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하나님 말씀 ― 생명 진입 | 발췌문 383
2021.08.17
성품 변화는 행위상의 변화도 아니고, 꾸며 낸 표면상의 변화도 아니며, 한때의 의욕으로 인한 변화도 아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성품에 변화가 생김으로써 나타나는 행위상의 변화이다. 이러한 행위상의 변화는 사람의 표면적 행위 방식의 변화와는 다르다. 성품 변화는 진리에 인식과 체험이 생긴 것이며, 진리가 네 생명이 된 것이다. 예전에는 어떤 일을 할 때 진리를 알아도 실행하지 못했고, 진리를 도리처럼 여겨 대충 보고 넘길 뿐이었지만, 이제는 성품에 변화가 생겨 단순히 진리를 아는 것을 넘어 진리대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예전에 네가 좋아하며 하고 싶었던 것, 너의 상상과 관념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내려놓지 못한 것을 지금은 내려놓을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성품 변화이고 성품 변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듣기엔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수많은 고통을 겪어야 하며 스스로를 이겨 내면서 자신의 육 안에 있는, 본성에 속하는 것들을 저버려야 한다. 또한 책망과 훈계, 형벌과 심판, 시련과 연단을 체험해야 한다.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체험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본성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로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며, 그 과정에서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네가 어떤 일에 인식이 있다고 해서 실행할 수 있겠느냐? 바로 실행하지는 못한다. 인식 단계에서 누군가 너를 훈계하고 책망하며, 또 환경이 너를 압박해야 진리의 원칙대로 행하게 되는 것이다. 간혹 어떤 이가 못마땅해하면서 “난 그렇게 하고 싶은데 왜 안 되는 거지? 왜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 거야?”라고 할 때, 다른 이가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렇게 해야만 해. 이렇게 하는 게 진리에 부합하는 거야.”라고 한다. 사람이 어느 정도에 이르러 시련을 겪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으면, 진리의 원칙대로 행하기가 달가워진다. 누구나 처음 진리를 실행할 때는 마지못해 억지로 실행한다. 본분 이행의 충성심을 들어 이야기해 보겠다. 네가 본분 이행, 하나님에 대한 충성에 얼마간 인식이 있고, 진리를 알고 있다고 치자. 하지만 언제쯤 완전한 충성심을 갖고 명실상부하게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여기에는 어느 정도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너는 많은 고통을 겪을 수도 있다. 누군가 너를 책망하고 누군가 너를 질책하며, 모두의 눈이 네게 집중되어야 너는 비로소 자신에게 잘못이 있음을 깨닫고, 자신이 나쁘다는 것을, 본분을 이행할 때 충성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건성으로 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령이 안에서 깨우쳐 네가 잘못된 일을 할 때 너를 질책하면, 그 과정에서 너는 스스로를 얼마간 인식하게 되고, 네 본분 이행에 불순물과 개인의 속셈, 사치스러운 욕망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것들의 본질을 인식한 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진실로 회개하면, 정결하지 않은 것들이 정결케 될 수 있다. 늘 이렇게 진리를 구해 자신의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한다면 조금씩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오를 것이다. 사람의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됨에 따라 생명 성품에도 점점 변화가 생기게 된다.
솔직히 말해, 지금 너희의 본분 이행 중 진정한 본분 이행이 얼마나 되겠느냐? 성품 변화를 이룬 후 진리에 부합하는 본분 이행이 얼마나 되겠느냐? 이러한 것들을 성찰하다 보면 네가 과연 성품 변화를 얼마나 이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성품 변화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행위 면에서 변화가 생겼거나 진리에 대해 얼마간 인식이 있다고 해서, 모든 진리에 대해 어느 정도 체험을 이야기할 수 있다거나 징계를 겪고 얼마간 변화와 순종이 생겼다고 해서 생명 성품의 변화를 이뤘다고 할 수는 없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겠느냐? 네게 얼마간 변화가 생기기는 했지만, 진정한 진리 실행에 이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순간 알맞은 환경이나 좋은 조건 때문에, 또 어쩌면 그 당시의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이 밖에, 네가 정서적으로 안정적일 때나 성령이 역사할 때는 실행할 수 있겠지만, 시련을 겪는 중이라면, 욥처럼 시련으로 고통을 받거나 베드로처럼 하나님이 죽게 한다고 말씀한다면, “제가 당신을 알게 된다면 죽어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성품 변화는 하루아침에 되는 일도 아니고, 네가 진리를 깨달은 후에 다양한 환경에서 항상 실천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본성과 관계된다. 간혹 겉으로는 진리를 실행하는 것 같지만 사실 네 행위의 본질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가정과 일을 다 내려놓거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이러한 외적인 행위를 갖추고는 자신은 진리를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일을 할 때, 개인의 속셈과 목적과 불순물이 들어 있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일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너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 칭찬받지 못하고 기억되지 않으며 정죄될 수도 있다. 더 분석해 보면 네가 이렇게 하는 것은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네가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고 파괴를 부르지도 않아 어떠한 진리에도 어긋나지 않으며 논리와 이치에 맞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의 본질은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네가 성품의 변화가 있는지 또는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일을 하는 너의 마음가짐으로 판단해야 한다. 사람의 상상과 뜻, 또는 너 자신의 입맛에 맞는지를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네가 하나님의 뜻에 맞다고 하는지, 네가 한 일이 진리 실제가 있다고 하는지,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달했다고 하는지를 보아야 하며, 하나님이 말씀한 요구에 근거하여 가늠해야 정확한 것이다. 성품 변화와 진리 실행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니다. 이제 깨달았느냐? 여기에 대해 체험한 것이 있느냐? 너희가 문제의 본질에 관한 것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너희는 진입이 너무 얕다. 온종일 뛰어다니고 아침 일찍 일어나 어두워질 때까지 바쁘게 보내지만, 생명 성품에 어떤 변화도 없고, 무엇이 성품 변화인지도 알지 못한다면 진입이 너무 얕은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길든 짧든, 너희는 성품 변화의 본질적인 것, 깊은 것을 느끼지 못할 텐데, 이것을 성품이 변화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칭찬하는지 칭찬하지 않는지 어디에서 알 수 있겠느냐? 적어도 일을 할 때마다 마음이 더없이 편안해야 한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거나 어떤 일을 할 때, 또는 평소에, 성령이 너를 인도하고 깨우쳐 주며 네게 역사한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하고, 네가 하는 모든 행동이 하나님 말씀과 맞아야 한다. 어느 정도 체험하고 나면 너는 네 예전 행동들이 꽤 적절했다고 느낄 것이다. 네가 한동안 체험하고 나서 예전에 행한 일 중 일부는 스스로 봐도 적절하지 않고 만족스럽지도 않아 확실히 진리가 없다고 느낀다면, 이는 네가 한 모든 일이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의미이며, 너의 섬김에는 패역과 대적, 사람의 방식이 가득했다는 의미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성품 변화에 대해 가져야 할 인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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