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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알아 가기[4]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20)

거시적ㆍ미시적 차원에서 알아보는 하나님의 권병

하나님의 권병은 유일무이한 것으로, 하나님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고유의 발현이자, 하나님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특정 본질의 한 측면이기도 하다. 이 고유의 발현과 특정 본질은 피조물과 비피조물에게는 없는 것이며, 오직 창조주만이 이런 권병을 가지고 있다. 즉, 창조주, 유일무이한 하나님만이 이러한 발현과 본질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권병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 자신의 권병은 사람이 생각하는 권병과 어떤 차이가 있으며, 어떤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이를 언급하는 데는 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걸까? 모두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질문들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하나님의 권병’이란 주제에 대해 항상 막연하게 느낄 것이다. 알아보려고 해도 쉽지 않고 언급되는 내용들도 다소 공허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병에 대한 사람의 인식은 하나님 권병의 본질과 늘 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모든 사람이 실생활에서 느끼거나 경험할 수 있는 사람과 사물, 일이나 여러 현상을 통해 하나님의 권병에 대해 조금씩 깨닫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권병’이란 말이 사람에게 심오하게 느껴지겠지만 이는 결코 공허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병은 인류와 매 순간을 함께하며 매일매일 인류를 이끌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두 실생활에서 하나님 권병의 가장 실제적인 면을 보거나 느낄 수 있다. 이 가장 실제적인 면은 하나님의 권병이 실제로 존재함을 족히 증명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러한 권병을 가지고 있음을 사람이 충분히 인식하고 깨닫게 해 준다.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하였다.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했고 또 만유를 주재하고 있다. 하나님은 만유를 주재하면서 동시에 만유를 다스린다. ‘하나님은 만유를 다스린다’는 말은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현실에 비추어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은 만유를 다스린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통해 하나님의 권병에 대해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은 만유를 다스린다’는 말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이 일부 행성, 피조물, 인류만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거시적인 것부터 미시적인 것까지,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부터 볼 수 없는 것까지, 우주의 각종 행성부터 지구상의 모든 생물까지, 사람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생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생명체 모두를 다스린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은 만유를 다스린다’에서 ‘만유’가 뜻하는 정확한 의미이자 하나님의 권병이 미치는 범위이고, 하나님이 주재하고 관리하는 범위이다.

우주의 천체는 인류보다 먼저 생겨났다. 우주의 천체가 언제부터 존재했든 간에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것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규칙적으로 운행하고 있다. 어떤 행성이 언제 어떤 위치로 이동하는지, 어떤 행성이 언제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지, 어떤 행성이 어떤 궤도에서 운행하는지, 언제 소멸하고 또는 교체되는지, 이 모든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된다. 이 행성들의 위치와 행성 간의 거리에는 엄격한 법칙과 정확한 수치가 있다. 운행 궤도, 운행 속도, 운행 법칙, 언제 어떤 위치까지 운행하는지에 대해서도 특정한 법칙과 정확한 수치가 있다. 행성들은 천만년 동안 그러한 법칙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해 왔다. 그 어떤 힘도 그 운행 궤도와 법칙을 변경하거나 파괴할 수 없었다. 정확한 수치와 특정한 운행 법칙들은 모두 창조주의 권병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 행성은 자발적으로 창조주의 주재와 다스림을 받으며 그에 따라 규칙적으로 운행한다. 인류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일부 법칙과 수치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고,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일부 신기한 법칙이나 현상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인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했고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창조주의 권병의 존재는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의 과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들은 알 수 없는 엄청난 암흑에너지가 만물의 생존과 운행의 법칙을 주재하고 다스리고 있음을 점점 더 많이 발견하고 있다. 이런 사실이 존재하기에, 인류는 만물의 운행 법칙에는 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한 ‘능력자’가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는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그는 항상 모든 것을 주재하고 다스린다. 그의 주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나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인류는 사람이 만물의 생존 법칙을 좌지우지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이 법칙을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 법칙은 사람이 측량할 수 없으며,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닌 어느 주재자가 다스리는 법칙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모두 인류가 거시적인 측면에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권병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구에서 사람이 볼 수 있는 산과 하천, 호수, 바다, 육지와 사람이 겪는 사계절, 각종 동식물, 미생물, 인류,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지구상의 만물은 하나님이 주관하고 주재하고 있다. 하나님의 주관과 주재로 만물은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생성 또는 소멸하고, 하나님의 주관과 주재로 생존의 법칙이 만들어져 만물은 이 법칙에 따라 번성한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권병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란 게 그 유일한 답이다. “하나님의 권병으로 인한 것이다”란 말은 ‘하나님의 생각으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것이다’, 혹은 ‘하나님이 친히 한 행사로 인한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즉, 만물의 법칙은 하나님의 권병에서 비롯될 뿐만 아니라 그의 생각에 따라 생겨난다. 또한, 만물은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움직이고 변화한다. 그 모든 움직임과 변화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생성 또는 소멸한다. 일례로 전염병은 갑작스럽게 발생하며 아무도 그것의 발원지와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한다. 또한, 전염병이 이르는 곳마다 불운을 피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인류가 가진 과학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전염병’은 악성 혹은 유해 미생물이 만연하여 발생하는 것으로, 그 전염 속도와 범위, 전염 방식은 인류의 과학 지식으론 예상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인류가 각종 전염병을 막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는 있으나, 전염병이 발생할 때마다 병에 걸리고야 마는 사람이나 동물을, 인류는 통제할 수 없다.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예방과 억제, 연구뿐이다. 그러나 아무도 매번 전염병 자체가 발생하거나 소멸하는 근원을 알지 못하며,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전염병이 발생되고 확산되는 상황에서 인류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백신 개발이다. 그런데 인간이 백신을 개발하기도 전에 전염병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세균을 억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계절이 바뀌면서 소멸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황당한 주장이 성립하는지에 대해 과학적으로 분명하게 설명할 수도, 정확한 해답을 제시할 수도 없다. 인류는 이러한 황당한 가설뿐만 아니라 전염병에 대한 몰이해와 공포와도 마주해야 한다. 그 누구도 전염병의 근원과 그것이 소멸된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이는 인류가 과학만을 신뢰하고 의존한 탓에 창조주의 권병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주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는 영원히 이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

만물은 하나님의 주재하에서 하나님의 권병으로 말미암아 생성되고 소멸하며, 하나님의 경영을 위해 생성되고 소멸한다. 어떤 것들은 조용히 왔다 조용히 사라진다. 인류는 그 기원을 보지 못하며, 그 법칙 또한 파악할 수 없고, 생성되었다 소멸한 이유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사람은 만물에 발생한 모든 현상을 직접 보거나, 듣거나, 느낄 수 있으며, 그 모든 것은 인류와 관련이 있다. 또한, 인류는 온갖 현상의 특이함과 법칙, 심지어 이상하게 느껴지는 점까지 무의식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만물에 발생한 현상 이면에 창조주의 어떤 뜻과 생각이 담겨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한 현상 이면에는 많은 이야기와 진실이 숨겨져 있다. 인류는 창조주를 멀리하고 그의 권병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인류는 창조주 권병의 주재하에서 발생한 모든 현상을 영원히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다스림과 주재는 사람의 상상과 지식, 그리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능가하고, 사람의 과학 지식이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으로, 창조된 인류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다. 하나님의 주재를 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병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믿을 수 있는지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본다고 해서 반드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본다고 해서 반드시 인정하거나 인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나는 “믿음은 사람이 사물의 근원과 진상에 대해 얼마만큼 깊이 깨닫고 느끼느냐에 따라 생기게 된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면서도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고 다스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이러한 사실에 눈뜨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이런 권병을 가지고 있고 그의 권병이 유일무이한 것임을 절대 인정하지 못한다. 영원히 창조주를 너의 주, 너의 하나님으로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21)

인류의 운명, 만물의 운명은 창조주의 주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미 모두 성인이 된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은 중년기에, 어떤 사람은 노년기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 전부터 믿기까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해서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의 사역을 체험하기까지 그의 주재에 대해 얼마나 깨달았느냐?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느냐? 삶을 살면서 모든 일이 다 소원대로 이루어졌느냐? 지금까지 몇십 년을 살면서 뜻대로 풀린 일이 얼마나 되느냐? 예상치 못했던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느냐? 기쁨을 가져다준 일이 얼마나 되느냐? 아직 결과를 기다리는, 다시 말해 저도 모르게 적절한 시기와 하늘의 뜻만 기다리고 있는 일이 얼마나 되느냐? 또 얼마나 많은 일에 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손을 놓고 있느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운명에 대해 기대를 가득 품고 있다. 자신의 삶이 뜻대로 풀리고,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살면서 출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가난하고 미천한 삶, 우여곡절로 점철된 삶, 불행이 끊이지 않는 삶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는 모두 사람이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떤 자들은 과거에 경험한 모든 일에 흐리멍덩한 인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안 적도,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이, 동물처럼 무지몽매한 상태로 되는 대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사람의 운명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고, 사람이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관심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운명에 대해 어떠한 깨달음도 얻지 못하고, 죽기 전까지도 인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영혼이 없는 송장과 같으며 짐승과 진배없다. 사람은 만물 가운데 살며 이 세계가 선사하는 온갖 필요한 물질들을 누리고, 이 물질세계가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는 것을 본다. 그러나 사람이 경험하는 것, 즉, 사람의 마음과 영이 경험하거나 체험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과 상관없고 그 어떤 물질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마음 깊은 곳에서 깨닫는 것으로,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이러한 깨달음은 운명 또는 인생에 대한 이해 혹은 느낌으로 이어진다. 또한, 은연중에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안배하고 지배하는 주재자가 있음을 수시로 느끼게 한다. 사람은 이 모든 것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운명의 지배와 안배, 창조주가 예비해 놓은 앞날, 창조주가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람이 운명에 대해 무엇을 깨닫고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든 간에 아무도 이 사실을 바꿀 수 없다.

사람이 매일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할지, 어떤 사람이나 일을 맞닥뜨릴지, 어떤 말을 할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예상할 수 있을까? 사람은 이 모든 일의 발생을 예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이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도 통제할 수 없다. 예상치 못했던 일을 맞닥뜨리는 상황은 살면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런 ‘삶 속의 사소한 일’들의 발생과 발전 양상 혹은 법칙은 인류에게 어떤 일이든 우연이란 없으며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과 필연성은 사람의 뜻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모든 사건의 발생은 인류는 자신의 운명을 지배할 수 없다는 메시지와 인류를 향한 창조주의 경고를 전하는 동시에, 자신의 손안에 운명을 쥐고자 하는 인류의 헛된 야심과 욕망에 주먹을 날리고 있다. 여러 차례 거칠게 뺨을 때려 대는 것처럼 인류의 주의를 환기시켜, 대체 누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주관하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인류는 또한 야심과 욕망이 끊임없이 무너지고 깨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예비된 운명에 순응하고, 현실과 하늘의 뜻, 창조주의 주재를 받아들이게 된다. 계속해서 일어나는 ‘삶 속의 사소한 일’부터 일생의 운명까지,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를 나타내지 않는 일이란 없다. 또한, 그것들은 하나같이 ‘창조주의 권병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메시지와 ‘창조주의 권병은 지고지상하다’는 불변의 진리를 전하고 있다!

인류의 운명과 만물의 운명은 창조주의 주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그의 지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한마디로 인류의 운명과 만물의 운명은 창조주의 권병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다. 인류는 만물의 법칙 가운데 창조주의 지배와 주재를 경험하고, 만물의 생존 법칙을 통해 창조주의 다스림을 목격하게 된다. 만물의 숙명을 보며 창조주가 만물을 주재하고 주관하는 방식에 대해 알게 되며, 인류와 만물의 생사윤회를 통해 창조주가 모든 만물 생령을 지배하고 안배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창조주의 지배와 안배가 세상의 모든 법률, 규정, 제도뿐 아니라 그 어떤 힘과 세력도 넘어선다는 사실에 진정으로 눈을 뜨게 된다. 따라서 인류는 어떠한 피조물도 창조주의 주재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어떤 세력도 창조주의 예정을 따르는 만사 만물에 해를 끼치거나 이를 바꿀 수 없다. 인류와 만물은 바로 이런 천상의 법칙과 규칙에 따라 살아가면서 한 세대 또 한 세대 번성해 왔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권병이 진실로 구현된 것이 아니겠느냐? 인류는 객관적인 법칙을 통해 창조주의 주재, 만사 만물에 대한 그의 예정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창조주가 만물을 주재하는 원칙을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느냐? 자신의 운명에 대한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를 깨닫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창조주가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믿기에 그가 사람 일생의 운명도 주재한다는 사실을 진정 믿고 인정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사람의 운명이 창조주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진정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창조주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주관한다는 사실을 대면한 인류가 창조주의 주재를 어떤 태도로 바라보아야 할지는, 지금 이 사실에 직면한 모든 사람이 선택해야 할 문제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22)

삶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여섯 관문

모든 사람은 살면서 몇 개의 중요한 관문을 거친다. 이 중요한 관문들은 한 사람의 삶과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핵심적인 몇 가지 단계들이다. 다음은 사람이 일생 동안 반드시 거치는 관문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

첫 번째 관문, 출생

어느 곳의 어떤 가정에서, 어떤 성별과 외모를 가지고 언제 태어나는지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첫 번째 관문과 관련된 사항들이다.

이 첫 번째 관문과 관련한 부분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창조주가 일찌감치 운명으로 정해 놓은 것들로,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어떤 외부 환경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 또한, 그 어떤 인위적인 요소도 창조주가 예정한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한 사람의 탄생은 창조주가 그 사람의 운명에 대한 첫 번째 단계를 완성하였음을 의미한다. 이 세부 사항들은 모두 창조주가 운명으로 정해 놓은 것이므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앞으로의 운명과 상관없이, 사람의 출생 배경은 이미 정해져 있다. 출생 배경은 일생의 운명에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고, 일생의 운명에 대한 창조주의 주재함에도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1. 새 생명의 탄생은 창조주의 안배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관문의 출생지, 집안, 성별, 외모, 출생 시간 중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어떤 곳에서, 어떤 시점에, 어떤 가정에서, 어떤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 한 가정의 일원이자 한 가족의 후손이 된다. 삶의 첫 번째 관문에서 사람은 선택권 없이, 창조주의 안배에 따라 특정한 환경에서 태어난다. 태어날 가정, 성별, 외모뿐 아니라 사람의 일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출생 시간 역시 정해져 있다. 이 중요한 관문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출생과 관련해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새로운 생명이 이 세상에 올 때 창조주의 예정과 인도가 없다면 가족, 귀속, 진정한 집도 없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서 머물러야 할지 알지 못할 것이다. 창조주가 세심히 안배해 머무를 곳을 주었기에 그에게 부모와 귀속, 가족이 생기는 것이다. 이로부터 이 생명의 인생 여정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새 생명의 탄생은 창조주의 안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장차 이 생명이 가지게 될 모든 것 역시 창조주가 부여하는 것이다. 이 새 생명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표류체에서 조금씩 피와 살이 있고 모양을 갖춘 사람이 되어 간다. 그 생명은 사고를 하고 숨을 쉴 수 있다. 따뜻함과 차가움을 느끼고 물질세계의 여느 피조물과 다를 바 없이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또한, 창조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겪게 될 세상만사를 경험하게 된다. 창조주가 한 사람의 출생을 결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부여해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사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주로부터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장차 또 다른 형태로 창조주의 공급과 그의 주재 아래에서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사람의 출생 배경이 각양각색인 이유

다시 태어나면 명문가에서 태어나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많다. 여성의 경우, 공주 같은 외모로 모두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어 한다. 남성의 경우, 먹고 살 걱정 없이 떵떵거리며 사는 왕자 같은 삶을 꿈꾼다. 이렇게 원하는 출생 배경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시에 태어난 가정부터 외모, 성별, 심지어 출생 시간까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것에 큰 불만을 느낀다. 하지만 왜 그런 가정에 태어났는지, 왜 그런 외모를 타고났는지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다. 어디에서 태어나든, 어떤 외모로 태어나든, 사람이 창조주의 경영을 위해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고 정해진 여러 가지 사명을 완수한다는 이 근본 취지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창조주의 눈으로 보면 사람이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떤 성별로 태어나고, 어떤 외모를 가지는지는 모두 일시적인 것으로, 창조주가 모든 시기의 전체 인류를 경영하는 데 사용하는 아주 작은 기호나 상징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의 진정한 종착지와 결말은 한 시기의 출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매 차례 사명과 창조주의 경륜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창조주가 내리는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기 마련이라는 말처럼 한 사람의 출생은 전생과 금생, 모두와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이번 윤회의 끝이라면 한 사람의 출생은 당연히 새로운 윤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간 윤회가 전생이라면 새로운 윤회는 당연히 금생으로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출생이 전생과 금생, 모두와 관계가 있다면 그 사람이 태어난 곳, 집안, 성별, 외모 등 모든 요인 역시 전생과 금생, 모두와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사람의 출생과 관련된 모든 요인이 전생의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금생의 운명에 의해서도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출생 배경이 각양각색인 것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명문가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남쪽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북쪽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 사막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푸르른 초원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환호, 웃음, 축하를 동반하는 출생이 있는가 하면 슬픔, 불운, 걱정을 유발하는 출생도 있다. 태어날 때부터 집안의 복덩이로 불리는 사람도 있고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사람도 있다. 외모가 반듯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목구비가 조화롭지 않은 사람도 있다. 외모가 준수한 사람도 있고 부족한 사람도 있다. 한밤중인 자시에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오시에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제각각인 출생 배경은 창조주가 정한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사람마다 제각각인 금생의 운명, 금생에서의 다양한 역할과 사명도 결정된다. 이 모든 것은 창조주의 주재와 예정하에 이루어지며, 아무도 그가 정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출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23)

두 번째 관문, 성장

한 사람이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 어떤 가정 환경에서 어떤 가정 교육을 받는지가 그 사람의 성장 배경을 결정하고, 이 역시 사람이 일생에서 두 번째로 반드시 거치게 되는 중요한 관문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이 관문 역시 사람이 선택할 수 없고 이미 정해지고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1. 창조주는 모든 사람을 위해 특정한 성장 배경을 안배하였다

한 사람이 성장 과정에서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의 감화와 영향을 받는지, 어떤 지식을 배우고 어떤 능력을 갖추는지, 어떤 습성을 익히는지, 이 모든 건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부모, 가족,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도 선택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주변 사람과 일, 사물과의 관계나 그것이 성장 과정에서 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역시 선택할 수 없다. 그럼 누가 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안배하는 것일까?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사람이 스스로 결정한 것도 아니며,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더더욱 아니라면, 이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의 형성은 두말할 필요 없이 모두 창조주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확실하다. 창조주가 모든 사람에게 특정 출생 배경을 안배한 것처럼 특정한 성장 배경도 안배한 것이다. 한 사람의 출생이 주변 사람과 일, 사물의 변화를 초래한다면, 그 사람의 성장 역시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집안의 몰락을 가져와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사람도 어느 한 특정 규칙에 따라 태어나지 않으며, 그 어떤 사람의 성장 배경에도 규칙과 필연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상상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운명에서 비롯되고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 결국에는 창조주가 정해 놓은 운명, 그가 주재하고 안배한 운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2. 사람의 여러 가지 역할은 다양한 성장 배경에 의해 만들어진다

한 사람의 출생 배경은 그의 기본적인 성장 환경과 배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해 주고, 그의 성장 배경 역시 출생 배경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이 시기에 언어를 배우면서 새로운 사물을 접하고 받아들인다. 새로운 사물을 접하고 받아들이면서 계속해서 성장해 나간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뇌로 받아들이면서 조금씩 생각을 키우고 적극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한다. 사람이 접하는 사람과 일과 사물, 사람이 배우는 다양한 상식, 지식, 능력과 다른 사람으로부터 영향받고 주입당하는 다양한 생각이 삶의 운명을 이끌고 영향을 준다. 성장 과정에서 배우는 언어와 가지게 되는 생각은 모두 성장 환경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성장 환경은 부모, 형제,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을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한 사람의 성장은 그 사람이 성장기에 생활하는 환경과 이 시기에 접하는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의 성장 배경이 정해져 있는 이상 성장기에 생활하게 되는 환경 역시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성장 환경은 사람의 선택이나 기호가 아닌 창조주의 계획, 그의 세심한 안배, 사람의 운명에 대한 그의 주재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성장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접하는 사물은 모두 창조주의 계획, 안배와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사람은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는 관계망을 예상할 수도, 통제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다. 모든 사람의 성장 배경은 다른 사람, 다른 일과 사물, 그리고 수많은 사람, 수많은 일과 사물과 관련되어 있다. 아무도 이렇게 거대한 관계망을 계획하거나 안배할 수 없다. 각 부류의 사람과 일과 사물의 출현, 지속, 소멸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과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창조주만이 가능할 뿐이다. 사람과 일, 사물을 연결하는 각각의 방대한 관계망은 창조주의 예정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의 성장을 일구어 내고, 또한 성장 과정에 필요한 다양한 환경을 마련해 준다. 또한, 창조주의 경영 사역에 필요한 다양한 역할을 키워 내고, 사람이 저마다의 사명을 순조롭게 완수할 수 있도록 든든한 기반을 구축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24)

세 번째 관문, 독립

모든 사람은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성숙해진다. 다음으로 할 일은 성장 단계에 철저히 작별을 고하고 부모와 이별하는 것이다. 성인으로서 홀로 앞에 놓인 길을 대면하고, 성인으로서 직면해야 할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마주하며, 장차 자신의 운명에 나타날 모든 부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살면서 거쳐야 할 세 번째 관문이다.

1. 사람은 독립 이후 어렴풋이 창조주의 주재를 체험한다

한 사람의 출생과 성장이 전체 인생 여정을 위한 준비 기간이자 운명의 기반이라면, 독립은 운명의 서막이 열리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출생과 성장이 운명을 위해 재산을 축적한 것이라면, 독립은 그 재산이 줄어들거나 늘어나기 시작하는 분기점이다.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한 사람이 어떤 사회 환경에서 어떤 일이나 사업을 하게 될지는 모두 운명으로 정해져 있으며, 이는 부모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어떤 사람은 대학에 진학해서 좋은 전공을 선택하고, 졸업 후 만족스러운 일자리를 찾을 것이다. 인생 여정에서 첫발을 순조롭게 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기술을 가졌어도 자신의 사업은 고사하고 자기에게 맞는 일이나 자신이 속할 곳 하나 찾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의 첫 발걸음을 내딛자마자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순탄치 않아 앞날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경우다. 성공과는 연이 없는 운명인 것처럼, 힘들게 공부했지만 대학교와는 인연이 닿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인생의 첫 희망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 경우, 앞으로의 운명은 순탄할지 험난할지 알 수 없는 변수로 가득 차 있음을 처음으로 실감하고, 인생에 대해 두려움과 기대를 동시에 품게 된다.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아도 책을 써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자무식인데도 창업을 해 돈을 벌고 밥벌이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떤 직업을 선택하고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지,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의 기로에서 과연 사람은 스스로 방향을 정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의 바람과 결정에 따른 선택이 가능한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은 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 싶어 한다. 바람과 햇빛을 피할 수 있는 편안한 장소에서 지내며 번듯하게 차려입고 떵떵거리며 살기를 원하고, 남보다 성공해서 가문을 빛내고 싶어 한다. 사람의 소망은 이렇게 ‘완벽’하지만, 그가 인생의 여정에서 첫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운명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차츰 깨닫게 된다. 또한, 자신의 미래를 위해 대담한 계획을 세우고 마음껏 꿈을 키울 수는 있어도 실제 자신에겐 꿈을 실현할 능력과 힘이 없을뿐더러 미래를 결정할 능력도 없음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된다. 사람이 직면한 현실은 언제나 꿈과는 괴리가 있고 늘 생각만큼 만족스럽지 않다. 사람은 그런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의 직업과 미래를 위해 온갖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고, 운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과 희생을 아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해서 자신의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운명은 영원히 바꿀 수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의 숙명을 거스를 수는 없다. 능력, 지능,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 앞에서 사람은 나이, 우열, 귀천을 구분할 수 없는 동등한 존재이다. 사람이 평생 어떤 직업을 가질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지, 얼마나 많은 부를 가질지는 부모에 의해 좌우되거나 재능, 노력, 욕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는 창조주가 정한 운명에 달려 있다.

2. 사람은 부모의 품을 떠난 후 인생이란 큰 무대에 올라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사람이 성숙해지면 부모의 품을 떠나 ‘세상에 뛰어들’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다. 사람은 이 시점에 자신의 역할을 진정으로 수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불확실했던 현생에서의 사명도 이 시점에서 점차 분명하게 드러난다. 형식적으론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지만, 현생에서 수행할 역할과 사명은 부모와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독립 후엔 부모와의 친밀했던 관계가 차츰 벌어지게 된다. 육적인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사람이 일단 성장기를 벗어나면 그의 모든 것이 부모와 상관이 없어지고, 그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독립적으로 해내야 한다. 부모는 한 사람의 삶에서 출산과 부양의 책임을 지고, 그 사람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형식적으로 제공할 뿐이다. 모든 사람의 운명은 오직 창조주의 정하심과 관련이 있다. 사람의 미래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으며, 그 누구도 좌지우지할 수 없다. 부모조차 자식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 운명에 관한 한 모든 사람은 독립적이고 각자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부모는 자식의 운명을 막을 수도 없고, 자식이 현생에서 맡은 역할을 해내는 데 힘을 보태 줄 수도 없다. 즉,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고 어떤 환경에서 성장할지, 이는 현생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전제 조건일 뿐, 그것이 운명을 결정할 수 없고, 어떤 운명 속에서 사명을 완수하게 될지도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는 한 사람이 현생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없고, 가족들 역시 그가 현생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완수하게 될지, 어떤 생존 환경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지는 순전히 현생의 운명에 달려 있다. 즉, 창조주의 뜻으로 정해진 모든 사람의 사명은 그 어떤 객관적인 조건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각자 특정 성장 환경에서 성숙해지고, 인생 여정을 한 걸음씩 밟아 가며, 창조주가 정해 놓은 운명을 조금씩 실현하게 된다.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수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인생에서의 역할을 짊어지고, 창조주의 예정과 주재에 따라 피조물로서의 책임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25)

네 번째 관문, 결혼

사람이 나이를 먹고 성숙해지면 부모와 점점 소원해진다. 출생과 성장 배경도 그 의미가 퇴색된다. 그 대신 부모와는 다른 삶을 살면서 자신만의 인생 방향과 목표를 추구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부모가 아닌, 일생을 함께할 수 있는 반려자를 ― 자신의 운명과 밀접히 맞닿아 있는 배우자를 ― 필요로 하게 된다. 이렇게 독립 후 맞닥뜨리게 되는 인생의 첫 번째 대사(大事)가 바로 결혼, 즉 사람이 거쳐야 할 네 번째 관문이다.

1. 결혼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은 인륜지대사로, 여러 책임을 짊어지고 각종 사명을 점차 완수해 가게 되는 진정한 출발점이 된다. 결혼 전에는 결혼에 대한 장밋빛 환상이 가득하기 마련이다. 여성은 백마 탄 왕자를, 남성은 백설공주를 배우자로 원한다. 이러한 환상들은 각자 결혼에 대해 나름의 조건과 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현재 이 사악한 시대에선 결혼에 대해 오해하게 만드는 그릇된 정보들이 넘쳐 난다. 이 가운데 사람들은 결혼에 더 많은 조건을 붙이고, 결혼에 대해 여러 부담을 느끼며 왜곡된 시선으로 결혼을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결혼에 대해 어떤 인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든, 결혼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결혼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다.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누가 자신의 결혼 상대자가 될지는 알지 못한다. 결혼에 대해 저마다의 의견과 생각을 가질 수는 있어도 궁극적으로 누가 자신의 배우자가 될지는 그 누구도 예상하거나 결정할 수 없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구애를 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이 너에게 관심을 가질지, 너의 반려자가 될 수 있을지는 개인이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와 삶을 함께할 배우자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반대로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너도 모르는 사이에 네 삶 속으로 들어와 운명의 가장 중요한 부분, 즉 네 운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배우자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에는 수많은 부부가 있지만 그 모습은 천태만상인 것이다. 기쁨이 넘치는 결혼이 있는가 하면 불만스러운 결혼도 있다. 동과 서를 넘나드는 결혼이 있는가 하면 남과 북을 아우르는 결혼도 있다. 천생연분인 부부가 있고 비슷한 집안의 상대와 결혼한 부부도 있다. 행복한 결혼이 있는가 하면 불행한 결혼도 있다. 동경과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결혼이 있는가 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결혼도 있다. 기쁨으로 가득한 결혼이 있는가 하면 눈물이 끊이지 않는 절망적인 결혼도 있다…. 결혼 생활에 임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제각각이다. 결혼에 충성하며 죽을 때까지 배우자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결혼 생활을 아끼고 소중히 지키는 사람도 있다. 반면, 결혼 생활을 이해할 수 없어 하고 체념하는 사람이 있고, 배우자를 배신하고 심지어 적대시하는 사람도 있다. 결혼 자체가 가져다주는 것이 행복이든 고통이든, 창조주의 예정으로 각자가 결혼에서 맡게 되는 사명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 반드시 완수해야 할 사명이다. 결혼 생활 이면에 있는 각자의 운명은 창조주가 정해 놓은 것이기에 바뀌지 않는다.

2. 결혼은 두 사람의 운명에서 비롯된다

결혼은 삶의 중요한 관문이다. 결혼은 운명에서 비롯되고, 운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결혼은 사람의 의지와 취향에 기반하지 않고, 그 어떤 외부 조건의 영향도 받지 않으며, 오롯이 두 사람의 운명, 결혼할 두 사람을 위해 창조주가 예정하고 안배한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 결혼은 후손을 낳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일종의 의식에 불과하다. 사람이 결혼을 통해 수행하는 역할은 자녀 양육만 있는 게 아니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맡게 되는 여러 역할과 완수하게 되는 사명도 포함된다. 한 사람의 출생이 주변 사람과 일, 사물에 영향을 미치듯이 결혼 역시 주변 사람과 일, 사물에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변화를 초래한다.

사람은 독립 후 인생의 여정에 오른다. 이 여정에서 내딛는 모든 발걸음은 결혼과 관계된 사람과 일, 사물로 이어진다. 그와 동시에 결혼 상대방도 그런 사람과 일, 사물을 향해 다가간다. 창조주의 주재로 아무런 관계가 없던 두 사람이 같은 운명에 의해 결혼이란 울타리를 만들고 기적적으로 한 가족이 된다. ‘한배를 탄 운명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결혼 후 한 사람의 인생 여정은 배우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배우자와 연관되며, 그 배우자의 인생 여정 역시 자기 짝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고 그 운명과 연관된다. 즉, 사람과 사람의 운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삶의 사명이나 역할을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완수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출생은 거대한 관계망과 닿아 있고, 한 사람의 성장도 복잡한 관계망과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결혼 역시 거대하고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존재하고 유지된다. 결혼은 이 관계망 속 모든 사람과 관련을 가지며 그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 결혼은 태어난 가정, 성장 배경, 외모, 나이, 자질과 재능 등의 다양한 요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는 두 사람의 공동 사명과 관련된 운명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가 지배하고 안배한 사람의 운명 가운데 결혼이 이루어지게 되는 유래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26)

다섯 번째 관문, 자녀

사람은 결혼 후 자녀를 양육하게 된다. 어떤 자녀를 몇 명이나 둘지는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역시 사람의 운명과 창조주의 정하심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거쳐야 할 다섯 번째 관문이다.

한 사람의 출생이 자녀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라면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두 가지 역할이 바뀌면서 인생의 각 시기를 겪으며 다양한 인생 경험을 하게 된다. 다양한 인생 경험을 하면서 창조주의 변함없는 주재를 체험하게 되고, 또한 창조주가 정한 운명에서 벗어나거나 이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1. 자녀의 일은 사람이 결정할 수 없다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의 출생이나 성장, 결혼에 불만을 가지기 마련이다. 자신의 가정이나 외모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모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성장 환경에 큰 불만을 터뜨리고 원망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결혼만큼 불만스러운 것도 없다. 출생과 성장, 결혼에 있어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얼마나 많았든, 경험자들은 모두 알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출생 시점과 장소, 외모, 부모, 배우자를 선택할 수 없고 운명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자녀를 키우기 시작하면, 사람은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자녀가 대신 이뤄 주고 뜻대로 되지 않았던 자신의 삶을 만회해 주길 바란다. 이 때문에 자녀에게 터무니없는 기대를 가지게 된다. 딸은 예쁘고 아들은 잘생기기를 바란다. 딸은 예술적인 재능을 두루 갖추고, 아들은 공부와 운동에 능하고 뛰어난 능력을 가지길 바란다. 딸은 온화하고 현명하며 교양과 지성을 겸비하기를 바라고, 아들은 똑똑하고 유능하며 이해심이 많기를 바란다. 딸과 아들 모두 어른을 공경하고 부모를 살뜰히 챙기는, 모두에게 사랑과 칭찬을 받는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이 시기 사람은 인생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짐과 동시에 새로운 욕망에 불이 붙게 된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 변변찮은 탓에 이번 생에서는 더 이상 성공의 기회와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자신이 못 이룬 꿈과 희망을 자녀에게 떠넘기고 대신 이뤄 주기를 바란다. 자녀가 가문을 빛내거나 높은 위치에 오르기를 바라고, 큰 부자나 유명인이 되기를 바란다. 자녀가 출세만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여긴다. 사람의 계획과 생각이 아무리 완벽하다고 한들 부모가 자녀의 수, 그리고 그 자녀의 외모나 능력 등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 자녀의 운명은 더욱이 부모가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걸 왜 모르느냐? 자신의 운명도 어쩌지 못하면서 자녀의 운명을 바꾸려 들고, 자신의 운명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면서 자녀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이 얼마나 분수를 모르는 짓이냐?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냐? 사람은 자녀에게 온갖 정성을 기울이지만 어떤 자녀를 몇 명이나 두게 될지는 계획이나 바람대로 되지 않는다. 무일푼임에도 많은 자녀를 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 부자임에도 슬하에 자식이 없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딸을, 어떤 이는 아들을 간절히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녀 덕분에 복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를 입는 사람도 있다. 부모는 똑똑한데 자녀는 멍청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부지런한 부모와는 달리 자녀가 게으른 경우도 있다. 정직하고 선한 부모가 간사하고 악한 자녀를 두는가 하면 건강한 부모가 장애를 가진 자녀를 두는 경우도 있다. 평범한 부모가 비범한 아이를 두는 경우도 있고,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낮지만 자녀가 대성하는 경우도 있다….

2. 다음 세대를 키운 후 사람은 운명을 새로이 이해하게 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서른 즈음에 결혼을 하지만, 그 시기에 있는 사람은 아직 타고난 운명에 대한 이해가 없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고 그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세대 역시 이전 세대의 삶과 모든 경험을 되풀이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 속에서 과거의 그림자를 보며, 그들은 자신의 삶이 꼭 그랬듯 다음 세대가 걸어가는 길 또한 계획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러한 사실과 마주하면 사람의 운명이란 이미 정해져 있음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 소망을 내려놓게 된다. 욕망의 불길도 조금씩 꺼져 간다…. 이 시기는 삶의 중요한 몇 가지 단계를 지나 인생을 새롭게 이해하고, 새로운 삶의 자세를 갖게 되는 시기이다. 그 나이의 사람이 미래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 수 있을까? 쉰 살이 되고도 백마 탄 왕자를 꿈꾸는 여성, 백설공주를 찾길 바라는 남성이 있을까? 쉰 살이 되고도 눈부신 외모로 탈바꿈하길 꿈꾸는 여성이 있을까? 젊은이들만큼 일에 의욕이 넘치는 중년 남성들이 얼마나 될까? 한마디로 말해,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 정도 나이가 되면 결혼과 가정, 아이들에 대해 비교적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 나이가 되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고, 운명에 도전하려는 욕구도 없다. 그 나이가 되면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자세를 취하게 된다. ‘사람은 운명을 받아들여야 해.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운명이 따로 있지.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정하는 거야.’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세상의 갖은 우여곡절과 좌절과 고난을 겪은 사람들은 종종 “다 운명이야!”라는 한 마디로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총결한다. 이 표현은 운명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결론과 깨달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사람의 무력함을 보여 주는데, 예리하고 정확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창조주의 주재를 인식하는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고, 이를 깨달았다고 해서 창조주의 권병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27)

운명을 믿는다고 해서 창조주의 주재를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긴 세월 하나님을 따른 너희가 운명에 대해 알고 있는 바는 세상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느냐? 너희는 창조주의 예정과 창조주의 주재를 진실로 알게 되었느냐? 어떤 사람들은 “다 운명이야.”라는 말을 깊이 느끼고 이해하긴 했지만, 하나님의 주재를 전혀 믿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지배하고 안배하고 있다는 사실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려 하지도 않는다. 바다 위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파도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사람처럼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고, 다 운명이라 생각하며 단념할 뿐이다.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의 주재 안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병을 알아 가는 삶,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삶, 더 이상 운명에 맞서지 않는 삶,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삶을 살지 못한다. 다시 말해, 운명을 받아들였다고 창조주의 주재에 순종하게 된 것은 아니다. 운명을 믿는다고 창조주의 주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알게 된 것은 아니다. 그저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과 이 사실이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창조주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주재하는지 알거나, 그가 만물의 운명을 주재하는 근원임을 인정하는 것과는 다르며, 인류의 운명에 대한 창조주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과는 더더욱 차이가 있다. 누군가 운명을 믿고 이를 마음 깊이 느꼈음에도 창조주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의 이번 생은 한 편의 비극일 것이다. 여전히 헛되고 공허할 것이며, 여전히 창조주의 권세 아래로 돌아오지 못해 창조주의 인정을 받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조된 인류가 되지 못한다. 진실로 창조주의 주재를 알고 경험한 사람은 소극적이거나 무력하지 않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의 운명이 정해져 있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삶과 운명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게 된다. 사람의 일생은 창조주의 주재 아래에 있다는 정의 말이다. 사람이 지금껏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며 자신이 겪었던 인생의 각 단계들을 떠올려 볼 때, 매 순간이 힘들었든 수월했든 하나님이 모든 걸음을 안배하고 인도해 왔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세심한 계획과 정성스러운 안배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오늘날까지 오게 되어 창조주의 주재와 구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번 생에서 얻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누군가 운명을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면, 이는 그가 하나님이 그를 위해 예비한 모든 것에 반항하며 순종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누군가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여 자기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주재를 진정으로 느끼게 된다면, 그는 하나님이 안배한 모든 것에 더욱 진심으로 순종하고 싶어질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더 이상 거역하지 않고 더욱 단호한 의지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의 운명을 지배하도록 할 것이다. 운명이 어떤 건지 모르고 하나님의 주재를 알지 못한 채 안개 속을 헤쳐 가며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그 과정이 너무나 고단하고 쓰라리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총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깨닫고 받아들이는 길을 택한다. ‘자신의 두 손으로 좋은 삶을 일구기 위해 애썼던’ 고통스러운 날들, 운명에 맞서 싸우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위 삶의 목표란 것을 추구하던 나날에 안녕을 고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던 나날, 하나님을 볼 수 없던 나날, 하나님의 주재를 정확히 알지 못했던 나날, 그런 나날들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었고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했든 사람의 생존 방식과 목표는 끝없는 슬픔과 벗어날 수 없는 고통만을 가져다주었기에, 그런 날들은 돌이켜 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오로지 창조주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그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고, 참된 삶을 추구할 때, 사람은 차츰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풀려나고 삶의 공허함을 떨쳐 버릴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28)

창조주의 주재에 순종해야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배와 주재를 알지 못하는 탓에 늘 반항심을 가지고 패역한 태도로 운명과 마주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권병과 주재, 그리고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 그들이 처한 상황과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헛된 바람일 뿐, 곳곳에서 좌절을 맛보게 된다. 영혼 깊은 곳에서의 이런 몸부림은 고통스러운 것이며, 그 고통은 마음 깊이 새겨지고 사람의 생명을 낭비하게 만든다. 그 고통의 원인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주재 탓일까, 아니면 사람의 운명이 나쁜 탓일까? 둘 다 틀렸다. 한마디로 말해, 사람들이 가는 길, 사람들이 선택한 생존 방식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할 때, 하나님이 너를 위해 주재하고 안배한 모든 것이 너를 얼마나 이롭게 하고 보호해 주는지 알게 될 때, 고통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며 자유롭게 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 예전과 다른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창조주가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 것의 실제 가치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창조주의 주재를 진정으로 인정하지도 순종하지도 못하며, 어떻게 창조주의 지배와 안배를 구하고 받아들이는지 역시 알지 못한다. 그래서 창조주가 사람의 운명과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창조주의 권세에 진정으로 순종하지 못하면, ‘운명은 스스로 정하는 거야’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헤어 나오기 쉽지 않고, 운명과 창조주의 권병에 필사적으로 반항하며 생기는 고통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물론 참된 자유를 얻기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기도 아주 어렵다. 이런 내적 상태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기존의 생존 방식과 인생 목표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기존의 생존 방식과 인생관, 목표, 소망과 꿈을 정리해 보고 분석한 다음,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뜻과 요구에 대조해 본다. 그리고 자신의 생존 방식과 인생관 등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 있는지, 하나님의 요구에 맞는 것이 있는지, 올바른 인생의 가치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진리를 점점 더 깨닫는 삶을 살고 인성을 갖춘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게 하는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인류가 추구하는 다양한 삶의 목표와 생존 방식을 반복적으로 살피고 자세히 분석하다 보면, 창조주가 인류를 창조할 당시의 취지에 부합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창조주의 주재와 보살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들뿐, 하나같이 사람을 타락시키고 지옥으로 이끄는 함정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기존의 인생관을 버리고 여러 함정을 멀리하며, 하나님의 주관과 안배에 네 삶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없이 하나님의 지배와 인도에 순종하기만을 구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쉬워 보이지만 실은 어려운 일이다.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기꺼이 응하고 어떤 이는 꺼린다. 이를 꺼리는 사람들에게는 응하려는 생각과 의지가 없다. 하나님의 주재를 알고,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지배하고 안배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하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거나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기를 원치 않는다.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항상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의 두 손으로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하고, 자신의 힘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권병과 주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보려고 한다. 사람에게 슬픔이 생기는 것은 사람이 행복한 삶을 추구하며 명예와 이익을 좇기 때문도, 안개 속에서 운명에 맞서며 힘겹게 나아가기 때문도 아니다. 창조주의 존재와 창조주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수렁 속에서 나오는 대신, 차라리 잘못을 깨닫지 않고 독하고 완강하게, 수렁 가운데서 계속 발버둥 치길 원하며 고집스럽게 창조주의 주재에 반항하고 조금도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리고서야 포기하고 방향을 돌린다. 이것이 사람의 진정한 슬픔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순종을 선택한 자는 현명하고, 벗어나려는 자는 우매하고 완고하다고 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29)

여섯 번째 관문, 죽음

정신없이 분주한 나날을 보내며 수많은 우여곡절, 기쁨과 슬픔, 좋은 시절과 나쁜 시절을 경험하고, 잊을 수 없는 세월들과 무수히 많은 계절을 보내면서,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삶의 중요한 관문들을 지나온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 인생이 저물어 가는 시점에 와 있음을 깨닫는다. 세월은 온몸에 낙인과 같은 흔적을 남겨 놓았다. 허리는 굽고, 검던 머리는 하얗게 세었으며, 초롱초롱 빛나던 눈은 흐릿해졌고, 부드럽고 탄력 있던 피부는 주름과 반점들로 가득하다. 청력이 떨어지고, 치아는 흔들리고 빠지기 시작하며, 반응 속도와 움직임이 느려진다…. 이 시점에서 사람은 열정적이었던 젊은 시절과 작별하고 인생의 황혼기, 즉, 노년기에 들어선다. 앞으로 남은 것은 한 가지, 삶의 마지막 관문인 죽음이다.

1. 오직 창조주만이 사람의 삶과 죽음을 주관할 수 있다

사람의 출생이 전생의 인연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죽음은 그 인연의 끝인 것이다. 사람의 출생이 현생에서 이행해야 할 사명의 시작이라면 죽음은 그 사명의 끝이다.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출생 배경을 정해 놓은 창조주는 죽음에도 당연히 각자의 배경을 계획해 놓았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의 출생은 우연이 아니고, 죽음 역시 돌연한 것이 아니다. 태어남과 죽음은 모두 그 사람의 전생 및 금생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출생과 죽음의 배경 모두 창조주의 예정과 관련이 있다. 이는 한 사람의 타고난 숙명이자 운명이다. 모두가 다른 배경에서 태어나듯, 죽음에도 각자 고유한 배경이 있다. 그래서 사람의 수명, 죽음의 방식과 시점이 모두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튼튼하고 건강하지만 일찍 죽는다. 어떤 이는 몸이 약하고 자주 아프지만 장수하며 편안히 눈을 감는다. 비명횡사하는 사람도 있고, 천수를 다 누리는 사람도 있다. 타지에서 마지막을 맞는 이도 있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는 이도 있다. 하늘에서 죽는 사람도 있고, 지하에서 죽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익사하고 누구는 재난을 만나 죽는다. 누구는 아침에, 누구는 밤에 죽는다…. 누구나 빛나고 당당하게 태어나 멋진 삶을 살다 명예롭게 죽기를 바란다. 하지만 숙명을 뛰어넘고, 창조주의 주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사람은 미래를 위해 어떤 계획이든 세울 수 있어도 어떻게 태어날지, 언제 어떻게 죽을지 계획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죽음이 닥치는 것을 피하고 막으려 애쓰지만 죽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조용히 다가온다. 그 누구도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 더 나아가 어디서 죽을지 알지 못한다. 인류의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존재는 인류 자신도, 자연계의 그 어떤 생명체도 아닌 유일무이한 권병을 지닌 창조주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인류의 삶과 죽음은 자연계 내 모종의 법칙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주의 권병과 주재로 인한 결과이다.

2. 창조주의 주재를 모르는 사람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노년기에 접어든 이가 맞이하는 것은 더 이상 가족을 부양하거나 인생의 원대한 꿈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삶과 작별할지, 어떻게 삶의 마지막을 맞이할지, 어떻게 삶에 마침표를 찍을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죽음에 대한 탐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죽음의 저편에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또 다른 미지의 세상이 존재하는지 사람은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직시하길 두려워하고, 죽음을 똑바로 마주하길 겁내며,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애써 외면한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고,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실엔 신비의 베일이 드리워지며, 모든 이의 마음에는 걷히지 않는 그늘이 생긴다.

자신의 몸 상태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며 죽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옴을 감지할 때, 사람은 어렴풋한 공포와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한층 더 외로움과 막막함이 느껴질 때, 사람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사람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삶이란 이렇게 빨리 끝나 버리는 것일까? 이렇게 마침표를 찍게 되는 것일까? 삶의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삶은 궁극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을까? 명성과 부를 얻기 위한 것인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인가?’ 사람이 이런 구체적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봤든 그렇지 않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크든, 마음 깊은 곳에는 이 비밀을 탐구해 보고 싶다는 욕망과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음속엔 세상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도 섞여 있다. 과연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쉬워하고 미련을 가지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걱정을 너무 많이 한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이런저런 걱정을 한다. 마치 걱정거리가 있으면 죽음이 가져다주는 고통과 두려움을 지울 수 있기라도 한 듯, 산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 가면 죽음이 가져오는 막막함과 외로움을 피할 수 있기라도 한 듯, 자식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재산을 걱정한다. 사람은 마음속 깊이 어렴풋한 공포를 느낀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 파란 하늘과 이 물질세계를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있는 것에 익숙해진 외로운 영혼은 낯선 미지의 세계로 홀로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30)

명성과 부를 좇던 삶은 죽음 앞에서 방황한다

본디 가진 것 하나 없던 외로운 영혼이 창조주의 주재와 예정으로 부모와 가족을 얻고 인류의 일원이 되고, 삶을 경험하고 세상을 체험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창조주의 주재를 경험하고, 창조주의 만물 창조가 얼마나 경이로운지 알며, 창조주의 권병을 알고 그 권병 아래에 복종할 기회 역시 얻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이 드문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한다. 사람은 평생의 에너지를 운명과 맞서 싸우는 데에 쓰고, 자기가 가진 모든 시간을 가족을 부양하고 명성과 재물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데 다 써 버린다. 사람들은 가족, 돈, 명예, 이익 등을 소중히 아끼고,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이라 생각한다. 모두가 운명이 기구하다고 불평하면서도 ‘사람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가’처럼 사람이 꼭 알아야 하고 탐구해야 할 문제들은 뒷전으로 미룬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나날이 얼마나 되든 명성과 부만 좇다가 젊음을 보낸다. 머리가 세고 얼굴에 주름이 질 때까지, 명성이나 재물이 나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돈이 공허한 마음을 채워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그 누구도 생로병사의 법칙과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될 때까지, 그렇게 살아간다. 어쩔 수 없이 삶의 마지막 관문을 마주한 뒤에야 백만장자도, 귀한 신분과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며, 모든 사람은 반드시 그의 원래 자리, 즉 가진 것 없는 외로운 영혼으로 되돌아가야 함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부모가 있을 때는 부모가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재산이 있을 때는 돈이 의지할 수 있는 삶의 밑천이라 생각한다. 지위가 있을 때는 그것에 집착하여 목숨이라도 걸려고 한다. 하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평생을 바쳐 좇은 것들이 찰나에 지나가는 구름에 불과하여 소유할 수도, 가져갈 수도 없고, 죽음을 피하게 해 주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외로운 영혼이 돌아가는 길의 동반자나 위로가 되어 주거나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세상에서 쌓은 명성과 재물은 일시적인 만족감, 잠깐의 기쁨과 위로를 주고 마음이 편안한 듯한 착각을 주어 방향을 잃게 만든다. 그래서 안식과 위안과 마음의 평온을 갈망하던 사람들이 아득한 인생의 바닷속에서 허우적대다 겹겹이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리고 마는 것이다.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왜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 등,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한 채 사람들은 명성과 재물의 유혹과 꼬임에 넘어가 그것들의 조종을 받는다. 그렇게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고 세월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려 사람은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 버린다.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조금씩 멀어지고, 가졌던 모든 것을 쥐고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는다. 그제서야 사람은 갓 세상에 태어난 아기처럼 자신은 여전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 사람은 자기가 사는 동안 무엇을 했는지, 인생의 가치와 의미가 무엇이고 사람은 왜 이 세상에 온 건지 생각하게 된다. 또한 바로 이때에 내세가 있는지, 하느님(원문: 上天)이나 보응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지 등의 사실들을 점점 더 알고 싶어 한다. 죽음이 다가올수록 삶이 진정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고, 죽음이 다가올수록 마음은 점점 더 공허해지며, 의지할 곳 하나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는 날로 커져만 간다. 사람들이 죽음에 임박해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결국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삶의 기반이 되었던 명성이나 재물을 곧 잃게 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작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낯선 미지의 세상, 두렵고 알 수 없어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세상, 사랑하는 사람도 의지할 데도 없는 세상과 곧 혼자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처음 느끼는 공포와 당혹스러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야 사람은 깨닫게 된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내용들은 ‘사람은 어디서 왔으며, 삶의 이유는 무엇이고, 누가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며, 누가 인류를 생존하도록 공급하고 인류의 생존을 주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란 걸 말이다. 이러한 것들이 진정한 삶의 자산이며, 생존의 근본이다. 어떻게 가족을 부양할지, 어떻게 명성과 부를 좇을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성공할지, 어떻게 더 부자가 될지, 어떻게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고 경쟁해서 남들을 이길지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들여 익힌 다양한 생존의 기술들은 충분한 물질적 안락함을 가져다줄 수는 있지만, 진정한 마음의 평안과 위안을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자꾸만 방향과 통제력을 잃게 하고, 삶의 의미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끊임없이 놓치게 만들며, 죽음을 똑바로 대면하지 못하도록 근심을 가져다준다. 사람의 인생은 이렇게 망가진다. 창조주는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고, 모두에게 일생 동안 그의 주재를 체험하고 알도록 기회를 준다. 하지만 사람은 죽음을 마주했을 때, 곧 죽게 되었을 때에야 이를 깨닫기 시작한다. 하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사람들은 재물과 명성이 자신을 구해 주는 생명 줄이자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인 양 평생을 이것들을 좇는 데 쓴다. 이것들만 있으면 죽음도 피하고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죽을 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깨닫게 된다. 재물과 명성이란 게 얼마나 요원한 것인지, 죽음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연약하고 쉽게 부서지는지,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얼마나 외롭고 무력한지를 말이다. 그리고 사람의 목숨은 재물이나 명성과 바꿀 수 없고, 아무리 돈이 많고 높은 자리에 있다 해도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똑같이 가난하고 하찮은 존재라는 것 또한 깨닫게 된다. 돈으로 목숨을 살 수 없고, 명성이나 재물로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이들 중 그 어느 것도 사람의 수명을 1분 1초라도 연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런 느낌이 들수록 살고자 하는 욕망은 더욱 강렬해지고,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한층 증폭된다. 그제서야 사람은 자신의 목숨과 생명은 자신의 것도, 스스로 지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생과 사는 자기에게 결정권이 없을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주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31)

창조주의 권세에 복종하여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다

한 사람의 출생은 외로운 영혼이 이 세상에 와서 인생을 경험하는 출발점이자 창조주의 안배에 따라 창조주의 권병을 경험하는 시발점이 된다. 이는 당연히 한 사람 또는 한 영혼이 창조주의 주재와 권병을 인지하고 창조주의 권병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사람은 평생 창조주가 정해 놓은 운명의 법칙 속에서 살아간다.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에게 있어 수십 년 인생을 살며 창조주의 주재를 인정하고 창조주의 권병을 인지하는 데 이르게 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수십 년의 인생 경험을 통해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이 예정한 것임을 깨닫고 삶의 의미를 느끼거나, 그 의미에 대해 정리하는 것은 굉장히 쉬운 일이다. 그러한 삶의 경험을 인정함과 동시에 사람의 생명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마음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을 진정한 삶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삶의 목표와 사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조금씩 깨닫게 된다. 또한 창조주를 경배하지 않거나 창조주의 권세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죽음에 직면할 때, 즉 영혼이 다시 창조주와 마주하게 될 때 그 영혼은 더없는 공포와 불안에 떨게 될 것임을 점차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서 수십 년을 살면서 사람의 생명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지 못하고 운명이 누구에 의해 좌우되는지도 깨닫지 못한다면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수밖에 없다. 수십 년 동안 삶을 영위하면서 창조주의 주재를 깨달은 사람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순수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며, 삶의 이유를 깊이 깨달은 사람이다. 또한 창조주의 주재를 제대로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이고, 더 나아가서는 창조주의 권병 아래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은 창조주가 사람을 만든 의미를 이해한 것이다. 또 사람은 마땅히 창조주를 경배해야 하고, 사람의 모든 것이 창조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머지않은 미래에 창조주의 품으로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도 안다. 이런 사람은, 삶은 창조주가 마련한 것이고, 죽음은 창조주의 주재에 달려 있으며, 삶과 죽음 모두 창조주의 권병 아래 예정돼 있음을 안다. 따라서 사람이 이런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면 자연스레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고,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담담히 내려놓게 된다. 또한, 무턱대고 저항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곧 닥칠 모든 것을 흔쾌히 수용하고 순종하며, 창조주가 마련한 삶의 마지막 관문을 맞이하게 된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창조주의 주재를 경험하고 창조주의 권병을 알아 가는 기회로 삼고, 또한 창조된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이행하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는다면, 분명 올바른 인생관을 가지게 될 것이고, 창조주의 축복과 인도에 따라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창조주의 빛 속에서 행하고, 창조주의 주재를 깨달으며, 창조주의 권세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또 창조주의 경이로운 행사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고 창조주의 권병을 증거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은 두말할 필요 없이 창조주의 사랑을 받고 창조주에게 열납될 것이다. 이런 사람만이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삶의 마지막 관문을 흔쾌히 맞이할 수 있다. 욥은 분명 죽음에 대해 이런 태도를 가졌고 흔쾌히 인생의 마지막 관문을 맞이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순조롭게 인생의 여정을 마쳤고, 삶의 사명을 완수하였으며, 창조주의 곁으로 돌아갔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32)

욥은 평생 동안 추구하고 얻은 것이 있었기에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성경은 욥에 대해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욥 42:17)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죽을 때가 된 욥은 어떠한 미련이나 고통 없이 자연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모두가 알다시피, 욥은 살아생전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다. 그의 의로운 행위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고 후세에 길이 남겨졌다. 그는 인류 중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욥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 땅에서 하나님께 의인이라고 불렸다. 그는 하나님이 내린 시련을 받기도 했고 사탄의 시험을 겪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부여한 ‘의인’이란 호칭에 걸맞게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섰다. 하나님의 시련을 받은 후 수십 년 동안 그는 이전보다 더욱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았으며, 한층 더 평온하고 담담한 태도로 살았다. 그는 의로운 행위로 인해 하나님이 준 시련을 받았고, 또한 그 의로운 행위로 인해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래서 욥은 시련을 받은 후 수십 년 동안 삶의 가치에 대해 더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창조주의 주재를 더 깊이 느끼게 되었으며, 창조주가 복을 베풀어 주는 것과 거두어 가는 것에 대해 더 정확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욥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욥을 이전보다 더 축복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축복은 욥이 창조주의 주재를 깨닫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데 좋은 조건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욥은 나이를 먹고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에도 재산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고 다른 근심거리도 없었다. 어떠한 미련도 없었고 당연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갔기에 자신의 최후도 걱정하지 않았다. 현대인 중에 죽음을 앞두고 욥과 같은 이런 모습들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왜 겉으로 볼 땐 쉬워 보이는 일인데도 정작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없는 것일까? 이유는 단 하나다. 욥은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인정하며,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기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욥은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인생의 중요한 관문들을 지나 자신의 노년을 보냈으며, 인생의 마지막 관문을 맞이했다. 욥이 살면서 어떤 일을 겪었든 그의 추구와 인생 목표는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 행복한 것이었다. 그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창조주의 축복이나 칭찬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하게는 그의 추구와 인생 목표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창조주의 주재를 조금씩 깨닫고 실제로 느꼈기 때문이다. 더욱이 창조주의 주재를 경험함과 동시에 그의 놀라운 행사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하고 그를 알아 가면서 느끼는 따뜻함과 잊지 못할 경험, 마음 깊이 새겨진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조주의 뜻을 깨닫는 과정에서 위안과 기쁨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창조주의 위대함, 놀라움, 사랑스러움, 신실함을 경험하여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욥이 아무런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창조주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평생 추구하고 얻은 것이 있었기에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창조주가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는 것에도 담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런 걱정 없이 성결하게 창조주와 마주할 수 있었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욥이 소유했던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너희들은 그런 행복을 소유할 조건을 갖추었을까?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사람들이 욥처럼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의 사람들은 왜 죽음의 공포라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죽음을 앞두고 실금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려움에 벌벌 떠는 사람도 있다. 기절하는 사람,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사람, 심지어 대성통곡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행동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급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당혹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마음속 깊은 곳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해 제대로 느끼거나 깨닫지 못하고 진심으로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모든 것을 계획하거나 통제하려 들고, 자기가 자신의 운명과 생사를 결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33)

창조주의 주재를 받아들여야 그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하거나 체험하지 못하면 운명과 죽음에 대한 인식도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고,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주재하며, 사람이 그의 주재를 뿌리치거나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숨을 거두기 전 길고 긴 유언을 하고 걱정과 미련을 남긴다. 마음의 짐이 몹시 무겁고, 꺼려지거나 이해가 안 되는 점이 너무 많기 때문에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출생과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 과정을 건너뛸 수 없다. 사람이 아무런 고통 없이 이 세상을 떠나고, 아무런 아쉬움과 근심 없이 인생의 마지막 관문을 맞이하고 싶다면, 유일한 방법은 그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무런 미련을 남기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창조주의 주재와 권병을 깨닫고, 창조주의 주재와 권병 아래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인류의 다툼과 죄악, 사탄의 올무에서 멀어질 수 있다. 욥처럼 창조주의 인도와 축복 속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정의롭고 떳떳한 삶을 살 수 있다. 욥처럼 창조주의 시련과 박탈, 창조주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다. 욥처럼 평생 동안 창조주를 경배하며 창조주의 칭찬을 받을 수 있으며, 욥처럼 창조주가 친히 발한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의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욥처럼 행복한 삶을 살다 그 어떤 고통이나 근심과 미련 없이 행복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다. 욥처럼 빛 가운데 살며 빛 가운데 삶의 모든 관문을 통과하곤 빛 가운데 순탄히 인생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 순조롭게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즉,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주재를 체험하고, 깨달아 빛 가운데 세상을 떠날 수 있다. 그리하여 창조주의 칭찬을 받는 창조된 인류로서 그의 곁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34)

창조주의 주재를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

몇십 년의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사람이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의 20년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이 나이대의 사람은 나이로 보면 성인이지만 인생과 운명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경험이 계속 쌓이면서 사람은 차츰 중년기에 접어들게 된다. 30~40대가 되면 인생이나 운명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지만 이 연령대의 사람도 인생과 운명의 개념을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어떤 사람은 4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이 만든 인류와 천지 만물에 대해 알기 시작하며, 인생과 운명에 대해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오랫동안 따랐고 어느덧 중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주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정의를 가지지 못하고, 그에게 진심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복받는 것에만 몰두해 그 외의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나이를 먹었어도 창조주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거나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한다’라는 실제 공과에 전혀 진입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리석기 그지없고, 평생을 헛되이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운명에 대한 인식과 인생 경험에 따라 삶을 구분한다면 대략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유년기, 즉 출생부터 중년 또는 태어나서 30세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이다. 두 번째 단계는 성장기, 즉 중년부터 노년 또는 30세부터 60세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이다. 세 번째 단계는 성숙기, 즉 노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또는 60세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이다. 태어나서 중년에 이를 때까지 대부분 사람의 운명과 삶에 대한 인식들은, 대체로 실제에 부합하는 실용적인 내용 하나 없이 그저 남의 말에 주관 없이 흔들리는 말잔치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시기 형성된 인생관과 삶의 여러 처세 방식은 얄팍하고 유치하다. 이 시기가 바로 사람의 유년기이다. 사람은 삶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후 비로소 운명을 실감하게 된다. 마음속 깊은 곳과 무의식 속에 운명은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이 서서히 자리 잡고, 창조주가 인류의 운명을 실제로 주재한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된다. 이 시기가 바로 사람의 성장기이다. 그러다 사람이 더 이상 운명에 맞서지 않고 각종 분쟁에 휘말리려 하지 않으며, 천명을 알고 하늘의 뜻을 따르며 자기 생의 공로와 잘못을 정리하고, 창조주가 자신의 삶을 심사해 주길 기다리는 시기가 온다. 바로 사람의 성숙기이다. 바로 사람의 성숙기이다. 세 단계의 삶에 수반되는 다양한 경험과 수확의 관점에서 보면,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창조주의 주재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다. 한 사람의 수명이 60세라면 하나님의 주재를 깨닫는 데에 주어진 시간은 30년 정도에 불과하다. 충분히 오래 살거나 100세까지 장수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주재를 깨닫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일반적인 생존의 법칙에 따라 보면, 한 사람이 ‘창조주의 주재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주제를 접하고 창조주의 주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고 창조주의 주재에 순종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러한 성과를 얻는 데에 주어진 시간은 30~40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람은 늘상 복을 받고자 하는 욕망과 욕심에 눈이 멀어 삶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 창조주의 주재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한다. 그로 인해 이 세상에 와서 인생과 창조주의 주재를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직접적인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건지 실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이 최대한 빨리 마무리되고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조속히 정해, 되도록 빨리 하나님의 참모습을 목격하고 복을 받길 원하는 사람은 대역무도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들이다. 반대로 제한된 세월 가운데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창조주의 주재를 깨닫는 사람은 굉장히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이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이 품은 서로 다른 희망을 통해 그들의 전혀 다른 관점과 추구하는 바가 드러났다. 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이기적이고 비열하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그의 주재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할 생각도 없이 제멋대로 살아간다. 이러한 사람은 타락을 자초하는 자들이고 파멸될 부류이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기를 원한다. 또 하나님의 권병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해 드리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사람은 빛과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사람의 선택은 부질없는 것이고,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이 얼마나 지속될지를 결정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지배에 따르고 그의 주재에 순종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의 지배에 따르지 않겠다고 한들 어쩌겠느냐? 하나님이 손해 볼 것이 있겠느냐? 하나님의 지배에 따르지 않고 너 자신이 결정권을 가지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다.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너 자신이다. 하루빨리 하나님과 협력하고 그의 지배에 따르며, 그의 권병과 그가 사람을 위해 행한 모든 것을 깨닫는 사람은 희망이 있다. 이런 사람의 삶은 헛되지 않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35)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권병 아래에 있으며, 모든 사람은 능동적 또는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인다. 사람이 살면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아무리 시행착오를 겪어도, 결국에는 창조주가 정해 놓은 운명의 길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창조주의 권병이며, 또한 창조주가 권병으로 만물을 주재하고 다스리는 방식이다.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창조주의 이러한 권병이 있고, 이러한 주재와 다스림의 방식이 있기에, 만물은 질서 정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인류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끊임없는 윤회를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이 규칙적으로 돌아가고, 매일, 매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너희들은 이러한 사실에 눈을 뜨고 정도는 다르겠지만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진리에 대한 너희들의 경험과 인식,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따라 느끼는 바가 깊을 수도 얕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해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지는 진리의 실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만큼 체험했는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가 사람의 순종 여부에 따라 존재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이런 권병이 사람의 순종 여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하나님의 권병은 어떤 상황에서든 존재한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생각과 뜻에 따라 모든 사람의 운명과 만물을 주재하고 안배한다. 이는 사람의 변화나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 지리적인 변화로 인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권병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를 알고 받아들이고, 그의 주재에 순종할 수 있는지 여부는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이 사실을 조금도 바뀌게 하지 못한다. 즉,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갖든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과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해도 너의 운명은 여전히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를 모른다고 해도 하나님의 권병은 변함없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권병과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은 사람의 의지와 기호, 선택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병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천지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의 권병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고, 유일무이한 권병을 갖고 있으며, 그의 권병은 그 어떤 사람이나 일, 사물, 공간, 지리적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항상 변함없이 권병을 시행하고 큰 능력을 나타낸다. 그는 경영 사역을 계속하며 만물을 주재하고, 공급하며, 지배한다. 이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는 사실이자 영원불변한 진리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36)

하나님의 권병에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와 실천

하나님의 권병과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사람은 어떤 태도로 대하고 알아 가야 할까? 이는 모든 사람의 앞에 놓인 현실적인 문제이다. 네가 실생활에서 문제에 맞닥뜨릴 때 하나님의 권병과 주재를 어떻게 느끼고 깨달아야 할까? 이러한 문제에 봉착하여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떻게 체험해야 하는지 모를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네게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려는 마음과 염원과 실제가 있음을 보일 수 있을까? 우선 너는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다음 구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런 후에는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때, 즉 하나님이 너에게 안배한 사람과 일과 사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점차적으로 너에게 나타나는 것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배하는 사람과 일, 사물 가운데 하나님의 애쓰는 마음을 살피고 깨닫는 것이다. 그 속에 있는 진리를 깨닫고, 사람이 행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도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얻고자 하는 성과와 맺고자 하는 결실을 아는 것이다. ‘순종한다’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이 지배하는 사람과 일, 사물, 그리고 그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 창조주가 어떻게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어떻게 그의 생명을 사람에게 공급하며, 어떻게 진리를 사람 안에 만들어 넣는지를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안배와 주재 아래에서 모든 일은 자연의 섭리대로 흘러간다.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한 모든 것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구할 줄 알아야 하며,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권병에 순종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이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다. 너희가 많은 노력을 들여 이런 태도와 소양을 갖춰야만 진정한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37)

하나님을 유일무이한 주재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받는 첫걸음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권병’에 대한 진리를 진지하게 대하고, 마음으로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이런 진리들은 모든 사람의 삶과 관계가 있고, 모든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일생에서 거치게 되는 중요한 관문들과도 관련될 뿐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의 주재를 알아야 하고,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권병을 대해야 하는지와 같은 문제와도 관련된다. 당연히 모든 사람의 종착지와도 관계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 평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네가 하나님의 권병을 직시하고 그의 주재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권병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차츰 인식하고 체득하게 된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의 권병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주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권병을 진정으로 느끼거나 깨닫지 못하면 인생의 끝자락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을 수십 년간 믿었다고 해도 인생에서 얻은 바가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깨달은 바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는 얼마나 슬픈 일이냐? 따라서 인생의 길을 얼마나 걸어왔든, 현재 나이가 몇 살이든, 앞으로 갈 길이 얼마나 남았든, 우선 하나님의 권병을 인정하고 직시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너의 유일한 주재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진리들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깨닫는 것은 모든 사람이 완수해야 할 과제이자 인생을 알고 진리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열쇠이고, 매일 마주해야 하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기본적인 공과이자 일상이다. 이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지름길로 이런 목표에 이르려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알려 주겠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주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사람의 유일한 주이고, 유일한 운명의 주재자이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주재할 수 없고 운명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한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든 타인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그것을 지배하고 안배하거나 좌우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만이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할 수 있다.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만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권병을 가지고 있기에 창조주만이 인류의 유일무이한 주재자이다. 하나님의 권병은 창조된 인류를 주재할 뿐만 아니라, 아무도 보지 못하는 비(非)피조물, 우주와 별들도 주재한다. 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이를 바꾸지 못한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직도 요행심을 품은 채 자신에게 특기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 현재의 처지를 바꾸거나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인위적인 노력을 빌어 명예와 부를 얻고 출세를 하는 등 운명을 바꿔 보려는 자가 있다면, 자기 무덤을 제 손으로 파며 고생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라 말해 주겠다! 너는 조만간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고, 자신이 헛수고를 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운명에 맞서려는 야심과 욕망, 반역적인 행동으로 인해 그릇된 길로 빠지게 될 것이며,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너는 지금 당장은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진리를 점차 깊이 체험하게 될 때면 오늘 내가 한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될 것이다. 네가 마음과 영이 있는 사람인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인지는 하나님의 주재와 진리에 대한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물론 이것들은 네가 하나님의 권병을 진정으로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지도 결정한다. 네가 평생 동안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느껴 본 적이 없고 그의 권병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너는 황폐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며 분명 하나님이 혐오하여 버리는 대상이 될 것이다. 이는 너 자신이 가는 길과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동안 하나님이 주는 시련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권병에 순종하고, 점차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경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병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진실한 체험을 하게 되며, 진정 창조주 앞에 복종하게 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재를 깨닫고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진실로, 확실히 깨닫고 이에 순종한다. 이런 사람은 죽음이 닥쳤을 때 욥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욥처럼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며, 개인적으로 무엇을 선택하려 하거나 무엇을 바라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창조된 인류의 신분으로 창조주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38)

사람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5~17)

여자에 대한 뱀의 유혹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동물 중에서 뱀이 가장 교활하였더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하나님께서 정말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이르되 우리가 동산 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죽지 않을 수도 있노라 너희가 그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분별할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이니라”(창 3:1~5, 중국어성경 직역)

이 두 구절은 창세기에서 가져온 것이다. 모두 익숙한 구절이 아니더냐? 이는 처음 인류가 막 창조되었을 때 일어났던 실제 일이다. 먼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어떤 명령을 했는지 살펴보자. 이 명령은 오늘 우리가 교제할 주제에서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몇 가지 내용을 담고 있느냐? 먼저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떤 것을 먹을 수 있는지 알려 주었다. 각종 나무의 실과는 위험하지 않고 독이 없어 사람이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 내용이다. 두 번째 내용은 경고다. 이 경고에서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으면 안 된다고 알려 주었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 실과를 먹을 경우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은 직설적이지 않으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면, 네가 그 이유를 몰라도 그 말씀을 규례나 명령으로 여겨 지킬 수 있느냐? 당연히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냐? 하지만 사람이 지킬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명확하다.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무엇이고,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하나님은 분명히 알려 주었다. 하나님의 이 간단한 말씀 속에서 너는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이 말씀은 진실하지 않더냐? 기만하는 것이냐? 거짓됨이 있느냐? 협박을 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직하고 진실하고 간절하게 사람에게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알려 주었다. 이 말씀 안에 숨겨진 다른 뜻이 있느냐? 아주 직설적이지 않더냐? 추측할 필요가 있느냐? (없습니다.) 추측할 필요가 없다. 뜻을 한 번에 바로 알 수 있으니, 아주 명확하게 느껴진다. 하나님이 하려는, 그리고 표현하려는 말씀은 바로 그의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매우 깨끗하고 직접적이며 분명하다. 말씀 속에는 풍자나 숨겨진 다른 뜻이 있지 않다.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말씀하였다.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것을 먹을 수 있고, 어떤 것을 먹을 수 없는지 알려 주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이 말씀에서 조금의 거짓도 없는 하나님의 투명하고 진실한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먹을 수 있는 것을 먹지 말라 하고, 먹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네가 알아서 하라’라는 뜻은 없다. 하나님은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말씀한다. 만약 내가 이 몇 구절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이러한 모습 때문에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하면, 아마 너희는 별것도 아닌 것을 억지로 크게 부풀려 해석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조급해하지 말고 다음 이야기를 들어 보아라.

다음은 ‘여자에 대한 뱀의 유혹’에 대해 말해 보자. 뱀은 누구냐? (사탄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6천 년 경륜에서 부각물의 역할을 맡고 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교제할 때 언급할 수밖에 없는 역할이다. 왜 이렇게 얘기하겠느냐? 사람이 사탄의 사악과 패괴, 그리고 사탄의 본성을 모르면 인정하지 못하며, 거룩함이 도대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사람은 어리석게도 사탄의 행위가 아주 정당하다고 여긴다. 사람이 이러한 패괴 성품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부각할 것도 비교할 것도 없이는 무엇이 거룩함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반드시 사탄을 언급해야 한다.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고 해서 근거 없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언행을 통해 사탄이 어떻게 했고, 어떻게 인간을 패괴시켰는지, 그리고 본성은 어떠하며 몰골은 또 어떠한지를 보는 것이다. 여자는 뱀에게 무슨 말을 했느냐? 여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녀에게 한 말씀을 뱀에게 전했다. 여자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한 말씀이 정확하다고 확신했느냐? 확신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으냐? 막 창조된 사람으로서 그녀에게는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과 사물에 대한 인지 능력이 없었다. 그녀가 뱀에게 한 말을 통해,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고 확신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가 이러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여자의 태도를 본 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가 죽지 않을 수도 있노라 너희가 그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분별할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이니라(중국어성경 직역)”. 이 말에 문제가 있느냐? 이 말을 보고 뱀에게 다른 속내가 있다는 것이 느껴졌느냐? 뱀에게 어떤 속내가 있었느냐? (사람을 유혹해 죄를 짓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뱀은 여자를 유혹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게 만들려 했다. 하지만 뱀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뱀이 교활하다는 것이다. 뱀은 돌려 말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뜻을 전하면서 사람이 알지 못하는 자기 마음속에 숨겨 둔 목적을 이루었다. 이것이 바로 뱀의 교활한 부분이다. 사탄은 항상 이렇게 말하고 행동한다. 사탄이 “죽지 않을 수도 있노라”라고 말했는데, 그 말도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무지한 여자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렸다. 뱀은 자신의 말이 효과가 있었기에 기뻐했다. 이것이 바로 뱀의 교활한 속셈이다. 그리고 뱀은 사람에게 좋아 보이는 결과물을 꺼내 그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고 여자를 유혹했다. 사람은 잠깐 생각하더니, ‘눈이 밝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라고 여겼다. 뱀은 이어서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분별할 것이다.”라고 사람에게 더 좋아 보이는, 사람이 잘 모르는, 일단 들으면 엄청난 유혹을 느낄 말을 했다. 이 말이 사람을 유혹하기에 매우 효과적이지 않으냐? 누군가 너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겠느냐? “당신은 다른 곳은 다 예쁜데 코가 좀 낮네요. 코만 더 높이면 세계적인 미녀가 될 거예요!” 성형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사람도 이 말을 듣고 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느냐? 이게 유혹하는 말이 아니냐? 이 유혹이 너를 꼬시는 것이 아니냐? 한번 떠보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말씀하더냐? 방금 본 하나님의 말씀에 이런 뜻이 조금이라도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말씀하지 않더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느냐? (네.) 하지만 뱀이 사람에게 한 말들에서는 그것의 마음을 알 수 있느냐?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사람은 무지함 때문에 사탄의 말에 쉽게 유혹되어 꾐에 빠지고 속아 넘어간다. 그렇다면 사탄의 그 속셈은 알 수 있느냐? 사탄이 한 그 말의 목적은 알 수 있느냐? 사탄의 음모와 간계를 알 수 있느냐? (알 수 없습니다.) 사탄이 말하는 방식은 사탄의 어떤 성품을 대변하느냐? 사탄의 그런 말에서 너는 사탄의 어떤 본질을 보았느냐? 음험함이 아니냐? 사탄이 겉으로는 너를 향해 웃거나 무표정으로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다. 그 목적은 네가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이 너에게 말하는 약속과 좋아 보이는 것들이 너를 유혹하는 요인이 되어 너는 그런 것들을 좋게 보고, 사탄이 하는 말이 하나님 말씀보다 더 유용하고 실속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포로가 되어 따르지 않겠느냐? 사탄의 이런 수법은 악랄하지 않으냐? 사탄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네가 스스로 타락하게 만든다. 그저 몇 마디 말로 그를 따르게 만들어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아주 사악한 속셈이 아니냐? 이것이 사탄의 본연의 모습이 아니냐? 사탄의 말에서 사람은 사탄의 사악한 속셈과 추악한 몰골, 그리고 사탄의 본질을 보았다. 그렇지 않으냐? 이 대조되는 말들을 분석해 보지 않는다면, 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평범하고 일반적이며, 통속적이어서 하나님의 성실함을 크게 확대하여 찬양할 정도는 못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탄의 말과 추악한 몰골을 통해 부각해 본다면, 하나님의 그 말씀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매우 비중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부각물을 통해 하나님의 티끌 하나 없는 순수함을 느낄 수 있다. 사탄의 말에는 모두 속셈과 속내, 말하는 방식 같은 각종 불순물이 섞여 있다. 사탄이 말하는 방식은 주로 어떤 것이 있느냐? 빙빙 돌려 말하며 유혹한다. 그러니 너는 사탄의 진짜 목적을 볼 수도, 알아들을 수도 없다. 너는 스스로 속아 넘어가 사탄을 찬미하고 그것의 공덕을 찬양하게 된다. 이것이 사탄의 일관된 수법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4>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39)

사탄과 여호와 하나님의 대화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6~11)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2:1~5)

이 두 구절은 모두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했고 사탄이 어떤 말을 했는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많지 않고 매우 간단했다. 이 간단한 말씀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볼 수 있느냐? 쉽지 않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탄의 대답에서 사탄의 추악함을 볼 수 있느냐? (네.) 먼저 여호와 하나님이 사탄에게 어떤 질문을 했는지 살펴보자. “네가 어디서 왔느냐”라는 말씀은 직설적이지 않으냐? 숨겨진 다른 뜻이 있느냐? (없습니다.) 순수한 질문일 뿐 다른 속셈이나 불순물이 전혀 없다. 만약 내가 너희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라고 물으면 너희는 어떻게 답할 것이냐?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냐? 너희는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다고 답할 것이냐? (아닙니다.) 너희는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물음에 이런 식으로 대답하는 사탄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드느냐? (참 터무니없고 간사하다고 느껴집니다.) 나는 어떻게 느꼈는지 아느냐? 나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혐오감이 든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을 한 것이냐? 이 말은 대답이 아니다. 결과가 없다. 하나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이 구절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사탄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이냐? 너희는 그 답을 얻었느냐? (얻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사탄 간계의 ‘교묘함’이다. 그 누구도 사탄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길이 없다. 다 듣고 나서도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는데, 사탄은 대답을 끝내고 스스로 훌륭하게 답했다고 여긴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혐오스럽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제 이 말을 혐오하게 되었구나. 사탄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며 상대가 갈피를 못 잡고 영문을 모르게 만든다. 어떨 때는 다른 속셈이 있다. 사탄은 자신의 본질과 본성에 지배받기 때문에 입을 열면 이런 식으로 말이 나올 때도 있다. 오랜 시간 생각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다. 네가 사탄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장황하게 대답하여 어디서 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게 만든다. 너희 중에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느냐? (네.)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불분명하고 모호하게 말하며 정확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이런 대화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성동격서(聲東擊西) 식으로 진위를 구분 못 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지 않으냐? 이는 마치 어떤 이가 자신이 어제 어디에 있었는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을 때 하는 말과 같다. 네가 그에게 “어제 어디 갔었어요? 어제 당신을 봤는데요.”라고 물었는데, 그가 “어제요, 정말 피곤했어요!”라며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그가 너의 말에 대답을 했느냐? 대답은 했다. 하지만 원하는 답을 주지는 않았다. 이것이 바로 화법의 ‘교묘함’이다. 너는 늘 그의 뜻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으며, 그가 하는 말의 근원과 속셈을 알 수 없다. 또한 그가 무엇을 피하려는 건지 알 수 없다.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음험하다고 한다. 너희도 자주 이런 식으로 말하느냐? (네.) 그렇다면 목적이 무엇이냐? 어떤 때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어떤 때는 자신의 지위, 이미지, 사생활의 비밀, 체면을 지키기 위해 그러는 것이냐? 어찌 됐든 모두 이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는 본성이 아니더냐? 이런 본성을 가진 자는 사탄의 친척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결론적으로, 이는 반감이 드는 혐오스러운 부분이 드러난 것이다. 이제 너희도 혐오감을 느끼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다음 구절을 보도록 하자. 사탄은 또 여호와께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사탄은 욥에 대한 여호와의 평가에 적의를 담아 공격하기 시작했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이는 여호와가 욥에게 한 일들에 대한 사탄의 인식과 평가이다. 사탄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늘 불분명하고 모호하게 말하던 사탄이 여기서는 명확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 즉 하나님 자신에 대한 공격이자 모독이며 반항인 것이다. 사탄의 이런 말을 듣고 나니 너희는 어떠하냐? 반감이 드느냐? 사탄의 속셈이 보이느냐? 먼저,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는 여호와의 평가를 부정했다. 그리고 사탄은 욥의 모든 언행, 즉 여호와를 향한 욥의 경외심을 부정했다. 이는 사탄이 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사탄은 여호와가 행한 것과 말씀한 것을 참소하고 부정하고 의심하였다. 그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 말씀이 그러해도, 왜 내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나이까? 욥에게 그리 복을 내려 주시는데 그가 어찌 당신을 경외하지 않겠나이까?” 이는 하나님의 행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냐? 참소, 부정, 모독이 담긴 이 말은 공격적이지 않으냐? 이 말은 사탄의 마음속 생각이 진실로 드러난 것이 아니냐? 방금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라는 말과는 완전히 양상이 다르다. 이 말 한 마디에서 사탄이 마음속에 품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에 대한 증오심이 확연히 보인다. 그때는 사탄의 악랄함과 사악한 본성이 완전히 드러난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악에서 떠난 자를 증오하고, 여호와가 복을 준 자는 더욱 증오한다. 사탄은 이 기회를 빌려 하나님이 손수 인도해 키운 욥을 해하려 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께서 욥이 주를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고 하시나 저는 그렇게 보지 않나이다.” 사탄은 갖은 수단으로 여호와를 진노케 하고 시험했다. 또한, 어떻게든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욥을 넘겨받아 마음대로 다루며 우롱하고 해하려 했다. 이 기회를 틈타 하나님이 보기에 의인이자 순전한 자를 파멸시키려 했다. 사탄은 충동적으로 이런 마음을 먹은 것이냐? 아니다. 사탄의 이런 마음은 이미 오래된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하고 누군가를 보살피고 감찰하면, 사탄은 바로 그 뒤를 따라간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마음에 들어 하면 사탄은 그 뒤를 쫓아가서 살펴본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얻고자 하면, 사탄은 있는 힘을 다해 훼방 놓는다. 갖가지 사악한 방식을 동원해 시험하고 방해하며 하나님 사역을 파괴하여 오직 자신만 아는 숨겨진 목적을 이루려 한다. 사탄의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탄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도 얻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이 얻기를 원하는 사람을 자기가 얻고자 한다. 그리고 그를 점령하고 통제하고 장악해서 자신을 경배하게 하고 함께 악행을 저지르게 하려 한다. 이것이 사탄의 음험한 속내가 아니겠느냐? 평소 너희는 사탄을 얼마나 사악하고 얼마나 나쁜지 종종 말하지만 직접 목도한 적이 있더냐? 사람의 나쁨만 봤지 진짜 사탄이 얼마나 나쁜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욥의 이야기에서 사탄의 나쁨을 보았느냐? (네.) 사탄의 추악한 모습과 본질을 아주 명확히 보여 준다. 사탄이 하나님과 싸우고, 하나님의 뒤를 쫓아다니는 목적은 하나님이 하려고 하는 모든 사역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이 얻기를 원하는 사람을 점령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다. 사탄은 하나님이 얻기를 원하는 사람을 모두 멸해 버리거나 자신이 가져 이용하려 한다. 이것이 사탄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했느냐? 이 구절에는 하나님의 간단한 한 마디만 나오고 하나님이 어떻게 행했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너희도 보았듯이 사탄의 행함과 말에 대한 기록은 더욱 많다. 아래 구절에서 여호와가 사탄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라고 묻자 사탄은 어떻게 대답했느냐? (여전히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전히 같은 답이다. 이 말이 사탄의 좌우명이나 대표 어록이 되기라도 한 것이냐? 사탄이 증오스럽지 않으냐? 한 번만 해도 될 이 혐오스러운 말을 왜 매번 되풀이하겠느냐? 이는 사탄의 본성이 변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사탄의 추악한 면모는 그 스스로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물음에도 이러한데 사람을 대할 때는 어떻겠느냐! 사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께 복종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감히 하나님 앞에서 방자히 굴고, 매번 똑같은 말로 하나님 물음에 무성의하게 대답하고 대응하여 하나님을 미혹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추한 면모다. 사탄은 하나님의 전능과 권병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순종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사탄은 계속 하나님께 반항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공격함으로써 하나님의 행사를 파괴하려 든다. 이것이 사탄의 사악한 목적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4>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0)

사탄과 여호와 하나님의 대화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6~11)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2:1~5)

욥기에 나오는, 사탄이 한 이 두 구절의 말과 행동들은 하나님의 6천 년 경륜 중에서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한 대표적 사례이며, 사탄 본연의 모습이다. 너는 실생활에서 사탄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설령 봤더라도 사탄이 아니라 사람이 말하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 사람이 말하는 것은 무엇을 대표하느냐? 사탄을 대표한다. 네가 설령 이를 알았다고 해도 정말 사탄이 말하는 것이라고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너는 지금 여기서 사탄 스스로 한 말을 명확히 보았고, 사탄의 추악한 모습과 사악함에 대해 명확하고 뚜렷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사탄이 한 이 두 구절의 말은 현재를 사는 사람이 사탄의 본성을 아는 데 큰 가치가 있지 않으냐? 이 두 구절은 현재 인류가 사탄의 추악한 면모와 본연의 모습을 아는 데 있어 간직할 가치가 크지 않으냐? 이 말은 비록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뜻은 잘 전달되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구나. 너희는 그 의미를 알면 된다. 사탄은 여호와가 하는 일을 거듭해서 공격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욥의 경외심을 참소하였다. 사탄은 여호와에게서 욥을 시험하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 갖가지 방법으로 여호와를 진노케 하려 했다. 그래서 사탄의 이 말은 굉장히 도발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 그렇다면 말해 보아라. 사탄이 이런 말들을 끝냈을 때, 하나님은 사탄이 무엇을 하려는지 명확히 알지 않았겠느냐? (명확히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자신이 감찰하던 욥, 즉 하나님의 종이자 하나님이 인정한 의인, 순전한 자는 그런 시험을 이겨 낼 수 있었느냐? (네.) 하나님은 왜 그가 이겨 낼 수 있다고 단언했겠느냐? 하나님은 줄곧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고 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할 수 있겠느냐? 사탄은 하지 못한다. 사탄이 설령 너의 마음을 들여다보더라도, 그 사악한 본성으로는 절대 거룩한 것을 거룩하다고,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사악한 사탄은 절대로 거룩함과 정의, 광명한 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사탄은 질리지도 않는 듯 본능적으로 자신의 본성과 사악함, 그리고 그러한 방식으로 일을 한다. 심지어 하나님께 징벌받거나 멸망당하는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께 완고하게 반항한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고 사탄의 본성이다. 그래서 사탄은 또 이렇게 말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사탄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하나님에게서 좋은 것을 너무 많이 얻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에게서 좋은 것을 얻어서 하나님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얻은 것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을 경외할 뿐이고, 하나님이 베풀었던 것들을 거두어 가면 바로 하나님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탄의 사악한 본성으로는 사람의 마음이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을 거라 믿지 않는다. 사탄은 사악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거룩함이고 경외심인지 모르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사탄이 사악하지 않으냐? 우리 교회를 제외한 각 종교 각 교파, 종교 단체 혹은 사회단체 모두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너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또한, 간음하는 자는 누구를 봐도 그 자신처럼 음란해 보이고,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의 눈에는 누구나 다 솔직해 보이지 않고 모두 거짓말쟁이로 보이며, 악인은 누구를 봐도 악하게 보여 늘 싸우려 든다. 상대적으로 솔직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다 솔직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늘 속임수에 넘어가고, 사기를 당하며 늘 방비를 하지 못한다. 내가 이런 예를 든 것은 사탄의 이러한 사악한 본성이 부득이한 상황에서 일시적인 드러냄 혹은 환경에 의해 생겨난 것이거나 어떤 이유와 사정이 있어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너희가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함이다! 사탄은 본능적으로 그런 것이다! 좋은 일은 절대로 하지 못한다. 사탄이 듣기 좋은 말을 할지라도 그것은 너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다. 사탄의 말이 듣기 좋고 완곡하고 부드러울수록 뒤로는 더 음흉하고 악독한 속셈을 숨기고 있다. 사탄이 한 이 두 구절의 말에서 너는 사탄의 어떤 면모와 본성을 보았느냐? (음험하고, 악독하며, 사악합니다.) 사탄의 주요 특징은 바로 사악함이다. 아주 사악하고 악독하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4>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1)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한 후 줄곧 인류의 생활을 이끌어 주고 있다. 인류에게 복을 준 것, 율법과 계명을 정해 준 것, 생활에 관련된 많은 규칙들을 정해 준 것 등 하나님이 그렇게 행한 의중과 목적이 무엇인지 아느냐? 먼저 하나님이 한 이 모든 일이 모두 사람을 위한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느냐? 너희에게 있어 이 말은 비교적 광범위하고 와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세세한 부분부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모든 행사가 사람을 이끌고 인도해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더냐? 규례나 율법을 지키게 해서라도 사람이 사탄을 경배하거나 사탄에게 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최초의 목적이었다. 최초에 사람이 아직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간단한 율법과 규칙 등 여러 부분에 관한 규정을 만들었다. 비교적 간단한 규정들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인류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사랑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을 거룩하고 깨끗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다른 의도가 있느냐? (없으십니다.) 그럼 하나님의 이 목적은 정당하고 긍정적이냐? (네.) 하나님이 어떤 규정을 만들었든, 하나님이 역사하는 동안 이 규정들을 통해 이루려는 결실은 모두 사람에게 긍정적인 것이고 사람을 이끄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속에 사사로운 생각과 잡념이 있느냐? 다른 목적이 있거나 사람을 이용하려는 생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 것은 조금도 없다. 하나님은 말씀을 할 때도 이러했고, 일을 할 때도 이러했으며, 또한 마음의 생각도 이러했다. 그 어떤 불순물이나 사사로운 생각과 잡념이 없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사람을 위해서이다. 자신을 위한 목적은 없다. 그는 사람에게 계획이나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하는 이 모든 것은 순전히 인류를 위한 것이고, 인류를 보호하고 인류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지켜 주기 위한 것이다. 이 마음이 귀하지 않으냐? 하나님의 이런 귀한 마음을 사탄에게서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있느냐? (아뇨,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탄에게서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모두 하나님의 자연적 발현이다. 하나님의 사역 방식을 보면, 하나님은 어떻게 했느냐? 이러한 율법과 말씀을 마치 긴고아처럼 모든 사람의 머리에 씌어 강요했느냐? 그런 방식으로 했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방식으로 행했느냐? (이끌어 주시고 권면을 해 주셨습니다.) 협박하는 것이 있느냐? 너희에게 빙빙 돌려 말하는 경우가 있느냐? (없습니다.) 네가 진리를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이끌어 주느냐? (깨우침과 빛 비춤을 주십니다.) 깨우침과 빛 비춤으로 진리에 맞지 않는 것들과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분명히 알려 준다. 하나님의 이러한 역사 방식을 보면서 그와 너의 관계가 어떻다고 느꼈느냐? 하나님이 가까이할 수 없는 높은 존재라고 느꼈느냐?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느꼈느냐? 거리가 없는 굉장히 가까운 사이로 느꼈을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이끌고 공급하며, 도와주고 붙들어 줄 때, 하나님은 정답고 존경스러우며 사랑스럽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하나님이 너의 패괴를 꾸짖거나 너의 패역을 심판하고 징계할 때, 또 어떤 방식을 사용하느냐? 말씀으로 꾸짖지 않느냐? 환경이나 사람과 일, 사물로 징계하지 않느냐? (그렇게 하십니다.) 그 징계의 정도는 어떠하냐? 사탄처럼 사람을 해하는 지경까지 가느냐? (아닙니다. 사람이 감수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사역 방식은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며 섬세하다. 또한 매우 애틋하다. 그리고 적절한 수위와 정도가 있어 너무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의 마음이 감당하기 힘들게 ‘무조건 이래라저래라’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심지어 네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어떤 느낌이 들더냐? 하나님의 권병과 위력을 느낄 때는 어떤 기분이더냐? 하나님의 신성불가침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때 하나님과 거리감이 느껴지더냐? 하나님이 무섭더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느껴진다. 하나님의 행사가 있었기에 모든 사람이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더냐? 사탄이 역사할 경우 이런 느낌이 들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과 진리와 생명으로 끊임없이 사람에게 공급하고 사람을 붙들어 준다. 사람이 연약하고 소극적일 때, 하나님은 “소극적으로 굴지 마라! 소극적이고 연약해질 일이 뭐가 있느냐? 이렇게 연약하고 소극적인데 살아서 뭐 하겠느냐?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라며 강압적으로 말씀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할 권병이 있느냐? (네.) 하지만 이렇게 행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 때문이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아낌과 사랑, 귀히 여김은 사람이 한두 마디로 명확하게 표현하거나 자랑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실제로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 본질의 발현이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 방식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볼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고심, 사람에게서 이루려는 성과, 사람에 따라 취하는 다양한 방식, 또 어떤 사역을 하고 사람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 주려고 하든, 이 모든 하나님의 사역 방식과 이런 애쓰는 마음에서 그 어떤 사악함이나 간사함을 보았느냐?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행사와 말씀,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에게서 발현되는 모든 본질을 보고 우리는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할 수 있느냐? (네.) 이러한 거룩함을 인간 세상이나 너희 자신에게서 본 적이 있느냐? 하나님 외에 사람이나 사탄에게서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에서, 하나님을 유일무이한 거룩한 하나님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느냐? (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사람에게 취한 여러 방식, 사람에게 알려 주고 일깨우고 권면한 것들 같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모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이런 거룩한 하나님이 없었더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해 이런 사역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사람을 완전히 사탄에게 넘겨줬다면, 너희가 지금 어떤 지경에 처해 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어디 여기 온전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 앞에서 건방지고 뻔뻔스럽게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다며 큰소리칠 수 있지 않았겠느냐? (그랬을 겁니다.) 100% 그럴 것이다. 하고도 남았을 테지! 사람에 대한 사탄의 태도에서 사탄의 본성, 사탄의 본질이 하나님과 완전히 다름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대조되는 사탄의 본질은 무엇이냐? (사악함입니다.) 사탄의 사악한 본성과 하나님의 거룩함은 대조적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이러한 발현과 거룩한 본질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이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사탄의 패괴 속에서, 그리고 그의 활동 반경 내에서 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제 거룩함이 무엇인지, 또 거룩함을 어떻게 정의할지 모른다. 설령 네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느낄 때도, 너는 이를 하나님의 거룩함이라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람의 인식 간 차이가 이러하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4>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2)

사탄이 사람에게 역사할 때 보이는 대표적 특징이 무엇이냐? 너희는 체험을 통해 사탄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을 어느 정도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사탄은 자주 그렇게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하려고 시도한다. 너희는 아마 그런 특징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사탄이 무섭거나 가증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 특징이 무엇인지 아는 자가 있느냐? 말해 보아라. (사탄이 하는 모든 짓은 사람을 해칩니다.) 사탄이 사람을 어떻게 해친다는 것이냐? 구체적인 행동과 자세한 내용을 말해 보겠느냐? (꾀어내고 유혹하며 시험합니다.) 그렇다. 그런 행동들을 보인다. 또한 미혹하고 공격하며 참소한다. 다 맞는 말이다. 또 있느냐? (거짓말합니다.)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본성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사탄은 거짓말을 자주 하는데 별로 생각 같은 것도 하지 않고 입만 열면 청산유수다. 또 있느냐? (이간질합니다.)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설명해 주면 너희는 아마 듣고 등골이 오싹해질 것이다! 너희를 겁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하는 사역, 하나님의 태도와 마음은 사람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반면, 사탄은 사람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느냐? 사탄은 그렇지 않다. 사람을 해할 궁리만 한다. 그렇지 않으냐? 사탄이 사람을 해하려고 궁리할 때, 그 마음은 다급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사람에게 역사할 때 사탄의 악독하고 사악한 본성을 잘 드러내 주는 두 개의 단어가 있는데, 너희는 사탄의 가증스러움을 잘 깨달을 수 있다. 바로 사탄은 모든 사람을 대할 때 강제적으로 점령하고 들러붙음으로써 그 사람을 완전히 통제하고 해치려는 목적과 야심을 이루려고 한다는 것이다. ‘강제 점령’은 무슨 뜻이냐? 네가 원하는 상태이겠느냐, 원하지 않는 상태이겠느냐? 네가 알 때이냐, 모를 때이냐? 네가 모를 때이다! 네가 아무것도 모를 때, 사탄은 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아무 짓도 하지 않을 수 있다. 아무런 전제나 배경도 없이 너의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노리다 강제로 점령하고 들러붙음으로써 너를 완전히 통제하고 해치려는 목적을 이룬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게서 인류를 빼앗기 위한 사탄의 가장 전형적인 속셈과 행동이다. 이 말을 듣고 너희는 어떤 느낌이 드느냐? (모골이 송연해지고 겁이 납니다.) 혐오스럽지 않으냐? (혐오스럽습니다.) 혐오감이 들면서 사탄이 뻔뻔하다고 느껴지지 않느냐? 사탄의 뻔뻔함을 느끼고 보니, 너희 주변에서 항상 너희를 통제하려는 자들, 지위와 이익에 대한 야심이 큰 자들이 혐오스러워 보이지 않느냐? (혐오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에게 강제로 들러붙어 점령하는지 명확하게 알겠느냐? ‘강제 점령’이나 ‘들러붙다’라는 말을 들으면 느낌이 괴이하고 혐오스럽다. 그렇지 않으냐? 사악함이 느껴지지 않느냐? 네가 아직 동의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데, 너에게 들러붙어 너를 점령하고 패괴시킨다. 너는 어떤 기분이겠느냐? 증오스럽고 혐오스럽지 않으냐? (네, 그렇습니다.) 네가 사탄의 이런 수법에 대해 증오심과 혐오감을 느낄 때, 반대로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이 느껴지느냐? (감사의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너의 모든 것을 주관하고 주재하길 바라는 소망이나 의지가 있느냐?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그런 것이냐? 사탄이 강제 점령하고 들러붙을까 봐 두려워하는 상황에서 그런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져서도 안 된다. 그러는 것도 옳지 못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이 계시니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너는 사탄의 사악한 본질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과 고심,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더 정확히 알거나 귀하게 여기게 된다. 사탄이 그렇게 증오스러운데도 너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고, 기대려는 마음이 우러나지 않는다면, 너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사탄이 그런 식으로 너를 해하길 바라는 것이냐? 사탄의 사악함과 추악함을 보고 난 후,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니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좀 생겼느냐?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나님께 흠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거룩함’이라는 칭호를 감당할 수 있느냐? (네.) 세상 만물 중,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사람의 이러한 인식에 걸맞지 않으냐? 또 다른 존재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것은 대체 무엇이냐? 네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 보호와 관심, 보살핌을 조금 주는 것이 전부이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엇을 줬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과 모든 것을 주었다.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런 속셈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사람에게 베풀어 주었다. 진리와 말씀과 자신의 생명으로 사람을 이끌고 인도하여, 사탄의 해함과 시험, 유혹을 멀리하고 또한 사탄의 사악한 본성과 추악한 면모를 간파해 제대로 보게 해 주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애틋함이 진실하지 않더냐? 너희 모든 사람이 다 직접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4>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3)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어 온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이 너에게 행한 것을 돌이켜 보아라. 그 느낀 바가 깊든 얕든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니더냐? 네가 가장 얻어야 할 것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진리가 아니더냐? 생명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전에 너를 깨우쳐 주었든 아니든, 하나님이 그런 것을 주고 난 후 보답하라거나 갚으라고 한 적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는 것이냐? 하나님의 목적도 너를 점유하려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보좌에 오르려는 것이냐? (네.) 그렇다면 마음의 보좌에 오르는 것과 사탄이 강제로 점령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 하고 점유하고자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사람을 하나님의 꼭두각시나 로봇으로 만들려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점유하는 것과 사탄이 강제로 점령하거나 들러붙는 것은 차이가 있느냐?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마음을 가져 뭐 하겠느냐? 다시 말해, 하나님이 너희를 점유해 뭐 하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점유한다’는 말을 너희는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나님에 대해 오해가 없도록 제대로 말해야 한다. 안 그러면 사람은 늘 오해를 한다. ‘하나님이 늘 나를 점유하려 하시는데 대체 무엇 때문일까? 나는 점유당하고 싶지 않고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 사탄이 사람을 점령한다더니 하나님도 사람을 점유하시는구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나는 나야. 그 누구에게도 점유당하고 싶지 않아!’ 여기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 곰곰이 잘 생각해 보아라. 내가 먼저 너희에게 묻겠다. ‘하나님이 사람을 점유한다’는 것이 그저 허울뿐인 말이냐? 하나님이 사람을 점유하는 것이 너의 마음속에 들어가 모든 언행을 지배하는 것이냐? 앉으라 하면 감히 서지 못하고, 동쪽으로 가라 하면 감히 서쪽으로 갈 수 없는 것이냐? 이런 의미의 점유란 말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으로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난 세월 사람을 경영해 오면서 사람에게 행한 사역들, 그리고 오늘날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한 모든 말씀이 사람에게서 어떤 결실을 맺게 되느냐?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으로 살아가는 것이냐?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점유한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보면 마치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차지해 그 안에서 살고 나오지 않는 것 같다. 또한 사람의 마음의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을 하라고 하면 사람은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갖출 수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사람도 하나님의 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냐? 이런 의미의 ‘점유’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생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너희에게 묻겠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급한 모든 말씀과 진리는 하나님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의 발현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는 확실하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급한 말씀들은 하나님 자신이 반드시 행하고 갖춰야 할 것들이냐?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할 때, 무엇 때문에 사람을 심판하느냐? 이런 말씀은 어떻게 온 것이냐?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는 말씀의 내용은 무엇이냐? 무엇에 근거한 것이냐? 사람의 패괴 성품에 근거한 것이 아니냐?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심판하여 이루는 성과는 하나님의 본질에 근거한 것이냐? (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점유하려 한다는 것은 허울뿐인 말이냐?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했겠느냐?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한 목적은 무엇이냐? 이런 말씀들로 사람의 생명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한 이 모든 진리를 사람의 생명이 되게 하려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진리와 말씀을 사람 자신의 생명이 되게 할 때,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지 않겠느냐? 악에서 떠날 수 있지 않겠느냐? 사람이 이 경지에 이르면, 이미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권병 아래에서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욥이나 베드로처럼 길의 끝에 이르렀을 때, 생명이 성숙했다고 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을 진실로 알게 될 때, 그때도 사탄이 그들을 데려갈 수 있겠느냐? 여전히 그들을 점령할 수 있겠느냐? 강제로 그들에게 들러붙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어떤 자들이냐? 완전히 하나님께 얻어진 자들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완전히 얻어진 자들을 너희는 어떻게 보느냐? 하나님이 볼 때, 이는 하나님이 이미 사람의 마음을 점유한 상태이다. 하지만 사람이 보기엔 어떠하냐? 하나님의 말씀과 권병, 하나님의 도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어 사람의 전부를 점유하였고, 그 사람의 삶과 본질이 하나님을 흡족게 하는 경지에 이르게 하지 않았느냐? 하나님께 있어 바로 이때가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 점유된 순간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너희는 이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나님의 영이 너를 점유한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도가 너의 생명이 되었고, 진리가 너의 생명이 된 것이다. 이때, 사람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이 생긴다. 하지만 이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라 말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사람이 갖춰야 할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따랐든,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말씀을 얻었든,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설령 어느 날 하나님이 “내가 네 마음을 점유했고, 너는 내 생명을 가졌다.”라고 말씀할지라도, 너는 네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때 너는 어떻게 바뀌겠느냐?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지 않겠느냐? 너의 몸과 마음속에 하나님이 베풀어 준 생명이 가득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점유했을 때 나타나는 아주 정상적인 상태이다. 이것이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얻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을 때, 사람이 하나님의 신분과 하나님의 본질을 가질 수 있겠느냐? (가질 수 없습니다.) 어떤 때든 사람은 결국 사람이고, 너는 피조물이다. 네가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말씀과 도를 받아들여도, 너는 그저 하나님 말씀의 생명을 가진 것일 뿐, 영원히 하나님이 될 수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4>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4)

사탄의 시험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1~4)

이는 마귀가 첫 번째 시험에서 예수에게 한 말이다. 어떤 내용이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이 말은 간단하지만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는 말이 아니냐?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했다. 그럼 마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몰랐겠느냐? 그가 그리스도임을 몰랐겠느냐?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만일’이라고 했겠느냐? (하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시험한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마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게 잘 알고 있었음에도 마귀는 순종하거나 경배하였느냐? (아닙니다.) 마귀는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이냐? 그런 방법, 그런 말로 예수를 격노하게 하여 꼬임에 빠지도록 유인하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가 자신의 뜻대로 행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사탄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이것이 사탄의 본성 아니겠느냐? 사탄의 본성은 어떠하냐? (교활하고 사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하나님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겠느냐? 사탄은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공격했다. 그러고는 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말했다. 이것은 사탄의 음흉한 속셈 아니겠느냐? 사탄은 무엇을 하려고 했느냐? 사탄의 의도는 아주 분명하다. 즉, 그런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와 신분을 부인하려 한 것이다. 사탄의 그 말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니 그 사역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의미가 아니겠느냐? 사탄은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공격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허물거나 망치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악독함이다. 사탄의 악독함은 본성에서 자연스레 나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성육신 하나님임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짓, 그러니까 하나님을 뒤쫓고, 계속 공격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망치는 짓을 하는 것이다.

다시 사탄이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한 말을 분석해 보자. 돌을 떡이 되게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이냐? 있는 음식을 먹으면 될 것을 왜 굳이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하는 것이냐? 이는 무의미한 일 아니더냐? 그때 예수가 금식을 하고 있긴 했으나 설마 먹을 것이 없었겠느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탄이 한 그 말이 얼마나 황당한지 알 수 있다. 또 사탄이 아주 음험하고 악독하지만 한편으로는 황당하고 터무니없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사탄이 한 일들을 통해 사탄의 악독한 본성과 하나님의 사역을 망치는 짓들을 보고 있자면 너무나 가증스럽고 화가 난다. 그런데 반대로 사탄이 한 그런 일과 말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몹시 유치하고 황당하지 않으냐? 이는 사탄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런 본성이 있기에 그런 짓을 한 것이다. 지금 사람이 그 말을 보면 황당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다. 그런데 사탄은 그런 말을 꺼냈다. 그러니 사탄을 무지하고 그릇되다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사탄의 사악함은 어디서나 시시각각 드러난다. 예수는 어떻게 대답하였느냐?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강력하지 않으냐? (강력합니다.) 이 말씀이 강력하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이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이 살려면 떡에만 의지해야 하느냐? 예수는 사십 주야를 금식했다. 그가 아사하였더냐? (아닙니다.) 그가 아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다가와 그런 말을 하며, “돌을 떡으로 만들면 먹을 것이 생기지 않느냐? 그럼 금식을 할 필요도, 굶주릴 필요도 없지 않겠느냐?”라는 식으로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다. 하지만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그 말은, 사람이 비록 육으로 살고 있으나 사람의 육을 살게 하고 숨 쉬게 하는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진리로, 한편으로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어 하나님을 진리로, 사람이 기댈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하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말씀에 그의 실제적인 면도 담겨 있지 않으냐? 예수는 사십 주야를 금식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더냐? 살아 있지 않았더냐? 이것이 실례(實例) 아니겠느냐? 예수가 사십 주야를 금식했음에도 살아 있었다는 것이 이 말씀의 강력한 증거이다. 간단한 말씀이긴 하나 예수는 사탄이 그를 시험할 때 그제서야 이 말씀을 한 것이냐, 아니면 원래부터 이 말씀을 갖고 있었던 것이냐? 다시 말해, 하나님은 곧 진리이고 생명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은 후천적으로 생겨난 것이냐? 후천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본질이 진리이자 생명이다. 어떤 일이 임해도 그에게서 발현되는 것은 다 진리이다. 그가 말한 내용이 길든 짧든 그 진리, 그 말씀은 사람을 살게 하고,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 또한 사람이 그 말씀에서 진리를 얻게 하고, 인생의 길을 알게 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한다. 즉, 하나님이 한 이 말씀의 근원은 긍정적인 것이다. 그럼 긍정적인 것을 거룩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탄이 한 말은 사탄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다. 사탄은 언제 어디서나 사악하고 악독한 본성을 드러낸다. 이는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아니더냐? 사탄에게 그렇게 하라고 지시한 자가 있더냐? 도와준 자가 있더냐? 협박한 자가 있더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나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사악한 본성이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든 사탄은 그 뒤를 쫓는다. 사탄이 한 행동, 말의 본질과 본색이 바로 사탄의 본질, 즉 사악하고 악독한 본질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마 4:5~7)

우선 사탄이 한 말을 살펴보자. 사탄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라고 했고, 또한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였다. 사탄의 이 말이 어떻게 들리느냐? 굉장히 유치하지 않으냐? 유치하고 황당하며 역겹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사탄은 항상 어리석은 짓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스로 아주 똑똑하다고 여기며 늘 성경 말씀, 심지어 하나님이 했던 말씀까지 인용한다. 이런 말을 통해 역으로 하나님을 공격하고 시험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 계획을 망치려고 하는 것이다. 사탄이 한 말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사탄의 사악한 속셈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하는 짓은 언제나 사람을 시험하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사람을 시험하고 유인하고 유혹하는 방식으로 빙 돌려 말한다. 사탄은 평범한 사람을 시험하듯이 하나님을 시험했다. 하나님도 사람처럼 우매하고 어리석으며 사물의 본모습을 잘 분별하지 못한다고, 또한 그것의 본질, 교활함과 음흉한 속셈을 간파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사탄의 어리석은 면 아니겠느냐? 또한, 사탄은 당당하게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자신의 말이 이치에 맞고 근거가 있다고 여겼다. ‘당신이 무슨 빈틈을 찾을 수 있겠어?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사탄의 터무니없고 유치한 점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증거하며 복음을 전할 때, 불신자들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지 않더냐? 너희도 비슷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지 않더냐?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떠하더냐? 역겹지 않더냐? (역겹습니다.) 역겨운 마음이 들면서 혐오감과 증오심이 생기지 않더냐? 그럴 때면 사탄, 그리고 사탄에 의해 생성된 패괴 성품이 사악한 것임을 깨닫게 되지 않더냐? 그런 느낌이 들 때, ‘사탄의 말은 공격성과 유인책을 담고 있어 참으로 황당하고, 가소로우며, 유치하고 역겹구나.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를 보면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말씀하거나 사역하신 적이 없어. 그런 방식은 한 번도 없었다고.’라는 생각이 들지 않더냐? 물론 그때도 사람은 그런 느낌만 들 뿐 하나님의 거룩함을 깨닫지는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의 현재 분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진리야. 우리에게 이로우니 받아들여야 해.’라는 정도만 느낄 뿐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는 상관하지 않고 모두가 입을 모아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하나님이 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리 자체가 곧 거룩함이요, 하나님이 곧 거룩함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럼 방금 사탄이 했던 말에 예수는 어떻게 대답했느냐? 예수는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라고 했다. 예수의 이 말씀에 진리가 담겨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진리가 담겨 있다. 겉보기에는 명령의 말씀, 아주 간단한 말씀 같아도 사람과 사탄은 이를 자주 거스른다. 그래서 예수는 사탄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라고 말씀한 것이다. 사탄은 항상 그렇게, 그칠 줄 모르고 하나님을 시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사탄의 본성과 본질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경외심도 없다. 사탄은 하나님의 곁에서 하나님을 보았지만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시험한다. 이 때문에 예수는 사탄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라고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항상 한 이 말씀이 오늘날에도 유효하지 않으냐? (유효합니다. 저희도 자주 하나님을 시험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도 자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겠느냐? 사람에게 사탄의 패괴 성품이 가득하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위에서 사탄이 했던 말들을 사람도 자주 하지 않더냐? 어떤 상황에서 말하느냐? 사람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한다. 이는 사람의 성품이 사탄의 패괴 성품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증거이다. 예수는 아주 간단한 말씀을 했지만, 이는 진리를 대변하는 것이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사탄과 언쟁을 벌이며 한 말씀이 있더냐? 사탄과 맞붙어 싸우면서 한 말씀이 있더냐? (없습니다.) 그는 사탄의 시험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역겹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느냐? (그렇습니다.) 혐오스럽고 역겹다고 느끼면서도 그는 사탄과 언쟁을 벌이지 않았다. 사탄에게 큰 이치를 설명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왜 그랬겠느냐? (사탄은 줄곧 그렇게 해 왔고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치로 깨우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진리임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영원히 알지도, 인정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사탄의 본성이다. 사탄의 본성에 혐오스러운 점이 또 하나 있는데 무엇이겠느냐? 사탄은 예수를 시험해서 성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일단 시도해 보려고 했다. 징벌을 받을지라도 그렇게 행동하며, 하나님을 시험해서 얻는 것이 없을지라도 그런 짓을 계속하고, 하나님께 끝까지 맞섰다. 이는 어떤 본성이겠느냐? 사악함 아니겠느냐? 하나님 얘기만 나오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본 적이 있느냐? 그들이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느냐?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다. 하나님 역시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없고, 그를 건드린 적도 없다. 그런데 그들은 왜 화를 내는 것이겠느냐? 그런 사람을 사악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세상의 풍조며,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것이며, 스타를 추종하는 것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 않으면서 ‘하나님’이란 단어만 언급해도 성을 내고,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만 언급해도 성을 내니, 이것이 사악한 본성 아니겠느냐? 이것으로 사람의 사악한 본성이 충분히 증명된다. 너희는 진리를 언급하거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시련과 심판의 말씀을 들을 때 즉시 반감이나 혐오감이 들고 듣기 싫은 경우가 있느냐?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하나님은 진리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어떤 건 진리가 아니라 사람을 꾸짖는 말씀이잖아!’ 심지어 ‘맨날 이런 이야기만 하시지. 입만 열면 시련이요, 심판이요 하는 것들뿐. 도대체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 거지? 언제쯤이면 좋은 종착지에 이를 수 있는 거냐고!’라며 반감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 이런 원인 모를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는 어떤 본성이겠느냐? (사악한 본성입니다.) 이는 사탄의 사악한 본성으로 초래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사악한 본성이나 인류의 패괴 성품에 대해 사람과 언쟁을 벌이거나 따진 적이 없고, 또는 사람의 우매한 행동을 크게 문제 삼은 적도 없다. 하나님에게서는 인류가 특정 사물에 대해 갖는 관점 같은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인류의 관점이나 지식, 과학, 철학, 상상으로 일을 처리하는 모습은 더더욱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하나님이 행하고 나타낸 모든 것은 진리와 관련이 있다. 즉, 하나님이 한 모든 말씀과 모든 일은 다 진리와 관계가 있다. 그 진리는 터무니없이 상상해 낸 것이 아니다. 그러한 진리와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과 생명으로 인해 발현된 것이다. 그런 말씀과 하나님이 행한 일들의 본질이 진리이므로 하나님의 본질은 거룩하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모든 행사나 말씀은 사람에게 생기와 빛을 가져다준다. 그리하여 사람에게 긍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의 실제를 보게 하고 길을 알려 줘 바른길을 가게 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에 의해 결정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6)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 4:8~11)

사탄 마귀는 앞에서의 두 가지 방법이 통하지 않자 또 다른 방법을 택했다. 바로 예수에게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자신을 경배하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마귀의 어떤 본모습을 알 수 있느냐? 사탄 마귀는 참으로 뻔뻔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면에서 뻔뻔하냐?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께 역으로 만물을 보여 주며 “만국의 이 부귀영화를 보라. 당신이 내게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라고 말하다니,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니냐? 뻔뻔하지 않으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였다고는 하나 그 모든 것을 누리더냐? 하나님은 만물을 인류에게 주었다. 사탄은 이를 삼켜 버릴 속셈을 품고 있었고, 그다음 하나님께 보여 주며 “내게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탄의 추악한 몰골 아니겠느냐! 사탄은 ‘수치’라는 두 글자의 의미를 모른다. 여기서 또 사탄의 사악함을 볼 수 있다. 사탄은 수치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사탄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며, 주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만물은 하나님의 것으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며 더욱이 사탄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마귀 사탄은 뻔뻔하게 하나님께 이 만물을 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사탄이 또 한 번 어이없고 낯 두꺼운 일을 저지른 것 아니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증오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그렇지 않으냐? 하지만 사탄이 어떤 짓을 하든 예수가 그 꼬임에 넘어갔더냐? 예수는 어떻게 말씀했느냐?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실제 의미가 담겨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실제 의미가 있겠느냐? 사탄의 말에서는 사탄의 사악함과 뻔뻔함을 알 수 있다. 그럼 인류가 사탄을 경배한다면 어떤 결말을 맞겠느냐? 만국의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사람도 사탄처럼 뻔뻔하고 가소로워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탄과 똑같이 될 것이다. 그래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고 한 예수의 말씀은 모든 이에게 매우 중요하다. 즉 주님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섬기거나 사탄 마귀를 경배한다면, 너는 사탄과 한패가 되는 것이며, 사탄과 똑같이 뻔뻔하고 사악해질 것이고, 사탄처럼 하나님을 시험하고 공격하게 될 것이다. 그럼 네 결말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께 혐오받아 죽임을 당하거나 멸망되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몇 번의 시험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을 때, 사탄은 계속해서 시험했더냐? 더 이상 시험하지 않고 떠나갔다. 이로써 무엇이 증명되었느냐? 사탄의 사악한 본성, 악독함, 그릇되고 황당무계한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단 세 마디로 사탄을 물리쳤다. 그리하여 사탄은 수치를 당하고 풀이 죽어 도망갔으며, 더 이상 예수를 시험하려 들지 않았다. 예수는 이미 사탄의 그 시험을 이겼으므로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사역, 담당한 사역을 순조롭게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예수가 한 이러한 말씀과 일들을 오늘날로 가져와도 모든 이에게 실질적인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실질적인 의미가 있겠느냐? 사탄을 물리치는 것이 쉬운 일이냐? 그러려면 사람이 사탄의 사악한 본성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사탄의 시험을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사탄의 시험에 들었을 때, 사탄의 사악한 본성을 간파할 수 있다면 사탄을 이길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사탄의 그릇되고 황당무계한 면을 알게 되면 사탄의 편에 서서 사탄과 같이 하나님을 공격할 수 있겠느냐? 너 자신에게서 사탄의 뻔뻔함과 악독함이 발로될 때, 이를 확실히 깨닫고 의식한다면 계속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공격하고 시험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느냐? (사탄을 저버리고 내칠 것입니다.) 그것을 쉽게 할 수 있겠느냐? 쉽지 않다. 이를 위해 사람은 항상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을 성찰해야 하며,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과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사탄의 미혹과 통제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

사탄이 한 이 모든 말을 통해 사탄의 본질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정리해 보자. 우선, 사탄의 본질은 전반적으로 사악하며 하나님의 거룩함과 대립된다. 왜 사탄의 본질이 사악하다고 하겠느냐? 이는 사탄이 사람에게 한 일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근거해 살펴보아야 한다. 사탄은 사람을 패괴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통제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살면서 일을 하고, 사탄이 패괴시킨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사탄에게 점령되고 동화되어 사탄의 패괴 성품, 즉 사탄의 본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탄의 말과 행위에서 교만함을 보지 못했느냐? 사탄의 간사함과 악독함을 보지 못했느냐? 사탄의 교만함은 주로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느냐?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지위를 차지하려고 하지 않더냐?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사역과 지위를 없애고 자신이 하나님의 지위를 차지하려 들며,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고, 옹호하고, 경배하게 하려고 한다. 이것이 사탄의 교만한 본성이다.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킬 때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직접 알려 주더냐? 사탄이 하나님을 시험할 때 “당신을 시험하고 공격하겠습니다.”라고 직접 이야기하더냐? 사탄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럼 어떤 식으로 하느냐? 유인하고, 시험하고, 공격하고, 함정을 파 놓으며, 심지어 성경 말씀까지 인용해 다양한 방식의 말과 행위로 음흉한 속셈과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사탄이 이렇게 한 후, 사람에게서 발로되는 것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사람도 교만해지지 않더냐? 수천 년 동안 사탄에게 패괴되면서 사람 역시 교만하고, 간사하고, 악독하게 변했고, 이치로 깨우칠 수 없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사탄의 본성이 초래한 결과다. 사탄은 사악한 본성을 가졌기에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도 그 사악한 본성이고, 그 사악한 패괴 성품이다. 그래서 사람은 모두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게 되었으며, 사탄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공격하고, 시험하고, 나아가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한 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게 되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7)

사탄은 어떻게 지식으로 사람을 패괴시키는가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긍정적인 것 아니더냐? 적어도 ‘지식’이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사탄이 지식으로 사람을 패괴시킨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진화론은 지식의 일부 아니더냐? 뉴턴의 법칙도 지식의 일부 아니더냐? 지구 인력 역시 지식의 일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그럼 지식이 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로 포함되겠느냐?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지식에 진리가 조금이라도 담겨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지식의 본질은 무엇이냐? 사람은 무엇에 기초하여 이 모든 지식을 배우느냐? 모두 진화론을 기초로 배우는 것 아니더냐? 사람이 탐구하고 정리한 지식은 모두 무신론에 기반한 것 아니더냐? 이 모든 지식이 하나님과 관련이 있느냐?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관련이 있느냐? 진리와 관련이 있느냐?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어떻게 지식으로 사람을 패괴시키겠느냐? 나는 방금 이런 지식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도, 진리와도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진리와 상관은 없지만 지식이 사람을 패괴시킨 것도 아니잖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지식은 너에게, 행복은 사람의 두 손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더냐? 사람의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가르치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그런 말을 어떻게 보느냐? (허튼소리입니다.) 적합한 표현이다. 모두 허튼소리이다! 지식이란 것은 굉장히 복잡하다. 만약 단순히 어느 지식은 그저 지식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한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 분야의 지식을 습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지식을 배울 때,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고, 다스리고, 관리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지식 안에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탐구하고, 답을 찾는 것에 그칠 뿐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연구만 한다면 영원히 진정한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저 지식을 통해 생계 수단과 일자리를 마련하고, 돈을 벌어 그럭저럭 밥벌이를 할 뿐, 지식은 결코 너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고 악을 멀리하게 하지 못한다. 네가 배운 지식이 많을수록 하나님을 거역하고 연구하고, 시험하려 들며,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이 더 커진다. 지식이 사람에게 어떤 것을 가르쳐 주느냐? 모두 사탄의 철학이다. 사탄이 패괴된 인류 가운데서 퍼뜨린 생존 철학과 생존 법칙이 진리와 관계가 있겠느냐? 진리와 관계가 있기는커녕 오히려 진리에 위배된다. 사람은 흔히 “목숨은 운동에 달렸다”,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라고 말한다. 이는 무슨 말이냐? 전부 궤변이자 듣기만 해도 역겨운 말이다. 사탄은 소위 말하는 지식에 자신의 많은 처세 철학과 사상을 담아 사람에게 주입한다. 그와 동시에 사람이 그러한 사상, 철학, 관점을 근거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하나님이 만유와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은 지식을 배울수록, 또한 지식을 습득할수록 하나님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사탄이 사람의 내면에 관점, 관념, 생각들을 주입했기 때문이다. 사탄이 이런 사상들을 사람의 내면에 주입할 때, 사람은 패괴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사람은 무엇으로 살고 있느냐? 정말 이런 지식에 기대어 살고 있느냐? 아니다. 사람은 지식 속에 숨겨진 사탄의 사상, 관점, 철학에 기대어 산다. 이는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핵심이며 목적이자 방법이다.

지식 얘기가 나왔으니 가장 간단한 것부터 이야기해 보자. 말과 글의 문법이나 글자가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겠느냐? 단어가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단어는 사람을 패괴시킬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이 말을 하기 위한 도구이자 하나님과 소통하는 수단이다. 게다가 오늘날 하나님은 언어와 말씀을 통해 사람과 소통하므로 이는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다. 1+1=2, 2×2=4는 지식이 아니더냐? 그런데 이런 지식이 너를 패괴시킬 수 있겠느냐? 이는 상식, 규칙일 뿐 사람을 패괴시킬 수 없다. 어떤 지식이 사람을 패괴시키느냐? 사탄이 지식에 가미한 관점과 사상이다. 사탄은 지식을 통해 사람에게 이러한 관점과 사상을 주입한다. 한 편의 글을 예로 들어 보면, 그 모든 글자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는 것은 저자가 글을 쓸 때의 관점과 속셈, 그리고 그의 사상에 대한 내용이다. 이는 영혼과 관련된 것이므로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네가 드라마를 본다고 하자. 드라마의 어떤 부분이 사람의 관점을 변화시키겠느냐? 배우가 하는 말, 그 어휘들이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어떤 것들이 사람을 패괴시키느냐? 바로 그 드라마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와 내용이다. 이는 감독의 관점을 대변하며, 이러한 관점에 담긴 메시지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좌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이제 사탄이 지식을 이용해 사람을 패괴시킨다고 이야기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으니 그릇되게 이해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럼 소설이나 글을 읽을 때 그 글에 담긴 사상이 사람을 패괴시키는지, 아니면 사람에게 유익한지 분별할 수 있겠느냐? (조금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단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천천히 배우고 경험해야 한다. 사람이 어떤 지식을 연구하거나 학문을 배운다고 생각해 보자. 그 학문에 긍정적인 점이 있을 수도 있다. 그 학문에 대한 상식과 사람이 피해야 할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전기를 예로 들어 보자. ‘전기’는 지식 아니더냐? 전기에 감전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무지한 것 아니겠느냐? 그러나 전기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 후에는 함부로 전기를 만지지 않고 이를 활용할 수도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긍정적인 점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람을 패괴시키는 지식이 어떤 것들인지 이제 확실히 이해하겠느냐? 이해했으면 더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은 매우 많아서 너희는 스스로 천천히 분별해 나가야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8)

사탄은 어떻게 과학으로 사람을 패괴시키는가

과학이란 무엇이냐? 모두가 마음속으로 과학이 아주 대단하고 심오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과학이라고 하면 그것은 과학 연구원이나 전문적인 연구 인력이나 접하는 것이지 일반인은 이해할 수도 없고,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관계가 없겠느냐? (있습니다.) 사탄이 어떻게 과학으로 사람을 패괴시키겠느냐? 멀리 갈 필요 없이 요즘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을 얘기해 보자. ‘유전자’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지 않으냐?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전자는 과학을 통해 발견한 것 아니더냐? 그럼 유전자라는 것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가져다주었느냐? 사람의 몸이 굉장히 신비롭다고 느끼게 하지 않았느냐? 사람이 이 화제를 접하면, 특히 호기심이 많은 사람의 경우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하지 않겠느냐?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에 몰두할 것이다. 이 분야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한 나머지 시간만 나면 온갖 서적을 뒤지고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를 검색할 것이다. 과학이란 무엇이냐? 과학이란 사실 사람이 호기심을 느끼는 일, 사람이 모르는 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주지 않은 일, 사람이 탐구하는 비밀에 대한 상상이나 학설이다. 과학의 범위는 어떻게 되느냐? 매우 광범위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흥미를 느끼는 모든 것이 연구 대상에 포함되며, 세부적인 내용과 법칙을 연구한 후 보기에 그럴싸한 결론을 낸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이 이렇게 많다니 과학자들은 정말 대단해. 지식을 얼마나 쌓아야 이런 것까지 알 수 있는 걸까?’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우러러본다. 그렇지 않더냐!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더냐? 만물을 연구하고, 흥미를 느끼는 신비로운 현상을 연구하고 싶어 하지 않더냐? 그럼 궁극적인 결과는 무엇이냐?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고, 경험에 근거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사람도 있다. 또 역사와 배경을 연구하여 결론을 얻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럼 과학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과학은 사람에게 물질세계의 존재만 보게 하고 호기심만 충족시켜 줄 뿐,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법칙을 일깨워 주지는 못한다. 사람은 과학에서 해답을 찾은 것 같지만, 이 해답은 사람을 미혹하고 일시적인 만족감을 준다. 이러한 만족감은 사람의 마음을 물질세계에 가둬 버린다. 사람은 과학을 통해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하며 어떤 일이든 과학적인 관점에서 증명하고 받아들인다. 과학이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고 유혹하면서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을 알거나 경배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됐고,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믿지 않게 됐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답을 얻어야 하는 것 아니더냐? 과학을 믿는 사람일수록 그릇됐다. 그런 사람은 어떤 일이든 과학이나 연구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님을 찾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도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을 몇 년이나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한가하게 세균을 연구하거나 어떤 일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자료를 찾는 사람도 있다. 진리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으며, 많은 일에서 과학적인 관점이나 지식, 과학적인 해답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이런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존재하겠느냐?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과학을 연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연구하려는 사람도 있다. 일례로, 많은 종교 전문가가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던 산에 가서 방주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드러난 방주의 현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으므로 이야기와 역사(歷史)만 믿게 된다. 이것이 과학과 물질세계를 연구한 결과이다. 물질을 연구하면, 연구 대상이 미생물이든 천문 지리이든, 하나님이 존재하고 만유를 주재한다는 결과는 절대로 얻을 수 없다. 그럼 과학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느냐?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을 연구하게 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의심하게 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사탄은 과학으로 사람의 무엇을 패괴시키려 하겠느냐? 과학적으로 입증된 결과를 가지고 사람을 미혹하고 마비시키려 하지 않겠느냐? 불확실한 답으로 사람의 마음을 점유하여 사람이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를 찾지도, 믿지도 않게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과학 역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9)

사탄은 어떻게 전통문화로 사람을 패괴시키는가

전통문화에 포함되는 것이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전통문화란 무엇을 말하느냐? 어떤 사람은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한 부분이다. 가족, 민족, 나아가 인류가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는 생활 방식이나 규칙, 논리, 규례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 주입되어 사람은 그것을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 규례, 생명으로 간주하며 지켜 나간다. 심지어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것이므로 영원히 바꾸거나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이외에도 공자나 맹자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 중국의 도교나 유교가 주는 가르침 등이 모든 사람의 뼛속에 박혀 있다. 그렇지 않으냐? 전통문화에는 또 어떤 것들이 포함되느냐? 사람이 기념하는 명절들도 포함되지 않느냐? 예를 들어 설날, 정월 대보름, 청명, 단오, 백중, 추석과 같은 명절들이 있으며, 심지어 어떤 집안에는 집안 어른의 생신, 생후 1개월 축하 잔치, 백일잔치 등등 여러 가지 기념일이 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전통 명절에 속한다. 전통 명절의 근간이 전통문화 아니더냐? 전통문화의 핵심은 무엇이냐? 거기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내용이 있느냐? 진리를 실천하게 하는 내용이 있느냐? 하나님을 위해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하는 명절이 하나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모든 명절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현대인은 명절을 먹고 놀며 즐기는 날로 생각한다. 이러한 전통문화는 어디에서 기원했느냐?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느냐? (사탄입니다.) 사탄에게서 비롯되었다. 사탄이 이러한 전통문화를 통해 몰래 사람에게 주입하는 것들이 있다. 무엇을 주입하겠느냐? 조상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이 그중 하나 아니더냐? 일례로 청명절에는 성묘를 가서 제사를 지내며 조상을 기린다. 단오절에는 나라 사랑의 정신을 되새긴다. 음력 8월 15일은 어떠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가족들이 어떤 배경에서 모이느냐? 왜 모이느냐? 정을 나누고 마음을 교감하기 위함이다. 물론 섣달 그믐날, 정월 대보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런 다양한 설은 모두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철학과 사상이다. 사탄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좋다고 주입하고, 또 사람이 조상이나 사탄을 위해 제사를 지내게 하며, 육의 쾌락을 추구하게 만든다. 여러 명절을 지내면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도 모르게 사탄의 사상이나 관점이 심어지며, 40~50세 또는 그 이상 나이를 먹으면 이런 사상과 관점이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또한 사람은 그 관점이 맞는지 틀린지 전혀 분별하지 못한 채 다음 세대에게 이를 있는 그대로 남김없이 전수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전통문화와 명절은 어떻게 사람을 패괴시키느냐? 이것을 알고 있느냐? (규례로 사람을 속박하고 옭아매어 하나님을 찾을 시간과 힘을 앗아 갑니다.) 그것도 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설날에 다른 사람은 모두 설을 쇠는데 너 혼자 쇠지 않는다면 마음이 씁쓸하지 않겠느냐? 꺼림칙한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 ‘올해 설도 제대로 못 쇠었는데, 한 해 동안 일이 안 풀리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겠느냐? 불안하거나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겠느냐? 심지어 몇 년 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았더니 조상이 꿈에 나타나 돈을 요구했다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겠느냐? ‘세상을 뜨신 분이 돈이 부족하다니 안되셨네. 종이돈이라도 태워 드려야지 안 되겠어! 그러지 않으면 산 사람이 무슨 해를 입을지 몰라.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이 꼬일 수도 있다고!’라며 마음속에 늘 이런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걱정은 누가 가져다준 것이겠느냐? (사탄입니다.) 사탄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이다. 이것이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법 아니더냐? 사탄은 온갖 구실과 방법을 동원하여 너를 지배하고, 위협하고, 속박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사탄에게 굴복하고 순종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법이다. 사람은 연약할 때 종종 귀신에 홀린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어리석은 일을 하곤 한다. 즉, 사탄에게 사로잡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일을 하고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식이다. 심지어 지금도 많은 사람이 뿌리 깊이 박힌 전통문화에 연연하며 놓지 못하고 있다. 특히 사람은 연약해져 있거나 소극적일 때, 명절을 보내면서 사탄과 상봉도 하고, 다시금 사탄을 만족시키면서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를 얻고자 한다. 이런 전통문화의 뒤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겠느냐? 사탄의 검은 마수가 조종하고 있지 않겠느냐? 사탄이 사악한 본성으로 휘어잡고 지배하고 있지 않겠느냐? 사탄이 이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전통문화 속에서 살면서 전통 명절을 지내는 것은 사탄에게 농락당하고 패괴되는 것이라고, 또한 그것은 스스로가 원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 모두가 이를 알고 인정하는구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0)

사탄은 어떻게 미신으로 사람을 패괴시키는가

사탄은 어떻게 미신으로 사람을 패괴시키느냐? 사람은 모두 앞으로의 운명을 알고 싶어한다. 사탄은 사람의 호기심을 이용하여 사람을 유혹한다. 사람이 점, 사주, 관상을 보는 것은 모두 미래의 운세와 앞으로 가게 될 길을 알기 위해서다. 그런데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미래와 운명은 결국 누구의 손에 의해 결정되더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하지만 사탄은 이런 방식으로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더냐? 사탄은 사주나 점을 보는 방식으로 사람의 향후 운세를 알고 있다면서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알고 관장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 기회를 틈타,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지배하여 미신을 받아들이고 따르게 하는 것이다. 네가 사주를 보러 갔다고 가정해 보자. 점쟁이가 눈을 감고 지난 몇십 년 동안의 일을 정확하게 맞춘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정말 용하네! 다른 사람한테 옛날 일을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참 대단해!’ 사탄이 너의 과거를 아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아니겠느냐! 하나님은 오늘날까지 너를 이끌어 왔고, 사탄 또한 오늘날까지 너를 쫓아다니며 패괴시켜 왔다. 몇십 년 동안 너에게 발생했던 일을 알기란 사탄에게는 식은 죽 먹기이다. 점쟁이가 한 말이 모두 정확하다고 느낄 때 너는 마음을 그에게 내주게 되지 않겠느냐? 너의 앞날과 운세를 모두 그가 결정하게끔 맡기지 않겠느냐? 너는 갑자기 그에 대한 숭배나 존경의 마음이 생길 것이다. 심지어는 혼이 쏙 나가서 곧바로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년에는 무엇을 피해야 하죠?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점쟁이는 가지 말아야 할 곳, 피해야 할 일, 입지 말아야 할 옷 색깔, 많이 가면 안 되는 장소, 많이 하면 좋은 일 등등을 늘어놓는다. 너는 그 말을 듣는 즉시 마음에 새기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빨리 마음에 새길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에 기대 요행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때 점쟁이가 너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겠느냐? 점쟁이의 말이 하나씩 들어맞으면 다시 그를 찾아가 다음 해의 운세를 보고 싶지 않겠느냐? (그럴 겁니다.) 점쟁이가 하라는 것, 하지 말라는 것을 그대로 따르면서 시키는 대로 다 하지 않겠느냐? 너는 아주 빨리 그 품으로 들어가고, 쉽사리 미혹되며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점쟁이가 한 말이 사실이고, 그가 네 전생, 금생, 미래를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탄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지배한다. 하지만 실제로 누가 사람을 주관하느냐? 사탄이 아닌 하나님이다. 사탄은 그저 이때를 틈타 무지하고 물질세계만 보는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의지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고는 사람을 사로잡아 자신의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따르게 한다. 그다음,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려고 하면 사탄이 손을 놓아주겠느냐? 사탄은 손을 놓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정말 사탄에게 사로잡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사탄의 이러한 행위를 뻔뻔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겠느냐? 사탄은 사기와 기만이란 수단을 동원한다. 사탄은 뻔뻔하기 그지없으며, 자신이 사람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무지한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만든다. 불과 두세 마디 말로 사람을 기만하고 속여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 사탄은 어떤 방법이나 말들로 네가 믿게 하겠느냐? 예를 들어, 네가 너희 집 식구가 몇 명이란 말을 하기 전에 점쟁이가 너희 집 식구가 몇 명이고, 네 부모와 자식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맞춘다고 가정해 보자. 네가 점쟁이를 믿지 못하고 의구심을 가질 때 이런 말을 들으면 믿음이 좀 생기지 않겠느냐? 곧이어 점쟁이가 “요즘 일이 잘 안 풀리는군요. 상사가 알아주기는커녕 툭하면 걸고넘어지니….”라고 하면 너는 그 말을 듣고 “맞아요. 요즘 일이 잘 안 풀리긴 하죠.”라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또 믿게 되지 않겠느냐? 그럼 점쟁이는 다시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으며 너를 미혹하고 그를 더욱더 믿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너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조금씩 그와 맞설 힘을 잃고 의심을 지우게 된다. 사탄은 하찮은 능력, 심지어 보잘것없는 수작으로도 너를 미혹한다. 또한, 네가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하게 만들어 자신의 말에 복종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고단수’의 수법이다. 네가 자신도 모르게 꼬임에 넘어가도록 유인하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먼저 일러 준다. 그런 다음,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것을 피해야 하는지 알려 준다. 그러다 보면 너는 자신도 모르게 속임수에 빠지게 되고, 속임수에 빠지는 순간 일은 복잡해진다. 너는 사탄의 말과 지시를 시시때때로 떠올리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에게 점령당할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사람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없으면 사탄의 유인과 유혹에 맞설 힘이 없다. 사탄의 사악함, 간사함, 음험함 앞에서 사람은 몹시도 무지하고 유약하며 연약하다. 그렇지 않으냐?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법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모두 자신도 모르게 사탄의 온갖 수법에 조금씩 유혹당하고 속아 넘어간다. 사람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분별할 능력과 분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탄을 이길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1)

사탄은 어떻게 사회 풍조로 사람을 패괴시키는가

사회 풍조는 언제부터 존재했느냐? 최근 들어 형성된 것이냐? 그것은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킨 순간부터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이 사회 풍조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느냐? (옷차림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자주 접하는 것이다. 옷차림, 패션, 의류 풍조는 사회 풍조의 작은 부분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소문도 포함되지 않겠느냐? 사람들이 동경하는 라이프 스타일도 포함되지 않겠느냐?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수, 스타, 잡지, 소설도 포함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보기에 어떤 분야의 풍조가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을 것 같으냐? 너희에게 가장 큰 유혹이라고 할 수 있는 풍조는 무엇이냐? “우리는 이제 나이가 들었습니다. 50~60대, 70~80대 사람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지요. 풍조는 우리에게 유혹적이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맞는 말이냐? 또 어떤 사람은 “20대 애들이나 연예인을 따라다니지, 우리는 그러지 않습니다. 유행하는 패션 아이템을 입지도 않고요. 그런 건 멋 내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지요.”라고 말한다. 그럼 무엇이 너희를 패괴시키느냐? (유행하는 말들입니다.) 그런 말들이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겠느냐? 내가 예를 들어 볼 테니 맞는지 보아라.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라는 말은 풍조에 포함되지 않느냐? 너희가 언급한 패션, 미식보다 더 강력하지 않으냐?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라는 말은 사탄의 철학으로, 인류에게서, 그리고 모든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주입되어 자리 잡고 있으므로 풍조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람도 실생활에서 이 말을 접했을 때 차츰 묵인하게 되고 이 말이 사실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과정 아니겠느냐? 이 말에 대한 이해도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거나 자신이 직접 겪은 일에 기반하여 각기 다른 정도로 해석하고 수긍한다. 그렇지 않으냐? 사람이 이 말을 얼마나 체험했는지는 차치하고, 이 말이 사람의 마음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은 무엇이겠느냐? 너희 모두를 포함해 이 세상의 인류에게서 드러나는 성품이 한 가지 있는데, 무엇이라고 보면 되겠느냐? 사람은 돈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이를 지우기가 쉽겠느냐? 쉽지 않다! 사탄이 사람을 참 심각하게도 패괴시킨 것 같다! 그럼 사탄이 이런 풍조를 통해 사람을 패괴시킨 것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느냐? 너희는 돈 없이는 이 세상에서 단 하루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사람은 돈을 많이 가질수록 높은 지위를 누리고 존귀해진다. 기를 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과 달리 부자는 높은 지위를 누리고 거만을 떨며 큰소리를 치면서 오만 방자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 말과 이런 풍조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겠느냐? 많은 사람이 돈을 위해 어떠한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지 않겠느냐?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 존엄성과 인격을 포기하지 않겠느냐? 더 나아가 수많은 사람이 돈 때문에 본분을 이행할 기회와 하나님을 따를 기회를 놓치지 않겠느냐? 이는 사람에게 손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탄은 이런 방식, 이런 말로 사람을 이 정도로 패괴시켰다. 사탄의 속셈이 음흉하지 않으냐? 이는 아주 악랄한 수법이 아니더냐? 이런 말이 유행할 때 처음에는 수긍하지 못하던 네가 이를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너라는 사람의 마음은 사탄에게 철저히 빼앗겼다. 그래서 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말대로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너는 이 말에 벌써 얼마나 영향을 받았더냐? 참도이고 진리임을 알면서도 추구할 힘이 없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뻔히 알면서도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으며, 진리를 얻기 위해 고난을 감내하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미래와 운명을 희생하더라도 하나님과 끝까지 맞선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어떻게 행해도, 너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알게 되어도, 너는 오로지 이 말만 고집하고 집착하며 자신을 바친다. 즉, 이 말이 네 행위와 사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이 말에 네 운명이 좌우될지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 이런 말 한마디에 좌지우지되어 끌려다니는 것은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생긴 결과가 아니겠느냐? 사탄의 철학과 패괴 성품이 네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것 아니겠느냐?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사탄이 목적을 달성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는 사탄이 사람을 이렇게 패괴시키는 것을 보았느냐? 느꼈느냐? (아닙니다.) 보지도 못했고 느끼지도 못했다. 그럼 이제 사탄의 사악함을 알겠느냐? 사탄은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패괴시킨다. 사람은 막으려고 해도 막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사탄의 사상, 관점, 사탄에게서 비롯된 사악한 것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후에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만 아니라 보물처럼 끌어안고 소중하게 여기면서 사탄의 지배를 받고 농락당한다. 이렇게 사람은 사탄에 의해 갈수록 패괴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2)

사탄은 위의 몇 가지 방법을 통해 사람을 패괴시킨다. 사람은 지식을 습득하고, 과학적 이론을 어느 정도 이해하며, 전통문화에 물든 채로 살아간다. 모든 사람은 전통문화의 계승자로, 사명감을 가지고 사탄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전통문화를 이어 간다. 또한, 사람은 사탄이 만든 사회 풍조에 발을 맞춘다. 사람은 이렇게 사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탄이 하는 모든 일에 항상 협조한다. 그리고 사탄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사악함, 간사함, 악독함, 교만함을 받아들인다. 사탄의 이러한 성품을 갖게 된 후 이 패괴된 인류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행복하겠느냐, 슬프겠느냐? (슬플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사람은 모두 패괴된 것들에 결박당하고 지배당하여 죄악 속에서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안경을 쓴, 유식해 보이는 사람을 예로 들어 보자. 그는 점잖게 말을 하고 입만 열면 청산유수이며 근거가 탄탄하다. 다양한 일을 두루 겪었기에 경험과 경력이 풍부하고,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그 경위를 설명할 수 있으며, 일의 이치와 진위도 판단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그의 행위, 외모, 인격, 인성, 됨됨이 무엇 하나 흠잡을 것이 없어 보인다. 이런 사람은 오늘날의 사회 풍조를 적극적으로 따르는 사람이며, 나이가 들었음에도 사회 풍조에 뒤처지지 않고 평생을 배우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렇게 외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사람의 내적 본질은 사탄에 의해 완전히 패괴되어 있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점잖으며, 유식하고, 윤리 의식과 인품을 갖추어 흠잡을 구석이 없어 보이고, 젊은 세대만큼 아는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의 본성과 본질은 사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완전히 살아 있는 사탄의 모델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켜 거둔 ‘성과’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너희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사실이다. 사람이 습득한 지식, 사람이 지닌 과학, 사람이 사회 풍조에 발맞추기 위해 선택한 방식, 이 모두가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수단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사람은 이렇듯 철저히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이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사람의 행위 역시 비정상적인 데가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정상적으로 일하고, 생활하고, 책을 읽고, 신문을 보고, 공부하며, 말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윤리 도덕을 좀 배워 말을 잘하고, 이해심이 많고, 친절하고, 타인을 돕는다. 또 은혜를 베풀고, 계산적으로 굴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덕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탄에 의해 패괴된 성품은 내면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그 본질은 외적인 노력으로 바꿀 수 없다. 사람은 이런 본질을 지녔기에 무엇이 하나님의 거룩함인지 알지 못한다. 설령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을 공개한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사탄이 이미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의 마음과 생각, 관점과 사상을 완전히 점령했기 때문이다. 이 점령과 패괴는 일시적이거나 이따금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3~4년, 5~6년 믿고도 사탄이 주입한 사악한 사상과 관점, 논리와 철학을 여전히 보물인 양 끌어안고 내려놓지 못한다. 사람이 사탄 본성에서 비롯된 사악하고, 교만하고, 악독한 것들을 받아들였기에 사람들 사이에 언쟁과 싸움이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고, 서로 마음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사탄의 교만한 본성이 초래한 것이다. 사탄이 사람에게 긍정적인 것을 가져다주었다면, 예를 들어 사람이 유교와 도교와 같은 전통문화를 수용했을 때, 그런 것들이 좋은 것이라면 이를 받아들인 사람들끼리 마음이 잘 통해야 한다. 그런데 왜 사람은 똑같은 것을 받아들이고도 더 심하게 분열하겠느냐?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이러한 것들은 사탄에게서 비롯되었고, 사탄은 분열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사탄에게 속한 것이 겉으로 그럴싸하고 위대해 보여도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 그리고 살아 내게 한 것은 다 교만하고 간사하고 사악한 본성이다. 그렇지 않으냐? 아무리 위장에 능하고, 지식이 풍부하고, 가정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라도 사탄에 의해 패괴된 성품을 감출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몹시 그럴싸해 보이는 사람, 네 생각에 성인(聖人) 같은 사람이나 완벽해 보이는 사람, 천사 같은 사람이라도, 네가 그를 아무리 깨끗하게 생각할지라도 그들의 삶 이면에서, 그들의 성품에서 드러나는 본질을 보면 다 무엇이더냐? 완전히 사탄의 사악한 본성으로 가득하다고 할 수 있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주변에서 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던 사람이나 우러러보았던 우상을 예로 들어 보자. 현재의 네 분량으로 보면 그를 어떻게 평가하겠느냐? 우선 너는 그에게 인성이 있는지, 정직하고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언행이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도움이 되느냐? (아닙니다.) 그가 드러낸, 소위 말하는 선량함, 사랑, 훌륭함은 무엇이냐? 모두 위선과 허상일 뿐이다. 그러한 허상 뒤에는 자신을 우상으로 떠받들게 하려는 은밀하고 사악한 목적이 숨어 있다. 이제 확실히 간파했느냐? (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3)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이런 방법들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이냐? 거기에 긍정적인 것이 있겠느냐? 우선, 사람이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 이 세상의 유명인, 위인이나 잡지, 간행물의 선악, 시비 분별 기준이 정확하겠느냐?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겠느냐? 진리가 담겨 있겠느냐? 이 세상과 인류가 진리의 기준에 따라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가늠하고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 사람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겠느냐? 그렇게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과학을 이해하게 됐으면 능력도 대단하지 않겠느냐? 어찌하여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도 분별하지 못하겠느냐? 무엇 때문이겠느냐? (사람에게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지식은 모두 진리가 아닙니다.) 사탄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은 사악함과 패괴일 뿐, 진리, 생명, 길이 없다. 사탄은 사람에게 이런 사악함과 패괴를 가져다주었는데, 사탄에게 사랑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이 인류에게 사랑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이나 노숙자를 돕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리고 자선 단체들도 선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선행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어떠냐? 사탄은 온갖 방법과 학설로 사람을 패괴시킨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킨다는 것이 모호한 개념이냐? 모호하지 않다. 사탄도 이 세상과 사회에서 어떠한 관점, 학설을 제창하며 실제적인 일들을 하고, 각 연대, 각 시기마다 학설을 제창하며 사람에게 사상을 주입한다. 이런 사상과 학설은 사람의 마음에 차츰 뿌리를 내리고, 그러면 사람은 그런 학설과 사상들에 의존해 살게 된다. 사람이 그런 것들에 의존해 살아가면 사탄으로 변하지 않겠느냐? 사탄과 하나가 되지 않겠느냐? 사람이 사탄과 하나가 되면 결국 하나님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게 되겠느냐? 사탄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일치하지 않겠느냐? 이를 인정하기는 두려운가 보구나. 그렇지 않으냐? 더없이 무서운 일이다! 어째서 사탄의 본성을 사악하다고 하겠느냐? 사탄이 저지른 일과 드러낸 것에 따라 그것을 규정하고 해부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사악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저 말로만 사탄이 사악하다고 한다면 너희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아도 사탄은 사악한 존재입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탄이 어떤 면에서 사악하냐?”라고 물으면 너는 “하나님을 대적하니 사악하지요.”라며 얼버무릴 것이다. 지금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니 사탄의 사악한 본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이해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사탄의 사악한 본성을 정확히 간파하면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 너희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말해 보아라.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에 대해 교통할 때, 사탄의 사악한 본질을 얘기할 필요가 있느냐? (그렇습니다.) 왜 그러하냐? (사탄의 사악함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부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냐? 그 말도 반은 맞다. 즉, 사탄의 사악함 없이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알 수 없다는 말은 옳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함은 사탄의 사악함으로 부각되어 드러난다고 한다면, 이 말이 옳겠느냐? 이렇게 변증하듯 하는 말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하나님 고유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함으로써 무엇이 발현되었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이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로, 줄곧 존재해 온 것이고, 하나님이 본래부터,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다. 다만 사람이 보지 못했을 뿐이다. 사람은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살며,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거룩함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의 거룩함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포함하는지 더더욱 알지 못한다. 그러니 먼저 사탄의 사악한 본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왜 항상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법과 사탄의 사악한 본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라며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그런 의문이 해소되었느냐? 사람이 사탄의 사악함을 분별하고, 이를 정확히 정의하여 사악함의 구체적인 내용과 태도, 근원과 본질을 모두 똑똑히 본 후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논해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이고, 이것이야말로 거룩함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거나 인식할 수 있다. 내가 사탄의 사악함을 언급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들은 사회 안에서나 인류 가운데서 사람이 행한 일, 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들 중에도 거룩함과 연관된 것이 있다고 착각한다. 이는 잘못된 관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4)

사탄은 지식을 미끼로 쓴다. 잘 듣거라. 지식은 다만 미끼일 뿐이다. 사람이 열심히 공부하며 매일 정진하도록 유도하고, 사람이 지식을 무기 삼아 자신을 무장하게 한 후 지식으로 과학의 문을 열게 한다. 그러면서 네가 지식을 많이 익힐수록 아는 것이 많아진다고 말한다. 이건 모두 사탄이 알려 주는 것들이다. 또한 사탄은 지식을 습득하고 원대한 이상(理想)과 포부를 가져야 한다고 속삭인다.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사탄은 이런 메시지들을 수도 없이 전달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사탄의 메시지가 옳고 유익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사탄이 정해 놓은 길을 가고, 이상과 포부에 끌려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사람은 사탄이 주는 지식을 통해 자기도 모르게 위인과 유명인의 사상을 배우고, 사람이 보기에 영웅인 인물의 행적을 본받게 된다. 사탄은 ‘영웅’들의 행적을 통해 사람에게 무엇을 권장하느냐? 어떤 것을 주입하고자 하느냐?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의 지조와 영웅적 기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입한다. 사람은 역사 이야기나 영웅 전기를 통해 무엇을 배우게 되느냐? 의리가 있어야 하고 친구나 의형제를 위해서는 위험도 무릅써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사람은 사탄의 지식으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부정적인 것을 많이 배우게 되고, 어느새 사람의 어린 마음에는 사탄이 미리 준비해 놓은 씨앗들이 심어진다. 그런 씨앗으로 인해 사람은 위인, 유명인, 영웅, 애국자, 가정적인 사람, 친구를 위해 위험도 무릅쓰는 의리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사탄의 꼬임에 넘어간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사탄이 준비해 놓은 길을 가게 된다. 사람이 그 길을 가는 동안 사탄은 자신의 생존 법칙을 강제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럼 사람에겐 부지불식간에 자신만의 생존 법칙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탄이 강제로 주입한 사탄의 생존 법칙이다. 사탄은 사람이 공부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생존 목표, 생존 법칙, 생존의 방향을 정하게 하며, 사탄에게 속한 것들을 주입한다. 이야기나 전기 등 각종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을 조금씩 함정에 빠지게 만든다. 이렇게 학습해 나가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문학을, 어떤 사람은 경제를 좋아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천문 지리, 또 어떤 사람은 정치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물리나 화학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며, 신학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지식의 일부로, 모든 사람이 알고 있고 또한 누구나 다 접해 봤던 것들이다. 그리고 누구나 이러한 지식들 중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다. 지식이 얼마나 사람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지, 이런 지식들이 사람 마음속에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사람이 특정 지식 분야에 흥미를 가지거나 깊이 빠지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꿈을 품게 된다. 작가나 문학가를 꿈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관리나 정치인을 목표로 하는 사람도 있고, 비즈니스를 하는 사업가가 꿈인 사람도 있다. 또 영웅이나 위인, 유명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인물이 되길 꿈꾸든, 사람의 목표는 모두 배움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자신의 소망을 이루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이 지속적으로 원대한 이상과 포부를 가지는 목적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든가, 이번 생을 헛되이 살지 않기 위해서라든가, 큰 업적을 세우고 싶어서라든가 등의 말로 미화될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너희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사탄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탄이 이런 것을 사람에게 주입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너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잘 알아야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6>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5)

사람이 지식을 습득해 나가는 과정에서 사탄은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단순한 특정 지식을 활용하기도 하고,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거나 꿈을 이루게 만들기도 한다. 사탄은 대체 너를 어떤 길로 끌고 가려고 이러는 걸까? 사람은 지식 학습이 비난할 만한 일이 아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좋게 말해서, 원대한 이상과 포부를 가진다는 것은 패기가 있다는 뜻이고, 그것이 삶의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크게 성공하는 게 더 멋진 삶 아닌가? 가문을 빛내고 이름을 후세에 떨칠 수 있으니 좋은 일이지 않은가?’라고 생각한다. 세상 사람이 보기에 이는 좋은 일이고, 정당한 일이고, 긍정적인 일이다. 그러나 음흉한 속셈을 가지고 있는 사탄이 사람을 그러한 길로 유도하는 것으로 그칠까? 당연히 아니다. 사실, 얼마나 원대한 이상을 품고 있든, 얼마나 현실적이고 정당한 바람을 가지고 있든, 사람이 실현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 두 단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두 단어는 모든 사람의 삶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하려고 하는 것이다. 대체 무엇일까? 바로 ‘명예’와 ‘이익’이다. 사탄은 공격적인 방법 대신 부드럽고 사람의 사고방식에 맞고 온건한 방법을 써서 사람이 부지불식간에 사탄의 생존 방법과 생존 법칙을 받아들이도록 하고,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세우게 한다. 또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인생의 꿈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인생의 꿈이란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해도 결국에는 ‘명예’와 ‘이익’으로 귀결된다. 어떤 위인이나 유명인이든, 모든 사람이 평생 동안 좇는 것은 ‘명예’와 ‘이익’ 두 가지뿐이다. 사람은 명예와 이익만 있으면 부귀영화를 누리고 인생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명예와 이익만 있으면 유흥과 육적인 향락을 거리낌 없이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명예와 이익을 거머쥐기 위해 기꺼이,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 심지어 자신의 모든 것, 미래와 운명마저 사탄에게 확실하게 넘겨 버린다. 그러고는 이에 대해 전혀 의구심을 갖지 않고, 자신에게 속한 것을 되찾을 줄도 모른다. 사람이 사탄을 이렇게 의지하고 사탄에게 충성하게 된 이상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겠느냐? 틀림없이 불가능할 것이다. 사탄에게 완전히 지배당하고, 그 늪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사람이 명예와 이익에 사로잡히면 광명도, 정의도, 아름다움과 선함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게 된다. 사람에게 명예와 이익의 유혹이 너무나 강할 뿐만 아니라, 이것들은 사람이 평생 동안, 심지어 영원히 좇아도 끝이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으냐? 혹자는 “지식을 배우는 것은 시대나 세상에 뒤처져 도태되지 않기 위해 책을 읽고 모르는 것을 공부하는 것일 뿐이에요. 배움이란 자신의 직업, 미래, 생계를 위한 것일 뿐이죠.”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의식주나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0년 동안 힘들게 공부할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과 고된 시간을 견디는 것일까? 바로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다. 명예와 이익이 눈앞에서 손짓하며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 노력하고 고생하고 싸워야 명예와 이익을 향해 나아갈 수 있고, 이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평탄한 길을 가고,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그 정도 고생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사람이 지식을 습득하면서 깨닫게 되는,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생존 법칙이 아니겠느냐?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인생의 ‘원대한 이상’이 아니겠느냐? 위인의 사상, 유명인의 품격, 영웅의 기개, 무협 소설에 등장하는 협객이나 검객이 가진 강직함과 부드러움을 예로 들 수 있지 않겠느냐? (네.) 이러한 생각이 한 세대 또 한 세대에 영향을 미치고, 한 세대 또 한 세대 이를 받아들이게 만들어,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며 이를 끊임없이 좇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식으로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법과 수단이다. 사탄에게 끌려 이러한 길을 가게 된 후에도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을까?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지식과 사상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있느냐? 진리에 속하는 것이 있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너희가 확실히 대답을 못 하는 것 같은데, 걱정할 필요 없다. ‘명예’와 ‘이익’은 사탄이 사람을 사악한 길로 유도하기 위해 사용하는 두 가지 주요 개념이라는 것만 알면 된다.

다시 복습해 보자. 사탄은 무엇으로 사람을 단단히 옭아매느냐? (명예와 이익입니다.) 사탄은 명예와 이익을 가지고 사람의 생각을 지배한다. 사람이 명예와 이익에만 사로잡혀 이를 위해 분투하고, 고생하고, 치욕을 참고, 명예와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이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게 만든다. 이렇게 사탄은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족쇄를 채워 놓았다. 족쇄가 채워진 사람은 족쇄에서 벗어날 능력이나 용기가 없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족쇄를 차고 힘겹게 한 걸음씩 나아간다. 인류는 ‘명예’와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멀리하고 배신하며, 갈수록 사악해지고 있다. 이렇게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사람이 사탄의 명예와 이익에 넘어가 파멸한다. 지금 보니 사탄의 이런 음흉한 속셈이 가증스럽지 않으냐? 오늘은 너희가 아직 사탄의 음흉한 속내를 간파하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명예와 이익이 없으면 삶이 끝난다고 생각할 것이고, 명예와 이익이 없으면 앞으로 방향과 목표를 찾을 수 없고 칠흑같이 어두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명예와 이익이 얼마나 큰 사탄의 족쇄인지 서서히 깨닫게 될 것이다. 너희가 이를 깨닫고 나면, 사탄의 통제와 사탄이 묶어 놓은 족쇄에 철저하게 맞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가 사탄이 주입한 것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사탄과 완전히 결별하고 사탄이 준 모든 것을 진심으로 증오하게 될 것이다. 그때야 사람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사모하게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6>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6)

사탄은 과학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의 호기심,  과학이나 비밀을 향한 탐구욕을 충족시킨다.  또한 과학이란 이름으로 사람의 물질적인 욕구, 갈수록 높아지는 삶의 질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킨다. 이런 것들을 명목으로 삼아 사탄은 과학을 내세워 사람을 패괴시킨다. 사탄이 과학을 통해 패괴시키는 것이 비단 사람의 생각과 머리뿐일까? 우리가 보았거나 접했던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을 생각해 보자. 사탄이 과학으로 또 무엇을 패괴시켰느냐? (자연환경입니다.) 그렇다. 너희도 큰 피해를 입어서 그런지 잘 알고 있구나. 사탄은 각종 과학 정설과 과학적 결론으로 사람을 미혹시킬 뿐만 아니라 과학적 수단을 이용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생존 환경을 함부로 개발하고 파괴한다. 과학을 연구하면 생존 환경이 점점 개선될 것이고 생활 수준이 지속적으로 향상될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물질적 수요와 삶의 질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둘러대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과학을 발전시키면서 내세우는 이론적 근거이다. 그런데 과학이 인류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느냐?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인류가 마시는 공기가 오염되지 않았느냐? 우리가 마시는 물은 진짜로 깨끗할까? (아닙니다.) 그럼 우리가 먹는 음식은 천연 식품이냐? 대부분이 화학비료나 유전자 변형으로 재배되거나 여러 가지 과학적인 변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먹는 야채, 과일조차 천연 식품이 아니다. 요즘에는 온전한 천연 상태의 계란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사탄이 말하는 소위 과학적인 가공 과정을 거치면서 계란 본연의 맛이 다 사라졌다. 더 넓게 보면 공기가 망가지고 오염되었으며, 산천, 호수, 삼림, 강, 바다, 땅, 지하 모두 소위 과학적 성과에 의해 파괴되었다. 즉, 하나님이 인류에게 준 생태계와 생존 환경 전체가 소위 말하는 과학에 의해 훼손되고 못 쓰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질이 기대만큼 향상되었고 사람의 욕망과 육은 충족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사람이 생존해야 할 환경은 여러 과학적 ‘성과’에 의해 처참히 파괴되고 훼손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깨끗한 공기 한 모금 마실 권리조차 잃어버렸다. 이것이 인류의 비애가 아니겠느냐? 이런 환경에서 사는 사람이 과연 행복을 논할 수 있을까? 사람이 살고 있는 이 공간, 즉 이 생존 환경은 본디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창조한 것이었다. 사람이 마시는 물, 공기, 사람이 먹는 식재료, 식물, 나무 그리고 바다까지, 이러한 생존 환경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자연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자연 그대로의 환경이다. 과학이 없었다면, 사람은 하나님 방식대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주어 누릴 수 있게 된 것들로 본디 행복할 수 있었고, 모든 것을 태초의 상태 그대로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사탄에 의해 파괴되고 훼손되었다. 사람의 기본적인 생활 환경은 이미 태초의 상태가 아니다. 하지만 무엇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인지,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갈수록 많은 사람이 사탄이 주입한 생각을 바탕으로 과학을 이해하고 다룬다. 참으로 가증스럽기도 하고 또 불쌍하기도 하지 않으냐? 지금 사탄이 사람의 생존 공간과 환경을 이 모양으로 망쳐 놓았다. 인류가 이런 식으로 계속 나아간다면 하나님이 지구상의 인류를 친히 멸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런 식으로 계속 나아간다면 인류는 어디로 가게 되겠느냐? (멸망입니다.) 어떻게 멸망하느냐? 사람은 탐욕스럽게 명예와 이익을 좇을 뿐만 아니라 과학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깊이 연구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물질적인 필요와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다. 그런데 어떤 결과가 나타났느냐? 먼저 생태계가 균형을 잃었다. 그리고 인류의 오장육부는 모두 이런 환경 속에서 오염되고 망가졌으며, 각종 전염병과 유행병이 도처에 창궐하여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는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인류가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계속 사탄을 좇아가며 지식으로 자신을 채우고, 과학을 이용해 인생의 미래를 탐색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자연히 어떤 결과를 맞게 될지 알 수 있느냐? (멸망입니다.) 바로 멸망이다. 한 걸음씩 멸망을 향해 걸어간다. 한 걸음씩 멸망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지금 보면, 과학은 사탄이 사람의 혼을 빼놓기 위해 조제한 약과 같아서 너희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사리를 분별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사탄은 또 과학이란 이름으로 너의 흥미를 유발하고 너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빠지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6>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7)

세 번째 방법은 사탄이 전통문화를 이용하여 사람을 패괴시키는 것이다.  전통문화와 미신은 비슷한 점이 많다. 다만 전통문화는 이야기, 유례, 출처가 있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사탄은 수많은 이야기를 날조하여 사람들에게 퍼뜨리고 역사책에 실어 전통문화나 미신과 관련된 인물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킨다. 예를 들면 여덟 신선이 바다를 건넌 이야기, 당나라 승려가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하는 이야기, 옥황상제 이야기, 정의로운 소년 나타와 악을 저지르는 동해 용왕 사이의 대결을 다룬 이야기, 봉신연의 등등, 이런 이야기들은 중국에서 사람들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지 않으냐? 구체적인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 알고 있다. 대략적인 내용일지라도 마음과 머리에 아로새겨져 잊히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사탄이 미리부터 마련해 둔 것이다. 사탄이 시대별로 퍼뜨리는 각종 사상이나 전설 이야기는 사람의 영혼을 직접적으로 갉아먹고 망가뜨리고, 사람들을 각종 마법과 저주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즉, 네가 그러한 전통문화와 이야기, 미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음과 머릿속에 새기는 순간, 마치 마법과 저주에 걸린 것 같다. 즉, 그런 문화와 사상, 전통적인 이야기에 사로잡혀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너의 삶과 인생관에 영향을 미치고, 사물에 대한 판단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삶의 길을 찾는 데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것이 바로 네가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고 떨쳐 내려고 해도 떨쳐 낼 수 없는 마법과 저주이다. 게다가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마법과 저주에 걸리면 무의식적으로 사탄을 경배하게 되고, 마음속에 사탄의 형상이 자리 잡게 된다. 즉, 사탄을 자신의 우상 또는 자신이 숭배하고 존경하는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부지불식간에 이런 것들이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사람의 언행을 지배하게 된다. 너는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나 전설이 가짜라고 생각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런 이야기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고, 이야기 속의 인물이나 대상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여기게 되면서 무의식적으로 그런 사상과 그것들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무의식적으로 마귀와 사탄, 우상을 자신의 집으로 끌어들이고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마법과 저주이다. 공감하느냐? (네.) 너희 중 향을 피우면서 부처를 숭배했던 사람이 있느냐? (네.) 어떤 목적으로 향을 피우고 부처를 숭배했느냐? (안녕을 빌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탄에게 안녕을 빈 것이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느냐? 안녕은 사탄이 가져다주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때 참 어리석지 않았느냐? 참으로 황당하고 어리석고 유치한 행동이었다. 그렇지? 사탄은 어떻게 너를 패괴시킬지에 대해 열중하지 안녕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일시적인 평온함을 느끼게 해줄 뿐이다. 하지만 너는 그래도 서원을 해야 한다. 네가 만약 약속을 어기거나, 서원을 저버리면 사탄이 너를 어떻게 괴롭히는지 보게 될 것이다. 사탄은 서원을 하게 해서 너를 지배하려 한다. 너희는 안녕을 빌어서 안녕을 얻었느냐? (아닙니다.) 안녕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입었고, 게다가 불행이 끊이지 않는다. 정말 끝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다! 사탄의 권세하에 안녕이란 없다. 이것은 진실이다. 이것이 바로 봉건적 미신과 전통문화가 인류에게 초래한 결과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6>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8)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마지막 방법은 사회 풍조를 이용하는 것이다.  사회 풍조는 많은 것을 포함한다. “패션, 뷰티, 헤어, 미식을 가리키는 건가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것에 관한 것이냐? 그것도 풍조의 일부이긴 하지만 그런 것은 말하지 않겠다. 우리는 사회 풍조가 사람의 생각, 처세 방식, 생존 목표와 인생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이다. 이는 사람의 생각을 좌우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풍조에는 사악한 기운이 들어 있다. 사람은 사악한 기운에 물들어 계속해서 타락하고, 양심, 인성, 이성을 상실하고 있으며, 도덕성, 인격과 품격도 갈수록 곤두박질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대다수의 사람은 인격과 인성, 양심, 그리고 이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풍조는 과연 어떤 것일까? 풍조는 눈으로 볼 수 없다. 풍조라는 바람이 불 때 앞장서서 그런 일, 그런 사상과 관점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풍조에 물들고, 동화되고, 매료된다. 그러면서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그런 풍조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매몰되거나 지배받기도 한다. 끊임없이 변하는 풍조 속에서 원래 심신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 진리가 무엇인지 애당초 모르는 사람,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전혀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그런 풍조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사탄의 생존관과 가치관, 사탄이 사람에게 알려 준 삶을 대하는 방법, 사탄이 사람에게 ‘선사’한 생존법을 받아들이게 된다. 사람은 거부할 힘이나 능력이 없거니와 거부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면 이런 풍조들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내가 간단한 예를 들면 너희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장사를 할 때 고객이 누구이든 상도를 지켰고, 물건 가격을 제멋대로 부르는 일이 없었다. 조금이나마 양심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이 있지 않으냐? 신조를 지키며 장사를 했다는 것은 당시 사람에게 일말의 양심과 인성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사람은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갈수록 돈, 이익, 안락함에 큰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 사람은 돈을 더 중시하게 되지 않겠느냐? 돈을 더 중시하면 자신도 모르게 명예, 명성, 신용, 인격을 간과하게 되지 않겠느냐? 네가 장사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다른 사람이 온갖 사기 수법으로 돈방석에 앉은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지만 갈수록 많은 돈을 쓸어 담는다. 똑같이 장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가족이 더 많은 부를 누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배가 아프다. 그럼 너는 ‘나는 왜 저런 능력이 없지? 나는 왜 저 사람만큼 벌지 못하지? 나도 어떻게든 장사를 잘해서 돈을 더 많이 벌어야겠어.’라고 하면서 돈 벌 방법을 궁리한다. 평소에 하던 대로 고객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않고 정직하게 장사를 한다면 양심적으로 돈을 벌 수는 있어도 벼락부자가 되지는 못한다. 너는 이익에 눈이 멀면서 조금씩 생각이 변하게 된다. 생각이 변하는 과정에서 일의 원칙도 변하기 시작한다. 처음 남을 속일 때는 ‘이번만 남을 속이고 다시는 사기를 치지 않을 거야. 사기를 쳐서는 안 돼. 천벌을 받고 후환이 생기니까!’라고 생각하며 조금 망설인다. 처음 사기를 칠 때는 양심의 작용으로 망설여지고 마음이 찔리기 때문에 행동이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사기 치는 데에 성공하고 평소보다 많은 돈을 손에 넣으면 그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지만 자신이 거둔 성공에 기뻐하며 자축한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행동, 자신이 저지른 사기 행각을 합리화하게 된다. 사람이 도박에 물들면 도박꾼으로 전락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기를 치는’ 것에 물들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사기 행각을 합리화하고 받아들이게 되며, 사기를 일종의 정당한 비즈니스 행위 또는 자신이 생존하고 생활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간주한다. 그렇게 해야 빨리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사기 행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런 행위와 방법을 경멸했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직접 사기를 시도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런 행각을 벌이는 과정에서 마음이 점차 변하게 된다. 어떻게 변할까? 그러한 풍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로 사회 풍조가 주입하는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장사할 때 사기를 치지 않으면 뭔가 손해를 봤거나 뭔가를 잃었다고 느끼게 된다. 부지불식간에 ‘사기를 치는’ 것이 너의 영혼으로 자리 잡고, 너의 중심이 되며, 생존을 위해 꼭 해야 할 행위로 변질된 것이다. 사람이 그러한 행위와 생각을 받아들일 때면 마음이 변하지 않겠느냐? 마음이 변한다. 그럼 너의 인격은 어떨까? 인성은 어떠하겠느냐? 너의 양심은 또 어떻겠느냐? (변합니다.) 마음과 생각이 변하고, 심지어 안팎으로 질적인 변화가 생긴다. 그러한 변화로 인해 너는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갈수록 사탄과 마음으로 가까워지고 사탄을 닮아 가는 것이다.

이제 보니 이런 사회 풍조가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느냐? 사람에게 큰 해악을 초래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크나큰 해악을 초래한다! 사탄은 그런 여러 가지 사회 풍조를 이용하여 사람의 무엇을 패괴시키느냐? (양심, 이성, 인성, 도덕성, 생존에 대한 관점입니다.) 사람을 조금씩 타락시키지 않느냐? 사탄은 이런 사회 풍조를 이용하여 사람을 악마의 소굴로 조금씩 유인한다. 사회 풍조의 영향으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돈, 물욕, 사악함, 폭력을 숭상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마음에 자리 잡는 순간 사람은 어떻게 변하느냐? 사탄 마귀로 변한다! 사람에게는 어떤 것을 지향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냐? 사람이 무엇을 숭배하느냐? 사악함과 폭력을 좋아하게 되는 반면 아름다움과 선함을 싫어하고, 평화는 더욱 싫어하게 된다. 그리고 정상 인성을 가지고 평범한 삶을 살기보다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육적인 향락을 즐기고 자신의 육을 최대한 만족시키고 싶어 하며, 그 어떤 제약이나 속박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한다. 사람이 이런 풍조에 빠지게 되면 그동안 습득했던 지식이 풍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느냐? 네가 잘 알고 있는 전통문화와 미신이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느냐? 전통적 윤리 도덕과 예의가 사람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느냐? 예를 들어 ≪삼자경≫이 그런 풍조에서 발을 빼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느냐? (아니요, 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람은 갈수록 사악해지고 교만해지며, 안하무인이 된다. 갈수록 이기적이고 악랄해진다. 사람 사이의 정이 사라지고, 가족 간의 사랑이 없어지며, 친척과 친구에 대한 이해심이 사라지고, 사람 사이엔 폭력이 난무하게 된다. 모든 사람은 폭력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며, 폭력적인 방법으로 밥그릇을 차지하고,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고, 이익을 도모하고자 한다. 또한 폭력적이고 사악한 방법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한다 이 인류가 무시무시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내가 방금 한 말을 들어 보니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환경 속에서, 세상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섭지 않으냐? (무섭습니다.) 너희는 자신이 불쌍하다고 느껴 본 적이 없느냐? 지금은 조금 그렇게 느껴진다. 그렇지? (네.) 너희들의 말투를 들어 보니 ‘사탄이 갖은 방법으로 사람을 패괴시키고 틈만 찾으면 파고드는데, 과연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구나.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 사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느냐? (아니요, 할 수 없습니다.) 옥황상제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느냐? 공자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느냐? 관음보살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느냐? (불가능합니다.) 누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느냐?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의문이 생길 것이다. ‘미쳐 날뛰면서 해를 가하는 사탄으로 인해 우리는 삶에 대한 희망과 자신감을 잃었고 패괴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으니, 지금 우리 마음은 너무나도 무거워. 그런데 사탄이 우리를 패괴시키는 동안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던 거야?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 우리는 느껴 본 적이 없어!’ 어떤 사람들은 실의에 빠지기도 하고,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너희는 꽤 강렬히 이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말해 주는 내용을 깨달을수록 너희는 더욱 자신이 구원받을 가망이 없고,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너희는 조급해하지 마라. 우리가 오늘 이야기를 나눈 ‘사탄의 사악함’은 진짜 주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관련된 본질을 이야기하려면 어쩔 수 없이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법과 사탄의 사악함을 얘기해야 했을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사람이 현재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확실히 알게 해야 했을 뿐이다. 이런 내용을 다룬 목적은 사탄의 사악함을 알게 하고, 무엇이 진정한 거룩함인지 더 깊이 이해시키고자 함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6>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9)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고 있을 때, 사람을 닥치는 대로 해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자신이 택한 사람을 내버려 두거나 못 본 척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사탄이 하는 모든 일을 분명하고 똑똑히 알고 있었다. 사탄이 어떤 일을 하거나 풍조를 만들 때마다, 하나님은 사탄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조용히, 소리 없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해 나갔다. 하나님은 누군가에게 사역을 할 때나 누군가를 택할 때,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하고자 하는 일을 할 뿐이다. 그 누구에게도, 사탄에게도 선포하지 않고, 요란하게 움직이지도 않는다. 우선 하나님은 네가 태어날 가정을 정해 주었다. 너의 가정 환경, 부모, 조상은 하나님이 일찍부터 정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일을 즉흥적으로 결정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했다고 하는 것이다. 네가 태어날 가정을 정한 다음에는 네가 태어날 날짜도 정했다. 이어서 네가 울며 태어나는 모습, 네가 옹알옹알 말을 배우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는 모습까지 하나님은 다 지켜보았다. 한 걸음씩, 너는 달릴 수 있게 되었고, 뛸 수 있게 되었으며, 말을 할 수 있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사탄은 성장 과정에 있는 모든 사람을 호시탐탐 노린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는 일은 사람이나 일, 사물, 공간, 시간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는다. 그는 해야 할 일, 하고자 하는 일을 행할 뿐이다. 너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좌절, 질병, 우여곡절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곁에서 너를 보호하고 돌보아 주었다. 그렇게 이 길을 걷는 너의 생명과 미래를 엄격하게 지켜 주었으며, 너의 삶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어느새 너는 장성하여 새로운 사물을 접하게 되고, 이 세상과 이 인류를 알아 가기 시작한다. 모든 일이 새롭게 느껴진다. 너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길 좋아하며, 자신의 인성으로 자신만의 공간에서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너는 하나님의 존재를 조금도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조금씩 성장하고, 한 걸음씩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심지어 지식을 습득하고 과학을 공부할 때에도 하나님은 너에게서 한 걸음도 멀어진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너도 세상을 알아 가고 접하는 과정에서 꿈을 키운다. 자신의 취미, 자신의 관심사를 가지게 되고,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늘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며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려 본다. 그 과정이 어떠했든지 하나님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눈에 담고 있다. 어쩌면 너는 자신의 과거를 잊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너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너는 하나님이 지켜보는 앞에서 살아가고, 자라고,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그 기간 하나님은 가장 중요한 일을 행한다. 이는 아무도 느끼지 못했던 일이고, 아무도 모르는 일이며, 하나님이 한 번도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렇다면 이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하는 이 일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일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이 일은 사람과 하나님 모두에게 굉장히 중요하다. 이 일이 무엇인지 너희는 아느냐? 너희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아무 개념도 없어 보이는구나. 그럼 내가 알려 주겠다. 네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사는 동안 하나님은 너에게 수많은 일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일을 했는지 일일이 알리지 않고, 네가 알게 하지도 않으며, 너에게 말한 적도 없다. 하지만 그 일들이 어떤 것이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일들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하나님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 한 가지가 다른 일들보다 훨씬 중요하다. 바로 사람이 태어나서 현재에 이를 때까지 그 사람의 안전을 보장해 준 것이다. 이 말이 너희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아 “안전이 그렇게 중요합니까?”라고 물을 수도 있다. ‘안전’은 문자적으로 보면 무엇을 말하느냐? 아마 너희는 평안함, 재앙도 화도 없는 것, 멀쩡하게 사는 것, 정상적인 삶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하나님의 그 일은 도대체 무엇을 말할까? ‘안전’이 하나님 편에서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정말 너희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뜻일까? 아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일까? 여기서 말하는 ‘안전’이란 사탄에게 먹히지 않도록 지켜 준다는 의미이다. 중요한 일이지 않으냐? 사탄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것은 너의 안전과 관련된 일이지 않으냐? 신변의 안전과 관련된 일이니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사탄에게 먹히는 순간, 너의 영혼과 육체는 더 이상 하나님께 속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은 더 이상 너를 구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영혼, 그런 사람을 포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네가 사탄에게 먹히지 않도록 너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중요한 일이지 않으냐? 그런데도 너희는 왜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느냐? 아무래도 너희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느끼지 못했나 보구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6>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0)

하나님은 사람이 사탄에게 먹히지 않도록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 외에도 많은 사역을 하였다. 즉, 한 사람을 택하고 구원하기 위해 많은 예비 사역을 한 것이다. 우선, 하나님은 너라는 사람이 어떤 성격을 소유할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지, 부모는 누구일지, 형제는 몇 명일지, 그 가정 상황과 경제적 여건은 어떠할지, 가정 환경이 어떠할지 등을 다 정성스럽게 마련해 놓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택할 사람들 대부분이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는지 알고 있느냐? 대단한 지위를 가진 집안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겠느냐?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매우 드물다. 그럼 억만장자, 천만장자의 집안처럼 특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겠느냐? 거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대부분의 사람이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도록 하겠느냐? (평범한 가정입니다.) 평범한 가정이란 어떤 가정을 말하느냐? 근로자 가정이 있다. 근로자는 급여로 생활하며, 의식주는 해결할 수 있지만 여유로운 생활을 하지는 못한다. 농민 가정도 있다. 농민은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며,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어 배를 곯거나 추위에 떨지는 않는다. 자그마한 장사를 하는 가정도 있다. 부모가 지식인인 가정도 평범한 가정에 속한다. 부모가 기껏해야 회사원이거나 낮은 직급의 공무원인 가정도 상류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이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는데, 이는 다 하나님이 안배한 것이다. 다시 말해, 네가 살아가는 그 환경이 생각처럼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정해 준 가정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가정에서 살고 있다. 사회적 지위는 어떻겠느냐? 대부분 경제력이 평범하고, 이렇다 할 사회적 지위가 없다. 직업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성장(省長)이나 대통령인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기껏해야 작은 회사의 과장이나 사장으로 평범한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가정생활 환경도 빼놓을 수 없다. 일단 부모의 영향으로 자녀가 무속인의 길을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부모가 평범한 편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택함과 동시에 그 사람에게 이런 환경을 정해 주는데,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 겉으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지 않고, 모든 일을 묵묵히, 소리 없이 조용하게 행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은 네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고, 길을 예비하고, 각종 조건을 예비한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시점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한다. 그때가 바로 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시점이자,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때이다. 그때 어떤 사람은 이미 부모가 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아직 자녀의 신분으로 남아 있다. 즉, 결혼하여 자녀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루지 않고 미혼인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하나님이 너를 택할 시기,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너에게 다가갈 시기를 하나님은 이미 다 정해 놓았고, 환경까지 마련해 놓았다. 누구를 통해 혹은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시켜 너에게 복음을 전해 줄지, 그리고 네가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지를 정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위해 모든 조건을 예비해 두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 오게 되고,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또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따라 한 걸음씩 그의 사역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예비한 그의 사역 방식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기간에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사람에게 사역하겠느냐? 우선, 사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을 마련하여 사람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행사를 보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어서 다른 이에게서 복음을 받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다. 특정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은 누가 마련한 것이냐?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병 때문에 온 가족 또는 가족 중 일부가 하나님을 믿게 된다. 겉보기에는 가족이 병에 걸린 것 같지만 사실 이는 네가 하나님 앞에 올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마련해 준 계기이며, 하나님의 은혜이다. 어떤 사람의 경우는 늘 가정에 평안이 없고 되는 일이 없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누군가에게서 “예수를 믿으면 가정에 평안이 깃듭니다.”라며 복음을 받게 되고,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매우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게 된다. 이것도 하나의 계기 아니겠느냐? 가정에 평안이 없었던 것도 하나님이 준 은혜 아니겠느냐? 또 다른 이유로 믿게 된 사람도 있다. 저마다 각기 다른 이유와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게 된다. 네가 어떤 이유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든 사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안배와 인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에 다양한 방식으로 너를 택하고 하나님의 집까지 데리고 왔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은혜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6>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1)

지금의 이 말세 사역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예전처럼 은혜와 축복만 주는 사역을 하지 않으며, 더 이상 사람을 달래면서 나아가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하나님 사역의 다양한 면을 체험하면서 무엇을 보게 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도 보게 된다. 또한 이 기간에 하나님은 공급과 붙듦, 깨우침, 인도의 방식을 통해 사람이 그의 뜻과 그의 말씀, 그가 사람에게 준 진리를 조금씩 깨닫게 한다. 사람이 연약하거나 소극적이거나 길이 없는 것 같아 막막해할 때,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을 위로하고 권면한다. 그리하여 유약한 사람의 분량을 조금씩 강하게 키워 주고,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며, 하나님과 협력하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한다.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면서 패괴 성품을 드러내면, 하나님은 가차 없이 사람을 채찍질하고 징계한다. 그러나 사람의 우매함과 무지함, 연약함과 유약함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고 인내한다. 이렇게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한 다양한 사역 속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성숙하며, 조금씩 그의 뜻과 진리를 깨달아 가고, 무엇이 긍정적인 것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것인지, 무엇이 사악함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알게 된다. 하나님은 무조건 사람을 채찍질하거나 징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관용을 베풀거나 인내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처한 시기, 사람의 분량과 자질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각 사람에게 공급한다. 그는 사람에게 많은 일을 하고 많은 대가를 지불하였다. 사람은 그러한 대가와 일들을 전혀 느끼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행한 것은 실제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실현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실제적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한 번 또 한 번 화를 면하게 되었고, 연약함으로 인해 한 번 또 한 번 하나님의 관용을 받게 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통해 인류의 패괴와 인류에게 있는 사탄의 본질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또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공급, 깨우침, 인도를 통해 갈수록 진리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고,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사람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삶의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행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유일한 취지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왜 그런 방식으로 사람에게 사역하겠느냐? 어떤 성과를 거두고자 하는 것이겠느냐? 즉, 그는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얻고자 하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자 한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사람에게 사역하여 끊임없이 사람의 마음과 영을 불러 깨우며,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누가 사람을 인도해 주고 붙들어 주고 공급하고 있는지, 누가 사람을 지금까지 살 수 있게 했는지를 알게 해 준다. 또한 누가 창조주이고, 사람이 누구를 경배해야 하며, 어떤 길을 가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와야 하는지를 알게 해 준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조금씩 소생시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깨닫게 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구원 사역을 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알게 한다. 마음이 깨어나면 사람은 더 이상 타락한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으며,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자 한다. 사람은 마음이 되살아났을 때 사탄과 완전히 결별한다. 사탄에게 더 이상 해를 입지 않고, 사탄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사탄에게 우롱당하지 않게 된다. 또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고자 하는 사역의 취지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6>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2)

방금 사탄의 사악함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모두가 사람의 삶은 행복이 없고 매우 불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가 사람에게 행한 사역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오니, 기분이 어떠하냐? (너무나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행한 모든 것,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세심하게 마련한 모든 것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행한 일에 오차가 없다는 것은 잘못이 없으므로 누군가 정정하거나 조언을 하거나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이를 위해 행한 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손을 잡아 이끌고 있다. 하나님은 시시각각 너를 보살피며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사람은 이런 환경과 배경에서 성장하니, 하나님의 손길 아래에서 자란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아직도 허전하냐? 여전히 소극적이냐? 하나님이 인류를 버렸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행하였느냐? (인류를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행하면서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 모든 사역을 행하면서 어떤 조건도 내걸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하나님이 치른 대가를 알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런 적이 있더냐? (없습니다.) 지금 이 나이까지 살다 보면 거의 모든 사람이 일생에서 수많은 위험과 시험을 겪게 된다. 사탄이 네 곁에서 시시각각 너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네게 재난과 불행이 닥치거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즐거워한다. 또한 네가 사탄이 던진 올무에 걸려드는 것을 즐긴다. 반대로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불행과 재난을 피하도록 너를 항상 지키고 보호한다. 그러므로 평안, 즐거움, 복, 신변의 안전 등 사람의 모든 것은 사실상 하나님이 주관하는 것이다. 모든 이의 평생의 운명은 다 하나님이 인도하고 주재한다. 그런데 하나님께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지위라는 개념이 존재하겠느냐? 하나님이 “모든 사람 중에서 내가 가장 위대하니 내가 너희를 관리하겠다. 모두 나에게 용서를 구해라.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며 인류를 위협한 적이 있더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패괴된 인류는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다. 그렇게 신경 쓰면서 안배해 줄 필요 없이 대충 챙기면 된다.”라고 말씀하거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더냐? 하나님이 그렇게 하더냐? (아닙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은 매우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모든 사람을 대한다. 네가 스스로를 대하는 것보다 더 책임감 있게 말이다. 그렇지 않더냐? 하나님은 빈말을 하지 않는다. 지위를 점하고 거드름을 피우거나 사람을 무책임하게 대하거나 기만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진실하게,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행한다. 그렇게 행한 일들은 사람에게 복과 평안, 기쁨을 가져다주었으며, 지금처럼 무탈하고 행복하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 집에 있게 해 주었다. 또한, 사람이 정상적인 이성과 사고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그의 구원을 받게 해 주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역하면서 사람을 겉 다르고 속 다르게 대한 적이 있느냐? 가식적으로 대하며 듣기 좋은 말로 얼버무리고 외면한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언행이 불일치한 적이 있느냐? “너 대신 이 일을 해 주겠다. 저 일을 도와주겠다.”라고 공수표를 날리거나 큰소리를 치고 사라진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간사함이나 거짓됨이 없으며 신실하다.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진실하다. 그는 사람이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자 사람이 자신의 일생과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는 간사함이 없으니 가장 진실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지금 하나님을 ‘진실하다’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으나 사실 이는 하나님을 표현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며, 인간의 관점에 치우친 단어이다. 그러나 인류의 언어가 가진 한계로 인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니 하나님을 진실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다소 부적절해도 잠시 이 단어를 사용하도록 하자. 하나님은 신실하고 진실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고 있는 몇 가지 측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은 인류와 다르고 사탄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에게는 사탄의 패괴 성품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므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으냐? 아멘으로 화답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멘!) 하나님이 드러내는 것에서는 사탄의 그 어떤 사악함도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이 행하고 드러내는 모든 것은 사람에게 이롭고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공급과 생명이 되고, 길이 되며, 방향이 된다. 하나님께는 패괴가 없다. 또한 우리가 지금 보게 된 하나님의 모든 행사로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어떤 패괴도 없고, 인류의 패괴 성품, 사탄의 본질과 비슷하거나 같은 점이 전혀 없다. 이 때문에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어떤 패괴 성품도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과정에서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로, 이는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다는 것을 여실히 입증한다. 너희는 이를 깨달았느냐? 일단 두 가지 측면에서 지금 알게 된 하나님의 거룩함의 본질을 말하겠다. 첫째, 하나님은 어떤 패괴 성품도 가지고 있지 않다. 둘째,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한 사역의 본질은 하나님의 본질을 보여 준다. 그 본질은 모두 긍정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한 모든 사역은 다 긍정적인 것만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우선, 하나님은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한다. 이는 긍정적인 것 아니겠느냐?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를 가지게 한다. 이는 긍정적인 것 아니겠느냐? 사람으로 하여금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한다. 이는 긍정적인 것 아니겠느냐?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한다. 이는 긍정적인 것 아니겠느냐?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에 근거하여 사람, 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게 한다. 이는 긍정적인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사탄에게 더 이상 미혹되지 않고, 잔혹한 해를 입지 않으며, 사탄에게 지배당하지 않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즉, 사탄의 패괴 성품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로 조금씩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6>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3)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수단은 주로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통제와 협박이다. 사탄은 어떻게든 너의 마음을 지배하려 든다. ‘협박’이란 어떤 의미더냐? 위협과 강박으로 그것의 말을 따르게 하는 것이며, 어떤 결과를 연상하게 만듦으로써 두려움을 느껴 사탄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순순히 따르게 된다.

둘째는 기만과 현혹이다. ‘기만과 현혹’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사탄은 전설과 거짓말을 지어내어 너를 속이고, 그 거짓말을 믿게 만든다. 또한 사탄은 절대로 너에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했다고 알려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너를 만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예 ‘하나님’이란 단어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다. 다른 것으로 이를 대체하고 너를 미혹해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게 만든다. 물론 이 ‘기만’이란 것은 여기에 국한되지 않으며 여러 측면을 포함한다.

셋째는 강제 주입이다. 무엇을 주입하겠느냐? 강제 주입이 사람의 선택에 따라 이루어지겠느냐? 사람의 동의를 거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네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소용없다. 사탄은 네가 상황 파악을 전혀 못 한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 생존 법칙, 본질을 주입한다.

넷째는 위협과 회유이다. 즉, 사탄은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네가 자신을 받아들이고 따르며,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만든다. 사탄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작은 선심을 베풀 때도 있고, 너를 범죄로 유인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괴롭힌다. 사탄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너를 공격하고 해를 가한다.

다섯째는 미혹과 마비이다. ‘미혹과 마비’란 사탄이 듣기에 그럴싸하고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는 말과 사상을 퍼뜨리는 것이다. 언뜻 보기엔 사람의 육적인 것과 삶, 미래를 생각해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너를 속여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게 마비시킨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꼬임에 넘어가 사탄의 지배를 받게 된다.

여섯째는 심신 파괴이다. 사탄이 사람의 무엇을 파괴하겠느냐? (사람의 마음, 사람 전체를 파괴합니다.) 사탄은 사람의 마음을 파괴하여 거스를 힘을 앗아 간다. 즉, 너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씩 사탄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것이다. 사탄은 매일 네게 그런 것들을 주입하고, 그러한 사상과 문화로 악영향을 끼쳐 너를 물들인다. 너의 의지를 조금씩 꺾음으로써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거나 소위 말하는 정의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말끔히 없애 놓는다. 그렇게 되면 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에게 맞설 의지를 상실하고 사탄의 뜻대로 흘러가게 된다. ‘파괴’란 사람을 괴롭혀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상태로 만든 후 기회를 틈타 집어삼키는 것이다.

사람을 패괴시키는 사탄의 이 모든 수단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어 반항하지 못하게 하고 사지로 내몬다. 즉, 사탄이 동원하는 수단은 어떤 것이든 너를 타락시키고, 사탄의 지배를 받게 하며, 죄악의 늪에 빠지게 한다. 이것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사탄의 수단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6>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4)

지금 너희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성적인 인식은 오랫동안 체험하고, 증명하고, 느끼고, 경험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 날엔가 하나님의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본질이 흠 없다는 것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사랑이 이기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즉,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심 없이 모든 것을 내주며, 하나님의 거룩함은 흠잡거나 비난할 만한 구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본질은 하나님이 자신의 신분을 자랑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로 묵묵하고 진실하게 모든 사람을 대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본질은 공허하지 않고, 이론이나 학설이 아니며, 지식이나 사람에 대한 교육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님 자신이 일할 때 참으로 드러나는 것이며 하나님 자신이 드러낸 소유와 어떠함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과 말씀은 모든 이에게 더없이 큰 가치와 의미를 가지기에 사람은 이러한 본질을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알게 될 때, 너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알게 될 때, 너는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이란 말의 진실한 함의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다. 또한 다른 길을 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이 너에게 예비해 준 모든 것을 더는 저버리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본질은 거룩하기에 오직 하나님만이 너에게 밝고 바른 인생길을 걷게 하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너에게 진정한 인성으로 살게 하고 진리를 깨닫고 갖추게 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너에게 진리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한다. 또한,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멀리하고 사탄의 박해와 지배에서 벗어나게 한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사람이나 사물도 네가 고통의 나락에서 벗어나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구원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또 오직 하나님만이 사심 없이 너를 구원하고, 너의 미래, 운명,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며, 너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한다. 이는 그 어떤 피조물과 비피조물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본질을 지닌 피조물과 비피조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사물도 너를 구원하고 인도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질이 사람에게 갖는 중요성이다. 나의 이 말들이 너희에게는 그저 도리적으로 작은 도움을 받는 것 정도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네가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한다면 지금의 이 말이 앞으로 체험해 나가는 과정에서 네 운명을 바꾸고 올바른 삶의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6>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5)

오늘 모임을 시작할 때 너희가 보인 뜻밖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떤 사람들은 감격하거나 감사한 마음 등 여러 가지 생각에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다. 이는 비난할 만한 사안도 아니고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너희가 한 가지를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엇이겠느냐? 우선 너희에게 묻겠다. 너희가 아까 한 행동이 엎드린 것이냐, 아니면 무릎 꿇고 절한 것이냐? 말해 줄 사람이 있느냐? (엎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엎드렸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럼 엎드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경배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럼 무릎 꿇고 절하는 것은 무엇이냐? 여태까지 너희와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으니 오늘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너희는 평소 예배 모임에서도 엎드리느냐? (아닙니다.) 그럼 기도할 때는 엎드리느냐? (네.) 여건이 되면 기도할 때마다 엎드리느냐? (네.) 좋구나. 그렇지만 나는 오늘 너희가 한 가지를 깨달았으면 한다. 하나님이 무릎 꿇은 것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두 부류의 사람에 한한다. 성경이나 영적 인물의 행위를 참고할 필요 없이 이 자리에서 너희에게 정확한 정보를 알려 주겠다. 먼저, 엎드리는 것과 무릎 꿇고 절하는 것은 다르다. 사람이 무릎 꿇고 엎드렸을 때, 하나님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누군가를 부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소명을 받은 사람에게 맡길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은 그가 엎드리게 하는데, 이것이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다. 두 번째 부류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엎드려 절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이것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두 가지 부류의 사람에게만 해당한다. 그렇다면 너희가 어떤 부류에 해당하는지 말할 수 있겠느냐? 이 말이 사실이긴 하지만 감정을 좀 상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도할 때 무릎을 꿇는 것은 따질 것이 없다. 그것은 정당한 것이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사람은 기도할 때 대부분 무언가를 간구하고, 하나님께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교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식에 치우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오늘 너희가 한 행동을 비난할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너희가 이러한 원칙을 확실히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알겠느냐? (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럼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무릎 꿇을 기회는 없는 것이겠느냐? 영원히 없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알겠느냐? 서글픈 마음이 들지는 않느냐?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다. 내가 한 말이 너희에게 힘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마음으로 이해하도록 깨달음을 줄 수도 있다. 최근 들어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교류가 많아지긴 했으나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은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길은 여전히 멀고도 멀다. 나는 너희가 조급한 마음에 이런 행동을 하거나 그런 바람이나 마음을 표출하지 않았으면 한다. 오늘 너희가 한 행동은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거나 표출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그 마음을 느꼈기에 너희가 그런 행동을 했을 때 일어나서 너희에게 안부를 물었던 것이다. 나는 너희 모두가 잘되기를 바라기에 말 한 마디, 일 하나를 할 때에도 최선을 다해 너희를 돕고 인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가 모든 일에 정확한 인식과 시각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있겠느냐? (네.) 아주 좋다. 사람이 하나님의 여러 측면의 성품, 소유와 어떠함, 사역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는 하나 대부분 문자적인 것, 도리적인 것, 생각에만 머물러 있다. 사람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실제 체험 과정에서 진정으로 알고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일깨우고는 있으나 사람의 마음이 어느 정도까지 되살아날지는 아직도 먼 길을 가 봐야 안다. 나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냉대받거나, 버림받거나, 미움받는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모든 사람이 굳은 의지를 가지고 아무 후회 없이, 또 주저함 없이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 길을 갔으면 한다. 어떠한 걱정도, 부담도 없이 말이다. 네가 이전에 어떤 잘못을 했든, 어떤 잘못된 길을 갔든, 어떤 과오를 남겼든 그것이 하나님을 알아 가는 길에서 짐이나 부담이 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본질 중 가장 귀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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