 자신의 목적을 위해 고난과 굴욕을 견뎌 왔다. 이 말을 실행하고 정신적인 지주로 삼아 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복받을 희망이 보이지 않자 아예 안면몰수한 채 대놓고 할 말을 다 하게 되었다. “저는 불신파입니다. 저는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고 세상을 추구하는 것과 사악한 흐름을 좋아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진리라고, 하나님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구원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제 눈에는 그런 게 왜 보이지 않을까요? 저는 왜 체험하지도, 느끼지도 못할까요? 하나님 말씀이 사람의 무엇을 변화시켰죠? 제가 보기에 하나님 말씀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장 실리적인 것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복을 받을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뿐이죠. 이 말은 사실입니다. 만약 복을 받으려는 목적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면 왜 사람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겠습니까? 그는 자기 자신조차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마음속 말을 한 것인데 여기에서 추악한 몰골이 드러난 것 아니겠느냐? 이는 그동안 쌓여 온 관념과 원한이 폭발한 것으로, 적그리스도가 마침내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어떤 적그리스도는 늘 이렇게 말한다. “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위해 가정과 일을 버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대가를 치르고 그렇게 많은 고생을 했는데, 제가 무엇을 얻었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냐고요. 그럼 저는 무엇을 얻었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진리를 공급해 주었고, 아무 대가도 없이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었다. 또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그 많은 대적과 패역도 기억하지 않고 여전히 사람을 구원하러 왔다. 적그리스도는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는지 보지 못한다. 그가 말하는 ‘무엇을 얻었습니까?’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복을 받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무엇이든 가지려고 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러 왔는데 그는 승산이 있다고, 수지가 맞다고 생각했다. 속세와 앞날을 버렸으니 장차 온 세상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가 대가로 얻으려는 것은 그가 버린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는 그런 것들보다 더 가치 있고, 자신에게 더 실리적인 것이어야 교환한다. 말해 보아라, 적그리스도가 폭발하면서 내뱉은 말들이 한때의 분노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그 말을 오랫동안 참아 왔을 것이다. 그러다가 한순간에 폭발한 것이다. 폭발한 후, 그가 생각했던 것, 그동안 그가 추구하던 것들이 전부 드러났으며, 그동안 그가 꾸며 왔던 겉모습도 전부 까발려졌다. 그가 한 말의 중점은 무엇이겠느냐? “지난 세월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 제가 무엇을 얻었습니까?”라는 것이다.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는 진리나 생명, 성품 변화, 하나님의 구원을 원치 않는다. 그는 자신이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얻으려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 세상에서 얻은 것보다 더 큰 복이다. 즉, 그는 자기가 세상에서 버린 것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약속한 복,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최고의 복을 얻으려 한다. 그러다가 욕망이 충족되지 않고 희망이 없음을 알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다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하게 될 때 그가 거기에서 그만두겠느냐? 그렇지 않다. 온 가족이 하나님을 믿는데 가족 중 적그리스도가 나타난 경우도 있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이 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가족들까지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교란할 것이다. 이것이 가족이겠느냐? 표면적으로 육적인 관계나 혈연관계를 보면, 그 가족은 너무도 가깝다. 하지만 그들이 걷는 길을 보면, 똑같이 하나님을 십여 년간 믿었지만, 누구는 적그리스도로 드러났고, 누구는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며, 누구는 평범하게 진리를 추구하는데, 사람의 본성 본질이 드러난 것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형편없는 자는 적그리스도로,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하나님 집에서 출교되어야 할 대상이다. 이것이 가족이겠느냐? 진정한 가족이 이렇겠느냐? 그들은 같은 부류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오랜 세월 마귀와 살면서 그들을 가족으로 여기며 내려놓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그들이 자기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뭐가 가족이란 말이냐? 적그리스도는 본모습이 드러난 후 어떤 악행이든 저지를 수 있다. 심지어 가족들 중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할 수도 있고, 더 심할 경우 자기 가족을 사악한 정부에 넘기기도 한다. 어떤 부모는 자식을 팔아먹고 어떤 자식은 부모를 팔아먹는 등 적그리스도는 관계가 아무리 가깝고 친밀해도 어떤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 적그리스도가 가족들 중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팔아먹고 박해할 수 있으니 이것은 원수가 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교회에 적그리스도가 한두 명 나타나면 형제자매들이 위험해진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이 복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을 알게 되면 자포자기하여 안면몰수하며, 다른 형제자매들을 어떻게 교란할지 골몰할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연약하고 분량이 작아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인터넷상의 유언비어를 보여 주고는 선동하고 말을 덧붙여 해석한다. 그럼 그들은 교란되고 미혹되며 망쳐진다. 물론, 분별력이 있는 일부 사람들은 그가 적그리스도임을 알아챈다. 공개적으로 그를 처리하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지혜로운 방식으로 그를 격리시키는 데서 그칠 뿐, 적그리스도에게 교란되거나 해를 입지는 않는다. 사탄을 대할 때는 지혜가 필요하다.

적그리스도는 앞날과 운명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 그들은 복받으려는 욕망과 자신들만의 야심을 갖고 하나님 집에 와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받아들이고 전하며, 또 앞날과 운명 때문에 하나님 집에서 몸을 굽히고, 고난과 굴욕을 견뎌 낸다. 그들은 오랫동안 관망하다가 희망이 물거품이 되면, 앞날과 운명 때문에, 복받으려는 욕망과 속셈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회와 하나님 집을 떠난다. 이런 부류의 결말은 무엇이겠느냐? 도태되는 것이다. 그럼 그는 왜 도태되겠느냐? 그가 하나님 집에 왔을 때부터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지 않기로 정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그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겠느냐? (그 자신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집에 올 때, 밀 속의 가라지처럼 섞여 들어온 것이다. 혹자는 “그럼 하나님은 모르셨던 겁니까?”라고 묻는데, 하나님은 알고 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감찰한다. 이 부류는 변화하지 못한다. 설령 그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보고 하나님이 밝힌 비밀과 사람의 종착지, 사람의 각종 패괴 성품을 폭로한 말씀을 모두 읽었다고 할지라도 소용이 없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한다. 누구에게도 숨겨져 있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주어진다. 사람은 누구나 그 말씀을 보고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는 결코 얻지 못한다. 그는 적그리스도이고 마귀, 사탄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그렇게 오랜 세월 하나님 곁에 있었는데도 변화하지 않았다. 적그리스도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네가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게 한다고 해도 그는 얻지 못한다. 그는 적그리스도이고,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가 자신의 이익과 앞날, 운명을 포기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돼지한테 나무를 타라고 하는 것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적그리스도는 눈앞의 이익을 보고, 미래의 영원한 이익도 본다. 만약 그중 어느 이익도 얻지 못하고 충족되지 못한다면 그는 금세 태도를 바꾸고 멋대로 떠나 버릴 것이다. 적그리스도 부류는 하나님 말씀의 행간 속에서 하나님의 어조와 억양을 듣고 하나님 말씀의 의미와 하나님의 의도를 추측함으로써 그들이 원하고 관심을 갖는 갖가지 이익을 가늠한다. 이런 태도로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데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말하든 적그리스도 부류는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에 대립하는, 불구대천의 존재인 것이다. 혹자는 “그 사람은 여태까지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떻게 그렇게 된 걸까요? 하나님 말씀을 교제하고 난 뒤 그는 이해했다고 하고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변화하지 못하는 것입니까?”라고 묻는데, 내가 사실대로 말해 주겠다. 그는 지금만 변화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변화하지 못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변화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양을 잡아먹지 못한 늑대는 너무 배가 고파서 어쩌다 한두 입 풀을 뜯거나 물을 마셔 허기를 채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늑대의 본성이 변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적그리스도가 악을 행하지 않고 한동안 좋은 모습을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가 변화했고 진리를 받아들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엄한 책망과 훈계가 임해 그의 권력이나 지위를 건드리는 순간, 자신은 희망이 없고 도태될 거라고 깨닫는 순간, 그는 바로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 손을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며, 즉시 본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누가 이런 사람을 바꿔 놓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할 생각이 없고, 오직 사실로 그들을 드러내고 도태시킬 뿐이다. 그러니 이 사탄의 종들은 모두가 분별하고 버려야 할 대상이다.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것은 악인과 사탄을 분별하는 것과 같고, 적그리스도를 해부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사탄 마귀를 해부하는 것과 같다. 오늘 우리가 해부하는 적그리스도는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언행과 태도 또한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고, 그들의 뜻을 가늠할 수도 있다. 영계의 사탄 마귀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기에 너에게는 영원히 하나의 개념이자 호칭에 불과하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해부하는 적그리스도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살아 있는 마귀 사탄으로, 형태가 있으며 뼈와 살로 이루어진 마귀 사탄이다. 이 마귀, 사탄은 영계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저버리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싫어한다. 오늘날 교회에 와서도 적그리스도는 여전히 이런 일을 저지르는데, 똑같이 하나님 말씀을 대적하고 싫어하고 저버리며, 심지어는 늘 멸시한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면 마음속으로 의문을 품고 연구하고 분석하며, 자기 머리로 가공한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에게 하나님 말씀은 그들이 믿는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영원히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실제적이고 진실하고 신실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이 몇 가지 면으로 볼 때,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원수 아니겠느냐? 그들은 진리의 원수로 타고난 것 아니겠느냐? 이 부류는 날 때부터 하나님의 원수로, 진리를 싫어한다. 또 그들은 영원히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겨 대하거나 지키지 않는다. 이 부류는 그 본질과 하나님에 대한 각종 모습,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갖가지 태도 때문에 결국 전부 하나님 말씀에 의해 정죄될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는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럼 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이익인 앞날과 운명을 그들이 얻을 수 있겠느냐? 절대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한, 사람에 대한 약속과 축복, 사람을 위해 예비한 종착지는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겠느냐? 거기에 적그리스도의 몫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약속한 인류의 아름다운 종착지는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에게 주어지며, 하나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진리로 삼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하나님 말씀을 사기꾼의 거짓말로 생각하는 적그리스도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2020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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