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

오늘은 모두에게 익숙한 화제에 관해 교제하겠다. 이 화제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 그리고 사람의 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사람이 매일 접하고 듣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화제겠느냐? 바로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이다. 이 화제가 어떠하냐? 참신하냐? 매력적이냐? 이 화제가 얼마나 매력적이든 나는 그것이 너희 모두와 관계가 있으며, 사람이 구원받는 것,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고 성품 변화를 이루는 것, 사람의 훗날 결말 및 종착지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현재 많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며 각성하기 시작했지만,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 이 화제에 관해 교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리 추구는 사람이 일상생활 속에서 수시로 접하는 화제이자, 일이 임하거나 본분을 이행할 때 직면해야 하는 실제적인 문제이다. 많은 사람이 일이 임했을 때 주관적인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소극적인 방향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거나 하나님을 오해하는 일 없이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고자 한다. 자질이 좀 좋은 사람은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하나님 말씀에서 각 측면의 진리와 원칙, 하나님의 요구, 실행의 길을 찾거나 자신에게 임한 일에서 성찰하고 묵상하고 인식하여 진리 원칙을 이해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이는 여전히 크나큰 난관으로, 이렇게 될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이 측면의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이 여전히 많다. 그렇기에 지극히 평범하고 흔하고 세부적인 화제에 대해 시간을 갖고 묵상하게 해도 실제적이고 객관적이고 진실한 인식을 얻기가 매우 힘든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교제하겠다. 너희는 묵상하는 데 능숙하지 않지만, 나는 너희가 열심히 들었으면 좋겠다. 단순히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고 이해하고 깨닫길 바란다. 또한 네가 깨달은 것이 네 내적 상태나 성품, 그리고 각 측면의 실제적인 상황과 부합하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겨 중요한 일로 받아들이길 바란다. 그 후, 패괴 성품에 속하는 것은 해결하고, 실행 원칙에 속하는 것은 어떻게든 마음속에 새기려고 노력하여, 관련된 문제가 나타났을 때 실행할 길이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 말씀을 실행의 길로 여겨 실행하고 준수한다면 더없이 훌륭한 것이다.

진리 추구란 무엇이냐? 이것은 개념적인 문제지만, 또 가장 실제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지는 사람의 기호나 자질, 추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진리 추구에는 실제적인 내용이 무척 많이 내포되어 있다. 너희가 되도록 빨리 진리를 깨닫고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 진리 추구와 관련되는 문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게 하기 위해 하나씩 교제해야 한다. 그래야 마지막에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에 관해 알게 될 것이다. 먼저 말해 보아라. 너희가 지금 여기에서 설교를 듣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냐?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설교를 듣는 것은 그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이자 행동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진리 추구와 관련되는 내용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진리 추구와 관련되는 화제는 무척 많으며, 당연히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문제 역시 매우 많다. 여기에서 그런 것들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매일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진리를 교제한다면,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며 교회 안배대로 행하고 한 번도 교란하고 방해하는 일을 해 본 적이 없다면, 설령 진리 원칙을 어긴 적이 있다고 해도 의식적으로 일부러 한 행동이 아니라면 이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좋은 질문이다. 많은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사람이 계속 그렇게 실행한다면, 진리를 깨닫고 얻을 수 있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렇게 실행하는 것이 옳기는 하지만 종교 의식에 속하고 규례를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진리를 깨닫고 얻는 성과를 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럼 그런 행동은 과연 무엇에 속하겠느냐? (표면적인 좋은 행위에 속합니다.) 대답이 마음에 드는구나. 그것은 그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후 양심과 이성의 기초에서 여러 가지 훌륭하고 긍정적인 교의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좋은 행위일 뿐, 진리 추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 그런 좋은 행위들의 근원은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들이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사람의 양심과 이성, 도덕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좋은 감정, 자아 단속에서 비롯되었다. ‘좋은 행위’라고 하는 이상, 그것은 진리와 관계가 없으며, 그 둘은 결코 같은 개념이 아니다. 좋은 행위를 하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고, 좋은 행위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좋은 행위와 진리 실행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개념으로,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로, 하나님의 뜻에 완벽히 부합한다. 좋은 행위는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람의 속셈과 동기를 내포하고 있는, 사람이 좋게 보는 것이다. 좋은 행위가 악행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진리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며 진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 좋은 행위가 아무리 훌륭해도,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아무리 부합해도, 그것은 진리와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좋은 행위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는다. 좋은 행위의 정의가 이러하니, 그것이 진리 실행과 관계가 없음은 분명하다. 만약 사람의 행위로 사람의 유형을 나눈다면, 그 행위들은 기껏해야 충심으로 봉사하는 자의 좋은 태도일 뿐, 진리 실행이나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하는 것과는 어떤 관계도 없다. 그런 것들은 그저 좋은 행위에 불과하지, 사람의 성품 변화나 사람이 진리에 순종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 등 진정으로 진리에 관련된 실제적인 내용과는 무관하다. 그럼 어째서 ‘좋은 행위’라고 하겠느냐? 이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이 있다. 물론 이는 이 문제의 본질에 관한 해석이다. 즉, 그것들은 사람의 관념과 기호, 바람, 주관적인 노력에서 비롯된 행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진실로 인식한 후 나타난 회개의 태도가 아니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생겨난 진리 실행의 행위나 행동도 아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되느냐? 다시 말해, 그런 좋은 행위들은 성품 변화와 전혀 관계가 없으며,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겪음으로써 얻게 되는 성과와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또 사람이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한 후 하게 되는 진정한 통회와도 관계가 없다. 당연히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진실한 순종과도 관계가 없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과는 근본적으로 무관하다. 그것은 그저 사람에게서 비롯되고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그런 좋은 행위들을 진리 실행의 태도로 본다. 이는 단단히 틀린 것으로, 그릇된 관점이자 이해이다. 그런 좋은 행위들은 그저 종교 의식을 행하고 형식을 따르는 것일 뿐, 진리 실행과는 일말의 관계도 없다. 하나님이 명백하게 정죄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인정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너희는 그런 좋은 행위들, 혹은 표면적이고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는 행동들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며,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너희는 이 측면의 교제를 듣고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관해 개념적인 인식이 조금 생겼을 뿐이고, 진리 추구의 개념에 대해 초보적이고 단순하게만 이해했을 뿐이다.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더 많은 내용을 교제해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려면 반드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진리를 깨달아야만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사람의 좋은 행위와 진리 실행이 관계가 있겠느냐? 좋은 행위가 진리를 추구하여 생겨난 것이겠느냐? 어떤 태도, 어떤 행동이 진리 실행에 속하겠느냐?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갖춘 자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이러한 문제들을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진리 추구에 관해 교제하려면 일단 사람이 그것에 대해 어떤 잘못된 관점을 갖고 있고, 어떤 어려움들에 봉착해 있는지 이야기해야 한다. 먼저 사람의 잘못된 관점과 어려움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 순수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진리인지 비교적 명확히 알고 있다. 그는 진리 추구에 길이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무엇이 진리인지 이해하지 못하며, 진리에 관심이 있을지라도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는 좋은 일을 하는 것, 좋은 행위를 하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며,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곧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말씀을 수도 없이 읽은 후에야 비로소 좋은 일을 하고 좋은 행위를 갖추는 것과 진리 실행은 완전히 다른 일임을 깨닫는다. 여기에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얼마나 황당한지 알 수 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일도 밝히 알지 못한다! 수많은 사람이 오랜 세월 본분을 이행하며 매일 바쁘게 뛰어다니고, 적잖이 고생을 겪으면서 자신이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고,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체험 간증도 이야기하지 못한다.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진리를 깨달았는데 어째서 실제적인 체험을 말하지 못하겠느냐? 이는 모순 아니겠느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예전에 본분을 이행할 때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지도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했죠. 당시 저는 그저 바쁘게 일을 하는 것에만 골몰했습니다. 그러면서 본분 이행으로 바쁜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헛되이 세월만 흘려보냈죠.” 이 말의 속뜻은 무엇이겠느냐? 본분 이행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진리 추구에 지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겠느냐? 그릇된 자들은 ‘본분을 이행하느라 정신이 없어지면 패괴 성품이 드러날 시간도 없겠지. 그럼 더 이상 패괴 성품을 드러내지 않을 테고, 패괴된 상태에서 사는 일도 없어질 거야.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패괴 성품을 해결할 필요도 없어.’라고 생각한다. 이런 주장이 옳으냐?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느라 정신이 없어지면 정말 패괴 성품을 드러내지 않겠느냐? 이 주장은 너무도 황당하다. 이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본분을 이행하느라 정신이 없어 진리를 추구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니, 이는 그야말로 궤변이자 바쁜 것을 핑계로 삼는 것이다. 본분 이행과 생명 진입의 진리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교제한 바 있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해야 생명이 성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분을 이행하면서 일에만 정신이 팔려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힘만 쓰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것으로 천국의 복을 얻고자 한다. 마지막에는 본분을 이행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진리를 추구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고, 심지어는 본분을 이행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패괴 성품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까지 한다. 그 속뜻은, 본분을 이행하느라 바빠서 패괴 성품이 사라지고 없어졌다는 것인데, 이는 거짓말 아니겠느냐? 이것이 사실에 부합하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이는 무엇보다 큰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본분을 이행하느라 바빠서 패괴 성품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런 사람이 있겠느냐? 그런 체험 간증이 있겠느냐? 절대 없다. 인류는 사탄에게 극도로 패괴되어 모두 사탄의 본성을 갖고 있고, 사탄 성품으로 살아가고 있다. 사람의 내면에 패괴 말고 긍정적인 것이 있더냐? 태어날 때부터 패괴 성품이 없는 사람이 있더냐? 태어날 때부터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더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더냐? 하나도 없다. 사람은 모두 사탄의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패괴 성품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닫거나 실행하지 않는다면 패괴 성품으로 살아갈 뿐이다. 그러므로 본분을 이행하느라 바빠서 패괴 성품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은 가장 황당하고 그릇된 소리이자,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해 남들을 미혹하는 짓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본분 이행으로 바쁘든 바쁘지 않든, 하나님 말씀을 읽을 시간이 있든 없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에 이유와 핑계를 댈 것이다. 이런 사람은 영락없는 봉사자이다. 봉사자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데 제대로 봉사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무릇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이요,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며 수많은 악을 행하는 자이니, 충심으로 봉사하는 사람이 아니며, 봉사해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가정에 너무 심하게 얽매여 수시로 번민에 빠진다. 젊은 형제자매들이 가정과 직업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며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보면 부러워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저 젊은이들을 선대하시는구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을 믿게 되어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은 데다가 가정에 얽매이지도 않으니 생계 때문에 고민할 일도 없겠지. 하나님을 따르며 본분을 이행해도 걱정이 없을 테고. 하나님의 말세 사역과 복음이 확장되는 시점에 발맞추었구나. 하나님께서 저렇게 좋은 조건을 예비해 주셨으니 몸과 마음을 다해 본분 이행에 집중할 수 있겠네. 진리를 추구할 수도 있을 거야. 나는 글렀어. 하나님이 내게 배치해 주신 환경은 적절하지 않아. 나는 가정에 너무 심하게 얽매여 있다고. 돈을 벌어서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 현실적인 어려움이 눈앞에 펼쳐져 있어서 진리를 추구할 시간이 없어. 진리 추구는 전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며,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의 일이야. 나처럼 가정에 잔뜩 얽매인 사람은 생계유지 같은 자질구레한 일들이 마음에 가득해서 시간과 정력을 쏟아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본분을 이행할 수가 없다고. 그러니 어떤 조건을 보든 나는 진리를 추구할 방법이 없어. 그러니 내가 진리를 추구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지. 나는 애당초 진리를 추구할 운명이 아니라고. 본분을 이행할 조건도 안 되는 걸. 가정에 얽매이는 일이 좀 줄어들고 아이들이 다 독립하고 내가 은퇴한 다음 먹고 사는 데 걱정이 없어지면 그때 가서 진리를 추구하는 수밖에.” 이런 사람은 일상생활 속에서 삶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신의 패괴 성품이 일상의 잡다한 일 속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수시로 느낀다. 단, 마음으로 느낄지라도 세상의 올무에 걸려, 그렇게 살아가고 하나님을 믿고 설교를 듣고 하루하루 보낼 수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진리를 추구하는 건 나중에 생각하자고, 패괴 성품은 몇 년 후에 해결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리 추구라는 이 큰일을 한쪽에 내팽개치고 계속 미루기만 한다. 그들의 명언은 무엇이겠느냐? ‘진리 추구는 언제 해도 늦지 않다. 그러니 2년 후에 다시 생각하자.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지만 않으면 시간이 있는 것이고 기회가 있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 관점이 어떠하냐? (옳지 않습니다.) 그들이 진리 추구에 부담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그들은 어떤 것에 부담을 갖고 있겠느냐? 생계를 이어 나가고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녀를 키우는 데 부담을 갖고 있지 않겠느냐? 그들은 모든 정력을 자녀와 가정, 자신의 하루하루와 삶에 쏟아붓는다. 그러다가 그런 임무를 모두 완수하면 그제야 언제쯤 진리를 추구할지 계획한다. 그들이 말하는 그 핑계들이 성립하겠느냐? 그 핑계들은 진리 추구를 가로막는 걸림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믿는 동시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배치한 환경을 원망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요구에 신경도 쓰지 않고, 주동적으로 협력하는 법도 없다. 그저 육을 만족시키고 가정과 친지를 만족시키는 데 골몰할 뿐이다. 그들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냐? “저희는 살기 위해 너무 바쁘고 힘들게 지내야 합니다. 진리를 추구할 시간이 없어요. 저희에게는 진리를 추구할 적절한 환경이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라는 것이다. 그들의 관점은 무엇이냐? (진리 추구는 언제 해도 늦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리 추구는 언제 해도 늦지 않으니 2년 후에 다시 생각하자.’ 이것이 어리석지 않으냐? (어리석습니다.) 어리석다. 이는 핑계를 대며 스스로를 우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이 너를 기다려 주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2년 후에 다시 얘기하자니, 그 2년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네가 구원받을 희망과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시간이 2년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2년, 또 2년을 보내다 보면 눈 깜짝할 새에 10년이 흘러갈 것이다. 너는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할 것이며, 어떤 진리 실제에도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패괴 성품이 전혀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정직한 말 한마디 하는 것도 더없이 힘이 들 것이다. 이것이 위험하지 않으냐?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 대해 갖가지 핑계와 이유를 대며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마지막에 손해를 보는 것은 누구겠느냐? (자기 자신입니다.) 그렇다. 마지막에 손해를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지난 세월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얻지 못한 스스로를 증오하며 평생의 한을 남길 것이다!

얼마간 지식을 갖췄지만 자질이 부족하고 영이 통하지 않아 설교를 아무리 들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서도 늘 야심과 욕망을 품고 지위를 다투며, 지위가 없으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제게 문서 작업이나 영상 작업, 혹은 교회 리더나 각 팀의 책임자 등 제가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본분을 좀처럼 안배해 주지 않습니다. 제게 이런 중요한 사역을 맡기지도 않죠. 하나님 집에서는 저를 발탁하거나 양성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선거를 할 때마다 저를 뽑아 주는 사람이 없고, 저를 좋아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설마 저한테 괜찮은 점이 하나도 없을까요? 뭐라 해도 저는 지식인이고 지식을 갖췄는데, 하나님 집에서는 저를 발탁하거나 양성하는 법이 없네요. 그러다 보니 진리 추구에 동력이 안 생깁니다. 저와 같이 하나님을 믿은 형제자매들은 모두 중요한 본분을 이행하면서 리더 일꾼이 되었는데, 저는 왜 쓸모없는 사람이 된 걸까요? 가끔 복음을 전할 때도 들러리나 설 뿐, 복음을 증거하지도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발탁해 중요한 본분을 맡길 때도 제 몫은 없고요. 예배 때조차 제가 주도하지 못하게 하고, 어떤 책임도 제게 맡기지 않으니 억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환경을 배치해 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제 존재의 가치를 느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왜 다른 사람들만 사랑하고 저는 사랑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왜 다른 사람들만 양성하고 저는 양성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하나님 집에서는 제게 부담을 주어야 합니다. 제가 책임자든 뭐든 되게 해야 한다고요. 제가 진리 추구의 동력을 얻을 수 있게 말입니다. 동력이 없는데 어떻게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를 추구하려면 얼마간 동력이 있어야 합니다. 뭐라도 좋은 점이 있어야죠!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기에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도, 진리를 추구하면 구원받고 온전케 될 수 있어 좋다는 사실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중용되지 못하니 진리 추구에 힘이 나지 않네요! 형제자매들이 모두 저를 우러러보고 지지하게 된 후에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해도 늦지 않겠죠.” 이런 부류가 있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문제점은 무엇이겠느냐? 지위와 명분을 원한다는 것이다. 분명 진리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집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명분을 갖고 싶어 하니, 이는 염치 없는 것 아니겠느냐? 너는 봉사자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충심을 다해 봉사할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왜 이것을 깨닫지 못한단 말이냐? 지위와 명분이 생기면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냐? 그 주장이 성립하겠느냐?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는 남들 앞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존재감을 뽐내고 싶어 한다. 또 욕망이 충족되지 않자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으며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한다고, 하나님 집에서 자신을 발탁하지 않고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뽑아 주지 않는다고 원망한다. 진리를 추구할 때 그런 것들을 기반으로 삼아야 하더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모두의 지지를 얻고 형제자매들의 존경을 받아야 하며, 중요한 본분과 사역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 집에 큰 기여를 해야 한다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더냐? 그런 사람만이 진리를 추구할 수 있고, 진리를 추구할 자격이 있으며, 진리 추구의 조건에 부합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해 마지막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런 말이 있더냐? (없습니다.) 그들의 말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럼 그는 왜 그렇게 말하겠느냐?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 대한 핑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지위와 명성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명리를 좇고 지위를 추구하는 데만 골몰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핑계를 대며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을 변호하는 것이다. 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책임을 교회와 형제자매, 하나님에게 미루는 것이다. 음험하지 않으냐? 이는 적반하장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얼토당토않게 고집을 부리는 것이며 생트집을 잡는 것이다. 양심과 이성이 없어도 너무 없지 않으냐! 사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문제는 심각하다. 그런데 이치를 따지고 행패를 부리니, 이는 사리 분별이 안 되는 것 아니겠느냐? 진리 추구는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다. 네가 진리를 사랑한다면 성령이 역사할 것이다. 네가 마음속으로 진리를 사랑하며, 어떤 핍박과 환난이 임하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인식한다면, 문제를 발견할 경우 주동적으로 진리를 구해 해결한다면,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다. 그러면 굳게 서서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은 전부 사람이 진리를 사랑해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스스로 원하고 기꺼이 원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누구의 강요도, 어떤 추가 조건도 없다.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따르면 마지막에 진리와 생명을 얻을 것이요, 진리 실제에 진입할 것이고,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낼 것이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 어떤 추가 조건이 필요하겠느냐?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며, 자신의 선택이다. 진리 추구는 지극히 당연한 일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바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늘 육적인 누림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얻고자 한다. 하지만 핍박과 환난, 조소와 비방이 임하면 소극적으로 변하고 연약해져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정하기도 한다. 이것이 사리 분별이 안 되는 것 아니겠느냐? 복을 얻고 육적인 누림을 추구하고자 하지만, 핍박과 환난이 좀 임하면 하나님을 원망한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리 분별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기가 힘들다. 약간의 핍박과 환난만 임해도 드러나 도태될 것이다. 이런 사람이 너무도 많다. 네가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믿든, 하나님은 마지막에 진리를 얻었는지 여부를 보고 사람의 결말을 결정한다. 만약 네가 진리를 얻지 못했다면, 어떤 이유와 변명도 성립하지 않는다. 네가 원하는 대로 이치를 따지고 마음대로 해 보아라. 하나님이 너를 신경이나 쓰겠느냐? 하나님이 너 같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변론하고 토론하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상의하겠느냐? 답은 무엇이겠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네 이유가 아무리 합리적이어도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며, 갖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하나님은 네가 다양한 환경 속에서, 그리고 네게 임한 모든 일 가운데서 진리를 구하며, 마지막에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진리를 얻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어떤 환경을 배치하든, 네가 어떤 사람과 일들을 마주하든, 어떤 환경에 놓이게 되든 너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 그런 일을 마주해야 한다. 이런 것은 바로 네가 진리를 추구하면서 배워야 할 공과이다. 만약 늘 이유를 찾으며 회피하고 도망치고 거부하고 저항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포기할 것이다. 네가 이치를 따지고 억지 부리고 훼방 놓아도 아무 소용없다. 하나님이 너를 상대하지 않으면 너는 구원받을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는 해결 못 하는 문제가 없다. 하나님은 누구를 대하든 안배가 되어 있으며, 다루는 방법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네 이유나 핑계의 성립 여부를 따지지 않으며, 네 변명의 이유가 합리적인지에 대해서도 듣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냐? 너에게는 패괴 성품이 없느냐? 너는 진리를 추구해야 하지 않느냐?”라고 물어볼 뿐이다. 한 가지 사실만 분명히 하면 된다. 바로 하나님은 진리이며 너는 패괴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동적으로 진리를 구해야 한다. 어떤 문제나 어려움, 핑계나 이유도 성립하지 않으며,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위해 사람이 어떤 대가를 치르든 가치가 있다. 사람은 모든 핑계와 이유, 어려움을 내려놓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생명을 얻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는 사람이 얻어야 할 생명이며, 이 생명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이 기회를 놓친다면 평생의 한으로 남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아쉬움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철저히 망칠 것이다. 결말과 종착지가 없어지고, 너라는 피조물은 끝을 맞이할 것이며, 더는 구원받을 기회가 없을 것이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에 이유와 핑계를 대며 퇴로를 만들어 두지 마라. 그래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너 자신과 다른 이까지 속이는 짓이다.

어떤 리더는 사역할 때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법 없이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제멋대로 행동한다. 형제자매들이 “당신은 일할 때 늘 다른 이들과 상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결론을 내리고 결정한 후에야 알게 되고요. 왜 다른 사람과 상의하지 않는 겁니까? 결단을 내릴 때 왜 미리 우리에게 한마디 해 주지 않는 거죠? 설령 당신이 옳다고 해도, 당신의 자질이 우리보다 좋다고 해도 한마디 통지는 해 줘야 하는 겁니다. 우리에게도 최소한의 알 권리가 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이렇게 독단적으로 결정하네요. 이는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라며 의견을 낼 때 그 리더가 어떻게 말하는지 들어 보아라. “저는 집에서 가장입니다. 그러다 보니 집안의 대소사를 전부 혼자 결정하는 게 습관이 되었네요. 저희 집에서는 일이 생기면 모두 저를 찾아오고 저한테 의견을 묻거든요. 모두 저한테 많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희 집에서는 언제나 제가 가장으로서 결정권을 가졌습니다. 사실 교회에서는 제가 크게 신경 쓸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리더로 선발됐지 뭡니까. 별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런 운명을 타고난 모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이런 능력을 주셨나 봐요. 결정을 하고 다른 이를 위해 결단을 내리는 능력 말입니다.” 그 말인즉슨, 그는 애당초 남들의 위에 서는 운명을 타고났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명의 병사, 노예로 태어났으니 그의 말을 듣고 그가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형제자매들이 그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야기해도, 책망하고 훈계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으며 맞서고 반항한다. 그런 일은 형제자매들이 그를 자리에서 끌어내릴 때까지 계속된다. 그런 상황이 벌어져도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나 정도의 자질이면 어디를 가도 대장이 될 운명이지. 반면, 너희는 어디를 가도 노예나 하녀가 될 정도의 자질밖에 없어. 평생 남의 부림을 받을 운명이라고.’ 그는 늘 이런 말을 하는데, 그가 드러낸 것은 어떤 성품이냐? 두말할 나위 없이 패괴 성품이다. 교만하고 유아독존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자신의 장점과 특기를 남들에게 드러내며 뽐낸다. 패괴 성품을 드러냈으면 마땅히 반성해야 하며, 인식하고 회개하고 저버려야 한다. 또 진리를 추구하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하지만, 그는 이렇게 실행하기는커녕 뉘우치는 법 없이 자신의 관점이나 방식을 고수한다. 이러한 모습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며,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누가 폭로하고 책망해도 그는 듣지 않고 갖가지 핑계를 댄다. ‘흥, 나는 이렇게 살 거야. 이게 바로 능력이고 재능이라는 거라고! 너희한테 이런 게 있어? 나는 천생 대장으로 태어난 사람이야. 어디를 가도 리더가 되지. 나는 혼자 결정하는 게 익숙해. 무슨 일이든 다른 사람과 상의하지 않고 혼자 알아서 하는 게 습관이 됐다고. 이건 내 특징이자 나라는 사람의 매력이야.’ 이는 수치심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는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을 심판하고 폭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자신의 사설과 궤변을 진리로 여기며 모두가 받아들이고 존중하고 떠받들게 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 집에서는 진리가 권세를 잡아서는 안 되고 그가 권력을 잡고 결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뻔뻔스럽지 않으냐? 입으로는 진리를 추구하겠다고 하지만, 막상 그의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또 입으로는 하나님과 진리에 순종한다고 하지만, 늘 자신이 권력을 잡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려 하며, 형제자매들 모두 자신에게 순종하고 자기 말을 들었으면 한다. 자신의 행동이 적절한지, 원칙에 부합하는지와는 상관없이, 그는 다른 이가 감독하고 건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다른 이들은 모두 자신의 말과 결정을 따르고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법이 없다. 형제자매들이 아무리 지적하고 도와줘도, 하나님 집에서 아무리 책망하고 훈계해도, 심지어 몇 번이나 교체해도 그는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지 않으며 어딜 가든 같은 수작을 부린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대장이야. 무슨 일이든 내가 주도하고 결정하지. 무슨 일이든 최종 결정권은 다 내게 있다고. 이게 습관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어.’라고 말이다. 정말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구제 불능이다! 이렇게 부정적인 방식을 긍정적인 것으로 삼아 선전하면서도 스스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니,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은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며, 몇 번을 가르쳐 줘도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는 마음속으로 진리를 싫어하고 적대시한다. 이런 사람이 지위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치르는 대가와 고생은 모두 헛수고로,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는다. 단언컨대, 그런 것들은 하나님이 혐오하는, 진리에 어긋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태도이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분별할 수 있다.

이 밖에, 하나님을 오랜 세월 믿었지만 진리 실제가 전혀 없고, 오랜 세월 설교를 들었으면서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자질이 무척 떨어지지만,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특기’가 하나 있다. 바로 거짓말과 자기 합리화에 몹시 능하며, 감언이설로 남을 우롱하고 속이는 데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가 열 마디를 하면 보통 그 열 마디에 모두 불순물과 과장이 들어 있다. 단언컨대, 그가 하는 말은 다 진실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질이 부족하고 겉으로 상대적으로 얌전해 스스로 ‘나는 타고나길 야무지지 못하고 솔직한 데다가 자질도 부족해. 어딜 가든 괴롭힘 대상이 되지. 남들이 괴롭혀도 참고 분을 삭이는 수밖에 없어. 상대에게 받아치고 싸우지 못하거든. 그냥 피하고 양보하고 참는 수밖에.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정직하고 어리석은 사람, 하나님의 백성이야.’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그에게 “그런데 왜 거짓말을 하는 겁니까?”라고 물어보면 그는 “제가 무슨 거짓말을 했습니까? 제가 누구를 속였죠? 저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솔직한 제가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두뇌 회전이 느리고 지식도 별로 없습니다. 거짓말도 못하죠! 간사한 사람들은 눈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세 가지 수작을 부리겠지만, 저는 그런 속셈 같은 게 없습니다. 언제나 괴롭힘을 당하는 입장인 걸요. 그래서 제가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정직한 사람인 겁니다. 제가 거짓말을 하고 남을 기만한다는 말 자체가 존재할 수도, 성립할 수도 없거든요. 그렇게 말한다면 저를 중상모략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저를 무시하고 어리석게 보며,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괴롭히고 싶어 하는 걸 압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저를 괴롭히지 않고 선대해 주시죠.”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은 채 뻔뻔스럽게도 자신이 하나님이 말한 ‘정직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건 스스로를 바로 보좌 위에 앉히는 짓이다. 그는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정직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며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이니 진리를 추구할 필요도,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타고나길 거짓말을 할 수 없게 태어났다고 여기면서 누가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지적해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늘 그런 말로 이치를 따지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가 스스로를 돌아보았느냐? 그럴 때도 있다. 그럼 그는 무엇을 ‘돌아보았느냐’?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정직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야. 좀 어리석을지는 몰라도 나는 이미 정직한 사람이라고.’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자기 미화 아니겠느냐? 자기가 어리석은 사람인지, 정직한 사람인지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정직한 사람이라고 단언하니, 스스로를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사회에서 괴롭힘 당하고 억울하게 살아가는 바보는 반드시 좋은 사람이겠느냐? 사람들 눈에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면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도 되겠느냐? 이런 사람은 날 때부터 진리를 갖추고 있겠느냐? 어떤 이는 “저는 무척 솔직합니다.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죠. 다만 좀 어리석은 데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저는 진리를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사람, 정직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한다. 그 속뜻은, 자기는 진리를 갖추었고 패괴 성품이 없다는 것 아니겠느냐? 인간은 누구나 사탄에게 극도로 패괴되어 패괴 성품을 지니고 있다. 패괴 성품이 있는 한, 언제든 거짓말을 하고 남을 기만하고 간사한 짓을 할 수 있다. 심지어는 약간의 성과만 내도, 일말의 기여만 해도 스스로를 뽐내며 교만한 성품을 드러낸다. 또 하나님에 대한 관념으로 가득하고, 하나님께 지나친 요구를 해 대면서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이 다 문제 아니겠느냐? 패괴 성품 아니겠느냐? 그런데도 성찰이 필요 없겠느냐? 필요하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정직한 사람이라고, 자신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고 간사한 성품도 없으니 진리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있으며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늘 자신이 바보 같고 남들에게 괴롭힘 당하며 자질이 떨어지는 데 대해 목 놓아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 오직 당신만이 저를 사랑하시고, 오직 당신만이 저를 긍휼히 여기시며, 관대히 대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저를 괴롭히면서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러고는 눈물을 닦으며 일어나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당신들은 모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아니야. 하나님은 오직 나만 사랑하셔.’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저 잘난 맛에 산다. 하나님이 말한, 사람이 드러내는 갖가지 패괴 성품과 그런 태도에 대해 그는 받아들이는 법이 없다. 설령 구체적인 문제가 임해 패괴 상태가 생기거나 패괴를 드러낼지라도 잠깐 생각한 후 입으로만 인정할 뿐 진리를 전혀 구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패괴가 있고 자신은 패괴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자신이 구체적인 사건에서 드러낸 패괴 성품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문제가 일어나든, 얼마나 많은 패괴 성품을 드러내든 마지막에는 항상 그 소리다.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정직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자,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대상이야. 하나님은 나를 크게 축복해 주실 거야.’ 이 말을 근거로, 진리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이 부류의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 대한 핑계이다. 이런 사람은 너무 황당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무도 황당하고 무지하다. 어느 정도로 황당하냐? 그는 하나님 말씀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말 한마디를 찾아 무기로 삼고, 그 말로 하나님을 협박하며,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사람에 대한 폭로와 심판의 하나님 말씀은 마치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일절 들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자신이 이미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그야말로 가련하기 짝이 없다. 자질이 떨어지고 이성도, 염치도 없는데 복을 얻으려 하니 말이다. 그는 자질이 떨어지고 이성도, 염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속으로는 더없이 거만하며, 평범한 사람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자질이 좋고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 어느 정도 진리 실제를 교제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런 장점이 다 뭐라고. 진리를 추구한다느니 스스로를 인식한다느니 하는 건 나한테 적용되지 않아. 나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좀 어리석은 게 문제가 되진 않지. 내가 드러내는 패괴 성품도 별거 아냐. 좋은 행위만 좀 있으면 그만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에게 어떤 요구를 하겠느냐? ‘어쨌든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셔. 나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걸로 됐어. 체험 간증이니,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식이니 하는 걸 매일같이 늘어놔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결국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으면 되는 거야.’라는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지 않으냐? 첫째, 이런 사람은 진리에 전혀 관심이 없다. 둘째, 이런 사람은 진리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일말의 이해 능력도 없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비범하고 고고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이유를 찾아 퇴로를 만들어 두거나 특정한 추구 방식, 또는 자신이 특기라고 여기는 것으로 진리 추구를 대신하려 한다. 참으로 어리석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 중에는 인성 측면에서 볼 때 이렇다 할 문제가 없고 규율을 잘 지키며 착실한 자들이 있다. 여성의 경우, 온화하고 현숙하며 단정하고 성실하고 문란하게 굴지 않는다. 부모 앞에서는 말 잘 듣는 착한 딸이고, 집안에서는 현모양처이며, 분수를 지키면서 가정을 지키고 삶을 유지한다. 남성의 경우, 착실하고 성실하며 무던하고 부모에게 효심이 있다. 또 술, 담배를 하지 않고 남의 것을 훔치지 않으며, 여성 편력이 없고 도박을 하지도 않는다. 집안에서는 모범적인 남편이고,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는 남과 마찰을 빚거나 시비가 붙는 경우가 드물다. 혹자는 하나님을 믿어 그런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이런 사람이 바로 모범적이고 올바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에 교회에서 선행을 즐겨 하고 기꺼이 남을 도우며 겸손하고 인내하고 포용한다면, 교회에서 무슨 사역을 안배하든 건성으로 임하지 않고 열심히 해낸다면, 진리 실제가 있는 거라고, 하나님의 요구에 근접했다고, 조금만 더 노력하고 힘을 내 하나님 말씀을 많이 보고 하나님 말씀의 글귀를 많이 기억하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전파하면 진리를 추구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패괴 표출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어떤 패괴 성품이 있는지도 모른다. 패괴 성품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어떻게 인식하고 해결해야 하는지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을 전부 모르는 것이다. 이런 부류가 있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천연적인 ‘좋음’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도달해야 하는 기준으로 여긴다. 만약 누군가 그를 가리켜 교만하고 간사하고 사악하다고 한다면, 그는 겉으로는 마찰을 빚지 않은 채 겸손하고 인내하면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겠지만, 마음속으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나더러 교만하다고? 내가 교만하다면 세상에 좋은 사람은 없을 걸! 내가 간사하다면, 이 세상에 정직한 사람은 없을 거야! 또 내가 사악하다면 세상에 올바른 사람은 없을 거라고! 요즘 시대에 나처럼 좋은 사람을 어디 가서 찾는다고 그래? 절대 없지!’라며 반발심을 가질 것이다. 그에게 간사하다고 하면 안 되고, 교만하다고 해서도 안 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도 안 된다. 불신파라고 하는 건 더더욱 안 된다. 그랬다간 그는 책상을 내리치며 시비를 가릴 것이다. “저더러 불신파라고요? 만약 제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여러분 중에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라고 말이다. 누군가 그를 폭로하면서 “당신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문제점을 지적해 주면 겉으로는 겸손하고 인내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강하게 반발하죠. 당신이 진리를 교제할 때 하는 말은 모두 옳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패괴 성품의 본질을 폭로하고 심판하는 하나님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 반발하고 반감을 갖죠. 그건 정말 흉악한 성품입니다.”라고 말하면, 그는 ‘흉악하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제가 흉악하다고요? 제가 흉악하다면 진작 여러분을 깔아뭉갰을 겁니다! 만약 제가 흉악하다면, 여러분은 이미 오래전에 저한테 짓밟혔을 거라고요!” 무엇을 폭로하고 무엇을 교제하든 그는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다른 사람이 어떤 문제를 폭로하든 하나님의 말씀에 대조하여 자신의 속셈과 생각에 정말 잘못이 없는지 성찰하는 것이며, 문제가 얼마나 되든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문제를 진실로 인식할 수 있다.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할 때는 관념과 상상에 기대서는 안 된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인식하는 전제 조건은 무엇이겠느냐? 사탄이 인류를 미혹하고 패괴시켰으며, 사람은 누구나 패괴 성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하나님 말씀의 폭로를 통해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으며, 반성 과정에서 조금씩 자기 내면의 문제점을 파헤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문제점이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고, 마음속으로 자신의 패괴 성품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기반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폭로를 받아들일 수 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리켜 준 실행의 길을 찾아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고 살아 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류의 사람들이 이렇게 받아들이더냐? 그렇지 않다. 입으로는 그도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진리이며, 패괴된 인류를 폭로하는 하나님 말씀 역시 전부 사실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라고 하면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으며,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단정하고 성실한 사람, 바른 사람, 정인군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른 것이 진리가 있다는 의미겠느냐? 바른 것은 그저 인성의 긍정적인 모습일 뿐, 진리를 대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상 인성의 한 가지 특징을 갖추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며, 이미 진리를 갖추었다는 의미도 아니다. 네가 이미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 소위 ‘정인군자’는 자신에게 교만함도, 간사함도,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도 없으며, 사악하고 흉악한 성품은 더더욱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패괴 성품이 그에게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자신은 정인군자로, 태어날 때부터 바르고 선량해서 늘 남들에게 괴롭힘만 당했으며, 비록 자질이 떨어지고 어리석지만 정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정직함’은 진정한 정직함이 아니라 솔직하고 무능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이는 바보 중의 바보 아니겠느냐? 이런 자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이 관점이 옳은 것이겠느냐? 그럼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자는 도대체 패괴 성품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솔직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겠느냐? 솔직한 사람은 기만하고 위장하지 않겠느냐? 솔직한 사람은 이기적으로 굴지 않겠느냐? 솔직한 사람에게는 탐심이 없겠느냐? 솔직한 사람은 관직에 오르고 싶어 하지 않겠느냐? 지나친 욕망이 전혀 없겠느냐? 이러한 것들을 모두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저 적절한 배경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악을 행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인군자라고 자처하고, 자신에게는 패괴 성품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군가 그에게 어떤 패괴 성품, 패괴 표출, 패괴 상태가 보인다고 말하면 “저한테는 그런 게 없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고,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오해한 거예요. 제가 솔직하고 바보 같고 무능하다고 생각해서 저를 괴롭히는군요.”라고 반박하고, 도리어 상대를 공격한다. 이런 사람은 어떠하냐? 누군가 그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죽기 살기로 물고 늘어져서 떨쳐 내려야 떨쳐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행패를 부리면서도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은 패괴 성품이 없는 솔직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수시로 “저는 어리석기는 하지만 솔직합니다. 저는 정직한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시죠!”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밑천으로 삼는다. 이는 염치를 모르는 행동 아니겠느냐? 너는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확실하냐? 근거가 있느냐? 너한테 성령 역사가 있느냐? 하나님이 너를 온전케 하겠노라 이야기했더냐? 하나님이 너를 쓰려고 하더냐? 하나님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너를 사랑한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이 너를 긍휼히 여긴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 혼자만의 이해일 뿐, 하나님이 정말로 너를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겠느냐? 하나님이 어리석고 무능한 자를 사랑하겠느냐? 하나님은 어리석고 무능한 자를 긍휼히 여긴다. 이것이 진실이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정직한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을 높이고 증거할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 또 진리를 받아들이고 책망 훈계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 진리도, 책망 훈계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이 혐오하여 버리는 자이다. 너는 진리를 싫어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반하니, 하나님은 너를 싫어하고 혐오하여 버릴 것이다. 너는 늘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불쌍하고 성실하고 무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너를 좋아할 리 있겠느냐?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거기에 근거가 되는 하나님 말씀도 없다. 하나님은 네가 솔직한지 아닌지, 네가 어떤 인성과 자질을 갖고 태어났는지는 보지 않는다. 오직 네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지 무시하는지, 순종하는지 반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네게서 성과와 결실을 냈는지, 하나님의 많은 말씀을 듣고 진실한 간증이 있는지를 볼 뿐이다. 만약 네가 마지막까지 체험한 후 “저는 솔직하고 무능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받고 무시당해 왔죠.”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은 간증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네가 또 “저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정직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네 말은 전부 거짓이며, 진실이 하나도 없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요구할 때 너는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치를 따지고 궤변을 늘어놓으며, “저는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렀습니다. 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한다면, 그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너는 진리를 추구했느냐? 진실한 체험 간증은 어디에 있느냐? 네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느냐? 증거를 보여야 인정할 것이다. 네가 “저는 정인군자입니다. 저는 바른 태도를 지니고, 음란한 짓을 하지 않으며, 일을 처리할 때는 규칙을 지킵니다. 또 저는 착실한 사람입니다. 사회에서는 방탕하게 살거나 도박을 하지 않으며, 하나님 집에서는 방해하거나 교란하거나 이간질하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또 저는 괴로움과 고생을 참고 견딥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미 진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할 것이다. “네 패괴 성품이 해결되었느냐? 네가 진리를 추구한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의 선민들이 동조하고 인정하게 할 수 있겠느냐? 만약 체험 간증이 없는데도 스스로 정직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너는 거짓말로 남을 미혹하는 사람이다. 너는 사리 분별이 되지 않는 마귀이자 사탄이니 저주받을 것이다. 너는 하나님께 정죄되고 내쳐질 뿐이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늘 함부로 행동하고 제멋대로 구는 사람들이 있다. 기분이 좋으면 일을 좀 하고, 기분이 안 좋으면 성질을 부리면서 “나는 오늘 기분이 별로야. 그러니까 밥도 안 먹을 거고, 본분도 이행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그와 상의하러 왔다가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멋대로 굴면 안 돼요.”라고 말하면 그는 뭐라고 하겠느냐? “저도 이래선 안 된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먹고 살 걱정 없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집안에서 자랐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 고모, 이모들까지 저를 무척 귀여워하셨죠. 부모님은 더더욱 저를 아끼셨고요. 저는 온 집안사람들이 애지중지하는 보물이었어요. 가족들은 무슨 일이든 다 제 뜻을 따라 주고 저를 사랑했고요. 그래서인지 이렇게 제멋대로인 성격이 되었네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도 다른 사람과 상의하거나 진리를 추구하지 않게 돼요. 하나님께 순종하기도 힘들고요. 이게 제 잘못인가요?”라고 말한다. 이런 식의 인식이 올바르냐? 이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그에게 편식을 한다든가, 이기적으로 굴면서 다른 사람은 생각해 주지 않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면, 그는 “저는 어릴 때부터 이랬습니다. 습관이 돼서 다른 사람을 신경 써 본 적이 없죠. 저는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집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이며 조부모님 모두 저를 무척 아껴 주셨거든요. 저는 온 집안 가족들의 보물 같은 존재였죠.”라며, 추잡한 궤변을 늘어놓는다. 이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뻔뻔한 행동 아니겠느냐? 부모가 너를 아끼면 다른 사람들도 다 너를 아껴야 한다더냐? 네 가족이 너를 사랑하고 귀히 여기면, 하나님 집에서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더냐? 그것이 이유가 된다더냐? 이것이 자신의 패괴 성품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임하든, 어떤 패괴 성품이나 인성 생활상의 문제가 생기든, 그는 객관적인 이유를 찾아 모면하고 해명하고 설명한다. 진리를 구하는 법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법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스스로를 반성하는 법도 없다. 반성하지 않는데 자신의 문제점과 패괴를 인식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신의 패괴를 인식하지 못하는데 회개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못한다면 어떤 상태로 살아가겠느냐? 스스로를 용인하는 상태로 살아가지 않겠느냐? 패괴를 드러냈지만 악을 행하지는 않았고 행정 법령을 거스르지도 않았다고, 진리 원칙에 어긋나기는 해도 고의는 아니었으니 정상참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보여야 할 상태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진실로 회개하지 않고, 늘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데 돌아설 수 있겠느냐? 영원히 불가능하다. 돌아서지 않는 사람은 손으로 행하는 악을 진정으로 내려놓지 못한다. 손으로 행하는 악을 진정으로 내려놓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진정으로 진리를 실행하여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안 봐도 선하다. 너는 손으로 행하는 악을 내려놓지 못하고 진리를 실행하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네가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고 싶다 한들, 성령 역사를 얻고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어 과오를 사함 받고 패괴를 해결하고 싶다 한들 가능하겠느냐?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불가능한데 네 믿음이 구원받는 성과를 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용인하고 만족스러워하는 상태로 사는 사람은 진리 추구와 10만 8천 리는 떨어져 있다. 사람이 손으로 하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두 다리로 뛰어다니는 것 등이 모두 하나님을 믿는 일과 관련이 있다 해도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는 것과는 무관하니, 그 결과는 분명하다. 진리 추구나 진리 실행과 무관하다면 자신을 반성하지도, 인식하지도 않을 것이고, 자신의 패괴가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회개해야 할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면 진실한 회개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는 것도 더욱 어려워진다. 사람이 이런 상태로 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고,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고 인정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서 ‘인정’이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하나님이 너의 모든 행동을 허락하고 칭찬하며 기억한다는 뜻이다. 이 몇 가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한 가지 사실이 입증된다. 바로, 네 행동과 네가 치른 대가, 그리고 네가 드러내고 나타낸 것들이 전부 진리 추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네가 어떤 생각이었어도, 설령 좋은 행위를 보였을지라도 그것은 네 인성 안에 아직 약간의 양심과 이성이 있다는 의미일 뿐, 그 좋은 행위는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이 아니다. 네 출발점과 속셈, 사상과 동기가 모두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하겠느냐? 네 모든 생각과 행동의 목적이 진리 추구에 있지 않고, 진리와는 무관하다는 점에 근거한다. 만약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 모든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을 수 없을 것이다. 단언컨대, 그 일련의 태도와 행동은 사람의 좋은 행위라고 할 수 있을 뿐, 진리 실행이 아니며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는 더더욱 아니다. 일을 처리할 때 함부로 행동하고 늘 제멋대로 구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도, 책망과 훈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늘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책망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 대해 핑계를 댄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말할 것도 없이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성품이다. 사탄의 본성과 성품을 지닌 사람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탄에 속하는 자이며, 마귀이자 사탄의 후예, 큰 붉은 용의 자손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마귀이자 사탄, 큰 붉은 용의 자손임을 인정하며, 자신을 인식할 때 아주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막상 패괴 성품을 드러내 누군가가 폭로하고 책망하고 훈계하면, 자신을 위해 온 힘을 다해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여기에서 사람은 철저히 드러난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말할 때는 그렇게 그럴듯하게 말하는 사람이 왜 책망과 훈계 앞에서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이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흔히 있지 않으냐? 이런 일을 분별하기가 쉬우냐, 쉽지 않으냐? 사실 분별하기 쉽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인식할 때 자신이 마귀이자 사탄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회개도, 변화도 없다. 그럼 자신을 인식하는 그 말은 과연 진실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거짓된 것이겠느냐? 진실한 인식이겠느냐, 아니면 외식하며 남을 기만하는 것이겠느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진실로 자신을 인식했는지를 알려면 그가 말하는 인식만 들어서는 안 된다. 책망과 훈계가 임했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핵심이다.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또한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패괴를 드러냈든 남들이 책망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책망하고 훈계하는 이가 어떤 사람이어도 안 된다. 그 스스로 자신에 대한 인식을 말하는 것은 괜찮으며,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만약 다른 사람이 폭로하고 질책하고 책망한다면, 아무리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말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드러낸 패괴 성품 중 어떤 측면에 대해 폭로하든 그는 극도로 반항하고, 한결같이 자신을 위해 궤변을 늘어놓고, 진정한 순종은 조금도 없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곤란해질 것이다. 교회의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못하고, 그에 대해 말하지도 못한다. 좋은 점을 말하면 기뻐하지만, 안 좋은 점을 말하면 화를 낸다. 만약 누군가 그를 폭로하면서 “당신은 좋은 사람이지만, 너무 함부로 행동하고 늘 제멋대로입니다.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부족한 점과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린다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면, 그는 “저는 악을 행하지도 않았고 죄를 짓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책망하는 거죠? 저는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부모님과 조부모님 모두 저를 무척 아꼈죠. 저는 가족들이 애지중지하는 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집에서는 아무도 저를 아껴 주지 않네요. 정말이지 사는 게 재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저의 이런저런 단점만 보면서 저를 책망하고 싶어 하죠. 대체 저더러 어떻게 살아가라는 겁니까?”라고 한다. 이것은 무슨 문제겠느냐?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보자마자 알아챌 것이다. 그는 부모와 가족들에게 지나치게 사랑을 받아 응석받이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고 독립적으로 살아가지도 못한다. 가족들의 지나친 사랑으로 인해 하늘 높은 줄 모른 채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제멋대로인 태도가 인이 박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반성할 줄도 모른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데도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지도 않는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어서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살아 낼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최소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인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변화할 수 있다. 언제나 관념과 상상에 기대 하나님을 믿고, 평안과 쾌락만을 바라며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회개하지 못하고 생명 성품의 변화를 이루지도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떤 일이 임하든 진리를 구하며, 어떤 패괴 성품을 드러내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고 진리를 교제함으로써 해결해야 한다. 만약 누군가 너에 대해 지적한다면, 혹은 너 스스로 성찰해서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입해 반성하고 돌아보고 자신을 인식한 다음 문제를 바로잡고 회개할 수 있다면,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늘 집안에서 사랑받는 기분에 도취되고, 부모에게 금지옥엽, 애지중지 여겨지는 존재가 되기를 좋아한다면, 그런 식으로 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네가 아무리 집안에서 금지옥엽, 애지중지 여겨지는 존재라고 해도 진리 실제가 없으면 폐물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진리 추구만이 가치 있는 일이다. 진리를 깨달으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되고, 진리를 깨달으면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한 행복인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인지 알게 된다. 가정환경이 어떻든, 특기나 은사 등 자신이 어떤 장점을 지녔든, 그것들은 다 진리 실제를 대신할 수 없고,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 대한 핑계가 될 수도 없다. 오직 진리를 얻어야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 낼 수 있으며,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을 수 있다. 사실이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리더 일꾼이 된 후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고, 마침내 빛을 발하게 됐다고 생각해 흐뭇해한다. 그러면서 그는 특기를 발휘해 제대로 한번 재능과 포부를 펼치고 실력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지식과 품격을 갖추었으며,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와 태도, 마인드, 리더십을 지니고 있다. 학교에서는 모범생으로 학생회장을 맡았고, 회사에 들어간 후에는 임원이나 대표가 되었으며, 하나님을 믿은 후로는 하나님 집에서 리더로 선발되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은 내 편이야. 이래서 능력 있는 사람은 조용히 살기가 힘들다니까! 대표 자리에서 내려온 지 얼마나 됐다고 하나님 집에 오자마자 또 리더 일꾼 자리에 앉게 됐네. 평범하게 살고 싶어도 그게 안 돼. 이건 하나님의 높여 주심이야. 하나님께서 내게 안배해 주신 일이라고. 그러니 순종해야 해.’라고 생각한다. 리더가 된 그는 경험과 지식, 리더십,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를 제대로 발휘한다. 그는 자신이 능력과 패기를 갖춘, 타고난 인재이자 능력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문제가 있다. 카리스마를 타고난 이 능력자, 인재, 지도자들이 교회에서 가장 잘하는 일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독립 왕국을 세우고 권력을 독점한 채 독선적으로 구는 것이다. 리더가 된 후 그는 명예와 지위를 위해 일하고 뛰어다니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일절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바쁘게 다니면서 사역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을 것이며, 패괴 성품도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에서는 늘 그를 필요로 하고, 형제자매들도 그를 원하며, 어떤 일이든 그가 없으면 안 된다. 그는 혼자 거뜬히 한몫을 할 수 있고, 권력을 독점할 수도 있다. 그에게는 독립 왕국을 세우는 비법이 있다. 뭔가 독창적이고 색다른 일들을 시도하는 것이다. 특히 감투를 쓰고 거드름 피우고 지위를 점하고 남을 훈계하는 데 매우 능숙하지만, 딱 하나 그가 못하는 중요한 일이 있으니, 바로 리더가 된 후 남들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 자신을 인식하는 것, 자신의 패괴를 발견하는 것, 형제자매들의 건의를 듣는 것이다. 사역에 대해 상의할 때 누군가 다른 의견을 내면 그는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핑계를 대면서 “여러분의 그 제안은 단편적입니다. 저는 교회 리더입니다. 여러분 의견을 따라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지만, 일이 생기면 책임은 저 혼자 져야 하죠. 대부분의 경우 여러분은 의견을 내도 됩니다. 이 형식은 유지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어떻게 할지는 제가 결정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많은 형제자매가 사역과 관련된 어떤 토론이나 교제에도 참여하지 않게 되며, 그 역시 사역상의 어떤 문제도 형제자매들과 교제하지 않게 된다. 그저 자기 혼자 결정하고 결론을 내릴 뿐이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이유가 많다. 그는 ‘교회는 리더의 교회나 마찬가지야. 리더는 대장이라고. 형제자매들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 어떤 길을 걸을지는 리더가 결정해야 해.’라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형제자매들의 생명 진입과 그들이 걷는 길, 추구하는 방향은 그에게 통제된다. ‘지도자’가 된 후 그는 권력을 독점하고 독립 왕국을 세우며, 일 처리에 투명성이 사라진다. 또 부지중에 일부 사람들을 억압하며, 진리를 추구하고 깨닫는 능력이 있는 형제자매들을 배척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교회 사역과 하나님 선민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일에 그렇게 논리적이고, 언제나 이유와 핑계가 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오직 자신의 지위와 권력 독점 상황을 지키고자 행동하게 된다. 그는 가정과 사회에서의 행동 원칙, 방식, 방법을 하나님 집으로 가져와서는 그게 바로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인식하고 반성하는 일은 결코 없다. 설령 누군가 그런 행동은 진리 원칙에 위배되는 거라고 지적해도, 하나님의 깨우침과 징계, 채찍질이 임해도 그는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무엇이 문제겠느냐? 리더가 된 날부터 그는 본분을 자신의 사업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진리를 추구하지 못하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사업을 하면서 스스로의 모든 행동이 진리를 추구하는 거라고 여겼다. 그는 진리 추구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 그는 하나님 집과 형제자매들의 이익을 지킨다는 기치를 들고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지킨다. 그런 것들이 다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지위에 올라 행동하고 드러낸 패괴 성품을 조금도 인식하지 못한다. 설령 그것이 패괴 성품이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임을, 흉악하고 강퍅한 성품임을 은연중에 느낄지라도 그는 곧 ‘아냐. 나는 리더잖아. 그러니까 리더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야 해. 형제자매들에게 내가 패괴 성품을 드러낸 걸 들켜선 안 된다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수많은 패괴를 드러냈고, 지위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수없이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아도 남들의 폭로 앞에서 궤변을 늘어놓거나 차단하는 수법으로 더 많은 사람이 그 일에 대해 알지 못하게 막는다. 권력과 지위가 생긴 후로 그는 스스로를 신성불가침의 위치에 올린 채 자신은 위대하고 올바르다고, 자신에게 비난하거나 의구심을 품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자리를 차지한 후로는 자신과 다른 어떤 목소리도, 형제자매들의 생명 진입과 교회 사역에 도움이 되는 어떤 건의나 제안도 거부하고 반대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 대한 그의 핑계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나는 지위와 신분이 있는 사람이야. 내 신분과 지위가 내 존엄성을 결정하지. 그건 신성불가침한 거라고.’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와 핑계가 생겼는데 그가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그는 시종일관 지위를 점한 채 말하고 행동하며, 지위의 복을 탐한다. 이는 스스로를 불 위에 올려놓고 태우는 것이니,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런 사람은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하고 가증스러우며, 또 몹시 역겨워 구역질이 난다! 그는 리더가 된 후 스스로를 성인(聖人)인 양 꾸몄다. 성인,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올바른 사람. 이 호칭은 무엇이더냐? 멍에이다. 이런 멍에를 쓴 사람은 더 이상 진리를 추구할 수 없다. 누구든 이런 멍에를 썼다는 것은 진리 추구와 아무 상관이 없어졌다는 의미이다. 이 부류의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주된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사실, 지위에 얽매여 마음속으로 늘 ‘나는 리더고, 지도자야. 나는 신분과 지위가 있는 사람이야. 존엄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나한테 교만한 성품이나 사악한 성품이 있어서는 안 돼. 솔직하게 내 패괴 성품을 교제할 수는 없지. 내 존엄성과 명망을 지켜야 하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보고 숭상하게 해야 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늘 그런 것들에 마음이 얽매여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자신을 반성하거나 인식하지도 못한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그들을 망친 것이다. 그럼 그들의 마음가짐과 관점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당연히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이 평소 본분을 이행하면서 보이는 모습, 예컨대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제멋대로 결단 내리고 위장하고 기만하는 등등의 행동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분명 진리 추구가 아니다. 그럼 그들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이유,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리더가 신분과 존엄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설사 패괴 성품이 있을지라도 폭로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 관점은 너무 황당하지 않으냐?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폭로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데, 이것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겠느냐? 리더가 되어서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네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겠느냐? 네 패괴가 어떻게 정결케 되겠느냐? 만약 네 패괴가 정결케 되지 않고, 계속 패괴 성품으로 살아간다면, 너라는 리더는 실질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는 거짓 리더일 것이다. 너는 리더가 되어 지위가 생겼지만, 그것은 그저 사역과 본분이 다른 것일 뿐, 신분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지위가 있고 남과 다른 본분을 이행한다고 해서 네가 다른 사람보다 존엄성이 더 있으며, 존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된 것도 아니다. 만약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염치를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지나치게 뻔뻔한 것 아니겠느냐? 리더가 아닐 때는 진지하게 남을 대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패괴 표출을 털어놓으며,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부하더니, 리더가 되고 나서는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는 가면을 썼다. 본모습은 가면 뒤에 있고, 가면 겉에는 어떤 표정도 드러나지 않는다. 울지도, 웃지도 않으며, 희로애락도, 칠정 육욕도 없다. 당연히 패괴 성품은 더더욱 드러나지 않는다. 언제든 똑같은 표정, 똑같은 상태이다. 실제 내적 상태와 마음속 사상, 생각은 모두 가면 뒤에 숨겨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어떤 리더는 늘 자신에게 신분과 지위가 있다고 생각해서 책망과 훈계가 임하면 존엄성을 잃을까 봐 몹시 겁내며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숨긴다. 그러면서 자신은 지위가 있으니 남들보다 존귀하고 성결하다고, 진리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진리 추구는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착각한다. 이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 일말의 염치도 이성도 보이지 않는다. 이 부류 사람들은 이렇다. 이 부류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의 본질을 볼 때, 그들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지위와 명리를 좇으며, 사역을 하면서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지킨다. 또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면서 그것이 바로 진리 추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바울처럼 언제나 자신이 그동안 어떤 사역을 하고 어떤 본분을 이행했는지, 교회 사역을 하면서 어떤 일들을 처리했는지, 하나님 집의 사역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종합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항상 그런 것들을 계산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라고 했던 바울처럼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달려갈 길을 마치고 싸워야 할 싸움을 끝냈으니 이제 구원받을 승산이 얼마나 될지, 자신의 공로가 얼마나 큰지, 자신이 받을 상이 얼마나 될지 계산해 보고, 하나님께 상을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면류관을 주지 않으면,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불복하며,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고 원망할 것이다. 이 부류 사람의 이런 마음가짐과 성품을 봤을 때,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겠느냐? 그가 하나님의 배치대로 따르겠느냐? 이는 안 봐도 뻔한 것 아니겠느냐? 그들은 달려갈 길과 싸워야 할 싸움을 진리 추구라고 생각하면서 진리를 전혀 구하지 않으며,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를 갖추지 않았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방금 교제에서는 주로 사람의 어떤 문제들을 폭로했느냐? 구체적으로 사람의 어떤 패괴 성품에 대해 주로 폭로했느냐? 한 가지는 진리를 싫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점이다. 이는 매우 구체적인 모습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이 있다. 바로 모든 사람의 성품과 본질 안에 존재하는 한 가지, 강퍅함이다. 이 모습 역시 무척 구체적이고 분명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는 사람이 주로 드러내는 두 가지 패괴 성품이다. 이 구체적인 모습과 관점, 태도 등은 사람의 패괴 성품 안에 진리를 싫어하는 성분이 있음을 실제적이고 정확하게 설명해 준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성품 안에 강퍅한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했든, 하나님의 사역 과정에서 사람의 어떤 패괴 성품이 드러났든, 사람은 시종일관 받아들이지 않고 반항한다. 물론 눈에 띄게 반항하거나 경시하는 태도로 거부하는 것 외에도 한 가지 모습이 더 있다. 바로 하나님의 사역이 자신과 무관한 양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바로 ‘당신은 당신 좋을 대로 말하시라. 나와는 무관하다. 당신이 어떻게 심판하고 드러내든 나와는 상관없다. 나는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강퍅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강퍅한 모습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살아갈 거야. 자유롭고 즐겁게 살아갈 거라고. 설령 나한테 당신이 말한 교만함이나 간사함, 진리를 싫어하는 태도, 사악함, 흉악함 등등의 모습이 있다고 한들, 그게 뭐? 나는 성찰하거나 인식하지 않을 거고, 받아들이지도 않을 거야. 내가 이렇게 믿는데 당신이 나를 어쩔 수 있겠어?’라는 것이 바로 강퍅한 태도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경 쓰거나 거들떠보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일깨워 주든 경고해 주든 권면해 주든, 어떤 방식으로 말하든, 하나님 말씀의 근원과 목적이 무엇이든 사람은 일절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일컬어 강퍅하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거들떠보지 않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진심과 애쓰는 마음은 더더욱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든 사람은 협력하려는 의지가 없고 진리에 공을 들이려 하지도 않는다. 설령 하나님이 심판하고 드러낸 것이 전부 사실이라고 인정할지라도 마음속으로 후회하지 않고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결국, 수많은 도를 들어도 “어쨌든 나는 진심으로 믿었어. 어쨌든 내 인성은 나쁘지 않지. 어쨌든 나는 일부러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어쨌든 나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버리고 고생하고 기꺼이 대가를 치렀어. 그러니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실 거야.”라고 한다. 이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는 바울의 말과 같지 않으냐? 바로 이러한 태도이다. 이런 태도의 이면에 숨겨진 성품은 무엇이겠느냐? 강퍅함이다. 그럼 강퍅한 성품이 쉽게 변화하겠느냐? 길이 있겠느냐?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법은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어떻게 바꿔야겠느냐? 자신의 강퍅한 태도에서 생겨난 상태, 마음가짐을 해부하고 인식하며, 자신의 어떤 행동과 말, 자신이 고수한 어떤 관점과 속셈,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과 생각이 강퍅한 성품에 지배되었는지 보아야 한다. 네가 드러낸 모습과 상태에서 시작해 성찰하고 해결한 뒤 바로잡되, 조금이라도 성찰했다면 한시바삐 바로잡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 기호와 기분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제멋대로인 행동이다. 이런 성품에는 진리를 싫어하는 성질이 얼마간 들어 있다. 만약 네가 자신이 이런 사람이고 이런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도 반성하거나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은 채 목을 빳빳이 세우고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가리켜 강퍅하다고 한다. 네가 설교를 듣고 문득 ‘나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나도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지. 그게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구나. 그런 게 진리를 싫어하는 거라면 이 부분의 성품을 해결해 봐야겠다.’라고 깨닫는다면,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먼저, 자신의 우월감과 제멋대로인 태도,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태도를 내려놓아야 한다. 기분이 좋든 나쁘든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봐야 할 것이다. 네가 육을 버리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실행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너를 어떻게 보겠느냐? 네가 정말 그 패괴된 행위를 해결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바로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는 태도이다. 너는 의식적으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을 버리며,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과 강퍅한 성품을 해결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부분의 패괴 성품이 다 해결되면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은 흡족해질 것이다. 너희가 여태까지 교제한 내용을 이해하여 육을 버릴 수 있다면 내 마음은 무척 기쁠 것이며, 앞에서 한 말들도 헛되지 않을 것이다.

강퍅함은 패괴 성품에 속하는 문제로 본성 안에 존재하며,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에게 강퍅한 성품이 있으면 보통 이치를 따지거나 궤변을 늘어놓기를 좋아하고, 자기 의견을 고집하며,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때로는 마음속으로 자기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허영과 체면을 위해 자기 뜻을 고수하며, 끝까지 우겨 댄다. 이 강퍅한 성품을 인식했다고 할지라도 바꾸기는 쉽지 않다. 강퍅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사람의 교만함과 간사함, 흉악함, 진리를 싫어하는 태도 등의 성품을 인식해야 한다. 자신에게 교만함과 간사함, 흉악함, 진리를 싫어하는 태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진리를 실행하고자 하나 육을 버리기는 싫을 때,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나 늘 자신의 논리를 내세우고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 강퍅한 문제를 쉽게 인식할 수 있다. 강퍅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정상인의 이성을 지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네가 하나님의 양이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어떻게 들어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낸 문제 중 어떤 것들이 너와 관련 있는지 듣고 생각해야 한다. 너와 관련 있는 문제를 발견했다면 받아들여야지, 그것은 다른 사람의 문제, 모두의 문제, 인류의 문제이고 너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여긴다면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폭로 가운데서 하나님이 들춰낸 패괴 상태나 치우친 관점이 너에게는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드러내는 교만한 성품의 모습을 폭로한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생각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교만한 모습이 없을까? 나는 패괴된 인류니까 분명 나한테도 그런 모습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어떤 부분에서 교만한 모습을 보이는지 반성해야 해. 사람들은 나를 보고 교만하다고, 늘 현실을 모르고 높은 자리에서 떠든다고, 남을 억압하는 말을 한다고 하지. 정말 나한테 그런 성품이 있는 걸까?’ 반성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 말씀의 폭로가 100% 정확하며, 너 자신은 교만한 사람임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폭로가 100% 정확하고, 네 상황과 조금의 오차도 없이 부합하며, 돌아보면 볼수록 정확하게 느껴진다면,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패괴 성품의 본질을 분별하며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진실로 후회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을 때는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셔야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또 패괴 성품을 해결할 때는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폭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똑똑한 사람이고, 하나님 말씀이 폭로한 것들이 기본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안다면, 혹은 절반이라도 옳다고 인정할 수 있다면, 한시바삐 받아들여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스스로를 반성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폭로한 말씀이 전부 정확한 사실이자 진상이며, 조금의 오차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진실로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고, 자신에게 갖가지 패괴 성품이 존재하며 자신은 확실히 교만하고 독선적이라는 사실을, 일말의 이성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이 심각하게 패괴되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자 할 것이다. 그러면 후회하는 마음이 생기고, 자신을 부정하고 증오하게 되며, 여태까지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된다. ‘나는 왜 하나님 말씀을 읽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하나님 말씀에 대한 내 이런 태도는 교만함 아닐까? 나는 어째서 이렇게 교만한 걸까?’ 이렇게 수시로 반성하면 얼마 후 자신이 정말 무척 교만하며, 하나님 말씀을 진리이자 사실이라고 완전히 시인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자신에게는 조금의 이성도 없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로, 반성할 때마다 아주 조금씩 인식하고 아주 조금씩 깊이를 더할 뿐이다. 단기간 내에 자신의 패괴 성품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기도하고 자신을 많이 반성해야 조금씩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사람은 모두 몇 번의 실패와 좌절을 겪은 후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을 반성한 다음에야 자신의 패괴된 본모습을 밝히 알고, 자신이 정말 깊이 패괴되었으며 진리 실제가 전혀 없다고 여기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며 일이 임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면 조금씩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마침내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자질은 좀 낫지만, 이건 하나님께서 주신 거야. 나는 늘 뽐냈어. 말할 때는 남들을 뛰어넘고자 했고, 모두가 내 뜻대로 따라 줬으면 했지. 정말 비이성적이었어. 또 교만하고 독선적이었던 거야! 나는 반성을 통해 내 교만한 성품에 대해 알게 됐어. 이건 하나님의 깨우침이자 은총이야.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해!’라고 말이다. 자신의 패괴 성품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좋은 일이겠느냐, 나쁜 일이겠느냐? (좋은 일입니다.) 그러고 나면 어떻게 해야 이성적이고 순종적인 언행을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남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서 다른 이를 억압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자신의 자질과 은사, 특기를 올바로 대할 수 있을지 등등을 구하게 된다. 이렇게, 교만한 성품은 낙숫물이 댓돌을 뚫듯 조금씩 조금씩 해결된다. 그 후, 너는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 함께 협력해서 본분을 이행할 때, 다른 이의 관점을 올바르게 대하며 열심히 잘 들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의 관점이 옳다고 생각한 순간, 깨달을 것이다. ‘이제 보니 내 자질이 가장 훌륭한 건 아니었구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장점이 있었어. 나보다 전혀 못하지 않잖아. 여태까지 나는 항상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자질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자아도취이고 견문이 좁은 거였어.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무 비이성적이고 염치없는 거야! 교만한 성품이 내 눈을 가리고 내 귀를 막았구나. 남들의 말은 듣지도 않고 내가 훌륭하고 옳다고 생각했어. 나는 사실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지 않아!’ 그 후로 너는 자신의 부족한 점과 보잘것없는 분량을 진실로 깨닫고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다음부터 남들과 교제할 때는 상대의 관점에 귀 기울이며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너무 많구나. 내 자질이나 깨닫는 능력은 기껏해야 평범한 수준이었어.’라고 깨닫게 된다. 이는 어느 정도 자기 객관화가 된 것 아니겠느냐? 이렇게 체험하고 늘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반성하면 자기 자신을 진실로 인식하게 된다. 또 인식이 점점 깊어져 자신의 패괴된 본모습을 간파하게 되고, 빈궁하고 가련하며 추하기 그지없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그때면 자기 자신을 싫어하고 패괴 성품을 증오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자신을 저버리기도 쉽다.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의 패괴 표출을 반성해야 한다. 특히 다양한 환경에서 패괴 성품을 드러낸 후 수시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면 자신의 패괴된 본질을 간파하기가 쉽고, 마음속으로 패괴와 육체, 사탄을 증오하게 되며,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에 공을 들이게 된다. 그러면 교만한 성품은 점점 줄어들 것이며, 너는 조금씩 그것을 벗어 버리고 점차 이성을 갖추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기도 상대적으로 쉬워질 것이다. 남들의 눈에 너는 예전보다 착실하고 신중하며 객관적으로 말하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또 다른 이의 말을 귀담아듣고, 다른 이에게 말할 시간을 주며, 다른 이의 말이 옳을 경우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 밖에도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게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며, 누구와 협력하든 조화롭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이성과 인성을 갖춘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 이것이 바로 이 부분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길이다.

여태까지 강퍅한 성품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 이 문제를 들어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길에 대해 교제하도록 하겠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려면 먼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사람의 패괴된 본질을 폭로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너의 패괴 표출, 패괴 상태, 패괴 속셈과 모습을 인식하고 해부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는 패괴 성품을 인식한 것이며, 이미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과정에 들어선 것이다. 반대로, 이렇게 실행하지 않는다면 강퍅한 성품이 해결되기는커녕 네 패괴 성품 또한 제거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모두 여러 측면의 패괴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패괴 성품부터 해결해야겠느냐?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사람의 강퍅함이다. 강퍅한 성품은 사람이 하나님께 다가가고 순종하며 진리를 구하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강퍅함은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교제할 때의 가장 큰 걸림돌이며,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에 가장 큰 지장을 준다. 강퍅한 성품을 해결하면 다른 패괴 성품은 쉽게 해결된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려면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인식할 수 있는 패괴 성품부터 해결하는 것이다. 인식이 많아질수록 더 많이 해결할 것이고, 인식이 깊어질수록 더 철저하게 해결할 것이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은 이런 과정이다. 즉,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며, 패괴 성품의 본질을 해부하여 육을 버리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패괴 성품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또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대충 “저는 패괴된 인류이자 마귀, 사탄의 후예이며, 큰 붉은 용의 자손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적대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진정으로 자신의 패괴를 인식했다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은 이렇다 할 인식이 없고 아마 다른 사람의 말을 따라 했을 것이다. 진실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사람의 지식과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자기가 느낀 패괴 성품의 해악과 그 결과를 밝히 아는 것이다. 또 패괴 성품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해한다는 사실을, 패괴 성품은 사탄에게서 비롯되었고 사탄에 속하는 독소이자 사탄의 철학이라는 사실을, 진리와 하나님을 완벽히 적대한다는 사실을 밝히 아는 것이다. 이 문제를 밝히 아는 것이 패괴 성품을 인식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마귀이자 사탄이라는 것을 인정한 후에도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가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 진리에 어긋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이것 역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마귀이자 사탄이라고 하지만, 만약 네가 “당신은 무슨 근거로 자신이 마귀이자 사탄이라고 하는 겁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그가 자신의 패괴 성품도, 자신의 본성 본질도 인식하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만약 그가 자신의 본성이 마귀의 본성임을 인식했다면, 자신의 패괴 성품이 사탄의 성품임을 인식할 것이며, 그리하여 자신이 마귀이자 사탄임을 인정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본성 본질을 인식한 것이다. 자신에 대한 진실한 인식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의 폭로와 심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실행과 체험을 통해 생겨나며, 또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생겨난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 자기 인식은 전부 공허하고 실질적이지 않다. 근원을 찾지 못했고, 본질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인식하려면 반드시 구체적인 일에서 자신이 어떤 패괴 성품을 드러냈는지, 어떤 속셈이 있는지, 어떻게 한 것인지, 어떤 불순물이 들어 있는지, 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등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을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자신을 인식한 것이다. 어떤 이는 책망과 훈계가 임했을 때, 자신이 마음속으로 진리를 싫어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추측하고 오해하고 하나님께 경계심을 가졌음을 인정하며, 사람을 심판하고 폭로한 하나님 말씀이 전부 사실임을 인정한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인식이 없고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하기에 이런 식의 자기 인식은 깊이가 얕다. 자신의 패괴를 인정했을 뿐 문제의 근원을 찾지 못했는데, 하나님을 추측하고 오해하고 경계하는 문제들이 해결되겠느냐?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을 인식하려면 자신에게 패괴와 어떤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말고, 진리를 깨달아 근본적으로 패괴 성품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패괴된 본모습을 밝히 알 수 있고, 진실한 회개를 할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인식하는 동시에 진리를 구하고 깨달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자기 인식이라야 성과를 낼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사람을 폭로하고 심판하는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마다 먼저 사람을 폭로한 하나님 말씀이 사실이자 실제에 부합한다는 것을 믿고, 또 사람을 심판하는 하나님 말씀이 진리이며 하나님의 공의를 대표한다는 것을 믿는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최소한 이러한 것들을 인식할 수 있다. 만약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사람을 폭로하고 심판하는 하나님 말씀이 사실이자 진리임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말씀이 전부 진리임을 굳게 믿는다면,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든, 말씀하는 방식이 어떠하든 전부 믿을 것이며, 설령 마음속으로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믿고 받아들일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하기가 쉽다. 스스로를 반성할 때는 반드시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다. 어떤 사람의 말도, 어떤 사탄의 말도 진리는 아니다. 사탄은 갖가지 지식과 학설, 이론을 이용해 수천 년 동안 사람을 패괴시켰다. 사람은 무감각해져서 자신을 전혀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설과 궤변을 숭상하고 진리를 거부한다. 이런 인류는 구제 불능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임을 믿고,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하여 자신을 인식한다. 이렇게 하면 진실한 회개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채 오직 사람의 지식에 근거해 반성하고 죄짓는 행위를 인정할 뿐, 자신의 패괴된 본질은 시종일관 간파하지 못한다. 이런 식의 자기 인식은 헛수고로, 어떤 성과도 낼 수 없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스스로를 반성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조금씩 자신이 드러낸 패괴 성품에 인식이 생길 것이고, 자신의 부족한 점과 인성 본질, 일을 보는 관점과 인생관, 가치관 등을 진리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인식할 수 있을 것이며, 정확한 평가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조금씩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인식은 생명 체험에 따라 계속 깊어진다. 진리를 얻기 전까지는 사람의 본성 본질을 완전히 간파할 수 없다. 만약 사람이 정말 자신을 인식한다면, 패괴된 인류가 정말 사탄의 후예이자 화신임을 깨닫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자격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완전히 엎드릴 것이다. 이 정도까지 인식한 자가 바로 진실로 자신을 인식한 사람이다.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해 실제에 진입하고자 한다면, 자신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사람은 누구나 패괴 성품을 갖고 있으며, 자기도 모르게 패괴 성품에 얽매이고 통제되어 진리를 실행하거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다. 그래서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려면 반드시 먼저 자신을 인식하고,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한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과정이 있어야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진리를 얻게 된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과정은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과정이다. 그럼 패괴 성품은 어떻게 해야 해결되겠느냐? 먼저, 자신의 패괴된 본질을 인식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패괴 성품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사탄의 어떤 헛소리와 궤변을 받아들여 생겨났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이 근원적인 것들을 철저히 인식하고 분별하면,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게 되며,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대 살아가고자 할 것이다. 또 일단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순간, 마음속으로 알아차려 거부하고 육을 버릴 것이다. 이렇게 실행하고 체험하면 패괴 성품을 조금씩 벗어 버리게 된다.

혹자는 “저는 사람을 폭로하고 심판하는 하나님 말씀을 읽고 스스로를 반성했으며, 제가 교만하고 간사하고 이기적이고 사악하고 강퍅한 데다가 인성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신이 무뢰한, 짐승, 마귀 사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이 진실로 자신을 인식한 것이겠느냐? 만약 그의 말이 남을 따라 한 게 아니라 마음속 진심이라면, 단지 인식의 깊이에 차이가 있을 뿐, 최소한 자신을 인식했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만약 남을 모방해서 남의 말을 그대로 읊은 것이라면 그것은 진실한 자기 인식이 아니다.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려면 모든 일과 모든 내적 상태, 즉 패괴 성품과 관련된 상태, 표출, 태도, 마음과 생각 등의 세부적 부분까지 구체화해야 한다. 그래야 진실로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사람이 정말 자기 자신을 인식하면 그에 따라 후회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진실한 회개를 하게 된다. 회개하려면 먼저 무엇을 실행해야겠느냐?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잘못을 인정한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자신에게 어떤 측면의 패괴 성품이 있는지 인정하고 인식해야 한다. 패괴 성품을 가리켜 일종의 ‘잘못’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다. 패괴 성품은 본성에 속하며, 사람을 통제한다. 패괴 성품은 사람이 저지르는 순간적인 잘못과 다르다. 어떤 사람은 패괴를 드러낸 후 바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기도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정확하지 않다. 만약 “죄를 인정합니다.”라고 말하면 상대적으로 더 적절할 것이다. 회개할 때의 구체적인 실행법은 자신을 인식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즉, 패괴 성품을 드러내거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임을 의식했다면, 관련된 하나님 말씀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그것이 사탄의 독소와 패괴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는 성과를 낼 수 있으며, 진리 실행의 원칙을 찾아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회개이다. 또 자신이 어떤 패괴를 드러냈든, 먼저 패괴 성품을 인식한 후 진리를 찾아 해결하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회개이다.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이 있지만,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진리를 실행한 간증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식의 자기 인식은 시간이 지나도 아무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그러니 진실한 회개는 말할 것도 없다. 진실한 회개를 하려면 반드시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한다. 그럼 패괴 성품을 해결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하고 진입해야겠느냐?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사람은 간사한 성품이 있고, 늘 거짓말을 하며 기만한다. 네가 이 점을 인식했다면, 간사함을 해결하는 가장 쉽고 직접적인 실행 원칙은 바로 정직한 사람이 되어 진실을 말하고 실질적인 일을 하는 것이다. 예수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라고 하였다. 정직한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 말씀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 간단한 한마디가 바로 가장 효율적이다. 이해하기도 실행하기도 쉽다. 하지만 사람은 너무 심각하게 패괴되어 모두 사탄 본성을 지니고 있고 사탄 성품으로 살아가기에,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몹시 어렵다. 정직한 사람이 되고자 하나 그렇게 되지 못한 채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기만행위를 한다. 그 후 인식하고 후회하지만, 여전히 패괴 성품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똑같이 거짓말을 하고 기만행위를 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한편으로는, 패괴 성품의 본질이 추하고 비열한 것임을 인식하고 마음속으로 증오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 원칙을 실행할 때, 너는 간사한 성품을 해결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물론 간사한 성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돌아서는 모습이며, 진실한 회개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네 행동을 인정할 것이며, 네가 돌아설 때 하나님도 마음을 돌릴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마음을 돌리는 것은 사람의 패괴 성품과 패역에 대한 일종의 사면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용서하고 사람의 죄악도, 사람의 과오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구체적이지 않으냐? 이해할 수 있겠느냐? 다시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너는 교만한 성품이 있어 어떤 일이 임하든 자기 생각이 몹시 강하고, 늘 네 생각대로 결정하면서 남들이 네 말을 듣고 네 뜻대로 움직이기를 바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것이 교만한 성품 때문에 비롯된 것임을 인식하고 그것이 교만한 성품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것이 자신을 인식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 그 후에는 교만한 성품을 폭로한 하나님 말씀 몇 대목을 찾아 자신에게 대입하면서 반성하고 인식해야 한다. 그 말씀을 자신에게 대입했을 때 맞아떨어져서 하나님이 폭로한 교만한 성품이 네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 후 교만한 성품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지, 사탄의 어떤 독소와 사설, 궤변에 지배되고 있는지 분별하고 파헤쳐서 이러한 문제들을 모두 밝히 깨닫는다면, 그것이 바로 교만함의 근원을 파헤친 것이며, 진실로 자신을 인식한 것이다. 또 네가 자신이 드러낸 그 부분의 패괴 성품을 더 정확하게 정의 내리면, 이는 더 깊이 있고 실질적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진리 원칙을 찾고,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말하는 것이 정상 인성의 모습인지 알아야 한다. 실행의 길을 찾았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해야 한다. 마음이 돌아서면 진실한 회개를 할 수 있다. 그러면 원칙 있는 언행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모습을 살아 낼 수 있으며, 패괴 성품도 조금씩 벗어 버리게 될 것이다. 그때의 너는 과거의 그 패괴된 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의 모습,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일 것이다. 이런 자가 바로 생명 성품이 변화한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여 얻을 수 있는 성과이다. 오직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야만 스스로를 진실로 인식할 수 있다. 심판과 형벌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기껏해야 자기가 저지른 실수나 잘못을 인정할 뿐, 자신의 본성 본질에 대해서는 밝히 알기 힘들다. 은혜시대에 주를 믿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죄를 짓지 않고, 행위 면에서도 좋아졌지만 생명 성품에는 줄곧 변화가 없었다. 하나님을 믿는데도 하나님을 대적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배반하기까지 했다. 왜 그랬겠느냐? 패괴된 인류는 이 문제의 근원을 깨닫기가 몹시 어렵다. 사람은 어째서 모두 사탄 성품을 갖고 있겠느냐?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켰으며, 사람은 모두 사탄의 헛소리와 철학을 받아들여 패괴 성품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의 성품은 인류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근원이 되었다. 이는 사람이 가장 인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하나님의 말세 심판 사역은 인류를 구원하여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근원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사탄은 수천 년 동안 인류를 패괴시켰으며, 사탄의 본성은 이미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그래서 어떤 패괴 성품이든 한두 번 반성하고 인식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패괴 성품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드러나므로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탄 성품과 오랫동안 싸워야 한다. 그리하여 사탄을 이기게 되면 패괴 성품을 철저히 벗어 버릴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하고, 또 진리를 실행해야 한다. 이를 통해 패괴 표출이 없고 생명 성품에 변화가 생겨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어야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각각의 싸움에서 얻을 수 있는 성과는 그리 눈에 띄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패괴 성품이 드러날 수 있다. 그러면 너는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침울해질 것이다. 하지만 단념하지 말고 계속 노력하며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해라. 그렇게 2~3년 유지하면 진정으로 진리를 실행하게 되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찾아온다. 그때 너는 비로소 모든 실패와 노력, 성과가 성품 변화의 과정,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는 과정에서 나타난 좋은 신호였음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비록 사람의 의식으로는 각각의 변화를 전혀 느낄 수 없겠지만, 돌이킬 때마다 생기는 성품 변화는 그 어떤 것, 그 어떤 행동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이는 사람이 성품 변화와 생명 진입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이다. 성품 변화를 추구할 때는 반드시 이렇게 실행해야 한다. 물론, 사람이 성품 변화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성품 변화는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경천동지할 변화가 생겨 놀람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시나브로 생기는 변화이다. 진리를 실행하게 되면 수확이 생긴다. 이렇게 3년, 5년, 10년을 보낸 후 고개를 돌려 보면 10년 전과 후의 네 성품이 180도 다르다는 사실에 놀람을 금치 못할 것이다. 어쩌면 네 성격이나 성미, 생활 습관 등에는 변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드러내는 성품이나 상태, 태도는 예전과 완전히 달라서 마치 다른 사람 같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변화가 생기겠느냐? 그 10년 동안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을 거듭하여 겪고 수많은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먼저 일을 바라보는 네 관점과 인생관, 가치관에 변화가 생겼으며, 생명 성품도 따라서 변화되고, 생존을 지탱해 주는 모든 토대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변화가 생기는 과정에서 너는 조금씩 완전히 다른 사람, 새사람이 되었다. 비록 네 성격과 성미, 생활 방식, 나아가 언행에는 변화가 없지만, 생명 성품에 변화가 생겼다. 이것이야말로 근본적인 변화, 본질의 변화이다. 성품 변화의 신호는 무엇이겠느냐?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이겠느냐? 먼저,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생긴다. 즉, 진리를 깨달음에 따라 내면에 갖고 있던 일을 바라보는 이방인의 수많은 관점에 변화가 생기고, 하나님 말씀의 진리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는 성품 변화의 시작이다. 이 밖에도 사람이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하고 진리 실행에 집중하면서, 또 자기 마음속 각종 속셈과 동기, 생각, 뜻, 관념, 관점, 태도를 돌아보면서 문제를 발견하게 되고 후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육을 버리고 진리를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고, 그리스도가 곧 진리요 길이요 생명임을 마음으로 인정하며,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커진다. 또한,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을 드러내고 심판하고 형벌하며, 사람의 패괴 성품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이렇게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것은 더없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만약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하나님 말씀의 공급과 인도가 없다면 사람은 하나님께 구원받지도, 이러한 수확을 얻지도 못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람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실생활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떠날 수 없다고 느끼게 되고, 하나님 말씀의 공급과 인도, 안내가 너무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또 마음에 평안이 넘쳐나며, 어떤 일을 마주하든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말씀을 찾아 근거로 삼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실행의 원칙과 실행의 길을 찾게 된다. 이는 자기 인식을 통해 얻는 한 가지 측면의 성과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자신이 드러내는 패괴 성품을 더는 예전처럼 그렇게 강퍅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된다. 마음을 평온히 하고 정직한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패괴 성품을 드러낸 후에도 더는 예전처럼 그렇게 강퍅하게 굴면서 순종하지 못하거나 난폭하게 날뛰거나 함부로 흉악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반성하고 자신의 실질적인 문제를 인식한다. 설사 자신에게 있는 패괴 성품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할지라도 마음을 평온히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리를 구한 후에 자신의 문제와 패괴 성품을 인정하여 하나님께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다. 이는 그야말로 순종하는 태도이다. 이렇게,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 사람에게 어떤 요구를 하든, 하나님이 어떤 사역을 하고 사람에게 어떤 환경을 배치해 주든 쉽게 순종할 수 있고, 패괴 성품이 가로막는 일도 줄어들어 해결하고 이겨 내기가 쉽다. 그러면 수월하게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품 변화의 신호이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할 때, 사람의 생명 성품은 이미 변화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진실한 변화로, 전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변화이다. 그 과정, 그 기간에 사람이 보이는 갖가지 태도는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정상 범주 안에 있는 소극적이고 연약한 것이든,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고, 이 또한 필연적인 법칙이다. 긍정적인 태도가 있으면 소극적이고 연약한 태도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소극적이고 연약한 태도는 일시적이다. 사람의 분량이 어느 정도 커지면 소극적이고 연약한 상태도 점점 줄어들 것이며, 긍정적인 태도, 긍정적인 진입이 많아지고, 일 처리에 점점 원칙이 생길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자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된 후에 생명 성품에 변화가 생긴 사람이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 수많은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을 체험하여 얻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진리 추구의 구체적이고 정상적인 과정에 대해 모두 듣고 이해한 이상, 더 이상 진리에 혐오와 거부감을 느끼며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 대해 각종 이유와 핑계를 지어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모두 깨닫고 이러한 측면의 문제들도 밝히 알았으니,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이유와 핑계를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 만약 어떤 노인이 “저는 나이가 많습니다. 젊은이들 같은 기력도, 열정도 없죠. 나이가 들어서 혈기 왕성은커녕 교만하게 굴 기운도 나지 않아요. 그러니 저한테 교만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헛소리입니다. 저는 교만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면 이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분명히 옳지 않다. 이제 모두 이런 말을 분별하고 그를 폭로하면서 “당신은 나이가 많지만 교만한 성품이 있습니다. 평생 교만하게 살았고, 그게 아직도 해결이 안 됐는데 계속 교만하게 굴 겁니까?”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어떤 젊은이들은 “저는 나이가 너무 어린 데다가 사회에서 복잡한 일을 많이 겪어 보지도 못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힘들게 일하면서 하루하루 견뎌 본 적도 없고요. 풍파를 많이 겪은 사람들 같은 연륜이 없죠. 더 중요한 건, 당연히 그 늙은 너구리들처럼 그렇게 교활하거나 간사하지 않다는 겁니다. 젊은 세대이니만큼 제게 좀 교만한 성품이 있는 것은 정상입니다. 하지만 제가 나이 많은 사람들처럼 그렇게 꿍꿍이가 많고 간사하거나 사악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이 적절하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패괴 성품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것은 나이나 성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은 너에게도 있고, 너에게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있다. 그러니 누구도 남을 질책할 필요는 없다.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나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면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진리를 얻고 성품이 변화해야만 목적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은 결국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유와 핑계를 내려놓으며 자신의 패괴 성품을 올바르게 직면해야 가능한 일이다. 회피하거나 변명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거부해서도 안 된다.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이겠느냐? 한 가지 경우가 생각나는구나.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저를 보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하든, 제게 어떤 패괴 성품이 있다고 드러낼지라도 저는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집에서 무슨 일을 시키든 저는 할 것이고, 어떤 업무를 시키든 그것 역시 할 것입니다. 설교나 예배도 다 참석해 듣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 때도 따라서 읽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체험 간증 영상을 볼 때면 저도 앉아서 볼 거고요. 여러분이 밥을 먹으면 저도 따라서 먹을 겁니다. 저는 여러분과 보조를 맞출 것입니다. 여러분 중 누가 저를 보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제가 원하는 대로 믿을 겁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핑계나 이유를 대지 않는 것 같지만 진리를 추구할 생각이 없다. 마치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그와는 무관한 것처럼, 그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저는 인성이 좋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으며, 제가 가진 것들을 기꺼이 버리고자 합니다. 또 고생하고 대가를 치를 수 있고요. 그런데 이런 제게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필요하겠습니까?”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는다. 또 진리에 어떤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고, 겉으로도 하나님의 사역을 정죄하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또 하나님의 말씀을 냉담하게 대하고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태도는 아주 분명하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6)라는 성경 구절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원치 않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교회에 이런 사람이 있지 않더냐? (있습니다.) 그럼 이런 부류의 사람을 어떻게 분류해야겠느냐? 그를 어느 쪽으로 분류해야겠느냐? 분류할 필요가 없다. 딱 잘라 말하자면, 이 부류의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스스로를 반성하거나 인식하지도 않고, 회개하는 마음 역시 없다. 그저 되는대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 집에서 시키는 일을 하고,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을 뿐이다. 네가 그에게 “당신에게는 뭔가 관념이 없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네가 “당신에게는 패괴 성품이 없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네가 “당신에게는 구원받고자 하는 소망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한다. 또 네가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합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한다. 전부 모르겠다는 대답뿐인데, 이 부류의 사람에게 문제가 없겠느냐?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 다만 그가 자신의 문제는 문제가 아니며, 해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성경에는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라는 기록이 있다.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라는 말은 바로 이런 사람을 처리하는 원칙이다. 이것이 바로 그 결과이다. 더웁지도 차지도 아니하다는 것은 아무 관점도 없다는 것이다. 네가 성품 변화나 구원받는 일에 대해 어떻게 교제하든 그는 무심하다. 무심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그러한 일에 관심이 없고, 듣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관점이 없고 패괴 표출이 없는 것도 잘못이란 말입니까?”라고 말하는데, 그건 터무니없는 소리다! 그런 자는 영혼이 없는 죽은 사람이다. 그는 더웁지도 차지도 아니하니, 하나님이 그에게 역사할 방법이 없다.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은 토하여 내치면 그만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 우리는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는다. 그저 무시하면 그만이다. 교회에 이런 사람이 있을 경우, 교란하지 않는다면 남겨 두고, 교란한다면 정리해서 내보내면 되니, 해결하기 쉽다. 나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명확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음을 인정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양을 대상으로 이야기한다. 이런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대상이다. 하나님을 더웁지도 차지도 아니하게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진리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 더웁지도 차지도 아니한 태도를 보인다. 그들에 대한 처분 방법은 “떠나가라. 너는 아무래도 나와 상관이 없다.”라는 것이다. 그들을 신경 쓰지도, 그들에게 공을 들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방금 진리 추구라는 주제에 대해 부정적인 사례를 교제했다. 사람은 늘 무의식중에 갖가지 이유나 핑계, 구실을 대며 자신이 패괴 성품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물론,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면서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도 한다. 이는 전부 바보 같고 어리석은 행동이다. 사람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진리임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존재하는 패괴 성품과 진리에 어긋난 잘못된 행위를 부정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뚜렷한 모습이다. 네가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든, 아니면 네가 드러낸 패괴 행위에 핑계와 이유를 대며 궤변을 늘어놓든, 결국 너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에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한 사실이다.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몇 년을 믿든 결국엔 드러나 도태되게 되어 있다. 이는 몹시 두려운 결과이다. 그런 자는 얼마 안 가 재난이 임하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재난이 임할 때 너는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네게 수많은 이유가 있고 핑계가 충분할지라도, 혹은 빈틈없이 위장하고 포장했을지라도, 한 가지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바로 네 패괴 성품은 조금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라는 것이다. 너는 진실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진실한 회개를 하지도 못했으니 마지막에 진실로 돌아설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할 수도 없을 것이고, 하나님이 너에게 마음을 돌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건 큰일 아니겠느냐? 너는 도태될 위험에 처할 것이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사람은 그 아둔한 핑계와 어리석은 이유를 버리고 자기 위장과 포장에서 벗어나 자신이 드러내는 패괴 성품을 올바로 직면하는 한편, 그것을 옳은 방식으로 처리하고 해결할 것이다. 또 자신의 모든 행동이 선행이 되도록 노력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고자 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네게 마음을 돌린다면, 이는 여태까지의 네 거역과 대적을 진정으로 사면해 주었다는 의미이다. 그럼 너는 심적 압박감이 사라지고 무거운 짐에서 벗어난 듯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깃들 것이다. 네가 이런 느낌을 받는다면 그것은 영적인 인증으로, 구원받을 희망이 생긴 것이다. 그 희망은 진리 추구의 대가와 선행으로 얻은 것이며, 진리를 추구하고 선행을 예비하여 얻은 성과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너는 자신이 꽤나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패괴를 드러낼 때마다 합당한 이유를 찾아 해명하고 몸을 빼려고 하면서 패괴 성품을 덮고 포장한다. 마치 자신은 패괴를 드러낸 적이 없는 것처럼 교묘하게 패괴 성품에 대한 반성과 인식을 피하는 것이다. 너는 스스로 무척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한번 또 한번 하나님이 배치한 갖가지 환경에서 폭로되는 것을 피한다. 너는 스스로를 반성하거나 인식하지 않고, 진리를 얻지도 못했으며, 하나님께 온전케 될 기회를 몇 번이나 놓쳤다. 그러니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네가 회개하여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여부는 차치하고, 하나님이 몇 번이나 회개할 기회를 주었는데도 시종일관 마음을 돌리지 못한 네 태도를 보면, 네 상황은 무척 심각하다. 또다시 변명하면서 스스로를 포장하고 꾸미며 이유와 핑계를 대는 것 말고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거듭 기회를 주었지만 너는 마음조차 돌리지 않으니, 너무도 위험하다. 무엇이 위험한지 알겠느냐? 너는 시종일관 네 패괴 성품에 대해 핑계를 대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 대해 변명과 이유를 늘어놓았다. 또 하나님의 심판과 사역에 맞서고 거부하면서도 스스로 나쁘지 않다며 흡족해했다. 너는 하나님 집의 감독과 책망 훈계를 거부하고 한번 또 한번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구원에서 도망쳤다. 네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거역으로 점철되었고, 너는 이미 하나님께 혐오받고 버림받았다. 그런데도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네가 그릇된 길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고 있으며, 이제는 더 이상 만회할 도리가 없음을 어찌 모른단 말이냐? 하나님 집은 하나님이 권세를 잡는 곳이다. 네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온갖 악행을 행하는데, 설마 하나님이 너 하나쯤 어쩌지 못하겠느냐? 너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 생명을 얻지 못했으며, 조금의 체험 간증도 없다. 이는 하나님께 정죄될 일이다. 너는 멸망의 화를 자초했으니, 이는 똑똑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 그것도 몹시 어리석은 것이다! 이는 멸망의 화이다! 이 한마디를 여기에 남겨 두겠다. 믿지 못하겠다면 지켜보아라. 너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지만 거기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고, 너는 말주변이 뛰어나고 간계를 잘 꾸며 누구도 너를 말로 이기지 못한다고, 형제자매들은 너를 폭로하지 못할 것이고 교회에서도 너를 제명할 명분이 없다고, 하나님 집에서 너를 어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생각한다면 틀린 것이다. 너는 항상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는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보겠다! 하나님이 사역을 끝마치고 상선벌악하는 날까지 네가 버틸 수 있겠느냐? 재난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겠느냐? 너는 정말 네 운명을 주재할 수 있느냐? 어쩌면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일시적으로 하나님 집의 추궁을 피하고 구차하게 남아서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계속 교회에서 머릿수를 채우며 위장하고 기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검증과 감찰을 피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리가 있는지를 보고 그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 하나님은 친히 사역하며, 또한 친히 키질한다. 네가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혹은 어떤 마귀든,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선민이 진리를 깨닫고 분별력을 갖추게 되면 누구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그때가 되면 너는 교회에서 제명될 것이다. 어쩌면 마음속으로 인정하지 않고 원망을 쏟아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저는 하나님을 위해 수없이 뛰어다녔고, 하나님을 위해 적잖은 사역을 했습니다. 또 많은 대가를 치렀으며, 집을 버리고 결혼도 포기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청춘을 바치고, 사업을 버리고, 반평생의 정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진리를 추구하거나 실행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저를 도태시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이다. 하나님 집은 진리가 권세를 잡는 곳임을 몰랐더냐?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상을 주고 어떤 사람을 축복하는지 마음속으로 깨달은 바가 없더냐? 만약 네가 버리고 헌신한 것에 참된 체험 간증이 있다면, 또 그것이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네게 상을 주고 축복해 줄 것이다. 그러나 네가 버리고 헌신한 것이 참된 체험 간증이 아니고, 나아가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공을 가로채는 것이라면, 너는 바울의 길을 걸어온 것과 같다. 그것은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네게 “악을 행하는 자여,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할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이겠느냐? 네가 화를 입을 것이고, 반드시 재난 속에 떨어져 징벌받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면 멸망의 화가 임할 것이다. 지난날 바울의 지위와 그가 행한 사역, 사역 능력, 은사를 보면 모두 평범한 사람보다 뛰어났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했느냐?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조건을 내밀었으며, 하나님께 상과 면류관을 얻어 내려 했다. 또 마지막까지도 진실한 회개를 하지 않았고, 이렇다 할 선행을 예비하지도 않았다. 진실한 체험 간증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진실한 회개조차 하지 않은 그가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마음을 돌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바울은 주를 위해 평생 헌신했지만, 적그리스도의 길을 걸으며 죽어도 회개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을 받기는커녕 하나님께 징벌받았다. 그가 맞이해야 했던 결과가 멸망의 화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 너에게 분명히 말하건대,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일말의 이성이라도 갖춰야 한다. 하나님께 이치를 따지지 말고, 도박하듯 자신의 결말과 종착지를 걸지 마라. 이는 하나님과 거래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한 사람에게 좋은 결말이 있겠느냐? 사람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솔직해진다. 사리 분별이 되지 않는 사람은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구원받고 싶은 자에게 가장 쉽고 현명한 최고의 방법은 바로 모든 핑계와 이유, 조건을 내려놓고 착실히 진리를 받아들이고 추구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마음을 돌릴 때, 구원받을 희망이 생긴다. 구원받을 희망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주는 그 희망의 선결 조건은 하나님과 거래하지 않고, 네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버리며,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나이나 성별, 지식 수준, 출생지 등과는 무관하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일절 보지 않는다. 너는 “저는 성미가 좋고 인내하며 포용할 줄 압니다. 또 마음에 사랑이 있고요. 끝까지 인내하면 언젠가는 저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돌릴 수 있겠죠?”라고 말하는데, 그런 것들은 아무 쓸모없다. 하나님은 네 성미가 어떤지, 성격이 어떤지, 지식 수준이 어떤지, 나이가 얼마나 많은지를 보지 않으며, 네가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많은 사역을 했는지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저 “하나님을 믿은 그 오랜 세월 동안 네 성품은 변화했느냐? 너는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너는 진리를 추구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느냐?”라고 물을 뿐이다. 네가 “저는 들었고, 또 받아들였습니다.”라고 대답하면 하나님은 다시 물을 것이다. “너는 들었고, 또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네 패괴 성품은 해결되었느냐? 너는 진실로 회개했느냐? 너는 하나님 말씀에 진실로 순종하고 그것을 받아들였느냐?” 이에 너는 “저는 고생하고 대가를 치렀으며 헌신하고 버렸습니다. 또 봉헌했고요. 저는 제 자녀들까지 하나님께 바쳤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네가 무엇을 바쳤든 소용없다. 그런 것으로는 천국의 복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마음을 돌릴 수도 없다. 하나님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진리 추구의 길을 걷는 것이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구원받는 일에 있어서는 사람이 잔꾀를 부릴 수 없고 뒷문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이해했느냐? 이 일을 밝히 알아야지, 흐리멍덩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너는 흐리멍덩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흐리멍덩하지 않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겠느냐? 태도를 바로잡고 관점을 바꾸며,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 인위적인 선함과 사람의 핑계, 철학, 지식, 도덕, 윤리, 나아가 양심이나 소위 인격, 존엄까지도 진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이러한 것들을 버리고 마음을 평온히 한 후 하나님 말씀 속에서 사람으로서 처신하고 행동하는 근거를 찾아라. 이와 동시에, 하나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폭로한 인류의 다양한 패괴 성품을 찾아 스스로에게 대조해 보고, 패괴 성품을 해결해라. 한시바삐 자신을 인식하고 패괴를 벗어 버리며, 회개하고 돌아서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 손으로 행하는 악을 내려놓고 사람으로서 처신하고 행동할 때 진리 원칙을 구하며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삼아야지, 절대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근거로 삼거나 하나님과 거래를 하거나 무의미한 고생을 대가로 하나님께 상과 축복을 얻어 내려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네게 노하고 너를 저주하고 끊어내는 일을 피하고 싶다면 더는 이렇게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마라. 이 정도면 분명하지 않으냐? 너희는 알아들었느냐?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가만히 묵상해 보거라.

방금 교제한 것들은 다 진리 추구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진리 추구가 무엇인지, 이 개념적인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진리 추구에 대한 사람의 갖가지 오해와 치우친 인식, 그리고 진리 추구에 존재하는 각종 어려움과 문제들을 교제하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진리를 추구하는 실행의 길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정리하도록 하겠다. 진리 추구란 무엇이냐? 진리 추구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진실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여 최종적으로 얻을 수 있는 성과이다. 물론, 진리 추구에도 과정과 절차가 있으며, 그것은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네가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 말씀이 진리이자 실제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하기 시작하며, 너에게는 패역도, 패괴도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기를 갈망하여 진리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하여 얻는 성과이다. 이때부터 네 생명 체험이 시작된다. 즉, 네 패괴 성품에서 비롯된 상태와 문제점을 파고들며 성찰하기 시작했다면, 이는 네가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너는 어떤 문제가 나타나든 어떤 패괴를 드러내든, 주동적으로 반성하고 성찰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패괴 표출이고 패괴 성품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연스럽게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할 것이다. 생명 진입은 스스로를 반성하는 데서 시작되며, 이는 진리 추구의 첫 번째 단계이다. 이어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하며, 하나님이 폭로한 말씀들이 사실에 부합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마음으로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진리 추구의 두 번째 단계이다. 많은 이가 사람의 패괴 행위를 폭로하는 하나님 말씀은 받아들여도 사람의 패괴된 본질을 폭로하는 말씀은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난 후에도 자신의 패괴가 몹시 심각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못하고, 오직 사람의 패괴 행위를 폭로하는 하나님 말씀만 인정한다. 하지만 이래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것을 등한시하게 된다. “저한테는 그저 패괴 행위가 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좋은 일도 하죠. 저는 좋은 사람입니다. 사탄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저는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 속하는 사람일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터무니없는 소리 아니겠느냐? 너는 세상에 태어나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아가고 전통문화의 교육을 받는다. 네가 갖고 태어난 유전과 네가 배운 지식은 모두 사탄에게서 온 것이며, 네가 숭상하는 명인이며 위인들 또한 전부 사탄에 속한다. 말해 보아라. 네가 사탄에 속하지 않는다면, 사탄의 패괴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몇 살 먹은 어린아이가 입만 열면 거짓말에 욕설이라면, 이는 누가 가르친 것이겠느냐?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이는 사탄에 의해 패괴된 결과 아니겠느냐? 사실이 이러하다. 영계의 사탄과 악령을 사람은 보지 못하지만, 인간 세상에는 도처에 산 귀신과 마왕이 존재한다. 그들은 전부 사탄의 화신이다. 이는 사실이니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이러한 일을 꿰뚫어 볼 수 있고, 하나님이 폭로하는 말씀이 모두 사실임을 인정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인식했다고 하지만, 하나님 말씀이 폭로한 패괴가 사실임을 시종일관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실로 회개할 수 없다. 물론, 누구에게나 패괴 성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면 하나님의 사역을 한동안 체험해야 한다. 사람은 수많은 패괴 성품을 드러낸 후, 사실 앞에서 자연히 고개를 숙이고 인정하게 될 것이며, 폭로와 심판의 하나님 말씀, 또 정죄의 말씀이 모두 사실이자 진리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승복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에 정복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따라 자신의 패괴 성품과 패괴 본질을 인식하고, 자신에게 사탄의 성품이 있으며 자신은 심각하게 패괴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할 수 있다. 또 인류를 폭로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엄하고 날카롭더라도 기꺼이 순종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패괴된 인류를 어떻게 정의하고 규정하고 정죄하고 심판하고 폭로했는지 이해하고 얼마간 인식하게 되면,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진실로 받아들여 자신의 패괴 성품과 패괴 본질을 인식하기 시작할 것이다. 또 마음속으로 패괴 성품과 사탄을 증오하고, 자신의 육을 증오하면서 진리를 얻고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내기를,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데에 집중하게 된다. 이것이 진리 추구의 세 번째 단계이다.

참된 자기 인식이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의 패괴 성품을 반성하고 인식하여, 자신의 패괴 본질과 본모습을 깨닫는 것이다. 이때, 사람은 인류가 너무도 심하게 패괴되었으며, 전혀 사람답지 못한 모습으로 산다는 것을, 전부 패괴 성품일 뿐, 최소한의 양심과 이성마저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온전히 알게 된다. 또 사람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사탄에게 속해 있으며, 올바르거나 진리에 부합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사람의 기호와 추구, 사람이 선택한 길에는 모두 사탄의 독소와 불순물, 그리고 사람의 사치스러운 욕망과 복받으려는 속셈이 들어 있다는 것을, 사람이 드러내는 성품 또한 사탄의 성품이자 사탄의 본성 본질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여기까지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만 가능하다. 만약 전통문화의 도덕적 이론이나 가르침, 사상에 근거한다면, 진실로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네 패괴 성품은 사탄의 그런 철학과 이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사탄의 그러한 것들에 근거하여 자신을 인식한다면 이는 황당한 일 아니겠느냐? 헛수고 아니겠느냐? 그렇기에, 자신을 인식하려면 반드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이며,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판단하는 준칙이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이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판단해야 정확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실행의 길을 얻을 것이고 광명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자신의 패괴 본질에 대해 진실로 인식한 후에는 어떤 태도를 갖추고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다. 사람이 자신의 본성 본질을 인식하게 되면 자연히 후회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회개하기 시작한다.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기를 추구하고, 더는 사탄 성품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고 처신하며,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회개이다. 이는 진리 추구의 네 번째 단계이다. 이제 너희는 진실한 회개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돌아서야 한다. 돌아선다는 것은 자신이 고집하고 옳다고 여기던 모든 것을 버리고 사탄 성품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진리를 실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돌아선다는 것의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먼저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패괴 성품에 속하며, 사탄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확신이 선다면 정죄하고 저주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러면 육을 버리고 사탄을 저버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어떤 행동이겠느냐? 패괴 성품을 부정하고 버리고 끊어내고 저버리는 것 아니겠느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부정하고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으며 자신의 그릇된 속셈을 버려야 바로잡을 수 있다. 이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내용들이 있다. 네가 마음속으로 회개하고자 하지만 입으로 말하는 데 그칠 뿐, 패괴 성품을 부정하거나 버리거나 끊어내거나 저버리지 않는다면, 이는 회개하는 모습이 아니며, 아직 실제로 회개에 진입하지 않은 것이다. 진실한 회개는 어떤 모습이 있겠느냐? 먼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예컨대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나 요구, 그리고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문제 처리 방식이나 방법, 사람의 경험 등을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실행이다. 잘못된 것을 마음으로 꿰뚫어 보고 부정해야 내려놓을 수 있다. 만약 네가 이러한 것들을 부정하지 않은 채 좋은 것, 옳은 것이라고 여기면서 다른 사람이 내려놓으라고 해도 내려놓지 못하며 “저는 지식 수준이 이렇게 높고 연륜도 깊습니다. 또 이러한 것들이 옳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왜 내려놓아야 합니까?”라고 말한다면, 자신에게 있는 것들을 지키며 마지막까지 고집한다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진리를 얻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이 옳고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부정해야 한다. 그 후 그런 것들의 본질이 부정적인 사물이며 사탄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언뜻 옳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궤변임을, 사탄에게서 온 것을 고집해 봤자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어 마지막에 징벌받고 멸망하게 될 뿐임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그 사상과 독소들이 결국 사람의 멸망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면 그것을 철저히 버리게 된다. 물론, 부정하고 버리고 끊어내고 저버리는 것 등은 다 사탄 세력과 사탄 본성, 사람을 미혹하는 사탄의 철학, 논리, 사상, 관점에 대해 취하는 태도이자 행동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육적인 이익과 기호, 추구를 내려놓고 사탄의 철학과 사상, 사설과 궤변을 끊어내며, 사탄의 권세와 사악한 세력을 저버리는 것 등 일련의 실행은 회개의 방식이자 길이다. 진실한 회개에 진입하려면 반드시 수많은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철저히 자신을 부정하고 육을 버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너는 스스로 지식이 있고 연륜이 깊으며, 하나님 집에서 크게 쓰일 인재라고 생각하지만, 진리의 도를 몇 년간 듣고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닫게 되면 자신의 그 지식과 학문이 무가치하고 하나님 집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 진리와 하나님 말씀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고,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음을, 사람에게 지식과 경험이 아무리 많아 봤자 진리가 있다는 의미는 아님을 느끼게 된다. 이 밖에도 사람이 지닌 것들이 아무리 사람의 관념에 부합해도 진리는 아니고, 전부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 부정적인 사물에 속하며 진리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네 지식 수준이 아무리 높고 네 연륜이 아무리 깊어도, 영이 통하지 않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 네게 리더를 시키면 진리 실제가 없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고, 네게 체험 간증 문장을 쓰라고 하면 써 내지 못할 것이며, 네게 하나님을 증거하라고 하면 너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 인식이 없을 것이다. 또 네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면 진리를 교제하여 사람들의 관념을 해결해 주지 못할 것이고, 네게 새 신자를 양육해 주라고 하면 이상(異象)에 관한 진리를 알지 못해 글귀와 도리만을 늘어놓을 것이다. 자신의 관념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새 신자의 관념을 해결해 줄 수 있겠느냐? 이러한 사역을 하나도 하지 못하는 네가 또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네게 힘을 쓰라고 하면 너는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 쓴다고 생각한다. 너는 스스로 소 잡는 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떤 일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고, 어떤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 말해 보아라. 네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너를 쓰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네가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교회를 탓할 수 없다. 어쩌면 너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요구가 너무 높은 것 아냐?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할 수가 없잖아. 나한테 왜 이렇게 큰 요구를 하시는 거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람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이렇게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며,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만약 네가 스스로의 관점이 옳으며 바로잡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론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지만 자신이 고집하는 낡아 빠진 것들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이는 네가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마땅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진리를 많이 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설교 교제를 많이 들어야 한다. 그러면 조금씩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으로서, 진리와 하나님을 대할 때는 무엇보다도 먼저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는 사람의 당연한 직책이다. 이러한 것들을 인식했다면, 바로잡히고 있는 것이다. 바로잡는 것은 회개를 실행하는 길이며, 예전에 옳다고 여겼던 것, 사탄에게서 온 것들을 철저히 버리고 새롭게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요구와 진리 원칙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걷는 것, 이것이 바로 바로잡는다는 것의 의미이다. 이는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며 회개의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때, 진리 실제에 진입하며, 진실한 회개를 하게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사실이다. 사람은 진실로 회개해야 구원받는 길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리 추구의 네 번째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사람이 진실로 회개했을 때는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선 것이니 하나님의 사역에 기본적으로 관념과 오해가 사라지며,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에 기꺼이 순종하고,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부터 본격적으로 심판과 형벌을 체험할 때까지, 그 사이에는 기나긴 과도기가 존재한다. 이 과도기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부터 진실로 회개할 때까지의 기간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시종일관 자신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도태된다. 그러나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말씀을 읽든 설교를 듣든 참된 수확이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사역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임을 깨닫고, 자신이 깨달은 진리로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할 것이다. 또 자신의 패괴 성품을 점점 더 증오하게 되고, 진리에 점점 더 관심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실로 자신을 인식하게 되고, 진실한 후회와 회개를 하게 된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으면 자연히 이러한 성과를 낼 수 있고, 점차 자신을 인식하여 진실한 회개를 할 수 있다. 진실한 회개를 한 후에는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매사에 진리를 구하고, 어떤 일이 임하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실행의 원칙과 길을 찾은 후 진리를 실행해야 한다. 이것이 진리 추구의 다섯 번째 단계이다. 진리를 구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함이다. 진리를 실행할 때는 반드시 진리 원칙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정확한 진리 실행이고, 그래야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진리 추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성과로, 이 단계에 도달했다면 진리 실행의 실제에 진입한 것이다. 진리를 구하는 것은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진리를 실행할 수 있을 때, 사람은 자연스럽게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으며,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이 요구하는 성과를 낼 수 있다. 진실한 회개에서 진리 실행까지의 과정은 이러하다. 예전에 패괴 성품 속에서 산 것은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산 것이었다. 모든 행동은 하나님께 정죄되고 혐오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실한 회개를 하며,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데, 이는 당연히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수시로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 자신의 패괴 본질을 진실로 인식하여 뉘우치는 마음을 갖고, 회개한 후에는 매사에 진리를 구하며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 진입에서 진리 추구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성과이다. 진실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에 순종할 수 없고, 진실로 회개할 수도 없다. 사람이 진실로 회개하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사탄의 성품으로 살아갈 것이며, 몇 년을 믿든 진실한 변화를 얻지 못한 채 행위만 좀 개선될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여 생명으로 삼을 수 없다. 그러면 사람의 모든 행위는 계속 패괴 성품을 드러낼 것이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여 생명으로 삼을 수 있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으며,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 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진리를 구하며, 더 이상 스스로를 위해 계획을 세우지 않고, 모든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다. 이 밖에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점점 더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게 되고, 점점 더 사람답게 살아가게 된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무엇을 추구하겠느냐? 그는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고 복과 상 받기를 추구한다. 그는 올바른 인생 목표 없이 야심과 욕망만 점점 커진다. 그가 무엇을 추구하기를 좋아하든,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한 포기하지 않으며, 마음을 돌리는 일은 더더욱 없다. 일단 적절한 배경이 갖춰지고 환경이 허락되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독립 왕국을 세운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숱한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배반해 하나님께 파멸당한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이고,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모두 사악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가 영혼과 피, 뼛속 깊이 숭상하는 것은 명리와 지위, 권세이다. 그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사탄 성품으로 살아가면서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고 사람들과 싸운다. 그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하며, 살아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영웅이 되고 죽어서는 백귀 가운데 웅걸이 되기를 바란다. 이는 분명 사탄의 멸망의 길을 걷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수록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진리가 소중하다고 생각해 기꺼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인다. 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든 진리를 추구하고 얻고자 한다. 이는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선 것으로, 하나님과 마음이 합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며, 정정당당하게 하나님의 인도와 안내, 축복을 얻으면, 하나님은 더 이상 그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마음이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며, 진리를 싫어하고 거부하기 때문에 갈수록 더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하나님에게 반하는 길을 걷게 된다. 바울처럼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상을 요구하고, 상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께 이치를 따지고 대항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적그리스도가 됨으로 사탄의 추악한 몰골을 오롯이 드러내 하나님께 저주받고 파멸당할 것이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는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순종할 수 있으며, 사탄의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고,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다. 또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람이 기꺼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절대적인 순종을 바칠 수 있으면, 온전히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사람다운 모습을 갖춘 것이다. 진정한 사람의 모습이란 무엇이더냐? 욥이나 베드로처럼 창조주께 순종하고 창조주를 경외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축복받는 사람이다.

오늘 교제한 진리 추구의 몇 단계는 이렇게 간단하다. 너희가 그 몇 단계에 대해 다시 말해 보아라.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폭로한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셋째, 자신의 패괴 성품과 패괴 본질을 인식하고 마음속으로 패괴 성품과 사탄을 증오하는 것입니다. 넷째, 회개하고 손으로 행하는 모든 악을 버리는 것입니다. 다섯째, 진리 원칙을 구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섯 단계이다. 패괴 성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 각각의 단계를 실행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매번 수많은 장애물과 난관에 부딪힐 것이며, 고심하며 실행하고 이루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실패와 좌절을 겪게 되겠지만, 나는 낙담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다. 설령 누군가 너를 정죄하면서 “당신은 끝났습니다.”, “당신은 좋은 놈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 정도군요. 변화하지 못할 거예요.”라며 듣기 힘든 말을 할지라도, 너는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 길만이, 이 몇 단계의 진입과 실행만이 진정으로 멸망의 화를 피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모든 어려움을 내려놓기를 택하고, 실패와 좌절을 피하지 않는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계속 걸어간다. 3년, 5년 동안 스스로를 성찰하고 인식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혹은 8년, 10년이 지나도 자신에게 어떤 패괴 성품이 있는지만 알 뿐 여전히 진리를 깨달아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너에게 이 한마디를 해 주고 싶다. 낙담하지 마라. 비록 네가 진정으로 뉘우치지는 못했지만, 세 단계에 이미 진입했는데, 뒤의 두 단계에 진입하지 못할까 봐 걱정할쏘냐? 걱정할 필요 없다. 더 노력하고 힘을 내면 그 길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단계까지 간 후 진리 원칙을 찾는 데 충분히 공을 들이지 않아 진입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래도 낙담하지 마라. 네게 의지가 있는 한, 지속적으로 추구하며 매사에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께 많이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언제나 수확이 있을 것이다. 네 자질과 조건에 따라 최선을 다해 추구하고,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열심히 노력해라. 최선을 다하여 가슴에 손을 얹고 부끄럽지 않을 정도가 된다면 분명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진리라도 더 깨닫게 된다면 좋은 일이며, 삶이 더욱 행복하고 즐거워진다. 요컨대, 진리를 추구하는 일은 공허하지 않다. 각 단계에는 모두 구체적인 실행의 길이 있으며, 사람이 얼마간 고통을 받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진리는 학술도 이론도 구호도 논조도 아니다. 그것은 공허하지 않다. 모든 진리는 사람이 몇 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체험하고 실행해야 어느 정도 깨닫고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어떤 대가를 치르든, 어떤 노력을 하든, 방식과 방법, 길, 방향이 옳다면 언젠가는 큰 수확을 얻을 것이며, 진리를 얻고 하나님을 인식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어 마음도 매우 흡족해질 것이다.

2022년 1월 8일

다음: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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