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6) 제 4 부
(4) 하나님이 언제 땅을 떠나고 대업을 이루는지와 관련된 말씀을 엿본다
제4조,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언제 땅을 떠나고 하나님의 대업이 언제 이루어지는지에 관한 말씀을 엿본다. 하나님 말씀 중에 이와 관련된 말씀은 많지 않다. 얼마 안 되는 이런 말씀 중에 만약 그 내용이 사람들이 특히 관심을 가지는 주제라면, 아무리 그 말씀이 눈에 띄지 않거나 은밀하다고 해도 그는 찾아낼 수 있다. 그런 다음 펜으로 표시하고 중요한 말씀으로 여기며 읽는다. 틈만 나면 가져다 공유하고 읽으면서 스스로 경계하고 위로한다. 물론 적그리스도에게 있어 그가 더 관심을 갖는 것은 하나님이 언제 땅을 떠나고 언제 대업을 이루는지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 이면에 하나님이 이루려는 사실이다. 적그리스도가 속으로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은 죽기 전에 두 눈으로 하나님이 땅을 떠나는 순간의 장관을 목격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따르는 그분이 하나님이 확실하고, 그가 하나님도, 따르는 대상도 잘못 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런 사실이 증명되면 동시에 그가 복을 받을 확률도 크게 높아진다. 그 밖에도 만약 사람이 살아생전에 하나님이 땅을 떠나는 광경, 하나님이 대업을 이루는 광경을 목격한다면 그것은 곧 한 사람의 믿음이 더욱 굳건해져서 더욱 아무 의심 없이 하나님을 따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 장면을 보게 된다면, 과거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의혹과 몰이해,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비방과 판단, 버림 등, 이 한 페이지는 넘어가고 그는 다시는 이런 일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한편, 하나님이 땅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 사역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지, 말씀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에게 참된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지, 온전케 되었는지 등을 지켜본다. 적그리스도가 현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니 많은 이들이 믿음도 크지 않고 본분을 이행할 때 자주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또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패괴 성품을 드러내서 책망과 훈계를 받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B조로 보내지거나 격리되고, 더러는 출교되기도 한다. 여러 가지 현상을 보면서 그는 생각한다. ‘하나님의 대업이 이루어질 날은 아직 멀었구나. 답답해 미치겠군! 하지만 사람이 답답해 한들 어쩔 수 있나? 무슨 문제가 해결되나?’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탓에, 또 영적인 이해력도 없고, 진리를 깨닫지도 못한 탓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하는 모든 사역이 사람에게서 어떤 성과를 이루더라도 그게 정상인지 아닌지 가늠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하는 사역이 과연 성과를 이루었는지, 하나님이 한 그 말씀들이 과연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지, 사람이 그 말씀들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과연 달라졌는지, 참된 수확이 있는지, 하나님께 인정받았는지, 이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고 복을 받을 수 있는지, 그는 속으로 알 수가 없고, 눈으로 관찰한 사실 역시 이해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다. 그가 목격한 모든 일, 그가 속으로 생각하는 모든 일이 그에게는 죄다 안개처럼 뿌옇고 아무리 풀어 보려 해도 풀 수 없다. ‘이런 일들은 당최 뭐가 뭔지 모르겠군. 정말 간파하기 힘들고, 이해하기 어려워. 그렇다면 하나님이 땅을 떠나는 일, 하나님의 대업이 이루어지는 일이 설마 정말 있을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적그리스도는 한편으로 자기가 따르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의심한다. ‘그가 하나님일까? 사람이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건 좋지 않아. 많은 이들이 모두 그가 하나님이라고 믿으니 나도 믿어야 해. 아니, 믿어지지가 않아! 어딜 봐서 그가 하나님이지? 그가 하나님의 대업을 이룰 수 있을까? 그가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있을까? 그가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을까? 그가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할 수 있을까?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그가 사람들을 아름다운 종착지로 이끌어 들어갈 수 있을까?’ 이 모든 것과 유사한 생각들은 적그리스도의 마음속에서 풀려고 해도 풀리지 않고,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는 자물쇠가 된다. 그는 생각한다. ‘이걸 어쩐담? 역시 최고의 원칙을 따르자. 기다리고 견디는 거야. 끝까지 견디면 반드시 구원받을 거야. 내가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만의 규칙이 있지. 모두가 떠나지 않으면 나도 떠나지 않고, 모두가 따르면 나도 따를 거야. 난 대세를 따를 거야. 다들 그를 하나님이라고 하면 나도 하나님이라고 외칠 거고, 다들 믿지 않고 하나님을 저버리면 나도 사람들을 따를 거야. 여럿이 잘못하면 죄가 아니라잖아.’ 하나님의 사역이 확장되어 절정에 이르는 것을 보고 그는 속으로 몰래 기뻐한다. ‘가장 의심이 많고 연약했던 그 시기에 떠나지 않아서 다행이야. 지금까지 믿으니 어떤지 봐. 그날이 곧 오려고 하니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잖아. 특히 해외에서 여러 나라 사람들이 다들 참도를 알아보고, 믿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어. 하나님 집에서 제작한 동영상, 영화, 찬양, 간증도 점점 늘어나고 갈수록 주목받고 있잖아. 이런 성과는 오직 하나님 사역으로만 이룰 수 있고, 사람은 어느 누구도 이룰 수 없어. 그렇다면 이 평범한 사람은 십중팔구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이야. 그가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이라면 그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야. 논리적 추론대로라면 이렇게 추론하는 게 일리 있고 맞는 말이지. 하나님이라면 땅을 떠나는 그날이 있고 하나님이라면 대업을 이룰 수 있어. 이런 현상으로 볼 때 교회에 하나님을 따르는 이 사람들은 모두 긍정적인 방향, 좋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어. 모든 게 비교적 이상적이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야. 이게 세상의 흐름을 좇는 것보다 낫지. 그런 걸 추구하면 별로 가망도 없는 데다 수모를 당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멸해지고 말 거야.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이 땅을 떠나고 하나님 대업이 이루어지는 그날을 볼 수 있고, 또 하나님을 따라 영광을 얻게 된다면 그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어!’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또 이런 느낌이 든다. ‘난 어쩜 이리 똑똑할까? 이런 길을 선택하다니 지능도 높고 머리도 좋다니까!’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하지 않고 자신의 지능이 높고 총명한 것이라고 한다. 이 얼마나 황당한 생각이냐!
적그리스도는 생각한다. ‘하나님이 땅을 떠나고 대업을 이루는 일은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 저주와 징벌, 재난에 관련된 예언과는 달라. 이 일은 급하게 굴 게 아니야. 사람은 100%, 200% 인내심을 발휘하며 그날이 오기를 기다려야 해. 그날이 오면 무슨 일이든 성취될 텐데, 지금 참지 못하면, 적막을 견디지 못하고 이 고생을 감내하지 못하면 그날이 왔을 때 내 몫은 없어.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는데, 과거에 그 고통도 전부 감내했으면서 지금 이만한 고통을 못 견딘다면 너무 멍청하잖아!’ 따라서 적그리스도에게 있어 그날이 오는 것을 보고 싶다면 명심해야 할 한 가지가 바로 ‘조급하게 굴지 말고 인내하는 법을 배우며 착실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그는 생각한다. ‘이왕 올인해 보기로 했으니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해. 이번에 인내하는 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 끝까지 견뎠을 때 이 일이 성취된다면 그때는 큰 복을 받는 거야! 이 시간을 견디지 못하면 큰 화를 입겠지. 이번 일은 모 아니면 도야. 큰 복을 받든가 큰 화를 입든가 둘 중 하나지.’ 보아라, 적그리스도가 그래도 어리석지는 않은 게 아니냐? 그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진리를 믿지 않는 불신파이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면 이렇게 제대로, 세밀하게 분석하겠느냐? 이렇게 분석하는 것이 적절하겠느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보기에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이런 ‘진지한’ 태도가 있어야 하겠느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렇게 큰 일, 앞날과 운명에 관한 일, 하나님 대업의 성공에 관한 일은 건성으로 대하면 안 돼요. 하나님이 언제 땅을 떠나실지 그 연도와 달을 제대로 추산해야죠. 또 하나님 말씀의 행간에 드러난, 하나님이 땅을 떠나실 때의 방식과 현상을 모두 분석해야 해요.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철저하게 분석하지 않았다가 이런 좋은 일을 놓치면 그건 천년의 한이 될 거고 다시는 볼 수 없을 거예요. 특히 하나님의 대업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영광을 얻는 그날, 그 순간이라면 더더욱 알아야 해요.” 누군가 묻는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사람이 어떻게 알죠?” “그건 하나님께 꿈에서 계시를 내려 달라고 기도해야죠. 계시록에 나오는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요. 이상(異象)을 얻고, 꿈이나 이상 속에서 하나님 대업이 이루어지는 그날을 보는 순간 믿음이 완전히 확고해질 거예요. 그러면 당신의 인내와 기다림은 더 이상 형식이나 행위가 아니고, 마음속으로 기꺼이 원해서 기다리고 견디는 것이 될 텐데, 얼마나 좋아요!” 이래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인류에게 성육신 하나님이 얼마 동안 필요하든 언젠가는 이 육신의 사역이 완성되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이 사람이 언젠가는 인류를 떠날 것이고 그것은 결국 일어날 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6천 년 경륜의 사역은 이미 결말로 접어들고 있다. 그 결말까지 10년이 남았는지, 20년, 50년, 80년, 100년이 남았는지, 우리가 파고들 필요는 없다. 어쨌든 이것은 하나님의 표현 방식이다. 하나님의 표현 방식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에게 결말의 개념이 과연 몇 년인지를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사람의 시간 개념이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몇 년인지 우리가 상세히 연구할 필요가 있느냐? 그럴 필요 없다. 왜 그렇겠느냐? 모든 것은 하나님 손안에 있다. 그러니 사람이 구하여 얻을 수도, 사람이 알고 나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제한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하고 싶은 대로 사역할 뿐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진리를 추구하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생명을 얻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나는 길에 오르고, 진정으로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대업이 정말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하나님은 안식에 들어갈 것이다. 하나님이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인류가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가 안식처를 얻으면, 하나님도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안식이 곧 인류의 안식이다. 인류가 정상적인 생존 환경과 생활 질서를 갖추면 그것을 하나님의 안식과 맞바꿀 수 있다. 언제 인간이 그런 생존 환경을 갖추고, 언제 그 단계에 도달할지, 하나님이 언제 대업을 이루어서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두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된 일이며, 하나님에게 계획표가 있다. 하나님의 이런 계획표상의 시기가 과연 어느 시대일지, 몇 년 몇 월, 몇 시 몇 분일지는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알고 있으며, 인간은 알 필요가 없다. 너에게 알려 줘도 소용이 없다. 날짜와 시각을 너에게 알려 준다고 한들 그것이 네 생명이 될 수 있느냐? 그것이 생명이겠느냐? 그것은 생명을 대신할 수 없다. 피조물이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받아들이고, 그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나는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 그러나 늘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려 하고,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지 엿보려 하고, 하나님 말씀의 옳고 그름을 검증하고 분석하고 연구하려는 것과 같은 일은 피조된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그런 길을 가고 그런 일을 하려는 사람은 분명 하나님이 원하는 피조물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준 규율과 법칙대로 살아가지 않는다. 하나님 눈에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이자 마귀, 사탄이지 하나님이 구원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언제 땅을 떠나고 언제 대업을 이룰지, 하나님 영광의 날이 언제 도래할지에 관한 하나님의 이런 말씀, 이런 일에 인간은 어떤 관점을 지녀야 옳겠느냐? 하나님이 말씀하는 이 모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동시에, 하나님의 대업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만민에게 현현함으로써 하나님도 일찍 안식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라야 한다. 그것이 피조된 인간,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마땅히 바라고 간구해야 할 일이다.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정당하며, 엿보는 짓이 아니다. 그러나 늘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질지를 놓고 하나님을 협박하고 하나님에게 조건을 내세운다면, 그것이 바로 엿보는 짓이고, 원수가 하는 짓이다. 또한 늘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질지를 기준으로 해서 자신이 대가를 치를지, 모든 것을 버릴지, 본분을 이행할지를 결정하는 것 역시 원수가 하는 짓이다. 진정한 피조물이 하나님 말씀, 하나님 자신의 신분, 하나님이 말씀한 그 어떤 내용을 대할 때는, 사탄과 악마, 원수의 관점이 아닌 피조물이 갖춰야 할 관점으로 대해야 한다.
(5) 하나님의 성품과 신분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에 관련된 말씀을 엿본다
이어서 다음 항목을 교제해 보자. 이는 하나님의 성품과 신분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에 관련된 말씀이다. 이런 말씀들은 포괄하는 범위가 굉장히 넓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대부분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에 관계된 내용이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당신이 말씀하는 방식과 어투, 말씀의 내용을 통해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보여 주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명확한 말씀을 통해 인류에게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알려 주고 밝히기도 한다. 이 두 부분의 내용 중 하나는 하나님 말씀의 행간에서, 또 하나님 말씀의 내용과 성질, 그 말투와 말씀의 대상에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성품, 어떤 신분과 본질을 지니고 있는지를 명문으로 알려 준다. 이 두 부분의 내용을 적그리스도는 전혀 보지 않는다. 그는 이로부터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더욱이 하나님과 관계된 이 모든 것을 믿지 않는다. 그는 불신파이기 때문에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 바로 하나님 신분, 하나님 본질을 대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그가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 말씀은 이미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성품, 어떤 신분을 지니고 있는지, 하나님의 본질은 또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의 말씀은 그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가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이 설마 그가 진실로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뜻이냐? 그는 인정할 리 없다. 반대로, 하나님이 말씀하는 하나님 성품 속 공의와 거룩함,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권병 등,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에 관계된 이런 내용을 적그리스도는 멸시하고, 경시하고, 얕잡아볼 뿐만 아니라 역시 엿보는 관점으로 이런 말씀을 대한다. 예를 들면,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공의롭다고 하면 연구할 것이다. ‘당신이 공의롭다고? 세상에 감히 스스로를 공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어. 당신이 그렇게 말씀한다면, 한번 따져 보자고. 당신이 어디가 공의롭지? 당신이 어떤 공의로운 일을 했어? 난 인정 못 해! 그 말씀이 정말 실현된다면, 당신이 정말 내가 납득할 만한 공의로운 일을 한다면 당신이 공의롭다고 인정하지. 만약 당신이 한 일로 나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그땐 내가 무례하게 나와도 나무라지 말라고. 난 절대로 당신에게 공의로운 성품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테니!’ 결국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많은 대가를 치르고 많은 고생을 한 어떤 리더가 결국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해서 거짓 리더로 규정되고 교체된 것이다. 교체된 후 그는 소극적으로 변해서 오해하고 원망하며, 불평과 판단의 말을 쏟아 냈다. 그 소식이 적그리스도의 귀에 들어가 그가 보게 되면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도 교체되는데 그러면 나 같은 사람은 더 큰 일이군요. 만약 당신이 구원받을 희망이 없고, 하나님 마음에 합하지 못한다면 누가 하나님 마음에 합할 수 있겠어요? 또 누가 하나님 눈에 들겠어요?” 적그리스도는 거짓 리더의 편을 들면서 억울함을 달래 주는 한편, 거짓 리더가 한 불평과 판단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속으로 몰래 하나님에게 맞선다. ‘하나님이 공의롭다고? 그럼 왜 교회를 위해 사역하면서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사람을 교체하는 거지? 이 사람은 당신에게 가장 충성했던 사람이야. 이보다 더 충성스럽고, 고생하고, 대가를 크게 치른 사람은 못 봤다고. 그는 몸이 아파도 참아 가며 온종일 정신없이 일했어. 가족들에 대한 정도 내려놓고, 육의 편안함, 육의 앞날도 내려놓고, 목숨도 돌보지 않고 당신을 위해 사역했어. 전에 감옥에 갔을 때도 배신하지 않았지. 그런데 당신 한 마디에 교체되고, 당신 한 마디에 드러나다니, 그래도 당신이 공의로운가? 당신이 공의롭다는 사실이 어디에 있어? 왜 내 눈에는 안 보이는 거지?’ 적그리스도는 마침내 하나님 사역에서 약점을 잡아서 하나님 성품이 공의롭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속으로 말한다. ‘만약 하나님이 공의롭다면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없을 거야. 만약 하나님이 공의롭다면 사람은 정말 조심해야 하고, 하루하루 사는 게 쉽지 않겠지. 오늘 드디어 하나님 사역에서 약점을 잡아서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했어. 이러면 쉬워지지.’ 그는 속으로 은근히 쾌재를 불렀다.
하나님 선민은 하나님을 따르는 내내 큰 붉은 용에게 탄압받고, 잡혀가고 모진 박해를 당한다. 각지 교회에서는 하나님 선민이 잡혀가 박해를 받는 일도 흔하고, 그 때문에 넘어지거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종종 있다. 하지만 잡혀가 박해를 받으면서도 굳게 서서 증거하는 사람도 많다. 하나님은 큰 붉은 용의 봉사를 이용해 하나님 집에 섞여 들어온 복을 받으려는 불신파를 드러내는 동시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 선민을 온전케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다.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이런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줄곧 하나님을 의심한다. ‘어째서 하나님은 큰 붉은 용의 체포와 박해에서 벗어나도록 선민들을 구원하지 않지?’ 그는 성육신 하나님을 의심하며 속으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계속 내려놓지 않는다. ‘하나님 선민은 왜 이런 구타와 혹형을 당할까? 바로 그들의 믿음 때문이야. 유다가 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들이 혹형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순간 하나님은 어디 계신 거지? 왜 그들을 구하지 않지?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나?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 있지? 설마 냉정하게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사탄, 악마에게 이렇게 무참히 능욕당하고 실컷 혹형을 당하게 내버려두는 건가?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란 말인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는 어디에 있지? 왜 내 눈엔 보이지 않지? 조심하는 게 좋겠어. 하나님은 시험이나 험악한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사람을 지켜 주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의지가 강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일수록 시련을 만나고, 고통과 괴롭힘을 당하기 십상이야. 하나님이 그렇게 한다면 나도 대책이 있지.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치른 대가 때문에 그런 대우를 받는 거야. 그렇다면 그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그렇게 추구하지 않으면 그런 시련도 없는 거잖아? 그런 시련이 없으면 그런 고통을 안 받아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런 고통을 안 받으면 편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겠어? 똑같이 복을 받는 건데 내가 왜 그렇게 멍청하게 굳이 육적으로 시달리고 고통받아야 하지?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난 이런 방식의 하나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어! 당신들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하라고. 나랑은 상관없으니 난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좀 피해 가고 비켜 가면서 조심하고 경계해야지. 하나님에게 붙잡혀 그런 역할을 맡는 대상이 되지 않도록 말이야.’ 적그리스도가 감추고 있는 이런 생각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오해이자 반발이고, 판단이자 대적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을 조금도 인식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엿보고, 하나님 성품과 신분, 본질을 엿보는 동시에 그는 이런 결론을 얻었다. 적그리스도는 그 결론을 마음속에 묻어 두고 스스로에게 경고한다. ‘조심해서 몰아야 배를 오래 몬다고 했어. 절대 재능이나 포부를 드러내면 안 돼.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도 있고, 높은 곳은 추위를 견디기 어렵다는 말도 있지! 언제가 되었든 모난 돌이 되지 말고, 높이 오르지도 말자. 높이 올라갈수록 더 크게 떨어지는 법이야.’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이 모두 진리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 하나님 성품이 공의롭고 거룩하다는 사실도 믿지 않는다. 그는 사람의 관념, 사람의 상상에 따라 이 모든 것을 바라본다. 사람의 시선, 사람의 사고, 사람의 계략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대하고, 사탄의 논리, 사탄의 사고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규정한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 관념과 반발, 패역이 가득하고 참된 인식이 전혀 없다는 건 아주 자명한 사실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사랑을 물음표와 의혹으로 정의하며, 잔뜩 의문을 품고, 부정하고, 비하한다. 그러니 하나님의 신분에 대해서는 어떻겠느냐?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의 신분을 대표하거늘 하나님의 성품조차 이렇게 대하니, 하나님의 신분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이 바로 부인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질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 중 그 어떤 부분의 말씀, 그 어떤 방면의 행사를 대하든, 또 하나님이 만물 가운데서 한 일이든 구체적인 개인에게 한 일이든 모두 사람의 관점과 사탄의 논리로써, 지식과 논리의 방식을 이용해 추리하고 판단하지, 진리를 대하는 방식 혹은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대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 성품,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에 관계된 이 말씀들을 대할 때나, 하나님이 입은 육신과 하나님의 영을 대할 때나 적그리스도는 사실 같은 방식을 취하며, 별 차이가 없다. 총체적으로 말해서, 그는 하나님 자신에 관계되고 창조주에 관계된 것이라면 모조리 엿보고, 그런 다음 추측하고, 연구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도출하는 결론은 부정과 비하이다. 적그리스도가 어떤 관점과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든 언제나 최종적으로 정죄와 비하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어째서 최후에는 늘 이런 결론이냐? 설마 피조된 인류 가운데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정말 아무도 없다는 말이냐? 이것이 필연적인 결과이냐? 이는 하나님 때문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사람에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성이 있다. 그런데 어째서 어떤 사람은 이런 말씀을 보고 난 뒤 진리임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한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어떤 사람은 부정하고, 정죄하고, 비하하는 것이냐? 이는 문제를 잘 보여 주고 있으며, 그건 바로 사람 내면의 본질이 다르다는 점이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는 근본적으로도 그렇고, 주관적인 바람에서도 그렇고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반발심을 품고 시험하려 든다. ‘당신은 당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그럼 당신이 어디가 하나님다운지 좀 봐야겠어. 당신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성품을 지니고 신성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당신 말씀 중에 당신이 신성과 하나님 성품을 지녔음을 증명하는 말씀은 어떤 거고, 당신이 한 일 중에 당신에게 하나님 신분과 본질이 있음을 증명하는 일은 어떤 건지 좀 봐야겠어. 당신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기를 했나, 아니면 사람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 주기를 했나? 당신이 저주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죽기라도 했나? 당신이 사람을 죽음에서 부활시키기라도 했나? 당신이 한 일 중에 당신에게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이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일이 뭐지?’ 적그리스도는 늘 이런 일, 진리, 길, 생명 이외의 일을 보려 하고, 이런 일을 통해 하나님의 신분을 증명하고, 또 사람이 따르는 분이 하나님임을 증명하려 하는데, 이는 출발점 자체가 틀렸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대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진리가 무엇이냐? (하나님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입니다.) 이것이 최소한의 진리이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어째서 이 최소한의 진리마저 이해하지 못하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얘기하려는 주제이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멸시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멸시한다. 그는 진리를 싫어하고, 모든 긍정적인 사물을 싫어한다. 그는 진리를 증오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증오한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 가운데서 어느 말씀이 진리이고, 어느 말씀이 긍정적 사물인지 보지 못한다. 그 마귀의 눈으로 볼 수가 있겠느냐? 보지 못하는데 인정할 수 있겠느냐? 그가 이런 말씀이 진리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인정할 수 없다. 이것은 확실하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품과 신분, 본질에 관련된 말씀을 대할 때는 다른 하나님의 말씀들을 대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속으로 저울질하고, 계획하고, 궁리한다. 만약 하나님이 하나님의 신분으로 한 어떤 말씀이 즉시 이루어지고 실현된다면 그의 태도는 금세 변할 것이다. 그가 만약 하나님이 하나님의 신분으로 한 어떤 말씀이나 일에서 약점을 잡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책을 세울 것이고 그의 태도도 즉시 돌변할 것이다. 하나님을 정죄하는 것도 그고, 하나님을 하나님 같다고 말하는 것도 그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이 하나님의 성품과 신분, 본질을 지니고 있느냐는, 오로지 자신이 눈으로 확인한 것과 자기 머리로 한 분석에 근거해서 결론을 내린다.
최근 1~2년 사이에 교회에서 체험 간증 영상을 어느 정도 제작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체험 간증 덕분에 일부 뿌리가 단단하지 않은 사람, 어느 정도 의혹을 품은 사람들은 그 뿌리를 어느 정도 내릴 수 있었다. 영상은 물론 적그리스도를 안정시키는 데도 어느 정도 작용을 했다. 간증을 한 이 사람들은 연령과 계층이 다양하고, 국가와 민족이 다른 이들도 있다. 그들의 체험 간증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서 변화를 얻고 진리와 생명을 얻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현 단계 사역을 받아들임으로써 적지 않은 진리를 깨닫는 한편, 성육신 하나님이 하나님 신분을 갖추고, 하나님 본질을 갖추었음을 입증했다. 물론 이런 체험 간증을 듣고 적그리스도도 예외 없이 조금은 내심 기뻤다. ‘내가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성급하게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 많은 사람들의 간증을 보니, 이 도(道)는 정말 괜찮군. 이 그리스도, 평범한 사람이 아마 하나님일 수도 있겠는걸. 이번에는 제대로 베팅했어. 계속 이런 식으로 가서 더 많은 이들이 이 사람을 증거하고, 더 많은 이들이 이 사람 앞에 오고, 더 많은 이들이 이 사람의 신분과 본질을 입증하면, 내가 복받을 희망과 확률도 점점 커질 거야.’ 적그리스도는 관망하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을 격려하고 채찍질한다. ‘서두르지 말고, 참아야 해. 그냥 견디면 되는 거잖아. 끝까지 견디면 반드시 구원받을 거야. 지금 여러 가지 조짐으로 볼 때, 교회 규모나 상황으로 볼 때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일어나 이 사람을 증거하고 있고, 이 도가 맞다는 게 증명되고 있어. 그렇다면 내가 왜 그렇게 바보같이 급히 일어나 부정해야 할까? 그렇게 하지 말자. 바보같이 굴면 안 돼. 3~5년 더 기다리자. 더 많은 이들, 명망 있고, 지식 있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많은 이들이 더 강력한 증거로 이 평범한 사람이 그리스도임을 증명해 보이거나, 혹은 세계적으로 명망 있고 지위 있는 사람이 더 많이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 규모가 세계적으로 더 확대되면, 그때는 나도 뭔가를 얻지 않겠어? 크게 덕을 보지 않겠어? 교회가 세력을 얻으면 나도 세력을 얻지 않을까? 절대 떠나지 말자! 만약 이 모든 게 맞다면,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이라면 내가 지금 그를 저버리고 지금 그를 부정할 경우 복을 하나도 못 받을 거야. 이 사람에게 전부 올인하자. 그의 신분과 본질이 과연 누구인지, 그의 성품이 과연 누구를 대표하는지는 관심 없어. 내가 관심 갖는 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지, 교회 세력과 규모가 점점 커지는지 하는 일이야. 만약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정상적인 상황에서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다면 나는 내 앞날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 만약 그가 정말 성경에서 예언하는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라면 나는 큰 복을 받고 크게 덕을 보겠지.’ 매번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다소 위안과 기쁨을 얻는다. ‘어때?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 않아도 여전히 복을 받고, 하나님이 한 일이 모두 공의롭다는 걸 믿지 않아도 여전히 굳게 설 수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아도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한다는 걸 믿지 않아도 여전히 교회에서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어. 하나님이 전능하고 권병이 있다는 걸 믿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의미가 있다는 걸 믿지 않고, 하나님이 모든 걸 주재하고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걸 믿지 않아. 이 모든 것을 믿지 않으면 또 어때서? 내가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은 믿지 않지만 여전히 교회에서 머릿수를 채울 수 있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 아닌가? 내가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고 이렇게 교회에서 그럭저럭 지내고 견디면 누가 나를 어쩔 수 있겠어? 여전히 끝까지 견디면 반드시 구원받지 않겠어?’ 너희가 볼 때 적그리스도의 그럴듯한 계산이 성공하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정말 언젠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보게 될 때, 그는 어디에 있겠느냐? 정말 그가 하나님의 신분, 하나님의 본질을 확실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공의를 보게 될 때 그는 어디 있겠느냐? 그가 정말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그의 인내가 정말 소용이 있겠느냐? 정말 어물쩍 넘어갈 수 있겠느냐? 그가 인내하고, 보전을 꾀하고, 와신상담하고, 잔꾀를 부린 일이, 정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지 엿본 그 악행을 상쇄할 수 있겠느냐? 그의 그럴듯한 계산, 그의 대책, 음모와 계략, 그가 속으로 저울질한 모든 것,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엿봄이 정말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일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인해 그가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모습을 볼 때, 그토록 영리하고 어떤 일도 물 샐 틈 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하는 적그리스도가 결국 이런 말로를 맞이하는 원인이 무엇이냐? 원인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그가 하나님 말씀을 직시하거나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 진리로 삼거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엿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최후에 이런 결과를 맞이하는 원인이다. 이런 걸 너희는 다 이해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비록 너희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일러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이런 사실을 얘기함으로써, 적그리스도의 관점과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해부함으로써 모두 하나님 말씀을 대하고 이해할 때 어떤 태도가 가장 올바른 태도이고, 피조물이 갖춰야 할 태도인지 알았을 것이고, 또한 그것이 피조물이 해야 할 일임을 알았을 것이다.
2020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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