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6)

지난번 예배 때 어떤 내용을 교제했는지 기억하느냐?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이 생각하는 좋은 행위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교제해 주셨습니다. 그다음 전통문화 가운데 사람의 덕행과 관련된 내용을 교제해 주시면서 덕행에 관한 가르침을 총 21가지 종합해 주셨습니다.) 지난번에는 두 부분을 교제하였다. 먼저 좋은 행위라는 화제에 일부 내용을 보충하여 교제하였고, 그다음 사람의 인품과 품행, 덕행 측면에서 간단하게 일부 내용을 소개했지만, 세부적으로 교제하지는 않았다.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라는 화제에 관해서는 이미 몇 차례나 교제했고, 진리 추구와 관련하여 폭로하고 해부해야 할 좋은 행위에 대해서도 모두 교제한 바 있다. 이 밖에도 지난번에는 사람의 덕행이라는 기본 화제에 관해 얼마간 교제했다. 덕행의 주장들을 구체적으로 폭로하거나 해부하지는 않았지만, 관련된 내용을 21가지나 나열하였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전통문화가 주입한, 인의예지신을 위주로 하는 주장들이었다. 예를 들어, 사람의 덕행과 관련된 충, 의, 예, 그리고 신용이나 남성, 여성, 신하, 자식된 자 등에 대해 제기한 다양한 주장이 있었다. 우리가 나열한 이 21가지 덕행의 주장이 총체적이든 그렇지 않든, 완벽하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그것들은 사상적으로, 또 본질적으로 중국 전통문화가 사람의 덕행에 대해 제기한 각종 요구의 정수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이것들을 나열한 후, 너희는 관련된 내용을 다시 묵상하고 교제해 보았느냐? (예배 때 어느 정도 교제했습니다. 몇몇 덕행의 주장은 진리와 혼동하기 쉬웠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등이 그랬습니다.) 그 밖에도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해라.”, “물을 마실 때는 우물을 판 사람을 기억하라.” 등이 있었다. 자세히 파고든다면, 많은 사람이 처신할 때, 그리고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덕행에 대해 평가할 때 기본적으로 이러한 덕행의 주장을 근거로 한다. 이러한 주장은 모두의 마음속에 작게, 혹은 크게 존재한다. 그 주된 원인은 먼저 사회적 배경과 국가 정부의 교육에 있고, 다음으로는 가정 교육과 가문의 유전에 있다. 어떤 가정에서는 늘 자식들에게 돈을 주워도 갖지 말라고 가르치고, 어떤 가정에서는 “국가의 흥망에는 민초도 책임이 있다.”라고 가르치면서 나라가 있어야 가정도 있으니 나라를 사랑하라고 한다. 또 어떤 가정에서는 자식에게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아야 한다.”라고 가르치면서 처신할 때 근본을 잊지 말라고 한다. 어떤 부모는 덕행에 대한 교육에 명확한 주장이 있고, 어떤 부모는 말하고 싶어도 분명히 말하지 못하지만 솔선수범하여 말과 행동으로 가르치며, 언행을 통해 다음 세대에 영향을 주고 교육한다. 이러한 언행에는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 ‘기꺼이 남을 도우라’거나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 등이 포함될 수 있으며, “진흙에서 자라도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다.”와 같이 약간 고급스러운 말도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들은 그 주제나 정수가 기본적으로 중국 전통문화가 요구하는 덕행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학교에 가면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선의로 남을 돕고, 기꺼이 남을 도우라고,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며, 스승을 존경하고 도리를 중히 여기라고 가르친다. 또 고문이나 고대 영웅의 전기를 다룰 때면 학생들에게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 “국가의 흥망은 민초도 책임이 있다.”, “길에 떨어진 물건은 줍지 않는다.” 등을 실행하라고 가르친다. 이것들은 전부 전통문화에 속한다. 국가에서 제창하고 선전하는 것 또한 이러한 사상이다. 국가 교육이 제창하는 것은 사실 가정 교육이 제창하는 것과 기본적으로 동일해서 전통문화의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하며, 사람의 인품이나 덕행, 처신 등의 요구들은 기본적으로 전통문화의 사상들을 관통하고 있다. 한 측면으로 그것들은 사람에게 표면적으로 예의범절을 지키고 남들에게 동조받을 만한 언행을 갖추라고, 좋은 행위와 태도를 보이는 한편, 내면 깊은 곳의 어두운 면은 숨기라고 요구한다. 또 다른 측면으로 그것들은 처신하고 처세하는 방법 및 친구, 가족, 다양한 사람들과 일을 대하는 태도와 행위, 행동을 덕행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사람들의 동조를 얻고 우러름을 받게 한다. 사람에 대한 전통문화의 요구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것들을 중심으로 한다. 크게는 사회 환경과 배경 아래에서 사람이 선전하는 것부터, 작게는 가정 안에서 사람이 제창하고 지키는 덕행이나 처신 측면의 요구까지, 기본적으로 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국의 전통문화든, 서양을 포함한 다른 나라의 전통문화든, 기본적으로는 다 사람이 이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며, 양심과 이성을 기초로 해낼 수 있는 것들이다. 최소한 몇몇 사람들은 덕행 측면의 요구대로 어느 정도 행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사람의 품행, 천성, 기호의 범위에 제한된다. 못 믿겠다면 사람의 덕행에 대한 이 요구들을 자세히 살펴보아라. 사람의 패괴 성품에 관한 것이 있더냐?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싫어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질에 관한 것이 있더냐? 진리와 관계있는 것이 있더냐? 진리의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있더냐? (없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든 없으며, 전부 진리와 무관하고 아예 상관이 없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얼마간 체험하고 진리를 좀 깨달은 사람들은 이 일을 어느 정도 참되게 인식하고 있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도리만을 이해하고 이론적으로만 통과될 뿐,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다. 어째서겠느냐? 많은 사람이 전통문화의 규례를 하나님의 말씀이나 요구와 비교해야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진리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전부 동의하지만 마음속 깊이 동경하고 인정하고 좋아하고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 인류의 전통문화에서 종합해 낸 것들이다. 그중 일부는 국가에서 제창하고 선전하는 내용인데, 사람은 누구나 그것들을 긍정적인 사물, 또는 진리로 여긴다. 그렇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전통문화에 속하는 것들은 이미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려 단기간 내에 없애고, 뿌리째 뽑아 버릴 수가 없다.

우리가 종합한 이 21가지 덕행에 관한 요구가 중국 전통문화의 일부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사람의 덕행에 대해 중국 전통문화가 제시하는 대표적인 요구 사항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들은 전부 사람에게 긍정적인 사물이자 고상하고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사람이 존엄성 있게 살아가면서 남들의 탄복과 경모를 얻게 하는 덕행이다. 일단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마라.’, ‘기꺼이 남을 도우라.’라는 말처럼 깊이가 얕은 것은 다루지 않고, 사람들이 매우 추앙하면서 고상하다고 생각하는 덕행에 관해 말하도록 하겠다. 예를 들어,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단순하기 그지없는 말로, 개괄하면 근본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런 덕행을 갖추었다면 사람들은 그의 인성 품격이 무척 고상하며 “진흙에서 자라도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우러름 받는 모습이다. 사람이 우러러본다는 것은 곧 마음속으로 이 주장을 정말 인정하고 공감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덕행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탄복해 마지않는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이 주장들에 정말 동조하며, 그런 좋은 행위들을 실행하고자 한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며, 남을 도울 수 있고, 기꺼이 남을 도우며, 속이거나 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속세를 추구하지 않고, 부귀나 누림을 탐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옳다고 인정한다. 혹자는 “누군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도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는다.’라는 덕행을 갖추었다면, 근본을 잊지 않는 좋은 사람, 선량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믿은 후에 아주 빨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복을 얻기도 쉽겠지요.”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남을 평가하고 바라볼 때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로 상대의 본질을 살피지 않고, 덕행에 관한 전통문화의 요구에 근거한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사람이 좋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진리로 생각하기 쉽지 않겠느냐? 사람 눈에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자를 하나님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라고 여기기 쉽지 않겠느냐? 사람은 언제나 사람의 뜻을 하나님께 강요하려 하는데, 이것은 원칙적인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무척 심각한 문제이다. 만약 사람에게 정말 이성이 있다면, 밝히 알지 못하는 일이 있을 때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지,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지껄여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평가하는 원칙과 기준 안에 “이 사람은 근본을 잊지 않았으니 좋은 사람이고, 좋은 사람의 특징을 갖췄다.”라는 말이 있더냐? 하나님이 비슷한 말씀을 한 적이 있더냐?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기한 구체적인 요구 가운데 “너는 가난할 때 도둑질하지 말고, 돈이 많을 때도 음란을 저지르지 말며, 어떤 위협이나 무력이 다가와도 굴복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 있더냐?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이런 요구가 있더냐? (없습니다.) 단연코 없다.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는다.”라는 말은 분명히 사람이 한 것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고 진리에 반한다. 그것은 진리와 결코 같지 않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근본을 잊지 말라는 요구를 한 적이 없다.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예를 들어 보겠다. 네 조상이 농민이었다면, 너는 지금 늘 조상을 생각해야 한다. 네 조상이 과거에 공예가였다면, 지금 너는 그 기술을 갖고 대를 이어 전수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은 후로도 그것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조상의 유훈, 조상의 수공 기술, 조상이 물려 준 어떤 것도 너는 잊어서는 안 된다. 네 조상이 거지였다면, 너는 타구봉(打狗棒)을 보관해야 한다. 조상이 한때 변변치 못한 것들을 먹고살았다면 후대들도 질 나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행복할수록 힘든 과거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고,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상들이 한 일을 너 역시 지켜야 하며 학력과 지위가 생겼다고 해서 조상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국인은 이것을 가장 중요시한다. 중국인의 마음속에는 근본을 잊지 않는 자만이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 정정당당히 처신하는 사람, 존엄성 있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관점이 올바르냐? 하나님의 말씀에 이런 내용이 있더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없다.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사람이 추앙하고 동경하는 덕행의 경지일지라도, 그것이 무척 긍정적으로 보이고 사람의 덕행을 규범화하며, 사람이 그릇된 길을 걷거나 타락하지 않게 하는 것일지라도,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고 모두가 인정하는 긍정적인 사물일지라도, 전통문화의 그 주장과 사상들을 진리나 하나님 말씀과 대조하면 그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또한 그것은 입에 올릴 가치조차 없고, 진리의 근처에조차 가지 못하며, 하나님의 요구나 뜻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이러한 사상과 관점, 덕행에 대한 각종 주장을 제창하는 것은 단지 사람의 사상적 경지보다 높은 것을 제시함으로써 특별해 보이려는 행위, 자신이 얼마나 위대하고 옳은지 표방하여 남들에게 숭배받으려는 행위일 뿐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사람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인류가 제창하고 제기한, 덕행에 대해 요구하는 사상과 출발점,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루려는 목표는 기본적으로 똑같다. 서양인들은 동양인이 강조하는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와 같은 명확한 사상이나 관점이 없고, 중국의 전통문화처럼 분명한 주장이 있지도 않지만, 그들의 전통문화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이런 사상에 불과하다. 우리가 교제하고 다루는 것들은 중국 전통문화 안에 있는 내용이지만, 이러한 덕행의 주장과 요구는 어떤 부분에서는 본질적으로 패괴된 인류의 주도적 사상을 대표한다.

우리는 오늘 전통문화 중에서 사람의 덕행과 관련된 주장이나 요구가 사람에게 과연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주었는지에 관해 중점적으로 교제했다. 이 일을 확실히 파악한 후에는 하나님, 그러니까 창조주가 인류의 도덕적 행위 측면에서 어떤 요구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을 하고 어떤 요구들을 제기했는지 등을 알아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요구를 하고 어떤 말씀을 했는지에 대해 전통문화가 전혀 증거하지 않으며, 이 일에서 진리를 구하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전통문화를 먼저 받아들여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전통문화는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수천 년 동안 사람의 삶을 주도해 왔다. 이는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키는 주된 방식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사람이 알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지음 받은 인류의 인성이나 도덕에 대해 창조주가 과연 어떤 요구를 했는지, 다시 말해, 이러한 측면의 진리 준칙이 도대체 무엇인지 하는 것이다. 또한 전통문화가 제기한 그 요구들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중 과연 어떤 것이 진리여서 사람을 정결케 하고 구원하며 인생의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는지, 어떤 것이 궤변이어서 사람을 오도하고 해하여 잘못된 길로 이끌고 죄 속에서 살게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분별이 생기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당연한 것이며, 사람이 마땅히 실행해야 하는 진리 원칙임을 인정할 수 있다. 전통문화 중 진리를 추구하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영향을 주는 덕행의 주장과 판단 기준을 분별하는 한편, 이것들의 황당하고 그릇된 본질을 간파하고 꿰뚫어 보면 마음속으로 버릴 수 있다. 그러면 덕행과 관련된 의구심과 문제들이 해결된다. 이러한 것들이 해결되면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서 적잖은 방해물과 어려움을 줄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할 때는 사람이 공인하는 덕행 측면의 주장을 진리로 여겨 추구하고 지키기 쉽다. 그러면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데 큰 지장이 생기며, 진리를 추구하여 성품 변화라는 성과를 내는 데도 영향을 받게 된다. 이는 너희가 원치 않는 결과이며, 당연히 하나님 또한 이런 결과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먼저 사람이 숭상하는 덕행 측면의 소위 ‘긍정적인’ 주장과 사상, 관점을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하여 인식하고 분명히 분별함으로써 그 본질을 간파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음속 깊이 그것에 대해 정확한 정의와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면 마음속에서 조금씩 그것들을 파헤치고 도태시키고 버릴 수 있다. 그 후, 이렇게 소위 ‘긍정적인 주장’이 진리와 충돌할 때마다 사람은 가장 먼저 관념 속에서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주장이 아니라 진리를 선택해야 한다. 소위 ‘긍정적인 주장’은 사람의 관점으로, 사실 진리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각도에서 보든 우리가 오늘 이 화제를 교제하는 주요 목적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각종 장애물을 제거하려는 데 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의 준칙에 대해 사상 속에서 생겨나는 불확실한 요소들 말이다. 이러한 불확실 요소는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때 어떤 것이 인류가 제창한 덕행의 주장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이 인류에게 제기한 요구인지, 도대체 어떤 것이 진정한 원칙이고 준칙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이유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인류의 전통문화 중 덕행과 관련된 주장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혼돈 상태 속에서 먼저 접한 것, 모두가 옳다고 공인하는 것을 올바르다고 인정하게 된다. 그 후에는 네가 좋아하는 것, 이를 수 있는 것, 네 입맛과 관념에 맞는 것들을 선택하며, 그것들을 진리로 대하고 지키고 고수한다. 그로 인해, 사람이 행동하고 추구하고 선택하고 고수하는 것들은 진리와 전혀 상관이 없어지며, 진리가 아닌, 사람의 행위와 도덕적 태도에 속하게 된다. 사람은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그것들을 진리로 대하고 고수하는 반면, 사람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이 요구한 진리는 멀리 배척한 채 신경도 쓰지 않는다. 사람이 좋게 보는 그 행위를 얼마나 갖추든,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는 없다. 그것은 사람이 진리를 벗어나 쓸데없는 일을 많이 한 것에 속한다. 이 밖에, 사람에게서 비롯되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진리로 여겨 대하는 것은 이미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전통문화에 속하는 것들을 먼저 접하고 받아들였기에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이 수도 없이 생겨났고, 이는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데 크나큰 어려움과 방해가 된다. 모두가 좋은 덕행을 갖추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거라고,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속에 그런 관점과 태도가 들어 있다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이런 심리를 갖추었다면 사람이 정결케 되고 구원받는 데 얼마나 큰 방해가 되겠느냐? 이런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인해 하나님을 오해하고 거역하고 대적하게 되지 않겠느냐? 이런 결과가 초래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화제를 교제하는 의의에 관해 어느 정도 분명히 이야기한 것 같구나. 대략적으로 이렇다.

이제 중국 전통문화 중 덕행 측면의 각종 주장을 하나씩 해부하고 분석하고 그런 다음 결론을 내리겠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최소한 마음속으로 확증과 답을 얻으며, 이런 주장들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인식과 견해를 갖게 할 것이다. 먼저 첫 번째,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주장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이 성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무엇이더냐? (재물을 주우면 몰래 숨겨서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수준 높은 도덕심과 사회 풍조를 의미합니다.) 이 주장을 실행하기가 쉽겠느냐? (상대적으로 쉬운 편입니다.) 대다수 사람에게는 주운 물건이 무엇이든 자기가 갖지 않기가 쉽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물건이니 네가 가져서는 안 되며, 마땅히 잃어버린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주인을 찾지 못했다면 공공재로 사용해야 한다. 어쨌든 자기가 가져서는 안 된다. 이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내지 않고 남의 이익을 점하지 않는 정신이자 사람의 품행에 대한 요구이다. 사람의 품행에 이런 요구를 한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이런 덕행을 지니는 것이 사회 풍조에 긍정적이고 올바른 영향을 준다. 사람에게 이런 사상을 주입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이의 이익을 탐하지 않게 함으로써 올바른 덕행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모두가 이렇듯 올바른 덕행을 지니고 있다면 사회 풍조는 상대적으로 좋아져 길에 떨어진 물건은 줍지 않고, 밤에는 문도 잠그지 않는 수준에 이를 것이다. 이런 사회 풍조와 사회 치안이 갖춰지는 것은 상대적으로 좋은 일이다. 사람의 삶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 되고, 도둑이나 강도도 별로 없을 것이며, 사람들 사이에 원한으로 서로 죽이고 싸우는 일도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다. 사람이 이런 사회 환경 속에서 살면 안정감을 느끼며, 행복 지수도 높아진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주장은 사회 환경, 생존 환경 속에서 사람에게 제기한 덕행 측면의 요구로서, 사회 풍조와 사람의 생존 환경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이 쉽겠느냐? 사람이 해낼 수 있든 없든, 이런 사상과 덕행을 요구한 사람의 목적은 사람이 이상적으로 동경하는 사회생활 환경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주장은 처신의 준칙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물건을 주웠을 때 사람의 덕행에 대한 요구일 뿐, 사람의 본질과는 큰 관계가 없다. 덕행에 대한 인류의 이런 요구는 이미 수천 년간 존재해 왔다. 물론, 이런 덕행의 요구 덕에 특정 시기, 특정 국가나 사회의 범죄율은 무척 낮을 것이다. 심지어는 밤에 문을 잠그지 않을 수 있고,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으며, 많은 사람이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시의 사회 풍조와 사회 치안 그리고 사람의 생존 환경은 모두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평화로웠을 테지만, 이런 풍조와 사회 환경은 그저 한때, 한 단계, 한 시기에만 유지될 뿐이다. 즉, 사람은 이런 덕행을 특정한 사회 환경 속에서만 행하고 지킬 수 있을 뿐, 생존 환경이 바뀌거나 기존의 사회 풍조가 깨지면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덕행 또한 사회 환경과 사회 풍조, 사회 흐름의 변화에 따라 바뀐다. 큰 붉은 용이 권세를 잡은 후, 사회 안정을 위해 수많은 주장으로 사람들을 미혹한 것을 보아라. 80년대에는 “길가에서 돈 한 푼을 주웠다네. 그 돈을 경찰 아저씨한테 가져다주었다네. 경찰 아저씨는 돈을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나는 기뻐서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했다네.”라는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돈 한 푼을 주운 사소한 일을 노래로 부르고 이야기할 정도이니 이 얼마나 ‘고상한’ 사회적 행위이며 공중도덕이냐! 사실 정말 이러하겠느냐? 사람은 돈 한 푼을 주웠을 때 경찰 아저씨한테 가져다줄 수 있다. 그런데 100위안, 1,000위안을 주우면 경찰 아저씨에게 가져다줄 수 있겠느냐? 장담하기 힘들 것이다. 만약 금은보화나 그보다 더 귀한 물건을 보았다면 욕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흉악한 모습을 드러내 남을 해치고 피해를 줄 것이며,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모함하고, 주동적으로 다른 이의 재물을 빼앗거나 심지어 살인도 할 수 있다. 이때, 수준 높은 전통문화와 전통 덕행은 어디로 갔겠느냐?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도덕 준칙은 어디로 갔겠느냐? 여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겠느냐? 사람이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정신과 덕행을 갖췄든 그렇지 않든, 이런 요구와 주장은 사람의 상상과 이상, 소망 속에서만 해낼 수 있고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정한 사회 배경 속에서 그리고 적절한 환경 속에서 사람이 어느 정도 양심과 이성을 지니면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한때의 좋은 행위일 뿐, 사람으로서 처신하는 준칙은 될 수 없으며, 사람의 생명 또한 될 수 없다. 사람이 생존하는 사회 환경이나 사회 배경이 바뀌면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다는 신조, 사람의 관념 속 이상적인 이 덕행은 사람과 거리가 멀어져 사람의 욕망이나 야심을 충족해 줄 수 없고, 당연히 사람의 악행을 제약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해진다. 그것은 한때의 좋은 행위이며, 상대적으로 고상한 사람의 이상 속 품행이다. 현실이나 이익과 부딪힐 때, 사람의 이상과 충돌할 때, 그 덕행은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지 못하고, 사람의 행위와 사상을 주도할 수도 없다. 그리하여 결국 사람은 이러한 덕행과 어긋나 전통 도덕관념을 깨부순 후, 자신의 이익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덕행은 돈 한 푼을 주웠을 때만 적용되어 경찰 아저씨에게 갖다주게 된다. 1천 위안, 1만 위안, 혹은 금화를 줍는다면 그때도 경찰 아저씨에게 갖다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즉, 이익이 사람의 덕행이 도달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설 때 사람은 그 주장을 실행하지 못하고,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덕행은 사람에게서 구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이 사람이 지닌 인성 본질을 대표할 수 있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단언컨대,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덕행의 요구는 어떤 사람이 인성을 지녔는지를 판단하는 근거가 아니고, 처신의 준칙이 될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의 덕행과 인품이 어떤지 판단하기 위해 그가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사람인지를 본다면, 이 판단이 정확하겠느냐?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사람은 진정으로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운 돈이 얼마 안 되거나 값어치 없는 물건을 주웠다면 내어 줄 수 있겠지만, 값나가는 물건이라면 내어 주기 힘듭니다. 만약 보물이라면 더더욱 내어 주지 않을 것입니다.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말입니다.) 그 말인즉슨, 사람은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을 수 없기에 그것을 인성을 판단하는 준칙으로 삼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럼 만약 사람이 정말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을 수 있다면, 그때는 그것을 준칙으로 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이 그 주장을 실행할 수 있을지라도 준칙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사실 사람이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을 수 있든 없든, 그것은 그의 인성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성의 좋고 나쁨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인성을 판단하는 기준 또한 아닙니다.) 그것은 한 가지 측면의 인식법이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과 인성의 좋고 나쁨은 그다지 큰 관계가 없다. 그럼 정말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사람을 만났다면 너희는 그를 어떻게 보겠느냐? 인성이 있는 사람, 정직한 사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느냐?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을 인성을 갖췄다는 기준으로 볼 수 있느냐? 이 일에 대해서는 교제할 필요가 있다. 누가 말해 보겠느냐?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과 사람이 지닌 인성 본질은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의 본질은 진리로 판단해야 합니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어떤 사람은 많은 돈을 줍고도 그 재물을 갖지 않거나 좋은 일을 수도 없이 하지만, 거기에는 속셈과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공을 세워 상을 받고자 하는 거죠. 명성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좋은 외적 행위가 인성 품격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무엇이 있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돈을 줍고도 갖지 않을 수 있지만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에 맞서는 태도를 보인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판단했을 때, 그는 인성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지금 몇몇 사람들은 이미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으로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즉,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을 인성 유무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관점이 올바르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을 수 있든 없든, 그것은 처신하는 원칙이나 길을 선택하는 것과 큰 관계가 없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먼저,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은 그저 사람의 일시적인 행위를 대표할 뿐, 주운 물건이 값어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옆에서 다른 사람이 보고 있어서 칭찬과 존경을 받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설령 불순물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저 좋은 행위에 불과할 뿐, 사람이 추구하고 처신하는 것과 그다지 큰 관계가 없다. 기껏해야 그런 사람에게 어느 정도 좋은 행위와 고상한 품격이 있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부정적인 사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긍정적인 사물이라고 정의 내릴 수도 없으며,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런 사람을 긍정적인 인물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은 진리와 관계가 없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어째서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라는 겁니까? 그렇게 고상한 행위조차 긍정적인 사물에 속하지 않는다고요? 인성이 없고 부도덕한 사람이라면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는데 그것 또한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니다. 마귀도 한두 가지 좋은 일은 할 수 있다. 그럼 그것을 가리켜 마귀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느냐? 어떤 마왕들은 업적을 세우고 역사에 길이 남기 위해 한두 가지 좋은 일을 한다. 그럼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인성을 지녔는지, 인품이 좋은지를 판단할 때, 오직 그가 행한 좋은 일이나 나쁜 일 한 가지만 보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일관된 모습에 근거하고, 올바른 사상과 관점을 지니고 있는지에 근거해야 정확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무척 귀한 물건을 주워 주인을 찾아 돌려주었다면, 그것은 그가 욕심이 없고 남의 물건을 탐내지 않으며 그 측면의 좋은 덕행을 지녔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것이 그의 처신이나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관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관계가 없다고 하면 인정하지 못하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다지 객관적이지도, 정확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쓸모 있는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의 마음은 무척 초조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물건을 주운 사람 입장에서는 어떤 물건을 줍든, 그것은 자기 것이 아니니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이 물건이든 돈이든, 값어치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그 주인은 네가 아니니 주웠다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마땅한 의무 아니겠느냐?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니겠느냐? 여기에 또 무슨 제창할 만한 가치가 있겠느냐? 좀 호들갑 떠는 것 같지 않으냐?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을 고상한 품행으로 둔갑시키고, 고상한 정신적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은 너무 과장한 것 아니겠느냐? 겨우 그 정도의 좋은 행위를 좋은 사람들 가운데서 언급할 가치가 있겠느냐? 이 행위보다 좋고 고상한 것은 무척 많으니,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이런 좋은 행위를 도둑이나 거지들한테 가져가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제창한다면 적절할 것이고, 어느 정도 효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어떤 국가에서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행위를 대대적으로 선전한다면 이는 그 나라 사람들이 무척 사악하며 도둑과 소매치기가 기승을 부려 어찌할 방도가 없어서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다는 덕행을 제창하고 선전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사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예를 들어, 네가 길을 걷다가 50위안을 주웠는데 단순히 주인에게 돌려주었다고 해 보자. 이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을 만큼 작은 일 아니겠느냐? 이것을 칭찬할 필요가 있겠느냐? 호들갑을 떨며 돈을 주워 주인에게 돌려준 일을 칭찬하면서 그의 덕행이 얼마나 고상하고 귀한지 찬양할 필요가 있겠느냐? 돈을 주우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더없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느냐? 정상적인 이성을 지닌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니겠느냐? 사회 공중도덕을 모르는 어린아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인데, 요란스레 떠벌릴 가치가 있겠느냐? 그것을 사람의 덕행이라는 수준까지 끌어올릴 가치가 있겠느냐? 내가 보기에는 그 수준으로 끌어올릴 가치도, 선전할 가치도 전혀 없다. 그것은 사람이 보인 한때의 좋은 행위로서,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는 아예 관계가 없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은 무척 작은 일로, 정상적인 사람, 인두겁을 쓰고 사람의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사람이 한순간의 열정으로 할 수 있는 일로, 어떤 사상가나 교육가가 가르칠 필요도 없다.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일을 사상가, 교육가는 무척 중요한 덕행의 요구로 삼으니, 이는 작은 일을 두고 요란스레 떠벌리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측면의 주장이라고 해도 근본적으로 인성이나 덕행의 고상한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으로 사람의 인성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은 정확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 이것은 덕행에 대한 전통문화의 요구 중 가장 깊이가 얕은 것이다. 인류 사회는 이런 사상을 제창하며 주입하고 있지만, 사람의 패괴 성품과 온 인류의 사악한 흐름의 성행으로 인해, 사람이 특정 시기에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을 수 있을지라도, 혹은 그런 좋은 덕행을 갖추었을지라도 한 가지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바로 패괴 성품이 사람의 사상과 행위를 끊임없이 주도하는 동시에 사람의 처신과 추구도 주도하고 통제한다는 것이다. 한때의 좋은 덕행은 사람의 추구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사람이 사악한 흐름을 떠받들고 숭상하고 따르는 것 또한 바꿔 놓지 못한다. 그렇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과거에 사람들이 부르던 “길가에서 돈 한 푼을 주웠다네.”라는 노래는 지금 한 곡의 동요로서 추억이 되었다. 사람은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이 최소한의 좋은 행위조차 해내지 못한다. 사람은 좋은 덕행을 제창함으로써 사람들의 추구와 패괴 성품을 바꿔 놓고, 인류의 타락과 갈수록 나빠지는 사회 기풍을 막으려 시도하지만, 결국 그 목표는 이뤄지지 않는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덕행은 그저 사람의 이상 세계에만 존재할 뿐이다.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이상, 아름다운 인간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바꿔 놓았다. 사람의 정신세계에 존재하는 그것은 미래 세계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지만, 사람의 실생활이나 진정한 인성과는 하나도 맞지 않는다. 또 사람이 처신하는 원칙, 가는 길, 추구하는 것, 갖춰야 하는 것, 도달해야 하는 것과도 전혀 맞지 않으며, 정상 인성을 드러내고 나타내는 것이나 사람들과 함께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과도 맞는 부분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덕행을 평가하는 이 기준은 고금을 막론하고 성립하지 않는다. 특히 사람이 제창한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사상과 관점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것은 사람의 처신 방향이나 추구를 바꿀 수 없고, 사람의 타락이나 이기심,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과 늘 사악함을 향해 가는 발전 추세를 바꾸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이 얕디얕은 요구는 이미 풍자적인 의미의 우스갯거리가 되어, 이제 어린아이들조차 “길가에서 돈 한 푼을 주웠다네”라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탐관오리가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그것은 큰 풍자거리가 되었다. 돈 한 푼을 주우면 경찰 아저씨에게 갖다주지만, 100만 위안, 1,000만 위안을 주우면 자기 주머니에 넣는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 현상으로 볼 때 사람이 제기한,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덕행의 요구는 이미 패배를 선포한 것이다. 즉, 사람은 최소한의 좋은 행위조차 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좋은 행위조차 해내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사람이 최소한 해내야 하는, 다른 이의 물건을 주웠을 때 숨겨서 자기가 갖지 않는다는 것조차 사람들은 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사람은 일을 그르치면, 솔직한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게다가 죽어도 인정하지 못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행위조차 해내지 못하는데, 무슨 자격으로 도덕을 논하겠느냐? 양심과 이성조차 원하지 않는 자가 도덕을 논할 자격이 있겠느냐? 공직자, 권력이 있는 자들은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이익을 착취하고 빼앗으며, 본디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점거하고자 머리를 쥐어짜는데, 법으로도 제약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어쩌다가 지금 이 지경까지 이르렀느냐? 이 모든 것은 사람에게 사탄의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사탄의 본성이 지배하고 주도하는 상황에서 갖가지 기만행위와 남을 해치는 행위가 나타났다. 외식하는 자들은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기치를 든 채 비열하고 몰염치한 짓들을 수도 없이 저지른다. 이는 뻔뻔스러운 것 아니겠느냐? 현재 외식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악인이 활개치고 좋은 사람이 억압받는 세상에서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이치는 사람의 패괴 성품을 전혀 제약하지 못하고, 사람의 본성 본질과 사람이 걷는 길을 절대 바꿔 놓지 못한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화제에 대해 이런 이야기들을 교제했는데, 이해가 되느냐?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논조가 패괴된 인류에게 어떤 의의가 있겠느냐? 이 부분의 덕행을 도대체 어떻게 인식해야겠느냐?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것은 사람이 처신하고 가는 길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가는 길을 바꿔 놓지 못합니다.) 그렇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것으로 사람의 인성을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것으로는 사람의 인성을 판단할 수는 없고, 그것을 통해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것은 그저 한순간의 행위일 뿐, 절대 한 사람의 본질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덕행의 주장을 제시한 사람, 소위 사상가나 교육가들은 이상주의자다. 그는 인성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본질을 알지 못하며, 전 인류의 타락 정도나 패괴 정도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가 제시한 덕행의 주장은 매우 공허하고 전혀 실제적이지 않으며, 사람의 실제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이 덕행의 주장은 사람의 본질, 사람이 드러내는 갖가지 패괴 성품, 그리고 패괴 성품의 주도 속에서 사람에게 생겨나는 관념, 관점, 행위와 어떤 관계도 없다. 이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다른 한 가지 측면은,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 부모는 너를 낳아 주고 길러 줬다. 철없던 시절에 너는 부모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요구할 줄만 알았지만, 철이 들고 사리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부모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그들이 마음고생을 하거나 속을 태우지 않게 하고, 덜 고생하고 덜 힘들게 하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한 스스로 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네가 사람이고, 양심과 이성이 있는 한 해낼 수 있고 해내야만 한다. 이는 언급할 만한 가치도 없는 일이다. 그것을 사람의 고귀한 품격이라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작은 일을 두고 떠벌리며 견강부회하는 격이다. 이렇게 정의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정상 인성을 갖췄다는 한 가지 표지이다. 즉, 그 사람의 이성이 정상이며, 정상 인성 안에서 사람이 생각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을 모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더없이 정상적인 일 아니겠느냐?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했는데, 좋은 덕행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 일을 제창할 필요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럼 인성이 고상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인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인성이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는 없다. 어떤 사람에게 인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입장, 그리고 문제 처리 방식이나 방법이 상대적으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다는 의미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것을 보여 주는 한 가지 표지는 무엇이겠느냐? 그 사람에게 양심과 염치가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표지는 바로 그 사람에게 정의감이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며 편식하고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는 등의 나쁜 생활 습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쁜 생활 습관 외에, 그에게는 장점도 있다.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원칙과 최저선이 있고, 염치를 알며, 정의감이 있는 등 긍정적인 면이 비교적 많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면은 적은 편이다. 거기에다 그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며, 더 쉽게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그 사람이 사악한 것을 사랑하고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며 돈과 부자의 삶,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면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과 인생관, 가치관은 모두 부정적이고 어두울 것이며, 그는 염치를 모르고 정의감이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인성이 없을 것이며,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하나님께 구원받는 것도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이는 사람을 판단하는 간단한 원칙이다.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것은 인성을 지녔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다. 사람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려면 그의 인성을 보아야지, 덕행을 보아서는 안 된다. 덕행은 표면적인 부분에 많이 치중되어 있으며, 사회 풍조와 사회 배경,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몇몇 행동과 태도는 부단히 변화하기에 덕행만 봐서는 사람의 인성이 어떤지를 판단하기가 무척 힘들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회 공중도덕을 열심히 지키고, 어디를 가든 규율을 지키며 일거수일투족 자제하고, 정부의 규정을 지킨다고 해 보자. 그는 공공장소에서도 큰 소리로 떠들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침해하지도 않으며, 남을 존중하고 돕고, 연장자를 도와 보호하고 어린이를 보살펴 준다. 이렇게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면, 이것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낸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런 의미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말을 착실히 행하고, 언제나 사람들이 선전하고 제창하는 그 덕행을 고수할 수도 있지만 그의 인성은 과연 어떻겠느냐?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덕행을 갖추었다고 해도 이는 그의 인성이 어떤지를 설명해 주지 못하며, 그 덕행으로 그의 인성이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럼 그의 인성을 어떻게 판단해야겠느냐?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덕행으로 만들어진 포장을 벗겨 버리고, 정상 인성으로 최소한으로 이를 수 있는, 사람 눈에 좋은 행위, 덕행을 제거한 뒤 그가 처신하는 원칙과 최저선, 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등 가장 중요한 모습을 보아야 인성 본질이나 내면에 있는 본성과 관련된 것들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을 바라보면 상대적으로 객관적이고 정확하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덕행의 논조는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이해가 되었느냐? (이해가 됩니다.) 나는 너희가 정말 이해한 것 같지 않아 늘 걱정이 된다. 그저 약간의 이치만 이해했을 뿐 본질적인 것들은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몇 마디 더 하는 것이다. 너희가 이해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면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느낌은 어디에서 오겠느냐? 너희의 표정에 기쁨이 비치면 마음속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 성과를 낼 수 있으면 내가 몇 마디 더 하는 것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덕행의 요구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교제한 것 같다. 그것이 어느 부분에서 진리와 충돌하는지, 왜 진리의 수준까지 오를 수 없는지, 하나님이 사람의 행위와 덕행에 대해 과연 어떤 요구를 했는지 직접적으로 알려 주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것들을 모두 다루기는 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덕행을 제창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 집에서는 도대체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더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은 정상 인성에 갖춰져 있어야 하고 정상 인성으로 해내야 하는 부분이므로 제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은 사람의 덕행과 관련된 태도로, 처신의 원칙이나 추구 관점, 가는 길, 인성의 좋고 나쁨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덕행이 인성을 대표하더냐? (대표하지 않습니다. 어떤 덕행은 정상 인성에 갖춰져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인성을 얘기할 때 진리 추구라는 대전제하에서 인성과 사람에 대한 분별을 얘기한다. 기본적으로 사람의 덕행이 어떤지를 판단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그 사람이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지 판단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관찰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의 인성이 어떤지,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사랑하는지,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떤지를 관찰할 뿐이다. 어떤 사람이 사회에 있을 때는 늘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믿은 후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 않는다면, 제물을 관리할 기회가 생겼을 때 제물을 훔치거나 함부로 사용하거나 심지어 팔아먹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면, 이런 자는 어떤 존재겠느냐? (악인입니다.) 하나님 집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일어서서 지키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더냐? (있습니다.) 그럼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논조로 그의 인성을 판단하는 것이 적절하겠느냐? 적절하지 않다. 혹자는 “그는 예전에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품성이 고귀하고 사람들에게 많은 동조를 받았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 집에 오니 변했을까요?”라고 하는데, 정말 변했겠느냐? 사실 변하지 않았다. 그는 겨우 그 정도의 덕행과 좋은 행위를 지녔을 뿐, 그 외에 그의 인성 본질은 원래부터 그러했으며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어디를 가나 그렇게 처신한다. 그저 예전에는 사람들이 진리로 그의 인성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덕행의 기준으로 판단했기에 변했다고 생각되는 것이지, 실은 변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그는 원래는 그러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는데, 그가 과거에 그러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일들이 임하지 않았고, 그런 배경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 사람들 또한 진리를 깨닫지 못해 그를 분별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판단할 때 한 가지 측면의 좋은 행위만 보고 인성 본질을 보지 않는다면 마지막에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사람을 간파할 수 없을뿐더러 좋은 외적 덕행에 가리고 미혹된다. 사람을 간파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언제나 상대를 잘못 믿고 발탁하여 쓰게 되며, 사람에게 미혹되고 기만당한다. 어떤 리더 일꾼은 사람을 발탁하고 쓸 때 늘 이런 잘못을 저지른다. 좋은 외적 행위나 덕행을 지닌 사람에게 속아 그들에게 중요한 사역을 맡기거나 중요한 물품을 보관하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문제가 생겨 하나님 집에 어느 정도 손해를 끼치게 된다. 문제가 생긴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리더 일꾼이 그 사람의 본성 본질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성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리더 일꾼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사람을 판단하거나 분별하지 못하며, 사람의 본성 본질을 밝히 알지 못하고, 그들이 하나님과 진리, 하나님 집을 과연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째서 모르겠느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리더 일꾼들의 관점이 틀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관념과 상상으로 사람을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 원칙으로 사람의 본질을 본 것이 아니라 사람의 덕행, 외적 행위와 모습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볼 때 원칙이 없었기에 상대를 잘못 믿고 써서 속고 기만당하고 이용당했으며, 그 결과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실을 끼쳤다. 이는 사람을 볼 줄 모르고 사람을 간파하지 못해 생긴 결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려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공과는 바로 사람을 분별하고 바라보는 법이다. 이는 오랜 공과이자 가장 기본적인 공과이다. 사람을 간파하고 확실하게 아는 법을 배우려면 먼저 하나님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사람은 다른 이를 바라보고 판단할 때 어떤 그릇되고 치우친 사상 관점에 통제되고 주도되는지, 그것들이 사람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기준과 충돌하지는 않는지, 어디에서 충돌하는지 알아야 한다. 네가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과 준칙은 하나님의 요구에 근거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느냐? 진리에 의거하느냐? 그렇지 않다면, 너는 언제나 경험과 상상, 나아가 사회에서 제창하는 사회 공중도덕이나 네 눈으로 관찰한 것에 근거할 것이다. 그럼 네가 분별하려는 그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고, 간파할 수도 없다. 네가 그를 믿고 쓴다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하나님의 제물과 교회 사역, 그리고 하나님 선민들의 생명 진입에 해를 끼칠 가능성을 피할 수 없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려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공과는 바로 사람을 분별하는 법이다. 물론, 이는 사람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측면의 진리이기도 하다. 사람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려면 오늘 교제한 화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어떤 것이 사람의 좋은 덕행이고 좋은 인품인지, 어떤 것이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부분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분명히 분별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이 두 가지를 분명히 분별해야 사람의 본질을 확실히 간파하고 알 수 있으며, 마지막에 누가 인성이 있는 사람이고 누가 인성이 없는 사람인지 확신할 수 있다. 분별할 줄 알려면 먼저 무엇을 갖추어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과 이 부분의 진리를 깨달아 사람을 바라볼 때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한다. 이는 진리를 추구할 때 마땅히 실행하고 갖춰야 할 진리 원칙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화제를 교제하는 것은 아주 필요한 일이다.

방금 우리는 “재물을 주어도 갖지 마라.”라는 첫 번째 논조에 관해 교제했다. 이는 분명 한 측면의 덕행이며, 사람의 품격과 일시적인 행위가 가져다주는 좋은 인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사람이 인성을 지녔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두 번째 “기꺼이 남을 도우라.” 역시 마찬가지다. 논조로 보면 이 말 역시 사람들이 환영하고 좋다고 여기는 행위이다. 이런 좋은 행위를 지닌 사람은 당연히 좋은 덕행과 인품을 가진 사람으로 떠받들어진다. 종합하자면, 그들은 기꺼이 남을 돕는 사람이고, 품격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은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 또한 어느 정도는 사회 풍조 속에서 생겨난 좋은 행위이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을 사전적으로 풀이해 보면, 남을 돕는 것을 자신의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는 남을 돕는 것을 ‘책임’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즐거워서 ‘기꺼이’ 행한다. 이러한 점을 보면 남을 돕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마음속에 번뇌와 고통이 많기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돕고 베풀고 도움의 손을 내밀며 힘닿는 데까지 좋은 일을 함으로써 마음속으로 행복과 기쁨, 평안,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며, 그로 인해 삶이 그렇게 공허하거나 고통스러워지지 않고 더 충실해지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덕행을 쌓는 것으로써 영혼과 사상의 경지를 정화시키고 승화시키는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다. 그럼 이것은 어떤 성질의 행위겠느냐? 이러한 면에서 해석하면 기꺼이 남을 돕는 사람이라고 해서 좋은 사람은 아니다. 최소한 그는 도덕적인 각도에서, 혹은 양심이나 인성의 각도에서 출발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거나 사회에서, 가정에서 책임을 다한 것은 아니다. 그저 기쁨과 정신적인 위안, 영혼의 위로, 더 행복한 삶을 위해 그 일을 한 것이다. 이런 덕행이 어떠하냐? 성질을 보았을 때, 이런 덕행은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으려면 최소한 이기적인 부분이 없어야 한다. 그럼 ‘기꺼이 남을 돕는 것’은 어떠하냐? 이 ‘기꺼이’라는 말을 보면 그 행위에 이기적인 불순물과 비열한 속셈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남을 돕는 것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며, 그의 행위는 사욕 없는 봉헌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기쁨을 위해 남을 돕는다. 이는 결코 제창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예를 들어, 한 노인이 거리에서 실수로 넘어졌다고 해 보자. 그 상황을 보고 ‘나는 요즘 계속 기분이 별로였지. 저 노인이 넘어진 것은 나한테 기회야. 이 기회에 기꺼이 남을 도와주면서 기쁨을 얻자!’라고 생각한 너는 다가가서 그 노인을 부축해 주었다. 일어선 노인은 너를 칭찬하며 “착한 아이구나.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네 앞날에 평안과 기쁨이 가득하기를 바라네. 건강하게 오래 살렴!”이라면서 좋은 말을 잔뜩 늘어놓았다. 그의 말에 너는 순식간에 번뇌가 사라지며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남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다음부터는 할 일이 없을 때마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넘어지는 사람을 보면 얼른 다가가 부축해 주었다. 이런 사상에 지배되어 드러낸 좋은 행위를 인류 사회에서는 기꺼이 남을 돕는 훌륭한 전통이라고, 기꺼이 남을 돕는 훌륭한 전통의 고상한 품격을 계승한 거라고 정의한다. 기꺼이 남을 돕는 행위의 이면을 보면,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종종 자기 자신을 도덕적 최고점에 올려 두고, 엄청난 선인으로 여긴다. 사람들이 칭찬하면 할수록 그는 더더욱 남을 돕고 베풀려고 하며, 남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서 자신의 영웅주의 심리, 중생을 계도하겠다는 마음, 남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 거기에서 만족을 느끼는 심리를 충족하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욕구를 가지고 있지 않더냐? 남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됐을 때, 자신이 무척 쓸모 있는 사람 같고, 살아가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아니겠느냐? 사람은 존재감을 드러내야 기쁨을 느낀다. 이는 사람이 생존하는 이치이다. 사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은 어떤 각도에서 보든,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다. 기꺼이 남을 돕는 일은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 무척 쉽다. 네게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사회적 책임을 어느 정도 다한 것이다. 네게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도 아무도 책임을 다하라고 추궁하지 않으며, 사회 여론도 너를 질타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칭찬해 마지않는 좋은 행위들을 행해도 그만, 행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논조로 사람을 결박하여 남을 도우면서 기쁨을 느끼는 법을 배우게 할 필요는 없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 자체는 일시적인 좋은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하든, 아니면 공덕심이라는 각도에서 이 일을 대하든 마지막에 어떤 결과가 발생하겠느냐? 한 번 좋은 사람이 되어 레이펑(雷鋒) 정신을 떨치는 데 만족하며, 그것을 기쁨과 위안으로 삼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사상적 경지를 끌어올리는 것, 오직 그것뿐이다. 본질이 이러하다. 너희는 여태까지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논조를 어떻게 인식했느냐? (여태까지는 사람 내면의 그 이기적이고 비열한 속셈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책임지는 일이 있다면 너는 어깨가 무거울 것이고, 그 일을 행할 때 어려움이 있다면 고통과 희생을 겪으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래도 해낼 수 있지만, 그 일을 할 때 그렇게 기쁘지는 않을 것이다. 네가 대가를 치르며 일을 마무리 지었다고 해도 마지막 결과 역시 네게 어떤 기쁨이나 위안을 가져다주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네 책임이자 네가 해야 할 일이기에 너는 해낼 수 있다. 이것과 ‘기꺼이 남을 돕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인성이 있어 보이느냐? (사람으로서의 책임과 본분을 다하는 것이 더 인성이 있어 보입니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 자체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특정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사회 여론, 사회 공중도덕, 나아가 어떤 국가의 법률이 사람의 덕행과 사회적 책임에 제기한 요구일 뿐이며, 그것을 통해 덕행이 있는지, 인성이 어떤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꺼이 남을 돕는 것은 인류 사회가 사람의 사상적 경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제기한,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는 논조에 불과하다. 이 논조는 사람이 좋은 행위를 하게 할 뿐이며, 그 좋은 행위의 판단 기준은 사회 공중도덕과 사회 여론, 나아가 법률이다. 예를 들어, 공공장소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를 보았을 때 그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 도와줘야 할 사람이 너라고 해 보자. 그런데 네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너를 어떻게 보겠느냐? 교양이 없다고 욕할 것이다. 이것이 사회 여론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사회 공중도덕이란 무엇이겠느냐? 이 사회가 선전하고 제창하는, 진취적인 것이자 풍조이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에는 많은 것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사람은 마땅히 약한 자들을 도와주어야 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도움의 손을 내밀어야지,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이러한 덕행을 지녀야 한다. 이를 사회 공중도덕이라고 한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척 수수방관하며 강 건너 불 보듯 한다면, 이것은 사회 공중도덕이 없는 것이다. 그럼 법적으로는 사람의 덕행 측면에 어떤 요구를 하겠느냐? 여기에는 특수한 경우가 있다. 중국의 법률은 사람의 사회적 책임이나 사회 공중도덕에 대한 명문화된 규정이 없다. 그저 모두가 가정 교육이나 학교 교육, 사회에서 빈번하게 들은 것들에 영향을 받아 얼마간 알게 되었을 뿐이다. 반면, 일부 서양 국가는 법적으로 이 부분에 명문화된 규정이 있다. 예를 들어, 길을 걷다가 넘어진 사람을 보았을 경우, 최소한 다가가서 “Are you OK? Do you need help?(괜찮으세요? 도움이 필요하신가요?)”라고 물어야 한다. 만약 그 사람이 “I’m OK. Thank you.(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면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 즉,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I need help, please.(저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탁합니다!)”라고 말한다면 너는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 돕지 않는다면 법적인 책임을 물게 된다. 이는 몇몇 국가가 사람의 덕행에 대해 법적으로 명문화된 규정을 통해 제기한 특수한 요구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회 여론, 사회 공중도덕, 심지어 법률이 사람의 덕행에 제기한 요구들은 사람의 행위에 국한되는데, 그 행위의 기본 준칙은 바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다. 겉으로 볼 때, 이 덕행의 기준이 판단하는 것은 사람의 행위, 즉 사람이 사회적인 책임을 다했는가 하는 것이다. 한편 본질을 볼 때, 그것이 판단하는 것은 너라는 사람의 인품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사회 여론이든 사회 공중도덕이든, 혹은 법률이든 그것이 판단하는 것, 혹은 요구하는 것은 사람이 행하는 일, 사람의 행위에 국한된다. 행위를 통해 그 사람의 덕행과 인품을 판단하는 것, 바로 이것이 범위이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은 이런 성질을 갖는다.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측면에서 서양은 법적 규정을 통해 요구하고, 중국은 전통문화로 교육하고 물들인다. 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실 그 성질은 동일하다. 즉, 다 같은 논조로 사람의 행위와 덕행을 제약하고 규범화한다. 하지만 서양의 법률이든 동양의 전통문화든, 그것은 그저 사람의 덕행과 행위에 어느 정도 요구를 하고 규범을 제기한 것에 불과하며, 그 준칙은 사람의 덕행과 행위를 규범화하는 데 그친다. 그것들 중 사람의 인성에 관한 것이 있더냐? 사람이 마땅히 어떤 행위를 갖춰야 한다고만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을 사람의 인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겠느냐? (불가능합니다.)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몇몇 악인들도 기꺼이 남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속셈과 목적이 있다. 마귀가 좋은 일을 할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말해 보아라. 기꺼이 남을 돕는 사람들이 모두 정의감이 있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겠느냐? 중국의 그 의협심 있는 사람들,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사람들, 나아가 수시로 장애인이나 사회의 취약 계층 등을 도와주는 소위 ‘기꺼이 남을 돕는’ 인사들이 모두 인성을 지닌 사람들이겠느냐? 모두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고 정의감이 있는 사람들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인품이 상대적으로 좋은 사람에 불과하다. 기꺼이 남을 돕는 정신에 지배되어 자신이 기쁨과 위안을 얻고 충분히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일들을 수도 없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런 행위가 있다고 해서 인성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의 신앙이 무엇인지, 그들의 정신세계 추구가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고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그럼 ‘기꺼이 남을 돕는’ 그들의 좋은 덕행을 봤을 때, 그들을 인성과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소위 ‘기꺼이 남을 돕는’ 재단이나 복지원 등은 장애인이나 사회 취약 계층을 돕지만, 기껏해야 사회적인 책임을 다할 뿐이다. 더 좋은 사회 여론을 조성하고 자신들의 지명도를 높이며 기꺼이 남을 돕는 심리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런 일을 하니, ‘그들은 인성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주장은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이 기꺼이 남을 도울지는 몰라도, 도움을 받는 상대가 정말 꼭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겠느냐? 기꺼이 남을 돕는 일이 그 자체로 정의로운 일이겠느냐?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크고 작은 일들을 많이 보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어떤 것은 순수하게 ‘기꺼이 남을 돕는’ 일이다. 하지만 기꺼이 남을 돕는 일 중 많은 것들이 내면에 밝힐 수 없는 비밀과 사회의 어두운 면을 숨기고 있다. 어찌 됐든 ‘기꺼이 남을 돕는 것’에는 속셈과 목적이 들어 있다. 그것은 이름을 알리고 남들 앞에 드러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사회의 공중도덕을 지키고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한 것일 수도 있으며, 더 좋은 사회적 평판을 얻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든 그것은 사람의 표면적인 행위일 뿐이며, 기껏해야 좋은 덕행으로, 하나님이 요구한 정상 인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기꺼이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무척 평범하고 야심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물일 수도 있으며, 마음씨가 꽤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씨가 상대적으로 악독한 사람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든 다 될 수 있고, 누구든 한순간은 기꺼이 남을 돕는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덕행의 논조는 절대 인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덕행의 논조는 사실 인성의 본질을 대표하지 않으며, 사람의 본성 본질과 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통해 인성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인성을 어떻게 판단해야 적절하겠느냐? 적어도 그가 남을 돕고 책임을 다할 때 자신이 행복한지에 근거하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양심과 이성에 근거하여 자신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남을 돕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또는 자신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지 등을 고려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남을 도우며 상대가 고통받지 않게 해 준다면, 그러니까 어떤 사심이나 목적 없이 순수하게 남을 돕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인성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남을 돕는 목적이 스스로가 기쁨이나 명성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기적이고 비열한 성질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진실로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람들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자는 오직 자신의 기분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남을 도우며, 보답을 바라지 않고, 다른 속셈이나 목적도 없다. 그렇게 할 때 어려움이 있다거나 사람들의 판단을 마주한다고 해도, 심지어는 위험에 맞닥뜨린다고 해도 그는 그것이 사람의 본분, 책임이라고 인식한다. 만약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께도 죄스러운 일이며 평생의 한이 될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최선을 다한 후 하늘의 뜻에 순종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든, 고마워하든 우러러보든 상관없이 마음을 다해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으면, 그는 만족한다. 이렇게 일을 처리하는 자가 바로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며, 이런 일 처리가 바로 품격이나 덕행이라는 범위의 행위에 그치지 않고 인성을 갖춘 모습이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은 한 가지 측면의 행위일 뿐이며, 어떨 때는 특수 상황 속에서 보이는 행위에 불과하다. 이런 일시적인 행위는 기분이나 정서, 사회 환경, 당시 배경에 따라서, 또 그 일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나 피해가 되는지에 따라서 좌우된다. 인성이 있는 사람은 남을 도울 때 이러한 것들을 보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의 판단 기준은 더 긍정적이고 옳으며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부합한다. 심지어 때로는 도덕적인 기준과 모순되거나 충돌하는데도 입장을 지키며 행하기도 한다. 도덕적인 준칙과 사상 관점은 일시적인 행위를 제약할 뿐이다. 그 행위의 좋고 나쁨은 사람의 기분, 정서, 선악, 또는 한때의 선하고 악한 마음에 따라 변화하며, 당연히 사회 풍조나 사회 환경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여기에는 불순물이 무척 많다. 그것들은 전부 표면적인 것으로, 과연 인성이 있는지를 판가름할 수 없게 한다. 하지만 사람의 인성 본질, 사람의 추구, 인생관과 가치관, 걸어가는 길, 처신하고 일 처리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근거로 인성이 있는지를 판단하면 상대적으로 훨씬 정확하고 실제적이다. 말해 보아라. 인성과 덕행을 판단할 때 근거가 되는 것 중 어떤 것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덕행을 판단하는 기준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아니면 인성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어떤 기준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사실, 인성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진리에 부합한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것들이 기준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말 한마디에 변할 수 있고 사람의 거래와 이익, 기호, 추구, 정서, 사악한 사상, 패괴 성품 등의 불순물이 무척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류와 불순물이 너무 많아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을 판단하는 준칙이 될 수 없다. 그 안에는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갖가지 것들이 있으며, 사람의 사탄 패괴 성품으로 인해 생겨난 수많은 추가 조건들도 있기에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덕행 측면의 그 준칙들이 사람 눈에 도달하기 쉬워 보이든 어려워 보이든, 수준이 높아 보이든 낮아 보이든, 아니면 평범해 보이든 상관없이 그것들은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고 규범화하는 논조에 불과하며, 사람의 덕행과 인품의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요구한, 진리로 사람의 인성을 판단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사람이 인성 안에 최소한으로 갖추고 도달해야 할 기준조차 없고, 거기에 도달하지도 못한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할 때 덕행 측면의 모습에 치중하는 것은 전적으로 전통문화의 요구에 근거하여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판단할 때 덕행과 관련된 특정 모습 하나만을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의 인성 본질을 중요시한다. 인성 본질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겠느냐? 사람의 기호, 일을 바라보는 관점, 인생관, 가치관이 포함되며,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정의감이 있는지,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지,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순종할 수 있는지,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것들에 근거하여 사람이 지닌 인성 본질을 보아야 정확하다.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논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교제한 것 같다. 지금까지 덕행에 대한 요구 두 가지를 교제하였다. 이제 덕행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덕행과 하나님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어떻게 다른지, 그 기본적인 분별의 원칙을 모두 알겠느냐? (네.)

방금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마라.’, ‘기꺼이 남을 도우라.’라는 덕행에 관한 전통문화의 요구 두 가지를 교제하였다. 이 두 가지 측면의 교제를 통해 뭔가 깨달은 바가 있느냐? (사람의 덕행과 인성 본질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이러한 덕행을 지녀 봤자 도덕 품격 면에서 어느 정도 좋은 행위와 태도를 보이게 될 뿐, 인성이 있고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덕행이 있다고 해서 꼭 인성을 갖춘 사람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사실이 그러하다. 사람은 모두 사회의 사악한 흐름을 따라가면서 조금씩 양심과 이성을 잃었기에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가 몇 안 된다. 지난날, 길가에서 돈 한 푼을 주워 경찰 아저씨에게 갖다주던 사람들이 지금 모두 좋은 사람이 되었겠느냐?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한때 영웅으로 칭송받던 사람들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였더냐? 머릿속에 떠오르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한때 기꺼이 남을 도우며, 시상대에서 붉은 꽃을 가슴에 달고 도덕적인 모범, 엄청난 선인(善人)으로 추앙받던 사람들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느냐? 대부분이 좋은 작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름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몇 가지 좋은 일을 했을 뿐, 사실 이면의 행동과 삶, 인품은 대부분이 별로였고, 아첨하는 것 외에는 어떤 능력도 없었다. 가슴에서 붉은 꽃을 떼어 내고 사회의 도덕적인 모범이라는 수식어를 걷어 내면, 그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말해 보아라.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사회가 그에게 ‘도덕적인 모범’이라는 면류관을 씌우고 해친 것 아니겠느냐? 그는 자신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 채 높이 추앙받아 자신이 무척 위대하다고, 평범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 상태로 삶이 엉망이 되며, 심지어 어떤 이는 마지막에 술에 절거나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하기까지 한다. 이런 사람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은 늘 느낌을 따르고, 영웅이나 모범이 되고자 하며, 이름을 크게 알리고 도덕적 정점에 서려고 한다. 그들은 늘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는데, 먹고사는 현실의 일들을 그들은 귀찮고 고통스럽게 여긴다. 그러한 고통을 직면할 때, 그들은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어떻게 올바른 인생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이는 자극을 좇으며 마약에 취하고, 어떤 이는 공허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며, 어떤 이는 자살은 하지 않더라도 결국 우울증으로 목숨을 잃는다. 이런 사례가 많지 않더냐? (많습니다.) 이는 전통문화의 해악이다. 전통문화는 사람이 인성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사람이 걸어야 할 바른길로 인도하지 못한다. 이 두 가지를 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사람을 그릇된 길, 허망한 상상 속 세상으로 이끈다. 이는 사람을 해치는 것, 그것도 심각하게 해치는 것이다. 혹자는 “전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희는 지금 무척 잘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하는데, 지금 너희가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가 있기 때문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고 지켜 주었기에 운 좋게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여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예배하고 교제하고 본분을 이행하며 정상인의 삶을 살고 정상적인 이성으로 일상생활 속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희의 사상 깊은 곳에 여전히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마라.’, ‘기꺼이 남을 도우라.’ 등과 같은 사상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와 동시에, 사람에게서 비롯된 사상과 도덕 준칙들 역시 너희를 옭아매고 있다. 어째서 너희를 옭아매고 있다고 하겠느냐? 너희가 선택한 인생길, 일하고 처신하는 원칙과 방향,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원칙, 방식, 준칙 등 모든 것이 정도는 달라도 여전히 이런 사상과 도덕 준칙의 영향을 받으며, 심지어는 그것에 결박되고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는 너희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와 준칙이 되지 못했다. 지금 너희는 그저 올바른 인생의 방향을 선택했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걷겠다는 바람과 이상, 기대를 갖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실, 너희 중 더 많은 사람이 진리 추구의 길,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비해 준 올바른 길에 아예 들어서지도 못하고 있다. 혹자는 “그 길에 들어서지 못했다면, 저희는 지금 왜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입니까?”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선택과 협력, 양심, 다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 너는 하나님의 요구에 협력하여 열심히 공을 들이지만, 공을 들인다는 것이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섰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너희가 여전히 전통문화가 주입한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 교제하고 폭로한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마라.’, ‘기꺼이 남을 도우라.’라는 두 가지 논조의 본질을 너희는 지금 무척 잘 이해하고 있지만, 며칠 후에는 마음이 바뀌어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는 게 뭐가 안 좋다는 거지? 나는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사람이 좋아. 그런 사람은 적어도 욕심이 없잖아. 기꺼이 남을 돕는 건 또 뭐가 나빠? 적어도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군가 손을 내밀어 도와주잖아. 그건 무척 좋은 거라고. 사람에게 필요한 거란 말이야! 게다가 남을 돕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든 무척 좋은 일이야. 그건 긍정적인 사물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의무니까 비판해서는 안 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보아라. 깨달음을 얻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잠 한숨 자고 나니 변해서 처음으로 돌아갔다. 다시 전통문화에 얽매이는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즉, 사상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은 시시때때로 네 사상 관점에 영향을 주는 동시에 네가 선택한 길에도 영향을 준다. 또 그것은 네게 영향을 주는 동시에 불가피하게 계속 네 발목을 잡아 네 뜻대로 올바른 인생길, 진리를 추구하는 길,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인생길에 들어서지 못하게 한다. 네가 마음속으로 그 길에 무척 들어서고 싶어 하고 그것을 몹시 갈망하며, 그 일 때문에 초조해서 매일 계획을 세우고 생각하며 다짐한다고 해도, 또 매일 그 일을 두고 기도한다고 해도 현실은 여의찮다. 전통문화가 네 내면 깊은 곳에 너무 깊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전통문화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 깊이 뿌리내렸다고 하시지만, 그건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겨우 20대입니다. 70, 80대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 너무 깊이 뿌리내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는데, 어째서 너무 깊이 뿌리내렸다고 하겠느냐? 말해 보아라. 네가 사물을 구별하고 기억하기 시작한 이래로, 부모에게 교육받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너는 상대적으로 고상한 사람이 되기를 꿈꾸지 않았느냐?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의협심을 다루는 영화나 소설을 보기를 좋아하는데, 이야기 속 피해자 캐릭터를 무척 동정하고 포악한 자, 가해자, 부정적인 캐릭터를 증오한다. 너는 이런 배경 속에서 자라면서 너도 모르게 일반 대중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것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왜 그것들을 받아들였겠느냐? 사람은 천성적으로 진리가 없고,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너에게는 그런 본능이 없다. 사람은 좋은 것, 올바른 것,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본능을 타고났다. 이 긍정적이고 올바른 것들은 네가 좋은 방향으로 행동하고 싶게 하고 좋은 사람이나 영웅, 위인이 되고 싶게 한다. 네가 사회 여론이나 공중도덕과 관련된 논조를 접할 때, 이러한 것들은 네 마음속에서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도덕적인 면에 관한 전통문화의 논조는 네 마음속에 들어가 네 내면세계에 진입한 후 네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네 삶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그때, 너는 분별하고 저항하고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네게 필요하다고 마음속 깊이 느낀다. 그렇기에 네 첫 번째 행동은 그 논조에 영합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 논조들은 사람의 입맛과 관념, 정신세계의 필요에 너무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는 그 논조들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 사회의 영향과 주입 속에서, 거기에 네 상상까지 더해져 차츰차츰 마음속 깊이 그것들을 긍정적인 사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갖가지 배경과 조건 속에서 열심히 그 논조들과 인성 본능이 좋아하고 옳다고 여기는 것들을 좇게 된다. 그것들은 네 내면에서 점점 형태를 갖추고 뿌리를 내리는 한편, 네 인생관과 추구 목표를 주도하여 사람과 사물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전통문화의 이러한 논조가 사람의 내면에서 형태를 갖출 때,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가장 기본적인 소재가 생겨난다. 마치 자신만의 이유와 근거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람의 패괴 성품과 패괴 본질을 폭로할 때, 정면으로 호되게 사람을 형벌하고 심판할 때, 사람은 각종 관념을 품으면서 마음속으로 ‘사람들은 늘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고 말해. 그런데 하나님은 왜 저렇게 말씀하시는 거지? 저분이 정말 하나님이실까? 하나님이라면 저렇게 말씀하시지 않을 거야. 하나님이라면 지고지상의 자리에 서서 온화한 어조, 중생을 계도하는 어조, 보살의 어조로 말씀하시겠지. 그런 분이 하나님이셔. 얼마나 온화하고 위대한 모습이냐고!’라고 생각한다. 이 일련의 생각과 관점, 관념이 네 마음속에서 계속 밖으로 튀어나오면, 또 점점 더 자주 튀어나오면, 결국 너는 참지 못하고 부지중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일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네 관념과 상상에 의해 망쳐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나이가 많든 적든 전통문화의 교육을 받고 성년의 사상을 갖고 있는 한, 네 마음속에는 이미 전통문화, 도덕과 관련된 것들이 가득할 것이다. 그것들은 네 내면에서 점점 깊게 뿌리내려 이미 너를 주도하고 있으며, 너는 그것들에 기댄 채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또 네 생명과 본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통문화와 도덕에 점령되어 있다. 예를 들어, 너는 5~6세 때부터 ‘기꺼이 남을 도우라.’,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마라.’라는 법을 배웠고,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아 네 행위는 완전히 이것들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지금 중년의 나이가 된 너는 그것들로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이는 네가 하나님이 요구한 기준에서 매우 멀어졌음을 의미한다.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그 덕행의 논조를 받아들였을 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요구에서 점점 더 멀어졌고, 네 인성의 기준과 하나님이 요구한 인성의 기준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졌다. 그렇게 너는 하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냐? 내가 한 이런 말들을 천천히 묵상해 보도록 하여라.

이제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의 주장에 관해 교제하도록 하겠다. 이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요구하고, 남에게는 관대하게 대해 큰 너그러움과 넓은 도량을 보여 주라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인성의 자연스러운 표출이겠느냐? 사람이 이 말대로 행동하려면 얼마나 많은 억울함을 참아야겠느냐! 욕심도 바람도 없어야 하며, 또한 적게 누리면서 많이 고통받고 대가를 치르고 일해야 하는데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불평하고 원망하거나 제대로 하지 못해도 지나치게 요구해서는 안 되며, 그럭저럭 괜찮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람은 이것이 고상한 덕행의 특징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나는 왜 그리도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들까? 이는 가식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인성의 자연스러운 표출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것인데, 이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볼 때는 다 알 수 있다. “저 사람은 교만해!”, “저 사람은 못됐어.”, “저 사람은 이기적이야!”, “저 사람은 대충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해!”, “저 사람은 너무 게을러!”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자신을 대할 때는 어떻겠느냐? ‘조금 게을러도 괜찮아. 나는 자질이 좋으니까 게으르다 해도 다른 사람들보다 일을 잘한다고!’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단점을 꼬치꼬치 따지고 트집을 잡지만, 자신을 대할 때는 관용을 베풀 수 있으면 베풀고 대충 넘어갈 수 있으면 넘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성의 자연스러운 표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사람에게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고 요구한다면 이것 때문에 얼마나 괴롭겠느냐? 사람이 견딜 수 있겠느냐? 몇 명이나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누구도 해낼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사람의 본성은 이기적이며, 모두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말을 신봉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인 본성을 갖고 있고, 이기적인 존재로,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사탄 철학을 신봉하는 데 열을 올린다. 또 사람은 스스로를 위해 생각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이기적으로 굴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신봉한다. 만약 사람에게 이기적으로 굴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요구를 하고 무슨 일이 임하든 손해를 볼지언정 남에게 불이익을 주지 말라고, 다른 사람이 부당하게 네 이익을 취할 때 기쁘게 “제 몫을 취하셨군요. 저는 당신과 따지지 않을 겁니다. 저라는 사람은 속이 넓어 당신을 뭐라 꾸짖지도 않을 거고, 보복도 하지 않을 거예요. 충분히 이득을 취하지 못하셨다면 더 가져가셔도 됩니다.”라고 말하라고 요구한다면 이것이 현실적이겠느냐? 몇 명이나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패괴된 인류의 정상적인 모습이겠느냐? 단언컨대, 이 현상은 좀 비정상적이다. 어째서 비정상적이라고 하겠느냐? 패괴 성품이 있는 사람, 특히 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람은 모두 자신을 위해 이익을 좇고 다투지, 절대 다른 이를 생각해 주면서 만족을 느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현상이 비정상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에 관한 말은 사회 도덕 학자가 인성의 배경을 알지 못한 상황에서 사람에게 제시한, 사실과 인성에 부합하지 않는 요구임이 분명하다. 이는 쥐한테 구멍을 파지 말라고 하고, 고양이한테 쥐를 잡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런 요구가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법칙에 어긋납니다.) 이런 요구는 분명 현실에 부합하지 않으며 무척 공허하다. 이 요구를 제기한 사람은 그대로 행할 수 있겠느냐? (행할 수 없습니다.) 자신도 행할 수 없으면서 남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슨 문제겠느냐? 좀 무책임한 것 아니겠느냐? 적어도 무책임하고 헛소리를 한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는 어떤 성질이겠느냐? (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는 외식하는 것이다. 분명 스스로도 행할 수 없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관대하고 마음이 넓은지, 도덕적으로 얼마나 고상한지를 표방하니, 이것이 바로 외식하는 것 아니겠느냐? 어떻게 말하든, 이런 말은 아주 공허하고 거짓의 의미가 들어가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외식하는 말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말과 유사한 것으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과시하는 것으로, 자신은 덕행이 고상한 사람이라고 표방하거나 사람들에게 덕행이 고상한 모범, 본보기로 추종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 인류 가운데서 어떤 부류가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교사나 의사가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숭배하는 공자, 맹자, 노자 등 소위 성인이나 명인, 위인들이 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제기한 그 주장이 아무리 황당해도, 그 요구의 성립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것 또한 사람의 품격과 행위 측면의 요구에 불과하다. 적어도 사람은 그 요구를 실행하고 싶어 하지 않고, 요구에 이르기가 쉽지도 않다. 그것은 사람이 정상 인성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말하든, 그것은 전통문화가 사람의 덕행에 관해 제창한 하나의 기준이자 요구이다. 그것이 무척 공허할지라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할지라도, 그 요구는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나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주장과 같이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속셈과 동기를 갖고 있든, 정말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든 없든, 결국 이 요구를 제기한 사람이 자신을 도덕적인 정점에 올려놓는다는 것에 근거하면 그 사람은 너무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비정상적인 이성을 지닌 것 아니겠느냐? 네가 그에게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를 행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그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겠지만, 정말로 실행하라고 요구하면 해내지 못한다. 어째서 해내지 못하겠느냐? 그에게는 교만한 성품, 사탄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와 지위나 권세, 명리를 놓고 다툴 때 그에게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을 지키라고 한 다음 그가 실행하는지 보아라. 그는 절대 해내지 못하고, 게다가 너를 외면할 것이다. 네가 “당신도 실행할 수 없는 말을 왜 했습니까? 왜 다른 사람에게 그런 요구를 했죠? 당신은 외식하는 사람 아닙니까?”라고 물어보면 그가 승복하겠느냐? 네가 폭로해도 그는 승복하지 않는다. 어떻게 폭로해도 승복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가 좋은 작자가 아님을 의미한다. 실행할 수 없으면서 큰소리치는 자는 그야말로 사기꾼이고, 외식하는 위선자이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것은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나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말처럼 사람의 덕행에 대한 전통문화의 요구 중 하나다. 마찬가지로 이 측면의 덕행은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지, 실행 가능한지 등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것 또한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를 가늠하는 기준이나 준칙이 될 수 없다. 어쩌면 네가 정말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를 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에게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행동거지를 매우 조심하며, 무슨 일을 하든 남을 먼저 고려하고 생각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굴지도 않아 매우 공평무사해 보일지도 모른다. 또한, 네게는 사회적인 책임감과 도덕심이 있어 네 주변 사람들, 너와 함께하고 왕래하는 사람들 눈에 고상한 인격과 인품을 지닌 것처럼 비칠지도 모른다. 네 행위는 한 번도 어떤 질책이나 비난을 받을 일이 없으며, 언제나 큰 칭찬, 나아가 감탄을 받을지도 모른다. 사람들 눈에 비치는 너는 진정으로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네 마음 깊은 곳에서 생각하는 것이 이러한 겉모습, 겉으로 보이는 행위와 일치하겠느냐?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네가 그렇게 행동하는 데는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 있겠느냐? 분명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그 목적이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것이고 어둡고 사악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럼 그 목적이 어째서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것이고 사악한 것이겠느냐? 사람의 인성이 패괴 성품에 통제되고 조종되기 때문이다. 인성의 모든 생각, 그것은 사람이 말하든 말하지 않든, 드러내든 드러내지 않든, 부정할 여지 없이 패괴 성품에 주도되고 통제되고 조종당한다. 이로 인해 사람의 속셈과 목적은 음험하고 사악하다. 사람이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를 행할 수 있든 없든, 이 측면의 덕행을 겉으로 제대로 보여 주든 그렇지 않든, 그의 인성은 이러한 덕행에 영향을 받거나 통제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럼 진정으로 인성을 조종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이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에 가려진 인성 본질, 그것이 바로 사람의 본모습이다. 사람의 본모습은 곧 사람의 인성 본질이다. 사람의 인성 본질이란 과연 무엇이겠느냐? 주로 사람의 기호, 추구, 인생관, 가치관, 그리고 진리를 대하거나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등을 가리킨다. 이러한 것들만이 사람의 인성 본질을 대표할 수 있다. 단언컨대, 무릇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을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위욕이 매우 강하다. 그들은 패괴 성품에 지배되어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 마음속의 지위와 명망, 사회적인 지명도를 추구한다. 이러한 것들은 그들의 지위욕과 관계가 있으며, 그들이 좋은 덕행에 가려진 가운데서 추구하는 것들이다. 그러면 그들이 추구하는 이러한 것들은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전부 그들의 패괴 성품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며, 패괴 성품에 지배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어쨌든, 누군가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을 행할 수 있든 없든, 제대로 해낼 수 있든 없든, 그의 인성 본질을 조금도 바꿔 놓을 수 없다. 이 말의 숨은 뜻은 바로 그것이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을 조금도 바꿔 놓을 수 없으며,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을 좌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일수록 위장과 가식에 능한 사람이고, 좋아 보이는 말과 행동으로 남을 미혹하는 사람이며, 본성이 간사하고 사악한 사람이다. 또 이런 사람일수록 지위와 권세를 깊이 사랑하고 추구한다.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덕행이 아무리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옳아도, 아무리 보기 좋아도,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차마 밝힐 수 없는 추구와 본성 본질, 심지어 야심은 언제든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들의 덕행이 아무리 훌륭해도 인성 본질을 가릴 수는 없고, 그들의 야심과 욕망을 가릴 수도 없으며,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추악한 본성 본질을 가릴 수도 없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말은 더없이 황당하다. 또한, 야심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말과 행위로 차마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야심과 욕망을 숨기려 시도한다는 사실이 더욱 드러난다. 교회의 적그리스도나 악인들에게 대입해 보아도 좋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신의 지위와 권세를 공고히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더 높은 명성을 얻기 위해 본분 이행 과정에서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를 수 있다. 심지어는 직장과 가정을 버리고, 모든 것을 팔아치운 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도 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치른 대가와 겪은 고난 중 일부는 평범한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것들이다. 그들은 와신상담의 정신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증거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 않으며,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추구 목표는 지위와 권세, 그리고 하나님이 주는 상이다. 그들이 행한 것 중 진리와 관련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든, 마지막 결말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과연 그들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들이 표면적으로 살아 낸 좋은 행위로 그들의 결말을 정하겠느냐?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이러한 행위와 모습으로 다른 이를 바라보고 판단하는데, 그러면 상대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해 속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말을 실행했다고 해서 절대 그들의 덕행을 기억하거나 칭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야심과 그들이 지위를 추구하면서 걸어간 길 때문에 그들을 정죄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마땅히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사람을 판단하는 준칙을 분별해야 한다. 이 황당한 판단 기준을 철저히 부정하고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에 근거하여 사람을 분별해야 한다. 사람이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는지, 어떤 길을 선택하고 걸어가는지 등에 근거하여 상대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인성을 지녔는지 정의 내려야 한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면 오류가 생기거나 잘못을 범하기가 너무 쉽다. 네가 사람에게서 온 원칙과 논조로 다른 이를 그릇되게 분별하고 바라본다면, 그 일에서 진리를 위배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될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사람을 바라보는 근거가 옳지 않아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와 전혀 맞지 않으며, 심지어는 서로 적대되거나 다른 길을 가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의 논조로 한 사람의 인성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런데 네가 굳이 그 논조를 준칙으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함으로써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확정 짓고자 한다면, 진리 원칙을 완전히 위배한 것이다. 그러니 너는 분명 과오를 범할 것이며, 잘못을 저지르고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일들을 분명히 하고 나면 하나님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근거와 원칙, 준칙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에게서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고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럼 너 자신의 각도에서 보면 어떻겠느냐? 너는 최소한 무엇에 근거하여 사람을 바라보아야 정확한지, 어떤 준칙으로 사람을 바라보아야 진리에 부합하고 사실 진상에 부합하며 절대 오류나 잘못이 생기지 않는지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정말로 알게 된다면 전통문화의 것들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사람의 논조나 이론,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며, 전통문화에서 온 것들과 사람에게서 비롯된 각종 주장, 관점을 철저히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을 바라보고 분별하는 데 진리 원칙이 생기며,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대적하거나 하나님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다. 또 조금씩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는 동시에, 사물의 본질이나 사람의 본질을 점점 더 분명히 보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확증을 얻어, 사람을 폭로하는 하나님의 각종 말씀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 규정이 모두 옳고 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확증을 얻는 동시에 당연히 하나님이나 하나님 말씀에 점점 더 믿음과 인식이 생길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사람이 마땅히 살아 내야 하는 실제임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얻는 과정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얻는 과정이다.

진리 추구의 목적은 진리를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진리를 받아들이면 사람 내면의 인성과 생명이 점차 변화한다. 최종적으로 봤을 때 이 변화가 바로 수확이다. 여태까지 너는 전통문화를 근거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제 잘못을 깨달았으니 더는 그러한 각도에서 일을 바라보지 않으며, 전통문화를 근거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하겠느냐? 아직도 모르겠다면, 이는 네가 아직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만약 네가 어떤 진리 원칙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알고, 정확하고 분명하게 네 근거와 방법, 준칙과 원칙을 말할 수 있다면, 또 그 진리 원칙들로 사람을 분별하고 대할 수 있다면, 그때 진리는 네 내면에서 역할을 한 것이고, 그것은 네 사상이나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진리가 네 내면에 뿌리를 내려 생명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럼 진리가 네 내면에서 하는 그 역할은 최종적으로 네게 어떤 도움을 주겠느냐? 그것이 네 처신이나 네가 선택하는 길, 인생의 방향에 영향을 주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 처신이나 네가 선택하는 길에 영향을 준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리가 너와 하나님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면 어떤 성과를 얻을 수 있겠느냐? 너는 하나님과 점점 더 가까워지겠느냐, 아니면 멀어지겠느냐? (점점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분명 점점 더 가까워질 것이다. 하나님과 점점 더 가까워지면, 갈수록 기꺼이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겠느냐, 아니면 의혹과 오해를 품고 억지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겠느냐? (기꺼이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것입니다.) 분명 그럴 것이다. 이 기꺼운 마음은 어떻게 생긴 것이겠느냐? 너는 실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증을 얻는다. 진리가 네 내면에서 역할을 하고 너는 그것에 대해 확증을 얻는다. 너는 만사와 만물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그 이면에 숨겨진 근원이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부합한다는 확증을 얻는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부 진리임을 실증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은 더욱 커지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이 커질수록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점점 더 정상이 되고, 너는 갈수록 기꺼이 피조물이 되길, 하나님이 너의 주재자가 되길 원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성분 또한 점점 많아지게 된다. 이 관계 개선이 어떠하냐? 좋지 않으냐? 이는 훌륭하고 양호한 발전 결과이다. 그럼 나쁘고 악성적인 발전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존재를 점점 더 믿지 않고, 하나님께 오해와 의혹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것이다. 결과적으로 너는 어떤 일에서든 확증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얻지 못함은 물론이요, 갖가지 관념을 품고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하고 경계하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부정할 것이다. 네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데 그래도 하나님을 따를 수 있겠느냐? (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따르고 싶지 않게 된다. 그럼 그다음 어떤 상황이 생기겠느냐? 하나님이 말씀하고 행한 것에 관심이 없어진다.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이 눈앞에 다가왔다.”라고 하면 너는 “저는 보지 못했는데요!”라고 하면서 믿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진리를 추구하면 훗날 좋은 종착지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 너는 “좋은 종착지는 어디에 있지요? 안 보이는데요!”라고 하면서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너는 진정한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면 너는 “진정한 피조물이 되면 뭐가 좋은가요? 얼마나 큰 복을 받을 수 있죠? 정말 복이 있나요? 그게 복받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까?”라고 할 것이다. 또 하나님이 “너는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라고 하면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주재하시나요? 왜 저는 느끼지 못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주재하신다면 왜 저를 가난하게 하신 건가요? 왜 제가 병까지 걸리게 하신 거죠? 하나님께서 주재하시는데 왜 제 일은 이렇게 순조롭지 않은 겁니까?” 네 마음은 원망으로 가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는 네가 하나님께 진정한 믿음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각종 일이 임할 때 원망만 늘어놓으면서 전혀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면 악성적인 결과로 바뀌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재하신다면 제 병을 바로 낫게 해 주시고 모든 것이 제 뜻대로 되게 해 주셔야 할 텐데 지금 저에게 임한 일들은 왜 이렇게 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겁니까?”라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고 그나마 있던 막연한 믿음조차 사라져 없어진다. 이것이 바로 악성적인 결과, 악과(惡果)이다. 너희는 그런 지경에 이르고 싶으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런 지경까지 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진리에 공을 들여야 한다. 이 모든 비결과 방법은 진리 안에 있고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 말씀에 공을 들이고, 진리에 공을 들이면 너도 모르는 새에 하나님이 네게 알려 주고 인도하는 방법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고, 너는 하나님이 배치한 사람과 일, 사물의 본질을 확실히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씩 체험하는 과정에서 점차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과 근거를 찾게 되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깨닫게 되어 네게 임한 사람과 일, 사물에서 실행의 원칙과 실행의 방법을 찾게 된다. 네가 그 방법대로 실행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네 내면에 들어가 생명이 되고, 너는 부지중에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 아래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 아래에서 살아가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게 되고, 네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입장과 관점, 시선으로 일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 그 결과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부합할 것이며, 네가 점점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진리를 더 갈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에 공을 들이지 않으며, 진리에 관심이 없다면, 어느 지경까지 가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마지막에 최악의 결과는 아무리 믿어도 하나님의 행사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재를 느끼지 못하며, 많은 일을 체험했음에도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만을 인정할 뿐, 구원받을 희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성품이 공의롭고 거룩하다는 사실은 더더욱 보지 못한 채 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여전히 막연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는 사람이 진리를 얻지 못했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얻지 못했으며, 하나님을 여러 해 동안 믿었음에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세 번째 논조인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는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네 번째 덕행의 주장은 무엇이냐?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원한을 덕으로 갚는 데는 목적이 있지 않겠느냐? 한발 물러나서 마음을 넓게 쓰겠다는 것 아니겠느냐? 분쟁을 그치고 편안하게 지내려는 일 처리 방식 아니겠느냐? 서로 끝없이 보복하지 않고 일을 마무리 지은 다음 편안하게 살겠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평생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100살까지 살든, 수백 살까지 살든 인생은 짧디짧게 느껴지는 법이다. 온종일 복수며 살육 같은 일만 생각하며 지내면 내면세계에 평안함이 없고 삶도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사람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떳떳하게 살기 위해서, 원한을 덕으로 갚기로 한 것이다. 사람이 평생 남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고, 남에게 해를 입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런데 늘 보복이나 증오의 정서 속에서 살아가면 하루하루가 그리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도덕가들은 사회 풍조와 사회 안정, 단결을 위해 이것을 출발점으로 사람들에게 하나의 도덕 준칙을 제시하여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말고, 증오하거나 살육하지도 말고, 원한을 덕으로 갚는 법을 배우라고 훈계했다. 한때 너를 해한 사람일지라도 복수하지 말고 오히려 도와주어야 한다고, 지난 악감정을 잊고 정상적으로 지내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를 감화시켜 증오감을 없애고 사람과 사람 사이 화목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렇게 하면 조화로운 사회가 되지 않겠느냐? 너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네 가족이든 친구든, 이웃이든 직장 동료든, 너는 원한을 덕으로 갚아야지,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누구나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모두가 조금씩 사랑을 보여 준다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라는 사람들의 말과 같아질 것이라고 말이다. 이는 상상에 기대어 하는 말 아니겠느냐? 아름다운 세상이라니, 대체 뭐가 아름답다는 것이냐! 누가 이 세상을 통제하고 있는지, 누가 이 인류를 패괴시키고 있는지 보아라.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라는 덕행의 주장이 무엇을 바꿔 놓을 수 있겠느냐? 아무것도 바꿔 놓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이 주장도 사람의 덕행 품격에 관해 제기한 특정 요구이자 사람에 대한 특정 규범으로, 사람이 증오나 살육 같은 문제를 직면했을 때, 증오와 살육을 내려놓고 평안한 마음으로 자신을 해한 사람을 대하며, 덕행으로 증오와 살육을 사그라뜨리고 살육을 줄이라고 하고 있다. 물론, 이 덕행의 주장은 사람들 사이에서 특정한 역할을 한다. 또 어느 정도 증오와 원한을 불식시키고 원한으로 인한 살해를 줄이는 등 사회 풍조와 치안, 사회의 조화로움에 일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일조의 전제 조건은 무엇이겠느냐? 거기에는 하나의 큰 사회 환경이라는 전제 조건이 있다. 먼저, 사람에게 정상적인 이성과 판단력이 있다면 ‘내가 복수하려는 그 사람은 나보다 세력이 강할까, 약할까? 만약 내가 그에게 복수한다면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만약 내가 복수에 성공해서 그를 죽인다면 나한테 죽음의 화가 미치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먼저 이런 결과를 따져 볼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따져 본 후에 깨닫는다. ‘그는 지지자가 많고 사회적으로 세력이 커. 게다가 잔인하고 악독하지. 그한테 해를 입었어도 복수할 방법이 없으니 꾹 참는 수밖에. 하지만 이번 생에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복수할 거야.’라고 말이다. 옛말에 “원한이 있는데 갚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다.”, “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는 10년 걸려도 늦지 않다.”라고 했다. 사람의 내면에는 이런 처세 철학이 들어 있다. 원한을 덕으로 갚는 처세 철학은 한 측면으로는 사회 환경이나 사람의 패괴 성품과 매우 깊고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그것은 사람의 관념과 이성적인 판단으로 생겨났다. 많은 사람이 이런 일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꾹 참으면서도 겉으로는 원한을 덕으로 갚는 것처럼, 증오와 원한에 의한 살인을 내려놓은 것처럼 행동한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이는 양측의 힘 차이가 현저하여 복수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만약 복수한다면, 온 가족이 죽음의 화를 입고 상상하기 힘든 결과가 초래될 테니 그렇게 꾹 참고 살아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원한이 사라지겠느냐? 원한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큰 원한의 경우 특히 그렇다. 예를 들어, 상대가 네 가족을 죽이고 네 집안을 풍비박산 내며 네 지위도 명예도 땅에 떨어뜨려 네가 엄청난 원한을 품게 되었다고 해 보자. 그것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는 인성에 갖춰져 있는 것으로, 인성으로 이겨 낼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증오를 품는 것은 무척 정상적인 일이다. 그것이 혈기에서 비롯되었든 아니면 본능이든, 그것도 아니면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상관없이 이는 매우 정상적이다. 개도 누가 자기한테 잘해 주고 먹여 주고 도와주면 그 사람을 따르고 믿으며, 누가 자기를 학대하고 괴롭히면 그 사람에게 적개심을 품는 건 물론이요, 냄새나 목소리만 비슷한 사람을 봐도 싫어한다. 개조차 이런 본능이 있는데 사람은 어떻겠느냐! 사람의 생각은 동물보다 훨씬 복잡할 것이다. 그렇기에 원한으로 인한 살인이나 억울한 일이 임했을 때 마음속에 적대감을 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원인이나 특수한 상황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럭저럭 양보하며 안전을 꾀하고, 분노를 꾹 참으며 당장은 그 화를 삼킨다. 이는 원한을 덕으로 갚으려는 것이 아니며, 그 말을 실행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이는 한 측면으로는 인성의 각도에서 출발한, 사람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사회의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보자면, 사람이 원한을 덕으로 갚지 않고 복수하고 원수를 살해한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어쩌면 구속될 수도 있고, 징역을 살게 될 수도 있으며, 심각할 경우 사형 판결이 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 근거하여 판단해 보면 사람이 원한으로 인한 살인이나 억울한 일을 직면했을 때, 인성의 각도에서 출발하든, 아니면 사회적, 법적인 구속력이라는 각도에서 보든, 마음속 깊은 곳, 또는 머릿속에서 원한을 아예 지워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에게 말로 공격을 당하거나 놀림이나 비방을 당하는 등의 작은 상처 앞에서도 사람은 원한을 덕으로 갚지 못한다. 원한을 덕으로 갚는 것이 인성의 정상적인 모습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괴롭힘 당하고 상처를 받을 때, 인성이 최소한 필요로 하는 것과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기꺼이, 기쁘게 “저를 괴롭히세요! 당신은 세력이 강하고 악독하니 마음대로 저를 괴롭히십시오. 저는 원한을 덕으로 갚을 것이니, 당신은 제 고상한 인격과 품격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절대 복수하지 않겠습니다. 마음속으로 어떤 감정을 품지도 않을 거고, 화를 내지도 않을 것입니다. 전부 농담으로 여기겠습니다. 당신이 한 말들이 아무리 제 인격을 모욕하고 제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제 이익을 침해할지라도 괜찮습니다. 마음대로 말해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진정으로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없다. 당장 원한을 품고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것만 해도 이미 훌륭하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원한을 덕으로 갚는 사람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특수한 배경에 제약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거나 날조했거나 거짓으로 지어냈을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람이 심각한 박해나 피해를 입으면 원한과 보복 심리가 생긴다. 원한이 너무 커서 심각한 충격을 받아 기억을 잃거나 바보가 되어 원한에 대한 지각이나 반응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무릇 정상 인성과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이 모욕하고 차별하고 깎아내리고 조롱하고 비웃고 빈정대고 피해를 주는 등의 방식으로 자신을 대하고, 나아가 자신의 인격이나 존엄을 짓밟고 유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또 누구도 지난날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기꺼이 덕행으로 거짓된 보답을 하지 못한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는 덕행의 주장은 패괴된 사람에게 더없이 보잘것없고 무력하며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라는 면에서 봤을 때, 사람의 패괴가 아무리 깊을지라도, 악인이나 상대적으로 인성이 선량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타인이 자신에게 잘해 주고 최소한의 존중을 해 주기를 바란다. 만약 누군가 아무 이유 없이 항상 네게 아부한다면 너는 기쁘겠느냐? 좋겠느냐? (좋지 않을 것입니다.) 왜 좋지 않겠느냐? 농락당하는 기분이 들지 않겠느냐? 항상 ‘나를 세 살배기 어린애로 아는 건가? 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네. 내가 그렇게까지 대단한가? 내가 그런 일을 했나? 괜히 왜 나한테 아부하는 거야? 역겹지도 않아?’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사람은 아첨하는 말은 듣고 싶어 하지 않는데, 그런 말은 상대에게 일종의 모욕이다. 사람은 최소한의 존중 외에도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대해 주길 바라느냐? (진실되게 대해 주기를 바랍니다.) 진실은 고사하고, 괴롭히지만 않아도 괜찮다.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객관적이다. 존중하고 괴롭히지 않으며 가장 중요하게는 공평하게 대해 주기를 바란다. 만만해 보인다고 괴롭히거나 네가 별로라고 멀리하지 말고, 늘 네게 아첨하거나 아부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는 다 역겨운 마음이 들게 한다. 너는 그저 사람들이 너를 공평하게 대해 주기만을 바란다. 그렇지 않으냐? 공평하게 대하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 사람의 사고의 범주에서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이상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보아라. 사람들은 왜 포청천을 좋아하겠느냐? 모두가 포청천의 판결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이야기가 전부 허구이고 마음대로 꾸며 낸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그것을 좋아하겠느냐? 어째서 그 이야기를 보고 싶어 하겠느냐? 사람은 이상 세계 속에서, 사고의 범주에서,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긍정적인 세상, 상대적으로 좋은 세상을 원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상대적으로 공평하고 공정한 사회 환경 속에서 살 수 있기를, 모두에게 이런 환경이 보장되어 있기를 바란다. 적어도 네가 악한 세력에게 괴롭힘 당할 때, 정의를 펼치고 억울한 상황을 호소할 곳이 있으며, 또 그런 권리도 주어져서 최종적으로 억울함을 풀 수 있고, 어떤 굴욕이나 억울함도 품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회,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억울함을 풀 곳이 있을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이 인류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 아니겠느냐? 모든 사람이 동경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동경하는 바다. 사람은 공평한 대우를 받기를 원하지, 어떤 불공평한 대우도, 혹은 그런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도 호소할 곳이 없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이는 사람을 무척 괴롭게 하는 일이다.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는 덕행의 요구 기준은 실생활 속 인류의 패괴 실상과 거리가 무척 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덕행의 요구는 사람의 뜻에 맞지 않으며, 객관적인 사실이나 실생활과 크게 동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이상주의자가 제시한 주장이기도 하다. 이 이상주의자들은 치욕을 참고 억울한 누명을 쓰는 취약 계층의 심리가 어떤지 이해하지 못한다. 취약 계층이 아무리 억울한 일을 겪어도, 그들의 존엄과 인격이 아무리 큰 굴욕을 당해도, 심지어는 그들의 신변 안전에 아무리 큰 문제가 생겨도 이 이상주의자들은 이런 실정을 알지 못한 채 그들에게 분쟁을 마무리 짓고 편하게 지내라고, 보복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모욕당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니 운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당신은 사회의 하층민으로 태어났고, 노예 감입니다. 남에게 억압받을 운명을 타고났다고요. 그러니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복수하지 말고 원한을 덕으로 갚으십시오. 사회 풍조와 사회 안녕을 위해 힘을 보태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며, 당신의 인성 중 가장 좋은 덕행을 펼쳐 사회에 기여하세요.”라고 말이다. 이는 하층민들에 대한 통치 계급과 사회 상류층의 착취를 변명하고, 그들에게 편리를 제공해 주고, 그들을 대신해 취약 계층의 심리와 정서를 안정시키려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목적이 들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한 나라의 법률과 사회 제도, 그리고 모든 종족과 민족의 규정, 제도가 공명정대하다면, 인성 법칙에 어긋나고 비객관적인 이 주장을 제시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라는 말은 통치 계급과 권세를 지닌 악인들이 취약 계층을 착취하고 짓밟도록 길을 열어 주고 편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 분명하다. 동시에 이는 취약 계층을 위로하여 복수하지 못하게, 부자나 상류층, 통치 계급을 적대시하지 못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소위 사상가, 교육가들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도덕적인 정점에 서서 사람들에게 좋은 덕행을 갖추라고 요구한다는 기치를 들고 이 주장을 제시한다. 이는 사회 갈등을 증폭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게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사회가 더 불공평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회가 공평하다면, 이런 주장으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고 요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는 사회나 사람들 사이에 공평성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법적인 제재를 받고, 국가의 법이 권력보다 크다면,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성립하지도 않을 것이다. 공직자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서민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 부자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빈자가 몇이나 되겠느냐?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라는 말은 서민이나 빈자, 사회 하층민을 대상으로 제기한 것이 분명하다. 이는 도덕적이지도, 공평하지도 않다. 예를 들어, 네가 공직자에게 “당신은 원한을 덕으로 갚아야 합니다.”라고 요구하면 공직자는 “제가 무슨 원한을 갚겠습니까? 누가 감히 저를 괴롭힐 수 있죠? 누가 감히 제게 잘못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저에게 ‘아니요’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감히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를 죽이고 그의 집안을 쓸어 버리며, 구족을 멸할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보아라. 공직자에게는 원한이 없다. 그래서 그에게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는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그에게 “당신은 원한을 덕으로 갚는 덕행을 지녀야 합니다. 그런 덕행을 갖춰야 한다고요.”라고 하면 그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겠지만, 이는 사람을 기만하는 거짓말이다. 어떻게 말하든,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는 말은 사회 도덕 학자들이 사회의 하층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주장이며, 나아가 사회 하층민들을 노예로 부리기 위한 주장이다. 그 목적은 통치 계급의 통치를 안정시키고, 또한 통치 계급에게 잘 보이는 데 있다. 그리하여 사회 하층민들을 계속 노예처럼 부리는 것, 그러니까 대대손손 노예로 부려도 원망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봤을 때, 이런 사회의 법률과 제도는 확실히 불공평하며, 진리가 주권이나 권세를 잡고 있지 않고, 공평과 공의가 권세를 잡고 있지도 않다. 반대로 사람의 사악함과 권세가 주권을 잡고 있다. 누가 공직자가 되든 마찬가지인데, 서민이 공직자가 되어도 똑같을 것이다. 이는 이 사회 제도의 본질이다.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라는 말에서는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이 말은 명백히 정치색을 띠고 있다. 이는 통치 계급이 사회 하층민들을 더 잘 통치하고, 부리기 위해 제시한 덕행 측면의 요구이다.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는 요구는 인성의 정상적인 요구나 필요에 맞지 않을뿐더러 인성의 인격이나 존엄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당연히 사람의 인성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은 더더욱 될 수 없다. 이 요구는 진정한 인성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이는 행할 수 없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아예 제시해서는 안 되는 요구이다. 그것은 통치 계급이 국민들을 더 잘 통치하고 통제하기 위해 제시한 주장이자 하나의 수단이다. 물론, 하나님은 이런 주장을 제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율법시대든 은혜시대든, 지금의 하나님나라시대든 하나님은 이런 방식과 주장, 혹은 요구에 의거하여 사람의 인성이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한 적이 없다. 사람에게 덕이 있든 없든, 그 사람의 덕행이 어떠하든, 덕행과 관련된 이 주장들은 하나님에게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오직 사람의 본질이 어떠한지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는 덕행의 주장은 하나님 집에서 성립하지 않고, 분석할 가치도 없다. 네가 원한을 덕으로 갚든 원한을 복수로 갚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원한을 갚는’ 일을 어떻게 바라봐야겠느냐? 어떤 태도와 관점으로 이 일을 바라보고 대해야겠느냐?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악을 행했다고 해 보자. 하나님 집에는 행정 법령이 있고 사람에게 처분을 내리는 원칙이 있으니 누구도 손을 뻗어 다른 이 대신 원한을 갚고 불평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 집에는 그런 일이 없으니 교회에서는 당연히 원칙대로 처리할 것이다. 이는 사람이 이러한 각도에서 볼 수 있고 접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로서, 교회에는 사람에게 처분을 내리는 원칙이 있고 하나님 집에는 행정 법령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고 확실히 말해 주고 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겠느냐? 악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상응하는 징벌을 받는다. 단, 언제 어떤 징벌을 받을지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징벌하는 원칙은 하나님의 성품이나 본질과 떼어 놓을 수 없다. 하나님에게는 공의 성품, 사람이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이 있으며, 위엄과 진노가 있다.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님께 상응하는 징벌을 받을 것이다. 이는 법률보다 높고 인성보다도, 세상의 법보다도 높다. 이는 공평하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일도, 인성의 바람에 부합하지 않는 일도 아니며, 더욱이 모두가 손뼉을 치며 쾌재를 부르게 하기 위한 일도 아니다. 네가 도덕적인 정점에 서서 이 일을 판단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행하는 데는 하나님의 원칙과 하나님의 때가 있다. 하나님이 과연 어떻게 행할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겨야지, 사람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 이는 사람과 무관하다. 그럼 ‘원한을 갚는’ 일에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이겠느냐? 혈기로 일을 처리하거나 상대에게 복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네게 잘못을 저지르고 너를 괴롭히고, 나아가 너를 해치고자 한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처리 원칙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일에는 모두 방법과 원칙이 있고, 의거가 되는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있다. 어찌 됐든, 원한을 덕으로 갚는 덕행의 주장 역시 인성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원한을 덕으로 갚을 수 있다고 해도, 기껏해야 그를 가리켜 상대적으로 관대하고 무던하며 다른 사람과 따지지 않는다고, 도량이 넓고 덕행 면에서 봐 줄 만하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인성이 과연 어떤지, 이 주장으로 판단하고 단정 지을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러려면 그가 추구하는 바와 걸어가는 길,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태도 등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2022년 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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