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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과 진입 9

유구한 ‘민족 전통’과 ‘정신적 풍모’는 너무 일찍 사람의 순결하고 어린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조금의 ‘인성’도 없이 무자비하게 사람의 영혼을 공격하고 있다. 이 마귀들의 수법은 극도로 잔인하여 마치 ‘교육’이나 ‘육성’이 사람을 죽이는 마왕의 ‘전통적인’ 수법이 된 듯하다. 마귀는 ‘심도 있는 가르침’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추악한 영혼을 숨기고 양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사람을 속여 신임을 얻어 낸 후,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사람들을 전부 삼키려고 한다. 불쌍한 인류가 어찌 자신이 나고 나란 곳이 마귀의 땅이며 자신을 키워 준 자가 자신을 해친 원수인 줄 알 수 있겠느냐? 그럼에도 사람은 각성하지 못했음은 물론, 배고픔과 목마름이 가시자 ‘키워 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려 한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사람은 아직도 자신을 키워 준 ‘국왕’이 실은 자신의 원수임을 모르고 있다. 땅에는 죽은 자의 유골이 도처에 흩어져 있고, 마귀는 기뻐 날뛰며 ‘저승’에서 계속 사람의 육체를 삼키고 있다. 사람의 시체를 자신과 함께 순장a시키려고 마지막에 살아남은 만신창이가 된 사람까지 다 삼키려고 든다. 그런데도 사람은 전혀 알지 못하고 마귀를 원수로 대하기는커녕 도리어 성심성의로 섬기고 있다. 이렇게 타락한 민족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성육신하여 모든 구원 사역을 하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쉽겠느냐? 이미 저승에 떨어진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인류의 사역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는지 모른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했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생지옥에 내려와 사람들과 함께하면서도 인간 세상의 쓸쓸함을 원망한 적이 없으며, 사람의 패역을 질타한 적도 없다. 도리어 크나큰 치욕을 참으며 친히 사역을 할 뿐이었다. 하나님이 어찌 지옥에 속할 수 있겠느냐? 어찌 지옥의 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그는 모든 인류를 위해서, 그리고 모든 인류가 하루빨리 안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치욕을 참고 땅에 내려와 친히 ‘지옥’과 ‘저승’에 들어가, 호랑이 굴로 들어가 사람을 구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단 말이냐? 또 무슨 이유로 하나님을 원망하겠느냐? 무슨 낯짝으로 다시 하나님을 마주한단 말이냐? 하늘의 하나님은 가장 더럽고 음란한 땅에 왔으면서도 단 한 번도 억울함을 토로하거나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묵묵히 사람들의 박해b와 억압을 감내할 뿐이다. 그는 한 번도 사람의 과한 요구에 반항하지 않았으며, 사람에게 지나친 요구를 한 적도, 무리한 요구를 한 적도 없다. 그저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가르침, 깨우침, 책망, 말씀의 연단, 일깨움, 권면, 위로, 심판, 폭로 등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사역을 할 뿐이다. 이런 것 중 사람의 생명을 위하지 않는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비록 사람의 앞날과 운명을 거두어 갔다고는 하나, 하나님이 하는 일 중 사람의 운명을 위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사람의 생존을 위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고난으로 점철되고, 칠흑처럼 어두운 흑암 세력의 압제에서 구해 내려고 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사람을 위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인자한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누가 알겠느냐? 하나님의 그 절박한 심정을 누가 이해하겠느냐? 불처럼 뜨거운 마음과 간절한 기대의 대가로 하나님께 돌아온 것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마음과 무정하고 냉혹한 눈동자,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람의 훈계와 욕설, 냉소와 조롱, 비방과 무시였다. 또한, 비웃음과 유린, 저버림, 오해와 원망, 거부와 회피였다. 하나님께 돌아온 것은 전부 기만이었고, 공격이었으며, 쓰디쓴 결과뿐이었다. 따뜻한 말씀은 ‘차디찬 시선과 손가락질’로 돌아왔으니, 하나님은 ‘머리를 숙이고 몸을 낮추며c’ 고통을 참아야만 했다. 수많은 세월, 하늘의 별과 마주하며 지새운 밤이 얼마였고, 전전반측d하며 하늘의 달과 함께 철야한 적 얼마였던가! 아버지와 이별하는 것보다 천배나 더한 고통을 참아 내고, 사람의 공격과 ‘깨뜨림’을 견디고, 사람의 ‘훈계’와 ‘책망’을 감당했다. 하나님이 ‘지극히 낮춘’ 대가로 얻은 것은 사람의 차별e, 그리고 불공평한 시선과 대우였다. 하나님의 소리 없는 인내와 포용은 사람의 탐욕 섞인 시선으로 돌아왔다. 사람은 인정사정없이 하나님을 밟아 죽이려 했고, 하나님을 갈라진 땅 틈 사이에 밀어 넣으려 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는 ‘보기 드물게 똑똑했다’. 사람은 자신이 업신여기고 별 볼 일 없다 생각하는 하나님을 만인의 발아래 깔아뭉개고는 스스로를 추켜올려 ‘산(山)을 차지하여 왕’이 되고, ‘권력을 독점하고f’, ‘수렴청정’을 하려는 듯 굴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는 고분고분 순순히 ‘무대 뒤의 감독’ 역할이나 하게 하며, 반항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였다. 즉, 하나님에게 ‘마지막 황제’처럼 조금의 자유도 없는 ‘꼭두각시g’ 역할을 시킨 것이다. 사람의 작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이런저런 요구를 한단 말이냐?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에게 ‘건의’를 한단 말이냐? 또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연약함을 헤아려 달라고 요구한단 말이냐? 사람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자격이 있더냐? 끝없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관대함을 누릴 자격이 있더냐? 계속되는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을 자격이 있더냐? 사람의 양심은 어디에 있느냐? 일찍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없이 아프게 하였고,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하나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가슴 가득 기쁨을 안고 세상에 왔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아주 작은 온정이라도 베풀기를 원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늘 사람들의 위로를 얻지 못했으며, 돌아온 것이라고는 설상가상h 식의 공격과 괴롭힘뿐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너무 탐욕스럽고, 사람의 욕망은 너무 커서 하나를 얻으면 둘을 갖고 싶어 했으며, 무리한 트집을 잡으면서 하나님에게 조금의 자유도, 발언권도 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은 묵묵히 울분을 참으며 사람의 조종을 받아야만 했다.

창세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참고, 얼마나 많은 이의 공격을 받았더냐!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요구를 늦추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연구’하고 있으며, 조금의 관용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를 ‘가르치고’, ‘질책하고’, ‘혼낼’ 뿐이다. 마치 하나님이 길을 잘못 들까 걱정하는 것 같고, 하나님이 땅에서 함부로 행동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며, 막무가내로 굴어 일을 그르칠까 겁내는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가 항상 이런 식일진대, 하나님이 상심하지 않을 리 있겠느냐? ‘성육신’한 것만으로도 이미 크나큰 고통과 치욕을 감내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가르침까지 받으라고 하는 것은 어떠하겠느냐? 세상에 왔는데도 조금의 자유조차 없어 마치 저승에 갇힌 것 같고, 반항도 못 한 채 사람들의 ‘해부’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이 전부 치욕이 아니더냐? ‘예수’가 정상인의 가정에 태어난 것 자체가 이미 크나큰 굴욕이다. 자신을 지극히 낮추사 이 풍진세상에 임할 때 지극히 평범한 육신을 취한 것은 더더욱 큰 치욕이다. 지고지상한 하나님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것이 고통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인류를 위한 일이 아니더냐?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생각한 것이 한 번이라도 되더냐? 유대 족속에게 버림받고, 죽임당하고,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그는 단 한 번도 하늘을 원망하지도 땅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수천 년 전의 비극이 다시 한 번 유대 족속과 비슷한 이방의 족속 가운데서 재연되고 있으니, 모두가 같은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냐?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단 말이냐? 하나님을 대적한 후에 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은 사람이 아니냐? 어째서 사람은 항상 정의를 향하지 않고 진리를 구하지 않는 것이냐? 어째서 사람은 늘 하나님이 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이냐? 사람의 의로움은 어디에 있느냐? 사람의 공평함은 어디에 있느냐? 사람이 무슨 낯짝으로 하나님을 대표한단 말이냐? 사람의 ‘정의감’은 어디에 있느냐? 사람이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은 얼마나 있느냐? 사람은 모두 보배를 알아보지 못하고j, 흑백을 가리지 못하며k, 정의와 진리를 깔아뭉개고, 불공평과 불의를 높이 들어 올린다. 또한, 사람은 밝은 빛을 몰아내고 어둠 속에서 환락을 좇는다. 진리와 정의를 찾는다는 사람이 오히려 빛을 쫓아내고, 하나님을 찾는다는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을 발로 짓밟으며, 자기 자신을 높이 추켜올린다. 사람은 모두 비적l 같다. 그런데 무슨 이성이 있단 말이냐? 누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 누가 정의를 지키겠느냐? 누가 진리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겠느냐? 전부 흉악무도한 자들이다!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는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고, 또 광란의 환호성을 멈추지 않았으니, 닭이나 개 같은 부류다. 당을 지어 독립 왕국을 세우고, 곳곳에서 바람 잘 날 없이 일을 만들고 있다. 무턱대고 미친 듯이 짖어 대는데, 닭도 울고 개도 짖으니, 온 세상이 엉망진창이 되어m ‘시끌벅적’하다. ‘부화뇌동n’하는 사람들은 끝도 없이 튀어나와서는 자기 조상들의 ‘위대한 이름’을 높이 떠받들고 있다. 그 짐승 같은 것들은 오래전에 하나님을 뇌리에서 지워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람은 모두 개와 닭 같아 한 마리가 짖으면 백 마리가 따라 짖는다o”라고 말씀한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사역을 이처럼 ‘요란’하게 오늘날까지 끌어왔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정의가 있는지, 하나님에게 발붙일 곳이 있는지, 내일이 어떻게 될지, 자신의 비루함과 더러움은 어떻게 될지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한 번도 미래를 걱정한 적이 없다. 모든 이익과 보물은 전부 품에 끌어안고 하나님에게 던져 주는 것은 그저 잔배냉적p뿐이니, 이 얼마나 잔인한 인류냐! 사람은 하나님께 조금의 인정도 베풀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모든 것을 몰래 훔쳐 먹고는 하나님을 멀리 차 버리고 그의 존재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짓밟으면서 입으로는 감사하다 말하고 하나님을 찬미한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기만한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떠받들고’ 하나님의 얼굴을 우러러보면서도 으스대고,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서는 하나님의 ‘불의’를 ‘심판’한다. 입술로는 ‘하나님께 죄스럽다’고 말하고 눈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욕한다q. 하나님께 ‘관용’을 보이면서도 하나님을 억압하고, 입으로는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또, 손에는 하나님의 물품을 들고 있고 입으로는 하나님이 준 음식을 씹으면서 눈으로는 냉혹하고 무정하게 하나님을 주시하는데, 마치 하나님을 통째로 삼켜 버리려는 것 같다. 진리를 보고도 ‘사탄의 간계’라고 우기고, ‘정의’를 보고는 그것을 ‘자기희생’으로 둔갑시킨다. ‘사람의 행위’를 보고는 ‘하나님의 속성(원문: 所是)’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사람의 재능’을 보고는 ‘진리’라고 우긴다. ‘하나님의 행사’를 보고는 “오만방자하다”, “거만을 떨며 잘난 척한다”라고 억지를 부리고, ‘하나님’에게 기어이 ‘사람’이라는 표식을 붙이고는 강제로 그를 끌어다가 사탄의 더러움에 물들어 버린 ‘피조물의 자리’에 앉히려 든다.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알면서 기어이 ‘사람의 글’이라고 말한다. ‘영이 육신 되었고’, ‘성육신 하나님’임을 확실히 알면서도 기어이 ‘사탄의 후예r’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고 드러내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사탄이 치욕을 당하고 하나님은 이미 승리했다”라고 말한다. 이 폐물들아! ‘집 지키는 개’보다도 못하다! 흑백을 분변치 못하는 것도 모자라 짐짓 흑백을 전도하고 있다. 사람의 세력과 포위 공격 속에서 어찌 하나님이 빛을 볼 날이 허용되겠느냐?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하고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을 죽음으로 밀어 넣으며 얼굴을 조금도 드러내지 못하게 한다. 의로움이 어디에 있단 말이냐? 사랑은 또 어디에 있단 말이냐? 사람은 하나님의 곁에 앉아 하나님을 자신의 발아래에 짓누르고는 자신에게 용서를 빌게 하고, 자신의 모든 배치에 순종하게 하며, 자신의 모든 배치를 따르게 한다. 하나님이 사람의 눈치를 보고 행동하게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노발대발s하며 고함을 친다. 이렇듯 흑백이 뒤집어진 흑암 권세하에서 하나님이 비통해하지 않을 리 있겠느냐? 근심하지 않을 리 있겠느냐? 왜 하나님의 이번 사역을 천지개벽과 같은 일이라고 하겠느냐? 사람의 행위는 어찌나 ‘풍부’한지, ‘끊임없이 흐르는’ ‘생수의 근원’이 사람의 마음을 ‘적시는’ 것 같다. 그 ‘생수의 근원’은 또 하나님과 공존할 수 없어 ‘힘겨루기’를 마다하지 않게t 한다. 게다가 거리낌 없이 하나님 대신 사람에게 공급하고, 사람 또한 ‘제 몸을 돌보지 않고’ 그에 협력하고 있다. 그러니 무슨 성과가 있겠느냐? 냉정하게도 하나님을 사람들의 이목에서 벗어난 외진 곳에 치워 놓고는, 누군가 주목할까 봐 심히 걱정하고, 하나님의 생수의 근원이 사람을 황홀한 경지로 이끌고 사람을 얻을까 봐 겁낸다. 그래서 사람은 오랜 세월, 세상사들을 겪은 후 하나님과 아귀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비판 투쟁’할 대상으로 본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눈 속에 있는 들보라도 되는 양, 어떻게든 잡아서 불 속에 넣어 남김없이 단련시키려고 안달이며, 하나님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포복절도하며 기뻐 날뛴다. 그러면서 하나님도 연단에 들어갔다고 하며, 하나님의 불결한 불순물들을 몽땅 태워 버리겠다고 말한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이치에 들어맞고 ‘하늘’의 공평하고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의 이런 폭력적이고 비열한 행위는 고의 같기도 하고 무의식적인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고 또 그 추악하고 더러운 영혼을 내보이며, 불쌍한 거지의 모습까지 드러낸다. 또한, 곳곳에서 횡포를 부린 뒤에는 가련한 모습을 하고 하늘의 용서를 구하며, 극도로 불쌍한 아첨꾼의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은 언제나 방심한 틈을 타서 허를 찌르고, 호가호위하며, 임기응변u하는데, 하나님의 마음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신분과 비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하나님께 맞설 뿐이다.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억울하게 한 양, 처음부터 이렇게 대하면 안 됐다는 양, 하늘이 보는 눈이 없어 자신을 괴롭혔다는 양 군다. 그래서 사람은 늘 몰래 악랄한 수단을 쓰고, 하나님에 대한 요구를 매우 엄격히 하며, 눈을 부릅뜬 채 호시탐탐 하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이자 적수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으며, 언젠가 하나님이 뿌연 안개를 걷어 내고 사실을 밝혀 자신을 ‘호랑이 아가리’에서 구하고 원통함을 풀어 주기를 소망한다. 오늘날까지도 사람은 자신이 역대 이래 수많은 사람이 맡았던, 하나님을 대적하는 역할을 맡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어찌 자신의 행함이 이미 오래전에 잘못된 길에 들어섰고, 자신의 깨달음이 진작에 깊은 물 속에 잠겨 버렸다는 것을 알겠느냐?

누가 진리를 받아들인 적이 있더냐? 누가 하나님의 강림을 기쁘게 맞이하였더냐? 누가 하나님의 현현을 즐겁게 바랐더냐? 사람의 작태는 이미 썩어 문드러졌다. 사람은 하나님의 전(殿)을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도 없이 더럽혀 놓고도 여전히 자신의 사업을 계속하면서 하나님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마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이제는 고칠 수도 없게 된 듯하다. 그래서 사람은 차라리 저주를 받을지언정, 자신의 ‘언행이 또다시 억울함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안식을 누리겠느냐?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있겠느냐?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봉헌하는 것은 분명 옳은 일이다. 그런데 사람은 또 어째서 늘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모든 것을 뇌리에서 지워 버리고는 자신의 ‘심혈’을 사심 없이 봉헌한단 말이냐? 사람의 공평무사한 봉헌 정신은 귀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사람이 어찌 자신이 내뱉는 ‘실타래’가 하나님의 속성을 대신할 수 없음을 알겠느냐? 사람의 호의는 분명 귀하고 얻기 힘든 것이다. 그렇다고 어찌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물v’을 삼킬 수 있느냐? 너희 모두는 스스로의 과거를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 어찌하여 무정한 형벌과 저주가 항상 너희를 떠나지 않는 것이겠느냐? 어찌하여 위엄의 말씀과 공의로운 심판이 항상 사람과 ‘아주 친밀한’ 것이겠느냐? 정말 하나님이 사람에게 시련을 주는 것이겠느냐? 정말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을 연단하는 것이겠느냐?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연단 속에서 진입한 것이냐? 하나님의 사역을 사람은 정녕 알고 있느냐? 하나님의 사역과 진입이라는 과제에서 사람이 얻은 것은 무엇이냐? 모두가 하나님의 당부를 잊지 말고, 하나님의 사역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며, 진입에 대해서도 확실히 파악하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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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순장(殉葬): 살아 있는 사람을 핍박해 죽은 이와 함께 생매장하는 것.

b박해[摧殘]: (신체적, 정신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보는 것. 본문에서는 사람의 패역을 폭로함.

c머리를 숙이고 몸을 낮추며[俯首甘爲孺子牛]: 원래 ‘사나운 눈초리로 뭇사람들의 질타에 맞서고(橫眉冷對千夫指), 머리 숙여 기꺼이 어린아이의 소가 되다(俯首甘爲孺子牛)’라는 구절로, 본문에서는 따로 써서 문제를 더 정확히 설명함. 앞 구절은 사람의 ‘행위’를, 뒷 구절은 하나님이 받는 고난과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고 드러내지 않으심을 가리킴.

d 전전반측(輾轉反側): 마음에 걱정이 있어 잠을 못 이루고 뒤척거리는 것을 말함.

e 차별[岐視]: 불평등한 대우. 본문에서는 사람의 패역 행위를 가리킴.

f권력을 독점하고[獨攬大權]: 사람의 패역 행위를 가리킴. 즉, 자신을 추켜올리는 한편, 다른 사람이 자신을 따르도록 좌지우지하면서 고통을 주는,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세력. 원뜻은 혼자서 대권을 장악한 것을 말함.

g꼭두각시[傀儡]: 인형극에 나오는 나무 인형. 본문에서는 이 어휘를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조롱함.

h설상가상(雪上加霜): 엎친 데 덮친 격. 피해가 더욱 가중됨을 비유함. 본문에서는 이 어휘로 사람의 비열한 행위를 더 두드러지게 함.

j보배를 알아보지 못하고[明珠暗投]: 재능 있는 사람이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귀한 물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비유함. 본문에서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사탄의 것으로 비하하는 것, 나아가 하나님을 저버리는 사람의 모든 행위를 가리킴.

k흑백을 가리지 못하며[黑白混淆]: 진리와 허상, 정의와 추악함이 섞여 있음.

l비적[土匪]: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식견이 없음을 가리킴.

m온 세상이 엉망진창이 되어[烏烟瘴氣]: 환경이 소란스럽고 복잡하며 무질서함, 또는 어두운 사회를 비유함.

n부화뇌동[吠影吠聲]: 일의 진위를 확실히 알아보지 않고 줏대 없이 남의 의견을 따르는 것을 비유함.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의 장단에 맞추고 시류를 좇는 자를 가리킴.

o한 마리가 짖으면 백 마리가 따라 짖는다[一犬吠形, 白犬吠聲]: 부화뇌동[吠影吠聲]과 같은 뜻.

p잔배냉적[殘羹冷炙]: 먹다 남은 음식. 하나님을 억압하는 사람의 행위를 가리킴.

q욕한다[謾駡]: 멸시하고 조롱하는 태도로 욕함.

r후예(後裔): 죽은 이의 자손. 본문에서는 풍자의 의미로 사용됨.

s노발대발[怒髮衝冠]: 매우 화난 모습. 격분하여 제정신이 아닌 추태를 가리킴.

t마다하지 않게[毫不顧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음.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개의치 않고, 경외하는 마음 또한 전혀 없음을 가리킴.

u임기응변[逢場作戱]: 기회를 보아 끼어들어 노는 것을 말함.

v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물[無價之寶]: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전부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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