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2)

지난번 예배 때는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관해 교제했다. 일단은 한번 되돌아 보자. 진리 추구란 무엇이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더냐? 너희는 지난번 교제가 끝난 후에 묵상해 보았느냐? 어떤 내용은 교제를 마친 후에 묵상해야 한다. 그런 다음 실생활 속에서 실제로 체험하고 경험해야 진정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 또 그렇게 해야 네가 묵상한 내용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느낄 수 있고, 진실한 체험과 인식을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는 묵상했느냐?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 진리 추구와 관련된 내용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크게 몇 가지 항목을 포함하는지 정리해 보았느냐? (지난번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진리 추구에 대한 사람의 갖가지 그릇된 생각과 관점, 태도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후, 세부적으로 진리 추구의 다섯 단계에 대해 교제해 주셨습니다.) 지난번에 교제한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진리 추구와 관련하여 사람에게 존재하는 소극적인 상태나 그릇된 관점, 그리고 진리 추구에 대한 오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 대한 핑계와 이유가 그 첫 번째였다. 두 번째 내용은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으로, 총 5단계가 있다고 하였다. 분류 항목이 많지는 않지만, 그것과 연관된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은 무척 많았다. 한 측면으로는 진리 추구에 대한 사람의 치우친 인식과 이해를 폭로하였고, 다른 측면으로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때의 어려움과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려고 대는 핑계와 이유, 구실에 대해 폭로하였다. 진리 추구에 대해 사람이 드러내는 이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태도와 인식 방법은 사람이 실생활 속에서 보이는 생활 방식과 추구, 진리를 대하는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그것들은 전부 사람이 드러내는 구체적인 태도나 모습과 관련이 있다. 그다음으로는 사람의 여러 가지 모습에 근거하여 진리 추구의 길에 대해 구체적인 실행법과 실행 단계를 제시하였다. 너희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 이해했느냐? (네.) 정말 이해했느냐? 왜 말이 없느냐? 아무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으니, 좀 더 교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을 때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바로 진리 추구이다. 진리 추구란 무엇이더냐? 진리를 추구할 때 사람이 보이는 모습에서 수많은 어려움과 문제점이 드러난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 대해 갖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는데, 장애물이 너무 많다. 자신의 갖가지 어려움들로 인해 진리 추구라는 이 일은 너무도 어렵고 힘들어 보이며, 쉽지 않게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 놓고 보면 답은 무척 간단하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답을 낼 수 있는 문제를 사람은 왜 실천하지 못하겠느냐? 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스스로 양심과 이성이 있으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또 본분을 다할 수 있고 기꺼이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고자 한다고 자랑한다. 이렇듯 좋은 태도를 기반으로 하는데 왜 진리 추구의 길을 걷지 못하느냐? 이렇듯 좋은 인성과 인격, 뛰어난 명성, 추구하고자 하는 다짐, 이상, 소망, 사람의 주관적인 노력, 기꺼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려는 태도, 진리를 갈망하고 받아들이는 긍정적이고 올바르며 발전적인 태도 등을 기초로 하는데 왜 진리를 추구한다고 할 수 없겠느냐? 왜 진리 추구에 이르지 못하겠느냐? 문제의 근원은 어디에 있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며, 본성적으로 진리를 싫어하는 데 그 근원이 있습니다.) 정확한 대답이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패괴 성품은 사탄에게 속하며, 사탄에게 속하는 것은 하나님, 진리와 적대적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진리를 추구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생명과 속성, 추구법과 인생관을 저버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 그릇된 것들을 내려놓고 육적인 기호에 등 돌리고 육이 좋아하지 않는 것, 사람에게 없는 것, 사람이 무시하고 혐오하여 내치는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는 것은 그들에게 어려움이 큰 것이다. 너에게 진리를 추구하라고 하는 것은 네 고유한 생명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는 사람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스스로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목숨을 내놓는 일을 사람이 하려 하겠느냐? (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속 깊이 원치 않는다. 백 번, 천 번, 만 번 물어봐도 원치 않는다. 어떤 사람이든 사탄에게 속하는 자기 고유의 것들을 내려놓기 힘들어한다. 이것이 사실이다. 너희 역시 절실하게, 그리고 진정으로 느꼈을 것이다. 사람은 마음속 깊이 육을 저버리지 않으려 하고, 사탄의 본성 본질에 속하는 자신의 생명을 저버리지 않으려 하며, 자기 고유의 사탄 속성과 사탄 본성을 저버리고 진리를 추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탄 본성이 있는 사람, 사탄 성품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은 본심에 어긋나는 일이며, 바라지 않는 바이다. 그 근원은 무엇이겠느냐? 사람 내면의 속성은 사탄에게 속한 것으로,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적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듣고 깨닫게 된 후에도, 오직 마음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에 공을 들이려 하며 기꺼이 대가를 치르려 하는 사람, 그런 의지와 이상, 소망이 있는 사람만이 진리를 깨달으면 실행할 수 있으며, 진리에 기대 살아가고 진리 실제를 살아 낼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어도 사탄 본성과 사탄 성품에 가로막혀 실행하지 못한다. 사실, 실생활 속에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더없이 어려운 일이다. 네게 가장 좋아하는 옷과 액세서리, 즐겨 사용하는 물건, 좋아하는 일과 직업, 특기와 취미 등을 내려놓으라고 하면 너는 이러한 것들을 저버리고 쉽게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네게 네 육과 사탄 성품을 저버리고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하면 이는 몹시 어렵다. 적절하지 않은 말로 표현하자면 오리보고 홰에 오르라 하는 셈이고 황소보고 나무를 타라고 하는 격이니, 너무 힘든 것이다. 고양잇과 동물이 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것은 그들의 본능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에게 고기가 아닌 풀을 먹으라고 한다면 절대 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평생 소박하게 살라고 한다면, 약간의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육적인 어려움은 그게 무엇이든 별것 아니다. 육적인 안일을 꾀하지 않는 것, 매일 잠을 줄이고 10년을 한결같이 고생하는 것, 의식주 모두 부족하게 사는 것 등 이런 식으로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은 의지가 있고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또 자제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해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사람에게 육을 저버리고 사탄을 배반하며 오롯이 하나님의 요구와 말씀대로 행동하라고, 진리대로 실행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한다면 이는 누구에게든 더없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사람의 문제는 모두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한 번 굳게 마음을 먹거나 자제하거나 규례를 지켜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는 진리를 실행할 수도, 갖출 수도 없다. 패괴된 인류에게 진리 추구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문제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냐? (사탄 성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 사탄 성품이 사람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자질이 떨어진다거나 성미, 성격이 나쁘다거나 이렇다 할 특기, 은사, 재능이 없다거나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결국 문제는 사람의 패괴 성품에 있다. 패괴 성품은 사람의 손발, 마음과 생각, 사상, 사유, 영혼 깊은 곳을 단단히 통제하여 진리 추구의 길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3년, 5년 믿어도 어떤 수확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10년, 20년, 30년 믿었는데도 보잘것없는 수확만 얻은 사람도 있고, 아예 어떠한 수확도 없이 두 손이 텅 빈 채 더없이 빈곤하고 가련한 사람도 있다! 30년을 믿었건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여전히 가난하고 눈먼 상태인 것이다. 소극적인 상태에 빠졌을 때는 어떻게 헤쳐나와야 하는지 모르고, 하나님을 오해할 때는 어떻게 그 오해를 풀어야 할지 알지 못한다. 또 역경을 만나면 어떻게 직면해야 할지 모르고, 그런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저 주관적인 의지로 극복하고 인내로 끝까지 버티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느냐?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왔고, 사건은 지나갔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패괴 성품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다. 이런 자는 소극적인 상태에 몇 번이나 빠졌든, 하나님을 몇 번이나 오해하고 관념을 가졌든, 몇 번이나 실패하고 좌절하고 연약해졌든, 지금까지 조금의 체험 간증도 말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에 관한 인식이나 경험, 체험을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마음과 영혼 깊은 곳이 텅 비어 있다. 또 진리에 어떤 느낌도 없고, 하나님 말씀에 어떤 진실한 인식도 없다.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에 대한 인식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사람은 빈곤하고 눈이 멀고 가련한 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 믿어도 소용이 없다. 그럼 사람이 왜 그 지경에 이른 것이겠느냐? 그 원인은 어디에 있겠느냐? 이 또한 마찬가지로, 문제의 근원은 사람의 패괴 성품에 기인한다. 이것이 객관적인 원인이다.

사람이 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지 그 객관적인 원인에 대해 우리는 분명히 이야기했다. 이제 주관적인 원인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주관적인 원인은 이러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과 모든 말씀을 통해, 그리고 실생활 속에서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는 했어도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하여 자신과 대조하며,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저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한 적은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길에서 많은 것을 바치고 헌신하며, 큰 노력을 기울이고 고통을 겪고 대가를 치렀을지라도 이는 그저 표면적인 행위에 불과할 뿐,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섰다는 의미는 될 수 없다. 초기에 하나님을 따른 자들은 누구보다 고난을 많이 겪었다. 20대에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제 50대가 되었는데도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기 위해 자신의 청춘을 바치고 가정과 결혼을 포기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대가가 크지 않으냐? (큽니다.) 청춘을 버리고 자신의 일생을 바친 결과가 어떠하냐? 크나큰 대가를 치렀지만, 마지막에 얻은 것은 자신이 지불한 것에 부합하지도 않고 같은 값도 아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대가를 치를 때의 태도와 의지, 그리고 시간과 양, 정도로 보면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며 간증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겼어야 마땅하다. 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얻는 한편,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들어서 진리 실제에 진입했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 이는 추론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는 그저 논리적인 연관성이 있을 뿐, 사람이 살아 내는 것이나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연구하고 토론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이는 사람이 깊이 생각해 볼 만한 문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현 단계 사역을 받아들인 지 2~3년쯤 된 사람 중에는 체험과 간증이 있는 자가 꽤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그들을 변화시키고 정직한 사람이 되게 했는지, 진리 추구의 길에서 어떻게 진리를 깨닫게 했는지, 자신의 패괴 성품, 교만함과 간사함, 패역, 지위욕, 야심과 욕망 등등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증거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2~3년밖에 믿지 않았는데도 체험과 간증이 있고, 하나님 말씀에 깊이 느낀 바가 있으며, 하나님 말씀의 진실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20~30년간 믿은 사람들은 그렇게 큰 대가와 고난을 치르고 그렇게 많은 길을 뛰어다녔는데도 마음 깊은 곳과 정신세계가 여전히 텅 빈 듯 공허한 것이겠느냐? 많은 사람이 그런 상태에서 수시로 막막함을 느끼며 “저는 막막함을 많이 느낍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면 나는 “너는 하나님을 20~30년이나 믿었으면서 어찌하여 아직도 막막함을 느낀단 말이냐? 보아하니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 같구나.”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수시로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거나 연약해져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어. 그런데 뭘 얻었지?” 그들은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거나 연약해질 때, 지위와 이익을 잃고 허영심이 충족되지 않을 때 늘 하나님을 원망한다. 또 그렇게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은 것을 후회하고, 지난날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믿으며 직장과 결혼, 가정, 대학에 입학할 기회를 내려놓고 결연히 하나님을 따른 것을 후회한다. 심지어 교회를 떠나려는 마음을 품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후회할 거라면 애당초 왜 그렇게 했느냐? 하나님을 20~30년 동안 믿으면서 그렇게 많은 진리를 듣고 하나님의 수많은 사역을 체험했는데도 마음 깊은 곳이 여전히 공허하고, 수시로 혼돈과 막막함, 후회, 불만에 사로잡힌다. 심지어는 앞길이 막막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이는 어떻게 초래된 것이냐? 이런 사람을 가련하게 여길 필요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볼 때면, 혹은 그들의 소식을 듣고 근황을 알게 될 때면 나는 그들에 대해 어떤 예감과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의 상태와 정신세계가 왜 이리 익숙한 것이겠느냐? 그들은 지금도 하나님 집에 남아 본분을 이행한다. 그들이 무엇으로 버티고 있겠느냐? 은혜로 구원받겠다는 마음가짐이겠느냐? 끝까지 따르면 반드시 구원받을 거라는 마음가짐이겠느냐? 아니면 요행 심리 같은 것이겠느냐? 전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겠느냐? 이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라는 바울의 말과 같다. 이 말을 분석해 보자. 간단히 말해서, 이 말은 거래의 성질을 띠고 있으며, 거래의 태도, 생각, 계산이 있고, 욕망과 야심에서 비롯되었다. 이 말에서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느냐? (면류관과 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복과 좋은 종착지를 얻고자 추구하고 있다. 그럼 그 좋은 종착지와 복을 어떻게 얻는 것이겠느냐? 무엇으로 맞바꾸는 것이냐? (그들은 고된 사역과 희생, 헌신, 고통과 대가로 맞바꾸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에 따르자면, 싸워야 할 싸움을 끝내고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할 일을 다 끝냈으니 이제 당연히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예비해 놓은 좋은 종착지와 복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님은 두말할 것 없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며, 그러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순종도,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도,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려는 태도와 생각도 없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이용해 하나님이 인류에게 약속한 복을 맞바꾸겠다는 생각뿐이다. 방금 말한 그 사람들은 늘 정신세계가 공허하고 마음 깊은 곳에 의지처가 없지만, 시종일관 그렇게 대가를 치르고 고통받으며, 자신의 싸움과 달려갈 길을 끝까지 견지한다. 그들은 무엇에 의지하느냐? 그들이 고수하고 맹신하는 바울의 명언이 그들의 ‘믿음’을 지탱해 준다.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상을 받고 면류관을 얻겠다는 야심과 욕망이며, 거래로 복을 얻겠다는 꿈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추구한 체험이나 인식, 하나님 사역에 대한 인식에 의지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런 것들에 의지하지 않는다.

앞에서 교제한 사례를 보면, 진리 추구의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실질적인 어려움을 수없이 맞닥뜨리며, 패괴 성품에 결박되거나 속박되고, 숱한 좌절과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진실한 믿음을 갖고 하나님 말씀의 인도와 성령 역사에 의지하기만 하면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온전히 들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베드로가 그 선례였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저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데만 집중하며,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데만 만족할 뿐,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다. 그 결과, 하나님을 10년, 20년, 30년 동안 믿어도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진실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진리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어떤 체험이나 인식도 말하지 못한다. 예배 때 체험 간증을 말하려고 해도 할 말이 없고,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다. 아무리 오래 믿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더욱이 진리를 실행하지도 못한다.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이 문제를 간파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글귀와 도리를 말하는 사람도 진리를 실행하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이 성립하겠느냐? 글귀와 도리를 말하는 사람이라면 애당초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설령 그의 행동이 겉으로 볼 때 진리에 어긋나는 점이 없고 좋은 일, 좋은 행위라고 할지라도 이 좋은 일, 좋은 행위를 어떻게 진리 실제라고 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무엇이 진리 실제인지 모른다. 그는 사람이 행하는 좋은 일, 좋은 행위를 모두 진리 실행이라고 생각한다. 황당하지 않으냐? 그것이 종교인의 사상, 관점과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이렇게 치우치게 이해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무엇이 진리를 깨닫는 것인지, 무엇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을 평가하고 분별할 수 있으며, 사람에게 정말 진리 실제가 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사역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해야만 사람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으며,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여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채 관념과 상상대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데만 만족한다면, 네가 행한 그 모든 것이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느냐? 네 생명 성품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진실로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럼 네가 행한 그 모든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그저 너의 기호와 개인적인 이해, 일방적인 바람을 의미할 뿐이다. 이는 다 너 스스로 좋아하고 원해서 한 일이다. 너는 그저 네 개인적인 욕망과 다짐, 이상을 충족시킨 것에 불과하다. 단언컨대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너의 모든 행동은 진리와도, 하나님의 요구와도 아무 관계가 없다. 네 행동은 전부 너 자신을 위한 것이며, 너는 스스로의 이상과 명예, 지위를 위해 사역하고 싸우고 뛰어다닌 것이다. 이는 바울과 다를 바가 없다. 네가 평생 힘들게 사역한 것은 전부 상을 받고 면류관을 얻으며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이는 분명 바울의 길을 걷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저는 스스로 원해서 힘들게 사역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과 거래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는데, 네가 하나님과 거래를 하든 하지 않았든, 네 생각과 태도에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분명한 뜻이 있었든 그렇지 않든, 그러한 계획과 목적이 있었든 없었든, 너는 힘들게 사역하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른 것으로 천국의 상과 면류관을 얻으려 했다. 그러니 네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 그 문제의 성질은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다. 어떻게 말하든, 사람이 복을 얻기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한, 바울의 추구와 성질이 같다. 무엇이 같겠느냐? 힘을 들이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 등의 좋은 행위로 하나님의 축복을 얻고, 하나님이 인류에게 약속한 복을 얻으려는 성질이 같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조금의 차이도 없이 성질이 같다. 네가 바울의 길이 아니라 베드로의 길을 걷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다면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물을 것도 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을 인식하고 성품 변화를 이루는 데 집중하며, 하나님 사랑하기를 추구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는 것이고, 베드로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베드로의 길을 걸으려면, 먼저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요구를 했는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리켜 준 길은 무엇인지 이해하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길을 걸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 어떤 길을 걸으면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되는지 분별해야 한다. 또한, 자신이 왜 바울의 길을 걷게 됐는지 참되게 돌아보고, 어떤 성품에 지배되어 바울의 길을 걷게 됐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너는 교만함, 간사함, 사악함 등 네 패괴 성품 중 가장 두드러지고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패괴 성품에서부터 착수하여 반성하고 해부하여 자신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만약 진실로 자신을 인식하고 증오하는 성과를 낸다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기도, 진리를 실행하기도 쉬워진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교만한 성품을 예로 들어 간단히 교제해 보자. 일상생활 속에서 말하고 처신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남과 교제할 때 등 어떤 일에서든, 어떤 곳 어떤 환경에서든 너는 자신이 어떤 교만한 성품을 드러냈는지 시시각각 성찰하는 데 집중하는 한편, 네가 의식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교만한 성품과 생각, 그리고 네 속셈과 목적을 파헤쳐야 한다. 특히 늘 높은 곳에 서서 남에게 훈계하려 드는 것,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 것, 모두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것, 다른 이의 말이 아무리 옳아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말이 옳지 않은데도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이고 순종하게 하는 것, 마음속에 항상 다른 사람을 이끌려는 경향이 있는 것, 리더 일꾼의 책망과 훈계가 임해도 불복하고 이치를 따지며 상대를 거짓 리더 일꾼이라고 정죄하는 것, 언제나 남을 정죄하고 자신을 높이기를 좋아하는 것, 늘 자기가 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 늘 명인이나 위인이 되고자 하고 남들 앞에 나서서 우러름과 숭상을 받고자 하는 것 등과 같은 패괴 표출에 대해 반성하고 해부하면, 교만한 성품이 더없이 추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스스로를 혐오하고 역겹게 여기게 되며, 나아가 교만한 성품을 증오하게 된다. 그러면 모든 일에서 자신이 교만한 성품을 드러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한 측면으로는, 말할 때 어떤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품을 드러냈는지, 어떤 허풍을 치면서 교만하고 비이성적인 말을 했는지 반성하게 된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일을 할 때 관념과 상상, 야심과 욕망에 기대 어떤 황당하고 비이성적인 일을 저질렀는지 반성하게 된다. 이렇게 반성해야 자신을 인식하는 성과를 낼 수 있다. 자신을 진실로 알게 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정직한 사람이 되는 실행의 길과 원칙을 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켜 준 길과 원칙대로 실행하면서 다른 사람을 대하고 사귀고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이렇게 한동안 실행하면, 한 달 혹은 두 달쯤 지났을 때 이 부분에서 마음이 밝아지고 어느 정도 수확이 생겨 달콤한 결실을 맛볼 수 있다. 그러면 정직한 사람, 이성적인 사람이 되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하여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 이는 아직 진리에 대해 깊은 인식을 말하지는 못할지라도, 이미 어느 정도 감성적인 인식과 실행의 길을 얻은 것이다. 또 말로는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할지라도, 교만한 성품이 사람에게 주는 해악과 인성에 끼치는 왜곡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교만하고 방자한 사람은 늘 허풍을 치고 터무니없는 말, 남을 기만하는 마귀적인 말을 하며, 큰소리를 치고 구호를 외치고 고담준론을 늘어놓는다. 이는 교만한 성품의 갖가지 표출 아니겠느냐? 이런 교만한 성품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도 비이성적이지 않으냐? 네가 마음속으로 이런 교만한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확실히 정상인의 이성을 잃은 것임을 인식하고, 교만한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은 인성이 아닌 마귀 본성을 살아 내는 것임을 인식한다면, 패괴 성품이 곧 사탄의 성품임을 진정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사탄과 패괴 성품을 증오할 수 있다. 이렇게 반년, 혹은 1년을 체험하면 진정으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그 후 다시 교만한 성품이 드러나면 바로 의식하여 그것을 저버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변화의 시작이다. 이렇게 하면 조금씩 교만한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고, 정상적으로 남들과 함께 지낼 수 있으며, 더는 거짓말이나 교만한 말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말, 솔직한 말을 할 수 있다. 이는 어느 정도 이성이 생긴 것이자 정직한 사람의 면모를 갖춘 것 아니겠느냐? 이러한 진입이 곧 너의 수확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네가 수확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네가 이렇게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실행하면, 어떤 교만한 성품을 드러내든 진리를 구해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다. 또 이렇게 한동안 정직한 사람이 되는 일을 체험하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정직한 사람이 되는 진리와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네가 그런 진리로 네 교만한 성품을 해부하면 네 내면 깊은 곳에는 하나님 말씀의 깨우침과 빛 비춤이 있을 것이며, 마음속이 밝아지기 시작할 것이다. 또한, 교만한 성품이 사람에게 패괴를 가져다주고, 추악한 몰골로 살게 한다는 것을 밝히 알게 되며, 사람이 교만한 성품을 드러낼 때의 갖가지 패괴된 상태를 분별하게 될 것이다. 해부하면 할수록 사탄의 추태를 더 분명히 보게 될 것이고, 마음속으로 점점 더 사탄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교만한 성품을 벗어 버리기가 쉽다. 이 정도까지 인식하고, 관련된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를 밝히 깨닫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전부 정상 인성이 갖추고 살아 내야 하는 것임을 인식했다면, 더는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느껴질 것이고, 진리 실행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임을, 사람은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전부 자발적이고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이와 함께 진리를 더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네 마음속에 긍정적인 것들이 모여 많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인식이 점차 생겨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으로, 무슨 일을 대하든 올바른 관점과 견해를 갖게 될 것이다. 또 이 진실한 인식과 올바른 관점은 점차 네 마음속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이는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으로, 누구도 박탈하거나 빼앗아 갈 수 없다. 이 긍정적인 것들이 조금씩 모이면, 내면 깊은 곳이 훨씬 충실해졌음을 느끼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거나 마음속이 공허하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네가 진리를 깨닫는 것이 참으로 좋다고 생각하며 인생이 밝다는 것을 보았을 때, 진정한 믿음이 생겨난다.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며,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는 것이 더없이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너는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할 것이며, 네 진실한 체험과 인식을 교제하여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과를 낼 것이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위력과 진리가 가져다주는 이점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더 큰 믿음으로 진리를 실행하고 네 본분을 잘 이행할 것이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 것이다. 네가 진실한 체험 간증을 이야기할 때, 네 마음은 점점 더 밝아지고, 진리 실행에 더 분명한 길이 보인다고 느끼게 된다. 이와 함께 네 부족한 점과 실행해야 할 진리가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체험 간증은 남에게 이로움과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너 자신도 진리 추구에서 수확을 거두고, 진실로 하나님께 축복받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여 하나님을 증거하면,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여 패괴 성품의 결박과 속박, 고해에서 벗어나고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빠져나오도록 인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너 자신 역시 점점 더 믿음을 갖고 진리를 추구하여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런 체험은 진실한 증거가 되지 않겠느냐? 그것이 바로 진실한 증거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지루하고 의미 없으며 공허하다고 생각할 리 있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께 진실한 인식이 생기면, 마음 깊은 곳에 평안과 기쁨이 넘치며, 충실하고 매우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 사람이 그런 상태, 그런 경지에서 살아가면 자연히 자기 자신에게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고 자제하기를 강요하지 않게 되며,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육을 저버리는 데에만 집착하지 않고 적극적인 면에서 사람의 패괴 성품을 알아 가는 데 집중하게 된다. 이 밖에도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알아 갈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한순간의 느낌 같은 데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과 진리 실행의 원칙을 찾게 된다. 예를 들어, 일이 닥쳤을 때 자제하지 못해 성질이 나고 기분이 나빠졌다든가, 오늘 또 화를 냈다든가, 오늘 또 어떤 일을 제대로 완벽하게 못 해냈다든가 하는 등의 사소한 일들이 네 진리 실행을 막지 않는 한, 그것에 신경 쓸 필요 없다. 마땅히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한편, 어떻게 실행해야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을지를 찾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렇게 진리를 실행하면 생명이 빠르게 성장하고, 진리를 추구하여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 또 마음이 더 이상 공허해지지 않고, 하나님께 진실한 믿음이 생기며,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점점 더 관심이 생기고, 그것들을 더욱 소중히 여기면서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점점 더 깨닫게 된다. 사람이 그 수준에 이르렀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실제에 완전히 진입한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이 진리 실제가 아니라 표면적인 좋은 행위, 기꺼이 대가를 치르고 고생하며 모든 것을 바치는 상태에 진입하고자 한다. 하지만 내면 깊은 곳은 여전히 공허하고, 정신세계는 여전히 의지할 곳이 없다. 어찌하여 의지할 곳이 없겠느냐? 어떤 일을 마주하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혼자만의 생각에 기댈 뿐, 진리의 원칙을 실행하지 않으며, 패괴 성품을 드러내도 그저 자제하려고만 하고 진리를 구해 해결할 줄 모른다. 다행히 사람의 육체에는 한 가지 본능이 있으니, 바로 고난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방인들 사이에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없다. 오직 누리지 못할 복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육체에는 타고난 본능이 있다. 바로 복을 많이 누리는 것은 안 되지만, 고생은 아무리 해도 괜찮으며 인내하고 자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이 좋으냐? 이것이 장점이겠느냐, 아니면 단점, 결점이겠느냐? 그 말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진리가 아니다. 그리고 진리가 아닌 것은 전부 헛소리이다. 이는 빈말로, 네 어떤 문제도, 실질적인 어려움도 해결해 줄 수 없다. 정확히 말해, 그 말은 네 패괴 성품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네가 인식하고 의식하며, 깊게 느낀 바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방인들은 또 이런 말을 한다.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 마당에 사는 게 두려울쏘냐?”, “겨울이 왔는데 봄이라고 멀리 있겠는가?” 이 말들은 꽤나 대단해 보이지 않느냐? 무척 고무적이고 철학적이지 않으냐? 이방인들은 이 말들을 ‘영혼의 닭고기 수프’라고 부른다. 너희는 이런 말들을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싫어하느냐? 혹자는 “저희는 그런 말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건 이방인들이 하는 얘기니까요. 저희가 좋아하는 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너는 하나님의 말씀 중 어떤 구절을 좋아하느냐? 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진리로 여기느냐? 어떤 구절에 느낀 바가 있고 진입했으며 어떤 구절을 얻었느냐? 네가 이방인들의 그런 말을 좋아하지 않아도 소용없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너는 그것의 본질을 분별하지 못한다. 이방인들의 그런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의 말이 옳든 그르든 진리와는 무관하다. 설령 사람의 눈에 좋아 보이고, 맞는 말 같아도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진리에 미치지도 못한다. 그것은 전부 진리에 어긋나고 진리를 적대하는 말들이다. 이방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들과 시비를 가릴 필요는 없다. 그저 그들의 말을 터무니없는 헛소리로 여기면 그만이다. 헛소리란 무엇이더냐? 사람과 사람의 삶, 사람이 걷는 길, 사람이 구원받는 데 어떤 도움도 가치도 될 수 없는 말이다. 이런 말은 전부 헛소리, 빈말에 속한다. 그것은 사람의 생사나 사람이 걷는 길과 상관이 없는 헛소리로, 긍정적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사람이 그 말을 들어도 삶이 달라지지 않고 예전대로이며, 그것은 어떤 사실도 바꿀 수 없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진리만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며, 가늠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진리는 사람의 운명과 사상, 관점, 정신세계를 바꿀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사람의 패괴 성품을 없애고 사람의 속성을 바꿔 사람의 사탄 속성을 진리에 속하는 속성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진리와 하나님 말씀에 기대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 사람이 진리 실제를 살아 낼 수 있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산다면, 이는 생명이 변한 것 아니겠느냐? 생명이 변한 것이란 사상과 관점이 변하고, 사람과 일을 보는 시각, 태도, 관점이 변한 것이며, 사물을 바라보는 입장과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이방인의 말들은 전부 빈말, 헛소리이며,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니 방금 이야기한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없다. 오직 누리지 못할 복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은 헛소리, 빈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고난을 겪을 수 있다고 한들 무엇이 어떻단 말이냐? 진리를 위해 고난을 겪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너는 명리와 지위를 누리기 위해 고난을 겪었으니 네가 겪은 고난은 어떠한 가치도, 의미도 없다. 사실상, 네가 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고 그렇게 많은 대가를 치렀는데도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패괴 성품에서 생겨난 마음과 생각조차 파악하거나 해결하지 못했다면, 생명 진입을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네가 고난을 겪은 게 가치가 있겠느냐? 아무 가치도 없다. 어떤 사람들이 겪는 고난은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진리를 얻기 위해 겪는 고난은 가치가 있다. 사람이 진리를 얻으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공급해 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름으로써 교회 사역과 하나님 집 사역이 전개되게 하고, 하나님나라 복음이 확장되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진리를 얻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행위는 전부 수확이 있으며,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인정받는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고생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으나, 그 은총은 그저 하나님의 긍휼, 관용이자 사람에 대한 후대이며, 나아가 사람에게 베푸는 은혜일 뿐이다. 어떤 은혜겠느냐? 물질적인 축복이다. 오직 그뿐이다. 이것이 네가 원하는 바더냐? 이것이 네가 하나님을 믿는 최종 목적이더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날부터 네가 바란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 물질적인 축복뿐이었느냐? 너는 이러한 것들을 원하느냐? 이것이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추구하는 것들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네가 구원받는 것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보아하니 너희는 생각이 분명하고, 무엇이 핵심이고 가장 중요한지 이해하는 것 같구나. 또 어리석지 않으며, 무엇이 가볍고 무엇이 중한지 잘 아는 것 같다. 하지만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지는 아직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은혜나 하나님의 관용, 긍휼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엇을 얻어야 하느냐? 구원받아야 한다. 그럼 구원받는 지표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은 무엇이겠느냐? 어떻게 해야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렇기에 천 번, 만 번을 말해도, 네가 아무리 많은 고난을 겪고 아무리 큰 대가를 치러도, 아무리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라고 자처할지라도, 마지막에 패괴 성품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면, 이는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또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기에 패괴 성품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네가 구원받는 길에 전혀 들어서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을 구원하는 이 모든 사역이 네게서 어떤 수확도, 어떤 증거도, 어떤 성과도 거두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네가 고생하고 대가를 치렀기에 나는 이미 네가 이번 생에서 받아야 할 은혜와 축복, 보살핌, 보호를 내려 주었다. 하지만 사람이 구원받은 후 얻어야 하는 것은 너와 무관하다. 어째서겠느냐? 나는 네가 이번 생에 얻어야 할 것을 전부 주었다. 하지만 너는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서지 못했기에 구원받은 후 얻어야 하는 것은 얻을 수 없다.”라고 말할 것이다. 너는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며, 진정한 피조물이 되지도 못했으니 하나님은 너를 원치 않는다. 하나님이 얻으려는 사람은 그저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고 뛰어다니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약간의 진심과 믿음만 갖춘 것으로 그만인 사람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 속에서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고 힘만 쓰는 사람은 너무도 많아 셀 수가 없다. 하나님이 예정하고 택한 사람, 하나님이 하나님 집으로 데려온 사람은 누구든 원치 않는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어째서겠느냐? 이는 너무도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 힘쓰거나 힘을 들이는 사람이 매우 많은 것이다. 적그리스도나 악인조차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바울처럼 말이다. 바울 같은 사람이 많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가 교회에 가서 “당신이 하나님을 위해 뛰어다니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고자 한다면 훗날 의의 면류관이 당신을 위해 예비되어 있을 것입니다.”라고 떠벌린다면, 모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겠느냐? 무척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마지막에 구원하는 사람, 하나님께 구원받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그저 힘만 쓰는 단계에 머무르면서 오직 하나님을 위해 힘만 쓰기를 바란다. 바꿔 말하자면, 그 사람들은 단순히 힘을 내는 것으로 복과 은혜, 축복을 얻으려 할 뿐, 생존 방식과 살아가는 방식, 생존의 토대를 바꾸려 하지는 않는다. 또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 패괴 성품을 바꾸고,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으려 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 사람들은 오로지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모든 것을 버리고 바치고 대가를 따지지 않은 채 전부를 희생하고자 했다고, 어떤 식으로 힘을 내는 것이든 전부 원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네가 그에게 자신을 인식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패괴 성품을 해결하고 육을 저버리고 진리를 실행하라고, 니느웨 사람들처럼 손으로 행하는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라고 한다면, 이는 더없이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는 무척 어려운 문제 아니겠느냐? 하나님은 이토록 많은 사역을 하고 이토록 많은 말씀을 했다. 그런데 사람은 왜 진리 추구를 힘들게 여기겠느냐? 왜 시종일관 무감각하겠느냐? 몇 년이나 설교를 들었으면서도 변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고, 마음속 깊이 하나님을 향해 진실로 회개해 본 적이 없으며, 진정으로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본 적도 없다. 또한, 일을 바라보고 처리할 때 단 한 번도 자신의 관점을 내려놓고 진리를 구한 적이 없으며, 자신의 관점을 바꿔 하나님께 회개하는 태도로 모든 일을 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많은 일을 체험하고 많은 사역을 하며, 오랜 기간 본분을 이행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떤 증거도 말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식과 체험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체험과 인식을 이야기하면 몹시 난감하고 무기력하며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람이 진리를 인식하지 못했거나 진리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힘만 내는 것은 더없이 간단하고 쉬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위해 힘만 쓰고자 하지, 진리 추구를 택하지 않는다.

그럼 진리 추구란 대체 무엇이더냐? 이렇게 많은 말을 했는데,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 정의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정의할 수 있느냐? 이 정의는 무척 간단하지 않겠느냐? 그저 묵상하고 토의하고 단어를 곱씹으면 그만이겠느냐? “진리 추구는 큰 주제입니다. 몇 마디로는 확실히 말하기가 쉽지 않죠. 저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단어로 형용할 수 있을까요? 진리 추구는 큰일이니, 위대한 차원의 단어로 형용하거나 정의를 내려야 적합할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겠죠!”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것이 필요하겠느냐?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럼 너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로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 정의해 보아라. (진리로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이 진리 추구입니다.) 그것을 정의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말한다면 결론을 내리는 것 아니냐? 제대로 정의할 수 있겠느냐? 정의를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로, 공을 들여 묵상해야 한다. 진리 추구란 무엇이더냐? 그럼 정의해 보도록 하자. 인류의 언어 중 간단하고 통속적이며 삶에 가까운 것이 최고의 언어이다. 우리는 외계어를 말하는 것도, 뭔가 위대한 단어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 용어로 유창하고 통속적이고 이해하기 쉽게, 한 번 듣고 이해할 수 있게 말할 것이다. 미성년자나 바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정상적인 사유가 있는 성년이라면 모두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 이것을 통속적이라고 하며, 생활 용어라고 한다. 그럼 진리 추구란 무엇이더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 바로 진리 추구이다. 이것이 바로 정확한 정의이다. “진리 추구는 무엇이더냐?”라고 물을 때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 추구의 정의이다. 간단하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온종일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두고 교제했습니다. 그런데 정의가 그 한마디라니, 그렇게 간단하단 말입니까?” 그렇게 간단하다. 그렇게 간단한 정의가 이렇게 많은 화제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 화제들은 모두 진리 추구와 관계가 있다. 이 화제에는 사람의 어려움과 사상, 관점이 포함되어 있으며,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갖다 대는 갖가지 핑계와 이유, 방식, 태도가 포함되어 있고, 패괴 성품으로 인해 사람이 진리 추구라는 일에 대해 보이는 반감과 거부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진리 추구라는 이 화제에는 사람에게 알려 주는 진리 추구의 몇 가지 길과 절차 또한 포함되어 있다. 진리 추구의 길은 무엇인지, 진리 추구로 얻을 수 있는 성과는 무엇인지, 사람에게서 볼 수 있고 사람이 살아 낼 수 있는 진리 실제는 과연 무엇인지 등등의 것들 말이다. 최종적인 성과는 바로 사람이 진리 추구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함으로써 하나님 말씀과 사역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체험 간증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성과이다. 이 간증은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하는 성과이면서 한편으로는 진리를 추구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성과이다. 즉, 사람의 패괴 성품이 서로 다른 정도로 해결되는 것 말이다. 예를 들어, 여태까지 더없이 교만하던 사람이 있었다고 해 보자. 일 처리가 제멋대로이며, 독단적으로 결정해 왔는데, 하나님 말씀을 읽고 그것이 패괴 성품이라는 것을 이해하여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패괴 성품이 남과 자신에게 끼치는 해악을 조금씩 인식했다. 작게는 사람에 대한 해악이요, 크게는 교회 사역에 대한 방해이자 교란, 파괴라는 사실 말이다. 이것은 한 측면의 성과로,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깨달은 후에 알게 된 것이다. 이 밖에도 사람은 하나님 말씀의 폭로를 기초로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정하게 된다. 그 후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 속에서 점차 회개하고, 여태까지의 자신의 생활 방식과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관점을 포기한다. 또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실행의 원칙과 길을 찾아 하나님이 준 실행 원칙대로 일을 행한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회개이고, 진실로 돌아선 것이며, 하나님 말씀에 따라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일을 처리할 때 진리 원칙을 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는 한 가지 측면의 실제를 살아 내게 되는 것이다. 이는 교만한 성품을 해결하는 측면의 사례로, 최종적으로 거두는 성과는 바로 더 이상 교만하게 살지 않고, 양심과 이성을 갖추며, 진리 원칙을 구하고, 진리에 진실로 순종하는 한편, 더 이상 패괴 성품에 주도되어 실행하고 살아 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준칙으로 하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를 살아 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과이다. 이 성과는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이루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이루는 것은 이러한 측면의 성과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기에 사람이 이렇게 살아 내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진실한 증거이자 피조물이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 폭로를 겪고 얻은 성과이고 진실한 증거이다. 이는 하나님에게 영광스러운 일이다. 물론, 사람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저 명예로운 일, 빛나는 일이며, 피조물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때 마땅히 해야 할 증거이자 살아 내야 할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이룬 긍정적인 성과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이런 체험과 인식, 살아 냄을 하나님 사역이 이룬 성과로 본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이는 사탄을 깨부수는 강력한 증거로, 하나님이 좋아하고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관해 정의했다. 진리 추구라는 말을 정의함으로써 너희는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좀 더 현실에 가까워졌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진리 추구에 대한 정의를 이해했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너희의 추구를 어떻게 바라봐야겠느냐? 아마도 절대다수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이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좀 언짢지 않으냐? 앞에서 한 말을 다시 한번 읽어 보아라. (진리 추구란 무엇이더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는 그 말을 정확히 이야기했다. 다시 묵상해 보아라. 그 말이 옳으냐? (그렇습니다.) 그 말에 근거하여 지난날 너희가 추구하고 실행했던 것들을 판단한다면 결과가 어떻겠느냐? 지금 너희에게 진리 실제가 있는지 알게 될 것이고, 지금 너희의 행동이 진리 추구가 맞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추상적이지 않다. 그렇지 않으냐? 무척 통속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 말은 일상에서 널리 쓰는 말이라서 평범한 사람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 말이 언뜻 이해하기 쉬워 보여도 사람에게는 한 가지 어려움이 있다. 어떤 어려움이겠느냐? 이해한 후 마음이 불편하고 언짢아진다는 것이다. 어째서 언짢아지겠느냐? 여태까지 자신이 받은 고난과 치른 대가들이 전부 정죄된다고, 헛되이 고생했다고 생각하여 마음의 평온을 잃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아이고, 진리 추구를 그렇게 정의하는군요. 그 정의에 따르면 여태까지 저희의 헌신은 모두 헛수고가 되는 것 아닌가요? 당신이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으셨다면 저희는 스스로 무척 잘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당신이 그렇게 정의하셨으니, 저희가 추구하고 대가를 치른 것이 전부 물거품이 되는 것 아닙니까? 면류관과 상을 얻겠다는 꿈은 전부 깨지는 것 아닙니까? 진리를 깨달았으면 복을 얻고 꿈을 이뤄야 하는데, 어째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겁니까? 어째서 어둠 속에서 아무 희망 없이 살아야 하는 겁니까? 저희의 과거와 현재가 전부 정죄되었습니다. 게다가 미래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복받을 희망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정말 이런 것이겠느냐? 사람의 이런 생각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야겠느냐?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한 가지 좋은 일이 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진리 추구의 정의를 여러 번 읽은 후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살피고 또 미래를 내다보면서 마음이 언짢아진다는 것은 네가 무감각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너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할 줄 알고, 자신의 앞날을 위해 계획하고 고민하고 초조해하고 마음 졸일 줄 안다. 이는 좋은 일로, 네가 아직 살아 있다는 의미이다. 너는 살아 있는 사람이고, 네 마음은 죽지 않았다. 어떻게 말하든, 진리 추구의 길을 얼마나 분명히 교제해 주든 꿈쩍하지 않으면서 마음속으로 ‘내 몸뚱어리가 복을 받든 화를 입든 상관없어. 어떻게 심판받고 정죄되든 괜찮다고. 될 대로 되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걱정스럽다. 어떻게 말해도 이렇게 무감각한 것은 큰 문제다. 무엇을 두고 문제라고 하겠느냐? 네가 진리를 어떻게 교제하든 그는 알아듣지 못하는, 영이 없는 죽은 자이다. 하나님을 믿는 일, 진리를 추구하는 일, 구원받는 일,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그는 머리가 꽉 막혀 있고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음치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색맹에게 색 배합을 가르치는 것처럼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말씀을 교제하는 것이 그에게는 어떤 의미도, 가치도 없다. 네가 어떻게 말하든, 네 말에 깊이가 있든 없든, 세부적이든 두루뭉술하든 그에게는 어떤 차이도 없이 무감각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치 장님에게 안경을 씌워 주는 것처럼 쓰나 안 쓰나 똑같다. “겨울이 왔는데 봄이라고 멀리 있겠는가?”,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 마당에 사는 게 두려울쏘냐?”, “손을 흔들며 구름 한 점 가져가지 않으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전부 영이 없는 죽은 자가 한 말로, 그들은 똑똑한 척하지만, 영적인 단어로 말하자면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그는 ‘진리 추구니,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니 하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 마당에 사는 게 두렵겠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마는 자는 바로 죽은 사람이다. 진리 추구라는 일의 정의는 이러하다. 네가 정의를 본 후 앞으로의 길을 어떻게 계산하고 계획하든, 혹은 어떤 변화가 생기든 모두 너 개인의 추구와 관련이 있다. 내가 해야 할 말, 해야 할 사역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나는 해야 할 말을 다했고, 적게 말하지도 않았다. 만약 너희가 정말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려는 뜻이 있다면, 내가 이야기한 진리 추구의 정의를 너희가 평소에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추구 목표나 방향, 혹은 참고로 삼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를 통해 조금씩 하나님 말씀의 실제와 진리 실제에 진입하면 머지않아 진리 추구의 길에서 수확을 얻을 것이다. 어떤 이는 “진리 추구는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다.”라고 하는데, 이 말 역시 정확하지 않다. 하나님의 사역이 끝난다면 진리를 추구해 봤자 늦을 것이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진리 추구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기 전에,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역이 끝났다는 종을 울리기 전에 해야 한다. 이 말은 성립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고 하나님이 “나는 더 이상 사람을 구원하는 어떤 사역도 하지 않을 것이고, 사람이 구원받는 데 도움이 되며, 그것과 관련 있는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더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겠다.”라고 하면, 하나님의 사역이 정말 끝나게 된다. 그때 가서 진리를 추구하면 정말 늦다. 어찌 됐든 지금부터 진리를 추구하면 아직 시간이 있고, 구원받을 기회가 있다. 지금부터 네 최대한의 노력을 하되,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조금씩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삼고 진리를 준칙으로 삼아라. 단기간 안에 사람의 패괴 성품을 드러낸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읽고 이해하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하려고 노력해라. 이는 생명 진입에 크나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인류의 패괴 성품을 폭로하는 하나님 말씀 가운데 적그리스도의 성품과 관련된 말씀이 가장 기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말씀을 근거로 무엇을 하겠느냐? 스스로를 정죄하겠느냐? 스스로를 저주하겠느냐? 네 앞날과 운명을 박탈하겠느냐? 아니다. 네 패괴 성품을 인식해야 한다. 이 관문은 모두가 통과해야 하니 도망치지 마라. 모두가 통과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모두가 부모에게서 태어나 성장하고 늙고 죽어가는 것처럼, 이 하나하나의 관문은 누구나 통과해야만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 일이 어느 정도로 중요하겠느냐? 사람이 평소에 식사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만약 식사를 중단한다면 네 육체는 살아남을 수 없고, 네 생명은 계속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한다.”라는 것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해 관점과 행동, 실행이 생겨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다는 것은 진리를 준칙으로 한다는 것과 같다. 그럼 이 정의에서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한다’는 것으로 충분할 텐데 왜 ‘진리를 준칙으로 한다’는 말이 추가된 것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 중 언급하지 않은 세부적인 문제가 있으면, 진리 원칙을 구하고 원칙 안에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절대 틀릴 수 없다. 절대 틀릴 수 없는 결과를 얻기 전에, 사람은 스스로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는 한편, 자신의 패괴 표출과 패괴 본질을 인정해야 한다. 그 후, 진실한 회개를 하고 참되게 돌아서야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이는 사람이 식사하는 것과 같다. 음식을 입에 넣고 식도로 넘겨 위로 보내 소화하고 흡수해야 조금씩 혈액 안으로 들어가 몸에 필요한 영양분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여 진리를 준칙으로 하고, 그것을 실행하고, 진리를 살아 내어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일련의 정상적인 과정은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이 어떤 진리를 추구하든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이다. 어떤 이는 “저는 진리를 추구할 때 그러한 절차와 과정이 필요 없습니다. 저는 바로 진리를 구해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를 제 실제로 삼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런 식의 이해는 너무 단순하다. 하지만 만약 정말 그렇게 해서 성과를 낸다면 당연히 더 좋을 것이다. 이는 네가 평소에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이미 어느 정도의 인식과 성과를 쌓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성찰하고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등의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진리 원칙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곧바로 진리 원칙을 구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분량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서 분량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자신의 패괴 성품에 진실한 인식이 있으며,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을 인식하거나 회개하거나 뉘우칠 필요 없이 바로 진리 원칙을 깨닫는 것이다. 그다음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면 그만이다. 이는 평범한 사람의 분량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적어도 이미 하나님의 엄한 심판과 형벌, 징계, 시련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께 순종하며 온전케 되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패괴를 인식한 후 인정하고 회개하고 돌아서는 등의 과정이 필요 없다. 그럼 너희는 어떠하냐? 너희 대부분은 자신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지 않겠느냐?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면 승복할 수 없고,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며, 진실한 회개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진실로 회개하지 않는데, 진리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럼 너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이 말씀들을 교제하고 나니 진리를 추구하는 이 일에 대해 어느 정도 길이 생겼느냐? 추구할 자신이 생겼느냐? (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전혀 생기지 않았을까 봐 걱정되었다. 혹자는 이 설교를 듣고 소극적으로 변해 ‘아이고, 나는 자질도 떨어지고 설교를 들어도 이해가 안 돼. 도리만 좀 알게 될 뿐이지. 아무래도 영적인 이해력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진리 추구에 대해 항상 의욕이 없고, 본분을 이행하면서는 그저 힘을 좀 낼 수 있을 뿐이야. 나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고, 패괴 성품으로 점철되어 있어. 이건 바뀌지 않을 것 같아. 이렇게 하자. 힘쓰는 자가 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소극적인 사상을 지닌 사람이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겠느냐? 내가 보기엔 좀 위험하다. 이 소극적인 사상이 바로 진리 추구의 가장 큰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해결하지 않는다면, 이 길이 아무리 좋아도 들어서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 추구의 길에서 여러 차례 실패하고 쓰러진 뒤 결국 낙담하여 ‘관두자. 추구하지 말자고. 나는 복받을 팔자가 아닌가 봐. 하나님도 ‘너는 복받을 만한 오관을 가졌느냐?’라고 말씀하셨잖아? 거울을 보면 나는 외모가 평범하고 눈도 또렷하지 않아. 오관도 단정하지 않고. 기개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지. 아무리 봐도 복 있는 사람 같지가 않잖아. 하나님이 예비해 놓지 않으셨으니, 사람이 아무리 추구해도 소용없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 상태를 보면 내면에 해결되지 않은 추한 것들이 이렇게 많다. 그런데 어찌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겠느냐? 진리 추구는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이다. 가장 금기시되는 것은 바로 언제나 복받는 것과 연관 짓는 것이다. 먼저 복받으려는 속셈을 해결해야 한다. 그러면 진리 추구의 길이 한결 여유로워질 것이다. 진리 추구에서 가장 핵심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의 선택을 따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요구대로 노력하며 베드로를 본받아라. 현재를 밝히 알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신이 현재 드러내는 패괴 성품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지금 당장 진리를 구해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먼저 그것을 철저히 해부하고 인식한 후 하나님께 회개해라. 회개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그래야 실제로 성과가 생긴다. 네가 “하나님, 저는 회개하고자 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만 하면서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괜찮겠느냐? (그래선 안 됩니다.) 만약 네가 늘 하나님께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괜찮다. 그대로 하거라.”라고 말씀하길 바란다면, 언제나 이런 상태로 살아간다면, 진리에 진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하고 회개해야겠느냐? 길이 있느냐? 이 부분에 체험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말해 보아라. 없느냐? 아무래도 너희는 평소 회개의 기도를 하거나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 본 적이 없는 것 같구나. 그럼 너희는 어떻게 자신의 바람과 속셈을 내려놓고 패괴를 해결하느냐? 실행의 길이 있느냐? 예를 들어, 교만한 성품을 해결할 길이 없다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에게는 교만한 성품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훌륭하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이 제 말을 들었으면 합니다. 이건 너무도 비이성적입니다. 저는 이것이 교만함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일까요? 저를 징계하고 질책해 주십시오. 저는 교만함과 제 뜻을 내려놓고 당신의 뜻을 구하며, 당신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여 제 생명과 일 처리의 원칙으로 삼고, 당신의 말씀을 살아 내겠습니다. 저를 인도하고 도와주시며 이끌어 주십시오.” 이 말에 순종하는 태도가 있지 않으냐? 순종의 뜻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 한 번으로는 소용없습니다. 일이 닥치면 여전히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면서 제가 주도하고 싶어지는걸요.”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계속 기도해라. “하나님, 저는 너무 교만하고 패역합니다. 저를 징계하여 악을 행하는 발걸음을 멈추게 해 주시고, 제 교만한 성품을 제한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말씀을 살아 내며, 당신의 말씀과 요구대로 행동하고 실행하도록 저를 인도하고 이끌어 주십시오.” 몇 번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간구하여 하나님이 행하도록 하여라. 네 말과 마음이 간절할수록, 육과 자신을 저버리겠다는 소망도 커질 것이다. 이 소망이 네 뜻대로 행동하겠다는 생각을 억누를 때, 네 마음은 점차 돌아설 것이다. 마음이 돌아서면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 원칙대로 행동할 희망이 생긴다. 비록 네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지는 않더라도, 네게 무언가 지시하거나 약속하지는 않더라도, 하나님은 네 마음과 말하는 속셈을 살피고, 네가 하는 말이 간절하고 진실한지, 네가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는지 살핀다. 네 마음이 정직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살피면 네 요구와 기도에 따라 너를 인도하고 이끌어 줄 것이다. 물론 너를 질책하고 징계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네 기도대로 이루어 줄 때, 네 마음은 깨우침을 얻고 얼마간 변화할 것이다. 반대로 만약 네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할 때, 진심을 다하지 않고 마음에 진실로 회개하려는 바람이 없으며, 그저 입으로만 대충 건성으로 한다면, 하나님은 네 마음을 살피면서 네게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며, 너를 혐오하여 버릴 것이다. 그때도 너는 하나님이 네게 무슨 말씀을 하는지, 무엇을 행하는지,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 알 수 없겠지만, 네 마음이 정직하지 않기에 하나님은 네게 아무것도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역사하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네 마음도 네 뜻처럼 회개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전혀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그럼 너는 현실적으로 처한 환경 속에서, 그리고 네게 닥친 일 앞에서 진리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람의 뜻과 패괴 성품을 따라 행동할 것이다. 또 계속 네 마음이 생각하고 바라는 대로 행동하고 실행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한 결과가 기도 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여전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전혀 돌아서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사람의 주관적인 노력과 진리를 깨닫는지 여부가 무척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마음속으로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고자 하지만 어려움을 느낄 때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한편, 자신의 진심과 진실한 기도를 바치는 것 역시 무척 중요하다. 이는 빠져서는 안 될 부분이다. 만약 네가 대충 건성으로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기도한다면, 네 마음 역시 기도 때 한 말처럼 하나님을 무성의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네게 아무것도 역사하지 않고, 너를 신경 쓰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해도 하나님은 절대 “괜찮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네 무성의한 말을 듣고 물을 것이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더냐? 네 계획은 무엇이냐? 회개하겠느냐? 손으로 행하는 악을 내려놓고 돌아서겠느냐? 네 뜻과 계획, 이익을 내려놓고 당장 돌아서겠느냐? 너는 의지를 갖고 돌아설 수 있느냐?” 이 과정에서 너는 하나님의 어떤 질문도 듣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네가 하나님께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방금 내가 말한 태도로 그렇게 추궁할 것이다. 어떻게 추궁하겠느냐? 이어서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한 후, 어떻게 행동하고 선택하는지, 진실로 자신의 패괴를 인정하고 증오하여 참되게 회개하는지,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떤지, 자신의 패괴 성품을 어떻게 보며 관점은 어떠한지, 네 잘못된 관점과 행동을 버릴 생각이 있는지, 네 선택은 무엇인지, 진리 추구의 길을 걷기로 선택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원칙을 지킬 것인지,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지 등을 관찰할 것이다. 하나님은 네 일련의 거동과 계획, 선택을 지켜보는 한편, 선택을 내린 후의 네 행동이 과연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인지 지켜볼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핵심적인 문제이다.

사람이 회개하기로 선택했다면 도대체 어떻게 돌아서야겠느냐? 자신의 뜻과 사상, 관점, 낡은 행동을 버림으로써 진리를 실행하고 진실한 변화를 이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돌아선 것이다. 만약 네가 입으로는 돌아서겠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여전히 네 뜻을 고집하고 진리를 포기하며 계속 여태까지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은 진실로 돌아선 것이 아니다. 네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만 할 뿐, 그 후 일련의 행위를 보면 여전히 네 뜻대로 선택하고 행동하고 실행하고 살아 내며 전부 진리와 어긋난다면, 하나님은 너를 어떻게 정의 내리겠느냐? 너는 돌아서지 않았다. 최소한 하나님은 네게 돌아설 뜻이 없다고 할 것이다. 비록 네가 하나님께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저 모면하려는 말일 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온 회개나 참회가 아니다. 그것은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태도가 아니라 빈말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네가 뭐라고 하는지 듣지 않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 도모하는 것을 본다. 네 일 처리의 근거와 원칙이 여전히 진리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보았을 때, 하나님은 너에 대해 진실하고 현실적이고 정확한 규정을 할 것이다. “너는 돌아서지 않았고,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이 말을 할 때, 너를 이렇게 규정할 때, 하나님은 더 이상 너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더 이상 너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나날에서 네 마음은 어두울 것이요, 어떤 일을 하든 깨우침과 빛 비춤이 없을 것이다. 패괴 성품을 드러내고도 어떤 자각이나 징계 없이 그대로 계속 무감각하고 둔하게 지낼 것이다. 너는 공허하고 기댈 데 없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계속 제멋대로인 행위를 방임하고 네 패괴 성품이 팽창하고 아무렇게나 커지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결과이다. 이런 행동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마지막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버린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 바로 이런 결과를 마주하게 된다.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명확하게 뭐라고 지시하지도 않지만, 사람 스스로 느낄 수 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 현실 상태, 그리고 진리를 대하는 태도로 볼 때, 그 사람의 상태는 무감각하고 둔하고 강퍅할 것이다. 사람은 이러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니 너희의 실행과 실생활에 대조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보거나 살펴봐도 무방하다. 하나님께 전혀 돌아서지 않았을 때, 너는 감언이설로 하나님께 듣기 좋은 말을 수도 없이 늘어놓겠지만, 그때 네가 처한 상태와 상황은 어떠하겠느냐? 네 마음이 진실로 돌아섰을 때, 네 기도에는 감언이설과 듣기 좋은 말이 없고, 그저 마음속에 있는 말만 좀 들어가 있을 것이지만, 이때 너는 또 어떤 상태와 상황에 처해 있겠느냐? 이 두 가지 상태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일상생활 속에서 무엇을 하라고 명확하게 지시하거나 무슨 말씀을 하지는 않아도, 성령 역사와 성령이 행하는 모든 일, 나타내려는 모든 뜻을 사람은 일상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방관자 역시 알아챌 수 있다. 무감각하고 둔하던 사람이 갑자기 무척 똑똑해진다거나, 평소 매우 똑똑하던 사람이 갑자기 무감각하고 둔해지며 맞는 게 하나도 없어진다거나 하는 이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상태와 상황이 한 사람, 또는 서로 다른 사람에게서 동시에 나타난다. 이러한 일은 자주 발생한다. 여기에서 사람이 똑똑한지 아니면 어리석은지는 대부분 사람의 머리나 사상, 자질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알아들었느냐? (알아들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체험하지 않으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체험하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깊이 있게 체험할수록 네 깨달음도 분명해질 것이며, 이 일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행사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은 너에게 명확하게 지시하거나 알려 주거나 말씀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이 네게 아무 태도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며, 네가 어떤 생각이나 사상, 상태, 태도를 보일 때 하나님이 아무 관점도 갖지 않는다는 의미 역시 아니다. 어떤 일이 닥쳐 개인적인 속셈과 계산이 생길 때, 사람의 패괴 성품이 여실히 드러날 때, 이럴 때가 바로 스스로를 반성하고 진리를 구해야 할 때이며, 하나님이 사람을 감찰하는 중요한 때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럴 때는 네가 과연 진리를 구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 진실로 회개할 수 있는지가 가장 잘 드러난다. 그때, 너는 스스로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진실로 회개하고자 하며, 하나님께 진실한 태도를 보여야지,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무성의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무성의한 게 아니라 진실로 회개하는 태도이다. 만약 네게 어려움이 있다면 한 걸음 한 걸음 돌아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너를 도와주고 인도하고 이끌어 주어 진리를 받아들이고 추구하는 길을 걷게 할 것이다. 물론, 네가 입으로만 회개한다고 하거나, 회개할 마음은 있어서 속셈과 욕망을 내려놓으려고 하지만 진실한 마음이 없고 그렇게 행동할 의지도 없다면,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에 ‘반드시’라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네게 자유를 주고, 선택의 여지를 준 후 기다린다. 무엇을 기다리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회개할 마음이 있는지를 본다. 네게 회개할 마음이 있다면, 언제 회개할 것이냐? 네 회개의 모습은 무엇이냐? 회개할 계획이 있고 회개하고자 하지만, 일을 할 때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지위를 잃지 않으려 한다면, 이는 분명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이 아니며, 성의도 없는 것이다. 그저 약간의 바람만 있을 뿐, 진실한 회개는 없다. 회개할 계획만 있고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네게 역사하겠느냐?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럼 너는 언제 회개할 계획이냐?”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너도 모른다. 하나님이 네게 다시 묻겠느냐? 그럴 리 없다. 하나님은 “너는 진심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구나. 그럼 기다려라.”라고 말할 것이다. 너는 회개할 계획도, 바람도 없고 자신의 지위와 이익을 내려놓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럼 좋다. 네게 자유를 줄 테니 마음대로 선택해도 된다.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알아 두어라. 니느웨 사람들과 같다. 돌아서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겠느냐? 파멸될 것이다. 지금 너는 회개할 계획만 있을 뿐, 아직 회개의 실질적인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으니, 하나님은 너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왜 너를 신경 쓰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네게는 진심이 없구나. 너는 태도를 밝히지 않았고, 네 마음은 여전히 거기에서 흔들리고 있다.”라고 말할 것이다. 비록 네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후 회개하고 싶다고 했어도, 그저 그런 생각만 하고 빈말만 했을 뿐, 어떤 행동이나 구체적인 계획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 같은 사람은 한쪽에 치워 두겠다. 신경 쓸 필요가 없구나. 네 마음대로 하거라!”라고 말할 것이다. 언젠가 네가 깨닫고 ‘이런, 회개해야겠다.’라고 생각했다면 어떻게 회개해야겠느냐? 하나님이 네 말 한마디에 속아 맹목적으로 행사하면서 “그가 회개할 마음을 먹었구나. 그에게 축복을 내려 줘야 할까?”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관찰할 것이다. 네게 회개할 생각과 뜻이 있고, 그 생각이 예전보다는 좀 더 강해졌다고 해도 언제쯤 회개할지는 알 수가 없다. 너에게 아직 회개할 구체적인 절차나 계획이 없다면, 이는 진실한 회개가 아니다. 너는 실제로 행동해야 한다. 네가 실제로 행동할 때, 하나님은 네 행동에 따라 역사할 것이다. 하나님이 행사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원칙이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사역할 때 사람은 깨우침을 얻어 눈이 빛나며,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사람이 얻는 것은 백 배, 천 배나 되니, 정말 축복받은 것이다. 그럼 사람이 얻는 이러한 성과는 무엇을 기초로 하겠느냐? (사람의 진실한 회개를 기초로 합니다.) 그렇다. 마음으로 진정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참된 회개를 한다면, 악을 행하는 발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행하는 악과 자신의 욕망,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참회하고, 하나님의 요구와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사람은 비로소 돌아서는 실제에 들어서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회개이다.

방금 교제한 내용은 모두 사람의 진리 추구 과정에 흔히 존재하는 문제이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의식하고 인식할 수 있는 문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 문제들은 여태까지 많이 설명하거나 해부하지 않았고, 나아가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도 않았지만,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체험하는 모든 절차와 서로 다른 태도, 상태에 대해 하나님은 상응하는 말씀과 사역, 상응하는 대응 방법과 해결 방식이 있다. 사람은 그러한 일들을 어느 정도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으니 하나님을 오해하지도, 하나님께 어떤 비현실적인 관념이나 상상을 품지도 마라. 이 밖에, 진리 추구와 관련된 모든 절차, 행동, 실행 방법에 있어 하나님은 사람에게 충분한 자유와 선택의 권리를 주며, 강요하지 않는다. 비록 그 말씀과 요구들이 문자로 쓰여 명확하고 정확하게 전달되지만,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진리를 어떻게 대할지는 여전히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는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면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지만,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지 않고, 그러한 진리를 신경 쓰거나 마음에 두지 않으며, 진리 추구의 실행법에도 전혀 흥미가 없다 해도 괜찮다.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는다. 네가 힘을 들이고 싶어도 상관없다. 원칙만 어기지 않는다면, 하나님 집은 너 스스로 선택하게 한다. 진리 추구와 구원받는 것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진리 추구에 관심이 없고, 어떤 생각이나 계산, 계획도 없다. 그럼 그 사람들이 정죄되겠느냐? 그렇지도 않다. 그들이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조건을 갖추었다면 계속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해도 된다. 하나님 집은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네 본분 이행의 권리를 박탈하지 않는다. 그저 그 본분 이행의 성질이 지금까지 힘들인 것으로 규정될 뿐이다. 힘들인 것이라는 말이 듣기에는 좋지만, 이는 하나님 집의 용어로, 실은 아르바이트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면 돈을 벌 수 있잖아요.”라고 하는데, 그렇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 그럼 네 보수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주는 수많은 은혜, 그것이 바로 네 보수이다. 진리 추구라는 일에 있어서 네가 어떤 계산, 계획, 바람을 갖고 있든, 지금 명확하게 알려 주겠다. 너는 자유롭다. 진리를 추구해도 되고,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진리를 추구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으며,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희망이 제로이다. 사실이 이러하다. 이 사실은 반드시 알려 줘서 너희가 분명하고 명확하고 정확하고 똑똑히 마음에 새기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구원받는 희망이 과연 무엇을 기초로 세워지는지 마음속으로 명확히 알게 해야 한다. 만약 네가 힘을 들이는 데만 만족하면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하나님 집에서 출교되지만 않으면 돼. 진리 추구같이 어려운 일에 마음 쓸 필요 없다고.’라고 생각한다면, 이 관점이 제대로 설 수 있겠느냐? 지금 네가 하나님을 믿거나 본분을 이행하기는 해도, 끝까지 따를 자신이 있느냐? 뭐라고 말하든 진리 추구는 인생의 큰일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자녀를 키우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돈을 버는 것보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며 앞날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천 번, 만 번 말하건대, 진리 추구는 인생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너희가 지금 진리 추구의 이 일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너희를 규정하면서 너희가 앞으로 진리를 추구하지 못할 거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나 또한 너희가 지금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영원히 진리를 추구할 수 없다고 규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런 일이 아니다. 그런 논리 관계는 없으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찌 됐든 너희가 머지않은 미래에, 나아가 지금 당장, 진리 추구의 길을 걷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구원받을 희망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진리 추구와 구원받는 일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므로 진리 추구에 관련된 화제는 사소하지 않다. 비록 자주 하는 평범한 화제이기는 하지만, 이것과 관련된 진리는 매우 많다. 이 화제는 사실 사람의 앞날이나 운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런데 수시로 교제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은 진리를 추구할 때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각각의 진리와 문제들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다. 그저 사람이 좋다고 여기는 갖가지 행위와 방법, 비교적 진취적이고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일부 사상이나 관점 등을 진리로 여겨 되는대로 추구할 뿐이다. 이는 틀려도 크게 틀린 것이다. 많은 사람이 좋고 옳고 바르다고 여기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부 진리가 아니다. 어떤 것들은 기껏해야 진리에 부합할 뿐, 진리라고 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진리 추구라는 일을 크게 오해하고 있으며, 내면에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인식과 편견이 수없이 많다. 그렇기에 분명히 교제하는 한편, 사람에게 여기에서 깨달아야 할 진리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 방금 교제한 진리 추구와 관련된 이런 구체적인 내용을 통해 너희는 뭔가 생각이 있게 되었느냐? 계획이나 계산이 있느냐? 이런 교제를 통해 무엇이 진리 추구인지 구체적으로 정의한 후, 많은 사람이 지금껏 자신이 행동하고 드러낸 것들과 앞으로 하려고 하는 것들에 막막함을 느끼고 언짢아한다. 심지어는 희망이 없어졌다고, 도태될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리를 분명하게 교제했는데 오히려 힘을 잃은 것이다. 그런 상태가 올바르냐? 정상적이냐? (비정상적입니다.) 만약 네가 지금까지 진리를 추구했다면, 이런 교제를 듣고 나서 검증을 얻었을 것이다. 그럼 더욱 힘이 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힘을 잃었다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힘을 잃은 근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분명하고 확실히 교제할수록 사람에게는 더욱 길이 생긴다. 그런데 왜 길이 생기는 상황에서 힘을 잃겠느냐? 여기에는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겠느냐? (진리 추구가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추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추구하려고 하지 않기에 힘을 잃은 것이다. 그럼 여태까지 해 온 것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정죄됩니다.) ‘정죄된다’라고 말하기에는 좀 부적절한 감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결과겠느냐? 어떻게 되는 것이겠느냐?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매우 간단하다.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을 추구하고 있으며, 여전히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기대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하다.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면 마음이 언짢아진다. 그럼 이때 사람에게 올바르고 정확한 실행의 길이 있겠느냐?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소극적이 되고 책임을 내팽개치고 자포자기하는 게 옳겠느냐? 이것이 올바른 실행의 길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올바른 실행의 길이 아니다.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의 문제를 발견했다면 제때 바로잡아야 한다.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관한 교제를 통해 여태까지의 네 행동이 진리 추구와 무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마음이 언짢든 그렇지 않든 지금까지의 잘못된 실행의 길과 방식, 추구의 길을 가장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 얼른 바로잡아야 한다. 여태까지의 행동이 부정되고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며, 전부 힘을 들이는 것이 되어 진리 추구와는 상관이 없다는 얘기를 들으면 속으로 ‘아이고, 사람은 정말 어리석고 눈이 멀었구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일을 간파하지도 못하다니. 여태까지 줄곧 그렇게 하는 게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겠네. 소위 ‘진리 추구’라는 것은 다 사람의 좋은 행위이고, 육체의 각종 본능, 자질, 재능에 기대어 한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그건 진리 추구의 본질이나 정의, 요구와 거리가 아주 멀어. 아예 관계가 없다고. 이 일을 어쩌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큰 문제이니 해결해야 한다. 해결의 길은 무엇이냐? 문제가 나왔다. 여태까지 옳다고 생각한 행위와 행동이 전부 부정되고 하나님께 기억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진리 추구라고 정의하지 않는다면, 대체 진리 추구란 무엇이겠느냐? 진리 추구의 정의에 대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읽어 보고, 그 정의에서 실행의 길을 찾은 후, 그것을 자기 삶 속의 실제로 만들어야 한다. 여태까지 진리 추구를 실행하지 않았다면 지금부터는 진리 추구의 정의를 근거로 삼고, 처신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럼 진리 추구의 정의는 무엇이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다. 이 이상은 더 명확하게, 분명히 말할 수 없다. 여태까지 사람이 행한 것은 전부 무엇이더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삼았느냐? 돌아보아라. 그랬느냐? (그러지 않았습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 격으로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이렇게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 말씀을 읽고 교제했는데, 설마 정말 아무런 성과도 없는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한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이냐? 여기에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겠느냐?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겠느냐? 사람의 어떤 문제, 어떤 측면의 성품 본질을 대상으로 하겠느냐? 사람은 진리 추구의 정의를 이해하기는 했지만, 여태까지 자신의 행동이 왜 인정받지 못하는지, 왜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것으로 정의되는지 알지도,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희는 하나님의 이름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가정과 일, 자기 앞날까지 버렸지요. 어떤 사람은 좋은 일자리를 그만뒀고, 어떤 사람은 화목한 가정을 버렸으며, 어떤 사람은 좋은 사업과 막대한 수입, 유망한 앞날까지 내려놓았습니다. 이것들을 다 내려놓았어요. 이 밖에도, 저희는 하나님을 믿은 후로 겸손과 인내, 포용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남과 함께 지낼 때면 싸우지 않았고, 교회에 무슨 일이 있든 최선을 다해 임했으며, 형제자매들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든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왔습니다. 남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고, 남의 이익에 어떤 해도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요. 이런 행동들이 진리 추구와 무관하다는 말씀입니까?” 잘 생각해 보아라. 사람이 버리고 헌신하고 지불하고 포용하고 인내하고 나아가 고난을 겪은 이것들은 전부 무엇과 관계가 있겠느냐? 전부 어떻게 이룬 것이더냐? 무엇을 근거로 했겠느냐? 무엇을 원동력으로 이루었겠느냐? 돌아보아라. 이는 사람이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니, 오늘 우리가 토론하고 살펴보도록 하자. 사람이 줄곧 좋고 옳고 고매하다고 여긴 그것들이 과연 진리 추구와 관계가 있는지 보자.

먼저 사람이 버리고 대가를 치른 부분에 대해 살펴보겠다. 사람이 어떤 배경과 환경에서 버리고 대가를 치렀든, 그 원동력은 어디에서 왔겠느냐? 정리해 보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사람은 사상과 관념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헌신하고 대가를 치러야 해. 그러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지. 하나님은 사람이 안일을 탐하고 세상을 추구하면서 입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셔.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변화 없이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고.’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사람의 주관적인 소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옳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였든, 사람의 주관적인 소망은 그렇게 하는 것을 인정하고, 오직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좋아한다고, 하나님이 기뻐하고 만족할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착실하게 공들이고 노력하면서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고 헌신하고, 화복을 묻지 않고 대가를 치르며, 한결같이 희생하고 대가를 치르고 헌신하고 봉헌하면 하나님이 틀림없이 기뻐할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진한다. 또 모든 것을 불사하고 자신이 버릴 수 있는 것들을 버리고, 바칠 수 있는 것들을 바치며,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을 감내한다. 사람은 이런 행동을 하지만, 누구도 고개를 들고 하나님께 “하나님, 제 이런 행동을 원하십니까? 하나님, 제가 헌신하고 노력하고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르는 것을 인정하십니까?”라고 묻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께 이렇게 묻는 법이 없다. 하나님이 어떤 반응,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람은 일방적으로 대가를 치르고 바치고 헌신하면서 그렇게 고생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고 만족할 거라고 여긴다. 심지어는 만두를 먹는 것조차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만두를 먹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대신 옥수수빵을 먹는 것이다. 그는 만두를 먹는 것은 안일을 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옥수수빵, 마른 전병, 장아찌 같은 걸 먹어야 마음이 편해진다. 또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면 하나님도 만족할 거라고 여긴다. 자신의 느낌과 희로애락을 하나님의 느낌, 하나님의 희로애락으로 여기는 것이다. 황당하지 않으냐? 사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진리로 여겨 대하고 하나님께 강요하며, 이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라고 말하는 자들이 많다. 사람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 이상, 무의식중에 그런 말과 행위, 행동을 너무 쉽고 자연스럽게 진리라고 정의하게 된다. 또 진리라고 확신한 이상, 그것은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실행의 원칙이 된다. 사람이 그렇게 실행하고 지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된다고도 생각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면, 그 고생이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올바른 대가를 치른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만족하고 기억하는 것 아니겠느냐? 사람은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생각하는 ‘진리’와 하나님 말씀 사이의 간극, 차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관념과 상상으로 인성과 도덕, 품격에 부합한다고 여기는 모든 좋고 고매하고 올바른 것을 일률적으로 진리라고 규정한다. 그러고 나서 그 방향으로 행동하고 열심히 실행하며,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요구한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영락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당연히 틀림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와 사람이 관념적으로 좋고 옳고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어떤 관계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받드는 동시에, 자신이 관념적으로 좋고 옳고 아름답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리고 긍정적이고 사람이 제창하는 그러한 것들을 통틀어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로 여기며, 지치지도 않고 추구한다. 또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것을 추구하고 이루라고 요구한다. 사람은 지치지도 않고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진리로 삼은 후 그것들이 요구하는 기준과 방향대로 추구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미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진리 실제를 살아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진리 추구에 관한 사람의 그릇된 인식 중 한 부분이다. 이 그릇된 인식은 사람이 관념적으로 좋고 옳고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사물을 기준으로 하며, 그것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하나님 말씀의 요구, 기준을 대신한다. 사람은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삼으며, 거기에서 더 나아가 지키고 추구하기까지 한다. 이것이 하나의 문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사람의 사상과 관점상의 문제다. 사람이 그러한 일을 할 때, 그 원동력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그러한 생각과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인식을 갖도록 부추기는 근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하나님이 그것들을 좋아할 거라고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통문화는 근검절약을 제창하며, 근검절약은 사람의 미덕이라고 가르친다. “고생을 해 봐야 뛰어난 사람이 된다.”라는 말을 미덕으로 보기도 하고, “일을 할 때 주인 말대로 하지 않으면 지쳐 죽어도 공이 없다.”라는 말도 있다. 각 민족과 사람들이 좋고 옳고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라고 여기는 것을 그들은 다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것들을 진리로 여기며,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진리를 대신한다. 또 그들은 사람이 인정한, 사탄에게 속하는 것들을 진리나 하나님의 요구 기준으로 여기며, 사람이 상상하는 것, 옳다고 생각하는 이상(理想), 방향, 목표를 향해 추구한다. 이는 단단히 틀린 것이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서 비롯된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부합하지 않으며, 전적으로 진리와 어긋난다.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여기는 상황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들면 추상적이지 않고, 너희가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은 하나님을 믿은 후에 더 이상 화장을 하거나 액세서리를 하지 않으며, 화장품과 액세서리를 한쪽에 치워 두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단정해야 하니 치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집에 있는 차를 몰지 않고 자전거를 타면서 차를 타는 건 안일을 탐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여유가 있는데도 고기를 먹지 않으며, 항상 고기를 먹으면 나중에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때 소극적으로 변하고 연약해져서 하나님을 배반할 거라고, 그러니 미리 고난을 겪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밖에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 겉보기에 단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단점이나 나쁜 습관을 돌아본 후 말투를 바꾸고 성질을 자제하며, 저속하지 않고 우아하게 바뀌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에 자제하고 제약하며, 남들에게 좋은 사람, 단정한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고, 이것이 바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고 하나님이 흡족해하는 것이며 진리 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가끔 치장을 하고 쇼핑을 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을 믿으면 화장하거나 치장하고 좋은 옷을 입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화장하거나 치장하고 좋은 옷을 입으면 하나님이 혐오하고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원시 인류를 좋아하며, 산업과 현대 과학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또 시대적 흐름 같은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진리 추구라고 여긴다. 이는 치우친 이해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읽었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기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여기지 않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행동과 태도는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삼은 것이며, 사람이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로 진리를 대신하고 일방적으로 실행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실행한 후에는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자신은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후로 드라마나 뉴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심지어는 쇼핑조차 한 적이 없다. 복음을 전하고 본분을 이행하느라 건초 더미 속에서 잔 것도 여러 차례요, 개집 옆에서 묵은 것도 몇 날이나 된다. 찬밥을 먹고 탈이 난 것도 여러 번이고, 수면 부족과 영양 부족으로 살이 몇 킬로그램이나 빠졌으며, 수많은 고난을 겪었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마음에 담아 두고 하나하나 기억해 둔다. 이런 일들을 왜 그렇게 정확히 기억해 두겠느냐? 이러한 행위와 행동이 진리 실행이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거라고, 이 좋은 행위들은 모두 하나님께 인정받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원망하지 않고 거침없이 실행하며, 지치지도 않고 되새기고 반복하고 되돌아보며 마음이 충실해진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련이 임할 때,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이 사람의 뜻에 맞지 않을 때, 하나님의 요구와 행사가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을 때,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그런 것들과 사람이 치른 대가, 실행은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며, 사람이 자신에게 닥친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인식을 얻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방해물이 된다. 그 원인을 따져 보자면,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것들이 전혀 진리가 아니고, 사람이 실행하는 것 또한 진리 추구가 아님을 끝까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이 얻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저 좋은 행위일 뿐, 진리나 생명을 얻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사람은 그 좋은 행위가 바로 진리 실제라고 착각하며, 마음속으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들이 바로 진리이자 긍정적인 사물이라고 확신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확신은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다.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그런 것들을 숭상하고 맹신할수록 진리를 배척하게 되고, 하나님의 요구나 말씀과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이와 동시에 사람이 치른 대가가 많을수록 자신은 밑천이 많으며, 구원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악순환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문제의 원흉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자신의 관념을 긍정적인 사물로 여겨 하나님 말씀을 대신한 것입니다.) 사람이 관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한쪽에 치워 두며,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진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후 하나님 말씀을 읽기는 하지만, 여전히 관념과 상상에 기대 추구하고 선택하고 있으며, 하나님 말씀이나 요구대로 하나님을 믿는 길을 걷고 있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관념과 상상에 기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문제의 근본 원인은 과연 어디에 있겠느냐? 사람의 관념과 상상은 어디에서 생겨났겠느냐?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대부분 전통문화와 사람의 유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종교계에 물들고 영향받은 것도 있다. 이러한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사람이 사상과 관점으로 좋고 옳고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것들에는 또 무엇이 있느냐? 예를 들어 보겠다. 사람은 종종 “좋은 사람은 일생이 평안하다.”, “성실한 사람은 오래간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또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생기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생긴다. 응보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때가 되지 않은 것이다.”, “불의를 많이 행하면 반드시 자기 무덤을 파게 되어 있다.”, “하늘이 너를 멸할 때는 반드시 먼저 네 멋대로 굴게 한다.”, “고생을 해 봐야 뛰어난 사람이 된다.”, “모든 게 다 쓸모없고, 오직 공부만이 최고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런 마귀적인 말들은 너무 역겨워서 듣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사람은 이 말들을 정말 열심히 익힌다.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익히겠느냐? 나는 왜 익히지 않겠느냐? 나는 이러한 말, 이러한 견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너희는 입만 벌렸다 하면 이런 말을 줄줄 읊으며, 열심히 늘어놓는다. 이는 너희가 이러한 것들을 매우 좋아하고 숭상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너희는 그 공허하고 허무맹랑하며 진실하지 않은 것들을 숭상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좌우명으로, 일 처리의 원칙과 준칙, 근거로 삼은 후,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들은 골자가 똑같다고, 하나님 말씀은 대체로 그러한 의미를 지닌다고, 좋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이 올바르냐? 하나님이 말씀하고 선포한 진리가 그런 의미겠느냐? 전혀 아니다. 그것들과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진리에 대한 태도를 바로잡아야 하며, 이 밖에도 진리에 대한 인식을 고쳐야 한다. 즉, 사람이 진리를 정하는 기준을 고치고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매우 힘들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걸을 수도 없다. 진리란 무엇이더냐? 개괄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진리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보았을 때 진리란 무엇이냐? 예전에 말한 적이 있다. 뭐라고 했느냐? (“진리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이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8조(3)> 중에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진리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준칙이다. 그럼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이 진리와 관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그것들은 어디에서 왔겠느냐? (사탄의 처세 철학에서 왔습니다. 또 전통문화가 사람에게 주입한 사상이기도 합니다.) 그렇다. 정확히 말해서 그 근원은 사탄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럼 사람에게 그러한 생각을 주입한 명인이며 위인들은 누구겠느냐? 사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조상들은 모두 사탄, 살아 움직이는 사탄이다. 중국인이 제창하는 말들을 보아라. “멀리서 벗이 찾아 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엎어진 김에 쉬어 가라.”, “부모가 계실 때는 멀리 나가 놀지 마라.”, “모든 선행 중 효가 으뜸이다.”,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 자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크다.” “죽은 사람이 대단하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착한 말을 한다.” 등의 말을 세밀히 분석해 보면, 진리가 한 마디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전부 마귀적인 말이고 그릇된 말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인 후에도 이러한 마귀적인 말, 그릇된 말을 진리로 삼는다. 말해 보아라.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으냐? 사람에게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그릇된 자들로,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전혀 없다. 그럼 너희는 이제 이 많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에 대해 얼마간 인식이 생겼느냐? (네.) 진리는 어디에서 오느냐?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온다.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면 전부 믿지 마라. 사탄의 처세 철학이나 전통문화에서 온 것은 진리가 아니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그것을 근거나 준칙으로 삼아선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면 전통문화에서 비롯되었든, 어떤 명인에게서 비롯되었든, 지식에서 비롯되었든, 사회에서 비롯되었든, 또 어떤 시대에서 전해졌든, 어떤 종족에게서 비롯되었든 전부 진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하필 진리가 아닌 그런 것들을 진리로 여기며 진리 대신 추구하고 실행한다. 그러면서 늘 자신이 진리를 실행하고 있으며, 머지 않아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네가 그러한 것들을 따라 추구하고 실행하면 하나님의 요구와 진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사람은 사람이 좋고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생각해 추구하는데, 이 일은 그 자체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사람은 왜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수많은 하나님 말씀을 읽은 후에도 사람이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삼아 추구하겠느냐?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이는 사람이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진리에 대해 어떤 진실한 인식도 없다는 것을 충분히 말해 준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방금 언급한 “그것들이 진리가 아닌데 사람은 왜 계속 그렇게 실행하면서 진리를 실행한다고 생각하겠느냐?”라는 질문의 한 가지 원인이다. 다른 측면의 원인은 사람의 패괴 성품과 관련이 있다. 사람은 관념적으로 좋고 옳고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라고 생각한다. 또 그것을 기초로 자신만의 계산을 하면서 사람이 하나님을 만족게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면 사람에게 약속한 복을 베풀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계산은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인식을 품은 채 이러한 것들을 지키고 추구하는 한편, 욕망과 야심을 갖고 하나님과 거래한다. 이것이 또 다른 측면의 원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러한 측면의 원인은 예전에 수시로 교제했으니, 지금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겠다. 그럼 이제 너희에게 묻겠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고생하고 헌신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에 사람의 속셈과 목적이 들어 있지 않겠느냐? (들어 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습니다. 어떤 배경에서든 버리고 헌신하고 대가를 치를 뿐입니다. 제 개인적인 야심이나 욕망 같은 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어떻게 대하시든 상관없습니다. 상을 주시든 주지 않으시든 저는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동하고 바치며 버리고 대가를 치르고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다. 혹자는 “그런 사람은 딴 세상에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데, 딴 세상에 있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그 역시 패괴 성품과 욕망, 야심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과 거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두 번째 원인은 바로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삼은 후 자신만의 계산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계산은 무엇이겠느냐?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사람에게 약속한 복과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으려는 것이다. 그는 사람이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분명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대로 행동하고 추구하면서 그렇게 실행하면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거라고 여긴다. 이것이 바로 그의 계산이다. 두 번째 원인은 전적으로 자신의 욕망과 야심을 충족시키며, 하나님과 거래한다는 것이다. 그가 하는 거래를 끊어 버리고, 그의 욕망과 야심을 무너뜨리며, 내려놓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라고 하면 그는 바로 힘을 잃는다. 어째서 힘을 잃겠느냐? 자신의 앞날과 운명이 모두 사라졌으며, 복받을 희망도 없어졌다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실행한 것, 추구한 것이 진리가 아니라 그의 상상 속 긍정적인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욕망과 야심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대가를 치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말해 보아라. 사람에게는 무엇이 있느냐? 진실한 믿음이 있느냐? (없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서, 사람에게 충성심이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든 저희는 따를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든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낙담하거나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포기하는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이 저희를 원치 않으셔서 저희가 힘쓰는 자나 힘을 내는 자라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며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하셔도 저희는 주저 없이 따를 것입니다. 또 계속 본분을 이행할 거고요. 이것이 충성심이 있는 것 아닙니까? 믿음이 있는 것 아닙니까? 충성심과 믿음이 있다는 건 진리를 추구하는 것 아닐까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진리를 추구한다는 뜻 아닙니까?” 말해 보아라. 이것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모든 ‘활로’가 막혀 버렸으며, 목숨을 살리는 지푸라기마저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방법이 있겠느냐? 사람에게 방법이 있든 없든 이 말을 듣고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마음이 차갑게 식는다. ‘설마 복받을 희망이 조금도 없다는 건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누구나 갈피를 잡지 못한다. 내가 한 말들이 너희의 모든 ‘활로’를 빼앗아 갔으니, 나는 너희가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겠다. 어떤 이는 “힘을 들이는 것도 옳지 않고, 거래를 해도 안 되고, 치우친 인식이 있어도 잘못되었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까지 틀렸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옳은 것입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셔도 저희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계속 본분을 이행할 것입니다. 이것을 진리 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데, 이 문제는 확실히 알아야 한다.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며, 무엇이 진리 실행인지에 관해 늘 치우친 인식을 가진 채 버리고 헌신하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을 진리 실행이자 하나님께 순종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틀려도 크게 틀린 것이다. 진리 실행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원칙이 있어야지, 절대 사람의 관념과 상상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참된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마음이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진리 실행이다. 만약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면서 늘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 하고,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면 이는 진리 실행이 아니라 진리를 우롱하고 짓밟는 것이며, 그런 자는 외식하는 사람이다. 그럼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복받으려는 속셈과 욕망이 무너지고 어떤 기대도 원동력도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계속 본분을 이행한다면, 이것을 진리 추구, 진리 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라는 정의에 근거하여 판단해 보면, 이것은 진리 추구가 아니며, 진리 추구의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이제 진리 추구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렸으니, 그 정의에 따라 사람의 모든 행동과 태도를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 사람이 복받으려는 기대가 전혀 없는데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계속 본분을 이행하는 이 태도에서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느냐? 사람이라는 피조물은 인성 안에 타고난 좋은 점 두 가지가 있다. 이 두 가지를 제대로 쓸 수 있다면 최소한 하나님을 따를 수는 있을 것이다. 너희는 그 두 가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양심과 이성입니다.) 그렇다. 인성 안에는 가장 귀한 두 가지가 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또 사람의 자질이 떨어지고 진리나 하나님의 요구를 전혀 인식하거나 거기에 진입하지 못한 상황에서 사람이 제자리를 지키는 것, 여기에 도달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답은 아주 분명하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복받으려는 욕망과 야심이 전혀 없으며, 복받으려는 욕망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한다면, 무엇에 근거하고 있겠느냐? 사람의 원동력은 무엇이겠느냐? 근거도 원동력도 없다.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 지금의 상황이 그러하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네가 이해하고 있는 도리들은 소용이 없으며, 진리 실제에 진입했다는 의미가 결코 될 수 없다. 너는 앞날과 운명을 추구하기 위해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기특한 점은 앞날과 운명에 대한 추구와 복받으려는 욕망이 정죄되고 무너졌을 때도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한다는 것이다. 너는 진리를 얻지 못했음에도 하나님을 따른다. 무엇에 근거한 것이겠느냐? 양심과 이성에 근거한 것이다. 양심과 이성은 사람이 정상적으로 생존하고 살아가고 사람과 사물을 대하게 해 준다. 그럼 양심과 이성에 기대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진리 실행의 차이는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한다. 하지만 양심과 이성에 기대 행동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아도 하나님 집에서 힘을 들이고 본분을 이행할 수 있기에 남을 수 있으며, 나쁜 전과도 없다. 그가 기대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는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삼지 않고, 진리를 준칙으로 삼지 않는다. 양심과 이성을 기준으로 삼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을 봤을 때 네가 양심과 이성만으로 본분을 이행한다면, 진리 추구와 거리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양심과 이성에 기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힘을 들이는 데 만족하는 것이며, 제대로 힘을 들이고,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고, 잘 따르고 순종하고, 모범적인 행동과 좋은 인간관계가 있고, 나쁜 전과가 없는 것 등을 기준으로 한다. 이것을 진리 추구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사람에게 좋은 행위가 얼마나 되든, 패괴 성품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패역과 관념, 오해 및 각종 소극적인 상태도 인식하지 못하고 해결할 수 없다면, 진리 실행의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드러내는 패괴 성품을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채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제멋대로이고 교활하고 간사하게 군다면, 심지어 때로는 소극적이 되고 연약해지며 하나님을 의심하는 등의 상태가 시종일관 계속된다면,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할 수 있겠느냐? 그런 패괴 성품이 존재하는데, 하나님의 사역을 진실로 체험할 수 있겠느냐? 오직 좋은 행위 하나가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이겠느냐? (아닙니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 중 최고는 무엇이겠느냐? 오직 양심과 이성뿐이다. 이 두 가지만이 긍정적인 것이고, 사람에게서 칭찬할 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다 진리와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때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에 불과하다. 네가 인성의 정상적인 이성과 양심을 갖추고 있다면 진리를 듣고 깨달을 수 있다면, 일이 닥쳤을 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갖춘 양심과 이성은 바로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너는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너를 택했으니 너는 마땅히 하나님을 위해 바치고 헌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 ‘마땅히’는 오직 네 양심과 이성이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느냐? 네 일 처리의 원칙과 방식은 무엇이냐? 네 패괴 성품을 너는 저버렸느냐? 해결했느냐? 이러한 것들은 앞에서 나온 ‘마땅히’와 관계가 없다. 마땅히 무엇을 하고,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한다는 등의 기초에 머무르면서 ‘마땅히’의 범위 안에서 살아갈 뿐이라면, 이는 양심과 이성의 작용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 양심이 네게 ‘하나님은 나를 구원해 주셨어. 그러니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해. 하나님은 내 목숨을 구해 주시고, 두 번째 생명을 주셨어. 그러니 마땅히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 해.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나는 피조물이야. 그러니 마땅히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해야 해.’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양심과 이성의 작용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양심과 이성의 영향 속에서 생기는 갖가지 행동과 실행법, 태도, 관점은 그저 양심과 이성이 본디 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머물러 있을 뿐, 진리 실행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제게 본분을 이행하게 한 것은 저를 높여 준 것입니다. 게다가 먹을 것, 입을 것을 주고 머물 곳도 신경 써 주면서 제 삶의 구석구석을 돌봐 줍니다. 저는 이렇게 많은 하나님 은혜를 누렸으니 그 사랑에 보답해야 합니다. 본분을 이행할 때 하나님을 대충 건성으로 대해서는 안 되고,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저질러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안배하든 저는 순종하기 원하고, 무슨 일을 시키든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런 태도는 괜찮다. 이는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을 진리 실행으로 승격시킬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 실행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양심이 아무리 고상하고 이성이 아무리 정상적이더라도, 모든 일을 양심과 이성에 기대서 하면, 아무리 합당하고 봐줄 만하며 탄복을 자아낼 정도로 해냈더라도, 사람의 좋은 행위에 머물러 있을 뿐이고, 사람의 좋은 행위라는 범위로 규정될 뿐, 진리 실행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네가 이성에 기대 사람들과 사귈 때 부드럽게 말하고, 남을 공격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통제하지 않고, 괴롭히지 않고, 약점을 잡지 않는 것 등은 전부 정상 인성의 이성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이 진리 실행과 관계가 있겠느냐? 관계가 없다. 이는 사람의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부분으로, 진리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어째서 양심과 이성에 기대 일을 처리하는 것과 진리 실행이 무관하다고 하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네게 은혜를 베풀어서 네가 그와 사이가 좋은데, 그가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인 후 네게 복음을 전했다고 하자. 이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 너에게 복음을 전한 것과 같다. 너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받아들인 후 그에게 더욱 고마워서 늘 보답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그에게 한발 양보하고, 그에게 무슨 말을 하든 예의를 차리며, 그에게 존중과 겸양, 관용의 태도를 보인다. 그가 어떤 나쁜 일을 하든, 그의 인품이 어떻든 너는 인내하고 포용해 주며, 심지어는 그가 어떤 어려움에 부딪혀 도움을 요청해도 무조건 그를 도와준다. 왜 그렇게 하겠느냐? 이는 무엇의 작용으로 나온 행동이겠느냐? (양심이 작용한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양심이 작용하여 나온 행동이다. 이 양심의 작용은 긍정적이라거나 부정적이라고 말할 게 못 된다. 그저 너라는 사람이 그래도 양심과 인성을 좀 갖추었으며, 누군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면 고마워하고 보답할 줄 안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너라는 사람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하지만 진리로 가늠한다면 결론은 달라진다. 만약 그 사람이 악을 행해서 교회의 제명 대상이 되었는데도 네가 계속 양심으로 판단하면서 “그는 내게 복음을 전해 주었어. 그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그가 없었으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테니까. 그가 지금 악을 행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를 폭로할 수 없어. 설령 그가 옳지 않은 일을 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돼도 말할 수 없다고. 그는 내 은인이니까. 그에게 보답하지는 못할지언정 공격할 수는 없잖아. 다른 사람들이 윗선에 보고하겠다면 그러라지. 나는 가만히 있을 거야. 그의 상처에 소금을 뿌릴 수는 없어. 그랬다간 어떤 사람이 되겠어? 양심도 없는 사람이 되지 않겠냐고. 양심 없는 사람은 짐승 아니겠어?”라고 말한다면 어떻겠느냐? 이런 배경에서 양심이 어떤 작용을 하겠느냐? 양심의 작용이 진리에 어긋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 일에서 알 수 있듯, 때로 양심의 작용이 감정에 얽매이고 흔들려 진리 원칙에 어긋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양심의 작용은 진리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며, 어떨 때는 양심대로 행동해도 진리에 어긋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에 근거하여 살아가지 않고 양심에 기대 행동한다면, 과연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어떨 때는 정말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양심대로 행동하면 결코 틀릴 일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려면 양심대로 행동하는 것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진리에 근거해 행동해야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할 수 있다. 네가 양심을 진리로 여겨 모든 것의 위에 둔다면, 진리는 어디에 놓겠느냐? 너는 양심으로 진리를 대신한 것이다. 이는 진리를 대적한 것 아니겠느냐? 진리에 맞선 것 아니겠느냐? 양심에 기대 살아가면 진리를 어길 수 있고, 진리를 어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후에 양심을 기준으로 말하고 일하며, 양심에 기대 처신한다. 양심에 기대 일을 처리하는 것이 과연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겠느냐? 양심이 진리를 대신할 수 있겠느냐? 양심에 기대 일을 하는 것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의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 있겠느냐? 혹자는 늘 양심에 기대 일을 처리하기를 고집하면서 자신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관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양심의 느낌이 진리를 대신할 수 있겠느냐?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이냐? (진리에 어긋난 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그렇다. 그는 양심의 느낌을 진리와 동일시했는데, 그러면 진리에 어긋나기가 쉽다. 이런 사람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언제나 양심을 기준과 준칙으로 삼으며 양심에 얽매이고 통제된다. 이와 동시에 그의 이성 역시 양심에 통제된다. 양심에 통제되었는데 진리를 구하고 진리대로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럼 양심이 진리를 대신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대할 때 양심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양심을 진리로 여겨서도 안 된다면, 하나님을 대할 때 양심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옳습니까?”라고 묻는데, 이는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다. 어쨌든 양심은 진리를 대신할 수 없다. 진리 없이 양심에 기대 하나님을 대한다면,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는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준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기껏해야 진리를 어기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대할 때 양심적으로 행동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라고 하는데, 이 말이 과연 옳으냐? 도리나 이론상으로 보면 옳지 않다. 그렇지 않으냐? 그럼 진리로 판단하면 어떻겠느냐? 너희가 보기엔 옳으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양심으로 하나님을 대하라고 하더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이더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라고 요구했느냐? 네게 양심이 있다면, 진심은 있느냐? 양심은 있지만 진심은 없다면 그것은 안 된다. 하나님을 대할 때 진심이 있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요구이다. 성경에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라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이더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더냐? (사람의 진심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너희는 너희의 양심과 이성을 다해서, 또 너희의 본능으로 나를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더냐? 하나님이 그렇게 말했더냐?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말하지 않았겠느냐? (양심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무엇이냐? (인성의 최소 기준입니다.) 그렇다. 양심과 이성은 인성의 가장 기본적인, 최소한의 기준이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인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어떻게 판단하겠느냐? 무엇으로 판단하겠느냐? 가장 기본적인 최소 기준은 바로 그 사람에게 양심이 있는지, 이성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인성을 지녔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럼 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를 보려면 그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는지를 보면 된다는 말이 진리겠느냐? 이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도대체 사람의 무엇이겠느냐? (진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진심을 원한다. 그 진심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가더냐?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진심을 보여 주는 것이더냐? 기도할 때 입으로는 하나님께 진심을 바치겠노라 말하지만, 나중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거나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진심이겠느냐? 그것은 진심이 아니라 기만이다. 그럼 이 진심이 드러나는 행위는 무엇이겠느냐? 구체적인 실행은 무엇이겠느냐? 알고 있느냐? 순종하는 태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태도가 있는 것이 진심이다. 이것이 양심보다 훨씬 높지 않겠느냐? 사람의 양심과 이성은 진심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거리가 있다. 사람의 양심과 이성은 그저 사람의 생존과 정상적인 생활, 인간관계를 유지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에 불과하다. 만약 양심과 이성을 잃는다면 사람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이나 정상적인 생활, 인간관계조차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자 또는 악인과 사귀려는 사람이 있더냐? (없습니다.) 아무도 그들과 사귀려 하지 않는다. 그들과 사귀는 사람은 어떤 느낌을 받느냐? 역겹고 혐오스러운 느낌, 심지어는 두렵고 속박되고 결박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사람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조차 갖추지 못했다. 사람들조차 그들과 사귀려 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겠느냐?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악인에게 원망을 사면 이런 말을 듣게 된다. “적절한 상황이 오면 나는 너를 죽이고 없애 버릴 것이다!” 그가 정말 그런 짓을 할 것인지와는 무관하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악인이라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겁을 먹는다. 그러니 그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그에게 양심이나 이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에게 인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인성이 없는 그런 악인과 누가 감히 사귀려 하겠느냐? 그에게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의 인간관계는 어떤 상태겠느냐?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제약당하고 속박된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 괴롭히며 짓밟고 싶어 한다. 이런 사람에게 정상 인성이 있겠느냐? 양심과 이성이 없는 이런 사람과는 아무도 사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정상인의 삶조차 영위하지 못하는 자는 마귀, 짐승과 같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날뛰고 물어뜯으며 이 사람 저 사람 못살게 군다. 결국 모두 그를 멀리하고 피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냐! 정상적인 인간관계조차 이루지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제대로 서지 못하는 자는 어떤 존재겠느냐? 이렇듯 인성조차 없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추구할 수 없습니다.) 인성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짐승이자, 마귀이다. 하나님이 선포하는 진리는 짐승이나 마귀가 아닌 인류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다. 양심과 이성이 있는 자만이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너희가 다시 말해 보아라.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갖추면 정상 인성을 오롯이 살아 낼 수 있겠느냐? 아직은 힘들다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추구해야만 패괴 성품을 없애고 정상 인성을 살아 낼 수 있다. 혹자는 “저는 양심과 이성을 갖추었습니다. 제가 악을 행하지 않는 한 진리 실제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는데, 이 말이 옳으냐?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갖추었다고 해서, 또 양심과 이성에 기대 살아간다고 해서 진리를 추구한다는 뜻은 될 수 없다. 그럼 양심과 이성은 대관절 무엇이더냐? 양심과 이성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때 갖춰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인성의 상징이자 인품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에 기대 살아간다고 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아니며, 진리 실제를 갖추었다는 의미는 더더욱 될 수 없다. 방금 이야기한 사례로 봤을 때, 사람이 양심과 이성에 기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면 진리와 원칙에 어긋나기 쉽다. 이는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 그러므로 네가 아무리 양심을 갖추고 아무리 이성이 정상적이어도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지 않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지 않는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양심과 이성이라는 본능의 범위 안에서 아무리 고난을 겪고 힘을 들여도 너라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방금 진리 추구에 대한 사람의 편견과 오해를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해부하였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 세 가지 항목에는 어떤 것들이 있더냐? (첫째, 사람이 관념적으로 좋고 옳고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보고 기준으로 삼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하나님 말씀의 요구, 기준을 대신한 후 추구하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이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인식을 기반으로 욕망과 야심을 품고 하나님과 거래하며,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약속을 주실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셋째, 양심과 이성에 기대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면 곧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 세 가지를 제쳐 둔다면, 과연 진리 추구란 무엇이겠느냐? 진리 추구에 대한 정의로 돌아가 보자.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 도대체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일전에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에 관해 많이 얘기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겠느냐? 이에 관해서도 예전에, 그리고 지금 이미 많은 교제를 했다. 사람과 일을 바라볼 때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 바로 진리 추구이다. 이 말과 무관한 것들은 전부 진리 추구가 아니다. 물론,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 사람의 패괴 성품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사람의 일부 사상과 관점, 관념을 겨냥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겨냥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라면,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라면, 마지막에 이루는 성과 또한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은 매우 명확하고 분명하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사람에게 주는 길은 실행 과정에서 편견을 버리고 욕망과 야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사람은 스스로 우월하고 인성과 양심, 이성이 있다는 생각에 가려 살면서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실행 원칙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네게 어떤 이유가 있든, 어떤 장점과 특기가 있든,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을 대신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와는 반대로, 만약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출발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면, 또 진리를 실행 원칙으로 삼는다면,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관념과 상상 속에서 살면서 거래하는 속셈으로 일을 처리하거나 늘 자신이 수많은 덕행을 갖추었다고 자처하면서 그것으로 진리 추구와 진리 실행을 대신하는 것은 전부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것은 전부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이 아니며, 그렇게 하면 결국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구원받는 길에 들어서지 못하는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물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 중 구원받을 수 없는 자를 제외하고, 일부 사람은 기꺼이 힘쓰는 자가 되어 살아남으려 한다. 이것도 괜찮다. 그것 역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 이외의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구체적으로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너희 자신에게 달렸다. “한참 교제하셨지만,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말씀하셨습니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무엇을 근거로 해야 하느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합니다.) 무엇을 준칙으로 해야 하느냐?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더냐? 진리는 어디에 있더냐?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척 많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이모저모를 전부 알려 주었으니 여기에서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겠다.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 너희가 다시 한번 읽어 보도록 하여라.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생명의 좌우명으로 삼아 수시로 생각하고 묵상하여라. 자신의 행위와 생활 태도, 일을 바라보는 관점, 속셈과 목적에 대조해 보면 네 실제 내적 상태와 네가 드러내는 성품 본질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느끼게 될 것이다. 그 후 다시 이 말씀에 대조해 보고 이 말씀을 실행의 원칙, 길, 방향으로 삼아 추구한다면, 이 말씀에 완전히 진입하고 이 말씀을 완전히 살아 낼 때,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의 실제에 진입했을 때, 너는 이미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섰을 때의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너는 패괴 성품에 방해받고 통제되고 속박되는 번뇌가 날이 갈수록 적어질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너는 패괴 성품을 해결할 길을 찾았으며, 구원받을 희망이 생겼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삶이 충실하고 평안하고 기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어도 여전히 삶이 몹시 공허하며, 의지할 곳이 없다. 심지어는 패괴 성품 속에서 사는 것이 더없이 고통스럽다고 항상 느끼게 되지만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지 못한다. 시종일관 패괴 성품에 통제되고 속박되고 결박되어 마음이 몹시 힘든데 어떤 길도 보이지 않는다. 힘든 날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여 구원받으면, 그 고통스러운 날들은 지나간다. 하지만 모든 성과는 너희가 나중에 추구하고 진입하는 것에 달려 있다.

2022년 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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