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알아 가기[3]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83)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유를 창조하다
창 1:3~5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6~7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창 1:9~11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창 1:14~15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창 1:20~21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24~25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첫째 날, 인류의 낮과 밤이 하나님의 권병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세워지다
먼저 첫 번째 단락을 보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3~5). 이 단락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하면서 행한 첫 번째 일이자 하나님이 보낸,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었던 첫 번째 하루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평범하지 않은 하루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위해 빛을 예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빛과 어두움을 나누었다. 이날 하나님은 말씀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씀과 권병은 공존한다. 그의 권병은 만물 가운데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의 능력은 그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만물 가운데서 펼쳐졌다. 이날부터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과 권병,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세워지고 이루어졌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권병,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운행되기 시작했다.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자 ‘빛’이 생겼다. 하나님은 어떠한 공사도 벌이지 않았지만, ‘빛’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겼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이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에 의해 낮이라 명명된 ‘빛’이다. 하나님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자신의 본질과 가치를 바꾼 적이 없고, 또한 사라진 적도 없다. 그것의 존재는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을 나타내고 있고, 또한 창조주의 존재를 알리고 있으며, 반복적으로 창조주의 신분과 지위를 입증하고 있다. 그것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진짜로 볼 수 있는 빛이다. 이로부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텅 빈 이 세계에 첫 번째 물질이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 것이며, 하나님의 권병으로 인해,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만물이 만들어지는 제1막에 출현하였다. 이어서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변화하고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빛’을 ‘낮’이라 명명하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였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만들고자 한 세계의 첫 번째 저녁과 첫 번째 아침이 생겼으며, 하나님은 이날을 첫째 날이라 칭하였다. 이날은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한 첫째 날이며, 또한 만물 창조의 시작이고, 창조주의 권병과 능력이 그가 만든 이 세계에 첫 번째로 나타난 날이다.
이 단락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권병을 보여 주고, 하나님 말씀의 권병과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준다. 하나님만이 그러한 능력을 지녔으므로, 하나님만이 그러한 권병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그러한 권병을 지녔기에 하나님만이 그러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 누가, 그 어떤 것이 그러한 권병과 능력을 갖출 수 있겠느냐? 너희 마음속에 이에 대한 답이 있느냐? 하나님 외에 피조물이나 비피조물이 그러한 권병을 가지고 있느냐? 너희는 어떤 책이나 간행물에서 이러한 사례를 본 적이 있느냐? 유사 이래로 누가 만물을 창조했다는 기록이 있느냐? 그것은 책이나 어떠한 기록에도 없으며, 성경에서도 물론 그것은 유일한 기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세상 창조에 관한, 위세가 드높고 권병과 위력을 지닌 일부 말씀인데, 이 부분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권병을 대변하며,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신분을 대변한다. 그러한 권병과 능력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신분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으냐? 그것은 하나님 자신만이 지닌 권병과 능력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권병과 능력은 그 어떤 피조물과 비피조물도 갖추지 못한 것이며 대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만의 특징이 아니냐? 너희는 이것을 보았느냐? 이 부분의 말씀을 통해 아주 빠르고 명확하게 하나님이 유일무이한 권병과 유일무이한 능력을 가졌고, 지극히 높은 신분과 지위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상의 교제를 통해,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으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84)
둘째 날, 하나님이 권병으로 물을 지배하고 궁창을 창조함으로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공간이 만들어졌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창 1:6~7). 하나님이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라고 말씀한 후에 어떤 변화가 생겼느냐? 성경에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일을 하자 결과는 어떻게 되었느냐? 바로 이 단락의 마지막 말씀이다. “그대로 되니라”.
짧은 이 두 구절에 기세가 웅장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물을 어떻게 관리하고, 어떻게 인류의 생존 공간을 창조하였는지, 이 놀라운 위업, 멋진 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장면에서 물과 궁창은 순식간에 하나님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들은 하나님 말씀의 권병으로 말미암아 갈라졌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위와 아래로 나뉘었다. 즉, 하나님이 창조한 궁창이 아래쪽 물 위를 덮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위쪽 물까지도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창조주가 물을 움직이고 물을 다스리고 궁창을 창조할 때의 장관이나 그가 보여 주는 권병의 위력은 놀랍고 찬미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능력과 권병으로 말미암아 또 한 번의 위업이 달성되었다. 이것이 창조주 권병의 위력이 아니겠느냐? 성경 내용을 통해 하나님의 행사를 해석해 보자. 하나님의 말씀이 있자, 물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궁창이 생겼고, 아울러 이 공간에는 하나님의 한마디 말씀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이 변화는 일반적 의미의 변화가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한 일종의 교체로서, 그것은 창조주의 생각으로 생겨난 것이다. 창조주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인해 무에서 유가 창조되었고, 그때부터 그것은 창조주를 위해 존재하고 세워지며, 창조주의 생각에 따라 움직이고 변화하며 새로워진다. 이 단락에서 기록한 것은 창조주가 행한 천지 창조의 두 번째 사건으로서, 창조주의 권병과 능력이 또 한 번 발현된 것이자 창조주의 위대한 행사이다. 이날은 창조주가 천지를 창조하며 보낸 둘째 날이자, 창조주가 보낸 또 하나의 멋진 하루였다. 그가 빛 속을 거닐며 궁창을 가져오고 모든 물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날 속에서 그의 행사, 그의 권병과 능력이 행해졌다….
하나님이 말씀하기 이전에 물 가운데 궁창이 있었느냐? 물론 없었다! 하나님이 물 가운데 궁창이 있으라고 말씀한 후에는 어떠했느냐? 하나님이 원하던 것이 나타나 물 가운데 궁창이 생겼고, 물 또한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위아래로 나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있자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만물 가운데에 신선하고 새로운 두 가지 사물이 출현하였다. 그러면 그 두 가지 새로운 사물의 출현에 대해 너희는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 창조주 능력의 대단함을 느꼈느냐? 창조주의 유일무이하고 비범한 기개를 느꼈느냐? 그러한 기개, 그러한 능력의 대단함은 하나님의 권병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권병은 하나님 자신의 대언이자, 하나님 자신만이 갖고 있는 특징인 것이다.
이 단락의 말씀에서 너희는 또 한 번 하나님의 유일무이함을 감명 깊게 느끼지 않았느냐?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직 너무 부족한데, 창조주의 권병과 능력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유일무이함은 그의 본질이 그 어떤 피조물의 본질과도 다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창조주의 권병과 능력이 비범하고 무한하여 모든 것을 초월하며 모든 것의 위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권병과 소유와 어떠함이 생명과 기적을 만들 수 있고, 멋지고 특별한 매 순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가 자신이 창조한 생명을 주관하며, 자신이 만든 기적과 일분일초의 매 순간을 주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85)
셋째 날, 땅과 바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겼으며 하나님의 권병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생기로 가득 찼다
창세기 1장 9절에서 11절 말씀의 첫 구절은 이러하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하나님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라고만 했을 뿐인데,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느냐? 빛과 궁창 이외에 그 공간에 또 무엇이 생겼느냐? 성경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는 바로 그 공간에 또 육지가 생기고 바다가 생긴 것, 다시 말해 물과 육지가 나뉜 것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사물의 출현은 모두 하나님의 명령 한 마디에 ‘그대로 되었다’. 성경에 하나님이 이러한 일을 하던 기간에 바쁘게 보냈다고 기록된 것이 있더냐? 하나님이 손을 댔다고 기록된 것이 있더냐?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한 것일까? 하나님은 어떻게 그 새로운 사물이 생겨나게 했을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그 모든 것을 이루었고, 그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
계속해서 이 단락의 마지막 구절을 읽어 보자.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하나님이 말씀하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생각대로 생겨났다. 순식간에, 형태가 각각인 여린 작은 생명들이 흙 속에서 꼬물꼬물 올라와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은 몸에 묻은 흙을 채 털어 내기도 전에 너도나도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네고, 서둘러 이 세상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그들은 창조주가 부여해 준 생명에 감사를 표하고, 그들 모두가 만물의 일원임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또한 그들은 창조주의 권병을 나타내기 위해 그들 각자의 생명을 바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자 땅에는 풀들이 파릇파릇 돋아났고, 사람들에게 제공될 각종 채소가 흙을 뚫고 무럭무럭 자라났으며, 산과 들판에는 나무가 무성하고 숲이 울창하였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이 밋밋하던 세상이 순식간에 풀, 채소와 나무 등 각종 식물들로 둘러싸여 초록빛을 한가득 머금게 되었다…. 공기는 풀꽃 향기로 그윽하고, 흙 내음이 물씬 풍기며, 각종 식물들은 공기를 통해 숨을 쉬면서 자신들의 성장 과정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에 따라 모든 식물들은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싹트고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고 번식하는 일련의 생명 여정을 시작하였다. 각자 생명의 궤적을 지키며, 만물 중에서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모두 창조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나고, 창조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게 된다. 또한 창조주에게서 계속 자양분을 공급받을 것이고, 창조주의 권병과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이 땅 곳곳에서 강인하게 살아갈 것이며, 창조주가 부여해 준 생명력을 영원히 세상에 나타낼 것이다….
창조주의 생명은 비범하고 그의 생각은 비범하며 그의 권병은 비범하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이 있자 최후의 결과는 늘 ‘그대로 되었다’. 확실히 하나님은 일을 할 때 손댈 필요 없이, 그의 생각으로 지휘하고 말씀으로 명령했을 뿐인데, 일은 곧 그대로 되었다. 그날 하나님은 물을 한곳으로 모아 뭍이 드러나게 한 다음, 뭍에 풀이 자라나게 하였고,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도 자라게 하였으며, 그것들을 각기 종류대로 분류하고 열매마다 씨를 품게 하였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루어져 계속해서 이 새로운 세상에 나타났다.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은 그의 마음속에 그려져 있었다.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기 시작할 때, 하나님이 그 그림의 내용을 말씀으로 표현할 때,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그의 권병을 어떻게 행하든, 일은 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한 단계씩 이루어졌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권병으로 말미암아 한 단계씩 변화되었다. 그 모든 변화와 발전은 창조주의 권병을 나타내고, 또한 창조주 생명력의 비범함과 위대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단순한 구상도, 공허한 그림도 아니며, 생명력과 엄청난 능력을 지닌 권병이고,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소생시키고, 새롭게 하고, 소멸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다 그의 생각에 따라 움직이며, 동시에 그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물이 아직 생겨나기 전에,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이미 완전한 구상과 아주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져 있었다. 비록 셋째 날 땅에 각종 식물들이 자라났을지라도, 하나님은 천지 창조의 발걸음을 멈출 이유가 없었다. 그는 계속 말씀으로 자신이 창조하고자 하는 모든 종류의 새로운 사물을 만들었다. 그는 말씀하고 명령하고 그의 권병을 행하고 그의 능력을 보이고자 하였으며, 자신이 만들고자 한 만물과 인류를 위해 구상한 모든 것들을 예비하고 있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86)
넷째 날, 하나님이 또 한 번 권병을 행하자 인류의 절기와 날짜와 연도가 탄생되었다
창조주는 말씀으로 자신의 계획을 이루면서 그렇게 자신이 계획했던 처음 3일을 보냈다. 그 3일 동안, 그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기진맥진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계획했던 첫 3일을 멋지게 보냈고, 상전벽해처럼 변화무쌍하게 위대한 업적들을 이루었다. 새로운 세상이 하나님의 눈앞에 나타나고, 하나님의 생각 속에만 봉인되어 있던 아름다운 그림이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조금씩 펼쳐졌다. 모든 새로운 사물의 출현은 마치 신생아가 태어나는 것과도 같았다. 창조주는 그의 생각 속에 있던 것이 막 현실이 된 그 광경을 흐뭇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마음에 작은 위안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창조주의 그 새로운 페이지의 계획은 또 무엇이었을까? 그는 또 무슨 말씀을 하였을까? 그의 권병은 또 어떻게 행사되었을까? 아울러, 또 어떤 새로운 사물이 이 새로운 세상에 왔을까? 창조주의 인도에 따라 우리의 눈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넷째 날에 머무는데, 이 하루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물론 창조주에게 있어 그것은 틀림없이 또 하나의 멋진 하루이자 현 인류에게도 역시 대단히 중요한 하루이며,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하루였다. 그날이 얼마나 멋지고, 얼마나 중요하며, 또 헤아릴 수 없는 그 가치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먼저 창조주의 말씀을 들어 보자….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창 1:14~15). 이것은 하나님이 뭍과 그 위의 식물을 만든 후에, 또 하나의 피조물에서 보여진 하나님 권병의 행사이다. 이런 일이 하나님께는 마찬가지로 아주 쉬운 일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하면 책임지고, 책임지는 이상 반드시 이룬다. 하나님이 하늘 궁창에 광명체가 있으라고 명령하니, 그 광명체는 하늘에서 빛을 발해 땅을 비추었을 뿐만 아니라 낮과 밤, 절기와 날짜와 연도를 구분하는 기호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말씀하는 순간, 하나님이 이루고자 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과 지정 방식대로 이루어졌다.
‘하늘 궁창의 광명체’는 상공에서 빛을 발하는 물체로서, 그것은 하늘도 비추고 땅과 바다도 비춘다. 그것은 하나님이 명한 리듬과 빈도로 회전하며, 땅을 비추어 서로 다른 시간대가 형성되게 한다. 이와 같이, 지구 동서쪽의 낮과 밤은 이 광명체의 회전 주기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낮과 밤에 대한 표시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서로 다른 회전 주기로 인류의 절기와 각종 날짜에 대한 표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명명한 춘하추동의 사계절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인류에게 절기와 날짜와 연도를 나타내는 규칙적이고 정확한 기호가 된다. 인류는 경작을 하게 되면서 비로소 하나님이 만든 광명체가 구분해 주는 절기, 날짜, 연도를 알아보고 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 인류가 오늘날 알고 있는 절기, 날짜, 연도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넷째 날부터 있었고, 인류가 경험하는 춘하추동의 교체 주기 역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넷째 날에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광명체로 인해 사람들은 낮과 밤을 규칙적이고 정확하고 분명하게 구분하고 날짜를 계산할 수 있게 되었고, 절기와 연도를 아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달이 둥글어지는 날, 즉 달이 차서 한 달이 되는 날에 사람들은 광명체가 비추는 새로운 주기의 시작을 알게 되고, 달이 이지러지는 날, 즉 한 달의 절반이 되는 날이면 사람들은 새로운 절기의 시작을 알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며칠이 하나의 절기를 이루고, 몇 개의 절기가 하나의 계절을 이루며, 몇 개의 계절이 한 해를 이루는지 매우 규칙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인류는 광명체의 운행으로 표시되는 절기, 날짜, 연도를 매우 쉽게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인류와 만물은 자연스럽게 광명체의 운행으로 만들어지는 낮과 밤의 교체, 사계절이 바뀌는 규칙 가운데서 살게 되었다. 이 역시도 창조주가 넷째 날에 광명체를 만든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창조주가 그 일을 통해 이룬 목표와 의의도 그의 권병과 능력을 떠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든 광명체와 그 광명체들이 장차 인류에게 가져다줄 가치 역시 창조주가 행한 권병의 또 하나의 걸작인 것이다.
인류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신세계에서, 창조주는 이미 자신이 곧 만들 새 생명을 위해 ‘저녁과 아침’, ‘공기’, ‘땅과 바다’, ‘풀과 채소, 그리고 각종 나무’, ‘광명체와 절기, 날짜, 연도’를 예비하였다. 창조주의 권병과 능력은 그가 창조한 모든 새로운 사물 가운데서 발현되었고, 그의 말씀과 사실은 오차도 간격도 전혀 없이 병행된다. 그 모든 새로운 사물의 출현과 탄생은 다 창조주의 권병과 능력을 증명하고 있다. 즉, 말씀하면 반드시 책임지고, 책임지는 이상 반드시 이루며,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영원까지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바뀐 적이 없으며,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지금 다시 성경의 이 말씀을 보면, 너희는 매우 새롭게 느껴지지 않느냐? 너희는 새로운 내용을 보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것은 창조주의 행사가 너희의 마음을 움직여 그의 권병과 능력을 알도록 인도하고 또한 너희에게 창조주를 알 수 있는 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며, 그의 행사와 권병이 이런 말씀과 생명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사람들은 창조주의 권병이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창조주의 지고지상함을 보게 되었으며, 창조주의 권병과 능력의 뛰어남을 보게 되었다.
창조주는 권병과 능력으로 하나 또 하나의 기적을 창조하고 있고, 사람의 이목을 끌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 권병으로 행한 창조주의 하나하나의 놀라운 행사를 주목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비범한 능력은 인류에게 계속 놀라움과 기쁨을 선사하여 사람들이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를 정도로 기뻐하고, 찬양하며, 기묘함에 감탄하고, 갈채를 보내게 만들었다. 더욱이 사람들을 감동시켜 하나님을 사모하고 경외하는 마음과 그리움의 정이 생기게 했다. 창조주의 권병과 행사는 사람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고,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였으며, 더욱이 사람의 마음을 흡족게 하였다. 그의 모든 생각, 모든 음성, 발현된 그의 모든 권병은 다 만물 가운데의 걸작으로서, 창조된 인류가 가장 깊이 알고 인식할 가치가 있는 놀라운 위업인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절기: 창세기 1장에서는 ‘사시’로 번역되었음.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87)
다섯째 날, 다양한 형태의 생명들이 각각의 방식으로 창조주의 권병을 보여 주었다
성경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20~21). 성경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날 하나님은 각종 수중 생물들을 만들고, 땅 위에는 각종 새들을 만들었다. 즉, 어류와 날짐승들을 만들고, 아울러 하나님이 그들을 각기 종류대로 되게 하니, 땅 위와 하늘과 물속이 하나님의 창조로 말미암아 풍요로워졌다….
하나님이 말씀하자, 순식간에 형태가 각기 다른 살아 숨 쉬는 생명들이 창조주의 말씀 속에서 생생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깡충깡충 뛰면서 기쁨에 차 환호하며 이 세상에 왔다…. 물속에서 각종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각양각색의 패류들이 갯벌에서 자라며, 비늘 달린 생물, 갑각류, 그리고 각종 연체 생물들이 물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경쟁하듯 자라났다. 그들은 크고 작고 길고 짧은 것들로 어우러져 크기도 다양했다. 또한 각종 해조류들도 마찬가지로 서로 앞다투어 자라났으며, 수중 생물들의 움직임에 따라 하늘거리며 몸을 흔들었다. 그들은 마치 그 고요한 물에 다그치듯 말하는 것 같았다. “힘차게 흘러라! 네 친구들과 함께. 이제 너는 외롭지 않아!” 하나님이 만든 수중 생물들이 물속에 나타난 그 순간부터, 그 살아 숨 쉬는 생명들은 오랜 세월 침묵하던 바다에 생기를 불어넣고 신기원도 열어 주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서로 의지하고 함께하면서 서로를 구분 짓지 않았다. 물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생물들을 위해 존재하며, 자신이 품고 있는 모든 생명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하고, 그 각각의 생명들 또한 물이 공급해 주는 자양분으로 말미암아 물을 위해 존재한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각자의 생명을 바치며, 동시에 같은 방식으로 창조주의 창조의 오묘함과 위대함을 증거하고, 창조주의 권병에 깃든 초월할 수 없는 능력을 증거하고 있다….
바다가 더 이상 고요하지 않게 되었고, 공기 중에도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새들이 땅에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들이 수중 생물과 다른 점은 깃털이 가득 나 있고, 두 날개가 있으며, 자태가 우아하고 몸놀림이 가볍다는 것이다. 새들은 두 날개를 퍼덕이며 의기양양하게 창조주가 자신들에게 부여한 화려한 겉모습, 특별한 능력과 재주를 한껏 과시하고 있다. 그들은 자유롭고 능숙하게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다니고, 들판과 숲속을 누비고 있다…. 새들은 하늘의 총아이자 만물의 총아이다. 그들은 곧 하늘과 땅을 이어 주는 연결 고리가 되어 만물에게 소식을 전할 것이다…. 그들은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고 날아다니며 휑하니 비어 있던 세상에 기쁨과 웃음소리를 채워 넣었고, 생기와 활력도 불어넣었다…. 그들은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마음의 소리로, 창조주가 자신들에게 부여해 준 생명을 찬미한다. 그들은 즐거운 춤사위로 창조주의 완벽하고 놀라운 창조를 자랑하며, 창조주로부터 받은 특별한 생명으로 창조주의 권병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들의 일생을 바친다….
수중 생물이든 공중을 날아다니는 생물이든, 다 창조주의 지시에 따라 구조가 다른 생명체로 살며, 또 창조주의 지시에 따라 무리 지어 그들 각자의 부류 속에서 살아간다. 그 규칙과 법칙은 그 어떤 피조물도 바꿀 수 없다. 그들은 감히 창조주가 정해 준 영역을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하며, 또한 그 범위를 벗어날 수도 없다. 그들은 창조주가 정해 준 숙명 속에서 대를 이어 번식하며, 창조주가 그들에게 정해 준 생명의 궤적과 법칙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또 창조주의 무언의 명령과 창조주가 그들에게 준 천상의 법칙과 계율을 오늘날까지 자발적으로 지키고 있다. 그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창조주와 대화하고, 창조주의 뜻을 깨닫고, 창조주의 명령에 순종한다. 그 어떤 피조물도 창조주의 권병을 초월한 적이 없다. 창조주는 생각으로 그들을 주재하고 주관하고 있다. 말씀은 하지 않더라도, 창조주만이 갖고 있는 권병으로 이 인류와 다른, 말하지 못하는 만물을 소리 없이 주관하고 있다. 이런 특별한 방식으로 권병이 행해짐으로 사람은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병을 새롭게 알게 되고, 새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나는 새날에 행한 창조주의 권병으로 그의 유일무이함이 다시 한번 드러나게 되었다고 말하겠다.
계속해서 이 단락의 마지막 구절을 보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말씀을 너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가 창조한 만물은 이미 그의 말씀으로 인해 세워지고 이루어졌으며, 모든 것이 점차 변화하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각종 사물과 성취한 갖가지 일들에 대해 아주 흡족해하지 않았느냐? 그에 대한 답이 바로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여기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무엇을 상징하느냐? 이 말은 하나님은 그가 계획한 일과 정해 놓은 일, 그리고 그의 목표를 성취할 능력과 지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다 마친 후 후회한 적이 있느냐? 그 답 역시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즉, 하나님은 후회는커녕 아주 흡족해했다. 후회하지 않았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의 계획은 완벽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또한 완벽하다는 것과, 그의 권병이 완벽한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근원임을 의미한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나서 하나님처럼 보기에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사람이 하는 모든 일들이 다 완벽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한 번으로써 영원히 이룰 수 있겠느냐? 사람들이 “더 좋은 것만 있을 뿐 가장 좋은 것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이 하는 일은 영원히 완벽에 이를 수 없다. 하나님 자신이 행하고 이룬 모든 일이 하나님 보기에 좋았을 때, 하나님이 만든 모든 것은 그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고정불변의 법칙이 생겼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을’ 때, 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그 한 번으로써 영원히 형태가 고정되고 유형이 구분되며 위치와 용도와 기능이 정해졌다. 동시에, 만물 가운데 맡은 역할과 하나님이 만물을 경영하는 기간 가야 할 여정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 정해져 영원히 바꿀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창조주가 만물에게 정해 준 ‘천상의 법칙’에서 온 것이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워낙 단순하여 사람들이 관심을 갖거나 중시하지 않는 말씀이지만, 사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에게 내린 천상의 규칙, 천상의 법칙이다. 이 말씀에서 창조주의 권병이 또 한 번 더 실제적이고, 더 깊이 있게 구현되었다. 창조주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가 얻고자 한 모든 것을 얻었고, 그가 이루고자 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가 만든 모든 것을 그의 수중에서 주관할 수 있고, 그의 권병 아래 질서 정연하게 주재할 수 있었다. 동시에 만물도 그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소멸되며, 그의 권병으로 말미암아 그가 정한 법칙 안에서 생존한다. 그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법칙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그 법칙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존재하고, 지속되고, 운행될 것이다. 창조주가 그 법칙을 폐기하는 그날까지 말이다!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병은 그가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을 그의 명대로 세울 수 있다는 사실에서 묻어날 뿐만 아니라, 만물을 다스리고 주재하며 만물에게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에서도 구현되고 있다. 또한 창조주가 자신이 창조하려 계획한 만물이 완벽한 형식, 완벽한 생명 구조, 완벽한 역할을 가지고 그가 만든 세계에 한 번으로써 영원히 나타나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데서도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병은 구현되고 있다. 또 창조주의 모든 생각이 그 어떤 조건의 제한이나 시간, 공간, 지리적인 제한도 받지 않는 데서도 구현된다.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신분은 그의 권병처럼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권병은 영원히 그의 유일무이한 신분의 대언과 상징으로서, 영원히 그의 신분과 공존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88)
여섯째 날, 창조주가 말씀하니 그의 생각 속 각종 생물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부지불식간에,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하는 사역이 벌써 닷새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곧이어 그 여섯째 날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날은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자 또 하나의 평범하지 않은 날이었다. 새날이 왔을 때, 창조주는 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까? 또 어떤 새로운 피조물이 생기고 만들어졌을까? 들으라. 이것은 창조주의 음성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24~25). 이들 생물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느냐?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말하자면, 이날 땅 위에는 각종 생물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모두 그 종류대로 분류되었는데,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
앞의 다섯 날과 마찬가지로, 창조주가 여섯째 날에도 똑같은 어조로 그가 원하는 생물이 생겨나라 명하니 그들이 땅 위에 나타났으며, 각기 종류대로 되었다. 창조주의 권병이 행사되자, 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여섯째 날에 창조주가 만들고자 계획한 모든 생물들이 예정대로 생겨났다.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라는 창조주의 이 말씀이 있자, 뭍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땅 위는 순식간에 각종 생물들이 내뿜는 기운으로 가득 찼다…. 초록 풀빛을 잔뜩 머금은 들판에는 튼실하게 살찐 소들이 꼬리를 흔들며 속속 등장하고, 양들이 메에 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무리를 짓고, 말들이 울부짖으며 질주해 왔다…. 순식간에, 고요하던 광활한 들판이 시끌벅적해졌다…. 각종 가축들의 출현으로 조용하기만 하던 초원에 아름다운 볼거리가 더해졌고 더없는 활기가 넘쳤다…. 그들은 초원을 벗 삼고, 초원의 주인이 되어 서로 의지하며 살 것이고, 들판의 파수꾼이 될 것이다. 들판 역시 그들의 영원한 서식지가 되어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그들이 영원히 생존하게끔 자양분을 공급해 줄 것이다….
이들 가축들과 같은 날에 태어난 각종 곤충들도 창조주의 말씀에 따라 잇따라 나타났다. 비록 그들이 피조물 중 가장 작은 생명체일지라도 그들의 생명력 역시 창조주의 오묘한 창조에서 온 것이다. 그들은 결코 늦게 온 것이 아니다….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는 것도 있고, 천천히 기어 다니는 것도 있으며, 또 어떤 것은 폴짝폴짝 뛰어다니기도 한다. 비틀거리며 걷는 것도 있고, 힘 있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재빠르게 뒷걸음질 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옆으로 걷고, 어떤 것은 위로 뛰어오른다…. 그들은 각자 바쁘게 자신의 집을 찾고 있는 중이다. 어떤 것은 풀숲에 들어가고, 어떤 것은 땅에 굴을 파느라 분주하고, 어떤 것은 큰 나무에 날아올라 숲속에 몸을 감춘다…. 몸집은 작아도 그들 모두 배고픔을 참지 못하니, 각자 집을 마련하고는 배를 채울 먹이를 급하게 찾아 나선다. 어떤 것은 여린 풀잎에 기어올라 먹고, 어떤 것은 흙을 물어 한 입씩 삼키는데, 아주 맛있게 먹으면서 정말 즐거워한다(흙은 오히려 그들의 맛있는 먹이가 되었음). 어떤 것은 숲속에 숨어서도 결코 쉬지 않는데, 나무 위 진초록 잎사귀의 진액은 그들 입맛에 맞는 아주 좋은 음식이 되었다…. 배를 실컷 채운 후에도 그들의 활동은 계속된다. 그들은 작지만 에너지도 활력도 아주 넘쳐 난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물 가운데 가장 많이 활동하고 가장 부지런한 피조물이다. 그들은 게으름 피우거나 편안함을 탐하는 일이 없다. 그들은 배를 채운 후에도 여전히 앞으로 살날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그들의 내일과 생존을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 그들은 다양한 선율과 다채로운 박자의 노래들을 조용히 흥얼거리며 스스로에게 힘찬 기운을 북돋아 준다. 또한 온 풀숲, 숲속, 모든 토양에도 즐거움을 선사하며, 언제나 특별한 하루, 남다른 한 해를 만들어 준다…. 그들은 각자의 언어와 각자의 방식으로 땅 위의 각종 생물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또한 각자 특별한 생존의 궤적으로 다른 만물에게 이정표가 되어 주며 족적을 남긴다…. 그들은 흙과 풀과 숲과 매우 친밀하여 이들에게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기도 하고, 창조주가 각각의 생물에게 한 당부와 안부를 전해 주기도 한다….
창조주가 자신이 만든 만물을 두루 살피고 있던 그 시각, 그의 두 눈은 숲에, 큰 산 사이에 머물렀으나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말씀이 있고 난 후, 무성한 숲속에, 그리고 산속에는 이전의 피조물과는 다른 부류의 피조물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말씀한 ‘짐승’이다. 그들은 예사롭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머리와 꼬리를 흔들며 어슬렁어슬렁 걸어온다. 보라. 털이 난 것이 있는가 하면 딱딱한 껍질이 있는 것이 있고, 어떤 것은 이를 드러내고 어떤 것은 입을 벌리고 있다. 또 목이 긴 것이 있는가 하면 꼬리가 짧은 것이 있고, 어떤 것은 두 눈에 살기를 띠고 있고, 어떤 것은 두려워하는 눈빛을 띠고 있다. 몸을 굽히고 풀을 뜯고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입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두 발로 뛰어다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네 발로 움직이는 것이 있고, 또 나무에 기어올라가 멀리 바라보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은 숲속에 숨어 기다리고 있고, 어떤 것은 쉴 만한 동굴을 찾는가 하면 어떤 것은 또 평원을 내달리며 장난치고, 어떤 것은 수풀을 헤치며 다닌다. 포효하는 것도, 으르렁대는 것도 있고, 미친 듯이 짖어 대는 것도, 울부짖는 것도 있다. 그들이 내는 소리는 높은 것도, 나지막한 것도 있고, 우렁찬 것도, 맑고 청아한 것도 있다. 어떤 것은 무섭게 생겼고, 어떤 것은 예쁘장하고, 어떤 것은 역겹게 생겼는가 하면 어떤 것은 아름다워 호감 가게 생겼고, 어떤 것은 그 생김새가 공포감을 주고, 어떤 것은 귀여움이 철철 넘친다. 그들이 하나하나 속속 걸어 나온다. 보라. 그들 모두 의기양양하고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며, 누구를 상대하려 하지도 않고 누구에게도 눈길 한 번 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 창조주가 자신들에게 부여한 특별한 생명을 받아, 거친 야수성과 난폭성을 지니고 숲과 산속에 나타났다. 그들이 그렇게 ‘안하무인’ 격으로 기세가 등등해도 그들이 산과 숲의 진정한 주인인 것을 어쩌겠느냐? 창조주가 그들에게 나타나라 명령한 그 순간부터, 그들은 숲과 산을 ‘강점’했다. 창조주가 이미 그들의 경계를 정하고 그들의 생존 범위를 정해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산과 숲의 진정한 제왕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처럼 야수성을 지니고 ‘기고만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야수’로 불리는 까닭은, 만물 가운데 그들만이 진정으로 야수성과 난폭성을 지니고 있는 길들이기 어려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길들여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사육될 수 없고, 인류와 화목하게 살 수 없으며, 인류를 위해 일할 수 없다. 그들이 사육될 수 없고 인류를 위해 일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인류를 멀리해야 하고, 인류도 그들을 가까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인류를 멀리하고 인류가 그들과 가까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창조주가 부여한 책임, 즉 산과 숲을 지키는 일을 완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야수성으로 산과 숲을 지키며, 야수성으로 번식을 위한 최적의 보장을 받게 된다. 아울러, 그들의 야수성은 또 만물의 균형을 보장하고 유지하게 만들 것이다. 그들의 출현은 산과 숲에 의지처를 제공했으며, 적적하고 쓸쓸하던 산과 숲에 생기와 활력이 넘치게 하였다. 그때부터 산과 숲은 그들의 영원한 서식지가 되었고, 그들은 영원히 자신들의 집을 잃지 않게 되었다. 산과 숲은 그들을 위해 생기고 존재하며, 그들은 장차 산과 숲을 지키기 위해 맡은 책임을 다하고, 최선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창조주가 자신들에게 당부한 것, 그들의 영토를 지키고 그들의 야수성을 유지함으로 창조주가 정한 만물의 균형을 유지하고, 창조주의 권병과 능력을 나타내는 것을 엄격하게 준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89)
창조주 권병 아래의 만물은 다 완전무결하다
새와 어류, 나무와 화초처럼 움직일 수 있는 것과 움직일 수 없는 것, 그리고 여섯째 날에 만들어진 집짐승, 곤충, 들짐승을 포함하여 하나님이 만든 만물은 하나님이 보기에 다 좋았던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이 보기에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가장 완벽하고 아름답게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였다. 창조주는 그의 계획에 따라 하고자 한 사역을 순서대로 하나씩 이루었다. 그가 창조하고자 한 것들이 한 가지씩 나타났고, 나타난 것마다 모두 창조주 권병의 구현이자 그의 권병이 가져온 결정체였다. 이 결정체는 모든 피조물들로 창조주의 은혜와 공급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가 나타남으로 이 세계는 점차 하나님이 만든 만물로 풍요로워졌다. 혼돈하고 캄캄했던 세계가 맑고 깨끗하게 변화되었고, 적막하던 세계가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세계로 변화되었다. 창조된 만물은 큰 것에서 작은 것까지, 작은 것에서 미세한 것까지, 창조주의 권병과 능력으로 창조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또한 모든 피조물은 그것만이 갖는 정해진 존재의 필요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형식이나 구조가 어떻게 다르든지 간에, 창조주의 창조에서 온 것이면, 그것은 모두 창조주의 권병 아래에 생존하게 된다. 간혹 사람은 못생긴 곤충을 보면 “왜 이리도 못생겼어? 하나님이 절대 이렇게 못생긴 것을 만드셨을 리 없으니 이건 절대 하나님이 만드신 게 아니야.”라고 한다. 그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관점이다!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 곤충은 유난히 못생기긴 했지만, 이것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니 분명히 이것만의 특별한 쓰임새가 있을 거야.” 하나님은 그가 만들려는 모든 생물들이 다양한 생김새를 가지고 각양각색의 기능과 용도가 있도록 다 생각해 두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든 만물은 천편일률적이지 않으며, 외형부터 내면의 구조까지, 생활 습관부터 각자 차지하고 있는 위치까지 다 다르다. 소는 소의 생김새가 있고, 나귀는 나귀의 생김새가 있으며, 사슴은 사슴의 생김새가 있고, 코끼리는 코끼리의 생김새가 있다. 누가 제일 예쁘고 누가 제일 못생겼다고 하겠느냐? 누가 가장 쓸모가 있고, 누가 가장 불필요한 존재라고 하겠느냐? 어떤 이는 코끼리의 모습을 좋아하지만 코끼리를 이용해 밭을 가는 자는 없다. 어떤 사람은 만물 가운데 가장 위엄 있게 생겼다며 사자, 호랑이의 모습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 사자와 호랑이를 애완동물로 키울 수 있느냐? 요컨대, 만물을 대함에 있어, 사람은 창조주의 권병에 순종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즉, 창조주가 만물에게 정해 준 규칙에 순응하는 이런 태도야말로 가장 현명한 것이다. 또한, 창조주의 초심을 찾고 순종하는 태도야말로 창조주의 권병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에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
이때에 이르러, 창조주 권병 아래의 만물은 창조주의 주재에 새 악장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창조주의 새날의 사역에 눈부신 서막을 열 것이며, 창조주도 그 순간 자신의 경영 사역에 새로운 장을 열 것이다! 만물은 창조주가 정한 ‘봄에 싹트고 여름에 무성해지고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저장하는’ 이 법칙과 창조주의 경륜에 따라 서로 함께 호응할 것이다. 그들은 각자 새로운 날과 새로운 시작, 그리고 새로운 생명 여정을 맞이할 것이고, 또한 창조주 권병의 주재 아래에서의 하루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쉼 없이 성장하고 번성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90)
피조물과 비피조물 모두 창조주의 신분을 대체할 수 없다
만물을 창조하면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유를 창조했기 때문에 그가 어떤 방식으로 만유를 창조했든, 그가 어떤 이유로 만유를 창조했든 간에, 어쨌든 만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기고, 세워지고,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병이다. 인류가 이 세상에 아직 출현하지 않았을 때, 창조주는 그의 능력과 권병으로 인류를 위해 만유를 창조했고, 그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인류를 위해 적합한 생존 환경을 예비했다. 그가 행한 이 모든 일은 다 장래에 자신의 생기를 얻게 될 인류를 위해 예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류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권병은 인류와는 다른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나타났는데, 크게는 천체, 광명체, 바다, 육지가 있고, 작게는 날짐승과 길짐승 및 각종 곤충과 미생물이 있다. 또한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각종 균류까지 그 어느 것도 창조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어느 것 하나 창조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번식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또 어느 것 하나 창조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주의 주재 아래 살지 않는 것이 없다. 그들은 비록 창조주의 생기를 얻지 못했지만, 다양한 형식과 구조로 창조주가 그들에게 부여한 생명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창조주가 인류에게 부여한 언어 능력을 받지 못했지만, 그들 각자는 창조주에게서 인류의 언어와는 또 다른, 생명의 표현 방식을 얻었다. 창조주의 권병은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사물에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어 그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각종 살아 있는 존재에게 번식 능력을 주어 영원히 자취를 감추지 않고 창조주가 부여해 준 생존 법칙과 규칙을 대를 이어 전하게 할 수 있다. 창조주가 권병을 행하는 방식은 거시적, 미시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고, 어떠한 형식에도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하늘의 운행을 주관하고 만물의 존망을 주재하며, 만물을 움직여 자신을 위해 봉사하게 할 수 있다. 그는 산천과 호수의 운행을 주관하고, 그 가운데 있는 만물도 주재하며, 만물이 필요로 하는 바를 공급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이외의 만물 가운데서 나타나는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병이다. 이는 한 번의 생이나 하나의 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영원히 멈추지 않고 쉬지 않는다. 또한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이를 바꾸거나 파괴할 수 없고, 더하거나 제할 수 없다. 창조주의 신분은 아무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피조물도 창조주의 권병을 대체할 수 없고, 그 어떤 비피조물도 그 권병에 이를 수 없다. 예컨대, 하나님의 사자나 천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갖지 못했고, 창조주의 권병은 더더욱 갖지 못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권병이 없는 까닭은 그들이 창조주의 본질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피조물 가운데, 예컨대 하나님의 사자와 천사들은 하나님을 대신해 어떤 일들을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대표할 수는 없다. 그들이 인류에게는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권병은 갖지 못했다. 하나님처럼 만유를 창조하고 주관하고 주재하는 권병은 갖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함은 그 어떤 비피조물도 대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 역시 그 어떤 비피조물도 대체할 수 없다. 성경에서 만물을 창조했다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느냐? 하나님은 왜 그의 사자와 천사를 보내 만물을 창조하게 하지 않았을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권병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병을 행할 능력이 없다. 모든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창조주의 주재 아래 있고, 창조주의 권병 아래 있으며, 창조주는 그들에게도 하나님이자 주재자이다. 신분의 높고 낮음, 귀하고 천함, 능력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그들 가운데 그 어떤 자도 창조주의 권병을 초월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 그 누구도 창조주의 신분을 대체할 수 없으며, 그들은 영원히 하나님이라고 불릴 수 없고, 영원히 창조주가 될 수도 없다.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이며 사실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91)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과 언약을 세우다
창 9:11~13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만물을 창조한 후, 창조주의 권병이 ‘무지개 언약’으로 또 한 번 입증되고, 나타나다
창조주의 권병은 언제나 모든 피조물 가운데 나타나고 행사된다. 그는 만물의 운명을 주재할 뿐 아니라, 그가 친히 빚은 인류, 즉 다른 구조와 형식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이 특별한 피조물 역시 주재하고 있다. 만물을 창조한 후에도 창조주는 그의 권병과 능력을 나타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인류가 그의 손에 탄생된 순간부터 자신이 만물과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권병을 본격적으로 행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인류를 경영하고 주재하기로 하였고, 인류를 구원하고 진정으로 인류를 얻고자 하였는데, 바로 만물을 관리할 수 있는 인류를 얻고자 한 것이다. 그는 그러한 인류가 그의 권병 아래 살아가며, 그의 권병을 알고 그의 권병에 순종하도록 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본격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말씀으로 그의 권병을 나타내고, 그의 권병으로 자신의 말씀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권병은 어디서든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너희가 하나님의 유일무이함과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권병을 이해하고 알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친숙한 일부 특별 사례들만을 뽑아 보았다.
창세기 9장 11절에서 13절 말씀은 위에서 얘기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기록과 관련된 말씀과는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다른 부분도 있다. 유사한 부분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말씀으로 자신이 하고자 한 일을 행한 것이다. 다른 부분이라면 이 단락의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의 대화라는 점이다. 이 대화는 사람과 언약을 세우고 사람에게 언약에 대해 알려 주는 내용이다. 이때 하나님 권병의 행사는 사람과의 대화 가운데 이루어졌다. 즉, 인류가 창조되기 이전까지 하나님의 말씀은 일종의 지시이자 명령이었으며, 그가 만들고자 하는 피조물을 향한 선포였다. 그러나 이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대상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말씀은 사람과의 대화이자, 인류에게 하는 당부이자 훈계이고, 그가 만물에게 하달하는 권병을 지닌 명령이기도 했다.
이 단락에서는 하나님이 어떠한 일들을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느냐? 여기에는 홍수로 세상을 멸한 후, 하나님이 사람과 언약을 세우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을 것임을 알려 주고, 또한 이를 위해 하나님이 증거를 세운다고 하였다. 그 증거는 무엇이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이것은 창조주가 인류에게 한 원래의 말씀이다. 그가 말씀함과 동시에 무지개가 사람들 눈앞에 나타났고,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너희 모두 무지개를 본 적이 있을 텐데, 무지개를 보았을 때 그 무지개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알았느냐? 과학으로는 이 사실을 논증할 방법이 없다. 과학으로는 그 근원을 찾지 못했으며, 행방도 찾지 못했다. 이는 창조주가 사람과 세운 언약의 증거이기 때문에, 과학적 근거는 필요 없다. 이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창조주의 말씀이 있고 난 후 권병이 지속되는 결과인 것이다. 창조주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사람과 세운 언약과 약속을 지켜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무지개를 출현시켜 하나님이 세운 언약의 증거로 삼은 것은 창조주에게나 창조된 인류에게 있어, 영원히 바꿀 수 없는 천상의 규율이자 법칙인 것이다. 변함없이 지속되는 이 법칙은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하고 난 후 그의 권병이 또 한 번 진정으로 구현된 것이며, 창조주의 권병과 능력은 무한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지개’를 그 언약의 증거로 삼은 것은 창조주 권병의 지속이자 연장선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또 한 번 말씀으로 행한 일이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과 세운 언약의 증거이다. 이는 그가 무엇을 이루고자 결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이루고 성취하겠다고 하면, 그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사람에게 알려 준다. 하나님만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이런 말씀이 있고 난 몇천 년 후인 오늘날에도 인류는 하나님이 말씀한 무지개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로 인해, 이 일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변함이 없다. 그 누구도 그 무지개를 없어지게 할 수 없고, 그것의 규칙을 바꿀 수도 없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병이다. “하나님은 말씀하면 반드시 책임지고, 책임지는 이상 반드시 이루며,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영원까지 지속된다.” 이 말은 여기서 아주 명확하게 구현되는데, 바로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의 확실한 증거이자 특징이다. 이러한 증거와 특징은 그 어떤 피조물도 갖추지 못한 것이고, 그 어떤 피조물에게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어떤 비피조물 가운데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증거와 특징은 유일무이한 하나님만이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주 고유의 신분과 본질을 피조물과 구분시켜 준다. 아울러, 그것은 하나님 자신 이외의 모든 피조물과 비피조물이 영원히 초월할 수 없는 증거이자 특징인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사람과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그는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줌과 동시에 그의 뜻도 알려 주었다. 이를 위해 그는 고유한 방식으로, 특별한 증거를 사용해서 사람과 언약을 세우고, 그 증거로 그가 사람과 세운 언약에 확신을 준 것이다. 이 ‘언약’을 세웠다는 건 큰 사건이 아니냐? 얼마나 큰 사건일까? ‘언약’의 특별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약이 아니며, 단체와 단체 간의 언약도, 한 국가와 또 다른 국가 간에 세운 언약도 아니다. 이건 창조주가 인류 전체와 세운 언약이다. 이 ‘언약’의 유효 기간은 창조주가 만물을 폐기하는 그날까지이며, 이 ‘언약’의 시행자는 창조주이고, 그것의 수호자 역시 창조주이다. 요컨대, 인류와 세운 ‘무지개 언약’의 모든 것은 창조주와 사람의 대화에 따라 응하고 이루어졌으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권병에 순종하고, 따르고, 신뢰하며, 그 권병을 깨닫고, 목도하고, 칭송하는 것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느냐? 유일무이한 하나님 이외에 이러한 언약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매번 나타나는 무지개는 인류에게 창조주가 사람과 세운 ‘언약’을 알려 주고 상기시켜 준다. 창조주가 인류와 세운 언약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가운데, 그것이 인류에게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은 ‘무지개’와 ‘언약’ 자체가 아니라, 창조주의 영원불변의 권병인 것이다. 무지개의 출현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창조주가 은밀한 곳에서 행하는 놀랍고도 오묘한 행사이며, 창조주의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변치 않는 권병의 생생한 구현이다. 이런 것들은 창조주의 또 다른 면에서 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권병의 구현이 아니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92)
하나님의 축복
창 17:4~6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창 18:18~19(중국어성경 직역) “아브라함은 반드시 강대한 나라가 되고 땅의 만국은 필히 그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니라 내가 아브라함을 택한 것은 그로 그의 자식과 권속들에게 나 여호와의 도를 지킬 것을 명함으로 의와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 이로써 내가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 것이라”
창 22:16~18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욥 42: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창조주만의 말씀 방식과 특징은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신분과 권병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고 얻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원칙이 있고, 그의 방식대로 사람에게 복을 내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약속을 하고 얼마만큼의 은혜를 베풀어 주는지는 사람의 생각과 행위에 따라 분배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을 설명할까? 사람에게 그 안에서 무엇을 보게 할까? 여기서 우리는 잠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는지, 하나님이 축복해 주는 원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접어 두자. 하나님의 권병을 알아 가는 것을 목표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살펴보자. 즉, 하나님의 권병을 알아 가는 면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자.
이상 네 단락의 성경 내용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준 축복에 관한 기록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욥과 같은 하나님이 복을 내리는 대상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고, 또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복을 내리는 이유와 그 복의 내용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어조, 말씀하는 방식과 하나님이 서 있는 위치와 높이를 통해, 사람은 복을 내리는 자와 받는 자의 신분과 지위, 그리고 본질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어조와 방식, 그리고 하나님의 위치는 창조주의 신분을 가진 하나님만의 것이다. 그는 권병과 위력은 물론 창조주의 존귀함과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의 위엄을 지니고 있다.
먼저 창세기 17장 4~6절 말씀을 보자.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이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린 축복이다. 하나님이 그를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고, 그의 후손을 번성케 하리라 하였다. 또한 나라들이 그를 좇아 일어나고 열왕이 그를 좇아 일어나리라고 말씀하였다. 너는 이 몇 마디 말씀에서 하나님의 권병을 보지 못했느냐? 너는 하나님의 권병을 어떻게 보았느냐? 너는 하나님 권병의 어떠한 본질을 보았느냐? 이 구절들을 자세히 읽다 보면, 하나님의 권병과 신분이 하나님의 어휘 사용에서 확연히 나타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 될찌라 … 내가 너로 … 하리니” 이 중에서 ‘너는 … 될찌라’, ‘내가 … 하리니’ 등의 표현에서 하나님 신분과 권병이 나타나는 확고한 어휘 사용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창조주의 신실함이요, 또 한편으로는 그것은 모두 창조주의 신분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전용 어휘이자 관용어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축복하기를, 후손이 번성하고 나라들이 그를 좇아 일어나고 열왕이 그를 좇아 일어난다고 했다면, 이는 확실히 하나의 바람일 뿐이지 약속이나 축복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감히 “나는 반드시 너로 하여금 어떠하게 할 것이다. 나는 너를 어떠어떠하게 하겠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사람은 자신에게 이러한 결정권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설사 이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빈말일 뿐이고 헛소리일 뿐이며, 사람의 욕망과 야심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다. 사람의 욕망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감히 이렇게 큰소리칠 수 있겠느냐? 사람은 누구나 좋은 소망을 갖기 마련이어서, 후손들이 모두 출세하고 남보다 뛰어나기를 바란다. ‘만일 황제가 되는 후손이 있을 수 있다면, 그건 크나큰 행운이야! 성장(省長)만 될 수 있어도 괜찮아. 어쨌든 높은 사람이면 돼!’ 이 모든 것들은 사람의 바람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저 후손을 위해 축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다른 어떤 누군가의 약속을 이루어 줄 수는 없다. 인간에게 거기까지 가능하게 하는 권력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도 잘 안다. 자신의 일도 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어찌 다른 사람의 운명을 주관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할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는 그런 권병이 있어서 사람과 약속한 것, 사람에게 축복한 모든 것들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며, 하나님께 있어 사람의 후손을 번성케 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가 누군가의 후손을 번성하게 하는 것은 단 한 마디로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그는 한 번도 이 때문에 수고한 적이 없다. 또한 이 때문에 머리를 쓰거나 고민해 본 적도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자 하나님의 권병이다.
창세기 18장 18절 “아브라함은 반드시 강대한 나라가 되고 땅의 만국은 필히 그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니라(중국어성경 직역)”라는 말씀을 보고 난 후, 너희는 하나님의 권병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창조주의 비범함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창조주의 지고지상함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 말씀은 아주 확실하다. 하나님의 이런 말씀은 하나님께 필승을 자신하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한 것이 아니고, 그런 확신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하나님 말씀이 지닌 권병을 입증하는 것이자 그의 말씀이 이뤄지도록 하는 일종의 명령이다. 여기에 너희가 주목해야 할 어휘가 두 가지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은 반드시 강대한 나라가 되고 땅의 만국은 필히 그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니라(중국어성경 직역)”라고 한 말씀에 모호한 부분이 있느냐? 걱정의 요소가 있느냐? 두려움의 요소가 있느냐? 이런 것들은 인류에게서 자주 드러나는, 사람만이 갖고 있는 요소이다. 하나님 말씀 속의 ‘반드시’와 ‘필히’라는 이 두 어휘 때문이라도, 사람의 그런 요소는 창조주와는 조금이라도 연관된 적이 없다. 그 누구도 타인을 축복할 때 이런 어휘를 감히 사용하지 못한다. 또한 그 누구도 감히 단정적으로 타인에게 강대한 나라를 주겠다는 복을 내리지 못하며, 천하 만민이 필히 그로 인하여 복을 받을 거란 약속을 하지 못한다. 하나님 말씀이 확실할수록 그 말씀은 무엇을 증명할까?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이런 권병이 이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하고, 하나님은 이 일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리란 걸 증명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린 이 모든 축복은 하나님의 마음속에선 매우 확실해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말씀에 따라 이 모든 일을 이루고자 하였으며, 그 어떤 세력도 이 일의 이룩을 바꾸거나 저지하거나 파괴하거나 교란시킬 수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 말씀의 이룩과 성취를 멈추게 하거나 영향을 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가 하는 말씀의 위력이며, 부인할 수 없는 창조주의 권병인 것이다! 네가 이 말씀을 다 읽었을 때, 마음속에 의혹이 일겠느냐?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과 위엄, 권병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위력과 권병, 그리고 일이 성취되리란 필연성은 그 어떤 피조물과 비피조물도 이를 수 없고 초월할 수 없는 것이다. 창조주만이 이러한 어조와 말투로 인류와 대화할 수 있다. 사실을 통해 그의 약속이 빈말이나 허풍이 아니며,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이 초월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권병의 발현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93)
창 17:4~6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창 18:18~19(중국어성경 직역) “아브라함은 반드시 강대한 나라가 되고 땅의 만국은 필히 그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니라 내가 아브라함을 택한 것은 그로 그의 자식과 권속들에게 나 여호와의 도를 지킬 것을 명함으로 의와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 이로써 내가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 것이라”
창 22:16~18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욥 42: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나님의 이 말씀들을 보고 너는 하나님 말씀의 위력과 권병을 느꼈을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면, 너는 어떤 느낌을 받을 것 같으냐? 너무 교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가 허풍을 떤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자신을 과시한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그 사람은 그런 능력이 없고 그런 권병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이런 일들을 이룰 수 없다. 그가 이렇게 확신에 차 약속했다면, 그건 단지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지껄인 것에 불과하다. 만일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건 교만하고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이며, 전형적인 천사장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틀림없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다면, 네가 그 안에서 교만함을 느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농담처럼 느껴지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권병이며 사실이다. 그의 말씀이 입에서 나오기 전, 그가 어떤 일을 이루고자 마음먹었다면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말씀은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이며,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다. 그 약속은 이미 결정된 사실이자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점차 실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했다고 하나님께 교만한 성품이 있음을 뜻하진 않는다.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룰 수 있고, 그 일을 완벽하게 이룰 수 있는 능력과 권병을 가지고 있고, 그 일들을 이루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능력 범위 안의 일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라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면, 하나님의 진정한 성품이 나타나고 발현된 것이고, 하나님의 본질과 권병이 완벽하게 구현된 것이며, 창조주 신분에 가장 적합하고 합당한 증거인 것이다. 말씀을 하는 이러한 방식, 어조, 어휘는 바로 창조주 신분의 상징이며, 하나님 자신의 신분에 완전히 부합되는 표현이다. 여기에는 어떤 거짓도 불순함도 없으며, 온전히 창조주의 본질과 권병이 완벽히 나타나 있다. 하지만 피조물에게는 이러한 권병도 없고 이러한 본질은 물론 하나님이 부여한 능력도 없다. 만일 사람이 이런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건 의심할 여지 없이 패괴 성품의 분출이자, 꿈틀거리는 교만과 야심이며,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미혹하고 유인하는 전형적인 마귀와 사탄의 악독한 본심이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언어적 노출을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과 자리를 다투고 하나님을 사칭하며, 하나님을 대신하고 싶어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어조를 흉내 내는 너의 속내는 사람들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원래 하나님께 속해야 하는 인류를 빼앗으려는 것이다. 이것은 영락없는 사탄이고, 천사장의 후예가 하는 행위이며, 하늘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너희 중에는 하나님을 모방하여 어떤 방식으로 말을 했던 자가 없느냐? 사람을 오도하고 미혹시킬 마음을 품고, 사람들에게 자신은 하나님의 권병과 위력을 가지고 말하고 일하며, 자신의 본질과 신분은 남다르며, 심지어 어조가 하나님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느낌을 주려고 했던 자가 없느냐? 너희는 이런 일들을 한 적이 없느냐? 하나님의 말투를 모방해서 말하고, 소위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한다는 손짓을 하며, 하나님의 위력과 권병을 가진 척 가장한 적이 없느냐? 이런 건 너희들 대다수가 걸핏하면 저지르거나, 아니면 하려고 마음먹은 행위들이 아니냐? 이제 너희는 창조주의 권병을 진정으로 보고 느끼고 알게 되었는데, 과거 너희가 행하고 드러냈던 행동들을 돌이켜 보면 역겹지 않으냐? 너희의 비열하고 파렴치했던 모습을 알게 되지 않았느냐? 이런 부류의 성품과 본질을 해부해 보면, 그들은 저주받아 마땅한 지옥의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으냐? 이런 일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굴욕을 자초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지 않으냐? 너희는 이 성질의 심각성을 알고 있느냐? 어느 정도로 심각한 것이냐?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모방하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자 하는 속내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를 없애고,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는 하나님을 쫓아내고, 자신이 사람을 통제하고 차지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는 모두 이러한 욕망과 야심이 있다. 사람은 모두 이렇게 사탄의 패괴 본질 속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면서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는 사탄의 본성 속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의 권병과 관련된 주제를 교제했는데, 너희에겐 아직도 하나님을 사칭하고 하나님을 모방하고 싶은 욕망과 야심이 있느냐? 아직도 하나님 노릇을 하고 싶은 욕망이 있느냐? 아직도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느냐? 하나님의 권병은 사람이 능히 모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는 사람이 사칭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너는 하나님이 말씀하는 어조를 흉내 낼 순 있지만, 하나님의 본질을 모방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을 사칭할 수는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이나, 만물을 주재하고 주관하는 일은 영원히 행할 수 없다. 하나님이 보기에 너는 영원토록 아주 하찮은 피조물일 뿐이다. 네 능력과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고, 네가 아무리 많은 은사를 가졌어도, 너의 모든 것은 창조주의 권세 아래 있다. 네가 몇 마디 모진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너에게 창조주의 본질이 있다고 할 수 없으며, 네가 창조주의 권병을 가졌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지,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니며, 외부로부터 더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본질이다. 그러므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창조된 인류의 일원으로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본위를 지켜야 하며, 성실한 사람이 되어 분수에 맞게 창조주가 맡긴 사명을 지켜야 한다. 도가 넘치는 일을 해선 안 되고, 자신의 ‘능력 범위’ 밖의 일을 해서도 안 되며, 하나님이 증오하는 일을 해서도 안 된다. 위인이나 초인, 고귀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되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들은 사람에게 있어선 안 되는 ‘소망’이다. 위인이나 초인이 되고자 하는 건 허무맹랑한 일이고,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건 더더욱 파렴치한 일이자 혐오감을 불러오는 일이며 버림받아 마땅한 일이다. 반대로 진정한 피조물이 되는 것이야말로 귀한 것이고, 피조물이 가장 지켜야 할 바이며,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목표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94)
창조주의 권병은 시간, 공간, 지리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창세기 22장 17절에서 18절을 보자.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였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여러 차례 축복하며 그의 자손을 크게 성하게 하리라고 했다. 그 정도가 얼마나 된다고 했느냐? 성경 구절처럼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한다’고 했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줄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그저 형상적인 언어일 뿐이다. 하지만 이 형상적인 언어를 통해 하나님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줄 후손이 한둘이 아니고 수천수만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나라를 이룰 정도가 된다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여러 나라의 아비가 되리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까지 많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달린 일이냐, 하나님에게 달린 일이냐? 자신의 후손이 얼마가 될지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느냐?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느냐?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게 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후손이 몇 명일지조차도 사람은 결정할 수 없다. 누가 자신의 자손이 별과 같이 많아지기를 바라지 않겠느냐? 하지만 아쉽게도 세상일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되든,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든 상관없이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예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 너에게 주는 대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적게 주었는데 네가 너무 많이 받게 되는 법은 없다. 하나님이 네게 많이 준다면, 네가 많다고 탓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냐?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으로,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은 다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으며,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네 씨로 크게 성하게 하리라고 한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이다. 이 언약은 ‘무지개 언약’처럼 영원히 이뤄질 것이며,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기도 하다. 이 약속을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사람이 믿든 안 믿든, 받아들이든 못 받아들이든,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어떤 식으로 보고 대하든 상관없다. 이 모든 것은 장차 하나님의 말씀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의지나 생각이 바뀐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며, 그 어떤 사람이나 일, 사물의 변화에 의해 변하는 것도 아니다. 만물이 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만물이 사라지는 그 날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이뤄지는 날이다. 그는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그는 창조주의 권병을 지녔으며, 창조주의 능력이 있고, 만유와 모든 생명을 주관한다. 그는 무에서 유를, 유에서 무를 가능케 하며, 모든 생과 사의 전환을 주관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자손을 번성케 하는 것은 하나님께 있어선 지극히 간단한 일이다. 사람이 듣기에는 천일야화나 동화 속 이야기 같은 일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하나님이 하고자 결정한 일이나 사람에게 약속한 일은 천일야화나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하나님이 이미 목격한 사실이며,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다. 너희는 여기에 대한 체득이 있느냐? 아브라함의 후예가 많은지 사실이 증명하고 있지 않으냐? 얼마나 많으냐?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과 같지 않으냐? 각 나라, 각 지역, 세계 각지에 널리 퍼져 있지 않으냐? 이러한 사실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냐? 하나님 말씀의 권병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난 후, 몇백 년 혹은 몇천 년 동안 그 말씀은 계속해서 이뤄지고, 끊임없이 현실화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위력이자 하나님 권병의 증거이다.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할 때,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이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로,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 일의 성취와 응답은 시간 차 없이 그 즉시 이루어졌다. 이 또한 다 하나님의 권병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한 일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 권병의 또 다른 면의 본질을 보고, 창조주의 권병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과, 그 권병의 더 실질적이고 훌륭한 면도 알 수 있게 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자마자 하나님의 권병은 그 사역을 주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한 것들이 점차 현실이 되기 시작하였다. 만물의 모든 것이 다 이로 인해 다양한 변화를 맞았다. 일례로, 봄이 오면 풀이 파릇파릇해지고 꽃이 피고 나무에 싹이 튼다. 새들이 노래하기 시작하고 기러기들이 돌아오며, 논밭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이에 발맞춰 만물도 다시 소생한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놀라운 행사이다.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이룰 때, 하늘과 땅의 만물이 다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새로워지고 변화되는데, 그 어떤 것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이루기 위해 만물이 다 힘쓰며 움직이게 된다. 모든 피조물이 다 창조주의 권세 아래 지배되고 안배되어 각자의 역할을 다하고 각자의 기능을 다한다. 창조주의 권병은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너는 하나님의 권병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권병에 정해진 범위가 있느냐? 시간적 제약이 있느냐? 하나님 권병의 높고 낮음과 길고 짧음을 논할 수 있느냐? 크고 작음과 강함과 약함을 논할 수 있느냐? 사람의 기준으로 헤아릴 수 있느냐? 하나님의 권병은 사라졌다 나타나고 있다가도 없는 것이 아니며, 아무도 그의 권병이 얼마나 큰지 가늠할 수 없다.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복을 내리면, 시간이 얼마 걸리든지 간에 그가 내린 복은 지속된다. 그 지속됨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권병을 증거하고, 창조주가 가진 영원불멸의 생명력이 수없이 재현되는 것을 사람에게 보여 준다. 그의 권병은 나타날 때마다 그의 말씀을 완전하게 구현해 내어 만물과 인류에게 보여 준다. 그리고 그의 권병이 이룬 일은 하나같이 더없이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완전무결하다. 그의 생각, 그의 말씀, 그의 권병과 그가 이룬 일은 전부 그 어떤 것도 비할 수 없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피조물에게 있어서 그 의의와 가치는 인류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약속한 후에는, 그 사람이 어디서 태어났든, 무엇을 하든, 약속받기 전후로 그의 사정이 어떻든, 그의 생존 환경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든, 하나님은 모두 환히 알고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하나님이 보기에는 다 방금 일어난 일과 같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류에게 한 모든 약속을 추진하고 주관하고 실현시키는 능력과 권병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약속이 무엇이든 간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간에, 시간, 장소, 종족 등 그 약속의 실현이 관련된 범위가 얼마나 넓든 상관없이, 그 약속은 이루어지고 실현된다. 게다가 이는 하나님께 있어서 전혀 힘들지 않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이 주관하는 범위는 우주 전체, 인류 전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빛을 만들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빛만 관리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물을 만들었으니 물만 관리하고, 나머지 일은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한다면 오해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몇백 년 후, 그 일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그 약속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여전히 이루어져 가는 과정 중에 있고,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다. 그 기간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권병을 행하였는지, 만물을 어떻게 지배하고 안배했는지,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가운데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는지, 인류는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권병과 그의 행사에서 나타난 탁월한 면면들은 만물 가운데 전해지며 칭송되고 있고, 만물은 창조주의 놀라운 행사를 나타내며 전하고 있다. 창조주가 만물을 주재하는 갖가지 미담들은 만물을 통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은 하나님이 어디에나 항상 존재함을 만물에게 보여 준다. 네가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은 어디에나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은 시간, 지리, 공간, 그리고 그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의 제약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의 범위는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며, 사람이 헤아릴 수 없고 상상하기 어려우며, 영원히 다 알 수 없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95)
추리하고 상상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이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느냐? 사람의 추리와 상상력으로 하나님 권병의 진정성과 확실성을 그려 낼 수 있느냐? 사람에게 하나님의 권병을 알게 할 수 있느냐? 진정 하나님의 권병을 깨닫고 순종하게 할 수 있느냐? 사람의 추리와 상상력은 사람 두뇌 작용의 산물일 뿐 하나님의 권병을 아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이 증명하고 있다. 공상 과학 소설을 읽어 본 사람은 달이 어떤 모양인지 상상할 수 있고, 우주의 행성들이 어떠한지 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사실이 하나님의 권병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상상은 그야말로 상상일 뿐이며, 사실이 어떤지, 다시 말해서 이 일련의 일들과 하나님의 권병이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사람의 생각으로는 절대 알 수 없다. 설령 네가 달에 가 봤다 한들 어쩌겠느냐? 하나님의 권병에 대해 여러 측면으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의 범위가 얼마나 큰지 상상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사람의 추리와 상상력으로는 하나님의 권병에 대해 알 수 없다면, 사람은 어찌해야 하겠느냐? 가장 현명한 선택은 추리와 상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권병을 알아 가는 데 있어, 절대 상상이나 추리에 의존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 하나님 자신의 신분,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은 너의 상상력으로 인식 가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상상력으로 알 수 없다면, 어떤 방법을 통해야 하나님의 권병을 진정으로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과 교제를 통해,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체험을 통해, 점차적으로 체득하고 실증해 가며 깨달으면서, 한 걸음씩 깊이 있게 알아 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병을 알아 가는 유일한 길이며, 이 외에 다른 지름길은 없다. 너희에게 상상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저 앉아서 기다리라는 말도,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다. 머리로 생각하고 상상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논리로 추리하지 말고, 지식으로 분석하지 말며, 과학을 근거로 삼지 말라는 뜻이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통해, 삶 속에서 접하게 되는 모든 일을 통해, 네가 믿는 하나님이 권병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증명하고 실증하라는 뜻이다. 또한 그가 너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으며, 그의 능력은 항상 그가 진정한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음을 실증하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다. 혹자는 더 간단한 방법으로 이 목표에 이르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런 간단한 방법을 너희는 생각해 냈느냐? 내가 말하지만 다른 길은 없다! 그러니 너는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을 통해, 성실하고 착실하게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인식하고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아 가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하나님의 모든 것은 공허하지 않고 실제적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96)
창조주가 만물 생령을 주관하고 주재한다는 사실은 창조주의 권병이 진실로 존재함을 말해 주고 있다
욥기에 욥에 대한 여호와의 축복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욥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욥 42:12). 인류에게 있어 하나님이 욥에게 베풀어 준 것들은 무엇이냐? 사람의 재산이 아니냐? 이런 재산을 소유한 욥은 그 시대에 아주 부유하지 않았겠느냐? 욥은 그 재산들을 어떻게 소유하게 된 것이냐? 그의 부는 어떻게 생긴 것이냐? 그런 재산은 당연히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욥이 그 재산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하나님의 축복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여기서 우리가 언급할 주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축복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님의 축복이란 모든 사람이 꿈에 그리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일생 동안 재산을 얼마나 얻을 수 있는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여부는 사람이 주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재산을 베풀어 주고 그 어떤 축복이라도 줄 수 있는 권병과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님의 축복에는 원칙이 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느냐?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다! 아브라함과 욥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은 같지만,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축복은 다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모래와 같이, 별과 같이 많으리라고 축복하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준 이 일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님은 한 사람의 후손, 한 종족을 강성해지게 하였다. 이 일에서 하나님이 권병으로 주재한 것은 만물 생령 중에서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인류이다. 하나님 권병의 주재 아래 이 인류는 하나님이 정한 범위와 속도에 따라 종족을 번식하며 생존해 나간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이들 족속의 생존 능력, 확장 속도, 수명은 다 하나님의 지배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한 이 모든 일의 원칙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즉,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권병의 보호 아래 막힘없이 순조롭게 실현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에 대해 말하자면, 이는 천지개벽하는 일이 일어나도, 어떤 시대에서도, 인류가 어떤 재난을 겪어도 아브라함의 후손은 다 죽음이라는 재앙의 위협에서 안전할 것이며, 그 족속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하지만 욥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그를 매우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욥에게 준 것 가운데 대부분이 숨 쉴 수 있는 여러 생명체들이었다. 그 생명체의 수, 번식 속도, 생존율, 살진 정도 등 구체적인 사항들도 다 하나님의 주관 가운데 있다. 이 생명체들은 언어 능력이 없지만 마찬가지로 창조주의 지배 아래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지배하는 원칙은 욥에게 약속한 축복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욥에게 준 축복에 대해 말하자면, 약속의 내용은 다소 차이가 날지라도 만물 생령을 주재하는 창조주의 권병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의 세부적인 내용은 아브라함과 욥에 대한 서로 다른 약속과 축복 가운데 구현되었고, 또 한 번 인류에게 하나님의 권병은 사람의 상상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것임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세부적 내용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가운데서만 하나님의 권병을 알 수 있음을 인류에게 다시 한번 알려 주고 있다.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권병에서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권병은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궁창이 있으라 하니 궁창이 생겼고 뭍이 드러나라 하니 뭍이 드러났다’는 이런 말씀에서만 구현된 것이 아니다. 더 많은 부분은 하나님이 어떻게 빛을 지속시키고, 궁창이 사라지지 않게 하며, 뭍을 영원히 물과 나뉘게 하느냐는 부분에서 구현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빛, 궁창, 뭍과 같은 피조물들을 주재하고 관리하느냐는 구체적인 내용에서 구현된다. 인류에게 준 하나님의 축복에서 너희는 또 무엇을 보았느냐? 아브라함과 욥에게 복을 준 후에도 하나님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권병은 이제 막 행해지기 시작했고, 그는 자신이 한 모든 말씀을 현실로 이루고, 자신이 한 말씀의 모든 세부 사항을 실현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이후 세월 속에서도 그가 하고자 했던 모든 일들을 계속하였다. 어쩌면 사람은 하나님께 권병이 있기 때문에 그는 말씀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만사 만물이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이런 상상은 황당한 면이 없지 않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과 언약을 세우고,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룬다는 사실을 단편적으로만 보고, 하나님의 권병으로 주재하는 만물이 생존하는 여러 현상과 사실을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권병에 대한 너의 이해는 공허하고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이런 상상을 품는 것에 대해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벌써 미궁에 빠져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상상 속 하나님은 명령만 내리는 기계일 뿐, 권병을 지닌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욥의 사례를 통해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의 실제적인 면을 보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욥을 축복한 후 제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았고, 사자에게만 일을 시키고 자신은 결과만 기다리고 있지도 않았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자마자 만물은 하나님 권병의 인도 아래 하나님이 행하고자 하는 사역에 협력하여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과 일, 사물을 예비하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하나님의 권병은 온 땅에서 행해졌고, 아브라함과 욥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고 응답하기 위한 길을 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진행될 각각의 절차와 모든 중요한 부분에 필요한 것들을 다 계획하고 예비하였다. 그 기간 하나님이 움직인 것에는 하나님의 사자뿐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하나님이 권병을 행하는 범위는 하나님의 사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만물도 움직여 하나님이 이루려는 사역에 협력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권병을 행하는 구체적인 방식이다. 너희들 가운데, 하나님의 권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은 권병과 능력이 있기 때문에 셋째 하늘이나 어떤 고정된 자리에 계시면서 그 어떤 구체적 사역을 행하지 않고 생각만으로 모든 사역을 완성할 것이라고 말이다.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긴 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그저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이 그러냐?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권병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의 권병은 진실하고 실제적인 것이지 절대 공허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의 진정성과 실제성이란 측면은 그가 만물을 창조하고 만유를 주관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가 인류를 인도하고 경영하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나타나고 구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주재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각각의 방식, 각각의 측면, 각각의 세부 내용과 그가 이룬 모든 사역, 그리고 만물에 대한 그의 이해는 확실히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이 공허한 말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 준다. 그의 권병과 능력은 항상, 모든 일에서, 나타나고 구현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권병이 실제로 존재함을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시시각각 자신의 권병과 능력으로 지속적인 사역을 하며, 만물을 주관하고 주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능력과 권병은 천사와 하나님의 사자를 포함해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 아브라함에게 어떤 축복을 주고, 욥에게는 또 어떤 축복을 주었는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결정이며, 하나님 말씀대로 된 것이다. 설사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이나 욥에게 직접 임했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행한 것일 뿐이며 모두 하나님의 권병 아래 있는 것이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재 아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성경 기록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임한 장면을 보았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무엇을 하였는지 보지 못했을지라도, 사실상 진정한 능력과 권병으로 행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설사 네가 천사나 사자에게 큰 능력이 있어 그들이 이적과 기사를 행하거나 하나님이 준 사명을 받고 일련의 일을 행하는 것을 보았을지라도, 그들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이 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일 뿐, 절대로 하나님의 권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는 창조주의 권병을 가진 사람이나 사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창조주의 권병을 행하거나 나타낼 수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97)
창조주의 권병은 영원히 바뀌지 않고 거스를 수 없다
1.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유를 창조하다
창 1:3~5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6~7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창 1:9~11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창 1:14~15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창 1:20~21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24~25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2.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과 언약을 세우다
창 9:11~13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3. 하나님의 축복
창 17:4~6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창 18:18~19(중국어성경 직역) “아브라함은 반드시 강대한 나라가 되고 땅의 만국은 필히 그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니라 내가 아브라함을 택한 것은 그로 그의 자식과 권속들에게 나 여호와의 도를 지킬 것을 명함으로 의와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 이로써 내가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 것이라”
창 22:16~18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욥 42: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이상 세 부분의 성경 내용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그의 권병을 행함에 있어 원칙이 있다는 것을 보았느냐? 예를 들어, 하나님은 무지개로 사람과 언약을 세웠다. 그는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고 더 이상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알려 주었다. 지금 사람들이 보는 ‘무지개’가 하나님이 당시 말씀했던 그 ‘무지개’가 아니냐? 그 무지개의 성격과 의미에 변화가 있느냐? 확신하건대 어떤 변화도 없다. 하나님은 그의 권병으로 이 일을 행하였고, 사람과 세운 언약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 ‘언약’이 언제 변할지는 물론 하나님이 결정한다.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라고 말씀한 후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 ‘언약’을 지키고 있다. 이 일에서 너는 또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권병과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매우 신중하고 원칙 있게 일하며 신용을 지킨다. 그의 신중함과 그가 일하는 원칙은 창조주의 거스를 수 없음과 뛰어넘을 수 없는 창조주의 권병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지고지상한 권병을 가지고 있고, 만물이 모두 그의 권세 아래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가 만물을 주재하는 능력을 갖추었을지라도,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계획을 파괴하거나 혼란을 야기한 적이 없다. 그는 권병을 행할 때마다 항상 자신의 원칙을 엄격하게 지키며, 그가 말씀한 대로, 그가 계획한 절차와 목표대로 정확하게 진행한다.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는 만물 역시 하나님 권병의 행사 원칙을 따르고 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그의 권병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의 권병이 행사하는 원칙을 바꿀 수 없다. 그가 보기에 복받는 자는 그의 권병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게 되고, 저주받는 자 역시 그의 권병으로 말미암아 벌을 받게 된다. 하나님 권병의 주재 아래,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 권병의 행사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하나님 권병이 행사하는 원칙을 바꿀 수 없다. 창조주의 권병은 그 어떤 요인의 변화로도 바뀌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권병이 행사하는 원칙 역시 그 어떤 원인에 의해서도 바뀌지 않는다. 천지가 격변한다 하더라도 창조주의 권병은 변하지 않는다. 만물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창조주의 권병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영원히 바뀌지 않고 거스를 수 없는 창조주 권병의 본질인 것이다. 이 역시 창조주의 유일무이함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98)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욥 2:6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
사탄은 창조주의 권병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만물은 규칙 속에서 생존한다
이것은 욥기에서 발췌한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그’는 욥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짧을지라도 많은 문제들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기록된 것은 하나님이 영계에서 사탄과 나눈 구체적인 대화로서, 하나님이 말씀하는 대상인 사탄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이고 명령이다. 그 명령의 세부적인 사항은 욥의 목숨과 관련되며, 하나님이 사탄에게 정해 준 욥을 대하는 마지노선에 관련된다. 즉, 오직 욥의 생명은 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먼저 이것이 하나님이 사탄에게 한 말이며, 또한 욥기의 원문과 연관시켜 볼 때 하나님이 어떠한 배경에서 이러한 말씀을 했는지도 알 수 있다. 사탄은 욥을 참소하고자 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동의를 얻어야 욥을 시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욥을 시험하고자 하는 사탄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사탄에게 이러한 조건을 걸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였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 이 말씀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느냐? 확실히 이것은 지시이고 명령이다. 이 말씀의 성격을 파악하면, 너는 이 명령의 선포자가 하나님이며, 명령을 받아들이는 자는 사탄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양자의 관계는 이 명령을 통해 이 말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보여진다. 물론 이 역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에서 볼 수 있는 영계에서의 하나님과 사탄의 관계이며, 하나님과 사탄의 신분과 지위의 차이이다. 또한 지금까지 인류가 구체적인 사례와 구체적인 기록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과 사탄의 신분과 지위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 기록이 인류가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아는 데에 있어 중요한 문헌이며, 이 기록에서 인류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데에 필요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받았고, 영계에서의 창조주와 사탄의 대화를 통해 창조주 권병의 구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씀으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병이 또 한 번 입증되었다.
겉으로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은 사탄과 대화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는 태도와 서 있는 위치는 사탄보다 높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명령하는 어조로 사탄에게 지시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탄에게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알려 주고, 욥을 그의 손에 붙였으니 욥을 마음대로 대해도 되지만 욥의 생명을 취해서는 안 된다고 알려 주었다. 그 뜻은 욥을 사탄의 손에 붙이긴 했으나 욥의 생명까지 붙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이 있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에게서 욥의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태도는 사탄에게 한 이 명령에서 아주 명확하게 나타나 있고, 여호와 하나님이 사탄과 대화할 때 서 있던 위치 역시 이 명령에서 나타나고 드러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서 있는 위치에서 볼 때 그는 빛과 공기를 만들고 만물 생령을 만든 하나님일 뿐 아니라, 만물 생령을 주재하는 하나님이고, 인류를 주관하고 음부를 주관하는 하나님이며, 모든 생령의 생과 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인 것이다. 영계에서 하나님을 제외하고 누가 감히 사탄에게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왜 사탄에게 친히 명령을 내린 것일까? 욥의 목숨을 포함한 사람의 생명은 모두 하나님이 주관하고, 하나님은 이에 대한 사탄의 침해를 허락하지 않으며 욥의 생명을 빼앗아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했을 때에도 특별히 그 명령을 내리는 것을 잊지 않고, 재차 사탄에게 욥의 생명을 빼앗아 가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던 것이다. 사탄은 감히 하나님의 권병을 넘어설 수 없다. 사탄은 하나님의 명령과 구체적인 지시에 대해서는 더욱 조심스럽게 복종하고 따르며 감히 거역할 수 없다. 물론 사탄은 하나님의 어떤 명령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정해 준 범위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감히 이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이는 하나님 권병의 위력이 아니냐? 하나님의 권병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냐? 사탄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고, 속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인류보다 훨씬 더 잘 안다. 사탄은 영계에서 하나님의 지위와 권병을 확실하게 보았고, 하나님 권병의 위력과 하나님의 권병이 시행되는 원칙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감히 태만히 굴거나 조금도 거스르지 못하며, 하나님의 권병에서 벗어난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한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에 맞서 그 어떤 도전도 하지 못한다. 사탄은 본성이 사악하고 교만할지라도 하나님이 정해 준 한계와 범위를 감히 벗어나지 못한다. 천만 년 동안, 사탄은 엄격하게 그 한계를 지켰고, 하나님의 모든 지시와 명령을 준수하였으며, 지금껏 감히 한계선을 한 걸음도 넘지 못했다. 사탄은 악독하긴 해도 패괴된 인류보다 훨씬 ‘현명’하다. 사탄은 창조주의 신분을 알고 자신의 한계도 안다. ‘규율을 지키는’ 사탄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은 사탄이 뛰어넘을 수 없는 천상의 법칙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유일무이함과 권병으로 인해 만물이 법칙 속에서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으며, 인류가 하나님이 정한 궤도 속에서 번성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이 규율을 깰 수 없고 이 법칙을 바꿀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창조주의 손에서 나온 것이고, 창조주의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며, 창조주의 권병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99)
사탄의 ‘특별’한 신분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사탄의 다방면의 행위에 관심을 보인다. 심지어 많은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 외에 사탄도 권병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탄도 이적을 보이고 인류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 외에도 마음속에 사탄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으며, 심지어 사탄을 하나님으로 삼아 숭배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불쌍하기도 하거니와 가증스럽기도 하다. 그들이 불쌍한 것은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이고, 그들이 가증스러운 것은 그들의 대역무도함과 타고난 사악한 본질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너희가 권병이 무엇인지, 권병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고 대변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괄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자신이 곧 권병이다. 하나님의 권병은 하나님의 지고지상함과 하나님의 본질을 상징한다. 하나님 자신의 권병은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사탄은 자기 자신을 감히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탄은 감히 자신이 만물을 창조하였으며, 만물을 주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러지 못한다! 사탄은 만물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지금까지 하나님이 창조한 것과 같은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생명이 있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탄에게 하나님의 권병이 없기 때문에 사탄은 영원히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가질 수 없다. 이는 본질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사탄에게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있느냐? 물론 없다! 사탄이 행한 일들, 사탄이 보인 이적은 무엇이냐? 능력이 맞느냐? 권병이라 할 수 있느냐? 물론 아니다! 사탄은 사악한 흐름을 주도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시키고 파괴하며 방해하는 짓을 일삼는다. 몇천 년 동안, 사탄은 인류를 패괴시키고 해쳤으며, 사람을 유혹해서 타락의 길로 가게 하거나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골짜기로 걸어가게 하였다. 이런 짓 말고, 사탄이 인류에게 행한 것 중 어느 것 하나 기릴 만하거나 칭찬하고 귀히 여길 만한 것이 있느냐? 사탄에게 권병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사탄에 의해 패괴되었겠느냐? 사탄에게 권병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사탄에 의해 해를 입었겠느냐? 사탄에게 권병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길로 나아갔겠느냐? 사탄에게 권병과 능력이 없다면, 사탄이 행한 모든 것의 본질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겠느냐? 혹자는 사탄의 모든 행위가 보잘것없는 잔재주에 불과하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나는 사탄에 대한 이런 정의는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인류를 패괴시키는 사탄의 악행이 보잘것없는 잔재주일까? 사탄이 욥을 해한 그런 사악한 기세와 욥을 해치고 집어삼키려던 강렬한 욕망은 단연코 보잘것없는 잔재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욥이 소유했던 엄청난 양의 소와 양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거액의 재산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게 보잘것없는 잔재주로 할 수 있는 일이더냐? 사탄이 한 행위의 성격으로 볼 때, 모두 파괴, 방해, 훼손, 상해, 사악, 악독, 어둠 등과 같은 부정적 단어와 잘 맞고 어울린다. 그러므로 모든 정의롭지 못하고 사악한 것의 발생은 사탄의 행위와 떼어 놓을 수 없으며, 또한 사탄의 추악한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사탄이 아무리 ‘재주가 신통하다’ 할지라도, 아무리 오만하고 야심이 크다 할지라도, 아무리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또 아무리 사람을 미혹하고 패괴시키는 재능이 탁월하고 사람을 협박하는 수법과 권모술수가 뛰어나다 할지라도, 아무리 그것의 존재 형식이 변화무쌍할지라도 상관없다. 사탄은 지금껏 생명 있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고, 만물의 생존 법칙과 규율을 정하지도 못했으며,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을 주관하거나 주재하지 못했다. 우주 창공에는 사탄에 의해 생기고 사탄으로 인해 존재하는 사람이나 사물은 아무것도 없고, 사탄이 주재하고 주관하는 사람이나 사물 또한 아무것도 없다. 반대로, 사탄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존재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지시와 명령에 순종해야만 했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 위의 물 한 방울, 모래 한 알도 함부로 만질 수 없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 위의 개미조차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거늘, 하물며 하나님이 만든 인류는 어떠하겠느냐? 하나님의 눈에 사탄은 산속의 백합만도 못하고, 하늘을 나는 새만도 못하며, 바닷속의 물고기만도 못하고, 땅 위의 구더기만도 못하다. 만물 가운데 사탄의 역할은 만물과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하나님의 사역과 경륜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사탄의 본성이 아무리 악독하고 본질이 아무리 사악해도 상관없다. 사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분수에 맞게 자신의 기능,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기능과 부각물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본질이자 본래 자리이다. 사탄의 본질은 생명과 무관하고, 능력과 무관하며, 권병과 무관하다. 사탄은 하나님 수중에 있는 장난감,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기계에 불과하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00)
권병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먼저, 권병이든 능력이든 모두 긍정적인 것으로서, 그 어떤 부정적인 것들과 무관하고, 그 어떤 피조물이나 비피조물과도 무관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 어떤 형식의, 생명 있고 활력 넘치는 것이라도 다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권병은 모든 생명체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게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겨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생존하며 지속되게 한다. 그 후에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를 주재하고 주관한다. 지금껏 여기엔 오차가 없었으며,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이런 것들은 그 어떤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갖추지 못했으며, 창조주만이 이러한 능력을 소유하고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권병이라 일컫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주의 유일무이함이다. 그러므로 ‘권병’이라는 이 단어 자체나 권병의 본질은 오직 창조주와만 관련이 있다. 이는 권병이 창조주만의 신분과 본질의 상징이기 때문이며, 창조주의 신분과 지위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창조주 외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권병’이라는 이 단어와 관련이 있을 수 없다. 이 역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병에 대한 해석이다.
사탄이 욥을 호시탐탐 노렸을지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욥의 털끝 하나도 감히 건드릴 수 없었다. 사탄의 본성이 사악하고 잔인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탄은 하나님의 지시를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욥에게 임한 사탄이 양 떼에 침입한 사나운 늑대처럼 거칠게 날뛰었을지라도, 사탄은 감히 하나님이 정해 준 범위를 망각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명령을 벗어나지 못했다. 사탄은 아무리 해도 감히 하나님 말씀의 원칙과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것이 사실 아니냐? 이 점에서 볼 때, 사탄은 여호와 하나님의 그 어떤 말씀도 넘어설 수 없다. 사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다 명령이고 천상의 법칙이며, 하나님 권병의 발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 뒤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천상의 법칙을 어기며 위반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명령을 벗어나면, 하나님의 권병을 넘어서고 천상의 법칙에 대항한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다. 그 결과는 도대체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사탄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벌이다. 사탄이 욥, 이 한 사람에게 행한 일은 인류를 패괴시킨 사탄의 소행을 보여 주는 축소판일 뿐이다. 사탄이 그 일을 저지를 때 하나님이 사탄에게 정해 준 범위와 내린 명령은 사탄이 모든 일에서 지켜야 하는 원칙을 보여 주는 축소판일 뿐이다. 그리고 사탄이 이 일에서 담당한 역할과 위치는 사탄이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위치를 보여 주는 축소판일 뿐이다. 사탄이 욥의 시험에서 보인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은 하나님의 경영 사역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히 대항하지 못하는 사탄의 모습을 보여 주는 축소판일 뿐이다. 이 축소판들이 너희에게 주는 경고는 무엇이냐? 사탄을 포함한 만물 가운데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감히 창조주가 정한 천상의 법칙과 규칙을 벗어나지 못하며,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저항자에게 내리는 창조주의 처벌을 바꾸거나 그 처벌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주만이 천상의 법칙과 규칙을 정할 수 있고, 창조주만이 그러한 법칙과 규칙을 시행할 능력이 있으며, 창조주의 능력만이 그 어떤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초월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주만의 권병이며, 이 권병은 만물 가운데 지극히 높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장 크고 사탄이 그 다음이다”라는 말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유일무이한 권병을 가진 창조주 외에 다른 신은 있을 수 없다!
현재 너희는 하나님의 권병에 대해 어떤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느냐? 먼저,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권병은 사람의 권력과 어떻게 구분되느냐? 어떤 차이가 있느냐? 혹자는 함께 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매우 좋은 말이다! 사람들이 이 둘을 함께 논할 수 없다 말할지라도, 사람의 생각과 관념 속에는 항상 사람의 권력이 권병이라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함께 놓고 비교하기도 하는데 왜 그런 것일까? 이는 개념을 잘못 사용하는 오류에 빠진 것이 아니겠느냐? 양자는 함께 연관시킬 수도 함께 비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사람은 통제가 되지 않는다. 이를 어찌 해결해야 할까? 네가 진정으로 해결하고 싶다면 유일한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권병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창조주의 권병을 알고 이해하게 되면, 네가 사람의 권력과 하나님의 권병을 한데 놓고 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의 권력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패괴 성품, 욕망이나 야심으로 잔뜩 부풀어진 사람이 목적한 바를 달성시키는 일종의 수완이나 재주라 할 수 있다. 이것을 권병이라 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의 야심과 욕망이 얼마나 부풀어지고 그 사람이 그것을 얼마나 달성할 수 있든, 그 사람에게 권병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의 팽창과 목적 달성은 기껏해야 사탄이 사람 가운데서 한 어릿광대짓에 지나지 않는다. 잘해 봤자 사탄이 스스로 조상이 됨으로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야심을 충족시키는 연극일 뿐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01)
하나님의 권병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지 않느냐?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상징하지 않느냐? 하나님 자신만의 지위를 상징하지 않느냐? 만물 가운데 너는 어떠한 일들에서 하나님의 권병을 보았느냐? 어떻게 보았느냐? 사람이 경험하는 사계절에서 볼 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변화에 대한 법칙을 바꿀 수 있는 자가 있느냐? 봄에는 나무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며, 여름에는 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나뭇잎이 떨어진다. 이 법칙을 바꿀 수 있는 자가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권병이 어느 한 면으로 구현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자 빛이 있었는데, 이 ‘빛’은 지금 존재하고 있지 않느냐? 그것의 존재는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이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하나님의 권병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공기가 지금도 존재하지 않느냐? 인류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기도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누가 빼앗아 갈 수 있느냐? 누가 그것의 본질과 기능을 바꿀 수 있느냐? 하나님이 나눈 낮과 밤, 주야를 정한 법칙을 깨뜨릴 수 있는 자가 있느냐? 사탄을 포함해 깨뜨릴 수 있는 자가 있느냐? 밤이 되었을 때, 잠을 자지 않고 대낮처럼 보낼지라도 역시 밤이다. 네가 너의 생활 규칙을 바꾸었지만, 낮과 밤이 교체되는 법칙은 바꿀 수 없다. 이 사실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사자에게 소처럼 밭을 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코끼리를 나귀로 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닭을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늑대를 양처럼 풀을 먹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물속의 물고기를 육지에서 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그들을 물속에서 살도록 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물속에서 살아야 한다. 육지에서는 살 수 없어 죽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한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만물은 모두 자기만의 생존 법칙과 범위가 있고, 각각 자기만의 본능이 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창조주가 정한 것으로, 그 누구도 바꿀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사자는 영원히 사람과 격리된 야생 세계에서 살지, 영원히 소처럼 충직하게 성실하게 사람과 함께하며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없다. 코끼리와 나귀는 다 동물이고 네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숨을 쉬는 피조물이지만, 그들은 다른 종이다. 그들은 각자 하나님에 의해 종류가 구분되고 모두 각자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서로 바뀔 수 없다. 닭도 두 다리를 가지고 있고 독수리처럼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나무 위에 날아오를 수 있을 뿐 영원히 하늘을 날 수 없다. 이것은 닭의 본능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권병에 의해 정해진 것이 자명하다.
인류가 오늘날까지 발전해 오면서, 인류의 과학은 ‘일취월장’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이룩한 성과가 ‘과히 놀랄’ 정도이니, 인류의 기량이 날로 커지고 있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유독 한 가지만은 인간의 과학이 돌파하지 못했다. 인류는 비행기를 만들고, 항공 모함을 만들고, 원자 폭탄을 만들고, 우주로 날아가고, 달에 착륙하고, 인터넷을 발명하여 첨단 과학 기술 시대에 살고 있지만, 숨 쉴 수 있는 생물은 만들어 내지 못한다. 인류의 과학은 생물의 본능과 생존 법칙, 각 생물의 생사윤회를 통제할 수 없고 여기에 대해선 속수무책이다. 그렇기에 인류의 과학이 아무리 높은 수준에 도달했어도 창조주의 생각 하나에 비할 수 없고, 창조주의 만물 창조의 오묘함과 창조주 권병의 위력을 측량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구상의 바닷물이 그렇게 많아도, 하나님이 각각에게 경계를 정해 주었기 때문에 바닷물은 지금껏 함부로 자신의 범위를 넘어 육지로 올라온 적이 없다. 그들은 정해 준 대로 있고,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며,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움직이라고 말씀할 때에야 움직일 수 있고, 그들이 어디로 가고 어디에 머무를지는 하나님의 권병으로 결정된다.
‘하나님의 권병’을 늘 하는 말로 설명하자면, 하나님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할지 결정할 권리가 있고, 하나님은 하고자 하면 그대로 한다. 만물의 법칙은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지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명령으로 바뀌는 것이지 사람의 의지대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천지 만물, 우주, 별, 1년 사계절, 사람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은 다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한 당시의 법칙에 따라 조금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권병 아래 존재하고 운행되며 변화한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그것의 법칙을 바꿀 수 없으며, 그것 본래의 운행 궤적을 바꿀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병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그 권병으로 말미암아 소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병이다. 여기까지 말했는데,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권병이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상징한다고 느껴지지 않느냐? 하나님의 권병이 그 어떤 피조물이나 비피조물이 갖출 수 있는 것이냐? 그 어떤 사람이나 일, 사물이 모방하고 사칭하고 대체할 수 있는 것이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02)
창조주의 신분은 유일무이한 것이니 ‘다신론’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사탄의 기량과 재주가 사람보다 클지라도,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사탄이 할 수 있을지라도, 사탄이 하는 일이 네가 부러워하고 갈망하는 것이든, 네가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이든, 네가 볼 수 있는 것이든 볼 수 없는 것이든, 또한 사탄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여 자기를 숭배하게 할 수 있든, 네가 사탄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든, 너는 절대로 사탄이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는 하나님만이 권병을 가지고 있으며, 만물을 주관하고 주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는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는 재주를 가졌고 사탄이 하나님으로 사칭할 수 있다는 이유로, 사탄이 하나님이 행한 이적과 기사를 모방할 수 있다는 이유로, 또한 사탄이 하나님과 비슷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기량에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다스리는 권력의 범위에 차이가 있을 뿐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분이 아니라 여러 분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먼저 오고 나중에 온 순서에 따라,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크고 작음의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되고, 더욱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다고 오해하거나 하나님의 능력과 권병이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라고 오해해서도 안 된다. 만일 네가 이러한 생각을 한다면, 만일 네가 하나님의 유일성을 인정하지 않고 유일하게 하나님만이 권병을 지닌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만일 네가 ‘다신론’을 고집한다면, 너는 피조물 중 인간 말종이고, 전형적인 사탄의 화신으로서 매우 사악한 자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인지 알겠느냐? 언제든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너는 하나님을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과 함께 놓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 네가 하나님의 권병과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고 그것에 접근하기 힘들다고 생각할지라도, 사탄의 행동 방식과 말하는 방식이 아무리 너의 생각과 일치하고 너의 상상과 일치하더라도, 얼마나 그것이 너를 만족시키든,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안 되고 개념을 혼동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거나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부인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을 문전 박대 하고 대신 사탄을 끌어들여 너의 마음속 ‘하나님’을 대체하거나 너의 하나님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03)
인류는 패괴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창조주 권병의 주재 아래 살아간다
사탄은 수천 년 동안 인류를 패괴시키면서 무수히 많은 악행을 저질렀고, 대대로 사람들을 미혹하였으며, 인간 세상에서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렀다. 사람을 해치고 미혹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도록 유혹하며, 하나님의 경륜을 교란시키고 파괴하는 등 온갖 악행을 자행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권병 아래 있는 만물 생령은 늘 변함없이 하나님이 정한 법칙과 규율을 따르고 있다. 하나님의 권병과 비교해 보면, 사탄의 사악한 본성과 그것이 날뛰는 모습은 추하기 그지없으며, 역겹고 신물 나는 데다, 보잘것없고 취약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비록 사탄이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가운데서 돌아다닌다 할지라도, 사탄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그 어떤 사람, 일, 사물도 변화시킬 수 없다. 수천 년이 지나도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내려 준 빛과 공기를 누리고 있다.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친히 불어넣어 준 생기로 숨을 쉬고 있고, 하나님이 만든 꽃과 새, 물고기와 곤충들을 누리며, 하나님이 공급해 준 만물을 누리고 있다. 낮과 밤은 여전히 끊임없이 교체되고, 사계절 역시 변함없이 순환하고 있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는 올겨울에 떠나가서 내년 봄에 다시 돌아온다. 물속의 물고기는 그들의 집인 강과 호수를 떠나 본 적이 없다. 땅 위의 매미는 여름날 마음껏 자기들만의 노래를 부른다. 풀 속의 귀뚜라미들은 가을날 소슬바람 따라 낮은 소리로 노래한다. 기러기는 무리를 이루고 매는 홀로 지낸다. 사자 무리는 사냥하며 살아가고, 사슴들은 꽃과 풀밭을 떠나지 않는다…. 만물 가운데 각종 생령들은 갔다가 다시 오고 왔다가 다시 가며 찰나 간에 천태만상으로 변화한다. 하지만 그들 각자의 본능과 생존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는 자양분을 받아 생존한다. 그 누구도 그들의 본능을 바꿀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들의 생존 법칙을 파괴할 수 없다. 만물 가운데 살아가며 사탄에 의해 패괴되고 미혹되었을지라도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만든 물과 공기와 만물을 떠날 수 없다.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만든 이 공간 속에서 번성하며 살아간다. 인류의 본능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는 여전히 두 눈으로 바라보고, 두 귀로 듣고, 머리로 생각하며, 마음으로 깨닫고, 두 다리와 두 발로 걸으며, 두 손으로 일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본능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가 하나님과 협력하는 기관(器官)은 변하지 않았고, 피조물의 본분을 다할 수 있는 기관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 심령의 필요는 변하지 않았고, 뿌리를 찾아 돌아가려는 인류의 소망은 변하지 않았으며, 인류가 창조주의 구원을 얻고자 하는 소망도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병 아래 살아가며 사탄의 피비린내 나는 학대를 견디고 있는 인류의 현주소다. 비록 사탄의 엄청난 유린을 당한 인류는 더 이상 태초에 창조된 아담과 하와가 아닌, 지식과 상상, 관념 등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들이 가득하고 사탄의 패괴 성품이 가득한 인류라 할지라도, 하나님 눈에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만든 인류이다.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의 주재와 지배 아래 있고, 하나님이 정한 궤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기에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인류는 단지 외관상 더럽고 굶주리고 반응도 약간 느리고 기억력도 다소 감퇴되고 나이가 조금 많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기능과 본능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이 인류가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인류이다. 이 인류는 창조주의 부름과 창조주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바로 일어나 그 음성의 근원을 찾기 위해 달려간다. 이 인류는 창조주의 그림자를 보기만 하면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창조주를 위해 헌신하며, 심지어 목숨까지 바친다. 인류의 마음과 영이 창조주의 마음의 소리를 깨닫게 될 때, 인류는 사탄을 버리고 창조주의 곁으로 온다. 인류가 완전히 몸의 더러움을 씻어 내고 창조주가 다시 공급해 주는 자양분을 얻게 될 때, 인류의 기억은 회복된다. 그때의 인류는 진정 창조주의 권세 아래로 돌아온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04)
창 19:1~11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찌기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 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롯이 문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말라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 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 들이고 문을 닫으며 문밖의 무리로 무론 대소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더라”
창 19:24~25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성경의 이 구절들을 통해 소돔의 사악함과 패괴함이 천인공노할 지경에 이르러 하나님 안중에 반드시 멸해야 할 대상이 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성을 멸하기 전에 어떤 일들이 발생하였고, 그 일들이 사람에게 어떤 점을 시사하였느냐? 그 일들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통해 사람에게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보여 주고 있느냐? 기록된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고 발생한 일의 전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치가 떨리고,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올 정도로 패괴된 소돔 성
그날 밤, 롯은 하나님의 두 사자를 영접하고 식사를 베풀었다. 식사 후 사자들이 아직 눕지 않았을 때, 성안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롯의 집을 둘러싼 후 롯을 불렀다. 성경에는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라고 되어 있다. 이는 누가 한 말이냐? 이 말은 누구에게 한 것이냐? 이 말은 소돔 성 사람들이 롯의 집 밖에서 롯에게 외친 말이다. 이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 화가 나지 않느냐? 역겹지 않으냐?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느냐? 그 사람들의 외침은 사탄의 행위를 뜻하지 않느냐? 그 외침에서 너는 그 성의 사악함과 어두움이 느껴지지 않느냐? 그들의 외침에서 너는 그들의 행위에서 나오는 야만성과 잔인함이 느껴지지 않느냐? 그 사람들의 행위에서 그들이 얼마나 패괴되었는지 느낄 수 있지 않으냐? 그들이 말한 내용에서 그들의 사악한 본성과 흉악한 성품이 스스로 통제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롯을 제외한 성안 사람들은 모두 사탄과 같아서 사람을 보면 해를 입히고 통째로 집어삼키려 하였다…. 여기까지만 말해도 이 성의 음산함과 공포스러움, 죽음의 기운, 사악함과 잔혹함이 절로 느껴진다.
인간성도 없고 사람의 영혼을 집어삼키겠다는 야심으로 가득 찬 폭도들을 보며 롯이 뭐라고 말했느냐? 성경에는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말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롯이 이 말을 한 의도는 그의 두 딸을 포기하더라도 사자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인간의 도리상, 롯이 그런 제안을 했으면 그 무리들은 양보를 하고 두 사자를 가만히 놓아두었어야 한다. 어디까지나 두 사자는 그들과 일면식도 없고 아무 관련이 없으며, 그들의 이익을 침해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악한 본성에 끌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난폭해졌다. 여기서 그들이 나눈 또 다른 대화를 통해 그들의 악독한 본모습을 더한층 알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이 왜 그 성을 멸하려고 했는지도 알고 이해하게 된다.
그다음에 그들이 뭐라고 하였느냐? 성경에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 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라고 되어 있다. 그들은 왜 문을 부수려 하였을까? 두 사자를 빨리 해치지 못해 안달 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두 사자가 소돔에 간 이유는 무엇일까? 롯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성안의 사람들은 그 두 사자가 법관이 되기 위해 그곳에 왔다고 착각하며 추측만으로 이유도 묻지 않고 해하려 하였다. 그들이 해하려 한 것은 그들과는 전혀 무관한 두 사람이었다. 따라서 소돔 성 사람들이 이미 인간성과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였다는 것과 그들의 광기와 날뛰는 정도가 사람을 해하고 집어삼키는 사탄의 악독한 본성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롯에게 두 사람을 내놓으라고 하자 롯은 어떻게 하였느냐? 성경에서 알 수 있듯 롯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롯은 하나님의 두 사자를 알았느냐? 전혀 몰랐다! 그렇다면 그는 왜 두 사람을 구하였느냐? 그는 그들이 무엇을 하러 왔는지 알고 있었느냐? 그는 그 두 사자가 그곳에 온 이유는 몰랐지만 두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들을 영접한 것이다. 롯이 하나님의 종을 주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롯이 평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소돔 성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갔을 때 그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두 종을 영접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또 두 딸을 넘기고 그들을 보호하려 하였다. 이는 롯의 의로운 행위이며, 롯의 본성과 본질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 것이기도 하다. 또 이것은 하나님이 종을 보내 그를 구한 이유이기도 하다. 위기가 닥쳤을 때, 롯은 아랑곳 않고 두 종을 보호하였으며, 심지어 자신의 두 딸로 두 종의 안전을 지키려 하였다. 그 성안에 롯이 했던 일을 똑같이 할 수 있는 자가 또 있었느냐? 없다는 것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롯을 제외한 소돔 사람 모두가 멸해야 할 대상이자 멸망당해야 할 대상이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05)
창 19:1~11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찌기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 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롯이 문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말라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 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 들이고 문을 닫으며 문밖의 무리로 무론 대소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더라”
창 19:24~25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소돔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 흔적도 없이 멸망당하다
소돔 성 사람들은 두 사자를 보았을 때, 그들이 거기에 온 이유를 묻는 자가 없었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왔는지도 묻는 자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무리 지어 와서 다짜고짜 미친개와 같이, 악한 이리와 같이 그 두 종을 잡으려 하였다. 당시에 일어난 일을 하나님은 다 보고 있지 않았겠느냐? 사람의 그런 행위와 그런 일을 대함에 있어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나님은 이 성을 멸하리라 굳게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는 주저하지 않았으며 기다리지 않았고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그의 날이 오면 그는 하고자 했던 일을 그대로 행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19장 24절과 25절에서 말씀한 바,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라는 이 두 구절의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이 성을 멸하였는지를 말해 주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이 무엇을 멸하였는지도 알려 주고 있다. 우선, 성경에는 하나님이 불로 이 성을 태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성안의 사람에서부터 땅에서 난 모든 것까지 다 멸할 정도로 불태운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늘에서 내린 불이 이 성을 멸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안의 사람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함께 멸하고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성을 멸한 후, 땅에는 더 이상 생물이 살지 못하였고, 더 이상 생기가 없었으며, 더 이상 생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성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고, 정적만 흐르는 공터로 변해 버렸다. 이 땅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행이 다시는 있을 수 없었으며, 살육과 피비린내가 다시는 없었다.
하나님은 왜 이 성을 이렇게 완전히 불태웠을까? 너희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인류와 만물이 그렇게 멸해지는 것을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었을까? 네가 만약 하늘에서 떨어진 불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볼 수 있다면, 하나님이 멸망시킨 대상과 그 성이 멸망당한 정도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노한 정도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성을 증오할 때는 징벌을 내릴 것이며, 하나님이 어떤 성에 염증을 느낄 때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알 수 있도록 계속 경고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성을 없애고 멸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면,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을 거스르는 일이 생겼다면 더 이상 징벌이나 경고를 주지 않고 곧바로 멸한다. 그리하여 완전하고 철저히 사라지게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06)
창 19:1~11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찌기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 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롯이 문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말라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 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 들이고 문을 닫으며 문밖의 무리로 무론 대소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더라”
창 19:24~25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계속 하나님을 적대시하며 대항했던 소돔 성,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제거되다
사람들 눈에 소돔 성은 인간들의 욕망과 사악함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는 도시이자 밤마다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요염하고 유혹적인 도시였다. 그 화려함에 사람들은 정신이 팔리고 미치광이가 되었으며, 그 사악함에 사람의 심령은 잠식당하고 미혹당해 타락하였다. 소돔 성에는 더러운 귀신과 악령이 판을 쳤고 죄악과 살육이 가득하였으며, 피비린내와 썩은 내가 진동하였다. 그야말로 등골이 오싹하고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도시였다. 성안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참도를 찾거나 광명을 갈망하는 이가 없었고, 죄악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자도 없었다. 사람은 사탄의 통제와 패괴, 농락 속에 살면서 인간성과 이성을 잃고 인간 본연의 생존 목표도 잃어버렸다. 하나님을 대적한 그들의 악행은 수없이 많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였다. 그들의 악행은 그들과 그 성과 성안의 살아 있는 것 모두를 한 걸음씩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이 두 단락에는 소돔 성 사람들이 얼마나 패괴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고, 단지 하나님의 두 종이 소돔 성에 도착한 후 사람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간단한 사실로 소돔 성 사람들이 얼마나 패괴되었고 얼마나 사악한지,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했는지 알 수 있다. 그에 따라 성안 사람들의 본모습과 본질도 드러났다. 그들은 하나님이 내린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징벌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분노를 멸시하였다. 그들은 계속 하나님께 대항하였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든 그들의 악독한 본성은 더 심해졌으며, 하나님을 계속해서 적대시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임함, 하나님의 징벌을 적대시하였고, 하나님이 내린 경고는 더욱 적대시하였다. 그들은 안하무인으로 집어삼키고 해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했으며, 하나님의 종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돔 성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을 해하려 한 일은 그들이 행한 모든 악행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고, 여기서 드러난 그들의 사악한 본성도 바닷물 중 한 방울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불로 멸할 것을 택하였다. 하나님은 홍수, 허리케인, 지진, 해일이나 다른 방법이 아닌 불사르는 방식으로 성을 멸하였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불태워진다는 것은 성의 완전한 멸망을 뜻하며, 이 성이 지구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멸망’이란 형체나 외형이 사라지는 것만이 아니라 성안의 모든 사람의 영혼까지도 존재하지 않는 것,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이 성과 관련된 모든 사람과 사물이 멸해지고, 그들에게 더 이상 내세와 윤회는 없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된 인류 가운데서 한 번으로 영원히 제거해 버린 것이다. ‘불살랐다’는 것은 죄악이 그곳에서 제지되고 끝나서 다시는 존재하지 않고 파생될 수 없음을 의미하며, 사탄의 사악이 자생할 수 있는 터전을 잃고, 머무르고 기거할 수 있는 무덤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에서 하나님이 승리했음을 낙인으로 사탄에게 남긴 것이다. 소돔 성의 멸망은 사람을 패괴시키고 집어삼킴으로써 하나님께 대항하고자 했던 사탄의 야심이 실패로 끝났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인류 발전사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거절하고 스스로 타락한 인류의 수치스러운 기호이며, 아울러 실제로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한 실제 기록이다.
소돔 성이 하나님이 내린 불로 인해 잿더미가 되었다는 것은 다시는 ‘소돔’이라 불리는 성을 볼 수 없고, 성안의 모든 것도 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 성은 하나님의 분노에 의해 멸망되었고,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 속에서 사라졌으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인해 상응하는 징벌을 받았고, 그에 걸맞은 결말에 이르렀다. 소돔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소돔의 사악함 때문이고, 하나님이 그 성과 성에서 사는 어떤 사람도, 생장하는 어떤 만물도 다시 보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다시 보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이 표현된 것이다. 그 성의 사악함과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 성에 대해 분노와 미움, 증오심을 갖게 되었고, 더 이상 소돔 성과 성안의 사람 그리고 성안의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다시는 보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결국에는 불로 이 성을 멸하였다. 소돔 성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을 때, 하나님 안중에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소돔에 대한 기억까지도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즉, 하늘에서 내린 불이 태운 것은 온 소돔 성과 성안의 죄악으로 가득 찬 사람, 그리고 죄악으로 더럽혀진 만물뿐만 아니라 인류의 사악함과 하나님을 대적한 기억까지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소돔 성을 불태운 목적이었다.
인류가 심히 패괴되어 누가 하나님인지 모르고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면 그들은 공격하고 비방하고 모독할 것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경고를 전달할 때에도 그 패괴된 사람들에게서는 회개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행을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며, 반대로 하나님의 종을 함부로 해하려고 할 것이다. 그들에게서 보여지고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을 극히 증오하는 본성과 본질이다. 그러므로 패괴된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고, 진상을 모르면서 비방과 조롱을 쏟아 내는 것만도 아니다. 그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무지몽매해서, 기만당해서, 미혹되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공개적으로 제멋대로 하나님과 대립하고 대항하고 소란을 피우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러한 행동은 반드시 하나님을 노하게 할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 사람의 범함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이 그들에게 직접적이고 공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가득 찬 그 성을 가장 빠른 방법으로 멸하고,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그 안의 사람들을 멸함으로 모든 죄악을 멸해 버리려고 했다. 그리하여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하고, 그 안의 죄악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바로 불로 태우는 것이었다. 소돔의 사람들을 상대로 취한 하나님의 태도는 포기하거나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 위엄, 권병으로 그들을 징벌하고 쳐서 완전히 멸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육체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파멸시켜 영구적으로 사라지게 하였다. 이것이 하나님께 있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의 진정한 함의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07)
하나님의 진노는 감춰져 알려지지 않았지만, 거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지몽매한 온 인류를 주로 긍휼과 관용으로 대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대부분의 시간과 사건에서 가려져 있고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보기 아주 어렵고, 하나님의 진노를 알기도 매우 어렵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마지막 사역과 절차로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고 용서했을 때, 즉 마지막으로 긍휼을 베풀고 경고했을 때도 사람이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대항하고 조금도 회개하지 않고 돌아서지 않으며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인내하지 않는다. 이때 하나님은 반대로 긍휼을 거두고 사람에게 진노만을 발한다. 하나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의 진노를 표현할 수 있고 사람을 징벌하고 멸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불로 소돔 성을 멸망시켰다. 이 방식은 하나님이 인류나 물체를 멸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불을 이용해 인류를 멸한 것은 그 육체뿐 아니라 영, 혼, 육 전부를 멸하여 소돔 성 사람들이 물질세계와 사람이 볼 수 없는 세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진노를 발현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이런 발현은 하나님의 진노 본질의 일면이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할 때 더 이상 그 어떤 긍휼과 자비, 관용을 베풀지 않고 인내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어떤 일도, 어떤 이유도 하나님이 계속 인내하도록 설득할 수 없고, 다시 긍휼과 관용을 베풀도록 설득할 수 없다. 그 대신 하나님은 한시도 지체 없이 그의 진노와 위엄을 나타내고, 그가 하려는 일을 하고 또한 깔끔하고 마음에 들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을 나타내는 방식이자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일부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걱정하고 사랑할 때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을 볼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느낄 수 없는데, 이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는 오직 긍휼, 관용, 사랑만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성을 멸하고 인류를 증오하는 것을 보게 될 때, 인류를 멸하는 그의 노와 위엄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은 사람의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은 어떤 피조물도 상상할 수 없고, 피조물이 아닌 어떤 것도 간섭하거나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사칭이나 모방은 더욱 불가하다. 그러므로 이 부분의 하나님 성품을 인류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이러한 성품을 갖추고 있으며 하나님만이 이런 성품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공의로운 성품을 갖춘 것은 하나님이 사악함, 암흑, 패역, 인류를 패괴시키고 집어삼키는 사탄의 온갖 악행을 증오하는 데에서 기인하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모든 죄악된 행위를 증오하는 데에서 기인하고 또 하나님의 거룩하고 무결한 본질에서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조물이든 비피조물이든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대항하고 하나님과 겨루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설령 하나님이 긍휼히 여겼던 자일지라도, 설령 하나님이 택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인내와 관용의 원칙을 거슬렀다면 하나님은 가차 없이, 주저하지 않고 거스를 수 없는 공의로운 성품을 보여 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08)
모든 정의의 힘과 긍정적인 사물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성품과 하나님의 위엄은 하나님 자신만의 본질이고,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 자신만의 성품이다. 하나님이 노하는 원칙은 하나님 자신만의 신분과 지위를 뜻하며, 그가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상징한다는 것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의 본질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고 지리적 위치로 인해 바뀌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고유의 성품은 하나님의 고유의 본질이다. 그가 누구에게 사역하든 간에 그의 본질과 공의로운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노하게 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 원래의 성품이다. 이때 하나님이 노하는 원칙은 변하지 않고, 그의 유일무이한 신분과 지위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노하는 이유는 그의 본질에 변화가 생기거나 그의 성품에 다른 요소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사람이 공공연히 하나님께 도발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하나님이 봤을 때, 하나님에 대한 도전은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는 것이자 하나님의 노를 시험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항할 때, 하나님과 겨룰 때, 계속해서 하나님의 노를 시험할 때가 바로 죄악이 범람할 때이며,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자연스럽게 발현하고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는 것은 모든 사악한 세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모든 적대 세력이 멸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이고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진노이다. 하나님의 존엄과 거룩함이 도전을 받을 때, 정의의 힘이 저지당하고 사람이 정의를 찾아볼 수 없을 때는 바로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낼 때이다. 하나님의 본질 때문에 땅에서 하나님과 겨루고 대적하고 맞서는 세력들은 모두 사악하고 패괴되고 정의롭지 않은 세력이며, 사탄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사탄에 속하는 세력이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빛이며, 흠이 없이 거룩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악하고 패괴되고 사탄에게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게 되면 모두 소멸될 것이다.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한 측면의 표현이지만 하나님은 절대 원칙 없이, 대상의 구분 없이 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절대 쉽게 노하지 않고, 진노와 위엄을 쉽게 나타내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노에는 상당한 정도와 기준이 있다. 이는 사람이 화를 내고 울분을 쏟아 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성경에는 사람과 하나님의 대화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이는 하는 말이 깊이가 없고 우매하여 어린아이 같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치지 않았고 정죄하지도 않았다. 특히, 욥이 시련을 겪는 동안 욥의 세 친구와 사람들이 욥에게 한 말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했느냐? 그들을 정죄했느냐? 그들에게 노했느냐?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욥에게 그들을 위해 간구하고 기도하라 하였고, 그들의 과실을 기억하지 않았다. 이는 패괴되고 무지한 인류를 대하는 하나님의 주요 태도를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것은 절대 감정을 표현하거나 감정을 쏟아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화를 총체적으로 폭발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것은 스스로 감정을 통제하기 힘들어서도, 울분이 극에 달해 쏟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도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발현이자 참된 표현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하나님이 진노하는 분이어서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유와 원칙 없이 노한다는 것이 아니다. 아무 이유도 원칙도 없이 함부로 화를 내는 것은 오히려 패괴된 인류의 전유물이다. 사람은 어떤 위치에 오르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트집 잡아 분풀이하고 불만을 털어놓으며, 이유 없이 화를 냄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자신의 신분과 지위가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한다. 어떤 자리에 오르지 못한 패괴된 인류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데, 그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항상 자신의 이익이 침해당하기 때문이다. 패괴된 인류는 항상 자신의 지위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쏟아 내고 교만한 본성을 드러낸다. 사람이 화를 내고 울분을 표하는 것은 모두 죄악의 존재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는 사람이 불만을 표현하는 방식이며, 여기에는 불순함, 음모와 계략, 패괴와 사악함, 심지어 야심과 욕망이 가득하다. 정의와 사악의 싸움에서 사람은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화내지는 않는다. 바꾸어 말하자면 정의의 힘이 위협당하고 박해당하고 공격당할 때, 사람은 이를 무시하고 회피하거나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사악한 세력 앞에서는 비위를 맞추고 비굴하게 굽실거린다. 그러므로 사람이 분풀이하는 것은 사악한 세력의 출구이며, 이는 육에 속한 사람의 악행이 넘쳐 나고 억제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반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때 모든 사악한 세력과 사람을 해하는 죄악은 저지당할 것이고, 하나님의 사역을 가로막는 모든 적대 세력은 드러나고 분리되고 저주받을 것이며, 하나님을 적대시한 사탄의 모든 공범자들은 징벌받고 완전히 제거될 것이다. 그에 반해 하나님의 사역은 막힘없게 되고, 하나님의 경륜은 정해진 대로 한 단계씩 앞으로 진행된다. 또한 하나님의 선민은 사탄의 교란도 미혹도 받지 않게 되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안정되고 평온한 환경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공급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사악한 세력이 더 이상 자생하고 판치지 못하도록 보장하며, 모든 정의와 긍정적인 사물이 존재하고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도록 보장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09)
하나님이 소돔을 멸한 일에서 너희는 하나님 진노의 본질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노에 불순물이 있었느냐? 하나님의 노가 순결하지 않으냐? 사람들이 하는 말로, 하나님의 진노가 순수하지 않으냐? 하나님의 진노 이면에 계략, 음모,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느냐? 너희에게 엄숙하고 진지하게 알려 주겠다. 하나님의 진노에는 사람이 의심할 만한 그 어떤 요소가 없고, 하나님의 노는 순수하며 다른 속셈이나 목적이 없다. 하나님이 노하는 이유는 순결하며 질책하거나 흠잡을 데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이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고, 그 어떤 피조물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의 일부이자 창조주가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점이다.
사람이 타인의 앞이나 뒤에서 화를 낼 때는 다 서로 다른 속셈과 목적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의 이익이나 이미지, 체면 등을 지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어떤 이는 화를 내는 데에 기준이 있지만 어떤 이는 기준도 없다. 화를 내고 싶으면 마음대로 내며 아무 제약도 받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사람의 화는 사람의 패괴 성품에서 온 것이다.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다 혈기와 천성적인 것에 속하며, 정의로움과 정의롭지 않음을 논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사람의 본성과 본질에는 진리와 부합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패괴된 인류의 화는 하나님의 진노와 함께 논할 수 없다. 사탄에 의해 패괴된 사람의 행동은 하나같이 다 패괴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고 패괴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이 이론적으로 얼마나 정당하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함께 논할 수 없다. 하나님이 노할 때, 사악한 세력은 저지당하고 사악한 사물은 멸망되지만 정의롭고 긍정적인 사물은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아 계속 이어질 수 있다. 하나님이 진노하는 이유는 정의롭지 않고 부정적이고 사악한 사물이 정의롭고 긍정적인 사물의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거나 교란시키거나 파괴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정의롭고 긍정적이며 아름답고 선한 사물의 존재를 수호하고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 규칙과 법칙을 수호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진노를 발하는 근본 원인이다. 하나님의 노는 하나님의 성품이 매우 정당하고 자연스럽게, 또 진실하게 나타난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 이면에 다른 속셈이나 교활함이나 음모가 없고 패괴된 인류에게 공존하는 욕망, 간사함, 악랄함, 폭력성, 사악함 등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진노를 발하기 전에 이미 모든 일의 본질을 분명하고 뚜렷하게 보았고, 이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정의와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일에 대한 목표와 태도가 아주 명확하다. 두루뭉술하거나 맹목적이지 않고, 충동적이거나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 않으며, 원칙이 없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 또한 하나님 진노의 실제적인 면이다. 인류는 바로 하나님 진노의 이 실제적인 면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잃게 되면 인류는 비정상적인 삶으로 추락하게 되고, 정의롭고 아름다우며 선한 모든 사물은 멸해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하나님의 진노를 잃게 되면 피조물의 생존 법칙과 규칙이 파괴되고 심지어 완전히 뒤집어질 것이다. 인류가 만들어진 후, 하나님은 그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계속해서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을 지키고 유지하였다. 그의 공의로운 성품에는 진노와 위엄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악한 사람과 사물,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모든 것은 징벌받고 통제되고 멸망된다.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은 인류를 경영하는 사역에서 그에게 대항하는 자, 사탄의 공범자 그리고 사탄의 종이 된 더러운 귀신과 악령을 그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끊임없이 치고 멸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계속해서 앞으로 이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가 있었기 때문에 인류 가운데 가장 정의로운 일이 지금까지도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10)
인의와 도덕의 겉모습에 가려진 잔인하고 사악한 사탄의 본질
사탄은 사람을 속이고 명예를 훔치면서 늘 자신을 정의의 선봉자나 정의의 본보기로 치켜세운다. 사탄은 정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해하고 사람의 영혼을 집어삼키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마비시키고 미혹하고 부추기는 것이다. 사탄의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탄의 악행을 지지하고 따르게 만들어 사탄과 함께 하나님의 권병과 주재에 대항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탄의 음모와 계략, 추악한 몰골을 간파하여 더 이상 사탄에게 짓밟히거나 농락당하는 것을 원치 않고 사탄을 위해 목숨을 걸거나 사탄과 함께 징벌받고 멸망되길 바라지 않을 때, 사탄은 보살 같았던 얼굴을 금세 바꾸고 가면을 벗어던져 사악하고 잔인하고 추악한 민낯을 드러낸다. 그리고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고 사악한 그 세력에 반항하는 모든 사람을 제거하지 못해 안달이 난다. 그때의 사탄은 더 이상 사람이 믿을 만한 정인군자의 모습으로 가장하지 못하고 양가죽 뒤에 숨겨져 있던 추한 악마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사탄은 음모가 발각되고 본모습이 폭로되면, 즉시 노발대발하며 야만성을 드러내고, 사람을 해치고 집어삼키려는 욕망이 점점 더 강렬해진다. 왜냐하면 사탄이 사람의 깨달음으로 인해 분노하고, 자유와 광명을 갈망하고 사탄의 농락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의 소망으로 인해 강한 복수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탄이 노발대발하는 것은 사악함을 지키기 위함이며, 또한 사탄의 잔인한 본성이 실제로 드러난 것이다.
사탄은 사악한 본성을 행동 곳곳에서 드러낸다. 사람을 미혹시켜 자신을 따르게 만들고, 사람을 이용해 나쁜 물이 들도록 한다. 나아가 진면목이 폭로되고 간파되어 사람에게 버려진 후에는 복수심을 갖기까지 한다. 사탄이 사람에게 저지른 그 모든 악행에서 사탄의 사악한 본질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고, 사탄이 긍정적인 것과 무관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사탄이 모든 사악한 사물의 근원임이 증명되지 않는 것이 없다. 사탄이 행하는 모든 것은 사탄의 사악을 지키기 위한 것이며 악행을 계속하기 위한 것이다. 또 정의롭고 긍정적인 사물과 어긋난 것이고,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 법칙과 규칙을 깨는 것이며,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탄에게도 분노가 있지만 그것은 사악한 본성을 쏟아 내는 방식에 불과하다. 사탄이 악에 받쳐 격분하는 이유는 사람에게 알릴 수 없는 음모가 드러나서 자신의 계략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되었고, 하나님을 대신하고 하나님이 되려는 야심과 욕망을 이루는 데에 타격을 받고 방해를 받았으며, 인류 전체를 장악하려는 목적이 물거품이 되어 영원히 실현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한 차례 또 한 차례 계속해서 진노를 내려 사탄의 음모가 실현되지 못하도록 저지하였고 사탄의 사악이 자생하고 판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사탄은 하나님의 진노를 증오하면서도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때마다 사탄의 추악한 본모습이 폭로되었고, 사악한 욕망이 빛 속에서 드러났으며, 동시에 사탄이 인류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이유도 빠짐없이 드러났다. 사탄이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사탄의 사악한 본성을 실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며, 사탄의 음모가 폭로되는 것이다. 물론, 사탄의 모든 격노는 사악한 것이 파괴되고 긍정적인 것이 보호받고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또한 하나님의 진노는 거스를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11)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앎에 있어 경험과 상상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네게 임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물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진노 이면에도 사연이 있고 불순물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성품이 다 공의로운 것은 아니라고 하나님을 비방할 수 있겠느냐? 우선 너는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 하나님이 인류를 치거나 벌하거나 멸한 것을 포함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어떠한 불순물도 흠도 없고 거룩한 것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고유 성품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는 인류의 지식, 전통, 철학이 포함되어 있지 않고, 완전히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의 발현으로서 패괴된 인류의 그 어떤 것과도 관련이 없다. 사람은 고정 관념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긍휼, 관용은 어떤 흠과 불순물 없이 거룩하다고 여길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에도 불순물이 없다는 것을 아는 이가 없고, 심지어 하나님이 왜 사람의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지, 왜 이렇게 크게 노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이도 없다. 반대로 어떤 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패괴된 인류의 성질로 오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는 것을 패괴된 인류가 화를 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심지어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것이 마치 사람의 패괴 성품이 자연적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고 패괴된 사람이 기분 나쁜 일이 생겼을 때 화를 내는 것과 같다고 착각하며,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것을 일종의 감정 표현으로 잘못 생각한다. 이번 교제를 통해 나는 너희 모두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해 오해하거나 상상하거나 추측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있는 진노에 대해 진정한 확신이 생기고, 이전에 가졌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내려놓고 하나님 진노의 본질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견해를 바로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너희 모두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해 더 이상 그 어떤 의심도 품지 않으며, 하나님의 참된 성품에 대해 인위적으로 추리하거나 상상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하나님 자신의 참된 본질이지 사람이 만들거나 지어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곧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피조물과 그 어떤 관계도 관련도 없다. 하나님 자신은 곧 하나님 자신으로, 영원히 피조물로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피조물의 일원이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 고유의 성품과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은 어떤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것을 분석하는 것도 아니며, 어느 사람을 파악하는 것도 아니다. 사물을 인지하거나 사람을 알아 가는 관점 혹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아 간다면 너는 영원히 하나님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체험이나 상상에 따르면 안 된다. 따라서 자신의 체험과 상상을 하나님께 덧붙여서는 절대 안 된다. 너의 경험과 상상력이 아무리 풍부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한된 것이다. 더구나 너의 상상은 사실에도, 진리에도 부합하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의 참된 성품과 본질에 전혀 맞지 않는다. 너의 상상력으로는 영원히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 후에 천천히 체험하고 천천히 알아 가는 것이다. 너의 협력과 진리에 대한 갈급함 때문에 언젠가 하나님이 네게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이해하도록 깨우쳐 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12)
니느웨 사람들에게 임한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
이어서 두 번째 단락인 요나 3장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이 말은 하나님이 요나에게 직접 일러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한 말씀으로, 여호와가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하고자 했던 말씀이다. 이를 통해 니느웨 사람들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하나님이 그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로 말미암아 성을 멸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성을 멸하기 전에 하나님은 그 사실을 알리고 사람들에게 40일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40일 안에 회개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니느웨 성을 소돔 성처럼 멸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안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다. 이는 분명 단순한 선포가 아니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와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태도를 전달한 것이었고 또한 성안 사람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낸 것이었다. 이 경고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악행을 증오했음을 알려 주었다. 또한 그들의 악행이 큰 재난을 불러올 것이므로 성안 사람들의 목숨도 위태롭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대함에 있어 소돔 성 사람들과 전혀 달랐던 니느웨 사람들의 태도
여기서 ‘무너지리라’는 무슨 의미이냐? 사라진다는 뜻이다. 왜 사라질까? 누가 성을 무너뜨릴 수 있단 말이냐? 물론 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니느웨 성 사람들은 어리석지 않았기에 듣자마자 그 말이 하나님에게서 왔고 하나님이 그 성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악독이 여호와 하나님을 노하게 만들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그들은 성과 함께 멸해질 것임을 알아차렸다. 니느웨 성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들은 후 어떻게 하였느냐? 왕부터 백성까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 성경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를 들은 니느웨 성 사람들은 소돔 성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소돔 성 사람들은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대항하여 악에 악을 더했지만, 니느웨 성 사람들은 그 선포를 들은 후 외면하거나 대항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 신복하고 금식을 선포하였다. 여기서 ‘신복’이란 무슨 의미이냐?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믿고 순종한다는 뜻이다. 니느웨 사람들의 실제 행동에 따라 해석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곧 그렇게 할 것임을 믿고 기꺼이 회개하겠다는 뜻이다. 곧 닥쳐올 재앙을 앞두고 니느웨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꼈느냐? 그들은 신복했기 때문에 두려워했다. 그렇다면 니느웨 사람들이 신복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 성경에 따르면,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니느웨 사람들이 참으로 신복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은 신복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꼈고,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금식을 하고 굵은 베옷을 입었다. 이는 그들이 회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니느웨 성 사람들이 소돔 성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 점은 대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개를 표하고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니느웨의 백성뿐만 아니라 왕도 그렇게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니느웨 왕의 회개
소식을 들은 니느웨 왕은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은 후 재에 앉았다. 그리고 니느웨 백성들에게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고 소나 양 같은 가축에게도 풀이나 물을 먹이지 말고, 사람이든 가축이든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라고 선포하였다. 니느웨 왕이 행한 일련의 일들을 살펴보면 그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회개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보좌에서 일어난 후 왕의 의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다. 이 일련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니느웨의 왕이 왕의 신분을 내려놓고 일반 백성처럼 굵은 베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다시 말해,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를 들은 후, 왕위에 있을 때 행했던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 권력을 내려놓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다는 것이다. 이때 니느웨 왕은 왕의 신분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였다. 또한 그는 성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처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라고 선포하였으며,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지시하였다. 예를 들어,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라고 하였다. 그는 니느웨 성의 왕으로서 최고 지위와 권세를 갖고 있으므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를 무시하거나 홀로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데에 그칠 수도 있었으며,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를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관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보좌에서 내려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여호와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회개했으며, 성안의 사람들과 가축들 또한 그렇게 하도록 명령했고, 심지어 사람들에게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명하였다. 니느웨 왕의 이러한 행동은 왕으로서 진정으로 행해야 할 행동이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왕도 하기 어렵고 하지 못했던 행동이자, 역사상 유례없는 위대한 행동으로, 기념하고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인류 역사에서 왕들은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께 대적하고 대항하게 하였지,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악행을 돌이켜서 여호와 하나님께 사함을 받고 징벌을 피하게 한 자는 없었다. 하지만 니느웨 왕은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께로 마음을 되돌리게 하였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도록 하였으며 왕위를 내려놓았다. 이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은 뜻을 바꾸고 진노를 거두어 성안의 사람들을 멸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니느웨 왕의 행동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보기 드문 기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회개한 모범 사례라 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신복(信服): 요나 3장에서는 ‘믿고’로 번역되었음.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13)
욘 3장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참된 회개를 보았다
니느웨 성의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포를 들은 후 일련의 일을 했다. 그들의 행동과 그들이 그런 일을 한 성격은 무엇이냐? 즉, 그들이 한 모든 행동의 본질은 무엇이냐? 그들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 하나님의 안중에 그들은 참으로 회개하였다. 하나님께 힘써 부르짖으며 죄를 자백하였고 또한 모든 악행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큰 두려움을 느꼈고,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는 것으로 자신을 돌이키고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것임을 표하였고, 여호와 하나님께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간구하였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결정과 내리려 했던 재앙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이 이전에 행했던 악을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들이 왜 멸망되어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히 회개하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완전히 떠나려고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를 알게 된 후 그들은 다 마음속으로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 이상 악을 저지르지 않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증오하는 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들의 지난날의 죄악을 용서하고 그들의 과거로 그들을 대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또한 그들은 다시는 악을 행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고자 했으며,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을 노하게 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들의 회개는 참되고 철저한 것이었으며, 가식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닌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진노했다는 소식을 들은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이 취한 모든 행동과 태도, 그리고 그들의 결정과 선택은 하나님의 눈에 아주 분명하게 보였다. 하나님은 그들이 보인 행동에 따라 마음이 바뀌었다. 이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느냐? 성경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렸지만 그때 하나님의 마음은 복잡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고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 모두의 마음을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참된 회개를 하고 죄를 자백하고 있고, 마음 깊은 곳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복이 있으며, 그들이 자신들의 악행으로 인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음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고, 여호와 하나님이 내릴 처벌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보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재앙을 면할 수 있도록 그들에 대한 진노를 거두어 달라는 절실한 간청도 들었다. 하나님은 모든 사실을 살핀 후 조금씩 진노를 거두었다. 전에 얼마나 크게 노했든 간에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참된 회개를 보고 감동받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았고, 더 이상 노하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그들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었고 인도하고 공급해 주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14)
욘 3장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복이 있으면 너는 늘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니느웨 성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바뀌는 과정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모호함도 없었고, 순수한 진노에서 순수한 관용에 이르렀다. 여기서 하나님의 본질이 참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사역에 있어 단 한 번도 우유부단한 적이 없다. 그의 사역 원칙과 목적은 흠 없이 순결하고 투명하며, 여기에는 절대 그 어떤 계략과 음모도 섞여 있지 않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본질에는 어둠과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노한 것은 그들의 악행이 하나님 안중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고 그들에게 다시 관용을 베풀었을 때도 하나님이 나타낸 것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었다. 이 모든 변화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로 인해 바뀐 것이다. 그 기간에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은 변하지 않았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고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본질도 바뀌지 않았다. 사람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노하지만, 사람이 참된 회개를 하면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려 진노를 거둔다. 그러나 사람이 완고하게 하나님께 계속 대항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멸할 때까지 노를 멈추지 않는데, 하나님의 진노는 그렇게 조금씩 사람에게 가까워진다. 이 또한 하나님 성품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나타내는 성품이 진노든, 긍휼과 자비이든 모두 사람의 태도와 행동,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난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 기인한다. 만약 하나님이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노한다면, 그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사람이 참된 회개를 하거나 하나님께 ‘머리를 숙인’ 적이 없고 진심으로 신복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 항상 하나님의 보살핌 안에 있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진실로 신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적대시한 적이 없을 것이다. 늘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가 늘 임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임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간단한 성경 내용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 본질의 참됨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진노하는 것과 마음을 되돌리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진노할 때와 마음을 되돌릴 때 극명한 대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관용, 두 측면의 본질에 차이와 대비가 크다고 느꼈다. 하지만 니느웨 성 사람들의 회개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보면서 사람은 또 한 번 하나님의 참된 성품의 다른 면을 느낄 수 있었다. 인류는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진실성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으며, 진실하게 발현된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있었다. 인류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전설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그때 하나님의 마음이 진실했고, 마음을 되돌린 것도 진실했으며, 하나님이 확실히 또 한 번 인류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15)
욘 3장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참된 회개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 결말을 바꾼 니느웨 사람들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리는 것과 진노하는 것에 모순이 있느냐? 당연히 없다! 하나님이 관용을 베풀었을 때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느냐? 그것은 성경에 언급한 ‘각기 악한 길에서 떠나다’와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다’이다.
‘악한 길’은 한두 가지의 악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행한 일의 근원이 사악함을 의미한다. ‘악한 길에서 떠나다’는 더 이상 그렇게 일을 하지 않고 악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하는 방식, 근원, 출발점, 속셈, 원칙 모두를 바꾸어 더 이상 그런 방식과 원칙으로 향유하거나 즐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다’의 ‘떠나다’는 내려놓고 버림으로 과거를 완전히 끊어 내고 다시는 지난 길을 걷지 않는다는 뜻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난 것은 참된 회개를 했음을 증명하고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습과 내면을 모두 관찰한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마음으로 참된 회개를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살펴보고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제서야 마음을 되돌렸다. 즉, 사람의 행동과 태도, 다양한 모습과 마음에 진실로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음을 돌리고, 뜻을 바꾸고, 내린 결정을 거두고, 그들을 벌하지 않고, 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의 결말이 바뀌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되찾았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었다.
얻기 힘든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이 아닌 사람의 참된 회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컸든 간에,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은 그 순간 하나님의 마음은 점차 누그러져 뜻을 되돌리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을 멸할 것이라 선포하기 바로 직전, 즉 그들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기 직전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면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점차 관용과 긍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두 성품이 하나의 일에서 동시에 나타났는데, 이는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여기서 모순되지 않음을 사람은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해야 하느냐? 완전히 다른 두 본질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기 전과 후에 하나님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참되고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 본질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태도를 통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이 어렵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노할 때 하나님은 사람이 진실로 회개할 수 있기를 바라고, 사람의 참된 회개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낌없는 긍휼과 관용을 베풀 것이다. 사람의 악행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지만,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를 하는 자와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을 대한 일에서 하나님의 태도는 아주 명확하다. 즉,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고, 하나님은 사람의 참된 회개를 원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면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리고 사람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16)
생생하게 나타나는 창조주의 공의로운 성품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마음을 되돌렸을 때, 그가 베푼 긍휼과 관용이 거짓이었겠느냐?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너는 하나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두 측면의 성품이 전환되어 나타난 것을 보며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나님의 성품은 분리되지 않고 완전하다. 그가 사람에게 진노하든, 긍휼과 관용을 베풀든 모두 그의 공의로운 성품의 발현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생생하게 나타나며, 그는 일이 진행되는 상태에 따라 마음과 태도를 바꾼다.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태도 변화는 그가 로봇이나 돌부처가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갖고 있음을 인류에게 말해 준다. 그는 살아 숨 쉬는 하나님 자신으로, 니느웨 사람들에게 진노할 수도 있고, 그들의 태도 변화에 따라 그들의 과거를 용서할 수도 있으며,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결정할 수도 있고, 그들의 회개로 그 결정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다. 사람은 규례에 끼워 맞추기를 좋아하고, 규례로 하나님을 규정하고 정의하기를 좋아하며, 공식(公式)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 가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이 생각할 줄 모르고 실질적인 견해도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물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며, 그와 동시에 서로 다른 측면의 하나님 본질이 드러난다. 바뀌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리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인류에게 그의 생명이 확실히 존재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생생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을 진실로 드러냄으로써 인류에게 그의 진노와 긍휼과 자비 그리고 관용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물의 발전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 드러날 수 있다. 그에게는 수사자 같은 진노도 있고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긍휼과 관용도 있다. 그의 공의로운 성품은 그 누군가 의심하거나 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누군가 바꾸거나 곡해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즉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은 만사와 만물 가운데서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 만물의 구석구석에서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고, 모든 순간순간에 생생하게 시행되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시간이나 공간에 국한되어 기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발현되고 나타난다.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려 진노를 거두고 니느웨 성을 멸하지 않은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오직 긍휼이요 자비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진노는 빈말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긍휼을 거두고 크게 진노할 때, 하나님에게 인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악행으로 인해 크게 진노한다. 그의 진노에는 흠이 없다. 또 하나님은 사람의 회개로 감동받고 사람의 회개로 마음을 돌이킨다. 그의 감동과 돌이킴 그리고 사람에 대한 관용과 긍휼은 어떤 흠도 없이 깨끗하고 순수하고 순결하며 아무 불순물도 섞여 있지 않다. 하나님의 관용은 곧 관용이고, 긍휼은 곧 긍휼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회개와 다양한 태도에 따라 진노를 드러내기도 하고 긍휼과 관용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드러냈든 그것은 모두 순결하고 직접적이며 어떤 피조물의 본질과도 다르다. 하나님이 나타내는 사역의 원칙, 마음과 생각 혹은 하나님이 내린 어떤 결정이나 하나님의 그 어떤 행동에서도 흠이나 오점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은 결정한 이상 그렇게 행하며, 그렇게 이룬다. 그 결과는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정확하다. 그 근원에 흠도 오점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에는 어떤 흠도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 역시 피조물이 갖추지 못한 것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으며 어떤 연구와 검증(원문: 推敲與體驗)도 통과할 수 있다.
너희는 니느웨 성 이야기를 알게 된 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서 다른 측면의 본질을 보게 되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의 다른 측면을 보게 되지 않았느냐? 인류 중에 이러한 성품을 갖춘 사람이 있더냐? 하나님의 이런 진노를 지닌 사람이 있더냐? 하나님의 이런 긍휼과 관용을 가진 사람이 있더냐? 피조물 중에 크게 진노하여 인류를 멸하기로 결정하거나 인류에게 재앙을 내릴 수 있는 자가 있더냐? 또 인류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고 죄를 사해 줌으로써 인류를 멸하겠다는 결정을 바꿀 자격이 있는 자가 있더냐? 창조주는 자신의 고유한 방식과 원칙으로 그의 공의로운 성품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어떤 사람과 일, 사물에도 좌지우지되거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의 고유한 성품으로 볼 때 그 어떤 사람도 그의 마음과 생각을 바꿀 수 없고, 그를 설득하거나 그가 내린 결단을 바꾸지 못한다. 피조물의 모든 행동과 생각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심판받는다. 그가 진노하든, 긍휼을 베풀든 그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오로지 창조주의 본질, 즉 창조주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결정된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이다!
너희는 니느웨 사람들을 대하는 하나님의 달라진 태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유일무이’라는 단어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중 긍휼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 중 한 측면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 이 두 가지 측면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라 정의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거룩한 것으로, 사람의 거스름도, 누구의 의심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는 피조물과 비피조물 모두에게 없는, 하나님만의 고유한 성품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하며 사람이 거스를 수 없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다른 측면인 긍휼도 거룩하며, 사람이 거스를 수 없다. 그 어떤 피조물도, 비피조물도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대표하여 하나님이 하려는 사역을 할 수 없고,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대표하여 소돔을 멸하거나 니느웨를 구원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의 참된 발현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17)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진심
사람들은 늘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행사를 나타내어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류와의 대화를 멈춘 적이 없고, 인류를 피해 숨거나 감춘 적도 없으며, 그의 마음과 생각, 말씀과 행사를 인류에게 다 공개하였다. 그러므로 인류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기만 한다면 다양한 경로와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 가고 이해할 수 있다. 인류는 늘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인류를 피하고 숨는다고, 사람이 그를 알아 가고 이해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인류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으며, 더욱이 창조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말씀하고 무엇을 행했는지 등등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틈날 때만이라도 창조주의 말씀이나 행사에 관심을 두고 알려고 하고, 창조주의 생각과 마음의 소리에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인다면, 창조주의 모든 생각과 말씀과 행사가 공개적이고 투명하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창조주가 항상 인류와 함께 있고, 만물, 그리고 인류와 대화하고 있으며, 매일같이 새로운 행사를 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본질과 성품은 인류와의 대화에서 나타나고, 그의 마음과 생각은 그의 행사에서 남김없이 드러난다. 그는 언제나 인류와 함께하며 인류를 관찰하고, 소리 없는 언어로 조용히 만물과 인류에게 알려 준다. ‘나는 하늘 위에 있다. 나는 만물 가운데 있다. 나는 수호하고 있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나는 바로 네 곁에 있다.’ 그의 두 손은 따뜻하고 힘이 있으며, 그의 발걸음은 가볍다. 그의 음성은 감미로우며, 그의 그림자는 끊임없이 사람의 주변을 맴돈다. 그의 얼굴은 아름답고 온화하다. 그는 떠난 적도 사라진 적도 없으며, 줄곧 그림자처럼 인류와 함께하였다. 인류를 살뜰히 보살피는 정성과 인류에 대한 특별한 ‘감정’, 그리고 진실한 염려와 사랑은 그가 니느웨 성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드러났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은 요나와의 대화에서 창조주가 손수 만든 인류에 대한 연민의 정을 오롯이 드러냈다. 여기에서 너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심을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요나 4장 10절에서 1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의 원래 말씀으로, 요나와의 대화이다. 이 대화는 짧고 간결하지만, 인류를 아끼고 염려하는 창조주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피조물에 대한 진실한 태도와 감정을 나타냈고, 또한 인류가 들어 보기 어려운, 명확한 언어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심을 표현했다. 이 대화는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 준다. 어떤 태도겠느냐? 회개하기 전후의 니느웨 성 사람들에 대한 태도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류를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이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도 있고 하나님의 성품도 있다.
이 대화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겠느냐?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에서 하나님이 ‘아끼다’라는 단어로 인류에 대한 그의 진실한 태도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아끼다’라는 단어를 글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다양한 해석들이 나올 수 있다. 첫째, 거기에는 보살피고 불쌍히 여긴다는 의미가 있다. 둘째, 몹시 사랑한다는 의미가 있다. 셋째, 너무 아껴서 차마 상처를 줄 수 없다는 의미가 있다. 한마디로 이 단어는 몹시 사랑하고 어여삐 여기며 내치지 못한다는 뜻을 지닌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고 인류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 대화에서 그의 마음의 소리와 인류에 대한 태도를 남김없이 보여 주었다.
니느웨 성 사람들도 소돔 성 사람들처럼 패괴되고 사악하고 아주 폭력적이었지만, 회개했기에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려 그들을 멸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를 대하는 태도는 소돔 성 사람들과 확연히 달랐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순종하고 회개하였고, 여러 면에서 진실하고 간절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에 하나님은 다시 한번 그들을 아끼는 마음이 우러났고, 그들에게 상응하는 보답을 해 주게 되었다. 그 누구도 하나님처럼 인류에게 보답을 해 주고 인류를 아낄 수 없고, 그 누구도 하나님처럼 긍휼과 관용, 그리고 인류에 대한 진심을 지닐 수 없다. 네가 생각하는 위인이나 초인 중에 높은 위치, 즉 위인의 입장이나 지고한 위치에 서서 인류나 피조물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가 있느냐? 인류 중에 누가 인류의 생존 현황을 제 손금 보듯 환히 알 수 있겠느냐? 누가 인류의 생존에 부담과 책임감을 가질 수 있겠느냐? 누가 성을 멸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겠느냐? 또 누가 성의 죄를 사할 자격이 있겠느냐? 누가 자신이 창조한 만물을 아낀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오직 창조주밖에 없다!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어여삐 여기고, 이 인류를 사랑하며, 이 인류를 내치지 못하는 참된 마음을 갖고 있다. 또 오직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며 모든 피조물을 아낀다. 그의 마음은 인류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끌린다. 그는 인류의 사악하고 패괴된 모습에 분노하고 근심하고 슬퍼하며, 인류가 회개하고 신복하는 모습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마음을 되돌리고 축하한다. 그의 모든 마음과 생각은 인류를 위해 생기고 움직이며, 그의 소유와 어떠함은 인류를 위해 발현된다. 또한 그의 희로애락은 인류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인류를 위해 바삐 움직이고, 인류를 위해 묵묵히 자신의 생명을 전부 희생하며, 인류를 위해 생명의 매분 매초를 기여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아낄 줄 몰랐지만 자신이 손수 창조한 인류는 늘 아껴 왔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인류에게 주었다…. 그가 조건도 보상도 없이 긍휼과 관용을 베푸는 것은 오로지 인류가 그의 눈 아래에서, 그의 생명의 공급 아래에서 계속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 언젠가 인류가 다시 그의 앞에 돌아와 그가 바로 인류에게 생존을 위한 자양분을 공급하고 만물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그분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18)
욘 4장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참된 고백
여호와 하나님이 요나와 나눈 이 대화는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참된 고백임이 틀림없다. 이는 창조주가 자신이 주재하는 만물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여호와 하나님이 한 말씀과 같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이는 하나님이 니느웨 성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안에 살아 있는 것(사람과 가축까지)이 얼마나 있는지, 아이나 미성년자, 즉 좌우를 분변 못 하는 사람이 몇 명인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류에 대해 손금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증거이다. 다음으로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태도, 즉 창조주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인류의 무게를 사람에게 알려 준다. 여호와 하나님이 한 말씀과 같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요나를 책망하는 말씀이지만 모두 사실이다.
요나가 명을 받들고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긴 했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 성안 사람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염려와 기대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요나를 질책함으로써 그에게 알려 주려는 것이 있었다. 즉, 인류는 하나님이 손수 만든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심혈을 기울였고, 모든 사람에게 기대를 걸고 있으며, 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 공급을 누리고 있고, 하나님이 자신이 기울인 심혈로 그 모든 사람을 바꾸어 왔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가 박 넝쿨을 아끼는 것처럼 하나님도 손수 만든 인류를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더군다나 그 성안에는 수많은 아이와 무고한 가축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철없는 나이대인 창조된 인류의 생명을 그렇게 쉽게 끝내거나, 그들의 결말을 그렇게 쉽게 정할 리가 없다. 하나님은 그들이 성장하여 다시는 조상들이 갔던 길을 답습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받지 않으며, 니느웨 성의 과거를 증언할 수 있기를 바랐다. 또한 하나님은 회개한 후의 니느웨와 니느웨의 미래를 보고, 다시 하나님의 긍휼 아래에서 사는 니느웨를 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니느웨 성에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창조된 인류가 곧 니느웨의 미래라고 생각했고, 그들이 언급하기 싫은 니느웨 성의 과거를 짊어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 아래에 있는 니느웨 성의 과거와 미래를 증언하는 중차대한 일을 책임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그 참된 고백에서 인류를 긍휼히 여기는 창조주의 마음을 완전히 볼 수 있다. 이는 인류에게 ‘창조주의 긍휼’이 알맹이 없는 단어나 헛된 약속이 아니라 여기에는 구체적인 원칙과 방식, 목표가 있다는 것과 그는 거짓이나 가식이 없고 진실하고 참되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는 모든 시기와 시대에 끊임없이 인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었다. 하지만 요나와의 대화는 창조주가 왜 인류를 긍휼히 여기는지, 어떻게 긍휼히 여기는지,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관용과 진심을 베풀었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창조주가 언어로 표현한 유일한 내용인 것이다. 이 짧은 대화는 여호와 하나님이 인류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표현한 것이고, 인류를 향한 자신의 태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긍휼을 많이 베풀었다는 구체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인류의 선조에게 긍휼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예전과 같이 오늘날의 후손에게도 한 세대 또 한 세대 긍휼을 베풀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진노가 종종 인류의 어떤 구석, 어떤 시대에 임했더라도 하나님은 긍휼을 멈춘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긍휼로 창조된 인류를 한 세대 또 한 세대 이끌고 인도하며 그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인류에 대한 그의 참된 마음이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이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한 말씀처럼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손수 만든 만물을 아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공의로운 성품에 있는 긍휼이다. 이것 또한 틀림없는 창조주의 유일무이함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19)
다섯 부류의 사람
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한 사람의 인식과 체험에 기반하여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분류하겠다. 이를 통해 너희에게 지금 자신이 처한 단계와 분량을 알게 하려 한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한 깨달음을 놓고 볼 때, 사람이 처한 단계와 각 단계의 분량을 대략 다섯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이 주제는 유일무이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아는 것에 기반하여 제시된 주제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다음의 내용을 읽을 때, 자신이 하나님의 유일무이함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고, 얼마나 알고 있는지 자세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너희가 어느 단계에 있는지, 너희의 분량이 얼마나 되는지, 너희가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 가늠해 보아야 한다.
첫 부류, 강보에 싸인 아기 단계
무엇을 강보에 싸인 아기라고 하느냐? 강보에 싸인 아기는 바로 이제 갓 태어난 아기, 신생아를 가리키는데, 이는 사람이 가장 어릴 때를 가리킨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일에 관해 인식이나 지각이 거의 없고, 모든 것에 모호하고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 있다.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길 수도 짧을 수도 있지만, 그들의 모호하고 불명확한 상태와 실제 분량으로 그들은 강보에 싸인 아기 단계로 결정된다. 강보에 싸인 아기 단계에 처한 사람의 상태를 정확히 정의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얼마가 되었든 시종일관 어리둥절하고, 흐리멍덩하며, 무지몽매하여 왜 하나님을 믿는지 모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며, 누가 하나님인지 모른다. 하나님을 따르긴 하지만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없고, 자신이 따르는 분이 하나님인지 분명히 할 수 없으며, 더군다나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하는지 확신이 없다. 이것이 바로 이 부류 사람들의 실상이다. 이 사람들은 마음이 혼탁하다. 결론적으로 말해 흐리멍덩하게 믿는 것이다. 그들은 항상 혼탁하고 텅 빈 상태에 있으며, 어리둥절하고, 흐리멍덩하며, 무지몽매하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본 적도, 느껴 본 적도 없다. 따라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면 마치 무자천서(無字天書)를 읽듯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전설을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혼탁하면서도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 쓸데없는 헛수고라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부류인 강보에 싸인 아기 단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부류, 젖 먹는 아기 단계
이 단계의 사람들은 강보에 싸인 아기 단계에 비해 조금의 발전은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나 깨달음이 없으며,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분명한 생각과 속셈이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옳든 옳지 않든,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과 목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평안과 기쁨이 있고, 윤택한 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아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고 또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더 많은 축복을 받기를 바라며, 금생에 백배를 얻고 다음 생에 영생을 얻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이 생각하고 헌신하고 대가를 치르고 고생하는 목표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며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평안하게 하고 은혜를 베풀어 줄 수 있다는 것만 확신한다. 하나님이 왜 사람을 구원하는지, 하나님이 말씀과 사역으로 어떤 성과를 거두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 또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알기 위해 노력한 적도 없고 관심도 없으며 상관하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뜻,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에 관해 물어보려 하지 않고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께만 관심이 있으며 그 외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얼마나 되든 그들은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을 자주 양육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들은 계속 하나님을 믿는 길을 가기가 매우 어렵다. 만약 예전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면, 그들은 매우 쉽게 떠나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부류로, 젖 먹는 아기 단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 부류, 젖을 뗀 아기 단계, 즉 유아 단계
이 단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뚜렷한 인식을 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자신에게 참된 체험이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평안과 기쁨을 추구하고 은혜받는 것에 몰두하거나 다른 사람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체험을 얘기하고 하나님이 베푼 축복을 찬양하며 간증한다 해도 그것이 사람에게 생명이 있고 진리의 실제가 있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따라야만 한다는 지나친 욕망을 품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림과 동시에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어 하고,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며, 기꺼이 고생하고 수고하며 또 하나님과 협력하길 원한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추구함에는 불순물이 지나치게 많다. 자신의 속셈과 욕망이 너무 크고 성품이 너무 교만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기 어렵고, 하나님께 충성하기도 정말 쉽지 않다. 그러므로 항상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고, 하나님께 한 맹세도 지킬 수 없다. 그들은 늘 최대한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강력하게 대항하는 모순적인 상태에 있다. 그들은 늘 하나님께 맹세하지만, 또 금방 자신의 맹세를 번복하는 모순적인 상태에 있다. 그들은 늘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지만, 또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부정하는 모순적인 상태에 있다. 하나님의 깨우침, 인도, 공급, 도움을 간절히 바라지만 또 스스로 활로를 찾는 모순적인 상태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이해하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께 가까이 가길 원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피하며, 하나님을 향한 마음도 닫혀 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대해 글자 그대로 어느 정도의 얕은 이해와 체험이 있고,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얕은 개념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잠재의식 속에 하나님이 진리인지에 대한 확신이나 확정이 없고,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인지 확신하지도 못한다. 또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의 진실성을 확정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참된 존재에 대해서는 더욱 확정하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는 늘 의심과 오해, 상상과 관념이 섞여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림과 동시에 마지못해 그들이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진리를 조금씩 체험하거나 실행한다. 이로써 그들은 믿음을 충족시키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얻는 경험을 풍부하게 하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자신이 확립한 인생의 길을 걷고, 인류의 정의로운 사업을 완수하겠다는 허영심을 만족시키며, 동시에 복을 받으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인류의 큰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에게 도박을 걸며, ‘하나님을 얻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다’는 원대한 포부와 평생의 염원을 이루고자 한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들은 욕망과 복을 얻으려는 속셈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이를 내려놓기를 꺼리고 아까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을 받으려는 욕망과 ‘하나님을 얻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다’는 숙원이 사라지면 하나님을 믿는 원동력을 잃게 될까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현실을,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마주하지 않으려 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직시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더더욱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하나님,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그들의 상상을 대체하게 되는 순간, 그들의 꿈이 깨지기 때문이다. 또한 소위 순수하고 올바른 신앙과 오랜 시간 고생하면서 쌓은 ‘공덕’이 수포로 돌아가거나 물거품이 되고, 그들이 오랫동안 고생하면서 쌓은 ‘강산’이 곧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오랫동안 고생하고 대가를 치렀던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그들이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에게 심적으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자 가장 맞이하고 싶지 않은 결과이다. 따라서 그들은 계속해서 대립하고 뉘우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부류로, 젖을 뗀 아기 단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앞서 언급한 세 부류의 사람들, 즉 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 그리고 공의로운 성품을 참되게 믿지 못하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인정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이 세 단계의 사람들은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기 무척 어렵고, 하나님의 긍휼을 얻기도 어려우며,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기도 쉽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방법과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태도로 인해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속에 역사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의심, 오해, 상상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인식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몹시 위험한 세 부류이자 몹시 위험한 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신분, 또 하나님이 진리인지, 하나님이 진실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여전히 의심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이때,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진리, 길, 생명이라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구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이러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참된 인도와 공급을 받을 수 있겠느냐? 이 세 단계에 처한 사람들은 언제든 하나님께 대항할 수 있다. 언제든 하나님을 판단하고 모독하며 배신할 수 있고, 또한 참도를 배반하고 하나님을 저버릴 수 있다. 이 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위험한 시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 번째 부류, 유아의 성장 단계, 즉 유년 단계
사람은 젖을 뗀 후, 다시 말해 충분히 은혜를 누린 후 하나님을 믿는 의미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한다. 사람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역하려 하는지 등과 같은 문제에 대해 알려고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긴 후, 사람들은 이 의문들을 가진 상태에서 끊임없이 양육을 받으며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게 된다. 이 시기에 하나님의 참된 존재에 대한 의심은 완전히 사라지고, 하나님을 믿는 의미도 정확히 깨닫게 된다. 이를 기반으로 하나님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고,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해서도 점차 어느 정도 답을 찾게 된다. 이 시기의 사람은 성품의 변화이든 하나님을 알아 가는 측면에서든 모두 정상 궤도에 들어서기 시작하고 전환점에 들어서게 된다. 이때부터 사람은 비로소 생명이 생기기 시작한다. 생명이 생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갖는 오해, 상상, 관념, 그리고 하나님을 막연하게 정의하는 것 등의 하나님을 알아 가는 부분과 관련 있는 문제들이 점차 해결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된 존재를 진정으로 믿고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고 하나님의 지위를 확정하게 되며, 하나님을 진실로 따름으로써 막연한 신앙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추구했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된다. 그리고 진리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채찍질, 징계를 사모하며, 성품이 변화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또한 이 시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여러 관념과 상상을 점차 내려놓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서 하나님에 대해 순수하고 올바른 기본 인식을 어느 정도 갖게 된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어떤 부분은 아직도 그리 구체적이거나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의 관념, 잘못된 인식,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점차 내려놓기 시작하고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을 더 이상 고수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은 포기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관념의 것, 지식적인 것, 사탄에게서 온 것을 버리기 시작하고, 옳고 긍정적인 것에 순종하려고 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과 진리에 맞는 것에 순종하길 원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체험하고 실천해 보려고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행동 원칙으로 하고, 성품이 변화하는 근거로 삼는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생명이 되도록 한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마음속으로 믿는 하나님이 참으로 존재하는 분임을 점점 더 분명하게 깨닫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의 체험과 삶에서 하나님이 언제나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고, 사람을 인도하고 있고, 사람에게 공급하고 있음을 점차 깨닫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점차 하나님의 존재를 실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잠재의식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사역을 인정하고 확신하며, 하나님의 말씀도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인정하게 될 때,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부인하게 된다. 자신의 관념과 지식, 자신의 상상을 부인하게 되고 또한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계속해서 구하게 된다. 이 성장 시기에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은 매우 얕고, 심지어 자신의 언어로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으며, 감성적인 깨달음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세 단계와 달리, 이 단계 사람들의 어린 생명은 양육과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아 이미 싹트기 시작했다. 땅에 심어진 씨앗 하나가 물과 양분의 공급을 받은 후 땅을 뚫고 나오는 것과 같이, 싹이 텄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사람들은 생명의 조짐을 알 수 있다. 사람에게 생명이 생기면 성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발을 내디디고 자신의 관념을 내려놓으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면 이를 기초로 사람의 생명은 필연적으로 점차 성장한다. 이 성장은 무엇을 근거로 가늠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험,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한 참된 체험으로 가늠할 수 있다. 이 성장 시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정확하게 묘사하기 정말 어렵다. 하지만 주관적으로 더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목표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구원 대상이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성장 단계에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기는 하지만 불분명하고 구체적이지 않다. 분명하게 말하지는 못할지라도 속으로는 성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해의 깊이가 얕아 아직 초기 단계에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대함에 있어 이 단계의 사람들은 구체적인 관점이 있다. 이는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와 방식이 바뀌는 것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요구와 폭로를 통해 만약 사람이 더 이상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실제에 진입하지 않는다면, 또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아 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의미를 잃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무리 많이 누린다 해도 성품이 변화하지 않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알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만약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산다면 사람은 영원히 성장할 수 없고,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만약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실한 체험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영원히 아기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생명이 성장하는 단계로 발을 내딛지 못할 것이다. 네가 영원히 아기 단계에서 살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며, 하나님 말씀을 생명이 되도록 하지 못하고, 또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과 인식이 없다면, 네가 하나님께 온전케 될 희망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생명이 되도록 하는 사람,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사람, 패괴 성품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염원이 있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려는 소망이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이들이야말로 진정 네 번째 부류에 속한 사람이다. 다시 말해, 유아의 성장 단계, 즉 유년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다섯 번째 부류, 생명의 성장 단계인 성년 단계
비틀거리며 부딪치고 넘어지는 유년 단계를 겪고 반복해서 성장하는 단계를 지나 사람의 생명은 안정화된다. 더 이상 전진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가로막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앞길은 여전히 험난하지만 더 이상 연약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더 이상 모색할 필요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방향을 잃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체험하는 과정에서 기반이 단단해졌고, 마음은 하나님의 존귀함과 위대함에 이끌린다. 그래서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르며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고자 간절히 바란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를 믿고 있는지, 자신이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자신이 사는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하나님이 한 말씀이 모두 진리임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이들은 오랜 시간 체험을 통해 만약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없다면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올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 단계의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시련이 임하길 간절히 바란다. 그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보고, 더 순결하게 사랑할 수 있길 바라며, 동시에 더 진실하게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단계의 사람은 이미 아기 단계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떡으로 배를 불리는 단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이들은 더는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지나치게 바라지 않고, 오히려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이 끊임없이 임하길 바라고 또 받아들일 자신감도 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나 추구 혹은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 그들은 마음속으로 모두 명확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년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막연한 신앙 단계, 은혜로 구원 얻는 단계, 생명이 어려서 시련을 감당할 수 없는 단계에서 벗어났고, 모호한 단계, 모색하는 단계, 늘 행할 방법이 없는 단계를 떠났으며, 변덕스러운 불안정기와 맹목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단계와 결별하였다. 이런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이 있고, 하나님과의 진실한 사귐과 소통이 있다. 이 단계에 사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일할 때 진리의 원칙을 찾을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지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길을 찾았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증거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점차 성장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 인류를 창조한 하나님의 뜻, 인류를 경영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점차 깨닫고 알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해서도 본질적으로 깨닫고 알게 되는데, 이는 사람의 그 어떤 관념이나 상상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다섯 번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의 생명이 완전히 성숙하였다고 말할 수 없고, 의인이라 부를 수 없으며, 완전한 사람이라 칭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들은 생명이 성숙한 단계로 이미 들어섰고, 하나님 앞에 이르러 하나님 말씀과 대면하고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체험하였고, 무수한 시련을 겪었으며,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 형벌도 셀 수 없이 겪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순종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잠재의식에서 정확하고 뚜렷한 인식으로, 얕은 인식에서 깊은 인식으로, 모호한 인식에서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인식으로 바뀌었으며, 또한 힘들게 모색하고 수동적으로 구하던 데서 쉽게 깨닫고 자발적으로 증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의 진리의 실제를 갖추었고, 베드로처럼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바로 다섯 번째 부류의 사람으로, 생명이 성장하는 삶을 사는 단계, 성년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