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하나님 말씀 ― 하나님의 사역 알아 가기 | 발췌문 197

2020.08.16

하나님이 성육신한 일은 각 교파와 교단을 뒤흔들었고, 종교계의 질서를 ‘어지럽혔으며’, 하나님의 나타남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누구인들 앙모하지 않겠느냐? 누구인들 하나님 뵙기를 고대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온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오늘에 이르러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 모두에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냈으니, 이 어찌 즐겁지 않겠느냐? 지난날 하나님은 사람과 만남의 기쁨과 헤어짐의 슬픔을 나눴고, 이제 또다시 인류와 만나 옛정을 나누고 있다. 하나님은 유대에서 떠나간 이후로 줄곧 종무소식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재회할 날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러다 오늘날 이렇게 다시 한번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지난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느냐? 2천 년 전의 오늘, 유대인의 자손인 바요나 시몬은 구주 예수를 만나 음식을 나누고 오랜 세월 그를 따르면서 깊은 우정을 나눴으며, 예수를 마음으로 사랑하고 가슴 깊이 사랑했다. 어둡고 차가운 말구유에 강생한 노란 머리의 갓난아이가 바로 성육신 하나님의 첫 번째 형상이었음을 유대 백성들이 어떻게 알았겠느냐? 사람들은 모두 그를 자신과 같은 부류로 생각했지, 그를 특별하게 여긴 이는 아무도 없었다. 평범하고도 일반적인 ‘예수’를 사람이 어찌 알아볼 수 있었겠느냐? 유대인들은 모두 그를 당시 유대인의 아들로 여겼지, 사랑스러운 하나님으로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언제나 그를 향해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은혜와 평안과 기쁨을 내려 달라고 요구할 뿐이었고, 오로지 그가 백만장자처럼 모든 걸 가지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한 번도 그를 사랑해야 하는 분으로 대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 또한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반항하고 터무니없는 요구만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고, 일관되게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는 묵묵히 사람에게 따스함과 자비와 긍휼을 베풀었으며, 나아가 새로운 실행을 알려 줌으로써 사람을 율법의 속박에서 풀어 주었다. 사람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저 그를 부러워하고, 그의 ‘출중한 재능’을 높이 살 뿐이었다. 사랑스러운 구주 예수가 얼마나 큰 굴욕을 참음으로 이 세상에 왔는지, 눈먼 인류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고충을 헤아려 주는 사람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그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리아가 그의 ‘생모’라고는 하나, 인자한 주 예수의 마음의 소리를 그녀가 어찌 이해했겠느냐? ‘인자’가 참아 내야 했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누가 알아주었더냐? 당시 사람들은 그에게서 얻어 낸 뒤에는 냉정하게 그를 뇌리에서 지워 버리고, 또한 문전 박대 했다. 그는 그렇게 길거리를 떠돌아다녀야 했다. 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 수많은 나날 동안 떠돌아다니면서 길고도 짧은 고난의 33년 인생을 보낸 것이다. 사람은 그를 필요로 할 때는 집으로 초대하여 원하는 바를 얻어 내고자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고, 그의 ‘공헌’을 받은 후에는 즉각 그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사람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공급받고, 그의 피를 마시고, 그가 베풀어 주는 은혜를 누리면서도 그를 대적했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누가 베풀어 주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는 여전히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사람은 그의 살을 먹고, 그가 해 주는 밥으로 배를 채우며, 그가 개척한 길을 걷고, 그의 피를 마시면서도 그를 저버리려 한다. 사람은 자신에게 생명을 베풀어 준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고, 자신과 같은 부류의 노예를 ‘하나님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고의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냐? 예수는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했느냐? 너희는 알고 있느냐? 그를 먹고 마시고 누리며 그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유다가 그를 팔아넘긴 것이 아니더냐? 팔아넘긴 이유는 예수가 보잘것없는 평범한 ‘선생’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더냐? 예수가 하늘에 속한 비범한 분이라는 걸 정말로 보았더라면 사람이 그를 산 채로 십자가에 못 박아 숨이 끊길 때까지 24시간 동안이나 매달아 놓았겠느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누구더냐? 사람은 끝을 모르고 탐욕스럽게 하나님을 누릴 줄이나 알지, 한 번도 그를 안 적이 없다. 하나를 얻으면 둘을 원하면서 ‘예수’가 자신의 지시와 부름에 완전히 복종하기만을 원했다. 머리 둘 곳도 없는 ‘인자’에게 일말의 온정을 베푼 이가 있었더냐? 그와 한마음으로 협력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맡긴 사명을 완수하려고 했던 자가 있었더냐? 그를 생각해 준 자가 있었더냐? 그의 고충을 헤아려 준 자가 있었더냐? 사랑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그를 이리 끌어당기고 저리 밀치고 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광명과 생명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고, 인간 세상의 고난을 체험한 2천 년 전의 ‘예수’를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을 꿍꿍이만 가지고 있다. 설마 ‘예수’가 그렇게 혐오스러운 존재란 말이냐? 그가 행한 모든 것을 사람은 벌써 다 잊었단 말이냐? 수천 년 전부터 쌓인 원한을 끝내 쏟아 내려고 하는구나. 유대인 같은 자들아! ‘예수’가 언제 너희에게 적의가 있었느냐? 어찌하여 그리도 그를 증오한단 말이냐? 그가 한 수많은 일과 수많은 말씀들이 설마 다 너희에게 무익하기라도 하단 말이냐? 그는 너희에게 자신의 생명을 값없이 베풀어 주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주었다. 그런데도 너희는 산 채로 그를 삼키려 드느냐? 그는 너희에게 자신의 전부를 아낌없이 바쳤고, 세상의 영화, 인간세상의 따스함, 사랑과 모든 복과 즐거움은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했다. 그에 대한 사람의 태도는 너무나도 야박했다. 그는 땅에 있는 모든 풍성함을 누려 본 적이 없고, 자신의 진실하고 뜨거운 마음을 전부 너희에게 바쳤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인류에게 바쳤다. 그런 그에게 누가 온정을 베풀었더냐? 누가 위안을 주었더냐? 사람은 모든 압력을 그에게 가했고, 모든 불행을 그에게 주었으며, 인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체험을 그에게 강제로 떠넘기고, 모든 불의를 그에게 덮어씌웠으나 그는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가 누군가에게 항의를 한 적이 있더냐? 보답을 요구한 적이 있더냐? 누가 그를 체휼했었느냐? 정상적인 사람 치고 낭만적인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은 자가 있느냐? 오색찬란한 청춘을 가져 보지 못한 자가 있느냐? 가족의 온정을 느껴 보지 못한 자가 있느냐? 친구와 친척들의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자가 있느냐? 다른 이의 존중을 받아 보지 못한 자가 있느냐? 따뜻한 가정이 없는 자가 있느냐? 절친한 벗의 위로를 받아 보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그가 어찌 누려 봤겠느냐? 누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온정을 주었더냐? 누가 그에게 일말의 위안이라도 주었더냐? 누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인성의 도덕을 베풀었더냐? 누가 그에게 관용을 보였더냐? 누가 그와 고난의 날들을 함께했더냐? 누가 그와 인생의 힘든 삶을 함께했더냐? 사람은 한 번도 그에 대한 요구를 느슨하게 한 적이 없으며 그저 아무 거리낌 없이 그에게서 받아 내려 요구했을 뿐이다. 마치 그가 인간 세상에 온 이상, 반드시 사람의 마소 역할을 해야 하고, 단상 아래 선 죄인이 되어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인류는 절대로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이대로 포기하지도, 그를 하나님이라고 하지도, 높이 평가하지도 않을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는 너무나도 엄격해서 어떻게든 하나님을 고통 속에서 죽게 만들어야 요구를 느슨하게 하지,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에 대한 요구치를 낮추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인류가 어떻게 하나님의 증오를 사지 않을 수 있겠느냐? 오늘날의 비극이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사람의 양심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입에 침이 마르게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겠다는 말을 하면서 하나님을 해부하고 잔인하게 괴롭혀 죽음으로 몰아가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비법’이 아니더냐? ‘유대인’은 어디에나 다 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똑같은 일,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똑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하나님을 높인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육안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겠느냐? 육으로 사는 사람이 어떻게 영에서 비롯되어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겠느냐? 누가 알아볼 수 있겠느냐? 인간 세상에 진리가 어디에 있더냐? 진정한 공의는 또 어디에 있더냐? 하나님의 성품을 누가 알 수 있겠느냐? 누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겨룰 수 있겠느냐? 사람이 인간 세상에 온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저버린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용인할 수 있겠느냐? 어찌 빛이 인간 세상에서 어둠을 쫓아내는 것을 용인하겠느냐? 이 모든 것이 사람의 공명정대한 봉헌 정신이 아니더냐? 사람의 정정당당한 진입이 아니더냐? 하나님의 사역은 전부 사람의 진입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더냐? 너희가 사역과 진입을 결합시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잘 처리하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을 다하며, 모든 성의를 다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역 역시 영광을 받음으로 끝날 것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사역과 진입 1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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