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조 사악함과 음험함, 그리고 간사함(2) 제 5 부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은 교회에서는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이 실행되지 않는다. 이와 더불어 교회에 괴상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과 무관하거나 상반된 사역만 하여 형제자매들이 다른 견해, 다른 논조를 갖게 하고, 교회에 혼란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럼 거짓 리더는 어떻게 하느냐? 그는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을 따라 사역하지 않는다. 마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랫사람들은 흩어진 모래알 같다. 체계를 잡아 주는 사람은 없고 다들 원하는 일을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런데도 거짓 리더는 아무 말도 없고 이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반면 적그리스도는 다르다. 그는 사역지침을 지키기는커녕 본인이 직접 일련의 주장과 행동 방식을 만든다. 상부의 사역지침을 자신의 주장으로 가공해 실행하는 자도 있고, 상부의 사역지침을 전혀 따르지 않고 다른 수작을 부리는 자도 있다. 그가 상부의 사역지침을 보류하여 전달하지 않으니 아랫사람은 영문을 모른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일련의 이론과 주장을 정리해서 아랫사람을 미혹하고 속인다. 그러니 너는 적그리스도가 겉으로 얼마나 버리고 어떤 고통을 받는지를 보지 마라. 겉으로 보이는 그의 이런 행동 방식은 제쳐 두고 그가 행한 그런 일의 본질을 보아라. 그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냐? 하나님이 말씀하고 행한 것, 하나님이 형제자매에게 깨달으라고 한 것, 하부에 실행하라고 요구한 것 등 이 모든 일을 그는 반대한다. 어떤 사람들은 “실행하지 않은 게 반대한 건가요?”라고 묻는다. 그가 왜 실행하지 않겠느냐?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납득할 수 없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 집보다 높으냐? 납득할 수 없다고 한들 그에게 묘책이 있느냐? 없다. 그런데 어째서 납득할 수 없다며 감히 실행하지 않겠느냐? 그는 교회를 장악하고 통제하고 싶은 것이다. 만약 완벽하게 사역지침과 상부의 요구에 따라 실행한다면 그의 공로가 묻히고 두드러지지 못할 테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그에게 재난이다. 만약 사람들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늘 진리를 교제하며, 진리를 깨달아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고, 일이 생겼을 때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께 기도로 부르짖는다면 그가 무슨 역할을 하겠느냐? 그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그의 역할이 사라져 장식품이 될 것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장식품이 되는 것을 그가 수긍하겠느냐? 그는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 국면을 되돌리려 할 것이다. 성품과 본질이 사악한 적그리스도가 만약 형제자매가 모두 진리를 추구하면 자신이 드러나게 될 거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하겠느냐? 이토록 나쁘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그는 사악하고 간사하며 음험한 데다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만약 모두가 진리를 깨닫는다면 그를 분별할 것인데 적그리스도가 이를 모르겠느냐? 그는 알고 있다. 영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네가 어떤 곳에서 악령을 만났는데 그 악령이 너를 눈에 거슬려 하고 너는 그가 역겨워 보여서 그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 사실 그가 네게 잘못한 일이 없고 네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는데 너는 그가 역겹게 보이고 그의 말은 더더욱 역겹게 들린다. 실제로 그는 너를 모르고 너도 그를 모르는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란 것이 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선민의 원수이다. 네가 그와 함께 지내면서 아무런 느낌이나 지각이 없다면 너무 무감각한 게 아니겠느냐? 그가 하나의 논조를 말하고, 어떤 관점을 제시하며, 어떤 태도로 행동할 때, 그가 두세 마디만 하고 말을 아끼면 너는 간파하지 못한다. 오랫동안 함께 지냈는데도 네가 지각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상부에서 그를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고 나서야 크게 깨닫고 두려움을 느끼면서 ‘이렇게 확실한 적그리스도를 나는 왜 분별하지 못했을까? 정말 위험했어!’라고 생각한다면 너는 얼마나 둔하고 무감각한 것이냐!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에는 확실한 특징이 있다. 분별할 수 있는 비결을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그것은 바로 그의 말이든, 행동이든 네가 그의 속내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너와 대화할 때 이리저리 눈을 굴리지만 너는 그가 무슨 계략을 꾸미는지 알 수 없다. 그가 충성스럽고 무척 진지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네가 줄곧 그를 간파하지 못하면 네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이 들 것이다. 이 사람은 음침하고 헤아릴 수 없으니 참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 말이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의 첫 번째 특징이다. 이것으로 이미 사악한 특질을 갖추었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의 두 번째 특징은 무엇이냐? 바로 그가 어떤 말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미혹성이 몹시 강하다는 것이다. 이 미혹성은 어디에서 나타나느냐? 그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능해서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는 말, 사람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을 한다는 데서 볼 수 있다. 하지만 네가 분별해야 할 한 가지는 그의 그럴싸한 말들이 그에게서 전혀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가 다른 사람에게 도리를 전하면서 정직한 사람이 되는 법, 일이 생겼을 때 기도하는 법,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법을 알려 주지만 그에게 일이 생기면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전부 자기 뜻대로 하며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자기의 이익만 도모하면서 모두가 그를 위해 봉사하고 그의 일을 하게 한다. 그는 하나님에게 주인이 되어 달라고 전혀 기도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그럴싸하지만 행동은 전혀 딴판이다. 그가 일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이다.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가 일할 때 순종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도모하고 살길만 찾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것이 사람이 볼 수 있는 적그리스도의 간사함과 사악함의 단면이다. 적그리스도가 사역하면서 수고하고 대가를 치를 때도 있고, 심지어 침식을 잊을 때도 있는데 이는 명예와 지위를 도모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야심과 목적을 위해 고생하지만 하나님 집에서 안배한 중요한 사역은 건성으로 하고 조금도 실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겠느냐? 자기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겠느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에게는 다른 측면의 모습도 있다. 형제자매가 이견을 제시하면 에둘러 거부하고 빙빙 돌려 말함으로써 모두와 교제하고 상의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말하다 보면 결국 그의 말을 따르게 된다. 그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부정하고 남들이 자기 의견을 따르고 자기 말을 듣게 하는 것이 진리 원칙을 구하고 있는 것이냐? 분명 아니다. 그럼 그가 사역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그것은 모든 사람이 그의 말을 따르고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 그 누구보다 그의 말에 따르는 것이 낫다는 것, 그의 말이 최선이자 최고라는 것, 모두가 그의 말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그가 곧 진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의 두 번째 특징이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의 세 번째 특징은 그가 자기를 증거할 때 항상 자신의 공로, 자기가 했던 고생, 자기가 모두를 위해 처리했던 유익한 일을 증거하여 모든 사람이 이를 명심하게 하고 그에게 신세를 졌다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를 칭찬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무척 영적인 말을 해서 그가 대단히 영적인 사람이고 진정한 하나님의 착한 종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사실 그는 자기를 높이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지위가 전혀 없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그의 지위는 이미 하나님의 지위를 훨씬 넘어섰다. 이것이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증거한다는 것에 대한 사실적인 증거가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고 통제하는 교회의 사람들 마음속에는 적그리스도의 지위가 가장 높고, 하나님의 지위는 그저 두세 번째에 머물 뿐이다. 만약 하나님이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은 교회에 가서 이야기를 하면 그들이 귀담아듣겠느냐? 속으로 받아들이겠느냐? 장담할 수 없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증거하는 데 얼마나 힘을 쏟는지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하나님을 전혀 증거하지 않고 하나님을 증거할 기회를 죄다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데 쓴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수단은 너무 음험하지 않으냐? 너무 사악하지 않으냐? 앞에서 교제한 세 가지 특징을 토대로 하면 적그리스도를 손쉽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적그리스도에게 또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이는 사악한 성품의 주된 모습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진리를 교제하든, 하나님의 선민이 자기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교제하든, 그리고 어떻게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든 적그리스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명예와 이익, 지위를 추구하면서 복을 받으려는 속셈과 욕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 대가를 치르며 수고하면 하나님이 축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한동안 교회 사역을 하면 교회를 위해 또 어떤 사역을 했었는지, 하나님 집을 위해 어떤 공을 세웠는지, 형제자매에게 어떤 일을 처리해 주었는지 세어 보고, 이런 일을 가슴에 새겨 두어서 나중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어떤 은혜와 축복을 줄지 지켜본다. 과연 이렇게 한 보람이 있는지 확인하기 편하게 말이다. 어째서 그는 속으로 늘 이런 일들을 따지는 것이냐? 그가 마음속 깊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무엇이냐? 그는 하나님을 처음 믿을 때부터 복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설교를 몇 년을 들었든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먹고 마셨든, 도리를 얼마나 이해했든, 그는 복을 받고자 하는 욕망과 속셈은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본분에 충실한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건 저랑 상관없어요. 제가 추구할 바가 아니거든요. 제가 추구해야 하는 건 싸울 땐 싸우고, 힘쓸 땐 힘쓰고, 고생할 땐 고생하는 겁니다. 제가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면 하나님은 제게 상을 베풀어 주시고 저를 살아남게 해 주실 겁니다. 하나님나라에서 면류관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보다 높은 위치에 서겠죠. 적어도 두세 개 고을은 맡기실 거예요.” 적그리스도가 무엇보다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하나님 집에서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복을 받고자 하는 그의 속셈과 욕망은 끊어 낼 수 없다. 이런 자가 바로 바울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 이런 적나라한 거래 속에 사악하고도 흉악한 성품이 들어 있지 않겠느냐? 어떤 종교인들은 말한다. “우리 세대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며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이니 우리는 복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수고하고 대가를 치렀으며 고배도 마셨습니다. 심지어 체포되고 수감되어 형을 산 사람도 있어요. 우리가 이토록 고생하고 설교도 많이 들어서 성경 지식을 이렇게나 쌓았는데 언젠가 복을 받지 못한다면 셋째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께 따질 겁니다!” 너희는 이런 말을 들어 본 적 없느냐? 그들은 무슨 담력으로 하나님에게 따지러 셋째 하늘에 올라간다는 말을 하느냐? 듣기만 해도 두렵지 않으냐? 누가 감히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겠느냐? 그들이 믿는 예수가 이미 승천해서 다행이지 아직까지 땅에 있었으면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지 않겠느냐? 물론, 하나님을 처음 믿은 경우, 이 말이 힘 있고 대단하게 느껴져서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런 기개와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믿어 온 너희는 이 말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이런 사람이 천사장이 아니냐? 사탄이 아니냐? 네가 누구에게 이치를 따지든 하나님에게 따져선 안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복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하나님이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네가 복받을 조건을 충족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주지 않는다고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져선 안 된다. 전 우주, 전 인류를 모두 하나님이 다스리고 하나님이 결정하는데 너같이 미미한 사람이 감히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다니 어쩜 그리도 자기 분수를 모르느냐? 자기가 누군지 거울로 비춰 보지도 않고 감히 창조주에게 언성을 높이며 대드니 제 무덤을 파는 꼴이 아니냐? “언젠가 복을 받지 못하면 셋째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께 따져야죠.” 이는 대놓고 하나님에게 고함치는 말이다. 셋째 하늘이 어떤 곳이냐? 하나님이 거하는 곳이다. 감히 셋째 하늘에 가서 하나님에게 따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찬탈이자 반란’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말씀하신 이 일이 적그리스도와 무슨 상관이죠?” 관계가 대단히 깊다. 셋째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에게 따지려는 사람은 모두 적그리스도이고, 오직 적그리스도 같은 부류의 사람만이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말을 가슴 깊이 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이다. 적그리스도가 입으로는 이런 말을 하지 않지만 마음속에는 이런 것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단지 그가 감히 표출하지 못하고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있는 욕망과 야심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계속 타오른다. 왜 그렇겠느냐? 적그리스도가 진리, 하나님의 공평과 공의,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한다는 사실은 더더욱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증오한다. 그럼 그가 무엇을 사랑하겠느냐? 그는 지위를 사랑하고 상에 관심을 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게 은사와 능력, 재주가 있고 교회를 위해 힘을 들였으니 하나님께서 제게 보상해 주시고 상을 주셔야 해요!” 이러면 골치 아프지 않겠느냐? 이는 제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에게 직접 도전하는 것이 아니냐? 창조주에게 도전하는 게 아니냐? 감히 하나님에게, 창조주에게 창끝을 겨누는 것은 천사장이나 사탄만이 저지를 수 있는 짓이다. 만약 정말 이런 관점을 가지고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의심의 여지 없는 적그리스도이다. 감히 이렇게 대놓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판단하는 자는 이 땅에 오직 적그리스도밖에 없다. “저희가 본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난폭하고 건방지지 않던데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적그리스도가 처한 배경과 환경을 봐야 한다. 그가 완전히 득세하지 못해 조력자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감히 서슬을 드러낼 수 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잠자코 때를 기다릴 줄 안다. 권토중래할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시퍼런 서슬을 완전히 드러낼 것이다. 일부 적그리스도는 지위가 없을 땐 잘도 숨어 있어서 겉으로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일단 지위를 갖게 되어 조력자들이 많아지면 그들의 사악함과 추함은 남김없이 드러난다. 마치 이런 경우와 같다. 진리 실제가 없는 사람들은 지위가 없을 땐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마지못해 순종하고 속으로도 승복하지만 리더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선민 가운데 명성이 좀 생기고 나서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본색을 드러내고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며 떠들어댈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평소 본분을 무척 잘 이행하면서 전혀 불평을 가지지 않는데 암에 걸려 곧 죽을 처지가 되면 아마 본색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에게 큰소리치며 따질 것이다. 적그리스도들은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며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폭로되고 드러난 후에도 교회에서 기꺼이 힘쓰고, 나아가서는 말단 따르는 자 중 가장 작은 자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느냐?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 그에게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는 복받겠다는 속셈을 항상 내려놓지 않는다. 그의 뜻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해. 복을 못 받으면 하나님과 끝장을 볼 거야. 내가 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거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성품이냐? 대놓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에게 언성을 높이니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복받을 희망이 한 줄기라도 있으면 그는 하나님 집에 머물며 복받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이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느냐? 바리새인처럼 늘 외식하는데 그 안의 속셈과 목적이 분명하지 않겠느냐? 그가 겉으로는 얼마나 훌륭하게 행동하고 얼마나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든 그는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고 일할 때 진리를 구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고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오직 복을 받으려는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채우는 것만 추구한다. 이러면 골치 아프지 않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게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가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은 오직 그의 사탄 성품만을 대변할 뿐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 추구하는 것을 모두 긍정적인 것,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하나님에게 열납하고 축복해 달라고 하는 것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느냐? 이는 하나님에게 반기를 들고 대드는 것이 아니냐? 적그리스도는 매사에 하나님과 거래를 한다. 고생하며 치른 대가로 하나님에게 상과 면류관을 요구하고 좋은 종착지를 받아 내려 한다. 그의 타산이 잘못되지 않았느냐? 그가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어찌 하나님의 징벌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는 그가 뿌린 대로 거둔 것이고 인과응보인 것이다.

예전에 업무를 좀 파악한 적그리스도가 있어서 합창단의 형제자매에게 업무를 가르치도록 안배했다. 그 형제자매들은 모두 어려서 대부분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짧았고, 본분 이행을 하고자 하는 열의만 있을 뿐 진리는 깨닫지 못했다. 기반도 다지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적그리스도는 사역하면서 그들이 성령 역사를 느끼게끔 인도해서 하나님이 함께하는 느낌과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 체험하게 했다. 그저 느낌에만 매달리게 한 것이다. 그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진실한 체험도 없어서 이렇게 그의 관념과 상상으로만 사람을 미혹하고 오도했다. 상부에서 그에게 진리 실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단지 그에게 업무만 지도하라고, 업무만 확실히 설명해도 합격한 본분 이행이고 책임을 다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진리 교제’를 하여 사람들이 느낌을 찾고 느낌에 매달리게 하려 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사람들을 악령 역사의 초자연적인 느낌으로 이끌기 쉽지 않겠느냐? 너무나 위험한 행동이다! 한 번 악령이 사람에게 달라붙을 틈을 주면 그 사람은 끝장이다. 훈련 기간 그는 그들에게 기도를 시키면서 기도하고 나서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자기에게 땀이나 눈물이 나는지, 혹은 몸에서 어떤 다른 느낌이 있는지 살펴보게 했다. 그는 여전히 이런 것들을 중시했다. 사실 이런 것은 이미 충분히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토록 많은 진리는 제쳐 둔 채 교제하지 않고 그들을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게 이끌지도 않았다.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형제자매에게 안무를 짜지 말고 무대에서 내키는 대로 춤추고 마음대로 발휘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괜찮아요. 하나님께서 이끄시니 걱정 마세요. 성령이 역사하십니다!”라고 했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깨닫지 못해 미련한 짓만 일삼았다. 그 형제자매들도 분별하지 못한 채 그의 말을 따라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역사하소서. 하나님, 역사하소서….” 그들도 ‘마음을 다해’ 힘껏 기도했다. 기도하고 나서는 울기도 했다. 그다음엔 무대에 올라 즉흥적으로 한바탕 춤을 췄다. 다른 사람은 무대 밑에서 이를 지켜보면서 분위기가 좋다고, 성령이 크게 역사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춤추는 것을 보면 눈물이 나오니 마치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것 같은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이 일을 모두 기록하고 사진으로 남겨 내게 보여 주었다. 사진에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울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한겨울인데도 얼굴 전체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진을 보고 나서 문제가 되겠다, 그가 이들을 망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들에게 업무만 지도하라고 했는데 그는 아무런 진리도 깨닫지 못하면서 상상에만 의지해 엉망으로 한 것도 모자라 성령 역사의 느낌까지 찾으려 했다. 성령 역사가 느낌에 관한 일이더냐?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실제적이다. 느낌에만 매달리는 것은 공허하고 소용없다. 네가 느낌만으로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너는 느낌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저 하나님 말씀을 토대로 원칙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 다음 일이 생겼을 때 상황에 맞게 적용하면 된다. 이 얼마나 현실적이냐. 그러면 차츰차츰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면 성령이 자연스레 역사한다. 설령 성령이 역사하지 않더라도 네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실행하면 하나님도 너를 따르는 자로 인정할 것이다. 이 얼마나 현실적이냐. 이것이 가장 진실한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교제하지 않고 한결같이 느낌을 찾거나 이적과 기사, 기이한 꿈 같은 것을 찾도록 사람을 선동했다. 이것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문외한이 무지몽매한 아이들을 이끌면서 저지른 황당한 일이다. 사진 속의 사람이 울며 눈물을 흘린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것이 무언가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한 가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한 일이 어떤 성질이냐 하는 점이다. 이 적그리스도는 그 일들을 모두 사진으로 남기면서 ‘하나님 역사의 면면’이라고 이름까지 지었다. ‘면면’이 무엇이냐? 이들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툭하면 성령 역사의 느낌을 찾고 툭하면 즉흥적으로 춤추니 출 때마다 춤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느낌이 다르고 하나님의 ‘인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면면’이다. 이런 ‘면면’에는 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느냐? 그리고 이것이 성령 역사의 성과라고 했다. 이렇게 말하자 형제자매들은 마치 믿음과 분량이 단번에 훌쩍 성장하기라도 한 것처럼 흥분했다. 그가 왜 ‘면면’이라고 했겠느냐? ‘면면’이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느냐? 내가 하나님 역사의 면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면면이 무슨 뜻이더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여 이룬 성과다. 이는 사람이 볼 수 있고 만질 수도 있으며 초자연적이지도, 막연하지도 않다. 네가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네게 많은 사역을 했고 많은 말씀을 했으며 심혈을 기울여서 너라는 사람의 생존 방식, 일을 바라보는 관점, 처신하는 태도,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등 다방면에서 바뀌게 하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 사역의 수확과 결실을 면면이라고 한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그가 한 일을 ‘면면’이라고 하였는데 일단 이 일이 어떤 성질인지는 차치하고 이 말만 분석해 보았을 때 너희는 무엇을 알아차렸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역사하면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는 면면을 보라고 했는데, 이 적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이렇게 제멋대로 굴도록 이끌어 엉망진창을 만들었으면서 ‘면면’이라는 말을 썼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이었느냐? (그는 하나님과 대등해지고자 했습니다.) 그렇다. 그의 ‘면면’이라는 말은 어디서 비롯되었느냐? 그는 하나님과 대등해지고 싶다는 생각에 하나님을 흉내 내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면면이라고 하니까 내가 이 사람들을 이끌면서 하는 것도 면면이지.’라는 뜻이다. ‘면면’의 수식어는 ‘하나님 역사’지만, 사실 그는 속으로 성령 역사의 면면의 성과를 자기 자신에게 돌린 것이다. 이것이 적그리스도가 하는 짓이다. 나설 기회만 있으면, 실낱같은 기회만 있으면 그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사람을 두고 하나님과 다투려 한다. 어떤 사람을 두고 다투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대세에 편승하기를 좋아하며 겉으로만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 믿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기초가 얕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는 사람들이다. 결국, 이 일은 제때 제재를 받게 되었다. 제재하는 것은 별것 아니지만, 적그리스도가 저지른 그 어리석은 일들은 한번에 드러났다는 것이다. 모두가 교제하고 돌이켜 보면서 말했다. “이 적그리스도가 없었을 땐 저희의 찬양이 전문적인 면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헤맬 때도 있었지만 찬양할 땐 마음에 와 닿아서 구절마다 마음을 다해 부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온 뒤로는 전문적인 이론을 얘기하다 보니 다들 딱딱한 느낌을 받아서 찬양하기 싫어졌어요. 가사 속에 담긴 하나님 말씀이 무엇인지 음미할 수 없고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거든요.” 이러면 골치 아프지 않겠느냐? 적그리스도가 나서기만 하면 그 결과 사람은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합당한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사람이 일단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충성스럽게 행동할 수 있겠느냐? 사탄에 의해 패괴된 사람에게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들 파리처럼 대세를 따르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확실한 목표는 필요 없다. 무리를 이끄는 한 사람만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를 따라 떠들어대기만 한다. 이렇게 활기 넘치고 이렇게 행동하는 데 구속을 받을 필요가 없으며 제한도 없으니 아무도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기도하며 구할 필요도 없고, 경건할 필요도 없으며, 조용히 있을 필요도 없다. 머리가 있고 숨을 쉴 수만 있으면 할 수 있다. 이는 짐승과 다를 바 없지 않으냐? 패괴된 인류가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으니 미혹을 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진리를 깨달아 이런 것을 분별할 줄 알면 쉽게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이 적그리스도가 폭로된 후 모두 모여 하나님 말씀에 대조하면서 사람을 미혹하는 그의 말과 그런 일을 저지른 그의 수단을 해부해 보고는 그자가 사람을 미혹하는 데 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엉망으로 하면서도 마치 대단한 기운이 도는 것처럼, 성령이 크게 역사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사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못했는데 말이다. 겉으로 보면 다들 열의가 대단하고 믿음과 분량이 갑자기 커진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은 허상이다. 그것은 악령이 역사한 것이다. 초자연적인 상황이 나타나 성령이 역사하지 않았다. 나중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모두가 진리를 교제하면서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게 되었고 내적 상태도 차츰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예전에 이들은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어 나와 소원했었다. 내가 말하면 이들은 낯선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고, 묻는 말에도 대답하려 하지 않아서 금방 서먹서먹해졌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적그리스도가 말해야 순종했다. 적그리스도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다 보니 적그리스도의 말이 그들을 대변하게 되어 그들에게 발언권이 없어졌다. 그런데도 이들은 발언권이 없음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으며, 그에게 통제되었다. 악령, 적그리스도는 이런 짓으로 사람을 미혹한다.

말로 분명하게 설명하고 해부할 수 있는 사악한 것들도 있지만, 그 속에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악령 역사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사악한 것들도 있다. 이것은 오직 네 느낌이나 네가 깨달은 진리, 네 체험으로만 분별할 수 있다. 그 적그리스도를 신속하게 분별해서 해결하니 교회 생활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모두가 이 일을 교제하면서 뒤늦게 두려움을 느끼며 말했다. “정말 위험했어요! ‘면면’이라고 한 적그리스도의 말이 우리에게 끔찍한 해를 끼쳐서 하마터면 그 사람이 우리를 망쳐 놓을 뻔했네요.” 그래서 너희가 적그리스도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만약 적그리스도에 대한 분별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면 너는 위험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될지 모르고, 심지어 영문도 모른 채 얼떨결에 적그리스도를 따를지도 모른다. 그 당시 너는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적그리스도의 말도 옳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너도 모르게 미혹되었다. 네가 미혹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평소 괜찮은 모습을 보이다가 일순 적그리스도에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교회에서 만류하고 교제하여 결국 구해 내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돌아오지 않고 죽을 때까지 적그리스도를 따른다. 이렇게 되면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가 고집을 부리며 뉘우치지 않으면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분별하지 못하고 이런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말한다. “그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에요.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으면서 버리고 헌신했죠. 예전엔 본분도 무척 충성스럽게 이행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대단해서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었는데 그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줘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관점이 옳으냐? 진리에 부합하느냐?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볼 때 겉모습만 볼 수 있을 뿐 속내를 알 수 없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는지 간파하지 못한다. 반드시 한동안 그 사람과 접촉해 보거나 지켜봐야 하고, 일이 닥쳐서 드러나야 그를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네가 선의로 그를 구해 내려고 하지만 아무리 교제해도 그가 뉘우치지 않으면 너는 그 이면에 어떤 원인이 있는지 모른다. 사실 하나님이 진작 그를 꿰뚫어 보고 도태시킨 것이다. 무슨 이유로 하나님이 그를 도태시켰겠느냐? 가장 직관적인 이유는 바로 어떤 적그리스도들은 악령이 분명해서 악령 역사가 있는 적그리스도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일정 기간 그를 따르면 마음이 어두워지고, 진흙같이 퍼져 버릴 정도로 연약해진다. 이는 하나님이 일찍이 그들을 포기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성품을 가지고 있고, 사탄을 증오한다. 그들이 사탄과 악령을 따르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하나님 따르는 사람으로 인정하겠느냐? 하나님은 거룩하고 사악을 증오한다. 악령을 따랐던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 설사 사람들에게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자일지라도 하나님은 원하지 않는다. ‘사악을 증오한다’는 게 무엇이냐? ‘사악을 증오한다’는 게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이어서 내가 하는 말을 들으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에게 택함 받은 때부터 하나님이 진리, 공의, 지혜, 전능이고 유일무이한 하나님임을 인정할 때까지 이런 것을 깨닫고, 어느 정도 체험이 생기고 나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마음속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기본적인 이해는 그의 믿음, 그가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본분을 이행하는 동력이 된다. 그에게 체험이 생기고, 그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마음속에 뿌리내리는 등의 분량을 갖추게 되면, 그는 두 번 다시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실제 하나님은 진실하게 인식하지 못하면서 적그리스도를 숭배하고 따른다면 이런 사람은 여전히 위험하다. 그는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저버리고 사악한 적그리스도를 따를 것이다. 이는 대놓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런 뜻이다. “저는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사탄을 따르겠어요. 저는 사탄을 사랑하고 기꺼이 사탄을 섬기며 따를 거예요. 사탄이 저를 어떻게 대하든, 저를 어떻게 유린하고 짓밟고 패괴시키든 저는 마다하지 않겠어요.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롭고 거룩하든, 얼마나 많은 진리를 선포하든 저는 하나님을 따르고 싶지 않아요. 저는 진리보단 명예와 지위가 좋고, 상과 면류관이 좋은걸요. 가질 수 없다 해도 그런 것을 좋아해요.” 그는 이렇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을 따르고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적그리스도와 함께 달아났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겠느냐? 절대 원할 리 없다. 하나님이 그를 원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으냐? 합리적이기 그지없다. 하나님은 사악을 증오하는 하나님이고, 거룩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너는 도리적으로 알고 있다. 네가 이 도리를 이해하지만 하나님이 그 적그리스도 추종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알고 있느냐? 하나님은 일단 사람을 혐오하여 버리면 주저 없이 그 사람을 포기한다. 내 말이 실제 상황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실제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을 포기하는 하나님을 매몰차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행사에는 원칙이 있다. 하나님이 누군지 알면서 하나님을 따르기를 싫어하고, 사탄이 누군지 알면서 한사코 그것을 따르고자 한다면 하나님도 강요하지 않는다. 영원히 사탄을 따르고 돌아오지 마라. 하나님은 너를 포기했다.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고 거룩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에는 사악을 증오하는 요소도 있다. 즉, 피조물로서 네가 기꺼이 타락하고자 하는데 하나님이 무슨 말을 하겠느냐? 하나님은 결코 하기 싫은 일을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고, 진리를 억지로 받아들이라고 하지 않는다. 타락을 자처한 건 네 선택이었으니 결국 그로 인해 초래되는 결과는 네 몫이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처리하는 원칙은 변치 않는다. 네가 타락을 자처한다면 징벌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네가 지금껏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따랐든, 네가 타락을 자처한다면 하나님도 네게 회개를 강요하지 않는다. 너 자신이 사탄을 따르며 사탄에게 미혹되고 유린당하기를 원한다면 결국 이런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 혹자는 이런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무작정 호의를 베풀어 그를 돕지만 아무리 그를 권면해도 뉘우치지 않는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이겠느냐? 사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데 사람이 뭘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그 이면의 이유다. 그런데 사람이 간파하지 못할 때에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고 이행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고 난 뒤의 결과가 어떨지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끄는가에 달려 있다. 내가 들려준 이런 세부 사항을 통해 “하나님은 사악을 증오하는 하나님이다.”라는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았느냐? 이것은 그중 하나의 측면으로, 하나님은 악령에 물들었던 자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사탄을 택했는데 하나님이 너를 원하겠느냐? 네가 사탄을 택했는데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고 감동을 주어 네가 돌아오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하고도 남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고, 하나님은 사악을 증오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는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본질의 주된 모습, 즉 모든 긍정적인 사물과 모든 진리를 적대시하고 혐오하는 것에 대해 중점적으로 교제하였다. 오늘은 다른 관점으로 교제해 보겠다. 적그리스도는 긍정적인 사물과 상반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 그것이 무엇이냐? (부정적인 사물입니다.) 그렇다. 부정적인 사물이다. 다시 말해, 진리에 어긋나고 맞서며 합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다. 적그리스도가 긍정적인 사물을 싫어하면 좋아하는 것도 있지 않겠느냐? 그럼 그가 무엇을 좋아하겠느냐? 그는 기만과 거짓말 그리고 음모와 계략, 술수를 좋아한다. 틈만 나면 ≪삼십육계≫를 보는 적그리스도가 있지 않으냐? 아마 있을 것이다. 내가 ≪삼십육계≫를 보더냐? 보지도 않고 연구하지도 않는다. 그걸 봐서 무슨 소용 있느냐? 보면 역겨워서 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삼십육계≫를 보고 나서 너희에게 어떤 느낌이 들더냐? 이 사악한 인류에 대한 염증이 더 커지지 않겠느냐? 이런 느낌이 없었느냐? 보면 볼수록 역겹고 정말 나쁜 사람이라는 느낌 말이다! 사소한 일도 계략을 세워야 하니 일이 복잡하고 머리 아프다. 밥맛도 없고 밤잠을 설치며 어떻게 싸울까 골머리를 앓는데 이럴 필요가 있겠느냐? 틈만 나면 삼십육계를 배워서 남들과 두뇌 싸움을 하고 하나님과 두뇌 싸움을 하는 적그리스도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거짓말, 기만, 음모, 계략, 술수, 계책을 좋아한다. 그럼 하나님의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겠느냐? 공평과 공의의 반대말이 무엇이냐? (사악함과 추함입니다.) 사악함과 추함이다. 그들은 추한 것들을 좋아한다.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모든 것들을 좋아하고 정의롭지 않고 정당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정의로운 일인데 적그리스도는 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바보야!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평생 사는 게 무슨 가치가 있겠어?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살아야 해. 뭐 하러 진리나 정의를 위해 살아? 그건 바보나 하는 짓이지!” 이게 그의 관점이다. 그런 그가 정의로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그는 정의로운 일을 하지 못한다.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일이 교회에 일어나면 그가 나서서 목소리를 내겠느냐? 그는 나서기는커녕 남의 불행에 신이 나서 몰래 기뻐하니 이를 악질이라 한다. 그는 결코 하나님 집 사역에 관한 일로 마음을 졸이거나 하나님의 선민을 지키기 위해 발 벗고 나서지 않을 것이다. 악을 행하는 악인이나 교회에서 제멋대로 구는 나쁜 사람을 보고도 남몰래 기뻐하고 하나님 집을 조롱하는 자는 어떤 사람이냐? 모두 사악한 무리이다. 그렇다면 이런 악인들을 싸고도는 리더는 어떤 사람이냐? 바로 적그리스도다. 자기 이익에 해가 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지만 교회의 이익에 해가 되는 것에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뒤에서는 자기가 손해 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이다.

방금 적그리스도가 진리는 싫어하면서 불의하고 사악한 일은 좋아한다는 것에 관해 언급했다. 그들은 이익을 추구하고 복받기를 추구해서 항상 복받으려는 속셈과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과 거래를 한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분별하고 규정해야겠느냐? 만약 이익에 눈이 멀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약하다. 마치 바울이 그의 몸에 가시가 있어서 속죄하기 위해 사역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마지막엔 공의의 면류관을 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어떤 성질이냐? (흉악함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흉악한 성품이다. 그런데 이 일의 성질은 무엇이냐?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질이 있는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이든 이득을 보려 하고 거래를 한다. 이방인의 말 중에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적그리스도 역시 같은 논리다. ‘제가 당신을 위해 사역하는데 당신은 제게 무엇을 주시나요? 제가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죠?’ 이 성질을 어떻게 결론지어야 하겠느냐? 이익이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익에 눈이 멀었다, 이기적이고 비열하다는 것이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다. 적그리스도는 오로지 이익과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약간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그것 역시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것이다. 복을 받고 상을 얻으려는 그의 속셈과 욕망이 너무 커서 단단히 붙잡고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토록 많은 진리를 선포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한결같이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한 것, 즉 좋은 종착지를 얻기 위한 거야. 이는 지고지상의 원칙으로서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어. 만약 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선 안 되지. 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는 의미나 가치는 사라져 없어지는 거야.’ 적그리스도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누군가가 주입했기 때문이냐? 누가 가르치고 영향을 주기라도 했느냐? 전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본성 본질에 의해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 오늘날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하는데 그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고 정죄한다.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그의 본성은 영원히 바꿀 수 없다. 그가 바뀔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의 본성이 사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성품이 사악하여 대놓고 하나님에게 고함치며 맞서는 것이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며 그의 실체이다. 하나님에게 대놓고 고함치며 대항하는 적그리스도는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느냐? 사악함이다. 어째서 사악함이라 하겠느냐? 적그리스도가 복받기 위해, 명예와 이익, 지위를 위해 감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고함치기 때문이다. 그가 왜 감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마음속에 그를 지배하는 일종의 힘과 사악한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굴며 하나님에게 따지며 고함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면류관을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기도 전이고, 하나님이 그의 종착지를 빼앗아 간 것도 아닌데 “제게 면류관과 종착지를 주지 않으면 셋째 하늘에 올라가 당신께 따지겠어요!”라며 그의 내면에 있던 사악한 성품이 폭발한 것이다. 만약 사악한 성품이 없다면 이런 기세가 어디서 나오겠느냐? 일반인에게 이런 기세가 나오겠느냐? 어째서 그는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 않느냐? 복을 받겠다는 욕망을 왜 한사코 물고 늘어지겠느냐? 이 또한 이상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약속한 복이 바로 그의 야심과 욕망이 된 것이다. 그는 복을 받겠다는 의지만 대단하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려 하지 않고 진리도 싫어한다. 그는 그저 복과 상, 면류관을 받는 것만 추구한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지 않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하나님에게서 쟁탈하려는 것이다. 그의 논리는 무엇이냐? “제가 복과 상을 받지 못하면 당신께 따질 거예요.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라며 맞설 거예요!”라고 한다면 이것이 하나님을 위협하는 게 아니겠느냐? 이는 왕궁까지 쳐들어와 반란을 일으키는 꼴이 아니냐? 그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사역이 그의 뜻에 부합하지 않으면 감히 하나님이 창조주이며 유일무이한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이것이 사탄의 성품이 아니겠느냐? 또 사탄의 사악함이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행태와 하나님을 대하는 사탄의 태도가 다를 게 무엇이냐? 완전히 똑같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그가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에게서 복과 상, 면류관을 빼앗으려 하니 이것이 어떤 성품이겠느냐? 그가 무엇을 근거로 이런 짓을 하며 이렇게 빼앗으려 하느냐? 그가 어떻게 이런 기세를 부릴 수 있느냐? 이제는 그 이유를 결론지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이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복과 면류관을 받으려 하고 하나님에게서 이런 상을 빼앗으려 한다. 이는 제 무덤을 파는 게 아니겠느냐? 이것이 제 무덤을 파는 짓임을 그가 알겠느냐? (모릅니다.) 자신이 상을 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 역시 은근히 느낄 것이기에 “만약 복을 받지 못하면 셋째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께 따지겠습니다!”라고 선수를 치는 것이다. 그 자신도 이미 복을 받지 못하리라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탄이 공중에서 몇 년간 하나님에게 고함쳐서 하나님에게 무엇을 받았느냐? 하나님은 그에게 딱 한 마디만 했다. “사역이 끝나면 너를 무저갱에 던져 버릴 것이다. 너는 무저갱에 속한 것이다!” 이것이 사탄에게 한 하나님의 유일한 ‘약속’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상을 받을 생각을 하니 이는 사악한 생각이 아니냐?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적그리스도의 태생적 본질은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이다. 그 자신도 영문을 모른 채 오로지 복과 면류관을 받는 데만 몰두한다. 진리와 관련되고 하나님과 관련되기만 하면 그의 마음속에 거부감이 들고 화가 미친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정상인은 그의 마음속 느낌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도 죽을 맛이긴 하다. 그토록 야심이 크고 내면이 악질적이며 복을 받으려는 욕망까지 커서 욕심이 불타오른다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 집에서 늘 진리를 교제하니 그가 들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괴롭고 죽을 맛이어야, 또 얼마나 스스로 억지춘향이 되고 가식을 떨어야 버틸 수 있겠느냐? 이는 사악한 힘이 아니겠느냐? 일반인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교회 생활이 따분하게 느껴져 마음속에 반감이 생길 것이다. 그에겐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교제하는 것이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적그리스도는 버틸 수 있겠느냐? 복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도 자신이 억울함을 당하고 싶지 않지만 억지로 버티도록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하나님 집에 숨어 들어가 사탄의 종노릇을 하며 일부러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한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완수하지 못하면 마음이 편치 않고 사탄에게 미안해진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정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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