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과 진입 9

유구한 ‘민족 전통’과 ‘정신적 풍모’는 너무 일찍 사람의 순결하고 어린 마음과 영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인성’이라곤 전혀 없이 무자비하게 사람의 영혼을 공격하고 있다. 이 마귀들의 수법은 극도로 잔인하다. 마치 ‘교육’이나 ‘육성’이 마왕의 ‘전통적인’ 살인 수법이 된 듯, 마귀는 ‘깊은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추악한 영혼을 완전히 숨긴 채, 양의 가죽을 쓰고 사람을 속여 신임을 얻어 낸 후, 사람들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전부 삼키려고 꾀한다. 불쌍한 인류가 어찌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 마귀의 땅이며, 자신을 키워 준 자가 자신을 해친 원수인 줄 알겠느냐? 그럼에도 사람은 전혀 각성하지 못한 채, 배고픔과 목마름이 가신 뒤 ‘키워 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려 한다. 사람이 이럴 수 있다니! 아직도 자신을 키워 준 ‘국왕’이 바로 원수임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땅에는 죽은 자의 유골이 깔려 있고, 마귀는 기뻐 날뛰며 ‘저승’에서 계속 사람의 육체를 삼키고 있다. 사람의 시체를 자신과 함께 순장시키려고 마지막에 남은 만신창이가 된 일부 사람들까지 다 삼키려고 망상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도무지 알지 못하고 마귀를 원수로 대하기는커녕 도리어 성심성의로 섬기고 있다. 이렇게 타락한 민족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말이 되겠느냐?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그들 가운데 와서 모든 구원 사역을 하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쉽겠느냐? 이미 음부에 떨어진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인류를 위한 사역 때문에 얼마나 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는지 모른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했고, 사람이 살고 있는 생지옥에 내려와 하늘 끝까지 사람과 함께하면서도 궁상맞은 인간 세상을 원망한 적 없고, 사람의 패역을 질타한 적도 없으며, 도리어 크나큰 치욕을 참으면서 자신이 친히 해야 할 사역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어찌 지옥에 속할 수 있겠느냐? 어찌 지옥의 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그는 전 인류를 위해서, 인류 전체가 하루빨리 안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치욕과 억울함을 참고 땅에 내려와 친히 ‘지옥’과 ‘음부’, 호랑이 굴로 들어가서 사람을 구원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단 말이냐? 무슨 이유로 또 하나님을 원망한단 말이냐? 무슨 낯짝으로 다시 하나님을 마주한단 말이냐? 하늘의 하나님은 가장 더럽고 음란한 땅에 와서 단 한 번도 억울함을 토로하거나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묵묵히 사람의 박해[1]와 억압을 감내하고 있다. 그는 한 번도 사람의 무리한 요구에 반항하지 않았고, 사람에게 지나친 요구나 무리한 요구를 한 적도 없으며, 아무리 힘들어도 원망 한 마디 없이 가르침, 깨우침, 책망, 말씀의 연단, 일깨움, 권면, 위로, 심판, 폭로 등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사역을 할 뿐이다. 사람의 생명을 위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비록 사람의 앞날과 운명을 거두어 갔다고는 하나, 하나님이 하는 일 중에서 사람의 운명을 위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사람의 생존을 위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이 고난과 칠흑처럼 어두운 흑암 세력의 압제에서 사람을 구해 내려고 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사람을 위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인자한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누가 알겠느냐? 하나님의 그 절박한 심정을 누가 이해하겠느냐? 하나님의 불처럼 뜨거운 마음과 간절한 기대로 얻은 것은 뜻밖에도 얼음처럼 차가운 마음, 냉혹하고 무정한 눈동자,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람의 훈계와 욕설, 그리고 냉소와 조롱, 비방과 폄하, 사람의 비웃음, 유린과 저버림, 사람의 오해와 원망, 소외와 회피, 기만과 공격, 쓰디쓴 결과뿐이었다. 따뜻한 말씀은 ‘차디찬 시선과 손가락질’로 돌아왔으니, 하나님은 ‘머리를 숙이고 몸을 낮추며’[2] 고통을 참아야만 했다. 수많은 세월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전반측하며 아버지와의 이별보다 천배나 더한 고통을 참아 내고, 사람의 공격과 ‘깨뜨림’, ‘훈계’와 ‘책망’을 참아 내야 했다. 하나님이 ‘낮추고 감춘’ 대가로 얻은 것은 사람의 차별[3], 불공평한 시선과 대우였다. 하나님의 묵묵한 인내와 포용으로 얻은 것은 인정사정없이 하나님을 밟아 죽이려 하고, 하나님을 갈라진 땅 틈 사이로 밀어 넣으려고 하는 사람의 탐욕스러운 시선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는 ‘보기 드물게 똑똑해져’, 사람 눈에 만만해 보이고 사람들이 깔보는 하나님을 만인의 발아래 깔아뭉개고는 마치 ‘왕 노릇을 하려는’ 듯, ‘대권을 독차지하여[4]’ ‘수렴청정’하려는 듯 스스로를 높이 추켜올리고, 하나님에게는 고분고분 순순히 ‘무대 뒤의 감독’ 역할을 맡겨 반항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였다. 또한 하나님을 ‘마지막 황제’처럼 분장시켜 자유라곤 전혀 없는 ‘꼭두각시[5]’ 역할을 맡게 했다. 사람의 작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니, 또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이런저런 요구를 한단 말이냐?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건의’를 한단 말이냐?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사람의 연약함을 배려해 달라고 요구한단 말이냐? 사람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자격이 있더냐? 끝없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관대함을 누릴 자격이 있더냐? 계속되는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을 자격이 있더냐? 사람의 양심은 어디에 있느냐? 사람은 일찍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없이 아프게 하였고,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하나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가슴 가득 기쁨을 안고 인간 세상에 와서 사람이 그에게 아주 작은 온정이라도 베풀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오래도록 사람의 위로를 얻지 못했고, 돌아온 것이라고는 설상가상[6] 식의 공격과 괴롭힘뿐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너무 탐욕스럽고, 사람의 욕망은 너무 커서 하나를 얻으면 둘을 갖고 싶어 하고, 무리한 트집을 잡으면서 하나님께 약간의 자유도, 일말의 발언권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은 울분을 참으면서 묵묵히 사람의 조종을 받아야 했다.

창세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참고, 사람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공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요구를 늦추지 않고, 하나님을 ‘연구’하고 있으며, 조금의 관용도 보이지 않고, 그저 그를 ‘가르치고’, ‘질책하고’, ‘혼낼’ 뿐이다. 마치 하나님이 길을 잘못 들까 봐, 하나님이 땅에서 막무가내로 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좋은 결과를 이루지 못할까 봐 매우 두려워하는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가 항상 이런 식이니, 하나님이 상심하지 않을 리 있겠느냐? 하나님은 ‘성육신’한 것만으로도 이미 크나큰 고통과 치욕을 감내했는데, 사람의 가르침까지 받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 인간 세상에 와서 마치 음부에 갇힌 것처럼 일말의 자유도 없고, 또 아무 반항 못 한 채 사람의 ‘해부’를 받아들이는 이런 것들이 전부 치욕스러운 일 아니겠느냐? ‘예수’에게는 정상인의 가정에서 태어난 것 자체가 이미 크나큰 굴욕이며, 이 풍진세상에 임하여 자신을 지극히 낮추어 매우 평범한 육신을 취한 것은 더더욱 큰 치욕이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이 한낱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것이 고통받는 일 아니겠느냐?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인류를 위한 일이 아니더냐?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생각한 것이 한 번이라도 있더냐? 그는 유대 족속에게 버림받고, 죽임 당하고, 사람의 비웃음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단 한 번도 하늘과 땅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수천 년 전의 비극이 또다시 유대 족속과 비슷한 족속 가운데서 재연되고 있으니, 사람은 다 같은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냐? 사람이 무슨 밑천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단 말이냐? 하나님을 대적하고 나서 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가 사람이 아니더냐? 어째서 사람은 항상 정의를 향하지 않고 진리를 구하지 않는 것이냐? 어째서 사람은 늘 하나님이 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이냐? 사람의 의로움은 어디에 있느냐? 사람의 공평함은 어디에 있느냐? 사람이 무슨 낯짝으로 하나님을 대변한단 말이냐? 사람의 ‘정의감’은 어디에 있느냐? 사람이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은 얼마나 있느냐? 사람은 모두 보배를 알아보지 못하고[7], 언제나 흑백을 가리지 못하며[8], 정의와 진리를 깔아뭉개고 불공평과 불의를 높이 들어 올리며, 밝은 빛을 몰아내고 어둠 속에서 환락을 좇는다. 진리와 정의를 찾는다는 사람이 오히려 빛을 쫓아내고, 하나님을 찾는다는 사람이 오히려 발로 하나님을 짓밟고 자기 자신을 높이 추켜올린다. 사람은 모두 비적[9] 같으니 무슨 이성이 있단 말이냐? 누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 누가 정의를 지킬 수 있겠느냐? 누가 진리를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겠느냐? 전부 흉악무도한 자들이다!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는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고, 미친 듯한 환호성을 멈추지 않았으니, 모두가 닭이나 개 같은 부류다. 무리를 지어 독립 왕국을 세우고, 곳곳에서 바람 잘 날 없이 일을 만들며, 무턱대고 미친 듯이 짖어 대고 있다. 닭도 울고 개도 짖으니, 온 세상이 엉망진창이 되어 ‘시끌벅적’하다. ‘부화뇌동[10]’하는 사람들은 끝도 없이 튀어나와서는 자기 조상들의 ‘위대한 이름’을 높이 떠받들고 있다. 닭이나 개와 같은 자들은 벌써 오래전에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람은 모두 개와 닭 같아 한 마리가 짖으면 백 마리가 따라 짖는다[11]”라고 말씀한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사역을 이처럼 ‘기세 드높이’ 오늘날까지 해 왔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이 어떤지, 정의가 있기는 한지, 하나님이 발붙일 곳은 있는지, 내일이 어떻게 될지, 그리고 자신의 비천함과 더러움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다. 사람은 전혀 그렇게 많은 것을 고려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으며, 모든 이익과 보물을 자신의 품에 끌어안고, 하나님에게 던져 주는 것은 그저 잔배냉적[12]뿐이다. 이 얼마나 잔인한 인류냐! 사람은 인정사정없이 하나님을 대하며 하나님의 모든 것을 몰래 훔쳐 먹고는 하나님을 뒤에 내버려둔 채 그의 존재를 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누리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짓밟으면서도 입으로는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고 하나님을 찬미한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을 기만한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떠받들고’ 하나님의 얼굴을 우러러보면서도 거들먹거리며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하나님의 ‘불의’를 ‘심판’한다. 입으로 ‘하나님께 죄스럽다’고 말하고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욕한다. 하나님께 ‘관용’을 보이면서도 또 하나님을 억압하고, 입으로는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물품을 손에 들고, 하나님이 준 음식을 입으로 씹으면서도 마치 하나님을 통째로 삼키려는 듯 냉혹하고 무정한 눈빛으로 하나님을 주시한다. 진리를 보고도 ‘사탄의 간계’라고 우기고, ‘정의’를 보고는 그것을 ‘자기희생’으로 둔갑시킨다. ‘사람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의 어떠함’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사람의 타고난 자질’을 보고는 ‘진리’라고 우긴다. ‘하나님의 행사’를 보고는 “오만 방자하다”, “거만을 떨며 잘난 척한다”고 억지를 부리고, ‘하나님’을 보고는 굳이 그에게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여 강제로 끌어다가 사탄의 더러움에 물들어 버린 ‘피조물 자리’에 앉히려 든다.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알면서 기어이 ‘사람의 글’이라고 말하고, ‘영이 육신 된’ ‘성육신 하나님’임을 확실히 알면서도 기어이 ‘사탄의 후예’라고 우기며,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고 감춘 것’을 알면서도 “사탄이 치욕을 당하고 하나님은 이미 승리했다”고 억지를 부린다. 이 폐물들아! ‘집 지키는 개’보다도 못하구나! 흑백을 분별치 못하는 것도 모자라 짐짓 흑백을 전도하다니. 사람의 세력과 포위 공격 속에서 어찌 하나님이 빛을 볼 날이 허용되겠느냐?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하고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을 죽음으로 밀어 넣으며 얼굴을 조금도 드러내지 못하게 하니, 의로움이 어디에 있단 말이냐? 사랑은 또 어디에 있단 말이냐? 하나님의 곁에 앉아 하나님을 자신의 무릎 아래에 두고 자신에게 용서를 빌게 하고, 자신의 모든 안배에 순종하게 하며, 자신의 모든 지시를 따르게 하고, 자신의 눈치를 보고 행동하게 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노발대발[13]하며 울화통을 터뜨린다. 이렇듯 흑백이 뒤집어진 흑암 권세 아래에서 하나님이 비통해하지 않을 리 있겠느냐? 근심하지 않을 리 있겠느냐? 왜 하나님이 이번 사역을 펼치는 것이 천지개벽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느냐? 사람의 행위는 참으로 ‘풍부하다’. ‘끊임없이 흐르는’ ‘생수의 근원’은 사람의 마음을 끊임없이 ‘적셔 보양하고’, 사람의 그 ‘생수의 근원’은 또 거리낌 없이[14] 하나님과 ‘겨루면서’ 양립하지 못한다. 게다가 서슴지 않고 하나님 대신 사람에게 공급하고, 사람 또한 ‘제 몸을 돌보지 않고’ 그것에 협력하고 있다. 그러니 무슨 성과가 있겠느냐? 하나님을 찬밥 취급하며 사람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외진 곳에 치워 놓고는, 누가 주목할까 봐 심히 걱정하고, 하나님의 생수의 근원이 사람을 황홀한 경지로 이끌고 사람을 얻을까 봐 겁낸다. 그래서 사람은 오랜 세월 동안 세상사들을 겪은 후 다시 하나님과 아귀다툼을 벌이기 시작한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비판 투쟁’ 대상으로 본다. 마치 하나님이 눈엣가시라도 되는 듯, 어떻게든 불 속에 집어넣어 깡그리 사라질 때까지 단련시키지 못해 안달이다. 하나님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포복절도하며 기뻐 날뛸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연단 속에 들어갔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불결한 불순물들을 몽땅 태워 없애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이치에 들어맞는 것이고 ‘하늘’의 공평하고 합리적인 방법인 것처럼 말이다. 사람의 이런 폭력적이고 비열한 행위는 의도적인 것 같기도 하고 무의식적인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 추악한 몰골뿐만 아니라 추악하고 더러운 영혼도 드러내며, 불쌍한 거지의 모습까지도 나타낸다. 곳곳에서 횡포를 부린 뒤에는 가련한 모습을 하고 하늘의 용서를 구하며, 극도로 불쌍한 아첨꾼의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은 언제나 방심한 틈을 타서 허를 찌르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임기응변한다. 하나님의 마음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처지와 비교도 하지 않으며, 그저 조용히 하나님께 맞설 뿐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억울하게 한 것처럼, 처음부터 자신을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 것처럼, 하늘이 보는 눈이 없어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늘 몰래 악랄한 수단을 쓰고, 하나님에 대한 요구를 조금도 늦추지 않으며, 눈을 부릅뜬 채 호시탐탐 하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한다.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이자 적수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고, 언젠가 하나님이 뿌연 안개를 걷어 내고 사실을 밝혀 자신을 ‘호랑이 아가리’에서 구해 주고 원통함을 풀어 주기를 바란다. 오늘날까지도 사람은 역대에 수많은 사람이 맡았던, 하나님을 대적하는 역할을 자기 자신이 맡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어찌 자신의 행함이 이미 오래전에 잘못된 길에 들어섰고, 자신이 이해한 것이 진작 바닷속에 잠겨 버렸다는 것을 알겠느냐?

누가 진리를 받아들인 적이 있더냐? 누가 하나님의 강림을 기쁘게 맞이하였더냐? 누가 하나님의 나타남을 즐겁게 바랐더냐? 사람의 행위는 이미 썩어 문드러졌고, 하나님의 전을 본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더럽혀 놓고도 여전히 자신의 일을 계속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다. 마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이제는 고칠 수도 없게 된 듯하다. 그래서 차라리 저주를 받을지언정, 자신의 ‘언행이 또다시 억울함을 당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안식을 누릴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있겠느냐?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봉헌하는 것은 분명 옳은 일이지만, 사람은 또 어째서 늘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모든 것을 뒷전으로 한 채 사심 없이 자신의 ‘심혈’을 봉헌하는 것이냐? 사람의 공평무사한 봉헌 정신은 귀하기 이를 데 없지만 사람이 어찌 자신이 토해 낸 ‘실’이 하나님의 어떠함을 대신할 수 없음을 알겠느냐? 사람의 호의는 물론 귀하고 얻기 힘든 것이지만, 그렇다고 어찌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물[15]’을 삼킬 수 있겠느냐? 너희 모두는 스스로의 과거를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 어찌하여 무정한 형벌과 저주가 항상 너희를 떠나지 않겠느냐? 어찌하여 위엄 있는 말씀과 공의로운 심판이 항상 사람과 ‘친밀하게 붙어 있겠느냐’? 정말 하나님이 사람에게 시련을 주는 것이겠느냐? 정말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을 연단하는 것이겠느냐?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연단 속에서 진입한 것이냐?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정녕 알고 있느냐? 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진입에서 어떤 공과를 배웠느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당부를 잊지 말고, 하나님의 사역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며, 사람의 진입에 대해서도 확실히 파악하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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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해[摧殘]: 여기서는 사람의 패역을 폭로함.

[2] ‘차디찬 시선과 손가락질’, ‘머리를 숙이고 몸을 낮추며’: 원래 문장은 ‘사나운 눈초리로 뭇사람들의 질타에 맞서고[橫眉冷對千夫指], 머리 숙여 기꺼이 어린아이의 소가 되다[俯首甘爲孺子牛]’라는 한 구절로 되어 있지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문제를 더 정확히 설명하고 있음. 앞 구절은 사람의 ‘행위’를, 뒷 구절은 하나님이 받는 고난과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고 감추는 것을 가리킴.

[3] 차별[歧視]: 본문에서는 사람의 패역 행위를 가리킴.

[4] 대권을 독차지하여[獨攬大權]: 사람의 패역 행위, 즉 자신을 추켜올리는 한편 다른 사람이 자신을 따르고 자신을 위해 고통받도록 통제하는 행위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세력에 대한 표현. 원뜻은 큰 권력을 혼자 틀어쥐고 있음을 의미함.

[5] 꼭두각시[傀儡]: 본문에서는 이 어휘를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조롱함.

[6] 설상가상(雪上加霜): 본문에서는 이 어휘로 사람의 비열한 행위를 더 두드러지게 함.

[7] 보배를 알아보지 못하고[明珠暗投]: 본문에서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사탄적인 것으로 비하하는 것, 나아가 하나님을 저버리는 사람의 모든 행위를 가리킴.

[8] 흑백을 가리지 못하며[黑白混淆]: 진리와 허상, 정의와 추악함이 섞여 있는 것을 가리킴.

[9] 비적[土匪]: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식견이 없음을 가리킴.

[10] 부화뇌동[吠影吠聲]: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의 장단에 맞추고 시류를 좇는 자를 가리킴.

[11] 한 마리가 짖으면 백 마리가 따라 짖는다[一犬吠形, 百犬吠聲]: 부화뇌동[吠影吠聲]과 같은 뜻.

[12] 잔배냉적[殘羹冷炙]: 먹다 남은 음식. 하나님을 억압하는 사람의 행위를 가리킴.

[13] 노발대발[怒髮衝冠]: 격분하여 제정신이 아닌 추태를 가리킴.

[14] 거리낌 없이[毫不顧忌]: 여기서는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음을 가리킴.

[15]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물[無價之寶]: 여기서는 하나님의 전부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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