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조 일 처리가 기이하고,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남들과 교제하는 법이 없고, 남들에게 순종을 강요한다 (제 1 부)

참고 다밍과 샤오밍 이야기

본 주제를 교제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떤 장점이 있겠느냐? (기억하기 쉽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억하기 쉬운 이야기를 몇 개나 이야기하였느냐? (다바오와 샤오바오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바오와 샤오바오의 이야기>는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이다. (<포서기(捕鼠記)>와 여성 리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적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겠느냐? 사실 좀 가볍고, 단순하며, 이해하기 쉬운 형식을 빌려 사람이 깨달아야 하는 진리들을 교제하는 것이다. 만약 너희가 내가 한 이야기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너희가 각 방면에 진입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이 이야기를 한 것이 헛된 것은 아니다. 이는 너희가 정말로 이 이야기와 관련된 진리를 깨달았음을 의미한다. 그저 이야기로만 듣지 않고 이 방면 진리의 실제적인 면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우리는 다바오와 샤오바오의 이야기를 하였다. 오늘 우리는 다밍과 샤오밍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너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이야기가 너희에게 깨닫게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방면의 진리와 관련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다밍과 샤오밍은 부자지간이다. 얼마 전, 다밍이 아들 샤오밍을 데리고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였다. 이는 좋은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좋은 일이다. 샤오밍이 어리고 아는 글자가 많지 않아, 다밍은 매일 샤오밍을 데리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었으며, 샤오밍이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해 주었다. 얼마 후, 샤오밍은 처신의 도리를 많이 이해하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전혀 접해 보지 못했던 ‘순종’, ‘믿음’, ‘정직’, ‘간사함’ 등과 같은 어휘들도 이해하게 되었다. 다밍은 아들의 성장을 보고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밍은 샤오밍에게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읽어 줘도 샤오밍의 행위나 말에서 큰 성장이 없음을 발견했다. 다밍은 마음이 조급해졌고 부담을 느껴 ‘어떻게 하면 아들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좀 깨닫고 변하게 할 수 있으며, 남들이 인정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착한 아이라고 칭찬하고, 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역시 좋다고 칭찬하게 할 수 있을까? 이와 동시에 아이의 변화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라고 생각했다. 이런 부담을 갖게 되자, 다밍은 마음속으로 계속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샤오밍을 잘 교육해 샤오밍이 처신의 도리를 더 많이 이해하고 더 좋은 모습을 보여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할 수 있을까? 최종적으로, 샤오밍이 착한 아이가 되어 사람들이 모두 샤오밍을 칭찬할 때,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 그때가 되면 내 마음속 큰 짐을 내려놓을 수 있어.’ 다밍이 갖게 된 이런 부담에 대해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합당하냐? 본연의 일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출발점은 옳고, 합당하다고도 할 수 있으며, 본연의 일에 충실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밍이 샤오밍을 위해 선택한 길은 올바른 길이겠느냐, 아니면 잘못된 길이겠느냐? 좋은 것이겠느냐, 안 좋은 것이겠느냐? 계속해서 살펴보겠다. 다밍은 항상 이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고 기도하여 결국 어느 날 ‘영감’이 생겼다. 어떤 ‘영감’이겠느냐? 이른바 따옴표가 붙은 ‘영감’이다. 이 ‘영감’에 따옴표가 붙었으니, 그렇다면 다밍이 가리키는 길은 어떻겠느냐? 너희는 이야기의 다음 부분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지 상상할 수 있겠느냐? 잘 모르겠지 않느냐? 약간 미지수이다.

어느 날, 다밍이 아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준 후, 매우 엄숙하게 샤오밍에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좋은지 안 좋은지 묻자, 샤오밍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좋아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들 남을 괴롭히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면 재난을 당하지 않으며, 천국에도 갈 수 있고, 죽은 후에도 지옥에 가지 않아요.” 샤오밍의 말이 맞느냐? 아이의 어린 마음에, 샤오밍이 이 정도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훌륭하다.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한 샤오밍의 인식은 매우 간단하고,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얕지만, 샤오밍의 입장에서는 이미 매우 심오한 것이다. 다밍은 이를 듣고 매우 기뻐했으며 위안도 받았다. “잘했어. 샤오밍이 수확을 얻었구나. 보아하니 하나님을 믿는 기초가 조금 생겼네. 아빠는 아주 기쁘고 위안도 받았단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렇게 간단한 것일까?” 샤오밍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말씀에서 말씀한 것이 이런 것들 아닌가요? 또 뭐가 있나요?” 아빠는 바로 이어서 말했다. “하나님의 요구는 이것들만이 아니란다. 네가 하나님을 이렇게 오랫동안 믿었는데, 형제자매가 와도 인사할 줄도 모르는구나. 앞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을 만나면 할아버지나 할머니라고 부르고, 젊은 사람을 만나면 삼촌이나 이모, 또는 형이나 누나라고 불러야 해. 이렇게 하면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아이가 될 거야.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아이여야 하나님께서도 사랑하신단다. 앞으로 내 말을 듣고, 내 말대로 하렴. 내가 부르라는 대로 그대로 부르는 거야.” 샤오밍은 아빠의 말을 마음에 새겼다. 아빠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어린 마음에 아빠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하나님 말씀도 자기보다 많이 읽었고, 아는 것도 자기보다 많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아빠는 자기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니, 분명 자기에게 잘못된 길을 가르쳐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아빠가 말한 것은 분명 옳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샤오밍은 진리란 무엇인지, 도리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은 알고 있었다. 아빠가 말을 마친 후, 샤오밍 마음속에도 이 일에 대한 부담이 조금 생겼다. 그 후, 샤오밍은 매번 아빠와 외출할 때마다 사람을 만났을 때 아빠가 이모라고 부르라고 하면 “이모, 안녕하세요.”,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하면 “안녕하세요, 삼촌.”이라고 인사했다. 사람들이 다들 샤오밍을 착한 아이이고 예의 바르다고 칭찬했으며, 이와 동시에 또 다밍이 아이 교육을 잘한다고 칭찬했다. 샤오밍은 매우 기뻐하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아빠가 가르쳐 준 게 정말 맞아. 다들 날 좋아해.’ 샤오밍은 매우 흐뭇했고 자부심을 느꼈으며, 아빠가 알려 준 길이 정말 좋고 옳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샤오밍이 학교에서 막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빠에게 달려가 말했다. “아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옆집 장 노인이 이만큼 큰 물고기를 낚았는데…” 샤오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빠가 말했다. “샤오밍, ‘장 노인’이라니, 네가 그렇게 부르면 되겠니? 그러고도 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 어떻게 ‘장 노인’이라고 부를 수 있어? 너한테 한 말을 기억하고 있지 않다니, 아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구나. 너는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니야. 봐봐,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널 도와주고 일깨워 줄게. ‘장 씨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해. 기억했니?” 샤오밍은 생각을 좀 하다가 “‘장 씨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괜찮아요.”라고 하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옆집 장 씨 할아버지께서 이만큼 큰 물고기를 낚으셔서 장 노파가 무척 기뻐했어요!” “너 또 잊었구나? 너도 참…… 아직도 철이 없네. 방금 너한테 말했잖아. ‘장 노인’이 아니라 ‘장 씨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이야. 그렇다면 장 씨 할아버지의 아내는 같은 항렬이니까 뭐라고 불러야 할까? ‘장 씨 할머니’라고 불러야 해. 앞으로 잘 기억해 둬. 다시는 장 노인이나 장 노파라고 불러서는 안 돼. 남들이 들으면 웃음거리가 될 거야.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 얼굴에 먹칠하는 것 아니겠니? 우리가 예의범절이 없다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지 않다고 사람들이 흉볼 거야. 이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란다.” 원래 샤오밍은 신나서 아빠에게 장 노인이 큰 물고기를 잡았다고 이야기하려 했는데, 결국에는 아빠에게 이렇게 혼나 흥미가 완전히 사라졌고, 말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책가방을 메고는 고개를 돌려 가버렸고, 걸어가면서 중얼거렸다. “아빠만 뭐든 다 알지 뭐. 장 씨 할아버지, 장 씨 할머니라니. 우리랑 무슨 관계라고? 아빠만 영적이지 뭐!” 다밍이 말했다. “내가 영적인 것은 맞잖아! 보통 사람이 나이가 어느 정도이든, 난 그 사람의 나이만 보고도 연배를 알고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알아. 나는 나이가 많은 사람은 전부 ‘삼촌, 이모’라고 부르는데, 넌 어째서 호칭조차 부르지 않는 거니?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이런 걸 잊어선 안 돼. 위아래를 몰라서는 안 된다.” 샤오밍은 꾸중을 듣고 기분이 언짢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아빠가 옳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하는 건 모두 옳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잘못을 인정했다. 그 이후로 샤오밍은 장 노인 부부를 만날 때면 장 씨 할아버지, 장 씨 할머니라고 불렀다. 샤오밍은 아빠가 가르치고 주입한 이러한 것들을 마음속 깊이 새겨 두었다. 이것이 좋은 일이겠느냐, 나쁜 일이겠느냐? 지금까지는 그래도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으냐?

어느 날, 샤오밍은 아빠와 산책을 하다가 늙은 암퇘지 한 마리가 새끼 돼지들을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미와 새끼의 관계가 무척이나 가까워 보였다. 샤오밍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들은 모두 좋고, 돼지든 개든 모성애가 있으며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오밍은 이번에는 경솔하고 예의 없이 ‘늙은 암퇘지’라고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실수하면 아빠가 화를 낼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샤오밍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 이 어미 돼지는 나이가 얼마나 됐어요? 새끼를 이렇게나 많이 낳았는데 제가 이 돼지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다밍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대답했다. “뭐라고 불러야 할까? 참 말하기 어렵구나.” 아빠가 한참을 고민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샤오밍은 아빠를 원망했다. “하나님 말씀 많이 읽으셨잖아요?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데, 어째서 이것도 모르시나요?” 아빠는 샤오밍의 말에 조급해져 “외할머니라고 부르던지.”라고 말했다. 샤오밍이 부르기도 전에 다밍은 약간 생각하더니 또 말했다.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안 돼. 외할머니라고 하면 네 외할머니와 같은 항렬이 되는 거잖아? ‘돼지 할머니’는 더 안 돼. 그러면 우리 어머니와 같은 항렬이 되니까. 이렇게나 많은 새끼를 낳았으니, 돼지의 신분과 지위에 걸맞고 항렬도 맞게 ‘돼지 아주머니’라고 불러야 해.” 샤오밍은 이 말을 듣고 돼지에게 공손히 허리 굽혀 인사하며 “돼지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늙은 암퇘지는 깜짝 놀랐고, 놀란 돼지들은 모두 뛰어 달아났다. 샤오밍은 이를 보고 잘못 부른 게 아닌지 의심했지만, 다밍은 “돼지는 분명 기쁘고 흥분해서 그런 거야. 앞으로 이런 일이 닥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든 상관하지 말고, 이렇게 해야 해. 예의범절이 있는 사람은 돼지도 좋아한단다.”라고 했다. 이 일을 통해 샤오밍은 또 하나를 배웠다. 무엇을 배웠겠느냐? 그는 말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만물이 서로 존중하고, 예의와 항렬을 차리고, 어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면, 만물이 모두 조화롭게 지낼 수 있어요.” 샤오밍은 이 도리를 이해했다. 아빠는 이 말을 듣고 샤오밍에게 가르친 보람이 있다고 칭찬했다. 그때 이후로, 샤오밍은 더욱더 매너를 지키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어디에서나 단정하고 예의 발랐기에 특별해 보였다. 이것이 ‘착한 아이’ 아니겠느냐? 따옴표가 붙은 ‘착한 아이’ 말이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이 이야기는 어떠하냐? 꽤나 우습지 않으냐? 이 이야기는 어디서 나왔겠느냐? 현실 생활 속 사람의 말과 행동, 사상과 관점에서 추출해 이렇게 작은 이야기로 압축해 낸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떤 문제를 말하느냐? 이야기 속에서 너희는 다밍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발견하였느냐? 샤오밍에게 있는 문제는 무엇이냐? 다밍에게 있는 문제의 본질은 또 무엇이냐? 우선, 너희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다밍이 도출해 내고 행한 것들이 조금이라도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실행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관념과 상상입니다.) 그의 그 관념과 상상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전통문화에서 온 것입니다.) 그 근원은 전통문화이다. 그것은 전통문화에 전염되고 물들고 교육받은 산물이다. 그는 전통문화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고 긍정적이며 정수라고 여기는 것들을 가져와 포장한 후 자기가 생각하는 ‘진리’로 둔갑시켜 아들에게 실행하게 했다. 이 이야기는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편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이야기 속에서 깨달은 것과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해 보아라.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저는 다밍의 문제는 바로 그가 하나님을 믿지만 한 번도 하나님 말씀에 공을 들이지 않은 점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사람의 전통 관념에 따라 하나님을 믿으면서 겉면의 그런 것들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거라고 생각하고는 하나님 말씀 속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사람이 어떻게 정상 인성을 살아내야 하는지를 찾거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밍은 무엇으로 살고 있느냐? (관념과 상상입니다.) 관념과 상상에 의지한다는 것, 이는 공허한 말이다. 사실 그는 전통문화로 살고 있으며, 전통문화를 진리로 삼은 것이다. 그가 전통문화로 살고 있는 것에는 어떤 구체적인 내용이 있느냐? 그가 왜 샤오밍에게 그런 호칭을 사용하라고 요구했겠느냐? (그는 겉으로는 그런 좋은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고 아이 교육을 잘 시킨다는 칭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맞다. 이것이 그의 의도이다. 그는 아이를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깨닫게 하지 않았으며, 아이가 그의 체면을 세워 주는 일을 하여 그의 개인적인 허영심을 만족시키게 했다. 이 또한 한 가지 측면의 문제이다. 늘 행위적인 면에서 자신을 꾸미고 포장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문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그 사람이 걷는 길에 문제가 있으며, 이 문제는 가장 심각한 것이다. 늘 행위를 포장하는 데 집중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남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하고, 받들며 칭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어떤 성질이겠느냐? 이는 외식하는 것으로, 바리새인의 행동 방식이다. 표면적으로 좋은 행위를 보이는 것과 자신의 행위를 포장하는 데 집중하고, 행위 면에서 공을 들이는 데 신경 쓰는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느냐?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꽤 많이 읽었고 공도 꽤 많이 들였는데 왜 진리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경영하고 구원하는 것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며, 사람을 온전케 하고 성품 변화를 이루게 하기 위함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읽든지 간에, 내가 남들이 비교적 동조하고 칭찬하며, 엄지를 치켜세우게 하는 말, 방법, 행위를 도출해 내고, 그다음 실생활 속에서 그러한 것들을 살아 내고 지키면, 그런 사람이 바로 진정한 신자지.’라고 생각한다.

너희에게는 다밍과 같은 문제가 없느냐? 방금 말한 것처럼 눈에 띄게 규범을 지키고 항렬을 따지며, 노인 공경이나 아이 사랑, 장유유서를 강조하는 것 외에 이와 비슷한 행위나 사상, 관점, 인식이 있지는 않으냐? 너희 스스로 그것을 파헤치고 해부할 수 있겠느냐? 예를 들어, 교회에 연장자, 혹은 하나님을 믿은 햇수가 오래된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 너는 마음속으로 늘 그의 체면을 지켜 주고 싶어 한다. 말을 할 때 그가 먼저 말을 끝마치도록 해 주고, 그가 쓸데없는 말을 해도 끊지 않으며, 그가 무슨 잘못을 해서 책망과 훈계를 해야 할 때도 그의 체면을 지켜 주느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나무라지 않는다. 그가 아무리 억지를 부리고 엉망으로 일을 해도 모두가 그를 용서하고 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에는 또 늘 “어르신의 체면을 지켜 드려야죠. 그분들 체면이 깎이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손아랫사람이잖아요.”라며 다른 사람을 교육한다. ‘손아랫사람’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겠느냐? (전통문화입니다.) 전통문화 사상에서 파생된 것이다. 또한, 교회에 나이가 좀 많은 형제자매를 만나면 ‘형’, ‘누나’, ‘이모’ 또는 ‘연세 많은 형제’라고 부르는 분위기를 형성한다. 한 가족처럼 아주 친근하게 부르고, 그들을 각별히 존중하여 어느새 사람 마음속에 좋은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전통문화의 것들은 중국인의 사상과 뼛속에 아주 깊이 뿌리내려져 있어 교회 생활에서도 끊임없이 만연해 분위기를 형성한다. 사람은 늘 이러한 것들에 제약받고 통제받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것들을 인정하며 열심히 그 방향으로 행동하고 실행할 뿐만 아니라 남들도 그렇게 하도록 도와주고 가르친다. 전통문화는 진리가 아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전통문화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만 알면 그만이겠느냐? 전통문화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은 한 가지 측면이다. 어째서 그것을 해부하려고 하겠느냐? 그 근원은 어디에 있겠느냐? 문제의 본질은 어디에 있겠느냐? 어떻게 해야 그런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전통문화를 해부하는 이유는 너로 하여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이러한 측면의 이론과 사상, 관점을 완전히 새롭게 인지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완전히 새롭게 인지할 수 있겠느냐? 먼저 전통문화가 사탄에게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럼 사탄은 어떻게 그런 전통문화를 사람의 내면에 주입했겠느냐? 사탄은 매 시기마다 유명 인사나 위인을 통해 이러한 사상들을 전파하고, 이러한 이른바 견해와 이론을 전파한다. 그런 다음 점차 체계화하고 구체화하여 점점 사람의 생활과 가까워지게 하고, 또 그다음에는 점차적으로 사람 사이에 퍼트려 이러한 사탄의 사상, 견해, 이론을 조금씩 사람의 사상 속에 주입한다. 이러한 것들이 주입되면, 사람은 사탄에게서 비롯된 이런 사상과 이론들을 인류가 마땅히 실행하고 지켜야 하는 가장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사탄은 이러한 것들을 이용해 사람의 사상을 억압하고 통제한다. 인류는 이런 환경 아래에서 끊임없이 교육받고 물들고 통제되며, 한 세대 한 세대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렀다. 각 세대의 사람들은 모두 전통문화가 옳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누구도 이런 이른바 ‘좋은 것’, ‘옳은 것’의 출처와 근원이 어디인지 해부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심각성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오랜 세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후에도 이것들이 옳고 긍정적인 사물이라고 생각하며, 나아가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읽었든,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한 삼종사덕(三從四德)이나 인의예지신 등 소위 전통 사상과 전통문화를 버릴 수는 없어. 이것들은 선조 때부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기 때문이지. 우리의 선조들은 성현이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선조들의 가르침을 어겨서는 안 돼. 옛 선조들의 가르침을 왜곡하거나 버려서는 안 돼.’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마음속에 늘 이런 생각, 이런 의식을 갖고 있으며, 여전히 자기도 모르는 새에 이런 전통문화의 것들에 통제되며 결박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20여 세쯤 된 너를 보고 ‘삼촌’이라고 불렀다고 해 보자. 너는 무척 기쁘고 흐뭇할 것이다. 반면, 직접 네 이름을 불렀다면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 아이는 예의를 모른다느니, 교육을 받아야 한다느니 생각하며 다른 태도를 보일 것이다. 사실, 너를 삼촌이라고 부르든 네 이름을 부르든, 네 인격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왜 삼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해서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이겠느냐? 이것이 바로 전통문화에 지배되고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네 내면에 먼저 자리 잡아 네가 사람과 일을 대하고 모든 사물을 평가하며 판단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되었다. 기준이 틀렸을 때 네 행동의 성질이 옳을 리 있겠느냐? 분명 옳지 않을 것이다. 만약 네가 진리로 판단한다면, 이 일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다른 사람이 너를 뭐라 부르든 그것을 마음에 담아 두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가 너를 욕하거나 모욕한다면 너는 틀림없이 마음이 불편해질 것이다. 이는 인성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만약 네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또는 하나님에게서 온 문화로 평가하는 것이라면, 그 아이가 네 이름을 부르든 아니면 너를 삼촌이나 형으로 부르든 너는 절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는 지역 풍습을 따라도 된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누군가 너를 삼촌이라고 하면 그것이 너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서방에 가면 그 호칭이 매우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네 이름을 부르면 아주 좋다고, 그것은 너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중국이라면, 너보다 나이가 많이 어린 사람이 네 이름을 부를 경우 기분이 나빠져서 위아래가 없다고, 큰 모욕을 당했다고 여길 것이다. 너는 그것 때문에 화를 내거나 심지어는 그 일로 그 사람을 정죄할 수도 있다. 이것이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려는 문제이다.

나라마다, 인종마다 각자의 전통문화가 있다. 우리는 모든 전통문화를 비판해야겠느냐? 비판해서는 안 되는 문화가 하나 있다. 어떤 문화인지 너희가 말해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예를 하나 들어 주겠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했는데, 아담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느냐?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고, 인류와 함께 지낼 때 사람을 어떻게 불렀느냐? (이름을 직접 부르셨습니다.) 맞다. 이름을 직접 불렀다. 하나님이 너에게 이름을 주었으니, 그 이름은 하나님에게 의미가 있다. 이것은 하나의 별칭이자 호칭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별칭을 주었고, 바로 그 별칭으로 너를 불렀다. 이는 일종의 존중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가장 큰 존중이며, 가장 진리에 부합하고 가장 긍정적인 존중이다. 이는 사람을 존중하는 기준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는 일종의 문화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문화를 우리가 권장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은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른다. 하나님이 너에게 이름과 별칭을 주고, 그 별칭으로 너를 대표하고 부른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을 대한다. 두 번째 사람을 만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였느냐?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녀의 이름을 짓게 했다. 아담은 그녀의 이름을 하와라고 지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불렀느냐? 불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게서 온 문화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각각의 별칭을 지어 주었다. 그 별칭을 부를 때 인류와 하나님 모두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알면 된다. 이것이 바로 존중이자 평등이라는 것이다. 이는 어떤 이가 예의를 아는지, 인성 안에 규범을 갖추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다. 이것이 정확하지 않겠느냐? (정확합니다.) 이것이 정확하다. 성경에는 어떤 사건을 기록하든 혹은 어떤 가족의 족보를 기록하든 인물들마다 이름과 별칭이 있다. 그러나 너희가 주의를 기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이모, 또는 큰아버지, 큰어머니 등의 호칭은 없다는 것이다. 전부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정해 준 규율이든 법칙이든,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인류가 계승해 온 전통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으로, 항렬에 따른 존칭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삼촌, 큰이모, 작은이모, 큰고모, 작은고모 등과 같은 복잡한 호칭이 없다. 그런데 사람은 늘 이런 항렬과 호칭을 따지니, 이는 어떤 의미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일을 가장 혐오하는데, 사탄에 속한 부류가 늘 이런 일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전통문화만 보더라도, 하나님에게는 매우 실질적인 점이 하나 있다. 하나님은 전 인류를 창조했기에, 한 사람 밑에 얼마나 많은 가족과 후손이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으므로, 항렬 같은 것은 필요 없다. 하나님은 단지 자손이 번성하라고, 가문이 흥성하라고 했을 뿐이니, 그저 이것만 분명히 기억하면 된다. 각각의 세대가 얼마나 많은 후손을 번성했는지, 그리고 그 후손이 또 얼마나 많은 후손을 번성했는지 그것뿐이며 항렬이 필요 없다. 후손들도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지 알 필요 없고, 사당이나 절을 지을 필요도 없고, 그들을 섬기거나 그들에게 제사를 지낼 필요는 더더욱 없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과 여호와를 믿는 사람은 모두 제단 앞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가문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와 제사를 드렸다. 중국의 집집마다 사당이 있고, 사당 안에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의 위패로 가득 찬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이 사역을 처음 시작한 발원지에는 이런 것들이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 장소와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은 사탄과 악령에게 통제되었으며, 이런 불교 국가에서는 사탄에 속한 것이 특히나 성행했다. 사람들은 늘 조상에게 절을 해야 했으며, 모든 일을 가문에 물어봐야 했고, 조상에게 모든 것을 말해야 했다. 심지어 조상의 유골조차 남아 있지 않아도 향을 피우고 절을 해야 했다. 근대에 서양의 새로운 사상을 접하고 전통적인 가문의 속박을 뚫고 나온 사람들은 이러한 가문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가문에 의해 철저하고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다고 느꼈다. 무슨 일만 있으면 가문의 어른들이 다 와서 간섭했으며, 특히 결혼 문제에 있어서는 더 심했다. 중국에서 이런 일은 흔하다. 사탄이 사람에게 항렬을 따지게 했는데, 사람들은 이런 말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사람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에 항렬이 있어요. 맨 위 항렬이 바로 우리의 조상이죠. ‘조(祖)’자가 붙으면, 신을 대하듯이 무릎 꿇고 절해야 해요.”라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가문에서 이렇게 영향을 받고 물들며, 또 이렇게 교육을 받으면 어린 마음에 어떤 한 가지가 주입되게 된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가문을 떠나서는 안 되며, 가문을 떠나거나 가문의 속박을 벗어나는 것은 대역무도한 짓이라는 것이다. 대역무도가 암시하는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네가 가문의 말을 듣지 않으면 불효자이며, 불효자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은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중국인은 항렬, 그리고 삼종사덕(三從四德), 삼강오상(三綱五常)과 같은 것들에 심각하게 물들고, 전염되고, 통제되었다. 젊은이가 나이가 약간 더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삼촌’이나 ‘이모’, 또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으면 항상 예의와 교양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네가 이 집단과 이 사회에서 저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는 네가 규범을 모르고, 교양도 없으며, 장래성도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옷을 잘 차려입고 위장을 할 줄 알고, 말도 예의 바르고 교양 있게 하며, 듣기 좋은 말도 잘하는데, 네가 ‘삼촌’이나 ‘이모’라고 부르지도 못한다면 남들에게 교양 없다는 소리를 듣고, 어디를 가든 무시당한다는 것이다. 중국인은 이런 사상을 주입받는다. 아이가 사람을 보고도 호칭을 부를 줄 모르면 부모에게 심하게 혼나거나 맞기도 한다. 어떤 부모는 때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누가 너보고 예의 없이 굴래? 못난 데다가 교양도 없으니, 차라리 때려죽여 버리겠어! 너 때문에 망신만 당하잖아. 남들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겠어!” 아이가 사람을 보고 호칭을 부를 줄 모른다고 부모가 자신의 체면을 위해 지나치게 문제 삼아 아이를 심하게 때린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내가 이 일에 대해 이렇게 교제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의식할 수 있겠느냐? 실생활 속에서 어떠한 현상을 통해,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이러한 일들을 조금씩 꿰뚫어 보고 인생의 방향과 네가 걷는 길의 방향을 바꿀 수 있겠느냐?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깨닫는 능력이 많이 부족한 것이다. 매사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요구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가장 옳은 것으로, 조금의 틀림도 없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탄에게서 온 것이 사람의 관념에 아무리 부합하고, 사람의 입맛에 아무리 맞으며, 겉보기에 아무리 그럴싸해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목적은 바로 너희의 생각을 트이게 하여 무엇이 진리인지, 사람이 대체 무엇을 얻고자 하나님을 믿는지, 하나님이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고 사람이 진리를 얻게 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이 말씀한 진리와 하나님의 요구가 사람의 사상 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 또는 국가와 사회 환경이 교육하고 영향을 주어 만들어 낸 사상, 관점, 각종 인식과 대체 관계가 있는 것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너희 자신도 해부해 보아라. 오늘은 한 측면의 예만 이야기했지만, 사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런 전통문화의 것들이 여전히 적지 않게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항렬을 따지지 않는다면, 부모님의 이름을 직접 불러도 되지 않나요?”라고 하는데, 이래도 되겠느냐? ‘부모님’이라고 한다면 또 항렬의 문제뿐 아니라 전통문화에 빠지는 것 아니겠느냐? 아니다. 부모님은 그대로 부모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아빠’, ‘엄마’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렇게 부르게 한 것이며, 이는 마땅히 있어야 하는 호칭이다. 마치 너의 부모가 너를 ‘아이’ 또는 ‘아들’이나 ‘딸’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너희가 주로 무엇을 깨닫게 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느냐? 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냐? (사람이 사물을 평가하는 기준이 바뀌어야 하며, 모든 일을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요구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맞다. 자기가 함부로 지어내면 안 된다. 사람은 항상 스스로 ‘진리’를 만들어 내려 한다. 어떤 일을 하고 싶으면 일련의 주장과 이론을 만들어 내고, 또 일련의 행동 방식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렇게 한다. 그 결과 몇 년간 실행하면서 성과가 있든 없든 그냥 그렇게 죽어라 고수하고는 자신이 매우 어질고, 의롭고, 선량하다고, 자신이 살아 낸 바가 매우 훌륭해 남들이 무척이나 칭찬하고 우러러본다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점점 더 자기가 위대하다고 느끼게 된다. 사람은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요구했는지, 각각의 일을 할 때의 원칙은 무엇인지, 자신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맡긴 것에 충성을 다했는지를 결코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으며, 구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부정한 것만 궁리한다. 이것이 사악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무릇 겉으로는 매우 온화하고, 행동이 단정하며, 교양 있고, 예의 바르며, 입만 열면 인의예지신을 이야기하고, 유식한 단어를 구사하며,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는지 안 하는지 너희가 관찰하여라. 만약 그가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가 바로 외식하는 위선자이다. 바로 다밍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며, 다른 점이 전혀 없다. 좋은 행위에만 집중하고, 좋은 행위로 남을 속여 칭찬과 우러름을 얻어내는 자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외식하는 사람입니다.) 이 부류의 사람이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실행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실행할 수 없겠느냐? (무엇이 진리인지 모르기에 겉으로 좋아 보이는 행위와 사람이 좋게 보는 것들을 진리로 여겨 실행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된 이유가 아니다. 그가 아무리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몇 가지 분명한 일 처리 원칙은 그도 알지 않겠느냐? 그가 본분을 이행할 때 네가 그에게 어떻게 하라고 알려 주면, 그가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으니, 진리를 실행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네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듣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말한다. 우리는 요즘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어떤 사람들이 변화가 있고, 어떤 사람들이 행위와 일 처리 원칙에 전혀 변화가 없는지 네 주변 사람들을 관찰해 보아라. 네가 아무리 교제해도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설령 자신과 대조되어도 고치지 않고 고칠 생각도 없으며, 여전히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지 살펴보아라. 너희는 이런 사람을 발견하였느냐? 발견하지 않았느냐? 어째서 어떤 사람은 리더 일꾼을 하다가 교체되었겠느냐? 바로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실제적인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도리를 다 알면서도 자기 방식대로 하고, 아무리 진리 원칙을 교제해 주어도 자신만의 생각이 있어 자기의 견해만 고수하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기가 하던 대로 하니, 이런 리더 일꾼은 교체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교체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은 어떤 길을 걷고 있는 것이겠느냐? (적그리스도의 길입니다.)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적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이는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다. 만약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전혀 변화가 없다면, 이러면 골치가 아파진다. 이미 적그리스도가 된 것이다.

오늘 이 이야기가 너희에게 주는 가장 큰 일깨움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잘못된 길에 들어서기가 매우 쉽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첫째,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사상과 내면 깊은 곳이 결코 공백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너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기 쉽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 가지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사람은 자신이 좋고 옳다고 여기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해 지키기 쉬우며, 성경 지식과 영적인 도리를 하나님 말씀으로 여겨 실행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를 이해한 후, 너희는 자신이 앞으로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모든 일들에 대해 어떤 새로운 인식, 생각, 계획을 갖게 되었느냐? (앞으로 일을 할 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 자신이 생각한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하나님의 요구와 부합하는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그다음 하나님 말씀에서 실행 원칙을 찾아서 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자기가 한 것이 진리 실행임을, 하나님을 믿으며 걷는 길이 올바른 길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에 공을 들여야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너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자질이 부족하다. 네가 생각해 낸 것들이 아무리 대단해도 진리가 아니다. 설령 네가 행한 일이 단 하나의 실수도 없이 옳다고 확신한다 할지라도 끄집어내 형제자매들과 교제하며 검증하거나 관련된 하나님 말씀과 대조해 봐야 한다. 이렇게 하면 100% 틀림이 없겠느냐? 꼭 그렇지는 않다. 네가 진리 원칙을 완전히 파악하거나 하나님이 한 이 말씀의 근원을 헤아리지 못하는 한 어쩌면 실행에 오차가 생길 수도 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그의 행동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남들에게 칭찬받을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진리를 대체할 수는 없다. 진리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니며, 긍정적인 사물도 아니다.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느냐?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정죄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이 정죄하는 일을 저질렀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하나님께 혐오받을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모두 부정적인 사물이며,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이 말을 어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천천히 체험해 보아라.

오늘 한 가지 일을 진지하게 비판하였는데, 무슨 일을 비판하였느냐? 늙은 암퇘지를 ‘아주머니’라고 부른 일이다. 그렇지 않으냐? 돼지를 ‘돼지 아주머니’라고 부르다니, 이는 부끄러운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부끄러운 일이다. 사람은 늘 존칭을 두고 싶어 하는데, 존칭의 ‘존’자는 어디에서 온 것이겠느냐? ‘존’자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항렬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항상 남들의 손윗사람이 되려 하고, 늘 항렬을 따지고 싶어 하는데, 이는 좋은 것이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항렬을 따지는 것이 어째서 좋지 않으냐? 항렬을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분석해 봐야 한다. 네가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간단하겠느냐. “하나님께서 항렬을 따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당신은 어째서 함부로 항렬을 따지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면서 교양 있는 척하는군요. 당신은 본분을 이행할 때 전혀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으니, 팔이 완전히 밖으로 굽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이익과 관련이 있을 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고요. 그런데도 좋은 사람인 척하다니요! 그럴 자격이나 있나요?” 이렇게 말하면 되지 않겠느냐? (됩니다.) 그럼 좀 더 엄하게 말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하겠느냐? “무슨 헛소리입니까? 당신이 바로 어리석은 돼지이고, 어리석은 자입니다.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면서 뭘 사칭하는 겁니까? 당신은 공부도 했고, 교양도 있으며, 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 자신이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진리 실행이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이러니 어리석은 돼지이자 어리석은 자 아니겠습니까?”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교제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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