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7) 제 1 부
3.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
계속해서 오늘은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 중 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에 관해 교제하도록 하겠다. 지난번에는 해당 주제의 세 번째 항목, 즉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해 교제했다. 이 항목을 세 개의 소주제로 나누어 교제하고 해부했는데, 그 세 가지가 어떤 것이었느냐? (‘첫 번째,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마음대로 변조하고 해석한다. 두 번째, 적그리스도는 관념에 맞지 않는 하나님 말씀을 부정한다. 세 번째,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질지 엿본다.’입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의 전부이겠느냐? (몇 가지가 더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말이나 모습이 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불손하게 대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불손하게 대하는 것이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는 모습 중 하나이냐? 그건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는 모습에 대한 해석 중 하나가 아니냐? 여기서는 해석하라는 게 아니라 네가 보거나 접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네가 전해 들은 것 중에서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는 여러 가지 모습과 행동을 말해 보라는 것이다. 보아하니 너희는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는 여러 가지 모습을 그리 잘 인식하지는 못한 것 같구나. 전에 내가 교제한 세 가지 모습에 관해 너희가 문자 그대로 좀 인식하고 있지만,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는 모습에 또 어떤 것들이 있는지는 생각해 내지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전에 교제한 세 가지 모습은 다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는 몇몇 행위와 모습은 떳떳한 것이냐? 올곧은 사람이 해야 할 행동이냐? (아닙니다.) 이런 것은 모두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모습도 아니고, 긍정적인 것도 아니다. 하나같이 부정적인 것이다. 이 몇 가지 행위의 본질의 이면이 가리키고 있는 대상은 사탄, 마귀이고 하나님의 원수이다.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태도는 순종, 수용, 체험이 아니다. 또한, 자신의 관념을 내려놓고 단순하게 마음을 열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사탄에게 속한,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온갖 태도를 형성한다. 적그리스도의 이 몇 가지 모습과 행위에서 표출되는 성품은 바로 영계의 사탄에게서 표출되는 것이다. 이 몇 가지 행위는 어떤 상황에서든, 어느 시대에서든, 어느 사람들 사이에서든 긍정적이지 않고 사악하고 부정적이며, 피조물이나 정상적인 사람이 갖추어야 할 모습과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적그리스도의 모습이라고 규정한다. 이 세 가지를 교제하고 나서 대다수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적그리스도의 기본적인 태도가 이 세 가지 모습으로 전부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너희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방식은 이 세 가지에만 그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고 있음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모습, 행위가 하나 더 있다. 이 한 가지가 무엇이겠느냐? 바로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상품 취급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만약 문자적 의미로 본다면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아마 몇몇 사람을 가리키는 장면들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에 해당하는 구체적이고 진정한 모습에 대해서는 아직 모호하고 두루뭉술해서 그리 뚜렷하지 않다. 그럼 오늘은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상품 취급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교제해 보기로 하자.
4)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상품 취급한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상품 취급한다. 또한, 적그리스도가 진리를 상품으로 취급한다고도 할 수 있다. 상품으로 취급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입으로 떠들면서 으스대고, 그런 다음 남들을 속여 신임과 옹호, 동조를 얻고, 쉽게 명예와 이익, 지위를 얻는 과정에서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그의 디딤돌이 된다는 뜻이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이런 식으로 대한다. 그가 진리를 이용하고, 가지고 놀고, 짓밟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로 결정된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 진리가 과연 무엇이냐? 진리를 어떻게 정의해야 정확하겠느냐? 진리가 무엇인지 너희가 말해 보아라. (진리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입니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정확하고 구체적인 정의이다. 너희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너희의 생활, 너희의 인생 속에서 이 말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느냐? 이 말을 어떻게 체험해야 하느냐? 너희가 떠오르는 대로, 이해한 대로, 여과나 가공하지 말고 즉시 말해 보아라. 너희가 체험한 말로 말해 보아라. 진리가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이 무엇이냐? (진리는 한 사람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바꿀 수 있고, 사람이 정상인의 모습으로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비록 전면적이지는 않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진리에 대한 체험적 인식이고, 모두 일상생활에서 겪고 정리한 체험 소감이다. 누가 또 말해 보아라. (진리는 저희의 패괴 성품을 정결케 해서 저희가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 뜻에 맞게 행동하게 해 줍니다.) 정말 훌륭하고 예리한 말이다. 또 말해 보아라. (진리는 생명이고 영생의 길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에 의지해 살아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진정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이 두 가지는 일상생활의 실행 원칙에 관계된다. 비교적 깊고 수준 높은 해석이지만 매우 실제적이다. (진리는 사람 내면의 패괴 성품을 폭로할 수 있고, 일을 바라보는 내면의 그릇된 관점을 바로잡아 진정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몇 가지는 전부 실제적이고, 진리가 사람에게 지니는 가치와 의미, 진리가 사람에게서 이루는 성과와 관련된다. 너희가 말한 내용은 우리가 전에 자주 얘기했다. 비록 각자가 말한 요지는 다르지만 모두 예전에 진리를 해석하고 정의했던 ‘진리는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말과 관계가 있다. 진리는 하나님 말씀과 동일시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곧 진리이다. 너희가 교제한 체험적 인식에서 볼 때, 진리는 모든 긍정적 사물의 실제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진리는 모든 긍정적 사물의 실제이다. 진리는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고, 사람이 걸어가는 방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진리는 사람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 하나님이 사랑하고 열납하는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다. 진리가 이렇게 소중하니 사람은 어떤 태도와 관점으로 하나님 말씀을 대하고 진리를 대해야 하겠느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 하나님 말씀이 생명줄이므로 마땅히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먹고 마시고 누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사람의 생명, 사람이 걸어가는 방향, 사람의 항시적 도움과 공급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진리가 말하고 요구하는 대로 실행하고 체험하며, 진리가 사람에게 주는 갖가지 요구와 원칙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은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된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주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는 것이지 하나님 말씀을 연구, 분석, 추측,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사람의 항시적 도움이자 공급으로서,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사람은 진리를 가장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 그 이유는 사람이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고, 진리에 의지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하고, 진리에 의지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진리에 의지해 일상생활에서 실행의 길을 찾고 실행 원칙을 파악함으로써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진리에 의지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관점, 어떤 방식으로 얘기하든 사람이 진리를 대할 때 가장 지양해야 할 태도는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물건으로 취급하고 심지어 상품으로 취급해서 제멋대로 판매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보기 싫어하는 모습이기도 하고, 진정한 피조물이 가장 지양해야 할 행위이자 모습이기도 하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상품 취급하는 목적과 의도는 무엇이냐? 그가 배후에서 하려는 짓, 그의 속셈은 무엇이냐? 상품을 손에 넣은 상인이 상품에 거는 기대는 그것이 자신에게 가져다줄 이익과 그가 원하는 넉넉한 돈이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상품 취급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가 하나님 말씀을 이익이나 돈으로 맞바꿀 수 있는 일종의 물질적인 것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겨 소중히 여기지도, 받아들이지도, 실행하지도, 체험하지도 않았고, 더욱이 하나님 말씀을 자신이 지켜야 할 생명의 도(道)로 여기지도 않았으며, 하나님 말씀을 자신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기 위해 반드시 실행해야 할 진리로 여기지도 않았다. 하나님 말씀을 상품 취급한 것이다. 상인에게 상품이 지니는 최고의 가치는 바로 그것으로 맞바꿀 수 있는 돈이나 원하는 이익이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상품 취급하는 것 역시 당연히 이런 속셈과 동기에 지나지 않는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상품 취급한다고 할 때, 상품으로 취급한다는 말은 먹고 마시고 누리거나, 체험하고 실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수중의 물건처럼 언제 어디서든 판매하고 팔아 버린다는 것이다. 그에게 득이 되는 사람에게 팔아 버리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상품 취급하는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자면, 하나님 말씀을 물건처럼 거래해서 돈과 맞바꾸는 데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매매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다. 글자 그대로 봐도 적그리스도의 이런 방식과 행위가 부끄러운 짓이고, 혐오스럽고 역겨운 짓이란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을 상품 취급하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느냐? 이것이 우리가 교제하려는 핵심이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상품 취급하는 데는 사실 몇 가지 아주 명확한 모습이 있다. 너희가 좀 더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나씩 조목조목 얘기하겠다. 내가 왜 이렇게 얘기하겠느냐? 몇 년간 사역하고 말씀한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생각이 혼탁하고 문제를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이 부분을 감안해서 생각해 낸 가장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어떤 문제이든, 어떤 주제이든 항목을 나누어 조목조목 해석하고 설명해서 너희가 생각하고 묵상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는 적절하지 않으냐? (적절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딱 좋은데요. 골치 아프고 마음 쓰이는 일은 좀 덜겠어요. 저희는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거든요! 저희 에너지와 마음은 큰일을 하는 데 써야지, 이렇게 자질구레한 일에 써선 안 되죠. 저희에게 이런 사소한 일을 고민해 보라고 하시는 건 저희를 너무 얕보시는 거고, 어찌 보면 인재를 썩히는 일입니다.”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저희는 자질이 너무 형편없어서 때로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세히 교제해 주시고 한 글자씩, 한 마디씩 교제해 주셔야 저희가 그나마 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본의 아니게 실상을 얘기해서 너희 약점을 들추게 됐구나. 허나 사실이 이렇다. 들추지 않아도 사실은 사실이니 이렇게 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만약 대주제를 간단히 대략적으로 훑기만 한다면 그것은 괜히 얘기해서 힘만 빼는 것이다. 시간 낭비나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으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상품 취급한다는 내용을 소주제 몇 개로 나눠서 차근차근 해석하고 설명하겠다. 적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상품 취급하는지,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사실, 적그리스도에게 정말 이런 본질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 구체적인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 경우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교제해 보자.
(1) 하나님의 말씀을 지위와 명예를 얻고 체면을 세우는 도구로 삼다
첫째,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상품 취급한다. 이 항목과 관련해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바로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도구로 삼아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얻고 체면을 세우는 것이다. 물질적인 즐거움과 맞바꾸는 경우는 더 흔하고, 돈과 맞바꾸기까지 한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접하면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 말씀은 훌륭하구나. 구구절절 일리가 있고 올바른 말씀이야. 이런 말씀은 사람이 할 수 없고,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과거 두 시대에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지 않았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불문하고 이렇게 명문화되고 직설적인 말씀은 없었다. 성경에는 하나님 말씀 일부가 제한적으로 실렸지만, 지금 하나님이 하는 이런 말씀을 보면 내용이 무척이나 풍부하다. 적그리스도는 내심 질투가 나고 부러워서 속으로 궁리한다. ‘이 평범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하는데, 언제쯤 나도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언제쯤 저분처럼 하나님 말씀을 거침없이 쏟아 낼 수 있을까?’ 그의 마음에는 이런 충동과 욕망이 생겨난다. 그의 충동과 욕망으로 봤을 때 그가 속으로 하나님이 한 이 말씀들을 부러워하고 숭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부러움’, ‘숭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들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기며 받아들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이런 말씀의 풍부한 내용을 부러워하고, 방대한 편폭과 분량을 부러워하며, 말씀의 심오함,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그 깊이를 부러워한다는 점이다. 더욱 부러운 건, 자신은 할 수 없는 말씀이란 점이다. 이 몇 가지 ‘부러움’으로 볼 때,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신성의 선포나 진리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고 인류에게 공급하려는 생명, 진리로 여기지도 않는다. 적그리스도가 이런 말씀을 부러워한다는 건 분명 내심 그도 이런 말씀을 선포하는 그분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적그리스도 중에 많은 이들이 남몰래 얼마나 힘을 들였는지 모른다. 매일 기도하고, 매일 이런 말씀을 보면서 기록하고, 암기하고, 종합하고, 정리하는 등 하나님의 이런 말씀에 크게 공을 들인다. 얼마나 필기하고, 혼자 영적 생활을 할 때의 인식을 얼마나 적고, 이런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 몇 번을 기도했는지 모른다. 그가 한 이 모든 행동의 목적이 무엇이냐? 언젠가 갑자기 풍부한 상상력을 펼쳐 하나님이 하려는 말씀을 거침없이 내뱉기 위함이다. 그것도 봇물 터지듯 끊임없이 말이다. 또한, 하나님 말씀처럼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사람의 생명을 공급하며, 사람이 달성해야 할 것을 공급하고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기를 바라서다. 그도 성육신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의 말투, 하나님이 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말씀과 똑같은 말씀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를 위해 적잖이 공을 들인다. 심지어는 일부 사람들은 그가 속으로 하려는 말을 기록하고, 그가 기다리던 하나님이 그에게 주는 음성을 기록하기 위해 남몰래 노트를 꺼내 적는 경우가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든 적그리스도의 이 욕망은 채워질 수 없고, 그의 바람은 실현될 수 없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기록하고 외우며 정리해도 다 소용없다. 하나님은 그를 빌어 말씀하지 않고,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지도 않는다. 그가 속으로 아무리 갈망하고, 애를 태워도 하나님 말씀을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다. 조바심이 나고 질투가 날수록, 또 도달하지 못할수록 그는 화가 치민다. 그는 뭣 때문에 화가 나고, 뭣 때문에 조바심이 나겠느냐? 눈앞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데, 정작 자기 아래, 자기 앞에는 자기를 숭배하고 앙모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조바심이 나고 화가 나는 것이다. 화가 나고 조바심이 난 나머지 그가 속으로 생각하고 궁리하게 되는 것은 역시 이런 것이다. ‘왜 이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있을까? 하나님 집에 오면 왜 이방의 세상과는 다른 거지? 왜 대부분 사람이 하나님 집에 온 뒤로는 착실하게 행동하고 점점 나아지는 거지? 왜 대부분 사람이 아무런 보상 없이 하나님 집에서 헌신하고 대가를 치르면서 책망과 훈계를 받아도 떠나지 않고, 심지어 일부는 제명되고 출교되어도 떠나지 않는 거지? 그 원인을 살펴보면 한 가지밖에 없어. 바로 하나님의 그 말씀,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이 책의 성과와 영향 때문이야.’ 이 점을 깨달은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더욱 부러워한다. 그래서 그는 아무리 기를 써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출구로 변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 말씀으로 목표를 옮긴다. ‘비록 내가 하나님 말씀 이외의 말씀은 하지 못하지만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는 말들은 할 수 있어. 설령 도리이고 공허한 말일지라도 사람들이 들었을 때 맞는 것 같고,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는 것 같으면,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한자리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 사이에서 굳게 설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종종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에 나오는 말씀들을 전하고 해석하고, 항상 이 말씀으로 사람들을 도울 때, 입으로 하는 말이나 전하는 말이 남들에게 하나님 말씀에서 비롯된 옳은 말씀으로 들리면 사람들 사이에서 내 지위가 점점 공고해지지 않을까?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위신이 서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적그리스도는 자신이 지위를 얻고, 더 높은 명성을 얻으려는 바람이 실현되기 위한 길이 생긴 것 같고,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희망을 본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다행스러워한다. ‘난 어쩜 이리 똑똑할까? 아무도 이를 알지 못했을 거야. 다른 사람들은 어째서 이 방법을 모를까? 난 너무 똑똑해! 근데 똑똑한 건 똑똑한 거고, 이 실상은 아무한테도 얘기할 수 없어. 혼자만 알고 있으면 돼.’ 이런 목표와 계획이 생긴 후,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전에는 하나님 말씀을 그저 대충대충 보고 들은 다음 아무렇게나 떠들었는데, 지금은 전략을 바꿔야겠어. 이런 식으로는 안 돼. 시간 낭비야. 전에 이렇게 해서 성과가 없었는데 지금도 계속 이러는 건 너무 멍청한 짓이야!’ 따라서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하나님 말씀에 공을 들이고 실력을 발휘해 보려 한다. 어떤 일에 실력을 발휘하려 하느냐?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는 방식, 말투를 연구하고, 하나님이 각 단계, 각 시기에서 한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도 연구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그 말씀들을 어떻게 해석할지, 그 말씀들을 전할 때 어떻게 말하고 해석해야 사람들이 자기를 부러워하고 숭배할지 준비한다. 이런 식으로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에 적잖이 공을 들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런 노력의 이면에 깔린 옳지 않은 의도와 못된 심보 때문에 그가 내뱉는 말은 아무리 들어도 도리에 지나지 않고, 아무리 들어도 하나님 말씀 구절을 그대로 옮겨 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에 아무리 공을 들여도 적그리스도 본인에게는 수확이 없다. 수확이 없다는 건 무슨 뜻이냐?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생각하지 않고, 실행하지도 않으며, 그저 전하기만 한 탓에 그에게서는 어떤 변화도 찾아볼 수 없고, 잘못된 사상 관점이나 인생관에도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패괴 성품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고, 하나님이 말씀한 사람의 여러 가지 내적 상태에 자신을 전혀 맞춰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그리스도가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연구해도 그에게서는 딱 두 가지 결과만을 볼 수 있다. 첫째, 비록 그의 입으로 말하는 하나님 말씀이 모두 옳고 심지어 해석도 틀리지 않지만, 그에게서 어떠한 변화도 볼 수 없는 것이다. 둘째, 그가 아무리 기를 써서 하나님 말씀을 추천하고 전해도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적그리스도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원인은 바로 그가 입으로는 늘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추천하고 전하지만 정작 본인은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자신부터가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이 말씀을 이용해 자신의 은밀한 목적을 이룰 생각뿐인 것이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전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지위와 이익을 얻고 싶어 한다. 만약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으로 여겨 대하고 경배한다면, 그로서는 그 이상 바랄 게 없다. 비록 지금은 이 목적과 성과를 이루지 못했지만, 이것이 모든 적그리스도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면, 어떤 이들에게는 이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 말씀에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은 다 적그리스도란 말인가?’ 네가 이렇게 받아들인다면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의도나 목적이 다릅니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자신의 이익과 지위를 위한 것이고, 개인의 야심을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에 어떤 노력을 기울이느냐? 자신의 관념에 맞는 하나님 말씀을 좀 외우고, 사람의 말로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는 법을 배우고, 영적인 기록이나 체험 소감을 좀 적고, 하나님의 여러 가지 말씀을 종합해서 정리한다. 예를 들어 사람의 관념에 비교적 부합한다고 생각되는 일부 말씀, 들으면 하나님의 말씀 어투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일부 말씀, 비밀에 관련된 일부 말씀, 그리고 한동안 교회에서 비교적 성행하고 사람들이 종종 설교하는 일부 하나님 말씀을 말이다. 외우고 정리하고 종합하는 방법, 체험 소감을 기록하는 방법 말고도 물론 더 많은 방법이 있으며, 해괴망측한 방법도 좀 있다. 적그리스도는 지위를 얻고 자신의 야심을 채우고 교회를 통제하고 하나님이 되겠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 어떤 대가도 마다치 않는다. 밤을 지새우고 꼭두새벽에 일어나길 밥 먹듯 하며 온갖 노력을 기울여 정신없이 바쁘게 설교 연습을 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말한 훌륭한 부분을 기록하는데, 바로 도리로 무장해 수준 높은 설교를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날마다 어떻게 수준 높은 설교를 할지를 고민하는데, 하나님 선민의 탄복과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데에 가장 유용한 하나님 말씀을 골라 외운다. 그런 다음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해석해야 자신의 고명함과 높은 수준을 보일 수 있을지 고민한다.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 그들은 몇 번이고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 학생이 대학 입시를 준비하듯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누가 설교를 잘하는지, 어떤 빛 비춤을 설교하고 어떤 이론을 설교하는지 그들은 모두 수집하고 정리해 자신의 설교로 바꿔 버린다. 적그리스도는 어떤 노력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렇게 노력하는 이면에는 어떤 속셈과 동기가 있는 것이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줄줄 외우고 자유자재로 적용하여 사람들에게 그들이 누구보다 더 영적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히 여기며,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 사람들의 우러름과 숭배를 받을 수 있다.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며 어떤 고생을 한다 해도 다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이렇게 노력을 기울인 지 2년이 되고, 3년이 되고, 5년이 되다 보면, 그들은 하나님 말씀의 방식과 내용, 어투에 점차 익숙해진다. 심지어 일부 적그리스도는 입만 열면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말하고 몇 마디는 외울 수도 있게 된다. 당연히 이것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입만 열면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말하고 외우는 동시에 말하는 방식, 어투, 심지어 억양도 점점 하나님을 닮아 가고 그리스도를 닮아 간다.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기뻐한다. 어떤 부분이 기쁜 것이겠느냐? 그는 생각할수록 하나님이 되는 일이 정말 좋기만 하다.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숭배받고 둘러싸인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냐! 그는 하나님 말씀에 이 모든 공을 돌린다. 자신이 기회를 얻고 깨우침을 얻은 건 다 하나님 말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하나님 말씀 덕분에 하나님 말씀을 모방하고, 하나님의 어투를 모방할 줄 알게 되면서, 궁극적으로 자신이 점점 하나님을 닮아 가고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에 가까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말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어투를 모방하고, 또한 하나님 말씀의 방식과 억양으로 말하고 살아가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에게는 그 순간이 가장 즐겁다. 적그리스도가 이 지경에 이른 건 위험한 일이 아니냐? (위험합니다.) 어떤 점이 위험하냐? (그가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한다면 위험한 일이다. 그건 곧 바울과 같아지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이런 소리를 지껄이는 사람은 구제 불능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루트로 삼는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적그리스도는 무엇을 했느냐? 그는 하나님 말씀에 막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막대한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 부었다. 그 기간에 그는 하나님 말씀을 연구, 분석하고, 하나님 말씀을 뒤적이며 열독하고, 암기하고, 정리했다. 나아가 하나님 말씀을 열독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투와 말씀의 방식을 모방하고, 하나님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어휘도 모방했다. 이런 모든 행동의 본질은 무엇이냐? 여기서 나는 그것을 장사꾼이 도매가로 물건을 사들이는 본질에 비유하겠다. 즉, 적그리스도는 가장 저렴한 방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자신이 보유하는 물건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적그리스도는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사람이 진입해야 할 길로도 받아들이거나 대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이 말씀을 기억하려고 했다. 이런 말씀의 방식과 어투를 기억하고, 자신이 이 말씀의 선포자가 되려고 시도했다. 자신이 하나님 말씀의 어투와 방식을 모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말씀의 방식과 어투를 충분히 활용해서 말하고 행동하면서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가 얻고자 했던 것은 충실하게 본분을 이행하거나, 원칙을 가지고 행동하거나, 하나님에게 충성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어투와 방식을 모방하고,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설교함으로써 그 자신이 사람들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 그들의 숭배 대상이 되려고 했다. 그는 사람들 마음에서 보좌에 오르고 왕권을 잡아서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를 지배하고 싶어 했고, 이로써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
만약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에 노력을 기울이는 일을 장사꾼이 하나님 말씀을 상품 취급하며 싼값에 사들이려 하는 행위에 빗대서 말한다면,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모방하며 하나님 말씀의 방식과 어투를 활용해 하나님 말씀을 설교하는 일은 하나님 말씀을 상품 취급해서 판매하는 행위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들인 물건을 팔지 않고 모셔 두는 장사꾼은 없다. 그가 물건을 사들이는 목적, 물건을 보유하는 목적은 바로 그 상품에서 더 많은 금전적 이익을 거두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에 이렇게 노력을 기울이고 하나님 말씀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단지 장사꾼처럼 하나님 말씀을 가장 저렴하고, 또 가장 싸고 빠른 방식으로 손에 넣어서 자신이 보유하는 부속물로 만들고, 그런 다음 더 높은 가격으로 판매해서 자신이 원하는 이익을 얻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바라는 이익이 무엇이냐? 사람들의 우러름과 숭배, 앙망, 나아가 사람들의 추종이다. 이 때문에 교회에서 심심치 않게 보게 되는 현상이 있는데, 하나님 말씀을 전혀 실행하지 않고 자신을 인식할 줄 모르는 사람이 도리어 많은 이들로부터 추종을 받고, 많은 사람이 그를 의지하고 숭배하는 경우다. 그 원인이 무엇이냐? 바로 그 사람이 말주변이 좋아서 뛰어난 언변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말씀도 실행하지 않고, 일 처리도 원칙대로 하지 않고, 교회 사역과 상부의 안배도 시행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일부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냐? 그에게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째서 많은 이들이 그를 비호하고 감싸는 것이냐? 어째서 그가 리더를 맡으면 일부 사람들이 그를 지켜 주는 것이냐? 어째서 그가 교체될 때는 일부 사람들이 반대하며 가로막는 것이냐? 문제투성이인 사람,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가득하고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교회에서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원인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언변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는 위장에 능하고 사람을 미혹하는 재주가 있다. 적그리스도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이 곧 적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다. 이런 사람은 100% 적그리스도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읽고 외우고 설교하고,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이용해 사람들을 꾸짖고 책망하고, 하나님의 위치,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꾸짖어 그에게 고분고분하고, 그의 말을 두말없이 따르게 하고, 또한 그가 말하는 거창한 도리에 말문이 막히게 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인식하는 법도 없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법도 없는 사람이다. 그가 만약 리더를 맡는다면 그의 윗선 리더는 허수아비가 되고, 하부 교회 상황을 파악하고자 해도 불가능하다. 그가 있는 한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 하나님 집에서 하달한 원칙과 요구는 하나도 시행되지 못한다. 이런 자가 적그리스도가 아니겠느냐? 그가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생각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읽는 일에도 한바탕 노력을 기울이고 일부 말씀은 암기하기도 한다. 예배에서 교제할 때도 항상 하나님 말씀을 언급하고, 평소에도 틈만 나면 하나님 말씀 낭송 녹음을 듣는다. 사람들과 만나서 얘기할 때도 하나님 말씀만 따라 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나 말 중에는 틀린 말이 없다. 겉보기에는 이렇게 완벽하고, 소위 옳은 사람인데,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 하나님 집의 요구와 원칙이 그에게만 가면 막히기 일쑤다. 그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은 그 이외에는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그와 하늘의 막연한 하나님만을 숭배할 뿐,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런 자가 적그리스도가 아니냐? 그가 어떤 수단으로 이 모든 것을 이룬 것이냐? 그는 하나님 말씀을 이용했다. 흐리멍덩하게 믿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우매하고 마음이 혼탁한 자들, 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자들, 불신파들, 맞장구나 치는 기회주의자들, 이들은 적그리스도 같은 자를 영적인 사람으로 여기고, 적그리스도가 설교하는 글귀와 도리를 진리 실제로 여기고, 적그리스도를 따라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그들은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따르는 대신 적그리스도를 따른다. 심지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리더가 아직 얘기도 안 하고 교제도 안 했잖아요. 우리끼리는 하나님 말씀을 봐도 이해하지 못해요.”, “우리 리더가 집에 없으면 일이 생겨서 하나님께 기도해도 빛 비춤이 없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길을 깨닫지 못해요. 그러니까 리더가 올 때까지 기다립시다.”, “우리 리더는 요 며칠 바빠서 이 일을 해결해 줄 시간이 없어요.” 이 사람들은 자기 주인을 떠나면 스스로 기도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 줄도 모른다. 하나님에게 구하고 의지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서 실행의 길을 찾는 방법도 배우지 않는다. 주인이 없으면 장님이나 마찬가지이고, 마치 심장이 도려내진 것 같다. 그의 주인은 그의 눈이고, 그의 심장이자 간이자 폐이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자기 주인만큼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 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는 주인이 집에 없으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 생각도 없고, 주인이 돌아와서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고 풀이해 주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속으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자기 주인이 전달자가 되어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성과’를 거둔 것은 적그리스도의 마음속에서는 더없이 기뻐할 만한 일이다. ‘몇 년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고, 몇 년의 세월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됐어. 노력은 정말 배신하지 않는구나.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더니, 그만큼 노력한 보람이 있구나!’ 적그리스도는 자신이 없으면 못 산다는 추종자들의 말을 듣고 속으로 죄책감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남몰래 좋아했다. ‘하나님 말씀은 정말 좋은 거로구나. 그때가 옳은 결정이었고, 몇 년간의 노력도 옳았어. 이렇게 하길 잘했어. 성과를 얻었잖아.’ 그는 내심 기뻐했다. 자신의 악행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이나 후회, 증오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속으로 자기 행동 방식이 옳았다고 더욱 확신하고 긍정했다. 그러니 앞으로의 시간, 앞으로의 생활에서 그는 계속해서 더욱 열심히 하나님 말씀의 방식, 어투를 배우고 하나님 말씀의 방식과 어휘 사용을 더 많이, 더 깊이 모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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